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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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의 기록자 인터뷰집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기록가와 북구의 기록자가 만나 서 로 연결되는 과정

이음북구 기록가

북구의 문화(인문), 생태, 예술, 역사 등 다양 한 방면을 기록하는 시민. ‘더할 가(加)’를 써 서 기록을 더하고, 이음을 뜻한다.

북구의 기록자 북구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했거나, 하고 있는 기록자들. 다양한 주제와 방식으로 기록을 남 기고 만들며 공유하는 사람들을 찾았다.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의 기록자 인터뷰집

contents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들어가는 글

구포

김도경 8 김민선 18 문봉규 32 신미영 42 이외철 52 이은호 62 임종근 70 정영미 76 초등교사연구회 86

금곡 방한나 98 이수재 108 이현호 118

덕천

만덕

김정곤 130 박찬석 142 최진식 154

곽종영 166 김성연 178 문난이 188 서주열 200 이언옥 210 전상규 224 정신모 236 최기봉 246

화명 강호열 김지연 258 구민진 구민서 270 김부련 282 박혜수 296 백복주 308 장소라 322 황기철 332

북구, 기록으로 연결되다

우리 동네에 그런 게 있었다고? 옛 모습이 궁금해!

도시는 변화하고 있다. 늘 보는 풍경 같아 보이지만 잠시 멈추어 돌이켜보

면 나의 기억과는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다름의 재미도 잠시 변해버린 과거의 흔적에 대해 아쉬움도 든다. 이러한 마음을 달래고자 <2022 북구

문화도시 예비사업: 시민 기획 도시아카이브>에서는 우리 삶의 터전인 북 구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이미 도시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음을 깨달았고, 이들이 궁금해졌다. 우선 자신만의 방식으로 북구의 역사, 마을, 공동체 등을 기록한 도서간 행물들과 ‘북구의 기록자’를 찾았다. 주제와 형태에 차이는 있지만 딱 하 나 공통점이 있었다.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 시민기획단은 이미 기록자가 존재하고 있고, 누구나 기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기록자 간의 연결과 서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도 시아카이브를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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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올해는 기록자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라는 주제로 기록자 인터뷰를 기획했다. 기록을 통해 사람이 이어지고 그 과정을 다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이음북구 기록가’는 기존의 기 록자를 인터뷰하며, 도시를 기록하는 활동의 의미와 어떤 기록들이 만들 어지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1시간의 대화는 북구에서 기록 활동 을 하는 서로를 알아가고 기록의 중요성을 함께 공감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 책은 23명의 이음북구 기록가와 2명의 빨간집 기록활동가가 북구의 기록자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결과물이다. 30명의 기록자는 왜 기록 활동을 시작했고, 어떤 기록을 어떻게 만들고 나누고 있는지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기록은 전문 지식이나 기술이 아닌 ‘도시를 기 록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졌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북구의 기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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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7 구포 김도경 김민선 문봉규 신미영 이외철 이은호 임종근 정영미 초등교사연구회 구 포
토속민요 가사에 북구의 역사와 이야기가 있으니 그 자체가 전부 자료예요
김도경 국악인

#예술로기록 #국악 #북구역사

김도경 님은 북구에서만 43년째 거주하고

계신 북구 토박이 국악인이며, 낙동국악

예술원을 운영하고 있다. 북구, 특히 구포

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구포 토속민

요를 발굴하고 창작민요를 만들어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2021년에 토속민요와

창작민요 15곡을 담은 음반을 냈고, 올해

17곡으로 2집 앨범을 냈는데, 2집에는 가

사만 전해져 오는 토속민요에 곡을 붙인 대

여섯 곡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북구의

역사적인 노래들이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자

료를 수집했다고 한다. 토속민요의 가사가

전부 귀중한 자료이며, 전국에 많은 아리

랑이 있지만, 「구포아리랑」에는 특이한 가

사들이 있어서 많이 알려지고 불렸으면 좋

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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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시며 북구에서는 몇 년간 거주하셨습니까?

고향은 김해인데 북구에 정착하기 전에도 이모가 여기 사셨기 때문에 북 구에 왕래를 많이 했어요. 북구에는 43년째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국악인의 길을 걸으셨습니까?

87년도, 한 20대 후반부터 시작했어요. 특별하게 ‘언제 해야겠다.’ 이런 건 아니고 어릴 때 엄마가 장구 치고 노래하고 하는 걸 많이 들으면서 컸기 때 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계기가 되더라고요. 풍물, 민요 소리 이런 걸 옛날 부터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됐었죠.

어떤 단체 활동을 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낙동국악예술원은 제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단체예요. 그리고 구포대리

지신밟기 보존회(옛 낙동민속보존회) 창설 멤버입니다. 몇십 년 동안 지신

밟기 하면서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고, 북구 민속예술연합회 회장직

을 5년째 맡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구포에 관한 노래로 「구포아리랑」, 「구포국수」, 「재칩 국」 등의 많은 창작곡을 발표하셨는데, 지금까지 발굴하거나 발표 한 노래는 몇 곡이나 되나요? 작년에 토속 창작민요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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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15곡을 냈고 올해 17곡을 음반 2집으로 냈습니다. 17곡 중에서 토속민요도 있는데 제가 가사만
는 것에 곡을 붙였고,
게 한
정도 되고
하기도
1집으로
창작한
5곡
그렇습니다. 자료를 참고
했고, 창작곡의 경우 제가 북구에 오랫동안 살다 보니까 몸소 겪었

던 거, 예를 들면 재첩 잡는 것, 구포국수, 옛날에 옥상이나 마당에서 대나

무에 국수 많이 걸고 했잖아요. 그런 걸 자연스럽게 노래로 만들게 됐죠.

1집하고 2집은 전혀 다른 내용입니까?

같은 것도 있고 몇 곡 더 포함된 것도 있어요. 같은 내용인데 약간 업그레

이드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구포를 소재로 한 노래를 만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제가 옛날부터 북구에서 국악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소리에도 관심이 많

았어요. 북구의 역사적인 노래들도 있을 거라고 항상 생각하고 낙동문화

원에 있는 자료, 제가 수집한 자료들, 그런 걸 갖고 있으면서 관심이 많았

었어요. 몇 년 전에 코로나로 모둠북이나 악기 수업을 못 하면서 자연스럽 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됐었어요. 하나씩 자료를 찾아내다 보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던 노래들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곡은 없었어요. 그렇게 가사에 곡 을 붙이는 걸 코로나 시기에 했으니까 한 몇 년 됐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만덕동의 「빼빼 영감」, 「야시고개」 같은 곡을 창작하게 됐죠. 이때까지 창작하셨던 것 중에서 소개해 주고 싶으신 노래나 구포 에 관련된 자료가 있나요? 토속민요 가사 자체가 전부 자료거든요. 북구의 역사이고, 이야기니까요. 특히나 전국에 아리랑이 많지만 「구포아리랑」 같은 경우에는 특이한 가 사들이 있어서 많이 불렀으면 좋겠어요. 1집에는 중모리로 곡을 붙였는 데, 2집에는 세마치로 좀 신나게 곡을 붙였어요. 또 「구포국수」, 「재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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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빼 영감」, 「야시고개」, 「구포 회향가」 가사가 다 진짜 괜찮아요. 구포 선 상 노래가 옛날에 불렸던 게 1절만 남아 있어서 제가 2절 가사를 붙이기도 했어요. 다 괜찮아요. 버릴 게 없습니다. 창작 활동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으신가요?

우리 북구문화해설사 선생님들, 특히 박찬석, 김정곤 해설사님께서 많이 도와주시고, 가사가 있으면 또 찾아주셨죠. 아무래도 주위 분들이 자료 라든지 그런 도움을 많이 주셨지요. 또 북구문화예술플팻폼 문봉규 작 가님이 구포국수 노래를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주셨고 그게 계 기가 되어 몇 곡의 노래들을 더 창작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힘이 되어준 사 람은 옆지기 박소산 샘이겠죠. 저는 더 빨리 이런 일을 못 한 게 조금 안타 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요를 불렀던 어른들이 살아 계실 때 그런 작업 을 안 해서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고 아쉬움이 있습니다. 재정 때문에 어려웠던 적이 있는지, 또는 지자체에서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시스템은 있나요?

재정적으로는 당연히 어렵지요. 코로나 때문에 수업도 다 끊어졌으니까. 어려우면서도 작업하는 데는 돈이 들어가거나 이런 건 아니었고, 재정적 으로 어려운 건 저뿐만 아니고 예술을 하는 사람 다 어려웠을 테고요. 옛 날부터 국악 하면서 지자체에 제가 바라거나 도움을 받으려고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큰 도움은 없었는데, 구청에서도 조금씩 도움을 주셨어요. 작년에 음반 1집은 구포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의 신미영 국장님도 많이 도와주시고 그래서 문화재단 사업을 하면서 음반 낼 때 도움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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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2집을 만들면서 도움 없이 제가 다 했습니다. 작년에 500장을 만 들어서 거의 다 뿌렸어요. 올해에는 1,000장을 만들어서 선물로도 드리 고 공연할 때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노래들의 보급과 홍보를 위해서 별도로 생각하고 계신 것이나 구 상하고 있는 거는 있습니까? 북구 자체에서 전시관을 만들어서 토속민요를 아무나 들을 수 있고, 체험 할 수 있고, 이런 게 제 바람이에요. 제가 그런 공간을 만들려고 하는데, 지금 공간을 2층으로 옮겨서 구포 토속민요 체험 전시관을 겸해 오픈식을 준비 중입니다. 많은 사람이 구포의 소리를 체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어떤 공연을 하고 계시나요? 해마다 단오맞이 행사가 있고, 구포대리지신밟기 발표회 있고요. 제가 이 번에는 처음으로 토속민요로 마당극을 만들었어요. 시나리오를 짜서 <구 포아지매뎐> 마당극을 크게 했습니다. 아이들도 참여하고 장애를 가진 분 도 참여하고 일반인도 다 참여해서 많은 인원이 참가했어요. 예술원에서 처음 토속민요 할 때는 한 1년 동안 거리 공연을 했어요. 거리 공연하면서 모금한 돈으로 북구에 소년, 소녀 가장들을 도왔어요. 지금도 계속하려 고 하고 있고 토속민요와 관련해서 공연을 많이 하고 있어요. 멀리까지 갈 때는 경비가 더 들 때도 많지요. 그래도 뜻깊은 일을 하고 있어요. 위령제 휴전선 별곡이라든지 안산에 6.25를 겪으신 노인 분들이 통일을 바라는 마음에서 프로젝트로 하는 그런 데는 가서 해드려야 되잖아요. 그런 아 픔이 있는 곳, 뜻깊은 곳은 돈을 들여가면서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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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는 선생님에게 어떤 동네입니까?

구포에 오래 살면서 구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했었어요. 국악 활동을 하면서 힘들 때는 가끔 ‘내가 북구에서 왜 이렇게 살고 있나.’ 그 런 생각이 들었는데 제가 토속민요를 하게 되면서 북구는 절대 떠나면 안 되는 곳이고 구포는 구석구석 역사가 깊은 곳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구포 에 역사적인 일들이 많았는데 그걸 사람들이 너무 못 살려내고 못 만들어 간다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래에 북구가 조금 활성화된 게 저는 몇 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제 뭔가 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보이 고 저도 토속민요를 하면서 북구가 살아있다, 구포가 살아있다는 그런 느 낌도 들었어요. 구포에 끄집어내서 만들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 북구 구포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좋습니다.

예술 활동과 관련하여 북구 주민이나 북구청 담당자분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가요?

제가 찾아내서 곡 붙이고 창작도 하고 하지만 저는 제 일이 아니고 북구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북구의 지자체라든지 북구 시민들이 다 같이 함 께 참여하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 북구뿐만 아니고 전국의 모든 토속민요가 자꾸 사라져 가고 없잖아요. 옛날 토속민요를 찾아서 뭔 가 하려고 하는 사람이 요즘에는 없거든요. 하동이나 이런 데는 문화원에 서 뜻깊은 일이라고 해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줘요. 이런 일들을 누군가 는 해야 하잖아요. 지금은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우리 소리가 점 점 없어지고 있는데, 누군가 사비라도 들여서 이렇게 해놓으면 나중에 다 뜻깊은 일이에요. 그런 걸 나 몰라라 하고 등한시한다면 좀 안타까운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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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에 <우리 소리 박물관>이라고 토속민요를 들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그런 게 하나 있으면 참 좋겠어요. 그렇 게 우리 북구의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국악 활동을 포함하여 앞으로 북구에는 어떤 기록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북구의 기록들이 많지요. 예를 들면 선착장, 흔적만 남아 있는 나루 그런 것들을 살려서 기록하면 좋겠고, 덕천초등학교 앞이 옛날에 미나리꽝이 었어요. 그런 것들도 어찌 보면 다 역사라고 생각하고요. 옛날에는 여기 고가도로 있었잖아요. 그런 옛날 사진들이 없어지기 전에 기록으로 모으 면 좋겠어요. 옛날에 계전 그 옆에 소전거리라고 있잖아요. 장날 되면 소 를 끌고 가서 팔고 하는 그런 역사적인 사진들을 찾아내서 북구에 있었던 일들과 사진들도 전시하고 또 우리 북구의 민요, 소리도 다 포함해서 박

물관이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북구 <도시아카이브>를 만들고자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카 이브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북구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 이 들거든요. 이렇게 자꾸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진짜 문 화도시를 제대로 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화도시, 문화도시 하는데 진짜 문화도시를 생각하는지 약간 의아할 때도 있고 물론 신세 대도 좋지만 오래된 그런 일들을 가지고 북구의 문화도시를 만들어갔으 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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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북구 기록가 민정식 30여 년간 금융기관에서 근무하다가 3년 전에 퇴직하고

지금은 취미생활과 더불어 시민기획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화명동 사는 민정식입니다. 우연히 김도경 님의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구포를 소재로 한 곡에 흥미를 느꼈다. 인터뷰에서 43년째 북구를 지킨 토박이며 국악인으로서 전통을 이 어 나가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한 개인이 자기 고장을 위해서 저렇게도 헌신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인터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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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이 나오는 순간은 아이를 낳은 것처럼 가슴이 뛰는 순간이에요
김민선 구포초등학교 학부모회

#교육자료 #북구역사 #기록활동

김민선 님은 행복하고, 뛰어놀 수 있고, 아

이를 기다려 줄 수 있는 교육환경에서 아이

들이 자랐으면 하는 바람으로 8년 전 혁신

학교인 구포초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사

왔다. 학부모들이 마을에 대해 기록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한 선생님의 권유로 마을

지도인 『구포여지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학내 일

제 잔재를 알아보는 활동을 담은 리플렛

『구포의 봄』을 만들기도 했다. 활동의 결과 물이 인쇄되어 나오면 가슴이 뛰고, 이를 공유하고 나눌 때면 공동체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 보람되다고 한다. 아이가 졸업하더

라도 학부모들의 움직임, 주체적인 활동과 계획, 기록들이 이어질 것 같아서 뿌듯하 다고 했고, 북구와 구포 곳곳의 골목과 사

람의 흔적, 정취가 기록으로 남겨지면 좋겠

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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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의 이름은 김민선이고요. 양정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양정이라도 거제4 동 찻길 건너이고 7살 때부터는 거제2동에 살아서 거제동이 제 고향이라 고 생각하고 있어요. 북구 쪽은 원래 살던 데랑 많이 떨어져 있기도 해서 낯선 곳인데, 아이 교육 때문에 구포에 자리 잡고 산 지가 8년 정도 되었어 요. ‘부산학부모연대’라는 학부모 시민단체 쪽에 몸담아서 학교나 마을에 서 교육 운동을 하다가 2, 3년 전부터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요즘 은 동화 쓰는 걸 배우면서 초보 동화작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다른 지역에 비해 북구에 교육인프라가 적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 는데 왜 구포로 오게 되셨을까요?

제가 살고 있던 데가 연제구 쪽이었거든요. 보통 교육을 위해 그쪽으로 이 사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가 생각하는 교육 방향과는 안 맞았어요. 아 이들이 행복하고 뛰어놀 수 있으면서 기다려줄 줄 아는 교육이 되었으면 했는데, 너무 경쟁이 치열하고 성적 위주로 아이를 줄 세우는 교육이 지 나쳤었거든요. 마침 북구에서 구포초등학교와 만덕고등학교가 혁신학교 로 시작을 했었어요. 그래서 북구로 오게 되었고 구포초등학교에 아이들 이 다니고 있어요. 기록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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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초등학교에
와서 선생님들이 하시는 활동을 보니 너무 좋은 게 많았 어요. 아이들이 마을을 알아가는 교육, 그게 마음에 드는 거예요. 처음에 는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아이들 데리고 구포시장 다니고 구포1동 주

민센터 가고 하길래 ‘왜 굳이 수업 시간을 빼서 저렇게 애들을 밖에 데리 고 다니시지.’라고 학부모들이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 안에 엄청난 배움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마을 나들이 너무 좋더라 했더니 “어머니, 어머니들은 마을에 있는 것들을 기록해주세요. 마을의 어르신 들이 돌아가시고 있는데 해가 바뀔 때마다 마을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거 예요. 특히 구포처럼 역사가 깊은 곳은 사라지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 러셨어요. 처음엔 그 말이 너무 어려웠어요. 뭘 하란 말이지 싶었거든요. 그게 마음의 숙제로 남아있다가 마을 지도가 있으면 아이들이 마을 나들 이 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엄마들하고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어 요. 그 안에 구포의 역사도 담고 문화도 담고 하다 보니 구체적으로 다른 것도 만들어보자 그래서 리플렛 4종류가 만들어졌어요. 지도도 만들고

구포의 역사문화가 담긴 리플렛도 만들고 구포 독립운동가에 대한 리플 렛도 만들어 알리면서 이렇게 자료들이 남게 되었어요. 『구포여지도』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구포여지도』는 구포의 관공서나 시설, 역사문화 공간 위주로 표기한 지 도거든요. 뒷면에는 설명을 담았는데, 구포동의 역사, 인물, 그리고 현재의 문화를 담았어요. 낙동민속예술제, 대보름에 어떤 행사를 하는지 이런 것 들이죠. 그리고 구포에 훌륭한 불화를 그리는 장인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남겼어요. 구포동 당숲은 표지판도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고 마을을 지켜 주는 나무여서, 분명히 초록으로 우거진 큰 팽나무일 거라고 생각하고 사 진을 찍으러 갔는데 새카맣게 말라 죽어 있는 거예요. 안타까웠죠. 어떻 게 하다가 이 나무가 죽었을까 했는데 토양이 오염되어서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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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추측하시더라고요. 지도에는 푸른 나무의 모습을 넣을까, 가지만 앙

상하게 남은 현재 모습을 넣을까 고민했었어요. 현재를 담자고 했고, 그러 면 ‘우리 주민들도 각성할 것이다.’ 생각했어요. 구포초 학부모회에서 먼저 시작은 했지만, 우리끼리 하는 것보다 인근 학부모들까지 최대한 모아서 하는 게 좋겠다 해서 구포2동, 3동, 신천초, 포천초, 구남중 학부모까지 함 께 참여했어요. 지도 뒤에 보면 참여한 일곱 학교의 이름이 나와 있어요. 『구포여지도』는 어떻게 활용이 되었나요?

3학년 교육과정에 활용되기도 하고, 신문에 기사도 났었어요. 학부모들 이 이렇게 지도를 만든 사례가 드물다고 알려졌고, 부산대학교의 지리교 육학과 교수님이 연락해서 가져가시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구포지역의 초

등학교, 같이 참여했던 인근의 학부모들 위주로 나눠줬거든요. 나중에는 북구 관내 학교에 다 배포했어요.

『구포여지도』를 만들고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지도를 완성하고 나니 없어지는 게 생기고, 새로 생기는 게 또 있는 거예 요. 김찬동 가옥이라고 적산가옥이 있거든요. 일제 강점기 팔작지붕을 아 주 멋들어지게 만들고 보존도 잘 되었고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서 검색하면 나오는 곳이에요. 김찬동 가옥의 소유주분께서 절대 언론에 모 습을 안 드러내시는 거예요. 촬영도 못 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사진은 못 찍고 검색한 것을 넣었는데, 지도를 만들고 나서 좀 있다 파셨어요. 지금 은 거기에 병원이 들어섰거든요. 옛날에 이런 가옥이 있었다는 기록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구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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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의 봄』이라는 기록물은 무엇인가요?

2019년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3.1운동 100주년이었던 해였어 요. 구포초는 역사가 105년 정도 된 유서 깊은 학교고, 우리 학교다운 무 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보통 100주년이라고 하면 들 썩들썩 1년 내내 축제를 열 텐데, 우리나라는 조용하다, 아직 일제 잔재에 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많이 있으니 그것을 찾아보자고 했죠. 사업공모를 따내서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님을 모시고 학생과 선생님도 같 이 연수를 들었어요. 학교에 일제 잔재로 남아있는 걸 알게 되었고, 이걸 기록으로 남길 필요도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나온 게 『구포의 봄』이라는

리플렛이거든요. 구포초가 지역민들이 한 푼 한 푼 모아서 아이들을 교육 시키고, 일본을 극복하자는 취지로 만든 학교라 설립 취지서에 대해서 면 을 많이 할애했어요. 그리고 우리 학교의 역사, 구포의 인물들을 넣었어

요. 사실 만들고 나니 아쉬움도 있어요. 구포초 출신의 훌륭한 분들도 있 지만, 구포초도 일본인 교장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고 민족운동을 했다가

변절하신 분도 있는데, 이에 대한 기술을 더 솔직하게 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기는 해요. 학교에 어떤 일본의 잔재들이 있었나요? 교목이 히말라야시다였거든요. 나무가 학교 건물의 5, 6층 높이만큼 자 라고 있었어요. 근데 태풍 때문에 한 그루가 넘어졌는데, 소방서에서 ‘나머 지 하나도 위험하다, 건물로 넘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젠가는 베 어내야 한다.’라고 해서 안전 때문에 베는 계획을 세웠을 때가 2019년이었 어요. 계획을 세우고 보니 교목이 일제 잔재인 거예요. 그럼 시기적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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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맞다 해서 베게 되었어요. 그 후에 동창회와 교사, 학부모가 함께 교목 변경에 대한 대토론회를 가졌고요. 그 다음에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함께 설문조사를 했는데 일제 잔재인 교목을 변경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어 요. 전교생 대상으로 설문조사하여 소나무로 정했고요. 아주 좋은 종자 의 소나무를 심어서 교목으로 가꾸고 있어요. 구포초의 교가 작사를 하신 분이 시조 시인 고두동이라는 분인데, 일제 부역을 하셨어요. 그래서 투표 하니 바꾸는 게 맞겠다고 했고, 아이들과 같이 만들자 해서 교가를 만드 는데 2년 반이 걸렸어요. 원하는 가사가 뭔지, 노랫말에 뭐가 들어갔으면 좋겠는지 하나씩 적고, 조합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투표했어요. 이호재 선생님께 작곡을 맡기고, 노래는 아이들이 녹음했어요. 구포초에서 흉상을 세운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이야기도 소개해 주 세요.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게 좋겠다고 해서 우리 학교에 자랑스러 운 선배가 누가 있을까 알아봤어요. 윤현진 선생님이라고 윤상은 선생의 조카로, 일본에 유학 가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 만들 때 초 대 재무차장으로 활동하셨어요. 그렇게 독립운동도 하고 김구 선생과 같 이 의용단을 꾸려서 독립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시다가 과로로 29세에 돌아가셨는데 구포초 1회 졸업생인 거예요. 이렇게 훌륭한 분을 우리가 잊고 있으면 안 되겠다 해서 학교에 동상을 세우자고 했어요. 흉상을 만드는 과정은 어땠나요? 동상은 너무 거창하고 우상화한다는 느낌도 들어서 학교에서도 요즘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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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하는 추세이긴 하거든요. 실물 크기의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친근한 흉

상 정도면 좋을 것 같다 해서 흉상을 만들기로 했죠. 학부모연대랑 몇 군 데 알아보다가 소녀상을 만드신 분께 연락해보니 기꺼이 재능기부로 해주

시겠다고 하셨어요. 재룟값만 마련할 수 있으면 해주겠다고 해서 제작비 천만 원을 마련하는 해로 2020년을 살았어요. 사실 천만 원은 학교 구성 원들 모금하고, 바자회 몇 번 하고, 동창회와 국회의원 찾아가면 금방 만 들어져요. 하지만 한 푼이라도 아이들이 보태고, 주민들이 관심 가지며 내고, 윤현진 선생도 알리는 활동으로 하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해서 펀 딩 물품을 만들었어요. 윤현진 선생님 호가 우산이거든요. 우산도 만들 어서 펀딩 물품으로 썼어요. 외부에도 알릴 필요가 있겠다 해서 다음 카

카오 펀딩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댓글도 많이 달리고, 다음 메 인화면에도 올라갔었어요. 그렇게 알려지면서 라디오 방송 <자갈치 아지

매>에서도 연락이 오고, 방송국에서도 몇 군데 연락이 와서 알려졌어요.

이렇게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셨던 게 너무 뿌듯했어요. 달력도 소개해 주세요. 구포초 건물이 40년이 넘었거든요. 정부에서 노후화된 학교를 새로 지어 주는 그린 스마트 사업에 선정이 되어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서 생각해 보니 너무 아쉬운 거예요. 우리 아이들 기억에 있는 모교인데 한순 간에 와르르 허물어진다는 게 안타까운 거예요. 나중에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 찾아왔을 때 내가 다니던 학교의 모습이 이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 도 들 것이고. 그해 제가 학부모회장이어서 학부모들과 의논했어요. 어떻 게 기억에 남기면 좋을까 하다가 달력을 만들면 평생 간직할 수 있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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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했는데 다들 좋다고 했어요. 달력이니까 열두 달, 열두 명의 학부모들 을 모았어요. 1년 동안 열심히 어반스케치를 배워서 학교 곳곳의 모습을 그렸고, 뒷면에는 사진과 연혁을 넣었어요. 전 구청장님께서 강사님을 지 원해 주셔서 덕분에 잘 배울 수 있었어요. 학부모 밴드에 매일 그려서 올 리고 서로 도와주고 해서 그해 연말에 달력이 나왔어요. 마을에서 원화 전시회도 열었는데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전시회를 보러 오셔서 좋아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달력은 전교생, 선생님들, 우리 학교 계시다가 전근 가 신 분들께도 보내드렸어요. 기록물들을 만들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마음 아팠던 게 독립운동하신 분 중에 자긍심을 가지고 잘 살고 계시는 분 들도 있겠지만 힘들게 사는 분들이 많잖아요. 윤현진 선생이 그러시거든

요. 손녀분이신 윤정 어르신이 팔순 나이인데 거창 시골에서 혼자 살고 계 세요. 손자인 윤석우 선생이 경기도 쪽에 혼자 계시는데 연세도 많으시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소식을 들어서 마음이 아팠어요. 윤정 어르신을 찾아뵙고 흉상을 만들고 있는데 제막식에 오실 수 있겠느냐고 했더니 꼭 가고 싶다고 했고 참석하셨는데 너무 좋아하셨어요. 그 소식을 들은 광복 회 회원분들이 개인적으로 저한테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너무 고맙다고 하셨어요. 며칠 전에 화명중학교던가 역사동아리 친구들이 구포초 윤현진 선생 흉상을 보러 탐방 온다고 하더라고요. 만든 지 몇 년 안 되었는데 주 변에서 알고 찾아온 게 고맙고 그래요. 또 구포초 씨앗동아리 분들이 포토 존 벤치를 만들었어요. 디자인은 우리 학부모들이 하고 제작은 마을기업에 의뢰해서 만들었어요. 낙서 하나 없이 3년째 아이들이 사용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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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더 남기고 싶은 기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윤현진 선생의 손녀분이 치매가 있으셔서 현재 일은 깜박깜박하시는데 일제 강점기 당시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혼자 계시니 말할 사람도 없다가 우리가 찾아가니 반가웠던 거예요. 별의별 말씀을 다 해주 셨는데 이게 보물인 거예요. 올해 초에 한 번 더 찾아뵈었는데 아직 기록 은 못 하고 있어서 걱정이에요. 오지랖 같기도 한데 찾아뵙고 말씀도 기록 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신익희, 이승만 같은 들어보면 알만한

분들에 대해 실제 겪으신 일, 윤현진 선생의 가족이 일제에 고초를 당했 던 것들 등 많은 이야기가 있으시더라고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보람이 있었던 때가 언제일까요?

이번에 축제를 기획하는데 아이들이 축제 마지막에 교가를 부르자고 했 고, 유행가 부르듯이 즐겁게 불렀어요. 자신들이 만든 교가라서 정말 아

끼고 좋아하거든요. 아이들이 구포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 같아서 제일 보람됩니다.

이런 활동과 기록들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해요. 지도나 기록물 인쇄가 나오는 순간이 되면 가슴이 뛰어요. 아이 낳은 기분 이 들 정도로. 찬찬히 보면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죠. 품고 낳 을 때는 힘들었는데 지나면 둘째를 생각하는 그런 느낌? (웃음) 지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아쉬움이 들 때도 있어요. 달력까지 하고 나 서는 그때 했던 것들을 글로 써보고 싶고 동화에 제 생각들을 담고 싶고 그 런 욕심이 생기기도 해요. 그다음의 나를 있게 하는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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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의 과정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요?

일단 우리 집 컴퓨터, USB에 다 있어요. 다행복학교가 새로운 변화를 위 한 학교의 시도이고 활동의 성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현재 구포초 교장 선생님도 이전 학교에서의 활동을 기록해서 책자로 남 기셨더라고요. 학부모들의 활동, 교사들의 교육과정 변화, 사진들, 자료 들, 공모서류들, 이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시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던 기록을 교장 선생님께 드렸더니 그걸 책으로 만드셨어요. 지금까지 혼자 서 기록을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학교도 기억하고 기록을 남겼더라고요. 올해 아이가 졸업하면 8년 만에 제가 구포초를 졸업하게 되는데 제가 없 더라도 학부모들의 움직임, 주체적인 활동과 계획, 기록들이 이어질 것 같아요. 기록과 사람이 연결되는 <도시아카이브>를 북구에서 만들고자 하 는데 이런 활동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가 「구포 반딧불 방송」에도 함께 하고 있는데 마을 방송이 잘 되면 좋겠 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마을 소식을 마을 분들과 같이 녹음하고 글도 다듬 고 활동하고 있거든요. 이게 활성화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마 을에서 꾸준히 쓰레기 줍는 분에 대한 소개와 감사 인사가 방송으로 나갔 는데 너무 좋았어요. 내가 지나며 보는 가게, 나의 이웃 이야기, 이런 소소 한 이야기가 미소 짓게 하는 이야기들이거든요. 이런 마을 방송국들이 잘 되면 좋겠고, 구포만이 아니라 북구의 다섯 개 동에서도 운영되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해보네요. 방송 내용을 유튜브에도 알리고 있고 주민의 참여도 다양하게 이끌어내려고 하는데, 이것도 기록의 한 부분이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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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북구 기록가 정영수 마을에서 어린이, 청소년들과 놀고 있고, 친구들이 끼워만 준다면 나이가 들어도 더 같 이 놀고 싶은 이랍니다. 진정한 활동가이자 끊임없는 기록자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던 인터뷰였 고 또한 이야기꾼이었다. 8년간의 학부모회 활동을 막힘없이 이야기했고, 사 라진 구포동의 골목을 이야기할 때는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구포와 구포초등학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모든 기록물이 나올 수 있

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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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곳이 행복하고 멋진 곳이었으면 좋겠고, 예술로 하나의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문봉규 작가, 문화예술플랫폼 센터장

#예술로기록 #북구역사 #기록활용

문봉규 님은 현재 북구 문화예술플랫폼

을 위탁 운영하며 북구민들의 다양한 문화

활동을 위해 힘쓰고 있는 문화예술가이다.

북구와 문화예술을 연결 짓는 작업을 많

이 하는데, 옛 북구의 지도와 한시, 작가들

의 그림을 접목시켜 한시 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구포시장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는 동안, 작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인형으로 제작해 선물로 드리는 작업도 했

다고 한다. 예전에 북구 블로그 기자 활동 하며 시민들을 기록했을 때, 시민들 스스

로가 존중받는 기분을 느끼곤 했는데, 이 런 부분이 기록의 핵심인 것 같다고 이야 기한다. 지표에 나타난 것만 기록하는 건 일차적인 기록이고, 곰국에 기름을 끌어내

듯이 그 밑에 진짜 진국을 찾아내는 것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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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고향은 어디시고 북구에서 얼마 동안 거주하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태어난 곳은 문현동이고요. 문현동에서 살던 집이 철거되면서 정착지로 시영 아파트에 살았어요. 햇수로는 한 40년 정도? 근데 북구가 지하철이 복선이 되면서 땅값이 올라가서 예술가들이 살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그 래서 지금은 양산으로 이사 갔습니다. 현재 활동하고 계신 영역은 어떤 분야이신지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도예가이고요. 공예와 시각 미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건 주로 예술 활동, 미술적인 분야고 특히 도시재생으로 탄생한 이 갤러 리를 운영하면서 지역의 미술이나 일상들을 기록하고 있죠. 사실 어떤 동 기가 있어서 했던 건 아니었는데, 예술의 쓸모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 요. 아직은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한테만 인지돼 있는데, 사실 누구나 예 술가로 태어난 거죠. 어찌 보면 의식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거지만, 예술 이 당신들에게 어떻게 쓰일 수 있는가를 증명하고 싶었지요. 예술이 왜 필 요한가에 대해서. 주민들과의 소통에 초점을 많이 맞췄고, 일반인들이 플 랫폼으로 많이 들어오도록 했어요. 어떤 기록 활동을 하고 계시는가요? (시장 할머니 조각상을 가리키며) 이 작업은 구포시장 할머니들을 찍어서 제 나름대로 작가로서 기록했어요. 문화예술 활동을 하고 싶어도 나오지 못하시는 분들을 제가 찾아가서 인형을 만들어 드리거든요. 처음에는 문 화재단 사업으로 초상화 작가로 들어갔다가 흙으로 인형을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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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을 만들면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도 아이들이 계속 바라볼 수도 있 고 만질 수도 있고. 그걸 만들어주면서 할머니가 이야기하시는 걸 계속 듣 는 거죠. 작년에는 덕천3동 복지관에서 한 열 분 정도 했었어요. 그런 특 별함을 받으니까 예술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조금 인지하시는 거죠. 그런 식으로 마음의 문을 연 것이 기억에 남아요. 나눴던 이야기가 기록되거나 남겨지지는 않았죠?

남기지는 못했죠. 작년에 시도는 했었어요. 지금 인터뷰처럼 촬영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서사가 궁금했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작업에 영감을 받고, 그 영감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선물로 드리기 때문에 그분도 좋은 거고요. 저는 그분들을 만났을

때는 위안이라는 역할로서 예술을 접하기도 하고, 현실의 모습을 기록하

는 예술 작업을 하게 되죠. 지금 하는 <아빠와 크레파스>는 아이들이 아 빠와 함께하는 기록 활동이에요. 아이들은 보통 엄마와 활동을 많이 하 지만 아빠들하고는 잘 안 해요. 그래서 목표는 아빠였어요. 한 주는 밖에 나가서 물품을 주워 오거나 지역 탐방을 하고, 한 주는 같이 만드는 거죠. 톱질도 해보고. 잘 만들고 못 만들고는 사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빠와 함께 보내는 추억에 대한 기록을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것. 저는 의 미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은 만들어서 자기가 가져가는 것보 다 엄마나 친구들한테 선물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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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관련 전시를 기획하기도 하셨죠?

태극기 부대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는 지역 관변단체가 있어요. 한국자유 총연맹(이하 자총)이나 청년회, 새마을 같은 단체들이 북구에 정말 많아 요. 근데 그분들이 문화예술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제가 작년에는 아예 그분들의 전시를 기획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자총 전시를 했어요. 부산 본부에서 창고 속에 있던 물건들을 끄집어내게 됐죠. 그러면서 평양 거리를 바라볼 수 있는 VR까지 후원받고, 각 구에 있는 자 총 사무장들이 다 모여서 회의하고, 통일 강사도 부르고 일이 엄청 커져 버렸죠. 전시를 시작하고 의외로 자총과 상충되는 민예총이나 진보 쪽 작 가들도 전시를 보러 오시면서 자총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어요. 그 래서 저는 참 서로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소개해 주고 싶은 자료나 내용이 있으시면 설명을 부탁드리 겠습니다. 이것도 되게 의미 있는 기록인데, 지역에서 장애인, 일반인들 그리고 노인 들과 만나서 공공 미술을 해보자는 슬로건으로 처음에 시작했었어요. 복 지관에 가서 일반 아이들과 경계성 장애인인 아이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했죠. <한시로 다시 보는 감동포> 같은 경우는 작년에 제가 한 곳만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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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추해보자는 의미로 구포라는 동네를 잡았어요. 그리고 예전부터 감동 이라는 지명이 있으니까 그걸 찾기 위해서 옛날 지도들을 다 구해봤는데 의외로 이곳에서 시를 읊으신 분들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우선 한 스 무여 편 정도의 시를 발췌했고, 청년 작가들에게 이 시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해서 전시도 진행했죠. 고려 말기 신하

였던 정몽주가 청년이었을 때 한양에 올라가기 전에 지은 시들이 있고요. 배 하나를 몰고 유유히 뱃놀이하면서 지은 시들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시민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대부분 지표에 있는 걸 주로 시각화시켰다면, <한시로 다시 보는 감동포> 와 같이 저희는 한 곳을 아주 깊이 파고 들어가 보자는 생각으로 한 거였 거든요. 지표에 나타난 것만 기록하는 건 일차적인 기록이라고 생각이 들 고요. 저는 곰국에 기름 끌어내듯이 그 밑에 진짜 진국을 찾아내는 게 기 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 만세 거리를 보며 근래 불우한 시절의 모습 을 자꾸 떠올릴 게 아니고, 그 이전에 이 지역은 어떤 지역이었는가 그런 걸 생각하는 거죠. 물론 자료가 많이 없지만, 미술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서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키는 거예요. 여기 와서는 그런 상상을 하는 ‘예

술가’가 되시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죠. 북구의 역사나 사람에 대해서 기록한다고 했을 때 주변 분들이나 예술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반응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이걸 하기 전에는 블로그 기자 활동도 많이 했었는데 다들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세요. 거기에 관심 을 가지고 기록하러 간 거기 때문에 본인들이 일종의 존중받는 기분을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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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시죠. 저는 그게 기록의 핵심인 것 같았고요. 사실
비슷비슷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속 깊은 이야기까지 꺼내서 듣고자 하 면 존중이라는 부분이 들어가죠.
사람들의 이야기는

블로그 기자단 활동은 어떤 취지로 하신 건가요?

북구에 대한 공식적인 활동을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아무도 미술에 관심 을 가지지 않으니까 내가 나간 거죠. 관에서 블로그 기자단을 모집해서 한

4년 정도 활동했었고요. 작년인가 재작년까지 활동했어요. 주로 어떤 주제로 기사를 쓰셨어요?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알리는 거죠. 전시나 미술가들의 활동, 축제 이런 게 많이 있음에도 알려지지 않으니까 그런 부분들도 알려주고 싶었고, 주변에 있는 비석에 대한 내용도 블로그에 올리면서 저도 많이 알 게 됐죠. 관에서 만든 역사 자료나 책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근데 아무도 안 봐요. 그림책처럼 만들어 놓으면 재밌게 볼 수 있을 텐데. 그래서 문화 원 사람들이나 실제로 활동을 많이 하시는 분들, 일반인들하고 내가 만 나는 방법이 기자 활동이었죠. 북구에서 하고 있는 기록 활동이 가지는 의미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제가 어릴 때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에 애착이 좀 있어요. 제가 사는 곳이 행복하고 멋진 곳이었으면 좋겠고, 거기에 하나의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알게 되면서 여기가 매력적 인 도시로 다가오더라고요. 예술적인 잠재력은 많은데, 그걸 도와주는 게 내 역할이겠구나. 그래서 그거에 대한 예술의 쓸모랄까 그런 키워드로 운 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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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북구에 어떤 기록이 남겨지면 좋을까요? 너무 많아요. 저는 설화라든가 그런 걸 떠돌게만 하지 말고 형태로 만들 어서 곳곳에 배치했으면 좋겠어요. 구포 왜성을 왜 왜성이라 할까, 이런 것들. 500명의 병사와 최후까지 지역을 지킨 황룡 장군이라고 있어요. 우 리는 그 장군이 있었는지도 몰라요. 빼빼 영감 이야기처럼 만들어서 설치 하고 싶었어요. 그 기록이 사소해 보이지만 그런 곳에서 자기가 살고 있다 는 게 본질적으로 자존감하고도 연결되거든요. 저는 미술을 하기 때문에 미술의 영역으로 끄집어내고 싶은 거고. 북구는 자연 생태만 해도 기록할 게 엄청 많은 것 같아요. 부산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산이 두 개나 있고, 낙동강도 있는데. 만덕사 같은 경우는 지금 범어사보다 더 큰 규모의 절이 었어요. 그런 것들을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춰서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을 까 생각하죠. 저는 기록이라 했을 때 현재의 모습이나 이야기들, 결과물 들을 담기보다는 질문을 좀 담았으면 좋겠어요. 2022년도에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가? 1998년도에 우리는 어떤 질문을 던졌는가? 그런 질 문들을 시대순으로 담으면 ‘그 시대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했었네.’ 하고 상상할 수 있잖아요. 저는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이곳에 살고 있 는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록을 좀 세련되게 표 현해서 이해도를 높이는 부분을 많이 생각했었어요. 북구에서 <도시아카이브>를 계획하고 있는데,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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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인 플랫폼이라 생각해요. 아까도 이야기한 게 미술하는 사람들끼 리만 모여 있다 보니까 경계가 생겼어요. 아까 말한 자총전이라는 전시들 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죠. 다양성이 있으면 좋

겠다고는 이야기하나 사실 다양성이 모일 수 있는 평상이 없어요. 목적 중

심의 모임이 아니고 그냥 모일 수 있는 곳. 그런 곳에서 이야기도 눈치 보

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저는 충분히 좋은 재료들이 많이 모여든

다고 생각합니다.

이음북구 기록가 김경희

인생의 전반기를 살았고 남은 후반기를 문화와 예술을 늘 옆에 두고 살고 싶은 ‘꿈꾸 는 나무꾼’입니다. 2022년 북구생태문화해설사로 선발되어 내년에는 더욱 열심히 활 동할 예정입니다. 문봉규 님은 생활에 밀착되고 뜻깊은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다. 북구에 옛 이야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예술가들 의 활동을 매개로 밖으로 나와 구민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될 수 있었

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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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이해하고, 이해를 통해 새로운 것들을 만들기 위해 기록이 필요해요
신미영 구포이음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사무국장

#지역기록 #소식지 #기록수집

신미영 님은 마을전문가이자 도시재생 전

문가이다. 구포이음 도시재생현장지원센

터(이하 센터)는 업무상 기록이 필요했고, 마을활동을 하면서 기록자로 추천을 받아 기록을 시작했다고 한다. 소식지와 유튜브

를 제작하면서 기록자의 역할을 충실히 진

행하고 있으며, 구포이음 도시재생사업에

대한 온라인 콘텐츠를 만들기도 한다. 소

식지 『구포이음』에는 구포에서 오래 거주

하였거나, 영향력이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여 수록하고 있다고 한다.

신미영 님은 과거를 기록하는 것 못지 않게

현재의 기록을 수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기록은 그 지역을 이해하고, 이해를

통해서 사람들과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나

가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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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님께서는 북구와 언제부터 인연을 맺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여기는 2019년 2월부터 근무했어요. 현재 직업은 마을 활동가라고 이야 기하는 게 대표적인 것 같아요. 주민자치와 관련된 마을 활동가이자 마을 전문가, 공동체 전문가라고 얘기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센터는 어떻게 기록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계기를 알고 싶습니다. 일단 우리 업무를 다 기록하기 위해 시작하게 되었죠.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서 올리고, 분기별로 소식지를 내는 게 정기적인 기록자로서의 역할인 것 같아요. 영상 같은 건 저희가 한 달 동안 구포에 서 일어난 여러 가지 활동, 모임, 구포이음 도시재생사업의 현황을 뉴스 형 식으로 담았어요. <구포이음 뉴스>라고 어제 46회 촬영했어요. 『구포이음』 소식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소식지에는 3개월 동안 이루어진 회의 결과, 행사 결과, 홍보할 내용들을 담고 ‘이음 칼럼’이랑 ‘이음 인터뷰’라는 코너를 만들었죠. ‘이음 인터뷰’는 여기 오래 사셨거나 영향력이 있거나 의미가 있는 분들을 인터뷰해서 기 록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고요. ‘이음 칼럼’은 사업과 관련해서 문화, 미디 어, 도시재생처럼 주제별로 사람들에게 글을 받는 거예요. 그리고 ‘이슈 깨기 좌담회’라는 것을 기획했는데 어떤 이슈를 정해서 그 이슈와 관계가 있는 행정, 주민, 상인, 우리 센터가 이 이슈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에 관 해 이야기하고요. 그런데 품이 많이 들어서 계속하지는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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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어떤 기록 활동이 있을까요? 일단은 저희가 구포이음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이기 때문에 8개~10개 정 도 지점을 정해놓고 2019년부터 현재까지 매달 1회씩 몇 지점의 사진을 촬영하고 있어요. 거점 공간, 만세길 초입, 구포역 앞 광장 등 저희 사업 대 상지에 건물, 길을 매달 똑같은 지점에서 찍었거든요. 광장이랑 만세길이 19년도부터 어떻게 모습이 변하는지 사업 전후를 비교하기 위해서 기록 하는 건데요. 아까 말씀드렸던 ‘구포이음 TV’라는 유튜브 채널에 구포이 음 뉴스를 매달 올리는 활동, 소식지 만드는 것, 그리고 저희 사업의 대상 지에 매달 사진 기록들이 남아있죠.

소식지에 옛날 노포에 대한 내용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음 인터뷰’라고 해서 가장 오래 장사하셨던 노포 상인들을 몇 차례에 걸쳐서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듣고 소식지에 실었는데, 그건 여러 가지 이

유가 있었어요. 일단 친해지려고. 그리고 두 번째는 소식지를 보게 하려 고. (웃음) 이음 인터뷰를 진행한 분들과는 정말 가까워졌어요. 인터뷰하 면서 상인 분들의 원래 모습, 원래 말투,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떻게 살아 오셨고, 어떻게 구포에 발을 들였고 그분의 개인사와 관련해서 많은 이야 기를 듣게 돼요. 그러면서 각별해지고, 우리 사업에 참여하게 되는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기록을 토대로 2차, 3차적인 작업이 많이 이루어졌 죠. 예를 들면 부산대학교 인문도시 사업을 할 때 제가 그분들의 삶에 대 한 기록이 있으니까 연결되고, 부산시립미술관하고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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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할 때는 미술관
평생 한 번도 오지 않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걸 미술관이 찾아오는 방식으로 제안했어요. 상인들이 간단하게 시도 쓰고 전시도 했

는데 이런 작업의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 기록 활동이었던 것 같아요. 근

본적으로 그분들에 대한 이해가 있으니까 다른 사업, 다른 것들과 연결해 서 볼 수 있는 게 있어요. 부산시립미술관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협업을 하셨나요?

미술관에서 시인과 사진가를 저희한테 보내줬죠. 이동근 작가님 같은 경 우는 사진 찍는 방법을 가르쳐드리고, 그분들을 기록하고요. 시인님은 자 기 삶 속에 있는 이야기를 시로 표현할 수 있도록 몇 강좌를 진행해서 <삶 이 예술이다>라는 전시를 같이했죠. 국밥집 사장님이 국밥 한 그릇을 통 해서 자기 인생을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미술관에서 굉장히 놀라워했고 요. 이건 전적으로 참가한 상인 분들만 해서는 가능하지 않고 사진가나 시인 분들이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끌어내도록 도와주셨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자기 작품을 하나 만들어내고 그걸 또 전시하고 그래서 또 하나 만들어가고. 장사하시는 분들은 건물 안에 항상 계시잖아요. 밖에 나가 는 게 어렵고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주면 맞이할 수 있는데 이동이 쉽지 않 으시니까. 선생님들이 아주 귀한 경험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기록 활동한 것을 어떻게 공유하고 활용했는지 궁금합니다. ‘구포이음 TV’에 들어가면 ‘구포이음 뉴스’가 있고 ‘구포이음 이야기’라 는 것이 있어요. 구포이음 뉴스는 매달 하나씩 올라가고 누구나 다 보실 수 있죠. 소식지도 저희가 홈페이지에 PDF 파일로 공유하고 있어요. 기 록이 남겨져 있으니까 사람들이 검색해서 찾으면 더 보잖아요. 기록의 힘 이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이 동네에 오지 않아도 기록물을 통해서 여

47 구포

기를 알 수 있으니까. 사진 자료 같은 경우에는 저희가 많이 드리고 있어

요. 저희랑 같이 작업했던 분들이 메일로 사진 좀 받을 수 있느냐고 하면 드리고 있고, 낙동문화원에 있던 자료들도 다 저희가 정리해서 가지고 있 거든요. 그걸 받아서 정리하는 것이 어렵진 않은데 사진을 찾는 것은 어 려우니까요. 사진이나 PDF 파일 말고도 다른 유형의 기록물들도 있나요? 저희가 구포이음 뉴스를 제작하잖아요. 해보면 어떤 영상소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게 돼요. 그런 것을 계속 찍어 놓거든요. 그다음에 경성 대학교의 콘텐츠 학부에서 학생 영상 촬영 팀이 장학금을 받고 우리에게 파견 왔죠. 방학 한 달 동안 와서 어디 좀 기록해달라고 하면 드론을 띄워 서 촬영하고. 그러니까 수집하고 있어요. 콜렉트(Collect). 기록도 중요하 지만 수집하는 것, 보유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인문도시 북구 를 할 때 구포 시간 여행 영상 15분짜리 만드는 것이 있는데, 저희가 가

지고 있는 영상 소스를 제공해서 빨리 만들 수 있었습니다. 기록을 수집 하는 것은 그 지역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이해를 통해서 사람들과 새 로운 것들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제가 기록과 수집에 관 심이 많으니까 사람들이 갖다 주시죠. 그러면 그걸 주민 제안 사업과 연 결해서 이렇게 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와요. 한 사람은 생각으로 그칠 수 있는데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이 되면 많은 것을 만들어 볼 수 가 있잖아요.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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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나 사진을 보관하려면 데이터가 많이 들잖아요. 그건 어떻 게 하시나요?

저희는 외장하드가 있어서 거기에 4년간 작업한 모든 것들이 들어가 있

어요. 계속 백업하고 있고, 우리가 물러나면 그걸 딱 전달하면 행정에서 도 일하기 쉽죠. 센터의 기록 활동에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이음 인터뷰도 그렇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이해하고 알아간다는 게 큰 기쁨 인 것 같아요. 기록을 통해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경험이라서 기 뻤고요. 제가 되게 좋아하니까 주위에 있는 분들도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그 자체를 기뻐해 주셨어요. 상인 분들도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에 불만을

느끼는데 그걸 기록해서 남겨드리면 자기 기록이 남겨져 있으니까 되게

좋아하세요. 여기에 대학생들이 도시재생이나 전공과 관련된 견학 와서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흥미로워하거든요. 사람들에게 이야기로 다가가는 게 접근하기도 좋은 것 같아요. 기록하면서 가장 보람됐던 순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한 가지는 구포이음센터에서 「구포 반딧불 방송」이 탄생한 거예요. 앞으 로 어떻게 해나갈지는 모르겠지만 멤버들이 기록자로서 되게 재밌어하고 즐거워하는 게 좋아요. 또 한 가지는 제가 근무하는 12월까지 구포이음 뉴스가 49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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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거든요. 센터에서 기획, 제작해서 포기하지 않고 만들 어낸 게 참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진행자로 참여했기에 4년간의 저의 얼굴 변화도 뉴스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웃음)

북구 <도시아카이브> 사업으로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 해서 국장님 의견을 한번 듣고 싶습니다. 이게 되게 엄청난 일이잖아요. 나중에 결과물이 나오면 사람들이 이걸 가 지고 활용할 수 있잖아요. 화명기록관처럼 하나의 공간 안에 주민들이 했 던 작업을 다 넣어놓으면 기록관으로 정리가 되는데, 북구 전체의 여러 가 지 기록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영상 기록관이라도 하나 있 어야겠죠. 저희가 사업의 공간과 자료를 담기 위해 온라인 가상의 세계 에 북구이음메타버스를 구축하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북구라는 메타버 스 안에 북구 관련 기록물들을 구축해서 어떤 걸 클릭하면 기록물들을 볼 수 있고, 또 어떤 걸 누 르면 다른 것들이 연결되게 링크를 걸어놓는 다든가 해서 이 기록물들을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5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기록가 이상진 부산 구포에서 태어나고 자라 북구를 사랑하는 30대 청년. 부산 청년활동가로서 부산을, 그리고 내 고향 북구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진행함에 있어 어색한 분위기 없이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어 좋 았다. 북구 주민들이 어떤 가치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사는지에 대해 연 령대별로 구분한 데이터를 책으로 기록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51 구포
기록은 숨 쉬는 것과 같아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을 단지 내가 할 뿐이죠
이외철 가람기획 대표

#지역기록 #향토연구 #기록수집

가람기획 이외철 님은 북구에서 출판업을

하고 있다. 『낙동강 신문』을 창간하여 발행

하다 보니 향토 자료와 문화에 관심이 생겼

는데 주로 사진을 수집했다고 한다. 귀중한

사진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서 받아와 스캔

작업을 했고, 그러한 노력으로 퀄리티 좋은

옛 사진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다 백

이성 초대 낙동문화원장님을 만났고, 협력 하여 낙동문화원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낙동강을 따라 민요를 채록하러 함께 다

녔는데, 아쉽게도 가사만 남고 음성을 녹

음한 테이프가 사라졌다고 한다. 출판사에 서 만든 책이나 신문 등의 데이터는 절대로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이외철

님은 기록은 숨 쉬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명감보다 숨 쉬듯이 일상적으

로 하다 보면 작은 기록이 나중에는 큰 기

록이 되고, 큰 역사가 되는 것이므로 누군 가는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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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에서 몇 년 거주하셨습니까?

고향은 경상남도 사천군 곤양면입니다. 거기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중·고 등학교랑 대학은 인천과 서울에서 나오고. 그때 우리 아버님이 부산에서 사업하고 계셔서 그게 제가 부산에 내려온 계기가 됐죠. 대저에서 생활했 는데, 당시에는 대저가 북구였습니다. 그래서 북구로 내려온 지는 한 30년 도 넘었죠. 그 길로 낙동강 환경운동으로 『낙동강 사람들』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는데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일이죠. 지금 집은 모라에 있고, 그전에 는 만덕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지금 하는 일에 종사하신 지는 몇 년 정도 되었습니까?

그것도 북구에 왔을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거의 한 30년 넘는다고 봐야

죠. 당시에 직원 4명을 두고 『낙동강 신문』을 만들었고 그 뒤에 구청에서

발행하는 『북구 신문』을 용역 인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지역 향

토 자료에 관심을 갖게 됐죠. 제가 주로 많이 수집한 것은 사진이었습니 다. 사진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니까 어디든지 사진만 있다고 하면 가서 촬영하고 그랬죠. 스캔 작업하고 돌려주고, 찢어진 것은 붙이고, 복원 작 업한다고 애를 많이 썼어요. 그렇게 스캔 작업을 해서 저장해둔 사진이 굉장히 많았죠. 가람기획에서 출판한 책들은 주로 어떤 종류의 책들입니까? 주로 용역 출판이에요. 기획을 해서 책을 하나 만들면 돈이 2천만 원 정 도 들어가는데 그걸 몇 번 하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서 기획 출판을 안 하 고 의뢰받아서 하는 거죠. 주로 한문 번역 책 있잖아요. 규장각에서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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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 있던 서계집을 그 자손이 목판본 9권을 복사해오셨어요. 참 재밌는 점

이 이분 자손이 서계집 목판본을 번역 출판해서 이것을 전세계의 큰 도

서관에 다 보낸 거예요. 목판본 한자를 자판기로 치면 오자가 날 수 있어

서 목판본 그 자체를 그대로 스캔해서 넣었어요. 그리고 목판본 밑에다가 후대에 한자를 못 읽을까 봐 한글 토를 다 달았어요. 총4권 4,000페이지 의 번역책을 15년이 걸려서 만든 거예요. 사진도 제가 다 찍고 문중의 비 석 탁본을 돕고. 비문도 탁본해서 번역을 다 했어요. 그다음에 논문 15편, 16편 싣고 이래서 책을 만들었는데 중국의 공자학회에서는 고맙다고 비 행기표까지 주며 초청하더라고요. 학술단체도 아니고 개인이 이런 걸 하 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국립도서관에도 보냈지만 고맙다 인사 한마디 안

오는데, 외국에 있는 모든 대학은 다 감사 편지가 오더라고요. 기증해줘 서 고맙다고요. 이 번역책을 만들고 나서 대한민국에서 이 책에 대한 논

문이 한 30편이 나왔어요. 어떤 분들과 협업하셨나요?

그때 당시에 이쪽 지역 역사 문화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누구냐 해서 백 이성 원장님을 소개받았어요. 『낙동강 사람들』 책을 주면서 이 지역 사람 들이 기사를 내야 되는데 만들어주는 건 우리가 계속 만들어주겠다고 했 어요. 그래서 그분이랑 협력해서 문화원도 만들기 시작하죠. 지금 정식 문 화원 말고 그때는 부산시 등록문화원이 있었어요. 지원도 못 받고 사무실 한쪽에 문화원이라고 해서 문패 하나 놓고 활동했어요.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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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들 때는 가람 사무실 안에 작은 방이 문화원 사무실이었죠? 그렇죠. 그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나마 재미있는 것은 낙동강 하류부터 상 류까지, 진주부터 낙동강 지류까지 직접 가서 민요 채록을 했던 거예요. 그걸 백 원장님이 가지고 계셨는데 돌아가시면서 어디 갔는지 없더라고 요. 노래 부른 것을 그대로 다 녹음해왔는데 그게 세상에 없어요. 그때는 마이마이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채록을 다 했거든요. 그것도 장장 2 년 이상 걸렸습니다. 그것을 책으로 만든 건 있어요. 당시에 북구청 문화 체육과에서 500만원을 지원받아서 채록집을 만든 건 있어요. 음성을 잃 어버린 게 제일 아쉬워요. 그리고 북구에 남아있는 옛 사진들 그것도 없어 지기 전에 하나하나 모았어요. 제가 ‘낙동포럼’ 회원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스캐너가 부실하다 보니까 낙동포럼에서 500만원을 지원받아서 서울에 서 스캔을 다 받아왔어요. 그 작은 사진들이 그래서 퀄리티가 되게 뛰어

나요. 그나마 스캔 작업을 잘 해놓으니까 그걸로 풍물 사진전을 했죠. 지 금의 모습하고 옛날 모습하고 이런 식으로 비교하면서. 그것을 지금도 보 관하고 있는데 DVD로 복사해서 문화원, 구청, 우리 사무실 하나씩 가지 고 있어요. 왜냐하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게 사라지면 안 되니까. 그런 식으로 사진 보안을 제가 주로 했어요. 그래서 옛날 사진들은 저희가 다 발굴한 거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소리를 기록하러 다닐 때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제가 알기로 MBC 라디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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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1분도 안 되 는 노래를 채집하기 위해서 3년을 따라다녔더라고요.
힘들죠. 그게
힘들 리가 있겠어요. 저희는 지역별 문화원을 끼고 하니

까 그분들이 노래하기로 문화원이랑 약속했기 때문에 했죠. 저희가 잘 모 르니까 지역별 문화원에 연락해서 그분들과 시간 맞춰서 차 끌고 가는 거 예요. 우리가 거기서 이틀 동안 쫓아다닐 수는 없고 그분이 안 한다고 그 러면 못 하는 거죠. 그때 사진도 다 찍어 왔었는데 지금 어디 갔는지 모 르겠어요. 민속 민요집은 우리가 녹취하고 편집해 가지고 구청에 부탁해 서 출판했죠. 아까 『낙동강 사람들』 이야기하셨는데,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죠?

『낙동강 사람들』은 문화원에서 만들죠. 옛날에는 계간지로 나오다가 지 금은 1년에 한 번씩 나와요. 원고는 향토사연구소 위원들이 같이 만들고 있고, 출판은 우리가 하고 있어요. 처음 구포에 왔을 때 역사가 굉장히 깊 다 보니까 동네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초창기 때 백이성 원장님하고 만

덕사지에 대한 기사도 쓰고 국가 보조금을 받아서 발굴하게 됐죠. 발굴 하려면 이슈화시켜야 되니까 원고 같은 것도 많이 썼어요. 『낙동강 사람

들』에서 처음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이 원고를 다른 데로 넘기기도 했죠. 낙동문화원의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동별 향토지 출 판도 맡고 계시지요?

올해는 화명동 하고 있습니다. 원고도 거의 다 썼습니다. 작년에 처음 할 때는 원고를 다 만들어 놨는데 예산이 없어서 못 만든다는 거예요. 추경 에 용역비도 없이 겨우 출판비만 받아서 책을 만들었죠. 만들고 나니까 더 보완할 부분, 뺐으면 좋겠는 부분이 많아서 화명동 작업을 하면서 성 찰을 많이 했어요. 낙동문화원에서 향토사연구소를 만든 이후로 아마 전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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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문화원에서는 최고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매달 만나서 월례 회도 하고, 글을 쓰고 교환하면서 읽고 있죠. 구 단위 향토지로는 마을의 세세한 걸 못 넣더라고요. 그래서 그 지역에 있었던 자연환경과 기록을 우 리가 세세하게 논문 식으로 만들고 나중에는 문중 내용도 다루었습니다. 기존 향토지에서는 그걸 못 다루잖아요. 구포초등학교에 아이를 구하다가 돌아가신 선생님의 추모집을 만 들었다고 하던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그것도 가람기획에 서 만들었나요? 책이 여기 있을 겁니다. 우리 사무실에서 만들었는데. 그 책이 아마 그때 당시에 그분의 일대기하고 간단한 부분을 작게 만들어서 아마 데이터로 돼 있으니까 필요하면은 저희가 데이터를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네요. 출판사들이 보통 작업을 의뢰받아서 하 면 신문이든 책이든 인쇄물로 만들고 데이터는 잘 보관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은 다 가지고 계시는군요. 거의 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절대 버리는 게 없습니다. DVD로 저 장한 게 안 열릴 때도 가끔 있긴 하는데, 그거 외에는 거의 DVD로 저장 했죠. 아쉬운 점은 저희가 맥으로 작업을 하니까 IBM하고 호환이 안 되 는 점이죠. 사진도 파일로 다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만두게 되면 이걸 누 가 관리하게 될지 걱정입니다.

59 구포

작업하신 북구 관련한 책 중에 가장 소개해 주고 싶은 책이 있나요? 민속 민요집에 구포의 놀이, 소리가 다 있거든요. 그 책이 그래도 제일 보 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다음에 『낙동강 사람들』인데 창간을 저희가 했 고, 그걸 기점으로 문화원도 만들기가 쉬웠습니다. 북구청에서 발간하는 『북구 신문』도 되게 빨리 만들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반상회지를 만 들었거든요. 반상회지 만들 돈으로 신문을 만들자 이렇게 된 거예요. 반 상회보 내용은 그대로 들어가면서 북구소식을 더해서 『북구 신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만들어지는 거죠. 처음 『북구 신문』을 만드실 때 등사기 같은 기계를 가지고 했습니까?

옛날에는 활자를 넣었는데 우리 때 되니까 식자가 돼서 식자기로 글자 하 나하나를 만들어서 대지위에 한 부분을 잘라서 넣었죠. 1년여 후에 당시 에 매킨토시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신문을 만들 때 그

걸로 전산 처리를 했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료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대표님이 생각하시기에 기록을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숨 쉬는 것하고 똑같은 것 아닐까요. 제가 서계집 하면서 느낀 게 우리가 숨을 쉬듯이 작은 기록들이 나중에는 큰 기록이 되는 것 같아요. 기록이 없어지는 순간 역사가 없어지는 거니까 작은 기록이라 해도 나중에 큰 역 사가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6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항상 갖고 있습니다. 저희도 사명감이라기보 다는 이렇게 하는 일을 밥 먹는 것처럼 생각하고 보람 있다고 생각했지, 내 가 이걸 대단하게 생각한 적은 없어요. 돈
아니고 누군가는 해 야 하는 것을 단지 내가 할 뿐이죠.
되는 것도

<도시아카이브> 사업에서 최소한 웹 아카이브 정도의 아카이브를 생 각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발언을 많이 해주시면 되게 좋을 것 같아요. 자료를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게끔 아카이브가 반드시 있어야 되거든요. 나름대로 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어제 화명동 가니까 맨발동무도 서관부터 시작해서 그분들도 활동을 참 많이 하시더라고요. 젊은 사람들 이 이렇게 관심을 갖고 하니까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요.

이음북구 기록가 곽종영 북구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외철 님의 사무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북구의 기록이 집대성되어있는 기록저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북구의 기록이었다. 인 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아쉬움에 어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많은 것 을 배우고 느끼는 하루였다.

61 구포
‘감동’이라는 단어처럼 명칭을 바로 잡아 나갔던 게 보람 있습니다
이은호 구포역사문화연구소 운영, 향토연구사

#향토연구 #북구역사

이은호 님은 30대에 낙동문화원 이사로 활

동하면서 구포의 역사에 눈뜨기 시작했고, 낙동문화원 사무국장이 되면서 본격적으

로 북구의 역사와 문화 연구를 하게 되었

다고 한다. 낙동문화원에서 발행하는 『낙

동강 사람들』에 강의한 내용들이 다수 수

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은호 님은 구포를

모르면 부산을 다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연

구할 때 마을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큰 도

움이 되는데, 한 어르신의 인터뷰에서 “진

정한 원도심은 구포였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활동을 통해 연구를 계속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 보람이 있다 고 했다. 이은호 님은 <도시아카이브> 사업 이 중요한 사업이므로 올해 말 마무리 단계 인 낙동강 하구 마을과 관련한 책이 나오 면 꼭 기증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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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북구에서 몇 년 거주하셨고, 직업은 무엇인가요?

사천에서 태어나서 5살 때쯤 구포 대리로 이사 왔어요. 구포가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61살이니까 한 55년 산 것 같습니다. 현재 구포역사 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직업은 구포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있 는 향토 연구사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향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저는 사실 역사를 잘 몰랐는데 30대에 낙동문화원 이사로 들어오면서 조 금씩 구포의 역사에 눈뜨기 시작했어요. 원래 전공은 국문학인데 지역에

살면서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해 눈이 떠지더라고요. 그래서 조금씩 연구하

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낙동문화원 사무국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 와 문화에 대해서 연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주변에 다른 여러 단체에서

저한테 구포의 역사를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그때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기록물로 남겨진 게 있나요? 낙동문화원에서 『낙동강 사람들』이라고 매년 발표하는 책자가 하나 있습 니다. 낙동강이라는 자연과 낙동강 옆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다 보니까 그 책자에 제가 강의했던 내용들을 조금씩 싣게 됩니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 낙동문화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일 히트 를 쳤던 건 ‘국수가 왜 유명한가’였던 것 같습니다. KBS에 불려가서 김숙 이런 사람들하고 같이 방송도 했었죠.

65 구포

연구하실 때 주로 어떤 방식으로 하시나요?

마을 사람들하고 인터뷰가 제일 컸습니다. 40대였을 때, 한 70대 어르신 들 특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을 인터뷰했고, 서울까지 가서 90대 어르신

들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김준형이라는 교수님이 있는데 그분이 말씀하 시길 “진정한 원도심은 구포였다.”라고 했습니다. 공장, 우체국, 은행 다 구 포에 있었습니다.

연구하신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시민들과 공유하나요?

북구청에서 주민들을 위한 향토사 강의를 해달라고 의뢰가 들어왔어요. 조그만 강의실에서 열다섯 번 정도 하면서 문화해설사 1기, 2기 이렇게 배출했죠. 지금 그분들이 현재 북구에서 가이드 역할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저보다도 깊은 연구를 많이 해서 청출어람의 실력 을 갖추고 있더라고요. 선생님께서 가장 보람되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구포는 정말 대단했던 곳이었는데, 많은 굴곡을 겪으면서 숨 막힐 정도로 단절됐었어요. 그래서 구포를 안 좋은 동네로 생각했던 분들이 제 강의를 듣고 인식을 바꾸게 되면 보람이 있어요. 부산대학교 개교 70주년 때 부

산대학교를 설립한 사람이 구포 사람이다 보니까 제가 1강의를 맡았습니 다. 그때 제목이 ‘구포를 알아야만 부산이 보인다’였습니다. 구포를 모르 면 부산이 어떻게 탄생되었고,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은 행도 구포에 제일 먼저 생겼고, 모든 상권이 구포에 있었죠. 그런 구포를 사람들이 다시 알게 하고, 다시 자연과 이어지게 만드는 그런 사업이 지금

6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 동네의 사업 아닙니까? 그런 단초를 마련했다는 것이 큰 보람입니다. 북구에 5개 동이 있잖아요. 저희가 기초자원 조사를 하는데, 덕천 동은 자료가 잘 없더라고요. 덕천동은 거의 물바다에 있습니다. 물바다, 늪, 습지 그런 동네였습니다.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있었어요. 물이 어디서 내려오냐 하면 음정골하고 사랑골이라는 데서 내려와요. 물이 안 들어오게 만들려고 둑을 만들었 는데, 그 물들이 전부 다 덕천으로 빠져나갔죠. 거기 하천을 거쳐서 낙동 강으로 빠져나왔죠. 그랬는데 개발을 한 거죠. 그래서 덕천동에는 역사 가 별로 없어요. 지금도 북구를 계속 연구 중인가요? 더 연구해봤자 했던 것들을 좀 더 보강하는 수준이죠. 백이성 전 낙동문 화원 원장님이 다 했던 겁니다. 저는 백이성 원장님이 하신 것 중에 오류 가 있는 부분만 다시 고쳐나간 거죠. 예를 들면 감동창이 3칸이라 했는 데, 제가 16칸이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그다음에 백이성 원장님은 구포 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나는 감동이라는 원래 이름을 썼어요. 감동의 ‘감’ 자는 신을 의미하고, ‘동’은 땅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연구에서 발표했죠. 기회가 되면 정확한 뜻을 적어서 책을 새로 만들 거예요. 북구에 대해 소 설식으로 쓰고 있거든요. 여기에서는 구포역이 없어지고, 주변에 문화단 체가 생기는 그런 이야기를 해요. 역사를 바탕으로 해서 국가가 가야 할 미래에 대해 이야기까지 해서 책을 만들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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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선생님의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연구하다 보니까 새로운 동네를 알게 됐어요.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어 온 동네가 대저더라고요. 전국에서 대저 같은 동네가 없더라 고요. 아마 학자들이 접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현대, 근대사를 다 안고 있는 동네가 저 동네거든요. 아마 대저를 연구하고 그다음에 양산으로 갈 것 같습니다. 양산이 사실 구포의 큰 집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근데 양산 이 역사 문화 연구가 너무 안 돼 있더라고요. 지금 양산의 여러 연구단체 랑 서로 만나고 있고 계속 연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제 체질이 맞는 것 같 으니까. 저는 되든 안 되든 1년에 한두 개는 연구를 계속할 사람들에게 도 움을 줄 겁니다. 사는 게 뭐겠습니까. 이런 게 보람이 있습니다. 북구에서 <도시아카이브>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북구는 진짜 단절의 역사였습니다. 낙동강과 자연, 마을 이 끊어졌어요. 철도도 옛날에는 연결되어 모든 차나 물류가 통하다가 잘 려서 지하로 다니고요. 그런데 지금은 구포 하면 전국 사람들이 다 알아 요. 지금은 모든 게 잘되어있죠. 이음 사업이 지금 잘 되고 있고, 부산시에 서도 길을 다 내줬잖아요. 낙동강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거든요. 우리의 문화, 과학, 생물, 추억 모든 게 저기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저 자연하고 연결이 되어야만 진실한 이음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도 이 어져야 하지만, 자연과 우리도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죠.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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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북구 기록가 이찬순

이음북구 기록가로 활동하게 되어 보람되었고 삶에 있어 도움도 되었다.

책 한 권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고 감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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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남기면 공동체 참여가 되고, 사회도 개선되죠
임종근 구포3동 경로당 회장, 북구신문 명예 기자, 함박웃음 봉사단

#공동체기록 #신문 #기록활동

임종근 님은 현재 구포3동 경로당 회장을

맡고 있으며, 여러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북구 명예 기자를 25년 정도 하고 있

는데 과거 한 매체의 기자와 편집에 참여하

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북구 명

예 기자를 하며 택시 기사였던 아파트 회

장님이 자기 얼굴과 이야기가 북구 신문에

실려 손자들이 매우 좋아했고, 본인도 기

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서울의

어느 아파트가 신문을 발행한 것을 보고 “우리도 한 번 해보자.”하고 2007년 아파

트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낙 동 저널』이라는 신문을 만드는 등 지속되

지는 못했지만, 여러 매체를 시도했다. 그 냥 잊히고 지나갈 수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사람들이 참여하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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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3동 경로당 회장을 맡고 있으시고, 북구 신문 명예 기자이자 함박웃음 봉사단 활동으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시네요.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야간 산업체에 무료로 근무하기도 했고, 먹고 살 려니까 미술 학원 원장도 했어요. 전국정신교육 강사로 임명받아서 부산 에 와서는 환경에 대한 소양 교육 민방위 강사를 한 20년 했습니다. 환경, 질서, 예절 등을 주제로 교도소, 여성대학, 복지관, 교통문화연수원, 청소 년을 대상으로 강의를 계속했어요. 주민들이 어떻게 화합하고 즐겁게 살 까 생각하다가 새마을 지도자도 했고, 아파트 경로당 회장도 맡았어요. 지금은 구포3동 경로당 회장 하면서 즐거운 아파트를 만들고 즐거운 마 을을 만들자 하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북구 명예 기자 활동도 오래 하셨죠?

25년 했죠. 오래됐어요. 좋은 미담이나 동아리 활동을 기사로 썼어요. 특 히 예술 방면에 직접 가서 인터뷰도 하고요. 틈만 있으면 냈죠. 안 되면 수 필 한번 쓰라고 편집장한테 전화가 와요. 다른 사람들도 써내라고 권유도 하고요. 구포3동 사람만 계속 나와도 안 되니까, 이번에 구포3동 사람이 나오면 다음에는 저쪽에서 나오고, 여자가 한 번 있으면 남자가 한 번 나 오고, 나이별로도 해보기도 하고. 신문이 다양하게 어우러져야지 한쪽만 치우치면 안 되거든요. 청년의 소리도 듣고 어려운 가정 이야기도 좋고, 그 러다 보면 도와줄 사람도 생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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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신문 기자 활동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택시 기사를 하면서 아파트 회장을 하는 할아버지가 계셔요. 그 할아버지 이야기로 인터뷰 기사를 내줬더니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자기 평생에 신문에 얼굴 나올 일이 없는데, 기사로 나오니까 손자들이 억수로 좋아하 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부른다고요. 또 다른 기록 활동도 하셨나요? 제가 군대에서 화랑 신문을 했어요. 그래서 그런 걸 좋아해서 신문 네 가지 편집장을 직접 했어요. 아파트 신문도 발행했어요. 자기들 글, 사진 넣어주 면 좋아하죠. 쓰레기 주우며 환경 개선 활동한 거나 좋은 미담 기사를 냈 거든요. 주민도 좋아하고 애들도 좋아해요. 바쁘다 보니까 3호까지만 했어 요. 반상회를 안 하니까 누가 누군지 몰라요. 반상회를 해야 돼요. 윤리연 구 교육원장을 맡으면서 윤리 신문도 발행했고, 낙동 저널도 냈어요. 낙동 신문이라는 제목으로 하고 싶었는데 대구에서 하고 있더라고요. 같이 하 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계속하지는 못했어요. 이것도 3호 정도 냈어요. 아파트 신문 만드실 때 혼자 하신 건가요? 아니면 사람을 모아서 했나요? 누가 할 줄도 모르고 할 사람도 없어서 혼자 했어요. 그래도 주민들이 참 여하게끔 했어요. 글을 써주면 넣어준다고 하고, 사진도 넣어주고 그런 식 으로 해서 유도했죠. 아파트 신문이 나오면 전국에서도 알려지거든요. 서 울에 어디서 아파트 신문을 발행한 걸 봤어요. 그래서 우리도 한번 해야 겠다 해서 소식지를 만든 거죠.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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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같은 걸 계속하려고 하시는 의미나 이런 게 있을까요?

기록도 남기고, 공동체 참여도 되지요. 사람들에게 글도 받고, 여러 사람 을 봄으로써 또다시 참여하게 되는 거죠. 도시에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개 인주의가 되거든요. 서로 공동 의식을 가져야 하는데, 너와 나를 몰라요. 예전에는 아파트마다 경로잔치도 했는데 지금은 안 하거든요. 누가 팔순 잔치를 해도, 결혼해도 아파트에서는 몰라요. 우리가 그렇게 인생을 살 아도 되나 싶어요. 많은 사람한테 전달되면 또 그걸로 개선도 많이 되죠. 이음북구 기록가 이희정 북구를 사랑하고 북구를 알리고 싶은 북구문화관광해설사 이희정입니다. 내가 사는 지역에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아파트 소식지 발행은 나도 한번 해보고 싶어졌다. 다만, 신문은 중요한 기록물이고, 유의미 한 산물을 만들 수 있는 좋은 매체이므로 현재까지 이어졌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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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대한 반성과 본보기를 위해 기록 활동을 항구적으로 진행해야 해요
정영미 『희망북구』 편집장

#지역기록 #신문

정영미 님은 20여 년의 세월을 북구청 발

행 신문인 『희망북구』의 편집자로 일했

다. 북구 전역을 속속들이 다 알 수 없지 만,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 주민의 이야기 들을 가급적 다 귀담아들으려고 한다. 디 지털 시대에도 아직 활자 매체에 대한 향수

가 있고, SNS와 같은 매체에 접근성이 떨

어지는 분들이 아직도 있어 어떤 방식으로

든 정보를 취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놔

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문도 기

록으로 남아 보관되고 보존하는 대상이며, 이에 『희망북구』는 100호 단위로 축쇄판

을 만들어 기록을 보관하는 노력을 해오

고 있다. 정영미 님은 기록은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본보기가 될 수 있어 지역이나 국

가 차원의 자산이 되기 때문에, 항구적으

로 진행해야 할 활동이라고 했다.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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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북구에 오시게 되었나요?

고향은 경남 밀양인데, 제가 오랫동안 해왔던 신문 만드는 일에 대해서 공 채가 나와서 오게 됐고요. 신문사와는 또 다르겠지만, 지역의 소식을 주 민들한테 전하는 건 비슷할 거라는 생각에 지원하여 채용되었습니다. 지 금 일한 지는 거의 20년 가까이 된 것 같네요. 『희망북구』는 어떤 기록을 남기고 있나요? 지역의 다양한 문화 활동이나 주민들의 활동을 취재해서 기록으로 남기 고 있고요. 그다음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구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이라든지 구정사업 이런 것을 주민들한테 알리는 그런 매개체 역할을 하 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주로 어떤 프로세스로 진 행되나요? 예전에 비해서 행사라든지 취재해야 할 대상이 사실은 되게 많아요. 주 민 활동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마을 단위의 행사도 있고. 물론 지면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모두 기사화는 못 하는데 그래도 가서 봐야 되고 하는 것 때문에 조금 힘들기는 하죠. 15일 이전에는 무엇을 싣겠다는 것을 결 정해요. 그러면 그때부터 편집 작업을 해서 편집이 끝나면 주민과 구청 내 외 간부들이 같이 참여하는 편집위원회에서 같이 검토하고요. 거기서 나 온 의견들을 바탕으로 계속 조금씩 바뀔 수도 있어요. 각 부서도 있고 외 부 편집인들도 있어요. 우리 내부에서 보면 한쪽밖에 못 보는 게 있다 보 니 외부에서 제보도 해주시죠. 그렇게 해서 월 9만 부씩 발행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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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부수가 많이 늘었네요. 주민분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나요?

전화 오는 걸 보면 “독자 투고는 어떻게 하면 돼요?”하는 할머니들도 계세 요. 할머님들이 실제로 글을 개발새발 주시지만 제가 조금 손봐서 가급적

올려드리고 하거든요. 그럴 때 무척 뿌듯해하세요. 자기 이름이 한 번 나 가는 게 좋은 거 같더라고요. 명예 기자나 편집위원들은 각자 어떤 역할을 하나요?

말씀하신 구성원 중에 사진 담당자가 빠졌는데, 아시다시피 요즘은 비주 얼이 강조되고 옛날처럼 글만 읽는 신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진 담당 자가 지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소식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서 저한테 주 시면 그걸 신문 제작하는 데 활용하고 있고요. 그 밖에도 행정적인 부분, 신문 기획에서부터 편집, 배부까지 다양한 절차에서 우리 팀들이 전반적

인 내용, 광고 게재나 다양한 것들을 함께 작업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 습니다. 20년 동안 일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일까요?

코로나와 관련된 일이었는데요. 지난해 일이지요. 신문은 실제로 한 달에 한 번 발행해서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에서는 좀 신 속하게 정보를 제공해야 해서 호외를 펴냈거든요. 실제로 SNS 같은 걸로 훨씬 빨리 정보를 접하는 분도 계시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기 때문 에 주로 활자 매체를 통해 신문을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만들었어요. 그래 서 이게 정보의 공백이 생기는 계층을 없애는 데 일조했죠. 물론 돈도 많 이 들고 그랬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씩 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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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에 안주해 있다가 거기서 벗어나 속보로 전해 주는 방법도 깨달은 경험

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일하시면서 기억에 남았던 기사가 있을까요?

이것도 코로나 상황이었는데, 할머니가 손바느질로 마스크를 만들어서

나누어줬다는 거예요. 그게 시발점이 되어서 여성단체나 이런 분들도 마 스크를 직접 만들어서 돌리고 그런 소식을 듣게 된 거죠. 처음 겪는 그 어 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런 기지가 나온다는 게 참 지금도 신기하고. 구에 서는 의도치 않았는데 그 할머니 덕분에 북구에서 되게 대처를 잘했다는 그런 이미지가 생겼죠. 물론 열심히도 했지만 그런 상황 덕분에 더 빛이 났던 것 같아요. 북구 신문은 다른 신문과 차별성 내지는 특징 같은 것이 있나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른 데는 올 칼라가 많아요. 책자로 내는 곳도 많고 요. 저희도 이게 좋아 보여서 이렇게 만들면 어떨까 했는데, 예산이 엄청 나더라고요. 그래서 북구에서는 하기 어렵겠다 싶었죠. 종이 신문에 대한 향수가 있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고요. 완벽하게 하는 것도 좋기는 한데 실 제로는 돈이 정말 많이 들어가요. 젊은이들은 디지털이 익숙하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블로그 기자도 운영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블로그 기자들도 계시고 구정을 접할 수 있는 통로들이 많이 늘어났잖아 요. 특히 젊은 분들은 SNS를 통해서 정보를 많이 접하니까 예전처럼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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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대한 향수를 가진 분들이 줄어들고 있지요. 세대가 변하고 시대가 다양화된다고 저희가 방식을 더 넓힌다든지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여 전히 활자 매체에 대한 향수가 있고, SNS 같은 매체에 접근성이 떨어지시 는 분들에게는 그래도 아직 이런 매체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든 취득할 수 있도록 길을 다 열어놔야 한다 고 생각하고 있네요. 신문도 기록으로 남아서 보관되고 보존되는 상황이 기 때문에 계속 만드는 거 같아요. 아무튼 홍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 양한 매체나 방법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되지요. 북구에 기록들이 참 많아요. 그중에 이거는 꼭 남겨져야 한다고 생 각하는 기록이 있나요?

사실 요즘은 신문 말고도 마을 공동체에서도 지역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 고 계시잖아요. 그런 소식들을 듣다 보면, 신문에서도 이렇게까지 못 해 봤는데 싶죠. 마을 활동가들이나 이런 분들이 하시는 것도 실시간으로 SNS에 올라오기 때문에 이런 게 신문의 발간 공백기를 메워주거나 신문 에서 못 다뤘던 부분을 해주니까 훨씬 많은 정보가 공유될 수 있겠다, 다 행이다 싶어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왔는데,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이게 계속 똑같은 패턴만 매회 가져갔다면 힘들었을 텐데 편집하는 시기 가 있고 밖에 돌아다니면서 하는 시기가 있어서. 실제로

8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다른 공무원들은 하루종일 앉아서 일하잖아요. 물론 저도 한꺼번에 편집할 때는 머리를 막 채웠었고 하긴 했지만, 취재를 핑계로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대기를

호흡하고 그런 시간, 그런 숨구멍들이 좀 있으니까. 이게 계속되는 업무가

아니고 하나를 끝내면 또 다른 쉼표가 생기는 거죠. 기록 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기록이라는 게 그 지역이나 국가에도 커다란 자산이잖아요. 역사를 담아 내고 기록을 남기는 게 옛날에 대한 반성이나 본보기가 될 수 있으니까 이 런 활동들은 항구적으로 진행해야 할 거 같아요. 요즘은 동네 소식지들 도 많이 나오는데. 제가 사는 중구도 사실 되게 쪼끄마한 동네거든요. 근 데 마을 소식지들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좀 작은 동 소식을 만들어보고 싶기도 해요. 신문이 종이 매체라서 가정에서는 한번 읽어보고 냄비 받침 대로 쓸 수도 있지만, 구청에서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저장하죠. 결국 이런 것들이 쌓이면 아마 역사서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북구신 문을 다양한 매체로 볼 수 있게 홈페이지에도 코너를 만들어서 계속 기 록을 쌓아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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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북구 기록가 김현주 북구 전역을 다니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동화,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는 동화구연가이자, 북구의 프리랜서 강사 쁘띠 김현주입니다.

기록 과정을 쉽게 생각했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녹취문 옮기는 것만 해 도 수일이 걸리는 과정을 지나면서 기록의 참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 문이라는 매개체로 우리 북구의 과거, 현재, 미래를 기록하는 정영미 님의 노 고에 또 한 번 고마움과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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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구포
저희가 만든 자료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고장을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김경옥김선영서창우정현진차수현김원영 지역사회 바로알기 초등교사연구회 ※ 본문에는 [경], [선], [창], [현], [수], [원]으로 표기했습니다.

#지역기록 #교육자료 #기록활용

‘지역사회 바로알기 초등교사연구회’ 소속

의 선생님 여섯 분을 만났다. 연구회에서는

지역의 학생들이 북구에 대해 알 수 있도

록 다양한 자료들을 만들고 있었다. 코로

나로 학생들이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온라인 수업을 할 수 있는 키트를 개발하기

도 했다. 최근에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

이 사회과 수업에서 온·오프라인에서 언제

든지 쓸 수 있는 자료로 메타버스를 활용

한 수업자료를 만들고 있다고도 했다. 북

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연구회

가 만든 자료가 수업에 활용된 후기를 들 을 때 보람을 느꼈으며, 연구회 활동을 하 는 선생님들도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 라졌다고 한다. 연구회가 만든 자료를 통해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님들이 고장에 관심 을 가지고 애향심을 갖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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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여섯 분 선생님 참여해 주셨어요. 소개 부탁드립니다.

[경] 저희는 2018년 ‘지역사회 바로알기 초등교사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북구 지역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어요. 이름만 팀장인 양천초등학교 교사 김경옥입니다.

[선] 2018년부터 연구회를 함께한 만덕초등학교 교사 김선영입니다.

[창] 저는 서구의 사남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창우라고 합니다. 2021년부터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 2018년부터 열심히 연구하려고 애쓰고 있는 만덕초등학교 교사 김 원영입니다.

[현] 저도 2018년부터 연구회를 함께한 양덕초등학교 교사 정현진입니다.

[수] 강서구 송정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차수현입니다. 2020년부터 연구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경] 서창우 선생님은 메타버스 분야에서, 차수현 선생님은 그래픽 분야에 서 잘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초빙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모두 북구 분은 아니시네요. 모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경] 2018년 북부다행복지구 ‘지역사회 바로알기 교사연구회’로 시작했어

요. 팀 이름은 ‘북구의 재발견’이고, 우리가 사는 북구를 다시 한번 알 아보자는 의미가 있어요. 처음에는 교사연구회에 초등과 중등 2팀이 있었어요. 처음에 뭔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개발 된 학습자료는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서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지 역사회 바로알기 초등교사연구회’로 시작해서 2021년부터는 ‘교실에 서 만나는 우리 마을’이란 다행복교육지구 사업으로 초등 1팀만 유지

89 구포

되고 있습니다. 북구의 다양한 지역화 자료를 개발하기 위해 다른 지 역교육청의 선생님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북구의 다양한 지역화 자료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경]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사회과의 내용은 우리 고장의 지명유래, 옛이 야기, 문화유산인데, 학습을 위해 자료를 검색해 보면 북구청이나 낙 동문화원의 자료가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수업하시는 선생님 또한 북구와 관련된 학습자료가 부족해 어려움이 있었고요. ‘북구의 지역화 자료를 개발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하 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기록을 활용해서 교육자료를 만드는 활동을 하시는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경] 개발한 지역화 자료의 제목은 『우리 고장 북구를 만나다』입니다. ‘만 나다’는 ‘우리 고장 북구와 만나고, 캐릭터인 고북이 팽이와 함께 나누 며, 자랑스러운 북구인 답게’라는 뜻이에요. 북구와의 만남, 고북이와 팽이와 함께 학습 나눔, 자랑스러운 북구인 다움을 통해 고장을 이해 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자는 뜻으로 ‘만나다’에 의미를 두었어요. 2018년에는 교사용 교재와 학생용 워크북을 발간하여 배부했고, 관 련 앱을 개발하여 공유했어요. 2019년에는 학생들이 언제든지 북구 의 옛이야기를 읽을 수 있도록 13편을 엮어 동화책을 발간했고, 카페 를 개설하여 학습자료를 공유했어요. 검토가 필요한 부분은 낙동문 화원 최진식 소장님, 북구문화관광해설사 박찬석, 김정곤 선생님의

9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도움을 받아 만화책 형태의 동화책을 만들었어요. 2020년에는 학생 용 만들기 키트인 ‘칼레이도사이클’을 2021년에는 ‘툭툭블럭’을 제작 했어요. 2022년 올해는 『메타버스로 만나는 북구』를 개발 중입니다. 만화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도를 하고 계신다고요. [경] 언제 어디서나 우리 고장 북구에 대해 찾아볼 수 있도록 2018년에 『우리 고장 북구를 만나다』 앱을 제작해, 지명유래, 옛이야기, 문 화유산, 체험활동 자료를 공유했어요. 2019년에는 인터넷 검색으 로 자료를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카페(https://cafe.naver.com/ meetbukgu)에 학습자료를 공유하고 매년 자료를 업로드하고 있습 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온·오프라인에서 만들 수 있는 키 트인 ‘칼레이도사이클’을 제작했습니다.

[선] 그림을 보시면 그림의 질이 어떤 출판사 못지않아요.

[현] 다 완성됐을 때는 결과물 자체가 정말 멋지더라고요.

[경] 2021년에도 온·오프라인에서 만들 수 있는 키트인 ‘툭툭블럭’을 제작 했어요. ‘툭툭블럭’으로 ‘고북이와 팽이’ 캐릭터를 만들면 핸드폰이나 태블릿 받침대로 사용할 수 있어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아이 템이었고, 온라인 학습에 활용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선] 이런 자료를 통해 학생들이 쉽고 재미있게 우리 지역의 옛이야기나 문 화유산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경] 또 2021년에는 북구 다행복 온라인 마을 콘텐츠 영상 제작 자문도 했 는데, 우리 고장을 알리는 동영상에 들어가는 옛이야기 그림을 차수 현 선생님께서 너무 멋지게 그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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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 이야기도 해주세요.

[경] 2020년부터 코로나19로 체험을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직접 그 장 소에 간 것처럼 체험학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 래서 올해에는 『메타버스로 만나는 북구』를 개발하고 있어요. 온라 인으로 북구 지도에서 체험하고 싶은 장소를 터치하면 360도 카메라 로 체험 장소를 둘러보고, 옛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보며, 퀴즈를 풀고 게임을 할 수 있어요. 온라인 체험 후에는 오프라인으로 『스템프 투 어』 팜플렛에 확인 도장을 받는데, 올해 메타버스는 호응이 클 것 같 습니다. 『메타버스로 만나는 북구』는 서창우 선생님께서 제작을 담

당하고 있습니다. 서창우 선생님은 메타버스 제작의 일인자이시죠.

[선] 저희가 이렇게 세뇌당하면서 일하고 있어요. (웃음)

[경] 이렇게 ‘지역사회 바로알기 초등 교사연구회’는 능력과 열정이 없으면

참여할 수 없어요. 김선영 선생님은 옛이야기 만화 구상, 김원영 선생

님은 문화유산 사진 촬영 및 정리, 정현진 선생님은 지명유래 비쥬얼

씽킹 그래픽, 차수현 선생님은 그래픽, 서창우 선생님은 메타버스 개

발을 맡아주고 계십니다. 이 외에도 동영상을 제작해주신 김근태 선 생님, 앱을 개발해주신 박민규 선생님이 계시고요. 저는 팀장으로 취 합 및 검토, 학습자료 업로드 등을 맡고 있는데, 영혼을 갈아 넣으라 고 팀원들에게 재촉하는 역할을 맡고 있죠. (웃음) 자료나 기록을 남기고 난 후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영] 3학년과 마찬가지로 4학년도 지역화 자료가 필요한 부분이 있거든요. 근데 그런 수업을 할 때 선생님들이 진짜 어려워하세요. 자료 자체가

9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좀 없기도 하고 향토지는 더 어렵고요. 연구회에서 개발한 만화책처

럼 만든 동화책은 재미가 있어서 아이들이 읽기만 해도 수업이 저절

로 되는 부분이 있어요. 지명유래는 글이 아닌 그림으로 비쥬얼씽킹

을 만들어서 선생님들이 수업하기가 편하시죠. ‘어떻게 하면 선생님 들이 3, 4학년 학생 수준에 맞춰서 수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 니 여러 가지 지역화 자료를 만들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올해는 어떤 키트야?”라고 물어보기도 하세요.

기록과 활동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경] 우리가 함께하는 열정이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지역화 자료를 활용하 면서 학생들이 고장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면서 고장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그 작은 바람 에 의미가 있는 것이겠죠?

[현] 아프리카 원주민 속담 중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다양한 마을 교육공동체, 다행복교육지구, 학 교와의 협업을 통해 학생들은 마을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겠지요. 저 희가 제작한 지역화 자료를 통해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님들께서도 고 장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북구에서 또 어떤 활동을 하실 계획이신가요? [경] 오늘을 살아가고

93 구포
있는 우리 학생들에게 마을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 재와 미래를 잇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지역화 자료를 개발하고 싶어요. 마을별 테마를 정해 프로젝트 활동으로 일회성 체험이나 활동이 아

닌 체계적인 마을 교육활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 면, 구포시장을 테마로 구포시장의 옛 모습을 알아보기, 구포시장을 둘러보며 시장 사람들과 인터뷰 하기, 구포시장과 슈퍼마켓의 장단점 을 비교하여 구포시장 개선 프로젝트 활동하기, 구포시장 홍보대사가 되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등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프로젝트 체험을 통해 우리 고장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또한, 초등 3학년 1학기 사회과에서는 우리 고장의 지명유래, 옛이야기, 문화유산만 다루고 있고, ‘기록’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철저한 역사적 고 증이 필요한 부분이라 아직 인물에 대해 다루지 않았어요. 기회가 된다 면 북구를 빛낸 인물을 찾아 소개하는 동영상을 제작해보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이 이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직접 공부하고 연구하셨을 텐 데, 선생님들 느끼는 보람이나 변화가 있을까요?

[현] 지역화 자료는 3학년 학생들이 우리 고장에 대해서 배울 때 필요한데, 북구 선생님이라도 해당 학년을 맡지 않으면 수업자료를 활용하기가 어려운데, 제 주변에서 연구회에서 제작한 자료를 활용하는 후기들을 들으면 보람차죠. 또, 사회 시간에 연구회에서 개발한 내용에 대해 조 금이라도 나오면 이야깃거리로 활용하면서 보람찼던 기억이 납니다. [영] 북구 관내에 근무하는 교사이긴 하지만, 고향이 부산도 아니고 북구 에서 살던 사람도 아니어서 북구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그래서, 수업 할 때 어려운 부분도 있고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어 야 했는데, 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쉽고 재미있게 수업을 할 수 있었어 요. 무에서 유를 좀 창조하는 느낌이라 할까요? 북구가 동래구에 비해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94

문화재가 화려하거나 역사가 깊은 곳은 아님에도, 뭔가 의미를 찾게

되고 몰랐던 걸 알게 되면서 북구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아요. 현재를 잇는 여러 장소도 새롭게 보이고, 역사적인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을까 찾아보게 되는 거 같아, 저에게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이음북구 기록가 김순덕

부산 북구 및 국내의 문화유적 및 명소를 탐방하는 <박물관을 사랑하는 사람들> 대표로 향토조사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선생님들의 열정으로 고장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마을교육 공

동체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열정으로 뭉쳐진 연구회의 고군분투한 경험담이

의미 있었다. 아울러 ‘지역사회 바로알기 초등교사연구회’의 이후 활동을 응

원하며 앞으로 만들어질 결과물들을 기대한다.

95 구포
9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금 곡

97 금곡
방한나 이수재 이현호
책을 잘 만들어서 복지관 활동 참여자들이 좋아하시거나 홍보가 될 때 뿌듯해요
방한나 동원종합사회복지관 사회복지사

#지역기록 #소식지 #공동체활성화

방한나 님은 동원종합사회복지관 지역 조

직화 팀에서 업무하고 있다. 지역 조직화 팀

은 지역의 많은 자원을 활용하여 지역 주

민들이 지역을 더 사랑하고, 끈끈하게 뭉

칠 수 있도록 공동체 형성과 활성화 업무

를 맡고 있다. 그 일환으로 소식지를 발간

하는 것이다. 동원종합사회복지관은 2016

년부터 2021년까지 주민기자단을 모집하

여 『금곡나루 신문』을 발행했다. 어린이, 청소년이 참여하기도 했고, 활동을 지원

하기 위해서 전문 강사를 초청해서 교육

을 진행했다고 한다. 현재는 복지관의 활

동을 알리는 소식지 위주로 간행물을 발간

하고 있으며 주민기자단의 활동을 이어가

려고 하고 있다.

10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동원종합사회복지관에서 얼마나 근무하셨나요?

북구에 실질적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하루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지금 1년 6개월 정도 됐습니다. 제가 근무지로 동원종합사회복지관에 오 게 되면서 북구라는 지역에 대해서 조금 많이 알게 됐고요. 그래서 거주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북구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식은 있지 않을까’라 고 생각합니다. 복지관에서 무슨 일을 하시나요? 저는 사회복지사이고, 흔히 아시다시피 생계와 관련된 도움을 필요로 하 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그분들이 지역사회에서 본인의 강점을 찾아 자립할 수 있게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 다. 제가 하는 업무는 이 역할의 마지막 단계에서 지역 주민들이 지역을 더 사랑하고 지역의 많은 자원들을 활용해서 지역 내에서 더 끈끈하게 뭉

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에요. 주민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면 그 조직이 활 성화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역 조직화 팀 에서 업무하고 있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복지관에서 발행했던 『금곡나루 신문』에 대해서도 소개 부탁드립 니다. 『금곡나루 신문』이라고 2016년부터 계속 꾸준히 발간되던 신문이 있는 데, 주변의 금곡중학교, 금곡고등학교랑 연계해서 청소년 기자단이 있었 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신문도 몇 차례 발간했었고. 2021년 2월에 마지막 으로 발간되면서 사업을 종료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 기자단 같은 경우

101 금곡

에는 내가 정말 소개하고 싶은 우리 지역의 사람, 내 친구, 우리 학교 선생

님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취재를 많이 했었죠. 기본적인 기자의 자세 같은 경우는 전문 강사를 따로 초청해서 강의도 몇 번 진행했습니다. 주제 의 경우는 주민들과 기획했습니다. 올해 사업을 정리하게 된 건 금곡동에 새롭다 할 장소나 이슈 거리가 점점 줄어들어서 기삿거리를 찾는 데 투입 되는 에너지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은 없어졌지만, 기자단은 계속 유지되는 거죠?

네. 원래는 2022년도 사업으로 우리 복지관에 있는 스튜디오 공간을 활 용해서 뉴스를 취재하는 식으로 북구의 장소 소개 등을 진행해보려고 했

는데 성인 기자분들이 50~60대시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의 거부감이 일

단 너무 컸고, 청소년 기자단들도 학원에 간다든가 시간 내기가 주말에도

너무 어려워져서 사실상 지금 사업이 주춤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동원종합사회복지관에 입사하자마자 신문을 맡게 되어서 고민이 많으셨겠어요. 작년에 제가 입사하고 딱 한 달 만에 신문이 나왔어요. 근데 전임자 선생 님이 많은 일을 넘겨주고 가셔서 제가 많이 허둥댔거든요. 그래서 그 하나 가 너무 벅찬 거예요. 책을 내본 적도 없고 신문이랑 가까웠던 사람도 아 니었고 사회복지사로서 이런 일까지 해야 한다는 회의감이 한 번에 오면 서 많이 힘들었는데,

10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봤을 때 너무 뿌듯하고 기억에 남는
아요.
결과물을
것 같
그래서 저는 첫 직장인 동원복지관을 생각하면 기자단을 생각할 것 같다는 그 순간의 감정들이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복지관에서 간행물을 발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업무 중 하나가 소식지 발간인데, 이전에는 신문을 발간했어요. 소식지 는 기관 내의 소식을 지역 주민에게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예요. 제 업무지 만 사실 심리적인 부담이 있어요. 왜냐면 우리 복지관을 후원해 주시는 분 들이나 자원봉사자들한테 어떻게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할지가 중 요한 부분이거든요. 두 번째는 이 책을 발행하면서 활동하신 누군가 혹 은 앞으로 우리 복지관과 이어질 누군가에게 어떻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런 것들도 고민해야 되고요. 책자를 잘 만들었다든가, 복지관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자신의 활동이 보이니까 좋아하실 때는 저도 뿌듯함 을 느끼죠. 또 이걸 보시고 복지관에서 활동을 해보려고 하는 분이 생길

때 저는 성취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지역 주민들이랑 소통하는 부

분에서도 제일 간접적으로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업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소식지를 담당하면서 보람이 있었던 일을 조금 더 말씀해주세요.

우리 복지관은 관할 지역 중에 정신 장애인분들이 되게 많으시거든요. 근데 그중에서 한 분이 1년에 두 번 나오는 이 소식지만 기다리시는 거예 요. 신문 제일 마지막 칸에 십자 단어 퍼즐 맞추기 이런 걸 넣고, 참여하 시는 분들에게 소정의 상품을 드리는 이벤트를 진행했었는데, 매번 응모 해주셨어요. 그리고 유독 이 소식지나 신문을 만드는 담당자만 기억하시 는 거예요. 매번 바뀔 때마다. 그래서 그런 걸 볼 때 약간 뿌듯해요. 바로 바로 드러나는 성과는 아니지만, 글을 통해서 에너지를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매개가 되는 게 확실하다는 것을 좀 많이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103 금곡

소식지 배포는 어떻게 하나요?

소식지를 다 제작하고 나서 후원자분들이랑 자원봉사자분들에게 우편물

로 발송을 드려요. 홈페이지에도 게시하는데, 주소가 불분명해서 책자를

받지 못하신 분들께는 SNS나 문자, 온라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전송하면 서 적극적으로 공유하려는 편이에요. 소식지 말고도 월마다 카드 뉴스를 발행해서 이메일로 발송하기도 해요.

신문이나 간행물을 만들 때 원본 소스에 대한 관리는 따로 하나요?

컴퓨터로 저장할 때는 따로 저장하고 그 폴더에 대한 잠금장치도 하죠. 주 민이 나오는 기사를 실어야 할 때는 당사자한테 개인정보 동의서를 따로

수집하고 있어요. 주민들이 쓴 사진도 제가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공유한

다음에는 최대한 삭제를 요청하는 편이긴 해요. 기관에서 원본을 보관하

는데 3년이 지나면 폐기를 해요.

소식지 발행에 협력하거나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나요?

저희가 소식지를 발간할 때 최종 검토를 하고 디자인 업체를 선정하고 직

원 중에서도 TF를 꾸리거든요. 그래서 실무자가 가장 협력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더 큰 틀에서 얘기하자면 이 내용을 실을 수 있게 프로 그램에 참여해 주신 분들도 저희가 도움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10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에서 <도시아카이브> 사업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좋은 의견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북구에 좋은 자연경관이 많잖아요. 근데 저는 금정구 주민이다 보니까 북 구에 대해 잘 몰랐어요. 놀랐던 게 저번에 해설사 한 분이 찾아와서 이야 기를 나누는데, 다양한 활동들을 많이 하고 있더라고요. 북구는 자원이 많아서 기록할 만한 거리가 많은 곳이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좀 젊은 버전 으로 기록들이 많이 소개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 리 사회복지관에서도 영상이라든지 카드 뉴스라든지 온라인 매체를 활 용한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고, 이런 게 요즘 추세인데 그런 매체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105 금곡

이음북구 기록가 김현석 한국심리학회와 한국상담학회 정회원이자 재난안전심리지원단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동의대학교 교육대학원 청소년교육상담학과를 졸업한 후 프리랜서 및 이음북구 기록 가로 활동하는 문화예술 전문가인 김현석 입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사전 질문을 토대로 집에서 시뮬레 이션으로 거울로 보고 연습도 했다. 녹취문 등 결과물 최종보고서를 완성 하고 나니 앞으로 이음북구 기록가 활동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포부 가 생겼다.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106
107 금곡
장롱 속에 있는 기록을 끄집어내서 같이 공유하는 게 기록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해요
이수재 공창마을 행복센터 센터장

#마을기록 #기록수집 #공유

이수재 님은 금곡동의 자연마을인 공창마

을이 고향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주변

이웃에게 동네에 대해 듣고 낙동강과 금정

산이라는 자연환경을 자주 접하면서 자란

것에 비해, 요즘 학생들은 자신이 사는 동

네조차 모르는 현실이 안타까워 기록 활동

을 시작했다고 한다. 중대한 역사는 아닐

지라도 금곡동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자연마을의 이름 과 의미, 과거 사진을 조사·수집하고 판넬 을 만들어 전시했으며, 엽서도 제작했다고

한다. 자신이 찾은 자료로 사람들이 연결

되고, 서로 알지 못했던 부분을 나누는 계 기가 될 수 있으며, 더 공부하고 기록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본인 작업의

의미로 꼽았다.

11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1957년 3월 1일 금곡동 공창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고등학교까 지 다니고 서울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대우그룹에서 한 25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와서 현재는 공창마을 행복센터의 센터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동네 역사에 대한 고민들이 많습니다. 역사에 관심이 있으셔서 기록을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동네 이웃들한테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 고 또 실제로 체험하면서 알았던 사항들이 많은데, 현재 자라나는 어린이 들을 보면 학교와 집밖에 몰라요. 그런 부분이 안타까워서, 과거 기록이 자라나는 어린이들한테 도움 되지 않겠나 싶은 마음에서 사진첩을 만들 게 됐습니다. 그게 주된 목적이었고. 저도 과거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 마을에 대해 알게 된 부분들이 많아요. 작지만 이런 부분에서 역사를 일 구어 가는 것도 좋지 않나 싶은 생각에서 이 사진첩을 만들게 됐습니다. 사진첩 제작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실제로 사진을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소장된 걸 보면 관에 있는 것도 있고, 집의 장롱에 보관된 것도 있어요. 여러 가지를 끄집어내서 발품 팔아서 취득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어떤 사진이 나오는 골짜기에 직접 경 험하러 가봐야 됐거든요. 그 산을 다니면서 한 2년간에 걸쳐서 사진 작업 을 하고, 사진첩을 만들었죠. 옛날 사진만 보여주면 학생들은 여기가 어딘 지 모른다 아닙니까. 그래서 현재 사진하고 같이 병합시켜서 위에는 옛날 사진, 밑에는 현재 사진 이렇게 조금 가미를 해봤습니다.

111 금곡

개인적인 만족으로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그걸 나 누기 위해 전시를 직접 준비하시는 분은 잘 없었거든요. 전시하게 된 이유도 궁금해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장롱 속에 들어가 있으면 자기만 알게 되는 거 죠. 저도 이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린이들한테 과거 모습을 더 보여주 고 “옛날에 여러분들이 사는 동네는 이런 모습이었다.”라고 말해주고 싶 어요. 우리 금곡도 보면 율리패총이나 천승호 기념비 같은 가치 있는 유물 들이 있습니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교육이 되면 좋 겠다는 마음에서 공유하게 된 거죠. 처음 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반응은 어땠나요. 반응은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으로 작업을 한 것 같아요. 하고 나니까 누구든지 보면 “참 잘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만들 생각을 했나.” 이런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또 어떤 분들은 이런 사 진이 있어서 참 고맙다는 말도 하고. 또 동네의 어떤 형님들이 와서 보고 모내기하고 있는 사람은 우리 모친이니, 담을 쌓고 있는 분은 우리 아버지 니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11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내가 무언가를 해놓으면 그걸 보고 다른 누군가가 이런저런 이야 기를 덧붙여줘서 사진 하나가 점점 커지는, 그런 게 되게 재밌는 것 같아요. 판넬에 있는 사진은 아무래도 전시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애들한테 나눠주 기 위해 엽서를 만들었어요. 사진은 보는 순간에 바로 느낌이 있을지 몰라 도 집에 가면 잊잖아요. 엽서를 만들어주면 자기들이 보면서 ‘금곡에 이 런 게 있었구나’하는 느낌이 안 있겠습니까. ‘금곡의 과거와 오늘을 담다’ 라고 해서 우리 센터 이름을 붙여서 주게 됐죠. 진짜 아이디어가 너무 좋고 실행력도 엄청 좋으신 것 같아요. 2년 전에 낙동문화원하고 연결해서 법정동에 대한 향토지를 만들어보자 해서 제일 먼저 우리 금곡동 향토지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향토사 연구 위원회가 있는데 그분들이 세 개의 팀으로 나눠서 금곡동의 자연, 인문, 문화 세 파트를 정리해서 이 책이 만들어진 거죠. 그래서 아마 이런 부분 들은 귀감이 되고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이 안 나타나겠나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이번에 책을 만들면서 느낀 게 뭐냐 하면은 옛날에는 우리 북구가 양산이나 동래, 진구에 속해 있다 보니까, 역사나 유물을 우리가 소장하 고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런 부분들은 우리 구민들이 더 신경 써 야 되지 않나 싶은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보러오나요?

113 금곡
내가 볼 때 학교 차원에서는 실질적으로 굉장히 관심도가 없어요. 우리가 각 동에서 공동체 활동을 하다 보면 학생들 위주로 프로그램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하고 서로 매칭이 되거든요. 근데 안전을 이유로

학교 문이 너무 많이 닫혀 있어요. 다시 열리게 되면 과거와 현재에 대한 사진첩 활용도가 더 높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보죠. 새로운 자료들이 업데이트되고 있나요?

업데이트보다도 현재 진행형이고, 만들었던 거를 가지고도 전시도 자주 해야 할 부분들도 있어요. 엽서도 나눠주다 보면 굉장히 수량이 적어집 니다. 그런 부분들을 앞으로 차근차근해야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을 해 보고요. 저도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주관하에 금곡동 향토지도 만 들게 됐지만, 북구의 다른 동들로 확산해 나가는 게 좋지 않나 싶은 생각 을 해봅니다. 활동하시면서 보람됐던 순간이 있으셨을까요. 보람이라면 장롱 속에 있는 사진이 밖으로 나오게 된 동기가 되지 않습니 까.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저 사진과 관계되는 사람은 굉장히 반가워하거든

요. 35번 국도도 보면 지금은 아스팔트가 돼서 왕복 8차선이 돼 있지만 그

때는 거의 버스 한 대가 다닐 정도로 좁은 길이었죠. 옛 35번 국도를 보면 서 “아 여기가 거기였구나.”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 걸 볼 때는 ‘이 사진을 잘 만들었구나.’ 이런 부분들이 생각이 나죠. 35번 국 도인 금곡대로 뒤에는 효열로가 있거든요. 효열로도 천승호 기념 효열비 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어요. 그런 걸 설명해주면 뭔가 매칭이 되 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대한 느낌이 와닿는 것 같더라고. 이렇게 공감대가 형성될 때 상당히 느낌이 좋았죠.

11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에 이런 기록이 남겨져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으실 까요. 만덕에 가보면 만덕사지라고 하는 만덕사 절터가 있습니다. 설명을 들어보 니까 만덕사 절이 그대로 있었다면 아마 범어사보다 컸을 거라고 하데요. 지금은 훼손이 돼서 절은 없지만, 그 절이 어디부터 어디였고 이런 부분을 더 연구해서 우리 북구에도 이렇게 큰 절이 있었다 하는 걸 세심하게 기록 해보는 것도 좋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해봅니다.

센터장님이 마을 해설사를 양성해 봤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는 걸 로 알고 있어요. 향토사연구소하고 연결고리가 됐을 때 내가 이 동네에 대해 조금은 아는 데 해설에 있어서는 상당히 무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해설사를 모집한

다 했을 때 낙동문화원에서 해설사 수업을 6개월 정도 참관하면서 시발 점이 된 것도 있어요. 요즘은 보면 관광지에 가보면 마을 해설사들이 상

당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더라고요. 그분들이 없으면 그 정도에 대한 느낌 을 우리가 못 받거든요. 이런 것도 보면 동별로 활성화시키거나 하면 안 좋 겠나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잘 발굴하고 일구어 놓은 자원들을 사람들과 연결해 주는 해설사 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이런 부분은 교육청에서 관계를 좀 해야 돼요. 자라나는 학생들한테는 공 부도 중요하지만, 역사적인 부분, 사람과 사람의 친화적인 관계, 자연과 관 계 등 정서적인 도움도 많이 되거든요. 굳이 학교 안에서만 교육할 이유도

115 금곡

없어요. 강을 이용하고 산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제일 좋다 아 닙니까. 그러면 육체적인 건강도 좋을 거고. 안 그렇겠습니까. 사진 파일들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계신 건가요? 개인적으로도 갖고 있지만, 가람기획이라는 업체에서 인쇄를 해서 거기 에 보면 다 있어요. 저는 저작권을 생각하기보다는 누구나 공유할 수 있 는 거라고 생각해요. 상용화가 되면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이걸 내가 소장 하려는 게 아니고 공유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장롱에 있는 걸 끄집어내 고, 또 전달하는 거죠. 그게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죠.

11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기록가 염수정 좋아하는 일, 생활, 취향을 찾는 여정 속에서 기록을 만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수재 님은 많은 사람이 동네에 대해 더 잘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기록을 모으고 공유하고 있는, 기록 활동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있었다. 기록에 대한 열정에는 나이가 없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작업은 다른 사람을 울리 는 힘이 있음을 깨닫는 인터뷰였다.

117 금곡
주민들이 찾기 쉽고,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아카이브에서 최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현호 그루북협동조합 이사장, 주식회사 엔지디(NGD) 이사

이현호 님은 주식회사 엔지디(NGD)와 그루

북 협동조합을 통해 북구의 여러 활동들을

기록해온 북구 주민이다. 현재 그루북 홈페이

지를 통해 조합 활동을 아카이빙하고 있으며, (주)엔지디에서는 북구문화도시 플랫폼 사업

의 일환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북구의 프

로그램을 기록 중이다. 이현호 님은 오랜 시간

직업적으로 사진 찍는 일을 하다가, 아카이브

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는 자신이 하는 일도 하

나의 아카이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한다. 그는 특히 기록 그 자체보다는 기록 을 활용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관심 의 연장에서 현재 아카이브 DB를 구축하는

12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일에도 관여하고 있다며 그 계획을 들려주었 다. 이현호 님은 앞으로 북구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행사나 활동들이 더 활발하게 기록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아카이브플랫폼 #기록활용

북구에 온 지는 얼마나 되셨고, 지금 하시는 일은 어떤 일인가요? 고향은 부산 해운대고, 결혼 전까지 30년 넘게 살았습니다. 북구에 온 지 는 6, 7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는 일은 주식회사 엔지디(NGD) 라는 디자인회사의 이사를 맡고 있고요. 그루북협동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NGD에서는 디자인이나 기획, 여러 가지 업무를 하고 있고요. 그루북협동조합에서는 북구의 문화예술이나 프로그램 같은 문화 활동 을 하고 있습니다. 그루북협동조합이 활동 중인 작가들이랑 같이 만든 단체라고 되어 있던데, 처음에 선생님이 시작하시게 됐나요? 처음엔 그루북협동조합이 아니었고 그루북 단체였습니다. 임의 단체였고 요. 시작은 사실 작가님들이랑 구에서 지원사업을 받기 위해서 단체를 만 든 거였어요. 같이 활동하다 보니까 시너지가 많이 나더라고요. 처음 했 던 작업은 구포역 이음 갤러리라고, 전시 활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1년간 활동하다가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최근에는 북구청이랑 협약을 맺었 어요. 화명역 아트스테이션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 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그루북협동조합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에 계획한 목표를 어 느 정도 이루신 것 같나요? 생각보다 빨리, 좀 많이 이뤘죠. 왜냐면

121 금곡
구청이랑 협약해서 아트스테이션 을 운영할지는 꿈에도 몰랐거든요. 그리고 부산문화재단의 <사우나>라는 생활커뮤니티 사업이 있는데 그것도 저희가 받아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

어요. 청년공동체 활성화 사업이라고 부산시 사업도 저희가 받아서 하고

있고요. 저는 좀 천천히 즐기면서 갈랬는데 생각보다 일이 많이 진행됐죠. 생각보다 많은 것을 빨리 이루면서 하고 계신 건데, 어려운 점은 혹 시 없으셨어요?

어려운 점이라면 본업으로 엔지디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그루북이라는 협 동조합도 하고 있는데, 일을 병행하는 게 좀 버거운 부분이 있다는 거예 요. 일을 너무 많이 벌인 것 같아요. 지금은 체계도 잘 잡혀 있지 않다 보 니까 그런 부분이 많이 힘들죠. 본업으로 하시는 일이랑 그루북에서 하시는 일이 접점도 있고 다 른 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접점이 많죠. 엔지디 같은 경우엔 청년프로그램이라 해서 영화제도 만들

거든요.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문화 활동이니까요. 그루북도 문화 활동

을 하고 있어서 약간 겹치는 부분도 있어요. 또 엔지디에서는 구청 행사도 많이 맡고 있고, 문화도시사업도 맡아서 진행하고 있어요. 엔지디랑 그루 북이 같이 간다고 봐야죠. 근데 이제는 각각 할 일을 따로 보고 해야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구포 노포 조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이건 어떤 건가요? 그건 엔지디에서 했죠. 노포보다는 북구의 맛집들. 노포를 찾으려고 했는 데 노포에 대한 정보는 온라인으로 잘 안 나오잖아요. 그래서 아카이브 회 의를 갔을 때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던 거였어요.

12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죠?

문화도시 사업 중에 플랫폼 사업이 있는데 예비단계에서 블로그를 운영 하자 해서 하고 있죠. 두 달 정도 됐는데, 문화도시 사업들, 공론회 그런 걸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려요. 시민 살롱이나 이때까지 했던 프로그램들 전 부 다 기록했고요. 프로그램 개최를 공지하기도 하고, 뉴스 기사들도 올 리고, 문화도시 소개랑 전반적인 센터 소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는 기록 활동이 있나요?

기록은 계속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가게라든지, 마을 결혼식나 행사라 든지. 올해 마을 단오 축제 때도 제가 촬영했거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기록을 남기는 거죠. 하다 보니까 아카이브에 대한 개념을 알게 되고, 이 게 생각보다 중요한 거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체계적으로 해야 되겠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됐고요. 기록 활동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거나 활용한 경험도 있나요? 화명동에 가볼 만한 곳들을 다 가서 촬영해서 찍고, 엔지디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렸죠. ‘그곳을 늗기다’라고. 음식점도 있고 마을 축제 같은 것도 있고. 따로 공유는 안 했어요. 단오 축제 같은 건 맨발동무도서관이나 이 런 쪽에 공유는 했고. 사실 저도 업이 이런 쪽이다 보니까 사진도 찍을 줄 알고 장비도 좀 다 있으니까 그냥 혼자 하는 거죠. 지금 시간적 여유도 없 다 보니까 그냥 찍고 저장하고 그것밖에 안 돼요.

123 금곡

북구에 어떤 기록이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북구 하면 자연환경이죠. 산도 있고 하천도 있고 강도 있고. 이런 자연환 경이 변해가는 모습들을 기록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 동원 비스 타 아파트가 생기면서 앞이 다 깎였잖아요. 이제 옛날 모습을 볼 수가 없 으니까, 그런 부분이 좀 아쉽죠. 그런데 그런 아카이브가 잘 되어 있다고 듣긴 했어요. 주민들끼리 조금씩 조금씩 해서 엄청 많이 하더라고요. 그 런 걸 아카이브하면 어떨까요. 그런 게 잘 돼 있으면 이번에 문화도시 사

업 같이 큰 사업에서도 공동체가 활발하다는 걸 어필할 수 있으니까요.

활동이든 조직이든 기록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거를 당시

에 성실하게 하기는 좀 힘든 것 같아요.

저희도 프로그램 아카이빙을 하긴 하는데, 설계 과정을 아카이빙 안 한

게 좀 아쉽더라고요. 사진도 안 찍고. 그래서 설계안을 만들어 나가는 과

정이랑 작은 프로그램이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 그런 게 아카이

빙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문화도시 사업 을 받으면 할 수 있겠죠. 플랫폼에서 아카이브 DB를 어떻게 구축할지 고 민 중이거든요. 내년에 주민 의견을 수렴해서 제대로 할 계획이에요. 주민 들이 찾기 쉽고,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저는 아카이브에서 최고 중 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내년에 주민들 의견을 수렴 받고 주민들 이 어떤 식으로 자료를 찾는지 파악해서 DB에다 적용할 계획입니다. 그 러면 후차년도에는 주민들이 쉽게 찾고, 직접 업데이트도 할 수 있고, 거 기다 의견도 남길 수 있겠죠.

12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 곳곳의 기억이 연결되고 사람이 연결되는 <도시아카이브> 사 업을 앞으로 만들고자 하는데요. 이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방금 말씀드린 거 같아요. 일단 자료가 모여야 되잖아요. 모이는 게 중요한 데, 어디에도 모일 수 있는 곳은 없지 않습니까. 맨발동무도서관에도 자료 가 축적돼 있을 거고 딴 데도 축적돼 있을 건데, 그게 그 안에만 있으면 활 용하긴 힘들잖아요. 그거를 어떤 키워드나 태그로 분류하는 방법이 있겠 죠. 예를 들어 ‘대천천 낚시’라고 검색하면 낚시와 관련된 아카이브가 쫙 뜨고, 주민들은 그런 태그를 이용해서 필요한 정보를 찾는 거죠. 저는 아 카이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활용되는 거고요. 그렇게 되어야 어느 정도 연결이 되고 활용이 되는 거 지, 그냥 가지고만 있으면 거기서 그냥 끝나는 거잖아요. 이 부분이 문화 도시 사업에서 최고 핵심인 것 같아요. 그게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사람 들 생각이 다 다르잖아요. 구축 용역이 내년에 사업으로 선정되면 이런 방

식으로 아카이브 DB를 만들어보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록 을 전부 다 전자화시키는 거죠. 그것도 작업이 장난 아닐 텐데. 예산이 된 다면 저는 하면 좋겠는데. 아니면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치면 되긴 될 거 고. 주민들이 직접 자료를 올릴 수 있도록, 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시 스템화한다면 그런 게 <도시아카이브>에 맞지 않나 싶어요.

125 금곡

개인적으로 기록에 대한 고민이나 앞으로의 고민 같은 것들이 있 을까요?

고민은 플랫폼이 어떻게 활용될지. 그리고 원본 데이터도 생각하고 있어 요. 플랫폼이 활성화되려면 사업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플랫 폼의 운영주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만든 게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조금 민감한 부분일 수도 있는데, 아카이브 기록물을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려면 돈을 주고 사는 시스템도 넣으면 좋다고 생각해요. 기록물을 올려놓으면 돈을 벌 수도 있고, 기록물 활용이 활성화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도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어야 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해야 플랫폼이 돌아가거든요. 그리고 체계적 기록 시스템은 공공기관에서도 유용하게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 플랫폼 운영에 대한 지원을 기관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 여야 하구요. 그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12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기록가 신아영

부산 북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현호 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한 기록에 관한 생각 들을 재정리해볼 수 있었다. 그간 내 관심이 주로 활자를 통한 아카이브와 아

카이브 행위 자체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이현호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다

양한 방식의 아카이브와 그것을 활용하는 문제까지 두루 생각해볼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127 금곡
12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덕 천

129 덕천
김정곤 박찬석 최진식
아카이브는 공동체를 재생, 회복, 강화하는 좋은 도구이자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정곤 북구문화관광해설사, 낙동문화원 향토사 연구위원

#향토연구 #지역기록 #북구역사

김정곤 님은 올해 낙동문화원의 『화명동

향토지』 집필에 참여했는데, 구 단위가 아

닌 동 단위의 향토지를 출간하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이며, 새로운 시도라고 한다. 이외에도 구포이음 도시재생현장지원센

터에서 발간하는 『구포이음』과 낙동문화

원의 『낙동강 사람들』에 칼럼 연재,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정곤 님은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면서 사람 간에 관계 가 단절되고 있는데, 관계를 회복하는 좋

은 방법 중에 하나가 아카이브라고 했다.

취향이 같은 사람, 목적이 같은 사람들 끼 리끼리 모여 기록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 에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아

카이브가 좋은 도구이자 수단이라는 말을 남겼다.

13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에서 몇 년 거주하셨고, 현재 직업은 무엇인가요?

부산에서 거의 자랐기 때문에 부산이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북구에 거주한 지는 올해로써 12년 됩니다. 제가 퇴직해서 사실상 무직이 죠. 그런데 문화해설사로서 제2의 직업 겸 취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평 범하게 직장생활 하다가 제가 역사에 관심이 있고, 나이도 있고, 시간도 많고 하니까 이래저래 살펴보다가 역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죠. 북구 문화해설사 양성 과정이 눈에 띄어서 그걸 수료했어요. 그때부터 줄 곧 북구에 관련된 해설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북구에서 기록을 하게 된 계기는 어 떻게 되나요?

문화관광해설사 활동을 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주로 해설 활동을 했어 요. 사람들과 더불어 길을 걸으면서 현장에 가서 해설하는 활동을 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책을 좀 읽고 나름대로 연구했어요. 북구에 관련된 수 많은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기에 관련된 지식이나 정보를 모으게 되고, 또 내 나름대로 생각 정리가 되니까 그 생각들을 자연스럽 게 책으로 풀어내게 되었어요. 그게 기록의 시작점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저술 활동도 하고, 그걸 PPT 자료에 담아서 강의도 하고 그런 식으로 활 동하고 있어요. 어떤 저술 활동을 하고 계시는가요? 제가 일부 가져왔는데 『삼차강은 흐른다』라는 책자를 조만간 출간할 예 정입니다. 그리고 요즘 낙동문화원에서 동별 향토지라는 걸 만들어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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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

별 향토지가 상당히 드문 케이스고 새로운 시도인데, 작년에 『금곡동 향

토지』를 만들었고 올해 화명동 향토지를 만들고 있어요. 그 향토지 중에 서 자연 파트를 제가 지금 맡아서 저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자는 올해 12

월에 편집 회의를 거쳐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제가 칼 럼을 썼는데요. 구포이음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소식지 『구포이음』이라 든지 『낙동강 사람들』 같은 문화원에서 만드는 책자에 칼럼을 썼어요. 시 간이 있으면 PPT 자료를 만들어 강연도 하고, 이렇게 다양한 활동으로 기록을 공유합니다. 이렇게 많은 집필과 활동을 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죠. 처음 저를 문화해설사로 인도한 분부터 시작해서 제가 멘토처럼

문의하는 분들이 당연히 있습니다. 제일 먼저 기억나는 건 처음 문화해설

사 양성 과정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이후에 문화해설사를 임명하고, 활 동하는 걸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북구청 원상희 팀장님. 그분은 제가

참 고맙게 생각하죠. 그리고 처음에 아무것도 모를 때 강의해 주신 분들, 이은호 선생님이라든가 여러 선생님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 강의를 들으 면서 제가 첫발을 내게 됐으니까요. 또 박찬석 선생님이라고 아시죠. 그분 은 경험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분과도 서로 대화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습 득했어요. 향토지 저술하면서 도움받은 사람들도 생각나는데, 맨발동무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백복주 씨 이분은 제가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아 서 책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13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선생님이 해설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처음엔 무작정 제가 좋아서 시작한 거예요. 하고 나면 재미있고 즐거우니 까 다른 생각은 없었죠. 그래서 그냥 제 마음대로 해설도 하고 즐겼는데 뒤에 가보니까 이게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어느 날 보니까 나만 즐거워 하고 있던 거죠.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이야기를 듣고자 할 때는 그 사람 들마다 수준이 있고 기준이 있고 또 한계가 있는데, 여태껏 제 기분과 제 기준을 갖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경험이 쌓이면 보이거든요. 이거는 아니 다 싶어서 요즘은 고객 위주로 해설합니다. (웃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게 뭐냐 하면, 이분이 도대체 나와 같이 이 귀중한 시간을 공유하면서 ‘무엇 을 나한테 얻어가겠다.’라는 걸 파악해야 해요.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한 번씩 실수합니다. 파악이 되면 그때부터 최선을 다해서 거기에 시간을 쓰려고 노력하죠. 현재까지 활동해 오시면서 보람되었던 순간이 있을까요? 상당히 많았습니다. 근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두 달 전인가, 석 달 전 에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서 도보 해설을 하더라고요. 그때 영광스럽게도 저를 추천하신 분이 있어서 제가 해설을 맡았습니다. 스무 명 정도 오셨는데 각계각층에서 오 셨고, 연세 많으신 분부터 젊으신 분도 많이 오셔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주제가 뭐였냐면, 구포에 있는 만세길부터 시작해서 길을 탐방하는 거였 습니다. 만세 거리를 걸으면서 그 지역에 숨겨져 있는 역사를 알려주는 거 였죠. 지금은 개발 때문에 유적이라든가 유물은 다 사라져버렸어요. 거리 를 걸으면서 책을 통해 발췌한 내용을 전달하며 해설했죠. 끝나고 난 뒤

135
덕천

에 만족도 조사를 했는데, 봤더니 평가도 좋고 잘 몰랐던 역사를 알았다 는 식으로 평을 해줘서 참 좋았어요. 말 그대로 길 위의 행복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도시아카이브> 사업에서 제가 강의를 두 번 했어요. 첫 번째 강연을 마치고 젊은 분 한 분이 “구포 부근에 살지만, 구포에 이런 역 사가 있는지 몰랐어요. 이제부터 다시 구포를 봐야 되겠네요.”라고 이야 기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아직도 계속 기억에 남아요. 제 해설이나 강연 을 들은 한두 분이 자기 고장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 되거든요. 그런 걸 표 현해 주실 때 보람 있죠. 소개하고 싶은 북구 자료가 있나요. 제가 공부하다 보니까 부산에서는 동래하고 북구 두 군데가 역사가 깊은

곳입니다. 나머지 중앙동이라든가 부산진구라든가 요즘 뜨는 해운대라든

가 그런 지역은 사실 역사가 없어요. 거의 현대에 와서 개발된 곳이고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이 부산항을 개발하면서 그렇게 된 지역이거든요. 그러 면 부산에 살았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느냐? 당연히 동래와 북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래는 제법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 아있는데, 북구는 근대에 들어오면서 변두리 지역으로 퇴락했어요. 유물, 유적을 다 파괴하고, 손상시켰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들이 거의 다 사라지 고 있습니다. 다행인 건 고문서, 고지도가 많이 남아있어요. 그래서 그걸 퍼즐 맞추듯 끼워 맞추면 적어도 17세기, 18세기, 19세기 한 300년에 걸 쳐서 북구 사람들의 삶을 그려낼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책을 저술하거 나 해설할 때 외부에서 안으로 보는 그런 관점으로 봅니다. 관점에 따라서 시야가 달라지잖아요. 북구에 관련된 책들은 참 많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

13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에는 99.9%가 그 안에서 평면적으로 바라보는 모습들을 이야기하고 있

어요. 그래서 저는 외부에서 보는 관점도 읽어보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활동이 북구 기록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 다. 북구에 어떤 기록이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소설 쓰는 거예요. 정확 한 기준과 흐름을 잡은 이야기들이 없기 때문에 ‘아니면 말고’ 하면서 던 지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어요. 그렇게 해놓고 대중에게 먹혀들면 설화가 되고, 나중에 역사도 안 되겠느냐 이래요. 제가 보기에는 차라리 안 하는 게 좋아요. 왜냐하면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풀어내야 현대의 삶에 보탬이 되고 미래의 우리 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지향점으로 도움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 서 저는 사실과 정확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야기들을 풀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북구 곳곳을 기록하고 연결하고 계시는데, <도시아카이브>에 대한 의견도 부탁드립니다. 저도 아카이브가 뭔지는 잘 몰랐는데 보니까 기록, 기록물 저장하는 곳이 라는 건데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조선왕조실록 이런 것들이더라고요. 대 통령 기록물은 좀 어마어마한데, 우리 일상생활과 접목되니까 참 재미있 고 멋진 뜻으로 전달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요즘 현대화라는 수식어에 딱 따라붙는 게 물질만능, 개인주의, 그리고 단절 이런 거거든 요. 공동체라는 의식이 사라지니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서운해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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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

서 말 그대로 단절돼버리잖아요. 다시 공동체 의식을 높여야 하는데,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아카이브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거. 취향이 같은 사람들, 목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관심 대상에 대해 기록하는 거지요. 그러 다 보면 활동도 더 적극적으로 되는데, 그런 부분에서 보면 아카이브는 공동체를 재생, 회복, 강화시키는 좋은 도구이자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인터뷰에 자료들을 가지고 오셨는데 하나하나 소개 부탁드 립니다. 아직 책으로 안 나왔지만, 책으로 나오기 직전의 모습들을 소개하는 것 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져왔어요. 『낙동강 사람들』은 향토문 화지인데요. 이건 향토사 연구위원들의 연구물들입니다. 제가 한 건 문화 해설사하고 북구에 있는 예술가들 몇 분과 상주를 답사하고, 답사기를 한 번 적어본 적이 있고요. 이거는 『구포이음』인데 제일 끝에 구포의 정신과 옛 영광을 간직한 공간인 만세 거리를 중심으로 길의 역사적인 의미에 대 한 제 나름대로 소감을 밝힌 칼럼을 썼어요. 그다음에 이건 작년에 제가 문봉규 대표랑 같이 문화예술플랫폼 3층 만세 갤러리에 전시한 거예요. 관람하신 분은 인상이 깊었는지 저를 만나면 우리나라 어디에도 그런 전 시는 없었다고 이야기해요. 구포에 관련된 고지도가 연도별로 쫙 있는데 지금 이렇게 남아있거든요. 관직이 높은 사람들의 작품도 아직도 남아있 거든요. 그래서 그 한시들을 지역에 활동하는 화가들에게 한 편씩 드렸어 요. 그리고 제가 해설을 해줬습니다. 그러면 뭔가 시상이 떠오르잖아요. 그 시상을 그림으로 그려 달라고 하고 그걸 모아서 전시한 거예요. 근데 작

13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가들이 그린 그림은 현대적이라서 한시와 너무나 매치가 안 되죠. 이게 바

로 이 전시회의 묘미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도 하는구나.” 하 고 시각을 확 바꾸었죠. 근데 인기는 별로 없었어요. 왜냐하면 요즘 사람 들이 이런 데는 관심이 별로 없잖아요. 좀 딱딱한 느낌이니까. 하여튼 상 당히 괜찮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조금 성공은 한 듯한데 참 부족합니다. 한시를 쓴 붓글씨는 누가 쓰신 거예요? 제가 썼습니다. 사실 캘리그라피 하는 사람들한테 맡기면 참 편한데 그 걸 못하니까 제가 쓴 거죠. 쓰고 그냥 한지를 갖다 붙였어요. 엽서로 만 들어서 전시에 오시는 분들한테 한정판으로 드렸는데 나중에는 없어서 못 드렸죠. 대단한 일을 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이거는 ‘삼차강은 흐른다’ 같은 맥락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들. 태백에서부터 쭉 흘러 모든 고장을 거쳐서 구포로 남해로 가는 모든 강을 낙동강으로 불러요. 옛날에는 안 그랬어요. 지역마다 강 이름이 달 랐거든요. 구포 앞에 있는 강 이름이 옛날에는 세 갈래로 흘렀다고 삼차 강, 삼차수라 하거든요. 그 지역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때 어떤 삶을 살았겠느냐? 그걸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들어가는 거 예요. 그래서 그걸 풀어내지요. 거기서 공감대가 나오면 보람 있는 거잖아 요. 그래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지만 그 시대에는 있었던 것, 삼 차강 시절에는 있었던 것을 제가 풀이했습니다. 북구에 역사 문화 관련 책들이 참 많이 나오는데, 이 책은 그런 책들하고는 궤를 달리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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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

중요한 건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중심이 되고 거기에서 현대적인 걸 받

아들일 때 외부 사람들이 구경하러 올 거예요. 예를 들어 저녁노을에 낙 동강 모습을 즐길 수 있도록 벤치도 하나 만들고 한시도 하나 갖다 두고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거기서 소위 말해 ‘멍’도 때리고 힐링 도 하고 그러면 나중에 또 온단 말입니다. 북구는 생태 환경적으로 정말 멋져요. 거기에다 이 지역의 정체성만 딱 넣어주면 됩니다. 생태환경을 배 경으로 정체성이 들어가 있으면 아마 괜찮은 문화가 살아날 거예요. 생 태, 역사, 문화 이 세 개가 모이면 공장이나 큰 기업체가 하나 없더라도 사 람이 살 수 있는 괜찮은 곳이라는 평을 들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14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기록가 이시연

어느덧 긴 터널을 지난 듯 햇빛을 보니 가슴이 푸근합니다. 짧다면 짧고 길었다면 긴 시간이, 시간 아닌 세월이 지나간 여운이 남음은 왠지 누구의 마음일까요? 머리, 들어 하늘을 보았네, 푸른 하늘이 보였네. 본인이 좋아서 한 일이지만 이 길을 걷기까지 스승에게 배우고 공부한 덕분에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주민이 원하면 어디든지 해설하고 교학상 장하는 배움을 가지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았다.

141 덕천
과거에서 지금까지 잘못 전해진 걸 수정하고 있어요
박찬석 북구문화관광해설사, 낙동문화원의 향토사 연구위원

#북구역사 #생태기록 #해설

박찬석 님은 생태에 관심이 있어 화명동 생

태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다. 북구 구석구

석에 감춰져 있는 문화와 역사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역 사적으로 잘못된 사실을 발견하고 고치는

데 관심이 많다고 한다. 화명생태공원이 조

성된 후, 화명종합사회복지관에서 생태동

아리를 만들었는데 초대 회장을 맡아 생태

교란 식물 제거 작업 등을 시작했다고 한

다. 일반 꽃과 구분하기 어려운 생태교란

식물에 대해 방송 영상이나 책자로 기록

이 남겨져 있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들

을 위해서는 주민들에게 구전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공부한 자료, 지역 안내 책자, 부산일보에서 발행한 산행지 등의 기록물

을 보관하고 있다. 박찬석 님은 세월이 변

함에 따라 마을도 계속해서 변화할 수밖

에 없으며, 그런 모습들을 남기기 위해 기

록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14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선생님 고향은 어디시며 북구에서 몇 년 거주하셨나요?

내 고향은 황해도 연백이에요. 6.25 사변 나서 여섯 살 때 피난 내려왔어 요. 여러 곳에 살다가 북구에 온 지는 지금 20년이요. 주로 하시는 일은 어떤 일이신가요?

올해 일흔일곱 살이에요. 다른 사람 같으면 다 백수예요. 그런데 문화관 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는 일은 생태에 관심이 있었기에 화명동 생태 지킴이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북구 구 석구석에 감춰져 있는 문화, 역사 이런 걸 조사하고 연구하고 찾아오는 사 람들한테 알려드리고 있어요. 문화관광해설사 일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나요? 내가 원래 학교 다닐 때 역사, 지리 공부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중학생 때

『간추린 세계지리』, 『간추린 한국지리』, 『간추린 세계사』, 『간추린 국사』 등 간추린 시리즈로 나온 참고서를 봤어요. 고등학생도 보는 참고서였는 데. 그 당시 세계의 각 나라 수도, 산맥 이름 이런 걸 머릿속에 다 집어넣 을 정도로. 그러다가 졸업하고 한 오십 년이 흘렀잖아요. 화명동 와서 직 장생활을 하면서 주말에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화명동 산악회를 따라다녔는데, 1등으로 올라가서 1등으로 내려온 거예요. 남는 게 하나도 없어. 그래서 어느 산에 간다고 하면 그 산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한 거 예요. 미리 조사해 가서 내가 공부한 거랑 맞춰보면 거의 다 맞아요. 나만 알 게 아니라 설명도 해야겠다, 그래서 유적지, 바위, 인구에 대해서 설명 해줬죠. 그때 생태에 대해서 조금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태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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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도 조금 설명하다 보니까 해설을 잘하게 되고. 회사 일 때문에 더 이

상 못했어요. 그러다가 회사 생활을 끝내고 바로 부산관광공사에서 모집 하는 스토리텔러에 응시해서 시작했어요. 올해로 11년째예요. 해설사 활동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을까요?

해설할 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돌아서거나 집중해요.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은 이기대에서 활동할 때 모 단체 지적장애 가족

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어머니가 부족하면 아이들이 똑똑하고, 아이들 이 부족하면 어머니가 똑똑한 이런 가족들이 있어요. 이런 가족들이 모여 서 이기대를 찾아왔어요. 예약된 팀은 아닌데 단체로 와서 내가 “어떻게

오셨나요? 오늘 제가 여러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해드릴까요?”하니 까 좋다고 하더라고. 그랬는데 어머니가 지적장애가 있으면 그 자녀들이 내가 설명하는 걸 열심히 듣고 자기 엄마한테 다시 설명해주는 거예요. 반 대로 엄마가 똑똑한 사람은 엄마가 듣고 자식들한테 이야기를 해주는 거 예요. 어느 한쪽이라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전달할 수 있도록 했 어요. 그다음에는 타지역에서 ‘두드림 모임’이라는 중학생 단체가 왔어요. 국제시장에서 할 건데 사상 터미널에서 기다렸어요. 학생들을 데리고 지 하철 타고 국제시장 가서 설명하고 다시 사상으로 보내줬는데, 그중에서 한 아이가 투어 중에 내 손을 꼭 잡고 안 놔줘요. 어떤 아이인지 물어봤더 니 결손 가정이래요. 거기 온 아이들 전부 결손 가정이에요. 마지막에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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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이름을 부르면서 학교 찾아가면 만날 수 있냐고 하니까 부끄럽다고 오 지 말라 하더라고요. 이런 가족이나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해설하고 대해야 할지 노하우가 계속 쌓였어요.

그러면 향토사연구소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향토사연구소는 지금 4년 됐어요. 북구에서 문화해설을 하다 보니까 낙 동문화원도 출입하게 되고, 낙동문화원 해설사 중에서 한 명이라도 연구 위원이 필요하다 해서 찾아가서 연구위원이 됐죠. 사실은 문화원에서도 나를 눈여겨봤는데, 가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거든요. 「아침마당」, 「전 국을 달린다」. 다른 방송에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저를 연구위원으 로 흔쾌히 받아줬다고 봐야죠. 내가 제일 부끄러웠던 것이 북구에 대해 서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북구에 대해서 공부해야 되겠다 해서 문화원 을 찾아간 거예요. 가서 그 당시 국장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북구 에도 문화해설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국 장하고 팀장하고 나하고 세 사람이 주동이 돼서 문화해설사를 만든 거죠. 향토사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금곡동 향토지』

집필에 참여하신 건가요? 네. 『금곡동 향토지』 원고를 쓸 때는 금곡 토박이인 이수재 선생을 중심으 로 자연 팀을 맡아서 활동했어요. 저는 산을 좋아하고 산 구석구석을 알 고 있으니까 내가 인솔해서 같이 다니는 거예요. 공창마을 행복센터에 가 면 복도에 ‘신선바위’라는 사진이 하나 있어요. 그 이름은 제가 붙인 거예 요. 거기가 경치는 좋은데 바위 이름이 없다고 그래요. 그럼 지금부터 내 가 이름을 붙인다고 하고 신선바위라고 부르자 해서 그때부터 신선바위라 고 부르게 되었어요. 그걸 그대로 향토지에도 적어놓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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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을 위해 공부했던 자료를 정리해 놓으신 게 있으세요?

집에 다 있어요. 문화관광해설사 공부한 거 2권, 그다음에 자료집, 어디 찾아가서 조사한 것, 어디 가면 가져오는 책자. 부산일보에서 발행한 산 행지도 거의 다 있어요.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어떤 역할들을 하셨나요? 향토사 연구는 유적지를 중심으로 하고, 과거에서 지금까지 잘못 전해진 걸 수정하기도 해요. 연구위원이 되다 보니까 학술지에 기록할 수 있는 거 예요. 가장 잘못된 게 지금까지 임진왜란 때 양산왜성, 구포왜성, 김해죽 도왜성 삼각 방어제를 구축했다고 설명해 왔는데, 그걸 제가 고쳤어요. 구 포왜성이 있을 때는 양산왜성이 없었고, 양산왜성이 있을 때는 구포왜성 이 없었는데 어떻게 삼각 방어가 되느냐고요. 오히려 농소왜성, 마사왜성 이렇게 방어지를 구축한 거예요. 이번에 구포왜성에서 설명할 때도 그걸

설명할 거예요. 향토지 『낙동강 사람들』에 발표하기도 했어요. 또 한 가 지는 백산 안희제 기념관 연혁에 구명학교 교장으로 2년 재직했다고 적 혀 있어요. 잘못된 거죠. 백산 안희제 선생이 구명학교에서 교장을 할 리 가 없는 거예요. 10년째 고치라고 해도 안 고치고 있어요. 구명학교를 설 립했던 장우석 선생하고 안희제 선생이 친분이 있었고, 안희제 선생의 권 유로 학교가 설립된 거예요. 학교 설립하는 날 안희제 선생이 축사하고. 그거 외에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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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잘못된 내용을 따로 정리한 자료가 있나요?

북구문화관광해설사들이 쓰는 매뉴얼집이 있어요. 처음에 북구청에서 매뉴얼을 만들 때는 북구 관광과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적어서 만들 었어요. 근데 부족하다 해서 두 번째 매뉴얼은 우리 해설사들이 직접 적 은 거예요. 생태에 대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셨어요? 화명생태공원이 조성되고 오픈식을 할 때 구민 체육 축구장에서 준공 기 념 걷기 대회를 해서 참가했어요. 그 이후로는 새벽 운동을 하면서 계속 걸었죠. 그리고 화명종합사회복지관에서 생태 공부한 사람들 열다섯 명 이 생태동아리를 만들어서 초대 회장을 내가 맡고, 그때부터 생태교란 식 물 제거 작업부터 시작해서 감시하고 있어요. 사실 저희의 감시는 아무런 힘이 안 돼요. 축구장 옆에 있는 파크 골프장도 원래는 잔디밭이었어요. 한 5~6년 동안 잔디를 잘 가꾸어서 잔디가 다 생성되니까 거기다 골프장

을 만들더라고요. 그러더니 골프 인원이 자꾸 늘어나니까 하나 더 만들자 해서 지금 또 하나 만든 거예요. 그때 제가 적극 반대했거든요. 이거 만들 면 여기에 있는 모든 벌레가 다 죽는다. 벌레들이 있어야 새들이 날아올 거 아니에요. 처음 생태공원이 조성될 때는 달팽이, 민달팽이가 많았고, 그다음에 고라니, 너구리, 족제비, 심지어 산에서 멧돼지도 넘어와요. 그 랬던 곳이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사람만을 위한 공원이에요. 그 게 무슨 생태공원이에요. 안타까운 것은 생태계를 다 살리고 싶어서 노력 하는데 환경단체는 못 따라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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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꽁이 사진과 소리를 녹음했던 이야기를 전에 들었어요. 맹꽁이는 해지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울거든요. 내가 거기 가는 시간은 새 벽이에요. 아침 새벽 운동하러 갔는데 소리가 들려서 이걸 어떡할까 하다 가 녹음했어요. 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주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것 같 아서 안 들려주고 환경단체에만 문자를 보냈어요. ‘여기가 맹꽁이 서식지 고 떼창이 나오고 있다. 근데 여러분들이 찾아오지는 말아라. 울음소리만 듣고 가라.’ 근데 그 문자를 보고 그날 저녁에 다 온 거예요. 맹꽁이를 찾 으려고 다 뒤졌어요. 맹꽁이들은 거기서 도망도 못 가요. 오죽했으면 파크 골프장에 웅덩이 비슷한 곳으로 탈출한 거예요. 환경단체에서 조사한다 고 한번 왔다 가면 그 순간에 환경이 파괴되는 거죠. 생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런 건 우선 기관의 문제예요. 생태 문제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지는 사

람들은 제외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뭘 발표할 수도 없고 지속할

수가 없어요. 지난가을에 축제위원회에서 양미역취꽃이 예쁘게 피어 있

으니까 거기다 포토존을 설치하겠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우리 동아리 사람들 다 불러서 제거해 버렸어요. 양미역취 꽃가루가 날아다니면 알레 르기를 일으키거든요. 양미역취는 다년생이기 때문에 그대로 퍼지면 양 미역취밭이 돼요. 축제위원회에서는 몰랐다고 그러더라고요. 이번에 축 제위원회에서 양미역취 제거 작업을 한다고 그래요. 근데 달맞이꽃이

15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양미역취를 확실히 구분할
라고
것이
수 있게 교육시켜서 하
했어요. 나도 사진을 찍어서 갖고 다니는데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이
양미역취인지 달맞이꽃인지 구분을 못 해요. 관리주체가 낙동강 관

리본부인데 거기서 관리를 안 해요.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할머니 들이 양미역취꽃이 예쁘니까 꺾어가요. 나한테 들키면 그거 애들한테 알 레르기 일으키는 안 좋은 꽃이니까 버리라 하거든요. 그럼 다 버려요. 그 리고 그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해요. 지금은 생태공원에 가면 양미역취 꺾 어가는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것을 몇 년 동안 그렇게 했거든.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생태 관련 조사 보고서 작성에도 참여하셨다고요. 생명 다양성 조사팀이 있어요. 2013년부터 시작했어요. 저는 2014년부 터 참석했는데 을숙도, 삼락, 이기대, 장산, 금정산, 수영강, 오륜대 이런 데에 곳곳에 다니거든. 그런데 화명생태공원만 다양성 조사를 안 했어 요. 2018년도에 대천천, 금정산에서 조사한 것을 토대로 보고서를 만든 건 있어요. 북구에서 기록으로 남겨야 할 대상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구포는 워낙 많이 변하거든요. 제일 어려운 것은 구포역에 갔을 때 “구포 역장 관사가 있습니다. 관사를 보여드릴게요.”하고 갔는데 관사가 없어진 거예요. 분명히 내가 교육을 받을 때는 관사에 갔거든요. 교육 끝나고 사 람들을 데리고 가니까 관사가 없어진 거예요. 그다음에 만세 거리에 가면 일본사람들이 지은 백화점이 있어요. 우리는 미나카이 백화점이 최초인 줄 알지만, 구포가 워낙 돈이 많으니까 일본사람들이 여기다 백화점을 지 은 거예요. 근데 백화점이 6개월 만에 망했어요. 망했어도 백화점 건물이 몇 년 전까지 있었거든요. 근데 그것마저 헐어버렸어. 관사는 책에도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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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고, 우리가 조직하기 전에 헐어버려서 사진을 못 찍어놨어요. 그리고 그 때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 사진을 찍을 수 없잖아요. 그래도 해설하는 포 인트에 대한 사진들은 다 찍어서 다 보관하고 있어요. 더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놓아야죠.

15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기록가 김나경 글쓰기와 읽기를 모두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가치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보존하며 살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어서 긴장도 되고 미흡한 부분이 많았지만, 나 중에는 일상 대화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실 때는 옛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기록 활동에 진심으로 열정 이 있으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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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동 향토지를 만들 때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게 보람 있었어요
최진식 낙동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향토연구 #아카이브 #기록정리

최진식 님은 부산전문대학의 민속박물관

장을 맡으며 추진했던 유물 정리 및 전시, 기증자 관리 경험이 현재 향토사연구소의

아카이빙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향토

사연구소는 지역 자원을 연구·조사·수집

하고 잡지, 연구서, 향토지 형태로 발간하

고 있으며, 이를 활용해 학술특강이나 문

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21년부터 금

곡동을 시작으로 북구 5개 동 향토지를 매

년 만들고 있으며 동시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에만 치중하지 않고 현

재의 이야기와 인문 분야를 포함시켜 기존

의 향토지를 보완하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

이 지역에 대한 애향심도 생기고, 단결도

되고, 지역 문화에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 면서 기록 활동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고 말

하며, 기록물을 보존·공유하는 거점의 필 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15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에는 언제부터 어느 정도 사셨는지, 지금 하고 계신 일은 무엇 인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지금 향토사연구소장을 하고 있습니다. 1985년에 부산전문대학 강사로 오면서 구포에 대해서 알게 됐고, 1990년에 전임 교수가 되면서 만덕동에 서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어요. 부산과학기술대학교에서 교수이자 민속 박물관장으로서 한 8년 정도 민속박물관을 거의 만들다시피 했죠. 북구 의 문화나 역사와 관련해서는 백이성 원장님의 많은 협조가 있었는데, 그 래서 지금 소장의 자리에 왔지 싶습니다. 부산과학기술대학교가 전국의 평생학습 중심대학 7곳 중 하나로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은 북구청과의 합 작품이라 볼 수 있죠. 그때 많은 주민에게 특강도 하고 프로그램도 운영했 었습니다. 그 후에 『북구신문』 편집위원을 12년 하고 또 얼마 전에 한 2년 을 더 했어요. 북구 선거관리위원도 한 12년 정도 했네요. 민속박물관 이야기가 되게 흥미롭네요. 박물관 시절에 관장하시면

서 여러 가지 토대를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때 활동을 좀 더 구체 적으로 얘기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당시 동래야류 제대각시를 맡았던 사람이 민속 관련한 지역의 유물을 모 았는데, 그중에 1,500점 정도의 민속 유물을 우리 학교에서 구입했어요. 초대 관장이었던 양근석 교수가 철학을 전공해서 90년대 이후부터는 제 가 유물 전시도 하고, 안내판도 붙이고, ‘민속박물관 교실’이란 것도 했어 요. 초·중·고 학생들을 데려와서 1시간은 강의하고, 1시간은 박물관을 돌 면서 설명했죠. 그래서 한때는 학생들의 교외학습 시간의 필수 코스로 발 전했어요. 민속박물관이라는 것이 서민들이 애환이 상당히 서렸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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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은 이런 걸 생판 처음 보다 보니까, 상당히 인기가 있어서 전국

적으로 소문이 났었어요. 그러다 초등학생들의 토요일 수업이 체험학습

으로 대체되면서 다른 기관으로도 가다 보니까 점차 학생들이 안 왔죠. 요

즘은 유치원생들이 많이 와요. 박물관에 있을 때 학교에서 계간지를 만들

어서 그 안에 유물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하기도 했죠.

민속박물관에서의 활동들이 향토사 연구로 연결이 됐던 건가요.

처음에는 부산과기대의 민속박물관이 이 지역에서 문화와 민속의 센터

역할을 하려고 상당히 노력했어요. 그런데 사립대학교고 북구청에서는

생각이 또 다르다 보니까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죠. 사실 안타까운 건 우 리 북구에는 공적인 박물관이나 전시관 이런 것이 없어요. 그래서 기록물

을 모으는 것도 문제고, 그걸 보관하고 목록화·전산화하는 부분들이 상

당히 취약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세종문화원에 있는 것처럼 큰 향토사연구실을 북구에 만드는 게 하나의 목표예요. 사실 그것이 민속 박물관에서부터 생각이 계속 왔던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웃음) 저희도 그 부분을 지금 준비하고 있어요. 올해는 도서간행물을 중 심으로 해서 어떤 게 있고 무슨 내용이 있고 어디에서 볼 수 있고 이런 걸 정리하고 있어요. 사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북구와 관련된 기초 자료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예요. 우리는 재작년에 문화원에 있는 자료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김해, 양산, 부산 이런 식으로 목록화 작업을 하는 중이에요. 목록화 작업을 하 나씩 주기도 했는데, 한자를 모르다 보니까 그걸 전담할 사람이 필요한 상

15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황이에요. 그다음에 그걸 가지고 연구위원들이 자기 전공 분야별로 논문 을 쓴다면 수준이 더 높아질 거라 보고 있어요. 향토사연구소는 어떻게 운영됐나요? 제가 2015년도에 향토사연구소 소장으로 왔는데, 당시에 사람도 없고 운 영 규정도 없었어요. 그래서 세종문화원과 문경문화원에 갔었는데, 세종 에 가서 깜짝 놀랐어요. 향토사연구소가 문화원 전체의 일을 보면서, 자 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책자를 만들고 주민들을 교육한다는 거예요. 이 런 것들이 북구 문화 생성에도 도움이 되겠다 해서 우리 문화원의 규정 도 만들고, 새마을문고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서 운영했죠. 소장이 있고 밑에 간사가 있고 그 밑에 연구위원과 자문위원이 있는데, 연구위원 안에 는 특별연구위원이 있어요. 특별연구위원은 구청에서 어떤 사업을 맡겼 을 때 단기간으로 그 작업을 하고 사업이 끝나면 흩어져요. 일반위원은 지 금 각 분과 또는 전공별로 열 몇 명 정도 있어요. 그다음에 우리가 향토지 를 만들다 보니까 법정 5개 동을 조사하기 위해 동마다 자문위원을 뒀어 요. 연구 활동 같은 경우는 『낙동강 사람들』 연간 잡지를 계속 쓰고 있고, 『낙동향토문화연구』라는 논문 모음집 형태의 책을 계속 발전시켜 가면서 쓰고 있어요. 문화 활동과 관련해서는 재작년부터 외부에서 한두 사람을 불러와서 주민들에게 특강도 하고, 각종 문화행사에 참석해서 자문도 하 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김해, 양산, 함안문화원 등을 방문해서 어떻게 운 영하고 있는지 보면서 문화 정보를 교류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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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연구원 활동 외에도 개인적으로 기록을 남기신 게 있을까요. 제가 90년부터 북구에 살면서 북구 관련 논문 썼던 걸 한번 뽑아보니까 1994년에 「조선시대 낙동강 유역의 경제활동」이라 해서 부산전문대학 학 술연구소 『연구논총』에다가 실었던 게 있더라고요. 1998년에는 『구포청 년회 회록』을 한글로 다시 쓰고, 학교 『한국문화논집』에다가 「일제 구포 청년회의 조직 활동」이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안 쓰다가 2019년에 『부산 북구 문화해설사 양성 과정 교재』라고 해서 양성을 위한 책을 만들었어요. 2020년에는 『부산광역시 북구 당산제 실태조사』라는 책을 만들었죠. 그다음 『낙동향토문화연구』 안에 「부산 북구 문화유산 보존과 복원」, 그다음 「조선시대 낙동강 동원진의 수참지 연구」, 2021년 에는 『북구 자연마을』이라는 사진첩도 냈어요. 그다음 『낙동향토문화연

구』에서 「구포장터 3.1 만세 운동 연구」 이런 식으로 제가 논문을 실제로

썼는데, 지역사 논문을 쓸 때 자료가 없는 한계도 있었죠. 그래도 하는 데 까지 해야 안 되겠나 생각합니다. 『낙동강 사람들』은 소식지 개념인 건가요?

아니에요. 향토지 관련 잡지예요. 북구 문화와 관련된 소식은 거의 없고 새롭게 문화 관련 글을 씁니다. 예를 들어서 마을 축제가 있으면 어떤 축 제고 언제부터 하고 이런 걸 쓰죠. 30호 이후부터는 내가 담당했는데, 낙 동강 유역에 대해서 특집을 한 게 있어요. 낙동강변에 있는 행정구역에 대 해 한 네 편 정도로 해서 연구위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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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직접 조사해서 하고 있거든 요. 우리 북구 낙동문화원에서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해서 벌써 이만큼 많은 자료가 축적되어 있고,
대표성을 띤다고
그래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조사 내용을 정리한 것 말고 낙동문화원과 향토사연구소에

서 하는 활동 자체를 정리하거나 기록하는 작업은 없었나요?

지금 우리가 5개 동 작업을 하고 나면은, 문화원 역사서를 만들 계획이에

요. 그게 있어야만 문화원이 실제로 문화정보센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데, 없다 보니까 사실은 사람들이 문화원이 있느냐 없느냐 하고 있죠. 그 런데 자료도 없고, 특히 우리 같은 경우는 문화원 원사가 없으니까 처음 부터 자료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내가 처음 소장으로 왔을 때는 『낙동강 사람들』 책자가 없는 호도 있어서 억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맞춰 놨어요. 그게 문화원 원사를 할 때 기본적인 자료가 될 거예요. 아까 이야 기했듯이 박물관, 전시관이 없으니까 문화원에 단독 건물을 주면 도서관 기능도 하고 유물 전시도 하고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데 지금 그런 게 안 되고 있으니 문화원을 없애자는 말이 자꾸 나와요. 전에 북구청 지하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문서가 정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상 구청에는 기록관실이 따로 있더라고요. 북구청에도 구청으로 들어오는 문서나 기록들이 보관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고, 민간에서 학술적 으로 들어오는 자료는 향토사연구소에서 관리했으면 좋겠어요. 지역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 있 을까요? 금곡동 향토지를 만들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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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
때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그 책이 만 들어지면서 북구의 다른 동에서도 잘 만들어보자고 하더라고요.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향심, 어떤 동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단합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저희 입장에서는 하나의 큰 보람이죠.

같은 마을에서도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번에 향 토지가 나오면서 한데 묶여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거 같아요. 그런 걸 하는 게 향토사연구소잖아요. 그런데 향토사연구소가 ‘사(史)’자 가 중심이 되다 보니까 명칭이나 범위에서 좀 너무 한정적이다, 상당히 고 리타분하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또 향토지의 기본 구성이 과거사이 지만, 2020년대의 금곡동이 어떤지 화명동이 어떤지 이것도 상당히 중요 하지 않냐 그래서 인문 쪽에도 방점을 많이 두고 있거든요. 그래서 화명동 의 경우 ‘부산다운 건축상’을 받은 건축물을 게재하면 현재의 사람들이 중요하게 안 보겠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했죠. 향토지는 어떻게 배포하나요.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졌나요?

500부를 만들었는데, 나누다 보면 얼마 안 돼요. 화명동 같은 경우는 오 랜 전통을 갖고 터줏대감으로 있었던 집안이 평택 임씨 집안, 파평 윤씨 집안이거든요. 그다음에 창원 정씨, 경주 최씨, 안동 권씨가 들어왔죠. 이 번 화명동 향토지는 옛날 집성촌과 관련된 내용을 좀 넣자 해서 제일 먼 저 파평 윤씨 집안을 찾아갔어요. 그다음에 평택 임씨 집안, 수정마을의 김해 허씨 집안, 창원 정씨 집안 이렇게 해서 상당히 많이 정리했어요. 사 업이 크다 보니까 파평 윤씨 집안 같은 경우는 50부를 요청할 정도로 관 심이 있더라고요. 앞으로 만들

16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향토지에
향토지라는 게 그 지방의
대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특색을 집중적으로 다뤄야 하거든요. 구포 같은 경우는 대표성을 갖기 때문에 구포 전체 지역을 아우르며 손을 많이 대야

할 것 같아요. 만덕은 오히려 자료가 진짜 많이 없거든요. 덕천은 만든 동 이다 보니까 제일 자료가 없을 것 같아요. 지역사 하면 제일 문제인 게 누가 카더라 하는 것 가지고 적어놨다가는 큰일나요. 그래서 철저하게 인터뷰하 고 신빙성 따져 가면서 해야 되는데 거기에 그럴 인물도 없어요. 그래서 구 포동을 할 때는 구포국수 자체에 대해서 좀 많이 다뤄볼까 싶기도 해요.

이음북구 기록가 염수정

좋아하는 일, 생활, 취향을 찾는 여정 속에서 기록을 만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해보니 최진식 님과 올해 <도시아카이브> 예비사업이 지향한 바가

뜻이 맞는 부분이 많았다. 북구 아카이브에 대한 애착이 있는 기관이기에 문

화원과 협력할 방안이 모색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63 덕천
16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만 덕

165 만덕
곽종영 김성연 문난이 서주열 이언옥 전상규 정신모 최기봉
우리 동네는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돌봄이 필요한 학생들과 하는 투어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어요
곽종영 만덕마을해설사, 북구문화해설사

#지역기록 #북구역사 #해설

곽종영 님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전국을

돌며 문화재를 찾아보는 걸 좋아했는데, 우연히 주민센터에서 만덕마을해설사를

양성한다는 얘기를 듣고, 해설사 수업을

수강했다고 한다. 이후 수강생들과 만덕해

설사반을 결성하고, 주민 대상으로 해설하

다가 북구 교육지원과의 <별난 마을 선생

님>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교육청의 다행

복교육과정으로 학생들에게 마을을 알리

고 있으며, 꼬마해설사 양성 등 활발한 활 동을 하고 있다. 아들이 BTS 정국과 친구

라 관련 정보를 가지고 <정국투어>를 만든 게 방송을 타면서 곽 반장이란 별명을 가 지게 되었다. 앞으로 어려운 아이들과 함께 만덕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돌면서 우리나 라를 알려주는 게 미래의 계획이라고 한다.

16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곽종영입니다. 곽종영보다는 곽 반장으로 더 유명하고요. 경남 밀양 수산이라는 낙동강이 흐르는 조용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 하고 1995년도 3월부터 북구에 와서 살고 있고요. 30년이 다 되어가고 있 습니다. 옛날에는 직장생활을 했고 지금은 유통 쪽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북구 문화해설사이기도 하고 만덕마을해설사이기도 하신데, 시작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가 아이들 어릴 때부터 데리고 놀러 다니기 좋아해서 토요일, 일요일 만 되면 전국으로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이 만덕 은 교통이 굉장히 막히는 지역이라는 겁니다. 만덕에 왔다가 교통 막힌다 고 짜증만 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을을 좋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까?’ 생각만 하던 중에 우연히 우리 만덕2동에서 마을해설사를 모집한다 는 소리를 듣고 참여하게 되었어요. 해설사 교육을 받고 ‘마을을 위해서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그때 당시의 최기봉 동장님 과 의논하여 만덕마을해설사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18 명이었는데, 지금은 7명이 남아있습니다. 일곱 분 중에 두 분이 이사하다 보니까 실질적으로 다섯 분 정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만덕마을해설사 활동을 위해 자료를 많이 찾아야 하잖아요. 어떤 식으로 자료들을 구하셨어요? 고향이 북구가 아니다 보니까 사진도 없고 어디서 구하는지도 몰라서 처 음에 막막하긴 했었는데요. 인터넷에서 구하다 보니까 문제가 많습니다.

169 만덕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정보들이 100% 맞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아는 교수들도 찾아뵙고 역사 강사들이랑 만나서 이야기하고 만 덕에 있는 고등학교, 중학교 출신분들께 사진도 구했어요. 그 당시에는 해 설을 위해서 찍은 사진이 아니다 보니까 정확한 내용이 부족했습니다. 우 리 만덕마을이 중구 쪽 산복도로에서 이사 온 분들이 살더라고요. 그런 어른들도 알다 보니까 그분들 상대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래서 만덕에 대해서는 자신 있다 싶어서 2017년도 9월부터 만덕투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활동하셨다고 그러던데요.

초창기에는 학교에서 요청받아서 했고요. 2018년도부터는 <별난 마을 선

생님>이라는 북구청 교육지원과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 참여해서 북구에 있는 학교 50여 곳을 요청받아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꼬마 해설사를 양성했다고 하던데 소개 좀 해주세요. 꼬마 해설사는 세 군데에서 양성을 시작했습니다. 신덕초등학교는 만덕 복지관을 통해서 의뢰받았고요. 금곡초등학교는 동원복지관을 통해서 의뢰받았고요. 장산복지관을 통해서 만덕중학교 해설사 양성 의뢰를 받 아서 수업했었는데, 지금은 신덕초등학교만 수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꼬마

17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해설사들도 잘합니까? 어른들도 앞에 나서기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그만두시더라고요. 지금도 보조만 하겠다고 하는 분도 있고요. 그 정도로 어른들도 자신 없어 하는

부분이니까. 저도 처음 만덕복지관에서 의뢰를 받았을 때 꼬마 해설사가 가능하겠나 의구심을 가지고 수업에 참여했는데, 3개월 하고 나니까 특 출한 아이 한두 명이 보이더라고요. 신덕초등학교에서 종업식 날에 학부 형들 모시고 학예회를 했는데, 꼬마 해설사가 가장 인기가 좋았다고 하더 라고요. 교장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서 직접 양성하자 그래서 2019년도부 터 다행복 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설사를 시작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이 일을 돈을 받고 하는 게 아니고 자원봉사로 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주 변에서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운송, 유통 쪽 일을 하다 보니까 주로 저녁에 움직입니다. 저는 좋아서 하는 건데 친구들은 “그거 왜 하노?”, “ 잠 좀 자지.”, “술 먹으러 오지, 뭐 하고 있노?” 했거든요. 우리 집사람도 “

잠을 더 자지 뭐 한다고 자꾸 그래 하나? 일요일에나 하지.”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또 제가 옛날부터 가족을 데리고 많이 놀러 다녔는데 투어 를 하다 보니까 그런 게 많이 약해져요. 그래서 반대를 많이 했는데,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집사람이 같이 와서 동영상 촬영도 해주고 적극적 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마을해설사를 하면서 스스로 좀 바뀌었다, 혹은 이걸 통해서 성장 한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마을해설을 하려면 옛날이야기를 많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다 보니 책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요새는 동양 신화를 공부하는데 우리 역사에 허점 이 너무 많더라고요. 공부도 하고 한국사 강의도 시간 나면 듣고 그런 부

171 만덕

분이 저한테는 좋아요. 지금은 또 왜성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왜

성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안 밝혀져 있더라고요. 우리 대한민국에 왜

성이 30개 정도 남아있거든요. 하나씩 투어하면서 공부하려는 중입니다.

2017년도부터 투어를 하셨는데 코로나 때문에 좀 멈칫하지 않았 습니까?

우리가 2020년 3월 투어부터 못 했고요. 7월에 잠시 풀려서 7월, 11월에 투 어를 했어요. 2021년도는 인터넷으로 신청받아서 사진을 가지고 줌으로 1 년을 했고요. 2022년부터는 5명이나 10명 소단위로 투어를 하고 있습니다. 투어 내용을 책으로 낼 생각은 없으신가요?

초창기에 한 3년 정도는 제가 투어 나갔던 내용을 다 기록했습니다. 그 냥 책처럼 밴드에 글을 쓰고 투어했던 내용을 썼어요. 제가 참 희한한 게 역사 연대를 외우려고 하면 돌아서면 까먹는데 투어했던 내용은 집에 와 도 다 기억이 납니다. 그 내용들을 그대로 기록을 해놨어요. 그걸 가지고 ‘곽 반장의 투어 이야기’라든지 이런 형식으로 책을 한번 내려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예산 문제도 있고 그래서 마음속에 고요하게 간직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투어를 하면 보통 어떤 분들이 주로 오나요? 북구투어 하면 북구 사람, 만덕투어 해도 북구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하 는데요. 1회에 20~25명 정도를 모집하는데 반쯤은 북구 사람이고 나머 지는 타지역 사람들이 옵니다. 자원봉사센터에서 북구투어 할 때는 봉

17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사 시간 때문에 많이 오는데요. <해설사와 함께 만덕에서 놀아보기> 투

어에는 주로 만덕에 살다가 다른 지역으로 간 학생들과 어른들이 궁금해

서 많이 옵니다. <정국투어>를 만드셨다고 그러는데 계기는 무엇인가요?

2019년도에 방탄소년단이 사직운동장에서 콘서트를 했거든요. 이틀을 했는데 일찍 오신 분들이 온 김에 정국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보려고 관 광버스를 타고 많이 오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초등학교 앞에서 사진을 찍 고 가더라고요. 근데 그 학교가 정국이가 다닐 때 모습이 아니거든요. 모 든 게 바뀌어 있거든요. 오신 분이라도 그걸 알고 가야 안 되겠나 싶었는 데, 투어로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제가 그 당시에 학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밖에 나와 있는데 한 세 가족이 와서 정국이가 살던 아파트를 찾 으며 두리번 두리번 하면서 가더라고요. 제가 참 오지랖이 넓지, 학원에 아이들이 있는데도 가족을 데리고 올라가서 “여기가 정국이가 살던 아파 트고, 정국이 먹던 분식점이 여기고.” 빙 둘러보면서 “정국이가 다닐 때 학 교는 이런 모양이었습니다.”, “여기가 지금은 후문이지만 정문이고.” 이렇 게 설명하고 보냈어요. 이렇게 할 게 아니고 투어를 한번 계획해보자, 싶어 서 특별 투어를 기획했어요. 제가 원래 3월에서 11월까지 투어를 하는데 요. <정국투어>는 2월에 한 번, 7월에 한 번 별도로 투어를 하고 있습니다. 정국이가 가던 분식점 이런 건 어떻게 압니까? 제 둘째 아들이 정국이랑 친구입니다. 그 당시 방탄소년단 연습생 시절하 고, 이름 알리기 시작할 때 부산에 오면 꼭 친구들 5명이 만났거든요. 만

173 만덕

덕에 엔제리너스 2층에 모이게 되면 그날 그 엔제리너스는 다른 사람 출

입 못 하게 빌려가지고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은 엔제리너스가 없어졌는

데요. 제가 그 당시 투어할 때 거기가 정국이가 앉았던 자리다고 이야기했

으면 아마 그 커피숍은 대박 났었을 겁니다. 활동들을 기록이나 사진으로 남기신 거잖아요. 주로 어떤 내용을 전시했었어요?

저희 투어할 때 사진들을 모아서 남겼죠. 우리 투어하는 모습, 문화재 사 진. 그렇게 전시한 거나 캘린더, 파일 이런 건 다 갖고 있어요. 밴드에 다 올려요. 만덕에 은행나무잎 축제라고 있었습니다. 그 축제 기간에 저희가

1년 동안 활동한 것을 사진으로 전시했었거든요. 그런데 코로나가 오고 나서는 활동을 알릴 길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1년 동안 돌았던 것

을 기록하는 방법이 사진보다는 달력이 더 낫겠다는 생각으로 올해, 작 년, 재작년 3번을 만들었습니다. 올해는 한 30부를 만들었고요. 2년 정도 는 5부씩 만들어서 필요한 곳에 제공했습니다. 투어를 하면서 느낀 아쉬운 점과 앞으로 해보고 싶은 투어는 무 엇인가요?

제가 돌아다니면서 깜짝 놀란 것이 학교 수업을 들어가면 초등학교 3학 년이 한글을 모르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저는 충격이었습니다. 모르는 애 들이 뭐 있겠지, 정도였지 실감을 못 했거든요. <별난 마을 선생님>이라는 수업할 때 못 따라가더라고. 그 애한테 질문을 하면 옆에 애들이 “그 아이 는 아무것도 못 해요.”하면서 그림자 취급을 하더라고요. 따로 물어보니

17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까 아이들 부모들이 전부 맞벌이하고 있어요. 밤낮없이 일하시니까 자식 교육이 안 되더라고요. 예산이 있으면 그런 학생들을 데리고 투어를 하면 서 우리 문화를 알게 하고 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를 스스로 깨우칠 수 있 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는데 방법이 없어요. 옛날에 해설하고 <역사와 함께 숨바꼭질하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거든요. 역사 강사 를 모시고 주민들을 모아서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 게 하면서 느낀 건데 거기 돌아다니는 학생들은 사회 공부가 별도로 필요 가 없는 거예요. 왜냐면 다 본 거니까. 부모들이 해줄 수 없는 건 사회에서 해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에 바라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동네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175 만덕

이음북구 기록가 최기봉

마을의 지리, 역사,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다가 문득 이제 나에 대한 아카이브 작업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터뷰를 통해 사전에 알고 있던 정보 외에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만덕의 많은 기록가들과 협업하면 더 다양한 활동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며, 앞으로 하고 싶은 활동 등도 꼭 이루시길 바란다.

17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177 만덕
나중에 제 사진이 만덕을 기억할 수 있는 사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음을 담아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성연 사진작가

#마을기록 #사진기록

김성연 님은 직장을 다니면서 청년 사진작

가로 활동하고 있다. 만덕의 소식을 알리

는 만덕마을기자단에서 사진기자로 활동

하고 있기도 하다. 동네가 변화하는 모습

을 앵글에 담기 시작했고, 한국경관학회

에서 주최하는 사진전에 만덕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이 입선하면서 명실공히 우리 동

네 사진작가로 자리매김하였다. 만덕주민

기자단이 만든 잡지 『만덕 사람들』과 『만

덕의 풍경 달력』 등에 사진으로 참여한 소 감, 촬영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인터뷰했는데 주요 키워드는 ‘연결’이었다.

동네는 계속 변하지만, 사진 한 장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기에 북구 아카이브 활동

에 대해서도 조언해주었다.

18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고향과 직업은 무엇입니까?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용호동에서 10살까지 살다가 만덕에 이사

와서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마케팅 팀장을 하고 있는데

원래 하는 일은 사진작가입니다.

언제부터 사진작가를 했고, 주로 어떤 사진을 찍으셨나요?

사진을 전문으로 한 것은 한 7~8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신라대학교에 서 광고홍보학을 전공하면서 영상광고를 배웠고 자연스레 사진으로 전향 하게 되었어요. 주로 제가 전시를 하고 발표를 했던 작품들은 미술 쪽이 에요. 추상적이기도 한데 ‘Color’라는 주제를 통해서 계속 새로운 작업 을 하고 있습니다. 잡지인 『만덕 사람들』과 만덕을 주제로 한 달력집 제작에는 어떻 게 참여하시게 되었나요? 마을 기자 2기 때 최기봉 동장님이 사진을 전담할 인원이 없다고 저한테 의뢰하셨어요. 그때 저도 시간이 맞고 제가 잘 아는 공간이다 보니까 재밌 을 것 같아서 참여해서 사진을 찍게 됐어요. 중간중간에 만덕 풍경 사진 혹은 인물 인터뷰 사진들은 제가 촬영했어요. 3호 달력에 있는 사진은 대 부분 제가 많이 찍었고, 2호의 표지 사진도 찍었고요. 특히 2호에서는 동 신아파트를 철거하기 전에 기록한 사진들이 실렸지요. 풍경 사진들이 많네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풍경 사진을 찍을 게 많거든요. 만덕을 바닥에

181 만덕

깔고 하늘을 찍으면 굉장히 예쁜 사진들도 많고, 조금만 발품을 팔아서 만덕 고개나 유림 노르웨이숲 아파트로 가면 저희가 평소에 보기 힘든 풍 경들이 많아서 그런 것도 제가 좀 찍었어요. 사진이라는 게 찍으려고 하면 또 안 찍혀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계속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작업하신 것이 있습니까? 만덕의 행사라든가? 타 지역의 행사도 간 적 있었고, 부산 코미디 페스티벌이나 국제마술 페스 티벌에 참가해서 찍은 사진도 많습니다. 만덕 같은 경우는 매년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리는데, 거기에서 요청해주시는 대로 제가 촬영했었어요. 주 민들을 상대로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달라고 해서 은행잎사진관이라고 해서 야외스튜디오를 임시로 만들어서 사람들 사진을 찍어준 적도 있고

요. 또 흑백 사진관에서 흑백 사진을 찍어서 차후에 전달해 드리는 작업

도 했고요. 프로그램 진행 요청을 안 하실 때는 행사 전반적으로 스냅 촬 영을 많이 해달라고 하세요. 나중에 관공서에서 사진을 많이 요청하시는 데, 모아서 자료로 사용하시죠. 시상 받은 적도 있습니까?

2017년에 한국경관학회라는 곳에서 처음으로 전국단위공모전을 열었거 든요. 거기에 ‘우리 동네’라는 주제가 있었는데, 그 주제에 딱 맞는 만덕 사 진이 하나 있어서 처음 출품을 했죠. 그 사진으로 장려상을 받았고 다양 한 곳에 사용됐습니다.

18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달력 사진을 보니까 산에서 찍은 사진도 있던데, 오래 기다려서 찍 는 경우도 있겠네요. 제가 진짜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할 때 두 가지 방법으로 사진을 찍거든 요. 만약 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면 핸드폰으로 일단 기록하고 차후에 장비를 들고 와서 촬영하고요. 장비를 들고 있으면 거기서 자리 잡고 촬 영하기도 하죠. 산에서 찍은 사진은 우연히 만난 풍경이었는데, 그때 마 침 저한테 카메라랑 삼각대가 다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운 좋게 그 장면 을 잘 찍었어요. 그게 아마 『만덕 사람들』 창간호 표지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거든요. 창간호 표지 사진을 처음 낼 때, 최기봉 동장님은 다른 사진을 들고 저는 이 사진을 밀었어요. 동장님은 의미가 있고 상도 받았던 사진 을 스타트로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 사진은 제 기준에서는 이래 저래 많이 보여준 거거든요. 근데 이 사진은 찍은 지 얼마 안 됐고, 제 스 스로도 좀 자랑하고 싶었던 사진이었어요. 그래서 동장님한테 이야기도

많이 하고 사진도 노출을 많이 시켜드리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그 사진이 창간호 표지가 됐죠. 사진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북구나 만덕의 매력이 뭡니까? 화려하거나 스케일 있는 사진을 바라고 촬영하면 절대 좋은 사진을 못 찍 습니다. 그냥 걷다가 보이는 느낌으로 촬영하면 진짜 생각도 못 하게 나와 요. 잘 보면 블록마다 집들이 다 똑같이 생겼거든요. 사람들은 그냥 주택 이구나 하고 잘 몰라요. 그런 걸 발견하는 재미도 있고, 동네 골목이 많다 보니까 변수가 있는 사진들이 많아서 재미가 있어요. 그리고 만덕을 위에 서 보면 색채가 알록달록해서 사진 찍을 때 재미를 많이 느껴요.

183 만덕

선생님이 찍은 만덕 사진이나 북구 사진은 나중에 어떤 의미로 다 가올까요?

제가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이 동네가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모르거든 요. 그때 이 동네에서 누군가가 만덕의 자료로 글을 쓰고 출판물을 만들 때 제 사진이 쓰이면 그땐 기분이 다를 것 같아요. ‘나중에 내 사진이 사 용되겠구나. 전부는 못 찍더라도 사진 한 장 한 장에 진심을 담아서 찍어 기록을 잘 해놔야겠다.’ 이런 생각을 좀 많이 했었거든요. 몇십 년 뒤에 제 사진이 어린애들한테 만덕을 소개할 수 있는 사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을 좀 가지고 있어요. 만덕을 기록하신 분들이 지금 많이 안 남아있는 걸 로 알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제가 남길 수

있는 건 다 남겨요. 이것도 언젠가는 사라질 풍경일 수도 있거든요. 제가 지금 아파트들을 찍어 놓지만, 영원한 아파트는 없어요. 이 아파트가 무

너지고 다시 새로운 아파트가 올라가거나 공원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러 다 보니까 허락하는 기한 내에서는 제가 기록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죠. 만덕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자신의 변화라든지 그런 부분은 없습 니까? 일단 저 스스로 좋은 건 우리 동네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다는 것. 여러 가 지 기회를 부여받으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참 많이 돌아다녔고, 그러면서 공부도 많이 됐어요. 지형이나 골목도 많이 알게 됐지만, 무엇보다도 만덕 내부에 생각보다 이야깃거리가 많더라고요. 그런 걸 남들에게 이야기해 줄 정도가 되어서 스스로 뿌듯한 것도 있어요. 지금은 제가 사는 동네에 대해서 자부심도 많이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18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만덕 사진 중에 많이 알려진 사진이 레고 마을 사진이거든요. 작가 님이 찍은 사진도 많이 올라와 있는데, 이런 위치 포인트는 어떻게 잡아냅니까?

제가 알려진 건 SNS가 발달하면서부터거든요. 부산에 문화 골목이나 벽 화 마을 같은 것들이 많이 생기기 시작하고, SNS에서는 예쁜 옷을 입고 예쁜 곳에 가는 게 유행이 됐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SNS에서 맛집이 나 장소를 소개해 주는 계정들이 많이 생겼고, 거기서 레고 마을 사진을 올리면서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지게 됐거든요.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건물이 굉장히 커요. 각도를 잡아낼 수 있는 게 먼 거리밖에 없어서 아마 사진들 구도가 거의 동일할 거예요. 저는 백양중학교부터 해서 동신아파 트 그리고 백양산의 능선까지 다 나오게 찍었는데, 아마 우리 동네라서 무 의식중에 그렇게 찍었던 것 같아요. 가장 애착이 가는 사진은 어떤 게 있을까요. 사진을 찍으면서 좀 고 생했다든가. 고생했던 사진이 하나 있긴 있어요. 만덕에 관심 많으신 분들한테 보여드 렸던 사진 중에 있는데, 2022년 달력에 8월 사진이에요. 보시면 만덕 하 늘에서 빛이 쫙 내리거든요. 빛 내림 현상이라 해서 구름이 많은 날 해가 질 때 안개 같은 게 있는 거예요. 저거를 찍으려고 8월, 9월, 10월 초 해질 녘에는 자주 저 장소에 가서 구름을 봤던 것 같아요. 날씨가 5분씩 바뀌 는 경우가 있어요. 집에서 저걸 보고 차를 몰고 10분 만에 올라갔는데 구 름이 사라지고 그냥 빨간 해만 떠 있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렇게 예쁜 걸 찍을 일이 잘 없었어요. 그리고 이건 기술적인 건데 보정도 생각보

185 만덕

다 오래 걸렸어요. 결과물을 사람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이 남기기가 힘

들거든요. 결과론적으로 작품성이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저 걸 위해서 나름 노력했고 많이 돌아다녔다고 생각했죠. 만덕이 계속 변하면 본인 사진전을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런 계획 은 없으십니까?

만덕에서 사진전을 하려면 몇 년은 더 찍어야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저는 약간 소품전처럼 하고 싶어요. 동네 카페 같은 작은 곳에서 만덕 사

진들을 엽서처럼 걸어놓고. 아니면 동이나 관공서와 같은 곳에서 지원받 아서 사진집 같은 걸 만들고 판매 수익으로 다른 활동에 사용해본다든 지. 카페하고 연계가 되면 사람들이 거기서 커피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관람할 수도 있고요. 제가 이벤트를 열 수도 있겠죠. 커피 기프티콘이나

엽서를 이벤트로 드린다든지. 만약에 그게 좀 잘 되면 만덕에서 활동하 고 있는 작가분들하고 동네하고 상호작용해서 지역에서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쪽으로도 아이디어가 많으시네요. 예전부터 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긴 있어요. 만덕에도 관심이 많고 사진이 나 그림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이 있어요. 그 청소년들한테 작품을 받아서 같이 전시를 한번 열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전시에 작품을 걸고 사 람들이 내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느끼는 감정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거든요. 하나의 직업 체험이라 할 수 있죠.

18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 <도시아카이브>에 대한 의견도 부탁드립니다. 문구만 봤을 때는 일단 기록을 할 사람들끼리 서로 연결되는 게 가장 중 요할 것 같아요. 구포를 기록하는 사람, 덕천을 기록하는 사람 또는 저처 럼 만덕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돼야지 그 기록도 연결된다고 생 각하거든요. 서로 기록하는 방식도 다 다를 거고, 자기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의미도 다를 거예요. 그 사람들끼리 연결이 되어야 결과물도 연 결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음북구 기록가 남상국 만덕에서 살고 있고 생태와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동네의 변화와 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내세울 것도 없는

부분까지 애정을 가지고 시간을 두고 기록으로 남기는 모습에 많은 느낌을 받

았다. 사소한 것이라도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것과 그냥 보는 것은 차이가 분명

있다. 인터뷰 내내 기분이 좋아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187 만덕
다른 학교에서도 우리 활동을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기록하고 있어요
문난이 만덕고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공동체기록 #학교기록 #공동체활성화

문난이 님은 6년째 만덕 아래에서 활동하 고 있다. 만덕고사회적협동조합은 학교 협

동조합으로 전국에서 이름이 나 있는데, 활동으로만 그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이 야기가 많아서 2017년부터 매년 활동을

기록한 자료집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공

유하고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기 때

문에 자료집을 기꺼이 공유한다고 했다. 자 료집에는 멋진 모습만을 담으려고 하지 않

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담아낸다고 한다. 여기에는 학생

들과 학부모, 교직원, 지역 주민이 큰 역할 을 하고 있다. 문난이 님은 만덕고사회적

협동조합의 좋은 사례가 다른 학교나 마

을 교육 공동체, 마을 공동체 등에 영향을

주고 확장하는 게 기록하는 목적이라고 얘 기했다.

19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사장님 고향은 어디시며 북구에서 몇 년 거주하셨나요?

저의 고향은 부산 영도입니다. 섬 아가씨였죠. 북구에 온 지는 18년 되었 습니다. 처음에는 북구에 2년 정도 살려고 했는데 2년 뒤에 갑자기 아파 트 분양을 받으면서 눌러앉았어요.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떠날 생각이었는데 또 머물게 되고. 갑자기 만덕에서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면 서 점점 만덕에 대한 애착을 가지며 고향이 되었죠. 직업은 지금 무엇이며, 협동조합에서는 어떤 기록 활동을 했나요? 저는 만덕고등학교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16년도 7월 18일에 이 조합을 창립하면서 현재 6년째 만덕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는데요. 이 활동이 학교 협동조합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마 을과 연계해 그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서 전국에서 이름나있습니

다. 이것이 단순히 활동에만 그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소중한 이야기 가 많아서 2017년부터 매년 기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록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처음에 만덕고협동조합을 되게 궁금해 하시고 직접 찾아오는 분들도 굉 장히 많았습니다. 한 번으로 설명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고, 거기에 참여한 분들만 협동조합을 아는 것도 아쉬웠죠. 그래서 협동조합을 궁 금해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자료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91 만덕

그 기록물들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으 며, 그 기록물을 어떻게 활용하고 계시는가요? 저희는 최우선이 학교 협동조합이거든요. 학교 협동조합 안에서도 만덕 고협동조합은 굉장히 우수한 사례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저희를 굉장 히 궁금해하고 또 벤치마킹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자료를 만들었고, 전 국에 있는 학교 협동조합에 우선적으로 배포하고 있습니다. 우리 만덕마 을뿐만 아니라 부산에 있는 마을 교육 공동체에도 배포하고 시 교육청, 구청 그리고 마을 이런 식으로 자료를 배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자료가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협동조합만의 노하우가 담겨 있는 자료라서 쉽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공유하고 함께하 고자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기꺼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기록 활동을 하는 데서 도움을 주신 분들에는 어떤 분들이 계실 까요? 상당히 여러 군데에서 도움받고 있는데 이렇게 추진해서 오다 보니 작년 에 교육부 장관상도 수상했죠. 협동조합이 활동을 잘해서라기보다는 학 생들과 학부모와 교직원, 지역 주민들이 힘을 합쳐서 함께 하고 도와주었 기 때문에 현재의 결과물을 낼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예산 부분도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청과 북구청, 시 교육청이 같이 다행복교육지구를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서도 마을 교육공동체로서 인정받고 예산을 지원받 고 있습니다. 자료집도 지원을 통해 어렵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19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저희는 자료집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담았거든 요. 그냥 우리가 어느 날짜에 이런 활동을 했다고 담았는데, 다른 곳에서 는 학교 협동조합이 학교 안에서 이렇게 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었느냐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우리 자료 집을 가져가서 똑같이 해보기도 하고요. 내용적인 면에서 따라 하고 싶 은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고 많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하지만 그냥 자 료를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학교를 찾아오고 우리 학교에 관심 가져주는 곳에만 주고 있어요. 선생님의 기록 활동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세요. 마을 안에서 또 학교 안에서 학생들,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모습을 단 순히 활동으로만 그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거죠. 앞으로 이런 역할을 할 학교들이 생겨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활동들을 기록해서 그 학교 에서도 우리의 기록을 참고해서 활동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이 좋 은 사례를 우리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이어갔으 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기록을 계속 남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협동조합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보람이 없었다면 사실 이 봉사를 6년째 이어서 하기는 힘들 거예요. 학 교 협동조합도 엄연한 비영리 법인이다 보니까 굉장히 어려운 부분도 많 습니다. 그래도 이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로 학생들의 변화. 학 생들이 협동조합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마을을 바라보는 눈도 생기

193 만덕

고, 마을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도 생각하고 이것을 봉사활동으

로까지 연결하는 것을 보면서 학생들의 성장을 굉장히 큰 보람으로 느끼 고 있고요. 그다음에 처음에는 학교가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이 없었는데 우리가 교육 속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학교 안에서도 계속 성장하는 모습 을 보면서 지금은 누구보다도 든든하게 옆에서 도와주고 계시죠. 그리고 제가 이 지역 주민에 대한 보람을 느꼈던 게 올해가 제일 컸던 것 같아요. 우리 협동조합도 코로나를 맞이하면서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운영 과정 에서 학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매년 바뀌는 게 어려움이 있었죠. 그런데 지 역 주민들은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서 우리가 어려울 때 직접 오셔서 행 정이나 사업을 도와주시는 걸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러면서 우리 는 지역의 자원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느꼈어요. 또 협동조합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있어요. 아마 모르실 건데 저희는 5년 동안 컨테이너

2.5평 안의 공간에서 많은 일들을 해왔어요. 제가 교육청에 매점을 안으 로 옮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거든요. 학교 안에서도 의견을 조율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5년 만에 매점이 교실로 들어왔는데 그때가 제일 기 뻤어요. 춥지 않고 덥지 않고 쾌적한 공간에서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기뻤 던 것 같아요. 소개하고 싶은 협동조합의 활동이 있을까요? 저희는 학교에 있는 학생들, 학부모, 교직원들 교육을 하고, 3년 전부터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사업들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할 일도 찾고, 봉 사를 하고 싶은 분들이 마을에 많이 계시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이 지 역 주민들의 역량을 키워서 마을 선생님이나 마을 봉사자로 역할을 할 수

19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해서 저희가 교육을 시작했어요. 마을에 계시는

분들이 부담 없이 기술을 익혀서 그것을 다시 봉사로 나누면 좋겠다는 아 이디어가 있어서 공예 교육도 하고, 바리스타 자격증도 딸 수 있게끔 했고

요. 마을의 축제에서 쓸 수 있도록 풍선아트 같은 것도 했어요. 처음에는 취미반, 자격증반으로 운영했는데 끝나고 그냥 가시는 분들이 많더라고

요. 그래서 처음부터 정말 봉사를 할 수 있는 분들만 모집했는데, 어르신 들이 너무 많이 오신 거예요. 그래서 그 어르신들하고 취미반으로 시작해 서 올해 자격증을 발급받으시고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불러드렸죠. 지역 주민들과 같이 역량을 키우고 성장하고 또 그것을 이웃분들, 좋은 분들과 나누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잘돼서 저희는 정말 자랑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기록을 더 남겨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있나요? 네. 협동조합으로서의 기록은 충실하게 만들어지는데, 저희는 아무래도 공동체다 보니까 마을과 함께해야만 성장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공 동체의 다양한 활동들은 꾸준히 기록되어야 하고, 우리 안에 예산이 있 다면 예산이 없어서 활동하기 힘든 공동체와도 연결해서 같이 사업하고 싶어요. 어쨌든 마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 민들이 마을 안에서 각자 역할을 찾을 수 있게끔 하려면 중간 역할이 사 람이 될 수도 있고 공동체가 될 수도 있고 기관이 될 수도 있죠. 마을 속에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그 활동을 하고 싶으면 스스 럼없이 거기에 같이 참여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95 만덕

학교 협동조합을 처음 만들 때나 운영하시면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어떤 게 있겠습니까?

만덕고가 2015년도에 부산형 혁신학교라 해서 다행복학교로 지정됐어

요.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게 협동조합을 만들겠다고 하는 작업이었어요. 그러면서 건강하지 못했던 매점을 협동조합으로 바꾸자는 사업이 시작된 거죠. 근데 반대가 엄청나다 보니 창립총회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 요. 저는 학교 협동조합 했을 때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창립총회를 하면 서 본의 아니게 제가 이사장이 된 거예요. 협동조합의 설립을 제안하셨고 중추 역할을 하셨던 교장 선생님께서 북부교육지원청 교육장님으로 가

셨을 때 제일 어려웠고요. 또 어려웠던 것은 돈이 없었어요. 지금은 학교

협동조합을 설립할 때 교육부에서 지원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게 아예 없었잖아요. 근데 선생님들께서 돈을 모아서 600만 원을 넣어주신 거예요. 너무 감동이었죠. 그렇게 어렵게 협동조합을 시작했어요. 그 이후 에 새로운 조직이 생겨나면서 계속 충돌하기도 하고. 학부모님들도 협동

조합을 하는 학부모, 그냥 학부모로 나뉘어서 엄청나게 갈등이 많았었어

요. 그래도 그 어려움을 제가 다 극복할 수 있었던 게 지금은 학생들이 우 리 못지않게 역량이 올라가 있어요. 그건 진짜 뿌듯해요. 이 협동조합을 하면서 스스로 변화가 있었습니까? 저는 변화를 2개 정도 이야기하면 첫 번째는 외모 변화. 협동조합을 하면 서 폭삭 늙었어요. (웃음) 두 번째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죠. 제가 예전에 는 아주 일을 잘하는 직장인이었어요. 거기서는 정해진 일만 했는데, 협 동조합에서는 새로운 일이 많이 와요. 저는 굉장히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19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제가 이렇게 창의적인 사람인 줄 몰랐어 요. 협동조합을 위해서 나름 공부도 해야 되고, 아이들을 교육하려면 연 구도 해야 되고 하다 보니까 제 역량이 많이 키워진 거죠. 봉사를 막연하 게 생각했는데, 이 일을 하면서 봉사를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 이 들어요. 뭔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옛날보다 훨씬 따뜻해졌다는 거죠. 기록이 연결되고 사람이 연결되는 <도시아카이브>를 만들고자 합 니다. 이에 대한 의견 좀 부탁드립니다. 올해 초에 코로나가 줄어들어 전면 등교가 되면서 학생들과 우리 북구 마 을을 둘러보고 싶어서 제가 여행 박사라는데 의뢰했어요. 여기가 부산의 원도심부터 시작해서 굉장히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재미나게 설명하고 학

생들도 엄청 흥미롭게 참여하게끔 하는 곳이더라고요. 근데 그분이 하시 는 이야기가 북구에 크게 설명할 곳이 없다는 거예요. 저는 깜짝 놀랐어 요. 북구도 여행 코스를 만들어서 만덕사지와 만덕고협동조합을 가고, 그 다음에 대천마을, 화명생태공원에 갔다가 구포 국수를 먹고, 북구의 대 표적인 금빛 브릿지도 걷고 이런 걸 할 수 있잖아요. 북구를 기록하는 작 업이 잘 되면 그걸로 북구 해설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북 구는 늘 낙후된 이미지잖아요. 지역과 그 지역을 설명하는 사람을 연결 해서 기록하고, 해설사분들이 외부 사람들에게 설명하면서 다니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197 만덕

앞으로 어떤 걸 해보고 싶다는 포부나 비전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 립니다. 일단은 학교 협동조합이 더 발전할 수 있게끔, 지금도 그 역할을 하고 있 고 앞으로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부산에 협동조합이 저희까지 4개 가 있거든요. 이게 지속적으로 연결되려면 우리 만덕고만 잘해서 되는 일 이 아니에요. 다른 학교도 다 같이 연결해서 갈 수 있게끔 연합회를 만든 다든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거든요. 저는 지금보다 더 확장해서 만덕 마을에도 대천마을 학교 같은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만덕 안에서 공동체들도 살리고, 학교와 마을을 같이 아우를 수 있는 만덕마 을 학교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19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기록가 한지연 북구 다행복 별난마을에서 모든 사람과 소통하며 멋과 풍류를 즐기는 별난 선생입니다. 학교 학부모연수가 있어 우연히 참여했다가 교장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이름 만 적어 올리면 되는 줄 알고 시작하게 되었던 일이 이렇게 큰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문난이 님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199 만덕
시인들과 함께 북구를 예찬하는 시집을 만들고 싶어요
서주열 북구문인협회 회장, (사)강변문학낭송인협회 이사장

#예술로기록 #시 #문학지

서주열 님은 낙동강과 구포 등 북구의 자 연을 소재로 한 시 창작 활동과 더불어 시

낭송인 양성과 교육을 하고 있으며, 『감동

진 문학』 책자를 발간하고 있다. 생업을 정

리하고 시 창작에 매진하였는데, 특히 북 구의 자연환경을 주제로 한 창작 활동을

활발하게 해오고 있다. 『북구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발간을 시작한 북구 문예지 발간

사업을 진행 중이며, 현재 『감동진 문학』으

로 제호 명을 변경하여 발간하고 있다. 북

구에서 창작 활동하는 문학인들의 적극적

인 활동을 독려하며 문학인으로서 지역 문

화 발전에 애써야 한다는 자긍심으로 다양

한 활동들을 계속하고 있다.

20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에 사신 지는 얼마 정도 되셨고, 고향은 어디이신가요?

북구에는 지금 32년 차 살고 있습니다. 90년도, 89년도에 왔으니까요. 이 전까지는 동래 온천동에 살았어요. 온천장에. 고향은 전남 나주입니다. 원래 제가 군대 생활을 부산에서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2의 고향 처럼 느껴져서 부산에 오게 된 겁니다.

32년 전에 북구에 처음 오셨을 때는 어떠셨는지 기억이 나세요? 회사 다니면서 은퇴하면 노년에 뭘 할 건가 생각은 계속했어요. 그런데 부 산에 초량 떡방앗간이라고 있어요. 오촌 조카가 하는 데인데. 이 조카가 하루는 아파트를 짓는다는 거예요. “니 어떻게 해서 돈 그렇게 벌었어?” 하니까 초량 떡방앗간을 해서 그렇게 벌었다는 거야. 집사람하고 나하고 일요일 날 떡을 얼마나 하는가 보자 하고 갔죠. 보니까 요새 말로 장난이 아니었어요. 아침 9시에 전량을 다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공휴일 이나 휴일마다 가서 기술을 배웠고, 아내는 날마다 가서 배우고. 이제 우 리가 떡방앗간 하나 차려야 되겠다, 어디다 차리지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만덕으로 오게 된 거예요. 만덕 와서 전세로 얻어 살면서 나는 회 사 다니고 집사람은 자기 동생이랑 조카 데리고 해서 엄청 재미가 좋았죠. 정년 퇴임을 하고 2년 뒤에 온천장 쪽으로 다시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2 년 동안 사귀었던 친구들이 가지 말라고 하다 보니까 여기 눌러앉게 된 거 예요. 떡방앗간을 세 들어서 하다가, 나중에는 잘 되니까 집을 사서 한 15 년 정도 더 했어요. 그러다 우리 집에서 무겁다, 힘들다 그래서 그만뒀죠. 뭘 했냐면 부경대 앞에 가서 임실 치즈 피자집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경대 학생들이 난리가 난 거라. 하루에 매상이 100만 원이 넘어가는 거

203 만덕

죠. 그러다가 부경대가 담벼락을 다 허무니까 학생들이 동서남북으로 다 흩어진 거예요. 그거 하고 나니까 상권이 죽는 거야. 그래서 철수하고 문 학의 길로 들어선 거예요. 회사도 다니시고 장사도 하셨는데, 문학의 길을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으셨어요?

있었죠. 옛날에 6학년 말이면 중학교 가려고 시험을 치게 돼요. 시험 보 는 날 아침에 가니까 10여 명이 모여서 김소월의 시 「초혼」을 보고 있는 거 야. 중학교 가면 배운다고. 그걸 가지고 서로 쟁탈전이 벌어진 거야. 나도 엎어져서 보는데,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하니 까 초등학교 6학년 마음에도 와닿기 시작한 거예요. ‘아, 시가 이런 거구 나.’ 그러던 차에 연예인들한테 쓴 연애편지를 입수하게 됐어요. 그쪽으로

끼가 좀 있었든지. 연예인들한테 좋은 글만 쓰는 거예요. 영화배우 엄앵

란이한테 쓴 편지, KBS 김인숙 아나운서한테 썼던 편지가 지금도 가슴에

와닿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글을 좋아하게 된 거죠. 지금은 주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세요? 제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예요. 국제 문인단체라고 보면 되겠지. 부 산 지회도 있고요. 부산 지회는 부회장을 하다가 그만뒀고, 현재는 『한국 문학신문』 편집위원, 그리고 그 자매지인 『국보문학』 신인 심사위원을 하 고 있고요. 부산에서는 문인협회 이사. 부산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북구 가 문화가 제일 낙후된 곳이에요. 내가 회장을 맡고 보니까 다른 구에서는 800만 원, 1천만 원, 1천 200만 원까지 지원해 주는데, 북구는 10원짜리

20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하나도 지원을 못 받아요. 그래서 청장님한테 “돈 없어요, 도와주세요.” 그

랬어. 지금은 책값 정도는 받고 있는 거예요. 안타까워요. 북구는 문화 활 동이 엄청 낙후돼 있어서. 그러다가 모자란 것은 회장이 책임져야 되는 거 고. 전에는 적자도 나고 그랬지만 지금은 적자는 안 나요. 대표적으로 책자 만드는 작업을 하시고 그 외에도 어떤 활동들을 하고 계세요? 내가 지금 맡고 있는 것이 북구 문인협회가 있고, 사단법인 강변문학낭송 인협회가 있어요. 북구 문인협회는 전에는 『북구 문학』이라는 책자를 발 간했거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북구 개명 운동을 부르짖은 사람이 에요. 북구가 구포 출장소에서 북구로 개명이 된 거죠. 구포 출장소였으니 까 구포구로 이렇게 해버리면 될 건데. 북구라는 건 그냥 북쪽이라는 뜻만 이 아니에요. 달아날 ‘퇴’ 자로도 쓰고 패배할 ‘패’ 자로도 써요. 강변문학낭송인협회에서는 시를 낭송하는 활동이나 행사를 하시 는 거예요? 그렇죠. 협회는 설립된 지가 2009년도니까 올해 13년 차. 낭송을 처음 할 때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 묻혀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자는 뜻으로 단체를 만든 거예요. 한 10여 년 지나니까 거기서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고. 잘못 하면 희석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근데 발굴을 하는 거죠. 지금은 내가 심사 를 안 하는데 전에는 심사할 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는가도 보고 심 사했죠. 어떤 심사위원은 글자 하나만 틀리면 그냥 쫙 긋거든. 그래서 내 가 하지 마라, 감점만 줘라. 감점만 주고 나머지 잘하면 그 사람 잘하는 거

205 만덕

다. 그러니까 원칙이되 융통성은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협회 회원으로 뽑으셔서 같이 관리하고 활동하시 는 거네요?

내가 오기 전에는 북구에 뭐가 없었어요. 북구 문인협회라 해도 6, 7명이 모여서 했었어. 10원짜리 하나도 지원 못 받았지. 거기다가 내가 나서서 이름도 새로 바꿨어요. 『북구문학』에서 『감동진문학』으로. 보니까 『강변 문학』도 강변 좋다 해서 그렇게 찾아냈죠. 문인협회에서 『북구문학』이라고 하는 책자를 발간하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감동진문학』으로 바꿨어요. 『북구문학』을 처음 발행한 게 2002, 3년 될 거예요. 내가 5대 회장이에요. 이 문학 책자에는 어떤 내용들로 기획이 되고 있나요?

다른 15개 구군에서는 회원들끼리만 시를 모아서 내요. 그런데 여기는 우 리 회원들, 그다음에 부산시에 있는 시인들 한 10여 명, 그리고 전국에 있는 시인들 한 15명 정도. 그러니까 북구에서 발행되는 잡지지만 전국적인 거라 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지금 다른 데는 안 하고 있어요. 북구만 하는 거야. 어쨌든 타지역에도 청탁해서 같이 하시는 거고요. 그렇죠. 서울 사람, 경기도 사람, 대전 사람, 광주 사람, 진주 사람. 그러면 생각해 봐요. 원고료가 나가야 되잖아요. 최하가 5만 원이고 30만 원까지 나가거든요. 그럼 예산이 적으니까, 재능기부 좀 하라고 하는데. 쉬운 일

20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 아니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보고 대단하다고 한 사람도 있어. 근데 돈 없는 구에서 해봐야 얼마나 내가 대단하겠어요. 그래도 긍지를 가지고 있어요. 3년 전에 어떻게 해서 북구문화예술인상 1호를 내가 받았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문화도시 선정하는데 작년에는 내가 강의를 한 네 번 했거든요. 올해도 한 번 했고. 거기에 참여하고 있어요. 낭송하고, 시화도 하고 있고. 앞으 로 주목적으로 두고 있는 것이 북구를 예찬하는 시집을 하나 만들고 싶 어요. 나 혼자가 아니고 북구에 있는 시인들을 모아서. 얼마나 좋아요. 다 른 구는 그게 없어요. 시인들한테 언젠가는 해야 되니까 다섯 편씩만 쓰 라고 해놨어요. 낙동문화원 백이성 원장 알아요? 그 원장님이 나를 그렇 게 좋아했어. 『낙동강 사람들』 거기에 내 작품 다섯 편을 올려놨었어요. 만덕사 당간지주, 백양산 산수유 등 이런 거. 그다음에 또 중요한 것이 하 나 있어요. 저기 시비라고 있어요. 해운대에 24개, 부산진구 22개, 사상 구 21개, 강서구 7개 등 이렇습니다. 그런데 북구는 동그라미. 우리말로 하 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시비를 몇 개라도 세워야 된다고 생 각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북구 주제로 쓰신 이런 작품들을 모아도 시집 한 권이 되 겠어요. 한 50편이 넘어요. 근데 나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게 좋죠. 내 개인 만 생각했다면 내가 혼자 낼 수 있죠. 50편 정도가 넘으니까 거기다 다른 걸 좀 넣고 하면. 하지만 나 혼자 빛나면 뭐하나요. 그렇지요. (웃음)

207 만덕

이음북구 기록가 김지현 경계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며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지원과 예산이 부족한 북구에서 지속적인 문학 활동을 통해 문화예 술의 저변을 넓히려 애쓰는 모습이 지역에 필요한 활동들이라는 생각이 들었

다. 시를 낭송하거나 여러 책자를 실물로 보여주시며 설명하고 아쉬운 점들을 짚어주셔서 풍성한 구술 기록 과정이 되었다.

20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209 만덕
어떤 활동에 대한 그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배울 수 있는 기록이 남겨지면 좋겠어요
이언옥 교육문화공동체 고치 대표

이언옥 님은 교육문화공동체 ‘고치’(이후 고치

공동체) 대표를 맡고 있다, 고치공동체는 청 (소)년을 위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 덕천 살리기 운동’ 등 배움과 실천으로 청소

년공동체에서 청년공동체로 진화하고 있다.

2014년 『청소년 동인지 ‘지팡이’』를 시작으로 『청소년지역문화매거진 ‘팡팡뉴스’』, 『청년문 화활동사례 ‘고치는 집’』, 『사진집 ‘관계의잔치 가치의재생』, 『만덕천살리기운동활동기록집

1,2』 등 다양한 기록물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시선에 비친 활동의 감흥과 의미를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기록을 통해서 당시의 너와 나 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기록의 의미를 부여

했다. 이언옥 님은 기록이 ‘거울’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이를 먹다 보면 변질되기도 하고 요 령도 생기는데, 옛날 것들을 보면서 다시 생각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떠한 사람이 어떤

21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의지를 가지고 무엇을 시도했는지 자세와 태도 를 배울 수 있는 사람 중심의 기록이 앞으로 이 루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공동체기록 #마을기록 #공동체활성화

대표님은 고향이 어디시고 북구에 어느 정도 사셨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 구포로 이사 왔어요. 중학교를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 하는데 지금은 남중으로 바뀌어 아쉬워요. 이후 진주로, 대전으로, 서울 로 갔다가 14년 전쯤에 다시 구포로 왔어요. 북구에서 20년은 산 셈이죠. 직업은 무엇이고 주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요? 명함에는 협동조합 ‘고치’ 대표, ‘레스토랑&갤러리 프린체’ 대표라고 되 어 있어요. 협동조합 고치는 진정성 있는 관계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이 루어진 ‘사회적인 가족’ 같은 곳이에요. 그렇다고 우리끼리의 친목 활동만 있는 것은 아니고 공공성을 가진 활동도 많이 하고 있어요. 자기 자신의 성장과 사회의 성장이 같이 가게끔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곳이라고 보시 면 돼요. 아이들이 청소년일 때는 청소년 사업을 했고, 청년이 되었을 때 는 청년 사업을 했고, 청년으로서 자기 주체적인 것을 갖추게 될 때쯤에는

또 다른 청년들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서 하기도 하고 그렇게 계속 개인 의 인생이 성장하는 것에 따라 유기체처럼 진화하고 있어요. 현실적인 자 립을 위해 ‘프린체’를 운영하고 있기도 해요. 고치공동체가 기록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고치에서 처음 나온 책은 2014년 『청소년 동인지 ‘지팡이’』예요. 부산문화 재단 청소년 동인지 지원 사업으로 제작했어요. 이때 처음으로 아이들의 글을 담았는데, 글 쓰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완성하고 나니 너무 좋은 거 예요. 제일 기억에 남았던 게 공부를 굉장히 안 하는 친구가 시를 하나 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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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어요. “시라고 하는 거 누구나 쓸 수 있단다.” 했더니 [그래서 조퇴를 했 다. 기분이 좋다. 그래도 아프다. 일단 손목도 쓰리다. 걸어간다. 횡단보도 신호등에 걸렸다.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운이 안 따르지. 집 안에 들어섰다. 누나의 생각 없는 한 마디. 수업 쨌냐.] 그런 이야기들을 쭉 넋두리하는 거 예요. 근데 그걸 다듬으면 삶을 담은 시가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이 친구 랑 소통이 되는 거죠. 자연스럽게 말을 끌어내고, 또 이게 동인지에 실리 면서 자존감도 생기고. 책을 편집했던 친구는 편집이 재미있었던지 몇 시 간을 붙들고 작업을 하더라구요. 책 가운데 제일 애착이 가는 내용은 6명 의 아이가 세월호에 탔던 친구들의 전날 이야기를 상상해서 옴니버스식 소설로 썼던 거예요. 수학여행 가기 바로 전날을 상상해서 쓰는 거죠. 그

러면서 그 친구의 삶에 이입할 수 있잖아요.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그 입

장에 서 보는 간접적인 경험을 하는 거죠. 자신을 키우려면 자기 안의 타

인의 자리가 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타인을 주제로 한 소설 쓰기는 그 런 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봐요. 대표님 국문학과 출신이세요? 글쓰기 유도를 많이 하셨네요. 국문학과는 아니고 오히려 이공계에요. 고등학교 때 문학 동아리는 했어 요. 글쓰기는 생각을 넓히고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결국에 자기 자신의 중심을 찾게 하는 좋은 도구라고 생각해요. 일상화된 글쓰기가 자신을 지 켜줄 거라고도 생각해요. 과학고, 카이스트, 대기업... 이렇게 엘리트 코스 를 밟긴 했는데, 그러다 보니 폭이 조금 좁은 삶을 살았거든요. 남을 밟아 야 성공할 수 있는 경쟁적인 시스템이 마음에 계속 스크래치를 내었어요. ‘여기서는 깊이 행복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부산에 내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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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예요. 그리고 우연히 과외를 시작했다가 공부방을 열게 되었어요. 공부 방에서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집, 학교, 학원을 오가기를 반복하는데 그 범위 내에서 자신의 적성이나 사회에 대한 시야를 키우기는 힘들어 보였 어요. 그래서 함께 데리고 학교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저 도 사회에 대한 시야가 좁은 편이라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학교 밖의 배움을 찾아 나섰던 것 같아요. 봉사단, 기자단으로 활동은 시 작되었어요. 봉사도 누가 시키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기획해서 했 고, 기자단 아이들은 여러 다양한 어른들의 인터뷰를 하면서 타인의 삶 과 사회에서 그들이 살아갈 여러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했어요. 세상에 는 길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고 싶었어요. 없는 길을 만들어갈 수도 있는 거고요. 안정을 떠나 자신만의 길을 찾아 부딪쳐 나 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고치공동체는 또 어떤 기록 활동을 하나요? 『고치는 집』 같은 경우에는 청소년에서 막 청년으로 넘어가는 아이들이 부산문화재단 청년문화 활성화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만든 결과자료집이 에요. 청년이 되었으니 이제는 좀 활동의 스케일을 키워서 사회에 나가서 낯선 이들과 만나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활동을 해봐야 되지 않겠냐고 권 유했죠. 결과자료집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정량적인 기록이에요. ‘고치’ 는 가족적이지만 교육 기관에 가까워요. 아이들의 성장이 가장 중요한 지 점이죠. 그래서 활동 과정에서 느낀 감흥이나 해석, 의미 이런 걸 아이들 이 직접 써서 주관적인 기록을 남겨요. 글을 쓰면서 활동을 스스로 평가 하고 의미를 되새기고 자기를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죠. 사실도 중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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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해석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펀펀 메이커스’라는 이름으로 학 교 밖 청소년들과 마을교육공동체사업을 했었어요. ‘고치는 집’과 마찬가 지로 사진에 덧붙여 활동 과정에서의 삶의 변화나 새로 획득한 지식, 느 낌 등, 개인 삶의 서사에 한 줄을 그을 수 있는 것들을 모아서 주로 기록 했어요. 미리 생각하셨어요? 아니면 그때그때 애들의 감흥이나 이런 것들 을 글로 받았어요? 아이들은 글쓰기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아요. 제가 사진이 취미라서 일 단 사진을 많이 찍어놔요. 아이들이 글을 써서 정리를 해야 될 때쯤, 사진 을 보고 활동을 떠올려서 생각나는 걸 글로 써보자고 하면 다 써내요.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었고, 어땠는지 사진이 상기시켜주니까요.

주위 사람들 반응은 어떻나요?

칭찬을 해주시고 응원해 주시죠. 근데 저는 이런 활동이나 고치라고 하 는 단체에 대한 칭찬보다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원해 주시길 바 래요. 이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있고, 내가 이 친구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뭘 까 한 명 한 명에게 구체적인 관심을 써주는 어른들은 사실 굉장히 만나 기 힘들어요. 그런 어른들이

21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사람을
하면서 강하게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소개해 주고 싶은 책이나 자료 같은
있어요? 『고치는 집』이 제일
설치미술전을
많아져야 아이들도 외롭지 않게
신뢰
애착이 가요. 『뿌리 이야기』라는
한 적

이 있어요. 그때의 도록이 이 책이에요. 이 설치미술전은 사람들에게 관

심을 못 받아서 애착이 가요. 전시 기간도 짧았고 갤러리가 무척 외진 곳 에 있었어요. 2014년에 만덕5지구 대추나무골이 공권력에 못 이겨 헐리 기 전에 아이들이 남아계신 주민들을 위한 만덕 잔치를 열었었어요. 『관 계의 잔치, 가치의 재생』이라는 이 사진집이 그때의 사진 기록물이에요. 이후로 5년이 지났고 대추나무골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조성이 되고 첫 입주자가 들어오고 있었죠. 우리는 그 아파트 밑에 어떠 한 역사가 있었다는 걸 알잖아요. 그래서 뭔가 그런 역사를 새로운 입주 민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어요. 당시에 저희가 월담회라는 이름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저녁 식사를 같이하며 좌담회를 열곤 했었는데 ‘각자의 삶의 뿌리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좌담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나 온 대화들을 바탕으로 설치작품들을 만들었어요. 스페이스 만덕이라는 갤러리에 조명 설치를 안 하고 문에는 암막천을 대어 공간을 깜깜하게 만 들었어요. 아파트 아래에 펼쳐진 남모르는 이전의 역사를 발굴하듯이, 어 두운 땅속에서 뿌리를 캐내듯이 작품을 감상하게 하려는 의도였어요. 또 한 땅속이라는 게 청년들의 불안한 마음, 어두운 마음속의 느낌도 있었 어요. 아무리 어두운 마음이라도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잖아 요. 그래서 들어갈 때도 랜턴을 가지고 작품 하나하나를 비춰보게끔 했어 요. 이처럼 내가 밝은 마음으로 내 안을 비춰보면 무언가 찾을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소외되고 어두운 무언가들 속에서 빛이 숨어져 있다는 간접 적인 메시지를 전하고도 싶었어요.

217 만덕

그 외에 특별히 애썼던 활동이 있나요?

애쓴 걸로는 ‘만덕천 살리기 운동’이 기억에 남아요. 『만덕천 살리기 운동 기록집』 1, 2를 2018년, 2019년에 만들었죠. 그때 ‘마을교육공동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학교와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나면서 활동했었어요. 마을 교육 하면 보통 떠오르는 게 마을 역사잖아요. 옛날 분들이 다 만들어 놓 은 역사고 거기에 개입할 여지가 없으니 아이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 내는 데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오염된 만덕천을 바 꿔 나가는 행위를 하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거잖아요. 중·고등학생 정도

면 작든 크든 정화를 위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만덕천을 상 징하는 캐릭터 ‘만디’를 창작하고 동화를 만들어 어린아이들은 상상 속에

서 만덕천에 애착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만덕천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친구 만디가 여기서 산대. 근데 누가 여기

에 쓰레기를 버리고 갔어.”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이런 상상 속에서 큰 아이

들은 커서도 환경운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만덕

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디 인형 탈을 쓰고 캠페인을 벌여요. 캐릭터 같 은 경우엔 만덕고에서 만덕천 캐릭터 디자인 공모를 해서 만들었어요. 만 디를 목격한 모습을 적어 달라 했는데, 머리 위에 깨끗한 물을 담아 다닌 다, 시력이 좋다, 속눈썹이 길다 이렇게 애들이 제보를 하는 거예요. 그 내 용을 모아서 제가 캐릭터를 디자인했어요. 지금도 만덕고등학교 학생들이 ‘만덕천 살리기 운동’을 하나요? 부산에 ‘다행복 교육’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을 때였어요. 마을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빠르게 확산되기 위해서는 좋은 사례가 필요하기도

21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했죠. 좋은 사례를 만들려면 학교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학생이 있어 야 되고, 마을 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되고, 예산이 있 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사업을 따내고 마을교육공동체로서 학교와 만났 어요. 그런데 문제는 학교에서 마을 교사들을 크게 반기지 않는다는 거예 요. 선생님들의 일이 늘어난다는 이유인 것 같았어요. 그중에 한 선생님 이 다행복 교육에 찬동하시고 과학 동아리 학생들과 만나게 해주었어요. 아이들도 처음에는 만덕천 살리기 운동, 즉 환경 운동에는 호응이 없었어 요. 근데 실제 현장에 가서 실태를 보고 구청 직원하고 스피커 통화를 했 는데, 이 구청 직원이 아이들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들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관은 믿을 수가 없다. 우리가 힘을 내 야 된다.” 그래서 그렇게 2년 동안 열심히 하더라구요. 아이들이 시민발언 대에서 만덕천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주창하기도 하고 라디오 방 송에서 만덕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이런 활동을 통해 환경공 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도 생겼죠. 그런데 정말 아쉬운 것이 그다음 연도에 학교에서 인수인계가 안 됐어요. 마을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학교에서 느 끼고 있지 않았었고 무관심한 탓이었다고 보고 있어요.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기록과 활동에 어떤 의미라는 게 있을까요? 거울 같은 거라고 할까요. 사람이 순수한 시절도 있는가 하면 나이를 먹 다 보면 변질도 되고 타락하기도 하죠.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겪다 보면 점 점 요령도 생기는데 옛날 기록을 보면 ‘맞아. 이랬었지.’ 하면서 다시 초심 을 떠올리고 마음을 잡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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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에 어떤 기록이 남겨져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활동이나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만덕천 살리기’ 도 결국에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을 구심점으로 해서 활동이 지속되잖아 요. 그러면 아이들도 그 기록을 보고 ‘이런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이런

시도를 했구나.’, ‘그때 이런 역경이 왔는데 이런 마음으로 이겨냈구나.’ 하 고 배우게 되는 거죠. 그 자세와 태도를 배울 수 있는 기록들이 남겨지면 참 좋겠어요. 그리고 기록관처럼 그 기록을 모아두고 보게 하는 곳이 있 으면 좋겠죠. 공동체의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공동체를 ‘제 삶의 기반’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혼자서 살 수는 없

어요.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 또한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공동체를 가

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외롭고 불안하지 않을까요. 기반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곁에 지지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불안하고 부 실한 삶은 없다고 봐요. 자기한테 힘이 되는 공동체를 스스로 만들 수 있 으면 좋겠어요.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자세를 갖추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꼭 내 주위에서 공동체를 만들지 않는다고 하더 라도 이미 생성된 인류라는 공동체도 있잖아요. 또 국가 공동체, 지역 공 동체가 있잖아요. 그런 나를 둘러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나에 대한 관 심과 더불어 당연히 가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의식하지 못해도 나에게 어 마어마한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요.

22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앞으로 대표님이 하고 싶으신 활동이나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때로 개인이 희생되는 부분이 있기도 해요. 개인 이 펄펄 살아서 날 수 있는 공동체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고민하고 있어요.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 안에서의 삶의 비중에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생각 해요. 저는 사진을 찍거나 예술 활동을 하는 걸 무척 좋아해요. 개인적인 욕구죠. 그런데 이 욕구와 공동체와 맞닿을 수 있는 형태가 무엇일까, 그 지점을 만들어내야죠. 사진은 공동체의 활동을 기록하기도 하고 예술은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상상과 반성의 과정으로 구현될 수 있어요. 저뿐 아니라 아이들, 공동체 구성원들도 각기 자유롭게 개인적인 욕구와 공동 체적인 욕구를 함께 조화시켜 나갔으면 좋겠어요.

221 만덕

이음북구 기록가 서미화

마을기자단에서 취재를 위한 인터뷰 기법을 배우러 왔다가

사람과 공동체를 알아간다는 짜릿한 새로운 경험을 한 서미화입니다.

고치공동체의 활동과 기록은 관계와 가치의 재생을 이끌어 내고 있다. 학생들

이 개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역사의 주체자가 될 수 있게 이끌고 있었다. 개

인의 삶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각자가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

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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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해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선을 넘어버렸죠
전상규 사진작가

전상규 님은 마을, 사라져가는 것들, 쫓겨 나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아서 매축지, 자 갈치, 전포동 공구상가 등을, 북구에서는 구포시장과 대천마을을 10년 이상 꾸준하 게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연히 만덕5지구 재개발 구역의 투쟁을 알게 되 어 참여하게 되었으며, 주민들과 함께 만덕

5지구를 사진으로 기록한 <동네 한 바퀴>, <내 집 앞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한

다. 마을공동체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사라지는 마을을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기록물은 공공재라는 생각 으로 공익적인 목적으로 요청하면 언제든 지 사진 원본 파일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

22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다. 북구의 역사적인 공간이 제대로 기록되 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고, 지 역의 기록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기록관 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했다. #사진기록 #마을기록

언제부터 만덕에 사셨어요?

원래 고향은 경남 의령이었어요. 4학년까지 할머니하고 살다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서 아버지 어머니 따라 부산으로 왔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먼 저 동생 둘을 데리고 부산 엄궁에 내려와 계셨죠. 그러다 덕천동으로 이 사 가고, 저는 거제리에 있는 작은집에 얹혀서 학교 다니고, 외할머니한 테 옮겨가고. 한마디로 부산 안에서 어머니가 저를 유학시킨 거예요. 아버 지는 고등학교 때 돌아가시고, 군에 갔다 와서 스물다섯 살인가 그때부터 한 3년 정도 어머니하고 살았죠. 어머니가 암에 걸려서 돌아가시기 전에 급하게 결혼했어요. 결혼하고 덕천동에서 집사람하고 나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살다가 어머니가 1년 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면서 애를 낳고 처 가가 있는 만덕으로 가게 된 거죠. 큰놈이 지금 스물네 살이 됐는데, 그놈 이 네 살, 다섯 살 때 올라왔으니까 20년 됐죠. 진짜 오래 사셨네요. 만덕5지구 투쟁은 어떻게 함께하게 되신 거 예요? 처음에는 만덕에 정이 잘 안 들었어요. 만덕5지구 투쟁에 함께 했던 계기 는 사실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때가 이명박 정부 때였 을 건데, 노사모였어요. 학생들이 군홧발에 의해서 피 흘리고 할 때 안 되 겠다 싶어서 부·경 아고라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만덕5지구 투쟁을 어 떻게 알게 됐냐면 그때 제 스튜디오가 명륜동에 있었거든요. 아침에 버스 타고 올라가는데 노인들이 이마에 벌건 걸 쓰고 만장 세워서 육교 위에 서 깃대를 흔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 정류장에 바로 내려서 이야 기를 들어보니까 처음에는 보상을 좀 더 많이 받고자 하는 투쟁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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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투쟁이 이어져 가면서 주거권에 관한 투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더라 고요. 그 시점에 제가 아주 깊숙이 들어갔죠. 그래서 만덕을 알려야 되겠 다고 시작한 게 사진을 찍어서 시민단체 이런 데 계속 보내고 인터넷 사이 트에 올리고 그랬죠. 그때 시민사회단체들이 상당히 합류를 많이 했어요. 그 이후에 부산반빈곤센터가 들어와서 주민들하고 공대위를 꾸렸죠. 그 싸움 마지막에는 고공농성까지 갔으니까 엄청났었죠. 투쟁 이후로는 내 가 만덕에서 뭔가를 좀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죠.

선생님을 생각하면 <동네 한 바퀴>라는 프로젝트가 제일 기억에 남더라고요.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동네 한 바퀴> 프로젝트는 주민분들하고 함께한 것이에요. 그분들도 알 거든요. 이 마을이 미래에는 없어진다는 것을. 작가가 남겨놓은 기록도 중 요하지만, 주민들이 한번 남겨보자 그래서 제가 사진 수업을 했어요. 기 본적으로 사진을 어떻게 찍고 어떻게 저장하는지 정도만 알려드리고 작 업을 시작했고, 몇 달을 했어요. 사진을 찍으면서 동네 어르신들이 저한 테 했던 말이 뭐냐 하면 “우리 마을이 이렇게 예쁜 줄 그때는 몰랐다.”였어 요. 그때부터 소중함이 새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골목에 나 있는 풀 하나도 예쁜 거예요. 그러면서 어머님 아버님들도 우리 마을을 바라보는 게 좀 달라졌던 거 같아요. 미처 몰랐던 걸 기록하시라, 작가보다 우리 어 머님 아버님이 기록하는 게 아주 가치 있는 거다. 그렇게 시작한 게 <동네 한 바퀴>예요.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사진 찍는 거. 이런 게 투쟁을 더 오 래 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모아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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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활동하는 작가들 몇 명과 같이 전시회를 열었죠. 전시회를 하니까 국회의원도 오고 그랬거든요. 뿌듯하고 되게 좋았어요. 마을 사람들하고의 관계는 어떻게 깊어지게 된 건가요? 그 과정이

좀 궁금하네요. 지금도 우리 어머니들이 그래요. 우리 동민 왔다고. 제가 만덕에 올라가면 옆 마을이지만 그냥 인정해 줬어요.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잖아 요. 처음에는 투쟁하는 데 가서 카메라 들고 왔다 갔다 주위를 맴돌면서 내가 말 걸 수 있는 어른들 계시면 말도 슬쩍 걸어보고. 마음이 열린 분이 생기면 그분한테 집중적으로 가서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저하고 어머니 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몇 분이 와요. 그러면 한 분하고 이야기하다가 또 네다섯 분 친해지잖아요. 이게 확대되다 보니까 저놈은 나의 말을 들어주 는구나, 우리가 살아왔던 흔적을 들어주는구나, 그게 되게 강했어요. 믿 고 안 믿고 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네.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우리를 도우러 외부에서 온 고마운 사람. 그게 조금씩 시간 이 길어지면 관계가 더 깊어지고, 진짜 아들하고 아버지 어머니가 돼요. 선생님이 개인적으로도 마을을 계속 기록했잖아요. 집 안으로 들어 가서 기록하기도 했잖아요. 그게 <내 집 앞에서>라는 프로젝트인데 아주 사소한 생각에서 출발한 거 거든요. 평생을 가꾸며 살아왔던 내 집이 이제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이 집 을 누가 기록할 것이냐, 내가 살아왔던 흔적이라도 남기자. 흔적이 기록이 니까요. 그래서 내 집 앞에서 한 컷씩 찍자. 그게 시초예요. 그런데 욕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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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잖아요. 그래서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 삶을 알려면 그래야 하 니까. 아무리 친해도 처음에는 안 보여주려 하죠. 근데 제가 작업할 정도 가 됐을 때는 신뢰 관계가 너무 두터워졌기 때문에 들어가서 밥 먹고, 사 진 찍고 하기 시작했죠. 이게 소문이 나니까 집을 떠났던 그 마을의 주민들 한 서너 분이 찾아오기도 했어요. 자기 집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고. 기록 작업은 선생님 혼자서 계속해오고 계신 거예요? 기록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것을 기록 한다는 게 그런 겁니다. 매번 똑같을 것 같지만 다 다르거든요. 그걸 계속 찍어나가는 거예요. 기록해 놓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큰 그림 을 그렸다가 자꾸만 좁아져요. 자꾸만 깊숙이 들어가게 되죠. 그러면 그 게 완성이 되는 건데 기록은 시작은 있어도 끝은 없어요. 계속 가야 하 는 거예요. 이 긴 시간 동안 만덕5지구 재개발 현장을 계속 기록하면서 진짜 이때는 때려치우려고 했다, 내가 뭐 때문에 이러고 있지, 이런 생 각하신 적 있어요? 너무 많죠. 그런 기분이 제일 크게 들 때는 실제로 우리가 힘이 너무 없을 때예요. 우리는 너무 쉽게 끊어지는 거예요. 갈등들이 주민들 사이에서 도 있고 활동가 사이에서도 있고 활동가랑 주민 사이에서도 있어요. 그럴 때 보면 내가 뭐 한다고 여기 있지 이런 생각을 되게 많이 하죠. 최소 3일 에 한 번은 들었던 것 같아요. 우리 안의 갈등이 조금씩 보일 때 그게 큰 갈등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그게 너무 상처가 되더라고요. 그래도 그럴

23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때 다독여주고 잡아주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마을 주민분들이에요. 나중에 협박까지 하니까 니는 우리 때문에 올라오는 거 아니냐고. (웃음)

반대로 이건 진짜 내가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뭐가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제가 정말 잘했다고 하는 거는 만덕에서 한 5, 6년 활동하면 서 사진을 어떻게 기록하고 남겨야 하겠다는 거를 배웠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그런 기록이나 다큐 사진들이 만덕 투쟁 이후로 깊이가 더해지기 시 작했어요. 두 번째로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정말 좋았던 거는 어떻게 살 아가야 하는가를 주민들을 통해서 봤거든요. 그전에는 막연하게 정의롭 게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삶을 더불어서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겠다 하는 거를 배웠어요. 그전에는 많은 걸 보려 고 하는 삶의 지향점이 있었다면 이제는 내가 정말 봐야 할 것만 보겠다 는 것으로 생각이 바뀐 것 같아요.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부분, 그 안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는 결국 만덕 안에 제가 들어가서 촬영하면서 봤다는 거죠. 만덕은 저한테 많은 성장을 가져왔어요. 사진으로나 삶의 바라보는 태도 면에서 말이에요. 박배일 감독의 「사상」이라는 영화에 선생님이 나오잖아요. 제가 본 장면이 망루를 짓고 있는 날이었는데, 그게 아주 힘들고 어려운 결

231 만덕
정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심각한 순간에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 는 거예요? 저도 몰랐는데 만덕 투쟁에서 저를 찍었던 사진작가들이 되게 많더라고 요. 보면 항상 웃고 있더라고 바보처럼. 즐거웠던가 봐 뭔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안 그렇습니다. 항상 성질내고 있었고, 고함 지르고 있 었고, 우리 공대위 회의하면 끝나고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한 서너 가치를 펴야 하는 상황이고. 처음에는 너무나 우리끼리 싸움을 했는데 뒤에는 진 짜 전국에서 관심을 가져줬잖아요. 그런 힘을 얻었을 때부터 내가 웃기 시 작했던 것 같아요. 너무 즐거웠던 것 같아요. 사람이 희망이 생기면 웃게 되잖아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만 망루를 세우거든요. 망루를 세웠을 때 느낌이 안 그랬겠어요. 이거 세우면 이길 수 있다.

선생님이 그동안 기록해왔던 다른 마을처럼 만덕5지구도 그냥 사 진으로 기록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깊숙이 관

여하게 되어버린 걸까요?

나는 항상 기록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미래에서 보는 그 당시의 진실이

라고. 나는 현재를 찍고 있지만, 기록이라는 게 미래를 위해서 찍는 거잖 아요.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찍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덕 사진 같은 경우는 주관적으로 돼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선이라는 게 있는데 제가 그 선을 넘어서 버렸어요. 그 선이 뭐냐 하면 인간이에요. 인간, 사람. 그 마 을에 사람이 있었거든요. 내가 이 마을 사람들하고 만나버렸기 때문에 그 냥 훅 들어와 버린 거예요. 선생님은 마을이나 공동체, 어쩔 수 없이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 기를 왜 이렇게

23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긴 시간 동안 긴 호흡으로 기록하고 있을까요? 선생님이 지금 나한테 질문한 걸 제가 저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게 꽤 됐는데 ‘나는 왜 이런 것만 찍고 있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가만히

생각하니 트라우마가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4학년 때까지 시골에 있었잖

아요. 시골은 내가 놀 수 있는 천국이었거든요. 그러다 부모님과 도시로 가 면서 엄청나게 향수병에 걸린 거예요. 시골에 대한 향수, 그리움 이런 것 들이 계속 남아있었던가 봐요. 그래서 아마 자꾸 그쪽으로 가는 것 같아 요. 자꾸 부여잡으려고. 그리고 다른 영향이 있다면 최민식 선생님의 영향 을 많이 받았죠. 그러면서 사람, 인간에 집중하다 보니까 실질적으로 사회 적 약자, 사진 한 장이지만 힘이 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었죠. 북구에서 이런 것들이 좀 기록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게 있 을까요? 장소의 기록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 지금 그걸 구포가 잘하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내려왔던 장소, 터 이런 걸 북구에 살 면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되게 많아요. 이런 거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북 구에도 기록관이 있으면 좋겠어요. 자체 예산을 들여서라도 기록관을 만 들어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북구가 부산을 네트워 크 하는 중요한 곳이 될 수도 있는데 아쉬워요. 북구의 문화가 기록되면 좋겠고, 그런 걸 집대성해서 모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233 만덕

이음북구 기록가 백복주 마을을 기록하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좋아합니다. 마을의 기록이 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할 아름다운 도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에게 전상규 사진작가는 늘 고마운 분이다. 대천마을이 재개발되기 전 마을 을 사진으로 기록하려고 할 때 기꺼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마을에 서 마지막 전시를 할 때도 그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해 주었다. 긴 호흡으로 변 함없이 사진으로 세상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본인조차도 가늠하기 힘들만큼 많은 사진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필요한 곳에 잘 쓰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23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235 만덕
기록하기 위해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활동한 걸 주민들과 나누기 위해서 기록해요
정신모 만덕종합사회복지관 관장

#공동체기록 #소식지 #기록기획

만덕종합사회복지관은 만덕의 문제가 무

엇인지, 지역사회를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라는 고민으로 주민 인터뷰와 조사를 진행

했다고 한다. 그 결과 교육여건이 좋지 못

해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 만덕고등학교 김대성 교장

선생님과 최기봉 동장을 찾아가 의기투합

해 청소년, 청년, 마을공동체가 함께 마을

의 문화와 교육에 대한 비전을 찾는 작업인

<만덕다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소식지가

없어 복지관에서 『만사소통』이라는 마을 신문을 발행하고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 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기록이 주목 적은 아니었지만, 활동을 정리하고 기록으 로 남겨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고 이 야기했다.

23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복지관에서 발행하는 『만사소통』은 어떤 소식지인가요?

복지관의 소식지는 있었는데, 우리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내용들은 사실 없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마을 신문이라는 게 필요한 부분이 있겠 다, 만덕 복지관의 소식지가 아니라 만덕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 업을 하면 좋겠다 해서 마을 신문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만사소통』이라는 신문을 주로 만덕마을 기자단하고도 협업해서 기사를 쓰신댔는데, 그러면 전체 기사는 모두 주민들이 작성하는 건가요? 주민들이 다 작성하지는 않고 기획 회의에 주민들이 같이 참여하고요. 저 희가 유튜브에 올릴 영상도 찍어요. 영상을 제작하는데, 영상의 아나운서 를 지역 주민들이 같이 참여하기도 하고 또 사진이나 이벤트 같은 것들도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게끔 하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주민들 손으로 다 만 들어진다고 보기에는 아직 어려운 건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만덕 기자단 하고 같이 협업하는 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웬만하면 만덕 복지 관을 홍보하는 활동은 거의 배제하고 있고, 주민들하고 같이해서 공동체 가 좀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진행하고 있어요. 주민들이 같이하면 직원들도 소일거리가 줄어서 본연의 일을 할 수 있겠네요. 공동체가 많아지면서 일이 더 많아졌을까를 돌아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공동체가 성장하면 사회복지사들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거예 요. 그러면서 더 많은, 더 큰 일들을 해 나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거든요.

239 만덕

저희가 다른 복지관에 비해서 많은 일, 큰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

만 사실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공동체가 하는 역할이 진짜 많아요. 그렇 게 환경이 바뀐 거죠. 만덕의 공동체가 많아지면서 저희가 기획할 수 있 는 게 참 많아진 거죠. 마을 활동가들이 활성화되면서 복지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멋진 뭔가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도 관리자나 담당자의 역할이 아주 큰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는 저희 할 일을 하는 거거든요. 저희가 하는 방식이 사회복지

실천 방법에서의 전문화된 방법들을 실제로 적용해보고 이것들이 맞는

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있는데 우리 복지관 직원들 근속률이 지금 부산

에서 되게 높은 축에 들어가거든요. 제가 생각했을 때는 만덕이라고 하는

동네에 매력이 있는 거죠. 이론적이거나 전문화된 부분들을 현장에 녹여 내는 걸 한번 느껴보기 시작하니까 본인들이 재밌어하는 것 같아요. 제가 여기 관장으로 온 지는 6년이 넘었는데 생각해보면 직원들이 더 재밌게 활동하고 있는 것 같고 저는 그러면서 할 일이 별로 없어지는 거죠. (웃음) 기록 활동을 하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었는지 여쭤 보고 싶네요. 기록하기 위해서 활동하는 건 아니고 활동한 것들을 주민들과 더 나누기 위해서였죠. 사실은 활동이 더 앞서간다고 생각이 들어요. 활동을 어떻 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았고, 이 활동이 쌓이다 보니까 이 내용 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다른 사람하고 나누는 데 한계가 있겠다는 생

24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각도 들었죠. 제가 좀 아쉬운 거는 예전에 지역사회 생애사 형태로 만덕

이 바뀌는 그림들을 전반적으로 기록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어떤 분이 제

안하셨어요. 제가 그런 능력이 안 되어서 진행을 못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좀 아쉬운 것 같긴 하고요. 저희가 하는 역할은 마을 주민들이 마을 을 위해서 또 마을과 함께 할 수 있는 활동들에 대한 판을 까는 작업인데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항상 아쉬운 건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지역사회 생애사라는 과제가 하나 남았다 는 생각이 드는데 향후 계획 속에 이게 포함이 되겠네요.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긴 해요. 우선은 제가 만덕에 오면서부터 저의 생애 사가 시작된 거죠. 참 많은 변화가 있었거든요. 지역사회가 바뀌었던 그런 부분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지금도 계속해서 마을이 변화

해 가는 흐름 속에서 또 저는 사회복지사로서, 사회복지 실천의 방법들이 나 이런 것들을 어떻게 적용하고 풀어나갔는지에 대한 것들도 정리해보 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지역사회 생애사에 대한 프로그램이라고 할까요, 프로젝트라고 할까요. 이걸 계획해서 진행하게 된다면 어떤 것들

241 만덕
않을까요. 그리고 주민들이 느꼈던 활동의 영역들을 저희가 조금 더 구체화하는 작업이죠. 마을의 이 슈가 계속 바뀌면서 각각의 공동체가 했던 역할들이 있거든요. 마을 교육 공동체라고 해서 마을 교육만 한 건 아니고 돌봄으로 이슈가 넘어가면서
이 필요할까요? 아무래도 글을 쓰는 기술과 시간이 필요하지

할 수 있는 역할을 또 해주시고, 거기서 또 넘어가서 청년들과 함께하고, 고립된 1인 가구 주민들과 같이했던 그런 흐름이 있어요. 그래서 지역사 회 커뮤니티가 공동체를 통해서 바뀌는 모습들이 있었거든요. 그것들을 담고 싶은 욕심은 있어요. 이런 활동들을 하시면서 성장하게 되었다거나, 자신의 생활이 변화 했다거나 이런 게 있으시다면?

아무래도 같이하는 데 의미들이 많이 주어지는 거죠. 이 마을 활동을 하 기 위해서는 혼자만 잘해서는 안 되거든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이타적인 마음도 필요하고 마을에 대한 이해도도 필요한데, 사회복지사 로서 전문가답게 접근하기 시작하면 한계에 봉착하게 돼요. 그래서 주민 들이나 공동체, 또는 다른 분들과 어떻게 협업하고, 동참할 것인가. 이게

제가 지내왔던 세월에서 성장을 많이 했던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복지 영역을 뛰어넘는 다양한 영역과의 융복합을 통해서 풀어내 는 작업이 많이 있었어요. 우리가 사는 데 있어 필요한 것들,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작업이 복지잖아요. 우리가 단순히 취약계층이나 어려운 분들을 도와준다 해서 그냥 끝나버리면 사 실 마을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환경적 변화를 통해 마을을 만들기 위 한 작업도 같이했다는 측면에서는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 회복지 안에서의 부분들도 중요하지만, 문화도시의 측면에서 봤을 때 문 화적 돌봄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들을 만들어냈잖아요. 문화와 돌봄이 같이 가야지만 사람의 인생에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부분을 건드릴 수 있 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북구는 취약계층이 많고 어려운 사람이 많이

24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있는 곳인데 이분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일까 했을 때 예전 같으면 의식주 라는 일상생활의 지원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근데 지금은 그 욕구를 조금 더 뛰어넘어서 사람들과의 관계나 사회적 활동에 더 중심적으로 가는 방 법을 모색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결론적으로 문화라고 하는 게 매 개체로서 되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마을 활동을 통해서 알게 되었 습니다. 문화적 돌봄이라는 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성과 문화라는 게 왜 필요한지, 그런 필요성을 대변해준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 성과들도 많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북구 만덕을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셨는데, 은퇴하시고 난 다음에 계획이 있으시다면? 그렇게 거창한 꿈은 사실은 없어요. 최기봉 동장님처럼 시민으로 돌아가 고 싶어요. (웃음) 제가 산복도로 르네상스 할 때를 생각해 보면 주민 조직 과 마을 활동가로서 활동하는 것도 되게 재밌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요. 우선 저는 새로운 곳을 여행하고 싶어요. 스페인 순례자의 길을 한 달 여행하며 나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다음에 이집트 다합으로 가서 한 달 동안 서핑을 즐기고 오는 게 제 꿈입니다. 제가 여행을 다니면 서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 것 같아요. 코로나 전에 오스트리아를 다녀 와서 사회주택 모형을 본 것들을 참고해 부산에서 ‘도담하우스’라는 사회 적 기업과 같이 만들었던 경험도 있어요. 실제로도 제가 더 성장하기 위해 서는 많이 보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제가 사회복 지 한 지 20년이 넘었거든요. 20년이 넘어서 좀 더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 면서 가야 하지 않을까, 좀 더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43 만덕

그동안 활동해 오시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런 거 하나 해냈다 하는 그런 사람이나 일들이 기억나시는 게 있으신가요? 해냈다기보다는 그 동력을 잃지 않으려고 계속 이슈를 옮겨 다닌 거죠. 다 행복 교육지구가 되면서는 제 역할이 많이 없어도 되는 상황으로 발전했 고, 다복동 사업을 하면서 제가 어느 정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사실 은 빠져야 하는 상황들도 발생했었고, 그 이슈를 계속 옮겨 다니면서 공 동체가 해야 할 것들을 만들어내기도 했기 때문에 공동체들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코로나만 아 니었으면 정말 재밌게 계속 이어갔을 것 같아요.

우리 이 사업도 예비 문화도시가 선정되기 위해서 관장님께서 아 주 큰 역할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내년에 우리가 정식으로 문

화도시가 된다면 할 수 있는 구체적으로 한두 개의 아이디어를 얘 기해주시면. 우선은 문화예술인들뿐만 아니라 문화를 매개로 하는 공동체들이 문 화 돌봄 활동가 양성과정을 만들어서 취약계층이나 어려운 사람과 의 관계에서 매개체 역할을 하며 ‘문화 도시락’이라는 걸 만들 계획인 것 같아요. 우리가 식사 배달하잖아요. 어르신들 식사 배달하듯이 문 화를 배달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삶의 활력소가 되고. 예전에는 어르신 들 식사 배달하면 밥 챙겨줘서 고맙다고 눈물 흘리셨어요. 요즘에는 식 사 배달하면 혼자 먹는 것을 힘들어 하세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중장년 남성의 고민은 ‘외로움, 사회적 고립, 사회적 배제’ 이런 것들이 기 때문에 저는 이걸 문화를 통해서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24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문화적 돌봄’이라고 하는 거는 공동체와 같이 작동할 수 있는 거고, 문화

예술인이나 문화 활동을 하시는 분들도 공동체에 대한 이해도나 돌봄 대

상자에 대한 이해도가 있어야지만 성공할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그런 양

성과정을 만들고 도시락을 배달하듯이 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 을 제안해볼까 싶습니다.

이음북구 기록가 김말선

결혼 후 20년은 교육을 전공하며 생활에 충실하였고, 앞으로 20년은 복지실천가로서 삶과 건강한 노년기를 위한 사회참여활동가로서 성실히 걸어가고자 합니다.

내가 사는 곳은 아니지만, 직업인으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말, 복지관의

이름보다 지역민의 활동이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는 겸손의 말을 남기시는 정 관장님의 一言, 평생 공부로 배워야 하겠다.

245 만덕
나중에는 아이들한테 우리 동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노인이 되고 싶어요
최기봉 만덕마을기자단

#마을기록 #마을잡지

만덕은 최기봉 님의 공무원 생활의 첫 발

령지이자 마지막 근무지이다. 만덕2동 동

장을 하면서 만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한다. 누군가(전 문가)에게 맡기기보다는 주민들이 직접 글

을 쓰면 기록 활동이 지속되지 않을까 하

는 생각에 마을기자단을 만들었다. 글이나

다른 재주가 있는 분들이 아니라, 봉사하

고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을 모았다고 한

다. 만덕 기자단과 마을 해설사를 양성했 고, 마을 해설사는 매년 책상 달력을 제작 한다. 2017년에는 『만덕 사람들』 창간호, 2020년에는 제2호를 발간했으며 현재 제 3호를 준비 중이다. 기록할 때 마을을 지 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는 시간

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궁금해야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고도 했다.

24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만덕마을 기자단을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만덕이라는 동네가 제 공무원 생활의 첫 발령지이기도 하고, 돌고 돌아 2016년도에 만덕2동 동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당시에 만덕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어서 봉사하시던 분들을 모아 마을 기자단을 만들 었어요. 2년에 걸쳐 마을기자단 교육을 하고 2017년에 창간호를 발간했 습니다. 창간호라고 쓴 이유는 2호를 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서였 죠. 많은 기자 분이 참여해서 매년 만들고 싶었는데, 예산이 모자라다 보 니까 올해에서야 3호를 만들고 있는 단계입니다. 마을기자단 활동이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본인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내 삶도 한번 기록해보자.’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고요. 요즘은 사

진도 핸드폰으로 많이 찍다 보니 정리가 잘 안 돼요. 그래서 매일 저녁에

조금씩이라도 정리해서 블로그에다 올린다든지 나 자신을 기록하는 작업

을 조금씩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대한 애정도 많고 작업 활동을 좋아하시는데, 2017년에 처 음 기록 활동을 하셨을 것 같진 않거든요. 만덕 기자단 외에 또 어 떤 활동들을 하셨는지. 처음에는 마을 해설사를 양성했고요. 제가 이 동에 동장으로 오면서 보니 까 마을에 공동체가 13개 정도 있어요. 그래서 각 분야 공동체들이 모여 서 이 동네를 위해서 뭐 하나라도 하면 안 되겠냐 했는데, 정신모 복지관 장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각 분야를 꽉 쥐고 있는 키맨들이 있

249 만덕

다고요. 교육 분야에서는 그 당시 김대성 교육장님, 복지 분야에서는 정 신모 관장님, 행정 분야에서는 제가 그런 역할을 하는 거죠. 세 사람이 모 이면 기본적인 정리가 다 되는 건데, 그게 벌써 5년이 지났어요. 저는 퇴직 했고, 교육장님도 퇴직하셨고, 그때가 좋았죠. 마을기자단에서 기자들은 주제를 어떻게 정하나요? 주제는 그때그때 편집 회의를 하면서 정하고 있습니다. 부산민학회의 주 경업 선생님이라든지 이런 분들한테도 물어보고, 마을 기자들을 가르치 셨던 최원준 교수님께서는 제일 처음에 토박이들을 먼저 인터뷰해야 한 다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창간호는 상리마을과 하리마을의 토박이들, 오 래된 점포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2호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을 주제로 했 어요. 닥종이 인형을 만든 분, 오카리나를 만든 분, 동네 지신밟기에 무형 문화재 등록되신 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죠. 3호는 만덕 고갯길을 특 집으로 해서 고갯길에 나오는 오리마을이나 주막 관련 이야기가 특집으 로 나오고, 길에 관한 이야기도 나올 것 같아요. 할 때마다 주제를 하나 정 해서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마을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만덕 사람들』 3호까지 계획을 하고 계 셨는데, 향후 또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지금 만덕 복지관에서도 이런 작업을 많이 하고 있는데, 복지관과 같이 3 개월마다 『만사소통』이라는

25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마을 신문을
지에서 업그레이드해서
만들고 있습니다. 복지관 소식
복지관 소식, 주민센터 소식 외에도 마을의 이야 기를 같이 싣고 있죠. 계간지 형식으로 발간되고 있는데, 저희가 같이 붙

어서 두 달에 한 번이나 매월 낸다면 우리 마을의 신문이 만들어지지 않

을까 싶어요. 마을기자단 활동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을까요? 사실, 문제는 책 만드는 데 의외로 돈이 많이 든다는 거예요. 중간에 몇 장 만 칼라가 들어가도 가격 차이가 크게 나더라고요. 전문가가 도와주기도 하고, 글 쓸 거리도 많고, 글을 쓰려는 열정들도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책 을 내는 데 필요한 예산 확보죠. 오랫동안 지역을 위해서 활동을 해오셨던 터라 본인의 삶에도 변 화가 좀 있었을 것 같아요. 만덕에 대한 기록 작업은 옛날부터 하고 싶었는데, 제가 마침 발령이 여기 에 났어요. 그러면서 여기에 30년째 살고 있으니까 퇴직하고 굉장히 도움 됐어요. 관료로서 작업을 하는 거랑 민간인으로서 이 작업을 하는 건 또 다른 느낌이거든요. 관에서는 어떤 틀에 맞춰서 해야 하잖아요. 거기에서 나와서 이런 작업을 하는 게 좀 더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더 재밌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공직 생활에서의 활동들이 오늘의 이 마을기자단 활 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죠. 그런 부분들이 본인의 삶에 있어서 성장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죠. 성장은 계속해야 하는 거고, 배우는 건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거죠. 만덕 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북구 이야기도 알아야 하고, 가까운 동래에

251 만덕

대해서도 알아야 해요. 그럼 결국은 부산의 역사를 다 알아야 하는 거죠. 재밌어요. 공부는 생활이죠. 마을기자단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 분이나 마을을 위해 앞장서서 운동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들에게 어떤 도움의 말씀을 남기 고 싶으신가요? 그 마을에 대해 기본적인 역사나 향토지리 같은 부분들은 조금 공부를 하

셔야 해요. 그 외 부분들은 주위에 있는 오래 사신 분들에게 말을 걸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죠. 마을에 오래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 반세기 동안의 이 동네 역사가 나와요.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를 뽑아

서 기록하고 기억해놨다가 그 시대에 또 다른 사람한테 질문해 보면 또 새

로운 이야기가 나와요. 이걸 모아서 또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막 나오는 거죠. 궁금해야 돼요.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물어봐

야 하고. 인터뷰를 끝내야 할 시간에 또 질문 던져요. 그러면 또 40분 지나 가거든요. 그렇게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진짜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죠. 직장생활이 주민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경험을 만들고, 퇴직 후 에도 지역 활동으로 연계된 것을 보았을 때, 공무원 생활을 참 잘했 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했다는 것보다는 그 당시도 그냥 좋아서 열심히 했었고요. 항상 그때도 했던 말인데, 원래 내 꿈은 골목대장이었습니다. 골목대장이 꿈인데 동장 까지 해 먹었으니까 사람들이 성공했다 그러죠. 나중에는 아이들한테 우 리 동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노인이 되고 싶어요. 개인적인 꿈이 있다

25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면 만덕만의 문화재단을 하나 만들어서 지역 주민들이 직접 모은 기금을 가지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해보고 싶어요. 축제 하나를 하더라도 동네 사 람들이 다 모여서 하는 그런 축제. 은행 축제라면 은행으로 요리한 걸 내 놓는다든지. 돈이 있어서 연예인이 오면 좋고, 없으면 동네 빵집의 케이크 교환권 같은 마을의 상품을 경품으로 내걸고 하는 우리 마을만의 축제. 그런 걸 할 수 있는 문화재단, 문화재단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할 수 있 는 ‘동네 문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게 마지막 꿈입니다. 향후 원하는 계획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 일이나 포 부가 있으신가요?

제일 중요한 건 사람들의 참여죠. 행정에는 주민센터, 교육에는 교육청, 복지에는 복지관 이게 큰 세계라면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공동체들이 있거 든요. 마을에서 활동을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활동을 두세 개씩 연결해 서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또 동네 이야기를 글로 쓰는 기자가 있고 말로 해주는 해설사가 있잖아요. 아이들은 그걸 보고 자라고, 이 동네를 알아 가는 거죠.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는데는 마을전체가 필요하다 는 말이 있는데, 이 도시에서도 사실은 가능하거든요. 그럼 결국은 살기 좋은 동네, 문화 즐기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게 최종의 목표라고 보면 됩 니다. 서로 이웃인 게 자부심이고, 이 동네에 사는 게 자부심을 가질 수 있 도록. 그러려면 자꾸 찾아 나가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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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북구 기록가 김말선

결혼 후 20년은 교육을 전공하며 생활에 충실하였고, 앞으로 20년은 복지실천가로서 삶과 건강한 노년기를 위한 사회참여활동가로서

성실히 걸어가고자 합니다.

지역을 위해 활동하신 분을 찾아서 인터뷰하는 것은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마을에 관한 공부가 재밌다는 말로 평생교육을 실천하고 계시는 최기봉 님

의 말을 듣고 나니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 가능한 일인가를 잠시 생각하게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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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열‧김지연 구민진‧구민서 김부련 박혜수 백복주 장소라 황기철
마을공동체나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기록을 정리하고 보관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강호열김지연 [강] 대천천네트워크 공동대표 [김] 대천천네트워크 교육팀장, 자연생태해설사 ※ 본문에는 [강], [김]으로 표기했습니다.

#공동체기록 #생태기록

강호열 님과 김지연 님이 활동하고 있는 대 천천네트워크는 대천천 유역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대천천의 환경을 보존하고 기 후 위기에 대응하여 아름답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공동체이

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며 주민들

의 마을 현안 활동의 기록(백서), 대천천 스 토리텔링, 대천천 생물종다양성 기록, 『대 천천 생물도감』을 편찬하는 등의 기록 활 동을 했다. 마을의 기록들은 어떤 형태로

든 정리하고 관리하고 보관해야 뿌리를 가

지고 미래로 갈 수 있기에, 북구의 다른 동

에서도 각 마을의 활동과 이야기가 잘 정리

되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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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직업은 어찌 되실까요?

[강] 저는 시민사회 활동가, NGO 활동가이고요. 현재는 대천천네트워크 공동대표입니다.

[김] 저는 숲 해설사이고 사회환경 활동을 주로 하고 있어요.

[강] 요즘은 숲 해설가 이러면 숲만 생각해서 자연 생태 해설사라는 명칭 으로 부르더라고요. 대천천네트워크 활동을 하시면서 어떤 기록을 하셨나요?

[강] 공식적으로 기록 활동을 한 건 대천천 스토리텔링이었어요. 대천천 의 상류부터 하류까지 이야기예요. 그중 애기소 이야기, 화산 이야기, 해월사 이야기를 기록했어요. 대천천의 옛 물길 이야기 이런 걸 어른

들과 구술 활동을 해서 자료로 만들고 스토리텔링 콘서트도 했어요. 대천천네트워크에서는 2017년, 2019년, 2021년에 대천천 생물종다

양성 기록을 했어요. 그리고 대천마을의 현안과 투쟁, 금명여고 비상

대책위 활동에 대한 백서를 만들었죠. 남아있는 자료가 많진 않지만

지금도 기록물은 있어요. 그다음에 했던 사갱 공사 대책위 활동은 백 서로는 정리를 못 했는데 자료는 있어요. 대천천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강] 화명동이 옛날에는 들, 산, 강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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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부락으로 있었는데 택지개 발이 되면서 옛날 대천천의 물길은 어떻게 흘렀을까 궁금했어요. 그 궁금증 때문에 대천천의 옛 사진도 수집했고 물길을 찾아봤죠. 애기 소 있는 다리 밑에 섬처럼 생긴 거기를 북섬이라고 하는데, 그 북섬은

물길이 두 개로 나누어져서 정화양로원 쪽으로 흘러 내려갔어요. 또 하나 궁금했던 게 대부분 그 지역에 가면 “실타래 몇 개를 풀어도 끝 이 닿지 않는다, 용이 나온다.” 같은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거 든요. 대천천은 어떤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지 윤희은 어르신이나 마을 분들과 구술을 했어요. 물길이 S자로 넘치고 흐르는 것을 여울 이라고 하고, 물이 떨어져서 파인 곳을 소라고 하는데 애기소 주변에 굽이굽이 열 몇 개의 소가 있었대요. 그 소가 배를 닮았다고 해서 뱃 소, 젓가락을 닮았대서 젓가락소. 이런 소들이 있었더라고요. 그다음 에 계곡 이야기인데, 가장 가까운 데가 불송곡 계곡이거든요. 지금은

산성터널에서 그 밑으로 흘러 내려가는데 쭉 올라가면 한전 위에서

부터 내려오는 물이거든요. 지금 보건소 옆으로 올라가는데 공식 행

정상 명칭은 용두천이고 옛날 이름은 용동골이었어요. 이런 계곡이

산성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파리봉부터 중간중간 내려오는 골들

이 있어요. 화명수목원 옆 사시골은 굉장히 커요. 금성동 마을을 통

과해서 올라가다가 남문 습지에서 오는 물이 있고, 상계봉에서 내려 오는 물줄기가 있어요. 그 두 물줄기가 흐르다가 수목원 사시골에서 만나는 거죠. 이렇게 물줄기에 대한 흐름과 지역 역사에 대한 궁금증 있어서 스토리텔링 콘서트를 하고 음악회도 하고 기록된 걸 발표도

했죠. 지역의 주민과 공유하는 형태로 축제 때 판넬을 만들어서 전시

하기도 했어요. 재밌었어요. 옛날이야기 하는 거 어른들이 좋아하시 잖아요. 도서관도 기록을 많이 했지만, 우리도 많이 했어요. 스토리텔 링 한 건 자료집으로 엮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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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다양성 기록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강] 대천천에 있는 생물이 뭔지, 그 생물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초 창기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수질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 었거든요. 근데 생물다양성 전략이라는 국가 정책이 있어요. 그 정책 을 이해하면서 부산광역시의 생물다양성이 과연 어떤가에 초점을 둬서 생물다양성 워크숍이나 탐사가 진행되었고, 2017년도에 내가 대천천과 화명생태공원에서 부산 전체 바이오블리츠(생물종다양성 조사)를 하자고 강력히 제안해서 1차 생물다양성 탐사를 하게 된 계 기가 되었어요. 그걸 해보니까 대천천 생태계가 너무 다양한 거예요. 물속에 저서생물과 새, 어류들도 풍부해서 ‘하천이 제대로 생태복원

을 하면 생물다양성이 굉장히 많아지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국가

의 생물다양성 전략 이런 것들이 중요한 하나의 분야예요. 그런 분야

에 눈을 뜨면서 공부하고, 부산의 생물다양성 탐사도 이끌고, 북구

청에 북구 생물다양성 탐사를 매년 하자고 제안했죠. 생물다양성 탐 사는 주민참여 방식으로 했어요. 공개 모집해서 행사의 취지를 높이 도록 했는데 그런 3년간의 활동이 빛을 발해서 올해 『대천천 생물도 감』을 만든 거였죠. 도감은 기관과 학교에 다 배포하고 외부에서도 요 청하는 데가 많아요. 북구에는 다른 하천들도 있는데 생물다양성 조사를 다 하려면 어 렵지 않나요? [강] 북구에서 할 수 있는 천은 크게 없어요. 오픈된 데가 별로 없고 해도 소수라서 쉽지 않아요. 하천을 살리려면 전략적으로 생물다양성 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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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해서 언론보도도 하고 관심을 끌어야 행정이나 지자체가 관심

을 가져요. 덕천천은 ‘만덕천 살리기 주민 모임’은 자주 만나서 이야 기도 해주고, 대리천도 마을 주민들이 관심이 있더라고요. 지금쯤 은 거기도 생물다양성 탐사를 할 시기가 아니겠느냐 생각하고 있어 요. 북구청에서 생물다양성 탐사를 하기 전에는 <찾아가는 곤충학습 전> 사업을 했거든요. 곤충 기록을 모은 것도 우리의 기록 활동이라 고 할 수 있어요. <찾아가는 곤충학습전>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강] 처음에는 화명초등학교가 업자하고 연계해서 시작했어요. 업자는 학습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전시해주고 돈을 받는데, 해보니까 한계 가 있으니 민간이 운영하고 행정이 지원하는 형태로 해보자고 해서 대천천네트워크와 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찾아가는 곤충학습전>을

했을 때 북구에 있는 유치원에서 예약을 받았는데 많이 왔어요. 일 주일 동안 800명 넘게 오더라고요. 그게 시초가 되어서 생물다양성 으로 넘어갔죠. 김지연 선생님께서도 『대천천 생물도감』을 만들 때 참여했었지요?

[강] 도감을 만들 때 실무 책임을 맡으셨어요. 여러 선생님이 함께했는데, 김지연 선생님이 회의를 주재하면서 파트별로 영역을 나눴죠.

[김] 식물, 곤충, 어류, 수서곤충 이런 식으로 분야가 있고 약간 전문성이 있어야 하니까 선생님들 역할을 나름대로 나눴어요. 어떤 선생님은 물속에 있는 걸 하고, 어떤 선생님은 식물을 맡고, 그런 식으로.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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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고, 다듬는 시간이 많았고요. 생물다양성 탐사를 할 때 모아둔 사진이 있었지만 실제로 도감을 만들기 위해 찍 은 사진이 아니다 보니까 사진이 미흡한 거예요. 완벽하지는 못하지 만 나름대로 우리가 사진을 찍기도 했어요. 그런 작업을 하느라 시간 이 오래 걸렸어요. 도감을 만들 팀은 어떻게 구성했나요?

[김] 대천천네트워크에서 활동하시는 강사분들로 팀을 꾸린 거예요. 그분 들이 인터넷도 찾고 도감에 있는 내용도 정리했고, 사람들이 재미있 어 할만한 내용을 고민하고 의미를 담으려 했어요.

도감을 만들 때 내용 구상은 어떻게 하셨나요?

[김] 형태는 어떻고, 크기는 얼만지 이런 게 나오는 도감은 재미가 없으니 까 우리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재밌는 도감으로 만들자고 했어요. 왜 이 꽃이 빨간색인지, 나비가 이런 색이어서 화려하고 예쁘구나, 이 렇게 특징적인 것을 알 수 있게 적자고 했어요. 책이 작다 보니 많은 내용을 서술하는 게 아니라 생물들을 고르고 특징을 잘 설명해서 만 들었죠. 도감을 쉽게 만들려고 식물은 식물대로 분류하고, 계절 순서 대로, 꽃피는 순서대로 나누고, 곤충도 종류대로 모으고 그런 식으로 분류했습니다. 생물다양성 탐사가 주로 봄에 한 거라 가을 생물들이 많이 없어서 약간 아쉽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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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가요?

[강] 없는 사진을 다시 찍는 것도 중요했고, 기록을 수정하고 정확하게 하 는 것도 중요했고. 분야를 동정하고 감수하는 것도 중요해서 그러느 라 몇 개월 걸렸죠. 지연 선생님이 책임감 있으셔서 그 역할을 잘 해 내셨어요. [김] 하나 재미난 이야기를 하자면 맨 마지막에 유혈목이라는 뱀이 나와 요. 뱀을 한 마리 찍어 넣어야 하는데 뱀을 구할 데가 없는 거예요. 근 데 사진을 도감에 넣을 때 인터넷에서는 가져오면 안 된다고 하더라 고요. 결국 대표님이 주변에 이야기해서 대천천에서 찍은 유혈목은 아니지만, 사진을 받아서 썼죠. 도감에 있는 모든 사진은 직접 찍은 사진들이라는 게 정말 중요해요. 한 장이라도 인터넷에서 가져왔다고

하면 책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진대요. 그래서 그 뱀 한 마리 사진을 찾

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힘들게 애썼던 거예요.

기록물이 나왔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강] 주변 반응도 좋지만, 네트워크 활동이 뭔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 있죠. 그런 게 좋더라고요. 두께를 맞추기 위해서 섬세하게 모든 걸 넣지는 않았어요. 그 부분은 다음에 문헌 자료로, 아니면 2권으로 보강하게 남겨둔 몫이고요. 참, 초기에 작업한 건데, 도감은 아니지만 『대천천 생태자료집』이라고 있어요. 20년 전에 만든 생태자료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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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작업들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강] 대천천의 생태계를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는 것도 보람되고요. 대천 천네트워크의 활동가들이 함께했지만, 주민자치회 사업으로 마을 의 제로 결정해서 실행했다는 것도 공감대가 확대된 측면이 있어 더 의 미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에 배포했을 때 선생님들의 반응도 좋았어 요. 선생님들이나 전문가들도 놀라더라고요. 한국생태환경기술연구 소 박사 이런 분들도 지역 풀뿌리 단체에서 이렇게까지 만들었냐고 했죠. 부산에 환경단체가 40여 개가 있는데, 기관에서 만든 게 아니 라 지역에서 이렇게 만든 건 처음이라고 봐야죠. 뿌듯했어요.

선생님께 이런 활동들과 기록과정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강] 우리가 한 중요하고 소중한 활동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다음

세대로 갔을 때 잊힌다는 것도 있겠죠. 마을로 봐서도 워낙 급하게 변 화하니까 과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고. 기록은 대천마 을공동체라는 측면에서도, 이 지역의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정리하 고, 관리하고, 보관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김지연 선생님도 도감을 작업하면서 어떤 의미가 있으셨나요? [김] 곤충 이런 건 계절에 따라 다른데 그 책 한 권만 갖고 다니면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거 같아요. 대천천을 찾는 사람들이 “이런 게 대 천천에 있었구나”하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관심의 계기가 되 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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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북구에 어떤 기록들이 만들어지고 남겨져야 한다고 생 각하시나요?

[강] 북구에 12개 동이 있잖아요. 우리처럼 지역 공동체가 활성화된 데는 기록들이 있지만, 마을 기록을 안 하는 지역도 있거든요. 마을의 기 록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금정산 국립공원화 도 지금 추진하는데 북구는 금정산 국립공원에 관심이 없어요. 근데 금정산도 2,800가지의 생물다양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절반이 북구 에 속한 곳이니까 지역의 명산 금정산, 낙동강에 대한 기록과 역사를 잘 정리하고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구포역 뒤에 다리 놓으려고 하 는 이런 것은 하지 말고 화명생태공원에 북구생태환경전시관, 강문 화전시관, 이런 걸 만들어서 ‘생물다양성 도시’, ‘자연 생태 도시’, ‘저 탄소 도시’라는 컨셉을 갖고 가야 도시의 특색을 갖는다고 봐요. 그런 인프라로 남아있는 게 별로 없어요. 기후환경센터도 부산시가 위탁 운영하는데 내용이 주로 기후변화에 가 있고, 어촌박물관 거기도 지 역 주민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런 건 민간 위탁해야 해요. 그런 부분이 아쉽죠. 낙동강 하류 이야기를 공부해보면 구포나루, 감 동진, 동원나루, 이런 거점이 중요했거든요. 그런 것들이 지역 문화재 로 정리되면 좋겠어요. 낙동강 하류 쪽에는 낙동강 에코센터가 있고 수자원공사의 물문화관도 있는데 그것도 약해요. 중류나 상류는 경 북 예천에 강문화전시관이 있거든요. 거기에는 낙동강에 대한 인문 사회 자연 생태가 다 기록으로 남겨져 있어요. 예천군이 거기에 엄청 투자하고 있어서 그쪽은 훌륭해요. 상주에 가면 상주낙동강생태문 화관이 있어요. 거기는 상주의 문화와 낙동강의 생태계를 다 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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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도시아카이브>에 대해 보태고 싶은 의견이 있으실까요?

[강] 이렇게 기록되는 것들이 어떻게 정리되고 후속으로 이어지는지, 기 록물들을 지역 주민들과 어떻게 공유할지 하는 고민도 있었으면 좋 겠어요.

이음북구 기록가 정영수

마을에서 어린이, 청소년들과 놀고 있고, 친구들이 끼워만 준다면

나이가 들어도 더 같이 놀고 싶은 이랍니다.

지역에서 25년 넘게 활동해 온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인데 낙동강과 북구의 생 태, 북구의 콘텐츠에 대한 강호열 님의 생각을 알 수 있었고, 화명동의 어촌박

물관 활용에 아쉬움을 표현한 대목은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낙동강 문화를

잘 살려서 북구의 생태문화 콘텐츠가 풍성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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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정보를 줄 수 있고, 또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구민진구민서 [진] 참빛학교 학생 [서] 김해 금곡고등학교 학생 ※ 본문에는 [진], [서]로 표기했습니다.

#마을기록 #청소년기록 #기록활동

구민진 학생은 현재 부산 북구 화명동에

위치한 대안학교인 부산참빛학교 학생이

며 동생인 구민서 학생은 부산참빛학교를

다니다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학생이다.

구민서 학생은 참빛학교에서 ‘비건’, ‘성교

육’, ‘진로’를 주제로 주민들과 부모님을 인

터뷰하고, 물음표라는 잡지를 만드는 작업

을 하였다. 언니인 구민진 학생은 초등부터

현재까지 부산참빛학교에서 본인이 받고

싶은 교육을 받으며, 학교생활에 만족하면

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구민진 학생은

2022년 1학기, 마을의 다양한 직업을 알아

보는 과정인 인턴십 프로그램에서 마을 사

업장을 찾아가 여러 사업주들을 인터뷰하 고 결과물로 『별하(상)』이라는 책자를 만 들었다. 두 학생 모두 처음엔 본인들의 의 지와 상관없이 시작했지만, 지나고 보니 많 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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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진] 안녕하세요. 참빛학교에 다니고 있는 19살 구민진이라고 합니다. 1학 기 때 저희 반에서 인턴십 기록물을 남기게 되었는데 그걸로 인터뷰 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서] 안녕하세요. 저는 김해 금곡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1학년 구민서이고요. 작년에 1학기, 2학기에 나눠서 물음표라는 두 개의 잡 지를 만들고 많은 사람을 인터뷰했습니다.

오늘 구술자로서 인터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은 어땠 나요?

[진] 좀 걱정이 됐던 것 같아요. 기록물을 만들었으니까 연관이 있기는 한 데 ‘내가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내용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 어요.

[서] 저도 걱정이 많이 됐었는데 저는 올해 일도 아니다 보니까 ‘그때 일 을 잘 기억해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이 들었어요.

각자 학교 소개를 해주시고, 구민서 학생은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된 동기나 생각들도 말씀해주세요. [진] 참빛학교는 미인가 대안학교입니다. 일반 학교와는 다르게 시험공부 를 많이 안 하고, 선택 수업이라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들을 수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영어랑 글쓰기, 사진 수업 같은 다양한 수 업을 듣고 있어요. 또 들살이라고 1년에 두 번 2주간 농사하러 가기 도 하고 도보하러 가기도 하는 몸으로 하는 수업도 있고요. 제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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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학교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드는 생각일 수도 있는데 좀 편한 느낌 이 많이 드는 것 같아요. [서] 저도 참빛학교에서 6년 정도 다녔으니까 편해서 그게 좋았던 것 같아 요. 고등학교 생활이 마지막 학생 생활인데 ‘내가 여기서 편하게 단조 롭게 생활하는 것보다는 더 다양한 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에 확신을 줬던 게 작년에 진로를 주제로 한 물음표 인터뷰였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양한 경 험을 해야겠다. 새로운 환경으로 가야겠다.’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김해금곡고등학교도 대안학교라고 들었어요. 공립형 대안학교는

일반 교육 과정을 그대로 하는 건가요?

[서] 그대로는 아니지만, 공교육이다 보니까 거기서 요구하는 것들이 있기 는 해요. 엄청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학교는 아니고 최대한 학생들에 게 어떠한 철학을 갖고 일반 학교에서는 제공해 주지 않는 걸 제공해 주려고 해요. 다른 학교로 진학한 후 생각했던 다양한 경험을 느끼고 있나요?

[서] 제가 다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나갔던 건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

었거든요. 중학교 때까지는 한 번도 일반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궁 금한 것도 있었어요. 공교육이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거를 겪 어보고 싶어서 갔던 거였거든요. 그리고 공립이다 보니까 지원이 많 잖아요. 그런 점에서도 ‘내가 대한민국의 학생으로서 조금 더 많은 걸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겠구나.’라고 봤었고 가보니까 확실히 많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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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받는 동시에 결과물로 내서 증명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 힘듦을 느끼면서도 ‘내가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구나.’를 느끼는 것 같아요. 『물음표』와 『별하』라는 책을 만들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서] 만들게 됐던 계기는 아무래도 선생님이 하자고 하셔서 그랬어요. 삶 교과 시간에 수업으로 진행이 됐었던 거거든요. 그때 담임이셨던 선 생님이 올해 삶교과 프로젝트는 인터뷰를 할 거라고 하셔서 그냥 했 어요. 그때는 자의로 했던 건 아니었어요. [진] 학교에서 들살이라는 걸 한다고 했잖아요. 원래 들살이가 끝나고 나 면 일정, 일지, 식단, 사진 이런 것들을 의궤라는 기록물로 항상 만들 었었거든요. 들살이 대신해서 한 게 인턴십이다 보니까 그냥 자연스 럽게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근데 쌤 관여 없이 저희끼리 만들었는데, 인턴십이 저희 안에서만 진행한 것이 아니고 마을 사람의 다양한 이 야기를 넣은 책이다 보니까 기록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

죠. 또 인턴십이 다양한 작업장을 탐방하면서 진행된 게 저희가 처음 이다 보니까 후배들한테 참고 자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

요. 또 저희를 생각했을 때 오래 기억할 수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기 록을 남기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기록 활동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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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까요? [진]
힘들었던 거나 안 좋은 점은 어떤 것이 있었
한 번에 끝났던 작업이 아니다 보니까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다는 거. 그리고 아직도 완성이 안 됐다는 거? 과정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리

는 게 힘든 점이긴 하지만 그 외에 정리하거나 기록하는 데에서 힘든

점은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서] 인터뷰 대상을 저희가 고른 게 아니라 다 선생님이 골라주시니까 그

분야에 대해서 딱히 관심이 없고 그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 진행 하기가 좀 어렵더라고요. 1학기 때 주제가 ‘비건’이었는데 비건에 대

해서도 잘 모르니까 어떻게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질문 을 준비하는 게 어려웠던 것 같아요.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여러 가지 일하면서 좋았던 점은 뭐가 있 을까요?

[진] 저는 엄청 다양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걸 다 녹취 풀고 정리하 고 편집하는 게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그게 제일 편했어요. 그리고 다양한 작업장에 가서 다양한 사람들 만나면서 이야기만 듣고 끝났

다면 마음에 많이 와닿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근데 저희가 녹취를 하

고 그걸 정리하고 편집도 하고 그런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의도치 않 게 여러 번 상기가 되고 더 오래 기억이 되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게 좋았던 점입니다. [서] 두 개의 잡지로 내서 주제가 다른데 저는 1학기 때는 느낀 게 많이 없 었던 것 같아요. 인터뷰하면서 제가 무언가를 찾기보다는 그냥 시키 니까 한다는 느낌이었어요. 2학기가 되면서 애들이 진로에 대해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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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많이 하는 걸 선생님도 느끼시니까 진로로 주제를 잡아주셔서 인 터뷰했는데 거기서는 얻는 게 많았던 것 같아요. 저희가 고민하고 있 던 걸 이미 겪어온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는 거잖아요. 1학기 때보다

질문할 거리도 더 많고 말씀하셨을 때 더 와닿는 게 많았던 것 같아

요. 제가 인터뷰하면서 삶의 방향성을 많이 느꼈어요. 첫 번째 인터 뷰 대상이셨던 저희 참빛학교 교장 선생님 인터뷰를 하면서 깊게 와

닿았던 게 “진로는 직업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인생의 길을 뜻하는 거 다. 진로를 생각하면 직업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갈 인생 의 길을 생각을 해야 된다.”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게 되게 와 닿았 어요. 머리를 방 맞은 느낌이었고 인터뷰하면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거기서 또 저만의 의미를 갖고 무언가를 얻어내는 거 그게 좋아 요. 생각을 정리하고 제가 또 연결해나가서 제 주관이 될 수 있는 거. 그게 좋았어요.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이나 기분 좋았던 일들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서] 선생님의 의지로 진행이 된 건 맞지만 그래도 여태껏 해왔던 인터뷰 에서는 제일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개개인의 스토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영화 같고, 드라마틱하고, 신기하구나.’라는 생각을 했 던 것 같아요. [진] 『별하』는 마을에서만 해도 10곳 정도를 방문했고, 서울이랑 강원도 까지 가서 또래 애들, 어른들까지 다양한 나이대와 다양한 분야의 사 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너무 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졸업하고 나서 당장 뭘 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부담이나 불안감을 많이 안 느껴도 된다.’라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277
화명

서울에는 어떤 곳에 인터뷰하러 간 거죠?

[진] <니트컴퍼니>라고 백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만든 커뮤니티 같은 곳이

에요. 자기가 해내고 싶은 걸 정해서 서로 꾸준히 해나가는 그런 곳이

었어요. 또 <유스보이스>라고 청소년들이 하고 싶은 프로젝트들을 지 원도 해주면서 성장시키는 곳이었고 강원도는 홍천 밝은누리공동체

라고 화명동이랑 비슷하게 마을 공동체가 잘 되어 있거든요. 거기서 도 맨발동무도서관이랑 대천마을학교처럼 마을의 작업장들이 있어 요. 또 삼일학림이라고 하는 학교가 있거든요. 거기는 저희 또래다 보

니까 그냥 수다 떨고 얘기하면서 보냈어요.

기록의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진] 단순히 추억이나 기억을 남기는 것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한테 도움

을 줄 수 있고, 정보가 담겨 있을 수도 있고, 나중에 이걸 참고해서 이

인터뷰처럼 또 다른 걸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런 점에서 기록은 중

것 같아요.

저도 기록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정보를 주는 게

27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요한
[서]
인터뷰의 중요 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기록으로 인해서 그 분야를 궁금해하 는 사람이나 인터뷰 대상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기록 은 꼭 있어야 한다!’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게 충분히 좋은 영향 을 주고 있다고는 생각해요.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게 있나요? [진] 저는 저희가 인턴십 한 것처럼 다양한 작업장에 가서 진로 질문을 많

이 만드는 게 되게 좋다고 생각하는 게 저희가 학생들이다 보니까 진

로 고민이 많잖아요. 또 어른 분들이 그런 걸 학생들이 했을 때 인터

뷰에 더 친절하게 응해주시고 많이 말씀해주시고 그런 게 있는 것 같

아서 더 좋은 내용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또래 친구들이 기록물을 남기기 위해 작업을 할 때 도움이 될 만 한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진] 기록이라는 것 자체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자기가 정한 콘셉트나 방향을 생각하고 그 거에 맞는 비슷한 자료들을 많이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희 는 인터뷰니까 처음에 잡지처럼 만들겠다고 해서 인디자인이라는 프 로그램을 썼거든요. 근데 유튜브로 기본적인 것만 배우고 다른 기능

은 자세히 배우지 않았다 보니까 제대로 활용을 못 하고 완성하고 나서

도 완전히 ‘노가다’로 뒤집어야 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래서 써야 하

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계획을 잘 세워서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저처럼 앉아서 편집하고 기록하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은 성 향에 잘 맞을 수도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요. [서] 저도 자신이 궁금한 주제나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궁금한 게 있고 그걸 찾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잘 진 행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결과물로 잘 내는 건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만 있으면 잘 될 것 같 고, 진행할 때 인터뷰를 경험해본 사람이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 이 있으면 더 좋겠죠.

279 화명

마지막으로 오늘 인터뷰한 느낌을 한마디씩 해주세요.

[진] 인턴십 기록물을 만들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했던 것 같은데 인터뷰하 면서 질문을 생각하고 나름대로 기록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 것 같아 서 좋았어요. 기록물을 만들 만한 내용이 담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좋 은 시간이었어요. [서] 저도 그때 당시에 인터뷰하던 때를 다시 상기시켜주고 인터뷰에 대한 좋은 점들이나 그런 걸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서 좋아요.

28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이음북구 기록가 한지연 북구 다행복 별난마을에서 모든 사람과 소통하며 멋과 풍류를 즐기는 별난선생입니다.

학교 교육과정으로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활동이 아니라서 이 학생들을 북구 의 기록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본인이 생각하는 참 행복의 길을

찾아 많은 생각과 고민하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281 화명
다양성이 존중되는 기록으로 공동체성이 건강하게 잘 유지되면 좋겠어요
김부련 맨발동무도서관 활동가

#마을기록 #공동체기록 #기록활동

김부련 님은 맨발동무도서관에서 활동가

로 지내면서 마을 어른들을 새롭게 만나

고, 마을의 변화와 어른들의 삶을 기록하

는 작업을 통해 ‘기록’의 소중함을 알게 된

다. ‘왜 도서관이 기록을 해야 할까?’ 혹은 ‘우리 도서관이 해야 하는 기록은 어떤 것

이 되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동료들과 함

께 씨름하면서 길을 찾아갔다. 그녀에게 기

록, 아카이브는 무엇보다 ‘건강한 공동체’

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소수의 활동가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

이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하면서 만들어가

는 과정이어야 의미가 산다. 또한 건강한 공동체성은 다양성의 존중, 민감한 감수성 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할 때 만들어지 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문턱이 낮은 아카이브. 그녀 가 꿈꾸고 고민하는 아카이브의 모습이다.

28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선생님의 고향은 어디시고 북구에 사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어요. 아주 어린 시절에는 산복도로에서 지냈어요. 그 후 울산으로 이사 가서 지내다가 9살 때는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진암부락이라는 바위가 많은 동네로 이사 갔어요. 친정이 아직도 거기에 있어요. 고등학교 3년은 진주에서 보내고 대학교 1학년이 되었던 21살 때 부산에 다시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공동육아를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그때 당시에 공동육아가 약간 사회적 이슈였어요. 그래서 공동 육아가 어 떤 곳인지 찾아보게 된 거죠. 제가 시골 생활을 하기도 했잖아요. 아이와 밖으로 놀러도 나가고 자연과 벗하면서 지내는 프리한 교육 철학을 가진

어린이집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저희 아이가 5살 때 ‘북구공동육아사회

적협동조합’과 ‘쿵쿵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어서 면담을 받으러 왔었어요. 근데 자리가 없어서 포기하고 돌아갔거든요. 그러다 화명동 아파트에 입

주하게 되어서 남편이 이사 가기 전에 공동육아 홈페이지에 “그때 면담 받 았던 누구누구네인데 저희가 화명동으로 이사 가게 되었습니다.”하고 소 식을 올려놓았었어요. 그리고 8월 3일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인데 “공동 육아의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 반에 여아 한 명을 더 받기로 했다.”라 며 저희에게 전화하신 거예요. 기가 막힌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그다음 날 다시 면담 받으러 가서 며칠 있다가 등원하게 됐어요. 그렇게 공동육아 생 활을 시작하게 되었죠.

285 화명

맨발동무도서관에서 활동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마을의 몇 분이 도서관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얘기도 듣다가 관심을 가졌 어요. 그렇게 ‘어린이도서관 맨발동무’에 자원 활동도 하고 이용자로도 이 용을 하면서 6년 정도 지내게 됐었어요. 저는 책 문화 공연하는 찰방찰방 예술단원과 도서관에 홍보를 맡아서 하는 자원활동가였어요. 그렇게 지내 다가 ‘어린이집을 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때 보육교사 공부를 하고 당감동에 있는 ‘캥마쿵쿵어린이집’이라는 새로운 공동육아어린이집

에 초대 교사로 일했었거든요.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서 가방을 쌓아서

어린이집 운영을 해야겠다.’ 계획을 그때 막 구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 에 제가 자원 활동을 하고 있던 맨발동무도서관에서 반상근제로 같이 활

동을 해보자는 제안이 온 거예요. 어린이집 운영을 해야겠다 계획하고 있 던 중이었는데도 제안을 듣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알겠어요, 좋아요.”하고

바로 출근했어요. 그래서 자원활동가에서 도서관 상근 활동가 운영위원이

된 거죠. 현재까지 도서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중입니다. 그때 어린이 집 했으면 돈 많이 벌었을 거라고 주변에서 얘기를 많이 해주세요. (웃음) 맨발동무도서관 같은 경우에는 책을 통해서 사람들을 이어주기도 하는데 활동가를 하면서

28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저는 사람들이
손쉽게
도서관은 책을 읽고, 반납하고 일들이 시작이긴 하지만, 정말 많 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들과 많은 일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활동가가 되고 난 뒤에 알게 됐던 것 같아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 만남이 굉 장히 구체적이고 깊게 만나는 거죠.
느낀 의미는 무엇인가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도구가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 었어요.

맨발동무도서관이 기록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10년도에 그때 관장님이 ‘<생활문화 공동체 만들기 시범사업>이라는 것을 진행을 해야 된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제 파트가 문화기획이었거 든요. 저희가 외부 사업들을 간간이 받아서 운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건 또 무슨 사업일까?’ 생각하면서 당연히 결합했죠. 근데 알고 봤더니 구 술생애사 사업이었던 거죠. 대천마을에 윤씨와 정씨 집성촌 마을이 있었 어요. 윤씨, 정씨 집안의 딸과 며느리만 갈 수 있는 마을회관이 <대천마 을 경로당>이라고 따로 있어요. 그 마을경로당에 오시는 할머니들을 만나 서 구술생애사를 하는 프로젝트였어요. 관장님이 프로젝트 계획을 세우 고 제가 보조로 따라다니게 된 거죠. 거의 1년 다녔던 것 같아요. 할머니 들하고 차를 마시고, 점심도 같이 먹고 놀다가 화투도 치고요. 구술생애 사 인터뷰를 위해서 질문지도 만들어보고, 그 질문으로 인터뷰하기 위해

서 할머니들 병원도 따라가 보고, 회식 자리도 가보고, 이러면서 긴밀하 게 어르신들을 만났어요. 근데 좋더라고요. 할머니들이 마을에서 사셨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밌기도 했고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 얘기가 재미있 구나. 할머니들의 이야기지만 마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네.’ 그 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며 어떤 보람을 느끼셨나요? 저처럼 공동육아나 신도시가 생기면서 외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많았죠. 저희도 도서관 활동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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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오랫동안 사셨던 토착 원주민들은 ‘외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신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여기 어르신 들을 1년 가까이 만나고 자료집을 만들고 출판기념회도 했어요. 마을 축

제 때 어르신들 모셔서 얘기 듣는 시간도 보냈죠. 그다음부터 일하기가 되 게 쉬워졌어요. 즉 라포 형성이 된 거죠. ‘도서관 새댁’이라고 부르셨어요. (웃음) 그분들은 지금 거의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한 번씩 가서 “도서관 새댁이에요.” 하면 알아주시거든요. 마을에 도서관이 뿌리를 내리는 일에 신뢰를 하게 되고, 마을에서 뭘 하려고 하는 젊은 사람들이다, 라는 정도 의 인식을 가지면서 원주민들과 많은 연결이 되었죠. 만나서 얘기를 나누 고 듣고 했을 뿐인데 사실 일대일로 만난 사람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저희 가 통으로 같이 알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아, 구술생애사라는 것이 그런

의미가 있구나!’ 생각했죠.

이후에 맨발동무도서관에서 또 어떤 기록 작업을 하셨나요?

2010년에 도서관이 이사하면서 저희가 영상 기록 작업을 했거든요. 도서 관 이사 장면을 기록하면서도 도서관의 이사에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마

음이 있는지 촘촘하게 듣는 경험을 했어요. 이사를 오고 난 뒤에는 임숙 자 관장님이 관심 있어 하시던 구술생애사를 하셨고. 동원복지관이랑 화 정복지관의 사업을 받아서 거기에 계신 어르신들 혹은 중년 여성들을 만 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그림책이나 이런 걸로 구술생애사를 보여주는 작 업을 진행했었습니다. 도서관은 남항시장 이야기라든지 마을 여자들의 이야기나 이런 것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했고. 저는 그것들이 기록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들을 했었어요. 그렇게

288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작업을 하 다가 기록이라는 거, 아카이브가 뭔지를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저희는 ‘기록을 꼭 해야지’ 이래서 기록이 이루어졌다기보다 도서관의 운영상 구 술생애사나 이런 기록 활동들이 자연스럽게
접목이 되었던 형태였어요.

『대천마을, 사진을 꺼내 들다』와 『오늘은 왠지』에 대해 소개해 주 세요. 서울에 가족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천 개의 마을, 천 개의 기록>이라는 마을 공동체 기록 전시를 보게 됐어요. 그때는 ‘이거 되게 재밌겠다.’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이야기를 듣는, 되게 문턱 낮은 형태의 프로젝트라고 생 각했어요. 자세히 보고 와서 프로젝트로 만든 거죠. 그게 『대천마을, 사진 을 꺼내 들다』라는 사진 아카이브 작업이었어요. 돌이켜 보면 그런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 몰랐기 때문에 했던 것 같아요. ‘마을의 과거 이야기, 역사 와 현재, 우리의 생활, 미래의 이야기까지 담겠다.’ ‘집집마다 있는 사진을 꺼내서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하겠다.’가 프로젝트의 주제였거든요. 사람 들이 이야기를 꺼내놓는데 쉽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해서 마을예술

가들의 문화예술 도구를 활용한 <내 안의 역사 쓰기>라는 기록 작업을 2 년간 진행했어요. 지역에 있는 문화예술가, 공방을 운영하시는 분들과 지 역 주민이 만나서 문화, 예술, 교육 활동을 통해 이야기를 꺼내놓게 하는 게 주제였거든요. 2년이 끝나고 그걸 『오늘은 왠지』라는 책으로 발행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3년 하고 나니까 재미있기도 하고 의미도 있는데, 진짜 많이 힘들더라고요. 엄청 장기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품도 너무 많이 들고 해서 그 뒤 2년인가 쉬었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2018년도에 마을 재개발 기록 작업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는 중입니다. 마을의 재개발 기록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2018년에 말로만 듣던 마을의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이 되었어요. 철 거의 흔적들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곧 마을이 사라질 텐데 누가, 어느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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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가 이것을 기록하고 있나 살펴봤어요. 근데 그때 당시에 없었어요. 그래

서 도서관 내부적에서 ‘어떻게 할 거냐?’, ‘기록할 거냐, 말 거냐?’ 이 질문

을 한 거죠.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도서관이 또 손을 들게 된 거예요. 도서 관 활동의 생태 상 사업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이 일을 전담할 인력과 여력이 나지 않거든요. 예산이 필요하니까 부산시 마을 공동체 사업에 공 모를 했는데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지?”하고 있던 찰나에 화명

2동 주민센터에서 “<우리 동네 행복마을 만들기> 주민 공동체 공모 사업 이 있는데, 혹시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세요?”하고 찾아오셨어요. 저희가 덥석 “준비되어 있는 게 있습니다.”하고 그때 썼던 기획서를 꺼내드렸어요. 우리 마을에 일어나고 있는 재개발을 기록하겠다고 하니까 주민센터에서

좋아하셨죠. 그때 민간 협치 사업으로 2018년, 2019년 2년에 걸쳐서 마 을 재개발 기록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기록과 관련된 활동들, 사업들을 해오셨는데 그중에서 제일 기억 이 남는 사업과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당연히 2013년 『대천마을, 사진을 꺼내 들다』라는 사진 아카이브였고요. 근데 당시에 이 사업을 담당하시던 분이 어디로 가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쩔 수 없이 기록 공부를 하면서 맡게 되었는데, 너무 잘했다는 생 각이 들어요. 『대천마을, 사진을 꺼내 들다』 사업을 통해서 마을에 정말 깊숙이 들어간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마을에 오랫동안 살았던 분들 거의 다 만났거든요. 연령대가 40대부터 90대까지 다 계셨어요. 만났던 분 중 에 인상 깊었던 건 정우상 어르신이에요. 이 마을은 마을회가 아직도 남 아있는 곳이거든요. 문중 사람들이 마을 일을 이야기하고 논의하는 ‘대

29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천마을회’라고 있는데 마을회 인터뷰를 가게 된 거예요. 그때 정우상 어르 신이 가운데 앉아 계셨어요. 마치 전설 속의 인물처럼 느껴졌던 분이었거 든요. 우리 마을의 굉장한 유학자이시고, 마을에서 엄청 중요한 분이라는 말을 이야기만 듣다가 직접 만나 뵙게 된 거예요. 인터뷰하는 내내 ‘마을 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각별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마을 을 이해하고 마을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통 찰력 있고 각별했어요. 마치 마을 새내기가 마을의 어른한테 마을 이야기 를 배우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될까? 저는 그 어르신을 통해서 마을에 대한 애정이 어떤 방향이어야 되는지, 마을 일은 어떤 방향으로 의논 해야 되는 건지, 이런 것들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대천마을회 어르신들이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셨나요?

어르신들을 만날 때, 제가 누구인지, 우리 도서관 활동가들이 누구인지, 이 일이 어떤 일인지를 그 자리에서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그분들이 저희 를 많이 인정해 주셨던 거였어요. 그 뒤에 섭외하면 그냥 척척척이었죠. 실 제로 책을 발간하고 전시회를 할 때 그분들이 거의 다 오셔서 응원해 주시 고 “이 마을에 대한 자긍심과 소속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라는 얘기를 해주고 가셨어요. 굉장히 힘들었지만,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 작 업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역사 골든벨> 프로젝트는 무엇인지 소개해 주세요. 이런 기록 작업을 하면 어떻게 활용할지가 늘 질문이거든요. “학교에서 쓰 면 좋겠는데?” 이런 얘기들을 했었는데 ‘골든벨 같은 걸 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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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어요. 그래서 화명2동만 한 게 아니라 북구 전체를 대상으로 <역사

골든벨>을 기획했어요. 그때 주민센터 대강당에 엄청 많이 오셨는데 골 든벨은 못 올리고 1등만 나왔거든요. 엄마랑 딸이 참여한 팀이 1등 하셨 어요. 공부 진짜 열심히 하셨을 겁니다. 올해는 어떤 기록 활동을 진행했나요? 맨발동무도서관이 화명2동 행정복지센터와 업무 협약 체결을 맺고 화명 기록관 ‘마을을 담는 집’ 운영을 맡고 있는데, 올해 <마을과 이름>이라는 기록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에요. 마을 주민들이 ‘이야기 수집가’라는 이 름으로 마을의 물건에 담긴 이야기들을 수집하는 프로젝트인데, 20대 초 반부터 50대 후반의 주민들과 함께하고 있어요. 시니어분들과 <텃밭그림

일기>라는 것으로 텃밭의 성장 일기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도 하고 있어요. 아카이브에 대한 공부를 하기도 했나요?

2014년 그때 저희가 아카이브와 기록이 무엇인지를 다시 처음부터 공부 했었던 해였어요. 전문가를 찾아가서 공부하는 기회도 생기게 되었고, 실 제로 기록 작업을 하면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었죠. 공부하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진짜 어려운 일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맨 발동무도서관이 하고 싶은 기록 활동은 무엇인가?’를 질문했었던 해이기 도 해요. 저희가 3년 동안 지역 주민과 활동가들이 함께 만들어갔던

29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기록 활동이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일이 힘들었던 거죠. 그러면서 ‘맨발동무도 서관에서는 기록이라는 것을 꼭 하고 싶은가? 왜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 을 얻게 된 해가 이 3년 뒤였어요. 기록이 뭔지, 아카이브가 뭔지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고민의 시간을 통해 도서관이 해야 하는 기록에 대해 정리된 것들이 있을까요? 2년 동안 마을 재개발을 기록하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된 것 같아 요. ‘도서관은 기록하는 곳이다.’라고 합의하게 되었고요. ‘어떤 기록을 하고 싶은가?’라고 했을 때, 도서관이 가지고 있는 본래 목적이 스스로의 성장을 위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잖아요. 도서관 기록 활동도 공동체성을 건 강하게 잘 지키고 회복하는 일이면 좋겠다고 해서 ‘우리의 기록은 커뮤니티 아카이브 형태면 좋겠다.’라고 정리하게 되었죠. 그래서 그 이후의 기록 활 동은 주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지고, 저희가 판을 열고 기록 활동한 것들을 기록집으로 엮어내는 일을 하는 거죠. ‘어떤 도구와 형태이면 좋을까?’라고

했을 때 그거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도구들을 쓰고 있는 거죠. 글쓰기도 해보고, 시니어들과 기록 작업할 때는 그림일기라는 방식도 취해보고. 중장년들과도 그림을 해보고, 글쓰기도 해보고. 지금은 ‘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누구나 마을의 이야기, 개인의 이야기를 기록하면 좋 겠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어떻게 하면 기록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아이들이 기록할 수 있는 키트를 예술가 들과 협업해서 만들어본다든지, 그런 사례들을 수집하는 중이에요. 올해 는 실제로 화명초등학교 친구들하고 기록을 통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수 업 교안을 마련해서 진행해보기로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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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문화도시의 <도시아카이브>의 방향에 대해서 코멘트해 주실 게 있다면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요?

북구이음도시 <도시아카이브>에서 제가 가지고 있는 목적과 가치, 기대하 는 바는 이 ‘공동체성이 건강하게 잘 유지되면 좋겠다.’라는 지점이거든요. 활동하면서 공동체성이 건강해지려고 하면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다양성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굉장히 민감한 감수성 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번에 <시간과 공간 연구소> 교육이

있었잖아요. 그거 듣다가 제가 적절한 단어를 알게 됐어요. 많은 시민이 기 록을 다양하게 하면 “저항성을 가진다.”라고 표현하셨어요. ‘저거다.’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생각했던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되고, 민감한 감수성이 있을 때만 가능한데, ‘그건 어떻게 마련되지?’라고

했을 땐 그건 결국 ‘저항성이다.’라는 생각을 그날 정리했거든요. 다양한 사 람들의 이야기를 만나고, 기록하고, 스스로 하는 활동이나 이야기를 기록 해보면 다양성이 당연히 존중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정답이 없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공동체 활동을 할 때는 방법이 천 가지, 만 가지 있을 수밖 에 없다는 게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겨질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게 저 는 저항성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존중되는, 귀 기울여지는 것은 기록만 한 도구가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이 얘기들이 누군 가에게 전달되듯이, 우리 마을에 일어나는 누군가의 활동들이 ‘그런 이유 로, 그런 가치로 이루어지고 있구나.’라는 것들이 잘 기록으로 남겨서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면 ‘어, 그렇지 않구나, 다양하구나. 다 의미 있는 일이구 나.’라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꺼내놓고 수집하는 것들이 문턱이 낮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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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뭘까?’를 고민해 보는 장이 <도시아카이브>에서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이음북구 기록가 이광욱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활동과 흔적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맨발동무도서관의 기록 활동 과정에 대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부족하나마 내가 살아가는 마을의 활동에 보탬이 된 듯해 보 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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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이야기가 의미 있듯이 아이들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박혜수 부산북구공동육아사회적협동조합 징검다리놓는아이들 초등방과후 교사

#공동체기록 #아이들기록 #기록기획

징검다리놓는아이들(이하 징검아)은 재개

발되는 마을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이야

기 모음 책 『시간을 찍는 아이들』, 마을의

공간 12곳을 그리고, 이야기를 담아 마을

펀드로 제작한 마을 달력 『하늘에서 달력

이 떨어진다면』을 만들었고, 마을에서 들

을 수 있는 소리를 녹음하고 발표하는 <마

을이 그랬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박혜

수 님은 지금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

로서 아이들의 시선으로, 아이들의 이야기

가 더 많이 기록되면 좋겠다고 했다. 아카

이브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필

요한 것처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아

이들의 이야기도 꼭 포함되면 좋겠다고 이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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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소개를 좀 부탁드립니다. 저는 부산북구공동육아사회적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초등방과후 징검 다리놓는아이들에서 올해 17년째 교사 생활하고 있는 박혜수고요. 이 동 네에서는 사실 제 이름보다 ‘동글이’가 훨씬 편안하고 익숙해요. 동글이 가 저한테는 정체성 같은 느낌이에요. 특성상 교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 기는 하지만, 저희는 아이들과 만나고 같이 살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부산북구공동육아사회적협동조합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부산 북구 지역의 마을 공동체면서 동시에 함께 아이를 기르는 단체예요. 함께 모여서 아이들을 기르고자 하는 부모님들이 돈도, 일도, 마음도, 관 계도 n분의 1을 해서 내는 곳이에요. 이 운영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 고 있어서 그렇게 긴 이름이 다 소중한 거죠. 저는 거기에 고용되어서 교 사로 일하고 있지만, 동시에 협동조합의 조합원이기도 하죠. 이번 개원 잔 치가 23년 개원 잔치래요. 북구에서 산 기간과 징검아에서 일한 기간이 같나요? 아니요. 저는 결혼하고부터 북구에서 살았어요. 물론 저희 어머니가 북 구에 사셨고 제 고향이 사상구라 북구에서 늘 놀기는 했지만, 저의 청년 기는 남구에 있어요. 그래서 남구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사람들은 이해를 잘 못 하셨죠. 일과 나의 삶이 분리가 아직 잘 안 되는데, 마을에 들어와 살면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 그러다 이 일에 대해서 확신도 생기고 오래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 지금 마을에 들어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결혼하고부터 들어와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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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아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세요?

징검아는 아이들이 학교를 갔다 온 다음 시간, 그러니까 방과 후 시간에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배우기도 하고 놀기도 해요. 저는 학교를 다 녀온 다음에 아이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교사들은 아이들 이 어떤 걸 하고 살아가는지, 이 아이들한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지에 대해서 고민하죠. 또 중요한 건 아이들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른으로서 어른들의 공동체와 아이들의 공동체를 연결 해 주는 역할을 하죠. 아이들에 대해서, 아이들의 공동체가 돌아가는 것 에 대해서 관찰하고 그것을 또 부모들과 함께 고민하고 때로는 영향을 미

치고요. 저의 역할은 어른들의 공동체와 아이들의 공동체 그 사이에 있 어요. 예전에 졸업한 애가 저한테 중간 어른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말이 방과 후 교사인 제 위치를 잘 알려주는 말 같았어요. 중간 어른으로

서 일하고 있어요. 아이들과 기록했던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징검아 에는 어떤 기록이 있나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게 아이들의 기록 활동이기는 한데요. 그게 아니더라 도 저희는 아이들 기록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단체예요. 저희가 가 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아카이브는 저희 아이들의 사진이죠. 23년 치 아 이들의 사진은 사실 대천마을에서 살아온 아이들의 23년간의 기록이기 도 하죠.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교사들의 날적이 기록들이 사실은 제가 제일 애정하는 기록이에요. 날적이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교사의 스케치 글이거든요. 그 스케치 글을 갖고 있던 어떤 어머니가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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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하면서 4년 치를 저한테 제본해주셨어요. 여기는 기록이 늘 소중한 곳 이에요. 우리가 했던 교육이 증명되려면 어떤 형식으로든 기록으로 남아 야지만 이 아이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보이거든요. 그래서 교사들이 해 온 기록들이 상당히 많죠. 그렇군요. 아이들의 기록 활동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우선 『시 간을 찍는 아이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그때 양달마을이 재개발되는 상황이었어요. 재개발의 한가운데에 징검 아 건물이 있었거든요. 양달마을을 지켜주던 큰 당산나무랑 마주 보고 있었어요. 아이들도 아쉬웠지만, 저한테도 거기가 매일같이 있었던 공간 이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그래서 담아놔야겠다는 생 각이 좀 있었죠. 사실 중요한 건 아이들이었어요. 갑자기 마을에 있는 건 물들이 부서지고 철거라는 글자가 붙고 그랬을 때 충격이 좀 있겠다. 어떻 게 하면 아이들이 부드럽게 이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근데 저는 마을이 없어진다고 생각해서 너무 아쉬웠는데, 애들은 새로운 마을 로 바뀐다고 생각한 거죠. 애들한테서 많이 배웠어요. 애들의 동의를 받 아 작업하고 책으로 만들고 나니까 이게 마을에 굉장히 중요한 기록이 되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만들면서 제가 마을 활동가로 좀 더 자리 매김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저한테도 의미가 되게 커요. 그때 3 학년, 4학년 한 20명의 친구하고 3학년 교사, 4학년 교사 2명하고 대천마 을을 1년 동안 기록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동시에 같이 진행 했던 게 우리는 변화에 초점을 맞췄으니까 1년간의 변화를 담았으면 좋겠 다고 해서 한 장소를 꾸준히 찍기도 했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마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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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어떤 개념인가를 보여주는 글을 간단하게 담았죠. 저한테 되게 보물 같

은 책이에요. 저 책을 만들면서 많은 오해를 받았던 게 교사 손길이 많이 들어가 있는 줄 아세요. 근데 교사가 해줘서 퀄리티가 좋아진 게 아니라, 애들이 1,000장을 찍고, 그중에 10장을 건져서 퀄리티가 좋은 거예요. 달력도 만드셨잖아요. 행복(징검아 방과후교사)이 했던 달력도 상당히 중요한 기록물인데, 달 력은 이야기랑 그림을 담아내는 작업으로서의 의미도 상당히 커요. 펀드 라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달력을 찍고 마을 사람들한테 배포했다는 게 되 게 큰 의미인 것 같거든요. 달력이라는 매개를 이용하다 보니까 책이나 이 런 것보다 더 접근하기가 쉬웠고, 아이들의 기록물에 대해서 훨씬 더 편

안하게 접근하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저희한테는 중요한 시도라고 생각해요. 소리 기록은 어떻게 작업했나요?

원래는 마을에 있는 소리를 채집해서 소리 지도를 만들고 싶었어요. 사실 저희는 교육 기관이지 아카이브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은 아니잖아요. 달 력이나 저 책도, 이 소리 전시도 아이들한테 필요한 것들이 있어서 시작 한 거거든요. 소리 기록을 할 때는 아이들이 깊이 있는 몰입과 장기적인 작업을 하기에는 힘들었어요. 근데 이야기는 상당히 잘 쓰는 아이들이었 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조금 편안하게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게 소리를 생각했죠. 소리는 사실 되게 아껴놓은 아이템이었어요. 소리라는 게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니까 애들하고 해보고 싶었죠. 결과적으로는

302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있었고 제가 생각한 거랑 전혀 다른 방향이 었죠. 애들한테 놀이터 소리, 은행 소리, 맨발동무에 가서 책 넘기는 소리, 마트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 캐셔 기계 소리 이런 걸 했으면 좋겠 다고 했는데 애들은 자연의 소리를 담고 싶다고 했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는 자연의 소리만 세트로 가게 된 거고. 아이들이 그만큼 이 작업을 진심 으로 대하고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자기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잘 담아내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니까 결과적 으로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카이브가 되어서 너무 좋았죠. 그러면 소리 기록은 어떤 형태로 남아있나요?

사진 파일이랑 글 파일을 각각은 가지고 있지만, 그때 전시했던 판넬은 끝 나고 아이들과 나눠 가지는 바람에 없어요. 미디토리가 만들어주신 메이 킹 필름도 가지고 있죠. 달력 같은 그림 결과물은 누가 봐도 애들이 한 게 티가 나는데, 미디어를 활용한 결과물은 애들이 했다는 티가 안 나니까 메 이킹 필름이 없으면 아이들이 했는지 잘 모르시더라고요. 다행히 미디토 리, 맨발동무랑 협업이 돼서 메이킹 필름이 잘 되었어요. 소리 기록은 소리 와 사진이 합해진 동영상 파일이 그때 전시했던 그대로 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너무 감동적인데, 아이들이랑 같이 기록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두 가지 측면인데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희는 교육 기관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아이들이 이 시기를 잘 살아가도록 하고, 이 시기가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좋은 방향으로 가게 하는 출발점이 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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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하는 게 저희의 궁극적인 목표잖아요. 그 시기가 아이들한테 의미 있게 남으려면 기록이 너무 중요해요. 동시에 어른들에게 아이들도 아이들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인지하게 하는 것 같아요. 이 마을은 아이들에 대한 존중이 있어서 전시회나 출판기념회를 할 때 아이들의 작품을 정말 작가 가 한 작품으로 봐주시고 소통해주셔서 교사로서 너무 감사하죠. 4학년 때 하는 마을 프로젝트의 제일 큰 목표는 그거거든요. 아이들도 마을 구 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시간을 느껴보는 건데, 저는 이 아카이브 작업이 아이들이 마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너무 좋아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무엇인가요?

두 개 정도 있어요. 하나는 『시간을 찍는 아이들』을 보면 어떤 큰 집 대문 에 멋없게 우체통만 하나 찍어 놓은 사진이 있어요. 사실 나는 사진으로

는 그닥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런데 애들끼리 쫑알쫑알 이야기하는데, 알 고 봤더니 거기가 학교 선생님 집인 거예요. 애들은 다 아는 거죠. 그때 크 게 놀랐어요. 한 지역에 사는 모든 아이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곳 이 학교구나. 애들이 학교에서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 마을에 있는 집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마을 활동을 하고, 초등방과후를 한다 면 초등학교와 함께 연계하려는 노력을 해야 되는 거구나.’하고 크게 배우 기도 했고, 동시에 마을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걸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죠. 두 번째는 이번에 소리 촬영할 때 메이킹에도 찍혀 있는 장면인

30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데. 다른 소리는 늘 나는 소리인데, 새소리는 새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사 실 새는 아침에 많이 우는데 애들이 아침에 학교에 가니까 찍을 수 없었어 요. 그래서 저녁에 우는 새들을 노리고 우르르 갔어요. 사진팀 애들은 사

진을 찍었는데, 소리팀 애들은 아무리 녹음을 해도 새가 울지 않는 상황

이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이 자리에서 울 때까지 기다 리는 거였고, 두 번째 방법은 장소를 바꾸는 거였죠. 근데 문제는 장소를 이동하면 사진팀은 새롭게 사진을 찍어야 했어요. 아이들끼리 한참 의논 하더니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옮긴 장소에서는 소 리가 정말 예쁘게 잘 났거든요. 그 과정이 되게 감동적이었죠. 저희한테 는 판타지 같은, 정말 잘 없는 시간이에요. “소리 녹음한다. 다 조용히 해.” 하고 5분간 조용히 하면서 소리를 녹음하고 있을 때 생기는 고요랑 그 5 분이 끝났을 때 이야기하는 순간이 너무 좋았었어요. 애들이 정말로 이 작품에 애정이 크구나 싶었어요. 아이들과 작업하실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제일 어려운 거는 일종의 기록 기획이죠. 제가 하는 거는 기록을 기획하고 그걸 제안하는 거고 실제 기록은 아이들이 하는 거라서 까이는 경우가 흔 하게 있어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을 때 그걸 기다리고, 지켜보 고, 조마조마해 하고, 감동하고 그런 거죠. 사실 애들이 결과적으로 자기 삶을 잘 담아낼 때마다 배워요. 얘들도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도 자 기 삶을 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근데 그걸 느끼기 전까지, 믿는 구 석은 있지만 늘 혹시나 하며 조마조마하고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기다 리는 게 제일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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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듣다가 궁금한 게 아이들이 자기가 한 기록에 대해서 의미 를 찾으면 어떤 식으로 찾나요? 뭐라고 말해요? 메이킹 필름에 많이 나오는데 걔들이 반복적으로 그 이야기를 해요. “아 이들도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런 말을. 그다음에 애들이 처음에는 감을 못 잡다가 내가 이렇게 완성이 됐다고 결과물을 보여주면 다 거기에 서 눈을 못 떼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들의 시간이 자기들의 힘으로 기록된 것에 되게 감동하는 것 같아요. 그런 단어를 쓰진 않지만 자기가 볼 때는 미숙했던 자기 이야기가 작품이 되었다는 것에 되게 감동하는 것 같아요. 혹시 소리 기록처럼 숨겨놓고 있는 아이템이 있나요?

아껴놓고 있는 건 절대 공개하지는 않고요. (웃음)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애들하고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어요. 왜냐하면 올해 아이들은 그림 작업

을 굉장히 잘하거든요. 동시에 굵직굵직하지 않고 자잘자잘한 애들이에

요. 그래서 마을의 자잘자잘한 이야기들을 그림과 글로 담아내 보려고 하 고 있어요. 저는 ‘우리 마을 200% 활용법’이라고 가제를 지었는데 역시나 또 대차게 까였어요. (웃음) 아이들 시선으로 남겨야 하는 북구의 기록이 있다면 어떤 게 있 을까요. 저는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특별하게 한정되어 있는 아이들의 시 선이나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한 사람의 이야기고, 살아 온 세월의 차이와 현재 보고 있는 눈은 분명히 다르겠지만 70년을 산 사 람의 이야기가 의미 있는 것처럼, 10년을 산 사람의 이야기도 의미 있는

30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것 같아요.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함께 아카이브를 해보는

것도 되게 재밌을 것 같아요. 북구 <도시아카이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혹은 저희가 하는 사 업에서 기록해야 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많은 도시들의 아카이브에서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만 자꾸 담아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현재 아이들의 삶에 대해서 는 자꾸 놓치고 가는 것 같아요. 할머니들의 어린 시절이 소중한 이야기 듯이 지금 아이들의 이 시절도 너무 소중한 이야기거든요. 어른들은 출근 해버리니까 마을의 낮 시간을 담아낼 수 있는 건 아이들이거든요. 우리가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하듯이, 다양한 연령의 사람을 만 나는 아카이브가 되면 좋겠어요.

이음북구 기록가 장소라

아이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어른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을 발견해가는 중입니다. 박혜수 님과의 인터뷰는 이전부터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기록 작업 과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성 장과 배움, 삶을 잘 남기는 것이 교육 활동의 일환이고 이런 과정의 기록이 단 순히 개인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마을의 역사와 기록이 된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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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기록 활동하면서 느낀 건 세상에 의미 없는 삶은 없다는 것, 내가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한다는 거예요
백복주 맨발동무도서관 활동가

백복주 님은 10년째 다양한 마을 기록 활

동에 참여해온 북구 주민이다. 예전부터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복주 님은

도서관을 만나 본격적으로 구술기록과 여

러 아카이브 활동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

다. 그의 일터인 맨발동무도서관은 그동안

주민들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재개발로 사

라진 마을 공간과 대천마을의 역사 등 화

명2동의 모습을 성실하게 기록해왔다. 구

술자는 이곳에서의 활동을 통해 우리 주변

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이 세상에 의미 없

는 삶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백 복주 님은 작년에 개관한 화명2동의 마을

기록관에서 주민들과 함께 더 다채로운 기

록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

북구 <도시아카이브>를

310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야기를
#마을기록 #공동체기록 #구술기록
다.
통해 한 사람
사람의 작은 이야기들이 저마다가 원하
도구와 방식으로 기록되면 좋겠다는 이
들려주며 인터뷰를 마쳤다.

고향은 어디시고, 부산 북구에서는 언제부터 거주하셨나요? 남해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고등학교를 진주에서 다니고 대학 때부터 부 산에서 살기 시작했어요. 북구에는 2009년부터 살았어요. 맨발동무도서관에서 처음에는 스탭으로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는 데, 그 계기가 기록 활동이라고 들었어요. 그때 참여한 사업에 대해 서 좀 들려주세요. 그때 한 작업은 영도 남항시장 상인들의 생애를 구술하는 거였어요. 책을 내기까지는 한 1년 정도, 구술 수집하는 데는 6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아 요. 그 시장에서 아주 오랫동안 살고 계시는 분, 상가를 가지고 계시는 분, 아니면 가판대에서 오래 계시는 분, 해녀. 이런 다양한 분들을 만나서 진 행했죠. 당시에 맨발동무도서관 임숙자 관장이 주로 기획하고 인터뷰를 맡았고, 저는 사진과 채록에 참여했어요. 마지막에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또 함께한 스탭이었고요. 그때 제가 느낀 건 ‘진짜 의미 없는 삶이 없다’라 는 거였어요. 떡집으로 성공해서 돈이 엄청 많은 분도 계셨고, 계속 자기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 치열하게 일하시는 분도 계셨고, 다양한 상인 들을 만났어요. 또 하나는 ‘내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엄청 좋아하 는구나’라는 거였어요. 그게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큰 축으로는 그 두 가지를 느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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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부터 기록에 관심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때 관심 있었던 기록 과 실제로 도서관 사업을 하면서 만났던 기록 활동이 좀 비슷했어요? 제가 국문과를 나왔는데 구술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엄청 좋아했어요. 특히 무당들의 이야기나 제례 의식할 때 무당이 읊조리는 게 무슨 말일 까?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이 되게 많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좀 특별한 이야기였지. 무당도 특별한 사람이고. 남항시장 생애 구술사를 진행해보 면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충분히 의미 있다. 이렇게 생각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채록하는 건 안 힘들었어요?

내가 진짜 반복되는 일을 잘 못하는데, 특이하게도 채록은 진짜 날 새는

줄 모르고 듣고 또 듣고 했어요. 그때 당시 임숙자 관장이 토씨 하나도 남

김없이 다 기록하게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훈련시켰다고 생각해요. 그 런데 이상하게 안 지루하고 재밌고, 안 들리면 백 번도 듣고. ‘채록하는 일

이 나한테 좀 맞는 일인가?’ 이런 생각 했어요. 재밌었어요. 그게 도서관 스탭으로 처음으로 한 활동이었고. 그다음 기록 활동 은 어떤 건가요? 그다음으로 활동가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받고 마을 기록을 했 어요. 첫 시작은 40~50대 중년 여성들, 그다음에 노인 여성들의 이야기 를 남기는 거였어요. 특히 노인 여성들과는 매주 만나서 그림책을 읽었어 요. 한 4년이 넘게 ‘라포’가 두껍게 쌓인 뒤에 그림책을 읽고 거기에서 일 어나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눴어요. 어떤 책을 읽으면 주제가 하나 나오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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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요. 거기에 대해서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채록해서 책으로 엮

었죠. 『수다, 꽃이 되다』라고. 이후에도 경로당이랑 양로원에서 더 길게 했잖아요. 그 이후에는 따로 결과물을 내거나 한 건 없나요? 결과물을 내려고 했는데 그때는 제가 남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책으로 만 드는 거에 대해서 약간 두려움이 생겼어요. 왜냐하면 『수다, 꽃이 되다』 책이 나왔는데 할머니들이 눈이 안 보이시니까 돋보기를 끼고 보시는 거 야. 저희가 꽃바구니 같은 걸 사서 조촐하게 출판기념회도 경로당 안에서 했는데 할머니들이 밤새 책을 다 읽고 자식들에게도 줬다고 이야기하시 는 거예요. 그때 약간 무게감 같은 게 나를 확 짓누르면서 구술 아카이브 에 대한 겁이 좀 났죠. 고민의 시간이었어요. 겁이 나고 고민하는 그 시기에 ‘말과 활’에서 공부를 하신 거예요?

맞아요. 그때 엄청 했어요. 책도 이것저것 찾아보고, 말과 활이라는 곳에 서 구술 아카이브를 좀 깊이 배웠어요. 최현숙 선생님의 그 꼼꼼함, 한 사 람을 대하는 충분한 조사와 준비, 한 인간이 왜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가를 사회적으로 풀어보는 이런 걸 배웠죠. 그래서 내 시야가 확 확장되는 경험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냥 하면 된다, 매일매일 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고요. 이 사람의 인생에 어떤 일들이 관통하고 지나갔는가 를 아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 사람의 삶이 이 시대와 동떨어져 있 지 않다. 그래서 말과 활에서 ‘내가 왜 구술 아카이브를 하려고 하지?’ 이 런 거에 대한 정리도 좀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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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서울에 오가면서 공부하는 과정을 지지해 준 거잖아요. 그 속에서 공부한 걸 또 가지고 와서 같이 나누기도 하고.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내가 만났던 도서관은 늘 나를 지켜보고, 아이 를 키우는 동안 도와줬어요. 아이가 어느 정도 커서 내가 좀 움직일 수 있 는 시간이 있을 때는 내 재능을 알아봐 줬고요. 어디에 쓰임이 있을 때 나 를 써주고, 이런 과정이 있어요. 그러니까 뭘 하든 무조건 다 지지해주고 기다려줬죠. 도서관의 지지는 나한테 엄청 큰 힘이었어요. 아까 이야기했던 노인 여성분들과의 구술 기록 작업은 지금 어떤 상황이에요?

그 뒤에는 경로당에 못 갔어요. 그다음에는 이 동네에 있는 60대 이상 의 시니어들하고 그림 그리는 프로젝트 같은 걸 진행했고요. 그 결과물로

『그때 좋았지』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 책을 낼 때도 되게 갈등이 많았어

요. 왜냐하면 ‘책을 이렇게 쉽게 내나?’ 이런 고민이 저한테 있었어요. 지 금은 함께 하는 사람들한테 의미가 있다면 ‘개떡’ 같은 책이라도 낼 것 같 은데. 그때는 이것을 잘 기획해내는 도서관에 비해 내가 못 따라가는 거

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했잖아요. 각자 이 책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읽었어요. 울기도 하고. 마지막에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도 불렀거든요. 자식들도 왔어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의 미 있었어요. 지금까지도 이 독서 모임을 일주일에 한 번씩 하고 있잖아요. 근데 이분들이 계속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시선이 본인한테로 오고 있거 든요. 그래서 한두 분은 올해 ‘빨간집’에서 하는 글쓰기 모임을 권해드렸 어요. 이분들은 스스로 본인을 기록해 낼 수 있겠다, 그 옆에서 내가 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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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고 싶다, 그렇게 세대를 떠나서 친구로 만나가면 되겠다, 나도 그렇게

늙어 가면 되겠다, 이런 생각을 지금 하는 것 같아요. 도서관 사업이라는 것은 혼자 하기보다는 함께하는 경우가 많은 데, 사람들이랑 도서관 활동가들이 같이 기록 작업을 하면서 좋은 점도 있고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아요. 어려운 점이 더 많았어요. 내가 누구랑 같이 작업하는 거에 적합한 사람 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숙자 관장이랑 내가 남항시장 프 로젝트를 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게 똑같은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아요. 두 사람 다 결과물에 대한 기대나 욕심이 없고, 내가 충만한 게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 뒤에 『활동가의 진심』 책을 낼 때는 함께 하 는 것에 대한 시너지를 봤어요. 너무 바쁠 때였지만, 활동가 이야기이기 때문에 꼭 하고 싶었어요. 채록은 내가 하고, 내용을 덜어내는 거에 탁월 한 사람이 있고, 최종 교정이 되는 사람이 있어서 사무실이 한 공장처럼

돌아갔죠. 호랑이 출판사하고 냈는데, 그 출판사에서 우리를 항상 지지해 줘요. 그래서 그 책을 낼 때 이렇게 함께 가는 게 맞구나, 이런 생각도 들 었어요. 옛날에 『이야기들이 사는 집』의 글을 써준 이은희 작가가 “이 도 서관은 모지리들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완성된 하나의 그림을 만든 곳”이 라고 했죠. 맨발동무도서관에서는 누구든 일할 수 있고, 훌륭한 한 명이 없다는 이야기를 우리한테 했는데, 살아갈수록 맞는 것 같아요. 각자의 역할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다 있고. 근데 그게 모이면 시너지가 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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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마을을 기록한 책이 여러 권 있는데, 그 중 마을 재 개발에 관한 책이 두 권 있는 걸로 알아요. 네, 『대천마을, 사진을 꺼내 들다』랑 『나의 대천마을, 안녕』이라는 책이에 요. 『대천마을, 사진을 꺼내 들다』를 할 때는 재개발 조합이 있었어요. ‘이 분들이 이사 가면 옛날 사진들이 다 없어지겠지?’ 해서 사진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이 책이 나왔어요. 『나의 대천마을, 안녕』은 재개발 이 완전히 결정 나고, 집들이 부서져 가고 있는 와중에 만들어진 프로젝 트고요. 집을 부수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이틀에 한 번, 그 뒤에는 한 달 에 한 번 단위로 계속 사진을 찍었어요. 마을의 모든 집을 다 찍었어요. 그 사진들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분도 계셨어요. 『대천마을, 사진을 꺼내 들다』를 만들 때는 사실 이런 책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나는 역사 알려주는 건 역사학자들이나 연구자들이 하면 되지, 우리가 책까지

만들어야 되나, 이랬었죠. 그래서 내 나름의 의미를 찾았던 게 사진하고 채록이었죠. 문진우 사진작가가 하야리아 부대도 기록하신 분이고, 기록 사진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사진가인데, 그 샘이 우리한테 작업실을 다 내주고 그러셨어요. 근데 갈등도 많고 힘들기도 했어요. 처음에 내 마 음대로 되지도 않고, 해야 할 일은 엄청 많았고요. 체력적으로는 힘들었 는데 마음은 신나고. 갈등과 신남이 뒤얽혀 있었죠. 그런 결과물이 저 책 이었고요. 부엉이는 아무래도 기획하는 사람이니까, 다양한 방법으로 마 을을 기록해내면 좋지 않을까 이런 의견을 냈죠. 이 과정도 의미 있었죠. 그림 그리고, 같이 이야기 나누고, 또 그림을 펼쳐놓고 고르고. 마을을 보 내주는 작업 중에서 나쁘지 않았다, 좋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진도 같이 전시했는데,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 안녕을 고할 수 있는 일을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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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만든 거잖아요. 그래서 마을을 기록하는 일은 재밌는 일인 것 같아요. 각자 다양한 기록의 방법으로 재개발되어 사라지는 마을을 보내 준다는 게 되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기록 활동가의 역할이라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그 과정에 충실 할 수 있도록 시간이랑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일이다, 나는 그런 생각 이 들더라고요. 그림을 그릴 때도 충분히 마을을 느끼게 하고, 사진을 고 를 때도 본인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를 보게 하고요. 마을을 다양 한 방식으로 기록하려면 기록하는 사람이 다양하면 된다는 얘기를 들었 거든요. 너무 맞는 얘기잖아요. 그동안 도서관에서 했던 기록 활동들을 출판기념회 말고도 어떤 방식으로 공유했어요? 마을 축제 때 그림이나 글들을 전시해서 마을 분들한테 알렸어요. 도서 관은 사람들이 계속 오는 곳이니까, 책이 나오거나 이런 일이 있으면 동 아리에 쫙 퍼지죠. 그렇게 마을에도 알리고 도서관에도 알리고요. 요즘 은 봄날 언니들의 글이 있으면 카카오 채널로도 앨리스가 정리해서 올려 주고 이런 것들을 하고 있어요. 기록을 매개로 또 다른 이야기가 계속돼 요. 도서관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책과 사람이 연결되는 그런 활동 이 일어나는 곳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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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면서 주변에서 어떤 반응과 피드백이나 이런 걸 받기도 했

을 텐데, 혹시 선생님에게 가장 힘이 되었던 피드백이 있었어요? 피드백이라기보다 나는 구술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임숙자 관장하고 많이 하는데, 힘을 줄 때는 별로 없고 주로 왜 그렇게 하느냐 이런 이야기를 많 이 하죠. 임숙자 관장이 올해부터 채록했던 걸 본인의 구술 기록 선생님 에게 처음으로 보여드리기 시작했는데,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채록은 예술이렸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 도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그냥 그대로 옮겨 놓는 게 채록이 아니고, 우 리가 구술 아카이브를 할 때 어떤 태도여야 하는가에 대한 거죠. 나를 구 술 아카이브로 이끌었던 선배가 산 한 개를 더 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엄청 힘이 됐어요.

선생님이 원래는 녹취 원본을 절대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채록하 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셨잖아요. 그 말을 듣고는 생각이 좀 바뀐 건가요? 나는 지금도 원본의 정확함을 살리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채 록을 책으로 낸다든지 할 때 이걸 옮기잖아요. 그때 내가 어떤 태도일 건 가에 대한 변화는 좀 있는 것 같아요. 변화라기보다 자신감? 구술자가 자 기만의 언어로 표현한 걸 내가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이거에 대한 고민이 엄청 깊어야 된다는 거죠. 어떤 작가나 예술가가 자기 작품을 내놓 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 방향을 약간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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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은 언제였어요? 봄날 언니들처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내 남편은, 내 자식은.” 이렇게 매주 만나 이야기하다가 어떤 시선이 자기한테 탁 돌아오는 걸 느 낄 때가 있어요. 이걸 배움의 순간이라고 해야 되나? 이분들이 자기감정 을 제일 처음 표현할 때 그 순간이 보람 있는 것 같아요. 글을 잘 썼어, 못 썼어가 아니라 그렇게 함께 성장하는 순간을 만날 때가 제일 보람 있어요. 깊이 만나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그런 순간인 것 같아요. 선생님의 기록 활동이 스스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 같아요? 사람을 깊이 만나는 거. 그리고 내 인생으로 보면 내가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는 거라고 생각해요. 성격상 살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많이 했단 말이 에요.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어떤 일을 주도하는 사람의 유형이라고 생각했 어요. 또 그게 멋있어 보이고. 근데 그렇지 않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 있다, 기록하는 사이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일어난 것 같아요. 나 자신 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나를 알아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미래의 나는 다 른 모습이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 같고. 내 인생에서는 기 록과 함께하는 게 제일 큰 의미인 것 같아요. 북구에 앞으로 어떤 기록이 좀 남겨지고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 하시는지. 요새는 아카이브, 커뮤니티 아카이브 이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내가 살 고 있는 이 마을에서 계속 아카이브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내가 계속 만나잖아요. 그리고 이 기록을 통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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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고리를 만들 수 있잖아요. 아카이브를 해서 기록관에 전시하는데, 전시를 하게 만든 사람이 남이 아니고 우리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는 거 죠. 나는 그런 공동체가 이어지고, 훨씬 더 넓어지고, 깊어질 거라는 믿음 이 있어요. 북구는 원도심이나 오래된 마을들이 많잖아요. 전체적으로 지 역을 기록하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만나게 하는 그런 기록이 필요해요. 그래서 기록관도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의미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그런 이 야기들을 자꾸 꺼내놓음으로써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그런 공동체 기록

이 진짜 중요해요. 다음 질문이 <도시아카이브>에 대한 의견인데 이게 다 이어지는 것 같아요. 아까 말했지만 기록하는 사람들이 다양해져야지 이런 다양한 기록이 일

어날 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사진으로 기록하는 게 중요하고, 어떤 사 람은 역사를 정리하는 게 중요한 분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기록하는 사 람들이 많아져야 되고, 이들이 각자가 할 수 있는 도구와 방법으로 기록 하고, 이것들이 입체적으로 모이는 게 <도시아카이브> 아닐까요? 계획적 으로 어떤 팀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기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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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북구 기록가 신아영 부산 북구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복주 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기록 활동이란 결국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중 이 밑바탕되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맨발동무도서관과 마 을기록관 같은 거점 공간이 기록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들에게 기록의 경험을 제공하고, 함께 기록하고, 결과 물을 공유하고 또 보관하는 일련의 일들을 수행하는 공간이 기록을 훨씬 더 풍성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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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하면서 서로 위로받은 이야기가 기록되면 좋겠어요
장소라 참빛학교 교사

#기록활동기획

장소라 님이 활동하는 부산참빛학교는 교

육과정의 일환으로 아이들과 ‘채식’을 주제

로 동네 주민을, ‘성교육’을 주제로 부모님

을 인터뷰하고, 뭔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어보자는 의미에서

『물음표』라는 제목을 붙인 잡지를 만들었

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의 작업장을 찾아

가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아이들 스스로 진

로에 대해 고민하는 활동이 있었는데 이를

『별하(상)』이라는 제목으로 엮었다. 아이들

의 기록이 학교 또는 개인만의 기록이 아니

라 마을의 기록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장소라 님은 쌓이는 기록물을 보관하는 것

을 고민하다 아카이브에 더 많은 관심을 가 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 들끼리도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서 로 위로받고 기록물로 남기면 좋겠다는 바 람을 전했다.

324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공동체기록 #청소년기록

선생님 고향은 어디고 북구에 얼마나 거주하셨나요?

저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기는 했고요. 금정구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대 학교까지 거의 금정구에서 보냈어요. 20대는 부산의 이곳저곳에서 살다 가 2015년에 부산참빛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일한 지 2년째 되던 겨울에 제가 결혼하면서 이곳 화명동에 이사 왔어요. 선생님은 언제 처음 기록 활동을 교육과정으로 기획하게 되셨나요?

처음엔 ‘기록이라는 일을 해야겠다.’ 하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출산 휴 직을 하고 작년에 복직하면서 중3 아이들과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사람을 좀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궁금한 게 있으면 혼자 찾

아보는 것보다는 사람한테 묻고 들었을 때 훨씬 이해가 잘 되더라고요. 그 래서 아이들도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설정했어요. 첫 주제는 ‘비건’으로 계획했는데, 마침 동네에도 채식을 시작하신 분들이

있어서 같이 공부하고 인터뷰했죠. 사실 그걸 할 때도 기록이라고 생각

은 안 했던 것 같아요. 책 제목인 『물음표』는 어떤 의미인가요?

뭐가 궁금한지 알면 그걸 물어보러 가면 되는데, 어려운 건 아이들은 자 신이 뭐가 궁금한지 잘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물음표’를 찾아보자고 이 야기했어요. 1호의 첫 번째 주제는 비건이었어요. 애들이랑 같이 사전조 사를 해서 질문지를 뽑고, 이야기를 받아 적고, 정리하는 과정이 사실은 힘이 필요한 일이에요. 애들이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걸 너무 힘들어 했거든요. 근데 인터뷰 내용을 계속 들으면서 혹은 글로 다시 보면서 되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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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활동이 되게 좋았었어요.

두 번째 주제는 ‘성교육’이었다고요. 두 번째 주제는 성교육으로 잡고, 부모님을 인터뷰하자고 했어요. 이 작업 도 엄청 재밌었어요. 중3 되면 부모님이랑 대화를 잘 안 하려고 하잖아요. 아이들은 못 들었던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고, 부모님들도 아이들이 아가 였을 때의 소중함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셨어요. 어쨌든 사 람을 만나서 들을 거리가 있다는 걸 느끼고, 잘 듣는 연습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들이 중3이다 보니까 고등학교 진학이나 나름의 진로 고민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을 질문으 로 만들어서 사람을 만나자”고 말했죠. 애들이 “남들 하는 대로 그냥 하 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안타까웠지만, 제가 옆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게 별로 의미가 없는 거죠. 그래서 여섯 명의 사람을 인 터뷰해서 물음표 2호를 만들었죠. 어떤 일을 찾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 지금 삶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많이 하 려고 했어요. 작년의 활동들은 이런 결과물이 남은 것 같아요. 배움의 결 과물이고, 성장의 과정들이죠. 학교 안에도 거의 모든 교육 활동들이 결 과물들로 남아있어요. 그걸 어떻게 잘 모아줄 건가가 저희도 늘 고민하는 지점이에요. 아카이브를 필연적으로 해야 되는 것 같아요. 횟수가 많아지면 기록물이 많이 쌓일 거잖아요. 그 기록을 어떻게 관리할지 계획하고 계시는가요? 잘 못해요. 그래서 제가 아카이브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사실

326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은 학교 안에 방대한 자료가 많거든요. 애들이 한 활동들이 어떻게 보면 다 기록이죠. 우리 학교만의 혹은 그 아이만의 기록이 아니라 이제 마을 의 기록이랑 맞물리는 거죠. 마을의 단오 축제가 우리 학교에서 했던 단오 축제랑 다르지 않으니까 같은 자료가 되는 거거든요. 근데 저희가 기록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 아니다 보니까 쉽지 않아요. 혹시 이런 기록물들은 함께 공유하시는 분이 있나요. 어떻게 활용 하시는지? 그것도 고민인데 저희는 학교 홈페이지 대신에 카페를 사용하거든요. 그 래서 카페의 교사 방이라든가, 학교에서 사용하는 외장하드라든가, 졸업 한 친구가 만들어준 가상 웹 하드 같은 것들을 잘 이용해서 모으려고 하 는데 한 곳에 모아놓는 것 자체가 우선 쉽지 않아요. 그다음에 『물음표』 와 『별하』 같은 경우는 마을 분들하고 같이 작업한 거라서 당사자분들한 테도 드리고, 도서관에서도 독립 출판 형태로 보관해 주시고 있어요. 2학 기 때는 『별하(하)』을 만들어서 출판기념회나 인턴십 보고회 같은 걸 하 려고 해요. 아이들은 자신의 작업을 한 거지만, 이게 진로를 고민하는 친 구들 혹은 진로 교육을 고민하는 어른들에게 마을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 을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록 활동을 도와주신 분들이 계실까요? 사실은 다 도움을 받아서 하죠. 아이들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고. 제 가 다 하는 건 거의 없어요. 어쨌든 인터뷰에 응해주시지 않으면 할 수가 없으니까. 특히 『별하』 같은 경우는 마을에 있는 작업장을 아이들이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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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서 인터뷰하는 건데 저희 마을은 되게 열려 있어요. 애들이 온다고 하면 어쨌든 다 받아주시는 게 일차적으로 큰 힘이 되죠. 기록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엄청 기특하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별하』 같은 경우는 올해 마을 교육 공동체 공부 모임이나 이런 데서 공유했는데, 다들 어떻게 아이들이 이런 걸 하냐, 너무 좋다, 멋지다 이렇게 이야기해주시거든요. 직접 한 당사자 들은 그렇게 잘 못 느껴요. 그래서 인턴십 같은 경우는 마을에서 애들하 고 같이 보고회든 출판기념회든 하려고요.

기록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이 있었을 때는 언제일까요?

이게 기록으로 나올 때도 좋지만, 작년에 이 작업을 했던 친구가 다른 고

등학교로 진학했거든요. 근데 여름에 저를 인터뷰하려고 왔더라고요. 제

가 가르쳐준 대로 질문지를 만들어서 핸드폰으로 녹음하는데 그때 기분 이 되게 묘했어요. 그때도 좋았고, 부모님들이 인터뷰하고 오셔서 눈을 반 짝이시면서 우리 애랑 옛날 얘기하니까 되게 좋았다고 이야기해주실 때. 저는 이 작업 자체보다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때 좋아요. 인터뷰에 응해주신 사업장은 어느 곳인가요? 복합 문화 공간 ‘무사이’, 카페 ‘이너프’, 여기 ‘대천마을 학교’와 ‘맨발동무 도서관’도 있었고요. 공정 무역과 제로 웨이스트 숍인 ‘지구 숲’과 ‘마플 상회, ‘북적북적 협동조합’, 화명기록관인 ‘마을에 담는 집’이 있었어요. 집수리 사업을 하는 ‘감동재 협동조합’과 마을 밥상에 납품도 하시고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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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수업과 판매도 하시는 ‘동주의 부엌’도 인터뷰에 응해주셨어요. 주민

자치센터 동장님도 흔쾌히 응해주셨어요. 애들이 길게는 하루 짧게는 반 나절씩 쭉 돌았어요. 다음 학기에는 『별하(하)』가 나오는데 개별 인턴십

이고, 고3 여섯 명 아이들이 여섯 군데의 작업장에 2주에서 3주간 직접 가서 일해요. 선생님은 이런 기록 활동들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처음에는 아이들하고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데서 시작을 했 잖아요. 생각보다 아이들 세상이 작은 거예요. 요새 애들은 뭐가 궁금하 면 유튜브를 찾는다고 하지, 누구한테 가서 물어본다고 하지 않거든요. 근 데 사람이 일하는 모습 혹은 이야기하는 걸 같이 작업하면서 보고 배우 는 게 엄청 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을 때 이것이 개인의 것으로 남지 않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또 좋은 것 같아요. 우리 학 교에서 했던 활동이지만 마을의 다른 기관에 혹은 그냥 개별의 사람들에

게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 것 같고요. 『물음표 2호』 했을 때 되 게 좋았던 게 애들이 20대, 30대, 40대, 50대를 다 만났어요. 근데 10대 가 하는 고민이 그때만 하는 게 아닌 거예요. 사실은 모든 사람이 계속해 서 가지고 있는 질문이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위로가 되잖아요. 같이 공유하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진행한 학생 중에서 기록 활동을 통해 더 성장했거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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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의 진로를 찾은 경우도 있을까요? 『별하(상)』을 했던 아이 중의 하나는 마을기록관에 가게 돼요. 우리 마을

에 있는 분들은 사실은 기획자들이 많아요. 근데 성향상 그게 맞지 않는 애들은 이게 너무 힘들어요. 이 친구가 그래요. 사실은 정해진, 주어지는 일만 하고 싶거든요. 채록은 누군가가 인터뷰한 걸 정리하는 작업이잖아 요. 걔가 그건 그래도 해볼 만할 거 같다고 했어요. 그리고 걔 동생이 저 한테 인터뷰하러 왔었는데, 걔는 어려움이 있을 때 사람을 찾아가서 물 어보면 되겠다는 게 확실히 생긴 것 같더라고요. 그런 아이들이 있었죠. 교과 과정 외에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기록이나 활동이 있을까요?

지금은 아이들 진로에 계속 꽂혀 있어요. 진로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 는 선생님들하고 한자리에 모여서 진로라는 게 도대체 뭐고, 마을 아이들 을 진로라는 이름으로 만날 때는 어떻게 대해줘야 되고, 어떤 내용이 필요 한지를 고민할 장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저도 『물음표』를 했던 애들처럼 ‘뭐 해서 먹고 살까’, ‘계속 교사를 해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춘기입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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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북구 기록가 서미화 마을기자단에서 취재를 위한 인터뷰 기법을 배우러 왔다가 사람과 공동체를 알아간다는 짜릿한 새로운 경험을 한 서미화입니다.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세상과 소통하게끔 하는 노력이 엿보여, 제 3의 『물음표』, 제2의 『별하』가 무궁무진하게 나올 것 같다. 배움과 따뜻함, 힘들어도 이어가는 힘으로 개인의 경험으로만 남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 기 록들이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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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명촛불의 활동도 지역에서 지나칠 수 없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을까요
황기철 부산화명촛불 회원

#공동체기록 #지역기록

부산화명촛불은 2014년 세월호 참사일 사

흘 뒤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매주 목요일

마다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얼마 전

정식으로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하여 창

립총회를 마쳤다. 촛불집회 말고도 정기적

으로 노란리본을 만드는 모임이 있고, 공

동체 상영, 초청강연회, 도보 행진 등 다양

한 활동을 진행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안

전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집된 사진, 현수

막 시안, 행사 포스터 등의 디지털 기록물

을 2018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기

증한 바 있다. 촛불집회의 기획과 진행 과

정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데, 아날로그와 디지털 자료의 특성을 잘 고려 해서 분류를 잘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자료의 쓰임새와 목적이 있어야 자료 정리

도 명확해지고, 사료로서의 가치가 생기는 것 같다는 생각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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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황기철입니다. 내년 2월까지 교직 생 활 34년을 마무리하고 시골로 귀촌할 예정입니다. 귀촌 생활하는 동안 농 사지을 땅은 7년 전에 구했고, 집은 구한 지 3년이 넘었습니다. 예전부터 환갑이 지나면 귀촌할 거라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부산화명촛불’이 어떤 단체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있고 사흘 뒤에 화명촛불을 시작했습니 다. 지난 9월 2일에 부산화명촛불 창립총회를 했는데, 딱 3,063일째였어 요. 처음엔 단체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고 창립총회 전까지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자연발생적인 시민들의 모임이었지요. 처음엔 부산역 촛불 모임 에 참여했는데, “부산역이나 서면같이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곳은 어차피 계속할 것이고, 동네 사람들을 위해 내일부터는 내가 사는 동네부터 촛 불을 들어야겠다.”라고 말하면서 마무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화명동에 공 동체 모임이 활발하고 지인들도 많아서 같이 촛불을 들자고 문자를 보냈 지요. 그때 함께 했던 벗들 가운데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고 뒤늦게 뛰어 들어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단체 등록을 하고 초 창기부터 활동해 온 분들이 대표를 맡아 활동 영역이 더 다양할 것 같습 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촛불을 든 건 전국에서도 아주 빠른 편일 겁니다. 부산화명촛불은 어떻게 지속되었나요? 처음엔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촛불만 들었는데, 그게 50일 동안 지속된 거죠. 우리 장례 풍속에 49재가 있듯이 그런 마음으로 계속 촛불을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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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 사람이 많이 오시니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시민들의 진정성에 기대 서 계속하게 됐어요.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뜻있는 사람들이 모 여서 피켓 만들랴, 서명받으랴, 영상 틀랴 아주 바빴지요. 촛불집회는 2시 간이었는데, 준비 시간과 정리 시간을 합쳐 거의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 도 걸렸어요. 50일이 지난 후에는 매주 목요일 7시에서 9시까지 촛불집회 를 하는 걸로 변경했습니다. 매일 하는 건 무리고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주 목요일 진행하는 활동 외에도 따로 진행했던 프로그램이 있 었을까요?

초창기에는 참사 100일, 200일, 1,000일, 2,000일, 1주기, 2주기 등 의미 있는 숫자라고 생각되는 날에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추모제 때는 대천천

에서 배도 띄우고, 풍등도 띄우고 행사가 컸어요. 아이씨밴드, 산하밴드, 소리꾼 양일동 등 많은 문화패가 와서 도와줬고 재능기부를 해주셨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노래 공연 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지요. 그 밖에도 유가족 초청 행사도 몇 차례 열었 고 유민이 아빠가 초청 강연도 해주셨고 유가족분들이 격려 방문도 해주 셨어요. 가장 길었던 행사는 홍성담 화백과 함께 한 세월호 그림 전시회였 는데, 거의 한 달 가까이 했죠. 정기적으로 노란 리본을 만드는 시민 모임도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동체 영화 상영회도 3차례 열었고, 3.1절 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 집회 때 화명동에서부터 도보로 참가하기도 했습 니다. 앞으로는 세월호 전체를 아우르는 행사를 열고 싶습니다. 가까운 공 원에서 전시 및 상영회, 초청 강연 등 세월호 주간 행사를 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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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창립총회를 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단체로 가게 되었 는지 상황이 궁금합니다. 지난해 12월 9일쯤 세월호 조례가 통과되면서 이번 기회에 단체를 만들고 창립총회까지는 하자고 결정 났습니다. 비영리 시민단체로서 단체의 성격 은 세월호 활동을 기본으로 안전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본활동, 민주주의 실현에 관한 활동,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직접 구현하는 활동 등 큰 세 축을 잡고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도록 범위를 넓게 잡았지요. 집회를 신고하러 갔을 때 경찰이 화명동이니까 화명촛불을 단체 이름으로 추천 하기도 하고, 단체 내에서도 화명동에서 시작했으니 화명촛불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어요. 그러다 창립총회 때 부산화명촛불로 공식 이름을 정했 습니다. 처음부터 굳이 대표는 정하지 않았고, 각자 자신이 대표라 생각 하고 다니자 그렇게 온 거죠. 비영리 시민단체의 등록 요건이 회원 100인 이상이기 때문에 짧은 기간인데도 회원을 모집했는데요. 회비로 부담 주

지 않기 위해 구글 설문지를 통해 2천 원을 기본으로 하되 더 후원하고 싶

은 분들은 원하는 대로 선택하도록 했지요.

부산화명촛불 활동 자료를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보냈다고 들었는데, 거기에는 어떠한 자료들이 있었는지 설명 바랍니다. 세월호에 관한 내용이 전부였어요. 촛불집회 때마다 상영했던 영상, 행 사 포스터, 현수막 뭐 이런 것들인데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 겠네요. 대부분 디지털 자료였는데, 제 하드에서 2022 세월호, 2021 세 월호, 2020 세월호 이렇게 폴더를 만들어서 정리한 것을 다른 하드에 옮 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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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활동까지는 아니어도 개인적인 수집으로 시작을 한 거네요. 그렇죠. 처음부터 특별하게 ‘기록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영상을 만 들고, 행사 자료를 만들고, 기획하고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기록의 과 정이 되는 거죠. 자료는 쓰임새와 목적이 있어야 정리도 명확해지고, 좀 더 의미 있는 자료들에 대해서는 고민하면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생기는 것 같아요. 같이 참여하셨던 분 중에도 기록이나 자료들을 모아두거나 같이 뭔 가를 의논하거나 그런 분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세월호 참사가 나고 나도 SNS를 시작했거든요. 올리면 자동으로 계속 남 아있으니까. 지금도 우리 활동가들이 다 그런 일들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 습니다. SNS로도 올리고 우리 텔레그램 방에도 계속 올리죠. 자연스럽게 자료들은 축적되는데, 아시다시피 SNS가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부분에 서는 취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조금 보강을 해야 될 것 같아요. 부산 화명촛불이 9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는데, 10주년 정도 해서 50분짜리 영 상 하나를 만들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자료들을 모으고 남기는 것이 원래 몸에 배어 있는 건지 아니면 의 식적으로 준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세월호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들 의 활동도 충분히 기록되고 정리해야 할 가치들이 충분히 있으니까 기록 에 대한 생각이 많이 있는 거죠. 옛날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의 기록 만 남고 민초들의 기록들은 너무 없었잖아요.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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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기록이 정말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여름에 4박 5일 동 안 형산강을 걸었는데, 가면서 계속 사진 찍고, 글로도 남기고 그러면서 걸었지요. 형산강을 걸으면서 들었던 깃발이나 배지, 구호가 적힌 빛바랜 종이같이 사소해 보이는 것들도 새삼 좀 의미가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 을 하게 됩니다. 부산화명촛불의 활동은 화명 지역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까요? 화명동에서 세월호 촛불활동을 하면서 그에 대한 기록이나 물품들이 지 역의 역사와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은 화명촛불이 계속 지속되어서 “이 동네에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시더라 고요. 이런 작은 것들이 하나둘 쌓이고 우리 공동체를 같이 하면서 정말

가치 있는 활동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화명촛불의 활동도 지 역에서 지나칠 수 없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을까요. 부산화명촛불이 지역 활동, 지역 연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한 게 있을까요. 우리가 추모문화제처럼 큰 행사를 할 때는 북구 지역의 많은 단체와 연대 해서 했어요. ‘북구제단체연석회의’란 이름으로요. 스무 개 이상의 단체 들이 모였어요. 그러면 모여서 같이 회의하고 역할 분담하고 사람 모으고 해서 행사를 치렀어요. 지금도 가을이 되면 북구 풀뿌리 단체들이 모여 ‘대천천 문화환경축제’를 하는데 세월호 행사를 위해 모인 단체들이 여기 에도 거의 참가하거든요. 오랫동안 인연이 있으니까 다 같이 모여서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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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처럼 준비하죠. 부산화명촛불 활동가 중에도 지역 활동이나 마을 활동

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좀 더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되겠죠. 우리는 우리대로 내용들을 담아야 되겠지만 결국은 아까 말했다시피 이 마을 활동 속에서 연대하고 함께 치르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 다.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더듬어 보는 기행을 가거나, ‘다크투어’처럼 어

둡고 힘들지만, 꼭 기억해야 할 전국의 역사문화 현장을 찾아가는 기획프

로그램도 의미가 있겠지요. 지역 사람과 단체들이 같이 계획을 잡고 거기 에 맞게 회의하고 역할 분담하고 그럴 테니까 제가 볼 때는 지역 활동에서

충분히 역할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북구의 도시 아카이브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북구 주민들의 삶을 기 록하려고 하는데, 어떤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는지요. 아카이브에 대한 고민은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 전에 우 리도 지역 지도를 만들자 했는데, 지역도 사실은 엄청난 이야기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북구에 있는 대천천이나 이런 자연환경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도 가치가 있는데 제대로 된 자료들이 없는 경우가 많아요. 북구 도시 아카이브에서 잊힌 것들을 하나씩 찾아서 발굴해 보면 어떨까 하네요. 구 술 작업 같은 것도 그렇고, 북구에도 작은 도서관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문화공간이 많을 텐데 제대로 정리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종이로 된 자료 도 중요하지만 정리하고 보관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런 것들을 디지털 자 료로 정리하면 언제든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고, 양도 무한정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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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북구 기록가 심종석

창문센터 지킴이지만, 별 볼 일 없는 노마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부산화명촛불’의 활동, 정규단체로서의 변화 과정, 그 리고 지역 공동체에 미친 영향이 컸음을 알게 되었다. 한 명 한 명의 마음과 힘이 공동체로 결집하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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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 성과공유회 금곡
덕천 만덕 화명

발 행 일 : 2022년 12월 16일

발 행 처 : 부산광역시 북구청, 북구문화도시지원센터

주 소 : 부산광역시 북구 낙동대로1570번길 33 (구포동)

이음북구 기록가 : 곽종영, 김경희, 김말선, 김순덕, 김지현, 김현석, 김현주, 남상국, 민정식, 박찬석, 백복주, 서미화, 신아영, 심종석, 이광욱, 이상진, 이시연, 이찬순, 이희정, 장소라, 정영수, 최기봉, 한지연

디 자 인 : 이노그램디자인

기획 도시아카이브’ 결과물의 일부를 편집하여 제작되었습니다. ※ 이 책의 저작권은 모두 북구문화도시지원센터에 있습니다. ※ 비매품으로 받아보길 원하실 경우 북구문화도시지원센터에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도시를 기록하는 마음 북구의 기록자 인터뷰집 북구문화도시지원센터
편집기획 : 염수정 원고정리 : 구민진, 김나경 ※ 이 책은 빨간집 용역으로 시행한 ‘2022 북구 문화도시 예비사업 : 시민
2022 북구 문화도시 예비사업 시민 기획 도시아카이브 북구 도시아카이브는 도시에 축적된 자원 중
세대를 위해
거와
미래
영구적으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과
현재의 기억과 기록의 총체 또는 이를 보존하
공간입니다. 북구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여 문 화적 미래를 위한 인문, 생활, 공동체, 예술 자원 수
및 활용·공유하고자 합니다.
도시를 기록하는 인터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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