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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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백림서신 - 17. 익숙한 것의 역습 / 글. composer B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 더 퍼지 시리즈 체니 사이드 - 4. 과나 3 / 글. 사진. 장수양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사진. 철민 가을인데 어디갈까? Ping Pong - 08. 창조 / 글. 황정운 이훈보


이달의 편집이 늦어졌지요? 원고가 모자라서 혼자 도망치다가 또 마무리를 지어야 한 다는 의무감에 앉아있다가 좌절했다가 웃다가 그렇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앉았습 니다. 솔직히 조금 창피합니다. 잡지라고 하기에는 얇고 지라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두꺼운 정도 인것 같습니다. 너무 너무 얇아져서 고심하다가 문득 2012년 9월호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의 잡지를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58쪽에 스무개의 코너.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 는 에너지가 넘치는 잡지더군요. 신기했습니다.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이 말이죠. 당시의 훌륭한 필자 분들은 지금은 다 들 좋은 곳에서 각자의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 좋은 작가나 기자나 필자가 되셨지요. 문득 지금의 부족함이 과거 저희를 도와주셨던 분들에게 누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영광이나 지긋지긋한 칭얼거림이야말로 진정 창피한 일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달에는 코너도 하나더 일부러 넣고 앞으로는 고의로라도 책을 조 금 다듬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창피하게 가지는 않겠 습니다. 게으른 편집인의 방만함이 적어도 열심인 필자 여러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월간 이리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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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림 서 신

伯 林 書 信

Composer B

17. 익숙한 것의 역습

잘 지냈어? 얼마전 내가 다녀온 음악회 이야기를 좀 해볼까? 베를린에는 그 어느 도시보다 훌륭한 오케스트라들이 여럿 모여 있어.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er Philharmoniker)’가 있고,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역 방송국(RBB) 산하의 오케스트라인 ‘도이체 심포니 오케스트라 (Deutsches Symphonie-Orchester Berlin)’가 있지. 그리고 옛 동베를린(동독)을 거점으로 두고 활동하다가 통일 이후에는 ‘베를린’의 오케스트라가 된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Konzerthausorchester Berlin)’와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Rundfunk-Sinfonieorchester Berlin)’, 그리고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전속 오케스트라인 ‘슈타츠카펠레 베를린(Staatskapelle Berlin)’이 있어. 사실 클래식 음악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정도만이 가장 잘 알려져 있겠지만, 사실 이 오케스트라들은 어디 하나 세상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과 나름대로의 역사를 자랑하는 빼어난 악단들이야. 최근 들어 베를린이 젊은 음악가들의 집결지가 되면서 이 오케스트라들의 수준과 에너지도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다녀온 연주회는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정기 연주회였어. 이 날 연주회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연주된 곡은 차이콥스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교향곡 5번」이었어. 하지만 그동안 음반으로나 실제 연주회에서나 이 곡을 너무나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진 데다가, 특히 한국에서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들이 이 곡을 하도 자주 연주하다 보니 성의 없고 나태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나도 언젠가부터 ‘ 뻔하지. 뭐 새로울 게 있나’하는 인식을 가지게 된 곡이야. 그 날도 연주회를 가기 전까지도 ‘ 베를린에 있을 때 연주회를 하나라도 더 보긴 해야 하는데 스케줄 맞는 건 별로 없고, 시즌은 끝나가고… ’ 하는 마음이 들었던지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집을 나섰어.

- 유럽의 오케스트라들은 여름에 휴식기를 가지고 가을 무렵에 새 시즌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게 웬일이래. 뛰어난 지휘자인 투간 소키에프(Tugan Sokhiev)는, 이 곡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인상을 단 하룻밤만에 바꿔 놨어. 그가 어떤 꼼수나 자극적인 충격요법을 가했다는 뜻이 아니야. 오히려 그 동안 ‘명곡’이라는 진부하고 흔해 빠진 표현 뒤에 숨어서 많은 지휘자와 악단들이 간과했던 세밀한 부분까지 끄집어내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악보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줬어. 현장에서 연주를 듣는 동안 ‘어? 이 곡에 이런 소리가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들어서 나중에 악보를 찾아보면, 그것이 지휘자가 임의로 손을 댄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악보에 존재하는 소리임을 깨닫게 되는 경험이었지. 음악의 큰 줄기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부분을 다 알고 있는 지휘자 앞이라면, 이미 훌륭한 기본기를 가진 오케스트라는 더욱 더 무서운 모습을 보여줄 수 밖에 없지 않겠어? 글로 쓰여진 작품 해설 혹은 입으로 떠들어댈 때는 느끼지 못했던 에너지가 온 몸을 휘감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 나는 차이콥스키와 대화 한 마디도 나눠보지 못했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엄혹한 운명의 시험대 앞에 선 인간-나약하지만 결국에는 강인한 의지로 돌파하려는-의 모습일 것이라는 확신이, 이 날의 연주회를 통해 더 강하게 들기도 했고. 어쩌면 예술가의 역할은 그런게 아닐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대중들이 이미 잘 안다고 자부했던 것들의 핵심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그 본질을 더욱 강렬하고 진중한 방식으로 전하는 능력 말이야. 낯익어서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던 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창조하는 것 또한 예술가들의 중요한 임무가 아닐까 싶어. 이 날 연주회의 리허설 영상과 소키에프의 인터뷰 영상을 보내줄게. 물론 실제 현장의 열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내가 느꼈던 그 감정들의 아주 조그만 조각이라도 함께 나눠보고 싶다. 말이 길어졌네. 또 편지할게.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더 퍼지 시리즈 (2013-2018) 감독 제임스 디모너코 한 번쯤은 의심해 봤어야 했다. “일 년에 하루 12시간 모든 범죄를 허용한다.”는 가볍다 느 껴질 정도로 명확하게 날이 선 설정이 들어간 영화 퍼지(The Purge, 2013) 가 그 날카로움이 비해서 조금은 심심하고 별 로라는 평가를 받았을 즈음, 혹은 그것보다는 조금 늦더라도 2014년 <더 퍼지 : 거리의 반란>이 나왔을 그때에는 소재의 날 카로움이 영화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고민하거나 이 야기를 나눠 봤어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16년 3편 <더 퍼지 : 심판의 날> 이 등장했고 2018년 새로운 <더 퍼스트 퍼지>라는 작품이 나올 예정이다. 이런 수순은 어찌 보면 흔한 비디오 게임의 발매 수순과도 닮 아 있고 여느 할리우드 영화의 작품 수순과도 닮아있다. <더 퍼스트 퍼지>라는 ‘퍼지’의 근원. 법제 정이나 아이디어를 떠올린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아마 이것으로 이 시리즈는 마무리될 가 능성이 높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일 년에 하루 모든 범죄가 가능하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소재는 현 대 법전이 말도 못 하게 두꺼워진 만큼 상상력을 자극한다. 인간애가 아니라 법적 처벌이라는 이유 로 하지 못하는 행동에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미워하는 사람을 찾아가 욕설을 하다 못해 폭력으 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은 현대사회가 가장 금기시하는 것을 영화 퍼지에서는 법이라는 틀 을 갖춰 전면으로 이끌어 낸다. 앙심을 품었던 직장 상사를 응징하거나 응징을 하다 하다 사망에 이 를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허용하고 이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폭력을 찬양한다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사회에서 폭력이 사 라지지 않는 이유. 인간 혹은 생명체 근원에 깔린 동물적 본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놓쳐서 는 안 되는 부분이다. 자 그럼 다시 1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시리즈는 4편이 나올 예정일 정도로 어떻게 보면 성공적인 시 리즈물인데 왜 시리즈의 최초는 오히려 조금 심심하고 흔한 공포물에 가까울까? 퍼지(2013)는 사회 적으로 폭력이 허용되는 날이라는 설정이 있을 뿐, 이 설정이 없다 하더라도 영화는 흔한 강도물과 다르지 않다. 물론 그 안에서 약간의 반전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퍼지’라는 법이 일으키는 사회 현 상을 그린다고 보기에는 조금 약하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하면 ‘퍼지’라는 법이 만들어지고 그 법이 일으키는 사회현상을 그리기에 1편 : 2시간 내외라는 러닝타임은 너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미래의 가상의 법을 설명하기 위해 아무런 환상적인 배경도 없는 일상적인 사회를 내내 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반 지의 제왕 1편과 같은 배경 설명이 ‘퍼지’에 있었다면 오히려 시리즈 자체가 이어지기가 어려웠을지 도 모르는 것이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설명서가 될 것을 감안해 날이 선 소재를 꺼내고도 1편은 그 배경을 지극히 좁은 집이라는 공간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렇게 보 면 퍼지의 1편은 현실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돈을 이끌어내서 제작을 하고 또 손해가 나지 않는 이익구조를 구성하기까지의 이야기 바깥의 고민들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그만큼 1편은 버둥거린다. 그 노력은 성공을 거둔 것일까? 퍼지는 리뷰어의 평가와 다르게 적은 예산으로 수익을 내기에 이른 다. 수익을 냈다 = 사람들이 충분히 보았다. 이 공식은 다시 말해 이야기의 바탕을 깔았으니 ‘퍼지’라는 법이 있는 사회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그리면 되는 것 아닐까? 2014년의 더 퍼지는 정확 히 그 지점을 다루고 있다. 1편과 주인공도 다르고 아들을 죽인 남자에게 복수를 꿈꾸는 주인공이 거리에 나서며 이야기는 시작되고 이 인물이 또 다른 등장인물들을 만나며 일으키는 파장을 통해 사 회에 어떤 변수가 창출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정부가 겪게 되는 곤란함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동시 에 ‘퍼지’라는 정책이 시행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의 폭력 상황 (1:1의 폭력 상황) 과 다르게 법을 더 나쁘게 악용하는 행태 또한 그려간다. 그리고 3편은 2편의 등장인물과 조금씩 보 여준 변수들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룬다. 정치적으로 ‘퍼지’라는 법을 없애고자 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법을 지속시키려는 집단이 갈등을 이야기한다. 아주 흔한 범죄 스릴러 물이 ‘법’이라는 사회적 배경을 가졌다는 것 만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흥 미롭지 않은가?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퍼지 시리즈는 로튼 토마토 지수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욕을 먹는 트랜스포머 시리즈 보다도 낮은 점수이다. 하지만 반대로 한낱 범죄 영화로 끝날 수 있 던 영화가 설정상 ‘법’이라는 배경을 가졌다는 이유로 확장되고 세계관을 다져간다는 것은 흥미롭 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한 번쯤 볼 만하다. 물론 무제한의 폭력이라는 자극적 소재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폭력 만으 로 시리즈를 이어가기에 배경의 스토리는 우습게 볼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어쩌면 이 영화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참고로 TV 시리즈 역시 시작되었다. 끝.


글. 사진. 그림. 철민



체니사이드

글. 장수양


4 과나 3

3 스물네 살까지 아무와도 연애하지 않았다. 내 관심사는 오직 자취하는 것뿐이었다. 친가쪽이 유복해서인지 이제껏 경제관념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비는 받는 대로 족족 써버렸다. 어느 날 언 제나처럼 성당에 다녀온 할머니가 나를 불러다 앉혔다. 할머니는 네가 이제 돈을 좀 버는 것 같 으니 가세를 신경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집 구해서 내 집 가세를 신경써야겠다 고 생각했다. 나는 일요일에 할머니에게 나가 살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아주 시끄럽게 코웃음 을 쳤다. 나가겠다, 나가고야 말겠다, 그 결심으로 옷 한 벌 밥 한 끼 철저하게 아꼈다. 나는 편의 점에서 종일 일했고, 그러면서 노트북으로 온라인으로 공유된 아이디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아 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관리하는 블로그는 서른 개가 넘었다. 성격이 다른 검색키워드와, 그 키 워드와 무연한 사진을 섞어둔 게시물을 매 시간마다 업로드했다. 방문자수가 오르지 않으면 독 촉 메일을 받았다. 할수록 바이럴마케팅이란 게 스크랩이 끝난 신문의 찌꺼기처럼 느껴졌다. 나 는 서울에서 가장 싸고 가장 더러운 원룸을 계약했다. 보증금과 월세를 나누려고 온라인게임 카 페에서 만난 어떤 여자와 동거하게 됐다. 그 여자의 이름은 전성유였다. 처음 언니라고 발음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딸려오는 것이 없었다. 성유 언니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지금보다 어릴 때 결혼하고 이혼했다고 했다. 아이는 남편과 살아서, 자주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언니에게 술을 배웠다. 성유 언니는 술을 마시거 나 온라인게임를 하거나 집에서는 옷을 헐벗고 있었다. 피부가 어두운 톤이었다. 성유 언니의 오 금은 피부가 어두운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까맸다. ―나 유연하지 밤에 언니가 말했다. 성유 언니는 좁은 우리집 벽에 붙어 다리를 찢고 있었다. 완벽히 일자여 서 나는 멍하니 쳐다봤다. 성유 언니는 그렇게 다리를 벽에 나란하게 붙인 채 상체를 뒤로 젖혀 나와 눈을 맞췄다. 정수리를 방바닥에 찧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유 언니는 상체를 부드럽게 펴 고 누웠다. 언니의 자세가 눈에 익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언니는 그 자세로 창문을 바라보 았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엔 별이 하나도 없었다. 성유 언니는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나는 언 니가 그러고 있지 않았으면 싶었다. ―어렸을 때 발레를 했는데 그만뒀어. 잘했는데 ―왜 그만뒀는데요? ―발레 선생님이 날 싫어했어. ―왜요? ―무릎이 까맣다고. 쁠리에 안 예쁘다고 검은 창문을 보는 언니의 눈 속에 별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성유 언니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 기분은 누굴 봐도 다시 없었다. 언니는 자주 집을 비 웠고 그 때마다 나는 성유 언니가 없는 이 집에서 내가 아는 검은 몸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아 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장면이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발레 동작을 검색했다. 쁠리에, 서있다가 개구리처럼 무릎을 벌리고 앉는 자세였다. 소떼, 발끝으로 선 채 가볍게 뛰는 동작이었


다. 그랑 주떼, 허공을 가르는 하나의 선분이 되는 도약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방안에서 이리저 리 뛰어다니는 성유 언니를 그렸다. 모든 동작과 어감이 생소했으며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나는 성유 언니의 모습과 냄새와 촉감을 상상했고 그 언니에게서 느껴질 미각까지 연상했다. 나는 유 리잔이며 완전히 성유 언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애가 타고 이유 없이 슬프고 자꾸 얼어붙게 되었다. 언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었다. 샤워를 마친 성유 언니가 내 주위 에서 돌아다니거나 함께 자는 밤이면 숨이 막혔다.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내 예전 번호로 연락을 했다. 그게 내 번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동생은 내 예전 번호를 조금 바꿔서 지금의 번호를 알아냈다. 저녁에 우리집에서 조금 떨어 진 카페에서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서로 반가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동생은 전 과 너무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생을 보자마자 나는 내 얼굴이 전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상기했다. 내가 시킨 홍차에서는 떫은 맛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누나. ―할 소리야? 동생은 인상을 썼다. ―할머니가 얼마나 더 사실지 몰라. ―그건 다 똑같아. 동생은 앞에 놓인 커피에 손도 안 댔다. 그 카페에서 나오는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서 더 잘 들렸다. 동생은 창백하고, 서늘하고, 사람을 잘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의 어 떤 부분은 어렸을 때와 똑같았다.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처럼 동생은 예전보다 더 무심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동생은 내가 나뭇잎을 부수고, 동생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때처럼 굴 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였다. ―누나는 몰라. 나는 동생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누나 돈 벌어? ―응 ―뭐하는데 ―편의점에서도 일하고, 온라인으로 일하고 ―누나 친구는 있어? ―개새끼야. 동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한동안 그랬다. 나는 홍차를 다 마셨 다. 동생은 내앞에서 진땀을 흘렸다. ―있어. 나는 말했다. 군대에 있는 Q를 떠올렸다. 휴가 나와서 몇 번 만났다. 나는 Q에게 절대로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확인했으니까 분명했다. ―애인 있어? ―애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별다른 대화를 안했다. 동생은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왔다고 했다. 아는 형이 맡아줬다고, 다시 가봐야 한다고, 그리고 군대에도 가야한다고 했다. 나는 동생이 이 만남을 질


질 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동생에게 일어나자고 말했다. ―누난 어디가 마비된 사람 같아. 동생이 말했다. 나는 동생이 조금도 마시지 않 은, 아직 얼음이 들어 있는 커피를 들고 마셨다. 그 리고 카페를 나갔다. 집쪽으로 걸어가다가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동생은 과거에 엄마를 만난 적이 있다고 묵묵하 게 말했다. ―누나가 나 내팽게치고 간 날에 엄마가 나 데 려간다고……싫다고 했어. 꼴이 너무 지저분하 게 보여서 진짜 엄마래도 아는 척 하기 싫고 그 랬다. 말하기 싫었어. 파출소에 있는 것도 창피 했고……. 나는 성유 언니가 보고 싶었다. 머릿속의 지평 선에서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생소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서울에 별 없는 게 별일인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게임 캐릭터가 되어서 내 설정을 다 직접 하 면 어떨까. 그래봤자다. 성유 언니가 뛰는 모습. 다리 벌린 모습. 언니의 음부도 그렇게 까말까? 동굴 같을지 몰라. 말하고 싶다. 나를 받아줄까? 그럴 리 없어. 싫다. 오늘 밤엔 감마가 올 거야. 개새끼. 쁠리에. 소떼. 그랑 주떼. 파드샤.


아쌍블레. 앙트르샤. 발란세. 글리사드.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행주에 소주를 적셔서 부엌의 때를 박박 씻었다. 커튼을 창밖으로 요란 하게 털었다. 방바닥에 무늬처럼 뻔뻔하게 붙어있던 얼룩들을 지웠다. 화장실의 머리카락을 둥 글게 뭉쳐 변기에 버렸다. 곰팡이만은 어쩔 수 없어서 집구석에 물 먹는 하마를 몇 개 두었다. 성 유 언니는 습기가 빨려 얼굴에 각질이 일어날 것 같다고 농담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가져온 음 식들로 끼니를 때우던 습관을 차차 버렸다. 따뜻한 밥을 지어서 성유 언니와 먹었다. 서투르게 지은 멸치볶음이나 다시마조림은 별로 맛이 없었지만 반찬의 가지수가 늘어가면서 자신 있어졌 다. 밤에 일하는 성유 언니가 새벽에 돌아와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만들었다. 나는 편의점보다 시급이 좋은 고기집에서 일하게 됐다. 미들 타임만 근무하게 되자 관리하는 블로그 개수를 늘려도 되냐는 메일에 긍정적인 답신을 보냈다. 내가 관리하는 블로그들은 배경과 게시 물과 사진이 나름대로 다양했지만 사실, 전부 똑같았다.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졸다가 겨우 이 부자리를 펴고 잠을 청하면 머리 위로 해파리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사각의 블로그 창들이 웅웅 거리며 돌아다녔다. ―나 요새 제대로 살고 있는 것 같아. 일찍 퇴근한 날에 편의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다가 언니가 말했다. ―왜? ―잘 먹고 다녀서 ―집도 깨끗하지 ―완전 깨끗해. 성유 언니는 정말 잘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외모도 나이보다 어려보여서 편하게 입고 있을 때면 대학생 같았다. 언니는 때로 아주 어린 사람만 지을 수 있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나는 모르는 일들로부터 비롯된 행복한 표정이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테이블 의자에 앉아있던 언니의 뒤로 갈색 나방이 재기처럼 튀어올랐다. 언니는 아! 소리를 질렀다. ―생각났어. 나 이제 밤에 말고 낮에 일할래. ―뭐야, 갑자기 ―좋은 생각이지? 밥도 꼬박꼬박 먹고 잠도 제때 잘 수 있잖아. 그런 일을 새로 구할 거야. 성유 언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는 차가운 맥주를 한 캔씩 더 마셨다. 두 사람 다 조금 씩 취해서, 테이블 위에 기어가는 날벌레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고 서로를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어딘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언니는 했던 말을 반복하는 주사가 있었다. 그날 새벽에도 낮에 일하겠다고 적어도 열 번은 이야기했을 거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언니는 그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나는 자주, 새벽에 들어온 언니가 화장실에서 토하는 소리를 들었다. 언니는 대낮까지 잠을 자다가 찡그린 얼굴로 커튼을 쳐달라고 했고, 휴대폰을 집 에 놔두고 외출했다. 아이에게 오던 전화가 줄어갔다. 주말이면 언니는 유난히 예민했다. 점심을 먹고 도로 잠든 언니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설거지를 해야했다. 나는 라디오를 사들고 와 서 밤마다 틀어놓았다. 교양 프로그램, 음악 프로그램, 우습거나 슬픈 사연들과 보편적이고 기억 에 남는 멘트들. 새벽에 언니가 방에 들어오는 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으면 하는 팝송이 몇 곡 생겼다. 우연찮게 타이밍이 겹친 적이 한 번 있었다. 성유 언니는 신발장에서 잘 벗겨지지 않는 구두를 벗기 위해 한쪽 발을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구두가 벗겨지면서 방 안까지 튕겨 들어오자, 방바닥에 드러누워 다른 발을 위로 쳐들고 나머지 구두를 벗었다. 붉게 부은 맨발을 노려보던 언 니는 이윽고 그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는 라디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니 는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으며, 노래 좋다, 라고 말했다. 이제 그 노래의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성유 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 몇 번인가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언니는 자기가 몇요일 몇 시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지켜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약속을 잡았다. 당일날 못 오겠다는 문자가 오거나, 며칠 후에 잊었다는 사과 를 받았다. 나는 늘 괜찮다고 했지만 언니는 마음쓰여 했다. 우리는 집 보증금 문제로도 아직 서 로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언니는 나한테 연락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언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소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떠 난 그 집을 정리한 후에도 단 한번 보았을 뿐인 언니의 발레 동작과, 함께 했던 식사, 술자리, 씻 지도 않고 이불 위에서 자던 모습들이 단발적으로 떠올랐다. 나는 언니 자체만이 아니라 언니와 함께 살았던 시기의 나도 그리웠다. 다시는 그렇게 열성적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행복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았다. 나에게도 비로소 완전한 반복이 찾아온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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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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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있는 9월 혹은 10월 월간 이리는 유독 펑크가 잦은 계절입니다. 날이 좋아지고 오곡백과가 여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고 방에 앉아 원고를 쓴다는 게 짐짓 우습고 또 서글프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월간 이리와 같은 영세업자는 휘청할 수밖에 없죠. 그런 계절에 등장하는 기획 코너. <가을인데 어디 갈까?>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은 관계로 큰돈이 들지 않는 공간들로 준비했습니다. 어쩌면 금전과 큰 연관이 없는 곳이 고유의 색을 유지할 수 있어서 일수도 있습니다. <문화 비축 기지>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알게 된 바로 그곳. “석유에서 문화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 산업화 시대 석유 비축기지가 도시 재생을 통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문화공원입니다. 1973년 석유파동 이후 5개의 탱크를 건설 당시 서울 시민이 1달간 소비가 가능한 6907만 리터의 석유를 보관했던 곳으로 2002년 월드컵 당시 안전상의 이유로 폐쇄된 이후 10년이 넘게 활용방안을 찾지 못하다가 2013년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탄생한 공간입니다. 기존의 탱크들이 공연장 강의실 카페 등의 공간으로 변형되어 2017년부터 운영 중입니다. 탄생한 지 약 1년 정도 된 공간이죠. 개인적으로 이 공간을 추천하는 이유는 넓은 부지의 한적함과 더불어 건축물의 독특함 때문입니다. 외부 비공개 공간이었던 태생적인 이유로 크게 드러나지 않은 외형이 신비감을 불러일으키죠.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도 어찌 보면 산책의 좋은 이유가 될 겁니다. 사진출처 서울시 홈페이지


< N 서울 타워 공원 > 당연한 것들은 너무 쉽게 잊혀진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서울 여기저기에서 가장 잘 보이는 N 서울타워야 말로 잘 잊혀지는 곳 중 하나입니다. 어쩌면 멀리서 보고 있다는 이유로 발이 가지 않는 곳이기도 하죠. 뒤집어 생각해보면 가장 쉽게 언제나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지금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N 서울 타워는 서울의 계절 변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이제 슬슬 가을이 된다면 남산 둘레길과 N 서울 타워 근처의 나무들의 다양한 색을 뽐내겠죠. 예전에는 접근이 불편했던 단점이 있었지만 지금은 버스 환승으로 아주 쉽게 정상까지 갈 수 있으니 올라갈 때는 버스로 단숨에 내려올 때는 걸어서 천천히 다녀오는 것이 가능합니다. 타워에 입장하지 않아도 한눈에 서울 대부분이 조망 가능하다는 서울 한가운데 산 정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방문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 경복궁 야간개장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그건 경복궁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낮의 경복궁은 뜨겁고 무수한 관광객이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죠. 아무리 과거로 날아갔다고 상상하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환한 대낮에 멀리 보이는 빌딩이 주는 이질감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간개장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많은 빌딩의 불이 꺼지고 낮에 비해 한정된 숫자의 관광객이 있습니다. 밤의 무거움과 은은한 조명이 단숨에 방문객들을 단숨에 조선시대로 날려 보냅니다. 9월에는 16일부터 29일까지 야간 개장이 있고 3000원에 인터넷 예매가 가능합니다. 날이 선선하고 고풍스러운 공간이 있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겠죠?



< 국립 고궁 박물관 > 경복궁과 딱 붙어 있다는 이유로 경복궁에 가는 사람들이 아주 쉽게 지나쳐 버리는 그러면서도 오직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굳이 찾지 않는 공간이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합니다. 경복궁을 방문했던 분들은 지친다는 이유로 지나치고 오직 이곳만을 보기에는 뭔가 부족한 듯한 그 느낌 때문에 쉽게 소외당하지만 경복궁의 존재와 별개로 박물관의 단정함이나 부담스럽지 않은 규모 건축물이 주는 편안함 만큼은 개인적으로 최고로 꼽습니다. 이상하게 이곳은 별로 볼 것이 없어도 지나가다 들르고 싶고 이전에 본 것을 또 보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받습니다. 고궁 박물관이 국립 박물관과 비교해서 볼거리가 화려하고 다양한 것은 아니지만 관람시 느껴지는 편안함 만큼은 웅장한 국립 박물관보다 나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비록 9월에는 특별 전시가 없지만 특별 전시가 있을 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궁중만의 독특한 문화나 소장품들을 볼 수 있어 여느 전시공간과는 다른 재미를 주는 곳입니다. 9월에는 경복궁 야간 개장과 발맞추어 야간 개장을 한다고 하니 따로 혹은 같이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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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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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황정운

이훈보

보내는 공

요새 아내와 두 편의 영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제작 과 감독을 맡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와 에이리언 커버넌트 (Alien: Covenant, 2017)입니다. 두 편의 영화는 1979년 1편으로 시작해 1997년 4편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 에 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Prequel)에 해당합니다. 두 영화가 공통으로 제기하는 화두는 창조(創 造)의 비밀입니다. 시간은 21세기에서 22세기로 넘어갈 무렵.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마이클 패 스벤더)은 자신을 창조한 인간에게 “당신은 누가 창조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생식 기능이 없는 자신도 점차 인간이 되고 싶어 합니다. 정확히는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창조주의 지 위에 오르고 싶어합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창조된 것의 기원을 찾는 동시에, 누군가가 누군가 를 창조하려고 하는 욕망이 치열하게 부딪치고 있습니다. 부딪친 결과는 아, 그것은 영화 결말 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겠군요.

창조(創造). 사전적으로는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냄. 혹은 조물주(造物主)가 우주를 처 음 만든다는 뜻입니다. 저는 종교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는 편이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다 소 부정적입니다. 정확히는 신 혹은 조물주가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는 있으나, 신을 중심 으로 한 가치 체계에 편입되는 것은 다소 경계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며 권력에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 중심으로 삶을 꾸려가고 이해하 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자연스럽게 오늘 말씀드릴 창조의 이야기는 첫 번째 정의.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다 – 에 관한 것이겠군요. 문장에 살을 붙이면 나를 복제한, 나를 투영시킨 새로운 무언가를 세계에 낳는다고 풀어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제 코와 입술, 웃는 모 습을 꼭 닮은 딸 아이가 생각나네요. 아이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두 살, 세 살 나이의 저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나, 저의 기원을 더듬어보고 싶어집니다.

2016년 현실세계에 태어난 딸. 사실 제가 창조하는 행위에 몰두해 있던 것은 현실이 아닌 가상 의 문학 세계였습니다. 아이가 막 생겼을 무렵, 저와 아내는 오스트리아 빈 여행을 생각하고 있 었습니다. 대부분의 일정을 상세하게 준비했을 무렵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는 여행 계획을 접어야만 했죠. 그때 꼭 뮤지크페라인(muzikverein)에서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 싶었습니다. 어느덧 4년째 못 이룬 꿈이 되었네요. 뮤지크페라인에 대한 동경. 음악에 대한 생각. 그 생각은


조금씩 음악을 소재로 한 단편 소설로 확장되었죠. 한 달에 한 번씩 음악 하나를 듣고 떠오르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코너 타이틀은 뮤지크페라인. 분량은 200매 원고지 20장 가량. 처음 쓴 단편 소설은 Bach Cello Suite No.6 D Major Prelude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입니 다. 눈을 감고 첼리스트 카잘스와 양성원의 바흐 선율 속에서 끊임없이 서사와 인물을 창조했 던 밤이 떠오릅니다.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행위는 즐거운 유희였습니다. 유희라는 단어로 느낌을 다 담아내지 못 할 만큼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의 정념(情念)은 무서울 만큼 집요했습니다. 가상의 문학 세계에 제가 창조한 다양한 군상들 ...... 더듬어보면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4년 이상문학 상 대상을 수상한 김훈의 <화장>을 읽고 최명희청년문학상에 단편소설을 응모했던 것이 2006 년 여름이었어요. 작가처럼 200자 원고지에 글을 써야 한다며, 여름 내내 책상에서 원고지와 씨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탄생한 17,000자 단편 소설 <초혼>. 물론, 물론이라고 이야기 해야 할까요. 저는 예심에서 탈락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의 소설은 전체의 구성을 돌아보려 하지 않고 단어의 힘에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간 작품을 찾아보기 가 힘들었다.”는 심사평은 저를 지칭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지경 속 세 계를 건축해나가던 스물 둘의 여름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다시 앞서의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인간은 인공지능 로봇을 창조 했고, 로봇은 또 다른 존재를 만들어 스스로 창조주의 지위에 오르려고 합니다. 우주의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인간으로, 다시 인공지능 로봇으로, 다시 미지의 존재로 창조의 사슬은 선형 적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인공지능 로봇은 고개를 정 반대로 돌려 자신을 창 조한 인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인간을 조롱하고 기만하고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피조물의 반란입니다. 내가 창조한 피조물이 고개를 들어 창조주인 나를 전복시키고 피조물 스스로의 이 름으로 살아가는 것. 이미 수 많은 문학 작품이 증명해 왔죠.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창조한 좀머 씨, 헤르만 헤세가 창조한 데미안, 조지 오웰이 창조한 빅 브라더, 박경리가 창조한 최서희 ......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창조주를 극복하고, 스스로 빛나며 신이 되려는 존재들. 그런 존재를 어 떻게든 만들어 영속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보람된 일이겠지요.

광인은 그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꿰뚫는 듯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신이 어디 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 니체 <즐거운 학문> 부분

황정운 글을 읽고 씁니다. 9년째 석유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https://marill00.blog.me/


돌아온 공

정운님께.

이달의 주제도 재미있는 주제를 정하셨네요.

오늘은 넋두리를 해야겠습니다.

홍대 앞에 살다 보면 ‘창조’라고 하면 그저 ‘창조의 아침’ 미술학원 밖에 떠오르지 않게 되는 세뇌의 단계가 있지만 그 거대한 벽을 넘어서 시작해 봅니다.

사실 창조 까지는 아니고 ‘창작’이라는 아주 가벼운 정도의 수준이라면 저의 근 몇 년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월간 고민과 잡담’이라는 무가지를 1년 6개월 정도 만들었었고 이후로 출판물로는 ‘ 월간 이리’라는 무가지를 7년 6개월 정도 만들고 있고 음악은 정체불명의 만들다 만 것 같은 노래를 9 곡 만들어 음원사이트에 올려도 보고 당선되지 못한 소설을 몇 편 쓰고 탈락한 드라마 대본이 3개, 탈락 예정이 1개. 보여주기 창피한 시들과 기존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음식들, 그리고 출간을 희망했으나 어느 출판사에도 간택받지 못한 인문서적 원고를 작성해왔습니다.

이런 실패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지요. 10년이니 양이 좀 많은 것뿐입니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입니다. 분명 외부에서 보기에 실패했음에도 창조 또는 창작을 해보겠다고 뭔가를 했으니 그리고 솔직히 스스로는 꽤 재미있게 지내왔으니 지난 세월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여생이 고난이겠지요?

창조라는 것은 꽤 소모적인 작업이죠. 이미 있는 노래 하나를 자신의 목소리로 불러내는 것만 해도 꽤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돌파해야 합니다. 물론 넘치는 재능 아래 이것저것 술술 해내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아등바등해야 한 코스를 넘어설 수 있지 않나 합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는데, 사람이 모방을 하기까지의 에너지 소모와 노력을 감안하면 조금 삐딱하게 봐도 뭔가를 만든 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창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왕 에너지를 쓰는데 자신만의 뭔가를 만들면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뿐이죠.


성공을 원한다면 모방을 하는 것도 조금은 효율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조언은 유효하고 완전히 새로운 게 없는 세상에서 모방을 하고 또 익히다 보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있죠. 물론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도 흔합니다. 그건 또 나름의 감각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요.

모방을 하는 것을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람들은 완전히 낯선 것보다는 조금은 익숙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모방은 단기 완성의 보장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사랑 또한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창작자는 사랑 받고 싶고 창작물은 스며드는 힘이 좋다고 할까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뭔가를 한다고 할 때에는 스스로가 원하는 게 성공인지 창조인지를 묻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좋은 균형을 이루기를 빌어줍니다.

자아비판을 하자면 저는 마무리가 좀 좋지 않은 편입니다. 무슨일이든 끄트머리에 가면 좀 재미가 없다고 느낍니다. 게임도 마지막 보스전에서 삭제하는 일도 좀 많은 편이고요. 어쩌면 저는 마무리가 좋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핑게를 대면 좀 편안합니다. (웃음) 어쩌면 저는 무척 다른 걸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주 흔한 것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창피) 그래도 삶이 재미는 있었습니다. 없는 재주를 짜내는 맛이 있어요. 어쩌면 그게 창조의 진정한 묘미이자 근원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일 같아서 신께서 재미있었다거나 보기에 좋았을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제가 신이라면 별로 재미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신이 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는데 큰 노력을 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으니까요. 말씀하셨던 영화 <프로메테우스>처럼 바다에 종자 균 하나 던져놓고 랜덤 하게 생명의 탄생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게 신의 일에 더 걸맞은 가벼운 행동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죠.

돌고 돌아서 조금은 허무주의로 흐른 것 같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에너지를 좋은 방향성을 갖고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에 힘을 쏟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노력을 하는 건 조금 쓸쓸한 일이니까요. 이달에도 재미있는 주제 감사드립니다.

이훈보 드림

https://brunch.co.kr/@e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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