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뜨는 빛우물 마을 동광동 마을기록: 이야기와 소리로 기록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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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는
마을 동광동
이야기와 소리로 기억 찾기
빛우물
마을기록
해뜨는
동광동
기억 찾기
빛우물 마을
마을기록 이야기와 소리로

이 책은 동광동 새뜰마을 마을기록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우리 마을 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다>와 <소리로 기억하는 우리 마을>에 참여한 주 민들의 기록활동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우리 마을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다>는 이야기와 글, 그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마을을 기록하는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소리로 기억하는 우리 마을>은 마을의 미래를 이끌어갈 초등학생이 모여 소리와 영상으 로 마을을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기억을 통해 마을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사라진 것과 남아있는 것을 정리했다. 또한, 새뜰마을사업 등으로 변화된 마을의 지금과 앞으로의 바람을 담아 <해뜨는 빛우물 마 을 동광동 마을기록>으로 묶어냈다.

1부 마을 사전 동광동 개요 연표 기억지도 기억사전 마을탐방 2부 주민기자단이 기록하는 동광동 이야기 김귀연 김숙이 김숙희 김순자 김윤자 이영숙 임혜자 조말숙 천은순 최영희 황춘록 주민기자단 활동을 마치며 008 016 018 040 058 080 084 088 100 106 110 116 122 134 142 146 148

152 153 154 166 167 168 174

3부 동광동 소리기록단

동광동 소리기록단

소리 기록 기획

소리 채집하는 날

영상 스케치

기록단 사운드 수집본

소리기록단 후기

부록 기록을 통해 만난 동광동 그리고 사람

참고자료 [도서]

『내사랑 부산자료 모음집. 제10호:(옛 사진으로 답사하는) 근대 부산 100년:근 대 개항에서 1970년대까지』, 2011. [신문기사] 굴착기 앞 석축, 초량왜관 선창 유적이라면…, 부산일보, 2018.06.07. 동광시장, 대교동 가설시장으로 이전, 부산일보, 1968.07.09. [사이트] 부산시청 https://www.busan.go.kr/ 부산공공데이터포털 통계자료실 https://data.busan.go.kr/index. nm?contentId=68/ 부산중구청 https://www.bsjunggu.go.kr/ 부산중구청 블로그 https://blog.naver.com/bsjunggu/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한국문화원연합회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454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국토지리정보원 https://www.ngii.go.kr/ 공유마당 https://gongu.copyright.or.kr/ [기타]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부산광역시립중앙도서관 향토자료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1부 마을 사전 동광동 개요 연표 기억지도 기억사전 마을탐방

1부 마을 사전

동광동 개요

동광동은 조선 중기 용두산 일대에

설치된 초량왜관 시기를 시작으로

조선과 일본의 무역 중심지로 부상

했다. 특히, 동광동 1~3가 지역은

당시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근

대 개항기 이후에는 서양 선교사들

이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중심으로 동광동 4~5가 지역에 정착하였다. 한국전

쟁 시기에는 애환 가득한 피란민들

의 삶터이자 행정 중심지였으나 점

차 사람들이 빠져나가 그때의 그리

움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8
・ 1 9 5 0 항공사진 ・ 2 0 1 5 항공사진 동 동 동 동 동 9

10

1부 마을 사전

지명

동광동은 초량왜관1 시기 동관(東館)이 위치한 곳으로 동관은 일본에서

오는 배가 정착하는 곳이었다. 1876년 근대 개항으로 왜관이 일본인 조 계지로 전환되면서 부산부 본정(本町, 혼마치)으로 불렸다. 해방 후 일본식 지명이 폐기되자 동관이 있었던 지역이라는 뜻에서 한동안 동관동으로

불렀다. 이후, 발음이 어려운 동관동 대신 광복동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광동(東光洞)으로 바뀌었다.

위치와 지리

동광동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북쪽은 영주동, 남쪽은 광복동을 끼고 있다. 서쪽은 용두산공원이 있는 대청동, 동쪽은 중앙동과 붙어있다. 대 청동과 중앙동 사이에 끼인 형태로 다소 특이한 경계가 만들어졌다. 이 는 매립 전 부산의 해안선이 반영된 것으로 그 흔적2 인 석축이 최근까 지도 남아있었다. 북서쪽의 복병산, 동쪽 끝으로 중앙동 해안으로 연결 되는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동광동 1가와 2가는 상가와 금융기관, 고미 술 화랑전시관, 3가에 부산영화체험박물관, 백산기념관, 4가의 동광동 인쇄 골목, 5가의 주상 복합지역이 혼재해있다.

1 초량왜관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절영도 임시 왜관, 1607년(선조 40) 두모포 왜관에 이은 네 번째 왜관이다. 초량왜관은 1678년(숙종 4)에 두모포에서 이전 설치되어 대마도에서 온 일본인 500명 내외가 거주하였다. 위치로 보면 가운데에 용두산공원이, 동남쪽에는 용미산, 북쪽에는 복병산이 있었다. 2 부산데파트 뒤 주차장 부지에 남아있었던 석축이 1870년대 초량왜관의 선창 석축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으나 2019년 선창 석축 앞에 건물이 신축되면서 완전히 가리워졌다.

복병산 동광동 중구보건소 부산중구청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코모도호텔�부산 ��계단�거리 인쇄�골목 백산기념관 부산데파트 용두산 북 서 동 남 �호선 중앙역 �호선 남포역 영주�동 영주�동 중앙동 광복동 남포동 대청동 다이아몬드�타워(용두산�타워) 동 동 동 동 동 11

12

1부 마을 사전

행정구역

동광동은 1678년 용두산을 중심으

로 들어선 초량왜관과 근대 개항기

를 거쳐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1914년에는 부산부였다가 해방 이

후인 1949년 부산시로 승격되었다.

1957년 중구에 속하여 1982년 동

광동 1가의 일부가 각각 광복동과

남포동에 편입되었다. 부산광역시

16개 구·군 가운데 중구의 행정구역

은 2.83㎢로 가장 좁은데, 그중 동

광동은 0.17㎢를 차지한다. 이는 중

구의 9개 행정동 가운데서는 물론, 한국에 현존하는 행정동 중에서도 가장 좁다. 법정동으로 동광동 1, 2, 3, 4, 5가가 있다. 1999년 18개통 73개반이던 것을 14개통 58개반으 로 조정하여 현재에 이른다.

동광동은 중구 내 9개 행정동 중에

서 인구감소율이 가장 높은 동으

로, 65세 이상 인구 비율도 매우

높다. 한국전쟁 당시 전국 각처에 서 몰려든 피란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적도 있었지만, 1991년 7,313명에서 2001년 4,786명으 로 10년 사이 큰 폭으로 감소했

다. 2011년 4,075명으로 4천 명 대를 유지했지만 2021년 9월 3,005명, 2022년 9월 말 기준 2,875명으로 매년 감소하고 있다.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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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자료 출처:
가구수 1,683가구 인구수 2,875명 남자 인구수
여자 인구수
인구
동 동 동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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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구청 홈페이지
1,540명
1,335명 2022.09 기준
추이
동 동

동광동을 가로지르거나 인접한 도로로는 대청로, 중구로, 동광길이 있다.

대청로 부산우체국 - 부산근대역사관 앞을 지나는 도로로 옛날 소도로

가 있던 것을 1909년 확장공사하여 부산 최초의 신작로로 1916년부터

전차가 다녔다. 편도 1차선이었으나 차량 증가에 따라 왕복 5차선으로 확장 개통했다. 중구로(유엔고개) 부산 제1호 이면도로이자 아스팔트 도로로 영주동 부산 터널 입구 삼거리 - 코모도호텔 - 중구청, 메리놀병원 - 카톨릭센터국제시장 입구 사거리로 이어지는 고개다. 조선시대 초량왜관 때부터 있었으며 매축 이전까지 중구에서 동구로 넘어가는 유일한 도로였다. 지금의 크기로 확장된 것은 한국전쟁 때로, 당시 부산에 상륙한 유엔군

이 지금의 코모도호텔 부지에 있던 국군 제12연대로 가는 도로가 비포

장 언덕길이어서 비가 오면 차량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

산 최초로

・ 도로
아스팔트
동광길(영선고개) 중구로 동쪽 밑에
입구 -
뒤 -
-
1912년 쌍산(영국영사관산과 영선산이라 부르던
산) 착평공사 때 헐려 없어 진 영선산 등선이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산 이름을 따서 붙인 고 개 이름이다. 도로명 주소 제도가 시행되면서 동영로, 샘길, 백산길 등의 새로운 도로 명이 생겼다. 동영로는 동광동과 영주동을 잇는 도로, 샘길은 샘이 많이 솟는 도로, 백산길은 옛 백산상회 주변 거리라는 의미다. 1부 마을 사전 14
포장을 했다.
있는 언덕 바로 윗길로 영주시장 남쪽
부원아파트
논치시장
대청로로 통하는 고개다. 1909 ~
중구로 동광길 동영로 백산길 샘길 대청로 복병산 중구보건소 메리놀병원 부산근대역사관 국제시장 부산중구청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코모도호텔�부산 부산터널�입구 영주시장 부원아파트 ��계단�거리 인쇄골목 백산기념관 부산데파트 용두산 다이아몬드�타워(용두산�타워) �호선 중앙역 �호선 남포역 동 동 동 동 동 15

16

1부 마을 사전

연표

1678 - 초량왜관 설치(조선 숙종)

1876. 02. 27 - 국제항 개항

1876. 11. 13 - 관립 제생병원 개설(현 동광동 우리은행 옆)

1877. 02. 11 - 관립 제생병원 개업식

1879. 09. 06 - 부산일본관리관청 청사 신축 완공(옛 초량왜관 관수가, 부산 최초의 양식건물)

1880. 04 - 부산일본관리관청 폐지

1884. 05. 07 - 부산영사관 착공(옛 부산일본관리관청 자리) -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 소속 부산경찰서 창설(옛 초량객사 현 봉래초등학교)

1897. 03 - 부산유치원 건립(현 신창동 대각사, 1936년경 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자리로 이전)

1902 - 북빈(북항) 매축공사 착공 1905 - 북빈(북항) 매축공사 준공

1906. 02 - 부산영사관이 부산이사청으로 개칭

1910 - 부산세관 준공(부산데파트 뒤편에서 1910년 현 부산경남본부세관 자리로 이전)

1910. 10. 30 - 부산역 준공 1912 - 40계단 조성(1909~1912년 사이로 추정)

1914. 04. 01 - 부제실시에 따라 부산부로 행정구역명 변경

1924. 06. 09 - 부산경찰서 이전(영정 1정목 3번지, 현 중부경찰서) 1924. 07. 11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설립(본정 5정목 19, 현 중구청 아래쪽, 1년 만에 해산) 1924. 08. 25 - 본정시장(현 부산데파트) 1935 - 남빈시장(남빈정시장)이 본정시장으로 이전·개칭 1936. 03. 31 - 부산부청사 신축 이전(현 롯데백화점 광복점) - 부청 뒤편으로 중앙도매시장 건설, 중앙대로 형성 1946. 03. 31 - 부산제1공립국민학교에서 남일국민학교로 개칭(1912. 04. 01 개교) 1946. 04. 07 - 부산제7공립심상소학교에서 동광국민학교로 개칭(1921. 09. 01 개교) 1949. 08. 15 - 부산시 승격 1950. 04. 15 - 메리놀수녀회의 진료소 메리놀수녀병원 개원(현 가톨릭센터) 1951. 09. 01 - 중부출장소 설치(14개동, 남포동 6가 63번지)

1953. 11. 27 - 부산역전 대화재 발생

1957. 07. 25 - 부산시 구제실시에 따라 중구 설치(10개동)

1960년대 초 - 신우정판, 동양정판, 자문정판이 효시가 되어 동광동 인쇄 골목 형성

1962. 11. 11 - 신축 병원 준공 후, 주한미군기념 메리놀수녀병원으로 변경 1963. 01. 01 - 부산직할시 승격

1964. 03 - 메리놀병원 신축 병원 이전 개칭

1964. 12. 06 - 구 중구청사 건립(남포동 6가 63번지)

1968. 03 - 부산데파트 착공

1969. 11. 15 - 부산데파트 준공(부산지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상가 우선 개장, 1971년 상층부의 주거부분 완공)

1977. 01. 01 - 동광동 일부가 광복동, 남포동에 편입

1977 - 동광동 당산제 현 제당 건립

1879. 07. 07 - 코모도호텔 개관

1982. 05. 01 - 법정동 경계 조정(동광동 1가 일부가 광복동 1가, 남포동 1가로 편입) 1983 - 부산유치원 폐원 1985. 04. 01 - 중구청 임시청사 이전(중앙동 4가 87번지) 1989. 10. 21 - 보건소 이전(중구청사 내) 1988. 04. 01 - 중구청 현청사 건립 이전 1988. 05. 01 - 지방자치구제 실시 1993 - 40계단 기념비 설치 1995. 01. 01 - 부산직할시에서 부산광역시로 변경 1995. 08. 15 - 백산기념관 개관 1996. 03. 01 - 동광국민학교, 남일국민학교가 각각 동광초등학교, 남일초등학교 로 개칭 1998. 01. 20 - 부산광역시청사 연산동으로 이전 1998. 09. 01 - 광일초등학교 개교(동광초, 남일초 통폐합) 1999. 01. 01 - 18개통 73개반에서 14개통 58개반으로 조정 2001. 12. 27 - 부산중부경찰서로 개칭 2003. 02. 12 - 40계단문화관 개관 동광동주민센터 이전

2004. 04 - 40계단 문화 관광 테마 거리 조성

2004. 06 - 40계단, 부산광역시 종합 평가 최우수 거리 선정

2006 - 40계단, 건설교통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지정

2010 -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 지원

2016. 08. 01 - 양정모 거리 조성(동광동 5가 3-9번지 선수의 생가)

2017. 07. 04 -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준공

2019. 04. 02 - 동광동5가 일원 새뜰마을사업 ‘해뜨는 빛우물 사업’ 선정

2022. 06. 17 - 동광동주민센터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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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마을 사전 18
・김귀연 #메리놀병원 58년의 역사를 지닌 메리놀병원. 옛날(약 60여 년 전)에는 무료로 어려 운 사람들에게 진료를 해주는 가톨 릭계 병원이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배가 너무 아픈데 도저히 낫질 않아서 새벽 일찍 추운 겨울날 언 니가 담요를 뒤집어씌우고 줄을 서 서 당첨되어 진료를 받은 기억이 난다. 기억지도 주민들의 기억으로 동광동 지도 를 그려보았다. 실제 지도와는 다를 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곳 이나 특별한 추억이 있는 장소 를 중심으로 나만의 지도를 만 들고, 그 속에 담긴 소중한 이야 기를 적어보았다.

기억지도

19

김숙이

#오륙군병원

엄마가 여수 뱃머리(지금의 부산항만공사로 옛 연안여객터미널, 여수 배가 정박 해서 불렀던 말) 쪽에서 식당을 했는데 상이용사가 오면 술도 주고 돈도 미 리 줬어요. 부산시청 옆에 오륙군병원(한국전쟁 당시 제5육군병원)이 있어서 상이용사가 많이 다녔는데, 그 당시는 상이용사에 대한 지원도 없었고, 병원을 나오면 갈 데가 없으니까 여기 근처에 짝을 지어서 다녔죠.

1960년대 초반까지는 아마 그랬던 거 같아요. 1부

#전차

서면 혜화여자중학교에 다닐 때 전차를 타고 다녔다. 3학년 때 전차가 없어졌다. #부산역 화장실 여기서 태어나고 동광국민학교(현 용두산 공영주차장)를 다녔다. 그 당시에 는 화장실이 없어 부산역 (당시 위치는 현 무역회관 자리)까지 화장실을 다 녔다. #해군본부 놀이공원이 없어서 해군본부 앞에서 대나무로 낚시를 하고 놀았다.

마을 사전 20

기억지도

21

#음식점

산동관, 옛날에는 샥스핀 요리가

인기 있었다. 삼거리추어탕, 한 그릇 9,000원

#먼나무

도시 까마귀는 먼나무 열매를 좋아

하는데 산동관 앞 먼나무에 까마귀

가 자주 와 먹고 배설을 해서 산동

관 주인은 식초를 뿌려 까마귀를

쫓는다. 사실 까마귀가 익조라는데

안타깝다.(음식점의 위생을 생각해야 하

기에 산동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된다.)

・김숙희
22
1부 마을 사전

기억지도

23

#논치시장

과거 논치시장에는 가운데 하천을

두고 양쪽에 가게들이 있었는데 주

로 먹거리(야채, 생선, 해산물)를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그 후 하천을 덮

은 공사로 옛날의 불편했던 모습을

탈피해서 무척 깨끗하다.

김순자
1부 마을
24
사전

기억지도

25

#메리놀병원

내가 어릴 적에 자주 다니는 병원

지금도 다니고 있음.

#우리 동네

이곳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

김윤자
부 마을 사전 26
1
27
기억지도

28

1부 마을 사전

#천막촌

덕원중학교, 고등학교 밑에 집들이

있었다. 판자촌 슬레이트집들이 많

았고,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 거기

천막집이 많다 보니까 집이 날아가

고 196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

때 덕원공고 (현 부산디지털고등학교)

있는 쪽 동네에 슬레이트집을 먼저

지었어요. 나라비 (나란히) 로 만든

집. 갈 데가 없어서 덕원공고 운동

장에 천막을 조금 짓고, 슬레이트집

이 지어질 동안에 그 안에서 생활하 고 산에서 나무를 해와서 밥을 해서 먹고 그런 기억이 나요. #동광국민학교 도로변 큰길 현재 중구청 밑으로 내려오면 동광국민학교 가는 길

이영숙

기억지도

29

임혜자

#복병산

20년 전에 복병산에 사람들이 몰

래몰래 들어갔는데, 그때까지는 복

병산에 아무도 못 들어갔어요. 지 금 수국이 있는 자리가 자갈밭이었

고, 군데군데 구덩이가 있고 군인

들이 있었어요. 어른들 말씀으로는

거기서 옛날에 왜적이 들어오면 막

아내곤 했었대요. 1부 마을 사전

30

기억지도

31

#오름소공원

폐가를 철거하고 오름소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폐가 4가구를 철거하고 운동 쉼터

만들었다.

조말숙
32
1부 마을 사전
기억지도 33

34

1부 마을 사전

천은순

#굴집(방공호)

예전에 굴집 앞에 ‘얼음’이라고 붙

어 있었어요.

1970년대 초 냉장고가 없던 시절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사러 다녔다.

바늘로 얼음을 깨서 미숫가루도 타

먹고 수박화채도 해서 먹었다.

1980년 정도 차츰 집집마다 냉장

고가 생기니까 얼음집이 없어지고

생선 파는 집으로 바뀌었다.

#마이크로버스

1972년 즈음 중학교 때 마이크로

버스가 생겼다. 대신동에 있는 계

성여중에 다녔기 때문에 운동장(대

신동)에서 산복도로 가는 버스로 메

리놀병원 앞에서 내릴 때 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빠져나오니까 시계

유리, 바늘이 다 없어지고 껍데기

만 차고 있었다. 그런 경우를 두 번

이나 경험했다.

기억지도 35

#인쇄 골목

동광동 5가 인쇄 골목 주변 계단 많

은 곳에 일본식 집이 있다.

최영희
1부 마을 사전 36

기억지도

37

황춘록 #남성초등학교 약 20년 전쯤 남성초등학교 체육관 남성-남일(국민학교) 배드민턴 친선게 임 40대 여자 복식 1등 한 것이 기억에 남음. #중구청 중구청장 선거한다고 여성회장과 한복 입고 선거운동을 한 기억이 남. #메리놀병원 119에 실려 응급실 간 기억 #300계단 민주공원 운동하러 가면서 계단을 세면서 올라가는 곳 296~7계단 #논치 정월대보름날 찰밥을 줘서 맛나게 먹고 그게 고마워서 찬조금도 낸 게 인 연이 되어 가입도 했다. 김숙희 회장님 등 모든 회원들의 단합된 모습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날까지 몸담고 있으며 자그마한 자원봉사 도 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곳! 그로 인해 오늘 여기까지 왔다. #논치텃밭 고추, 호박잎, 깻잎. 부산에 온 지 약 50년이 됐지만 직접 길러서 수확해 먹어 보기는 처음이라 기억에 남음. 1부 마을 사전 38

기억지도

39

기억사전

동광동의 주요 장소에 주민기자

단의 이야기를 더해 보았다. 그

러자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 는 선명하고 생생한 기억이 덧 대어져 풍부한 기억사전이 완성 되었다. 1부 마을 사전

40

#피란민 한국전쟁 때 전국 각지에서 온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천막촌이 형성되었다. 주민들의 기억에 따르면 전쟁고아들을 위한 보육원이 동광 동에 있었는데,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되어 복도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고 한다. 현재도 파란 지붕 집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1959년 9월, 사라 호 태풍으로 당시 덕원공고 아래에 형성된 천막촌이 큰 피해를 보았다. 이후 천막촌을 슬레이트집으로 정비하였다.

김귀연 최영희 이영숙

기억사전

부두가 있고 공동어시장이 있 다 보니까 일할 데가 많잖아 요. 그분들이 정착을 많이 했 었죠. 피란민들도 많이 와서 국제시 장에서 장사도 하고. 그 당시 에 먹고 살 거리가 많았어요. 동광동에는 소쿠리 장사들이, 그런 걸 많이 팔러 다녔거든 요. 이고 다니면서 파는 장사 를 했어요. 41

42

1부 마을 사전

#메리놀병원

1950년 4월 15일 지금의 가톨릭센

터 자리에 메리놀수녀회의 진료소

인 메리놀수녀병원으로 개원하였

다. 1954년 7월 29일 당시 부산지

역 주한미군의 지원으로 현재 병원

이 들어선 자리에 신축 공사를 시

작하였다. 워낙 환자가 많아 당시

줄을 서 있으면 수녀들이 직접 번

호표를 나눠주었고, 어려운 환자는

무료로 진료하였다. 김숙이

메리놀병원은 처음에 구호병

원이었거든요. 환자들이 줄을

쫙 서면 수녀들이 급한 환자인

지 보면서 딱지(순번을 위한 번호 표)를 나눠줬어요. 그때 메리놀

병원 약이 독일에서 온 약이라 굉장히 좋았어요. 환자들이 너

무 많아서 줄을 밑에까지 쫙

섰어요.

#300계단

동광동에는 유달리 계단이 많은데, 유명한 40계단 외에도 메리놀병원

옆으로 300계단이라 불리는 계단

이 있다. 원래는 나무로 만들어졌

으나, 정비하여 현재에 이른다. 주

민들의 말에 따르면 공사를 하면서

계단 수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영숙

메리놀병원 옆 계단이 옛날에 는 나무계단이었어요. 그래서

비가 오면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미끄러졌

기억사전

김숙희

어요. 공사하기 전 나무계단일 때는

297개였는데 지금은 정확하게

296계단이에요. 300개가 안

되는데 사람들이 300계단이라 고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43

#방공호

일제강점기 당시 전쟁에 대비해 일본인들을 위한 방공호를 곳곳에 뚫었

는데, 동광동에도 세 군데가 발견되고 있다. 가장 큰 규모는 동영로

13-3에서 17 사이에 있는 250평 규모의 방공호다. 방공호에는 해방

이후의 귀환 동포, 한국전쟁 피란민들이 생활했으며 23가구가 살았다. 방공호 입구에서 한 거주민이 1970년대에는 얼음을, 1980년대에는 생 선을 팔았다고 한다.

조말숙 천은순

1984년도에 동광동으로 시집와서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사람들이 방공호 앞에 좌판을 놓고 장사했었어요. 갈치를

사러 갔었는데 파는 할머니가 안 계셔서 이웃 주민한테 “고기 오늘 안 파나 보네요?” 물었더니 방공호 안으로 들

어가 보라고 했어요. 칸칸이 방이 있고 으슥하고 무서웠는 데, 안에서 젊은 청년들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 었어요. 방공호 안에 당시 아들하고 할머니가 살았다고 했

어요. 그 안에는 화장실도, 전깃불도 없어서 촛불을 켜두 었었죠. 생선 팔기 전 1970년도쯤에는 얼음 장사를 했었어요. 방 공호에 살면서 그 입구에서 장사했었던 거죠. 얼음을 팔아 야 하니까 방공호 안에 냉장고가 있었어요. 우리는 어릴 때 냉장고 있는 집이 많이 없어서 얼음을 다 사서 먹었죠. 방공호 앞에 ‘얼음’이라고 쓰여 있었던 기억도 나요.

동광동의 다른 방공호 ˙ 동영로 20-1, 비교적 칸이 좁다. 무기나 중요 서류와 탄약 보관 용도로 추정된다. ˙ 샘길 30번길 6-13,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군 부산요새사령부 사령관 저택으로 가족 대피용으로 추정된다.

1부 마을 사전 44
기억사전 45

#복병산 공원

복병산은 중구 대청동에 있는 산으로 주소지로는 동광동에 속해있지 않

지만, 주민들에게 매우 친숙한 곳이다. 해발 고도 49m이며 용두산과 함 께 초량왜관이 있던 장소로 개항 후에는 일본인 공동묘지로도 이용되었

제가 어릴 때 복병산에 군인초소가 있어서 놀러 갔다가 군

인들이 밥하는 걸 목격했어요. 무를 제대로 씻지도, 자르

지도 않고 그냥 솥에 집어넣어서 깜짝 놀랐어요. 부대가

아니라 초소처럼 군인 몇 명만 있었어요. 거기 복병산을

다. 1924년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촬영소가 있기도 했으며 일제강점 기에 건립된 복병산 배수지가 있다. 현재는 복병산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주민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천은순 최영희

지키는 집이 있었는데 어릴 때 ‘주인 온다!’고 하면 다 도망 가고. 잡히면 혼나니까 거기서 놀다가 도망 다니고 했었어 요. 놀이터였죠. 지금은 복병산 배수지를 다 막아놨지만 어릴 때는 올라가서 건너가고 그 위로 뛰어다녔어요. 복병산에 팽나무가 있는데, 왜적이 들어오면

다는
있고
이야기가
마을 사전 46
징 소리가 난
이야기도 있어요. 옛날에는 복병산에 포부대가 있어
산성처럼 전쟁을 할 수 있었어요. 거기서 죽은 사람도
그래서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팽나무가 운다는
있었지요. 1부

김숙이

원래는 중구청도 복병산이었어요. 중구청이 들어서기 전

에 야산처럼 되어있었고 집이 아주 많았는데, 중구청을 짓

기 위해 다 이주시켰죠. 옛날에 거기에 어린이놀이터도 있

었고, 건재상도 있었어요.

김숙희

복병산을 1994년쯤인가 중구청 건축과에서 공원화한다고

세부 사진을 찍으라고 해서 제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들어 갔더니 나무와 잡초가 너무 우거져있어서 여름에 모기가

많았어요.

기억사전

・1910년대 용두산과 복병산의 전경, 출처:『개항백년』, 부산광역시, 1976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47

#당산제 제당

동광동 5가 16에 있으며 주민들은 ‘논치당산’ 혹은 ‘산지당(산제당)’이라고

부른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음력 1월 14일 자정에 마을 공동으로 제

를 지낸다. 주민이 제관을 맡아 제당을 관리하고 있다. 동광동에 집이 생 길 무렵부터 있었다고 하나 지금 있는 제당은 1977년에 새로 만들어졌 다. 제당 오른쪽 옆인 대동맨션 쪽으로 오래 된 버드나무 한 그루가 뻗어 있다. 김숙이 옛날 산지당이 있었을 때는 동광동이 정말 살기 좋았어요. 저걸 뜯어버리고 1977년에 새로 짓고 나니까 동광동이 힘 들어졌다고 해요. 당시 김현옥 시장 때 뜯었는데, 뜯고 나 니까 동광동에 우환이 많이 생겨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했어요. 옛날에 한 아주머니가 집 밖으로 나왔다가 할머니가 하얀 소복을 입고 울고 있는 걸 봤대요. 그래서 김현옥 시장이 당산을 보러 왔을 때 할머니 울음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이

왔어요. 그런데 새로 짓고 나 니 명기가 없어졌다고 했어요.
안에
원래
공양주 할머니가 있었는데 그 할머니 가 우물을 청소하다가 사고를
물은 제당
1부 마을 사전 48
야기도 있고. 그 할머니를 당산 할머니라고 불렀어요. 그 길로 시장이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올려서 다시 지었어요. 제를 지낼 때, 시장도 오고 다
당산
우물이 있어요.
당산을 지키는
당했다고 했어요. 지금도 우
안에 남아있어요.

#논치시장

지금의 동광길인 영선고개 중간 대동맨션 옆, 부원맨션 뒤쪽 일대를 논

치라고 불렀다. 물이 풍부한 곳으로 중구지역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가능했기 때문에 논치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복개되기 전에는 하

천이 흘렀고 양옆으로 논치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김숙이 최영숙

대동맨션 자리에 옛날에는 천막촌이 많았고, 대동맨션 옆

계단 밑에는 공중화장실이 있었어요. 천막촌에 살던 사람

기억사전

이영숙 옛날에 논치시장 쪽에 다다미방이 많았어요. 49

조말숙

들이 거기 화장실을 갔었어요. 계단 아래로는 논치시장이 있었지요. 그때 논치시장이 아주 컸어요. 계단 위에서 끝 까지 양옆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으니까요. 옛날에는 냉장고가 없고, 서민이 많고 하니 거기서 시장을 많이 봤지요. 거기를 들어가 봤는데, 현관에서 안방까지 복도식이었고, 미닫이로 돼 있어서 문만 열면 큰 방이 되는 구조였어요.

#동광국민학교와 남일국민학교

1921년 부산제7공립심상소학교로 개교한 동광국민학교는 중구 대청동

1가에 있었고, 지금은 동광국민학교 부지를 용두산공원의 공영주차장 으로 사용하고 있다. 1912년 부산제1공립심상소학교로 개교한 남일국 민학교는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4가에 있었던 공립 초등학교이다. 동 광국민학교와 남일국민학교 모두 1998년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했고 두 학교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딴 광일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다. 광일초등학 교는 남일국민학교의 건물을 확장하여 현재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두 학교 모두 동광동에 속해있지 않지만, 주민들 대부분이 동광국민학 교를 다녔다. 이외에 남일국민학교를 다니거나 영주동의 봉래초등학교, 일부 소수가 사립인 남성초등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동광동에는 워낙 동광국민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많아 남일국민학교 학생들은 동광국 민학교에 대항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 한다.

마을 사전
1부
50

이영숙

남일은 산에 사는 사람들이 많고, 동광은 저지대라 약간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는 인식이 옛날에 있었어 요. 제가 덕원공고 근처 위쪽에 살았을 때, 봉래국민학교 (영주동에 있는 봉래초등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 때 단체로 동 광국민학교로 옮겼어요. 그전에는 동광국민학교는 밑에 사는 사람들만 갔지, 위에 사는 사람들의 일부는 봉래로 배정했었거든요. 워낙 인구가 많아 오전, 오후반까지 있었 어요. 그때는 어려운 시기다 보니까 동생들 돌본다고 학교 도 안 오고 해서 학교에 친구가 별로 없었어요. 학교를 못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천은순 남일하고 동광이 약간 라이벌이라 노래도 있었어요.

만들었어요. 동광동으로 이사를 오니까 주변 아이들이 다 동광국민학교에 다니는데 우리 동생하고 저만 남일이라서 많이 놀렸어요. 그래서 남일에 서 지은 노래를 부르면서 대응을 하고 그랬죠. 1968년에 서 70년 사이에 불렀던 노래에요. 기억사전 51
“동동 떠내려가는 동광 거러지(거지). 날만 새면 깡통 차고 남일학교로.” 이런 노래인데 남일에서
・1982년 용두산공원 항공사진, 공원 옆으로 지금은 철거된 동광국민학교의 교사와 강 당(동그라미 안)이 보인다. 1부 마을 사전 52
53
#40계단 피란민 천막촌 아래 설치되어, 애환의 역사를 가진 40계단 일대도 역전 대화재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지금의 40계단은 당시의 위치와 달라졌 는데, 약 25m 정도 대청로 방향으로 옮겨서 새로 만들어졌다. ・1950년대, 역전 대화재 당시 40계단, 출처: 『개항백년』, 부산광역시, 1976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영숙 40계단 바로 앞에 부산역이 있었어요. 기억사전

54

1부 마을 사전

#역전 대화재

1953년 11월 27일 밤, 영주동 판자촌에서 발생한 화재로 동광동 일대

가 모두 잿더미로 변했으며 1910년에 만들어진 부산역과 부산우편국도

당시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그 외, 간해루, 부산철도호텔(1912년 개업 한 국영호텔), 부산공화당(1928년 설립된 일제강점기 부산의 문화공간)도 모두 소 실되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에비스 약국은 불에 그을렸지만, 그 건물 은 지금도 남아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역전 대화재 때 천막촌을 태우려고 일부러 불길을 늦게 잡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 피해가 컸으며 화재 진압도 늦 어졌다. 3천여 가구가 소실되었고, 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김숙이 1953년, 제가 아기였을 때 불이 났었는데, 용두산공원 쪽 에도 불이 번졌어요. 지금 중부경찰서 옆에 당시 여경찰서 가 있었어요, 여자경찰서. 그건 안 탔다고 이야기를 들었 어요. 지금 하나은행 쪽이 부산역이 있던 자리였어요. 바 로 그 앞으로 아카데미 극장(당시 부산역 맞은편에 있었다고 함), 충무극장이 있었어요. 동광동 일대가 다 불이 났었죠. 몇 날 며칠을.

・1954년 부산 중구 동광동의 역전 대화재 후 조성된 천막촌과 부산세관,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공유마당, CC BY ・1953년 11월 발생한 부산 역전 대화재 이후 현 영주동 코모도호텔 일대 모습,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공유마당, CC BY 기억사전 55

동광동이니까. 그 맞은편에도 대교시장이라고 있었어

지금도 흔적은 남아있어요. 연안부두 쪽 지금의 롯데

자리에도 전부 시장이었고, 현재 몇 집은 남아있

#동광시장과 대교시장 동광동에는 일제강점기에 본정시장이라고 하는 공설시장이
데파트 자리에
간선도로
데파트가 준공된다.
맞은 편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주변에 있던 대교동 가설시 장, 통칭 대교시장으로 이전하였다. ・1953년 부산 중구 동광동 부산데파트 뒤 노점상들,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공유마당, CC BY 김숙이 부산데파트
요.
백화점
어요. 1부 마을 사전 56
있었다. 부산
있었는데, 해방 후에 동광시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68년 부산시
확장 계획으로 시장이 철거되고, 1969년 부산
부산데파트는 주상복합으로 상층에 있는 주거 공간 은 1971년에 공사를 완료했다. 1968년 부산데파트 공사 시작과 함께 동 광시장은
자리에 시장이 있었어요. 전매청 쪽도 지금은
・1968년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시장현대화를 위하여 동광시장터 부산데파트를 건립하 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 『부산의 상공업 100년』, 부산상공회의소, 1989 / 한국향 토문화전자대전 기억사전 57
�호선 중앙역 남성초등학교 복병산 ��계단�거리 인쇄�골목 농협 남성여자 고등학교 대청큰마루터 기상전시관 복병산 체육공원 부산광역시 중구문화원 영선고개 동광길 옛 ��계단 마을탐방마을탐방 1부 마을 사전 58
중구보건소 중구청 메리놀병원 코모도호텔�부산 대동맨션 아파트 부산중부 경찰서 부산요새사령부�사령관 관사�방공호�벽 피란민 구호주택�터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위치�안내판 선교사�어을빈 사택�터�및�축대 우물 방공호 사형집행장�터 에비스�약국�터 양정모�거리 논치시장 해관장�관사�터 탐방지 마을탐방 59

탐방 대장 | 김한근 소장(부경근대사료연구소)

탐방 대원 | 김숙이, 김숙희, 김순자, 김윤자, 서정심, 이영숙, 임혜자, 조말숙, 천은순, 최영희, 황춘록

탐방 일시 | 2022년 9월 17일 11시 30분 ~ 12시 30분(1시간 소요)

탐방 날씨 | 태풍의 영향으로 비 소식이 있어 걱정했더니, 해가 반짝하고 나타났다. 걷기에는 조금 더운 가을 초입이었다. 탐방 경로 | 동광동 다목적 커뮤니티센터 – 부산요새사령부 사령관 관사 – 피란민 구호주택 – 우물 – 조선키네마주식회사 – 해관장 관사 – 선교사 어을빈 사택 및 축대 – 방공호 – 영선고개 – 사형집행장 – 간해루 – 에비스 약국 – 양정모 거리 – 논치시장 – 옛 40계단 (※현재는 대부분 터만 남아 있음.) 김한근 탐방 대장의 강의를 들으며 동광동에 알려지지 않은 곳이 ‘이토 록’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민기자단들. 매번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서 프로그램에 임했지만, 이날의 열기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탐방보다 강의를 더 듣고 싶어요! 강의가 정말 유익해요.”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 듣는 것만큼 직접 보는

일은 기자단에게 꼭 필 요한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씩씩하게 출발했다. 더위와 배고픔 과 관절의 고통을 이겨낸 주민기자단의 마을탐방을 따라가 보자. 1부 마을 사전 60
샘길 30번길 6-13 동광동 새뜰마을현장지원센터로 사용하는 다목적 커뮤니티센터 뒤로 역 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부산요새사령부 사령관 관사 시절 사령관 가족 의 방공호가 있었다. 센터를 만들면서 방공호를 뜯었지만, 벽면 일부가 남 아있다. 부산요새사령부 사령관 관사는 1890년대 러시아영사관으로 사 용되다, 1924년 이 건물 2층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발족되기도 하였 다. 해방 후 미군 장교클럽으로 사용되다 역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부산요새사령부 사령관 관사 방공호 벽 마을탐방 61
샘길 22-18 앞 처음 피란민들이 살던 집은 2~4평으로 몸만 누울 정도의 크기였다. 전쟁 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을 포함하여 공무원, 교사를 위해 1955년 6평 크기 의 구호주택을 지었는데 지금은 흔적만이 남았다. 이 구호주택은 시조 시 인 이영도가 남성여중 교사로 재직하던 시기 살던 집이다. 피란민 구호주택 터 1부 마을 사전 62
샘길 28 러시아영사관이 있던 시절부터 사용한 우물로 120여 년이 되어간다. 샘길이라는 도로명이 의미하듯 동광동에는 곳곳에 물길이 흘러 우물 이 많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우물은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우물: 샘길 18-8, 샘길 21, 샘길 28, 샘길 31, 동광길 91번길 8, 동광길 91번 길 8-1, 동광길 91번길 10-1, 동광길 91번길 12-1, 동광길 91번길 8, 동광길 91번길 12-1, 동광길 91번길 8-1 우물 마을탐방 63
샘길 29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부지는 바닥 의 안내판부터 다목적 커뮤니티센터 까지 이어지지만, 사유지에 안내판 을 설치하기 어려워 이곳에 설치하 였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위치 안내판 1부 마을 사전 64
중구로 124-12 외국인 해관장(지금의 세관장)이 있던 시기, 해관장 관사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동광아파트가 들 어섰다. 해관장 관사 터 마을탐방 65
중구로 151 일대 코모도호텔 자리에는 근대개항기 이후에 들어온 의료 선교사 어을빈(동광 동에 전킨기념병원과 영선고개에 어을빈의원을 개원하였고 1935년 사망 후, 복병산에 묻 혔다.)의 사택이 있었다. 1902년 북항 매축 때 지금의 메리놀병원 자리에 있던 산을 깎아 평지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이 닭을 키우며 살아서 ‘달구 동네’라고도 불렀다. 1941년에는 부산요새사령부가 오면서 이 일대에 사 령부 병사 막사가 있었고 관련 인물과 건물이 많다. 부산요새사령부 진입 로가 축대 위에 있었지만, 지금은 코모도호텔로 들어가는 길은 없고 메리 놀병원으로 연결되는 윗길만 있다. 축대 앞에는 피란민들이 집을 짓고 살 았으나 역전 대화재 때 전소되었다. 선교사 어을빈 사택 터 및 축대 1부 마을 사전 66
동영로 17 지금은 오른쪽에 집이 들어서면서 방공호가 막혀있지만, 예전에는 23가 구가 거주했다. 집이 들어서면서 막힌 곳이 많다. 피란민들이 거주할 때 식수를 받아 놓던 곳, 환기구 등 삶터로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2020년 까지 거주했던 마지막 한 사람이 퇴거하면서 현재는 비어있다. 방공호 마을탐방 67
집이 들어서며 벽이 막혔다 벽 두께로 견고함을 확인할 수 있다. 방공호 1부 마을 사전 68

마을탐방

환기구 계단 오른쪽 집부터 다음 골목까지 방공호 가 이어져 있어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계단 끝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축대 가 있다. 69
・1908년경 부산 중구 동광동 영선고개 위편 일대, 출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공유마당, CC BY 동광길 초량교회나 부산진교회의 역사를 찾아보면 초량 영서현 혹은 영선현에 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영선현은 영선고개를 일컫는다. 이 길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중심지로 주변에 스미스를 비롯한 선교사 집이 많았다. 영선고개 1부 마을 사전 70
동광길 143 공터는 초량왜관 시기 범죄인을 사형 집행하던 곳이면서 후에 영도대교 공사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 부지가 되었다. 토요코인 호텔을 지으면서 사형집행장 터와 바로 옆의 붉은 벽돌 건물이 함께 무너졌다. 아마 코모 도호텔에서 부두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 대피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 는데 건물이 무너졌을 당시 아래쪽에 엄청난 크기의 공간이 확인되었다 고 한다. 현재는 자갈과 모래를 부어서 막아놓은 상태다. 사형집행장 터 마을탐방 71
논치시장 동광길 93번길 길 가운데 배수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 물이 흘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물이 흐른 덕분에 양쪽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논이 있는 언 덕이라는 의미로 논치라고 불렀는데, 바로 앞바다에 있는 정치망 어장 을 논치어장이라고 했다. 1부 마을 사전 72
옛 40계단 동광길 38 역전 대화재 이후 소실되어 원래 계단에서 25m가량 남쪽으로 이전 복원 되었다. 원래는 지금 유진봉투 건물의 절반이 당시 계단이었을 것으로 추 측된다. 마을탐방 73
돌 표면에 피부가 벗겨진 듯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정으로 깼을 때와 차 이가 있다. 석축에 남은 흔적을 통해 화재의 범위를 알아볼 수 있다. 석축에 남은 역전 대화재의 흔적 ・불에 타지 않은 석축 ・불에 탄 석축 1부 마을 사전 74
대청로 132, 금생약국 외벽에 층마다 띠를 덧대는 양식으로 복병산 기상대에서도 볼 수 있다. 사라센 양식 마을탐방 75

탐방 후기

#방공호 대형 방공호(땅굴)는 내부에 들어갈수록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다. 일 본 군부대가 피할 수 있도록 격자형으로 만들어졌고 안전한 대피를 위 해서 출입구는 2개다. 동네 한가운데 오늘날까지 자리 잡고 있다. 역사 를 바로 알리고 바로 세우는 것은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의미 있는 일이 라 방공호가 잘 보존되어서 많은 이들이 방문했으면 한다. -조말숙 방공호(굴집)는 땅속에 굴을 파서 미로처럼 수십 개의 칸을 만들었고 윗 쪽에 칸칸이 네모난 구멍을 내서 환기를 할 수 있게 했다. 6·25 동란으 로 좁은 공간에 100명의 피란민들이 기거했던 것을 보면서 자유가 얼마 나 소중한 것 인가를 새삼 알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김순자 #사형집행장 터

사형을 당했는지는 모르 겠지만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고 마음 아프다. -이영숙 #우물 동네에 산 지는 40년이 넘었지만, 우리 동네에 이렇게 샘이 많은지는 몰랐다. 현재에 아무리 수도시설이 잘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계속 퍼내 1부 마을 사전 76
사형장 터의 흔적이 뚜렷하게 있었다. 어떻게

어 샘의 물길을 살려주어야 한다. 퍼내면 퍼낼수록 살아나는 샘물에서 빨래 빨고 배추 씻으며 수다 떠는 여인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김숙희 #양정모 거리 레슬링 금메달 선수 양정모가 살았던 곳. 옛날에는 방앗간 집이었는데 지금은 방앗간 집이 사라지고 없다. 양정모가 살았던 방앗간이 동광동 사람들의 기억에서 되살아나면 좋겠다. -이영숙

#동광동 동광동은 골목길이 많고 언덕이 많다. 언덕집은 1층이 좁고 2층과 3층 이 크다. 예전에는 집이 좁아서 식구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제는 빈집이 많이 보인다. 동네가 예전처럼 활성화되어 인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김숙이 몰랐던 이 동네의 역사와 40계단,

또 한 아름답게 느끼게 된다. 고불고불해도 인정 넘치고 달동네같이 정이 많은 우리 동네도 다른 동네처럼 발전하고 더 나온 동네로 거듭나면 좋 겠다. -최영희 마을탐방 77
방공호, 샘터, 대화재, 천막촌 등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탐방하면서 너무 즐겁고 옛날에 고생하던 시절도
주민기자단이 직접 찾고, 그리고, 찍은 기록을 모았다. 개인의 기록인 줄만 알았던 앨범 속 사진이 훗날 사라진 마을의 흔적을 찾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모은 기록을 더해보니 나 - 가족 - 집 - 마을이 촘촘히 연결되어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옛날 앨범에서 찾은 추억 어린 사진과 이야기를 더한 옛날에 우리, 동광동 지금 우리 집, 과거에 살았던 집, 혹은 앞으로 살고 싶은 집의 모습을 직접 그려본 집의 기억 주민기자단의 눈에 비친 동광동의 현재를 사진으로 촬영한 요즘에 우리, 동광동
2부 주민기자단이 기록하는 동광동 이야기 김귀연 김숙이 김숙희 김순자 김윤자 이영숙 임혜자 조말숙 천은순 최영희 황춘록 주민기자단 활동을 마치며
김귀연 1952년생 1952~2012년까지 동광동 거주 내가 기억하는 동광동의 옛 모습은 전도관, 복병산, 기상대와 저수지 등이다. 기상대 저수지에서 국민학 교 때 방학 과제로 곤충채집을 하 곤 했다. 동광동은 나의 모든 기억 과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다. 태어 나서 자라고 학교에 다니고 결혼했 고 아이들을 끝까지 모두 여기서 길러서 결혼까지 시켰다. 동광동에 서 기록해보고 싶은 것은 물동이다. 옛날에 우리, 동광동 2부 80
1980년대 동광국민학교 운동회 마스게임. 앞에 보이는 곳은 1학년과 6학년이 있는 교 사로 전체 ㄱ자의 형태였다. 사진 속에 보이는 숲은 용두산공원이다. 김숙이: 돔이 있는 곳이 강당 건물인데 교무실이 아래층에 있었어요. 4학년 교실은 따로 있었고요. 김귀연 81
1980년 큰딸(사진 속 단발머리)의 첫 소풍 당시는 교복을 입었다. 대청공원으로 갔었다. 교복을 입을 때는 옷 깃이 때 타면 그것만 떼서 씻었다. 김숙이: 우리 때는 봄 소풍 가면 주로 구덕산에 갔어요. 2부 82
1980년 3월 큰딸의 입학식 김귀연 83
김숙이 1950년생
동광동 거주 동광동에는 메리놀병원이 있어 아 플 때 좋았다. 동광동 쫄쫄이 샘에 서 빨래하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었다. 산지당 우물에 할머니가 빠져 돌아가셨다. 그전에는 동광동 이 번화했다. 대동맨션 자리 위에 집이 있었고 9세대가 살았는데 무 너져서 지금은 도로가 되었다. 옛날에 우리, 동광동 2부 84
1950~1967년, 1978년부터
1981년 동광국민학교 가을운동회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이모,
쌍둥이 그리고 조카들 김숙이 85
큰딸과
메리놀병원 옆 300계단 공사 현장에서 2부 86

집의 기억

이 집에서 3대가 살고 있는데 사는 데 불편한 것 없는 행복한 집입니다.

현관 앞에는 큰 도로가 있는 곳이라 편합니다. 방에서는 버스 정거장이 보

이기 때문에 좋습니다.

김숙이 87

김숙희

1 2

옛날에 우리, 동광동 2부 88

1950년생 1983년부터 동광동 거주 복병산에 자주 갑니다. 옛날에 동 광동은 주택 수에 비해 인구가 많 고 계단도 많아 서민들의 삶이 한 눈에 보이는 동네였습니다. 동광동 은 우리 아이들 4남매가 자라고 학 교 다니고, 내 인생 전성기를 고스 란히 기록해 놓은 나의 삶터! 동광 동의 샘, 샘길, 물길, (현존하는) 우물 과 배수지를 기록해보고 싶습니다.

1 1988년 동광국민학교 운동회 달리 기, 아들이 1등 같지만, 사실은 4등으 로 달리는 중

김숙이: 보통 6명이 달리거든. 천은순: 3등까지만 줬으니까, 1등, 2등, 3등까지 도장 딱 찍잖아요. 저는 달리 기를 잘 해서 1등만 했는데 상품을 많 이 받아가니까 엄마가 진짜 좋아했어 요. 우리 막냇동생도 몸이 허약해서 맨 날 꼴찌만 했는데. 최영희: 우리 아들은 하도 뒤에 있어서 “니, 왜 그라노. 좀 앞에서 뛰어라.”고 하니까 “애들이 다 앞에 가잖아.” 이래 가지고 내가 할 말이 없었어요. 2 1988년 5월 10일 제16회 어버이날 기념 학예발표회

그때는 애들이 어버이날 선물로 공연 을 준비해 보여주는 거였죠. 옛날에는 강당에서 주로 학교 행사만 했지만, 요 즘에는 체육관처럼 사용하잖아요. 그때 는 운동은 당연히 마당(야외 운동장)에서 하는 거로 생각했어요. 김숙이: 동광국민학교 강당이 굉장히 컸어요.

김숙희 89
2부 90

4

3 김숙희

3 1993년 9월 18일 토요일 2시 부산중구청 강당에서 열린 중구민 가족노래 경연대회에 청실홍실팀으로 출전했다. 빨간 저고리는 김귀연 주민기자단, 위아래 핑크색이 김숙 희 주민기자단이다. 부부 동반으로 출전했고, 맨 앞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소년은 김 숙희 주민기자단의 막내아들이다. 벽면에 진행 식순이 붙어있고, 무대 뒤편에 선풍기 를 비롯해 상품을 쌓아두었다. 가족 노래자랑이라서, 부부 외에 가족 구성원이 한 사람 들어가야 했어요. 그래서 막 내아들 검정 정장을 입혀서 같이 나갔는데 아나운서가 까만 실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사진은 구청 직원에게 찍어달라고 부탁했어요. 또 숨은 비화가 하나 있는데, 남편이 청실홍실이라는 노래 가사를 몰라서 제 저고리 뒤에 가사를 다 적어놨어요. 그래서 시 선이 사선으로 조금 내려가 있죠. 밤마다 연습을 많이 했는데도 외우기가 힘들었나 봐 요. 너무 연습해서 중구 주민들의 민원도 들어왔어요. 잘라고 하면 노래를 한다고.

4 청실홍실팀은 장려상을 받았고, 상품은 리모컨 달린 선풍기였다. 지금 중구청과 변함 없는 모습으로 뒤로는 복병산 숲이 보인다. 그때 당시는 선풍기가 엄청 귀했어요. 선풍기 하나를 받아서 노란 저고리의 회장님 이 수고가 많으셨기에 드렸어요. 그때는 상품이 하나라도 불만이 없었어요. 단합도 잘 되고, 물자는 귀했으니까.

91
1989년 어느 봄날, 코모도호텔 거북선 앞 코모도에 옛날에는 큰 분수하고 거북선을 만들어뒀어요. 지금은 없어지고 주차장으로 쓰고 있죠. 옆에 친정어머니와 언니는 지금 은 돌아가셨고 가운데 키 큰 여자가 저입니 다. 부산 딸 집에 놀러 온 거죠. 그때는 놀러 가면 주로 자갈치나 초읍 어린이대공원에 동물원이 있으니까 구경나가면서 코모도호 텔 거북선 앞에서 사진을 찍었어요. 2부 92

1993년 9월 17일 10% 소비 절약 및 건전 가정 가꾸기 사례 발표회 후원은 중구청이지만 장소는 지금은 없어진 새부산예식장이었다. 그때는 물자 절약이나 알뜰하게 살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던 때였어요. 건전 가정이 라는 것은 주최 측의 이름에도 나와 있듯이 똑바로 살자는 뜻이지요. 우리 동네 가까이 에 당시 유흥가가 많았잖아요.

김숙희 93

집의 기억

우리 집 앞마당은 3개 노선의 버스가 휙휙 달릴 정도로 넓습니다. 성냥

갑 만해도 우리 가족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4남매를

공부시키고 결혼시킨 공헌이 매우 큰, 크기는 작아도 저택이 부럽지 않

은 우리 집입니다.

2부
94
김숙희 95
2부 96
요즘에 우리, 동광동 1 3 1 샘길 21, 버려진 옹달샘 2 샘길 31, 이런 속박에도 불구하고 안으로 흐르는 물 3 동광길 91번길 10-1, 아! 옛날이여. 4 복병산공원 저수조, 곧 우리의 생명으로 이어질 물 2 4 김숙희 97
동광동 하늘의
2부 98
거미줄
김숙희 99

김순자

1973년 용두산공원에서

옛날에 우리, 동광동 2

1940년생 1990년부터 동광동 거주 과거에 동광동에서 논치시장을 이 용하는 주민들과 장사하는 상인들 의 열심히 일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들, 딸을 결혼시키고 내 생애에 제일 오래 산 제2의 고향 입니다. 옛 역사와 추억이 있는 원 도심에 살고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 낍니다.

시어머니와 딸(모자 들고 있는 아이)과 아들 그리고 조카들, 서울에서 놀러 온 시누 의 딸과 함께, 용두산 팔각정 공사를 하 고 있을 때이고 용두산 타워가 아직 올 라가기 전이다.

부 100
김순자 101
1979년 즈음으로 추정 동광국민학교에 있던 이승복 동상에서 2부 102
1974년 중앙대로 바로 뒤편에 시민관극장(현 한국투자증권)과 오른쪽엔 부산데파트가 보인다. 오리엔트 시계 광고가 크게 걸려 있다. 천은순: 우리 시동생이 오리엔트 시계에 다녔었어요. 그래서 형수가 취직했다고 와이셔 츠를 쫙 다려놓고 입고 가라고 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오리엔트 시계회사가 컸거 든요. 김순자 103

집의 기억

대동맨션은 내부가 모두 다르다. 81년도에 준공된 이곳도 언젠가 역사

되겠지.

2부 104
김순자 105
김윤자 1957년생 1990년부터 동광동 거주 동광동에서 자주 가는 장소는 복병 산이고 내가 기억하는 동광동의 옛 모습은 집이 쫑쫑쫑 붙어있다는 것 이다. 지금 동광동은 중심지며 살 기 좋은 곳이라 생각한다. 동광동은 아니지만, 예전 우리 집 과 아이들 학교 사진입니다. 옛날에 우리, 동광동 2부 106
김윤자 107

집의 기억

내가 원하는 집을 그려보았습니다. 집이 너무 작아 할 일은 많은데 무엇

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2부 108
김윤자 109
이영숙 1952년생 1957년부터 동광동 거주 동광동 옛 모습은 판자촌이 떠오른 다. 판자촌이 사라호 태풍으로 다 날아 가버리고 슬레이트집으로 바 뀌었다. 또 전도관이 떠오르는데 교회인지 지금도 궁금하다. 동광동 에서 새마을회원 분들하고 봉사 활 동하면서 동사무소와 인연이 깊다. 동광동을 위해서 많은 봉사 활동 을 하면서 느낀 점을 기록하고 싶다. 동광동에서 흘러온 나와 아이들의 시간 옛날에 우리, 동광동 2
110
이영숙 111
그 당시에 유랑극단 방송을 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관광객에게 알려줬어요. 최영희: 40계단이라고 외지에서 와도 여기에 먹거리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아쉬워요. 2부 112
2002년 즈음 제3회 40계단 행사 동광동 새마을부녀회장으로 참여했어요. 한국전쟁 당시 물동이에 받아 길어 다녔던 것을 재현한 모습이거든요. 40계단 문화 축제를 살리기 위해, 전국노래자랑이나 작곡가 들이 오면 우리가 알리려고 노력했다. 여기에 40계단 축제가 있으니 꼭 보고 가시라고
저는 한마음 걷기대회 등 다양한 행사에 나가 봉사 활동도 많이 했어요. 이영숙 113
집의 기억 -동광동 슬레이트 집 지붕 위에 화분들 나에게 추억이 생각나는 집 -지금 집은 나의 편안함을 지켜주고 따뜻한 보금자리 상추는 냠냠 맛있고, 고추밭에 고추가 주렁주렁 고추는 아삭아삭 맛 있다. 2부 114
이영숙 115
임혜자 1943년생 1977년부터 동광동 거주 동광동에서 살면서 아이들을 다 키워서 각자 생활터전으로 나가고 지금 은 혼자 살고 있다. 동광동과 대청동 사이에 있는 복병산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중에도 산에 있는 팽나무를 좋아한다. 그곳에는 편백나무 숲이 있어서 공기도 좋고, 친구들과 놀기도 참 좋다. 지금은 복병산에 들고양이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하얀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이름은 순이와 순돌이다. 나에게 동광동은 제2 고향이다. 2부 116
임혜자 117
집의 기억 45년 산 집입니다. 막내가 4살 때 와서 여기서 명성유치원, 남성초등학 교, 대학까지 졸업했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직장 관계로 서울에 살고 딸들도 다 갈 길을 가고 지금은 나 혼자 살고 있습니다. 동광동에 살게 된 이유는 남편이 중구가 교통이 좋아서 아이들 학교 다니는데 좋다고 이 집을 사서 왔습니다.
1978년 2부 118
임혜자 119
1  150년 된 복병산 할아버지 팽나무 2  맞은편에 있는 건데 내 생각 에는 할머니 팽나무 1 2 요즘에 우리, 동광동 2부 120
3  고양이 순이와 순돌이가 놀 고 있다. 4 복병산에서 찍은 용두산 타워 3 4 임혜자 121

옛날에 우리, 동광동

1958년생 1984년부터 동광동 거주

판자촌, 천막촌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전쟁이 일어나서 수많

장사하면서 헤어진 가족을 애타게 기다

눈물이

장소, 40계단을 잊을 수 없다. 동광동 방공호에 대해

주민들의 삶과 기억을 담고 싶다. 동광동은 동네는 작지만, 이웃 간 에 서로 애정이 많고 따뜻한 마을이다. 그리고 중구청, 병원, 자갈치시 장, 국제시장 등이 가까이 있으니 걸어 다닐 수 있어 편리하고 좋다.

조말숙
동광동의
은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내려와
리는
서린
1988년 6월 20일 서화사진관 뒷골목, 첫 아이. 보시다시피 골목도 좁고, 샷시문이 현 관문인데 다닥다닥 붙어있죠. 골목도 좁고. 그러다 구청에서 지구환경개선지 역 허가 결정문이 나와서 집을 4층까지 지을 수 있다고 했어요. 두 집, 서너 집 합쳐서 지금 보이는 저 건물을 싹 철거 하고 빌라를 지어서 지금까지 주민들이 살고 있어요. 2부 122
조말숙 123
1993년 8월 집이 철거되기 전에 아이들이 어릴 때 생일잔치를 해주었었다. 음식을 직접 만들고 친구들 초대하고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떡볶이, 잡채가 보인다. 2002년 2월 12일 살던 집이 철거되고 새로 이사를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포대기로 업고 있는 것이 생활하기에 편했다. 늦둥이가 태어나고 남편이 참 좋아했다. 2부 124
1 1993년 큰 딸의 동광국민학교 운동회 모습 학교 모습이 ㄱ자로 보인다. 2  동광국민학교의 상징 동백꽃 용두산공원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1 2 조말숙 125
기억
시고 그 이후에
2부 126
집의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치매에 걸려 고생하시다가 자택에서 돌아가
우리집 늦둥이가 태어났다. 딸은 결혼하고 늦둥이 아들
잘 성장해서 지금은 대학생이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고 바다 와 부산대교도 참 잘 보인다. 전망 좋은 집이 바로 우리 집이다.
조말숙 127
방공호 첫 번째 방공호 기록, 내부 사진을 성공했다! 우리 아저씨 어릴 때 숨바꼭질 놀이한다고 들어가서 많이 놀았 답니다. 그래서 평면도 그릴 때 도움을 받았어요. 요즘에 우리, 동광동 2부 128

과거의 방공호 평면도, 한국전쟁 후 피란민들이 임시 거주 목적으로 세대별로 공간을 구 분하여 거주하였다. 아래는 현재 방공호 평면도, 거주민들이 떠나고 텅 빈 공간이다.

조말숙 129
오름소공원과 체육시설 | 주민들에게 생긴 변화 2부 130
당산제
조말숙 131
제당과 버드나무, 소원을 비는 곳

조말숙 주민기자의

동광동 르포 : 오래된 집

동광동의 집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은 떠나고, 집만 남았다. 빈

집은 폐가가 되고, 집이 사라진 자리에 공터가 덩그러니 남겨졌 다.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다니

며, 그런 집들을 하나하나 사진 으로 남겨본다.

2부 132
조말숙 133

천은순

옛날에 우리, 동광동

1980년 코모도호텔 거북선이 보인다. 코모도호텔 생기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엄마가 가서 찍었었던 것 같아요. 그 당 시에 엄마가 동광동 멋쟁이였어요. 예 전에 새마을부녀회 회장도 하시고. 코 모도호텔이 지어지기 전에는 어릴 적 기억으로는 대공분실(실제로는 헌병대가 있 었다고 한다)이 있어서 무서운데다 간첩 들 잡아다가 취조하는 데라고 했었어 요. 밖에서는 안이 잘 안 보였어요.

1958년생 1968~1983년, 2009년부터 동광동 거주 내가 기억하는 동광동의 옛 모습은 공동수도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 억하고 추억하는 동네로 굴집, 복병 산 추억 등을 기록에 담고 싶다.

2부 134
천은순 135
1980년 9월 3일 중구 건전가요 합창경연대회 중구청 강당에서 저는 당시 직장에 다니느라 몰랐는데, 엄마의 오래된 앨범을 보고 알았어요. 건전 가요는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노래 같아요. 건전하게 살자고. 2부 136
천은순 137
가서 기절하는
도둑이
2부 138
집의 기억 1층은 시어머니방, 2층은 우리 부부방, 3층은 가끔 놀러오는 아들 부부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릴 때는 이 집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마루에 요강을 사용하였다. 중학교 때 한 번은 연탄가스를 마셨는데 내가 엄마 한테까지
바람에 두 동생을 살렸다고 많이 칭찬해주셨 다. 어릴 때
한번 들었는데 아버지 지갑에 돈을 다 빼가고 지갑은 밖에 있는 화장실에 버려두었다. 그때는 다시 올까 봐 많이 무서웠다.
천은순 139
1 옛날 철호집, 상처가 있는 곳 2 메리놀 버스 정류장 안쪽 1 2 요즘에 우리, 동광동 2부 140
3 4 3 부원 아파트 가는 길 4 변하지 않는 장소 천은순 141

최영희

1947년생

1970년부터 동광동 거주

동광동은 독거노인이 많고 가난하 지만 정다운 동네다. 옛날 일본식 건물, 인쇄소 밀집 지역을 기록하 고 싶다.

옛날에 우리, 동광동

1976년 동광국민학교 운동회

딸은 현재 54살, 사진을 찍으면 나는 어

색하니까 자꾸 딴 데를 보고 있다.

2부
142
최영희 143
용두산공원에서 2부 144
최영희 145
황춘록 1955년생 2009년부터 동광동 거주 동광동에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가 생겼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동 광동은 제2의 고향 같고 소소한 자 원봉사를 하는 재미도 있다. 옛날에 우리, 동광동 2부 146
1998년 2월 8일 남성초등학교 체육관 남성-남일(국민학교)배드민턴 친선게임. 40대 여자 복식 1등을 했다. 황춘록 147
주민기자단 활동을 마치며 2부 148
149
주 주 기 자 주 주 동 을 마 주 주
3부 동광동 소리기록단 동광동 소리기록단 소리 기록 기획 소리 채집하는 날 영상 스케치 기록단 사운드 수집본 소리기록단 후기

동광동 소리기록단 동광동에 사는 광일초등학교 어린이들로 소리기록단을 구성했다. 아이들 은 매일 학교-학원-집만 다니느라 정작 자신이 사는 마을을 알 기회가 거 의 없었다. 여름방학의 끝 무렵, 6명의 아이들이 모여 동광동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기록하기로 하였다. 이름도 낯선 소리 기록을 통해 아이들이 마을에 소속감을 느끼고 마을의 정체성을 탐방할 기회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3부

152

소리 기록 기획

1) 동광동을 기록하게 된 이유 남포동, 보수동, 광복동으로 익숙한 원도심 지역에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동네가 나타났다. 동광동에는 초등학교가 없어, 다른 동으로 가야 만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동광동의 과거 모습과 현재를 관찰하면서 미 래에 어떤 곳으로 남아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기록으로 체험하게 하고 싶었다.

2) 소리 기록의 최종 목표

지나치던 소리들을 관찰한다.

생각나는 소리들을 표현한다.

음악을 들으며, 소리를 기억한다.

영상을 보며, 소리를 표현한다.

소 소 기 록 주 소 소 소 기 록 기 소 153

소리 채집하는 날 채집일 | 2022년 8월 21일 기록단 | 백선영, 장나은, 정윤진, 정지원, 정지혜, 진채린, 한수정 채집 코스 | 오름소공원 - 코모도호텔 근처 방공호 - 우물서화사진관 - 인쇄 골목

대청큰마루터 기상전시관 부산광역시 중구문화원 인쇄�골목

남성초등학교 복병산 ��계단�거리 농협

남성여자 고등학교

마을 구석구석을 ‘소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관찰하고, 낯설게 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가는 과정으로 기획하였다. 미래의 주인공이 될 아이들이 직접 소리 채집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새로운 기록을 만드는 첫걸음이 아이들 의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호선 중앙역

3부 154
중구보건소 중구청 메리놀병원 코모도호텔�부산 대동맨션 아파트 부산중부 경찰서 오름소공원 코모도호텔 근처�방공호 우물 서화사진관 탐방지 소 소 소 소 소 소 소 155
중구의 도시계획시설사업의 일환으 로 조성된 오름소공원은 메리놀병원 에서 직선으로 70m 정도 가면 나오 는 계단을 통해 갈 수 있는 공간이 다. 지역의 재개발사업을 공원으로 이용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좋은 경 관을 가진 공원으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계단을 올랐을 때, 보이는 항구의 모습이 힘듦을 잊게 한다. 오름소공원 3부 156
소 소 소 소 소 소 소 157
원도심은 일제강점기 시절을 고스란히 보낸 곳이다. 그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동네이다. 코모도호텔에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던 방공호가 있었다고 했다. 과거를 모르는 사람 들에게 미래를 물을 수는 없지만, 기록단은 방공호의 입구를 직접 보고, 주민에게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코모도호텔 근처 방공호 3부 158
동광동에는 여러 우물이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 다. 그렇지만, 우물을 통해 과거 마을이 가지고 있던 공동체성을 느낄 수 있다. 우물의 모습을 본 기록단이 소리기록을 통해서 미래에 가지고 갈 기 억을 만들 수 있었다. 말라 있지만, 그곳에 살아있는 우물들 소 소 소 소 소 소 소 159

서화사진관

안녕 어디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록단에게 인사를 한다.

누군가요?

옆집 아주머니요! 학교 친구요! 엄마가 미용실하세요.

이처럼 동광동에는 10년에서 40년까지도 그 자리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

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기록이 모여 또 다른 기록단을 만들어 가

는 모습을 볼 수 있다.

3부 160
소 소 소 소 소 소 소 161
큰 출판사로 인해 생긴 작은 사업들이 이 골목을 인쇄 골목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골목에 예전만큼 큰 인쇄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다. 기록단이 들어 간 곳은 ‘까치원색’이라는 인쇄소로 인쇄부터 후가공까지 책임지는 곳이 었다. 그곳에서 만났던 분들의 웃음이 기록단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여기 신기하지? 이거 신기하지? 그렇게, 여러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는 힘 있는 소리가 오늘도 기록단의 마 음 안으로 울려 퍼진다. 인쇄 골목 인쇄소 까치원색 3부 162
소 소 소 소 소 소 소 163
3부 164
165
영상
8월 20일 – 8월 21일, 멘토링과 직접 기록을 통해서 결과물을 도출하였다. 인터뷰 영상 3부 166
스케치
기록단
동광동 소리로 만든 음악 영 영 영 영 주 소 기 록 주 사 영 영 영 소 영 167
사운드 수집본
소리기록단 후기 3부 168
소 소 기 록 주 소 기 169
3부 170
소 소 기 록 주 소 기 171
부록 기록을 통해 만난 동광동 그리고 사람

살기 좋은 마을을 위한 변화의 노력

해뜨는(東) 빛(光) 우물(洞)마을 동광동 새뜰마을사업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사업)

동광동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살기 좋은 동광동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 활성화 기반을 마련하는 사업입니다. 2019년도에 선정되

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동광동 5가 일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안전확보사업

노후화된 마을에 보행이 불편한 골목길, 계단, 나대지 정비와 설치, 계단 핸드레일 설치, 메리놀병원 옆 높은 계단을 대리석 판석으로 교체, 거북맨 션 옆 계단 길에서 오름소공원 진입 계단 설치와 골목길 정비, 소화기 설 치로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거환경개선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던 빈집을 철거하고 ‘운동쉼터’, ‘다목적 커뮤니티 센터’, ‘마을텃밭’ 등을 조성하여

부록
만난 사람 174
주민들이 모여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생겼습니다. 슬레이트 지붕 개량, 도시가스 설치 및 집수 리사업 진행으로 30년 이상 건축물로 노후되고 열악한 주거 대상은 지원 을 받아 진행하였습니다.
통해
#마을공동체 지원 공동체 회복과 활성화를 위해 휴먼케어 ‘빛우물마을학교’, ‘도시농부학 교’, ‘마을미디어 스튜디어 &
프로그램 을 기획하였습니다. 주민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 에 주민이 모여 소통하고 주민들이 실행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진행하였 습니다. 175
마을기록’, ‘주민대학’ 등 다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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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통해 만난 사람

동광동 5가는 주민 대부분이 노령층에 속하고 청년 인구의 유입이 거 의 없어 신생아 울음소리를 듣기 어려운 동네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합니 다. 이곳은 노후 밀집 주거지로 마을 내 보행로 대부분이 경사지로 되어있 으며 보행로 중 경사가 심하거나, 안전상 위험한 지역이 많아 항상 안전사 고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동광동 새뜰마을 사업을 통해 동광동 5가에 산재되어 있던 많은 문제점들을 상당 부분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 에서 동광동 현장지원센터가 주민들의 의견을 행정기관에 전달하는 역할 을 담당하며 주민들의 목소리가 사업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동광동 새뜰마을사업을 통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정비도 많이

이루어졌지만 휴먼케어 사업을 통해 동네의 분위기도 완전히 바뀌었습니 다. 고령 인구 밀집 지역 특성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프로그램들

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비 공식적인 공동체 조직들이 여럿 생겨났습니다. 특히, 어르신 대상 프로그 램 수강생들이 팀을 꾸려 석 달 넘게 공연을 준비해 새뜰마을 축제 공연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새뜰마을 프로그램으로 만났지만 이제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통하는 정다운 이웃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텃밭을 가꾸고 공동 밥상을 준비하는 시간을 통해 서먹하던 이웃 간의 거 리가 가까워지고 돈독해졌습니다. 동광동 새뜰마을사업이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이루어져 방역수칙에 따 른 제약도 있었지만,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오히려 장기화된 코로나로 인 한 우울증을 호소하던 어르신들에게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177

가장 동광동다운 동광동의 이야기를 담다

행복을 나누는 동광동 새뜰마을사업 주민협의체 위원장 서미자

안녕하십니까? 동광동 새뜰마을사업 주민협의체 위원장 서미자입니다. <해뜨는 빛우물 마을 동광동 마을기록>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민협의체 위원장으로 가장 먼저 수강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프로그 램 개강 직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까지 하다 보니 주민기자단으로 함 께 활동하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그렇지만 이 책을 한 장씩 넘기며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봅니다.

30일 이상 거주할 목적으로 일정한 주소 또는 거주지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동광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 내고, 이 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이곳을 떠나간 가족들의 이야기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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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평범한 동광동 ‘주민’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주민’의 사전 적 의미처럼
그리고
꾸밈없이 담고 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동광동 주민들은 각 자의 방식대로 동광동을 회상하고, 마음껏 추억하고, 그리고 한없이 느껴 보

며 가장 동광동스러운 동광동을 이 책에 담은 것이죠. 그리 딱딱하지도, 어 렵지도 않습니다. 첫 장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펼치고 싶 은 페이지를 펼쳐 먼저 읽어도 상관이 없는 그런 재밌는 책이 탄생했습니다! 동광동 주민들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있는 역사 를 기록했습니다. 사진이나 시각 자료들을 통해 과거 역사의 순간들을 회 상하기도 했고, 살아 숨 쉬는 현재 삶의 순간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하 고 담아냈습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초등학생부터 수십 년을 이 곳에서 거주한 어르신들까지 모든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낸 성과입니다. 우 리가 잘 알지 못하던 동광동을 찾기 위해 역사의 발자취가 살아 숨 쉬는 공 간을 전문가와 함께 탐방하며 삶의 터전 곳곳에 숨어있는 역사의 흔적들과 마주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어쩌면 소리 채집에 참여한 어린 학생들에게 는 그저 평범하게 지나다니는 공간들이 한때 누군가에겐 남다른 의미를 지 닌 공간이었겠죠. 평범한 사람들이 조금씩 기록한 역사의 순간들을 모았지만, 이 책의 가 치가 평범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먼 훗날 ‘동광동’의 역사를 알 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분명 좋은 이정표가 되어줄 겁니다. 동광동 은 어디에서

시작했고, 그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리고 동광동 사 람들은 그 공간에서 어떤 꿈을 꾸며 살았는지를 알려 주는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동광동 역사 한순간에는 새뜰마을사 업을 통해 동광동 주민들이 똘똘 뭉쳐 함께 땀 흘린 시간들도 분명 선명하 게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동광동 새뜰마을사업은 끝이 있지만, 동광동 주민들이 만들어가는 역사 179

는 계속될 것입니다. 다음 세대가 이 책을 보며 동광동의 역사를 다시 기록

할 때쯤이면 2022년 동광동 주민들의 모습이 동광동의 역사 속에서 아름

답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길 기대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민’들의 협의

체 위원장으로서 다시 한번 이 책의 발간을 진심을 담아 축하드립니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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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만난 사람

살기 좋은 마을은 긍정적인

주민의식으로 만들어 진다

바른 생각을 품는 활동가 임지은 (동광동 새뜰마을 현장지원센터)

동광동 5가 일원은 부산의 구도심에 있지만, 도심 내 전형적인 노후 및

저소득 밀집 주거지로 인접해 있는 중구 영주동과 보수동, 대청동이 도시

재생사업을 추진하는 것과 비교되어 분위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새뜰마을사업은 오래전부터 추진해 온 사업이고 규모도 작고 도시재생 뉴딜사업과는 좀 다른 사업이다. 2020년 마을활동가로 동광동에 들어왔을 때 현장지원센터가

없어 혼 자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사진도 찍고, 모르는 주민에게 인사하 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니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목적 커뮤니티센터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거점 공간이 없으니 지속해서 주민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2021년에 주민들의 주도적인 참여로 빈집을 헐고 체력증진과 소통공 간으로 ‘빛우물 운동쉼터’와 ‘빛우물 마을텃밭’을 조성하였고, 요리와 다 181

양한 프로그램이 열리는 ‘다목적 커뮤니티센터’ 거점 공간에 새뜰마을 현 장지원센터도 생겼다. 2022년에는 <건강한 동광동, 가르치고 배우는 생활문화 만들기 프로 젝트>가 진행되었다. ‘빛우물 마을학교’는 치매예방, 웃음치료, 원예치료, 스마트폰 활용, 전통놀이교실, 요리교실, 동광동서당, 공동밥상 등의 프로 그램을 운영하면서 거점 공간에 계속해서 주민들이 모일 수 있게 되었고, 서로 알아가고 정을 쌓는 시간이 되었다. ‘빛우물 마을텃밭 - 도시농부학 교’ 프로그램이 개설되어 건강한 먹거리 로컬 푸드 이야기, 작물재배, 친 환경 방제법을 배웠다. 그리고 허브와 작물을 활용한 다양한 체험 활동을 통해 마을텃밭은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장소가 되어주었다. 코로나19 대유행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때 만난 주민들이 지금도 나에 게 큰 힘이 된다. 소모임을 열어 마을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제점을 알게 되고, 함께 해결방안을 고민하는 과정 안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인 동 기부여를 얻게 되어 함께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의 특성과 수요를 고려한 맞춤형 방식의 주민대 학(2020년, 2021년, 2022년)에 참여하면서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역량이 조금씩 커지게 되었다. 올해 추진사업이 마무리되어 가는 중인데 그동안 마을의 모습이 점점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주민들과 함께해

온 일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많은 일이 있었구나!’ 감회가 남다르다. 인사만 하고 지나치던 이웃들이 생각나고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졌다면 정분이 난 거다. 자주 모여서 수다도 나누고 반찬 한 가지씩 들고 와서 같 부록 통해 만난 사람 182

이 식사해도 좋을 것 같다. 공동체가 별거 있나. 새뜰마을사업은 올해로

끝나지만, 내년에는 또 5년 후에는 동광동 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 길 원할까? 새뜰마을사업을 통해 배운 공동체 의식을 통해 작은 것이라도

우리끼리 해볼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개인적으로는 공동체 조직을 세우고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마을활 동가의 역할도 어느덧 5년이 되어 간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주민들과 함 께해오면서 나 또한 배우고 성장한 곳으로 동광동이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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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음원과 음반을 제작해왔고 지금도 음악을 만드 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내가 선호하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나뉘 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중 지역의 소리를 수집하고 음원으로 만드는 작업은 굉장히 선호하는 작업이다. 이전에 독일의 베를린과 인도 네시아의 족자카르타 지역에서 그 지역의 소리를 녹음해서 진행했던 작 업이 생각난다. 아직도 그때 만든 음원을 들으면 그 지역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래서 이번 작업을 제안받았을 때도 흔쾌히 수락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번 작업은 동광동에 사는 어린이들과 함께해서 더욱 특별했다. 아이 들이 처음에는 다들 이

수업에 왜 왔는지 모르겠고, 이런 걸 왜 하냐고 툴 툴댔었는데, 헤어질 때는 집에 가기 싫다며 담에 또 하자고 말해줘서 고마
복수
부록 통해 만난 사람 184
동광동의 소리를 만나다. 이광혁(재미난
운영실장, 밴드 하퍼스)

웠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동광동이란 곳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남포동, 보수동, 광복동으로 익숙한 원도심 지역에 ‘동광동’이란 동네가

있는 지도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동광동은 대한민국의 과거 와 현재가 신기하게 얽혀 나름의 매력을 풍기는 동네였다. 언제부터 있었 는지 모를 우물,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다는 방공호,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인쇄 골목, 피난 시기에 지어져 들쑥날쑥한 집과 골목길, 40년 동안 주민 이 운영해 온 사진관,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와 공원까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각자’가 모여 동광동이라는 ‘동네’를 형성하고 있었다. 신기한 매력 을 가진 동광동의 소리를 수집하는 과정은 매우 즐거웠다. 아이들과 함께 동광동의 역사를 공부하고, 가고 싶은 장소를 정하고, 채집하고 싶은 소리를 고르며 혼자 작업할 때와는 다른 쾌감을 느꼈다. 나 도 어릴 때 이런 수업을 했다면 우리 동네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텐 데, 세상 참 좋아졌다. 아이들이 자기가 사는 동네를 새로운 방식으로 만날 기회를 줄 수 있어 기쁘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을 때 이번 작업물을 보고 들으며 어린

185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또한 시간이 지나도 동광동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답던 동광동의 소리와 함께.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6살 때 동광동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 판자촌 이 주민들이 모여 살았다. 어려운 살림이지만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어느 덧 나도 모르게 나이가 들었다. 1976년 26살에 통장님 추천으로 새마을 봉사를 하게 되었다. 열심히 하다 보니 1997년 대통령 훈장을 받게 되었 다. 지금도 새마을에 관여하고 있다. 10년간 부녀회장도 맡았고, 현재 까지 동광동을 위해서 주민자치 외 몇 가지 봉사를 하고 있다. 내 몸이 아프지 않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동광동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싶다. 그곳에

부록 통해 만난 사람 186
함께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립다. 세월이 갈수 록 가슴 한구석이 찡하면서 아려온다. 지금까지 동광동에서 65년을 살 았다. 나는 앞으로도 동광동에서 살아가려고 한다. 내가 기록하고 싶은 동광동 이영숙 주민기자단

뜻밖의 행복

최영희 주민기자단

21살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두 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남편의 잦은 실 패와 아이들의 교육 문제, 생활고로 정신없이 살았다. 애들이 커서 결혼 하고 이제 숨 쉴만하니 손자 손녀가 태어났다. 사정상 애들을 키워주다 보니 세월은 어느새 10년이 흘렀다. 60살부터 우울증과 불면증, 신경통, 허리협착증 때문에 울상 짓고 살다가 생각도 못 한 견학, 단체모임, 운동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특히 <우리 마을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다> 프 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시간을 만들어 준

실무자 선생님, 서미자 선생님, 빨간집 여러분께 모두 감사한 마음이다. 동광동에 사는 형님들과 아우님들 그리고 친절한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 건강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면서 잘 살아갑시다. 함께 했 던 주민기자단 여러분 사랑합니다.
복수 영상제작 손민정 제작지원 염수정, 이지안, 정자현 도움주신분들 동광동 새뜰마을 주민협의체 ※ 이 책자는 부산광역시 중구의 ‘동광동 새뜰마을 마을기록사업’의 결과물로 제작되었 습니다.
해뜨는 빛우물 마을 동광동 마을기록 이야기와 소리로 기억 찾기 발행일 2022년 11월 18일 지은이 동광동 새뜰마을 마을기록사업 참여 주민 일동 발행처 부산광역시 중구 기 획 빨간집 편집기획 윤주 편집디자인 박소영 <소리로 기억하는 우리 마을> 책임 운영 및 콘텐츠 제작 재미난
해뜨는 빛우물
동광동 마을기록 이야기와 소리로 동광동 새뜰마을 주민협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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