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대리와 K대리가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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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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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날

13

두 번째 날

59

세 번째 날

79

네 번째 날

99

다섯 번째 날

111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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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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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K대리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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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삶의 의미에 대해 그리 드물지 않은 빈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민 한 철학적 감각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만 한가할 뿐 일지도 모르겠다. 낙원이 바로 그러한 부류에 속했다. 그는 이런저런 학교를 나왔고, 많지 않은 대인 관계는 그럭저럭 원만한 편이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딱히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만 하며 지냈다. 최소한의 돈이 갖추어진다면 어차피 다 똑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의사나 변호사나 편의점 직원이나 일용직 노동자나. 다른 것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뿐이다. 오히려 하루의 3분 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자는 노예라는 니체의 말을 중얼 거리며 다른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낙원은 그런 시선을 방어해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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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자신을 위로하길 즐겼고, 스스로의 한가함을 사랑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에게는 무료함을 벗어나게 해줄 어떤 자극이나 불 안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자기 삶의 귀결로 여겼다. 어차피 다들 살기 위해 사는 것이다, 삶은 동어반복이다. 낙원은 눈치가 보 일 때면 장엄하게 선언하곤 했다. 살기 위해 사는 것, 그러니 고작 살기 위해 그렇게나 열심히 살 필요는 없었다.

*

낙원이 혜민을 만난 것은 학교 동아리에서였다. 휴학하고서 무턱 대고 사들인 카메라 위에 먼지가 쌓일 무렵, 낙원은 필름 사진을 자 가 현상한다는 동아리의 존재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낙원이 가입 할 당시의 혜민은 그 동아리의 회장이었고, 낙원의 가입 원서 작성 을 도와준 당사자도 바로 혜민이었다. 필름 카메라가 없었던 낙원에 게 혜민은 동료의 카메라를 빌려주었고, 낙원이 속한 조의 조장이 되어 출사를 이끌었다. 어린이대공원에서 우리 안의 사자와 원숭이 따위를 열심히 찍은 낙원은 동아리방으로 돌아와 필름을 꺼내려 했 지만, 몇 주 전 혜민이 가르쳐주었던 필름을 감는 방법을 잊어버렸 다. 낙원은 컴퓨터 앞에서 비품 비용을 정산하던 혜민에게 도움을 구했고, 혜민은 와인더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헛돌았던 와 인더는 필름을 감지 못했고 그 상태로 열려버린 카메라 안의 필름 은 동아리방의 형광등 아래에서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말았다. 근 엄하게 앉은 사자와 잠든 원숭이는 우중충한 배경과 함께 어둠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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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어떡해, 미안해. 냉정한 혜민의 얼굴에 당혹 감이 번졌다.

혜민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맡지 않으려 는 회장직을 선뜻 수락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순간 회장다 운 책임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혜민은 아직 타지 않은 낙원의 필 름 중에서 신인 전시회에 출품할 만한 사진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 해 신중히 현상하고, 인화하러 암실로 들어갔다. 낙원은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무언가에 홀린 듯 따라 들어 갔다. 무덥던 그 날 그들이 함께 보았던 동물들과 함께 웃고 떠들던 동아리 사람들이 붉은 와인 빛의 암실 아래에서 하얗고 매끄러운 인화지 위에 서서히 떠 올랐다. 너도 해볼래? 혜민이 말했다. 능숙한 혜민의 솜씨를 넋 놓고 바라만 보던 낙원이었다. 으응. 긍정도 망설 임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하고 난 한참 뒤에야 낙원은 집게 사이에 인화지를 끼우고 상이 대강 떠오른 사진을 픽서 용액에 담갔다. 사 진에 대해서,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낙원은 하고 싶은 말이 너 무 많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사진이 완성 되어가는 동안, 낙원과 혜민은 아무런 말 없이 서로의 침묵을 해석 하고 있었다. 어쩌면 누군갈 좋아하기 위해 삶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낙원은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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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혜민은 낙원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혜민은 낙원만 큼 자의식이 강하지도,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낙원처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혹시라도 아팠다가는 대책이 없었을뿐더러, 그녀는 무력하게 가만히 있을 바에야 어떻게든 움직여보는 것을 선 호했다. 그녀는 삶을 그런대로 사랑했다. 하고 싶은 것이 없지도 않 았고, 낙원처럼 주변의 시선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과연 용 감한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다만 혜민에게도 평범해지는 것에 대 한 두려움은 있었고,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궤도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그러한 궤도의 이탈을 구경이나 해보고 싶다는, 혹 은 가끔 참여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최소한의 반항심이 남아 있었던 혜민은, 낙원과 함께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필름을 태우는 광경을 보던 낙원의 입에 은근히 드러난 친절의 미 소가 떠올랐다. 혜민은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종종 자책하곤 했고, 그 때문에 풀이 죽어 있는 자신을 한 번 더 미워하곤 했지만, 낙원 은 그런 혜민을 포근하게 보듬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인간관 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고약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바라보기 만 해도 실없이 웃게 되는 그런 편안한 설렘. 말도 안 되는 쓸데없는 이야기나 시답잖은 농담으로 위로가 되는 것. 삶에 질식당하지 않으 려 애쓰는 낙원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혜민과 낙원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서장


조금 더 엄숙한 태도로 임하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큰 변수 없이 그 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태도에 걸맞은 삶을 살게 되었다. 혜민은 별 지체 없이 어느 창업 교육 관련 회사에 일자리를 구했고, 어느덧 입사 5년 차의 대리가 되었다. 낙원은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을 한 뒤에도 어떠한 방향도 설정하지 못했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했 고, 주중에는 출근하는 혜민을 부모님이 사주신 차에 태워주곤 했 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시늉 을 하였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게으름에 천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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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날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해가 뜰 때쯤 일어나 냉장 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켠 낙원은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위에 앉아 졸면서 전날 챙겨보지 못한 프로야구 경기 영상을 돌려보았다. 자신 이 보지 않은 경기는 늘 이겼다. 낙원은 안도 섞인 한숨을 크게 내 쉰 뒤, 휴대폰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고 물을 내렸다. 거울 속의 부스 스한 눈을 응시하면서 이를 닦았다. 하는 듯 마는듯한 세수를 마치 고 나면, 곧 전화할 시간이다.

평소 잠을 깊게 자지 못하는 혜민은 이불 안에서 꾸물거리며 전화 를 받을 것이다. 탁상 위의 시계를 확인하면서 왜 이렇게 일찍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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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냐고 타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반쯤 깨워놔야 20분 뒤에 다 시 전화했을 때 비로소 이불을 박차고 나올 것을 낙원은 알고 있었 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예상은 언제나처럼 오늘도 모두 들어맞았다. 약속한 시각보다 10분 늦게 문을 열고 나왔다는 점도, 졸린 눈으로 아무 말 없이 안전벨트를 매었다는 점도. 다만 낙원이 놓친 것은, 반 복적인 어떤 소리였다.

딸깍, 징— 딸깍, 징—

낙원은 조수석 쪽을 쳐다보았다. 혜민은 차창을 아무 의미 없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 창밖을 내다보면서, 어딘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표정을 보니 행복한 몽상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그제야 손가락을 멈춘 혜민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알잖아. 회사 가기 싫은 거.” 혜민이 회사를 가고 싶어 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딘가에 짓눌 린 사람처럼 창문을 성가시게 여닫은 적도 없었다. 출근을 앞둔 혜 민에게 얼마 안 있으면 대면하게 될 것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해서 는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버려 두 는 것도 낙원은 영 내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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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 대리님, 안색이 평소보다 어둡고 눈꺼풀에 힘이 없는 데다 가 애꿎은 창문을 괴롭히고 계시어 몹시 염려되는바, 어제 무슨 일 이 있었는지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느닷없는 연극에 그제야 혜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예전에 얘기했었나? 부장님 있잖아. 왜, 이름값 못하는 할머 니 말이야.” 낙원은 혜민의 회사에서 영어 이름을 쓴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혜 민의 이름은 뭐였더라. 혜민이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는 것만 기억이 났다. “컴퓨터 잘 못 다뤄서 매일 일 떠넘긴다는 분이었나? 왜? 또 뭔갈 대신해달래?” “아니 그건 아닌데. 퇴근한 뒤에도 새벽에 자꾸 카톡 하잖아. 자려 고 겨우 누웠는데 핸드폰이 번쩍거려서 봤더니 상사만 아니었다면 씨알도 안 먹힐 아이디어나 내놓으면서 어떠냐고 물어봐. 새벽 한 시 에. 그러면서 자기도 좀 머쓱했는지 ‘업무 상황은 다 공유를 하고 있 어야 한다’는 거야. 무슨 개인 메모장이냐고.” 그냥 알림을 꺼 놓으면 될 일 아니야? - 라고 말하려던 찰나 급하 게 옆 차가 끼어들었다. 낙원은 클랙슨을 운전자의 얼굴이라도 되는 듯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미친 ㅅ… 차도 개똥 같은 거 끌고 다니면서.” 급박하게 튀어나온 속된 말에 혜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 좀 이쁘게 해주면 안 돼?” 운전하다 보면 마음에 없었던 말도 나오는 법이라고 낙원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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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을 도로 삼켜야만 했다. 아침부터 혜민과 부딪혀서 좋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저녁이 되면 이런 투 정조차 못 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버리는 혜민이었다. 그 이유라도 들을 수 있어야, 낙원은 혜민과 더는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 고 그 기회는 사실상 지금뿐이었다. 조금 뒤틀리고 고약한 형태이기 는 하지만, 혜민이 낙원에게 의지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기도 함을 낙원은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조금 천천히 가도 돼. 시간 아직 많잖아. 나 데려다주고 어디 급하 게 가야 할 곳이라도 있어?” “으응. 원규가 브런치 먹자고 하네. 얘가 얼마 전에 이사 갔잖아, 그 래서 집 들렀다가 만나려면 조금 빠듯해.” 브런치라는 말에 혜민은 조금 심드렁해졌다. “원규 씨는 출근 안 한대?” 게임회사의 개발팀에서 근무하는 원규는 낙원의 고등학교 동창이 다. “어제 퇴근길에 접촉사고 났다더라. 카센터 가야 해서 오늘 아침에 반차 냈대.”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던 혜민은 낙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 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오전에 반차라니, 아까운 것.” “왜? 오전이랑 오후랑 무슨 차이야?” “너 같으면 5시간 쉴 수 있는데 3시간 쉬고 싶니? 하기야 그 회사 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내가 이런 말 할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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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니긴 하지. 나도 내가 원할 때 휴가 좀 써보고 싶다.” 낙원은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다. 낙원의 입술이 무슨 말을 뱉어 야 할지 몰라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것을 본 혜민은 다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렸다. “우리 회사 휴가 시스템이 말이야, 좀 구린 구석이 있어.” 노란 불을 본 낙원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가 맞춰볼게. 오후 반차는 상사가 모조리 가져간다. 맞지?” “비슷해. 좋은 건 윗분들이 가져간다는 부분만. 낙원아, 1년 연차 계획을 연초에 내라는 게 말이 되냐? 1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가 어떻게 안다고. 그렇게 계획하면 그날에 무조건 쉬어야 해. 내 가 쓰고 싶은 날은 샌드위치 연휴 같은 날인데 그런 건 다 윗선에서 가져가지. 남은 건 애매한 날들뿐인데, 그런 날은 굳이 내가 쉬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그냥 일하고 싶어. 돈 덜 주려고 무조건 연 차 쓰게 해놓고 쉬고 싶지 않은 날 쉬게 하고 꼭 바쁠 때 자기들이 쉬더라. 짜증나 죽겠어.”

낙원은 다시 액셀을 밟았다. 한 블록 더 간 다음 오른쪽으로 꺾으 면 바로 혜민의 회사였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고, 혜민은 안전벨트 를 풀었다. “나 갔다 올게. 오늘 야근할 수도 있어.” “응, 조심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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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은 차를 돌려 근처 카페로 향했다. 원규와의 약속은 없었다. 혜민을 바래다주고 나면, 낙원은 늘 가던 카페에 들러 영화를 보거 나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 커튼을 걷고 침대에 누 워 아침보다 고도가 높아진 햇볕을 만끽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다를 것 하나 없는 날이었다. 원규와의 브런치는 내일이었지만, 바쁜 일이라도 있냐는 혜민의 질문에 왠지 기분이 상했기 때문에 낙원은 약속 시각을 하루 앞당겼던 것이었다. 구석진 곳에 주차하고 차 문 을 열어젖히며 낙원은 중얼거렸다. 왜 바쁜 사람은 한가한 사람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각자의 생활 방식이 있는 것이라 고, 혜민은 혜민이 원하는 방식대로, 낙원은 낙원이 선택한 방식대 로 산다고 머리로 생각은 하지만 왠지 모르게 위축이 되는 낙원이었 다. 사람들이 일하는 이유도 그저 바빠지기 위해서일까.

출근 시간을 약간 지난 카페는 낙원에게 그러한 공상의 좋은 재료 가 되어주었다. 출근하는 회사원들로 북적이던 카페가 몇 분 사이에 한적해지는 풍경은 물이 빠진 갯벌에 혼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선 사해 주었고, 2층 창가에 기대어 밖을 내려다보면 빠듯하게 뛰어가 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지하철역에서 떨어진 동네에 사는 사람들을 지하철역으로 데려다 주는 버스가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뜯어진 쌀 포대인 듯, 아니 면 거대한 다른 누군가의 들숨과 날숨인 듯 인간들을 토해내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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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버스, 그 와중에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방향이 정해진 길을 재촉하 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세상이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고 많이 배설하는 한 사람이며, 우리는 단지 다양한 소화기관을 거치면서 비슷한 기능을 위해 분해되고 흡수되는 음식 알갱이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정해진 오장육부 속에서 우린 단지… 당과 단 백질과 지방 정도의 차이, 만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낙원 은 생각했다. 세상이 소화할 수 없는 불량분자들은 어디에도 흡수 되지 못하고 똥이 되어버린다는 생각도.

낙원은 여전히 창가에 기댄 채 길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투명한 유리창이 뿌옇게 흐려졌다. 분주한 사람들의 행진이 불투명한 유리 창에 가로막혔다. 낙원은 그들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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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화이팅입니다. 김혜민 대리님!”

낙원의 인사와 함께 차 문이 닫히고 혜민은 회사 정문 앞에 섰다. 회전문엔 사람들이 뿜어대는 전날의 피로와 아침의 묘한 긴장감이 빙글빙글 돌며 섞이고 있었다. 아직 덜 말라 목덜미에 들러붙는 머 리를 털어내고 혜민은 회사 안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귀에 대고 눈길을 땅에 박은 채 엘리베이터로 뚜벅 뚜벅 걸어갔다. 얼굴만 얼핏 아는 옆 부서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가는 어색한 웃음을 귀에 걸고선 요즘 열대야라 잠을 설쳤다, 따위 의 이야기를 나눠야 할 터였다. 얼굴이 이뻐졌다며 연애 시작했냐는 불쾌한 넉살에까지 웃어내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럴 바에야 업무가 바쁜 척 핸드폰에 기대 미숙한 연기를 펼치는 편이 나았다.

엘리베이터를 열자 사무실의 건조하고 찬 바람이 얼굴로 쏟아졌 다. 혜민은 출근 확인 지문을 찍고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파티 션 건너에는 줄리아가 목을 꺾어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고 선 볼펜을 빙빙 돌리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미간에 솟은 주름의 깊 이를 보니 분명 아침부터 심사가 단단히 뒤틀린 모양이었다. 혜민은 가벼운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도 어락 시스템에서 한 번 더 출근 인증을 하고 메일 창을 클릭했다. 어 제 퇴근 전 팔레스타인에 보낸 연수 관련 메일에 답장이 와 있을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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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리셉션 애들은 하는 게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야. 회사로 온 택배를 내 집으로 보내 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아주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줄리아의 궁시렁대는 목소리가 관자놀이를 은근하게 쪼아대는 탓 에 혜민은 이메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리셉션 부서 사람에게 택배 심부름을 시켰다가 거절당한 모양이었다. 줄리아는 이 회사 외에도 몇몇 회사에서 겸직을 하는 터라 이곳저곳에서 택배가 오는 일이 잦 았고, 집에는 받을 사람이 없으니 회사로 보내 놓았다가 집으로 다 시 보내겠다는 것인데,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서류뭉치와 스탠드 조명에서부터 열무김치까지, 온갖 택배가 일주 일에 서너 번 혜민의 책상에 쌓인 적도 있었다. 퀵 서비스는 비싸서 안 되고, 몰라 어떻게든 내일까지 집에 도착하게 해놔, 줄리아는 말 했다. 어떻게든, 내일까지. 그러니까 그 택배를 지고 직접 우체국에 가서 부치라는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 불똥이 리셉션 직원 에게 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가 싫은 거지. 나보고 그건 개인적인 일이라 해 드릴 수가 없다고 아주 눈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더라고. 네 일, 내 일 나눠서 자기 것만 하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냐고. 그럴 거면 나도 내 시간 써가면서 밤새 메신저에 업무 리스팅 안 하지.”

커피라도 한 잔 뽑아 와야겠다는 생각에 혜민은 가방에서 텀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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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꺼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의 의미 없는 부지런 함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나 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뒤편의 화이트보드 앞에서 서성대기 시작했 다.

“이 이기적인 조직문화 자체를… 손봐야 해. 연수 때 다들 바쁜데 밥 안 챙겨줬다고 찡찡대질 않나. 회사가 급식소도 아니고 말이야.”

사무실로 가로질러가던 혜민은 순간 텀블러를 손에서 놓칠 뻔했 다. 냉기가 머리 안쪽부터 엉치뼈까지 훑는 듯했다. 밥 안 챙겨줬다 고 찡찡대질 않나. 그것은 분명 혜민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어쩌면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지난달 창업 연수 행사에서 혜민은 20명 이 넘는 팔레스타인 스타트업 창업자들의 인솔을 맡았다. 놀이공원 에 처음 발을 디딘 아이같이 호기심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고객들 을 따라다니다 보면 밥을 거르기가 일쑤였는데, 행사가 끝난 후 자 유롭게 피드백을 해 보라는 줄리아의 말에 혜민은 인솔자들의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매일 그런 식으로 밥 을 거를 순 없었고,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혜민이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줄리아는 혜민의 의견을 한낱 밥투정과 칭얼거림으로 들 었다.

한기가 가시자 혜민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혜민은 감정을 능숙하게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회사가 급식소가 아니듯,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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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맘껏 드러낼 수 있는 술자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하고 당황 스러운 내색을 했다가는 혜민을 어린아이쯤으로 생각하는 줄리아 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줄 뿐이었다. 혜민은 귀에 웅웅거리는 줄리아 의 목소리를 애써 듣지 못한 척 정수기에 텀블러를 들이밀었다.

“좋은 아침!”

쨍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늦는 법이 없는 최과장 이었다. 최과장은 줄리아와 전 회사부터 함께 했던 오랜 지인으로, 뻑뻑한 더벅머리를 왁스로 억지로 올렸는지 항상 엉겨 붙은 머리를 하고 꽉 끼는 바지를 입고 다녔다.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민감한 책 임을 피해 다니는 데 도가 튼 터라 얼굴엔 웃음 주름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혜민은 과장을 항상 흐릿한 사람이라고 생 각했다. 때로는 무능한 영리함이라고 이름 지었다.

“클로이, 혹시 괜찮으면 아홉 시 전까지 메일 정리해서 가져다줘 요. 바로 일 시작할 수 있게.”

회사에선 혜민을 클로이라 불렀다. 위계를 없앤다고 직책 대신 영 어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장님을 줄리아 로, 과장님을 알렉스로 부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자연스럽 게 과장급 이상은 직책으로, 대리급 이하는 영어 이름으로 불렸다. 혜민은 과하게 씩씩하지도, 너무 쳐지지도 않은 적절한 톤을 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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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하고는 컴퓨터에 앉아 이메일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

줄리아: 클로이 님 이리 좀 와보세요

막 잠에 빠져들었는데 깨우는 사람처럼, 시작된 업무가 본격적으 로 진행되자마자 컴퓨터 우측 하단에 줄리아가 보낸 메신저가 깜빡 거렸다. 혜민은 잠시 뜸을 들여 마음을 가라앉힌 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줄리아의 얼굴은 분명 유쾌해 보이 진 않았다. 그러나 4층까지 갈 만큼 불쾌해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아 혜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4층은 비어 있는 사무실로 줄리아 가 센터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그러니까 가끔은 소리를 지 르며 화를 내고 싶을 때 사용하는 장소였다. 혜민은 엉덩이를 의자 에서 뽑아내고는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본인이 정리한 회의록 확인해봤나요? 분명 강의료 책정비 상한선 을 500만 원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590만 원이라고 써 놨어 요?”

젊은 시절 경찰이었다는 줄리아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했다. 컴 퓨터가 불편해서인지, 젊은 시절의 향수에 젖어서인지는 모르겠지 만 줄리아는 회의 때마다 무언가를 화이트보드에 휘갈겨댔고, 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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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해석해 깔끔한 문서로 만드는 것은 온전히 혜민의 몫이었다. 문서를 만드는 일쯤이야 별 품이 들지 않았지만 줄리아의 글자를 읽어내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특히 0과 9와 6을 구분해 내는 일은 택배 심부름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글씨를 잘 못 알아본 것 같습니다.” “제 글씨가 문제라면 그렇게 얘기를 하세요. 그런 것도 아닌데 자 꾸 틀리면 곤란해요.”

차라리 냅다 소리를 질렀다면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란 걸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일 텐데, 줄리아는 유능한 척 우아하게 직원을 교육하는 흉내를 내어 혜민을 더욱 성가시게 만들었다. 대충 죄송하 다는 말을 급하게 얼버무리고는 자리에 앉아, 다시금 들려오는 궁시 렁거림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지만, 점심시간 까지는 두 시간이 넘게 남아있었다. 혜민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메일에 집중하려 애썼다.

“클로이 메일 천천히 해요. 급하게 하다 내 이메일도 잘못 쓰는 거 아니지?”

최과장이 책상에 초코바를 하나 얹어주며 웃었다. 맞설 자신은 없 고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환상은 계속 가져야 하는 것이겠지. 혜 민은 애써 웃어 보이고는 초코바를 까 입에 넣고 신경질적으로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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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벌써부터 되뇔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늘 같은 패턴이었다. 비효율과 가식, 그리고 그것을 감내하는 자신 에 대한 원망.

*

열한 시 오십 분이 되었다. 사무실에서 나온 혜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건물 로비 문을 열어젖혔다. 햇볕이 따뜻했다. 오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건,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같은 부서 사 람끼리 먹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후부터, 점심시간만큼은 업무와 분리하고 싶은 혜민이었다. 이런 날씨에는 한강으로 가서 잔 디밭 그늘에 앉아 쉬면 정말 행복할 텐데. 유리에 비친 빛들에 눈을 가늘게 떴다. 혜민은 대학에 다닐 때 공강 날이면 낙원과 수도 없이 가보았던 한강 변을 어디랄 것 없이 뒤섞어 기억하기 시작했다.

한낮의 공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 새 지저귀는 소리 와 저 멀리 강변북로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섞여 들리고, 강이 무 심하게 흐른다. 이따금 선글라스와 헬멧을 쓴 아저씨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자전거에 달린 스피커에서 철 지난 유행가가 얼핏 들려온다. 은퇴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낙원이 물으면 일단 취직부 터 해볼까, 혜민이 대답했다. 평일 낮에 한강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 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혜민이 중얼대면 왜 그런 행복한 일 을 나이 먹을 만큼 먹어야만 누릴 수 있는 걸까, 낙원이 투덜거렸다.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첫 번째 날


큰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남자, 알싸한 향을 풍겨오는 이름 모를 꽃들, 흩날리는 하루살이와 여전히 무심한 물, 그리고 낙원.

“혜민아!” 백일몽에 빠져 있던 혜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 다. 희정이었다. “왔구나. 희정아, 완전 오랜만이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었던 거야? 길 건너편에서부터 너 이름 불렀 는데.” “그냥, 좀 피곤해서.” 푹 쉬다 온 사람의 아우라랄까, 희정은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 다. 한결 좋아진 피부와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희정을 감싸고 있었다. “얼마 만이냐 이게. 잘 지냈어? 회사 생활은 할 만하고? 나 너한테 할 얘기가 너무 많아. 어서 가서 점심 먹으면서 얘기하자. 네가 가자 고 한 곳이 어디였지?”

혜민은 회사 근처에 새로 생긴 브런치 카페로 희정을 데려갔다. 디 자인도 깔끔하고 분위기도 좋아 보여서 꼭 가봐야겠다고 점찍어둔 곳이었다. 다행히 희정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근데 희정아, 오랜만에 한식 먹고 싶었던 거 아니야? 여기 분위기 가 정말 좋아 보여서 데리고 오긴 했지만….” “안 보는 사이에 엄청 소심해졌네. 괜찮아. 나 저번 주에 귀국해서 지금까지 한식 실컷 먹었어. 맞아, 하긴 귀국할 때가 다 되었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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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힘들긴 했지. 덴마크에서 어찌어찌 한식 재료를 구해서 김치찌 개도 해보고 비빔밥도 만들어 봤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된 맛이 안 나더라고.” 작년 봄, 혜민이 희정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서울의 한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희정은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자신 에게 엄격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서툴게 처리한 일 때문에 남들이 두 번 일하게 만드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고, 주어진 일이 있다면 잘 해내야만 했다. 주어진 일이 많다고 느껴질 때면 그것은 자신의 방법이 효율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더욱 박차를 가하기 도 했다. 그런 희정의 성격과 주말 없이 이어지는 회사의 업무가 만 나 희정은 아주 빠른 속도로 자신을 소모해버렸다. 그리고는, 혜민 도 모르는 사이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버렸다.

“대체 언제 떠났던 거야? 그때 좀 서운했어, 말도 없이 가버리고.” 주문을 다 받은 웨이터가 등을 돌리자 혜민이 물을 한 모금 마시 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안해. 정말이지 그때는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어. 아 니지, 나만 없어진 기분이랄까.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이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거의 잡아먹기 직전이었어. 그래서 우선 나부터 살리고 보자, 하니까 어느새 덴마크더라고.” 일이 아가리를 벌린다. 재미있기도 재미없기도 하다고 혜민은 생각 했다. “가서 뭐 했는데? 왠지 그냥 놀다 오진 않았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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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사실 덴마크를 선택한 것도 다 이유가 있지. 거기 자유학교라 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데 시험도 없고 전공도 없는 학교가 하 나 있어. 수업도 거의 대화로만 하고,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하고. 당 장 회사 그만두고 나니까,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될 건지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여하간 다시 학생이 되고 싶었 어. 현실적으로 가능한 교육인가 궁금하기도 했고.” 혜민이 이것저것 캐묻는 사이 팬케이크와 오믈렛이 나올 채비를 마친 것 같았다. 혜민은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식이 놓일 자 리를 내기 위해 희정이 식탁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혜민이 다시 희정 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생각한 대로였어?” 희정은 과장하지 않으려는 듯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뭐, 그런대로? 환경이야 만족스러웠지.” “그런데?” 희정이 말의 일부를 남겨놓자, 답답해진 혜민이 다음 말을 재촉했 다. 물을 한 모금 삼킨 희정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문제는 나였어. 입학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인가, 다 같이 요리한 적이 있었거든. 거기는 워낙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인 곳이니까 서로 친해지자는 의미로 각자 자기 나라의 전통요리를 만드는 행사 가 열렸어. 프랑스인들끼리 모여서 라따뚜이를 만들고, 인도인들끼 리 모여서 카레랑 난을 준비하고,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한국 음식 을 만드는 거지. 나 말고도 한국인이 두 명 더 있었거든. 한국인 셋 이 모여서 무슨 요리를 만들지 의논을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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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이 말을 멈추고 적당한 단어를 고르는 듯 창문을 바라보았다. “있는데? 왜?” 혜민이 부추기자 가늘게 눈을 뜬 희정이 조금 냉소적으로 말했다. “학교만 바뀌었지, 그냥 똑같더라고. 아무도 평가 안 하는데, 그냥 만들면 되는데 다른 조는 잘하고 있는지, 우리는 저만큼 잘할 수 있 을지, 최소한 그럴듯해 보이기는 할지 의논만 하고 있는 거야. 수업 도 아니고 시험도 아니고 평가도 경쟁도 없는데, 그런 환경이어도 사 람이 쉽게 변하진 않는다는 생각에 좀 싱숭생숭했어.” 혜민은 다소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거기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 했을 거야.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 지, 비교 안 하는 사람이 어딨냐?” “그런가. 그래도 나는 그때가 제일 부끄러웠어. 그때만 부끄러웠던 것도 아니고. 정도야 다르겠지만 굳이 여기까지 와서 광고회사 다닐 때처럼 인정을 바라고, 그게 아니면 성취는 불가능한 것만 같고….” 희정이 말을 이어갔고, 혜민은 빈 컵을 홀짝거리며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하긴 안 그런 적이 있었으려나. 대학 다닐 때도 그랬지. 아무리 고 생했어도 학점 잘 찍히면 미화되고 그러잖아. 그런 지표들을 빼면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도통 평가할 수 있어야지.” 말을 마친 희정이 다시 고개를 혜민에게로 돌렸다. 희정은 본질적 인 것들을 자주 생각했다. 혜민은 잠시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자신 과 상관없는 이야기라면 예의 바르게 웃으며 손쉬운 응답을 건넬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편할 수는 없는 주제. 그러나 희정은 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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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더 나아갔다. “너는 요새 좀 괜찮아? 저번에도 회사에서 꽤 고생하는 것 같던 데.” “응, 똑같아. 똑같은 사람, 똑같은 일, 똑같은….” 어물쩍 넘기려다가 이내 포기한 혜민이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엎 어놓았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혜민은 알지 못했다. 사실 나 는 그때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했다고, 희정이 덴마크에서 느꼈던 것처럼, 브런치 카페에 도착하기 전 우체국을 잠 시 들렀던 희정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아까워 미리 카페에 가서 주 문해놓을까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는 여 전히 일이 너무 많고 모든 것이 팍팍한데, ‘대충 살자’가 트렌드인 요 즈음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1학년 때 선배들이 MT 불참하는 학생들한테도 강제로 참가비 걷 으려고 했을 때 네가 그 문제 공론화시켜서 결국 그 악습 없앴잖아, 또 남들 다 성적 쉽게 받을 수 있는 강의 찾아 들을 때 너는 이왕 대학 온 거 제대로 배우겠다고 대학원 수업도 신청해서 들었잖아, 횡단보도를 건너며 추억을 이야기했던 희정의 말 앞에, 혜민은 이렇 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오믈렛은 여기에, 팬케이크는 저기에.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매번 피할 수만도 없 는 문제. 희정이 수저를 들며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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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난 그냥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한때는 커서 청소년 교육을 하고 싶어 했던 희정은 비록 그렇게 되 지 않았지만, 장래 희망에 대한 이유를 물으면 꼭 대답하곤 했던 문 장만은 늘 품에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희정이 말하는 좋은 어른의 롤모델을 혜민도 알고 있었다. “맞아. 꼭 너희 아버지처럼.” 혜민은 희정의 아버지를 잘 알지 못했지만, 언젠가 희정이 입버릇 처럼 자랑하던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혜민이 지켜본 희정의 아버 지도 그리 다르진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흐음,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데?” 희정은 자신의 아버지를 늘 이렇게 표현했다. “사랑이 많은 분이지.”

부지런히 먹는 동안 희정은 덴마크에서의 근황을 풍성하게 전해주 었다.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어도, 여전히 그 나라는 좋아 보였다. 희 정은 늘 지니고 다니던 유쾌한 입담을 덴마크에 두고 오지 않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가운 것은 기대했던 대로였다. 다만 혜민은 습관적으로 휴대폰의 잠금화면을 켜고 끄기를 반복했다. 점심시간 이 1시까지였다. 1년 만에 만난 친구를 점심시간 따위의 틈에 이렇 게 급하게 만나야 한다니. 그러나 혜민에게 저녁은 약속을 고정할 수 없는 시간이었고, 보려면 이렇게라도 보아야 했다. 혜민은 남은 커피를 신경질적으로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꼭 묻고 싶었던 질문 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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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아, 그래서 너는 이제 어떡할 거야?” “응?” “덴마크 사람들이 아무리 행복해 보였다 한들 너는 다시 한국에 돌아왔잖아. 너도 다시 일자리를 구해서 먹고살아야 할 거고, 그러 면 덴마크에서처럼 살기는 어렵지 않아?” 희정은 어렵지 않게 수긍하며 다짐 비슷한 말을 했다. “그렇긴 해. 내가 그쪽 언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다시 우리 나라에서 일하면서 살아야겠지. 그래도 예전처럼 눈앞에 주어진 일 을 해치우느라 내 모든 시간을 쓰지는 않을 거야.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소모되기만 하는 일보다는 나를 채울 수도 있는 일을 선택할 거야. 가끔은 나를 파괴하는 몹쓸 책임감이라는 것도 조금은 내려 놓을 거고. 내가 겪는 불행의 이유가 전부 나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 각은 절대 하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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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초침이 12를 지나쳤다. 1분은 60초. 한 바퀴는 360도. 360을 60으로 나누면 6. 그러니 초침은 1초에 6도를 돌아간다. 정확히 그 간격을 분침은 1분에 돌아가니, 6 나누기 60을 하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낙원이 초점 없는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면 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60. 분침은 정확히 12를 가리켰다. 오후 5시가 되었다. 침대 시트에 비벼대어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바닥에 던져놓았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다시 입을 시간이다. 혜민은 큰일이 없으면 보통은 6시쯤 회사를 나섰다. 낙원이 데리러 가는 것을 혜민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낙원 이 평일 저녁에 별달리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는 혜민이 지하철을 타고 연락을 해올 때면, 낙원은 은근한 죄책감을 느꼈다. 낙원은 차 키를 손에 움켜쥐고, 원규와 나누었던 가상의 이야기들 을 꾸미기 시작했다. 거짓말은 언제나 상응하는 과제를 준다.

혜민을 데려다주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낙원은 퇴근한 혜민에게 줄 꽃을 고르고 있었다. 혜민은 봄을 좋아 했다. 주말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마르쉐 장터를 가자고 낙원 을 조르며 그곳에서 쥐눈이콩이나 붉은 꽃 완두 씨앗을 사곤 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여유가 생기면 텃밭을 가꾸고 싶다고 이 야기할 만큼 혜민은 식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혜민을 위해 낙원 은 프리지어 한 다발을 골랐다. 군대에 가기 전 코인 노래방에서 혜 민과 같이 불렀던 <칵테일 사랑>을 떠올리며 낙원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꽃말도 낙원의 마음에 쏙 들었다. 천진난만과 자기 자랑.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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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회사 생활을 거치며 서서히 흐릿해졌지만 원래 혜민은 그런 색깔 을 가진 사람이었다. 부장이 오늘은 또 어떤 기막힌 방식으로 혜민 을 괴롭힐지는 모르겠지만, 피곤한 기색으로 조수석에 올라탄 혜민 에게 샛노랗게 피어오른 프리지어를 선물해준다면 혜민은 다시 그 색깔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혜민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려다 말고, 피식 웃으며 <칵테일 사랑>을 이야기할 것이다. 추억의 노래를 틀고 둘은 행복하게 노래를 부를 것이다. 낙원은 그 런 종류의 행복이 흔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꽃집 주인에게 힘찬 인 사를 건네며 밖으로 나갔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낙원은 오늘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 생각 을 했다. 낙원은 혜민과 함께 갔던 행궁동 카페를 기억했다. 무자비 한 햇볕이 쏟아지던 여름날, 화성의 성곽을 돌아다니던 낙원과 혜민 은 줄줄이 흐르는 땀을 식히러 그곳에 들렀다. 이곳에서도 낙원은 잃어버린 혜민의 조각을 찾을 수 있었다. 써브웨이 알바생과 새우의 크기와 개수의 적당함에 대해 의논하고, 디저트 카페에서 티라미수 가 우리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해 주인과 열변을 토할 만큼 작은 이야기들을 좋아했던 혜민은, 이곳에서도 호기심 어린 눈 으로 주인의 역동적인 손가락에 시선을 겨누었다. 카페 주인은 커 피 찌꺼기와 꿀을 섞어서 팩을 만들고 있었다. 혜민의 시선을 의식 한 주인은 혜민에게 팩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혜민은 무슨 일을 꾸미기라도 한 듯이 낙원에게 비밀스러운 눈짓을 한 뒤에 주인을 바라보더니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 팩이 정말 효과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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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자신은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 주인은 되직하 게 굳어진 팩을 손등에 올려주는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혜민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낙원에게 싱긋 웃 어 보였다.

카페에서 나왔을 즈음에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날이 선 선해진 길거리를 걸으며 혜민에게 읊은 에세이의 한 구절을 낙원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낙원에게 가장 깊은 사랑의 낭만적인 한순간이었다. 그 거리를 오늘 다시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신호 앞 에 멈춰 선 낙원은 운전대를 만지작대며 생각했다. 조수석의 샛노란 프리지어가 삼삼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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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서

“네가 지은 거야?” 눈이 휘둥그레진 혜민은 그렇게 물었던 거로 낙원은 기억한다. “응. 군대에 있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 낙원은 혜민이 눈치챌 만한 망설임을 곁들여 거짓말을 했다. 그럼 혜민은 카페 주인에게 지은 것과 똑같이 얄궂은 표정을 짓는 것이었 다. “거짓말. 누구 글인데?” “가르쳐주면 재미없잖아. 외워뒀다가 나중에 찾아보면 안 될까?” 혜민이 좁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낙원이 알기로 그것은 기분이 나쁘진 않지만, 잔말 덜고 말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입을 떼려 는데, 혜민은 더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됐고,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만 알려줘.”

글쎄, 라는 말로 시간을 번 뒤 낙원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분 명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외운 것일 텐데, 그 이유는 낙원도 그 당시에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혜민에게는 자기반성이라는 반쪽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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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정답을 제공했다. 언제나 지켜야 할 자신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죽도록 사랑한 적은 없었다고. 자신이 천착한 질문에 성실하게 답 하느라, 둘만의 관계에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지는 못했다고. 집착에 넌더리가 난 사람들은 그것을 건강한 관계라 칭하지만, 그런데도 이 시를 외운 것은 가끔은 건강하지 않게 사랑해보고도 싶다는 일종 의 다짐이라고.

혜민을 회사로 데려다줄 때 차로 붐비던 사거리가 강한 햇살이 아 스팔트에 내리꽂힌 아지랑이로 가득했다. 눅눅한 풍경과 프리지어 향으로 몽롱해진 낙원은 한산해진 거리에 기분이 놓였다. 준비는 끝났으니, 집으로 가서 낮잠을 청할 것이다. 오늘 저녁은 소중하게 꾸밀 생각이었다.

*

“낙원아, 오늘 약간 늦어질지도 모르겠어. 너 바쁘면 안 데려다줘 도 돼. 이따 다시 연락할게.” 혜민에게서 온 문자였다. 이제 막 집을 나서려던 낙원은 차 키를 손에서 놓으려다, 모처럼 긍정적인 마음을 불러내 그것을 다시 움켜 쥐었다. 조수석에 오르는 혜민의 피곤한 기색은 물론 평소보다 더하 겠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더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손에는 프리지어를, 다른 한 손엔 정답게 손을 잡고 찍은 사진이 매달린 차 키를 쥐고서, 낙원은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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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은 역시나 순탄치 않았다. 혹시나 혜민이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퇴근하지는 않을까, 낙원은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텅 빈 공간의 아지랑이는 온데간데없고 징그럽도록 이어진 전조등과 브레이크등이 앞뒤로 번쩍거렸다. 언제 가로질러 갈 수 있을지 모르 는 사거리 앞 신호에 걸린 채, 지금 가고 있으니 혹시 퇴근하면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낙원은 문자를 보냈다.

낙원은 예상 도착 시각이었던 6시보다 30분 늦은 시각에 혜민의 회사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혜민이 지친 몸을 질질 끌며 회사를 나 오는 모습이 낙원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꼭 그만큼의 시간이 더 흐 른 7시도, 한 번 더 흐른 7시 30분도 아니었다. 혜민은 낙원에게 문 자를 보내놓고 아예 휴대폰을 쳐다보지도 않은 듯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아무리 빨리 속도를 낸다고 해도, 행궁동의 카페가 문을 닫 기 전에 그곳에 도착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시각이 지나가고 있었다.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 낙원이었지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해 무력감을 느낄 뿐이었다. 요즘 들어 혜민은 늘 이 런 식이었다. 일정이 예정대로 되지 않을 거라 이야기는 하지만, 정 확히 어떻게 될 것인지는 연락이 잘 되지 않아 낙원이 하염없이 기 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물론 혜민은 그럴 때마다 자신을 변호할 적당한 이유가 있었고 사과를 하는 것에도 능숙했다. 낙원은 쌓여 왔던 앙금이 조금씩 밀려오는 것을 감지했다. 노란 꽃이 그새 바라 고 시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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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지도 한참이나 지났다. 회사를 나오던 혜민은 낙원의 차를 발견하고서야 낙원에게서 한참 전에 온 문자를 확인했다. 혜민은 혜 민대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줄리아가 미루어 놓은 연수를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간의 한 가운데, 혜민은 연수 기획으로 눈코 뜰 새 없는 하루를 보낸 뒤였고, 더는 입에서 나올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미안함에 낙원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잠 시 가늠해보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부담스러웠다. 시간만 있었다면 시원하게 마사지를 받고 조용히 잠에 빠져드는 것이 혜민의 솔직한 소원이었다. 그러나 혜민에게는, 변명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많이 기다렸어? 미안해. 문자를 확인할 틈이 없었어. 부장님이 떡 하니 버티고 있어서 언제 끝날지도 몰랐고.” 혜민은 착석과 동시에 레버를 당겨 몸을 뒤로 뉘었다. “괜찮아. 나도 늦게 와서 너랑 엇갈릴까 봐 조마조마했지. 다행이 다. 생각보다 차가 덜 밀렸어.” 실제로 느끼는 것보다 친절하게 말을 마친 낙원은 혜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차가 덜 밀렸어, 하고 힘없이 낙원을 따라 한 혜 민은 앞 유리 너머로 희멀건 시선을 던진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오늘은 좀 어땠어? 부장이 자기 할 일 떠넘기거나 막 그러진 않았 어?” 꼭 이런 쓸모없는 부분에서 디테일한 탓에 낙원은 혜민에게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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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싶지 않은 상황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준 셈이 되었다. 혜민은 조금 더 피곤해졌다. 최대한의 절제가 담긴 목소리로, 혜민이 대답했 다. “응. 뭐 대충 그래, 똑같지. 낙원아, 나 조금 졸리는데 조금 이따가 이야기하면 안 될까?”

그렇게 차는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지어는 온데간데없었다. 예전의 관계를 기억하며 그리워하던 낙원의 한낮은 여느 날처럼 바 스러졌고, 혜민의 입술이 칵테일 사랑을 노래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낙원은 기대와 현실 사이의 낙차에 압도되어, 자신이 혜민의 개인 기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젖었다. 꽃을 줄 타이밍은커녕 집에 도 착할 때까지 둘 사이의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선의 목표가 될지도 몰랐다. 낙원은 아닌 척하며 한숨을 쉬었다.

*

“혜민아, 다 왔어. 일어나.” 일방통행 도롯가에 위치한 혜민의 집 앞에 멈춰선 낙원은 뒤쪽에 서 날아드는 헤드라이트를 의식하고는 혜민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아침에나 들을 법한 투정이 전화 너머가 아니라 바로 옆자리 에서 들려왔다. “아아… 10분만.” 낙원이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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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차 운전자가 참지 못한 요란한 클랙슨이 뒤에서 울어댔다. 혜민은 귀를 닫은 채 숙면에 빠진 듯 아무런 요동도 없었다. 낙원은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엄습해왔지만, 별 수 없이 짜증이 치밀었다.

“꼭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 되나….” 골목길을 빙빙 돌다 결국 큰 도롯가로 우회전하여 나온 낙원은, 들 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던 차가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있었던 낙원이 재차 혜민을 깨우기 위해 고개 를 오른편으로 돌렸을 때, 낙원은 거의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놀라 움을 겨우 녹여낸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꿈쩍도 안 하고 자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혜민이 그 자세 그대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것 이다. “꼭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냐….” 혜민이 입을 거의 벌리지 않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할 말은 많지만, 굳이 터뜨리면서 자신의 피곤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킬 만큼 그 질 문이 가치가 있는지를 재보는 듯한 차가운 어조였다. 그러나 낙원이 이미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요즘 들어 매번 똑같아서 그래. 아침에 너 바래다주고, 저녁에 데 리러 가는 시간 말고 우리가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있나 싶어. 사실 요즘은 그마저도 못하잖아. 오늘처럼 예기치 못한 야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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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어김없이 나를 귀찮아했으니까. 힘드니까 쉬어야 하는 건 알 겠는데….” “귀찮은 게 아니라 낙원아….” “그래.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거라고 넌 말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 각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네가 출근하면서 회사 들어가고 나서나 퇴근할 때 차에서 내려서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나면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어. 우리 관계에서 내가 그저 어떤 역할에 불과한 존재는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낙원이 자신을 연민하는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을 때, 혜민은 머리가 지끈거려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혜민도 바로 그 부분이 부담 스러워 데려다주는 걸 마다하고, 일이 늦어질 때면 그럴 필요가 없 다고 연락한 것이었다. 혜민의 입장에서는 서로 바쁘고 알찬 하루를 보낸 뒤에, 잠자리에 들기 전쯤 전화 한 통 하는 것이 가장 마음이 편했다. 혜민의 대답이 이어지지 않자 낙원이 하던 말을 계속했다. “주말 저녁 말고는 어디 나가지도 못하잖아. 그나마도 동네에 있는 레스토랑이랑 카페 돌아다니는 게 다야. 물론 난 그것도 좋지만, 그 때, 네 표정은… 마치 또 다른 과제를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 득한 것 같아. 그럴 땐 꼭 급한 전화라고 휴대폰 들고 나갔다 오고.” 혜민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낙원이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꺼내 는 시늉을 했다. “오늘 너 회사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 예전에 같 이 갔던 꽃집이 보이길래 들러서… 기억나? 나 군대 가기 전에 코인 노래방 갔던 거… 그때쯤 갔던 행궁동도 생각나서 오늘 여차하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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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가려고 했는데… 아무튼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가 더 행 복했어. 그때만큼은 아니라도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소한 연락이라두….” 그러나 혜민의 얼굴에 성가심이 그득그득했다. 충동적으로 나오는 말을 혜민은 삼킬 수 없었다. “너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멍청하고 미련해서 아침이면 출근하고 밥 먹듯이 스트레스 받고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퇴 근하는 거로 생각하니? 너는 그렇게 안 할 만큼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다거나 다른 무슨 대단한 계획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야? 언제까 지 과거에 머물러 있을 거야? 우리 서른이야. 너도 언제나처럼 이렇 게 살진 않을 거잖아. 공무원이 뭐 어떻게 다를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너는 나와는 달리 직장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을 늘 피할 수 있 을 것처럼 말하지 말아 줄래?”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래, 상황이 다르니까 이해 못 할 수 있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 지고. 그냥 내가 바라는 건 같은 처지에서 서로 위로해주고 힘든 일 있으면 공감해주고 대신 화도 내주고…” “나 사실 공무원 시험 준비 안 해.” 순간 무슨 소린가 싶어 차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뭐?”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오늘 우리가 얘기하는 건 그런 게 아니잖 아. 꼭 둘 다 일을 해야만 연애를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최소한 더 편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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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도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어. 우리 서로 조금만 신경 써주면… 그러니까 오늘처럼 늦는다고만 말하고 아무 연락도 없는 게 아니라….”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던 혜민의 뒤통수가 신경질적으로 머리 받침 대에 부딪혔다. “네 문자를 내가 못 봤다고 자꾸 그러는데, 그럼 내 문자는 제대로 보긴 한 거야? 늦을 것 같다고 안 데려다줘도 된다고 분명히 말했잖 아. 왜 내 상황을 뻔히 알면서 혼자 일 벌여놓았다가 내가 안 따라 주면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건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공기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할 말이 없어진 낙원은 최대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조금 뒤, 혜민이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여기서 내려줘. 걸어가면 돼. 모르겠다. 나도 이런 말 하기 너무 싫 은데, 우리 나중에 얘기하자. 데려다줘서 정말정말 고마워. 오늘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문이 열리고 닫혔다. 프리지어는 조수석에 그대로 놓여있었고, 혜 민은 사이드미러 속에서 빠르게 작아지더니 골목길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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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혼자였다면 조금 더 나았을까. 혜민은 다 비어 가는 샴푸 통을 손바닥에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혼자였다면, 조금 더 공허하기 는 했어도 덜 피곤하지 않았을까. 자기 방식의 판을 미리 짜놓고 그 것대로 남들이 움직여주지 않았을 때 불쾌감을 드러내는 낙원의 가 장 큰 결점을 혜민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회사와 애인, 두 개의 고민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나는 충분히 강한 가. 혜민은 생각했다. 익숙한 실망도 결국은 실망이었다. 어느덧 입 사 5년 차, 그간 중금속처럼 천천히 누적되어갔던 낙원과의 문제는 서서히 표피 위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만 같았다. 혜민의 일상과 혜민을 둘러싼 환경이 예전 같지 않아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낙원은 자꾸만 시간을 되돌리려 했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둘의 모습 을 이상향으로 고정한 채 낙원은 스스로 변할 생각을 도무지 꺼내 지 않았다. 혜민은 푸석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수챗 구멍에 아무렇게나 엉킨 머리카락 때문에 내려가지 않는 비눗물이 혜민의 발등을 적셨다.

어쨌든 봉합은 해야 했다. 8년을 이어온 연애에 변수를 만들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봉합이라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툼이 있고도 다음 날 아침의 출근길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만들 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혜민은 잘 알고 있었다. 익숙한 실망도 결국은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털어낸 새 수건을 벽에 걸 고, 걸려있는 수건을 발판에 깔고, 깔려있던 수건을 빨래통에 넣은 혜민은 휴대폰을 충전기에서 뽑아냈다. 그러나 메신저를 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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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딸, 잘 지내?”

*

혜민은 우선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엄마의 연락은 언제나 두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잘 대해야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는 느낌과 저 네 글자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오갔을까를 생각할 때의 아득함. 어느 감정도 혜민이 편안 히 머무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일과 애인, 그리고 가족의 문제를 모두 원만히 처리할 만큼 혜민은 자신을 강한 사람이라 생 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저 바쁘니까 나중에 연락하라는 매정 한 대답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혜민은 모든 것을 포기해버 릴 것처럼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가만히 세어보니 벌써 석 달이 흘렀다. 혜민은 부모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려 애썼다.

어렸을 적, 이제는 더는 연락이 닿지 않는 혜민의 오빠는 집에 자 주 들어오지 않았고, 엄마는 비행을 일삼는 오빠의 학교에 자주 들 러야 했다. 부모님은 오빠를 이해하려 애썼지만, 오빠에겐 간섭일 뿐이었고, 관계의 아무런 진전 없이 서로의 속만 타들어 갔다. 대체 로 상냥하고 책임감이 강한 부모님이었지만 그런 부모 밑에서 꼭 그 런 자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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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갈등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을 때, 당사자가 아닌 구성원이 가장 먼저 학습하게 되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 아니라 자신 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눈치다. 혜민은 오빠가 부모에게 가 한 채찍을 보상해줄 당근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 서 혜민은 자기 자신에게 채찍을 가했다. 기대에 어긋나는 짓을 벌 이는 것, 즉 사회적인 어떤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자신을 상 상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여유 없는 마음에 고민 의 짐을 얹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부모에게 기댈 지친 마음을 혜 민은 그저 삼켜야만 했다. 엄마의 연락은 늘 이런 기억을 되살려 부 모와 혜민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혜민의 코끝을 맹맹하게 만들었다. 혜민은 몸을 일으켜 베개에 등을 기대었다. 휴대폰을 다시 뒤집고 메신저를 확인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

혜민의 인스타그램에는 스토리 하이라이트가 같은 주제로 잘 정 렬되어 있었다. 2009부터 하나씩 늘어나는 숫자를 제목으로 한 영 상에는 혜민이 그토록 어려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정답게 담겨 있 었다. 삼척의 어느 한적한 바닷가 민박집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아빠, 여수의 해변에서 막대기 폭죽을 신기해하며 하트를 그리고 있 는 엄마, 어디에서든 카메라 뒤에서 깔깔 웃음을 지으며 가족에 대 한 애정을 담뿍 드러내는 혜민. 언제나 그런 관계로 지내오지는 못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티 없이 행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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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족 여행은 가족에 대한 일종의 의 무감을 단숨에 해소해버리는 하나의 관습이었고, 그래서 그 한 번 의 여행으로 부채를 떨쳐버리려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지 만, 꾸준히 함께 여행을 가는 것에 대해 시즌만 되면 부모님은 틈이 날 때마다 친구에게 자랑할 만큼 기꺼워하셨고 혜민도 같은 마음이 었다. 혜민은 타이밍을 잡은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응, 문제없지. 엄마는 요새 어때? 몸은 좀 괜찮고?” 남들도 다 보내는 흔한 답장을 보낸 뒤에도 혜민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3년 전을 마지막으로 혜민의 엄마는 퇴직했지만, 엄마가 이 제 좀 쉴 때도 되었다고 혜민이 생각했을 즈음 엄마는 몸이 고장 나 기 시작했다. 위염이라는 진단을 건너 듣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 때문일까 혜민은 짐작했지만, 그저 짐작에 머물렀을 뿐 더 큰 신경을 평소에 쓰지 못했던 무심함이 혜민을 더욱 부채질했 다. 혜민은 성마른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 많이 바빠? 우리 바다 보러 갈까? 나 한 달 뒤에 연차 잡아 놓은 거 있는데 얼마 전에 친구가 여행 갔다 오고서는 근사한 펜션 있다고 추천해주더라고.” 한결 마음이 편해진 혜민은 커피포트를 올려놓고 침대로 돌아와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답이 채 오지도 않았지만, 수많 은 숙박업소 사이트를 열고 닫으며 혜민은 이미 무언가 확정된 기분 을 느꼈다. 수많은 경쟁과 부조리한 선점 순서를 뚫고 어렵사리 잡 아놓은 샌드위치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원래는 당연히 낙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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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낼 예정이었지만,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을뿐더러 그 순간 떠 오른 낙원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그 형상을 마음 한구석 으로 밀어버렸다. 크게 번거로운 일정이 없을 부모님은 적극적인 딸 의 문자를 미쁘게 받을 것이다. 낙원과의 관계 회복을 포함한 몇 가 지 사소한 업무를 처리한 뒤, 혜민은 노트북을 접고 잠자리에 들었 다. 자고 일어나면 엄마의 답장이 와있을 것이다. 크게 변한 것은 없 었지만, 짊어지게 된 마음의 짐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떨쳐버릴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혜민은 제법 개운한 마음으로 꿈 을 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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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날

오후의 태양이 창틀 끝자리에 걸려 소파에 누워있는 낙원의 눈꺼 풀을 긁어대는 바람에 낙원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여름의 꿉꿉한 더위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소화가 안 돼 가스로 가득 찬 장기 안이 이렇지 않을까 낙원은 생각했다. 핸드폰을 열어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두 시였다. 아차. 혜민이 회사 데려다줬어야 했는데. 쓰러져 자는 것 같아서 그냥 지하철 타고 간다는 혜민의 카 톡이 읽지 않은 단톡방들 사이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미안. 조금 만 더 깨우지 그랬어. 짧은 답장을 보내고 낙원은 핸드폰을 덮었다.

햇살과 새소리에 깨는 아침이 상쾌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늦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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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의 기상은 항상 알지 못하는 찝찝함이 함께했다. 알람 소리에 버 둥대는 사람들을 보며 아침잠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오후 햇살에 한적한 거리를 내려다보면 삶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 버리 는 기분에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어제 혜민과의 불 편한 기류가 온몸 사이사이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얼른 씻어내지 않으면 그것이 몸을 분해해 소화해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낙원은 화장실로 가 샤워기를 틀었다.

*

저녁 7시 찌개집. 고등학교 친구들 약속

낙원의 핸드폰 화면에 알림이 반짝거렸다. 한 달에 몇 번 없는 약 속은 이미 낙원의 머릿속에 모두 들어있지만, 텅 빈 캘린더에 몇 줄 적어넣는 일은 작은 위안이 되었다. 지도 앱을 보니 집에서 약속장 소까지는 걸어서 25분. 시계는 벌써 6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한마디 듣겠네.’

낙원은 신발에 발을 찔러넣고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익숙한 유 재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낙원의 핸드폰 에서 돌아가는 노래는 언제나 비슷했다. 요즘 새로 나오는 노래는 가사도 많고 뿅뿅거리는 탓에 이해할 수도 없는 데다가, 이해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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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를 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익숙한 노래를 들으며 익숙한 술집을 향해 익숙한 길을 걸으며 낙원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럴 때면 마치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유수풀에 떠내려가듯 어딘가에 실려 가는 기분이었다.

뚝잔잔한 도입부를 지나 절정을 향해 단단하게 고조되어가던 가수 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지더니 다시 전주가 흘러나왔다. 다시 진행 되던 노래는 절정 직전에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핸드폰을 열어 보니 다른 사용자가 음악을 듣고 있어 1분 미리 듣기만 가능하다는 문구가 떠 있었다. 혜민이 노래를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낙원은 혜 민의 음악 스트리밍 아이디를 빌려 쓰고 있었다. 한 아이디로 두 기 계에서 동시에 노래를 들을 수 없는 시스템 탓에 낙원이 다시 음악 을 재생하면 혜민의 음악이 끊길 터였다. 낙원은 핸드폰을 다시 주 머니에 찔러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귀에는 후렴의 절정에 다다르지 못한 가수의 힘없는 목소리가 도돌이쳤다. 인생을 왜 이렇게 미적지 근하고 잔잔하게만 살아, 좀 다이나믹하게 살아봐. 며칠 전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삶을 사건과 사고로 꽉꽉 채워야 그 삶을 성실 하게 살아내는 것일까. 고민의 자리를 과잉된 행동으로 지워버리는 건 아닐까. 마음이 힘들 땐 뭐라도 하라던 어머니의 말처럼. 동물원 에 갇혀 자폐증에 걸린 동물들은 끊임없이 한 자리를 빙글빙글 돈 다던 인터넷 기사가 떠올랐다. 고개를 들어 거리를 보니 모두가 제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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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얘는 뭐 맨날 늦어. 몇 시냐 지금?” 찌개집 문을 열자마자 한적한 거리에 왁자지껄한 소음이 쏟아졌 다. 이미 불콰해진 친구들이 낙원을 반겼다. “야 다 왔는데 사진 한 방 찍자. 아이폰인 사람?” 최근에 경찰공무원에 합격했다던 찬일이 웃으며 주머니에서 핸드 폰을 꺼냈다. 고시 공부 기간 내내 2G 핸드폰을 쓰다 최신 핸드폰 을 산 모양이었다. “좀 모여 봐봐. 찍는다. 하나, 둘, 셋” 좌우 반전이 된 셀프 카메라 사진 속 모습을 낙원은 언제나 어색 해했다. 그 모습이 남들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일 테지만,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친 반전된 얼굴이 훨씬 눈에 익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 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 사이에는 항상 어색한 차이가 있었다. “진짜 다들 아저씨다. 어쩌다 우리 이렇게 됐냐? 한민이 저거 배 좀 봐.” “어이, 낙원. 네 머리숱이나 신경 써.” 소주를 담은 잔이 몇 번 빠르게 오갔다. 한민은 배가 부른지 등받 이가 삐걱거릴 정도로 등을 의자에 밀어 넣고선 한계까지 빵빵해진 허리띠를 끌렀다. “요즘 회식을 너무 했더니 죽을 것 같아. 살이 미친 듯이 찐다.” “네가 언제는 날씬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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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웃으며 한민의 배를 쿡 찔렀다. “낙원아. 넌 회사 들어오지 마라. 회사 건물에 발을 딛는 순간 하 루가 사라져. 도대체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어.” 입 속에 잔을 털어넣던 찬일이 뾰로통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너무 배부른 소리 아니냐. 나 경찰 합격할 때까지 얼마나 불안했 는데… 낙원아, 요즘 취업 준비는 잘 돼가냐?” 낙원은 소주잔을 내려다봤다. 솔직히 왜 취업해서 바둥거려야 하 는지 모르겠어. 알바하면서 나 먹고살 정도만 벌면 되지 않을까? 아 니 그럼 혜민 씨는? 너희 결혼 안 할 거야? 그것도 잘 모르겠고. 앞 으로 이어질 뻔한 대화들이 소주잔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낙원은 잔을 들어 얼른 삼켜버리고는 인상과 함께 쓴 냄새를 뱉었다. “어. 뭐 그냥 똑같지.” “얘들아. 회사고 뭐고 결국 이게 답이다.” 한민이 지갑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쾅 소리와 함께 양철 테이블 에 올려놓았다. 술기운에 힘 조절이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지인의 지인이 집 가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로또를 샀는데 1 등 당첨됐대. 그 길로 회사 때려치우고 대학원 갔다고 하더라. 어차 피 피똥 싸면서 고시 공부하고 평생 상사 술잔 채워봤자 1등 상금 만큼 못 벌어. 그리고 뭐 삶의 낙이 특별한 데 있냐. 이거 한 장 지 갑에 끼워놓으면 일주일이 설렌다. 소확행인거지 소확행.” 낙원은 한 번도 복권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왜 실망감을 돈을 주면 서까지 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큰돈을 바라지도 않았다. 벼락부자가 된 백수와 낙원의 생활 패턴이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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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지 않은 것도 한 이유였다. 통장 잔고만 제외한다면. “야 근데 너네는 복권에 당첨되면 회사 그만둘 거야?” 낙원은 냉장고 옆 텔레비전에 눈을 박은 채 말했다. 초과근무와 장 시간 노동에 못 이겨 자살한 집배원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 나는 계속 다닐 것 같다. 애초에 고시 공부하면서 이 직업이 더 절실해졌기도 하고, 무엇보다 로또에 당첨됐다고 해서 내 삶에 큰 변화가 없었으면 좋겠어.” “당장 때려치워야지. 그리고 돈을 안 주더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갈 거야. 돈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비겁하고 억눌 린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지 알잖아. 난 아마 도서 산간 지역 으로 내려가서 봉사할 것 같아.” 한민은 IT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첫 출근 날, 한민의 업무는 회사 컴퓨터에 워드와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을 최신판으로 업데이트하 는 일이었다. 정품 구매가 아닌 불법 다운로드로. “그래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세상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딨겠 냐.” 세상에 이렇게 놀랍도록 진부한 위로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다니. 낙원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소주잔으로 가리고선 얼른 털어 넣었다. 취한 탓인지 최저시급의 알바생이 연봉 사천의 대리를 위로하는 꼴 이 우스워서인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진부한 위로와 웃 음이 건넬 수 있는 최선이란 것 역시 낙원은 잘 알고 있었다.

“1차는 내가 산다. 2차는 네가 합격 턱 내, 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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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뭐 먹고 싶어?” 언제부턴가 술값 지불의 의무에서 낙원은 자연스럽게 제외되어있 었다. 그럴 때마다 낙원은 불편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고, 그런 마음이 삐죽 튀어나올 때면 자리는 어색해지기 마련이었다. “아냐. 나 내일 일찍 스터디 있어. 술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낙원은 친구들과 짧은 인사를 마치고 대로변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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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 신도림역은 어디에 이 많은 사람이 숨어 있다가 쏟아져 나왔나 싶을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 온종일 일한 탓에 지친 표 정이었다. 혜민은 익숙한 듯 핸드백을 끌어안고 1호선으로 환승하려 는 대열에 합류했다. 넓은 대합실을 지나 1호선 승강장으로 이동하 는 계단에 이르자 대열은 더 빽빽해졌다.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학생 들이 개미 떼처럼 얽힌 채로 꾸역꾸역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중간 쯤에는 돗자리를 펼쳐놓고 조잡한 도금 팔찌와 반지를 파는 상인이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매를 권유했지만, 관심이라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어서 이 개미지옥에서 벗어나 고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퇴근 시간 신도림역은 어쩔 수 없이 거쳐 가야 하는 피곤한 환승지일 뿐, 그 누구에게도 목적지는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멈추어 설 여유 따위는 없었다.

승강장 스크린도어 앞에 다다른 혜민은 어느 줄에 서야 조금이라 도 빨리 열차에 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어느 줄이나 수십 명씩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짧은 줄 을 찾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빨리 이곳 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다는 걸 혜민도 알고 있었다. 연이어 승강장에 도착한 다른 모든 사람이 혜민처럼 체념하고 아무 줄에나 서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살아 가고 있었다.

낙원은 오늘 저녁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난다고 했다. 혜민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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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잘 아는 친구들이었다. 1년에 꼭 한 번씩은 있는 모임이었고, 두 어 번쯤 초대되어 간 적도 있었다. 그들은 낙원이 어찌하여 제 나름 의 안분지족을 지키며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원을 몸소 보여주는 친구들이었다. 술을 마실 때면 내일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 친구, 안 가본 클럽이 없는 친구, 그 와중에 복권에 당첨된 친구, 그 친구 옆에서 복권만 긁었던 친구 …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는 듯 허름한 표정에 실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낄낄댔다. 혜민은 자 신을 익살스럽게 놀려대던 그들이 떠올라 어이가 없어서 그만 웃음 이 나왔다가, 이내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들마저도 지금은 전 부 세상과 친해졌다. 낙원은 혜민에게 먼저 말하는 법이 없었지만, 낙원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그들의 근황을 간접적으로 듣 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무원과 연봉 사천이 과연 세 상과 친한 것이냐, 라는 물음에 대해 혜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 았다. 다만 낙원과 세상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을 생 각할 때면 막막함과 착잡함이 엄습해왔다. 아마도 낙원은 오랫동안 술을 마실 것이다. 다음 날 출근이 없는 혜민이 기다리지 않는 이 상, 혜민이 잠들기 전까지 계속해서 술을 마실 것이다. 아무래도 상 관은 없었다. 내일 아침에는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고, 혜민은 별 고 민 없이 먼저 하루를 마감하고 싶었다.

그냥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소모되기만 하는 일보다는 나를 채울 수도 있는 일을 선택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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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혜민은 자꾸만 점심시간에 희 정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희정은 대학교를 함께 다니던 시절에, 혜민이 훗날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고 했다. 혜민은 그 시절에 어떤 삶을 꿈꿨을까?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지금보다는 무언가가 더 있기를 바랐다. 회사의 훌륭한 일원이 되어 묵묵히 주 어진 것들을 처리하는 것도 물론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이 전부이 기를 혜민은 바라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면 우르르 쏟아져 나와 피곤한 얼굴로 지하철을 기다리고, 집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어 아 무것도 할 수 없어지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 이런 삶에 대해 그 수 많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혜민은 문득 궁금해졌다. 낙원은 그 문제에 있어서 너무 멀리 있었다.

어렸을 때는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막연히 남들 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믿었고, 그것이 좋은 삶이라 여겼다. 그래서인지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아이 디어 공모전에도 몇 번 참여했고, 상을 타진 못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음번에 잘하면 되니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열악한 학 생 휴게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고 선배들의 부 당한 요구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 와중에 공부하는 것도 손에서 놓치지 않아서 늘 중상위권 성적이 나온 데다가 겨우 2학년 때 대 학원 수업을 신청해서 들어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학원 진학 을 권유하는 교수도 있었다. 한동안 대학원에 갈까 진지하게 고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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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도 했지만, 일반인들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협소한 주제를 다루 는 연구자가 되는 것보다는 어서 현업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렇게 혜민은 취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 단 취업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만 했지, 그 이후에도 인생의 행로 를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할 줄은 몰랐다. 어찌어찌 회사에 들어와서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아오다 보니 지금이다. 능동과 수동,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답은 뻔했다. 혜민은 자신 을 삼십 대 직장인 이외에 달리 묘사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참 많은 이동수단. 버스, 지하철, 기차, 가끔은 비행기까지. 많이 탄 다는 건 그만큼 한 곳에 있지 않고 많이 움직인다는 것일 테고, 나 도 그런 사람인데. 갈아타는 곳이 있다면, 정해진 출구가 있다면 좀 더 시간을 아낄 것 같지만 시간은 뒤 없이 잘 간다. 언젠가 목적지 가 정해진다면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아름답게 보일까? 혜민은 머릿 속으로 일기를 썼다. 그것은 곧 없어질 것이었다.

“삐- 삐- 삐스크린도어가 닫힙니다.”

가까스로 만원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었다. 이러다 문 사이에 끼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스크린도어는 아슬아슬하게 혜민 의 등을 비껴갔다. 지하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드라마라도 볼까 싶었지만, 너무 비좁은 탓에 주머니에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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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기도 힘들었다. 체념한 혜민의 눈에 앞사람의 스마트폰 화면이 들 어왔다. 화면 속에서는 어느 유튜버가 돈 모으는 방법에 관해 이야 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는 돈 버는 방법도 참 다양한 세상이 된 것 같다 고 혜민은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아나운서가 꿈이었던 한 친구는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후 메이저 방송사 면접에서는 번번이 떨어 지다가 끝내 소규모 방송사의 아나운서에 합격하더니, 1년 후 갑자 기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 선언을 했다. 그때 혜민은 그 친구가 걱정 스러웠다. 충분한 방송사 인맥도 없이 어떻게 프리랜서를 하려나 싶 었다. 그러다 그 친구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요점 을 정리해주는 유튜브였는데 언변이 좋았던 덕분인지 폭발적인 인 기를 얻었다. 수익을 꽤 얻은 후에는 여행 리뷰, 인생 조언, 다이어트 관련 콘텐츠까지 다루기 시작했다. 이제는 프리랜서 아나운서 겸 유 튜버로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에세이집도 한 권 냈다 던가.

대학 시절, 4수 끝에 입학한 어느 언니도 생각났다. 음악에 꿈이 있어서 대학 시절 내내 홍대 앞에서 밴드를 했는데 졸업 후에는 뜬 금없이 모 사교육업체의 인터넷 강의 강사가 되었다. 소문으로는 평 생 음악을 하고 싶은데 그것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워서 투잡을 알아보다가, 아예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을 선택한 거라고 했다. 하긴 수능을 네 번이나 보았으니 문제 풀이에는 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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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 사람. 대학 다닐 때도 대치동에서 학원 아르바이트를 간간이 했 었다. 평생 음악을 하고 싶은데 기타 레슨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취직을 해야 하나 고민하더니 결국 짧은 시간 안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인터넷 강의 강사가 된 것이다. 저녁에는 대치동에서 강의하고, 새벽에는 밴드 멤버들과 합주를 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혜민은 비좁은 와중에 힘겹게 스마트폰을 꺼내 멜론을 켰다. 밴드 이름이 뭐였더라? PH… 그래, PHZD. 검색 버튼을 누르니 최근에 새 앨범이 발매됐다고 떠 있었다. 검푸른 파도와 고래의 이미지로 된 앨범 커버였다.

무척 바쁜 시즌일텐데 그와중에 앨범은 또 어떻게 낸 걸까. 혜민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때 방황하는 듯 보였던 친구들은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10년, 20년이 지나면 나 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줄리아의 퀭한 눈이 떠올랐다. 적어도 그 사람의 모습이 내 미래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줄리아도 혜민의 것과 비슷한 고민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이지 이제는 그런 고민 없이, 남아있는 별다른 선택지 없이 살아가는 것만 같았 다. 그러나 서른의 줄리아와 지금의 혜민이 어느 정도로 다른 것일 까. 지금의 줄리아와 오십의 혜민은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낮게 울 리는 기타 소리를 들으며 혜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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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이제는 각자의 생계수단을 어깨에 짊어진 친구들과 가 장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에, 낙원은 취하지 않은 자신 이 낯설어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빠른 걸음으로 번화가의 상점들을 지나치다 횡단보도 앞 빨간 불에 멈춰 섰다. 왜 그곳을 일찍 나올 생 각을 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결론이 나지 않은 듯 동 동 발을 굴렀다. 그동안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임에서만큼은 철이라 는 가면을 쓰고 어른이 된 양 연극을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또한 몇 년 전만 해도 같은 고민을 흔쾌히 공유해왔으므로, 더구나 자신 의 고집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으므 로, 오늘 낙원의 퇴장에는 논리가 없었다. 그러니 결국 그곳이 변해 버린 것이라고, 낙원은 편리하게 생각하려 했다. 친구들은 떠나버렸 지만, 이로써 자신의 무엇인지 모를 삶의 철학은 조금 더 희소해졌 고 고귀해진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오가는 사이 바뀔 때가 되었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은 신호등이 붉은빛을 여전히 내뿜었고, 길가는 여러 방향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메워졌다. 어쩌면, 친구들이 변한 게 아니라 자신이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적절할 때 변하지 않은 저 신호등처럼. 낙원은 같은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묘사에 심 상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신호마저 변했다. 사람들 이 우르르 도로 위로 쏟아졌고, 낙원은 불안한 발걸음을 내디뎌 거 대한 퇴근의 대열에 합류하는 기분을 느꼈다.

금요일 밤, 혜민은 퇴근하고 나서 종종 친한 회사 동기들끼리 일주 일간 묵은 것들을 해소하러 어딘가로 가곤 했다. 과거의 어느 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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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는 낙원 역시 오늘처럼 약속이 있었고 그날 밤 둘은 꽤 취한 상 태로 혜민의 집에서 아무런 의무도 주어지지 않은 내일을 무시하며 순간을 만끽했다. 술이 들어갈 때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둘의 관계는 낙원의 향수가 머물러있던 과거로 근접할 수 있었다. 서로의 상황상, 금요일은 그들에게 그런 의미를 가졌다. 주말을 맞이한 혜민 의 집에서 관계는 어느 정도 리셋되는 것이었다. 낙원은 여전히 그곳 에 기대었다. 어딘가에서 동료들과 슬슬 헤어지고 있을 혜민이 있는 곳으로 낙원은 가고 싶었다. 여건이 된다면 심야 영화를 보거나 코 인노래방에 들른 뒤 혜민의 집에서 이른 주말을 금요일 밤부터 시작 할 것이다. 하지만 혜민은 낙원의 어떤 연락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낙원이 혜민의 집에 도착했을 때,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바로 그 곳에서 혜민은 등을 돌리고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푸른 등이 혜민을 깨우지 않게끔 천천히 문을 조금씩 여 닫는 것밖에, 낙원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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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날

늦은 아침,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낙원의 눈에 벌 써 거울 앞에서 꾸물거리는 혜민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일어났어?” 혜민은 거울 뒤에서 꿈틀거리는 낙원에게 말을 걸었다. 평일 내내 회사에서 모든 열정을 쏟은 뒤 주말에는 한없이 늘어져 있곤 했던 혜민이 점심시간이 다 될 때까지 잠을 청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 었다. 주말이라도 충분히 쉬어야만 다음 주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 었기 때문이었다. 혜민에게 토요일 아침의 늦잠은 주중에 고생한 자 신을 위한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침부터 일어나 꾸 역꾸역 화장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낙원을 적잖이 불안하게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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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어제 일찍부터 자더니, 오늘 무슨 일 있는 거야?” “응, 오늘 은비 결혼식 있어서. 그때 청첩장 보냈던 고등학교 동창. 시간 빠르지?” 혜민이 그녀의 일정을 말해주어도 곧잘 잊어버리곤 했던 낙원은 다시 한번 자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혜민의 말속에는 어떠한 서운함 도 없는 것 같았다. “나도 별로 가고 싶진 않아. 그래도 다들 가는데 안 갈 수가 있어 야지. 아마 좀 늦을 것 같아. 지방에 사는 애라 짧게나마 기차도 타 야 하고. 오랜만에 보는 동기들이라 늦은 저녁까지 계속 있을 것 같 은데, 괜찮지?” 낙원은 정신이 꽤 또렷했음에도 졸리는 척 대답을 대충했다. 얼마 간 씁쓸했다. 자신이 동창과의 모임에서 일찍 나온 이유와 혜민이 결혼식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겹쳐 보였다. 낙원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잠에 빠지기 위해 노력했다.

혜민은 푸르죽죽한 다크서클을 가리기 위해 눈가에 퍼프를 열심히 찍어댔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창들에게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는 않았다. 생기 넘치는 얼굴을 만들어내다시피 화장을 끝내고 나 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혜민은 자기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 데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 그래도 아끼는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으니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꽤 괜찮 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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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 장소는 한적한 동네에 위치한 어느 성당이었다. 신랑이 어 린 시절을 보낸 동네였고, 특히 이 성당을 열심히 다녔다고 했다. 택 시에서 내려 성당 정문으로 들어서니 이미 수백 명의 하객이 바글바 글하게 모여 있었다. 혜민은 인파 속에서 어디에 동기들이 모여 있는 지 재빨리 눈으로 살폈다.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 다. 현아였다.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혜민은 반가움과 긴 장감을 동시에 느끼며 동기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대여섯 명쯤 되는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저기 신랑 봐봐. 키도 크고 너무 잘생겼다. 은비는 어디서 저런 사 람을 만난 거야? 그러게 말이야. 은비 걔 남자한테 관심 없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혼은 이렇게 성대하게 하는 거 봐. 여기가 연예인 들도 많이 다니는 성당이래. 진짜? 은비 남편도 그쪽 분야에 있는 건가? 아이, 그게 아니고, 이 동네가 한적하고 오래돼 보여서 그렇지 사실 엄청 부촌이래. 연예인 정치인 할 것 없이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인가 봐. 은비 남편은 피부과 의사라더라. 심지어 병원장 아들이 래. 콕 집어서 은비한테 그 사람 소개해달라고 얘기하면 되겠다. 나 는 병원장 아들은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오랜만이다, 혜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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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예상 가능한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현아를 향해 걸어가던 혜민은 현 아가 건네는 침착하고 정다운 악수에 이내 환상에서 깨어났다. 어 쩌면 결혼식을 거부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드라마에 나올 법한 속물적인 대사로 친구들을 바라본 것일지도 몰랐다. 혜민은 얼 른 현아에게로 관심을 돌려 기억을 최대한 짜내려 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 좋네. 다니던 회사는 나왔 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처음부터 너무 직접적으로 질문을 한 것은 아닌가 후회하던 참에, 현아 역시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불편한 친구가 있었는지 혜민의 팔 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며 장소를 옮기려 했다. “맞아. 예전부터 일이 안 맞아서 고민이었거든. 우리 앉아서 얘기 할까? 너도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궁금하다. 통 보질 못했어, 이게 얼마 만이냐.” 이게 얼마만인 친구들이 요즘 들어 너무 많은 혜민이었다. 이렇게 점점 보지 못하다가 하나둘씩 멀어지겠지. 식이 진행되기까지는 얼 마간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그래서 현아와 혜민은 사람들이 북적거 리는 예배당을 벗어나 근처 카페로 향했다.

*

“결혼하고 나서, 나는 퇴사하겠다고 마음먹고도 몇 개월 동안 망 설였는데 남편이 계속 설득해줬어. 일 그만두고 천천히 내 인생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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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고민해봐도 된다고.” 시켰던 음료를 들고 자리에 앉은 현아가 말했다. 혜민은 자신의 이 야기로 그들의 대화가 채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소개팅을 처음 할 때 주변 사람들이 해주었던 조언을 따르듯 현아에게 최대한 많은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퇴사한 건 후회 안 해?” “글쎄. 얼마 안 되긴 했지만 아직은. 스타트업인 걸 감안해도 일은 점점 많아지는데 사람은 새로 뽑히지 않고, 애써 기획을 해도 개발 이 안 되고, 그래서 지쳤던 것 같아. 남편이 그러더라고. 어떻게든 기 한 안에 업무를 끝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것 같다 고. 근데 실제로 내가 딱 그랬거든.” “맞아. 너만큼 워커홀릭이 없었지.” 혜민은 20대의 현아를 거의 보지 못했다. 가끔 있었던 동창 모임 에 혜민은 가끔 나가는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현아는 보기 힘든 친 구였다. “갈리고 갈린 게 워커홀릭이라면… 맞아, 그런 편이었지. 너랑 학교 다닐 땐 그냥저냥 학교 재미없다- 하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 졸업하 고 나서는 왜 쉽게 그만두지 않고 그렇게 독하게 살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영향력을 갖는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이라도 있었던 건 가.” 혜민이 보기에는 그런 것 같았다. 20대의 현아는 입시를 앞둔 고 등학생보다 더 전투적이었다. 부족한 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계 발은 멈추지 않으며 연봉은 언제나 전진해야 하는 삶. 혜민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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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의무감이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단 있는 추진력이 부 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현아도 그런 자신이 의식된 것일까. 혜민은 잠깐 홀짝대더니 얼음만 남은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사라졌고?”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 어. 내가 잘 나가든 못 나가든, 그건 주변 사람들과의 사이를 다르 게 만드는 것 같지 않더라고.” “주변 사람들?” “응, 그것도 전부는 아니지만… 누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으로 기억되고 싶은 건 있잖아. 딱 그만큼만이라도 말이야.” 모르는 사이 현아는 조금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사람이 된 것 같 았다. “무슨 말이야?” “생각을 좀 해봤는데, 그동안 분명히 뭔갈 이루려고는 했단 말이 야. 명확하다고 생각한 목표만 보면서 열심히 살아온 건 맞아. 이를 테면 최소한 얼마의 연봉, 얼마의 집 같은 것들. 그런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끝내 가지게 되면 그 목표는 정말로 이룬 걸까?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고. 절대 만족할 수 없는 끝이 없는 꿈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거든.” 목표가 없다면 티 없이 바스러질 삶이었지만, 정작 목표는 손에 잡 히지 않는 흐릿한 것들이기 쉬웠다. 혜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내 자아가 더 커질 거라곤 나도 생각 못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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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지낼 때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된 게 남편을 만난 뒤라니 내가 봐도 좀 이상하긴 하다.” 아무튼 그래, 라는 말로 현아는 그동안의 자신을 정리하는 일을 마무리한 것 같았다. 혜민은 어느새 하나 남은 얼음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관계는 정해진 파이를 나누는 게 아니라는 걸, 낙원이는 왜 모르는 걸까. 어느새 찢어져 있는 영수증을 바라보며 혜민은 생각했 다. “요새는 뭐 하고 지내?” “이것저것. 정해진 건 없지만 꾸준히 무언갈 배우고는 있어. 얼마 전엔 남편이 도자기를 추천해줬는데, 꽤 재밌더라구. 마음에 안 들 면 부수고 다시 만들기도 쉽고. 조금 쉬어가더라도 내가 20년이고 30년이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갔으면 남편은 좋겠대. 그런 말은 내 가 스스로 해줄 수도 있을 텐데, 남이 말해주면 묘하게 안심되는 거 있지.” 마냥 부러워하는 것이 가장 편했겠지만, 혜민은 그런 게으름을 피 우고 싶지 않았다. 현아의 선택에 깃들어있을 크고 작은 고민들을 애써 무시한다면, 혜민 자신이 더 초라해질 것이었다. 그래도 묻고 싶은 것은 있었다. “그럼… 계속 쉴 거야?” “아니, 그럴 수 있다 해도 안 그럴 거야. 2년, 딱 2년 정도만 이렇게 살고 그 안에서 찾아낸 최선의 것들을 정해 내 일을 하면서 살아갈 거야. 그건 그렇고, 낙원 씨랑은 여전히 잘 지내는 거지?” 혜민은 약간의 뜸을 들였다. 잘 지내니까 계속 만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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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솔직하게 신세를 한탄하다 카페를 나 왔다면, 식장에서 벌어질 여러 편치 않은 상황들을 피해 기댈 수 있 는 동료가 한 명 생길 수도 있을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것 나 름대로 의미 없는 일이었다. 현아가 적잖이 궁금해했음에도, 혜민은 낙원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가장 따뜻한 말들을 골 라 균일한 대화를 이어갔다. “좋아 보여, 현아야. 그 어느때보다도.”

얕은 구름이 서서히 해를 가리기 시작할 때쯤, 식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다. 현아와 혜민은 카페를 나와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섰다. “아 맞다, 혜민아. 나 얘기 안 한 게 있는데….” “왜, 무슨 일인데?” 현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저녁이라도 사주겠다는 것일까. 그러나 횡단보도의 초록 불이 켜지고, 의아해하 던 혜민은 그제야 현아의 손끝이 배꼽을 향해 있다는 걸 알아챘다. 혜민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야, 아니… 너! ”

해맑은 웃음소리가 저 멀리 퍼져갔다. 둘은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 까지 아기의 나이와 성별, 이름과 향후 계획들에 대한 문답을 주고 받았다. 대문이 닫히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혜민은 친구들이 모여있던 긴 의자의 끝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성 스러운 예수의 형상이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가 햇빛을 받아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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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있었다. 식전 멘트가 웅웅거리기 시작했고, 혜민은 이제는 입 장을 앞둔 은비가 처음 청첩장을 보냈던 날이 떠올랐다. 들을 때마 다 심란해지는 단어, 아기. 얼마 안 있어 착석을 알리는 종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

띵동- 띵동-

문 앞에 선 혜민은 얼핏 봐도 다섯 켤레가 넘는 구두를 포도처럼 주렁주렁 손에 달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멀리서 낙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워있던 소파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듯했다. 접기에 따라 소파가 되기도 침대가 되 기도 하는 하얀색 가짜 가죽 소파. 지지난 여름, 살갗에 쩍쩍 달라 붙는 촉감이 불쾌하다며 혜민이 한쪽으로 밀어놓은 소파는 혜민과 낙원이 갈등을 일으킬 때마다 낙원의 유용한 대피처가 되어주었다. 방 한 칸짜리 좁은 집이 둘의 날 선 눈빛으로 쾌쾌하게 메워지면, 낙원은 자연스럽게 소파로 자리를 옮기곤 했다.

“나야 혜민. 문 좀 열어줘. 나 손이 없어.”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문이 열렸다. 낙원이 손을 내밀었다. “이게 다 뭐야? 웬 구두를 이렇게 왕창 들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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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잖아, 우리 회사 운동화 못 신게 하는 거. 맨날 운동화 신고 가 서 앞에서 구두 갈아신는데, 퇴근할 때 자꾸 두고 오다 보니까 회사 에 내 구두가 너무 많이 쌓였더라고. 배고프다. 저녁 먹었어?” 낙원은 무언가 예상 밖이라는 눈치였다. “아니 아직 안 먹었지. 그런데 약속 다녀온 거 아녔어? 오늘 고등학 교 때 친구 오랜만에 만난다고 데리러 오지 말라 했었잖아.” “그냥 커피 한잔 마시고 말았어. 오랜만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거 주더라고. 은비, 결혼한대.”

안으로 들어가는 혜민의 뒤에서 낙원은 청첩장을 유심히 살펴보 았다. 저희 두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함께 축복해 주 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뒤편엔 유럽 여행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 담겨 있었다. 알프스산맥을 배경으로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신랑이 번쩍 들어 올리는 모습이었다. 혜민이 소파 위로 풀썩 쓰러지며 말했다. “그 사진 신랑이 직접 찍은 거래. 대단하지 않아? 그 둘이 처음 사 귀기로 한 곳도 거기라고 하더라고.” “그러게. 멋있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멋있는 곳에서 프러포즈할 게.”

혜민은 누운 채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던 거로 기억한다. 혜민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됐고, 나 너무 배고파. 우리 피자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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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의 집 근처에는 다른 동네에서도 자주 찾아오는 유명한 피자 집이 있었다. 낙원은 피자라면 언제든 좋아했기에, 저녁 메뉴는 이 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낙원이 나갈 채비를 했다. 이런 점은 늘 고마웠다. 혜민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 어갔다. “혜민아, 고구마 피자로 사 올까?” “응. 너 먹고 싶은 거로 사와. 고마워.” 욕실에 들어선 혜민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피자를 사러 가는 낙 원의 모습을 상상했다. 가끔 피곤하게 구는 성격을 제외한다면 같 이 살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친구. 20대의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한 친구. 물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뻗은 왼손으로 흐르는 물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혜민은 문득 청첩장을 받아든 낙원의 반응이 궁금했다. 어느덧 서른이었고, 결혼에 완전히 무심할 나이는 아니라 고 혜민은 생각했다. 청첩장을 받아들었을 때 혜민이 가장 먼저 생 각 난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낙원이었다. 혜민 자신의 마음도 잘 알지 못했기에 당연히 재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다만 얘기는 꺼내 보고 싶었다. 은비의 청첩장이 구실이 될 수 있을까, 혹시나 낙 원이 결혼하고 싶어 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는 않을까, 우리 관계의 종착점은 어딜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흘러갔 다. 혜민의 두 발 위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혜민아 다 씻었어? 얼른 나와, 피자 식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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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낙원이 돌아와 있었다. 축축한 머리칼 아래로 잠옷을 걸친 혜민에게 낙원이 습기에 살짝 눅눅해진 피자 박스를 내밀었다. 혜민 은 배를 채우기 전에 냉큼 물꼬를 텄다. “근데 이 청첩장 사진 말이야. 웃는 게 진짜 이쁘지 않아? 나는 사 진기만 들이밀면 입꼬리에 마비가 오는 느낌이야. 어떻게 이렇게 자 연스럽게 웃지?” “진짜 행복해서 그런가 보지. 저 풍경에 저런 옷을 입고 프러포즈 를 받았는데 어떻게 웃음이 안 나겠어.” 낙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고, 그러한 태도에 혜민은 약간의 용기를 얻었다. “근데 난 저런 거창한 거 없어도 결혼하면 행복할 것 같아. 이렇게 퇴근하고 너랑 마주 보고 저녁 먹는 것만 해도 너무 좋아. 핫소스 뿌려줄까?” “응 조금만. 나도 그래. 이렇게 저녁 먹고 수다 떨다가 잠들어도 눈 뜨면 내 옆에 계속 있는 거잖아. 지금도 가끔 그러고 있긴 하지만.” 큼지막한 고구마 토핑이 낙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녁은 네가 차려 줄 거지? 낙원아?” “당연하지. 그리고 우리 닮은 아이도 있으면 무지 재밌겠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낙원은 혜민보다 한발 더 나아가 있었다. 너무 멀리 나가셨네요, 하며 웃고 넘기려는 혜민이었지만, 핫소스가 발린 피자 조각을 씹으며 혜민 역시 한 발짝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 라는 생경한 단어에 혜민은 몇 달 전 태어난 조카를 떠올렸다. 양수에 불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세 번째 날


어 쭈글쭈글한 조카의 첫인상. 그것은 생명의 거룩함이라기보다는 외계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낯섦에 더 가까웠다. 동생은 퉁퉁 부 은 얼굴로 조카를 안았다. 엄마가 되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혜 민은 자신을 단 한 번도 어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많은 대 화를 하진 않지만, 동생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었다. 동생은 언제나 피터 팬을 좋아했다. 반찬 투정을 하는 동생에게 언제 철이 들 거냐 는 잔소리가 떨어지면 평생 철들 계획이 없다며 능글능글하게 넘어 가는 모습은 당장 초록 옷을 입혀 애니메이션에 넣어놔도 어색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느새 엄마가 되어 조카를 안고 있는 동 생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의학의 발달로 오랜 마음고생 없이 아이가 생겼고, 무통 주사와 수 술로 조카가 태어났다. 하지만 육아의 지난함을 줄여주는 기술 따 윈 아직 없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깨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다 보 면 머리가 울려서 제 이름도 잊어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 다. 젖은 눈망울을 보며 도대체 이 생물체는 내게 뭘 원하는 걸까 허 둥대는 사이 하루가 끝나버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이 책 임감의 길로 들어갈 동생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늘 밝은 피터 팬 같던 동생을 어른으로 만들어버린 조그만 조카가, 동생에 게 기쁨을 더해주는 효자로 자라났으면 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좋 은 사람, 좋은 가족이 생겼다는 기대감. 아이에게는 그런 성스러움 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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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해?” 낙원이 우물거리는 입을 멈추고 말했다. “그냥. 아기 얘기 나오니까 조카 생각나서.” “아 맞아. 그때 사진 보여줬었지. 조카 진짜 귀엽더라.” “동생이랑 매제랑 고생을 엄청나게 하겠지. 그래도 무럭무럭 자라 서 10년 뒤에 나랑 말도 하고 그럼 엄청 신기하겠다. 너 말대로 우 리 결혼하고 아이 생기면… 둘이 같이 놀기도 하겠지?” “그래그래. 내일 점심 먹고 바로 결혼할까 그러면?”

진심인지 장난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낙원은 그 어떤 진지한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장난치지 말고 바보야. 요즘 결혼 한번 하려면 진짜 준비 많 이 해야 한단 말이야. 돈도 차곡차곡 모아둬야 하고. 내가 모으고 있는 적금에다 대출 좀 받으면 작은 방 하나는 얻을 수 있을 것 같 은데… 낙원아, 너도 곧 일 시작하고 준비 같이하면 우리도 한 2년 안에는 결혼할 수 있지 않을까?” “좋지. 피자 테두리 안 먹으면 나 줘.” “시험 준비는 잘 돼 가? 요즘에 통 신경을 못 써줬네. 낙원아, 이제 는 공무원이 대세래. 50살 넘기면 회사에 남아있기도 힘들잖아. 친 구가 다니는 회사 부장님도 얼마 못 버티고 나가셨다더라. 맨날 도 서관 가서 인강 듣고 문제 푸느라 무지 힘들겠지만, 조금만 힘내자. 응?”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세 번째 날


“그래. 천천히 생각해보자.” 낙원은 피자 테두리에 눌어붙은 치즈를 떼어내며 말했다. 피자의 치즈 옷이 다 벗겨지자 갈 곳을 잃은 낙원의 손은 피자 박스의 가장 자리를 야금야금 찢어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모서리가 모두 종이 부스러기가 되어있었다.

“이런 얘기 하는 게 너무 부담돼 낙원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도 좋아. 너랑 알콩달콩 사는 것도 좋 고. 근데 사실 너무 먼 이야기 같아서….” “그래도 미리 얘기해놓으면 좋지 않겠어? 2년 뒤면 우리도 서른둘 인데. 그렇게 먼 미래도 아니잖아.” “아직 뭔가를 책임진다는 게 부담되는 것 같아. 아이도 그렇고 가 정도 그렇고. 내가 준비가 안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노력해야 준비가 되는 거지. 계획을 세워야 노력을 할 수 있는 거 고.” “맞아. 천천히 해볼게. 한번.”

남은 피자를 봉지에 싸 냉동고에 넣고, 식탁을 물티슈로 치우는 동 안 낙원과 혜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 정리가 끝나자 혜민 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켰다. 알프스 여행을 리뷰하는 달뜬 목소 리가 조용한 집을 메웠다. 낙원이 다시 하얀 소파 위로 올라갔다. 싸 운 것도 아닌데,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그런데도 변하지 않았다 는 이유로 낙원은 소파 위로 올라갈 일이 많아졌다. 적어도 낙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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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했다.

*

결혼식은 예상 밖을 벗어나는 일 없이 무사히 치러졌다. 피로연이 끝나고 친구들은 우리만의 시간을 갖자며 다른 곳으로 향했지만, 혜민은 영 내키지 않아 낙원과의 약속을 핑계로 식장을 빠져나왔 다. 택시에 몸을 실은 혜민은 휴대폰을 켜고 기차 시간을 앞당겼다. 창밖에는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토요일 밤이었는데도, 출발 시각이 임박한 기차는 자리가 얼마 남 아있지 않았다. 혜민은 가족석을 선택하며 그곳에 가족이 앉아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혜민이 열차 칸에 이르렀을 때 혜민의 좌석 앞에는 어느 부부가 아기를 안은 채로 착석해있었다. 아직 개월 수 를 세야 할 것 같은, 두 살배기 여아였다. 아기는 아빠의 굵직한 팔 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혜민은 창가에 머리 를 기대어 얕은 잠을 청했다.

부부는 어떻게 결혼을 한 것일까. 은비는 어떻게 결혼을 했을까. 그 일엔 어떤 종류의 용기와 사랑이 필요할까. 이미 수많은 세상 사 람들이 거쳐 간 과정임에도, 혜민은 눈을 감은 채 느끼는 어둠처럼 그것이 아득하기만 했다. 하기야 용기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 은 아니었다. 은비는 그럴만한 상황이기 때문에 결혼에 이르렀고 현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세 번째 날


아의 아기는 그럴만한 상황에서 생긴 것일 테다. 조금 더 괜찮은 상 황이라면, 현아처럼 잠시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가능할 것이지만, 혜민은 그런 요구를 생에게 바라는 편은 아니었다. 어딘가 불편했는 지 요란하게 울어대는 딸을 달랜 아빠가 기저귀를 갈기 위해 객실을 나갔다. 이미 많이 해본 일인지 능숙한 솜씨였다.

혜민이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낙원은 청첩장을 받 았던 날 혜민이 집에 도착했을 때 지었던 표정과 같은 표정이었다. 다만 그때와는 다른 혜민의 표정에 대해 낙원은 이렇게 물을 뿐이 었다. 어디 아파? 아니라고 대충 얼버무린 혜민은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갔다. 능숙 한 아빠가 다시 한번 딸을 달래며 객실을 나섰다. 오늘만큼은, 어쩌 면 오늘부터는, 문밖의 다른 존재가 혜민은 불편할 것만 같았다. 오 른손에 샤워기를 쥐고 수도꼭지를 돌려가며 혜민은 다시 한번 생각 했다. 우리 관계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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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날

월요일이었다. 해가 서서히 떠오를 무렵, 혜민을 깨운 것은 낙원의 전화가 아니라 카카오톡의 알람이었다. 알람을 켜놓는 대화방은 정 해져 있었다. 낙원이 아니었으니, 같은 부서 사람들이 있는 단톡방 이었을 것이고, 아침 7시에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줄리아: 클로이 님, 출근하면 바로 4층으로 올라오세요. 전할 내용 있음.

다른 사람과 관련 없는 내용이면 단체방에다 올리지 말았으면, 하 고 혜민은 바랐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항상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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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지기 마련이라는 것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혜민은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리곤 널브러 진 화장품들을 잠시 빤히 쳐다봤다. 토너, 베이스, 어두운 계열의 파 운데이션, 밝은 톤의 파운데이션. 누렇게 뜬 피부톤을 가리고, 피곤 이 농져 익은 트러블은 컨실러로 가리고, 눈썹과 대칭, 짙음과 옅음. 뷰러와 아이라인. 매일 같이 있는 일이지만, 40분에 걸쳐 사회에서 부과하는 여성상을 찍어 바르는 이 과정이 새삼스레 의식되는 월요 일 아침이었다. 그러나 맨 얼굴로 갔다가는 들려오는 것들, ‘혜민 씨 어디 아파?’, ‘혜민 씨 어디 갔어?’ ‘내가 알던 혜민 씨가 아닌데?’. 웃 어넘길 힘도 없었다. 얼굴이든 감정이든 가리는 것들은 이제 그만 하고 싶었지만, 혜민은 거울 속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화장 솜을 들었다.

출근길은 순탄치 않았다.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가겠노라고 말해 둔 터라 혜민은 만원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었다. 둘러싸고 있는 사 람들의 들숨과 날숨이 피부로 느껴졌다. 소화 과정에서 음식이 장기 에 영양분을 뺏기듯 지하철의 꿀렁거림은 어김없이 혜민의 기력을 빨아들였다. 어쩌면 출근길 지하철의 동력은 사람들의 에너지일지 도 모르겠다. 이런 건 낙원이가 할 법한 말인데, 혜민은 되뇌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역과 회사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공원을 가로질 러 갔다. 철근을 아치형으로 두르고선 식물로 덮어 만든 초록 터널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네 번째 날


에 팻말들이 걸려 있었다. 넌 웃을 때 예뻐.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상단엔 ‘직장인 힐링 프로젝트. 서울시청’ 이라 적혀있었다. 표정 없 는 공무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위로 멘트를 찍어내는 상상을 하 니 왠지 모를 구토감에 혜민은 고개를 숙였다.

*

4층은 혜민의 사무실인 3층과 비상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재작 년 광고대행사가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2년째 텅텅 비어있었는데, 줄 리아는 이곳을 부하 직원을 혼낼 때 애용했다. 도배가 벗겨져 헐벗 고 있는 콘크리트에다 끊긴 머리카락 뭉치처럼 뒹굴고 있는 전선까 지 모든 것이 줄리아의 잔소리를 위해 만들어진 세트장 같았다. 그 렇기 때문에 화장실 옆 비상계단 문이 열릴 때면 회사 사람들은 으 레 눈길을 내리깔고선 줄리아에게 불려가는 사람의 민망함을 배려 해주었다. 4층에 다녀와 눈이 퀭해진 동료와 씩씩거리는 줄리아 모 두를 달래는 데 도가 튼 혜민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오늘은 자신을 달래야 할 터였다.

혜민은 자리에 가방을 놓고선 4층으로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출 근 시간까진 아직 15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팀원들 자리의 컴퓨터 가 모두 켜져 있다는 건 줄리아의 호출에 혜민이 가장 늦은 것을 의 미하는 것이었고, 보통 그녀의 화는 가장 늦은 사람에게 퍼부어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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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서니 줄리아와 과장, 그리고 도대체 무슨 자 문을 해 주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자칭 교수이자 자문위원 김 교수 가 화이트보드 앞에 앉아있었다.

“여기 앉아봐요. 혜민 씨.” 존댓말에 이은 본명. 줄리아의 과도한 예의가 혜민의 신경을 긁었 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지만 좋지 않은 소식이거나 불쾌한 부탁 둘 중 하나인 것은 확실했다. “어제 연락이 왔는데 다음 달에 중국 창업자들 연수가 생길 것 같 아. 촉박한 거 아는데 우리가 오래 해왔고 매뉴얼도 있으니까 손이 많이 가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그 혜민 씨가 냈던 다음 주 휴가 말이야. 좀 조정해야 할 것 같아.”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선물이 고마운 사람과 불편한 사 람. 혜민은 선물이 불편한 사람이었다. 혜민에게 다른 사람이 베푸 는 호의는 그저 나중에 갚아야 할 부채 덩어리로 느껴졌다. 받은 만 큼 돌려줘야 하는 것만큼 당연한 진리는 없었다. 그래서 혜민은 고 마움과 미안함을 느낄 때도 그 감정이 마음에서 푹 익어 깊어지기 전에 빨리 표현해서 휘발시키곤 했다. 그런 혜민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항상 묘한 불편함을 줬다. 낳아 주고 길러줬기 때문에,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내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혜민은 절대 엄마보다 더 사랑을 줄 수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네 번째 날


없었다. 찝찝함이 귓가에 앵앵댈 때면 혜민은 백화점으로 가 비싼 선물을 사고는 가격만큼의 죄책감을 푹 퍼내 엄마에게 보냈다. 그리 고 이번에 혜민이 선택한 선물은 바닷가로의 여행이었고, 일 년에 며 칠 없는 휴가를 엄마에게 쓴다는 생각에 혜민은 만족하고 있었다. “조정이라면 어떤 걸 의미하는 건지….” “11월 이후로 몰아보던가 아니면 다음 주쯤에 미리 몰아서 쓰던 가. 날짜 결정해서 오늘 퇴근 전에 알려줘요.”

부탁은 어렵고 민망하다. 적어도 혜민에게는 그랬다. 그러나 줄리 아에겐 부탁은 너무도 쉬워 보였다. 마치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 인지 해석할 수 없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말을 툭 던지면 그만이 었다. 줄리아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화이트보드에 뭔가 를 휘갈기기 시작했고, 과장과 교수는 칠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누구도 머쓱한 표정을 띄워 혜민에게 미안함 을 표시하는 예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매끄러운 무시에 하마 터면 혜민도 화이트보드에 괴발개발 적힌 글씨를 알아보는 데만 집 중할 뻔했다. “저 부장님 죄송한데요…. 이번에 휴가 날짜 못 바꿀 것 같아요.” 완벽한 조화에 혜민의 불협화음이 던져진 순간, 침묵과 함께 여섯 개의 눈동자가 혜민에게 꽂혔다.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 려 노력하는 듯 혜민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 정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무슨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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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랑 같이 여행 가기로 했거든요. 숙소 예약도 다 해놨고….” “그러면 연수는 어떻게 하고? 당장 닥친 것만 해도 강연자 섭외부 터 버스 대절, 세미나장 예약. 스케줄 엄청 빡빡해요. 그렇게 쏙 빠 져버리면 일 진행이 힘들지.” 연수 기획팀은 4명이었다. 그러나 줄리아는 워드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혜민에게 매번 회의록을 대리 작성시킬 정도였고, 김 교수는 상근직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과장 은 주로 재무를 담당했고, 그마저도 외근이 잦아 사실상 모든 실무 는 혜민이 감당해야 했다.

“정말 죄송해요. 이번엔 힘들 것 같습니다.” “클로이. 세상에 나쁜 딸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 그래도 돈 받 고 일하는데 개인 사정 다 고려해줄 순 없잖아요. 미안하게 됐지만, 프로면 프로답게 해야죠. 혜민 씨 없으면 연수 준비는 어떻게 하라 는 거야.” 혜민은 엄지 손 마디를 검지 손톱으로 꾹 눌렀다. 줄리아의 갈라지 는 목소리, 과장의 볼펜 딸깍거리는 소리, 교수의 헛기침 소리가 묘 하게 삐걱거리며 혜민의 신경을 긁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죄송한데, 실무가 저한테만 너무 집중되어 있는 것 자체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강연 연사 섭외부터 현 장 인솔부터 다 저 혼자서 담당하다 보니 제가 자리를 비우면 진행 이 잘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말인데… 업무 분담에 있 어서 이런 부분 조금만 고려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네 번째 날


불편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과장이 손을 책상 위에 올리며 웃어 보 였다. 사회생활 경력만큼 깊은 팔자주름이 어색한 웃음소리와 함께 도드라졌다. “에이 클로이. 말이 너무 그렇다. 무슨 일 혼자 다 하는 것처럼. 말 에 뼈 심는 버릇 사회생활에 안 좋아요.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말 고. 겪어보니까 그렇더라고.” “이번 휴가도 부장님 과장님 다 고르시고 남는 날짜에 고른 건 데… 너무 희생을 강요하시는 것 같아요. 솔직히 너무하시는 것 같 아요.” “김혜민 씨. 자꾸 그런 식으로 사사건건 따지고 들 겁니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요. 저번 연수 피드백 자리에서도 센터장님 다 계시 는데 밥 안 준다고 투덜대질 않나. 망신도 그런 망신이. 회사가 집 안 방이에요? 그리고 나이가 몇 살인데 엄마 타령이야 엄마 타령은.” 잠자코 듣고 있던 김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아 클로이 둘 다 그만 해요. 자자, 젊은 친구가 억울한 게 많 았나 보네. 부장님도 너무 몰아붙이지 말고. 응? 요즘 애들이 다 우 리 때 같다고 생각하면 안 돼. 그러면 꼰대야 꼰대. 그리고 혜민 씨 도 그런 식으로 어른한테 말하는 거 아냐. 그렇게 몰아붙이면 쓰나. 이사님이랑 부딪혀봤자 다 혜민 씨 손해야. 둘이 날 세우면 어떻게 되겠어. 결국 혜민 씨가 나가야 할 거 아냐. 그치? 얼른 사과드려.” 혜민은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을 느꼈다. 군데군데 뜯어진 사무실의 회색 벽이 혜민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귓가엔 역겨운 웃음과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섞여 우웅우웅 울려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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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무언가 뻑뻑한 것이 목구멍서부터 미어져 나와 금방이라도 쏟아 낼 것만 같더니 이내 울컥 쏟아졌다.

“그럼….”

*

혜민은 계단을 내려와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제가 나갈게요, 원래 혜민이 뒤이어 하려던 말은 그것이었다. 오래된 사무실 바닥은 마감 재가 내려앉아 누군가 걸어갈 때면 주위가 푹 꺼져 직원들은 엉덩이 로도 혜민이 지나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혜민은 양 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쉼 없이 움직였다. 조용히 컴퓨터를 끄고, 달력 과 가습기, 미니 다육식물까지 주섬주섬 챙겼다. 하나둘 혜민을 쳐 다보기 시작했고, 멍한 표정의 과장을 비롯한 사무실의 온 직원이 혜민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식탁 위에 올려진 코끼리를 보는 것처럼 모두가 생경한 광경을 이해하려 애쓰는 듯했다. 혜민은 계속 걸었다.

회전문을 밀고 나오니 거리는 금세 한산해져 있었다. 햇살은 밝고 따뜻했다. 이상하리만치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만큼 시 원하지도, 걱정이 되지도 않았다. 몇 분 전의 일이 마치 어릴 적 본 영화처럼 멀고 아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혜민은 고개를 들어 하늘 을 한번 쳐다보고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은 몇 번 울리 지도 않았다.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네 번째 날


“응, 엄마, 우리 여행 말이야….” “그래. 너무 바쁘면 다음에 가도 돼.” 마치 예상된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혜 민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혜민은 따가운 목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지금 당장 갈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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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날

어떤 터널이 있어. 아주 길고 어두운, 어디가 끝인지 모를 터널이. 사실은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를 그 터널을,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왔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터널은 끝나지 않 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붙잡은 손을 통해 우리는 그 긴 시간 동 안 연결되어 있었지.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아주 특별 한 사이라고 생각해. 울퉁불퉁하고 거친 바닥과 알 수 없는 낙서와 갈라진 금으로 가득한 벽, 어디선가 들려오는 불안한 소리를 어찌 되었든 견디며, 때로는 힘이 되어주며 지켜왔으니까. 하지만 그와 비 견할 만큼 오랜 기간 동안, 나는 우리의 악수가 아주 간신히 유지되 어온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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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어둠에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해 왔어. 이리저리 둘러보고, 바닥을 쿵쿵 소리 내 밟아보며 내가 서 있 는 곳이 얼마나 안전한지 확인하고, 때로는 냅다 뛰기도 했어. 어찌 되었건 이곳은 내게 주어졌고, 주저앉아 울기만 할 수는 없었으니 까. 그래서 이제는 언제 내 머리 위에 돌이 떨어질지, 나를 괴롭히는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아. 물론 어둠은 아랑곳하지 않고 위력을 떨치면서, 이제는 거의 부숴버릴 것 같은 기세로 나를 옥죄어 오고 있어.

그렇지만 너는,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조금씩 새어 나올 때 내가 좋아하기 시작했던 너는, 온종일 그 빛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것 같 아. 어둠 속에서, 빛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 빛을 상상하기 위해 애를 쓰다가, 잘되지 않을 바에야 너는 포기해 버렸어. 어차피 어둠 속이라면, 적응하든 말든 어둠 속일 뿐이니, 애 써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일 테지.

왜 아무런 말도 없이 널 떠나버렸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어. 다들 앞으로 가고 있는데, 그래서 나도 앞으로 가고 있는데, 그것만으로 도 충분히 숨이 벅찬 일인데도, 너는 멈춰 있었고 멀어지는 나를 시 큰둥하게 쳐다보기만 했지. 나는 우리가 함께 뛰기를 원했어. 다들 그러는 것처럼 말이야.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일하느라 지친 서로 를 달래주고, 주말엔 적당한 취미생활을 누리고, 사랑하고, 여건이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다섯 번째 날


맞아 결혼하고, 둘 다 원한다면 아이도 갖는 것. 너무 평범해서 영화 나 드라마에서는 배경으로만 잔잔하게 흐를 뿐이지만, 그만큼 견고 해서 더 아름다운 것. 평범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어려운 일이 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꽤 괜찮은 결말로, 후회하지 않을 이야 기로 어떻게든 완성될 수 있다고 나는 믿어. 그런데 지난 몇 년간 너 를 볼 때면, 나는 포기조차 못 할 것 같았어. 시작이 없다면, 포기할 수도 없으니 말이야. 시간에 맞춰 기차는 자꾸 지나가는데 아무것 도 못 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기분이 뭔지 알아? 기차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숨이 막힌다며 너는 투덜댔지만, 어찌 되었든 저 많은 사람이 향하는 어딘가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 꼭 많이들 그렇게 한다는 이유뿐만은 아니야. 내가 그곳으로 가고 싶은 것이기도 해. 다들 따라가는 길을 벗어나야만 특별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 이야. 그래, 관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네가 가만 히 있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들을 나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어. 그래도 마음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어. 네가 잘못 살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는 거야.

나는 회사를 나왔어. 네가 내게 연락을 할 수 없던 날, 그날은 내 가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던 날이야. 네가 매일 나를 데려다줄 때마다 조금씩 털어놓곤 했던 조각들이, 하지만 최근엔 말조차 꺼 내지 못했던 조각들이 이미 높다랗게 응어리져 쌓여있었던 와중이 었어. 언급하기도 싫은 뭔가가 나를 톡 건드렸고, 평소에는 눈 한 번 꾹 감고 참을 수 있었던 일이었겠지만 그날은 와르르 무너져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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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장 엄마에게 전화했어. 이리로 좀 와줄 수 있냐고. 계획했던 여행을 미루라 명령하는 회사를 나왔으니, 아무 계획 없이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나는 이곳에서 너에게 편지를 써. 너무 많이 걱정하 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지난 결혼식 날, 현아를 만났어. 그곳에서 나는 우리를 생각했어.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고, 이대로 머무르는 건 더욱더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 수많은 증인 앞에서 우리가 특별한 사이라 는 것을 확인받는 것을 꿈꾸었고 현아의 손끝이 가리키던 곳이 자 꾸만 떠올랐어. 누군갈 만나고 내가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비 교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 날아 가 버리고 말았어. 어쩌면 비교할 필요가 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 우 리에게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그 전날 점심시간에는 희정이를 만났지. 그곳에선 나를 생각했어. 과거에 상상했던 현재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 간의 괴리에 대해서. 희정이의 삶이 완벽하다거나, 약간은 이상화되어있을 외국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건 아니야. 그저 체념과 인내로 일궈온 나의 삶에 조 그마한 변수라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더는 나를 포기하 고 싶지 않았어. 재료는 과거에서 오는 법이니까, 존경했던 교수님을 다시 찾아갈까 해. 내가 무엇을 더 공부할 수 있고 어떤 일을 꿈꿀 수 있는지 알아보기라도 하려고.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다섯 번째 날


너를 많이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긴 세월을 함께할 수 는 없었을 거야. 다만 나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을 뿐 이야. 아주 많은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노력으로나마 바꾸어나가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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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제법 쌀쌀한 수요일 아침, 혜민은 낙원의 뒤에서 코를 파고 있었다. 왼손 새끼손가락이 오른쪽 콧구멍에 들어가 작은 원을 그렸다. 반 대편 손바닥은 관자놀이를 괴었고, 두 다리는 잠옷 바람으로 쭉 뻗 었다. 수요일 아침이었다. 버릇처럼 일어난 낙원이 이를 닦고 있는데 거울 뒤로 펼쳐지는 광경이 생경했다. 이 시간이면 늘 전화기 너머에 서 바삐 움직이던 사람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초 점을 맞추지 않은 채, 들을 것은 화장실에서 낙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창밖의 소음뿐이라는 듯이. 마치 혜민을 데려다주는 것으로 일과를 마친 낙원이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청했던 모습처럼. 낙원은 양칫물을 뱉고 입을 헹궜다. 그녀는 거울 뒤에 있고 낙원은 졸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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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것을 참아야 했다. 매일 아침 전화를 받는 그녀도 이런 느 낌이었을까.

편지를 받은 뒤, 낙원은 무언가 근본적인 것을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 낙원이 처음으로 혜민을 신경 쓰게 되 었던 붉은 빛과 매끄럽고 흰 인화지에 대해서. 의미 없음이 지구 대 기를 구성하는 꽤 비중 있는 요소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 던 시절 어떤 구원의 신호처럼 다가온 혜민의 당찬 모습에 대해서.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게으름이라는 가치가 혜민의 마음을 자신으 로부터 분리시킬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인가에 대해서. 사실 낙원도 게으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입고 싶지 않은 옷들을 모두 제 외하고 남은 어쩔 수 없이 걸치게 된 허름한 티셔츠 같은 것이어서, 마냥 오래 입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혜민은 지쳐있 었고,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지쳐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어떤 임 계점에 도달한 것만 같다고 낙원은 생각했다. 입장을 바꾸어본다면 혜민이 자신을 만날 이유가 오로지 8년이라는 긴 세월이 주는 무게 밖에 없다고. 혜민이 편지에 적어놓은 어떤 평범함을 함께 이루어낼 재간이 현재 자신에게는 없다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낙원은 움직여 야 했다.

*

“제발 손가락으로 튕기지만 말아줘.”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가을


원래는 곱게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낙원의 애원을 듣고 혜민이 계획 에 없던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낙원은 생각했다. 몇 시간 뒤에 낙원 에게 닥칠 운명보다 코딱지의 그것이 더 중요한 것 마냥 혜민은 손 가락 위의 분비물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면도하는 낙원의 얼 굴에 처진 입꼬리와 주름진 미간이 떠올랐다. 많이 낮춰 쓰긴 했지 만, 그래도 붙을 줄 몰랐던 회사에서 면접을 봐야 하는 지금, 낙원 은 얼떨떨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몇 학기나 질질 끌었던 졸업 이후 회사에서 좋아할 만한 것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 는데. 과연 무엇을 물어볼까? 낙원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혜 민처럼 착실히 살아온 사람도 종종 나가떨어지는 회사에 내가 들어 갈 수나 있을까. 낙원은 초점을 뒤로 옮겨보았다. 혜민은 여전히 부 동자세다. 심드렁한 그녀는 낙원을 완전히 포기한 것만 같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쩌면 코딱지는 낙원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친구를 언제, 어떻게 처리할까.

“해줄 만한 조언 같은 건 없어? 이를테면 옷은 어떻게 입고 가야 하는지, 면접장 들어가서 내 자랑은 어느 선까지 하는 게 좋은지 같 은 것들 말이야. 떨려 죽겠어. 혜민아.” 그녀가 눈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낙원은 그것이 무엇인 지 알지 못했다. “이빨이나 열심히 닦아.” ‘이빨’이 아니라 ‘이’라고 따지는 바람에 싸운 적도 있었다. “이는 무슨 상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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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누렇잖아. 안 보여?” 낙원의 치아가 이빨이 된 것도, 그게 누렇다는 유치한 지적도 마음 에 들지 않았지만, 혜민의 손가락 위의 분비물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직 운명이 결정되지 않은 낙원의 분신. 어쩌면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자신의 위치를 정교하게 파악하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누런 게 어때서. 이가 누런 사람은 일 못 한대?” 낙원의 대답에 무엇인가 떠오른 듯 그녀는 휴지를 한 장 뽑아 마 치 담배꽁초를 지지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새끼손가락을 비볐다. “글쎄, 면접관들이란 그런 사람들이야. 이가 누런 사람은 뭔가… 자기 관리가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게다가 같이 일을 하는데 그 사람이 실실 웃기라도 해봐. 누런 이를 보는 내 기분이 어떻겠어? 동료의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는 요인을 가진 당신, 불합격이야.” 그럴 리는 없다고 낙원은 생각했다. 위악은 혜민의 습관이었으니 까. 하지만 무엇을 위한 위악일까.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는 조건을 지적하는 건 지금 낙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낙원이 모 르는 무언가가 혜민의 마음을 괴롭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낙원은 생각했다. 낙원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업무가 안 될 정도로 심하게 누런 거야?” 혜민은 몸을 일으키더니 두 무릎을 몸쪽으로 끌어당기고 두 팔로 부드럽게 감쌌다. 협탁 위의 안경을 눈가에 걸치며 혜민이 말했다. “미안해. 그 정도는 아니야. 이가 누렇다고 떨어지는 게 말이 안 되 기도 하고. 아니, 그래야 하는 건 맞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 4년 전 에 말이야, 나는 한창 취업 준비하고 넌 군대에 있을 때, 회사 다녔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가을


었던 교수님한테 진로 상담 받은 적이 있어. 나는 내 학점이 조금 부 끄럽기도 했고, 대외 활동 같은 것도 거의 안 하고 고작 자격증 몇 개 있을 뿐이어서 무슨 잔소리를 들을까 엄청나게 걱정했다? 수업 자주 들었던 교수님인데 평소에 준비를 엄청 열심히 하시는 분이어 서 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거든. 근데 내가 무슨 말을 들은 줄 알 아?” 혜민은 옆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베개 위로 풀썩 쓰러졌다. “여자라서, 여자라서, 여자라서. 키가 좀 작다, 외모는 친근하다, 머 리 염색은 언제 풀 거냐, 치아미백을 할 생각은 없냐. 사원 뽑는 사 람들이 다 꼰대라서 어쩔 수 없대. 그 말이 더 짜증 났지만 뭐 어쩌 겠어. 당장 그 교수님한테도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웃고 나왔는걸.” 낙원은 당연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교수님 정말 못됐다. 자기는 꼰대 아닌 줄 아는가 봐.”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문 열고 나오면서 마음이 좀 복잡 해지더라. 듣는 사람 생각 안 하고 내뱉긴 했지만, 여자인 교수님도 경험에서 깨달은 거라고 생각하니깐. 미안해, 너랑은 상관없는 이야 기일 수도 있겠다. 중요한 일 앞둔 건 너인데 난 또 내 하소연만 하 고 있네.”

면도를 마치고 로션으로 덕지덕지한 낙원의 얼굴 뒤에 혜민이 천 장을 보고 누워있었다. 낙원은 혜민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만약에 내가 면접 보는데 누가 내 외모를 지적하거나 일이랑 상관 없는 질문하고 그러잖아? 그럼 내가 시원하게 욕 박아주고 올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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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대사는 네가 짜. 연기는 내가 할게.” 무리하게 남을 즐겁게 하려다 자신의 무지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을 낙원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혜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 다. “그게 너랑 나랑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야. 나는 타협이 일상이거 든. 너는 직장이 오락가락하는 이 상황보다 내 기분이 더 중요하겠 지만, 나는 그러지 못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거라든 가, 일이 이상하게 나에게만 몰리는 걸 거절한다든가. 물론 끝까지 참지는 못했으니까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거겠지. 여하간, 내가 ‘아 니오’라고 말을 하면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게 말한 나는 행 복할까? 나도 불행해질 것만 같았어. 문제는 말이야. 이상한 일은 언 제나 어디에나 널려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상하고 아니고는 중요 한 게 아니야. 그런 건 늘 있다니까? 하나하나 다 반응하고 살면 적 응할 수 있는 곳이 남아나질 않을 거야. 이제 내 질문은 부당함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선을 결정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어. 도저히 허 용할 수 없는 부당함의 선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 말이야.” 숙연해진 낙원은 화장실에서 나와 묵묵히 옷을 갈아입었다. 장례 식 외에는 입어본 적 없었던 양복은 더 다릴 필요 없이 매끈하게 걸 려 있었다. 핀잔을 주기는 했어도, 낙원이 잘 되길 바라기는 혜민도 한마음이었다. “너무 떨지도 말고 잘하지 못했다고 상처받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원래부터 친절함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곳이니까.” “마치 지금처럼?”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가을


“그래. 그러니까 진지하게 좀 들어. 지금 내가 너 모의 면접 받고 있는 거라고.” 얕은 웃음이 터져 나온 혜민이 이젠 더 이상 잘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비볐다. 낙원이 셔츠 뒷부분을 바지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친절한 것까지 기대하진 않아. 대체 뭐 하고 살았냐고 핀잔주지 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어 벨트를 매고 자켓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민이 부은 얼굴을 감싸 쥐고 다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졸업하고 나서 알바하면서 보낸 적 있었잖아. 4년 동안 한 번 도 쉬지 않고 달렸으니까 반년 정도는 돈 조금씩 벌면서 여행도 다 니고 앞으로 갈 길에 대해 생각도 좀 해보고… 여하간 면접관이 졸 업하고 뭐하셨어요? 하길래 구구절절 설명했는데, 딱 한 마디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더라고.” “뭐래?” “결국 놀았단 말이네요.” 넥타이를 어떻게 맬지 몰라 끙끙대던 낙원이 동작을 멈췄다. “네가 결국 논 거라고? 나는 어떡하지?” 하다 못한 혜민이 일어나 낙원의 타이를 다듬어 주었다. “몰라 나도.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건 없고, 그냥 능글맞은 사람 인 것만 보여주고 와. 그거 꽤 중요해, 구렁이 같은 성격.”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내 신고 문 앞에 선 낙원은 긴 호흡을 내 쉬 고 잠시 혜민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혜민은 늦게까지 자기 위해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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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었던 커튼을 젖히려 창가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눈을 마주칠 때까 지 낙원이 버티고 서 있자, 늦을 수도 있으니 어서 나가라는 듯 앞 뒤로 손등을 휘저었다. 낙원은 두려움이 다소 누그러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고 문을 닫았다. 어두웠던 실내에 어느 쪽에서인지 모를 뿌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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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이었다. 도로는 차들이 눈을 녹이며 아삭거 렸고, 코트를 여민 사람들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인도 위를 걸어갔 다. 버스 정류장 앞에는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휘트니스 센터에 서 고용한 아주머니가 두꺼운 장갑을 끼고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 를 누비며 왼 팔뚝에는 홍보 전단지를 한 움큼, 다른 손에는 한 장 씩 움켜쥐고서, 마치 빨리 받지 않고 무엇하냐며 독촉이라도 하는 듯 오른 팔뚝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세상은 늘 똑같이, 그 어떤 혁명도 없이 거대한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다. 전단지를 받아들고 정 류장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며 낙원은 생각했다. 오래된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던 것이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5분이 남아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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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난밤 한껏 긴장한 탓에 잠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낙원이었다. 버스를 놓치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나자, 졸음이 몰려왔다. 첫 출근 이었다. 세상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자. 낙원은 그렇게 다짐했다.

혜민은 지난 5년간 미뤄놓았던 아침잠을 한꺼번에 해소하듯이 오 후가 되어서야 늦게 도서관으로 향했기 때문에, 낙원은 졸리는 목소 리를 달래러 전화할 필요가 없었다. 혜민을 데리러 갈 필요도, 낡은 차로 혼잡한 도로를 뚫을 필요도, 카페의 고즈넉한 우월감도, 귀가 뒤의 가난하고 달콤한 낮잠도 물론 존재하지 않았다.

버스가 느릿느릿 정류장에 주차하고, 낙원은 유일하게 남아있던 버스 기사의 바로 뒷자리에 힘겹게 올라가 자리를 잡고 창문에 몸 을 기대었다. 라디오에서는 스포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아나 운서는 막강한 전력으로도 우승하지 못한 야구팀의 감독을 경질하 지 않은 경영진을 비난하는 팬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낙원은 그 비 난의 결과가 궁금하다는 듯, 스피커를 향해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자 세를 가다듬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렸던 11월 초, 큰 결심 후에 다소 불안해진 혜민을 달래기 위해 낙원은 혜민의 손을 잡고 야구장으로 향했다. 자신이 보는 경기는 어김없이 패배했기 때문에, 승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곳에서 펼쳐지는 짜릿한 드라마와 흥겨운 노래들 은 혜민을 매료시킬 것만 같았다. 왜 텔레비전으로 봐도 되는 걸 꼭

대리와 대리가 아닌 것 - 겨울


굳이 가서 보아야 하는지, 또 규칙들은 무엇이 그렇게도 복잡한지 혜민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워했지만, 낙원은 우선 자리에 앉아 탁 트인 운동장을 본다면, 응원봉을 손에 쥐고 응원단의 근사한 군무 를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날 하루는 웃으면서 마무리되리라고 확 신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저녁이 무르익자, 혜민은 종전 의 무심한 표정을 접고 안타 하나와 삼진 하나에 감정의 롤러코스 터를 타게 되었다. 낙원이 응원하던 팀은 낙원의 징크스를 깨고 결 국 승리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 해서 모두 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혜민 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야구장에, 왜 하필 그곳에 가야 하는지 알 지 못했다. 낙원이 강제한 그곳에서, 물론 혜민은 한동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혜민은 얼마 안 있어 눈을 뜨고 귀를 열었다.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느꼈다. 낙원은 그동안 혜민이 어렵다고 해서 질문을 외면한다고만 생각했지, 자신이 중요하지 않 은 질문을 내내 던지며 사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야구장에 대한 낙원의 확신과 비슷한 태도로 혜민은 삶을 살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사람들을 음식 알갱이로 애써 격하시 키며, 낙원은 펼쳐질 미래를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반쪽은 무엇이었을까? 낙원이 읊었던 시에 대해 어떤 다른 대답이 가능했을까? 어쩌면 그것은 혜민이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지키다가 잃어버리는 것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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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하는 사람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할지도 모르는 모든 세 상이며, 자기 자신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나아가야 한다고, 혜민은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혜 민도 잊지 않아야 하는 말이라고 낙원은 생각했다.

거대한 날숨의 최전선에 서서, 초록 버스를 뒤로한 채 지하철역을 향해 낙원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디선가 강렬한 햇빛이 반사되 어 낙원의 눈을 찔렀다. 낙원은 걸음을 멈추고 그 진원지를 찾으려 했다. 그곳은 낙원이 혜민을 데려다준 다음 종종 들리곤 했던 카페 였다. 계절이 지나 추운 겨울, 김이 서린 창문에서 세상을 삼킬 듯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뿌연 창 뒤에서 누군가의 형체 가 보였다. 나른하게 흔들리는 흐릿한 그림자였다. 가만히 선 상태로 한참 동안 그곳을 쳐다보았다. 낙원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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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K대리들의 이야기

지사라 윤세란 윤선해 송은별 백충훈 배민정 박주희 고은지


지사라

대리들의 이야기


달팽이: 곧 캐나다로 가신다고요.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지사라: 캐나다 가서 설렌다기보다도 지금은 백수 상태거든요. 그래서 늦잠을 자는 것, 내 시간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좋아요.

달팽이: 어떤 이유로 캐나다에 가시는 건가요? 지사라: 어학연수고요. 원래는 영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 는데, 예전에 1년 동안 싱가포르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영어 실력이 늘었다는 생각이 안 든 거에요. 제 주변 친구들은 공부하기 위한 목적 으로 외국을 가서 영어도 늘어 오고 부러웠거든요. 그런데 저는 ‘왜 여기서 공 부를 온전히 못 하고 일을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국에 돌아 와서 막연히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계기가 있었어요. 제가 서울역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그때가 한창 박근혜 정권 시절 집 회가 많을 때라, 외국인이 오더니 “너 영어 할 수 있니?” 하는데 “조금 할 수 있 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외국인이 집회를 보고 “이게 뭐냐?”라고 물었는데, 막상 답을 잘 못 하는 거예요. 그때 ‘내 생각을 정리해서 외국인에게 말을 해보 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게 첫 번째로 영어 공부를 결심한 이유에요.

달팽이: 싱가포르에 가신 건 훨씬 전 일인가요? 지사라: 훨씬 전에 싱가포르에서 1년 동안 일을 했고, 다녀와서 취업 준비를 해서 취업을 하고 3년 동안 일을 했고, 지금은 캐나다에 가기 위해서 퇴사한 상태예요. 달팽이: 외국에서 1년 동안 생활한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결심 같거든요. 당시 싱가포르 행을 결심했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지사라: 그때 학교에서 인턴십 해외취직 제의가 들어왔어요. 저 말고도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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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학생들도 있었고, 저한테도 마침 기회가 온 거니까 이때 아니면 언제 해 외에서 일해보겠냐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너무 재밌게 잘 지내긴 했지만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었어요. 영어권 국가다 보니까 영어를 잘 배울 수 있겠다 고 생각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병행이 어려워서 언어는 늘지 못했던 상황이었 어요. 해외에서 일했을 뿐이지 거기서 학업적인 능력을 키우지는 못했던 것 같 아요.

달팽이: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오셨나요? 지사라: 저는 전공이 관광 쪽이어서 자연스레 해외 취업으로 연결이 되었고, 최근까지는 여행사에서 일했어요.

달팽이: 원래부터 관광 쪽 진로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요? 지사라: 대학교 입학할 때 어느 과를 갈까 생각하다가 “나는 관광이 좋아”라고 생각을 해서 갔고, 그 후에도 이왕이면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고 싶었던 것 같 아요. 사실 고등학교 다닐 땐 딱히 뭔가를 하고 싶다는 강한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요, 관광이 제가 선호하는 전공 리스트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게 됐어요. 일단 여행이라는 게 너무 좋았고, 너무 멋있는 삶 같더라고요. 여 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유롭고, 밝은 이미지다 보니까 크게 생각 안 하고 그쪽 진로를 선택했어요.

달팽이: 대학에서 학문으로 접한 관광은 어떤 것이었나요? 지사라: 관광을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겠고요. 대학에서는 관광의 역 사, 일할 때 사용하는 용어, 비즈니스 영어 같은 것들을 배워요. 실무적인 것도 물론 배우긴 하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일을 하면서 스스로 배웠던 게

대리들의 이야기


더 컸어요.

달팽이: 졸업 이후 전공을 살려 취업하겠다 마음먹었다고 하셨는데, 졸업 이후 취업까지의 과정이 궁금합니다. 지사라: 제가 학교에 다니고 있는 와중에 한 학기를 남겨둔 상태로 싱가포르를 갔었거든요. 학교를 거의 반년 못 가고 해외 취업으로 싱가포르를 갔다가 한국 으로 돌아오니 졸업자 상태가 됐어요. 한국 귀국 후에 알바를 하면서 “그래도 나는 1년 동안 해외에서 일했으니 이렇게 잠시 쉬어도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 던 거 같아요. 그 시간을 나름 의미 있게 보냈어요. 반년 정도 그렇게 시간을 보 내다 취업 준비를 시작했는데, 다행인 건 취업 준비를 오래 안 했어요. 언제 한 번 취업준비 중에 면접관이 면접자들에게 “다들 졸업을 하고 뭐 하셨어요?” 라고 물어봤는데, 저를 포함한 몇몇 면접자들이 “졸업 후에 알바를 하며 시간 을 내서 여행을 갔었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면접관은 “그럼 결국 놀았던 거네 요?”라고 답이 돌아왔었어요. 그 당시 저는 많이 어려서 그 답이 충격적이었어 요. 인간적으로 이런 답변이 나와도 되는 건가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 면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정말 바로 일할 인재를 원 했던 거지, 이렇게 시간을 두고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을 원했던 건 아니잖아 요.

달팽이: 반년 정도 놀고 취직을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은 취직을 앞두고 는 노는 시간을 제대로 못 즐기는 경우도 있잖아요. 불안하고, 할 일을 미룬 것 같고. 그런 감정이 들지는 않았나요? 지사라: 저도 그랬어요. 저도 불안했어요.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거나 어찌 됐 든 소속이 있잖아요. 계속 무언가를 한다는 게 있는데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 고 그냥 알바하고 원할 때 놀러 다니는 삶처럼 느껴져서. 한편으로는 ‘이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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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면 어떻게 이런 시간을 보낼까’라는 생각 때문에 최대한 국내 여행을 많이 다니려고 했는데 막상 다녀오면 ‘빨리 취업을 해야 하는데, 이제 모아둔 돈도 다 떨어지는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다른 친구들은 공부하면서 되 게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원하는데 나는 자격증도 없고⋯ 자괴감이 들었어요.

달팽이: 불안감을 어떻게 해소하셨어요? 지사라: 불안감을 그냥 해소를 잘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냥 불안감을 인정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다른 친구들이 원하는 직업군과 내가 원하는 직업군이 달랐 고, 나는 되게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를 했기 때문에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 는 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달팽이: 첫 직장에서 3년을 다니면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지사라: 여행사를 다녔는데, 제가 여행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여행사를 다녀보니까 거기서 하는 일은 제가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남 들을 여행 보내주는 일이잖아요. ‘왜 내가 여행을 간다고 생각을 하고 여행사 에 들어왔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나름 되게 재밌게 했었던 거 같아요. 취업 준비 초반에는 좀 웃겼던 게, 여행 분야라고 하니까 당연히 해 외여행이라거나 국내 관광 관련된 일을 생각했는데, 이력서를 넣다 보니까 골 프 여행사가 몇 군데 있더라고요. 그쪽 분야는 잘 몰랐기도 해서 한두 개 지원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용산구에 살다 보니까 중구, 종로 쪽에 여행사가 많아서 그쪽에 많이 지원했고 강남은 두세 개밖에 지원 안 했는데 강남에 위치 한 골프 여행사에 덜컥 붙은 거예요. 예상하지 못했던 골프 여행사였어요. 골 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내가 왜 여기 취직을 했지? 그래도 뭐 알아두면 좋 겠지’라는 마음으로 다녔어요. 사실 지금까지 다니면서 골프에 대한 지식을 많 이 쌓기 보다는, 손님이 어디를 가고 싶다고 요청을 하면 그걸 준비해주는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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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 좋았던 거 같아요.

달팽이: <맛있는 녀석들> 아세요? 거기 보면 개그맨들이 일상생활에서 웃고 떠 들잖아요. 그걸 보면서 개그맨들이 방송촬영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웃겨 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사라 님은 대리만족 프로그램 중 간에 “서비스직이 밝은 이미지를 강조하다 보니 그걸 지키는 게 힘들었다”고 하셨어요. 지사라: 보통 저는 ‘사람은 친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되게 강하고, 이전에 알바 시절에도 자연스럽게 손님한테 잘해야 한다는, 친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 긴 했어요. 또 그 입장을 잘 알기 때문에 제가 손님으로 음식점에 가거나 하면 밝게, 나긋나긋하게, 기분 안 나쁘게 종업원들을 대하려고 하는데, 사실 일을 하다 보면 상대방을 배려해주시는 손님도 많지만 아닌 분들도 많거든요. 그렇 다고 거기서 제가 인상을 쓰거나 할 수는 없으니까요. 가끔 제 선에서 해결이 안 되는 컴플레인이 있으면 매니저 불러서 도와드리겠다고 하고 그랬는데, 일 하기 위해서 그렇게 밝은 에너지 소모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당연 한 것 같기도 하고. 서비스직은 어찌 됐든 감정노동인 거잖아요. 그걸로 인해 서 저는 돈을 벌었고, 기분 나쁜 일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 가능해요.

달팽이: 다니던 회사를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사라: 캐나다에 가려고 한 게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일을 해보니까 일이 너무 단순했고, 과연 이게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는 퇴직하고 이직하겠지.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 캐나다 행을 결심하지 않았다 면 언제까지 다녔을지 모르겠어요.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예전보다는 뚜렷하게 정해졌는데, 저는 컨벤션에서 일을 너무 하고 싶어요. 컨벤션은 복합적인 건데 예를 들면 킨텍스 같은 곳에서 박람회 개최 기획을 하는 거예요. 기획 쪽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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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관심이 있었고, 그쪽 일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영어가 되어야겠다는 생 각이 들어서 비즈니스 영어를 배우려고 캐나다 행을 결심했어요.

달팽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사라: 저 자신이요. 제가 사는 인생인데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달팽이: 나중에 사라님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들만 남았을 때, 어떤 사람 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지사라: “참 괜찮았던 애야.” 성격이든 뭐든. 제가 죽고 나서, 제 친구들이나 저 랑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와서 많이 슬퍼해 주다가 그들끼리 남 아서 이야기할 때, 제가 가는 길을 축복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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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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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만약 본인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이 책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겨 진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윤세란: 내가 내 삶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봤을 때 나쁘지 않은 사람 정도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20대 초반에 는 사실 거창한 걸 생각했어요. 큰 성공을 이루고 권력을 쟁취하게 되는 꿈. 사 람인지라 그런 목표도 분명히 있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그런 것들은 부수적인 거고 일시적인 거라 평생 쥐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것들이 영향력을 지니고 파급력을 지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범사회적인 케이스이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그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주 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달팽이: 생각이 변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윤세란: 지금 남편을 만나면서 많이 변했어요. 그전에는 사실 전투적인 성향이 었어요. 항상 일이랑 업무 중심. 집에서도 잠을 서너 시간 자고, 자기계발에 힘 썼고 이게 당연한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연봉은 최저 어느 정도 벌어야 하고, 내년엔 더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회사에서도 사내 정책이 있어서 가끔 원치 않게 끌려들어 가는 케이스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죽으려면 같이 죽자’라는 마인드였어요. 남편이 특별히 가이드를 제시해주지는 않지만, 남편 덕에 제가 많이 바뀌었어요. 저 스스로가 생각이 유해지고 부드러워졌어요. 한 창 바쁘게 살던 시기에, 불현듯 생각이 들었어요. ‘10대 때 윤세란은 모나지 않 았었는데’라고.

달팽이: 10대 때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윤세란: 학교에 다니는 것도 재미가 없었고. 그렇다고 일탈을 꿈꾸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단지 목적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조용히 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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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트러블도 없었고,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도 안 쓰였던 것 같아요. 학교생 활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는데, 누가 뭐라고 해도 당연히 거슬릴 게 없었어요. 사실 둥글둥글하다기보다는 크게 삶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달팽이: 직업이 생기면서 목표가 확실해지고 전투적인 성향이 생겼나요? 윤세란: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런 자극을 못 받았거든요. 회사생활을 하 는 자체가 지금까지 생활과는 많이 달라서 자극이 많이 됐어요. 전혀 다른 세 계였어요. 야생에 방생된 느낌이었어요.

달팽이: 회사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하셨는데,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이었나요. 아니면 생존수단이었나요? 윤세란: 둘 다 아니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나는 내 할 일을 해야지. 회사 생 활을 절대 오래 하지는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남의 것이 되거든요, 제가 봤을 때는. 물론 잘해주고 좋은 회사 많고 인정받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건 많은 케이스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저는 회사에서 전투적으로 일했던 것도, 자기계발도 했던 것도, 잠을 줄였던 것도, 이런 생활 을 해야지 내가 원하는 목표를 조금이라도 빨리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에요.

달팽이: 이루고 싶은 그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윤세란: 목표는 내 것 하기 + 따라오는 돈들, 물질적인 것들. 사실 물질적인 건 마땅한 기준이 없이 두루뭉술하게 ‘난 돈을 많이 벌 거야, 내 집을 가질 거야’ 라고 생각해왔어요. 다시 생각해보면 뚜렷한 목표는 아니었던 것이죠. 무지개 를 좇는 느낌, 약간⋯ 허황된 꿈 아닐까?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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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그런 생각들이 축적되고, 후에 남편분을 만나서 많이 바뀌신 건가요? 윤세란: 그냥 만나면, 내 주변의 환경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조금 더 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았어요. 이루려고 했지만 명확하지 않은 물질적인 꿈들. 다시 돌이켜 봤을 때 ‘이게 정말 필요했던 걸까? 내가 원하는 게 맞나? 이 걸 가지면 내가 만족하고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했는데 답 은 ‘아니다’였어요. 그걸 가졌더라도 전 내려놓지 못했을 거예요. 끊임없이 끝 이 없는 꿈을 좇았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지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달팽이: 현재는 일을 안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퇴사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윤세란: 네 맞아요. 퇴사하기까지 1년 걸렸어요. 결정하고도 나오기까지 3~4 개월 걸렸고. 회사에서 붙잡았던 부분도 있지만, 스스로 고민도 있어서 지연이 됐어요. 퇴사 얘기를 했던 것도 남편이 1년 동안 꾸준히 얘기했던 거거든요.

달팽이: 남편은 왜 퇴사를 권하셨죠? 윤세란: 제가 회사에서 UX 기획, UI 디자인 일을 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제가 일하는 걸 보더니 “재밌게 하는 느낌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하는 느낌이 든다” 라는 거에요. 실제로 제가 이 회사 다니면서 많은 걸 깨달았고 좋은 회사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일과 관련된 면에서는 갈증이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이 많 았거든요.

달팽이: 어떤 문제점이 있었나요? 윤세란: 회사가 스타트업이기도 하고, 국내에서 입지가 있고. 업계 1, 2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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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으니까. 작은 인원수로 그 레벨까지 올라오다 보니까 기획이랑 디자인 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었어요. 계속 갈리고 갈리다 보 니까 일에 대해 집중해서 생각할 수 있는 여력이 도무지 없는 거예요. 개인적 으로도, 회사 적으로도. 리소스가 부족하다 보니 인당 두세 개 프로젝트에 투 입되다 보니 집중해서 생각할 여력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퀄리티는 점점 떨 어지고, 저 자신도 만족스럽지 못한 거였죠. 기획과 디자인은 나왔지만 리소스 가 부족해서 개발되지 않은 프로젝트가 많았어요.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도 느 껴졌죠. 7~80% 정도는 반영이 돼야 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인데 그 생각 에 많이 못 미쳤었어요. 기껏 기획과 디자인을 해놨는데 실제로 개발되지 않으 니 저로서는 허무했던 상황이었어요. 물론 개발팀 쪽도 이해가 돼요. 인력이나 시간에 여유가 있지 않은 건 마찬가지거든요. 채용에 있어서도 회사에서도 신 중했기 때문에, 서로 많이 힘들었었죠. 무표정으로 제가 집에서 작업하고 있으 니까 남편이 그렇게 생각했었나 봐요.

달팽이: ‘내 일’을 하기 위해서 지금 준비 중이신 거예요? 윤세란: 저는 지금까지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목표가 명확히 있어야 움직이 는데, 지금 같은 경우에는 뭘 해야지 하는 목표가 없이 나왔거든요. “그만둬도 괜찮다. 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스타트업처럼 야생적인 환경에서 생각할 여력이 없지 않으냐. 나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다”라는 남편의 조언이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죠.

달팽이: 말만 들어도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윤세란: 사실 전에 한 번 말씀드렸지만, 저는 대기업을 간다라고 해도 사실 이 정도 자유도나 스스로 100%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기업 에서도 저는 만족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성향상. 저는 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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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닌 것 되게 싫어하거든요. 꽉 잡거나 풀어놓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하는 데 미적지근한 건 영 안 맞아요. 9 to 6도 썩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상황이 되 게 다르기 때문에 그 9 to 6 사이클에 맞추는 건 업무 효율이 그다지 높다고 보 지 않거든요. 개인마다 성향이 다르니까. 자유도가 너무 낮기도 하고요.

달팽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건 어떤 형태의 일인가요? 프리랜서인가요? 윤세란: 저는 창업도 아직 생각이 없고, 프리랜서로서 살아야 하는지도 잘 모 르겠어요. 저는 우선, 제가 관심 있는 걸 배워보고 그것 중에서 제가 꾸준히 할 수 있는 걸 찾게 되면 그냥 그것만 하며 살 생각이에요. 남편이 권유했던 게 도 자기를 한번 배워보면 좋을 것 같다고 했어요. 저는 생각도 못 했던 분야긴 한 데. 저는 만약에 하게 되면 그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예전에 그림을 하려다 못 했기 때문에. 근데 남편이 물감이나 재료를 다 준비해줬는데, 제가 안 그리는 거예요 집에서. 알고 보니까, 제가 하다가 맘에 안 들면 다 뜯어서 버리거든요. 수정하는 게 너무 힘드니까 다 버리는 거예요. 제가 스킬이 낮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리기는 하는데 제 맘에 안 드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손에 안 잡혔어 요.

달팽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으신가 봐요. 윤세란: 아예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예를 들면 물건 같은 경우에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하고 그 정도?

달팽이: 자기만의 약속 혹은 인생의 규칙 같은 게 있나요? 윤세란: 규칙 같은 건 따로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이런 건 좀 있어요. 20대 중반 에, 한 1년 정도 운동한 적이 있었고 그러다 너무나 쉽게 빠져나왔는데, 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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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로 그냥 뭔가 이 몸 상태를 계속 유지하자는 생각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삼 시 세끼 건강식 챙겨 먹기, 일주일에 하나씩 네일아트 하기 등의 규칙이 있는 것처럼, 저는 이게 내 최소한의 관리라고 생각하거든요. 타인이 봤을 때도 그 렇지만 내가 나 자신을 봤을 때도 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바운더리 정도는 있는 거 같아요.

달팽이: 내 일이 아닌데도 회사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한 동력은 뭐였다고 생각하세요? 윤세란: 회사에서의 일들이 제 경력이 되니까, 포트폴리오로 남으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만족할 수 없는 건 잘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이 시간 안에 최 대한 많은 걸 정확하게 해내야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그만둘 때까지 계속 제가 생각하는 대로 해왔던 것 같아요.

달팽이: 대학생 때도 특정 직업을 위해서 포트폴리오 준비를 하셨나요? 윤세란: 아니요. (웃음) 포트폴리오 준비는 안 했어요. 그때도 사실 뭐가 문제 였냐면, 뭘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취업 시즌이라 다들 뭘 하고 있는데, 저는 영상 전공을 했었는데 이 진로로 나가려니 “이걸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막 연한 두려움이 들더라고요. “나 잘 못 하는 것 같은데. 이거 말고 딴 길 없나?”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준비할지 모르겠어.” 막연했어요. 누가 조언을 해줘 도 별로 와 닿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헤맸고 어영부영하다가 대학원 까지 가게 됐거든요. 남들이 보기에는 도피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반은 도 피가 맞아요. 목표가 명확했으면 취업을 했겠죠. 근데 그런 것도 아니고. 하여 튼 포트폴리오를 그렇게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달팽이: 대학원 졸업 이후 취직을 하셨잖아요. 똑같은 고민이 또 생겼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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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어떻게 취업 결심을 했나요? 윤세란: 멍하니 있었어요. 그냥 그 당시 확실한 생각이 있던 것도 아니었어요. 여전히 준비 못 하고 있었고 갈피도 못 잡고 있었는데, 그냥 막연하게 뭐라도 배워놓든지 준비하든지 해야 할 것 같다, 대신 남들이 잘 하지 않는 분야를 준 비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색채 관련된 쪽으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 알고 있던 분이 제안을 해주셨어요. 일해 볼 생각 있느냐. 그래 서 취업이 된 거예요. 어영부영 뒷걸음질 치다가⋯.

달팽이: 그렇게 회사생활을 시작하신 거군요. 윤세란: 그렇죠. 들어갔을 때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어요. 왜냐면 그 분은 제가 잘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절 데리고 가셨던 거고, 전 진짜 아는 게 없었거든요. (웃음) 제로 베이스였어요. 심지어 저는 온실 속의 화초였어요. 화 술이 뛰어나지도 않고 눈치가 빠르지도 않았어요. 남들이 A라고 하면서 괄호 치고 사실은 이게 B야 라고 하면 다 알아듣지만, 저는 그냥 A라고 곧이곧대로 알아듣는 편이었어요. 그 정도였어요 저는.

달팽이: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윤세란: 제가 다녔던 회사 중 가장 하드코어 했어요. 환경도 스케줄도, 여러 가 지 면에서 힘들었죠.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다 보니까 그냥 ‘죽을 것 같 아. 어떻게 하지?’라고 재지도 않았고, 의지가 0이었고, 그냥 흘러갔던 거 같아 요. 그러다 보니까 오히려 더 많이 습득하고 배울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더 빨리 배웠던 거 같아요. 웬만한 사회생활 2~3년 치보다 더 많이 습득했던 거 같아 요. 2년 정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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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첫 번째 이직 결심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윤세란: 일이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아무래도 색채 관련된 쪽으로는 이걸 베 이스로 주로 활동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다음 스텝이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학교 쪽으로 가거나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까 퇴사를 결심하게 됐죠.

달팽이: 총 회사를 몇 번 옮기셨어요? 윤세란: 저는 회사를 좀 자주 옮겼어요. 한 너 다섯 번? 분야도 조금씩 바꿔 다 녔어요. 어차피 나는 내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커리어가 일관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약간 방향을 틀 어서 하더라도 나는 충분히 내가 원하는 곳에 붙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요.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만. (웃음) 뭐 이도 저도 안되면 양으로 승부하겠다라 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는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데는 붙었던 거 같아요.

달팽이: 멀리 보면 회사 일들이 본인의 일을 하기 위한 커리어를 쌓는 과정이어 서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윤세란: 만약에 회사를 위해서 일을 열심히 하고 회사 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면 아마 저는 그렇게까지 생각 안 했을 거 같긴 해요. 회사 사람들 이랑 술 마시며 너무 힘들다, 친구들한테 넋두리하거나 그러지도 않았거든요. 그냥 제 일을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달팽이: 2, 3년 후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윤세란: 제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것들이 있으니, 이 중에서는 꼭 내가 하고픈 일 을 찾겠다. 정확하게는 2년 안에는 꼭 찾으려고 해요. 만약에 도자기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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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판단이 된다면 바로 다른 걸 찾아보든지 할 생각이에요.

달팽이: 그런데 왜 하필 도자기였나요? 윤세란: 남편이 추천했는데, 되게 잘 어울릴 거 같대요. 해본 적은 없었는데. 저는 컴퓨터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이래왔지 뭘 만든다는 건 처음이었거든 요. 예전에 의상 제작 하던 적이 있어요. 패턴을 만들고 사이즈를 맞추고 자르 고 사이즈를 재고 이런 게 너무 싫었어요. 남편이 봤을 때는 맘에 조금이라도 안 들면 쉽게 없애고 하는 성격인데, 금방 부수고 쉽게 만들 수 있는 도자기가 괜찮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림 그려놓은 건 다 버렸어요. 저에게 의미가 별로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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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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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윤선해: 저는 37살이고요, 청소년지도사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윤선 해라고 합니다.

달팽이: 처음으로 직장에 들어가실 때 어떤 기대를 하고 계셨고, 실제로 들어 가 보니 어땠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윤선해: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2년 정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다가, 제가 너무 하는 일 없이 있는 것 같으니까 가까운 지인분께서 청소년수련관에 와서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주셨어요. 저는 사실 수련관이라는 곳을 처음 들어봤어요. 제가 워낙 시골에 살아서, 청소년단체나 회관이나 수련 시설 이런 걸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거든요. 제가 성인이 된 이후에 그런 시설이 생 겨서. 처음으로 출근을 했는데, 가을이었어요. 9월 4일이었고. 강원도의 산 밑에 수 련관이 있고, 거기로 가기 위해서 저는 북한강 지류가 흘러가는 화천천 위에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출렁다리를 건너가면서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되었 는지 궁금하다. 나는 여기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이런 기대를 했던 기억이 있어요. 되게 생생해요. 그날의 기억이.

달팽이: 실제로 들어갔을 때는 어땠나요? 처음에 어떤 일을 하게 된 건가요? 윤선해: 사실 청소년수련관이라고 하면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 는 일을 하는데, 저는 메인 업무가 아니라 운영지원 일을 3개월 정도 했어요. 3 개월이 지나서 처음으로 청소년 사업 일을 맡게 되었는데 저랑 엄청나게 잘 맞 는 거예요. 서류 업무하고 아이들이랑 직접 교감하는 일이 반반 정도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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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청소년들이랑 활동적으로 교류하는 일을 하다가 지칠 때쯤 되면 책상 에 앉아서 뭔가를 할 수 있고, 그게 너무 지겨울 때가 되면 다시 청소년들이랑 뭔가를 할 수 있고. 청소년들이 처해 있는 환경이나 교육과정 같은 게 계속 변 하니까 저는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기회를 얻게 되고 이런 것들이 너무 즐거웠어요.

달팽이: 혹시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나요? 윤선해: 청소년들은 모두 기억에 남는데요, 최근에 저하고 같이 4년 정도 활동 했던 친구가 있는데 특성화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었거든요. 이 친구는 취약계 층이었고 한 번도 그림 같은 걸 배워본 적이 없었는데 디자인고를 갔어요. 근 데 거기서 ‘기능반’이라고 해서 국제기능대회에 출전하는 대비반 같은 걸 했는 데, 계속 출전을 했지만, 순위권 안에 들지는 못했던 거죠. 그것도 올림픽 같은 거라서 순위권 안에 들면 군대도 면제되고 무슨 산업특기생 같은 거로 취업도 되게 잘 되나 봐요. 근데 얘가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계속 그 기능대회를 준비 하느라 군대도 좀 미루고 특별한 직장을 얻지 않고 계속 학교에 남아서 준비하 는 게 저를 약간 불안하게 했었거든요. ‘이렇게 자꾸 지연되면 안될 텐데’ 또는 ‘이렇게까지 준비하다가 안 되면 이 친구가 너무 실망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 정을 되게 많이 하고 있었는데. 올해 3월 초에 이 친구가 다시 시험을 봤는데, 밤 10시 정도에 갑자기 전화가 온 거예요. 안 그래도 이 친구가 시험 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있었는데, 전화를 받고 “무슨 일이 야?!” 그랬더니 “선생님 저 2등 했어요!!” 그러는 거예요. 2위를 해서 전국대회 에 나갈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9월에 또 시험을 본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또 한 6개월 정도 마음 졸이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대부분의 취약계층 청소년들은 특성화고를 갈 것인가 인문계고를 갈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대학에 가서도 얻을 수 있는 게 있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취업을 먼저 하고 다른 것도 도모해보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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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특성화고등학교를 가는 거를 지지해서 선택 하는데, 이 친구들이 너무 빠르게 18, 19살 때부터 취업을 나가고 치열한 사회 에 나가서 고생하면서 일하는 걸 보면 사실 마음이 안 좋아요. 근데 이번에 이 렇게 기쁜 소식을 들어서. 지금은 그 친구가 딱 떠올랐어요.

달팽이: 그러면 청소년들과 함께했던 시간 이후에도 연락을 계속하시나 봐요. 윤선해: 네. 대부분의 청소년이랑. 시집가서 애가 둘 있고 이런 애들도 있어요. 2007년도에 중2 친구들이랑 기획단 활동 같은 걸 했었는데 그 친구들이 이제 다 자랐죠.

달팽이: 혹시 어렸을 때는 지금의 나이쯤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 거로 생각 하셨나요? 윤선해: 제가 최근에 지인들이랑 그런 얘기를 종종 했거든요. 초등학교 때는 29살 정도 되면 오피스텔 있고 차 있고 멋있게 살 것 같다고, TV 드라마를 보 면서 생각했죠. TV 드라마를 보면 20, 30대인데 모든 걸 가진 사람들이 많잖 아요. 나도 저 정도로 사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뭐 이런 얘기도 종종 하고요. 중학교 때는 건축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도. 전 세계를 다니면서 지역 곳곳에 내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달팽이: 그러면 그때 생각했던 모습이랑 지금의 삶은 다르잖아요. 혹시 어떤 기분이 드세요? 윤선해: 그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설레하거나 무언가를 열심히 도전해보고 준 비했던 시간도 저를 이루는 데 많은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에 많이 감사하고, 그걸 꼭 이루어야 행복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리고 지금 청소년들과 함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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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직업에 대해서 저는 감사하고 있거든요.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 진 것이기 때문에 더 감사한 마음이 크고. 그래서 저는 직업에 대해서는 굉장 히 만족하는 편이에요.

달팽이: 지금까지 해온 일 중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을 꼽자면? 윤선해: 순위를 매겨서 리스트업시키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요. 어쨌든 제가 이 직업을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거는, 사람이 살면서 나나 가족들에게도 긍정 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쉽지가 않은데 나 아닌 누군가에게 어떤 성장의 기회를 주거나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 사건이나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 를 기획하고 제공해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달팽이: 일을 하다 보면 좋은 시간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특히 선해님은 다른 학생들의 삶에 깊이 관여해서 상담도 해주고 교류하는 직업이다 보니, 혹시 나 자신을 잃어간다고 느끼는 순간은 없었나요? 윤선해: 제가 되게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성장에 참여할 때만 성장할 수 있다.”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청소년들이랑 교육 활동하 는 일이 저를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만들어 준다는 걸 더 많이 느끼고요. 그런데 청소년들한테 제가 원래 의도한 대로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 많아요. 정책적인 것들도 있고, 청소년들이 다 공교육 안에 들어가 있다 보니까 청소년 들은 대학 입시를 위한 공교육과 사교육 이외의 자투리 시간에 수련원에서 활 동한다는 점도 있고. 또 아무리 제가 열린 태도, 수평적인 관계 이런 것들을 청 소년들에게 해주려고 해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너무 수직 적이고 굉장히 경쟁적이고 목표지향적이고 이렇다 보니까, 그런 걸 체감할 때 되게 큰 벽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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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지금 본인이 가진 특성 중에서, 앞으로도 이것만큼은 잃지 않고 싶은 것이 있나요? 윤선해: 사유하는 것.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잖아요. 근데 되게 높은 고 산을 올라갈 수 있는 폐활량을 가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고, 또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신체조건을 가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는 것처럼, 사고하 고 생각하는 데에도 근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계속 고민하고 사유하는 것 도 훈련해야 할 것이고, 나에게 벌어진 많은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사유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힘들어하거나 멈추거나 그러지 않고 늙을 수 있으면 좋겠 어요.

달팽이: 평소에도 그동안 있었던 일이나 현재 하는 일에 대해서 많이 사유하는 편이신가 보네요. 윤선해: 제가 그렇게 규칙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매일 일기를 쓴다거나 매일 시간을 정해서 뭘 한다거나 이러진 않아요. 다만 독서를 할 때 생각 정리를 해 본다든지 아니면 제가 의문이 드는 사건에 대해서 고민을 해본다든지, 저는 그 런 걸 하는 것 같습니다.

달팽이: 혹시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윤선해: 저는 계속 청소년지도사 할 거예요. 다시 태어날 일은 없을 거로 생각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아 사실 이건 뭐냐면,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근 데 청소년지도사 활동을 하는 방식이나 형태를 바꿀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요. 꼭 바꾸고 싶어요. 지금은 제가 어떤 기관, 시설에 소속이 되어서 일을 하고 있 어서. 여기서는 돈도 벌어야 하고 민원처리도 해야 하고 정치인들의 어떤 요구 에 맞추기도 해야 하고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는데 그런 것들에 제가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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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해야 하거든요. 제가 이 조직의 일원이니까. 적극적인 동참자가 되는 거죠. 청소년들을 어디 동원해서 어떤 자리에 참석하게 한다든지. 최대한 설득을 하 거나 진솔하게 하려고 하지만, 어쨌든 제가 동의하지 않는 일들에 청소년들도 참여하게 한다는 것은 저에게 엄청난 가책으로 쌓이거든요. 이건 마치 중금속 처럼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쌓이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기관들도 되 게 많아요. 살아있는 무언가가 일어나는 곳들이 훨씬 더 영향력 있긴 한데, 일 반적으로 조직 안에서 그런 것들을 양보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기관의 높으 신 분들이나 뭐 그런 결정권을 가진 분들도 두려우신 것 같아요. 외부의 요청 을 거절하는 것이.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겠죠.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 을 수 있는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달팽이: 요즘 제일 몰두하고 있는 생각이나 고민이 있나요? 윤선해: 제가 청소년들이랑 함께 뭘 제작하는 활동을 기획하고 있는데, 그게 제일 화두예요. 메이커 활동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나요? 디자인, 제작 활동 이 런 건데. 학교 밖 청소년들이나 니트 청년들이랑 모여서 디자인 활동 하고 콘 텐츠 만드는 작업을 저희끼리 해서 그런 걸 상품화 시켜 본다든지 하고 싶어서 생각하고 있어요. 기획은 되어 있는 상태인데 지금 자원을 모아보려고 하고 있 어요. 세운상가에 있는 분들과 협업하고 있죠.

달팽이: 이상적인 인간상이라거나 그런 교육관이 있으실 텐데, 어떤 것일지 궁 금해요. 윤선해: 저도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정립을 하는 과정이니까. 청소년들 도 아주 명확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사 회 문화적인 환경이 제공되는 것이 저의 바람이고. 옛날에는 세배할 때 건강해 라, 착하게 살아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얼마 전부터는 좋은 데 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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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라, 돈 많이 벌어라. 이런 이야기들을 덕담으로 많이 해주신다는 이야기를 어 디서 듣고 되게 속상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스승의날 노래 들어보면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이라는 가사가 있어요. 그래서 청소년들에게 꼭 1등이 되거나 많은 것을 쟁취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타인에게 선한 마음 을 가지고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자기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스 스로 책임지며 살아갈 수 있는 청소년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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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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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무지랑이 첫 번째 직장인가요? 송은별: 네 그렇습니다.

달팽이: 처음 입사하실 때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송은별: 저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입사를 했어요. 원래는 건축을 공부했 는데, 보통 건축이라고 하면 건물이나 공간을 많이 떠올리잖아요? 근데 제가 배운 건축은 사람을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배우는 학문이었기 때 문에 사실 성북신나를 직장으로 선택할 때 공간 쪽 분야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고 생각했어요. 위화감이 없었어요. 워낙 사람 또는 지역, 도시와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선택할 때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달팽이: 현재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송은별: 작년에는 무중력지대 성북 공간을 운영 관리하는 한편, 지역의 공간을 발굴하고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를 했었고요. 올해에는 역할이 많이 바뀌었 어요. 올해는 하고 있는 학교 프로그램이나 지원사업 프로그램을 운영 관리하 고 있습니다. 사업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달팽이: 앞으로는 현재 직장에서 어떤 일을 맡고 싶으신가요? 송은별: 일단은 올해 제가 맡고 있는 사업에서의 기록을 잘 해두고 싶고요. 그 리고 올해 예정된 프로젝트 중에서 탐나는 건 지역에 있는 공간들을 연구개발 하는 프로젝트예요. 그런 게 좀 욕심이 나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이직을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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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송은별: 제가 94년생이고 이제 20대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지금 이 시기 에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 은 일들을 하고 싶어요.

달팽이: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은,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요? 송은별: 공간 분야를 떠나 있다 보니까 느끼는 건 제가 생각보다 공간에 대한 애착이 더 많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런 공간 쪽이나 도시 쪽에 집중된 프로젝 트를 하고 싶어요. 엄청 높고 큰 빌딩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지역에서 스쳐 지나가는 공간들을 리모델링하는 일, 그리고 그 공간의 역사를 찾아서 기록하고 새로운 쓰임을 찾는 일을 하고 싶어요.

달팽이: 일하면서 어떨 때 스트레스를 받았나요? 송은별: 무중력지대 같은 곳에서는 각자가 할 일들을 명확하게 빠르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잘하는 것보다도 시간 내에 해내는 것이 중요하더라고요. 근데 그동안 제가 해왔던 것은 최상의 퀄리티를 뽑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그런 부분 에 있어서 좀 안 맞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하루의 업무시간 내에 해야 하는 일 을 욕심껏 밤새워서 하다 보니까 번아웃이 좀 크게 왔었고요. 작년 12월, 1월 에 많이 힘들었어요. 첫 입사여서 의욕은 있는데 내 한계를 모르니까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달팽이: 어떨 때 보람을 느끼나요? 송은별: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중에서도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는 게 정말 좋아요. 건축 쪽에서 있다 보면 사람 운운하고 이러는 것이 되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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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적인 것으로, 소위 비주류로 여겨질 때가 있거든요. 근데 이곳에 오면서 저 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게 되게 좋았어요. 그리고 제가 활동하는 프로젝트에서 다른 청년분들을 만났을 때 서로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게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달팽이: 20대에는 현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고 싶다고 하셨는 데, 그러면 30대는 어떻게 기대하고 계세요? 송은별: 저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30대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말괄량이였고 막 진짜 뺄뺄거리면서 돌아다니 는 것을 좋아하면서 여러 가지 많이 해보려고 했는데, 그게 30대부터는 안될 것 같은 막연한 공포감이 있었어요. 뭔가 정착해야 할 것 같고. 안정을 찾아야 할 것 같고.

달팽이: 30대분들 얘기 들어보면 별다를 것 없다고 하잖아요. 사실 10대에도 스무 살 되면 나는 자유로워질 거고 하고 싶은 것 다 할 거고, 그런 생각을 하 는데 막상 그렇진 않잖아요. 그러니까 30대가 되어도 지금이랑 똑같지 않을까 요? 송은별: 그렇죠. 똑같지 않을까 싶긴 한데, 똑같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진짜 막연하게 말하면, 제가 지금 여러 경험을 하면서 내 취향을 알고 쌓아가고 있 다고 느끼거든요. 30대에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고. 한편으로는 지금 제 가 여러 곳에서 알아가는 것들이 30대 때에는 제가 선택한 한 분야에서 활약 해주면 좋겠어요. 누군가를 도울 수 있게. 보다 멋진 모습으로요. 다시 말해 지 금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한 군데에서는 뿌리를 내 리고 싶고, 오랫동안 진득히 지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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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어린 시절에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나요? 송은별: 게임과 만화를 좋아하는 친오빠의 영향으로 일곱 살 때 심즈라는, 사 람 키우는 게임을 접하고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었어요. 심즈 1,2,3,4, 그리고 확장판까지 다 섭렵했어요. 커뮤니티 활동도 했어요. 워낙 그 게임을 좋아해서 그 당시에 저는 공간 인테리어 쪽 전문가 아니면 EA게임즈에 입사하겠다. 그 렇게 생각했었죠.

달팽이: 게임 개발 쪽으로 안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송은별: 초등학교 때 심즈를 알았다면 중학교 때는 책과 잡지의 매력에 많이 빠졌어요. 제가 처음으로 접한 잡지가 엄마가 정기구독하는 홈쇼핑 책자였는 데, 늘 아파트 도면과 3D모델링이 그려진 아파트 분양 전단지가 같이 왔었어 요. 저는 그때 디자인이 뭔지도 몰랐지만 그 전단지를 모아서 거기에 사람을 그려보거나, 공간을 다른 식으로 구성해보곤 했었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 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공간 디자인 쪽으로 빠졌어요.

달팽이: 퇴근 후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송은별: 저는 좋아하는 게 진짜 많아요. 혼자 따릉이 타고 홍대 상상마당에 영 화 보러 가기도 하고, 종로구를 너무 좋아해서 그쪽을 많이 산책하고. 서점 가 서 잡지 구경하고. 돌아다니기엔 너무 힘든 날에는 집에 가서 그냥 넷플릭스 엄청 보고요. 그리고 틈틈이 하고 싶은 것들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을, 틈틈이 찾아서 행사 같은 데를 참여하고 있어요. 세미나나 강연 같은 곳들이요.

달팽이: 살면서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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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별: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요. 먼저 나의 행복을 제외하고서는 일단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 생각이 나요. 제가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점점 제 주변 사람들 에게 의지를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또 다르게 중요한 것은 나의 취향, 시선 이 런 것들이에요. 제가 몇몇 부분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잃고 싶지 않아요. 사실 무지랑에 있으면서, 옛날에 처음 들어올 때는 눈빛이 되게 반짝반짝했는데 지 금은 낯빛이 안 좋다는 얘기를 좀 들었어요. 많이 너덜너덜해졌거든요. 제가 장 점이자 단점인 게 무슨 일이 있든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일을 하 다보면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내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는 해요. 그러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것들에 대한 내 감정이 일보다 덜 중요해지죠. 이 게 빈번해지면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아요.

달팽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송은별: 분명히 있는데, 뭐 하나 자신 있게 ‘나 이거 잘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없어서 잘 말하진 않아요. 분명히 좋아하는 건, 사진 찍는 것. 영화 보는 것. 디자인잡지 보는 것, 그림 그리는 것.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되게 평범할 수 도 있는 건데 그게 저는 너무 좋고 설레요. 제가 여태까지 알고 지냈던 내 지식 과 생각들이 제 그림, 제가 보는 사진과 영화에서 드러날 때 희열을 많이 느껴 요. 평범하게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도 제 해석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들이 있어 요. 그게 사진이라고 했을 땐 사진으로 포착되는 것들이고, 그게 기록이라고 했을 땐 영화를 보고 쓰는 비평이나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쓰는 글로 나타나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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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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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본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이 자서전만 남는다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 되고 싶나요? 백충훈: 조금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지금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똑 같이 직장 다니고 너무 에브리데이 루틴으로 살아가는데, 기억나는 것들은 독 특한 것들이잖아요. 남들과 똑같지 않은, 나라는 독특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는 참 독특함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누구보다 잘 될 거 다, 나는 당연히 부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 어찌 보면 자존감인 거죠? 자존감 이 되게 높았었는데 어느 순간 이게 꺾이더라고요. 나이가 한 살 두 살 먹어가 면서. 혼자 자기 전에 생각해요. 내가 다른 사람이랑 뭐가 다르지? 옛날에는 정말 조그만 거라도 나라서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점점 꺾이는 것 같아 요.

달팽이: 예전에는 어떤 스타일이셨나요? 백충훈: 아이디어를 되게 많이 던지는 스타일이었죠. 그랬었는데 점점 톱니바 퀴를 따라가다 보니까, 아, 내가 왜 이렇게 되어가나 싶더라고요. 저는 공대생 인데 공대랑 관련된 것에서 탈피하고 싶어서 광고 공모전 이런 것도 해보고 되 게 다양한 일들을 하려 했어요. 시도를 많이 해보려고 했는데 이제는 점점 할 수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정해진 여덟 시간을 회사라는 공간에 있다 보 면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요즘은 유튜브를 하고 있어요. 사실 회사에서 옆에 있는 부장님들을 보면 마음이 좀 이상해요. 그분들은 지금까지 버티시고 한 분야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내가 만약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은 일들을 그 때까지 하고 있으면 우울할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다른 걸 하고 싶어했고 퇴 근하고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점점 지날 수록 자기 시간은 없는 것 같고.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로 되어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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잖아요. 이런 생각이 많이 들고 그러네요.

달팽이: 회사에 있으면서 자아를 실현하시는 게 목표인가요, 아니면 언젠간 회 사를 나와서 자아를 실현하는 게 목표인가요? 백충훈: 모든 직장인은 똑같이 생각할 것 같아요. 명확한 게 없으니까. 아직 밥 벌이 수단이기도 하고. 누구한테나 이 직업이 많이 별로이거나 이렇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지금보다 더 나은 걸 하려니까 계속 찾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저 같은 경우도 완전 이상한 직장 상사가 있고 그런 게 아닌데, 내가 앞으로 뭐 할 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자꾸 드니까. 퇴근하고 나서 뭐 할지를 생각한 게 벌써 4년째인데, 사실 입사할 때부터 생각했어요. 앞으로 뭐 할지는 계속 고민 이 들고 그렇습니다.

달팽이: 경제적인 걸 고려하지 않는다면, 뭘 가장 하고 싶으세요? 백충훈: 보통 다 여행을 꼽지 않을까요? 관광한다기보단 돌아다니면서 조금 생각 정리를 하고 싶어요. 서른이 넘어도 뭘 할지를 모르겠다는 건 제 잘못일 수도 있고, 환경이 그랬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진짜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고 싶어요. 경제적인 문제가 없다면 더 빨리 찾게 되겠죠. 직업적으로는 스 포츠 관련된 일을 하고 싶고. 에이전트 일이나 스포츠 마케팅. 좋아하는 일을 할 것 같아요.

달팽이: 어린 시절에 어른 백충훈을 상상할 때 어떤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어요? 백충훈: 어렸을 때는 음⋯ 그냥 뭐 중요한 직책?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으 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은 모르는 정보를 나만 알고 있는 역할? 그런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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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을 하면 좋겠단 생각도 들었고. 돈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그런 건 있어요. 서른 중후반이 돼서 내가 했던 경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까지 됐으면 좋 겠다. 그래서 강단에 서는 사람.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고등학교에 가서 강단 에 서잖아요. 그냥 일반적인 사람은 초대 안 할 거 아니에요. 그 정도까지는 해 보고 싶다고 그랬었죠.

달팽이: 무엇을 할 때가 제일 행복하세요? 백충훈: 어떨 때는 사람 만나는 게 좋고, 어떨 때는 혼자 있는 게 좋고. 옛날 친 구들 만나는 게 좋다는 걸 최근에 느꼈어요. 작년에 졸업하고 해외여행을 처 음으로 같이 가게 됐는데. 그냥 그 시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냥 바다에서 놀 고. 다들 경상도 사람들이니까 막 친근하게 그러지도 않아요. 되게 편했어요. 아무래도 십 년이 넘는 친구들이니까. 하나씩 고민 툭툭 이야기하고.

달팽이: 2~3년 이내 이루고 싶은 목표는? 백충훈: 앞으로 하고 싶은 걸 명확하게 해서 열심히 한번 살아보고 싶어요. 지 금까지 대충 살았다고 할 순 없지만, 엄청 열심히 해본 적도 없거든요. 여태까 지는 운이 좋아서 그래도 잘 풀렸다고 생각하는데, 한번 정말 기억에 남도록 열심히 도전해보고 싶어요. 아직 자유롭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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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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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가요? 배민정: 행복입니다.

달팽이: 행복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배민정: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로움? 즐거움을 찾아 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항상 버킷리스트를 쓰고 있거든요. 중학생 때 부터 쓴 게 있어요. 단순히 어디를 가고 싶다 부터, 초등학교 실과 수업 때 사과 깎기를 하다가 손을 왕창 벤 적이 있어서 그때 이후로 칼에 대한 두려움이 있 는데 그 트라우마를 이기자라는 버킷리스트 까지. 버킷리스트에 있는 내용처 럼 칼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자 한식 조리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4개월간 요리 수업을 들은 적도 있어요. 인생은 즐거움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그때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하는 거 그게 저의 행복입니다. 제 버킷리스트 중에 나의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것도 있는데 그 버킷리스트로부터 지금 이 달 팽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달팽이: 본인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배민정: 저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e커머스 (전자상거래)일을 해보고 싶어요. 매여 있는 삶보다는 스스로 시간을 구조적 으로 활용하는 삶이 가능한 일을 하고 싶거든요 요즘은. 근데 저는 계속해서 일생을 살면서 업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을 것 같아요. 어느 하나를 정하지 않 고.

달팽이: 어렸을 때는 30대가 된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하셨어요? 배민정: 30대가 되면 단순히 결혼은 했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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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30대가 올 지 몰랐어요. 20대가 그리고 청춘이 영원할 것만 같았어요. 30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보다는 현재에 더 포커스를 맞춘 삶을 살면서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이나 경험을 하기 위한 계획을 더 많이 구상했어 요.

달팽이: 해외에 관심이 되게 많으신데 이유가 있을까요? 배민정: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MRK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콩순이 나오고 아 무튼 그런 게 있었는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잡지예요. 거기에 아론 카터 라는 사람이 표지 모델로 나온 적이 있었어요. 아론카터는 백스트리트 보이즈 멤버인 닉 카터의 동생이에요. 그걸 보고 아론카터에 첫눈에 빠졌던 것 같아 요. 제가 영어를 잘 못 했는데 그 이후로는 아론카터와 말도 해보고 싶고 실제 로 만나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어떻게 말할지도 준비하고, 아론 카터 팬 페이지 가서 팬들과 소통하기도 했어요. 제가 미국을 꼭 한번 가고 싶 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 사람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서였어요. 그때부터, 나중에 그를 만나면 얘기를 해야 하고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하니까 영어 공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게 중학 교 1학년이었고, 그 후 영어성적도 많이 올랐던 것 같아요. 그때 이후로 영어가 제가 잘하는 과목이 되었고, 그 시기 쯤 해외 펜팔도 시작하면서 펜팔 친구들 도 많이 사귀게 되었는데 그 친구들에게 한국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주고 싶고 독도라든지 동북공정에 대한 얘기를 설명해주고 싶어서 더 영어공부에 매진했 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테트리스를 하면서 옆 배너에 시드니 오페라하우 스가 있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을 한 번도 안 가봤었는데 그래서 그걸 보고 ‘저기 가야겠다.’ 하면서 그 배너를 눌렀어요.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 자면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여러 경쟁 과정을 통해 선발이 되면 호주를 공짜로 보내주는 거였어요. 열심히 지원서를 써내려갔고 7월쯤인가 집으로 합격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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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왔었는데, 처음에는 보이스 피싱이라 생각하고 끊었어요. 근데 두세 번 똑 같은 번호로 연락이 와서 전화를 받았고 그제야 진짜로 합격을 했다는 걸 알 았어요. 그렇게 첫 해외여행으로 호주를 가게 되었고,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지 평을 넓힐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달팽이: 마지막 질문인데요, 10년, 20년 말고 2, 3년 안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배민정: 요즘 안정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좋은 배우 자를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중심이 된 삶을 살고 싶 어요. 내가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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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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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요즘 근황을 좀 들려주시겠어요? 박주희: 제가 새 회사에 최종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합격하고 나니까 머릿속에 고민이 많아지네요. 한동안 쉴 만큼 쉬었다고 생각했고, 이게 되게 하고 싶었던 일이라서 합격하길 바랐고, 좋은 결과가 나왔는데.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고민되는 것 같아요. 그동안 쉬면서 잘 지켰던 내 마음을, 이제 내 가 또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가서 일하면서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좀⋯ 지레 겁먹고 고민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달팽이: 이전에 쉬시기 전에 일할 때, 많이 힘드셨어요? 박주희: 저는 너무 몰입해서 일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제가 저 자신을 빨리 지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도 너무 일을 열심히 하고 일에 애정이 넘쳐나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큰 사람이었더라고요.

달팽이: 주희 님은 되게 밝고 에너지가 많으셔서 쉽게 일상생활에 스트레스받 아서 기죽고 그런 거는 사실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이전에는 회사생활 하면서 그런 모습이 있으셨나요? 박주희: 아니오, 막 기죽지는 않아요. 기죽을 일이 없죠. 뭐 일은 하면 되는 거 고. 근데 일을 할 때 저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았던 것 같아요. 잘해야 하 고, 잘하고 싶고, 내가 한 일을 적어도 손 두 번 안 가게 하고 싶고, 그러다 보 니 저 자신을 지치게 하는 것들이 좀 많았어요. 마라톤을 했어야 했는데, 단거 리를 빠르게 달린거죠. 그것만이 퇴사의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런 것도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퇴사했고, 1년 8개월 정도 쉼을 가지면서 다양한 형 태로 저 자신을 또 다르게 만나고 내 내면의 목소리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 지 알아가는 시간을 요새는 갖고 있거든요. 일할 때는 막 엄청 모든 게 완벽해 야 한다 할지라도 그냥 인간 박주희로서 삶을 살 때 “어, 왜 난 꼭 잘하려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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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좀 못하면 어때? 왜 완벽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을 계속 저 자신한테 하 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

달팽이: 1년 8개월간의 쉼을 전후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박주희: 많은 게 변했어요. 그전에는 사실 교만했던 것 같고, 나 자신이 모든 면 에서 실패의 경험 없이, 늘 제가 원하는 걸 다 했거든요. 그리고 그게 옳다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었는데, 쉬면서 새롭게 제 부족함을 인지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런 시간을 지금 가지고 있어요.

달팽이: 자기의 약점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 혹시 그 어려운 일을 하게끔 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박주희: 저는 퇴사를 하고 덴마크에 있는 한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나 자신 을 좀 돌아봐야겠다고 결정을 했어요. 그 학교는 시험이나 평가가 없고, 수업 도 듣고 싶은 것만 골라서 들을 수 있어요. 평가가 없기 때문에 해보고 싶은 것 들은 얼마든지 시도해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인생 학교’ 또는 ‘삶을 위한 학교’ 라고 불리기도 해요. 저는 교육 필드에서 청소년들을 계속 만나던 입장이었기 때문에 유토피아와 같이 느껴지던 그 학교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서 고민 끝 에 가게 된 거였어요. 실제로 학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얼마든지 마음껏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 죠. 거기에서도 저는 잘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거에요. 잘하건 못하건 그 냥 하면 되는데, 칭찬에 익숙해서 잘 하는 것만 하고 싶고, 못할 것 같은 것은 잘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죠.

달팽이: 그런 걸 느꼈던 구체적인 사례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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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희: 30여 개 나라에서 온 백여 명 되는 학생들이 다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비슷하면서도 참 다르다는 것을 느껴요. 그래서 서로의 문화 적 배경들을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도록 컬쳐이브닝이라는 행사를 학기 중에 진행해요, 주로 대륙별로 나뉘기에, 저는 아시안컬쳐이브닝을 준비하게 되었 는데, 부대행사로 악기연주를 할 기회가 생겼어요. 저희 중에는 실제로 전문가 급으로 연주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아마추어인 제가 함께 연습하는 과정에 서 위축이 되면서 망설여지더라구요. 결국 연주를 하기는 했지만, 부족한 제 실 력에만 집중하느라 과정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어요. 그때 그 일을 계기로 내가 얼마나 칭찬에 익숙한 사람이었는지를 돌이켜보게 되었던 거 같아요.

달팽이: 주로 교육 관련 필드에서 일하셨나요? 박주희: 청소년을 대상으로 세계시민교육 및 문화교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들을 했어요. 중국에 오래 살았던 경험이 있고 또 고등학생 때부 터 청소년문화, 교육관련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달팽이: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박주희: 사실 얼마 전에 면접을 준비하며 생각해봤거든요? ‘왜 나는 그런 생각 을 했을까’를 돌이켜봤을 때, 제가 고등학생 때 제 주위에 좋은 영향을 끼친 어 른들이 많았어요. 덕분에 저는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고,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자양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도 나중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 거 같아요.

달팽이: 그럼 주희 님에게 가장 좋은 영향력을 끼친 어른을 한 명 꼽으라면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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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를 꼽으시겠어요? 박주희: 저는 저희 아빠가 바로 생각나는데요. 저희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에요. 정말 사랑이 많고 그 사랑을 특히 자식들에게 정말 그대로 표현하시 고, 굉장히 다정다감하시고 되게 스윗하세요.

달팽이: 이번에 새로 직장을 옮기셨는데, 되게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되실 것 같아요. 이번 직장에서 이거는 좀 이뤄보고 싶다, 이런 건 내가 좀 해내 보고 싶 다, 하는 것이 있나요? 박주희: 음⋯ 워라벨이라고 하죠? 그전에는 저는 정말 일에만 몰입을 했거든 요? 제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부분이 85%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그 이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일을 너무너무 사랑했고, 제가 종교가 있는데도 한 때는 내 종교보다 내 일을 사랑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 중독자 성향이 있었는데. 그래서 사실 두 번째 직장에서는 그걸 지혜롭게 잘 조절하고 싶은 거예요. 물론 그 전 직장은 첫 직장이었기 때문에 초년생으로서 겪을 수 있는 실수들이었다면, 두 번째 직장에서는 좀 더 제 삶도 잘 챙기면서 또 휴식 기를 가지면서, 나 자신을 여러 방면으로 돌봤던 그 모습들을 잊지 않고 잘 간 직하면서,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열심히 일하지 않을 거야 이건 절대 아니고, 저는 여전히 일을 할 수 있는 것 을 감사히 여기고,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은 맞지만, 개인적인 삶도 좀 더 잘 보살피면서 살고 싶어요.

달팽이: 이번 대리만족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여러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봤 는데, 한 가지 되게 신기했던 게 일에 대해서 굉장히 애착을 가지고 사랑을 가 지신 분들이 꽤 되더라고요. 보통 주위에 취업하고 필드에 처음 발을 딛는 사 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고 그래서 일이 싫고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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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얘기가 많아서, 되게 좀 신선하게 다가오는 점이 있거든요. 주희 님에게 일에 대한 사랑을 일으키는 이유가 뭔지 여쭤보고 싶어요. 박주희: 음⋯ 생각해보질 않아서. 저는 그냥 제 개인적인 성향상, 무엇을 하든 지 최선을 다하긴 했던 것 같아요. 적어도 제가 좋아하는 거에 대해서는 좀 최 선을 다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 같고, 또 책임감이 좀 강한 성향인 것 같아요. 책임감이 강한 게 장점일 수 있지만, 엄청난 장점이기만 하다고는 생각하지 않 거든요? 그만큼 저 자신을 힘들게 해서. 하지만 그런 성향 덕분에 나에게 주어 진 일이라면 뭐든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자세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 아요. 사실 제가 일반 기업을 다녔더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어요. 일반 기업에 다녔다면 그냥 일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만 했을 수도 있는데, 저는 어쨌거나 제가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서 선택한 일을 하고 있잖아 요.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해서, 내가 선택해서 한 일이기 때문 에 그거에 대한 책임감이 또 다르지 않았나 싶어요.

달팽이: 혹시 일을 그만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박주희: 여러 가지가 있어요. 이 일을 마라톤처럼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페이스 조절을 못해서 늘 빠르게 달려갔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지치게 되어 있고, 그런 것들이 좀 컸던 것 같아요. 또 배울 점이 많은 동료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게 큰 의미가 있었는데 동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어요, 그 외에 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일하면서 소모만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뭔가 나를 계속 채우면서 일을 해야 하는데, 정말 내 앞에 일이 많기 때문에 그 걸 처리하는 데만 아등바등하느라, 내가 가진 것을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 럼 소진하기만 하는 느낌. 그런 이유도 있었어요.

달팽이: 스스로를 소모하고 있다는 느낌을 언제 많이 받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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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희: 매번 일이 너무너무 많아서 매일 야근을 해도 일이 줄어들지 않을 때, 그런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고요. 그리고 일이 계속 그렇게 많으면 내가 일을 못 해서 이렇게 일이 많은 걸까라는 생각도 하게 돼요. 내가 스마트하게 일을 못 해서 미련하게 계속 일을 하는 건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되거든요. 근데 제가 했던 일은 결국 사람을 만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잖아요. 제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하느냐를 참가자인 청소년들도 고스란히 느끼거든요. 그래서 더 진심을 담아 디테일에 신경쓰다보니, 제가 늘 일을 만들고 있더라구요.

달팽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박주희: 지금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대리만족 프로그램과 비슷한, 이런 일을 진행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달팽이 팀은 청년을 대상으로 했다면, 저 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세계시민 교육을 주제로 교육도 하고, 문화교류 프로그 램을 기획해서 해외에서 진행하기도 헀어요.

달팽이: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나중에 주희 님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나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박주희: 후회 없이 살다간 자로 남고 싶네요. 매 순간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 고 솔직해서 원하는 것들은 다 하고 그래서 미련 없이 살다 갔다고 기억되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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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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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고은지: 제 인생의 시가 있는데 <다 함께 봄>이라고, ‘꽃 한 송이 핀다고 봄인가 요, 다 함께 피어야 봄이지요’라는 시예요.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것. 그걸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달팽이: 왜 본인이 행복한 것보다 모두가 함께하는 게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 나요? 고은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행하면 나도 같이 불행해지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실 저는 전 세계 모든 지구인이 한 공동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 왕이면 모두가 각자의 가치관과 방식대로 좀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기본이 바 탕이 되어야 그게 되는 건데 사실 그렇지 않은 세상이다 보니까⋯.

달팽이: 그 기본이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고은지: 적어도 아무도 굶어 죽지 않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누릴 수 있는 것? 의 식주라고 해서 으리으리한 옷과 명품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요. 그 기본이 안 되어서, 내 의지가 아닌데 죽을 수밖에 없는 건 좀 속상하지 않을까요.

달팽이: 일상에서 언제 제일 행복하다고 느끼세요? 고은지: 요즘은 파란색, 초록색 이런 게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워낙 황사도 심 하고 날도 계속 추웠고해서 파란 하늘, 초록 색깔 나무숲 이런 게 너무 보고 싶 은 거에요. 그래서 그런 걸 보면 좀 행복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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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최근에 그런 걸 본 경험이 있으세요? 고은지: 제주도에서요. 사실 어제 제주도에서 돌아왔어요. 그래서 오늘 회사 에서 약간 ‘업무 모드가 아니다. 아직까진 여행자의 모드다’ 이러면서 일을 했 거든요. 제주도에 있을 땐 안 유명한 곳을 찾아다녔어요. 오름도 안 유명한 곳 으로 골라서 가보고. 산굼부리, 아부오름 이런 곳이요. 이번엔 숙소도 호텔 말 고 에어비앤비로 골랐어요. 조용하고 사람 없고 자연적인 여행이었어요.

달팽이: 중간중간 여행에서 힘을 많이 얻으세요? 고은지: 네. 여행할 때의 행복했던 추억으로 일상을 버티고 있어요. 그래서 아 까 복권 이야기했을 때도 이 워라밸을 좀 더 완벽하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요. 지금은 약간 충분치 않고 너무 많은 시간을 일에 쫓기고 사는데, 내가 좋아 하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충분히 갖고 싶어요. 그런데 여행을 갈 때는 내가 오 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달팽이: 여기 대리만족 프로그램 참가자분들 중에서도 은지님이 특히 더 일에 대한 열정이나 일에서 느끼는 성취감 같은 게 많으신 것 같아요. 고은지: 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렇더라고요. 제가. 하하.

달팽이: 왜 그러고 싶지 않으세요? 고은지: 이게 업무 모드로 가면 효율적인 걸 되게 따지고 어떻게 하면 시간을 줄일까, 어떻게 하면 더 성과를 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근데 사람들이랑 모였으면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되어야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이러잖아요? 그 런데 교회에 가면 막 쓸데없는 이야기 하는 게 너무 시간이 아까운 거예요. 그 냥 뭘 준비해올 때 준비 안 하면 그만큼 시간이 딜레이되고, 이렇게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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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 있으면 뭔가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고 착착 진행이 돼야지 각자 소그룹끼 리 더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데, 그런 게 안 되면 너무 답답한 거예요. 교회 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야기하자고 모인 거고 그냥 친교 하자고 모인 건데 거기 서 제가 막 효율성을 따지게 되더라고요. 그런 게 요즘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요. 일상이 다 너무 업무 모드로 세팅이 되어 있어요. 심지어 이번에 제주도에 가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렌터카를 빌리는데, 제가 배가 너무 고프니까 ‘식당이 근처니까 친구가 렌트를 할 동안 나만 식당을 갔다 올까?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오싹해졌어요. 내가 얘랑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여행을 온 건데, 여 기까지 와서도 효율적인 시간 분배 따위를 계획하고 있다는 거에 스스로 너무 놀랐어요. 좀 그러지 않으려고 하고 있죠, 요즘.

달팽이: 그게 원래 성격인가요, 아니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바뀐 건가요? 고은지: 후자예요. 예전에는 공부할 때도 벼락치기로 하고 계획 같은 것 싫어 하고 여행도 그냥 막 갔는데, 지금은 나의 취향대로 여행을 다 설계하고 여러 가지 대안을 B, C까지 다 만들어놓는 식이에요. 선택의 풀을 다 준비해놓고 그 중에서 되는대로 선택하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제가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아서, 대체 내가 왜 이럴까 싶어요.

달팽이: 그 변화의 계기를 꼽자면 회사생활인가요? 고은지: 그렇죠. 효율적으로 일하는 거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일을 빨리 진행 해서 내 시간을 좀 가지려고 효율적인 시스템, 매뉴얼 이런 걸 찾다 보니까 제 방식이 너무 그런 식으로 바뀐 게 아닌가 싶어요. 좀 아쉬워요. 사실 사람 성격 이 바뀌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회사에서는 그런 식으로 변하는 게 합리적인 거죠.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곳이니까요. 그런 방식을 찾다 보니 점점 그렇게 제가 변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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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회사에서의 모습이랑 회사 퇴근 후의 모습이랑 다른 편이세요? 고은지: 회사에 에너지를 다 써서 집에 가면 아무것도 못 해요. 요즘 회사에서 제가 비품 담당을 하고 있는데, 제가 창고 정리하는 걸 보고 다들 “어 되게 청 소 잘할 것 같다”라고 하는데, 집에 가면 사실 에너지가 하나도 없어서 내 방 청소도 못 해요. 그런 자신을 보면서 ‘아⋯ 내가 너무 에너지를 회사에만 다 쓰 고 있구나’ 생각이 들어서 요즘 너무 안타깝죠.

달팽이: 그럴 때 공허한 편이세요, 아니면 그래도 회사에서 나의 능력을 발휘 하고 인정을 받는 거니까 성취감을 더 많이 느끼세요? 고은지: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회사 일과 나를 분리하려고 해도 쉽지 않고, 그래서 더 회사 일을 잘하려 하고 열심히 하려고 하고. 열심히 안 하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열심히 안 하고 내가 회사에서 탈탈 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걸 모르겠어요. 분명 회사에서는 ‘아 오늘은 좀 괜찮은데’ 싶어도 일 다 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있고. 퇴근만 하면 눈도 못 뜨겠고. 요즘 ‘대충 살자’가 트렌드인데, 저는 어떻게 해야지 대충 사는 건지 자 체를 모르겠어요.

달팽이: 대학생 때 모습을 떠올리면 또 대충 사는 모습이 어떤 건지 기억나지 않으세요? 고은지: 대학 때는⋯. 대학 때도 열심히 살긴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는 아예 방향성 자체가 없으니까, 내가 어떻게 살지? 무엇이 중요하지?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이것도 공부하고 저것도 공부하고 활동도 다양 하게 해보는 식이었어요. 환경에 관심이 있으니까 환경 관련 활동도 해보고 뭐 광고에 관한 활동도 해보고, 뭐 내가 NGO 쪽에 관심이 있으니까 그것도 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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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러니까 그땐 너무 바쁘게 살았던 것 같아요. 하고 싶었던 것도 많고.

달팽이: 기본적으로 효율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삶을 살고 계시는데, 10년 뒤 에도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나요, 아니면 조금 더 여유롭고 일과 삶이 분리된 삶이면 좋겠나요? 고은지: 10년 후에는 제 사업을 하고 있겠죠?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기 위 해서 창업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내가 대표가 되고 싶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기 위해서 창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조금 더 여유롭지 않을까요? 전 저혈압이라 아침에 너무 힘들거든요. 일어나기도 힘들고 컨디션이 오후 돼야 지 좀 회복이 되고. 좀 내 스타일대로 나의 삶과 나의 바이오리듬에 맞게끔 살 고 싶어서 창업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달팽이: 그럼 이상적인 본인에게 이상적인 근무환경은 무엇인가요? 고은지: 한 11시쯤 출근해서 1시부터 밥 먹고, 그리고 한 6시에 퇴근하고. 하 하, 그렇게 살면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주 3일만 일하든가. 하루 8시간. 근데 하루 8시간도 너무 긴 것 같아요.

달팽이: 아까 듣기로는 회사에서 편의를 좀 봐주는 환경이라고 하셨는데. 고은지: 회사가 너무 바빴는데 제가 그거를 다 해치운 거죠. 그러다 보니까 건 강을 버린 거죠. 그래서 회사에서도 이제는 주 3일로 근무를 해도 괜찮다고 한 거예요. 예전에는 밤 12시 퇴근, 11시 퇴근 막 이러니까 아무래도 많이 건강이 악화되었죠. 제가 건강식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는데도 과로로 몸이 너무 망가졌어요. 그래서 회사에서도 배려를 해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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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몸이 회사 때문에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기분이 좀 어떠셨어 요? 고은지: 몸도 몸인데 나의 정서가⋯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게 된 거죠. 너무 신 경질적으로 변하고 너무 다 짜증이 나고 너무 화가 나고. 화병이 나서 간도 안 좋아지고. 원래 제가 손발도 차고 되게 차가운 체질이었는데도 바뀌더라고요. 또 예전에는 되게 밝고 친절한 편이었는데 점점 그런 모습이 사라지는 거예요. 내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게 되었다는 걸 깨닫고 위기의식이 들었죠. 여기서 멈춰야겠다, 그만둬야겠다.

달팽이: 이제는 원래 모습을 좀 찾으셨나요? 고은지: 네, 주3일 근무를 시작하고 한두 달 지나니까 다들 느껴요. 아직 완전 히는 아니지만 원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고 모두 느끼더라고요.

달팽이: 장기적인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고은지: 저는 여성 일용직 일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좀 괜찮으면서도 진입장벽 이 낮은. 왜냐하면 여자들이 일용직을 찾으면 별로 없거든요. 몸이 아픈 사람 들도 그렇고 취준생도 그렇고, 우울한 사람들도 그렇고, 일주일에 며칠만 일해 도 사실 생활비 정도는 나오거든요, 우리나라 최저임금에서. 근데 진짜 괜찮은 일용직 일자리는 없어요. 그래서 여성 일용직 일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 어요. 그런데 아직 아이템이 없어서 창업을 못 하고 있어요.

달팽이: 사회적인 영향력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고은지: 제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 게 커요. 일단 여성 차별도 많이 당했고, 몸이 아파봤고, 나 스스로가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 안 되는 마음의 상태도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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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봤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혈기왕성하고 원하는 대로 성취할 수 있었을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런 불편한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일자리라든지 사회적 혜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이 다시 자존감을 얻으려면 어떻게든 일을 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산다는 감 정을 느껴야 하는데, 그건 그냥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로는 안 되거든요. 그건 그들이 일을 할 수 있을 때, 스스로 돈을 벌어서 뭔가를 살 때 자연스럽게 느껴 지는 감정이에요.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여성들에게 진입 장벽이 높다고 생 각해요. 진입장벽이 없는 여성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요.

달팽이: 여성 차별 같은 경우는 어떤 걸 실감하셨나요? 고은지: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 남자들 위주의 환경인 게 많았어요. 제가 화약 관련 자격증을 땄을 때도 그랬고, 우리나라 일반 기업들에서도 가지고 있는 인 식들이 있고. 모든 것들이 다 너무 안 좋더라고요. 심지어 일용직 일자리를 검 색해봐도 남자들은 건설 현장 일용직 등 선택지가 많은데 여자는 다 술집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그곳에서 일하는 건 스스로 자존감을 더 깎아내리는 일이 고, 그런 곳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여성들에게 적합한 일자 리가 없어서 되게 답답함을 많이 느꼈어요.

달팽이: 생각하고 계신 창업 아이템은 어떤 것들인가요? 고은지: 아직 뚜렷한 아이템을 찾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일을 하기 위한 매뉴얼, 시스템 등을 만드는 일이에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해서 어떻게든 알아서 먹고살잖아요. 진입장 벽이 없는 일자리를 만든다는 건 그만큼 교육 수준이나 일 처리 능력이 높지 않 은 사람들이랑 일하겠다는 뜻이고 때로는 답답할 일이 많다는 뜻인데, 그걸 어 떻게 하나하나 극복할까가 저한테는 요즘 많이 이슈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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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그것에 대한 답을 찾으셨나요? 고은지: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한 상태지만,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소비자들을 끌어와야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회적기업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되도록 애 용하려고 하는 편인데, 얼마 전에는 성북구의 한 사회적 기업이 메일로 ‘저희 는 언어장애나 청각장애가 있는 분들이 일하고 있어서 전화상담이 어려우니 까 메일을 많이 이용해 주세요.’라고 아예 알림을 주더라고요. 실제로 제가 아 무 생각 없이 전화했을 때 언어가 어눌하신 분이 전화를 받길래 ‘아, 진짜 여기 는 사회적기업이라 전화상담이 어렵구나’ 생각이 들어서 천천히 말해드리긴 했어요. 근데 나중에 그 회사로부터 견적 메일을 받았는데 그런 알림이 적혀있 던 거죠. 이런 게 어떻게 보면 답답하고 불편한 것일 수 있는데도 그냥 ‘그럴 수 있겠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게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알림을 잘 하는 것, ‘우리는 어떤 회사다,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양해해 달라’ 이런 메시지를 친절하게 잘 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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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울특별시 청년공간 무중력지대 성북의 2019 커뮤니티학교 사업을 통해 제작되었습니다.





목표가 없다면 티 없이 바스라질 삶이었지만, 정작 목표는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한 것들이기 쉬웠다. 혜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을 뿐이야. 아주 많은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노력으로나마 바꾸어나가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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