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6일 토요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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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희

사)한국문협

이민 6년 차(1980), 몬트리올에서 쌩로

랑 강을 건너 비둘기장처럼 작은 집을 마

련하고 살 때였다.

부활절이 되면 쇼핑몰마다 병아리를 전

시하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알에서 갓 부

화되어 삐약거리는 노란 병아리를 볼 때

마다 아이들은 사 달라고 졸랐다. 나는 강

경하게 반대했지만, 남편은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남편에게, 병아리가 크면 어

떻게 할 거냐, 그리고 약 병아리가 되면 닭

을 잡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이

민 초기라 닭을 집에서 못 잡으면 도살장

에 갖고 가면 된다는 것을 몰랐다. 결국 남

편의 약속을 받아내고 노란 병아리 다섯

마리를 샀다. 아이들이 팔짝팔짝 뛰면서

좋아했다.

처음 한동안은 병아리가 상자 안에서

잘 자라더니 한 마리 두 마리 죽어 갔다.

결국 팔자가 센 수놈 한 마리만 살아남았

다. 상자 안에서 자라던 녀석이 몸집이 커

지면서 가끔 상자 밖으로 뛰어나왔다. 아

이들은 병아리일 때는 모이도 주고 예뻐

하더니, 병아리가 점점 자라자 더 이상 관

심을 두지 않았다. 날도 따뜻해졌기에 녀

석을 아예 마당에 놓아길렀다. 수놈은 점

점 늠름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머리꼭지

엔 발그레 한 벼슬을 달고 목덜미에는 갈

색의 머플러를 둘렀다. 꼬리깃도 제법 길

어지며 혼자 살아남은 팔자에 상관없이

수놈의 풍채를 자랑하듯 점잖게 마당을

모란 부활 병아리

거닐었다.

어느 날, 새벽 정적을 깨고 닭이 회를 쳤 다. 꼬끼오 오! 아니 수탉이 회를 치다니.

그리고 다음 날도 새벽에 또 꼬끼오. 드디 어 내가 걱정하던 문제가 찾아왔다. 이웃

들의 항의다. 새벽 수면을 방해하니 무슨

조치를 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퇴

근한 남편에게 이제 약 병아리를 만들 때

가 되었으니,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남편

은 그날은 피곤하니까 다음 날 해 주겠다

고 했다.

나는 다음 날 다시 채근했다. 동네 사람

들 불평에 체면이 구기니 제발 빨리 닭을

잡아 달라. 잡기만 하면 뒤처리는 내가 다

한다며 졸라 댔다. 남편은 그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이유로 계속 약속을 미루었다.

나의 인내심이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랐

을 때, 남편은 결국 남자의 자존심을 내려

놓고 자기는 동물을 죽이지 못한다고 고

백했다. 대한민국 군인의 체면이 말이 아

니다. 군인생활 20년을 어떻게 했을까, 닭

한 마리도 못 잡는 군인이 어떻게 6.25. 전

쟁터에서 총을 쏘았을까? 대한민국은 이

런 군인에게 보국 훈장까지 주다니. 종알

대는 내 소리가 시끄럽다는 듯, 퉁명스레

한마디 내뱉었다. 전쟁터에서 총을 쏘았

지만 사람 맞으라고 쏜 것이 아니고 그저

무서우니까 공중에 대고 막 쏘았단다. 하 기야 벌레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인 걸 나 는 안다. 나는 혼자 말로 내가 어쩌다 이렇 게 겁쟁이 군인 아저씨와 결혼했는가. 신

세 한탄을 하다가 약병아리 먹긴 다 틀렸 다고 결론을 내렸다. 닭 못 잡겠다는 남편 과 아무리 입씨름한들 뾰족한 수가 없었

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제안했다.

내다 버리자. 그냥 내다 버리고 오자. 우

리는 아이들을 뒤에 태우고 시골길로 저 녁 드라이브를 나갔다. 바람이 불고 구름

도 잔뜩 낀 으스스한 저녁이었다. 우리는

드넓게 펼쳐진 들과 드문드문 박힌 시골

농가 주택을 사이에 둔 하이웨이를 달렸

다. 남편은 정말 버릴 거냐고 물었지만 차

마 내가 기른 녀석을 바람 부는 들판에 버

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을 속 가게에 가 서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늦게까지 열려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수탉 한 마리

를 버려야 하는데 누가 닭 필요한 사람 있 을까 하고 나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설명 했다. 조그만 동양 여자의 닭 가져가라는

제안에 가게 주인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가슴은 콩콩 뛰었다. 이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 그때 가게에 있던 건장한 중년 사나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기가 갖고 가겠 다며, 내일은 맛있는 치킨 수프를 먹게 되 었다고 말했다. 나는 얼른 차에 가서 닭이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 와 사나이에게 건 네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키다리

녀석이 들판에 버려진 것보다는 누군가의 식탁 위에 올라가게 된 것이 다 행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친정어머니가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아무도 없는 이 새벽 기어이 꽁꽁 옷고름 풀었다

차마 감당할 수 없어

검붉은 입술도 타다 말고 열려버렸나

향 칠갑

소리 한 점 없이 사방을 진동한다

진자주 꽃잎 속

샛노란 마그마

펄펄 용암을 뿜는구나 세상은

숨소리조차 없는데

너는 누굴 바라

홀연 쏟아져 넘쳐

첫길을 깨우느냐

이랑을 다지느냐

■ 경력: 15 years+

■ 실력: 실적 상위 0.1% (MLS FVREB)

메달리언 클럽멤버

■ 열정: 7am-11pm 7days a week (무료상담)

“허울뿐인 ‘인권 변호사’는
【아무튼, 주말】

위해 그 권력에 복종할 수밖 에 없었던 피해자들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며, 그 결과 피해자들에게 회복하

기 어려운 수치심과 고통 및 좌절감을

안겨준 것이다. (중략) 피고인을 징역

6년에 처한다.”

2018년 9월 19일, ‘연극계 대부’ 연

출가 이윤택의 1심 선고가 내려졌다.

자신이 이끌던 극단의 여성 단원들을

상습적으로 유린해 온 그는 국내 ‘미

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최초

실형 사례로 기록됐다. 변호사 서혜진

(44)은 이날을 자신의 사명(使命)을 또

렷하게 깨달은 순간으로 기억한다. ‘피

해자를 위한 변호사’다.

그날 이후 안희정 전 충남지사, 고

은 시인, 박원순 전 서울시장까지. 전

국을 들썩이게 한 권력형 성범죄 사건

피해자 곁에는 늘 서혜진이 있었다. 그 는 온라인 성착취로 삶이 무너진 ‘텔레 그램 n번방’

만났다 평범하고 다양한 얼굴들 가장 잊히지 않는 건 친족 성폭력 피해 아동궧 만연한 권력형 성폭력

사람 우습게 보기 때문

정치인 연루 범죄 앞에선

진영 논리가 먼저더라

가 됐고, 61년 전 성폭행을 피하려다

전과자가 돼 평생을 살아온 최말자씨

의 재심에도 힘을 보탰다.

자칭타칭 ‘인권 변호사’는 흔해 빠

졌지만, ‘피해자를 위한 변호사’는 찾 기 어려운 시대. 서혜진은 이 드문 길 을 선택했다. 고통과 절망에 빠진 피 해자들을 매일 마주하는 그가 무채색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

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11 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명랑하

고 말 많은, 옆집 언니 같았다. 화도 많

고, 웃음도 많은 사람.

“저는 의뢰인들의 인생 최악의 순간 에 나타나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항 상 가장 좋은 옷과 액세서리를 하고, 멋지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그들 옆 에 있으려고 해요. 삶이 잿빛이 된 이 들에게 그들이 잃어버린 색을 되찾아 주는 게 제 일이니까요.”

◇피해자를 위한 변호사로 산다는 것 -피해자 변호사란 길을 택한 이유는 뭔가요. “대단한 사명감이나 거창한 정의감 에서 비롯된 건 아니에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 감동적인 계기나 드라마 틱한 서사는 없어요. 그저 제 일이니 까, 하루하루 버티듯 한 거죠. 대형 로 펌도 서울대 출신도 아닌, 이른바 엘리 트 코스를 밟지 않은 여자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요. 2013년 개업 후 국선변호를 시작했는 데, 이상하게도 피해자를 만나는 게 괜 찮았어요.” -어렵고 힘든 일 같은데요. “전혀요. 피해자도 그저 평범한 사 람들 중 하나예요. 성폭력 피해자 중 엔 20~30대 여성이 많거든요. 제 또래 거나 어린 친구들이어서, 대화하는 게 편했어요. 공감도 많이 되고. 피해자라 고 다 같지 않아요. 각자 개성과 취향 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을 듣는

-얼마나 많은 피해자를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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