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201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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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스펙터클 1925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은 철근콘크리트건축물을 선호하게 되었다. 게다가 양식적으로도, 1920년대 중반 이 후에는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던 국제주의 양식(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하얀색, 혹은 회색의 장식없는 사각형 건축 스타일)이 식민지 조선에도 도입되려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1926년 완공된 조선총독부의 경우는 1912년부터 그 계획이 시작되고 1918년부터 착공이 이루어졌기에 당시의 유행과는 다른 경향을 보였다. 물론 시대적 배경뿐 아니 라 이 건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도, 일본 제국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에 ‘서구고전주의’적 양식으로 만들 어졌다. 대칭적 입면과 중앙의 돔이 주는 위엄과 석재재료가 주는 육중함, 거기에서는 권력의 ‘힘’이 그대로 드러났 다. 게다가 그 큰 도로의 중심에, 초점이 되는 곳에 이 건물이 있다는 것은 ‘제국의 스펙터클’을 생산하며 그 곳을 지 나는 조선인들에게 거의 공포감마저 불러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광화문 철거 이전과 이후의 조선총독부 - 식민지 제국의 스펙터클을 완성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광화문 철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후 광화문통은 광화문이 없는 광화문통이 되어버렸다. (하긴 세종로 역시 세종대왕 없는 세종로였다. 세종대왕이 그 거리에 나타난 것은 실로 얼마되지 않은 일이니…) 거리의 끝에는 빛나는 ‘조선총독부건물’이 세워졌고 가로변은 장랑대신 가로수들이 줄지어 늘어서며 ‘근대적 가로경관’을 만들어냈다. 가로변 건축물들도 기존의 육조를 대신한 근대적 행정기관들(경기도청, 통신국, 탁지부 건축소, 법학교, 경찰,순사 교습소 등)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단층건물일 색의 거리풍경에서 2층 이상의 근대적 건축물들로 가득찬 거리로 변해갔다. 이 풍경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거리의 중앙에 늘어선 가로수이다. 당시 남대문로, 종로, 을지로 등 서울의 주요 도로 가로변에 가로수가 식재되긴 하였으나 이렇게 길의 한 가운데 가로수가 식재된 것은 광화문로가 유일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중앙청이 되었고, 광화문로는 세종로가 되었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이승 만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회관(이후 시민회관)’이 세워졌 으며 그 건너편에는 미국대사관이 들어섰다. 이승만 대 통령의 기념비적 건축인 우남회관은 세종로 일대의 가장 높은 건물로서 당시의 전체 세종로 가로경관을 지배하였 다. 1966년에는 불도저 시장, 김현옥 시장의 주도하에 지 하보도의 건설이 이루어졌으며, 1968년에는 전차가 철 폐되고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새’ 광화문이 제자리 로 돌아오고 충무공 동상이 들어서는 등 세종로의 새로운 모습들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하차로 가 생겼으며 또한 우남회관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 세종 문화회관이 같은 자리에 들어섰다. 1970~80년대에는 정 부중앙청사, 교보빌딩, 이마빌딩 등이 가로변에 연속적 으로 들어서며 가로변 건축물의 고층화가 이루어졌다.

1960년대의 세종로. 중앙청과 가로수길, 우남회관과 새로 만든 지하도입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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