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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로윈의 밤 -1--------------------------------------그레이디즈 백화점의 도자기, 유리 제품의 매장은 백화점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다이아나는 평상시와 같이 안경을 코허리에 걸치고는, 진열대에 진열되어 있는 도기 인형이며 유리 제품 등의 장식물을 바꾸어 진열하고 있었다. 그때, 후리후리한 키의 낯익은 남자가 이쪽을 향해 빠를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진열대 뒤에 몸을 굽혀 숨어 버릴까 하고도 생각했지만, 제이슨 데블레어의 눈은 마치 매의 눈처럼 날카로와서 도저히 속일 수가 없었다. 다이아나는 너무나 놀라 어지할 바를 몰랐고, 몸이 덜덜 떨렸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장식물이 미끄러져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다이아나는 놀라 숨이 막힐 것만 같이 되어 저도 모르게, "아아, 어쩌면 좋아……."라고 소리치고 말았다. "미스 스테이시, 어떻게 된 거요?" 매장의 주임이 달려와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조각들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늠름한 몸을 그레이의 신사복으로 감싼 제이슨으로부터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어렵쇼! 로열 돌턴이잖아! 변상해야 되겠는걸." 주임은 얼굴 가득 노기를 들러내며 말했다. 변상이라는 말이 다이아나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맴돌았다. 진열대 맞은 쪽에서 제이슨의 싸늘한, 위엄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제이슨은 진열대 위에 몇 장의 10파운드 짜리 지폐를 놓았다. 하지만, 주임은 즉시 대답했다. 󰡒아니, 값비싼 물건을 깨쯔렸을 경우, 종업원이 자신의 급료에서 변상하는 것이 우리 백화점의 방침이어서요.󰡓 󰡒그렇게 하면 일주일 동안 점심을 거르게 될 텐데요? 돈을 받아 둬요.󰡓 제이슨은 명령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고 , 그 말에 주임도 납득했다. 󰡒알겠습니다., 손님.󰡓 주임은 지폐를 세고는, 금전등록기에 집어넣었다. 그 싸늘한 금속음이, 다이아나의 신경을 몹시 자극했다. 󰡒미스 스테이시, 거기에 장대처럼 멀거니 서 있지 말고 빨리 손님의 상대를 하도록 해요.󰡓 주임의 목소리가 날아들었지만, 다이아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이슨이 다시 그녀의 인생에 힘찬 발걸음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당황하고 동요한 것이다. 제이슨이 눈앞을 딱 가로막고 서서 물그러미 응시하고 있었으므로, 다이아나는 떠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돌아가 줘요! 나의 일을랑 내버려 두고요!󰡑라고 진열대 맞은쪽에 서 있는 제이슨에게 말하고 싶었다. 제이슨의 집을 나오기 전에 이 말을 해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헤븐쇼어 마을,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는 화강암의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 그의 집은 새벽녘이면,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때문에 구름 위에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 세워진 것처멀 보였다. 다이아나가 떠나온 아침에도 그 집은 짙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다이아나는 정신없이 안개 속을 달려 빠져 나왔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역의 플랫폼에 서 있었다. 머리칼은 안개에 젖어 있었다. 기차에 타고 몇 시간 후에 런던에 요착한 다이아나는, 이 혼잡한 인파 속에서 몇 만 명이라는 여점원이나 직업여성들 틈에 섞여서 산다면, 제이슨에게 발견되는 일은 없으이라고 생각했다. 안심하고 있는 참인데 돌연 제이슨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날의 꺼림직한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호랑이 장식물을 수집하고 있는 계집아이가 있는 데, 당신 뒤의 선보내반드시 에 있는 , 거칠고 사나운 형상을 하고 수없는 호랑이를 보여주지 않겠소?󰡓 제이슨의 말에 다이아나는 잠자코 호랑이 장식물을 가지러 갔다. 매끄러운 선, 냉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호랑이 장식물을 제이슨에게 건네는 순간 다이아나는 다리에서 힘이 쑥 빠지면서 휘청했다. 제이슨은 마치 먹이를 발견한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눈을 다이아나에게로 돌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이거라면 기꺼이 받을 것 같군, 그러나 침대의 사이드테이블 위에 놓아두는,


어둠 속에서도 번쩍번쩍 빛나는 토파즈(topaz)의 눈을 가진 호랑이에는 미치지 못하했는데.󰡓 󰡒어째서 날 내버려 두지 않는 거예요? 더 이상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얼굴도 보고 싶지 않고,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요, 제발 돌아가요!󰡓다이아나의 얼굴은 백지방처멀 하얗고, 안경 너머에서 말끄러미 제이슨을 쏘아보고 있는 푸른 눈은 불꽃처멀 타오르고 있었다. 󰡒다이아나, 내가 온 것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알아. 그렇지만 핼로윈 축제의 밤의 일의 발단은 당신이었어, 당신은 인정하려고 들지 않겠지만 말이야.󰡓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다이아나는 점점 울화가 치밀어서, 손에 든 장식물을 무의식중에 꽉 움켜쥐고, 여차하면 제이슨을 겨냥하고 집어던질 참이었다.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 분하기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제이슨의 자신감을 산산이 부숴뜨리고 싶다……. 󰡒나라면, 값비싼 장식물을 집어던지거나 하진 않겠어, 자신만 곤란해질 뿐이니까 말이야.󰡓 󰡒빨리 돌아가세요……. 짓궂게 굴면 주임을 부르겠어요. 당신에겐 나를 지배할 권리는 없어요. 나는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지금은 자유의 몸이 됐어요.󰡓 다이아나는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다이아나, 당신은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나는 후견인으로서 줄곧 당신의 뒷바라지를 해왔으니까.󰡓 󰡒잘도 후견인이니 어쩌니 떠벌리는 군요.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성실한 인간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뻔뻔스러운 것도 유분수지. 난 무척 상처를 입고 있어요.󰡓 제이슨은 신경질적으로 콧방울을 실룩거렸다. 󰡒당신은 여자들의 하찮은 뒷공론 쪽을 믿고 있는 모양이군, 나의 말은 믿지 않고.󰡓 󰡒당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믿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 핼로윈 축제의 밤에 썼던 가면처럼요.󰡓 제이슨의 집을 떠난 지 2개월이 다 되어가지만, 다이아나는 그 핼로윈 축제의 밤의 파티에 대한 기억을 떨어버릴 수가 없었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이윽고 차의 엔진 소리마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와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모두들 돌아간 모양이고, 나는 여기에 머무를 수가 없어요. 당신도 나를 붙잡지는 않겠지요. 나는 여기를 떠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겠어요. 다른 여자들과 마내리반드시 가지로, 일하면서 자할하겠어요.󰡓 다이아나는 딱 부러지게 제이슨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 말에 제이슨은 대리석 조각처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다이아나의 어깨를 멍이 들 정도로 꽉 움켜 잡았다. 󰡒나는 당신의 후견인이야. 충분히 뒷바라지를 해주었어. 이 집에서 아무런 부자유 없이 살아왔잖아? 이집은 당신의 집이기도 하니까, 여기에 있도록 해.󰡓 󰡒싫어요!󰡓 다이아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꿈이 깨지고 지독한 상처를 입고 경멸을 당하고 만 지금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나가겠어요. 백화점에 취직하겠어요. 거기라면 활기가 넘쳐흐를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에서 일해 보고 싶어요.󰡓 󰡒바로 같은 말 하지마! 그렇게도 나의 집에 있는 것이 싫은가? 그렇지만, 진심이 아닐 테지? 백화점에서 일하는 것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될 여자나 하는 거야. 아무리 세상물정을 모르는 당신이라 하지만, 하루 온종일 서 있는 일을 동결할 줄은 몰랐는걸. 마치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느 가엾은 여주인공 같잖은가!󰡓 제이슨은 몹시 거친 말투로 말했다. 󰡒당신은 여자가 사회에 나가 일하는 것을 비뚤어진 눈으로 보고 있어요.󰡓 다이아나의 몸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가지도, 제이슨과는 노상 이렇게 옥신각신해 왔다. 하지만 제이슨은 언제나, 다이아나의 행복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라고 우기면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자립하고 싶어요. 기필코 해보일 생각이에요. 평생에


한번은 자신의 생각대로 해보고 싶어요. 당신이 하라는 대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구요.󰡓 제이슨은 찌푸린 얼굴로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이아나는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의 일. 그리고 그후 몇 년간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샹냥하기 그지없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처음 만나는 제이슨은 눈앞을 딱 가로막고 서 있는 마왕처럼 보여, 어린 다이아나는 독수리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비둘기 새끼처럼 잠시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던 것이다. 다이아나의 양친이 비행기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어머니 쪽으로 먼 친척이 되는 제이슨이 다이아나의 후견인이 되어 뒷바라지를 해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이아나는, 일용품이 들어 있는 슈트케이스 한개만을 달랑 들고 제이슨 데블레어의 커다란 저택에 온 것이다. 양친도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다이아나는 제이슨과 같은 부자는 본적이 없었다. 다이아나의 양친은 배우여서, 헐리우드나 유럽에서 영화에 출연하고 있었다. 인기스타라기보다는 성격배우였다.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다이아나는, 양친이 영화 배우라는 것을 동급생들에게 은근히 자랑스럽게 털어놓곤 했다. 미인인 어머니와는 하나도 닮은 데가 없는 딸이구나, 하는 말을 들어하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양녀가 아니냐는 말을 들은적도 있었고 , 개구멍받이라고 조소를 받은 적도 했었다. 그녀 자신, 거울을 기웃거릴 때마다, 커다랗고 둥근 안경을 걸치면 올빼미가 영락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집에 오고 나서부터는 , 이집에는 올빼미와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남몰래 쓴웃음을 짓곤 했다. 제이슨의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위험을 내포한 동작,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분위기 탓이다. 데블레어 가에 처음 오던 날, 현관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커다란 창을 배경으로 그의 존재감에 압도되고 있었다. 그 핼로윈 축제의 밤에 제이슨은 󰡐집을 떠나지 말아.󰡑라고 말했지만, 다이아나는 이미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해서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어머니날, 핼로윈 축제 --이렇게 연 3회 파티를 여는 것이 데블레어 가의 관습이었다. 그 해의 핼로윈 파티에는 제이슨의 조모 유품인 시골처녀의 의상을 입기로 되어 있어 다이아나는 즐거운 기대로 가슴 설레고 있었다. 핼로윈 축제에는 마법사가 등움직이반드시 해 일종의 독특한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이루게 되므로 더 한층 가슴이 설레었다. 그날 밤, 데블레어 가에는 많은 손님들이 모여 있었다. 큰 홀에서는, 반짝반짝 빛나는 샹들리에의 불빛아래에서, 제각기의 취미를 살린 의상을 걸치고 가면을 쓴 커플들이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가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제이슨뿐이었다. 그는 주름 장식이 있는 하얀 드레스셔츠에 고급 슈트를 몸에 걸치고, 여기저기로 눈길을 돌리면서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느때와는 달리 특별히 화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이유는, 이 자리에서 제이슨과 다이아나의 약혼 발표가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얼마 동안 둘만의 비밀로 하고 싶으니까 발표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졸라 댔지만, 제이슨은 웃어넘기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지? 여자란 대개, 결혼이 결정되면 남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법인데……. 나와의 결혼을 망설이고 있는 건가?󰡓 라고 제이슨이 물었을 때, 다이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어째서 그가 나를 택한 것일까,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이슨의 입에서 한번도 󰡐사랑하고 있어󰡑라는 말이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으면 편안해.󰡑라고 말했을 뿐 이었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다이아나는 살짝 파티장을 빠져 나와 테라스에서 샴페인 글라스를 한손에 들고 산들바람을 쐬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볼을 간질였다. 그때,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의 약혼 반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몸의 열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버리게 만드는 대화가 들려왔다. 활짝 열어아젖힌 응접실 창 맞은쪽에서 두 여자가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고 말고요. 제이슨은, 젊은 남자들은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는 그 가엾은 아가씨를


거두어 준 거예요. 데블레어 가의 사람으로서 몇 년이나 살았고 일류대학에도 나녔으면서 그 아가씨는 촌티를 벗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요, 안경을 걸친 <고아 어니>같은 아가씨지요. 그런데도 제이슨은 최고의 파트너를 발견했느니 어쩌니하다니……. 어째서 콘택트 렌즈를 끼지 않을까. 휠씬 보기에 좋을 텐데.󰡓 한껏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걸맞지 않는 커플이에요. 약혼 발표를 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구요.󰡓 󰡒틀림없이 제이슨은 책임을 느끼고 있는 거예요. 젊은 남자들이 다이아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을 걱정한 거예요. 어쨌든 두 사람은 후견인과 피후견인인 이상의 관계라는 소문도 이제 이것으로 없어지했군요. 안 그래요?󰡓 이어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이윽고는 사라졌다. 다이아나는 멍하니 그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가슴이 바싹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모든 사람에게서 축하의 인사를 받았지만, 모두가 건성으로 말했을 뿐 이야. 두 여자의 대화는 다이아나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손님들이 다 간 것은 한밤중인 열 두시가 약간 지났을 무렵이었다. 드디어 집안은 조용해 졌고, 주방에서 접시를 씻고 있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폭이 넓은 계단을 올라가, 제이슨의 조상 중의 한 사람인 레이디 그레이스의 이믈이 붙여진 건물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 건물에는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다리가 없는 레이디 그레이스의 망령이 출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이아나는 손을 뒤로 해서 조용히 문을 닫자, 참나무재의 옷장에서 옷가지를 껴냈다. 그러고는 하나씩 개켜서 여행가방에 넣었다. 점더 가져가고 싶은 게 있긴 했지만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캐시미어 스웨터, 맞춤인 진바지, 올드레스, 실크 블라우스, 승마복, 테니스웨어, 요트용 쇼트팬츠- 모두 화로츠 백화점에서 산 고급품이었지만 두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나 처럼 매력이 없는 여자에게 이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담, 하고 다이아나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이슨은 언제나 좋은 옷을 몸에 걸치도록 하라고 했다. 다이아나는 약손가락에 꼭 맞게 끼여 있는 반지를 난폭하게 잡아 뺐다. 다이아몬드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여행가방의 지퍼를 막 잠그려는데, 뭄을 세차게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다이아나는 짐을 꾸리는 데 여념이 없어서 제이슨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제이슨의 모습이 퍼뜩 머리에 떠올라서, 그녀는 문에 눈길을 준 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렸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사이에 활짝 문이 열리면서 제이슨이 들어왔다. 파티 때의 슈트 차림 그대로였으며, 입에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나와 함께 있어 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다가 여행가방을 보고는 제이슨은 감짝 놀라 커다란 목소리를 냈다. 󰡒다이아나,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 난……나가겠어요.󰡓 󰡒뭐라고?󰡓제이슨은 침대 옆까지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스탠드의 불빛을 받으며 서 있는 다이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집을 나가겠어요.󰡓 다이아나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바닥에 얹었다. 󰡒이것 돌려드리겠어요, 당신과는 도저히 결혼 할 수 없어요.󰡓 󰡒어째서지?󰡓 󰡒어쨌든요.󰡓 다이아나는 겁을 먹으면서, 제이슨의 상의 호주머니에 반지를 떨어뜨리고는 뒷걸음질쳤다. 󰡒당신은 나를 올드미스로 만들지 않으려고 결혼해 주려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오늘 밤 파티에 모였던 사람들, 나를 조소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안경을 걸친 촌스러운 나를 측은하게 생각해서 결혼해 주려는 것이라느니, 오랫동안 함께 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미 이상한 관계가 된 것이라느니 하면서 수군거리고 있었어요.󰡓 다이아나는 한숨 돌리고 나서 다시 계속했다. 󰡒당신과 같이 지위가 있는 사람은, 나 같은 평범한 여자와의 소문에도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어쩌자고 또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제이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파티에 참석한 여자들이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뒷공론을 하는 것을 들었어요…….


너무해요…… 그렇지만, 사실이니까 하는 수 없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이상,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수 없어요…….󰡓 󰡒집을 나간다는 말을 그만둬요! 진심으로, 내가 잠자코 당신을 보내 주리라고 생각했나? 어처구니없군! 여기는 당신의 집이잖아?󰡓 󰡒나를 붙잡지 말아요. 택시를 부르겠어요.󰡓 수화기를 집어들려고 하는 다이아나의 손을, 제이슨은 날쌔게 움켜잡았다. 180센티가 훨씬 넘은 장신의 제이슨이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 다이아나는 자신의 인생은 모두 이 남자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을 싫든 좋든 뚜렷이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제이슨은 한 손으로 다이아나의 손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안경을 벗기고는 블루그레이의 눈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제정신으로 여자들의 고십을 믿고 있는 건가? 내가 당시놔ㄱ 결혼하는 것은 당신을 올드미스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느니 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서 라느니 하는 말을? 그건 당치도 않는 말이야!󰡓 󰡒어쨌든 난 바늘 방석에 않아 있는 기분이었어요. 부탁이나까 나를 붙잡지 말아요!󰡓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손에서 빠져 나오려고 바둥거렸다. 󰡒다이아나, 자아, 여행가방 안의 것을 꺼내 옷장에 넣도록 해, 그리고 이를 닦고 자도록 해요.󰡓 󰡒그럼 내일 아침에 떠나겠어요.󰡓 󰡒도대체 어디로 갈 셈이지?󰡓 󰡒다른 여자들처멀 일자리를 찾겠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다이아나는 제이슨이 분노를 푹발시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수 있었다. 성급한 기질은 데블레어 가의 내림으로, 이 지방에서는 너무도 유명했다. 제이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이아나를 내려다 보는 제이슨의 눈이 번쩍 빛났지만, 그 눈은 이내 짙은 속눈썹에 가려지고 말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유럽에 가지 않겠어? 내일 수속을 할 거야. 먼저 프랑스로 갔다가 베니스로 가자구, 틀림없이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고 생각해.󰡓(이런 멋있는 남자가 가자고 하면 당장 따라 나설텐데.....후후.)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마음을 돌리려고 이썼다.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거요? 난 차라리 백화점에서 일하는 게 좋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다이아나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백화점에는 지독한 말을 태연하게 지껄여 대는 여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지. 런던에서는 1파운드의 돈을 벌기 위해서 남을 밀어 젖히고 일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도시 사람들은 그런 일에 익숙해 있지만, 당신에겐 무리야. 사무실이나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아니야. 잘 생각해 보도록 해. 그러면 이해가 될 거야.󰡓 󰡒그럼, 거역하지 말고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라는 말인가요?󰡓 데블레어 가의 사유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바다의 내음이 실려왔다. 󰡒제이슨, 당신에겐 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여자가 있을 거예요, 어째서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해서 남의 소문거리가 되려는 거지요?󰡓 󰡒자꾸 이러면 정말 화낼 거야……. 자아, 가방 안의 것을 꺼내 서랍속에 넣도록 해! 지금 당장!󰡓 거친 말투로 명령하는 제이슨의 말에 다이아나는 겁을 집어 먹었다. 몸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지만 다이아나는 허세를 부리면서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처리하면 되잖아요? 빨리 처리하라구요!󰡓 제이슨은 가방을 발로 걷어차서 안에 들어 있는 옷가지를 그 언저리에 마구 흩뜨려 놓았다.. 󰡒자아, 정리하라구 ! 지금 당장 !󰡓 위압적인 명령에 다이아나는 거역할 수가 없었다. 울분을 꾹 참고 옷가지를 하나씩 집어들자, 그것을 아무렇게나 옷장 안에 쑤셔박고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닫았다. 다이아나로서는 한껏 오기를 부린 반항이었다. 옷장의 거울에 비친 적의에 가득 찬


자신의 얼굴, 저택을 감싸고 있는 어둠, 아래층의 음산한 정적, 저기 스탠드의 맞은쪽 벽에 천장까지 닿을 것만 같이 길게 뻗은 제이슨의 그림자 ---- 다이아나는 제이슨과 단둘이 있는 것이 무서워졌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나가 줘요!󰡓 다이아나는 그것으로 제이슨이 나가 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럼 다이아나, 어린아이 같은 짓은 그만둬. 다시는 집을 나간다는 말을 하지 말아. 약속하는 거지?󰡓 󰡒약속은 할 수 없어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일단 약혼반지를 돌려주었으니까, 이제는 하라는 대로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제이슨의 날카로운 시선은 다이아나에게 못박힌 채였다. 󰡒당신이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까지 나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어.󰡓 󰡒나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학교에 보내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엇이든지 당신의 말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난 일해 보일 테에요. 매월 받는 급료에서 그동안의 양육비를 갚겠어요.󰡓 󰡒끈덕진 아이로군!󰡓 제이슨은 당장에라도 분노를 푹발시킬 것만 같았다.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어린아이인가요 그렇지 않으면 어른? 어느 쪽으로든 정해 주기 바라요. 정말 교활하군요. 자기 좋을 대로 하려고 드는 군요. 결국 당신은 나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예요! 이 집의 가구와 마찬가지로, 나를 당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데 내가 의지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였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요?󰡓 다이아나는 턱을 흠뻑 젖어서 속옷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며 입었던 시골 처녀의 의상도, 이제는 빨리 섭어던지고 싶었다. 󰡒미술관 같은 집에 수없는 것은 이제 넌더리가 나요. 입는 것, 행동하는 것, 심지어 생각하는 것까지도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폭군 밑에서 사는 것은 이젠 지긋지긋해요!󰡓 󰡒생각을 해보고 말하는 건가?󰡓 제이슨의 얼굴에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폭군은 사람을 노예처멀 취급하지. 내가 지금까지 당신을 그런 식으로 다룬 적이 있었나? 지금까지 내가 당신에게 한 일은 모두 당신의 행복을 생각한 끝에 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좋은 학교에도 보내준 거야.󰡓 󰡒그래요, 당신은 나의 친구까지 골라 주었어요. 당신은 내가 시시 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했어요. 경망스럽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가씨라는 것이 이유였지요. 그렇지만 나는, 시시는 명랑하고 늘 웃는 얼굴로 대하는 아가끼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놀러 데려가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여기에 꼭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걸핏하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나를 데려가고 싶어하는데, 그런 필요가 없어요! 여기가 바로 미술관이니까요!󰡓 󰡒잘도 지껄이고 있군.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런지도 모르지요.󰡓 다이아나는 자포자기적인 마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신은 무엇이나 소유물 취급을 하고 있으니까, 인형처멀 나를 유리 케이스 속에 집어 넣고 싶을 거예요. 어차피, 의지를 갖고 있고 피가 통하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요? 벽창호는 바로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구요!󰡓 󰡒무슨 말버릇이 그따위야!󰡓 무서운 얼굴을 한 제이슨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당황해서 뒷걸음질치다가 발이 걸려 비틀거리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제이슨은 웅크리고 넘어진 다이아나를 안아들자, 침대에 내동댕이쳤다. 사이드테이블 위의 스탠드의 불빛이 공단 침대커버를 비추고 있었다. 그 불빛을 통해서 본 제이슨의 얼굴은 지금까지 본 적도 없을 만큼 무시무시했다. 다이아나는 도망치려 했다. 언제였던가, 암말인 그라스호퍼를 타고 울타리를 점프하려다가 말과 함께 도랑에 처박힌 적이 있었다. 다이아나가 말 밑에 깔려서 두 시간이나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의 제이슨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때 그는 부상을 당한 그라스호퍼를 수의에게 데려갔으며 폐렴에 걸린 다이아나를 정성껏 간호해 주었었다. 제이슨이 그의 애미인 문라이트에 다이아나를 태워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을 때, 다이아나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불안한 마음은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때 진흙투성이가 된 다이아나를 다정하게 정성껏 돌봐주었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달려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제이슨은 무쇠같이 억센 손으로 다이아나를 내리누리면서 놓아줄 만도 한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데블레어 가의 성급하고 발끈하는 기질을 이어받은 제이슨 역시 감정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다이아나는 제이슨을 알았다. 다이아나를 양육해 준 후견인으로서가 아니라 다이아나를 자기 것으로 만든 남자로서의 제이슨을....... 제이슨은 도기 호랑이 장식물을 사자, 선물용으로 포장해 달래서 들고 떠나갔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가 영원히 다이아나 앞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었다. 문을 기세좋게 열고는 시원시원한 걸음걸이로 나가는 제이슨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이아나는 후유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멸하듯이 한껏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두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태도는 분명히 밝힌 셈이다. 그것이 제이슨에게 충분히 전해졌기를 바랄 뿐 이다. 이윽고 하루의 일과가 끝났다. 그레이디즈 백화점에는 종업원을 위한 숙박 시설이 있었으며, 많은 여점원들이 그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런던은 집세가 너무 비싸서, 자활하고 있는 여자로서 아파트를 빈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숙사에 있으면 도시 특유의 범죄에 부닥뜨릴 걱정도 없다. 높아지는 실업률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임금을 받은 사람을 습격하기도 하고 도둑질을 하거나 위해를 가하는 사건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방을 빈다 해도 직장에 나간 사이에 도둑이 들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방에 있을 때라도 이상한 남자가 침입해 오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것이 싫어서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백화점에서도 가깝고, 일이 끝나면 걸어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해가 짧은 겨울 동안은 버스를 타든지 택시로 돌아가는 게 좋다고 동료 여점원한테서 충고를 그렇다고 듣고 있었다. 기숙사 가까이까지 갔을 때, 다이아나는 한 대의 차가 뒤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길이라도 물어 보려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흘끗 눈길을 주니, 운전석에 제이슨이 앉아 있었다. 다이아나는 심장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가 2,30미터 앞에서 멈췄을 때, 다이아나는 홱 등을 돌리자 도망쳤다. 그렇지만 세 발짝도 못 가서, 차에서 내려 쫓아온 제이슨에게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함께 가. 할 이야기가 있어.󰡓 󰡒이야기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다이아나는 뒷걸음을 쳤다. 그날 밤 제이슨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가슴이 꽉 죄어들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면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팔을 움켜잡고 있는 제이슨의 손을 떨쳐버릴 힘도 기력도 없어 그가 끄는 대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나이트브리지 호텔의 칵테일라운지로 데려가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브랜디를 주문했다. 󰡒이거라도 마시는게 좋겠어.󰡓라고 말하면서 제이슨은 브랜디글라스를 들어 다이아나 앞에 놓았다. 󰡒자아, 마셔요.󰡓그는 재촉하듯 말했다. 라운지 안은 어둑어둑했다. 󰡒어떻게 내가 있는 데를 알았나요?󰡓 다이아나는 글라스를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제이슨은 슬쩍 다이아나의 얼굴에 눈길을 주며 안색을 살피고 나서 입을 열었다. 󰡒소거법(消去法)에 따랐지. 당신은 백화점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래서 거기서부터 조사를 한거야. 가명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거기에도 주의를 기울였지. 그레이디즈 백화점에 문의하니 최근에 입사한 점원은 미스 스테이시뿐이라고 하더군. 당신 어머니의 이름이 실비아 스테이시니 당신이라는 걸 알았지. 취직을 때 가명을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사기행위야. 법률 위반이라고!󰡓 다이아나는 긴장한 나머니 몸이 굳어져, 입에 머금은 브랜디를 꿀꺽 삼켰다. 󰡒나를 붙잡아 두어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거군요, 당신은.󰡓 라운지 안을 둘러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즐거운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쌍쌍이나, 남의 눈은


아랑곳없이 손을 꼭 마주잡고 있는 연인들뿐이었다. 어쩐지 견뎌낼 수 없는 느낌이었다. 󰡒당신, 안색이 나쁜걸. 브랜디를 좀더 마시도록 해요.󰡓 제이슨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젠 나에 대해서 상관하지 말아 줘요.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두지 않나요?󰡓 󰡒열 살 때였지, 당신이 내 집에 온 것은. 그 이래 친부모 같이 돌보아 온 나로서, 당신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것 당연하지. 앞으로도 내내 그럴 테고.󰡓 󰡒그럴 수는 없어요! 나는 이미 스무 살이 넘은, 어른이 다 된 어엿한 여자인걸요.󰡓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다이아나는 뭔가에 의지하고 싶은 기분으로 브랜디에 손을 뻗었다. 󰡒당신은 고집장이로군.󰡓 라고 말 하는 제이슨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함축성이 있는 것처멀 느껴졌으나,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수 없어서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얼굴을 바로보았다. 그렇지만 그 단정한 얼굴 뒤에 감추어진 속마음은 조금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 브랜디를 다 마시고 나면 돌아가요. 나에겐 나의 생활이 있어요. 당신에게 간섭당하고 싶지 않아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제이슨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 짙은 눈썹, 검은 눈동자----그 득의만면하고 기품이 있는 용모에는 수심이 깃들여 있었다. 라이트그레이의 플란넬 슈트, 칼라와 커프스가 흰, 그레이의 셔츠 ----언제나 그렇듯이 흠잡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복장이다.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백화점에서, 심술궂은 주임 밑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라는 건가?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걸. 명약관화한 일 아닌가?󰡓 󰡒당신에게 명령받기보다는 그 주임에게 명령받은 편이 차라리 낫지요.󰡓 다이아나는 비웃듯이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본심은 아니겠지?󰡓제이슨의 턱 언저리가 꿈틀하고 움직인 것은 다이아나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젠 일하는 데도 익숙해져서, 즐거워요. 하루 온종일 서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늘 아침 백화점에 갔을 때는 다리가 휘청거린 것처럼 보였는데…….󰡓 󰡒아, 그건요……당신이 느닷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감짝 놀라서 그랬던 것뿐이에요.󰡓 다이아나는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나를 찾으러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요. 특히, 당신은 그날 밤, 원하고 있던 것을 가졌으니까요.󰡓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다이아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후유 하고 제이슨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한 말이 그의 가슴을 푹 찔렀으면 좋으련만, 하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당신은 나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나의 집에 처음 왔을때부터, 당신은 나와 일생을 함께해야 할 운명이었던 거야. 당신은 제복을 입고, 둥근 모자를 쓰고, 현관에 서서 슬픈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 󰡒핼로윈 축제의 밤의 나에 대해서도 생각하세요.󰡓 이 정도의 말로 불사신인 제이슨이 상처입을 리 없겠지만, 다이아나는 싸늘한 말을 내뱉음으로써 고소한 여운 맛보았다. 󰡒인간이란 간혹 이성을 잃을 때도 있는 거요. 그날밤, 당신도 그랬잖소……. 감정에 휩쓸릴 경우도 있는 거지.󰡓 제이슨의 얼굴은 다이아나에게로 향해져 있었지만, 눈은 먼데를 바라보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을 나누었던 그 행복한 순간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다이아나가 제이슨의 얼굴에 낸 손톱 자국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마음에 새겨진 추억은 지울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다이아나도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만일 사과할 생각으로 나를 찾고 있었다면,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뜨거워진 몸과는 반대로 얼음처럼 싸늘했다. 󰡒당신을 찾은 것은 결혼하기 위해서야, 아직 약혼이 깨진 것은 아니니까.󰡓 제이슨의 목소리를 작았고, 아무런 감정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결혼?󰡓다이아나의 얼굴에는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내가 당신과 결혼할 거라고 제정신으로 생각하고 있나요? 난 당신을 경멸하고 있어요. 정말 그것을 모르나요?󰡓 󰡒속죄를 하겠어.󰡓제이슨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고 억양이 없었다. 은행 합병 계약의


수정안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어조였다. 󰡒나더러 집에 돌아가 달라는 건가요? 나를 다시 당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속셈인가요? 당신은 젊은 나이에 아버님의 뒤를 이어 은행장이 되어, 남을 지배해 온 사람이에요. 속죄하다니, 당신답지 않아요?󰡓 󰡒우린 둘 다 일찍 양친을 여의었지.󰡓 제이슨은 다이아나에게 양친의 일을 상기시켰다. 󰡒재력과 권력에 둘러싸여 대대로 은행가인 가문에 태어난 당신과 달리, 나는 마냥 유머스런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지요. 당신의 어머님은 아버님보다 훨씬 젊었기 때문에, 따스한 이해도 받지 못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태어나고부터는 싸움을 하지 않게 된 대신 어머님은 아버님에게 등을 돌린 것 같더군요. 묘소를 참배했을 때 보니, 23세에 돌아가셨다구요…….󰡓 󰡒행복하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너무 심하잖아.󰡓목소리는 거칠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분노가 넘쳐 있었다. 󰡒어머나, 나에게 심한 말을 하게 만든 것은 당신이에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건 당신답지 않아. 우선, 당신은 그런 차가운 말에 걸맞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거든.󰡓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경이 크게 보일 정도로 자그마한 코, 도툼한 아랫입술은 관능적인지는 모르지만 , 공교롭게도 금발은 아니었고, 눈은 블루와 그레이가 뒤섞인 빛깔이었다. 갑자기, 제이슨이 테이블 너머로 몸을 내밀며 다이아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안색이 나쁜걸. 일이 힘든가,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괜찮아?󰡓 󰡒모두 제대로 잘 하고 있어요.󰡓 다이아나는 , 빤히 들여다보며 응시하고 있는 제이슨의 얼굴을 밀어젖히기라도 하려는 듯이 허세를 부리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다이아나는 그가 자기 마음속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상치가 않아, 다이아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해 주지 않겠어? 당신은 말할 의무가 있어.󰡓 명령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의무 따윈 없어요! 우리 사이는 백지로 돌아갔으니까요. 대차관계는 없다구요.󰡓 다이아나는 스스로도 감짝 놀랄 정도로 냉정했다. 󰡒백지로 돌릴 수는 없어. 우리가 핼로윈 파티의 밤의 일을 잊어버릴 수 없는 동안은 무리야. 나는 자신이 몸쓸 인간임을 이번 일로 깨닫게 되었어 당신이 떠나 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에게서 도망친 거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어……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고 말았지. 집안을 샅샅이 찾아 돌아다녔지만, 흔적도 없었고……. 그리고 그날 밤의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지. 잊으려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분명하게 생각이 나더군. 틀림없이 우리 두 사람은 운명의 끄나불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군요. 우스꽝스럽지 않아요? 나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던 거예요. 그런 식으로 나에게 벌을 준 걸 테지오?󰡓 󰡒벌이라니?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제이슨의 단정한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물론이에요. 나는 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이아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고, 속눈썹이 촉촉히 젖었다. 그녀는 제이슨에게 얼굴을 돌리고 복받치는 오열을 억눌렸다. 그 얼굴은 몹시 창백하고 애처로왔다. 󰡒혼자 있게 해줘요, 부탁이니까.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말아요. 가만히 내버려 둬 줘요.󰡓라고 다이아나는 목멘 소리로 애원했다. 󰡒나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아. 겨우 당신을 찾아냈는데! 자아,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당신이 싫다고 해도 억지로라도 데리고 돌아갈 테요. 전처멀 그 집에서 살도록 합시다.󰡓 󰡒설마,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다이아나는 볼을 타고 흘러 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제이슨에게 눈물을 보인 것이 분했다. 이제야말로 마음을 강하게 먹고 겨우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는데, 하고 생각하니 자신이 비참하게 생각되었다. 󰡒나를 끌고 갈 수는 없을 거예요!󰡓 제이슨은 숨을 죽였다.


󰡒지금 당신의 기분이 복잡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집은 당신이 살아야 할 집이야.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 파티의 밤과 마찬가지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인가요? 그렇지요?󰡓 그날 밤 받은 모욕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제이슨의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혀서 이 가슴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그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이슨은 가죽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긴 속눈썹 밑으로 말끄러미 다이아나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칵테일라운지가 점점 붐비면서, 여기저기에서 즐거운 듯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이아나만이, 다시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남자와 마주앉아, 주위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맛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줘야 당신은 그날 밤의 기억을 잊어 버리겠어?󰡓 󰡒당신이 내 앞에서 종적을 감추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잊어버릴 수 있을 거예요.󰡓 󰡒어수선한 런던에 당신을 혼자 있게 그냥 놔둘 수는 없어.󰡒 󰡒어수선하다구요? 그렇지 않아요. 󰡓다이아나는 시선을 제이슨의 손으로 옮겼다. 그 믿음직한 남자다운 손을 보고 있노라니, 핼로윈 축제의 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제이슨은 미간을 모으면서, 다이아나의 얼굴로부터 몸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이아나……아기를 가진 거지, 그렇지?󰡓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 말은 다이아나에게 있어서 커다란 타격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쇠붙이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날쌔게 일어나 나가려 했으나 제이슨에게 손을 붙잡혔고, 그는 뼈가 으스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꽉 죄어왔다. 󰡒놓으세요!󰡓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 다이아나는 이미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게 되었다. 다리가 휘청거려서, 무리하게 걸으려고 한다면 출입구까지 가지도 못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손을 잡은 채, 시선을 얼굴에 못박고 있었다. 그는 다이아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다이아나, 분명하게 말해 봐. 난 알 권리가 있어.󰡓 󰡒없어요!󰡓 다이아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물론 나의 아이겠지? 그렇다면 알 권리가 있는 거요. 자아, 분명히 대답해 줘.󰡓 󰡒그럴까요? 나에 대해서는 걱정해 주지 않아도 좋아요. 지금은 옛날과는 달라요. 원하지 않는 아이는 낳지 않아도 되는 시대인걸요. 그리고, 나는 벌써 결심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 믿어지지가 않는 군. 아이를 살해하는 짓1이라는 것을 몰라? 그리고, 내가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줄 알아?󰡓 󰡒어쩔 수 없어요.󰡓 다이아나는 차갑게 말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얼어붙은듯 싸늘하게 긴장되었고 , 불안과 비참한 기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바보로군! 1백 퍼센트 나와 관계가 있는 일이잖아?󰡓 제이슨은 싸늘한 다이아나의 손을 끌어당기자 꼭 쥐었다. 억세고 커다란 따뜻한 손에 감싸여 있는데도 온기는 전해져 오지 않았다. 얼어붙은 마음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던가. 평생 그를 용서 할 수 없어. 󰡒다이아나, 당신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우리 두사람은 이미 부부가 되어 있을 거야. 그렇지?󰡓 제이슨은 자못 다정하게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분명히 얘기해 줘요, 속이 시원하게끔요. 당신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어째서 그렇게 명령하고 싶어하나요? 오만한 사람! 당신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나는 진정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설마, 내가 예스라고 말하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아내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다이아나는 경멸하듯이 말했다. 󰡒인간이니까, 때로는 화가 나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 말해 둘것은, 내가 지금까지 위한 행동은 모두 당신에게 명령한다고 말하지만, 당신이 후회하지 않도록,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그런 거야. 그것은 믿어


주기 바라.󰡓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결혼만 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당장 수속을 하겠어.󰡓 󰡒당치도 않아요!󰡓 다이아나는 고개를 가로줄이고는 턱을 쑥 내밀었다. 󰡒결혼한다면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되겠지만, 나는 그렇게 간단히 꺾이지는 않는다구요! 우리의 결혼은 편의상의 결혼이 될 것이고, 마음에도 없으면서 잘 어울리는 부부 역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될 거예요. 그러다 보면 나는 자연히, 고분고분하고 말대꾸도 안 하는 아내로 길들여지고 말겠지요. 어쨌든, 발랄한 청년이 나타나 나를 데려가는 일은 있을 것 같지 않고, 설사 있다 해도 당신이 금방 도로 데려올 테니까. 나의 꿈은 모두 깨져 버리고 말았어요. 당신이 취한 행동은 모두 나의 행복을 생각해서 한 것이라지만, 내겐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당신은 남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잖아요?󰡓 긴 속눈썹 속의 제이슨의 눈에 침울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겨우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 나선 거야. 그것은 이해하겠지?󰡓 󰡒고양이에 먹이를 주거나 잠자리를 만들어 주거나, 지붕이 새지 않는가 걱정하거나 하는 것은 누구든 할수 있어요. 그렇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 감정이에요. 당신은 굴욕을 참으면서까지 감정을 우선할 사람은 아닌걸요. 그렇게 한다면 프라이드가 손상을 입어서, 나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도 없게 될 테니까요.󰡓 󰡒그런가? 당신은 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제이슨은 한껏 빈정대며 말했지만, 볼이 움푹 꺼지고 눈 언저리가 거무스름해진 다이아나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는 걱정스런 빛이 감돌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의 응시를 받는 것이 싫었다. 󰡒언젠가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타날 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제이슨은 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을 테지요? 당신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에겐 젊은 남자를 끌 만한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그렇다면, 이 세상 여자들은 모두 결혼을 포기해야 될 거야. 그보다, 당신은 어째서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수다장이 중년 여자가 한 말에 대해 그렇게 마음을 쓰지?󰡓 󰡒우리의 결혼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무슨 뜻이지?󰡓 󰡒미술관으로도 꾸며도 좋을 정도로 훌륭한 미술품을 집안에 장식해 주는 것이 취미인 당신이니만큼, 피앙세도 거기에 어울리는 여자를 택하리라고 누구나 다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를 택했으니 모두들 실망했을 거예요. 어차피 나는, 프랑스 화가 모네의 연꽃과 드가의 무희와 나란히 늘어놓는다면 올빼미가 영락없는 걸요.󰡓 󰡒그만둬, 다이아나.󰡓 제이슨은 다시 몸을 앞으로 내밀고 다이아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당신은 우리 두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걸 모르나?󰡓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구요! 농담 마세요!󰡓다이아나는 무리하게 웃어 보였다. 󰡒당신이 그처럼 괴로와 할 줄이야…….󰡓 제이슨은 말을 중도에서 멈추었다. 후회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다이아나가 이해해 줄까 하고 말을 찾았지만 좀처럼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간에, 나와 결혼한다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소문거리와도 결혼하는 것이 되니까, 꺼림칙하게 생각하면 한이 없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당신과 내가 잘 지낼 수 있느냐 어떠냐 일 테지. 내가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다만…….󰡓 󰡒두려워한다구요? 당신답지 않군요. 피후견인을 임신시킨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건가요?󰡓 다이아나는 똑바로 제이슨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한 말투는 삼가 주기 바라.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니잖아…….󰡓 󰡒이 아이는 폭력으로 생긴 아이예요.󰡓 󰡒다이아나!󰡓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은 언제나 자신의 방법을 남에게 강요하고, 갖고 싶은 것은 뭐든 손아귀에 넣어왔어요. 이번의 일만 해도 그래요.󰡓


󰡒난 언제나 당신의 행복을 생각해서 행동해 왔어.󰡓 󰡒이것도?󰡓라고 말하며 다이아나는 자신의 배를 눌러다 󰡒이것이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구요? 당신은 언제나 자신만만하군요. 반지를 열개 스무 개 갖다 바쳐도 나의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어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아무도 바꿀 수 없어요, 당신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지만. 당신은 나의 인격을 무시해 온 거예요. 그런 당신을 난 좋아할 수도 존경할 수도 없어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무슨 말을 해도 좋아. 그렇지만 당신은 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거야. 나는 아이를 원하고 있어. 낳아줘, 다이아나. 제발 부탁이니 생각을 고쳐 줘. 우리 두 사람의 피를 이어 받은 아이의 생명을 끊는 짓을 한다면, 난 살아갈 기력을 잃게 되고 말 거야. 그러한 짓을 하겠다면 당신을 탑에 유폐시키고 말겠어.󰡓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얼굴 표정이며 어조로,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수 있었다. 󰡒제이슨, 우린 20세기에 살고 있어요. 탑에 나를 가두다니, 그런 일은 할 수 없어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우스꽝스럽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생각인걸.󰡓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로 소유물 취급을 할 생각이겠지요?󰡓 󰡒아이에게 애정을 쏟고, 사는 보람으로 삼고 싶은 거요.󰡓 󰡒당신이 애정 운운하다니!󰡓 다이아나의 야유에 가득 찬 말에, 제이슨은 분하다는 듯이 이를 악물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해도 좋아. 아무리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아이는 꼭 갖고 싶어.󰡓 언젠가 제이슨은,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랙터의 커다란 바퀴에 깔린 농부를 생명을 걸고 구해 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여름날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다이아나는 두려움에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폭풍으로 트롤선이 난파되었을 때 , 위험을 무릅쓰고 구명보트를 띄우고 구조하러 나섰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강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다이아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 핼로윈 축제의 밤의 일은 동이 트기 전의 기분 좋은 잠 속에서 꾼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같은 지붕 밑에서 살았으면서도 당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라고 다이아나는 불쑥 말했다. 󰡒모두가 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다이아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서는, 틀림없이 아이에게 무엇이든지 명령만 하는 아버지가 될 거예요. 셩격은 변하지 않는걸요.󰡓 󰡒다이아나, 나의 인생은, 어느 쪽인가 하면 쓸쓸한 편이었지. 양친을 일찍 여의고 형제도 없고……. 그럴 때 당신이 나타난 거요. 나는 그 집을 좋아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지. 하지만 당신의 타고난 명랑성이 그 어두운 그림자를 흩날려 버려 주었어. 당신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은 불이 켜진 듯 확 밝아졌지.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 󰡒제이슨, 그런 인사를 다 하다니, 당신 변했군요.󰡓 󰡒완전무결한 사람이 있을까?󰡓 다이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그런 사말은 없지요. 당닌ㅅ의 생각은 고랍지만, 결혼은 할수 없어요. 나를 붙잡아 두려고 하지 마세요.󰡓 󰡒알았어. 정 그렇다면 좋은 말로 이야기해서는 안되겠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다이아나는, 그 말을 듣자 얼굴을 쳐들었다. 제이슨의 눈은, 그 핼로윈 축제의 밤과 마찬가지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때는 집을 뛰쳐나와 안개 속을 구불구불한 길을 정신없이 달렸지만, 이번에는 두근거리는 가슴의 고동을억누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백화점에서는 당신이 임신한 것을 알고 있나?󰡓 󰡒물론 모르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이아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길이 없었다. 󰡒온종일 서 있는 직업이니까, 어쨌든간에 그만두로록 만들겠지요…….당신, 백화점에 알릴 속셈은 아니겠지요?󰡓 다이아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일이 되어가는 추세에 따라선…….󰡓 󰡒너무해요,말할 셈이군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의자에 깊숙이 고쳐 않는 다이아나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당신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최후의 수단까지 동원한 셈이 되겠지?󰡓 일순 제이슨의 입가에 의미 있는 웃음이 떠올랐다. 󰡒더 이상 나쁜 놈이 될 수는 없겠지. 그래, 백화점의 인사부에 당신의 상태를 전하지. 이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별문제지만……. 지금 생각한 것이지만, 7개월간 나와 함께 있어 주지 않겠어? 그렇게 하면 그다음에는 좋을 대로 해도 돼요. 약속한겠어.󰡓 󰡒약속? 어떻게 그 약속을 보증할 수 있죠?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도 여간 의심이 많은 게 아니군……. 변호사에게, 아이가 나의 손에 넘겨진 시점에서 이혼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서약서를 만들게 하는 거야. 만일 내가 약속대로 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 서류을 들고 재판소에 가면 되는 거지.󰡓 제이슨은 상체를 꼿꼿이 하고 뒤로 기댔지만, 시선은 다이아나의 얼굴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어때? 괜찮지? 앞으로 7개얼간 당신은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돼요. 어김없이 산부인과 의사도 딸려 줄 것이고, 부자않스럽게 하지도 않겠어. 나의 아이를 낳아 주는 것이니까. 아이는 데블레어가의 아이로서, 남자아이든 나의 뒤를 있게 되지. 이혼한다 해도, 아마 재혼은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다이아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 핼로윈 축제의 밤, 후견인에서 갑자기 야수로 화한 이 남자가 말하는 것을 믿어도 좋을지 어떨지 다이아나는 망설였다. 󰡒모르겠어요…….󰡓다이아나는 빈 브랜디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한 잔 더 마시겠어?󰡓라고 말하고는 제이슨은 웨이터를 불렀다. 다른 손님이 부르고 있는데도, 웨이터는 이내 허겁지겁 두 사람의 테이블로 와서 주문을 받았다. 이러한 광경을, 다이아나는 지금까지 몇번이나 본적이 있었다. 그것은 제이슨이 데블레어 가의 도련님이기 때문일 뿐만아니라, 사람의 눈길을 끄는 단정한 용모, 위엄과 기품이 가득 찬 풍모의 소유자로 중요 인물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아나만은 제이슨의 내부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 성급하게 야수 같은 일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이트그레이의 슈트를 몸에 걸친 제이슨의 모습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다. 이러한 제이슨을 보고 있노라니, 그날 밤의 일은 마가 씐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당신의 말, 믿어지지가 않아요. 난 당신의 집에서 11년간이나 살았지만, 아직 모르는게 너무나 많아요. 당신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지 모르지만요.󰡓 󰡒남에 대해서 정말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 변호사는 신중한 남자니까, 서류는 확실한 것을 만들어 줄 거요. 나를 미워하게 만든 내가 나빴지만,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고 증오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으로 한다면 당신도 납득이 가지 않을까?󰡓 웨이터가 브랜디를 가져왔다. 제이슨은 글라스를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며 건배! 잭 혹은 캐롤이 탄생하는 날에 내가 당신에게 지불할 막대한 사례금에 대해서도 건배하기로 하지.󰡓 󰡒이름까지 생각하고 있었군요.󰡓다이아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안 되나? 어렸을 때 , 잭이라는 형과 캐롤이라는 누이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지. 이 이름은 내가 아주 좋아했던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이거든. 태아나는 아이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질 테니까 내가 이름을 지어 주어도 괜찮겠지?󰡓 글라스를 손에 들었을 때, 제이슨의 긴 속눈썹이 떨리고 있는 것이 다이아나의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말이에요, 언제나 당신을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신의 집에 처음 갔을 때 , 현관의 스테인드 글라스의 창가에 서 있던 당신은 어린 나에게겐 몹시 무섭게


느껴졌어요.󰡓 제이슨이 어깨를 으쓱했다. 떡벌어진 어깨가 다이아나의 눈앞에 있었다. 그날 밤, 울면서 그 어깨에 매달렸던 일이 생각났다. 󰡒언제 변호사한테 가는 거예요? 다이아나는 그날 밤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떨어버리고 싶어 사무적으로 물으면서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당신 형편만 괜찮다면 내일 가지 않겠어? 시내에 사무실이 있으니까, 오늘 밤에라도 전화를 해서 시간을 정해 두지.󰡓 󰡒또 당신의 뜻대로 되었군요.󰡓 다이아나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후유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만일 아이의 생명을 멋대로 없애버렸다면, 평생 마음의 상처를 안고 지내야 했으리라. 정말 다행이야……. 갑자기 글라스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글라스를 쥔 손에 너무 힘을 준 탓일까, 제이슨의 손안에서 글라스가 깨져 파편이 떨어지고, 브랜디가 쏟아졌다. 그는 깨진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호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피가 스며나오는 손을 닦았다. 󰡒제이슨, 괜찮아요?󰡓 다이아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돌처럼 냉정한 나에겐 피도 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 라고 말하면서 제이슨은 일어섰다. 󰡒차로 보내주지.󰡓 󰡒가까우니까 걸어서 가겠어요.󰡓 󰡒차로 가도록 해요.󰡓 제이슨은 딱 잘라 말했다. 다이아나가 제이슨 데블레어의 아내가 된 날은, 두 사람의 전도를 말해 주는 듯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인도, 차의 지붕, 직장으로 쇼핑으로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사람들의 우산을 굵은 빗방울이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심플한 디자인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빛깔은 눈빛과 매치된 블루그레이, 제이슨은 차콜그레이의 양복에 주름 하나 없는 새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다이아나는 제이슨에게 매료되었고 , 얼마나 기품있는 자태냐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결국은 인정하고 말았다. 그녀의 슈트 칼라에는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의, 꽃 모양의 브로치가 빛나고 있었다. 제이슨이 그녀의 호텔 방으로 보내 준 것이었다. 제이슨의 강권으로 다이아나는 10일 전에 기숙사를 나와, 그가 체재하고 있는 호텔 가까이에 방을 얻어서 묵고 있었다. 결혼할 무렵에 변호사가, 다이아나는 평생 이 결혼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것, 출산 후에는 언제든지 이혼을 신청할 수 있는 것을 명기한 서류를 작성해 주었다. 그 내용에 대해서 제이슨은, 한 구절 한 구절에 오해가 없도록 다이아나에게 설명했고, 그녀의 동의를 얻은 뒤에 함께 서류에 서명했다. 이혼할 경우의 위자료가 막대한 액수여서 다이아나는, 그 돈은 받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자립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제이슨은 그 점에 대해서는 좀처럼 동의해 주지 않았다. 󰡒시기가 오면 헤어지기로 해요. 그 뒤에는 절대로 당신의 인생에 무단히 파고들어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제이슨은 약속했다. 다이아나의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졌을 때 ,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난 것이다. 침실을 함께 쓸것인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 까지 행복이 깃들지어다󰡐라는 결혼 서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제이슨이 서글픈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다이아나는 알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의 성스러운 결혼식이라면, 이 말의 커다란 의미를 음미하고 행복의 절정을 느끼는 순간일 텐데. 그런데도 막상 제이슨의 손이 닿자 다이아나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고, 빨라지는 고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사랑을 서약하는 그 말을 제이슨은 어떤 기분으로 들었을까, 하고 다이아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에 호텔에서, 소수긴 하지만 제이슨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샴페인과 특제 샌드위치로 조촐한 피로연을 벌였다. 호텔측의 호의로 꽃과 웨딩케이크가 서비스되었다.


결혼한 부부에게 행운을 가져야 준다고 전해져 오는 케이크자르기를 꼭 해야만 된다고 친구들이 끈질기게 권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국 그렇게 했다. 제이슨의 구릿빛으로 그을은 손이 다이아나의 하얀 손 위에 포개어 졌다. 두 사람이, 함께 들고 있는 긴 나이프를 하얀 생크림으로 덮여 있는 프루트케이크에 찔렀을 때 , 친구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친구들은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해서 오늘 결혼식을 올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기 때문에 , 다이아나가 이 결혼 뒤에 숨겨진 사실로 괴로와하고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제이슨은 샴페인글라스를 손에 들고 다이아나의 곁에 서서, 입술에 미소마저 띠고, 신혼부부에 대한 판에 박은 축하 인사에 답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마음속에서는 회의, 괴로움, 불안 등의 갖가지 상념이 뒤섞여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 피로연의 밝은 분위기에 용기를 얻어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샴페인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서 침착하게 하객들을 응대할 수 있었고 , 모두에게 행복에 겨운 얌전한 신부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칙칙한 블루의 슈트를 입은 걸 보고, 왜 하얀 것을 입지 않았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 다이아나는 웃으면서 슬쩍 얼버무렸다. "저는 낡은 관습에 얽매이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이거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입을 수 있구요. 그러나 새하얀 웨딩드레스라면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귀찮은 짐이 되고 말지 않겠어요?" "어머나, 그래요? 젊은 신부라면 대개는 전통적인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어하는데요. 더구나, 제이슨과 결혼하는 마당이니 돈 걱정 같은 건 안 하셔도 좋을 텐데." 어느 여자가 비꼬아서 말했다. "그도 그렇군요." 라고 다이아나는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그 여자의 눈이 다이아나의 허리께를 수상쩍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지만 , 알아차리지 못한 체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멋대로 생각하라지, 상관없으니까. 신부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두들 멋대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결혼식 전에 제이슨과 다이아나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것은 조만간 다 알게 될 것이다. 서둘러 올린 결혼식이었다. '애정이 없는 결혼󰡐이라는 생각이 돌연 다이아나의 마음에 엄습해 왔다. 피로연도 대충 끝나고,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짐은 제이슨의 차인 재규어의 트렁크에 실렸다. 제이슨은 프랑스나 이탈리아로 여행하자고 은근하게 유혹했지만 다이아나가 막무가내로 싫다고 해서, 신혼 여행은 그만두고, 두 사람은 일단 헤븐쇼어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 모르게 누군가가 차의 범퍼에 은 말굽과 리본을 매달아 놓았는지, 차가 달리자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제이슨의 얼굴이 함박 웃음으로 일그러지면서, 갑자기 장난꾸러기 어린애처럼 악의없는 장난기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모두의 축복속에 두 사람은 출발했지만 , 비가 내리고 있어서 친구들은 이내 호텔로 되돌아갔다. 마개를 따지 않은 샴페인이 몇 병인가 남아 있었으니까, 틀림없이 다시 술자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는 걸까, 하는 따위의 화제를 안주삼아 샴페인을 마시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이아나는 시트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한숨을 내 쉬었다. "아아, 드디어 끝났군요. 결혼식이라는 게 이렇게도 신경이 쓰이는 것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 "이젠 마음을 놓아도 좋아요, 모든 게 다 잘 되었으니까. 하얀 웨딩드레스도 면사포도 없긴 했지만, 당신은 아름다운 신부였거든." "호기심어린 눈길로 보고 있던 여자가 몇 명인가 있었어요…….신부는 소위 깨끗한 몸이 아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어요." 다이아나는 그렇게 뇌까렸다. "다이아나! 빈정거리는 것은 그만둬요! 자꾸 비꼬다 보면 버릇이 된다고." "당신도 깨끗한 신부를 원했을 테지요?" "그런 문제에 연연하는 일은 집어치워요. 그 사람들은 부러워서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꺼림칙하게 생각할 건 하나도 없어!" 제이슨은 야단을 치듯이 말했다.


"부러워한다구요? 어째서요? 당신과 결혼해서 데블레어 부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모르겠어요. 그럼 어떤 뜻인가요?" 다이아나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왼손의 약지에 낀, 손톱만큼의 애정도 담겨 있지 않은 결혼반지를 오른손으로 비틀었다 돌렸다 하면서. 󰡒당신의 젊은과 명랑함, 그리고 당신의 순박함을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자기 자신도 나의 순박함을 이용했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군, 하고 다이아나는 분하게 생각했다. 얼굴을 돌려 제이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청동 조상처럼 다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용모……. 거기엔 그의 강한 성격이 나타나 있었다, 무엇이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일을 처리하는 명민함도. 이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미스마저도 유리한 결과가 되도록 만드는 재능이 있다……. 이 결혼만 해도, 충실하고 애정이 깊은 남편이 되는 노력을 하지 않고도 데블레어 가의 후계자를 손에 넣었으니까……. 󰡒마음을 편하게 가져요. 이것저것 생각하면 끙끙 앓는 건 이제 그만두라구. 당신이 임신 2개월의 신부라고 얼굴에 씌어 있는 게 아니니까 괜찮아. 전과 같이 아직도 날씬한걸.󰡓 󰡒어머나, 칭찬의 말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른 남자가 당신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기분 좋아할 줄 알았나? 그런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나는.󰡓 󰡒남자들은 안경을 걸친 여자에겐 달콤한 말을 속삭이지 않으니까 그럴 걱정은 없어요. 그리고 , 어차피 나는 아이만 낳아 주면 되고 거잖아요…….󰡓 󰡒다이아나! 얼마 동안은, 당신은 제이슨 데블레어의 아내야.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해도 좋으나, 표면상으로는 데블레어 부인답게 행동해 주기 바래.󰡓 󰡒그런 것이 이해가 안가요!󰡓 다이아나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목표를 정하지 않는 쏜 화살처럼, 그 말은 제이슨의 마음을 조금도 동요시킨 것 같지 않았다. 󰡒하여튼, 그것은 일이 되어가는 대로 맡겨 둔다 해도, 우리는 상식이 있는 인간으로서 서로 의논할 펼요는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타인 앞에서만 그러는 것으로 충분하겠지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생각지 않고 있어요. 전혀 남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기억해 두기 바래요.󰡓 󰡒다이아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 당신과 내가 남이 될 수는 없어. 당신의 뱃속에는 나의 아이가 있는걸.󰡓 󰡒당신 탓이라구요!󰡓 제이슨은 웃으면서 말했다. 󰡒다이아나, 웃음을 잃어버렸나? 당신은 아버님의 유머 센스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웃을 기분이 되지를 않아요. 당신은 시치미를 뗀 얼굴로 냉정한 체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요. 그런데도 모든 게 나의 탓인 양 모두들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 다구요. 당신이, 나를 가련하게 생각해서 거두어 준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나에게 슬기롭게 행동하라고 하는 건 무리한 주문이에요!󰡓 다이아나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약지에서 반짝이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감추었다. 반지는 값비싼 수갑이야. 이것의 대가는 엄청나다……. 게다가, 제이슨과 결혼한 이유를 언제나 상기시켜 준다----그렇게 생각하자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로 상식을 갖고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예의바르고……냉정하게…….󰡓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마주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말인가?󰡓 󰡒그 정도로도 족해요. 어쨌든 부부간의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아요.󰡓 󰡒교회에서의 결혼식은 소꼽장난이 아니야. 신 앞에서 앰세한 진짜 결혼식이지. 목사님이 성경을 손에 들고 우리를 부부로 인정한 거야. 그러니까 7개월간은 우리 두 사람은 남편이요 아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의논해야 할 일도 있겠지?󰡓 󰡒무엇을 의논하지요? 아차피 당신이 말하는 대로 되게 돼 있잖아요?󰡓 󰡒결혼에는 으레 따르게 마련인 신혼여행도 강요하지 않았잖나?󰡓 󰡒그것은, 당신도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잖아요?󰡓 󰡒그렇지가 않아. 당신의 착각이야.󰡓 󰡒그렇다면, 베니스에서 곤돌라에 흔들리며 밀짚모자를 쓴 뱃사공의 노래를 꼭 듣고 싶다는


건가요?󰡓 󰡒물론이지. 그것이 신혼여행의 상례적인 코스라고 듣고 있는걸.󰡓 󰡒신혼부부가 해야 할 상례적인 일은 얼마든지 있지만, 우리에겐 적합하지 않아요.󰡓 다이아나는 그 말에 내포된 의미를 제이슨이 미루어 추측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말했다. 제이슨은 웃으면서, 다이아나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어린애처럼 유치한 건지 아니면 성미가 괴팍한 건지 알 수가 없구만.󰡓 󰡒어느 쪽이라고 좋아요.󰡓 󰡒임신중의 어머니가 울적해 있으년, 태어나는 어린애의 인생이 비참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나?󰡓 󰡒그런 건 미신이에요.󰡓 다이아나는 프런트글라스에 내리치는 빗물을 부지런히 닦아내고 있는 와이퍼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와이퍼는 사정없이 빗방울을 닦아내고 있었다. 나의 인생도 저 빗방울과 마찬가지인걸. 강력한 와이퍼에 밀려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 어디로 가는 것일까? 떨어진 곳은 위험으로 가득 찬 세계인지도 모른다. 다이아나의 제이슨에 대한 빗방울처럼 흐트러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사랑도 느끼지 못한 채 그의 옆에 앉아, 아내로서 집으로 향하는 길을 채촉하고 있다……. 󰡒헤븐쇼어의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되어 돌아온 것을 수군거리겠지요.󰡓 󰡒모두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긴 하겠지만, 마음쓸 것 없어요. 우리가 무사히 첫날밤을 치렀다는 것을 곧 알려지게 될 테니까.󰡓 󰡒그런 말투는 그만두세요. 다른 말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다이아나는 힐날하듯이 말했다. 󰡒어차피, 아이의 일은 곧 알려지게 될 거요. 그렇지만 그것은 남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일 텐데? 두리 두 사람의 문제야. 헤븐쇼어의 사람들이라 해도 모두 인간이야. 충동에 쫓겨서 행동하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거요.󰡓 제이슨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당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당신은 아주 냉정해서 충동적으로 행동할 사람이 아닌걸요.󰡓 󰡒당신에 대해서라고 나는 확신을 갖고 이것저것 말하고 있는 건 아니요. 그렇지?󰡓 󰡒하지만, 모든 게 당신의 뜻대로 되었잖아요? 나는 당신 곁에 있으며, 당신에게서 받은 반지를 끼고 있어요.󰡓 󰡒그 반지, 마음에 드나?󰡓 󰡒생각했던 대로 값비싼 것이더군요.󰡓 󰡒하나 더,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빈지가 있어. 집의 금고에 넣어두었지. 스페인 사람이었던 조모의 것이니까, 그분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아름다운 분이었지. 당신도 초상화를 봐서 알고 있지?󰡓 다이아나는 응접실에 결러 있는 금박 테두리의 액자에 넣은 제이슨의 조모 마누에라 부인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훌륭한 부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제이슨의 갈색 피부, 검은 눈동자, 눈을 뒤덮을 듯한 긴 속눈썹, 자신에 가득 찬 기품은 스페인 태생의 마누에라 부인에게서 이어받은 것이었다. 󰡒꼭 당신이 반지를 받아 주었으면 해. 디자인이 옛날 것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새로 디자인하도록 하면 돼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앞으로 몇 개월밖에 끼지 못할 텐데요.󰡓 󰡒내내 갖고 있어도 좋아.󰡓 󰡒제이슨, 당신은 대단히 관대한 사람이군요. 하긴 당신에게는 그 정도의 여유는 충분히 있지만.󰡓 󰡒칭찬하고 있는 건지 비꼬아 말하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는걸.󰡓 제이슨은 어깨를 움츠렸다. 󰡒어머나, 칭찬하고 있는 거예요.󰡓 다이아나는 양손을 단정하고 무릎 위에 얹고 똑바로 앉았다. 󰡒한 가지, 꼭 이야기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어요. 침실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지만요……. 저어, 나는 따로 쓰는 게 좋아요. 물론 반대하지 않겠지요?󰡓 󰡒나는 그런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아. 당신이 될 수 있는 한 나에게서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 쯤은 분명히 알고 있어.󰡓 󰡒하지만……당신의 일이니까, 원한다면 우격다짐으로라도 손에 넣으려고 둘테지요. 당신이 그 강한 힘으로 나를 누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았을 거예요.󰡓 󰡒나를 괴롭히면서 즐기고 있는 건가?󰡓 󰡒나로선, 우리의 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면 이것밖에 없는 걸요.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지 말아요. 임신중에 울적해 있으면 안 된다고 당신이 방금 말했잖아요. 당신은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정도로 고상한 신사가 아니라는 것을 이따금 당신에게 깨닫게 해줌으로써 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거든요.󰡓 제이슨은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차를 달렸다. 다이아나가 곁눈으로 흘끗 쳐다보니, 그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느끼게 된 거야. 하지만 다이아나는, 이것으로 만족감을 맛보고 싶었는 데도 왠지 뒷맛이 씁쓰레해서 입술 을 꼭 깨물었다. 󰡒죄송해요, 언짢은 말을 했어요.󰡓 다이아나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사과할 건 없어. 만약 내가 또 그 핼로윈 축제의 밤과 같은 행동을 취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같은 말을 할테니까.󰡓 제이슨의 어조는 쌀쌀하기만 했다. 이 말을 끝으로, 두 사람 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이아나는 푹신한 좌석에 깊숙이 파묻혀 앉았고, 부드러운 가죽을 씌운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육체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피로다. 제이슨이 백화점으로 찾아왔던 날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장시간 서 있는 데서 오는 다리의 통증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긴장의 연속이어서 다이아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제이슨이 말한 대로, 일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이 들었다. 백화점의 주임과 손님들에게 하루 종일 귀가 아프도록 잔소리를 듣고서, 지친 채 기숙사에 돌아가면 식사도 못하고 녹초가 되어 비리곤 했다. 그렇게 오랜 된 일도 아닌데도, 다이아나에겐 아주 오래 된 일 옛날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일을 한 것은 좋은 경험이 되었으며 후회하고 있지도 않았다. 제이슨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일하는 것이 더욱 즐거웠을는지도 모른다.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었다. 불안이 가중되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을 때의 비참한 기분을 다이아나는 잊을 수 없었다. 10일 전 제이슨이 그레이디즈 백화점에 나타났을 때, 다이아나는 완전히 당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정신응 잃을 뻔했던 것은 사실은 안도한 나머지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제이슨이 떡벌어진 어깨, 힘찬 걸음걸이로 보았을 때, 이것으로 아이에 대한 문제는 모두 해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다. 제이슨에게로 돌아와 결혼하여 무사히 아이를 출산하게 되긴 했지만 , 7개월 후 아이가 태어나면 나는 정말 약속한 대로 자유롭게 되는 걸까, 하고 다이아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가 작성한 서류에 서명했을 때 의 제이슨의 강철같이 차가운 표정이 다이아나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다이아나는 다시는 제이슨을 신용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다이아나에게 안도감을 주는 강인함이 있었다.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쓸쓸함을 달래 주었고 , 그레이디즈 백화점의 기숙사에서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들볶이고 있던 괴로움을 없애 주었다. 그때 다이아나는 고민하던 끝에, 아이를 출산하지 않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니렸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여자 점원으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다. 그래서, 낳자마자 양자로 보낼 바에야 낳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그 수배까지 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던 참에 제이슨이 나타났으므로 다이아나는 구원을 받은 심정이었다. 따스한 정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와 결혼한다면 적어도 아이의 생명은 끊지 않아도 될 것이고 , 태어나면 친아버지 밑에서 자랄 수 있으므로 행복하게 될 것이다. 다이아나의 후견인으로서 이모저모로 보살펴 주었고 아무 부족함 없이 키워 주었듯이, 제이슨이라면 아이를 착실하게 약육해 줄 것이다. 자신의 결단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다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겨 있던 다이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스며나왔다. 오열을 참알모든 수가 없었으며, 가슴이 아픔이 몸속으로 번져 갔다. 경제적으로 아무 부족할 게 없는 제이슨과 결혼해서 태어날 아이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다이아나에게 있어서는 잃는 것이 너무나도 컸다. 진통을 겪어 낳은 자식을 떼어놓을 일을 생각하자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추운가? 히터를 넣을까?󰡓 제이슨이 물었다.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는데도, 두 줄기의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제이슨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하려고 일부러 눈물을 닦지 않았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어 그날 밤의 일을 잊어버리고 말 생각이었고 다시는 제이슨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굳게 맹세한 다이아나였는데도, 또 약해지려 하고 있었다. 󰡒몸이 떨리고 있는 모양인데, 괜찮겠어?󰡓라고 제이슨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피로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더니, 배가 고픈 게지? 조금 더 가서 잠시 쉬면서 뭐든 먹도록 합시다.󰡓 󰡒먹고 싶지 않아요! 당신, 아주 착실하게 연기하고 있군요.󰡓 󰡒뭣을?󰡓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 역할말이에요. 연기가 뛰어나요.󰡓 󰡒연기 따위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건가요?󰡓 󰡒조금은.󰡓 󰡒조금뿐인가요?󰡓 하는 다이아나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당신이 만족할 정도의 양심의 가책은 느5ㅣ고 있지않아. 당신은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밖에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모양이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진심으로 원해서 당신과 결혼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에요. 당신의 손길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을 수 없으니까요!󰡓 다이아나는 기세등등하게 말했지만, 몸은 긴장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외곬으로 생각하는 건 그만둬요. 그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몸을 해치게 돼. 편안하게 있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만일 내가 스트레스가 쌓여서 병이 난다면 그 원인은 당신이에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고, 눈이 말하는 것이 달라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무슨 의미지?󰡓 제이슨은 곁눈질로 흘끗 다이아나를 쳐다보았다.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골길을 들어섰다. 도로폭이 좁아서 맞은쪽에서 오는 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므로 제이슨은 이내 눈길을 앞쪽으로 돌렸다. 󰡒당신은 우스꽝스러운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군. 하지만 그것은 필시, 당신 몸의 상태 탓이겠지.󰡓 󰡒나의 이러한 상태를 당신은 기뻐하고 있는 것 같군요.󰡓 다이아나는 대꾸했다. 조금 전에 자기가 운 것이 거짓말 같기만 했다.󰡒당신이 이러한 상태가 되었어야 하는 건데.󰡓 제이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 할수 있다니 그만하면 됐어.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군, 유머를 되찾은 걸 보니,󰡓 󰡒난 손톱만큼도 재미있지 않아요.󰡓라고 다이아나는 화가 치민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가 생기는 따위의 짓을 하지 않는 게 좋았다구요.󰡓 󰡒그 논리는 놀라운 걸. 그렇지만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잘 알았어. 그런데 당신은 남자만이 러브메이킹(lovemaking)을 엔조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러브라구요?󰡓 󰡒그럼 뭐라고 해야 좋지? 섹스?󰡓 󰡒섹스……그 말은 딱 질색이에요!󰡓 제이슨은 일부러 요란스럽게 한숨을 쉬어 보였다. 󰡒그럼 나는 평생 당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 같은 걸.󰡓 󰡒제이슨, 나에게 결혼하자고 할 때 말한 것을 잊지 않았겠지요? 두 사람은 묶어 놓고 있는


것은 애정이 아니라 증오라고 당신은 말했어요. 핼로윈 축제의 밤에 당신이 한 것과 같은 짓을 당한다면, 대개는 여자는 증오를 품게 되지 않을까요? 좀더 분명하게 말하기를 바라나요?󰡓 󰡒말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하고 싶은 말은 다이아나의 감슴에 새겨져 있었지만,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다이아나는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기품 있는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맵시가 좋은 양복으로 몸을 감싼 제이슨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제이슨은 그 가면 밑에 숨겨져 있으니까. 시선을 돌리고 있는 다이아나의 뇌리에 어떤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방에 아침 햇살이 비쳐들기 시작할 즈음 눈을 뜬 다이아나는 곁에서 자고 있는 제이슨을 보았다. 머리가 흐트러진 채 피부에 시트를 둘둘 휘감고서, 그는 깊은 잠에서 아직 깨나지 않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살며시 침대에서 빠져 나와 블라우스와 진바지로 갈아입자, 핸드백 하나만 달랑 들고 집을 나섰다. ―악마에게 쫓기기라고 하는 것처럼 급한 발걸음으로. 교양을 느끼게 하는 매너가 몸에 배고, 성장 환경이 좋았음을 은은하게 풍기고 있는 제이슨―다이아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면일 뿐이었다. 언제 진짜 제이슨으로 변신할지 모르는 것이다. 더 이상 다정한 말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다이아나는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날 밤 제이슨의 행위는, 그때까지 다이아나가 품고 있었던 그에 대한 신뢰를 그녀에게서 빼앗아가고 말았다. 오늘 결혼식에서 친구들은 제이슨을 세련된 매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그것은 겉보기뿐인 것이다. 다이아나는, 자제심을 잃은 제이슨을 본 사람은 자기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다이아나는 잠이 들어버렸다. 이주 잠깐 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눈을 떴을 때는 비가 그쳐 있었고, 이미 집에 도착해 있었다. 석양빛이 유리창에 반사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하품을 하고는,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어째서 깨워 주지 않았어요?󰡓 󰡒기분좋게 자고 있어서,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었던 거야.󰡓 차는 다이아나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데블레어 가에 도착해 있었지만, 제이슨은 한쪽 팔꿈치를 핸들에 놓고 조용히 다이아나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그녀가 깨나기를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차를 세운 곳은, 데블레어 가의 대문에서 대저택으로 이어지는 차도였다. 그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을 때는 가도가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길게 느껴졌던 길이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니, 차도의 커다란 가로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맑아서, 다이아나는 완전히 잠에서 깨나려고 가슴 가득히 공기를 들이 마셨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층계를 올라가고 있을 때,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손이 허리께에 닿는 것을 느끼고 몸을 경직시켰다. 현관 앞의 아치를 빠져나갈 때 제이슨이 다이아나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7개월 동안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떤 사소한 행운이라고 놓치고 싶지 않은걸. 하느님이 우리에게도 행운을 나누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당신과의 첫 출발이니까, 당신을 안고 집 안에 들어가고 싶어.󰡓 󰡒싫어요!󰡓 다이아나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행복한 출발이 아니니까요.󰡓 󰡒최소한 친구 대접은 하고 싶은걸.󰡓라고 말하면서 제이슨은 억센 팔로 다이아나를 가볍게 안아올렸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집사가 안쪽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안은 채 현관으로 들어섰다. 넓은 현관의 참나무 대들보에 달려 있는 전등의 불빛이 두 사람을 비춰 주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남편이 된 제이슨을 차분하게 응시했다. 금년 36세인 그는 그 나이에 걸맞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젊어서 책임 있는 지위에 오른 그의 얼굴에는 연륜이라고 할 수 있는 주름살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썹, 긴 속눈썹 속에서 빛나고 있는 눈, 강인한 턱, 야무지게 꽉 다물고 있는 입술, 그 용모에서는 마치 19세기에 살고 있는 사나이 같은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제이슨, 내려 줘요.󰡓 집사가 고개를 수그린 채 눈만 칩떠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15세 때와 같은 체중인걸, 달라지지 않았어. 당신은 곧잘 텔레비전 앞에서 잠들곤 해서, 내가 침대까지 안아다 뉘곤 했지. 기억하고 있나?󰡓 󰡒당신은 나의 아버지 같은 분인걸요.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곤란하지요.󰡓 다이아나는 급기야 커다란 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제이슨은 화난 얼굴로 다이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렇게 나를 화나게 만드는 말만 골라서 하느냐는 얼굴로 다이아나를 노려 보면서. 제이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나자 집사에게 말했다. 󰡒하당, 우리 오늘 결혼했다네.󰡓 󰡒그러신 것 같군요.󰡓 하당은 반신반의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의례적으로 말했다. 󰡒축하는 드려야 하겠군요.󰡓 󰡒그런가. 그렇다면 축하의 인사를 받기로 하지, 결혼은 즐거운 일이니까. 하지만, 실은 자네의 동정을 받고 싶네.󰡓 제이슨은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다이아나는 제이슨에게 상처 입히는 말을 하고 만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후견인과 피후견인이라는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건 제이슨이야. 마녀가 재앙을 몰고 온다는 핼로윈 축제의 밤을 경계로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으니까. - 4 헤븐쇼어 마을은 후미진 데 면하고 있었으며, 단애처럼 되어 있는 갑에는 데블레어 가의 커다란 저택이 성처럼 우뚝 치솟아 있었다. 외벽 한 면이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저택은, 데블레어 가가 몇 대나 이어져 온 유서 있는 가문임을 알게 해준다. 밤에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담쟁이덩굴이 흔들리면서, 몇 대에 걸쳐 데블레어 가에 쌓여 온 괴로움이며 못다 이룬 꿈을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냈다. 다이아나는 이 갖가지 상념이 깃들인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한번 떠 났던 집에 다시 돌아오니 뭔가 우스꽝스러운 느낌이 들기고 했고 , 또 이상한 기분이 들기고 했다. 다이아나는, 앞으로 7개월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창살속에 갇혀서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 미치 형무소에 7개월간의 형을 살러 들어온 듯한 어두운 마음에 사로잡혔다. 이 집에 얽힌 이야기도 많이 있는데, 연인에게 배반당한 한 여자가, 이곳에서 불과 1킬로 반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일도 있다고 한다. 결혼식을 끝내고 돌아온 날 밤, 그들은 식당에서 두사람만의 저녁식사를 했다. 쌉쌉하고 얼얼한 맛이 나는 백포도주에 게, 디저는 서양배와 초콜렛 아이스크림이라는 메뉴였다. 데블레어 가의 요리는 모두, 제이슨이 찾아낸 일류 쿡이 솜씨를 발휘해서 만들고 있었다. 쿡뿐만 아니고, 데블레어 가의 고용인은 모두가 제이슨의 손에 들어서 채용된 사람들 뿐이었다. 식사전에 헤스터라는 젊은 아가씨가 다이아나에게로 인사하러 왔다. 헤븐쇼어의 토박이 아가씨인 헤스터는 앞으로 다이아나의 일상사를 돌보아줄 하녀였다. 사고처럼 빨간 볼을 지닌 시골 처녀로, 티 없이 순진하게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말씨에그런데 ㅡ 이 지방 특유의 부드러운 여운이 있어서, 다이아나의 무디어진 신경을 달래 주는 것만 같았다. 󰡒잘 부탁드리겠어요. 일상적인 일은 모두 제가 돌보아드릴 테니까 무슨 일이든 시켜 주세요. 아기에 대해서 들었어요. 주인님께서, 훌륭한 아기가 태어나도록 돌보아아 드리라고 분부하셨지요. 무엇이든 명령만 내려 주세요.󰡓 󰡒어머나, 그래? 주인님이 그렇게 말했다구? 남자는 고생할 게 없거든. 임신의 괴로움도 분만의 고통도 없을 테니까.󰡓 다이아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분만하는 데 고통이나 괴로움 같은 것은 없어요. 그냥 편안하게 계시면 되는걸요. 시기가 오면, 땅콩처럼 껍데기가 탁 벌어지면서 아기가 나오는 거예요. 걱정하실 것 없어요. 정말이에요.󰡓


자기와 비슷한 정도의 나이일 텐데도 무엇이든 다 알고 있느 중년여자 같은 말을 하는 헤스터의 말투가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끝내 다이아나는 웃고 말았다. 󰡒그렇게 간단히 낳는다는 걸 어떻게 알지?󰡓 󰡒저희 집은 아들 넷에 딸 넷이거든요. 어머니는 원래부터 가냘프고 담력이라곤 없었는데도 말이에요. 제말을 믿어 주세요. 절대로 신경쓰실 게 없어요.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고, 새나 고기처럼 헤엄치고 싶을 때 헤엄치고 날고 싶을 때 나는 게 좋아요. 그래야만 만사가 순조로와져요.󰡓 󰡒그게 정말이야?󰡓 다이아나는, 이 아가씨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니 높은 파도가 밀려와도 파도를 타고 익숙하게 헤엄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개운해졌다. 다이아나가 대학시절에 꿈꾸던 로맨틱한 사랑, 진실한 애정……. 데블레어 가의 주부가 된 지금 그러한 동경은 모두가 공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안벽에 밀려와 부서져서 물보라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파도처럼 꿈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시가의 자욱한 연기 너머로 제이슨의 얼굴을 바라모면서 다이아나는, 그가 아이를 낳는 것은 헤스터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간낟 하지는 나타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제이슨에게 있어서는 아버지가 되는 것은 간단한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 불공평한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저녁식사 후. 두 사람은 뮤직룸이라고 부르고 있는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방은 제이슨이 좋아하는 방으로,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그랜드피아노, 텔레비전, 스테레오 세트, 비디오 카세트 등이 놓여 있었다. 레코드와 카세트가 꽉 들어찬 선반, 거기에 가구도 새까만 목제 골동품이어서, 검은 피아노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모자이크의 마룻바닥 위에 깔린 카핏도 짙은 빛깔이었다. 바닥의 나뭇결은 자연스럽게 윤이 나서 왁스를 칠할 필요도 없었다. 다이아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곧잘 이 방에서 제이슨과 저녁식사 후의 한때를 보내곤 했던 것이다. 테라스를 향해 활짝 열린 창으로, 제이슨이 치는 야상곡의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이 넘쳐 흐르듯 정원으로 울려퍼지던 것이 다이아나는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 무렵에는 마음의 갈등도 없었고 오직 아름다운 음악에 도취하여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족했었다. 좋아하는 등나무 의자에 않아서, 정원에서는 나이팅게일이, 미치 곡에 맞추어 노래하듯이 지저귀고 있었다. 제이슨은 어렸을 적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줄곧 배운 게 아닌데도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그는 모든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별로 애쓰지 않고도 무엇이나 성취하곤 한다. 아직 10대 였을 무렵에 다이아나는 , 머리가 좋고 스타일도 멋진 제이슨을 존경하고 있었다.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연애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두 사람은 이렇게 부부가 되어 있다. 그 무렵부터 이미 운명의 신의 조종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뮤직룸에는 제이슨의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을 깊이 감동시켰으며, 마치 캔버스 위에서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하얗게 비쳐 보이는 듯한 피부, 먼데를 응시하고 있는 눈에는 괴로움이 깃들여 있었다. 이 그림이 그려졌을 때 뱃속에 제이슨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제이슨을 낳은 뒤에는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예감을 숨기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 뱃속의 제이슨을 감싸듯이 하고 있는 하얀 손에는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제이슨이 언제나 냉정하고 지나칠 정도로 자신만만한 것은 어머니 없이 자라온 탓일싸, 하고 다이아나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감상적이 되는 것을 억지로 피하고 마음을 닫고 있는 제이슨이었지만, 누구와도 감정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에 조바심을 낸 적도 있었고, 가끔 사람이 변한 것처럼 발작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키며 다이아나를 거칠게 대한 적도 있었다. 그럴 대면 다이아나는 견뎌낼 수가 없었다. 갖가지 일들이 다이아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난로앞의 카핏위에 주저 앉아 있는 다이아나를 보고, 제이슨이 말을 건넸다. 󰡒거기에 축 늘어져 앉아 있는 걸 보니, 와인 기운이 도는가 보군?󰡓 제이슨은 시가를 입에 물고 난로에서 타오르는 새빨간 불꽃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더니, 잠시 후에 다이아나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상냥하게 물었다. 󰡒집에 돌아오니 즐거워?󰡓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 되는 군요.󰡓 얼굴에 휘감기듯 피어오르는 시가의 연기 너머로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초상화에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당신의 초상화도 어머니와 조모의 것과 나란히 여기에 장식하게 될 거요. 데블레어 가의 부인들은 모두 초상화가 있지. 이 집의 여기저기에 걸려 있으니까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분들과 달라서 여기에 오래 있지 않을 테니까 데블레어 가의 일원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나의 초상화를 그리는 건 무의미하고 헛된 일일거예요.󰡓 󰡒그석은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 제이슨은 반쯤 타다 남은 통나무 장작을 구두끝으로 차서 불꽃 속으로 처넣었다. 무어라고 하는 빛깔이지?󰡓 󰡒아프리코트색이에요.󰡓이 시퐁 드레스는 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입어 온 것인데오 제이슨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남자란 형태나 빛깔로 옷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의 분위기로 기억하는 것일까, 하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전에 이 드레스를 입었을 때 의 기억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을 확실히 19세가 되던 생일이었다. 제이슨이 생일 축하 선물로 진주 목걸이를 다이아나의 목에 걸어 주었을 때 그의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디이아나는 가슴이 떨려서, 흠칫 하며 엉겁결에 몸을 뺐다. 그때 제이슨의 화난 얼굴은 지금까지도 다이아나의 머릿속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이내 허리를 굽혀 바닥에 산산이 흩어진 진주를 하나씩 주워모으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입고 있었던 옷이 바로 이 살구 빛깔의 드레스였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오늘 밤 이 드레스를 입은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다이아나는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 속의 제이슨의 눈동자가 그 때의 그 일을 생각해 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피우던 시가를 난로불 속으로 던지고, 농담을 하듯 말했다. 󰡒생각났어. 진주는 악운의 상징이지!󰡓 󰡒무슨 말이에요, 제이슨?󰡓 󰡒여자는 마음속은 증오로 가득 차 있는데도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로군……. 사랑하고 있을 때 도 역시 그렇다고 하겠지만…….󰡓 󰡒사랑의 이야기는 터부예요. 화제를 바꿔요.󰡓 󰡒어째서 당신은 본심을 숨기고 있지? 나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지 않고 일부러 비뚤어지게 나오는군. 그런 태도는 그만두는 게 좋아요.󰡓 한 마디 한 마디가 핵심을 찌르고 있다. 조상처럼 윤곽이 뚜렷한 그의 얼굴과 같은 날카로움으로. 󰡒 당신은 단순해. 그것이 사랑스러운 점이긴 하지만…….그리고 전혀 자만심이 없거든. 여성으로서는 드문 일이지. 언제까지나 그런 모습으로 있어 주기 바라.󰡓 󰡒어머나, 칭찬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투는 마치 도망친 말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도 마구간에 열쇠를 채워 놓는 꼴이 아닐까오? 당신은 승마를 하니까 잘 알테니요? 채찍질을 너무 해대면 말은 자신감을 잃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고는 빈틈을 노렸다가 거꾸로 인간을 습격하려고 들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설탕을 손에 들고 기다리고 있는 수밖에 없는 모양이군.󰡓 제이슨의 입가에는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물론, 당신의 날카로운 작은 이빨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을 하고 있지. 그때는 아팠다구.󰡓 제이슨의 말을 듣는 순간, 그 핼로윈 축제의 밤에 있었던 일이 머리에 되살아났다. 그 날 밤, 다이아나는 정신없이 제이슨에게 덤벼들면서 그의 어깨 언저리를 물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잇자국이 나 있는 제이슨의 어깨가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제이슨은, 다이아나가 생각하게 한 일을 마음속으로는 웃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다이아나는 카핏 위에 앉은 채, 제이슨에게서 눈을 돌리고 난로 곁에 있는 철제의 용을 응시했다. 용의 날카로운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난로의 불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이아나의 마음속에 굴욕감이 번져 갔다. 어디론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엎드려 있던 강아지가 벌떡 일어나 소리도 내지 않고 나가 버리듯이, 살며시 아무에게도 눈치채이지 않게 감쪽 같이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싶었다.


󰡒텔레비전이라고 켤까?󰡓 제이슨도 마음속의 사념을 떨어버리려 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옛날 영화를 방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으면 비디오 쪽이 좋을까? 전에는 곧잘 「챔프」를 보곤 하던데.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지? 오늘 밤 한번 더 보기로 할까?󰡓 다이아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무렵에는 두 사람은 후견인과 피후견인이라는 사이 였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그저 영화를 즐길 수가 있었다. 「챔프」의 주인공이 귀여운 금발의 사내아이가 죽은 아버지에게 󰡐눈을 뜨세요!󰡑라고 부르짖는 라스트 신에 감동해서 다이아나는 울어버리고 말았었다. 오늘 밤 다시 본다면, 언제까지나 눈물이 멈추지 않을 게 틀림없다. 제이슨이 다이아나 곁에 다가와, 난로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깊숙이 뻗어왔다. 다이아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제이슨의 눈은 검은 철판에 부딪친 광선처럼 날카롭게 빛났고 ,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궤뚫어보는 듯했다. 그 시선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다이아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자는 카핏 위에 직접 앉는 것을 좋아하는군. 고양이와 흡사한걸. 고양이와 여자는 공통점이 많이 있긴 하지만……. 어느 쪽이나, 감쪽같이 속으면서도 칭찬을 받고 귀여움 받은 것을 좋아하니까.󰡓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나를 감쪽같이 속일 셈인가요? 설마 나를 애완동물로 삼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다이아나는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말하면서, 흘끗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제이슨은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검은 빌로도의 실내복 호주머니에서 네모진 케이스를 꺼내, 다이아나의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놓았다. 󰡒자아, 열어 봐.󰡓 마치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다. 󰡒아아, 그 반지인가요?󰡓 󰡒그래.󰡓 󰡒받을 수 없어요.󰡓 󰡒그건 곤란한걸. 싫더라도 받아 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라고 말하자 다이아나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케이스를 손에 들었다. 열어 보니 금의 링에 박힌 보석이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있었다. 오래 된 것이긴 하지만 세련된 디자인이어서, 사랑을 받고 있는 여자가 낀다면 한층 광채를 발할 반지라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이 반지를 끼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나로서는 그럴수가 없어요.󰡓 다이아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지?󰡓 제이슨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조부님이, 특별히 조모님을 위해서 만들게 한 반지겠지요?󰡓 󰡒디자인이 오래 된 것이라 싫다면, 바꿔도 좋아요.󰡓 󰡒어마, 그런 짓을 한다면 아름다움이 손상되고 말아요.󰡓 󰡒그렇다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그럼 그것으로 됐잖은가.󰡓 󰡒저어……하지만……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반지인걸요.󰡓 󰡒어째서지?󰡓 󰡒알고 있을 텐데요?󰡓 󰡒모르겠는데.󰡓 머리칼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금고에 넣어두세요. 내가 떠난 뒤에 올 여자를 위해서 소중히 간직해 두는 게 좋아요.󰡓 󰡒나는 결혼은 한번 밖에 하지 않아, 앞서도 말한 것처럼.󰡓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갖지요?󰡓 󰡒이쨌든 확실해요. 자아 반지를 끼어 봐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끼워 줄까?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반지를 당신에게 끼워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다이아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 반지를 결혼 반지에 겹쳐서 끼었다. 두개의 반지가 훌륭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광채를 뿜었다. 제이슨의 곁을 떠날 때가 오면, 다이아나는 이 반지를 둘 다 두고 갈 작정이었다 ― 제이슨과 결혼했던 일을 영원히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 더 늘었다고 해서 별로 거추장스럽지는 않을 테지?󰡓 제이슨은 거드름을 피우는 어조로 말하고 나자 갑자기 일어서더니, 19세기 초엽 섭정시대의 사이드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브랜디글라스를 두개 꺼내 코냑을 철철 넘치도록 따라 가지고 돌아와, 허리를 굽히며 글라스를 다이아나에게 건네주었다. 다이아나는 글라스를 받아들자, 잠시 코냑의 향긋한 내음을 음미했다. 제이슨도 크고 남자다운 손으로 글라스를 돌리면서 마찬가지로 코냑의 향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품을 손에 들고 있다는 기쁨으로 흡족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제이슨이 아름다운 것을 만졌을 때 나 훌륭한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언제나 떠오르는 표정이다. 다이아나는 그 제이슨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지금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 무직룸은, 분위기가 착 가라앉 있다. 창에는 상아 빛깔의 실크 커튼이 처져 있고, 그 창 너머에서는, 아득히 아래에 있는 바위에 와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쩐지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군. 외계와 차단된 이 방에 단둘이 있게 되다니…….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을 무렵 당신은, 이 집은 동화에 나오는 바다의 성 같다고 곧잘 말하곤 했지. 겨울에 안개가 자욱이 끼어 여기에 갇힌 적도 있었지만, 당신은 한번도 무섭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 󰡒당신은 바깥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을 좋아했지요?󰡓라고 말하면서 다이아나는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시퐁의 원피스, 어깨까지 내려오는 윤이 반지르르 하게 흐르는 머리칼――다이아나는 소녀처럼 보였다. 제이슨은 웃음을 띤 입가에 브랜디글라스를 가져가, 호박 빛깔의 코냑을 한모금 마셨다. 󰡒다이아나, 때로는 바깥 세계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차단시키느 것도 좋은 거야. 마음이 편안해지거든, 바깥 세계에서는 최근 폭력 사건이 증가 일로에 있고 스트레스가 쌓일 일만 일어나고 있어서, 나는 19세기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할 때 가 가끔 싱지.󰡓 󰡒당신이라면, 그 시대의 복장을 몸에 걸쳐도 틀림없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의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도 19세기말엽에서 20세기초엽의 것이긴 하지만……. 지금도, 여자란 집안에 있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을 테지요? 남편을 섬기기만 하면 된다고…….󰡓 󰡒당신은, 나에게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의 결혼이 바로 그렇잖아요?󰡓 제이슨은 손안에서 글라스를 돌리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말할 셈으로, 악의에 가득 찬 비꼬는 말을 하나하나 노트에 기록해 두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요. 당장 노트를 사야겠는걸요.󰡓 다이아나가 말을 끝냈을 때, 난로 위의 로즈우드의 탁상시계가 은방울 소리를 방안 가득 울리면서 시간을 알렸다. 󰡒시간이……󰡓 제이슨이 중얼거렸다.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야 과거의 싫은 기억들을 잊어 줄 텐가? 슬슬 마음이 동하는 걸…….󰡓 다이아나는 깜짝 놀라 손이 떨리는 바람에, 코냑을 원피스에 쏟고 말았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졌단 말이요.󰡓 제이슨은 일어서자, 피아노로 다가가 덮개를 열었다. 조명에 비추인 상아의 건반이 빛나고 있었다. 󰡒나의 피아노 연주를 듣거 싶은가?󰡓 󰡒그래요. 달리 할 일도 없구요.󰡓 다이아나는 손수건으로 드레스에 쏟아진 코냑을 훔치면서 말했다. 아래를 향하고 있어서, 제이슨의 표정은 알수 없었다. 제이슨은 피아노 의자를 끌어내어 앉았다. 음의 상태를 살피고 나서 매끄럽게, 「 노 체 트리스테」라고 하는 조용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밤의 고독」이라는 곡이지, 하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이 독의 가사를 알고 있나? 로맨틱하지.󰡓 제이슨은 연주하면서 다이아나에게 물었다. 다이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이슨은 낮은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울려 퍼지는 여운에는 어딘가 빈정거리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랑의 와인에는 조심을 하세요, 사랑하는 체하는 달콤한 술맛, 깨고 나면 눈물 맛이


나지요. 혼자만의 사랑이란, 어차피 씁스레한 뒷맛이 남은 것을, 그러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사랑의 와인을 마실 때 는.󰡓 󰡒그 노래의 가사는 좀 고리타분하지 않아요?󰡓 라고 다이아나는 물었다. 󰡒그렇지. 옛날 노래니까.󰡓 제이슨은 이어서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나는 피아노에 기대고, 그 아름다운 음식에 취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꿈꾸듯 황홀한 경지에 빠져들었던 기분을 떨어버리려는 듯 중얼거렸다. 󰡒난, 멋진 옷을 언제까지 입을 수 있을 까요?󰡓 󰡒다른 옷을 사주겠어. 당신이 알려지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비밀을 감추기에 충분할이만 큼 여유 있고 헐렁한 스코크를.󰡓 󰡒제이슨, 너무해요. 당신은 , 나를 이런 몸으로 만들다니, 외출하지 못하고 된 것을 즐기고 있군요!󰡓 󰡒포충망에 걸린 나비,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 뒷걸음질 쳐서 제이슨과의 사이에 거리를 두면서, 다이아나는 자닌의 몸 속에서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의식했다. 갑자기 무서워진 다이아나는, 홱 돌아서자 손을 올려 제이슨의 뺨을 때렸다. 그의 뺨에 손자국이 빨갛게 남았다. 󰡒당신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을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어요. 이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요.󰡓 다이아나는 헐떡이면서 말했다. 󰡒오늘 막 돌아왔을 뿐이잖아.󰡓 제이슨의 목소리를 여전히 차분했다. 조금도 동요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따귀 한 대 쯤으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전혀 상처를 입지 않는다구󰡑라고나 말하듯 태연자약했다. 󰡒어쩌자구 이런 짓을 했을까……. 이런 지독한 짓을 해버린 자신이 미워요! 나를 이렇게 만든 당신도 싫어요!󰡓 󰡒이렇게 만들었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그저 나의 아내가 된 것뿐이잖나.󰡓 󰡒나의 감정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군요. 당신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다이아나는 반항적인 눈초리로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당신에게, 나의 아이를 낳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 󰡒제이슨! 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바로 그대로 될 거야. 나는 천국하고는 어차피 인연이 없는걸.󰡓 제이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의 마음은 돌처럼 차갑군요,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겠지만.󰡓 빈정거림으로 가득 찬 눈길을 다이아나에게로 돌리며 제이슨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이상 없는데.󰡓라고 말했다. 󰡒이런……이런 관계는 흔히 있는 게 아니라구요!󰡓 다이아나는 침착하지 못하게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값비싼 미술품. 그것들을 ― 제이슨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엉망진창으로 부수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쫓겨다. 그보다도 정말 상처를 입히고 싶은 것은 제이슨의 마음이지만……. 그렇지만, 그것을 불가능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다이아나는 똑바로 제이슨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당신, 여행을 떠나는 게 어떻겠어요? 유럽으로 가서 훌륭한 미술관이나 박물관, 화랑 등을 구경하면서 돌아다니는 건 어떨까요? 나는 여기에 남겠지만,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요. 배도 점점 불러오겠지요. 그러니까 여행은 무리라고 생각해요. 당신 혼자서 로마에 가면 어떨까요? 모두들 로마에 가고 싶어하는데 어째설까요?󰡓 󰡒조각을 보러 가는 거요.󰡓 󰡒그럼 파리에는?󰡓 󰡒세련된 여자를 보러.󰡓 󰡒런던에는요?󰡓 󰡒트라팔가 광장의 사자도 보고 빨간 버스도 타보려는 거지. 다이아나, 당신도 함께 갑시다.󰡓 다이아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는 이내 숙였다.


󰡒나는 곧 그 빨간 버스처럼 뚱뚱해지고 말겠지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인간의 아이를 낳는 거야, 당신은. 코끼리 새끼를 낳는 것이 아니라구. 아기가 태어나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야 해요.󰡒 제이슨이 성큼성큼 다이아나 쪽으로 다가왔다. 무엇인가를 습격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다이아나는 손으로 쫓는 시늉을 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구멍이 뚫어지는 게 아닌가 싶도록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다이아나의 몸 속에 있는 슬픔의 샘을 파헤친듯,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쏟아져 내렸다. 󰡒다이아나, 아기를 낳는 것은 그렇게 두려운 일이 아니야.󰡓 다이아나는 제이슨이 흘리게 만든 눈물을, 분하다는 듯이 훔쳤다. 두번 다시 울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겠으면서도 울어버리고 만 자신에게도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우리는 약간 씁쓰레한 무슨 과일을 먹어버린 게 아닐까요? 당신은 나무 과일을 좋아하지요?󰡓 흐느낌 때문에 다이아나의 목소리를 떠듬떠듬 이어져다. 󰡒약간 씁쓰레한 나무 과일은 독을 갖고 있으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당신은 우리의 결혼을 그런 식으로 빈정거리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평생 괴로와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그 괴로움을 누그러뜨리고 싶겠지? 내가 위로해 줄까?󰡓 󰡒당신의 위로라면 필요 없어요.󰡓 󰡒그럼 수면제 대신에 코냑을 한 잔 더 마셔요.󰡓 󰡒그러겠어요.󰡓 다이아나는 자신의 글라스를 제이슨에게 건넸다. 󰡒듬뿍 따라 줘요, 철철 넘쳐흐르게요. 취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들고 싶은 걸요.󰡓 󰡒당신이란 사람은…….󰡓 󰡒이젠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군요, 나는. 당신이 이렇게 만든 거예요.󰡓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 꽃병에 꽂은 진한 홍색의 장미꽃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머리에 손을 뻗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거요? 어떻게 해야 당신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태어날, 당신의 소중한 후계자에 대해 걱정하고 있나요? 내가 늘상 신경질을 내며 흥분한다면 유산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겠지요?󰡓 제이슨이 무어라고 말하려 하는 순간, 다이아나는 날쌔게 몸을 떼며 제이슨의 손을 뿌리쳤다. 󰡒그만! 말했을 텐데요. 당신이 손을 대면 기분이 나빠져서…….󰡓 다이아나는 문 쪽으로 뛰어갔다. 문을 활짝 열고 복도로 나와 계단을 올라가자, 2층의 레이디 그레이스라고 불리고 있는 별채로 달려갔다. 그곳을 전에 다이아나가 사용하던 침실이었다. 문 앞까지 갔을 때, 다이아나는 걸음을 멈추고 뒷걸음질 쳤다. 헐레벌떡 달려오긴 했지만,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 침실은 바로, 잊으려야 움직이을 수 없는 그 일이 벌어졌던 방이다. 그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이 방으로부터 뚝 떨어진 다른 방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던 것을 그만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새로운 자기 방으로 달려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을 꼭 닫았다. 문에는 열쇠가 꽂혀 있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면서 문을 잠그고, 꼼꼼히 문단속을 하고 난 뒤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몹시 지쳐 있는데도 가슴의 고동은 빨라지고 있었다. 제이슨이 여기까지 쫓아오진 않겠지, 그렇게 심한 말을 들은 뒤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다이아나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제이슨에게서 받은 반지가 무겁게 느껴졌다……. 제이슨은 뜻대로 나를 이 집에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로서는 , 이 집에 있는다는 것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일 뿐이다. 두


사람의 사랑의 결정도 아닌 아이를……. 그로부터 몇 주일이 지났다. 그동안에 다이아나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귀중한 존재가 된 두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리타 말콤이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제이슨이 사전에 조사해서, 평판도 좋고 솜씨도 좋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이아나를 맡기기로 한 산부인과 의사다. 닥터 말콤은 40세 가량의 총명하고 따스한 인간미를 풍기는 여의사다. 짙은 밤색 머리를 목덜미에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그녀는 다이아나가 진찰을 받으러 갔을 때 혈액검사며 기타 대충 진찰을 하고는, 임산부에 대한 상례적인 질문을 했다. 언제 수태했는가에 대해서 다이아나가 정확하게 대답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 핼로윈 축제의 밤말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아주 정확하게 대답하시는군요. 당신들 부부에게 일어서 특별한 밤이었나요?󰡓 닥터 말콤은 미소하면서 물었다. 닥터 말콤과 마주 앉아 있던 다이아나는, 󰡒네, 그래요.󰡓라고 어물어물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닥터 말콤은 수태한 날을 카르테에 기록했다. 󰡒예정일은 8월 1일이에요. 태어날 아이에게 있어서 여름은 좋은 시기지요. 그렇게 되도록 계획했나요?󰡓 다이아나는 고개를 들고 당황해 하면서 대답했다. 󰡒네? 아, 아니에요…….󰡓 닥터 말콤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부드러운 양가죽의 밤색 부츠를 벗고, 크림 빛깔의 구두를 신었다. 그러고는 아직 순진한 데가 있는 다이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밝은 밤색 머리칼이 감싸고 있는 하트형의 얼굴, 도톰한 입술, 안경 속의 눈은 그녀가 내성적인 성격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 눈은, 아이를 가진 행복감에 가득 찬 눈이 아니라 망설임에 싸인 슬픈 눈이었다. 󰡒미세스 데블레어, 아이를 몹시 갖고 싶었겠지요?󰡓 닥터 말콤은 걱정스러운 듯 다이아나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 말했다. 󰡒주인은 몹시 기다려진다고 하시더군요. 서로 알게 된지 아직 얼마 안 된 모양이지만, 틀림없이 좋은 아버지가 되실 거예요. 당신도, 주인의 격려를 받아 좋은 어머니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약간 불안하긴 하지요?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런 거예요.󰡓 다이아나는 닥터 말콤이 왼손의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어 보았다. 󰡒선생님은 아이가 있으신가요?󰡓 󰡒네, 쌍둥이 사내아이가 있어요. 둘 다 대학에 다니기 때문에 내 곁을 떠나 있지요. 주인도 의사였는데, 폐혈증으로 도아가셨어요. 주인은 나의 전부였기 때문에, 난 아무리 해도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지 않았어요.󰡓 󰡒주인의 일은 안됐군요.󰡓 라고 말한 다이아나는, 부부가 진심으로 사랑해서 생긴 아이라면, 지금처럼 불안과 공포가 뒤섞인 기분을 갖게 되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한 기분을 떨어버릴 수 없게 된 진짜 이유를 말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미세스 데블레어, 당신은 아직 젊고 건강하긴 하지만, 약간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아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요? 그래선 안 되요. 조금 더 체중을 늘리도록 노력해 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월씬 뚱뚱해 보일 텐데요.󰡓 닥터 말콤은 생긋 웃어 보였다. 󰡒글쎄요. 지금의 상태로은 어쨌든 간에 너무 야위었어요. 임신중에는 상당한 양의 칼로리를 태아에게 빼앗기니까,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서 모체를 가하게 빼앗기니까,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서 모체를 강하게 해둘 필요가 있어요. 게다가 부인의 경우는 첫 아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도록 해서 아이가 순조롭게 자라도록 해야 돼요.󰡓 󰡒순조롭게 자라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건가요?󰡓 다이아나는 불안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내 말을 잘 듣고, 제대로 확실하게 식사를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에요. 어쨌든 저바심하지 않도록 하세요. 원래 신경질적인가요?󰡓 󰡒네 그런 편이에요.󰡓라고 다이아나는 긍정했다. 그러고 보니, 제이슨이 곧잘 다리를 쭉 뻗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느긋하게 한 시간쯤 보내는 데 반해서, 다이아나는 편안하게 지내지를 못하고 언제나 조바심을 하며 안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이아나도 담배를 피워 보았지만 콜록거리기만 했다. 󰡒당신이 불안해 할 이유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주인은 헤븐쇼어의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대지주며,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훌륭한 저택도 갖고 있고, 경제적인 걱정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그렇게 예민하게 된 원인으로서 생각되는 것은 단 한 가지, 아직 결혼 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 정도랄까요. 물론 그전에는 연인 사이였겠지만……. 이것저것 캐어 묻는다고 해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심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이아나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꽉 주먹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세게. 󰡒미세스 데블레어, 무슨 일이 있나요? 주인을 사랑하고 있겠지요?󰡓 󰡒저어……실은……그이는 나의 후견인이었어요.󰡓 다이아나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지만, 말은 거침없이 나왔다. 󰡒그랬군요.󰡓 닥터 말콤은 다이아나의 눈앞에 놓여 있는 카르테를 연필 끝에 달린 고무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럼, 그 관계에서 결혼까지 발전한 것이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굉장히 운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주인은 명문 출신이고, 이 지방의 전통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착실하게 가문을 지키고 있는 걸요. 스페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실인가요?󰡓 󰡒네, 그의 조모는 스페인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분이지요.󰡓 닥터 말콤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아무말도 할게 없군요. 당신은 그런 주인과 결혼했으니 정말 행복하겠어요. 주인은 정열적인 스페인 남성처럼 매력적인 분이니까요.󰡓 󰡒그런가요? 그렇게 느끼셨나요?󰡓 다이아나의 목소리를 차갑기만 했다. 󰡒어머나, 당신이 가장 그렇다고 생각해야 할 사람 아니에요? 언젠가 댁의 옆을 차로 지난 적이 있는데, 멋진 곳이더군요. 가까운 시일 안에 저녁식사에라도 초대해 주지 않겠어요?󰡓 󰡒와 주신다면야 대환영이지요.󰡓라고 다이아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럼 그 일은 매듭지어졌군요. 앞으로 당신이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좀더 먹어야 한다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편안한 기분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시켜 줄 릴랙스 교실에 들어갈 수속을 해두겠어요. 주 2회, 장소는 이 빌딩 안에 있어요. 아주 즐겁지요. 게다가 참가자는 모두 초산인 사람들뿐이니까, 공통의 괴로움 등을 서로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더욱 좋을 거예요.󰡓 다이아나는 진찰실을 나오자 차까지 걸어갔다. 번쩍번쩍 빛나도록 닦은 벤츠 안에서 운전기사인 젠킨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젠킨즈는, 다이아나의 일상사를 돌보아주고 있는 하녀 헤스터의 연인이었다. 다이아나는 대학 졸업 축하로 제이슨에게서 스포츠카를 선사받았었다. 하지만 그 핼로윈 축제 이튿날 아침 집을 떠날 때 차고에 두고 갔었기 때문에 제이슨에게 열쇠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지금의 다이아나의 상태로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운전을 못하게 했다. 사고라도 일어나서 아이에게 만일의 일이 생긴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제이슨은 아이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다이아나에게 아무것도 못하게 했다. 언제나 아이의 일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다이아나는 벤츠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마님, 건강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요?󰡓 젠킨즈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의사 선생님이 후계자는 순조롭게 자라고 있다고 하시던가요?󰡓 󰡒전혀 걱정할 것 없어요. 데블레어 가의 후계자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대요.󰡓라고 다이아나는 아유가 가득 담긴 투로 말했다. 이제는 그녀의 임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낳는 당사자인 자기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이아나는 끝내 심사가 뒤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젠킨즈는 거기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이아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안심이


되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헤스터가, 마남은 사내아이라고 믿고 계시는 모양이라고 말하더군요.󰡓 󰡒물론이에요! 사내아이 쪽이 강하게 자랄 수 있고, 게다가 계집아이처럼 속거나 지독한 꼴을 당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들 말하고 있지만, 계집아이 쪽이 더 귀엽지 않을까요?󰡓라고 젠킨즈는 말하면서, 다이아나 쪽의 문을 살며시 바깥에서 닫았다. 마치, 오후의 차 마시는 시간에 사용하는, 깨지기 쉬운 차잔이라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태도다. 칙칙한 황색 제복을 입은 어디까지나 베테랑 운전기사다운 젠킨즈는 운전석으로 돌아가자 깊숙이 앉더니, 전원 한가운데를 데블레어 가를 향해 차를 달렸다. 어제 한밤중에 갑자기 내린 눈 때문에 주위는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데블레어 가에 오고 나서 11년간 줄곧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지냈는데, 금년에 처음으로 밖에서 맞이했다. 데블레어 가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면 반짝반짝 빛나는 장식을 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현관 홀에 세우고, 고용인 전원에게 프레젠트를 하며 성대한 파티를 여는 것이 관례였다. 금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다이아나는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인파의 북새통 속에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맛보았다. 잔업을 하고, 밤이 늦어서야 동료 여점원들과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갔고 ,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엔 가까운 교회로 예배를 보러 갔다. 복도에 서서 그리스도 탄생의 그림을 보았을 때는 죄의식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제이슨이 분노를 폭발시킨 결과 다이아나의 몸을 빼앗아 생긴 아이였지만, 뱃속에 있는 아이의 생명을 말살시키는 일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혼자서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고명한 의사의 진찰을 받고, 운전기사가 딸린 고급 차의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고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로부터는 아이가 순조롭게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집에 돌아가면 호화스러운 점심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정신적으로 충족되지 못한 탓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다이아나지만, 스스로는 자기야말로 이젠 영원히 행복할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괴로와 할 때도 있었다. 그날 밤,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을 때 다이아나는 제이슨에게서, 닥터 말콤이 전화를 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다이아나의 상태는 호조지만 약간 신경질적이 되기 쉬우며, 좀더 먹어서 힘을 내고 활력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다이아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웨이스트를 살짝 죄는 디자인의 , 몸의 선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진주 빛깔의 실크 드레스를 몸을 감싸고 있었다. 목에는 스카프를 둘렀고 허리에는 은벨트를 매고 있었다. 아직 날씬해서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제이슨 앞에서 모델처럼 빙그르르 한바퀴 돌아 보였다. 󰡒될 수 있는 한 날씬한 몸으로 있고 싶어요. 뱃속에서 당신의 소중한 아이가 자라고 있지만, 나 자신도 의지가 있는 인간이에요. 그런데도 모두가 한결같이 뱃속의 아이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아이를 위해서만 이래라저래라 한다구요! 지금은 먹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먹겠어요. 먹어서 뚱보가 되겠어요! 그러면 당신도 마음이 놓이겠지요?󰡓 󰡒잔소리는 집어치워요!󰡓라고 나무라면서 제이슨은 다이아나에게로 바싹 다가와서 허리에 팔을 감았다. 다이아나는 반항적인 눈초리로 제이슨을 마주 보았다. 󰡒임신중의 여성은 아름답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 비단결 같은 살갗인데, 이 실크 원피스보다도 매끄러운 걸. 그리고 살짝 붉은 기가 도는 얼굴도 아름다와, 당신이 칭찬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 특히 그것이 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구. 칭찬의 말은, 내가 당신의 침실을 찾아가 악마의 행위를 하기 위한 전주곡이라고 당신은 굳게 믿고 있을 테이까. 그렇지?󰡓 다이아나는 얼굴을 붉혔다. 닥터 말콤이 제이슨에 대해서 매력적이라고 말한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흘끗 시선을 제이슨에게로 돌리자, 무어인 같은 검은 눈동자, 리틴계인


특유의 뚜렷한 얼굴 윤곽, 구릿빛 살갗, 새하얗고 건강하게 보이는 치아가 다이아나의 눈에 들어왔다. 󰡒나를 껴안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라고 다이아나는 뻔뻔스럽게도 물었다. 󰡒물론이지.󰡓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얼굴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그러고 싶다고 생각지 않았다면 이상한 거지. 그런데, 당신은 나의 아내겠지?󰡓 얼굴에는 동요를 나타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새가 요란하게 날개를 치듯이 가슴이 몹시 두근거려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것을 억누르고 다이아나는 물었다. 󰡒당신, 애인은 없나요? 당신처럼 지위가 있고 돈도 있는 남자는 모두 어딘가에 여자를 숨겨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한 여자는, 부부관계에 흥미가 없는 부인을 가진 남자를 동정해서, 부인대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친절한 사람이라던데요…….󰡓 다이아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이슨은 그녀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눈은 날카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보복을 당하고 싶은가? 그렇게 돼도 여러만 못할 테지? 아무리 나를 화나게 해도 임신중의 당신에게는 아무 짓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멋대로 지껄이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몰라.󰡓 제이슨이 화가 나서 제정신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다이아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공포로 가슴이 떨렸다. 자기 자신에게 공포감을 가져다 줄 말을 제이슨에게 지껄이고 말았다는 데 혐오감마저 느꼈지만, 제이슨을 바로 지척에서 느끼자, 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느닷없이 다이아나는 제이슨에게 물었다. 󰡒제이슨, 만일 내가 당신에게 내 방으로 오는 것을 허락하고, 잠자리를 … … 함께해도 좋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물론, 그렇게 하겠어.󰡓 󰡒하지만, 내가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잘 알고 있지.󰡓 󰡒나의 아버지라고도 할수 있을 만한 후견인이 그렇게 돌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당신도 어지간히 멋대로 지껄이고 있군.󰡓 제이슨은 신경쓰지 않는 체해 보였지만 눈에는, 그렇게까지 말해서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힐 건 없지 않으냐고 말하는 듯, 분노의 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은 자신을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때의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요? 설마 로맨틱한 말로 꾸미려고 드는 건 아니겠지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어. 최신 유행의 양복을 입고 테이블 앞에 앉아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하며, 목욕을 하는 것은, 인간이 세련되고 지적인 대화르 즐기며 달나라에 사람을 보내는 시대가 되었지만, 인간의 본능은 동굴 생활을 하던 시대와 달라진 게 전혀 없어. 충동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는 거지.󰡓 󰡒특히 당신은 그래요.󰡓 라고 다이아나는 못을 박았다. 󰡒무어인이 안달루시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정원에 분수를 만들어 스페인의 정원을 바꾸어 버렸다고 하지만, 스페인 사람의 피를 받아들여 기질까지 바꾸었다고 하는 것은 정말인가요?󰡓 󰡒사실이야.󰡓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허리에 들렀던 팔을 늦추며 몸을 뗐다. 그러고는, 눈을 내리깔 듯이 하고서 말했다. 󰡒그 피가 당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흐르고 있는 거야. 걱정스러운가?󰡓 󰡒어째서요? 아이를 키우는 것은 당신인걸요.󰡓 제이슨은 눈썹을 지켜올리며 다이아나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사내아이가 태아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래?󰡓 다이아나는 웨이스트에 맨 벨트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남자들은 사내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것 같더군요. 게다가 당신에겐 상속시켜 줄 것이 잔뜩 있으니까요. 이 저택에다가 토지, 그리고 은행도. 재혼은 하지 않겠다고 당신이 말했으니까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먼데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제이슨의 눈초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왔다. 󰡒결혼은 한 번으로 충분해요. 아이는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게 되겠지……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에서밖에 어머니를 볼 수 없는, 어머니를 모르는 아이로 말이야.󰡓 식사할 때 제이슨은 다이아나에게,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줄 화가가 헤븐쇼어에 오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바리 소잔이라는 남자지. 여성을 그리는 데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한 사람으로, 일류 화랑에도 작품을 내고 있다더군.󰡓 󰡒그렇지만. 어째서 나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하지요?󰡓 다이아나는 알맞게 구운 스테이크에 포크를 푹찔렀다. 󰡒벽에 나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비참한 결혼 생활을 생각하기보다는, 나에 대한 기억을 일각이라도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나으리라고 생각하는데요.󰡓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지. 아버지와 자기를 두고 떠나가 버린 어머니에 대해서 언젠가는 알고 싶어할 테니까.󰡓제이슨은 감칠맛이 나는 몬라시에 와인이 든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저어, 나는……그렇게는 생각지 않아요.󰡓 와인글라스를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리면서 다이아나는 말했다. 갑자기 식욕이 없어져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당신의 어머님은 돌아가신 거니까 당신은 아무런 원한도 갖고 있지 않을 테지요. 그렇지만 나의 경우는 스스로가 아이를 두고 떠나가는 거예요. 무사히 출산을 해서, 죽지 않고 잘 넘긴다면 말이지만요…….󰡓 󰡒당신은 죽은 따위의 일은 없을 거요.󰡓 제이슨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보다도, 좀더 먹지 않겠어? 레온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만들어 준 거요. 그런데도 거의 먹지 않고 있잖은가.󰡓 󰡒그런 말 마세요!󰡓라고 말하면서 다이아나는 접시를 밀어놓았다. 󰡒나의 식욕에 대해서 말하는 건 이젠 그만 두고, 나의 초상화를 그려 준다는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세요. 젊은가요, 아니면 중년인가요?󰡓 󰡒그렇군. 40세 정도가 될까. 데이트 갤러리에서 그가 그린 그림을 보았어. 정말 훌륭한 그림이었지. 한 여성이 해변에 서 있는 그림인데, 맨발이 파도에 씻기고 있었고 ,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며 어깨 언저리에서 금빛으로 물결치고 있었지. 입고 있는 블루의 면 원피스는 바람에 휘날려 몸에 감기듯 착 달라붙어서 아름다운 지체를 상상하게 해주더군.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그 그림을 보려고 몇 번이나 화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었지. 󰡒당신은 화가의 뛰어난 그림 솜씨에 감탄 한 것이아니라, 그 여자에게서 동경하는 여성상 같은 것을 본 거군요, 틀림없이.󰡓 󰡒맞아, 바로 그랬어.󰡓 제이슨은 와인을 단숨에 쭉 마셔 잔을 비웠다. 󰡒그 그림을 사고 싶었지만 비매품이어서 단념했지. 그 전람회는 분명히, 영국 신진화가의 작품 전람회였는데, 거기에 내놓은 출품작이었지. 화가는 팔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더군. 그 그림의 여성은 그 화가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아마, 결실을 맺지 못한 상대라고 생각되지만, 그 그림에 대한 기억이 줄곧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초상화를 그려야 할 시점에서, 이내 그 화가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지. 연락을 했더니, 당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와준다고 했어요. 거금을 준다 해도 좀처럼 그려 주지 않는 사람이니까,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부탁해요, 젊은 마님.󰡓 󰡒어머나, 난 함부로 말한 적 없어요……. 다른 남자에게는, 그렇지만…….󰡓다이아나는 중얼거렸다. 󰡒나 이외에 몇 사람의 남자나 알고 있지?󰡓 󰡒글쎄요, 나의 머리를 만져 주는 보그 살롱의 미용사인 로저가 있고 , 그리고 아이스크림 가게의 포거스. 그는 언제나 버찌를 덤으로 주곤 하는데,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걸까…….󰡓 제이슨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마음만 먹으면 당신도 꽤 재미있는 여성이 될성 싶은데. 자아, 라이스푸딩을 다 먹도록 해요.󰡓 󰡒제이슨, 라틴계의 남자는 풍만한 여자를 좋아하나요?󰡓


󰡒그렇게들 말하지만, 나에겐 라틴의 피는 4분의 1밖에 흐르고 있지 않는걸.󰡓 󰡒당신은 제정신에서 나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겠다고 생각했나요?󰡓 󰡒물론 제정신에서지. 소잔씨에게, 그 여성은 그린 것과 같은 당신을 그려 달라고 할 작정이야. 그 여성은 생기발랄하게 빛나고 있었어. 그리고 요정같이도 보였지.󰡓 󰡒내가 요정처럼 보이는 것도 시간 문제군요…….임신과 라이스푸딩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다이아나는 넋두리하듯 말했다. 󰡒소잔씨는, 당신의 배가 두드러지게 커졌다 해도 그 것을 감쪽같이 숨기고 그려 줄거요.󰡓 󰡒아아, 분해! 나는 점점 두루뭉수리가 되어가고 있는데 당신으로 말하면 투우사처럼 팽팽하잖아요!󰡓 다이아나는 모시 냅킨으로 살며시 입술을 훔쳤다. 󰡒그래요,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면 되겠군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나는 그림이 되질 않아.󰡓 󰡒당신의 어머님 그림은 정말로 훌륭해요. 그때 당신은 뱃속에 있었겠지요?󰡓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박복한 분이었지. 정말 가엾은 분이었어. 그것이 어머니의 초상화의 눈에 나타나 있는 것을 알아 차렸을 테지? 그렇지만, 소잔씨가 그린 여성은 한 남성을 깊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라고 생각해. 수줍음과 자신감이 뒤섞인 모습에 그것이 나타나 있더군. 틀림없이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거요. 소잔씨는 그 그림에 「도미니」라는 제목을 붙였지.󰡓 󰡒그게, 그 여자의 이름 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다이아나는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물었다. 󰡒틀림없어. 그 그림을 보았을 때, 좀 특별한 이름의 소유자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지. 그녀는 화장도 하지 않았고 성장도 하지 않았는데 눈부실 정도의 아름다움을 은은하게 풍기고 있더군.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지. 그리고 양가의 규수다운 침착성과 내부에 숨은 정열이 멋지게 믹스되어 표현된 거야.󰡓 󰡒제이슨, 당신은 그 사람을 잊을 수 없나 보군요.󰡓 다이아나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제이슨이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지 마음에 걸렸다. 그가 그 그림의 여자를 너무나도 칭송하고 우상화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당신은 걱정이 되나?󰡓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는 편이 인간다와서 좋잖아요?󰡓 󰡒나를 그런 비인나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이따금 그렇게 될 적이 있어요.󰡓 󰡒돌처럼 차갑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네, 그래요.󰡓 󰡒그것은 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당신이 나를 싫어 하는 것은 내가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이잖은가?󰡓 󰡒잘 아시는 군요. 당신은 남에 대한 사려가 결여되어 있어요. 남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의 기분을 무시하고 있으니까요.󰡓 󰡒빅토리아 시대의 멜로드라마의 대사 같은걸.󰡓 제이슨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당신은 진실을 숨기고, 자신의 형편에 알맞게 왜곡 하는군요.󰡓 다이아나는 반항적으로 말했다. 󰡒그런가?󰡓라고 말하고는,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집시가 깨끗이 비워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라이스푸딩은 맛있었나?󰡓 󰡒네, 아주 맛있었어요.󰡓 󰡒겨우 깨달은 모양이군. 싫다고 생각했던 일이 결과적으로는 기쁨이 되는 경우도 있는 거요.󰡓 󰡒라이스푸딩과 비교하다니, 당신도 참!󰡓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다이아나는 얼굴을 붉혔다. 제이슨이 말한 의미를 알아 차렸던 것이다. 그 핼로윈 축제의 밤, 다이아나는 골수까지 치욕을 느끼고 흐느껴 울면서 제이슨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남겼다. 그것을 그는 잘 알고 있으면서,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이 결과적으로는 환희를 알게 된 거라고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마치 ……사막의 야수 같군요.󰡓 󰡒그랬나? 그것은 나의 몸 속에 무어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탓이지.󰡓 󰡒속여넘기는 데도 명수로군요. 당신 탓으로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땐 … … 부끄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누구에게 상담해야 좋을 지 몰랐어요.󰡓 󰡒나에게 상담하러 왔더라면 좋았잖아.󰡓제이슨은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으로부터의 연락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지…….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쪽에서 연락하다니……당신은 자신이 한 짓을 뽐내고 싶었던 거지요? 당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이었겠지요. 당신의 행동은 계획적이었다고 밖에 생각 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 아무래도 나를 그리스 신화의 호색한인 사티로스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다면 그렇게 하라구. 임신한 여자는 피클이나 자두잼을 먹고 싶어한다는데, 당신은 신포도가 먹고 싶은가보군. 그것은 억지를 부리는 거야. 「여우와 포도」라는 이솝 우화처럼 말이오.󰡓 다이아나는 제이슨에게 집어던질 게 없나 하고 테이블 위를 둘러보았다. 󰡒커트글라스를 집어던지는 것은 그만두라고! 값이 비싸서가 아니고, 상처가 난 얼굴로 은행에 출근하는 것은 싫으니까.󰡓 󰡒그럼, 내가 할퀸 상처는 뭐라고 설명했나요?󰡓 󰡒그 이튿날 내가 출근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출근할 수 없었지. 당신이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가출해서 몹시 당황했던 거요. 어쨌든 당신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지.󰡓제이슨은 검은 눈을 다이아나에게로 돌리며, 그 이튿날 출근했으리라고 생각하다니 놀랐는걸, 하는 얼굴을 했다. 󰡒거기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아가씨처럼, 나도 절벽에서 뛰어내렸을 것으로 생각했나요? 설마 구명보트를 띄우거나 하진 않았겠지요?󰡓 󰡒물론 띄웠지.󰡓 󰡒정말이에요? 그렇게도 나를 걱정해 주었나요?󰡓 다이아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제이슨을 쳐다 보았다. 󰡒그렇다니까.󰡓 󰡒바다에 빠져 죽다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어째서일까요?󰡓 󰡒살고 싶었던 거지, 틀림없이. 당신은 전부터 활발한 아이였거든.󰡓 󰡒이젠 아이가 아니에요, 나는. 화제를 돌리겠는데요, 닥터 말콤이 식사에 초대해 주면 응하겠다고 하더군요. 나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가봐요. 당신을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칭찬이 자자했어요. 당신과 결혼하게 된 나를 러키걸이라고 하면서요.󰡓 󰡒바로 그렇지 않은가.󰡓 제이슨은 의자를 밀면서 일어서자 테이블을 돌아서, 맞은쪽에 앉아 있는 다이아나에게로 와서 손을 잡았다. 󰡒뮤직룸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할까. 피아노를 연주해 주겠어……. 기분이 온화해 지겠지?󰡓 󰡒그래요. 뱃속의 아이의 기분도 포근해지겠지요. 언제 닥터 말콤을 식사에 초대할 건가요?󰡓 󰡒실은 벌써 초대했지. 그녀가 당신의 진찰을 끝내고, 아이가 순조롭게 자라고 있다는 것, 당신은 좀더 먹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에게 전화로 알려 주었을 때 말했어. 당신의 식욕을 돋우려고, 레온이 솜씨를 발휘해서 맛있는 것을 만들어 줄 거요.󰡓 󰡒당신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광고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속도위반이라고 모두가 쑥덕거리고 있어요. 나에 대해서 뭐라고들 말할지 당신은 걱정이 되지 않나요?󰡓 󰡒달링, 지금은 19세기가 아니요.󰡓 󰡒그, 별로 의미가 없는 달링이라는 호칭은 그만둬 주었으면 해요. 당신이 속해 있는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곧잘 그런 호칭을 쓰는 것 같지만요.󰡓 󰡒내가 속해 있다니? 당신의 어머님과 나의 어머니와는 먼 친척간이야.󰡓 제이슨은 똑바로 다이아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어머니를 닮았으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곧잘, 어머니의 눈은 수레국화의 블루라고 말하곤 했지요. 어머니는 머리를 언제나 단정하게 매만져서 부드러운 웨이브가 져


있었어요.󰡓 다이아나는 생각에 맞긴 듯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제각기 장점을 갖고 있게 마련이요. 당신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아주 섹시하고, 다리도 아주 멋져요.󰡓 󰡒그럼, 소잔씨가 초상화를 그릴 때 필히 다리를 드러내야겠군요……. 그분은 언제 오시나요?󰡓 󰡒일요일 저녁때, 닥터 말콤도 도니까 모두 함께 식사 하기로 합시다.󰡓 󰡒좋아요. 그대 <도미니>라는 여자에 대해서도 물을수 있겠군요.󰡓 :그것은 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이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면의 사람에게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럴까요? 은밀한 개인적인 문제는, 모르는 사람 쪽이 오히려 이야기하기가 수월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두 사람이 호화스러운 분위기의 뮤직룸에 들어가자 이내 커피가 날라져 왔다. 제이슨은 피아노 앞에 앉자, 다이아나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비창」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분명한 선율과 섬세한 표현--제이슨이 연주하는 곡을 듣고 있노라니, 다이아나의 머리에 갖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예전에,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의 일, 휴가를 실컷 즐길 수 있도록 제이슨이 플랜을 세워 주던 일 등이……. 런던에 있는 제이슨의 단골 레스토랑에 데려가 준 일, 해변에서의 피크닉, 연극이나 연주회에 갔던 일---다이아나는 「 마 이 페어 레이디」같은 뮤지컬을 무척 좋아했다. 「 신 데 렐 라 이야기」도 좋아하는 연극이긴 했지만 ……. 그 무렵에는 아직 꿈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도 없는 한 여성을 교양 있는 숙녀로 키워 준 그 대학 교수 같은 사람을 동경하고 있었다. 제이슨은 리스트의 「사랑의 샘」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가락을 들으면서 다이아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슨 속엔 두 개의 인격이 있는 거야. 지성과 교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야수. 다이아나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꼭 쥐어 배에 갖다 대고 눌렀다. 뱃속에서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나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긴 하지만 완고한 성격의 지배적인 제이슨의 피를 이어받은, 바로 데블레어 가의 아이가 되는 거야. 다이아나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제이슨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손이 피아노의 건반 위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다……. 저 나긋나긋한 손이 나의 몸을 애무하고,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제이슨은 연주를 끝내자 다이아나 곁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의지가 강해서 무슨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니까,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고 생각겠어요.󰡓 다이아나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피아노에 평생을 걸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무엇에? 은행에?󰡓 그러나 제이슨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아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무엇인가에 매혹된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서 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눈동자는, 상아 빛깔의 커튼 저쪽으로 번져가고 있는 밤의 어둠처럼 새까맸다. 󰡒다이아나…….󰡓낮고 깊이 있는 목소리. 󰡒나의 사랑스러운 다이아나…….󰡓제이슨은 다이아나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이마에 입술을 밀어붙였다. 다이아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싫어요!󰡓 󰡒전에도 그렇게 말했지.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되지 않았나.󰡓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을 때, 다이아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고 , 돌연 다이아나는 난폭하게 제이슨을 밀어 젖혔다. 󰡒그만 ! 내몸에 손대지 말아요! 당신 따윈 딱 질색이라구요!󰡓 제이슨은 몸을 경직시키며 일어서자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다이아나에게 등을 돌린 채 잠시 꼼짝 않고서 있었지만, 이윽고 쓸쓸하게 말했다. 󰡒내가 미처 모르고 있었군.󰡓 그 목소리에는 싸늘한 여운이 있었다. 󰡒무엇을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다이아나는 완전히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좀더 원하는 경지까지 나를 접근시켰는가 싶으면 싹 돌아서고 마는군. 어떤 속셈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속셈이라고 생각해요?󰡓 󰡒하기야 그 정도야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만……. 그러나 당신으로선 허용할 수 없는 일이겠지.󰡓 󰡒무슨 뜻이지요?󰡓 󰡒모르겠어…….󰡓라고 말하자 제이슨은 뒤돌아서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핼로윈 축제의 밤에 일어났던 일로 굳이 옹고집장이가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 해도, 역시 결혼은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아니 우리 두 사람 다 그 행위에 대한 보상은 치르지 않으면 안 될거요, 값비싼 보상을. 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해주기 바라.󰡓 󰡒당신의……말뜻을 잘 모르겠군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라니 무슨 말이지요?󰡓 다이아나는 실크 원피스를 매만지면서 일어섰다. 󰡒좀더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요.󰡓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잘 자요. 2층에 올라가기 전에 옷매무시를 단정하게 고치는게 좋을 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안 사람들에게, 두 사람은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될 테니까.󰡓 제이슨은 나갔다. 그가 등뒤에서 문을 닫았을 때, 다이아나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요일의 디너 파티를 위해서 새로운 드레스 ,그것도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멋진 드레스를 사라고 제이슨은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값은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겠지요?󰡓라고 다이아나는 물었다. 토요일 아침, 두 사람은 아침식사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다이아나가 아침 햇살이 가득 비쳐드는 방에 들어갔을 때, 제이슨은 읽고 있던 신문을 놓고 다이아나 쪽에 시선을 주었다. 쌓여 있던 눈도 거의 녹은, 활짝 갠 기분좋은 아침이었다. 정원에서는 새가 지저귀고, 아래쪽 바다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산들바람이 바다의 내음을 실어와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방안에 봄기운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밝은 햇살을 받은 다이아나의 머리칼은 생기에 넘친 우아하고 아름다운 빛깔로 빛나고 있다.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면서 다이아나를 쳐다보는 제이슨의 눈에는, 기쁨과 놀라움이 깃들여 있었다. 󰡒양장점에서 가장 좋은 드레스를 사도록 해요.󰡓제이슨은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여학생처럼 보일 때가 있는걸.󰡓 󰡒하지만 기분은 그렇지가 못해요.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 ,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헤스터가 증류수와 비스킷을 가져다 주어서, 그것을 먹고 나니 조금 나아지더군요.󰡓 󰡒그랬나, 어쨌든 다행이군.󰡓 다이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터 덕분이에요. 눈치가 빠르고 이야기를 해도 지루하지 않고, 솜씨 있게 일을 해내는 아가씨예요.󰡓 󰡒그거 다행이군. 헤스터의 아버지를 은행의 경비원으로 쓰기로 하지.󰡓 다이아나는 토스트를 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슨은 커피포트를 집어들어 다이아나의 잔에 커피를 따르고 크림을 듬뿍 넣었다. 󰡒새 드레스를 사는 것말인데요, 소용없지 않을까요……. 곧 입지 못하게 될 텐데요.󰡓 󰡒소잔씨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거요.󰡓 󰡒그의 그림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요. 나의 초상화도 추억거리밖에 되지 않을 텐데요.󰡓 다이아나는 안경 너머로 제이슨을 말끄러미 쳐바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제이슨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커피를 마셨다. 󰡒소잔씨에게 몇 번 정도 와달라고 부탁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말해 두겠어. 너무 장시간 계속하다가 건강을 해치게 되면 곤란하니까.󰡓


󰡒나라면 괜찮아요. 보세요, 2인분이나 먹고 있는걸요.󰡓다이아나는 잼을 듬뿍 바른 두 개빼의 토스트를 제이슨에게 보였다. 󰡒닥터 말콤은 나의 정신상태를 걱정하고 있어요. 하지만 말하지 않겠지요, 진짜 이유는?󰡓 󰡒나 때문에 당신의 마음의 동요하고 있다는 건가?󰡓 제이슨은, 머리를 물덜미께에 묶고, 화장도 하지 않은 다이아나의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그렇지 않은가요? 당신과 나는 물과 기름인걸요. 잘 되어갈 리가 없지요. 부부니까 더욱 그래요.󰡓 제이슨은 커피를 마시고 잔을 비우자, 뭔기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꿀벌이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려고 바르작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집안의 꽃병에는 언제나, 정원사인 타이슨이 정성을 들여 재배한 꽃이 꽂혀 있었다. 벌이 그 꽃에 붙어서 집 안에까지 들어온 모양이다. 타이슨은 꿀벌을 잡아주기도 했으나, 이따금 아침식사의 식탁에 기어오를 때도 있었다. 돌연, 굳게 오므라져 있던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꿀벌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꽃가루에 도달한 기쁨의 소리를 지르듯이 붕붕거렸다. 제이슨은 갑자기 시선을 다이아나에게로 돌렸다. 󰡒요전의 뮤지컬룸에서의 일, 아직 한번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물과 기름인가?󰡓 다이아나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손에 묻은 잼을 핥으면서 말했다.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당신이 넌지시 유혹하는 것 같았는데?󰡓 󰡒그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제이슨이 눈살을 찌푸리자 이마에 굵은 한일자가 그러졌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앉아 있는 그의 눈에는 사람의 근접을 허용치 않는 쌀쌀한 그늘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무의식중에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고 해석해도 좋겠군.󰡓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젠가요?󰡓그렇게 말은 했지만,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제이슨의 팔에 안겨 키스해 주기를 바라듯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은 플레이를 하고 있는 셈인가? 만일 그렇다면 말해 두겠는데, 그런 어린애 같은 짓은 자주 하는게 아니야. 이번에는 그냥 넘길 수 없다구!󰡓 󰡒어머나, 플레이 같은 걸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그때는 반쯤 잠들어 있었어요. 기분좋게 음악을 듣고 있을 때 꾸벅꾸벅 조는 경우가 곧잘 있거든요…….아얏!󰡓 다이아나는 펄쩍 뛰었다. 조금 전의 그 꿀벌에 쏘인 것이다. 󰡒정말 못된 벌이야! 나를 쏘다니!󰡓 󰡒좀 봐요.󰡓 제이슨은 일어서자, 다이아나의 가날픈 하얀 팔을 잡았다. 쏘인 데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제이슨은 이내 쏘인 자리를 입으로 빨고는 손수건으로 입을 훔쳐ㅅ다. 󰡒이젠 괜찮아. 하지만 약을 바르는 게 좋아요. 2층으로 갑시다.󰡓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허리에 팔을 둘러 받쳐주듯이 하면서 2층으로 데리고 갔다. 다이아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렷다. 󰡒제이슨, 난 벌에 쏘였을 뿐이에요. 독사에 물린 게 아니라구요.󰡓 󰡒마찬가지야. 어쨌든 약은 발라야 해요.󰡓 2층에 올라가자 회랑을 지나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자기의 침실로 데리고 갔다. 다이아나를 거기에서 기다리게 하고, 제이슨은 약을 찾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다이아나가 처음 들어와 보는 제이슨의 침실이다. 소녀 시절에도 한번도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었던 방……아내가 된 지금도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은 이 방에는, 바닥까지 늘어진 연두빛 침대커버기 씌워져 있는, 참나무로 만든 커다란 더블 베드가 있었다. 조각이 되어 있는 옷장에는 그의 취양에 맞은 고급 의류가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커프스버튼, 시계, 셔츠의 장식 단추 등을 보관하는 가죽 상자가 놓여 있었고, 뚜껑에는 제이슨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또, 헤어브러시가 몇 개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다이아나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찍은 사진이 금박을 입힌 액자에 넣어져 장식되어 있었다. 액자를 손에 든 다이아나는, 졸업 가운을 입고 예모를 씌고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제이슨이 뒤에 서서 어깨너머로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을 안 다이아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것을 떨어뜨릴뻔했다. 󰡒나, 나는……그 무렵엔 아주 앳된 얼굴을 하곳 있었다고 생각되어 보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다이아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지금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어. 아침식사 때도 말했을 텐데?󰡓 다이아나는 사진을 화장대 뒤에 도로 놓았다.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팔을 잡자, 약이 스며든 가제를 벌에 쏘인 곳에 가져다 댔다. 󰡒이젠 괜찮아요.󰡓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벌에 쏘였는데도 아픔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바로 지척에 있다는 데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출근하기 전이어서, 제이슨은 고상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중역회의가 있을 때는 언제나 수수한 빛깔의 양복을 입도록 하고 있어, 오늘 아침에도 가는 줄무늬의 다크블루의 양복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셔츠도 다크블루였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빈정거림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흠잡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군요.󰡓 이렇게 제이슨과 함께 있으니, 그의 아이가 뱃속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고 만다. 제이슨의 아이 ! 오랫동안 후견인이었던 그의 아이……지금은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가 되긴 했지만,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다. 대학 졸업식 때, 제이슨은 함께 따라와 주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갈색 피부를 가진 기품이 있는 제이슨을 보자, 다이아나의 친구들은 모두 그에게 동경을 품고 제이슨을 졸졸 따라다닐 정도엿다. 식이 끝나고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제이슨과 기닐 때만 해됴, 반년도 못 되어 그의 아이를 갖게 되리라고는 다이아나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아, 통증이 멎었나?󰡓 라고 말하다가 제이슨능 다이아나가 자기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수상쩍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요. 그보다 한층 쓰라린 생각을 하고 있는걸요…….󰡓 󰡒우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춤을 추고 있는 한쌍의 커플 같군---추고 또 추어도 어김없이 앞에 나왔던 곡이 흘러나와서, 계속 거기에 맞춰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되는.󰡓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변한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당신이 이젠 여학생이 아니고 훌륭하게 성장한 한 사람의 숙녀듯이…….󰡓 󰡒그래서 프로포즈한 거군요. 만일 내가 그대로 계속 이 집에 산다면 모든 사람의 소문거리가 되기 때문이었을 테지요?󰡓 제이슨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당신은 교복을 입고 약간 둥근 모자를 쓰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 그렇지만 노래 가사에도 나오듯이, 그런 소녀가 어른이 되면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아름다와지지, 어쨌든, 우리는 결혼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도, 그 두여자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기까지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어요…….󰡓 다이아나는 먼 곳을 응시하는 눈길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스포티한 셔츠와 진바지라는 캐주얼한 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다이아나는 아직 날씬해서 임신한 것 같이 보지 않았다. 머리는 뒤로 빗어넘기고, 광대나 걸칠 것 같은 안경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다이아나는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올렸다. 󰡒나는 , 당신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그 그림의 여자와는 너무 달라요. 그 도미니라는 여자는 금발이고…….나의 초상화를 감상할 만하게 그리려면, 소잔씨의 솜씨가 여간 훌륭하지 않고서는 무리가 아닐까요?󰡓 󰡒그런 말일랑 집어치워요!󰡓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어깨를 움켜잡자,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내가 소잔씨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그 그림의 여자가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림이 생기에 넘쳐 있기 때문이야.󰡓 󰡒마찬가지잖아요? 그녀가 아름답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요. 난 당신에 대해서 한 가지만은 알고 있어요. 당신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요. 그런데 어째서 신사인 체하며 나와 결혼해서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 거지요? 나는 그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이제가 알았어요, 당신이 나에게 프로포즈한 이유를. 내가 시시 랭처럼 취직하는 것을 말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나를, 당신 곁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거지요?󰡓 다이아나는 얼굴을 들었다. 눈이 공격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레이디즈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별로 문제가 없었어요. 여기에 오고 나서부터예요, 문제가 생긴 것은요!󰡓 제이슨이 다이아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 힘이 너무나 억세어서 뼈가 으스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치자, 결전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길 것만 같았다. 제이슨은 손의 힘을 조금씩 늦추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싸늘하게 말했다. 󰡒시내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셨지만, 신경쓰지 말아요,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요. 적어도 30분은 걸려요. 그럼 중역회의에 늦게 되잖아요?󰡓 󰡒난 은행장이야. 잊었어? 내가 가지 않으면 회의는 시작할 수 없어요. 자아, 기다려 줄 테니까, 준비하고 와요. 양장점까지 데려다 주지, 나도 혼자 가는 것은 싫으니까.󰡓 제이슨이 이야기 하고 있는 동안 다이아나는 커다란 더블 침대에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거기가 아니야.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는데는 30분 이상 걸릴 테니까…….󰡓 제이슨은 웃으면서 말했다. 󰡒뭐라구요? 난……가서 준비하고 오겠어요.󰡓 다이아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다이아나는 급히 자기 방으로 뛰어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을 닫았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가만히 선채, 양손을 달아오른 볼에 가져다 댔다. 침착하라니까, 하고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이러한 감정을 흥분시키는 언동은 좋지 않다고 닥터 말콤에게서 주의를 받았는데, 하고 생각했다. 제이슨과 단둘이 있게 되기만 하면 언제나 마음이 흐트러지고 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짓눌린 듯한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다. 다이아나는 장식선반 위에 놓여 있는 호랑이를 바꾸어 늘어놓았다. 그레이디즈백화점에서 제이슨이 산 호랑이 장식물도 있다. 내동댕이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랑이, 호랑이, 호랑이---어둠 속에서도 번쩍번쩍 빛나는 눈, 매끄러운 털 밑에 불거져 나온 근육, 한없이 탐욕스러운 숨결---용맹스러운 동물이야, 라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다이아나는 떨리는 손으로 호랑이 장식물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셔츠와 진바지를 벗고 원피스로 갈아 입었다. 머리를 빗고, 커트글라스의 용기에 들어 있는 분을 바른 후 후즈를 바르고는 향수를 살짝 뿌렸다. 벽장에서 구두를 찾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나고 헤스터가 들어왔다. 󰡒마님, 부르지 그러셨어요!󰡓 헤스터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누군가의 손을 빌지 않고 일을 해서는 안 되는 마님인데, 하는 표정이다. 다이아나는 심술궂게 웃었다. 󰡒옷 입는 것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어. 그리고, 그렇게 걱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제이슨은 네게 가려운 데를 긁어주듯 돌보아주라고 말했겠지만, 그것은 내가 건강한 아이를 낳아서 빨리 아버지가 되고 싶기 때문인 거야. 나를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구.󰡓 다이아나는 빠른 걸음으로 거울 앞으로 가자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맞아! 우리 두 사람이 시내에 가면 모두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는데, 왜 그런지를 알았다구! 이 도시에서 최고로 매력적인 남성이 안경을 걸친 여자와 함께 다니기 때문이야!󰡓 󰡒마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돼요. 주인님이 마님과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그는 나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사실은 내가 아니라고 좋았던 거지. 그도, 신사의 가면을 벗기고 보면 한 사람의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구.󰡓 󰡒주인님은 언제나 마님에 대해서 걱정하고 계세요. 낮에 회사에 가 계실 때는 모두가 마님을 돌보아드리도록 하라고 언제나 신신당부하시는걸요.󰡓 󰡒그것은, 나의 뱃속에 그의 소중한 아이가 있기 때문이야. 데블레어 가의 후계자인걸,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나를 돌보아주라고 말하고 있는거야. 헤스터, 너도 제이슨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고 있습니다. 󰡓 다이아나는 히스테릭하게 웃으면서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남편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핸섬해서 헐리우드의 스타 같지. 아름답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나같은 여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다이아나는 층계를 내려가면서 또 웃었다. 아래층 현관에서 제이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에 문 시가가 반쯤 줄어들어 있었다. 제이슨은 시가를 놋쇠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계단 아래까지 와서 다이아나를 기다렷다. 다이아나가 내려가자 제이슨이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다이아나는 일부러 그를 피해 어깨에서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른 걸음르로 현관까지 갔다. 󰡒아까 헤스터에게도 말했지만, 나에겐 돌보아주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안경을 쓰지 않아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일 같은 건 없다구요!󰡓 밖에는 재규어가 멈추어 서 있었다. 오늘 제이슨이 타는 차는, 날씬하고 마력수가 나가는 금빛의 재규어였다. 󰡒당신은 금빛을 좋아하는군요.󰡓 󰡒은앵가에겐 안성마춤인 빛깔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슨은 조수석의 문을 열어 다이아나를 앉게 하려고 했다. 󰡒나에게 운전을 시켜 주지 않겠어요?󰡓 다이아나는 애원하는 듯한 눈길을 그에게로 돌렸다. 󰡒운전을 하고 싶어요. 무모한 운전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시켜 주세요. 네, 제발요…….󰡓 제이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자의 장남감 같은 게 아니야.󰡓 󰡒어머나, 여자를 멸시하고 있군요!󰡓 다이아나는 투덜거리면서 마지못해 조수석에 앉았다. 제이슨은 차 앞을 돌아서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면서 다이아나에게도, 󰡒안전벨트를 매도록 해요!󰡓라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다이아나가 안전벨트를 매자, 차는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문까지의 차도에는 주의의 나무나 정원의 숲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창을 열어,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네요, 눈이 내리는가 싶었는데 봄을 알리듯이 작은 새들이 지저귀고 있으니.󰡓 󰡒봄은 멀지 않았지.󰡓 제이슨이 화제를 바꾸며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길에서는 곧잘 사고가 나니까 당신도 앞으로 조심해요. 요전에 사고가 났을 때, 나는 마침 현장을 지나가고 있었지. 슬림 사고였는데, 차는 협곡으로 굴러 떨어졌고 운전하고 있던 여자는 차밖으로 내동댕이쳐졌는데,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죽었다더군.󰡓 󰡒만일 내가 사고를 당했다면, 이 뱃속의 소중한 아이도 같은 운명이 되었겠군요.󰡓라고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얼굴을 살피면서 말했다. 그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당신은 나를 심술궂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않은가요? 나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무엇이 죄선인지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군요.? 󰡒 생각해 봐요. 나는 당신만한 나이 때 은행을 물려받았어. 물론 데블레어 가의 선조가 창설한 은행이지만, 그것을 물려받아 최고의 자리에서 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것을 보아 왔고, 문제가 일어나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나 다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거든. 배의 선장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결혼도 마찬가지지요, 주인님은 한 사람이니까.󰡓 다이아나는 알전벨트를 늦추었다. 󰡒배가 많이 불러져서요. 알겠지요?󰡓 󰡒당연한 일 아닌가?󰡓라고 제이슨은 나무라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 상태가 평생 계속될 리는 없잖아. 그 사실을 차분하게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당신의 오늘의 과제지.󰡓 󰡒지독한 사람! 당신은 즐거운 생각만 하고 있는데, 나는 아픈 생각만 하고 있잖아요!󰡓다이아나는 힐난하듯이 말했다. 다이아나는 핸들을 잡고 재규어를 자유롭게 다루고 있는 제이슨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크블루의 바지에 감싸인 그의 팽팽한 근육질이 다리를 보자 다이아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단련된 몸의 야성적인 매력이 나타나 있었다. 그는 훌륭한 체격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셈세한 마음의 소유자기도 했다. 다이아나는, 그의 복잡한 감정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깊이 숨겨진 그 어두운 부분을 엿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들어갔다가는 갇히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메종 테리에서 내리면 될까?󰡓시내 중심가에 이르렀을 때 제이슨이 물었다. 이 부근은 회사나 상점의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디. 󰡒네, 거기가 좋아요. 미장원에도 가는 편이 좋을까요? 커트를 할까요, 퍼머넌트를 할까요?󰡓 󰡒머리는 그대로가 좋아. 그 캐주얼한 느낌이 썩 잘 어울리니까. 바리 소잔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가고, 당신의 얼굴에는 화려한 헤어스타일은 어울리지 않거든󰡓 󰡒그럼, 내 용모가 평범하다는 거예요?󰡓 󰡒당신은 내가 손을 스치면 느낄 수 있는 , 피가 통하는 인간이지 잡지 표지의 사진이 아니라는 거지.󰡓라고 제이슨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다이아나쪽으로 몸을 내밀어 키스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감짝 놀랐기 때문에, 다이아나는 그의 입술이 포개졌을 때 입을 벌린 채였다. 두 사람의 입술은 겨우 몇 초 밖에 포개져 있지 않았지만 제이슨의 손이 다이아나의 머리를 받쳐 주고 있어서, 그녀는 무의식중에 제이슨의 어깨에 매달리고 있었다. 제이슨은 천천히 다이아나에게서 몸을 뗐다. 그의 입에 루즈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다이아나는 핸드백에서 티슈를 꺼내 제이슨에게 건넸다. 󰡒입을 닦는게 좋겠어요.󰡓 제이슨은 티슈로 입을 닦으면서 다이아나의 홍조띤 얼굴을 보고 있었다. 󰡒선착장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하지 않겠나? 난 한시에는 시간이 날 것 같은데, 당신도 괜찮겠지?󰡓 다이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규어에서 내리자 문을 닫고, 차가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이슨의 은행은 선착장 옆에 있는, 전망이 좋은 고층 빌딩에 있었다. 다이아나는 바다 내음을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교통량이 많아서 배기가스가 소용돌이치는 런던에 있을 때, 이 상쾌하고 기분을 북돋워 주는 것 같은 바다 내음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메종 테리에 들어가기 전에, 다이아나는 잠시 한가하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틀림없이 제이슨에게 키스를 당했기 때문이야. 그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다이아나는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이슨은, 양친을 잃고 의지하러 온 다이아나의 후견인이 되어 그녀를 자기 아이처럼 보살펴 주며 키워왔으므로 자기 것인 양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다이아나는 고아원으로 보내져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겠지만……. 양장점에 들어가자, 󰡒어서오세요, 미세스 데블레어. 오래간만이군요.󰡓라고 점원이 인사를 했다. 다이아나는, 양장점 사람들이 상냥하게 대하는 것은 자기가 제이슨 데블레어의 아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안경을 걸친 고아 주제에 어떻게 데블레어씨와 결혼 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음을 틀림없다는 것도. 쇼룸에 있던 주인 테리 레녹스가 나와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일에만 매다려 살고 있는 30대 중반의 금발 미인인 테리를 다이아나는 존경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인기 모델이었지만, 돈을 벌어 파리로 가서 프랑스인 선생 밑에서 2년간 양재와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때 그 선생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는 독신주의자였으므로 결혼은 할수 없었다는 것이다. 영국에 돌아와서는 , 사랑을 깨끗이 단념하고 디자이너가 되었다. 일에 대해 정열적이고 성격이 차밍한데다가 미인이기고 해서, 양장점을 헤븐쇼어의 유한 마담의 메카로까지 발전시켰다. 다이아나는 18세 때부터 쭉 이 양장점의 단골손님이 었다. 󰡒어머나, 오랜간만이네요.󰡓라고 말하면서 나온 테리는 프랑스식으로 양쪽 볼에 키스를 했다. 󰡒결혼을 축하해요. 이 지방에서 가장 부자를 꼬아 맞혔군요.󰡓 󰡒어머나,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요.󰡓라고 말하는 다이아나의 목소리를 야유가 담겨 있었다. 테리가 차례차례로 드레스를 권해 올 테니 임신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겠지,


하고 생각했다. 다이아나는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테리는, 󰡒얼마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약간 몸이 좋아졌지요?󰡓라고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다이아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우린, 가족이 한 사람 더 불어나는걸요.󰡓 󰡒어머나, 정말?󰡓테리는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결혼은 지난달에 했지요? 그렇다면 두 사람만의 신혼시절이 짧았군요…….확실한가요?󰡓 󰡒네, 예정일을 8월이에요. 8월에 들어가서 바로라나요.󰡓 다이아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어머……그래요…….󰡓테리의 얼굴에는 분명히 놀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순수한 사랑이 두 사람을 불타오르게 한 거군요. 그렇지요?󰡓다이아나는 수줍음에 어깨를 움츠렸다. 󰡒주인은 기뻐하시겠지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걸요. 아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아버지가 되는 것이 몹시 기다려지나 봐요.󰡓다이아나의 목소리를 들떠 있었다. 󰡒물론이겠지요. 데블레어 가의 후계자가 태어나는걸요. 주인은 외아들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무척 쓸쓸하게 보냈을 거예요. 부자집 도련님에겐 밖에서 노는 것이 허용되지 않거든요. 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주인은 오래 전부터 부인과 결혼하기로 결정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한 게 아닐까요? 그런데, 내가 디자인한 중세풍의 드레스, 아직 갖고 있나요? 그것을 입으면 탑에 유폐된 여자처럼 보여요.󰡓 󰡒안경을 쓰고 있어도요?󰡓다이아나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테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안경은 부인에게는 일종의 매력이 되고 있어요. 아주 잘 어울려요. 마음쓸 거 없어요. 섹시하게 보인다고 일부러 안경을 쓰는 패션모델도 있을 정도인걸요. 도로시 파커 여사가 한 말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예요. 지금 시대에는 안경을 쓴 사람도 섹스를 즐기고 있어요.󰡓 󰡒섹스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라고 다이아나는 불쑥 물었다. 󰡒육체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테리는 눈에 쓸쓸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치수를 새로 재야겠네요. 곧 다시 본래의 몸매로 돌아가긴 하겠지만, 어느쪽을 원하세요? 사내아이, 그렇게 않으면 계집아이?󰡓라고 말하면서 테리는 다이아나를 경의실로 데려갔다. 󰡒주인은 사내아이를 몹시 바라고 있어요. 나도 사내아이쪽이 좋다고 생각해요. 여자에 비해서 남자 쪽이 괴로움이 덜할 테지요?󰡓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 반대가 되는걸요.󰡓테리는 다이아나의 히프를 재서 기록했다. 그러고는 웨이스트를 재고, 바스트를 재더니 갑자기 휘파람을 불었다. 󰡒바스트가 3센티나 커졌는데요. 잘 되어가는군요.󰡓 다이아나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난, 맥주통처럼 될 것 같아요. 주인에게는 말한 적이 있지만, 만일 남자가 아이를 않아야 한다면 그들도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을 거예요.󰡓 󰡒그럴 거예요.󰡓테리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둘이서 나누어 가질 기쁨인걸요. 주인은 다정하게 대해 주시겠지요?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겠지요?󰡓 󰡒네, 그렇긴 하지만.󰡓다이아나의 얼굴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일요일에 손님을 식사에 초대 하기로 되어 있어요. 나를 돋보이게 할 만한 드레스를 사라고 했어요……. 골라 주시지 않겠어요?󰡓 󰡒실은, 부인에게 꼭 어울리는 게 있어요. 어느 손님의 부탁으로 특별히 만든 것인데, 그분은 일전에 사고를 당해서 돌아가셨지요. 부인이 미신을 믿는 분이라면 권하지 않겠지만, 너무 멋진 드레서라서요. 빛깔도 틀림없이 잘 어울릴 거예요. 사정이 사정인 만큼 버릴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요……한번 보시겠어요?󰡓 다이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분, 협곡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분인가요?󰡓


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포츠카였던 모양이에요. 미끄러져서, 그녀는 차 밖으로 내던져졌다나 봐요.󰡓 󰡒주인은 그 사고를 목격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오싹하도록 충격을 받으셨겠군요.?󰡓 󰡒그 사고가 있은 후로는, 주인은 나에게 운전을 못하고 해요. 그러니까, 드레스 건은 주인에게 물어 보지 않으면…….󰡓다이아나는 말끝을 흐리며 미간을 모았다. 󰡒그렇다면 그만두기로 하지요. 디자인을 한 나로서는 어느 분에게도 입힐 수 없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할수 없지요.󰡓 󰡒하지만 보고 싶어요. 무슨 빛깔인가요?󰡓 󰡒잿빛에 가까운 블루……. 아주 아름다운 빛깔이에요. 옷감도 최고급이지요……. 하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분에겐 안됐지만, 운명이나까 하는 수 없지요. 나는 미신 따윈 믿지 않아요. 일어날 사교는 일어나게 되어 있는 걸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건 그래요. 그럼 곧 가져오겠어요.󰡓 테리는 다이아나를 경의실에 혼자 남겨 둔 채 나갔다. 칸막이로 화려한 꽃무늬의 커튼이 쳐져 있었다. 마침 공단을 씌운 의자가 있어서, 다이아나는 속옷 바람으로 거기 앉아서, 테리가 드레스를 갖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슨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하고 생각하니 흥미가 일었다. 경의실의 커튼이 열리고, 테리가 비닐 봉지에 들어 있는 드레스를 들고 나타났다. 다이아나는 일어서며, 테리가 꺼내는 드레스를 보았다. 숨을 죽일 정도로 훌륭했다. 󰡒멋진 빛깔이지요? 입어 보시겠어요, 그렇지반드시 않으면 생각을 고치시겠어요?󰡓 다이아나는 옷감을 만져 보았다. 매끄러운 것이, 꼭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비싸겠지요?󰡓 󰡒당신의 주인이라면 충분히 사줄 수 있는 가격이에요. 입어 보도록 하세요.󰡓 그 드레스는 다이아나에게 딱 맞았다. 삼면경에 비춰보니, 마치 자신을 위해서 만든 드레스로 착각을 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스커트 부분에는 충분히 주름이 잡혀 있었으며, 실크의 광택이 폭포처럼 바닥까지 이어져 있었다. 조심조심 걷자, 사각거리며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멋지군요!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 호화스러운 것 같지 않아요?󰡓라고 다이아나는 물었다. 󰡒눈의 빛깔이 드레스의 빛깔과 어울리는군요.󰡓테리의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있었다. 디자이너로서, 다이아나를 기쁘게 했다는 것이 즐거웠던 것이다. 󰡒부인 만큼 깨끗한 피부를 가진 분는 그렇게 흔치 않아요. 여자 손님을 많이 보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피부를 가진 분은 별로 없었어요. 스킨로션의 선전 광고에 나가도 되겠어요.󰡓 다이아나는 얼굴을 붉혔다. 자기에게는 다른 여자가 부러워할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만큼, 전혀 뜻밖의 칭찬이었다. 󰡒나는 안경을 걸친 고아 어니라는 말을 듣고 있는걸요. 스킨로션의 광고에 나가다니, 어림도 없어요!󰡓 󰡒하지만, 주인께서는 그런 말을 하실 텐데요?󰡓테리는 윙크를 했다. 󰡒당신은 로맨틱하군요. 어째서 결혼하지 않나요?󰡓 󰡒제멋대로고,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서지요. 양장점도 잘 되어가고 있고 , 확장할 생각도 하고 있거든요. 주부로서의 생활과 양립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가 아닐까요. 여자는 사랑에 전념하념 살든지 일에 전념하며 살든지,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돼요. 주인은 남편으로서도 최고겠지요, 모든 점에서?󰡓 󰡒애정면에서?󰡓 󰡒네. 생활을 리드해 가면서, 부인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있겠지요? 바로 맞혔지요?󰡓 󰡒당신은 주인에 대해 겉으로 드러난 얼굴밖에는 모르고 있어요.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인간에게는 두가지 얼굴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당연하지요󰡓라고 테리는 힘주어 말했다. 󰡒나만 해도 그런걸요. 밖에 나오면 양장점 주인답게 행동하고 있지만, 집에 돌아가면 느긋해져서, 화장도 지우고 거들도 벗어버리고


피자를 먹는걸요. 치즈와 후추가 입안에서 녹는 맛이란 기가 막히지요. 맨발로 돌아다니고, 머리도 풀어버리지요. 부인은 그러한 나를 상상할 수 없겠지요?󰡓 󰡒당신은 무엇을 해도 우아하게 보일 분이에요.󰡓라고 말하면서 다이아나는 미소를 지었다. 󰡒부인도 이 드레스를 입으면 우아해질 거예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른 걸 입어 보시겠어요?󰡓 󰡒이것으로 결정했어요.󰡓빛깔도 잘 어울렸고, 조만간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다이아나는 결심했다. 󰡒사고에 대해서는 잊겠어요. 청구서는 주인에게로 보내 주세요.󰡓 󰡒그러겠어요.󰡓테리는 다이아나가 드레스를 벗는 것을 거들면서 말다. 󰡒오후에라도 보내드리겠어요. 주인은 부인에게 새삼 홀딱 반하실 거예요.󰡓 다이아나는 힘없이 웃었다. 󰡒테리, 당신은 직업여성인데도 로맨틱하군요. 나는 더 이상 로맨틱해질 수 없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도 현실이 너무 냉혹하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경우가 있겠지만……나의…… 경우는 마음이 삶은 계란같이 단단한걸요.󰡓 󰡒부인은 아직 반숙 정도 밖에 안 된 것 같은데요. 주인은 주위의 사람들을 차단시키고 단둘이만 있기를 원하시지 않나요?󰡓 󰡒데블레어 가의 집은 육지의 고도 같은걸요.󰡓 다이아나는 화제를 돌리려는 듯이 말했다. 테리는 우리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거야, 라고 생각되자 가슴이 아팠다. 다이아나는 무거운 기분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제이슨은 돌벽에 등을 기대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헤엄치는 백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잠자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름다운 모습이군……. 그런데, 드레스는 어떻게 되었지? 마음에 드는 것이 있던가?󰡓 다이아나는 심술궂은 웃음을 입가에 띠면서 말했다. 󰡒테리는 원기 왕성하던걸요.󰡓 󰡒그래, 그거 다행이로군요. 이봐, 저 새를 보라구! 마치 발레리나 같은걸.󰡓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당신이 나 같은 여자를 아내로 선택하다니, 정말 이상해요!󰡓 제이슨은 다이아나 쪽으로 얼굴을 홱 돌렸다. 다이아나는 떨고 있었다. 차에 코트를 두고 온 것이다. 그는 다이아나의 손을 잡자, 울화가 치미는 듯 말했다. 󰡒어째서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거지? 이미 결혼했으니까,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잖아!󰡓 다이아나는 후리후리한 키에 건장하고 핸섬하며 우아한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태어날 아이가 나처럼 근시하면 어떡하지요. 학교에 가면 <네눈이>라고 놀림받을 거예요.󰡓 󰡒아이들은 때로은 잔혹하니까. 그러나 악의는 없는 거요.󰡓 󰡒어른은 일부러 악의를 갖고 말하구요.󰡓 󰡒어째서 그렇게 안경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거요? 당신이, 눈이 서글서글한 금발 아가씨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어쨌다는 거요?󰡓 󰡒그렇지만, 당신은……설마…….󰡓 다이아나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제이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설마, 뭐지? 자아, 말해 보라구!󰡓 󰡒설마……나를 존경하고 있는 건 아닐 테지요?󰡓 다이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두 사람이 점심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킹피셔>라는 레스토랑 쪽으로 달려갔다. 다이아나는 뒤돌아보며, 󰡒빨리요! 바람이 싸늘해지고 있어요!󰡓라고 제이슨을 재촉했다. 제이슨은 쫓아와 다이아나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자는 듯이 말했다. 󰡒마치 경주견 같은걸. 돌바닥 위에 나뒹굴면 어쩌려고 그래!󰡓 󰡒당신은 아이가 걱정스러워서 그러는 거지요?󰡓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팔을 움켜잡았다. 󰡒테리가 무슨 말을 했나?󰡓 󰡒아니요, 굉장히 기뻐해 주었는걸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거요?󰡓 󰡒나는 기쁠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완고한 당신 때문에 나의 인생은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겨우 일자리를 얻은 참이었는데…….󰡓 󰡒당신이 원한다면 그레이디즈 백화점은 다시 당신을 고용히 줄 거요. 조금 전에, 내가 당신을 존경하고 있느냐고 물었지?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존경 할 수 없다구.󰡓 식사중, 두 사람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제이슨은 택시를 불러 다이아나를 태워주었다. 택시 안에서 다이아나는,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오늘 산 드레스의 주인공이 죽은 사고 현장을 지나갈 때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 블루그레이의 드레스---결연히 그것을 입을 수 있을까……. 저주는 정말 존재하고 있는 걸까?

---7--바리 소잔은 은빛의 숱이 많은 머리를 말갈기같이 나부끼고 있는 남자다운 사람이었다.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로, 그 대화 솜씨는 노동자 계급 출신임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커다랗고 억센, 강인해 보이는 손을 갖고 있었다. 저녁식사의 자리에서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다이아나는 줄곧, 상대의 매력을 찾아내려고 드는 듯한 화가 특유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리에서 얼굴로 옮겨졌을 때는, 어떻게 느꼈을까 하고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짙은 녹색의 원피스에 프렌치슬리브의 상의를 걸친 세련된 옷차림의 닥터 말콤이 제이슨과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어서, 다이아나는 바리 소잔을 한층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세스 데블레어, 초상화를 원하고 있나요? 바리는 흘끗 제이슨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자기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서 벽에 장식 하는 것은 돈이 많은 남자나 하는 짓이지, 라고 경멸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다이아나는 아보카도 열매가 곁들여진 새우 요리를 스푼으로 떠서 입에 가져가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주인이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걸요. 집안일은 고용인들이 전부 해주고 있고 , 집안에서 쿡도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거의 할 일이 없어요. 그저 아이가 태아나기를 기라릴 뿐이지요.󰡓 󰡒예정일은 언제인가요?󰡓 바리는 상냥하게 물었다. 다이아나는 단도직입적인 바리에게서 포근한 정을 느꼈다. 󰡒순조롭게 된다면 8월초예요.󰡓 라고 말하는 다이아나는 인지와 중지를 교차시켜, 앞으로의 일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고 시늉을 했다. 󰡒이 아이는 핼로윈 베이비인걸요. 그래서, 마법사가 태어나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돼요.󰡓 󰡒미신을 믿는 편인가요?󰡓 바리는 웃으면서 물었다. 다이아나를, 남편인 제이슨보다 훨씬 연하의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제이슨은 검소한 양복을 입으면 관록이 있어 보인다. 거기에 비해 바리는 풍우에 견뎌 온 로마 조상 같은 풍모였다. 󰡒그것은 주인에게 물으세요. 화가의 눈으로 본다면 남편의 얼굴에서 대답을 알수 있을 걸요 생각해요.󰡓 바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와인을 마시고 잔을 바웠다. 그러고는 흘끗 제이슨의 얼굴을 보고는 다이아나에게 말했다. 󰡒주인의 초상화도 그리고 싶은 모양이더군요.󰡓 󰡒가운을 입고 망사 그물을 뒤집어쓴 주인일 테지요?󰡓 다이아나의 말에, 웃음을 참을 길 없다는 얼굴을 하며 바리는 말했다.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어요.󰡓


󰡒어머나, 기뻐요. 정장을 해야 하나요?󰡓 바리는 잠시 다이아나를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보고 나서 말했다.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면 됐어요. 눈빛과 꼭 같은 그 빛깔이 아주 잘 어울려요.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뭔가에 사로잡힌 듯한 구슬픈 분위기라고나 할까요.󰡓 다이아나는 확 얼굴을 붉혔다. 화가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표현은 보통인 것일까. 그 구슬프고 쓸쓸한 그림자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바리처럼 상냥한 사람을 대하고 보니 무의식중에 그것이 얼굴에 드러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이 그렸다느 <도미니>라는 여자와는 너무도 차이가 져서 실망하신 거 아닌가요? 주인도 도미니양에게 홀딱 반했는걸요.󰡓 󰡒주인께서?" 바리는 곁눈으로 슬쩍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주인은 대단히 안목이 높은 분 같군요. 그 밖에도 비슷한 취양의 사람을 만난 적은 있지만요." "그런가요?"다이아나는 안경을 치켜올리고, 데블레어가의 술창고에서 꺼내 온 고급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소잔씨는 재미있는 분이군요." "사람은 제각기 취향이 다르니까요. 아까 말한, 주인과 취향이 비슷한 사림이란, 위압적인 구석이 있으며 프라이드도 높고……그래요, 호랑이 비슷한 남자였지요." "어머나, 작가 같은 표현도 하시는군요."다이아나는 바리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작가와 화가와는 공통점이 많이 있어요. 사람을 볼 때, 왕성한 상상력으로 관찰하지요. 그리고, 이름을 떨치기까지는 빈곤과 투쟁해야 하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즐거운 일로 보일는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남보다 배나 일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요. 일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시겠지요?" "물론 평생의 일이지요." "결혼은?" 바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사자처럼 날카로운 눈에 갑자기 구슬픈 빛이 떠올랐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사랑의 상대를 만나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은 일시적인 사랑에 절대적인 사랑을 원하고, 어떤 사람은 일시적인 사랑에 만족하지요. 하지만 나는 원하던 사랑의 형태를 충족시킬 수 없었으므로 일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거지요." "그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다이아나는, 건강한 체격에 상냥한 마음을 지닌 바리 소잔과 이야기 하고 있으니 마음이 온화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인이 어째서 나의 초상화를 당신에게 부탁했는지 알고 있겠지요?" "나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고마운 일이지요." "주인은 웬만해서는 남을 칭찬하는 법이 없으니, 칭찬할 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겉치레로 칭찬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10년 이상이나 전에 데이트 화랑에서 「도미니」라는 당신의 그림을 보고, 그 훌륭함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소잔씨는 미인만 그리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가요?󰡒 󰡒나는 개성 있는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은 거예요. 도미니는 우연히 미인이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사람을 강렬하게 끄는 개성이 있었지요. 설사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해도 사랑했으리라 생각해요.󰡓 󰡒진심으로 사랑하신 모양이군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시 침묵이 흘렀다. 쿡이 카리브 해 스타일의 로스트포크, 버터에 볶은 강남콩, 잘게 썬 박하 잎을 뿌린 감자, 데친 양배추를 날라다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맛있을 것 같군요.󰡓 바리의 얼굴에 웃음이 되살아났다. 다이아나도 미소를 지었다. 󰡒주인은 무엇이나 최고의 것을 선택하는 주의인걸요. 그래서 나의 초상화도 당신에게 부탁한 거예요. 그런데, 얼굴이 잘 그을었는데요, 어디에 갔었나요? 이 지방은 날씨가 나쁘잖아요…….󰡓


󰡒그렇더군요. 크리켓 시합을 하거나 테니스를 하거나 야외음악제에라도 가려고 마음먹으면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바리는 로스트포크를 먹으면서 만족스러운 듯 미소했다. 󰡒실은 지금는 크레티 섬에 살고 있어요. 이따금 런던의 아틀리에로 돌아오곤 하지만요. 주인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는 마침 거기에 있었다는 뜻이 되지요.󰡓 󰡒에게 해의 섬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다이아나는 오늘밤엔 식욕이 왕성했다. 󰡒그리스라는 나라도 그리스인도 아주 좋아하지요. 한번 친구가 되면 결코 우정을 잊지 않거든요. 도미니말이지만, 그녀는 그리스인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그렇게 행복스러운 부부는 본 적이 없을 정도지요. 금화의 앞뒤처럼 일심동체지요. 아이도 둘이나 있어요. 도미니는 한번, 하마터면 남편을 병으로 잃을 뻔했지요. 그 무렵에 나도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에 그를 방해물로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가 죽는다 해도 도미니는 재혼할 사람이 아니에요. 도미니의 몸과 마음은 그의 것이니까요. 그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난 친구로서 그녀와 교제하게 되었고, 지금도 둘도 없는 친구지요.󰡓 바리는 닥터 말콤과의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제이슨에게 눈을 돌리고, 도미니의 결혼과 다이아나의 결혼과를 비교하는 듯한 얼굴을 했다. 󰡒주인에게도 좋은 점이 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아주 관대한걸요. 관대함이 지나쳐서, 은행에서도 중역들과 노상 옥신각신하나 봐요. 곤란한 사람에게 돈을 융통해 주는 일이 흔히 있거근요.󰡓 󰡒당신의 후견인이었다고 들었읍니다만?󰡓 󰡒네, 10세 때부터.󰡓 󰡒그럼, 자신이 좋아하는 타이프로 당신을 키웠나 보군요.󰡓 󰡒그의 양육 방법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취미가 고상한 드레스도 좋고, 정숙한 아내답게 주인을 감싸는 것도 좋고, 용의주도하군요.󰡓 󰡒주인에게 따르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결코 당신의 친구인 도미니 같은 미인은 못 되니까요.󰡓 바리는 다이아나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그녀의 얼굴의 윤곽, 피부 빛깔, 도톰한 입술에 시선을 쏟으면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응시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눈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랑? 그것은 꿈이 아닐까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그림자---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아닐까요?󰡓 󰡒사랑은 형체도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요.󰡓 󰡒하지만,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 같아요.󰡓다이아나는 바리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는 다정한 빛이 넘치고 있었다. 󰡒초상화에는, 이 드레스를 입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요?󰡓다이아나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그 드레스가 싫은가요?󰡓 󰡒저어 실은, 이 드레스에는 어두운 이야기가 얽혀 있어요.󰡓 다이아나는 제이슨에게도 들리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고 , 가슴 두근거리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드레스를 처음 주문한 사람은, 이 근처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하더군요. 차가 미끄러져서 골짜기 밑으로 떨어졌고, 그 분은 차 밖으로 내던져져서 죽었다나 봐요.󰡓 모두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제이슨이 일어서면서 분노를 폭발시켰다. 󰡒어째서 그 따위 드레스를 산 거지? 빨리 갈아입고 와요!󰡓 제이슨의 분노는 상상 이상으로 격렬했다. 다이아나는 후회의 감정도 있었지만 승리감에 도취한 듯 의기양양한 기분이 있었다.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제이슨이 곁으로 다가왔을 때, 그녀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자아, 빨리! 당장 가지 않으면 2층까지 끌고 가서 그 드레스를 찢어버릴 테니까!󰡓 닥터 말콤이 끼어들었다. 󰡒부인을 흥분시키지 말아 주세요.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선생, 그렇지가 않아요. 선악의 구분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아니거든요……. 저 사람에 대해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요. 내가 운전을 못하게 했더니, 앙갚음을 한 거예요.󰡓라고


말하자 그는 다이아나의 팔을 움켜잡고 흔들어댔다. 󰡒앙갚음하려고 계획적으로 꾸민 짓이지? 응? 분명히 말하라고!󰡓 󰡒네, 그래요. 당신이 화를 낼 것은 알고 있었어요.󰡓 󰡒얼른 옷을 갈아입고 오지 않으면 끌고서라도 데려 갈 거요!󰡓 󰡒소잔씨는, 초상화엔 이 드레스를 입는 게 좋다고 말씀하셨는걸요.󰡓 다이아나를 2층으로 올라가도록 독촉하던 제이슨은, 바리 소잔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바리는 실눈을 뜨고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초상화는 스페인 사람인 조모의 드레스를 입게 할 생각입니다. 잘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지금도 아름답지요. 조모가 젊은 시절에 입었던 승마복이긴 하지만.󰡓 제이슨은 다이아나 쪽으로 돌아서자 그녀를 노려보면서 거칠게 말했다. 󰡒벽창호같으니라구! 자아, 빨 2층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라구! 그 저주받은 옷을!󰡓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등을 떼밀 듯이 하면서 독촉했다. 󰡒그렇게 고래고래 악을 쓰면, 죽은 사람에게까지 들리겠어요!󰡓발끈한 다이아나는 그에게 대들었다. 󰡒난 이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당신처럼 미신에 얽매이지도 않는다구요!󰡓 제이슨은 적의에 가득 찬 눈초리가 되었다. 󰡒잠깐 실례.󰡓라고 두 손님에게 말하고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팔을 움켜잡자, 식당을 나와 질질 끌 듯이 하며 2층으로 데리고 갔다. 다이아나는 바이스처럼 꽉 죄는 그의 손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유산할지도 모르니까요!󰡓 󰡒당치 않은 말 집어치워! 선생은, 당신은 괜찮다고 말했어.󰡓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방 문을 확 열자 그녀를 내팽개 치듯이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저주받은 드레스를 벗지 않겠다면 갈가리 찢어 놓겠어!󰡓 󰡒찢으면서 오싹오싹한 쾌감을 맛보고 싶은 거지요? 그것이 당신의 사랑의 테크닉이니까.󰡓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건가?󰡓라고 말하자,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빙그르르 돌리고는 허리께까지 이어져 있는 단추를 하나씩 끌렀다. 다이아나의 몸에서 바닥에 미끄러져 떨어진 드레스를 제이슨이 발로 차버리자, 두사람은 마주 보고 섰다. 천천히 제이슨의 목에 팔을 감은 다이아나는 달콤한 목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듯이 말했다. 󰡒정말 화나셨나요?󰡓 󰡒내가 어째서 화가 났는지 알고 있을 텐데? 이 따위 드레스를 당신에게 권하다니, 테리에게 한마디 해주겠어…….󰡓 󰡒테리를 나무라지 마세요, 내 생각으로 결정한 것이니까요. 나는 이 드레스가 갖고 싶었어요.󰡓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우리 두 사람의 사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고는 은밀하게 즐기고 있군 그래. 우리의 관계를 깨버리지 않고서는 마음이 개운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이가 뱃속에 있는 동안은 분별있게 처신해 주기 바라.󰡓 제이슨은 옷장으로 가자, 행거에 걸려 있는 다이아나의 드레스르 하나씩 살펴보다가 옅은 블루의 원피스를 꺼내 들고 왔다. 󰡒이것을 입어요, 당장. 머리도 매만지는 게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살롱에서 커피와 코냑을 마시고 있을 테니까 내려오도록 해요.󰡓라고 싸늘하게 말하고 제이슨은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자 다이아나는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응시했다. 깊은 애정에 감싸여서 구애를 받는다는 것은 어떠한 느낌일까? 모든 것을 사랑해 준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이윽고 침대에서 일어서자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학 동창들은 모두가 미인이었다. 그녀들은 자주, 남자는 미인이고 명랑한 여자와 데이트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근시여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다이아나를 몹시 가엾게 생각해 주었다. 대학의 댄스파티에서도 치크댄스를 추자는 남자들의 신청을 거절하느라고 애를 먹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다이아나는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주말에는 언제나 공부만


했기 때문에, 미인 여학생처럼 보이프렌드와 함께가 아니고 책과 함께 지내곤 했다. 다이아나를 진정으로 생각해 준 것은 제이슨뿐이었다. 테리 레녹스가 말했듯이, 그는 다이아나를 장래 자기의 아내로 만들 셈으로 교육해 왔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몇 대나 이어오는 은행가의 집에 태어나, 가업을 계승하고 번영시키는 것에 밖에 관심이 없는 남자에게 걸맞은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 제이슨으로서는 제멋대로인 여자와는 도저히 잘 해 나갈 수가 없었으리라. 다이아나라면 데블레어 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 고용인들과도 잘 지낼 수 있으며, 멋대로 집안의 관습을 바꾸려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이아나는, 자신은 제이슨이라는 커다란 기계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어깨를 움츠리자 거울 앞을 떠나, 제이슨이 골라 준 드레스를 입었다. 그가 이른 대로 머리도 단정하게 매만지고 나서 아래층의 살롱으로 갔다. 닥터 말콤 옆에 앉자, 조금 전의 행동을 사과했다. 억지로 웃음을 띠면서, 󰡒나의 컨디션 탓으로 돌리세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닥터 말콤은 웃은 얼굴로 달래 주었다. 󰡒임신중에는, 그것도 첫 아이를 가졌을 때는 신경질적으로 되는 사람이 많지요. 젊음에 대한 미련과 어미니가 된다는 불안으로 조바심이 나는 거지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커다란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영예로운 일이기도 해요.󰡓 󰡒영예?󰡓다이아나는 커피에 코냑을 따르고 은스푼으로 저으면서 닥터 말콤의 말을 되풀이 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중국 양탄자, 비단으로 바른 벽, 동양풍의 가구를 배치한 살롱에 걸맞게, 오늘 밤의 커피 잔은 중국제 도기였다. 󰡒생각해 보세요, 다이아나. 당신의 몸 속에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예요. 한 사람의 인간이 자라나고 있는 거지요. 당신을 향해 내미는 손, 아장아장 걷는 다리, 귀엽게 웃는 입과 눈이 생겨나고 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지요.󰡓 어느샌가 바리 소잔이 두 사람 곁으로 와 있었다. 󰡒나도 선생과 같은 의견이에요. 관찰해 보면, 자연이라는 것은 신비해요. 눈을 휘둥그렇게 뜨게 만드는 것이 있어요. 작은 씨앗에서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사랑의 포옹에서 아이가 태어나니까요. 그러고 보니, 나는 자연을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걸요.󰡓 󰡒그것은 별로 나쁜 일은 아니지요. 모두가 세상에서 제각기의 역할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걸요. 달님도 이지러질 때가 있으며,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선과 악이 요동치고 있으니까, 자연을 거스르는 생활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결국, 인간은 자연그러더라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비가 올 때가 있는가 하면 갤 때도 있는 것 처럼.󰡓 닥터 말콤의 이야기에는 직업상 풍기는 품위 때문인지 설득력이 있었다. 이야기꽃이 피었고, 금방 한 시간이나 지나고 말았다. 다이아나는 그다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인생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닥터 맘콤은 왕진 예약이 있다고 하면서 작별을 고했다. 제이슨이 닥터 말콤을 전송하려고 살롱에서 나가자 이내, 다이아나는 바리에게 물었다. 󰡒내가 주인에게 쌀쌀하다는 것을 알고 말았군요. 이제 나의 초상화 같은 건 그리고 싶지 않겠지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그리고 싶은 의욕이 샘솟고 있는걸요. 부인의 마음도 잘 알았어요.󰡓 󰡒나의 감정은 알지 못하실 거예요. 만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는걸요.󰡓 󰡒주인은, 부인이 사회에 나가 남성들과 교제도 해보기 전에 결혼을 결정한 거지요?󰡓 다이아나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당신이 좋아했던 분이 그랬나요?󰡓 󰡒그건 다르지만, 내 말이 맞지요?󰡓 󰡒도미니양은 아름다운 분이었겠지요?󰡓 󰡒마음의 아름다움이 드러나 있지요…….부인처럼, 내부에 정열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에요.󰡓 다이아나는 깜짝 놀랐다. 󰡒나에겐 정열 같은 것은 없어요.󰡓


바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미간을 모았다.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부인은 아직 젊어서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거예요.󰡓 󰡒주인은, 어쨌든 말참견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아요.󰡓 다이아나는 바리의 통찰력에 놀라고 말았다.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자신의 내부에는 숨겨진 정열이 있는 것일까……. 바리의 말은 신경이 쓰이는 지적이었다. 󰡒주인은 조모의 승마복을 나에게 입히고 싶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라고 말할 수 없군요, 보지 않고서는……. 하지만, 부인의 개성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은 안 됩니다.󰡓 󰡒안경이라든지?󰡓 바리는 얼굴을 가까이 해서 안경을 벗기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안경이 없으면 곤란한가요?󰡓 다이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한 근시라서요.󰡓 󰡒요즘은 근시도 수술을 하면 고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주인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던가요? 무엇이나 다 알고 계시는 분같이 보이던데요…….󰡓 다이아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주인은 안경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어쨌든간에, 근시를 고쳤다고 해서 헤븐쇼어의 미인 콘테스트에 나갈 것도 아닌걸요.󰡓 󰡒그다지 허영심이 강하지 않군요.󰡓 󰡒하지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싶어요. 스타일은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다이아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것도 지금이나 그렇다는 것이지만, 이 나긋나긋한 몸매도 잠시뿐이겠지요…….초상화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형편에 따라서지요. 안장 위에 옆으로 슬쩍 걸터앉게 돼 있는 승마복이라면 에드워드 7세 시대의 것인데, 부인은 그 당시 부인들의 새침한 용모와는 좀 다른데가 있어서.󰡓 󰡒주인의 스페인인 조모는 너그러운 마음씨의 소유자였다고 들었어요. 다이아나는 분개한 듯이 말했다. 󰡒개성적이었고, 언제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인상이 주인과 비슷한걸요. 주인의 초상화를 그리면 좋으련만! 유명한 투우사 루이 데 멘도스가 선사한 의상이 있거든요. 틀림없이 썩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주인은 투우사의 용기에는 감탄하지만, 투우 그 자체는 좋게 생각하지 않아요.󰡓 󰡒주인에게는 그 풍격이 있어요. 주인은, 내가 부인을 다이아나라고 불러도 뭐라고 하지 않을까요? 나와 부인과는 부녀 사이맘큼이나 나이 차가 나니…….󰡓말하다 말고 바리는 입을 다물었다. 제이슨도 다이아나의 아버지 뻘이 되는 연령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모양이었다. 󰡒주인에게 물어 봐 주세요.󰡓다이아나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나는 개의치 않자만, 주인은 ---별것도 아닌 일을 느닷없이 화를 내곤 하니까요…….󰡓 󰡒거의 모든 일을 주인의 뜻대로 하시는 것 같군요. 하지만, 폭발해서 난처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그 드레스말인가요?󰡓 󰡒우리 앞에서 부인으로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요. 그 화를 내는 폼으로 보아서는 말입니다.󰡓바리소잔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그래요.󰡓라고 다이아나도 시인했다. 󰡒그 사고를 자기 눈으로 목격했으니까, 더욱 그런 거지요. 소유욕이 대단한 사림이니까요…….그래서 나의 마음과 몸을 혼자서 독점하려고 드는 거예요.󰡓 그때 제이슨이 들어왔다. 다이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들어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눈을 번뜩이면서 귀를 곤두세우고 있으니까.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제이슨이 본심을 숨기는 데는 명수라는 것을 다이아나는 잘 알고 있었다. 󰡒소잔씨, 담배는?󰡓라고 말하면서 제이슨은 목각으로 된 시가 상자의 뚜껑을 열고,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매밀었다. 시가의 연기와 향기가 살롱에 은은히 감돌았다. 󰡒저어…….󰡓바리가 입을 열었다. 󰡒무엇입니까?󰡓의자에 푹 파묻혀 앉은 제이슨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바리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종종 폐를 끼치게 될 텐데, 두 분을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겠지요?󰡓 󰡒물론이고말고요. 그런데, 나의 조모님의 승마복을 다이아나에게 입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지요? 집 사람은 승마를 하니까 승마복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선 보여주시겠어요?󰡓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라고 말하면서 제이슨은 일어섰고, 옻칠을 한 장에서 양복상자를 꺼냈다. 󰡒보고 싶어하실 것으로 생각해서 여기에 넣어두었지요.󰡓 시가를 입에 문 채 제이슨은 양복상자를 열고, 얇은 비단에 싸인 승마복을 꺼내 상의와 스커트를 펼쳐 보였다. 보랏빛의 캐시미어로 만든 것으로, 안달루시아 지방 특유의 정교한 수가 놓여 있었다. 󰡒멋진 빛깔이군요!󰡓 바리는 몸을 굽히고 승마복을 보고 있었다. 󰡒스포티한 가운데 여자다움이 함빡 담겨 있는 옷이군요. 부인에게 꼭 어울리겠어요. 섬세한 느낌이 들 것 같은데요. 그것을 그림에 나타내 보이고 싶어요. 부인의 피부 빛깔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 빛깔이군요.󰡓 제이슨은 바리 쪽을 보았지만, 그 검은 눈동자에는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싸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바리는 승마복을 불빛 가까이로 가지고 가서 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무릎 위의 쿠션을 껴안으며 말했다. 󰡒당신의 머리가 비상하군요……반드시 생각한 대로 하고 마니까요.󰡓 󰡒내가 말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뿐이야. 그 드레스가 사고와 관계가 없었다 해도, 당신에게는 승마복을 입히고 싶었던 거요. 조모의 유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소잔씨도 말했듯이 당신에게 잘 어울리기 때문이지.󰡓 󰡒안경은 어떻게 할까요?󰡓다이아나는 중얼거렸다. 󰡒그림을 그릴 때는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별난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좋지 않을까요?󰡓라고, 바리는 승마복을 상자에 넣으면서 말했다. 󰡒어머나, 소잔씨는 자신의 용모가 훌륭하다는 것을 짐짓 과시하고 계시는군요.󰡓 다이아나는 바리에게 미소하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고맙군요. 빨리 그림을 시작하고 싶은데요.󰡓바리는 창작 의욕에 불타는 눈으로 다이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제이슨에게로 돌아서면서 물었다. 󰡒매일 아침 두 시간씩, 열 시에서 열 두시까지면 어떨까요?󰡓 󰡒어때, 다이아나? 두 시간은 무리일까?󰡓 󰡒그 정도라면 괜찮아요. 병에 걸린 것도 아닌걸요.󰡓 󰡒앉아 있는 걸 그리게 되나요? 제이슨이 바리에게 물었다. 󰡒글쎄요, 어느쪽이 좋을지. 앉는다면 멋진 승마복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서 있는 것이 좋겠지요. 3,4회, 반드시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어요.󰡓 󰡒나는 괜찮아요. 제이슨, 당신이 오히려 임신한 나보다 더 걱정하고 있군요. 실은 그 승마복으로는 앉기도 힘들겠어요. 그리고 서 있는 편이 스커트가 아름답게 보일 테지요? 피로를 느끼게 되면 언제라도 이내 말 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지. 언제부터 시작해 주시겠어요?󰡓 󰡒월요일에 준비를 끝내고……화요일부터 시작하기로 하지요.󰡓 󰡒완성하려면 얼마나 걸리겠어요?󰡓 󰡒글쎄요, 고치는 것까지 감안해서 3주일 정도면 되겠지요.󰡓 󰡒그러면 좋아요. 그럼 초상화의 착수를 축하하는 뜻에서 건배!󰡓 세 사람은 글라스를 맞부딪쳤다. 󰡒자신의 초상화를 갖게 되어 기쁜가요?󰡓 바리는 다이아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네. 하지만 여기에 걸려 있는 것들은 아름다운 분들의 그림뿐이어서 나는 자신이


없어요.󰡓 󰡒한여름의 태양이 지고 밤의 어둠이 밀려오기 직전의 하늘 빛 같은 이러한 보랏빛 승마복이 어울리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아요.󰡓바리는 타이르듯이 말했다. 󰡒모든 것을 맡기겠어요. 제이슨의 조모님의 초상화 보셨나요?󰡓 󰡒아직. 꼭 보여주십시요.󰡓 바리가 당장 보고 싶어해서 세 사람은 살롱에서 나왔다. 복도의 벽에, 기품이 있는 용모의 나누에라 부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제이슨은 그녀의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이어받은 것이다. 󰡒아름다운 분이지요.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아요.󰡓 다이아나는 한껏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었다. 바리의 날카로운 눈이 검은 레이스의 쥘 부채를 들고 있는 손께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다이아나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것과 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보여주시기 않겠어요?󰡓 바리는 다이아나의 왼손을 잡자,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초상화에 이 반지를 넣어야겠군요. 아이가 장성했을 때 , 데블레어 가의 가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할 테니까요.󰡓 󰡒그렇지만……나는 그때는…….󰡓라고 말을 건넸지만, 생각을 고쳐 이야기를 흘렸다. 󰡒그렇군요, 제이슨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다이아나는 이야기하는 투로 미루어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모양이지만, 바리는 손목시켸를 보고는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데블레어 가의 다니기 편리하게끔 가까운 마을에 집을 빌고 있는 바리는, 화요일 아침에 올 것을 약속하고 식사에 대한 인사를 하고는 작별을 고했다. 제이슨이 현관 밖에까지 전송을 나간 사이에, 다이아나는 2층으로 올라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헤스터는 일찍 돌아갔으므로 혼자였다. 다이아나는 일부러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목욕 타월로 정성껏 몸을 닦았다. 오늘 밤은 정말 즐거웠고, 바리와 같은 멋진 사람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어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가까지, 마음을 쏟을 데가 있으니 시간도 빨리 갈 테지. 아이는 사랑의 결정이어야 마땅한데,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항하는 다이아나를 막무가내로 자기 것으로 만든 제이슨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욱신거리는 것 같은 관능의 세계로 자기를 이끌어갔던 그날의 일을 다이아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잡지를 읽고 있는데, 문의 핸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을 잠갔으니까 열리지는 않겠지만, 제이슨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자 다이아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이아나가 전기 스탠드의 스위치에 손을 뻗었을 때, 발코니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제이슨이 들어왔다. 다이아나는 깜짝 놀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무슨 일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신에게 볼일이 있지, 오늘 밤엔.󰡓 하면서 제이슨은 한 발짝 다가왔다. 󰡒나가요! 당신에겐 여기에 들어올 권리가 없어요!󰡓 󰡒문을 잠그지 않았다면 이러지도 않았다구!󰡓 제이슨은 떨고 있는 다이아나에게 덮쳐들었다. 다이아나는 제이슨을 밀어젖히려고 필사적이었지만, 막무가내로 내리누르는 데는 당할 수가 없었다. 󰡒그만! 꺼져요!󰡓라고 외치면서 다이아나는 그의 가슴과 어깨를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하지만 철문을 두드리고 있는 거나 진배없었다. 드디어 다이아나가 울음을 터뜨리자 제이슨은 그녀의 눈까풀에 다정하게 입술을 댔다. 그토록 저항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이아나는 감미로운 새계로 이끌려 가고 있었다. 잠시 후,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남겨 두고 조용히 발코니로 나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이아나는 한기를 느끼고 침대로 파고들었다. 수치심이 머리를 들고 있었다. 이미 화를 낼 기분도 아니었지만, 다시는 제이슨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손톱만큼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몸을 맡긴 스스로에게 울화가 치밀어 올라다. 다이아나는 일어서자,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리면서 갑자기 피로를 느껴, 몸에 모포를 휘감고는 소파에 눕자 이내 잠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침대에서는 자고 싶지 않았다……오늘밤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30분마다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초상화의 모델 노릇을 하는 것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바리는, 그림을 완성하기까지는 다이아나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면서, 돌아갈 때는 반드시 캔버스에 유포를 씌우고 가죽끈으로 매고는 열쇠를 채웠다. 󰡒나를 신용하지 않는군요?󰡓 󰡒부인네들은 꼬치꼬치 캐내기를 좋아하거든요. 지금 보고 실망해서 눈매가 변하면 곤란하니까요.󰡓 󰡒어떤 눈매로요? 근시인 사람은 놀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매라고 해도 되나요?󰡓 󰡒그렇군요. 하지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약점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되나요?󰡓 󰡒주인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나요?󰡓 바리는, 다이아나의 남편인 제이슨의 속마음을 헤아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그에 대한 화제는 피하려 하고 있었다. 󰡒속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분이더군요.󰡓 󰡒그다지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군요? 주인이 집을 나간 뒤에밖에는 뵐 수가 없으니까요.󰡓 󰡒거기엔 이유가 있지만…….󰡓바리는 커피 잔을 놓았다. 자아, 그럼 시작하기로 하지요.󰡓 󰡒잠깐만요. 그 이유를 듣고 나서요.󰡓 󰡒정말이지 부인네들은 꼬치꼬치 캐어 묻기를 좋아한다니까…….󰡓 󰡒어쨌든 꼭 듣고 싶어요.󰡓 󰡒주인에게는 강요하는 듯한 구석이 있더군요. 어느 정도 그렸느냐고 몇 번이나 물어 왔지만, 난 보일 생각이 없어요.󰡓 󰡒마음에 걸리나요?󰡓 󰡒마음에 걸릴 건 없어요. 하지만 난, 제이슨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성을 초상화로 그리고 있는 겁니다. 그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서 내게 부탁한 그림을 말입니다. 그래서 제이슨의 기분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추상적인 말이지만…….󰡓 󰡒잘 알아요……. 주인은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요. 나를 원하는 것도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에요……. 나는 그를 위해서밖에 존재하지 못하는 거예요. 11년 전 처음으로 이 집에 와서 그를 보았을 때, 커다란 나무로 보였어요. 그가 나를 안아들었을 때 울고 말았던 일이 지금도 기억나요. 양친을 잃고 쓸쓸했던 탓도 있긴 했지만요. 그때 이미 나는 그의 소유물이 된 거예요. 도망치면 죽음을 당할 거라고까지 생각했는걸요……. 하지만, 잠시 가출했었지요. 물론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이내 끌려 돌아왔으니까요. 그리고 결혼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다이아나는 모든 것을 바리에게 이야기했다. 바리와 함께 있으면 몹시 즐거웠다. 그는, 다이아나의 결혼에 관해서는 그 후로는 한번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바리는 다이아나의 속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보다 한층 더 상냥하게 대했고, 다이아나도 좋은 친구가 생겨 기쁘기 그지없었다. 어느 날 다이아나가 물었다. 󰡒도미니의 그림은 만족스럽게 그려졌다고 생각하시나요?󰡓 바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도미니를 그린 것은, 저 유명한 풍경화가 터너가 바다의 풍경을 그린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사랑을 하고 있는 여성은 바다처럼 끊임없이 변하니까, 좀처럼 그릴 수가 없지요. 물론 변한다는 것은 매력이 더해지고 있다는 뜻이지만.󰡓 󰡒도미니를 잊을 수 없지요?󰡓 󰡒네, 언제나 머릿속에 있어요. 그녀만큼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은 앞으로도 없을리라 생각해요.󰡓 바리는 다이아나를 룸끄러미 쳐다보더니 캔버스에 화필을 달리기 시작했다. 󰡒당신도 매력적이에요, 다이아나. 도미니와 마찬 가지로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리고, 자신의 매력을 이용하려는 행동을 하지 않는것도……. 지금까지 몇


사람의 여성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지만, 정신적으로 풍부한 사람을 캔버스에 표현하는 것은 재미있어요. 얼굴을 별로 상관이 없어요. 화가는 그 사람의 내부에 숨겨진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지금 나를 그리는 것도 그렇게 하고 있겠군요?󰡓 다이아나는 웃은 얼굴로 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제이슨이 어떠한 반응을 나타낼지 걱정 되었다. 󰡒보는 것은 조금만 더 참아 줘요.󰡓 󰡒만일 내가 그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나는 모가지지요.󰡓 󰡒그럼, 제이슨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그림은 깊숙이 보관되겠지요. 다이아나, 그 얼굴, 어떻게 좀 할 수 없을까요?󰡓 󰡒그 얼굴이라니요?󰡓 󰡒아름답게 그리도록 해서 제이슨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지나쳐서, 입이 일그러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수정해서 그리나요? 당신은 그렇게 할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그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정직한 인간이지요. 미모도 껍데기에 지나지 않지만 여자는 요물이에요.󰡓 󰡒나도 그런가요?󰡓 󰡒당신은 깊이가 있어요. 셈세하고. 조가비처럼.󰡓 󰡒어머나, 추상화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나의 경우는 바닷가에서 만조를 기다리고 있는 임신한 조가비인걸요.󰡓 󰡒다이아나, 유니섹스를 부르짖으면서 남녀의 구별을 없애려는 운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이 있지요. 그 여자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만족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에요. 원래가 남자와 여자은 체격도 사고방식도 다른 겁니다. 다르기 때문에 멋진 거지요. 낮과 밤처럼 상반 되니까 말이에요.󰡓 󰡒어느 쪽이 밤인가요?󰡓 󰡒물어 보지 않아도 알 텐데?󰡓 󰡒그럼 여자가 밤이군요.󰡓 󰡒물론이지요. 그리고, 신비스럽다는 면에서도 남자는 여자에게 당할 수 없지요. 그 신비가 모두 남녀의 사랑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사랑은 밤의 것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다이아나는 중얼거렸다. 󰡒가장 알맞은 때지요. 수수께끼에 가득 차 있고, 상상력이 풍부할 때. 그리고 따스한 침대가 준비되어 있을 때…….󰡓 󰡒지금 주인이 들어와서, 우리가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내 목뼈라도 부러지게 될까봐 걱정하고 있는 건가요, 다이아나?󰡓 󰡒내 쪽이 먼저 부러질 거예요.󰡓 󰡒주인이 당신에게 상처 입히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아이 때문에?󰡓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데블레어 가의 관습이라고 말했을 테지요?󰡓 󰡒그 말도 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사랑의 성격을 포착해서 표현하는 화가기 때문에 선택한 거래요. 당신을 부자연스럽게 아름답게 그리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거지요.󰡓 󰡒그래요? 그래서, 그대로 하고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요. 당신의 눈 속 깊이에는 슬픔이 깃들여 있어요. 그런 당신의 눈 속에 행복의 빛을 그릴 수는 없는 거지요.󰡓 󰡒이 집에서 오래 살았는걸요. 제이슨은, 나의 성격이 비뚤어져 있어서 어둡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나는새장 속의 새나 다름없어요.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되었구요.󰡓 󰡒도미니와 마찬가지군요……. 남편인 폴이 몸만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대개의 남자가 그렇겠지요?󰡓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사려가 깊은 남자도 있는 걸요, 무신경한 남자도 있지만. 도박이나 마찬가지예요.󰡓 󰡒도박? 그 말 마음에 들었어요.󰡓 󰡒그것이 인생이에요. 한번 승부에 이겼으면 다음에는 한번 지게 마련이지요---결국은 남자도 여자도 사랑을 구하고 있는 거예요. 「 남 태 평 양 」 이 라 는 영화에 이런 노래가 나오지요---여자란 정말 불가사의한 동물. 남자는 유전을 파고 전쟁에 나가고 우주를 탐험하지. 그렇지만 여자와의 사랑 없이는 살아 갈 수 없어요, 라는. 들은 적 있지요?󰡓 󰡒바리, 당신은 정말 로맨틱한 분이군요.󰡓 󰡒그렇지 않으면 화가가 될 수 없어요. 예술의 근원은 사랑인걸요.󰡓 󰡒그렇지만…….󰡓 라고 말했을 뿐 다이아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보랏빛 승마복이 다이아나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허영심 같은 건 전혀 없는 다이아나였지만, 언경을 쓴 <고아 어니>가 아닌 자기의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 기쁘기만 했다. 아이가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았을 때 실망하지 않을 테니까. 󰡒다이아나?󰡓 󰡒죄송해요, 움직였지요?󰡓 󰡒아니, 그건 아니에요. 뭔가 고민스러운 일이 있나요? 이야기해 봐요.󰡓 󰡒글쎄요,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면, 됐어요…….󰡓 󰡒크레타 섬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시기 않겠어요?󰡓 그로부터 며칠간, 다이아나는 바리에게서 멋진 나라 그리스에 대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바리가 그리스를 본거지로 하고 있는 것은, 광선이 그림을 그리는 데 가장 알맞고 멋진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다이아나는 무서워서 도저히 사랑을 믿을 마음이 될수 없었지만, 바리는 진심으로 사랑을 믿고 있었다. 그러한 바리에게, 제이슨과 결혼생활을 보낸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비취나 호박의 장식물과 마찬가지로 취급되고 있는 나. 제이슨은 잠시 그 감촉을 즐기고는 본래의 장소로 돌아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자기도 마찬가지라는 기분을 다이아나는 떨어 버릴 수가 없었다. 제이슨에게는 메스필드라는 비서가 있었다. 데블레어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오랫동안 근속한 사람들뿐으로, 결혼도 그 사람들끼리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이아나의 시중을 들고 있는 헤스터도 운전기사인 젠킨즈와 약혼했고, 진주 반지를 받고는 행복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다이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사랑받은 환희를 온몸 가득히 느끼고 있는 헤스터를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느날 밤, 헤스터가 다이아나의 머리를 빗어 주고 있을 때, 헤스터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웨딩 드레스는 당연히 새하얀 것으로 해야겠지요, 마님. 아버지가 사주신다고 하셨어요. 면사포는 조모님의 것을 빌기로 했어요. 약간 누렇게 되긴 했지만 지금도 아름다운 걸요. 뭔가 한 가지라고 옛 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다고들 말하잖아요?󰡓라고 헤스터는 마냥 즐거운 듯이 말했다. 다이아나는 행복에 가득 찬 헤스터의 얼굴를 거울 속에서 보면서,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너는 더 이상 행운이 찾아드는 것을 바랄 필요가 없어요. 젠킨즈는 다정한 사람잉걸.󰡓 󰡒네. 어머니는 나이 차가 너무 난다고 하시지만, 주인님과 마님보다 훨씬 연상이어서 오히려 더 마님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시고 있다고 말해 버렸어요.󰡓 󰡒주인은 자기 것은 무엇이나 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인걸. 그보다도, 결혼 축하 선물의 이야기는 들었어?󰡓 헤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형의 냉장고를 갖고 싶다고 했더니 주인님이 주문해 주셨어요. 신혼여행을 떠난 사이에 집에 도착할 모양이에요.󰡓시골 태생인 헤스터의 빨간 볼이 더욱더 빨개졌다. 󰡒헤스터, 너는 행복하구나. 나도 선물을 주고 싶어. 신혼여행 때 입을 네글리제와 가운은


어떨까?󰡓 󰡒젠킨즈가 기뻐하겠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너는 귀엽게 생겼으니, 결혼식 날의 웨딩드레스도 썩 잘 어울리겠구나. 첫날밤에 멋진 네글리제를 입으면 앳되고 순진하게 보일 거야.󰡓 󰡒마님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으셨겠지요?󰡓 󰡒그랬더라면 얼마나 멋있었겠니.󰡓라고 말하면서 다이아나는 일어섰다. 얼어설 때, 배가 묵직한 것을 느꼈다. 모습도 형체도 없었던 것이 다이아나의 몸 속에서 작은 인간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다……. 첫 울음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사랑스럽게 느꺼질까, 어떻게 아이를 두고 떠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울부짖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제이슨은 내가 분명히 이런 기분이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아이에 대한 애착이 깊어질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마님 괜찮습니까?󰡓헤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괜찮아. 침대에 누워, 주인이 사다준 육아백과라도 읽겠어.󰡓 잠시 책을 읽고 나서 전기 스탠드를 끄고, 다이아나는 단애에 밀려와 부딪치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청하곤 하던 일이 생각났다. 학생시절에 집을 떠나 있었을 때도, 밤이 되면 이 파도 소리가 그리워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런던에서 그레이디즈 백화점에 기숙사에 있을 때 도 그랬다. 다이아나는 가까스로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흠칫 놀라면서 눈을 떴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어둠을 응시했다. 얇은 네글리제 하나만 걸친 팔에 싸늘한 바람이 닿으며 몸이 떨렸다. ---창이 열러 있었다. 커튼이 약간 흔들렸지만, 사람이 있는 기척은 없었다. 󰡒제이슨, 당신인가요?󰡓라고 말해 보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다이아나는 잠귀가 밝은 편이어서, 깊이 잠들었을 때도 사람이 들어오면 반드시 눈이 떠졌다. 누군가가 방안에 들어왔다면…….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커다란 방의 네 귀퉁이에 어두운 그림자가 보인다. 무서워서 시트 사이로 파고들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잠시 꼼짝 않고 있으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 듯했지만, 어제 제이슨이 없을 때 본 공포영화의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젊은 보모가 2층의 침실에서 아이를 재우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드니 협박 전화였다. 되풀이해서 울리는 전화 벨 소리에 벌벌 떨고 있는 보모, 공포의 라스트 신을 보자 다이아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안고 있던 쿠션을 더 꼭 끌어안았다. 바로 그때 제이슨이 집에 돌아왔고,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다이아나를 보고, 다시는 심야영화를 보지 말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했다. 떨고 있는 다이아나를 안아서 2층의 침실까지 데려다 주고는 상냥하게, 잘 자라는 인사를 했다. 그때는 그의 배려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다이아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작은 비명을 지르면서 침대에서 뛰어내리자,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불이 커져 있는 복도를, 제이슨의 침실로 향해 뛰어갔다. 방문을 열자 제이슨이, 󰡒누가야?󰡓라고 외쳤다. 󰡒나예요…….󰡓다이아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제이슨이 침대 곁에 스탠드를 켜자, 눈이 부셨다. 󰡒나쁜 꿈이라도 꾼 건가?󰡓 󰡒저어……갑자기 무서워졌어요……. 나의 방에 누가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가위 눌린 거야, 틀림없이.󰡓 스탠드의 불빛에 비추인 제이슨은 더욱 건장하고 커 보였으며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여기서……자도 되겠어요?󰡓 제이슨은 이내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도 무표정했다. 싫어하고 있는 것이라고 다이아나는 생각했다. 󰡒그럼 돌아가겠어요.󰡓다이아나는 나가려 했다.


󰡒이리로 와요! 어리석군, 당신은.󰡓 다이아나는 문을 닫자 제이슨에게로 달려가 얼굴을 어깨에 기댔다. 󰡒자아, 이리 들어와.󰡓제이슨은 침대 커버를 들쳤다. 다이아나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옆에 파고들었다. 제이슨은 다이아나를 꼭 끌어 안았다. 󰡒이젠 무섭지 않겠지, 사랑스러운 나의 다이아나?󰡓 󰡒나의 행동을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을 테지요?󰡓 󰡒틀림없이 임신 탓이야. 신 것을 너무 많이 먹은 거지……. 내가 도깨비를 퇴치시켜 줄까? 어때?󰡓 다이아나는 안심하고 제이슨의 곁에 누워, 다정한 그에게 몸을 맡겼다, 차츰 감미로운 세계로 이끌려 가는 것을 느끼면서. 󰡒당신의 도깨비는 도망쳤나?󰡓제이슨은, 비단처럼 매끄러운 다이아나의 목덜미에 입술을 밀어 붙이면서 말했다. 󰡒정신없이 열중할 때의 당신은 멋지더군.󰡓 󰡒내가 그랬나요?󰡓 󰡒몹시.󰡓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마음속 깊이에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다정할 때가 있군요.󰡓라고 다이아나는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나를 가죽 봉제인형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어떤 의미에서는요.󰡓라고 말하면서 다이아나는 그의 얼굴의 윤곽이며, 눈과 코를 쓰다듬었다. 제이슨이 그 손을 상냥하게 잡았고 두 사람은 다시 사랑의 세계로 들어갔다. 제이슨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서, 다이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정말 이상해. 제이슨의 팔에 안겨 있으면 더 할 수 없는 행복한데도, 언제나 자신이 자유가 없는 포로 신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반항적이 되고 마는 것은 어째서람……? 대답은 명확했다. 그 원인은 모두 그 핼로윈 축제의 밤에 있었다. 제이슨은 사랑한다는 말도 없이 그저 일방적으로 나의 몸을 빼앗았다. 사랑을 나누어 가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이슨응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다이아나의 마음속에는 슬픔과 동요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 두 사람은 서로가 정열을 불태웠다. 충분히 사랑을 나누어 가진 뒤에 아침을 맞이하는 느낌은 여느때의 그것과는 다른 것일까……. 다이아나는 눈을 감고, 제이슨의 무거운 팔을 느끼면서 잠속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다이아나는 커다란 침대에 혼자 동그마니 남겨져 있었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베이컨에그에 롤빵이 먹고 싶다, 거기에 커피도. 하녀를 부르는 벨을 누르고 베개에 등을 기대고서 기다리고 있으니, 헤스터가 생글거리면서 들어왔다. 󰡒주인이 이야기한 거지?󰡓 󰡒네. 이런 말씀을 드려서 기분 상해 하시지 않으면 좋겠는데요. 마님도 이젠 침대를 이쪽으로 옮기셔야겠어요.󰡓 헤스터는 침대 커버를 정돈하면서 말했다. 󰡒저는, 결혼하면 부부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이라고 배웠으니까요.󰡓 󰡒우린 따로 쓰는 것을 좋아해.󰡓 󰡒신혼 시절이 지난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는 거지요, 식욕은 있으신가요? 안색은 좋군요. 비스킷과 물을 가져다 드릴까요?󰡓 󰡒오늘 아침엔 메슥거리지 않는데. 이상한걸…….󰡓 󰡒이상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주인님과 함께 잘 주무셨는걸요.󰡓 󰡒그래서일까?󰡓아무것도 모르는 처녀 같은 모르반드시 투였다. 󰡒주인은 벌써 은행으로 출근하셨나?󰡓 󰡒전화를 하시는 것 같던데요……오시라고 할까요?󰡓라고 말하면서 헤스터는 생긋 웃었다. 󰡒그럴 필요 없어. 아침식사만 가져다 줘.󰡓그러고는, 눈을 떴을 때 머리에 떠올랐던 메뉴를 일러주었다.


󰡒 침대에서 드시려고요?󰡓 󰡒그렇게 하겠어. 이 침대는 정말 푹신한 게 그만이야. 주인의 것은 모두가 최고급뿐이라니까.󰡓 헤스터가 나갔다가, 이윽고 쟁반에 아침식사를 얹어 가지고 돌아왔다. 제이슨도 함께였다. 󰡒굿 모닝, 다이아나, 정말 이걸 다 먹는 거요?󰡓 󰡒어마,안 되나요……. 당신, 오늘 아침은 브룩스 브라더의 모델 같군요.󰡓 짙은 밤색의 멋진 양복으로 몸을 감싼 장신의 제이슨을 응시하면서 다이아나는 말했다. 󰡒당신은 비치 멜버의 모델 같은데.󰡓볼에 홍조를 띠고 있고 다이아나를 보고 제이슨이 말했다. 헤스터는 컵에 커피를 따랐다. 제이슨은 침대에 걸터 앉았다. 󰡒식욕이 생겨서 다행이군……. 닥터 말콤과 방금 통화를 했는데,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을 30분 단축하도록 하라고 말하더군.󰡓 다이아나는 수상쩍은 얼굴을 했다. 󰡒어째서요?󰡓 󰡒불안정한 시기니까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거요. 단지 그런 이유지.󰡓 󰡒아이를 가진 것은 나니까, 순조롭지 못하다면 나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요.󰡓 󰡒모든 게 순조로와요. 다만, 무리를 하지 않도록 하라는 거지.󰡓 󰡒초상화를 부탁한 것은 당신이잖아요. 나야 죽든말든 아랑곳없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그러고는 제이슨은 헤스터 쪽을 향해, 󰡒안됐지만 두 사람 만 있게 해주지 않겠나?󰡓라고 말해서 밖으로 내보냈다. 문이 닫히자,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면서 말했다. 󰡒당신의 불안은 죄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간밤의 이 침대에서 당신과 함께 지낸 남자는 바로 나요. 그런데 어째서, 내가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하는 거지? 왜 그런 식으로 또 나를 멀리하려고 드는 거지?󰡓 󰡒내가 죽는다면, 이혼의 소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견실한 은행장이 이혼 따위를 하게 된다면 평판이 떨어지겠지요?󰡓 󰡒그것은 그때 가서 의논할 일이요. 당신은, 지금은 건강한 아이를 낳는 일만을 생각하면 되는 거요. 오늘 아침엔, 당신이 식욕이 난다는 말을 들어서 즐거웠는데…….󰡓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게 되었어요. 헤스터에게 쟁반을 물리라고 하세요.󰡓다이아나의 목소리를 싸늘하기만 했다. 󰡒당신은 먹을 때까지 헤스터를 부르지 않겠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어째서 이해해 주지 않는 거요. 그렇게 우겨댄다면 따귀를 갈길 거야!󰡓제이슨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속이 시원하시겠지요.󰡓 󰡒내가 약자를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다이아나, 어째서 당신은 말썽을 부리려고 들지? 간밤엔 멋있었어.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어째서 솔직해지지 못하는 거요?󰡓 󰡒그것은 악몽 탓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달래 주었기 때문에 진정할 수 있었어요. 감사하고 있어요.󰡓 제이슨은 화가 치민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앞으로는 내가 말하는 대로 하는 거야. 먹으라면 먹고, 손가락을 딱 튀기면 곧 이 침대로 달려오라구! 알았어!󰡓 󰡒잘 알았습니다, 주인님.󰡓 다이아나는 눈을 치뜨고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제이슨 데블레어의 본심을 드러내는군요. 명령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고 있을 테지요?󰡓다이아나는 롤빵릉 입안 가득히 넣었다. 󰡒좋아, 알았어. 구체적으로 의논할 문제가 몇 가지 있긴 하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처리하기로 하자구. 됐지?󰡓 󰡒알았습니다!󰡓 다이아나는 손을 이마에 붙이고 군대식으로 경례를 했다. 󰡒소집에는


즉각 응하겠습니다. 당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약속하겠어요. 그 대신, 때가 되면 서류대로 해 줄 것을 부탁드리겠어요.󰡓 󰡒무슨 뜻이지?󰡓 󰡒서약서 말이에요.󰡓 󰡒심술궂군, 당신은. 당신에게 선사하고 싶은 것을 가져왔는데.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선물 따윈 필요 없어요.󰡓 다이아나는 베이컨에그를 입속에 쑤셔넣었다. 간밤의 기쁨을 나누어 가졌지만 그저 그것으로 끝난 일이었다. 앞으로 6개월, 그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제이슨은 나가기 전에 호주머니에서 동그스름한 가죽 케이스를 꺼내 말없이 침대에 들졌으나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나가고 바로 헤스터가 들어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케이스를 주워 다이아나에게 건넸다. 󰡒열어봐, 선물이라나 봐.󰡓라고 다이아나는 쌀쌀하게 말했다. 헤스터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마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주인님은 훌륭한 분이에요. 마님이 아이를 가지신 것이 기뻐서 뭐든 선사하고 싶으셔서 그런 건데!󰡓 󰡒그럴까? 주인은 그렇게 훌륭한 인간이 아니야.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고집이 세고 오만해. 자아, 빨리 케이스를 열어 봐. 안에 든 것을 보고 싶겠지?󰡓 󰡒아니에요, 마님이 열어야 해요.󰡓 다이아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푸른 기가 도는 짙은 진주 빛깔의 오팔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헤스터는 그 아름다움에 숨을 죽였다. 󰡒아름답군요! 훌륭해요.󰡓 󰡒정말, 멋지군나.󰡓다이아나는 중얼거리면서, 제이슨에게 심술궂은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걸어 보세요. 마님의 흰 피부에 잘 어울릴 거예요.󰡓 󰡒어째서 이것을 선사했을까? 그래, 남자는 언제나 부드러운 살갗 곁에 있고 싶어하는 거야.󰡓 󰡒바로 그래요, 마님. 주인님은 다정한 마음씨에서 주신 것이니까, 마님도 그 마음씨를 이해하고 답례를 해 드리지 않으면 안돼요.󰡓 󰡒그 마음씨에 대한 답례로는 무엇이 좋을까? 󰡒그래요. 오팔 한개에 키스 한 번씩이지요.󰡓 󰡒어머나, 로맨틱하구나. 멜로드라마 같은걸.󰡓하고 다이아나는 조소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잖아요, 마님.󰡓헤스터는 화가 치민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욕실에 마님의 새 드레스가 뭉쳐져 있던데요, 클리닝하러 보낼까요?󰡓 󰡒그 드레스는 주인이 싫어하니까, 아래층 소각로에서 태워 버려.󰡓 󰡒하지만 새것인데요…….󰡓 󰡒그래, 새것이고 값비싼 것이지. 그러나 재로 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거야.󰡓 󰡒아주 잘 어울리던데요…….󰡓 󰡒주인님이 질색하는걸. 이 집에서는 주인님이 명령하는 일에 거역할 수 없겠지? 그리고, 싸움의 원인도 되었던 드레스니까 이젠 꼴도 보기 싫다구.󰡓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면서 헤스터는 쟁반을 들고 나갔다. 다이아나는 오팔 목걸이를 케이스에 다시 집어넣으면서, 간밤에 이 침대에서 사랑을 나우었던 것을 떠올렸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지를 않는다……. 󰡐손가락을 딱 튀기면 곧 이 침대로 달려오라구.󰡑라고 한 제이슨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한숨을 내쉬면서, 다이아나는 침대를 떠나 그의 침심에서 나왔다. 제이슨은 그런 말투로밖에 이야기 할수 없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면서 다이아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9-----


다이아나는 보랏빛 승마복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스커트 부분에는 생지를 충분히 사용하고 있어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팔치 같은 둥근 고리가 스커트에 달려 있어, 그것을 손목에 끼면 걷기에 거북한 일이 없었다. 아래층에서는 여유 있게 헐렁한 하얀 셔츠에 밤색 바지를 입은 바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리는 카메라용의 조명 스탠드를 이즐에 부착하면서 말했다. 󰡒간밤에는 지독하게 퍼붓더군요.󰡓 다이아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간밤에는 제이슨의 곁에서 그에게 응하느라고 그 이외의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으며 빗소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다이아나는 포즈를 잡았다. 󰡒시작하겠어요. 준비됐나요?󰡓라고 말하며 바리는 화필을 잡았다. 󰡒오늘부터 한 시간 반씩만 그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부지런히 화필을 놀려야겠어요. 주인은 진정으로 당신을 생각하고 있더군요.󰡓 󰡒주인은 아이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림은 어떤 식으로 그리고 있나요? 긍지 높은 아내와 어머니의 얼굴이 되어가고 있나요?󰡓 󰡒실은, 배경은 그 멋진 스테인레스 글라스예요. 중세풍의 분위기를 풍기니까. 이 집은 세운지 몇 년이나 됐지요?󰡓 󰡒아마 몇백 년은 되었을 거예요.󰡓 다이아나는 이 집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 시대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참나무 재목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그 고풍스럽게 꾸며진 집을 답답하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제 와서는 다이아나도, 자신의 초상화가 이 집에서 남편에게 사랑받거나 또는 증오당하며 살아온 데블레어 가의 여자들의 그림과 함께 걸리는 것을 운명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 집에는 유령이 있대요. 알고 계신가요?󰡓 󰡒네, 마을 사람에게서 들었지요. 데블레어 가는 마을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더군요. 태어날 아이는 사내아일까 계집아일까 하며 야단들이 났어요.󰡓 󰡒하는 수 없지요.󰡓다이아나는 마지못해서 웃음을 띠었다. 제이슨이 다이아나와 결혼한 것은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제이슨은 헤븐쇼어의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요. 데블레어 가는 은행도 갖고 있어서, 토지의 관리를 하고 있는 소작인들을 돌보아주고 있지요.󰡓 󰡒마을에선 주인의 험담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잘 돌보아주고 있으니까요.󰡓 󰡒재산가고 인망도 아니은 사람과 결혼을 했은데도 당신은 그다지 행복스럽지 못한 모양이군요.󰡓 바리의 그 말은 다이아나의 가슴을 찔렀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음악을 듣고, 그러고는 굿나잇이라고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잘 뿐인 생활로써는 마음 속이 허전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관대하고 사려 깊은 제이슨에게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나요?󰡓라고 바리는 물었다. 다이아나는 그런 것은 없다는 시늉을 해보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제이슨의 애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이 집에 와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러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검은 눈동자를 가진 제이슨에게 매혹되어, 태양의 신 아폴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다이아나, 그대로 먼곳을 바라보는 눈길을 하고 있어줘요…….󰡓 󰡒처음 제이슨과 만났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를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했 알고 있을지…….󰡓 󰡒날카로운 분이니까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는, 어린 내게는 우뚝 치솟은 탑같이 보였어요.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던 거예요. 그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나를 안아들고 뮤직룸으로 데려가 주었어요. 난로에서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은쟁반엔 머핀이 놓여 있었어요. 나는 울면서 그 빵을 먹었기 때문에 얼굴이 온통 눈물과 버터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지만 제이슨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어요. 느닷없이 어린 계집아이가 들어 닥쳤으니, 난처했으리라 생각해요. 그 무렵엔 모두가 제이슨을 독신주의자라고 말하고 있었는걸요.󰡓다이아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이야기했다. 복도에서 전화 벨이 울렸다. 󰡒내가 받지요. 잠시 쉬어요.󰡓라고 말하고는 바리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로 나갔다. 다이아나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바리가 수화기에 대고 데블레어 가의 전화번호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더부룩한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돌아온 바리의 얼굴은 잔뜩 흐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누구? 제이슨이었나요?󰡓다이아나는 일어서면서 물었다. 바리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실내에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비쳐드는 부드러운 빛이 넘치고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다이아나는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떨렸다. 바리의 얼굴로 보아 나쁜 소식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이아나, 앉아 있는 편이…….󰡓 바리가 말했다. 󰡒아니예요, 선 채로 듣겠어요. 이야기하세요.󰡓다이아나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은행에서 사건이 있었대요…….󰡓 󰡒제이슨은 괜찮은가요?󰡓 󰡒다이아나, 당황해서는 안 돼요.󰡓바리는 벽 가에 놓여 있는 ,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다이아나를 앉히려고 했다. 󰡒아니, 이대로 괜찮아요. 전화 내용은 뭐였나요?󰡓 󰡒은행에 강도가 들었는데, 다친 사람도 좀 있다나봐요.󰡓 󰡒제이슨은?󰡓 󰡒다이아나, 어쨌든 앉아요. 침착하게 들어요.󰡓 󰡒참착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당장 제이슨한테로 가야 해요!󰡓 󰡒당신이 간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바리는 만류했다. 󰡒어째서요? 설마, 제이슨이 죽은 것은…….?󰡓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몰라요. 지금 경찰이 조사하고 있어요. 밝혀지는 대로 연락이 오게 되어 있어요.󰡓 󰡒자기 은행인걸요. 강도가 들었다면, 제이슨은 가움직이 먼저 앞장 서서 물리치려고 들었을 거예요.󰡓라고 말하자마자 다이아나는 비틀거리면서 스커트를 질질 끌고, 현관으로부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무나 놀라서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발이 스커트에 걸리면서 돌계단을 헛디디고는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다이아나는 필사적으로 제이슨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돌계단 밑에 쓰러진 채, 고통과 충격으로 다이아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정신을 차리자, 곁에 바리가 무릎을 꿇고서 어디 다친 데는 없나 하고 살피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이아나는 안아들고 돌계단을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나의 아기, 아기는 괜찮을까요…….󰡓다이아나는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착한 아기니까.󰡓 그러자 이내 다이아나는 바리의 팔안에서 의식을 잃었다. 보랏빛 승마복이 다이아나의 얼굴을 더 한층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깊은 잠에서 깨나 의식을 회복했을 때, 다이아나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엾은 아기……가엾은 제이슨.󰡓누군가에게 손을 잡혔고, 잦은 볼에 키스를 받았다. 󰡒용태를 어때요?󰡓라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러고는 다시 꾸벅꾸벅 졸면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이아나는 죽어 있었다. 곁에느 제이슨도 있다. 이 사후의 세계에서는 사람은 육체를 갖고 있지 않으니까 부상을 입을 일도 없고, 마음이 없으니까 고통스러울 일도 없다……. 󰡒주사 탓이에요. 가위 눌리긴 하겠지만 통증은 없을거예요.󰡓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났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처럼 괴로와하고 있는걸요.󰡑라고 다이아나는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군요. 울고 있어요.󰡓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다이아나, 눈을 떠봐요.󰡓라는 목소리. 다이아나는 가까스로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눈꺼풀이 무거웠고, 속눈썹은 눈물로 달라붙어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며, 따스한 입술이 몇번이고 다이아나의 눈꺼풀을 스쳤다. 󰡒제이슨……?󰡓 󰡒나 여기 있어, 다이아나.󰡓 흐릿한 눈으로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얼굴을 찾았다. 곤란할 때는 언제나 곁으로 와서 도와주곤 하던 제이슨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제이슨, 아기가 죽고 말았어요!󰡓 󰡒아니야, 우리의 아이는 괜찮아요. 당신의 뱃속에 탈없이 잘 있어요.󰡓 󰡒하지만 나는, 돌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틀림없이 제이슨은 나를 슬프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잘 들어요, 다이아나. 그 승마복 덕분이야. 풍만한 옷이 쿠션 역할을 해줬던 거야. 그래서 아기는 무사한 거지.󰡓 󰡒하지만, 난 아파요…….󰡓 󰡒발목의 뼈가 부러졌어. 그것뿐이야.󰡓 󰡒정말 그것뿐?󰡓안도감이 말려왔다. 󰡒닥터 말콤에게 물어 봐요.󰡓 닥터 말콤은 침대 맞은쪽에서 다이아나에 미소하면서 말했다. 󰡒당신 뱃속의 아이는 틀림없이 데블레어 가의 피를 물려받고 있군요. 꿈쩍도 않고 있어요.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는 편안한 당신의 배에 매달려 있으려나 봐요. 발은 아프겠지만 참으세요. 엑스레이를 찍기까지 깁스느 할 수가 없어요. 잠시만 참아 주세요.󰡓 다이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제이슨의 얼굴을 쳐아보았다. ---줄곧 옆에 있어 주어요, 하고 애원하는 눈초리로.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팔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 다치셨군요!󰡓 󰡒탄환이 살짝 스친 것뿐이야. 걱정할 것 없어요.󰡓 󰡒정말?󰡓다이아나는 손을 내밀어 다정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이 강도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지만……당신, 제일 먼저 맞섰던 거지요?󰡓 󰡒그래, 2인조가 손님의 팔을 다치게 했기에, 플라잉킥을 먹였지. 덕분에 나도 팔에 부상을 입긴 했지만 말이요. 경찰도 이내 달려와 주었고, 별로 큰 일도 벌어지지 않고 끝났어.󰡓 다이아나는 말끄러미 제이슨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닥터말콤이 살며시 방을 빠져나갔는데도 두 사람 다 눈치를 채지 못했다. 전기 스탠드의 불빛이 두 사람 포근하게 감싸 주고 있었다. 󰡒바리에게서 들었어.󰡓제이슨은 다정하게 말했다. 다이아나는 제이슨이 눈이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광채를 뿜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유산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어서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제이슨이 지켜보고 있다는 안도감으로, 눈을 감자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다이아나의 얼굴에는, 슬픈의 눈물이 아닌 편안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다이아나는 일광욕실에 누워, 해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오늘의 하늘은 투명하도록 파랗고, 군데군데 조각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유리로 둘러싸인 일광욕실 맞은쪽에는, 풍경화가인 터너가 묘사한 것 같은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 밀려오는 푸른 바다의 만화경이 잇달아 펼쳐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다이아나는 만족감에 젖어 들었다. 두드러지게 부르기 시작한 배에 손을 얹고, 여기에서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안 돼, 하고 생각하자 사랑스러운 마음이 우러났다.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제이슨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다이아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데블레어 가에 있으면서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이 역사 깊은 커다란 집, 넓은 정원에 많은 즐거운 추억을 지닐 수 있도록 키워 나가리가 결심했다. 일광욕실 밖에서 귀에 익은 발소리가 들렸다. 제이슨이었다. 스웨터와 승마 바지에, 부츠 차림으로 애마 문라이트를 타고 해변을 달리고 오는 참이었다. 다이아나는 파도의 비말을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일광욕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은 어때? 깁스를 하니까 편안한가?󰡓라고 말하면서 제이슨은 다이아나에게로 다가와 볼에 키스를 했다. 󰡒기분은 좋아요. 아까 문라이트를 타고 있는 당신은 보니까 나도 타고 싶었어요.󰡓 󰡒발목은 조만간 낫겠지…….󰡓라고 말하고는 제이슨은 소파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나의 발이 나을 즈음에는 배가 너무 불러서 승마는 무리겠지요. 떨어지면 큰일이니까요.󰡓 󰡒그래. 내가 초상화 때문에 그 승마복을 입힌 탓으로 당신이 다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요.󰡓 돌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의 일을 생각하자 오싹했다. 유산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옷감을 넉넉하게 사용한 승마복이 쿠션 역할을 해주어서 무사했던 것이다. 이렇게 단둘이 있게 되자, 다이아나는 가슴의 고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눈 속에 불안과 괴로움의 빛이 깃들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기 일은 정말 다행이에요. 만일 잘못되었다면 난 자살했을 거예요…….󰡓 󰡒당신을 죽게 하다니, 말이나 되나. 만일 그랬다가는…….󰡓 제이슨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다이아나는 마음속으로, 󰡐나를 괴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거요󰡑라고 그가 말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오팔 목걸이를 걸었군 그래.󰡓 󰡒아주 마음에 드는걸요.󰡓 󰡒당신의 눈빛과 같아. 아름답군.󰡓 󰡒어마, 근시인 내가?󰡓다이아나는 처녀같이 수줍어 했다. 󰡒나의 눈을 봐요, 다이아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나로서는 말하기 괴로운 일이지만…….󰡓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손을 꼭 쥐었다. 󰡒부상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당신을 보면서, 당신에게 강요하는 행동은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지……이제부터 집을 나가 혼자서 살고 싶다면 나는 만류하지 않겠어. 당신 생각대로 해도 좋아요. 조용한 곳에 자그마한 집을 찾아보아도 좋고, 조용한 호텔 방을 빌어도 좋고…….󰡓 󰡒호텔은 싫어요!󰡓 󰡒자그마한 집은?󰡓 󰡒그것도 싫어요!󰡓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일자리를 찾아 자립하고 싶다고 말했잖소?󰡓 󰡒나를 내쫓으려는 건가요?󰡓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억센 손에 다시 잡히고 말았다. 󰡒후견인으로서 자기 아이처럼 보살펴오던 당신을 사랑하게 되고 만 나의 괴로움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거요. 당신이 오고 나서부터는, 썰렁하고 쓸쓸했던 집에 밝은 분위기가 살아나게 되었지. 사실은 나는 당신이 줄곧 있어 주기를 바라는 거요.󰡓 제이슨은 다이아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이아나도 누운 채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일순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이윽고 제이슨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겐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자신에게 들려주며, 나는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어. 처음에는 그렇게 될것도 같았지만, 당신이 성장해서 여자답게 되었을 때, 딸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보게 되고 말았지. 졸업식 때 졸업장을 손에 들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티없이 맑고 아름다왔어.󰡓제이슨은 말을 멈추고, 다이아나에게 상냥하게 키스를 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당신은 너무 섬세해서 사회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 내가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요, 후견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말이요. 당신에게 연애 감정을 갖게 되고 말았던 거요.󰡓 다이아나의 마음속 깊이에서 환희의 샘이 솟는 것만 같았다. 󰡒계속하세요.󰡓다이아나는 제이슨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점더 듣고 싶은가? 그렇지만, 이렇게 곁에 있으면 키스가 하고 싶어지는걸…….󰡓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입에서 이렇게 다정하고 정열적인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의 마음을 핼로윈 축제의 밤의 파티에서 약혼 발표라는 형태로 나타냈던 거요. 당신도 받아주었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두 부인의 수다가 그것을 망쳐 놓았지만. 파티는 보람없이 되고 버렸고, 방으로 가자 당신은 가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다이아나, 나는 그날 밤의 일을 용서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은행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도 나는, 나의 더러운 마음을 권총으로 쏘아줬으면 하는 생각에서, 탄환이 날아오는데도 피하지 않았어. 당신이 돌계단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자 나의 오만한 마음은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지. 하지만, 두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아이가 무사했다는 것은 하느님이 지켜 주신 덕분이야. 저……나는 이혼해도 괜찮아, 당신이 원한다면…….󰡓 󰡒제이슨, 나의 눈을 보세요?󰡓다이아나의 눈을 쳐다보는 제이슨의 눈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내가 발을 헛디딘 것은, 한시라도 빨리 당신에게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머릿속에는 그 생각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어떤 대우를 한다 해도 좋아요. 나는 여기에 있고 싶어요. 당신이 아이의 아버지기 때문이라서가 아니에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다이아나!󰡓 제이슨은 열망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외치며 다이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팔에 안겨, 사랑을 음미하고 있었다. 다이아나가 커다란 검은 차를 타고 데블레어 가에 올때부터 두 사람은 결합될 운명이었던 것이리라. 어린 소녀였던 다이아나는, 제이슨의 사랑에 감싸여 행복한 인생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지만. 󰡒제이슨.󰡓 󰡒왜?󰡓 󰡒어째서 잠자코 있는 거예요?󰡓 󰡒핼로윈 축제의 밤에 저지른 일 때문에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내가 집을 떠난 것은 당신이 미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않겠어? 그때까지 후견인으로서 돌보아주고 있던 소녀에게 야수처럼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반지를 돌려주었을 때는 화가 치밀었지. 언제나 당신의 얼굴에 감도는 불신감을 보는 것도 그지없이 괴로왔고.󰡓 󰡒그 불신감은 영원히 사라졌어요. 내가 영원히 추방한걸요. 제이슨 달링.󰡓 다이아나는 진실한 사랑이 담긴 웃는 얼굴을 제이슨에게로 돌렸다. 󰡒나는 렁른이됐어요. 그뿐이러에요. 이젠 여자라구요……. 그것도, 진실한 사랑을 알고 있는 여자예요.󰡓다이아나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랑한다는 것은 멋진 거예요. 하지만 용서한다는 것은 더욱 멋지군요.󰡓 󰡒할 말이 없군.󰡓제이슨은 중얼거렸다. 두 사람에게는 이미 말이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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