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10 - 이상학 이경숙 자서전

Page 1




이상학 1936.02.18.

이경숙 1945.10.17.



차례

6

20


28

48

54


6


할머니의 어릴 적

7


8


난리통도 그런 난리통이 없었지. 엄마는 만삭이어서 배가 남산만하고 이모도 배가 불룩한데 전쟁이 터져버렸으니 까. 근데 몸이 그렇게 무거워서 피난을 어떻게 가. 어쩔 수 없이 엄마랑 고모는 서울 집에 숨어있고 나머지 가족들만 피난을 가기로 했어. 좀 잠잠해지면 다시 만나자 하고.

우리 엄마가 오빠가 있는데, 그니까 나한테 삼촌이지? 그 분이 해방 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그쪽에 정 착해서 살고 계셨대. 그러다 전쟁이 나고 1.4 후퇴 때 인민 군이랑 같이 고모랑 엄마 있는 삼청동 집에 내려오신 거 야. 와서 엄마한테 하시는 말씀이, 곧 서울이 불바다가 될 거니까 여기 있으면 다 죽는다고 평양으로 같이 넘어가자 고 하신 거야. 절대 못 간다고 하셨대. 죽어도 거기서 죽을 거라고. 근데 버티는 게 뭔 소용이 있었겠어. 상황이 급박 해지니까 삼촌이 끌고 북으로 가셨대. 그리고 엄마를 못 봤어.

9


10


그렇게 힘들게 피난 갔다가 어찌어찌 휴전되었다는 소식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 우리 집은 형체도 다 있었고 쓰러지거나 불타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집안에 풀이 무 성하게 자라있더라고. 아마 2월인가 그때 돌아왔으니까. 군인들이 먹을 거나 가져갈 만한 것들은 다 가져가고 남은 게 없었어. 그러니까 먹거리는 어른들이 해결하고 나랑 애 들은 뭐 주면 주는 대로 먹고, 그러면서 다시 살아갔지.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국민학교 다니기 시작했어. 여느 집처럼 우리 집도 형편이 어려웠어. 전쟁 직후니까 더더욱 그랬지. 그런데도 우리 집에선 항상 공부가 중요하다고 학교를 그 없는 살림에 보내셨어. 나도 공부 욕심이 있었 고. 그 당시엔 3달에 한 번씩 교육비를 내야 했거든? 국민 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 경제적으로 뒷바라지가 잘 안 되니까 힘들었지. 그땐 사친회비 못 내면 막 쫓아내고 그 랬다고. 그래도 끝까지 고등학교 3년 공부 다 마쳤어.

11


돈이 없어서 힘들었어도 학교는 재밌었어. 방과 후에 운 동 연습하고 재밌게 학교 다녔었지. 그때 배구 했었는데, 내가 배구를 잘했어. 반에서 선수로 뛰었으니까. 5월인 가? 해마다 봄이면, 교내에서 반끼리 시합도 많이 했었어. 잘 뛴 날에는 선생님이 맛있는 것도 사주셨었어. 교문 앞 에 ‘풍문당’ 이라는 빵집 하나 있었거든. 안국동 풍문여고 앞에. 지금은 걸스카우트 건물이 들어섰는데 그 당시에는 앞에 지나다니고 하면 빵 냄새가 엄청났지. 소보로빵, 앙 꼬빵, 크림빵 정도 팔았었는데, 그때는 내가 어려웠을 때 니까 왔다 갔다 얻어먹기도 하고 사 먹기도 했어. 당시에 는 되게 맛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맛이 안 나더라고.

12


13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나 학교 보내고 키우시면서도 우리 엄마를 계속 기다리셨었어. 근데 남북이 갈라져선 붙을 생 각을 안 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 엄마도 이북에서 오실 수 가 없으니까 재혼을 하셨어. 그렇게 내 밑으로 동생만 여 섯이 생겼지. 내가 육남매 중 첫째다 보니까 책임감이 있 었어. 당시엔 첫째가 동생들 다 업어 키우고 그랬다고. 새 엄마가 많이 알려주셨지. 집안일부터 애 낳는 것까지. 확 실히 첫째로서 부담감이 있긴 했어.

14


15


16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했는데도 돈을 많이 못 벌었어. 나도 누가 소개해줘서 직장에 갔어. 그때는 다 소개로 갔 지. 뭐 지금처럼 시험 보고 그런 게 아니라 지인 소개로. 근 데 그 사람들도 사업이 안되니까 돈을 잘 안 주더라. 내가 가는 곳이 잘못된 건지... 무슨 무역회사라고 그랬던 것 같 아. 나는 거기서 제품 정리하는 일을 했어. 그렇게 다들 일 해가지고 수출을 하긴 했는데, 수출이 돼도 수출 대금이 안 나오는 거야. 그 정도로 회사가 힘들었나 봐.

스물한 살 처음 직장 다녔을 땐 월급이 오천 원인가 그랬 어. 집안 살림살이가 풍족하지 못하니까 다들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잘 못 사잖아. 그래도 월급 타면 돈이 좀 있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뭘 좋아하시나, 엄마가 뭘 좋 아하시나 봐놨다가 사다 드렸어. 그때 우족, 소 발 있지? 그걸 내가 하나 사가지고 간 기억이 나. 우리 아버지 드리 려고. 그래서 우리 엄마가 고아서 아버지 드리고 그랬지. 그 당시에는 진짜 일하는 게 힘들었어. 그러면서 컸지 다 들. 일하는 게, 아유 어려워.

17


그러다 뭐 신랑 만나서, 시집왔지. 돈은 뭐 많이 벌 수가 없었어. 근데 사실 힘든 건 다 그래. 그래도 우리 때는 그 나마 ‘전쟁으로 인해서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거다’라 는 이유로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는 거지.

18


19


20


할아버지의 어릴 적

21


22


어릴 땐 운동하고 뛰어노는 게 일상이었어. 용인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야 뭐 주로 태권도를 많이 하고, 시골 이니까 맨날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면서 서리하고, 그러 고 놀았지. 그 당시에는 체육관이 하나밖에 없었어. 지 금 국기원이지. 각종 운동 다 거기서 했어.

중학교 2학년 때였나. 고향이 용인이니까 서빙골로 건 너 가서 학교 다니고 그랬었는데 이제 전쟁이 나니까 서울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어. 그러다 보니까 고향 용인에서 서울 학교까지 거리가 30리나 됐다고. 맨날 그 거리를 걸어 다니고 고등학교 다닐 때도 산 넘고 물 건너 걸어 다녔어. 매일 매일 그렇게 걸어 다니니까 피 곤해서 수업 때 맨날 뒤에서 졸았어. 하도 조니까 선생 들이 밤에 뭐하고 학교에서 매일 조냐고 야단을 치셨 지. ‘30리 걸어 다녀야 하다 보니 피곤하다’고 하니까 그냥 자라고 하시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선생님이 셨던 것 같아.

23


24


그렇게 학교 다니던 중 학교가 비행기 폭격으로 불타 버렸어. 하는 수 없이 창고에서 의자를 가져와서 자기 앉고 싶은 대로 앉았지. 지리 선생님이 박우지라고 평 양 사람이었어. 국어 선생님도 평양 사람인데 꼭 가르 칠 때마다 알간? 알간? 이런 말버릇이 있어서 친구들이 랑 한참 놀렸어. 그렇게 전쟁 중이어도 학교 다니고 지 냈는데 하루는 중공군이 용인까지 왔어. 나 살던 동네 까지 들어 왔는데 다짜고짜 밥을 해달라고 하더라고. 하는 수 없이 밥을 해줬지. 근데 밥을 해주는데도 꼭 주 인보고 먹어보라고 그러더라. 뭐 독약이라도 탔는 줄 알고. 그러다가 한번 아군이 폭격을 하니까 금방 그 다 음날 어디로 다 가버렸어. 밤사이 얼로 갔는지도 모르 게 쌀 가지고 도망갔어. 걔네들은 신발도 안 벗고 자더 라고.

25


그렇게 전학 간 학교 다니면서 졸업하고 대학 다니다 군대 갔지. 그리고 내가 태권도 유단자인데 급이 있으 니까 군대 가서도 태권도 조교를 했었어. 그 당시에 논 산에는 제대로 된 물이 없었어. 마실 물도 없어가지고 흙탕물 퍼먹고 생활하면서 훈련받았다고. 밥도 부실하 니까 배도 엄청 고프고. 너무 힘들게 군 생활을 해서 정 말 논산은 쳐다도 안 본다고 했어. 그쪽으론 오줌도 안 눈다고.

군 제대하고 전북대에 3학년으로 편입했어. 대학교 다 니다 졸업하고 서울시에 공채 시험 봐가지고 취직했 지. 시골 사람이 서울에 와서 직장 잡으니 시골에서 난 리가 났었대. 최고라고. 처음에는 동대문구청 세무과에 있었어. 한 달 꼬박 일해서 월급을 받았는데 정말 쌀 한 줌을 주는 거야. 나 혼자 먹고 쓰기에도 한참 모자랐지. 그래도 참고 7~8년 다니다 그만둬버렸어.

26


27


28


함께한 오랜, 소중한 이야기

29


30


우리 집 양반, 우리 고모가 소개해줬지. 우리 고모가 시 공 무원이셨어. 이 양반은 세금담당 공무원이었거든? 그때 소개받아 결혼한 거지. 중매해서 결혼하고 사는 거야 지 금까지. 어른들이 워낙 좋다고, 잘한다고 그랬어. 그만하 면 됐지 뭘 더 찾냐고. 지금은 각자가 맘에 맞아야 하지만 우리 때는 주위에서 그냥 ‘괜찮다. 괜찮다. 저만하면 너 밥 안 굶긴다’ 그러면 결혼하는 거야. 그때 내 나이가 스물셋 이었지. 9살 차이. 바로 결혼했어.

31


32


결혼하고 이 동네에 터를 잡은 건 아니고 맨 먼저 살기는 저쪽 딴 데서 살았어. 저기 마포 국민학교 있는 곳. 가난한 산동네였지. 우리 집에서 마포 아파트가 보였는데, 내려 다보면 아주 황홀하고 좋은 거야. 아주 잘 지은 거였거든. 진짜 고관들만 사는 데였어.

마포에 살다가 저 양반이 공무원 때려치면서 종암동으로 이사를 왔어. 갑자기 건축 일을 하겠다고 하시더라고. 친 구가 ‘건축해보자, 이러면 돈 많이 남는다’ 하니까 꼬임에 넘어가서. 그땐 내가 젊었을 때니까 뭐 남자가 하는 대로 놔둔 거지. 집을 지어서 파는 것까지 다 했어. 근데 사업이 란 게 내 돈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돈을 빌려서 하잖아. 투자를 받아서 집을 올렸는데 매매가 안 된 거야. 없는 돈 에 집 겨우 지었는데. 자재 값도 못 건지고 쫄딱 망한 거야.

33


종암동에서 그렇게 집안이 힘들어져가지고 이제 이 동네 로 온 거였어. 장사하려고 여기 끄트머리로 온 거야. 아파 트 짓기 전에는 여기 다 산동네였거든. 하꼬방 집이라고 그러지? 판잣집. 다 판잣집이었어요. 여기 위에 다 개운중 학교까지 산동네. 지금이야 산을 깎아 아파트 지어서 그 렇지 우리가 이사 왔을 때는 다 비둘기 집이었어. 판자 쌓 아서 집 만들면 무허가니까 사람 살지 말라고 구청에서 때려 부수고. 근데 이게 뭐 워낙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 냥 뭐 ‘너는 그래라, 나는 지을란다’ 하고 또 짓고. 정말 사 람 잠자리만 되면 되니까. 그렇게 살았어.

34


35


36


내가 여기서 처음 시작한 일은 일반 가게였어. 이것저것 다 팔았지. 그렇게 장사하면서 별일 다 봤어. 어떤 사람이 요 앞 아파트 106동 10층 1호로 쌀 20kg이랑 콩 한 되를 가져다 달래. 10만 원짜리 수표로 계산하겠다고. 그때 쌀 20kg면 4만원인가 그랬거든? 그래서 쌀이랑 콩이랑 핸드 카 얹고 서덕서덕 거리면서 끌고 올라가는데 누가 따라오 더라고. 보니까 차림이 아주 신사야. 그 신사가 대뜸 "아 지매, 그거 우리 집 가져가시는 거예요?" 그러는 거야. 그 렇다고 하니까 수표는 자기 마누라한테 쌀 주면서 받고, 자기한테 거스름돈만 먼저 달라는 거야. 차림새도 멀끔하 고 그러니까 믿고서 잔돈을 줬지. 근데 그게 거짓말이었던 거야. 쌀 주문서부터 싹 다 사기였던 거지. 장사하는 사람 들 그런 식으로 네바다이 많이 당했다고.

37


통금 있었을 때 되게 장사하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아. 통 금시간 맞춰서 사람들이 우루루루 몰려서 집으로 돌아가 면서 물건 하나씩 사가는 게 참 쏠쏠했다고. 그리고 통금 시간이 지나면 맹인들이 다 우리 집으로 왔어. 맹인들이 아랫동네에 많이 살았거든. 근데 그때는 저쪽 아랫동네 굴다리 쪽에는 가게가 없었는지 아님 그냥 밑으로 내려가 기 싫었는지 담배 사러 다 우리 집으로 오더라고. 통금이 있어도 맹인들은 안 잡아갔거든. 걸어서 건너오거나 통금 시간에는 차가 안 다니니까 차 가지고 운전도 해서 왔어.

38


39


문방구 시작하게 된 내력 보면 또 웃기지. 80년대부터 가 게를 하다가 옆에 바니문구라고 문방구가 하나 생긴 거 야. 근데 그 집이 장사를 정말 잘했어. 아침에 보면 학생들 이 좀 많았어? 성신여중, 여고하고 엄청 많았어요. 오죽하 면 학생들이 울고 가, 물건을 못 사면. 또 돈 때문에 싸우 고 막 거스름돈을 안 줘놓고 줬다고 하고 이런 걸로 울고 가고... 그런 적 많아, 많이 봤어. 그 정도로 장사가 잘됐어. 아침마다 보면 진짜 나도 문구점을 하고 싶더라고.

그래도 상도덕이란 게 있잖아. 그 집은 문방구고 나는 마 트고. 그러니까 너희는 문구 팔아라 우리는 하던 거 할게 이렇게 된 거지. 근데 좀 있다가 세일 물건이 막 쏟아져 들 어오더라고. 500원짜리 세 개 1000원에 묶어 팔고 그런 거. 그렇게 팔다 보니까 우리도 좀 잘 됐거든. 그걸 보더니 바니문구에서 욕심이 났나 봐. 마트 물건들을 하나둘 놓 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대놓고 냉장고도 들여오더라고. 음 료수 이런 거 팔려고. 열받지. 나도 그래서 연필 하나, 뭐 하나, 하나씩 하나씩 넓힌 거야. 도매상 가서 물어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아예 문방구를 하게 된 거라고.

40


41


42


우리 알뜰문구가 문구도 문구지만 분식으로 유명했어. 우리가 문구점을 하면서도 용인에선 농사를 지었거든. 우 리 아저씨가 고구마 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싣고 오는데 너무 많은 거야. 뭐 팔기도 그렇고 그래서 맛탕을 해볼까 해서 하게 됐지. 했더니 학생들이 먹어주더라고. 우리 문 구점 앞에 맛탕 먹으려고 학생들이 모이니까 바니문구가 갑자기 떡볶이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도 떡볶이를 했어. 근데 음식 맛이란 게, 하는 사람 따라서 맛이 천차만별이 잖아? 내 음식 맛이 좋았다고. 떡볶이 장사하면 바니문구 가 맨날 음식 맛이 지는 거야. 음식 맛이 지니까 내가 세판 팔면 걔들은 하나도 못 팔아 맨날 남고. 약이 올랐는지 맨 날 우리 가게를 구청에다 신고하는 거야. 단속 나오기 전 에 자기네들은 후라이팬이랑 음식 싹 다 치우고. 그래서 벌금도 많이 냈어.

43


그리고 문방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니까 학생들이 바 니문구에 안 가고 우리 알뜰문구에 오면 난리 나는 거야. 우리 집에 온 학생들을 봐뒀다가 나중에 “이리와 봐라, 이 리와 뭐 샀니? 얼마에 샀니?” 이러고. 솔직히 우리 집보다 장사도 훨씬 잘 되고 가게도 컸거든. 근데 너무 욕심을 부 려서 우리가 힘들었지. 그러다가 다른 일 하겠다고 어느 날에 나가더라고. 나가는 날까지 남은 문구 재고를 공짜 로 뿌리는 바람에 우리를 힘들게 했어. 근데 나중에 그 부 부가 완전히 망했다고 하더라고. 그니까 욕심부리지 말고 과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해. 그래도 다시 만나면 한번 인 사는 해야지. 어떻게 지내냐고. 뭐하냐고 이렇게 물어보 고 싶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고 그러지.

44


45


그렇게 막 힘들게 살다 보니까 이 나이야. 근데 요즘 찾 아오는 학생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야. 학교 준비물이 없 어. 그게 애석한 거지. 준비물 많어봐. 여기 문방구 또 생겨. 근데 요즘 학교에서 준비물 사 오라고 안 하잖아. 그러니 까 아무도 문방구를 안 하려고 하지. 생긴다 하더라도 엄 청 큰 문구점들이 다 잡아먹고. 내가 하다가 고만두면 이 동네 문방구도 끝이야. 직업 자체가 소멸돼서 없어지는 거 야.

그래도 우리 집엔 다이소나 대형 마트에서 안 파는 물건 들이 있으니까 학생들이 그거 사러 오는 거야. 100원짜리 물건 같은 거. 우리 집으로 오긴 오지 오는데, 숫자도 줄고 파는 양도 줄고 다 그래요. 방학은 거의 놀고 있는 거예요. 그냥 뭐 몇천 원 팔 때도 있고 개시도 못 한 날도 있고 그 래. 요새 개학해서 조금 살겠다 했는데도 뭐 별로야. 하루 종일 해도 매상이 별로 안 올라 10만원 팔기도 힘들어.

46


47


48


남아있는 소중한 삶

49


여생, 건강하다면 뭐 정말 건강하기만 하면 돼. 우리가 100세 시대 이러는데 100세까지 사는 동안에 난 딴 거 없 어. 화장실 출입만 잘 할 수 있으면 최고야. 그지 솔직히 말 해서 화장실 출입, 근데 그렇게 못하고 진짜 그냥 자리보 전하고 있으면 죽은 인생이야. 안락사시켜 달라고 할 거 야.

누워 있어 봐, 떠주는 밥 먹어야 되고 정말 대소변 다 받 아 줘야 하는데. 그거 어떻게 살어. 내가 죽을 순 없으니까 안락사시켜 달라고 해야지. 그지 난 그거 원해. 그건 인간 의 존엄이 없는 거 아냐. 솔직히 말해서 학생들은 아직도 살 날이 많으니까 그런 생각 안 하겠지만 우리는 그래. 나 이 먹은 사람들 다 그런 얘기들 하더라구.

50


51


이 양반은 어디가 아파서 병원 가자 그러면 못 가시겠대. "그래, 당신이 못 가면 내가 모셔다 드릴 테니까 갑시다." 어휴, 그래도 안가. 다리가 아파서 힘들어 못 가시는 거야. 아침에도 피부과를 가야겠다 그러고 나가셨는데 되돌아 오셨더라구. “왜 와요?” 그랬더니 다리가 아파서 못 걸어 가겠대. “그럼 내가 택시 잡아 줄 테니 갑시다.” 했더니 안 간대. 오늘 안 간대. 낼 모레, 다음주 간대. 그렇게 계속 미 루시는 거지.

얼마 전부터는 입버릇처럼 "나 많이 살아봐야 한 5년 살 까? 5년 살까?"하시더라고. 하다가 인제 3년이야. 또 줄 어서 3년. 100세 시대에 뭐 5년 3년을 따져. 내가 막 뭐라 고 그러지. 그래도 몰라. 학생들하고도 자꾸 대화를 해라 내가 막 그러지. 그래야 돼. 치매 올까봐도 걱정되고. 오래 오래 건강하셔야 할 텐데...

52


53


54















68


www.snailbooks.com 달팽이는 자서전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달팽이는 지나간 자리에흔적을 남깁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 자취를 찾아 이야기로 만들어드립니다.


이상학 이경숙 자서전 만든이 발행일

2018년 12월 5일

글편집

이홍근, 노혜서, 박시현, 이정민, 정세형

사진

김정재, 황병철

영상

최규민

일러스트

류송이

디자인

배완

Copyright Ⓒ

, 2018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


71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