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3월 15일(금) 제1087호 통합 162호
캐나다를 넘어 열방으로 “크리스천 신문”
캐나다 사회는 기독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 하는가?

레이먼드 이브라힘(Raymond Ibrahim)은 2024년 1월 25일 출간
한 “캐나다: 2023년에 거의 100개의
교회가 불타고, 크리스마스 동안 네
개가 전소됐다. (Canada: Nearly 100 Churches Torched, Four during Christmas, 2023)”라는 참
혹한 제목의 글에서 기독교에 대한
캐나다 사회의 적대감을 알렸다. 이
브라힘은 “지난 2년 반 동안 캐나다
전역에서 약 100개의 교회가 기물
파손, 방화 또는 모독 등을 당했으
며, 이는 종종 캐나다와 관련된 평
화롭고 관용적인 이미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밝혔다.
이러한 반기독교적 행위의 급증은
2021년 여름 방화가 일어난 이후 상
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당국
의 무관심이나 암묵적인 승인을 배
경으로 그 수가 96건으로 증가했다. 이브라힘의 글은 이러한 공격의 배 경이 기독교와 원주민기숙학교에서 아이들의 무덤이 발견된 사건을 연 결시키는 캐나다 주류 언론의 이야 기와 관련이 있다고 강조한다. 언론 과 일부 공인들은 가톨릭교회가 아 이들에 대한 극악무도한 행위를 했 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브라힘은 이러한 관점에 도전하며, 아이들이
1800년대 초에 흔한 전염병 속에서
자연적인 원인으로 사망했을 가능
성도 있다는 증거와 함께 학술적인
연구를 소개한다.
제프 핀폴(Jeff Fynn-Paul )의 ‘
새로운 세상의 진실(The Truth in the New World)’이라는 작품은 기
숙학교의 목적과 유산을 둘러싼 오
해를 더욱 폭로한 것으로 언급된다.
급진주의자들은 가톨릭과 다른 기 독교 공동체를 표적으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이용 했고, 이는 교회의 화재로 이어졌 다.
이러한 반응은 역사적 불평등과 싸
우는 것으로 가장하여 기독교 기관
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깊은 편견과 걱정스러운 경향으로 연결 된다.
RCMP는 “교회 방화와 반(反)기독 교적인 증오를 연관 짓는 증거가 없 다.”고 밝혔다. 특히 한 콥트교회의 방화는 교회들이 기숙학교의 논란 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도 공격의
표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더 광범위하게 경멸하고 있 음을 보여주는 예다.

이상열 선교사의 원주민 이해하기 시리즈
카누여정 – 치유로 이어지는 길

카누 여정이 오래될수록 서로 익숙해져가 고 서로의 아픈 상처들도 드러나고, 한쪽 에서는 위로와 격려가 일어나고 있었다. 고
된 카누 여정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속에 서 엄청난 실제적인 치유들도 일어나고 있 었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원주민들은 술과 마 약에 늘 중독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들도 많이 있다. 일부는 옳은 이야기다. 그 곳에 참석한 500여 명의 원주민 중엔 아마 도 이미 술이나 마약에 중독되어 참석한 사 람도 일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누 여정에 서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었다.
NO Alcohol, NO Drug, NO Struggle. Respect each other.
본인이 마약과 술에 중독된 사람임을 알고 도, 그 술이나 마약을 하루라도 하지 않으 면 심각한 금단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앎 에도 그들은 이 카누에 참석한다. 카누 여정 은 힘든 육체노동과 함께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많다. 짜증이 날 정도로 날씨 나 물살이 어려움을 줄 때가 많이 있다. 자 기 하고 싶은 대로 살든 사람들이 통제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텐데, 그럼 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은 함께 지키기로 약속들을 잘 이행해 나가고 있었다. 중독자
들이 자신들의 중독을 끊기 위해 엄청난 노 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중독의 문제를 해 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우리 부족의 카누대장이었던 브랜든은 어 린시절부터 마약중독자였지만 그가 카누 여정을 10여차례 참석하면서 스스로가 절 제하게 되었으며 마약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자기 간증을 하기도 했다. 그는 마 약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 림을 쳤는지 모른다는 과거 이야를 하기도 했으며, 사실 마약을 할때마다 자신의 얼마 나 증오스러웠는지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 다. 그리고 마약이 깰때마다 수없이 죽으려 고까지 했다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 게 나눴다. 자신이 카누 여정을 통해서 마 약에서 더이상 손에 대지 않은다고 간증하 며 여전히 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로 하고 격려를 하기도 했다. 해질 무렵 한켠에서는 자신의 상처를 감당 치 못해 울고 있는 한 자매를 다른 자매가 아무 말없이 꼭 안아주고 있었다. 한참을 울 도록 다독이며 말없이 함께 안아주고 있었 다. 그 누구도 울고 있는 자매의 아픔을 알 수도 없었다. 심지어 안아주고 있던 자매도 울고 있는 자매의 상처를 알 수 없었지만 조 용히 침묵으로 함께 서 있어 주는 것이 카 누 여정을 통한 치유가 일어나는 모습이었
다. 그러다보니 여기저기서 흩어져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부족 사람들이나 주 변 사람들이 가까이 가서 기꺼이 안아주며 같이 흐느끼고 울어 주는 일들을 보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닐 정도로 흔했다.
카누 여정에서 우리는 의사처럼 누구의 아 픈 부위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상담사처 럼 아픈 내면의 상처에 대해서 자세히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정확한 해결책을 내어 줄 필요도 없었다. 카누 여정은 그냥 그 옆에 서 묵묵하게 힘든 여정을 함께하며 침묵으 로 동행해주기만 해도 훌륭한 치유가 일어 나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그러므로 카누 여정은 자신의 뿌리를 찾 아가고, 자신을 알아가고, 그리고 공동체를 알아가면서 그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스 스로에 변화를 가져오는 치유의 여정이었 다.

이상열


트랜스젠더 논쟁에 대해 신자가 알아야 할 5가지
미국 크리스천헤드라인스가 ‘트랜 스젠더 논쟁에 대해 모든 기독교인 이 알아야 할 5가지’라는 칼럼을 소 개했다.
이 글을 쓴 앤드루 T. 워커(Andrew T. Walker)는 미국 남침례교 산하 윤리종교자유위원회(ERLC) 정책 연구 책임자이다. 다음은 칼럼의 요 약.
1. 트랜스젠더리즘에 반대한다고 해 서 성별불쾌감으로 인한 고통을 부 정하는 것은 아니다
트랜스젠더리즘을 둘러싼 문화 전 쟁의 정치적 측면과 성별불쾌감 (gender dysphoria)으로 고통받는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성별불쾌감이란 개인이 자신 의 성 정체성(남성 또는 여성으로서 의 느낌)이 생물학적 성별과 일치하 지 않다고 느끼며, 이로 인해 감정적 고통을 겪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성별을 선택의 문제로 간주 하는 문화적이고 법적인 시도에 저 항하는 것이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 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인 식해야 한다. 성별불쾌감을 경험하 는 사람들이 반드시 문화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과 동의하지 않 더라도) 기독교인들이 그들을 사랑 하고, 그들을 위해 그곳에 있고, 그 들을 경청하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들에게 최
선의 것을 깊이 바라고 있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성별불쾌감을 경험
하는 개인에 대한 연민과 존엄이 사
회적 운동으로서 트랜스젠더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2.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고, 여자
도 남자가 될 수 없다
트랜스젠더 운동의 가장 큰 주장은
자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가 실제로 여성일 수 있고, 그 반대
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는 선호
하는 대명사, 성전환 수술 및 주어
진 성별이 아닌 인식된 성별의 화장
실 사용을 요구하는 등 다양하다.
문제는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는
철학적 주장이라는 점이다. 남자 염
색체는 여자 염색체로 조작될 수 없
다. 미용이나 수술로 외모를 바꾸는
것이 개인의 생물학적 구성의 근본
적인 현실을 바꿀 수 없다. 마음의
심리학은 사람의 생물학적 표지자
를 무시할 수 없다. 트랜스젠더 혁명
은 우리가 인간 본성에 대한 거짓말
을 믿도록 요구한다. 또한 진실과 거
짓이 결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이유는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
고 말할 권한이 있는 창조주가 계시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3. 성경은 트랜스젠더 혁명을 이해 하는 데 필요한 틀을 제공한다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사람들이 성별불쾌감을 경험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이 세계관은 피조물의 붕괴가 있었고, 이전과는 다르며, 새로운 창조에서 는 그렇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창 세기 3장, 로마서 8장, 계시록 21장). 우주에서 우리 존재의 어떤 부분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피조물의 깨어짐이 우리 삶 의 모든 부분, 심지어 우리의 정신 과 마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그 정도와 방식은 달라도, 모든 인간은 우리 자신의 육체, 욕망 및 생각의

깨어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그들 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 셨고, 언젠가 그들을 회복시킬 것을
인식함으로써 진정한 정체성을 찾 을 수 있다.
따라서 창조되었지만 깨어진 세상 에서 우리는 모든 정체성이나 감정 을 수용하거나 발전시켜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선한 욕망과 깨어진 욕망의 조합에 이끌린다. 창조, 타락, 구원 에 관한 위대한 성경 이야기는 우리 에게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온전 함을 실현하지 못할 욕망을 경험하 는 것에 놀라지 말라고 말한다. 또 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겪 거나 죄를 짓는 방식에 대해 결코 자 신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다.
4. 트랜스젠더 논쟁은 남성과 여성, 엄마와 아빠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남자 또는 여자가 되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이나 의지로 결정된
다면, 이는 진정한 남성성이나 여성
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 다
문화적 고정관념에 기초한 구성물
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어린 소 년에게 그가 진짜 소년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어린 소녀에게
아버지로서 그녀에게 보이는 아버 지의 독특한 반응이 객관적이고 실
제적인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생물학 적 의미를 지워버리면, 성별 간의 상호작용과 아이들이 어머니와 아 버지의 차이를 알도록 하나님이 인 간 존재에 넣어두신 대본을 파괴하 는 것이다.
5. 기독교인들은 트랜스젠더 논쟁에 있어 확신과 연민이 모두 필요하다 트랜스젠더 논쟁은 논란의 소지가 가득하다. 이 논쟁에서 성경적 확신 을 가지는 것은 친구, 가족 및 동료 들과의 갈등을 의미한다. 게다가 어 떻게 표현하든, 우리는 혐오자, 편 협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기독교인들은 하나 님의 형상으로 창조된다는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 번영을 위한 참된 비전을 옹호하는 용기가 필요 하다. 진부한 설명이나 반사적인 반 응은 피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를 만드셨으니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그분께 있음을 계속 말해야 한다. 우리는 결연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동정심 없이 행 동하거나 말한다면, 세상의 어떤 확 신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은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하셨 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마찬가 지다. 하나님의 불변하고 완전한 말 씀에 우리의 확신을 두되, 마음속에 연민을 갖고 말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