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엘리

Page 1

아무리 영국이지만 이정도의 폭우는 기록적이다. 피터 모나헌은 평소보다 큰 우산을 쓰고 왔음에도 바지 끝이 젖어오는 것에 적잖 이 불쾌했다. “여 소년” 비를 피해 폐건물 입구에 서있던 중년이 말을 걸어온다. 피터가 그에게 시선을 보내자 중년은 품안에서 지하연합 소속임을 인증하 는 증서를 보인다. “안 봐도 알아 아저씨” 헬리오스에 비하면 지하연합은 비능력자 소속원의 수가 많지 않 다.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면서 자발적으로 돕는 사람이거나 퇴역 군인들로 구성되어 이제 10년을 넘게 지하연합에 있는 피터의 눈 에는 이름은 몰라도 얼굴이 눈에 익은 사람이 여러 있다. “미안하지만 노란불이다” 노란불은 정찰임무를 하고 온 사람들이 말해주는 암호다. 신호 등에 비유해서 해당임무를 속행할지 보류를 할지 정하는 것이다. 피터는 살짝 놀란 듯 말했다. “노란불이라니 정말 오랜만이네” 보통은 파란불이나 빨간불로 심플하게 나누어지는 정찰임무에서 노란불이라니.. 어지간히 미묘한 일이거나 정찰요원이 병적으로 조


심스러운 사람인 경우다. “어린 아이를 사지로 보내는데 함부로 정할 수 없지” 피터는 속으로 그가 후자에 속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노란불 이란건 비능력자인 아저씨 본인이 위험한 사지로 더 깊이 들어가 는거라고..’ 라며 속으로 말했다. “되도록이면 대충 정해줘 늙은 아저씨를 무리시키는 것도 맘이 편치 않아” 겉으론 퉁명스레 말했지만 그런 피터의 말에 아저씨는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서로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중년의 마음씀씀이라고 생각하셔” “응 알았어..” 생각해보니 그럼 오늘은 이대로 임무가 끝인가. 그리 생각하니 피터는 폭우로 나빠졌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럼 무리하지 말아 아저씨” “소년 다음 주에 생일이지?” 돌아서 걸어가려던 피터가 잠시 발을 멈춘다. “응” “선물. 받고 싶은 거 있나?”


“박봉인 아저씨의 등골을 뺏어먹고 싶지 않아” “20살 선물정도는 등골을 빼서라도 주고 싶은 법이야” 자신의 나이와 생일까지 알다니, 피터는 마지못해 머릿속으로 선물을 생각해보았다. “그럼.. 넥타이정도로 할래” “그래 알았다 중년의 센스로 멋들어진 걸 사줄 테니 기대하라 고” 이렇게 임무에 완벽주의자에 능력자에게 마음까지 주는 사람이 오래 살아있다니, 피터는 속으로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생각했 다. 저 사람의 이름과 생일정도는 나중에 요기 라즈에게 물어봐두 자. 그렇게 생각하며 피터는 그에게 손인사를 건네며 집으로 돌아 갔다.

Waltz 그 정찰임무를 한지 3일. 피터는 그 날 세탁을 맡겼던 코트를 입으면서 안에 입은 와이셔츠의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 붉은색 넥 타이를 보자 불현 듯 그 비오던 날이 생각났다.


‘그 아저씨. 임무는 어찌 되었으려나’ 성격이 좋은 사람이 혼자서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것이 맘 이 좋지 않았다. 되도록 자신 외의 다른 형이나 누나들이 임무를 인계받아 끝냈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피터어 어디가?” 2층 침대에서 금발머리가 사르륵 내려온다. 붉은색 후드 잠옷을 입은 금발 청안의 미소녀가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본다. “아침 사러” ‘너는 아침 직접 안 해먹잖아’ 라고 마음속으로 문장을 맺는다. “헤에 사먹는구나. 그럼 나도 햄버거 사줘” 피터는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 코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햄 버거 가게의 쿠폰도 챙겨두었다. “싫어 나 샌드위치 먹을거니까 너도 그냥 샌드위치해” “뭐야아아아 난 비비 햄버거가 좋단말야” 비비 햄버거란 그녀가 지하연합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꾸준히 좋 아하는, 그들이 있는 지하연합 기숙사 건물 맞은편에 있는 햄버거 가게의 이름이다.


“비비 햄버거면 네가 나가서 사먹으면 되잖아” “귀찮아 아직 졸립단 말야” 피터는 거울로 넥타이 매듭을 확인하고 코트의 단추를 잠갔다. “알았어 사줄게” “정말!? 사랑해 피터!” ‘그런 말 가볍게 하지마’ 라고 속으로 생각하곤 필기구나 서류, 종이들이 들어있는 서류가방을 한손에 든다. 임무를 나가는건 아 니지만 어린 시절부터 가방을 메고 다니다보니 직업병처럼 필기구 가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맨 몸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아 기 분이 안좋다. “진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에에 진심을 담은건데” 기숙사 문을 나서려는 피터가 잠시 발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 았다. “샌드위치 사와도 사랑할거야?” “아니 그땐 애증이야!!” 미간을 찡그리는 그녀를 보고 피터는 문 밖을 나섰다.


그녀와 같이 살게 된 데에는 그녀가 사춘기에 접어든 것에 있었 다. “나 이글아저씨랑 같이 살거야!” 2년 전 크리스마스. 그녀의 16살 생일이 10분 남았을 무렵이었 다. 다 같이 모여서 파티를 할 때 그녀가 그리 말하자 그곳에 모 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다. “30대 중반이 가까워지는 총각이랑 같이 살겠다고? 엘리 그건 인생의 황금기인 사춘기를 에딘버러 앞바다에 투척해서 애버딘까 지 흘려보내는 거라고” 분홍빛 머리의 전직 경찰관의 말에 피터는 속으로 ‘애초에 그렇 게 비유할거면 도버해협으로 비유하지... 지도상으론 가깝지만 북 해의 해류 상 네덜란드로 갈 텐데’ 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했다. “아니 사춘기기 이전에 엘리.. 남자와 동거라니..” 그녀의 보모역할인 나이오비는 취기가 확 달아났는지 마시던 맥 주잔을 내려놓고 엘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렇게 취기가 오른 얼 굴을 마주보고 잔소리한다고 진정성이 생기는 건 아닐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피터는 혼자 살잖아!”


맘속으로 이런저런 뒷생각을 하던 자신에게 이야기의 화살이 돌 아오자 피터는 음료수를 마시던 포즈 그대로 주변을 두리번거렸 다. “그야 피터는 혼자 사는 거고 기숙사니까..” 평소와 다르게 머리를 내리고 안경을 쓴 토마스가 변호를 나서 주었다. 말 그대로 자신은 최근까지 토마스와 같이 살다가 18살 생일을 맞아 기숙사에 들어갔다. 딱히 혼자 살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는 건 아니었으나 자신이 그 집에 있는 계속 있는 이상 자신 의 소년기를 돌봐준 토마스에게 성인인 자신의 미래까지 부탁하는 것 같아 맘이 편치 않았다. “철 좀 들어라. 러브” 피터는 언제부턴가 그녀의 이름을 놀릴 때마다 미들네임으로 불 렀다. “철이 들어서 이런 결정을 한거야!” 거의 입에서 폭죽을 뿜어내듯 열변을 토하는 그녀를 보며 피터 는 유리창으로 풍경을 보듯 멀찌감치 음료수를 마시면서 있었다. 물결처럼 파도치는 금발의 머리. 사파이어같이 빛나는 눈. 새하 얀 피부에 그녀가 좋아하는 붉은색 후드 코트를 입은 그녀는 자신 이 처음 봤던 6살 시절의 그녀와 달랐다.


‘내가 달라진 널 보고 이런 생각하는데 넌 어떨까’ 분명 아무생각 없을 거야. 하고 피터는 속으로 자조 섞인 답을 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당사자인 이글씨의 의견은 어떠셔?” 결론이 나지 않자 파티의 가장자리에서 맥주를 한가득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휴톤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엥?” 얼빠진 이글의 대답에 주변이 침묵한다. 피터는 어째선지 긴장 감에 목이 타서 음료수를 한 병 더 따서 마시기로 했고, 그렇게 자리에 일어나서 조용히 음료수가 담긴 상자로 걸어가는 그의 모 습이 이글의 눈에 띄었다. “피터랑 같이 사는 건 어때!? 둘이 나이도 비슷한 동료에다가 거기 기숙사! 원룸이지만 2층 침대라며?” 피터는 음료수 병을 들고 염동으로 뚜껑을 따려다가 당황하여 병목부분을 염동력으로 잘랐다. “이글씨 아무래도 그건 좀.. 일단 사춘기 남자 여자인데..” 토마스가 난처한지 의견을 던졌지만 주변은 의외로 괜찮은데? 하는 반응이었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낸 소꿉친구인 이


둘의 사이가 어른들 눈에는 이성이기 이전에 앞으로 인생을 함께 해쳐나가야 할 동년배기 동료로 보였나보다. “엘리 넌 어때? 이글이 아니여서 싫지?” 역시 어머니나 다름없는 나이오비 입장에선 피터와 같이 사는 것도 불안했나보다. 피터는 ‘그래그래. 나와 살지 말고 엄마랑 같 이 살아’ 하고 생각하며 병목이 날라 간 음료수를 마셨다. “흥..어쩔 수 없지 뭐..” 엘리 입장에선 이대로 사는 것보단 일단 나가서 사는 것으로 타 협을 본 듯 했다. 피터는 그렇게 마시던 음료수를 한가득 벽에 토 해냈고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생일 축하해 엘리!” 나이오비의 그 말을 필두로 이리저리 생일 축하한단 말이 터져 나왔고. “내가 왜 너랑 살아야해!?” “바보! 누군 너와 살고 싶어서 그렇게 정한건줄 알아!? 피터 완 전 싫어!! 아예 그 집에서 나와서 길바닥에서 지내는게 어때!?” 생일 축하의 함성에 지지 않을 만큼 둘은 5분간 말싸움을 거듭 했다.


결국 2년간 이렇게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도 그 둘이 서로 사 랑하길 놀리는 것보다 같이 어린 시절을 공유하며 지낸 동년배기 능력자는 드무니까 서로 싸우지 말고 아끼며 살라는 격려뿐이었 다. ‘자각 좀 해주시라구요 형, 누나들’ 햄버거를 주문하면서 토마스가 작년 생일에 사주었던 가죽지갑 에서 돈을 꺼내었다. 그리곤 안주머니에서 엘리가 마찬가지로 작 년 생일에 사준 별똥별이 그려진 부직포 지갑에서 쿠폰을 꺼냈다. “20번이나 도장을 찍으셨는데 보너스 햄버거는 안받아가셨네 요?” “나중에 일행과 와서 2개를 한 번에 먹을게요” 자신은 햄버거를 싫어해서 먹지 않으니 벌써 최근에 그녀의 심 부름을 20번이나 했다는 말이 된다. 그전까진 10번 찍을 때마다 엘리에게 주었으나 엘리는 그걸 이글에게 주는 것 같아서 이젠 자 신이 모아보기로 했다. “이거, 본인이 먹는게 아니에요?” 아침마다 자주 사가는 손님인만큼 종업원도 개인에게 흥미가 생 기는 듯 하다.


“네 같이 사는 사람이 좋아해요” “애인분이시군요?” “네에?” 평소답지 않게 놀라는 피터. “애인정도가 아니면 이렇게 자주 사러오지 않아요” 종업원이 웃으면서 포장된 햄버거를 건네자 피터는 그것을 낚아 채듯 받아들었다. “애인 아니에요 동료에요” “그럼 고백해서 연인사이가 되어보는 건 어때요? 애인, 없으시 죠?” 여자 종업원의 말에 피터는 속으로 ‘하여간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남의 사랑에 관심이 많은지’ 하고 생각했다. “없지만 그녀는 무인도와 떨어져도 사귀지 않을거에요” 코트 주머니에 지갑을 넣으며 피터는 가게를 나섰다. 그렇게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사들고 기숙사에 돌아오니 토마스 가 있었다.


“웬일이야 형? 여기에 다오고” 식탁 위에 사고 온 것을 내려둔 피터는 그제야 토마스의 옷차림 이 평소와 다르게 검은 양복인 것을 보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양복이야” 누군가 죽었구나. 그렇게 피터는 생각했다. “엘리는?” “화장실에서 씻고 있어” 토마스의 그 대답을 듣고 화장실 쪽에 귀를 기울이니 훌쩍이는 소리와 물소리가 작게나마 들렸다.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있어?” 엘리는 누가 죽던, 실제로 얼굴 한번 안본 사람이어도 눈물을 흘린다. 저렇게 마음 약하게 10년은 넘게 능력자로서 임무에 나가 다니 항상 생각해도 대단하다고 피터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야” 양복주머니에서 작은 상자와 서류를 꺼내서 건네준다. 피터는 그 안에 담긴 사진을 보고 서류가 구겨질 만큼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상자는 유품이야 유족이 전해주라고 그랬어”


함께 받은 상자에는 파란색 넥타이가 들어있다. 피터는 빠르게 서류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정찰임무 중 부주의하게 추적자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양 복점에서 넥타이를 사고 나오던 시점에 기습을 당해 사망. 마음이 휘청거려 눈마저 어지럽다. 피터는 서류와 상자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글과 나이오비가 그 일을 맺으러 갔어” 동료가 죽었으니 응당 보복을 하러 간 것이리라. “.....응 알았어” 그 순간 화장실 문이 열리고 눈이 붉어진 엘리가 양복치마에 하 얀 와이셔츠를 입고 나온다. “피터 괜찮아?” 토마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의 안부를 묻는 그 녀의 말에 피터는 답 없이 옷장에서 검은 양복을 꺼내었다. 이 양복은 어린 시절부터 몇 년을 꺼내 입어도 손에 무겁다. 코 트를 벗어 침대에 던져두고 양복을 들고 화장실로 걸어간다. “피터”


토마스의 말에 돌아보자 작은 상자가 날아와 손에 잡아본다. “그걸 매고 가자” 넥타이가 담긴 상자를 보고 피터는 다시금 눈이 어지러웠다. 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피터는 화장실 문을 닫았다. ‘늙어서 박봉받고 지내고 있었으면 몸을 사리라고..’ 상자 겉에 금색으로 파여진 명품가게의 이름을 보고 피터는 상 자를 화장실 벽으로 던졌다. 글림듀의 호수공원 근처에 있는 공동묘지에 검은 양복을 입은 능력자와 비능력자들이 한데 모여 있다. 피터는 계속 그를 생각하 면 마음이 아파 주변의 묘비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원래는 적었지’ 자신이 어린 시절. 처음 참가했던 장례식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엘리는 나이오비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 묻혔 던 사람의 묘지는 까마득히 멀리서 보일만큼 많은 사람들이 더 죽 었다. ‘지긋지긋하다’


묘비를 볼수록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결처럼 장례식에서 울던 엘리가 떠오른다. ‘잘도 저렇게 우네’ 그와 추억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예 모르던 사람인데 자 신의 사연을 듣고 울컥한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장례식 때마 다 운다. 토마스는 침울하지만 평온한 톤으로 추도문을 계속 읊는다. 옛 날부터 추도문은 그의 역할이었다. 눈물을 터뜨리며 앉아있는 유 족들 주변엔 모두 상심한 표정으로 지하연합의 사람들이 서있다. 이젠 그들도 한 명 한 명의 죽음에 눈물 흘리며 살기엔 이 세상에 죽음이 너무 만연함을 깨달은 것이리라. 그래서 유독 엘리의 울음만 크게 들려온다. “피터어...” 평소라면 나이오비나 이글의 품에 안겨 울었겠지만 오늘 그들은 추모전투에 나섰다. 피터는 자신의 품에서 양복을 적시며 우는 그 녀의 등을 다독이고 있었다. 평소에 붉은색 옷을 입는 그녀인 만 큼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는 건 마음이 묘하다. “피터” 토마스가 자신을 부르면서 국화 한 송이를 건넨다. 피터는 엘리 를 잠시 품에서 떠나보내고 그것을 들어 관 위에 올렸다. 뒤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엘리의 소리가 들려 맘이 괜히 더 아프다. 유가 족에게 인사할 때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는지 그들은 자신의 손을 잡았다. 이번 장례식은 마음이 너무 무겁다. 피터는 그리 생각하며 빨리 장례식이 끝나길 속으로 바랐다. 장례식이 끝나고 피터와 엘리는 기숙사를 향해 걸어가기로 했 다. 평소라면 엘리는 나이오비의 집에 있는 자신의 옛날 방에서 울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그녀가 없으니 결국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공동묘지의 밖으로 나설 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헤이” 뒤를 돌아보자 눈앞에 날아오는 열쇠를 엉겁결에 받는다. “형..” 검은 양복을 입은 커플이 자신을 보고 있다. 루이스와 트리비아 는 피터의 목에 매여진, 장례식에서 평소에 매던 넥타이와 다른 그것을 보고 잠시 말을 삼켰다. “차 빌려줄테니까 타고가” 루이스가 턱으로 엘리를 가리킨다.


“응 그럴게 그럼” “망가뜨리지 말라고” 일부러 던지는 농담에 피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더 망가질 곳이 남아있으면 주의할게” 쓸데없이 여기의 형과 누나들은 마음씀씀이가 여리다. 자신은 분명 저 나이 때까지 지하연합에 몸을 담그고 있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다. 그렇게 그의 차에 타자 엘리는 운전석에 앉는 피터를 보고 눈물 맺힌 눈을 동그랗게 뜬다. “면허 있었어..?” “따두었어” 최근에 이글의 운전을 타고 임무에 나서다가 결국 자신이 운전 대를 잡는 것이 낫겠다 싶어 따두었었다. 피터는 넥타이를 풀고 앞 단추를 풀어서 자세를 잡았다. 낡은 차의 시동이 걸리고 달리 자 불편한 승차감보단 시원하게 차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이 좋게 느껴졌다. “피터는 괜찮아..?” “응”


분명 죽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겠지. “애초에 그 날에만 친하게 이야기 했었고..” 신호등에 멈추자 옆을 보았다. 엘리도 차창의 바람이 좋았는지 턱을 괴고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봐도 검정 양복의 그녀 는 낯설다. “그래도..선물까지 받아버렸잖아” 룸미러를 올려다봐 자신의 목에 있는 넥타이를 보았다. 잠시 생 각에 잠기느라 제때 액셀을 밟지 못했다. 다시금 차가 달리자 시 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잊진 않을거야” 그리 말하고 다시 생각하니 이젠 맘에서 떠오르지 않는 죽은 이 의 이름들이 너무 많다. “피터” “왜” 좌회전을 하자 낡은 차가 앓는 소리를 내는 것 마냥 소음을 낸 다. “난 네가 죽어서 검은 양복 입기 싫어”


소음 속에서 혼잣말처럼 읊조린 그 말에 피터는 숨을 삼키는게 무거웠다. “나도 네가 죽으면.. 흰 양복 입을테니까” “뭐야 그게..” 엘리가 자신을 보며 눈물 섞인 미소를 보이는게 차량정면을 봐 도 느껴진다. “그러니까 죽지말라는거야” “응 그래. 우리, 죽지 말자” 그 말을 끝으로 말없이 서로 몇 분을 있는 것이 어색해 라디오 를 틀고 달렸다. 라디오에선 폭우 끝에 온 맑은 날씨나 새로 나온 신곡이 얼마나 좋은지 같은 사사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피터는 그제야 오늘이 오랜만에 맑은 날인걸 깨달았다. “엘리 비비 햄버거 갈래?” “응 그럴래” 기숙사에는 햄버거를 사둔 것이 식탁에 고스란히 있겠지만 거기 까지 들어가면 엘리는 눈물에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았다. 기숙사 맞은편 거리에 도착하자 피터는 시동을 끄고 차를 세웠다. “뭐해?” 내리지 않은 엘리를 빤히 보며 운전석 차문을 연다.


“이쪽 문.. 열어줘” 엘리의 말에 피터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다. “뭐야.. 우리 사이에 매너는” “왜에.. 그야.. 좋아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매너를 받고 싶은 법이 야” 그 말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피터는 마음을 다잡고 반대편으로 가서 차문을 열고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햄버거 사주니까 좋아하는거지?” “쿡..응 맞아” 엘리가 웃는 것을 보자 피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지금이 고백하면 좋았을 타이밍이었을까. 나중에 이 때를 후회할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내 지갑이랑 쿠폰 다 코트 안에 있었어” “뭐야! 피터 완전 싫어!! 나도 지갑 안가지고 나왔는데! 왜 비비 를 가자고 한거야!?” 그렇게 아직은 적막한 아침거리에서 둘은 티격태격 거리며 거리 를 향했다. 피터는 속으로 20장 찍힌 쿠폰을 종업원이 봤었으니 까..하고 생각하면서도 종업원이 엘리를 보면 영락없이 애인이라고 단정지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