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거시 가이드





살아 있는 유산
1982년, 결혼을 며칠 앞둔 빈센트 친이 야구 방망이로 처참하게 살해된 사건으로

반아시아계 증오로 인한 구조적 인종차별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빈센트 친
을 죽인 두 명의 백인을 아무런 처벌 없이 풀어준 재판부의 오심은 새로운 민권
운동에 불을 붙였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는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연대를
형성하며 평등한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요구하며 일어났고 이는 지금도 미국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로 우뚝 서 있습니다.
40년이 흐른 2022년,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 구현을 위해 연대하고 뜻을 함께한
그날의 교훈은 다시 한 번 일어나 분열과 증오에 맞서 싸우고 사회 각계 각층이
세대를 초월해 결속하여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나아가도록 촉구하 고 있습니다.
이 레거시 가이드는 토론과 수업용 도구로 활용하도록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빈
센트 친을 위한 정의를 위해 함께 싸우고 지금도 모든 커뮤니티가 폭력에 대한 공포 없이 안전하게 서로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행동하는 개인과 커뮤니티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전염병처럼 번지는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는 1980년대의 반아시아 증오와 불안할 정도로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디트로이트의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빈센트 친 사건의 부정에 맞서고자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ACJ)를 조 직하여 모두를 위한 정의를 추구하고 인종차별과 일체의 차별에 맞서 싸운다는 명확한 사명에 기반한 원칙을 가지고 사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빈센트 친 사건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입니다. 빈센트 친의 어머니 릴리 친이 전국 방
송에서 말한 것처럼 “피부색은 다를지라도 우리 몸 속에는 모두 같은 피가 흐릅니다.”
2020년 3월 20일부터 2021년 12월 31일 사이까지 커뮤니티에 기반한 StopAAPIhate.org 웹사이트로 11,000건에 달하는 증 오 사건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샌타바버라 캠퍼스의 증오와 극단주의에 관한 연구 센터(Center for the Study of Hate and Extremism)에서는 2020년과 2021년 사이에 아시아인에 대한 폭력이 339% 증가했다고 보고했습니다.
Vincent and Lily Chin Estate와 ACJ, 빈센트 친 40주기 추모 및 재헌정 기획 위원회(Planning Committee of the Vincent Chin Remembrance and Rededication)는 빈센트 친이 남간 유산이 평등한 정의, 그리고 인종차별과 증오에 맞서 손을 맞잡고 일어난다는 이상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HELEN ZIA & VINCENT AND LILY CHIN ESTATE
거짓 혹은 진실: 빈센트 친이 남긴 유산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출판된 간행 물 중에도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라운지의 위치와 빈센트 친이 제도사로 일했던 도시에 대해 잘못 기술한 사례가 발견되고 있습니 다. 이 가이드를 사실과 사진의 참고 자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빈센트 친
» 거짓: 빈센트 친을 살해한 사람들은 무직 상태였다. 진실: 두 사람 모두 직업이 있었고, 한 명은 큰 공장의 현장소장이었다.
» 거짓: 이 사건은 ’신원 오인’에 의한 사건으로, 살인자들은 빈센트 친을 일본인으로 오인했다. 진실: 범인들은 빈센트 친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들었고 “그 중국인을 잡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 빈센트 친의 중국인 친구들도 타겟으로 삼았다.
» 거짓: 빈센트 친은 엔지니어였다. 진실: 빈센트 친은 두 곳에서 일했고 제도사가 되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학교에도 다니고 있었다. 그 는 학업을 계속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울 계획이었다.
» 거짓: 빈센트 친은 땅에 버리를 부딪혀 사망했다. 진실: 살인자들이 홈런을 날리듯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빈센트 친의 두개골이 부셔졌다.
» 거짓: 살인자들이 빈센트 친을 죽인 것에 대해 사과했다. 진실: 범인들은 한 번도 릴리 친이나 빈센트 친의 가족 누구에게도 유감을 표
하거나 빈센트 친의 목숨을 앗은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Vincent and Lily Chin Estate는 범인들이 유족과 사회에게 정
당한 죗값을 치르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배운 것들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는 단일 조직이 아닙니다. 아시아계 민족에도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1965년 이민법으로 오랜 시간 ’앵 글로’ 유럽인을 우대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이민이 평등화되기 전, 많은 중국인이 중국 남부 광둥성 주강의 삼각주에서 미국 으로 이주해왔고 빈센트 친과 그의 가족도 이러한 이민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965년 이후, 많은 아시아인이 이민자
와 난민으로 미국으로 왔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해 제대로 아는 미국인은 많지 않으며 이 다양한 커뮤니티를 대부분 하
나의 집단으로 묶어서 생각합니다.
“모두를 위한 정의”는 고귀한 염원일뿐 사실이 아닙니다. 빈센트 친 사건에서는 경찰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는 등 사법 제도
는 모든 수준에서 실패했습니다. 백인 살인자들에 대한 구형은 지나치게 낮았으며, 판사는 선고 전 구금 권고를 무시하고 두
살인자를 보호 관찰로 석방했으며, 검사는 유족에 대한 사전 통지도 없이 선고 공판에 불참했습니다. 검찰은 ‘국민’을 대리
해야 하지만, 이 사건은 피해자를 배려하기 위해 옹호 단체나 감시 단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중요합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사회와 형사 사법 체계는 아시아계 미국인

과 기타 소외 계층의 경험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빈센트 친의 인종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내내 무시되었습니다. 1983년,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그동안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ACJ)를 조직했습니다. ACJ를 조직함으로써 집단의 목소리를 통해 불평등에 맞서 일어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인종과 문화를 초월해 연대하여 그동안 사회의 보이지 않던 존재에 서 벗어나 미국을 긍정적으로 이끄는 변화의 주도하고자 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전 아시아계 집단을 아우르는 동맹의 구축을 통한 아시아계의 역량 강화를 드러내는 용어입니다. 1968 년에 학생 활동가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많은 아시아 민족 그룹에 서 사용한 용어는 아니었습니다. ACJ 및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운동을 계기로 언어, 문화, 종교, 교육, 정치적 지향, 소득 수준 등 단일 아시아 민족 내에서도 존재하는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민족 그 룹이 한데 뭉치게 되었습니다.
ACJ와 빈센트 친을 위한 투쟁은 주요 흑인 조직을 비롯해 디트로이트와 전국의 지도자들과의 인종을 뛰어넘는 파트너십을 구축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정의를 구현한다는 원칙을 토대로 설립된 ACJ는 다른 커뮤니티 지도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서로


를 지지하기 위한 대화의 문을 열었습니다. 디트로이트 지역 흑인 단체(Detroit Area Black Organizations, DABO)를 설
립한 전설적인 민권 및 노동조합 운동가인 호레이스 셰필드 주니어, NAACP 디트로이트 지부 집행이사인 윈스턴 랭과 전
대선 후보 제시 잭슨 목사 등이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 ACJ의 활동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반아시아계 증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마치 그들이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위기가 있을 때마다 희생양이 되곤 했습니다. 1800년대 말, 반중국계 증오가 확산되면서 민족 청소 학살이 자행되고 배화 법(Chinese Exclusion Act)과 같이 인종차별적인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붕괴를 일본
의 탓으로 몰고갔습니다. 9.11 후에는 남아시아, 아랍계, 무슬림과 중동계 미국인이 표적이 되었고 이제는 모든 아시아계가 COVID로 인한 사태에 대해 비난과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제도화된 백인 우월주의는 미국 내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지울 수 없는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초기 아시아계 이민자
는 재산으로서 미 대륙에 대규모로 강제 이주해 왔습니다. 노예의 보조 인력 및 대체 노동력 역할을 하는 계약 근로자로 백
인 우월주위 위에 세워진 경제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허용된 일은 저임금 용 역 노동으로 제한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백인과 흑인 “사이에 놓이면서” 늘 다른 유색 인종과 늘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 있 습니다. 지속적인 외부 인종차별적 “모범적 소수민족”이라는 1960년대에 형성된 뿌리 갚은 스테레오타입이 미국의 구조적
인종 위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착취해 왔습니다.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투쟁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공공 정책 면에서 피해자 결과 진술과 피해자의
권리가 증진되었고, 연방 차원의 증오 범죄 보호 조치가 성별, 성적 지향, 장애의 문제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빈센트 친 사
건과 유사한 제도적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재판 절차도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옹호 단체와



권장사항
반아시아 증오범죄에 대비하세요. 놀라거나 당황하지 마시고 정보를 얻으세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폭력은 종종 유치원, 초중고 교육과정과 심지어 대학에서도 가르치지 않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 그리고 다른 사 람들을 지식으로 무장하고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방관자 교육’을 통해 대응책을 확인하세요. 가족 및 친구들과 이야기하여 대비하세요.
캠퍼스, 커뮤니티, 교회, 직장 직원 리소스 그룹, 사교 클럽 등을 참여시켜 특정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싸우기 위한 교육을
하고 인식 수준을 높이세요. 특히 밤늦게 다니는 경우, 보다 안전하게 외출하고 귀가하는 방법에 대한 전략을 고안하고 실






행에 참여합니다.

지역 내 사업체들에게 연락해서 증오 범죄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리고 방관자 교육 포스터, 전단지와 온라인 링크를 공유합 니다. 반아시아 증오범죄는 상점, 식료품점 및 공공장소에서 많이 발생합니다.
용기를 내어서 서로 협력자가 되세요. 반아시아 증오를 반아시아 편견, 편협성, 선입견, 차별, 인종 우월 의식, 극심한 편파 적인 생각이라고 있는 그대로 말하세요. 반아시아인 ‘정서’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아시아계 미국인이 직
면하고 있는 피해와 폭력을 모호하게 하는 예의상의 완곡 표현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인종차별적 표현
이나 행동을 일삼는 가족 및 친구들과 대화를 시작하세요.
국가, 주 및 지역 지도자들에게 반아시아 인종차별과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반아시아 증오범죄를 규탄하고 이를 멈추 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세요. 그렇게 하는 지도자를 지지하고 선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하도록 독려하세요. 조직을 통해서든, 기업이나 광고주에게 편지를 쓰든, 선출된 공직자를 방문하든, 언론을 통해서 든, 인종차별을 알리고, 교육하며,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반아시아 증오를 행하면 결과가 따른다는 점을 알리세요 구조적 인종차별 및 다른 형태의 제도적 불평등과 싸우는 유색인종 및 의식 있는 사람들의 연대 운동을 지지하세요. 망가진 안전망을 고쳐서 정신 건강, 의료 서비스, 주거 및 식량 불안정, 언어 지원 등의 이슈를 해결하고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는 방안을 모색하세요.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의 유치원, 초중고 교육 단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에 관한 교과과정이 포함될 것을 요구하세요. 캘리포 니아, 코네티컷, 뉴저지 및 로드아일랜드 입법 기관에서는 그러한 조취를 취했고, 코네티컷은 재정적인 자원을 보유하고 있 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뿐만 아니라, 다른 소외된 그룹에 대한 교과과정을 찾고 있는 고등 교육의 학생, 동문, 직원과 협력하세요.
서로 연결되어서 정보를 공유하세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미국 내 다른 소외된 사람들의 경험을 알아보 세요. 특정 집단에 대한 무지와 그들을 투명 인간으로 취급하는 행위는 그들의 인격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의 역사는 미국의 역사이며, 역사에서 누락되지 (MIH, Missing in History) 않도록 해야 합니다.
최신 소식을 받아보세요. 전 세계적으로나 국가 차원에서 겪는 어려움은 불평등, 빈곤, 의료 서비스 접근의 장벽, 주거 불안 정의 문제에 기여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합니다. COVID에 대한 정치적 빈정거림이 반아시아 증오를 부채질한 것처럼, 인식과 행동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희생양을 조작하는 이야기에 맞서 싸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민자와 난민을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소외된 커뮤니티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널리 알리세요. 소셜 미디어, 편지 쓰기 및 기 타 플랫폼을 사용하여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이 미국 건설에 기여했다는 점과 그러한 사람들의 다양성을 강조하세요.
Vincent Chin레거시 가이드를 사용하고 널리 공유하세요. 이 가이드는 수업과 토론 그룹에서의 사용을 위해 제작되었으 며 Smithsonian Asian Pacific American Center에서 작성한 대화를 위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청 시 학교 도 서관 및 공공 도서관에 인쇄한 복사본이 제공되며, 교사들은 vincentchin.org/legacy-guide에서 자유롭게 가이드에 액 세스할 수 있습니다.


왜 빈센트 친을 기억해야 할까?
40년 전, 빈센트 친이라는 젊은 중국계 미국인이 반아시아 증오가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적대감과 비난이 중국과 남아시아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인까지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향했던 때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는 여론몰이가 일본을 겨냥했습니다. 의회에서 기업의 중역 회의실과 노조 사무소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이나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누구나 움직이는 표적이었습니다. 당시 오일 쇼크가

미 전역의 불황과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미국 제조업과
자동차 산업 붕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연비 효율성이 높은
일본산 자동차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독일제 자동차와 유럽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표적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 세계 경제 혼란 및 기타 사회적 병폐는
종종 인종차별 색채가 짙은 발언과 함께 중국의 탓으로
돌려지고 있습니다. 일부 무책임한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경제를 악화시킬 수 있는 석유 부족에
대해서도 중국을 희생양으로 삼고, 이러한 주장은 계속해서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공격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증오의 물결 속에서 현재 너무나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취약한 노인, 여성 및 소녀들이 가장 자주 표적이 되었습니다. 집단과 개인을 대상으로 한 살인이 모든 아시아계 민족, 종교와 황색 및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종차별 공격은 직장, 거리, 대중교통, 공원과 상점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아시아계 미국인은 자신들의 집과 아파트 건물에서 스토킹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2020년 이후 발생한 증오범죄 중 애틀랜타에는 다음의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Daoyou Feng, Hyun Jung Grant, Suncha Kim, Paul Andre Michels, Soon Chung Park, Xiaojie Tan, Delaina Ashley Yaun, Yong Ae Yue.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피해를 입은 분들입니다. Amarjeet Johal, Jaswinder Singh, Amarjit Sekhon, Jaswinder Kaur. 뉴욕 피해자들입니다. Michelle Go, Christine Yuna Lee, GuiYing Ma, Yao Pan Ma. 앨버커키 피해자들입니다. Mary Ye, Sihui Fang. 다음은 피해를 입은 노인들입니다. Vicha Rattanapakdee, Yik Oi Huang, Pak Ho. 경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분도 있습니다. Soobleej Kaub Hawj. 이 외에도 전국적인 뉴스에 보도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반아시아 폭력이 계속되는 이 시기에 우리는 빈센트 친과 자동차 공장의 백인 노동자 두 명이 야구방망이로 그를 때려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전국적인 인종차별과 증오의
분위기를 기억합니다. 그는 이런 반아시아 시대에 살해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이 아니었고, 분명히 마지막 희생자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일어서서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커뮤니티, 헌신적인 활동가들의 작고 자발적인 그룹의 목소리를 증폭시킨 저널리스트 및 영화 제작자와 변호사, 학자, 웨이터, 요리사, 세탁소 노동자, 과학자, 기술자, 공장 노동자, 할머니, 할아버지와 유모차에 탄 아기들 덕분에 그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막 시작된 범아시아 사회운동을 세워나가기 위해 정의라는 대의로 힘을 실어준 각계각층의 비아시아 커뮤니티의 협력자들 덕분에 기억합니다.
우리는 40년 전 미 전역에서 투명 인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행동했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정당한 분노와 사회운동
정신에 대한 결의를 다시 다져야 합니다.
80년대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인종적 불평등과 맞서 싸우고 공정한 대우를 주장하기 위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절되어 있던 아시아 민족들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풀뿌리 차원에서 함께 단결할 수 있도록 조직했습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우리는 범위를 확대해서 다른
유색인종과 의식 있는 사람들과도 연대했습니다. 그 연대에서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지난 40
년 동안 미국의 아시아 이민자들의 복잡하고도 변화하는
필요사항을 해결하고자 다양한 아시아 언어와 문화를
지원하는 필수적인 권익신장 및 서비스 단체의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우리는 빈센트 친을 추모하면서 그의 어머니 릴리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녀는 아들 Emmett를 죽음으로 몰아간
인종차별의 추악한 얼굴을 폭로한 Mamie Till의 정신으로
슬픔을 딛고 강한 의지로 일어섰습니다. 릴리 친은 빈센트의
살인자들이 자신의 아들을 ‘동물을 다루는 것보다 더 심하게’
때린 것을 모두에게 말했고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이상 증오와 폭력으로부터 자식을 잃는 어머니가 생기지
않도록 정의를 위해 싸워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녀의
용감한 도덕적 리더십은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하여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민권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릴리 친의 사례에서 영감을 받아 1983년 새로 결성된 정의를
위한 미국 시민들(American Citizens for Justice, ACJ)은
다음과 같은 창립 원칙을 채택했습니다.
» 한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면 사회 전체가 피해를 봅니다.
» ACJ는 어떤 형태로든, 특히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비양심적입니다.
» ACJ는 특정 개인의 인종, 성별, 종교, 피부색 또는 국가 출신에 대한 태도와 고정관념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보장된 평등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 빈센트 친 사건에 대한 노력을 통해 ACJ는 다양한
인종 집단 간의 결속을 고취시키고, 디트로이트와
전국에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모든 집단과 지속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기를 희망합니다.
그 당시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활동가들은 ACJ의 이행원칙과
노력이40년이 지난 후에도 의미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목소리를 내어서 조직하고 연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얻은 교훈이 오늘날 반아시아 희생양 만들기와 폭력이 쓰나미처럼 급증하는 분위기 속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빈센트 친을 기억하고 인종을
둘러싼 사회정의와 더불어 완전한 인류애를 위해 유산으로 이어지는 투쟁에 대한 결의를 다시금 다집니다.
이 사진 속에 있는 빈센트 친은 그가 공격받았던 당시의 나이에 가깝습니다. 이 사진과 이 가이드에 포함된 다른 이미지들을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안경을 쓴 빈센트의 사진은 고등학교 초기 때 모습이고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외모와는 다릅니다.
Smithsonian Asian Pacific American Center

교육자들이
준비한 토론 가이드
이 가이드에 실린 대다수의 글의 끝부분에는
동료, 학생, 가족, 친구 및 커뮤니티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대화를 위한 질문’ 섹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심도 있는 토론은 모든 사람들의 민권과
인류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인종, 피부색, 민족과 그 밖에 인지되는 차이점을 넘어서 서로가 연결되게 합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이 살았던
시대를 기억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여러분이 기억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여러분은 그들의 유산을 어떻게 기리나요?
» 커뮤니티 차원에서 빈센트 친과 같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유산을 기리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빈센트 친은 누구인가?
한 여름 아침, 미시간 디트로이트 외곽에서 27세의 중국계
미국인이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눈을 떴습니다. 그는 며칠
후에 결혼할 예정이었으며, 400명이 넘는 가족의 지인들이
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신이 난 또 다른 이유는 부업이 끝나는 저녁에 몇몇
친구들이 총각 파티를 열어 주기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인기가 많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어릴 때부터 단짝으로
지냈던 게리도 총각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때는 1982년 6월 19일이었습니다.
무척 밝고 희망찬 아침으로 시작된 그날은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젊은이의 이름은 빈센트 친이었습니다.
그는 시위에 참가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구호로 삼고 자신의 죽음이 사회적 정의를 위한 운동을
촉발하며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도 자신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아시아계 미국인들 중 3분의 2는 이민자였으며,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온 빈센트 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중국 남부 광둥 지역의 고아원에서 보냈습니다. 그곳은 양부모인 릴리와 C.W. 힝
친의 출신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부부는 사진을 보고 그를 선택했습니다. 릴리는 그가 너무도 귀엽고 똑똑한 모습의 아이였고 해외 입양 절차가 시작되어 마무리되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당시 빈센트는 여섯
살이었습니다. 빈센트에게 미시간 디트로이트는 미국에서의
삶이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인 C.W.는 17세인 1922년에 중국에서 건너온 후
디트로이트에 정착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디트로이트에서
새롭게 부상한 자동차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며, 남부의 흑인과 백인 노동자들이 모터시티(디트로이트의 별명)로 대거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급여가 높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중국인 세탁소도 300곳이 넘었습니다. C.W. 친은 이러한 세탁소 중 한 곳에 취직했고, 매일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더러운 옷의 분류, 세탁, 다림질, 포장 등의 작업을 통해 푼돈을 벌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일주일을 내내 일하여 번 돈이 고작 2달러에
불과한 적도 있었습니다.
세탁소의 고된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순간은
그가 이미 30대 후반이었던 1940년대에 찾아왔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도중 미 육군에 입대한 그는 애국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미군에 입대한 중국계 미국인 남녀 18,000
명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디트로이트로 귀환한 그는
다시 세탁소로 돌아갔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중국인을 비롯한 모든 아시아인을 미국에서 배제했던 미국
이민법이 종전 이후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800년대에는 연방 정부, 주 정부 및 지역 정부의 엄격한
배타법으로 인해 차이나타운이 미혼 사회로 바뀌었으며, 대부분의 남성에게는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도덕하다고 딱지가 붙은 모든 중국
여성은 1875년의 페이지 법 이후로 미국 입국이 금지되었고, 1882년에는 '동화가 불가능'하다고 간주된 모든 중국 남성이
미국으로 이주하여 귀화 시민이 될 수 있는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다른 수많은 제약이 미국의 모든 아시아인들에게 확대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중국계 미국인 참전용사들이
미국 시민이 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남성은 중국에서
찾은 '전쟁 신부'를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돌변한 정책은 미국 내 중국인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바로잡는 것보다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와 더 큰 관련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중국계 미국인들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 육군 참전용사였던 C.W. 친은 쾌활한 27세의 여성인 릴리를 신부로 선택했으며, 1948년에는 고향인 호이핑( 카이핑)에 있던 그녀를 디트로이트로 데려왔습니다. 그녀
역시 세탁소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수의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세탁소는 가업이 되었고, 부부는 세탁소 뒤편에서 생활했습니다. 미국 생활의 위험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릴리의 몇몇 가족들은 그녀가 미국에 가는 것을 말리려고 했습니다. 그녀의 증조부는 대륙횡단철도 노동자로 일했지만 백인 군중들이 미국에서 모든 중국인을 '몰아내고' 인종청소를 감행한다는 명목 하에 차이나타운을 불태우고 린치를 가하며 대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하자 급히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 내의 반중국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릴리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삶이 고달플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C.W.와 결혼했고, 디트로이트에서 가정을 이룰 준비를 했습니다.
여러모로 빈센트의 가족은 광둥 남부 지역에서 이주해 온 중국인 세대의 전형이었으며, 이러한 가족들이 차이나타운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이 궁핍한 사람들은 타이산 문화와 주강삼각주의 언어를 공유했으며 그들이 먼 이국땅에서 일자리를 찾게 된 계기가 된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재앙을 공통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와 아편 밀매도 어느 정도의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대다수는 과거에 노예가 되었던 흑인을 대체하기 위한 연기계약노동자의 신분으로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으로 이끌려 왔습니다. 나머지는 철도 건설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중국인 노동자들은 어디를 가든 노동 계약이
종료되었을 때 심한 차별에 직면해야 했으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백인이 원치 않는 농사, 주방일과 세탁 등의 고된 허드렛일로 제한되었습니다.
이토록 친숙한 이야기를 가진 누군가가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빈센트 친에게 일어났던 일이 자신들을 비롯하여 일본인처럼 '보이는'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통감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에게 빈센트는 모두의 아들, 형제, 남자친구, 남편이나 아버지를 상징했습니다. 너무도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다른 아시아 민족으로 오해받은 경험이 있으며, 심지어는 모든 아시아인 집단이 똑같기라도 하다는 듯이 괴롭힘을 당하고 욕설을 들었습니다. 미국 수도에서
'일본 때리기 (Japan bashing)'가 확산되기 시작하고 뉴스

매체를 통해 증폭되면서 비단 디트로이트와 산업 지역인 중서부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거주하는 모두가 적대적인 반아시아적 분위기로 인한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빈센트 친이 괴롭힘을 당하고 구타당하여 사망하고 살인자들이 풀려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이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릴리와 C.W. 친이 빈센트를 입양했을 당시 C.W.는 나이가 60세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당시 Cass Corridor 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에서 모였던 디트로이트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적극적인 참여자였습니다. 디트로이트 중국인 복지협의회(Detroit Chinese Welfare Council)
센터의 비밀 도박장에서 그는 마작, 팬탠과 파이고우를
즐겼습니다. 이러한 도박장들은 차이나타운에 거주하는
미혼 노동자들의 주요한 친목 장소였습니다. C.W.는 아들인
빈센트에게 이러한 차이나타운의 클럽들을 소개해 줬습니다. 세탁소에서 고되게 일하며 평생을 보낸 C.W.는 1981년 76
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빈센트의 결혼식이 열리기 6개월 전이었습니다. 그의 관은 미 육군에서의 역할을 기리기 위한
성조기로 장식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지정학으로 인해 미국
이민의 문이 중국인들에게 살짝 열릴 때까지 수년 동안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거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지켰습니다. 빈센트는 그를 미국인으로 보지 않은 살인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을 때까지 성조기를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빈센트의 친구와 동료들은 그가 시비
끝에 싸움에 휘말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성격 좋은 젊은이였으며, 재정적으로
부모를 도왔던 헌신적인 독자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육상부에서 활동했고,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여유로운 오후
낚시를 즐겼습니다.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독서광이기도 했던 그는 시를 썼습니다.
친구들은 빈센트가 활기 넘치고 명랑하며
누구와도 잘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디트로이트의 지리에도 밝은 사람이라고 한결같이 묘사했습니다. 친구들이 생각하는 그는 중국계이지만 디트로이트의 여느 누구와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다른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빈센트는 과거의 미국계
아시아인 세대에 관한 역사를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민자 부모의 어려움을 목격했고, 어머니인 릴리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집을 신부와 함께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곧 시작될 결혼 생활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빈센트는
낮에는 제도사로, 주말에는 웨이터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훨씬 높았습니다. 컴퓨터 트레이드 학교인
Control Data Institute를 갓 졸업한 그는 Lawrence Institute of Technology의 야간 과정을 통해 학업을
이어가며 엔지니어링 학위를 취득할 계획이었습니다.
많은 중국계 미국인들은 빈센트, 릴리와 C.W. 친이 미국에서 영위했던 삶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반추했으며, 궁핍한
타이산 출신의 뿌리, C.W.와 릴리의

결혼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군 복무, 그리고 음식점과 세탁소에서 일하며
보내야 했던 고된 삶에 공감했습니다.
빈센트는 고통과 희생을 감내한
아시아계 이민자 부모를 둔 미국화된 세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아시아계 이민자들 중 다수는
정치적 문제가 있는 국가에서 도망쳐 왔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저자세를 유지하고 정치나 논란으로 인한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의 이상을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미국적인
관념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부모와 자녀들 모두 자신들의 비전이 미국 내 아시아인의 수용과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빈센트의
죽음을 둘러싼 부당함은 이러한 꿈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이 글을 읽기 전에는 빈센트 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나요? 그리고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었나요?
» 빈센트 친의 이야기는
훨씬 더 오랜 세월을 거친 미국계 아시아인의
역사에 어떻게 연결되나요?
» 희생양이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어떤
악재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을 받는 누군가를
의미합니다. 아시아인,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와 다른 유색인종 커뮤니티를
희생양으로 삼을 경우 어떤 결과로
이어지나요?
» 이 글에서 깨달은 빈센트 친에 대한 최대의 요점은 무엇인가요? 오늘날 빈센트 친의
이야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위해
빈센트에게 일어난 비극은 일본인처럼 ' 보이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C.W. 힝 친(오른쪽)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로서 미국을
위기의 시간: 누구를 탓할까?
1982년 여름 이전의 몇 년 동안 디트로이트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1970년대의 오일 쇼크를 시작으로 미국의

전반적인 제조 부문과 산업 지역인 중서부는 대대적이고
장기적인 해고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백악관의 정치인들이 사회의 안전망을 해체하는 데 열중하면서 수십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은 경제적 재앙으로 내몰려야 했습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이 붕괴되었고 고용국, 노조 사무실, 복지 사무소와 무료 급식소에는 절망에 빠진 실직자들이 길게 줄을 섰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만 100,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해고를 당했고 향후에 고용될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성과 여성들은 한때 호황을 누렸던 산업에서 평생을
열심히 일하며 모은 집, 자동차, 레저용 차량, 여름 별장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들을 '사양족 (new poor)'
이라고 불렀습니다. 표면상으로는 대부분 백인이었던 기존의
노동자들을 일할 수 없거나 일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추정되는
'과거'의 토착적인 빈곤자들과 구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양족들이 고통의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
혹은 뭔가를 찾기 시작하면서 우울함은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기업들은 너무도 적은 노력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것을 원하는 무능하고 불만으로 가득한 노동자들을 탓했습니다. 이에 반해 노동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개선되지 않은 노후화된 공장과 기계, 그리고 공장과 직원에
대한 재투자 없이 낭비된 수익을 병폐로 여겼습니다.
경제적 재앙을 예방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정부도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은 책임을 전가할 공통의 적을 찾아내게 됩니다. 바로 일본인이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기업과 정치 지도자들은 한때 석유 부족에 대비한 연료 효율이 좋은 자동차라는 아이디어를 비웃은 반면 일본과 독일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연비를 적게 먹는 자동차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978년에는 새로운 석유 파동으로 인해 디트로이트에서 생산되는 중량의 8실린더 대형 차량 시장이 침체에 빠졌고, 산업 지역인 중서부 전역에서는 대대적인
해고와 위기가 촉발되었습니다. 수입산 자동차는 기름 소모가
심한 차량과 현저히 달랐으며, 구매 및 운행 비용이 저렴하고 잘 만들어졌으며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제조업체와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수입산 자동차를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비롯되었거나 일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모든 것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독일산 자동차도 연비 효율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독일인처럼 생긴 사람들은 표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인종차별은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다르다고
묘사될 수 있는 경우에만 위력을 발휘합니다. 노동조합에서는
분노한 노동자들이 1달러를 내고 일본산 차량에 대형
망치를 휘두를 수 있도록 하는 이벤트를 후원했습니다.
일본 자동차는 파손되었고 운전자들은 고속도로에서 총격을
당했습니다. TV, 라디오와 길모퉁이에서는 일본인을 비방하는
언사들이 난무했습니다. 미국 자동차 노동조합(UAW)의 범퍼
스티커에는 "닷선, 혼다, 토요타 - 진주만"과 "진정한 미국인은
미국산을 구매한다" 등의 내용이 인쇄되었습니다.
전쟁 비유를 통해 실업자의 분노와 고통은 애국적 열정으로 돌려졌습니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주제를 이용하는 데
혈안이 된 지도자들과 커뮤니티 구성원들 모두 인종차별적
비하 발언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원 에너지 상공 위원회
(House Energy and Commerce Committee) 위원장을
겸임한 하원의원 존 딩겔(미시간 민주당) 등의 정치가들은
‘키가 작은 황색 인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저물어가던 크라이슬러의 회장이자 한때 대통령 후보였던
리 아이아코카는 태평스러운 태도로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아시아인의 얼굴을 가졌다는 이유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했습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근무하는 아시아계 미국인
직원들은 공장의 작업현장에 출입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으며, '일본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분노한 노동자들이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오래전부터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자리 잡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도 새너제이에 거주하는 재미 일본인 3세의
TV 기자가 한 자동차 공장 노동자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는
소위

아시아계 미국인은 반아시아적
혐오에 직면한 경우에도
인종차별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국가들, 특별히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경제가
호황을 누렸습니다. 일본,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다른 아시아 지역을 향한 커져가는 분노는
과거의 위험했던 시기를 상기시키는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반아시아적 편견의 패턴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더욱 광범위한 경제 문제에 대해 또 한 번 비난을 받고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있었으며, 분노한 미국인 노동자들은 폭력에 의지했습니다. 침울한 분위기는 과거의 시절과 사건들을 환기시켰습니다.
» 중국인 노동자들이 황화'라는 명목 하에 반복적으로 공격당했던 1800년대
»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
» 미국 서부에서 내몰린 아시아인, 그리고 인종 청소
» 인종 간 금혼법
» 아시아인이 재산을 소유하거나 법정에서 증언하거나 투표하는 것을 금지하는 수많은 법령
»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120,000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대통령 행정명령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었습니다.
이를 비롯한 정부의 기타 조치는 아시아인이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정당화'했습니다. 심지어는 1980년대에
동유럽을 찾아온 평화의 서광조차 일본인에 대한 편견을 초래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비에트권의 개방정책과 완화된 위협이 일본인을 향한
적대심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아시아계 미국인의 인구는 1965년의 이민법이
개정된 덕분에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에는 20년 동안 아시아계 미국인의 인구가 4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인종 집단으로서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보여준 경이로운 성장은 더욱
커진 다양성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인, 필리핀인, 아시아계 인도인, 베트남인, 라오스인, 태국인, 캄보디아인, 파키스탄인, 인도네시아인, 몽족, 사모아인과 통가인을 비롯한 새롭고 활기 넘치는 아시아계 미국인 집단들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인들은 변호사, 언론인, 교육자와 비즈니스 임원과 같은 보다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는 모습이 가시화되었으며,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대체적으로 그들의 전문성이 국익에 기여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미국 입국이 허용되고 그 수가 늘었습니다.
'모범적 소수민족’이라는 근거 없는 인종차별적 믿음은
더욱 깊게 뿌리를 내렸으며, 모든 아시아인이 고학력의
부자라는 잘못된 관념을 영속화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칼을 꺼내 들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난 일본 놈의 음식이
싫어... 미국 음식만 좋아한다고."
분노는 비단 일본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몇 십년 간 경제대국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미국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에 34%에
달했던 미국의 전 세계 생산 점유율은 1980년대에 들어 23%
로 떨어졌습니다. 미국이 정체되면서 환태평양 지역에 있는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빈곤하게 생활하고 있으며 궁핍한
소수계 이민자들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문제들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듭니다.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는
유전자를 형성하게 한다는 단일 민족 신화는 아시아인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집단 간의 ‘이질화’를 심화시켜 증오와
폭력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대중 매체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으며, 오히려 아시아인들을 성공한 '착한
'착한 소수민족'이라는
간주하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로 굳히려고 합니다. 이렇게 아시아인이 부유하고 성공한 인종이라는 위험한 고정관념은 다른 유색인종의 분개심에 기름을 부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간의 갈등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스킨헤드족, 신나치주의자, 아리안 생존주의자와 온갖 선동자 및 인종차별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가
민권 법안과 규제를 폐지하여 남아있는 보호 조치마저
시행되지 않도록 하면서 혐오 범죄 및 혐오 단체들이
되살아났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계 미국인을 위시한 다른
유색인종, 게이와 레즈비언, 유대인과 여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을 외국의 적대적인 침입자나 조용하고
순응적인 '착한' 소수민족으로 묘사하는 이미지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둔 두 가지 이미지 모두 동일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대수롭지 않고 무시할 수 있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문제를 일으키거나 불평하지 않는 투명 인간에 가까운 커뮤니티로 취급받게 합니다. 소위 '착하면서도 모범적인 소수민족'
이라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반아시아적 혐오에 직면한
경우에도 차별이나 인종차별주의를 경험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중 매체, 지도자, 영향력 행사자 등의 부인으로 인해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인종 문제, 인종차별주의, 차별, 그리고 미국이 당면한 주요
이슈와 관련하여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무섭게
급증하고 있는 반아시아적 혐오 사건들만 봐도 이러한
사고방식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유해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인종 문제와

인종차별이 디트로이트의 시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요?
» 이 글을 읽고 난 후에는 '황화'와 '모범적
소수민족'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남에게 어떻게 설명할 생각인가요?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 오늘날 뉴스를 접하다 보면 제품이나
서비스가 어떤 것이고 원산지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표적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나요?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 역사를 오늘날의
뉴스와 비교해 보면 어떤 유사성과 차이점이
목격되나요?
» 산업(또는 기업), 인종 문제와 인종차별
간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방금 읽은
아시아계 미국인과 미국 자동차 산업에 대한
내용과 유사한 사례를 미국의 역사 또는 국제
산업의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나요?
끔찍한 조우



이 글에는 1982년 6월 빈센트 친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디테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학생 및 젊은이들과
빈센트 친의 이야기를 토의할 계획인 경우에는 이 글의
내용을 먼저 검토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을 계속해서
읽기 전에 심적으로 불편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최대한
많은 휴식을 취하며 찬찬히 내용을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1982년 6월 19일, 친구들은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빈센트를
위한 미국 특유의 총각 파티를 열어주기 위해 그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한때 자동차 산업의 유력자들과 모타운 스타들이 거주했고 헨리 포드가 Model T를 생산했던 디트로이트의 허름한 지역에 위치한 스트립 클럽으로 향했습니다. 그 동네에서 자란 빈센트는 그 클럽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빈센트의 어머니는 "이제 결혼식도 올리는데 더 이상 그곳에 가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그를 훈계했습니다.
"엄마, 이번이 마지막이에요."라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하지 말거라. 액운이 낄 수 있어." 그녀는
오래된 중국의 미신을 들먹이며 그를 야단쳤습니다.
그날 밤에는 세 명의 친구가 빈센트를 축하해주고 있었습니다.
두 명은 백인이었고 한 명은 중국계 캐나다인이었습니다.
그들이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클럽 안으로
들어온 백인 사내 두 명이 무대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육중한
체구의 사내는 대형 자동차 공장에서 근무하는 43세의 현장
감독인 로널드 에벤스였고 나머지 한 명은 그의 양아들인
마이클 니츠였습니다. 22세의 니츠는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당한 후 가구 체인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 빈센트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예비 신랑의 친구들은 빈센트가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도록 댄서들에게 넉넉히 비용을 지불한 상태였습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에벤스는 중국계 미국인이 받고 있는 관심에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에 있던 댄서들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그토록 많은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에 대해 에벤스가 분개하는 것처럼 보였고, 빈센트에게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하며 그가 진정한 사나이가 아니라고 비꼬아서 말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빈센트의 친구들은 에벤스가 '중국 놈', '일본
놈', 그리고 '개xx'라고 욕하는 소리를 언뜻 들었습니다. 한
댄서는 에벤스가 "너희 개xx들 때문에 우리가 실직당했어."
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온화한 성격의 빈센트는 평소와 달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과 대면한 후 "나를 개xx라고 부르지 마."라고 대답했고, 실랑이가 이어졌습니다. 니츠의 이마에 생채기가 났고,
이에 대해서는 빈센트나 에벤스가 의자를 던져서 생긴
상처라는 엇갈린 진술이 있었습니다. 두 무리 모두 술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야외 주차장에서 에벤스는 곧바로 자신의
차량으로 이동한 후 트렁크를 열어 야구방망이를 꺼냈습니다.
빈센트는 도주했고 에벤스와 니츠가 그를 추격했습니다.
빈센트가 도망치자 두 백인 사내는 주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는 빈센트의 백인 친구 두 명과 중국계 캐나다인
친구인 지미 초이가 아직도 서 있었습니다. 에벤스와 니츠는
빈센트의 백인 친구들은 무시한 채 야구방망이를 들고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던 지미를 쫓아갔습니다. 지미 역시 도망쳤고, 나중에는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고 말했습니다.
목적에 집착했던 에벤스와 니츠는 친과 그의 중국인 친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은 30분 동안 차로 도로와 골목을 누비며 빈센트와 지미를 찾았습니다. 근처에 거주하는 한 사내는 그들이 '중국인을 잡을 수 있게' 도와 달라며 자신에게 20달러를 건넸다고 진술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디트로이트의 주요 도로인 우드워드 에비뉴에 위치한 북적이는 맥도날드 앞에서 빈센트와 그의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니츠는 무방비 상태의 아시아계 미국인들
뒤로 몰래 다가가 빈센트를 붙잡았고, 그의 양아버지는 야구방망이로 빈센트의 다리, 팔과 몸통을 구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빈센트의 두개골을 향해 있는 힘껏 야구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한 목격자는 마치 '홈런을 날릴 때의 자세' 같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야구방망이를 휘둘렀을
때의 충격으로 빈센트의 가슴에 걸려있던 옥 목걸이가 깨졌습니다. 중국인에게는 액운의 징조였습니다.
결국 비번이었던 2명의 경찰관이 총을 겨누며 살육을 멈췄습니다.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멈추라고
두 번을 명령했습니다. 제가 말리지 않았다면 20번은 더 야구방망이를 휘둘렀을 겁니다." 하지만 빈센트에게는
이것이 끝이었습니다. 의사들은 밤새 그의 구타당한 머리를 수술했습니다. 외과의들은 마치 누군가가 짐승을 폭행한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빈센트는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되었지만 그는 이미 뇌사 상태였습니다. 4일 후인 1982
년 6월 23일, 충격에 빠진 빈센트의 어머니와 약혼녀는 생명
유지 장치를 끄는 데 동의했습니다. 400명의 결혼식 하객들은 빈센트의 결혼식이 아닌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신랑이 결혼식 전에 친구들과 함께 축하
파티를 하는 것이 흔한 일인가요?
» 빈센트 친을 축하하는 자리가 남에게 위협이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 위협적인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들이 좋은 일을 축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1982년 7월 1일,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는 신랑을 사망에

이르게 한 구타 사건을 전면에 게재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빈센트의 삶과 결혼 생활에 대한 그의 희망을 다루었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어떠한 정황이나 디트로이트와 중서부에
스며든 일본인과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습니다.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였으며, 컬러 사진에는
함께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 커플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배적인 미국 문화가 일색인 뉴스, 잡지, TV나 영화에서는
무척 찾아보기 힘든 아시아인의 얼굴들이 디트로이트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아시아인이 아닌 사람들은 아시아인과 인종에 대해 아예
무지했던 반면 지역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에서 수시로 목격되는 적대성으로 인해 이미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많은 이들은 신랑의 인종이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답을 요구하기에는
커뮤니티가 너무 작고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이민자로 이루어진 커뮤니티에서는 대다수가 '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식의 태도를 취했고, 눈에 띄지
않는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향한 관심을 자극할
경우 더 큰 문제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설사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항의를 원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지지 단체나 감시 단체는
없었습니다. 범아시아적 비영리 법률 단체는 미국을 통틀어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 있는 두 곳이 유일했습니다.
9개월 후인 1983년 3월 18일, 디트로이트의 두 일간지 전면에는 새로운 헤드라인이 등장했습니다. 제목은 '82년의
살인 사건으로 기소된 두 사내, 보호 관찰형을 받다'와 '
살인 사건에 대한 보호 관찰형에 분노한 중국인'이었습니다.
기사에서는 한 남성을 잔인하게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에 대해 불항쟁 답변을 내놓은 두 살인범이 3년의
보호 관찰형과 3,780달러의 벌금형을 받았으며, 3년에 걸쳐 벌금과 법정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피해자의 이름은 빈센트 친이었습니다. 흑인이 마리화나 소지 등의 비폭력적 법규 위반으로 장기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도시에서 이와 같은 사실은 충격적인 뉴스였습니다.
선고 판사였던 찰스 코프먼은 선고를 내린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감옥으로 보내야 할 부류가 아니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처벌은 범죄가 아닌 범죄자에게 맞게 내려야 합니다." 60% 이상이 흑인이었고 1967년에는 불평등한 정의를 이유로 인종 폭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디트로이트는 경미한 형량을 접한 후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흑인 피고인들은 사소한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가 빈번했던 반면 두 백인 살인범들은 잔혹한
살인을 자행했음에도 석방되었습니다. 보호 관찰형은 분노의 외침으로 이어졌습니다. Nikki McWhirter와 같은 지역의 기고가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코프먼 판사를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당신은 인종차별의 추악한 망령을 불러냈으며, 선고에 대한 설명을 통해 살인자들의 삶이 훌륭하고 사회에 지속적인 가치가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들이 살해당한 피해자의 목숨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다고
분노를 행동으로
백인이 아시아인을
살해하고도

접촉하거나 심문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인종이 요인으로 작용했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이랜드
파크에서 근무하는 창백한 표정의 형사는 살인 사건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는 견해를 내놓았으며,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조차 없이 어떠한 인종적 요인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자신했습니다. 살인자들의 변호인단은 혐의를 2급 살인으로
조정해 줄 판사를 찾을 때까지 사건을 웨인 카운티 내의 한
법정에서 다른 법정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음으로
사건을 검토한 순환재판판사는 다음과 같이 공식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피고에 대한 혐의가 부족하다는 것이 본인의
과 흡사했습니다. 이러한
부당함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암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무례하고 과시적이고 냉담하며 부당할 수 있습니까..."
디트로이트 뉴스의 기자이자 하와이 출신의 중국계 미국인인
신시아 리는 판결에 대한 불신을 토로한 도시 내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구성원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지역
유명 레스토랑의 주인이자 '차이나타운의 비공식적 시장'
으로도 알려진 Henry Yee는 "개를 죽여도 감옥에 갑니다."
라고 말했고, 피해자 가족의 또 다른 지인은 "빈센트의 목숨은 중고차보다도 못했습니다."라며 항의했습니다.
빈센트의 어머니인 릴리가 빈센트의 넋을 위해 괴로워하며 통곡할 때 다른 중국계 미국인들은 그들이 꾸었던 꿈 즉, 언젠가는 자신들이 실존적인 위협이나 외국인 침입자가 아닌
미국인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산산조각이
난 것에 낙담했습니다. 빈센트는 사실상 '외국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살인범들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여느 미국인처럼 총각 파티에서 축하 자리를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반면에 백인 살인자들은
훌륭하고 정직한 미국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고작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저 무의미한 비극일 수 있었던 사건은 법 집행기관과
재판부에 의한 더욱 비극적인 실수와 무능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정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잦고
둔감하며 과중한 부담에 시달리는 관료 체계에서는 흔히
의견입니다. 이 사건에는 1급 살인의 요소가 존재합니다."
마침내 사건은 찰스 코프먼 판사에게 제소되었지만 그는
보호관찰관이 구금을 권고하는 내용조차 읽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에벤스가 '극도로 적대적이고
폭발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적대감을 보이고 폭발적인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정신과 보고서도 읽지 않았습니다.
코프먼 판사가 15분 동안 선고공판을 진행하는 동안 피해자인 빈센트 친을 대변한 검사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신 코프먼은 빈센트가 자신의 죽음을 초래한 반면 에벤스와 니츠는 무고한 행인이었다는 변호인단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코프먼 판사는 깔끔하게 면도하고 술에 취하지 않은 두 백인 남성을 책임감 있는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악명높은 보호 관찰형과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코프먼은 질문하는 기자들과 분노한 대중을 위해 몇 가지 성명을 제시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감옥으로 보내야 할 부류가 아니었습니다...한 명은 17~18년 동안 책임감 있게 직장을 유지했고, 그의 아들은 일과 학업을 병행했습니다…두 번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TV 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잔혹한 살인 사건이었다면 당연히 징역형을 선고했을 것입니다."
판사의 해명은 수많은 디트로이트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명백한 이중 잣대로 인해 사람을 죽인 살인범들이 풀려났다고 확신했습니다. 다수의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만약 2명의 흑인 남성 또는 2명의 아시아인 남성이 백인 한 명을 폭행하여 사망하게 했다면 그들이 장기 징역형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코프먼의 선고가 살인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즉, 아시아인에 대한
빈정거림이 수시로 목격되는 시기인 만큼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옥 탈출 카드'를 얻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습니다. 법정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폭력적인 범죄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선고 전에 목격자를
하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이 사건이 백인이 아시아인을 살해하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던 1800년대의 '서부 무법지대의 재판’과 흡사하다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던 1800년대의 '
서부 무법지대의 재판'
점을 떠올렸습니다. 1980년대에 활동한 이 판사는 빈센트
친을 사망에 이르게 한 야구방망이 폭행의 잔혹한 본질을
간과했으며, 얼마 되지도 않은 벌금을 매달 125달러씩 납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빈센트의 홀어머니가 장례 비용을
감당하는 데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통해 코프먼이 아시아계 미국인의 목숨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탄에 빠진 릴리,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미약한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명백히 잘못된 사법
결정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를 문의했습니다.
하지만 중서부에는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대변해 줄
지지 단체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여러 아시아계 민족
집단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으며, 여러 집단을 하나로
결속시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통의 조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인의 혈통을 물려받은 모든 이들은 빈센트
걸쳐 침묵으로 견뎌야만 했던 수모, 차별과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빈센트
친에게 벌어진 상황이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깨달았고, 더 이상은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의 살인범들이 보호 관찰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릴리 친은 중국어로 작성한 진정서를 영어로 번역한 후 그녀, 남편과 아들이 몸 담았던 차이나타운 비즈니스 커뮤니티의
시설인 디트로이트 중국인 복지위원회에 제출했습니다.
제 이름은 King Fong Yu(Bing Heng Chin
의 아내)이며, 두 명의 폭행범에게 야구방망이로
잔혹하게 구타당하여 사망한 내 아들 빈센트 친을
위해 비통해합니다. 두 살인범들은 경찰에 체포된
후 법원에 기소되었습니다. 법정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가난하고 돈 없는 미망인의 신분이었던 저는
죽은 아들의 사건을 탄원하기 위한 변호사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결과적으로는 살인자의 변호인단이
칼자루를 쥐게 되었습니다. 어제 신문에서 선고가
벌금형과 보호 관찰형으로 그쳤고, 살인자들이
풀려났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피해자의 가족에
대한 보상도 없었습니다.이는 극심할 정도로 부당한
처사입니다.내 아들은 피를 흘렸습니다.이 얼마나
부당한 일입니까? 저는 마음으로 울며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네, 아들은 돌아올 수 없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다만 죽은
내 아들 빈센트 친은 귀 단체의 일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저에게 도움을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항소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할 기금을 모금할 수 있도록
이 사건을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알려 주시기
친에게 벌어진 사건이 자신들의 소중한 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아시아계 미국인이 야구방망이로 폭행당하여 사망에
이를 수도 있으며 살인자가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목숨이 평가 절하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부당함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수세대에
대화를 위한 질문
바랍니다.살인자들을 교도소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그래야만 아들의 넋이 편히
잠들고 저의 슬픔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이 늙은
여인은 영원히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1983년3월18일,나KingFongYu는 존중을 담아

이 진정서를 제출하는 바입니다.
» 빈센트 친 살인 사건은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빈센트 친 살인 사건에서 인종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사람들이 확신하거나 믿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사람들이 확신하거나 믿지 않았던 데에는 어떤 요인이 작용했을까요?
» 빈센트 친의 이야기로 인해 아시아계 미국인과 단체가 하나로 뭉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당 사건은 어떻게 변화를 촉구하는 원인이 되었을까요?
릴리 친: 어머니의 용기
빈센트는 릴리 친의 외동 아들이었습니다. 릴리는 자신의
기쁨이었던 그에게 사랑을 듬뿍 주었습니다. 릴리는 훌륭하게
자라준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릴리의 남편은 1981
년 11월 3일에 세상을 떠났고, 조만간 있었을 아들의 결혼식은
그녀에게 손주라는 꿈과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잔혹하게 살해당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큰 슬픔에
빠졌습니다. 9개월 후, 빈센트를 살해한 범인들이 고작 보호
관찰 및 벌금형만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릴리는 마치 사랑하는 아들이 다시금 살해당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릴리 친의 고통과 슬픔은 눈에 띌 정도였지만 그녀는 힘을
내어 미 전역의 커뮤니티 모임, 집회 및 미디어 인터뷰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연설을 감행했습니다. 중국에서
이민을 온 뒤 평생을 식당, 세탁소와 공장에서 고되게 일한
릴리 친은 더듬더듬 영어로 연설하면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세상의 그 어떤 어머니도 자신처럼 아이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녀의 용감한 행동으로 인해 릴리 친은 아시아계 미국인
민권 운동의 도덕적 양심이 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비롯해 모두를 위한 평등한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목표는 간단했습니다. 아시아계를 포함한 모든 미국인은 평등한
정의, 공정성과 존엄함 아래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밋 틸의 어머니인 메이미 틸이 그랬던 것처럼, 릴리 친의
용감한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 차별과 증오 범죄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릴리 친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에 미국 전역의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평등한 정의를 촉구하고 증오 범죄에 반대하며
들고 일어났습니다. 아카데미 어워드 후보로 지명된 바 있는 '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WhoKilledVincentChin?)'라는 영화는 그녀의 결의와 고통을 담고있고 점점 더 거세지는 반 아시아계 인종 차별 및 폭력에 대한 반대 운동 속에서 그녀가 감당했던 중요한 역할을 다루고 있습니다. 2002년 6월 9 일, 릴리 친은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0년 전 아들이 살해당했던 날짜를 10일 남긴 시점이었습니다. 비록 그녀는 아들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로 인해 삶 속에서 감명을 얻었던 수많은 이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빈센트 친에 관한 언론의 보도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슬픔과 비탄에 젖은 릴리 친의 모습만 접했습니다. 찰스 코프먼 판사의 충격적인 보호 관찰형이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가 웨이터로 야간 근무를
했던 펀데일의 중국 음식점에 커뮤니티 멤버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는 동안
릴리 친은 뒤에서 앉아 소리 내어 흐느꼈습니다. 그곳에
모인 변호사들은 형이 바뀔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주류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커뮤니티의

이야기라도 이런 충격적이고 무지막지한 처사는 널리 알려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흐느끼는 소리가 멈췄습니다.
릴리 친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건 잘못된 처사임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릴리 친의 힘과 용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깊은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홀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민권운동 캠페인에서 그녀는
아들의 끔찍한 비극을 수백 번에 걸쳐 회상해야 했습니다.
낯선 이들, 기자들과 TV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를 전할 때마다
고통은 되살아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추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릴리 친이 아주 오래전에 미국 시민이 되었을 때 했던 국기에 대한 맹세에는 '모든 이를 위한 자유와 정의'라는 약속이 담겨 있었습니다. 릴리 친은 그 약속이 어떤 의미를 지닌 건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아들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느꼈던 고통 즉, 폭력과 편견으로 인해 자식을 잃는 고통을 다른 어떤 어머니도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혹자는 릴리 친을 '아시아계 미국인의 메이미 틸이자 로자 파크스'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사실입니다. 그녀는 의연히 일어섰으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슬픔 속에서 용기를 낸 그녀의 호소력은 세상을 향해 울려퍼졌으며, 이를 들은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울림은 널리 퍼져나가 아시아계 미국인과 양심있는 미국인들을 하나로 단합했습니다.
그녀의 존엄성, 강인함과 용기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또 한 차례의 '중국인의 절망(Chinaman's chance)'이라는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던 이들과 극명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릴리 친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이 사건에 대응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반드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릴리 친은 전 세계로 확산될 민권 운동에서 자신이 도덕적 용기의 상징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1947년에 C.W. 빙 힝 친의 신부로 미국 땅을 밟았을 당시에는 물질적 풍요로움이라고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이민 초기였던 1950년대 당시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하이랜드 파크의 작은 세탁소에서 일했습니다. 부부는 고작 몇 센트를 받고 셔츠를 세탁했습니다. 그후 부부는 중국 음식점에서 일했고, 남편이 은퇴했을 때 그녀는 공장에서 차량용 스노우브러쉬와 성에 제거기를 조립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수많은 미국인들의 공감을 사는 정직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녀의 가족사는 미국에서 삶을 꾸리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을 쳤던, 수많은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난민
가족들 또한 겪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릴리 친은 자신의 삶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행동으로 실천하고 투쟁하는 사람이었으며, 모든 면에서 굳건한 의지와 순결한 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관찰력이 뛰어나고 예리했으며,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인지했습니다. 그녀는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Detroit Free Press)와 디트로이트 뉴스
(Detroit News) 신문을 영문판으로 읽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중국어 신문도 읽었습니다. 그녀는 최신 시사에 밝았습니다. 또한 아들 빈센트의 사건과 관련하여 일어났던 모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친절하고 따듯하며 너그럽고 유쾌했던 릴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방문객들을 반기고 그들의 일상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녀는 본인의
대가족과 매우 친밀한 관계였으며, 새로 만난 사람들의
가족과 교류하는 것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다른
이를 위한 선물을 만들었습니다. 조끼나 스웨터는 하루나
이틀 안에 짤 수 있었고, 스카프 정도는 순식간에 만들 수 있었습니다! 훌륭한 요리사였던 그녀는 가장 신선한 야채를 사용했고, 심지어는 직접 고기를 갈아서 친구, 가족, 그리고 오크파크에 위치한 자신의 주방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던 ACJ(정의를 위한 미국 시민들,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 자원봉사자를 위한 맛있는 요리까지 선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 할머니, 누나 혹은 이모와도 같았던 릴리 친은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ACJ의 자원봉사자로
일했던 수많은 젊은 부모의 어린 자녀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취미 중 하나는 중매였습니다. 그녀는 항상 배우자가 없는 미혼 자원봉사자에게 짝을 찾아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정의를 위해 싸워준 모든 이에게 어떻게든 감사를 전했습니다. 그녀는 특히 미시간 남동부,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거주하는 모든 인종, 종교와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1987에는 모든 법적 소송이 끝났고, 릴리 친은 중국으로
이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국에 남아 있기에는 너무나도

슬픈 일이 있었으니까요. 중국으로 이주하는 것은 좋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녀의 노모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릴리
친은 유럽, 호주와 아시아를 두루 여행하며 남은 여생 15 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조상이 살았던 호이핑( 표준 중국어로 카이핑) 마을에서의 삶은 평화로웠습니다.
그녀는 친구와 친척이 많았고, 빈센트의 소송에서 남은 약간의 돈으로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ACJ를
통해 빈센트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장학금을 지원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001년, 릴리 친은 치료를 받기 위해 미시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최대한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도록 병마와 용감히 싸웠습니다. 그녀의 여동생인
Amy, 조카, 친구들과 커뮤니티 후원자들은 릴리 친이 2002
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를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언론은 릴리 친을 부당한 일을 겪은 자,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상징이라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미지로 포장을 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릴리의 연민과 정직함에 그녀를 우러러 보았고 자발적으로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용기, 솔직함과 진실함으로 영감을 주는 리더였습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살면서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기로
마음먹었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문제를
제기하거나, 입법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단체를 구성하는 등의 행동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행동의 실천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왜 중요했고, 그러한 결정을 내렸을
때는 어떤 기분을 느끼셨나요?
» 릴리 친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로 하자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나요?

» 릴리 친은 사람들의 온전한 인간성을
보았고, 주변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할
때 우리는 커뮤니티로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릴리 친과 ACJ 구성원들(앞줄 왼쪽에서 오른쪽)에게 상을 수여하는 디트로이트 시의회 의원들(뒷줄): 파커 우, 제임스 시모우라, 마리사 창, 임시 위원회장 마리 앤 마하페이, 릴리 친, 헬렌 지아, 어빙 켐프너
범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의 결속을 추구하다
1983년 3월 31일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에 있어 단연

특별한 날입니다. 대디트로이트 지역의 수많은 아시아인
단체에서 활동하는 100명 이상의 개인과 대표가 하나가
되어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은 모두의 협동과 연합을 위한
의지에 달렸음을 인정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가 결성된 날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밤이었던 그날, 카스와와 피터버러 근처에
위치한 디트로이트의 허름한 차이나타운에 소재한
중국통합사업연합회(Chinese Consolidated Business Association)와 온 르옹(On Leong) 협회의 시설인
디트로이트 중국인 복지위원회(Detroit Chinese Welfare Council)의 쌀쌀한 회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차이점을 제쳐두기로 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진보주의자, 보수주의자, 급진주이자, 젊은이와 노인, 과학자와 사업자, 사무원과 세탁소 직원,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 사람과 한국인, 기독교인과 불교인, 광동어와 중국 표준어 구사자, 미국 태생과 이민자들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인원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미 두 차례의 초기 소규모 집회가 있었으며, 이 중 한 번은 빈센트가 파트타임 웨이터로 일했던 펀데일의 Golden Star 라는 음식점에서 모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집회를 하는
도중에 한번은 릴리 친이 자리에서 일어선 후 떨리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그들은 내 아들을 짐승처럼 살해했습니다. 하지만 풀려나고 말았어요. 이건 잘못된 처사임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녀의 용감한 발언을 신호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이루어진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모임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모임은 아시아계 미국인을 지지함은 물론, 법적 소송을 제기하고 주도하며, 기금을 모으고 항의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커뮤니티 차원의 대응을 조율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한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이십 여 개의 단체가 서명했고, 대부분은 중국계 미국인이었습니다. 소속은 각각 중국계 미국인 협회 (Association of Chinese Americans) 및 대트로이트 대만인 협회(Greater Detroit Taiwanese Association)
에서 디트로이트 중국인 엔지니어링 협회(Detroit Chinese Engineering Association)와 같은 전문직 단체, 중국계 미국인 교육 및 문화 센터(Chinese American Educational and Cultural Center) 와 같은 문화 단체, 중국 지역사회 교회(Chinese Community Church)의
교회 조직과 디트로이트 불교 사원(Detroit Buddhist Church), 그리고 여성 단체인 중국계 미국인 여성 조직 (Organization of Chinese American Women)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이렇게 광범위한
명칭을 정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하나의 커뮤니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 모든
미국인을 위한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서는 포용력
있는 비전을 압도적으로
원했습니다.
집회가 있었던 것은 1930년대의 중국 전시 구호(China War Relief)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 시민단체 (Japanese American Citizens League), 메트로폴리탄 디트로이트 한국인회(Korean Society of Metropolitan Detroit)와 필리핀계 미국인 커뮤니티 위원회(Filipino American Community Council) 등 중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참가했습니다.
이러한 연합 단체의 명칭을 정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은 하나의 커뮤니티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 모든 미국인을 위한 정의를 위해 앞으로 나서는 포용력 있는 비전을 압도적으로
원했습니다. 이들은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ACJ)
라는 명칭으로 정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민자들이 나쁜
사람들로 그려지며 합법적 신분과 기본적인 인권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명칭은 미국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것이지만, 1983년 그 당시에는 아시아인들이
미국에 소속된 사람들임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미국인들과의 연대를 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ACJ는 미 전국 차원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민초 지지자들의
활동을 최초로 행한 기념비적인 단체가 되었습니다.
건축공학 엔지니어 킨 이가 이 새로운 민권 단체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롤랜드 황, 마리사 창 및 헬렌 지아가 간부로
지명되었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 3대째 거주하고 있었던
짐 시모우는 일본계 미국인 시민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중국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이사회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일본계, 필리핀계 및 한국계 미국인 단체도
지지하고 동참했으며 그들도 환영받았습니다. ACJ의
활동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흑인, 백인과 유대인
개개인들까지 자원 봉사에 나섰고 정의 실현을 위한 이
캠페인은 다인종적 특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이후 수 주, 수 개월에 걸쳐 ACJ의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은
국내외의 추가 지원을 얻기 위해 자금을 기부하고 수천 시간 봉사했으며,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오심이 발생한 원인을 밝히는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동원했습니다.
ACJ는 법률 사무소에 연락해서 홍콩 출신이자 대담한 리자 찬 변호사와 일을 진행하게 되었고 그녀는 쉴새없이 전력을 다해 법적 대응책을 강구했습니다. 그날 밤의 비극적인 사건을 재구성하고 관련 기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고된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했습니다. 경찰, 검찰과 재판부는 자신들의 실수와 무능력함을 감추는 데 혈안이 된 것처럼 굴었고 그동안 크게 주목을 끌지 않았던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디트로이트 지역의 저명한 민권 단체들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새로운 목소리와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특히 DABO(디트로이트 지역 흑인 단체, Detroit Area Black Organizations)는 몇 주에 걸친 지연 전략을 쓰던 판사와 검사를 만날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심지어 코프먼 판사는 예정된 미팅에서 도망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간 후 서기에게는 자신이 휴가를 떠났다고 말하도록 지시했습니다. NAACP
디트로이트 지부, 비나이 브리스의 반명예훼손연맹(Anti Defamation League of B’nai B’rith), 디트로이트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ACJ는
1. 모든 시민이 미국의 사법 및 정부 체계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2. 개인의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고통을 받습니다.
3. 역사적으로 아시아계 미국인을 비롯한 다른 수많은 인종 집단은 미국의 사법 및 정부 체계로부터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사회는 모든 이가 협력해야만 발전하며 모든 시민을 위한 더 나은 곳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ACJ의 첫 번째 는 명백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감정에 포커스를 둔 반 아시아인 혐오로 인해 살해당한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연합 단체의
시의회의 구성원, 연합 자동차 노조 지원계획회(United Auto Workers Union Community Action Program)를
비롯한 수많은 단체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지원 호소에
응하며 값진 도움을 주었습니다.
ACJ는 조금씩 빈센트와 당시 사법제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 관료, 뉴스
미디어와 일반 대중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존재는커녕
아시아인이 겪는 인종 차별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만큼, ACJ는
형량을 선고한 판사, 심지어는 살인자들까지도 인종 차별의
대상으로 비난하는 것을 삼갔습니다. 하지만 뉴스 미디어와
리자 찬은 술집에 있었던 목격자들의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경찰에서 조사조차 하지 않았던 목격자들이었습니다.
목격자들은 살해자인 에벤스가 빈센트 친에게 하는 모욕적인
인종차별 발언을 들었다고 선서한 후 증언했으며, 여기에는
“너희 개xx들 때문에 우리가 실직당했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새로운 증인의 진술을 손에 넣은 ACJ는 빈센트 친이 인종을 이유로 민권이 침해되었다는 불가피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ACJ는 빈센트의 사건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요청했습니다.
1983년 5월 9일, ACJ는 디트로이트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커뮤니티의 외침은 눈에 띌 정도로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시위가 일어나고 릴리 친의 워싱턴 DC 방문 이후 미국 법무부와 FBI는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1983년의 기나긴 여름,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소식이 미국과 전 세계로 계속 확산되자 아시아인들은 서로
연락하면서 조직화를 시작했습니다. 가족의 안위와 생계를 보장 받으려면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다른 인종,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ACJ와 디트로이트의 자원 봉사자들은 정부 관료, 기자, 친구와 가족, 교회, 직장 및 전문직 협회, 학교 캠퍼스와 클럽에 접촉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에 동조하는 다른 지역의 지지자들은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로스앤젤레스, 덴버, 시카고, 토론토와 뉴욕 등의 지역에서
각자 집회와 활동을 조직화했습니다. 릴리 친과 ACJ의
대변인들은 미국 전역에 초빙되어 연설에 나섰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와 뉴욕에서는 새로운
아시아계 미국인 지지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최초로 반 아시아인 편견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냈습니다. 아시아인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실제
모습은 아시아계 미국인을 끊임없이 이방인이자 적대적인
침입자으로 묘사한 이미지와 안일하고도 ‘모범적인 소수민족’
등 대중매체와 엔터테인먼트에서 1차원적으로 단순하게
묘사한 인종적 캐리커처, 즉 빈센트 친 살인 사건에 기여한
인종차별적 이미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디트로이트 단체들은 일본계 미국인 시민단체, 중국계
미국인 기구(Organization of Chinese Americans)
및 국제 중국인 복지 협회(National Chinese Welfare Association)를 비롯한 소수의 미 전국 차원의 아시아계
미국인 단체로부터 엄청난 격려를 받았습니다. 릴리 친과 ACJ의 대변인들은 전국의 TV방송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여기에는 미국내 3대 뉴스 네트워크, 필 도나휴 쇼, NBC 퍼스트 카메라 탐사보도 뉴스와 디트로이트
및 새크라멘토의 지역 TV 다큐멘터리가 포함되었습니다.
ACJ는 민주당의 APAC(아시안 태평양 미국 위원회, Asian Pacific American Caucus) 설립 회의에서도 연설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신문과 TV 보도를 접한 일본인들이 미국의
기업인들과 정부 관료들에게 미국 내의 아시아인들이
안전한지, 아시아인이 미국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디트로이트의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와 우발적으로 행동한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어느새 전국적인 캠페인을 주도하게 됐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전에는 한 번도 함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커뮤니티와 함께
중서부에 집중된 아시아계 미국인의 새로운 민권 운동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빈센트 친과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위해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 자신들의 활동이 교훈이 담긴 유산이 되고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다른 이들의 공감을 사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왜 사람들이 ACJ(American Citizens for Justice)를 조직 및 결성하는 것이
중요했을까요? ACJ가 범아시아계 미국인
단체로서 가지는 중요성은 무엇이었을까요?
» ACJ는 지지단체로서 디트로이트에서 어떤 환영을 받았나요?
» 사람들, 커뮤니티 및 지지 단체와 함께하는
조직 과정이 사회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이 글에서 ACJ는 DABO( 디트로이트 지역 흑인 단체, Detroit Area Black Organizations), NCAACP
디트로이트 지부, 비나이 브리스의
반명예훼손연맹을 비롯한 디트로이트의
다른 저명한 단체와 함께 조직화하며 어떤
결과를 얻게 되었나요?
» 현재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 중에서 보다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지지단체가 있나요?
본인이 지역적 또는 전국적 지지 단체에서
활동 중이라면, 사람들에게 어떤 점을
알리고 싶나요?
순간에서

사회 운동으로
새로 결성된 ACJ는 중요한 일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 먼저 효과적인 법적 대응책을 고안해야 했고,
» 아시아계 미국인과 빈센트 친에 대해 무지한 뉴스
미디어와 대중을 교육시켜야 했으며,
» 자금을 모으고 반 아시아인 폭력에 대응하고
싶어하는 잠재적 지지자들을 동원해서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를 실현해야 했습니다.
ACJ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임무는 앞으로의 법적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방향을 추구하든, 시간과
큰 법적 비용이 들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백인들이 꺼려하는 저급여 노동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어쩌다가 대학 교육을 받은 경우에도 전문직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는 1880년대의 배타적 시대와 미국 고용 및 노동 관행의 일상화된 구조가 남긴 잔재였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변호사직, 의료직, 엔지니어직이나 기타 전문직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을
찾아보기 쉽지 않았습니다. 1983년에는 미시간 주 전역에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변호사 수는 20명을 넘지 못했으며
취업할 기회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변호사
중 누구도 형사법을 다루지 않았지만, 이오 섬의 베테랑
소송가였던 헤롤드 레온이 법률 위원회를 지휘하며 세 가지의
법적 대응책을 조언했습니다.
첫째, ACJ는 리자 찬의 회사에 접촉하여 선고를 언도한 찰스

코프먼 판사가 보호 관찰 및 벌금형을 재고하고 무효화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코프먼 판사는 살인으로 이어진 술집에서의 다툼에 대한 책임이 빈센트에게 있다고 주장한 피고 측 변호사에 의해 오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고공판 당시에는 와전된 주장에 반박할 검사가 없었습니다. 리자 찬은 여러 개의 의견서를 준비한 후 판사 앞에서 주장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코프먼은 백인 살해자에 대한 자신의 관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욱 방어적으로 나왔으며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감옥으로 보내야 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처벌은 범죄 자체가 아닌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맞게 내려야 합니다.”
둘째, 첫 번째 법적 대응책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항소의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논의 후 ACJ는
추가로 변호사들을 동원해 미시간 항소 법원에 사건 개요를 제출하여 코프먼의 선고를 무효화하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세 번째 대응책은 미국 법무부에 의한 연방정부 차원의 민권 침해 조사를 신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두 번의 법적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FBI에서 본 사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커뮤니티의 쌓여가는 좌절감을
생생하게 보일 수 있도록 ACJ는 1983년 5월 9일, 수많은
역사적 시위가 있었던 디트로이트 도심의 케네디 광장에서
디트로이트 시 차원의 시위를 주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ACJ
는 시청 근처에 여러 줄의 떠들썩한 피켓 라인을 세운 적은
있지만, 광범위하게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한데 뭉쳐
디트로이트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시위 위원회의 대표직은 제너럴모터스 테크 센터의 선임
과학자인 데이비드 초크, 마이클 리와 만-펑 창이 맡았습니다.
집회는 단 일 분도 틀리지 않고 정확한 시점에 열렸고, 전례
없는 지지가 쏟아졌습니다. 수백 명의 전문직 근로자들과
가정주부들이 미국 전역에 위치한 중국 음식점의 웨이터, 주방장과 함께 행진하면서 성조기와 평등한 정의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휘날리며 가두 시위를 벌였습니다. 음식점 주인들은
가족을 비롯한 모두가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분주한
평일 점심 시간에 식당 문을 닫았습니다. 아이와 노인들은
유모차와 휠체어를 타고 나왔습니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과 필리핀인들은 범아시아적 화합 속에서 가두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시의 주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및 종교 단체와 지역 정치가들, 심지어는 UAW에서도 지지 성명서를 냈습니다. 집회가
감정적으로 끝나갈 무렵 릴리 친이 국민 앞에 등장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멈칫거리듯 말했습니다. “저는 아들을
위한 정의를 원합니다. 다른 어떤 어머니도 저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부디 도와주세요.”
5월 시위를 통해 ACJ는 빈센트 친의 민권을 유린한 살인자들에
대한 연방 기소가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질 것을 촉구했습니다.
반듯한 곳이 아닌 술집이라 하더라도 공공장소를 주장했습니다. 집회를 마치면서 시위자들은 민권의 찬가와도
같은 '우리는 이겨내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르며
연방 법원으로 행진했으며, 연방정부에 의한 민권 침해
조사를 촉구하는 3,000명의 서명이 기재된 청원서를 미국
연방 검사인 레오나드 길먼에게 직접 전했습니다. 몇 주 후
6월, 릴리 친은 미 법무부 민권침해조사과의 직원들과 만나
연방정부 차원의 민권 소송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워싱턴 DC로 향했습니다. 7월달, 법무부는 FBI에서 빈센트 친의
민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커뮤니티 대외 활동, 미디어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 및 인식개선을 위한 노력을 통해 ACJ는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 아시아인 혐오 확산과 폭력에 대해 수행한
자체 분석을 하나하나 설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이 어떻게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인종적으로 표적이
되고, 미국 현대 경제 병폐의 원인으로 비난받고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게 어떻게 더 큰 패턴의 일부인지를 처음으로
표현한 것은 ACJ였습니다.
미국 전역, 그리고 디트로이트보다 아시아계 미국인 인구가
훨씬 많은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및 시카고
등의 도시에서는 지역 커뮤니티 내에서 캠페인을 지지하고
반 아시아인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범아시아적 연합이
구축되고 있었습니다. 중국계 미국인 사회의 각종 단체를
총망라하는 전국적인 기금모금 활동이 진행되었습니다.
ACJ는 반 아시아인 폭력에 대항하는
운동에 명칭을 붙여주었고, 이는
100년 전에 연방법 속에 녹아들어
있던 희생양 만들기, 특정 집단 및 민족
배제와 인종 청소와 동일한 패턴에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ACJ는 이러한
행위들은 모든 사람이 걱정해야 할 이
시대의 사회 현상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아시아계 미국인의 전국적인
조직화를 위한 기틀이 세워졌으며, 이는
미국과 해외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정책 차원에서
가시화하기 위한 첫 단계였습니다.
여기에는 아시아의 공산주의 또는 우파 독재자 정부나 제2 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수행했던 역할, 심지어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화합하여 인종차별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지 등 확고한 신념을 놓고 충돌 중이던 단체들까지 포함되었습니다.
이렇게 광범위한 단체들이 보여준 화합의 단면은 빈센트 친 사건이 특히 인종 정치의 무대에서 전통의 힘과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줬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마침내 눈에 보이는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로 뭉쳤습니다. 이러한 결속은 유지가 어려웠습니다.
하나된 연합 활동을 끌어가는 일은 시간이 걸리며 어렵고도
복잡한 일이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다양성은 힘과 영감의 원천인 동시에 사람들을 서로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중국 표준어를 구사하는 고학력의 중산층이 광동어를 사용하는 차이나타운의 상인, 웨이터, 육체 노동자와 동조하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따라서 언어, 문화, 계급과 동류의식 측면의 여러 차이점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법적 대응의 비용 충당을 위한 ACJ의 미디어 대외 활동 및 모금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차이와 포부는 절제되어야 했고 재무를 장악하기 위한 시도는 억제되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정치적 관점의 차이도 존재했습니다. 차이나타운의
수많은 업주들은 장제스를 지지하는 열성적인
반공산주의자였던 반면, 다른 중국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부당함은
마오쩌둥과 중화인민공화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견해가 같은 장소에서 노골적인 적대심 없이
표현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정통한 중국계 미국인 인구가
대거 몰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상징적인 커뮤니티 서비스
센터인 캐머런 하우스에서 릴리 친과 ACJ가 등장하는 유명
미디어 이벤트가 진행되었으며, 이때 경쟁 구도의 정치
세력들이 무대에서 서로를 팔꿈치로 밀어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중국계 미국인 단체들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외에도 ACJ는 계속해서 다른 아시아 민족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며, 간혹 성 역할에 대한 문화적 충돌에 봉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장 중이던 디트로이트의 한국인 커뮤니티를 대변한 것은 대디트로이트 한인회
(Korean Society of Greater Detroit)와 코리안 미국인
여성 협회(Korean American Women’s Association)라는
두 개의 대형 단체였으며, 해당 단체의 구성원들은 한국에
주둔한 적이 있는, 한국계가 아닌 미군의 아내들이었습니다.
빈센트 친 사건 이전에 이들 두 단체는 협력하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른 민족 커뮤니티에 대한 범아시아적 대외 활동은 집단적 공동 정치의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디트로이트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집결하는 동안, 미국 전역의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규모 강제 수용에 따른 중대한 자유권 침해로 인한 피해를 노출시키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전국적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커뮤니티가 노먼 미네타 의원과 기타 의회 지도자들과 함께 구축한 관계를 통해 연방 정부가ACJ의 디트로이트 정의 구현 캠페인에 주목하게 되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미시간에서는 필리핀인과 남아시아인의 인구 규모가 다른 어떤 아시아 민족보다도 컸으며, 각 민족은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과 확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선거 무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 에게 직접적인 정치적 참여가
주는 실질적인 힘을 강조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민 역사가 깊지 않은 다수의 커뮤니티에서는 회피하려는 경향이 짙었던 행동이었습니다.
ACJ의 정책은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 실현을 위한 즉각적인
캠페인과 공정한 정의에 관한 원칙을 지지하고 다른
커뮤니티와 연대하여 평등한 정의를 실현하며 타인에 대한
관대하고 열린 정책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과 협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빈센트 친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생생하고도
고통스러웠기에, 몇몇 단체에서는 ACJ와 연계하여
커뮤니티의 명분을 이용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ACJ가 목표, 원칙과 가치를 고수하는 이상 새롭게 형성되어
취약할 수도 있는 연합체를 하나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ACJ의 첫 번째 기금모금 디너 이벤트에서는 건축가이자
지역의 저명한 시민이었던 미노루 야마사키가 참석했습니다. 그는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 타워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러 건물들을 설계했습니다. 당시 73세였던 야마사키는 일반 시민으로서 모임을 지지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근엄하지만 노쇠해 보였던 그는 동행한 지인의 도움을 얻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야마사키가 강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조용해졌습니다. "미국의 아시아인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부당함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1983년의 시위가 중요한 사건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위가 끝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 아시아계 미국인의 연합체 구축에 기여한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는 요인들은 무엇이었나요?
» 대외 활동 및 미디어 활동을 통해 ACJ
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어떻게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인종적으로 표적이 되고, 미국
현대 경제 병폐의 원인으로 비난받고
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게 어떻게 더 큰
사회적 패턴의 일부인지'를 처음으로 표현한
것은 ACJ였습니다. 오늘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일어난 아시아인을 향한
증오범죄에 대한 보도를 보면 과거 ACJ가
던졌던 화두와 우려가 조금이라도 달라진
점이 있나요?
“미국의 아시아인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자기주장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미노루 야마사키
연대를 향한 여정
1983년 3월 30일, 빈센트 친의 무자비한 살인자들을 풀려나게

만든 부조리와 대항하기 위해 ACJ(정의를 위한 미국 시민들,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가 처음 결성되었을 당시,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넘어서 그 이상의 범위에서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 중 하나임을 모두가
명확히 인지했습니다. 단체가 설립된 저녁, 집결한 사람들은
언론 대변인으로 뉴스 미디어를 상대로 전략을 수립하고자
저널리스트 헬렌 지아를 이사회 총무로 선출했습니다.
대다수의 미국인이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했던 만큼 무엇보다도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 민주주의의 일환으로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존재와 인간성에 대해 명료하고 효과적인 어구로 미디어를 교육하고, 인간이 아닌 음식이나 카펫에 적용되는 용어인 '오리엔탈'에 대한 보편화된 지식을 버리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ACJ는 2주 후에 디트로이트 기자 클럽에서 첫 기자 회견을 가졌습니다. 이메일과 소셜 미디어는커녕 팩스기조차 없었던 그 당시에는 취재의뢰서 내용을 하나하나 타자기로
작성했으며, 큰 활자체의 헤드라인 제목은 부착식 글자를
한 번에 하나씩 손수 붙인 다음 최종판을 그대로 복사하여 찍어냈습니다. 이렇게 작성한 글을 은퇴한 중국계
미국인 부부인 레이와 메이블 림이 직접 각 언론 기관에 전달했습니다. 주차가 여의치 않을 때에는 한 사람은 차에서 기다리고 다른 한 명은 각 뉴스 부서에 보도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1983년 4월 15일 오전에 그 지역의 모든 뉴스 미디어가 나타났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중서부에서 너무나도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기에 이러한 커뮤니티에서 부당함에 대한
시위를 위해 뭉친다는 뉴스는 이색적으로 보였습니다. 기자 회견은 비교적 기본적인 질문들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최근에 미국으로 온 사람들인가? 영어를 할 줄 아는가?
디트로이트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ACJ는 흑인 커뮤니티와 접촉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변호사 리자 찬과 헬렌 지아는 청취자의 솔직한 의견을 유도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유명한 흑인 라디오 방송국의 토크쇼에 출연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부당함을 얘기하기 위해 자기 커뮤니티에 접근하는 것을 반갑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시아인들이 그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지 물어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시아인들이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ACJ의 대변인들은 이러한 질문에 솔직히 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아시아계 미국인들 전부가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진 게 아니며 일부가 그렇다는 것을 인정했고, ACJ는 아시아인들의 인종차별적 태도를 비롯한 모든 집단에 대한 인종적 부당함을 해결하기 위해 결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토크쇼에서 민권 투쟁에
대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기여에 대해서도 논의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청취자들의 의견을 보면 민권과 관련된 흑인 운동, 혹은 이러한 운동이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반대 페이지 1983년 5월 9일 디트로이트의 케네디 광장에서 열린 ACJ 정의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 주요 연사들(왼쪽에서 오른쪽): NAACP의 윈스턴 랭, 흑인 단체 협회(DABO)의 호러스 셰필드 주니어, ACJ 변호사 리자 찬, ACJ 회장 킨 이, 또 다른 지지 연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인 커뮤니티 및 관련 문제가 대중적 무관심에서 벗어나고 공중이 참여하는 주요 담론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나오는 이러한 반응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상반된
감정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습니다.
어떤 이득을 주었는지 잘 모르는 최근 이민온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함께 이러한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다른 커뮤니티와의 연합을 모색 중이던 ACJ는 미국의
인종에 대한 전국적인 대화를 시작했으며, 민권 투쟁에서
흑인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동시에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민권에 대한 교육및
인식개선을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더 나아가 ACJ는 평등과 민권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 과정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흑인 커뮤니티를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DABO(디트로이트 지역 흑인 단체, Detroit-Area Black Organizations)와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직은 정의를 요구하는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촉구를 발 빠르게 지지했습니다. DABO의 설립자 겸 회장인 호러스 셰필드는 ACJ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주었고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이에 화답했습니다. NAACP 최대의 지부인 디트로이트 지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발표했습니다:
"NAACP 디트로이트 지부는 찰스 코프먼 판사가 빈센트
친을 살해한 자들에 대해 내린 보호 관찰형에 개탄하며, 해당 판결을 무효화하고 새로운 판결을 통해 적절한
실형이 내려지기 위한 노력을 지지하기로 결의한다."
다양한 단체의 중요한 지원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여러 저명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들, 비나이 브리스의
반명예훼손연맹(Anti-Defamation League of B’Nai B’rith), 디트로이트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원탁회의(Detroit Roundtable of Christians and Jews), 중동을 제외한
최대의 아랍인 인구로 이루어진 미시간의 아랍계 미국인, 라틴계 커뮤니티, 서인도 협회(West Indian Association), 이탈리아계 미국인들, 디트로이트 여성 포럼(Detroit Women’s Forum)부터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흑인 여성들 (Black Women for a Better Society)에 이르기까지 여성
단체들 모두가 ACJ를 지지했습니다. 디트로이트 시의회 회장에서 하원 의원 존 코니어스에 이르기까지 지역 정치 지도자들도 촉구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ACJ의 대외 활동 중 일부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분개를 불러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ACJ가 지지 촉구를 위해 백인, 유럽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초대했을 때, 일부는
인종차별에 맞서 행동에 나서려는 '또 다른 소수집단'에 대한
적개심이나 반발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심지어는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을 때조차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차별이나 '진짜' 인종차별을 경험하지 않았음을 암시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이나 역사에 대해 무엇 하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말입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에 대해 논의할 합당한 자격이
ACJ의 지도자와 대변인들은 인종 이슈에 대한 공개 담론을 위해 나서고 있었지만,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는
많은 이가 공개 발언에 나서는 게 옳은 일인지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인종 관련 이슈는 흑인과 백인의 구조로만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아시아인이 인종 관련 담론에 참여하여 정당한 입지를 행사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특별히 최근에 미국으로 온 이민자와 난민들, 그리고 고령의 커뮤니티 구성원들은 빈센트 친을 살해한 자와 관련하여 인종과 인종차별 이야기를 꺼내는 데 주저했습니다. 그들은 '인종차별'이라는 민감한 단어를 꺼내기에 앞서 인종차별에 대한 확실한 연관성이 확보될 때까지 기다리고자 했습니다. 빈센트의 사망으로 이어진 사건을 재구성하기 위한 조사 작업을 준비하는 일은 ACJ의 변호사인 리자 찬의 몫이 되었습니다. 경찰이 술집에 있던 손님이나 다른 핵심 증인을 심문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반 아시아인 인종차별과의 연관성을 찾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라신 콜웰이라는 댄서가 상황을 직접 목격했으며, 술집에서 에벤스가 친에게 “너희 개xx들 때문에 우리가 실직당했어.” 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고 망설임없이 진술했습니다.
리자는 더 많은 진실과 정황을 알아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자들은 빈센트와 그의 중국인 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운전하던 도중 '그 중국인을 찾을 수 있게' 도와 달라며 지역의 한 사내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반 일본인 혐오 정서로 가득한 뉴스가 매일 나왔던 그당시의 인종적 갈등이 만연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러한 전개는 인종차별과 명백한 연관이 있다 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자의 인종적 발언을 직접 들은 사람의 진술을 확보한 ACJ는 민권침해 조사를 공개적으로 촉구했으며 즉각 반발이 뒤따랐습니다. 인종차별이 표면화된 것에 분노한 백인 보수주의자들의 전화가 라디오 토크쇼에 빗발치듯 걸려왔습니다. “이게 인종과 무슨 상관이 있죠?” 한 청취자는 디트로이트 뉴스 핫라인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인의 민권은 없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백인 진보주의자들이 가장 회의적이었습니다.
웨인주립대학교에서 헌법을 강의하는 로버트 세들러 교수는 ACJ의 변호사 위원회를 만나서 "민권 소송은 잊으라"고 말했습니다. 민권법은 아시아인이 아닌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습니다. "
아시아계 미국인은 연방 민권법을 사용하여 불의를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아시아인은 백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은
그저 백인의 범주 안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시점과 법의
관점에서는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시간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의 상임 이사인 하워드 사이먼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외침을 묵살했습니다. '의무적 형량'을 지지해 치안을
강조하는 열성분자들의 운동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미시간 ACLU는 빈센트 친 살인 사건이 민권의 침해라는
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진보적인 법 단체라 자칭하는 미국변호사협회 (National Lawyers Guild) 디트로이트 지부마저 빈센트
친의 죽음과 인종차별 사이의 연관성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종 폭력에 대한 아시아인의 역사에 훨씬
익숙했던 웨스트코스트 지부에서는 끈기를 가지고 충분한
표를 확보함으로써 ACJ의 대의를 전국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습니다. 디트로이트 지부에서는 폭동에 가까운 사태가
벌어졌지만, 결국에는 웨스트코스트 지부가 승리했습니다.
또한 ACJ 대변인단은 디트로이트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지녔던 UAWU(연합 자동차 노조, United Auto Workers Union)에도 접근했습니다. ACJ가 조합 구성원의 반일
정서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면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적개심과 폭력을 어느 정도는 줄일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발은 너무도 거셌습니다. UAW 본부 외곽에 위치한
솔리더리티 하우스에는 수많은 인종적 갈등을 부추기는 표지판과 자동차 범퍼 스티커가 보였습니다. "해고당한
300,000명의 자동차 공장 노동자는 말한다. 일본 수입차는
도쿄에나 주차시켜라." 인기 차종으로 연료 효율이 높은
폭스바겐 비틀을 비롯한 유럽산 수입차는 전혀 반감을 사지
않았지만, 인종차별과 희생양 만들기는 본인과 다르게 생긴
표적의 대상에게만 효과를 발휘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무지하고 부정적인 반응은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
내에 남아있는 불확신을 더욱 부채질했습니다. 공개적인
커뮤니티 회의를 통해 ACJ는 미국의 인종 역학관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위치에 대해 사람들이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인종이라는 요소가 미국의 백인과 흑인에게 그토록 논란이
되는 주제라면, 아시아계 미국인이 굳이 나서서 한쪽이나
양쪽 진영의 잠재적인 분노를 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아시아인들은 간혹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를 내었다는 이유로 골칫거리라는 딱지가 붙는 것
아닌가? ACJ가 사람들을 동요시키고 나선다면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더욱더 표적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닌가?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민권침해 조사를 추구한다면, 인종에 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가?
ACJ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우려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포용했으며, 질문과 의구심에 대한 솔직한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예, 민권 소송은 인종과 관련이
있습니다. 침묵을 지킨다고 해서 우리 주변에 만연한 인종적
적개심으로부터 아시아계 미국인을 보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침묵이 빈센트 친이 표적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쌓여있던 좌절감과 수치심을 공유했고, 이는 그들이 빈센트 친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회사를 위해 40년 동안 열심히 일했습니다.” 라고 자동차 업계에 종사하는 한 기술 전문가는
말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항상 진급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저는 수많은 백인 젊은이들을
가르쳤지만, 결국 그들은 제 상관이 되었습니다. 비록 불평한
적은 없지만, 속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내야만 합니다. 빈센트 친 사건에서 일어난 일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이러한 취급을 받고
살해당할 수 있다면 침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당함에 대한 분노는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ACJ와
메트로 디트로이트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민권 및 인종 정치의 문제를 두고 벌이는 투쟁을 연방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입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아시아계 미국인의 민권에 관한 우려에
대해 ACJ 및 활동가들은 어떤 어려움에
직면했나요?
» 몇몇 사람이 빈센트 친 살인 사건에서
인종차별이 작용했다는 주장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이 글에서 한 특정 지문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에
대해 논의할 합당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아시아인 커뮤니티 및 관련 문제가
대중적 무관심에서 벗어나고 공중이
참여하는 주요 담론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나오는 이러한
반응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상반된 감정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했습니다."
이렇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것, 중요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걸 주저하는
데 기여하는 과거와 현재의 장벽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 두려움은 우리가 내리는 결정, 그리고
결정을 내리지 않는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또한 보다 정의로운 미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려면 어떤 자세로
두려움을 마주해야 할까요?
제시 잭슨 목사와 릴리 친, 1984년
법정 투쟁
1980년대 내내 ACJ는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수단을 추구했습니다. 사건의
온전한 심리를 위해 수많은 의견서와 기록물을 제출했지만, 경찰, 검찰과 재판부의 무능, 무관심 및/또는 무지, 그리고 이 사회가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소외시키는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거부당하고 말았습니다.
1984년 6월 5일, 연방 법원에서 재임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중 한 명이었던 안나 디긴스 테일러 판사가 주관하는 법정에서 연방 민권침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ACJ는 법정 공방이 힘겨운 싸움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시아계 미국인이 증오
폭력은 고사하고 인종적 편견조차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혐오 발언은 교실에서 뉴스룸, 법원과 의회에 이르기까지 미 주류 문화에서는 인종차별적 언어로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인종적 욕설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조차 아시아계 미국인 집단을 향한 인종적 욕설에
무지하거나 심지어는 공감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댄서 라신 콜웰은 에벤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희 개xx들 때문에 우리가 실직당했어.”
이러한 발언은 비록 인종차별적 단어나 욕설은 하나도
없었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을 지목한 건 명백했습니다. 재판을
취재한 디트로이트 뉴스의 나이가 지긋한 백인 기자, 돈 볼과
같은 영향력 있는 기자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직접 목격한
상황은 연관성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진술이 '친이
살해당한 것이 인종차별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어설픈 증거'라고 기사에 썼습니다. 빈센트 친의 재판 절차를 취재한
주도적인 기자였던 만큼 그의 편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졌던 커뮤니티에 대한 고정관념을 뛰어넘지 못한 다른 보도 내용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6월 28일, 디트로이트의 연방 배심원단은 볼과 다른 반대론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에벤스가 빈센트 친의 민권을 침해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니츠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인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WhoKilled Vincent Chin?)' 에서는 카메라 앞에 선 배심원단장이 에벤스에게 유죄를 선고함에 있어 라신 콜웰의 진술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너희 개xx들'이 일본인 혹은 일본인처럼 생긴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테일러 판사는 에벤스에게 20년형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1986년에 항소 재심으로 넘어갔습니다. ACJ 에서 처음 사건을 조사할 때 제작했던 증인의 테이프와 관련된 증거 오류와 사전 심리 과정에서의 언론 보도가 이유였습니다. 디트로이트의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 설득에 도움이 되었던 살인자의 인종차별적 동기를 밝히는 인터뷰가 디트로이트의 테일러 판사가 주재한 첫 번째 민권 재판의 항소를 얻어내는데 적용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잔혹한 아이러니였습니다. 재심은 배심원단 후보가 사건에
대해 알 가능성이 훨씬 적은 신시내티에서 진행하기로
예정되었습니다.
켄터키 오하이오 강 맞은편에 위치한 신시내티는 미 남부의
색이 강한 보수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디트로이트의
고조된 인종 의식, 다수의 흑인과 민권 투쟁의 역사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 아시아인을
찾기 힘들었다면 신시내티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신시내티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인구가 적은 만큼 쉽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1986년 7월 4일에는 '애국주의자'를 표방하는
백인 무리가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온 난민의 집에 총기를 발사했습니다.
1987년 4월20일, 재심을 위한 배심원 선정 과정이 시작되었을

때 배심원 후보들은 아시아인에 노출된 여부에 대한 질의를 받았습니다. “아시안과의 접촉이 있습니까? 어떤 식으로
그러한 접촉이 있습니까?” 그들은 마치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처럼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답변으로 인해 더 많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배심원
예비 후보군에 속한 약 180명의 신시내티 시민들 중에서
직장이나 그 지역의 포장 중화요리 음식점에서 아시아계
미국인과 '가볍게 접촉'한 인원의 수는 고작 19명이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친구가 있다고 말한 한 백인 여성은 마치 그
우정 때문에 오염이라도 된 것마냥 배심원단에서 제외되었고, 아시아계 친구를 둔 딸이 있던 여성,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한
적이 있는 흑인 남성도 제외되었습니다. 백인과의 접촉으로
인해 편견을 가지게 되었냐고 질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선정된 배심단원의 모습은 에벤스와 무척 흡사했습니다.
대부분은 육체 노동직에 종사하는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이번 배심원단장은 30년을 일하다가 해고당한 50대 기계공이었습니다. 피고측 변호인단은 ACJ와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가 민권 소송을 날조하기 위해 변호사 리자 찬을 돈으로 매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사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판사는 인정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피고측 변호인의 주장을 듣고 난 후였습니다.
1987년 5월 1일, 배심원단이 무죄 판결을 내렸을 때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실망감이 엄습했습니다. 빈센트 친이 살해당한 지 5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과 사실상
아무런 접촉이 없거나 그들의 우려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이들로 이루어진 이 배심원단은 '너희 개xx들 때문에'와 '그 중국인을 잡아라'라는 말에 어떻게 인종차별적 의도가 담길 수 있는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형사 소추가 에벤스와 니츠의 무죄 판결로 끝나자, 이 살인자들을 상대로 한 부당한 사망에 대한 민사 소송을
마침내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소송은 빈센트의
목숨이 가지는 '가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릴리 친은 드디어
법정에 서서 빈센트 친의 삶에 가치가 있었으며, 그가 중요한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정에서는 에벤스에게 150만 달러의 배상금을 부과했습니다. 매월 200달러씩 분할 납부가 가능한 형식이었습니다. 에벤스는 릴리 친이 절대 보상금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영화제작사에 말했으며, 채무자 친화적인 법이 시행되는 네바다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안락하게 생활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법원에서
명령한 판결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에벤스는 빈센트 친을 폭행하여 사망하게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보인 적이 없으며,
한 번은 기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 유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매년 빈센트 친 관련 재단과 그의 어머니인
릴리는 에벤스에 대한 판결을 유효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서류를 제출하고 있으므로 빈센트 친의 살인자는 자신이
저지른 혐오 범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해야 할 의무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반 아시아인 혐오 감정을 믿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빈센트 친의 이야기에
대한 극작가 셰를린 리의 연극 산에 호랑이를 옮기다 (CarrytheTigertotheMountain)가 워싱턴 DC 근처의
웨스트 버지니아 셰퍼즈타운에서 열리는 현대 미국 영화 페스티벌(Contemporary American Theater Festival)
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때, 페스티벌 주최 측은 에벤스를 변호했던 변호사를 초대하여 프로그램 북에 대한 기고문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빈센트가 야구방망이에 머리를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도에 머리를 부딪쳐서 사망했을 수
있다고 기고문에 썼습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극에 유대인
대학살을 부정하는 이의 글을 포함하거나, 흑인의 삶에 대한
프로그램 책자에 조지 플로이드 살인 사건이 거짓이라는
에세이를 포함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글을 워싱턴포스트지(Washington Post)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독자가 있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연극
비평가로 일하는 백인 남성은 연극의 타당성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는 부정적인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에벤스의 변호사에
따르면 인종이 사건의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아시아인이 인종차별이나 차별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인종차별적 '모범적 소수민족'이라는 믿음은 빈센트 친의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만연한 반 아시아인 혐오 속에 살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는 특히나 유해합니다. 하지만 신시내티의
지역 판사와 배심원단은 살해자들이 아시아인에 대한 어떠한
인종차별적 욕설도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면서 그들을
풀어주었습니다.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혐오 발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부족은 차별이나 인종차별을 경험하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더 높은 기준으로 판단하게 합니다.
사실 혐오에 의한 행동은 말 한 마디 없이 자행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이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범죄에서 인종이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반사적으로 부인하는 법집행기관, 공직자들과 기자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2021년 3월에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경우, 총기난사범이 아시아인이 소유한 업체에 있던 6명의 아시아계
여성과 2명의 행인을 사냥하여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적 요인을 부정했던 경찰의 경우를 TV로 생생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인종차별을 부정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 친을
위해 정의를 찾고자 일어난 민권 운동이 불러일으킨 여러
영향으로 다양한 배경을 지닌 모든 미국인은 이에 따른 혜택을
받았습니다. 판사 찰스 코프먼이 살인자들에게 보호관찰형을
내렸을 때 피해자를 대변해 줄 검사나 가족은 없었습니다.
빈센트 친의 이야기와 사건은 범죄 피해자의 권리를 위한
운동의 일환이 되어서 범죄 피해자가 선고 공판에서 자신이
경험한 피해에 대해 진술할 수 있게 했습니다. 미시간이
이를 법적으로 제정하기 위해 움직였을 때, 혹자는 이를 ' 빈센트 친 규칙'이라 지칭했습니다. 올림픽 체조선수들이
미시간의 법정에서 자신들이 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에게
당한 성폭행에 대해 진술했을 때, 그들은 빈센트 친 사건에
의해 제정된 범죄 피해자 진술권을 행사한 것이었습니다.
혐오 범죄 보호법 또한 빈센트 친 덕분에 강화되었습니다.
처음에 몇몇 백인 민권 변호사들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연방
민권 법에 의한 보호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해당 법의 원래 의도가 아시아계 미국인과 이민자가
아닌 흑인을 보호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미디어 및 교육을 통해 ACJ와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오늘날 인지 성별, 성적 지향과 장애까지 포괄하는 민권 및
혐오 범죄 보호의 범주를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ACJ에서 기울인 각고의 노력과 미국 전역에 울려 퍼진
다른 수많은 목소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미국 사회와 공익에
기여했으며, 특히 신세대 활동가 및 지지 단체는 현 세대의
문제를 지금도 계속 타개해 나가는 중입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이 인종
이슈에 대한 대담에서 제외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것이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 이 글의 초반부에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인종적 부당함을 경험하지 않는 커뮤니티로
취급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혐오 범죄로 인해
이러한 견해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미국의
인종 이슈에 대한 대담에 참여하려면 이들
아시아인과 아시아인 커뮤니티는 어떤
조치를 실행해야 할까요?
주요 법적 투쟁 일지
빈센트 사건을 강조한 미시간 변호사 협회
작성자: 롤랜드 황,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 회장 및 공동 설립자 2009년5월 미시간 법정 저널(MichiganBarJournal)에 처음 기고된 글에서 개작
1999년 6월 19일, 미시간 주 주요 법정 투쟁 일지(Michigan State Bar Legal Milestone) 프로그램은 빈센트 친 사건, 그리고 이 사건이 우리의 법적 유산에 미치는 중요성을
기념하기 위한 명패를 헌정하기 위해 기념식을 진행했습니다.
기초가 되는 사실


미시간과 미시간의 자동차 산업은 1982년에 심각한 침체를
겪고 있었습니다. 1982년 6월 19일, 로날드 에벤스와

마이클 니츠는 하이랜드 파크의 술집에서 벌어진 언쟁에
연루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빈센트 친이 3명의 친구와 함께 곧 있을 결혼식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언쟁 도중 에벤스는 “너희 개xx들 때문에 우리가 실직당했어.”라고
말했다고 전해졌습니다. 에벤스, 니츠, 친과 그의 친구들은 술집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에벤스와 니츠는 빈센트 친과
그의 친구들 중 한 명을 쫓아갔고, 지미 페리에게는 “
그 중국인들을 찾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드워드
에비뉴에서 친을 따라잡았습니다. 니츠가 친을 붙잡고 있는 동안 에벤스는 야구방망이로 그를 폭행했습니다. 비번이었던 2명의 하이랜드 파크 경찰관들이 폭행을 목격했습니다.
1982년 6월 23일,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한 빈센트 친은 사망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민권 침해가 일어났다고 믿었습니다. 피고들은 술집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인한 사망이었으며, 친의 민권을 침해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날드 에벤스 및 마이클 니츠 형사 사건
제2급 살인 혐의가 과실치사로 감경되었습니다. 에벤스는 유죄를 인정했고 니츠는 감경된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불항쟁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선고공판은 찰스 코프먼 판사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그당시 웨인 카운티 검찰청에는
판결 절차 참석에 대한 정책이 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선고공판에서 피해자 진술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만큼 피해자의 가족에게는 선고 당시 진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찰스 코프먼 판사는 피고들에게 3년의 보호관찰형과 3,000달러의 벌금을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은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격렬한 항의로 이어졌습니다. 중국계 미국인 조직(Organization of Chinese Americans)
의 디트로이트 지부장이었던 필자는 중국 자선자 협회 (Chinese Benevolent Association)의 책임자인 킨 이와 함께 일했습니다. 우리는 아시아계 미국인 민권 단체인 ACJ( 정의를 위한 미국 시민들,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
의 결성으로 이어진 일련의 커뮤니티 회외를 시작했습니다.
작가 헬렌 지아와 같은 저널리스트, 자동차 엔지니어, 자원
봉사를 위해 찾아온 변호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이 운동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로 뭉쳤습니다. ACJ의 구성원들은 케네디
광장에서 집회를 주최했고, 사건에 대한 사실이 와전된 것을
근거로 형에 대한 재고를 모색했습니다. ACJ는 코프먼 판사와
미시간 항소 법원 앞에서 재심을 주장하기 위해 토마스
브레넌 및 리자 측 메이 찬을 선임했습니다.
연방법원에 기소된 에벤스
주 차원에서 진행된 형사재판에서의 오심을 고려해 ACJ는
미국 법무부가 연방 민권 소송을 집행하도록 하는 가능성을 검토했습니다. ACJ는 피크닉과 공연을 열기도 하고, 웨인 법대 로버트 세들러 교수와 당시 민권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제프리 젠크스 간의 토론을 주최해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민권이 연방법에 의해 보호되는지 여부를 논의했습니다.
FBI는 본 사건을 조사했고, 미국 법무부는 민권 침해 혐의로
사건 기소를 결정했습니다. 연방법원에 기소된 사건은 안나 디그스 판사가 주관했습니다. 배심원단은 연방 민권 침해 혐의와 관련하여 에벤스에게 유죄 평결을 내렸고, 그는 20 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배심원단은 연방 민권 침해 혐의와 관련하여 니츠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그가 어떠한 인종차별적 발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에벤스는 제6연방순회항소법원에 항소했고, 거기서 신시내티의 배심원단은 친의 민권을 빼앗은 혐의와
관련하여 그에게 무죄를 평결했습니다. 에벤스와 니츠는 본인들이 한 행위에 대해 단 하루조차 감옥에서 보낸 적이 없습니다.
이 사건의 중요성
» 이 사건은 아시아계 미국인 피해자의 민권 운동이 발생한 계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 본 사건은 1994년 미시간 대학교에서 진행된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 협회(Association of Asian American Studies)의 전국 회의에서
우수 아시아계 미국인 단체로 인정을 받은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 Inc.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 본 사건은 선고의 단계에서 피해자 가족의 진술을 확보하지 못한 사법제도의 허점을 드러냈으며, 이러한 문제점은 차후 제정법의 개정으로
시정되었습니다.
» 본 사건은 형량 선고의 판결에서 판사의 재량권을 드러냈고, 이는 대법원과 입법부에서 의무적 최소 형량의 지침을 정하게 하였습니다.
» 본 사건은 재판이 이루어지는 관할 법원의 변경은 민감한 문제라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후에 있을 로드니 킹 사건의 경우처럼 관할 법원의 변경은 판결 결과를 바꿀 수 있습니다.
» 본 사건은 뉴욕 타임스(NewYorkTimes), 시카고 트리뷴 (ChicagoTribune)과 아사히신문(Asahi-Japan)
과 같은 미디어의 관심을 끌었으며, 1987년에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로 지명된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WhoKilledVincentChin?)
에서 초점을 맞춘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 이 사건은 5년마다 추모식을 통해
기념되고 있습니다. 2007년에는 디트로이트
도시권에 속한 매디슨 하이츠에 위치한
중국계 미국인 협회(Association of Chinese Americans)의 중국인 커뮤니티 센터에서 추모가
이루어졌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유사한 추모식이 있었습니다. 주 변호사 협회에서는 공적 대외 활동 위원회(Public Outreach Committee) 와 미시간 주요 법정 투쟁
일지(Michigan Legal Milestone)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단체와 협업하여 이러한 주요 과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포함된 조직으로는 미시간
아시아-태평양 미국 변호사 협회(Michigan Asian Pacific American Bar Association),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정의를 위한 아시아계 미국인 센터(Asian American Center for Justice) 및
아시아계 미국인 기자 협회(Asian American Journalists Association) 등이 있습니다.
롤랜드 황은 미시간 법무장관부(Michigan Department of Attorney General) 와 주 변호사 협회 공적 대외 활동 위원회(State Bar Public Outreach Committee)의
변호사로 근무했습니다. 그는 미시간 민권 부서(Michigan Department of Civil Rights)의 심리 심사원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민권 보장을 위한 정의로운 싸움
애초부터 미국의 부와 경제적 성공은 아메리카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토착 민족을 비롯한 수많은 민족의 고된 노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심각한 불평등으로 이루어진 체계는 흑인을 착취하고 노예화하여 상당한 혜택을 누린 자들에게 커다란 특권을 주었습니다. 땅을 소유한 상류층의 유럽계 미국인들은 불평등한 법, 위협과 폭력 등을 통해 인종적 계급을 강요하며 부를 축적했으며 피부색, 계층 배경, 성별 및 기타 사회적 지표에 따른 분열을 강화했습니다.
비록 수백 년이 걸렸지만, 노예가 된 이들과 이에 조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분열을 어느 정도 메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에는 수치스러운 노예 제도를 무너뜨렸습니다. 노예제가 정식으로 폐지된 후 사람들은 계속해서 계급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다른 억압의 형태를 대상으로 투쟁했습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이 나라는 모두에게 좀 더 공평한 곳이 되었습니다

민권을 위한 투쟁은 잔혹한 노예제와 불평등에 저항하고, 인간으로 대우받고 미국인으로서 온전한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운
미국 흑인들의 일대기와도 같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위해 싸운 이들의 이야기는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거부당한 이들의 정신을 고양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노예제: 미국의 관습
유럽인들은 15~16세기에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세계'에 거주하고 정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노동이 필요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노예화하여 최대한
저렴한 방식으로 이 목표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과 토착민들의
노동에 의지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농장, 광산을 비롯한
극도로 척박한 환경에서 강제로 일하도록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노예제와 유사한 제도가 오랫동안 존재했습니다. 빚을 진
가난한 백인들은 경우에 따라 계약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빚을 청산할 때까지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때로는 빚을 청산할
시점에 다다를 수 없었거나, 빚 청산을 불공평하게 방해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국은 해외 식민지 개척 초기에 이러한 제도를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백인과 아프리카인 모두를 계약노동자로 이용했습니다. 1619년에는 처음으로 노예가 된 20명의 아프리카인이 버지니아로 끌려왔으며, 그들은 30년 후 1651년에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만큼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식민지 지주들은 타인의 완전한 소유권을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얻게 됩니다. 1661년, 버지니아에서는 노예제를 합법화한 다음 노예로 태어난 아이들이 평생
동안 노예 신분을 유지하게 하는 법안을 제정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남부의 경제는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일부는 농장의 밭에서 일한 반면, 나머지는 백인
가정의 하인으로 일했습니다. 또한 주에 따라서는 노예가 농업이 아닌
산업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808년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하는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노예제는 계속되었습니다. 노예상들은 노예를 '사육'하여 그들의 자식들을 판매하고, 자유 신분이 된 흑인들을 납치 및 판매하여 돈을 벌었습니다.
1846년에는 노예 금지 지역으로 끌려온 드레드 스콧이라는 흑인 남성이
자유를 얻기 위한 소송을 제기했던 유명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대법원은 아프리카인의 후손이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연방 법원에서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1500년대에는 스페인 갈레온선의 교역이 시작되면서 아메리카와 아시아-태평양 지역 간에
배가 운행되었습니다. 필리핀과 폴리네시아의
항해사들이 북아메리카로 찾아왔습니다.
16~17세기에는 현재의 멕시코시티에서
중국인에 대한 기록이 남았으며, 필리핀인들은
현재 루이지애나가 되는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의 끝없는 노동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아시아, 특히 인도와 중국에서
건너온 수천 명의 노동 계약자들이 노역을
강요당했으며, 이들은 수 년 동안 농장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일부는
납치되어 배의 비좁은 선창 안에 감금되었습니다.
아메리카의 인신매매업자들은 끌려온 중국의
여성과 소녀들을 사고 팔았습니다.
아시아, 중동과 태평양 군도에서 건너온 300
명 이상의 남성이 남북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대부분은 북군으로 참전했지만, 몇몇은 남군을 위해 싸웠습니다. 여기에는 남부에서 붙잡혀
남군에 배치된 중국인 선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848년의 골드러시에 동참하기 위해 수만 명의
중국인이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이 광부들은
나중에 철도 작업자들과 합류했으며, 로키 산맥을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는 데 투입되었습니다. 매사추세츠, 미시시피와 펜실베이니아로 끌려온 다른 중국인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채웠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덴버, 로스앤젤레스 등의
도시와 서부 전역에서는 중국인, 펀자브인과
여러 아시아 민족의 생활 영역이 좁은 게토 빈민가로 제한되었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
‘인종 몰아내기 (driving out)’ 이라는 인종
청소가 자행될 당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미국에서 모든 아시아인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민간인 학살과 폭행이 비일비재했으며,
차이나타운 지구 전체가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중국인에게 부과된 여러 엄격한 법은 나중에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격리된 학교와 주거 공간으로
내몰렸고, 급여가 높은 직장에서 일할 수
없었으며, 불공평한 법과 세금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시아인들은 미국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 금지되었고, 폭행 피해자인 경우에도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었으며, 집이나 농지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법정에서 이러한 인종 우월 의식과 차별에
맞서서 싸우려고 노력했으며, 17건의 소송을
대법원까지 진행했습니다. 익 워 소송은 분리는 평등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줬으며, 수십 년 후에는 남부의 학교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용되었습니다. 웡 킴
아크 소송은 모든 미국인은 출생 시 시민권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인과 여러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 몰아내기 (driving out)’ 행위 및 금지
조치 중에는 중국 여성의 입국을 금지하는
페이지 법(1875)과 중국인 배척법(1882)의
도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위대한 미국 흑인
지도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다른 이들은
미국에서 중국인과 다른 아시아인들을 배척하는
차별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남북 전쟁, 재건과 백인
우월주의


결국 미국은 노예제 문제로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남북전쟁 동안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으며, 남부는 경제적으로 황폐화되었습니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해방선언에 서명했으며, 노예 생활을 한 사람들 중 일부는 해방되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1865년에 미국 수정 헌법 제13조가 통과되면서 자유 신분이 되었습니다.
노예제의 폐지로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백인들 중 일부는 노예제에 따른 혜택을 상실한 것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KKK단(Ku Klux Klan)과 백인 연맹(White League) 등의 백인 우월주의자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단체들은 백인이 사회에서 특권을 가진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전쟁 이후의 재건(Reconstruction) 시대에는 남부의 몇몇 주에서
법률 제도와 법 집행을 이용하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통제하고 사회
내에서의 신분 상승을 막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상대로 극도로 엄격한 법을 집행했으며, 소위 말하는 '불복종'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때 체포 및 구금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흑인과 백인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분리 정책이라고 합니다. 분리 정책을 시행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민권을 축소한 법들은 '짐 크로우' 법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868년, 연방 정부는 미국 수정 헌법 제14조를 통과시켰습니다. 이 개정안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귀화한 모든 이들에 대한 시민권과 ' 동등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여기에는 예전에 노예였던 사람들도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짐 크로우 법은 수십 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이는 1915년부터 기존의 분리 정책을 철폐하는 데 기여했던 일련의 대법원 소송을 통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1909년에는 미국의 가장 저명한 민권 운동 단체 중 하나인 NAACP(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학교의 분리 정책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맡은 역할로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NAACP의 수석
변호사인 서굿 마셜은 훗날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지지자들은 린치(lynching)와 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린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토착민, 중국인과
미국 역사상에 존재했던 여러 집단을 대상으로 가해졌던 잔혹한
형태의 살인입니다. 미국 하원에서는 린치를 금지하기 위한 세 가지 입법안을 통과시켰지만, 백인 우월주의 사상을 가진 남부 의원들 때문에 상원에서는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2005년, 상원에서는 린치 금지 법을 막았던 상원의 과거 행동에 사과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심지어 그때조차 남부의 몇몇 의원은 결의안 동참에 거부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NACCP에서 여러 주에 결쳐서 교육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흑인과 백인 어린이를 분리된 학교에서 다니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1954년에는 이러한 소송 중 하나였던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이 민권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법원은 수정 헌법 제14조가 공립학교제도에도
적용된다는 판결을 내렸으며, 이는 학교에서의 인종분리 폐지로 이어졌습니다.
에밋 틸과 로자 파크스
짐 크로우 시대에 일어났던 가장 부당한 사건 중 하나는 1955년의 에밋 틸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분리 정책이 만연했던 미시시피를 방문 중이던 당시 14세의 에밋은 한 백인 여성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이 여성은 나중에 에밋이 자신을 붙잡고 괴롭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여성의 남편과 또 다른 남성은 에밋을 납치하여 고문하고 살해했습니다. 시카고에서 거주하는 틸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떻게 고문당하고 학대당했는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관을 열어 시신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잡지에서 소년의 훼손된 시신을 본 미국인들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미시시피의 배심원단은 살인자들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고, 이를 계기로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듬해에 이 남성들은 기자에게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2007년에는 틸을 고소한 백인 여성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55년에는 이정표라 할 만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로자 파크스는 인종 분리 정책이 시행 중이던 남부의 앨라배마 몽고메리에서 버스에 탑승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 탑승한 몇몇 백인 남성들이 그녀가 앉아있던 좌석의 열을 요구했습니다. 다른 좌석도 많았으나, 버스 운전사 또한 파크스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명령을 거부한 그녀는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벌금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의 흑인들은 도시 버스 탑승 거부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탑승 거부 운동은 381일 동안 지속되어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고, 대법원에서 도시 버스의 분리 정책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중국인 배척법을 확대하는 다수의 연방법이 통과되어서 모든 아시아 국가에서의 이민이
극도로 제한되었습니다. 아시아계 이민자가
귀화시민이 되는 것을 금지했던 법들은
1943년부터 1952년까지 점진적으로
해제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유권자가 되고, 선거직에 출마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42년 2월 19일에는 미 서부 지역에 위치한
주에서 120,000명의 일본계 미국인을 추방 및
감금하기 위한 행정 명령 9066이 내려졌습니다.
일본인이라는 민족성 때문에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것이 명령의 근거였습니다. 간첩 또는
미 정부를 대상으로 한 방해 공작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본계 미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4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국가 시민 자유 운동을 통해
사과와 시정 조치를 받아냈습니다.
냉전 기간에는 한국 전쟁 및 매카시의 '적색 공
포'와 함께 중국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잠재적인
공산주의 동조자를 찾기 위한 감시가 고조되면
서 차이나타운을 극도의 긴장으로 몰아넣었습
니다. FBI 요원들은 용의자들을 체포하여 추방
하고 커뮤니티 조직을 와해하기 위해 수사망을
펼쳤습니다.
그레이스 리와 지미 보그스는 디트로이트의 노동자들과 흑인 커뮤니티를 조직화해서 진화를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혁명적 운동을 촉구했습니다.
교내 인종차별 금지
대법원에서는 1954년에 교내 인종 분리 정책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일부 교육구가 이 판결에 순응하기까지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NAACP는 기존의 백인 전용 학교에 9명의 흑인 학생을 등록하며 교내 인종차별
금지 조치의 시행을 강제로 앞당겼습니다. 수많은 백인들이 반대했지만, 1957년
가을에는 학생들이 연방군의 호위 하에 등교했습니다.
수많은 단과대학 및 종합대학을 비롯한 고등 교육 기관에서도 흑인 학생의 입학을 거부했습니다. 196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임스 매러디스가 옥스퍼드에 있는 미시시피대학교 최초의 흑인 재학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두 번에 걸쳐 등록을 거부당한 후 1971년에 소송을 제기하여 승리했습니다. 주 정부는 그가 등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날조했지만, 연방 정부가 여기에 개입했습니다. 그의 등교 첫날에는 수백 명의 미국 연방 보안관이 그와 동행해야 했으며, 시위 중이던 백인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비폭력과 민권


관심을 가졌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이 민권 운동에 지지하고 동참했으며, 여기에는 아브라함 아카카가
이끄는 하와이 대표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앨라배마 셀마의
악명 높은 페터스 다리를 건너 행진
중이던 마틴 루터 킹 박사, 존 루이스를
비롯한 여러 민권 지도자들을 위한 화환을 가져왔습니다.
남부 전역의 수많은 런치 카운터는 흑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1960년 2월, 노스캐롤라이나의 그린즈버러에서는 4명의 흑인 대학생이 울워스 체인점의 런치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직원들은 학생들을 무시했으나, 그들은 하루 종일 가게에 머물고 매일같이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가게를 찾아왔습니다. 5개월이 지난 7월, 이 매장은 결국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했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에게서 영감을 받은 평화 농성은 민권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에 의해 대중화되었습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중한 태도의 시위자들은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농성에 들어갔으며, 체포당할 때에도 순순히 투항했습니다. 심지어는 기마경찰이 달려들거나, 사나운 개를 대동하거나, 소방 호스를 들이미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NAACP는 교회, 도서관과 해변에서
수많은 농성을 준비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민권 운동에 활용된 또 다른 전략으로는 프리덤 라이드(Freedom Rides)가 있습니다. 프리덤 라이드는 여러 인종의 운동가들이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집단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함께 기차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남부의 주간(interstate) 열차 및 버스는 대법원의 위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남부에서 일어난 이러한 형태의 운동은 많은 경우 분노한 백인들의 괴롭힘과 폭력으로 귀결되고는 했습니다. 다양한 인종, 성별과 종교를 가진 민권 운동가들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흑인 자유 투사들의 목숨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1963년에는 미시시피 NAACP의 지도자인 메드가 에버스가 자식들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에버스를 살해한 백인 남성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살인자에 대한 재심을 진행하여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까지 3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1963년에는 250,000명 이상이 워싱턴 DC에서 진행된 대행진에 참석했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중시위였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시위로 인해 미국
전역에 민권 운동에 담긴 메시지가 널리 퍼졌습니다. 지금은 잘 알려진 수많은 연사들 중에서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유명한
연설을 선보였습니다.
민권 보호를 위한 새로운 법안
민권 운동의 주된 초점은 바로 투표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964년에는
미국 흑인의 유권자 등록을 위해 운동가들이 미시시피를 찾았습니다.
재건 시대 이후로 미국 흑인들은 투표를 어렵게 하기 위해 고안된 장애물
때문에 투표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964년 민권법의 통과는 짐 크로우 법에 큰 타격을 가했습니다. 민권법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지 5일 후에 통과되었으며, 공공 시설의
인종 분리 정책과 공공장소 및 직장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했습니다.
또한 민권법은 직장에서의 차별 예방 및 조사를 위한 연방 기관인
EEOC(평등고용기회위원회,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듬해에는 투표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는 미국 흑인의 투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자 했던 남부 입법자들의 행위를 저지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유색인종과 이민자 등의 투표를 어렵게 만들려는 새로운 행위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민 정책은 1965년 이민법이 통과되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거쳤습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프리카,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의 이민자들 중 극히 소수만 미국 입국이 허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백인 유럽인들은 매년 수만 명의 입국이 허용된 반면, 중국인의
수는 연간 105명에 불과했습니다.
1968년 민권법에는 공평주거권리법(Title VIII)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법안은 인종, 종교, 국적이나 성별에 따라 주거지의 매매, 임대 및
융자에 있어서 차별하는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이러한 법안과 여러 민권법은 흑인이 주도한 평등을 위한 투쟁에서
비롯되었으며, 다른 미국인들과 공평하고 정의로운 민주주의의
원칙에 막대한 혜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민권법이
통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권법을 되돌리기 위한 대응 행위는
계속되었습니다. 스쿨버스에 공격을 가해 학교의 인종차별 정책 철폐를
위한 싸움을 방해하거나, 흑인과 다른 유색인종 커뮤니티의 표 수를
줄이기 위해 투표권을 축소하는 등이 그 예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인간적인 근로 조건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필리핀계 미국인과 멕시코계 미국인 농부들이 힘을 합쳤습니다. 노조의 리더들이었던 래리 이틀리옹과 세자르 차베스는 커뮤니티 간의 분열과 싸움을 조장하는 사회적 압력을 거부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학생 활동가들이 흑인, 라틴계 미국인과 미국 원주민의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이 아시아 학생들은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으며, 인종차별과 전쟁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치기 위한 제3세계 해방전선(Third World Liberation Front)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다민족 범아시아적 운동에 명칭을 부여했습니다.
민권법은 주거와 관련된 장벽을 허물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시아계 미국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이 제한 조약과 차별적인 레드라이닝 (Red-lining) 관행 때문에 주거가 금지됐던
지역으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으로 인해
미국으로 건너온 다수의 난민은 주민 대다수가
흑인인 도심의 빈민가로 이주했으며, 영향을
받은 이들 커뮤니티를 위한 그 어떠한 안내나
구조적 장치도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보스턴에서는 아시아계 미국인은 물론 흑인과
다른 커뮤니티까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스쿨버스 통학을 반대하는 백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소수 집단 우대정책과 같은 민권 정책 시행의 결과로 아시아계 미국인을 포함한
유색인종과 여성들은 예전에는 뚫을 수 없었던
직업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고, 경찰, 소방, 건설, 전문 기술직에서부터 법조계, 의료, 언론, 출판에 이르기까지 여러 직종과 관리직 및
대표직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민권 및 인권 운동가로 활동했으며
말콤 엑스의 친구이자 지지자이기도 했던 유리
코치야마는 암살범의 총에 맞아 쓰러진 그의
곁으로 황급히 달려갔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1980년대의 경기 침체
기간에는 '일본 때리기 (Japan Bashing)'
가 계속되었으며, 인종차별이 동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살인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특히 디트로이트에서
두 명의 백인 자동차 공장 노동자가 빈센트
친을 살해한 사건은 새로운 민권 운동의
불씨가 되었으며, 증오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이민자, 아시아인과 다른 미국인 집단까지 보호의 범위가 확대된 증오범죄 보호법 제정에 기여했습니다.
9·11 테러 이후에는 남아시아계 미국인, 아랍인, 중동 및 무슬림계 미국인들이 괴롭힘과 증오범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슬함 혐오에 의한 살인사건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으며, 2012년에는 위스콘신 오크 크리크의 시크교 예배당에서 대량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민권운동 시대의 전략인 소수 집단 우대정책 역시 최근 집중 포화를
받고 있습니다. 1960년대에는 고용주들이 더 많은 인종, 여성, 장애인과 기타 소수 집단 등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기 위한 소수 집단 우대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입시에서는 백인 남성인 앨런 바키가
제기한 소송을 필두로, 다양성 확대를 시도했던 학교들을 상대로
수많은 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앨런 바키는 1978년 대법원 재판에서
승소했습니다. 현재 소수 집단 우대정책의 반대자들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정책에 따른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는 해당 정책을 철폐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입니다.
1968년에는 혐오 범죄에 관한 연방법을 최신화하고 개편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이나 민족성과 관련된
범죄 통계를 수집하기 위한 추가 법안이 제시되었습니다. 2009년의 매튜 셰퍼드 및 제임스 버드 주니어의 증오범죄 방지법은 실제 성별, 인지 성별, 성적 지향, 성적 정체성 및 장애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범죄를 포함하도록 보호 범주를 확대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및 태평양 섬 주민 커뮤니티는 오랫동안 이민국과 FBI를 비롯한 여러 법집행기관의 괴롭힘, 부당함과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한국 이민자 이철수가 살인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으며, 전국적인 범아시아적 운동을 촉발한 이경원 (K.W. Lee) 기자의 추적 보도 덕분에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1991년에는 15세의 청소년 흑인 라타샤 할린스가 로스앤젤레스의 한국계 미국인 상점 주인의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라타샤 할린스가 물건을 훔쳤다고 오인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비록 과실치사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상점
주인은 보호관찰 및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빈센트 친의 살인자가 받았던
형량과 유사한 처벌이었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관대한 판결은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백인 경찰관의 무죄 방면으로
인해 발생한 1992년 LA 폭동에 기여했으며, 흑인
주민 및 아시아계 미국인들 사이의 갈등에 불을
붙였습니다. 폭동이 지속되는 동안 한국인이
소유한 사업체 중 약 3분의 2가 파괴되었습니다.
존재하는

인종차별과의 싸움

속에
1991년, 인근 아파트 건물에 있던 한 행인은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광경을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했습니다. 녹화 영상은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에 뉴스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었으며, 미국 전역의 국민들은
백인 경찰관의 생생한 폭행 장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경찰이 미국 흑인을 상대로 행했던 위험하고 유해한 행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흑인을 대상으로 한 치명적인 경찰 폭력 사례가 핸드폰, 감시 카메라와 경찰 바디카메라에 의해 계속 포착되고 있으며, 이러한 영상은 역사적으로 예전부터 오늘날까지 흑인 개개인과 커뮤니티가 겪고 있는 제도상의 폭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20
년에는 조지 플로이드가 미니애폴리스 경찰관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 경찰관은 수갑을 찬 채 숨을 쉴 수 없다고 절규하던 플로이드의
목을 9분 29초 동안 무릎으로 짓눌렀으며, 3명의 경찰관이 이 광경을
치안 및 사법 제도
구경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 살인 사건을 비롯한 경찰에 의한 수많은 흑인 살해 사건은 많은 이의 분노를 샀고, 사람들은 제도의 변화를 촉구했으며,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운동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흑인은 제도적 인종주의 때문에 가난에 시달리고, 교도소에 구금되고, 교육을 방해받을 확률이 타 인종 대비 훨씬 높습니다. 사람들을 사회적 계층으로 나누는 불평등은 모든 사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세기 후반의 민권법은 이러한 불평등의 해소를 시도했으며, 여성과 기타 유색인종을 포함한 다른 소외 집단의 처우 개선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십 년 동안에는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싸움을 조장하여 이러한 프로그램을 역전하려는 캠페인이 여럿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민권을 위한 목소리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제도적 인종주의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해를 끼치며 여전히 미국 전체에
거대하고 근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평등과 민권을 위한 운동을
알고 여러 커뮤니티 사이의 협력과 결속을 다지는 방법을 배우면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미국이 만민을 위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로

거듭나는데 우리 모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여러 출처가 본 글에 기여함
조지 플로이드가 질식하여 죽는 모습을 서서 구
경했던 경찰관들 중 한 명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었습니다. 몽족을 포함한 다수의 아시아계 미국
인은 흑인의 생명을 위한 운동, 그리고 아시아
인들 사이에 있는 흑인에 대한 반감과 사회의
제도적 인종주의를 해결하기 위한 지지를 구축 해 왔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하와이 원주민 및 태평양 섬
주민(AANHPI)은 그 어떤 인종 집단보다도 훨
씬 큰 빈부 격차를 보입니다. AANHPI의 분리
에 관한 데이터를 보면 다양한 커뮤니티가 빈곤
수준은 높으며 교육 성취가 낮다는 걸 알 수 있
습니다. 이는 ‘모범적인 소수집단’이라는 인종
차별적 믿음에 의해 더욱 모호하게 보입니다.
'모범적인 소수집단’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은 위
험하며, 이는 민권운동이 일어났던 1966년 아
시아인과 흑인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습니다. 백인 보수주의자들은 민권법과 소수집단 우대 정책 등을 와해하기 위 해 아시아계 미국인을 이용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사회에 존재하던 수많은 제 도적 문제점이 드러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팬데 믹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저소득층, 이민자와
불법 체류 인구와 인종, 민족성, 연령, 성별, 성적 지향 및 종교로 인해 폭력의 표적이 되는 이들에 게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오늘날 미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민권이 제대로 적용되고 있나요?
» 역사를 통틀어 미국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항거하는 사회정의 운동은 흑인 이외의 사람들과 커뮤니티들에게 어떤 혜택을 가져다 주었나요?
» 민권 운동은 어떻게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조직화 활동의 길을 열어주었나요?
» 현재 본인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구축 중인 주요 민권 운동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반 아시아인 증오와 맞서
싸우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편견과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
작성자: 에블린 차오
이 글은 2022년 4월 23일 자 가디언지에 처음 기고되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총기 소유가 늘어났습니다. 맨해튼
차이나타운에서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구입하기 위한 줄이
몇 블럭에 걸쳐 이어져 있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부모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집에 머물게 합니다. 노인들은 더 이상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DC의 필리핀 대사관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필리핀인들에게 경고를 발령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증오범죄가 급격히
늘어나며 미국 전역의 해당 커뮤니티는 분노와 절망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증오 및 극단주의 연구 센터(Center for the Study of Hate and Extremism)에 따르면
증오범죄율이 2020년 대비 무려 339% 상승했다고 합니다.
FBI는 이미 2020년 3월에 아시아 국가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아시아계 미국인을 상대로 한 증오범죄의 '급상승'을 예측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무책임한 정치인과 소셜 미디어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자극적인 인종차별적 표현과 중국과의 지정학적
갈등은 이 사태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때 반 아시아인 폭력을 야기한 요인이었습니다."라고 작가 겸 운동가인 헬렌 지아는 말합니다.
하지만 지아는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합니다. 지아는 1980
년대에 아시아계 미국인과 관련된 최초의 연방 민권 소송을 제기하는데 기여했습니다. 2명의 백인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중국계 미국인인 빈센트 친을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자동차 업계가 침체에 빠진 원인을 일본인들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고작 3,000달러의 벌금형을 받는 데 그쳤습니다.
현재 아시아계 미국인은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인종, 혹은 민족 집단으로서 드디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상비한 뒤 별다른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입지에 있습니다. 한편 암시적, 무의식적인
편견에 대한 학술적 연구, 데이터 수집의 개선, 그리고 블랙
리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등의 사회적 운동은

인종차별 및 편견, 그리고 증오 발언 및 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언행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지역
차윈에서부터 연방 차원에 이르기까지, 커뮤니티 지지자 및
여러 지도자들은 지금도 계속되는 반 아시아인 증오의 확산에
맞서기 위한 지원 방안을 준비, 논의 및 구축하고 있습니다.
2021년 3월에는 애틀랜타 지역에서 백인 총격범이 6명의
아시아계 여성을 포함한 총 8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조 바이든 대통령은 반 아시아인 폭력
및 외국인 혐오에 대응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발표했으며, 5
월에는 아시아계 미국인, 하와이 원주민과 태평양 섬 주민을
위한 'AA 및 NHPI 커뮤니티를 위한 평등, 정의와 기회를
촉진하기 위한' 백악관 이니셔티브를 수립했습니다. 여러
방안 중에서도 이 이니셔티브는 정부 통계, 더 나아가 각종
프로그램과 정책에서 아시아인에 관한 데이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원인이 됐던 기존의 데이터 수집 방식을
개선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많은 이가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교육에 해답이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같은 해 1월, 일리노이는 공립학교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를 필수 과목으로 선정한 최초의
주가 되었습니다. 뉴저지가 곧 그 뒤를 따랐고, 최소 9개의
주가 같은 방침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법안을 후원한 4명의
뉴저지 의원들은 공동성명서를 통해 "아시아계 미국인 및
태평양 섬 주민 커뮤니티의 일원은 주와 국가에 수없이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역사책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소된 기록은…
학생들이 미국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건 물론 폭력 및 증오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 인종적 편견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 정신과 의사이자 메이크 어스 비지블 NJ(Make Us Visible NJ)의 구성원으로서 운동을 진두지휘한 카니
일랑고반은 2017년의 총격 사건으로 사망한 스리니바스
쿠치보틀라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스리니바스 쿠치보틀라를 살해한 백인 남성은 그와 친구를 '테러리스트'와 '이란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이 불법체류자인지 물었습니다.
2020년에 반 아시아인 폭력이 급증하기 시작했을 때 일랑고반은 조지 플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일부 영향을 받아
결성된 한 북클럽을 통해 AAPI의 역사, 인종적 정의 운동에
대해 배우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덕분에 더욱 깊은 소속감과
정체성을 느낄 수 있었고, 전에는 몰랐던 역사를 많이 배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아시아인이 주류인 자녀들의 학교, 그리고
본인이 어렸을 때 다녔던 백인이 주류인 학교에서조차
아시아계 미국인이 교과 과정에 반영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들의 이미지가 미국 역사의 일부가 아닌 '영원한 이방인'
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들 또한 다른 미국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북클럽의 멤버들에게
호소하고 메이크 어스 비지블 NJ를 결성했습니다. 스톱
AAPI 헤이트(Stop AAPI Hate)에서 AAPI 부모들이 3명 중
1명꼴로 자녀가 학교에서 증오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2021년 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이들은 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1,500명 이상의 서명을 받고, 60개 이상의 단체와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여러 차례 집회를 열며 이들은 역사적인 법안이 통과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반 아시아인 증오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2021년의 코로나19 증오범죄 방지법안 통과도 있습니다. 이 법안은 "'인종, 종교, 성적 지향 또는 민족성'에 따른 편견의 증거가 드러나는 범죄에 대한" 데이터 수집을 요구했으며 FBI에서 증오범죄 통계에 대한 연간 보고서를 처음으로 발표하게 만든 1990년 증오범죄 통계 법안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1990년의 법안은 "긍정적인 전개였지만, 해당 법안으로 인해 나온 통계를 보면 법집행기관에서
아시아인을 상대로 한 폭력 사건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라고 스텐리 마크는 말합니다. 그는 아시아계 미국인 법률 보호 및 교육 기금 (Asian American Legal Defense and Education Fund) 의 선임 변호사입니다. 심지어는 9.11 테러 이후에도 시크교, 남아시아, 중동과 무슬림계 미국인을 상대로 한 수많은 공격은 증오범죄로 분류되지 않았다고 그는 말합니다. ( 당시에 기록된 무슬림에 대한 증오범죄 수는 무려 1600% 나 상승했습니다.)
새로운 증오범죄 방지법은 신고를 보다 손쉽게 하고 지역
경찰에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이러한 간극을 어느 정도 메우는
데 목적을 둡니다. 예를 들면 증오범죄를 파악하는 방법에
대한 더 나은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헤더 헤이어에게서 이름을 차용한 조항도 포함합니다. 헤더
헤이어는 2017년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신나치주의자의
차에 치여 사망한 여성입니다.) "굳이 찾지 않는다면 반
아시아인 편견을 찾을 수 없는 만큼, 이 법안은 이러한
편견을 더 잘 찾아낼 수 있도록 경찰을 교육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마크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로 인해 증오의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는 않으며, 통계 때문에 아시아인 및 기타 소수민족
커뮤니티에 대한 과도한 감시로
자원을 투입한 결과:
아시아계 미국인 연합(Asian American Federation)의
상임 이사인 조안 유는 "커뮤니티는 경찰의 역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분열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경찰과의 접촉을 꺼리는 사람들은 경찰이 아닌 전반적인
편견, 괴롭힘 및 차별 사건(정의의 범위가 좁은 증오 범죄에
비해 훨씬 광범위함)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치까지 하는 인권 위원회에 사건을 보고할 수 있습니다.
스톱 AAPI 헤이트는 코로나19 증오범죄 방지법에 대해 '지역 커뮤니티에 자원을 투입하라'고 응답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발생한 기존의 풀뿌리 활동은 지역 주민들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느끼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호 협조에서부터 사회운동, 길거리 순찰을 위한 자원봉사자
모집, 아시아계 미국인의 자긍심 고취에 이르는 각종 작업에 포커스를 둔 새로운 커뮤니티 그룹들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필요는 엄청난 수준입니다. 뉴욕의 경우, 조안 유가 생각하는 가장 시급한 문제로는 팬데믹으로 인해 불균형적으로 타격을 받은 업계 (예: 네일숍, 음식점과 기타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수많은 아시아인 노동자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식량 불안정, 재정적 문제와 의료서비스의
접근성 부족 등이 있습니다. 노인들은 집 밖으로 외출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사회복지 프로그램 이용을 막는 언어 및
기술적 장벽으로 인해 격리되어 있습니다. 가정 폭력도 증가했습니다.
또한 조안 유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추모식을 주관하고, 각 가정을 방문하며 노인을 위해 Zoom을 설치하고, 잔혹한 폭력의 피해자와 면담하고, '뭘 해야 할지를 전전긍긍하며' 일선에서 2년 이상의 기간을 보낸 비영리 단체 직원들 사이에서도 두려움과 번아웃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과 다른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은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조안 유는 " 상관은 직장에 복귀하라고 하는데 정작 저는 지하철을 타는 게 두렵습니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자주 접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직원 보호를 위한 계획을 마련할 것을 기업에 촉구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매우 실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안 유는 정신 건강 서비스 수요가 대폭 늘어날 것이라고 봅니다.—인종차별이 동기가 된 폭력의 피해자, 이러한 범죄를 목격한 행인, 두려움에 정신적 충격을 입은 커뮤니티, 그리고 범법자들 모두에게 정신 건강 서비스가 필요합니다. “다수의 폭행범은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노숙자였습니다.
이들도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뉴욕의 노숙자 인구는 대공황 이후로 최대치를 기록했으며, 시에서는 에릭 애덤스가 이끄는 새로운 행정부의 주도 하에 노숙자들을 지하철에서 쫓아내고 노숙자 야영지를 철거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국제적 수준의 중대한 위기를 겪고 있으며, 인종차별, 증오 및 각종 억압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국립
아시아계 미국인 태평양 섬 주민 정신 건강 협회(National Asian American Pacific Islander Mental Health Association)의 상임 이사인 디제이 이다 박사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추한 모습이 머리를 치켜드는 법입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증오범죄가 피해자에게 큰 피해를 초래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묻지 마 강도나 습격에 당할 경우, 큰 충격을 받지만 '운이 나빴을 뿐'이라는 감정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증오범죄는
상황에서 도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본인의 정체성을 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로 인한 정신적 영향은 엄청날 수 있습니다."
정신 건강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바이든 정부에서 제안한
2023년 예산이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고 이다는 말했습니다.
2023년 예산에는 정신 건강 서비스 접근성 확대를 위해 전례
없는 금액이 할당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향후 10년에 걸쳐
교내 상담 교사 및 기타 교내 건강 전문가의 수를 두 배로
늘리기 위해 10억 달러가 투입될 예정입니다.
결국 연방정부 차원의 정책과 거시적인 해결책이 무엇이
되었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증오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개인이 실천하는 행동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입법은 물론 도움이 됩니다만, 증오 자체를 입법화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즉, 지역 차원과 일상에서
대처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AALDEF의 변호사인 스텐리 마크는 말합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오늘날 보이는 반 아시아인 증오는
1980년대의 반아시아적 편견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그리고 어떤 점이 같은가요?
» 학창시절을 되돌아보았을 때, 학교에서
학습했던 내용 중에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건 언제였나요?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 교과서, 수업, 도서관 책의
내용이나 담임 선생님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반영되었나요?
» 자라면서 교실, 미디어나 커뮤니티에 자신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물론, 다른 이가
우리를 어떻게 보길 바라는지에 대해서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최근 증가 추세에 들어선 반 아시아인 증오에
맞서기 위해 여러분과 커뮤니티는 단계별로
어떤 대책을 취할 수 있을까요?
두려움과 싸우는 아시아계 미국인들
작성자: 이민진 이민진 님은 소설가 및 애머스트 칼리지의 레지던스 작가입니다.
이 글은 2022년 3월 18일 자 뉴욕타임스지에 처음 기고되었습니다.
이번 달 초에 저는 소셜 미디어에서 간단한 설문조사에 응했습니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반아시아적 폭행에 대처하기 위해 일상생활에 어떤 변화를 줬는지에 대해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물어보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서 나름의 해결책 즉, 호신을 위한 추가 조치를 취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외출하는 대신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외출 시에는
가장 안전한 길로 이동하거나 호신용 스프레이 또는 개인용
경보기를 소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친구가 함께 있을
때만 길을 걷고 운동은 낮에 합니다. 그들은 모자를 쓰고
동양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며, 돈이 적든 많든 택시만 이용합니다. 두려움과 고통이 너무도 과한 나머지 자신을 감금하다시피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졌는지는 기억조차 할 수 없습니다.
1977년은 제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자매와 함께 서울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지 1년이 되는 해였고, 부모님께서는 맨해튼의 코리아타운에서 작은 귀금속 도매상을 운영하셨습니다. 가게라기보다는 가판대에 가까웠던 그 상점은 브로드웨이 30번가와 31번가 사이에 위치한 19제곱미터 규모의 공간이었습니다. 처음에 부모님은 14K 금목걸이에 이어 놋쇠와 니켈로 만든 장신구, 플라스틱 헤어비즈, 머리끈과 머리핀을 행상인과 영세 가게에 판매했습니다.
매일 아침 6시가 되면 부모님은 퀸스 엘름허스트의 반 클릭 스트리트에 위치한 땅딸막한 빨간색 벽돌 건물의 단칸 월셋집을 나섰습니다. 부모님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에만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
자매들과 함께 다닌 학교는 P.S. 102였습니다. 저는 둘째
딸이었고, 11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반에서 가장 어릴 때가
많았지만 키는 가장 컸습니다. 저는 조용하고 근시였으며
새로움에 혼란을 느꼈습니다. 예쁜 여자애들은 돌아가며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들의
관심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가끔씩 덩치 큰 여자애들이 저와 싸우려고 하면 언니가 끼어들어야 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할 일만 했고,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움츠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타인에게 세심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모님을 지켜본 이유는 두 분을 잃는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밤낮으로 부모님의 안전을 걱정했습니다.
부모님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제게 세상은 너무도 위험한 곳처럼 느껴졌습니다. 여동생이 유치원에 다닐 때, 어머니는 3시까지 집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서 가게를 나섰고 문을 닫는 일은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한 번은 덩치 큰 사내가 지하철에서 어머니를 따라왔고, 그랜드 에브뉴 역에서 어머니를 따라 하차했습니다. 사내는 계단에서 어머니를 붙잡았고,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계단으로 달려왔고 어머니는 사내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마자 아버지는 자동차를 구입하여 가게까지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에는 차고가 내려다 보이는 같은 건물 뒤쪽의 침실 2개짜리 월세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저녁만 되면 창가에 앉아 부모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밤에 가게에 도둑이 들어 경보가 울리고 전화가 오는 바람에
가족 모두가 잠에서 깼던 적이 두 번 있습니다. 누군가가
건물에서 함께 쓰는 지하에 숨었다가 가게 벽의 부드러운
석고 보드를 톱으로 잘라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도둑이 뒷문을 통해 침입했습니다. 경찰은 범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보험사에서는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건물 주인은 도둑이 드는 건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했고, 아버지는 강철로 강화한 벽과 철문을 설치했습니다.
그럼에도 강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토요일 오후에 가게 앞 인도를 쓸고
계셨습니다. 가게 문을 닫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철문은
이미 일부가 닫힌 상태였습니다. 무장한 군용 재킷 차림의
사내 두 명이 어머니를 구석으로 몰았습니다. 그들은
어머니를 다시 가게 안으로 밀었습니다. 한 명이 뒤에서
아버지를 붙잡고 있는 동안 다른 한 명은 부모님께서 열심히
모은 1달러, 5달러, 20달러 지폐를 내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금목걸이와 은목걸이를 전부 빼앗았고, 부모님은 빌린
돈으로 대금을 갚아야 했습니다. 강도는 훔친 물건을 챙겨서
도주했고, 그제서야 경찰이 모습을 보였습니다.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심각한 손해를 메꾸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의 어느 토요일, 나는 일을 돕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가게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가게 문을 열었고, 커피를 가져올 새도 없이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무장 강도가
들이닥쳤습니다. 눈을 감아도 여전히 그 총이 보입니다. 나는
두려워 말라며 나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전부 줘버리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진열 트레이 3
개에 있던 금과 금전등록기의 현금을 전부 건네었고, 남은
건 동전 뿐이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금 장사를 접고 무장 강도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저렴한 금속 제품으로 바꿨습니다.
수년이 지난 어느 토요일, 일손을 돕던 나는 아버지와 함께
오후 3시에 문을 닫고 31번가를 따라 차고가 있는 서쪽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키 작은 사내가 뒤에서 나타나서는 아버지의
가죽 손가방을 낚아챘습니다. 손가방 안에는 금고 열쇠와
현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쫓으며 외쳤습니다.
"멈춰! 멈추라고! 저 사람이 내 손가방을 훔쳐갔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뛰는 건 처음 보았고, 도둑에게도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헤럴드 스퀘어에서 몇 구획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엔진 1 래더 24 바로 앞에서 비번이었던 소방관이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린 후 도둑을 붙잡았습니다. 도둑을 제압하는 걸 돕기 위해 다른 소방관들도 소방서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경찰이 도착했고, 경찰관 한 명이 사내의 머리를 발로 밟고 있는 동안 다른 경찰관은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콘돔, 검 포장지와 칼이 나왔습니다. 경찰관의 검은 가죽 부츠가 젊은 사내의
맨머리를 강하게 짓눌렀습니다. 나는 도둑을 쳐다봤습니다.
어린 소년의 얼굴이었습니다. 나중에 범인이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열 여섯 살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80년대의 일입니다. 나와 자매들은 각자 다니는 고등학교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습니다. 왕복으로 지하철을 이용하면
최소 4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붐비는 E
선 지하철에 타고 있는 언니는 갑자기 한 청소년 무리에
둘러싸였습니다. 한 명은 언니의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훔쳤습니다. 언니는 지갑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훔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언니의 면전에
대고 웃으며 '칭크(Chink)'라고 놀렸습니다. 승객이 많았지만
누구도 언니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 청소년들은 다음
역에서 내렸습니다. 그들은 현금과 지하철 표를 꺼낸 다음
지갑과 신분증을 바닥에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행인이 지갑을 챙겨서 우편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저는 예일 대학에 다녔습니다.
코네티컷의 뉴 헤이븐은 마치 고향처럼 친숙한 감정이
들었지만, 전 바짝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가끔씩 아티쿠스 북스토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채플 스트리트를 따라
걸을 때가 있었습니다. 허름한 전투복 차림으로 동냥하던 재향
군인들이 걸어와서는 날 앞이나 뒤에서 붙잡고는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중국 여자가 좋아." 그러면
저는 최대한 핀잔을 준 후 성급히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절 도와준 행인은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평화롭고 친절했던
걸인들이 저만 보면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보수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얌전하게 옷을
입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옷을 원하는 곳에서
입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제 확고한 생각입니다. 심지어는
남자처럼 옷을 입었을 때도 전 눈에 띄었습니다. 전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집에 두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철회 집회와 '밤을
되찾기 위한' 여성 행진에 동참했습니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 일본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고, 엄마는 정부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단결해서 세상의 끔찍한 것들에 반대하고 항의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폭력 인식 기간에는 성폭행이 일어난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생존자의 실루엣을 따라서 땅바닥에 붙여 둔 테이프는
마치 유령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성장기와 학창시절에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었지만, 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집회에서 여성들과 남성들은 강간과 폭행 피해자가 된 이야기를 했고, 나는 군중 속에서 불이 붙은 촛불을 든 채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작은 촛불에 비친 어린 학생들의 상처받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 말고도 그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로스쿨에서는 남자친구와 사귀다가 헤어졌습니다. 그는 학교로 저를 쫓아왔고, 한 번은 차를 주차해 놓고 제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그는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마치 제가 다른 누군가의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저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22살에는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났고, 24살에 결혼했습니다.
젊은 기업 변호사가 되자, 고객들과 동료들 모두 이상한
손길로 제 몸을 만지면서 자신의 동양인 친구나 아내에 대해
애기했습니다. 저와 같은 인종의 여자와 잤다는 걸 궁금해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업무 중에는 태연한 척해야
했기 때문에 저는 주제를 바꾼 다음 웬만하면 그들과 단 둘이
있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일에 집중했고 친목을
피했습니다.
1995년에는 글을 쓰기 위해 변호사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동안 집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대학에서
강연과 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중년이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어리석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시아인들은 미국에 이주하기 시작한 이래로 적대감, 거부감을 쭉 마주해 왔으며, 많은 경우 주의 법규와 연방법은 이러한 행위를 용인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70년대, 80년대 당시 서양은 일본의 성장을 두려워했으며, 중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자 중국 혐오도 심해졌습니다.
9.11 이후로 이슬람 혐오와 시크교 및 힌두교를 향한 공격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과
선동으로 인해 더욱 큰 증오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정부가 제 자신의 안전을 완벽하게 지켜
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경험상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종종 적당한 대안을 찾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대안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은 모두가 압니다.
또한 임시방편이란 필요할 때마다 활용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은 배척주의자의 두려움에
따른 대가를 치릅니다.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복지
서비스가 줄어들면서 우리들 가운데 취약층은 제대로 된
의료 치료와 주거의 안정성 없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공격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박탈감을 느낀 평범한 배척주의자들은
저처럼 생긴 사람들을 비롯하여 너무도 많은 이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폭행범들은 우리가 신체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이
없고 서로 단결해서 대응하거나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작고 얕은 눈, 동그란 코, 높은 광대뼈와 검은 생머리와 같은 제 평범한 한국인 얼굴을 보고 패배한 전쟁, 창부, 간첩, 난민, 빈곤, 질병, 값싼 노동력, 교육 경쟁, 사기꾼, 성적 경쟁, 과두제, 불량 부모, 산업화, 성교나 포르노 중독 등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킬까요?
불신, 패배감, 불청결함, 수치, 질병, 죽음, 공포, 시기, 불안과 경멸입니다.
총을 구해서 가능한 한 많은 아시아인을 죽이고 싶다고
고함을 지르는 정신병 환자의 격렬한 선언을 제가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요? 작가 된 입장에서는 그의 생각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전 수십 년간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자신의 인생 스토리에서
본인이 영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신병 환자는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저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기
사람들을 구하려 한다고 생각할까요? 전 그렇다고 봅니다.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인들로부터 이 사회를 지키려고 한다고 생각할까요? 분명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신병
환자는 자신을 저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자기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종차별적 발언을 참을 만큼 자제력이 있는
이들도 있으므로 이러한 사람들로부터는 혐오가 깃든 그들의
진심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원할 경우 어느
정도의 크고 작은 행동으로 저와 같은 사람들 즉, 폭력적이고
수치스러우며 달갑지 않은 감정을 부추기는 아시아인들을
깎아내리거나 없애고 싶어하는 마음 속 깊이 감춰둔 생각을
드러내서 저로 하여금 느끼게 할 것입니다.
적응성은 유용합니다. 우리는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해를 입은 피해자들에게서 모든 해결책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게 어떻게 공평하고 정당한가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지역, 주와 국가 차원에서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는 불역적 특성 즉, 인종, 성별, 성적 지향과 정체성, 민족적 태생과 종교 등으로 인해 경멸을 받고 거부를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 변화를 통해 겉보기에는 '이들과 다른 이처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혹은 헛된 희망에 매달리며
직업, 가정, 교육, 옷차림, 안전 규약, 신체, 이름, 그리고 누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까지 바꾸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닌 본연의 모습을 바꿔야만 할까요?
53세가 된 저는 더 이상 이민자 소녀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 이민자 소녀처럼 제 늙으신 부모님, 자매들, 남편, 아들과 늘어나는 가족을 위해 촛불을 밝힙니다. 그들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전 안전함을 느끼고 싶습니다. 모두가 안전함을 느꼈으면 합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제 평소의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제 작은 두 눈 뒤에는 빛이 찾아오고, 이 빛으로 상대방을
봅니다. 그리고 이 빛이 깜박일 때 상대방도 저를 보리라는 희망을 가집니다.
이민진 님은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과 '파친코(Pachinko)'의 저자입니다.
애머스트칼리지의 레지던스 작가인 그녀는 회고록인 '
네임 레코그니션(Name Recognition)'과 한국인 3부작의
최종 소설인 '아메리칸 학원(American Hagwon)'을 집필 중입니다.
교육의 힘: 영화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 를 통한 교육
작성자인 진 우(Jean Wu)는 터프츠 대학교 인종 및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Race Studies and Asian American Studies) 학과의 명예교수입니다.
이 글의 원제목은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에 대한 교육(1991년 및 2001년)'이며, UCLA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 센터의 AmerAsiaJournal28권3호(2002년)에 처음 기고되었으며,승인 하에 재판되었습니다.
2002년은 빈센트 친이 증오 범죄로 인해 잔혹하게 살해당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살인자인 롤란드 에벤스와
마이클 니츠는 단 하루도 감옥에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1982
년 이후에도 외국인 혐오,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심화된
잔혹하고 임의적인 반 아시아인 폭력과 미국의 아시아인을
향한 전형적인 인종차별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시아인을 향한 증오 범죄는 친이 살해당한 1980
년대 초 이후에 급상승한 뒤, 2001년 9월 11일의 여파로
남아시아인과 남아시아계 미국인을 노리는 폭력의 급증과
함께 높은 수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를 가르치기 시작한 시점은 1974
년 이후였지만, 아시아계 미국인 입문 과정에 현대의 반
아시아인 폭력에 대한 수업을 포함하기 시작한 것은 친
사건이 발생한 1980년대 중반부터였습니다. 크리스틴 초이 (Christine Choy)와 르니 타지마-페나(Renee TajimaPena)가 감독한 영화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가 1988년에
개봉한 뒤, 저는 이 영화를 해당 수업의 입문 교재로 썼습니다.
빈센트 친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도 20년이 지났습니다. 전
되었으며, 이 영화는 학생들이 반 아시아인 편견과 폭력에
관한 만성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하기
위한 최고의 교과서입니다. 지난 13년 간 여러 고등 교육 기관(전부 미 동부에 위치한 3곳의 사립 기관 및 1곳의 공립
기관)의 재학생 500여 명이 수업에서 영화를 연구하고 반응을
작성했습니다. 2000년에 여러 아시아계 미국인 학자 및
운동가들이 빈센트 친의 유산에 대해 디트로이트의 연간
미국 연구 컨퍼런스(American Studies Conference)

에서 패널 토론회에 참석하면서 이 분수령적인 사건의 20
주년을 통해 13년에 걸친 학생들의 반응을 검토하고 몇
가지 교육학적 질문을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도록
독려받았습니다. 학생들은 이 영화를 대학 강의실에서
보고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요? 학생들은 영화에서 무엇을
배울까요? 1990년대 초 이후로 영화로 인해 학생의 학습
내용에 변화가 생겼나요? 영화(및 사건)에 대한 지난 10
년 간의 학생 반응에는 어떤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었나요?
여러 학생들이 빈센트 친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복적인
패턴과 주제가 있었나요? 만약 있었다면 학생들은 빈센트 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나요? 대학 교육 차원에서 빈센트 친은
어떤 유산을 남겼나요?
이 글을 위해 여섯 학생의 반응을 제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세 명은 1991년, 나머지 세 명은 10년 후인 2001년에 제가
진행한 아시아계 미국인 수업을 들었습니다. 이들의 반응은
주간 수업 일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며, 수업 자료 (이 경우에는
영화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를 보고난 그들의 반응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섯 학생의 반응은 어조와 내용 면에서
매우 전형적이며, 따라서 오랜 기간에 걸쳐 수집한 학생
수백 여 명의 반응을 대변합니다. 6명의 학생을 선정해서
그들의 반응 전부를 제시하기로 했으며, 독자가 작성자의
사고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저의 의견이나 생각은 넣지
않았습니다. 각 반응별로 해당 학생의 학년, 성별과 본인이
인지하는 인종을 포함했습니다.
1991년의 학생 반응
아프리카계 미국인, 3학년 여학생
빈센트 친에 대한 영화를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가 거주하고 사망한 지역에서 성장했지만,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그 사건에 대해 물어봤고, 아버지는 TV에서
관련 내용을 봤던 기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이 전부
흑인인 저희 동네에서 사건에 대해 얘기한 사람이 있었는지
물어봤고, 아버지는 얘기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제시 잭슨(Jesse Jackson)
이 사건에 대해 의견을 밝혔던 걸 기억하는지 물어봤고, 아버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학창시절 당시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을 들은 적이 있는지
물어보셨고, 저는 지난주에 수업에서 영화를 보기 전까지
빈센트 친에 대해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학교나 대학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에 관련된 내용을
배운 적이 아예 없습니다. 이 수업을 듣기 전에는 아시아인을
향한 차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본
후에는 차별이 존재하지만, 그점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시아인에게는
문제가 될 게 무엇 하나 없다'는 것이야말로 모범 소수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의 일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이 흑인인 제게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이 사회에서 인종차별에
직면하는 사람이 흑인 뿐이라고 항상 느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신중히 생각해보면 사실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저는 평생 동안 이런 생각을 갖도록 교육을 받았습니다.
다른 흑인들과 얘기할 때도 저희는 아시아인이 인종차별을
겪지 않으리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빈센트 친 사건에 대해
생각하면 흑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린칭'처럼 느껴지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흑인들이 이러한 연관성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제가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를 공부하고 이 사회의 제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면 저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조금 특이한 살인 사건으로 치부했을 것입니다. 인종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수업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에 관해 배운 내용, 특히 20
세기 초의 역사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강제 수용소 관련
내용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빈센트 친 사건처럼 우리가 알아야 할 수많은 사실을 배울 기회가 없는 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여러 소수 집단을 분열시키고 정복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하와이 집단 농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집단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면 인종차별이 노예제의 범주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확산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종차별에 맞서는 싸움을
위해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집단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는 생각을 흑인들 스스로가 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이번 주 수업은 매우 파워풀 했습니다.
저는 졸업 후 교사가 될 예정이며, 앞으로도 이러한 교훈을 이어가겠습니다.
중국 베트남계 미국인, 4학년 남학생
제 자신의 지난 교육 과정을 통틀어 봤을 때, 이번 주에 시청한 영화만큼 강력하고 감동적인 영화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였습니다.
강의실의 다른 수많은 학생들처럼 저도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후 토의 그룹에서 우리는 영화를 보며 울었던 이유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물론 릴리 친의 엄청난 고통이
느껴진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더 깊이 다가온 다른 이유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침묵'을 강요당하고 '배척'되는 이 나라의 아시아계 민족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도시의 적대적인 구역에서 바둥거리며 살아온 제 가족이 너무나도 잘 아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빈센트 친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ACJ 운동에 동참하고자 아시아계 사람들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정이 북받쳤습니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까지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침묵이 흐르고 두려움만 느껴졌습니다. 그렇기에 정의를 요구하기 위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미국 흑인들을
보며 감탄을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시위를 제가
아는 모든 아시아인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가족에게
영화를 틀어주고 싶고, 우리의 권리를 위해 일어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결과적으로는 ACJ
캠페인을 통해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저에게는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이 싸우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또한
제시 잭슨처럼 아시아인이 아닌 사람들이 아시아인의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어주는 모습도 놀라웠습니다.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제가 이 운동에 동참할 수
있을 만큼 일찍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수많은 아시아인에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도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대학생이면서도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본 내용을 통해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2001년도 학생들의 반응
아프리카계 미국인, 4학년 남학생
저는 빈센트 친은커녕 아시아계 사람들을 상대로 한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교수님과 다른
아시아인 학생들에게는 외람된 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시아인들에게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만의
문화와 돈도 있고 알아서 잘 사니까요. 심지어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영어를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흑인들을
좋아하지 않고 저도 아시아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
아시아인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영화에서처럼 아시아인을
폭행하거나 죽이지는 않지만 저도 그들이 싫습니다. 아시아계
미국 백인, 4학년 여학생
빈센트 친 영화를 시청한 후 충격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이 영화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미국에서 살인자들이 단 하루도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을까요? 미국은
세계 최고의 사법제도를 갖춘 나라입니다. 영화 외에도 이번
주에 읽은 내용에 관한 수업 토론에 참여한 뒤, 저는 백인이
북미 원주민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 혹은 중국인 및
멕시코 노동자 등의 유색 인종을 살해할 경우 실제로 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매우 슬펐으며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역사를 알게되면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빈센트 친 사건에 대해 처음 느꼈던 충격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슬프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실 때문에 더욱 슬펐다는 것입니다. 저는 왜
고등학교에서 이 사건과 다른 소수 집단 문제에 대해 배우지
않았을까요? 심지어는 이 대학에서도 이러한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 수업에 등록한 것도 작년에 같은 수업을
들었던 룸메이트가 내용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재 4학년 2학기 과정을 수료 중이고 2개월 후에는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이수하지 않았다면 제 자신이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졸업했을 것이며, 이
학교의 평판을 고려하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 조국의 역사, 그리고 기본적으로
피부색과 생김새에 따라 여러 민족에 대해 다르게 작용하는
제도의 원리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저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인 과목을 이수한 이유는 필수 이수 과목 요건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배우고 있는 내용을 배우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에 이수했던 흑인 역사 과목 중 하나와 비슷합니다. 전 영화 빈센트 친을 시청했고, 지난주에는 아시아계 미국인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묘사하는 내용과 소위 반 아시아인 폭력이라 불리는 인종차별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말문이 막히는 기분입니다.
물론 제 첫 번째 질문은 '왜 아무도 학교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가?'입니다. 저는 이 지역에서 최고로 손 꼽히는 사립학교를 다녔고, 다양성에 대한 많은 내용을 배웠습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수업과 프로그램도 많았지만, 아시아계 미국인 관련 내용을 공부한 적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의
다양성은 수업 시간에 토의했던 흑인과 백인에 대한 내용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왜 아시아인은 이에 대해 더 많이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요? 왜 이곳의 아시아계 학생들은 이에 대한 내용을 얘기하지 않는 걸까요? 알고는 있나요? 상관은 하나요?
세 번째 질문은 좀 더 사적입니다. 반 아시아인 인종차별에
대해 알게 된 지금, 저는 아시아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까요?
정말이지, 이것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마도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한 질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제 자신의 인종차별에
대해 제대로 반추해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흑인이 아시아인을 상대로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그렇다’라면 제 자신은 평생 ‘
인종차별주의자’로 살았다는 말이 되며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길들여진 셈인 것이죠. 정말이지, 이런 질문을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대학까지 와서 말이지요. 몇 주 후에 다시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3학년 여학생
영화 빈센트 친의 상영이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날 때까지도 몸을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다가와서는 괜찮냐고 물어봤습니다. 전 그때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울음을
제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영화를 시청하는 내내
숨죽여 울고 있었고, 영화에서처럼 불이 켜지면 울음을 멈출
거라 생각했습니다.
'칭총(ching-chong, 중국인을 부르는 비속어)'이라고 놀리던
말들, 저를 꼬집고 밀고 때리던 아이들... 평생을 감수해야
했던 일들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저와 다른 아시아인
친구들이 참아야 했던 괴롭힘에 대해 한 번도 부모님께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부모님께 말하지 않을 거라고
제 자신에게 약속했습니다. 우리가 단지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이리저리 괴롭힘을 당해도 부모님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괴롭힘에 맞서는 일은
저와 친구들이 스스로 대처해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전 그 자리를 피했고, 가끔은 몰래 학교를 빠져나갔습니다.
물론 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아무 가치없는 돌덩어리인 것처럼 행동하면 그들도 언젠가는
절 내버려 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대체적으로 인종차별에 의한 공격에 이런 식으로 대처합니다.
오늘 영화를 시청한 후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정말 돌덩어리가 아니라면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요.
제가 빈센트 친에 대해 그렇게 반응한 이유를 전부 알 수는 없습니다.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지금껏 한 번도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따른 충격이었습니다. 부모님도
이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를 거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릴리
친을 보면 제 할머니와 너무 비슷합니다. 그리고 저희 할머니처럼 얘기하고요.
단순히 빈센트 친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전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치 않는 동네에서 자라면서 학교에서
아시아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견뎌내야 했던 건 그저 제 운이
나빠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집단의 사람들이 백
년이 넘게 겪어온 패턴이 제 경험과 일치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반 아시아인 폭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많이 일어나는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전 '그럴
리가 없죠'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이들에 대한 차별이라면 모르겠지만, 저와 빈센트 친처럼 미국이 훨씬 익숙한 아시아인은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반 아시아인 정서란 게
존재했다면, 그건 같은 아시아인을 향한 아시아인의 정서일 거라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경찰의 폭력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인종 프로파일링에 관한 모든 내용은 아시아인이 아닌 흑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학창 시절에 빈센트 친과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에
관한 문제에 대해 배웠다면 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제가 충격을 느끼는 이유는 반 아시아인 폭력
문제의 심각성일 수도 있습니다. 이 과목을 이수하는 내내
쌓여가던 충격은 이 영화를 시청한 이후에 제대로 제 심금을 뒤흔들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당장 저는 아시아인의 상황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빈센트 친이
살해당한 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폭력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끝났을
때 저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시위에 동참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들은 신시내티
판결 이후 전부 백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제가
공부하는 제 전공과는 무관하게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교육과 우리의 커뮤니티들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이 과목을 이수한 이후로 제
안의 방향성은 예전과 같지 않으며,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더욱 명확해진 기분이 듭니다. 전 무슨 일을 하든 아시아계
미국인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유럽계 백인 미국인, 4학년 남학생
수업에서 영화 빈센트 친을 시청한 후 이 순간 가장 강렬한 느낌은 배신감입니다. 제가 받아온 교육과 제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 모든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는 미시간에서 자랐고, 당시에 그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때 무엇을 했을까요? 학교에서 이 사건을 한 번도 가르쳐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듭니다. 학교에서 다른 증오범죄에 대해 얘기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은 게이 및 흑인에 대한 편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같은 학년에서 로드니 킹(Rodney King), 제임스 버드(James Byrd)나 매튜 셰퍼드(Matthew Shepard)에 대해 모르는 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
아시아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는 여기에 포함되지
이 영화로부터
느꼈던 가장
강한 감정은 배움을 위해
의존했던
않았을까요?
이 과목 초반부터 들었던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제가
받아온 교육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와 빈센트 친의
사건 등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는 걸 고려한다면, 과연 또
어떤 사실들을 전해 듣지 못했을까요? 저는 또 어떤 거짓말을
믿었던 걸까요? 이번 과목을 듣기 전에는 저는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차별이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시아인
중에는 성공한 사람이 유난히 많아 보이고, 모두가 그들을
제가
이들에 대한 배신감입니다.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방금 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제가 모르는 또 다른 거짓말이 있지 않을까요?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영화 제목의 질문에 관심을 가지고
해당 질문에 답하도록 요청하셨습니다.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을까요? 영화를 시청하고 기사를 읽은 지금은 사실상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문제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 이외에도 빈센트 친과 그와 비슷한 모습의
사람을 죽여도 괜찮다는 미국 속의 만연한 생각이 원인입니다.
실제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살짝 무례한 일일
수는 있지만 그다지 악의적인 행위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괜찮은 이유는 빈센트 친처럼 생긴 사람은
사실상 미국인이 아니며 언제든지 '진정한' 미국인들에게 '
나쁜' 짓들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빈센트 친이 흑인이나 백인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흑인이었다면 살인자가 처음에는 쉽게 풀려났다 하더라도
미국 전역에서 더 많은 시위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흑인, 백인, 어쩌면 유대인을 포함한 더 많은 정치인이 목소리를 냈을 것이고 길거리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동조했을 것이며
신시내티에서 진행된 민권 소송의 결과가 뒤집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빈센트 친이 백인이었다면 살인자들은 감옥에 갔을
것이고, 어쩌면 사형을 선고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뉴스나 역사에서 그에 대한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살인자가 백인이 아니었다면 쉽게
풀려나기가 훨씬 어려웠겠지만, 그럼에도 풀려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미국인으로 간주되었을 것이고 아시아인은 항상 죽어 마땅한 외국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백인과 아시아인 사이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는 바로는 백인, 흑인 그리고 어찌 보면 모든 사람들이 아시아인은 건드려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실제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학교에서 이런 일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저 역시 이러한 생각에 동조하고는 했습니다. 이제 영화를
보고 느낀 제 감정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배움을 위해 제가
의존했던 이들에 대한 배신감입니다.
이러한 반응을 간단히 살펴만 보더라도 2001년도에 영화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가 학생들에게 지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미친 영향은 그로부터 13년 전 영화가 개봉되었던 당시만큼
그리고 빈센트 친 살인사건과 그 이후의 재판과정과 사회
각층을 아우르는 범민족적인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ACJ) 운동이 이루어졌을 때만큼이나 그 임팩트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01년도에도 계속해서
이 영화는 아시아계 미국인 과목으로서 가장 임팩트 있는
교재인 것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리포트 내용을 감안하면
영화를 접하기 이전까지 받은 교육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재 중 하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난 반 아시아인 증오범죄 사건에 대한 이 특별하고
강력한 기록 및 분석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인종적 배경의 대학생들에게 인종학 개념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꾸준히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에는
단순히 흑인과 백인 사이의 갈등이나 개개인의 인종차별적
행위를 넘어선 제도적 인종차별, 백인이 누리는 특권과
권력, 토착주의, 아시아인의 인종화, 법률 및 사법제도 내의
일상화된 인종차별주의, 아시아인의 미국 역사가 배제된
교육, 인종과 경제의 상호연관성,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과
근거없는 믿음에 의한 실질적인 결과, 언론과 인종차별주의,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사회운동 등이 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의 경우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를
본 뒤 특별히 두 가지의 주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는 점과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점이 이 영화를 본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들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반 아시안 폭력과 질식할 것
같은 침묵에 대해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들이 겪은
고통은 인종화, 취약성, 절망에 따른 자신의 두려움, 미지,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스토리가 영구적으로 기록되어 공개되는 것을 보면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현실에 대한 정당성과 타당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들이 빈센트 친 사건에 따른 ACJ 운동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놀라며 용기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 수업을 들은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 대부분은 1.5세대 또는 이민자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2세대였습니다. 이들은 아시아계 미국인을 위한 정의를 대변하는 조직화된 사회운동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거나 일종의 ‘금기’로 여기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범아시아계 사회운동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게 되면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무관심’하고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일반적인 가정에 도전하는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1991년에 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미국의 의무 교육
및 대학 교육에서 빈센트 친 사건과 아시아인의 미국 역사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10년이 지난 2001년에도 학생들은
같은 질문을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합니다.
갑자기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의 이러한 반응이 10년 넘게 일관성 있게 나왔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번 추고집에서 드러난 가장 충격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반응이 나온다는 건, 아시아인의 미국 역사가 계속해서 미 전국의 교육제도에서
체계적으로 누락되고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와도 같습니다. 아시아인의 미국 역사는 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심지어는 80년대 초에도 교육 커리큘럼에서 누락되었다는
점은 딱히 새로운 사실도 아닙니다. (사실 아시아계 미국인이
누락되었고 이를 메꾸기 위해 1968년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를 위한 운동이 촉발된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운동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지식을 생성하는 활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재 미 교육 커리큘럼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이 누락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관한 연구는 3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해당 연구 분야는 급속도로
성장했으며 미 전역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깊고 다양한 지식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에는 이전에 누락되거나 무시되었던 지식을
포함하는 다문화 커리큘럼 변화 프로젝트가 추진되었으며
다수의 학교와 대학에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개의 맥락 하에서 가장 시급한 질문에 답해야만 합니다. "
미국 전역의 훌륭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에 관한 지식 없이, 혹은 이러한 지식이 교육에서
누락되었다는 인식 없이 대학에 입학하거나 졸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 분야에서
창출된 지식을 활용하고 있고,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지식은 어디에서 누구에게 전해질까요? 21세기 미국의 교육
커리큘럼에 아시아인의 미국 역사를 포함해야 한다는 설득력
있는 요구는 어떻게 되었나요? 2001년의 수업 도중에 진행한
간단한 설문조사에서는 모든 학생이 로드니 킹, 제임스 버드, 애브너 루이마(Abner Louima), 아마두 디알로(Amadou Diallo)와 매튜 셰퍼드를 알고 있었고 관련 사건에 대한
정보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들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봤을 때, 상당수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및 대학교의 수업 토의와 미디어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접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빈센트 친, 짐 루(Jim Loo), 내브로즈 모디(Navroze Mody), 나오키 카미지마(Naoki Kamijima), 무케시(Mukesh) 및 카누 파텔(Kanu Patel), 쿠안 청 카오(Kuan Chung Kao), 티엔 민 라이(Thien Minh Ly) 및 조셉 일레토(Joseph Ileto)
의 사건을 알고 있거나 사건과 관련된 사실을 제시할 수 있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아시아인의 미국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빈센트 친의 잔혹한 살인 사건에 이어 미국의 사법제도에서
정의를 배신한 끔찍한 일이 일어난 지 20년이 흘렀습니다. 이
사건이 남긴 가장 강력한 유산은 아시아인의 미국 역사, 미국
내 아시아인 인종화에 대한 경험, 사회 속 뿌리 깊은 제도적
차원의 반 아시아인 인종차별,
미국인은 물론 인종을 이유로 억압받고 있는 모든 민족을 위해 깊이 자리잡은 제도적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교훈을 남긴 것입니다. 아시아인의 미국 이슈의 경우 그들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과 지식이 없이는 인종차별과 싸우는 데 필요한
능력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미국의 교육자들과 교류하고 협업하는 과정에서 아시아인의 미국을 ‘비미국적인’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과 미국 역사에서 아시아인의 미국을
배제하는 관행을 바꾸지 못한다면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연구에서 창출되는 지식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유익할 것입니다. (미국 전역에서 대부분 '재미로' 대학 수준의 아시아계 미국인에 관한 과목을 이수하는 비교적 소수의 학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나?의 교훈과 아시아계 미국인 역사와 함께 현재 직면한 이슈가 체계적으로 초, 중, 고 및 대학 교과과정에 포함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학생들은 계속해서 미국의 교육제도에 의해 배신당할 것입니다.
진 우는 터프츠 대학교 인종 및 아시아계 미국인 연구 학과의 명예교수입니다. 그녀는 미국의 AAPI 교사들을 위한 유일한 아시아계 미국인 태평양 섬 주민 교육자 멘토링 프로그램을 공동 지휘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알고 그들의 이름을 알다
1982~2022년

이 글은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아시아계 미국인을 상대로 있었던 여러 치명적인 공격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일화식 요약문이므로 내용이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건에서 경찰과 언론은 인종차별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학생 및 젊은이들과 빈센트 친의 이야기를 토의할 계획인 경우에는 이 글의 내용을 먼저 검토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을 계속해서 읽기 전에 본인의 안위를 우선시하고, 최대한 많은 휴식을 취하며 찬찬히 내용을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1982년 6월 23일, 마이애미 디트로이트—27세의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자동차 산업이 붕괴된 것을 일본의 탓으로
돌리던 두 백인 자동차 공장 노동자가 휘두른 야구방망이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두 살인자는 보호관찰형과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이는 시위와 전국적인 아시아계 미국인의 민권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983 5월 4일, 캘리포니아 데이비스—17세의 베트남계 학생 통 히 후인(Thong Hy Huynh)이 학교 복도에서 칼에 찔려 사망했습니다. 범인은 인종차별적 동기를 가지고 범행을 저지른 또 다른 학생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이 있던 날, ' 백인 학생 연합(White Student Union)'이라는 학생 단체에서 직업을 빼앗아 가는 이민자들을 비난하는 인종차별적인 전단지를 배포했습니다.
1984년 2월 29일, 뉴욕—의류공장에서 일하던 19세의 홍콩 출신 임산부인 리 영 청(Ly Yung Cheung)을 한 백인

남성이 지하철역 앞에서 밀어서 목이 잘리게 만들었습니다. 이 남성은 아시아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경찰에서는 인종차별적 동기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985년 1월 30일, 노스캐롤라이나 롤리—한 백인계 미국인 부부가 당시 8세였던 진 카-하르 페웰(Jean Kar-Har Fewel)을 홍콩에서 입양했습니다. 학교로 등교하던 2학년생은 납치당하여 성폭행을 당한 후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한
남성 잡지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특집을 내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1987년 9월 27일, 뉴저지 호보컨—내브로즈 모디(Navroze Mody)라는 30세의 인도계 미국인이 11명의 라틴계 청소년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지역에서 '힌두교 신자들'을 제거한다는 목표를 맹세한 '도트버스터즈(Dotbusters)' 라는 단체에 속해 있었습니다. 모디는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습니다. 검찰은 이 사건이 인종차별과 무관하다는 반복적인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인종차별적 언사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1989년 1월 17일, 캘리포니아 스톡턴—전체 학생의 80%가 동남아시아계인 학교에서 5명의 아시아계 어린이인 Raphanar Or(라파나르 오르)(8세), Ram Chun(램 춘)(8세), Thuy Tran(츄이 트란)(6세), Sokhim An(소킴 안) 6세과 Oeun Lim(오에운 림)(8세)가 살해당하고 다른 30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백인 총격범은 학교 운동장을
향해 반자동 무기를 난사했습니다. 법 집행기관과 미디어에서는 인종적 갈등이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인종차별적
동기를 일축했습니다. 캘리포니아 AAPI는 주 검찰총장에 의한 조사를 요구했으며, 살인자가 백인 우월주의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1989년 7월 29일, 노스캐롤라이나 롤리—이 지역 당구장 안에 있던 24세의 중국계 미국인 학생 짐 밍 하이 루(Jim Ming Hai Loo)에게 두 명의 백인 남성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형제들이 베트남에서 돌아오지 못했어' 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그런 형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공격을 받은 루는 이틀 후에 사망했습니다. 검찰은 인종차별적 언사가 없었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적 동기에 의한 살해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1989년 12월 26일, 뉴욕 퀸스—'마스터 레이스(Master Race)라는 갱단에 소속된 40명의 백인 청년들이 5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을 폭행했습니다. 피해자들 중 한 명은 이틀 동안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경찰은 피해자들을 향해 ‘브루스 리’라고 말한 것은 인종차별적 언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폭행이 편견과 관련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1992년 10월 17일, 로스앤젤레스 배턴루지—16세의 일본인 교환 학생 요시미로 하토리(Yoshihiro Hattori)는
친구와 할로윈 파티에 참석했다가 남의 집에 잘못 들어갔습니다. 그 십대는 가면도 없고 흰색 턱시도를 착용 중이었지만
집주인은 자신이 '위협'을 느꼈고 정당방위로 하토리를 총으로 쏴 죽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997년 4월 29일, 캘리포니아 로너트 파크—타이완에서 태어난 미생물학자인 콴창
카오(Kuanchung

Kao)는 늦은 밤 자신의 집 앞에서 각목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저녁 초에 발생한 인종차별주의자 사건 때문에 속이 상한 것이 이유였습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총으로 쏴서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무술'을 하듯 각목을 휘둘렀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었습니다. 커뮤니티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기소된 경찰은 없었습니다.
1999년 8월 10일, 캘리포니아 채츠워스—USPS의 우편 직원으로 일하는 39세의 필리핀계 미국인 조셉 일레토(Joseph Ileto)가 백인 우월주의자가 촌 쏭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유대인 커뮤니티 센터에 막 총격을 가했던 이 신나치주의자는 우편을 배달 중이던 일레토를 발견한 후 아홉 발의 총격을 가했습니다. 일레토를 라틴계 또는 아시아계의 연방 공무원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001년 9월 15일, 애리조나 메사—9/11가 발생한 지 4일 후, 시크교 미국인인 발비르 싱 소디(Balbir Singh Sodhi)
가 본인 소유의 주유소에서 살해당했습니다. 그를 살해한 남성은 '무슬림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소디가 표적이 된
이유는 시크교 신자인 그가 터번을 착용하고 턱수염을 길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 및 기타 AAPI 커뮤니티와
민권 단체는 사회에 만연한 이슬람 증오를 규탄했습니다.
2003년 7월 13일, 캘리포니아 새너제이—키 150cm의 베트남 여성인 카우 비크 트란(Cau Bich Tran)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그녀의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총을 발사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채소 필러 나이프를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자신들이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집단 시위가 이어졌지만 기소된 경찰은 없었습니다.
2006년 7월 22일, 미니애폴리스 미네소타—19세의 몽족계 미국인인 퐁 리(Fong Lee)가 미니애폴리스 경찰이 쏜 8발의
총격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가족은 퐁 리가 무장 상태였다는 주장에 반박했지만, 경찰관은 혐의를 벗어났습니다. 2020년에는 조지 플로이드의 살인 사건 이후 리의 어머니인 유아 뱅(Youa Vang)이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2012년 8월 5일, 위스콘신 오크 크리크—6명의 시크교 미국인들인 파람지트 카우르(Paramjit Kaur, , 41), 구루드와라의 창립자인 사트완트 싱 칼레카(Satwant Singh Kaleka, 65), 프라카시 싱(Prakash Singh, 39), 시타 싱(Sita Singh, 41), 란지트 싱(Ranjit Singh, 49)과 스베그 싱(Suveg Singh, 84)이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총격범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는 시크교 사원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사망자 외에도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총격은 특히 시크교도를 비롯한 남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 전체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배당에서 일어난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017년 6월 9일, 일리노이 어배너—잉잉 장(Yingying Zhang)이라는 중국인 객원 연구원이 납치, 강간, 폭행당한
후 시신까지 훼손당했습니다. 살인자는 그녀의 시신을 여러 개의 쓰레기 봉투에 나눠 버렸으며, 이 봉투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잉잉의 부모들은 계속해서 딸의 유해를 찾았습니다.
2020년 1월 6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89세의 중국계 미국인 익 오이 후앙(Yik Oi Huang)은 집 근처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심각한 폭행에 따른 부상으로 사망했습니다. 사랑받던 할머니는 다발성 골절에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손녀인 사산나 이(Sasanna Yee)는 할머니가 당한 폭행을 아시아인과 흑인 커뮤니티 간의 긴장을 악화시키는 데 사용하지 말아 달라며 공개적으로 호소했습니다.
2020년 3월 2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어릴 때 대한민국에서 입양된 20세의 잭슨 세일즈(Jaxon Sales)가 지인의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사고사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그의 가족은 잭슨이 LGBTQ+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온전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며, 잭슨의 사건이 'AAPI 및 LGBTQ 커뮤니티의 공통적인
제외에 대한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020년 9월 19일, 위스콘신 밀워키—36세의 몽족계 미국인 이에 리(Ee Lee)가 다른 아홉 명이 지켜보는 와중 대낮에 인종차별적 동기가 의심되는 청소년 두 명에 의해 강간 및 살해당했습니다. 그녀는 방치되어 사망했지만, 범법자들은 휴대전화로 강간 장면을 녹화하여 공유했습니다. 몽족계 미국인 여성 협회(Hmong American Women’s Association)

에서는 가족을 지지하고 폭력을 비판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2021년 1월 28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84세의 태국계 미국인 비차 라탄파크디(Vicha Ratanpakdee)는

낮에 산책을 나섰다가 강제로 바닥에 떠밀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딸과 사위가 증오 동기에 의한 폭행을 기소하기 위한
시위를 조직하는 동안, 지방 검사 및 몇몇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는 교도소 대신 다른 대안을 강조했습니다. 2021년 3월 16일—여섯 명의 아시아계 여성과 다른 두 명의 사람들이 총기 난사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여섯 명의 아시아계 여성은 샤오지에 에밀리 트랜(Xiaojie Emily Tran, 49), 유영애(Yong Ae Yue, 63), 김선차(Sun Cha Kim, 69), 현정 그랜트(Hyun Jung Grant, 51), 박순정(Soon Chung Park, 74) 및 다오유 펭(Daoyou Feng, 44)이었습니다. 총격범은 공격할 아시아인 소유의 스파 업체를 찾아 다녔습니다. 다음 날 경찰 대변인은 당시 살해자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언론에 전했으며, 인종차별적 동기의 가능성을 일축한 후 '섹스 중독'에 의한 범죄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살해자에 대한 변명을 줄 구실을 제공하고, 살해당한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의 삶을 폄하하고
아시아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성애화 가능성을 일축한 편견을 이유로 널리 비난받았습니다.
2021년 4월 15일, 인디애나 인디애나폴리스—대부분의 직원이 시크교계 미국인으로 이루어진 FedEx 그라운드 시설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총격범은 8명을 살해한 후 자살했습니다. 사망자 중 네 명이 시크교 교도였습니다. 아마르지트
카우르 조할(Amarjeet Kaur Johal, 66세)은 어머니이자 할머니였습니다. 자스빈더 카우르(Jasvinder
Kaur, 50세)는 두 자녀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마르지트 세크혼(Amarjit Sekhon, 48세)은 두 아들과 장애를 가진 남편의 부양자였습니다. 자스윈더 싱(Jaswinder Singh, 68세)은 남편, 할아버지이자 세 자녀의 아버지였으며, Fedex 시설에서 근무한 지 1주일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2021년 4월 23일, 뉴욕—야오 판 마(Yao Pan Ma, 61세)는 할렘에서 누군가에 의해 뒤에서 밀려 넘어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머리에 발길질을 당했습니다. 그는 2021년 마지막 날까지 뇌사 상태로 지내다가 결국 부상으로 인해 병원 침상에서 사망했습니다. 최근에 건너온 이민자인 야오는 세탁소에서 해고당한 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깡통을 모으다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2021년 6월 28일, 캘리포니아 유카 밸리 데저트—30세의 한국계 미국인 여성인 로렌 조(Lauren Cho)가 유카 밸리 데저트에서 실종되었습니다. 몇 개월 후에 그녀의 유해가 발견되었으며, 그녀의 실종 사건은 '백인 여성 실종 증후군' 또는 유색 인종 여성의 실종에 대해 언론이 관심을 훨씬 보이지 않는 경향에 대한 소셜 미디어 상의 논의를 촉발했습니다.
2021년 7월 2일, 유타 샌디—네 자녀의 어머니인 마사코 켄리(Masako Kenley, 53세) 실종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동료들은 20년 동안 우편직원으로 일한 그녀에 대해 상냥하고 친절하며 항상 남을 기꺼이 돕던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던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습니다.
2021년 11월 18일, 코네티컷 스탬퍼드—신 매노(Shin Maeno, 28세)는 정오 경에 친구의 아파트를 나서고 있었습니다.

5일에 걸쳐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한 수색이 진행되었고, 6일 후에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2022년 1월 15일, 뉴욕—미쉘 고(Michelle Go, 40세)는 타임스스퀘어 지하철역 선로로 내밀려 떨어졌습니다. 그녀는 10년 동안 뉴욕 주니어 리그(New York Junior League)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며 노숙자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살인자의 정신 상태에 초점을 맞춘 뉴스 미디어는 인종차별적 동기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일축했습니다.
2022년 1월 24일, 뉴멕시코 앨버커키—중국 후베이성 출신의 이민자 시후이 펭(Sihui Fang, 45세)이 자신의 마사지 스파에서 강도를 당한 후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3주 후인 2022년 2월 15일에도 무명의 마사지 스파 주인이 살해당했습니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같은 기간 내에 마사지 스파를 표적으로 삼은 강도 사건이 20건 이상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22년 2월 13일, 뉴욕—크리스티나 유나 리(Christina Yuna Lee, 35세)는 온라인 음악 플랫폼에서 아티스트로 일했습니다. 아파트 건물로 들어가는 그녀를 누군가가 쫓아와서 40회 넘게 칼로 찔렀습니다. 그녀가 한때 일했던 스튜디오에서
열린 미술 전시회는 미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강조합니다.
2022년 2월 22일, 뉴욕 퀸스—누군가의 배우자이자 할머니였던 구잉 마(Guiying Ma, 62세)는 11월에 거주지 앞의
인도를 청소하다가 습격당했습니다. 그녀는 10주 동안 뇌사 상태로 지내다가 사망했으며, 이는 2022년 첫 두 달 동안 뉴욕에서
반 아시아인 증오에 기인한 네 번째 살인 사건으로 집계되었습니다.
2022년 4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호놀룰루의 차이나타운에서 걸어가던 미상의 아시아계 남성(79세)에게 누군가가 뒤에서 불을 붙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용의자는 체포되었지만, 노인은 심각한 화상을 입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2022년 5월 12일, 텍사스 댈러스—한 총격범이 아시아계 미국인 소유의 미용실을 향해 총기를 발사하여 3명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처음에 경찰은 증오 범죄와 무관한 사건이라고 말했지만, 아시아인의 업체를 노린
다른 사건이 발생하자 입장을 바꿨습니다.
빈센트 친 운동의 주요 일자
1922년: C.W. 힝 친(C.W. Hing Chin)이 17세에 미국으로 이민옴.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미국 육군으로 입대함.
1948년: 릴리 이(Lily Yee, 27세)가 디트로이트에서 남편인 C.W. 힝 친과 합류한 후 세탁소에서 근무함.

1955년 5월 18일: 빈센트 친이 중국 광둥 지역에서 태어남.
1961년: 릴리 및 C.W. 힝 친이 6세의 빈센트를 입양함.
1965년: 빈센트가 귀화 후 미국인이 됨.
1981년 11월 3일: 빈센트의 아버지가 오랜 병환 끝에 사망함.
1982년 6월 19일: 총각 파티가 열린 날 저녁, 빈센트 친이 백인 자동차 공장 노동자 두 명에게 추격 및 습격당한 후 야구방망이로 치명적 폭행을 당함.
1982년 6월 23일: 빈센트 친이 생명유지장치 제거 후 사망함.
1983년 2월 8일: 로널드 에벤스(Ronald Ebens)와 마이클
니츠(Michael Nitz)가 죄목이 살인에서 과실치사로 낮춰지고



















각각 유죄인정과 불항쟁의 소답을 함.

1983년 3월 16일: 웨인 카운티의 순회재판판사인 찰스
코프먼(Charles Kaufman)이 각 피고에게 실형없이 3년의 보호관찰형과 3,000달러의 벌금형 및 법정 비용을 선고함.




1983년 3월 16일: 헨리 이(Henry Yee), 킨 이(Kin Yee)
와 헬렌 지아(Helen Zia)가 1983년 3월 21에 펀데일의 골든 스타라는 음식점에서 만나 더 큰 규모의 집회를 조직함.
1983년 3월 25일: ACJ 대변인이 코프먼 판사와 면담을 진행하기로 함. 법정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판사가 ‘휴가가 앞당겨졌다’는 핑계로 면담을 취소함.
1983년 4월 17일: 연방 민권침해 조사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200명 이상이 ACJ 와 미국 법무부 대변인과의 면담에 참석함.
1983년 4월 29일: 변호사 라이자 챈(Liza Chan)과 단 호에켄가(Dan Hoekenga)가 코프먼 판사 앞에서 선고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함. ACJ에서 100명의 법정감시인을 구성하여 심리에 참석하도록 함.
1983년 3월 31일: 대도시권에서 활동하는 약 100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에 의해 디트로이트 차이나타운에서 ACJ가 설립됨.
1983년 5월 4일: 라이자 챈과 헬렌 지아가 흑인을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 토크쇼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커뮤니티 구성원의 질문에 답변함.
1983년 5월 9일: ACJ가 디트로이트의 케네디 스퀘어에서 약 1,000명의 시위자가 참석한 집회를 주관함.
1983년 5월 21일: 앨빈 사익스(Alvin Sykes)가 ACJ를 방문하여 미주리 캔자스시티의 공원에서 살해당한 흑인 음악가인 스티븐 하비(Steven Harvey)의 폭행 및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본인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어떻게 연방 민권침해 소송에서 승소했는지 공유함.
1983년 6월 3일: 코프먼 판사가 에벤스 및 니츠에 대한 보호관찰형 선고를 추가적으로 정당화하며 '잔혹한 살인 사건이었다면' 그들을 교도소로 보냈을 것이라고 설명함.
1983년 6월 16일: 노만 미네타(Norman Mineta) 하원 의원과 ACJ 대변인이 시카고에서 반 아시아인 폭력에 대한 목소리를 높임.
1983년 6월 19일: 빈센트 친이 살해당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에 시카고, 디트로이트, 로스앤젤레스, 뉴욕, 샌프란시스코 및 토론토에서 그에 대한 추모 집회가 열림.
1983년 6월 29일: 릴리 친과 ACJ 대변인이 워싱턴 DC에서 법무부 관계자들과 만나서 빈센트 친의 민권 침해 가능성에 대한 연방 조사를 촉구함.
1983년 7월 6일: 미국 변호사 레너드 길만(Leonard Gilman)이 FBI에서 빈센트 친 살인 사건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함.
1983년 7월 14일: ACJ의 척 모이(Chuck Moy)가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태평양 미국 위원회 발족식에서 연설함.
1983년 11월 2일: 연방 대배심이 빈센트 친의 민권을
침해한 2건의 혐의에 대해 에벤스와 니츠를 기소함.
1984년 6월 5일: 디트로이트 판사인 안나 디긴스 테일러 (Anna Diggs Taylor)의 법정에서 연방 재판이 시작됨.
1984년 6월 28일: 배심원단이 빈센트 친의 민권을 침해한 1
건의 혐의에 대해 에벤스에게 유죄를 판결함. 니츠는 무죄를 선고받음.
1984년 7월 16일: 제시 잭슨 목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릴리 친과 ACJ 대변인을 방문하여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와

반 아시아인 증오에 대한 결속을 지지함.
1984년 9월 18일: 테일러 판사가 에벤스에게 25년형을 선고함. 그는 항소 후 보석금으로 석방됨.
1986년 9월 11일: 항소심에서 에벤스에 대한 유죄 선고가 뒤집힘, 제6연방순회항소법원에서 증거 오류와 사전 심리 과정의 언론 보도를 근거로 언급함.
1986년 9월 19일: 미국 법무부에서 에벤스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겠다고 발표함.
1987년 4월 22일: 오하이오 신시내티에서 에벤스에 대한
새로운 연방 재판이 시작됨.
1987년 5월 1일: 백인 11명, 흑인 1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에 의해 에벤스는 무죄를 선고받음. 아시아계
미국인을 지인으로 둔 배심원은 한 명도 없었음.
후기
1987년 7월: 릴리 친을 대신하여 진행된, 부당한 죽음에
관한 민사 소송에서 에벤스는 빈센트 친의 재단에 150만
달러를 지급할 것을 명령받음. 에벤스는 기자에게 빈센트의
어머니가 그 돈을 절대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미시간
외부로 이주하여 판결의 강제집행을 회피하려고 함.
1987년 9월: 빈센트 친의 어머니인 릴리는 대부분의 여생을
디트로이트에서 보낸 후 미국에 머물기가 너무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미국을 떠나 중국 광저우로 이주함.
1992년 4월 1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14세의 라타샤 할린스 (Latasha Harlins)의 살해범이 보호관찰형 및 벌금형을 선고받음. 상점 주인 두순자(Soon Ja Du)는 절도를 의심하여 라타샤에게 총격을 가함. 가해자에 대한 가벼운 처벌로 인해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커뮤니티에서 집단 시위가 촉발되었고 약 3,000개의 한국인 업체가 파괴된 폭동 사태에 기여함.
2002년 6월 9일: 아들이 사망한 지 20주년이 되기 2주 전에 릴리 친이 사망함.
2012년 2월 26일: 플로리다 샌퍼드에서 17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년인 트레이번 마틴(Trayvon Martin)이 아버지의 집 근처에서 인종차별에 의한 총격을 받아 사망함, 총격범
조지 짐머맨(George Zimmerman)은 소년이 '수상해
보였다'고 주장함. 짐머맨은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로 인해 촉발된 시위는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Black Lives Matte) 운동이 시작되는 데 기여함.
빈센트 친의 목숨을 앗아간 로널드 에벤스에게 내려진 살인 유죄판결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비록 감옥에서는 단 하루도 보내지 않았지만, 그는 릴리 친과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게 진 빚으로부터 결코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빈센트 친을 위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운동은 수많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커뮤니티와 이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투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범아시아계 미국인 조직이 설립되었습니다. 그
중에 몇 개만 열거해 보자면 아시아 태평양 미국 법률 센터(Asian Pacific American Legal Center, 로스앤젤레스), 아시안아메리칸정의진흥협회(Asian Americans Advancing Justice, 워싱턴 DC), 브레이크 더 사일런스(Break the Silence) 연합(북부 캐롤라이나), 반 아시아인 폭력 대처 위원회(Committee Against Anti-Asian Violence, 뉴욕) 등이 있습니다.
미국 민권 위원회(US Commission on Civil Rights)는 반 아시아인 폭력에 대한 정기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인지 성별, 성적 지향과 장애 차별로 부터 보호하는 2010년 매튜 셰퍼드 제임스 버드 증오범죄 보호법(2010
Matthew Shepard James Byrd Hate Crimes Protection Act)과 더불어 선고공판에서 범죄 피해자의
진술권을 허용하는 법의 제정으로 지역 정부와 주정부 차원의 증오범죄 입법화 움직임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2021년에는 상원의원 메이지 히로노(Mazie K. Hirono, 하와이) 와 하원의원 그레이스 멩(Grace Meng, 뉴욕)에 의해 발의된 코로나19 증오범죄 방지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법은 증오범죄에 대한 신속한 검토와 일반적으로 범죄 신고율이 낮은 사건의 수사와 식별을 지원하여 반 아시아인 및 기타 증오범죄의 급격한 증가를 해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결속을 통한 강력한 힘
작성자: 헬렌 지아
1980년대를 지배한 반 아시아인 증오는 미국의 병폐를 일본의
탓으로 돌리면서 일본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새로운 민권 운동을
통해 하나로 뭉치고 흑인, 유대인, 아랍계 미국인, 라틴계
단체 및 다양한 신앙, 성별과 배경의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우리들의 노력은 새로운 아시아계 미국인 태평양 섬 주민 지지
단체의 결성을 촉진하고 증오범죄 방지와 선고공판에서의
피해자 진술권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미국 내 아시아인을 상대로 한 폭력
사건에 종지부를 찍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진전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2019년부터는 코로나19 범유행에 의해
외국인 혐오가 고조되었으며, 아직까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를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StopAAPIHate.org
웹사이트에서는 2020년 3월부터 2022년 3월까지 11,000건

이상의 혐오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애틀랜타의
아시아계 미국인과 인디애나폴리스의 시크교 교인들에 대한 집단 살상도 포함되었습니다.
11,000건 중에서 3분의 2가 여성, 소녀와 나이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이었습니다. 빈센트 친이 미국의 경제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에서 살해당했다는 점에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코로나 19 첫 확진자가 보고된지 2년이 넘은 지금도 아시아계 미국인을 상대로 한 공격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아시아계 미국인이라고 밝힌 사람의 수가 현재 2,400
만 명으로서 미국 전체 인구의 7%에 해당하는 이 수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80년대에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인구가 처음으로 미국 총 인구의 1%
를 넘어선 것이 인구 조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놀라운 증가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계 미국인의
커뮤니티, 스토리, 역사, 영향력, 우려 및 존재감에 대한
일반적인 인지도는 여전히 미국 문화에서 저조한 상태입니다.
미국인 응답자들은 자신들의 배경과는 상관없이 가장 저명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름을 물어보는 질문에 ‘모르겠다’라고
일반적으로 답했습니다. 필자가 2020년에 작성한 논평이
위싱턴지에 실린 이후, 수많은 사람들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정말로 편견과 인종차별을 경험했다는 내용이 사실인지
물어봤습니다. 심지어는 대통령 후보였던 조 바이든이 미국의
반 아시아인 혐오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그가 내놓은 답변은 오로지 시진핑과 중국인민공화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회에 만연한 무지는 차별을 경험하고 이를 주장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장벽으로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1982년에는 빈센트의 살인자가 "너희 개xx들 때문에
우리가 실직당했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한 목격자가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의 수많은 목격자들은 인종을
비하하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다면서 살인자들의 발언에서
인종차별적 동기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취약계층에
처한 사람들이 잘 알듯이 차별이란 인종을 비하하는 언급이나
그 어떠한 구두적 표현 없이도 자행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021년 3월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 이후에도 현지 경찰은 처음에 인종차별과는 무관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살인자가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마치 범인이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스파를 의도적으로 찾아다닌 것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인 경찰관들은
단순히 자신의 '섹스 중독'을 치료하려 했다는 총격범의
주장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범인의 주장은 인종차별적이자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대한 극렬한 반감이 빈센트 친 살인 사건에
기여했듯이, 오늘날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적대심은
오랜 기간에 걸친 '중국 때리기 (China basing)'에 의해
조장되었습니다. 1980년대의 '일본 때리기 (Japan-bashing)'
가 줄어들면서 1990년대의 공포팔이들은 '위협적인 중국 (China threat)'으로 표적을 바꿨습니다. 단순히 빌 클린턴
대통령을 위한 선거 자금을 기부한 것 밖에 없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FBI의 조사를 받았으며, 중국에게 정보를 넘기는 위험한 인물일 수도 있다고 공개적으로 회자되었습니다.
필리핀인, 한국인, 태국인이나 비중국인이 아닌 아시아계
미국인들 조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중국 첩자를 찾기 위한 오늘날의 공격적인 수사망은 수많은 무고한 중국계
미국인에 대한 잘못된 형사 기소로 이어졌습니다. 크리스토퍼
레이 FBI 국장이 언급한 트럼프 행정부의 '차이나 이니셔티브
(China Initiative)’는 중국계 미국인에 대한 근거 없는 조사, 체포 및 기소의 속도를 가속화하기만 했습니다.

반아시아인 증오가 동아시아계 미국인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닙니다. 2001년 9.11 사태로 인해 '무슬림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공격과 살인이 발생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랍계, 중동계, 무슬림 및 남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이슬람 혐오가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2012년 8월 5일, 신나치주의와 관련이 있는 한 백인 총격범이 중무장을 하고 북적이는 시크교 구루드와라에 들어간 후 총격을 가하여 7명의 신도를 살해했습니다. 무슬림 때리기 (Muslimbashing) 정책, 예를 들어 2017년에 연방에서 명령한 '무슬림 금지' 정책은 주요 무슬림 국가 사람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계속해서 무슬림을 테러리스트와 동격화하며 이슬람 혐오에 따른 공격이
끊임없이 계속되게 합니다. 애틀랜타에서 동아시아계
여성을 상대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1개월이
지난 시점인 2021년 4월에는 직원 대부분이 남아시아계
여성인 인디애나폴리스의 Fedex 시설을 노린 또 다른 총기 난사가 발생하여 시크교 미국인 4명을 포함하여 총 8명이 사망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미국과 중국, 그리고 중동과 서아시아 간의 긴장은 가까운 미래에도 완화될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의
교육, 대중문화와 훨씬 강력한 정책으로 아시아계 미국인 및
기타 소수 민족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고취시키지 않는 이상 편견과 증오는 앞으로도 유색인종에 속하는 모든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는 역동적으로 전진하면서 저항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AAPI 인구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상당히 증가했으며, AAPI 의 영향력은 점점 성장하는 사회운동가, 지도자 및 단체 등의 인프라를 통해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인프라에 힘입어 목소리를 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인식과 민감한 사안에 대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AAPI가 맡은
역할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당면 과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1980년대에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반아시아 ‘정서’를 비난했습니다. ‘정서’라는
단어는 ‘느낌’이나 ‘태도’의 완곡 표현입니다. 오늘날의 폭력과
관련해서는 보다 투철하고 날카로운 언어가 반아시아적 '
선입견', '편견', '편협성', ‘증오’, '인종차별', 그리고 미국의
아시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특성을 좀 더 정확하고
당당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술적 변화 또한 새로운 세대의 사회운동가 양성에
기여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다양하고 개별적인 커뮤니티와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소통할 휴대전화나 인터넷이
사회 문제를 자신들의 탓이라고
비난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을
위해 함께 일어섰던 다양한
커뮤니티의 투쟁이 중요한
일대기로 기록될 것입니다.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AAPI는 스마트폰 카메라와 소셜
미디어로 무장하고 있으며, 증오와 편견에 맞서기 위한
결속을 다지고 있습니다. AAPI 커뮤니티 운동가들은 StopAAPIHate.org를 아시아의 여러 언어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집회 규제로 인해 어려움을 소통하기가
어려웠던 팬데믹 초기에도 반 아시아인 증오의 사례를
기록하고 검증하기 위해 수천 건의 사건 보고서에서 데이터를 캡처했습니다.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또한 AAPI가 어떻게 흑인, 라틴계 및 원주민 커뮤니티와 함께 제도적 인종차별에 맞서고 있는지를 강조했으며, 특히 흑인계 미국인, 그리고 아시아계 미국인을
포함한 다른 유색 인종을 경찰이 살해하는 상황에 대한
대처를 강조했습니다. AAPI 운동가들은 사회에서 경찰이
맡은 역할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며, 교도소 산업 시스템에
녹아들어간 인종차별에도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일부
운동가들은 형기를 늘리는 증오범죄 방지법의 필요성에 대한
의구심을 가집니다. 이 법이 빈센트 친 사건의 경우처럼 유색
인종 커뮤니티들이 투쟁해서 얻어낸 결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특히 차이나타운과 기타 아시아인의 중심지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는 반 아시아인 폭력에
대한 정부의 추가 보호조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는 계속되는 분열을 일으키는 데 쓰였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을 공격하는 흑인의 동영상이 확산되고
미디어에 의해 증폭되면서 거짓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두 건의 개별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반 아시아인 증오에
따른 폭행은 흑인이 아닌 백인 남성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분열과 헛소문은 커뮤니티가 함께 힘을 합쳐 안전하고 살기 좋은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하는 공동 목표를 위한 투쟁을 막습니다. 이와 반대로 빈센트 친의 이야기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모두를 위한 민권과 정의를 위해 싸우기 위해 주도했던 운동에서 하나로 힘을 뭉쳤던 다양한 민족들간의 결속을 보여줍니다.
2020년 3월, 필자는 반 아시아인 증오가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증오는 코로나 바이러스, 글로벌 경제,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온 격변과 중미 관계를 둘러싼
향후 전개에 따라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폭력과 증오가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건 여전히 막연한 꿈인
채로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당시와 지금 이 시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일어서고
있으며, 무시, 증오, 폭력과 부당함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어려운 코로나19 시대를 겪었다는 이야기가 역사에
쓰일 때가 되면,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에는 사회 문제를
자신들의 탓이라고 비난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을 위해 함께 일어섰던 다양한 커뮤니티의 투쟁이
중요한 일대기로 기록될 것입니다.
대화를 위한 질문
» 협력자가 있다는 것, 다른 집단의 협력자가 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나요? 본인이 생각하는 의미있는 협력체계란 무엇인가요?
» 새로운 정보를 익히고 편견을 버리는
것은 어렵고 놀라운 과정일 수 있습니다.
이 가이드의 글을 읽은 후 학습한 내용과
어떤 편견을 적극적으로 버릴지 반추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학습과 버림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본인을 지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독서를 하거나, 다른 커뮤니티의 일원과 대화하거나,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민감한 주제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추진하고 시도하는 모든 것이 중요한 노력이 될 것입니다.
» 우리가 빈센트 친, 그리고 빈센트 친 사건
전과 후의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해
얘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시아계 미국인의 역사에는

CREDITS
편집장 및 작가 헬렌 지아
편집자 및 디자인 사라 잉 라운서빌(Sara Ying Rounsaville)
검수 크리스틴 사르키스(Christine Sarkis), 리아 시게무라(Lia Shigemura)
편집 보조 올리비아 잉 라운서빌(Olivia Ying Rounsaville)
기고자 에벨린 차오(Eveline Chao, 가디언), 롤랜드 황(미시간바저널,MichiganBarJournal),


이민진(뉴욕 타임스)
대화를 위한 질문
스미스소니언 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카 센터
디자인 및 제작 Polytechnic Berkeley
그들을 알고 그들의 이름을 알다에 관한 연구: 다니엘라 카스틸로(Daniella Castillo), 다이앤 A. 바바(Dianne A. Barba), 에릭 챈(Eric Chan)
아시아계 미국인 다국적 연구 이니셔티브(Asian American Transnational Research Initiative) CalPolyPomona의 메리
쿤미 유 다니코 박사가 지원
번역(디지털 버전) 스미스소니언 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카 센터
편집 지원 Asian Health Services, One Nation Commission
모든 글과 작성된 콘텐츠는 달리 표시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헬렌 지아가 작성했습니다. 모든 오류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있습니다.
Kresge 재단
Surdna 재단
헨리 루스 제단
스미스소니언 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카 센터 아시아계 미국인 재단(Asian American Foundation, TAAF)
PHOTO CREDITS
표지(하단 사진): 게티이미지/티모시 A. 클레리(Timothy A. Clary), 34페이지: AP 사진, 36페이지: AP 사진/빌 허드슨(Bill Hudson), 39페이지: National Archives Photo/스파이더 마틴 제공, 40페이지: AP 사진/어니스트 베넷(Ernest Bennett), 42페이지: One Nation Commission 제공, 48, 53페이지: 진 우 제공, 60페이지: Unsplash/Korantin Grall, 61페이지: Unsplash/Viviana Rishe, 63페이지: Flickr 제공, 64페이지 Credit 레아 커(Leah Kerr). 다른 모든 사
진은 헬렌 지아와 빈센트 및 릴리 친 재단의 컬렉션에서 제공하며, 고 코르키 리(Corky Lee)와 빅터 양(Victor Yang)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합니다.
위쪽 사진: 왼쪽에서 오른쪽: 헬렌 지아와 릴리 친
아래쪽 사진: 빈센트 친 레거시 가이드는 빈센트 친 추모 및 재헌정 40주년(2022년 6월 16~19일)에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 및 파트너와 함께 발간되었 습니다. 기획위원희 구성원은 다음과 같습니다(왼쪽에서 오른쪽). 단 영(Don Young), 아시아계 미국인 미디어 센터(Center for Asian American Media), 데브라 나카토미(Debra Nakatomi) 및 에이미 와타나베(Amy Watanabe), 나카토미(Nakatomi) 및 동료, 조세타 구이르(Zosette Guir), 디트로이트 퍼블릭 텔레비전 (Detroit Public Television), 롤랜드 황, American Citizens for Justice, 레베카 이슬람(Rebeka Islam), APIAVote-MI, 제임스 시무라(James Shimoura), ACJ, 로첼 라일리(Rochelle Riley), 디트로이트 시 예술, 문화, 기업부(City of Detroit Department of Arts, Cultures, and Entrepreneurship), 헬렌 지아, 빈센트 및 릴리 친 재단 및 빈센트 친 인스티튜트(Vincent Chin Institute).
빈센트 친 레거시 가이드 스폰서
빈센트 친 레거시 가이드
아시아계 미국인과 민권
빈센트 친 인스티튜트에서 제작
빈센트 친 인스티튜트 2022년 7월 40주년 행사를 맞이하여 설립되었으며 빈센트 친의 유산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결속 을 다짐으로써 증오와 인종차별에 맞서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평등한 정의라는 민주주의 이상과 함께 아시아계 미국 인과 역사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포함한 모두를 위한 온전한 인간의 존엄성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빈센트 친 레거시 가이드 및 vincentchin.org 웹사이트를 통해 빈센트 친 인스티튜트는
1. 학교, 도서관과 정책 입안자에게 다가서고 있고
2. AAPI 인프라가 거의 없었던 아시아계 미국인 권익 신장을 위한 빈센트 친 운동에서 얻은 조직화에 관한 교훈을 취하며
3. 다인종적, 다문화적 이해와 커뮤니티 역량 부여를 통해 빈센트 친의 유산을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세대의 AAPI 리 더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빈센트 친 레거시 가이드는 광범위한 대외 활동의 유산을 이어가고 다양한 사람들이 증오와 폭력에 함께 맞설 수 있도록 조직 화와 교육을 제공하며 안전, 공정성, 정의, 사랑의 커뮤니티를 구축하기 위한 토론 가이드, 교육 도구이자 확실한 자료입니다.
스미스소니언 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카 센터에서는 '대화를 위한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가이드 곳곳에 보이는 가이드는 우 리의 다인종적, 다문화적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는 빈센트 친의 유산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를 교사, 학생과 여러 사람들이 논의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더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 이민자 커뮤니티에 다가갈 수 있도록 스미스소니언 아시아 태평양 아 메리카 센터에서는 빈센트 친 레거시를 중국어(번체 및 간체), 한국어, 베트남어와 아랍어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빈센트 친 레거시 가이드 전문은 모든 사람이 열람할 수 있으며, vincentchin.org/legacy-guide에서 여러 언어로 무
료 다운로드할

기타 자원
아시안아메리칸정의진흥협회: www.advancingjustice-aajc.org/anti-asian-hate www.asianamtoolkit.org/the-toolkit
무슬림 애드버키트(Muslim Advocates): www.muslimadvocates.org/issue/hate-crimes
전미 아태변호사협회: www.napaba.org/page/HateCrimeResources
국립 아시아계 미국인 태평양 섬 주민 정신 건강 협회: www.naapimha.org/resources
OCA-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카 애드버키트: www.aapihatecrimes.org/resources
One Nation Commission: www.onenationaapi.com
스톱 AAPI 헤이트: www.stopaapihate.org

아시아계 미국인 재단: www.taaf.org/toolkit
위 아 티처스(We Are Teachers): www.weareteachers.com/resources-anti-asiandiscrimination

STAND UP AGAINST HATE

인정 반 아시아인 인종차별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교육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세요
강조 및 조직화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조직화를 통해 반 아시아인 인종차별과 모든 이들에 대한 증오를 널리 알리고 규탄하세요










반대 및 거부
반아시아적이거나 기타 인종차별적/혐오적 언어와 정책을 반대하고 거부하세요
대비
온라인 리소스와 소셜 미디어를 비롯한 집중 도구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대비시키세요
연습
나름의 강력한 대응과 방어를 연습하세요
가족과 친구를 준비
인종차별적 선입견, 욕설 및 괴롭힘에 대해 얘기하고, 대응을 위한 행동과 언어로 힘을 키우세요
신고
인종차별적 사건을 관련 당국과 언론에 알리세요
결과를 통한 책임
지역정부, 주정부, 미국 정부 공직자들에게 문의하세요

지원 아시아계 미국인, 하와이 원주민, 태평양 섬 주민과 기타 유색 인종
커뮤니티의 비영리 활동과 사업을 지원하세요
교육
각종 플랫폼과 미디어를 사용하여 의무 교육 및 고등 교육에 접근하고, 모든 정부기관의 공직자들이 아시아계 미국인 과정을 위한
리소스와 교사 지원을 제공하도록 독려하세요
이 레거시 가이드는 vincentchin.org에서 영어 및 기타 아시아 언어로 무료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vincentchin.org/legacy-guide). 도서관과 학교에서 사본을 구하는 방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빈센트 친 인스티튜트 (info@vincentchin.org)에 문의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