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_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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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은 시간을 그린다

그는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극사실주의 작가의 시조로

돌만으로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품 세계를 펼친 그도

정리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극사실주의라는 화풍을 대학

젊었을 때는 작품 소재를 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접근했다

교 때부터 시작했다. “극사실주의도 시조이지만 요즘 유행하

고 한다. 그것이 지겨워서 이제는 끌리는 대로 소재를 정한다.

는 팝아트(pop art)도 1973~74년에 도입했습니다. 유행시키

“30~40대, 50대 초반까지만 해도 개념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

지 못했지만요(웃음).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시대에 충실하

어요. 따지고 들고 세상을 다 알 것처럼 세상 구조를 제시도

게 그림을 그려왔는데, 지금 보니까 그게 다 처음이더라고요.

하고 말이죠. 하지만 이제 보니 다 허상이에요. 너울너울 가다

내가 뭘 했는지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때 그런 걸 어떻게 할

보면 어느 순간 지나온 것을 되돌아보는 시기가 찾아와요. 제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상해요. 그때가 대학교 2학년

가 지금 그 시기인 것 같아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대단한 것

때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끔 학생들에게 얘기합니다. 대학교

도 아닌데 그것에 목매달았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돼요. 하

시절에 하는 것이 뭔지 모르지만 소중한 거라고, 버리지 말라

지만 그 시절(젊었을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저

고 말입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서 말이지요. 그 시기에는 대부

도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요즘 사람들 말로 저 밑에서 기어

분이 자신이 지금 뭘 하는지 몰라요. 나중에 보면 뭔가를 해놓

다녔어요. 하늘을 쳐다볼 틈이 없었습니다. 이젠 하늘을 바라

은 것이지요.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빡빡하게 그림

보잖아요. 이제야 눈높이가 맞는 거예요. 여유일 수도 있고 어

그리며 정신없이 살아가면서 내가 뭘 하며 사는지 모르지만,

찌 보면 흐름의 위치일 수도 있고. 60세쯤 되면 인생을 정리할

나중에 보면 내가 어떤 전환점이나 큰 영향을 끼치는 중간에

수도 있고, 너그러워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생겨요. 막 긁어모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으려 하기보다는 정리하는, 인생을 책으로 얘기하자면 자료를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의든 타의든 영향력을 끼

막 모으는 시기는 끝났고 책 나오기 전까지 모아서 글 쓰면서

치는 것은 시대를 잘 맞춰 타고나야 합니다. 제가 지금 태어나

편집할 시기라고 생각하면 돼요.”

면 무엇을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전환이 안 돼요. 그런데 그때 는 모든 세상이 전환점에 있었던 거지요.”

그는 자신의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시간 싸움이라고 말

한다. 시간 속의 한 인간을 그리기 때문이라고. “시간이라는 개념은 한 지점에서 한 지점까지 운동한 사이를 지나온 트랙 을 얘기하는 거잖아요. 이것이(사발 하나를 가리키며) 100년 됐으면 100년 전에 만든 사람과 그사이에 저한테 온 사이의 시간을 그리는 거예요. 시간 속의 우주를 그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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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is is a Stone 7411, 190×400cm, 캔버스에 오일, 1974 2. Stone Henge, 181×263cm, 천과 종이에 아크릴릭, 1989 3. The way, 123×97cm, 천과 종이에 아크릴릭, 1998 4. Top of the Pyramid, 168×120cm, 캔버스에 아크릴릭,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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