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리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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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쫓는 자는 빛에 다가갈수록 자신의 뒤에 지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것을 모른다. -

루드빅의 제안에 레스토랑에 들어가자 앨리셔를 알아본 직원이 미소를 지어온다. “앨리셔씨 오늘은 처음보는 분과 오셨군요?” “제 애인이에요” 경악하는 표정의 직원에게 “장난이에요” 라는 귓속말을 건네자 직원과 앨리셔 사이에서 웃음이 피어난다. 루드빅은 말없이 테이 블에 있는 손님들을 체크하고 문 밖에서 혹여 자신에게 시선을 보 내는 자가 없는지도 확인한다. “안내해드릴게요” “가죠 루드빅씨” 직원의 안내에 따라 루드빅과 앨리셔는 가장 구석에 있는 2인석 으로 안내받는다.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훑는 그녀를 선글라스 에 시선을 숨긴 채 관찰한다. “저에게 흥미가 생기셨나봐요?”


메뉴에 시선을 응시한 채로 앨리셔가 말한다. “조금은 생겼습니다” “기쁘네요 주인을 이해하려하는 반려견이라니” 동물취급을 받은 것에 기분이 상했으나 딱히 말로 표현은 않는 다. 애초에 자신이 불쾌함을 표현해도 그녀는 사과하지 않으리라. “당신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좋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관찰은.. 80점이에요” 앨리셔가 메뉴판을 접어서 그에게 건넨다. “아군이라면 완전히 저의 아군으로 두고 싶고, 적이 아니라면 아군으로 두고 싶어요 적이라면 살갑게 굴어서 허점을 만들고 싶 어요.. 그런 심정이랍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녀가 만약 헌터를 지망한다면 훌륭한 헌터가 될 것이라고 그 는 생각했다. 메뉴판을 건네려던 그녀의 손을 거절한다. “메뉴..안정할건가요?” “대충 오늘의 메뉴같은걸로 하겠습니다” 앨리셔는 선글라스를 벗어 자신이 입은 교복의 가슴주머니에 꽂 아두며 직원을 불렀다. 상냥한 미소로 길게 주문을 주고받자 직원


역시 미소로 답하며 자리를 떠난다. 루드빅은 직원이 떠나자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럼 저에게 건네주었던 타겟도 당신과 친목이 있습니까?” “있죠 응. 어느정도는요” 앨리셔는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잣말로 작게 “저번 추수감사절 파티 때 봤었나..” 하고 말한다. “이미 의뢰를 받은 시점에서 소용없는 충고입니다만 그렇다면 당신이 직접 사냥하는 편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후후..그건 우아하지 않잖아요?” 까다로운 여자다. 루드빅은 속으로 혀를 찼다. “루드빅씨는 체스란걸 아시나요?” “이론으론 압니다” 앨리셔는 테이블의 구석에 잘 접힌 채 쌓여있는 냅킨들에서 하 나 집어 무언가를 접기 시작했다. “왕을 잡는 것이 목적인 게임이지만 게임은 정작 체크를 당한 시점에서 끝나요 결국 왕은 죽는다는 결말은 눈에 담을 수 없죠” “.....그렇습니까?” 그저 흑과 백이 서로의 왕을 잡는 게임이다. 정도로만 알고 있 는 루드빅으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다.


“만약 루드빅씨가 현실로 체스를 옮겨와서 왕을 잡는 입장이라 면 어찌하실 건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전 병대를 꾸려서 전장에서 화려하게 왕을 잡기보다 왕이 방심했을 때를 기습해서 노리겠습니 다” “후훗.. 재밌는 감상이네요” 앨리셔가 냅킨에 두던 시선을 잠시 루드빅으로 옮기며 눈웃음을 짓는다. 루드빅은 그녀의 눈웃음이 진정으로 타인과의 관계형성에 큰 무기로 작용할 것임을 깨달았다. “저라면 말이죠 우선 킹을 이 게임의 룰 내에서 결국 잡지 못한 다면.. 최대한 정돈된 전략으로. 최대한 우아하게. 킹을 철저히 혼 자 남길 거예요” 루드빅은 자신의 테이블로 지나가는 손님을 향해 시선을 던졌 다. 화장실로 가려다가 지나친 걸로 보인다. 그의 눈에는 사이좋은 커플이 점심식사 전에 수다를 떠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킹을 혼자 남겨서.. 절망을 깨닫게 해주는 거죠. 넌 이 제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 하고 말이죠” “꽤 잔인한 사냥법이군요” “그런가요?” 냅킨이 꽃으로 변하자 앨리셔는 그것을 자신과 루드빅 사이에 올려둔다.


“그럼 제가 잡는 건 킹이 아닌 거군요” “후후.. 제 사냥법을 제대로 이해하셨네요 100점이에요”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체스의 기물 중 하나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킹에게 가장 큰 약점인 둘을 잡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루 드빅은 그녀의 ‘우아함’을 이해했다. 그렇게 그녀를 어느 정도 이해하자 음식이 나왔다. “루드빅씨 스테이크를 좋아하시죠?”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보고 루드빅은 살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루드빅씨의 집을 봤잖아요?” 원룸인 집의 구석에 있는 부엌을 본걸까.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유추해낸 정보가 루드빅으로선 짐작이 안될 만큼 정교하다. 직원이 모든 음식 서빙을 끝나고 물러나자 루드빅은 나이프를 집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훌륭한 사냥꾼이 될겁니다” “후후..이미 훌륭한 사냥개가 있으니 전 집에서 책이나 보겠어 요” 앨리셔는 앞에 놓인 파에야를 한 숟가락 떠먹더니 맛이 있어서 인지, 그와의 잡담이 맘에 들었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루드빅을 바라보았다.


상대에게 받은 신뢰를 포장지로 감싸서 사랑의 포옹을 나눌 때 포장 안에 숨겨둔 복수란 칼날로 찌른다. 그것이 가장 극적 이고 우아한 복수다. -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 루드빅은 이제 슬슬 들어가지 않으면 추적자에게 야습당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드빅씨 오늘 내내 추적자를 신경 쓰시던데요?” “알고 계셨습니까?” “좋지 않아요 데이트 중에 한눈을 팔다니” 애초에 데이트도 아니지 않았는가. 고 생각했다. 그녀의 본심은 미소와 상냥한 어조에 숨겨져 있어서 가뜩이나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는 루드빅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나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품은건가? “후후.. 지금 루드빅씨 제가 루드빅씨에게 사랑에 빠졌나? 하고 고민하셨나요?” “......어떻게 압니까” 선글라스로 시선도 가리고 있고 누가보아도 무표정이었으리라.


루드빅은 속으로 놀랐다. “여자의 감이죠” 대답으로선 탐탁지 않았지만 루드빅 역시 사냥꾼의 감으로 사냥 을 성공한 적이 여러 있었다. 굳이 더 캐묻진 않았다. “이정도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한 하루였던 것 같아요” “그렇군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라는 그녀의 본질에 대한 이해라 기엔 모호한 결과를 도출하였지만.. 이라고 루드빅은 속으로 생각 했다. “그리고 추적자라면 걱정 말아요”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앨리셔는 작은 팬던트를 주머니에서 꺼내보인다. “그건..” “눈에 익죠?” 앨리셔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당신을 쫓는 단체.. 이름은 뭐더라.. 적어도 그들을 이 구역 내 에는 다 죽었을 거예요” “...........”


수가 만만치 않은 집단이었다. 루드빅은 선글라스를 벗어 말없 이 눈으로만 의문을 표현했다. “여기, 글림듀는 헬리오스의 통제구역이니까요. 수상한 단체는 소탕해두는 것이 좋죠” 앨리셔는 그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가 최근에 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변사체들의 신분에 대한 조사를 마쳐두었다. 그가 우발 적으로 사냥을 해서 시체를 길바닥에 남겼다는 것은 그를 추적하 던, -본인이 사냥꾼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다가가 사냥감이 되어버 린- 사람인 것이 자명하므로 앨리셔는 임무로 가장해 헬리오스 소 속의 능력자들을 파견해둔 것이다. “그럼 왜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냥개가 얼마나 냄새를 자주 맡는지 관찰했어요 아뇨 사실은 말하려던 걸 까먹은 걸지도 모르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는 그녀를 보고 루드빅은 분명히 진 실은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의 저는 합격입니까?” “사냥개로선 우수해요 하지만 저와 이대로 다니려면 사회에 좀 더 순하게 녹아들 필요가 있어요” ‘이대로 다니려면’ 이라니 앞으로도 이렇게 둘이 같이 있어야한 단 말인가.


“자꾸 시선으로만 말하지 말아요. 주인에 대한 무례랍니다? 여 하튼 눈에 빤히 보이는 표정을 외면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말해 두면..” 무표정을 일관하는 그의 어디에서 심리를 읽었는지 그녀는 그의 마음을 잘도 읽어선 말을 늘어놓는다. “저와 함께 일주일간 다니면서 해주실 일들이 있어요” “그게 앞서 주었던 모녀지간을 사냥하는 데에 중요한 일입니 까?”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죠 체스, 아까 말했죠? 모든 건 킹을 철저히 혼자 남겨두기 위한 작전이에요” 본래의 그라면 추가적인 의뢰는 받지 않지만 그녀의 말은 어째 서인지 쉽게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은 아침 9시에 글림듀에 있는 공원에서 만나기로해 요” “.....데이트입니까?” “후후.. 농담도 참.. 사냥을 할 거예요” 선글라스를 벗은 탓인지 유독 그녀의 미소가 환하게 느껴진다. “미스 캘런” “네?” “전 농담을 하지 않습니다”


루드빅은 처음으로 그녀가 가식어린 미소나 표정이 아닌 진심이 우러나온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음을 보았다. (놀란 표정이라고 느꼈 지만 그건 아주 살짝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정도였다.) “그렇군요. 참고해두죠.” 살짝 붉어진 앨리셔는 고개를 살짝 고개를 돌리고 나자 감정을 다잡았는지 홍조는 온데간데없는, 평소와 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일 만나요. 루드빅씨” “알겠습니다. 미스 캘런” 그 말을 끝으로 집에 돌아온 루드빅은 정말로 오랜만에 추적자 를 신경 쓰지 않은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마음의 틈 새에 자신의 의뢰인이 스며들어왔다. 앨리셔 캘런. 생각할수록 흥미로운 여자다. 그녀는 유능하지만 그것을 뽐내지 않고, 냉정하지만 상냥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어쩌 면 자신보다 완벽하고 유능하게 이 세상에 적응된 사냥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10분 일찍 도착해있자는 마음으로 루드빅은 9시 약속에 맞춰 8 시48분에 자신의 원룸에 있는 옥상으로 올라왔다. 이미 루트는 숙 지했지만 다시금 지도를 펼쳐선 자신이 본 지도와 실제가 똑같은 지 다시금 확인해둔다.


“완벽하군” 목표를 추적하기 위해 불규칙하게 움직여왔던 그에게 이렇게 타 인과의 약속장소로 나간다는 행위는 익숙하지 않다. “그럼..” 옥상에서 건너편 옥상으로. 그렇게 발을 디딘 찰나에 다시 건너 편으로. 말 그대로 빛이 되어 이동한 그는 도보로는 15분은 걸릴 공원에 2분 만에 도달했다. “꽤 빠르시네요?” “데이트가 아닌 일인 이상 철저히 지키려 했습니다” “데이트여도 이렇게 일찍 나와주세요” 10분 일찍 나왔음에도 그녀는 어제와 같은 교복을 입고 어깨엔 남색 메신저백을 맨 채 공원 입구에서 그를 맞이했다. “미스 캘런은 어째서 일찍 나오셨습니까?” “사전준비가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럼 들어갈까요?” “알겠습니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그녀는 태연하게 자신의 일이라는 듯이


공원의 입구를 자물쇠로 잠갔다. “......?” “사전준비로 공원경비원에게 미화작업 후 10분간의 시간을 허락 받았어요” 그녀는 그 말을 뒤로 그와 함께 공원을 걸으면서 설명을 보충했 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공원미화작업으로 인해 평소엔 24 시간 개방하는 공원이 6시부터 10시까지 입구가 잠겨있음을, 그리 고 우리는 우리가 허락받은 10시부터 10분 내로 공원에 있는 목표 를 처리하는 것이 오늘의 일임을 이야기했다. “서로 일찍 온 덕에 지금 55분이니 15분이나 있는 거네요” “죄송하지만 그렇게 버거운 적입니까?” “아뇨. 당신이 찾아주었으면 하는 게 있어요” 앨리셔는 매고 온 백에서 그림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받아본 루 드빅의 표정이 무표정을 일관하고 있었지만 앨리셔는 그가 당황하 고 있음을 눈치 채고 그가 귀엽다고 느꼈다. “......토끼지 않습니까” “네 토끼죠” 루드빅은 설명을 요구하듯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어제 말했죠? 표정으로 말하지 말라구요” “설명을 부탁합니다”


고분고분 부탁하는 그를 만족스러운 미소로 화답하며 그녀는 입 을 열었다. “이 토끼는 몇 달 전에 이 공원에서 풀려나서 지금도 공원 어딘 가에 있다고 추정되는 아이에요” “추정되는 입니까?” “일단은 미화작업하는 분들과 경비원에게 물어봤어요 점박이 토 끼여서인지 본 것 같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었답니다” 샬럿이 만든 호수에 도달하자 앨리셔는 의자에 앉았다. 살짝 의 자가 차가웠는지 몸을 살짝 떨었다. “그리고 최소 이틀 전에 이 그림을 그려준 아이가 이 토끼를 여 기서 봤다고 했어요” 이 그림을 그린 소녀-샬럿-는 자신이 만든 이 호수를 좋아해서 꾸준히 이 공원을 들른다. 그녀의 목격정보가 있으니 앨리셔 입장 에서는 자신이 손이 닿는 범위에서 모든 정보를 모은 셈이다. “......뭐하세요?” “......무슨 말입니까” 의자에 앉아있던 앨리셔가 백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뚜껑에다가 내용물을 따르자 달콤한 홍차향이 그의 코까지 닿는다. “찾으셔야죠”


“.......알겠습니다” “아 제가 작은 선물을 드릴게요” 추적에 좋은 도구일까 싶어 가만히 있는 그에게 그녀가 작은 별 모양의 빛을 그의 가슴 쪽에 날린다. 따뜻한 빛이 차가운 아침 공 기를 밀어내어 몸이 고양된다. “축복을-” 눈웃음 짓는 그녀를 보고 그는 말없이 째려보다가 빛이 되어 사 라졌다. 5분 뒤. “예상보다 일찍 찾으셨네요” “..........” 자신의 자캣 여기저기에 붙은 풀을 떨어뜨리며 루드빅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토끼를 그녀에게 건네었다. “루드빅씨가 들고 있어요 그래야 작전이 성공한답니다?” “.....” 루드빅은 진심으로 토끼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 싶어졌다.


“저는 티타임중이니 이것도 부탁할게요” 앨리셔는 태연하게 공원 열쇠를 토끼를 쥐고 있는 그의 손끝에 걸었다. “........................” 빛이 되어 사라졌던 루드빅이 다시금 그녀의 앞에 등장한다. “제대로 열어두셨죠?” “물론입니다” 그럼..하고 앨리셔는 자신이 앉은 벤치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톡톡 쳤다. “여기 앉아서 절친한 친구처럼 연기해주세요” “미스 캘런. 진지한 질문입니다만” “네 말하세요” 그는 일단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그녀가 몸을 돌려 그를 마주본 다. 그의 품에 있는 토끼가 빛이 되어 이동한 것이 속에 안 좋았 는지, 그의 손에 무심결에 들어간 힘이 몸에 불편한지 몸을 바들 거리고 있다. “이 임무의 전말을 알려주시죠” “어머.. 깜빡하고 말을 안했네요.. 사냥개가 설마 주인의 뜻을 궁 금해 할 줄은 몰랐지 뭐에요?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이미 충분히 무례를 저지른 그녀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 을 열었다. “그 토끼는 말이죠 어느 소녀가 ‘이쁘다’고 말한 토끼에요” “그게 끝입니까?” “그 소녀는 주말마다 이 시간에 부모와 함께 산책해요. 공원미 화로 닫혀 있다가 열린 이곳은 인적이 특히 없거든요” “이해했습니다” 그 소녀와 부모 중 어머니 쪽이 그녀가 의뢰한 목표이리라. “오늘은 아주 우연히도 소녀의 아버지가 다니는 직장에서 긴급 한 일이 생겨서 말이죠 오늘만은 모녀가 함께 산책해요” “그럼 이 토끼로 유인한다는 겁니까?” 앨리셔가 장난스레 미간을 찌푸린다. “주인의 말이 끝날 때까지 차분히 들어주겠어요?” “알겠습니다..” 앨리셔는 토끼를 그에게서 받아들고 대신 그 손에 자신이 따른 홍차를 준다. 토끼는 그녀의 품에서 쓰다듬어지자 눈을 껌뻑거리 며 졸린 듯이 얌전히 있는다. “토끼가 몇 달 전에 풀렸다고 했었죠?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 가 토끼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토끼를 풀어둔 거예요 로맨틱하 죠?”


왜 토끼를 직접 사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앨리셔는 그 의 심중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준비하여 만들어낸 우연이 더 인생에 각인되니까요” ‘아마 어쩌면 그냥 애완동물로는 키우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 르죠’ 하고 그녀가 작게 말을 덧붙인다. “여하튼 이 점박이 토끼는 소녀가 산책할 때마다 ‘로라’ 라고 지 어두고 숨바꼭질 하듯 찾던 토끼에요 하지만 여느 토끼나 그렇듯 사람 손에는 잘 잡히지 않죠. 더군다나 이 공원, 잔디밭에는 사람 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니까요” 루드빅은 자신이 그 토끼를 찾은 곳이 잔디밭 깊은 곳에 우거진 나무숲이었음을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루드빅씨의 능력. 빛으로 마킹해둔 대상이면 그곳으로 순간이동 하듯 이동하죠?” 그녀의 말에 그는 심중을 파악하고 토끼에 빛을 마킹해둔다. “마킹은 얼마나 지속되나요?” “그렇게 길지는 않습니다” 음.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하고 그녀가 말을 덧붙인다. “그럼 토끼와 함께 타겟의 집까지 이동해야겠어요”


“....진심이십니까?” “어제의 루드빅씨에게 배워서 오늘의 전 농담을 모른답니다?” 환히 웃는 그녀를 보고 루드빅은 머리가 어질해진 기분이 들었 다. 그렇게 그녀는 그와 아무렇지도 않게 공원에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위해 티타임을 가졌다. 시간이 좀 지나자 화목해 보이는 모녀가 앨리셔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어머 앨리셔양 호수를 보며 티타임을 가지시는 건가요?” “크루그먼 부인께선 따님과 산책인가요?” 이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앨리셔는 이런 우연이-라고 진심어린 어조로 말하며 딸과도 환하게 인사를 나눈다. 그러던 딸이 루드빅 의 품에 있던 토끼를 보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 “로라!” “공원에서 우연히 잡은 토끼인데 이름도 있니?” “이 아이가 멋대로 지은 거예요 이 공원에 몇 없는 점박이 토끼 거든요” 루드빅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정말 몰랐다는 듯이 놀 란 표정을 태연히 짓는 앨리셔를 보며 한쪽 눈썹만 추켜올렸다.


“그럼 이 토끼 줄게” “정말 언니!?” 그녀의 말에 루드빅이 토끼를 건넨다. “앨리셔양 근데 옆에 있는 남자는..” “남자친구에요” 루드빅은 살짝 눈이 크게 떠졌으나 다행히 부인과 딸 쪽이 크게 놀라 앨리셔의 시선을 끌었다. “비밀로 해주셔야해요 후후..” “그럴게요 명왕의 양녀가 애인이라니, 파파라치가 물기 딱 좋은 소재네요”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만 데이트해야 해 요” 루드빅은 계속 말없이 있음에도 모녀는 앨리셔의 미소와 말솜씨 에 이끌려 그의 침묵에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부디 윌라드씨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 분도 은근 그런 면 에서 고지식하시니까요..” “그 이가 그렇긴 하죠 여자끼리의 비밀로 해요 우리” 여자의 비밀을 이어서 토끼를 품에 안고 연신 쓰다듬는 딸을 사 이에 두고 앨리셔와 부인은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었다.


“아 맞아 혹시 단 둘이 있으실 때 제 애인을 본다면 환하게 인 사해주세요. 이 사람, 포트레너드에 온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물론이죠” “응!” 심지어 딸과는 새끼손가락으로 약속까지 한다. 루드빅은 암살을 부탁해놓고 잘도 저런 평범한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름이..” “루트비히 빌데랍니다” 그녀가 그리 말하며 시선을 던지자 루드빅은 일부러 독일 악센 트를 강조하며 “루트비히 빌데입니다” 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영국까지 오시다니 유학?” “네 같이 밀러장학재단 유학생이에요” 명왕이 설립한, 앨리셔가 수석으로 속한 장학재단의 이름을 거 론하자 그녀는 딱히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제 슬슬 사람이 많아질 시간이니 저흰 가볼게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너무 붙잡았네” “괜찮으시면 같이 산책하시겠어요?” 본래 목적상 함께 이동하는 것이 필수불가결이었으나 그녀는 일 부러 마침 생각난 듯이 제안했다.


“어머.. 그게.. 그 이가 우리 집은..” 앨리셔는 윌라드가 자신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자신의 집 주소 를 숨기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환히 웃으며 말했다. “여자끼리의 비밀로 하죠 서로서로 비밀을 하나씩 가지는 거, 좋잖아요?” 그렇게 루드빅은 자연스럽게 목표와 일면식을 갖고 주소까지 알 아내었다. 이렇게까지 이루어지면 루드빅 입장에선 이후의 사냥은 실패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집까지 이동해서 차까지 대접받은 통에 둘이 거리를 나왔을 땐 한낮이었다. 12월의 추위도 한낮에는 한결 낫다. “어때요 이정도면 충분하죠?” “충분합니다” 루드빅은 그녀의 얼굴을 다시금 보았다. “제가 너무 잔혹한 여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자신이 전날 살해를 의뢰한 대상들과 암살자를 두고 자연스레 대화를 이끄는 것도 모자라 암살자와 암살대상과의 친분까지 태연 히 쌓아주다니, 평범한 정신의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리라.


“하지만 그 남자가 저에게 준 거에 비하면, 그 남자가 절 태연 히 대한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매우 신사적이랍니다” “그 남자..라면 그 가족의 가장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모르시나봐요?” “모릅니다” ‘사람에겐 관심이 없어서’ 라고 작게 말하자 앨리셔는 알 수 없 는 표정을 짓는다. “뭐 몰라도 상관없죠 설령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는 거여도 상관없어요” “정말로 모릅니다” “그럼 혹시 저에 대해선..” “당신도 정말로 모릅니다” 앨리셔는 장난기 있게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다. “하여간 신문 좀 보고 살아요 루드빅씨 윌라드씨는 몰라도 전 나름 유명인이라구요” “대충 그런 분인건 알겠습니다” 앨리셔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걸로 타겟은 언제든지 암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맘이 편해졌어요” “그럼 이제 무얼하면 됩니까?”


루드빅의 질문에 앨리셔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건 여자의 비밀이에요” 루드빅은 그 모습에 입꼬리를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어머 지금 웃은거에요?” “아닙니다” “훗-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닙니다” 그렇게 둘은 거리의 풍경에 녹아나듯이 사라졌다. ‘정말로 그는 모를까?’ 앨리셔는 이 정도까지 이야기가 진행되면 아무리 그여도 자신과 윌라드의 원한에 자신이 껴있음을, 자신이 그녀의 부모를 죽였던 사실을 기억해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모를 줄이야. 앨리셔는 속으로 다행이라 생 각했다. 만에 하나 그가 그녀와의 과거의 인연을 깨닫고 그녀의 계산 밖의 행동을 하면 그녀는 그를 죽인다는 계획을 머뭇거렸을 지도 모른다. ‘사냥이 끝나면 주인에게 죽임을 당할 거란 생각하지 못하다니


어리석은 사람..’ 팔짱을 끼며 그의 팔을 매만져본다. 너무 자신의 계산대로 흘러 가 김이 빠질 정도다. 앨리셔는 일주일 전에 두었던 브뤼노와의 체스가 더 머리를 쓰고 긴장감이 돌았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당신은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루드빅은 전날 밤에 그녀의 생각이 차오르면서 떠오른 기억에 자신이 여태껏 해왔던 의뢰의 내용들을 훑어보았다. 캘런 부부. 그 의뢰를 찾았을 때 루드빅은 자신이 드디어 오롯이 그녀를 이해했 다고 느꼈다. 자신이 소중한 것을 빼앗긴 만큼 그에게서도 빼앗는다. 심플하 지만 심플하기에 아름다운 사고방식이다. 심지어 그도 그녀도, 소 중한 것을 빼앗는 데에 자신을 사냥꾼으로 쓰고 있다. ‘제가 자의로 직접 사냥하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그녀의 눈이 놀람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고 싶다. 세상의 대부 분의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돌아갈 그녀가,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 는 사냥개에게 목이 물렸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면 무심 코 웃음이 나온다. 자신의 웃음의 의미를 모르는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온다. 이대로 곁에 두면서 미묘한 남녀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와 자신은 연인과 비슷한 상황도 연출될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흥미로우니 지금은 일단 지켜보자. 그녀는 여러모로 자신을 재미있게 해주는 사람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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