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6월호

Page 1


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백림서신 - 14. 뭉뚱그리다 / 글. 사진. composer B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 마약전쟁 (2013) 만든다오 - 13. 집커피 찬물커피 / 글. 사진. 진선 체니 사이드 - 3. 아무 下 / 글. 사진. 장수양 상처의 기록 - 2. 왼발의 파도 / 글. 그림. 희정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사진. 철민 하늘 사진 - 사진. 민하 Ping Pong - 05. 여행 / 글. 황정운 이훈보


오늘은 사전 투표일입니다. 저는 투표를 마치고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사전 투표를 하는 분들이 많아 조금 놀랐습니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지요. 독자 여러분들의 투표 일정은 어찌 되는지 궁금합니다. 투표라는 게 아주 당연하고 또 소중한 것 같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입장이 되어보니 이렇게까지 기다려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일더군요. 식당 앞에서는 1시간도 기다리곤 하면서 말입니다. 한 10분 정도 서 있었는데 그냥 갈까? 아니야 참고해야지! 등등 별 생각이 다 들었습 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옹호하듯 저희 어머니께서는 자신은 이제까지 투표를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안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힘 들지만 잘 살고 계십니다. 재미있지요? 투표를 하려고 생각하면 그놈이 그놈이고 또 이렇게 한 표를 행사한다고 세상이 크게 바뀌는 것 같지 않아서 하면서도 의아하고 돌아봐도 애매한데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아주 조금씩 바뀌긴 하는 것 같습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일단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주 아주 조금씩 바뀐다고 말이죠. 2년에 한 10분 정도 줄을 서는 노력을 들이는 만큼 바뀌는 세상이라고 하면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모두가 합의해서 바 꾸는 10분이 20년이 지나면 100분어치가 쌓이고 이 정도 시간이면 하루 24시간 중 잠 자는 시간 8시간을 빼면 하루의 1/10 정도가 바뀌는 셈입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근무 환경도 10% 정도 더 좋아지지 않을까요?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 안 되는 로또도 하 는데 투표로 희망을 가지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더워서 흰소리를 길게 써 봤습니다. 이달에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위 조심하시고 맛있는 냉면을 즐기는 여름이 되시길 기원하며 이만 줄입니다. 월간 이리 EXXX 드림

공식트위터 @postyri




백 림 서 신

伯 林 書 信

Composer B

14. 뭉뚱그리다

잘 지냈어? 벌써 6월이네. 새해가 찾아왔다면서 이런저런 다짐을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가운데까지 왔어. 한국의 친구들은 다들 뜨거운 여름을 건강하게 보낼 준비를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숨가쁘게 바쁜 생활속에서 나름대로 중심을 잘 잡으려 애쓰는 중이야. 5월과 6 월 두 달 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일들이 예정되어 있거든. 그 많은 일들을 때문에 신경도 쓰이고 스트레스도 받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 일들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정리되어 ‘그때’ 라는 표현으로 기억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네. 얼마전에 있었던 일이야. 유튜브에서 다섯 살 짜리 아이들의 대화를 듣다가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독일어로 하는 문장들이 독일인들에게는 이렇게 들리겠지?” 하는 생각 말이야. 물론 과장이 조금 섞인 건 맞지. 나름대로 체계적인 어학 교육을 받고, 조금 더 전문적인 단어들도 알고 있는 내가 다섯 살 짜리 아이들과 어떻게 직접적으로 비교가 되겠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른 미묘한 뉘앙스를 살리지 못하는 데다가, 당황하게 되면 기본적인 문장 구조도 지키지 못하고 기존에 알고 있던 단어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걸 보면, 꼭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복잡해지곤 해.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한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더라. 자신감이 떨어지면서 단어와 발음을 얼버무려서 말하는 버릇이 들게 되는 거지. 쉬운 문장이나 표현인데도 깔끔하게 말하지 못하고 거칠게 뭉뚱그려서 말하게 되는거야. 한국어로 이야기한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을 문장인데, 독일어로 말하면 괴상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으로 변해 버린다는 말이지. 실제로 이상하리만치 독일어가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날에는 괜시리 어깨도 움츠러드는 것 같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 오지나 않을까 싶어서 더욱 긴장하게 돼.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오로지 한국어만으로 대화할 때는 참 많은 말들을 생각없이 내뱉었고, 또 어떤 말들은 일부러 뭉뚱그려서 애매모호하게 말하곤 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렇게 낭비하듯 말을 하는 것 또한 모국어를 쓸 때의 특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해보게 된다. 언어의 소통이 자유롭지 못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다 보여주지 못하고 그저 뭉뚱그려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그 어려움을 마음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모국어로 말할 때는 일부러 ‘뭉뚱그림’의 기술을 일부러 써먹을 때도 있어. 자신의 감정을 낱낱이 그리고 직설적으로 말하기가 힘든 상황일 때, 막연하고 모호한 표현들로 애써 덮어버리고 가두는 행동 말이야. 지나간 감정들에 대한 뭉뚱그림은 과거의 일들을 미화 하는 위력까지 가지고 있지만, 외국어를 배울 때의 뭉뚱그림은 전혀 다른 것이겠지. 미화는 커녕 본의를 왜곡하고, ‘이 사람과 더 이상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 말이야. 말은 이쯤에서 그만 뭉뚱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들을 시간이 지나 돌아 봤을 때 ‘웃으면서 뭉뚱그릴’ 수 있는 좋은 추억으로 남기 만을 바랄 뿐이야. 바보 같은 시절이 아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기억될 수 있도록. 말이 길어졌네. 또 편지할게.

이규호 - 뭉뚱그리다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마약전쟁 (2013) 감독 두기봉 <독전>이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원작이라는 <마 약전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꽤 재미있지 않을까 합니다. <독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재미가 있다 없다. 잘 만들었 다 그렇지 않다가 갈리지만 그것과 별개로 <마약전쟁>은 볼 만한가? 그리고 이쯤에서 어떤 부분을 다루면 보다 재미있을 까? 하는 것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되겠지요. 참고로 <마약전 쟁>의 한자 표기는 독전(毒戰)으로 되어있습니다. 원작을 모르고도 <독전>의 광고와 음악이 지나치게 화려한 것이 걱정꺼리였을때, <마약전쟁>이라는 원작이 있고 그 감 독이 그럭저럭 때로는 괜찮은 영화를 만들어왔던 두기봉 이 라는 사실을 알았을때는 원작에 대한 기대가 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 <천공의눈>이라는 작품을 <감시자들>이라는 작품으로 바꾸며 편집과 연 출이 화려해졌던 것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치장을 덜한 <마약전쟁>에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 지 않을까요? 그런 이유로 봤습니다. <마약전쟁>은 마약상 중 한명이 잡히면서 다른 팀을 쫓는데 도움을 주는 내용입니다. 그 안에 서 심리전이 치밀하게 펼쳐지죠. 이 심리전을 이야기 하는데는 같은 감독이 제작을 맡았던 <천 공의눈>을 빼놓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흥미롭게도 <천공의눈>의 감독이자 각본가인 유내해(游 乃海)가 <마약전쟁>의 각본가 이기도 합니다. <천공의눈>또한 요원들이 특별 감시를 이어가며 범죄자를 쫓는 특별히 화려한 맛은 없어도 템포와 연출로 끈적한 심리전을 보여주는 영화입니 다.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아주 화려한 <독전>과는 다르게 <마약전쟁>은 끈적한 영화에 가깝 습니다. 밀도있게 마약조직을 쫓아가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관여된 사람들 사이의 심리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조금 심심하거나 어처구니 없는 연출이라고 할 수도 있는 액션 씬을 단점으로 꼽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반대로 영화가 아닌 실제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면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긴 여운을 남기는 엔딩 또한 일품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중국 그리고 홍콩의 영화를 생각할 때면 화려하지는 않아도 단단한 영화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영화를 생각하면 아주 화려하고 찰기있는 대사를 팡팡 날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 다. 사건을 일상의 언어로 화려하지 않게 밀어붙이는 것도 꽤 중요한데 의외로 많은 작품들이 한


포 스 터 의 간 극 을 보 라

방의 훅을 노리는 것을 보면 때로는 이렇게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가 입니다. .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확실한 훅들이 모여서 살아남고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게되는 결과도 있겠지요. 어찌되었든 무거움을 일상적인 언어를 드높이는 입장에서 ‘두기봉’이라는 감독을 이야기 할 필 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혹은 제 주위의 사람들은 크게 유명한 감독으로 꼽지 않지만 저는 이 감독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의 영화사를 통해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고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 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가라는 측면에서 봤을때 대단하죠. 살아남기도 했고 때로는 성공적으 로 증명하기도 합니다. 끈기도 있고 노력도 하니까요. 네이버 영화에서 두기봉 감독이 연출한 작 품을 정리해 보면 60편 제작이 43개이니 보통 부지런 한게 아닙니다. 어린시절에 봤던 <천장지 구> 시리즈부터 최근에 보고 감탄하고 있는 <마약전쟁>까지 여러 작품들에 걸쳐 활발히 활동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해가 지날 수록 감독은 영화 안에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런 성장을 느끼는 것도 영화를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겠지요. 넷플릭스에서 최근까지 있었던 <블라인드 디텍티브>는 사라졌지만 (이건 조금 덜 추천합니다.) 가장 최근작인 <삼인행>은 있으니 시간 나실때 한번 훑어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상 을 탔던 <흑사회>나 오늘의 주제인 <마약전쟁> 그리고<탈명금: 사라진 천만달러의 행방>도 같은 감독의 수작이니 한번 보시면 연출과 그리고 극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괜찮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끝.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13. 집커피 찬물커피 최근에는 조금 바빴다. 여행 원고 작업 요청이 여러 차례 있었고, 제사를 비롯한 갖은 집안 행사까지 겹쳐 정신적인 피로가 극에 달했다. 여유가 없었다. 5월 신록은 푸르른데 미세먼지는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초조했다. 뭔가를 만들면서 한 템 포 쉬어가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유일하게 요즘 만들고 있는 거라곤 커피 밖에 없었다. 몇 년 전에 지인이 처분한다고 해서 받아온 더치커피 기구 로 내린 커피를 마실 때, 비로소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집에서 커피를 내려먹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우리는 몇 년 전부터 더치커피를 주로 마시고 있다. 더치커피의 장 점은 무엇보다도 간편하다는 것. 한 통 가득 추출해서 유리병에 넣어 냉장고에 보관하면 1주일은 끄떡없다. 차가운 물로 추출하기 때문에 원두에서 나오는 오일이 덜 추출되어, 원액 산화가 덜해서 시간이 흘러도 맛이 크게 변하지 않는 다는 것도 장점. 무엇보다도 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먹기 간편해서 좋다. 물론 집에는 더치커피 말고도 추출 기구가 여럿 있다. 프렌치프레스, 핸드드립 도구, 모카포트 등. 흔히 커피를 좋 아한다는 사람이라면 갖춰놓고 있을 법한 뻔한 것들이 있지만, 하나같이 내리는 데 정성과 시간을 요구한다. 간편 하게 재빨리 마시고 싶을 때는 냉장고에 넣어둔 더치커피 만한 것이 없다.

김치는 떨어져도 커피는 안떨어지도록. 쌀은 떨어져도 원두는 안떨어지도록. 원두는 어느새 500g단위로 구입하고 있고, 커피를 담아놓기 위한 밀폐용기는 주기적으로 인터넷에서 주문한다. 종종 친구들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 라벨과 포장지도 마련되어 있다. 종종 여행을 갈 때도 조금 담아간다. 숙소 근 처에 괜찮은 카페가 없는 것을 감안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종종 물에 희석해서 마시기 좋다. 마침 더치 커피가 떨어졌다. 커피를 내려보자. 사실 커피를 내리는 건 내일이 아니다. 카페에서 3년 가까이 일한 건 나지만, 커피를 더 잘 내리는 건 나보다 언니가 한 수 위다. 분명 성격 탓이다. 나는 대충대충, 언니는 꼼꼼하고 신중하다. 커피를 추출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언니가 떠오른다. 조용히 커피를 내리던 모 습. 커피를 추출할 때만큼은 언니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초콜렛 향이 나는 원두를 좋아한다. 산미보다는 묵직한 맛이 좋다. 라떼를 만들어 먹을 때도 그 편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설탕을 넣지 않아도, 초콜렛 시럽을 넣지 않아도 은근히 달게 느껴지는 그 맛이 좋다. 밀폐용기를 열자 원두의 달큰하고 알싸한 향이 밀려온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몇 년 전 카페에서 일할 때가 떠


오른다. 그라인더에 원두를 촤르륵 넣을 때마다 행복했고, 수요일이나 목요일 원두를 받을 때마다 기뻤던 그때. 원 두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만 보더라도 든든했던 때였다. 여튼 지금은 그때부터 이미 오래 지났다. 다시 돌아가도 그때와 같지 않다는 걸, 지금은 안다. 향기라는 건 이토록 순식간에 시간을 여행하게 만들어준다. 전자저울을 꺼내서 무게를 잰다. 500ml의 커피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100g의 원두가 필요하다. 와르륵 와르륵, 원두가 쏟아지는 소리가 좋다. 영화 <아멜리에>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 아멜리에가 식료품점 앞에 놓인 콩 포대자루에 손을 쿡 집어 넣는 장면. 원두에 그렇게 손을 쿡 찔러넣고 싶다. 손가락을 콕 찔러넣어볼까? 관뒀다. 그건 포대자루여야만 하니까. 100g 딱 맞췄다. 이제 원두를 분쇄할 차례다. 우리집 그라인더는 분쇄도를 조절할 수 있는 타입이다. 더치커피의 분쇄도는 4 정도. 드립커피와 동일하다. 만약 원두가 다크로스팅 되어 있는 오일리한 타입이라면, 4-5 사이로 분쇄도를 좀 더 굵게 조절하는 게 좋다. 진하게 추 출하겠다고 곱게 갈았다가, 대참사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치커피를 내려 마시기 시작한 초반에는 그런 참사가 많이 일어났었다. 우리는 주로 에스프레소용 원두를 사용 했는데, 오일리(oily)함이 남달랐다. 그때 당시에는 더치커피 추출 비율 공식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대충 알아서 내려 먹었던 시기였던 터라, 종종 추출 도중에 원두 사이에 가스가 차서 폭팔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적당한 굵기로 분쇄한 원두가루를 흘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러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기구 안에 원두 를 탈탈 털어 넣는다. 원두를 털어 넣기 전에 필터를 깔아야 한다. 원형필터에 살짝 물을 묻히면 유리용기에 고정이 되어서 편리하다. 더치커피 추출 전용 필터기구가 따로 있기도 한 모양인데, 역시 세척이 문제기에 우리는 일회용


필터를 사용하고 있다. 필터는 두 번 써야 한다. 원두를 다 넣은 윗 부분에 도 필터를 하나 올려 줘야, 물이 한 쪽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골고루 흡수되 어, 원만한 추출이 가능하다. 그리고 정수한 물을 한 방울, 두 방울. 3초에 한 방울씩 떨어지게 조절하 면 끝. 이제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잊을 뻔 했다. 빨대를 끼워야 한다. 더치커피 추출기구는 물, 원두, 커피 이렇게 세가지가 각각 담길 통이 필 요하다. 우리집 기구는 오래된 것이라 중간에 돌돌이가 있었다. 그 돌돌이 는 아무런 역할이 없다. 그저 장식용일 뿐. 최근에 나온 실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더치커피 기구는 돌돌이 같은 기구가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튼 이 돌돌이는 세척을 하다가 깨졌다. 원두의 기름때를 제거하기 위해 전용 솔을 넣고 슥슥 해보기도 하고, 소금을 넣기도 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 하다가 결국 사망. 낱개로라도 새로 구매하려고 실험도구 판매상을 뒤적여 봤더니 3만원이나 했다. 고작 장식용에 그만한 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을까, 라는 생각에 망설이다 그냥 돌아왔다. 그래서 지금은 임시방편으로 빨대를 끼우고 있는데, 이게 돌돌이보다 편리하다. 잡담이 길었다. 이제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5시간 정도면 500ml의 커피가 추출될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 커피를 마신다. 시원하게 얼음을 넣고, 언더락처럼. 그런데 이걸 더치커피라고 부르는 게 맞는걸까? 독일의 상인들이 이렇게 마신 것에서 유래했다고는 하나.. 그건 그저 일본에서 넘어온 가설일 뿐, 정작 독일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콜드브루(Cold Brew)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기도 하고. 뭐가됐든 영어. 그저 집에서 마시는 커피일 뿐이니 거창할 필요 없지 않을 까? 한낱 찬물커피일 뿐이다. 모니터를 보느라 눈이 지쳤다. 눈에 잠시 휴식을 주기 위해 베란다로 나간다. 발 밑에 펼쳐진 벚꽃나무들은 어느 새 한껏 푸르다. 해수욕장도 개장했다. 그렇다. 여름이다.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체니사이드

글. 장수양


3 아무 下

농담이 실내상점을 지나쳐 유리문을 열었다. 주인처럼 편안하고 익숙해 보였다. 물소리가 흐 르는 탕으로. 농담은 옷을 벗지 않았지만 한 걸음 뗄 때마다 조금씩 흐려져 뭘 입을 필요도 벗 을 필요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이내 물소리에 섞여들었다. 나는 평상 위에 가만히 앉아있 다가 캐비닛을 열고 지갑을 꺼내왔다. 실내상점에 바나나우유의 값을 놓아두었다. 다른 할 일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 아니다. 나는 이런 일들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대부분 무시했다. 오직 혼 자서 다른 혼자를 만들고 있다. 지지부진하지만 계속 생각해야 한다. 나는 유지가 한 질문에 대 답하지 못했다. 뒤늦게 농담에게 돌려준 내 대답은 나에 대해 생각하겠다는 것이다. 유지의 질문은 뭐였지. 나는 김이 서리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유리문을 보면서 상기했다. 처음에 유지는 내가 보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했다. 유지는 그렇게 기묘하고 낯선 태도로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띄엄띄엄. 뭔가를 누르듯이 내게 물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데도 ―그렇게 편협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자리에 앉았다. 서있을 수 없었다. 기운이 없었다. 계속 내가 무서웠던 이유는 그 질문이 나를 화나게 했기 때문이다. 유지는 나를 화나게 한 적 이 거의 없고 나 역시 비슷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 다시, 내가 그의 질문에 화가 났던 이유 를 물어야 한다. 유지의 질문은 그 자체로 나와의 생활 속에서 그가 나로 인해 불편하고 제한되 었거나, 아마도,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담아내고 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 사실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로. 블루아몬드 목욕탕의 벽지와 캐비닛, 거울과 평상, 실내상점이 아까의 그 자리에서 냄새를 풍 기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비누 냄새와 목욕탕 특유의 물 고인 타일 냄새였다. 여기는 내가 고향이었으면 했던 장소다. 나는 평상에 등을 내고 차가운 바닥에 앉아있었다. 손을 모아 보았다. 다음 세 가지에 관해 기도를 했다.

첫 번째,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수없이 많이 눈앞에서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편협하다.

두 번째, 나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내 인지 범위 안에서는.


세 번째,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사랑하는 이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내 곁을 둘러싼 그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기도를 마치자 어떤 식으로든 내가 혼자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나는 종교가 없었고 이 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아무도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나에게도. 그 무엇이 되어 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조금 쓸쓸했다. 일어서서 유리문을 열었다. 물소리가 나를 받아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훅 끼쳐 오는 더운 기운은 어딘지 포옹 같았다. 외쌍의 손가락나비 하나가 발밑을 고요히 기어갔다. 그는 바다를 옮겨가는 소라게처럼 의연해 보였다. 나를 반가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내 몸을 감싸주었던 이들 중 하나일까? 손가락나 비는 탕 안에서의 용무가 끝난 듯 유리문 밖으로 천천히 나갔다. 냉탕에 투명해 보이는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마르고 덩치가 컸다. 긴 머리카락은 곱슬 거리고 힘없이 흔들렸다. 물에 반쯤 잠긴 머리카락들이 인어처럼 떠다녔다. 그는 아주 피곤하 고 졸린 얼굴로 이쪽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시원한 냉기가 돌았 다. 탕에 들어갈 자신이 없어 두 칸짜리 차가운 계단에 걸터앉아 냉탕에 손바닥을 띄우고 찬물 을 떠보았다. 얼핏 보니 탕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람의 하반신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뭐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농담은 되물었다. ―아무렇게나 편한대로 있어. ―난 아무렇게나 있어. 도무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너무나 치우쳐 있고 애써도 침묵보다 못 했다. 나는 새로운 모습을 한 농담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보기만 해도 아주 작은 무엇이 그를 변 하게 한다면 평온은 얼만큼의 거리를 필요로 하는 걸까? 농담이 불편함을 택했다고 해서 내가 그 를 불편하게 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확신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더 이상 그를 내 의지로 변하게 하고 유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곳이든지 내쪽에서 인도했다고 착각하지 않도 록. 농담은 냉탕에서 몇 번 뒤척이더니 물방울을 튕기며 일어섰다. 그에겐 몸이 있으며 그밖에도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상처의 기록 2.왼발의 파도 / 글, 그림 희정

no surprises

오늘도 발리입니다.

오늘 계획이 뭐야? 하는 말에 몰라- 딱히 없는데? 라고 말하며 보낸 날이 일주일을 넘어갈 무렵, 서핑을 가르 쳐 준다는 친구의 말에, 좋아- 하고 별 생각없이 따라나섰습니다. 이름은 코코. 짙고 검은 곱슬머리에 배인 소 금기와, 그가 늘 입는 남방에 배인 바다냄새를 맡으며 한참을 달려 바다에 도착했습니다. 그야말로 따가운 햇 볕과 그 아래 느긋히 누워있는 사람들,

난데없이 등을 확 밀쳐 모래를 딛은 왼발. 너는 왼발잡이구나- 하고 코코는 껄껄 웃습니다. 제 몸보다 훨씬 커다 란 서핑보드를 끌어 자국을 남기며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그냥 나 따라오면 돼. 하는 말에 마냥 뒤를 쫒는데 점 차 목까지 물이 차오르고,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될 때까지 깊이- 아주 멀리까지 들어가, 나중에는 보드위에 올라 타 코코가 끄는대로 끌려다니며 그저 서핑보드를 묶어둔 왼쪽 발목의 줄과, 코코에 매달려 숨쉬고 있었습니다.

“okay, it’s your wave.”

그렇게 해변에 등을 진 채 밀려오는 파도를 기다렸습니다. 자, 이제 네 파도야. 하는 코코의 말에 보드를 돌려 패들링할 준비를 한 채 파도가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춰 파도에 올라타는 일. 당연히 보 드에서 떨어져 물을 잔뜩 마셨습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그대로 가라앉아버 리곤 했습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들어 쉽게 흐름을 끊을 수 없고, 그 흐름에 스스로의 숨을 놓쳐 물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한참이나 허우적대며 잔뜩 두려웠습니다. 여행을 시작했을 때 부터 죽으면 죽는거지. 라고 생각했음에도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은 아주 괴로웠고, 그렇게 몇번이고 필사적으로 보드에 기어오르고 떨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가까스로 보드에 올라, 파도를 타는건 그렇다 치고 대체 빠지면 어떻게 해야하냐고 찡한 코를 붙잡고 물었습 니다. 올라오려 하지말고, 네 숨을 찾아.- 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코코. 그 후로도 역시나 수 없이 파도를 놓


치고 빠지기를 몇번, 마침내 어설프게 파도를 타고 바다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돌아와 오크와 오늘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의 일기를 여기에 싣습니다.

170906

좀 더 설명해봐. 라는 말이 너무 좋다. 정말로 내 말을 이해하려- 단순히 내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려는걸 넘 어서, 내가 지금 전하려는 이야기를 잡아내려 하는 몸짓, 나를 향해 건너오는 오크

일단 바다 위에 던져진 나는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 왜 파도를 타야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바보같은 시도라 는것. 그저 계속 숨을 쉬고, 나의 리듬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보드를 붙잡고 올라가 비로소 파도 를 타는 일. 마치 내가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삶에 던져진 나.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그저 숨을 쉬 는것. 가라앉거나, 살아내야한다. 지금 나에게 밀려오는 파도를. 나는 이렇게 끊임없이 살아가야하는게 두렵다고 했다. 하지만 너는 이미 해냈고, 어느정도 파도를 느끼고 있 잖아- 라며 네가 오늘 탄 파도를 생각해 보라는 오크. 나는 그야 누군가가 ‘저건 네 파도야’ 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혼자 남게되면 나는 다시 둥둥 떠다니는 수 밖에 없을 거라고. 그리고 오크는 하지만 그 게 어찌됐건 그 파도를 탄건 바로 너 자신이라고 단단히 말한다. -

그리고 돌아온 이곳에서 왼발에 파도를 새겼습니다. 그 바다 위가 삶이라면 밀려오는 파도를 잡아 흘러가 든, 흘려 보내든, 놓쳐 가라앉든, 그저 나의 숨을 쉬자. 정도의 생각이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여전히 저는 파 도를 타지 못합니다. 엉거주춤하게 일어서 한번 뭍으로 나간게 처음이자 마지막의 성공일 정도로 말이죠.

그저 숨을 쉬는 일 일 뿐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지 의문입니다. 자꾸만 답답하고 얼마간 괴로워, 그럼에도 놓 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중입니다. 여기서도 저는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가라앉곤 합 니다. 흐름에 맞서지 않고 그저 흐르며 스스로의 박자로 살아가는 일. 뭐 계속 연습하다보면 언젠가 능수능 란하게 파도를 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 질리지 않고 그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 그게 요즘의 바람 입니다.

나는 찬란한 당신을 비춰 빛나는 우물 입니다. 熙井 http://bitmhj.blog.me/


글. 사진. 그림. 철민



사진:

민하


2018/5/30 11:27am 674번 버스 연희104고지 정류장 전


:민


2018/6/5 12:47pm 망원동


PinG

05

PonG

‘여행’ 황정운

이훈보

보내는 공

선생님께,

최근에 대한항공이 세간의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좋은 쪽이 아니라 좋지 않은 쪽으로요. 몇 년 전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 이른 바 땅콩회항 사건이 터질 때에는 흔한 갑질 문화의 단면으로 생각했지만 이쯤 되면 대한민국 대기업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오너 이슈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 대기업에서 사회 생활을 하는 입장이라 대기업이 남인 것처럼 마냥 손가락질하고 질타할 수만은 없는 입장입니다만, 이래저래 씁쓸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지가 구겨질 대로 구겨진 대한항공을 바라보며 씁쓸한 이유는 어떤 추억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때는 2009년 초여름 …… 제가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일 무렵입니다. 10년 전이군요. 몇 번 말씀 드린 것처럼 저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개 맥킨지 (McKinsey), 보스턴컨설팅그룹 같은 컨설턴트의 삶을 꿈꾸거나 아니면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UBS와 같은 대형 투자은행에서 트레이더의 삶을 꿈꿉니다. 이런 곳에 입사하면 그 순간부터 억대 연봉을 받으며 화려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제가 대학을 졸업한 것이 벌써 8년 전인데, 여전히 경영학과 졸업생들이 이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저 당시에는 가장 이상적인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개 현실적으로는 공인회계사 시험을 몇 년 간 준비하는 경우가 많죠. 경영학과 학생들의 통과의례인 셈입니다. 아니면 저처럼 일찍 공인회계사의 꿈을 접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열심히 입사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고, 기업에 취직하는 경로가 일반적이었죠.

지금은 서울 한복판 광화문 사거리에서 석유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2009년 당시의 저는, 그러니까 스물 다섯의 저였군요. 스물 다섯의 저는 광고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광고인 중에서도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습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인데요. 15초의 광고에서 선보이는 짧은 몇 마디의 단어를 통해 사람들의 감정과 폐부를 찌르는 카피(Copy)를 만드는 라이터(Writer)가 정말 멋있게 보였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좋다면 방송 작가도 노려볼 수 있고 돈벌이는 시원치 않을 수 있지만 전업


소설가도 생각할 수 있고, 신문 기자도 있고 …… 여러 가지의 삶이 있을 텐데 그 중 광고 카피라이터를 꿈꾸었던 이유는 왜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TBWA 박웅현 씨가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라는 책을 펴낸 것이 2009년 8월이니, 박웅현 씨를 따라 광고인의 삶을 동경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저 사람이 그 광고 카피를 만든 사람이야? 라고 주변에서 수군거릴 수 있는, 그런 멋진 삶을 살고 싶었어요.

여하튼 광고인을 꿈꾸던 제게 유명 광고 대행사의 공모전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광고 대행사가 모두 대기업 그룹의 인하우스 계열사라는 점은 조금 아이러니합니다. 삼성의 제일기획, LG의 HS애드, 현대의 이노션, 롯데의 대홍기획 …… 그 중 광고 취급량이나 금액을 따졌을 때 업계 1위는 단연 제일기획이었습니다. 매 년 한 번 대학생을 대상으로 개최하는 <제일기획 아이디어 페스티벌>은 모든 예비 광고인의 등용문과도 같았죠. 제일기획 이외에도 HS애드, 대홍기획 등 유명 광고회사에서는 매 년 한 번씩 대학생들을 위한 광고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뭐랄까 ……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문인을 꿈꾸는 예비 작가들에게 있어 조선일보 혹은 중앙일보 신춘문예와 같은 위상이라고 표현하면 비슷한 비유는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소설가 장강명 씨가 최근 <당선, 합격, 계급> 이라는 책에서 신춘문예의 허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도 잊지 않아야 하겠지만요. 취준생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진실인지 허실인지 구분할 겨를이 없었을 겁니다. 일단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급했죠.

2009년 6월. 저는 대형 광고기획사 중 하나인 HS애드의 광고대상을 준비했는데 제가 선택한 대상 기업은 대한항공이었습니다.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니 ‘Young Target을 중심으로 대한항공 기업이미지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과제였군요. 글로벌 명품 항공사로서의 이미지 구축과 함께 Young Target 층과 심리적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광고 활동을 제시하라고 하는데, 아무리 패기 넘치는 대학생의 머리에서 이렇듯 화려한 수식어로 가득한 과제를 잘 수행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회의적이지만 당시의 저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듯 합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당시 대한항공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세간의 화제였습니다. 이번에는 좋지 않은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요.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시리즈 광고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거든요. 2008년 시작된 이 광고는 처음으로 스토리텔링 방식을 도입해 아름다운 영상과 감성적인 문구와 함께 대한항공 취항지의 매력을 소개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하죠. 미국 곳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도회적이고, 또 여유로운 삶을 아름답게 그려낸 광고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대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제2의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와 같은 빅히트 광고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사실 미국에 가본 적도 없지만 이미 제 마음은 미국을 거닐며 제가 만든


광고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듯 했죠. 주변에 광고를 좋아하는 경영학과 친구 3명과 조를 이루어 공모전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장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주제는, 우리 같은 젊은 세대에게 여행이란 것이 정말 무슨 의미일까? 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여행의 본질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죠.

여행의 본질이라 …… 돌아보니 그 때 저는 두 가지로 여행의 본질을 생각했던 듯 합니다. 먼저 하나는 여행 패러독스라는 개념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 해당 여행지에서 이런 것을 꼭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오르셰 미술관에 가서 마네의 <올랭피아> 그림을 꼭 보겠다거나, 북유럽에 가서는 하늘 위 오로라를 보겠다거나, 중국 성도에 가서는 팬더를 보겠다거나 하는 식이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역시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그런 시각적인, 감각적인 경험에 목말라 있었으나 막상 여행에 다녀와서는 그곳에서 만난 아주 흔한 사람들이 더 오래도록 기억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오르셰 미술관 앞에서 낡은 케이스를 앞에 펴두고 혼자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거리의 악사, 북유럽에서는 잔뜩 옷을 껴입고 입김을 불며 바삐 걸어가던 사람들, 중국 성도에서는 연신 웍을 흔들며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던 낡은 셔츠의 아저씨 …… 이런 사람들이 더 기억나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행 전에 기대하는 것과 여행 후에 기억나는 것이 서로 다른, <여행 패러독스>에 대해 감성적으로 접근해보자는 생각이 우선 들었습니다. 조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이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광고 기획서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대부분의 항공사는 여행 동기 단계에서 자연 경관, 독특한 현지만의 경험, 음식 등 비 인간적인 요소를 여행의 재미로 내세우지만 실제 여행 후에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었고, 이것이 바로 기존의 항공사들이 ‘여행’의 sequence에서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여행 동기 - 여행 추억의 갭을 ‘여행 패러독스’라고 부르며 다루어지지 않은 ‘사람’ 에 대한 이야기를 커뮤니케이션 메시지 테마로 삼아 전개하는 것. 이것이 특별한 비행의 완성이며, 특별한 비행이 보다 특별해질 수 있는 이유이며 대한항공의 특별한 비행이 더 감성적으로 젊은이에게 다가갈 수 있는 광고 전략이 될 것이다.

- 2009년 6월 26일 HSAD 광고대상을 준비하며 조원들에게 보낸 편지 중

그런데 한참 여행 패러독스에 대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던 중에 엉뚱하게도 또 다른 여행의 본질이 머리 속을 스쳐갑니다. 이것은 <여행 패러독스>처럼 멋진 타이틀은 없지만 대략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행의 전체 여정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죠. 여행을 가려는 결심, 여권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준비, 인천공항에서의 출국, 즐거운 여행, 돌아오는 비행기, 인천공항 활주로에 랜딩 하는 그 순간까지 …… 여행은 현지에서의 먹고 즐기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비단 해외여행이 아니라 서울에서 충청남도 개심사(開心寺)에 가려고 해도 비슷한


단계를 밟죠. 그런데 대다수의 광고는 전체 여정에서 즐거운 여행 순간만을 주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쿄에서, 파리에서, 뉴욕에서, 마드리드에서 무엇을 즐기고 먹고, 누구를 만날 수 있는지 오직 그것에만 사람들의 상상력과 설렘을 자극했죠. 그런데 제 자신을 돌아보니 예전에 떠났던, 혹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의 즐거웠던 여행을 되새김질 할 때 흐뭇하고 심지어는 애잔한 감정까지 깃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행은 떠나기 전이 아니라 떠나고 돌아올 때 완성되는 것 아닌가. 여행의 본질은 떠남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옴에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여행은 돌아옴이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은 결국 출발한 위치로 다시 돌아올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돌아옴이 있기에 그 다음에 다시 어디론가로 떠나갈 수 있을 것이다. 뒤늦게 떠오른 이 두 번째 생각이 솔직히 저는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원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개인적으로 기획서를 하나 더 만들어서 남몰래 응모를 하였죠. 그러니까 저는 두 개나 응모한 것입니다. 둘 중 하나는 되겠지 …… 이런 마음이었습니다만 둘 다 1차 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2009년 여름의 기억입니다.

이번 편지의 서두에 대기업에 종사하는 직장인의 제 처지를 잠시 밝힌 것이 있지요.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합니다.

얼마 전 저희 회사에 새로 오신 사장님께서 구성원들과의 간단한 간담회를 가지고 싶다고 하시면서, 간단한 이력이랄까 각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궁금해 하셨습니다. 대 여섯 개의 질문에 짧게 답을 해서 제출하기로 했는데요. 그 중 “삶의 버킷리스트는?” 이라는 질문이 있어 저는 10초 정도 고민하다가 <20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 비평분야 당선> 이라고 썼습니다. 2030년이면 제가 마흔 여섯의 나이겠군요. 저와 동갑인, 한 다리 건너 아는 친구가 몇 년 전 문학비평으로 수상한 것이 계속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부러움이 아니라 동경에 가까운 감정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가장 인상적인 여행지는?” 이었습니다. 저는 10초, 10분이 지나도 답을 써 내려가기가 좀처럼 어려웠습니다. 몇 번을 고민하다 적은 것은 <충남 개심사(開心寺)> 였답니다. 아까 어딘가 언급되었던,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서 소개했던 작은 절이지요. 서울에서 채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이곳은 봄에 가면 정다운 꽃과 물과 하늘이 가득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말 그대로 마음이 절로 열리는 절이지요. 제가 어릴 무렵 가족들과 함께 종종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내를 넘어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의 시가 문득 떠오르네요. 개심사로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기에 개심사가 떠오르는 것이겠지요.

봄이 다 지나기 전에 개심사에 한 번 들려보고 싶습니다. 봄이 다 지나기 전에 …… 아니, 어느덧 6월입니다. 이제는 여름이군요.


이 여행이 끝나면 다음의 내가 시작된다.

추신. 광고에 대해 생각하니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TBWA 카피라이터로 일하는 유병욱 씨의 <생각의 기쁨> 책에서 발견한, 일본 JR철도 광고 포스터 하나를 덧붙입니다. 이것 역시 또 다른 여행의 본질이겠지요.

[끝]

황정운 9년째 석유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글쓰기와 현대미술을 좋아합니다. https://brunch.co.kr/@aboutexpression


돌아온 공

안녕하세요. 정운님.

이달의 주제는 여행이군요. 안 그래도 최근 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어 여행에 대한 생각을 아주 짧게 했었는데 주제로 선택되어 놀랐습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 같은 경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광적으로 세상천지를 헤집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고 겁이 많아서 얌전하게 안전한 범위를 이리저리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인문의 영역에서 여행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다뤄야 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봤습니다. 그중 저는 오늘 이 문장을 걸고넘어지고 싶어 졌습니다. “여행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데 가장 좋은 계기” 아마 이와 비슷한 문장 중 아무거나 떠올리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한 일이 있었는데. 왜 이런 표현이 나오고 크게 인기를 끈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왜일까요

우선 여행의 시작에 대해 떠올려 봅니다.

“여행을 가자!” 혹은 “여행을 떠나야겠어.” 이 결심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여행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가는 것이라는 점이겠지요. 납치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여행을 결정하는데 스스로의 의사가 반영됩니다. 지인의 선택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도 동의의 과정을 거치니 아주 꼭 맞는다고 하지는 않아도 스스로의 의사가 반영된다는 요소는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확대해 생각해보면 책임이 자신에게 귀속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여기에 여행의 첫 번째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불확실한 세계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이죠. 그리고 만나게 될 경험의 분량도 꽤 방대할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사건들을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은 변화와 적응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는데 자발적 선택인 만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애쓸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적응을 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자신의 습관이나 행태를 돌아보고 수정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더해 일상이라는 생활 속에서 따라다니는 보통의

스트레스 요인들을 다 떼놓고 와서 누적된 자신의 경험을 다 동원한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사회적 지위와 무관한 나 자신의 100%를 드러내는 경험을 하게 되죠.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면 최대한의 자신이 적절한 범위의 스트레스(외부 변화 요인들)와 만나 적응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레벨 디자인이 잘 된 게임을 하면서 서서히 경험치를 쌓고 자기 자신을 LEVEL UP! 시키는 것입니다.


여행의 거리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볼까요? 여행이라고 해도 잠을 자고 오지 않는 범위 그러니까 우리 동네나 옆 동네를 가는 정도의 산책이라면 일상적인 고민을 머리에 담아 둔 채로 주변을 환기시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수정 가능한 범위를 조정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합니다. 산책을 하면서 아주 역사적인 (과학적) 발견을 하는 사례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산책이라면 결국 집에 돌아가 해야 할 일과 같은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주변을 환기시켜 객관화를 유도하고 일상적인 범위에서 긍정적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을 줍니다. 저는 글을 쓰다가 막힐 때면 나가서 좀 걷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런 낮은 단계의 변화와 적응을 거치다 보면 글이 풀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작년부터 자주 써먹고 있답니다. 그럼 1박 2일 거리 정도가 되는 국내라면 어떨까요?

조금은 다른 문화권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와 같은 교통과 이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면 전혀 다른 문화권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사투리로 인해 언어 차이를 경험할 수도 있고 지역의 습관을 몰라 곤란이나 웃어넘길 사건들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말은 통해도 지리도 낯설고 주변 환경도 통제되지 않습니다. 입에 안 맞는 음식으로 고생을 하거나 물갈이와 같은 신체적 적응 및 고통도 따르고 잠자리에 적응하지 못해 뒤척이는 등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 모든 문제와 부딪히고 감내합니다.

더 긴 기간은 뭐가 있을까요 국내의 경우라면 장기 여행이 있을 것이고 이때는 여행의 피로 +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의 수정과 길의 습득 (풍경의 기억) 등이 동반되는 것 같습니다. 빠르게 적응을 반복하면서 동일 언어의 지역 문화권을 훑어 가며 부딪히게 됩니다.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를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럼 이것을 좀 더 확장해 거리를 벌리면 다음은 해외여행이 있겠지요?

해외는 전혀 다른 문화권에 던져집니다. 표지판을 쓰는 방식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예절도 다르고 심지어 삶이 누적돼 만들어지는 법의 처벌의 기준도 다른 공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투쟁이나 정복의 역사를 거친다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물론 통치를 시작하고 문화를 바꿀 정도의 힘과 강제력은 없지만 반대로 자신이 부정당하는 (그러니까 단순히 문화권이 다르다는 이유로 행동을 스스로 돌아봐야 하는) 경험이 뒤따릅니다.

혹시 이런 행동이 실례가 될까? 우리는 너무 당연한 수저와 젓가락을 왜 여기서는 쓰지 않지? 등등 문제라고 인식할라 치면 아마 자신이 숨 쉬고 있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상들을 문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행의 즐거운 점이라면 끝이 있다는 것이죠. 고행이 멈추는 종료일이 존재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일상이 괴롭다는 것은 종료일이 없다는 것에 큰 절망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여행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하자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여행이라는 자기부정을 마치고 집이라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여행에서 무척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를 부정하는


행동이 끝없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참고 원래의 삶을 유지할 수 있고 혹은 깊게 되돌하보고 변화한 삶을 일상에 적용할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라는 것이 가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적당한 부정과 성찰 후에 돌아오는 습관과 일상을 통해 고통과 즐거움이 균형 있게 오고 가는 셈입니다.

여행지에서 흔히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좋은 것이죠. 추가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같이 간 지인들로 인해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죠. 변화를 꾀하러 갔던 곳에서 일상이 딱 붙어 당신을 괴롭힌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행이라는 것이 꽤 쓸모 있는 것이죠. 남이 자신을 부정하려 드는 것처럼 괴롭지도 않고 스스로를 형편없다고 혐오하는 것도 아닌 귀여운 모험이니까요. 물론 그 안에서 삶은 또 알 수 없어서 괴로운 일도 발생하고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큰 사고를 겪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원래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니 여행은 유익한 부분이 많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여행 말고 다른 여행도 있죠. 관광이라고 이야기하면 좀 더 와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TV를 보듯 가서 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집처럼 쾌적한 숙소에 안전하고 편안한 이동 그리고 느긋한 휴식 이런 여행이라면 호사의 연장이겠지요. 안락함의 확장 풍요의 연장이자 삶의 보상입니다. 뭐 이런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여행지의 시선의 건너에는 우리가 두고 온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즐겁게 누리는 것을 방해하거나 폄하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구나 그런 면이 있으니까요. 다만 최소한의 예의를 인간적 사랑을 가져간다면 미식을 위해 불행의 맛을 즐기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합니다. 최근에 뉴스에서 다뤄졌던 북촌의 관광 거부 운동도 이것과 조금 연관이 있겠네요.

이달에도 쓸데없는 이야기로 말이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하나 있다면 여행을 다니는 몸이라는 그릇도 늙고 노후화되는 만큼 젊은 시절에 가는 게 역시 좋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남은 생에 더 효율적으로 수정된 자아를 퍼트릴 수 있지 않을까요?

뭐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다음 달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훈보 드림 https://brunch.co.kr/@exxx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