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 밀양 내일·내이동 사람들의 기억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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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은 내 이 야기도 동 네기록 내일·내이동 사람들의 기억 찾기

내일

은 내 이 야기도 동 네기록 내일·내이동 사람들의 기억 찾기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

책은 <내일·내이동 동네기록학교>에

밀양시민활동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동네기록학교>는 밀양시

역사문화 아카이비스트 양성

사업으로 진행되어, 지역을 기록하려

시민들에게 아카이빙 방법론과 관련 도

구의 학습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참

가자들은 이론 강의를 듣고 개별 과제로

<아카이브 미션>을 수행해 매주 자신만의

동네기록을 정리했으며, 필름카메라로 현 재 동네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축적 된 자원을 활용해 동네에 대한 글을 썼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록이 모여 내일·내이동 동네기록이 되었고,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으로 묶어냈다.

1부는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으로, 내 일동과 내이동의 시간과 장소를 담고 있다. 연표와 기억지도, 화요일 2시 1분은 아카 이브 미션을 정리한 것이다.

2부는 동네기록학교 수강생들의 기록을 인물별로 담았다. 아카이브 미션과 동네에 대한 글, 필름카메라 사진으로 구성된다.

참여한
<내일·내이동
내일·내이동
교육
contents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개요 연표 주요장소 독립운동 역사탐방 기억지도 2022년 7월 12일 화요일 2시 1분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이야기 김미성 김윤경 김태현 민형우 박보영 박순희 이보나 이순선 이승호 이익행 이주희 조상권 조주영 진선화 최재현 9 22 24 30 42 54 60 64 68 76 78 92 100 106 110 118 124 126 138 140 150
내일동 내이동 1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참고자료

[도서]

•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지』. 밀양군:밀양문화원. 1987.

• 이서후, 김민지, 김해수, 최석환. 『경남 동네여행 : 경남 곳곳에 숨은 색다른 동네 이야기』. 창원:경남도민일보. 2020.

[신문기사]

• 25만→10만명 간당간당…'소멸 위기 지자체' 밀양시의 고민. 매일경제 2021.10.19.

• 밀양 내이3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 기공식. 경남일보 2015.11.24.

• 경남 밀양 도로명 주소가 정말 특별한 이유. 오마이뉴스 2020.01.21.

• 약산 김원봉이 윤세주와 밀양에서 도모한 일. 오마이뉴스 2020.01.22.

• [경남을 기록하다] (25) 구 밀양대학교 부지. 경남도민일보 2015.10.01.

• [현장이 답이다] 새 그림 그리는 옛 밀양대 부지, 17년 방치 끝낸다. 부산일보 2022.02.16.

• 웅변대회당선자. 경향신문 1954.03.14.

• 옛 밀양읍성내에 있던 우물. 밀양신문 2022.06.16.

[사이트]

• 밀양시 https://www.miryang.go.kr

• 밀양아리랑시장 https://www.miryang.go.kr/market/web/

• 밀양의열기념관 http://www.euiyeol815.or.kr

• 국토지리정보원 https://www.ngii.go.kr

• 네이버지도 https://map.naver.com/v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밀양강’, ‘밀양읍성’,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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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위키 https://namu.wiki ‘밀양시의 도로’ • 밀양시 블로그 https://blog.naver.com/miryangsi • 네이버 블로그 애관(愛觀) 보는 것을 사랑한다 “밀양의 극장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 blogId=ykhpd&logNo=222162514768&referrerCode=0&searchKeyword=밀양 • 네이버 블로그 뉴맨의 이야기 “밀양의 극장야사” https://m.blog.naver.com/jksam7700/222124013547 • 부산대학교 나노생명과학도서관 기획전시 <도서관에서 옛 밀양강을 거닐다>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9 내일동·내이동 개요 밀양읍성 안 동네라는 뜻의 성내동에서 유 래한 내일동과 내이동은 양반들이 모여 살 던 밀양의 핵심지역이었다. 내일동은 과거부 터 관아와 경찰서 등 관공서가 위치하고 시장 을 중심으로 상권이 발달한 시내였다. 내이동 은 교육과 주거 중심 지역으로 과거 면적에 비 해 학교가 많지 않아 통학거리가 먼 학생들을 위한 하숙집이 많았다. 1차 산업과 전통시장 이 쇠퇴하고 밀양대학교가 부산대학교에 통합 되어 삼랑진으로 이전하면서 인구가 줄어들고 분위기가 침체되었다. 그러나 내일동, 내이동 은 밀양의 상징적인 곳으로 주민들은 도시재 생사업 등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연도별 항공지도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0
1954
1977
1997
2017
2022

위치와 지리

내일동과 내이동은 밀양시의 중심부 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산외면, 서쪽으 로 부북면, 남쪽으로 삼문동, 북쪽으로

교동과 접한다. 아동산, 아북산의 시민 휴식 공간이 있으며 밀양강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내일동과 내 이동의 경계를 따라 해천이 남북으로 흐른다. 용평, 활성지역은 농촌취락지 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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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송, 월연정, 금시당 등 활성강변 유원지 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행정구역 조선시대부터 밀양군 부내면의 중심 지로, 1910년대 인근의 노상리, 노하 리, 부북면 등 일부가 병합되어 내일리 와 내이리가 되었다. 1931년 4월 1일 밀양면이 밀양읍으로 승격되고 1989 년 1월 1일 밀양읍이 밀양시로 승격되 면서 내일동과 내이동으로 호칭이 변 경되었다. 용활동(용평동, 활성동)이 1998년 9월 21일 내일동에 합동되었 고, 내이동에 속했던 운전리, 감천리 등 은 부북면으로 바뀌었다. 현재 내일동 은 10개통 46반으로 행정구역이 구분 되어 있는 총 면적 12.09 ㎢의 지역이 며, 내이동은 3.05 ㎢에 19개통 105반 이 속한다. 구분 내일동 내이동 면적 12.09 ㎢ 3.05 ㎢ 통, 반 10개통 46반 19개통 105반 (2021.02. 기준. 출처: 밀양시 홈페이지)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17 인구 밀양시 인구는 1960년대 기준 25 만 명이었으나 2022년 7월 말 기준 103,155명이다. 인구가 가장 많던 때 보다 절반 넘게 줄었으며 최근에도 감 소추세다. 2021년에는 경남 시 단위 지역 중 유일하게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 고시되었다. 농업이 주력산업이 어서 일자리를 창출할 제조업체나 기 업이 거의 없을 뿐더러 경부선과 중앙 고속도로, 함양울산고속도로가 밀양을 지나면서 인근 대도시에서 출퇴근 및 통학이 가능하여, 사망·전출이 출생·전 입보다 많은 상황이 굳어지고 있다. 내일동의 인구 변화를 보면 밀양 시의 전반적인 흐름과 비슷하게 매년 100여 명씩 줄고 있다. 2022년 7월 자료에 따르면 내일동의 거주 인구는 2,604명으로 2014년 3,596명과 비교 해 주민의 수가 많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내이동은 다른 양상을 보인 다. 2018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증가하 는 추세로 8년 전과 비교해 전체 인구 가 4,300여 명 늘어 16,501명에 이른 다. 내이동은 주택상가 밀집 지역이 많 고 대단지 아파트가 준공되면서 전입이 증가하고 있다. 구분 내일동 내이동 가구수 1,449가구 8,121가구 인구수 2,604명 16,501명 남자 인구수 1,269명 8,196명 여자 인구수 1,335명 8,305명 (2022.07. 기준. 자료 출처: 밀양시 홈페이지) 인구 변화 비교표 내일동 내이동 12,238 13,608 3,354 13,549 3,108 15,836 2,765 2,604 16,501 3,596 2014.12 2016.12 2018.12 2020.12 2022.7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8 도로 내일동과 내이동을 지나는 주요 도 로로는 밀양대로, 백민로, 석정로, 약산 로, 중앙로가 있다. 밀양대로는 남북방 향으로 내이동 신촌오거리와 창원시 모 산사거리를 잇는 도로이며 24, 25, 58 번 국도와 1077번 지방도 일부이다. 중앙로는 가곡동에서 출발하여 밀양역, 영남루를 지나 내일동 신촌오거리에서 끝난다. 석정로는 내일동 영남루에서 출발하여 북성사거리, 밀성고등학교를 지나 교동사거리에서 끝나는 도로이다. 중앙로와 석정로가 만나는 곳에 북성사 거리 로터리가 위치한다. 석정로, 약산 로, 백민로는 독립운동가의 호에서 따 온 도로명으로, 이 일대에 독립운동가 들이 밀집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외버스터미널 내이동에는 밀양시외버스터미널 이 위치한다. 내일동 ABL생명 자리에 서 1987년 내이동으로 이전하였다. 이 에 따라 내일동의 상권도 변화하였다. 밀양의 교통은 철도에 집중되어 있어 2016년까지 고속버스 노선이 없었으 며 시외버스 노선도 경상도에 한정되어 있다. 밀양 시내와 읍면지역을 오가는 버스 대부분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 발한다. 밀양시에 연고를 두고 있는 밀 성여객에서 주로 버스를 운행하고 있으 며 대구, 경북, 울산 방면은 경산버스에 서 운행한다.

‘전통시장’, ‘영남루’, ‘동문고개’, ‘밀양택시’, ‘청학서점’, ‘축 협’, ‘내이동우체국’, ‘북성로타리’ 등이

시내버스는 1, 1-2, 2, 3-1, 4, 4-1, 4-2, 5, 6, 6-1, 7, 7-1, 9, 10번

노선이 5개 동을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19 버스 내일동과 내이동에 걸친 정류소명 으로 ‘밀양관아’,
있다.
이 있으며, 대부분의
모두 지난다. 삼랑진, 하남, 초동, 부북, 상동, 용활동 중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 는 지역에는 마을버스를 운행하고 있 다. 밀양시에서 새롭게 도입한 공공버 스인 아리랑버스도 있다. 학교 초·중·고 7개교가 소재하고 있다. 밀 성초등학교, 밀성여자중학교, 밀성중 학교, 밀성고등학교, 밀성제일고등학 교, 밀양고등학교는 내이동에, 밀양여 자고등학교는 내일동에 위치한다. 밀양 고등학교 옆에는 밀양대학교가 있었으 나 부산대학교와 통합되며 삼랑진으로 이전했다. 밀양시는 비어있는 부지에 소통협력공간을 조성하고 폴리텍대학 을 유치할 계획에 있다. 동가리 신작로 주변으로 밀성고, 밀양고, 밀양대를 다 니는 하숙생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내일동·내이동 동네기록학교20 키워드 동네기록학교에서 언급된 내일동, 내이동 관련 단어를 모았다.
1부 내일동·내이동 개요 21

변화

3. 20 내일공동시장(2일, 7일장) 허가

3. 13 밀양 만세운동이 내일동 장터에서 발생

5. 6 밀양공립농잠학교 개교

4. 1 읍제 시행에 따라 밀양읍으로 승격, 밀양군 밀양읍 본정으로 내일동 행정구역 변화

4. 19 밀성국민학교

밀양국민학교로

성우애육원

삼문동으로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22 연표 1479 밀양읍성 조성 시작, 내일동에 밀양장 개장 추정 1590 밀양읍성 해자 조성 1895 전국을 36군으로 개편하며 대구부 밀양군에 속함 (시 지역은 부내면) 1896 경상남도 밀양군으로 개칭 1897 사립 개창학교(현 밀양초등학교) 설립 1901. 7 개창학교 공립화 1905 밀양역 영업 시작 1910. 10. 1 면제의 실시에 따라 밀양군 밀양면으로 행정구역 변화 1914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으로 행정구역
1915.
1919.
1924.
1931.
1937.
개교 1941 개창학교 →
개칭,
이전 1945 역전파출소 개설,
설립 1946 밀주국민학교 설립 1947 밀양군 밀양읍 내일동으로 내일동 행정구역 변화 1949 농산물관리원 밀양사무소 개업 1952 세종중학교, 세종고등학교 설립 1953. 7. 1 밀성고등학교 개교 1954. 6. 17 밀양여자고등학교 개교 1955. 3. 7 밀성중학교 개교 1959. 9. 17 사라호 태풍으로 내일동, 내이동, 삼문동 일대 큰 수해 1958 한양극장 → 제일극장으로 명칭 변경 (현 알파문구점) 1960 남보극장 개관 (현 밀양교회 주차장), 개관기념 상영 프로그램 『노다지』 1961 청학서점 개점 (2019년 삼문동으로 이전) 1968. 12. 8 밀양시장(상설시장) 개설 허가 1969. 11. 17 밀성여자중학교 개교 1970. 12. 9 상공부장관 법인설립인가 (사)밀양시장번영회 1971. 3. 4 밀양종합고등학교 개교 1971. 10. 11 내일공동시장(2일, 7일장) 폐지, 구 시장 장옥 철거 가곡동

설립

역전파출소 → 역전지구대로

2004 밀양역 KTX 정차

밀양대교 완공

2006. 3. 1 밀양대학교가 부산대학교에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23 1973. 11. 17 밀양종합고등학교 → 밀양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74. 1. 5 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개교 1981. 9 밀양문화회관 개관 (내일동 영남루 옆 소재) 1982 밀양역 현재 역사 신축 1987. 11. 20 밀양시외버스터미널 이전 (밀성여객에서 운영) 1988. 6. 22 밀양군 밀양읍 내일리 1989 밀양시로 승격, 시 승격으로 동사무소 개청 시각장애인복지연합 밀양지회 설립 1995 밀양소방서 가곡119안전센터 설립 1996 밀주국민학교 → 밀주초등학교로 교명 변경 1996. 3. 1 밀성국민학교 → 밀성초등학교로 교명 변경 1998. 9. 21 용활동(용평동, 활성동)을 내일동에 통합 1999 밀양공립농잠학교 → 밀양대학교로 교명 변경 2001 경남 밀양 지역자활센터
2003
명칭 변경
2005
통합되면서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가 됨 밀성여자상업고등학교 → 밀성제일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2007. 3. 5 내일전통시장 인정시장 등록 2010 역전지구대 → 역전파출소로 개칭 2010. 3. 13 밀양관아 복원 2011 해천 복원 2017 밀양시 장애인 복지관 설립 2017. 9 밀양아리랑시장과 내일전통시장의 협의로 밀양아리랑시장으로 명칭 통합 2018. 3. 7 밀양의열기념관 개관 2019. 11. 30 미리미동국 진장문화예술플랫폼 개관 2020 국토정보공사 밀양지사 내이동에서 가곡동으로 신축 이전 2021. 9 밀양대학교 추억소환이벤트 2021. 11 밀양대 페스타 & 동가리 페스타 2022. 3. 15 밀양문화회관 → 밀양문화원 신축 개원 2022. 4 ~ 7 밀양강 문화예술의 거리전 2022. 7. 1 밀양의열체험관 개관 2022. 7. 8 ~ 30 제40회 대한민국연극제

주요 장소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24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25 밀양강 밀양강은 울주군 고현산에서 발원하 여 밀양시를 거쳐 삼랑진에서 낙동강 으로 흘러든다. 옛 이름으로는 응천강, 의천강이 있고, 밀양시민들은 남천강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로 연장은 96 ㎞이며 여러 지류를 합한 유역 면적은 1,476㎢으로, 유로에 비하여 폭이 넓 다. 낙동강 합류지점에 너비 4㎞에 이 르는 밀양평야가 펼쳐져 곡창지대를 이 루며 과일·채소가 많이 재배되고 최근 비닐하우스에 의한 고등채소 재배가 활 발하다. 영남루 등의 관광명소가 많다. 영남루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 대 신라의 5대 명사 중에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 각에서 유래되었다. 현재의 누각은 이 인재 부사가 1844년에 중건한 것이다.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보물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 다. 주변에 천진궁, 아랑사, 석화군락, 밀양읍성, 무봉사 등의 문화재가 모여 있다. 영남루 일대와 밀양강 주변에는 건축물 고도 제한이 있어 시내 어디에 서나 영남루를 볼 수 있다. 이주희: 영남루 지붕 양끝에는 용머리가 동서로 보고 있고 누 각 올라가는 다리는 달 월자 모양이에요. 이렇게 되어있는 곳 은 영남루밖에 없어요. 목재 건물이라 화재 예방을 위해 누각 끝 부분은 도깨비 귀면으로 되어 있어요.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26 밀양읍성 밀양읍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지로 1479년(성종 10)에 축조되었다. 『신 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 둘레 4,670자, 높이 9자였으며 면적은 7만 5746㎡이다. 읍성은 1902년 경부선 설치와 1934년 밀양교 건설을 거치면 서 없어졌다. 2001년 밀양읍성 복원 사업으로 무봉사 뒤에서 동문까지의 성 곽 일부와 무봉대라는 망루를 복원했 다. 4대문 중에서는 동문만이 유일하게 복원되었으며, 주민들은 이 언덕을 동 문고개라 부른다. 해천 복개천, 해자천 밀양해천은 조선 성종 10년인 1479 년에 밀양읍성을 외부 공격으로부터 방 어하고자 만든 너비 5.9m의 해자이다. 성벽이 철거된 이후 생활용수를 처리하 는 하수고로 사용되어 환경과 수질 오 염이 심각했다. 1980년대 내일동, 내 이동 일원에 교통, 주차난 등으로 복개 되면서 해자의 흔적이 사라지게 된다. 2011년 해천 생태하천 복원을 추진하 며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탈바 꿈했다. 또한 주변 독립운동가 생가지 를 이용해 해천 항일운동 테마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 : 박순희 조주영: 내일동에 갈 때는 ‘시내 간다’ 안 하고 ‘읍에 간다’고 했어요. 김태현: 읍사무소가 내일동에 있었습니다. 또 밀양읍성 4대문 안이 내일동이거든요. 그래서 ‘읍에 간다’하면 내일동에 간다는 의미가 있어요. 지금도 써요.
관아 전 읍사무소, 전 내일동사무소 조선시대 밀양부 관아가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본래 있던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는데 1612년 원유남 부사가 원래 자리에 관 아를 재건하였다. 1895년 지방관제 개 편에 따라 군청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1927년 삼문동에 밀양군청을 신축 이 전하며 관아는 폐쇄 및 철거되었다. 이 후 밀양읍사무소, 밀양시청, 내일동사 무소의 청사로 이용되다가 2010년 4 월 현재의 관아로 복원되었다. 관아 주 변에 있는 산들은 각각 관아의 동쪽과 북쪽에 있다고 하여 아동산, 아북산이 라 이름 붙여졌다. 사진: 김태현 밀양아리랑시장 밀양아리랑시장은 밀양읍성을 지 을 당시 개장된 곳으로 5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15년 내 일 공동시장으로 개설허가를 받았고, 1968년에는 상설시장으로 허가를 받 았다. 문화관광형시장육성사업 선정 을 계기로 기존의 ‘밀양아리랑시장’과 ‘내일전통시장’ 상인회의 협의를 거쳐 2017년 9월 1일부터 ‘밀양아리랑시 장’으로 명칭을 통합하여 사용하고 있 다. 예전에는 밀양시내에 큰 시장이 내 일동뿐이었으나, 이전한 터미널 주변과 삼문동 신도시에 상권이 만들어지고 대 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인구는 감소하는 데 상권은 퍼지게 되었다. 이익행: 한때 명절에는 부르는 게 값이었어요. 포대 에 돈을 밀어 넣을 정도였지. 다음날 되면 신협이나 새마을금고 직원들이 가게로 찾아오기도 했어요.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28 극장 내일동에 극장이라는 새로운 문화시설이 들어 왔다. 한양극장의 정확한 설립연도는 확인되지 않 으나, 1954년 3월 1일 웅변대회가 열렸다는 기사 를 통해 그 이전에 지어졌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남보극장이 개관하였으며 이후 한 양극장은 제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남 보극장 자리에는 공한지공영주차장이, 제일극장 자 리에는 알파 밀양점이 들어섰다. 김태현: 남보극장 위치는 원래 밀양경찰서 옆자리. 그때 첫 작품이 <노다지>였어요.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29 동가리 신작로 현재는 백민로 4길이라 부르는 200m가 채 되지 않는 짧은 골목이다. 내이동 중심 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인데, 도로의 서 쪽 끝이 도랑과 학교 건물로 연결되지 않고 나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토막’의 사투 리인 ‘동가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밀양대학교 앞 대학로 역할을 했던 동가리 골목에는 여전히 학생들이 자주 찾던 술집 과 하숙집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학교 이전 과 인구 감소로 예전의 활력만 못하지만, 도시재생사업을 시작으로 동가리 거리를 조성하고 주변을 단장하고 있다. 2022년 7 월에는 동가리 가로와 해천테마거리 일대 에서 동가리 페스타와 해천 페스타를 개최 했다. 사진 출처: 부산대학교 나노생명과학도서관 기획전시 <도서관에서 옛 밀양강을 거닐다>
의열기념관 윤세주 생가지 김원봉 생가지 김병환 생가지 전홍표 생가지 황상규 생가지 윤치형 생가지 고인덕 생가지 김대지 생가지 구 밀양경찰서 (현 공영주차장) 연계소
독립운동 역사탐방 밀양공립보통학교 (현 밀양아리랑 시장) 구 동화학교 (현 밀양택시) 3.13만세 의거지 영남루 내일·내이동 구석구석을 걸어다니며 밀양 독립운동의 현장과 역사문화 자원을 확인 했다. 일시: 2022년 6월 28일(토) 10시~12시 해설: 이준설 학예연구사 사명대사 동상
밀양은 전국에서 독립운동가가 가장 밀집된 지역이다. 특히 내일·내이동에 살던 사람 가운 데 독립운동으로 수훈을 받은 이만 29명에 이 른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영화 <암살>의 영 향으로 밀양에는 의열 붐이 일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담아 의 열기념관을 설립하고 항일운동 테마거리를 조 성하였다. 김원봉, 윤세주 등의 독립운동가가 해천 주변에서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생가지에는 청동으로 만든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충의에 앞장선 사 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안고 독립운동 역사탐방을 떠나본다. 이준설 학예연구사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33 밀양의열기념관, 김원봉 생가지, 윤세주 생가지 밀양의열기념관이 위치한 곳은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이 다. 의열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 두에게 독립운동의 참 가치를 보여주고자 2018년 3월 7일 개관했다. 그 옆으로 윤세주 생가지에는 2019년 11월 10일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세워진 의열기념탑 과 아북산에서 있었던 항일운동을 형상화한 청동상이 있 다. 이곳을 중심으로 3.13만세운동과 밀양인의 항일운동 에 관련한 기록을 벽화와 조형물 등으로 제작되어 있다. 의열기념관 전경 사진출처:의열기념관홈페이지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34 전홍표 생가지 동화학교의 설립 발기인 중 한 명으로 3대 교장이자 김원봉, 최수봉, 김 대지 등을 길러낸 스승이었다. 1921년 7월 8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전 홍표의 장례를 치르자 일본은 불온분자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참석자를 잡아갔다고 한다. 공터로 남아있던 생가지는 몇 년 전 건물이 들어서면서 안내판은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있다. 전홍표 생가지 황상규 생가지 내이동 1008번지는 황상규 선생이 결혼 이후 분가한 집으로 1931년 9월 2일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황상규 선생은 대한독립선 언서에 서명한 39인 중 1인이기도 하다. 의열단 조직을 구체화하면서 조카 이자 제자인 김원봉을 불렀다. 제1차 국내기관총공격 당시 거사를 주도했 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수 만 명의 문상객이 모였다고 한다. 무 덤은 부북면에 있다.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35 고인덕 생가지 고인덕 선생이 살았던 내이동 1009번지는 지적도를 살펴보면 필지가 15개로 굉장히 넓었다. 부친은 고삼종 목사로 밀양교회 를 설립했다. 의열단 단원이자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와 경북 의열단사건에 활약했다. 하지만 경북의열단사건 이후 1926년 옥사하여 그 리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일제의 고문에 굴하지 않기 위해 자결하였는데 일제는 병으로 죽었다고 발표했다. 윤치형 생가지 1919년 서울의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 한 이후 밀양으로 내려와 3.13만세운동 을 주도했다. 수배를 받자 만주로 망명하 여 의열단에 가입했다. 1차 의열단 활동 당시 사비로 300원을 시사했다. 1년 뒤 의열단의 밀양폭탄사건에 관련되어 6년 형을 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광복 후 귀국하였으며 제4대 의 령 군수를 역임하였다. 안내판이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36 김대지 생가지 1913년 황상규, 윤치형 등과 함께 일합사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대한광 복회에서 활동했다. 의열단이 조직된 후 의열단원에게 폭탄제조 기술을 배우게 하고 1920년 상해에 있는 자신의 집을 빌려주어 연락소 및 폭탄을 제조할 장소로 제공하였다. 가난으로 부인과 자식 둘에게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보내야 했으나, 계파에 연연하지 않고 일제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 였다. 김병환 생가지 김병환 선생은 당시 쌀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폭탄 세 발을 숨겼 다. 밀양 청년회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밀양에서만 40년 가까이 독립운동 을 진행했다. 이승호: 저 뒤에 천이 하나 있는데, 김종직 선생님이 태어날 때 사흘 동안 물이 달았다고 해서 감내천이라고 해요. 조상권: 감내는 김원봉 장군이 이사 가서 살았던 곳이기도 한데, 감내 똥파리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김원봉 장군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일본 순사들이 포위를 하고 들어갔는데 없었대요. 그래서 파리로 둔갑해서 날아갔다고 한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얘기했으면 벌이나 나비라고 했을 텐데 일본에서 는 똥파리라고. 의열단이 변장에 능했다고 하더라고요. 감내천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37 이준설: 연계소는 유림들이 향토사나 지역 풍속 등을 의논했던 공간 인데, 독립운동과 관련하여서는 신간회의 모임 장소이자 야학을 위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연계소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38 구 밀양경찰서 밀양경찰서는 1920년 12월 27 일 의열단원 최수봉이 폭탄을 던진 곳으로 유명하다. 1911년 11월 7일 (추정) 밀양헌병 분견소가 설치되 고 1919년 8월 20일(추정) 이후 밀 양경찰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처음 에는 지금의 밀양교회 주차장 자리 에 있었고, 의거 이후 1921년 10월 아리랑시장 쪽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최수봉 의거지인 밀양경찰서 터는 밀양아리랑시장 남문 일대로 알려져 있 으나 이는 안내판을 세울 당시 첫 번째 밀양경찰서 위치를 몰라 두 번째 위 치에 세우면서 발생한 오해이다. 1917년 밀양 지도 광복 이후 밀양경찰서 모습. 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일본에서 만든 지도로 밀양헌병 분 교소, 해천, 밀양보통학교, 영남루 를 확인할 수 있다. 아북산과 아동 산은 후동산, 전동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준설)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39 구 동화학교 동화학교는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교육을 실시했 다. 진장에 있던 군사훈련 장이 1910년 조선군대 해 산을 계기로 없어지자, 동 화학교의 선생들은 학생 들에게 광복을 위해 싸울 것을 독려했다. 이에 일제는 1911년 늦가을 법 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폐교 조치를 내렸다. 학생들이 시내 전역을 돌면서 모금하여 80원을 모았지만, 독립운동의 정신을 끊고자 한 일제를 넘을 수 는 없었다고 한다. 북성사거리에서 동쪽으로 언덕을 조금 오르면 ㈜밀양 택시가 보이는데, 이곳이 동화학교 터로 추정된다. 3.13만세의거지 밀양관아 앞 공터는 1919년 3월 13일 전홍표의 지도와 윤세주·윤 치형의 주도 하에 밀양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일제의 기록에는 1,0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나오지만, 당시 밀양의 인구 규모로 볼 때 2,000~3,000명 정도가 모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태현: 그날이 음력이었는데, 밀양 장날이었어요. 그래서 사람이 더 많이 모일 수 있었지.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40 밀양보통학교 현 밀양아리랑시장 부지 1897년 손정현 선생이 사립 개창학교로 설립했으나 이후 공립학교가 되었다. 김원봉과 윤세주도 밀양보통학교 출신으로 이들의 학적부가 발견 되기도 했다. 내일동 시장 위치에 있었으나 1921년 9월 삼문동으로 옮겨 간다. 당시 학교는 상점, 여관과 함께 독립운동의 거점지였다고 한다. 게다 가 사람의 왕래가 잦은 시내였기에 일제가 외진 곳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사명대사 동상 구 밀양박물관 부지 이준설: 밀양시립박물관이 이전한 자리에는 사명대사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 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 신사가 있던 곳으로, 당시 군 단위에는 하나씩 만들었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에 신사를 허물고 밀양 출신의 일본인이 두려 워한 사명대사 동상을 세웠습니다.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41
42 박순희 이승호 김미성 이주희 민영우
기억지도 자신의 기억 속 내일동과 내이동을 그려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나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 주 변 지도를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적었다. 놀랍게도 10명의 지도가 모이자 내일·내이동의 지도가 완성되었다. 김태현 최재현 박보영 조주영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44 김미성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 지 알록달록 꽃과 나무가 눈과 코를 즐겁게 했는데 내이 토지구획정리로 꽃거 리가 사라져 아쉽네요. 김태현 저의 유년시절로~~~ 검정고무신 신고 자치기, 비석치기, 도망고, 말타기, 팽이치기를 경찰서 뒷마당이나 공터(놀이터)에서 동무들과 흙먼지 날리며 해 저문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여름이면 아동산에 올라 매미도 잡고 천덕그랑(지금의 삼문 동 송림 앞)에서 물놀이 하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러다 경찰서 오포(싸 이렌)소리에 집에 돌아와 찬보리밥에 물 말아 된장에 고추 덤북 찍어 훌딱 한 그릇 비우고 오후엔 왕게시리(대빗자루)로 진장에서 잠자리도 잡곤 했 습니다. 일흔은 앞둔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지만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없 는 그리운 추억이랍니다. 지금 우리 동네 옛사람은 다 떠나고 가장 오래된 한 사람이 되었네요♡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45 김태현:밀양교가는길에길이없었어요.지금은길이있는데.구밀양성당 자리는그때만해도공터였습니다.어릴때많이놀았어요.밀양돼 지국밥집이몇집있었어요.남아있는건단골집밖에없고.지금할 머니밑에따님이하고있고.그분어머님까지3대가했어요.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46 민형우 Ru327. 아무래도 지금 운영하는 카페가 제일 의미 있다. 모든 관심과 노 력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까지 엄마가 르까프를 하셔서 동네 아저씨 들이 우리 형제를 르까프라 불렀다. 해천이 생기기 전 르까프 뒷골목은 내 놀 이터였다. 가게 근처에 있던 슈퍼에서 매일 군것질을 하고 생일이면 맥도날드 로 친구들을 초대했다. 심심하면 시장 안에 아주 오래된 신국상회라는 문구 점에 가서 요상한 것들을 사며 놀았다. 알파가 생기면서는 알파에서 요상한 장난감을 많이 샀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단골집이라는 국밥집을 거의 매 일 갔다. 외삼촌도 좋아하시는 가게라서 외삼촌 이름을 대고는 외상으로 매일 국밥을 먹었다. 초중고 학생회장을 했던 나는 친구가 아주 많았는데 친구들 국밥까지 철없이 외상을 하곤 했다.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47 박보영 과제를 위해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습니다. 학교도 많이 변했지만 주변 동네가 너무 변했습니다. 힘들게 걸어 올라갔던 길들이 이젠 차로 쉽게 올 라가지네요. 구불구불 이어지던 오르막 골목길. 나지막한 지붕을 인 단층집. 학교 후 문 뒤 라면집. 옛 자취를 찾아 이 골목 저 골목 한창 헤매었습니다. 그래도 관아지 건너 광제당약국은 옛 모습 그대로 영업하고 계시고, 학교 후문 뒤 에 있던 배수지(지하 저수조)는 달빛쌈지공원으로 재탄생했네요. 학교 밑 오구 동네는 예전에 우범지역으로 유명했다는데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못 느꼈어요. (이 동네 건달들이 한 번씩 상설시장 쪽으로 내려와서 말썽을 많 이 피웠다고.) 과제를 위해 주변을 꼼꼼히 살피니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고, 새롭고 재미있는 공부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48 박순희 1990년대 내이동 복개천 동네 골목. 도랑에서 집으로 난 작은 다리를 통과해야 들어설 수 있는 집. 지나다닐 때 ‘혹시 빠지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되는 골목. 1980년대 하천이 복개되어 가족 모두 좋아했던 기억이 있 다. 지금은 해천 복원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더 아름다운 동네가 되었지 만. 90년대 초 복개된 동네 골목에서 동네 친구들과 땀을 흘리며 열심히 뛰어 놀던 아이. 해가 뉘엿한 오후 복개천으로 들어서는 퇴근한 엄마를 본 순간 두 팔을 벌리고 뛰어오며 활짝 맞아준다. 가슴과 가슴을 마주하던 그 때 그 기억. 살아가며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 그때 제 나이만큼의 아이를 키우는 아들. 또 그렇게 길은 길로 이 어진다. 세대에서 세대로... 삶에서 이야기가 많으면 좋겠다. 소소한 작은 이야기들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인생의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아 가듯이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며 살고 싶다.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49 이보나 내일·내이동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아는 장소라곤 교육 들으러 방문 한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전부이다. 그래서 건물탐구를 해보았다! 밀양도시재생지원센터 • 현수막 게시대 건물 돌아서 담배 피러 갔더니 현수막 게시대가 있는 게 아닌가? 걸려있는 현수막의 디자인, 폰트, 색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MZ 세대 직 원이 주문한 것이 아닐까?... • 창작마당 내가 수업 듣는 곳! 마치 카페처럼 전면 통유리로 되어있지만, 실내는 역 시나 관공서ST 회의실. 그 책상과 마룻바닥은 조달청에서 공통적으로 납품하는 것일까? 어떻게 전국이 유사할까? 전국 어디를 가도 동일한 느 낌을 받는다니, 놀라운 일이야... • 주차장 교육 들으러 방문하면 주차할 곳이 많다. 물론 나는 영업시간 이후에 방문한다. 건물에 입주해 있는 조직은 총 3군데(도시재생지원센터·밀양시 성가족상담소·희망드림취업센터)인데, 직원 대 비 주차장은 좁은 것 같다. 내가 이 곳의 직원이 라면 아침마다 주차 스트레스를 엄청 받지 않을까...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50 이승호 옛날 밀양대학교가 여기 있던 때 퇴근하고 나면 자주 들러서 한잔하던 perfect. 학생회 아이들과도 자주 만났었지. 퍼펙트한 것은 딱히 없었고 그랬었는데 왜 퍼펙트였을까? 안주가 좋았던 기억도, 술값이 저렴했던 것 도 아닌데 그곳에 그 이름으로 있는 퍼펙트. 시간 내어서 한 번 가볼까? 친 구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남보식당’도 있었는데. * 이후 확인한 바로는 동가리신작로에 위치한 주점 이름은 ‘퍼펙트’가 아니라 ‘퍼센트’였다.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51 이주희 관아를 좋아합니다. 밀양의 자랑인 영남루도 좋아합니다. 지금의 관아 자리에는 목조건물 2층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내일동사무소로 이용하기도 했지요. 지금의 내일동사무소로 옮겨 가기 전에 그 목조건물은 일제시대 때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틀릴 수도 있겠지요. 처음 내일동사무소에 갔을 때 밀양에 이런 건물도 있구나 생각했습니 다. 그때만 해도 밀양에 관한 것들을 잘 몰랐고 지금도 있지만 회화나무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옛날에도 여기는 보통 자리가 아니구나 생각했습 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심지 못하는 정승나무이기 때문에 밀양을 알아가다 보니 관아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군요. 우리 선생님 말씀으로는 부 사는 일찍 북향제배를 올리고 관아 문에 달려있는 북을 울려서 하루 일과 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매 맞는 도구를 보고 의아해했어요. 옛날에는 부사가 행정, 법, 경찰 일까지 다 했다고 말해주었지요. 양반 댁 에서는 매맞는 형이 내려지면 돈을 받고 대신 매를 맞는 사람도 있다고. 물 론 공덕비도 많지요. 억지 공덕비를 세운 분도 있답니다. 일제시대 때 석정 윤세주, 고종 장례식 갔다와서 3.13만세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지요.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52 조주영 이 시간을 통해 어린 시절·학창 시절의 나를 추억한다. 아플 때 병원을 가 서 주사 맞으면 꼭 양과자를 사주셨는데. 남보극장과 제일극장이 있던 이 곳 내일·내이동으로 가곡동에서 들뜬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왔다. 만화영 화였던 것 같은데. 그 영화관에 아이들이 가득했다. 다들 잘 살고 있겠지? 표정 하나 하나가 추억속의 한 장면이다. 사진으론 남아있지 않지만. 또 영 남루 맞은편 버스정류장 앞에 양품점이 하나 있었다. 수입코너~ 학교에서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다 들여다보곤 했었지. 그때만 해도 물 건너 온 예쁜 것들이 가득한 그곳이 마냥 신기했었는데~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감사하고, 기록할 기회에 또한 감사한다.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53 최재현 중학생 시절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으로 종종 몇 명의 친구들과 청소 년 수련관에서 모여 컴퓨터 게임을 즐기곤 했어요. 그리고 그 주위에 친구 집이 있어서 놀다가 배가 고프면 친구집에서 밥을 먹고 헤어지는 날들이 종종 있었어요. 또 어떤 때는 겁 없는 한 친구와 둘이서 밤 12시에 담력체 험하자고 여고로 올라가는 계단에 오르며 괴담에 대해 이야기나누다가 여 고 운동장에서 친구와 인증샷 찍고 괜스레 으스스해져 뛰쳐내려오곤 했 었어요. 과거 밀양시립도서관이 영남루 주변에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네요. 옛 도서관 향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는데.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54 2022년 7월 12일 화요일 2시 1분 김미성 관리사무소 근무 중이며 선풍기소리, 매미 소리가 앉아있는 저까지 시원하게 하네요. 2층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바깥풍경입니다. 부북면 내이동 박순희 오후 2시 1분에 교무실에서 학교 홍보를 위한 작업을 했습니다. 최재현 비 대신 땀을 흘리며 하루를 적시고 있어요 내일·내이동의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떨까? 한날한시 각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찍은 사 진을 모아보니, 그 속에서 동네의 여러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다.
내일동 가곡동 교동 박보영 고래처럼 유연하고 우아하게 물속을 유영하고 싶은 오랜 꿈이 있었습 니다. 가뿐 숨을 헉헉 거리지 않고, 너무나 편하고 아름답게 수영하는 오랜 나의 바램을 위해 매일 오후 시간을 비워 두었습니다. 깊은 바닷속은 아니지만 1.3m 깊이의 수영장 물 속에서, 열심히 발 을 차고 팔을 돌립니다. 온전히 나의 들숨과 날숨, 다리 움직임, 팔꿈 치의 높이, 유선형의 몸체를 예민하게 감각하며 물 속을 나아갑니다. 아가미를 가진 물고기처럼 숨쉬기 위해 물 밖으로 고개를 들지 않았 으면 하는 굳센 의지로 25m를 터치할 때까지 숨을 참습니다. 언젠가 는 50m도 숨을 참고 한 번에 갈 수 있을까요. 오후 2시 1분. 힘들고 지겨운 발차기를 끝내고 자유형을 시작하는 시 간. 이제 시작입니다. 민형우 가게 간판 없이 일 년 동안 장사했는데 젊은 사람 말고는 잘 못 찾아오셔서 지금 간판 달고 있습니다~ 이승호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서 논어 양화 8장을 베껴 쓰다. 원문과 한글과 영문 번역본을 따로 써본다. 6가지의 말과 6가지 폐단에 대한 말인데 그중에 하나 는 '지혜를 좋아하지만 배우지 아니면 그로 인해 방자해 지는 것이다'. 'Love of knowledge without a love to learn finds itself obscured by speculation.' '好知不好学其蔽也蕩'.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56 조주영 사무실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조상권 잠시 짬이 나서 밀양시립도서관 어슬렁어슬렁 거리고 있습니다. 이익행 미리미동국 부근 남문 벽화 내이동
1부 내일동·내이동 동네사전 57 진선화 학생들 배식 후 땀 한바가지 흘리면서 반짝반짝 식판을 씻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보나 나의 화요일 2시 1분은 역시나 회사, 그리고 컴퓨터 앞. 이건 일상의 기록이라기보다 내 책상 기록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구. 개-취 듬뿍 담긴. *NOTION : 노션 없을 땐 어떻게 협업하며 살았나 몰라 *갈축 숫자 키보드 : 분리되어 있음, 왼쪽에 놓고 씀 *무소음 적축 기계식 키보드. 68key : 직업 특성상 가 지고 있는 물품이랄까? 키보드가 너무너무 중요하다. 갈축을 더 선호하는 서타일이지만, 회사는 공용공간이 라... 무소음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 *사랑스런 모니터 : 색구현도 높은, 회사를 협박해서 얻 어낸 고급 모니터 *시간엄수 : 지난주에 알람을 맞춰놨더니 워치가 띠링 김태현 아리랑시장 내일상인회 박성병회장님과 9월22일~24일까지 열리는 아리랑대축제 중 야시장행사 미팅 중 내일동 단장면 삼문동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58 ● 내가 아는 동네 이야기 ▲ 옛날 사진으로 만나는 이야기 ■ 내가 남기고 싶은 장면들 ★ 필름카메라로 담은 동네기록 ※ 2부의 글과 사진은 수강생들이 직접 쓰고 찍은 것이다. 단, 수집한 사진에는 출처를 표기하였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59 우리가 기록한 2우리가 기록한 동네이야기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60 김미성 내 고장 밀양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신청을 하고 수 업을 들었습니다. 내일내이동의 옛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며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도 알게 되었어 요. 어릴 적 사진을 찾아보는 중에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내 부모 님의 여생에 행복이 함께할 수 있게 해드려야 겠 다고요. 감사하고 뜻 깊은 나날에 감사드립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61 ● 옛 밀양문화원 옛 밀양문화원 건물은 영남루 입구 버스정류장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 니다. 1층은 문화원과 예총, 2~3층은 밀양시립도서관, 유물과 전시행사도 많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영남루 주변 정비 사업으로 2008년 11월 철거 되고, 삼문동 밀양시립도서관 건물 1층으로 옮기게 되었고, 지금은 밀양대 로 1857에 위치해 있습니다. (올해 3월 개원) 밀양의 문화 중심지로 기억합 니다. 연극공연을 보러갔던 기억도 나네요. 김태현:저옛밀양문화원전에도건물이있었어요.작아서헐었지.밀양 천일여객사장님이돈을내서지었어요. 김미성:그분이기증을했던거라건물뜯을때말이많았어요. 사진 출처: 밀양시 블로그, 날 좀 보소! 밀양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62 ▲ 가곡동 용두목 유원지 보트장 50년 전 어느 햇살 가득한 여름날입니다. 유유히 배를 저으시는 젊은 아버지와 곱디고운 어머니의 푸근함이 느껴 집니다. 동생은 엄마품에 안겨 있고 4살쯤으로 보이는 나와 외사촌은 의 젓하게 뱃놀이를 즐기고 있네요. 일제히 카메라를 향해 찰칵. 뒤에 보이는 산은 용이 엎드려 잠자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용두산이라 하였고 산의 정상은 일자봉이라 합니다. 이 용두산에는 단청을 화려하게 한 청용사, 천경사, 용궁사 등 아담한 절들이 있어 많은 불자들이 찾는 곳 이기도 합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63 용두목의 배 부모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뒷산이 용두산이다. 용두목의 주인 잃은 조각배만이 그 날을 회상하게 합니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나의 부모님입니다. 아버지는 지팡이가 있어야 걸음 을 옮기십니다. 그래서, 바닥에 앉는 것보다 의자가 편합니다. 비둘기 모이 를 주며 행복해 하시는 모습이 너무 감사하네요. 어머니는 금계국 꽃씨를 받아 내년에 화려한 꽃을 볼 생각입니다. 나의 기억 안에 없는 어린 나를 지켜 주셨듯이 석양을 향해 가고 있는 내 부모님의 현재를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64 김윤경 사진 찍기, 시 쓰기, 낭송하기를 좋아합니다. 동네 기록학교를 통해 풍경뿐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 주변에 호기심이 생겨 기록 중입니다. 중 간중간 기록학교 활동에 참여하며, 지역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며 알게 되고, 우리 고장의 귀한 역사적 가치와 기록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뜻깊 은 시간들이었습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65 ■ 남해보리밥에서 어머니와 추억 어린 시절 3남1녀의 막내로 친정에서 유일한 딸이라는 이유로 시골에 살 때, 아버지께서 목마와 지게에 태워주시며 발이 땅이 닫는 시간보다 등에 업혀 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저희 공부 때문에 달성군 산골짜기에서 밀양으로 이사를 오셨는데, 아버지께서는 퇴근하실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사과를 사오시며 저만 몰래 주시는 극진한 사랑을 받아 퇴근 하시는 아버지 손만 보던 추억이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평생 농사만 짓다 밀양에 오셔서 저희를 양육하시기 위해 일반직장에 다시며 일을 하셨는데, 장날만 되면 어머니께서 저를 데 리고 시장에서 옷도 사주시고 맛난 장국도 사주셔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 아 있습니다. 그때는 미역에 찹쌀 수제비가 맛난 줄을 못 느꼈습니다. 단지 시장갈 때는 온전히 엄마를 독차지 할 수 있어 넘 행복했습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66 그때부터 어느 순간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 할 때는 장국을 먹으로 남 해보리밥에 가는 일이 반복 되었습니다. 최근에 부모님께서 연로하셔서 아 버지께서는 뇌졸중으로 어머니께서는 알츠하이머 치매로 일상이 살얼음 판이지만. 최근 동네기록을 고민하다 우연히 5일장에서 물건을 구입 하다 그때 엄마와의 추억이 생각이 나서 사진과 글을 적으며 추억해보았습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67 문화탕 금강탕 신선탕 운하목욕탕 ★ 목욕탕 알츠하이머치매로 최근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목욕 해 드리려다 어릴 적 목욕 탕과 관련 된 추억이 생각이 나서 목욕탕 사진을 담았습니다. * 어릴 적 목욕탕에서 즐거움 1. 오빠 3명은 남자여서 엄마와 나만의 유일한추억 2. 목욕 후 요쿠르트 먹기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68 김태현 내일내이 동네기록학교 수업을 통해 우리 동네의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유익한 사간이었습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69 ● 60여 년 전 내가 살던 동네 (현) 관아 동쪽 주차장과 서북쪽 주차장 자리에 우물이 있고 (현) 단골 식당(돼지국밥) 자리엔 마을 공동수도가 있었습니다. 새벽이면 동네아줌 마들로 북적했습니다. 서로 물 빨리 받으려고 다툼도 있었고. 전 학교 가기 전 물지게에 물동이 둘을 달고 분주히 물을 날라야 했습니다. 그 시절엔 상수도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가끔씩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합니다. ▲ 봄소풍 1972(고2) 밀양산외면 긴늪 솔밭에서 봄소풍 때 친구들과 고고춤을. 기 타 치는 사람이 본인입니다. 이승호:‘KeeponRunning’이곡에맞춰서많이췄어요. 진선화:긴늪도이제는돈을받더라고요.마을에서관리하는용으로.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70 ■ 무형문화제 밀양농악 1. 개요 밀양농악의 판제는 전체 12차수에 의한 12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마당의 판놀음이 상쇠의 쇠가락에 따라 전개되며 가락은 아주 빠르게 돌 아가는 다드래기와 엇가락이 많은 것이 특색이며 특히 2분박과 3분박의 혼 합박자인 10박짜리 가락이 많이 쓰인다. 놀이의 흐름이 유연하면서도 빠르 게 진행된다. 따라서 가락과 놀이의 변화가 다양한 것이 특색이다. 2. 생성 배경과 유래 예로부터 밀양에서는 삼원놀이라 하여 정월에 전해지는 단장면 법흥리 의 상원놀이(경남 무형문화재 16호), 백중날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중원놀 이(밀양백중놀이, 국가 무형문화재 68호), 가을 추수가 끝난 뒤 행해지는 하원놀이(초동면 새터 가을 굿놀이)가 계절마다 흥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 놀이의 주가 되는 농악이 자연히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지역마다 농악을 많이 쳤다고 한다. 3. 전승 과정 및 계보 1971년 권태목(작고) 선생께서 밀양의 무안면, 부북면, 상남면, 산내면 등 농악꾼들을 모아 지금의 밀양농악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뒤 추현태 선 생께서 지금까지 지도하며 이끌어 오고 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71 4. 편성과 복색 밀양 12차 농악은 천황기, 동, 서, 남, 북 영기, 농기, 나발, 포수, 양반, 색 시, 중, 상쇠, 부쇠, 수징, 부진, 북 4~12, 법고, 소고 4~12, 장구 4~12 등 으로 편성된다. 복색은 기무와 잽이들은 평복에 삼색 띠(왼 어깨 청색, 오른 어깨 노란 색, 배에 붉은색)를 둘렀으나 70년대 이후로 청색 조끼도 착용하였고, 쇠 는 개꼬리 상모(부들상모), 징, 북, 장고, 소고는 고깔을 썼으며, 법고는 상 모를 썼다. 또 잡색이 포수는 평복에 털모자, 나무총, 망테기를 사용하였고, 양반은 흰 도포에 흰수염, 색시는 때때옷에 고깔, 중은 승복, 목탁, 짚으로 엮은 모 자를 착용하였다. 5. 판굿연회 과정 밀양 12차 농악 줄거리를 정월에 행하여진 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먼 저 천황기에 기옷을 입히면서 시작되어 마을당산제부터 지낸 후, 각 집집 마다 지신밟기를 한 후, 다시 마을장터나 당산나무 앞마당에서 놀이판을 펼쳤다고 한다. 판 굿을 차수별로 정리하면, 입장(길군악) 1차 얼림굿(모듬굿) → 2차 질 굿 → 3차 문굿(인사굿) → 4차 돌림질굿(마당굿) → 5차 마당밟기(갈림굿) → 6차 농신제(멍석말이, 고동틀기) → 7차 액맥이굿 → 8차 허허굿 → 9차 소고놀이 → 10차 살풀이 → 11차 구정놀이 → 12차 반달굿으로 퇴장.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72 ★ 내일동 문화재 내일동에 있는 무형문화재와 유형문화재를 찍었다. 밀양 농악 보존회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73 동문 월연정, 금시당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74 밀양 백중놀이 전수관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75 영남루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76 민형우 밀양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우리 동네와 동네의 사 람들을 기록하는 밀양 1호 기록자 민형우입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77 ● 영남루 • 우리나라 3대 누각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 • 외지 친구들이 밀양에 놀러오면 꼭 놀러가는 곳! • 우리 카페 “루 327”의 이름 속 의미가 영남“루” 앞 중앙로 “327”이다! ● 루 327 • 네이버 평점 4.87/5점의 우리 형이 만든 카페다. • 바스크치즈머핀과 브라우니가 맛있다. (수제) • 인테리어를 신경 써서 젊은 인스타 손님이 많다. ● 내일동 내이동 • 구도심: 시내(엄마가 시내에서 오래 장사를 하셨다), 사라진 롯데리아 맥날 • 밀양고: 대장부 밀고인, 명문고, 모교 • 영남루: 관광지, 3대 누각 • 시장: 5일장(2, 7일)

박보영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78
오해받는 사람이 제일 좋아.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79 ● 말 역사문화 투어를 통해 독립투사들의 생가지도 방문해보고, 너무 무심 했다 반성하고, 더 공부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동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니,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밀양에는 말을 타고 다니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 관아 옆 과일가게 근 처에 작은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엔 항상 말이 끄는 수레와 멋진 말이 있었 습니다. 늘 학교 가는 길에 마주치곤 했습니다. 새삼 그분이 궁금해지네요. 김태현:말수레에짐을싣고다닌분이저의자형입니다. 이익행:그때는말구루마,소달구지다있었습니다.소는좀느리고말은 빨라서,무거운짐은대부분소달구지를끌고짐이가볍고빨리가 야할때는말구루마썼지. 김미성:짐을나르는차가많이없었어요.운반용으로사용했죠. 김태현:당시에밀양에장차가두대있었어요.밀양에있는5일장을다니 면서장품을싣고갔다가곡식가져오고했죠.세발트럭은아니고 지금으로치면4~5통짜리트럭이지. 진선화:학생때달구지가지나가면가방을탁던지고뛰어올라가서몰래 올라탔어요.달구지사장님이라해야하나기사님이라해야하나. 그분도모른척하고싣고가요.우리가너무가벼웠나.도착하면뛰 어내리고.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80 ● 밀양 스포츠센터 수영장 2003년 11월 30일 준공 되었고, 지하 1층은 수영장, 2층은 체육관과 헬스장, 3 층은 GX룸이 있다. 관람석 은 2, 3층에 있다. 건물은 아무런 개성도 특색도 없어 보이고, 조금 협소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주변 풍광이 너무 좋아서, 일찍 집을 나서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멍하니 ‘나무멍’, ‘하늘멍’을 하기도 한다. 가까이에 배드민턴 경기장, 밀양종합운동장, 밀양실내게이트볼장, 밀양 시청 등이 있다. 주말에는 한 번씩 동호회분들끼리 축구경기를 해서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경기 내내 한 골도 못 넣고 설렁설렁 입으로만 하는 아마 추어 경기지만 너무 재미가 있다. 운동장 옆으로는 나무가 어우러진 산책 로가 있어 운동 전이나 후에 가벼운 산책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밀양에서 내가 제일 애정하는 공간 중 하나인 이곳. 오늘도 가방을 꾸려 집을 나선다. 코끝으로 수영장 소독약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비싼 향수 냄 새보다 이 냄새가 너무 좋다. 사진출처: 밀양시청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81 ▲ 교련복을 입고 떠난 긴늪 봄소풍 학창시절 소풍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가득합니다. 늘 같은 장 소로 걸어갔다가 김밥을 먹고, 잠깐의 장기자랑 후 끝났지만 손꼽아 기다 려지는 날입니다. 고등학교 때는 소풍가는 장소가 늘 긴늪 솔밭이었습니 다. (기회송림, 긴늪유원지) 밀양 사람들은 기회송림이라 하지 않고, 대부분 ‘긴늪’ 또는 ‘진늪’이라 호칭하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첫 소풍으로 교련복을 입고, 줄지어 긴늪까지 행군했습니다. 소풍이 아니라 ‘행군’이었습니다. 교련시간에는 제식훈련과 응급처치 교육을 받았는데, 학교 운동장에서 월요일 아침마다 제식훈련 조회를 했습니다. 2, 3학년 중에서 소대장을 뽑 사진 뒷면에는 '1984. 4.25 행군 긴늪'이라 쓰여 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82 고 소대장 옆에는 기수라고 해서 소대 깃발을 들게 했습니다. 운동장을 소 대장의 구령에 맞춰 손, 발, 줄, 열을 맞춰 한 바퀴 돌고 교단본부석 앞을 지날 때는 소대장의 구령에 맞추어 구호를 외치면서 경례를 합니다. “받들 어 총” 하면 “충성”이라고 외치면서 손으로 거수경례를 합니다. 남자 선생 님은 제식훈련과 교련 이론수업을 하셨고, 여자 선생님은 붕대감기, 삼각 끈 묶기 등 응급처치에 대한 교육을 했습니다. 2학년 때는 교련수업이 폐 지되는 수순이었는지 제식훈련도 행군도 하지 않았던 것도 기억합니다. 고등학교 때 사진을 보면, 저희는 교복자율화세대라 다 사복차림인데, 1학년 첫 봄소풍 사진은 똑같이 교련복을 입은 사진입니다. 말이 좋아 교 련이지 최초의 목적은 왜놈 총알받이로 학생들을 동원하고 군사정권 때는 학생들 관리감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련복을 입고 농촌 일손돕기로 벼 베기를 간 것도 기억납니다. 긴늪 솔밭은 차를 타고 지나칠 뿐, 이제는 발걸음이 뜸해졌고, 교련복을 입고 환하게 웃던 친구들도 간간히 소식만 들을 뿐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네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휴가철이 지난 후, 오랜만에 긴늪 솔밭으로 친 구와 긴 산책을 다녀와야겠습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83 ※ 긴늪 솔밭 (출처: 기회송림 홈페이지) 긴늪 솔밭은 밀양시 교동 동북쪽에 밀양천을 따라 너비 200m, 길이 1500m에 이르는 숲대를 말합니다. 120년 된 소나무 9500여 그루가 빽빽 하게 들어서 있고, 송림 앞으로 밀양강이 맑게 흐르고 있어, 야영과 휴양 을 위한 관광객으로 많이 붐빕니다. 긴늪 솔밭은 100여 년 전 산외면 남기 리 기회마을에 해마다 밀양강이 범람하여 가옥과 전답에 피해가 심하자 주민들이 마을과 농토를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방수림으로 심은 데서 기원하였습니다. ※ 교련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교련이라는 교과목은 광복 전 일본이 학생들을 군국주의 침략의 방패 로 삼기 위하여 실시하였고, 광복 후에는 1948년 병역법에 의거하여 처음 으로 실시하다가, 1950년 6.25로 중단되고, 1951년 12월 다시 학생군사 훈련으로, 1953년 휴전협정체결과 국내정세 안정에 따라 1955년도부터 중단되고, 1968년 청와대 기습사건 등등 북한의 도발이 심해지자 1969 년부터 다시 고등학교는 주 2시간 연 68시간씩, 대학은 주 2시간 연 60시 간씩 실시하다가, 1990년 3월부터 대학은 폐지하고, 고등학교는 1993년 5월 18일 24년만에 교련을 고교군사훈련에서 안전교육 위주로 개편하였 습니다. 1996학년도부터는 남녀공통으로 국가안전과 개인 및 집단 안전을 중심으로 실시하게 되었고, 1997년 선택과목으로 변경되었고 2011년부 터는 교련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84 ■ 밀양 수원지와 배수지 밀양시 내일 5통 지역은 아북산의 남쪽 지역으로, 일제의 납석 광산 개발 의 흔적이 남아 있고,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이주로 형성된 마을이다. 관아 뒤편 산자락의 마을이 내일 5통이고, 관아 옆길로 계속 오르면 정 상 부근에 “달빛쌈지공원”이 있다. 공원 뒤편 오른쪽은 밀양여고 후문, 왼 편 아래쪽은 달빛주차장이 있다. 달빛주차장에서 백중놀이 전수관까지 ‘별달굽이길’이 펼쳐져 있다. 밀양의 일몰 명소인 ‘달빛쌈지공원’은 오래전 밀양시내에 수돗물을 공급 하던 배수지였다. 내일동 관아 인근 지역 주민들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수 돗물을 공급받았다. 영남루 건너편, 내일 1통 경로당 맞은편, 광제당 약국 뒤편 등 여러 곳에 공동 수도가 있었다고 한다. 물 공급 시간은 대략 아침 5시 ~ 6시 사이, 저녁 4시 ~ 5시 사이로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밀양여 고 밑 내일 5통 지역은 공동수도가 없었다. 지금은 없어진 관아 우물에서 길어 먹기도 하고, 공동 수도에서 물지게를 지고 힘들게 산비탈을 오르내 렸다고 한다. 82세 된 주민은 60년 전 밀양으로 시집을 오셨는데, 그때도 공동수도가 있었고, 수도요금을 계산한 기억은 없다 하셨다. 밥을 하거나 마시는 물은 수돗물을 사용하고, 빨래는 영남루 밑 강에 가서 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강가에 판판한 빨랫돌이 많았다고 한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85 ■ 밀양시 최초의 상수도 수원지 삼문 수원지는 1933년 3월 31일부터 수돗물을 생산하여 내일동 관아 인근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했다. 밀양강 둔치에 모래와 숯으로 된 차집관 로를 설치하여 자연적으로 정화된 물이 집수정에 모이게 되면 하루 200㎥ 의 물을 내일동 영남루 옆에 위치한 내일 배수지로 보낸 후 소독과정을 거 쳐 시민들에게 안전한 수돗물을 공급했다. 2007년 5월 7일 밀양시 상수 도 현대화 사업과 더불어 가동을 중지했다. ■ 밀양시 최초의 상수도 배수지 1933년 3월 31일부터 삼문 수원지에서 정수된 물을 공급받았다. 내일 동 관아 인근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했다. 700㎥의 수돗물을 저장할 수 있 고, 내부는 3단의 원형으로 설계되어 물이 배수지 내부를 돌면서 소독약 품이 충분히 섞일 수 있도록 매우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1988 년 12월 상수도 현대화 사업과 더불어 가동을 중지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86 ■ 밀양시 내일 2 배수지 내일동 431-110에 위치하고, 부지 면적은 2,690㎡, 시설 용량은 1,100 ㎥이다. 설치년도는 1986년 경이고, 사용중지는 2007년 6월이다. 시설이 완전히 폐지된 년도는 2017년 12월이다. 사진 왼쪽 중앙 부분에 작은 지붕 4개가 보인다. 수돗물 저장시설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달빛쌈지공원 으로 바뀌었다. 내일동 옛 공동수도 자리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87 ■ 달빛쌈지공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배수지 를 2017년 공원으로 바꿨다. 저수 조의 콘크리트 외관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비탈진 지형을 활용한 전망데 크의 ‘달빛문’과 전망데크 아래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소규모의 공 연도 가능하다. 2020년 대한민국 국토대전에서 관아 주변 공공디자인 개 선사업으로 장관상을 받았다. 2021년에 박경석, 서진희, 손영민 청년예술 인이 <달빛유희>라는, 야외설치가 가능한 작품으로 올해의 추천 작가 조망 전도 했다. 박보영:제가경로당에가서모여있는어르신들한테물어보면서조사해보 니공동수도가영남루건너편에제일먼저생겼고내일동전체에 몇군데가있었대요.경로당옆이발소맞은편이수도가있던자리 고관아옆에도우물이있었어요.단골돼지국밥집앞에있는우 물은장사하는분이나수도가없던오구동네사람들이썼어요. 내일동5통지역을옛날에오구동네라그랬어요,할머니들기억으 로는아침밥하기전,저녁밥하기전에물을길어오셨대요.어떤 분은‘아이고나는학생이없어가지고아침에는물을안떴다’라며 웃으셨어요. 김태현:빨래돌하니까생각나는데영남루밑에보면강에바위가많아요. 꼬꾸랑(꼬부랑)바위,귀신바위.지금은다매몰되어서없어요.거 기서수영많이했어요.
★ 대문 밀양여고 아래 동네에는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 문을 열면 바로 방 안이 보 이는 집들이 많다. 지금은 많이 없어진, 낡고 허물어졌지만 애써 가꾼 흔적이 남 아있어 아련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집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좁은 골목에서 일회용 카메라에 집 전체를 담기는 어려워서 낡은 대문을 기록했다. 용평에 있는 슬레이트 지붕 집이다. 여기는 아무도 살지 않지만 누군가 마당에 야채를 심어 텃밭을 가꾸고 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89 박씨 재실 정문이다. 동문 바로 밑에 비슷하게 생긴 세 집이 쪼르르 있는데, 이 집은 돌로 꾸며 놓았고 가운데 집은 석류나무가 있다. 동문 고개 밑에 축대가 특이한 집 맞은편에 위치한 집이 다. 기왓장, 돌멩이, 콘크리트 등 다양한 재료로 축대를 만든 점이 신기해 예전에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일회용 카메라로는 아무리 앵글을 잡으려 해도 담기지 않아 맞 은편 집을 대신 찍었다. 이 집도 비어 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90 사진 가운데 부분이 대문이다. 대문 밖 비닐 깔려 있는 곳에는 대문 기둥이 남아있다. 누군가의 집이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달빛쌈지공원 올라가는 계단 시작 지점에서 왼쪽을 바 라본 모습이다. 가운데 보이는 풀로 덮인 통로는 길 같아 보이지만 길이 아니다. 집이다. 누군가의 마당을 사람들 이 길처럼 다니고 있다. 밀여고 아래에 위치한 집이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91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92 박순희 내일·내이동 동네기록학교에 참여한 시간이 행복 했습니다. 책으로 나오니 더 좋습니다. 빨간집 가 족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음악과 함께 언제 나 행복한 선율·은율이 할머니입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93 ● 내이동 733번지 내이동 733번지, 결혼 전 생활했던 곳. 일제강점기 역사적인 동네임을 해천항일운동 테마거리 조성 후 알게 되었다. 영화 ‘암살’의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배우 조승우가 남긴 짧은 한마디. 이 동네가 자랑스럽다. 이 장수, 윤세주, 김원봉, 전홍표 생가로 이어지는 해천 길. 길은 길로 다시 이 어진다. 윤동주의 ‘길’ 중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 했습니다.’ 시가 생각나는 오늘. 그들의 자기희생과 나라사랑으로 다시 태 어난 K-동네. 새로운 비상을 꿈꾸며 다음 세대로 이어갈 내이동.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동네이다. 내이동 733번지 3층 건물에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호산나음악학원이 있었다. 그 옆 731번지에 해천루와 복합문화센터 건축이 한창이다. 복원사 업계획에 포함되어 없어졌지만 K-동네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내이동 731번지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94 ▲ 33년 전 그 자리에 서다 1989년 1월 대학 4학년 겨울방학 때 찍은 사진이다. 앞쪽 검은 코트를 입 은 사람이 나이고 오른쪽 옆 국어교생, 그 옆에는 국어 지도교사, 뒤에 있 는 선생님은 어느 과목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988년 5월 대학 4학년이 었던 그때 밀성여중에서 교생실습을 하게 되었다. 나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한 달을 국어 교생도 함께하게 되어 친하게 지냈다. 지금이 2022년 7월이니 33년이 지났다. 함께 했던 국어 교생은 지금 어 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변한 것은 내 나이만큼의 세월이기 도 하지만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밀양교도 새롭게 놓이고, 사람들이 자 유롭게 오가다 밟히기도 했던 아랑각 아랫길 석화도 보호받고 있다. 영남 루 아래 산책길을 거닐며 33년 전 사진과 똑같이 다리가 보이는 장소에서 사진을 찍었다. 산책로를 조성하면서 남천강을 친구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 기도, 남천강과 팔짱을 끼고 옆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는 상태, ‘멍 때리는 일’ 바로 물멍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이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는 시간, 뇌에 여유와 쉴 틈을 주는 시간, 뇌의 활 동을 멈추는 시간을 가짐으로 뇌를 더 건강하게 하고 회복 탄력성을 높여 준다. 밀양 강변 공원 산책로가 아름다워 전국에서 벤치마킹하러 온다고 한다. 산과 강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곳, 밀양 사람뿐 아니라 전 국민이 편 안하게 쉬다가 갈 수 있는 곳, 누구나 오고 싶어 하는 곳, 그곳에 내일, 내 이동이 있었으면 한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96 카페 밀양. 가곡동에 있는 영화 밀양을 배경으로 했던 전도연이 있었던 카페. ★ 해천과 카페 해천 주변과 카페를 찍었다. 아직 몇 년 남았지만 퇴직 후 하고 싶은 게 여러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카페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호호카페. 카페밀양 맞은편이다. 생 긴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호 떡이랑 커피를 판다. 주인 사장님께 서 호떡을 커피와 잘 어울리는 디저 트로 컨셉을 잡으신 것 같다. 겨울 에는 대박이 날 것 같은 집이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97 이디야 카페윤새벽 선물 Tea&Coffee선영씨 몬스터커피 With 24h 무인카페. 이익행 선생님 카페도 찍어보았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98 동가리 카페 대디 카페. 이 카페가 먼저 있었는데 바로 옆에 동가리 카페가 생겨서 사장님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들었다. 팜&커피 달빛정원나들목 팥빙수. 근무하는 학교 맞은편에 있는 빙수 집이 다. 꽤 된 것 같은데 가격도 싸고 괜찮다. 북성사거리 내이동 733번지. 호산나음악학원에서 조이음악학원까 지 부모님과 오빠 부부가 이어 오고 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99 밀양의열기념관 커피ALB RU:327 박군, 커피이야기 북카페인북스 해천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00 이보나 부업으로 디자인을 하며 밥 벌어 먹고 사는 인간. 본업은 늘 죄책감에 시달리는 nonpro 개집사. 강 아지들의 견생 질을 높이기 위해 밀양으로 귀촌했 다. 강아지들 만족도는 최상이지만, 내 만족도는 글쎄.... 좀 더 살아보자, 일단은.
● 옛날 손글씨와 폰트 사진은 당시 서라벌광고 사장님과 함께 일하셨던 분이 ‘E 드라이브 : 밀 양시’ 발주 일을 하면서 저장해둔 것을 받았고,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출처: 현재 밀양에서 광고사를 하고 있는 사장님의 머릿속
1996. 04. 부민그린타워 "아따, 날씨 좋네." - 아따, 뺑기 치기 좋은 날이네. "밧 타는 것도 이제 쉽지가 않네. 이 아파트 까지만 하고 고마해야지" - 요새가 뺑기로 돈 벌기 딱이구만, 쓸데없 는 소리 고마 해라. 옆에 아파트 하나 또 짓 는다 카던데, 고까지만 하자" " 옆에 미술사 김씨, 밧 타다가 저세상 갔다 는 얘기 들었제? 고마, 내 이제 만사 하기 싫 다." - 야 가 오늘따라 와이카노. 날도 좋은 데. 쓸데 없는 소리 고마하고 밧이나 메라." " 예전에는 꺽은글씨, 꺽은글씨 그라더만 요새는 전부 각진 글씨 쓰데. 이거 가다 잡는다고 붓 좀 날렸다고 내가 켔나?" - 고마, 그 붓값 오늘 내가 끝나고 술 한잔 으로 퉁 쳐주께. 니가 성격이 지랄 같애도 고딕 기가 막히게 써서 콱 마 짜를수도 없 고. " 내가 형님 드러븐 성질 맞춘다고는 생각 안하나? 키키" 1980. 02 밀성아파트 "사장님, 너무 한 거 아닙니까." - 백씨, 이번 한번만 봐도. 우야겠노, 아파 트 이름이 어제 바끼뿌다 안카나. " 요새 날도 추워가 뺑기칠 하기도 힘든 데, 빼다 전부 흰색으로 바르고 마르는거 기다리고 언제 또 글자 칠하고, 아따 나 는 진짜 모하겠습니다." - 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기라. 근데, 우야 겠노. 아파트 이름을 놓고 살 수가 있겠나. "겨울이라가 잘 마르지도 이게 잘못 덧 바르면 어진다 안합니까. 내가 사장님 정 봐서 에 글짜 다 떨어져도 머라카지 마이소" - 백씨, 믿고 맡기는거 한 일은 내가 다 처리할테니까 어도. 1987. 12 삼우아파트 "이기 아파트 사이에 어야 되는기라" - 근데, 이거 얼핏 되지 않겠습니까? "그라이 니가 아직 워야 칸다는 거라. 글자를 ■ 아파트 이름을 그린 사람들 관련 디자인 직종에서 일을 하며 선배들에게 당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재구성한 것이다.
요새는 전부 각진 글씨 잡는다고 붓 좀 날렸다고 내가 끝나고 술 한잔 성격이 지랄 같애도 콱 마 짜를수도 없 성질 맞춘다고는 생각 거 아닙니까." 봐도. 우야겠노, 아파 바끼뿌다 안카나. 뺑기칠 하기도 힘든 흰색으로 바르고 마르는거 글자 칠하고, 아따 나 처음인기라. 근데, 우야 겠노. 아파트 이름을 딴 거 써 놓고 살 수가 있겠나. "겨울이라가 잘 마르지도 않고예, 이게 잘못 덧 바르면 전체가 전부 떨 어진다 안합니까. 쉬운기 아니라예. 내가 사장님 정 봐서 다시 하긴 하는데, 뒤 에 글짜 다 떨어져도 내는 모릅니다. 내보고 머라카지 마이소" - 백씨, 믿고 맡기는거 아이겠나. 잡다구리 한 일은 내가 다 처리할테니까 글자나 잘 적 어도. 1987. 12 삼우아파트 "이기 아파트 사이에 '가'를 잘 적 어야 되는기라" - 근데, 이거 얼핏 보면 삼가우 되지 않겠습니까? "그라이 니가 아직 내 밑에서 배 워야 칸다는 거라. 글자를 쪼까 더 꺽든가, 동글동글하이 해주든가, 약간만 다 르게 해주는기라. 그라믄 뭐 된다, 일단 오 늘 함 보믄 알끼라."
1991. 07 동보아파트 "빼다 색깔이 뭐 이렇노, 이기" - 누리끼리하이, 이거 뭐 되겠습니꺼? "뭐 우짜든동 해봐야지, 저기 가서 가다 좀 가와바라. 일단 함 대보 고, 살짝 칠해보고 검정 좀 우째 만 져보자" - 근데 가다가 이게 맞습니꺼? 비읍이 너무 긴데예? "니 내가 오늘 요거 다 적고, 퇴근하는길에 저짜 멀리서 함 봐봐라. 눈에 띌라카믄 밖에 서는 글자가 세로로 쪼메 길어야 된다." 1988. 10 신촌아파트 "와, 이건 못보던 글잔데?" - 내가 부산가서 보고왔다 아이가. 요새는 글자를 또 특이하게 이래 쓴다카데. "이거는 뭐 피읖이 그리다 만 거 긑노." - 이기 도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라. "뭔가 쎌주그리 한데, 이거 되겠나" - 소장이 된다 케쓰이 우리는 뺑기 만 칠하믄 되는기라. 2022년 디지털 디자인, 시대 "고객님, 시안 보내드렸습니다. 컬러는 원하시는 팬톤컬러에 췄구요 폰트는 요즘 사각 고딕 계열로 세 만들어 봤습니다. 수정 으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정 횟수는 3회로 제한되며 초과하실 경우 추가 - 혹시 파란색을 조금 열로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 딱딱한 것 같습니다. 하면서 심플한 폰트로 도 될까요? * 2022. 08 이제는 찾아볼 리워하며, 누구나 디자이너라고 아간다. 활자를 말 그대로 수공업자들은 지금으로 디자이너'라고 해야할까.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맞습니꺼? 비읍이 너무 적고, 퇴근하는길에 눈에 띌라카믄 밖에 쪼메 길어야 된다." 글잔데?" 보고왔다 아이가. 요새는 이래 쓴다카데. 그리다 만 거 긑노." 좋아하는 기라. 한데, 이거 되겠나" 케쓰이 우리는 뺑기 되는기라. 2022년 디지털 디자인, 인쇄 시대 "고객님, 시안 보내드렸습니다. 컬러는 원하시는 팬톤컬러에 맞 췄구요 폰트는 요즘 트렌드인 정 사각 고딕 계열로 세 가지 시안 만들어 봤습니다. 수정 사항 있 으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수 정 횟수는 3회로 제한되며 횟수를 초과하실 경우 추가 금액이 발생합니다." - 혹시 파란색을 조금 더 지중해 파란색 계 열로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글자가 너무 딱딱한 것 같습니다. 부드러우면서 강 하면서 심플한 폰트로 다시 시안 부탁드려 도 될까요? * 2022. 08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활자 수공업자를 그 리워하며, 누구나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 오늘을 살 아간다. 활자를 말 그대로 '만드는' 시대를 살아갔던 수공업자들은 지금으로 치자면 '타이포그래픽 전문 디자이너'라고 해야할까. 활자 하나를 디자인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릿속 도안과 손끝에 들 고 있는 붓의 감각으로 하나 하나를 만들어갔던 그 사 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디자인 프로 그램의 보급으로 누구나 디자이너라고 '착각'하며 '오 만'을 떠는 시대를 살아가는 '밥 벌이 디자이너'는 오 늘도 아메리카노를 각성제처럼 때려 마시고 무리한 수정 요구를 '네, 네'하며 받아쳐낸다. '글자 하나 바 꾸는 것 금방 되죠?', '포스터 한시간 이면 되나 요?' 같은 질문은 시대가 만들어 낸 '당연한 무례함' 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무례함을 당연한 친절함으로 받아쳐내는 것을 '프로 디자이너'라고 여기는 세상을 살아가며 글자 하나를 쓰는데 꼬박 하루가 걸리기도 했던 시절을 상상해본다. 이 글은 나의 상상 속에서 벌어진 이야기이며, 하루하루 혐생에 쫓겨 자료조사 를 못한 수강생이 잔머리를 짜내어 27분만에 쓴 글이 다. 맞춤법 검사도 못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06 이순선 내일동에서 40년 동안 옷가게 하면서 아들1명 딸 3명 두고 열심히 살면서 봉사하고 밀양시 내일동 발전할 수 있는 일하고 싶어요~~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07 ● 용평동 추억 60년도에는 내일동 용평동 189커피숍 앞에 찬물샘이 있었다. 친구들과 선불사과 포도밭 과일 사서 찬물에 담그고 맛나게 먹고 손발도 담그며 쉬 고 했다. 지금은 꽃시계가 자리하고 있어 옛 생각이 많이 나고 그립다. 남천강 2013년 수영대회 사진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08 ★ 재래시장 우리 가게가 있는 시장 주변을 찍었다. 우리 가게. 상설시장 입구. 북문에서 떡집 올라가는 길.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09 팜&커피 달빛정원. 카페 앞 조형물에 불이 켜지지는 않 았지만 해가 지고 있는 시점에 찍은 사진들이다. 그래서 인지 조금 어둡지만 멋지게 나왔다. 시장 남문 쪽 거리. 달빛정원 옆에 ‘부강탕’ 목욕탕 건물을 살려서 밀양에 특색 있게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찍었다. 오래된 목욕탕인데 지금 하지는 않는다. 철거를 하느냐 살리느냐 기로에 서 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10 이승호 하기 싫은 일을 하다 3년 전부터 하고 싶은 일을 찾아하며 인생 2막을 행복하게 사는 중늙은이 입 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11 ● 추웠던 밀양고등학교 산천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방학은 아직 멀었고 변변한 겨울옷 하나 없던 시절, 차비가 넉넉하지 않아서였지만 차장의 우격다짐이 싫다는 핑계 로 찬바람이 쌩쌩 부는 2개의 다리를 넘어 내이동에 있는 학교를 다녔던 1970년 중반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학교 정문엔 평생 보지 않았으면 하는 교련선생과 선도부원들의 트집이 설치고 있었고, 잠사전문학교로 가는 길엔 우거진 메타스퀘이어가 늘어져 있었지요. 복장불량이라며 얼어붙은 뺨에 올라붙는 교련선생의 손바닥 의 감촉은 지금도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학교 옆에는 복개되 지 않은 개울에서 올라오는 온갖 냄새들과 쓰레기들... 즐거워야 할 학교에 선 연못을 메우는 사역에 동원되었고 술 냄새 풍기는 선생들의 튀기는 침 을 무방비로 받아내야 했고.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12 1975년부터 1978년 2월까지 내가 다니던 밀양고가 내이동에 있었지요. 이유없이 화풀이 대상이 되었던, 양쪽 뺨을 어루만지며 쳐다보았던, 메타 스퀘이어 나무에 걸린 푸르렀던 그때의 하늘은 아직도 그대로인데. 매일 아침 그때의 나만한 손자를 밀양고 후문에 내려주고 있네요. 이승호:저는본래멍에실에살았거든요.밀양역뒤쪽에있는동네.지금은 가곡동이죠.반티산이라고혹시아십니까.국민학교다닐때일자 봉을우리는반티 1 를엎어놓은것처럼생겼다고해서그렇게불렀 어요.반티산에서보면동네모양이소멍에 2 처럼생겼어요.그래 서멍에실이라고했죠.멍에실이가곡동의원동네에요.밀양역이 생기고철길이깔리고뚝을만들면서지금의가곡동이생긴걸로 알고있습니다. 저는밀양고등학교를다녔어요.가곡동에서버스를타면앉아서 올수있었거든요.근데내일동와서내릴때못내리겠더라고요. 밀치고쑤셔넣고하는게싫어서걸어다녔어요.겨울에는다리두 개넘어서학교가면볼떼기가다얼어있잖아요.그런상태에서뺨 을맞았던거에요.그런안좋은기억이있어서제아들과아내가 선생님인데늘‘절대아들때리지마라.사랑의매웃기는소리하 지마라.’라고말했던기억이납니다. 1 ‘함지그릇’의 경상도 방언. 2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말이나 소의 목에 얹는 나무 막대.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13 ▲ 밀양역 1972년 밀양역과 광장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광장 안까지 마이크로 버 스가 들어왔었지요. 아마 중학교 1학년 때. 멍에실 앞산. 불놀이하다 불 끄느라 식겁했던 기억도, 필기 뽑던 기억도. 칡 캐고 입가가 새까맣도록 씹 었던 기억들이 생생한 곳. 그 당시엔 밀양역이 아주 작았지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철길을 건너다녔지요. 이승호:우리집이옛날밀양역근처에있어서역있는뒷동네가놀이터였 어요.지금밀양역과비교하면엄청달라졌죠.광장은똑같이있 어요.왼쪽으로조금확장이됐고.사진에보이는버스가전에말 한마이크로버스예요.지금으로치면25인승정도되는버스인데 광장안에정류장이있어요.사진왼쪽에있는건물이창고예요. 당시에는열차에뛰어들어서자살하는사람이많았거든요.그러 면죽은사람들을저창고앞에뒀어요.
■ 가곡동 귀환동포촌 우리동네에는 특별한 곳이 서넛 있다. 오늘은 귀환동포촌에 대한 이야 기를 해보려 한다. 가곡 15길 근방에 위치한 이곳의 집들은 벽을 공유한다. 해방 후 일본 에서, 만주에서 밀려드는 귀환동포를 위한 임시 주택이었다. 그 후 6.25 피 난민, 호열자 3 환자들도 이곳으로 와서 살았다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곳을 병막(病幕)이라고도 한다. 당시엔 약 200호 정도로 제법 큰 마을 을 형성했다고 한다. 지금도 한 사람이 겨우 지날만한 골목들 사이로 집들 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15평 남짓한 집에 방이 3개, 부엌이 1개, 게다가 마 루까지 있다. 온돌을 구하지 못한 집에서는 다다미를 깔기도 했다고 한다. 입주절차는 확실하지 않으나 구장을 통해 신청하였는데 노부모를 모시는 가족, 자녀가 많은 가족, 생계가 어려운 가족 순으로 입주할 수 있었다. 화장실을 따로 갖지 못해서 공동화장실, 공동우물, 공동세면장이 있었 다. 월요일 아침 이 공동화장실 문이 얼마나 열리고 닫혔을까? 순서를 기 다리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겼을 법하다. 후에 둑이나 도로변에 접한 집들은 마당을 만들고, 채전 4 도 만들고, 어설프나마 화장실을 만들기도 하였다. 세월을 거치면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20~30채 의 집들이 남아있다. 아직 대부분 국유지고, LH에서 권리를 행사하고 있 다. 주민 대개는 나이가 많다. 학생은 여중생 1명, 여고생 1명, 2명뿐이라 한 다. ※ 도움을 주신 분: 주민 권재순, 당시 이곳에서 자취를 했던 이순공 3  장티푸스 4 ‘채소밭’의 경남 방언.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15 동네 입구이다. 왼쪽에 보이는 밀양 양조장은 내일동 밀성고등학교 앞에 있었는데 가곡동에 유치했다. 벽화는 동네 주민들이 이사 기념으로 아버지와 딸이 합작해서 그렸다. ★ 귀환동포촌 가곡동 귀환동포촌을 기록했다. 골목이다. 이 골목은 넓은 편으로, 정말 좁은 골목은 몸을 비켜서 들어가야 한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16 수도가 없을 때 사용하던 공동 간이 세면장이다. 지금은 개조해서 동네 노인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알았는데 둑 이름이 ‘가곡제’였다. 옛 공동 화장실이다. 옛날에는 집이 200호 정도 있어서 화장실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아주 많았겠다 는 생각이 든다. 문이 잠겨 내부를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집집마다 화장실이 다 설치되어서 이제는 화장실로는 사 용하지 않을 듯하다. 골목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17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자꾸 다니니까 길이 없으니 들어 오지 말라는 뜻으로 입구에 ‘길 없음’ 팻말을 붙여두었 다. 실제로는 길이 있다. 들어가보았더니 거미줄이 머리 에 붙어서 길 나와서 떼내야 했다. 둑과 동네 사이 길. 나무를 심은 분은 아직 살아계신다고 한다. 지금 이 동 네에 살지는 않고 이사를 가셨다. 동네에서 왼쪽으로 올라오면 둑이 있다. 둑에서 보는 경치 가 정말 좋다. 사진 가운데 가로지르는 도로는 철길이고, 그 뒤의 산은 용두산이다. 동네 끝나는 지점부터 송화보까 지 데크를 깔아서 새로운 등산로를 만들 계획에 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18 이익행 내일동에서 무인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내일동 도 시재생 협의회 회장 이익행입니다. 내일동 기록을 통해 동네의 발전과 재생에 힘쓰겠습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19 ● 해천 해자천의 줄임말이다. 조선 성종 10년, 왜구들의 노략질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조정은 이를 막기 위해 밀양읍성을 쌓고 이곳에 수로를 조성하였다. 해자(垓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싸서 뭍으로 만든 하천이 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일본을 극복하려는 기운이 이곳에서 싹텄다. 밀양해천은 항일운동과 독립운동가 배출의 근간이 되었다. 길이는 약 600m 쯤 된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20 ▲ 교련 고2^^. 금시당 교련행군 친구랑 한컷 ~~ 진선화:금시당에 옛날에 철길이 있었어요. 백송 가는 길이거든요. 영화 <똥개>촬영지인데굴이있어요.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21 ★ 내일·내이동 한 바퀴 내일동의 오래된 건물, 추억이 담겨 있는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는 곳을 다니면서 찍었다. 내일·내이동 동네기록학교 시작 전 기획팀에게 동네 소개를 부탁받았을 때 한 바퀴 돌았던 코스이기도 하다. 의열기념관과 해천거리 동가리 골목오른쪽에 보이는 주차장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시절 남보 극장 자리였다. 왼쪽의 나무대문 있는 기와집은 재작년까 지만 해도 영업을 했다. 농기계 부품을 취급했다. 오래된 집 이지만 보존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22 쌈지공원. 경치도 좋고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때때로 공연도 하고 있다. 밀양여고 좌측으로 교동 쪽으로 가다 보면 백중놀이 전 시관이 있다. 밀양하면 백중놀이인데, 이곳에 전수관이 있다. 백중놀이 전수관만 있는 게 아니고 예술단과 함께 사용하고 있다. 동문. 밀양읍성 동, 서, 남, 북문 중에 유일하게 복원되었 다. 용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기도 하다. 밀양여고. 옛날에는 오르막길을 걸어올라갔다. 우스갯 소리로 밀양고와 밀양여고 위치가 바뀌어야 하는게 아 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23 청학서점. 학교 다닐 때 터미널 옆에 밀양에서 제일 유 명한 제일 큰 서점이었다. 학기가 바뀔 때는 면에 살아도 학교 앞에 서점이 있어도 여기 와서 책 사면은 짜장면 한 그릇 사 먹고 밀양 시내 구경 한번 하고 간 추억이 있다. 구 제일극장 자리이다. 아직까지 옛날에 간판이 있던 자 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문구점 알파로 바뀌었 다. 고등학생 때 여기에서 <엄마 없는 하늘 아래>라는 영 화를 보며 울었던 곳이기도 하다. 동가리 골목.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러시아 등 5개국 대학생들이 와서 보름 정도 금강탕에 머물며 동네에 그림 도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동가리카페 자리에서 잔치를 벌였다. 윤세주 열사 생가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24 이주희 제2의 고향 밀양에서 도시재생 내일 내이동 기록 수업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내이동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동네 인줄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을 마감 할 때까지 살 동네라 보니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 라면 항상 동참하고 배우겠습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25 ● 부북면 집에서 내일내이동으로 나올 때 밀양으로 내려온 지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우리 농장이 부북 감래에 있 었는데 생필품을 구입하려면 내일동 상설시장과 내이동 버스터미널 2일 7 일 장에서 구입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국립식량과학원과 전화국 사거리 에 정미소가 있었다. 장날에는 쌀과 등겨가 가득 쌓여있었다. 사람들은 쌀 과 등겨를 담느라 머리에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열심히 퍼 담으시는 모습이 선하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 옆으로 오토바이 가게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다이소, 필마트가 들어서있다. 그리고 밀양시 라도 택시를 타고 가면 감천다리에 올라서면 택시요금이 달라진다. 다리 하 나 사이로 내이동과 부북면으로 나눠지니 그 당시 할증료를 주는 내 입장 에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26 조상권 우리 동네 숲과 길, 그리고 자연을 기억하고 기록 하는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숲길등산지도사 기록자 조상권 -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27 ● 밀양대학교 내가 아는 바로는 1923년 11월 밀양공립농잠학교로 시작해서 밀양실업 고등학교를 거쳐 밀양전문대학, 밀양산업대학 그리고 밀양대학교로 교명 이 변경되었다. 그러다 2006년 3월 부산대학교와 통합하였고 삼랑진으로 대학은 이전되었다. 현재는 아무도 입주해 있지 않은 허허벌판이긴 하지만 얼마 전엔 그곳에서 밀양페스타를 개최하기도 한 지역의 희노애락을 함께 한 유서깊은 장소이다. 1990년 후반 당시 밀양산업대학에서 축제가 열렸다. 내가 좋아했던 ‘맨발 의 디바 이은미’씨가 공연을 이끌었고 늘 하던 대로 관객들의 휴대폰을 손 에 가득 들고 노래하던 그 시절의 밀양대학교. 무대를 빙 둘러 마음껏 박 수치고 환호하던 그때의 모습에 괜히 쓴 미소를 짓는다. 지금은 황량해진 밀양대학교의 정문 앞을 매일 지날 때면 아쉬움이 가득하다. 빨리 그 넓은 운동장에서 모든 밀양시민들이 환호하고 응원하는 모습들을 보고 싶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28 ■ 30년 전 밀양에도 탁구장이 있었다. 지금이야 시내 곳곳에 탁구장들이 잘 운영되고 있고 시립도서관 지하에 는 시민들을 위한 탁구시설도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30여 년 전에는 탁구 장이 꽤 귀했던 시절이었고 찾기가 힘들었다. 밀양고등학교 정문에서 좌측 골목길을 빙 돌아 동가리시장 방향으로 올 라가다보면 당시 독서실 3층 건물이 한 채 있었다. 간판은 지금도 바뀌지 않고 명륜당독서실 간판 그대로이다. 학창시절 탁구를 좋아했던 나는 밀양을 다 뒤져 탁구장을 찾아다녔고 독서실 간판 그 건물 1층에 탁구대 4개를 둔 아담한 탁구장이 있었다. 그 탁구장에서 사장님과 1~2시간 경기를 했었고 사장님의 지인이 운영하는 탁구동호회를 소개 받았다. 그 탁구동호회는 밀양관아 앞에 위치한 현재 의 내일동 행정복지센터 건물 옥상에 있었다. 그곳에서 몇 몇 동호회 분들 과 탁구 시합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독서실이었던 그 탁구장 앞에 중국집이 있었다. 북성반점. 밀양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중국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점심시간이나 야간 자율학습 시작 전에는 자리가 없어 기다려야 했다. 시내 나올 일이면 가끔 들려서 볶음밥이나 짜장면을 시켜 먹곤 했는데 아직까지 그렇게 양이 많 은 중국집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학생들은 곱빼기에다 탕수육까지 추가 로 시켜먹고는 돈을 나눠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29 * 현재의 장수왕족발 옆 돼지나라 위치가 북성반점. 북성반점 바로 앞이 독서실 자리로 기억한다. 박순희:탁구장이라고하니생각납니다.제친구집도40년전에탁구장을 했어요.골든탁구장이었고요.위치는현재향촌식당아래입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30 ■ 밀양아리랑시장 조선 성종10(1479년) 밀양읍성 축조 시 동원된 백성들이 생필품 조달을 위해 밀양장이 개장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내일공동시장(2일, 7일장) 허가를 받아 영업 중 밀양읍 도시계획에 의거 시장 중앙으로 도로가 개설 됨으로 장옥을 헐고 현 시장인 (구)경찰서 부지에 밀양시장(상설시장)이 신 축개장하고 내일공동시장은 폐지가 되었으며 현재까지 밀양아리랑시장 ((구)밀양시장)이 전통시장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 시장터는 밀양관아 부속건물인 관청고와 호장청이 있었으며 그 뒤 개창학교(현 밀양초등학교)가 있다가 이전한 (구)밀양경찰서가 있던 곳으 로 밀양 3.13만세운동(1919.3.13.)과 최수봉의사 밀양경찰서 폭파사건 (1920.12.27.)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최수봉의사의 폭파시 밀양경찰 서의 위치는 현재 안내표지판이 붙어있는 밀양시장이 아닌 해천 맞은편 공영주차장 옆 건물로 추정된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31 ■ 종남산(663.5m)에서 내려다 본 밀양시 영남지방의 분수령인 태백산맥의 맨 끝에 그 정기를 모은 밀양 종남산 은 서북쪽으로 주령을 형성하여 이어지면서 옛날부터 여러 가지 민담과 설 화를 남기었고, 밀양은 통신과 교통상의 요지로 각광을 받았던 지역이기 도 하다. 밀양부 관아의 안산으로 산꼭대기에는 못이 있고 봉우리 북쪽에 기우정이 있어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 산봉우리 동편에는 고려시대 이래 남산 봉수대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유적이 있으며 북쪽으로 추화산 봉수대에 신호를 보냈다. 종남산 봉수대(남산 봉수대)는 남산리 후면에 해당하는 종남산 둘째 봉 우리에 있었다고 한다. 봉수대는 옛날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지 방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 수단이다. 봉화대, 봉오재 등 으로 불리었다. 이 남산 봉수터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김해 자암산과 추화 산으로 신호를 보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하남읍 백산 봉수대로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종남산에서 동북쪽 구배기로 가면 꿍꿍이골이 있는데 땅 을 밟으면 소리가 난다는 안내표지가 있다. 여기에 봉수꾼이 살았다고 전 해진다. 조상권:꿍꿍이골은지금도소리가울립니다.땅이물러서그렇습니다. 이승호:지금은‘꽁꽁’소리납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32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33 종남산은 밀양시민이라면 한 번쯤은 올랐을 만한 지역의 명산이다. 사 는 곳이 종남산 근처라 다행히 종남산의 모든 경로를 다 접했던 것 같다. 매년 1월 1일이면 산 정상에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린 다. 종남산 정상에 서면 삼문동이 내려다보이는데 여기서야 삼문동이 섬이 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정상에는 한 뼘 가량 할 미꽃이 자라는 곳이 있다. 펜스를 쳐서 특별히 관리를 하는데 산꾼들에게 있기가 있다. 종남산의 민담, 설화 남산마을은 종남산 아래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남산에는 영은 사와 봉수대가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기도 했다. 남산 구배기라 는 말은 구법리, 구박리가 구비기, 구배기로 변형되어 사용되어 지고 있다. 구법리, 구박리, 구비기, 구배기의 유래 아홉 번 절하는 의미의 <구배> 1. 남산은 풍수지리학상 매화낙지형이며 왕도의 지기가 서려있는 곳이라 중국 황제에게 9배 하는 것처럼 절을 9번 올려야 하는 신성한 명당 2. 구법리에 위치한 영은사로 가려면 산굽이를 돌아가며 9번의 합장 배례 를 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이익행:사진에삼문동제방비닐하우스는들깨밭이에요.지금은다아파 트로바뀌었지만. 이주희:그래도일부는아직남아있어요.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34 종남산의 이름 보통 밀양부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라 했지만 몇 가지 설화가 전해 지고 있다. 1. 옛날에 이 고을에 큰 해일이 발생하여 남산 꼭대기가 종지만큼 남아 있 었다 하여 종지산이라고 했다는 일설이 있다. 2. 옛날에 종남이라는 의적이 이 산 속에 숨어 살았다 하여 종남산이 되었 다는 것이다. 의적 종남에 대한 민담 조선 중기에 어느 심술이 고약한 이 고을 부사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또 심술이 고약한 영화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 부사 부녀는 남산에 숨어사 는 종남이란 힘쎈 장사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고을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부사를 종남이가 죽이려 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래서 딸 영화는 아버지 를 위하여 종남이라는 장사를 찾았다. 드디어 종남이 숨어사는 굴 앞에 다 다른 영화 처녀는 기지를 발휘하여 장사의 환심을 산 다음 굴 속에서 며칠 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서로 사랑을 맹세하고 혼인을 약속한 다음 멀리 달 아나서 함께 살자고 하였다. 그렇게 안심시키고는 품속에 감춘 비수를 꺼 내어 종남 장사를 찔러 죽였다. 별안간 큰 소리가 일어나 굴이 무너지고 영 화 처녀도 종남 장사와 함께 굴속에 갇혀 죽어 버렸다. 그 뒤부터 종남 장 사가 숨어 살았던 산이라 하여 후인들이 종남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밀양교 ★ 다리 고향이 섬이어서 다리가 상당히 신기했다. 다리 수명은 3, 40년 정도로 보수를 해야 된다. 모습이 바뀌기 전 다리를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산내 면에서 출발해서 밀양강을 따라 있는 다리를 다 찍으려고 했다. 그러나 다리 전 체 모습을 찍으려면 한 장을 찍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방향을 바꾸게 되 었다. 밀양교, 남천교, 나노교, 밀수교, 예빈교, 용두교 6개 다리를 찍었다. 다리 의 양면을 같은 자리에서 필름카메라로는 낮의 모습, 스마트폰으로는 밤의 모습 을 찍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36 밀양강 건너에서 바라본 영남루 남천교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37 예림교 밀주교 나노교 용두교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38 조주영 학창시절의 행복한 기억과 추억이 새록새록한 시 간을 보낼 수 있어 감사합니다. 기록의 중요성 또 한 실감하네요. 내가 사랑하는 밀양~ 발로 걸으며 일상의 소소함도 매일 기록으로 남겨 야겠다 생각하는 소시민입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39 ● 기억 속 내일동의 장소들 소싯적 기억이 새록새록한 내일동. 알면 보이는 엄청 많은 역사들이 숨어 있는 장소. 사람은 지나가도 장소와 터는 그 기억들을 가지고 있으리라. ‘읍’에 간다고 했었는데 밀양읍성 안이었음을 깨닫는다. 마을기록 수업이 밀양의 역사적 의미를 새겨보는 시간이 됨에 감사하며 내 일동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본다. 상설시장 어느 정도에 아이스크림(투게더) 파는 집. 고려당 양과자점. 아플 때 갔던 제중소아과. 그 옆 어디엔가 있었던 사진관. 사생대회를 위해 올랐던 영남루. 영남루 아래 있었던 문화원 도서관. 등교하기 위해 (구)국민은행에서 마이클 버스에서 내려서 시장골목길을 지 나 밀양여고 언덕길을 여학생들이 줄지어 바람처럼 달리던 추억. 이런 기회를 통해 추억을 소환하게 되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 밀양이 가진 서 말의 구슬을 잘 꿰는데 일조하기를 바라며... 조주영:버스가마이클버스라고작은버스가있었어요. 김태현:마이크로버스를밀양은줄여서마이클이라했어. 이익행:테레비도나왔습니다.밀양에는‘마이클’이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40 진선화 내가 태어나고 자라 결혼하여 살고 있는 고장, 신 이 내린 축복의 땅 밀양!! 밝은 햇살이 찬란하게 비춰주는 아름다운 밀양!! 대자연이 신비롭고 풍요로운 밀양!! 내가 사랑하는 밀양의 어메이징한 스토리가 앞으 로 계속 새롭게 펼쳐질 것입니다. 밀양시 도시재생 지속적인 발전과 배움을 통해서 주민들의 빛나는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41 ● 내일동 용평 선불 자갈밭 2022.06.22.수 기록인: 진선화 기록에 도움주신분: 박철원님, 진미순님 저는 일을 마치고 가곡동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박철원 팀장님을 찾아 갔습니다. 퇴근시간이 넘어서까지 저의 숙제를 도와주기 위해서 옛이야기 를 해주셨습니다. 먼저 내일동 용평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현재는 강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초~중등까지만 해도 자갈밭에 수석 애호가들이 자갈밭에 은빛 보물을 찾기 위 해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모습들을 많이 봤다. 어린 나이에도 우리동네 돌 다 가지고 간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성질 이 났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42 내일동 용평 선불에는 자갈밭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지요. 이번 내가 알고 있는 내일동 이야기를 알아보면서 정말 신기하고 뜻 밖의 이야기들을 알게 되어서 새로운 느낌과 호기심이 유발되었습니다. 그 옛날 일본의 식민지 시절 용활동 자갈밭은 말 그대로 은빛으로 찬란 하게 빛이 났으며, 우리나라 자갈밭 중에 가장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현재도 모양이 다른 돌들이 예쁘고 어릴적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합니다. 자갈밭에서 친구들과 돌로 집을 지어서 소꿉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기억 이랑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강 옆에 있는 우리 복숭아 밭에 들려서 복숭아를 옷에 가득 담아와 인근 강물에 던져놓고 복숭아를 강물에 그대로 씻어서 친구들과 나눠먹으며 물놀이를 했던 나의 정다웠던 벗 그 시절 나의 친구들도 어느새 아이 엄마가 되어 잇고 아빠가 되어서 행 복하게 살아가고 있겠지요~~~ 고향 친구들이 갑자기 그리워집니다~~~ㅎ ㅎ 자갈밭에서 소꿉놀이할 때 커서 결혼하면 옆집에서 함께 살자던 나의 친구 큰 경아, 작은 경아, 귀월이는 모두 멀리 떨어져 살지요~~~^^ 마을 이야기 하다가 저의 어릴적 추억을 살짝 얘기하게 되었네요~~ㅋㅋ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갈을 일본으로 운송하기 위해 동네 자갈밭 가운데 철길을 만들어서 밀양역까지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위치가 어디쯤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부산항만에서 배를 이용하여 일본에 운반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을의 은빛 보물을 약탈해가 서 어느 곳에서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궁금하기 합니다. 일본 어딘가에 용평의 은빛 자갈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겠죠? 용평 사 람들은 새벽부터 오후 늦은 시간까지 자갈을 싣는 작업을 하면서 임금을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43 받았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얼마 받았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용평에 자 갈을 싣기 위해 철길에 차가 도착하면 온 마을사람들이 나와서 자갈을 차 에 싣느라 분주하였으며 특별한 일자리와 농사를 짓지 않는 마을 사람들 에게는 자식들을 키우면서 생활하는데 보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옛날 아름다운 은빛 자갈밭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내심 그려보고 상상해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으뜸인 밀양의 자갈을 약탈해 간 것이 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니 일본인들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것 같습니 다. 다시는 그러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통같은 국가안보 태 세를 강화하며 국가가 힘이 있어야 하겠지요. 또 한 분의 지인님으로부터 추가로 들은 이야기를 하자면 일본 순사들 이 무단으로 남의 집에 막무가내 들이닥쳐서 술을 담아먹는지 감시하면서 철저하게 막걸리 담그는 것을 차단을 시켜서 주민들은 순사의 눈을 피해 서 몰래 막걸리를 담가서 다락방이나 순사들이 찾지 못하는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먹는 수난을 겪기도 했답니다. 내 집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일이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사소한 일상생활도 감시를 받으면서 살았다니 정말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시대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 숙제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하면서 바쁘게 숙제 하느라 더 깊이 들어가보지 않았지만 좀 더 마을 이 야기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 주어지면 좀 더 세부적인 이야기 를 듣기 위해 마을을 방문하여 어르신들을 찾아뵈야겠다는 생각이 들었 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밀양, 사랑하는 나의 고장에 이러한 아픈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 지금 내가 살고 생활하고 있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44 는 밀양, 사랑하는 나의 밀양, 의열의 고장 밀양, 문화가 숨쉬는 밀양, 과거 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는 밀양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장인가요? 제가 어릴 적에도 밀양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을 했고 지금도 변함 없는 마음입니 다. 나의 고장 밀양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타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 입되고 관광지로 활성되어서 지금보다 더 살기좋은 밀양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날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유익하고 업그레이 드된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켜 주셔서 밀양시도시재생센터장님과 관계 자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사진으로 남긴 하교길의 추억 1981년 밀성여중 2학년 3명, 후배 1명(제일 키 큰 아이)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춘추복을 입고 하교길에 북성사거리 도로변 사 진관 옥상에서 추억의 한 장면을 남겼어요~~~^^♡ 진선화:사진에있는글자는제가긁어서적었어요.기억하려고일부러적 었어요.하굣길에노을이참예뻤어요.그래서같이가던애들한 테사진한방찍자고했죠.사진관옥상에올라가서찍었는데역 광이라노을배경으로는못찍었어요.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46 첫 번째 코스는 3대 누각 중 하나인 영남루다.관광버스가 밀양시도시재생지원센터에 도착했다. 센터 장의 소개말로 투어를 시작한다. 박시춘 작곡가 옛집을 구경하고 노래 듣고 같이 부르고 흥겹게 놀다가 ★ 내가 밀양의 도시재생을 소개한다면 밀양에 아름다운 코스들이 많이 있다. 걷기 좋은 길을 찍으려다 내일동과 내이 동을 소개하는 느낌으로 바꿨다. ‘밀양이 모범적으로 도시재생을 잘한다고 전 국에 소문이 나서, 서울 동대문 도시재생 추진위원회에서 배우려고 왔다’고 상 상하면서 찍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47 사명대사 동상도 관람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시장 구경도 간다. 동문, 서문, 북문 다 둘러본 뒤 돼지국밥 한 그릇씩 한다. 보리밭 집도 유 명한데 사람들이 많이 와서 여러 집이 다 찼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48 해천거리로 내려와 의열기념관에서 해설사 이야기를 듣고 단체사진을 촬영한다. 남문으로 나오니 밀양을 대표를 하는 품목을 팔고 있는 팜센터가 보인다. 구경하면서 다들 한 보따리씩 산다. 길을 따라 쭉 올라가서 관아 한 바퀴 쫙 구경한다. 여기 에서 바라보면 밀양 시내가 다 보인다. 옛날에는 읍사무 소였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49 그 뒤에 밀양의 대표주자 윤세주 생가로 이동한다.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이렇게 지금 잘 살고 있음을 생각하며 경건 한 마음을 가져본다. 밀양은 의열기념관, 해천거리로 학생들의 수학여행이나 체험학습 장소로도 유명하다. 다시 센터로 모여 느낀점 발표하고 투어를 마무리한다. 배웅까지 잘 마쳤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50 최재현 탱탱볼 같이 갈 길을 잃고 사방으로 튀어다니는 내일동의 청년 최재현입니다.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51 ● 학창시절 아지트 내가 기억하는 내일, 내이동은 맥도날드와 인디언 노래방의 추억으로 가 득 차 있다. 그곳은 밀양의 모든 젊은 학생들이 모이는 만남의 광장이자 학 업으로 받은 스트레스와 무거운 중압감을 털어내는 놀이터였고 때론 의 식주를 그곳에서 해결하며 하루 반나절을 그곳에서 보내기도 했던 집보다 편한 차라리 집이었으면 바랐던 휴식터였다. 하교를 하고 맥도날드로 가 넓은 내부에 내가 좋아하는 위치에 앉아 맛 난 버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통유리로 된 창가를 바라보며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보기도 하고 버거를 다 먹고나면 지하 1층에 있는 인디언 노래방으로 몰려가 친구들과 신나게 노래 부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때론 노래방에 치킨이나 맛난 음식을 사들고 가서 맛 도 채우고 흥도 채우며 그렇게 종일 먹고 놀기도 했고 그리고 노래방 사장 님의 끊임없는 추가시간 베품에 하루 반나절을 노래방 안에서 주거하며 성대와 귀가 닳도록 소리 지르기도 했었다. 이익행:제가밀양맥도날드를잠깐말씀드리겠습니다.처음으로생겼던 저맥도날드가중심지였습니다.밀양대학이내이동에있을때는 부산경남에서매출액이다섯손가락안에들어갔다고해요.그런 데대학이삼랑진으로가면서학생이없어지니까매출이확떨어 졌죠.이후에다이소가들어왔는데지금은비어있습니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152 ▲ 성결교회 2000년 시작의 날, 지금은 삼문동으로 옮겨진 성결교회에서 교인들 모 두가 참석했던 것 같아요. 밀양여고 밑으로 원룸들이 들어서기 전, 성결교회가 크게 자리하고 있 었던 걸로 기억해요. 주일이면 매번 교회에서 친구들을 만났어요. 가장 기 억에 남는 것은 급경사로 된 차도였는데, 차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지르던 느낌은 작은 놀이공원에 있는 듯하게 했어요. 구글에 성결교회에 대한 역사 자료가 없는 것 같아서 실망하는데, 우연 히 유튜브에서 교회가 올려놓은 역사 영상이 있었어요. 교회의 시작과 2018년까지의 사진 자료인데,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시대 만의 풍경과 모습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2부 우리가 기록한 동네 이야기 153 ★ 내이동 문화의 장 무봤나촌닭 옆에 소공연장이 있는데 공연들을 많이 한다. 과거와 현재 의 문화활동에는 무엇이 있을지 찍고 싶다.
내일은 내 이야기도 동네기록 내일·내이동 사람들의 기억 찾기 발 행 2022년 10월 7일 지 은 이 내일·내이동 동네기록학교 수료자 일동 펴 낸 곳 빨간집 기획편집 염수정 디 자 인 이노그램디자인 내일·내이동 동네기록학교 기 획 빨간집(대표 배은희) 책임운영 염수정 운영지원 윤주 행정지원 내일·내이동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센터장 안중현) 전 화 070-7309-1947 이 메 일 rhousebook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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