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9 - 한경희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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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희 1949.03.11.


차례


성북구 동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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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떨어진 교복을 입고 자랑하고 다녔어 7


내가 어렸을 적에 시골에 살았어. 공주 탄천면. 탄천 삼각리. 면 소재지에서 조금 산길로 들어가지. 부여군 가는 쪽으로. 낙화암이 우리 집에서 30리밖에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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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논이랑 밭이 별로 없었어. 그러다 보니까 우리 집 농사일은 별로 없었어. 돈 별로 안 되는 품팔이를 많이 했지. 아버지가 외상으로 밭을 빌려가지고 농사를 지었어. 어머니도 일하시고. 열심히 하셨지 진짜. 내 집 일에 추가로 남의 집 일까지 하셨으니까. 10월에 남들 벼 추수 끝내고 11월에 또 보리를 심으셨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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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그렇게 바쁘시다 보니까 큰누나가 애들을 다 업어 키웠지. 우리가 6남맨데 큰누나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거든. 나도 열 살 때부턴 부모님 따라서 밭에 열심히 나갔어. 농사일이라는 게 워낙 일손이 많이 필요하거든. 근데 가난하니까 일꾼을 부릴 수가 있나. 그냥 식구들이 다들 팔 걷고 하는 거지. 밭에 가면 풀이 많이 나잖아? 그 풀 뽑는 걸 우리들이 하는 거야. 부모님 하시는 거의 반만 치도 못했지만 뭐 도와야지. 열 살부턴 무조건이야.

먹는 입은 많은데 먹을 건 없지, 한창 클 나이에 밭일한 다고 힘쓰니까 배는 계속 꺼지지. 얼마나 배고프겠어. 그 때 왠진 모르겠는데 고구마를 우린 감자라고 불렀어. 동 네에 고구마가 많이 나니까 애들이랑 맨날 고구마 캐다 가 삶아 먹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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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때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다 불을 직접 때야 밥을 해 먹을 수가 있었거든. 불을 때려면 나무가 있어야 하잖 아. 지금이야 산에 나무가 우거졌지만 옛날에는 나무가 없었어 산에. 땔감으로 쓴다고 다 베어가서. 이 없으면 잇 몸이라고. 나무가 없으니까 솔방울 같은 것도 땔감으로 썼거든 사람들이? 그래서 솔방울 따다가 판 적도 있었 어. 오 원이었나 십 원이었나. 그때는 그것도 컸어.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땐가. 엄니가 어떤 중학생이 입던 다 떨어진 헌 옷을 가져다준 적이 있었어. 중학교 교복. 검은 거. 다 떨어진 것 부잣집 사람이 준거지. 내가 그걸 입고 자랑하고 다녔어. 양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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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서울로 가고 싶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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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형님이 먼저 서울로 일하러 올라가셨어. 그때는 장남을 서울로 안 보내려고 했었어. 가업 물려받아서 농 사지으라고. 그런데 그것도 논이 많이 있어야지. 우리 집 은 논도 별로 없어서 이걸로는 저도 잘 못 먹고 부모도 잘 먹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가슴 아파도 보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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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가시는 거 보니까 나도 서울로 가고 싶더라고. 왜 그 사람들이 서울 다녀오면 옷도 깔끔하게 빼입고 선물 도 사오고 그러잖어. 그니까 나도 농사 안 짓고 서울 가 야지 마음먹고 있었지.

그러다 아는 사람 통해서 강원도 춘천으로 올라갔어. 소 양강 있지? 거기서 1~2년간 일했지. 얼마나 춥고 힘들었 다고. 숙소도 제대로 된 게 없어서 나무로 불 때가지고 혼자 밥을 해 먹었어. 밥, 간장, 그거랑 빠다. 마가린이지. 라면도 있는 사람들이나 사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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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내다 할머니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온 거야. 시 골로 내려가야지. 그때 나이가 열아홉인가 그랬을 거야. 그런데 시골 내려가게 사장한테 월급을 달라고 했는데 안주더라고. 한 달 치인가 두 달 치를 못 받았어. 지금이 야 노동청에다 신고하면 된다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 었어. 사장이 왕이었지. "돈 없어." 그러면 그냥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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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상 치루고선 다시 서울로 오려고 여기저기 알아 보고 있었어. 그때 서울 면목동에 사는 친구 하나가 있었 거든? 근데 그 친구가 중화동에 볼트공장 과장을 안다 고 하더라고. 얘기 좀 잘해달라고 했지. 그렇게 친구 소 개로 과장을 만났는데 과장이 일 좀 해봤냐 묻더라고. 그래서 내가 강원도 춘천에서 일도 해보고 농사도 지었 다고 그랬지. 그랬더니 일해 보라고 하더라고.

볼트 만든다 하면 단순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순서가 여 러 복잡해. 그래서 그런지 돈을 꽤 주더라고. 그 당시에 내가 월급을 3만 원을 받았어. 지금 돈으로 150만 원 정 도야. 그 돈도 친구가 소개시켜줘서 많이 주는 거라고 했 어. 그런데 문제는 방세가 비쌌어. 만원인가 만 이천원인 가. 그거 내고 쌀 사고 나면 남는 게 없지 뭐. 그땐 장비도 다 자기 돈으로 사야 했어. 안전화고 장갑이고 다. 장갑 이 쇠를 만지니까 금방 떨어져. 근데 장갑이 또 비쌌거든. 그래서 그냥 맨손으로 했지. 손이 시렵더라도 먹고 살려 면 일은 해야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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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철근을 기계로 자르지만 옛날에는 망치로 때려 가지고 도끼로 끊었어. 그런데 철근을 끊을 때 딱 딱 떨 어질 때도 있지만 파편이 옆으로 튀기도 하거든. 나하고 같이 일하던 양반이 6~70대 노인이었어. 그 사람이 도끼 를 철근에 놓고 내가 망치를 댔지. 깡 하더니 정강이가 부 서질 것같이 아파. 보니까 튄 철근이 튀어서 내 정강이에 박힌 거야. 얼마나 아팠겠냐. 철근이 박혔으니. 아예 구 멍이 뚫렸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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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주변 병원에 입원했지. 이게 뼈에 구멍이 뚫리니까 잘 낫지도 않아. 뼈에 구멍 뚫린 게 붙으려면 1~2년은 간 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내가 보름 입원했을 쯤인가 병원 에서 나가라고 하더라고. 아무리 공장에서 보험을 들어 놨어도 조금만 입원시키고 내보내는 거야. 내가 안 된다 고 사정하고 우기고 버텼는데도 한 달 만에 쫓겨났어.

다시 공장에 가서 일해 보려고 했는데 일을 못 하겠더 라고. 다리가 도저히 아파서. 계속 서 있어야 하니까. 돌 아다니기도 하고 무거운 것도 들고 서 있어야 해. 그래서 과장이 나를 부르고 20만원을 주면서 좀 쉬라고 하더라 고. 그 돈 받고 나는 시골로 내려왔어.

그 이후에 다시 서울에서 일할 때도 공장 같은 데는 못 가겠더라고. 철 소리가 너무 싫었어. 사람이 아주 무섭게 다치면 비슷한 일은 할 수가 없는 거여. 지금도 공장 옆에 지나갈 때 딱딱 소리 나고 그러면 깜짝 놀라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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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심정 이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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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시골 내려가 있을 때 미아리에서 어떤 사람이 내 동네로 이사를 왔어. 그 사람이 벽돌 쌓고 시멘트 일 하 는 기술자야. 시골에 왔으니까 낯설잖아. 나는 내 고향이 니까 일할 거 있으면 막 소개시켜주고 그랬어.

그 사람이 날 좋게 봤나 봐. 그 사람한테 여동생이 한 명 있었어. 그 여동생이 장충동이 고향이더라고. 이쁘장했 지. 날 소개시켜 주더라고. 결혼하자고 해서 결혼했어. 결 혼식은 안 올리고 어머니 아버지하고 사돈끼리 모였어. 말하자면 약혼식이지. 반지 하나 해주고 살았어. 한 1년 살다가 애를 낳았어. 아들이야. 그렇게 시골집에서 2년 가량 살면서 남의 집 일도 해가면서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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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나를 소개 시켜준 사람, 그니까 형님이지? 형님 이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 장인어른이 방학동에서 집 짓 는 일을 하니까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 건축. 한 채 짓고 팔고, 짓고 팔고 하더라고. 지금은 집이 꽉 찼지만 옛날 엔 방학동이 밭이었어. 팔면 집 한 채가 300만원 했어. 집을 지으려면 돌을 기계로 잘라가지고서 쌓아 만들어 야 하잖아. 나는 돌 자르는 공장에 취직을 했어. 돌도 만 지고 집 짓는데도 봐주고 하니까 바쁘더라고.

그래도 사위여서 월급을 2배로 준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았어. 벽돌 들어오면 세주고 장인한테 몇 장 들어왔는 지 결재받고 했지. 막걸리 한 통 사서 내가 자전거에 실어 다가 일꾼들한테 한 잔씩 주고 그랬어. 철물점에서 필요 한 것도 사다주고. 사람들이 기와, 시멘트 별돌 이런 거 못 훔쳐 가게 경비 서고. 웬만한 뒷일은 내가 다 한 거야. 장인이 잘 일 한다고 1년에 한두 번 돼지고기를 사줬어. 그땐 그 돼지고기 먹기가 정말 힘들었거든. 환장하고 먹 었지. 그때 없는 사람은 1년 12달 돼지고기 한 점 못 먹었 다니까. 그렇게 내가 거기서 5년을 일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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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는 그때 내가 번 돈을 직접 만져본 적이 없었어. 아 들을 장모가 맡아서 키웠으니까 다 장모한테 줬거든. 그 돈을 장모가 쪼개서 와이프한테 주고. 나는 그러려니 했 지.

그런데 내가 추석 때 시골에 내려가려고 애 엄마한테 돈 좀 줘라 했는데 돈이 없다는 거야. 시골 내려가려면 옷도 사 입어야 하고 부모님 선물도 좀 사가야 하잖아. 알고 보니까 자기 오빠 면회 다니고 영치금 넣어주고 하느라 돈을 다 쓴 거야. 그때 처갓집에 처남이 둘 있었는데 둘 다 감방에 가서 처가가 좀 어려웠거든. 그래도 내 입장에 선 얼마나 어이가 없어. 열심히 일해도 돈이 모여야 일할 맛이 있는 거지. 차비 아끼려고 걸어 다니고 했는데 말이 야. 정말 일하기 싫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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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일하기 싫어도 장인어른 회사니까 어떡해. 공장에서 계속 열심히 일했어. 그러다 예비군 훈련 때문에 고향에 내려 갔다 왔어. 근데 애 엄마가 안 보여. 장모한테 어디 갔냐고 물 어봤더니 성남에 갔다 하더라고.

5일 정도 지나서 애 엄마가 왔는데 갑자기 나랑 같이 안 산다 는 거야. 며칠 있다가 다시 성남에 내려가더니 이번엔 한 달이 지나도 안 올라오더라고. 바람이 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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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라면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그 랬어. 밥도 못 먹고 일하고 그러니까 쓰러졌지. 죽겠더라고. 그 래서 내가 장인한테 얘기했어. 그만두겠다고. 장인이 자네 심 정 이해하네 하면서 고기하고 밥을 사주더라고.

그렇게 애 엄마하고는 이혼하게 됐지. 애는 신촌에 계시던 형 님이 맡아 키우셨어. 근데 그 아들이 7살인가 8살인가에 죽었 어. 아파서 죽었어. 걔도 컸으면 얼추 오십은 됐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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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엄마랑 헤어지고 1년 정도 시골에 있었어. 그때 마포 에서 형이 중국집을 했거든? 형이 나보고 공장 가서 고 생하느니 중국집에서 기술 배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공장 그만두고 중국집에서 열심히 일했어. 내가 지 금도 짬뽕 국물은 기가 막히게 볶아.

그렇게 2년 가까이 중국집 일을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 가셨어. 아버지가 위가 안 좋으셨거든. 아버지가 매던 밭 이랑 논 있잖아. 형이 나보고 중국집 일 그만두고 내려가 서 농사일 하라고 하더라고. 그렇게 1년을 일하다가 누 가 논에 농사를 짓는다길래 줘버리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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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형이랑 신촌에서 술장사를 시작했어. 중국집 그만두고. 일류 요리 술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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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지배인으로 내가 앉았어. 형 바로 밑이니까 부사장이자 총 책임자로 있었지. 나도 좋더라고. 양주도 실컷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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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대한민국에서 양주는 내가 제일 많이 먹었다고. 잘 먹고 잘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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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이다 보니까 연세대학교 의사들이 많이 오고 그랬 어. 외과의사들. 수술하고 오더라고. 사람 배 가르고 그 러면 냄새가 엄청 난다 하더라고. 그 냄새 지운다고 와서 이제 양주 먹는 거야.

술집이다 보니까 건달 놈들도 많고 그랬어. 한 번은 이 랬어. 손님 술값이 50만원 정도인데 100만원 수표를 딱 주더라고. 그런데 그만한 거스름돈이 없더라고. 그래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손님이 이 가게는 돈도 없네 하고서 욕을 하더라고. 그땐 서대문 경찰서 형사들도 많이 알고 그랬어. 파출소 소장들도 다 알고. 그래서 혼꾸녕을 내 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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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도 많았어. 젊은 놈. 32살짜리가 과감하게 들어오더 라고. 술 좀 먹읍시다 하고. 양주 5병 이상은 먹었어. 그 런데 12시가 지나고도 안 가. 내가 그래서 웨이터보고 빨 리 가라고 해라고 했는데 문이 잠겼다는 거야. 나는 키 가 있으니까 문 열고 들어가니까 쓰러져있더라고. 근데 이 사람이 움직이지도 않고 얼굴이 새카매. 깜짝 놀랐지. 얼른 내 차로 세브란스 병원 딱 갔는데 의사가 청진기 대 보더니 죽었다고 하더라고. 의사가 싸이나 있지? 청산가 리. 그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더라고. 애초에 들어올 때부터 술 먹고 자살하려고 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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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는 진짜 잘 됐어. 떵떵거리고 살았다고 진짜. 근데 그러다 IMF가 와버린 거야. 장사가 아예 안 되지. 사람 들이 배 채우느라 바쁜데 무슨 술을 마셔. 소주도 아니 고 양주를. 술장사가 완전 다운돼버렸어. 그때 집세가 한 달에 450만원 정도 나왔어. 장사는 안 돼도 집세는 내야 될 것 아녀. 거기에 전기세에, 부가세에. 여차여차해서 세 금 깎고 뭐 했는데도 도저히 집세 때문에 유지가 안 돼. 장사를 그만둬야겠더라고.

가게 빼면서도 나는 형님이 나 무슨 장사 하나 차려줄 줄 알았어. 내가 돈을 많이 벌어다 줬으니까. 근데 형님 하고 형수는 내가 돈을 많이 빼돌린 줄 안 거야. 형님한 테 말했지. "나는 형님을 위해 다 했다. 나는 형만 잘 되 면 형이 나한테 뭐 하나 차려줄 줄 알았다." 이렇게. 얼마 든지 내가 돈을 빼돌릴 수도 있었거든. 그래도 난 안 했 어 정말. 온갖 궂은일도 다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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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떨어져 나왔지. 지금도 생각하면 형님이 좀 야속 하다고 생각해. 그때 모아둔 돈 같은 건 없었어. 형이 가 게를 하나 차려 줄 줄 알고 돈을 따로 안 받고 일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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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랑 멀어지고서 이제 나도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이 제 나는 나이도 있고 그러니까 어디 공장 가서 일은 못 하겠더라고. 그때 아는 공장 가서 박스 정리를 하면서 7~8개월 있었어. 돈 100만원인가 받으면서. 그리고 신촌 홍대 입구에서 경비를 2년 정도 내가 봤어. 월급 100만원 씩 받으면서. 그러다 건강이 좀 안 좋아져서 보조금 받으 며 생활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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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이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더라고. 15년 정도 됐어. 어머니도 화장해드렸고. 나는 자식이 없고 형님도 딸 하나 남아있어. 그래서 내가 이제 대가 끊기잖아. 내 아래로는 다 여동생이야. 형도 아들 없지. 나도 없지. 가 만히 생각해보니까 누가 조상을 모시나 했지. 그래서 11 년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모두 화장을 해드렸어. 그리고 깨끗한 산에 뿌렸지. 내가 속으로 ‘어떡합니까. 내가 자식이 없으니까 용서하십쇼. 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습니다.’ 되뇌었지. 맘은 이제 개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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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요새는 좀 재미있게 지내. 얼마 전에 어떤 사람 을 만났어. 나한테 잘해주더라고. 나도 어려울 때 많이 도와줬어. 이 사람이 나이가 78센가 먹었어. 여기 미아리 고개 풍림아파트에 살아. 그 사람 아들딸들이 나한테 다 잘해. 일본에 삿포론가? 거기랑 러시아 갔었지. 싱가포 르도 가고 인도네시아도 갔다 오고 그랬어. 근데 요새 좀 아파. 허리가 아파서 지금도 계속 약 먹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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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것은 미래를 장담 못 해. 어떻게 될지 몰라. 내 생각은 그래.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야 돼. 시간을 낭 비하지 말고. 오늘은 내일 안 돌아오거든. 오늘은 다신 안 돌아오거든. 그런 아까운 시간을 값어치 있게 살아라. 무슨 일을 하더라도 열심히 해야 하고.

잘못하면 나만 다치는 게 아니야. 부모님들 속 썩이지. 저만 망하는 게 아니고 집안이 다 망해. 낙인은 끼치지 말아야지. 남한테 폐 끼치는 건 싫어. 남한테 주는 걸 바 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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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나한테 알려준 게 있어. 아버지의 신조지. 니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손해는 끼치지 말라 하셨어. 지 금까지 내가 인생을 살아왔지만 남에게 크게 억울하게 뼈 아프게 한 건 없어. 그건 확실해.

지금은 죽는 그 날까지 앓지 말고 빨리 죽길 바라. 그게 내 소원이야. 간병인이 있다면 그거 다 피해 주는 거야. 병원에서 가끔 보면 사람이 다 마지막 가는 길에 다 안 타깝더라고. 너무 고생하더라고. 그렇게 살 바에는 빨리 가야겠더라고. 그게 마음이 가장 바라는 거야. 진심이야. 내가 말주변도 없고 자랑거리도 아닌데 이게 흘러온 내 인생이야. 남한테 뼈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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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snailbooks.com 달팽이는 자서전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달팽이는 지나간 자리에흔적을 남깁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 자취를 찾아 이야기로 만들어드립니다.


한경희 자서전 만든이 발행일

2018년 10월 31일

글편집

이홍근, 강태원, 김진성

사진

황병철, 김정재

영상

최규민

일러스트

류송이

디자인

배완

Copyright Ⓒ

, 2018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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