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이리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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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입니다. 도토루의 하루 / 그림. 호지 백림서신 - 13. 편리의 시대에서 / 글. 사진. composer B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 염력 (2017) 만든다오 - 12. 꽃도둑 / 글. 사진. 진선 Quarter life crisis - 1. 프리랜서로서의 독립 / 글. 사진. 박주원 체니 사이드 - 3. 아무 中 / 글. 사진. 장수양 상처의 기록 - 1. 떡갈나무 잎 / 글. 그림. 희정 의미 없는 이야기 / 그림. 글. 사진. 철민 Ping Pong - 04. 사전 / 글. 황정운 이훈보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 시간과 자유 / 글. 사진. 민하


5월에는 4월보다 두꺼운 잡지를 보여드리겠다는 약속을 했었는데, 일단 지키게 된 것 같습니다. <상처의 기록>의 희정 님과 <Quarter life crisis> 의 주원 님이 새로 합류 해주셨습니다. 두 분 모두 과거의 연재와는 다른 이야기를 펼칠 예정이니 재미있게 보 실 수 있을 겁니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 날이 있어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데, 그것뿐만 아니라 부 처님 오신 날과 518 광주 민주 항쟁일이 있죠. 5월의 기념일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단순 가정으로 한정 짓기보다 폭넓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달이 아닌가 합니 다. 가족도 종교도 민주화 운동도 사실은 서로를 사랑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니까요. 날도 본격적으로 따뜻해지고 마음도 여유가 생기니 피어나는 사랑을 나누시길 기원합 니다. 법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랑이 더 많은 것을 쉽게 바꿀 수 있습니다. 믿고 사랑하는 일에 시간을 쏟으시기를 바라며 이만 물러 갑니다. 이달에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월간 이리 EXXX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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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림 서 신

伯 林 書 信

Composer B

13. 편리의 시대에서

잘 지냈어? 드디어 이 곳에도 봄이 왔어. 올 듯 말 듯 했던 봄이라서 그런지, 등 떠밀려 온 건 아닌가-싶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날씨가 좀 따뜻해지니까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져서 좋네. 봄이 되면서 가게들은 테이블을 다시 테라스로 꺼내 놓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행사들도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어. 조금만 더 있으면 나라 전체가 축제들로 가득차겠지? 그곳에 가볼 수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식만으로도 괜히 가슴이 설레게 돼. 얼마 전에 나는 지인의 연락을 받았어. 여름에 독일에서 열리는 한 음악 축제의 오프닝 공연 티켓을 구하고 싶은데, 온라인으로는 티켓을 구매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예매 방법에 대해 알아봐 줄 수 있겠냐는 거였어. 연락을 받고 홈페이지에 가서 찾아보니, 오프닝 공연을 제외한 다른 공연들은 인터넷 예매가 가능하지만 오프닝 공연은 연주회의 형태가 특이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문의를 달라고 하더라구. 오프닝 공연은 뷔페처럼 여러 개의 공연들 중 관객이 보고 싶은 공연 몇 가지를 직접 선택해는 형태이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 홈페이지에는 역시 ‘온라인 예매를 제외한 전화, E메일 그리고 우편(!)으로 문의하라’는 안내가 되어있더라. 그래서 주최측에 직접 문의하는 메일을 보내는 동안 ‘시대가 어느 시댄데 고객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냐’ 하는


생각도 들더군. 하지만 아직도 우편을 통해서 상당수의 일을 처리하는 독일 사회의 특성상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어. 독일은 인터넷 뱅킹을 신청해도 몇 주를 기다려서 우편으로 PIN번호를 발급 받지 못하면 사용조차도 할 수 없고, 대학교 입학원서도 우편으로만 받는 곳이 여전히 많거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IT강국이라 자부하는 내 나라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도 느꼈고. 그렇게 메일을 보내고 며칠 뒤, 그 일과는 별개로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서 무언가를 결제 하기 위해 본인 인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어. 나는 독일 유심 카드를 쓰고 있어서 휴대폰 문자 인증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메일을 통한 인증이나 아이핀 인증을 하려고 했지.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람? 본인 인증 수단이라고는 휴대폰 인증 하나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오직 한국 통신사에 가입된 사람만 할 수 있게 되어있더라구. 혹시 모른다는 마음이 들어 한국에서 가져온 S통신사의 유심 카드를 끼워봤지만, 내가 독일에 오면서 그 회선을 정지시켜 놨기 때문에 그나마도 소용이 없더라.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니 신분증 사본을 그 포털사이트 고객센터에 보내서 문의해 보라는 조언이 있기는 했는데, 정작 그 포털 사이트에서는 그것에 대한 안내문을 찾기가 힘들었어. 그래서 나는 본인 인증이 필요 없는 은행 계좌 이체 방식으로 결제하기로 했지. 하지만 계좌 이체가 성공하기 직전에 경고창이 뜨면서 이체를 진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 일시적인 현상인가 싶어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똑같았어. 심지어 ARS 인증방식 마저도 한국 통신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가능이었지.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한민국 최대의 포털 사이트라는 곳에서 이런 불편을 겪을 줄이야. 물론 나야 인터넷이든 지인을 통한 방법이든 갖은 수를 써서 인증을 할 수도 있겠지만, 휴대폰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특히 요즘은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께서도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이용해보려는 분들이 많은데, 휴대폰이 없다면 이 분들의 본인 인증은 불가능한 것일까? 설령 휴대폰이 있다고 하더라도 휴대폰 인증방식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분들은 그 중에서 얼마나 될까? 그 포털 사이트 말고도, IT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느 곳이든 간에 이런 불편에 대해서 생각해본 곳은 얼마나 될까? 단순히 이 문제에 대해서 민망한 웃음으로 “요즘 휴대폰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면서 얼버무릴까? 아니면 그들은 애초에 고려대상도 아니었던 걸까? 물론 더 빠르고 간결하게 클릭 한 번 만으로도 모든 것이 처리가 되는 방법을 연구해보는 것도 기술 발전에 있어서 참 중요하지. 하지만 그 전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그 분야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 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통적인 방법을 지키는 것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듣는 “요즘 휴대폰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하는 식의 반문이 유효할 때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런 반문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봐. 빠르고 앞서가고 편리한 것들도 좋지만,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누군가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말이 길어졌네. 또 편지할게.

Michael Jackson - Much Too Soon


월간이리에서는 새로운 필진을 찾고 있습니다. 차분 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듯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하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장르를 가리지 않으며 이것이 될까 싶은 연재들도 가능한 연재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니 연재와 관련해서 문의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언제든 exxx2x@gmail.com 으로 문의 주시면 정말 정말 친절 응대 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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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 염력 (2017) 감독 연상호 주의 이 영화는 추천하는 것도 추천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영화는 연상호 감독의 <염력>입니다. 네 이버 평점 기준 기자 평론가 6.0 관람객 6.24 네티즌 5.05를 받고 있어서 남들이 추천하지 않는 영화에 <염력>을 언급 하는 것이 어울린다고도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지만 굳이 주의문을 쓰는 이유가 있으니 인내심을 갖고 글을 읽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온라인에서 <염력>을 검색해보면 평이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살리는 방법이라고는 김경식 님의 맛깔난 해설과 감질나는 편집 외에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영화를 들고 왔을까요. 오늘은 영화 바깥의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영화의 장면이나 대사 몇 마디보 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해서 오늘은 좀 즐겁습니다. 오늘은 <염력>을 둘러싼 추측과 의 견을 보시며 이 사람은 이런 이상한 생각도 하는구나..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개봉 전 이 영화가 상당히 흥행하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극장에서 예고편을 보는 순간 이 거 되겠다! 하는 느낌이 왔다고 할까요? 연상호 감독이 염력을 연출하는 장면이 빼어나다고 생각 해 <부산행>에 이어 연타석 홈런을 치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습니다. 물론 예고편 중간에 나왔 던 류승룡 씨의 코미디 연기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저 혼자만의 취 향일 수 있으니 아주 높은 감점 요소는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배우의 매력보다는 연출의 힘이죠. 연출을 맡은 연상호 감독은 이미 <돼지의 왕>부터 시작해 <사이비>, <서울역> 까지 시나리오 를 직접 쓰면서 단계적으로 흥행을 성공시켰던 만큼 구조를 짜고 실현시키는 데는 도가 텄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했던 실사영화 <부산행>의 완성도는 세간의 평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 저는 오히려 연상호 감독이 애니메이션보다 실사영화에 더 어울리는 감독이 아닌가 했을 정도 였습니다.) 보통사람들이 <부산행>을 8점이라고 생각하면 저는 9점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의 평가보다 후하게 점수를 주는 편입니다. 그래서 <부산행>을 보는 순간 ’아 앞으로 연상호 감독 은 뭘 만들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런 개인적 기대와 함께 등장한 <염력>의 예고편은 빠져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제목 좋고 소 재 좋고! 하지만 한 가지 그늘이라면 ‘이 작품에 류승룡이라는 배우가 어울리나?’ 하는 의구심


포 스 터 만 보 면 시 중 의 평 점 과 가 깝 다

은 여전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과도한 코미디를 하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봤습니 다. 저는 류승룡 최고의 흥행작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어색한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류승룡 씨의 최근작이 <도리화가> <손님> <명량> <표적><7번 방의 선물> <광해>로 <염력 >을 찍기까지 공백기가 있고 제 취향과 별개로 커리어의 정점이라고 할만한 <7번 방의 선물> 이 2012년이었으니 지금도 그의 이미지가 유효한지 또한 관심사였습니다. 저는 계속 실눈을 뜨 고 째려봐도 누군가는 좋게 볼 수 있으니까요. 이럴 때는 감독을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감 독은 흥행작을 만들어낸 이력이 있었고 탄탄한 연출력이 뒷받침되는 만큼 저 같은 관객은 완성 작을 앞에 두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흥행 결과가 나왔고 사람들의 의견도 늘어난 상황에서 <염력>이 어느 지점에서 관객들 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못했는지 그리고 여전히 주인공이 류승룡이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 을 과거보다는 강하게 갖고 있지만 저의 추측이 계측이 되는 것은 아니니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 들 중에서 이 부분에 흥미를 갖고 고민해 볼 분이 계시다면 <염력>을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이유를 넘어 <염력>을 볼만한 두 번째 이유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는 과연 감독의 역량은 쇠퇴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상상의 영역이고 작품의 평가가 들쑥날쑥한 감독들도 많으니 이번에 폼이 좀 오 락가락했나 보다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감독의 역량에 대한 의문은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혹


시 다른 문제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역량이 들쑥날쑥하다고 보기에 연상호 감 독은 아주 차근차근히 단계를 밟아오며 <부산행>을 터트렸으니까요. <염력>의 여러 장면들은 이제까지 연상호 감독의 작품들과 다르게 유기적인 면이 떨어집니다. 어쩌면 제가 연상호 감독 을 지나치게 치켜세운 나머지 우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장면은 ‘역시’ 할 정도로 탄탄하 고 또 어느 장면에서는 ‘어라?’ 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영화 되게 못 만 들었네.’ 하고 무작정 비난하기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 까 합니다. 그만큼 영화를 보는 내내 날카로움과 의아함의 간격이 크다고 할까요. 보통 애매한 장면이 이어지는 영화들은 아주 날카로운 부분도 없기 마련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염력>은 날 이 선 부분들은 아주 날카롭고 무딘 부분들은 날이 없다시피 합니다. 예를 들면 배우 정유미의 쓰임이나 연출 부분은 아주 놀랍습니다. 어설픈 부분이 하나도 없고 캐스팅을 한 그 자체로 감각에 날이 서 있습니다. 그러다 김민재가 등장하는 부분은 지나치게 통속적입니다. 그 외에도 염력을 사물에 사용하는 장면은 디테일하다가 인간에게 사용하는 장 면에서는 허술합니다. 희한하죠. 이런 요소들이 순간순간 엇갈리면서 좋기도 나쁘기도 한 영화 가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후반부 하이라이트는 과하게 밋밋합니다. <부산행>의 좀비들이 몸을 디테일하게 움직였던 것을 생각하면 <염력>의 건물 씬은 지나치게 느슨합니다. 이게 한 명 안 에서 일어나는 낙차라고 보는 게 단순하고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지만 왠지 저는 각기 다른 누 군가가 만든 요소들을 이어 붙인 것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작품을 코미디로 만들기 위해서 웃긴 연출을 시도할 때는 기운이 확 떨 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감독이 단순히 코미디에 최적화되지 않았던 것인 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렇게 본다면 아주 단순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지만 그렇게만 생 각하면 너무 심심하니 혹시 쉽게 알기 힘든 영화 외적인 부분이 뭔가 바뀐 게 있나 싶어서 찾아 본 다른 정보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부터는 감독을 신봉한 나머지 벌어지는 이상한 추측의 단계입니다. 우선 <부산행>과 <염력>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고 제작진을 검색해 보기로 했습니다. 두 영화 사이의 간격이 멀지 않으니 팀원들이 크게 변동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제작 총괄이라는 자리에 낯선 분이 보입니다. 이 분이 제작총괄을 맡은 작품은 최근작을 위주로 설 명드리면 <군함도> <염력> <곤지암>이고 그전에 참여했던 작품들은 <하루> <인천 상륙작 전> <시인의 사랑> 등으로 이렇다 할 작품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저는 그분의 최근작인 <곤지암>을 보지는 않았지만 <군함도>와 <염력> 의 제작총괄의 같다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르게 <염력>의 애매함이 납득되었습니다. < 다음 이름이 이시간에


염력>과 <군함도>는 설명하기 힘든 닮은 지점이 있고 그 닮은 지점에서 정확하게 의아하게 했 기 때문이죠. 저는 <군함도>를 보면서도 <베테랑>을 찍었던 사람이 <군함도>를 이렇게 만들 어? 하는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그 순간 저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하지는 못해도 납득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연상호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자! 제작 총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도 모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힐난할 수 있을 것 같습니 다. 어쩌면 저는 이런 방식으로 감독을 옹호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납득하기 위 해 또 다른 희생자를 찾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영화를 볼 수도 있 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부정확한 의견인 줄 알면서도 <염력>을 이야기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다음번에도 연상호 감독의 작품 그러니까 책과 애니메이션 영화를 포함해 모두를 지지하 고 기다리려고 합니다. 감독의 전작인 <사이비>와 <돼지의 왕> <서울역> <부산행> 등을 재미 있게 보신 분이 계시다면 이런 측면에서 ‘왜 이 영화는 이질적인 느낌이 날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시면 마냥 실망이라고 이야기하기보다 조금 더 재미있지 않을까 합니다. ps 제 지인 중 한 분은 어쩌면 그것은 큰돈을 들여 작품을 만들 때 발생하는 단점이 드러난 것 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염력>과 <부산행>의 제작비는 비슷한 편입니다. 어찌 되었든 예정대로라면 제가 잠시 맡아 연재하던 영화 코너는 이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마무리라고 생각해 부정확하면서도 이상한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한번쯤 해보고 싶었습니다. 끝.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만 든 다 오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가내수공업 고군분투기

#12. Hana Dorobou / 꽃도둑 일본에서 돌아오니 벚꽃이 지고 있었다. 만개한 날 떠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쿄에서 원 없이 벚꽃을 보고 돌 아온 터라,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벚꽃 폭탄을 맞은 길을 지나 아파트 복도 안으로 들어왔다. 밖과 달리 건물 안은 시원했다. 캐리어 옆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때, 가슴에 조금 시린 봄바람이 휑, 하고 지 나간 것 같았다. 4박5일간의 도쿄 여행은 좋았다. 20대에 두 번, 일본에 살 일이 생겼었다. 한 번은 교환학생, 한 번은 취업제의. 제1전공이 일본어가 아닌 내게는 일생의 운을 다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와 금전적인 문제로 두 번의 기 회는 그렇게 내 손을 떠났고, 난 그날 이후부터 중동무이(中途半端,ちゅうとはんぱ)한 상태였다. *하던 일이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서 흐지부지 그만두거나 끊어버림.


사는 게 바빠서, 먹고 사는 게 급급해서, 라는 변변찮은 이유. 그렇게 난 32살에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 공항으로 날아갔다. 도쿄는 깨끗했고, 소박했으며, 익숙했다. 거리에 차들이 조금 적었으면, 거리가 조용했으면, 길에서 담배 피는 사 람이 없었으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었으면… 등등, 내가 원하는 그 모든 이상적인 조건이 그곳에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불편한 것들이 적기에, 난 비로소 예민함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도쿄의 3월은 그야말로 벚꽃으로 시작해서 벚꽃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도쿄에 갔던 3월 말은 벚나무에 푸른 잎이 조금씩 비치던 시기로, 스타벅스에서도 벚꽃 시즌 음료가 종료됐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주쿠교엔*을 비롯 곳곳에는 벚꽃이 활짝 펴 있었고, 골목마다 분홍색 꽃잎이 소용돌이쳤다. *교엔은 일왕 소유의 정원으로 공원(코엔)과 다르다. 우리는 벚꽃빵을 먹었고, 벚꽃이 올라간 당고를 먹었고, 벚꽃 크레페에, 벚꽃찐빵마저 먹었다. 가는 곳마다 벚꽃 관련 상품이 보였기에, 꽃을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수동 '당고집'. 우리는 매년 봄이면 그곳에서 벚꽃 빙수와 벚꽃 당고를 먹었다. 아직 쌀쌀한 3월의 서울에서, 머 리를 찡 하게 울리는 빙수 얼음을 먹으며, ‘올해도 봄이네’ 라며, 연례행사를 치렀더랬다. 그녀가 퇴근 한 밤, 혹은 주말의 늦은 오후. 한적한 그 골목의 냄새와, 가게의 공기도 또렷이 기억한다. 내년 봄은 더 좋겠지, 내후년 봄은 더 좋겠지 하며, 희망을 품었던 그때의 우리에게 2018년 봄에 도쿄에서 벚꽃을 본다는 예상은 없었다. 어쩌면 제주도 보다 편안했던, 이번 봄 우리의 도쿄.


여행 빨래를 돌리면서 베란다에 앉아 발밑으로 펼쳐진 벚꽃을 보다 문득 어젯밤 본 NHK의 방송이 생각났다. 벚 꽃절임을 만드는 지방을 찾아가서, 만드는 방법이 나왔더랬다. 그래서 문득, 세탁기를 돌리다말고 밖으로 나왔다. 왕벚꽃이 질 무렵, 겹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진분홍색, 캉캉치마처럼 하늘거리는 꽃잎이 겹겹이 탐스러운 꽃송이가 단지마다 한 두 그루 피어있다. 사실 이건 도둑질이다. 벚나무는 아파트 소유고, 아파트 주민이라 할지라도 꽃을 개인적인 용도로 꺾을 자격 따위 나에겐 없다. 그러니까, 미안한 마음, 쫄깃한 마음으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내가 만들어도 과연 그 맛이 날지 궁 금하니까, 그 궁금함을 충족시킬 정도로, 아주 조금만.

작은 유리병 한통을 담을 정도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꽤 딸 수밖에 없었다. 만개한 꽃보다는 조금 덜 핀 망울이 모양이 예쁘다. 톡, 톡, 피지도 못한 꽃들이 내 손안에 담긴다. 집으로 돌아와 꽃을 물에 가볍게 헹군 뒤, 키친타월로 살살 물기를 제거한다. 꽃 말고 필요한 재료는 소금과 매실청. 재료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벚꽃절임은 달지 않다. 짜고 조금 시다.


소독한 유리병에 꽃을 차곡차곡 담고, 그 위에 소금을 붓는다. 소금과 같은 량의 매실청을 소금층이 깨지지 않게 붓는다. 그리고 돌같이 무거운 것으로 꽃과 소금층을 누른다. 문제는 그거다. 우리집엔 돌이 없다. 난 대신 매실청 안의 열매를 활용하기로 했다. 작년에 담근 매실청은 잘 숙성 되었고, 매실열매는 단단하고 부피가 커서 유리병의 남은 부분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꽉꽉 채운 병을 흔들어본다. 소금과 매실액이 뒤섞인다. 틈새를 빠져나온 꽃송이 하나가 나풀거린다. 그리고 난 도쿄 신주쿠 교엔을 떠올린다. 사방이 벚꽃이었던 그때, 봄의 한 가운데 나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골목골목, 처음 보는 것들,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던, 그 도시가 눈앞에 선하다. 함께 가는 곳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한 단서를 줍게 된다. 아주 오래된 과거이자 미래인 그 도시의 꽃잎과 파편이 이정표가 되어 줄 것만 같다. 짜고 시고 달큰한 맛이 꽃에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글쓴이_오진선(@ss_jinsun) 가내수공업 중독자 / 나노상공인 / 애견인 / 페미니스트 / 레즈비언 가정주부/홍대살다 부산거주 중/ 퀴어여성커뮤니티<언니네달방>운영자 /


25살, Quarter life crisis 장수하는 현대 사회에서 100살까지 산다고 가정할 때, 사분의 일인 스물다섯. 미국에서 이 시점을 가리켜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Quarter life crisis. 쉽게 설명한다면 25살에 찾아오는 ‘현타’’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사표를 던지고 난 뒤 나는 Quarter life crisis 의 한 가운데서 꼭 해보고 싶은 세개의 프로젝트를 실행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Project 1: 프리랜서로서의 독립 생각해보면 방송국에 피디로 첫 취직을 했을 때, 그토록 원하던 소속감을 얻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촬영은 항상 팀으로 이뤄졌고 언론인이라는 사명감과 자부심은 투명한 밧줄로 나와 동료들을 꽉 묶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게 된 얼마전의 두번 째 퇴사는 충격이

컸다. 미국에서 보낸 청소년기와 홍콩에서 대학을 다닐 때에 늘 따라다니던 언어와 문화의 장벽 사이에서 고립된 감각이 다시금 나를 엄습했다.

매체가 적히지 않는 명함을 파 본 적이 없는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소속감에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는 말이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 퇴사를 한 뒤 곧 통장은 텅텅 빈 ‘텅장’이 되고 커피 값이라도

벌기 위해,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과 함께, 나는 에베레스트 산을 장비없이 올라가는 마음으로 프리랜싱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기자를 통해 프랑스 방송국 TF1에서 연락이 왔다. Quotidien이라는 유명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정상회담을 촬영하러 오니 프리랜서로서 현지 촬영을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Fixer

이라고 불리는 이 일을 나는 지적, 그리고 육체적 ‘노가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인터뷰할 사람과 장소 섭외, 리서치, 통역과 번역, 촬영 보조, 카메라나 촬영 장비 들기 등등 취재에 관련된 모든 일을 실수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이다. 장점은… 단기간동안 넉넉히 보수를 받는다.

일요일 (4/22) 밤에 연락이 왔는데 수요일 전까지 취재에 필요한 탈북민 몇 명과 탈북민을 교육하는 정부 기관이나 NGO를 섭외,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조사, 회담 취재진 등록과 스케쥴 조율을 하고 판문점과 하나원에서 촬영 허가를 받으라는 무리한 부탁까지 해왔다.

하나원이 언론에게 마지막으로 공개된 시점이 거의 십 년 전인 만큼 민간인에게는 금단의 구역이다. 하지만 안될 줄 알면서 관련 정부 부처에 전화를 돌렸다. 역시나 대답은 “no.”

프리랜서에게 “no”는 허락되지 않는다. “까라면 까”처럼 하라면 해야 한다. “그래도 물어봐 줄수 있어?

우리는 Press 잖아…” 프랑스 방송국 측에서 재차 물어봤다. 판문점도 이 주 전부터 관광객을 안 받고 있고 프레스 투어도 끝나서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내 잘못도 아니지만 왠지 내 잘못 같아서 전전긍긍했다. 예전에 내가 핀잔을 준 인턴이 생각이 났다.


탈북민을 찾는 것도 고역이었다. 부모님의 고향은 전라북도라서 북한과 접점이 없으시다. 책 출판 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탈북민 이 모 씨가 있지만 매스컴을 이미 많이 탔기 때문에 섭외가 망설여졌다. 친척과 친구, 그리고 탈북민 단체에게 약 스무 통의 전화와 카톡을 돌린 후, 어렵게 탈북민 세분을

섭외했다. 세분 다 망설이시길래 여러 번 페이스 북 메시지와 카톡, 그리고 전화를 해서 설득 또 설득을

했다. 나 같아도 불편할 텔레비전 인터뷰를 남에게 해달라고 애걸하는 동안 마음이 썩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탁을 해서 섭외를 했는데 프랑스 기자는 한국에 도착해서 바로 두 명과의 인터뷰를 취소하라고 했다. 스케쥴 상 문제도 있었지만 인터뷰에 더 이상 필요할 것 같지 않다는 이유였다 (처음부터 그러면 잘 계획을 짜던지!!).

두번째 인터뷰이는 내가 이미 방송국의 요청으로 두번이나 취소를 하고 번복을 했는데 세번 째 취소를 하려고 하니 정말 죄책감이 들었다. 용기없는 나는 차마 전화를 못 드리고 장문의 문자로 사과를 대신했다. 이래서 나는 방송기자보다 펜기자가 더 맞는 것 같다.


유일하게 출연이 결정된 학생은 현재 서울대학교를 다니는데 프랑스 방송국 측에서 꼭 수업을 하는 모습을

촬영하기를 원했다. 한국에서는 대학이나 공공기관 안에서 촬영을 하려면 전화를 한 뒤 공문을 보내야 한다. 시간이 부족해 이메일을 보낸다고 하니 팩스만 고집한다. 솔직히 요즘 20대 중 팩스 써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도 한두 번은 써본 것 같은데 사용방법이 가물가물하다 (여담이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정부, 회사 그리고 대학 홍보팀에게 이메일로 정중히 촬영 협조를 구하면 최대한 빨리 검토를 해준다).

학생이 교수님한테 수업 촬영을 허락해달라는 이메일을 썼는데 촬영 하루 전까지 답변이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서울대에 전화를 걸어서 학생이 듣는 수업 이름과 시간을 대면서 교수님의 성함을 여쭤봤다.

“손 X X 교수님이요.”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몇 년 전, 나의 정치학 수업을 담당하셨던 교수님이었다. 세상이 좁은 건지, 내가 운이 좋은 건지, 아마 둘 다 해당되는 것 같다. 바로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주저하시더니 촬영 당일 학생들에게 허가를 얻고 진행하라고 하셨다. \

목요일, 촬영 첫날 프랑스에서 날아온 기자와 카메라 우먼은 잠을 쫓으려는 듯 삼십 분 간격으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셨다 (한국에서 카메라 기자는 거의 남자인데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는 프랑스 여성 카메라 기자가 멋있어 보였다).

탈북민 학생이 도착하자 서울대 입구역부터 산 위에 있는 서울대 강의동까지 걸으면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학생은 그날 중간고사가 있어서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싶어 했지만 방송의 ‘그림’을 위해 기자는 걷기를 고집했다.

서울대를 올라가는 언덕을 걸으며 프랑스 기자가 학생을 인터뷰하는 동안 나는 옆에서 통역을 하면서 방송 장비를 짊어지고 서울대 입구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아침부터 땀이 줄줄 났다.

수업 오분 전 강의실에 도착했다. 교수님은 조심히 말을 꺼내셨다. “우리 반에 북한에서 온 학생이

있는데 프랑스 방송국과 인터뷰를 한다고 해요. 혹시 프랑스 방송에 얼굴이 나오면 내가 큰일난다(!) 하는 학생들은 손 들어주세요.” 고요한 침묵 속에서 학생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탈북민 학생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는 교실 한 구석에 앉아서 무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12살 때 먼저 북한을 떠난 엄마가 중국에서 보낸 브로커를 통해 탈북을 한 그는 북경에서 얼마 못가서

다시 잡혀 북송이 되었다. 수용소에서 고문과 굶주림을 경험하고 어린 나이의 대가로 일찍 수용소에서 나온 그는 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모든 보직에서 박탈된 아빠와 근근이 삶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북한에서

또래 아이들 처럼 학교를 다닐 기회를 박탈당한 그는 무료함에 매일 동네 산을 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아직도 등산을 싫어한다.

그의 ‘코리안 드림’ 스토리는 절대 그냥 생기지 않았다. 탈북 후 그는 서울에 있는 모 학원을 다니며 긴 노력 끝에 서울대에 합격했다. 그의 학문에 대한 목마름은 수업시간에 드러났다. 옆에서 찍고 있는 카메라가


투명한 듯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교수님을 주시했고 손은 필기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수업 후 학생 식당에서 촬영이 이어졌다. 모든 눈들이 그를 주시했고 그 시선들에 왠지 내가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은 촬영 전 그가 자신이 탈북민이라고 밝히고 싶어 하는지 내게 재차 물어보셨다. 교수님의 우려는 이유가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정원은 공무원인 탈북민을 간첩으로 몰았고 전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낸 각종 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탈북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새로운 둥지 안에서 음해와 편견, 그리고 차별을 견뎌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리고 힘든 곳에 사는지 설명해주세요,” 프랑스 기자가 물었다. 학생은 본인의

가족이 탈북을 시도해서 그 대가로 심하게 고생을 했지만 상황은 집 집마다 다르고 몇 년 간격으로 북한 사정이 많이 변했다고 답했다. 만약에 신문에 실릴 인터뷰라면 훌륭한 답이다. 하지만 몇십 초 이내로

최대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그림’을 좋아하는 텔레비전은 정직한 답을 썩 선호하지 않는다. 특히

외신에서 탈북민들을 인터뷰할 때 원하는 ‘그림’을 미리 그려놓고 그 그림에 최대한 퍼즐을 맞춰 끼워

넣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프랑스 기자는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물어봤다.

서울대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임진각으로 향했다. 가는 길 왼쪽에 철조망 너머 안개 사이로 땅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기가 북한이야?” 프랑스 기자가 물었다. “응.” “그런데 임진각에 가면 저런 철조망이 있어? 우리가 근처에서 촬영을 할 수 있어? 제일 먼 철조망은 우리가 접근 가능한 곳부터 거리가 몇 미터나 떨어져 있어? 200 미터? 400 미터?”

임진각을 처음 가보는 나는 카메라 사정거리 안에 있을 것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기자는 짜증 난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략 몇 미터 되냐고 나는 묻고 있잖아. 200미터? 400미터?” 텔레비전은 화면을 통해

스토리텔링을 하는 미디어라 이런 사소한 디테일이 중요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상세히 물어보는 기자는

처음이었다. 그는 완벽함을 추구했다. 나중에 그의 트위터를 가보니 팔로워가 220,000 명이 넘었다. 그의 유명세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12시간의 촬영이 끝나고 밤늦게 호텔에 도착한 나는 와인 한 병을 사들고 올라가 침대에 쓰러졌다. 금요일, 드디어 고대하던 정상회담이 시작되었다. 아침 7시 30분에 호텔을 떠나 일산 킨텍스에 9시에

도착했다. 판문점 촬영이 일부 허락된 풀 (pool)에 소속된 몇 기자를 빼고 나머지 외신, 그리고 내신 기자들은 킨텍스에서 실시간 상황을 보여주는 대형 스크린을 앞에 두고 취재를 해야 했다.

김정은이 등장하기로 한 9:30분이 가까워지자 약 3,000여 명의 기자들이 모인 킨텍스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육천 개의 눈동자가 화면을 주시하는 동안 나는 잠깐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오는 길에 갑자기 “ 오” 하면서 숨을 헉 들이키는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메인 홀로 뛰어갔고

도착하자마자 천장까지 닿는 대형 스크린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보디가드에 둘러싸여 판문각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여졌다. 기자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김정은이 분계선을 넘어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를 할 때 그

먼저 누구라 할 수 없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정말 소름이 돋는다는 표현은 이때 적합한 것 같다.

킨텍스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예전에

인턴을

했던

미국

매체

Bloomberg 에 계신 선배들, 그리고 건너 건너 아는 내신 기자들과 인사를 했다. 눈에 익은 일본과 중국 앵커들도 봤는데

신기했다. 전 세계에서 이번 회담을 위해 일본에서 가장 많은 기자를 파견했다고 한다. 한 방송국에서만 무려 70명이 왔고

홋카이도 지역 신문에서까지 취재를 왔다. 대만도 열두 팀이나 파견했다고

한다. 중국보다 더 많은 숫자다. 내가 앞으로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온 몇 천명의 기자와 한 곳에서 취재를 할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스 센터에서는 돌발상황 때문에 간간히 탄식과 웃음이 섞여 나왔다. 한번은 북한 취재 기자의 동선이 꼬여 생중계 화면을 엉덩이로 가렸다. 기자들은 웃음은 순간의 긴장감을 깼다.

동선이 꼬이는 것은 북한 기자들 뿐만은 아니었다. 킨텍스 안에서도 취재 열기 때문에 카메라와 부딪히거나

화면 앞에 사람이 지나가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났다. 워낙 많은 국적의 기자들이 온 탓에 서로 카메라를 들고 국적과 소속이 어디인지 물으며 인터뷰를 부탁하기도 했다. 특히 외신 기자들은 인기가 많았는데 같이 일했던 프랑스 기자는 거의 열 번 가까이 인터뷰를 하고 지쳐서 다른 인터뷰는 거절을 했다.

회담이 끝나갈 무렵 킨텍스를 나와서 서울 시청으로 이동했다. 벤에서 딱 내리자마자 너무 놀란 일이 있었다. 내 앞에 CNN 앵커 Christiane Amanpour가 하얀색 슈트를 입고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판문점 선언이 발표된 후 정신없이 시청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인터뷰하다 보니 정상회담이 끝나고 오찬이

시작되는 6시 30분이 다가왔다. 약 22도의 파란 하늘 안에서 해는 왼쪽에서 마지막 열을 다하고 있었고 달은 반대편에서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회담도, 그리고 나의 하루도 막을 내렸다.


소속감에 대한 고민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글은 이렇게 마무리 하지만 소속감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명쾌히 정리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 방송국 팀과 같이 취재와 촬영을 하면서 내 소속을 물어보면 나는 프리랜서 기자라고 답했다. 외신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많은 한국 기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 한국에서는 매체에 속하지 않은 프리랜서 기자가 드물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도 매우 좁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프리랜싱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직책이나 매체에 기대지 않고 한번 정도 이 불확실함과 애매모호함의 경계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고 싶다.

제 두번째 프로젝트는 ‘민주주의 투어’ 프로젝트입니다. 외국인 관광객들과 반나절 정도 1980년도의

민주항쟁을 나타내는 장소들을 투어하면서 ‘민주주의’라는, 어쩌면 어렵고 무거운 단어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진행하면서 느끼는 점을

써보겠습니다. 아, 통장을 위해서 프리랜싱은 계속 할 계획입니다. 현재는 미국 온라인 매체 Quartz에 기고 할 기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박주원 www.brunch.co.kr/@pjw7109


체니사이드

글. 장수양


3 아무 中

농담이 모습을 바꾸어준 덕분에 우리는 같은 탕으로 갈 수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농담이 어 떤 모습을 하든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농담이 평소 유지의 모습과 똑같은 상태로 여탕에 간다고 해도 누가 제지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농담은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내가 밤에 혼자인 기분으로 가만히 있다가 몇 번 한숨을 쉰 적 이 있는데 그걸 따라하는 것이다. 농담의 한숨은 한숨 같지 않고 그가 계속 반복하다 보면 언젠 가는 입술 위에서 풍선이나 비눗방울이 부풀어오를 것 같았다. 한숨의 성격과는 관계없이 마음 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흘리는 것은 동일했다. 농담은 집사에게 꼭 끌어안긴 고양이처럼 변하지 않는 상태를 못 견뎌했다. 극장에서 그는 스크린과 좌석을 모두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 바람직한 장소라고 여기는 듯했다. 스크린에는 사람이 두 명 있다가 세 명 있다가 아무도 없다가 하고 좌 석에는 사람이 꽉 찼다가 텅 비었다가 한다, 하고는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차이를 두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그때와 비슷하게 농담은 탕을 두 곳으로 나누어 둔 메커 니즘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수건과 열쇠를 받은 나와 농담은 천막을 걷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목욕탕처럼 탕으로 들기 전에 캐비닛과 특유의 나무 평상, 헤어드라이기와 거울벽들이 있었다. 한 켠에 마련된 바나 나 우유나 일회용 샴푸 등을 파는 작은 실내상점에는 사람이 없었다. 캐비닛에는 목욕탕에서 파는 천 원짜리 샴푸, 바디워시의 냄새가 진하게 베어 있었다. 좋아하 는 냄새였다. 마음이 평화로워져서 피서지에 온 사람처럼 옷을 툭툭 벗고 캐비닛에 밀어넣었다. 내가 받아온 열쇠로 연 캐비닛 바닥에 십원짜리 동전이 두 개 들어있었다. 난 그걸 만져보지 않 았다. 떨어뜨린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나란히 잠겨 있는 캐비닛을 보다가 이들 대부분이 잠긴 채 오래이고 탕 안에는 사람이 무척 적구나, 하고 알았다. 농담은 캐비닛과 접한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있었다. 한쪽 무릎을 세워 팔로 턱을 괴고는 세상 아무것도 하기 싫은 듯이 침묵했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가 보았던 누군가를 흉내내는 것 이리라. 그 자세를 하고도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기에 썩 훌륭한 흉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옷 안 벗어? ―응. ―벗어야 탕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래? 농담은 일어나서 대뜸 캐비닛을 열었다. 열자마자 흥미를 잃은 듯 했지만. 그는 다시 한숨을 쉬더니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한쪽 다리를 들어 캐비닛에 집어넣으려 한 것이다. 나는 비틀거 리는 그의 어깨를 받쳐서 넘어지지 않게 끌어당겼다. ―뭐해? 농담이 물었다. ―너는 뭐하는데? 내가 물었다.


―네 말을 들어주고 있어. 나는 농담이 쓰고 있는 캡모자를 벗겨서 캐비닛 안에 던져 넣었다. 농담은 캐비닛 안에 들어간 모자를 유심히 보았다. 그는 알겠다는 듯이 겉옷을 벗어서 캐비닛 안에 넣었다. 나는 안도의 의 미가 담긴, 세 번째 성격의 한숨을 쉬고는 수건과 비누, 여행용 바디워시와 샴푸 등이 들어있는 비닐팩만 챙기고 캐비닛을 잠갔다. 돌아보니 농담은 캐비닛에 머리와 어깨를, 가능한 상체를 다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잠깐. 나는 농담을 끌어당겨 똑바로 세웠다. 그는 순순히 나와 마주본 채 눈을 깜빡였다. 나는 농담이 입고 있는 긴팔 셔츠를 걷어올렸다. 어느 정도 올라가긴 했지만 벗겨지지는 않았다. 당기는 감각 이 야릇했다. 굳이 말하자면 커다란 벌레의 날개를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이 옷은 유지가 평소 에 자주 입곤 했던 실내복으로, 외출할 때는 거의 입지 않았다. 실내에서 입는 옷이 몇 벌 안 되 기 때문에 유지는 떠나기 전 캐리어 안에 이 옷을 넣었을 것이다. 농담은 재미있긴 하지만 조금 지루하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미묘하게 유지와 달라졌고 머리가 길어지고 품이 줄었다. 키는 아직 나보다 컸다. 나를 보는 눈에는 순수 한 의문이 들어 있었다. ―옷……. 말을 몇 개 골랐지만 무엇도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우선 열쇠에 달린 둥근 고무로 머리카락을 모아서 묶었다. 농담은 캐비닛을 닫고 열쇠를 빼내어 나와 똑같이 했다. 나와 그는 마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를 흉내내면서 골탕먹이는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다만 난 옷을 벗고 있었고, 그는 그대로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대로 들어갈래? ―아니. 농담은 이렇게 덧붙였다. ―계속해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농담이 만세를 하게 만든 후 그의 상의를 잡아서 올렸다. 소용없었다. 농담은 묘한 얼굴이 었지만 얌전히 있었다.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통증을 느낄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번에는 바지를 벗기려고 해봤다. 버클부터가 끌러지지 않았고, 그 버클은 균열조차 없는, 거의 그림이나 장식 수준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랫배의 살갗이 바지의 안감과 이어져 있었다. 농담이 말 그대로 흉내를 낸다는 것을 이제야 정확히 알았다. ―옷을 접어 봐. 농담은 허리를 굽히고 바지 밑단을 두 번 접었다. 웃음이 나왔다. ―저 안에 든 옷은 네가 만든 거야? 내가 캐비닛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이제껏 그의 옷차림에 신경써본 적이 없었다. 유지가 겉 옷을 벗는 건 많이 보았지만 실내복을 벗는 건 본 적이 없는 걸까? 물론, 나도 본 적이 없었다. 내게 기인한 걸까. 농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를 풀어서 캐비닛을 열어보니 겉옷은 사 라지고 없었다.



―이 옷도 사라지게 해봐. ―사라지게? ―아까 그 옷처럼. 나는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다. 농담이 사라졌다. 캐비닛 안에는 캡모자밖에 없고, 실내상 점이나 거울 앞은 온통 비었다. 탕으로 들어가는 유리문에서 여전히 물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나타나 봐. 농담은 내 뒤에서 걸어나왔다. ―옷만 사라지게 해볼래? ―옷만? ―응. 그는 속내를 들여다보듯이 내 얼굴을 살피고는 물었다. ―피 얘기 하는 거야? ―전혀 아니야. ―재미있긴 한데 잘 못 알아듣겠어. 시끄럽기도 하고. 농담이 말하는 시끄러움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옷이랑 피부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그럼. ―뭔데. ―피부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옷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어. 그 사람들 이 차이야. 나는 들고 있던 목욕 용품을 평상에 툭, 내려놓았다. 줄곧 사라지고 나타나는 사람도 사물도 아닌 무언가를 목격해왔다. 이상할 만큼 나는 그것들 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떻게 구조하는지, 어떤 시간을 영위하는지, 삶이라 부를 만한 상태나 현상을 지속하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잘 사라지는 것들에게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 고 있었다. 그들에 대해 잘 알아도, 전혀 몰라도 그들은 어느 시점에 사라질 테고 어쩌면 다시 나 타날 테니까 말이다. 농담을 처음 만나고 얘기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몹시도 성가셨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유 지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분명 나는 그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셈이었다. 손가락나비가 나를 하루 재워 주었듯이 계속해서 그런 요행을 기대하 며 떠돌았다면 나는 유지가 아는 체니일 수 있었을까? 사람이었는지, 또 앞으로 사람일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유지와 닮았지만 유지는 아닌 농담이 앞에 서있다. 그는 나처럼 망설이고 있 지 않았다. 명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또렷하다. 아마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더 또렷할 것이다. 나는 수건을 몸에 두르고 실내상점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이곳저곳 살피고 화 장실까지 기웃겨렸지만 내가 인지하는 범위 내에서 여기엔 나와 농담밖에 없었다. 유리문 너 머 블루아몬드 특유의 마름모꼴 탕들이 수증기를 피워올리는 것을 보았다. 작은 대야를 부딪히 는 소음으로 누군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실내상점으로 돌아왔다. 수


제 비누 등을 파는 유리 진열대 위에 연필꽂이와 영수증 묶음, 포스트잇이 든 바구니가 있었다. 나는 포스트잇 한 장을 떼어 바나나우유 두 개의 값을 후불로 계산하겠다는 메모를 써붙였다. 농담은 평상에 앉아서 평상을 이루는 나무판들의 줄무늬 같은 틈새를 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 에게 바나나우유를 내밀었다. 내가 빨대를 꽂고 마시자 농담은 똑같이 했다. 만일 내가 바나나우 유를 정수리에 얹고 노래를 부른 뒤 용기의 밑부분을 깨물어서 마셨다면 농담은 그렇게 했을 것 이다. 빨대를 꽂아서 마시는 게 훨씬 더 이상한 짓거리인지도 모르겠다. ―맛있어? ―기분 좋아. 농담은 마피아게임에서의 선량한 시민처럼 대답했다. 의심해선 안될 것 같았고 의심하기엔 그 에 대해 지나치게 아는 게 없었다. 내가 아는 건 유지를 닮았고 흉내내기를 잘한다는 것뿐이었 다. 한가지 더. 그는 흥미가 떨어지면 언제고 사라져 보이지 않는 채로 ‘분방하게’ 지낼 것이다. ―몇 가지 물어볼게. ―그래. ―다른 건 다 잘 하면서 왜 옷은 못 벗는 거지? 농담은 두 세 모금으로 바나나우유를 끝까지 마셨다. ―나는 내가 못하고 있는지 몰랐어. 그리고 넌 내가 어느 정도는 너 같거나 유지 같아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어. 농담은 태연하게 말했다.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는 대신 차가운 바 나나우유 용기를 이마에 가져다댔다. ―그런 건 상관없어. 나는 간신히 말했다. ―너는 나를 배려하고 있는 거야? 내 물음에 농담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건 유지와 비슷한 목소리인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내게 말을 걸 때와 소름끼치도록 똑같았다. 농담은 선량하거나 무심한 것이 온통 서린 눈으로 나 를 보며 말했다. ―모든 것을 너를 기준으로 맞추지 않는다면 말 한 마디도 나눌 수 없을 거야. 끝


상처의 기록 1.떡갈나무 잎 / 글, 그림 희정

사실 여행 같은 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지 하는 생각 과, 어디든 무 서운건 똑같은걸. 하는 정도의 생각으로 마침 만료된 적금통장을 깨 여행을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쓰려는 <상처의 기록>은 그렇게 작년 8월부터 12월까지, 약 5개월 동안 다녀온 여행의 기록입니다. 시간을 지나며 남은 흔적 중, 깊은 자국을 남긴 순간들을 몸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타투에 대한 각각의 이야기입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저는 아직도 조금씩 눈물이 납니다. 마음을 그대로 말하고, 아무것 도 하지 않고도 불안해하지 않았던 때. 그때의 따뜻함과, 그 눈부심이 잊히지 않아 얼마간 컴컴 한 시야로 이곳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다녀온 첫 번째 여행지는 발리. 떡갈나무는 제가 발리에 서 처음 친구가 된 사람의 이름, 그 이름의 뜻입니다. Farmer’s yard 라는 호스텔에서 한 달을 살았습니다. 시차가 한 시간 정도 느린 것 밖에 차이가 없는데도 어쩐 지 일찍 일어나,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어스름 무렵 혼자 밖으로 나와 앉아있 곤 했습니다. 린이라는 친구 에게 배운 간단한 요가와 숨쉬기 연습을 하고, 호스텔 근처의 식당 에서 포장해온 대나무 잎에 싸인 밥을 먹고 있으면 파머스 야드의 사람들이 한 명씩 일어나 모 여듭니다. 인사를 하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그렇게 다들 눈을 뜨자마자 노래를 부릅니다. 언제는 어디서 주워왔다며 나팔 같은 것을 불어 호스텔의 온 사람 들을 다 깨워버리고, 노래를 불러달라 하도 채근해 동물원의 노래나 검정치마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우는 닭과 하루 종일 짖는 개.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 미지근한 찬물 샤워, 러쉬의 don’t rain on my parade의 냄새, 그리고 해사한 웃음. Oak는 눈이 마주치면 눈썹과 코를 찡긋하고 웃었습니다. 딱히 많은 일을 함께 하지는 않았는데, 그저 혼자서 혹은 어쩌다 만난 사람들과 하루를 보내고 해가 질 무렵 돌아오면 Oak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당에 있는 bamboo house 에 올라가 함께 빈 땅을 마시 며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해 늘 더듬대며 말하고 oak는 퀴즈를 풀듯 들었습니다. 와이파이가 자주 연결되지 않아 단어를 찾아본다거나 할 수 없을 때도 스스로 생각해 보라며, 완전히 말할 수 있 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테니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말하던 그 사람과, 몇 시간 후 어쩌 면 며칠 후까지 이어지던 하나의 대화. 오늘은 바다 냄새가 나는 곳을 따라 쭉 걸어갔더니 정말로 바다를 발견했다.- 라거나, 내일은 친구가 파도타기를 가르쳐 준다더라 하는 시덥잖은 이야기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해 왜 여행을 시작했고 우리는 여기에 있는 지, 서로 질문하고 대답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면 새벽이 되어, 맺힌 이슬에 공기가 축축해질 때가 돼서야 잠들었습니다. 잘 자- 하고 잠을 자러 갈 때면 꼭 안아주곤 했습니다. 발리를 떠난 그 날, 그리고 아직도 그 포 옹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 다. 신뢰의 마음이 가득 담긴 아주 강하고 따뜻한 포옹. 저는 아직도 그 따뜻함을 잊지 못합니다. 그 마음을 대체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저는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연애의 대상이 아 닌 그저 한 사람으로서 눈 앞의 사람을 그저 받아들이는 일. 고요하고 따뜻한 빛. 내가 알지 못했 던 세계. 그곳을 지나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Hati Hati- 발리의 길은 아주 복잡합니다. 수많은 스쿠터들과 자동차로 빽빽한 도로, 그리고 저 말이 적힌 표지판을 자주 볼 수 있는데, ‘하띠 하띠’의 뜻은 조심조심 정도가 될까요. 적당한 거 리를 유지하는 일. 그건 어디에서건 어렵다 생각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누군가의 민낯을 바 라보는 일. 거리를 좁히는 일은 위험합니다. 분명히 누군가 가면,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헤어지는 것은 언제나 슬프고 그 렇게 만들어진 작은 구멍은 언제까지고 마음에 남아 조금씩 조금씩 비어갑니다. 그렇게 나의 삶 이 가벼워지면,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지면 살아가는 게 조금은 수월해질까 생각합니다.

나는 찬란한 당신을 비춰 빛나는 우물 입니다.

熙井

bitmhj@gmail.com http://bitmhj.blog.me


글. 사진. 그림. 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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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PonG

‘사전’ 황정운

이훈보

보내는 공

선생님께,

저희가 오늘 주고받을 공의 이름은 ‘사전’ 입니다. 오늘은, 오늘의 공을 보내기 전에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전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웹사이트 어학사전에서 <사전>이라는 단어를 입력해보니 무려 110건이 검색되는군요. 가장 먼저 나오는 사전은 <사전(事前)>입니다. ‘[명사] 일이 일어나기 전. 또는 일을 시작하기 전.’ 이라는 뜻을 갖고 있군요. 사전에 미리 알아보지 그랬니, 할 때 그 의미 같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전은 <사전(辭典)>입니다. ‘[명사]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서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 이라는 뜻입니다. 국어사전, 영어사전 할 때의 그 사전입니다. 그런데 그 밑에 또 다른 <사전(事典)>이 하나 있는데 앞서의 <사전(辭典)>과 뜻 풀이가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 사항을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고 그 각각에 해설을 붙인 책.’ 무엇이 다른 뜻인지 한참을 비교하며 찾아 보았네요. 마지막 사전은 백과사전의 사전입니다. 처음부터 갈림길에 마주한 기분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국어사전이나 백과사전이나 같은 사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선생님께 편지를 쓰며 이런 선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여러 사전을 마주하니 조금은 고민이 됩니다.

좋습니다. 오늘 제가 던질 공은 사전(事典)으로 정했습니다. 한자에 무지한 부끄러움은 잠시 잊고 이야기를 드려 봅니다.

누구든지 어렸을 적에 백과사전 하나씩은 있었을 겁니다. 저 역시 …… 어느 출판사에서 발간한 백과사전인지는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늘색 표지에 약간은 두툼한 분량이었고 모두 열 권 정도의 백과사전이 있었습니다. 사진이 많았고, 아무래도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한 백과사전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하여 보여준다는 야심보다는 주요 개념을 사진이나 도식과 함께 보여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그런 백과사전이었습니다. 부연하자면 저는 절반은 국민학교 세대고 절반은 초등학교 세대입니다. 저는 1985년에 태어나 올 해 서른 네 살인데, 국민학교로 입학해서 3학년까지는 국민학생으로 지내다가 이듬 해인 1996년 4학년부터는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죠. 제가 백과사전을 가까이 읽던 때는 아직 공부라는 것이 생활 일부분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니까 국민학생 무렵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이제 막 유치원을 졸업하고 국민학교에 가서 <산수>나 <슬기로운 생활> 같은 교과를 배웠지만, 공부를 한다기 보다는 나름의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것이고 …… 공부라는 단어의 무게에 조금씩 짓눌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였겠지요.

사실 백과사전을 출간한 출판사나 정확한 분량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들이 놓여져 있던 방의 구조, 그 방이 위치해 있던 전체 집의 구조, 그 집이 위치해 있던 경기도 수원시 매탄동 5단지 주공아파트의 전반적인 풍경은 똑똑히 기억 납니다. 동네 뒷산의 개구멍, 앞산에 올랐다가 맹렬한 강아지에 쫓겼던 순간의 헐떡임,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던 뉴코아 아울렛 백화점, 교실 한 가운데에 있던 나무 난로, 난로에 댈 땔감을 가지러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운동장 한 편의 소각로, 동수원 국민학교, 선생님, 친구들 ...... 유년시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기억들이 그곳에 깃들어 있군요. 1985년 입주를 시작해서 아직도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하지 않았으니 제가 살던 시절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을 겁니다.

주공아파트. 그러고 보니 1980년 12월 입주를 시작해서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울시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가 문득 생각납니다. 워낙 낡아서 최근 재건축 허가가 났고 올해 초에 거주민 이주가 모두 완료되었다고 하네요. 둔촌동과 일면이 없던 제가 이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 독립잡지를 통해서입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종로구 계동 어느 독립서점에 찾았다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는 잡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재건축은 예정되었으나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고 건물이 철거되지 않은 둔촌주공아파트 여기 저기를 사진으로 담아 기억하려는 잡지였습니다. 주공아파트에 살았던 저로서도 남다르게 읽을 수 밖에 없었네요. 이제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사진과 그림으로 가득한 백과사전을 거의 매일같이 읽었던 국민학생 시절. 시간이 조금 지나 중학생에 접어드니 그나마 보육과 교육이 적절히 혼재되어 있던 초등학생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완연한 교육의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공부 성적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고 서열에 따라 차이를 인식하고 그 차이에 따라 암묵적인 계급을 구분하는, 그런 시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계급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죄송합니다만, 그 이외의 단어로 중고등학생 시절을 묘사할 방법이 지금은 떠오르지 않네요. 공부를 잘 하는 사람과 잘 하지 못하는 사람. 공부를 더 잘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드디어 저희 집에도 정말 백과사전다운 백과사전이 들어서게 됩니다. 동아대백과사전이었습니다. 모두 다 합해서 50권에 달하는 분량이었고, 심지어는 동아대백과사전을 놓기 위해 책장을 새로 하나 더 구비해야만 했습니다.

동아대백과사전은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ㄱ부터 ㅎ까지 없는 단어가 없었고 사진과 그림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지만 각 단어마다 정확하고 상세한 설명이 가득했습니다. 백과사전 한 권의


무게는 워낙 무거워서 침대에 걸터앉아 책 한 권을 무릎에 올려두고 읽다 보면 다리가 조금 저릴 정도였습니다. 뭐랄까요. 지식의 향연, 혹은 지식의 보고라는 표현이 정말 어울리는 책이었어요.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 했습니다. 동아대백과사전이 집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백과사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거든요. 그때가 1998년. 구리 전화선으로 인터넷을 이용하던 것에서 벗어나 집에서도 편하고 자유롭게 빠른 인터넷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56k모뎀, 새롬데이타맨 IMF, 천리안, 바람의 나라 …… 추억의 단어들이죠. 지금의 Google이나 Facebook에 비하면 소규모 동아리 활동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과사전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백과사전에는 없는 최신의 글과 사진과 정보들이 그 작은 네트워크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정말 그것은 네트워크였습니다. 인터넷이 바꾼 지식 접근 방식의 혁명이죠. 마치 저만 혼자 경험한 것인 듯 신이 나서 편지를 적었지만 아마 저와 같은 세대에게는 보편적인 경험일겁니다. 누구나 백과사전을 버리고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든 기억이 있을 거에요.

돌이켜보면 백과사전을 서서히 찾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백과사전은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제공해주지 않았고, 어느 한 순간에 완전히 절멸되다시피 그 존재를 감추었습니다. 단순히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공간이 더 재미있고 빠르고 최신의 정보로 가득해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백과사전은 이제 더 이상 절대적인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었습니다. 백과사전이라는 것이 encyclopædia이라는 단어에 걸맞지 않게, 이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나의 세계관이라는 것이 매우 작고 보잘것없어서 백과사전이라는 천공(天空)이 내 머리 위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으나,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는 사실 백과사전이라는 것은 땅에 고정된 작은 나무에 불과했던 건가 ……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능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지적 욕구와, 힘을 다해도 세상의 현재진행중인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는 백과사전 사이의 간극. 저는 그 간극이 슬펐습니다.

선생님,

왜 갑자기 저는 백과사전을 떠올리며 이런 말씀을 드렸을까요. 돌아보면 불과 몇 년 전 까지도 어릴 적에 느꼈던 간극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인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최근까지 『일 년에 인문학 책 100권 읽기』프로젝트를 했던 적이 있다고 말씀 드렸죠. 제가 1년에 책 100권을 읽으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장 힘들었던 건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그 다음의 책을 선택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다음에 무슨 책을 읽을까, 이 다음에 무슨 책을 읽어야 인문학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무슨 책을 읽어야 정치, 사회, 역사, 예술, 철학, 과학, 경제 …… 이런 것들의 진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 속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지식을 모두 습득해야 한다’는 자기 암시를 건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제 자신이 보다 완성 된다고 믿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100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 ...... 그 이면에는 스스로 삶을 구성해나가고 싶은 스물일곱, 스물여덟 나의 욕망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책을 통해 나를 구성해나가면, 나 자신은 좀 더 특별할 수 있다 혹은 특별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망이 분명 거기에 있었다. - 2012년 <100권의 책 읽기>를 마무리하며 남긴 일기 中

어떤 것이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거대한 책의 세계에 비해 초라한 제 자신을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무리 재미있고 열심히 책을 읽어도, 세상의 모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세상의 모든 지식을 내 머리 속에 담을 수 없다, 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 자기 인식은 결코 부끄럽지 않았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책 읽기가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어떻게 움켜 쥐어도 모래알이 손에서 끝없이 흘러 빠져 나온다면 그 흘러감에 대해 너무 연연하지 않으려는 삶을 지향한 것도 그 즈음입니다.

둔촌주공아파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볼까요. 거주민 이주도 마쳤으니 몇 년 지나면 최신식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그곳에 조성될 겁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만들어가겠지요. 그러나 또 30년, 40년이 지나면 그곳 역시 제2의 둔촌주공아파트가 될 겁니다. 아파트 외관은 낡고, 놀이터 미끄럼틀에는 녹이 슬고, 수 십 년 된 나무는 무성하게 자라 있겠지요. 누군가 또 제2의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잡지를 만들며 그곳을 추억하고 그리워 할겁니다. 그리고는 또 사람이 떠나가고 공간이 파헤쳐지고 새로운 공간이 조성되고 새로운 사람들이 자리잡을 겁니다. 영원히 머물러있거나 영원히 고정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원히 절대적인 것도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 …… 왜 어릴 적 보았던 열 권짜리 백과사전이 떠오르는 것일까요. 왜, 몸도 마음도 작았던 여덟 살, 아홉 살의 제가 그토록 생각나는 것일까요. 왜, 완전하고 절대적인 지식을 갈망하던 제 머리 위로 가득 열렸던 지식의 천공(天空)을 여전히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요.

[끝]

황정운 9년째 석유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글쓰기와 현대미술을 좋아합니다. https://brunch.co.kr/@aboutexpression


돌아온 공

안녕하세요. 정운님.

이달의 주제는 사전이군요. 개인적으로 국어사전을 읽으며 어휘가 어디에서 왔을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시리즈를 쓰다 다른 공모전을 준비하느라 미루고 있는 사이 배달된 질문에 얼굴이 빨개집니다. 짧게나마 답장드려봅니다.

요즘이야 컴퓨터를 켜고 검색어를 입력하면 결과가 쏟아지지만 예전에는 그 역할을 사전이 했었죠. 최초의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노인이나 지식인이 갖고 있는 정보들은 부족 내의 질문에 따라 검색엔진과 같이 작동하기는 했지만 복사가 용이하지 않고 또 윤색되는 경우가 있어서 아무래도 검수하고 복사되는 사전 정도는 되어야 믿고 쓸만한 무엇이 아니었나 합니다. 데이터가 누적된 것도 중요하지만 정확도가 중요하죠.

실제로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말싸움이 붙으면 사전을 열어보는 일이 잦았던 것 같습니다. 대백과나 단어 사전 같은 것들을 뒤적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끝말잇기의 시비에도 결착은 늘 사전이었고요.

정보를 분류하고 체계화해서 쌓는 사전과 같은 작업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절대적인 분량이나 검토 시스템 자체가 충분히 갖추어진 다시 말해서 이런 작업에 가치를 두고 여력이 있는 충분한 생산성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 사전작업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사전은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고 또 노력이 쌓인 만큼 신뢰를 얻고 다음 세대의 기초 데이터 베이스로 활용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사전에 대해서 뭐 더 이야기할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 보니 사전의 구조라는 것이 문득 재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하기 쉽게 국어사전을 떠올려 볼까요? ㄱ부터 ㅎ까지 순서대로 단어들이 주욱 나열되어 있고 이것은 컴퓨터의 폴더구조와도 같고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뇌의 검색 구조와도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부분을 생각하면 전체가 떠오르게 구조가 짜야지는 것이죠. 호출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색인이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전화기에서 ㅇㄱㅇㄹ라는 자음을 타이핑 쳤을 때 ‘월간 이리’가 검색되는 것과 같은 색인구조가 있다는 게 정보를 쌓고 접근하는데 유용하게 합니다.

농담이지만, 저는 오픈북 시험을 치러 갔다가 교수님이 문제를 너무 많이 내주는 바람에 검색에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겨울 시험에는 색인목록만 한 장 첨가해서 들고 들어갔던 일이 있습니다.


이상의 문학에 대해 논하라! -> 이상! -> 5주 차 프린트 3쪽! 이런 식으로 꼼수를.. 문득 끄럽습니다. 하지만 시험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머리에 남아있는 것은 없지만요. 하하.

다시 본래의 흐름으로 돌아가서 사전이 재미있는 것이 언어마다 접근 구조가 다른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ㄱ’을 기점으로 ‘ㅅ’ 항목에 도달해서 검색을 하겠지만 영어에서는 같은(혹은 비슷한) 내용을 찾기 위해 ‘L’ 항목에서 LOVE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정보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내용을 적층 시켜가는 구조가 유동적이면서도 닮아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전의 내용은 얼마든지 사전의 색인 구조 안에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보통 사전의 구조가 뿌리-나뭇가지와 같은 트리구조인 것 같지만 각 단어 안에서 유의어나 음절단위의 근간을 검색하기 위해 상호 호환, 검색되는 것을 생각하면 한 권의 사전 안에서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검색하다가 애정을 검색하다 마음을 검색하다 하면서 이리저리 근간을 쫓아 헤맬 수 있죠. 어쩌면 이렇게 오고 가면서, 마치 저희의 글쓰기처럼 ‘핑’ - ‘퐁’할 수 있는 넓은 뜰이라는 측면에서 인문학에서 사전의 의미와 재미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오늘도 뭔가 정신없는 글을 쓴 것 같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달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훈보 드림

https://brunch.co.kr/@exxx


심리학 논문 해적방송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I feel therefore I am

시간과 자유



시간에 관심이 많았던 때가 있었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사니까. 나 뿐만은 아니었다. 그저 흐르고 있을 뿐인, 물리적인 현상인 시간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건 인간만이 하는 ‘착각’이라고 말한 건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리고 스탠포드 감옥 실험으로 악명 높은 짐바르도(Zimbardo)는 시간을 심리학의 영역으로 들 여왔다. 인간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시간에 대한 태도에 어떤 개인차가 있는지. 시간을 대하는 태 도 또한 외향성-내향성 같은 성격 특질들 만큼이나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라고 짐바르도는 말했 다. 그러니까, 우린 모두 시간 속에서 살지만, 우린 또한 전부 약간씩은 다른 방식으로 시간 속에 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에 대해서 물어볼 만한 것들은 죄다 물어본 결과를 통계화한 후 짐바르도는, 인간의 시간에 대 한 태도는 크게 다섯 가지 요인으로 나뉜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부정적인 과거지향, 긍정적 인 과거지향, 쾌락적인 현재지향, 운명론적 현재지향, 그리고 미래지향. 나는 그 중 현재쾌락주의(present-hedonism)에 관심이 있었다. 사실 모든 건 현재, 그 순간 속 에 있다고 생각하는 어린 심리학도였으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던 인지심리학 강의 중 귀를 솔깃하 게 했던 얘기가 있었다. 현실과 가상은 어떻게 구분하는 걸까. 우린 어떻게 지금 이게 현실인지 가 상인지 알 수 있을까. 교수님은 결국 그 기준은 감각의 생생함이라고 하셨다. 고로 느끼며 존재하 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 그 자체라고 나는 생각했다. 또 반대로 피크닉 가듯이 신나서 들으러 가던 주관적안녕감 강의에선,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두고 하는 미래 예측은 대체로 틀리기 마련이라


는 걸 배웠다. 우린 미래에 있을 일들이 우릴 얼마나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할지 예측하는데 늘 오 류를 범한다고. 그러니 또 행복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미래 속에 있는 게 아니라 현 재 속에 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성실하지도 못한 주제에 기어이 들어갔던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난 결국 시간, 현재쾌락주의, 그 리고 행복을 주제로 한 논문을 내고 졸업했다. 난 궁금했다. 현재쾌락주의가 정말로 사람들을 행 복하게 해주는지. 그걸로 되는 건지. 요약하자면, 내가 한 엉성한 연구는 이런 결과로 수렴했다. 그건 결국 자율성에 달려 있다고.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은 현재쾌락주의가 딱히 행복 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자율성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는 게 행 복으로 이어졌다. 성실하지도 못한 주제에 기어이 또 머나먼 나라의 박사 과정에 들어와버린 나는, 가끔씩 자유를 좇 아 모든 걸 떠났던 내가 딱히 지금 더 자유롭지도 못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허망할 때면, 따뜻하 고 달달한 핫초코 한 잔으로 지금 이 순간 나의 감각을 만족시켜 준다.

Cho, M., & Sohn, Y. W. (2014). Lack of autonomy give value to immediate pleasure. Zimbardo, P. G., & Boyd, J. N. (1999). Putting time in perspective: A valid, reliable individual-differences metric. 글, 사진: 민하 (ㅇㅅㅌ @min.ete ㅇㅁㅇ minha@berkeley.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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