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u on Google+

1 1176 년, 영국 기버트 피찰란경은 아름드리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하녀 두 명이 야외 점심으로 먹다 남은 음식들을 주섬주섬 모아 치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대로 괜찮은 외모에 겸손한 남자라는 평판이 자자해 여자들은 물론, 그가 영주로 모시고 있는 아가씨의 시중을 들고 있는 하녀들조차도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바로 그때 두 하녀 가운데 더 젊은 쪽인 윌다가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대담한 눈빛에 당황한 그는 얼굴이 새빨개져 재빨리 눈길을 돌렸다. 꽃들이 만발한 봄이었고. 기버트 경에게 호의에 가득찬 시선을 준 여자는 윌다뿐만이 아니었다. 윌다 역시 기버트에게만 타오르는 눈빛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글쎄, 뭐랄까. 윌다는 남자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고나 할까? 자그마하면서도 매끈한 선이 돋보이는 코에 발그레한 장밋빛 뺨의 윌다는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미모가 두드러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윤기가 흐르는 밤색 머리카락에다 풍만한 육체로, 나무랄데 없이 완벽했다. 비록 제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기버트는 독신으로 마음을 굳힌 남자였다. 게다가. 윌다는 마흔다섯 살의 남자에 비해 너무 어렸다. 그녀는 기버트 경과 함께 모시고 있는 레오니 아가씨 또래였다. 레오니 아가씨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 살. 기버트 경은 레오니 몬티윈 아가씨를 딸처럼 생각하며 극진히 대했다. 바로 그때, 그는 레오니가 봄철 약초를 캐던 목초지를 떠나 숲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따라가라고 병사 네 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는 들판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즐겨하는 레오니를 보호하려고 열 명의 병사들을 배치시켰다. 그 병사들은 그 임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레오니는 종종 그들에게 그녀가 가리키는 풀들을 뽑으라고 시키곤 했다. 약초를 캐는 일은 남자가, 그것도 병사가 하기엔 낯간지러운 일이라는 생각에 은근히 거드름을 피웠다. 올 봄이 되기 전에는 그녀를 수행하는 데에 세 명의 호위병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크루얼에 새로운 영주가 왔고, 레오니가 약초를 찾으러 들어간 숲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켐프스턴의 모든 영지를 거머쥔 새 영주의 문제에 대해선 기버트는 아주 심각하게 여겼다. 기버트는 켐프스톤의 옛 영주인 에드몬드 몬티니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늙은 남작은 적어도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켐프스톤의 새 영주는 펄시윅 농노들을 줄기차게 고소했고, 크루얼 성을 손에 넣고 나서도 그 일은 계속 이어졌다. 그 고소들이 정당한지 어떨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건, 레오니 아가씨가 그녀의 농노들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버트경, 이 문제를 내가 처리하게 해주세요.] 레오니는 처음에 고소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에게 간청했다. [아무래도 농노들은 크루얼에다 위해를 가하는 게 나한테 봉사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좀더 자세한 상황을 설명을 하느라. 그녀는 조금은 머쓱한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알에인 몬티니가 그의 아버지와 그에게 어떤 일이 닥쳤는지 내게 말하러 왔던 날 난 마을에 있었지요. 많은 농노들이 내가 파르르 떨며 화를 내는 모습을 봤어요. 아무래도 크루얼을 다스리는 새 영주 검은 늑대를 빗대어 내가 염병할 놈이라고 욕한 걸들은 것 같아요.] 레오니가 누군가에게 욕을 했다는 게, 기버트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레오니는 그런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도 착하고 너무도 인정 많은 아가씨였으며, 어떤 병이든 아주 노련한 솜씨로 치료하는 걸 물론, 어떤 괴로움이든 함께 나누며 크나큰 위안을 주는 그런 아가씨였다. 기버트 경은 설령 그녀가 욕을 했다 할지라도 그녀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받아들였다. 그는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애지중지했고, 어쩌면 그녀의 응석을 모두 받아들인 탓에 그녀의 성격을 버려놓았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아니라면 누가 그녀의 여리디 여린 마음을 받아들이겠냐는 생각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레오니의 아버지는 그런 도리를 완전히 저버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6 년 전, 레오니의 어머니가 죽자, 그토록 사랑한 아내를 꼭 빼닮은 딸을 보는 게 고통스러웠는지, 아내의 언니인 베아트릭스를 딸려 그녀를 펄시윅 성으로 추방하듯 내보냈다. 기버트는 레오니의 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레오니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아씨가 레오니의 아버지인 윌리암 경과 결혼할 때 엘리자베스 아씨의 결혼지참금의 일부로 따라와 윌리암 경의 식솔이 되긴 했어도, 기버튼는 뫁티윈 윌리암 경에 대해선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백작의 다섯 자녀 중 막내딸이었던 엘리자베스 아가씨는 조르고 졸라 마침내 연애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와 윌리암 경은 전혀 어울리지 않은 한 쌍이었으나 윌리암 경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어쩌면 너무 지나칠 정도로…. 엘리자베스가 죽자 그는 자신을 학대하며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하나뿐인

딸을

보는

견딜

없어

했다.

아내

엘리자베스를 꼭 빼닮은 레오니는 자그마하고 가냘픈 체격에 상아빛 살결, 은빛이 감도는 보기드문

금발과

은회색

눈동자로

무척이나

예쁜

묘사하기에는 아름답다라는 말로도 충분치가 못했다.

아이었다.

레오니를

마디로


기버트는 두 여자-이미 고인이 된 아씨와 그 아씨처럼 소중한 부분이 되어버린 아가씨-를 생각하면서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순간 분노의 함성이 숲 쪽에서 들려와, 아련한 추억에 젖어 있던 그는 화들짝 놀라 얼른 생각에서 벗어나 긴장감에 온몸을 곧추세웠다. 한치의 망설임없이 벌써 검을 뽑아 들고 그는 숲쪽으로 달려갔다. 말들곁에 서 있던 네 명의

병사도,

레오니와

같이

병사들이

그녀를

지켜주기를

기원하며

기버트를

따라갔다. 숲속 한가운데에 있던 레오니도 그 무시무시한 함성에 놀라 한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평상시처럼 그 네 명의 호위병들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했는데…. 이건 필시 아주 흉포한 짐승이 가까이 있기 때문일 거야. 그러면서도 숙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은, 타고난 호기심으로 병사들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다가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르자 덤불과 나무들을 헤치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보일 때까지 내달렸다. 나무꾼 오두막이 검은 숯덩이로 앙상한 몰골을 드러냈다. 말탄 기사 다섯 명과 역시 말을 탄 열다섯 명의 병사들이 무너진 오두막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고, 나무꾼도 타다 남은 오두막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넋을 잃고 빤히 쳐다보았다. 갑옷을 입고 거대한 군마에 앉아 있는 기사가 오두막과 병사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레오니는 아까의 그 무시무시한 소리가 떠오르는 순간, 상황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엄청난 소리를 내지른 그 기사가 누군지도 알았다. 다행히 나뭇잎 색과 비슷한 암녹색 망토를 입어 눈에 띄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녀는 소리를 죽여 뒤로 물러나 관목 속으로 몸을 감췄다. 때마침 그녀의 호위병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자칫하면 기사들에게 들킬 위험이 벌어질 순간이었다. 레오니는 재빨리 그들쪽으로 몸을 돌려 조용히 하라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돌아가라고 손짓으로 지시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서자 그들은 그녀를 빙 둘러싸고서 그녀의 영지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잠시 후에 기버트와 나머지 병사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위험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이곳을 서둘러 떠나야겠어요, 켐프스톤의 영주가 나무꾼 오두막이 완전히 타버린 걸 봤는데, 그 행동이 심상치가 않던데요. ] [그를 보셨습니까?] [네. 그는 굉장히 화가 나 있어요.] 기버트 경은 투덜거리면서 레오니에게 어서 서둘라고 재촉했다. 불탄 오두막 근처에서 병사들과 같이 있는 그녀의 모습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이로울게 전혀 없었다. 거기서 나가는 걸 들킬 경우, 그녀가 뭐라고 둘러댈 것인가?


레오니가 캔 약초들은 나중에 안전해지면 농노들이 숲으로 가서 되찾아오면 되지 않겠는가?

지금

당장은.

레오니

아가씨와

병사들이

현장에서

벗어나는게

급선무였다. 기버트 경이 그녀를 들어올려 말에 태우면서 물었다. [아가씨가 본 그 기사가 검은 늑대라는 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 기사는 검은 바탕에 은빛 늑대가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거든요.] 레오니는 전에 한번 그 기사를 본적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크루얼에서 열리는 마상시합을 보려고 변장하고서 기버트 경 몰래 성을 살짝 빠져나온 탓에 그에게 감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인 걸 후회하긴 했지만…. [그의 부하들도 그와 같은 색상의 제복을 입긴 했겠지만, 십중팔구 그 남자일 겁니다.] 그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함성을 떠올리면서 기버트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셨습니까?] [아뇨.]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그녀의 목소리에 깔렸다. [그 남자는 투구를 쓰고 있었어요, 하지만, 몸집이 거대해서 한눈에 보아도 검은 늑대라는 걸 알겠던데요.] [아마 이번에는 부하들을 보내지 않고 그가 직접 와서 그 분쟁을 끝장내고야말 겁니다.] [아니면 그의 군대를 보내든지요.] [그는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아가씨. 한쪽 농노가 다른쪽 농노를 비방하는 말밖에 없지요. 그래도 지금은 성안에서 안전하게 계십시오. 제가 병사들을 이끌고 마을의 수비상태를 점검하겠습니다.] 레오니는 병사 네 명, 하녀 두 명과 같이 말을 타고 집으로 갔다. 그녀는 크루얼의 농노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 말라고 자신의 농노들에게 단호하게 경고를 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사실, 별로 주의를 주고 실은 마음이 없던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켐프스톤의 새 영주가 영지내의 문제들로 시달리는 게 그녀가 노리는 바였다. 그녀는 다음 축제일에 펄시윅 성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농노들과 함께 그 상황을 완화시키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벌어진 일로 검은 늑대에 대한 걱정과 그리고 그가 이제 어떤 짓을 할지 몰라서 성안에 아무도 불러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니, 이웃의 움직임을 늘 빈틈없이 경계하고, 한곳에 모여 술을 마실 기회를 농노들에게 전혀 주지 않는게 현명하리라 생각했다 그녀의 농노들은 그녀에게 손쉽게 관심을 끌 뭔가를 꾀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걸 그녀는 눈치를 챘다. 그래, 농노들이 검은 늑대에 대해 음모를 꾸미려 했다면, 차라리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했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마음을 다잡았다. 농노들에게 다시 한번. 그리고 단호하게 경고를 해야지. 하지만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친구 알에인, 그리고 헨리왕에게 자신의 가신들중 한 사람에게 훌륭한 영지로 호위를 베풀라고 청원하면서 죽음을 맞이한 불쌍한 에드몬드 경이 떠오르자 마음이 흔들렸다. 검은 늑대와의 평화를 원하는게 어렵다는걸, 정말로 어렵다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

2 레오니는 윌다에게 비누를 건네주며 제대로 등을 씻을 수 있도록 윗몸을 앞으로 숙였다. 물이 아직 뜨거워 레오니는 커다란 목욕통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아. 향긋한 풀 냄새가 나는 물을 식히려고 목욕통에 손은 넣고 휘저었다. 난로에 불을 지펴 방안에 한기는 없었다. 밖은 따스한 봄기운이 감도는 저녁이었지만, 돌벽으로만 된 펄시윅 성은 결코 누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냉기를 뿜어냈다. 그래서인지 현관의 거대한 홀과 연결된 그녀의 방 천장으로 외풍이 끊임없이 스며들었다. 펄시윅은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라든지. 손님들을 편안하게 머물도록 설계되지 않은 오래된 성이었다. 홀은 컸지만 백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레오니의 침실은 홀의 바로 위쪽 끝으로 나무판자들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녀는 그 방을 이모인 베아트릭스와 같이 쓰고 있었는데, 그 방을 반으로 갈라놓은 판자들 덕분에 그나마 서로의 사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새로 지은 성들 대부분은 홀 밖이나 그 위쪽에 방을 여러 군데 지었지만, 이 성은 다른 방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여자들 숙소도 따로 없었다. 하인들은 홀에서 잤고 병사들은 탑에서 잤다. 물론 기버트 경도 탑에서 묵었다. 펄시윅은 대충 성으로서 틀만 잡힌 곳이긴 하나 레오니에게는 소중한 집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6 년 동안 살아 왔지만, 이곳으로 온 이후로 자신이 태어난 몬티윈 성에 한번도 가지 않았다. 따라서 아버지도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몬티윈 성은 겨우 8 킬로미터 거리에 불과했다. 그 성에는 아버지 윌리암 경과 그의 아내인 주디스가 살고 있었다. 주디스는 레오니의 어머니가 죽은 지 일년 후에 아버지와 재혼한 여자였다. 레오니가 아버지에게 더 이상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녀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복한 어린 시절과 사랑하는 부모를 한꺼번에 잃어버린(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버려진)건 잔인한 운명이었고,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엄청난 고통이었다. 한때 온마음을 다해 아버지를 사랑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에 대해 애정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를 원망하며 저주를 퍼부었던 나날도 종종 있었다. 아버지는 사치스런 연회를 열려고 그의 하인들을 펄시윅 성으로 보내 그녀의 비축품들을 급습하여 빼앗아 갔다. 비단 펄시윅뿐만 아니라, 역시 그녀의 소유인 리셀과


마힐성까지도 아버지의 약탈에 휘말렸다. 그는 딸에게 한 마디의 통고도 없이 그녀의 소작료는 물론이요, 그녀의 고된 작업의 결실을 가로챘다. 그대로 당할 레오니가 아니었다. 레오니는 머리를 짜서 몬티윈의 집사를 교묘히 속여 지난 몇 년 동안에는 많이 거둬가지 못했다. 몬티윈의 집사가 목록을 가지고 방분할 때면 그녀는 신속하게 비축품을 성의 곳곳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장소 여기저기에 숨겨 놓아 창고들은

거의

바닥이

보일

정도

였다.

그런식으로

레오니는

향신료들과

리셀의

상인들에게서 받은 천들도 숨겼다. 이따금씩 집사와 함께 주디스도 왔는데, 주디스는 펄시윅 성에서 눈에 보이는 건 뭐든 마음대로 쓸수 있다는 생각으로 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레오니는 자신의 은닉장소들을 모두 기억할 수 없어 가끔씩 낭패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레오니는 그 방법을 포기한다거나, 펄시윅의 사제 베넷신부에게 자신의 계략을 털어놓고 그의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그를 설득해서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그녀는 은닉장소들의 미로를 나름대로 기록했다. 이제 그녀의 농노들은 더 이상 굶주림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고, 식탁도 풍성했다. 땀 흘린 보람, 그 어떤 것도 아버지 덕분으로 이루어진 건 절대 아니었다. 레오니는 비누칠한 몸을 깨끗이 닦아내고 일어나 그날 밤에는 방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 윌다에게 따뜻한 잠옷을 입혀달라고 했다. 베아트릭스 이모는 평소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불가에 앉아 자수를 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레오니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의 언니들 가운데 가장 위인 베아트릭스는 오래 전에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죽은 남편에게서 물려받은 몫인 토지를 남편의 친척들에게 빼앗기고는 다시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가

원해서

남편의

친척들에게

준거라고

우겼다.

그녀는

엘리자베스가 죽을 때까지 남동생인 쉐포드 백작과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레오니가 엘리자베스의 가신인 기버트 피찰란에게 떠맡겨지자, 베아트릭스 이모는 조카 딸 곁에 머무르면서 보살피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소심한 여자라 레오니가 이모를 돌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펄시윅 성에서 고립된 생활을 한 탓에 이모는 점점 더 소심해졌다. 친정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막내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원숙한

남성이자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대했던 반면-장녀인 베아트릭슨느 가장 격정적인 때의 친정 아버지의 모습을 간작하고 있어., 남자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레오니는 어머니의 가문을 이끌고 있는 쉐포드 백작 삼촌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그의 영지는 영국 중부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에 있었다. 혼인할 나이가 되어 남편감을 찾으려고 레오니는 삼촌에게 연락을 취하고 싶었다. 레오니의 심정의 변화를 눈치챈 베아트릭스 이모는, 삼촌은 여섯 자식과 손자, 손녀들을 비롯해 다섯 명의 형제


자매들에게 딸린 수십 명의 조카딸과 조카들이 있어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또한 삼촌 입장에서 보면, 막내누이 동생의 결혼을 영 못마땅하게 받아들였고, 지금은 죽어버린 누이동생의 딸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상냥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 당시 열다섯 살로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레오니는 결코 결혼은 하지 못하리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알지도 그녀에 대해 관심도 없는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다는 강한 자존심이 일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없는 게 훨씬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으레 그러는 것처럼 수녀원에 보내질 위협도 없었고, 또 그녀는 자신만의 성이 있는 독립적인 귀족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와 전혀 가깝지 않은, 그리고 그녀에게 그 어떤 관심도 보여줄 것 같지 않은 아버지에 대해서만이 약간의 부담을 느꼈다. 그건 그 시대에 아주 보기 드물면서도 부러운 위치였다. 그녀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열망을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 열망을 억눌렀다. 대부분의 신부들은 결혼 전에는, 남편이 얼굴조차도 몰랐고, 결혼 후에야 늙은 남자나 잔인한 남자, 아니면 무관심한 남자의 소유물이라는 걸 깨닫는게 보통이었다. 농노들만이 연애 결혼이 가능했다. 그래서 레오니는 스스로가 복받은 여자라고 믿었다. 단지 바라는 게 있다면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나는 일이었고,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크루얼에서 벌어지는 마상시합을 보려고 혼자 모험을 벌였다. 마상시합을 구경한적이 한 번도 없어, 가보고 싶은 호기심을 도무지 뿌리치질 못했다. 헨리 왕은 특별한 상황 하에서만 허락하는 몇몇 마상시합 외에는 모든 마상시합을 금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과거에, 마상시합들이 난무하여 처참한 전투로 끝을 맺는게 보통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아무 때나 어디서든 마상시합을 볼 수 있었고, 그리고 많은 기사들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마상시합에 참가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엄청난 부를 노렸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크루얼에서 열린 마상시합의 열기가 처음에는 하늘을 찌를 듯햇다. 검은 늑대가 똑같이 검은 색과 은색의 옷으로 모두가 건장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여섯 명의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갑옷으로 무장하고선 말을 타고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곱 명의 적수가 들고 있는 깃발들로 에드몬드 몬티니의 가신들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 때 상황에선 검은 늑대가 켐프스톤의 대영주 였다. 비록 과거엔 에드몬드 몬티니의 가신이었지만, 성을 함락한 이후로 자신의 가신들로 편입된 그들에게 검은 늑대가 왜 시합을 벌이는지 별다른 의아심이 들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들은 충분히 있어 관심을 갖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녀의 관심을 끈 건 오로지


검은 늑대였고 , 돌연 경기장으로 달려나와 그에게 정표를 건네준 그 귀부인이었다. 검은 늑대는 그녀를 끌어안고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대담하게 키스를 했다. 그의 아내인가? 군중들이 그 키스에 하늘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을 보냈고, 그리고 나서 갑자기 난투가, 모든 참가자들이 아주 격렬하게 벌이는 모의 전투가 시작됐다. 난투에는 진짜 전투와 구별되는 엄격한 규칙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규칙들은 그날 경기에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음이 금세 드러났다. 상대방 기사 일곱 명 모두가 검은 늑대를 말에서 떨어뜨리려고 작정하고 있음을 누가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적수들은 틈을 주지 않고 잇따라 검은 늑대를 공격했고 그나마 검은 늑대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건 오로지 그의 기사들의 재빠른 방어 덕분이었다. 검은 늑대의 적수들이 경기장에서 달아나자 그의 기사들이 추격을 하는 순간 검은 늑대는 부하들을 저지했다. 마상시합이 너무도 빨리 싱겁게 끝나 레오니는 실망만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검은 늑대들의 새 가신들 중에 자신들의 대영주인 그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겨우 만족했을 뿐….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검은 늑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가 켐프스톤을 쉽게 장악하지 못했다는 추측만이 밀려들었다. 레오니는 윌다를 내보내고 불가에 있는 이모에게로 다가가 옆자리에 조용히 않았다. 타오르는 불꽃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숲에서 일어났던 화재와 그리고 장차 어떤 새로운 문제들이 벌어질지 생각에 잠겼다. [우리 새 이웃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거냐?] 레오니는 화들짝 놀라 베아트릭스를 곁눈으로 흘긋 쳐다보았다. 괜한 걱정을 이모에게 끼쳐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걱정할 게 뭐 있겠어요?] 레오니는 표정을 바꿔 아무렇지도 않게 얼버무렸다. [저런, 아가, 네 걱정거리를 굳이 나한테 숨기지 않아도 된단다.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모를 것 같니?] 레오니 역시 그러리라 믿었다. [베아트릭스 이모, 아주 심각한 일은 절대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제 그 무례한 기사들이 와서 험악한 말로 우리를 위협헌하는 일이 없을 거란 말이냐?] 레오니는 두 손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람들은

말만

좋아하잖아요.] [오호, 난 몰랐구나.]

험악할

뿐이에요.

남자들은

허세를

부리고

호통치는


사람은

호호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열세

이후로

성에만

틀어

박혀

지낸

레오니보다는 베아트릭스가 당연히 아는 게 더 많았으나. 짐짓 아는 체하는 레오니의 말이 우스울 수밖에…. 레오니는 웃음을 거두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오늘 누군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도지 않았어요. 아마 그들은 오늘 일어난 화재를 우리가 저지른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양이에요.] 베아트릭스가 생각에 잠겨 눈살을 찌푸리자 레오니가 물었다. [이번에는 검은 늑대가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렇단다. 그가 아직 우리 마을을 불태워 버리지 않은게 이상한 일이잖아.] [감히 그렇게는 못할 거예요! 내 농노들이 말썽을 일으켰다는 증거를 그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아요. 그가 갖고 있는 증거라고는 그의 농노들의 고발뿐이라고요.] 레오니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래,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를 삼는 단다. 혐의만으로 충분한 거지.] 베아트릭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아요. 내가 내일 마을로 가서, 앞으로는 어떤 이유로든지 그 누구도 펄시윅 영지를 떠나지 못하게 단단히 일러두겠어요. 더 이상의 말썽은 없을 거예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되겠죠.]♣

3 롤프 덤버트가 성큼성큼 홀로 들어서면서 투구를 거칠게 홱 내던졌다. 헨리 왕이 보낸 새로 온 시종이 투구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간신히 받아 안았다. 그 투구는 다시 쓰기 전에 병기고에 보관해야 하겠지만, 롤프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뭐랄까, 심기가 몹시 불편해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들을 때려부수고 싶은,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토르프는 넓은 홀 맞은편 난롯가에 앉아 젊은 영주가 성질을 부리는 모습을 보며 전혀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꽤 재미있어 했다. 자신도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원숙한 장년이라 쉽게 흥분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롤프의 아버지를 섬겼던 여러 해 동안에도 토르프는 롤프의 흥분에 겨운 모습을 여러 번 본 터였다. 롤프의 아버지는 9 년전에 죽었고, 롤프의 형이 아버지의 작위와 가스코뉴에 있는 아버지의 소유지 대부분을 상속받았다. 롤프의 유산은 보잘 것 없었지만, 탐욕스런 형은 그것조차 갖고 싶어 롤프를 집에서 추방해 버렸다. 토르프는 그 형을 섬기지 않고, 안락한 지위를 포기하고는 롤프와 함께 떠났다. 그후로 몇 년 동안은 순풍에 돛단 듯 모든 일이 술술 풀려나갔다. 보수를 넉넉히 받는 용병이 되어 전투에 참가했고, 마상시합에서 탄 상금들로 점점 주머니가 두둑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토르프는 어린 사람의 지휘를 받는다는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다른 부하들도 한결같은 생각아라, 롤프는 아홉 면의 기사들과 이백 명에 이르는 용병들을 지휘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롤프를 따르는 모든 병사는 롤프가 정착하자 그와 함께 머물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렇지만 과연 정착을 한 건가? 토르프는 영국 헨리 왕의 관대함에 대해 롤프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미 꿰뚫고 있었다. 켐프스톤 영지는 여러 해 동안 롤프가 경험했던 그 어느 것보다 더 많은 부담으로 골머리가 쑤실 정도였다. 너무 부담스러워서 롤프는 그 모든걸 버리고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 영지는 확실한 수입이 전혀 없어 매일 그의 돈주머니를 고갈시켰기 때문에 체면치레만 존재하는 것에 불과했다. [소식은 들었소, 토르프?] [하인들이 밤에는 나무꾼이 성안으로 들어온다는 얘기 에는 별다른 얘긴 안하더군요.] 롤프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토르프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기랄!] 롤프가 곁에 있는 작은 탁자를 주먹으로 쾅 내리치자 탁자 한가운데에 금이 갔다. 토르프는 여전히 신중한 표정만 지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난 충분히 당했소!] 고함을 지르는 롤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올렸다. [우물에서 악취가 나질 않나, 가축 떼들이 숲속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농노들은 몇 마리 안 되는 가축들을 도둑맞은 것이 모자라 벌써 세 번째 화재를 당했소. 그 오두막을 다시 세우려면 얼마나 걸리겠소?] [여러 명이 서둘러 한다면 한 이틀 걸리겠죠.] [그 때문에 들판이 소홀해지겠지, 교묘하게 측면을 끊임없이 공격하는데 내가 어떻게 전쟁을 제대로 치른단 말이오? 내가 크루얼을 떠나 전쟁을 치르고 다시 돌아온다면, 이곳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을 뿐만 아니라, 농노들이 달아나고 또 들판은 황무지로 변하리란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소?] 토르프는 대답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란 걸 알고 있으나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부하들을 다시 한번 펄시윅 성으로 보내시렵니까? 그리고 그 농노들을 처벌하실 겁니까?] 롤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은 어떤 농노가 혼자서 한게 아니오. 아니고 말고. 농노란 명령에 따르니까요. 따라서 내가 원하는 건 명령을 내린 바로 그 작자요.]


[그러시다면 펄시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보셔야 할겁니다. 제가 기버트 피찰란 경을 만나 내가 온 이유를 말했더니 무척이나 놀라더군요. 그 사람은 그런 나쁜 짓을 할 만큼 비열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농노들에게 못된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하오.]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영주님은 그 성을 점령할 수는 없습니다. 펄시윅은 몬티윈 소유인데 그 사람은-만일 영주님께서 정이나 그러려고 하신다면-영주님이 대항하려고 준비한 병사들보다 더 많은 병사들을 소집할 만큼 수많은 성들을 가지고있거든요.] [난 싸움에서 절대지지 않을 거요.] 롤프가 험악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영주님은 이곳 유리한 고지를 잃게 될 겁니다. 켐프스톤에 딸린 일곱 성 가운데 성 두 곳을 점령하는 데만도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 곳이요.] 무뚝뚝하게 내뱉는 롤프의 말에 토르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세 곳이라뇨? 어째서요?] [펄시윅에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요. 오늘 오두막이 불탄 걸보고 화를 삭이지 못해 케닐 성으로 가 성벽을 파괴하라고 명령을 내렸소. 포위 공격은 거기서 완료되었다오.] [그럼 케닐은 성벽이 다시 세워질 때가지는 쓸모없겠군요.] 그게 유일한 결론이었다. [난… 그렇소, 맞소.] 토르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일곱 군데의 성들을 점령할 때 롤프가 최후의 수단으로 쇠뇌(여러 개의 화살을 잇달아 쏘아대는 활)를 사용할 생각이었다는 걸 토르프는 알고 있었다. 그건 지난 번 마상시합에서 반항하는 가신들을 굴복시키는데 실패하자 착상된 대담한 계획의 일부였다. 그 마상시합은 사실 반항하는 가신들을 위하여 열렸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새 영주를 배알하고 그의 멋진 솜씨를 보여줄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솜씨로 그의 솜씨를 시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대신 그를 죽이려고 기를 썼다. 그로 말미암아 롤프는 여덟 성 중에서 일곱 성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그를 거부하는 골치 아픈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자신의 소유지에 대해 전쟁을 치른다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소유지를 파괴한다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서 롤프는 헨리왕의 군대에서 오백 명의 군사를 보충해 전력을 보강했다. 하윅과 엑스포드성은 엄청난 롤프의 군대가 성문밖에 나타나자 마자 아무런 피해없이 항복하는 데 타협을 했다. 그 뒤에 롤프의 군대는 케닐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제, 그로부터 한 달 반 후에 케닐을 마침내 점령했다.


롤프가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토르프는 아멜리아가 왜 내려오지 않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마 그녀는 화난 롤프의 음성을 듣고 꼭꼭 숨기로 작정했으리라. 롤프가 애꿎은 그녀에게 분풀이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만큼 롤프의 정부인 아멜리아는 아직 그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한 게 분명했다. 우물쭈물하다가 토르프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은 동쪽을 공격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아시죠? 다른 집을 살펴보러 가시기 전에 자신의 집을 깨끗이 치워야 하는 법입니다.] [알고 있소.] 롤프가 볼멘 소리로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 보시오. 펄시윅을 사겠다고 했지만. 윌리암 경은 죽은 아내가 그 딸에게 물려준 토지라 팔 수 없다고 써 보냈습니다. 여간 까다롭게 구는 게 아닙니다. 딸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딸에게 펄시윅 성을 팔라고 하고 다른 토지를 주면 되잖소.] [어쩌면 그 어머니의 유언장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쓰여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그가 할 수 없는 거겠죠.] 롤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다시 한번 공격해오면 난 절대로 참지 않을 거요, 토르프.] [영주님께서는 언제라도 그 딸과 결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그 성을 갖게 되는 거죠.] 롤프의 눈빛이-홀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내 험악했던 그 눈빛이-평상시의 암갈색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토르프는 뜻밖의 변화에 숨이 턱 막혔다. [난 그저 농담했을 뿐입니다!] [아오.] 롤프는 토르프의 말을 심각하게,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롤프, 제발, 그 생각일랑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단지 농노 몇 명을 통제하려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당신이

그곳을

시찰하면서

단단히

나무라십시오.

그들에게 겁은 주시란 말입니다.] [그건 내 방식이 아니오. 무고한 사람이 그 때문에 고통을 받을 거요. 범인들 중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면, 그자를 본보기로 징계했을 테지만. 내가 거기에 도착하면 항상 그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소.] [여러가지 이유들로 결혼을 하지만, 이웃 농노들을 진압하려고 결혼한다는 건 타당한 결혼 사유가 못 됩니다.] [그래요. 그러나 평화가 필요한 곳에서 평화를 원한다는 건 충분한 사유가 되오.] 롤프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되받아쳤다.


[롤프!] [윌리암 경의 딸에 대해 뭐 아는 게 있소?] 토르프는 너무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영주님처럼 저 역시도 영국에는 처음인데.] 롤프는 홀 맞은편 끝에 모여 있는 부하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케닐에 갔던 병사

명과

명의

기사가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기사

명은

브르타뉴출신이었지만, 에바라드 경은 영국 남부 출신이었다. [에바라드, 우리 이웃한 윌리암 몬티윈 경을 아나?] 에바라드가 싱글거리며 다가 왔다. [아무렴요, 영주님. 제가 성년이 되기 전에 궁정에 있을 때 그 사람은 궁정에 자주 왔습니다.] [그에게 자식이 많나?] [지금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궁정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하나밖에, 달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벌써 대여섯 해 전으로 그의 아내가 죽기 전이었죠. 지금은 그에게 젊은 아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들에게서 아이들이 새로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딸을 알고 있나?] [그 딸이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마님과 함께 있는 걸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렇게 아름다운 부인에게 어떻게 저렇듯 못생긴 아이가 태어났는지 의아해 했던 게 생각나는군요.] [저런!] 토르프는 불쑥 끼여들며 롤프를 바라보았다. [롤프, 이제 그 어리석은 생각을 접어두시렵니까?] 롤프는 토르프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에바라드, 예쁘지 않다고? 그래 어땠는데?] [밖으로 드러난 살갗은 모두 검붉은 반점들로 덮여 있었습니다. 너무 안 된 일이었습니다. 얼굴 윤곽으로 봐서는 장차 엘리자베스 마님처럼 아름다워질 수도 있으리란 예감이 들기도 했지요.] [그녀에 대해 더 말해보게.] [전 딱 한 번밖에는 그녀를 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치마폭 뒤로 숨어 있었거든요.] [그녀의 이름은?] 에바라드는 기억해내느라 눈살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레오니 아가씨입니다, 영주님.] 느닷없는 여자의 목소리에 세 남자 모두 어떤 하녀를 돌아보았다. 롤프는 그의 대화에 하인들이 끼여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양미간을 좁히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는 제 이름이 뭐냐?] [밀드레드입니다.] 그녀는 아주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영주가 계속 쳐다보자, 그녀는 불쑥 끼여들어 거리낌없이 말해버린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롤프 경의 시선이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네가 어떻게 그 레오니 아가씨를 알고 있느냐?] 밀드레드는 롤프가 점잖게 묻자 용기를 냈다. [그… 그 아가씨가 펄시윅에서 자주 이곳으로 왔을 때….] [펄시윅!] 롤프가 홀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녀가 그곳에 사느냐? 몬티윈이 아니고?] 밀드레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레오니 아가씨에게 은혜를 입고 있었고, 그녀를 다치게 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롤프 영주가 크루얼을 손에 넣은 이후로 크루얼이 당하고 있는 피해를 펄시윅 탓으로 돌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영주님, 제발 고정하십시오. 그 아가씨는 무척 인정 많으신 분이십니다. 크루얼의 의사가 손도 못 대는 불치의 병으로 제 어머니가 죽어갈 때 레오니 아가씨께서 제 어머니를 구해주셨습니다. 그 아가씨는 의술에 대해 아시는 바가 많답니다, 영주님. 맹세하건대, 그분은 결코 손해를 끼치시는 분이 아니시랍니다.] 밀드레드가 숨도 쉬지 않고 설명했다. [그녀가 펄시윅에 산단 말이지?] 밀드레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걸보고 롤프가 다시 물었다. [왜 아버지와 같이 안 살고 거기 있지?] 밀드레드는 뭐라 대꾸해야 죻을지 두려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뒤로 물러섰다. 다른 영주에 대해 비록 새 영주가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일지라도, 나쁜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비난하면 매를 맞을 건 뻔했다. 롤프는 그녀가 왜 겁을 내는지 눈치를 채고 부드럽게 재촉했다. [자, 밀드레드, 네가 아는 것을 말하거라. 날 두려워말고….]


[제…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주인이신

에드몬드

경께서,

윌리암

경은

술을

좋아한다고… 그분의 첫 부인께서 돌아가신 뒤로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말씀하셨다는 게 전부입니다. 에드몬드 경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레오니 아가씨와 결혼시키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윌리암 경께서는 당신에게는 딸이 없노라고 맹세하셨거든요. 에드몬드 경께서는 몬티윈 가문과 사돈을 맺어봤자 얻는 게 전혀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가씨는 그 분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펄시윅으로 보내지셨고, 그 이후로 그분의 아버님과 한번도 만난적이 없습니다. 아니, 전 그렇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레오니 아가씨와 에드몬드 경의 아들이 그렇게…가까웠느냐?] [그 아가씨와 알에인 경께서는 동갑내기로, 알에인 경께서 이곳을 떠나시기 전까지 늘 함께 계셨습니다. 영주님.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아주 가까웠습니다.] 롤프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제기랄! 그래서 그녀가 자기 농노들에게 날 괴롭히라고 명령한 거로군! 몬티니 가를 좋아해 그렇게 한 거야!] [아닙니다, 영주님. 그분은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닙니다.] 롤프는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라 그 하녀를 깨끗이 잊어버린 듯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고소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건 하나도 이상할게 없군. 만약 펄시윅을 공격한다면 결국 여자를 공격한다는 애기가 되는 거로군. 토르프, 당신도 애기를 다 들었으니 이제 당신의 농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영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실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토르프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성급하게 일을 진행하시기 전에, 보기 흉한 여자를 진정으로 아내로 원하시는지 어떤지를 반드시 깊이 생각하십시오.] 롤프는 토르프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 여자와 같이 살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소?] [그러시다면 왜 그녀를 아내로 맞으려고 하십니까? 롤프, 신중하게 행동하십시오, 영주님과 결혼하길 원하는 지체 높은 미인들이 많이 있었는데도 영주님께서는 최근 몇 년 동안 내내 피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에겐 영지가 없었소, 토르프. 내 아내에게 줄 집도 없이 결혼할 수는 없잖소?] 토르프는 더 애 9 기를 하려 했지만, 롤프가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건 평화요.] [평화입니까? 아니면 복수입니까?]


롤프는 어깨를 들썩였다. [난 그녀를 해치지 않을 거요. 하지만 그녀가 내게 어떤 못된 짓을 하려 든다면, 그 어리석은 행동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남은 생애동안 펄시윅에 틀어박혀 가장 가벼운 죄에 대해서도 그녀의 농노들을 처벌하는 모습을 그녀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도록 합시다. 난 이 귀찮은 일들을 당장 끝장낼 거요.] [아멜리아는 어쩌시고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롤프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해서 이곳에 왔소. 그녀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그러면 되는 거요. 하지만 그녀가 머물고 싶다면 그녀 좋을 대로 하는 거고. 내가 아내를 맞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선 안 된다는 건 말도 안 되오. 적어도 내가 아내로 맞는 여자가 레오니란 아가씨인 한은…. 그녀를 만족스럽게 해줘야 한다는 그런 의무는 나한테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녀도 순순히 받아들일 거요. 그 레오니란 아가씨는 내가 하는 일에 참견할 권리를 갖지 못하리란 걸 분명히 깨닫게 되겠지.] 토르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롤프가 잠을 푹 자고 나서 제 정신을 차리기만을 바랄 수밖에….♣

4 롤프는 왕의 알현실로 통하는 대기실로 천천히 들어갔다. 헨리 왕은 뜻밖에 롤프를 빨리 보게 되어 즐거웠지만, 정작 롤프는 부탁을 청하는 걸 몹시 싫어했다. 비록 이 부탁이라는 게 앙피지 위에다 몇 자 끄적일 정도로 헨리 왕에게 하찮은 것일지라도 말이다. 한편, 헨리 왕은 호의를 베푸는 걸 좋아했다. 헨리 왕의 가신으로서 롤프에게 남작이라는 새로운 작위도 얼마 전 롤프가 런던에 있을 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하다가 예고없이 베푼 호의 였다. 켐프스톤 토지가 우연히 대화로 떠오르게 되자 헨리 왕은 롤프에게 켐프스톤을 원하느냐고 물으면서 그 자리에서 작위를 수여했다. 사실, 헨리는 롤프가 지오프리 왕자의 목숨을 살려준 데에 대한 보답을 오래 전부터 하고 싶어 했다. 그때마다 롤프는 왕자의 안전을 지키는 건 자신의 의무일 뿐이라며 포상을 모두 거절해 왔다. 롤프가 헨리 왕을 도와준 건 비단 그 일뿐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헨리왕은 켐프스톤을 제공하겠다는 자신의 제안을 롤프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놀랐다. 켐프스톤은 포상으로 받을 만한게 전혀 못되었고, 그걸 손에 넣으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헨리 왕은 설마 그러려니 싶었다. 마침내 롤프가 정착하려고 토지에 관심을 보이자, 헨리 왕은 즉시 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안했다. [고향과 아주 가까운 곳이 어떤가? 내가 마련해 볼수 있는데…] 롤프는 왕이 부담스러운 걸 제시하기 전에 손을 들어올려 가로막았다.


[제가 켐프스톤에서 원하는 건 도전입니다, 폐하. 전 가스코뉴 토지를 엄청나게 사들일 수도 있지만, 이미 그곳은 제 고향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 제 힘으로 획득할 수 있는 땅을 원합니다. 켐프스톤을 반드시 손에 넣게 된다면 폐하께 진심으로 감사할 겁니다.] [내게 감사한다고? 감사를 해야 할 사람은 나네. 난 사실 그곳을 지키려고 병력 유지 비용을 대는 게 지긋지긋했으니까. 이제 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 지역의 무법상태에 철퇴를 가할, 내가 진정으로 믿는 그대를 확보한 셈이지 않은가. 그대가 내게 도움을 준 거라네, 롤프. 그리고 그대가 난 도와준 모든 일들에 대해 이것으로 보답을 한거라곤 생각지 않네. 그대에게 달리 줄 수 있는 게 뭐 없겠나? 그대에게 많은 토지를 가져다줄 아내는 어떤가? 내가 중매를 서볼까?] [아닙니다. 폐하.] 롤프가 껄껄 웃으면서 가볍게 대꾸했다. [켐프스톤을 먼저 확보해놓고 아내 문제는 그때 생각해보겠습니다.] 얄궂게도 지금 롤프는 바로 아내 문제 때문에 대기실에 들어와 있는거였다. 레오니 몬티윈에게 한 청혼이 매정하게 거절된 상황이었다. 그 분쟁을 끝내는 데에는 결혼 외에도 다른 방법이 ���다는 걸 알고 있었다. 켐프스톤을 확보할 때가지 경계지역을 순찰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더 많은 병사들을 고용하여 농노들을 막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전 지역을 순찰할 만한 병사를 고용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다. [제기랄,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내 돈주머니를 줄게 하지는 못할걸!] 롤프는 소리치며 화를 벌컥 내다가 헨리 왕이 그 방에 들어온걸 보고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누구에게 그대의 돈주머니를 줄게 하지 못할 거라고 하는 말인가? 아멜리아 말인가? 그녀도 데리고 왔나?] 헨리 왕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아닙니다, 페하. 그녀는 시골에 있습니다.] 롤프는 헨리 왕이 계속 묻자 난처해 하며 대답했다. 롤프는 왕 앞에서는 전혀 맘이 편치 않았다. 체격은 롤프가 훨씬 더 컸지만 헨리는 영국 왕이었고, 그 사실을 무시하는 그 누구도 가만둘 인물이 아니었다. 헨리 왕은 넓은 어깨에 목은 두터웠으며 팔을 강한 전사의 팔로 우람한 체격이었다. 또한 붉은색이 감도는 머리칼을 항상 텁수룩한 스타일로 짧게 잘라 한결 혈색이 좋아 보였다. 헨리 왕은 엘리노아 왕비와는 달리 의복에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헨리 왕은 , 엘리노아 왕비가 왕과 그 자식들 사이를 이간질한다며 그녀를 윈체스터 성에 감금해 그 이후로는 아무도 궁전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헨리 왕은 마흔 살 남자로서는 최상의 체력을 유지했다. 그는 신하들보다 빨리 걸었고 말도 더 잘 탔다. 그를 따라가려고 하다 보면 누구든 지칠대로 지쳐버리는 게 흔히 벌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는 앉아 있을 틈이 없을 정도로 정력적인 남자였다. 또한 음식도 홀을 걸어다니면서 서서 먹는게 평소의 습관이었다. 왕이 서서 식사를 하면, 궁중의 예법에 따라 다른 사람들 역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할수 가 없었다. 왕이 듣는데서 결코 불평하지는 못했지만, 무척이나 성가신 일로 많은 사람들이 고역을 치렀다. 예의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로 헨리와 롤프는 포도주가 담긴 은 술잔을 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헨리 왕은 회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얼마 동안은 그대를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네. 켐프스톤 때문에 내게 항의를 하려고 이렇게 빨리 왔는가?] [그곳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어나가고 있습니다, 폐하.] 롤프는 재빨리 왕을 안심시키려는 듯 덧붙였다.] [성 여덟 개 중 네 개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네 군데 성은 단단히 폐쇄된 상태라 곧 확보될 겁니다.] [검은 늑대는 정말 그 명성에 걸맞는 행동을 하고 있군!] 헨리는 아주 기뻐하면서 들뜬 목소리로 응답했다. 롤프는 검은 늑대란 별명을 싫어한 탓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 별명은 그가 늑대처럼 용맹하다기보다는 그의 검은 용모에 빗댄 게 분명했다. 그 별명을 들들 때마다 곤혹스러움을 떨쳐버리질 못했다. [제가 온건, 켐프스톤 전체가 관련된 일 때문이 아니라 크루얼과 관련된 일입니다., 페하. 제 이웃에는 자신의 농노들을 교묘하게 조종해 제게 대항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전 하인들을 다스릴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어떤 무사인가? 한데 여자라고 말했나? 그대 이웃이 여자란 말인가? 그 지역에 특별히 생각나는 미망인은 없는걸.] 헨리 왕은 싱글거리며 롤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망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을 비운 영주의 아내도 아닙니다. 그녀는 윌리암 몬티윈 경의 딸인데, 크루얼 옆에 위치한 영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윌리암 경이라…. 아, 이제 생각나는군, 내 백작의 딸 중 하나와 결혼했던 사람이지, 그래, 그 아내가 쉐포드 가문의 딸인 엘리자베스였지. 하지만, 약 6 년 전에 엘리자베스가 죽자 그 사람은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지냈다네. 비극적인 일이지. 그들은 연애결혼을 했는데 그래서 더욱더 그녀의 죽음을 끔찍이도 괴로워했네.] [그 사람은 자신의 딸을 펄시윅에 가둬놓고는 그녀를 돌보지 않았다는 군요.] [무슨 말인가?]


[그 사람은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헨리가 머리를 흔들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 아이를 기억하네. 얼굴이 예쁘지는 않았지만 생기 있는 아이었지. 그 아이가 신경성

장애를

앓고

있다고

엘리자베스가

얘기했던

생각나는군,

가련한

엘리자베스는 약들을 들고서 그 애를 줄곧 따라다녀야 했다네. 윌리암 경이 그녀를 돌보고 있지 않다고 했나? 딸을 소홀히 하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야. 에, 그애는 이제 스무 살 가량되었을 거야. 오래전에 결혼했어야 했는데. 남편감을 찾는게 어려웠다 해도 돈으로 살 수 있는 남자는 항상 있는데, 안 그런가? 수녀가 될게 아니라면 그녀도 이제 결혼을 해야지.] [그렇습니다, 페하.] 롤프는 바로 이때라 생각하고 얼른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제가 그녀의 남편이 되겠습니다.] 헨리 왕은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말도 못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농담이지, 롤프? 그 멋진 얼굴로 나의 아름다운 숙녀들을 기절시켜 놓고선, 이제 평범한 아가씨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인가?] 롤프는 움찔했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자랐을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품은 게 너무 지나쳤나? [좋아서 하는 결혼은 거의 없습니다.] 롤프는 마음을 다잡고 정중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대는 자기 뜻대로 하는 사람이잖나. 그대가 그 아가씨와 결혼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왜 굳이 그 아가씨와 결혼하려고 하나?] [특별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녀가 제게 지역적인 평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녀와 전 이웃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제가 다른 이웃들을 다루는 데도 도움이 될겁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가신들이 있습니다. 제게는 아홉명의 기사들이 있습니다만, 지휘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자들이 있어서 다른 일곱 개의 성들을 이끌어 갈 가신들 이 필요합니다.] [롤프, 그대의 생각은 알겠네만, 난 그대의 목적을 어느 정도 이뤄줄 수 있고, 바라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운 아내를 찾아줄 수도 있네.] 롤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멜리아 같은 여자들은 어디든 항상 있습니다.] 헨리 왕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왕은 프랑스의 엘리스 왕녀와 내연의 관계로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에서 살고 있었다. 남자에게 정부가 있는 한, 아내의 외모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건 사실이었다.


[잘 알겠네. 그대에게 필요한 건 내 허락뿐인가?] [아니 더 있습니다, 폐하. 난 그 아가씨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의 남편감을 거절하다니?] 헨리가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대는 지금부터 삼 주 후에 반드시 그녀를 갖게 될 거네. 결혼 예고를 즉각 공고하지, 그리고 내일 윌리암 경에게 내 칙사를 보내겠네.] 그런 뒤 좀 화가 가신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그대는 이 일을 진정으로 원한다는 걸 확신하는가, 롤프? 이 결혼에 어떤 망설임도 없나?] 롤프는 확신하고 있어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었다. [확신합니다.] 롤프가 단언하자 헨리 왕은 싱긋 웃었다. [그렇다면, 그 아가씨가 윌리암 경의 유일한 상속녀라는 걸 알면 더욱 만족스럽겠군.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론, 몬티윈은 기사 다섯 명을 사례조건으로 내세울 정도로 가치가 있다네. 그녀는 그 엘리자베스의 유일한 상속녀이기도 해서 성 세 개를 상속받았다네. 마힐 성을 지키고 있는 가신에게는 그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여섯명의 아들이 있다네. 또한 레오니는 쉐포드 백작의 조카딸이고, 다른 삼촌들과 이모들이 있지. 그들 대부분이 작위를 갖고 있어 상당한 부러움을 사는 가문이라네. 만족스런 인척관계를 갖는 건 남자에게 해롭지 않아, 안 그런가?] 롤프는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결혼 지참금을 가진 상속녀였고, 뿐만 아니라 고귀한 신분을 가진 친척들도 많았다. 사실, 그는 그녀를 고독한 여자라고 생각했기에 이 모든 얘기가 분명 기쁜 일이었다. 혹시나 노여움의 대가로 자신이 원하던 것 이상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5. 주디스는 롤프 덤버트가 왜 레오니와 결혼하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만약 그 이유를 알았더라면 화가 나서 펄쩍 뛰었으리라. 지금 주디스는 거의 히스테리 상태로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섰다. 그녀는 그 결혼식을 저지할 만한 어떤 일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윌리암에게 왕의 명령에 관해 말하는 걸 미루었다. 하지만 결혼식이 단 하루밖에 남지 않아 허둥대며 조바심을 쳤다.


그녀는 하인에게 윌리암을 깨우라고 보내고서 테이블 윗 자석에 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침인 데다가 윌리암이 평소에 일어나는 시각보다 훨씬 더 이른 시각이었다. 그녀는 술에 절어 몽롱한 그의 정신 상태가 지금은 그녀의 얘기를 알아들을 만큼만 깨어 있기를 기도했다. 그가 장시간 맑은 정신을 유지하게 되면, 그녀가 수년 동안 벌인 모든 일이 들통나 뒤죽박죽 되리란 건 뻔한 일이었다. 만일 언젠가 윌리암이 그녀가 한 짓을 알게 되는 날에는 그녀를 죽일 테지 주디스는 그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시 윌리암을 인사불성로 만들 기회를 노린다면, 다른 일을 꾸밀 필요가 전혀 없으리란 사실을 나름대로 터득했다. 윌리암은 그녀의 모든 꿈과 희망을 파괴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잃은 슬픔 때문에 술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였고, 정신이 들자 주디스가 만취상태를 틈타 그를 속여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일로 그녀를 혼수상태가 될 정도로 때렸고, 그때 매맞은 작은 흉터가 왼쪽뺨 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그 때문에 그를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지나친 자만심이 그녀의 잘못이었고 파멸의 원인이었다. 그녀는 윌리암이 자신을 아내로 받아들이는 걸 기뻐하리라고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튼 6 년 전 그녀는, 결혼 지참금만 없었다 뿐이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로 광대뼈가 나온 뺨과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 그리고 숱 많은 금갈색 머리칼의 외모는 단연 돋보였다. 그녀의 미모 때문에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던 남자도 많았지만, 윌리암만큼 넉넉한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윌리암은 주디스가 생각했던 만큼 모든 걸 소유한 게 아니었다. 그의 성들 중 세 군데 성은 그의 딸의 소유였다. 그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주디스는 결코 윌리암을 속여서 결혼하지는 않았으리라. 윌리암은 그녀와 결혼한 것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 주디스는 위기를 모면하느라 임신 중이라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곧장 내쫓길 판이었다. 물론 주디스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 윌리암을 만나기 1 년 전에 무리하게 낙태를 하여 자궁이 망가져버렸지만 윌리암이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윌리암이 그 위장된 임신에 관해 물어볼 경우를 대비해서, 그녀는 위기를 모면하려고 늘 수에 취하고픈 그의 괴로운 심사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그녀는 더욱 집요하게 그를 알콜 중독자로 만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있게 했다. 윌리암을 그대로 두다간 폐인이 될 게 뻔한데도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때린 그날 부터 그녀는 증오심에 불탔다. 그 증오심은 해를 거듭해도 사그라질 줄 몰랐다. 이제 그는 술주정뱅이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곁에 있는게 끔찍했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주디스는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을 마구 사들이는 일부터 잘생긴 정부들을 곁에 두는 데에 이르기까지 기분 내키는 대로하면서 몬티윈 성을 장악했다. 모든 걸 그녀의 뜻대로 처리하려고 그녀는 윌리암과 결혼하는 즉시 윌리암의 딸이 간섭할까봐 몬티윈 성에서 내보냈다. 처음에는 레오니가 친척들 집을 방문하고 있다고 윌리암에게 둘러대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윌리암이 술과 슬픔으로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병들어 있음을 알고는, 그에게 레오니를 정기적으로 보지 않느냐고 오히려 몰아붙였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돈속에 빠져들어 제 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그는 그렇게 되는 줄로 믿었다. 친척들과 이웃들은, 레오니 스스로가 원해서 술주정뱅이 아버지 곁에 머물기보다는 펄시윅으로 갔다고 생각하고는, 레오니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주디스는 레오니에게 아버지가 그녀와 관계를 끊고 싶다는 얘기를 전하며 몬티윈 성을 방문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런저런 식으로, 주디스는 용케도 모든 사람들이 진상을 알지 못하게 감쪽같이 속였다. 그동안 레오니의 결혼 지참금은 여전히 윌리암의 몫이었고, 주디스는 그 수익금을 모두 써버렸다. 그녀는 레오니에게 들어온 청혼들을 윌리암의 이름으로 가차없이 거절했다. 레오니의 토지에서 생기는 이익들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약 그 계집애를 죽여서 그 토지가 영원히 윌리암의 소유로 할 수 있었다면 주디스는 레오니를 죽이는 일마저도

했으리라.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빌어먹을

유언장

때문에

토지는

레오니만이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엘리자베스가 자식 없이 죽었더라면, 그 토지는 쉐포드 가문의 소유로 되돌아갈 터였다. 이제, 왕의 명령 때문에 주디스는 그 토지의 수익을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영국 왕이 그토록 총애하는 롤프 덤프트라는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내일까? 그 남자는 처음에는 펄시윅을 사겠다고 하더니, 그 다음에는 그 계집애에게 청혼을 했다. 주디스는 그 제안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청혼자가 실제로 원하는 건 펄시윅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토록 펄시윅을 원한다면 그는 왜 직접 무력으로 그 성을 점령해버리지 않은 걸까? 그녀는 초조하게 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분통터지는 일이라고 열 번은 더 혼잣말로 외쳐댔다. 모든 걸 너무도 교묘하게 해치웠는데 이제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주디스.] 윌리암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해

주디스는

오싹

몸을

조였다.

그녀는

그의

무시무시한몰골에 등골이 서늘했다. 평상시보다 훨씬 더 상태가 좇지 않았다. 윌리암은 아침마다 첫 술잔을 들기 전까지는 기운이 축 늘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술잔조차 들지 못할 것처럼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가 첫 술잔을 마시기 전에 얼른 일을 처리해야 해.


[윌리암,

분부하신

대로

모든

준비를

해두었어요.

당신만

준비하시면

우린

바로

펄시윅으로 출발할 수 있어요.] 주디스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펄시윅?] [레오니가 있는 곳 말이에요, 윌리암. 우린 오늘 밤 그곳에서 지내고 이튿날 아침 일찍 크루얼로 가 결혼식에 참석할 거라고요.] [결혼식?]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자위는

끔찍하게도

거무튀튀한

분홍색이라고 할만큼 심하게 충혈되어 있었다. [생각이 나지 않은데…] [오, 이런. 윌리암, 당신 딸 결혼식을 잊어버리다니. 세상에!] 주디스는 아주 화가 난 척하면서 목소리를 놓였다. 물론 그녀가 그에게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는 잊어버린게 아니었다. [말도 안 되네, 이사람아. 레오니는 어린앤데, 무슨 결혼이야?] [당신 눈엔 그녀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이겠죠. 그녀는 스물이 다 됐어요, 윌리암. 당신은 그 애가 결혼하는 걸 보려고 하지 않았잖아요. 당신이 계속 청혼을 거부하니까 왕께서 직접 나서신 거예요. 당신도 그 명령서를 보셨잖아요, 갖다드릴 테니 다시 읽어보실래요? 결혼 예고를 헨리 왕께서 직접하셨어요. 레오니는 크루얼의 롤프 덤버트 경과 결혼하는 거라고요.] 윌리암은 새파랗게 질려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오, 이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레오니가 스물이 다 되었다고? 어떤 청혼들을 거절했단 말인가? 왕이 직접 딸의 결혼을 명령하다니? 정말이지, 그는 성장한 딸아이의 모습을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아직도 어린애로, 아내의 눈동자를 쏙 빼닮은 커다란 은빛 눈동자의 한 어린애로 가슴속에 간직해 왔는데…. 그 애가 결혼한다고? [난 결혼 계약서에 서명한 기억이 없어. 신랑측에서 엘리자베스의 유언 조건들을 따르겠다고 했나?] 주디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조건들요?] [레오니의 결혼 지참금은 엘리자베스의 유언에 따라 그 애가 원하는 한 계속 그 애의 소유야. 그 애의 엄마는 그런 식으로라도 그 애를 보호하고 싶어했어. 엘리자베스도 나와 결혼할 때 결혼 지참금만큼은 그녀의 소유로 했어. 그래서 그녀는 레오니도 자신과 똑같은 이점을 갖게 하기로 결정했던 거야.]


주디스는 너무도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롤프 덤버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일이 달라졌을까? 아마도 아닐 거야. 그는 일단 레오니를 갖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그녀에게 강요할 수 있을 거라는 걸 깨달을 테니까. 집요한 남자라면 그녀에게 그 토지를 억지로라도 팔게 할 수 도 있으리라. [그 조건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 계약서는 내일 결혼서약이 있기 전에 서명될 테니까, 당신은 그때 가서 그들에게 말하시면 돼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우리가 떠나기 전에 계약서를 작성할 수도 있잖아요.] 주디스는 실로 오랫만에 거짓없이 상황을 일러주었다. [그래, 그게 제일 좋을 것 같군. 롤프 덤버트는 어떤 사람이지?] 그는 딸아이의 신랑감에 대해 도무지 들은 바가 없어 주디스에게 물어본다는 게 영 껄끄러웠다. [켐프스톤의 새 영주예요.] [하지만 에드몬드 경….] [에드몬드 경은 몇 개월 전에 죽었어요, 윌리암. 그의 아들은 추방되기 전에 미리 달아났고요. 분명 생각이 나실 거예요. 당신은 에드몬드 경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죠.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왕한테 그를 고발하기 오래 전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한다며 의심하고 있었잖아요.] 윌리암은 낙담에 겨워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계속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년 동안 잠을 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있는 포도주 잔은 옆으로 치우다가 손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떨리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 조금만 마시면 진정될 거야. 다시 포도주 잔에손을 내밀었다. 조금만 마시자. 결혼 계약서를 준비해야 하잖은가. 그리고 레오니를 보게 되더라도, 이렇게 끔찍한 상태의 모습으로 사랑스런 딸아이에게 나서고 싶지 않아.♣

6. 레오니는 몬티윈 성쪽으로부터 대규모의 무리가 펄시윅 성쪽으로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 무리의 규모로 그녀는 잠시 주춤거렸지만 주디스가 또 오는 걸이려니 하며, 이번에는 보통때 보다는 더 많은 하인들을 데리고 오는구나 추측했다. 그녀는 통상적인 사전 조치를 취하느라고, 안에 있는 숙달된 그녀의 병사들을 탑에 있는 막사로 보내 그곳에서 수비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주디스 때문에 펄시윅 하인들을 고용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지나치게 따질 형편이 못 되었지만, 그런 일로 그녀의 병사들을 지치게 할 경우엔 레오니는 주디스에게 아주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녀는 하인 한 명을 마을로 보내 안전해질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숲에는 가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그리고 윌다와 다른 두 명의 젊은 하녀를 자신의 침실로 오라고


하고 안전해질 때까지 그곳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 윌다는 방에만 처박힌 게 못마땅한지 배짱좋게 항의를 했다. 그녀는 엄청난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짜릿한 흥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레오니가 기가 막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에서린다처럼 정원에서 강간당하고 싶니? 리처에게 당한 뒤에 그녀 꼴이 어땠는지 봤잖아?] 레오니가 화를 내며 질색하자 윌다는 머쓱하니 수그러들었다. 리처 캘베리는 주디스를 경호하고 펄시윅에 올 때는 굉장히 조심스럽고 복종적인 태도로 주디스를 대해, 레오니는 두 사람의 진정한 관계가 뭔지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주디스 없이 리처가 혼자 올 때는 아주 다른 성격을, 레오니가 예전에 봤던 것처럼 비열한 모습을 보였다. 에서린다의 애기에 따르면, 그는 그녀를 때리면서 쾌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레오니는 그 사건을 몬티윈 성에다 알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베아트릭스 이모와 레오니는 방문객들을 맞으려고 기버트 경과 함께 홀에 있었다. 레오니는 또 한번 불쾌한 주디스와 부딪쳐야 하는 일에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있었지만, 한 늙은 남자가 주디스와 같이 다가오는 순간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 가까스로 떠올렸다. 아버지-이 사람이? 비통, 증오, 그리고 그의 형편없는 모습과 수척한 얼굴에 깃든 방탕함에 대한 슬픔의 감정들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그의 눈빛에 그녀는 현기증이 났다. 그의 얼굴은 그가 알콜 중독자라는 걸 여지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사랑이, 레오니에 대한 사랑이 스멀거리며 스쳤다. [레오니?] 윌리암의 목소리는 그녀가 딸임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놀라움이 실려 있었다. 레오니는 가슴 밑바닥을 훑고 올라오는 비통함으로 아버지의 생활이 어땠는지 대강 윤곽이 잡혔다. 정말이지, 아버지가 어떻게 자신을 알아볼 것인가? 그녀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는 그녀를 6 년 동안이나 보지 못했다. 자그마치 6 년이나! [영광입니다, 영주님. 불가로 앉으십시오. 간단히 드실 걸 준비하겠습니다.] 레오니는 한기가 파고들 정도로 냉랭하게 말을 건넸다. 윌리암은 그녀의 냉담한 태도에 어리둥절했다. [아가, 뭐가 잘못 된 거냐? 네 남편감이 맘에 안 드니?] 그 애정을 담은 그의 목소리가 레오니의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이내 충격이 뒤따랐다. [남편이라니요?] [장난하니, 레오니? 네 아버지가 내일 너랑 결혼할 남자를 말라고 있다는 걸 알잖아.] 주디스가 날카롭게 끼여들었다.


[뭐라고요?] [모르는 척하지마, 레오니.] 주디스가 짐짓 지친 듯 손사래를 쳤다. [결혼 예고가 발표되었어. 그 결혼은 왕의 명령에 의한 거야. 왕의 전령이 오자 마자 네 아버지가 네게 알려줬잖아.] 그녀는 남편에게 몸을 돌렸다. [그렇죠, 윌리암?] 윌리암이 완전히 당황한 모습을 보이자 주디스는 언성을 높였다. [레오니에게 전갈을 보내는 걸 잊어버렸다는 말씀은 마세요! 저 가련한 애는 오늘밖에 준비할 시간이 없는 꼴이 되었군요! 오, 윌리암, 어떻게 그런 중대한 일을 잊어버린단 말인가요!] 기버트 경도 레오니 못지않게 충격을 받았지만, 레오니처럼 갈피를 못 잡지는 않았다. 레오니 인생이 변하듯 기버트의 인생도 이제 변화를 겪게 되리라.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영주이자 주인이 될 거였다. 기버트와 레오니의 다른 가신들은 새로이 서약을, 자신들이 그녀의 남편을 영주로서 받아들인다는 걸 의미하는 의식을 치러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레오니에게 기버트가 새로이 서약을 하는 일에 대해선 뻔한 일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의 맘에 들던 어떻든 간에 그는 결코 그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가신들은 그녀를 떠날 수도 있었다. [아가씨의 남편감이 누굽니까?] 기버트가 묻자 주디스는 최악의 일이 끝났다고 여기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면 기쁠 거예요. 그는 당시의 이웃인, 켐프스톤의 새 영주니까요.]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기버트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레오니만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버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느끼든 간에 왕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결혼할 때가 됐다고 기버트는 생각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레오니 아가씨는 그 배우자에게 익숙해지겠지. 아니, 그녀는 그렇게 해야만해. 레오니는 말없이 몸을 돌리더니 홀에서 달려나갔다.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에다 몸을 던지고 자기 연민에 젖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는 나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어, 결혼식 전날에야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말해준 거야. 아버지는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단 말인가? 한때 진정한 아버지로 자리했던 그 다정했던 남자는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그녀는 마침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떠올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하녀들은 그녀가 우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어서 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녀는 대충 눈물을 닦아냈다. 이토록 어린애처럼 감정에 쉽게 굴복하다니! 그녀는 화가 치밀어 그 마음을 추스렸다. 그녀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려 하녀들을 부엌으로 보낸 다음, 그나마 혼자 생각할 여유가 있다는 걸 다행스럽게 여기며 난롯가에 앉았다. 그녀는 왕이 왜 그녀의 생활에 간섭을 하는지를 알았다. 왕은 그녀가 결혼하지 않아 걱정돼서 그런게 아니었다. 그 검은 늑대의 부탁을 받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그녀에게 뭘 원하는지는 도무지 추측할 수가 없었다. 나무꾼의 오두막이 불탄 지도 거의 한달이나 되었고, 레오니는 농노들에게 크루얼 영지로 가는 모험을 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렇다면 그 남자의 걱정거리가 해결된 셈이 아니던가? 만약 그녀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런 분쟁들을 끝장내려고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는 거라고 결론을 내렸을 텐데…. 하지만 한 달 동안이나 평화가 지속되었기에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상당한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동맹 관계는 재산뿐만 아니라 도움을 위해서도 맺어졌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의 도움은 기대할 처지가 못돼 이 역시 검은 늑대가 그녀와 결혼하려는 이유로서는 없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이유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가 날 원하는 걸까? 레오니는 알에인 몬티니의 말을 떠올리자 이해가 됐다. ‘ 난 떠나야해. 검은 늑대에 관한 숱한 소문을 들어 난 이곳에 머물수도 없고 그가 내 땅을 손에 넣는 걸 막을 수도 없어, 그는 날 죽일 거야. 내가 저지른 것이라고 그가 믿고 있는 죄목들에 대해 내가 결백하다 해도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을 거야‘ ‘무슨 죄들인데?’ 레오니가 황급히 물었다. ‘죄는

무슨! 헨리왕은 프랑스 용병인 롤프 덤버트, 그 악마의 화신 검은 늑대에게

켐프스튼을 주려고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내 재산은 뺏은 거야. 왕이 그런 식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건 이상할 것 하나 없어! 그는 짐승 같은 약탈자야. 내게는 재판조차 허용하지 않았다고!’ 알에인은 소리를 지르더니 짐승처럼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레오니는 알에인이 분격하는 걸보고 흥분했다. 그녀는 알에인과 평생동안 알고 지냈다. 그들은 어린 시절에 같이 놀았고, 그녀는 그와 결혼할 생각까지도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나약한 성격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뚜렷하게 드러나자 그녀는 그가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하리란 걸 깨달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친구 사이로 지내왔으며, 왕의


부당함은 지독하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알에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싸울만한 용기도 없는데다가 그를 도와줄 사람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상황은 무척 불리했다. ‘내가 저항하고 싶다면, 내가 내 부하들을 소집할 거라는 걸 알지?’ ‘안 돼.’ 그가 화를 벌컥 내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네가 날 도울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레오니. 너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어. 검은 늑대는 엄청나게 강력하다고. 그는 켐프스톤을 점령하려고 바로 지금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어. 그의 뒤에 왕만 없어도….’ 오로지 왕 때문에 싸우지 못한다는 듯이 그는 여운을 남겼다. ‘알에인, 어디로 갈 거니?’ ‘아일랜드에 사촌이 하나 있어.’ ‘그렇게 멀리?’ ‘ 그 래 야 해. 내가 영국에 머물면 그 늑대가 날 찾아내 죽일 거야. 레오니, 정말이야. 헨리가 검은 늑대에게 내 집을 준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을 거라고. 그 개자식은 내가 켤코 켐프스톤의 반환을 요구하지 못하게 내가 죽기를 바란단 말이야. 그에 대해 내가 들은 얘기들을 너에게 하고 싶지 않아. 그 얘기를 듣고 나면 넌 너의 새 이웃을 두려워할 테니까. 하지만 하찮은 악행 하나도 잊는 법도, 증오를 누그러뜨리는 법도 없다는 점에서 그는 헨���와 닮았다는 걸 분명히 명심해야 해. 그에게는 신중해야 해, 레오니. 조심하라고. ‘] 그녀는 알에인의 경고를 명심하고 평화적인 이웃이 되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이젠 너무 늦었다. 검은 늑대는 하찮은 악행 하나도 잊는 법도, 증오를 누그러뜨리는 법도 없으니까 레오니는 섬뜩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가 롤프 덤버트를 곤경에 처하게 했으니 그에게는 그녀를 미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할 게 아무 것도 없니, 레오니?] 레오니는 몸을 돌려 주디스가 방을 들어서는 걸 보았다. [제가 신경쓸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부인.]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네가 주저할까 걱정했는데.] 레오니는 팽팽한 긴장감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그 점에 관해서라면, 부인. 전 왕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밖에는 할말이 없네요.] [얘야, 난 널 탓하지 않아. 나라도 내 남편감이 내 영지를 지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거야.] 그랬구나!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았나요?] [알다시피, 롤프 덤버트는 펄시윅 성을 사려고 했어. 물론 윌리암은 그걸 그에게 팔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 그건 너의 결혼 지참금의 일부니까. 그러자 그는 네게 청혼을 했고 너의 소중한 아버지께서는 오직 네 영지에만 관심이 있는 남자에게 널 주려하지 않았단다.] [아버지가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고요?] [물론, 그랬지. 하지만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너도 보았잖아. 그 남자는 곧장 왕에게로 가서 청원했단다. 이제 롤프 덤버트는 네 뜻과는 관계없이 널 갖게 될 거라구.] [아니오, 그렇게 못할 거예요. 난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정말이라고요. 난 롤프 덤버트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주디스의 눈이 한순간 번뜩였다. [그러나 넌 하게 될 거야. 사실, 네가 선택권을 갖고 있길 바래, 레오니. 하지만 이 문제는 왕의 명령이니까 그렇게는 못한다는 걸 알아야해. 널 억지로 보내야만 하는 네 아버지 역시 비통한 심정이겠지만, 네 아버지는 그렇게 할 거다. 아버지는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난 할 수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너무도 많은 게 드러날 수도 있는, 그래서 모든걸 망칠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딸과의 대면을 상상하면서 주디스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헨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며, 네가 롤프 덤버트와 결혼하는 게 그가 원하는 바야. 네 아버지도 왕에게 도전하지 않을 거고, 너도 그렇게 될 거다.] 레오니는 화를 불끈 내면서 벌떡 일어섰다. [주디스, 날 내버려둬요. 더 이상 우린 할 얘기가 없어요.] [아니, 있어.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넌 켐프스톤의 새영주와 결혼할 거라고 나한테 맹세하게 될거다.] 주디스가 험악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맹세컨대, 난 하지 않을 거예요!] [바보! 넌 네 스스로 화를 초래한 거야. 리처!] 주디스가 소리치자 마자, 그 끔찍한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뭘 해야 되는지 알지? 저 애가 내게 맹세할 때까지 절대 멈추지 마.] 그 말을 내 뱉고는 주디스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는 홀로 가서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걸, 잠시동안 계속 확인했다. 레오니의 방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무도 들어서는 안돼.


레오니는 심장이 마구 뛰는 걸 억누르려고 애를 쓰며 그 거대한 짐승으로부터 혹독한 시련에 저항하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길고 텁수룩한 머리카락과 빽빽한 수염은 그의 거친 행동과 딱 들어맞았다. 이상한 빛을 발하는 짙푸른 눈동자로 쏘아보며 그녀를 걷잡을 수 없는 위협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그녀가 저항할수 없는 공포는, 아주 천천히 히죽거리며 웃는 모습이었다.♣

7 그날 밤 크루얼에서는 다른 종류의 공포로 아멜리아가 떨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현재 헨리왕의 정부인 엘리스 왕녀의 시녀였는데, 또다시 그토록 많은 예쁜 시녀들과 함께 섞여버리는 궁정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궁정에서는 아무 런 힘도 없었고, 자신만의 생활에 대한 어떤 선택이라든가 자유로움이 없었다. 그녀는 끝도없이 왕녀의 비위만 맞추며 왕녀가 시키는 대로해야 하는, 그 변덕스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친척도 없고 땅도 없는 과부에게는 장래의 희망이란 건 거의 없었다. 더 중요한 건, 아내란 위치는 정부의 위치만큼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멜리아가 이미 경험했다는 거였다. 그녀는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는 그의 정부였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죽고 자연스레 결혼으로 이어진 그녀의 상황이 너무도 철저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이 죽자 애석한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남자란 정부를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는 만큼이나 아내를 만족시키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 아내는 남편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떠날 수 없지만 정부는 능히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잠자리는 정부와 비교될 수 없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성교는 출산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자,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설교하는 교회가 성의 문란함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아멜리아의

남편은

결혼

전까지만

해도

매력적인

정부였지만, 그는 결혼하자 태도를 싹 바꿔 그들의 잠자리를 의무로서 여기고 다른 의무들처럼 빨리 해치우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멜리아는

또다시

결혼을

원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의

애인과의

결혼일지라도…. 그 사람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던 그 모든 남자들 가운데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롤프 덤버트는 당돌한 면도 있고 화도 잘 냈지만, 그의 정부로서의 그녀의 위치는 그녀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완벽했다. 마치 그녀의 크루얼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똑같은 권위를 누렸다. 그녀는 몹시 만족스러웠다. 이곳에는 그녀와 같은 신분의 다른 여자도, 그녀가 떠받드는 다른 여자도 없었고, 단지 하인들만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는 롤프뿐이었고, 그는 그녀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녀에게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런 상황에 대해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가졌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오직 롤프의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고 그녀를 다시 궁정으로 보낸다고 해도 그녀는 그 모든 일을 받아들여야 할 판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그 시기를 늦추는 일뿐이었다. 헤어지게 되면 런던에다 그녀가 몸을 팔 집이나 한 채 사기 위해 그를 구슬러 자질구레한 장신구들과 선물들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얻어내는 일뿐이었다. 만약 롤프가 지금 그녀를 걷어찬다면, 그녀는 왕녀에게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애인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롤프 같은 애인, 자신을 그의 집으로 기꺼이 데려가는 그런 남자를 결코 찾아내지 못하리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아직까지 그가 미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롤프가 침실로 들어와 아멜리아가 그의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걸본 건 늦은 시각이었다. 그녀는 자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낮게 타오르는 불꽃을 가로지르며 우뚝선 그의 모습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 있는 쪽을 보지 않았고, 그녀는 그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어 차마 용기를 내어 말을 걸지 못했다. 그들이 헤어져야 한다는 걸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걸까? [아멜리아, 와서 갑옷을 벗는 걸 도와줘. 내 무능력한 시종은 벌써 쫓아버렸어.] 그 얘기는 바로 그녀가 거기 있고, 깨어 있음을 알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 간단한 요구는 너무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 그녀는 소리내어 웃고 싶었다. 그는 나를 잊지 않았던 거야! 나오 잠자리를 같이 할 생각이며, 더군다나 결혼 전날 밤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건 그의 정혼자에 대해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거라고. 아멜리아는 잠옷도 걸치지 않고 살짝 침대에서 내려왔다. 큰 키에 윤곽이 뚜렷하고 그녀가 자랑으로 여기는 날씬한 몸매를 지닌, 스물세 살의 육감적인 모습이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그 당시 유행하는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을 때조차도, 멋지게 보이려고 몸을 졸라매는 거추장스러운 부속물을 옷 속에 입을 필요가 없었다. 발가벗고서도, 그녀의 행동은 당당했다. 밤색 머리칼은 등으로 찰랑찰랑 흘러내렸고, 게슴츠레한 그 녹색 눈동자는 유혹적이었다. 롤프는 그녀가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을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정도 였다. [앉으세요, 영주님. 당신의 무거운 쇠미늘 갑옷을 위로 벗길 만큼 전 크지 않아요.] 그녀가 요염스럽게 코맹맹이 소리로 말을 건넸다. 멍한 표정으로 롤프는 난롯가에 있는 등 없는 의자로 갔다. 그가 의자에 앉자, 아멜리아는 쇠미늘 갑옷 단을 잡고는 그의 머리위로 끌어올렸다. 어떤 남자들은 전투를 할때 며칠씩 갑옷을 계속 입고 있어 돌보는 사람이 없는 마구간보다 더 지독한 악취를 풍겼지만, 롤프에게선 전혀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땀 냄새가 풍겼으나, 그건 깨끗한 냄새, 그만의 냄새였다. 기분 좋은 냄새….


[롤프, 당신은 여러 날 동안 떠나 있었어요.] 아멜리아는 그의 십자꼴의 양말 대님을 풀려고 몸을 숙이면서 약간 토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 결혼식 전에는 당신을 다시 못 보는 게 아닌가 했어요.] 그가 이내 툴툴거리는 반응을 보이자 아멜리아는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많은 걸 각오하고 그 결혼식을 입에 올렸다. [에바라드 경은 축하연에 쓸 사냥감들을 잡느라고 바빴어요, 당신 집사가 너무 바쁜 탓에 제가 홀 청소를 시켰다고요.]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결코 하인들을 감독하는 귀찮은 일은 하지 않았지만, 롤프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가 결혼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그녀가 도움을 주려 한다고 그가 생각해주길 은근히 노리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다음으로 그의 튜닉과 속셔츠를 벗겨냈다. 하지만 무척이나 신중하게 손을 놀리자 그녀가 옷을 미처 치우기도 전에 롤프는 그녀를 홱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가 짐짓, 이러지 말라는 듯 비명을 지르자 롤프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는 그의 절박함을 느끼면서도 그가 자신을 아주 몹시 원하고 있음을 감지하며 만족감이 온몸을 파고들어 짜릿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면서 그의 키스를 거부한다는 듯 윗몸을 뒤로 젖혔다. [그럼 아직고 절 원하신다는 건가요?]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오? 내가 안 그런 것 같나?] 롤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조바심이 일었다. [결혼하신다는 얘길 들어서, 영주님이 이럴 줄 몰랐어요.] 그녀는 마치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볼멘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당신이 신경쓸 필요없소.] 롤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영주님, 신경쓰이는 걸 어떡해요. 당신이 절 보내 버릴까봐 몹시 걱정했어요.] 그녀가 이 부분에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다잡자 거짓말처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났다. [왜 내가 그래야 하지요?] 아멜리아는 은연중에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 하마터면 계획한 모든 걸 망칠 뻔했지만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전 이곳에 있고 싶어요, 롤프. 하지만… 당신 아내가 뭐라고 할지 몰라 두려워요.] [그녀는 입도 뻥긋하지 못할 거요.]


[여자의 질투에 대해 잘 모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말하시는 거라고요. 당신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호의를 보이는 걸 그녀가 알게 되면, 그녀는 내게 떠나라고 요구할 거라고요.] [그녀는 여기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못할 거야.] 그가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내 의지대로 그녀는 따라야 해.] [그렇지만 당신은 여기 항상 있는 게 아니잖아요, 롤프. 그녀가 무자비한 여자라면 어쩌죠? 그녀가 날 때린다면 어떡 하냐고요?] 아멜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 그녀는 내 손에 맞게 되겠지. 난 나의 사람들이 여주인을 두려워하면서 살게 내버려두진 않을 테니까.] 그건 그녀가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 없을 때 그녀가 분노를 터뜨릴 때마다 어떻게 내 자신을 지킬 수 있죠?] 아멜리아는 집요하게 물었다. [아멜리아, 당신은 괜히 걱정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여기서 살지 않을 거야. 내가 그녀와 결혼하는 건 그녀의 영지 때문이야, 그 이상은 없다고.] [정말이세요?] 그녀가 놀라움을 그대로 드러내자 그는 웃었다. [이봐! 내가 그녀를 몹시 원한다면, 나한테 당신은 전혀 필요치 않을 거야.] 아멜리아가 이를 드러내며 싱긋이 웃었다. 안도감이 물밀 듯 밀려와 황홀함으로 거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일 결혼식에 많은 손님들이 올 거예요. 당신은 날 그들에게 뭐라고 해야….] [당신을 나의 피후견인이라고 소개할 거야.] 그녀는 두 팔을 그의 목에 두르며 탄력있는 봉긋한 가슴을 그의 가슴에 비볐다. [롤프, 그렇다면 내 위치는 변함이 없겠군요? 여전히 하인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또….] [말이 너무 많군.] 롤프는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대며 말을 막았다. 그는 그녀의 속셈을 알고 있었던 터라 오히려 즐거웠다. 하지만 그는 누구의 조종을 받는 그런 나약한 인물이 아니었고, 때때로 이런 기분 전환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그녀가 요구하는 걸 기꺼이 들어줄 생각이 그에게 없었더라면, 그녀가 무엇을 요구하든 결과가 달라지진 않으리라. 그는 그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는 걸 거부했다. 여자들이란 바느질과 수다, 그리고 숱한 말썽을 일으키는 데만 재주가 뛰어난 어리석은 피조물이었다. 어머니와 그녀를 거쳐간 여자들을 통해 터득한 사실이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원하는 걸 얻으려고 성을 이용했다. 어머니의 간계로 아버지가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모습을 수 년 동안이나 봐왔던 터였고, 궁정에 있었을 때도 똑같은 경우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여자가 침실에서 무슨 부탁을 할 경우에는 그걸 절대 들어주지 않으리란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웠다. 아멜리아와 일을 끝내고 롤프는 아멜리아의 존재에 대해 잊어버렸다. 아멜리아로 ���해 정신이 산만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이내 그는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는 문제에 다시 몰두 했다. 몹시 화가 난 상태에서, 레오니 몬티윈을 원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역시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를 손에 넣으려고 왕한테 청원해 결혼을 승낙받았다. 이제 그 분노가 사라져버리게 되자 걱정이 태산같이 몰려왔다. 남편으로서 아무런 긍지도 느낄 수 없고, 결코 사랑하지도 않을 아내를 맞아들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혼식을 올리자 마자 그녀를 펄시윅 성에 감금하려고 이미 계획을 세웠고, 그건 그녀가 그에게 못된 짓을 한 대가를 치르기 위함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고 있는 진짜 이유는 그녀가 못생겼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결혼은 추진하면서도 괜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녀가 못생긴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용모

때문에

그토록

악의에

여자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롤프는 성급하고도 어리석은 성질에 못이겨 일이 이 지경이 된게 마음이 아팠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댄다는 건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와 그녀의 기대감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나날이 커져갔다. 그 가련한 여자는 아마 구혼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쁨에 넘쳐 있을지도 몰라. 비록 그 상대가 싸움을 걸었던 남자일지라도

말이다.

그녀가

기뻐하지

않겠는가?

전에는

감히

구혼자가

있으리라는 기대조차 품지 않았겠지? 그는 죄책감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내쫓아버리지 못할지도 몰랐다. 크루얼에는 낡은 탑이 있었다. 그녀는 그곳을 선택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그는 그녀와 마주칠 필요가 없을 테고, 그녀는 남편의 집에서 내쫓기는 망신을 당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게다가 또 아이에 대한 그녀의 기대, 정상적인 결혼 생활에 대한 그녀의 기대도 산산이 부서지겠지. 그러다가 그는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을지, 그녀를 보고 냉담해질지 어떨지가 다시금 궁금해졌다. 남자란 모두 자신의 핏줄을 원하는 법이고, 그 점에서 그도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남자라도, 이런 감정은 꽤 거북했다. 그는 내일, 적어도 그 날만은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할 노릇이었다. 관습에 따라. 그 다음 날 그녀의 부모와 다른 손님들이 첫날밤을 치른 침대 시트를 면밀하게 살필 테니까. 그 관습 가운데 어떤 건, 가령 침실 의식같은 건 그가 막을 수도 있었지만, 그 여자의 처녀성을 확인하는 시트검사는 피할 도리가 전혀 없었다. 그걸 면할 방법이 아무데도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든가 아니면 성질을 죽이고 그를 조롱하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에 맞부딪치는 수밖에….♣


8 레오니는 윌다의 비명 소리에 의식을 차렸다. 순간 다시 고통이 밀려와 그녀는 윌다에게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사람들이 아가씨께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가씨 얼굴이 멍이 들고 끔찍하게 부어 있단 말이에요. 천벌을 받을 사람들 같으니! 감히 아가씨께 손을 대다니, 썩어 문들어질 손 같으니! 천하에….] [쉿, 윌다!] 레오니는 가능한 한 턱을 적게 움직이려고 애를 쓰면서 윌다의 울부짖음을 막았다. [내가 얼마나 쉽게 상처가 나는 줄 너도 알잖아. 내가 느끼는 고통보다 분명 더 심하게 보일 거야.] [정말이세요, 아가씨?] [거울을 가져오렴.] 레오니는 그 하녀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웃어보려 했지만 짓뭉개진 턱과 터져서 피가 난 입술이 너무 아파서 마음먹은 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잘 닦여진 강철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군마의 발굽 아래 짓밟힌 것처럼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녀의 한쪽 눈은 부풀어올라 꽉 닫힌 상태였고, 다른 한쪽은 그저 가늘게 터진 구멍에 불과했다. 그녀의 입술과 코 아래, 그리고 턱에는 피가 말라붙어 검붉은 색을 띠었다. 하지만 그 상처는 그녀의 온 얼굴에 심하게 든 검푸른 멍에 비하면 거의 눈에 띄지도 않았다. 가슴과 팔들은 또 어떨지 그녀는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리처가 나갔을 때, 그녀는 그가 들어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옷을 입은 상태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지난 밤에 누군가가 윌다를 레오니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섰기 때문에 윌다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을 틈도 없었다. 리처가 나가자 마자 의식을 잃고는 그 이후로 깨어나지 못한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이만한게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가 내 코를 부러뜨려 놓은 줄 알았거든. 그렇지만 곧 좋아질 거야-다른 데도 마찬가지고.] 거울을 한쪽으로 치우면서 레오니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지금 농담이 나와요, 아가씨?] [우는 것보다 낫잖아. 그리고 이 구타로 뭘 얻어냈는지를 생각한다면 난 정말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거야.] [그렇다면 아가씨께서는 그 사람과 결혼하실 건가요?] [어떻게 네가 그걸 아니?] [아가씨,

안장이

얹혀진

말들이

대기

중이에요.

모든

채비가

갖춰지고

준비가

뭐든

필사적으로

했을

테지만

스스로와

약속을

되었다고요…. 아가씨만 빼고요.] 레오니는

이런

사태를

막으려고

했기에-어머니의 무덤뿐만 아니라 신성한 모든 이름을 걸고 맹세했기에-이제는 어쩔수


없이 롤프 덤버트와 결혼해야만 했다. 어처구니없는 구타로 맹세를 했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자신이 약속을 했으니 그걸 지켜야만 할 터였다. 오, 어떻게 함부로 울 것인가! 레오니는 리처의 손찌검 정도는 능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 너무도 자신감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 자신감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리처는 그녀의 뺨을 계속 때렸다. 그리고 뺨이 새빨개져도 그녀가 겁에 질리거나 간청을 하지도 않자, 그는 주먹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검은 늑대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벌이든 간에 그 구타가 그것보다는 더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에 입술을 깨물며 악착같이 버텨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면, 리처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 아버지가 이 일을 꾸몄다면, 그는 그녀를 구해주지 않으리란 건 분명한 일!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피를 토해내듯 비명을 질러대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으며 비참한 심정으로 결혼 맹세를 했다. 기버트 경이 그녀 대신 리처를 죽일 테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인간 쓰레기는 그녀의 아버지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비애와 증오로 숨이 막힐 지경일지라도, 그녀는 더 이상의 끔찍스런 폭력을 원치 않았다. 이런저런 상황으로 보아 이제 그녀는 엄청난 일을 당한 걸 숨겨야 했다. [윌다, 내 약들을 가져와. 그런 다음에는 결혼식에 입을 만한 드레스를 찾아봐. 내가 강제로 결혼한다는 걸 내 남편이 아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야 돼, 알겠니? 나한테 검은색 베일을 찾아다주고, 그리고 장갑도 가져오렴. 어린 시절의 발진이 재발했는데 그걸 없앨 연고를 만들 시간이 없어 베일과 장갑이 필요한 거로 해야 돼. 알아 들었니? 이모와 기버트경에게 반드시 그렇게 일러두렴.] [그렇지만 아가씨가 커서는 발진이 나지 않았잖아요.] [알아. 하지만 내 장래의 남편을 만날 일 때문에 재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 발진이 다시 생겼다고 하면 모두 이해할 거야. 그리고 내가 그걸 감추고 싶어하리란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잖아. 기버트 경이 그 얘기를 믿게끔 꼭 납득시켜야 해. 어서 당장 그렇게 하렴. 그런 다음 돌아와서 내가 옷입는 걸 도와줘. 그리고 내 약들을 챙겨 크루얼로 갖고 가도록 해. 나중에 더 필요할 테니까.] 덩그러니 혼자 있게 돼자, 레오니는 머리를 감싸며 서럽게 흐느꼈다. 공포의 날이 오늘도 이어지겠지. 붓고 멍든 곳에다 그녀는 초지에서 뽑은 맬로우뿌리와 장미 기름을 발랐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그리고 이곳저곳 쑤시는 통증을 가라앉히려고 카밀레 꽃으로 만든 진정제 시럽을 마셨다. 흰 양귀비 혼합약도 복용하고 싶었지만,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잠에 떨어질까봐 그만 두었다. 윌다가 되돌아왔을 즈음, 레오니는 이미 약의 효과로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기버트 경에게 내가 시키는 대로 말했니?]


[그럼요, 그분은 아주 안 됐어 하시면서 직접 아가씨의 남편에게 아가씨가 베일을 쓴 이유를

설명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모님께서는

우시더군요,

이모님은

당장

아가씨께 오고 싶어하셨지만, 주디스 마님이 지난 밤부터 아침까지 내내 이모님을 달달 볶더군요. 글쎄, 이모님은 한숨도 못 주무신 것 같지 뭐예요.] [차라리 잘됐다. 이모가 이 꼴로 된 날 보는 걸 원치 않아.] 레오니는 잠시 윌다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한테 뭐 좀 말해줘, 윌다. 넌 남자를 경험해 봤지?] [아가씨! 전….] [널 질책하려는 게 아니야, 윌다.] 레오니는 펄쩍 뛰는 윌다를 재빨리 안심시켰다. [우리 엄마는 나중에 그럴 시간이 있으려니 생각하고는, 나에게 준비도 못 시키고 돌아가셨어. 오늘 내가 부딪쳐야 할 일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야. 말해줘.] 윌다가 눈을 내리 깔고 수줍은 듯 조용히 말했다. [처음에는 아프실 거예요, 아가씨. 처녀막이 찢기기 때문이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가씨의 시트 위에는 출혈의 흔적이 나타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고통스럽지도 않고, 아주 빨리 끝나요. 나중에는-가장 즐거운 일로 느낄 거예요.] [정말이니? 궁정에 있는 다른 젊은 여자들은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는데.] [거짓말을 한 거예요. 아니, 자기들 엄마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말한 거라고요. (윌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항상 고통스런 여자들도 있어요. 그건 그들이 그걸 즐기는 게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가씨가 아가씨의 남편에게 어떤 느낌을 갖는 한….] 오, 이런. 윌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는 걸 깨닫고는 황망하게 말을 돌렸다. [오, 아가씨. 죄송해요. 아가씨가 그 남자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큰 실수를 저질렀네요.] 레오닌 침착하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다. 두려움에 떨면서 크루얼에 갈 수는 없어. 만약 그가 두려움에 떠는 나의 모습을 기대했다면, 그는 앞으로 나에 대해 많은 걸 배워야만 할거야.♣

9 결혼식 일행을 맞으려고 크루얼 성의 커다란 홀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를 레오니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여자는

자신을

아멜리아며

롤프

덤버트의

피후견인이라고

소개했지만, 레오니는 그녀가 마상시합장에서 검은 늑대에게 정표를 주고 그의 열정적인 키스를 받았던 여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피후견인이라고? 정부인게 분명해, 하지만 레오니는 유감스럽지 않았다. 검은늑대가 그녀를 혼자 있게 한다면 그에게 정부가 백 명이 있어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윌리암 경, 주디스 부인, 편히 쉬세요. 곧 롤프 영주님께서 인사를 드리러 올 겁니다.]


아멜리아가 아주 사근사근하게 말하고는 레오니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절 따라오시면, 결혼식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릴 방으로 안내하겠어요.] 레오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와 주디스와 같이 있지 않아도 된 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그 연상의 여자를 따라나섰다. 크루얼로 오는 길에도 그녀는 그 두사람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말을 걸려 했지만, 그녀는 냉혹하게 외면했다. 레오니는 크루얼 서에 대해선 훤했다. 레오니는 아멜리아가 앞 건물에 있는 예배당 옆의 작은 방으로 데려간다는 걸 알았다. 크루얼 성은 펄시윅 성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전 영주였던 에드몬드 경은 모든 걸 안락하게 꾸몄다. 레오니가 어린 시절에 크루얼 성에 오는 걸 즐거워했던 이유 중 하나는, 늘 뭔가 바뀐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에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한 번은 이곳 홀 끝 높은 단 위쪽에 방을 새로 들인 걸보고 놀라기도 했다. 나중에 그곳은 벽을 쌓아 영주의 방이 되었다. 그 후로 홀 반대편에 하인들이 머무는 조그마한 난로 위로 방이 하나 더 만들어 졌다. 그때가 알에인이 기사 작위를 받았던 때였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두 개의 커다란 방 사이에 공간이 생겨 이제는 홀에서 나선형의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완전한 이층이 되어버렸다. 원래부터 천장이 아주 높아서인지 이층이 들어섰어도 여전히 높았다. 그곳은 안락한 곳이었고, 펄시윅 성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오니는 신경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검은 늑대의 정부가 그들을 홀에서 맞이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결혼하기 전부터 그는 그녀를 오만무례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오늘 일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아멜리아가 그녀를 데려간 작은 방에는 의자 두 개와 포도주 한 병과 잔들이 놓여 있는 탁자 한 개가 있었다. [잠시 후에 당신 옷매무시를 돌봐드릴게요. 레오니 아가씨. 그보다 먼저 결혼 계약서에 합의가 이뤄져야 하거든요.] [난 바쁠게 전혀 없어요,] 레오니는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리저리 재보는 듯한 아멜리아를 무시하고선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멜리아는 자신의 경쟁자를 미워할 마음의 준비를 이미 갖춘 상태였다. 가능한 온갖 수단으로 레오니를 괴롭힐 작정이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그 아가씨는 어린애보다 결코 크지 않았다. 목소리도 어린애 같았다. 그녀의 몸을 꼭 싸고 있는 망토와 머리와 얼굴을 덮고 있는 긴 베일로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대부분 여자들은 열서너 살에, 아니 더 어린 나이에도 결혼들을 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는 아주 어린 아이일 수도…. 그렇다면 아멜리아는 계획을 달리해야 한다. 도대체 어린애를 경쟁자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도울 일이 뭐 없을까요? 베일을 벗겨드릴까요? 아니면….] 레오니는 야무지게 머리를 저었다. [내 하녀 윌다를 보내주면 고맙겠어요.]


[그러죠.] 무거운 한숨을 쉬면서 아멜리아는 대답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잠시 여유를 두고 다시 돌아와서 레오니를 불시에 습격하기로 했다. 그 작은 방에 잠시 앉아 있으면 분명 베일을 벗겠지. 이곳은 무척 더운데 별 수 있겠어? 그녀는 그 하녀를 찾아서 레오니에게로 보내고는, 홀에서 롤프의 화난 음성이 들려오자. 방향을 돌려, 준비가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부엌으로 서둘러갔다. 아멜리아는 보통 그런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롤프의 살림은 크루얼의 집사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심정의 변화는, 바로 그날 아침에 자신의 소지품을 빼내 왔던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게 더욱 컸다. 적어도 현재로는, 그 방을 떠나온 것만으로도 그녀가 크루얼 성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예배당 옆 조그마한 방에 있던 레오니는 화가 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근 한달 전 숲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란 걸 그녀는 알아챘다. 검은 늑대! 하지만 그 목소리를 차음들은 윌다는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오니는 침대에 눕지 않고서는 윌다를 안심시킬 수가 없어 포도주에다 진정제를 듬뿍 넣어 마시곤 쉬던 참이었다. 그녀는 검은 늑대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이 결혼을 서두른 사람은 그였다. 결혼 계약서와 관련된 일 때문에 그가 화를 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의 토지들은 그녀가 원하는 한 그녀의 소유로 영원히 남아 있을 터였다. 그게 바로 어머니의 소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정말이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그 아버지가 결혼 계약서에다 그 조항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설령 아버지가 그랬다 해도, 그 결혼 계약서가 검은 늑대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는 자신이 원한다면 그 어떤 누구의 재산도 뺏는 사람이라는 걸 분명히 보여주었는데…. 그런 생각이 스치자 숨막히게 더운 작은 방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녀는 그의 소유가 될거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었다. 죽을때까지 그녀를 가둬둘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특권을 손에 거머쥐었다. 레오니는 약 바구니에서 붕대를 자르려고 넣어두었던 작은 칼을 충동적으로 집어들어, 베일을 쓰면 감쪽같이 감춰질 가죽띠 속으로 밀어넣었다. 리처에게 당했던 것처럼 또 다시 남자의 손에 무방비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레오니 아가씨, 주방에서 갓 만들어낸 걸 가져왔어요.] 레오니는 벌떡 일어나 의자 뒤로 갔다. 노크도 없이 아메리아가 작은 케이크들을 담은 쟁반을 들고서 방에 들어와 있었다. 아멜리아는 베일을 벗은 레오니의 얼굴을 보고 놀라 녹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당신은 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방에 들어오나요?] 아직도 화를 낼 힘이 있는 걸 놀라워하며 레오니는 다그치듯 냉랭하게 물었다.


[미…미안해요. 이걸 좋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경쟁자의 끔찍한 상태에 너무 놀라기는 했어도 느닷없이 질문을 할 만큼 그녀는 대담해졌다. [롤…롤프와 결혼하고 싶지 않았나요?] 레오니는 아멜리아가 그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유롭게 거들먹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난 내 남편으로 그를 원하지 않았어요. 결코, 하지만 아다시피, 나한테는 선택권이 없어요.] 아멜리아에게 비굴하게 거짓말을 둘러댈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안심시킬수 있겠군요. 당신이 나한테 잠시만 기회를 준다면요.] 레오니가 윌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윌다는 방에서 살짝 나가 문을 닫았다. 아멜리아는 들고 온 쟁반을 탁자 위에다 내려놓았지만 앉지 않고 말을 꺼냈다. [롤프 덤버트를 만나본 적이 없죠?] [그래요.] [그가 아주 잘 생겼다는 얘길 들은 적은 있나요?] 레오니는 기가 막혀 웃을 뻔했다. [아도니스같은 남자도 악마의 심성을 가질 수 있어요.] [정말로 그를 원치 않나요?] 아멜리아가 못믿겠다는 듯 말 끝에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다고 말했잖아요?] 레오니가 성마르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가 성가시게 하지 않으리란걸 알면 당신은 한결 마음이 놓이겠군요. 그는… 오로지 당신의 영지 때문에 당신과 결혼하는 거예요. 저, 그의…다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있거든요.] [그래요?] 아멜리아는 빈정대는 레오니의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당신과 난 적일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그를 원치 않는다면, 내가 그를 가진다 해도 당신은 전혀 반대하지 않겠군요.] [그래요, 난 반대하지 않아요, 당신 좋을 대로 하세요. 그래도 당신은 나에게 맘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군요. 나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갖고 있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있는데 그는 왜 나와 결혼하려는 거죠?] [그가 원하는 건 펄시윅이에요, 그곳에서 말썽이 끊이질 않자 그는 항상 골머리가 아팠죠. 이 사실에 대해선 나보다 당신이 더 잘알고 있잖아요. 난 그의 친구 토르프가 오늘 아침에서야 나한테 얘기했던 것만 알아요. 롤프는 성질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사람이죠. 그가 더 광활한 토지를 원했다면, 그걸 찾았을 거예요. 장차 원하게 된다면, 반드시 손에 넣을 거고요. 그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는 사람이에요. 그는 펄시윅과의 분쟁이 끝나길 원했고, 그래서 당신에게 청혼을 한 거랍니다. 그게 거절당하자 그는 왕을 만나러 갔죠. 그 결과로 이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갖게 됐죠.] [그래요, 그는 갖게 됐어요.] 예상하던 두려움이 확인되자 레오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한 가지만 말해줘요. 그가 나한테 어떻게 할 작정인지 아세요?] 레오니는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다급하게 물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당신을 내보낼 거라고 하더군요.] [내보내요? 어디로?] [몰라요, 하지만…]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의 대화가 멈췄다. 주디스가 들어왔다. 그 여자조차도 리처가 해 놓은 직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쩍 벌렸다. 그녀는 윌리암에게 죽도록 맞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멍이 들고 부은 얼굴에 가려서 레오니의 눈부시도록 빼어난 아름아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은빛이 도는 금발만이 레오니의 어깨 주위로 부드럽게 사라지고 있었다. 포동포동한 작은 몸은, 끈으로 꽉 졸라맨 긴 소매가 달리 잿빛 드레스와 그 위에 걸친 은색 실로 수놓은 엷은 회색 코트로 덮였다. 그 코트는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소매가 달려 있었고 양 옆구리가 터져 있어 안에 입은 드레스가 살짝살짝 드러났다. 은빛 줄로 된 띠는 아주 가는 허리를 더욱 강조했다. 하지만 그 멋진 몸매도 끔찍한 얼굴을 무마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뭣 때문에 여기 온 거죠, 주디스?] 주디스가 계속 뚫어지게 쳐다만 보자 레오니가 차갑게 물었다. [이런 모습으로 나오려는 건 아니겠지?] [왜요? 내가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게 차려 입었나요?] [가야겠어요.] 아멜리아는 주디스와 레오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서둘러 방을 나갔다. 주디스는 아멜리아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네가 그 여자와 얘기를 하다니 놀랍구나. 레오니, 그여잔 그의 정부라는 걸 모르니?] [몰랐다면, 나한제 그 사실을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해야겠군요.] 주디스는 비아냥거리는 레오니의 말을 무시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자, 네 아버지가 널 신랑에게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네 남편은 이미 제단 앞에 서 있어. 그는 네가 억지로 결혼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지름이 모습 그대로 나온다면, 네 자신만 망신당하게 되는 거야. 발진 얘기는 네 이모를 위해서 그나마 현명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그건 기버트를 위한 거였어요. 그가 내 아버지의 부하를 죽이지 않게 하려고요. 그리고 난 이런 모습으로 나가지는 않을 거예요. 같은 이유 때문이지요.]


레오니는 서두름없이 천천히 베일을 다시 쓰고, 그 주름들을 매끄럽게 폈다. 두꺼운 베일 때문에 사물이 일그러져 보였는데, 더군다나 한쪽 눈으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정신차리고 보려면 머리를 뒤로 젖혀야 했다. 이건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었다. 그 상황에선 그런 오해 역시 괜찮다는 심정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난 준비됐어요.] 레오니가 당차게 말하자. 주디스는 그녀의 용기에 약간 뜻밖인 듯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 예배당 입구에서 윌리암 경은, 레오니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걸 애달프게 느끼며 딸의 손을 잡아 자신의 팔 위에다 얹었다. 레오니는 예배당 안에 가득 찬 손님들과 재단 앞에 있는 거대한 남자의 흐릿한 형체를 보았다. 아버지와 함께 통로를 걸어가자, 온갖 공포가 밀려들었다. [레오니, 언젠가 내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아버지께 얼마나 의지해도 되는지를 아버지는 이미 확실하게 보여주셨어요.] 그녀는 야멸차게 덧붙였다. [아버진 절 검은 악마에게 데려가고 있어요. 제게 더 이상의 사랑이나 관심을 보여주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레오니!] 끔찍한 고통이 서린 절규가 레오니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버지가 감히 어떻게 사랑을 보이려 한단 말인가? 감히 어떻게 예전의 그 다정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라고 강요하는가? 그들의 행복했던 과거를 잊기 위해 그에게는 술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무엇이 있었는가? 그녀는 지난 6 년 외로움과 설움으로 온몸을 떨었던 그 순간순간을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도 많았지만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검은 늑대곁에 서 있게 되어 그 기회조차 잃었다. 나중에 그녀는 검은 늑대에게 속박당하는 서약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굵고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곁에서 듣는 순간, 전율하던 공포 때문이었을까? 롤프는 사제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부를 본 순간 씁쓸한 기분에 젖더 있었다. 그녀는 결코 어린애보다 크지 않았다. 그의 가슴께 정도 닿는 키였다. 이렇게 작은 EU 자가 나를 그토록 괴롭혔단 말인가? 그리고 더욱 기분인 상한 건 그녀가 나병환자처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발진을 숨기려고 했다고 그녀의 가신이 주장했다. 믿을 수가 있을까? 기버트 경이 암시한 것처럼, 그게 없어질 그런 것이기를 내가 혹시 은연중에 바라는 걸 아닐까? 이 지독한 상황을 그럴 듯하게 만들려고, 이 여자의 계모는 그를 한쪽으로 데려가 왕의 명령을 따르도록 그녀를 따끔하게 다그쳤노라고 털어 놓았다. 그들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 아마 그녀에게 식사나 몇 끼 정도 주지 않았을 테지. 그에게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녀가 그와 결혼하길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혹시라도 신부가 자신과 결혼하면서도 만족하리란 기대를 하길


바랐는데, 이제 보니 그녀는 자신을 원치 않았다! 궁정에 있는 모든 미인들 중 아내를 선택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던 그가, 마지못해 자신과 결혼하는 신부에게 달라붙게 되다니!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모든 걸 중단하고 그들을 모두 쫓아버렸어야 했어! 완벽한 핑계가 있잖은가. 결혼 계약서가 낭독되었을 때 롤프는 격분해 길길이 날뛰었다. 세상에, 여자의 결혼 지참금이 결혼 후에도 그녀의 손에 남게 된다는 걸 누가 들어봤겠는가? 그렇지만 윌리암 경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의 죽은 아내의 희망에 따라 그렇게 해야만 산다는 거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소유인 그 땅들을 그 딸에게 남겼다. 그는 결혼 자체만큼이나 옭매인 심정으로 그 어처구니 없는 계약서에다 서명을 했는데, 그게 가져다준 걸 보자-그와 결혼하도록 강요받은, 어린애보다 결코 크지 않은 여자라니! 정말이지, 이거 내가 천벌을 받은게 아닌가 싶군, 레오니는 흰 장갑을 낀 손가락에 반지가 거칠게 끼여지는 걸 느꼈다. 그 다음에 신부가 신랑에게 그 의식을 끝마치는 평화의 키스를 하라고 말했다. 롤프는 그녀의 베일을 들어올리려 하지 않고 입술을 대충 그녀의 이마가 있는 부위에다 살짝 댔다. 짧은 미사가 이어진후 그녀는 이제 남편이 된 남자의 손에 이끌려 예배당 밖으로 나왔다. 레오니는 홀에서, 그리고 그에게서 벗어나고만 싶었지만, 결혼 연회가 즉시 시작되어 그녀는 억지로 영주의 식탁, 그의 곁에 앉아 있어야 했다. 아버지는 한쪽에 앉아 말없이 술만 마셔댔다. 그녀의 남편도 술만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처럼 술이라도 마셨으면 하는 심정이 들었다.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주디스만이 그 연회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또한 영주의 식탁을 완벽한 침묵으로부터 막아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검은 늑대의 기사 두명과 얘기를 나누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꼴이라니. 롤프는 레오니에게 말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의 부하들이 뭘 물어보면 그는 괜히 툴툴거리기만 했다. 신혼부부를 위한 음식이 수북하게 담긴 나무 쟁반 하나가 두 사람 앞에 놓여 있었지만 둘 다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레오니는 사람들 앞에서 감히 베일을 올리지 못해서였고, 롤프는 포도주가 더 좋아서였다. 홀에는 다른 기사들과 그들의 아내도 몇 명 있었으며, 그리고 애들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축하연에서 흔히 하는 짖궂은 농담이나 재밋거리를 꺼내지 않았다. 레오니는 자신이 모든 사람의 흥을 깨뜨리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어, 어줍잖은 분위기에 대해 결코 주위 사람들을 탓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가 왜 저렇게 치렁치렁한 베일을 뒤집어 쓰고 가엾은 모습으로 말없이 앉아 있는지 궁금해 할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일어서려 했지만, 남편의 묵직한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꼼짝도 못하게 했다. 일어나는 걸 포기하고 한숨만 몰아 쉬었다.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감히 롤프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없어 포도주 잔을 단단히 잡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만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결혼 적령기에 이르러 이런 끔찍한


결혼피로연을 겪으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빳빳하게 앉아 있는 이런 비참한 상황이 닥치다니! 그녀는 롤프의 하인들과 펄시윅에서 온 자신의 하인들이 애써 준비한 맛있는 음식들을 입에 대지 않았다. 베이컨이 들어 있는 수프, 버섯을 곁들인 구운 돼지 두 마리, 깃털로 장식한 백조 세 마리, 꿀로 달게 저민 커다란 햄, 수탉과 오리들, 그리고 한 식탁에 차려진 것으로서는 이제까지 봤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겨자 소스들과 양념들이 놓여 있었다. 구운 고기들은 음식을 준비하는데 있어 섬세한 면이 없는 롤프의 주방 하인들이 마련했다. 하지만 펄시윅 주방 하인들은 크루얼의 하인들을 무색하게 하려고 경쟁을 한 탓으로 엄청나게 다양한 순무요리와 강낭콩 요리들, 그리고 여섯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진 완두콩 요리들로 선을 보였다. 펄시윅 정원에서 가져온, 그 여주인이 애정을 다해 가꾸었던 꽃들로 장식된 체리와 사과들이 놓여 있었고, 또 그 과일들을 뭉근한 불에 끓여서 만든 과자가 있었다. 열두 종류의 치즈와 포도주, 그리고 꼭대기와 가장자리에 아몬드와 설탕으로 사람의 모습을 본떠 장식한 거대한 결혼케이크가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레오니는 그중 어떤 것도 맛보지 않았다. 주디스가 레오니를 그녀의 방으로 이끄는 의무를 행하려고 일어섰을 즈음엔 늦은 시각이었다. 이때 롤프는 너무 취해 있어서 그녀가 떠나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레오니는 그가 신방으로 들어서질 못할 상태가 되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옷을 벗기는 침실 의식은 결혼식 하객들이 돕는 게 관례였기 때문에 레오니가 알지 못하는 여러 명의 여자들이 주디스, 아멜리아와 함께 신방으로 들어왔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레오니는 그들을 모두 내보냈다. 혼자 남게 되자, 레오니는 칼이 필요 없기를 바라면서, 얼른 그녀의 베개 밑에 감췄다. 하지만 그녀는 롤프 스스로는 그녀에게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손님들이 그를 신방으로 끌고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언제 롤프가 들어올지 몰라 그녀는 서둘러 옷을 벗고 커다란 침대로 올라갔다. 침대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롤프와 함께 들어올 하객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수 없으리란 생각에 베일을 벗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헤쳐 롤프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쪽같이 감출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마침내 문이 쿵 열리는 순간 한 무리의 남자들이 비틀거리며 들어와서는 롤프 덤버트를 침대로 데려올 때 그녀는 긴장감으로 몸을 떨면서 숨을 죽였다. 그들은 모두 취해 있었고, 음란한 농담들을 해댔다. 롤프가 무척이나 화 난 음성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가라고 명령할 때까지 그 농담은 계속 되었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침대 커튼이 젖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괴로운 몇 분이 지난 뒤 커튼이 젖혀지는 소리와 동시에 그의 육중한 몸이 침대 위로 푹 쓰러지자 그녀는 무서워 소리를 죽이며 울었다.


레오니는 가슴이 터질 때까지 숨을 삼키며 눈물을 흘렸다. 곁에서 ‘ 자 요 , 난 어린애를 강탈하진 않으니까.’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릴 때까지, 그녀는 온갖 공포를 상상하면서, 겁에 질려 몸을 웅크렸다. 레오니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안도감에 긴장이 풀로,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들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역시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10 롤프는 짙은 안개속에 휩싸인 듯한 몽롱한 상태에서도 가슴과 허벅지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침대에서 아멜리아는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그에게 바싹 달라붙는 법이 없다는 걸 알정도로 서로의 습관에 익숙한 그는 아멜리아와 무척이나 오래 지내왔다. 그런데 잠든 그를 따뜻하게 감싸안는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한 팔을 그녀에게 뻗어 그녀의 가슴사이에다 파묻고는 가만히 있었다. 순간 저항하는 듯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을 쉬면서 롤프는 다시 팔을 빼고 돌아누우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따스한 몸이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도대체 이런 변화가 왜 생겼는지 잠깐 동안 궁금해 하다가 그는 그녀에게 다시 팔을 둘렀다. 그녀가 저항하지 않자, 그는 그녀가 깨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레 그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고 않고 잠이 덜 깬 상태였다. 그의 손에 닿는 감촉이 유난히 달라 어리둥절했다. 아멜리아의 피부가 예전 같지 않아 부드럽고도 고운 비단처럼 느껴졌고, 뼈가 튀어나온 부분들이 전혀 만져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의 굴곡은 탄력이 넘쳤으며, 살이 통통했다. 가슴도 한줌 이상으로 더 풍만했다. 그는 이 모든 변화들을 손끝으로 느끼면서도 그 변화가 무엇인지 가물가물했다. 롤프는 낯선 느낌에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 그가 어루만지고 있는 건 아내, 자신을 어떻게든 화나게 만들려고 기를 썼던 아내였다! 그녀를 단지 어린애로 생각했는데, 어린애의 굴곡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갈망하는 듯이 자극적으로 등을 그에게 기대며 꿈틀거렸다.…그런가? 아직 잠들어 있는 건가? 처녀가 이렇게 뻔뻔스러운가 싶어 그는 놀랐지만 그의 몰이 훨씬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당혹스러움과 주저하는 마음과는 달리 욕망이 솟구쳤다. 그녀가 그렇게 이끌었어. 그녀를 원하게 만든 거라고.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했고 최악의 모습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는데도 웬 일이지? 어쩌면 간절히 바랐던 기회가 온 건지도 몰랐다. 사위를 분간하기 힘든 어둠과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의무를 스스럼없이 수행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옆에서 레오니는 무척이나 에로틱한 꿈속을 헤맸다. 그녀는 그런 느낌이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그 꿈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악착같이 달라붙었지만,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남자에게 꼭 붙어 누워있다는 걸, 그리고 그 남자의 손이 그녀를 만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런 달콤한 손길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의 손기에 꿈틀대는 쾌감으로 그녀 곁에 있는 사람이 남편이라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이렇게 달콤한 느낌이 아니라 고통스런 느낌을 느끼리라 이미 예상한 터였다. 느닷없이 얼굴이 욱신거리며 고통이 파고들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앞뒤 상황도 가릴 틈없이 깜짝 놀라 베개 밑에 있는 칼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롤프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멍든 뺨을 가볍게 쳤을 때 아내가 아파하리란 걸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녀에게서 나오는 소리로 그녀 역시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를 반듯하게 눕히기 전에 숱이 많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얼굴에서 걷어내려고 했을 뿐이었다. 순간, 옆구리가 따끔거리면서 불쾌한 고통이 느껴지자 그는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옆구리를 만지는 순산 손가락에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게 묻어나자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레오니는 처음에는 무모한 행동에 겁이나 얼어붙은 듯이 있다가 그가 고함을 치자 침대에서 황급히 내려왔다. 같은 순간에 옆구리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내려선 탓에 롤프는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선 걸 미처 보지 못했다. 그는 어린 시종이 자고 있는 곁방의 문 쪽으로 가더니 문을 홱 열어젖히고 소리를 질렀다. [불을 가져와, 다미안! 그리고 나서 하인을 깨워. 시트를 바꾸고 불을 밝혀야겠다.] 레오니는 두려움에 떨며 궤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선 황급히 잠옷을 찾아냈다. 방 밖에 불빛이 가물거리며 보이자 그녀는 얼른 등을 도리고 잠옷의 허리띠를 마저 맸다. 롤프는 다미안이 촛대를 들고 방에 들어섰을 즈음 비로소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불빛에 어른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숨을 죽였다. 아내의 모습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다. 그녀는 키가 155 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됐지만 완벽한 몸매였다. 몸의 굴곡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군살 없이 쭉 빠진 등이 잘록한 허리로 좁아들더니 다시 완만하게 부풀어오른

엉덩이로

동그스름하게

언덕을

이루었다.

그녀는

잠옷

속에

파묻힌

머리카락을 꺼내 은빛 구름처럼 뒤로 늘어트렸다. 아, 뒷모습의 그녀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침대로 가서 떨어뜨렸던 칼을 집으려고 몸을 굽혔다. 하지만 그가 날렵하게 다가와 그녀가 잡으려는 걸 보고서 소리를 질렀다. [그걸 놔두시오, 부인!] 레오니는 소스라쳐 놀라 몸을 돌려 어두운 귀퉁이쪽으로 튕겨오르듯 뛰었다. 그에게 해코지하려 했던 선 어리석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제 그녀는 갑절로 다치게 되리라. 이 모든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롤프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쏘아보면서, 그녀가 그 작은 칼로 뭘 하겠다고 그러는지 궁금했다. 칼은 그에게 심한 상처를 입힐 만큼 날카롭거나 크지 않았다. 옆구리의 베인 상처는, 그가 숱한 전투에서 입었던 상처들에 비한다면 핀으로


찌른 정도에 불과했다. 사고로 찌르게 됐는지도 모를 일…. 그렇다고 해도 베개맡에 칼을 숨긴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롤프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자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처녀가 아니어서 그 칼로 자신을 찔러 시트에 피를 묻히려고 했단 말인가? 그 상투적인 속임수를 쓰려 했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여자인가. 그녀가 처녀가 아닌 상태로 시집왔다고 해도 상관 없었지만, 자신을 속이려고 했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시트를 바꾸려고 들어온 두 하녀가 놀란 표정으로 먼저 그를, 그 다음에는 그 아내를 쳐다보자 더욱 더 못마땅했다. 그는 하녀들의 표정을 보고 그녀들도 자신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고 느꼈다. 이제 이 얘기는 하루도 못 돼서 돌고 돌아 완전한 웃음거리가 될 게 틀림없었다. [다미안!] 하녀들이 시트를 가는 동안 롤프가 근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가장 두툼한 붕대를 찾아내 이 베인 데를 붕대로 매라. 내 아내의 피 외에는 어떤 피오 시트에 묻히고 싶지 않다.] 그는 어두운 곳에서 ‘ 헉 ’ 하 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마땅히 느껴야 할 수치심을 내가 안겨주리라. 만약 내일 아침 그녀의 순결성을 증명하는 피가 시트에 전혀 묻어 있지 않는다면, 그녀는 한평생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겠지. 레오니는 그의 말을 듣고서 그 남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상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른 이들 앞에서 그녀를 해치려고 한다는 의미의 말에 그녀는 몹시 놀랐다. 갑자기 그녀는 너무도 철저하게 비열한 이 남자를 자세히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그나마 보이는 한쪽 눈을 그에게 초점을 맞출 정도로만 고개를 들었다. 그는 그녀 쪽을 보고 있지 않았지만 불빛이 그의 모습을 밝히고 있어 그녀는 처음으로 대담하게 그를 살펴보았다. 그는 허리에 시트를 걸치고는 난로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밝은 불꽃 덕분에 그녀는 그를 분명하게 보았다. 내 남편인가? 오, 아니야. 저토록 잘생긴 젊은 남자와 결혼하게 된 건 너무도 잔혹한 운명이야. 저 남자는 오로지 나에게 증오만을 심어줄 텐데,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 검은 바탕에 은빛 늑대가 그려진 그의 깃발 탓도 있지만, 그라 왜 검은 늑대라고 불리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의 거무스름한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까만 눈동자 때문이었다. 머리카락과 온몸을 덮은 털, 특히 그의 가슴에 난 헝클어진 덥수룩한 털은 정말 검었다. 그의 검은 용모가 그녀는 싫지 않았다. 싫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정말이지, 너무나도, 맙소사! 그의 모습에 그녀는 숨도 쉬지 못했다. 그의 몸은 남성미가 넘쳐흘렀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강건했고, 우람했으며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었다. 목과 관자놀이, 그리고 이마를 따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대충 다듬기는 했어도 그의 얼굴과 무척 잘 어울렸다. 비록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입술이 풍기는 풍부한 관능미가 사라지진 않았다. 이마는 넓었고, 코는 곧고 선이 뚜렷했으며 매끄러우면서도 네모난 턱은 윤곽이 아주 뚜렷하고 억세보였다. 무척이나 수려하고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저런 외모를 갖고 있는 남자가 차갑고 냉혹한, 복수심에 이글거리는 괴물이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천사의 얼굴에 악마의 마음을 갖고 있는 남자라니, 정말 통탄할 일이었다. 다미안이 상처를 봐주고 있는 동안 롤프는 자신에게 쏠려 있는 레오니의 시선을 느꼈다. 그가 그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은빛이 감도는 금발에 덮여 잔뜩 웅크린 작은 형체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침대에서 반응하며 그녀가 내던 쾌락의 신음소리가 문득 스쳤다. 그녀는 그를 원했고, 그 사실을 알자 그 역시 흥분했다. 이제 그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채자 그는 또다시 흥분에 떨었다. 그녀를 갖고 싶은 갈망으로 고통스러움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롤프는 다미안에게 서두르라고 이르고, 일을 끝내자 나가라고 딱딱거렸다. 문이 닫히고 또다시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레오니는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침대로 돌아오시오, 레오니.] 침묵만이 감도는 방안에 그의 목소리가 고함치듯 울려퍼졌다. 사실, 그의 목소리는 굵으면서도 걸걸했다. 롤프는 서둘러 침대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다. [옷을 벗으시오, 부인.] 레오니는 얼어붙었다. 치욕감으로 온 몸이 빳빳해졌다. [영주님, 전….] [당신이 원한다면, 커튼 뒤에서 벗으시오, 당신은 샅샅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롤프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던졌다. 레오니는 침대로 올라가 침대 커튼을 단단히 여몄다. 잠시 후 그녀의 옷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롤프는 다시 싱긋 웃었다. 그는 서둘러 촛불을 끄고 잠시 후에 그녀가 있는 침대로 들어갔다. 그녀는 침대 한쪽 끝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어 그녀를 만지려면 그가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를 침대 한가���데로 당겼다.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몸이 전해져 왔다. [춥소?] 안 돼. 내색해서는 절대 안돼.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 거야. [네 영주님.] 그의 손가락들이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차츰 그녀의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오랫동안 춥지 않을 거요.]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레오니는 그래도 몸이 떨렸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왜 그가 부드럽게 대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 처벌을 내릴까?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쓰다듬으며 유혹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두려움 외에는 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를 찌른 데에


대한 무서운 보복이 있으리란 확신에 점점 두려웠다. 그런데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그가 그녀의 몸을 파고드는 순간 레오니는 너무도 놀랐다. 그가 그녀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소리를 질렀지만, 고통은 짧았고 곧 둔한 진동만이 느껴졌다. 그녀는 얻어맞는 대신 잠자리를 갖게 된 일에 몹시 놀라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놀라기는 롤프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그녀는 처녀였다. 그건 자신의 결론이 틀렸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나를 찔렀던 거야. 정말로 나를 찌를 생각이었다고.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그녀와의 일을 재빨리 끝내버리고선 거짓말처럼 금세 잠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그가 코를 골지 않았지만, 레오니는 남편이 잠든 걸 알았다. 그래, 이제 난 처녀가 아니야. 순간적으로 치른 일은 그에 대한 갈망이 없어서인지 고통스러움만이 온몸을 휘감았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면 충분히 이겨내야 할 고통이리라. 만약 이날 이후로

다시

펄시윅

성으로

내보내진다면

고통은

끝나리라.

희망을

보듬어안고-그렇게 되길 바라면서-그녀는 잠을 청했다.♣

11 다음 날 아침 일찍 여자들이 떼를 지어 신혼부부 침실로 들이닥치는 통에 레오니는 무심결에 눈을 떴다. 잠에서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침대 커튼이 열리더니 침대 밖으로 잽싸게 끌려내려갔다. 시트를 걷고선 관습에 따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누군가 밖으로 갖고 나가려고 서둘렀다. 하지만 여자들 중 하나가 레오니의 얼굴을 보고서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그 의식은 잠시 뒷전에 버려졌다. 레오니는 몸을 돌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녀가 울고 있다는 애처로운 인상을 받았는지 여자들이 너나없이 큰 소리로 물어댔다. 그들은 그녀가 어디가 아픈 건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레오니는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아멜리아가 여자들을 밖으로 나가게 했다. 누군가가 레오니의 어깨에 잠옷을 걸쳐주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발가벗고 서 있음을 깨달았다. 단지 긴 머리칼만이 그녀를 휘감은 모습으로…. 그녀가 잠옷을 입자 주디스가 베일을 건넸다. 레오니는 주디스에게 무뚝뚝하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베일을 썼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의 계모와 아멜리아만이 방에 있었다. 남편의 자취는 아무 데도 없었다. [아까 그 여자들은 누구죠?] [네 남편이 태만해서 넌 피로연에서 그들을 소개받지 못한 거야. 하지만 곧 그들을 잘 알게 되겠지. 네 남편을 섬기는 기사들의 부인들과 딸들이니까. 그들은 롤프경이 용병시절 때부터 그를 따랐다는구나 아주 드문 일이지, 가는 곳마다 그 많은 기사들과 식솔들의 숙소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을 거야. 안 그래요, 아멜리아?]


[전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럴 거예요, 당연히 모르시겠죠.] 주디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당신이 롤프 경과 지낸 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걸 내가 잠시 잊었군요.] 아멜리아의 기분이 상한 건 주디스의 하찮은 적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시트에 묻어 있는 처녀의 피를 보고서 이미 단단히 화가 나 있는 터였다. 롤프가 못생긴 아내에게 손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런일이! [넌 미사를 놓쳤어, 레오니. 하지만 미사를 놓친 건 너만이 아니란다. 네 아버지는 아직도 깊이 잠들어 계신다. 그리고 네 남편은 손님들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자기 일만 하고 있으니, 축하연은 다 끝난 것 같구나. 우리가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겠지.] 주디스는 영 못마땅해 인상을 찡그렸다. [부인, 요구하시는 게 그거라면 그만 가세요.] 레오니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정말 우리가 필요치 않니?] 마음에도 없는 주디스의 말에 레오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곧바로 떠나겠다.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니? 그가 기억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만….] [역시,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얘야 우린 네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란단다.] [물론 그러시겠죠.] 레오니는 단조로운 말투로 대꾸를 하고는 등을 돌렸다. 주디스는 내쫒기듯 나갔다. [계모를

싫어한다고

해서

당신을

탓하지

않아요.

그녀는

기분

좋은

여자가

아니잖아요.] 아멜리아가 비아냥거리며 말을 건네자, 레오니는 이 여자와 역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내 하녀를 보내주면 고맙겠어요. 그럼 당신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칠 필요가 없을 거예요, 아멜리아. 목욕을 하고 싶군요. 그리고 식사는 여기로 가져왔으면 좋겠네요. 난 오늘 이 방을 나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멜리아는 입을 꾹 다물다가 이 거만한 여자를 곧 보지 않으리란 생각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부인.] 레오니가 목욕만 겨우 마쳤을 즈음 아멜리아가 되돌아와 펄시윅 성으로 데려가려고 호위대가 대기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전혀 뜻밖의 일이라 레오니는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정말 펄시윅 성으로 가게 되는 건가요? 정말로 곧?]


[그곳이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성이랍니다. 당신이 그 곳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던데요. 그리고 어쩌면 영주님이 직접 집사를 정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이 영주님의 주의를 끌지 않는 한, 그 때문에 곤란받을 일은 없을 거예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닌가요?] [물론이죠! 오, 정말, 그래요!] 레오니는 뜻하지 않은 행운이 펼쳐지자 얼떨떨했다. 그녀는 서둘러 모든 준비를 끝냈다. 기버트 경과 레오니의 병사들이 그녀를 호위하려고 채비를 갖췄다. 기버트는 갓 결혼한 레오니에 대한 첫 임무가 뭔지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를 너무도 간절하게 크루얼을 나가고 싶어하는 걸 보고는 의구심을 가슴에 묻어두었다. 게다가 그는 롤프 덤버트가 크루얼 성에 거의 있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그 남자가 갓 결혼식을 올린 신부를 크루얼 성에 혼자 남겨두지 않으려고 그러려니 했다. 펄시윅 성에서라면 레오니는 그녀를 모시고 있는 하인들과 편안하게 함께 지내리란 생각이 들었다. 기버트는 롤프가 뭘 하려고 하는지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소규모의 군대만으로 저항하는 일곱 군데의 성을 점령하여 기념비적인 위업을 달성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그는 그의 뜻이 이뤄지도록 행운을 빌었지만, 그 일이 쉽사리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희미한 불안함을 느꼈다. 어쩌면 레오니 아가씨, 아니 아씨는 올해 남편의 얼굴을 자주 대하지 못하리라. 해질 무렵 롤프는, 레오니와 함께 있고 싶은 어리석은 열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크루얼의 성문을 통과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지난 밤 한순간에 벌어진 모든 일이 미궁속으로 빠져버린 듯 혼란스러웠다. 옆구리의 상처가 심하지 않았지만 그런 상처를 입은 게 결코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한 여자에게 호기심을 갖는 건 무척이도 오랜만이라는 걸 인정했다. 오늘의 이 초조함과 열망은 어쩌면 한 여자에 대한 호기심과 많은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지만, 그 정체를 알아본다고 해서 손해볼 일은 전혀 없으리라. 하지만 아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고 펄시윅 성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소년 같은 열망이 사라지고 걷잡을 수 없는 자신의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그는 어느 정도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껴 곧바로 돌아서서 로데성 포위 공격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분수를 넘어선 짓을 한 아멜리아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혼내주지도 않았다. 그는 아멜리아에게 아내를 내보낼 것이라고만 말했지, 그녀보고 자시 대신 그렇게 하라고 이르진 않았다. 하지만 레오니가 없다는 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어리석은 갈망 때문에 자기 자신이 싫어질 게 뻔한 노릇이질 않은가. 자신이 그녀를 원한다는 사실을 그 여자가 알게 되는 걸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악의에 차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한 마음이 앞섰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엑스포드 성에서는 롤프 대신 임시 성주를 맡고 있는 워렌경의 부인인 로즈가 결혼실 다음날 아침 레오니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남편에게 말하고 있었다. 롤프 영주와 펄시윅 성과의 본쟁에 대해 알고 있었던 워렌은


아내의 말을 듣고 그 여자가 그 결혼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게 사실일 거라고 정확하게 추측했다. 그녀가 얻어맞았다면, 그건 그녀의 아버지가 한 일이라는 자연스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여러 달 동안 그와 헤어져 있었던 워렌의 아내는 펄시윅과의 분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또한 롤프 덤버트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게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롤프를 좋아하지만, 그건 롤프 경이 훌륭한 대영주라는 사실에 비중을 뒀을 뿐 롤프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롤프 경이 성미가 급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던 탓에, 롤프가 신부를 때렸다고 단순하게 결론지었다. 레오니의 끔찍한 몰골로 봐서 그 가엾은 신부는 무자비한 남자와 결혼한 게 분명했다. 불행하게도, 워렌경은 그녀의 오해를 풀어주지 않았다. 레오니의 심각한 상태를 듣고 그저 툴툴거렸을 뿐이었다. 사실, 그는 여자들의 수다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그의 아내가 다음 날 엑스포드에 머물고 있는 버싸에게 그 얘기를 건네준 걸 시작으로, 그 얘기는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경한 입장에 대립되는 논쟁이 일어났고 엑스포드, 케닐, 블리쎄, 그리고 크루얼의 농노들을 포함해 많은 남편들과 아내들이 다음 몇 주 동안 그 문제로 언성을 높이며 논쟁을 벌였다. 남자들은 그들의 영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탓에 그의 편을 들었다. 여자들은 영주를 잘 알지 못한 탓에 남자들이라. 증거가 명백한데도 무턱대고 늘 서로를 감싸는 거라며, 자신들의 견해가 정당하다며 영주의 아내를 몹시 딱하게 생각했다. 남의 뒷말을 좋아하는 농노들은 간단하게 두 편으로 나뉘었다. 남자는 남자편으로 여자는 여자 편으로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그 문제는 켐프스톤의 새영주와 그 부인이 그곳 사람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아멜리아는 그 소문을 듣고서 미친 듯이 화를 냈다. 그녀의 연인이 숱한 여자들에게 비난을 받아서가 아니라. 레오니가 동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롤프가 레오니를 잊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판단에서였다. 계속 재잘거리는 혀들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도 롤프가 크루얼 성으로 그녀를 다시 데려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실, 롤프는 결혼식이 치러진 뒤 몇 주 동안 자신에 관해 어떤 얘기들이 나돌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 그런 소문이 떠돈다는 얘기조차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는 토르프조차도 그런 소문을 그에게 비밀로 하려고 애를 썼다. 간단히 말해 롤프는, 부하들이 얘기를 나누다가도, 그가 다가가면 입을 다물고는 느닷없이 자기들의 아내들에 대해 큰 소리로 욕을 해대면서 이상하게 행동하는지 궁금해 했다. 그리고 더욱 기가 막힌 건 그와 마주치는 수많은 여자들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화를 낸다는 사실이었다. 몇 주 동안 죽 항복 교섭을 벌이면서 로데 성 바깥 막사에서 지낸 탓에 여자들에게 약점잡힐 만한 짓을 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주위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상황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에 잠긴 시간이 잦았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곡선과 속삭이는 듯한 신음소리와 더불어 자그마한 몸매의 영상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잡한 생각을 헤집고 문득문득 파고들었다. 레오니, 그의 아내는,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잊혀지지 않고 어느덧 그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다. ♣

12 레오니가 그토록 갈망한 기도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남편이란 존재가 그녀의 뇌리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인생은 예전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한 남자가 그녀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그의 집사가 펄시윅 성으로 아직 파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집사가 그녀의 영주에게 어떤 거라도 감추려고 한다는 고발을 하지 못하도록 그녀는 은닉 장소들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집사가 올 것에 대비해 만반의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녀는 이제 누가 오리라는 생각은 접어두었다. 또한

주디스의

집사가

갑자기

들이닥칠까봐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됐다.

이제는

자유스러웠고, 독립적이었으며 안정을 되찾아 평온한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좋은 일이란 그리 오래 가지 못하는 법. 어느 날 오후, 정원을 돌보고 있던 그녀는 성문에서 멈추라는 외침을 듣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기버트 경은 성문을 지키는 통괄 책임을 하급장교에게 지시하고 밖에 나가 있었다. 하급 장교는

성문지기에게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은-아는

얼굴이든,

모르는

사람이든-철저하게 심문하라고 명령하면서, 그에게 처음으로 맡겨진 임무를 아주 성실히 수행했다. 레오니는 딱총나무의 여러 부분들을 바구니에다 끊임없이 담고 있었다. 그걸 모아서 천의 염료를-나무껍질과 뿌리로는 검은색을, 나무 잎으로는 녹색의 염료를-만들 거였다. 파란빛이 감���는 엷은 보라색에서부터 진홍색에 이르는 염료들을 얻기 위해서는 그 열매들이 익는 가을까지 기다려야겠지. 이미 가득 채워진 두 번째 바구니에는 치커리와 꽃상추, 당귀, 단맛이 나는 마요라나, 박하향이 듬뿍나는 스피아민트와 캣처민트, 흰 양귀비, 로즈메리, 그리고 금잔화와 제비꽃잎 등 약용과 식용으로 쓰일 갖가지 풀과 꽃들이 담겨 있었다. 레오니는 풀과 꽃들을 캐는 일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 지시를 내렸다. 하인들은 풀들을 구별할 줄 몰라 독성이 있는 걸 샐러드용으로 뜯기 십상이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안뜰로 들어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서야 누가 펄시윅을 찾아온 건지 그녀는 궁금해졌다. 기버트 경은 그날 밤까지 돌아오지 않을 텐데? 말발굽 소리가 나는 건 손님이나 부유한 상인이 오고 있다는 걸 의미했지만, 그녀의 성처럼 작은 성에는 그런 사람들이 방문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낮은 정원 담장 밖으로 몸을 숙이고는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살펴보았다. 검은 늑대갑옷으로 완전무장을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거대한 검은 종마에서 내리자 두명의 병사들이 그를 따랐다. 그녀는 그들의 눈에 띠기 전에 재빨리 담 밑으로 몸을 숙였다. 갑작스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남편이 왜 거기에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정원 안에 갇힌 상태가 되어 그곳을 벗어나면 분명 그들 눈에 발각되리라. 그녀는 그가 떠날 때가지 정원 안에 숨어 있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하루종일이라도 별수 없는 노릇이지, 뭐. 그녀는 정원의 한쪽 끝에 있는 몇 그루의 월계수 수풀 뒤로 가, 롤프가 얼른 떠나 제발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맙소사, 하늘도 무심하시지! 간절한 소원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정원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유령소리처럼 들려왔다. 숨어 있는 걸 들켜서 당황하는 꼴을 보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서는 게 낫겠다 싶어 그녀는 용기를 내어 일어섰다. 그나마 다행으로 그녀가 먼저 그를 보았다. 작업할 때 입는 낡은 녹색 드레스가 수풀과 어우러져 그녀의 모습이 아직 눈에 띄지 않아서인지 그는 별 주의 없이 정원의 다른 쪽을 두리번 거렸다. 그녀는 그가 몸을 돌리기 전에 잠시 여유를 가지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자신의 행색이 영 꼴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녀는 몸을 움츠렸다. 두려움과 더불어 자존심이 상했다. 작업복 차림에, 길게 땋은 머리가 몸을 숙일 때 땅에 끌리지 않도록 두건으로 바싹 여민 모습이라니! 그 두건을 고정시키는 이마에 두른 장식 띠조차도 낡고 가는 긴 가죽 조각이라 엎친 데 덮친 꼴이었다. 드디어 최악의 모습으로 끔찍스럽게 두려운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롤프는 레오니를 이내 알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자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곳에 올 이유가 전혀 없었어! 이곳으로 온 건 순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야. 그는 생각없이 행동한 건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감 때문이라며 투덜거렸다. 지난 주 내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과연 그렇다 해도, 이곳에 와서 아내에게 당신과 무척 같이 있고 싶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이 보고 싶었노라고?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 싶었노라고? 아니야. 절대 그럴 순 없어. 오히려 그녀는 내가 관심없으리라 생각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최면이 걸린 사람처럼 펄시윅으로 와 그녀를 찾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은, 그가 비로소 그녀의 감추지 않은 본모습을 보게 되는 일이리라.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건 터무니없는 희망은 아니겠지. 그녀는 이곳 자신의 하인들과 함께 지내고 있어,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수수께끼는 끝장날 거고 그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열망 또한 끝날 터였다. 그런 희망을 품고서 그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하인이 그녀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말한 이곳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살펴보았다.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전에는 그녀의 옷 색깔이 나뭇잎 색깔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에 못 본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아내가 아니었다. 아아, 아내가 저런 차림으로 있을 리가 없어! 그는 그녀를


자세히 보려고 점점 다가서면서, 어쩌면 저렇듯 사랑스런 미모인가 하는 생각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그토록 흰 살결과 섬세한 장밋빛 입술, 그리고 곧고 작은 코에 아름다운 타원형의 턱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영국 아가씨들의 장밋빛 뺨이나 프랑스 처녀들의 음산한 얼굴 빛이 아니라, 그 매끄러운 얼굴을 어지럽히는 흠집 하나 없는 진주 같은 상아색 피부였다. 내리깐 긴 은빛 속눈썹이 그녀의 눈동자를 덮고 있어 그 눈동자 색을 보고 싶어서 그는 애가 탔다. 그는 차마 말을 건네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떤 말이든 해서 그녀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데 그럴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바보처럼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면서 그저 서 있기만 했다. 누굴까, 이토록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굴까? 그녀는 하녀처럼 촐싹거리지 않았다. 결혼할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은게 틀림없었다. 아내의 말동무일까? 저처럼 아름다운 미인 곁에 있는 게 흉측한 아내에게는 얼마나 혹독한 일이겠는가! 그 여자는 손가락들을 모아 신경질적으로 비틀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롤프는 그녀를 거북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의 아내가 그녀의 영주이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걸 알았으리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그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들이 더 예리하게 파고들어 얼마나 그녀를 원하는지 미칠 것만 같았다. 아아, 이 여자는 나의 양심의 가책을 잊게 만드는구나! [안심하시오, 들장미.] 롤프는 침을 삼키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당신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소.] [정말이세요?] 그는 부드럽고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무척 맘에 들었다. [당신이 날 두려워할 만큼 내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거요?] 마침내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서 그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눈은 내리 깔았다. 레오니는 그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를 잊고 지내왔다. 그는 투구를 벗어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흐트러지기 쉬운 곱슬거리는 그의 검은 머리칼은 얼굴과 체격에서 뿜어내는 강인한 인상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소년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의 침묵으로 그녀는 온몸에 힘이 빠졌으나 여전히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오랫동안 말씀을 안하시니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용서하시오, 아가씨 . 당신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까를 생각하느라고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소.] [전 이름이 있습니다만 다른 이름을 택하고 싶으시다면, 좋을 대로 하십시오.] [오해를 하고 있군요, 아가씨. 난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르고 싶소-만약 당신이 내게 그 이름을 말해 준다면.] 레오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제 이름을 말해주길 바라십니까?]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대꾸했다. [그러면 좋을 것 같군요, 그렇소.]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장난이 즐거운 걸까? 아니, 이런식의 장난을 즐길 남자가 아니야. 그렇다면 딱 한가지 가능성만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 있어 내가 하찮은 존재라. 그는 정말로 나의 이름을 잊어버린 거야!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똑바로 폈다. [이름이 무슨 상관입니까?] 롤프는 그처럼 사랑스런 은회색 눈동자가 사나운 빛을 뿜어내자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녀를 화나게 한 게 틀림없어! 그래, 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비밀로 해두길 바란다면, 그녀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하기는 그렇고, 들장미가 아주 적당할 것 같군.] 그는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면서 유쾌하게 말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꿨다. [좀더 은밀한 장소에서 당신과 뭘 좀 상의하고 싶군요.] [은밀한 장소라고요?] 그녀는 뒤로 물러서면서 그가 원하는 곳이 어느 정도 은밀한 곳일까를 생각하며 말끝을 떨며 다시 물었다. [어디로…가시고 싶으세요?] [들장미, 당신이 자는 곳으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긴장을 감추지 못해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속상했다. 그가 그런 이유로 이곳으로 오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도 못했어. 아멜리아가 그는 그런식으로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으리라고 말했기에 레오니는 그 말을 믿었다. 그보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남편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거였다. [절…절 따라오신다면, 영주님.] 그녀는 그 말을 하는데 너무나 힘이 들었다. 발을 내딛을 땐 더욱 곤혹스러웠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고 눈물이 솟아났다. 그가 제 아무리 부드러운 태도로 대한다 할지라도, 그녀는 그가 노여움 때문에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설움이 복받쳤다. 그들의 결혼식 날 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어쩌면 너무 술에 취해 있어 그가 그녀에게 가차없이 복수하리라 다짐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이제야 나를 처벌하러 온 것인가? 그래도 용서와 자비를 간청하지는 않으리라.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 롤프는 너무도 아찔해 하마터면 그녀를 따라나서질 못할 뻔했다. 그녀가 너무도 쉽게 복종하는 모습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런 일을 자주 했다는 말인가? 그녀의 남편은 도대체 누구기에 그녀가 이토록 무시하는 것일까? 늙은 남자일까, 아니면 그녀가 무척 혐오하는 사람일까? 그래도 그녀를 원하는 마음이 앞서 롤프는 뒤따라갔다.


안뜰을 지나 홀로 통하는 앞문에 이르렀을 때, 롤프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문득 떠올렸다. 아내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아내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을까? 그렇다 한들, 어떻게 이런 기회를 놓친단 말인가? 자기 침실로 안내하는 그 여자가 너무 아름다워 롤프는 아내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렸다. 그녀가 안내한 방에 들어서면서도 그는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녀가 방문을 닫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그를 쳐다보자, 그 역시 그녀를 바라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정말로 의논하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죠?] 롤프는 조롱하는 그녀의 말투를 기대에 가득 찬 말로 착각하고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리 오시오, 들장미.] 레오니는 그가 선택한 그 우스꽝스런 이름이 아주 싫어 그에게 얘기하고픈 심정이었다. 또한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는 마음 역시 못마땅했다. 그녀는 비참한 심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그 앞에 다가서며 잠시 기다렸다. 도대체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뭘 기대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뺨을 맞는 것? 그녀의 남은 인생이 비참할 거라는 어떤 예고든가, 매질?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당겨 안았다. 이건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잠시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녀를 안아 그녀의 침대로 데려갔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앉힌

다음

그는

곁에

앉아서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손가락

하나로

쓸어내렸다. 그의 벨벳 같은 암갈색 눈동자가 불안스럽게 그녀에게 다가들었다. 그 눈빛에는 그녀의 몸을 옥죄는 뭔가가 있었다. 그가 그녀쪽으로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숨이 막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다, 그녀는 가슴에 가득 차오른 호흡이 그녀의 아랫부분을 뚫고 터져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몹시 야릇한 감각들이 꿈틀거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점점 강하게 누르자 그녀의 입이 벌어지고 두 사람의 혀가 서로 엉켰다. 자기에게 첫키스를 퍼붓는 이 남자가 누군지를 깨닫자 레오니는 멍해졌다. 만약 그녀가 그가 하는 대로 그렇게 쉽게 따르지 않았다면, 롤프는 그녀가 경험이 없는 걸 분명 눈치챘으리라. 하지만 레오니으 머릿속에는 이 사람을 감히 저항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어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따랐다. 그래서 롤프는 자신이 그녀를 원하는 만큼, 그녀도 그를 원한다는 생각에 한층 더 흥분이 되었다.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똑바로 앉더니 그녀의 가죽 허리띠를 끌렀다. 그녀의 드레스의 양 옆에 달린 끈들이 쉽게 벗겨지지 않아서 성급한 롤프는 허리에서 단도를 꺼내 끈들을 잘라버렸다. 그녀의 낮은 비명에 그는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성급하다고

바꿔주겠소.]

탓하지

마시오,

들장미.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끈들은


레오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감을 가진 건 그의 방법이었지, 망가진 끈들이 아니었다. 갑자기 에서린다가 강간당한 일이 떠올랐다. 맞아, 지금 그가 그녀에게 하는 행동은 강간이나 다름없었다. 끈을 끊자 마자 그는 성급하게 그녀의 슈미즈 끈에다가도 칼을 갖다대는데, 강간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녀는 수치심과 비참함으로 범벅이된 눈물을 흘리며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가 미웠다. 그 앞에서는 절대로 울지 않으리라 맹세를 했는데 지금…. [들장미, 당신에게 이 끈들이 그렇듯 소중한 거요?] 그가 죄책감이 서린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속삭였다. 그는 그 시시한 끈들 때문에 그녀가 슬퍼하고 있는 줄 알고는 진심으로 미안해 했다. 그녀에게 이 끈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저한테는 다른 끈들이 수백 개도 어 있어요, 영주님. 하지만 전 제 옷이 찢겨나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답니다.] [아, 그렇다면 내가 정말 실수를 했소. 그렇다면 나한테 똑같은 짓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겠소?] 레오니는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그가 손에 쥐어준 날카로운 칼을 쳐다 보았다. [농담하시는군요, 영주님. 전 당신의 갑옷을 뚫을수 없답니다] [갑옷을 벗으려면 당신이 도와줘야 하겠지만, 당신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수만 있다면, 속옷들을 당신 마음이 후련해질 때까지 갈가리 찢어서 넝마로 만들어도 좋소.] 그의 허락을 받고 칼을 그의 옷에 댄다는 생각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레오니는 입을 삐죽이며 살짝 웃었다. [제가 당신에게 맞을 만한 옷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당신에게 맞을 만큼 커다란 옷이 여기에는 하나도 없답니다. 그래서 난 당신을 갑옷만 입혀서 내보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당신 부하들에게 그걸 어떻��� 설명하는지 듣고 싶기는 하지만요.] 그녀가 생글거리자 롤프도 따라 웃었다. 그에게는 침대에서 여자가 우는 모습이 친숙한게 아니었지만, 재치가 담긴 대화 역시 그랬다. 그녀의 말 한마디마다 유쾌해져 기분이 좋았다. 특히나 이처럼 수줍어하는 여자에게서 나오는 재치는 더욱 더. [그

점에

대해서라면

사실대로

얘기할

거요.

뻔뻔스러운

처녀가

너무

흥분시켜서….] 롤프가 싱글거리며 응수하자, 레오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깔깔댔다. [거짓말이에요! 정말로 그렇게 심한 말을 할건가요?] [뼈대 굵은 재 무릎이 이 육중한 갑옷 밖으로 삐져나온 걸 보면 내 부하들은 내 말을 믿을 거요.] [그렇다면 더더구나 당신의 단도를 사용하지 않겠어요.] [그래요, 그럼. 그러니 이제, 이 부속물을 벗는 걸 도와주겠소?] 레오니는 잠시나마 그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그의 뒤로 가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가 발가벗고 있다는 걸 거의 잊게 만들었지만, 그


역시도 곧 알몸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신의 벌거벗은 상태가 더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이상스럽게도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심정의 변화에 혼란스러웠다. 그에 대한 두려움은 친절한 말들과 유쾌한 농담들이 오가는 사이에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이 상황이 잔인한 계략이 아니도록 해달라고 신께 말벗이 빌지 않아도 될 정도로 편안했다. [들장미, 내 앞에서 하면 더 쉽지 않겠소?] 벨트와 검을 끄러 바닥에 놓으면서 롤프가 물었다. 이어서 그 무거운 쇠미늘 갑옷을 허리로 들어올렸다. [아니에요, 영주님.] 레오니는 얼른 갑옷을 붙잡았다. [당신이 앉아 있어도 이건 제대로 해낼 만큼 전 크지 않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기버트 경이 갑옷을 벗는 걸 자주 도와줬는데, 그때마다 기버트경은 그녀가 의자에 올라 그의 갑옷을 그의 머리위로 끌어올리는 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롤프의 등뒤에서 서서 까치발로도 그녀는 힘이 들었다. 결국에는 침대 위에 서서 그 임무를 간신히 끝마쳤다. 마침내 그가 알몸이 되자 레오니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갔다. 그녀는 머리를 풀면 알몸을 좀 가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그걸 기다릴 만큼 참을성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푹 빠져들었다. 롤프는 그녀에게 다가와 허리에 손을 얹더니 완만하게 굴곡이 진 그녀의 엉덩이와 풍만한 그녀의 가슴 사이를 어루만졌다. 아랫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사랑스런 모습은, 양미간을 약간 좁히자 더욱 그 빛을 발했다. 그녀는 너무 창피해서 그의 시선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완벽하게 솟아 있는 그녀의 발그레한 젖꼭지를 애무했다. 그녀가 가느다랗게 신음소리를 내뱉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문이 열리더니 이모 베아트릭스가 방으로 들어섰다. [레오니, 난…오! 영주님, 용서하세요! 레오니, 난…난 몰랐다…오, 나중에….] 얼굴이 새빨개진 베아트릭스는 등을 돌리고 허둥대며 방을 나갔다. 레오니는 남편의 표정만 아니었으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릴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의 이모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모는 저랑 방을 같이 쓰고….] 그녀가 웃음을 삼키며 말을 건네도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도 여전했다. [레오니?] 그건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투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홱 몸을 뗐다.


[오호! 이제야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그나마 이제라도 기억하게 되다니 정말 다행스럽….] 그의 얼굴이 굳어져 있어 그녀는 신랄하게 내뱉다가 말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 표정이 화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닌지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당신이 내 아내요?] 이 말투 역시 몰라서 묻는 투였다. [물론이죠. 달리 누가….] 검은 늑대는 침대 위로 벌렁 눕더니 몸을 꼬면서 격렬하게 웃어댔다. 레오니는 의아해 하면서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차츰차츰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날 다른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내가 누구든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했던 거야. 오, 이건 치욕이야, 치욕! 그는 아내가 아니라 정원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낯선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거였다. 흠, 그렇다면 나의 이름을 몰랐다 해도 그건 놀랄 일이 아니야. 그는 나를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바로 나의 성에서, 아내가 그 얘기를 듣게 되리란 걸 충분히 예상하는 이곳, 그가 날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지를 나의 농노들이 곧 알게 될 이곳에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레오니는 침대에서 벗어나 옷이 들어 있는 궤짝을 열고는 처음 손에 잡히는 대로 린네르 속치마를 꺼냈다. 그녀는 속옷을 입고서 남편이 아직도 배를 움켜쥐며 웃는 침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침착하게 베개를 집어들고는 그가 자신을 쳐다볼 때까지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만하시오, 부인, 알았어요.] 그가 요리조리 피하며 느물거렸다. [그렇다면 부디 어디 다른 데 가서 재미를 보시죠? 어서욧! 한 줌밖에 남아 있지 않은 내 인내심마저 바닥나기 전에.] 롤프는 몸을 일으켜 세워 바로 앉아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자 그는 웃음을 거두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 레오니. 나에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데도 당신은 날 나무랄 거요?] [이런, 맙소사!] 레오니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지으며 얼음장같이 차가운 은빛 눈동자로 그를 쏘아보았다. [영주님, 제가 충분히 이해시켜 드리지 못한 것 같군요. 전 당신이 떠나기를 원합니다. 다-당장요!] 롤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화났소?] [그래요.] [당신을 탓할 순 없지.]


[정말 친절도 하시군요.] 거무스레한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가 씨익 웃었다. [그렇게 거칠게 화내지 마시오, 부인. 해될 일은 전혀 없잖소. 당신 이모 덕분에, 오해가 말끔히 사라졌으니까.] [당신을 제대로 이해시켜야겠군요, 롤프경.] 레오니는 분함을 참지 못해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절 모르는 여자로 생각하고 저한테 구애를 해놓고서, 이제 와선 그저 오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당신은 내 아내요. 모르는 여자는 더더욱 아니지, 내 말을 알지 않소?] [제가 아는 건, 영주님, 당신은 가장 질이 나쁜 호색가라는 거예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레오니는 너무 화가 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받는 답니다. 당신이 그 들장미라고 생각하는 나 아닌 다른 여자와 일을 끝내기도 전에 전 당신의 죄에 대해 이미 알게 되었을 거라고요. 제 말을 오해하지는 마세요. 전 당신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잦든 상관없지만, 만일 당신이 펄시윅 성의 여자를 건드린다면, 그때는 나와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라는 뜻이에요. 제 농노들에게, 내가 못된 남편을 가졌다는 동정을 받긴 싫다고요!] [다 끝났소, 부인?] 레오니는 너무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닫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담했다. [어기서 중요한 건 당신이 내 아내라는 사실뿐이오. 그건 당신은 나한테 속해 있다는 걸 의미하며, 내가 원하는 대 해야 한다는 걸 뜻하오, 그걸 부인하오?] 그녀는 비참한 심정으로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날 따라야 한다는 걸 잊지 마시오.] 그는 그의 옷가지들을 챙겨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대가는 매질일 아니라, 경고였다. 하지만 그건 야비한 남자에게서 받은 비열한 경고일 뿐이야! 비열한 남자에게서 말이야!♣

13 윌다는 레오니 아씨에게 과연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두려워 레오니의 방밖에서 서성거렸다. 롤프 경이 어제 여기에 왔지만, 아주 험악한 기분으로 떠났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뿐만 아니라 레오니 아씨는 롤프 경이 떠난 이후로 내내 풀이 죽어 있었다. 이제 오늘, 어제 두 사람의 만남의 결과로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거였다.


한 무리의 말 타 병사들이 성문 앞으로 와서 문을 열라고 요구했던 시간은 아직 동도 트지 않아 하늘이 연한 보랏빛으로 곱게 물든 때였다. 주방 하인들조차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만큼 이른 시각이었다. 그 소동으로 펄시윅 병사들이 수비 태세를 갖췄지만, 곧 괜한 일로 밝혀졌다. 말탄 병사들의 외침을 잘못 받아들인데서 빚어진 촌극이었다. 밤에 보초를 선 사람은 마을에서 온 펄시윅 사람이었던 탓에 영어밖에는 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성문 밖에 있던 병사들은 프랑스에서 새로 온 용병들이라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상대방 기사들은 병사들 뒤편에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맞고함이 오가고,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혼돈스런 광경은 기버트 경이 도착해서야 수습이 되었다. 말탄 병사들이 이제 성 안뜰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과 같아 온 네 명의 기사들은 홀로 안내되었다. 기버트 경은 윌다를 보고서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윌다는 차마 그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지 않았다. [윌다!] 그녀는 기버트 경이 날카롭게 부르자 이내 기버트 경에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문을 열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제대로 말을 건네지 못할 것 같아 아주 천천히 촛불을 켰다. [아직 일어날 준비가 안 됐어, 윌다.] 촛불 때문에 눈이 부신지 레오니가 인상을 찡그리며 졸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버트 경께서 보내셨어요, 아씨. 병사들이 여기 와 있다고 말하라고요. 아씨 남편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아씨를 크루얼 성으로 모셔가야 한다고 했어요.] 침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아주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왠지는 말하지 않던걸요?] 윌다는 마음을 조이며 털어놓았다. [내 잠옷을 줘, 빨리.] 윌다는 설마 레오니가 잠옷만 입고서 허둥대며 나가겠는가 싶어시키는 대로 했다. [아씨!] 레오니는, 기버트 경과 함께 난롯가에 모여 있던 네 명의 기사를 보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기 전에 되돌아서 방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병사들만, 그녀가 대답을 요구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하인들만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여기 검은 늑대의 기사들을 협박할 수는 없지 않는가. 왜 기사가 네 명씩이나 온 거지?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내가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난롯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간신히 움직였다. [당신들은 롤프 덤버트의 명령으로 여기에 온 건가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기사 세 명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가 토르프 경으로 알고 있는, 그 네 번째 기사가 그녀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놀란 눈으로 기버트 경을 쳐다보았다. 기버트 경은 화가 났는지 토르프 경에게 소리쳤다. [어서 아씨께 대답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씨는 펄시윅을 떠나지 않을 거요!] [아씨라고요?] 토르프 경이 공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명의 기사들은 놀라움과 당혹감이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레오니는

그들이

자신이

누군지를

짐작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서 더 당혹스러웠다. 그건 잠옷 차림으로 나온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머리에 뭘 쓰지도 않고 여느 촌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죄송합니다, 레오니 아씨.] 나이가 어린 쪽의 한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가로막았다. [알아요.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당신들을 맞지 못한 날 용서해주시오. 당신은….] [리차드 아미아스입니다.] 그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을 서둘러 소개했다. 리차드는 흑갈색의 머리와 녹색 눈동자가 눈길을 끄는 잘생긴 남자였다. 그녀는 솔직히 그 용모에 감탄했다. 레아날드 경은 그보다 더 젊었으며, 넑을 빼앗길 정도로 환한 미소, 황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갈색 눈동자, 피부는 선명한 올리브 색이었고, 얼굴은 너무 잘생겨서 천사의 모습 같았다. 피어스 경은 정반대였다. 그의 얼굴에는 동정을 일으킬 만큼 전투의 상처자국들이 많았지만 아주 멋진 보라색 눈돋자를 갖고 있었다.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그녀는 그가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궁금했다. 토르프 경은 네 명의 기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거의 기버트와 동년배 같았다. 그는 롤프와 꼭같은 거무스름한 혈색이었고, 뭔가 재미있는 걸 발견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흑갈색 눈동자에는 잔뜩 웃음기가 어려 있었지만, 그래도 뭣 때문에 그렇게 재미있어 하는지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소개를 끝내고 롤프 경이 그녀를 안전하게 크루얼로 데려오라는 임무를 자신들에게 맡겼노라고

리차드

경이

용건을

말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른 얘긴 전혀 없었나요?] 당혹스럽고도 두려운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옷가지와 개인적인 물품 등 아씨의 모든 소지품들을 가져와야 한다고만 하셨으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당신이 크루얼에 있어야 한다는 얘기 같습니다.] 그녀는 까무라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때 모든 걸 체념하고 크루얼에 살면서 그곳에서의 고통을 견디기로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게 그녀는 펄시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고,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되었는데, 이제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짐을 모두 싸자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힘없이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일찍 온 겁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서둘러 주십시오.] 토르프 경이 이상하게 계속 싱글거리며 쾌활하게 대꾸했다. 날 기다리고 있는게 뭔데 서두르라는 거야? 꾸물대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레오니는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한 목소리로 기버트 경에게 말했다. [저 분들을 편안하게 해주시고, 그런 다음 모을 수 있는 하인들을 모두 모아 내게로 보내주세요.] 레오니는 돌아서서 네 명의 기사에게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침실로 되돌아 갔다. 아침 내내 쓸데없는 생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짐싸는 걸 지시했다. 생각할 틈이 있었다면, 불안에 떨며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뒤범벅이 되었으리라. 그녀는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롤프에 대한 감정이 한결 누그러졌고 그를 유쾌하게 해주지 않았던가. 그랬던 탓에 그가 다시 크루얼에 오라는 명령을 내리며 무정하게 굴자 그녀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굳이 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아내를 설득해서 자신의 침대로 데려갈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명령만 하면 됐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이라면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남자가 싫어 견딜 수 없는데도 과연 그럴 수 있는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녀는 특히 그가 잘생긴 게 혐오스러웠다. 그의 잘생긴 외모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를 끄는, 악마의 상징 같았다. 앞으로 그 남자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들 사이에서 괴로워하지 않으리란 한 줄기 희망이 나에게 있을까?♣

14 롤프는 로데성 포위 공격상황을 점검하고 그날 밤 늦게서야 크루얼에 머물러 아멜리아와 대화의 시간은 가졌다. 지금 롤프는 아멜리아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상황이 더욱 뒤틀려 버렸다. 그가 아멜리아에게 궁정으로 돌아가 줘야겠다고 말하자, 느닷없이 그녀는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제발 내쫒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녀의 눈물이 성가시기만 했다. 아무튼 두 사람은 서로 그 어떤 사랑의 서약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임신 중이라고 고백하자 그는 그녀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건 유쾌한 소식이 아니었지만, 롤프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여기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에게 남겨두고, 그녀는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아주 흔쾌히 동의 했다. 그녀는 그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그와 그의 아내에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녀가 어디 다른 곳에 가 있었으면 싶었다. ‘ 내 성들 중 어디 다른 곳에서 지내는 게 당신에게 좋을 거요. 특히 엑스포드 성은 자리가 잘 잡혀 있소.’ ‘ 하 지 만 왜요, 영주님? 당신의 아내는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모르고 있답니다. 그녀는 내가 당신의 피후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튼….’ ‘제발, 그러지 마세요.’ 아멜리아가 다시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홀몸이 아닌데, 낯선 사람들에게 억지로 떠맡겨지게 되면 전 견딜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의 아내는 제가 여기 있는 걸 좋아할 거예요. 맹세해요. 에바라드 경은 아내가 없으니까 함께 있을게요. 그리고 이곳에는 레오니와 동무할 만한 사람이 없어요. 제발, 영주님.’ 냉정하게 거절해야 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녀를 보살피는 게 그 여자에 대한 의무였고, 또 그녀가 실제로 어떤 해도 끼칠 것 같지 않아 마지못해 동의 했다. 크루얼 성으로 들어서는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이 끈질기게 괴롭혔다. 하지만 홀 저편 끝에 있는 커다란 난롯가에서 토르프가 혼자 앉아 있는 걸 뱔견하고는 그런

기분은

눈녹듯이

사라져버렸다.

롤프는

토르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남자 하인들 대부분은 초라한 침상을 벽을 따라 펴고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더 작은 난롯가에는 몇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이층에 이르는 계단 벽에 붙어 있는 횃대에서 불꽃을 뿜어내고 있지만, 지나치게 터다란 홀을 밝히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두 개의 난로 역시 따스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커다란 홀에 날로가 두 군데 있어도 추운 날엔 특히, 따듯하게 지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토르프는 옆에 있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롤프가 앉고 나서야 인사를 건넸다. 롤프를 바라보는 그 중년 기사의 두 눈동자에는 많은 관심을 담고 있었지만 아주 무심해 보였다. 항상 그랬다. 토르프는 승리감에 젖어 있을 때나 불쾌할 때나 표정이 한결 같았다. 그는 우쭐대거나 자못 흡족한 듯이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하며 롤프가 무슨 말을 해주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내 명령을 수행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 같군요. 그녀는 여기 있소?] [있습니다.]


롤프는 그때까지도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다가 갑자기 입안이 바싹 타 들어감을 느꼈다. [힘들지 않았소?] [그녀의 가신이 우리를 향해 검을 빼려고 하긴 했지만….] 토르프는 롤프의 표정을 보고 싱긋 웃었다. [그녀가 그러라고….] [오, 결코 아닙니다. 그녀의 부하는 우리가 아씨에게 존경심을 보이지 않은 것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당연한 실수였습니다. 그녀가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그녀가 누군지 몰랐거든요. 왜 그런지 영주님은 분명 아실 텐데요.] 사실이 그랬고, 그들이 어떤 걸 보게 될는지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고 토르프가 은근히 빗대어 나무라고 있다는 걸 롤프는 쉽게 눈치챘다. 레오니를 처음 봤을 때 토르프가 얼마나 놀랐을까를 그는 상상해보았다. 토르프도 분명 자신만큼 엄청나게 놀랐으리라. [그녀의 반응은 어떻소?] [그녀는 미소를 짓지도 않았고, 우리를 보는 게 반갑지도 않은 것 같더군요, 만일 영주님이 듣고 싶은 얘기가 이런 거라면요. 그녀는 다른 얘기없이 그저 자신이 여기 와야 하는 게 영주님의 명령에 의한 건지만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고나서는, 하인들을 불러 그 즉시 준비를 하더군요.] [그리고 여기 와서는?] [좀더 분명하게 말씀해주십시요.] 토르프가 마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순진하게 대꾸를 했다. [뭘요? 때로는 내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내 생각을 다 알고 있잖소. 내가 뭘 알고 싶어하는지 괜히 떠보지 마시오.] 토르프가 다시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정말 말씀 드릴 게 없습니다. 그녀는 도착하면 영주님이 여기 계실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더군요. 영주님이 없는 걸 알고는 영주님 방으로 들어가더니 그 이후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데려온 하녀 두명도 함께 있습니다. 아참, 다미안은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다미안은 그 두 하녀와 방을 같이 쓰게 되는 건가요?] [다미안은 로데에 두고 왔소. 그리고 방을 같이 쓰지 않을 거요.] 롤프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누구든 나의 침실 너무 가까이에서 자지 않았으면 싶소. 이성에 잠잘 곳은 많으니까.] 토르프는 입끝을 말아올리며 싱긋 웃었다. [그야 당연하죠.] 토르프와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은 후, 롤프는 이층 침실로 오르는 구부러진 좁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토르프의 말대로 하녀 두명이 곁방에서 자고 있었다. 한 하녀는 바로 문 앞에다 초라한 침상을 깔아놓은 탓에 그가 문을 열자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그 비명소리에 다른 하녀도 깼고 잠시 후에는 그의 방으로 통하는 안쪽 문이 급히 열리더니 레오니가 황망하게 잠옷을 부여잡고 거기에 서 있었다. 촛불 하나만이 밝히는 어스레한 빛이 레오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욱 고혹스럽게 비추고 있었다. 롤프는 한참 동안 그녀에게 사로잡힌 듯 넋을 놓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 하녀에게 나가라고 이르며 퉁명스럽게 명령했다. [내가 없을 때 아씨가 원한다면 여기서 잘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있을 때는 절대 안된다. 아침에는 아씨를 도우려고 다시 여기와도 좋지만, 그러라고 하기 전에는 들어와선 안 돼. 날 깨울 필요 역시 전혀 없다. 때와 상관없이 내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일부러 와서 날 깨우지 말아라. 알겠느냐?] 윌다와 윌다보다 더 나이가 많은 메리는, 무라고 대답하기 전에 레오니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들은 롤프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즉각 자신에게 먼저 반응을 보이지 않아 버럭 화를 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사실 은근히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저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기분을 내색하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가거라, 토르프 경이 여자들 숙소를 가르쳐 줄 거다.] 하녀들이 허둥지둥 모습을 감추자 롤프는 안쪽 방으로 들어와서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이렇게 빨리 크루얼로 돌아와 주어서 정말 고맙소.] [저한테 선택권이 있었던가요, 영주님?] [없지, 하지만 당신은 출발을 늦추려고 수백 가지의 핑계들을 생각 해 낼 수도 있었을 거요, 다행히 그러지 않아서 난 기쁘오.] 그래도 그녀는 문에서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을 닫으시오, 레오니. 그리고 들어와요.] 그녀는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는 게 영 못마땅했고, 그의 침착함 역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문을 닫고서 마지못해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잠옷 허리띠가 놓여 있는 침대곁의 궤짝으로 곧장 갔다. 그녀가 허리띠를 다 매고서도 그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자 롤프는 한숨을 쉬었다. [늘 이래야 하는 거요?] 검을 풀어 옆으로 치우면서 그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항상 당신에게 도와달라고 청해야 하는 거냔 말이오.] 레오니는 얼굴을 붉혔다. 그의 말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당연히 나에게 아무 것도 요청할 필요가 없지. 아내의 의무란, 남편이 필요로 하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미리미리 챙겨주는 것이잖아. 하지만 그녀는 다가가지 않았다. 왠지 남들처럼 평범한 아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가장 기본적이 아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왜 아내의 의무를 일일이 수행해야 하는가? [전 기사의 시종이 아닙니다, 영주님.] 그는 무뚝뚝한 표저으로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도와주기 싫다는 거요?] 레오니는 온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감히 그에게 어떻게 반항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이곳에는 하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오기보다는, 하인을 깨우는 수고를 하는게 낫다는 거요? 늦은 시각이요, 부인. 당신과 나만 빼고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소.] [전…, 좋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죠, 영주님.] 그녀는 적어도 자신이 마지못해 한다는-그게 그를 화나게 했든, 아니든 사실만큼은

그에게

알려줬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롤프가

간에-그 의자에

앉으려고 몸을 막 숙이려 하자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그 위에 서야 할 거예요.] 그 의자의 높이는 단지 60 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롤프는 의자를 쳐다보았다. [저건 올라가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오. [기버트 경을 도와줄 때 그렇게 했습니다.] 의자로 올라가면서 그녀가 고집을 피웠다. [자칫하다간 떨어질 거요.] 그가 그녀에게 경고하자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안 그럴걸요.] [흠, 난 당신이 정말 얼마나 작은지 잊고 있었소.] 그의 쉰 듯한 목소리가 얼마나 짜릿했는지, 마치 애무하듯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레오니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재빨리 몸을 숙여 그의 쇠미늘 갑옷의 끝단을 붙잡았다. 빨리 끝내야 하는데…. 그녀는 그의 머리쪽으로 그 무거운 갑옷의 맨 끝을 위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쇠미늘 갑옷이 기버트 경 것보다 얼마나 더 무거운 지를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평소처럼 그걸 홱 잡아당기다가, 무게를 못 이겨 몸이 뒤로 쏠리는 순간 균형을 잃었다. [얼른 갑옷을 바닥에 떨어뜨려요.] 그녀가 간신히 갑옷을 떨어뜨리자 그가 그녀를 붙잡았다. [당신은 이런 일에 적당치 않은 것 같군.] [내려주세요.] 그의 팔에 매달려 있는 꼴이라 당황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사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침대로 달려가 얼른 커튼을 쳤다. 롤프는 의자를 제대로 놓고 앉아서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침대를 쳐다보았다. 그의 작은 아내가 긴장을 풀려고 하지 않은게 뜻밖의 일로 비쳐졌다. 어제 그가 한 경고가 그녀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단지 사태만 악화시킨 것 같았다. 그는


화가 치밀어 숱 많은 머리카락 속으로 두 손을 찔러 넣었다. 어제 그는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 외에 뭘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화를 낸다는 게 상황을 더 나쁘게 몰고 가지 않았는가. 그랬다. 그의 노여움은 그녀에게 아무런 반응을 일으키지 못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성질을 다스릴 자신감이 그에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여자들이 얼마나 많든 간에, 그 여자들이 펄시윅 여자들만 아니라면 자기는 상관하지 않겠노라고 레오니가 당차게 말했을 때, 그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혼돈 스러웠다. 여자의 질투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니? 어떻게 이 사랑스런 여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내 마음을 어떻게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녀를 데려온 나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단 말인가? 롤프는 재빨리 나머지 옷을 벗어 던졌다. 어색한 기분이 들어 그는 촛불을 끄지 않고 침대로 올라갔다. 그러고서도 침대가 어둠에 갇힐까봐, 자기 쪽의 묵직한 침대 커튼을 치지 않았다. 레오니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잠옷을 그대로 입고선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담요를 치우고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혔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안고서, 어린애처럼 흔들어 얼렀다. 여전히 그녀는 가만히 있었지만 경직되어 뻣뻣했다. 그는 그녀를 안은 자세에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레오니, 몇 살이요?] 적막에 싸인 방 가득히 울려퍼지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레오니는 깜짝 놀랐다. 레오니는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잠시 기억하려 애썼다. [열아홉 해를 살았어요.] [그럼 내가 십년을 더 살았군, 당���과 너무 나이 차이가 많다고 생각하오?] [그…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롤프는 마음내키지 않아 하는 그녀의 대답에 거의 웃을 뻔했다. [그렇다면 내가 검어서 그렇게 싫은 거요?] [검어요? 당신의 구릿빛 피부는….] 레오니는 질겁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얼마나 잘생겼는지를 말하려고 하다니! [그렇다면, 내 모습 어디가 그렇게 당신 비위에 거슬리는지 솔직히 말해 주겠소?] 그건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로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레오니는 달콤한 말로 그의 허영심을 채워주느니, 차라리 자신의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찬사를 원했다면, 그는 다른 데에서도 들을 수 있잖아. 찬사를 한두 번 듣지는 않았을 테니까. [너무 많아서 듣기가 지루하실 겁니다, 영주님.] 조롱거리는 말에 그가 껄껄대자, 레오니는 아주 즐거웠다. [부인, 당신에게는 내 비위에 거슬리는 접이 전혀 없소. 당신은 아주 작자만, 그것조차 마음에 드는걸.]


오, 지독한 거짓말!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내쫓는 법은 없다구요! [당신은 아내를 원치 않았어요.] [무슨 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술에 취해 정신을 잃는 게 행복에 겨운 신랑이란 걸 솔직하게 표현하는 건가요?] [사실….]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당신이

베일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지를

듣고

나서,

당신에게

굳이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기 싫었소.] 레오니는 그녀가 맞았다는 걸-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했다는 걸-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에 대한 배려에서 그가 그렇게 처신했다는 걸 알고 놀랐다. 하지만 그 환상도 잠시, 롤프의 이어지는 말에 한순간 품었던 경외심이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그리고 그나마 결혼 전에 당신에 대해 내가 알던 사실은 당신이 못생겼다는 거였소.] [알겠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관심이 있었던 건 내가 아니었군요.] 레오니는 숨을 들이켜며 냉정하게 대꾸했다. [대부분의 결혼이 그렇지 않소?] [그렇죠.

하지만

우리들처럼

급작스런

결혼은

드물어요.

당신은

아내를

원했던게

아니었어요.] [레오니, 내가 싫었던 건, 당신과 결혼한 나의 이유였소. 난 화가 나서 청혼하게 된 거고, 그러자 이내 벗어날 길이 없었던 거요. 하지만 아내는 필요한 때였소.] 그가

돌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롤프는

어리둥절했다.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다 털어놓았는데 아직 더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건가? 그는 그녀와 눈길을 마주치려고 어르면서 그녀의 턱을 브드럽게 들어 올렸다. [우리가 결혼한 이유가 어쨌건 간에, 지금은 내가 아주 만족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치 않소?] [당신은 난 쫓아냈어요.] 그녀는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게 당혹스러웠지만, 마침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수였소.] 그는 낮고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녀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말해주세요. 그래서 날 다시 여기로 데려온 건가요? 새로 시작하려고?] [그래요, 바로 그 거요. 내 사랑.] 그는 그녀의 입술에 대고 그 고백을 속삭이고는 그녀에게 키스룰 했다. 그는 한 여자와 이토록 완벽하게 마음이 맞아본 적도 없었고, 여자가 진심으로 양보했을 때 그렇게 안도감이 든 적도 없었다. 그녀가 그에 대해 긴장을 푸는 게 느껴지는 순간, 그는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경험이 없다는 걸 염두에 두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레오니는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부드러운 키스에서부터 마음 저 깊은 곳을 휘젓는 깊은 키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핑핑도는 기분이란! 한순간 현기증이 나는 것 같더니, 나른하고 달콤한 기분으로, 그러다가 이내 하늘을 떠다니는 느낌으로 현기증이 났다. 그녀는 잠옷이 서서히 벗겨지는 걸 의식하지 못했지만, 롤프의 손이 그녀의 가슴에 처음으로 닿는 순간은 예리하게 의식했다. 그의 손이 분명 그곳에 있었다. 아주 살짝 누르는 그의 손길이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하더니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애무에 그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한 손을 롤프의 등에 살짝 대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우람한 근육의 움직임과 탄력 넘치는 그의 피부를 만진다는 게 묘한 감정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그의 키스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자신이 옆에다 눕히고서 그녀의 머리가 베개에 닿기도 전에 그녀 내부에 격렬한 욕망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냈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신음을 내뱉으며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고 그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여자를

이렇듯

경건한

몸짓으로

다루는

남자는

드물었다.

그녀를

만지는

손길은

따사로움과 소중함을 음미하려는 듯했으며, 그러면서도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롤프는 그녀의 갈망이 절정에 달했다는 걸 충분히 느끼며 서서히 그녀와 몸을 합쳤다. 그의 가슴에 난 털이 그녀의 민감한 가슴에 관능적으로 자극하면서 짜릿하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달콤함을 한껏 음미하려는 듯 그의 입술이 멈추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녀에게 주었다. 소중한 선물을 선사하는 그런 심정이랄까. 두 사람은 환희의 물결을 타고 사랑의 바다를 항해했다. 물결은 어느덧 격렬한 파도가 되었고, 두 사람은 파도를 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황홀경에 몸을 맡겼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녀는 입술에 닿는 그의 부드러운 마지막 키스를 꿈결처럼 받아들였다. 15 [아씨?] 윌다가 부르는 소리에 레오니는 눈을 뜨고 평상시와는 다른 자세로,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려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난 이런 자세로 자는 걸 결코 좋아하지 않았는데, 웬 일이지? 갑자기 지난 밤이 떠오르자, 짜릿한 흥분이 온몸을 훓고 지나갔다. [아씨?] 윌다가 채근하듯 침대곁에 서서 레오니의 잠옷을 내밀자 레오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누워서 지난 밤의 기억을 음미하고 싶었는데, 아니면 윌다가 아니라 남편이 거기 서 있든지…. [내가 늦잠을 잤니?]


[아니에요. 그 분이 아래층에 계셔서 미사에 늦지 않게 아씨를 깨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윌다가 심통맞은 목소리로 말하자 레오니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윌다가 왜 심술궂은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그와 방을 같이 쓰면, 그의 습관에 따라야지.] 그러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너도 잘 잤니?] [아무래도 안 그런 것 같아요. 으그, 그 징그러운 벼룩들이라니! 산채로 잡아먹힐 뻔했다구요!] 레오니도 몇 번 물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이곳은….] 그녀는 어제 처음으로 홀을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을 떠올라 말을 멈췄다. [끔찍해요.] 윌다가 레오니 대신 말을 끝마쳤다. [주방과 하인들의 숙소는 홀보다 더 심해요. 그리고 화장실 가기가 겁나고요. 이 방만 그런 대로 깨끗하네요.] 레오니는 윌다가 그녀의 머리를 빗질하기 시작하자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사실, 알에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크루얼을 관리할 안주인이 없긴 했지만, 담당 집사가 있었어. 그리고 지금은 아멜리아가 있잖아.] 그러다가 이리저리 홀을 휘젓고 다니던 해충들을 떠올리고는 진저리를 쳤다. 뼈다귀들, 썩은 음식들, 심지어는 개의 배설물에 해충들이 우글거렸다! [분명히 그 여자는 신경쓰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보니까, 하인들은 누가 시키지 않ㅇ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걸요. 그들은 자신들의 숙소조차도 깔끔하게 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구요.] [내 남편이 이렇게…그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는 줄 생각도 못했는데.] [하지만 그분은 여기에 거의 안 계시던대요, 아씨.] [뭐라구?] [밀드레드가 그러던 걸요. 나리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 군대 막사나 그런 데에 사신대요. 아마 그곳 상태 역시 여기와 그다지 다르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윌다. 그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건 무슨 얘기니?] [그분은 크루얼을 손에 넣은 뒤로, 자주 크루얼을 비우신다고 하더군요. 밀드레드가 그랬어요.] [밀드레드가 그 외에 다른 얘기도 해줬니?] 레오니는 윌다가 자신에게 비밀로 하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윌다는 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재잘거렸다.


[아씨,

왕에게서

광활한

켐프스톤의

영지를

받았는데도,

전투없이

성문이

열린건

크루얼뿐이래요. 그것도 알에인 경이 도망가서 이곳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가 들었던 마상시합 생각나세요?] [희미하게….] 레오니가 그 마상시합을 아무도 몰래 구경한 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거북살 스럽게 대답했다. [글세, 그건 켐프스톤 가신들과 성주들을 한곳에 모으기 위한 핑계였다는 군요. 그렇게 해서 그들이 새영주인 롤프경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말이에요.] [그랬구나.] 레오니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을 붙였다. [한 명씩 차례로 항복을 권고하는 대신에 그 방법이 훨씬 손쉬웠을 거야. 혼자서는 거부당할 염려도 있고, 자칫하다간 성안에 갇혀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어머나! 밀드레드도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아씨가 자랑스럽다는 듯 윌다는 신이 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행히 그들 모두가 참석했지만 맹세하려고 왔던 게 아니래요! 일곱 명이 모두 롤프 경을 공격하다가 도망쳤다는 군요.] 이제야 레오니는, 그날 목격한 일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무리 공포때문이라지만, 전 영주인 에드몬드 경의 가신들이 비열한 행동을 벌인 게 그녀는 혐오스러움이 치밀었다. 새영주인 롤프가 자신이 어떤 인물이라는 걸 입증할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 [내 남편은 그런 공격을 받은 후에 어떻게 했다니?] [일곱 성을 전부 포위했답니다.] [어떻게…일곱 군데 성을? 그렇게 할 만한 병사들이 있었대?] 윌단는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성 하나를 포위하는 데 병사들이 얼마나 필요한데요? 펄시윅은 한 번도….] [알아, 알아.] 레오니가 손사래를 치며 성급하게 말을 막았다.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그저 몹시 놀랄 따름이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성들끼리 서로 도와주는 걸 막기 위해서 일곱 성을 동시에 봉쇄해야 했지만, 그러자면 분명 수 천의 병사들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규모 군대가 펄시윅 근처에 있었다면 벌써 그녀에게 보고가 들어왔을 텐데, 지금까지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었다. [틀림없이 제대로 들은 거니, 윌다? 내 남편이 켐프스톤 성들 중 한 군데만 전쟁을 벌인게 아니었니?] [아니에요, 아씨. 그 성들 가운데 성 네 곳은 이미 점령됐대요. 로데성은 지금 포위 공격 중이고, 다른 성들은 그분의 명령을 기다리며, 봉쇄 중이래요.] 레오니는 이 모든 전투가 뭘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여러 달 동안 남편을 자주 못 보겠구나. 그렇지 않겠니?]


[안심이 되시겠군요.] 레오니는 윌다가 드레스를 가지러 간 사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윌다가 이번엔 잘못 짚었어, 윌다는 레오니가 이 결혼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윌다, 오늘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싶어, 우리가 프랑스 상인한테 사들인 푸른 실크 드레스 말이야.] [하지만 그 옷은 특별한 때만 입으셨잖아요. 결혼식 때도 거부….] [알아. 난 내 결혼식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그걸 입고 싶어.] 윌다는 더 따지지 않았다. 그러고서 윌다가 긴 소매가 달린 푸른빛이 감도는 실크 드레스를 매만져 줄 때 레오니는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그 위에 검붉은 스페인 모직으로 된 외투를 걸쳤다. 외투 옆자락이 터져 있어 안에 입은 푸른 드레스가 그 사이로 매력적으로 언뜻언뜻 보였고, 종 모양의 소매에는 수가 잔뜩 놓여 있었다. 긴 외투는 정말로 아름다웠고, 현재 유행하는 스타일로 그녀의 몸에 꼭맞게 맞췄다. 높은 목선 둘레에는 은색 실로 수를 놓았고, 허리 둘레를 느슨하게 매어 무릎까지 찰랑찰랑 거리는 허리띠는 은빛 끈을꼬아 만들었다. 레오니는 숱이 많아 소담스런 은빛 머리카락을 묶지 않고 땋았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가슴 위로 단정하게 풀어내렸다. 하얀 린네르로 만든 사각 끈 대신 은색 끈으로 머리띠를 했다. 그녀는 푸른빛을 띠는 스타킹과 부드러운 가죽신을 신어 단장을 끝냈다, [내 모습이 영주님의 지위에 걸맞아 보이니?] 레오니는 약간 쑥스럽게 미소를 띠며 물었다. [네, 정말로 그래요.]] 윌다도 미소를 지었다. 레오니를 이토록 아름답게 꾸미는 데에 자신도 한몫 거들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이상 숨어 있지 말자. 우린 앞으로 몇 주 동안 할 일이 많을 거야. 그러니 우리 일을 시작하도록 하자.] 윌다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채고는 눈빛이 환해졌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아씨. 그러면 제가 이 게으른 인간들을….] 레오니가 얼른 윌다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먼저 영주님의 허락을 받아내야지.] 윌다는 갑자기 기분이 상했다. 이젠 레오니 아씨가 더 이상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레오니와 같이 방을 나서면서도 윌다는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다. 가엾은 레오니 아씨….♣

16 그러나 레오니에게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루얼의 사제가 매일 아침 여러 차례의 미사를 거행하는 작은 방을 나설 즈음, 레오니는 아멜리아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레오니는 재빨리 놀라움을 감추었지만 아멜리아는 불행히도 숨기지 못했다. 얻어맞은 게 다 나았다면 레오니가 아주 예쁘리라 예상하긴 했다. 레오니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롤프가

다시

그녀를

데려왔겠는가?

하지만

정교하게

빚어진

귀족적인

얼굴

생김새에가 우유빛으로 빛나는 피부로 무척이나 눈이 부신 이 여자는 정말이지, 너무도 아름 다웠다. 어떤 남자가 이런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정부를 원하겠는가? 아멜리아는 당황했다.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로 간신히 롤프를 믿게 만들었는데…. 그리고 레오니가 한두 달 내에 다시 가버리면, 그 아이를 잃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 치밀한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그러면 모든 게 예전과 다름없게 ��� 터였는데. 그러나 이렇듯 남편을 사로잡는 미모의 아내가 빠른 시이 내에 사라지지 않으리란 생각에 조바심이 일었다. 아니, 이런 여자는 절대로 다시 내쫓기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여자가 여기 있으면, 아기를 잃었다고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일 텐데. 당장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를 급박한 상황이 벌어질 거야. 이제 남은 가능성이라고는 빠른 시일 내에 임신을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롤프를 유혹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 흥, 롤프처럼 검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괜찮을 거야. 에바라드 경? 아니면 미소년인 그 기사도 괜찮겠지. 그 기사 이름이 뭐더라? 아이의 아빠가 누가 되든 상관없어, 일단 임신만 하게 되면 시긴을 벌 수도 있고, 그녀와 그의 자식을 언제까지나 돌보게 롤프를 설득 할 수 있으리라. [오, 레오니! 정말 몰라봤어요.] [최근에 많은 일이 일어났죠.] 레오니가 능숙하게 받아쳤다. 아멜리아는 레오니의 표정을 보고는 슬그머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좋아, 이 여자는 내가 이직도 여기 있는 걸 싫어하지 않는군. 조금만 힘쓰면, 오히려 그녀는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지도 몰라. [어제 도착했을 때 당신을 맞아하지 못해 정말 미안해요.] 아멜리아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거침없이 이었다. [하지만 할 일이 많았거든요. 내 소지품들을 정리 하느라구요. 롤프가 미리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걸 신속하게 옮겨야 했답니다. 하지만 당신도 분명 그런 성가신 일들을 하셨을 테죠.] 레오니는 그 여자의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뻔뻔스럽게도 자기가 이제 막 롤프의 방에서 옮겨갔다는 걸, 롤프가 결혼한 후에도 줄곧 그와 그 방을 같이 썼다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그러니까 하인들도 당연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은지. 내가 남편 곁에 있는데도 이 여자는 크루얼 성을 떠나지 않으리란 걸 넌지시 내비치고 있었다. 레오니는 등골이 오싹해 다그치듯 물었다. [여전히 여기서 살 건가요?] [하지만, 아씨, 달리 어디서 살겠어요? 난 롤프의 피후견인….] 아멜리아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당신이 어떤 여자인지 난 알아요.] [아!] 아멜리아가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새치름한 표정을 지었다. [전 당신이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롤프에게 말해봤지만, 그는 당신이 반대할게 아무 것도 없다고 우겼죠. 당신이…나와 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걸 그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 이해하시죠? 롤프는 질투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질투!] 레오니는 너무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롤프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있으세요? 얼마나 무시무시한데요.] 아멜리아는 정말로 몸서리를 치는 것 같았다. [그가 화가 나 있을 때는 난 되도록 피해 있어요. 당신도 그렇게 될 거예요. 하지만 이런 얘긴 귀담아 듣지 마세요. 그래요, 난 당신같이 품위있는 여자 분은 질투하지 않으리란 걸 아니까요. 당신이 내게 롤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당신은 그가 날 성가시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죠.] 레오니가 다부지게 맞섰다. 아멜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얼마나 변덕스러운 줄 이제 아시겠죠? 하지만 용기를 내세요. 그는 분명 생각을 다시 바꿀 거예요.] 레오니는 그 미끼에 걸려들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이성을 누가 관리하고 있는지 말해줄래요?] [롤프는 나한테 책임을 맡겼지만, 사실은 당신에게 기꺼이 양보하고 싶은 일이에요.] [양보하고 싶다구요?] 고개를 끄덕이며 아멜리아가 눈을 내리 깔았다. [당신이 도와주면 좋겠다고 롤프에게 말해봤지만, 아아, 그런 일로 당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펄시윅에서 했던 대로 당신이 일을 처리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하던데요. 그는 펄시윅성을 꾸리는 당신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아직도 그 일을 두고 화를 ….] [지금 내 남편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레오니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물론이죠. 그는 항상 가는 곳을 내게 말하니까요. 마구간에 간다고 하길래 난 거기 갔어요, 그런데 어떤 멍청이가 그의 종마를 당신의 작은 말 곁에다 두었….] 레오니는 아멜리아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등을 도리고 안뜰로 걸어 나갔다. 레오니는 안뜰에 멈춰서서 잠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서 숨을 크게 내뿜었다. 잠시 전에 있었던 그 모든 대화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가슴속에 꼭꼭 박혀버린 걸….그럴바에야 이곳에 숨은 듯이 지내는 편이 더 나으리라.♣


17 나른한 날. 눈부신 햇살은 보드라운 꽃잎들을 어루만지며 새롱거리고 있었고 새들은 소리를 모아 요란스레 노래를 불렀다. 따스하고 향긋한 미풍이 부는 찬란한 초여름 날이었다. 아멜리아에게서 벗어난 레오니는 안뜰에서 숨죽여 기다렸다. 마침내 롤프가 혼자서 마구간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사라지자 마자, 그녀는 마구간으로 재빨리 들어가 자그맣고도 온순한 자신의 암말이 롤프의 거대한 종마 때문에 상처를 입지나 않았는지 직접 살펴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자 안도감을 느끼며 그녀는 오솔길을 따라 숲에 이르렀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에 그곳에 잠시 서성댔다. 아무도 없었다. 외로움이 밀려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는 자신이 싫어졌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껴 그녀는 마을까지 계속 걸어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일 역시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농노들이 크루얼에 해를 가했던 걸 잊고 있었지만, 크루얼의 농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곳 여자들은 그녀에게 수줍은 말 한마디나마 건네지 않았고, 남자들은 그녀를 보고선 슬금슬금 피했다. 정오 무렵 크루얼 성으로 되돌아왔지만, 그녀는 아직도 남편을 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착찹한 기분을 달랠겸 주방과 이어지는 정원을 찾았다. 그 정원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몹시 놀랐다. 잡초들이 너무 우거져 채소와 식용으로 쓰이는 식물들이 흔적조차 없었다. 크루얼은

불결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엉망이자만,

정원은

식품의

공급지가

아니던가,정원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나면 케케묵은 음식들을 맛있게 만드는 향신료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약초들을 제공했다. 그 정원이 이 지경이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씨를 찾고 계세요.] 레오니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다보았다. 예닐곱 살 된 소녀가 정원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흠, 그래도 누군가는 애를 쓰고 있는 모양이군. [네 이름이 뭐니?] [이델리에요.] 레오니는 이작은 소녀가 안절부절못하자 마음 놓으라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잡초를 다 뽑자면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 [오, 아니에요, 아씨. 제가 이 일을 혼자 해낼 수 없다는 걸 알면 요리사가 싫어할 거예요. 전 샐러드 만드는 데 쓸 녹색 잎을 조금 뜯는 것뿐일걸요.] [녹색 잎이라구? 그러면 요리사가 어떤 녹색 잎을 뜯으라는 얘길 하지 않았단 말이니?] 레오니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 아이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요리사에게 물어봤어요, 하지만… 하지만 요리사는 녹색 잎이면 아무거나 된다고 그랬어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전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아씨.] 레오니는 다시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꿨다. [아니야, 넌 시키는 대로 어. 이델리, 부엌일을 도운지 얼마나 되었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전 베 짜는 걸 배우고 있었는데, 아멜리아 아씨가 아이들이 성안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제 언니가 절 부엌으로 보냈어요.] [그렇다면 누군가 너에게 잡초로 엉망진창인 이 정원에서 뭘 뜯고 뭘 뽑아버려야 하는지 가르쳐줬어야 했던 거야, 네가 지금 뜯고 있는 걸 난 쓸모없는 것이라고 부른단다.] 이델리가 레오니의 친절한 말투에 생글생글 웃었다. [정말이세요?] [그럼, 자, 내가 하는 걸 잘 봐라.] 레오니도 미소로 답했다. 그녀는 몸을 숙이고 우거진 수풀을 헤쳤다. [아! 그래도 먹을게 있긴 있구나. 이게 바로 샐러드에 쓴단다.] 그리고서 그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 소녀의 바구니에다 민들레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정원에서 당신을 찾아내는군.] 느닷없이 나타난 불청객의 목소리에 레오니의 손이 얼어붙었다. 호흡조차도 멈췄다. [아씨를 찾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델리가 거보라는 듯 재빨리 속삭였다. 레오니느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응, 그랬지, 자, 이제 주방으로 돌아가거라, 이델리. 요리사는 네가 가져온 걸로 샐러드를 만들 거야.] 레오니와 이델리는 동시에 일어섰다. 이델리는 두렵기만 한 켐프스톤의 영주를 재빨리 지나쳐 사라지자 레오니는 그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또다시 그 남자의 잘생긴 모습에 아찔함을 느끼며, 그를 찬찬히 살펴본 그 잠깐 동안은 다른 모든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근육이 돋보이는 두 다리를 감싼 섬세한 긴 양말에서부터, 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게 짠 황금색 실로 수를 놓은 갈색 튜닉에 이르기 까지 그의 옷차림은 그의 강건한 육체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벨벳

같은

그의

갈색

눈동자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아멜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아멜리아에 대해서 묻거나, 또는 그가 그녀를 왜 이곳으로 데려왔는지를 직접 물어 스스로의 품격을 떨어뜨리지는 않으리라 레오니는 결심했다. 새로이 출발하고 싶다던 그의 말은 명백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그리고 더 이상의 거짓말은 혼란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또한, 아멜리아의 일로 화난 거라고 롤프가 생각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걸 정원이라고 부르십니까, 영주님?] 아주 사소한 화제를 먼저 입에 담았다.


롤프는 주변을 아주 잠깐 둘러보고는 다시 앞에 서 있는 사랑스러운 레오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정원에 대해 내가 뭘 알겠소?] [펄시윅에 있는 제 정원을 보셨잖아요.] [그랬나?] 그는 싱글거리며 더 가까이 다가서며 은근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오, 들장미, 난 당신밖에 못 봤소.] 가슴이 세차게 뛰어오르고 얼굴이 불처럼 뜨거워졌다. 이러면 안 돼. 이런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게 마음을 다잡자. 그녀는 그의 마법에 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제

하인들

앞에서

당신이

나를

얼마든지

수치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상기시키려고 지금 들장미라고 부르시는 건가요?] 롤프는 뜻밖의 예민한 반응에 의기소침해졌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광택이 나는 은처럼 빛났고, 진한 두 눈썹을 좁히며 입술을 일직선으로 굳게 다물었다. 또다시 그녀가 화를 내자 그 역시 화가 났다. [제기랄, 그건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레오니는 움찔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 있는 강한 육체로부터 남성적인 힘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 그저 당신이 왜 그 사건을 저한테 상기시키는지, 그 동기를 물었을 뿐이에요.] 롤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말을 했다고 퉁명스럽고 따분한 남자로 몰아붙이다니, 참으로 영리한 여인이야. 이런 특별한 여자를 다루는 건 쉽지 않으리라. 그는 그녀의 단단한 입술 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내 사랑, 당신이 나에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아오? 당신을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질 않소. 만약 내가 당신에게 어떤 불쾌한 기억을 상기시켰다면, 그건 고의가 아니오. 내 진심으로 사과하겠소.] 레오니는 어리둥절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의 말을 믿어도 될까? 그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달래려고 하는 말인가? 이유야 어떻든 그는 일단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녀의 노여움이 금세 사라지고 흥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무척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저…, 절 찾으셨잖아요, 영주님. 제게 원하는 거라도 있나요?] 짓궂게도, 그가 낮게 킬킬 웃자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영주님!] [롤프!] [전….] [롤프.] 그는 계속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며 우겼다.


[당신은 내 아내요. 그러니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그런 형식에 구애될 필요가 없소.] 흥! 굳이 그런 얘기를 할 게 뭐람! 마치 내가 그의 아내라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왜 고집을 피우는 거야! 그리고 지금 그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해서 내가 그의 소유라는 걸 인정하기라도 바라는 모양이네? [레오니? 아직도 그렇게 부끄럽소?] 걸걸하면서도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짜릿하게 퍼졌다. 그녀는 그 핑계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가 기분에 맞춰 감정을 숨길 필요는 없지. 솔직하게 말해야 돼. [단지 부끄러워서가 아니에요, 영주님. 어쩌면 조만간….] 롤프가 한숨짓자 레오니는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난 시간이 없소. 난 내일 여기를 떠나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하지만 내가 돌아올 때는 좀더 편안하게 대해주었으면 싶소. 우리가 결혼 한지 벌써 한 달이 넘었소.] [하지만 같이 있은지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냉랭한 말투로 그 사실을 강조했다. [그래도 적응할 시간은 있었소.] 그 역시 물러남이 없이 되받아쳤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설명을 해야겠네요. 당신은 날 여기서 내쫓았어요. 그래서 난 당신을 다시는 못볼 거라고 생각했죠. 바로 그 사실에 내가 적응 한 거라구요, 영주님.] [그렇군!] 마치 중요한 사실을 깨닫기라도 하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니는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점점 불안해졌다. [왜 절 찾고 있었는지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영주님.] [당신과 함께 오늘 즐겁게 보내려고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어디 있었소?] 그녀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모든 게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이 조용한 노여움은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숨이 막혔다. [거…걸어서 마을까지 가봤어요.] [누가 수행했소?] 맙소사, 그가 이런 사소한 일조차 문제 삼으려 하고 있어! [혼자 간 걸 아실 텐데요.] [알았다면, 묻지 않았을 거요, 혼자라고? 이곳은 당신 마음대로 하는 펄시윅이 아니란 말이오.] [영주님 저 역시 그렇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녀가 모질게 대꾸하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자신의 안전에 대해 전혀 안중에 없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내 사람이고, 난 내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하는 사람이오. 당신에게 항상 호위병을 붙여둬야 하겠는걸?] [그러지 마세요!]


아찔함과 동시에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 [호…호위병도 없이 성을 떠난 건 잘못이란 걸 알아요. 하지만 아무 정신이 없었어요. 시…시간이 좀 필요했던 거예요, 영주님.] 생각지도 않게 말을 더듬자 그녀는 당황해서 재빨리 말을 끝냈다. 그녀는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려 했지만 그가 그녀의 턱을 붙들었다. [내 욕심만 차리려고 요구하는 게 아니오, 레오니. 날 걱정시키지 말아요.] 그녀는 그토록 그에게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의 차분한 말투 또한 미웠다. 하지만 가장 저주스러운 건, 그녀의 기분을 마치 떡 주무르듯 올려놨다 내려놨다 하는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한순간 화가 났다가, 다음에는 위협을 받았다. 게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건 그가 만질 때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이 야릇한 느낌이었다. 그의 손가락들이 그녀의 턱에서 뺨으로 올라왔다. 레오니는 그가 키스하리란 생각으로 숨을 멈췄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눈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그의 눈동자…. [화를 내는 건 때로는 이로워요. 그건 모든 의혹을 사라지게 하고 혈기를 자극하지. 화난 걸 내게 굳이 감추지 말아요, 레오니. 내가 그걸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그게 곪아터질 때까지 참고 있는다면, 난 그게 더 싫을 거요. 나한테 뾰로통하지 마시오, 부인.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내 침대에서까지 화를 내지 마시오.] 가벼운 깃털처럼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스치듯 지나가더니 그는 그녀에게서 벗어나 가버렸다. 레오니는 그의 손가락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뺨에 손끝을 대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18 홀은

금세

사람들로

벅적거렸다.

하인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들을

나르느라

부산스러웠다. 하녀 하나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자 수프가 담긴 커다란 냄비를 멍석위에 쏟았다. 개 다섯 마리가 즉각 몰려들었다. 하지만 뜨거운 액체에 별다른 식욕을 못 느꼈는지 몇 번 킁킁대다가 또 사고가 나길 기대하는 몸짓으로 잇따라 들어오는 고기 접시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크루얼의 집사인 어니스가 그 사고를 바라보며 잠깐 양미간을 좁혔지만, 별 관심없다는 듯이 계속 접시를 채웠다. 하녀 역시 그 일에 대해서는 무덤덤한 모양이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흘린 음식물을 치우라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없는 걸 보아 흘린 음식물을 치우려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크루얼 성에서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너무도 오래 반복된 탓에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음식물을 쏟고도 치우지 않는 걸보고 개탄스러워 했을지도 모르지만,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릴 처지가 아니었다. 에바라드 경은 더 심한


환경에서 살았는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하인들은 스스로 나서서 뭘 하는 법이 없었고, 실제로 점점 더 게으름을 피웠다. 토르프 경은 뭐든 시켜보려고 하는 짓이 쓸데없는 일이라며 오래 전에 포기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철저한 청소를 감독할 만큼 크루얼에 오래 머물러 있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롤프 역시 생각할 게 많은 사람이었다. 아멜리아는 하인들을 다루는 솜씨가 없었고, 롤프의 방을 그런 대로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아내가 있으니 이런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롤프가 생각에 잠겨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건 단지 희망사항이었다. 아멜리아가 말하길, 그의 아내와 얘기를 해보았는데, 레오니는 크루얼을 운영하는 일로 괜한 골머리를 앓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거였다. 롤프는 특히나 레오니와 정원에서 실랑이를 벌인 후라 화가 나서 펄쩍 날뛰었다. 펄시윅은 그녀의 소유라 돌보지만 크루얼은 돌보고 싶지 않다고? 말도 안돼! 아멜리아는 한술 더 떠, 레오니 같은 신분의 여자들은 날마다 자수나 놓고 잡담이나 하면서 지내도록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롤프 역시 그의 어머니도 결코 살림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보며 자랐기에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 펄시윅에는 유능한 집사가 있었을 테지. 할수 없군,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자. 불행히도, 레오니는 그가 그 일로 아직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들어왔다. 그녀는 정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내쫒고 싶은 충동이 불끈 들었지만 너무 많은 눈들이 두 사람에게 쏠려 있어 간신히 충동을 억눌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그의 눈치만 보는 것 같아 그는 더 화가 났다. 계속 불만을 품은 듯한 그녀의 표정에 미칠 것만 같았다. 어젯밤처럼 그녀가 그와 얘기를 하고, 그를 받아들여 주기를 원했는데…. 그들이 모든 오해를 털고 새로운 출발을 하리라 믿었던 게 어리석었지. 다미안이 오후에 새로 손질한 롤프의 갑옷을 가지고 크루얼로 돌아왔다. 갑옷을 손질하는건 그 소년이 가장 자신있어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롤프는 그렇게 어린 시종을 데리고 있어본 적이 없는 데다가, 요즈음에는 그 애를 훈련시킬 여유도 충분치 않았다. 그를 수행하고, 그의 갑옷을 손질하고 갑옷을 입는 걸 돕고, 그리고 그의 식사 시중을 드는게 다미안의 의무였다. 고기를 써는 데서부터 포도주 잔을 바치는 일에까지, 시종이 하는 일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다미안은 롤프를 어떻게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걸 다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해내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오늘, 아내에 대해 자신의 인내심을 다 써버린 롤프는 급기야 그 소년에게 참아왔던 모든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의 포도주가 두 번째 엎질러지자, 그는 홀이 떠나갈 듯 호통을 치면서 그 소년을 내쫓았다. 그러자 다들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먹기 시작했다. 결국, 롤프가 화를 내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레오니는 이미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아멜리아가 롤프의 명백한 승인 하에 그의 음식 시중을 지시하는 걸 보고 레오니는 속이 뒤틀려 롤프에게 톡 쏘아붙였다. [항상 그애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하시나요?] 롤프의 험악한 눈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소. 당신도 입이 있긴 있는 모양이군,] 레오니는 소름끼치는 시선을 피해 식탁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말인가 해야 된다는 걸 몰랐네요. 하고 싶은 말이 아무 것도 없어서요.] [상식적인 예의는 당신에게는 안 맞는 모양이지?] [아니에요, 영주님.]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건 서로 지켜져아 하는 것이죠.] 자신도 그녀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그가 툴툴댔다. [그래서 이제야 하고 싶은 말을 찾아냈군. 흠, 그런데 겨우 비난이라? 침묵을 지키는 게 더 나았을 뻔했소.] [내 의견 따위야 당신에게는 하찮다는 걸 알아요, 영주님. 하지만 당신이 약간의 인내심이라도 보여준다면, 당신의 시종은 시중을 제대로 들겁니다. 그 소년은 침착하지 못한 것뿐이니까요.] [많은 시종을 훈련시켜 봤소?] [아니오.] [정말 하다못해 한 명이라도? 그러면서 내가 내 시종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안다는 거요?] 레오니는 그가 매몰차게 몰아붙여도 당당했다. [영주님, 상식이죠.] [내가 인내심을 보이는 걸로 그 서투른 걸 고치겠소?] [당신이 그렇게 그 애를 노려보지만 않는다면, 그 애는 그렇게 서툴게 시중들지 않을 거예요.] [알겠소. 그렇다면 다미안이 싸움터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때, 만일 그의 적이 미소를 지어 보이면 그가 잘 싸울 거라는 거요? 하지만 한 번이라도 적이 그애를 노려볼 경우에는 어찌되는 거요? 침착을 잃은 손가락 사이에서 포도주잔 대신 검이 떨어지는 거요. 당신이 말하는 상식은 다미안을 죽게 할 거요.] 레오니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의 말이 모두 옳았다. 다미안이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기사로서의 자격을 얻지 못하리라. 농노들이나 여자들은 서툴러도 되지만, 병사는 그럴 수는 없었다. [인정해요. 그래도 당신은 그 소년에게 지나치게 거칠게 대했어요. 이따금씩은 약간의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당신과 그 애, 두 사람 모두에게 이로울 거예요.] 레오니는 천천히 얼굴을 들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순진한 말투로 상냥하게 물었다. [내가 또 당신을 화나게 했나요, 영주님?] 롤프는 웃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그의 분노에 불을 당기려고 하는 짓에 더욱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도대체 뭘 충고하려는 거요?]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세요.] [받아들이기 어렵소.] [그렇다면 역시 인내심을 조정할 밖에 없네요, 영주님.] [대가 없는 인내란 노력할 가치가 없지.] 그가 으르렁거리며 되쏘았다. 경고였다. 그는 너무 많은 걸 기대했다. 그가 기꺼이 주고 싶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그랬으리라. [대가란 받을 가치가 있을 때만 돌아오는 거죠.] [내가 대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말이오?] [그건 당신 양심의 문제죠, 영주님.] [젠장, 이것과 양심이 무슨 상관이 있소? 내 양심은 깨끗하오!] [물론 그러시겠죠.] 그가 힐책하듯 물었으나 그녀는 흔들림없이 되받아쳤다. 이제 더 이상 말을 하는 건 위험했다. 롤프는 포도주를 다 마시고는 더 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레오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말을 붙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도통 저 남자와는 말이 통하지가 않아. 남자들은 대부분 이중적인 가치 기준으로 사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의 남편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유독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완벽함을 삼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남자였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는 아내와 정부를 한 집에 두는 이 역시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또한 정부에게 집안일을 맡기는 것도 잘못된 점이 아니었다. 남자의 부정은 당연한 듯 항상 그냥 넘어가지만, 여자가 나쁜 길에 빠지려고 하면 엄청잔 화를 당했다, 모두 위선이야! 엄청난 불합리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만 할 운명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런 종류의 위선을 절대로 모르는 체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식사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그녀는 전혀 식욕이 없었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음식을 먹는 건 아주 해로웠다. 또 음식은 맛도 없는데다가 양념도 안 돼 있어 끔찍할 정도였다. 더욱이나 빵에 끼워먹는 우유와 빵가루를 섞은 저민 고기 반죽에는 향신료가 들어 있지 않았다. 양젖으로 만든 치즈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야채의 영양가를 높이려고 넣은 버터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건 멍석에서 나는 악취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영주님, 그만 물러가도 될까요?] 롤프는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가 막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그녀를 불러세웠다. [레오니, 이제 그 심술을 이곳에 남겨두고 가시오, 곧바로 당신에게 가겠소.]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고,

그의

침대에서

남편을

기다린다는

고역스럽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펼쳐졌던 일들이 떠오르고, 남편에게서 느끼는 격분 사이를 오가며 처절한 좌절감으로 이기지 못해 방을 오락가락하며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런 지옥 같은 생활을 한다는 건 공정하지 못했다. 롤프 덤버트를 진정한 남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는 그녀를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였다. 밀려오는 좌절감을 물리치려고 그녀는 가장 최근에 구입한 물건에 싫증이 날 때까지 몰두하려고 했다. 롤프가 아직 올라올 기색이 없자 레오니는 곁방에서 펄시윅 성의 회계장부를 찾느라고 그녀의 궤짝들을 샅샅이 뒤졌다. 회계부를 들고 그녀는 식어버린 난롯가에 의자 하나를 갖다놓고 앉았다. 기버트 경에게 넘겨주기 전에 정리해 놓으려고 그 회계부를 챙겨 왔다. 손수 회계부를 기록하려고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이제 그녀의 솜씨가 소용없게 될 판이었다.-어쨋든 잠시 동안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잡아둘까? 알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몇 시간 뒤, 롤프가 들어서자 레오니가 의자에서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다가들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양피지 문서들이 펼쳐저 있었고, 옆에 있는 낮은 탁자 위에는 잉크 병이 놓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모든 지식을 관장하는 교회에서는 여자에겐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다. 교화와 직접 관련없는 남자들도 아주 소수만이 읽고 쓸 줄 알았다. 롤프는 일고 쓸 줄은 알았지만 서기한테 시키기만 했지, 손수 하지는 않았다. 롤프는 양피지 문서 한 장을 집어들고서는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눈을 뜨는 통에 얼른 그녀의 무릎 위에다 내려 놓았다. [이 휘갈긴 글씨를 알아보는 거요?] 레오니는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물론이죠. 내가 적어놓은 거예요.] [누가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소?] [펄시윅에 있는 젊은 신부요.] [무엇 때문에 가르쳐 준 거요?] 레오니는 잔뜩 긴장을 하며 경계했지만 그의 말투는 자못 사근사근했다. 단지 호기심 때문에 물어보는 것 같았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해고시킬 거라고 위협했거든요.] 롤프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당신이? 그가 당신의 위협에 굴복했다는 거로군, 하지만 왜 배우려 했소? 당신을 위해 그가 정확한 기록을 하지 않았소?] [정확하게 했어요.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어떤 부분들을 바꾸고 싶어했는데 그가 망설였죠. 얘기하자면 길어요, 영주님. 사제를 시켜 제가 원하는 걸 처리하기보다는 차라리 제가 직접 하기로 했던 거에요. 그래서 절 가르치라고 강요했던 거죠.]


[그렇다면, 기쁜 일이군. 아무 이의없이 당신이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여기 하나 있군, 내 서기가 되시오.] [제가요?] 그녀는 뜻밖의 제안에 소리쳤다. [당신은 읽고 쓸줄 ���른다는 얘긴가요?] [난 젊은 시절을 개인교사와 같이 수도원에서 보낸 게 아니라 훈련장에서 보냈소.] 그는 거짓말을 섞어 말을 하면서도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다. 배움을 위해서 어떤 훈련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고 개인교사와 같이 수도원에 틀어박히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개인교사는 훈련장으로 그를 따라다녀야 했다. 늙은 사제로서는 영 반갑지 않을뿐더러 성가신 일이었다. [하지만 당신 집사가 있잖아요?] [당신이 크루얼의 모든 회계를 떠맡으라는 게 아니오. 그렇지만 제대로 기록되어 있는지는 확인해볼 수 있잖소.] 그녀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일이 제 머리로는 벅차다고 생각지 않으신다면요.] 그녀의 빈정거림에 그가 웃었다. [천만에.] 레오니는 뻣뻣하게 일어섰다. [네, 좋아요. 영주님.] 그녀가 문서들을 치우고 방으로 다시 들어왔을 때, 롤프는 그녀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늘게 떠 제대로 그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혔다.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 린네를 잠옷을 더 꼬옥 여몄다. 크림색의 잠옷이 얼마나 얇은지 참으로 신경이 쓰였다. [이리 오시오, 레오니.] 부드러운 명령이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커다란 침대를 흘긋 쳐다보았다. 침대는 질색이었지만, 침대를 보자 핑계거리가 떠올랐다. [늦었어요, 영주님. 그리고….] [당신은 잠깐 눈을 붙였으니, 나에게 피곤하다는 말을 마시오.] 그녀는 계속 쳐다보는 그의 눈길이 뜨거워 별수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곧 그에게로 다가가 결국 그의 앞에 섰다. [더 가까이.] 그녀는 한 발자국을 더 뗐다. 그러자 롤프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당겨 무릎 위에다 앉혔다. 그는 손을 그녀의 엉덩이에다 대고서 그녀를 꼭 붙들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머뭇 거리다가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줘서 기쁘오, 내 사랑, 난 한번이상 경고하지 않으니까.]


레오니는 속에서 울컥 치미는 감정을 감추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자신의 명령을 그녀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제 내가 자기 하녀가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되겠지. [당신의 경고를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영주님?] 그는 입술을 그녀의 목에다 비비며 울얼거렸다. [알고 싶지 않을 거요.] [그렇지만 알고 싶어요, 영주님.] [롤프.] 계속 입술을 그녀의 목 한가운데에다 비벼대면서 그가 호칭을 바로잡았다. 레오니는 신음네 겨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영주님.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다니, 뭘?] [당신 이름을 부르는 거요.]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와 약간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냥 한 번 불어보오. 짧은 이름인데다 발음하기도 쉽고, 자, 어서 말해봐요.] 미소를 머금은 표정과 걸걸하면서도 달래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눈을 쳐다보았을 때, 그녀는 그 속에서 아멜리아의 모습을 보았다. 그 여자가 여기 두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할 수 없어요.] [하지 않겠다는 얘기겠지.] [그래요, 하지 않겠어요.] 갑자기 롤프는 그녀를 팔로 단단히 껴안고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그녀를 안고 침대로 가 거칠게 내려놓고 노려보았다. [당신에게 분별력이 그나마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난 당신이 의도적으로 날 화나게 하려고 그랬다고 생각했을 거요. 당신이 샐쭉거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혼자서 그러시오, 그래도 당신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내가 다시 당신에게 올 때까지 계속 샐쭉거리고 있으시오.] 그는 화가 나서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가 거칠게 문을 닫고 떠났다. 레오니는 긴장이 풀려 침대에 몸을 쭉 뻗고 누웠다. 한숨이 나왔다. 아침이 돼서 그가 떠나기 전까지는 그를 못 볼거라는 생가에 은근히 즐거워졌다. 하지만 그때 그가 어디서 밤을 보내게 될 것이지를 떠올리자 몸을 오싹 떨었다. 분명, 누군가, 그가 그의 정부에게로 가는 걸 볼 거고, 다음 날이면 틀림없이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말 거야. 그런 일은 보통 아내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쉬쉬하는 거니까. 하지만 여기 이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남편은 아내가 알든 말든


상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건 아내의 감정을 도무지 배려하려 하지 않는다는,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가장 수치스런 모욕이었다.♣

19 다음날 아침 레오니가 홀로 내려왔을 즈음, 롤프는 정말 크루얼 성을 떠나고 없었다. 에바라드 경에게 크루얼 성주의 임무를 맡기고, 토르프 경도 함께 가고 없었다. 레오니는 남편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문제삼지 않으며, 오로지 그에 대한 치욕감 때문에 심란할 뿐이라는 걸 수없이 되뇌이기를 거듭하느라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아주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기분은 높은 식탁에 앉아 에바라드 경과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아멜리아를 보고 더욱 가라앉았다. 그들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고 떠들어댔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모든 사람이 그의 정부를 받아들이는데, 정작 아내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아멜리아의 기분이 썩 좋다는 것도 아주 분명히 드러났다. 그 두 사람은 레오니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고, 그들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예배당으로 가고 있었다는 듯이 계속 걸어갔다. 미사에 너무 늦었다는 걸 알고 있어 레오니는 그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성을 나와 눈부신 아침 햇살을 한껏 받아들였다. 그녀는 앞으로 남편과의 관계가 더 심한 곤경에 처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을 위해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간단히 말해 빈둥거리며 지내지는 않으리란 각오였다. 빈둥거리고 있으면 쓸데 없는 생각에 빠져들어 점점 더 비참한 기분만 늘어가리라. 그녀에게는 뭔가에 몰두하는 게 필요했다. 보나마나 아멜리아는 롤프의 집에서 자신이 레오니를 누르고 윗자리를 차지하게 된 걸 대단히 만족스러워 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집안일을 관리하는 요령이 있다면, 분명 그 요령을 자신만의 비밀로 꼭꼭 감추고 있겠지. 문제는 크루얼 성에 사는 누구도, 현재의 상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였다. 그 알량한 정부를 위해 롤프가 자신의 안락을 희생하면서까지 그토록 상당히 깊은 애정을 보이다니, 레오니는 롤프의 애정에 대해 뭐라 참견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런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살지도 않을 거고, 그 돼지우리의 안주인이 되지도 않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작업을 명령한다면, 누가 감히 그녀의 말을 거절하겠는가? 롤프야 그럴 수도 있지만, 그가 돌아올 때까지 많은 부분을 정리하고 집안이 몰라볼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된 걸 보면 그도 화를 가라앉히겠지. 아멜리아가 나서서 불평을 할 경우에는? 기꺼이 한판 논쟁을 벌여야지.


모든 계획을 세우자, 그녀는 윌다와 메리를 찾으러 갔다. 이층에 있는 하인들의 숙소로 가는 계단을 찾아냈다. 그 계단위에는 큰 방은 하나도 없고 좁은 복도만 있었다. 하인들의 숙소는 왼편에 있었고, 그 복도 오른쪽에는 작은 방들이 여러 개 있었다. 레오니가 윌다의 이름을 조용해 부르자 윌다가 나왔다. [아씨.] [비축품들을 보관하는 곳이니?] 레오니는 호기심이 일어 일렬로 늘어선 방들을 보면서 물었다. 윌다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얘긴 전혀 못들었는 걸요, 아씨. 손님들에게 안락한 공간을 제공해주자는 건 전 영주 에드몬드 몬티니 경의 생각이었대요. 그래서 이작은 방들을 만들라고 했다는군요, 방마다 침대와 다른 편의 시설이 갖춰 있어요.] [이 방 하나하나가 작은 침실이야?] 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드레드 얘기로는, 크루얼 성엔 손님이 끊인 적이 없었다는 군요, 에드몬드 경께서는 손님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싶어하셨대요.] 레오니는 밀드레드가 그렇게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데에 별로 놀란 기색을 짓지 않았다 하인들은 남의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니까. [홀에 초라한 침상보다는 개인 침실이 정말 인상적이지, 몬티니 가문이 그렇게 부유했는 줄은 몰랐구나.] 윌다가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돌고 있는 소문에 의하면….] [윌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내가 소문을 싫어한다는 걸 알잖아.] 레오니가 꾸짖듯이 말하자 윌다는 아씨가 소문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아씨와 그 남편에 관한 소문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아씨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크루얼의 하인들은 롤프 덤버트가 결혼식 날 밤에 그 아내를 때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윌다는 그게 상당히 흡족했다, 롤프가 한집에 정부와 아내를 두고서 아씨를 모욕하고 있어 윌다는 그런 롤프가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하녀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고, 또 자신들의 영주 편을 들고 있는 남자들과 말싸움을 벌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그 싸움에 절대 끼여들지 않고 느긋하게 즐길 생각으로 메리에게도 그러하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롤프 덤버트는 하인들을 성마르게 대하는 남자란 걸 항상 염두에 두었다. [글쎄 에드몬드 경께서는 최고의 음식과 포도주를 대접했다는군요,] 윌다는 얼른 둘러대며 소문에 관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에드몬드 경에게는 분명 특별한 요리사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레오니가 덤덤하게 말하자 윌다가 낄낄댔다.


[맞아요, 새영주가 오자 그 요리사가 달아났다는 군요, 지금 주방 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마구간에서 데려온 거래요.] 레오니는 질겁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전 요리사가 데리고 있던 조수 몇 사람은 아직 여기 있을 게 분명해, 그렇지?] [네, 그들이 한다면 음식이 좀 나아질 거예요, 하지만 하려고 들지 않을 텐데요.] 윌다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여기에는 아씨 남편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대요. 그리고 아직도 그래요.] [에드몬드 경을 좋아했다니?] [아니오, 그 분은 엄했대요, 하지만 그 분이 계셨을 때는 충격받을 만한 일은 전혀 없었고, 하인들에게는 항상 연회에서 남은 풍성한 음식들이 돌아 왔었대요. 하지만 롤프 경은 여기에 거의 안 계시기 때문에 하인들은 그 분을 알 기회가 없어, 그래서 그들은 그 분을 신뢰하지 않아요, 게다가 모두들 그 분의 불 같은 성격을 무서워한답니다. 스스로 나서서 새영주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레오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을 대충은 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일렬로 늘어서 있는 방들을 흘긋 쳐다보았다. [이 방들은 다 비어 있니?] 윌다는 레오니가 뭘 묻는지 즉각 알아차리곤 소근거렸다. [그녀는 알에인 경의 방이었던 큰 방에서 자요.] [그러면 에바라드 경은 어디서?] [그 사람은 철저한 군일이라 병사들과 함께 자요. 밀드레드가 그러는데, 그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담요를 깔고 뒹구는 걸 가장 좋아하는 것 같대요.] [그런데 밀드레드가 그걸 어떻게 안다니?] 윌다가 멋쩍은 듯 씨익 웃었다. [여기저기로 옮아다니며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 여기 머물러 있는 걸 에바라드 경이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에 여자들이 있기 때문이래요. 그 분은 젊고 잘 생긴 남자예요, 아씨.] 레오니 역시 픽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얼른 삼켰다. [그러면 너도 그를 시험해 볼 생각이니?] 레오니가 결혼하기 전이었다면, 윌다는 그런 물음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레오니의 상황이 바뀐 터라 당당하게 대답했다. [생각 중이에요.] 어휴, 못 말릴 얘야. 레오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감이 간다는데 어떻게 윌다를 꾸짖을 수 있겠는가? 혼외정사가 죄라고 말해봤자 잔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을 테지. [며칠간은 그런 걸 생각할 틈이 거의 없을 거다. 넌 크루얼 하인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었으면 했었지? 이제 그렇게 될 거야.] 레오니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머리를 돌리자 윌다는 뛸 듯이 기뻤다.


[그렇다면 그분의 허락을 얻으신 건가요? 우리가 시작해도 별 무리가….] [그의 허락은 없었지만, 우린 어쨌든 시작할 거야.] [하지만….] 레오니는 걱정이 앞선 윌다의 말을 잘랐다. [난 이렇게는 살 수 없어. 그리고 그는 여기 없으니까 날 막을 수도없잖아.] [정말이세요, 아씨?] [그럼, 정말이지.] 성에

있는

모든

하녀들이

빗자루와

비누,

그리고

물통을

들고서

홀로

몰려들자

아멜리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레오니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롤프가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레오니는 입끝을 삐죽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그 책임을 나한테 넘기면 돼요. 난 이곳이 너무 지저분해 단 하루도 이런 상태로는 더 못 있겠으니까요, 물론, 내 남편이 만족스러워 한다면, 그 칭찬은 당신이 받아도 돼요. 시간이 없었다 뿐이지, 틀림없이 당신도 이 집을 치우려고 했었을 테니까요.] 대단한 조롱이었는데도 아멜리아는 그 숨은 뜻을 제대로 이해할 만한 재치가 없었다. [여기서는 뭐든 하려면, 끊임없이 감독을 해야만 해요. 농노들이 너무 단순해서 스스로는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하거든요. 제가 뭐 안 해본 줄 아세요?] 레오니는 뭐라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런 여자와 얘기하는 건 정말 고역이야. [이런 일을 다루는 데에 나만의 요령이 있어요.] [롤프가 만족하고 있다면 굳이….] 아멜리아가 샐쭉거리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내가

만족스럽지

않아요,

아멜리아.

그렇지만

당신에게

도와

달라는

아니에요.] 또한 그녀는 허락도 요청하지 않을 거였다. 아멜리아가 감히 나의 뜻을 꺾으려고 한다면 가만 안 두리라. 아멜리아는 이쯤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너무 많은 걸 얻은 터라 굳이 이런 하찮은 문제들로 롤프의 아내와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아멜리아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다. 레오니가

윌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윌다는

눈을

반짝이더니

주위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큰 소리로 지시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일이 시작되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자 몇몇 하녀들이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윌다가 거칠게 몇 마디 소리치자 불평이 쑥 들어가버렸다.


레오니는 펄시윅에서 늘 했던 것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일을 했을 테지만, 여기서 그렇게 행동을 하면 자신의 위치를 낮추게 되리란 걸 알아차렸다. 지금대로도, 하인들 대개가 아멜리아의 승낙을 받으려는 듯 아멜리아의 표정을 먼저 살피는 모습을 레오니는 놓치지 않았다. 홀은 윌다가 야무지게 감독하게 놔두고, 레오니는 하인들 몇을 모아 따라오라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하인 네 명에게 새 멍석을 모아오라고 시키고, 한 명에게는 에바라드 경을 모셔오라고 보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세 사람을 데리고 주방으로 갔다. 주방 하인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아무 간섭도 받지 않아서 인지 그녀가 들어오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비쩍 마른 중년 남자인 요리사외에 다섯 명의 남자 조수들과 세명의 어린애들이 있었다. 애들에게는 가장 쉬운 일이 주어졌는데, 꼬마 이델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다른 주방 하인들을 확실히 다루기 전까지는 레오니는 그 소녀에게 미소 짓는 걸 잠시 뒤로 미뤘다. 주방으로 사용하는 오두막의 상태는 정말로 끔찍했다. 사방이 연기와 기름으로 너무도 찌들어 있어 그 오두막이 불에 타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식기를 넣어두는 곳, 고기를 넣어두는 곳, 식료품을 넣어두는 곳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레오니는 이 모든게 요리사의 책임이라 그를 터럭 끝만큼도 동정하지 않았다. [넌 마구간으로 돌아가서 네 재능을 살리는 게 좋겠다.] 그가 감히 반대할 수 없게 냉혹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는 명령했다. 그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주방을 떠났다. 요리사가 떠난 뒤, 그녀는 데려온 세 남자에게 주방에 있는 걸 모두 밖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다섯명의 남자 조수들과 이델리에겐 정원으로 따라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원으로 나오자 레오니는 그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쳐다보며 그들의 태도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뜻대로 안 되면, 그녀가 요리사가 될 판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작은 소녀에게 눈길을 두고 잠시 엄격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이델리, 네가 정원에서 뜯고 있던 쓸모없는 것이 생각나니?] 이델리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말끝을 떨었다. [다시는 그런 것들을 뜯지 않았어요, 아씨. 맹세해요.] [알아. 하지만 이제 네가 그것들을 뽑았으면 싶다. 모두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걸요!] [그래, 그리고 그것들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니까 더 이상 이 정원에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알겠니?] 이델리는 아씨가 요구하는 일을 하자면 무척이나 긴 시간이 걸리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꼬마는 온마음을 다하며 레오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할게요.] 레오니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힘에 버거운 듯 참담한 아이의 표정을 보고서는 싱긋 웃었다.


[너보고

직접

그것들을

뽑아내라는

아니야.

아니지,

여기

이사람들이

뽑아낼

거야-특히 뿌리까지 말이다. 넌 곁에 서서 감시하면서 이 사람들이 하나라도 놓치는지 확인하는 거야, 그리고 이 일을 다 끝낼 때까지 쉬지 못하게 감시하는 거지.] [저 사람들이 내 말대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델리가 놀랍다는 듯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물었다. [바로 그거란다.] [아씨, 안 됩니다요! 그건…] 그 남자들 중 한 명이 거친 목소리로 불쑥 나섰다.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아닙니다요, 아씨. 하지만….] [일이 싫은 거냐? 아니면 어린애의 지시를 받기가 싫은 거냐? 하지만 네가 도무지 주방을 깨끗하게 유지할 줄 모른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그 곳에서 만든 음식맛이 어떤지도 봤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요리에 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다고 난 생각한다. 잡초를 뽑는 일 외에 다른 걸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너희 중에 하나라도 있느냐?] 다른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전 어떤 입맛도 돋울 만한 음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씨.] 레오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그러면 왜 지금까지 그런 걸 비밀로 했는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네 말이 사실이란 걸 증명할 수 있게 오늘 하루를 주마,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네가 요리사로서 일하게 될거고 주방을 관리하게 될 거다. 하지만 네가 거짓말을 했을 경우에는….] 그녀는 위협의 여운을 남겨두었다. 얼마나 가혹하게 할지 그들의 상상에 맡기는 방법이 제일 좋았다. 매질을 하겠다고 그녀가 위협했다면, 견딜 수 있을 거라든가. 설마 그렇게는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 역시 추방한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그러나 그녀가 뭘 할 건지 예측할 수 없다면, 감히 그녀의 격노를 불러일으킬 짓을 하지 않으리라. [도…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아씨.] 새 요리사로 지명받은 그 사내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네 이름은 뭐냐?] [존입니다.] 레오니가 그에게 화사하게 미소를 짓자, 그는 놀랍고도 황홀하여 몸둘 바를 몰라 어쩔 줄을 몰랐다. [네게 필요한 모든 걸 갖게 될 거다, 존. 거들 사람이라든가, 모든 재료, 필요 이상으로 주문하지 않기만을 부탁한다. 다시 말해 부족한 것만을 달라고 하거라. 회계부에


기록해야 하니까 모든 구입물은 어니스집사에게 보고하고. 이 외에 내가 뭘 더 바라는지 짐작할수 있느냐?] 그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볼수 없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꼭대기서부터 맨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북북 문지르는 겁니다.] [그래, 모든 기구들, 단지들 다. 부엌에 오물이 쌓인다면 나에게 어떤 변명도 필요없다는 걸 명심해라. 그리고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어떤 벌이 내릴지 단단히 각오하거라. 그리고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어떤 벌이 내릴지 단단히 각오하거라. 청소가 됐는지 확인부터 하고 음식을 만들어라. 이미 내가 데려온 세 사람이 그 일을 시작하고 있으니까, 그들을 부리도록 해. 여덟 사람이면 충분할 거다.] [감사합니다, 아씨.] 다섯 명의 남자가 새로운 요리사를 따라 주방으로 가는 모습을 이델리는 또다시 참담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저 혼자 쓸모없는 것들을 뽑아야만 하는 거예요?] [아니지.] 레오니가 씨익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지만 이건 중요한 일이란다. 내게는 아주 중요해. 이걸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주방에 있는 제 친구들요.] 이델리는 단숨에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다른 두 애들 말이니?] [네.] [그렇다면 그애들을 데려다 네 조수로 써도 좋아. 그리고 급할 것 없다, 이델리. 무엇보다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단다. 네가 이 일을 끝내면 여기다가 몸에 좋은 식물을 많이 심을 거야. 그때도 네가 도와주렴.] [정말 도와드리고 싶어요, 아씨.] [좋아. 이제 달려가서 인구들을 데려오렴. 에바라드 경이 나와 얘기를 하려고 이쪽으로 오고 있구나.] 레오니는 안뜰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갔다. 그는 뭐가 못마땅한지 잔뜩 인상을 썼다. [에바라드 경….] 하지만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그가 무례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롤프 경이 이걸 기뻐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씨. 당신은 영주님께서 떠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이곳을 뒤집어놓았습니다. 당신이 말썽을 일으키려고 작정하신 걸 영주님은 알게 될겁니다.] [감히 내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죠?] 레오니가 싸늘하게 받아치고는 성난 눈초리로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당신 영주의 아내인 내게, 그에 걸맞는 존경심을 보여주지 않겠다면, 난 당신과 같은 성에서 살지 않을 거요.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당신이 그저 단순하게 생각한 걸 그에게 고자질할 때 이 말을 덧붙여도 좋아요!] 그 남자의 턱이 완고하게 조여졌다. [지금 아씨께선 말씀을 빙빙 돌리시려고 하지만 아무도 홀에는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엉망진창을 만들어 놨으니까요, 모든 걸 마구 헤쳐놓았는데 그에 대해 변명을 하시겠습니까?] [정말 어리석군요! 그게 청소하는 거라는 걸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그런 심한 표현을 하는 건가요? 당신이 여기 온 뒤로 한번도 제대로 청소가 이뤄진 적이 없어서 정말 청소란 게 뭔지도 모른단 말이오? 오늘 중으로 홀은 제대로 정리될 거요. 그리고 당신이 오늘 저녁으로 먹을 음식은 건강에 좋을 겁니다. 내가 하고 있는 건, 에바라드 경. 당신이 식중독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쓰는 거라구요. 만약 주방의 상태를 점검하지 않고 저대로 내버려두었다면 당신과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식중독에 걸렸을 겁니다. 이제 말해 보시오-그 동안 내내 태만했던 데에 대해 이제야 그 대가를 치르는 하인들 외에 내가 하는 일이 누구에게 폐를 끼치는 것인지?] 에바라드 경은 더 이상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잘 몰랐나 봅니다.] [그게 다예요?] 그녀가 힐책하듯 묻자 그가 얼굴을 붉혔다. … [용서하십시오, 아씨. 전 엉망진창이 된 것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아직도 영주님께 악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당신이 영주님과 강제로 결혼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결혼한 여자는 불만을 품게 마련이죠. 그래서 전 당신이….] 레오니는 갑자기 허탈해졌다. 모든 노여움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내 남편에게 대단히 충성스럽군요.] [내가 섬기고 싶은 분은 오로지 롤프 경뿐입니다.] 그가 믿음직스럽게 말 끝에 힘을 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야겠군요. 에바라드 경,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얘기해 주겠어요.] 레오니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길 기다렸다가 얘기해 주었다. [남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건, 롤프 경께는 아직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내 농노들이 그에게 일으켰던 말썽에 대해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통감한다고 그가 생각하길 진심으로 원해요. 난 그 모든 책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이래요. 내 농노들은 내 명령에 따라 행동한게 아니랍니다. 명령한 적은 켤코 없었어요. 하지만 내 농노들은 내게 지나치게 충성스럽답니다. 내가 롤프 경을 욕한 걸 듣고서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한 거예요.]


[당신이 영주님께 욕만 했다고요?] 그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건 그러니까-상당히 심한 욕이었어요. 하지만 그 욕설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난 그 날 참을성을 잃지 않았을 거예요.] 에바라드 눈에 뜻밖에 장난기가 어렸다. [당신 병사들이 그 사람들처럼 충성스럽지 않았던게 다행이군요.] [그들 역시 충성스러운 병사들이에요. 그 날 내가 검은늑대한테 욕을 하는 걸 그들이 듣지 못했을 뿐이예요.] 레오니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영주님은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바라드 경이 손을 휘저으며 급히 말을 건넸다. [뭐라구요?] [영주님께서는 검은 늑대라고 불리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정감어린 미소를 지었다. [생각을 말씀해주셔서 저도 감사합니다, 아씨.] [오해는 하지 마세요, 에바라드 경, 내가 이곳이 맘에 들지 않다는 당신 생각은 맞아요. 하지만 그건 내 남편고 내 자신의 문제에요. 내가 그의 것 어느 하나라도 해를 끼칠까봐 당신이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는 영주님이 상관하실 일이지, 그의 소유물이나 그의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일이에요.] 그들의 일시적인 협상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걸 그녀는 그의 음울한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이런, 괜한 말을 덧붙였구나. 레오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안해요, 에바라드 경. 하지만 우리 두사람은 롤프 덤버트에 대해 서로 견해가 달라요. 그는 너무나 내 감정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생각을 바꿀수가 없네요. 하지만 당신에게 그 사람 욕은 더 이상 하지 않겠어요.] 에마라드는 대꾸도 않고 잠자코 있으면서 그 이유가 뭔지 추측해보았다. 결혼식을 올리고선 하룻밤을 지내자 마자 남편에게서 내쫓겼기 때문에 그녀의 감정이 상했던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지만 이제 되돌아왔으니까 그 모욕을 용서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의 추측은 레오니의 생각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레오니가, 그의 정부인 아멜리아가 크루얼 성에 있는 걸 의미하리라곤 그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이미, 아멜리아는 롤프의 피후견인이라고 그녀에게 소개한 걸로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녀가 그게 거짓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롤프와 아멜리아의 관계가 얼마나 완벽하게 끝나버렸는가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에바라드였다. 아멜리아는 이제 에바라드와 침대를 같이 쓰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침대를 같이 쓰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그는 영주의 정부와 놀아날 생각은 없었지만, 아멜리아가 롤프는 그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 했다며 그를 설득했다. 그


여자 말로는 그녀가 크루얼 성에서 지내든 말든 롤프가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게 증거라는 거였고 그렇다면 그가 마음에서 그녀를 깨끗이 지워버린게 아니냐고 말했다. 에바라드 경은 생각을 거두고 다시 현재의 상황으로 돌아왔다. [날 찾으셨지요, 아씨?] 레오니 역시 크루얼의 안주인의 위치로 다시 돌아왔다. 종종 그 위치란게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지던지…. 권위를 감추고 요청을 하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명령을 내려야겠지. [병사 한 사람을 말을 타고 펄시윅으로 보냈으면 좋겠어요. 기버트 경을, 만약 그가 없다면 내 이모인 베아트릭스를 만나서 내가 보냈다고 하고, 내가 쓴 쑥고 카밀레가 필요하니 모아둔 것을 가져오라 했다고 하면 돼요. 그들은 이 풀들을 어디에 쓰려는지 알거예요.] [여기도 모아둔 게 있습니다. 아씨. 롤프 경은 펄시윅에서 당신이 가져오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내

남편은

내가

펄시윅에서

가져오든

참견할

권리가

없어요.

펄시윅은

소유니까요.] 레오니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풀들이 사용한 적이 없으니까, 여기에는 모아둔 게 없을 거예요. 그 풀들은 오늘 필요해요. 쑥은 이곳에 있는 ���룩들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니까 홀에 새 멍석을 깔기 전에 뿌려놔야 해요. 그리고 나중에도 뿌려야 하구요. 카밀레는 멍석들을 새것으로 다바꿀 때까지 성에서 나는 악취를 제거할 거예요. 난 더러운 걸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에바라드 경. 그리고 내가 명령을 내릴 때는 이유를 따지지 말아주세요.]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아씨.]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몸을 돌렸다. [내 말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그는 마지못해 다시 돌아왔다. [아씨, 또 다른 분부라도?] [사냥을 얼마나 자주 가나요, 에바라드 경?] [날마다요, 식탁에 쓰려고 가지만, 운동 삼아서 가기도 하죠.] [개들을 이용합니까, 아니면 매들을 갖고 가나요?] [매는 데리고 다니기에 너무 따분합니다. 이곳에 정착하지 전까지는 우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기만 했거든요. 영주님께서는 아직 좋은 매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건 몇 마리 안 되는데, 그저 임시용에 불과합니다. 전 그 놈들을 쓰지 않습니다. 개들이 더 좋거든요.]


[그렇다면 사냥개는 충분한 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군요. 그리고 그렇지 못하다면, 성밖에서 운동을 시킬 수 있겠죠. 하지만 이제부턴 안에서는 더 이상 맘대로 돌아다니지 못할 겁니다. 내 말은 단지 홀만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개들의 습성은 너무도 불결해요.] [하지만 여태까지 홀에서 길렀는데요.] [이제부터는 안 돼요.]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듯 머리를 흔들면서 덧붙였다. [사냥개 사육사가 한 명도 없나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개들을 쓰지 않을 때는 항상 우리에 가둬두라고 하세요. 크루얼 성에 개우리가 없다면 몇 개를 지어야 한다고 하시구요.-충분히 지으라고 하세요. 날마다 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게.] [그 사람이 안하려고 할 텐데요, 아씨.] 그가 볼멘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를 바꾸세요.] 그녀는 침착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사육사를 할 만한 사람이 그 사람밖에 없다면, 그 일을 하도록 엄하게 다루세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펄시윅에서 쓰던 사람을 데려와야 할 거예요.] [그 문제를 곧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씨.] 무척 급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 만약에 또 문제가 생긴다면 이런 식으로 위협을 하여 계속 몰아 붙이면 되겠군. 외부 도움을 받는 걸 싫어할 사람은 크루얼에 에바라드뿐만이 아닐 테니까. 그 위협을 항상 염두에 두고 절절하게 이용해야 하겠는걸?♣

20 닷새 후,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말을 타고 성의 안뜰로 들어서면서 롤프는, 어째서 일 주일도 못돼 집 생각이 나는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결혼식을 치른 뒤, 레오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던 때에 레오니를 찾으러 펄시윅 성에 갔던 그 날처럼 스르로에게 혐오감이 치밀었다. 그래도 오늘, 그가 일찍 돌아온 데에는 아내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로데성과의 전쟁을 답보상태에 빠져 있었다. 성벽 밑으로 들어가려고 팠던 터널이 벌써 네 번째 붕괴되어 버렸다. 롤프는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시간은 이제 점점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성들은 거의 일곱 달 동안이나 봉쇄되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이들은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러서, 성문을 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중 어떤 성문이 열릴 때 롤프가 그의 병사들과 함께 거기에 있지 않는다면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리라.


그는 로데성에 대해서 결단을 내려야만 했지만, 굳이 야영장에서가 아니더라도 집에서도 내릴 수 있는 결단이었다.-사실 집에서 결단을 더 쉽게 내리리란 생각이 앞섰다. 일단 아내와 자고 나면, 로데에 생각을 쏟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은 아내 생각이 나지 않겠지. 롤프는 크루얼에서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아 케닐 성에 들러 수리작업 진척상태를 점검하고 난 후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다미안과 두 병사와 함께 그가 크루얼의 홀에 들어섰을 때, 아주 좋은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고, 그의 시선은 곧장 레오니에게로 쏠렸다. 그의 후각이 다른 감각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높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담청색의 드레스를 입은 천사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두 가닥으로 땋아져서 양쪽 가슴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머리에 푸른 색의 짧은 사각 끈 만 매고 있었지만, 무척이나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에바라드와 아멜리아가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으나 두 사람만 서로 얘기하는 것 같았다. 홀은 사람들로 가득 차 떠들썩한데도, 롤프는 자신과 레오니만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봐 주길 바라면서 그녀의 상아빛 얼굴에 시선을 못박았다. 마침내 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도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그녀에 대한 뜨겁고도 강렬한 욕망에 휘말려 그는 현기증이 일었다. 롤프를 보자, 레오니의 가슴이 미칠 듯이 쿵쿵 뛰었다. 열정적인 표정으로 그가 다가오자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하려고 아랫배에다 힘을 주었다. 그녀는 크루얼 성안의 변화들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그럴 용기가 차마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빨라지는 맥박 소리가 귀에 울릴 뿐…. 하지만 잠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롤프는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관심도 없었다. 그가 뭣 때문에 자신만을 그토록 쳐다보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자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식탁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서 그에게 살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 수가 없었다-이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군! 오로지 그녀만을 향해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하며 걸어가는 롤프에게 그토록 많은 눈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는 레오니밖에느 보이지 않았다. 롤프의 부하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 받으며 싱글거리고 있었지만, 윌다와 메리는 레오니가 걱정이 되어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아멜리아의 눈에서 분노가 이글거렸으나 그녀를 쳐다보는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영주와 그 아내의 만남, 그 순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잠시 후 의자가 식탁에서 빼내지자 레오니는 숨이 막혔다. 롤프가 그녀를 안아올리는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질러댔으나 그는 한 마디도 없이 계단 쪽으로 갔다. 그들이 계단을 올라가서 사라지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 소리와 환호성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휘감듯 터져나왔다.


레오니는 너무도 창피해서 롤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운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않았다. 마침내 방문이 닫혀서 아래층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을 때에야 그녀는 발버둥을 치며 소리쳤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그는 그녀를 꼭 부여잡고서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온 것뿐인데, 왜 그러는 거요?] [당신이 뭘 하려고 하는지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알 거라구요.] 오로지 창피를 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롤프는 싱글싱글 웃으며 그녀를 내려놓더니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암갈색 눈동자를 껌벅였다. [당신은 괜히 넘겨짚은 거요, 내 사랑. 그들은 내가 당신을 때리려고 이리로 데려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소. 당신이 멍든눈으로 홀로 돌아가면 화가 풀리겠소?]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군요.] 화가나 펄쩍 뛰면서도 그녀가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짐승들 조차도 서로가 어느 정도의 존중심을 보여 준다고요. 내가 당장 아래로 되돌아가야만, 내 화가 풀릴 거예요.] 느닷없이 너무도 강렬한 그의 키스를 받자 그녀의 수치스러움이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허공을

맴돌았다.

그가

열정적이고

뜨거운

키스를

끝냈을

때,

그녀는

너무도

어리벙벙해서 키스가 끝났다는 걸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자, 당신의 부풀어오른 입술을 보고, 다들 내가 키스만 하려고 했다고 생각할 거요. 당신 뜻대로 아래층으로 가도 되니 이제 화를 풀어요. 레오니.] [정말이세요?] 그녀가 흥분에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난 당신을 원하오, 하지만 당신을 계속 여기다 잡아두면 당신이 화를 낼 테니…. 자, 빨리 가요, 내 맘이 변하기전에.] 레오니는 살포시 눈을 내리깔며 기쁨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영주님.] [또, 영주님!] 넌더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저 끝내시오. 그리고 내 목욕물을 준비시켜주고 내 시종을 나에게 모내주시오, 레오니.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 하녀들이 다시 여기 들어왔다면, 하녀들보고 물건들을 챙겨 나가라고 하시오. 하지만 한 시간 안에 당신은 돌아와야 하오. 안 그러면 당신은 날 또 짐승이라고 부르게 될 테니까.] 레오니는 서둘러 방을 나왔다. 롤프가 그녀에게 일을 시키자 진짜 아내 같은 기분이 들어, 기쁜 마음으로 그 일들을 처리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됐고, 긴장을 풀고 식사를 끝냈다.


하지만 롤프에게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레오니는 점점 초조해졌다. 괜히 시간을 끌며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지는 것보다 낫겠다 실어서, 그리고 숨으 곳을 찾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까봐 그녀는 단숨에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목욕을 끝내고 난롯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를 문과 마주보게 놓고 앉아 있었던지라 그녀가 들어서자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노란색의 고운 비단 잠옷 차림이었다. 노란빛이 불꽃에 너울대고 있어 그의 눈동자가 더 밝은 갈색으로 보였다. 잠옷을 헐렁하게 입고 있었던 탓에 가슴 부위가 벌어져 곱슬거리는 검은 털들이 드러났다. 그녀는 계속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채자 그녀는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 그의 옆 탁자 위에는 그녀가 손수 만든 비누와 윌다에게 다미안 편으로 롤프에게 보내라고 시켰던 두꺼운 타올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비누는 물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나무로 만든 작은 비누곽에 들어 있었고, 젖은 타올은 접힌 상태였다. 롤프의 시선이 레오니의 시선을 따라갔다. [나한테 그 향기 좋은 비누를 준 건 나한테서 냄새가 났기 때문이오?] [아니오, 영주님,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당신에게서는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았어요.] 그가 뜻밖의 찬사에 싱글거리자 그녀는 용기가 생겼다. [그 비누는 로즈메리 기름으로 만든 거예요. 여기 있는 억센 비누보다는 그걸 더 좋아하실지도 모를 것 같아서요.] [비싼 거요?] [단지 시간만 많이 들죠, 영주님,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걸 줘서 기쁘오.] 목소리가 심각해지더니 그가 이내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로 더 빨리 와줬더라면 더 기뻤을 거요.] [난 늦지 않았어요.] [당신을 다시 보내는 게 나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면서도 나와 말싸움을 하자는 거요?] [이…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어쩌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레오니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점점 더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 뭘 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그래, 잠자리를 준비하면 우리 두 사람 모두 정신이 딴 데로 쏠릴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침대로 급히 갔지만 잠자리는 이미 다 준비되어 있어서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그와 거리를 두고 침대가에 앉았다. 그는 무척이나 남성다웠다. 힘줄이 불거진 근육, 남성적인 힘, 압도적으로 잘생긴 얼굴,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표정.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란 걸 확신하는 순간, 그녀는 겁이 나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당신 옷을 벗겨주겠소.] [제가 할 수 있어요.] 그녀가 중얼거리자 롤프는 아연 긴장했다. [아직도 나한테 토라져 있는 거요, 레오니?] [토라지지 않았어요,

절대로

토라지지

않아요.

어린애들이나

토라진다구요!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녀는 옆구리 끈들을 풀려고 애를 쓰면서 말 한 마디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무릎 길이의 소매 없는 크림색 속치마만 남겨두도 드레스를 서둘러 벗는 모습을 그는 참을성 있게 지켜보면서 그녀앞에 서 있었다. 슈미즈는 너무 얇아 그녀의 젖무덤이 아른거렸다. 롤프는 숨을 죽였다. 그녀는 정말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여자는, 화가 나 있을 때조차도 그랬다. 그녀와 떨어져 지내면서도 그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고, 꿈에서도 생생하게 다가들었다. 은빛 불꽃이 튀는 그녀의 눈동자. 혹은 혼란스러워하는 순진하고도 부드러운 눈동자…. 그녀의 머리칼은 찬란하게 타오르는 횃불이었다. 그는 손가락들을 놀려 그녀의 부드러운 금발을 쓸어내리는 걸 상상했다. 완만한 굴곡이 진 원숙한 그녀의 몸은 이제 그 모든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아름다운 여인은 딱 한번 그에게 자신을 내맡겼다. 오늘도 다시 그럴까? 레오니는 몸을 숙이고 슬리퍼와 스타킹을 벗었다. 그리고는 그가 거기서서 쳐다보는 동안은 슈미즈를 벗을 수 없다는 걸 알고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포개고는 말없이 발끝만 쳐다보았다. 롤프는 그녀의 머리에서 천천히 사각 끈을 풀고는 땋은 머리를 들어올린 다음 머리도 풀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그녀의

슈미즈를

벗겨

저만치

내던졌다.

그녀가

저항할까봐 그느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꼬옥 감싸고서 두 사람의 얼굴을 마주보게 했다. [레오니, 펄시윅 성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미처 당신의 용서를 구하지 못했소. 지금 용서를 비오, 그 일로 더 이상 나한테 화내지 마오.] 그녀는 너무 놀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롤프는 대답을 바란게 절대 아니었고, 그녀가 이제 화를 내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거부하지 않고 온 마음과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그는 몸을 숙이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처음에 부드러웠던 그의 키스는, 그녀가 응하기 시작하자 더 열정적이 되었다. 마침내 그녀가 신음소리를 내는 순간 그는 그녀를 침대 한가운데로 이끌고는 곁에 누워 꼬옥 껴안았다. 그녀는 다른 모든 걸 잊어버리고 그에게로 파고들었다. 넘쳐흐르는 그의 사랑에 온몸이 녹아드는 느낌에 무척이나 행복에 겨운 날개짓을 한껏 펼쳤다.♣


21 은빛 달이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언뜻언뜻 고개를 내밀며 살짝 비추고 있었고 바람은 여름 폭풍을 예고하듯, 난간을 넘어 세차게 불어 닥쳤다. 사냥개들은 우리 안에서 소리를 길게 뽑으며 짖어댔고, 말들은 마구간에서 불안스레 움직이며 힝힝거렸다. 롤프는 초조한 기색으로 난롯가를 서성대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촛불 하나가 바람에 너울대며 그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새벽이 되려면 아직 세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 시간 안에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영주님?] 롤프가 침대 쪽을 돌아다보았다. 열린 침대 커튼 사이로 걱정스런 눈빛이 담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녀가 앞으로 웅크리고 롤프를 바라보았다. [잠을 깨우려고 했던 건 아닌데, 레오니, 다시 자도록 해요.] 그녀는 그의 서성거리는 발자국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터였다. 덩치가 큰 사람이 조용히 움직인다 하더라도 역시 그 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법. [난 생각할 게 많소.] 그가 몸과 마음이 지친 듯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니 어서 자도록 하오.] 레오니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영주님, 당신을 괴롭히는 일에 대해 내게 말을 하면, 그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는 그녀를 쳐다보고는 성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일에 쉬운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다니, 얼마나 여자다운 생각인가. 레오니는 섭섭한 생각에 몸을 떨었다, 남편은 마땅히 아내를 신뢰해야 하지 않는가! [남편이 아내를 신뢰한다면야, 아내에게 못할 말이 없죠.] [잘 알겠소.] 롤프는 그녀가 고집을 피우자 짜증이 나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전쟁과 죽음에 대해 듣고 싶다면 말하지. 내일 내 부하들이 만이 죽을지도 모르오. 공격하지 않고 로데 성을 점령할 방법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아 지금 곤경에 처했소. 타협은 오래 전에 끝장났소.] 그는 의자에 앉아서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벽은 마치 철갑을 두른 듯 견고하고, 그토록 오랜 기간동안 뚫었던 터널이 또 무너져버렸소, 그들은 비축품이 충분하오. 성벽 위에서 우리를 조롱하면서 우리보다 더오래 버팉 거라고 장담하는 것으로 봐서 그런 게 분명한 것 같소. 내 부하들은 화가 나서 싸우고 싶어 안달인데, 사실 내가 보기에도 별 뾰족한 다른 방법이 없소.] [군사력으로 성벽을 밀어붙일 건가요?]


[케닐 성에서 그 방법을 썼는데, 지금 그곳을 수리하는 비용이 내 군사비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고 있소. 난 적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니오, 레오니. 단지 내 것을 확보하려는 것뿐이오. 성을 쓸모없게 만들어 놓고서 차지하고 싶지 않소.] [성벽을 오를 수 있으세요?] 그녀는 물으면서도 고지식한 질문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어리석다는 느낌이 일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아주 수준 미달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소, 아직도 난 성 세 군데를 점령해야 하오. 그리고 그 성들은 봉쇄된 지가 아주 오래됐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소, 이제 언제든 한 명, 아니 그 이상이 성문을 열고 탈출할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속았다는 걸 곧 알게 될 거요. 그들을 봉쇄하는 나의 병사들은 성안에서 보이는 것처럼 일개 군대가 아니고 얼마 안되는 인원이기 때문이오.] [정말 그런가요?] 레오니가 아찔함에 숨이 막히자 그는 양미간을 좁혔다. [난 이백 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이곳에 왔소. 왕의 군대에서 많은 군사들을 고용했지만, 아직은 성 일곱 군데에 배치할 만큼의 병력은 없소. 그 성들은 모두 내가 먼저 자기네 성을 공격하는 줄 알지, 그들은 자신들만이 성안에 갇혀 있는 줄 알고서, 다른 성들이 지원병을 보내리라 생각하고 있소. 난 내 모든 병사들을 몰고 각각의 성에 교묘하게 보여주어, 그들은 누가 도우러 오기 전에는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요.그리고는 그런 이상을 계속 주려고 내 부하들을 여기저기로 옮겼소, 그런데 남은 성들 중에서 한 성이라도 그 계략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들은 너무 분격해서 주둔시켜놓은 내 병사들을 모두 학살할 거요.] 레오니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로데성을 공격할 때 당신도 싸워야 하는 건가요?] 당치도 않은 그녀의 질문에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난 그 어떤 전쟁터에서든 내 병사들과 함께 결전을 치르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모든 군사 행동을 내가 직접 명령하오.] [성벽을 많이 올라가 봤어요?] 그의 말투가 냉담하게 변했다. [난 수많은 사람들의 전쟁을 치렀소-당신의 왕을 포함해서, 지금은 내 왕이기도 하지만. 내가 싸워야 하는 곳이면 난 어디서든, 필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싸웠소. 내 것을 확보하려고 애를 쓰느라, 그토록 자제력을 수없이 발휘한 건 최근의 일일 뿐이오, 일을 신속하게 해치우는 게 내 방식이오, 하지만 가능한 한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을 하지.] [그렇지만 당신을 로데 성을 공격해야만 한다고 했잖아요.] [난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 내 병사들을 많이 잃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로데 성에다 더 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소.]


[그렇다면 거긴 내버려두세요. 다음 성으로 가서 매듭을 짓고 마지막에 로데로 돌아가는 거예요.] 레오니는 아주 심각하면서도 조심스런 제안을 했다. [그래서 내 부하들에게 후퇴하고 있다는 기분을 갖게 하란 말이오? 성벽에서 보내는 조롱 때문에 그들이 화가 난건 아니란 걸 분명하게 기억하시오, 그들은 공격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거요.] [성벽을 돌파해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많은 병사들이 죽을 지도 몰라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다리를

오르다가

혹여

성벽에

있는

사람들이

사다리를

밀어버린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이 부러지게 되겠어요? 뜨거운 기름과 모래를 성벽에서 퍼붓는다면 또 그 피해는 어떻게 감당하시겠어요?] 롤프는 사나운 눈길로 천장을 쳐다보며 발끈 화를 냈다. [내가 왜 여자와 전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제게 답변할 말이 없나요, 영주님?] [그런 위험은 우리 모두 잘알고 있소. 전쟁은 장난이 아니오.] 그가 거칠게 대꾸하자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오호,

과연

그럴까요?

당신들

남자들이란,

애들이

장난을

좋아하듯

전쟁을

즐겨하잖아요!] 그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부인, 전쟁이 당신의 성문 앞에 벌어지지 않는 한, 당신이 관여할 게 아니오, 다시 자도록 해요. 당신은 날 돕고 있는 게 아니오.] 그녀는 잠시 동안 그가 뿌루퉁해 있는 걸 바라보다가 말을 계속했다. [로데 성벽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아주 적을 경우, 위험이 줄어들겠죠?]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그가 대답조차 하려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고집센 남자로군, 어어, 그런데 그가 마침내 대답을 했다. [로데는 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소, 계속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지. 그리고 그곳 가신은 바보가 아니오, 그 사람을 내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던 게 유감이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로 애석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사다리를 밀어버릴 사람이 몇 사람밖에 없다면요?] [바보 같은 질문이군, 부인. 위험은 당연히 줄어들게 되겠지.] 별 시답지 않다는 듯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떡하든 병사 하나를 로데 안으로 몰래 들여보낼 수 있을까요?] [그것도 생각해 봤소. 하지만 성문만 여는 데도 한 사람 이상이 필요할 거요. 그리고 십중팔구….] [영주님, 성문을 열려는 게 아니라 물이 있는 데로 보내기 위해서요.] 놀라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롤프가 몸을 홱 돌렸다.


[그들을 다 독살하고 싶소? 하인들까지! 세상에, 난 당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인 줄은 미처 몰랐소!] [독살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녀가 분개해서 소리를 꽥 질렀다. [당신은 정말이지, 날 비난하는 데는 무척 재빠르시군요! 물에다 개암나무 이파리를 넣자는 거예요. 그건 강력한 설사제거든요. 그걸로는 아무도 죽지 않을 거예요.] 롤프가 서서히 웃더니 느닷없이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면 서로들 화장실에 가려고 밀치고 싸우게 되겠군.] [그리고 배설을 못하면, 그들은 강한 복통과 구토 때문에 성벽에 대한 경계가 소홀해질 거구요.]A [세상에! 난 그렇게 사악한 계략을 생각해내지 못했을 거요.] 롤프가 놀라워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게 목숨을 구한다면 사악한 짓이 아니에요. 영주님.] 샐쭉거리며 그녀가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좋소. 어디서 개암나무를 구한다지?] [내…내 약 바구니에 조금 있어요. 하지만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죠.] [당신에게 약 바구니가 있다고? 정말로 의술을 알고 있소?] 진정 놀랍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말투는 그 얘긴 들어서 알고 있지만 믿지는 않았다는 걸 은근히 내포하고 있었다. [저에 대해 당신은 모르는 점이 많아요, 영주님.] 그녀가 야무지게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단 한 잔에다 섞는 데에만도 다섯 내지 일곱 잎의 즙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절대로 순한 설사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 적게 쓸수도 있죠. 좌우간 많이 필요할 거예요. 그리고 틀림없이 숲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전 아주 쉽게 찾아냈거든요. 또 다른 방법을 잎과 뿌리를 모두 포도주에다 담그는 거예요. 이 방법도 필요합니다. 물 있는곳을 발견할수 있다면 아마도 포도주 통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포도주에도 넣을 수 있을 거예요. 포도주와 물, 두 군데 다 넣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요.]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소?] [만드는게 쉽지 않아요.] [내일 하루면 해낼 것 같으니, 필요하다면 여기 하인들을 다 쓸수 있소, 충분할까?] 독재적인 그의 태도에 신경이 거슬려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대로 다가와 그녀의 한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이 성공하면, 레오니. 난 당신에게 큰 빚을 지는 거요. 예전에 내게 그토록 말써을 부렸지만, 이제 당신이 내 편이 된 게 기쁘오. 당신은 만만한 적이 아니니까.]


정말 묘한 취미로군, 그녀가 그에게 다정하게 보이면, 그는 꼭 지난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 지금은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오만한 태도에 그녀는 또다시 물러서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걸로도 만족하고 그저 내버려두기로 작정했다. 나중에라도 설명할 시간이 있겠지.♣

22 롤프는 달콤하고도 긴 키스로 레오니를 깨우더니, 생각없이 개암나무를 모으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속삭이자. 그녀는 잠이 확 달아나 분위기가 깨져버렸다. 그는 방을 나서면서 그녀의 표정이 딱딱해지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나 멋진 밤을 보낸 뒤라서, 그는 넉넉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만사가 다 잘될 것 같은 생각에 행복이 넘쳐흘렀다. 레오니는 더 이상 뾰로통해 있지 않았고, 그리고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그를 용서했다는 증거는 그녀가 도움을 제공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녀의 기묘한 구상에 그는 즐거웠다. 레오니가 도움을 주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못하던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결혼이 그녀에게 그런 변화를 가져온 것인가? 화가 나서 그녀와 결혼했던 게 그는 무척이나 유감스럽게 여겨졌다. 만약 결혼 전에 그녀를 만났더라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정상적인 이유로 그녀를 원했을 테니까…. 그는 한숨을 훅 내뿜었다. 이유야 어떻든 이 결혼에 레오니도 나처럼 행복감을 느끼고 있을까? 예배당으로 가다가, 롤프는 멈추고 홀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곳을 죽 훑어보고는 놀라 눈을 휘둥그래 떴다. 아니 놀람, 그 이상이었다. [세상에, 여기서 정말로 좋은…냄새가 나는데?] 그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 거렸다. [여름철 꽃들 때문이죠, 영주님.] 그는 귀에 익은 소리에 빙 돌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겨울에도 꽃이 핀다면, 그 향기를 일년 내내 맡을 수 있을 텐데요.] 아멜리아가 숲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나? 사실 그랬다, 그리고 그녀는 레오니가 멍석들 위에다 뿌려놓으라고 시킨게 뭔지도 모르면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의 변화들이 계절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그가 생각하기를 은근히 노렸다. 그러면 롤프가 레오니처럼 진작에 일을 하지 않았다고 자신을 나무라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롤프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내가 없는 동안 바빴겠군, 아멜리아. 정말 좋군.] 아멜리아가 뜻밖의 그의 말에 당황하고선 표정을 감추려고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다면 레오니가 정당한 공로를 인정받지 않았단 말인가? 그 공로가 나에게 돌아오게 될 거라던 레오니의 말이 정말이었나?


[전 한게 거의 없는 걸요, 영주님.] 아멜리아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상냥하게 대꾸했다. [너무 겸손하군, 내 아내가 당신과 같은 야심을 가졌어야 하는 건데. 내가 집에 없는 동안 그녀는 뭘 했소?] [그녀는 정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아멜리아가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면서도 약간 긴장하여 말을 얼버무렸다. 롤프가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정원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사냥개들은 어디 있지?] [우리…안에 있어요.] 그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 더니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별난 생각이긴 하지만 좋은 점도 있겠군.] 롤프가 계속 칭찬을 하자 아멜리아는 점점 용기가 생겼다. 그가 이모든 걸 그녀가 한일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녀는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식사도 더 유쾌하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영주님. 요리사가 해고되었어요. 그런데 새 요리사는 아주 솜씨가 좋거든요.] 롤프와 아멜리아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윌다 곁을 지나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은 윌다의 얼굴이 잿빛으��� 변했다. 윌다는 걸음을 재촉하여, 식료품 저장실에서 바구니들과 항아리들을 일일이 점검하고 있는 레오니를 찾아냈다. [그 여자가 그랬어요!] 윌다가 레오닐ㄹ 보자 마자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끔찍한 여자가 아씨께서 한 일을 다 자신이 한 것이라고 하고 있어요. 뻔뻔스럽기도 하지! 영주님께서 진실을 아시려 든다면 여기 있는 아무에게나 물어만 보시면 되는데.] 잠시 동안 레오니는 뻣뻣하게 굳어 아무 말도 못하다가, 이해하자고 마음을 다잡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분에게 틀림없이 사실을 말하실 거죠, 아씨?] 윌다가 답답하다는 듯 몰아붙였다. [그래서 내가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게 하라구?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는 내가 이곳을 바꾸길 원치 않았어. 내가 한 일을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자신의 뜻을 어겼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는 아마 그렇게 즐거워하지 않을 거야.] [정말이지, 전….] [더 이상 얘기 말자.] 레오니가 윌다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넌 날 도와야 해. 그가 해달라고 부탁한게 있는데, 일이 많을 거야.] 그날 내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레오니는 아멜리아와 롤프에 대한 생각에 점점 빠져들었다. 사랑의 밤을 보낸 뒤, 그녀는 남편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고, 그들의 끔찍한 출발에 대해 그를 용서하는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어떤 사실이 끊임없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가 정부를 계속 이 집에 머물게 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알에인 몬티니가 롤프에 대해 말했던 건 이제 과장된 얘기로 여겨졌다. 간밤에 롤프는 그녀에게 따스한 배려를 베풀지 않았는가? 그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유혈만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롤프는 알에인의 주장했듯이 그 불쌍한 알에인을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 잔인한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롤프의 좋은 점들을 인정한다 해도 알에인이 아무 죄도 없이 켐프스톤을 잃은 건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 그건 정말 너무도 부당한 일이었다-그리고 왕은 그녀에게도 인생을 결정짓는 결혼을 강요했다. 그녀는 왕에게 편지를 써거 왕의 간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도, 특히나 여자는 감히 왕의 뜻을 문제 삼지 못했다. 레오니는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풀잎을 모아 즙을 짜내며 온종일 바쁘게 보냈다. 롤프는 그 날 밤 와서는 모든 게 준비된 걸 보고 기뻐했다. 로데에 대한 준비는 완벽하게 다 되어

있으며,

그녀가

만든

갖고

로데에

들어갈

지원자도

있다고

흥분하기까지 했다. 롤프가 그녀에게 오로지 말하지 않은 건, 그녀의 생각에 대해 부하들이 처음 보인 반응이었다. 그녀 말을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토르프는 특히나 그 계획은 그들에게 성공이 아니라 분명 재난을 가져다 줄 거라면서, 레오니의 계획에 노골적인 불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롤프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병사 중 하나가 자신의 경험으로, 개암나무 풀잎은 레오니가 말한 그대로의 효과를 내리라는 걸 안다며 큰 소리로 끼여들었다. 그 병사가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자, 모두들 웃어대는 통에 롤프는 그 계획을 상세하게 설명하느라 비지땀을 흘렸다. 그렇지만 롤프는 이런 얘기는 전혀 레오니에게 하지 않았고, 레오니를 보며 그저 싱글거렸다. 그가 기분이 좋은 걸 보자 그녀는 더 불쾌해졌다. 왜 저 남자는 모든 걸 저토록 쉽게 받아들이는걸까? [불행하세요, 아씨?] 느닷없이 들려오는 질문에 레오니는 옆에서 개암나무 풀잎에서 즙을 짜내는 밀드레드에게 몸을 돌렸다. 이파리에서 즙을 짜내려고 안뜰에 탁자 네 개가 마련 되어 있었고, 부엌 하인들은 포도주에 섞을 걸 만들고 있었다. 밀드레드가 윌다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크루얼에 있는 동안 레오니는 그녀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에드몬드 몬티니가 이곳의 성주로 있었을 때, 레오니는 크루얼에 와봤기에 밀드레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밀드레드 어머니를 치료해 준적도 있었다. 하찮은 병이었는 데도 에드몬드 경의 멍청한 의산는 절절 맸다. 하지만 이전에 서로 만난 적이 있다고 해서 밀드레드가 꼬치꼬치 캐묻는 게 영 못마땅했다. 하녀인 처지에 감히 어떻게 그런 개인적인 질문을 한단 말인가? [넌 그렇게 할 일이 없니, 밀드레드? 내….]


[아씨, 죄송해요, 무례를 범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제가 진정을 바라는 건 아씨가 크루얼에서 불행하게 보내지 않는 것이랍니다-아씨가 결혼하신 게 아무래도 제 잘못 같아서요.] 허둥대며 내뱉는, 너무도 어이없는 말에 레오니는 호기심이 일어 화가 싹 가셨다. [네 잘못? 밀드레드, 어떻게 그게 네 잘못이니?] 의외로 레오니가 덤덤하게 중얼거리자 밀드레드는 민망함이 앞서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제…제가 바로 영주님께, 아씨가 펄시윅에 사신다는 걸 말한 사람이랍니다.] 밀드레드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더듬거리더니 털어놓았다. [바로 그때 그분은 펄시윅을 지배하시려고 아씨와 결혼하시기로 작정 햐셨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씨. 전 결코 아씨를 고의로 불행하게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울먹이는 그 가련한 하녀는 너무도 비참해 보였다. [넌 쓸데없이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밀드레드. 네가 내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알고 싶은 걸 알아냈을 거야. 그의 관심을 맨 먼저 펄시윅으로 이끈 사람은 바로 나야.] [하지만 제가 말하기 전까지는 아씨가 거기 사시는 줄 그분은 모르셨어요. 그분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이가 여자라는 걸 아시고는 지독히 화를 내셨어요.]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레오니가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어.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오로지 내 자신의 잘못 때문이란다.] [알겠어요, 아씨.] 밀드레드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또박또박 덧붙였다. [하지만 아씨의 결혼식 날 밤에 그랬던 것처럼 롤프 영주님께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기를 빌겠어요.] 레오니는, 밀드레드가 첫날 밤 자신이 롤프를 찌른 사건을 얘기하는 줄 알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밀드레드, 그 날 밤에 네가 본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길 빈다.] [전 절대로 말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씨. 에들리도 그렇구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분께서 아씨께 한 짓을 알고 있어요, 젖 영주님께서 잔인한 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성질이 급하시긴 하지만 잔인한 분은 아니라고 생갹했어요. 하지만 결혼식을 올린 지 몇 시간도 안 돼서 아내를 때리는 남자라면….] [뭐라구?] 이무도 듣지 않기를 바라며 밀드레드가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다른 이들은 흘긋 쳐다보다가 다시 눈길을 돌렸다. [아씨, 죄송합니다. 아씨를 화나게 하려고 말한게 아닙니다.]


밀드레드가 재빨리 중얼거렸다. [내 남편이 날 때렸다고 누가 그러던?] 레오니가 나무라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로즈 아씨가 아씨를 보시고 버싸 아씨께 말했고, 그리고….] [됐다! 맙소사,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이 나돌고 있는지 영주님이 알고 있니?] [모르실 거예요. 아씨. 저어, 여자들만 그 분이 그랬다고 우기고 있어요. 감히 누구도 롤프 영주님께 직접 확인 해 보지는 못했지만요. 남자들은 맹세코 그분은 여자를 때릴 분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싸움이 많이 일어났죠. 존안 아내 눈을 멍들게 했고, 주기는 남편한테 수프 사발을 내던졌어요. 버싸 아씨는 남편에게 혼이 나고서는 그 뒤로 남편과 말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버싸 아씨의 남편께서는 선물을 갖다바치며 버싸 아씨의 노여움을 풀려고 애를 쓰고 게시답니다.] 어리벙벙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레오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롤프 경은 날 때리지 않았다. 밀드레드. 내가 여기 오면서 무거운 베일을 쓰고 있던거 생각나지? 왜 그랬는 줄 아니?] [발진 때문에요.] [발진 따위는 전혀 없었어. 밀드레드. 그건 거짓말이었어. 꾸민…왜 그랬는지 신경쓰지마, 내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내 아버지가 날 때렸던 거야.] [그렇다면….] [내 남편은 하지도 않는 일로 오랫동안 비난을 받아오고 있었구나! 내가 막아야겠다. 내 말 잘 들어, 밀드레드. 네가 사실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할 수 있겠니?] [네, 아씨.] 새로운 사실에 무척 놀라며 밀드레드가 말 끝에 힘을 주었다. 레오니는 밀드레드의 확답을 받아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도저히 창피해서 밀드레드와 함께 있을 수가 없었다. 혼자 있을 시간이 좀 필요했다. 만일 자신에 대해 나돌고 있는 얘기를 알게 되면, 롤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이곳 사람들 사이에 그런 부당한 얘기를 나돌게 했다고 비난하려 들지 않을까?♣

23 새벽, 로데 성밖의 롤프의 진영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병사들은 잠자면서도 승리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매시간 마다 보초가 토르프에게 보고를 했지만, 그가 기다리고 있는 소식은 아직까지도 들리지 않았다. 동이 트자 마자 병사들이 일어나 진영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젯밤에 거의 다 준비가 완료된 상태라 병사들은 여유있게 서로 얘기를 하면서 점점 흥분에 들떴다. 아침 일찍 토르프가 자신의 큰 천막안에 있는 롤프에게 왔다. [계획대로 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자리들을 떴는지 성벽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습니다.]


토르프가 너무도 마지못해 말을 건네자 롤프는 씩 웃었다. [경은 다른 소식을 바라고 있었소?] [전 아직도 영주님의 아내가 영주님을 도우려 한다는 걸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녀는 우리와 로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목숨을 진심으로 살리고 싶은 거요.] [아마도 로데 성안에 있는 사람들만이겠죠.] 토르프가 얼굴을 찡그리며 툴툴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아침에는 날 화나게 하지 못할 겁니다, 친구. 난 아주 기분이 좋거든. 레오니의 계략이 들어맞다니! 이제, 가서 로데 성을 점령합시다.] [조심하실 거죠?] 롤프는 그 덩치 큰 남자가 걱정하는 걸 보고 싱글싱글 웃었다. [늙은 여자처럼 구는군요, 토르프. 난 차 마시려고 여기 온게 아니오. 이 성을 확보하려고 온 거지. 하지만 약속하겠소. 경이 안전하다고 말할 때까지 검을 칼집에 넣지 않겠소. 그러면 안심하겠소?] 로데 성의 점령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싱겁게 끝났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자 여기저기서 신음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이 성벽의 꼭대기에 이르는 순간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병사들은 극심한 복통으로 몸을 구부리고 있거나 먹은 걸 토해내고 있었다. 병사들 중에는 롤프의 병사들과 싸우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무런 힘도 없었기 때문에 저항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성은 비게 되었고, 포로들은 롤프의 막사에서 떨어진 곳에 마련한 공터로 모였다. 가신인 존 피츠얼스는 몸값을 요구하려고 따로 가둬 놓았다. 그 가신은 반란죄를 범해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지만, 롤프는 너무도 쉽게 성을 점령해 약간의 죄책감은 느껴 조금은 관대하게 처리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롤프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 다미안에게 투구를 건네주었을 즈음엔 아직도 아침이었다. 그는 임시용으로 만든 탁자에 앉았다. 레오니에게 전갈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가 이곳에 서기가 없으리란 걸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는 그 편지를 손수 쓰고 싶지 않았다. 그도 쉽게 읽고 쓸 줄 안다는 걸 그녀가 알기를 원치 않은 탓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 핑계를 대고 집사일을 맡으려 하지 않을 테지. 그녀가 아내의 도리를 빨리 몸에 익숙해질수록 그를 더 빨리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토르프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 롤프가 눈을 찡긋거리며 물었다. [모든 게 잘 처리됐소?] 토르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병사들에게도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걸 제안하실 겁니까?] [그들은 신병으로 모집된 농노들입니까, 아니면 용병들입니까?] [농노들로 보입니다. 대개가 영어밖에 못하거든요.] [그렇다면 엑스포드와 하윅 병사들에게 제안했던 걸 그들에게도 제안 하겠소. 여기서 머물면서 날 위해 싸워도 좋고 아니면 다른 곳으로 떠나도 되오. 용병들도 마찬가집니다.


이곳에 우리의 병사들을 적게 남겨둘수록 로데 성에 있던 쓸 만한 용병들을 남겨둬야 하니까. 누구에게 그 책임을 맡기는 게 좋겠소?] [왈터 위클리프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로데 성에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리차드와 피어스, 그리고 레이날드는 병사들과 함께 있고 싶어해서 왈터가 적격….] [그렇지만 왈터 경에게 앞으로 점령할 성 중에서 더 큰 성을 주려고 했는데….] [그는 이제 정착하고 싶어합니다. 그는 아내가 있는 엑스포든 성을 왔다갔다 하는 데 지쳤습니다. 버싸와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그녀는 혼자 놔두면 말썽을 너무 많이 일으킨다고 그가 그러더군요.] 롤프가 웃자, 토르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주님, 저라면 웃지 않겠습니다. 영주님도 말썽을 일으키는 아내를 가지셨잖습니까?] [그녀는 나와 결혼한 후로는 아무런 말썽도 피우지 않았소.] 롤프가 변호하듯 재빨리 되받아쳤다. [아직은 아니죠.] 토르프는 그래도 석연치 않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롤프가 아내를 변호하고 있을 때, 진영으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천막을 나가자 병사 하나가 말에서 내리면서 전갈을 외쳤다. [영주님, 난트 성이 항복했습니다.] [어떤 조건으로?] 롤프가 목소리를 높여 다그쳤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식량이 바닥이 날 지경이라 꽤 오랫동안 배급을 했던 모양인데, 그들은 너무 약해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 가신은 영주님의 자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토르프,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린 모양이구려.] 롤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가 마자, 말탄 한 병사가 미끄러지면서 멈추더니 외쳤다. [영주님, 크루얼에 있는 영주님 제분소에 누가 불을 질렀습니다.] 롤프는 얼굴을 찌푸리며 토르프를 쳐다보았다. [당장 병사 다섯 명을 준비시키시오, 그리고 경은 군대를 이끌고 워링 성으로 가야 하니까 여기 있으오.] [군대는 피어스 경이 이끌어도….] [난 보호자가 필요 없소! 화재 사건은 내가 처리할 거요. 내 말대로 하시오, 토르프.] 롤프는 얼른 채비를 갖춰 말을 타고 크루얼로 향했다. 다섯 명의 병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 로데에서 크루얼까지는 24 킬로미터의 거리라 숲과 들판으로 이어진 그 옛날의 길을 맹렬히 달렸다.


롤프의 종마는 경주마로 길러진게 아니었지만, 그는 병사들보다 훨씬 앞서서 제분소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 마을 북쪽에 있는 숲을 따라 물살이 급한 시냇가에서 잠시 숨을 돌리면서, 병사들뿐 아니라 수십 명의 마을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그는 화재가 진압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을 앞으로 재촉했지만, 더 이상 바람처럼 달릴 필요는 없었다. 순간 화살이 날라와 그의 몸에 박혔을 즈음엔 제분소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비명소리가 아스라이 들릴 만한 거리에 있었다. 화살은 그의 갑옷에 매달린 여러 개의 쇠미늘들을 뚫고서 그의 엉덩이에 박혔다. 롤프느 간신히 정신을 가누고 어두운 숲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형체들을 언뜻 보다가 고통에 휩싸였다.♣

24 레오니는 이처럼 많은 피일지라도 피를 보는 것에 익숙했다. 수많은 상처를 치료해왔지만, 롤프를 치료할 생각에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아직 희미한 의식이 남아 있는 롤프가 홀로 옮겨지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을 보고서 그녀는 등골이 서늘했다. 그의 눈 속에서는 격노와 비난이 서려 있었다. 왜지? [아씨] 윌다와 밀드레드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응] 윌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트로프 경은 롤프영주님을 그분의 - 아씨의 - 방으로 옮기고 싶어합니다. 아씨께서 그분을 돌보실 거예요?] [그가 날 불렀니?] 윌다는 레오니의 눈동자를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의사를 불렀어요] 그 말을 듣자 그의 비난의 시선 이상으로 그녀는 무척 기분이 상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그렇지만, 아씨] 밀드레드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속삭였다. [오도는 이발사일 뿐이에요! 많은 이발사들이 약간의 경험으로 의사로 일하는 건 알지만, 오도는 멍청이랍니다. 그는 자기가 치료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느니, 차라리 사람을 죽게 할 사람이라구요. 아씨도 오도리를 아실 거예요. 그 남자는 저의 어머니를 거의 죽게 해놨다고 아씨께서 혼쭐을 내셨던 바로 그 사람이라구요.] 레오니는 밀드레드를 매몰차게 노려보고는 돌아서 버렸다. 내가 혹시 롤프의 눈빛을 오해했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그는 내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획책했다고 믿는 걸까?


이층 곁방에는 한 호위병이 지키고 있어 그녀가 들어가려는 걸 막았다. 그녀가 그를 무시하고 지나가려 하자 그가 재빨리 그녀의 길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아씨.] 호위병은 그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날 들여보내지 말라고 내 남편이 시켰느냐?] 그녀가 날카롭게 다그치자 그는 아무 말 않고 바닥만 쳐다보았다. 그 행동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지금 의사가 그와 같이 있느냐?] [전….] 닫힌 문 뒤편에서 커다란 욕설과 ‘쿵’하는 소리에 놀라 호위병은 말을 멈췄다. 레오니는 몸이 뻣뻣해지고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이내 감정이 격해지자 안색을 금세 되찾았다. [내가 그를 보살폈으면 그가 저런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거야!] 분노에 찬 그녀의 눈이 호위병을 노려보았다. [그가 더 고통을 당하기 전에 지금 날 들여보내라.] [죄송합니다. 아씨. 아씨께서는 들어가셔서는….] [감히 스스로를 의사라고 지칭하는 저 안에 있는 멍청이만큼이나 너도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 말을 들었겠지, 오도?] 그녀는 문에다 대고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만일 네가 치료할 줄 몰라서 그의 상처가 더 깊어지거나 불구가 되면, 반드시 네 엄지손가락들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매달아 놓으리라! 그리고 만일 그가 죽는다면, 네가 대신 죽었기를 수천 번 빌게 될 거다!] 그러더니 그녀는 호위병 쪽으로 홱 돌아서서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너도 그렇게 될 거다!] 방안에 있던 오도는 그녀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화살을 빼내 벌어진 상처에 붕대를 감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제 문 밖이 조용해졌고, 그리고 영주가 의식이 없는 동안 그는 쉽게 붕대를 감았다. 레오니의 목소리가 층계 아래까지 들려서인지 그녀가 홀로 되돌아왔을, 많은 이들이 그녀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좌절감과 노여움을 삭이지 못해 싸늘하게 식어버린 난로 앞을 성큼성큼 왔다갔다했다.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에바라드 경은 롤프의 명령대로 자신은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지라도 레오니를 그 방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레오니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더 나이가 들고 더 현명한 남자만이 이 어리석은 짓을 끝장내 주리고 기대하고서는 롤프의 충성스런 가신인 토르프에게 전갈을 보냈다.


토르프 경은 그 날 저녁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롤프와 함께 그 방에 틀어박혀서는 밤늦도록 까지 나오지 않았다. 레오니는 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계단을 내려오자 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어때요?] 토르프가 그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자고 있습니다.] [그럼 상처는요?] [나올 겁니다-당신 덕택은 아니겠지만.] [당신 역시?] 그녀는 질식을 할 것만 같았다.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는 걸 알고서, 그녀는 마음을 다잡느라 시선을 돌리고 천장을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심호흡을 하고선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트로프 경,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그 일은 내 책임이 아니에요. 이제 내 농노들은 그를 공격하지 않아요. 그년 내 남편이에요. 당신은 왜 내가 이번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거죠?] 다그치는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토르프는 의자에 앉아서 먹을 걸 가져오라며 하인에게

고함을

질렀다.

먹을

것과

포도주가

차려졌을

때에서야

비로소

그는

험악한-롤프와 똑같이 험악한-눈으로 그녀를 섬뜩하게 노려보았다. [누군가 화살을 쏘고는 숲을 빠져나가 펄시윅 쪽으로 달아나는 걸 영주님께서 직접 봤습니다. 당신은 여기 온 후로도 펄시윅에 갔다고 에바라드가 그러더군요.] [그건 사실이에요. 내 이모 베아트릭스가 그곳에 살고 계시니까요. 그분을 찾아볼 권리가 내게는 충분히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그 일을 내가 저지른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당신은 거기 있는 동안 남편의 죽음을 꾀할 시간을 가진 겁니다. 당신이 영주님과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리고 아직도 이 결혼에 만족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영주님을 만나기 전부터, 영주님께 많은 재난을 안겨드렸다는 것도 아는 사실이구요. 결론은 이제 명백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분을 죽이려고 했던 겁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왜 로데 성을 점령하는 데 그를 도와줬겠어요? 또한, 난 아무 때든 그를 독살시킬 수 있었어요 그리고 교묘하게 불결한 주방 탓으로 돌릴 수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난 주방을 아주 청결하게 했어요] [당신이 그랬다구요?]


[하! 당신 역시 정말이지, 아멜리아가 그렇게 바꿔놓았다고 쉽게 믿는군요. 이 더러운 굴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오다가 그녀가 갑자기 이곳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작정했단 말이에요. 그래요? 오, 좋은 대로 생각하세요. 그리고 내가 손쉽고도 완벽하게 처리할 일을 실패할지도 모를 화살로 그를 죽이려고 했다고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난 어정쩡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아요, 토르프 경. 만일 내가 내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면, 그는 벌써 내 손에 죽었을 거예요.] [당신은 늘 구분에게 반대했잖아요. 그걸 부정할 수 있습니까?] [내가 과거에 느꼈던 감정에 대해 어떤 부정이나 변명도 하지 않겠어요. 검은 늑대는 괴물이라고 들어왔어요. 알에인 몬티니는 내 친구였는데, 당신의 영주께서는 그를 발견하기만 하면 그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그래요, 난 당신의 영주가 크루얼 성을 차지하는 게 싫었어요. 알에인은, 그에게 집을 빼앗긴 알에인은 목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달아났어요. 난 알에인이 성을 지키는 걸 도우려고 내 농노들을 모집하려 했어요 하지만 알에인은 싸우는 쪽을 택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쪽을 선택했잖습니까?] [그 부분에서 당신이 틀렸어요.] 레오니가 냉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가 강탈자라는 생각에 난 검은 늑대를 욕했어요 단지 그뿐이에요 나머지는 내 농노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행동했죠.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그에게 끼친 해는 결혼식 날 밤 그에게 상처를 입힌 것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건 사고였고-그는 기억조차 못하는 일이에요] 토르프는 화가 나서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롤프 경이 당신 곁에 있고 싶어하지 않은 건 다행한 일이겠군요.] 비아냥거리는 토로프를 보며 레오니가 씩씩거리며 쏘아붙였다. [다신은 여태까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군요! 난 그를 돕고 싶어요. 난 그의 고통을 덜 수 있어요. 그리고 그를….] [그에게서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설령 그가 마음이 누그러져 당신에게 치료를 맡긴다 하더라도, 난 당신을 믿지 못합니다, 레오니. 당신이 결혼한 건 내 어리석은 이 혀 때문입니다. 당신을 한 번 보고서는, 당신과 영주님이 결혼한 게 그다지 나쁜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이런 어리석은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느꼈던 감정이 모두 틀렸다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당신을 다시는 믿지 않을 만큼 현명합니다.] [당신은 고집이 센 사람이군요 토르프 내 남편을 위해서라도 당신이 계속 고집을 부리지 않기를 기도하겠어요. 오도는 그를 치료하기보다는 그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에요]


[그 의사요? 그 의사는 이제 치료를 끝냈어요. 그러니 롤프는 늘 그랬던 것처럼 금세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날 겁니다. 그가 이번 처음 부상을 당한 줄 아세요?] 토르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이 옳았기를 바라겠어요] 근엄하게 말을 내뱉으며 돌아선 그녀를, 그는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가 걸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숨어서 엿듣고 있던 밀드레드가 그의 눈빛을 보고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앞으로 나서면서 신랄한 표정을 지었다. [경은 아씨에게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느닷없이 밀드레드가 나타나자 무척 놀란 토르프가 험악한 눈초리로 쏘아보았지만,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서 덧붙였다. [아씨는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에 완벽한 의술을 갖춘 분이세요. 그리고 그분은 롤프 영주님을 해치지 않아요. 구분께서는 오도의 거들먹거리는 버릇을 아시고 위협까지 하셨어요. 제 말을 못 믿으시겠거든 에바라드 경께 물어보세요 [여자들은 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서로를 감싸지.] 토르프가 경멸 어린 투로 말을 내뱉었다. [그건 남아들도 마찬가지죠] [롤프 경에게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치 않아!] 그가 화를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하녀가 어떻게 겁도 없이 나에게 도전하는 거지? 펄시윅 농노들은 이보다 더 과격한 것 아닐까? [아씨께서는 영주님께 해를 끼치지 않아요! 아씨께서는 자신이 얻어맞은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영주님이 비난을 받자 무척 화를 내셨어요. 그리고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어요 영주님을 위해서요. 영주님을 증오하는 분이 그런 행동을 하십니까?] 계속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다가 밀드레드는 스스로에게도 놀라며 자리를 황망히 떴다. 토르프는 앞서 레오니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밀드레드가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25 나흘후, 롤프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토르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단찮은 부상인 것 같았는데.... 롤프는 그보다 더 심한 부상을 입고도 금세 회복되질 않았던가. 이번 부상은 정말이지 그의 체력을 서서히 약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상을 입은지 이틀째 되는 날부터 롤프는 열이 오르더니 급기야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헛소리할 정도까지 열이 올라, 한순간은 아내를 불렀다가 다음 순간에는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토르프를 전혀 알아보지도 못했다.


오도, 그 비겁한 겁쟁이는 롤프의 상처가 점점 악화되자 책임추궁을 받을까봐 살짝 성을 빠져나가 달아나 버렸다. 토르프는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니,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딱 한가지가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하인을 보내 레오니를 모셔오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윌다와 함께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송구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해 몸둘 바를 몰랐다. 그녀가 욕을 퍼붓자 토르프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더 일찍 날 부르지 않았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토르프를 다그쳤다. [상처 안의 오물이 그를 죽이고 있어요] [난 그의 붕대를 갈지 않아 그 상처를 보지 못했습니다.] 토르프가 변명을 해댔다. [당신은 그렇게 하라고 했어야지요! 오도는 좋은 일보다는 해를 더 끼칠 작자라고 당신에게 분명히 경고했어요.] [영주님을 도울 방법이 있겠습니까?] 토르프가 머리를 조아리며 겸손하게 물었다. 고름으로 가득찬 상처를 보면서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뭐라 단언할 수 없군요. 이렇게 심한 열이 난 지 얼마나 됐죠?] [사흘입니다.] [오, 하느님, 맙소사!] 토르프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절망적인 그녀의 태도로 보아 롤프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이 갔다.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서, 그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조심스레 지켜보았다. 그녀는 먼저 롤프의 입에다 억지로 약물을 들이부어 꿀꺽 삼키게

했다.

토르프는

침착하게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걸 느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풀잎들을 으깨, 악취가 풍기는 상처를 그걸로 감쌌다. 물이 끊고 있었고 그녀는 여러 개의 병에 담아 있는 내용물을 함께 섞기 시작했다. 그녀가 바구니에서 작은칼을 꺼내오��� 토르프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초조하게 물었다. [뭐하시려고?] 그녀는 그 커다란 남자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그의 상처를 열어봐야 뭣 때문에 열이 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당신이 하겠어요?] 그녀가 날카롭게 묻자, 토르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레오니는 칼을 소독하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상처에 붙여두었던 풀잎을 떼냈다. 그녀는 상처를 소독해가면서 칼로 그 안을 철저히 검사하기 시작했다. 완전한 침묵의 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녀가 겁에 질린 고함을 내질렀다.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그 엉터리 의사에게는 너무 관대해요!] 레오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토르프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토르프는 롤프가 이 지경이 된 게 전적으로 자기 탓처럼 여겨졌다. [그는 화살은 뺏지만, 화살과 함께 들어간 롤프의 쇠미늘 갑옷 조각은 빼내지 않았어요!]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 조각을 빼내 상처를 다시 소독했다. 마침내 상처에서 깨끗한 피가 새어나오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처가 소독되고 나자 손수 조제한 약으로 상처부위를 감쌌다. 마침내 치료를 끝낸 그녀는 휴식을 취하면서 토르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더 이상 걱정스럽지 않았다. [열이 가라앉을 때까지 상처에서 피가 나오게 내버려둬야 해요. 열이 가라앉으면 위험한 고비는 넘긴 거랍니다. 그때까지는 상처를 꿰매지 않을 거예요. 출혈이 심하면 그는 더 약해지겠지만, 상처가 깨끗해졌다는 걸 확신할 때까지는 난 출혈을 멈출 용기가 없네요. 그가 열을 이겨내는데 도움이 될 해열제가 나한테 있어요. 그의 체력을 회복시킬 것도 있구요.] 토르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고통을 누그러뜨릴 약도 먹일 거랍니다.] 그래도 토르프가 아무 말 않자, 그녀가 물었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 그의 상태를 지켜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도 되겠어요?] [위험에서는 벗어난 건가요?] 그가 한층 더 부드럽게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네, 그래요.] [그렇다면 여기 있으세요, 아씨.] [만일 그가 깨서 내가 여기 있는 걸 보게 되면, 그는 좋아하지 않을거에요.] [그럴 겁니다.] 토르프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사실은 레오니가 너무 고마워 롤프가 뭘 생각할지는 관심이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그에게 내가 한 일을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녀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말하지 말라는 겁니까?]


[회복되는 동안만큼이라도 그를 화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를 치료한 게 그 의사라고 생각하게 놔두세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그의 건강에 좋으니까요.] [난 롤프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당신보고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에 관해서 그냥 아무 말도 말라는 거지요. 그가 깨어나기 전에 난 이곳을 나갈 거예요.] 다음 날 늦게 서야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뜬 롤프가 맨 처음으로 본 모습은, 그녀가 들쭉날쭉한 붕대의 가두리를 매만져가며 상처를 붕대로 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고열로 이미 기진맥진 상태였고,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으로 그의 얼굴은 마치 산적같이 끔찍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를 보더니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더 음울해졌다. 레오니는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서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난롯가 의자에서 자고 있던 토프프가 깨어나 침대로 다갔다. [정말로, 다시 우리한테 돌아오신 겁니까?] [여기가 어디오?] 롤프의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토로프는 진심으로 존경해마지 않는 영주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죽을 뻔하셨습니다.] 롤프가 의심에 가득찬 눈길로 그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겨우 작은 화살 구멍으로 죽을 뻔했다는 말인가요?] [그 작은 구멍이 오염되어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열이 아주 심하셨어요.] [그건 아무래도 괜찮소. 도대체 그녀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요? 날 이 지경으로 만든 여자를 들여보내다니, 그러고서도 날 어떻게 보호한다는….] [진정하십시오. 롤프.] 토르프가 그의 말을 자르며 이내 덧붙였다. [전 이제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녀는 아닙니다.] [난 그녀가 뭘 하느냐고 물었소.] [네, 바로 그게 뚜렷한 증거입니다-결정적인 건 아니자만.] 토르프가 또박또박 말 한마디마다 힘을 주었다. [지금 그녀를 변호하고 있는 거요?] 경은 이전에는 그녀를 결코 믿지 않았잖소. 난 그녀가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걸 믿고 싶은 게 아니오. 토르프, 그녀와의 관계가 상당히 진전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꼴이라니.] 토르프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주 님은 부상을 입어 생각이 흐려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판단을 못했던 겁니다. 그녀 탓으로 돌리기 전에 한번 상황을 되짚어 보십시오. 누구든 영주님께 화살을 쏠 수 있었으니까요. 그자는 위락 점령했던 성들 중에 내쫓긴 자일수도 있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기서 내쫓긴 자일 수도 있습니다. 펄시윅이 이전에 우를 무기로 공격한 적이 있습니까? 영주님께서 그들의 영주를 아내로 맞이해 단단히 쥐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들이 그런 무모한 일을 저릴렀겠습니까] 토르프는 조금 여유를 두고 롤프를 신중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전에 그녀가 영주님께 왜 적대감을 품었는지 아십니까? 지금까지 그에 대해 그녀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래 봤습니까, 롤프?] [아니오. 하지만 경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렇지 않다면 왜 경이 날 이처럼 괴롭히겠소?] 토르프가 입끝을 올리며 싱긋 웃었다. [기분이 나아지고 계시는군요.]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거요?] 토르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그녀에 대해 좀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당신을 오해하고 있 구요. 함께 협력해서 두 분 사이의 앙금처럼 남아 있는 의심을 푸는 건 당신들 두 분에게 달린 일입니다. 롤프.] [난 아파서 여기 누워 있는데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군요] 롤프가 한숨을 길게 내뿜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튼 그 빌어먹을 의사는 어디 있습니까? 내 엉덩이에 불이라도 난 것 같소] [그럴 겁니다. 어쨌든 지금은 회복 상태입니다. 오도에 관해서 라면, 이틀 전에 떠났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잃을까봐 겁이 나 재빨리 줄행랑을 친 거죠.] [또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거요?] 롤프가 화를 벌컥 냈다. [오도가

영주님을

해롭게

한다면

어떻게

할지

영주님의

아내가

아주

분명하게

경고했거든요. 그리고 사실 영주님은 무능력한 오도 때문에 거의 죽을뻔….] [경은 내가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렀다고 계속 말하고 있는데, 의사가 도망가버렸다면, 경 덕분에 내가 살아났다는 거요?] 토르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상황을 이해하고는 롤프의 눈이 놀라서 커졌다.


[그녀가 날 치료했단 말이오? 또다시 날 도왔다고?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소? 이런, 토르프. 정말 그 여자가 나한테 관심을 갖게 되었군요] [전 그걸 확대 해석하고 싶지 않습니다.] 토르프가 서둘러 말을 막고선 얼른 덧붙였다. [그녀가 영주님의 딱한 목숨을 구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건 단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게 그녀의 성격이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이상으로 확대 해석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영주님만 곤란해지십니다.] 하지만 롤프는 그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기뻤다. 그리고 황홀했다. 그녀가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리라. 그렇다고 머지않아 그녀가 나를 사랑할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롤프는 기진맥진해서 잠이 떨어질 때까지 그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26 레오니가 막 홀에 들어섰을 즈음 홀을 살금살금 빠져나가는 어니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왔다. 그녀는 오랫동안 크루얼의 집사를 불러놓고 회계부에 관해 얘기하려고 했지만, 그는 늘 어딘가 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왜 나를 피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그 작은 남자의 뒤를 따라 홀밖으로 나가, 마구간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시간을 내게, 어니스 집사] 그는

멈추더니 무척이나 천천히

돌아보면서, 마지못해

그녀와

얘기한다는

표정을

역력하게 드러냈다. [어니스 집사. 자네는 에드몬드 경의 집사였지, 안 그런가?] [수년 동안요, 아씨.] 그 질문에 약간 놀라면서 그가 대답했다. [전 영주와 비교할 때 크루얼의 새영주는 엄한 주인 같나?] 레오니는 얼르듯 상냥하게 물었다. [정말, 아닙니다. 아씨 물론, 에드몬드 경이 훨씬 더....... 롤프 영주님께서는 여기 거의 계시지 않아.......] 그가 몹시 당황하여 말을 더듬기 시작하자, 레오니는 그가 당황한 틈을 이용했다. [나한테 크루얼의 회계부를 주었으면 좋겠네. 어니스 집사.] [아씨께요] 그가 레오니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갖고 뭘 하시려구요?] [내 남편께서 보고 싶어하네.]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하지만 그분은 읽으실 줄도 모르는데요] 그 남자는 이제 당황스러움을 넘어서 잔뜩 겁에 질렸다. 레오니는 재빨리 격려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영주님께서는 회복되고 있는 동안에 할 일이 거의 없다네, 어니스 집사. 그분은 크루얼에서 어떤 이익이 생기는지 직접 알아보고 싶은 모양이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신중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최근에야 소유지를 갖게 된 기사라서 아마 회계부를 이해하지 못할 거네. 구분의 서기한테 읽어달라고 할거야.]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 집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우겼다. [하지만 자네는 늘 너무 바쁘잖나?] [시간을 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서기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렇지만..........] 레오니는 참을성을 잃고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자네는 지금 영주님 명령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가?] [나이, 아닙니다. 아씨.] 그가 재빨리 자신 있는 태도를 취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지금 당장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가 초라할 정도의 얄팍한 양피지 더미를 건네주자, 레오니는 무척 놀랐지만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회계부는 통산 대천사 마카엘 축일(9 월 29 일)로부터 다음 해 축일까지, 일년 단위로 기입하였는데, 그 축일이 앞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여기에는 분명 거의 일년 치의 지출과 수입이 기록되어 있어야 했는데, 겨우 한 달치 기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빈약했다. 그녀는 그 회계부를 들고 임시로 잠을 자는 작은방으로 올라가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그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엉성한 상태였다. 집사는 주방 하인들과 마구간 하인들을 모아놓고 매일 저녁 의논을 하여, 구입한 모든 물품과 지불한 액수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게 의무였다. 그리고 비축품에서 사용한 물품들을 기록해야 하고, 또 마을 사람들이 소작료 명목으로 바친 모든 목록들도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이 소작료로 들어온 것 중에서 장에 내다 판 것 또한 수입으로 기록되어야 했고, 가령 내다 팔 물품을 수송하는데 드는 돈과 대장장이나 다른 장인들이 한 일에 대해 지불되는 총액들도 기록하는 게 정상이었다.


펄시윅의 일일 회계부에는 빵, 곡물, 포도주, 그리고 총 수량에서 소비한 맥주의 양이 빠짐없이 기록되어있다. 비축품에서 쓴 것들도 그 양이 정확히 기록되었다. 비축품에서 쓴 것들도 그 양이 정확히 기록되었다. ‘리설’성의 상인들에게 산 항아리, 천, 향신료, 같은 물품들과 그리고 용역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주방에 그날그날 필요한 특별한 치즈, 고기 종류를 구입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펄시윅은 비축품을 잘 마련해 두었고, 거의 모든 육류와, 닭. 오리 등은 영지에서 얻었다. 마구간에 필요한 건초, 귀리, 꼴풀은 대개가 잘 비축되어 있었고, 주된 지출은 말 한두 필을 사거나 너무 늙어 짐을 나를 수 없게 된 말들을 교체하는 비용이었다. 이 늙어 쓸모 없는 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어니스 집사는 주방과 마구간에 쓴 걸 기록은 해뒀지만, 일주일 치씩 한꺼번에 모아 기입해 주었다. 더욱 엉망인 건 뭐에 대 썼는지 전혀 적어 두지 않고, 그저 매주 지출 총액만 표시해두었다는 점이었다. 소작료로 지불한 물품도 기록은 해놨지만 그 총액이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 잉여 물품을 팔았다는 흔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레오니는 곡식과 양과 황소와 소들이 팔려나가는 걸 보았고, 그 귀에도 팔려고 엑스포드 성 장터로 수송되는 걸 보았다. 그런데 왜 이런 게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걸까? 그것만으로도 회계장부가 엉망이란 걸 발견했는데, 더 심한 건 매주 지출비의 총액이었다. 그건 펄시윅의 한달 지출비의 세 배나 되는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여기에는 롤프의 군대 경비가 포함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롤프는 각 성의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직접 공급을 받아 군대를 이끌어나간다고 에바라드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레오니는 비축품들을 면밀하게 점검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몇 주안에 수확이 시작되면 많은 게 다시 채워질 거라는 것과 또 기록된 소비량처럼 실제로는 그다지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니스 집사가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다는 게 명백하게 드러났다. 화가 나서 그녀는 그 죄인을 찾으려고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두 명의 병사를 불러 옆에서 호위하라고 했지만, 그들에게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사를 찾으러 주방으로 갔다. 두 경비경에게는 밖에 있으라고 하고 혼자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를 쳐다보며 먼저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어니 집사, 이 회계부에 구입한 것으로 기록된 말들은 어디 있나?] 어니스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들요? 무슨 말들이지요?] 전혀 모르는 척 느물스럽게 대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언성을 높였다. [그 말들 말이네. 자네는 분명히 말 열두 필을 샀었네.] [전 말 한 필도 사라고 지시하지 않았는데요, 아씨. 무슨 생각을 하지는….]


[말들을 사지 않았고? 그렇다면 내가 착각한 모양이군. 영주님이 아멜리아에게 준 장신구들은 자네가 구입했나?] [아씨, 죄송하지만….] 어니스는 불끈 화를 내며 몸을 곧추세웠다. [전 결코 여자들 장신구를 산 적이 없습니다. 롤프 경께서 저에게 그러라고 분부하신 적도 없구요. 그분이 이 회계부를 보고 뭐라고 하셔서 아씨가 의심하시는지….] [구분이 뭐라고 했겠나?]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날카롭게 되받아 쳤다. [아씨!] [자네가 이성을 위해 쓰는 돈들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가, 어니스 집사?]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창고에 잠겨진 금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 남편은 돈이 부족하다 싶은 때 금고를 채우나?] [지금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충분히 남겨….] [얼마나?] [아씨!] [구분께서 이성을 유지하라고 얼마를 자네에게 주었나?] 그녀가 한치의 물러섬 없이 당차게 물었다. [몇 백 마르크요.]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가 불안스럽게 대답했다. [정확히 명 백 마르크지?] 여기서 고삐를 늦춰선 안돼. 다독거려 가며 부드럽게 물어야지 [전 모릅….] [얼마냐고?]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깨 너머로 주방장과 그 조수들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잔뜩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레오니가 묻는 말투가 점점 심문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천백에서 천이백입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씨께서 왜 그런 걸 신경 쓰시는지 모르겠군요-뭘 사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만약, 그런 경우라면 전 아주 기쁠….] 어니스가 머쓱하니 말끝을 흐렸다. [자네는 분명 그럴 테지] 그녀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래 내 남편은 자네에게 준 돈 중에서 자네가 아직 지출하지 않은 돈은 그 잠긴 금고안에 아직 있겠지?] [물론입니다, 아씨.] [그리고 지출된 돈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겠지?] 그녀는 천천히 양피지들을 들어올려 그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네, 그럼요.] [그렇다면 자네가 크루얼에서 쫓겨나기 전에, 자네 숙소를 수색하는데 반대하지 않겠군, 그렇지?] 어니스의 납빛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아씨? 제…. 아아…. 제가 아씨 말씀을 잘못 들은 것 같네요.] [그렇지 않네.] 그녀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 회계부에 관해서 내 남편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겠지. 그는 전쟁터를 전전했을 뿐 영지를 경영한 적이 없으니까, 경비가 얼마나 드는지 모르리라 자네가 생각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날 속이려 하다니, 자네는 어리석었어. 난 게으른 여자가 아니야. 난 수 년 동안 집사일을 손수 맡아 했어. 이 정도의 성을 경영하는 데 정확히 얼마가 드는지 알고 있어. 세세한 동전 한 푼에 이르기까지 말일세.] 어니스의 눈이 놀라 휘둥그래지는 걸 보고 그녀는 생글거렸다. [어니스 집사, 내가 자네의 죄를 밝히겠네.] 어니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증거를 아씨께서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크루얼은 펄시윅이 아닙니다. 롤프 경께서 여기 오셨을 때는 엉망이었습니다. 비축된 건 거의 없었고 물품을 구입하려 해도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내 남편이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분에게 이 문제를 처리하라고 했을 거네. 왠지 아나? 자네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어.] 레오니가 화를 내며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아무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고?] 요리사를 돌아보며 그녀가 다그쳤다. [존, 이 회계부에 지난주에 네가 필요해서 삼십오 마르크 어치의 물품을 샀다고 기입되어 있다. 맞느냐?] [아닙니다, 아씨! 십 마르크도 쓰지 않았습니다.] 존이 기가 막히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자 레오니의 눈이 다시 집사에게 홱 쏠렸다. 창백했던 집사의 얼굴은 이제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했다.


[자, 어니스 집사?] [그 회계부에 관해 절 심문하실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아씨. 전 아씨 남편과 얘기할 겁….] [아니, 그렇게 못할 거네!] 출입구 쪽으로 물러서서, 놀란 눈을 굴리며 엿듣던 경비병들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그녀가 날카롭게 명령을 내렸다. [어니스 집사를 그의 숙소로 데려가 소지품들을 수색해라. 만약 훔친 돈이 발견되면, 그는 입고 있는 옷차림으로 크루얼을 떠나도록 하라. 그 이상은 절대 안돼. 만약 그 돈인 발견되지 않으면- 그녀는 그 초라한 집사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자네는 자네 소원대로 내 남편과 얘기하게 될 걸세. 그래도 그분은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거야.] 레오니는 화가 나서 속을 부글부글 끊이며 홀로 돌아가 기다렸다. 이거 괜한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닌지 모르겠네. 에바라드 경이나 아니면 토르프경에게 말해서, 그들이 그 집사를 다루도록 할 걸 그랬나? 얼마 지나기 않아, 좋든 나쁘든 그 사건은 끝이 났다. 경비병들이 얼뜬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그들이 그의 소지품들을 뒤지고 있는 동안 집사가 달아나 버렸다고 말했다. 그리고선 겨우 오십 마르크밖에는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백 마르크중에서 겨우 오십마르크라고? 세상에, 기가 막혀. 롤프에게 뭐라 말하지? ♣

27 롤프는 커다란 궤짝을 열라고 몸을 구부리다가 신음을 토해냈다. 토르프가 침대에서 나오지 말라고 그에게 누차 경고를 했었기에 무리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침대를 빠져나왔다. 몹시 허약해진 상태였고, 어제서야 상처를 꿰맸다. 하지만 침대에 빈둥거리며 누워 있을 정도로 참을성이 없었다. 레오니는 그에게 부상을 입힌 게 아니라 오히려 치료했다는 걸 알고 나서는 내내, 그는 야비한 행동에 대해 그 무엇으로든 보상하고 싶었다. 그의 불신에 가득찬 행동을 두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특히나 그가 로데성을 점령하게 도와준 직후인데 말이다. 그는 레오니에게 특별한 선물로 어떤 걸 줄까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하루종일을 보냈다. 뇌물로 그녀의 용서를 구하려 한다고 그녀가 생각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멋진 뭔가를, 그녀가 소중히 간직할 수 있는 그런걸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그리고 어떤 걸 갖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그래서 곁방으로 가 그녀의 궤짝들을 뒤져보리란 생각에 토르프가 방을 나가 침대에서 일어날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먼저 열어본 두 개의 궤짝 안에는 옷가지들밖에 없었다. 세 번째 열어본 더 작은 궤짝에는 레오니의 귀중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게 얼마나 빈약한지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상아로 만든 체스 한 세트가 있었고, 벨벳 안감을 댄 작은 나무 상자 안에는 열두 벌의 은수저들이 담겨 있었다. 수입 향신료가 들어 있는 주머니들, 부드러운 양모로 감싼 상자의 맨 밑바닥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가죽띠와 황금 색 끈이 보였다. 작은 상자에서는 황금 브로치 세 개를 찾아냈다. 하나에는 석류석들이 박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유약을 입힌 거였다. 이것들 외에 은으로 만든 머리핀 두 개, 황금 버클 하나, 그리고 정교한 동전이 하나, 목걸이의 고리 사이에 일정한 간격으로 커다란 석류석이 박히고 한가운데에는 황금 십자가가 매달린 금목걸이 하나가 있었다. 하나가 아주 아름다운 장신구들이었지만 너무 보잘것없었다. 레오니의 아버지가 그녀를 어렸을 때부터 무관심 속에 버려두었다는 사실을 롤프는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멋진 장신구들을 선물할 사람이, 놀라움과 기쁨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빛나는 걸 지켜볼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갑자기 레오니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한 아버지란 남자에 대한 증오가 끓어올랐다.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를 등지고 궤짝을 보고 있던 롤프의 몸에 두른 시트에 피가 흠뻑 베어 나왔다. 변명이 여지없는 상황이 벌어져 롤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만 보았다. 롤프는 민망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몸을 돌려 천천히 침대로 되돌아갔다. 레오니는 그를 따라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두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주님, 약을 찾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제 약 바구니가 화로 옆에 있다는 걸 토르프가 말해줬어야 했는데.] 롤프는 힘겹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랬어야 했소.] [하지만 당신 손수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드려야겠군요. 만약 치료법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으면 이롭게 하기보다는 해를 더 끼치거든요. 전 기꺼이 당신을 도울 거예요] [당신이?] 레오니는 그가 갑자기 부드러운 말투가 되받아 치자 다리에 힘이 빠져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꼭 오리라고는 생가하지 못했소.] 그녀는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그 집사 일에 관해서 못 들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무언가로 그는 괴로운 눈치였다. [영주님, 제가 왜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 거죠?]


그녀는 섭섭한 마음에 야멸차게 묻고선 이내 덧붙였다. [당신에게 항상 복종해야 한다고 당신이 분명히 말하셨잖아요.] [하지만 어쨌든 당신은 당신 좋을 대로하잖소.]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두 사람은 무엇이 문제인지에 관해 엉뚱한 화제로 말려들었다. [영주님, 누구도 제 생각과 감정을 조종할 수는 없어요. 다른 점에서는, 당신 아내니까 전 명령을 내리는 당신의 소유죠.] 롤프는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녀 말은 물론 옳은 얘기였다. 그는 그녀의 생가고가 감정을 지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려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그가 해볼 만했다. [당신이 설령 날 돌보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난 이해할 거요.] 레오니는 그 말을 인정하기보다는 그의 말투에서 겸손함을 느꼈다. [전 어머니로부터 병을 고치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소중한 선물을 물려받았어요. 그건 함께 나누기 위한 거죠. 만일 그걸 쓸 수 없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겠죠. 이제 당신의 출혈을 멎게 해도 될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니는 시트를 치우고 더러워진 붕대를 풀었다. 그때, 그녀는 일하는 즐거움과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는 게 흡족하고 반가워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남을 돕는 게 즐겁소?] 롤프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어. 나만을 위해 돌봐 주리라던 내 생각이 틀렸어. 토르프 말대로, 사람들을 돕는 건 그녀의 성격일 뿐이야. 그녀에게 그는 전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아프게 파고들었다. [영주님, 뭐가 잘못됐나요?] [아니오.] 그는 얼른 표정을 고치며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방금 난 내가 당신을 부르지 않고 그 엉터리 의사를 불러서 당신 맘이 상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소.] [마음 상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의 말을 받아 그를 재빨리 안심시켰다. [어리석은 일이라서 화가 났지요. 오도가 무능하다는 걸 알았거든요. 하지만 당신 곁에 날 오지 못하게 한 건 이해할 수 있었어요. 당신은 쇠약해져 있었고 고통을 받고 있었어요. 정신이 뚜렷하지가 않았던 거죠.]


[왜 당신이 날 변호하는 거요?] 그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당신이 제 정신이었다면, 영주님. 절 여기 못 들어오게 하는 대신 저에게 족쇄를 채웠을 거예요.] [족쇄를 채우다니! 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요…. 당신은 내 아내요.]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그녀는 화를 내며 대꾸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서 처벌을 해야 해요 - 그게 누구든 간에, 만약 내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 해도 나 역시 마찬가지로 처벌해야 할 거구요.] 롤프는 후회스런 느낌이 일어 씁쓰레하게 웃었다. [화살이 박히고 펄시윅 쪽으로 가는 범인이 봤을 때 처음에 당신이 생각났다는 건 인정하오. 당신이 날 죽이려 했다는 걸 믿고 싶진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고, 우리가 결혼하기 전 지난날을 생각해볼 때 그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니었던 거요 … . 이번 일로 당신을 의심해서 정말 미안하오. 레오니.] 왜 그를 바로 보고 싶지 않겠냐만은 그의 시선을 피해, 그녀는 그에게 붕대를 마저 갈아주고는 약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그러고선 파란 작은병을 들어올렸다. [영주님, 고통스러우시면 이걸 드릴까요?] 롤프는 싫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갑자기 아주 거북해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싫소!] 롤프는 호통을 치다가 금세 후회했다. [그래 절 아직도 의심하세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제 진통제를 거부하고 있고, 전 당신이 고통스럽다는 걸 알아요. 제가 당신을 독살할까봐 두려운 거죠?] [제기랄! 그걸 줘요!] 그는 그녀에게서 그 병을 낚아채고는 꿀꺽꿀꺽 들이켰다. [자! 이제 당신은 왜 날 용서할 수 없는지 말해주시오.] [그렇지만 전 용서했는 걸요.] 찬찬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제 얘기를 듣고 당신이 용서하기만을 빌 뿐….] [말하지 마시오.]


그가 갑자기 그녀의 말을 자르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한테서 어떤 고백도 듣고 싶지 않소.] [그렇지만 전 이 이야기를….] [하지 마시오!] 그녀는 자세를 고치고 일어나서 그를 노려보았다. 모든 온순함이 싹 사라져 버렸다. [당신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당신이 화를 내는 것으로 날 두렵게 하고 싶은 거죠? 그런데 전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먼저 말하는 걸 그저 당하고 있지 않을 거예요. 영주님, 전 당신 집사를 해고했고, 전 그 일이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가 화내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롤프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게 다요?] [그래요.] 그녀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요, 레오니?] [당신은 분명 화를 낼 거에요. 그리고 나한테 고함을 치고 싶다면 그러세요. 고함을 쳐도 당신 상처에 해롭지는 않거든요.] [아마….] 그는 웃음이 목에까지 차 올라 웃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왜 그를 해고했는지 얘기한다면….] [어니스 집사가 당신 재산을 몰래 훔치고 있었다는 걸 알아냈어요. 그것은 적은 액수가 아니라 수백 마르크를요.] [어떻게 당신이 그가 훔쳤다는 걸 알아냈소?] 그가 날카롭게 묻자 그녀는 서둘러 설명했다. [내가 그 문제를 서툴게 다룬 게 유감일 뿐이에요. 이제 그가 도망가버렸기 때문에 당신 돈도 사라졌어요.] [그가 훔치고 있었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확신하게 됐는지 당신은 아직 내게 말하지 않았소.] [영주님, 당신이 그 집사에게 처음에 얼마나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집사는 천백에서 천이백 마르크를 받았다고 그러더군요. 당신은 여기 일곱 달 있었는데, 그는 그 기간동안 구백 마르크를 지출했다고 기록해두었어요. 그건 지나치게 너무 많아요.] [레오니, 그게 많다는 걸 어떻게 아오?] 롤프가 격분했는지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전 … .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펄시윅에서 제가 직접 집사일을 보았어요. 이 정도 규모의 영지는 손님들이 자주 와서 머물지 않는 한, 당연히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정도의 성을 꾸려나가는 데 얼마나 드는 지도 안답니다.] 롤프는 어이가 없어 머리를 흔들었다. 펄시윅 집사일을 했으면서도, 그녀는 크루얼을 관리하는 걸 거부하질 않았던가. [소유지 관리는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당신도 분명히 알았을 거요. 그러니 내 집사가 나에게 사기를 쳤다는 당신의 말을 믿어야만 하겠지.] [전 정말로 그의 회계부를 꼼꼼하게 봤어요. 그리고….] [당신을 의심하는 게 아니오. 하지만 난 이제 집사가 없소. 에바라드가 그 일을 할 수도 없소.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는 게 없을 테니까.] [과연 그렇군요.] [그러니 이제 어쩌면 좋겠소? 당신이 그 자를 해고시켰잖소. 그를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겠소?]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데요.] [그런데 나는 생각이 나는걸. 당신이 그 자리를 채워야 할거요.] [내가요?] [당연하지 않소? 당신 책임이오. 알잖소.] [물론이죠, 알겠어요.] 레오니는 얼마나 기쁜지 그 표정을 그가 보지 못하도록 몸을 돌리고 약 바구니를 난롯가로 가져갔다. 사실, 그는 그녀가 보람으로 삼는 걸 그녀에게 시키면서, 그녀를 처벌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직접 집사일을 하겠노라 제안하고 싶었지만, 그가 거절할까봐 두려웠다. 아무튼, 그는 그녀가 크루얼에 어떤 책임을 지는 일을 거부해 왔었으니까-바로 이 순간까지는. 그녀는 간신히 표정을 추스르고는 돌아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영주님, 더 의논할 게 없다면, 식사를 가져오게 할게요.] [같이 식사하겠소?] 그가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판 병에 담은 진통제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원하신다면요.] [좋아요, 레오니. 그런데 어디서 자고 있소?] [저… 전, 몇 가지 소지품을 하인들 숙소 맞은편에 있는 방으로 옮겼어요.] [그걸 다시 갖고 오시오.] 비록 졸리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지만 어떤 거부도 용납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당신은 여기서 잘 거요.] [그러죠, 영주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나직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행복하고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28 커다란 난로에 불꽃이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었고, 하인들은 윌다의 세심한 감시 하에 저녁 식탁을 준비하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아멜리아는 불가에 앉아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일부러 못 본 척하면서 수를 놓고 있었다. 에바라드 경은 그녀 곁에 앉아 에일 맥주 한잔을 마시며, 그날의 임무를 끝낸 상태라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레오니가 영주의 방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아멜리아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레오니가 하녀에게 몇 마디를 하고 홀에서 걸어나가고 있는 모습을 골똘하게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아멜리아는 새치름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앉았다. 롤프가 레오니의 죄들을 그녀에게 낱낱이 들춰내 몰아붙일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롤프는 그 아내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제 틀림없이 레오니를 펄시윅으로 돌려 보낼 거라고 에바라드가 말했다. 롤프가 부상을 입었을 때 아멜리아는 비켜나 있었다. 괜히 섣불리 끼여들어, 만약 그가 죽어버리기라도 하여 그게 그의 아내 탓이라는 걸 아무도 증명할 수 없게 되면, 아멜리아가 죄를 뒤집어쓰고 쫓겨날 게 뻔한 노릇이지 않는가, 그녀는 레오니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롤프는 이제 회복되었고, 그 아내가 죽이려 했다고 믿는 게 분명하리라. [그가 그녀에게 짐을 싸라고 했을까요?] 홀을 지나 하인들의 숙소가 있는 위층으로 가고 있는 레오니를 역시 지켜보고 있던 에바라드에게 아멜리아가 물었다. [짐을 싸다니? 왜?] [물론, 펄시윅으로 돌아가려고요.] [ 왜 영주님이 그녀를 거기로 보내려고 하는데요?] 아벨리아는 화가 나서 이제 연인이 된 그 남자를 노려보았다. 서로 통하는 마음이 없어, 항상 그녀가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걸 설명해 줘야 했다. 그녀는 명예에 목숨을 건 에바라드 경에게 모든걸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제분소에 난 화재와 자신이 공격을 받은 걸 롤프는 그녀 책임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화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건 착오였소.]


에바라드는 태연하게 맞받아 쳤다. [착오라니요? 누구의 착오?] 에바라드가 잔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롤프 경은 이제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고 있소.]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그가 직접 당신에게 그러던가요?] [토르프경이 워링 성 포위 공격을 하기에 앞서 그렇게 말했다오.] [하지만 그가 롤프를 돌보고 있었잖아요.] [레오니 아씨가 이젠 그를 돌볼 거요. 그러니까 토르프 경이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지.] 아멜리아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가 불쌍한 어니스 집사 소식을 들어도 그녀가 여전히 그를 돌보게 될까요?] [롤프경이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아내가 단지 독단적으로 행동을 했다고 해서 아내를 떼어놓지는 않을 것 같군요. 그는 다른 점에서는 그녀를 아주 좋아하거든. 왜 안 그렇겠소? 여기 온 후로 그녀가 한 일들을 보시오.] 아멜리아는 분노의 외침을 억누르려고 거칠게 자수를 놓았다. 에바라드는 그녀의 동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건 정말 불공평해! 유산을 했다며 임신한 척 꾸민 일을 그만두려고 이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임신이 될 때까지는 영락없이 에바라드와 계속 관계를 가져야 할 판이야. 정말로 한시바삐 임신을 해야 돼. 만일 또 월경이 있게 되면,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나을 거야. 롤프는 아둔한 남자가 절대 아니잖아. 지금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그녀는 출신이 늦어지는 척해야 할 판이었다. 그녀는 혼란스런 생각들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래, 서둘러 임신할 수밖엔 달리 도리가 없어. 세밀하게 진행하여 임신 기간까지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 일 외엔...... 레오니에게 아멜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게 해야 한다. 마치 우연인 것처럼 무심코 소문을 퍼뜨리고는, 뒤로 물러서서 그 일로 영주와 그의 아내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볼 수 있으리라. 레오니는 자존심 때문에 정부와 한집에 있는 걸 롤프에게 뭐라고 말하지 못했을 테지만, 정부가 그의 아이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상황이 달라지겠지-특히 두 사람의 결혼 후에 생긴 아니 문제라면...... 레오니가 롤프와 그 문제를 두고 언쟁을 벌이든 말든 그건 절대 개의치 않으리라. 그는 그 아이를 부인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레오니는 그에게 아멜리아의 임신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겠지. 일단 레오니가 가버리기만 하면, 그 아이를 없앨 시간이 있을 터였다. 수년 전 궁정에서 배웠던 탕약으로 감쪽같이 처리하리라. 아멜리아가 계속 이런 상상을 하는 동안, 입가에 새치름한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29 어느날, 두 사람이 궁정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그가 말을 건넸다. 레오니는 그 말을 듣고 당혹스러움과

아울러

기분이

몹시

상했다.

분통터지는

일은,

왕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는 편지를 자신이 직접 써야 했다는 거였다. 롤프는 그녀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 않고 함께 궁정에 가야 한다고 우겼다. [헨리 왕은 당신을 만나보고 싶어하오.] 그는 그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도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왕의 명령에 의해 결혼식을 올렸음을 떠올리며 서글프게 미소를 지었다. 롤프가 여행할 정도의 아직 충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어서 출발을 일주일 후로 정해졌다. 일 주일이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레오니는 신경과민으로 어릴 적 발진이 돌아오지 않기를, 또 괜한 바보짓을 해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를 수없이 기도했다. 그녀가 궁정에 다녀온 지 정말 여러 해가 지났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거의 잊어버릴 정도였다. 롤프는 그녀의 불안을 이해하고는 그 불안을 누그러뜨리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는 왕과 그의 신하들에 얽힌 재미난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고, 그녀의 친척 몇 사람들을 거기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그런 말들이 그녀의 기분을 더 낫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더 나쁘게 만들었는지 그녀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사랑을 나눌 만큼 그는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책을 읽어주든가 함께 식사를 하고, 그가 편지를 쓰고 싶어할 때면 곁에서 그걸 받아쓰면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두사람은 아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롤프는 그녀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해주면서 그녀보고도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얘기를 하라고 어린애처럼 졸랐다. 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즐겁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두 사람사이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고, 늘 그들 사이에 가시처럼 박힌 아멜리아 문제에서만은 일체 입을 다물었다. 아멜리아에 대해 그에게 말하고 싶을 때마다 매번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가 아멜리아를 보내버리기만 한다면, 제발 그렇게만 한다면....... 하지만 그녀는 감히 청하지 못했다. 그가 거절할까봐, 그녀가 알고 싶지 않은 일이 더 분명하게 드러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아멜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을까? 그녀는 의문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을 방어하려고 그와 거리를 두었다. 잘 웃는 성격인 그녀는 그를 짓궂게 지분거리면서도, 그에 대해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만약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르는 불안으로 그녀는 더욱 더 지독스레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을 쌓았다.


그들이 런던으로 떠나는 날 아침은 롤프가 그들이 방을 정말 오래간만에 벗어나는 날이었다. 그는 자신의 짐을 싸는 일에서부터 레오니에게 모든 여행 준비를 맡겼다. 그녀는 즐겁게 아내의 의무를 행했다. 하지만 그녀의 짐을 싸는 일이 난감했다. 제대로 입을 만한 드레스가 두 벌밖에 없었다. 그래서 윌다가, 레오니가 아껴두었던 스페인 양모로 세 번째 옷을 만들려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끙끙거렸지만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레오니는 바느질을 아주 잘해 제대포(미사때 제단을 덮는보)와 세례복에 수를 놓아본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의 옷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바꾸기가 쉽다는 걸 알고서, 자신의 옷을 만드는 데에는 거의 시간을 내지 않았다. 소매가 분리되는 긴 웃옷은, 정원 일을 할 때면 햇빛과 풀에 베이지 않으려고 견직물과 모직물을 섞어 짠 소매를 달아 일하기에 편했다. 그 스타일은 야회복으로도 쉽게 변형이 가능했다. 소매가 분리되기 때문에 드레스를 입고서 덧입으면 꽤 괜찮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실 많은 옷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옷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들이 런던으로 막 출발하려고 했을 즈음, 전혀 모르는 마을 농노가 레오니에게 황급히 쪽지를 전해주었다. 그녀는 쪽지를 읽을 시간이 없어 꼭 끼는 슈미즈 소매안에다 찔러 넣고는 이내 잊어버렸다. 게다가 롤프가 아멜리아와 은밀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서, 그 쪽지는 그녀의 기억에서 더 멀리 사라져버렸다-그 모습을 보자 그녀는 하루종일 기분이 엉망이었다. 그들은 잠시 갈 길을 멈춰 작은 여관에서 머물기로 했다. 레오니는 뒷일을 마무리짓느라 여관 밖에서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는 롤프가 들어오기 전에 잠을 자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윌다가 그녀의 옷을 벗길 때 그 쪽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레오니는 그 쪽지를 주워 읽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알에인 몬티니에게서 온거군요.] [알에인 경요? 하지만 아씨가 그분은 아일랜드에 있다고 하신 것 같은데요?] [지금은 아니야. 나보고 영지의 경계선인 목초지 에서 만나자는 구나.] 레오니의 이마가 더 깊이 주름졌다. [도대체 그가 여기서 뭘 하고 이는 걸까?] [만나실 건가요?] [아마도 그랬겠지. 하지만 오늘 정오에 만나자고 했으니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야.] [그분은 아씨 남편을 두려워하고 있잖아요.] [그래, 두려워하지.] [그렇다면 무슨 생각을 하시고 ‘검은 늑대’의 소굴로 오신 걸까요?] [그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라!]


레오니가 재빨리 말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아씨.] 무심결에 내뱉은 호통에 레오니는 갑자기 멍해졌다. 맙소사, 내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방금 내가 한말을 맘에 두지 말거라, 윌다. 잠 자둬, 힘든 하루였으니까.] 윌다가 살짝 방에서 나가자, 레오니는 그 쪽지를 불속에 던지고는 윌다가 가져온 시트가 깔린 침대로 천천히 갔다. 하지만 그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알에인에 대한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빙빙 돌았다. 무슨 생각으로 알에인이 목숨을 걸고서 고향으로 되돌아온 걸까? 그녀는 혹시 알에인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닌지 차츰 궁금증이 일었다. 알에인이 그 날 그녀의 남편에 대해 했던 모든 얘기는 거짓말이거나 두려움에 찬 망상이란 게 드러났다. 롤프 덤버트란 남자....... 그 운명적인 결혼식을 치르고, 그 뒤 그와의 대화에서, 과거 그녀가 욕을 퍼부었던 그런 비열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 그네에 결점들이 있었지만, 가혹한 복수를 노린다는 건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야 그녀가 나서서 입증할 자신이 있었다. [레오니, 자요?] 오, 이런. 얼마나 조용히 방에 들어왔는지, 정말 놀랍네! [아니오. 영주님.] [그렇다면 도와주겠소? 다미안을 자라고 보냈거든.]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전의 거만한 요구들을 할 때와는 딴 판으로, 최근 들어 그는 도와달라는 말을 그렇듯 마지못해 했다. 혹시 그가 이전의 태도에 대해 아직 후회하지 않는 걸까 하는 의아심마저 들 정도였다. [이리 앉으세요, 영주님.] 그녀는 크루얼 성의 그들의 침대보다 훨씬 더 작고 좁은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소스(다리와 발 부분을 보호하는 정강이 싸개)를 풀기 시작했다. 육중한 쇠미늘 갑옷은 다미안이 이미 벗겨놓은 상태였다. [상처를 보고 싶어요. 오늘 무리하게 말을 타서 상처가 벌어지지 않았나 보려구요.] [그럴 필요 없소.] 그의 목소리는 정말 피곤에 지친 듯 힘이 없었다. [제 기분을 맞춰주세요, 영주님.] [제 기분을 맞춰주세요, 영주님.] 그가 질린다는 듯 따라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게 많은 걸 요구하지만, 주는 게 너무 적소, 그러니 내 기분을 맞춰주시오, 부인. 당신은 왜 우리 두사람이 편안하게 마음을 터놓을 기회를 갖지 않으려는지 말해 주겠소?] 그녀는 갑자기 뻣뻣해지더니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어요] 그가 힘겹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론이지. 난 당신의 감정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그녀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건 바로 당신인데, 왜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 순간 그녀는 자신이 너무 그에게 냉정하게 대하기 때문에 그가 정부를 곁에 두는 건지도 모른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녀는 너무 멍해 얼어붙어 꼼짝도 않고 그저 서 있었다. 당신은 다른 여자를 포기하기 전에, 내가 당신에게 다정하게 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나요? 그녀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냥 내버려둘까, 아니면 궁금한 걸 물어볼까? [튜닉을 벗길게요.] 롤프 쪽으로 몸을 숙이면서 그녀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는 순간 그녀의 린네르 옷이 살짝 벌어지자 롤프의 눈이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에로 쏠렸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서서히 눈을 들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강한 갈망이 담긴 그의 눈동자를 보고서, 부상을 입은 후로 그가 금욕생활을 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여행으로 지쳐 있었지만, 그게 별 문제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두 뺨이 어느새 발그레하게 타올랐고, 그녀는 얼른 옷을 여몄다. 그의 열정에 들뜬 눈길에 응답할 때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계속 이런 식으로 쳐다본다면, 그가 앞서 말한 말의 의미를 어떻게 물어볼 수 있겠는가? 달리 뭘 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녀는 그의 튜닉의 옷단을 잡고서 상처에 닿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면서 머리위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그의 속 셔츠도 같은 방법으로 벗기고는, 그가 일어나 나머지 옷을 벗을 수도 있도록 방 맞은편으로 물러갔다. 그 긴장감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그녀는 불쑥 말을 꺼냈다. [영주님, 만약… 만약에 제가 변한다면… 당신은 아멜리아를 내 보낼 건가요?] [아니오.] 그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거침없이 말하자 그녀는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비참함을 삭이려고 두 눈을 꼭 감았다. 바보! 차라리 묻지 말았어야 했어. 이 꼴이 뭐야. 그토록 두려워했던 답변을 확인하는 셈밖에 되지 않았잖아. [도대체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오!]


롤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무 상관도 없어요, 영주님.] 그녀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알아듣게 설명해보시오.] 곤혹스러웠다.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롤프는

질투하는

좋아하지

않는다던

아멜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나의 질문을 그렇게 해석하여, 내가 질투한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그녀는 질투를 하지 않았다. 롤프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질투를 한단 말인가? 오, 울고만 싶어.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덤덤하게 말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당신의 피후견인을 본 후로 줄곧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 당신이 그녀를

이번 여행에 데려오지 않았나

싶어서요. 아마

당신이

그녀에게

화가

있는가보다 생각했어요.] 바싹 긴장한 상태로 그가 다가와서 그녀 앞에 섰다. [그녀에게 화나지 않았소. 그녀를 데려올 이유가 전혀 없었던 거요. 그녀는 궁정을 좋아하지 않소.] 저도 궁정을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끌고 왔잖아요.] [당신은 내 아내요!] 레오니는 몸을 홱 돌리고 그에게 등을 졌다. 그런다고 화가 가라앉지는 않을 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당신이 아멜리아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소.] 그가 뚜벅 말을 건네자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며 앙칼지게 대꾸했다. [물론 잘 지내죠. 굳이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녀는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켰다. [젠장, 레오니! 뭣 때문에 이러는 거요? 아멜리아와 말다툼을 했소?]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전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아요. 만약 당신이 염려스러운 게 그 일이라면요.]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왜 우리가 지금 그녀에 관해 얘길 하고 있는 거지?] 롤프는 점점 더 낭패스러워었다. 이게 다 뭣하는 짓이지? [당신은 그녀는 내보냈으면 싶은 거요, 그렇소?]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럴 거냐고 당신에게 물었고, 그리고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게 전부예요.] 그녀는 또다시 몸을 돌리려 했지만, 롤프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가 그녀의 눈동자를 너무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그녀는 감히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당신은 뭔가 알고 있소!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거지? 당신에게 누가 말했소?] [영주님!] 레오니는 한 마디 내뱉고는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롤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당신, 정말 날 미치게 할 거요, 레오니? 왜 나한테 솔직하게 말을 못 하는 거요?] 그녀는 계속 흐느꼈다. 그가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했기에,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질투하는 아내라고 어느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안고서 침대로 데려가서는 울음을 그칠 때까지 살살 달래면서 얼렀다. 그녀는 달래며 그녀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다가 느닷없이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욕망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단호히 거부했다. 간신히 그 마법의 순간을 깨고는 그를 밀쳐냈다. [안돼요, 영주님. 지금은 안돼요. 제발.] 그의 불같은 화를 견뎌내리라 다짐하며 그녀가 간청했다. 하지만 그의 뜻밖의 말에 그녀는 너무 놀라 숨을 멈췄다. [그렇다면 그냥 안고만 있겠소, 내사랑. 그 이상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요.] 너무도 자상한 그의 태도에 그녀는 다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가 그에게 머리를 숙이자 그가 담요 밑으로 손을 넣고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잠이 드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드디어 그의 품에 꼬옥 안기어 그녀는 혼미한 꿈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30 침대가 들썩대며 움직이자 잠에서 깨어난 롤프는 눈을 뜨고 레오니가 침대를 빠져나가는 걸 아스라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두사람 사이에 벌어진 논쟁들을 서로 꿰맞추느라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멜리아와의 과거 관계에 대해 그녀가 무슨 얘기든 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가능성을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레오니가 만일 아멜리아를 내보내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아멜리아가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레오니에게, 다른 여자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아멜리아는 피후견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만약 아멜리아가 아기를 가진 걸 레오니가 알게된다면, 레오니의 사랑을 얻을 가능성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리라. 레오니가 파란 린네르 잠옷을 걸치고 자그마한 난로로 다가가는 모습을 그는 지켜보았다. 그녀는 난롯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창을


헤집고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이 그녀의 비단 같은 치렁치렁한 은빛이 감도는 금발을 비추고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가! 게다가 그녀는 생각이 깊고 정말로 인정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하녀를 절대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그러하듯 하인들에게도 친절했다. 그런 여자가 뭣 때문에 나의 속을 뒤집는 걸까? 그녀 때문에 그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고, 미친 듯이 화를 냈으며, 끝없는 걱정과 혼란을 겪었다. 그녀는 그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한순간 와르르 부서뜨리기도 했다. 그녀와 편안하게 지낸다는 게 헛된 희망이란 말인가! 토르프는 그녀와 솔직하게 얘기를 나눠보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롤프는 그 모험을 도저히 겪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자신에게 처음부터 반항했던 진짜 이유는 그 겁많은 기사인 알에인 몬티나를 사랑했노라 고백할까봐 두려웠다. 사실, 그녀가 자신에게 처음부터

반항했던

진짜

이유는

겁많은

기사인

알에인

몬티니를

사랑했노라

고백할까봐 두려웠다. 그녀가 그를 싫어하는 유일한 이유는, 지금 그가 몬티니 가문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 정말 그게 사실일까? 그녀에게 그런 고백을 끄집어내는 건 정말로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의 희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였다. 레오니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선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잠못 이루는 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닙랍니다. 영주님, 당신은 너무 많은 걸 너무 빨리 해치우려고 해요.]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나무랐다. [이제 당신 상처를 보여주세요, 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영주님, 지난 밤 일은 잊어보세요. 전 지나치게 피곤했고-그리고 신경이 날카로울 때는 전 제 정신이 아니랍니다. 당신을 화나게 했다면, 죄송해요] [아직도 헨리를 만날 일이 그렇게 걱정스럽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크루얼로 돌아갑시다.] 그녀는 어리벙벙하여 아찔했다. [날 위해 그렇게 하시려구요?] [물론이오. 당신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줄은 몰랐소] [정확히 말해, 두려워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그건 불안감 같은 거예요. 틀림없이 괜찮아질 거에요.]


그가 자신을 위해 기꺼이 계획을 변경하려는 걸 알고 그녀는 자신감이 생겨 그를 안심시켰다. [이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왕께서 우릴 기다리고 있어요.] [헨리는 간혹 한 번쯤 실망하는 게 좋소] [아니에요, 영주님. 정말로, 전 괜찮을 거에요] [정말이오?] [네.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나 봤댔자, 예전의 발진이 다시 생기는 정도일 거예요. 어릴 때 제가 궁정에 갈 때마다 생기곤 했거든요.] [그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오. 그러면 난 궁전에 있는 모든 기사들이 당신에게 반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가 느물스럽게 웃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신경성 발진을 벗어날 만큼 컸다고요. 그러니까 이제는 생기지 않을 거에요.] 롤프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레오니, 우리가 결혼한 날에도 발진이 생겼소.] [그렇군요, 영주님.] 그녀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당신 얘기는, 그때 발진이 없었다는 뜻이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제가 왜 베일을 쓰고 있었는지 당신은 알고 있군요? 그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벌떡 일어나 화난 채 성큼성큼 문쪽으로 걸어가는 걸 롤프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말로 그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레오니!] [그 얘기는 하지 않겠어요! 이제, 일어나세요, 영주님. 안 그러면 우리는 해질녘까지 런던에 도착하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돌아서서 재빨리 말하고는 문을‘쾅’닫고 나갔다. 롤프는 평생 이렇듯 얼떨떨해본 적이 없어 눈만 멀뚱거렸다.♣

31 레오니는 너무나 오랫동안 펄시윅성과 그후에는 크루얼 성에만 틀어박혀 지낸 탓에 런던으로 가는 여행길에 넋을 잃었지만, 수년 동안 프랑스와 영국을 두루 다녀본 롤프는, 그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녀만 바라볼 뿐, 굳이 주위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수년 동안 보지 못했던 마을들을 통과하면서도 그녀는 펄시윅에서 처럼 논밭에서 농부들이 일하고 있는 흔한 광경에서부터, 호위병들을 거느리며 여행을 하는 아름다운


차림의 귀부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걸 탐욕스럽게 쳐다보았다. 잔소리 할 나이든 여자가 곁에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걸 탐욕스럽게 쳐다보는 건 귀족 체면에 손상이 간다고 귀에 못이 막히도록 들어온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 시대의 엄격한 관습 따위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네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막 울릴 즈음 일행은 한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 종소리가 레오니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가만히 건드렸다. 그 시간이면 레오니는 수업을 끝내고 하녀에게 이끌리어 그녀의 부모에게 갔다. 세시부터 네 시까지는 가족에게 있어 신성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녀는 담소를 나누며, 날씨가 좋으면 숲으로 함께 산책을 나갔다. 누구고 그들이 함께 하는 시간을 방해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모든 평화가, 그 즐거운 시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영원히 뭍혀버렸다. ‘저주받을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왜 날 보살피지 않았던 것일까? 아버지는 왜 그토록 무력하게 변해 버린 걸까?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녀는 그 모든 슬픔을 가슴에 안고 이겨내야 했다. 레오니는 갑자기 한기를 느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언제쯤이면 아버지의 생각이 잊혀지게 될는지..... 간혹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하루나 그 이상을 불행한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걸 습관처럼 느껴왔���. 그녀는 과거에 대해 가슴앓이를 하지 않으려고 현재의 상황에만 몰두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무래도 왕을 만나면 그다지 즐겁지 않으리란 생각에, 지금 이 순간이라도 커다란 기쁨을 누리리라 다짐하고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런던에는 백 개 이상의 교구가 있었고, 각 교구마다 교회를 가지고 있어 도시 성벽위로 솟아 있는 그 무수한 뾰족탑들을 장엄한 광경을 자아냈다. 레오니는 어릴 적에 처음으로 런던에 왔던 걸 생생하게 기억해, 저 멀리보이는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성 바울 성당’ 이라는

금세

알아보았다.

거대한

지붕들과

이를

떠받고

있는

기둥,

그리고

고딕아치(끝이 뾰족한 건물 양식)들로 이루어진 그 성당은 도시를 굽어보듯 높게 솟아 있었다. 백년 가까이 된‘팔라틴’성은, 대부분이 단층집들로 이뤄진 도시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엄청난 석조 건물로서 명소로 각광받는 곳이었다. 그 성은 그 도시에 남아있는 옛 로마식 성곽에 둘러싸인 유일한 궁정이었다. 레오니와 롤프는 그곳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레오니는 기뻤다. 왕은 딱 한번만 보는 것으로 왕의 초대가 마무리짓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녀는 도착 다음날 왕을 배알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롤프는 런던 도착한 그날 저녁에 왕을 만나기로 일정을 잡았다. 헨리 왕을 만나는 일만으로는 레오니는 불안했는데, 마치 그것도 모자란 듯이 런던 그 자체가 위협하듯 다가섰다.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빽빽이 차 있어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막대자를 이리저리 휘젓는 포목상들, 식료품 장수들, 생선장수들 등 다양한 상인들이 물건을 사라며 아우성을 쳤다. ‘템스’ 강은 양모를 실은 배들과 뱃사공들로 가득 차 있었다. 런던의 성곽 안에는 모든 소음과 야단법석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지만, 그 성곽 바로 밖에는 경작된 들판과 광대한 숲이 있는 평화로움이 넘쳐흘렀다. 팔라틴 성이 시야에 들어오자, 레오니는 끔찍스러울 만큼 사람들과 붐비는 궁정이 생각났다. 영주들, 그리고 그들의 하인들과 귀부인들, 또한 항상 권력에 빌붙어 사는 식객들뿐 아니라 무희들, 도박꾼들, 협잡꾼들, 마술사들, 매춘부들과 뚜쟁이들까지 가득 차 있어 어린 그녀는 질식할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왕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헨리의 궁정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헨리와 함께 지금 웨스트민스터홀에 머물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런던의 궁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숙소를

같이 쓰지

않아도

되기를.…. 필라틴 성은 그녀가 두려워했던 만큼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롤프는 그녀가 짐을 푸는 걸 보지 못하고 곧바로 왕을 만나려고 갈길을 서둘렀다. 그는 피어스 경과 그의 병사 스무 명중에서 반을 그녀에게 남겨두었다. 리처드 경과 다른 열 명의 병사를 롤프와 함께 떠났다. 그들이 런던까지 데려온 기사는 피어스 경과 라치드 경밖에 없었는데, 피어스 경은 롤프가 업을 경우 레오니를 경호하기 위해 데려왔고, 궁정 생활에 흥분을 느끼는 리차드 경이 성화를 부리자 그를 데려온 거였다. 토르프 경은 남아서 워링 성 포위 공격을 지휘하고 있었다. 레오니는 토르프가 없어서 섭섭했다. 그녀는 젊은 리차드와는 잘 지냈지만, 피어스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리차드보다 피어스가 나이가 더 들긴 했어도 무척 성미가 급했다. 그는 그녀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오직 롤프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을 참아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래도 그는 그들이 팔라틴 성의 거대한 홀을 지나는 동안, 레오니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한 병사들을 지적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며 엄격히 다뤄 나름대로 자신의 임무를 잘 이행했다. 레오니는 탑에 있는 작은 방을 배정받아 윌다와 밀드레드와 같이 쓰게 되었다. 만약 롤프와 다미안이 찾아오면 그들과 같은 방에서 자야 할 판이었다. 조금 비좁긴 해도 낯선 이들과 함께 쓰지 않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야. 롤프가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돌아온 건 아주 늦은 시각이었다. 촛불하나를 켜두고, 레오니는 침대에서 누워 밀드레드가 흥분에 들떠 재잘거리는 걸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 하녀는 성을 둘러보다가 매력적인 경비병을 만나 그날 밤 그의 임무가 끝나면 만나기로 했다며 들뜬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윌다는 그 탑 방에 있지 않고 그날 오후에 만났던 잘생긴 기사와 함께 있기로 했다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레오니는 두 하녀가 섬뜩할 정도로 혼을 냈지만, 그들이 원하는 걸 굳이 막고 싶은 마음이 없어 조심하라고 다부지게 훈계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멀리서 레오니의 이름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롤프의 목소리가 들여와 레오니는 서둘러 옷을 걸쳤다. 밀드레는 롤프를 무서워했기에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가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아씨, 뭐가 잘못된 걸까요? 아무래도 그…그분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또다시 고함소리가 들리자, 레오니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러다간 성에 있는 사람들을 다 깨우겠어!] 그녀는 방밖으로 나와 계단의 꼭대기로 갔다. 벽에 붙어 있는 횃대에 횃불 하나가 가물거렸지만 계단의 어두운 그림자들만 길게 드리울 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소리를 듣고서야 밑에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리차드가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아니, 두 남자가 서로를 붙들고 휘청거리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롤프의 음성이 또다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돌 벽들에 울려 퍼져 엄청나게 컸다. [레오니!] 그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리차드에게 말했다. [그녀가 여기 없으면, 이곳을 부서 버릴 거야] [전 여기 있어요, 영주님!] 레오니는 너무 놀라 재빠르게 외쳤다. 두 남자가 동시에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리차드는 아주 멋쩍은 듯 씨익 웃었고, 롤프는 행복에 겨운 듯 씨익 웃었다. 레오니는 결혼식을 올린 날 외에 남편의 취한 모습을 한 번 본적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그녀가 다미안에 대해 좀더 인내심을 발휘하라고 그에게 충고하던 날이었던가? 그래서 그가 술을 마셨을 거라는 생각에 은근히 기분이 좋았지. [왜 이 시간에 그렇게 온통 소란을 피우는지 말해 주실래요?] 레오니가 묻자 롤프는 잠자코 한 손을 들어올리면서 리차드에게 웅얼거렸다. [자네 방을 찾아보게, 친구. 내 아내가 이제 날 돌볼 테니까.] [어떻게요? 전 당신을 부축해서 층계 위로 올릴 수가 없어요.] 레오니는 끔찍하다는 생각으로 엉겁결에 소리쳤다. 그는 정말로 너무 취해서 걸을 수가 없는 걸까? [난 걸을 수 있고, 부인 그래도 당신이 내려와서 길을 안내하시오] 리차드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비틀거리며 몸을 돌려 사라지자 레오니는 한숨을 쉬었다. 리차드가 그를 놓자 롤프는 몸을 지탱하려고 벽에다 몸을 기댔다. [이건 현명한 일이 아니에요, 영주님.] 계단을 서둘러 내려와 레오니가 벌컥 화를 냈다. 그녀는 그의 한쪽 팔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다 둘렀다.


[우리 둘 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거예요] 롤프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가 너무 많이 취했다고 분명 오해하고 있군. 난 취하지 않았고, 장담하오. 헨리왕은 얘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었고, 나에게 함께 마시자고 했을 뿐이오.] [그리고 당신은 물론 왕을 거절할 수 없었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왕의 거처에 당신이 머물 만한 침대가 분명 있었어요. 영주님. 여기로 말을 타고

오는 대신에 당신은 거기서 묵어야

했어요. 자칫하다간

목이 부러졌을지도

모르잖아요-고주망태가 된 사람들이 어떤 봉변을 당하는지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녀는 그를 계단 위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가 그녀를 뒤로 홱 잡아당겼다. [날 나무라지 말아요, 부인. 내가 취한 것 같지 않다고 했으니 당연히 취하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이 여기 있는데 어찌 왕의 거처에 묵는단 말이오.] 그녀가 함박 웃음을 머금고 계단을 가리켰다. [이 계단을 당신이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내가 이 계단을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소?] 그는 짐짓 화를 내는 척하며 곧바로 그녀의 한 손을 붙들고 계단 꼭대기에 이를 때까지 그녀를 잡아끌면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난 후 그녀를 보고 씨익 웃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영주님.] 헐떡거리며 레오니가 말을 건넸다. [토라지지 마오. 부인] [오!] 그녀는 화가 나서 그의 손을 홱 뿌리쳤으나 롤프는 다시 그녀의 어깨에다 한팔을 두르고는 약간 불안정하게 걸으면서 그 육중한 몸을 그녀에게 기댔다. 그녀가 점잖은 욕을 웅얼거리자 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오, 레오니, 난 정말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소.] 그녀는 심장이 콩당거리며 뛰는 순간, 자신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재빨리 억눌렀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해서 하는 헛소리를 믿다니, 절대 그럴 수 없어. [아, 그러세요. 영주님?] [틀림없소, 그게 아니라면 툭하면서 토라지는 당신을 내가 왜 견뎌내겠소?] [전에도 말했지만, 전 토라지지 않아요.] [게다가 당신은 순종도 모르지.]


마치 그녀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것처럼 그는 계속했다. [또 제멋대로고.] [저에게 그렇게 많은 결점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녀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뻣뻣하게 말했다. [정말이오. 하지만 어쨌든 난 당신을 사랑하오.] 그는 그녀를 빙그르 돌려 그녀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두팔을 꽉 껴안았다. [날 사랑할 수 있소, 부인?] [물론이에요. 영주님.] [오, 레오니. 당신 말이 진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난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아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짜릿한

흥분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그녀는 늘 그렇게 정신없이 그네에 이끌렸다. 갑자기 자신도 술에 취했으면 싶었다. 단단히 억눌린 감정을 풀어놓고서 그와 함께 시간을 즐겼으면 하는 욕망이 솟구쳤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단단한 포옹에서 벗어나 그의 목을 팔로 감쌌다. [당신을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랍니다. 사실, 아주 쉬워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내리 덮치더니 격렬하고 열정적인 키스로 그녀를 이끌었다. 처음에 그녀는 격렬한 충격에 얼떨떨했지만 곧 달콤한 감각 속에 녹아들었다. 처음에 그녀는 격렬한 충격에 얼떨떨했지만 곧 달콤한 감각 속에 녹아들었다. 그녀는 다부진 그의 근육을 이루 만지면서 그의 몸에 매달려 그의 키스에 열정적으로 응답했다. 그에 대한 엄청난 갈망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롤프가 키스를 뚝 그치더니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전투의 함성 같은 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그녀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검정 눈동자엔 곧 폭발할 것 같은 열정이 넘쳐흘렀다. 그는 아주 서서히, 그리고 신중하게 두 손을 아래로 내리더니 그녀의 엉덩이를 단단히 쥐었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이 파고들어 근육들이 흐느적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솟구치는 욕망이 그녀의 눈동자에 어리자 롤프는 승리에 찬 미소를 짓고서 그녀를 번쩍 안았다. 레오니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숨이 막혔다. [날 내려놓으면 더 안전하게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에요, 영주님.] 하지만 그는 너무 취해 있어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싫소.] 그녀가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열린 방문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그는 작은 방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가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밀드레드를 보고는 나가라고 명령했다. 레오니는 밀드레드가 방에서 달려나갈 때의 그 표정을 보고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밀드레드는 이 방을 나가게 된 걸 너무도 반가운 게 분명해. [또 한명은 어디 있소?] 침대로 가면서 그가 뚜벅 물었다. [윌다는 오늘 밤 다른 데서 잘 거예요]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현명한 여자로군.] [그런데 다미안은 어쨌어요?] [그 애 아버지, 수톤 경에게 두고 왔지. 우리 둘만 있고 싶었거든.] 두사람은 키득거리더니 침대 위로 푹 쓰러졌다. 그는 그녀에게 웃을 벗겨달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웃고 희롱하는 사이에, 그녀는 금세 그의 옷을 벗겨냈다. 그러고는 그녀의 잠옷이 벗겨지고 롤프의 눈이 욕망으로 타올랐다. 그가 두손을 그녀의 가슴에 대자, 그녀 역시 강렬한 욕망을 또다시 완전히 의식하게 되었다. 서로 꼭 껴안고서 함께 침대에 누웠다. 그의 힘은 손끝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힘줄이 불거진 근육들이 그의 목을 따라 힘차게 뻗어내려 그의 가슴에서 뭉쳤다. 거친 힘을 억누른 그의 부드러움을 그녀는 기꺼이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그 근육들을 만지면서 자신의 손끝에서 용솟음치는 힘을 느꼈다. 하지만 곱슬거리는 검의 머리칼의 느낌은 부드러웠다. 그건 그의 압도적인 남성다움의 또 다른 새로움이었다. 그는 그녀가 꿈꿔왔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를 원했다. 그때 그는, 그녀가 강렬한 키스를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만 대고 그녀를 곯리면서 그녀의 입술에다 장난을 쳤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입술을 애무하자 그녀에게서 순수한 쾌락의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의 애무가 그녀의 가슴으로 움직이자 그녀는 힘껏 그에게 가까이 파고들었다. 거대한 열정에 휩싸이자 그녀가 끝까지 남겨두었던 자그마한 자존심마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격렬한 경련이 그녀를 휩쓸자, 그녀는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저라 그는 그녀가 정신이 들기 전에 두 팔을 그녀 밑으로 넣고서 그녀를 더 가까이 당겼다. 두사람의 열정이 엄청난 불길을 내뿜었다. 레오니는 길고도 격렬한 순간에 그의 몸에 실려 쾌락의 물결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롤프가 두 팔을 여전히 그녀에게 두른 채로 굴러 그녀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녀는 구름위에 뜬 기분으로 그의 가슴에 누워있었다. 잠시 후 그가 푹 잠을 빠져든 걸 알았다. 그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자 롤프가 잠을 자면서도 그녀가 가까이 있길 원하는지 더욱 팔을 조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대로 누워 그의 팔을 베고, 배를 그의 옆구리에 붙이고는 다리 하나를 그에게 올리���서 더 없이 행복한 잠에 푹 빠져들었다.♣

32 간밤에 롤프 경계서 도착하신 뒤에 사람들이 내기를 건 걸 아세요? 이곳 손님 중 절반은 그분이 아씨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다른 절반은 아씨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살해됐다는 편과 아씨가 맞았다는 편으로 갈려 있구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씨?」 레오니는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윌다가 레오니의 머리칼을 빗기면서 태연하게 말을 건네서인지 더욱 더 그랬다. 이렇게 아침 일찍 이런 얘기를 듣게 될 줄 미처 몰랐다. [내기들이 걸린 걸 어떻게 아니, 윌다?] [아래층에서 그랜 얘기들을 하고 있어요, 아씨.] 윌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씨익 웃더니 덧붙였다. [그분이 아씨를 부르는 소리를 모두가 들었어요, 아씨. 그래서 그분이 아씨를 찾아낸 후에 무슨 일이 있어 났을까 궁금해 하고 있지요.] [그가 지나치게 소란을 피웠기로서니, 그가 누굴 죽였다고 생각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그런 영주님이 여기로 올라왔을 때 지르던 고함 때문이었어요. 모두가 들었던 건 아니지만요.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살인이 났다고 확신한 사람들이에요.] [그만해라! 그는 지나치게 술에 취했던 거야, 그게 다야. 그리고 그는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어, 윌다. 나한테나 그 누구한테도.] 윌다는 기대에 가득 찬 눈물로 레오니를 흘긋 쳐다보았다. 레오니와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가 잘 풀리는 게 윌다의 더할 나위 없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레오니 앞에 펼쳐질 불행한 날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 아파하겠지. 그녀는 진심으로 레오니를 사랑했다. [그분이 아씨를 안고 왔었다고 밀드레드가 그러더군요.] 윌다가 대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주제넘게 굴지 마라, 윌다! 밀드레드는 너무 말이 많구나.] [그분은 그렇게‥‥‥.] [윌다, 그만해!] 레오니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윌다는 정말 못말릴 하녀이기는 해도, 레오니의 결혼 생활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그녀는 윌다가 옷을 입는 걸 거들 수 있도록 일어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롤프가 들어와 두 여자는 깜작 놀라 펄쩍 뛰었다. 그는 한쪽 팔에 길고 좁은 상자를 끼고 있었고, 다른 한쪽 팔에도 더 작은 상자를 끼고 있었다. 그도 두 여자와 똑같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오니는 단지 소매 없는 무릎 길이의 슈미즈만 걸친 차림새였다. 그는 이내 험악한 눈초리로 딱 멈춰 서더니, 갑자기 몸을 돌리고 외쳤다. [리차드! 눈을 감게!] 그 기사는 바로 롤프 뒤에서 커다란 상자를 들 낑낑대며 서 있었다. [옷을 입으시오. 그래야 여기 내 친구가 짐을 내려 놓을 수 있잖소.] 얼굴을 붉히며 레오니는 롤프의 비기사도적인 행동에 화를 내면서 그의 말에 따랐다. 노크도 없이 들이닥치더니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감히 나에게 얼굴을 찌푸린단 말인가? 그녀는 옷을 입는 동안 내내 말이 없었지만, 다시 몸을 돌렸을 때는 그녀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은빛으로 반짝였다. 배시시 웃는 롤프를 바라보다가, 리차드는 그 커다란 상자를 내려놓고 씨익 웃더니 정식으로 절을 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롤프는 손가락 하나를 익살스럽게 흔들어 레오니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 이리로 와서 내가 당신 주려고 산 걸 보시오.] 레오니가 망설이면서 앞으로 다가가자 롤프는 조심스럽게 그 상자를 열었다. 너무나 놀라, 상자 앞에 그녀는 꿇어앉아서 정교하게 짠 아름다운 회색 비단을 손가락으로 만져보았다. 아주 많은 금속 실을 섞어 짠것이라, 투명한 은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정말이지, 한 번도 이런 걸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회색 비단은 놀라운 선물중 시작에 불과했다. 그 상자 안에는 열 자 길이의 천이 들어있었다. 금실을 섞어 짠 장미빛 비단, 보라색 비단,그리고 녹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두툼한 빗금 무늬를 띤 비단들이 있었다. 더욱 아름다운 거 선명한 색채의 세 자짜리 벨벳이었다. 벨벳은 영국의 북쪽 지방에서는 아주 희귀한 것이라 왕들이나 아주 부유한 영주들에게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비쌌다. 그녀는 이런 아름다운 천들은 갖게 되리라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 넋을 잃었다. [어디서…어디서 이런 걸 찾았어요?] 그녀가 잔뜩 주눅이 들어 간신히 물었다. [헨리 왕이 창고들을 열어주더군.]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롤프는 싱글싱글 웃고는 있었지만,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분이 당신께 이것들을 주었어요?] [ 요? 무슨 그런 생각을! 헨리 왕은 그 무엇으로도 답례를 받지 않고는 선물을 주는 법이 없소. 준게 아니라오. 내가 찾고 있는걸 말했더니 자기 창고에서 사면 더 좋은 물건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런던 상인들은 꿈속에서나 볼, 극동( 極 東 )에서 오는 뱃짐들을 왕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 하지만‥‥‥하지만 이것들은 비싼 재물이에요.] 레오니가 아직도 어리둥절한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물건들을 절 위해서 샀단 말이에요?] [물론이오.] [왜요?]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그냥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는 없을까? 내 모든 행동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오?] 그러자 그녀는 놀라움으로 차츰 입이 벌어졌다. 지난 밤의 일로 보상을 받고 있는 건가? [만약 이게 지난 밤 일과 어떤 관계가 있다면‥‥‥.] 레오니는 얼굴이 빨개져 윌다 앞에서 감히 말을 끝낼 수가 없어 얼버무렸다. 고갯짓으로 그녀는 윌다에게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두 사람만 있게 되자, 롤프가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지난밤에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을 했던‥‥‥.] [그럴 만한 일은 전혀 없었어요.] 그녀는 벌컥 화를 내며 그의 말을 가로막고선 비아냥거리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소. 사실, 지난밤에 대해 당신에게 물어보는 거였소.] 그는 아주 자신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억을 못하겠소‥‥‥웨스트민스터 홀을 떠난 기억이 전혀 없소. 여기 계단 맨 아래서 당신을 본 것만 흐릿하게 생각날 뿐이오.]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않자 그가 조바심을 쳤다. [내가 바보짓을 했던 건 아니오?] 순진한 그의 표정에 레오니가 생긋 웃었다. [오늘 사람들이 당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면, 그건 당신이 지난밤에 성에 있는 사람들 절반을 깨웠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레오니? 오, 이런! 어쨌든 간에 내가 당신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면 좋겠는데.] 애정이 듬뿍 담긴 그의 말에 깜짝 놀라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얘기를 많이 했지만, 내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나서 과감히 물어보았다. [정말 아무런 기억도 없어요?]


[단편적인 것들만, 부인.] 생각에 잠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소‥‥‥ 내가 당신을 이 방으로 안고 왔소?] 레오니가 천천히 고래를 끄덕이자 롤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해맑은 웃음과 그의 눈동자는 남자로서의 자부심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많이 마셔야겠군. 당신과 다시 한번 사랑을 나누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막상 당신과 사랑을 나눈 그 아름다운 일을 반밖에 기업 못하다니.] 레오니는 또다시 볼에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혹시 내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려고 짓궂게 그가 이런 만들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린 너무 자주 사랑을 나누었잖아. 아직까지도 난 그의 둔감함에 익숙하지 못한 걸까? [영주님, 저 선물들은‥‥‥.] 레오니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그래 또 ‘영주님’이오?] 민망한 생각에 레오니가 눈을 내리깔자, 롤프가 한숨을 쉬었다. [이것들 역시 당신 거요.] 그가 그녀에게 상자 두 개를 건넸다. 그녀의 눈을 금세 또 묻고픈 표정이 나타나자, 그가 방어적으로 경고했다. [왜 이것들을 당신에게 주는지 묻는 실수를 범하지 마오. 원하는 데에다 돈을 쓰는 건 남자의 권리요.] [또 헨리의 창고에서?] 그 상자들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다. 긴 상자는 붉은 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었고, 더 작은 상자는 유액이 입혀져 매끄러웠다. 그녀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보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이것들은 런던의 금 세공인에게 지난주에 주문해 놓은 거요.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소.] 그는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굳이 확인하지 않고 방을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정말 고마워요, 영‥‥‥.] 레오니는 ‘주’자를 발음하기 전에 말을 뚝 끊었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롤프는 문가에서 돌아다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스스로가내 이름을 거리낌없이 부를 수 있게 됐을 때, 그때서야 난 당신이 날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요. 그날을 기다리겠소.]


그가 가고 나자 그녀는 마치 강한 물건에 맞은 것처럼 멍하니 닫힌 문을 쳐답았다. 그는 왜 그토록 나의 사랑을 원하는 걸까? 그에게 아멜리아가 있잖아. 그것으로 충분치 않단 말인가? 아, 그러한 생각들은 자신을 또다시 화나게 할뿐이었기에, 그녀는 그런 생각들을 훌훌 털어 버렸다. 이런 아량을 베풀다니 그 긴 상자 안에는 정교한 벨트가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황금 원판들로 연결된 1.5 미터 길이었는데 반짝이는 황금 원판의 둥근 표면마다 작은 꽃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다양한 길을 엮은 황금 사슬로 7 센 미터 간격으로 커다란 루비가 한 개씩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벨트의 버클은 더 큰 루비가 박혀 찬란한 빚을 발했다. 아마 그 벨트를 하면, 사슬들이 그녀의 발까지 흘러내리리라. 은빛 상자 안에는 이미 복잡한 금세공을 입힌 수백 개의 구슬들이 있었다. 레오니가 그에게 선물로 받은 그 멋진 옷감들로 옷을 만든다면 그 옷을 장식할 아름다운 액세서리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무척이나 화려한 장신구를 손에 쥐었다. 마치 행운을 거머쥔 그런 기분이랄까. 어리벙벙하면서도

위압적인

느낌과

아울러

감격이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그는 아멜리아에게도 똑같이 이런 아량을 베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고통이 밀려왔다.♣

33 레오니는 갖고 있는 드레스 중 부드러운 푸른색 실크로 된 가장 좋은 드레스를 짙푸른 슈미즈 위에다 걸치고 롤프를 따라 웅장한 웨스트민스터 홀로 들어서면도 영 자신감이 없었다. 화려한 궁중 예복을 유난히 돋보이는 건 새 벨트뿐이었다. 그녀는 엘리스 왕녀와 귀부인들을 알현하고서, 왕을 배알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레오니는 ‘엘리스 왕녀’--그 유명한 헨리의 정부(情婦)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쫓겨난 ‘ 엘 리 노 아 왕비’는 어릴 적 궁정에 왔을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엘리노아가 헨리의 아들들을 획책하여 모반을 조장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래서였든 아니든 간에, 헨리는 그녀를 윈체스터 성에다 감금했다. 헨리는 곁에 그의 애인을 두고 그 왕비를 감금했다는 사실로 레오니는 롤프와 아멜리아에 대한 자신의 처지가 생생하게 떠올라 기분이 상당히 가라앉았다. 레오니는 그 왕비를 보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암갈색 눈동자에 상아빛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그녀가 두 왕의 아내였다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 루이 왕과의 결혼은 두 사람이 친척간이라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단지 먼 사촌간일 뿐이었는데도, 그 결혼 취소가 받아들여 그래서 그녀는 헨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헨리는 엘리노아와 결혼한지 이년 후에 스테판의 뒤를 이어 영국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미 노르망디(영국해협에 접한 프랑스의 북서부 지방)의 공작이었고 앙주(프랑스의


서부)의

백작이었는데,

엘리노아와의

결혼으로

아키텐(프랑스의

서남부

지방)까지

소유하게 되어 프랑스 전 서부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헨리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었다. 레오니가 기억하기론, 엘리노아는 화려하고 경박한 여자로 성격이 좀 과격했고 자만심이 정말로 강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부터 엘리노아는 원숙해졌다고 레오니의 어머니가 말하던 게 떠올랐다. 엘리노아는 헨리보다 열두 살이나 연상이었는데, 그래서 헨리가 그녀를 제쳐놓고 더 젊은 여자에게 마음을 두었는지도 몰랐다. 루이 왕의 딸인 엘리스는 레이오니보다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았다. 그녀는 헨리의 아들 리차드의 약혼자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헨리는 4 년전에 그녀를 정부로 삼고는, 왕비가 궁정에서 추방된 이후로는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뻔뻔스레 드러냈다. 놀라운 건 엘리스 왕녀가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아주 귀엽지도 않다는 거였다. 그녀의 시녀들은 헨리가 좋아하는 건 그녀의 재치 때문이라고 서둘러 강조했다. 걸을 때나 춤출때의 엘리스의 우아함에 헨리가 얼마나 감탄을 연발하는지 시녀들은 레오니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아름다운 시녀들은 그들의 왕이 왜 시녀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가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건 오로지 엘리스가 헨리를 사랑하듯, 헨리도 틀림없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밖에 없었다. 엘리스를 특별한 왕의 정부로서, 그리고 헨리를 부정한 남편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레오니는 그 왕녀에게 마음이 끌렸을지도 몰랐다. 엘리스를 보자 무심결에 아멜리아가 떠올랐다. 그래서 롤프의 안내를 받으며 왕을 배알하러 갔을 때 그녀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레오니가 6 년 전에 보았던 헨리는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위압적인 왕이었고 의복에 신경 쓰지 않는 것 역시 변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그는 재단사에게 몸을 맡길 시간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의 옷들은 호사스러웠지만, 제대로 맞질 않아 어색한 느낌을 풍겼다. [그대가 그다지 예쁘지 않은 아이었다고 내가 말해 그대의 남편에게 폐를 끼치는 셈이 되었소. 그에게 그대와 결혼하지 말락 말리기까지 했었지. 그가 내 말에 따랐더라면 난 절대 용서 받지 못할 뻔했구려.] 레오니와 단둘이 있을 때 헨리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그래도 레오니는 ���무런 감명을 느끼지 못했다. [폐하, 칭찬이시라면,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쌀쌀맞게 대답하자 그의 회색 눈빛이 따스하게 빛났다. [부인, 날 싫어하오? 아니면 롤프가 말한 대로 그대는 정말로 고집이 센 거요?]


레오니는 속으로는 투덜댔지만, 상대가 왕이라 감히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가 폐하께 뭘하고 했는지 전 모릅니다.]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되받아 쳤다. [오, 실로 많은 얘기를 했지-- 그가 과장해서 말한 것 같지만. 그대들의 결혼식 날 밤에 그대가 그를 죽이려고 했을 리가 없지.] 레오니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롤프는 그 후로 한번도 그 사건에 대해 그녀와 얘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헨리한테 말하다니! [그‥‥‥ 그건, 폐하, 제가 신경이 날카롭고 두려워서 일어난 사고였어요.] [그러리라 생각했고.] 헨리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내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그대를 위해 정한 이 결혼에 그대 남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대가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오. 처음에는 반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를 보고 나서는 마음을 놓지 않았소? 말해보시오, 레오니, 롤프 경에게 만조하오?]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게 기쁘시다면요, 폐하.] [그건 대답이 아니오.] [그렇다면 제 대답은 ‘아니오.’랍니다.] [자, 이봐요.] 너무 쉽게 단정을 내려 대답한 건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에 그녀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거짓말하는

원치

않으실

겁니다.

폐하께서는

물으셨고

대답했습니다.] 헨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소.] 레오니는 그가 성미가 급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눈을 계속 내리깔고 있지 말고 그의 표정을 살펴야 했는데‥‥‥. 다행히 헨리는 솔직한 그녀의 태도가 그다지 거슬리진 않았나 보다. [이거 대단히 흥미롭구려, 부인.] 헨리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계속 말을 했다. [그대의 남편은, 숙녀들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요.] [네, 그럴 겁니다.] 레오니 역시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마음이 끌리오?] [그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헨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또한 칭찬을 받을 만한 사람이오. 게다가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전쟁과 마상시합에서 얻은 재산에다가 이젠 토지도 가지고 있소. 그러니 롤프 덤버트의 어떤 점이 그대 맘에 들지 않는지 정확하게 말해주겠소?] 그녀는 답변을 회피할 방법이 전혀 없어 혹시나 수치스러운 고백을 누가 듣지 않을까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많은 아내들이 싫어할 그런 점입니다.] 그녀가 약간 어깨를 으쓱하면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롤프 영주님은 성실한 남편이 아니랍니다.] [그대를 만나고 나서도? 믿기 어렵구려.] [저도 믿기가 무척 힘듭니다.] 의미심장한 침묵이 있고 나서, 왕이 말을 꺼냈다. [부인, 난 그대의 어머니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소. 그녀는 내

궁정을

빚내주었고 왕비의 충동적인 성격을 억제하기 위해 많은 걸 했지 -- 그에 대해 항상 고맙게 생각했소. 그녀의 딸이 행복하지 않다는 걸 보는 건 싫소.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혼란에 빠져 마찬가지로 불행한 걸 보는 것도 싫소. 그냥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는 없소?] [그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리고 ‥ ‥ ‥

그리고 폐하가 바라시는

일이라면 해보겠습니다.] [그다지 믿음직한 소리로는 들리지 않는구려.] 헨리가 눈을 찡긋하며 부드럽게 꾸짖었다. [만약 그게 그대에게 그토록 중요한 문제라면, 내가 아멜리아를 다시 궁정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는데.] 레오니는 움찔했다. 아멜리아의 이름을 전혀 입에 담지도 않았는데, 왕이 아멜리아에 대해 알고 있다면, 궁중에 있는 다른 이들도 알고 있을 게 분명해. [폐하, 그건 롤프 영주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알겠소, 부인.] 헨리는 그녀의 답변에 안도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서 조금은 사적인 얘기들에 벗어나 이것저것 화제를 삼았다. 헨리는 롤프의 생활에 간섭하는 걸 진정으로 원치 않았던 게 틀림없었다. 그가 신하들의 부인들보다는 그 신하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왕의 은혜에 보답할 처지에 있는 부인들은 거의 없었다. 헨리 왕은 교활하고 완벽한 정치적 군주였다.


그날 오후, 가까운 숲에서의 사냥은 수사슴 한 마리와 멧돼지 세 마리를 극적인 사건도 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쏘아 맞춰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만약 그 사냥에 좀더 자극적인 일이

벌어졌더라면 마상시합 얘기가 뒤이어

평소보다는

오랫동안

웨스트민스터에

나오지는

지내왔던

않았으리라. 그러나

터라

궁정의

생활은

헨리가

지루했고

어수선했다. 레오니 역시 마상시합의 얘기가 나왔을 때 어떤 흥분을 느꼈다. 헨리 왕이 마상시합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가 거듭해서 나왔지만, 그래도 그의 영주들이 열렬하게 원한다는 걸 알게 되면 이례적으로 허용해 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기대했다. 그날 밤 헨리가 마상시합을 허용해서 다들 놀란 건 물론이고, 자신도 참가할 거라고 롤프가 말하자, 레오니의 흥분은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당신은 참가할 수 없어요.] 그가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당신의 부상 때문이죠. 이 주일도 채 안됐는데‥‥‥.] 롤프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염려를 해주니 기쁘지만, 레오니,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전 진지하게 말하는데 당신을 절 비웃는군요.] 레오니는 매몰차게 받아쳤다. [내 상처가 나았다고 당신도 그랬잖소.] [전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나아졌다고 했지 그건 분명히 차이가 있어요.] [내가 해낼 수 있는지 날 믿고 지켜보시오.] [당신은 이 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겨우 하루 말을 타고나서 당신이 얼마나 진이 빠졌는지는 생각도 못하는군요. 당신은 정상적인 체력을 되찾지 못했어요, 영주님. 내일 당신의 솜씨를 시험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리석은 일이랍니다.] [여자의 쓸데없는 걱정에 귀기울이는 게 더 어리석은 일일 거요.] 그녀의 날카로운 말에 그도 날카롭게 대꾸했다. [영국에 오기 전에 마상시합은 내 삶의 방편이었소. 그리고 여기 영국기사들은 전혀 상대가 못되오. 그들의 솜씨는 별로 늘지 못했지. 헨리는 그들에게 병역 면제세를 받고 사십 일간의 군무를 면제해줬거든.] [영주님, 단 한 번뿐인 충격에 부상당한 곳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화 내기 전에 그만두시오, 레오니.] 침실에서 화를 내면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롤프의 말을 그녀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그가 그녀를 끌어당겨 거칠게 키스를 할 때서야 그 말이 생각났다. 그때 윌다가 문 앞에 와서 그 광경을 보고는 재빨리 밀드레드와 다미안에게 돌아가라며 살짝 문을 닫았다.


레오니는 내일 열릴 마상시합에 대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녀와 롤프 사이의 신경전이 가장 감미로운 열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열정의 시간이 끝난 후에, 오로지 남편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마상시합에 그가 참가하는 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기로 그녀는 다부지게 결심했다.♣

34 아씨, 이건 옳지 않아요.] 포도주 한잔을 마지못해 레오니에게 건네면서 윌다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우리가 봤던 것보다 더 심하게 화를 내실 거예요.] [그가 무사하기만 하면 됐지, 무슨 상관이야?] 레오니가 꾸짖듯 대꾸했다. [그렇지만 이런 짓을 하다니요, 아씨!] [윌다, 조용히해! 그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데, 네 말을 들으면 어떡할 거야?] [나중에 닥칠 일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 거예요.] 윌다가 심술 맞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레오니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약 바구니를 열고서 필요한 약초들을 찾아냈다. 그녀가 그 약초들을 포도주에다 넣고 휘젓기가 바쁘게 롤프가 다미안과 함께 미사에서 돌아왔다. 롤프는 그녀가 마상시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험악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지금 채비를 할건가요, 영주님?] [당신이 도와주려고?] 그가 못 믿겠다는 듯 대꾸했다. [원하신다면요.] 롤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정말이지, 당신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요, 레오니. 다미안이 옷을 입혀줄 거요.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당신이 날 더 믿어 달라는 거요.] [당신의 솜씨와 능력을 믿지 못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영주님. 단지 당신의 건강상태가 걱정될 뿐이죠. 이걸 들면 전 더 이상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그녀가 내민 포도주 잔을 신중하게 눈여겨보았다. [난 특별한 물약이 전혀 필요 없소, 레온.] [이건 당신이 힘을 내도록 해줄 몇 잎의 약초일 뿐이에요. 부탁이에요. 절 안심시키기 위해 이까짓 것도 못해주시겠어요? 약초 몇 잎이 해로울 게 뭐 있겠어요?] 그는 진지하게 간청하는 그녀에게서 컵을 건네 받아 마셨다. [이젠 걱정하지 않을 거요?]


[네.] 그녀는 온순하게 대답하고서는, 그녀의 연기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는 윌다에게 컵을 건네주었다. 오래지 않아 수면제가 효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롤프가 잠시 눈을 껌벅이며 휘청거리자 다미안은 놀라 허둥댔다. 갑작스런 피로감이 몰려들어 당황한 롤프는, 그들이 부축해 침대로 데려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레오니는 안도감을 느끼며, 이것으로 그 문제는 끝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침대에서 물러가려는데 롤프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나한테 무‥‥‥ 무슨 짓을 한 거지, 레오니?] 눈꺼품이 무겁게 짓누르듯 하여 그는 그녀를 쳐다보려고 애를 썼다. 이 모든 일을 알 것만 같았다. 그녀가 부인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이왕 저지른 일, 그녀는 대담하게 맞섰다. [영주님, 당신이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제가 그렇게 했어요.] [이번에는‥‥‥ 정말이지‥‥‥ 너무 지나쳤소.]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그녀의 손목을 놓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그가 속삭이듯 나지막이 중얼거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그녀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가 너무 지나쳤다는 말‥‥‥. [아씨께서 이렇게 하신 겁니까?] 다미안이 못 믿겠다는 듯 놀란 눈길로 레오니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리는 아씨를 죽일 거예요!] 레오니는 새파랗게 질렸다. 다미안은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았을 뿐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롤프는 그 이유를 알겠지만, 그 이유에 대해선 전혀 상관하지 않을 거였다. 그가 또 부상을 입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가 고통스러워해도 그와는 상관이 없으리라. 자신을 절대로 다치지 않을 거라는 그릇된 생각에 파묻혀 있었고, 게다가 자신의 체력이 다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그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면, 역시 그녀에게 죄가 없다는 걸 쉽사리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충동적인 결정에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다미안 말리 옳았다. 그는 그녀를 죽일 거였다. 롤프는 용사였다. 그녀가 한 짓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어스 경과 얘기를 해야겠다.] 레오니가 문쪽으로 가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사람에게 아씨가 한 일을 얘기하지 마세요! 아씨를 때려눕힐 거예요.] 다급한 목소리로 다미안이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그렇다면 왕을 만나야겠구나.] 피어스 경은 롤프를 기다리지 않고 레오니가 성을 떠나려 하는 걸 막아섰다. 그녀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만약 그가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녀 혼자서 갈 거라는 걸 알고서 그녀를 호위하고 웨스트민스터 홀로 데려 갔다. 그녀는 피어스 경에게, 롤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에 대한 다미안의 말이 옳다는 걸 굳게 미도 있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날 아침 그녀는 헨리의 주변에 있는 영주들의 관심을 끌지 않고 헨리의 관심을 끌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피어스와 같이 들어갔을 때 핸리는 여느 때와 같이 신하들에 얘기를 하면서 왔다갔다 하며 아직도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가 레오니에게 다가서자 아무도 두 사람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대 남편은 곧장 시합장으로 갔소?] 헨리는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라서, 제발 왕이 그 상태를 유지하기를 그녀는 간절하게 빌었다. [폐하, 그는 오지 못할 겁니다.] 헨리가 양미간을 좁혔다. [대체 왜 못 온다는 거지?] 그녀는 그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고서는 아내 덧붙였다. [그를 지킬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를 지킨다구? 오히려 그는 그대에게서 지켜져야 할 것 같군!] [전 고심 끝에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폐하, 부상당할 위험에서 그를 구한걸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했으니까요.] 그녀가 비참한 표정을 짓자 헨리 왕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 남편을 잘 모르고 있군, 레오니. 그대는 그를 도와준 게 절대 아니오. 내 아들 리차드 역시 마상시합 신봉자인데, 그 애는 롤프 덤버트가 부상을 당하고도 계속해서 싸워 이겨 배상금을 엄청난 재물을 받는 걸 보았다고 나에게 그랬소. 경기장에서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소. 그는 다 죽어가도 싸울 사람이오. 그것의 그의 방식이오 -- 늑대의 방식이지. 단순히 그의 검은 용모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게 아니오, 부인.] [저‥‥‥ 전 몰랐습니다, 폐하.] [그는 그대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거요, 부인.] 왕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대가 내 보호를 청하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었음 싶은데?] 그가 예리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렇지만, 절 집까지 데려가 줄 호위대를 부탁합니다. 폐하. 아무래도 롤프의 부하들은 그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대는 그의 노여움에서 도망치고 싶은 거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도망이‥‥‥ 아닙니다. 제가 그와 부딪치기 전에 그의 노여움을 가라앉힐 시간을 주고 싶을 뿐입니다.] 헨리가 호탕하게 껄걸 웃었다. [그대의 해명을 듣기 위해서 그가 그대를 찾아나서지만 않는다면 야 그 방법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오. 안되어. 그대가 그의 남편에게서 도망치는 거 난 돕지 않겠소. 하지만 그대��� 다시 남편에게 데려다줄 호위대는 주겠소.] 헨리는 손목을 홱 움직여 병사 세명을 부르고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에게 사실을 말하는 게 어떻겠소? 어쩌면 이번에 그대의 어리석은 행동을 너그럽게 보아줄 거요.] [사실을 말하라구요? 오늘 그가 싸우는 걸 제가 왜 원치 않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 하지만 더 깊은 이유 말이요, 부인.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시오. 그 한마디의 고백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지 놀라울 정도지.]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물러 나왔다. 피어스경이 이일을 알아차리고 묻기 전에 재빨리 떠날 기회를 잡았다. 느끼지도 않는 사랑을 고백하라고? 안돼,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사랑을 고백하다니? 위급한 상황에서 그 문제에 관해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그녀가 런던의 성으로 돌아와,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던 리차드 경을 찾아냈다. 그는 마상시합장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어, 롤프는 아직 더 있다갈 것이고 피어스 경은 마상시합장에 있으니까 먼저 가라고 그를 설득하는 건 쉬웠다. 그는 단 두명의 병사들만 데리고서 즉 시 떠났다. 그래서 레오니에게는 병사 여덟 명이 남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은 프랑스의 브르타뉴 출신일 ‘거이’라는 하급 장교였다. 전에는 레오니가 그와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이제는 그 어떤 참견도 참지 않을 거라는 말투로 말을 건넸다. 거이는,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걸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피어스나 리차드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그녀의 뜻에 따랐다. 거이는 그저 명령을 받은 대로 짐을 실을 큰 짐수레 하나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부하들에게 내렸다. 그리고선 그녀의 짐을 챙기라고 병사들을 그녀의 거처로 보냈다. 다미안은 다루기가 더 어려웠다. 그녀는, 그가 여기 남아서 그녀가 가버렸다고 롤프에게 일러바치는 것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다미안을 묶고 재갈을 물려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짐꾸러미가 옮겨지고 하녀들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미안에게 롤프가 그녀를 쫓아오는걸 지연시킬 거짓말을 꾸며댔다. [왕께서는, 내 남편이 이 사건에 대한 내 해명에 귀기울일 만큼 적당한 기분을 되찾을 때까지 나에게 웨스트민스터 홀로 옮겨와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그게 현명한 일이네요, 아씨. 그러니까 왕의 보호를 받으신다는 얘긴가요?] 다미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일어날 때까지 곁에서 돌봐드려라.] 그녀는 잠에 빠진 롤프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다음 번에 그를 대할땐 지금처럼 평화스러워 보이지 않으리란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떠나는 게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건 아닐까? 아니, 시간이 흘러 그가 진정되기만을 바랄 뿐이야.♣

35 그날 오후 늦게 레오니는, 큰 길이 아닌 곳으로 여행을 하는 건 안전하지 않다고 계속 우기는 거이의 무서운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가라고 호위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범법자들이나 야생동물들에 대한 염려는 뒷전에 미루고 더 많은 시간을 벌자는 생각으로만 가득 찼다. 롤프는 그녀가 크루얼로 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곧장 거기로 갈 것인 반면, 그녀는 빙 돌아 동쪽으로 해서 펄시윅 성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 그녀는 펄시윅 성의 농노들과 남편사이에 싸움 붙여 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펄시윅 성에서만큼은 그가 그녀를 때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것 같은 희망에서였다. 그들은 그 날 밤 울창한 숲속에서 야영을 했다. 레오니는 이렇게 된게 순전히 자기 탓이라 불평을 할 수 없었지만, 윌다는 줄기차게 투덜거리며 불평을 했다. 롤프가 그녀를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그날 밤 자면서까지 레오니를 괴롭혔다.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입을 틀어막아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롤프가 예상보다 일찍 그녀를 찾아낸 줄로만 생각했다. 팔 하나가 그녀의 등을 끌어올리더니 가슴을 가로지른 다음 몸을 단단히 잡고서 일으켜세웠다. 그녀는 야영지 쪽을 뒷걸음질로 소리를 죽여 끌려나갔다. 낮게 타오르는 모닥불 빛에 다른 사람들이 계속 잠을 자고 있는 모습과 보초를 서던 경비병이 자리를 비운게 보였다. 그렇지만 롤프라면 그녀를 이런 식으로 데려가지 않을 거였다. 그는 화가 치솟을 대로 치솟아 도착하기가 무섭게 우렁찬 목소리로 모두를 깨웠을 텐데. 그런데 이 사람이 롤프가 아니라면?


레오니는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녀 뒤의 남자가 툴툴거리긴 했지만 아영지까지 들릴 만큼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고 납치자의 손을 물려고 했지만, 오히려 납치자의 손이 더 꽉 조여왔다. [진정하시오, 부인. 그렇지 않으면 당신한테 내 주먹의 매운맛을 보여줄 거요.] 그 거친 목소리로 프랑스어를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귀족들이 사용하는 유창한 프랑스어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채자 마자, 그녀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영주한테 이 여자를 데려가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뭣 때문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 여자를 납치했겠어?] 뒤의 남자가 화를 내면서 대꾸했다. [우리가 이 여자를 데리고 있었어야 되잖아.] [그러면 우리 주머니에 금화가 굴러 들어오지 않잖아.] 재빠른 말대꾸였다. [하지만 이 여자는 무척 예쁜걸, 데릭.] 살찐 얼굴 하나가 그녀 앞에 흐릿하게 나타났다. [우리가 돈을 받을 때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우린 둘다 가질 수 있어.] 세 번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네 영주는 이 여자와 재미를 볼 거라구, 데릭. 그런데 왜 우리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여자를 납치했어. 이 여자를 넘겨주기 전에 갖고 싶다구.] [동감이야, 데릭. 안 그러면 우린 더 이상 가지 않을 테야.] 두 번째 남자가 협박을 하며 으르렁거렸다. 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다른 두 사내는 데릭이란 사내의 결정이 내리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덤불을 헤치고 또 한 사내가 달려나와 소리를 치는 통에 정적이 깨져버렸다. [오스가.] 새로 등장한 사내가 흥분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보초는 찍소리도 못내고 죽어버렸어! 내가 잘 처리했어!] [오스가, 네 바보 같은 동생을 조용히 시켜! 정말 내가 왜 저 녀석을 썼는지 모르겠어.] 데릭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 [그건 저 녀석이 너를 대신해 살해를 하기 때문이지. 이제 이 여자를 어떻게 할 거야? 우리가 먼저 이 여자와 재미를 보는 게 어때?] 오스가란 사내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래, 하지만 여기서는 안돼. 그리고 재빨리 끝내야 돼. 성에 도착하려면 길이 먼데, 이 여자의 병사들은 말이 있고 우린 없으니까 어서 서둘러야 해.] 데릭이 동의를 하면서도 바쁘게 몰아붙였다. [그 놈들을 다 죽였어야 했는데.]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이 얼간아, 너무 많았어. 성에 도착하기 전에 잠깐 멈춰야 한다면 어서 서두르자.] 레오니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거칠게 끌려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건 현실일 리가 없어, 안 그래? 하지만 오스가와 다른 사내들이 다시 입을 열자 자츰 정신이 돌아왔다. [오스가 형, 이 여자도 다른 사람들처럼 고문을 당할까?] [넌 말이 너무 많아.] 오스가가 동생인 듯 보이는 사내에게 화를 벌컥 냈다. [고문을 당할까?] [만약 자신이 누군지 인정하지 않고 몸값을 준비하지 못하면, 그래, 고문을 당할 거야.] [데릭이 그 모습을 지켜보겠군, 그렇지?] [얼간아! 데릭이 직접 고문을 한다고, 지켜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영주야.] 데릭이 사내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웃었다. [네가 지하감옥으로 살금살금 기어 들어와 내가 얼마나 자주 고문하는걸 엿봤는지도 저 녀석에게 말했나, 오스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스가의 동생이 물었다. [오스가, 지하감방에다 이 여자를 오래 가둬둘까?] [넌 질문이 너무 많아.] [그 상인은 그의 하인이 몸값을 가져왔는데도 살해됐어. 상인과 하인 둘 다 살해됐지.] [네 동생 입 좀 닥치게 해, 오스가. 내가 그러기 전에.] 데릭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레오니는 그런 일들에 대해들은 적은 있었지만, 무정부 상태로 어수선했던 스테판 왕 시절 이후로는 들은 적이 없었다. 스테판 왕 시절에는, 아주 가난한 하급 영주들까지도 농노들과 자유민들을, 심지어는 교회들까지도 약탈해서 재물을 모았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랬다. 작은 재물이라도 가진 사람으로 보이면 어떤 이든 납치하는 건 그 당시에 흔히 벌어지는 범죄였다. 그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소유물 전부를 포기할 때까지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 시절에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다. 자신의 왕관을 지키려고 싸움을 벌이기에 급급했던 왕에게 의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마나 범죄가 횡행했느냐는 나중에 헨리가 허가 받지 않은 성들을 -- 천 개도 넘었다. -- 모두 몰수하라고 명령했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레오니는 데릭의 영주에게 넘겨졌을 때 자신에게 닥칠 끔찍한 일들이 떠오르자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네명의 사내들이 멈추자 그 공포는 점점 사라지고, 그녀는 그들이 세웠던 계획을 곱씹었다. [재갈이 필요해.] 데릭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아, 그래! 너도 이 여자를 갖고 싶구나. 그래서 여기서 그렇게 몸이 달아 설치는‥‥ ‥.] [재갈! 빨리! 경고하겠는데, 우린 정말로 시간이 없어. 이 여자의 부하들이 찾으러 오기 전에 입을 봉해둬야 해.] [천 조각들을 안 갖고 왔어.] 데릭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자 오스가가 투덜거렸다. [네 셔츠로 될 거야. 그걸 이리 줘.] 그 둘 중 하나가 그녀에게 재갈을 물리려고 데릭이 잠깐 손을 치우는 틈을 타 그녀는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은 금새 끊겼다. 악취나는 셔츠가 그녀의 입을 단단히 가로질로 홱 잡아당겨졌다. 셔츠 조각이 그녀의 머리 뒬 세차게 꽉 매졌다. 내 입가가 분명 찢어졌을 거야. 재갈이 단단히 물려지자, 데익이 그녀를 세게 흔들었다. 그에게 잡혀 있는 그녀의 두팔에 강력한 고통이 전해졌다. [그만해, 데릭. 그러다가 그 여자 목이 부러지겠어!] 누군가가 성마른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이 여자 목소리가 성에 있는 이들에까지 들렸을까?] 오스가가 약간 불안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들은 상관치 않아.] 데릭이 그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넌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이 여자 부하들이 있는 데서 그다지 멀리 오지 못했어. 누군가가 일어났다 해도 이 여자에게 달려올 정도의 거리는 아니긴 하지만.]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어야 했어. 거기엔 기사가 한 명도 없었단 말이야.] 오스가가 넌더리가 난다는 듯 뚜벅 말했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나 빼놓고는 검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지.] 데릭이 경멸 어린 말투로 그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웠다. [조용히! 무슨 소리가 들려!]


레오니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점점 크게 들리는, 덤불을 뚫고 달려오는 틀림없는 말발굽 소리었다. 희망이, 강렬한 희망이 솟구쳤다. [지금은 운 좋게 산 줄 알아, 부인. 하지만 나중에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어.] 데릭이 이를 갈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말을 하고선 다른 이들에게 명령했다. [지금 여기서 지체할 수 없어. 빨리 움직여. 하지만 제발 아무 소리도 내지마.] [데릭, 안돼. 어서 목초지를 지나야 해. 발각되고 말 거야.] 겁먹은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모든 게 다시 잠잠해질 때까지 목초지 근처에서 기다리면 돼. 여자를 찾으려고 흩어질 거야. 한명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죽이면 되잖아.] 레오니를 다시 앞쪽으로 몰아댔다. 이번에는 재갈을 못 빼게 그녀의 팔꿈치 바로 위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다른 세 사내는 앞서서 가고 있었지만, 데릭은 그녀의 몸부림을 치는 통에 뒤로 쳐졌다. 그 사내는 힘이 무척 세어 그래봤자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안 되겠는지 데릭은 곡식자루처럼 그녀를 들쳐 메고 뛰어갔다. 그녀는 또다시 절망적인 기분이 엄습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사라졌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소리지를 기회를 잡았어야 했는데! 데릭은 광대한 개척지 근처에서 멈췄다. 개척지는 숲을 잘라버리고 만든 것이라 그 둘레의 삼림지에 비해 유난히 한했다. 다른 세명의 사내는 그녀와 데릭을 기다리면서 개척지 경계 부근에서 바싹 긴장하고선 경계 태세로 몸을 웅크렸다. [뭐가 보였어?] 개척지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데릭이 물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어. 그렇지만 저 길 아래서 또 다른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그 소릴 누가 또 들었어?]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자, 데릭이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생각대로야. 이 여자를 찾으러 병사들이 이렇게 멀리까지는 오지 않았을 거야. 우린 목초지만 지나면 돼, 그럼 안전할 거야.] [난 이 여자를 넘겨줄 때까지는 안전할 것 같지 않아. 이건 그렇게 좋은 생각이 아니었어, 데릭. 보통 우리의 먹이는 그렇게 많은 호위대가 없었다구.] 그들은 조심스레 서로 바싹 붙어서 나아갔다. 하지만 그들이 목초지를 반도 지나지 못해 숲쪽에서 말을 탄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서서히 오고 있었다. [저 사람이 네 영주인지 말해 줘, 데릭.] 그 목소리에는 공포가 잔뜩 묻어났다. [물론 아니야. 그는 저렇게 덩치가 크질 않아. 그렇지만 이제 무서워 하지마, 완전 무장을 한 기사야. 이 여자와 함께 있던 자들 중에는 저런 기사는 없었어.]


[왜 저렇게 앉아서 우릴 노려보고 있는 거지? 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거야?] 오스가가 불안에 떨면서 물었다. [기다려, 이제 우리에게로 오고 있어. 이 여자를 잡아. 난 저자와 싸워야 할지 모르니까.] 데릭이 주의를 주며 레오니를 어깨에서 내려 다른 이들에게 맡겼다. [네가 저 사람과 싸운다고?] [네가 도움다면, 이 얼간아.] 데릭이 야유를 퍼붓자 마자 커다란 종마가 그들 앞에 우뚝 섰다. [저희가 뭘 도와드릴까요, 영주님?] [너희가 거기 데리고 있는 여인을 내놓아라.] [우리 영주님의 도망친 아내일 뿐입니다. 종종 우리가 찾아 다시 모시고 가지요. 이분은 정신병을 앓고 계시거든요.] [이상하군. 내 ���내와 너무 똑같이 생겼어. 켐프스톤의 여주인이 거칠게 다뤄졌다면 당연히 난 그런 일을 좋아하지 않을 거다.] 데릭은 섬뜩한 공포에 완전히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종마 위의 거대한 기사는 데릭을 노려보며 말하길 기다렸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켐프스톤의 새영주인 것 같아.] 데릭이 겁에 질려 속삭였다. [그렇지만 켐프스톤은 지금 ‘검은 늑대’소유야. 그러니까‥‥‥.] [그래, 맞아, 우‥‥‥ 우리가 데릭 있는 이 여자가 저 사람의 아내인 것 같아.] [어리구, 이 여자의 눈을 봐! 저 사람을 아는 눈빛이야!] 세 번째 사내가 절망스런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스가의 동생은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슬금슬금 도망쳤다. 거대한 종마가 금세 그의 길을 막더니, 칼날이 번쩍하며 그 사내를 내리쳤다. 소름끼치는 비명이 이어지자 다른 세 사내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몇 분도 안돼 종마가 두 사내를 잡았고, 그 날카로운 칼로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내리쳤다. 오스가는 그들이 왔던 길로 되돌라가면서, 종마가 개척지를 지나오기 전에 나무들 사이로 몸을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안전했다 -- 그러나 아직 안전하지 못했다. 새로운 시련이 눈앞에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여길 마무리하게 피어스. 그리고선 병사들을 야영지로 다시 돌려보내게.] 롤프가 말하는 도중에 그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개척지로 모여들었다. [이 자들 중에 아직 살아있는 자가 있거든,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했던 건지 알아보게.]


[영주님은‥‥‥?] 피어스가 롤프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곧 따라가겠네 -- 아내와 같이.] 레오니는 재갈을 풀고 나서도 너무 공포에 질려 있어서 감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롤프가 말에서 내려와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의 얼굴은 투구에 가려져 있어 그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들이 당신에게 해코지 했소?] 얼마나 냉정하고 형식적인 질문인가! [그‥‥‥ 그럴 작정이었지만, 그들은 당신 말발굽 소리를 듣고 겁을 먹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애원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영주님, 당신께 말하려 했지만‥‥‥] [아, 그 문제에 대해 조금 있다가 얘기를 할 거요, 부인. 반드시 그럴거요.] 그가 레오니이 팔을 잡고 말 있는 데로 데려가자 그녀는 숨이 막혔다. 그가 말에 올라타더니 그녀를 자신의 무릎위로 끌어올렸다. 그들은 숲으로 말을 몰고 가 아영지가 있는 쪽이 아니라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렸다. 레오니는 무섭고 비참했다. 롤프가 제발 때리지 말기를 기원했지만, 그는 그러려고 작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다른 곳으로 데려가겠는가? 그가 계속 달릴 것만 같아 그녀는 어디 한곳에 멈춰 이 숨막히는 순간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싶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겁에 질려 있어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서 더 멀리 벗어날수록 그녀는 더욱 끔찍한 처벌에 대한 상상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또다른 개척지에 이르렀다. 그 개척지 한가운데에는 무너진 오래된 탑이 있었다. 롤프는 그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무너진 돌무더기 옆에 멈추고는 레오니를 내려주었다. 달빛 아래 황량해 보이는 그곳은 음침해 보였지만 말에서 내려선 그녀의 남편만큼이나 음침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차근차근한 동작으로 투구와 목이 긴 장갑을 벗었다. 그러더니 그녀 앞으로 다가와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섰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누가 당신에게 내가 불성실하다고 그랬소?] 그녀는 흠칫하며 의혹에 가득 찬 태도를 취했다. 틀림없이 화난 목소리야. 그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험악했고, 그의 입술도 일직선으로 꽉 다물어져 있었다. 하필이면 왜 그런 걸 묻고 있는 거지? [무‥‥‥무슨 말인지.]


[헨리 왕한테 뭐라고 했던 거요?] [전‥‥‥.] 그날 왕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그녀는 아찔해 금세 화가 치밀었다. [그분은 내 말을 옮길 권리가 없어요!] [왕의 권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오. 다시 한번 묻겠는데, 내가 불성실하다고 누가 그랬소?] 롤프가 또 다시 강압적으로 물었다. [누구라도 말할 필요도 없었어요. 전

눈도 없는

아세요? 아멜리아는

당신의

피후견인이 아니에요. 결코 그랬던 적도 없었구요.] [그녀는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소.] 그가 재빨리 받아쳤다. [그 말 한 마딜 모든 일이 해결되나요? 한 남자가 이웃집 하녀와 놀아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하녀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죠. 그렇다고 그가 그 아내에게 성실한 건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이 보라는 듯 정부를 자신의 집에다 두는 남자보다 더 분별력이 있다 뿐이죠.] 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소리치다가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제기랄, 레오니. 난 우리가 결혼한 뒤로 다른 여자에겐 절대 손도 대지 않았소!] 그 말을 그녀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절 건드렸잖아요! 펄시윅성에서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침댈 데려가려 했던걸 잊었어요?] [그래!] 그는 살피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사납게 쳐다보았다. [그 일로 아직도 날 용서하지 않았군.]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 얘길 꺼낸 거예요, 영주님. 당신은 다른 여자들을 건드렸어요. 내가 크루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멜리아가 그때까지 당신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예요. 그러자 그는 나지막이 투덜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레오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두 팔을 붙들고 그녀를 들어올려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게 했을 때도 그녀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게 왜 당신한테 문제가 되는지 말해주시오, 부인. 당신은 내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자든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소?] 롤프의 목소리는 마치 폭풍을 예고하듯 고요했다. [신중하게 한다면요.] [조건들이 있는 줄 몰랐소. 그래 당신은 정말 관심이 없소?]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그녀는 목이 메였다. [상관없어요.] 그는 그녀를 내려놓고는 돌아섰다. 레오니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러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왜 내가 관심 있기를 원하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아내라면 그래야 하는 거니까.] 그가 즉시 대꾸했다. [아내라면 남편의 정부 앞에서 모욕 받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롤프가 홱 돌아섰다. 그의 몸이 분노로 팽팽하게 조였다. [모욕을 주려는 의도는 절대로 없었소. 그 여자는 더 이상 내 정부가 아니라고 했잖소.] [그걸 내가 믿기를 원했다면, 영주님. 당신은 그녀를 크루얼에서 내보냈을 거예요.] [나한테 그걸 요구하지 마오, 레오니.] 그녀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난 요구해요. 그녀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그녀를 크루얼성에 놔둘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녀가 가길‥‥‥ 원치 않소.] 그가 말 끝에 힘을 주었다. 차라리 그녀를 한 대 치는 게 더 나으리란 심정이 일었다. [당신을 그녀의 소망이 내 소망보다 더 소중한가요?] 그러면서도 그녀가 그가 아멜리아를 내보내겠다는 약속하길 기다렸다. 간절한 심정으로 그 말을 기다렸으나 그가 말을 하지 않자, 그녀는 서글픈 심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제가 당신에게 줄 건‥‥‥ 롤프 덤버트 경, 오로지 경멸뿐이에요.] [난 그 이상을 가질 거요, 부인.] 그는 그녀를 느닷없이 끌어당기더니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힘있게 갖다댔다. 그의 키스를 받자 그녀는 모든 의지가 꺾여 맥없이 무너졌다. 그녀는 그가 또다시 자신을 압도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이 믿기 어려운 감정을 일으키도록 내맡기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미워요.] 레오니는 신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그 말이 미덥지 않은 소리로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난 당신이 날 미워해도 당신을 사랑할 거요.]


그가 그녀에게 또다시 키스를 하자, 스스로를 배반하는 엄청난 격정이 일어나는 순간, 그에게 서서히 빨려들어 갔다. 그녀는 싸우고 또 싸웠다. 하지만 그녀가 싸우는 건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욕망이었다.♣

36 떠돌이 사냥개 한 마리가 그들의 발치에서 낑낑거리는 소리에 레오니와 롤프는 잠에서 깨어났다. 롤프가 덤벼드는 척하면서 그 짐승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개는 그저 그를 멀뚱 거리며 쳐다만 볼 뿐 사라질 기색이 전혀 없었다. 레오니가 깔깔대자 롤프는 화난 표정으로 그녀에게 돌아섰다. [저 개한테 가라고 부탁을 해보는 게 어떻겠어요?] 레오니가 눈에 웃음을 가득 담고 넌지시 권했다. [당신이 해보시오.] 그녀는 그렇게 했지만 그 개는 역시 그녀를 쳐다만 보았다. [저 개를 내버려둬야 할 것 같네요.] 그녀가 멋쩍게 얘기하자 롤프가 껄껄 웃었다. [저 놈은 이곳에서 계속 저러고만 있을 것 같군.] 그는 몸을 숙이고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벼운 키스를 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두 눈은 다정한 빛을 발했다. 그가 놓아주자, 레오니는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그의 망토 위에 반듯이 누웠다. 그들은 무너진 돌들과 남아 있던 탑 벽을 바람막이로 꼼짝않고 그 밤을 보냈다. 그녀는 롤프의 품안에서 안전하고 만족스럽게 잠을 이뤘다. 그녀에 대한 그의 뜨거운 갈망이 그녀의 분노와 상처 모두를 깨끗이 씻어버렸다. 그건 그녀가 거역할 수 없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밖에 무엇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간에, 롤프는 진정으로 그녀를 원했다. 롤프 역시 그의 분노가 그의 갈망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갈망이 레오니의 고통에 달콤한 진통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 밤 잠시,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온 마음으로 표현했다. 그 느낌과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킨 다른 모든 느낌들에 그녀가 뿌듯했다. 그녀는 롤프의 성급함을 회상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서로의 옷을 벗겨주고 그리고 천천히, 모든 순간을 설의 부드러운 애무를 음미하여 사랑을 나누었다. 그렇게 고통에 겨운 하루가 그런 식으로 마무리 지으리라 곤 그녀는 상상도 못했다.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학 있는지 알겠소, 내 사랑.] 레오니가 더 빨개져서 몸을 돌리자 롤프는 즐거움이 가득 찬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능청스럽게 그녀의 엉덩이를 톡톡 쳤다. [가서 일을 보시오. 우린 예상보다 여기서 시간을 너무 끌었소.]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가 씨익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급히 후미진 곳으로 갔다. 그녀가 돌아왔을 즈음 롤프는 말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에게 등을 지고 있어 그녀가 다가가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그에게 약을 먹인 일을 그가 잊으리라 곤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일로 그가 또 화를 내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녀는 롤프에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아직도 그는 돌아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기분이 어떤지 확신이 서질 않아 두손을 모아 쥐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절 찾아냈어요?] 그녀는 태연하게 말하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조사를 해서 알았지. 당신이 큰 길을 벗어나는 걸 본 사람이 있었소.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명백했지. 그래서 어두워진 이후였어도, 당신이 야영한 곳을 찾는건 어렵지 않았소. 하지만 거기서 당신이 없어진 걸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지.] 그가 천천히 돌아서서 그녀를 보았다. [그‥‥‥ 그때 절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영주님.] [그 자들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려 했는지 아오?] [근처의 성이에요. 고문을 해서 강탈하는 영주에게로요. 당신이 제 목숨을 구한 거예요.] 그 끔찍한 일이 떠올라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그 자들은 당신을 죽이지 않았을 거요, 레오니, 다치게는 했겠지만 당신은 너무 가치가 있어서 죽이지는 않았을 거요.] [그들은 내가 누군지 관심도 없었고, 또 내 가치도 몰랐어요. 틀림없어요.] [당신이 이름을 말했더라면, 그 자들은 당신의 가치를 알았을 거요.] 그는 그 말을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했지만,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이름 같은 건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 텐데‥‥‥. 순간 롤프의 정체를 알고선 그 사내들이 보인 반응이 떠올랐다. 자만심에 차 있던 데릭조차도 ‘검은 늑대’의 아내를 데려가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용기를 잃어버렸다. 레오니는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내가 요 몇 년 동안 너무 펄시윅 성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겠군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롤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어떻게 모를 수 있소? 바로 당신 이웃이, 아주 질이 좋지 않은 인간이었는데‥‥‥] [이수이오? 누굴 말하는 거예요?]


[달리 누가 있겠소? 몬티니와 그 아들이지. 그의 가신들도 틀림없이 연루되어 있을 거요. 그 가신들이 왜 그토록 날 받아들이기를 두려워 하는지만 봐도 알 수 있지. 틀림없이 그들은 내가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는 걸 보려고 왔다고 생각했을 거요.] 롤프가 역겹다는 표정을 짓자 레오니는 뻣뻣하게 굳어졌다. [전 안 믿어요! 제 평생 동안 몬티나 가( 家 )를 알고 지냈어요. 에드몬드 경은 좋은 이웃이었어요. 그리고 알에인‥‥‥.] [내 앞에서 그 녀석 이름을 들먹이지 마시오.] 롤프가 날카롭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당신이 믿든 안 믿든 간에, 레오니. 뫁니니 가는 숱한 범죄를 저질렀소. 그들은 신중했지. 그들에게 당한 이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몸값을 누가 가져갔는지 몰랐소. 그리고 살해된 이들은 당연히 그런 얘기를 전해줄 수가 없었지. 하지만 헨리 왕은 오랫동안 중부지방에서 고소장들을 접수하였소. 최근에 들어서야 그는 그 범죄자들의 이름을 알게 됐지.] [죽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사람을 헐뜯다니 너무해요.] [그가 어떻게 죽었을 줄 아오, 부인? 마침내 그의 행위를 알고 있던 많은 이들이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거요. 그는 체포에 저항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소. 그의 아들은 재판에 회부될까봐 도망쳤고.] [하지만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은 얘기예요. 에드몬드 경은 켐프스톤 전역을 지배���고 있었어요. 불법적으로 재산을 모을 필요가 어디 있었겠어요?] 롤프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스테판 왕 시절에는 그에게 더 많은 성이 있었소. 헨리 왕이 즉위하자 그는 그 성들을 해체해야 했지. 꽤나 사치에 익숙해 있던 그는 몰수 당한 성을 비롯해 재산을 다시 늘리려고 불법적인 수단들에 의존했던 것 같소. 그 사람은 늘 사치스럽게 살았으니까.] 레오니는 에드몬드 경이 얼마나 사치스럽게 살았는가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또한 어느 부분은 너무도 가증스러워 듣고 싶지 않았던 막연한 얘기들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 소문들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녀는 특히 알에인에 관해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알에인의 아버지는 사악한 인간이었을 수도 있지만, 겁많고 소심한 일에인은? 그래, 사실이 아니야. 하지만 논쟁을 다시 벌일 만한 사간이 없었다. [가야 하잖아요, 영주님?] [이 정도의 시간이면, 거이는 자신이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충분히 오랫동안 마음을 졸이고 있을 테지. 그래, 갑시다.]


그는 말에 올라탄 다음 그녀를 말 위로 끌어올리고서는,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가 흔들리지 않게 꽉 붙들었다. [무슨 처벌이오? 그 하급 장교가 무슨 짓을 했어요?] [그는 당신을 위험에 빠뜨렸소.] 종마는 숲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녀는 아찔한 생각에 소리쳤다. [그렇지만 그는 단지 제 명령을 따랐을 뿐인걸요!] [그게 문제가 아니오. 그에겐 당신을 보살피는 임무가 주어졌소. 그는 당신을 큰 길로 데리고 가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었소. 지난 밤에 내 손에 죽지 않았으니 그 나마 운이 좋은 거요. 우리가 크루얼에 도착하면, 그는 스무 대의 채찍을 받게 될 거고, 그 벌로써 끝나는 걸 고마워할 거요. 그 누구보다도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그를 처벌하지 마세요, 영주님. 누구도 제 잘못을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구요!] 말발굽 소리 때문에 그녀는 기를 쓰고 소리쳤다. [그건 당신 탓일 수도 있소, 레오니. 그래, 정확히 따지자면 그렇지. 그렇지만 내 판결에는 변함이 없을 거요. 그는 경솔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될 거고, 아무도 그걸 막을 수 없소.] [전 어떤 처벌을 받게 되나요, 영주님?] [당신이 지난 밤에 중요한 교훈을 얻었길 바라오.] [저도 채찍을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저 역시도 그 하급 장교와 마찬가지로 경솔했으니까요.] [날 부추기지 마시오, 레오니. 당신을 경솔한 것 이상이었소.] 그가 매몰차게 말하고는 이내 덧붙였다. [당신 때문에 난 왕과 거의 싸울 뻔했으니까.] 레오니는 엄청난 두려움에 신음하듯 말했다. [아닐 거예요.] [그래요. 당신을 숨겨놓지 않았다고 그가 우기자, 난 그에게 거짓말쟁이라고 했소.] 레오니는 새파랗게 질려 목소리를 높였다. [압소사! 그저 당신이 날 따라오는 시간을 늦추려고 왕한테 갈 거라고 다미안에게 말했던 건데. 제가 거기 없다는 헨리 왕의 말을 당신이 믿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피어스 경은 당신이 웨스트민스터 홀을 떠나는 걸 맹세코 본 적이 없다고 했소. 만약 그가 내 부하의 절반이 보이지 않는걸 발견한 즉시 나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당신을 찾느라고 홀을 마구 뒤졌을 거요.]


[저‥‥‥ 정말 헨리 왕에게 거짓말쟁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죠, 정말이죠?] [아니, 불렀소.] [하느님 맙소사, 그는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무슨 짓을 한 거죠?] [그는 이미 날 용서했소.] 롤프가 조금 누구러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는 둔감한 사람이 아니오. 그는 내 행동을 이해해 주었소. 심지어 당신의 행동을 내게 이해시키려고 당신과 나눴던 대화까지도 나한테 얘기해 주었소. 난 당신이 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를 헨리 왕에게는 얘기하면서 나에겐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굉장히 화가 났었소.]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그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 헨리 왕에게 말했던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소.] [그건 사실이에요.] [그래요? 어젯밤에 당신은 관심 없다고 맹세했잖소.] 레오니는 입을 열었지만 또다시 그 문제를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지난 밤 그들은 그 얘기를 하면서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잖는가. 그는 아멜리아를포기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그에게 또다시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롤프는 ‘훅’하고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다시는 나한테 약을 먹이지 마시오, 레오니. 그리고 절대로 다시는 나한테서 달아나지도 말고.] [네, 영주님.]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갈길을 재촉했다.♣

37 어느덧 크루얼 영지에 수확이 시작되었다. 그 토지의 일부는 영주의 직영지였다. 그렇지만 크루얼에는 농노들의 작업을 감독할 토지관리인이 없었다. 레오니가 감독할 수도 있었지만, 그 농노들이 자신에게 갖고 있는 증오가 떠오르자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그 농노들의 우두머리를 대리토지관리인으로 지명했다.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결정이었지만, 그녀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농노들은 그의 말을 잘 들을 테니까. 롤프가 없어 그녀는 그 결정을 직접 내렸다. 런던에서 그들이 돌아온 이후 이 주일 동안 그는 떠나 있었다. 거이가 스무대의 채찍을 맞은 그 날 밤 이후, 레오니가 힘겨운 건 롤프의 부재일뿐이었다. 롤프는 그 처벌을 내린 뒤 바로 워링성 포위공격으로 떠났고, 여태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워링 성은 크루얼에서 북쪽으로 24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먼 거리였다. 그녀는 그가 집에 올 수 없는 걸 이해했지만, 그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심지어는 말을 타고 워링 성으로 가볼 생각까지도 했었지만, 롤프가 반기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접어두었다. 롤프가 없어서 그녀의 생활이 비참한 것만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아멜리아는 존재가 정말이지, 견딜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에바라드 경이 식사 중에 불려나가는 통에 그의 의자를 사이에 두고 두 여자만이 남게 되었다. 레오니는 아멜리아에게 정중하게 대하려고 온갖 애를 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아멜리아는 새침떼며 한껏 으스댔다. 레오니는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뭣 때문에 아멜리아가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거지? 그날 저녁식사를 하다가 에바라드 경이 자리를 뜨자 아멜리아는 레오니에게 메스꺼움을 가라앉힐 약을 부탁했다. [아프면 누워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레오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절대 아니에요! 아픈 데는 아무 데도 없어요. 한달만 지나면 괜찮아 질 거예요. 그저 식사하는게 곤란해서요.] 아멜리아가 생글거리자 레오니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당신은 뭔가를 둘러서 말하고 있군요, 아멜리아. 그게 뭐죠?] 그에 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는 투로 레오니가 물었다. [틀림없이 롤프가 말했군요! 도저히 비밀로 할 수 없는 일이죠.] 아멜리아는 짐짓 깜짝 놀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당신이 내 남편의 아이를 낳을 거라고 말하는 건가요?] 아무런 긴장한 내색 없이 레오니가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그래요, 그 아이는 롤프의 아이랍니다. 그는 부인하지 못할 거에요.] 그 순간 모든게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롤프가 아멜리아를 내보내길 거부했던 건 당연했다! 레오니는 그 사실을 두고 온갖 상상을 떠올렸는데 이제서야 모든 걸 알게 되어 오히려 안심이 될 정도였다.레오니는 여전히 애절한 정도로 깡마른 아멜리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매몰찬 표정을 지었다. [언제 임신했죠?] [그게 무슨 상관....] [아멜리아, 대답해요!] 아멜리아가 어깨를 들먹이며 입끝을 울렸다. [한 달 됐어요.]


레오니는 재빨리 계산해보았다. 그녀가 다시 크루얼로 와서 살게 된지 한달째였다. 펄시윅에서 크루얼로 돌아온 그날 밤, 롤프가 화가 나서 침실을 떠났던 그때 그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다음날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아멜리아의 표정까지도...... 레오니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식탁을 떠났다.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이후로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비참함을 맛보았다. 혼자서 엉엉 울고 고함을 치면서

그의 우유부단함을 저주하고 거짓말을 한

그를

원망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원망스러웠다-이런 엄청난 시련은 그녀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그것도 엄청날 만큼 숱한 문제를 일으킨 자신을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알에민 몬티니에게서 또 전갈이 왔지만, 레오니는 너무 심란해서 그쪽지를 다른 종이들과 같이 치워두고는 그에 대해 잊어버렸다. 그녀는 그 주 내내 지독한 우울에 빠져 지냈다. 자신도 임신한 걸 발견하는 순간, 충격을 받았고 비참하다는 생각에 몸부림쳤다. 아이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날 거라는 사실은 아주 분명했다. 이미 아이가 있는 영주가 아내에게 서자들을 기르라고 요구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그 아이들이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임신되었기에 남편의 요구를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다른 여자가 임신한 애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전적으로 달랐다. 롤프가 아멜리아의 아이를 기르라고 요구하리라고 레오니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이와 엄마 둘 다 곁에 붙들어두고 싶어할 거라는 점에 대해선 확신이 섰다. 그 아이는 농노의 자식이 아니었다. 농노의 여자라면, 아이의 아버지기 더 나은 삶을 아이에게 베풀테니까 그아이를 쉽게 포기하리라. 그러나 아멜리아의 경우는 그게 아니었다. 아멜리아는 절대로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거고, 그렇게 되면 롤프 역시 아멜리아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으리라. 다가올 앞날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그 암담함이 고통스럽게 파고들었다. 레오니가 그의 아이를 갖지 않았어도 롤프는 그녀를 펄시윅 성으로 내 보낼 가능성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임신 중인걸 알면, 그는 절대로 그녀를 보내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임신사실을 그에게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임신한 게 드러나기 전에, 그를 떠날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펄시윅에 틀어박혀 지낼 수도 있으리란 막연한 생각이 스쳤다. 그에게 크루월 성에 붙잡아둘 핑계거리를 주지 않겠노라 레오니는 다부지게

결심했다.

동정심을

베푼

다든지,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따스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지만, 남편을 다른 여자와 공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멜리아가 떠날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지내왔다. 이제 그 실날같은 희망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허무한 짓이었어.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롤프, 당신은 아시나요? 여러 날이 지나도 그녀의 휑한 마음은 그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롤프가 크루얼 성에서 만나자고 전갈을 보냈다면서, 버트란드 경과 그 장남인 로널드가 어느 날 오후 늦게 크루얼로 왔다. 버트란드는 그녀 소유인 한성, ‘마힐’성을 관리하는 그녀의 가신이었다. 그녀 남편이 왜 그를 보자고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롤프가 곧 집에 오리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버트란드 경에게 그곳의 수확 등 마힐 성에 관해 몇 가지 사항을 겨우 물어보긴 했지만,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롤프 때문에 그녀는 너무도 심란하여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바쁜 시간이었다. 겨는 에바라드 경의 도움을 받아 자기 가신들을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접대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멜리아는 내내 홀에 나타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 가는데도 롤프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레오니는 손님들이 묵을 방을 준비시켰지만, 그 가신들은 무슨일로 롤프가 자기들을 보자고 하는지 알고자 홀에 있고 싶어했다. 마침내 그가 오는 소리가 들리자, 레오니는 재빨리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방으로 물러갔다. 롤프를 마주하게 되면 화가 부글부글 끓을 텐데, 자신의 가신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인다는 건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들의 방이라면 굳이 감정을 감추지 않아도 되니까 안전했다.그러나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롤프가 곧바로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찌나 빨리 왔던지, 아래층에 있는 손님들에게 분명 인사만 하고 온 것 같았다. 그처럼 무례한 행동에 대해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 한번 지켜봐야재. 어쨌든, 그가 두사람을 부르지 않았던가. 그녀의 눈썹이 의심스럽다는 듯 좁아졌다. [절 망신시킬 생각은 아니시죠, 영주님?] [왜 그러는 거요?] 롤프는 투구와 목이 긴 장갑을 내던지면서도 눈은 계속 레오니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는 난롯가에 서 있기만 했다. [버트란드 경과 그 아들을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냈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그들과 얘기도 나누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걸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롤프가 레오니에게 다가가면서 씨익 웃었다. [피곤하니까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고 했소. 그들은 충분히 받아들였다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당장 아래로 가서 그들과 얘기하세요!] 레오니는 어린아이를 꾸짖듯 호통을 쳤다. [그들을 이미 잠자리에 들었어요, 부인. 그리고.....] 그때 다미안이 방으로 들어오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레오니는 치솟는 분노를 꿀꺽 삼키고는, 다미안이 롤프가 무거운 쇠미늘 갑옷을 벗는걸 도와주는 동안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몇 분도 안돼 롤프가 상냥하게 말했다. [녀석아, 이제 가서 자거라.]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다미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방에서 나갔다. 로프가 그처럼 상냥하게 말하다니!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의 아내 앞에서 그의 태도가 얼마나 철저하게 달라지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레오니는 즉시 가슴에 꾹꾹 눌러두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작정으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마자 홱 돌아섰다. 그러나 셔츠와 소스만 걸치고 잇는 롤프를 보고서는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팽팽하고 우람한 근육들로 뭉쳐있는 긴 다리, 널따란 가슴-그 가슴은 옷을 입을 때와 벗을때가 별 차이 없이 넓어 그녀는 항상 신기했다- 그의 얼굴 주위로 제멋대로 물결치고 있는 머리카락, 그 모든게 남자와 소년의 모습을 동시에 갖췄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그는 그녀에게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건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야. [내가 보고 싶었지, 내사랑?] [아니오, 영주님.] 그녀가 뻣뻣하게 되받아 쳤다. [거짓말 .] 그는 그녀가 물러설 틈도 없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턱을 치켜세우고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부드러운 갈색이었지만 불꽃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내가 너무 오래 나가 있어서 화가 났군.] [절 화나게 하는 일은 많지만, 영조님. 그건 아니에요.] [그게 어떤 일들인지는 내일 말하시오, 레오니.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니까.] 그녀가 물러서려 했지만, 롤프는 그녀를 잡아당기고 키스를 했다. [보고 싶었소, 레오니. 정말 너무나 보고 싶었소.] 그는 그녀의 뺨에서부터 부드러운 목의 곡선을 따라 입술을 움직이면서 격정이 가득 찬 소리를 뿜어냈다. 끊는 마치 아득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또 이렇게 하는 걸 거부할 순 없었지만, 모든 비참함과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욕망이 겉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여...... 여자가 필요하다면.... 당신의 다른 여자한테 가세요..... 전....] [나에게 다른 여자란 절대 있을 수 없소.] 그녀는 습관처럼 유순하게 그에게 기댔다. 이렇게 뜨겁게 타오르는 우리 두사람의 정열에 저항할 수가 없어. 당분간은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38 롤프는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몸을 뒤로 젖히고는 토르프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의 오랜 친구의 의견을 물어보는 건 항상 유익하면서도 즐거웠다. 레오니의 소유인 마힐 성의 버트란드 경과 그의 아들 로널드와의 면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


면담이 일단 끝나자 그들은, 롤프와 만나려는 손님을 남겨 두고 왔다면서, 더 머물러 달라는 롤프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롤프는 면담 결과가 무척 만족스러웠다. 헨리왕이 귀띔해준 그대로였다. 버트란드 경에게는 롤프가 쓸만한 아들이 여럿 있었고, 바로 그 점이 절실히게 필요한 부분이었다. 롤프의 부하들은 그의 남은 성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는 걸 꺼려했다. 그들은 군인 생활을 더 좋아했다. [로널드 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오? 워링 성주로 적합하겠소?] [그는 아주 열성적인 것 같습니다. 사실 너무 열성적인 것 같이 조금은 염려스럽지만요.] 토르프가 생각에 잠겨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그에게는 아버지인 버트란드 경이 죽고 나서 뒤를 이어 마힐 성주가 될 가능성밖에 없었죠. 그는 영주님을 잘 섬길 것 같습니다. 그가 마힐 성에서 존경을 받는지는 때가 돼야 알게 되겠지만.] [동감이오. 우린 이제 워링 성을 점령하기만 하면 되오.] [일주일 내지 이주일이면, 성벽이 무너질 겁니다. 블리쎄에도 터널을 뚫고 있습니다. 광활한 켐프스톤은 첫눈이 오기 전에 평정될 겁니다. 그러고 나면 우린 뭘 하죠? 영주님이 영지는 다 평정될 테고 그럼 할 게 아무 것도 없을 텐데요.] 토르프는 자신 있게 때기하다가 은근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토르프를 보고 롤프가 겸연쩍게 씨익 웃었다. [잠시 평화를 즐기고 싶소. 다른 전쟁을 찾아 떠나기 전에.] [영주님은 아마도 토지를 가진 영주 생활이 너무 좋아 서둘러 전쟁터로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롤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연 내가 그럴까? 토르프는 이미 그걸 알고 있으리라. 토르프가 투덜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간에 영주님 뜻은 알겠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들을 쓰시기 전에 버트란드와 그의 아들의 생각을 떠보신 건 현명하신 일이었습니다. 사실, 전 영주님이 면담을 핑계대고 레오니 아씨를 보려고 한 건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롤프가 싱긋 웃자 토르프가 갑자기 커다랗게 웃을 터뜨렸다. [이런! 제 생각이 맞았군요!] [날 여기로 돌아오게 하는 건 이유가 뭐든 좋소.] 롤프가 멋쩍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데 그녀는 버트란드 경의 아들을 영주님의 성들을 지키라고 제안하신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버트란드 경이 블리쎄 성을 이끌고 갈 만한 아들이 또 하나 있다고 했죠?] [그랬소. 하지만 난 아직 레오니에게 말하지 않았소.]


토르프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눈을 치켜 떴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롤프? 버트란드 경은 그녀의 가신입니다.] [알고 있소.] [그 제안을 하기 전에 그녀의 의견을 물었어야지요.] [그러려고 했지, 하지만 지난밤은..... 시간이 없었소.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너무도 평화롭게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소. 그렇지만 그녀가 반대할 게 뭐 있겠소? 난 단지 그녀의 가문과 우리에게 더 견고하게 묶었을 뿐인데. 버트란드경은 그녀를 섬기고, 그의 아들들은 날 위해 일하게 되는 거요.] [여자란 남자보다도 더 자기 걸 뺏기지 안으려는 걸 모르십니까?] 갑자기 로프가 양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그처럼 여자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거요?] [틀림없이 내가 영주님보다는 훨씬 더 많이 알 겁니다.] 롤프는 방금 젊은 하녀가 식탁에 갖다놓은 커다란 접시에서 져서 차게 식힌 고기를 집으려고 손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그러다가 하녀가 미소짓는 걸 알아차리고는 그녀가 안 보일 때까지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여자들에 관해 그렇게 잘 안다면, 도대체 내 주변의 여자들이 무슨 병에 걸린 건지 말해주오. 내 아내만 빼고.] 토르프는 빵을 입에 물고 있어서 갑자기 목이 메였다. [어떤 여자들이오?] 그는 롤프의 천진스러운 요구에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모두들! 하녀들, 내 부하들의 아내들 말이오. 몇 주 동안 그들은 내가 무슨 몹쓸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피하더니, 이제는 내게 미소를 보내고 있소. 심지어 버싸는 나한테 과일파이를 갖다주려고요 워링 성까지 말을 타고 왔어요. 그리고 워렌의 아내는 꽃을 보냈지, 꽃을 말이오!] 토르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음껏 웃어젖혔다. [결혼식 날 밤 영주님 아내를 때린 게 영주님이었다고 생각했던 걸 보상하려고 온갖 애를 쓰는 게 틀림없어요. 바로 레오니 아씨가 그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었죠. 아씨는 아버지가 한 일로 당신이 비난을 받고 있는 걸 알고는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맞았다구요?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토르프는 웃음을 멈추었고, 롤프는 창백한 낯빛으로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롤프, 정말 모른다는 겁니까? 하지만 그날 밤을 그녀와 보내셨잖아요? 어떻게 모를 수 있습니까?] [누굽니까?]


롤프가 침울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결혼식 다음 날 여자들이 시트를 가지러 갔을 때, 워렌의 아내가 아씨의 얼굴을 흘긋 보았던 겁니다.] 토르프가 불안한 기색으로 말을 건넸다. [얼마나 심하게 맞았던 거요?] 토르프는 롤프의 태도를 보아 숨김없이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보기에 가혹한 매질이었던 같습니다. 레오니 아씨의 얼굴은 괴상하게 부풀어올라 있었고 멍이 들어 검게 되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워렌의 아내가 심한 충격을 받을 정도였답니다. 영주님이 그랬다고 생각하면서, 괘씸한 생각이었는지 그녀는 마구 떠벌렸습니다.]] [당신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한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소?] [영주님도 틀림없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얘기가 나오지 않았으면 지금도 그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롤프가 벌떡 일어나 단 걸음에 홀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토르프는 곤혹스런 눈길로 지켜보았다. 잠시 후, 뛰어가는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와 문이 ‘ 꽝 ’ 닫히는 소리가 이층에서 들려왔다.♣

39 레오니는, 남편이 뭔가 몹시 화가 나서 무섭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 앞에 우뚝 서자 놀라 쳐다보았다. [왜 당신이 당한 일을 말하지 않았던 거요?] [당하다뇨?] 또 술에 취한 건가? [좀 자세히 말해보세요.] [심하게 매를 맞았잖소! 나만 빼놓고 모두들 아는 사실 아니오!] 은회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더니 레오니는 온몸이 경직되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었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전에 그랬잖아요] 그녀는 냉담하게 내뱉었다. [젠장, 그러겠지! 맞은 걸 내게 숨겨서 당신이 뭘 얻었는지 한번 말해보오!] [숨기다뇨!] 그녀는 격렬하게 화를 내면서 되받아쳤다. [아무 것도 숨긴 것 없어요, 기버트 경에만 그랬지, 그리고 그건 살인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였어요. 알고 있었잖아요! 당신한테 얘기했다고 주디스가 그랬어요. 무엇 때문에 그날 밤에 제가 당신을 찔렀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제 부은 얼굴을 만졌기


때문에 전 아파서 잠을 깼어요. 그 일을 두고 당신이 한번도 언급하지 않길래, 분명 알고 있는 줄 알았죠.] 그녀가 화를 내자 롤프는 화가 가라앉기는 했지만, 그건 약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이 날 칼로 찌른건 대단찮은 것이라서, 한번도 들먹이지 않았던 것이오. 그리고 당신 계모는 당신을 강제로 결혼시켜야 했다는 걸 일러주긴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소. 결혼을 거부하는 신부에게 흔히 그러듯, 몇 끼 식사도 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소.] [영주님, 그럴 시간이 전혀 없어요.] 씁쓰레한 표정으로 그녀가 신랄하게 퍼부었다. [제 아버지는 결혼 전날에야 제가 결혼한다는 걸 말해주었으니까요. 보통 때처럼, 아버지는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어요.] [술 취한게 변명이 되오?] [전 아버지를 변명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당신이 맞은 것에 대해서요, 아니면 당신이 이제 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너그러워진 거요?] 그 역시 한치의 물러섬없이 거칠게 물었다. 레오니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등을 돌렸지만 롤프가 홱 돌려세웠다. 그는 손가락이 파고들 정도로 그녀의 두팔을 세게 잡고 있었고,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레오니, 왜? 내가 왜 그토록 싫은 거요? 왜 매를 맞고서야 나와의 결혼에 동의해야 했던 거요?] 이미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감정을 휘저으면서 그는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맞았다는 건 전혀 개의치도 않았고,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고통을 당했다는 건 관심도 없었다. 그의 자만심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 외엔 관심이 없었다! [영주님, 전 당신이 두려웠어요. 당신이 괴물이라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게 당신에 대해 제가 알고 있던 전부였어요. 제가 일으켰다고 당신이 생각했던 그 재난 때문에, 오로지 복수를 하려고 절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한테 당할 일보다는 맞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생각에 잠겨 잠시 한숨을 쉬다가 이내 덧붙였다. [전 그 매질을 견뎌낼 줄 알았어요. 하지만 틀린 생각이었죠. 그 비열한 작자는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제 어머니의 무덤에 대고 맹세하지 않았더라면 절 죽였을 거예요] 그녀는 그토록 참아왔던 리처 캘베리에 대한 모든 증오를 쏟아냈다. 그러나 롤프는 그런 그녀의 태도가 그와 억지로 결혼하게 된 것에 대한 분노로 잘못 해석했다. [당신은 정말로 날 괴물로 생각했소/]


[그랬어요.] [그럼 아직 그렇소?] [전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어요, 영주님.] [그래요, 물론 안 그랬지. 하지만 그런게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왜 아직도 날 거부하는 거요? 왜 진정으로 내 아내가 되는걸 거부하느냔 말이오?] 그의 말투에 그녀는 신중하게 대꾸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어떤 고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 그녀에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정부를 데리고 있다고 그녀가 또다시 그를 비난하는걸 듣고 싶은 거였다. 그녀에게 질투하는 아내 역을 맡기는 건 그의 자만심을 달래는 한 방법이리라. 하지만 그에게 그런 만족을 주고픈 생각은 터럭 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 당신을 거부하지 않아요, 영주님.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거부하지 않는다고? 그럼 당신이 냉담한 건 당신 성격이란 말이오?] [그런가 보죠.] 그녀가 겉발림으로 주절거렸다. 그는 한참동안 그녀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아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거겠지!] [다른 사람이오?] 그녀는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투로 대꾸했다. 그러지 말자고 결심을 했지만 화가 울컥 치밀었다. [지금 도대체 누구 얘길 하는 거죠? 전 결혼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영주님. 비록 당신은 안그래도요!] [천만에! 그럴 리가 없소.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당신의 첫사랑을 포기하고

받아들였을 거요. 자, 난 이제 사실을 알아야겠소, 부인. 그리고 그 문제를 끝장낼 거요. 더 이상 이런 의심들이 내 마음을 갉아먹게 하지 않겠소.] 레오니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감히 어떻게 나에게 배신 행위를 저지른다고 비난을 하난 말인가! 자기는.... 그녀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차디찬 은회색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만약 절 내보낼 핑계로 찾고 있다면, 영주님. 그렇게 애쓰실 필요없어요 . 전 차라리 떠나는 게 기쁠 테니까요.] 그의 두눈이 이글거리더니, 그는 가혹하리만치 입술을 악물었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당신은 좋을 테지, 부인.] [그럼요.] 그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아무런 주저 없이 대꾸했다. 그는 이제 우리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렷다! 남자들은 모든 일을 얼마나 간단하게 처리하는가?


그가 그녀 앞으로 한발자국 다가서자, 그녀는 그가 때리리라 생각했다. 그 정도로 그의 표정은 험악했다. 그는 그녀 앞에 우뚝 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자세로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빛을 쏘아대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이 아직도 그를 가질 수 있으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면, 그건 헛된 희망이오.] 격분한 그의 목소리가 무척 거칠었다. [언젠가는 정말 내가 당신의 차가운 태도에 질려서 당신과 끝장을 내버릴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절대로 그를 갖지 못할 거요. 그 전에 내가 그를 죽여버릴 테니까!] [누구요?] 엄청난 엄포에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알에인 몬티니!] 레오니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을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롤프는 그녀가 놀라는 표정을 보고 더욱 화가 치솟았다. [그게 다 어린 식충이 때문이란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소? 난 결혼전부터 알고 있었던 말이오!] 레오니는 이해하려 했지만 그렇지가 못해 그저 간단히 대꾸했다. [당신이 틀렸어요, 영주님.] [당신은 항상 그를 사랑했소, 부인. 그래서 당신 사람들보고 나한테 대항하라고 시킨 거요. 그래서 당신은 나와 결혼하길 거부했던 거요. 당신은 그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내가 당신을 차지하고 있으니 아직도 날 싫어하는 거지.] 이번에는 레오니가 웃어버리자, 롤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불쌍한 알에인을 질투하고 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녀는 남편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런 의심을 어느 기간 동안 품고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알에인은 그저 친구일뿐이에요, 한때는 그를 남편감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오래 전 일이에요. 제가 아는 젊은 남자라고는 그 외에는 없었고, 언젠가는 남편을 갖게 되리라는 걸 단념했을 때의 일이에요. 펄시윅에 틀어박혀 있었을 때의 일이라구요. 하지만 그건 단지 공상에 불과했던 거고, 금방 잊혀져버렸어요. 알에인은 유감스럽게도 덕성이 결여된 남자로 자랐고, 게다가 그때쯤에는 전 더 이상 남편을 동경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가 우유부단한 성격을 지녀 UT 다고 해서 그를 저버릴 수는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친구로 남았던 거예요.] 롤프는 아직도 일그러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 우정을 위해 당신이 당신 사람들을 나에게 대항하라고 시켰다는 걸 내가 믿을 것 같소?] [다신은 친구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지 않나요?] [당신은 여자요.] 레오니는 화를 참고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전 그 문제로 당신과 논쟁하지 않을 거에요. 영주님. 전 사실 제 사람들을 당신한테 대항시키지 않았어요. 알에인이 그에게 들이닥친 일과 당신 그의 토지를 빼앗으려 온다고 나에게 얘기를 했던 날, 난 ‘염병할 놈’이라고 당신을 욕했어요. 자, 마침내 제가 한 짓을 고백했어요.] 그녀는 편안한 느낌으로 말을 이었다. [전 당신을 아주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농노들이 그걸 마음에 두었던 거에요.] 롤프는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녀를 믿고 싶었지만, 그녀가 알에인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왜 여태까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걸까? [당신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레오니. 지금으로선 날 미워할 이유가 전혀없잖소.] [하지만 전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 걸요. 영주님.] [그렇지만 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잖소.] 레오니는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당신뿐이라면, 영주님. 난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만 받아들이는 일 이상을 나에게 요구하고 있어요.] [부인, 내가 그 말을 알아들을 것 같소?] 그의 목소리가 낭패감으로 커졌다. 그래도 레오니는 쳐다보지 않았다. 롤프는 잠시 더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다가 몸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으며 방에서 나갔다. 아래층에서 토르프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롤프는 뭣 때문에 자신이 화가 나게 됐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내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대한 낭패감이 또다시 타오르는 노여움으로 변했다. 그는 이 비밀들과 혼란들, 그리고 낭패를 끝장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화근의 처음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그 혼란 상태를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40 리처 캘베리의 거칠고 빽빽한 턱수염이 주디스의 가슴을 간지럽히자,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는 창고에서 그녀를 갑자 붙들고는 안된다는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와의 농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때와 장소가 적합치 않다고 그녀가 항의하는 걸 입술로 막으면서, 그는 곡식 마대자루에다 그녀를 기대게 하고는 몸을 그녀에게 밀어붙였다.


이 잔인한 남자는 어찌나 힘이 셌는지 성격 그대로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가 그녀를 부드럽게 만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들에게 하듯 그녀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잔인함이 그의 눈에서 번뜩이는 걸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감히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걸 능히 해낼 작자라는 사실로 그녀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가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리자, 주디스는 다시 저항의 몸짓을 했다. 그녀가 저항을 하면 할수록 그는 뜨거운 피가 솟구쳐 몸이 달아올랐다. 그들이 서로 만나기로 정한 곳에서 만날 때 즈음이면 그녀는 짜릿한 열정에 몸을 떨며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붙들고선, 혹시나 남의 눈에 띄일까봐 애를 태우는 그런 공공연한 장소에서 그녀를 갖고 싶어 안달했다. [오늘 밤까지 기다릴 수 없어? 리처, 우리가 정했던 대로 내 방으로 올 수 없냐구?] 그는 투덜대며 볼멘 소리고 대꾸했다. [우리 옆에서 술에 취해 코를 고는 당신 남편과 같이 당신과 자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너무나 자극적인 일이잖아, 자기. 만약 그가 깨면, 그는 또 망상을 보는 줄 알 거야.] 주디스가 천연덕스럽게 교태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바로 영주 앞에서 그 부인과 간통을 하는 게 오히려 그의 음흉한 기질에 어울리는 일이라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그녀에게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윌리암을 증오하는 마음이 커져, 술취한 남편이 곁에서 자고 있는 동안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게 짜릿함을 더해 주었다. [지금 당신을 가질 거요. 그리고 나중에 또 그럴거고.] 그녀의 몸에 바싹 붙어 리처가 음흉하게 씨익 웃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는

그의 타오르는 욕망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를

받아들이려는 그녀는 두 다리를 벌리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연극배우처럼 감정을 섞어 말했다.. [당신은 원하는 대로 할거야, 리처. 늘 그런 것처럼 말이야.] 그가 낄낄거리며 웃다가 문 밖에서 들리는 하인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멈췄다. [마님?] [뭐야?] 주디스가 쇳소리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마님-그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사위께서 와 계십니다. 롤프 덤버트께서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디스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리처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어나야겠어. 자기. 당신은 적어도 오늘 밤까지는 기다려야 해. 흥! 도대체 뭣 때문에 온 걸까?] 주디스는 서둘러 속치마를 펴고 머리를 매만지고선 하녀에게 손님을 맞으러 가겠다고 소리쳤다. [난 슬쩍 빠져나가겠어요. 부인을 데려왔을지 모르니까요.] 주디스는 리처의 말에 깜짝 놀라 그를 흘긋 쳐다보았다. 리처가 그렇게 불안스럽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역시 약간 겁이 났다. [그래, 그러는게 좋겠어. 켐프스톤의 영주가 내 의붓딸을 조금이라도 좋아하게 됐다면, 그애에게 당신 모습을 굳이 보이지 않는 게 좋겠어. 그 애가가 자기 남편에게 당신에 관해 말했을지도 모르고, 그랬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거니까.] 몬티윈의 커다란 홀에서, 롤프 덤버트는 두명의 기사와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예의상의 방문이 아니었기에, 롤프의 위협적인 표정을 보고 주디스는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친절한 기색도 없었고, 그녀가 다가서도 인사치레로 꾸민 미소조차 없었다. 주디스는 레오니가 같이 오지 않은 걸 보고서는, 그녀가 같이 오지 않아 겉으로 보기보다는 그가 그다지 대담하지 않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주디스는 그에게 우아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롤프영주.] [당신 남편은, 부인?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날 여기서 기다리게 할 참이랍니까?] [그를 기다린다고요? 윌리암은 병이 났어요, 롤프경. 그를 깨워서는 안 된다는 걸 하인들은 알고 있죠.] 그녀는 그에게 꾸밈을 다해 가장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신

나와

시간을

보내도

분명

괜찮으시겠지요?

내가

나중에

당신이

왔었다고

윌리암에게 말씀드리죠.] [아니오. 내가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당신의 남편이오.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그를 깨우렵니까, 부인? 아니면 내가 깨울까요?] [그렇지만 그는 정말로 편찮아요.] 주디스가 당황해 하며 고집을 피웠다. [그...... 그는 아마 당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거예요, 롤프 경.]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는 벌써 술에 취했습니까?] 롤프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주디스는 몸을 달싹거렸다. 그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불행하게도, 사실이에요, 롤프 경. 윌리엄은 맑은 정신일 때가 좀처럼 없어요.]


[알겠습니다.] 롤프는 부하들에게 몸을 돌려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린 그 사람이 말짱해질 때까지 여기 머물 거네. 토르프 경에게 우리가 오늘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전갈을 보내게. 워링으로 먼저 돌아가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야. 젠장!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구!] 주디스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무엇 때문에 내 남편을 만나려고 하는거요, 롤프경?] 롤프의 험악한 두 눈동자가 그녀에게 박혔다. [그건 당신이 알바 아니오, 부인.] [하...... 하지만 당신은 그저.....] [안 된다구요?] 말을 막는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당신은 혹시 술주정뱅이 남편을 가진 걸 즐기는 건 아닙니까?] [물론 아니에요.] 그녀는 아주 태연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난 그가 술을 못 마시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술이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어요. 나로서는 그를 도울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돕는 걸 고마워하겠군요. 난 곧 그가 제대로 움직이고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하게 만들테니까요. 이제, 안내해주시오. 난 이 불쾌한 의무를 즉시 시작할거요.] 롤프 덤버트가 스스로의 의무를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자, 주디스는 공포에 사로 잡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그녀는 심지어 그 오만한 영주나 아니면 윌리암을 죽일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 영주를 죽이는 일은 불가능했고, 윌리암을 죽일 경우에는, 레오니가 모든 걸 상속받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면 주디스는 무일푼으로 내쫓길 판이었다. 레오니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될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켐프스톤 영주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기만 해도 좋으련만, 그는 설명해달라는 그녀의 간청을 계속 무시했다. 리처는 그녀에게 걱정하게 아무것도 없다고 우겼지만, 롤프 덤버트는 왜 그다지 화가 났고, 또 왜 아무런 문제도 없는 윌리암을 만나겠다고 가차없는 결정을 내린 걸까? 술에 찌들은 윌리암은, 깨우는 하인들에게 욕을 해대면서 성가시게 구는 걸 피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목욕을 해야 했고 머리를 깎아야 했으며 또다시 수도 없이 목욕을 해야 했다. 몸에 가득 들어찬 술을 토해내려고 그는 음식을 잔뜩 먹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걸 거부하고 단지 우유와 물만 마셨다. 그가 필사적으로 좀더 효과 있는 걸 요구해도 무시당했고, 그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고 무시당했다.


그리고 그 동안 내내 롤프 덤버트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몰랐다. 주디스는 그저 무력하게, 자신이 수 년 동안 이룬 모든게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려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단지 윌리암이 폐인이 되어 최근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만을, 그리고 일단 롤프가 그들만 남겨두면, 윌리암이 다시 술에 빠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41 롤프는 피곤에 지친 듯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이방에 넌더리가 났고, 인생을 술로 탕진해버린 그 형편없는 남자에게도 혐오감이 치밀었다. [날 죽일 생각이라면, 왜 빨리 해치우지 않는 건가?] 롤프는 윌리암에게 술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혹독한 치료를 하면서 지난 며칠동안 열두번도 더 윌리암의 한탄을 들어왔다.윌리암은 자신에 대한 깊은 상심에 젖어 점점 좌절감만 쌓였다. 그렇지만 그의 손들은 그 다지 심하게 떨리지 않았고, 그의 악몽도 차츰 줄어들었다. 롤프는 충분히 기다렸다고 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윌리암과 그의 하인들, 롤프의 부하들, 그리고 주디스가 깜짝 놀랄 정도로 그는 방을 가로지르며 점잖으면서도 엄숙함이 깃든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왜냐하면, 영주님. 내가 왜 당신을 죽이고 싶어하는지 당신 스스로가 알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덤덤했기에 윌리암은 그 말을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은 약간 빨갛게 충혈된 그의 두눈이 롤프에게 멈췄다. 윌리암은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를 했지만, 결국 그날 아침 정장 차림으로 건강에 좋은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는 식탁에 강제로 앉아 있었다. 그는 음식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이렇듯 비참하게 만든 롤프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정말, 그런가, 롤프 경, 아무튼 그 이유를 내게 말해주게.] 윌리암이 쉰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윌리암, 그만하세요! 저 사람을 화나게 하지 마세요!] 주디스는 지레 겁을 먹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끼여들었다. [날 화나게 하는 건 당신이오, 부인.] 롤프가 일어서서 앞으로 나오면서 거칠게 말하곤 명령을 내렸다. [나가시오, 모두!] 그러더니 피어스경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디스를 끌고나가라는 몸짓으로 알렸다. [도가 너무 지나치군!]


윌리암은 고함을 치긴 했어도 의자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롤프는 씨근거리며 윌리암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제 날 알아보겠습니까?] [물론 난 자네를 알아. 이제 방금 자네와 내 딸이 결혼을 치렀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야.] [방금이라구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내가 당신 딸과 결혼한 지 만 석 달이 됐습니다. 아세요?] [석 달이라구? 어느새...... 그렇게 됐어?] 윌리암이 움츠러들며 말을 더듬거렸다. [결혼식은 기억나십니까?] 롤프는 목소리는 이제 싸늘하고 위협적이었다. [글세, 대부분은.....] [그 전은요?] [자네가 계약서에 서명했지.] [그 전은요?] 롤프가 식탁 맞은편으로 몸을 숙이면서 불만스럽다는 듯 쏘아붙였다. [당신이 크루얼로 오기 전 말입니다.] [자, 여보게. 말할 게 있거든 그거나 어서 얘기하게나. 내 기억을 계속 일깨우려 하지말고. 난 아주 피곤하다네.] 윌리암이 화를 삭이려고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난 당신이 딸에게 한 짓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 겁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윌리암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면서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도대체 내가 어떤 짓을 했기에 사이가 저토록 화가나 있는 걸까? [오, 그래, 그애가 날 보고 아주 당황했던 게 생각나는 군. 무리가 아니었지.] 윌리암이 솔직하게 인정했다. [당황이오? 당신은 단지 그녀를 당황시키기만 했다구요?] 롤프는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아무 변명도 않겠네. 난 그애에게 결혼하게 될 거라는 걸 미리 얘기해 주지 않았다네. 내 자신이 그걸 기억하고 있지 못했으니까. 사실, 아직도 그 애가 자네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왕의 명령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다네.] 윌리암이 잘못을 깊이 뉘우친다는 듯 말을 건넸다. [제기랄!]


롤프가 격분해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그녀를 무지막지하게 때린 뒤에 있었던 사소한 일들만 말하고 있군요!] 윌리암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격분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무슨 괘씸한 짓인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마침내 그녀가 나에게 고백한 얘기에 의하면, 그녀는 구타를 당했습니다, 영주님. 그리고선 나와의 결혼을 강요당했어요.] 푸른빛이 감돌던 윌리암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럴 리가 없네.]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까? 당신이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얘깁니까, 아니면 당신이 비열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윌리암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기억을 하든 못하든, 난 절대로 그 애를 다치게 하지는 앟았을거네, 정말이네. 그 애는 나의 엘리자베스가 남긴 나의 전부라네. 내가 그 애를 다치게 했을 리 없어. 난 그애를 너무도 끔찍이 사랑해.] [그녀를 사랑해요? 그녀를 그토록 사랑해서 여기에서 내쫓고 수년동안 저버린 겁니까?] 롤프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한동안은.... 그애를 내보냈지. 내가 너무 비탄에

젖어 있어서 그애를

보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 그애를

보고

있노라면

엘리자베스가 살아 있는 것 같아 괴로웠지. 그래, 그건 기억하네. 하지만 그리 오래는 아니었네. 난 절대로 하나밖에 없는 내 자식과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없었네. 그 애는....] 그는 두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썼다. [주디스가 그랬어..... 레오니는 바쁘다고...... 난 ...... 주디스가 분명히 말했어, 난..... 아, 하느님! 난 그날 펄시윅에서 그애를 알아보지 못했어! 내딸 레오니가 커가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네!] 그는 마치 롤프에게 어떤 해명을 기다리는 듯이 멍하니 롤프를 쳐다보았다. 롤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잘못 된 거야. 윌리암 경은 진심으로 고뇌하고 있지 않는가.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윌리암 경? 레오니가 아직도 당신과 여기 있다고 생각할 만큼 술에 취해 지냈단 말입니까?] 롤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애는 여기 있었어.] 그 말소리는 점차 약해지더니 속삭임이 되었다.


롤프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기 왔을 때 당신이 말짱한 정신었더라면, 당신 딸에게 가했던 그 고통의 대가를 난 당신을 죽였을 겁니다. 이제 난 그저 당신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낍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서서 문쪽으로 갔다. [기다리게! 누가 자네에게 내 딸 레오니에게 대해 그런 거짓말들을 했는지 모르지만, 주디스가 자네에게...] 롤프가 홱 돌아서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 보았다. [어리석은 양반 같으니! 나한테 말해 준 사람은 레오니예요.]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내가 그애를 다치게 했다면 내 손을 잘라버려도 좋아. 난 맹세코......]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롤프가 고함을 치자, 윌리암이 입을 다물었다. [나와 결혼해야 한다고 당신이 레오니에게 말했을 때 누가 곁에 있었습니까?] [거의 기억이 안나는데, 자네는.....] [생각해 보세요, 영주님!] [하인들이 있었고...... 레오니의 사람인 기버트 경...., 내 아내가 있었네.] 그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레오니의 사람들은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았을 거고, 주디스는 레오니를 해칠 만큼 힘이 세지 않을뿐더러, 기버트 경이 그녀를 때릴 리는 없었다. [당신이 결혼 소식을 전하자, 레오니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녀가 펄시윅 성을 떠나려 했습니까?] [그 애는 당황하더라고 이미 말했잖나? 그 애는 나한테 한 마디도 않고서 자기 방으로 달아났네. 그 이튿날까지 나오지 않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네.] [당신은 그녀와 얘기를 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윌리암 경은 어디서부터 잘못 됐단 말인가? 윌리암이 비굴하게 고개를 푹 숙였다. [주디스는, 용서받을 수 없는 내 건망증 때문에 레오니가 그런 거니까, 그래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거라고 했네. 그녀는 그 문제를.... 자기에게 맡기라고 고집을 피웠지.] 윌리암의 목소리가 또다시 힘없이 잦아들었다. [주디스는 내가 결혼준비에 방해가 될 거라고 했어. 그러더니 기버트에게 사냥으로 내 기분을 달래주라고 했다네. 알겠나? 난 차츰 기억이 돌아오고 있네.] 롤프는 문으로 걸어가 피어스 경을 불렀다. [부인을 어디로 데려갔나?]


[아래층입니다.] [다시 데려오게. 빨리!] 그러고선 윌리암을 보며 심문하듯 물었다. [주디스는 여자이기는 하나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그녀의 명령을 곧바로 따르는 사람이 누굽니까?] [모두.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어떤 일로든 내 사람들을 직접 다룬 게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다네.] [당신 아내가 수년 동안 이 몬티원 성을 관리했다는 겁니까?] 롤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난...... 그녀가 그렇게 해야 했네.] 윌리암이 중얼거리면서도 아직 뭐가 어찌된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수정처럼 뚜렷하게 다가들었다. 만약 사위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주디스는 글 속여 자신과 결혼하게 만든 죄만을 진 게 아니었다-- 그래, 그랬다. 그는 그 사실이 생각났다-- 그녀는 또한 그에게서 딸을 계속 떼어놓았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녀가 그렇게 했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레오니의 남편은 그 결혼 때문에 그녀가 당한 고통에 대해서 격분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저버렸다는 생각으로 그녀가 겪어야 했을 고통으로 윌리암은 넋이 나가 멍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딸아이를 저버린 건 사실이었다. 자신의 슬픔에, 자신의 허약한 의지에, 그리고 그를 조종해서 그토록 쉽게 그에게 거짓말을 한 여자에게 레오니를 내맡긴 거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갑자기 너무 많은 기억이 떠오르자, 미칠 듯한 분노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솟았다. 이 모든 건 나의 책임이야. 내가 그렇게 내버려둔 거야. 교활한 아내가 나를 마음대로 조종하게 내맡긴 거라구. 방으로 들어섰을 때, 주디스는 남편의 표정을 보고 어떤 식으로든 들통이 났다는 걸 깨달았다. 윌리암은 그녀를 죽이고 싶다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둘러댈 상황이 아니란 느낌으로 몸을 떨었다. 윌리암은 맨 정신이었고,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게 역력했다. 그를 속여 자신과 결혼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그때 이후로, 그녀는 그에게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킬 듯이 쳐다보았다. 우선은 자비를 빌고 그들만이 남게 되어 다시 그를 술독에 빠지게 할 때까지 연극을 해야 할 판이었다. 남편에게 매달릴 정도로 그녀는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금방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윌리암,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시든 간에, 전 아직도 당신 아내예요. 전 당신을 잘 보살폈고......] 윌리암이 손등으로 그녀를 쳐 바닥에 쓰러뜨리며 짐승처럼 사납게 퍼부었다. [난 잘 보살폈다고? 당신이 날 보살펴서 난 산송장으로 지냈어!] 주디스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맞던 때가 떠오르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롤프를 의식하지 않았다. 증오로 가득 찬 남편의 두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고 있었다. 그가 어떤 자비도 보이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결국 거짓말을 해서 스스로를 구해야만 할 판이었다. [당신이 술을 먹고 건망증에 빠지는 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어요, 윌리암. 전 그게 싫었지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거짓말!] 그가 호통을 치며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자 그녀는 겁이나 몸을 웅크렸다. [이제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리고 날 도와줬을 사람은 한 명뿐이었는데, 여기 없었어.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지. 나한테 거짓말을 하면서, 내가 그 애를 자주 본 것처럼 날 혼란속을 몰고가 그 애가 여기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 거야. 왜 레오니를 나한테서 떼어놓은 거지?] 주디스는 공포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어떻게 벌써 그렇게 많이 알아낸걸까? 절망에 빠진 심정으로 그녀는 그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신을 위해 그런 거 예요, 그리고 그 애를 위해서요. 그 애가 예전의 당신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참담했을지 모르시겠어요? 난 당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랬어요. 그리고 그 애가 상처받지 않도록 정말로 애를 썼다구요.] [제기랄! 내가 그렇게 바본 줄 알아? 당신은 비열한 이기심을 똘똘 뭉친 여자야! 내가 당신을 전혀 원치 않았다는 사실을 당신을 알고 있었지. 내가 제 정신이 되면 내쫓길 걸 당신은 알았던 거야. 그래서 날 계속 정신을 못 차리게 한 거라고. 그리고 딸아이에게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해서 떼어놓은 거지.] 그는 주디스의 눈빛에서 이 모든 얘기가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그녀를 때리려고 손을 뻗었다. 롤프가 얼른 그를 말렸다. 나중에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을 때, 윌리암이 그녀를 어떻게 다룰지 짐작이 갔지만, 이렇게 곁에서 여자가 맞는 걸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영주민, 내가 부인과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롤프의 말투에는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기 전에’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롤프는 한 손을 주디스에게 내밀어 그녀가 일어나게 도와주며 물었다. [왜 내 아내를 때리라고 명령했소?]


롤프의 음성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해서 주디스는 윌리암에게 시선을 두고 그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윌리암의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다시 롤프를 보았다. [부득이한 일이었오. 그 애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지요. 우리가 왕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내가 원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그런 결정을 내렸소 -- 당신의 남편의 승낙도 없이?] 여전히 롤프는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난 그 애의 결혼 문제를 그와 의논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노골적으로 경멸적인 표정을 지으며 윌리암을 흘긋 쳐다보면서 덧붙였다. [왕의 뜻은 따라야만 해요.] [다른 방법들도 있었잖소! 나한테 전갈을 보내고 그 문제를 나에게 맡길 수도 있었잖소!] 드디어 화를 참지 못해 롤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주디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을 그저 그 애의 토지만 마음에 두었으면서, 감히 그 방법에 대해 따지다니요? 그 애는 당신과 강제로 결혼하는 거라고 당신에게 말했잖아요. 당신은 원했던 걸 얻었어요. 그걸 어떻게 얻게 됐느냐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녀를 때리지 않으려고 롤프는 안간힘을 쓰며 입술을 깨물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코웃음을 치면서 맞받아졌다. 그는 뭣 때문에 이 야단법석이란 말인가? 그녀는 이미 따질 게 충분했다. [당신은 레오니에게 청혼하기에 앞서 펄시윅을 사겠다고 했어요. 내가 둘 다 거절하자, 당신은 왕의 도움을 청했잖아요!] 그 말을 무심코 뱉다가 주디스는 새파랗게 질려 얼른 얼버무렸다. [내...... 내 말은...... 그러니까......] [주디스!] 윌리암이 지친 한숨을 쉬면서 더듬거리는 주디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대신 얼마나 많은 청혼들을 거절했소? 얼마나 오랫동안 레오니의 결혼을 막았던 거지?] [그 애는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그 애의 토지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잘 가꾸고 있었으니까요. 왜 다른 사람이 거기서 나오는 이익들을 취해야 하죠?] 그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뭘 그렇게 나쁜 짓을 했다는 거예요? 레오니는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안 그렇다면 그 애가 왜 켐프스톤의 영주를 딱 잘라 거절했겠어요?] 주디스는 과감하게 따지듯 물었다. [그녀가 날 거절한 데에는 당신이 모르는 이유가 있었소.] 롤프가 불쑥 끼여들며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부인, 당신이 레오니에게 했던 짓은 마땅히..... 그렇지만 난 당신에게 볼일은 없소.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건 당신의 명령들을 수행하는 사람의 이름이오. 그 어떤 명령이든 간에.] 그녀는 고집스럽게 턱을 치켜올렸다. [여기에 내 명령을 따르기를 주저할 사람은 한 사람도......] 윌리암이 부르르 떨며 또 그녀를 때렸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걸 말해. 안 그러면 정말이지---.] [리처 캘베리예요!] 주디스는 그 이름을 내뱉으면서도 어쩌면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지도 모른다고 희망이 일었다. 끊는 리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지도 못했고, 그를 보호할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었다. [그..... 그는 우리 하급 장교인데, 레오니는 그가 어떤 자인 줄 알고 있어 레오니를 윽박지르기에 적합한 사람이었어요.] 롤프는 윌리암이 하고 싶은 대로 주디스를 처리하게 내버려두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막사에서 몬티윈 부하들과 함께 있는 리처 캘베리를 찾아냈을 때, 롤프의 표정은 달라졌다. 그는 분노를 마음 깊숙이 감추었다. 그 남자는 거대한 짐승 같았다. 살찐 팔과 가슴, 거대한 두손. 레오니가 무지막지하게 맞았을 건 뻔한 일이었다. 작은 레오니가 이런 엄청난 체격의 남자에 대해서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런 괴물을

견뎌낼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그녀는

얼마나

용감하고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녀에서는 전혀 승산이 없었다. 따라서 그 대가로 리처 역시 오늘 그 어떤 승산도 갖지 못하리라. 리처는 롤프 던버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서 그가 왜 자신을 찾아 왔는지는 재빨리 깨달았다. 그는 궁지로 몰고 간 그 의리 없는 주디스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윌리암 영주의 딸을 때리라고 그에게 명령했을 때,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귀족이라는 특별한 신분의 레오니를 구타하면서도 리처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지만, 그녀의 특별한 신분은 그의 행위를 죄로 만들었다. 그에게 누가 그 짓을 하라고


명령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귀부인에게 손을 댄 그를 죽이는 걸 망설일 영주는 이 세상에 없었다. 게다가 여기 사납게 노려보는 이 영주는 바로 그 귀부인의 남편이었다. 리처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영주의 눈빛에서 그가 본 건 죽음이라, 자신이 어떤 식으로 죽게 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상상을 초월한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하는 그런 것이 될지도 몰랐다. 아무도 그걸 막지 못하리라. 그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부하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감히 롤프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내에게 대항하지 못할 건 분명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스스로도 전혀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그는 공포로 창자까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지독히도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리처 캘베리?] 롤프는 그 남자에게서 공포의 낌새를 알아채며 굳이 그가 맞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롤프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단조로웠고, 그래서 그만큼 더 불길한 기운을 뿜어냈다. [네가 내 아내에게 한 짓 때문에, 난 널 죽이겠다. 네 검을 뽑아라.] 잠시 동안 그나마 다행이란 걸 깨닫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이 오래 가지는 않으리라는 걸 느끼고는 리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 영주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지 않고 리처에게 공정한 싸움을, 아니 공정한 싸움 이상의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다. 리처는 그래도 두툼한 가죽 겉옷을 입어 약간의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롤프는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사실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리처가 이길 가능성이,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 곧 죽게 되리라는 불길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어 그의 기회는 사라졌다. 결국 그 생각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그의 솜씨를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단 칼을 손에 쥐고는 닥치는 대로 휘둘러댔다. 롤프의 칼은 단번에 그의 허점을 발견하고는, 살과 뼈를 매끄럽게 뚫고 들어가 심장을 관통했다. 아무런 동정심도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롤프의 마음은 아내 레오니가 이 짐승 같은 자의 손에 고통을 당하는 모습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리처 캘베리의 육중한 몸이 바닥에 ‘쿵’ 떨어지기도 전에 롤프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42 오후 중반의 따가운 햇살이 여름 꽃들이 피어 있는 목초지에 내리쬐었다. 이와는 달리 주변의 숲은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덟명의 사내들과 그들의 말이 숲속에 교묘히 숨어 있었다. 알에인 몬티니는 부하 일곱 명이 제대로 숨어 있는 걸보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층민인 도적들과 자신처럼 토지가 없는 기사들이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필요한


비용은 크루얼의 집사인 어니스가 훔친 돈으로 지급되었다. 하지만 어니스가 적발된 뒤로 쉽게 들어왔던 그 돈이 끊겨버려 어니스가 쓸모가 없어지자, 재빨리 처치해버렸다. 그 어니스를 적발한 사람이 바로 레오니었다는 게 아직도 짜증스러웠다. 알에인은 지금 필사적으로 돈이 필요했다. 부하들과 함께 강탈했던 몇몇 여행자들은 돈주머니가 가벼워 계속 부하들을 부양할 만한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부하들은 더 남쪽 멀리, 더 돈 많은 여행자가 많이 다니는 길로 옮겨가기를 원했지만, 알에인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운명을 혹독하게 바꿔놓은 그 남자를 죽일 기회를 얻게 될 때까지 여길 떠날 생각이 없었다. 크루얼의 제분소에 불을 지르고 그 작자를 살해할 유리한 장소를 끌어냈을 때는 성공을 눈앞에 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지 못한 건, 정말이지 도무지 예기치 못한 불운이었다. 롤프 덤버트가 그의 군대에서 혼자 벗어나기를, 아니면 그의 호위대에서 벗어나길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만약 롤프가 무방비 상태일 때 알에인이 덮치기만 한다면 알에인의 부하들과 합세해 이길 테고 쉽사리 죽일 터였는데..... 그렇게만 되었다면 알에인은 레오니와 결혼하고

자신의 것,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있었으리라. 레오니의 농노들이 ‘ 검 은

늑대’를 괴롭히고 있다는 소식을 알에인은 어니스에게

전해들었다. 그래서 알에인은 레오니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또한 어니스는 레오니가 강제로 롤프 덤버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했다. 처음에, 알에인은 분격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레오니는 ‘검은 늑대’를 싫어해서 분명 그 결혼을 강요받았을 테고, 그래서 알에인만큼이나 남편을 미워하리란 생각이 스쳤다. 어떡하든 완벽하게 과부가 되는 길을 택해 그녀가 알에인과 결혼하게 되면 그녀의 지지를 받아, 알에인은 왕에게 사면을 청할 터였다.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진행되리란 확신이 섰다. 사실, 어떤 남자가 레오니의 매력적인 미모와 또한 매혹적인 육체에 저항할 것인가, 그 남자가 왕이라 하더라도? 알에인은 굶주린 매처럼 먹이를 노리듯 탐욕스럽게 숲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그녀가 와야만 하는데...... 그녀에게 전갈을 보내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새영주에게 만족하고 있었던 탓에 레오니에게 그의 전갈을 기꺼이 전해주려던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에인이 엄했던 걸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어 롤프 덤버트에게 고발할 것만 같았다. 알에인은 크루얼을 되찾아 다시 주인이 되면 그 수모를 단단히 갚으리라 맹세했다. 레오니는 앞서 보냈던 그 두 전갈에 대해서 응답이 없었고, 어쩌면 그가 요구했던 대로 그녀가 혼자서 그를 만나러 오는 건, 사실 힘든 일이란 건 틀림없었다. 그런데 롤프가 크루얼을 떠난 사실을 확인한 알에인은 그녀를 만나고 싶어 조바심을 쳤다. 그의


부하들은 아주 침착하지 못하고 다루기도 무척 까다로웠다. 조금만 더 참으면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되리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상당한 몸값을 받으면 알에인의 그나마 한 문제가 해결되어 부하들은 잠시 동안 유순해지겠지. 그녀의 몸값을 요구할 생각이라는 걸 과연 그녀에게 말해야 할까? 만약 그녀가 그와 함께 떠나는 데 순순히 동의한다면 그의 인생은 한결 수월해지리라. 어찌됐든 간에, 굳이 모든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에게 단지 그의 계획 중의 일부만 말하리란 결심을 굳혔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알에인은 덜컥 겁이 났지만, 때마침 그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호위대와 함께 숲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거긴 펄시윅 쪽과 이어진 길이었다. 그 병사들은 그녀의 병사들로, 펄시윅 제복 차림이었다. 레오니는 알에인에게서 세 번째 전갈을 받고 바로 펄시윅으로 향했다. 펄시윅에 도착한 그녀는 펄시윅에서 그 날 밤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그루얼로 돌아갈 때는 펄시윅의 호위대를 데려갈 거라며, 크루얼의 호위대를 물러가게 했다. 그러나 더욱 깊은 의미는 그녀가 목초지에 한 남자를 만났다는 걸 롤프의 부하들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알게 된다면 롤프에게 말할 테니까. 그렇지만 알에인이 또 전갈을 보내는 일도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걸 막자면 그와 만나 직접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펄시윅을 혼자 떠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병사 여섯 명은 데려가야 한다고 우기는 기버트 경에 상세한 얘기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부하들이었기에, 그녀가 그들에게 숲가에서 기다리라고 말하자, 아무도 거역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펄시윅의 호위대가 그녀를 훤히 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는 천천히 말을 타고 알에인에게로 갔다. 반 년 동안이나 보지 못했던 그 남자에게 다가갈수록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아니, 마음은 반 연도 더 된 것 같았다. 그 동안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것 보다, 그 짧은 시간에 세상을 더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에인은, 이곳을 떠난 후로 어떻게 지냈을까? 그녀는 그가 여기에 온 이유가 두 가지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국왕의 사면을 받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거나, 아니면 너무나 절망적인 상태라 고향 근처에 있는 게 다른 곳보다 심리적으로 위안을 느끼는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엾은 알에인.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차가운 겨울 태양에 그의 금발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그의 두 뺨은 불그스레한 핑크빛으로 변해 스무 살도 안돼 보일 정도로 앳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가까이 서 보다가 그녀는, 그가 너무도 여위어서 무척이나 놀랐다. 그의 얼굴에는 필로가 깊게 묻어 났고 그의 두 눈동자는 그녀에게 경계심을 일으키는 교활함이 번뜩였다.


[알에인. 난 네가 아일랜드에 정착한 줄 알았어.] 그가 그녀를 말에서 내려주고 나서야 레오니는 인사를 건넸다. 알에인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뚜벅 대꾸했다. [그랬지. 하지만 내가 그곳을 도착했을 때, 내 친척들은 이미 헨리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있었어. 날 숨겨줘 헨리의 화를 자초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 그들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나에게 떠나라고 종용하더군.] [안 됐네.] 레오니는 동정심이 일었지만, 감정에 사로잡힐 여유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네가 고발당했는지 나한테 전혀 말하지 않았어, 알에인. 그런데 이제서야 난 사정을 들었.......] [거짓말들이야.] 그가 재빨리 막아서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널 보니 정말 좋아, 레오니. 잘 있지? ‘검은 늑대’와 괜찮게 지내는 것 같구나.] 그녀는 감정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는 날 학대하지 않아, 알에인.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그 사람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여기 왜 온 거야?] 그는 풀이 죽은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정말 모르겠니? 네 결혼 소식을 듣고, 너 때문에 몹시 마음이 아팠어. 네가 내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어.] [고마워, 알에인. 하지만 난 도움이 필요치 않아.] 그녀는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그와 행복해?] 그녀는 서글픈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 그렇지만 아무 것도 내 상황을 바꿀 수 없어.] [나랑 함께 떠나면 돼, 레오니.] 레오니는 깜짝 놀라서 다시 그르 쳐다보았다. 그녀는 달아날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기꺼이 보내주지 않는 한, 롤프는 그 어디든 다니며 찾아낼 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은신처였으나 알에인은 도저히 그걸 그녀에게 제공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어디로 갈 건데, 알에인?] 단수난 호기심에서 물어본 거였지만, 알에인은 그 말을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넌 제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레오니.] 그가 미소 지으며, 그녀를 안으며 속삭였다. [행복하게 해줄게, 맹세해!]


[알에인!] 그녀는 그를 밀쳐내려고 있는 힘을 다해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난 결혼했어!] 그녀가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는 더욱 힘을 가했다. [곧 바로잡힐 잘못이지.] 레오니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슨 말이야?] [네 남편은 날마다 자기 생명을 내놓고 있어. 그는 지금도 내 가신들과 전쟁 중이야.] 알에인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레오니는 아내 되받아쳤다. [네 아버지의 가신들이지.] [내 가신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남자, 그러니까 전사는 죽게 돼-- 그것도 곧.] 알에인의 싸늘한 말투에 갑자기 상황을 파악하고 레오니는 울화가 치밀었다. 알에인이 처음전갈을 보냈던 건 롤프가 부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였다. 알에인이 그곳 사건 현장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가 바로 화살을 당긴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에인, 넌...... 오해를 한 거야......]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쉿!] 그가 갑자기 긴장하며 말을 막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쫓아 크루얼쪽의 난 숲길을 쳐다보다가 남편이 혼자 숲을 헤치고 나타나는 걸 보고선 등줄기가 싸늘했다. [네 부하들을 이리 못 오게 해, 레오니. 내 부하들이 쉽게 그를 잡을 테니까.] 알에인이 입끝을 올리며 흥분에 떠는 듯했다. [뭐라구?] 개척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 그러나 알에인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는 순간, 롤프가 함정에 빠진 사실을 그녀는 알아차렸다. [알에인! 롤프를 공격해서는 안돼!] [쉿, 레오니. 간단하게 끝날 거야.] 알에인은 자신있게 말하고는 개척지 맞은편에 대고 외쳤다. [거기서! 롤프 덤버트. 넌 제 것을 잃었어.] 롤프는 이미 그 연인들이 가까이 껴안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사실이

눈앞에 펼쳐지다니! 레오니에게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진상을 알려주려고

크루얼로 돌아왔다가, 그녀가 펄시윅으로 가고 없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그러고는 책상에 무심코 남겨진 알에인 몬티니에게서 온 전갈을 발견했다. 몬티니에게서 온 또


다른 전갈도 찾아냈다. 두 전갈만으로도 그녀의 죄는 분명했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무결한 확증이었다. [그녀를 놔라, 알에인!] [레오니는 나와 같이 갈 거다.] 알에인이 느물거리며 조롱했다. 레오니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이 막혔다. 그렇지만 손쓸 틈없이 상황이 급격하게 벌어져 알에인의 주장을 부인할 시간이 전혀 ���었다. 그녀의 부하들이 말을 타고 그들 쪽으로 오고 있었다. 또한 알에인의 부하들은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나무들을 헤치고 나왔다. 알에인의 부하 일곱 명이 일제히, 민첩하게 방어자세를 번개처럼 검을 빼어든 롤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함성이 개척지 안에 울려 퍼지자, 공격하던 부하들중 몇몇은 겁에 질려 멈췄고, 사실상 단지 네 명만이 정면으로 롤프와 맞섰다. 레오니는 부하들에게 서두르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명령이 롤프를 도우라는 얘기인 줄은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알에인 역시 계획이 성공하리란 확신을 갖고 있어 그녀가 그녀의 부하들에게 롤프를 공격하라는 줄로 알았다. [두려워할 것 없어. 그는 강해, 하지만 수적으로는 그가 열세야.] 승리감에 가득차 의기양양하게 알에인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바보! 네가 그를 죽이도록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그 전에 내가 널 죽일 거야!] 레오니가 소리치자, 알에인의 얼굴에 미소가 싹 가셨다. [넌 나한테 고마워......] 순간 그의 부하들이 등을 돌리고 숲속으로 달아나자 알에인은 입을 다물었다-- 두명은 목초지에 쓰러져 죽어 있었고, 다섯 명은 줄행랑을 쳤다. 어찌된 상황인지를 깨닫자, 알에인은 레오니의 손목을 잡고 그들의 말들이 있는 쪽으로 끌어당겼다. 롤프는 역시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레오니에게 서둘러 오려고 자신의 부하들보다 빨리 말을 달렸을 뿐이었다. 이제 기사 두 명과 여섯 명이 병사들이 롤프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레오니의 부하들은 레오니와 같이 있었다. 롤프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금세라도 알에 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당신이 그와 같이 가면 레오니, 난 그를 추격해서 잡아죽일 거요.] 알에인이 노려보는 롤프의 시선을 피해 즉시 그녀를 놔주었다. [그는 정말로 널 몹시 원하는구나. 그에게 가도 좋아.] 그가 두려워하면서 말하고는 덩치 큰 롤프가 혹시 막지나 않을까 싶어 롤프를 흘긋 쳐다보면서 말에 올랐다.


[그는 지금 이 잘못된 상황을 믿고 있어. 네가 그에게 말해야 해...... 알에인! 돌아와!] 알에인은 레오니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타고 자신의 부하들이 갔던 방향을 따라 숲으로 달렸다. 레오니가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지만, 알에인은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몸을 홱 돌리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말을 타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험악했고, 표정은 무자비했다. [아씨, 롤프 나리와 싸울까요?] 그녀는 자신의 부하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 그녀를 둘러싸는 걸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들이 관연 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녀는 롤프와 단 둘이서만 남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투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 대답하시오, 부인!] 롤프가 명령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주민, 당신은 내 설명을 들어야 해요.] [그들에게 대답하시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되받아쳤다. [영주님, 날 절대로 해치지 않을 거라고 당신이 직접 내 부하들에게 분명히 말하세요.] [내가 할 말은 누구도 내 아내를 내게서 떼어놓지 못한다는 것뿐이오. 그러려는 자는 누구든 간에 내 손에 죽을 거요. 만약 당신 부하들이 죽기를 원한다면, 나와 싸워도 좋소.] 그녀는 자신의 호위대를 둘러보았다. [펄시윅 성을 돌아가라. 난 내 남편과 갈 테니까.] [그렇지만, 아씨. 만일 아씨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 기버트 경이 우릴 죽일 겁니다.] 가장 젊은 병사가 롤프를 흘긋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기버트 경에게 날 크루얼까지 바래다 주었다고만 해라.] 그래도 그 병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버트 경이 날 구출하려고 크루얼 성으로 말을 타고 오는 경우는 절대 없으리라, 알겠느냐? 만일 여기서 일어난 일을 그가 알게 되는 경우에는 내가 직접 너에게 채찍질을 할 테다. 이제 가라.] 그 병사는 끈질기게 고집을 피우며 움직이지 않았다. 레오니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이는 내 남편이다. 난 저 사람과 같이 가야만 해. 그러니 제발 더 어렵게 만들지 마라, 부탁이다.]


그녀가 그 병사에게 자신이 말 타는 걸 도우라는 신호를 하자, 그 병사는 마지못해 그렇게 했다. 그녀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개척지 밖으로 말을 몰아 크루얼 쪽으로 갔다. 얼마 되지 않아 롤프의 부하들이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며 함께 달렸다. 레오니는 롤프가 따라오나 보려고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43 그일 이후로 그 주 내내 감정의 급류에 휘말려, 그녀는 깊은 우울과 도무지 헤어날 길 없는 격노에 빠져 헤맸다. 롤프는 그날 그녀 뒤를 따라 크루얼로 오자 마자 그녀를 그들의 방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최악의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방에 가뒀을 뿐이었다. 그날 밤 그가 고주망태가 되었다는 걸 그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다음 날 그녀에게 방의 출입을 허락했지만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가 알에인과 만났던 과정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알에인과 같이 떠나는 건 어림없는 일이라고 말해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어떤 얘기를 듣는 걸 단호하게 거부했다. 또한 그녀에게 말도 걸려 하지 않았다. 하인들도 그의 분노가 무서워 그녀를 슬슬 피했다. 가장 엄청난 시련은 바로 윌다와 메리가 내쫓겨, 그녀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니, 그녀와 얘기를 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만약 그가 크루얼 성을 떠났더라면, 그 긴강 상태는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워링 포위 공격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을 뿐더러 사냥조차 나가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혼자 놔두면 도무지 믿을 수 없기라도 하듯 그는 레오니 근처에 있었지만, 항상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그가 정확히 뭘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고민했다. 그는 그녀가 달아나리라고 생각하고, 그녀가 달아나지 않았다는 걸 항상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롤프가 그녀를 방에 가두던 날, 레오니는 알에인에게서 온 쪽지 두장이 바닥에 구겨진 걸보고는 그가 어떻게 그녀를 찾아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결론을 이끌어 냈는지를 알게 되었다. 개척지에서 그 장면이 얼마나 파국으로 몰고갈 끔찍한 것이었던가를 알고 있었지만, 롤프가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 상황을 바로잡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는 침대를 함께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밖에서 마치 보초라도 서는 것처럼, 곁방의 초라한 침상에서 잠을 잤다. 그녀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지낼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좌절감과 분노로, 레오니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문을 홱 열어 젖혔다. 그가 눈을 뜨고는 천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그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 뭐라도 던질 양으로 곁방을 둘러보았다.


[그만둬요, 레오니.]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왜요? 그러면 당신은 절 때릴 테고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장내게 될 텐데요!] 그녀는 부르르 떨며 따졌다. [당신을 때려? 바로 그런 짓을 한 사내를 내손으로 죽였는데, 당신을 감히 내가.......] 롤프는 초라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라구요?] [리처 캘베리는 내 손에 죽었소. 당신에게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난 그를 살려둘수 없었소.] 단조로운 그의 목소리에 레오니는 어리벙벙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전 결코 그가.......] [내가 여기서 나가 있었던 그 주 동안 난 당시 아버지와 지냈소. 그의 정신을 맑게 해서 내 도전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그녀의 눈에 돌연한 공포가 가득 서리자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당신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소, 부인. 그는 내가 생각했던 악한이 아니었소. 그를 술주정뱅이로 마든 건 그의 아내였지. 그는 허약한 사람이었소, 그렇다고 결코 최가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는 당신을 때리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소, 레오니. 그는 아무 것도 몰랐소. 당신이 요 몇 년동안 펄시윅에서 지낸 것도 몰랐고......] 그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어떻게...... 아버지가 모를 수 있지요?] 그녀가 충격을 받은 듯 충얼거리자 롤프가 모든걸 설명했다. [그는 지금 그토록 끔찍하게 당신을 저버린 것 때문에 심한 죄책감에 빠져 있소.] 그녀는 이 믿을 수 없는 얘기에 새파랗게 질렸다. 왜 한번도 악착같이 밀고 들어가 아버지를 만나보지 않았던가? 그랬으면 나와 아버지를 그토록 엄청난 비극에서 구했을 수도 있으련만. 오, 그 사실을 더 빨리 알았을 텐데...... [지금 아버지에게 가겠어요!] [안 되오!] [안 된다구요? 어떻게 안 된다고 막는 거죠?] 그녀는 발악하듯 소리를 냅다 질렀다. [당신 아버지에게 자존심을 되찾을 기회를 주시오, 레오니. 준비가 되면 그가 당신에게 올거요. 내 말을 믿으시오.] 그녀는 씨근덕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흥, 아버지에게 가겠다는 내 뜻을 막는데 그렇게 고상한 감정들로 포장하지 마세요! 당신을 절 여기다 계속 가둬두려고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걸 왜 부정하는 거죠?] [젠장!] 롤프가 버럭 화를 내며, 자신이 발가벗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단 두 걸음에 다가섰다. [당신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알게 된 모든 사실을 당신에게 얘기해주러 여기로 돌아왔는데, 당신은 당신 애인과 달아나고 없었어!] [그는 결코 제 애인이 아니에요!] [거짓말!]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쥐며 흔들었다. [그가 파놓은 함정에 날 빠뜨리려고 당신이 고의로 그의 전갈을 놔두었다고 해도 난 놀라지 않았을 거요. 그가 부하들을 데리고 날 공격하려고 기다렸다는 걸 당신은 알았지?] [그랬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어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 날 전에는 그를 본 적도 없는데, 맹세해요.] 그는 너무 화가 나 더 세차게 흔들었다. [쪽지는 두 개였소!] [세 개였어요!] 그녀는 지지 않으려고 맞고함을 쳤다. [하지만 먼저 왔던 두 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는 너무도 고집스럽게 날 보고 싶어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글을 읽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굳이 제가 왜 쪽지들을 남겨놨겠어요?

당신

읽으라구요?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라구요!] 롤프는 그 문제는 우물쭈물거리며 음울한 목소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당신한테 뭐라고 했소, 레오니?]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더 누그러져도 속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면서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가 당신과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는 날 돕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그가 절 그곳으로 끌어낸 이유가 진짜 그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당신은 공격했던 사람들은, 제가 만약 그와 같이 떠나려 하지 않을 경우 끌고 가려고 거기 있었던 것 같아요. 몸값을 받아내려고 그는 절 잡아두려고 했을 거예요.] 그러다가 그녀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이 점점 더 신경이 쓰인다는 건 이미 이 싸움에서 패배를 의미했다. 롤프도 그녀의 태도가 거북스럽게 변한 걸


깨달았다.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지 어떨지 미처 판단할 수는 없어도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그녀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가 그녀를 안자, 그녀는 너무 놀라 머리털이 곤두섰다. 이렇게 변덕스러운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녀는 몸을 빼려고 발버둥쳤다. [롤프, 안돼요!] 그럴수록 그는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레오니, 불공평하군. 결국 당신이 위기에 처하자 날 약하게 만들려고 내 이름을 부르다니.] [당신을 어떻게 이럴 수가......] [내가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소? 가엾게도, 난 당신을 원해. 난 이겨낼 수가 없으니 더 이상 애쓰지 않을 거요.] 롤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하면서 그녀에게 마법의 힘을 발휘했다-- 사실 그는 너무도 고집이 세서 그녀를 사랑한다는 그 진심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레오니는 지금까지 그에게 원한 건 오로지 그의 사랑뿐이었다. 그의 사랑을 갖게 되면 그녀는 그에게 모든 걸, 자신의 마음과 목숨, 그리고 아이들까지 줄 거였다. 그녀가 그의 정열에 화답했지만 롤프는 종처럼 정열이 사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그녀가 혼자서는 잠못 이루던 그 커다란 침대로 데려갔다. 거기서 그는 두 손으로, 입술로, 온몸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호소하면서 가슴속에 가득 차 오른 열망을 뿜어냈다. 그리고 레오니도 그 순간만큼 다른 어느 것도 생각지 않고, 그를 사랑했다. 그는 그녀의 것이었고, 그녀는 그가 가진 모든 걸 찬미하면서, 기쁨이 그녀를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44 다음날 아침 레오니가 깨어났을 때, 이미 롤프는 방을 떠나고 없었다. 그건 그의 습관이라 그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 그가 군대로 되돌아갔고 금세 돌아오지는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녀에게 한 마디 없이 떠난단 말인가? 그들 사이에 벌어진 모든 문제가 해결됐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심지어는 간밤의 그 모든 황홀한 느낌들이 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나 그의 속삭임에서 내가 듣고 싶었던 속삭임만 들은 건 아닐까?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이틀 동안이나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이 그녀를 돌보는 것으로 봐서는 그녀가 죽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녀의 방에다 음식은 두고 갔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그녀가 아직도 여기서 이방인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 사람들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녀는 침입자가 된 기분이었고, 그 기분이 점점 그녀를 갉아 먹고 있었다! 아니야, 이런 식으로 살수 없어! 절대로 살지 않을 거야! 하인에게 목욕물을 준비시키려고 그녀가 과감히 나와서는 아멜리아가 여전히 크루얼 성의 여주인처럼 행세하는 걸 보게 되었다. 모든 희망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떠나는 수밖에 없어. 롤프는 또다시 나를 데려오려고 애를 써야 할 거야. 그녀는 너무 두드러지지 않게 짐꾸러미 하나만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그리고 그걸 아래다 갖다놓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녀가 거기까지밖에는 나가지 못했다. 에바라드 경은 그녀가 성을 떠날 경우 열다섯 명의 호위대를 붙이라는 명령과 함께, 그 병사들은 그녀가 성을 되돌아올 때까지 그녀 곁을 한시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에바라드 경은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긴급한 일도 아닌 일로 크루얼을 떠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모두 룰프의 군대와 합류했기 때문에 주둔병이 별로 없다고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그녀를 막아섰다. 레오니는 아멜리아를 찾아서 곧장 본론을 얘기했다. [난 떠나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이제 맘에 들어요, 아멜리아?] 그 나이든 여자는 너무 기뻐 뻔뻔스럽게도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몹시 맘에 들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날 도와줄 거죠? 에바라드 경은 내가 호위대를 데려가야 한다면서 롤프가 정한 병사들의 수를 양보하려 들지 않아요. 그는 당신에게 다정한 것 같던데, 당신이 그를 설득시켜 마음을 바꿀 수 없을까요? 그에게 난 겨우 몇 시간 동안만 호위대가 필요하다고 말해요.] [그렇지만 여기에 그 호위대가 필요하다면......] [그들은 내가 일단 안전하게 펄시윅 성에 도착하면 즉시 여기로 돌아 올 거예요.] 레오니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애써 미소 지었다. [펄시윅이라구요? 하지만 롤프는 그곳에서 당신을 쉽게 찾을 거예요. 왜 영국을 떠나지 않는 거죠?] 레오니는 노골적으로 묻는 아멜리아가 혐오스러워 한숨을 쉬었다. [난 숨으려는 게 아니에요, 아멜리아. 롤프가 날 찾아내든 말든 상관없어요, 그에게 펄시윅을 열지 않을 테니까.] [아하!]


아멜리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걸. 레오니가 자신의 부하들을 부추겨 그와 싸움을 벌인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영원히 끝장나리라. 결과야 어떻든 그는 그를 데려오고 싶지 않을 테니까. [에바라드는 내게 맡겨도 좋아요.] 아멜리아가 마지막 호의 베풀 듯 상냥하게 대꾸했다. 에바라드는 레오니가 크루얼을 떠나는 걸 허락했지만, 그의 불쾌한 표정으로 봐서 몹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싶었다. 레오니의 짐꾸러미를 운반하는 짐수레 때문에, 펄시윅 성으로 가는 그 길은 보통 때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녀가 도착했을 때 기버트 경은 하루정도 성을 비운 상태였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녀가 그러는 걸 그는 허락하지 않았을 테고, 그리고 그걸 막기까지 했을지도 모르리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돌아와 그런 일이 일어난 걸, 그리고 레오니가 펄시윅에 푹 주저앉아 있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손쓸 일은 거의 없을 터였다. 그녀는 성문을 닫아두라고 직접 명령을 내렸다. 호위하던 이들은 그 모든 행동이 차츰 의심스러웠겠지만, 다행이 레오니는 그들에게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 의심이 현실로 나타나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준비가 대부분 끝나자, 그녀는 크루얼 성으로 돌아가지 않을거라고 하고, 그들에게 돌아가라며 명령하면서 성에서 물러가게 했다. 베아트릭스 이모는 모든걸 이해하며 감싸줬다. 그러나 윌다는 놀랍게도 반대를 했다. 윌다는 레오니가 싸워보지도 않고 아멜리아에게 롤프를 빼앗긴 걸 두고 치를 떨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아멜리아가 관련되는 일에 대해서는 그녀의 감정은 아주 격했다. 그리고 자신과 메리를 크루얼에서 빨리 쫓아내라고 명령을 내렸던 사람은 다름아닌 아멜리아였다고 윌다는 밝혔다. 아멜리아가 스스로가 원하는 걸 얻으려고 비열한 수단을 사용했다면, 레오니는 왜 전쟁터에서의 대담함과 그 정정당당함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지 않았단 말인가? 레오니는 윌다가 한가하게 떠벌릴 틈을 없애려고 그녀를 아주 바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버트 경에게는 똑같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날 저녁 도착해서 그녀의 소식을 듣고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그는 홀로 성큼 성큼 들어와서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제 정신입니까?] 인사말도, 묵례도 없이 그가 다그쳤다. [당신 남편과 전쟁을 하실 겁니까? 전 그럴 수.......]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난 그저 더 이상 그와 살기를 거부할 뿐이에요.]


레오니가 말을 막자 기버트는 점점 더 흥분에 떨었다. [아씨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제발이지, 레오니. 그는 이제 아씨의 주인이에요. 아씨는 모든 점에서 그에게 묶여 있다구요!] 그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상당히 불쾌했다. 그녀는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으리라 이미 다짐한 터였다. 그렇지만 기버트의 지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전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던 짓을 했다. 그녀는 눈물을 와락 터뜨리면서 정말 아버지 같았던 그

남자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은근히

살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오열을

쏟아내면서 그녀는 기버트에게 모든 걸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신이 남편의 아이를 -그의 두 번째 아이를 갖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아멜리아에 관해 털어놓은 얘기에, 그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만큼 충격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이, 비록 고통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 [남편의 사생아를 기르라고 요구를 받는 여자는 아씨뿐만이 아니에요, 레오니.] 기버트가 점잖게 나무랐다. 사실 롤프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고, 레오니 때문에 가슴이 아팠지만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는 일은 이제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될 터였다. [만일 그뿐이라면, 난 그와 살 수 있어요. 하지만 내 남편은 그 아이의 엄마를 내보내지 않을 거예요. 내가 요구를 했지만 그는 거절했어요. 그는 내 집에서 그녀를 감싸고 돈다구요. 그는 마땅히 내가 취할 권리를 그녀에게 주었어요. 마치 내가 첩같이 느껴진다구요!] [아씨는 지나치게 과장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에요! 난 당신에게 내가 어떤 상황인지 솔직하게 말한 거예요. 난 그래도 참고 살려고 했어요, 기버트. 만약...... 만약 내 감정들에 얽매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렇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를 사랑하게요?] [네.] 그녀가 간략하게 대꾸하고는 설움이 복받쳐 진심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랬어요, 그게 나에게 고통만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걸 난 알았어요. 그리고 그는 내가 계속 그녀와 함께 지내기를 기대하고 있었요. 하지만 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점점 질식할 것만 같다구요, 기버트.] 기버트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씨가 여기 와서 뭘 얻으려고 하는지 난 몰라요. 그 남자는 이곳보다 더 강한 성들을 포위 공격으로 점령했어요.]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난 그의 아내예요.]


기버트는 그녀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다고 그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바로 그러한 이율 그는 우리의 닫힌 성문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기버트.] 그녀는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롤프는 아직 두 성을 점령해야 해요. 그는 거기서의 승리를 포기하고 군대를 여기로 데려오지 않을 거예요. 오긴 오겠지요. 그렇지만 난 내 기분이 어떤지 솔직하게 말할 겁니다.-- 설령 내가 성벽 위에서 소리를 쳐서 알려야만 할지라도요. 그는 내 결정을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 [그는 아씬의 상태를 압니까?] 기버트가 날카롭게 물었다. [아뇨.] 그녀가 그를 흘긋 쳐다보고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에게 날 강제로 크루얼로 데려갈 핑계거리를 주지 않을 거예요.] [그가 아씨를 내버려두길 빕니다.] 한숨을 쉬면서 그가 덧붙였다. [그러지 않을 경우엔 --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요.]♣

45 레오니는 그 후로 며칠 동안 기버트가 염려했던 일을 걱정하며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롤프가 펄시윅으로 직시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 생각은 완전히 어긋났다. 날이 지나고 어느덧 일주일이 흘럳 그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그녀는 비참한 기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두 주일이 지나자, 레오니는 펄시윅 성문을 열고, 모든 상황을 정상적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녀가 요청해서 다른 성들에서 왔던 임시병들은 돌려보냈지만, 그녀의 병사들은 계속 경계태세를 취하게 했다. 창고들은 최근의 수확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시간은 지리하게 흘렀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점점 더 우울해졌다. 그녀가 크루얼을 떠난 지 4 주일이 흘렀다. 임신 두 달 반에 접어들어 드레스로는 두툼한 허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넌더리를 치며 아이문제와는 상관없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롤프에게 최후통첩을 하고 싶었다. 때 아니게 뜨거운 어느 날, 그녀가 성벽 난간에 서 있을 때 남편이 성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의 바로 뒤에는 그의 기사 네명이 말을 타고 따랐다. 하지만 그 뒤의 광경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맙소사, 그는 모든 군대를 데려왔어!]


천 명쯤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펄시윅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군대는 펄시윅 성의 사정 거리밖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멈추었다. 정말로 롤프가 전투를 할 생각이란 말인가? [아씨께 제가 경고했지요.] 그녀의 친구이자 가신인 기버트가 수심에 잠겨 말문을 열었다. 레오니는 아래의 그 무시무시한 광경에서 급히 발을 돌려 공포에 가득 질린 눈길로 기버트 경을 바라보았다. [성문을 열라고 하겠습니다.] [안 돼요!]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그의 얼굴이 비참한 모습을 일그러졌다. [제발이지, 레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입니까? 여자의 변덕으로 더 이상 이릉 어렵게 만들지 마십시오. 당신 주인은 진지하단 말입니다!] [그는

우릴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저

겁주려고

군대를

데려온

것뿐이에요.] [그저 단순한 아씨의 추측으로 우리 모두의 생명을 거시렵니까?] 그녀가 계속 고집을 피우자 그가 소리쳤다. [제발, 기버트. 지금 이 순간 내 모든 인생이 걸려 있어요. 최소한 그가 무슨 말을 할 건지나 들어보게 해줘요. 그러지도 않고 그냥 날 그에게 보내버리면, 그는 내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할 거예요.] 기버트는 다시 그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군대를 사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용병을 데려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녀는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었다.‘검은 늑대’는 지금 공격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지 않는가? [아씨가 직접 그에게 말할 겁니까?] 그가 묻자 그녀가 ‘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조바심을 치며 급히 물었다. [그를 화나게 하진 않을 거죠?] 레오니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신중하게 말할 거예요. 하지만 내가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분명한 태도를 취하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타협을 할 수 있겠어요? 기버트, 맹세해요. 타협이 잘 안 되면, 항복할게요.] [좋습니다.] 기버트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얼른 덧붙였다.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아씨. 그러니 그를 너무 밀어붙이지 마세요. 남자는 자존심 때문에 실제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할 수 있어요, 체면을 내세우려고 말입니다.] 롤프와 그의 기사들이 말을 타고 와 성문 위쪽 망루 아래에 멈췄다. 롤프는 그 망루 양 옆 성벽에 배치된 병력들과 그를 겨누고 있는 무기들과 닫힌 성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긴장감이 공중에 톡톡 튀어 올랐다. 롤프는 들아가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레오니는 숨을 멈추고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렸다. 롤프가 체면을 내세우기 위해 정말 어디까지 갈 것인가? [내 아내는 안에 있나?] [전 여기 있어요, 영주님.] 레오니가 그에게 소리를 쳤다. [고개를 내밀어 보시오. 당신이 안보이오. 부인.] 그가 손을 모아 위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녀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 완전무장을 하고 투구를 쓰고 있어 그의 눈까지 가려져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롤프는 종마를 타고 그녀 바로 밑을 와 멈췄다. [펄시윅 성은 전쟁채비를 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렇게 명령한 거요?] [성은 항상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해요.] 그녀가 얼버무리며 샐쭉한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왜 당신 군대를 여기로 데려왔는지 저도 묻고 싶군요.] [그야, 당연히 당신을 기쁘게 해주려고지. 당신이 원하는 게 전쟁이 아니오?] 레오니는 숨이 턱 막혔다. [전 경계태세를 취한 것뿐이에요, 영주님. 다른 뜻은 없어요.] 그는 험악하게 꽥소리를 내질렀다. [나에 대해서 말이군!] [그래요!] [레오니, 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너무 난처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말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주님, 전 더 이상 당신의...... 아멜리아가 살고 있는 크루얼에서 살지 않을 거예요.] [안 들리오, 레오니.]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이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그는 나를 창피하게 만들려고 작정했나? 레오니는 마음을 굳게 먹고 망루 위에서 몸을 더 앞으로 숙였다.


[아멜리아가 사는 크루얼에서는 더 이상 살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 때문에 이런 거요?]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그가 물었다. [그래요.] 그러자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롤프가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하더니 투구를 벗고 점점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는 성벽을 넘어 조용한 성안까지 울려 퍼졌다. [웃음이 나오다니, 말도 안 돼요, 영주님. 제 말은 거짓 하나 없이 정말이라구요.] 냉랭한 그녀의 말에 잠시 아무 소리도 없더니, 그가 거칠게 대꾸했다. [됐어요, 레오니. 성문을 열게 하시오.] [싫어요.] 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싫다구? 누구도 날 내 아내에게서 떼어놓지 못하리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소. 거기에는 당신도 포함되오, 부인.] [그러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 죽일 거라고 하셨죠. 거기에도 제가 포함되나요, 영주님?] [그건 아니오, 레오니. 하지만 당신이 날 이 성벽들을 파괴하도록 자꾸 부추긴다면, 이 펄시윅 성을 다시 세울 사람들이 제대로 남을 지 의문이오. 당신의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거요?] 공포에 질려 그녀는 숨이 막혔다.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할 거예요!] 롤프가 자신의 기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 [피어스 경, 마을을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리게!] [롤프, 안 돼요!] 레오니 펄쩍 뒤며 울부짖었다. 롤프는 다시 레오니를 쳐다보고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신은 ...... 당신은 안으로 들어와도 돼요, 영주님--- 혼자서요. 그리고 대화하기 위해서만요. 동의하세요?] [성문을 열라고 하시오.] 그가 대답도 하지 않고 냉담하게 말을 건넸다. 레오니의 얼굴에 패배가 역력했다. 롤프는 해볼 테면 해보자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녀는 유리한 고지를 잃었고,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밖에 그의 군대가 있으니까 그녀의 성안에 혼자 들어가도 안전하다는 걸 그는 이미 파악했다. [그의 말대로 해요, 기버트 경, 홀에서 그를 기다릴게요.]


[너무 괴롭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레오니. 이제 아씨 기분이 얼마나 격한지 그가 안 이상, 어쩌면 아씨가 원하는 걸 들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애처롭게 고개를 끄덕이고 망루를 떠났다.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가는 모습을 치켜보자니 기버트는 화가 치밀었다. 저렇게 처량하게 보이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행동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동기는 충분히 이해할수 있었다. 화를 삭이지 못해 성큼성큼 걸으며 기버트는 롤프 덤버트를 마중 나갔다.♣

46 롤프는 안뜰로 들어와 커다란 종마에서 내리며 가슴에서 울컥 치미는 화로 씨근덕거렸다. 레오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한번 믿어보자며 가벼운 마음으로 크루얼로 떠났던 거였는데...... 아무튼, 그녀가 진심을 알에인을 사랑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나에게 열정적으로 응답할 수 있겠는가? 그는 레오니에 대한 괜한 의심을 품은 스스로에 대해 혐오감이 치밀지 않았던가. 알에인은 죽어서 묻혔기 때문에 이제 그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 깨끗이 사라졌다. 알에인이 죽은 걸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소식을 접했다. 생각도 못할 가장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 어린 바보는 블리쎄 성으로 간신히 들어가서는 성밖의 롤프의 진영을 공격하자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리고는 워링 성에 포위되어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싸움에 합세하리라는 계산에 그들을 끌고 워링으로 갔다. 그러나 워링성에 있는 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왔다 하더라도 실제로 별 차이가 없었으리라.

알에인은

전쟁을

모르는

얼간이었거나,

아니면

롤프의

군대를

아주

과소평가한 게 분명했다. 싸움다운 싸움은 있지도 않았다. 알에인 몬티니는 백명도 안 되는 병사들을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알에인 몬티니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포위되어 있던 워링 성안의 사람들은 알에인의 완패를 목격하고서는 서둘러 항복했다. 롤프는 그 현장에 없어 그 놀라운 사태의 뜻하지 않은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 크루얼 성에 레오니를 두고 떠난 지 며칠도 못돼 노르망디로 불러갔기 대문이었다. 그는 죽은 형의 소유지를 돌보면서 지난 몇 주를 보냈다. 그의 형에 대해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를 떠올리며 가슴 답답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는 마침내 아무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형의 죽음에 대해 특별히 슬프다거나 애석한 감정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형수와 조카들을 내버려두고 떠난다는 건 도리에 어긋난 짓이라며 마음을 추스렸다. 정말로 힘겨운 나날이었다. 그리고 나서, 집에 왔는데 레오니가 그 동안 내내 펄시윅 성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그와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또 다시 그의 믿음을 우롱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부진 결심을 했다. 만약 그녀가 그런 짓을 할만큼 그에게 적대적이라면, 그녀가 돌아오는 걸 원치 않으리란 그 결심을 확고했다. 아니, 어쩌면 그 결심이 확고하리라 믿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흘 동안 그는 마음을 돌리고 싶은 온갖 충동을 억제했다. 문제는, 결국 어떻게 해서든지 레오니가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그가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걸 증명하려고 용병을 모집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극적인 사건들이 단지 질투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니! 그녀에게 키스를 퍼붓고 싶은지, 아니면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은지 혼돈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는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처리하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징벌을 면치 못할 거였다. 그와 틀어질 때마다 매번 그녀의 가신들에게로 달아날 수는 없다는 걸 단단히 못박으리라. 롤프가 화를 참고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했던 순간도 잠시, 기버트가 안뜰로 마중 나와서는, 레오니가 진정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한 강압적으로는 펄시윅을 결코 떠나지 않을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기버트는 필요한 모든 무력으로 자신의 입장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롤프는 노발대발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당신이 뭣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 거요?]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영주님.] [내 아내의 질투가 근거 없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소? 아멜리아가 크루얼에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소. 그렇게 된 걸 나 역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소.] [우리가 아이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기버트는 전혀 두려움 없이 대꾸했다. [우리?] [레오니 아씨는 단순하게 의심만 갖고 이런 올곧은 태도를 취하진 않습니다.] 롤프가 영 못마땅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녀의 질투는 근거가 없는 거라고 말했잖소! 그 아이는 그녀에게 문제될 게 없어요. 그녀와 내가 결혼하기 전에 생긴 애니까.] [그렇다면 그 사실을 영주님이 아씨께 납득시켜야만 합니다. 아씨는 분명히 다르게 알고 있으니까요.] 롤프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기버트가 그 말을 진심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롤프는 레오니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아멜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모르기를 바랐다. 레오니가 알아버린 것만으로도 상황이 꼬였는데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건....... [날 그녀에게 데려다 주시오.]


롤프는 퉁명스럽게 요구했다. 그는 레오니가 품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들 때문에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그 어리석은 생각을 할 정도라면 그녀가 그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감이 잡혔다. 아멜리아를 크루얼에 머물도록 한 그 곤혹스러움이 이제서야 다시 생각났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아멜리아를 너그럽게 보아준 태도에서 레오니가 어떤 결론들을 이끌어낼지 결코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롤프가 홀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 레오니는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 두려움과 더불어 롤프에 대한 엄청난 만족스러움이 언뜻 스쳤다. 자신의 목적에 그토록 집요하게 달라붙는 남자가 차라리 존경스럽기조 했다. 만약 그가 그녀의 요구들을 굴복되고 나서도 그가 아멜리아를 그리워한다면, 그가 굴복하는 걸 그녀는 원치 않았다. 그러면 마음만 더욱 뒤숭숭할 뿐이지, 해결된 게 아무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 문제가 영원히, 그리고 깨끗하게 해결되는 걸 원해! 롤프는 레오니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추고 그녀의 태도와 위치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마치 그들 사이에 그 의자를 방패삼은 것처럼 손가락으로 의자의 높은 등받이를 꽉 잡고서 의자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반항적으로 턱을 치켜올렸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는 불안함과 공포로 흔들렸다. [군대를 끌고 여기에 와야만 했나요, 영주님?] 먼저 주도권을 잡으면 그녀가 물었다. 그는 주위의 감도는 긴장감으로 웃음이 나오려 했다. 홀 여기저기에는 아주 충실한 가신과 롤프 덤버트에게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는 상당수의 우둔해 보이는 농노들뿐 아니라, 열두 명의 무장 병사들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오히려 내가 그런 조치를 취한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오, 부인. 만일 내가 혼자 왔다면, 당신은 계속 어리석게 굴 테고, 나중에는 내가 가혹한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 테니까.] 그녀는 거만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건 결코 어리석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 얘기는 하지 않겠어요. 이제 어쩔 셈인가요?] [당신을 데려가야지.] [제가 안 간다면요? 제 성을 공격할 건가요?] [돌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거요. 어떻게 해서든 난 펄시윅을 파괴하고 싶은 심정이니까.] 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협박투로 으르렁거렸다. [나한테 화가 난다고 그때마다 당신은 여기 와서도 안되고, 당신 사람들과 날 싸움 붙여서도 안되오, 레오니. 만약 당신이 언제고 또 이럴 경우에는, 난 그땐 가차없이 펄시윅을 파괴해버릴 거요. 당신은 내 사람이오.]


[그렇지만 전 당신과 행복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에게 대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녀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에 박혔다. 만약 그녀가 그의 마음을 짓밟기를 원한다면,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말자고 그는 다짐했다. [난 머지않아 당신이 날 사랑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소, 레오니. 아니면 적어도 나와 함께 사는 게...... 즐거운 일임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품었소. 당신이 그럴 수 없다니 유감이오.] 그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울려퍼졌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절 포기할 건가요?] 롤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빛이 험악했다. 그래, 그녀가 원하는 그런 것인지도 몰라. [아니오, 부인, 난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요.] 그녀는 기뻐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면서도 속마음을 그에게 너무 드러내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었다. [아멜리아는 어떡할 건가요?] 그녀가 단조롭게 묻자 그는 피곤에 지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다른 성으로 보낼 거요.] [당신 성들 가운데 하나로 말인가요? 그렇다면 지금과 실제로 뭐가 달라지겠어요?] [무정하게 굴지 마오, 레오니. 그녀가 아이를 갖고 있는 걸 알고 있잖소? 나에게 지금 임심한 여자를 버리라는 거요?] 그가 툴툴거리며 얘기하자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에게 결코 그걸 요구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왜 그녀를 항상 가까운 곳에다 두려고 하는 건가요? 그래서 나한테 화날 때마다 거기 가서 그녀의 위로를 받으시려구요?] [제기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그 여자는 내 정부였소, 그래요. 아이가 생겨서 유감스럽소. 하지만 당신과 결혼한 이후에는 그녀에게 손 한번 대지 않았소, 그래서 난 얼떨떨하단 말이오. 당신은 내가 그 이후에도.......] [아멜리아의 얘기는 달랐어요, 영주님.] 그녀가 그에게 사실을 일깨워주려 했지만 롤프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신이 그녀 말을 오해했소.] 레오니는 너무 화가 나서 등을 돌려버렸다. 그를 뭔가로 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맙소사, 어떻게 이토록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분명해!


[필요한 걸 꾸리시오, 레오니.] 롤프는 그녀의 뻣뻣한 등에다 대고 말했다. [우린 떠날 거요, 지금 당장, 그리고 당신이 기버트 경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당신은 마지못해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가는 거라고 그에게 말하시오.] 그녀가 홱 돌아서며 야유하듯 퍼부었다. [전 원해서 가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을 날 끌고 가거나 누구도 죽일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그를 홱 지나쳐서 짐꾸러미를 싸라고 지시했다. 그러고서 기버트와 의논을 했다. 그녀가 남편과 같이 집으로 가는데 동의한 걸 알고는, 그는 안도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아씨게 화가 나지 않았습니까?] 롤프가 조바심을 내면서 홀로 천천히 걷고 있는 걸 보고서 기버트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가 아무리 화를 내도 난 절대 무섭지 않아요.] 레오니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 다른 여자를 내보내는 걸 그가 거절했습니까?] 기버트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아니오. 그는 동의했어요.] 한숨짓는 그녀를 보며 기버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아씨께서는 기뻐하셔야 하잖아요?] [정말...... 기뻐야 하는데. 그렇지만..... 그렇지 못해요.] 기버트는 그녀가 골이 난 듯 훌쩍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47 얽히고 설킨 사태는 누구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저절로 풀렸다. 레오니가 크루얼로 아 침실로 들어시기 바쁘게 하녀가 엄청나게 흥분해서 그녀를 찾아왔다. [아씨, 그분이 죽어가고 있어요! 아씨께서 오셔야 해요-- 제발!] 제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아씨, 계략이에요.] 윌다가 재빨리 끼여들며 제니를 막아섰다. 어린 제니는 아멜리아의 하녀였지만 크루얼의 식솔은 아니었다. [그 여자는 쫓겨나게 될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어떡하든 막으려고 그러는 거라구요.]


윌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제니를 쳐다보고선 레오니와 제니 사이에 단단히 버티고 서 있었다. 레오니는 윌다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려고 헌신하는 태도가 무척 맘에 들었다. 그녀가 펄시윅으로 간 일로 얻은 게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해도, 적어도 윌다만큼은 다시 데려올 수 있었다. [돌아가서 우린 그녀의 속셈을 알고 있다고 그녀에게 전해.] 윌다가 당돌하게 명령을 하자, 레오니는 윌다를 막아야 하나는 생각이 스쳤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거라.] 레오니가 묻자, 제니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제가 아씨께 온 걸 알면 그분은 몹시 화를 내실 거예요. 그분은 아무도 자신이 한 짓을 모르길 바라시니까요. 하지만 그분은 피를 흘리고 계세요, 쉽사리 멎지 않을 거예요. 그분은 죽어가고 있어요, 아씨, 정말이예요!] [그녀가 월 한 거니?] 레오니가 목소리를 높여 다그쳤다. [어...... 어떤 약을 먹었어요. 그분은 그게 곧 모든걸 정상으로 만드는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레오니는 즉각 상황을 파악하고는 창백해졌다. [맙소사, 이건 내 잘못이야. 난 그 아이에 대해 아주 나쁜 생각을 가졌었어, 그 엄마 때문에. 그래서......] [아씨, 오실 건가요?] 제니가

다시 간청하자 레오니는

몸을

떨었다. 한가롭게 죄책감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윌다, 내 약들을 가져와라, 빨리!] 뜻밖에도,

에바라드

경이

아멜���아의

방밖에서

서성거리고

모습으로...... [아멜리아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건 아닐까요?] 그가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를 좋아하세요, 에바라드 경?]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불쑥 말을 던졌다. [좋아하냐구요? 난 그녀를 사랑합니다!] 확신의 찬 그의 대답에 레오니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러실 겁니까?] 그는 의례상 묻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있었다.

아주

비참한


[당신이 그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그녀도 당신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애 같고 까다로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아씨.] [에바라드 경. 부디 아래층으로 가세요. 내가 아멜리아를 도울 수 있다면, 난 도울 거예요. 믿어도 좋아요.] 레오니는 부드럽게 말하며 그를 다독거렸다. 아멜리아의 방은 레오니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었으며,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알에인이 쓰던 물건들이었다. 알에인은 늘 화려한 것들을 좋아했는데, 켐프스톤에서 도망칠 때 그의 소유물들 대부분을 남겨놓고 갔던 것이다. 그 방은 메스꺼운 냄새로 역겨웠다. 시트를 계속 갈아 끼웠는지 피묻은 시트들이 구석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침대에

있는 수척한 얼굴을

흘긋 보았는데도

레오니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다.

아멜리아의 얼굴은 회색 빛이 감돌았고, 두 눈을 푹 꺼져 있었다. 아멜리아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며 반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흐느끼고 신음하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침대가에 서 있는 두 하녀는 무력하게 레오니만 쳐다보며 서 있었다. 레오니는 시트를 끌어내렸다. 아멜리아는 피의 웅덩이에 누워있는 꼴이었다. 그곳에 있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레오니는 시트들을 다시 한번 갈고 피로 범벅이된 아멜리아를 닦고, 출혈을 멈추게 하려고 붕대로 아랫부분을 꼭 감쌌다. 그리고 나서 레오니는 출혈이 멈추기를 기도하면서, 아멜리아에게 억지로 야생완두 시럽을 마시게 했다. 침대 곁 큰 촛대 위에 놓인 유리병에는 아멜리아가 먹은 탕약이 들어 있었는데, 그건 레오니가 알기로는 보통은 설사제로서 유산을 일으키는 약물로 알려진 등대풀과 월계수를 달인 즙이었다. 너무 많이 복용하면 구토와 혈변이 쏟아져나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그 유리병은 거의 비어 있었다. 아멜리아가 눈을 뜨는 순간, 몹시 당황해 했다. 레오니가 그녀 침대곁에 서 있는 걸 알아보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이걸 얼마나 많이 먹었죠?] 대답 대신에 그 병을 치켜들면서 레오니가 물었다. [필요한 만큼요. 전에도 써봤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늘 처음에 의심이 들 때였어요. 이렇게 늦게 써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멜리아, 왜요?] 아멜리아는 레오니가 진정으로 염려하는 기색을 하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구요? 애가 있으면 뭘해요? 난 애들은 질색이예요!]


레오니는 순간 동정심이 싹 가셔 혐오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영주님의 아일 없애려고 한 거예요? 아이를 결코 원치 않았다면,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렸던 거죠?] [그럴 필요가 있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가버려서...... 오, 날 내버려둬요!] [정말 나도 그러고 싶어요. 당신 스스로 저지른 어리석음 때문에 죽게 내버려두고 싶다구요!] 레오니의 목소리는 격한 감정으로 날카로웠다. [안 돼요, 제발, 날 도와주세요! 난 이미 아이를 잃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는 날 내보낼 거예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레오니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롤프는 당신과 결혼한 후로는 날 원치 않았어요. 난 그가 날 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어요.] 아멜리아는 비탄에 젖어 울먹였다. [알아듣게 얘기해봐요, 아멜리아.] [난 정말이지, 궁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곳이 어떤지 모르죠? 더 젊은 여자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건, 항상 그래야 한다는 건......] [롤프에 대해서 말해줘요.] 헐떡거리는 아멜리아의 말에 짜증이 나 레오니가 언성을 높이며 강요했다. [난 그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롤프에게 있지도 않은 애를 가졌다고 속였어요.] 그녀는 처량한 시선으로 레오니를 쳐다보면서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애는 롤프의 애가 아니라 에바라드의 아이랍니다. 난 롤프가 당신에게 싫증나는 기간이 오래 걸릴 경우를 대비해서 아이를 가지려고 에바라드를 이용했어요. 난 롤프가 정말 그러리라 믿었어요. 그가 여기로 돌아와서도 당신을 찾으러 즉시 펄시윅으로 가지 않자, 당신에 대한 그의 사랑이 끝난 줄 알았고, 그래서 여기 머물기 위한 핑계로 아이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거예요.] 레오니는 계속 굳은 표정을 유지하면서, 반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멜리아의 뜻밖의 고백으로 롤프에 대한 사랑이 새롭게 타올라 레오니는 그에게로 달려가 껴안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말들이 얼마나 많은 걸 의미하는지, 아멜리아가 깨닫게 하고 싶진 않았다. 모든 고백을 털어놓고서도 두 여자 모두 어느 정도의 품위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화제를 재빨리 바꾸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레오니는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에바라드 경은 몹시 걱정하고 있어요. 바보같이, 그는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요.] [사랑이오?] 아멜리아가 씁슬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랑이 뭔데요? 내 첫남편도 날 사랑했어요--나와 결혼하기 전까지요. 그 뒤에는 딴 여자들한테만 흥미가 있었죠. 당신이 롤프와 결혼한 뒤에 그가 날 원하게 될 거라고 내가 왜 그토록 확신했을 것 같아요? 남자들은 아내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모든 남자가 다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아멜리아.] 아멜리아가 인정한다는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롤프는 확실히 당신에게 관심이 있더군요.] [그리고 아마 에바라드도 당신에게 관심을 가질 거예요, 당신이 그에게 기회를 준다면요. 그는 당신의 결점들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는 아이에 관해 알고 있나요?] [아니오. 그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 애가 롤프의 아이라고 생각하게 내버려두었어요. 계속 미루고 있었죠. 사실 난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왜 롤프와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 관해서는 그런 배려를 하지 않았냐고 레오니는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방금

아멜리아의 인간적인 모습에

그나마

용서하리란 생각에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그렇다면 에바라드가 이일에 과해 굳이 상세하게 알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럼 롤프는요?] [그에게 대해서라면 난 그헣게 너그럽지 못해요. 그에게 내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하세요.] [그렇지만 당신들 두 사람에게 내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를 알게 되면, 그는 날 줄일 거예요!] [안 그럴 거예요, 아멜리아. 그는 사실을 알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겠죠. 하지만 당신이 만약 그에게 말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당신을 여기다 내버려두고.....] [무정하군요, 레오니.] [그렇지 않아요. 난 단지 내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도 아닌 아이로 슬픔에 젖는 일을 막으려는 것뿐이에요.]♣

48 자그마한 소년은 한눈에 반할 정도로 무척 귀여웠다. 레오니는 아멜리아의 침실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순간에 그 애를 보았다. 롤프가 그 소년 곁에 서 있었다. 그 아이는 숱이 많은 검은 곱슬머리에다 아주 어두운 갈색 눈동자로, 그녀가 다가가자 그 애의


두눈이 수줍은 듯이 빛났다. 그 아이는 여덟 살로, 롤프를 꼭 빼닮았다. 그녀가 의심스런 시선으로 롤프를 쳐다보자 롤프가 멋쩍게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말하지, 이 애가 날 닮은 건 내 조카이기 때문이오.] 눈살을

찌푸리며

롤프는,

그녀를

아이에게

소개하고는-아이의

이름은

시몽

덤버트였다-한쪽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지난 며칠동안 저 애를 워렌 부인에게 보냈소. 저 애를 데리고 있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오. 그렇지만 이제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 그래서….] [그렇지만 당신은 저 애가 방문할 거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내 형이 죽었소, 그러니까 저애는 이곳을 단지 방문하러 온게 아니오. 나와 형 사이에 두터운 정이 있었던 건 결코 아니지만, 그건 전혀 상관없는 일이오.] 롤프가 퉁명스럽게 계속 말했다. [형수는 조카들의 앞날을 걱정하다가 날 찾아낸 거요, 형수는 내 형이 죽자 가스코뉴를 떠나 노르망디에 있는 친구에게로 가서 피신했소. 내가 근 한달 간 있었던 곳이 거기요, 레오니.]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랬군요…. 당신이 왜 펄시윅에 그토록 늦게 왔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그러니까 그 동안 내내 당신은 제가 펄시윅으로 간 것조차 몰랐던 거군요?]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까지는 몰랐소. 에바라드 경이 사람을 보냈지만 그들이 날 찾지 못했소. 형수는 걱정이 태산같아 마치 산송장이 다될 지경이었소.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 가스코뉴 주변의 강력한 영주들이 내형의 소유지를 강탈하려고 시도하면서 형수나 조카들을 억압하려 할까봐 형수는 내내 불안에 떨었소.]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나요?] 그 아이를 흘긋 쳐다보면서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오, 가스코뉴에 있는 가족 토지는 바로 엘리스 왕녀의 손에 들어 갔으니까 헨리 왕의 손에 들어간 거나 다름없지. 형수는 헨리를 후견인으로 신청하기만 하면 됐소.] [아니면 당신에게 연락을 취하 거나요.] [그래요. 그래, 난 사실 그 책임을 지는 것에 동의했소. 내 조카딸 셋은 엄마와 함께 가스코뉴로 돌려보냈지만 저 애는 잠시 동안 내가 맡기로 했소. 내 형은 저 애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어서 그 애는 너무 오랫동안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소.] [여기도 여자들이 있어요, 영주님.] 레오니는 생글생글 웃어가며 지분거렸다. 그러자 롤프는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난 저 애를 알고 싶소, 레오니. 반대하오?] 레오니는 발끝을 내려다 보며 미소를 감췄다. [물론 아니에요, 영주님.]


롤프는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뭣 때문에 그녀가 이렇게 변한 걸까? 바로 그날 아침까지도 화를 잘 냈던 그 여자는 어디로 간 거지? 너무도 나긋나긋하고 너무도 사근사근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걸?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계속 이었다. [난 이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가스코뉴로 보내 토지들을 감독하고, 형수가 재혼할 마음을 갖출 때까지 내 조카딸들을 돌보게 할 거요.] [피어스

경이

어떨까요?

여자들로

가득

가족을

관리하기에는

피어스

경이

이상적이에요. 어쩌면 그 미망인이 마음에 들어 결혼까지도 생각할지 몰라요.] [피어스가? 결혼을 생각해요? 절대 아니오!] [사람 일이란 결코 모르는 일이랍니다, 영주님. 그렇지만 이제, 부디. 시몽은 저한테 맡겨두고 아멜리아에게 가보세요.] 롤프는 느닷없이 아멜리아 얘기를 꺼내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곧 그녀에게 여길 떠나야 한다고 말할 거요. 내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할 필요없소. 레오니.] [그런

생각하지

않았어요,

영주님.

그런데

그녀가…

아파요.

며칠동안,

어쩌면

일주일동안은 누워 있어야 한다고 제가 주의를 줬어요.] 그가 놀라서 쳐다보자, 그녀는 그가 뭐라 할까봐 얼른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 가보세요, 영주님. 그녀는 당신과 얘기를 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얘기가 끝나면-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저에게로 오세요, 당신에게 할 얘기가 많으니까요.] 롤프는 너무 어리둥절해서 따질 엄두도 내지 않았다.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그녀는 생글거리며 지켜보았다. 레오니는 시몽과 함께 홀에 앉아, 그 애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그 애는 무척이나 수줍음을 타 거의 말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했지만, 그녀 자신이 너무 들떠 있어 몹시 힘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돌아온 롤프는 억제하기 힘들 만큼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레오니의 한쪽 팔을 붙들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무조건 그녀를 홀 밖으로 끌어내 정원으로 데려갔다. 그러고서 그녀를 놓아주고는 발 밑에 있는 민들레를 신경질적으로 툭 찼다. [당신이 이 정원만을 돌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이정원을 원망했는지 아오? 당신이 내 살림조차 경영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그래고 이곳에다가 시간을 허비한다는 아멜리아의 얘기에 난 기가 막혔소! 이 꼴 보기 싫은 식물들 위에다 내 종마를 풀어놓고 싶은 생각을 한 두 번 한게 아니오!] 마구 고함을 치며 날뛰는 롤프의 모습을 보며 레오니는 웃느라고 거의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만약 당신이 정말 그렇게 했다면, 영주님. 당신 종마는 몹시 앓았을 거예요.] 그는 씩씩거리며 레오니를 노려보았다.


[농담하지 마시오, 레오니. 내가 직접 할 수도 있는데. 내가 왜 당신에게 내 서기가 되어달라고 했겠소? 난 그게 당신이 그 외에 다른 건 다 거절했었으니까. 그리고 당신이 내집을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었다는 걸 아는 건 나에겐 더없이 중대한 사실이었을 텐데, 왜 그녀가 그 칭찬을 대신 받게 한 거요! 왜, 레오니, 왜?] [그래요, 당신은 그녀가 이곳을 정돈할 능력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 할 만큼 바보였어요.]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바보라구, 부인? 뭣 때문에 당신은 당신이 내 살림을 경영하는 걸 내가 원치 않을 거라는 그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게 된 거요?] [또 한 명의 바보 때문이지요.] [제기랄, 난 이 모든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단 말이오! 당신은 왜 한 번도 그녀가 당신에게 하던 그 터무니없는 말들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 당신이 나한테 얘기를 했더라면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드러났을 테고, 그랬으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에게 말했을 때, 당신이 내 말을 믿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저도 당신에게 같은 질문을 하겠어요, 당신도 나처럼 그녀의 터무니 없는 ���을 믿었잖아요.] [그건 다른 얘기요!] [그래요?]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망설이다가 한 손을 그의 가슴에 댔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예요, 영주님?] 그 사랑스런 두 눈동자를 바라보느라 그는 넋을 잃었다. [왜냐하면…왜냐하면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걸 드디어 믿으니까…. 아직 당신이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당신이 언제 그랬어요?] 그녀가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런던에서 그 밤에.] [당신은 취해 있었어요.] [그걸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취하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도 날 사랑할 수 있는지를 난 물었지, 하지만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건-그건 당신의 대답이오.] 기쁨이, 찬란한 기쁨의 물결이 가슴 하나 가득 밀려들었다. [그때 전 당신을 사랑하는 건 아주 쉬울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영주님.] [롤프.] 그는 그녀를 안으면서 반사적으로 고쳐잡았다. [롤프.]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다시 부르자 롤프는 모든 사랑과 온정으로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는 그녀를 안아올려 다시 홀을 지나 침실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모두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영주와 그 아내에 대해 뭐라고 수군거리는 걸 그만둘 때라는 사실을 모두들 느끼고 있었다. 롤프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 그녀를 방으로 데려가자, 그녀는 그가 얼마나 완고한 사람인가를-자신처럼-그리고 그가 얼마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사람인가를, 그러면서도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를 생각하면서, 그를 꼬옥 껴안고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아이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불화의 씨를 뿌렸던 그 어리석은 자존심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참이었다. 당분간은, 오로지 두 사람의 소중한 사랑만 생각하고 싶었고,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깊고도 열렬하게 그를 사랑하는지 온 마음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c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