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21 예핌 브론프만 피아노 리사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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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아라베스크 C장조, Op. 18

R. Schumann Arabeske in C Major, Op. 18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제3번 f단조, Op. 5

J. Brahms Piano Sonata No. 3 in f minor, Op. 5

Ⅰ. 알레그로 마에스토소ㅣAllegro maestoso

Ⅱ. 안단테 에스프레시보ㅣAndante espressivo Ⅲ. 스케르초. 알레그로 에네르지코 – 트리오ㅣScherzo. Allegro energico – Trio

Ⅳ. 인터메조. 안단테 몰토ㅣIntermezzo. Andante molto

Ⅴ. 피날레. 알레그로 모데라토 마 루바토ㅣFinale. Allegro moderato ma rubato

InTERMISSIOn

드뷔시 영상 제2권, L. 111 14’

C. Debussy Images Book No. 2, L. 111

Ⅰ. 잎새를 흐르는 종ㅣCloches à travers les feuilles

Ⅱ. 달은 황폐한 절에 걸려ㅣEt la lune descend sur le temple qui fut

Ⅲ. 금빛 물고기ㅣPoissons d’or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제7번 B♭장조, Op. 83 17’

S. Prokofiev Piano Sonata No. 7 in B♭ Major, Op. 83

Ⅰ. 알레그로 인퀴에토ㅣAllegro inquieto

Ⅱ. 안단테 칼로로소ㅣAndante caloroso

Ⅲ. 프레치피타토ㅣPrecipitato * 프로그램 및 순서는 연주자 사정에 의해

YefiM BRonfMAn

예핌 브론프만

예핌 브론프만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세계 유수의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지휘자 및 독주 시리즈에서 꾸준히 초청받고 있다. 그의 뛰어난 테크닉과 강력한 표현력, 그리고 탁월한 서정성은 전 세계 언론과 청중 모두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다.

2025/26 시즌은 베일, 탱글우드, 아스펜 페스티벌 무대를 거쳐 중국, 일본, 한국 등 아시아를 순회하는 리사이틀 및 오케스트라 투어로 시작한다. 유럽에서는 런던, 크리스티안산, 파리, 베를린, 암스테르담, 드레스덴 등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이스라엘 필하모닉과의 투어도 예정되어 있다. 또한 안네-소피 무터, 파블로 페란데스와 함께하는 트리오 프로젝트가 2025년 가을 스위 스,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북미에서는 뉴욕, 로체스터, 클리블랜드(마이애미 공연), 피츠버그, 캔자스시 티, 몬트리올 등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프라하, 밀라노, 뉴욕, 뉴포트, 비컨,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오렌 지카운티, 샬러츠빌, 토론토 등에서 리사이틀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브론프만은 다니엘 바렌보임,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세묜 비치코프, 리카르도 샤이,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구스타보 두다멜, 샤를 뒤투아, 다니엘레 가티, 발레리 게르기예프, 앨런 길버트,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안드리스 넬슨 스, 야닉 네제 세갱, 사이먼 래틀 경, 에사 페카 살로넨, 얍 판 츠베덴, 프란츠 벨저 뫼스트, 데이비드 진먼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긴밀히 협업해왔으며 유럽과 미국의 주요 음악 페스티벌에서도 정기적으로 연주하고 있다.

실내악에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브론프만은 핀커스 주커만, 마르타 아르헤리치, 막달레나 코제나, 안네-소피 무터, 에마뉘 엘 파위 등과 협연한 바 있으며, 1991년에는 이작 펄만과 함께 러시아 투어를 진행하며 이민 이후 처음으로 고국 무대에 섰다.

브론프만은 독주, 실내악, 협주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녹음 활동을 펼치며 지금까지 여섯 차례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고, 1997년에는 에사 페카 살로넨,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녹음한 바르톡 피아노 협주곡 전곡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주요 음 반으로는 엠마누엘 엑스와 함께한 라흐마니노프·브람스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집, 이스라엘 필하모닉 및 주빈 메타와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전곡, 주커만 체임버 플레이어스와의 슈베르트 / 모차르트, 디즈니 판타지아 2000 사운드트랙 등이 있다. 최근 발매된 음반으로는 앨런 길버트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한 린드베리 피아노 협주곡 2번, 마리스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 송 교향악단과의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 카네기홀 ‘Perspectives’ 시리즈와 연계된 독주 앨범, 데이비드 진먼과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및 삼중 협주곡 등이 있다.

그의 공연실황은 DVD등 여러 매체로 출시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는 빈 쇤브룬 궁전 실황의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프란츠 벨저 뫼스트 / 빈 필하모닉), 루체른 페스티벌에서의 베토벤 협주곡 5번(안드리스 넬슨스 /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라흐 마니노프 협주곡 3번(베를린 필하모닉 / 사이먼 래틀 경), 브람스 협주곡 전곡(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 벨저 뫼스트) 등이 있다.

소련 타슈켄트 출신인 브론프만은 1973년 가족과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해 텔 아비브 루빈 음악원에서 아리 바르디에게 사사했 으며, 이후 미국에서 줄리어드 음악원, 말보로 음악학교, 커티스 음악원에서 루돌프 피르쿠슈니, 레온 플라이셔, 루돌프 제르킨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미국 기악 연주자에게 수여되는

음악가는 손과 발 뿐만 아니라 머릿속 구석구석까지 움직여 크고 작은 여행을 다닌다. 때론 그 영혼의 방황이 지나친 인물도 있 지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헤매며 스스로 만든 질문에 자문자답하는 과정이 이어져야 약간의 성장이라도 이루어지는 예술의 속성 때문에 그 여행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성격을 지닌다.

연주자, 특히 피아니스트의 음악 세계를 다룰 때 그래서인지 내가 제일 많이 의식하는 부분은 ‘성장’과 ‘변화’다. 오늘의 연주에 서 무대의 그/그녀가 보여 준 것은 이미 과거일 뿐, 탁월한 모습의 인물일수록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 다음의 스텝과 방향이다.

예전의 가치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우면서 도약하듯 나아가는 연주자들의 활동은 이제 우리에게 낯설지 않으 며, 그 변화무쌍한 모습은 때로 음악가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아, 올해 67세의 연주자 예핌 브론프만의 스타일은 매우 특별하다.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로서 보일 수 있는 극과 극의 요소, 즉 물과 불처럼 양립하기 어려운 해석의 성향을 모두 드러내며, 변신의 모습을 계단을 밟아오르듯 하나씩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간 쌓아 올린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해가 갈수록 더욱 높은 완성도의 연주를 들려준다. 여기에 그가 받아 온 음악인으로서의 ‘엘리트 교육’은 중요한 화두이자 변수가 될 것이다. 유대계 음악인들의 파워와 그곳에서 나오는 혜택을 어린 시절부터 얻었고, 그 결과로 부침없는 캐리어를 유지하고 있는 연주자로서는 드물게, 스스로 만들어내는 변신의 모양들이 매우 다채롭기에 청중들이 느끼는 그 변화의 폭은 더욱 크다.

브론프만의 피아니즘을 평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지적인 컨트롤에 능하고,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을 본 능적으로 타고난 연주자’라는 평가다. 18세 때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과 만나 주목받기 시작하고, 20세에 뉴욕 필과 협연, 23세에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독주회를 열었던 놀라운 천재가 지닌 탁월함은 인정할 만하지만, 그가 미국이 아닌 소련, 그것도 당시로서는 매우 변방이랄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출신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면 다소 이질적인 프로필에 놀라 게 된다. 당시 이 지역 출신이라면 중요한 콩쿠르를 정복해 스타가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매우 독특한 풍모와 성장 스토리를 지 닌 채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기 때문이다. 브론프만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데, 이렇게 보면 그의 설득력 있는 해석과 보편타당한 음악성은 애초부터 로컬한 이미지보다는 코스모폴리탄적 특성을 품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참으로 반갑게 만나는 이번 독주회의 프로그램은 그의 주요

모두 품고 있기에 더욱 특별하다. 부드러움 속에 무 한한 판타지와 독자적인 상상력을 숨겨 놓은 슈만의 보석같은 ‘아라베스크’가 의미있는 음악회의 서두를 장식한다. 대형 피아 니스트의 면모 속에 소중하게 보관돼 있는 브론프만의 여리고 섬세한 감성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데뷔 시절부터 늘 함께 해 온 대표 레퍼토리,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이 뒤를 잇는다. 화려하지만 들뜨지 않고 세련된 느낌을 유지하는 특유의 피아 노 음향과, 어느 한 곳도 메마르거나 단조로운 표현에 그치지 않고 윤기 있는 뉘앙스를 남기는 대가의 모습이 브람스의 거대한 초기작을 통해 드러날 예정이다.

드뷔시의 히트작이자 매우 함축적으로 인상주의를 설명하고 있는 영상 2권의 세 곡에 대한 해석도 관심거리다. 악기가 지닌 고 유의 음색을 많이 거스르지 않고 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이미지를 꼼꼼하게 그려내는 브론프만의 자세는 어떨지 궁금하다. 대미 를 장식하는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7번은 그야말로 현재의 브론프만을 있게 만든 대표작이다. 풍성한 양감을 마음껏 뿜어내 는 브론프만의 피아니즘이 순간적으로 얼마나 날카로워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곡가가 프로코피예프라고 하겠다. 아울

러 텍스트를 통해 드러나는 우울감과 분노, 전위적인 화성과 도발적인 리듬 등에서 브론프만이 지닌 기교적 능력들이 모두 발 휘될 것이라 기대되기도 한다.

거대하고 무거운 악기 피아노는 무대 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잘 움직이지 않지만, 겉모습의 검은색을 벗어나 무한한 색채감을 발산하는 존재다. 우리 곁에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믿음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브론프만 역시 자신이 다루는 악기처럼 쉬 지 않고 위대한 거장의 위치를 향한 탈바꿈을 거듭하는 중이다. 무대에서 함께 호흡하며 귀한 변화의 순간을 지켜보기 바란다. 글ㅣ김주영 (서울사이버대학교 피아노과 교수)

슈만ᅵ아라베스크 C장조,

Op. 18

R. SchumannᅵArabeske in C Major, Op. 18

문학성과 상상력의 이상적인 집약체가 슈만의 피아노 곡이지만, 작품번호 18번의 ‘아라베스크’는 사랑스러움과 몽환적인 분위기 에서 같은 시기(1839년) 발표된 작품 가운데 으뜸이다. 전곡은 다섯 부분과 코다로 나뉘어져 있으며, 달콤함과 멜랑콜리가 교차된 다. ‘아랍 풍의 넝쿨무늬’라는 뜻의 아라베스크는 작곡가 특유의 미로같은 텍스트로 설명될 수 있으나, 슈만이 스스로 체험했을 환 상의 세계는 오직 음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으뜸조는 C장조이며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4분의 2박자의 첫 부분은 ‘경쾌하게 그리고 부드럽게’라는 지시어로 지속적 인 부점 리듬과 기분 좋은 혼란스러움으로 진행의 원동력으로 삼는 작곡가 특유의 서법이 나타난다. 두 번째 부분은 ‘단조 1’로서 e 단조다. 조금 느려진 템포로 약간의 센티멘탈을 노래한다. 양손의 두 성부가 유니즌으로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숨은 정열이 느껴진 다. 세 번째 부분은 첫 부분의 단순한 반복이며, 네 번째 부분은 ‘단조 2’로 슬픔과 그리움의 정서가 앞의 단조 섹션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모티브의 시작은 전곡의 시작에 나오는 모양과 흡사해서 재미있다. 다시 첫 섹션의 재현이 다섯 번째 부분을 차지한 후 등장하는 코다는 윗 성분의 긴 선율이 공명을 이루는 동시에 의미심장한 아르페지오들이 반주를 맡는 구성이다. 그윽한 환상이 피 아노 사운드를 감싸고 돌며, 그 향기는 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남는다.

브람스ᅵ피아노 소나타 제3번 f단조, Op. 5

J. BrahmsᅵPiano Sonata No. 3 in f minor, Op. 5

누군가의 개성이나 스타일을 좋아하고 따르려는 성향은 후천적인 선택과 노력으로도 만들어지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기질의 공통 점에서 오는 운명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가령 브람스가 베토벤의 세계에서 가장 존경했던 부분이 오케스트레이션, 혹은 관현악의 아이디어를 피아노 작품과 공유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는 어느 정도 브람스의 타고난 천분과도 맞닿아 있 다. 그렇지 않고는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상상조차 어려운 거대한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을 내놓을 수 있는 브람스의 능력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이 곡들에도 위대한 악성 베토벤의 그림자가 멋지게 드리워져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브람스의 나이 열 아홉 살이던 1852년부터 이듬해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은 피아니스트로서 왕성히 활동하 던 젊은이의 정열과 폭넓은 구상, 건반의 한계를 뛰어넘어 관현악적 색채를 구사하려는 실험정신 등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모티브 의 차용과 발전 방식, 절정과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베토벤의 길을 따르려는 의도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작곡가로서 자신의 목소리 와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1번, 2번과 거의 같은 시기에 착수되었지만 완성도 면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인 세 번째 소나타 f단조는 그런 면에서 브람스의 개성 이 오롯이 드러난 첫 번째 피아노곡이다. 앞의 두 곡에서 나타난 다소의 시행착오나 과잉의욕 등은 이 곡에서는 깔끔하게 다듬어져 나타나며, 기존의 네 악장 구성에 간주곡이 추가된 대곡임에도 악장 간의 균형과 비례 역시 훌륭하다. 전곡이 완성된 것은 1853년 10월, 당시 슈만이 살고 있던 뒤셀도르프에서였으며, 출판은 이듬해 2월 라이프치히에서 이루어졌다. 아울러 부분 초연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라 슈만의 연주는 1854년 10월이었으며 이 때는 2악장과 3악장만 소개되었다.

1악장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의 폭발적인 시작은 장대한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연상시킨다. 1주제의 뒷부분은 부드러운 6도 진행의 c단조이며, A♭장조로 제시되는 2주제는 여유로운 물결의 움직임이 연상되는 반주가 함께 한다. 발전부는 1주제를 중심으로 진행 되나 다양한 조옮김이 이루어지며, 재현부의 2주제는 F장조로 한층 밝은 모습이다. 코다에서 보여주는 양 손의 넓은 테시투라는 브 람스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스케일이다.

작곡가 스스로 독립된 작품의 개념을 지니고 있었던 2악장 안단테 에스프레시보는 슈테르나우의 시 ‘젊은 날의 사랑’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달그림자 속에 포옹하는 남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다. 긴 호흡의 느린 악장의 구성은 대규모의 종결부가 갖춰진 복합 3부 형식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동경에 찬 첫 부분은 A♭장조이며, 은근한 기쁨과 사랑이 담겨 있는 두 번째 부분은 D♭장조다. 셋잇단음표를 포함해 복잡한 반주 음형이 더해진 첫 부분이 인상적인 변화를 보이며 재등장하고, 그 후 수줍지만 깊은 감동을 숨기 고

새로운 멜로디의 코다가 시작하는데, 여리게 시작해 포르티시시모에 이르는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고 조용히 마무리된다.

스케르초에 해당되는 3악장 알레그로 에네르지코는 무거우면서도 강한 리듬감을 표현해야 하는 난곡으로, 거칠고 도약이 심한 멜 로디가 큰 스케일을 형성해 가며 발전한다. 밀어붙이듯 진행되는 악상과 아르페지오, 옥타브 진행 등이 기교적 어려움을 선사한다. 코랄풍의 주제를 지닌 트리오 D♭장조는 차분하여 흥분을 가라앉히지만 이내 첫 부분의 혼란이 찾아와 강렬한 마무리를 한다. 이어 지는 안단테 몰토의 인터메조는 작곡가 스스로 ‘회고’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는데, 리스트를 방문한 후 라인강변을 도보로 여행할 때 받은 감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악장 첫 주제와 유사하나 어딘지 쓸쓸함이 감도는 하행모티브는 팀파니의 리듬을 흉내 낸

왼손의 특징적인 반주와 함께 독특한 인상을 준다.

알레그로 모데라토 마 루바토의 지시어인 피날레는 뒷부분이 생략된 자유로운 론도 형식이다. 8분의 6박자인 첫 부분은 무거운 춤 곡의 분위기인데, 싱코페이션을 다루는 방법이 세련되게 나타난다. F장조의 두 번째 부분은 온화한 멜로디와 부드러운 파도가 연 상되는 반주 음형이 어우러진다. 중간부는 D♭장조의 코랄로, 이내 흥미로운 돌림노래로 발전하며 텍스트를 키워간다. 화려하게 변 형된 첫 부분이 지나고 나타나는 피우 모소의 코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악장을 이룰 만큼 큰 구성이다. 주된 재료는 중간부 코랄 시 작 부분의 네 개의 음이며, 이를 대위법적으로 발전시켜 놀라운 클라이맥스를 이뤄낸다. 흥분이 극에 달해 나타나는 프레스토에서 는 젊은 브람스가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비르투오시티가 펼쳐진다.

드뷔시ᅵ영상 제2권, L. 111

C. DebussyᅵImages Book No. 2, L. 111

피아노곡으로 출발한 드뷔시의 인상주의를 잘 설명해주는 작품들 중 첫 손에 꼽아야 할 곡은 역시 ‘영상’ 시리즈다. 각각 1905년과 1907년에 만들어진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소재의 묘사와 작곡가의 기분을 동시에 묘사하는 수법을 성공적으로 녹여낸 최초의 걸 작이다. 드뷔시 자신이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이 곡들은 슈만의 왼쪽, 쇼팽의 오른쪽에 자리할 것입니다”라는 자신감을 보였다. 각 곡집은 세 곡씩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 제2권에 실린 세 곡은 솔직담백한 정서가 두드러졌던 1권의 착상을 조금 더 미학적으로 심 화시킨 느낌과 음의 추상적인 표출이 더욱 두드러진다. 촉각을 포함한 오감을 매우 예민하게 표현한 1곡 ‘잎새를 흐르는 종’, 2곡 ‘달은 황폐한 절에 걸려’는 명상풍의 멜로디와 동양풍의 정서가 긴 여운을 남긴다. 3곡은 프랑스적 비르투오시티의 극치인 ‘금빛 물 고기’다. ‘금붕어’로 이름 붙이지 않아 더욱 특별한데, 드뷔시가 영감을 얻은 쟁반 속 그림의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며 자유롭 게 노는 모습을 밝은 분위기로 그리고 있다.

프로코피예프ᅵ피아노 소나타 제7번 B♭장조, Op. 83

S. ProkofievᅵPiano Sonata No. 7 in B♭ Major, Op. 83

1936년 5월부터 가족과 고향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며 제2의 전성기를 꿈꿨던 프로코피예프가 간과한 것은 ‘예술적 자유’에 관한 부분이었다. 러시아에 살면서도 서유럽에 여행을 다니거나 외국에서의 연주 등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프로코피예프는 1936년과 1938년 두 번의 연주 여행 외에 소련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불굴의 의지를 지녔던, 그 중에서도 음악에 있 어서 더욱 그랬던 프로코피예프는 스탈린의 철권통치와 끊임없는 반목을 거듭했으나 결코 자신의 순수음악적 가치를 놓치지 않 고 ‘건강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어지러운 유럽의 정세와 결국 터져버린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피아니즘은 새로운 원군을 만 나기도 했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39년부터 창작이 시작된 피아노 소나타 6번, 7번, 8번은 ‘전쟁 소나타’라는 별칭으 로 불리는데, 프로코피예프의 원숙함이 건강한 에너지를 통해 최고의 빛을 발한 시기에 가장 믿음직스런 대변자는 피아니스트 스 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였다. 명교사 겐리흐 네이가우스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무뚝뚝하고 과묵한 성격이 처음부터 잘 맞았고, 이 공동작업은 20세기 러시아 피아니즘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프로젝트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소나타 6번의 최초 연주자는 프 로코피예프 자신이었고, 8번의 초연자는 에밀 길렐스였지만, 훗날 ‘철의 장막’ 뒤에 숨어있던 리흐테르가 서방 세계에 등장해 던 진 놀라움 가운데 프로코피예프의 탁월한 작품들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39년에 잇달아 착수되어 1944년까지 씌어진 피아노를 위한 전쟁 소나타 중 가운데 들어있는 7번은 가장 작은 규모지만 작 곡가의 어법이 함축적이고 균형있게 배분된 구성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다분히 메카닉한 악상으로 전쟁을 겪는 인간군상들 의 불안정한 심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 하며, 강렬한 불협화음을 통해 기계문명에 대한 차가운 비판을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알레 그로 인퀴에토의 지시어를 지닌 1악장은 말 그대로 불안함을 가득 안은 악상으로 시작한다.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을 띄고 있음 에도 뒤틀린 화성과 불규칙한 프레이즈들 때문에 형식을 조소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거칠고 도발적인 1주제, 서정적이면서 음 울한 2주제를 거쳐 전개부에서는 이 모든 요소들이 건반 위에서 폭발한다. 2악장 안단테 칼로로소는 고요하고 슬푼 분위기가 지

배적이나 여기서도 터져 나오는 울분의 감성이 가장 큰 인상을 남긴다. 슈만의 가곡을 연상케하는 서정적 멜로디가 도입에 등장 하며, 이내 반음계적인 흐름과 대위법이 동반돼 복잡해진다.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는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화음의 반복인데, 죽 은 이를 위한 장송 행진을 떠오르게 한다. 3악장은 ‘프레치피타토’라는 지시어로, 역시 안정되지 못하고 흥분되는 감정을 나타낸 다. 카프카스 지역 무곡 리듬에서 착안한 것으로 알려진 8분의 7박자 리듬의 토카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며 점차 그 격렬함을 더해간다. 숨이 멈출 것 같은 격렬함과 짜릿한 쾌감이 공존하는 마지막 절정은 포탄과 총알이 오고가 는 치열한 전투의 모습과 닮아있다. 글ㅣ김주영 (서울사이버대학교 피아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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