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100

Page 1

사랑이 머무는 오후 1 "저길 봐, 제리. 저 숲 너머를 보란 말야!" 차가 큰길을 벗어나 샛길로 들어서자 브로디는 자리에서 튀어오르듯이 하며 소리쳤다. "아름답지 않아?" "뭘 그까짓 집 한 챌 갖고 야단이야." 제리가 웃으면서 놀려댔다. 그는 계속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앞만 주시하고 있다. "세이프하버 저택은 보통 집하곤 달라." 브로디는 그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세이프하버 저택의 슬레이트 지붕을 더 자세히 보려고, 낡은 차 계기판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서 그녀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하지만 그 상태로는 계속 언덕 위의 그 커다란 집 지붕밖에 보이질 않는다. "제발 좀 빨리 몰아." "딱지라도 떼이면 네가 경찰한테 설명해 줄 거야?" "석 달 동안이나 집엘 못 와봤단 말야. 내가 얼마나 저 세이프하버에서 여름을 보내고 싶어하는지 알기나 해?" "여름 내내?" 제리가 브로디를 조소하듯 바라본다. "나하고 결혼하겠다는 생각이 설마 바뀐 건 아니겠지?" 상점 건물에 가려 집이 보이지 않게 되자 브로디는 자리에 앉아 그를 돌아보았다. "물론 아냐. 하지만 가을이면 우린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되니까, 그전에 몇 주일 동안 아파트를 빈다는 건 말도 안 돼.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 우리가 세이프하버 저택에서 살길 아마 드루 아저씨는 바랄 거야." "글쎄, 넌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달라. 네 후견인이란 사람은 내가 지금 당장 결혼하는 걸 찬성 안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난 그 사람 맘에 쏙 들 결혼상대도 아닐 거고." 브로디는 쾌활하게 웃었다. "아냐, 제리. 그건 아저씨가 상관할 일이 못돼. 난 이제 어린애가 아냐." "넌 고작 20 살밖에 안 먹었어." "9 월이 되면 그분은 더 이상 내 후견인이 아니란 말야." 브로디가 다시 강조해서 말했다. "다음번 생일이 지나면 난 법적으로도 성인이라구. 그땐 그분이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 만약 네가 또 그분을 속좁은 사람이라고 강조한다면…"


"난 드루 해먼드 씨와 우리의 결혼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아. 변호사라면 딱 질색이야." "사회의 밑바닥서부터 출발하는 사람도 많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그 상태로 있는 건 아니잖아?" "해먼드 씨는 아마 그렇게 생각 안할 거야." 브로디는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해먼드 곶에는 계급제도 같은 건 없어." "해먼드 씨한테도 그렇게 얘기해 보렴. 그 사람은 지금도 자기가 이 도시의 지배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자기 증조할아버지가 이 도시를 처음 만들었다고 말이야." "하지만

증조할아버지도

짐마차를

타고

동부에서

아이오와로

이사왔을

적엔

가족들한테서 버림받은 외토리였어."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봐, 제리. 드루 씨는 내가 5 살 때부터 아저씨처럼 여겨 왔단 말이야. 아저씨에 대해 제발 불쾌한 얘긴 하지 마, 응?" "이것 봐, 브로디. 네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그 사람은 차갑고 거만하고 우쭐대는 속물이라구." "그분은 그렇지 않아! 넌 그분을 몰라. 네가 그분을 만나는 게 두려운 건 이해가 가지만 기가 죽을 필요는 없다구. 아마 너도 그분을 좋아하게 될 거야." 제리의 목소리는 그 말에 동의한 것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다시 한번 얘기해 봐, 너랑 해먼드 씨 집안이랑 어떤 관곈지." "우리 아버지와 앤디 해먼드 씨, 그러니까 드루 아저씨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친구셨대. 그래서 아버지께선 앤디 해먼드 씨를 내 후견인으로 지명하셨어. 그런데 그 앤디 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드루가 세이프하버하고 앤디 씨의 변호사 사무실을 상속받은 거야. 내 후견인 자리까지." 이런 설명을 벌써 몇 번째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브로디는 생각했다. 자신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얘기인데도. 차가 소음을 내며 언덕길을 올라갔다. 곧이어 세이프하버의 멋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높다란 벽돌담에 이어진 정교한 철문이 활짝 열려 있다. 골짜기를 끼고 도는 강가의 조그만 도시, 해먼드 곶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서 세이프하버 저택은 반갑게 웃는 듯이 서 있다. 브로디는 행복에 겨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택은 너무나도 포근하게 보이고, 집을 장식하고 있는 나무와 담장들은 두 팔을 벌리고 그녀를 안을 듯이 늘어서 있다.


브로디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일찍이 그녀가 아버지랑 해먼드 일가를 찾아왔던 l5 년 전부터 내내 느껴 온 감정이다. 세이프하버에 있는 한 안전할 거라고 브로디는 생각했다. 제리가 집 뒤쪽에다 차를 대자 브로디는 재빨리 뛰어내렸다. 그녀는 발꿈치를 세워 차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해먼드 씨가 늘 아끼는 차 링컨을 대놓던 자리는 비어 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안타까움을 지우고 미소를 띠웠다. 드루 씨는 아마 일이 무척 바쁠 거야. 하지만 곧 집에 돌아오겠지. 오후 내내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야.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제리와 깊은 사랑에 빠졌노라는 얘기를 할 시간도 충분할 테고. 어쨌든 지금 그녀는 세이프하버에 돌아온 기분을 충분히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가정부 라일리 아줌마는 뒷문 쪽에 있었다. 브로디는 노래하듯이, "드디어 집에 왔어요!" 하며 정신없이 뛰어가 아줌마를 껴안았다. "그래요, 잘 왔어요." 잔잔한 목소리로 라일리 부인이 그녀를 반가이 맞이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죠?" "내 친구예요, 제리 휘트콤. 제리, 이분이 라일리 아줌마야. 여기 있을 동안 우릴 돌봐 주실 분이야." 라일리 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제리를 훑어보고 있다. "난 당신을 알고 있어요. 체리 가에 살던 휘트콤 씨 댁 꼬마였죠, 그렇죠?" "맞습니다." 제리가 대답했다. 라일리 부인의 뼈있는 말에 그의 입은 한일자로 꼭 다물어진다. "제리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해요." 분위기를 눈치챈 브로디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방향이 같아서 날 태워 줬어요." "그랬어요? 어서 짐을 들여놓아요, 아가씨. 아가씨가 좋아하는 롤빵을 구워 놨어요. 저분과 함께 들도록 해요." 그녀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내가 별안간 5 살이 된 것 같군." 제리가 트렁크에서 브로디의 가죽가방을 끌어내리면서 내뱉었다. "신경쓰지 마. 아줌마는 아직도 날 어린애 취급한다니까." 제리가 투덜거렸다.


"언제부터 내가 그냥 친구가 됐지? 지난주엔 나랑 결혼하고 싶다고 그러더니. 내가 꿈을 꾼 건가?" 브로디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발 그만 해. 결혼 얘긴 드루한테 먼저 해야 하잖아." "내 식대로라면 그 마음씨 좋은 분의 허락 없이도 대문 앞에서부터 약혼을 공표했을 거야." "그분 걱정은 고만 하고 라일리 아줌마의 롤빵이나 먹으러 가, 응? 버터, 땅콩, 계피가 잔뜩 들어 있단 말이야." "아줌마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나도 먹으라고 그런 거야. 그만두겠어, 브로디. 난 가난한 내 세계로나 돌아가야겠어."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제리, 정말 갈 거야?" 그녀가 화를 냈다. "하지만 오늘 저녁땐 꼭 와야 돼." "꼭 그래야 해?" "언젠간 드루를 만나야 하잖아? 오늘밤이 좋을 거야. 그러니 함께 있어야지." "좋아, 알았어." "7 시, 정장차림이야?" "제기랄, 하얀 넥타이하고 연미복은 세탁소에 가 있다구." 빈정거리며 제리는 몸을 굽혀 키스를 하려 했다. 브로디가 몸을 피하며 말했다. "안 돼, 여기선. 사람들이 본단 말이야. 그리고…" "나한테 너무하는 거 아냐, 브로디?" 그가 날카롭게 물었다. "집에 돌아오더니 되게 고상하게 구네." "아니야! 드루한테 말할 때까진 기다려, 우리…" 그녀의 말은 힘없이 새어나왔다. "좋아." 제리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럼, 7 시에 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차를 타고 가버렸다.


브로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서 있었다. 그래, 잘했어. 드루한테 약혼을 발표하는 것이 먼저야. 그리고 또 그것이 현명한 처사일 거야. 남의 입을 통해서 내 결혼상대의 얘길 듣는다면 드루 씨도 결코 유쾌하게 생각지는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드루가 우리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길 건 확실해. 그는 착한 사람이지만, 해먼드 가문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자기가 여태껏 돌봐 온 내가 휘트콤 집안의 자식과 결혼하려는 것을 쉽게 용납하려 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열심히 부탁해서 이뤄지지 않은 일은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얼마나 제리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드루도 굳이 반대하진 않을 거야. 설사 그가 반대한다 해도, 이제 9 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브로디는 라일락 향기가 풍기는 초여름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번 여름엔 책도 많이 읽고 정원 손질도 하고 일광욕도 해야지. 세상에 여름철의 세이프하버보다 더 근사한 곳이 또 있을까? 브로디가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 주방으로 들어서자 라일리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도와 줄까요?" "아녜요, 내가 할 일인데요. 그보다도 갓 구운 빵이 있다고 그랬죠?" 라일리 부인은 큼직하게 부푼 빵을 오븐에서 꺼내 접시에 담았다. 브로디는 아침식사용 간이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향긋한 냄새를 들이마셨다. "이 냄새를 얼마나 맡고 싶었는지 몰라… 드루 아저씨는 저녁식사하러 들어오시겠죠, 네?" "아가씨가 집에서 갖는 첫 번째 식사를 잊어버리실 분이 아니잖아요." 라일리 부인이 꾸짖듯이 말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제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어요." 빵을 자르면서 브로디가 말했다.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라일리 부인이 커피를 타서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집에 돌아온 첫날에 손님을 부르다니, 해먼드 선생님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제리는 특별이에요." 눈을 감고 부풀어오른 건포도, 고소한 땅콩, 그리고 짜릿한 계피 향기가 물씬 풍기는 빵맛에 도취돼 버린 브로디에게는 걱정스러워하는 라일리 부인의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난주 학기말고사를 칠 동안, 줄곧 이게 먹고 싶어 혼났어요." 라일리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로디도 말없이 빵을 다 먹어치웠다. "커피는 이층에서 마실래요. 짐을 풀고 나서 뜨거운 물에 푹 목욕을 해야겠어요."


"기숙사에선 목욕도 못했나요?" "집 같진 않죠." 브로디가 웃음을 지었다. 주방에서 자기 방으로 가려면 뒤쪽 계단 쪽이 가까왔지만, 브로디는 일부러 호두나무로 꾸며진

현관

홀을

지나

진홍빛

카펫이

깔린

넓은

정면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세이프하버의 향취는 보통 집하고는 달라.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 자기 방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집이란 역시 좋은 곳이다. 남서쪽으로 창이 난 통풍이 잘되는 너른 침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써온 방이다. 그땐 분홍색 벽지와 물결치듯 비쳐 보이는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 어린 소녀에게 너무나 완벽한 방을 제공해 주려던 누군가의 잘못된 착상이었다. 이제 그 방은 요란한 장식 없이도 레몬빛과 복숭아빛 숙녀의 방이 되어, 그녀의 짙은 갈색 머리랑 검은 눈동자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결혼식은 이 집에서 올리면 돼… 머리를 올려 핀을 꽂고, 깊은 욕조에 거품을 잔뜩 일구면서 브로디는 그 생각을 머리에 떠올렸다. 면사포 자락을 길게 끌며, 드루의 팔을 끼고 정면의 큰 계단을 걸어내려가, 멋진 카펫이 깔린 넓은 복도를 지나서 이윽고 제리가 기다리고 있는 널찍한 거실로 나간다… 화장대에 팔꿈치를 괴고는 결혼식 장면을 이것저것 상상하며 황홀경에 빠져 있는데, 아래층 홀의 낡은 괘종시계가 6 시를 알리는 종을 쳤다. 드루의 귀가시간은 벌써 지났다. 혹시 이미 돌아와 라일리 부인한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건 아닐까? 갑자기 불안해진다. 어리석은 생각이야, 브로디 매켄지. 그녀는 이렇게 속삭이며 연노랑 스커트를 추슬러 입었다. 우선 라일리 부인은 사정을 잘 모르고 있고, 그녀가 드루한테 뭐라고 했더라도 그는 복음을 전하는 식의 그녀의 말을 곧이듣지는 않을 거고 적어도 먼저 나한테 물어볼 거야… 안 그래? 계단을 막 내려가자 서재에서 드루가 나왔으므로, 브로디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우뚝 멈춰섰다. 여느 때 같으면 그냥 기뻐서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으리라. 그러면 드루는 나의 흥분을 우스워하며 그 커다랗고 따뜻한 팔로 번쩍 들어올리곤 했었지.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망설여진다. 브로디는 계단에 못박힌 채 물끄러미 그를 쳐다볼 뿐이다. 계단과 굽 높은 샌들 덕분에 그녀의 눈은 그의 눈과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있다. "우리 꼬맹이 숙녀가 이젠 안아 주기엔 너무 커버렸나?" "그럴 리가 있나요!"


브로디는 그의 온화한 목소리에 생긋 웃으며 한 계단 내려가 팔을 내밀어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드루는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기 전에 한잔 할까 하는데, 어때?" 함께 거실로 가면서 브로디는 드루 해먼드와 세이프하버 저택을 생각했다. 그를 다른 곳에 두고 상상해 본 적은 없다. 큼직한 방과 집안의 우람한 나무들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하지만 방갈로에 있는 그를 상상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브로디는 동양풍의 보석처럼 아름다운 카펫의 색상과 조화를 이룬 푸른색 벨벳 의자에 앉아 그가 스카치를 글라스에 따르고 얼음과 소다수를 섞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아온 드루는 그렇게 썩 잘생긴 건 아니지만, 33 살의 그에겐 나이하곤 상관없이 여자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쳐다보게끔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는 성숙함이 있다. 몇 해 전에 그를 버리고 떠난 여자를 생각해 봤다. 그때는 꽤 어렸기 때문에 신시아라는 그 여자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 여자한테 채인 이후로 드루는 어떤 여자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무슨 엉뚱한 생각이람. 신시아가 어쨌든간에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드루가 돌아서서 생각에 잠긴 브로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지? 라일리 부인이 그러던데, 저녁식사에 손님이 온다면서?" "괜찮죠, 아저씨? 집에 돌아온 첫날밤은 둘이서만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며 지내기로 되어 있는 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드루는 잔을 죽 비우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특별한 손님인 모양이군." 브로디는 허리를 쭉 펴고는 양손으로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요, 사실은 제 약혼자예요…" 드루는 놀라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넌 아직 결혼하기엔 너무 어리잖니? 대학도 2 년이나 더 다녀야 하고." "아저씨, 전 꼭 제리와 결혼하고 싶어요." "로스 휘트콤의 아들 말이니?" 드루는 차갑게 말했다. "넌 로스에 대해서 아직 아무 것도 모르지?" "그의 아버지가 교도소에 들어갔었던 건 알고 있지만, 그건 제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그렇긴 하다만…" 그는 시인했다. 브로디는 자기 입장을 계속 주장했다. "만나기도 전에 제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아저씨답지 못해요. 본인을 만나보면 언제까지나 빈민가 같은 데에 있을 사람이 아니란 걸 금세 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좋겠는데." 드루가 반쯤 남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그 걸물을 만나기 위해 옷을 갈아입어야겠군." 그는 휘파람을 불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걸로 최대의 고비는 넘겼다. 드루를 화나게 자극시키지 않고 제리와의 약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브로디는 안도의 숨을 쉬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두번 다시 제리를 만나선 안 된다고 그럴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드루는 귀찮은 혹을 떼게 돼서 기뻐할지도 모른다. 벌써 l0 년 이상이나 내 후견인노릇을 해왔으니까, 이젠 적당히 손을 떼고 싶다고 생각한다 해서 이상할 건 없어. 내 결혼에 드루가 협조적인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건 왜일까? 저녁식사 때는 그럭저럭 예의바른 대화들이 오갔다. 드루는 제리에게 엄한 태도로 대하긴 했지만 법정 심문처럼 질문을 계속 퍼부어대거나 하진 않았다. 이전에는 브로디의 남자친구들이 드루의 날카로운 질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세이프하버로부터 달아나곤 했었다. 브로디는 딸기를 설탕에 재우면서 제리가 잘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검푸른 줄무늬 양복에 점잖은 넥타이를 맨 은행가처럼 보인다. 그는 아주 침착하게 똑바로 드루를 바라보며 차근차근 말하고 있다. 물론 드루는 자기 생각들을 조금도 얼굴 표정을 통해 노출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든 말투에서 그녀는 어떤 암시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름엔 패닝브라더스 회사의 조립공장에서 일할 생각입니다. 생산라인에서요. 물론 저로선 경영에 관한 일을 하고 싶지만." "경영분야에 관한 경험이 졸업 후엔 크게 유용할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르바이트에서 그런 일자리를 구하긴 꽤 힘들 걸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조립공장에서 일을 하면 다음 학비에 보탬은 되니까요. 그런데 패닝 공장이 원래는 해먼드 가의 소유였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 우리 할아버지가 패닝 가에 파셨지. 그분의 아들, 즉 우리 아버지는 농기구 생산보다는 법률 쪽에 더 흥미를 가지셨기 때문이지." 제리는 크리스탈과 은식기들이 진열된 휘황찬란한 식당을 둘러보고는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세이프하버 저택은 트랙터로 지었죠?" 제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브로디는 잘 알고 있다. 이 집은 노동자를 부당하게 착취해서 모은 돈으로 지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 제리가 수없이 논쟁을 벌였던 주제다. 사실 그의 말이 옳지만, 드루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다. 두 사람 사이의 화제를 딴 곳으로 돌려야 하는데… 제리가 한 말의 진의를 드루가 따지고 든다면 일은 난처하게 된다. 브로디는 부의 상징인 수많은 크리스탈 프리즘이 황금 파인애플 모양을 둘러싼 육중한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투로 입을 열었다. "해먼드 가의 사업은 우선 토지 투기로부터 시작해서, 농기구는 그후에 손을 대어…" "우리 집안의 자산분석은 그만 해둬." 드루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건 그렇고 브로디, 이번 여름엔 뭘 할 생각이야?" "아저씨 법률사무소에서 또 일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자리가 이미 차버렸다면 어떡하지?" 드루가 브로디를 놀려댔다. "어머, 아저씨도. 지금까지 써본 여직원 가운데 제가 제일 괜찮은 사무원이란 걸 잘 아시잖아요?" "그렇지, 그건 사실이야." 그가 빈정거렸다. "좋아, 브로디. 언제든지 네가 원할 때 일을 시작하도록 해." "다음주부터라도 괜찮죠? 우선 2, 3 일은 푹 쉬고 싶어요. 게다가 결혼식 계획도 짜야 하고, 아주 바빠질 것 같아요." 드루가 이마에 주름을 지어 보이는 걸 본 순간 브로디는 숨을 죽였다. "결혼 날짜를 벌써 정한 거야?" 드루가 천천히 물었다. 그것 보란 듯이 브로디는 의기양양하게 제리를 쳐다보았다. 봐 말했잖아, 드루는 내 말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줄 거라고… "되도록 빨리 했으면 좋겠어요. 제리 휘트콤 부인이 되는 게 무척 기다려져요." "내 생각엔 준비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식은 8 월말쯤에 하는 게 어떻겠니?"


"그렇게 오래 기다리긴 싫어요." 브로디가 짜증을 부렸다. "제리가 한여름에 신혼여행을 가느라 휴가를 달라고 하면, 아르바이트로 나가는 올리버 패닝 회사 사장이 반가와하지 않을 텐데."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제리가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식은 주말에 올릴 거고, 먼 곳으로 신혼여행을 갈 만큼 경제적인 여유는 없으니까." "신혼여행은 드루 아저씨가 결혼선물로 해결해 줄 거야." 브로디는 환한 미소를 드루에게 던졌다. "고려해 보도록 하지." "이봐요, 제리. 내일 당장 반지를 사러 가요. 자, 이젠 우리의 약혼은 정식으로 된 거야." "그렇지 않지." 드루가 날카롭게 가로막았다. "약혼발표가 끝나기 전엔 정식이 아니야." "하지만 드루 아저씨… 아저씨…" 브로디가 항의하듯 외쳤다. "알겠지, 약혼발표를 하기 전까진 약혼반지를 껴서는 안 돼." 드루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리는 브로디가 흥분해하는 걸 보고 끼어들었다. "아저씨 말대로 하기로 해, 브로디." "그러면 약혼발표를 빨리 해요. 성대한 약혼식 파티를 열어요." 브로디는 자신의 생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친구들을 모두 불러야지. 토요일 밤이 어떨까? 아저씨, 괜찮겠죠?" "알았다. 잠깐 제리와 단둘이서만 얘기를 하고 싶은데, 미안하지만 넌 자리를 좀 비켜 주지 않겠니?" "그럼, 저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브로디는 명랑하게 제리의 볼에 키스를 하고는 어깨춤을 추며 주방으로 갔다. "대관절 무슨 일이에요?" 라일리 부인이 물었다. 그녀는 접시를 설거지통에 담그고 있었다. "토요일 밤에 파티를 열 거예요."


하마터면 약혼식 파티라고 털어놓을 뻔했지만 간신히 꾹 참았다. 그것은 드루의 입을 통해서 얘기해야 할 말이다. "세이프하버 저택이 다시 북적거리게 된다니 잘된 일이에요. 자, 그럼 내일부터는 은식기를 닦아야겠군." 라일리 부인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난 초대할 손님을 정해야지." 브로디는 메모지를 들고 아침식사용 간이식탁 앞에 앉아 초대 손님의 명단을 적는 데 몰두했다. 이윽고 제리가 주방으로 왔다. "그럼 내일 또 만나." 허리를 껴안으며 브로디에게 다정하게 키스를 했다. "내일은 반지를 고르러 가자구. 비록 아직은 끼고 다니진 못하겠지만." 제리를 차 있는 데까지 배웅하고, 들뜬 기분으로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브로디에게 라일리는 손을 허리에 얹은 자세로 날카롭게 물었다. "토요일 파티는 약혼발표를 위해서군요. 저런 망나니하고 결혼할 셈이유?" "제리는 망나니가 아녜요!" 브로디가 열을 올렸다. 라일리 부인이 고개를 저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비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댁의 숙녀가 그런 집 자식과 짝을 이루게 될 줄은…" "이 집의 숙녀도 자기가 뭘 원하는진 잘 알아요, 라일리 부인! 알겠어요? 아줌만 잠자코 있어요. 내가 누구와 결혼하건 아줌마가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흥분한 채 주방에서 성큼 걸어나와 쿵쿵거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드루는 침실 옆 거실에 있었다. 침침한 방안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흐르고 있다. 그는 안락의자에 길게 기대앉아 잡지책을 무릎 위에 펼쳐 놓고 있다. "드루 아저씨,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으시면 눈에 나빠요." 브로디는 심통스럽게 말하며 스위치를 올렸다. 드루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방금 면도한 턱을 쓰다듬었다. "전 다만 라일리 부인의 건방진 행동 때문에 왔어요. 아줌마 생각엔 제가 제리와 결혼하는 게 미친 짓으로 보이나 봐요." "모두들 아줌마 의견에 찬성할지도 모르지." "두 분은 이해를 못해요." 브로디는 비꼬듯이 대꾸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어요. 아시잖아요."


"하지만 때때로 평등하지 않은 경우도 있거든. 넌 호강하면서 자라왔어. 제리가 대학을 졸업하고 일하기 시작할 때까지의 2 년간을 너희들 둘은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냐?" "그럭저럭요. 그렇지, 아저씨한테 부탁이 있었는데…" 브로디는 맞은편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언젠가 제 대학 공부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었죠? 학교에 다니는 건 시간낭비라고 제가 생각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계실 거예요. 이제 성악 레슨은 충분히 받았고, 슬슬 사회에 나가 실제로 제 실력을 테스트할 때라고 생각해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세계적인 가수는 매일 레슨을 받고 있어. 하지만 네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데 있는 것 같은데?" "사실 그래요. 앞으로 2 년 동안 더 다녀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또 아저씨는 제가 공부를 계속하길 원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아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왕 학비를 대주실 거라면, 그걸 더 가치있게 쓸 수 있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저 대신 제리 학비를 대주시면 어때요?" "안 돼!" 드루는 딱 잘라 거절했다. 브로디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아저씨…" "난 네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돈을 내겠어." "하지만 제리는 저의 장래이기도 해요, 아저씨! 그의 공부는 제겐 보증과도 같은 거예요." "하지만 네 자신의 공부도 중요해. 만일 결혼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을 때에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럴 일은 없어요, 아저씨.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하지는 않아요!" "결혼자격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아. 내가 다루는 이혼소송 사건만 해도, 처음엔 모두 죽을 때까지 갈라서지 않겠다고 믿었던 부부들이야." 드루는 브로디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돈 얘기는 제리한테 부탁받은 거냐?" "아뇨,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망설이듯 말했다. "그렇게 해주세요, 아저씨…" "절대로 안 돼, 브로디. 약혼식 파티와 결혼식 비용은 내가 내지. 그리고 또 적당한 선물도 해주지. 하지만 신혼여행 비용은 한 푼도 대줄 생각이 없어."


그는 갑작스럽게 머리를 흔들며 마치 상처를 받은 것처럼 한 손을 목덜미로 가져갔다. "네 아버님이나 내 아버지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에서 널 돌봐 왔지만, 결혼하고 나면 더 이상 널 돌봐 줄 필요는 없어지니까." 브로디는 어안이벙벙했다. 지금의 드루한테서는 자기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던 보통 때의 착한 아저씨의 모습, 자신을 귀여워해 주고 응석을 받아 주던 오빠 같은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전 생각을 해봤는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얘기를 계속했다. "결혼식을 올린 다음… 학교가 개학하기 전까지 몇 주일 동안 아파트를 세내는 건 낭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 집에서 살겠다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안 돼. 일단 휘트콤 부인으로 이 집을 떠나가면, 초대받지 않고서는 이 집에 올 수 없어요." 온몸이 떨려 오고 눈에선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린다. "제 맘을 돌려서 제리와의 사이를 갈라놓을 셈이군요!"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천만에, 그렇진 않아." 드루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줄 난 잘 알아. 다만 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해 보고 결단을 내리도록 말이야." 와락 방에서 뛰쳐나가다 말고 브로디는 문 앞에서 뒤돌아섰다. "좋아요, 사무실에도 나가지 않겠어요. 결혼은 내가 마음내킬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겠어요. 아저씬 조금도 참견 마세요!" "그러려무나."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이젠 너도 법적으로 성인이니까 스스로 실수를 할 권리도 가지고 있지. 하지만 말해 보렴, 브로디. 너희 둘은 다음 학기를 어떻게 지낼 작정이냐?" "일자릴 찾겠어요." 그녀가 당돌하게 말했다. "우린 할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햄버거라도 맛있는 법이에요." 드루는 다시 잡지로 눈을 돌렸고, 방안에는 라흐마니노프의 슬라브 무곡이 흘렀다. "넌 너무 어려. 넌 너무나, 너무나도 세상을 모르고 있어."


거실에 울려퍼지던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브로디에게는 마치 저주의 소리처럼 들렸다. 2 드루는 휘파람을 불며 애지중지하는 링컨을 살피고 있었다. 그 단조로운 엔진의 조정음이 주방에까지 울려와 은그릇을 닦고 있는 브로디의 신경을 건드렸다. 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치고 돌아온 이후 벌써 2 시간째 드루는 차에 매달려 있다. 엔진 상태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가 도맡아서 치러야 하는 약혼식 파티가 도통 마음내키지 않아 저렇게 밖에만 있는 걸 거야. 브로디는 한숨을 내쉬며 닦은 은쟁반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테이블 맞은편엔 브로디의 대학교 친구인 자넷이 앉아 있다. "아휴, 은그릇을 닦기 시작한 지 벌써 몇 시간째야. 아직도 멀었니? 이 집을 환하게 장식해 줄 촛대가 도대체 몇 개나 있어야 되는 거니?" "그걸 알게 되면 깜짝 놀랄걸." 채소를 다듬고 있던 라일리 부인이 얼굴을 들었다. "잠깐 쉬어요. 냉장고에 시원한 게 있어요. 브로디, 해먼드 선생님께도 한 잔 갖다 드려요." 브로디는 마지못해 유리컵을 3 개 꺼냈다. 그날 밤의 말다툼이 있은 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아저씨에 대한 감정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유리컵을 받쳐든 브로디는 주방 구석에 놓여 있는 이동식 테이블 앞에서 발을 멈추고는 오늘밤 약혼을 발표하는 즉시 연회장으로 운반될 케이크를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케이크 위에는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얼음으로 만든 두 개의 손이 있고, <제리와 브로디의 약혼을 축하합니다.>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오늘밤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약혼하게 되는구나. 제리와 함께 그렇게 고르고 골랐던 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제야 낄 수가 있겠구나 … 브로디는 혼자서 미소짓고는 뒷문으로 나가 기다리고 있던 자넷에게로 다가갔다. "자, 벤치에 가서 쉬자."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로부터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언덕 너머에서 산들바람이 꽃향기를 실어온다. 드루는 셔츠를 벗어 차의 보네트에 올려놓았다. "드루 아저씨, 마실 것 좀 드세요." 드루의 벗은 등에 차가운 음료수를 끼얹고 싶었지만 브로디는 공손하게 말했다. "고마와." 기름 묻은 손으로 잔을 잡으며 그가 돌아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벤치로 갔다. 이미 자넷은 앉아서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그 사람 말이야, 어쩜 저렇게 핸섬하니. 초록빛 눈을 가진 남자는 처음이야. 게다가 봐, 저 우람한 근육." "드루 아저씨 말이니?" "물론이지, 그 말고 또 누가 있니? 해먼드 씨 같은 멋있는 남자가 곁에 있는데 제리 쪽을 택하다니 믿어지지 않아." "넌 한때 제리를 좋아하지 않았니?" "음,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에 적당한 상대는 아니야." "드루라면 적당하다는 뜻이니? 그에 대한 좋은 정보를 가르쳐 줄까?" "정말이니, 브로디? 말해 봐." 자넷은 벌떡 일어났다. "드루는 말이야, l0 년 전에 신시아란 여자한데 실연당한 이래 그 슬픔으로부터 헤어나질 못하고 있어."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가슴속에 꼭 숨기고 있는 거야." "그랬었구나." 자넷은 드루로부터 눈을 떼자 브로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이는 금발 머리 여자를 좋아할까? 저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겠니? 상냥하게 아양을 떨면 될까, 아니면 자신을 강하게 밀고나가는 편이 효과적일까?" "그런 건 난 몰라." "요 심술쟁이야, 우린 친구 사이잖니. 좋아, 아무튼 파티에 불러 줘서 고맙다." "그릇 닦는 걸 도와야 하는데도?" "음, 그래. 한데 라일리 부인이 너보고는 브로디라 부르고, 드루 씨한테는 해먼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뭐지?" "드루 씨는 이 집 주인이고, 난 단지 여기서 얹혀 사는 가난하고 집 없는 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넌 언제나 좋은 옷을 입고 있잖니. 나도 해먼드 집안의 자비에 매달리고 싶어. 어떻게 하면 이 집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결혼하면 자리가 날 거야." 지금까지의 경위를 들은 자넷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너에 대한 재정지원을 중단하다니, 그런 일이 그에게 가능한 일일까?" "그럼, 그에겐 평생 동안 날 돌볼 의무는 없는 거니까." 브로디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난 다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때 도와 주길 바랄 뿐이야."


"아마, 그에겐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겠지." "그 사람을 두둔하는 일은 제발 그만둬!" "알았어. 그렇지만 너, 지금부터 어떡할 작정이니?" "대학에 돌아가는 대로 일자리를 찾겠어. 거리 여기저기에 나이트클럽이 있으니까, 전부터 하고 싶었던 노래를 부를 작정이야. 노래 레슨을 몇 년이나 받아왔으니까." 자넷은 고개를 저었다. "네 목소리가 고운 건 알고 있지만, 그쪽은 대학 도시야.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면 그냥이라도 노래할 학생들이 쌔고쌨어." "그렇다면 다른 일을 찾아야지." "정말이야, 이건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야. 결혼은 뒤로 미루고 공부를 계속해야 해. 제리의 졸업을 기다렸다가…" 브로디는 턱에 힘을 주었다. "우리 둘이서 뭔가 할 수 있을 거야. 드루 쪽에서 꺾일지도 모르고 …

그는 제리를

차츰차츰 이해해 가는 것 같아. 오늘만 해도 제리더러 골프를 치자고 권하던걸." 하지만 그 희망적인 말과는 반대로 브로디의 목소리는 자신이 없어 보였다. 파티 준비가 모두 완료된 세이프하버 저택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꽃으로 장식된 식당의 뷔페 테이블에는 크리스탈 유리잔과 최고급 식기가 쭉 놓여 있고, 연회장 바닥은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닦여 있다. 집안 가득 감미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세이프하버 저택이 마치 살아 숨쉬는 듯이 느껴졌다. 이 집은 떠들썩할 때가 좋아. 이 집에 필요한 것은 건강한 가족… 이방 저방을 뛰어다니고 계단 난간을 미끄럼 타고 내려오는 꼬마들 …

거기까지 생각하고

브로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영원한 독신자인 드루에게 많은 아이들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어. 기껏해야 개를 키울 정도가 고작이겠지. 혼자 중얼거리던 브로디는 파티 전에 뭔가 먹어 두려고 주방으로 갔다. 드루는 아직도 차에 매달려 있다. 이번에는 왁스 칠을 하고 있다. 브로디는 햄치즈 샌드위치를 만들어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드루 아저씨와 얘기를 해야겠디고 생각했다. 요 며칠 동안 서로가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대화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거북한 분위기로 중대한 약혼 파티를 망치고 싶지는 않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제가 드린 전기 왁스기를 사용하면 좋을 텐데요." 드루는 뒤돌아보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손으로 칠하는 게 더 말끔하게 마무리되거든." "이제 적당히 끝내는 게 어때요? 파티까진 앞으로 2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요."


"문제없어, 10 분이면 충분해. 게다가 나 따위는 어떤 누가 신경쓰지도 않을 테니까. 모두의 관심은 오로지 너에게 쏠릴 거야." 브로디는 정원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손님들은 오늘밤이 무슨 파티인지 알고 있을까요?" "이 고장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고말고. 만약 비밀에 부쳐 두고 싶었다면 너와 너의 로미오는 브룩보다는 좀더 멀리 떨어진 보석상에서 약혼반지를 샀어야 했어." "제리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아저씨가 제리를 제 결혼상대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이제 겨우 20 살인데 사랑이 뭔지 어떻게 알아. 그 나이 또래의 처녀애들은 연애를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전 신시아하곤 달라요!" 자신도 모르게 내뱉어 버린 브로디는 아차 하고 뉘우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까지 드루 앞에서 신시아의 이름을 입밖에 낸 적은 없었다. 그의 묵은 상처를 건드린 건 아닐까? 드루는 별안간 웃기 시작했다. "확실히 신시아는 사랑 게임에는 명수였지. 그런데 브로디, 제리에 대해 우리의 의견이 엇갈린 건 분명하지만, 그 일로 너와 입씨름할 생각은 전혀 없어. 이쯤에서 서로 휴전하는 게 어때?" "저도 아저씨와 싸우고 싶진 않아요." 그녀가 상냥하게 대답하자 드루는 싱긋 웃고는 다시 차를 닦기 시작했다. 잠시 후 브로디는 망설이듯 말을 걸었다. "저 있잖아요, 아저씨. 결혼식 때 노래를 불러 주지 않으실래요? 아저씨의 목소리는 정말 훌륭해요." 드루의 손에서 걸레가 떨어지면서, 그의 손에 끼인 반지가 그만 링컨을 할퀴어 버렸다. "이거 참." 그는 투덜거리면서 재빠르게 몸을 굽혀 차의 상처를 살폈다. 긁힌 부위에 열심히 왁스 칠을 하는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브로디는 끝내 안달이 나서 재촉했다. "봐요 아저씨, 승낙하는 거죠?" "뭘? 아, 노래 부르는 거. 결혼식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게다가 나 혼자서 인기를 독차지한다면 미안하잖아?" 농담인 것 같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다. "샌드위치를 다 먹었으면, 내게도 하나 만들어 주지 않겠어?"


"좋아요." 브로디는 일어나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가 노래 부르는 것을 거절했다고 해서 상심할 필요는 없다고 브로디는 자신을 달랬다. 그가 그 아름다운 바리톤으로 남 앞에서 노래한 적은 좀처럼 없었지만, 내가 간절히 부탁하면 결국은 불러 줄 거야. 브로디가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는데, 제리가 뒷문으로 나타났다. "벌써 왔어?" 뺨에 키스를 받으면서 브로디는 제리의 모습이 진 바지에 운동화 차림임을 알았다. "얘기할 게 있어." "얘기라면 간단히 해. 난 지금부터 샤워를 해야 하고, 게다가 아직 머리도 만지지 않았거든." "오래 걸리진 않아." 제리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다. "실은 오늘밤 파티를 중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브로디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약혼발표는 안할 셈이야?" 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넌 해먼드 씨가 우리의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는데, 이것저것 생각해 보니 굉장히 불안해져서 말이야. 그래서 사실을 알고 싶어졌어." "드루의 생각은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어. 그리고 말야, 난 자기를 불쾌하게 하고 싶진 않았어." "그는 대관절 뭐라고 그러는 거야?" 브로디는 드루와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대로 천천히 감정을 넣지 않고 얘기해 주었다. 얘기가 끝난 후 제리는 한참을 잠자코 있었다. "결혼하고 나면 해먼드 씨가 더 이상 너의 후견인이 되지 않는다는 걸 좀더 일찍 얘기해 줬어야 했어." "어쨌든간에 넉 달 후인 9 월엔 그는 더 이상 내 후견인이 아니야.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9 월까지 그의 도움 없이 어떻게 살아가지?" "할 일이 있을 거야. 우리 둘이서 힘을 합치면…" "해먼드 사무실에서 심부름을 하면 용돈 정도야 벌 수 있겠지만, 그것도 결혼 후까지 계속되리란 보장도 없어. 게다가 내 월급도 뻔하고." "절약하면 어떻게든 꾸려 나갈 수 있을 거야."


"넌 여태까지 궁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잖아." 제리는 냉담하게 말했다. "결혼은 9 월까지 연기하자." "9 월이 되면 무슨 좋은 수가 있어?" "9 월이면 넌 21 살이 돼. 그러면 해먼드 씨로부터 얼마간은 돈을 받아낼 수가 있잖아." "그건 어림도 없어. 왜냐하면 돈은 모두 드루의 것이니까. 만약 그가 싫다고 하면…" "하지만 너한텐 권리가 있을 테니까…" 제리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아니, 방금 뭐라고 했지?" "드루는 자기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했어. 그에겐 내게 그 돈을 나눠 줄 의무 같은 건 없다구." "네 재산은 어떻게 된 거야. 네가 2l 살이 되면 자유롭게 쓸 수 있다던 돈 말이야." 브로디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태어난 집엔 재산 같은 건 없었어. 다만 아빠의 유일한 친구인 앤디 해먼드 씨가 계셨지만." 제리가 입을 꼭 다물었기 때문에 그녀는 웃음을 멈췄다. "내게 돈 한푼 없어도 괜찮잖아?" 제리는 간이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충격을 받은 그의 눈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제리는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브로디는 목구멍이 칼칼하게 말라왔다. "남들이 생각하는 거와 다를 게 없지. 너를 해먼드 가의 한 사람으로만 생각했을 뿐이야. 너의 사치스런 생활과 옷차림…" "앤디는 날 친딸처럼 대해 주었으니까." "이젠 그만 해." 제리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지금 당장은 경제적으로 무리라면, 제리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결혼을 일 년이나 2 년 연기하면 되잖아. 미래는 먼 거야." 브로디는 온화하게 말했다. "확실히 미래는 멀지. 하지만 난 그동안 빈 돈을 갚아 나가지 않으면 안 돼, 알겠니? 잘 생각해 봐, 나 같은 놈이 어떻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다고 생각해?" "돈을 모았다고 그랬잖아." 제리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살 여유 같은 건 없어. 그렇다고 이런 대저택에 사는 여자한테 좁쌀만한 다이아몬드를 선물할 순 없잖아. 난 친구들한테 반지의 계약금으로 필요한 500 달러를 꿨다구. 결혼하면 갚겠다는 약속으로 말이야." "제리, 드루가 그 반지 값을 갚아 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아니,

하지만

결혼하면

몫을

받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어.

빌어먹을,

재수없게시리!" 제리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꽝 내리쳤다. "반지는 반환하면 되잖아. 다이아몬드는 갖고 싶지만, 그래도…" 그 화려한 반지를 이제 낄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하니 맥이 풀렸지만, 그런 기분을 억누르며 억지로 웃어 보이려 애썼다. "우린 언젠간 다이아몬드 반지를 살 수 있게 될 거야." 제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브로디를 응시했다. "넌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문제는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느냐 없으냐 뿐만이 아니야. 신학기 등록금에다 생활비, 게다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는 빚. 어떤 원조가 없다면 도저히 꾸려 나갈 수 없어." "어디서 돈을 빌면 될 텐데…" "은행은 졸업도 안한 학생 따위에게 돈을 빌려 주진 않는다구." 제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놀랐지? 지난 학기에 난 아르바이트를 두 건이나 했어. 거기에 너와의 데이트. 그건 완전히 헛된 시간낭비였어." 너무나도 가혹한 말에 브로디는 눈앞이 아찔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난 언젠가는 내게도 운이 트이기를 간절히 바랐었어. 이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지금 당장 그 운을 움켜잡고 싶단 말이야. 이런 내 기분 이해 못하겠어?" 브로디는 자신의 꿈이 발밑에서부터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와의 연애는 돈 때문이었구나. 그러니까 내가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빌어먹을! 넌 내게 거짓말을 했어." 제리는 의자에서 무서운 기세로 일어나더니 브로디를 향해 다가왔다. 그 얼굴은 흥분해 있고,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다. "난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았어." 브로디는 두려운 나머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제리가―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때리려 하고 있다니…


그때 뒷문이 열리며 드루가 주방으로 뛰어들어왔다. "휘트콤, 브로디한테 손끝 하나라도 댔단 봐라. 그땐 감옥에 처넣어 줄 테니까!" 순간 제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윽고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치켜든 손을 내렸다. 드루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브로디, 넌 네 방에 올라가 있거라." "고마와요, 아저씨." 브로디는 가까스로 그렇게 말하고는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이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내 약혼 파티…" 비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침대 위에 펼쳐 둔 파티용 드레스를 뭉쳐 옆으로 밀어 버렸다. 충격이 너무나 커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윽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루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아?" "그 사람은 돌아갔어요?" "두번 다시 여기는 못 올 거야." 드루는 침대에 걸터앉아 브로디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었다. "정말 무서웠어요." 브로디는 드루의 품에 안겼다. 그의 옆에 있으면 왠지 마음이 가라앉는다. "주방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기 때문에 얘기는 거의 다 들었어.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놈이 네게 난폭하게 굴려고 하기에 그만…" 좀전 주방에서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드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생각나게 해서 미안하다." 드루가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자, 이제 슬슬 샤워를 해야지. 네 파티에 늦어선 안 되잖아." 그래, 파티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브로디는 몸을 일으켰다. "파티엔 참석하지 않겠어요. 나갈 이유가 없잖아요." "아냐, 나가야 해. 만약 네가 여기에 숨어 있다면 실연을 당해서 울고 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온 도시에 퍼지고 말 거야. 그래도 좋으니?" "그건 안 돼요. 그렇지만…" "알겠어? 네 쪽에서 약혼을 취소한 거야." "전 도저히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순 없어요."


"모두들 네 쪽에서 먼저 취소했다고 믿도록 만들어야 해." "왜죠? 해먼드 가의 인간은 다른 사람을 걷어차는 건 괜찮지만, 채이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는 얘긴가요?" 또다시 신시아 일을 언급하고 말았다. 아저씨의 초록빛 눈에 긴장감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으며, 브로디는 말을 어물거렸다. "하지만 난 해먼드 가의 사람이 아녜요. 제리와 같은 부류의…" "알겠니, 브로디. 두번 다시 그 따위 말은 하지 마라. 제리는 재산을 노린 사기꾼이야. 자기를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비록 자기 할머니라 해도 죽이려들 놈이야. 하지만 넌…" 드루는 잠깐 멈췄다가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넌 상냥하고 정직하고 순진해. 결코 제리와 같다고 생각해선 안 돼. 자, 알았으면 옷을 갈아입도록 해."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언젠가는 부딪쳐야 될 일이야. 괜찮아, 나와 자넷이 있잖아. 라일리 부인도 네 편이야. 자 일어나렴." "싫어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방에서 나가려다 말고 드루는 문 앞에 멈춰서서 엄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니, 이제 마지막으로 말하겠어. 파티에 나가서 상냥하게 행동해!" "아저씨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말이죠!" "난 지금부터 샤워를 하고 오겠어.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그대로 널 끌고서라도 데리고 나갈 테니까 알아서 해. 알아들었지?" 브로디가 잠자코 있는 걸 동의의 뜻으로 안 드루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는 일단 말을 꺼내면 결코 다시 거두는 일이 없는 사람이다. 브로디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드루는 날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3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와 술잔 부딪는 소리가 계단 위까지 들려온다. 브로디는 숨을 삼켰다. "나 안 되겠어, 자넷." 자넷은 격려하듯 브로디의 손을 잡는다.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일만

어렵게

뿐이야.

친구들이잖니." "상어 같은 인간들이야. 일단 피 냄새를 맡았다 하면…"

게다가

사람들은

모두


거기까지 말한 브로디는 아차 했다. 아저씨가 말했던 게 바로 이것이야. 그가 지키려 한 건 해먼드 집안의 체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연회장엔 많은 손님들이 모여들어 테라스까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브로디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지만, 필사적으로 몸을 가누곤 억지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동안 자신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시간 전에 주방에서 있었던 무시무시한 사건은 단지 악몽에 불과할 뿐, 이제 곧 눈을 뜨면 모든 게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샴페인을 한 잔 더 갖다 주시지 않을래요?" 브로디가 드루에게 부탁했다. "오늘밤엔 주스를 마시는 게 좋아." "뭘 마시건 내 맘이에요!" 브로디는 발끈 짜증을 부리고는 직접 샴페인을 가지러 갔다. "브로디는 정말 아름다운 숙녀가 됐구나.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누가 와서 채가 버릴지도 모르겠는걸." 주위 사람들이 드루에게 들으란 듯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애가 원한다면 이 집에 머물 수도 있고, 나가고 싶을 땐 언제라도 여기를 떠날 수 있어. 그건 그애도 잘 알고 있어." 드루가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대답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냐. 자네가 브로디와 결혼하면 좋잖아. 그러면 그녀의 재산을 다른 녀석에게 뺏기지도 않을 거고." 드루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브로디는 그 남자의 억측에 부아가 났다. 이 고장 사람들은 모두 아빠가 내게 재산을 한밑천 남겨 놓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모두들 사실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에 날 이곳에다 데려다 놓으려고 전 재산을 팔아 차비를 마련하셨어. 그리고 어쩌면 그 돈의 대부분도 앤디 해먼드 씨가 대주셨을 거야. 갑자기 브로디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 소녀가 말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기껏해야 l8 살 정도로 파티엔 익숙치 않은 듯 머뭇거리고 있다. 측은하게 생각한 브로디는 그녀 옆에 다가앉아 말을 걸었다. "넌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난 해먼도 곶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전 이사벨 패닝이에요. 스위스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막 돌아왔어요."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브로디의 머릿속에 이사벨의 어릴 적 모습이 어슴프레하게 떠올랐다. 부끄러움을 잘 타는 어린애로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여름방학이라서 돌아왔니?" "이제 막 학교를 졸업했어요. 아빠는 날 이곳 대학에 집어넣을 생각이신 모양인데, 난 들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그래도 유럽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그쪽 말은 잘 할 줄도 모르고…" 이사벨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얼굴을 붉혔다. "미안해요. 이런 얘기는 지루하죠? 쓸데없는 얘기만 한다고 아빠가 언제나 주의를 줘요." 매사에 자신없어하는 이사벨의 태도는 부친 탓이라고 브로디는 생각했다. "난 유럽에 가본 적은 없지만, 이 세이프하버처럼 멋진 곳은 없으리라 생각해." "정말로 근사한 집이에요." 이사벨은 천장에 새겨진 섬세한 조각과 호화로운 융단을 보며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 "우리 집도 이랬으면 좋겠는데 …

아빠는 돈을 많이 들이곤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뒤죽박죽이에요. 나 역시도 어떻게 해야 산뜻하게 될지 전혀 모르겠고 …

저, 만약

가능하다면 당신이 도와 주면… 어머 정말 내가 왜 이러지." 이사벨은 또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아직 초면인데 이런 부탁을 드리다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 줄게." "이사벨이 무슨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요?"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만에요, 패닝 씨. 이사벨은 제가 다니고 있는 대학에 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좀더 자세한 얘기를 나누려고 다음주에 차나 한잔 하자고 초대했어요." 부친이 가버리자 이사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차 마시러 오도록 초대해 주시는 것 정말이에요?" "물론이야. 화요일이 어떨까?" 브로디는 생긋 웃어 보이며 일어섰다. "난 다른 손님들한테 가봐야 돼. 그럼 화요일에 만나!" 이사벨이 황홀한 표정으로 미소짓는 걸 보고 브로디는 마음이 훈훈해짐을 느꼈다. 이사벨에겐 어딘가 매력이 있다. 누군가가 돌봐 준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숙녀가 될 텐데… "어머, 안녕하세요." 여러 사람 곁으로 돌아온 브로디는 크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퍼시 부인의 인사를 받았다. "저, 당신의 사랑하는 낭군은 어디에 계시죠? 발표는 오늘 안하나요?"


순간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사벨 문제로 정신이 팔려서 제리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브로디는 방긋 웃어 보인다. "발표라뇨? 뭘 말씀하시는 거죠?" "어머, 난 지난주에 브룩 보석상에서 당신이 젊은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본걸요. 둘이서 약혼반지를 고르고 있었잖아요?" 주위의 모든 사람이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캐롤라인 퍼시는 이 고장에서 제일 가는 수다쟁이다. 만약 퍼시를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브로디는 이마에 주름을 모으고 의아한 듯 되물었다. "제가 사랑하는 낭군이라뇨? 아, 알았다! 제리 휘트콤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설마 나와 제리가…" 상대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브로디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제리는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고르고 있었고, 그래서 누군가 여자의 조언이 필요했던 거예요. 남자들이란 여자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모르잖아요."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럴까?" 드루가 어느 새 다가와 말참견을 한다. "자신의 보석에 대한 취미를 과시해서는 안 되는데요." 브로디는 목에 건 금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아저씨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목걸이는 드루가 작년 크리스마스 때 선물해 준 것이다. "게다가 보석상 주인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반지를 구경한다는 건 일종의 유희예요." 머릿속이 빙빙 돌고 있다. 브로디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드루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듬직한 시선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퍼시 부인, 제가 마치 제 반지를 사는 것처럼 행동했다면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그것은 정말 근사한 반지였어요." 브로디는 마지막으로 간신히 이 말을 했다. 드루가 옆에서 거들어 화제를 돌렸기 때문에 브로디는 한시름 놓고 사람들을 피해 테라스로 갔다. 서늘한 밤공기가 상기된 얼굴에 상쾌하게 와닿는다. 이것으로 난관은 통과한 셈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져 갔다. 월요일엔 자넷이 돌아갔다. 세이프하버는 마치 더위를 피해 그늘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처럼 다시 고요해졌다. 브로디는 응접실의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눌렀다. 매일 연습을 해야지 하면서도, 걸터앉았다.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내키지가

않는다.

그래서

주방으로

가서

의자에


라일리 부인이 위로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고마왔다. 만약 한마디라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면 아마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비프 웰링턴을 만드는 거예요? 여름엔 안 어울리잖아요?" "이건 박스터 선생님이 좋아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저녁식사 때 오시나요?" 브로디는 무표정하게 물었다. 다니엘 박스터는 드루의 법률사무소 동업자지만, 도무지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다. "어제 저녁에 해먼드 선생님이 박스터 씨를 초대한다고 그러시지 않았어요." "그랬어요? 난 똑똑히 듣지 못했는데…" 차 소리가 났다. 브로디는 식당을 뛰어나가 차고로 갔다. "마중을 다 나오다니, 정말 황송한데. 매력적인 내 옆에 있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무슨 계략이라도 숨어 있는 건가?" "아저씨가 안 계셔서 외로왔어요. 자넷도 조금 아까 돌아갔고… 오늘은 이제 일은 그만 하실 거죠?" "기분이 내키면…" 그녀는 강아지처럼 졸졸 드루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드루는 책상 위에 007 가방을 내려놓고 가죽을 씌운 커다란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세요?" 브로디가 위로하듯 말을 걸었다. "오늘은 해결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어. 게다가 비서인 수가 감기로 쉬는 바람에." 드루는 목덜미를 주무르고 있다. "제가 주물러 드릴게요." 브로디가 그의 긴장된 목의 근육을 풀어 주었다. "내일 제가 사무실에 나갈게요." "내일은 수가 나올 테지만, 네가 나와 준다면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오후엔 호수에나 가지 않겠니? 보트 놀이도 하고… 낚시를 해도 좋고." "아이 좋아!" 그녀는 드루 목에 매달리며 기뻐했다. "하지만 사무실을 비워도 괜찮아요?" "난 요 몇 주일째 통 쉬질 못했어. 가끔은 괜찮지 않겠어?" "아 참, 안 돼요. 저, 내일은 갈 수 없어요. 차 마시러 오라고 이사벨 패닝을 초대한걸요. 만약 취소한다면 그앤 크게 실망할 거예요."


"알았어. 호수에 가는 건 다음날로 미루지." "이사벨은 아버지를 굉장히 무서워해서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나 봐요. 가엾게도…" 브로디는 드루의 등뼈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누르고는 다시 목덜미 부근을 보들보들한 손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젠 됐어." 드루가 브로디의 손을 밀쳤다. "전엔 제가 이렇게 주물러 주는 걸 좋아했잖아요. 도대체 왜 그러세요?" 드루는 순간 말이 막힌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은 됐어. 다른 날에 해줘. 네 손은 정말 힘이 세구나. 피아노 연습 탓인가 봐. 물리요법사가 되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농담 같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가수 지망생인 건 알고 계시잖아요." 드루에게서 떨어진 브로디는 방문 가까이의 두다 만 체스 판 앞에서 발을 멈췄다. "흑 쪽이 지고 있는 것 같네요." "2 주일 전에 다니엘과 한 판 뒀었지. 오늘밤엔 그를 꼼짝 못하게 해줘야겠어." "저, 그런데…"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고 있던 드루가 얼굴을 들었다. "그 다음은 듣고 싶지 않은데. 네가 '그런데'라고 말할 땐 꼭 뭐가 있거든." "저, 이제 학교엔 돌아가지 않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설마 낙제했다는 건 아니겠지?" "아녜요, 당치도 않아요. 이건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이제 학교엔 조금도 흥미가 없는걸요." "지금 넌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거야. 결론을 내리는 건 좀더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 제리 일을 잊을 수 있게 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학교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다음에 제리를 잊어버리겠다는 거지만… 저, 가르쳐 줘요.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잊을 수 있는 건가요?" 드루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얼굴을 들었다. 표정은 굳었고 눈엔 고통의 빛이 어려 있다. 또 신시아를 생각나게 한 모양이다.


"아니, 인간은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결코 잊을 수는 없어. 평생 그 사람만을 사랑할 뿐이야." 다니엘 박스터는 허풍쟁이에다 아무 말이나 가리지 않고 툭툭 내뱉는 그런 남자다. 앤디가 살아 있을 때부터 법률사무소의 동업자였다. 브로디는 어렸을 적엔 곧잘 그의 무릎에 앉곤 했지만, 왠지 호감이 가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기분은 15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변호사로서의 수완은 대단하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네 환영 파티에 오지 못해 유감이었다." 디저트로 나온 블루베리 케이크를 먹으면서 다니엘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면서?" "거리의 소문에 일일이 신경을 쓰시는군요. 소문 같은 건 절반 정도는 무시해 버리는 게 마음이 편할 겁니다." 드루가 슬며시 말참견을 했다. "자넨 남의 소문 때문에 괴로왔던 적이 없나? 그렇지, 자네에 대한 오랜 세월에 걸친 그 소문은 어찌된 셈인가?" 다니엘이 야릇한 질문을 던진다. 무슨 일일까 의아했다. 드루만큼 성실하고 정직한 인간도 없을 텐데 … 그에 관한 한 가십거리가 될 만한 일이 있을 리 없을 텐데. 하긴 캐롤라인 퍼시 같은 사람이라면 아무 일이 없더라도 소문을 만들어낼 게 틀림없지만… "신경을 쓴다 해도 전 조금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아요. 자, 다니엘 선생님, 오늘 저녁의 체스나 생각하시죠. 아마 오늘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선생을 항복시킬 묘수를 생각해 두었으니까요." 다니엘은 웃었다. 바로 그때 라일리 부인이 식당으로 와선 드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고 알렸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사업상 중요한 얘기라서." 드루는 식당에서 나갔다. "저 사람은 일에 욕심이 너무 많아." 다니엘은 불만인 모양이다. "일이 사는 보람일걸요." "그야 알고 있지. 하지만 드루는 아직 젊어. 뭔가 사는 낙이 필요해." 디저트를 다 먹고 나서 접시를 옆으로 밀어 놓더니 다니엘이 난데없이 물었다. "만약에 드루가 결혼한다면 넌 아무렇지도 않겠니?" "결혼을 생각하고 있어요?"


브로디는 깜짝 놀랐다. "글쎄, 난 잘 모르지만…" 하지만 말과는 달리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다. "드루의 결혼에 반대겠지? 결혼한다는 말만 듣고서도 목소리가 달라지는군." "드루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결정해요. 아저씨가 어떤 식으로 살든 참견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네가 이 세이프하버에 있는 한 그는 자기가 원하는 걸 할 수 없을 거야. 이제 슬슬 그를 해방시켜 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앤디가 죽었을 때 드루는 겨우 2l 살이었어. 너의 후견인이 되기엔 너무 어려서 딱할 정도였지. 내가 듣기엔 그가 아직도 네 보호자노릇을 하고 있다던데, 도대체 넌 언제나 어른이 될 거냐?" "아저씨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요." "그럴까? 난 앤디 해먼드와 마찬가지로 네 아버지의 친구였지." "몰랐었군요…" "죽을 때가 다가왔다는 걸 안 그 친구가 널 데리고 해먼드 곶으로 돌아온 건 앤디나 내가 널 돌봐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는 널 여기서 키우고 싶었던 거야. 그 당시 난 다른 도시로 가야만 했기 때문에 결국 앤디가 네 후견인이 된 거야. 드루를 위해서도 내가 대신 널 맡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어." "만약 드루가 절 돌보기 싫었다면 어째서 앤디 씨가 돌아가신 후에 후견인 역을 물려받았을까요?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도의를 존중하는 남자고, 게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후견인 역할은 그에겐 무거운 부담이었어. 그래서 네가 21 살이 되는 생일, 다시 말해 너로부터 해방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저씨는 있고 싶을 때까지 세이프하버 저택에 있어도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게 단지 겉치레 말에 불과했단 말인가? 브로디는 불안해졌다. 여름방학이 돼서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줄곧 드루와의 사이가 원만치 못했던 게 제리와의 결혼 얘기 탓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만은 아니었단 말인가? 내가 이 집에 있으면 자신의 자유가 속박되기 때문에 노여워하고 있는 걸까? 드루는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왔다. "자, 중요한 사건이 하나 해결됐어요. 브로디, 내 커피 좀 다시 따끈한 걸로 갖다주지 않겠어?" 브로디는 드루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지만, 그 마음속의 부담스러운 표정이라곤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요 2, 3 일 동안 그는 초조해하고 있다. 아까도


서재에서 목을 주물러 주고 있을 때에, 이제 그만 하라고 내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지 않았던가… "자, 다니엘 선생님, 체스나 둘까요? 브로디와 뭔가를 심각하게 얘기하고 계셨던 모양인데, 이제 얘기는 다 끝났습니까?" "응, 이제 끝났어. 어디 자네 솜씨를 좀 보기로 할까." 브로디는 어둠침침한 거실에서 재미도 없는 텔레비전을 건성으로 보고 있다. 두 주일 전만 해도 내 삶은 계획대로 모두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제리와 결혼하여 그가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도와 주고, 그리고 졸업 후에는 그가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도록 훌륭한 반려자가 될 작정이었는데 … 그를 위해서라면 가수가 되는 꿈도 버릴 작정이었는데. 하지만 이제 내 곁에 제리는 없다. 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먼드 씨는 있고 싶은 만큼 세이프하버에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러나 만약에 내가 여기 계속 머문다면… 다니엘이 말한 대로 나 때문에 드루는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를 마음껏 못하고 있는 걸까? 그가 독신을 고집하고 있는 건 신시아 때문이며,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어쨌든 나도 이제 어른이 될 때가 온 거야. 더 이상 드루에게 어리광을 부리지 말자. 브로디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독백인가?" 거실에 들어온 드루는 언제나 정해 놓고 앉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스는 이겼나요?" "저항을 했지만 대패야." 브로디가 물끄러미 드루를 응시했다. "왜 그래? 슬픈 얼굴을 하고 있군. 다니엘이 무슨 말이라도 했어?" "그는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어요. 드루 아저씨가 절 돌보는 데 싫증을 내고 있다는 것도." 드루는 얼굴을 찡그렸다. "다니엘이 날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틀린 짐작이야." "제가 21 살이 되길 드루 아저씨는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어째서 지금까지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뭔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저씨는 항상 제 곁에 있어 주었지만, 그에 대해서 아저씨가 어떻게 생각할까 따위는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널 부담스럽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어." "하지만 평생 아저씨의 호의를 그냥 받고만 살 수는 없어요. 때문에 아저씨도 자신이 원하는 걸 못하는 거 아녜요?"


"내가 너 때문에 희생당하고 있다는 따위의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어." "다니엘 씨는 아저씨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드루는 잠시 잠자코 있었지만, 이윽고 중얼거렸다.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때면 좀더 조심해야겠구만." "그렇담, 결혼 얘기는 사실이에요?" "한번은 생각해 봤지만, 결국 그만뒀어." "왜요? 저 때문인가요? 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어엿한 어른인걸요. 혼자서 어떻게든 해나가겠어요." "네가 어느 정도의 어른인가는 제리를 이곳에 데리고 왔을 때 잘 알았지." 드루는 빈정대듯 말했다. "두 눈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제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곧 알아차렸을 거야. 하긴 너는 사랑에 빠져서 눈이 멀었던 거겠지만." 브로디는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걸 이젠 점점 확실하게 깨닫게 됐다. 제리와의 약혼에 드루는 맞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말로 타일러 봤자 효과가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겐 아무런 말도 없이 나의 계획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날 아저씨는 제리에게 골프를 같이 치러 가자고 했어요. 두 사람이 갑자기 친해지다니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때 제가 빈털터리라는 걸 일부러 그에게 말했던 거죠, 그렇죠?"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거냐? 녀석이 돈을 노리고 있었다는 걸 결혼 후에 아는 편이 좋았을까?" 브로디는 분통을 터뜨렸다. "아저씨는 제가 바라던 유일한 것을 망쳐 버렸어요!" "게다가 너의 인생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드루는 쌀쌀하게 내뱉었다. "만사를 다 내 탓으로 돌려. 난 기꺼이 그 비난을 받을 테니까." "아저씨는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문제를 모두 깨끗이 해결해 줬다고 자만하면서 말예요! 알겠어요, 제 문제는 저 혼자서 해결하겠어요! 구태여 저한테서 해방될 날을 손꼽아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전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겠어요!" 브로디는 방을 뛰쳐나왔다. 복도에 드루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정신차려, 브로디! 잘 생각하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귀중한 것을 잃게 돼."


4 땅콩 버터 병과 크래커를 골라 위태롭게 기슴에 안은 브로디는 맛있어 뵈는 치즈를 발견하고는 그걸 집어들었지만, <요 냉장>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도로 진열대에다 내려놓았다. 지금 들어 있는 호텔 방에다 둬도 상하지 않을 식품을 찾는 건 그리 쉽지가 않다. 방에 혼자 앉아 께지락께지락 먹는 건 도무지 싫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급료를 갖고서 외식을 한다는 건 엄두도 낼 수가 없다. 이게 제리가 말한 가난이라는 거구나. 1 센트의 돈이라도 헛되게 낭비해서는 안 돼. 아, 돈을 여유있게 갖고 싶다. 전에는 별 생각없이 이것저것 맘대로 살 수가 있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드루 아저씨의 돈이었어. 젊은 여자애가 언제까지나 보호받으면서 편안히 지내는 건 결코 좋은 일이 못돼. 힘들지만 그래도 이런 생활에도 좋은 점은 많아. 요 2 주일 동안에 2kg 이나 빠진걸. 물건 값을 치른 브로디는 가게를 나오기 전에 거리를 살폈다. 혹시 드루가 나타나지나 않을까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다. 2 주일 전에 세이프하버 저택을 나온 이래로

아저씨한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다. 아마

은혜도

모르는

계집애라고

노여워하고 있을 거야. 드루와 말다툼을 한 다음날, 브로디는 시내에 딱 하나 있는 나이트클럽을 찾아가 지배인을 졸라서 가수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억지로 얻어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형편에 맞는 낡고 싼 호텔 방 하나를 빈 다음 세이프하버에서 일용품 몇 가지를 챙겨 갖고 살짝 나와 버렸다. 드루에게는 여러 해 동안 도와 주어서 고맙다고 정중히 인사하고는 그동안 그가 자신를 위해서 쓴 돈은 꼭 갚겠다고 장담하면서, 아울러 자기에 대해선 이제 상관 말고 혼자 내버려 둬달라고 쓴 편지를 남겨 두고 나온 것이다. 그 이후로 드루 아저씨의 모습은 전혀 보지 못했다. 해먼드 곶은 작은 도시여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도, 그는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의 무관심은 내가 뭘하건 조금도 상관 않겠다는 그의 의사를 나타내는 거겠지. 브로디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법석을 떨지 않고 조용히 있어 주는 건 매우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도 자신이 원했던 일을 하고 있는데도, 갑자기 그의 보살핌에서 벗어나고 보니 몹시 쓸쓸했다. 단골 의상실 앞에서 발을 멈춘 브로디는 진열장에 진열돼 있는 차분한 커피색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한번 입어봤으면 좋겠다. 예전 같으면 내 용돈으로도 저 드레스를 살 수 있었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하라고 자신을 나무랐다. 넌 마치 네가 타고난 권리를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처럼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고 있단 말이야. 아무튼 드루 아저씨가 옳았어. 너는


너무나 호강스럽게 살아왔어. 이전에 널 그토록 편하게 살게 해준 그러한 좋은 환경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나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배워야 해… 드레스에 시선을 못박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 당장 사야 할 건 나이트클럽의 무대용 드레스야. 그것 때문에 어젯밤에도 지배인과 말다툼을 했지 않은가 "여기는 카네기홀이 아니야. 손님을 끌기 위해선 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게 필요해." 지배인은 브로디의 단조로운 검은색 드레스를 힐끗 쏘아보았다. "넌 아름다와. 좀더 화장만 한다면…" 브로디는 전에 드루가 한 말이 생각나 쓴웃음을 지었다. "넌 아름다와. 화장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한 여자에 대한 두 남자의 의견이 이렇게 정반대라니… 하지만 누구 말이 믿을 만한 것인가는 분명하다. 클럽 지배인은 손님을 끌 생각밖엔 하고 있지 않지만, 드루 아저씨는 … 그녀는 마음속으로 어째서 드루 아저씨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특이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 도시에는 드루를 경원시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깐깐한 지성과 굽힐 줄 모르는 도의심이 그를 두려운 존재로 만들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브로디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자신이 아는 그는 따스하고 동정심 많고, 이해성이 깊고 관대한 사람이다. "여, 브로디."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해서 뒤를 돌아본 브로디는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아저씨가 다정한 얼굴로 거기에 서 있었다. "별일없어? 좀 마른 것 같은데?" "네, 조금요." "조금이 아닌 것 같군. 그건 그렇고,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전 노래 부르는 게 좋아요." 드루는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이윽고 아주 부드럽게 물었다. "행복해, 브로디?" 행복하냐고? 지금과 같은 생활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의 인정을 받을 때까진… 드루는 그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 내가 저녁을 사지. 골프를 반 라운드 돌고, 그리고 나서 스테이크라도 먹는 게 어떨까?" 군침이 도는 초대지만 브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앞으로 한 시간 후면 쇼가 시작돼요. 그래서 지금 곧 옷을 갈아입어야 해요." 그대로 가버리려고 했지만, 그의 초록빛 눈과 마주치는 순간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럼, 다음에라도…" 그는 낙심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눈빛은 꽤 우울해 보인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 등을 돌리고 호텔로 향하는 브로디의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 준 드루 아저씨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그가 내 인생에 간섭을 했을지는 몰라도 그건 다 나 잘되라는 뜻으로 했던 건데. 그런 그를 슬프게 만든 일이 참을 수 없이 괴롭다. 나이트클럽에도 분장실은 있었지만 <벽장>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너무 좁아서 옷을 제대로 갈아입을 수가 없다. 그래서 브로디는 미리 호텔 바에서 무대의상으로 갈아입고 클럽에 나가고 있었다. 브로디는 작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며 한숨을 쉬고는 화장품 상자를 끌어당겼다. 드레스는 어쩔 수 없지만, 화장이라도 좀 짙게 해보자. 그렇게 하면 지배인도 조금은 좋아할 테지. 이 엷은 오렌지색 드레스는 대학의 댄스파티용으로 샀던 거였지. 확실히 지배인 말대로 나이트클럽의 무대에는 어울리지 않는군. 하지만 좀 색다른 모습을 원한다면 먼저 급료부터 올려 줄 일이지… 오늘 저녁 손님은 좀 점잖았으면 좋겠는데… 지난 며칠 동안은 건달패들이 와서 야유를 던지곤 했다. 건달들이라고 해도 가게 단골 손님들이므로 지배인도 모른 척하며 도와 주려 하지 않는다. 브로디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는 손님들 대부분은 아직 식당에 있고, 쇼 테이블 쪽은 거의 비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갑자기 서기보다는 손님이 적은 곳에서 노래 부르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불과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 자신의 목청에 무리가 가지 않는 가벼운 곡, 현대곡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담배 연기 자욱한 곳에서 발성연습도 하지 않고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것이 목청에 좋지 않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직업이니까 어쩔 수가 없다. 쇼 도중에 또 그 건달들이 들어와 무대 옆 늘상 앉던 자리에다 진을 쳤다. 오늘 저녁엔 세 명뿐이지만 그들 패거리 중에서도 제일 귀찮은 작자들이다. 오늘은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쇼가 반쯤 진행됐을 때쯤 다른 소란스런 한 패가 들어왔다. 그들은 홀 한복판에 요란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그들이 누군지 잘 몰랐지만, 사랑의 노래를 반쯤 불렀을 때 브로디는 깜짝 놀라 몸이 굳어졌다. 제리가 와 있다… 그와는 세이프하버의 주방에서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전엔 둘이서 함께 들었던 이 사랑의 노래를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부르지 않으면 안 되다니… 왜 그가 이곳에 왔을까? 제리의 테이블 쪽을 보지 않으려 하는데도 자꾸만 눈이 그쪽으로 간다. 그는 여럿이 어울려서 왔다. 함께 있는 저 여자는 누굴까? 피아노를 치는 브로디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이사벨 패닝 … !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잘 타던 바로 그 이사벨이 자기가 바라던 꿈이 이뤄졌다는 듯한 표정으로 기분 좋게 앉아 있다. 브로디는 이사벨의 시선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제리 이외에는 아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다른 일행은 브로디를 알아본 듯 자기들끼기 수군거리고 있다. 내가 세이프하버에서 살고 있지 않은 지금, 저 사람들이 아직도 날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휴식시간에 브로디는 지배인에게 불려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넌 피아노를 잘 친다고 했는데 아까 그 연주는 형편없잖아." 지배인은 화가 나 있다. "저 피아노는 다시 조율을 해야 되겠어요." "이제까지 그 누구도 탈을 잡지는 않았어!" "피아노는 한번 조율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건 아녜요." "좋아 브로디, 너한텐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주고 있지만, 그래서 손님이 몇 사람이나 더 는 것 같아? 지난 한 달 동안 손님은 거의 늘지 않았어. 지금 받고 있는 급료를 계속 받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충분히 해줘야겠어." "내 노래를 들어주는 손님은 많아요." "그래, 분명히 손님들은 네 노래를 듣고는 있지. 하지만 듣기만 하지, 마시지는 않는단 말이야. 오늘밤에도 널 보러 온 듯한 남자가 하나 있지만, 위스키소다 한 잔으로는 장사가 안 돼." 드루 아저씨가 여기에 온 걸까? 골프를 치러 간다고 했는데, 설마… 바보 같은 생각이야, 해먼드 곶에서 위스키소다를 마시는 사람이 꼭 드루 한 사람만은 아닐 거야. "좀더 분발해 주지 않으면 곤란해. 그렇지 않으면 다른 데 일자리를 찾도록 해." 지배인은 끝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제리와 이사벨 일행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옆을 지나갈 때, 그중 한 사람이 손짓해 불렀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노래를 시작했는데, 벌써 휴식이에요?" 이사벨이 말을 걸어왔다. "곧 돌아올게. 그런데 일전엔 차 한잔 하자고 초대하고서 내 멋대로 취소해서 정말 미안해." "또 다른 기회에 함께 만나기로 하죠. 하지만 그 장소가 세이프하버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겠죠?" 이사벨은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브로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사벨은 분명 취해 있다. 제리가 억지로 마시게 했을 거야. 제리는 좀 지쳐 보인다. 다음 쇼가 시작되기 전에 잠깐 쉬려고 분장실로 막 가려는데, 뒤쪽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스키소다의 손님은 역시 그였구나 … 드루가 손을 들었으므로 브로디는 그의 자리로 갔다. "왜 여기에 있죠?" 브로디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브로디의 쇼가 보고 싶어서." "골프 치러 갔던 게 아녜요?" "가긴 갔지만 반 라운드 돌고선 갑자기 여기로 오고 싶어지더군. 이상해?" "쇼를 봤으면 무슨 의견이 있을 텐데요?" "내 생각 따윈 듣고 싶지 않겠지." "아녜요. 저는 프로 가수예요. 무슨 말을 들어도 충격받진 않아요." "알았어. 그렇담 얘기하겠는데, 쇼는 시시하고 넌 나이트클럽 가수로는 맞지 않아." "절 생각해 주셔서 고마와요." 그녀는 맞받았다. "언제나 그렇지. 넌 이곳에 있으면 안 돼." 브로디는 피식 웃었다. "당신이 음악 전문가예요?" "아니, 하지만 어쨌든 쇼는 유치하기 짝이 없고 비평가가 볼 만한 것이 못돼. 확실히 네 목소리는 훌륭하지만 이곳 쇼에는 어울리질 않아." "지배인도 그랬어요. 여긴 카네기홀이 아니라구요. 하지만 신출내기인 제가 별안간에 그렇게 화려한 무대에 설 순 없잖아요?" "이곳을 나와 다른 데에 갈 때쯤엔 이미 네 목소리는 쓸모없게 될 거야." "하늘에 운을 맡기고 해보는 수밖에 없지요. 전 이제 가봐야 해요."


드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일어나서는 브로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분 후에 그의 모습은 클럽 안에서 볼 수 없었다. 후반부 쇼가 시작됐다. 그녀에겐 정해진 프로그램이 없었으므로 후반부에선 지난날 드루와 함께 불렀던 흘러간 옛 노래를 이것저것 불렀다. 그 건달들이 오늘밤에도 몹시들 취해 브로디에게 술 한잔 사겠다며 몇 번이나 연주를 방해했다.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건 처음이어서 쇼가 끝날 무렵, 브로디는 화가 나고 초조해서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분장실로

돌아온

브로디는

오랫동안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얇은

벽을

통해

주크박스(동전을 넣고 원하는 음악의 단추를 누르면 자동적으로 판이 돌게 된 장치)의 음악이 들려온다.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가수로서 가망성이 없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노래를 그만둘 수는 없어. 게다가 지금 포기한다면, 내게서 노래를 떼어 버린다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브로디는 뒷문으로 클럽을 나왔다. 이 주변의 거리는 늘 어두컴컴하다. 언덕 위의 세이프하버 저택에선 주위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 같았던 어둠이 여기선 마치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무섭게 여겨진다. 주차장 옆을 지나가는데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와 브로디는 몸을 떨었다. 클럽 손님이 겁날 때도 있고, 누군가가 뒤를 쫓아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내 그림자에 놀라고 있을 뿐이야.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두려움을 떨쳐 버리려 했지만, 발은 저절로 빨라진다.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와 가슴이 철렁했다. 어깨 너머로 힐끗 돌아보니 반 블록 뒤에 오늘밤 클럽에서 떠들어댔던 세 명의 건달들이 있다. 호텔까지는 아직도 2 블록이나 남아 있다. "헤이, 아가씨. 같이 한잔 안하겠어? 일은 이제 다 끝났잖아?" 그중의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뛰려고 생각했지만 하이힐을 신은 걸음으로는 금방 따라 잡힐 것이 뻔하다.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브로디는 모르는 체하고 오로지 호텔의 침침한 네온 불빛만을 응시하며 계속 걸었다. 아무튼 호텔에 당도하기만 하면… 어깨에 손이 와닿자 브로디는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서 보니까 귀여운데." 두목인 듯한 한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이미 한쪽 손은 그녀의 검은 머리를 만지고 있다.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인데. 이봐, 키스해 줘." "놓아 주세요!" "이 맥스한테 키스 정도 해줘도 괜찮을 텐데."


남자는 간사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더니 몸을 굽힌다. 술냄새가 풍긴다. "손님한텐 부드럽게 굴어야지." 브로디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밀쳐 버리려고 애썼다. "왜 그래?"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준다. "나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키스를 할 수 있는지 어떤지 보여 주지." 상대방의 목소리가 갑자기 바뀌자 브로디는 너무나 무서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맥스, 그 손 놓지 못해!" 등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야. 이건 우리 해먼드 곶의 페리 메이슨 나으리 아냐. 어때, 우리하고 함께 어울리지 않겠소?" 맥스란 남자는 그녀를 잡고 있는 손을 늦추지 않고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만약

미스

매켄지가

폭행상해로

고소하면

농담으로

끝나진

않을걸.

아직

집행유예중인 몸이지. 안 그래, 맥스? 다시 법정에 서게 된다면 재판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드루의 목소리는 아주 조용하다. "알았어요. 또 교도소로 가는 건 곤란하니까." 맥스는 그렇게 내뱉고는 패거리와 함께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덜덜 떨고 있던 브로디는 드루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호텔로 돌아왔다. "고마와요, 여기까지면 됐어요." "방까지 데려다 줄게." "남자를 방에 들여서는 안 되도록 돼 있어요." "이 호텔은 위험해. 복도에 악한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 브로디는 몸을 떨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계단 구석에 맥스 같은 남자가 숨어 음탕한 눈으로 자신을 엿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5 층의 자기 방에 도착해서 방문을 열며 브로디는 그에게로 돌아섰다. "저도 이제부턴 조심하겠어요. 오늘은 구해 줘서 고마와요." "조심하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야? 클럽에서 여기까지 불과 세 블록인데 택시를 부를 건가? 게다가 호텔의 어두운 복도는 어떡하고? 내일은 맥스가 여기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문을 열자 드루는 그녀의 뒤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 들어오면 안 돼요. 호텔 규칙이…"


"하지만 날 밀어내고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넌 조금도 모르고 있어." "제발, 위협은 그 정도로 해두세요." "넌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어. 그렇지?" 드루의 경직된 표정에 브로디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야? 무슨 속셈이 있어서 널 여기까지 바래다 주었다면 어떻게 하겠어?" 그가 서서히 다가온다.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둬요!." 그러나 드루는 한발 한발 다가온다. "뭐가 바보 같은 짓이야? 나도 남자라구. 넌 오늘밤 내내 섹시한 러브송을 불러 주었어. 널 원하는 건 당연한 일 아냐?" 더 이상 도망갈 구멍이 없다. 벽에 몰린 브로디는 눈을 감았다. 이건 꿈이야, 드루가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내가 너한테 키스를 강요하건 혹은 폭행을 하건, 설사 널 죽인다 해도 아무도 말리러 들어올 사람은 없어." 귓전으로 가차없는 목소리가 울려온다. 브로디는 너무나 두려워서 말문이 막혔다. 그의 손가락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볼을 스친다. 살갗에 그의 입김이 뜨겁게 와닿는다. 갑자기 안아올려지자 브로디의 심장은 멈춰 버리는 것 같았다. 아, 하느님… 이건 꿈이야, 드루가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어… 그는 브로디를 가만히 침대에 내려놓더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넌 정말 아름다와." 브로디는 무서워서 어쩔 수가 없었지만, 도망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소리를 질러 봤자 아무도 도우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드루를 떨쳐 버리려는 듯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이젠 알아차렸겠지?" 그의 목소리가 싹 바뀌었기 때문에 브로디는 안심한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렇게 겁줄 수가 있어요? 금방 전 아저씨가 정말로 그러는 줄 알았어요." "필요하다면 또 그런 짓을 하지." 드루는 을러대듯 말하면서 브로디의 팔을 잡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맥스에게 잡혔을 때 생긴 멍에 쏠려 있다. "내가 2, 3 분만 빨리 갔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구…"


"괜찮아요. 멍든 건 곧 없어져요. 절 걱정해 줘서 고마와요." 눈물을 떨구며 그녀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검게 탄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상체를 내밀어 그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이제까지 수백 번도 더 했던 그런 키스다. 순간 드루는 몸이 굳어지며 브로디를 살피듯 응시했다. 드루가 키스할 때까지 브로디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도 못했다. 설사 알았더라도 오빠가 동생에게 하는 식의 키스겠거니 하고 몸을 피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루가 브로디의 머리를 받치고는 천천히

음미하듯

키스했을

때,

그녀도

무의식중에

응하고

있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브로디는 견디다 못해 그에게 꼭 매달렸다. 이윽고 드루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그녀에게서 몸을 떼었다. "브로디." "이젠 돌아가 주세요." 브로디는 좀 거친 숨결로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침대에서 일어나야지 …

그러지

않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오늘밤 뭐 가지고 갈 거 없어? 아니면 내일 한꺼번에 전부 가지러 올까?"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거죠?" 방 한가운데 선 브로디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널 세이프하버로 데리고 가려는 거야. 자, 어서 준비해." "안 갈래요! 지금은 여기가 내 집인걸요." "그래도 모르겠어? 이곳은 안전하지가 못해." "그래요, 아저씨가 그 좋은 예지요." "내가 널 공포로 몰아넣었다는 거야?" 드루는 한참을 잠자코 있었다. "잘못했어, 브로디를 겁줄 생각은 없었던 거야. 다만 네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 속에 있는가를 깨닫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브로디는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세요. 조금도 무섭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어쨌든 이젠 돌아가 주세요." 드루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절대로 널 상처입게 하진 않을게." "여기서 나가세요!" 그녀는 벽에 기댄 채 드루를 노려보면 큰소리로 말했다. "같이 돌아가야 해."


드루가 내민 손을 그녀는 뿌리쳤다. "나한테 손대지 말아요!"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좋아, 집에 돌아가는 건 내일 얘기하기로 하지. 내가 방에서 나가거든 즉시 방문에 의자를 버텨 놓으라고. 알았지?" 드루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브로디는 창가에 서서 골목에 세워 놓았던 드루의 차가 떠나는 것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아 맙소사! 드루가 날 덮치려 했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니… 싸구려, 그게 바로 너, 브로디 매켄지야. 브로디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 제리…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돼 버린 것일까… 5 다음날 밤, 제리가 이번에는 혼자 클럽에 찾아왔다. 뒤쪽 으슥한 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었지만 브로디는 금방 그를 알아보았다. 전반부 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줄곧 자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쳐다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괴롭다. 도대체 그는 왜 여길 왔을까? 그는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세이프하버의 주방에서 있었던 그 끔찍한 순간은 잊을 수가 없어. 만약 드루가 뛰어들어와 말리지 않았더라면 난 저 사람에게 얻어맞았을 거야. 그때의 공포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 드루 생각을 하니 브로디는 어젯밤 일이 생각나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나를 사랑해 주고 감싸줄 사람을 그토록 애타게 갈망했기에 제리 아닌 드루를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받아들였던 게 아닐까. 그 같은 자격지심 때문인지 잠을 설쳐 지금은 피곤해서 간신히 악보에 눈을 주고 있을 뿐,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거나 오늘의 유일한 행운은 언제나 앞자리에 진을 치고 있는 맥스 일당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오늘밤은 돌아가는 길에 그 건달들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브로디는 전반부 쇼를 마쳤다. 분장실로 돌아가려면 제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 옆을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쌀쌀한 미소를 띤 채 지나치려고 하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서 앉으라고 자기의 맞은쪽 의자를 가리켰다. 브로디는 선 채 냉랭하게 말했다. "안녕, 제리." "결국 넌 쫓겨난 셈이군."


제리는

도전적인

어조로

말했다.

술이

들어간

넥타이는

풀어지고

눈은

게슴츠레하다. "놈은 날 처치하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지. 너의 다정한 드루는 어디로 가버린 거야?" 브로디가 잠자코 있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난폭하게 소리질렀다. "앉아, 브로디!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브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얘기할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때 넌 할 말 다 하고 떠났잖아?" "널 사랑하고 있어. 그건 내 실수였어." "뭐가 실수였다는 거지? 나한테서 돈을 우려낼 수 있다는 걸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나와 사랑에 빠진 것이?" 브로디는 낮은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하고는 제리를 밀어젖히며 가려고 했다. 그가 팔을 잡았다. "앉으라면 앉아!" "두번 다시 내게 손대지 말아요." 브로디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제리의 손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두 사람은 얼마간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윽고 브로디는 그의 손을 휙 뿌리치고는 분장실 쪽으로 활기차게 걸어갔다. 그러나 분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찌그러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존심 때문에 제리한테는 매몰차게 대했지만 그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되자 그 허세가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고통스런 아픔이 온몸을 짓누르며 지나간다. 이젠 두번 다시 제리를 만나지 않겠어. 브로디는 중얼거렸다. 마음속 어디선가 언젠가는 다시 그와 화해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기념일이라든가 무슨 날에 샴페인 잔을 마주 기울이면서 옛날 한때는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서로 웃으면서…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해. 둘이 합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젠 끝장이 나버린 거야.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 그렇지만 사랑은 그렇게 간단히 지울 수 있는 게 아냐. 드루도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잊을 수 없다고 말했잖아. 신시아가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드루는 지금도 그녀를 계속 생각하고 있어. 제리도 마찬가지야. 그는 타산적이고 제멋대로 하는 인간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인걸. "브로디!" 밖에서 지배인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다음 쇼는 언제 시작할 거야!"


깜짝 놀라 일어서는 바람에 낮은 천장에 머리를 쾅 부딪쳤다. "죄송해요. 시간을 깜빡 잊고 있어서…" 무대에 나가려니 왠지 울적하다. 브로디는 머리를 비비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무대로 향했다. 좁은 분장실에서 롱드레스를 벗기는 어렵다. 간신히 몸을 움직여서 드레스를 벗고는 진 바지에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적어도 이런 차림이면 오늘밤에는 만일의 경우에 뛸 수 있겠지. 이게 모두 드루 탓이야. 악한이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 덮칠지도 모른다고 어젯밤에 그가 잔뜩 겁을 주고부터는 무슨 그림자만 봐도 무섭다. 특히 오늘밤은 무서워 보이는 그림자가 여기저기에 어른거려서 클럽 뒷문을 나온 브로디는 잠시 그 자리에 주춤하고 멈춰섰다. 곧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내릴 모양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달을 가린 구름이 어쩐지 기분 나쁜 그림자를 거리에 드리우고 있다. 천둥이 싫다기보다는 무서운 브로디는 정신을 가다듬어 가슴을 쭉 펴고서 거리에 발을 내디뎠다. 그때 저편 길모퉁이 주차장에서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움찔했다. 이런

겁쟁이,

이래

가지고서야

생쥐

울음소리에도

질겁해서

도망치는

아냐?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엔진 소리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 건달들이 오늘은 클럽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젯밤 드루의 그 으름장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클럽에서 나오니 바깥은 상쾌했다. 브로디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등뒤에서 차 소리가 들린 것 같다. 누가 미행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자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또 맥스라면 어떡하지… 기분 탓이겠지 하고 브로디는 자신을 진정시켰다. 다음 블록의 선술집 앞을 막 지나가려 하는데 문이 열리고 웃음소리와 함께 두 명의 사내가 나왔다. "야, 이건 클럽의 가수 아가씨 아냐." 어젯밤 맥스와 함께 있던 사내들이다. 브로디는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계속 걸었지만, 심장은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린다. "난 맥스처럼 집행유예중인 몸도 아니니까 해먼드 녀석의 협박도 효과가 없어. 이봐, 좀 놀다 가지 그래?" 브로디는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때 자동차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까 났던 차소리는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브로디는 냅다 달렸다. 천둥번개가 치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차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너무나 두려워서 그녀는 심장이 터지도록 정신없이 계속 달렸다.


호텔이 그렇게 캄캄하고 칙칙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이 그녀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녀가 막 문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누가 손을 덥석 잡았다.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뒤돌아보니 거기엔 드루의 얼굴이 있었다. "날 쫓아온 게 당신이었어요?" 브로디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놀라게 할 작정은 아니었어. 다만 네가 무사히 호텔로 돌아가나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브로디는 한동안 물끄러미 드루를 응시하더니 마침내 놀란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며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시커먼 하늘에서 폭포처럼 내리쏟아지는 비로 두 사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흠뻑 젖어 버렸다. 드루는 그녀의 등을 밀어 호텔 로비로 들어가며 다정하게 물었다. "방까지 바래다 줄까?" 브로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 오래 돼 우중충한 로비, 찢어진 벽지, 군데군데 회벽칠이 벗겨진 천장, 너덜너덜한 양탄자 위에 놓인 속이 튀어나온 싸구려 비닐 소파… 이제 하릇밤이라도 더 여기에 있다간 미쳐 버릴 것만 같다. "집에 데려다 주세요, 네? 세이프하버에 돌아가고 싶어요." 그녀는 속삭였다. 드루는 그제서야 안심이 된 것 같다. "알았어, 그렇다면 방에서 짐을 갖고 오자구." 브로디는 세게 도리질을 했다. "내일 가지러 오겠어요. 이젠 단 l 분이라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링컨의 가죽 시트에 몸을 묻은 브로디는 휴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하늘에선 번개가 치고 있다. 브로디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겁나?" 그가

시동을 걸면서 물었으나 빗소리

때문에

그녀는

듣지

못했다. 윈도와이퍼도

앞유리창에 세차게 와 부딪치는 물줄기 때문에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차가 세이프하버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려서 차고에 차를 들여놓은 후에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대로 가만히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빗발이 가늘어졌다. "내가 먼저 가서 뒷문을 열고 올게." "같이 가요. 이제 더 이상 젖을 것도 없는걸요." 게다가 한시라도 빨리 세이프하버 저택의 안락한 분위기를 음미하고 싶다.


더듬더듬 식당에 불을 켠 브로디는 드루의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웃는 게 정말 며칠 만인지 모르겠다. "마치 물에 빠진 생쥐 같아요." 그녀는 계속 킥킥거렸다. "브로디의 꼴은 어떻고. 자, 여기 수건 있어. 라일리 부인이 닦아 놓은 바닥을 적시지 않도록 해야지." "우리, 얘길 좀 했으면 좋겠어요." 브로디는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래, 어쨌든 우선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하고 와. 감기 걸리겠어." 팔뚝의 물을 쓱쓱 닦으며 말한다. "전 괜찮아요." 그렇게 대꾸를 했지만 브로디는 결국 순순히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예상했던 대로 방은 그대로였다. 내 물건을 다락방에라도 처박아 넣고 방을 깨끗이 치워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브로디는 옷장에서 욕의를 꺼내고는 젖은 옷을 벗어던졌다. 이윽고 드루가 기다리고 있는 아래층 거실로 머리에 수건을 두른 브로디가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얘기란 뭐지, 브로디?" 브로디는 그와 마주보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앞으로의 제 거취 문제예요." "여기서 살 작정이 아냐?"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물론 그럴 작정이죠. 전 그러고 싶어요. 다만 얘기하고 싶은 건 제가 여기서 살 조건에 관한 거예요. 당신의 호의에 그냥 기대고 싶진 않거든요. 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그 점은 나도 인정해." 드루는 싱긋 웃으며 욕의에 싸인 브로디의 날씬한 몸과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마음이 편치 못했지만 브로디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전 방값과 밥값은 정식으로 내고 싶어요. 물론 많이 내지는 못하겠지만, 제가 묵고 있던 호텔 방 값 정도는 내겠어요. 그리고…" "여긴 네 집이야. 구태여 돈을 낼 필요 따윈 없어." 그는 지그시 이를 물며 말했다. "돈을 받지 않겠다면 전 나가겠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드루는 순간 움찔했다.


"그 지저분한 호텔 같은 데로 또다시 돌아갈 셈이야?" "전 독립하고 싶어요." 브로디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좋아. 방세는 받기로 하지. 얘기는 그것뿐이야?" 그는 젖은 머리카락에 손을 찔러넣으며 말했다. "아뇨, 아직 남았어요. 식비 문제예요." "그래, 하긴 너도 먹어야 살 테니까." 드루의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결국 나와 함께 식사하는 건데 식비를 내고 안 내고는 그렇게 문제되진 않잖아?" "제게 있어선 대단한 문제예요. 제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요." 그녀는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야?" 드루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식비를 내는 대신 라일리 부인의 주방 일을 돕겠어요. 그리고 부인이 쉬는 날엔 제가 요리를 해드리겠어요." "무슨 소리야. 너한테 식모가 하는 일을 시킬 순 없어." "전 이제 이 집의 손님이 아니예요. 제 형편이 여의치 않아 여기에서 사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드루는 한동안 말없이 브로디를 응시했다. "그 결심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요. 제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든가 않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세요." "만약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일이라도 호텔로 돌아가겠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되길 원하진 않겠죠?" "날 협박하는 거로군." 그는 할 수 없이 동의한다. "좋아, 알았어. 그럼 당장 내일부터라도 일을 부탁해야겠군. 마침 라일리 부인이 쉬고 있거든." "라일리 부인이 휴가예요?" 브로디는 놀랐다. "그래, 집에 손자가 놀러와 있대. 자 어떻게 하겠어?" 드루는 재미있어하는 눈치다. "알았어요. 아침식사는 몇 시에 하죠?" 그녀는 쾌활하게 물었다.


"7 시에 해주지 않겠어? 내일은 조금 일찍 사무실에 나가야 하니까." 다음날 아침 브로디가 주방에 내려왔을 땐 6 시 반이 좀 지나고 있었다. 좀더 일찍 일어날 셈이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반들반들하게

닦여진

주방을

불안스럽게

둘러본

브로디는

자신을

격려하듯

중얼거렸다. "문제없어, 실패할 리가 없지. 베이컨은 프라이팬에 넣고 불만 켜면 돼. 간단하다구." 어쨌든 우선 커피를 끓여야 한다. 빨리 끓이기 위해 커피포트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커피 병에 붙어 있는 설명서에는 l0 스푼이라고 써 있지만, 일일이 재는 것이 귀찮아서 커피 가루를 한번에 푹 쏟아붓고는 좀 적은 듯싶어 다시 조금 더 넣었다. 드루 아저씨는 진한 커피를 좋아하니까. 그녀는 커피포트에 스위치를 넣은 다음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드루가 주방에 나타났을 때는 베이컨은 프라이팬에서 튀어올라와 사방이 기름투성이였고, 달걀은 펄펄 끓는 물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브로디는 토스터에 끼워진 빵을 끄집어내느라고 쩔쩔매고 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금방이라도 신경질을 부릴 것 같은 모습이다. "잘 잤어?" 드루는 즐거운 듯이 말을 걸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침식사는 곧 돼요." 토스트를 겨우 반쯤 끄집어냈다. "계란을 벌써 몇 분째나 삶고 있는 거지? 너무 삶아지고 있는 거…" "10 분 정도예요. 드루, 아침식사는 7 시라고 하더니 늦게 내려오니까 그렇죠." 브로디는 반항적인 눈길을 드루에게 던진다. "그래, 알았어." 드루는 간이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설탕그릇을 당겨 3 스푼 가량 더 넣었다. "슬슬 달걀을 냄비에서 꺼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부풀어서 터져 버리겠어." 브로디는 화난 얼굴로 노려보고는 달걀을 꺼내어 반 조각의 토스트와 함께 드루 앞에 갖다 놓았다. "오늘 아침엔 빵이 얼어서 토스터에 꼭 물려 버렸어요." 그녀는 드루의 입을 막으려고 미리 선수를 쳤다. 드루는 스푼으로 달걀을 두드렸지만 잘 까지질 않자 단념한 듯 옆으로 밀어놓았다. 베이컨은 브로디가 싱크대로 갔을 땐 이미 새까맣게 눌어붙어 있었다. "베이컨은 드시지 않을 거죠?" "글쎄, 그만둘까?"


커피에 설탕을 한 스푼 더 넣고 저으면서 그녀가 토스터와 악전고투하고 있은 모습을 바라본다. 드루는 조용히 말했다. "점심은 준비할 필요 없어. 손님과 함께 먹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오늘 저녁식사 말인데 브로디가 좋아하는 중국요리를 사줄까?" 발끈한 브로디는 겨우 끄집어낸 토스트 반쪽을 드루를 향해 내던졌다. 하지만 그가 살짝 머리를 숙이는 바람에 빵은 그에게 명중되지 않고 식탁 위에 떨어졌다. 브로디는 식탁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고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미안해…" 드루는 일어나서 브로디 곁으로 다가갔다. "당신이 사과할 건 없어요. 모두 다 제 잘못인걸요." 드루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정하게 매만져 주었다. "나중에 전화할게." "일찍 돌아오세요. 8 시엔 클럽에 가야 해요." 드루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나갔다. 잠시 후 링컨이 큰길로 질주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울거나 하진 않겠어!" 브로디는 스스로에게 단단히 다짐했다. 막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의자에 앉아 참담한 주방을 둘러보았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일 따윈 간단하게 생각했었는데… 진한 갈색 커피는 도무지 써서 마실 수가 없다. 거칠게 커피 잔을 옆으로 밀어놓은 브로디는 식탁 위에 얹어놓은 팔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얼마 동안을 울었을까 갑자기 등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주방 꼴이 이게 뭐람?" 브로디는 놀라서 눈물투성이 얼굴을 들었다. 라일리 부인이 뒷문에 서 있었다. "당신이야말로 어떻게 된 거죠? 오늘은 쉬기로 돼 있잖아요?" "손자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갔어요. 브로디야말로 언제 돌아왔죠? 그리고 이 주방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라일리 부인은 핸드백을 간이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드루의 아침식사를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라일리 부인은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나 닦아요. 자, 무슨 일이 있었나 모두 말해 봐요." 브로디는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다.


라일리 부인은 커피를 잔에 따르고 그 빛깔을 살펴보더니 커피포트의 커피 찌꺼기를 싱크대에 쏟아 버렸다. "그래, 하숙비를 치르기 위해서 날 돕겠다는 거예요?" "그래요." "어쨌든 이곳에 돌아와서 기뻐요. 브로디가 집을 나간 후로 이 집은 너무 조용해서 쓸쓸할 정도였는걸. 자, 망쳐 버린 식사는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이제부터 진짜 아침식사를 만들기로 해요." 브로디는 음식 부스러기를 치웠다. "저, 어떻게 만드는 거죠? 그리고 어떻게 해야 드루가 내려오는 시간에 알맞게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거죠?" "난 별로 하는 게 없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해먼드 선생님은 브로디를 놀려 본 거예요. 브로디가 대학에 들어간 뒤부터는 2 년 동안 계속 손수 아침식사를 만드셨거든요. 단지 커피를 끓이고 토스트를 굽기 위해 아침 일찍 내가 이리로 올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달걀을 삶고 베이컨을…" 브로디는 격분했다. "난 9 시 이전에 온 적은 거의 없었어요." 라일리 부인이 덧붙였다. "그런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야 당연하죠." 라일리 부인은 조용히 말했다. "브로디는 집에 있을 때도 9 시 이전 일어나 본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브로디는 그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저,

아침식사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을래요? 이렇게

어려울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물론이죠. 우선 커피 끓이는 법부터 하죠. 언제나 물부터 끓이고…" "자신이 없어요." 브로디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머릿속에 이것저것들이 꽉 들어차 잘못하면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릴 것만 같다. "해낼 수 있어요. 감자볶음은 이미 오븐 안에 있고, 샐러드는 다 돼 있으니까, 이젠 스테이크를 굽는 일만 남았어요. 그릴에서 양쪽을 정확하게 5 분씩만 굽는 거예요.


절대로 그 이상은 안 돼요. 그래야지만 해먼드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티본 스테이크가 되니까요." 라일리 부인은 앞치마를 벗더니 한쪽에다 건다. "아니, 가시게요?" 브로디가 의아해서 물었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모든 게 허사가 될 거 아녜요." "하긴 그래요. 만약 아줌마가 계시면 내가 저녁식사를 준비했다곤 믿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요. 오늘 저녁식사 준비는 모두 브로디가 혼자서 한 거예요. 간단한 메뉴지만 칭찬받기에 충분해요. 그러니까 난 돌아가려는 거예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다시 한번 복습하고 싶어요." 브로디의 목소리는 아주 간절하다. "안 돼요. 이제 곧 해먼드 선생님이 돌아오세요. 괜찮아요, 걱정할 거 없어요. 방금 나한테 다시 한번 복습하자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잖아요." "말은 쉬웠지만…" 브로디는 우울하게 말했다. 브로디는

식탁에

앉아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녹이려고

냉장고에서

꺼내 놓은

스테이크용 고기를 한동안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드루의 차 소리를 들은 순간 마치 사형대로 향하는 사형수 같은 기분이 돼버렸다. 차고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이윽고 휘파람을 불며 드루가 주방에 나타났다. "식사

전에 뭔가 드시고

싶으시면

냉장고에 차가운

마르가리타(칵테일의

일종)가

있어요." 드루는 유리잔을 잡았다. "브로디도 마시겠어?" "아뇨, 요리중이니까 괜찮아요." 브로디는 꽤나 엄숙하게 말했다. 드루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샤워할 시간은 있을까? 오늘 사무실 에어콘이 나갔거든." "물론이죠. 스테이크가 구워지려면 몇 분쯤 걸릴 거예요." "그럼, 앞으로 10 분만 기다려 줘." 드루는 스테이크용 고기를 힐끗 쳐다봤다. 지금 드루는 분명 스테이크는 보나마나 또 새까맣게 탈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상상하니 브로디는 속에서 화가 울컥 치밀었다. 드루는 냉장고에서 마르가리타를 꺼내 잔에 따랐다.


"오늘 저녁은 밖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을

브로디가 기뻐하며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드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목숨이 두 개는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듯한 표정이다. "곧 내려올게." "네, 천천히 하셔도 돼요." 그녀는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 편이 낫다는 걸 오늘 아침에 충분히 깨달았으니까요." 드루는 만족스러운 듯 접시를 옆으로 밀어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젠 됐어. 그건 치워 줘." "무슨 말씀이에요?" 그녀는 갈색 눈을 크게 뜨고 천진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디저트는 필요없어요? 그 복숭아 샤벳은 슈퍼에서 사온 건데 굉장히 맛있어요." "모처럼 권하는 거지만 됐어. 훌륭한 스테이크 맛의 여운을 즐기고 싶어. 한데 브로디는 지금까지 스테이크를 구워 본 적이 없었을 텐데?" "나에 대해선 아직 모르는 게 많다구요." 브로디는

커피를

마시면서

어쩜

이렇게

맛있을

있느냐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디서 요리를 배웠지?" "이 세상엔 요리책이라는 편리한 것이 있다는 걸 모르세요?" 그는 힐끗 브로디를 보고는 일어선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군. 뭐 그래도 좋아. 그럼, 요리는 브로디가 했으니 설거지는 내가 하지." 브로디는 꼼짝도 않는다. "저, 솔직히 말해 보세요. 내가 클럽에 간 뒤에 몰래 샌드위치라도 먹을 셈이었죠?" "실은 그럴 작정이었지.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 걸, 난 충분히 만족했으니까. 자, 옷을 갈아입고 와. 클럽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돼요. 귀찮을 텐데요." "클럽까지 걷기엔 좀 멀잖아. 브로디가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은 내가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할게."


브로디가 거절하려고 하자 드루가 테이블을 돌아 가까이 다가와선 그녀에게 몸을 굽혔다. 그의 눈과 마주치자 그가 또 키스할 것만 같이 느껴져 브로디는 순간 몸이 굳어졌다. 드루는 곁으로 다가오더니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건 단순한 의무감에서 하는 건 아냐. 내가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는 게 피차간 가장 좋은 일일 것 같기 때문이야." 6 일주일 전 진열장에서 봤을 때보다 커피색 드레스는 썩 그럴 듯해 보인다. 브로디는 양심과 싸워 봤지만 결국 유혹엔 이기지 못했다. 세이프하버에 돌아왔기 때문에 조금은 금전적 여유가 생겼고, 게다가 오늘은 기분을 전환시킬 뭔가가 필요하다. l5 분 후에 클럽 지배인과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좋은 얘기는 아닐 것 같다. 낮 시간 동안의 클텁은 텅 빈 헛간 같다. 공기는 탁하고, 찌든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브로디는 빠른 걸음으로 객석을 가로질러 지배인실의 방문을 노크했다. 지배인은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젖힌 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얘기란 뭐죠?" "3 주일 전에 네가 이곳에 왔을 때, 너는 이곳 급료수준보다도 훨씬 많은 급료를 요구했었지." "하지만 결국 타협을 보았잖아요." "그래도 여전히 보통보다는 많았지. 그때 난 너한테 큰 기대를 걸었던 거야. 그런데 높은 급료를 지불한 만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그는 심술쟁이가 아니라 단지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널 풀타임으로 고용할 순 없어. 만약 한 달에 한 번 정도 꼴로 나와 준다면…" "그러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냐. 내가 무슨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혹 다른 일을 해볼 마음이 있다면 웨이트리스로 써줄 순 있어." 드루가 뭐라고 할지 뻔하다. 무조건 반대할 게 틀림없다. 게다가 그 건달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조차도 치근덕거리는 판에 웨이트레스가 돼 봐. 어떻게 될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직업을 바꿀 생각은 없어요. 난 가수지, 바의 호스티스는 아니니까요." "알았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만약 마음이 변하거든 알려 줘." 그는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신문을 집어든다. "네가 가수라고 하니까 말인데, 이 해먼드 곶에서 잘해내지 못하고선 어딜 가도 소용없을 거야."


해고된 브로디는 총총히 클럽을 나왔다. 해먼드 곶 말고도 노래 부를 곳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지배인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해먼드 곶에서 잘해내지 못하고선… 그 불쾌한 말을 뇌리에서 떨쳐 버리려고 브로디는 머리를 세게 저었다. 내 노래가 형편없어서가 아냐. 이 고장은 너무 바닥이 좁아 가수로서의 직업이 성립되지 않을 뿐이야. 진열장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브로디는 섬뜩했다.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다. 얼른 표정을 바꾸고 앞을 향해 걸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브로디는 자문자답했다. 지배인에게? 아니야, 그는 다만 자신의 업무에 충실할 뿐이야. 그러면 이곳 사람들에게? 그것도 틀려. 쇼가 마음에 안 드는데 일부러 클럽에 와서 술을 마실 의무 같은 건 그들에겐 없어. 결국 나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가수로서의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왔기 때문이야. 지배인 말이 옳아, 해먼드 곶 같은 작은 도시에서 성공하지 못하고선 좀더 큰 도시에서 성공할 턱이 없지. 가수로서의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긴 괴롭지만 이것이 진실이라면… 세이프하버를 향해 천천히 언덕을 올라가고 있던 브로디는 도중에 드루의 사무실에 들러 저녁식사론 뭐가 좋겠느냐고 물어보기로 했다. 오늘은 라일리 부인이 쉬는 날이다. 지난 한주일 동안 그녀에게 충분히 배웠기 때문에 요리엔 어지간히 자신이 생겼다. 사무실 비서 수는 브로디를 보자 생긋 웃었다. "안녕, 브로디. 이번 여름엔 얼굴을 통 볼 수가 없네요." "바빴어요." "올해엔 브로디가 도와 주지 않아 유감이었어요." "작년 여름 난 다만 심부름꾼이었는걸요." "그렇지 않아요. 브로디가 도와 줘서 많은 도움이 됐었다구요." "그렇게 말하니 기뻐요. 그런데 해먼드 씨는 계세요?" "오후엔 쉬겠다고 나가셨어요." 수는 브로디가 아무 것도 모르는 데 놀라고 있는 것 같다. "아마, 공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모양이죠." 브로디는 방긋 웃어 보였다. "아녜요, 해먼드 선생님은 자택으로 돌아가셨어요. 요즘 들어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무척 지쳐 있는 것 같고,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으시는 것 같았어요." 드루의 상태가 안 좋다고? 병 같은 건 걸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듣고 보니 최근엔 말수도 적어졌고,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다. 정말 어디가 아픈 걸까?


"대단한 건 아니겠죠?" 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브로디가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해먼드 선생님은 한번 진찰을 받으셔야 해요." "누가 진찰을 받는다구?" 다니엘이 서류를 손에 들고 방에서 나왔다. "해먼드 씨요. 그렇지만 그가 아플 리가 없어요. 그렇죠?" 브로디가 대답했다. 다니엘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드루에게 필요한 건 의사가 아니라 바로 너야." "저요? 제가 뭘 할 수 있죠?" 다니엘은 자신의 방 입구에 서서 뚫어지게 브로디를 쏘아본다. "요상한 술집에 매일 밤 그를 끌어들이는 걸 그만둬야 해." "드루를 억지로 끌고간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럼, 드루는 어떻게 하면 되지? 집에 가만히 앉아서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안달하며 기다려야 하나? 어쨌든 드루에겐 큰일임엔 틀림없어." "전 혼자서도 충분해요. 드루에게 돌봐 달라고 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겐 말했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다. 드루가 클럽까지 데려다 준 첫날 밤, 괜찮다는데도 그는 쇼가 끝날 때까지 클럽에서 기다려 주었다. 그가 있어 주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런 기분을 눈치챘는지 그로부터 매일 밤 그는 객석 한구석에서 잔을 기울이며 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농담도 작작하지." 다니엘은 또 코웃음을 쳤다. "도대체 그는 언제 자기 시간을 갖지? 매일 아침 8 시엔 사무실에 나오고, 밤엔 밤대로 그런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니 … 드루가 벌써 얼마 동안이나 골프를 못 치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런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고 보니 드루는 최근 골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건 내 생각인데, 드루는 지쳐 있어. 넌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고 얌전히 집안에 있든지 다른 경호원을 찾든지 해서 그를 해방시켜 줘야 돼."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정통으로 따끔하게 한방 맞았네요. 수도 저 사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브로디는 수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지금까지 해먼드 선생님이 무척 피곤해하셨던 적은 있었지만, 결코 초조해하신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최근 열흘 동안은…" 나를 클럽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하게 된 후부터의 일이다. "고마와요, 참고가 됐어요." "미안해요, 기분이 상했나요?" "그럴 리가 있어요? 당신은 단지 할 말을 한 것뿐이에요." 사무실을

나온

브로디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깥은

푹푹

찌는

날씨다.

세이프하버까지는 길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만 한다. 간신히 현관에 당도한 브로디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벽돌집인 세이프하버는 고요한 정적에 휩싸여 있다. 서재랑 객실 쪽도 인기척이 없다. 드루는 결국 골프를 치러 간 모양이다. 브로디는 레몬 주스를 만들어 갖고 자기 방으로 가려다가 이층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와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드루가 소파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무척 지쳐 있는 것 같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잠들고 있는 동안에도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게 분명하다. 창으로 비치는 햇빛이 부신 모양인지 그는 손으로 눈 언저리를 가리고 있다. 브로디는 커튼을 쳤다. 그리곤 살며시 그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아 레몬 주스를 마셨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드루는 단지 지쳐 있는 걸까? 클럽에서 나오는 때가 자정이 훨씬 넘을 적도 많았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확실히 다니엘의 말이 옳았어. 매일 아침 비실비실 주방으로 내려가 보면 이미 드루는 사무실에 출근하고 없었다. 보다 일찍 일어나서 식사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었다. 그렇잖으면 수의 말대로 정말 드루가 병에 걸려 있는 걸까? 방정맞은 생각들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하지만 이것저것 고민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 만일 병에 걸린 게 확실하다면 지금 당장 어떻게 할 것인지를 궁리하면 돼. 브로디는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두 시간쯤 지나자 드루가 눈을 떴다. 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 방안은 꽤 어둡다. "이렇게 오랫동안 잘 생각은 아니었는데. 벌써 밖이 어두워졌군. 서두르지 않으면 클럽에 늦겠는데…" "밖은 아직 환해요. 아직 7 시 전인걸요." 브로디가 커튼을 열자 저녁 햇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 다행이군. 곧 일어날게." 드루는 자리를 고쳐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지 않았군." "네." 브로디는 방안을 가로질러 텔레비전 스위치를 켰다. "방세 문제로 다시 한번 얘기할 게 있어요. 난 수입이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드루는 호기심을 애써 감추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오늘 오후에 직장을 그만뒀어요. 아니, 사실은 해고당했어요. 내 노래 가지고선 손님을 끌어모을 수 없다고 지배인이 그러더군요." 드루는 한참 동안 잠자코 있더니 이내 웃는 얼굴이 되었다. "걱정할 거 없어. 하숙비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금방 내쫓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보담 오늘 저녁 메뉴는 뭐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야." "어떡하면 좋죠. 식사준비하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볼 작정이었어요. 한데 잠들어 있는 바람에…" "큰일날 식모 아가씨군." 드루가 놀려댔다. "아주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구. 그럼 컨트리클럽에 데리고 가지." 브로디는 그의 손을 잡아 자기 뺨에 갖다댔다. "수는 당신이 병에 걸린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요. 저, 어디 불편한 거 아녜요?" "수는 어쩔 수가 없군. 비서노릇만 하면 됐지, 무슨 간호원 역할까지 하려고 들다니. 난 아무 데도 아픈 데가 없어. 건강하기 짝이 없다구." "거짓말 아니겠죠?" 드루는 좀 약이 오른 모양이다. "이 드루가 거짓말을 한다고? 정직하고 선량한 시민인 이 드루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브로디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물고늘어졌다. "마지막으로 의사를 본 게 언제죠?" "지난주 수요일이었던가? 여느 때처럼 단짝 넷이서 골프를 쳤을 때야." "그건 말도 안 돼요!" 그녀가 흘겨봤지만, 그는 다만 웃을 뿐이다. "자, 어서 옷을 갈아입고 와. 그 문제는 식사하면서 얘기하지." 왕새우는 정말 살이 푸짐했다. 브로디는 얘기보다는 먹는데 열중하고 있었지만, 이윽고 접시가 비자 드루의 건강문제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교묘하게 피하는


바람에 결국 포기해 버렸다. 그래, 그도 어엿한 어른이니까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어. "이제부터 브로디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초콜릿 과자를 먹느라 정신이 없는 브로디에게 드루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너무 오래 세이프하버에 눌러 있을 생각은 없어요. 아대로 죽 식객노릇을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무슨 소리야? 거긴 브로디 집이야." "당신은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다니엘이 그러던데요. 다 큰 계집애가 자기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걸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넌 다니엘을 싫어하니까, 그의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걸리는 거야."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저, 드루,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정말로 결혼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드루는 잠자코 있다. "그게 당신의 대답이군요." "브로디도 마찬가지야. 너도 언젠가는 결혼할지도 몰라." 브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넌, 내가 신시아를 잊고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브로니도 언젠가는 제리 이외의 남자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제 경우는 얘기가 좀 달라요." "넌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 "아녜요, 전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물론 저도 제 가정을 갖고 싶어요. 그리고 아이도… 그렇지만…"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간다. 언제나 꿈속에 그리던 생활 ― 두 아이와 유모차, 강아지, 그리고 YMCA 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는 남편 … 그런 것들이 없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허망할까. 하지만 난 그런 게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지. "지금은 무릴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경우는 몇 년이나 걸렸잖아요? 게다가 최초로 사랑한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드루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물론 한번 사랑했던 사람은 깊은 기억 속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지. 하지만…" "전에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드루는 그 말은 무시한 채 얘기를 계속했다. "생각만 있다면 언제라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어." 브로디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학에 돌아가지 않을 것만은 확실해요." "그럼, 다른 도시로 가서 노래를 부를 작정인가? 만약 뉴욕에서 자신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 싶다면, 내가 기꺼이 도와 주지." "아녜요, 그거야말로 쓸데없는 돈 낭비예요. 제가 가수가 될 재능이 없다는 걸 이번 일로 확실하게 알았어요." "그럼 어떻게 할 거지?" "아무튼 무엇이든지 해야지요. 자넷한테 가서 할 일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할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세이프하버에 있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해요. 다시 당신 사무실에서 일하게 해주지 않겠어요?" "그건 괜찮지만, 그러나 노래를 단념하는 걸 견뎌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들인 레슨비가 아까와서 그러시는 거예요?" "돈이 아깝다는 게 아냐. 스타로서의 꿈은 사라졌지만, 이제까지 받은 레슨 실력을 어디서든 발휘해야 할 게 아니겠어." "그렇군요,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 불러도 좋고 남에게 가르쳐도 되겠군요. 노래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는 건 무모한 꿈이었어요… 어머, 다니엘 아저씨." 드러낸 어깨에 손이 얹혀지는 것을 느껴 뒤를 돌아본 브로디는 쌀쌀맞게 인사했다. 오늘밤에 그녀가 입고 있는 커피색 드레스는 등과 어깨가 많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브로디의 모습을 보았을 때, 순간 환상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어. 오늘은 쉬는 날인가?" "클럽은 그만뒀어오." 다니엘의 눈이 반짝 빛나며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에 힘이 주어졌다. "역시 착한 아이야.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었지." 브로디는

그의

일방적인 생각을 굳이

바로잡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드루, 오늘은 건강해 보이는데?" "낮잠을 잔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 모양이지. 내일 아침 일찌감치 만나세. 일 관계로 할 얘기가 있네." 다니엘은 윙크를 하고는 또다시 브로디의 어깨를 힘껏 치고 사라졌다. "다니엘이 내가 한 일에 찬성을 다 해주다니 기쁘긴 하지만, 너무 우악스럽게 대하지나 말고 말로만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브로디는 어깨를 주물렀다. "다니엘은 자기가 얼마나 힘이 센지 모르거든." 웨이트리스가 따라 준 커피를 브로디는 생각에 잠긴 듯 젓고 있다. "참, 그후 신시아는 어떻게 됐죠?" "결혼했지. 아들이 하나 있어." "편지는 와요?" "신시아한테서

말야?

어림도

없지.

하지만

그녀의

소식은

자주

들어.

다니엘의

조카니까." "그랬어요? 몰랐는데요. 그렇다면 그녀를 봤을 때 첫눈에 까닭없이 싫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군요." "신시아를 기억하고 있어? 그때 브로디는 아직 어렸을 텐데?" "어렴풋이 기억이 나긴 하지만 다만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은 남아 있어요." 말해 버리고 나서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문다. "미안해요."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만…" 드루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식당 문이 열리더니 많은 사람들이 유쾌한 듯 큰소리로 웃으며 들어왔다. 그중에 제리가 있는 것을 보고 브로디는 깜짝 놀랐다. 여기는 그가 올 만한 장소가 아닌데… 언뜻 보니 그 옆에 이사벨이 서 있다. 올리버 패닝이 돌아가며 각 테이블에 샴페인을 따르더니 이윽고 브로디의 자리로 왔다. "오늘을 축하하는 뜻에서 샴페인은 내가 한턱 내는 겁니다." "대관절 무슨 축하입니까?" 드루가 물었다. "딸의 약혼 축하입니다. 이사벨이 결혼해요." 올리버는 잔을 높이 들어 건배를 하고는 다음 테이블로 갔다. 행복에 겨운 듯 미래의 신부는 제리의 팔에 꼭 매달려 있고, 그녀의 손가락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리고 있다. 브로디는 손을 꽉 움켜쥐고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제리는 다른 여자를 찾아서 목적을 달성한 거야. 누군가가 이사벨에게 충고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드루가 브로디를 바라보며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잠시 어디 가서 쉬는 게 좋지 않을까. 호수 옆 별장은 어떨까?" "아녜요, 도망을 치면 일이 더욱더 어렵게 될 뿐이에요." 냅킨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드루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무슨 말이라도 했다면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부탁이에요, 집에 데려다 주세요." "그러고말고." 드루는 곧 일어났다. 소지품 보관소에서 숄을 찾고 있던 브로디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딴 데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겨우 숄을 찾아 막 돌아가려 하자 드루가 팔을 잡았다. "잠깐 기다려." "하지만…" 놀라서 올려다본 브로디는 그제서야 누군가가 입구 쪽에 서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밤 그녀의 드레스를 봤어요? 그렇게 살을 드러내 놓다니, 얌전치 못하게…" 그 목소리는 캐롤라인 퍼시다. "그래도 그 사람은 그런 게 좋은가 봐요. 그앤 그 집에서 나가지 않을걸요." "그게 아니고 드루 쪽에서 놓아 주지 않는 게 아닐까요." 상대의 목소리는 다소 차분하다. "그녀는 일단 집을 나갔지만, 그가 곧 가서 세이프하버로 도로 데려왔어요." 브로디는 놀란 눈으로 드루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다만 그녀가 그 얘기에 충격을 받지나 않을까 그것만을 염려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드루 해먼드 그 양반도 참 기가 막혀요. 함께 살고 있으면서 단지 보호 감독만 하는 체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 사람은 그녀의 후견인이니까 그렇죠." 맞은편 여자가 조용히 나무라고 있다. "정말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세요?" 캐롤라인 퍼시는 날카롭게 웃었다. "때가 되면 더 알게 될 거예요." 부인들이 클럽에서 나갔는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자, 이제 돌아가지, 브로디." 브로디는 굳어 버린 듯이 그 자리에 못박혀 서 있었다. "너무했어요." "그건 집에 돌아가서 얘기하지." 드루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여운이 있다.


드루가 이런 식으로 말할 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녀는 잠자코 차에 탔지만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그런 심한 말을 듣고도 당신은 조금도 놀라지 않는군요. 화를 내고는 있지만, 당신에겐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여요." "바로 그래." "언제부터 이런 소문이 있었죠?"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다. "몇 해 전, 브로디가 이미 어린애가 아니라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고 나서부터지." "모두들 우리가 한 침대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그렇지." 브로디는 발끈했다. "왜 소문을 부정하려 들지 않았죠? 왜 사실을 모두에게 밝히려 하지 않았어요?" "브로디나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진실을 다 알고 있어. 저렇게 남 말 하길 좋아하는 작자들에겐 누가 뭐래도 소용이 없거든." "하지만 당신의 평판은 어떻게 되는 거죠? 변호사한텐 평판이란 건 무척 중요하잖아요?" "내 직업에까진 영향이 미치지 않고 있어." "이런 소문은 부당해요. 어째서 저 사람들을 고소하지 않는 거죠?" "내가 떠들고 나서게 되면 도리어 소문은 사실이라고 모두가 생각하게 돼. 난 다만 이 소문이 흐지부지되도록, 그리고 이 일이 브로디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그것만을 진심으로 빌고 있었는데…" 브로디는 오랫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불쑥 중얼거렸다. "드루, 이것이 저 때문에 당신이 치르고 있는 또 하나의 희생이군요…" 드루는 차를 차고에 들여놓고는 그녀를 돌아봤다. "난 널 위해 한 일 중에서 후회하고 있는 건 하나도 없어. 이것만은 믿어 줘." "당신에게 한 가지만 더 부탁하고 싶어요. 이게 마지막 부탁이에요. 여길 나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돈을 좀 빌어 주세요. 우선 자넷한테 갈 생각이에요." "자넷한테는 가고 싶지 않다고 그랬잖아." "하지만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이번엔 제가 당신을 위해 뭔가 해드릴 차례예요.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리겠어요." "아까, 넌 세이프하버에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었잖아." "그건 제가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의 얘기예요." "농담 좀 작작해. 네가 내게 상처를 입히는 일 따위를 한 적은 없어. 난 소문 같은 건 조금도 신경쓰고 있지 않아!"


그는 차문을 난폭하게 닫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차에서 내린 브로디는 당당한 세이프하버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여긴 거친 세파로부터 나를 지켜 주는 피난처였는데, 이제 두번 다시 이곳에는 돌아올 수 없어. 세이프하버는 이제 나의 집이 아냐… 브로디는 드루를 따라 현관 홀을 가로질러 서재로 갔다. "짐을 쌀 테니까 호텔까지 데려다 주실래요? 물론 전에 묵고 있었던 호텔은 아녜요. 거기엔 두번 다시 묵고 싶지 않아요." "거절하겠어. 왜냐하면 넌 어디에도 갈 필요가 없으니까." "그럴까요?" "그 말 많은 작자들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진실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야. 어린애 같은 짓은 이제 그만둬!" "당신이야말로 이제부턴 절 어린애 취급하진 마세요. 남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전 알 권리가 있다구요!" 드루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곧 갈 테니까." 브로디는 일부러 푹신한 의자를 피해 그랜드피아노의 딱딱한 의자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세련된 가구며 호화로운 아랍 풍의 융단, 난로 위에 걸려 있는 드루 어머니의 초상화 등을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돌아갈 집이 없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만이 자꾸 어른거린다. "브로디." 드루가 방에 들어온 걸 몰랐기 때문에 그 갑작스런 목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까 날 위해서 뭔가 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구태여 여길 떠날 필요는 없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겠어?" "제가 뭘 하면 되죠?" 브로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눈물을 닦았다. 드루는 할 말을 잊어버린 듯 오랫동안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다. "다니엘이 말한 대로 난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어." 브로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손을 꼭 움켜쥐었다. "브로디,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 7 순간 브로디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드루의 눈빛이 진지하기 때문에 농담은 아닌 것 같다. 브로디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드루, 기사도 정신 같은 건 옛날 중세 때에 벌써 없어졌어요! 만약에 당신이 뭔가 고귀한 일을 하고 싶으면…" "내 얘기를 들어준다고 약속했잖아." 드루의 말에는 단호한 의사가 담겨 있다. 브로디는 웃음을 멈췄다. 어째서 그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냈을까?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사랑했던 사람한테서 깊은 상처를 받았어. 브로디는 그 상처가 아직 생생해서 영원히 아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진 몰라도, 결코 그렇진 않아."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당신 말로 그랬잖아요." "분명히 완전하게 잊을 수는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드루는 우물거렸다. "게다가 인생에는 사랑 이외에도 소중한 게 있어. 그것은 동정심과 우정이야. 정열적인 사랑은 금세 다 타버리고 없어질지 모르지만 동정심과 우정은 오래 지속되거든. 우정에서 출발한 결혼에는 용솟음치는 정열은 없겠지만 깊은 절망감도 없을 거야. 조용한 결혼생활, 그것이 내 소망이야. 격동하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드루는 갑자기 말을 끊었다. 신시아가 도대체 드루를 어떻게 대했길래 저토록 괴로와하는 걸까? "제리는 이사벨과 약혼했어. 다시는 네 곁으로 돌아오지 않아. 그와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면, 넌 다른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돼." "달리 무슨 길이 있다는 거죠? 제리는 이미 없는데…" 브로디는 투덜거렸다. "알아, 제리는 이제 돌아오지 않아. 그러니까 제리를 단념하고 다른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오늘 오후 넌 가망이 없다면서 가수가 될 꿈을 포기하고 딴 길을 찾겠다고 했지. 그건 처음 목표완 다르지만, 지금의 너로선 최선의 길이리고 생각해." "노래하는 것과 결혼이 무슨 상관이 있죠?" "똑같은 거야. 제리라는 첫 목표를 잃었을 때, 그걸 슬퍼하며 평생을 보낼 수도 있고, 혹은 주위를 둘러봐서 그 다음으로 좋은 남자를 찾을 수도 있어." "자신이 두 번째라는 게 기분 나쁘지 않은가요?" 드루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브로디, 난 일생을 혼자서 보내고 싶진 않아. 하지만 날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여자하곤 결혼해서 살 수 없을 것 같아. 만약 나도 똑같이 그 여자를 사랑해 주지 못한다면, 그땐


정신적으로 무척 괴로울 거야. 난 그런 일로 고민하고 싶지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동정과 우정이야." 브로디는 드루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신시아가 당신에게 그토록 상처를 입혔나요?" 드루는 뭔가를 참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사랑받지 못하고 견디기 힘든 상처를 입은 사람들끼리 짝을 맺으면, 서로 위로하면서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브로디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보다 더 큰 괴로움을 맛보진 않을 거야. 둘이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 보지 않겠어?" "왜 절 결혼상대로 택했죠? 저한테 책임을 느껴서요?" "확실히 책임을 느끼고 있어. 난 네가 걱정스럽고. 이런 심정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아. 하지만 단지 널 돌봐 주는 것만이라면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그럼, 왜 결혼이라는 형식을 택한 거죠?" "왜냐고? 너는 내 아픔을 잘 알기 때문이야. 브로디 말고 날 이해할 수 있는 여자는 없어." 드루는 브로디의 부드러운 고수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우린 이제까지 죽 좋은 친구였어. 사회적으로는 일단 결혼이라는 형식을 취하지만 우리의 우정은 오래오래 소중히 간직하며 살아가고 싶어, 브로디." "우정이라고요? 당신이 바라는 건 그것뿐예요?" 브로디가 조용히 물었다. "지금으로선 그래. 제리 이외의 남자를 깊이 사랑한다는 건 지금의 너로선 생각도 못할 일일 테니까. 하지만 언젠간 브로디도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뜨거운 정열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가 올 거야. 게다가 오늘 저녁, 너는 언젠가는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그랬잖아?" 제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브로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아이를 원하세요?" 드루는 한참 동안 잠자코 있었다. "난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후회할 거라고 생각해." 브로디는 얼굴을 붉혔다. "전, 약속할 수 없어요."


"약속 같은 건 안해 줘도 돼. 다만 내가 아이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브로디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얘기한 것뿐이야." "전 아직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에 동의한 건 아녜요." 브로디는 고개를 숙이고 융단을 응시했다. 드루의 아이를 낳는다 …

생각만으로도 제리를 배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브로디더러 약속해 달라고 말하진 않겠어. 일 년 후, 2 년 후의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너 자신도 전혀 알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맹세할게, 난 결코 억지로 강요하진 않겠어. 브로디 마음이 바뀔 때까진 지금처럼 친구 사이로 있기로 하지. 지금까지와는 단지 형식만 다르게 지내면서 말이야." "하지만 만약에 제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친구 사이 그대로도 만족해. 약속하지." 드루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요?" "혼자 있는 것보다는 둘이 있는 게 좋지. 난 이제까지 고독했어." 드루는 갑자기 말을 끊고는 브로디의 손을 꽉 잡았다. "만약 브로디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제리를 잊고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난다면…" "그런 사람이 나타날 리 없어요." "그땐 난 아무 말 않고 브로디를 자유롭게 해주겠어. 어때 브로디, 함께 서로 위로하며 살겠어? 아니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그 꿈 같은 행복을 기다리며 외롭고 고독한 인생을 보낼 거야?" 브로디는 고딕 풍의 창문 옆에 서서 바로 앞에 펼쳐지는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 규칙적인 기하학적 무늬로 꾸며진 정원 오솔길이 마치 자신의 뒤얽힌 마음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다. 정원이 온통 달빛을 받아 환하게 떠오르고, 나뭇잎이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리고 있다. 자신이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자 드루는 더 이상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고, 다정하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선 자기방으로 갔다. 지금쯤은 아마 푹 잠들었겠지. 만약 승낙한다면, 앞으로의 자신의 생활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다. 브로디는 머리를 저었다. 아, 싫어, 난 지금 드루의 결혼제의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하지만 드루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제리가 떠난 지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순 없어. 나이트클럽에서 이사벨과 함께 있는 그를 보았을 때의 충격도 컸지만, 오늘밤의


약혼발표는 내 덧없는 희망을 아주 완전히 박살내 버렸어. 그래도 오늘 저녁 전까지는 돈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걸 제리도 깨달을 때가 언젠가는 꼭 올 거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는 이제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갔어. 가수의 꿈이 깨진 바로 오늘 그런 슬픈 사실을 알게 되다니. 어쨌든 장래의 일을 걱정해야만 한다.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여름방학 때 잠시 드루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단순한 심부름꾼이었지 전문적인 직업 경력이라고 할 순 없어. 그렇다고 그것 말고 딴 일을 해본 경험도 없잖아. 대학에서는 오로지 가수가 되려고 음악공부 말고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고. 노래 말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그러나 어떻게든 되겠지. 다음 학기에 대학에 돌아가면 뭔가 흥미있는 걸 공부해야겠어. 하긴 그것도 드루가 학비를 대준다는 것을 전제로 한 생각이지만.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바로 그거야. 그렇지만 무얼 하고 싶다기보다는, 아무튼 나는 이 세이프하버를 떠나고 싶지 않아. 그러나 언젠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돼. 여기에 계속 있을 수는 없어. 이 이상 드루에게 기대는 것은 좋지 않아. 하지만 드루가 나더러 있어 달라고 한 거야. 내가 되돌아 온 첫날, 라일리 부인은 이 집이 쓸쓸하다고 그랬어. 드루는 오랫동안 나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러 왔지만, 그 보답으로 그가 바라는 건 단지 나더러 옆에 있어 달라는 것뿐이야… 그의 소원대로 해주는 게 어떨까? 제리는 이제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드루와 둘이서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도 인생을 혼자서 보내고 싶지는 않고. 브로디는 테라스에 이어진 손님용 침실로 들어갔다. 올이 거친 커튼을 통해서 달빛이 가득 흘러들어와 벽지의 꽃무늬가 얼룩덜룩하게 어른거린다. 벽을 새하얗게 칠하고 거기다 새 벽지를 발라야지. 초록색과 노랑 줄무늬가 좋을까, 아니면 곡마단의 동물 무늬? 뭔가 어린애의 눈을 끌 밝은 무늬가 좋을 거야… 갑자기 자기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브로디는 뺨을 두드리며 새삼스럽게 드루의 제의를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드루와 함께 살며 한 침대를 쓰고, 그의 아기를 낳는다는 일이 가능할까? 아냐, 가능할 리가 없어. 하지만 드루는 지금 당장 진짜 부부가 되어 아기를 낳아 달라고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그 역시 자기 아내가 신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거야. 이제까지 드루는 내게 언제나 아저씨 같은 존재였어. 그를 남자로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친구로서는 잘 지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브로디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어지러웠다. 한참 만에 침대에 들어 겨우 잠이 들었다. 꿈속에 제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드루의 팔을 잡고 흰 공단 웨딩드레스의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교회의 빨간 융단을 밟으며 걸어간다. 제단 가까이 가자 제리가 앞으로 나온다. 그런데 그는 손을 내밀려고는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준엄하게 따져 묻는다. "돈은 어디에 있지? 돈을 세어보는 게 먼저고, 결혼식은 그 다음이야." 그녀가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자, 제리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큰소리로 마구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브로디는 비명을 질렀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드루의 초록색 잠옷 소매에 매달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귓전으로 계속 달래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진정된 것을 보고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아무 것도 아녜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와주셔서 고마와요." "브로디가 부르면 난 언제든지 달려올 거야." 드루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자 햇살이 침대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른하게 큰 기지개를 켜는 순간 어젯밤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오늘은 드루에게 대답을 해야 하는데… 집안은 아주 고요하다. 브로디는 라일리 부인에게 메모를 남겨 놓고는 드루의 사무실을 향해 언덕길을 내려갔다. 길 가로 퍼져가는 자신의 발소리가 마치 자신을 다그치는 것만 같다. 도대체 그에게 뭐라고 대답할 셈이지? 드루는 수에게 계약서 작성에 관한 지시를 하고 있다가 브로디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 가에 얼핏 긴장의 빛이 감도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아, 이거 별일인데. 아직 9 시도 안 됐는데 벌써 일어났어? 오늘은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은 모양이군." 그는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전 일을 하러 왔어요. 어젯밤에 다시 여기서 일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죠?" "어머, 고마와라." 수가 기뻐했다. "잠깐만, 수. 2, 3 분 동안 브로디와 할 얘기가 있어. 일을 시키는 건 그 다음에 하도록 하지." 드루 방의 두툼한 떡갈나무 방문이 철컥 닫히자, 브로디는 순간 감옥의 독방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정말 일을 하고 싶다는 거야?" "네, 그리고 당신은 어젯밤의 대답이 듣고 싶겠죠?" 이 방은 밖으로 소리가 새지 않게 돼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브로디는 소리를 낮추었다. "그래 준다면 고맙고." "대답은 예스예요.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어떤 조건인데?" 드루의 얼굴이 굳어진다. "제가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은 절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당신에게도 같은 말을 하고 싶어요. 만약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나타나서 당신이 그 사람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전, 어쩐지 두려워요." 드루는 브로디의 턱에 손을 갖다대고는 얼굴을 위로 치켜올렸다. 키스를 당하는 게 아닌가 불안해졌지만 그의 입술은 살짝 볼에 와 닿았을 뿐이었다. "실은 나도 좀 두려워. 우리가 하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니까 말야." "미친 짓 같아요." 드루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부터 반지를 사러 갈까?" 브로디는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제리와 같이 갔던 브룩 보석상에 또 반지를 보러가다니, 견딜 수 없어… "보석상엔 가고 싶지 않아요." "알았어. 좌우간 식은 되도록 빨리 올리는 게 좋겠어." "하지만 모두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텐데요." "결혼식을 뒤로 미루면 그만큼 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돼. 일시적인 소란이 가라앉으면 더 이상 아무도 수군거리지 않을 거야." "그것도 그렇군요…" 웨딩드레스나 부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아. 그런 건 우리처럼 편의상 결혼하는 사람들에겐 어울리지 않아. "식 준비는 모두 내가 하겠지만, 혹시 누군가 알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없어요." 브로디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식장과 시간이 결정되거든 알려 주세요. 그럼, 전 일하겠어요." 드루는 브로디의 손을 힘껏 잡았다. "고마와, 난 정말 기쁘다." "전 아무 약속도 할 수 없어요. 당신이 후회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수가 시킨 서류함 정리를 브로디가 하고 있는데, 올리버 패닝이 여느 때처럼 큰소리를 내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 뒤엔 이사벨이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있다. "드루와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수가 정중하게 응대한다. 이사벨은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브로디 곁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일자리예요? 가수에 비하면 따분하지 않아요?" "그렇진 않아." 브로디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컨트리클럽에서

당신을

봤지만

체해서

미안해요.

제리

친구들과

만나느라고 바빠서… 알고 있겠지만 난 제리와 약혼했어요." "알고 있어." "그래서 오늘 아침 여기에 온 거예요. 결혼계약서에 관해서 아빠가 해먼드 씨와 상의할 게 있나 봐요. 아빠는 뭐든지 확실히 해두고 싶어하는 분이시거든요." 드루의 방문이 열리자 올리버 패닝은 딸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은 언제니?" 브로디는 그런 건 아무렇든지 관심이 없었지만 일단은 물어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3 주일 이내예요. 아빠가 자마이카로 신혼여행을 보내 주시기로 했어요." 이사벨의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6 월인데 카리브 해로 가는 거야?" 말하고 나서 브로디는 아차 싶었다. "카리브 해로 신혼여행을 가는 게 꿈이었어요. 계절이야 어떻든 상관없어요!" 이사벨은 턱에 힘을 주며 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네 결혼식이니까." 브로디는 달래듯이 중얼거렸다. "웨딩드레스는 특별히 맞췄어요. 그리고…" 이사벨은 자랑스러운 듯이 이것저것 얘기를 계속했다.


브로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성적이고 무료했던 여자애가 별안간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자― 아버지조차도 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행복감에 젖어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것이다. 서류더미가 기울어져 책상에서 떨어질 뻔했다. 브로디와 이사벨이 그걸 서로 얼른 잡으려 하는 통에 잘못해서 이사벨의 소매가 걷혀 올라갔다. 팔뚝 위에 퍼렇게 멍든 자국이 보였다. 그것은 손자국 같았다. 이사벨은 황급히 소매를 끌어내렸다. 내가 알 바 아냐. 브로디는 생각했다. 제리가 낸 멍자국인지의 여부도 모를 뿐더러 어쩌면 멍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사벨, 조심해야지. 자기 몸은 자기가 소중히 해야 돼." 브로디는 다정하게 주의를 주었다. "무슨 뜻이죠?" 이사벨이 깔깔 웃었다. "누가 날 상처입혔다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진정으로 사랑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거예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위해선 뭐든지 해줄 수 있는 거라구요. 상처를 입히다니, 당치도 않아요." "그래, 난 그런 행복을 느낀 적이 없어서…" "내가 부럽지요?" 이사벨은 꽤나 자랑스런 눈치다. "아직 차를 나누지 못했죠. 지금도 난 아빠 집의 실내장식 관계로 당신과 상의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리와 난 결혼 후에도 아빠하고 같이 살 거예요. 부탁인데요, 다음주에 우리 집에 와주시지 않겠어요?" "그래, 나중에 연락할게." 브로디는 현명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올리버 패닝이 드루의 방에서 나왔다. "그럼 다음주에 이사벨과 제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서명을 하러 오죠. 자, 가자 이사벨. 이분들을 방해해선 안 돼." 어느 새 이사벨은 내성적인 딸로 돌아가 순순히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사무실 문이 닫혀지기가 무섭게 수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가씬 어쩌면 그렇게 중뿔나게 굴까 … 여기에 2 분만 더 있었더라면, 브로디에게 남자친구라도 소개시켜 주겠다고 덤볐을 거야." 나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면 이사벨은 틀림없이 놀라겠지. 그리고 제리도 …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내


8 바깥은 6 월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지만 석조건물인 교회 안은 서늘했다. 브로디는 열심히 미사에 집중하려 했지만, 머릿속은 몇 분 전에 이곳 성당에서 있었던 자신의 간소한 결혼식 일로 가득 차 있다. 결국은 결혼을 했다. 나는 이제 브로디 매켄지가 아니라, 브로디 해먼드인 거야. 그런데도 왼손에 낀 반짝이는 결혼 금반지를 봐도 왜 그런지 결혼했다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식에 대해서는 모든 걸 드루 혼자서 결정했고 결혼반지도 그가 골랐지만, 그녀는 그것들에 대해 한마디도 트집잡지 않았다. 전에는 결혼식을 꿈꾸며 이것저것 생각도 많이 했지만, 이제 그 꿈을 제리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실현시켰다는 건 제리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드루도 허세를 부리는 것은 싫어한다. 단순함과 우아함을 즐기는 게 해먼드 집안의 전통이다. 약혼반지가 그 좋은 예다. 브로디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끝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약혼반지는 필요없다고 했더니, 드루는 l 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순금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다. 손끝으로 다이아몬드 표면을 어루만지며 브로디는 모자 챙 너머로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이 옆자리의 드루를 바라보았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서로 위로한다? 존경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드루를 존경해 왔으니까. 그리고 또 위로하는 것도 가능할 거야. 결혼식 때 신부님은 위로한다는 것이 자기의 소중한 사람을 잘 받들고 친절하게 보살피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거라면 나도 잘할 수 있어. 오랫동안 날 소중하게 보살펴 준 그를 본받으면 되는 거니까 말야. 남은 일은 사랑하는 건데, 세 가지 중에서 두 가지가 가능하니까, 그 이상은… "오늘 미사를 마치기 전에 새로 교회에 나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함과 동시에 우리의 오랜 형제이시며, 이번에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시게 된 해먼드 내외를 소개합니다. 이 두 분은 오늘 아침 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셨습니다." 신부님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성당 안에 잠시 술렁임이 일고 모두가 일제히 뒤를 돌아다본다. 두 줄 앞에 앉아 있는 캐롤라인 퍼시 같은 사람은 목뼈가 부러지도록 홱 고개를 틀어 뭔가를 탐색하듯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드루는 결혼하면 아무도 우리를 입에 올리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이 성급한 결혼으로 소문의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된다면 어떡하지…


미사는 눈깜짝할 사이에 끝나, 브로디와 드루는 주위의 의심을 떨쳐 버리려는 듯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채 사람들의 축하인사를 받으며, 교묘하게 질문을 받아넘기면서 서서히 출구 쪽으로 향했다. "브로디도, 어쩌면 그렇게 숨기고 있었어요?" 이사벨이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는 내 결혼식 얘기만 하고, 당신의 결혼 얘기는 한마디도 안했잖아요? 참 무서운 사람이군요! 그래, 좋아요. 내 약혼자 제리 휘트콤을 소개하죠. 제리, 이분도…" "야, 브로디." 제리는 내뱉듯 말했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드루 쪽을 향했다. "난 당신에게…" "축하를 해주겠다는 건가?" 드루는 명랑한 어조로 되받고는 브로디의 허리에 감은 손을 꽉 당기며, 비난하는 듯한 제리의 시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출구로 향했다. 브로디는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제리에게 뭐라고 한마디 설명이라도 할 수 있다면… 교회 밖의 계단 쪽에서 다니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난폭하게 껴안는 게 아닐까 하고 브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그는 특별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쌀쌀한 어조에 놀랐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당연한 일일지 몰라. 이 결혼으로 드루의 부담이 더욱 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던 드루의 손에 갑자기 힘이 가해졌다. "야, 신시아…" 그제서야 브로디는 다니엘 옆에 서 있는 금발 머리의 여자를 알아보았다. 10 년 동안에 신시아 탠디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옛날의 그 나무랄 데 없던 얼굴에도 지금은 잔주름이 져 있다. 신시아는 브로디를 한번 슬쩍 보고는 드루 쪽을 향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다시 만나게 돼서 기뻐요." "이곳엔 오래 있을 거야?" 그렇게 묻는 드루의 목소리가 왠지 떨리고 있는 것 같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오던 사람을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돼서 아주 괴로울 거라고 브로디는 그를 동정했다.


"적어도 2, 3 주일은 있을 거예요. 에릭이 다니엘 삼촌과 좀더 친해졌으면 하니까요. 제게 아들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벌써 8 살이에요." "다니엘한테 들어서 알고 있지. 브로디를 기억하겠지?" "물론이죠. 언제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죠. 어때요, 다음주에라도 다니엘 삼촌 댁에 식사하러 오시지 않겠어요? 옛날 얘기를 이것저것 하고 싶어요." 신시아는 미소지으면서 드루의 양복 깃에 손을 얹고는 자신있다는 듯이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브로디는 깜짝 놀라 긴장했다. 드루는 그 초대를 틀림없이 거절할 거야 … 그러나 그는 잠시 망설였을 뿐, 이내 둘이서 기꺼이 방문하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브로디는 그를 후겨갈기고 싶었다. 옛날 애인과의 식사에 왜 나를 데리고 가죠? 난 당신한테 제리하고 같이 저녁식사 자리를 가지자고 부탁하진 않아요! 하지만 만약에 드루가 신시아에게 쌀쌀맞게 대한다면 곧 소문이 쫙 퍼질 것이고, 내가 함께

가기를 거절하거나 하면 소문은

더욱더

퍼지게

된다.

드루에겐

신시아와의

재회만으로도 괴로운데, 하물며 그녀 때문에 또다시 이러쿵저렁쿵 소문들이 나돈다면 더욱 견디기 어려워질 게 틀림없어. 드루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돼… 브로디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상대의 아픔을 서로 어루만져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신시아도 그래. 일부러 결혼식 날에 드루 앞에 나타날 게 뭐람… 우리의 결혼이 일종의 투기라는 건 잘 알곤 있지만 순탄하게 지속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신시아가 등장하고 보니 그렇게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브로디는 밀가루를 뿌린 다음 그 위에 파이 재료를 놓고 차근차근 버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하지 않아도 돼요, 부인." 라일리 부인의 말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부인이라는 말이 잘 안 나오는 모양이다. 브로디는 고개를 들어 생긋 웃었다. "그냥 브로디라고 불러 줘요. 그게 서로 편안할 거예요. 결국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는걸요." "그렇기도 하군요.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난 도무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엉덩이를 펑펑 두들겨 주고 싶은 기분이에요." 이 갑작스러운 결혼이 그녀에겐 충격이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브로디가 드루의 침실로 옮겨가지 않고 있고, 또한 두 사람이 조금도 신혼부부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선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현관 벨이 울렸기 때문에 라일리 부인은 앞치마를 벗고 현관 홀로 나갔다. "이사벨 패닝 양이에요. 무슨 선물을 갖고 오신 것 같아요. 응접실로 안내했어요." "이런 모습으로 맞이해도 괜찮을까? 하지만 갑자기 왔으니 어쩔 수가 없어요." 브로디는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고, 맨발인 채로 응접실로 향했다. 벽난로 위의 유화를 바라보고 있던 이사벨은 브로디가 들어가자 천천히 돌아보았다. "방해가 된 건 아닌가요?" "아니, 지금 파이를 굽고 있던 참이야." 이사벨은 깔깔대며 웃었다. "어머, 너무너무 가정적이네요! 당신을 무시해서 웃고 있는 건 아녜요. 저도 결혼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게 낙인걸요." 제리를 위해서? 브로디의 가슴에 예리한 아픔이 지나간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크림을 곁들인 초콜릿 아몬드 과자인데… "전 오늘은 결혼선물을 드리러 왔어요. 미리 알았더라면 축하 파티를 열었을 텐데, 브로디는 결혼한다는 얘긴 한마디도 안했잖아요." 크고 두툼한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드레스인 모양이다. 브로디는 촌스러운 드레스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예감으로 상자를 열었다. 한데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고상해 보이는 새하얀 레이스 잠옷이었다. "어머,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해먼드 씨도 맘에 들어할 거예요." 브로디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 이사벨이 웃는다. "흰색은 당신에게 아주 잘 어울려요." "정말 고마와." 라일리 부인이 차를 날라왔기 때문에 브로디는 상자를 덮어 옆으로 밀어 놓았다. "저, 느낌이 어떻죠? 요컨대 결혼한다는 것 말예요." 이사벨이 흥미진지하게 묻는다. 그런 걸 어떻게 안담, 우리들의 결혼은 형식적인걸. 브로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겠죠?" 이사벨은 상대방이 잠자코 있는 것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우린 아담한 아파트를 빌릴 거예요. 제리가 학교에 가 있을 동안, 전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할래요. 그이가 대학을 졸업하면 이리로 돌아와서 아빠와 함께 살 작정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대단할 거예요. 제리와 아빠는 회사의 중역이니까요. 많은 손님들을 대접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렇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브로디는 잠자코 그녀가 흥분해서 수다를 떠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2, 3 주일 전의 나라면 이런 식으로 순진하게 재잘거렸을 것이다. 불과 얼마 안 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나이를 먹어 버린 걸까. "나이 차가 많은 사람과 결혼한다는 건 전 상상도 못해요." 이사벨은 계속 말했다. "드루와는 l0 살 이상 차이가 나죠?" "열셋이야." 브로디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게나요? 그럼 드루는 당장에라도 아기를 낳고 싶어 하겠네요. 나이 든 사람한텐 자식을 갖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니까요." 브로디는 발끈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사벨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드루는 그렇게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명실공히 아내의 역할을 다 하라고 요구해 온다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이 브로디를 엄습한다. "제리는 아기를 별로 원하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이는 우선 자기 기반을 다지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빠는 제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이는 회사에서의 특별대우는 곤란하다, 자신의 힘으로 출세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빠한테서 금전적인 원조는 절대 받고 싶지 않대요. 물론 월급은 별도지만. 그리고 아빠 집에서 사는 것도 예외고요. 그는 커다란 집에서 살아온 제가 어떻게 조그만 집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애처롭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사벨." 브로디는 앞으로 다가앉았다. "결혼이라는 건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해야 돼. 이사벨은 제리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많아." "제리에 대해선 모두 알고 있어요." 이사벨은 꽤 화가 난 모양이다. "그이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으로 남만 못하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 그 말은 제리가 훌륭하다는 것을 드루에게 설명할 때 자신이 했던 말과 똑같았기 때문에, 브로디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좀더 설득력있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사벨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제리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이사벨은 발끈해서 응수했다.


"내 얘기를 들으면 아마 놀랄 거야." "그이가 당신하고 몇 번 데이트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어제 교회에서 당신을 만난 뒤에 제리가 말해 줬어요. 당신 쪽에서는 진지하게 교제하고 싶어했지만, 그이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던데요. 저하고 만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했어요. 전 당신 일 따위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리는 정말 멋있는 남자예요. 당신이 그이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브로디는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하도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사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되길 바라겠어요." 말은 공손했지만 마치 두 번째 남자를 골라잡은 것이 안 됐다는 투였다. "드루와의 결혼은 브로디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커다란 다이아몬드 정말 근사하네요." 브로디는 자기도 모르게 다이아몬드를 손으로 가렸다. "저 같으면 그렇게 큰 다이아를 항상 몸에 지니는 건 무서워서 감히 엄두도 못낼 거예요." 브로디는 자기가 뭐라고 대꾸했는지 잘 생각이 안 난다. 배알이 뒤틀린 기분으로 주방으로 돌아오자 파이 반죽에 놓아 둔 밀방망이를 힘껏 내리쳤다. 이것이 이사벨의 얼굴이었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드루가 돌아왔을 때, 브로디는 정원에서 딸기를 따고 있었다. "좀 도와 줄까?" "됐어요. 옷이 더러워질 거예요." 브로디는 건성으로 말하고는 잘 익은 것을 따서 딸기밭 옆 낮은 돌담에 주저앉아 먹기 시작했다. "바구니가 거의 비다시피한 게 당연하군. 따는 족족 먹어 버리니 말이야. 내게도 좀 남겨 줘. 그런데 브로디는 내가 돌아온 게 기쁘지도 않아?" "물론 기쁘죠. 한데 그런 건 왜 묻죠?" "왜냐니, 조금도 기뻐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지." "어머, 미안해요. 내일은 돌아오시는 시간을 미리 알려 주세요. 밴드부를 동원해서 마중해 드릴 테니까요." 브로디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런데요, 저 여기서 음악을 가르치면 안 될까요? 피아노나 성악이나…" "내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해?" 드루는 바구니에서 알이 굵은 딸기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모르겠어요. 음악교실을 여는 건 세이프하버 저택엔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전 뭔가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건 이제 싫증이 난 거야?"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수는 늘 조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이 집 일은 라일리 부인이 모두 도맡아 해주고 있으니까." 드루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아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싫으면 곧 그만둘 수 있도록 적은 인원수로 시작해 보지." "벌써 한 학생을 봐뒀어요. 수의 딸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거든요." 브로디는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고 그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저 말예요, 오늘 저녁 꼭 다니엘 씨 댁에 식사하러 가야만 해요?" "골치가 아프다든가 하는 핑계는 다니엘에겐 통하지 않을 거야." 브로디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며 드루의 팔에 기댔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 정경인가.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산들바람에 꽃들이 한들거리고, 그리고 곁에는 드루가 있고… 그녀는 얼굴을 들어 세이프하버에 돌아오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자 드루의 얼굴이 내려와 부드럽게 입을 막았다. 조용한, 그러면서도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듯한 키스였다. 오랫동안 두 사람은 꼼짝 않고 있었다. 이윽고 드루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떼었다. "미안해,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늘 하는 그런 키스였는데요, 뭐." 브로디는 어깨를 으쓱했다. "늘 하는 키스라고?" 드루는 슬며시 되물었지만, 거기엔 어떤 여운이 있었다. 브로디는 캐묻듯 물끄러미 드루를 올려다보았다. 경고하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드루는 천천히 그녀의 눈꺼풀과 귓불, 턱을 손으로 어루만지더니 다시 키스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때의 오빠가 동생에게 하는 그런 키스가 아니었다. 브로디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얇은 면 블라우스를 통해 그의 따스한 손의 온기가 전해온다. 그 부드러운 애무의 손길 따라 억누를 수 없는 격정이 치솟는다. 이윽고 그가 몸을 떼자 그녀는 균형을 잡을 수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겠어." 드루는 그녀의 턱을 손끝으로 가볍게 어루만졌다. "먼저 딸기를 다 따야 해요."


브로디는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휘파람을 불면서 집 쪽으로 걸어가는 드루의 뒷모습을 브로디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무해요. 날 갖고 놀고 나서는 신시아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니까 서두르라니, 정말 너무해요. 남자라는 건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 …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정말 애정이 철철 넘치는 풍경이군. 당신네들은 확실히 열렬한 한 쌍이야." 얼굴을 든 브로디는 깜짝 놀랐다. 제리가 거기에 서 있다. "깜짝 놀랐잖아요." "말해 봐, 브로디. 이 느닷없는 결혼은 대관절 어떻게 된 거야? 별안간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 아니면, 나와 맞서기 위해서 해먼드와 결혼한 거야?" 브로디는 잠자코 있었다. 온 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그날 이후, 제리와 단둘이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너와는 이제 관계없는 일이야." "네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 난 알고 있어. 사랑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잊혀지는 게 아냐."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던데?" 딸기를 따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건 틀려. 난 지금도 널 사랑하고 있어. 앞으로도 쭉 그럴 거고." 제리의 목소리는 진지하기 짝이 없다. "지난주에 당신네들의 결혼 청첩장이 왔어. 이제 더 이상 서로의 심정에 대해선 그만 말하기로 해." "그렇지만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어." 제리는 우쭐대며 내뱉었다. "난 이제 들어가야겠어." "내일 함께 점심이라도 할까?" 브로디는 놀라서 제리를 노려보았다. "이사벨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는 이해해 줄 거야." "이사벨이 과연 얼마만큼 이해해 줄지 의문이군." 브로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구니를 집어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제리가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며 뚫어지게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브로디는 알고 있었다.


브로디는 커피색 드레스를 입었다. 깊게 팬 가슴엔 다이아몬드가 빛나고 있다. 드루가 뭐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지만, 다만 힐끗 한번 쳐다보기만 하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문을 열어 주는 다니엘은 브로디의 아름다움을 인정한 것 같았다. "신시아는 아직 내려오지 않았어." 그는 그렇게 사과하고 미안해했다. "30 살이 지나면 젊게 보이도록 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게 마련이죠." 브로디는 내심 심술궂게 생각하면서도 다니엘에게 씽긋 웃어 보였다. "뭣 좀 마시겠어?" 다니엘은 두 사람을 안뜰로 안내했다. "드루, 식사 마치고 체스 한판 두세. 오늘 저녁은 그렇게 쉽게 놓치진 않겠네." "정 그렇게 원하신다면…" "뭐라구? 신부하고 떨어져 있기 싫다는 건가? 브로디 상대는 신시아가 잘해 줄 걸세." 다니엘이 신시아를 부르러 가자 드루는 의자에 기대어 술잔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런데 브로디, 이 다음에 제리 휘트콤을 만나거든, 또다시 내 재산에 접근하면 그땐 가만 두지 않겠다고 그래!" 드루는 제리를 봤던 모양이다. 날 죽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창문으로 우연히 봤던 걸까? 아무튼 지금 당장이라도 신시아가 나타날 판에 이런 얘기를 꺼내다니… 브로디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아양 떠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재산이란 절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세이프하버를 말하는 건가요?" "둘 다야." "전 당신의 소유물이 아녜요." 브로디는 쌀쌀맞게 말했다. "세이프하버 저택에 그 녀석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데 필요하다면 법원에 고소할 수도 있어. 하긴, 그런 짓을 하면 올리버 패닝이 가만 있지 않을 테지만." 그때 신시아가 안뜰로 나왔다. 금발 머리를 높이 묶어올리고, 사방으로 빛을 내뿜는 것 같은 드레스를 몸에 걸치고 있다. 브로디는 드루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는 잠깐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내 곧 평온을 되찾아 싱긋 웃고는 그녀에게 의자를 권하고 있다. 드루에 대한 노여움이 어느 새 사라지고 마음속에서는 그를 향한 연민의 정이 샘솟는다. 지금의 드루 심정을 잘 알 수 있어. 신시아를 만나고 싶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렇게 갈망하는 한편, 절망감과 고통에 못이겨 사랑하는 그녀가 오지 못할 장소로 몸을 숨기고 싶어지는 … 나도 제리를 만나면 이와 똑같은 심정 때문에 괴로와할 거야.


신시아는 다니엘에게서 마티니를 받아들자 '옛 친구에게'라고 외치며 술잔을 높이 들고는 드루의 눈을 들여다본다. "해먼드

곶에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평화로운

고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울했던 제 마음은 편안해져요." 신시아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오늘 저녁 그녀는 멋있고,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이 보이는데… "다니엘 삼촌도 에릭과 제가 여름 내내 여기에 있어도 괜찮다고 했어요. 전 지금 이혼을 신청하고 있거든요." 이혼이라고? 브로디는 드루를 돌아보았다. 잔을 든 손은 떨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충격을 애써 감추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브로디의 머릿속은 빙빙 돌았다. 만약 드루가 알고 있었다면, 제리 때문에 그렇게 초조해한 것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딸기밭에서의 그 정열적인 키스는 어떻게 된 거지? 갖가지 생각들이 브로디의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인다. 신시아가 이제 곧 자유의 몸이 된다면 나 브로디는 어떻게 되는 걸까…? 9 식사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신시아는

잠시도

드루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브로디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그녀와 드루의 농담 섞인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드루는 긴장을 풀고 편안한 자세로 신시아와 함께 지나간 일들을 즐거운 듯이 얘기하고 있다. 그녀의 이혼소식이 그렇게도 기뻤던지, 조금 전까지의 지루해 보이던 태도가 싹 가시고 거짓말처럼 신명이 나 있다. 이따금 드루가 걱정스러운 듯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브로디는 애써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신시아의 이혼 얘기로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려고 지금까지의 일들을 이것저것 떠올리고 있던 브로디의 가슴에 갑자기 한 가닥 의문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드루는 신시아가 이 도시에 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조카딸이 온다는 사실을 다니엘이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게다가 결혼식 날 교회 밖에서 신시아를 보고서도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 그녀가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내게 청혼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어째서 서둘러 나와 결혼했지? 머릿속에는 별의별 의문이 소용돌이친다.


"자, 드루, 체스를 둘 시간일세. 어디 자네의 실력을 한번 보기로 할까." 다니엘이 일어섰다. "두 분께선 즐기고 오세요. 브로디와 저는 얘길 하고 있을게요. 디저트는 체스가 끝난 다음 모두가 모였을 때 먹기로 하죠. 드루, 서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을 테지만 이해하세요. 삼촌은 지금까지 혼자서 살아왔기 때문에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에 익숙치가 않아요. 그래서 서재 안은 삼촌 마음대로 하시도록 내버려 두고 있어요." 겨우 방 하나만을 자유롭게 쓰게 하다니, 친절도 하셔라. 이 집은 아직 그의 것인데… 하지만 다니엘은 그런 일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집안에 웃음소리가 난다는 건 좋은 일이야. 신시아가 당분간 이 집에 있겠다고 하니 정말 기뻐. 다만 이혼은 별로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니지만 말이야. 신시아는 내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해서 여기에 올 때까지 이혼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했어. 브로디, 믿을 수 있겠어? 이 조카딸이 내 의향을 존중한다는 걸 말이야." 브로디는 뭐라고 적당히 중얼거렸다. 드루는 옛 애인이 자식을 데리고 이 도시에 돌아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혼을 신청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거야. 아직까지도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그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청혼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니 이야기의 앞뒤가 들어맞는다. 하지만 왜 그런 사실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신시아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만 있었다면 난 결코 결혼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잠자코 있었던 게 틀림없어. 결국 손해를 본 건 드루야. 신시아는 이제 곧 자유의 몸이 되는데, 이번엔 자기가 자유롭게 될 때를 기다려야만 하게 됐으니. 그런 그를 계속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래, 오늘밤 집에 돌아가자마자 그를 자유롭게 해드리겠다고 말해야지. 이혼수속은 곧 끝날 거야. 그가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행동했더라면 서로가 이렇게 복잡하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

브로디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고통을 억누르며

신시아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신시아는 테이블 너머로 탐색하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브로디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요, 남자친구와의 일은 사실이에요? 아니면 단지 드루의 동정을 사서 결혼하기 위한 연극이었나요?" 브로디는 깜짝 놀랐다. 손이 떨려 커피가 컵 위로 흘러나왔다. 드루가 제리 일을 신시아에게 말한 것일까? "훌륭한 솜씨예요. 브로디의 실연을 몹시 마음 아파한 드루는 브로디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이는 언제나 브로디 일만을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지금 그 저택의 안주인이 된 셈이군요. 아마 퍽 만족하겠죠. 하지만 드루 그이의 행복을 생각해 준 적이 있어요? 브로디는 언제나 그이를 희생시키고 있잖아요." "제 쪽에서 억지로 결혼을 요구했던 건 아녜요. 드루가 결혼해 달라고 한 거예요." 브로디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브로디가 그렇게 말하도록 만든 거겠죠. 하지만 어째서 그가 결혼을 서둘렀다고 생각해요? 그건 말이죠, 결혼하지 않으면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구요." "그렇게 드루의 행복이 걱정된다면, 10 년 전에 왜 그이와 결혼하지 않았죠?"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이에요. 다니엘 삼촌 같은 따분한 해먼드 곶의 변호사 생활에 얽매이는 게 싫었던 거죠." "지금은 생각이 변했다는 뜻인가요?" "드루는 다니엘 삼촌과는 달라요. 안 그래요?" "남의 결혼을 망치려 하다니 양심에 찔리지도 않나요?" "당신들의 결혼은 진정한 결혼이라고 할 수 없어요." 신시아는 코웃음쳤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브로디는 필사적으로 감추려 했다. 드루는 신시아에게 모든 걸 다 말해 주고 있어… "l0 년 전에 드루와 결혼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이었어요. 두번 다시 날 방해하지 말아요." "그건 무슨 뜻이죠?" "그 당시 당신은 아직 어린애였어요. 드루의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 그이는 당신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는 생각은 꿈에도 안했고, 난 귀찮은 아이의 계모가 될 생각은 없었고, 그래서 우린 갈라선 거라구요." "저 때문에 헤어졌다는 말인가요?" 브로디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헤어진 원인을 드루가 브로디에게 말할 리가 없죠. 그이는 자신이 희생되고 있다는 말은 죽어도 입밖에 낼 사람이 아니니까요." 몇 주일 전에 들은 다니엘의 말이 가슴을 파고든다. 이제 적당히 드루를 자유롭게 해주는 게 어때?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던가? "어릴 때부터 브로디는 귀찮은 존재였는데,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

드루의

행복을

방해하고

끼친다고는 생각지도 않는군요." "그렇지 않아요!"

자기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그럼 그 증거를 보여 줘요. 드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뭔가 해드리는 게 어때요?" 신시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렇게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브로디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거실엔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텔레비전 앞에 조그만 사내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고, 그 주위엔 더러워진 접시와 사탕껍질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에릭." 신시아가 다정하게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몇 번인지 불렀을 때야 겨우 꼬마가 일어섰다. "왜 그래, 엄마? 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단 말야. 방해하지 마." "브로디, 얘가 내 아들 에릭이에요." 텔레비전 소리가 시끄러워 신시아는 큰소리로 말했다. "에릭, 이분은 브로디 매켄지 씨란다." "매켄지가 아니라 해먼드예요." 신시아는 브로디를 노려보더니 아이 쪽을 향했다. "에릭, 부탁이니 제발 텔레비전 소리를 좀 낮추렴." "싫어!" 에릭은 다시 텔레비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봉지에서 비스킷을 꺼내고 있다. "에릭!" "내일 내 방에 텔레비전을 사주겠다고 약속하면 소리를 줄일래." 소년은 드러누워서 히죽 웃었다. "알았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는 더러워진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가버렸다. 에릭이 텔레비전의 소리를 조금 줄였기 때문에 브로디는 거실 구석의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저어, 자고 있는 거예요?" 바로 옆에서 꼬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텔레비전 소리가 시끄러워서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들리지 않는다면서 대답은 어떻게 해요?" "그래, 미안하구나.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단다." 텔레비전 소리가 작아졌다. "저어, 뭘하고 있어요?" 브로디는 눈을 떴다.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거야."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술을 걸다니, 그럴 수가 있어요?" "그럼! 우선 그럴 수 있다고 믿어봐. 그러면 간단히 할 수 있단다." 너같이 철없는 꼬마를 무한한 최면상태로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거란다. 브로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럼 가르쳐 줘요." "가르쳐 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러자면 조용해야 돼." 텔레비전이 꺼졌으므로 브로디는 일어났다. "최면술을 걸려면 드러눕는 게 제일 좋아. 자꾸 연습하면…" "대관절 뭘하고 있어요?" 신시아가 거실 입구에 딱 버티고 서 있다. "자신에게 최면술을 거는 방법을 배우고 있어요." "엄마는 그런 걸 싫어해요!" "그래도, 엄마…" 에릭은 브로디를 쳐다보았다. "상관하지 말고 우리 계속해요. 엄마는 내 말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 줘요." "안 돼요, 어머니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난 허락할 수 없어!" 신시아는 엄하게 말했지만, 갑자기 웃는 얼굴이 되었다. "자, 에릭, 할아버지가 오신다. 착하지, 가서 마중해야지." "싫어!" "자, 에릭, 네 방에 텔레비전을 갖고 싶다면…" 그 말의 효과는 대단했다. 잠시 후 남자들이 거실에 들어서자 에릭은 주근깨투성이 얼굴에 웃음을 띠우며 드루의 팔에 매달렸다. 드루도 함께 싱글벙글 웃었지만 브로디는 놀라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매료되고 말 거야. "오늘 저녁 자네에게 실망했네. 게임에 전혀 열의가 없었어. 틀림없이 무슨 걱정되는 일이 있나 보지?" 다니엘이 의미심장하게 신시아를 쳐다본다. "아 참, 아까 무슨 디저트 얘기를 했었는데?" "네, 삼촌. 제가 특별히 만든 디저트예요." 드루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우린 이만 실례하겠어요. 내일 일찍 법정에 나가야 해요." 신시아는 귀엽게 토라져 보였다. "유감이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오늘밤엔 푹 주무세요."


엄마가 드루에게 아양을 떠는 것을 보고 에릭은 심투룽한 얼굴을 했다. 나도 너와 같은 기분이란다. 브로디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니엘 집에서 나온 두 사람은 두 블록 떨어진 세이프하버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밤공기가 차가와 브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신시아의 꼬마를 어떻게 생각해?" 드루는 브로디의 손을 꼭 쥐었다. "역시 꼬마는 꼬마예요." 브로디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어, 드루, 얘기할 게 있는데요." "미안하지만, 나중에 해주지 않겠어? 기분 좋은 밤이니까 조용히 산책을 즐기고 싶어." 브로디는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걸었다. "저, 이제 말해도 돼요?" 그녀는 집에 닿자마자 물었다. "내일 재판 서류를 다시 한번 훑어봐야 해, 급한 얘기야?" "그렇진 않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얘긴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리고 싶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굳이 오늘 저녁에 서둘러서 말할 필요까진 없어요. "미안해, 그럼 잘 자." 서재 문이 찰칵 닫혀지고, 혼자 남겨진 브로디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드루는 정말 내일의 재판 준비로 바쁜 걸까? 아마 내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운 걸 거야. 자기가 신시아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걸 비난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어. 왜 모든 일이 이렇게 얽혀 버렸을까? 다음날 아침, 꼬박 밤을 지샌 브로디는 이제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결판을 내야겠다고 결심하고 맨발로 일찌감치 드루의 방으로 달려갔지만 방안은 텅 비어 있다. 맥이 탁 풀린다. 어쨌든 오늘 오전중으로 사무실에 일하러 나가야 하니까 그때 얘기하기로 하자. 사무실에 도착한 브로디는 곧장 드루의 방으로 갔다. 하지만 그의 방에 들어선 순간 좀전까지의 자신만만했던 기세는 사라지고, 어젯밤 어둠 속에서 몇 번씩이나 연습했던 말들이 멋쩍은 듯이 느껴진다. "뭐지, 브로디?" "2 분 정도만 시간을 내주세요." 얘길 하려고 했지만 소리가 잘 안 나온다. 헛기침을 하고 나서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신시아는 이제 곧 자유의 몸이 돼요…" "뭐라고?" 드루는 서류에서 눈을 떼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당신도 자유로와지고 싶겠죠? 전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예요." 마침내 말해 버렸다. "무슨 소리야? 벌써 우리들 결혼이 싫증났다는 거야?" "그게 아녜요! 전 조금도…" 브로디는 말문이 막혔다. 드루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만 보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브로디가 결혼을 취소하고 싶어할 때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해준다고 약속했어.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 하지만 만약 자유로와지고 싶으면 그러고 싶다고 분명하게 말해 줘. 날 위해서 그런다는 식의 얘기는 그만둬. 얘기가 끝났다면 난 이것으로 실례하겠어. 앞으로 l5 분 후면 재판이 시작되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 옆을 지나 방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브로디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생각했던 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드루를 화나게 만들어 버렸구나. 난 늘 앞뒤 가리지 않고 말해 버리는 게 탈이야. 오전

내내

수는

자기

자리에서

일에

몰두했고,

브로디는

전화를

받고

서류를

타이핑하느라 바빴다. "오늘은 조용하군요. 변호사님들은 두 분 다 법정에 가셨고, 신시아 탠디는 집에 있고…" 잠시 쉬는데 수가 말을 걸어왔다. "신시아는 자주 이곳에 나오나요?" 브로디는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와요. 다니엘을 만나고 싶어 온다고는 하지만, 드루가 여기에 있을 때는 다니엘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게다가 그 문제아…" "문제아라면, 에릭도 함께 온다는 거예요?" "거의 매번 그랬어요. 그애는 좀더 엄하게 버릇을 들여야 해요." "드루가 방에 있을 때는 그애가 어떻게 굴어요?" "그런 건 생각도 안해 봤지만, 그러고 보니 좀 얌전했던 것 같아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때 전화 벨이 울렸다. 브로디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드루였는데 뭔가 서두르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브로디, 소환장을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왔어. 지금 곧 그걸 법원까지 가져다 주겠어? 그리고 테드라는 사람의 서류철도 함께 부탁해. 수더러 말하면 찾아 줄 거야."


"알았어요. 제가 찾아 갖고 갈게요." 테드의 서류철은 언제나 드루가 중요한 서류를 넣어 두는, 열쇠로 잠그는 캐비닛 안에 있었다. 그 서류를 꺼냈을 때 탠디라고 적힌 서류철이 눈에 들어왔다. 봐서는 안 된다고 브로디는 자신을 타일렀지만, 저절로 손이 그 서류철로 간다. 떨리는 손으로 그걸 들자 서류철 사이에서 사진이랑 편지 뭉치가 아래로 떨어졌다. 주우려고 몸을 구부렸을 때 여자의 필체로 보이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저는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쭉 그럴 거예요. 하지만 저로선 안 돼요…> 편지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브로디는 그 뒤는 읽지 않고 사진과 함께 원래의 서류철에 끼웠다.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브로디는 자신의 호기심을 저주하며 두 블록 거리의 법원까지 급히 걸어갔다. 드루가 여전히 신시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이제 와서 그게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냐.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왜 오늘 아침 이혼해 주겠다는 내 제의를 거절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이혼하게 되면 난 외토리가 돼버리니까. 그래서 날 돌봐야 할 책임을 느끼고 있는 그로서는 이혼을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는 거다. 법정 안은 아주 조용했고, 배심원 후보자에게 질문하는 검사의 목소리만이 울리고 있다. 드루는 그 질문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며 후보자들이 공평한가 어떤가를 판단하려 하고 있다. 법원에서 하루를 보낸 그가 지쳐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브로디는 일순간 따뜻한 마음이 되었다. 그녀는 최근 들어 법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또 한 사람의 법률보조원이 필요하다는 수의 말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일까?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한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매일 밤 집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별빛 아래에서 정원을 손질하기도 하고, 새로운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태양이 세이프하버 저택 뒤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석양이 지는 순간, 마지막 햇살을 받아 유리창이 불길처럼 타오르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정말 세이프하버 저택은 아름다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법률보조원이 되는 것은 어떨까? 혹시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드루가 신시아와 결혼하면 어떻게 되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사무실에서 일할 수는 없어. 신시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드루를 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고, 그와 반대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더욱 괴로우리라.


그녀와의 결혼생활이 평탄치만은 않으리라는 것은 뻔하다. 신시아가 바라고 있는 건 드루 자신이 아니라 그의 지위와 재산인 거야. 뿐만 아니라 에릭이 드루를 아빠라고 부른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그게 드루가 바라는 바라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해. 나는 어디 다른 도시로 가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배심원 후보자에 대한 검사의 질문이 끝나고 판사가 5 분간 휴식을 알리자, 드루는 뒤를 돌아보며 브로디에게 손짓을 했다. "이걸 잊고 오다니, 나도 어떻게 된 모양이야. 더운데 갖고 오라고 해서 미안해." 드루는 눈치를 살피듯이 브로디를 쳐다봤다. "괜찮아요. 걷는 것도 나쁘진 않은걸요." "홀로 나가지. 서기실에 있는 구두진술 필사본을 가지러 가야 해. 이제 재판관이 휴정을 선언할 테니까, 그러면 함께 점심이라도 할까?" "괜찮아요. 수와 교대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녀는 오늘 집에 가고 싶대요." "함께 차를 보러 가려고 생각했는데. 브로디도 한 대 필요하지 않아? 링컨은 내가 하루종일 쓰고 있으니 말이야." "제겐 필요없어요. 정말이에요." 드루가 의아해했지만 그녀는 이 이상 더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만 만지작거렸다. 복도에 검사가 나타났다. "자네 사무실의 새 법률보조원인가?" 브로디를 눈여겨보며 묻는다. "우수한 보조원이 될 것 같아." 드루가 대답했다. "그럼, 내가 스카우트해야겠는데." "아마 그건 어려울걸. 내 아내니까 말이야." "자네도 마침내 속을 차렸군. 전혀 몰랐었는데." 검사는 꽤나 놀란 표정이다. "바로 일주일 전이었어." "한데도 신혼여행을 떠나지 않고 법정에 나오고 있는 거야? 지독한 친구군." "방심하지 말게. 결혼했다고 해서 내 머리에 곰팡이가 슬진 않을 테니까." 드루는 빙긋 웃었다. "제발 그러길 바라겠네." 웃으면서 검사는 법정으로 돌아갔다.


드루가 서기실에서 받아든 속기록을 뒤적이고 있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브로디는 제리와 이사벨의 모습을 보고는 긴장했다. 드루도 제리 일행을 진작에 알아차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혼증명서를 신청하러 왔을 거야." 브로디는 드루를 올려다보았다. "결혼증명서는 간단히 끝나나요?" 중얼거리듯 묻는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우리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선택할 수가 없어. 우연에 좌우될 때도 있고, 그건 우리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드루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브로디의 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바로잡아 주었다. 그것은 드루 자신의 사랑에 묘비를 세워 주는 말처럼 들렸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줄곧 브로디는 그 말과 자기를 아내라고 소개했을 때의 드루의 어조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해 봤다. 아무튼 지금의 이 상태는 드루에게 공평하지가 못해. 나는 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 때문에 드루는 사랑하는 사람을 단념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 것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내라면 사정은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실제는 형식상으로만 아내이니… 그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할 거라 진심으로 마음먹고 있다는 걸 그가 알도록 해야 돼. 신시아와의 결혼이 그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면 나는… 제리와 함께 장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부풀어 이 도시에 돌아온 게 불과 4 주일 전인데, 벌써 몇 년이 지나 버린 것만 같다. 10 지루하게 한 주가 지나고, 새 주일이 시작됐다. 요새 드루는 다루고 있는 재판에 눈코 뜰새없이 바빠, 아침에 그녀가 눈을 뜨면 그는 벌써 사무실에 출근하고 없고, 밤엔 늦도록 사무실에 남아 있거나 세이프하버의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바람에 그와 얘기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그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녀 자신도 잘 몰랐다. 확실한 건 다만 자신이 지금 매우 참담한 기분이라는 점뿐이다. 하지만 드루는 자기보다 더 괴로울 거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주말에는 이사벨의 결혼식이 있다. 그것은 해먼드 곶에서의 올 여름 최대의 사교행사가 될 것이며, 교회는 많은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결혼식 날이 가까와짐에 따라 브로디의 고민은 깊어지고, 가슴속의 응어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혼식엔 갈 수가 없어 …

금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소송 관계 서류철을 작성하면서

브로디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는 모습을 어떻게 냉정하게 지켜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쨌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순 없어. 결혼식에 갈 수 없다는 걸 드루에게 납득시킬 만한 구실이 없다. "무슨 일이 있어요, 그렇게 멍하니 있게?" 수가 말을 걸었다. "아녜요, 이 서류철을 작성하는 데 지쳤을 뿐이에요. 아무리 해도 도무지 끝날 것 같지가 않아요." "무슨 일에나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면은 있게 마련이죠. 법률도 예외는 아녜요. 브로디, 요즘 무슨 일이 있어요? 처음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나서고, 가능한 한 공부까지 하겠다고 그렇게 의욕에 차 있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

모든 일에 흥미가

없어진 것처럼 보여요." "거기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곳 일에 싫증이 났나요? 아니면 인생 자체에? 결혼이라는 게 생각보다는 그리 즐겁지 않은 모양이죠?" 수는 계속해서 물고늘어진다. "난 어린애가 아니예요. 이 세상이 모두 장미빛이라곤 생각지 않아요." 브로디는 다부지게 말하고는 일을 계속했다. 모두들 나에 대해 제발 쓸데없는 걱정들일랑 하지 말아 줬으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잠시 후에 수가 브로디 곁으로 다가왔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내가 좀 말이 지나쳤나 봐요." 브로디는 바닥 쪽을 본 채 단지 고개만 끄덕였다. "해먼드 선생님은 결혼한 이후로 정말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지신 것 같아서 제가 놀라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주에는 왠지 모르게 굉장히 초조해하시고…" "한꺼번에 두 건의 재판을 맡고 있는걸요. 어쩔 도리가 없지요." 브로디는 미소를 짓는다. "재판이 끝나면 예전의 해먼드 선생님으로 되돌아오시겠죠. 자, 이제 난 이사벨의 결혼계약서를 다시 작성해야겠어요. 이것으로 여섯 번째나 다시 고쳐 쓰는 거예요. 패닝 씨는 이랬다저랬다 생각을 자꾸 바꾸거든요." "이사벨을 지키기 위해서죠." 수가 깜짝 놀란 듯 얼굴을 들었다. "브로디는 제리 휘트콤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다고? 그 말은 화살처럼 브로디의 가슴에 꽂힌다. "부부 가운데 한쪽은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고 다른 한쪽은 빈털터리인 경우, 결혼 전에 재산에 관한 계약서를 작성해 두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럴까요? 나완 상관없는 일이지만." "드루가 결혼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좀 놀랐어요. 하긴 대장장이 집에 식칼이 없다고 하더니 그 짝인지도 모르겠어요." "당신 경우하고 제리의 경우는 전혀 달라요." "그건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재산을 노린 건 아니라고 브로디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머릿속으로는 제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도대체 이건 무슨 까닭일까? 제리는 나쁜 인간은 아니다. 어린시절의 가난이 그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에게 어떤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렇다. 드루가 이혼 얘기를 회피하고 있는 이유를 알았어. 만약 자기가 먼저 이혼을 제기하면 나한테 위자료를 지불해야 되니까 이혼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꾸미고 있는 거야. 만약 내 쪽에서 이혼을 제기한다면 … 어느 쪽에서 제의하든 대단한 차이는 없어. 우리의 결혼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고, 이혼은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니까. 드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이해시켜야만 돼. "그에게 괜찮은 구석이라곤 아무 데도 없죠?" 수가 슬쩍 묻는다. "누구 말예요?" "제리 휘트콤 말예요. 그 말고 또 누가 있어요? 빈털터리인데다가 능력도 없다고 들었어요. 거기에 비하면 당신에겐 온갖 가능성이 있고, 게다가 돈도 있잖아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에요." "당신이 말하는 건 드루의 돈을 말하는 거겠죠?" "아뇨, 브로디의 신탁기금을 말하는 거예요." "당신까지도 그런 소릴 … 이 도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한밑천 재산을 남겼다고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앤디 해먼드가 당신을 위해서 설정해 놓은 신탁기금이에요." 갑자기 주위가 밝은 오렌지 색깔로 변했다. 이대로 정신을 잃는 게 아닌가 싶어 순간 브로디는 책상 모서리에 몸을 기댔다. 수는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사벨의 결혼계약서 작성에 열중하고 있다. "앤디 해먼드 선생님은 브로디가 독립해서 살아나갈 수 있길 바라셨어요. 그분은 후견인이 되신 이후 당신을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계셨으니까요."


왜 드루는 신탁기금에 대해 내겐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그이가 신탁을 해약한 걸까? 아니면 자기가 그 돈을 모두 써버렸나? 갖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신탁기금에 대해선 전혀 몰랐어요. 그 신탁기금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 거죠?" 브로디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보통 형식이죠." 수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결혼계약서로 눈을 돌렸다. 수가 잠자코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브로디는 점점 긴장이 고조되어 거의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아, 이제 끝났어." 수는 계약서를 옆으로 밀어놓으며 한숨을 내쉰다. "앞으로 30 분쯤 있으면 그들이 서명하러 올 거예요. 참, 신탁기금 말예요, 그건 보통 형식으로 돼 있어요. 브로디가 21 살이 되면 이자를 받을 수 있게 되고, 그리고 30 살이 되면 원금에 손을 댈 수 있어요. 아니, 25 살이었던가? 신탁 사본이 저기 어디 있을 텐데…" 그런 것이 저기 어디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닐 리가 있나요. 브로디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드루는 그 신탁기금에서 내 교육비를 지불한 건가요?" "그래요, 그밖에도 필요한 비용은 모두 거기서 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벌써 다 써버리고, 아무 것도 안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수는 빙그레 웃었다. "자, 5 시가 지났으니까 돌아가도 돼요. 패닝 씨와 제리 휘트콤이 올 테니까 난 남아 있어야 하지만, 굳이 브로디까지 있을 필요는 없어요." 브로디는 넋 나간 듯 느릿느릿 책상을 정리했다. 그들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자리에 있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한시라도 빨리 홀로 남아 이 상상도 못했던 신탁기금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사무실을 막 나오다가 브로디는 하마터면 이사벨 패닝과 부딪칠 뻔했다. 이사벨은 손에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선물 꾸러미를 잔뜩 안고 있다. "걸을 때는 앞을 잘 보세요, 브로디.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잖아요." "미안해." 이사벨은 꽤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 "이봐요, 이사벨, 두렵지 않아? 겨우 몇 주일 전에 만난 남자하고 결혼하는 거 말이야. 지금이라도 늦진 않았어. 지금이라면 아직…" 브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느닷없이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이사벨의 얼굴이 홱 굳어졌다. "우리의 결혼이 끝장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결혼한 주제에, 당신은 아직도 그를 원하고 있군요!" 브로디는 말문이 막혔다. 아냐, 난 널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거야. 어떡하면 지금의 내 심정을 너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요." 이사벨은 그렇게 내뱉고는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착잡한 심정으로 집에 도착한 브로디는 도시 전체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관절 어찌된 셈일까? 어쨌은 이미 신탁기금이 없는 것만은 확실해. 남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는 드루가 제리한테 내가 무일푼이라고 분명히 일러 주었으니까. 신탁기금은 처음에는 있었지만, 내 교육비랑 그밖에 다른 비용으로 다 써 버린 걸까? 아니면 앤디 해먼드가 마지막 순간에 생각을 바꿔 신탁을 취소해 버린 걸까? 하지만 일부러 서류까지 작성해 놓았으니, 그것을 파기했을 린 없을 테고… 아니면 드루가 신탁을 해약해 버린 걸까. 착복했다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 아냐, 그는 그럴 사람은 아냐… 아마 정식으로 신탁을 해약했을 거야. 거기엔 그럴 만한 까닭이 틀림없이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그렇다고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아무리 어린애였지만 내게도 알 권리는 있었을 텐데. 갖가지 의혹이 머릿속을 지나가고, 브로디는 울부짖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진실을 알려면 드루에게 물어볼 도리밖에 없어.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자신이 없는걸. 브로디는 밤늦도록 어두컴컴한 서재에 꼼짝 않고 앉아서 드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 굳어져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창밖에 불빛이 비쳤다. 드루가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여러 가지 의문들을 분명히 밝히고 싶은 브로디는 뒷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은 드루가 아니었다. "제리!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널 만나러 왔어." 제리는 그녀를 밀어젖히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오면 안 돼. 한번만 또 오면 그 자리에서 쫓아낼 거라고 드루가 말했다구." "놈은 아직 사무실에 있어. 이 귀여운 부인 혼자 내버려 두고 말야. 난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제리가 안으려고 했지만 브로디는 몸을 피했다.


"너와 떨어져 있는 걸 참을 수 없단 말이야. 매일 밤 너를 껴안는 꿈을 꾼다고… 브로디,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줘. 부탁이야." 이것이야말로 내가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지만… "난 결혼한 몸이야, 제리." "나도 내일 결혼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거야." "한 달 전에 그 말을 들었다면…" "내가 바보였어." 제리에게 팔을 잡힌 브로디는 덮쳐 오는 입술을 피하려고 얼굴을 외면했다. 술냄새가 난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지?" "내 독신 시절 최후의 파티지." 그는 브로디의 목에 입술을 갖다댄다. "파티차 한창일 때 이 결혼으로 잃는 게 무엇인지를 갑자기 깨달았어. 너만 있다면 그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아." "제발, 손을 놔줘요." "네가 결혼한 건 날 질투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지? 그래, 그건 분명히 적중했어. 지난 2 주일 동안 내내 해먼드 놈이 너한테 키스를 하고 너의 몸을 껴안고 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해먼드와는 헤어져!" "그럼, 이사벨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게 필요한 건 너야. 이사벨은 단지 돈줄일 뿐이야." 그 무자비한 말에 브로디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우리가 함께 힘을 합치면 뭣이든지 할 수 있어. 부탁이야, 내 사람이 되겠다고 말해 줘." "당신은 겉으론 악당처럼 행동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엔 소년처럼 착한 마음이 들어 있다고 나 자신에게 타일러 왔는데…" 브로디는 중얼거렸다. "나한테 중요한 건 네 사랑뿐이야." "네가 다른 사람에겐 동정심이 없고 털끝만큼의 양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제리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건 그래. 내가 한 짓은 모두 우리 둘을 위해서야!" "이사벨 패닝을 쫓아다닌 것도 그 때문이라구?"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지." "너는 일할 줄을 몰라?" 브로디를 자극하려는 듯 제리는 몸을 더욱 바싹 갖다붙인다. "브로디, 사랑해."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기에 누가 서 있는지 브로디는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순간 온 방안이 얼어붙은 것만 같다. "제법 근사한 파티 같은데."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드루는 브로디를 떼어 놓고는 턱을 한방 갈겨 제리를 바닥에 드러눕혔다. "방으로 가 있어, 브로디. 이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는 명령하듯이 말했다. "싫어요." 브로디는 가냘프게 말했다. "제리는 취했어요." "그래도 이 같은 짓거리는 용서할 수 없어!" 드루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다. "지금의 태도는 당신답지 않아요. 취해 있는 사람을 때리다니 말도 안 돼요." "보기 싫으면 보지 마!" 브로디는 드루의 팔을 막았다. "제발 그만두세요." 그는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브로디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난 이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두 사람 다 비실비실 일어난 제리는 보지 못했다. 그가 커다란 과일 그릇에 들어 있던 과일들을 테이블 위에다 비우고 있는 것을 본 브로디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드루, 위험해요!" 뒤돌아본

드루는

덤벼드는

제리의

팔을

잡아눌렀고,

과일

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나 버렸다. 배를 한 대 얻어맞은 제리는 그 자리에 쓰러지며 장식장에다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순간 방안이 고요해졌다. 이윽고 제리가 눈을 뜨자 브로디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브로디의 기도가 통했나 보군, 살인은 안한 셈이야. 머리도 지독하게 단단한 놈이군. 다치지도 않은 모양이야. 내일 아침이면 또 늘상 있는 숙취로 인한 두통이라고만 생각하겠지."


"당신들 두 사람 다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빌겠어요!" 브로디는 북받쳐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자기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간신히 방으로 와서도 브로디는 자리에 앉질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금 주방에서 일어난 일이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드루의 눈에는 분명히 살기가 있었다. 그가 어쩌면 그렇게 미친 사람같이 될 수 있을까. 아, 끔찍해… 좀

기분이

가라앉자

드루하고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다리를

휘청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드루는 서재에서 고딕 풍의 창문을 통해 깜깜한 정원을 말없이 내다보고 있었다. 브로디가 입구에서 망설이고 있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애인을 찾고 있는 거라면 그놈은 벌써 돌아갔어." "차 소리가 났을 때 전 당신이 돌아온 줄 알았어요. 만약 제리라는 걸 알았다면 문을 열어 주지 않았을 거예요." 드루는 잠자코 있다. "정말이에요. 맹세해도 좋아요!" 드루는 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침묵을 지킨 채 창문 쪽으로 갔다. 브로디는 옆에 있던 체스 판에서 흑의 왕패를 집어들어 드루에게 냅다 던졌다. "제 얘기를 좀 들어주면 무슨 탈이 나요!" 드루는 뒤돌아보았다. "어째서 당신 얘기를 들어야 하지? 검은 걸 희다고 우기는 당신 말 따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제리를 불러들인 게 아니라고 그 달콤한 목소리로 말할 작정인지는 모르지만, 난 이제 그 따위 말은 믿지 않아." "얘긴 내일 하겠어요. 그때쯤이면 당신도 좀 마음이 가라앉아 있을 테니까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현관 홀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갔다. "난 지금도 아주 냉정해." 뒤쫓아온 드루가 한발 한발 그녀를 계단 위 벽 쪽으로 몰아붙인다. "제리를 부르진 않았어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안겼겠지?" 드루의 뜨거운 손이 천천히 그녀의 팔을 따라 올라온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키스도 했을 텐데?" "전 막으려고 했어요."


"나한테도 그럴 셈이야?" 세차게 맥박치는 목 밑으로 드루의 뜨거운 입김이 와닿는다. 날카로운 말과는 반대로 그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정말로 막으려고 했어?" "정말이에요." 그녀는 모기 소리만한 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리고 이런 것도 했어?" 드루는 그녀의 부푼 가슴을 손으로 감싸며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만!" 몸을 틀어 그의 팔에서 빠져나가려 몸부림쳤지만, 드루는 그리 쉽사리 놓아 주질 않는다. "어디까지 갔지? 침대까지 간 거야? 아니면 아직이야?" "너무해요…" 드루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브로디의 첫 아기에게 내 성을 붙일 영광이 주어질 땐 분명하게 내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한테도 기회를 줘야 할 게 아냐. 안 그러면 공평하질 못해." 그녀의 방문이 열리고 번쩍 안아올려진 그녀는 침대로 옮겨졌다. 그리고 몸을 피할 사이도, 항의할 틈도 주지 않고 드루는 그녀 곁에 누웠다. "드루…" "아직 내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니 기쁘군." 드루는 그녀의 몸을 누르며 격렬하게 키스를 퍼붓는다. 아, 하느님, 드루는 진심인가 봐요… 두려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브로디는 안간힘을 써서 그의 얼굴을 외면했다. "이러는 건 싫어요, 드루. 아 하느님, 제발." 드루의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숨을 삼켰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건, 이제 더 이상 항거할 힘이 없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드루는 별안간 한숨을 내쉬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브로디의 볼과 매끄러운 어깨를 어루만진다. "이제 두번 다시 브로디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겠어." 고통으로 가득 찬 목소리다. 그리고 드루는 방에서 나갔고, 브로디는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다. 11


브로디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드루의 타는 듯이 뜨거운 애무의 손길이 느껴져 벌떡 일어나서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했다. 어른과 게임을 하려면 자기 몸을 지킬 방법을 생각해 둬야지. 브로디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이제는 드루도 믿을 수가 없다. 그가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언제나 매사에 냉정하게 대처하는 사람이었는데… 브로디는 담요를 밀어붙이고 일어나서 방안을 거닐었다. 제리를 집안에 들여놓지만 않았어도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아니면 드루와 얘기를 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게 잘못된 일이었을까? 아무튼 그가 뭐라고 얘기하든 난 이제 이 세이프하버에는 있을 수 없어. 내 방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면, 이곳은 이미 어린시절의 평화로왔던 보금자리는 아냐. 그렇지만 이제 어린애는 아니니까 자신을 애처롭게 여기는 일 따위는 그만두라고 브로디는 다시 자신을 타일렀다. 문제는 모두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거야.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그리고 삶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장난하는 어른들의 게임을 하면서, 모든 걸 어린 시절처럼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거야. 이미 결혼한 몸이면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다니, 그러면서 어떻게 말썽을 피할 수가 있을까. 제리에 대한 사랑… 그 꿈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건 기뻐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제리와 결혼할 수 없는 이상, 누가 뭐라 해도 난 이제 그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난 제리가 아니라 단지 사랑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브로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옆에 있는 아무 거나 마구 집어던질 것만 같다. 제리를 사랑했던 내 어리석음을 저주해야 할까, 아니면 그의 계략에 걸려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사벨 패닝이라고 다행스러워해야 할까. 지금은 다만 허무감밖에 없다. 내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드루가 제기했던 결혼― 언젠가는 진정한 의미의 결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드루와는 같이 살 수 없다. 오늘밤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제 드루를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야. 그는 내가 항복하도록 밀어붙일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는 안했어. 나의 단 한마디 항의로 그는 난폭한 행동을 그만두고, 내가 알고 있는 이제까지 사랑해 온 본래의 그 드루로 되돌아갔었어. 사랑해 온 … ? 브로디는 깜짝 놀라 빗을 꽉 움켜쥐었다. 난 드루를 오빠처럼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브로디는 거울에 비친 창백한 자신을 보며 말했다. 그를 아저씨, 혹은 아버지같이 사랑했던 거야.


남편으로서는 어떨까? 브로디는 머리를 저었다. 그럼 왜 결혼했지? 그 물음이 방안에 메아리친다. 나는 외로왔으니까. 이 넓은 세상에서 혼자 살아가는 게 두려웠고 드루가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그를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하지만 그건 바로 사랑이라는 거잖아? 자신을 희생시키더라도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바로 사랑이야. 아니야, 사랑은 그것뿐만이 아니야. 사랑이란 온 세상이 장미빛으로 보이고,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어야만 해. 그 사람하고만 있으면 그밖에 아무 것도 필요없게 되고, 진정한 사랑이

있으면 다른 모든 문제는 사라져야 해.

내가

제리한테

가졌던

그런

감정이었어.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만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잖아.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선언했다고 해서 현실의 문제가 안개처럼 사라져 가지는 않았어. 게다가 제리에 대한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하고 그의 본심을 알게 된 순간 식어 버렸어. 그렇다면 사랑에 대해서 난 지금까지 뭔가를 잘못 생각해 왔던 거야. 브로디는 화장대에 팔꿈치를 받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랑이란 함께 일하고 가정을 꾸미며, 아기를 낳아 기르고 인생을 충만하게 채워 가는 것… 거기까지 떠올린 브로디는 재빨리 생각을 멈추었다. 이건 마치 드루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잖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 … ? 그런 바보 같은 …

하지만 사랑은

그것뿐만이 아냐, 사랑에는 정열이 필요해. 상대방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없다면 진정한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어. 난 드루한테서는 그런 걸 느끼고 있지 않아. 그러니까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는 수 없는 거야.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안정이 되는 듯했다. 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하지만 눈을 감은 순간 다시 드루의 따스한 손과 부드러웠던 입맞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품에 꼭 안겼을 때의 그 우람한 육체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다가 방문 앞에서 뚝 멎었기 때문에 브로디는 몸을 일으켰다. "브로디, 아직 안 자는 거야?" 속삭이는 듯한 드루의 목소리다. 브로디는 자신이 일어나 있다는 것을 모르도록 숨을 죽였다. 긴 침묵이 흐른 뒤 다시 발소리는 멀어져 갔고, 이윽고 드루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제 이것으로 끝이야, 그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나는 드루를 사랑하고 있어. 브로디는 지난 몇 주일 내내 가슴속 깊이 자리하며 사라지지 않던 그에 대한 사모의 감정을 마침내 인정했다. 아니, 지난 몇 주일 동안이라기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드루를 아저씨도 후견인도 아닌 애인처럼 생각하고 있어. 그를 애인으로 확실히 의식하게 된 것은 어쩌면 그 호텔에서의 밤부터야. 그때의 키스로 내 가슴에 사랑의 불길이 타올랐던 거다. 오늘밤 드루가 요구해 왔을 때 저항했던 건 결코 그가 싫었기 때문이 아니야. 만약 그런 닌폭한 태도가 아니라, 좀더 부드럽게 요구해 왔더라면 난 받아들였을 거야. 왜냐고? 난 그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브로디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기된 볼에 자신의 손바닥을 갖다댔다.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브로디의 가슴에 피어올랐다. 사랑이란 즐거움뿐만 아니라 괴로움도 서로 나눠 갖는 거야. 고통이 없는 인생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사랑이란 모든 것을 서로 나눠 갖는 거야. 나는 인생의 모든 것을 드루와 나눠 갖고 싶어 …

그를 거부하지 말았어야 했어. 민약 드루를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껴안아 주었더라면 그도 예전의 그 부드러움을 되찾았을지도 몰라. 나는 그의 아내니까, 신시아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관계를 드루와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어. 신시아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왜 서재에서 드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브로디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에 앉아서 시내의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이제는 신탁기금에 대해선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일단 확실히 해둬야지. 내일 드루에게 물어보자.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면 돼. 내 예상대로 그것이 이젠 남아 있지 않다면, 돈이 없어진 것을 숨기기 위해 드루가 나와 결혼한 것이라면… 아,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 브로디는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그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기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 그 말이 브로디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만약에 나와 이혼하고 신시아와 결혼하는 것이 드루의 행복이라면… 나는 못해. 드루와 헤어지다니 … 브로디는 잠들지 못한 채 이마를 차가운 유리창에 맞대고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윽고 3 시가 되었다. 창가에 앉아 자기자신과 싸우고 있던 브로디는 몽유병 환자처럼 슬며시 일어나서는 드루의 방으로 갔다. 그의 침실은 조용하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만이 어둠 속에서 일렁이고 있다. 드루는 자고 있는 모양이다.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브로디는 가슴이 철렁했다. "왜 왔지?"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는 마치 허깨비라도 보고 있는 표정이다. 브로디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방을 가로질러 침대로 다가갔다.


"제가 꼭 해야 할 일을 하러 왔어요." "브로디, 난 너무 난폭하게 굴었어. 당신이 내게 빚진 건 아무 것도 없어." "아마 제 자신에 대한 빚일 거예요." 브로디는 달빛 속에서 엉거주춤 서 있다. "절 안아 주시겠어요?" "왜지, 브로디?" 브로디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떨리는 손으로 드루의 얼굴을 만졌다. "오늘밤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발, 드루…" 긴 침묵이 흘렀다. "난, 난 널 내쫓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진 못해…" 조용히 중얼거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브로디는 그의 품안에 살며시 안겨든다. 드루의 살갗은 부드럽고 따스하다. "전 두려워요…" "두려워할 건 없어." 드루의 손과 입술이 부드럽게 브로디의 몸을 애무해 온다. 저 깊은 속에 잠들어 있던 정열이 활활 타올라 그 불길로 몸도 마음도 다 타버릴 것만 같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걸까? 이 아득한 쾌락의 불길을 혼자서는 감당해낼 수 없다. 드루도 같은 느낌을 맛보았고, 두 사람 모두 환희의 절정에 도달했다. 이윽고 감미로운 나른함이 온몸을 감싼다. "이래도 할 말이 없는 거야?" 브로디의 목에 입술을 눌러대며 속삭인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다는 거죠? 서로의 육체가 모든 것을 다 얘기하고 있는데. 자신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있는 드루를 바라보며 브로디는 기분 좋은 피로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최후의 싸움에 도전해서 굴복한 여자가 맛보는 행복감을 곰곰 음미하면서. 하지만 그러한 행복감도 새벽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침해가 비치기 시작하자, 어쳇밤 자신이 한 일이 떠오르며 소름이 오싹 끼쳤다. 브로디는 아직 자고 있는 드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한밤중에 드루의 침실에 와서 안아 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정말 내가 어떻게 되었던 거야.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아직 신탁기금 문제가 남아 있고, 신시아 일도 있다. 어젯밤 일로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돼버렸다.


드루가 깨지 않도록 살짝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을 나왔다. 이제 아래층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계면쩍겠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침대에 함께 있는 건 그 이상으로 창피해서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주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 브로디는 기분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드루는 대관절 어떤 얼굴로 나타날까? 시간은 시시각각으로 흘러간다. 이사벨의 결혼식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도 채 안 남았는데 그는

아직도

내려오지

않는다.

브로디는

커피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노크했지만 대답이 없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으며, 침대 시트는 흐트러진 그대로다. 브로디는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고는얼굴을 붉혔다.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그쳤으므로 그녀는 소리쳤다. "드루, 결혼식은 l0 시예요. 잊지 마세요." "지금 곧 나가." 브로디는 커피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 오늘은 예쁘게 보여야지. 옷장 속을 뒤져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잘 어울리는 겨자색 드레스를 골랐다. 이 목걸이는 날 지키는 방패가 되어 줄 거야. 서둘러서 화장을 마치고, 챙이 넓은 희 모자를 썼다. 모자는 우아해서 어른스럽게 보일 것이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내 표정을 읽을 수 없게 해줄 거야. 계단 아래서 기다리는 드루의 모습을 보니 브로디는 마음이 아팠다. 바느질이 잘된 회색 양복을 입은 그는 한층 멋있어 보인다. "잘 잤어, 브로디?" 그의 초록색 눈은 주의 깊게 빛나고, 그 목소리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다. 미친 것 같았던 어젯밤의 일은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을 작정인 모양이다. 그가 그럴 생각이라면 나도 모르는 체해야지 하고 브로디는 태연자약하게 말을 걸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식에 늦어요." "세기의 결혼식을 놓칠 생각은 없어." 그의 목소리가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정말 한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결혼식이에요." "특히 브로디에게 있어선 말이지. 그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선 제리가 결혼했다고는 믿지 않을 테니까." 그 말에는 분명히 가시가 있다. 브로디는 잠자코 있었다. 드루가 현관 문을 잠그고는 좀전과는 달라진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미안해, 말하지 말아야 될 것을 말해 버렸군."


교회는 세이프하버에서 불과 한 블록 거리에 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꽃으로 장식된 제단, 불켜진 양초 …

정말로 제리와

이사벨이 결혼하는 거야… 브로디는 예리한 아픔이 자신의 몸속을 뚫고 지나가는 게 아닐까 싶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쭈뼛했다. 하지만 제리와 헤어진 이후 응어리졌던 마음의 고통은 어느 새 사라져 버려 지금은 다만 허무감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오르간 소리가 높이 울려퍼지고, 패닝의 인도로 이사벨이 교회의 중앙 통로로 걸어나가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승리의 환희로 가득 차 있다. 제리 쪽은 창백하고, 얼굴의 한부분이 조금 부어 있는 것 같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신부님의 말이 시작되자 브로디는 눈을 감고 2 주일 전에 있었던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나 제리는 그대 이사벨을 아내로 맞아…" 제리는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신부님을 따라 서약의 말을 하고 있다. 드루가 브로디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를 지그시 주시하고 있다. 내가 이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거야. 브로디는 고개를 숙였다. 모자 챙 덕분에 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부터 얼굴 표정을 숨길 수가 있었다. 드루는 내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내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까? "좋을 때나 싫을 때나…" 틀리없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야. 우리 두 사람은 아무런 감정이 얽히지 않은 안정된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했지만,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은

계획

밖의

일이었으니까.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드루의 건강이 나쁜 게 아니냐고 수가 말했을 때에 느꼈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그를 잃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서로 위로하며…" 내 마음의 변화를 드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알게 된다면 그는 비록 자유롭게 되고 싶어도 날 자기 곁에 붙들어 두려 할 거야. 그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니까. 쏟아지는 눈물을 멈추려고 브로디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드루의 손에 다시 힘이 가해져서, 브로디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틀림없이 내가 제리 때문에 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드루는 지금의 내 기분을 믿지 않을 거야. 제리에 대한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말한 게 바로 나 자신이니까. 그래 놓고 금방 마음이 변했다면 그는 믿지 않을 거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제리의 서약을 들으며 브로디는 자신의 결혼을 생각했다. 우리의 결혼은 영원한 걸까? 아니면 다른 많은 부부들처럼 결혼생활의 귀착점은 냉랭한 법원일까? 마음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했을 뿐인 결혼이 갑자기 이렇게 소중한 것이 되디니 우스운 노릇이다. 지금은 드루 말고는 아무도 바라지 않는다. 혹 그를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른 상대를 찾지 않고 혼자서 고독을 음미할 거야. 제리에게 배신당했을 때는 이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오르간이 다시 높게 울려퍼지고, 식을 마친 신랑신부가 중앙 통로로 걸어나왔다. 이사벨은 만면에 밝은 웃음을 띠고 있다… 결혼식 날의 신부는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확실히 오늘 이사벨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 언제까지라도 지속되길 브로디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괜찮아?" 드루의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로디가 얼마나 괴로와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어. 이 이상 브로디를…" "정말 화려한 결혼식이었죠?" 신시아가 드루의 팔에 팔짱을 끼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게다가 참석한 사람이 딱 두 패로 갈라져 있는 게 참 재미있지 않았어요? 점잖은 사람들은 신랑 친구들 옆에 가까이 가면 때라도 묻을까 봐 모두들 식장 한쪽에 몰려 앉아 있었어요." 다니엘이 드루의 소매를 당겨 재판 상황을 물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옆으로 비켜서 업무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기운이 없어 뵈는군요, 브로디. 노래를 불러 달라고 청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결혼식과 비교해서 이사벨의 결혼식이 화려했기 때문에? 설마 그런 일로 낙담하고 있을 리는 없겠죠?" 신시아가 동정하는 투로 말했다. "물론이죠." 브로디는 조용하게 대답했다. "이 결혼은 오래 가지 못할 거예요. 결혼식 하객들에 대한 답례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결혼이 깨지거나 하면 이사벨이 어떤 얼굴을 할지 볼 만할걸요." "그런 건 알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지도 몰라요." "그럼, 우리 내기할까요? 적어도 브로디에 관해선 내기를 할 여지도 없지만서도. 어마어마하게 식을 올리지 않아서 그래도 참 다행이에요. 조용히 식을 올리고 조용히 이혼을 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예요."


브로디는 얼굴을 들어 신시아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드루와 내가 이혼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신시아는 의기양양한 듯 더욱 크게 웃었다. "드루는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한테 눈치채이고 싶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당신과 결혼한 거예요. 하지만, 내가 이제 곧 자유의 몸이 되는 걸 그가 보게 되면, 당신의 승산은 물거품이 되고 말 걸요." "꽤 자신있는 모양이군요." "그래요, 당신에 대한 드루의 양심의 가책이 누그러질 때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감안하고 있어요. 그런 강한 도덕관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니깐 말이에요. 난 결코 초조하게 굴진 않아요. 조만간 드루는 당신과의 유희에 지쳐서 내게로 돌아올 거니까요." "마치 다 결정된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내가 참견할 여지는 전혀 없는 것처럼 말예요." "당연하지 않아요. 마음이 다른 데 있는 사람을 억지로 붙들어 매둘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신시아는 차갑게 내뱉었다. 두고 보라고, 신시아. 꼭 드루를 붙들어 두고 말 테니까 … 브로디는 마음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12 그 용감했던 맹세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브로디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집안의 정적은 깊어만 가고, 세이프하버 저택 자체가 토라져서 울적해져 버린 것만 같다. 재판이 2 주일째로 접어들어 드루는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로 나갔고, 집에 있을 적에도 서재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많았다. 브로디는 마음의 갈피를 못 잡아 매일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이대로 결혼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드루와는 며칠째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들은 잘 살아갈 수 있는 가망성이 있는 걸까? 이런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수요일 오후, 브로디는 수의 딸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끼고, 당장 소나기라도 퍼부을 것 같은 날씨다. 라일리 부인이 와서 이사벨의 방문을 알렸다. 브로디는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사벨은 자마이카로 신혼여행을 가 있을 텐데요." "여행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어깼든 지금 여기에 와 있어요. 거실로 안내했어요." "차를 준비해 주세요. 저도 곧 가겠어요." 수의 딸에게 숙제를 내주고 라일리 부인이 특별히 구운 비스킷을 주어 돌려보낸 후 거실로 향했다. 신혼여행에서 이렇게 빨리 돌아 오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결혼식 전날 밤에 제리가 털어놓은 그 끔찍한 말 ― 결혼은 단지 돈줄이야. 이사벨은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 ― 을 이사벨에게도 말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사벨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라일리 부인에게 일러 드루에게 경찰을 불러 달라는 게 낫지 않을까. 좀 상상이 지나쳤어. 드루는 일 때문에 바쁘니까 귀찮게 굴지 말아야지. 게다가 경찰을 부를 필요도 없을 거야. 연약한 이사벨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뻔한걸. 이사벨은 열린 창문 곁에 서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시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선글라스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얼굴은 카리브 해에 갔다온 사람치고는 너무나 창백하다. 차를 날라온 라일리 부인이 방에서 나가자 이사벨은 뒤돌아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죠?" "알고 있다니 뭘?" 브로디는 어리둥절했다. "부탁해요, 브로디, 그것 보라고 놀리지 말아 줘요." 이사벨은 창가에서 떨어지더니 선글라스를 벗었다. 브로디는 깜짝 놀랐다. 이사벨의 왼쪽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이것뿐만 아녜요." 이사벨은 소매를 걷어올려 다른 멍자국을 보여 주었다. "보고 싶다면 아직 다른 데도 또 있어요." 숨쉬기도 괴로운 듯한 기색이다. "갈비뼈도?" 브로디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아파보기는 생전 처음이에요." "그렇다면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받기 전까진 차는 안 마시는 게 좋아." "괜찮아요. 이 멍은 사흘 전에 생긴 거고, 그때부터 마음내키는 대로 이것저것 아무 거나 먹고 있는걸요. 하지만 사실은 그다지 식욕이 없어요." "그 멍은 사흘 전에 한꺼번에 생긴 게 아니지?" 멍 중에는 가시기 시작한 것도 있어서, 비전문가의 눈에도 그것들이 한꺼번에 생긴 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가 있다. 이사벨은 어깨를 움츠렸다. "사실은 그래요. 눈은 어젯밤에 그랬어요. 오늘 아침 그가 해안에 나간 사이에 짐을 꾸려서 도망쳐 왔어요. 난 바보인진 몰라도 자기 남편의 샌드백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알아요." "물론, 그래."


브로디는 소파에 기댔다. "그런데 왜 나한테 왔지?" "그건 말예요, 전에 당신이 내 팔에 멍이 든 것을 봤을 때, 진정으로 걱정해 줬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해먼드 씨 사무실에 이런 꼴로 가고 싶진 않았어요. 가정부 아줌마에게 보인 것만도 창피해서 죽겠는데…" "괜찮아, 라일리 부인은 입이 무거우니까. 드루는 법정에 나가 있는데, 몇 시에 돌아올지 잘 모르겠어. 그것보다 우선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 "어쨌든 차나 한 잔 주세요." 이사벨은 의자에 앉자 선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내팽개쳤다. "전 결혼무효를 신청할 작정이에요." "아버님께 말씀드렸어?" "아직요. 곧 말씀드려야죠." "언젠가는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 돼. 이사벨의 이런 모습을 보신다면 틀림없이 힘이 돼주실 거야." "그건 기대할 수 없어요. 그래도 어쨌든 얘기는 해보겠지만…" 이사벨의 눈은 겁에 질려 있다. "아빠에게 전화해 주시지 않겠어요? 전 무서워서 도저히 …

죄송해요, 폐를 끼쳐서.

하지만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직접 거는 게 좋아. 내가 자리를 피해 줄까?" 브로디는 그렇게 말하고는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왔다. 이사벨은 하는 수 없이 수화기를 쥐었다. 잠시 후 이사벨은 브로디가 있는 응접실로 왔다. "아빠가 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병원에서 저를 기다려 주신데요." 그 목소리는 뜻밖이라는 듯한 느낌이 담겨져 있다. 나의 충고가 효과를 봤다니 믿어지지 않아. 이사벨의 힘이 되어 주지 않으면 안 돼. 내 일만 없었더라면 이사벨이 제리와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테니까. 이사벨은 좀 안정이 된 것 같다. "결혼은 아무 소용없는 거라고 누군가가 가르쳐 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당신도 어려운 일이 참 많죠?" 브로디는 우물우물 중얼거릴 뿐이었다. "신시아 탠디가 마을에 왔을 때 당신이 괴로와하는 걸 보고, 어쩐지 재미있었어요. 뭐든지 다 갖고 있는 당신에게도 고민거리가 있구나 하며 고소하게 생각했었죠." "이해해… 이사벨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걸 드루에게 전할게."


"부탁해요. 아빠도 결혼 무효신청은 좋은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사벨은 브로디를 힘껏 껴안았다. 비가 세차게 퍼붓기 시작하고,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가자 주위의 공기가 서늘해지고 비에 씻긴 정원의 나무들이 한층 신선해 보인다. 테라스에 앉아서 찬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드루가 돌아와서 브로디는 깜짝 놀랐다. 오늘은 그가 저녁식사 시간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라일리 부인을 일찍 돌려 보냈다. 드루는 거실로 들어가 직접 선반에서 포도주를 꺼내 잔에 따른 뒤, 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왔다. "재판은 끝났어." 그는 무척 지쳐 있는 것 같다.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걱정이 돼?" 드루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결국 배심에 부쳐지기 전에 화해가 성립됐어." "그거 잘됐네요. 하지만 재판을 위해 준비한 당신의 시간과 노력이 허사가 돼버렸군요." 브로디는 빈 유리 컵을 이러저리 돌리고 있다. "그런데 드루, 결혼을 무효로 하는 건 어려운 일인가요?" 드루의 손에 있던 포도주 잔의 가는 다리가 똑 부러져 포도주가 타일 바닥으로 쏟아졌다. "굉장히 힘들지. 그런데 그런 건 왜 묻는 거지?" "이사벨이 돌아왔어요. 그녀는 결혼을 취소하려고 해요." 드루는 잠시 잠자코 있었다. "이사벨은 아마 이혼신청을 해야 될 거야. 결혼무효라는 건 한쪽이 미성년이든가, 혹은 중대한 사기행위가 있을 경우에만 인정되거든. 음료수 한 잔 더 줄까?" "네, 부탁해요." 브로디는 유리 컵을 내밀었다. 열어 놓은 테라스 문으로 마실 걸 따르고 있는 드루의 모습이 보인다. "동화 같던 이사벨의 결혼은 일주일도 못 간 셈이군." "예상했던 일이죠." "이사벨을 빼놓고 말이야. 대관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제리가 그녀를 때렸대요."


컵을 받을 때 드루의 손과 맞닿았기 때문에 움찔했다. 요 2, 3 일 동안 가능한 한 그에게 접근하지 않으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몸이 닿으면 미칠 것 같았던 그날 밤의 일이 생각나 가슴이 두근거리기 때문이다. "이사벨이 무슨 말을 해서 제리의 화를 돋구었다고는 생각지 않아?" "말도 안 돼요.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내의 몸에 멍을 내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어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브로디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조각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서 있다. 그날 밤, 자기가 내 몸에 멍이 들게 한 행동을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한참 후 드루가 입을 열었다. "브로디의 말이 옳아. 변명할 여지가 없어." "당신을 두고 말한 게 아녜요. 우리하고 이사벨의 경우와는 경우가 틀려요." 브로디는 유리 컵을 흔들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럴까? 브로디가 결혼무효 얘기를 꺼냈을 때, 난 꼭 브로디 자신의 얘긴 줄 알았어." 브로디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브로디의 기분은 잘 알아. 우리의 결혼은 잘못이었어. 브로디에게 상처를 줘서 정말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 브로디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이것으로 끝장이야.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고 있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진 이상 이제 이것저것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드루는 브로디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커다란 손으로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브로디는 참을 수 없어 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그렇게 소리치고 거실을 뛰쳐나와 자기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침대 위에 몸을 내던지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모든 것은 끝났어. 드루는 내게서 떠나 버렸어…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라고 브로디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드루는 처음부터 신시아의 것이었어. 언젠가는 그가 사랑해 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단지 낭만적인 꿈에 불과했어. 우리는 헤어져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나아. 기분이 차츰 가라앉는다. 그러나 눈물에 젖은 베개를 꼭 움켜쥐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브로디?"


드루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을 걸었다. "나가세요!" "맹세해, 브로디. 다신 건드리지 않겠어." 브로디에게는 이제 저항할 힘도 없다. 드루가 침대 옆의 의자에 앉는 것을 보자 또다시 눈물이 쏟아진다. "제발 울지 마."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그 포근함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마음의 고통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다. "난 전에 브로디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할 땐 언제라도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 자유롭게 되고 싶은 거야?" 브로디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왜 그런 약속을 해버렸을까. "난 브로디에게 감사하고 있어. 이번 여름에 난 많은 것을 알게 됐어."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신시아에 대한 것이겠죠. 브로디는 속으로 중얼걸렸다. "앞으로도 브로디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어." "친구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아요." 순간 드루는 풀이 죽은 모습이다. "지난 몇 주일 동안 브로디가 용케도 잘 참아 주어서 고마왔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만약 그가 자신은 신시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따위의 말을 한다면 나는 울부짖고 말 거야. "제발 그만,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브로디는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사람과 합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잠시 잠자코 있던 드루는 곧 입을 열었다. "제리와 다시 만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이사벨의 이혼신청에 그가 이의를 제기하진 않을 거니까. 몇 주일만 기다리면 브로디는 그를 바로잡고 선도하는 취미를 즐길 수 있을 거야." 드루의 매정한 말에 울컥 화가 치민 브로디는 곧장 맞받아쳤다. "나한텐 제리에게 바칠 수 있는 돈이 한푼도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올리버가 제리에게 위자료를 지불할 거야. 게다가 브로디도 무일푼으로 이 집에서 나갈 셈은 아니겠지. 두 사람의 돈을 합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마치 내가 당신한테서 돈을 받는다는 말투군요." "브로디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이 있어." "제 신탁기금은 어떻게 됐죠?"


브로디는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누구한테 그걸 들었지?" "그게 누구든 상관없잖아요? 그럼 정말로 신탁기금이란 게 있었단 말이군요." "물론이지. 브로디가 행복하기를 바라셨던 우리 아버지는 당신 생명보험금의 대부분을 브로디의

신탁기금으로 돌리셨어. 그것

때문에

브로디가 제리

같은 남자의

밥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셨을 거야." "왜 말해 주지 않았죠?" "브로디에겐 알리고 싶지 않았어. 큰 돈이 자기 수중에 들어온다는 기대가 어린애한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말이야. 올 여름부터는 재산을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어." "하지만 제리에겐 내가 무일푼이라고 그랬잖아요?" "난, 브로디 아버님이 딸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고만 말했을 뿐이야. 그건 사실이니까. 제리는 우리 아버지가 브로디에게 뭔가 재산을 남겼느냐고 묻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았을 뿐이고. 나는 오직 브로디가 신탁에 대해서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어. 그렇지 않으면 브로디는 곧장 그 친구 곁으로 날아가 버릴 테니까 말이야." 드루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 브로디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럼, 돈은 얼마나 있죠?" 드루는 그녀를 두들겨패고 싶다는 얼굴을 했다. "약 50 만 달러. 아무리 제리가 사치를 좋아한다 해도 둘이서 살기엔 충분한 액수야." 그는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방안을 왔다갔다한다. "신탁기금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써버릴 걸 그랬어. 그랬더라면 적어도 브로디를 제리로부터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은 그 돈에 손을 대지 않았나요?" "손을 대다니, 어림도 없지. 난 내 힘으로 브로디를 돌보고 싶었어. 만약 브로디가 제리란 친구가 어떤 인간인 줄 알고도 그의 곁으로 가겠다고 한다면 나는 이제 말리지 않겠어. 그 친구한테 얻어맞고서 나한테로 와 울고불고 매달리지나 말아 줘!" "전 그렇게 바보는 아녜요!" 그는 브로디의 말 따위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러는 게 훨씬 더 낫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제리를 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드루에게 밝히고 싶지는 않아. 브로디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가서는 멀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들이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날 밤 왜 내 방에 왔지?"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좋아요." 드루가 천천히 다가오자 브로디는 뒷걸음질치면서 중얼거렸다. "그날 밤엔 뭐가 잘못됐었어?"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그녀도 그걸 부인하지는 못할 거라는 명령조의 말투다. "서로가 다만 사랑하는 체했던 건 잘못된 일이었어요." "그래, 알겠어. 브로디는 내가 제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네, 그래요." 브로디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크게 외치고 있었다. "제리와 대등한 입장이 되기 위해서, 그에게 보복하려고 나하고 잔 거야? 아니면 그 친구완 자지 않았다는 걸 나한테 알리려고 그랬던 거야?" "그런 게 아녜요! 그런 천한 말은 하지 마세요!" "알았어. 그래, 제리한테로 가기 위해서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거야? 그 친구 곁으로 돌아가는 건 그만둬. 브로디는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닐 테니까." "뭐라고요!" 드디어 브로디의 분노가 폭발했다. "내가 바보라고요! 당신이야말로…" "나야말로 뭐라는 거야?" "아녜요, 아무 것도 아녜요." "그래 브로디는 이혼하고 싶단 말이지?" "네, 그래요. 신탁기금이나 위자료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다만 이 집에서 나가고 싶은 거예요!" "브로디, 부탁이야. 날 똑바로 봐줘." 드루는 자기를 보도록 그녀의 얼굴을 억지로 끌었다.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브로디는 몸을 틀어 뒷걸음질쳤다. "내가 두려워?" 네, 그래요. 만약 당신 몸이 닿으면 내 결심이 무너져 당신한테 매달려 날 안아 달라고, 날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말 것만 갈아요. "브로디, 난 당신에게 상처입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왔어." 드루는 고통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결국 전 당신에게 심한 상처를 입었어요. 덕분에 제 인생은 엉망진창이구요!" 드루는 마치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완전히 풀이 죽었다.


"전 이제 싸우는 데 지쳤어요! 신시아한테로 가란 말예요! 그게 당신 소원 아녜요? 더 이상 이 조마조마한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아요. 이젠 지긋지긋해요." "만일 내가 신시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지 말아요!" 브로디는 거의 절규하듯이 소리질렀다. "당신은 제리 얘기를 그 여자한테 했죠? 그리고 그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 나하고 결혼했다는 얘기도요." 드루는 잠시 말이 없다. "재미있는 얘기군." "그걸 부정하진 못하겠죠? 사실이니까요. 당신은 신시아가 이 도시로 온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 "당신을 나무라고 있는 건 아녜요.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만일 당신이 저한테 사실을 말해 주기만 했더라면…" 브로디는 입을 꼭 다물고 길게 숨을 들이쉬고는 결심한 듯 말했다. "신시아와 살게 되면 당신은 불행하게 돼요.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그 여자는 거짓말쟁이고 순 사기꾼이에요." 두 사람 사이에 답답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드루가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엔 야릇한 여운이 있다. "내가 불행해지는 게 걱정이 돼?" 브로디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래서 당신이 불행해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녜요." 드루는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브로디." 그녀의 턱에 손을 갖다대고 자기 쪽으로 얼굴을 돌리게 한다. "뭘하는 거죠?" "브로디는 자유롭게 되고 싶겠지? 마지막 부탁이야, 작별의 키스를…" "싫어요!" 브로디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점차 숨이 가빠지고 있다. "대단한 건 아냐, 그냥 키스만이야." 드루는 속삭였다. 그래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게다가 마지막으로 드루에게 안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의 품의 따스함을 가슴에 간직하고 앞으로의 고독한 세월을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올려다본 브로디는 그의 타는 듯한 눈길에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멍해졌다. 드루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와 입술이 포개진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키스에 브로디의 몸에 전류가 흐른다.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팔은 드루의 목에 감겼다. 드루의 눈은 더욱 타올라 그녀를 강하게 껴안더니, 이번에는 격렬한 키스를 퍼붓는다. "제리는 이런 키스를 했어?" 드루가 잠긴 듯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브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곁으로 돌아갈 거야?" "아뇨." 브로디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루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짓고는 팔의 힘을 풀었다. 브로디는 비틀거리듯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에게 키스를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어. 이 키스만 없었다면 그날 밤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는데 … 아, 이 이상 나를 속일 수가 없어. 하지만 어쨌든 나의 이런 심정을 알아차리게 해선 안 돼. 브로디는 눈을 뜨고 조용히 말했다. "안녕, 드루." "안 돼, 지금 브로디를 가게 할 순 없어." "키스를 하면 절 보내 주겠다고 하고선…" "난 거짓말을 한 셈이야. 하지만 이 키스로 더욱더 분명하게 알게 됐어." "부탁이에요. 약속했잖아요." "나도 보통 인간이야. 브로디를 갖고 싶어." "제게 책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은 브로디에 대한 책임감 같은 건 잊고 있어." 브로디의 숨결이 거칠어진다. 왜 드루는 나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걸까? "브로디, 말해 줘. 그날 밤 제리가 과일 그릇으로 날 치려고 했을 때, 왜 위험하다고 알려 줬지?" "당신이 다칠까 봐서요." 드루는 그녀를 애무하며 다시 키스를 하려고 한다. "제발 그만하고 우리 얘길 해요. 키스를 하고 있으면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래." 드루는 마지못해 브로디의 몸을 떼어 놓았다. "자, 이러면 됐지? 대관절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야?"


"신시아 일이에요." 드루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난 신시아한테 브로디 일이나 우리의 결혼, 더구나 제리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한 적이 없어. 그녀는 모두 다니엘한테서 들은 거야. 그렇지만 다니엘은 모든 걸 자세히 알 턱이 없으니까, 그녀가 한 말은 모두 추측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런 걸 브로디는 그녀가 모두 알고 있다고 믿어 버린 모양이지?" 드루의 말이 정말일까? "옛날에 신시아가 약혼을 취소한 것은 저 때문이었던가요?" "그건 아냐." 그는 브로디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브로디 때문에 파혼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약혼을 취소한 건 내 쪽이야." "그건 거짓말이에요." "난 브로디에게 감사하고 있어. 만약에 브로디가 없었다면, 난 그녀와 결혼해서 이 집을 팔고 동부로 갔을 거야. 자, 이것으로 신시아 일에 대해선 이제 만족했겠지?" "그 여자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잖아요." "내가 운이 좋았다는 걸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이야." "왜 그런 얘길 안해 줬어요?" "만약 사실을 말한다면 브로디가 결혼해 주지 않았을 게 뻔했기 때문이지." "당신은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었잖아요." "그건 사실이야, 브로디. 브로디야말로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야. 신시아는 다만 한때의 방황에 불과했어. 결혼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안도감 말고는 그녀한테선 아무 것도 느끼지 않아." "저도 제리에 대해 같은 심정이에요." "그럼 이것으로 모든 게 결말이 났군." "무슨 소리예요?" 브로디는 머릿속이 혼란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브로디가 이제 더 이상 제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는 여기지 마세요." 브로디는 말이 너무 지나쳤음을 깨닫고는 말을 부드럽게 했다. "드루, 지금까지 제 일은 언제나 당신이 결정해 주었어요. 하지만 이제 제 일은 제가 결정하고 싶어요." "부탁이야…" "좀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너무나 혼란스러워요."


브로디는 혼자서 정원으로 나왔다. 밖에는 아직 비가 오고 있다. 드루의 말을 믿어도 될까? 지금까지 그가 신시아를 사랑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 그가 신시아를 잊었다고 해도, 난 그것이 그대로 믿어지질 않아.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제리에게 그토록 몰두했었지만, 그 사랑이 식었을 때 난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드루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잖아. 어째서 드루는 나더러 있어 달라는 걸까? 나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 ? 하지만 내겐 신탁기금이 있어. 구태여 그와 억지로 살지 않더라도 내겐 혼자서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이 있어. 브로디는 문득 눈을 들었다. 드루가 문간에 서서 묵묵히 이쪽을 보고 있다. 그 얼굴엔 냉정한 변호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마음의 갈등만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순간 브로디의 마지막 망설임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고 곧장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전 충분히 생각하고 싶었어요. 전 언제나 아무 생각없이 행동해 버리니까." "브로디는 잘못 같은 건 안해." 드루는 그녀를 꼭 껴안고 입을 맞췄다. "이웃 사람들이 봐요." "이 정도의 일로 충격을 받는다면 어디 다른 곳으로 이사가라지. 앞으론 이런 장면을 싫증날 정도로 볼 텐데." "풍파 없는 평온한 결혼생활은 약속할 수 없어요." "상관없어." "왜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무엇을 얘기해야 좋았을까? 당신을 갖고 싶어 밤중에 당신의 방 앞을 지날 때마다 몸도 마음도 산산조각이 났다는 얘길 어떻게 말할 수 있었겠어.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단지 기다리는 것뿐이었어. 언젠가 브로디가 보잘것없는 남자 대신 날 사랑해 줄 날이 꼭 올 거라고 믿으며 말이야." "그래서 제리를 때렸나요?" "그때만큼 만족스런 적은 없었어. 아, 아니지. 훨씬 기분 좋았던 적이 그때 말고도 있었지." 드루가 짓궂게 눈을 반짝였기 때문에 브로디는 얼굴을 붉혔다. "브로디를 잃는다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아."


"아아, 기뻐… 사랑해요, 드루. 세이프하버에 대해 당신이 했던 말이 옳아요. 여기만 있으면 누가 지켜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집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드루는 브로디의 촉촉히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 안으로 들어가서 머리를 말리자구. 그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고 말아. 폐렴이라도 걸리면 모처럼의 허니문이 엉망이 돼버리니까."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가 아니었나요?" 브로디가 놀려댄다. "무조건 브로디를 사랑해." 마음 든든한 그의 말에 브로디는 너무나 행복해서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맞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이프하버가 후유 하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 끝 >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