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 토요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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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녜스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시간당 100mm의 기습 초극한 강우, 양

동이로 물을 쏟아붓는 물길이 열렸다.

얼마 전 텍사스 과달루페강의 범람이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한국

TV 뉴스 화면의 폭우에 잠긴 마을 전체가

황톳빛 물바다, 자동차 지붕이 보일 듯 말

듯, 고립된 주민을 구조하는 보트, 축사를

나온 소들이 집을 못 찾고 헤매는 모습에

서 내 유년의 장마가 떠올랐다.

7월 장마 통에, 어머니는 갓 낳은 나를

다라이에 담아 이고 언덕배기 교회로 피

신하셨다고 했다. 동네 어른들은 나를 '장

마둥이'라고 불렀다. 공덕동 394번지 일대

는 한강보다 저지대이다. 집중호우로 한

강 물이 차오르면 물이 빠져나가야 할 하

수관이 역류해서 오히려 물이 솟아 나왔

다. 도꾸 짖는 소리가 유별났던 어느 여름

밤, 물이 댓돌까지 찰랑이고 마당을 헤엄

쳐 마루로 올라와 위험을 알렸던 도꾸.. 그

때의 재난 대응은 지극히 원시적이고 간

단했다. 젖으면 안 되는 살림살이를 높은

곳으로 올리고 대문을 잠그고 하수도를

틀어막고 다 같이 지대가 높은 교회로 갔 다. 할머니 말씀은 ‘불은 화마라서 잿더미

로 만들어도 물은 순해서 남기고 간다 라

고 하셨다. 비가 그치고 물이 빠져 집으로

돌아와 보면 대문 안쪽에 이런저런 물건

들이 쓸려 나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몇몇일 젖은 살림살이를 씻고 말리고

이부자리를 빨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즈

음이면 한강 물이 맑아져서 빨래하러 갔 다. 다라이에 빨랫감을 이고 가는 엄마와

숙모들 뒤에 따라가면서 떨어지는 것이

없나를 살피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빨랫

배에 오르면 배 밑에 뚫린 부분에 빨래판

이 있었고 한쪽에 빨래를 삶는 솥이 걸려

있던 배. 모래사장에 펼쳐 널은 흰 홑이불

에 반사된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물비늘 반짝이며 잔잔한 수

면, 그 사나운 물결을 잠재운 건 뭘까..

한 여름이면 그런 물난리를 겪으면서도

대를 이어 살았으니 내 기억 속의 한강은

아직도 추억으로 흐른다. 여름에는 아버

지께서 좋아하시는 큰 민어 한 마리와 솥

을 싣고 밤섬으로 놀러 가면 도꾸는 배를

따라 헤엄쳐 왔다. 여의도 비행장의 에어

쇼는 맞은편 강둑에서 보는 게 최고로 잘

보여서 모두 강둑에 모였다. 어른들 틈에

끼어 있다가 아버지 어깨 위에 올라앉으 면 빨강, 파랑, 초록 연기를 뿜으며 곡예 하

는 비행기가 내 머리에 닿을 듯했다. 강물 이 꽁꽁 언 한겨울, 썰매 타러 가는 오빠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지켰다. 오빠는 외발 썰매 한가운데에 나를 앉히 고 씽씽 달렸다. 해빙기에는 위험하니 한

강에 안 가고 샛강에서 썰매를 타다가 물 이 녹은 웅덩이에 빠졌다. 오빠는 어른들 이 피운 모닥불에 나를 데려가 말리고 엄

마한테 말하면 다시는 썰매를 안 태워준

다고 겁을 줬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기념으로 사 남매에게 스케이트를 사 주셨다. 방에 담요를 깔고 연습하면서

강물이 얼기를 기다렸다. 그 강 언저리가

사계절 나의 놀이터였다. 물에 잠재된 에

너지, 소수력이 나를 키웠던 걸까...내 스스

로 정한 닉네임은 맑은 물 이다.

마포 배수펌프장 시설이 들어온 이후

집에 물은 안 들어왔지만, 장마 때면 동네

사람들과 물구경을 가곤 했다. 저녁 먹고 한강 둑에 올라가면 엄청난 유속으로 흘

러가는 흙탕물에 집도 떠내려오고 소도

떠내려왔다. 동네 어른들은 “저 소 잡아

라” 소리쳐도 아무도 감히 그 물살에 들어

가는 사람 없이 발만 동동 굴렀다. 불어난

강물은 무서웠다. 둑이 터지면 마포는 물

바다라고 하시면서 넌 장마둥이야! 왠지

내가 장마의 원인 제공자 같은 생각에 불

편했던 별명! 그래도 장마 때마다 떠오르

는 나의 별명, 장마둥이 물은 순하다는 할머니 말씀이 지금은

틀린다. 지구는 이미 난폭해졌다. 기후 위 기는 이미 우리 곁에 생존의 문제로 와 있 다. 날로 그 규모가 대형화, 다양화되는 자 연재해, 그 앞에 무릎 꿇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과 그들이 창조한 과학 문명. 재난 대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가을비

나뭇잎 떨어진 황량한 전경속 냉기로 덮어가는 거리 위에

우수로 가득 찬 눈물 내려온다

그리움이 묻힌 창가로

하늘 향한 눈동자 앞에 하염없는 쏟아짐 적시고 채우며 떨어진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보이는

얼룩진 미련과 아쉬움

가득 채워진 물기로

말끔히 닦고 지워진다

가을비의 단상 속에

단풍잎은 부드럽게 충족되고

흐느낌은 거름 되어

무딘 거리에 계속 흩뿌린다

싸늘한 일상은 촉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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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왕씨 아저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왕씨 아저씨는 관철동 보신

각 뒤에 있던 작은 중식당 ‘회현반점’

으로 소년을 데려갔다. 식당 주인은 그

에게 철가방을 들려 줬다. “이제부터

네가 배달 담당이야.” 그는 그날부터

식당에서 먹고 자면서 배달 일을 했다.

소년은 밤마다 펑펑 울었다. 공부를 곧잘 했는데도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

니지 못해 억울했고, 친구들은 자기보

다 공부를 못해도 학교에 다니는 게

배 아팠다. 그렇게 울기를 일주일. 문

득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

아가셨고, 도와줄 친척도 없었다. 그

는 다짐했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 이 일이 내 운명이고 미래다. 천직(天職)으로 여기고 열심

히 하자.’

그는 더 이상

요리사’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흑백

회장이자 ‘흑백요리사’ 등 방송과 유튜브로 대중 인기 얻어 하고 그림까지 직접 그려 자신만의 요 리책을 만들었다. 소심한 성격을 고치 려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으 려고 버스와 지하철에서 일부러 “하하 하” 큰 소리로 웃다가 미친놈 취급받 기도 여러 번. 어느덧 여경래는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사로 우뚝 섰다. 세계중국요리협 회 부회장이자 한국중식연맹 회장이 다. 중국 정부는 그를 ‘세계 100대 중식

요리사’ 등 여러 TV 프로에 출연하고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며 연예인급 대 중 인지도를 얻었다. 후배 요리사들은 그를 ‘사부(師父)’라고 부른다. 단순히

조리 기술뿐 아니라 인성과 삶의 자세 를 배울 수 있는 인생 멘토라는 의미 가 담긴 존칭이다.

여경래를 만난 8월 11일은 그의 요

리 경력이 꼭 50주년을 맞은 날이었 다. 그는 “지난 100년간 중화요리는 화교가 주도해 발전시켰지만, 앞으로 100년은 한국인이 한국의 식재료와 미각을 통해 ‘한중차이(韓中菜)’로 발 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15세 때 학교 그만두고 중식당에 들 어갔다고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었어요. 어머니가 ‘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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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토요일 2025 by Vanchosun - Iss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