달팽이 #7 - 이해순 자서전 (원시림을 걷는 아이)

Page 1








6


나의 태어남엔 울음이 없었다.

늦은 나이에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다. 이미 7형제를 키우느라 늙고 약해진 육체는 나 를 담기가 버거웠고, 새 생명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임신 중독증을 얻었다. 출산이 임 박했음을 느꼈음에도 멀리서 일하는 남편을 부를 수 없던 어머니는, 홀로 무거운 몸을 뽑아 병원 앞까지 지고 갔다. 그러나 3킬로의 작은 생명뿐만 아니라 오랜 생활고와 노 동, 병까지 지탱하고 있던 어머니의 무릎은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7


대구 동산병원 앞 계단에 쓰러져있던 어머니는 다행히 의사의 손에 거둬져 무사히 치 료를 받았다. 그러나 배 속의 아이는 어머니의 행운까지는 물려받지는 못했나 보다. 가 까스로 태어난 나는 울지 못했다. 70년대는 부랑자가 많았다. 그들 눈에는 어머니가 부 랑자로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부랑자의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울지 못하 는 작은 아이를 보자기에 똥똥 묶여서 냉장고 위 먼지 쌓인 다른 짐들 옆에 놓았다.

의식을 찾은 어머니와 큰 언니가 황급히 아이를 찾았고, 냉장고 위에 뉘어진 나를 내 렸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전히 울지 않는 나를 따듯한 아랫 목에 눕혔다. 그리곤 밥상을 차려 지친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내가 입맛을 다시더란다. 어머니는 급하게 물에 설탕을 풀어 작고 마른 입술에 부었고, 그게 세상에서의 내 첫 식사였다. 나의 삶은 그렇게 냉장고의 울림, 맛있는 설탕과 함께 시작되었다.

8


9


10


11


12


나의 어린 시절은 원시림을 걷는 아이 같았다. 우리 집은 대구 근교 깡촌이었다. 산과 연못, 나무와 풀 한가운데 우리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었다. 유일한 친구는 한참을 걸어 야 나오는 집의 남자 형제였다. 셋이서 온 산을 뒤집고 다녔다. 총싸움, 칼싸움을 하다 보면 해가 지기가 일쑤였다. 그때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상태로 현실과 뚝 떨어져 있는 듯하다.

제제와 규범 같은 것은 없었다. 벌써 어머니와 아버지는 50대 중반이셨다. 부모님과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나는 살아가는 방법을 거의 전수받지 못했다. 큰언니와는 24살이나 차이가 났다. 나는 모든 것을 혼자 배워야 했다. 원시림을 걷는 아이처럼 그저 본능적으로 뛰어다니며 세상의 신기함과 부딪혔다. 그러다 문득 찾아오는 불편함과 답 답함이 있었다. 나중에야 그게 외로움이란 걸 알았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몰라서 그 게 외로움인 줄 몰랐다.

13


14


어느 날 원시의 아이는 불현듯 초등학교로 옮겨졌다. 어머니는 어린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음을 알고 학교를 일찍 보냈다. 그렇게 숫자도, 기역 니은도 모르는 6살짜리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네모난 감옥에 갇혔다. 초등학생이 된 나는 착했다. 못되게 하 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착하기만 했다. 친구랑 대화하는 법도 몰랐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이 없었기에 나를 제외한 네모난 교실 안의 사람들은 나를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시간은 나에게만 유독 느리게 흘렀다. 한글을 몰라서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없었고, 그저 다른 생각을 하면서 느리게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목덜미로 느꼈다. 또래 아이들 과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나만 다른 것을 보고, 나만 다른 시간에 살았다. 나 혼자 고요 한 물속에 잠겨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시간의 기억이 통째로 없다. 선생님이 누구였 는지, 누가 옆에 앉았는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15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시작된다. 엄마가 밥을 해 놓았고, 나는 밥상 옆에 누 웠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세상에서 제일 서럽게 울었다. 태어날 때도 울지 못했던 아이 가 밀린 울음을 허공을 향해 쏟았다. 내가 왜 우는지도 몰랐다. 외롭고 힘들 때 우는 거 라고 누가 시키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냥 본능적으로 눈물이 꾸역꾸역 밀려 나왔 다. 나는 우는 법도 혼자 배웠다.

16


17


원시림을 걷는 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사랑을 받는 귀염둥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항상 측은해했다. 그리고 그 측은한 마음은 내 주머니에서 작은 동전으 로, 간식으로 짤랑거렸다. 언니들과 달리 오빠가 없을 때 아버지와 겸상할 수 있는 특전 도 있었다. 사랑 덕분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공부를 해 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동아전과를 달달 외웠다. 공부를 할 줄 몰라서 그냥 외웠다. 이 해를 하고 외우는 게 아니라 그저 외웠다. 70페이지인체해부도위장:식도와샘창자사이 의위창자관이부풀어커져주머니처럼커져주머니처럼생긴부분위장의기능:주된소화기관 으로서.... 그 그림과 설명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공부를 하면서부터 친구들이 생기기 시 작했다.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고, 공부를 잘하니까 친구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이후에는 선생님도 기억나고 그곳에 있었던 친구들 이름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누군가 내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18


19


그렇지만 외우기만 하는 행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기에. 중학교 때의 기 억은 또다시 희미하기만 하다. 어느새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역시나 6살 때처럼 원시 림을 걷고 있었다. 나는 똑똑하지 못했다. 그러나 핏속에 흐르는 예술적인 무언가가 있 었는지 감각적이고 예술적인 판단이 빨랐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 공식이 나 사회 일반에 대한 지식에는 흥미가 더더욱 떨어지고, 손에 잡히지 않는 우주적 진리 나 내 내면세계에 빠져들었다. 나만의 생각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분투하다 보니 나만의 언어, 나만의 단어들이 생겼다.

나를 가두는 감옥은 더 이상 네모난 교실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이라는 무형의 공간 이었다. 그 감옥에서 도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루한 시 간 속에 가두며 학대했다. 공부하지 않으면서 책보기,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에 빠지 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저 둘이 같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었다.

20


21


22


23


24


두 번째 기억나는 큰 울음은 처량해서였다. 좌석버스 첫 번째 자리였다. 밖에는 눈발 이 달리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전문대에서 도자기를 빚었다. 해보니 싫지 않 았고, 남들보다 잘할 수 있었다.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전문대에서의 노력은 세 상에서 그저 조롱거리가 될 뿐이었다. 황당했다. 그래서 4년제 대학을 가기로 마음먹었 다. 몇 년 동안 편입을 준비했고 잘 안 됐다. 그리고 가난했다. 참 처량했다. 그래서 하염 없이 눈물이 나온 듯하다.

25


호야 언니의 소개로 학원비를 감면받아 데생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힘들고 의욕이 없었다. 무기력하고 답답한 마음에 남의 집 대문 앞에 멍하니 앉았다. 슬픈 울음, 처량 한 울음. 내 마음에만 기댄 고민. 그건 끝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으면 잠깐 자 유로웠다. 그러나 짧은 자유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책임질 괴로움이 신용카드 고지서 처럼 날아오기 일쑤였다. 잠깐 솟아올라 허겁지겁 산소를 들이마시곤 몇백 배의 시간을 심해에 잠겨있는 고래처럼 내 일상은 잠깐의 숨트임, 그리고 가라앉음의 반복이었다.

26


27


한글을 배우기 위해 전과를 외웠던 초등학교 4학년 때처럼 그림을 외우기 시작했다. 데셍 교본을 사 방한지처럼 줄을 그어 다 외웠다. 실기 시험 전날, 입시 학원에 홀로 남 아 몽당연필을 쥐고 아그리파를 그렸다. 내 착각이었겠지만 석고가 일그러지며 아그리 파가 씩 웃었고, 그 학원에서 나만 유일하게 정시에 합격했다. 그때 무작정 내 마음에만 기대서 사는 건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28


29


대학교 3학년 때였던가…. 혼자 사는 큰언니는 암에 걸렸다. 수술을 하고 몇 개월에 한 번씩 호전과 악화를 거듭했다. 결혼을 안 했으므로 직계가족이 없어 마지막 병간호 는 내가 했다. 차가운 대구 동산병원 병동에서 잠을 자며 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보았 다. 5센티 남짓한 짧고 희끗한 머리를 눈발이 날리는 병원 창가에 기대고 있는 언니. 짜 증과 외로움, 슬픈 회한이 섞인 참담한 표정으로 날리는 눈발을 뒤로 한 채 앉아 있었 다. 나는 대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진정한 공감이 없었 다. 그저 그냥 어떤 큰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만 했다. 언니의 유골이 산과 바다에 골고루 뿌려지던 날과, 훗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때서야 존재가 사라진다는 슬픔을 깨달았다.

30


31


32


33


34


프랑스로 유학 가던 날, 호야언니는 부엌에 계신 엄마에게 내가 간다는 사실을 아버 지 몰래 알렸다. 완고한 옛날 노인인 아버지는 내 유학에 반대했다. 야반도주하듯 몰래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70세의 늙은 엄마는 앞치마를 훔치며 그저 잘 가라는 말로 내 눈을 쳐다봤다. 나는 움찔 슬펐지만 아주 짧은 인사말만 나누고 집 앞 현관을 떠나 왔다.

35


유학은 힘들었다. 프랑스어를 알파벳부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예술에 호의적인 그곳 의 분위기는 나를 어두운 세계에서 밝은 세계로 끌어당겼다. 예술에 대한 것이라면 어 떤 이야기든 사람들이 들어줬다. 남들이 보기에 중요하지 않은 내 깊은 내면의 이야기 도 다 괜찮다면서 얘기하라 했다.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 말하자면 첫 대화였다.

유학 생활은 학문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알아주는 국립 공 예 학교였지만 우리나라 학제와는 맞지 않아 한국에서는 인정받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나에게 유학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 휴식의 시간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편재하는 신의 느낌을 느꼈고, 밝은 세계가 준 안정감은 내게 자신감을 줬다. 세상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막상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때 부서지리라는 걸 알면서도.

36


37


다시 서울로 왔다. 이미 서울권 대학원 지원은 대부분 끝난 상태였다. 숙명여대가 한 주 늦게까지 지원을 받았고, 그 학교에 지원해 진학했다. 한 학기는 그냥 열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새벽 열차를 타고 5시쯤 도착해 실기실에서 쪽잠을 잤다. 그 후엔 기숙사 에서 지내면서 졸업을 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돈을 벌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엔 경기도에 있는 미술관에 취직했다. 그러나 이름만 미술관이지 도자기 체험관 같은 곳이었다.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여기서 도대체 뭘 하겠는지 모르겠지만, 다니 고 싶으면 다녀보란 말에 그냥 출근하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 논두렁의 미꾸라지마냥 흙을 튀기는 아이들을 자리에 앉혀 물레를 가르쳤다. 말이 가르치는 것이지 그냥 흙을 치우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아 미대를 나오고도 미술 학원에서 일하지 않은 사람인데. 이틀 만에 또 문간에 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 또다시 물속에 가라앉는 듯한 불쾌한 기시감. 그래서 그길로 그만뒀다.

38


39


40


문득 프랑스 유학 시절 눈빛이 신선 같던 한 화가가 생각났다. 그 화가는 교회와 성당 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복원하는 일을 부업으로 했다. 한국에도 문화재 보존 관련 일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수소문하던 중, 운 좋게 박물관 계통 지인의 소개로 국립중앙박물 관에서 문화재를 보존처리하는 부서에 임시 일용직으로 고용되었다. 2002년 당시 도자 기 보존은 미지의 세계였다. 도자기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나는 도자기를 잘 알았 다. 전문대 2년, 대학 4년, 유학 2년, 대학원 2년. 방황으로 꽉 찬 10년이었다. 도자기를 내 운명이라 생각했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꾸준했다. 나도 모르게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신은 나를 준비시켰는지도 모르겠다.

41


첫 월급 53만 원. 아무도 내가 거기에 오래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9시 에 일어나서 6시에 퇴근하는 삶을 견딜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나는 잘 해낼 수 있을 거 라고 직감했다. 도자기 보존이 내 운명의 천직임을 느낀 게 아니다. 그저 10년의 방황과 노력이 넌지시 알려준 담담한 앎이었다. 그렇게 50개월을 일용직으로 버텼다. 36살이 되던 해, 나는 안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시험을 쳐 정규직이 되었고 15년째 도자기 보 존을 하고 있다.

42


43


44


45


46


세 번째 큰 울음은 어쩔 수 없어서였다. 39살, 나는 결혼을 했다. 아이가 없다고 살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와 남편은 아이를 원했다. 하지만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았다. 산부인과를 들락날락거렸다. 생각하지 못한 굴욕과 고통이 찾아왔다. 세상의 많은 여 자가 이런 식으로 병원을 다닌다는 게 지금도 끔찍하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쌍둥이가 태어나던 날,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기억한다. 태어날 때 울지 못했던 나는 내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내 인생이 새로 시작됨을 느꼈다. 커다란 산을 넘은 듯한 안도감. 우여곡절 끝에 나에겐 사랑스러운 쌍둥이가 있다. 쌍둥이는 또 다른 모습 으로 나를 규정짓기 시작한다. 나는 준비된 부모일까. 아이들이 자아를 찾아 내가 걸었 던 가시투성이 여행길에 섰을 때, 나는 담담히 지켜봐 줄 수 있을까. 새로운 고민들이 나 를 채운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쌍둥이 엄마라고 부른다. 이건 듣기 좋다.

47


나는 이렇게 인생 2막을 시작하려 한다. 지금의 나는 쌍둥이 엄마, 보존처리사, 중년 의 아줌마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관계없이, 내 역할에 스스로 충실하고 싶다. 누군가 계속 상기시켜주진 않지만, 도자기 보존 분야에서도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어느 정도 수 행해 왔다고 생각한다. 도자기 보존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보고 싶어서 3D 기법 을 제시했고, 어찌 되었든 나는 우리나라에서 3D를 문화재 보존에 접목한 최초의 사람 이 되었다. 또 내가 쓴 [보존과 복원의 세계 – 토기 자기]는 우리나라 보존과학 분야에 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단행본이다.

나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시간에도 내 주위에서 함께 했던 나의 엄마를 기억한다. 나 는 가끔 그 무덤에 꽃을 꽂는 상상을 한다. 엄마가 준 이름만이 진실이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나의 쌍둥이가 자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갈 때, 그 여정을 이해해줄 마음의 준비를 한다. 나의 엄마가 나에게 주었던 삶을 내 쌍둥이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48


49


사람은 누구나 해야 할 만큼의 방황과 절망이 정해져 있다. 그 불행을 겪어야만 나름 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흔들리는 파도 속에 마음껏 흔들리고, 마음 껏 깊이 빠져보았다. 나는 시간이 멈춘 듯한 절망의 심연을 알고 있다. 그 절망은 누군가 죽거나, 파산하고, 관계가 조각나는 영화 속 스토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말 하 지 않는 자폐아에게도, 신성의 세계를 엿볼 줄 아는 천재에게도,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 비교하지 말라.

온몸에 생채기를 내며 맨손으로 원시림을 헤치며 걷던 아이는 마흔여덟의 엄마가 됐 다. 문득 걸음을 멈췄을 때, 손톱 밑의 피가 어느새 멎었음을 알았다. 이젠 건강했으면 좋겠다. 현명했으면 좋겠다.

50


51


52


지난날의 기록

53


고등학생 때, 대명동 집에 온 가족이 모였다.

54


전문대학 시절, 정이언니와 함께 감은사에서.

55


영남대학 3학년 때, 동기들과 동해안 여행.

56


파리 유학 시절, 고암 이응로 선생님의 집을 방문한 날.

57


2002년 겨울, 숙명여대 대학원 졸업작품전을 준비하며.

58


2003년, 대학원 졸업식날 엄마와 함께.

59


국립중앙박물관 일용직 생활 당시.

60


언니들

61


62


2018년 봄의 기록

63


"저는 사춘기를 너무 원시림을 걷는 아이처럼보냈던것 같아요. 근데 그 원시림 속에서도 어디쯤에 위험이있고, 어디쯤 가면먹을 걸구할 수 있고, 어디쯤 가면 동굴에숨을 수 있는지. 그걸알면 괜찮은데. 난 그런지식이없었어요."

64


65


66


67


"우리엄마랑 아버지는 굉장히 늙은, 내가 까만 머리의 부모를 한 번도 기억할 수 없는, 언제나 하얀 머리의 부모였어요. 근데나는 막내고. 언제나 측은함이있었겠죠.

68


한번은 장난감을 사 주겠다고 내 손을 잡고 시장 안에 장난감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가게에갔어요. 제일마음에 드는 걸 고르래요.

근데 그때 고른 게이순신 칼이었어요. 그걸 빼 들고 죽이네 살리네하면서 남자애들하고 굉장히 잘 놀았던기억이나요. 지금도 생각나."

69


70


71


"바다에 빠져서허우적대는 듯한, 그게 젊은이들 모습이거든. [데미안]에나오는 싱클레어가 겪는 그런 종류의 고민과 방황들을 다 하는데, 참 나는 지독하게겪었지 그거를."

72


73


"입시학원갔을 때도 정말 웃기는 일이있었어. 평소에는 그림안 그리다가 실기시험전날에서야 몽당연필 딱 깎아가지고 흔들흔들거리면서 그걸그리고 있는데, 다른 학생들은 다 가버린거야. 내일 시험치니까 다 집에갔을 거아냐.

나는 뭐한 장 더 그리지하고 아그리빠를 그리고 있는데, 이건나의 상상이겠지만, 아그리빠가 나를 향해서 쓱 웃는 거야. 허, 소름이확 끼쳐가지고. 놀래서 후다다다닥 뛰어가지고 집에갔지.

74


그랬는데 그다음 날에 시험을 치러갔어요. 실기장에가면번호를 갖다가 제비뽑기를 시켜요. 번호를 봤더니 9번인거야. 9번이면은 거의 뒤통수를 그려야 해.

에이 짜증나 짜증나 하는데 딱 보니까 6번이랑 나랑 바뀌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불현듯. 그래서 6번한테가서니 잘못했다 여기앉아라 그랬지. 그러고는 6번으로 갔더니어제내가 그린 그 면이 딱 오는 거야. 정말 1센티도 안 틀리고. 그 아그리빠가 웃은."

75


"몰래 유학 떠나고 나서집에서는 이제난리가 났죠. 아버지가 나 어디갔냐고 했는데, 엄마가 “왜, 내가 유학 보냈다!” 그랬대요. 그때엄마가 벌써 70살이넘으셨어요.

76


유학을 가서는 되게힘들었어요. 배도 고프고. 돈도 없고. 막 그랬는데, 이상하게 그 나라의 분위기가 어떤게있냐면 예술 이러면아! 이렇게하고, 나 예술 때문에 고민한다 하면멋지다 하고.

어디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들어 주는 사람이있는 거야. 남들에게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내면의 얘기를 엄청나게해도 괜찮다, 괜찮다, 해주면서 잘 들어주는 거죠. 그래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어요."

77


78


"숙명여대대학원을 다니는데 우리교수가 가면에대해서디자인을 해 오래. 그러면서남산에가면 그런박물관이있대.

근데내가 그랬어. “남산이어딘데요?” 남산 바로 밑에있는 학교에서.

교수가 한숨을 퍽퍽 쉬더라고."

79


80


"아, 이건 절체절명의 무엇이다, 나랑 딱 맞아, 이렇게말하는 건내 성격이아닌 것 같아요. 그냥 뭐 싫지않았다, 이렇게말하는 게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요. 싫지않았고, 그래도 재밌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잘할 수 있었다. 그래서대학을 가고 유학을 갔다가 또 대학원까지할 수 있었던것 같아요."

81


82


83


"유물 복원 보존이라는 미지의 세계에1세대들이깃발을 꽂아 놨어. 이제내가 2.5세대쯤에왔더니 전체적으로 방은 나눠놨어. 이런방 저런방. 그 속에 주인들이없을 때잖아요.

그 방에가서 처음부터의자도 사들이고 옷장도 사들이는 기분으로 일하다가 한 10년쯤 됐을 때이 책[보존과 복원의 세계 – 토기 자기]를 썼어요. 내게 주어진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84


85


86


87

1


이해순 자서전 만든이 발행일

2018년 7월 17일

글편집

이홍근

사진

김정재, 황병철

영상

최규민

디자인

배완

그림

이해순, 배완

Copyright Ⓒ

, 2018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