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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하여 다이애나 팔머

(K-130) 1 그는 세인트메리 병원 심장 병동 쪽으로 걸어 내려가다가 즐거이 소곤대는 소리들을 들었다. 그는 방금 수술실에서의 자신의 버릇에 관해 인터뷰를 한 참이었다. 그 인터뷰 담당 기자는 심장 수술로 세계에 알려진 레이먼 코르테로 박사가 수술을 하는 동안 록 그룹 데스페라도의 음악을 듣기 좋아한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그가 일하는 심장 병동 내의 간호사들과 기사들이 그 일로 종일 그를 놀려댔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그런 놀림에 화를 내지 않았다. 사실, 그들 중 몇 명은 와이오밍에 근거지를 둔 데스페라도 그룹의 팬이기도 했다. 녹색 수술복을 입은 그는 방금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심장 판막을 교체시킨 한 환자의 아내를 찾아 성큼성큼 걸었다. 그 여자는 있어야 할 장소, 즉 2 층 수술 대기실에 있지 않았다. CCU(심장병 환자 조기 치료 특수 병동) 간호사가 무심코 그녀를 본관 로비 대기실로 내려보낸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폐렴 합병증으로 보철물

판막이

누출되자

병원에 싣고

왔다. 그

환자가

살아나기까지는 레이먼의 모든 기술과 몇 사람의 기도가 필요했다. 지금 그는 그녀에게 전해 줄 희소식을 갖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그가 찾던 부인이 내렸다. 그녀는 길고 검은 외투를 입은 10 대 아들과 남편의 가족 몇 명, 그리고 수술이 시작된 48 시간 전부터 그녀 곁을 거의 떠나지 않은 여목사에 둘러싸여 있었다. 많이 울어서 빨갛게 부어 오른 그녀의 두 눈 속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묻기 두려워하는 시선을 던지자 레이먼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남편께선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심장은 튼튼합니다] [오, 하느님 고맙습니다!] 그녀가 속삭이며 아들을 끌어안았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박사님, 고맙습니다] 그녀가 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레이먼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우리가 도울 수 있어서 기쁩니다] 레이먼 옆에서 싹싹한 흑인 심장병 전문의가 싱긋 웃었다. 그들이 심장 병동에 도착했을 때 심장 판막 교체뿐만 아니라 심장 카테터(체강 또는 위, 창자, 방광 등에 괸 액체를 뽑아 내거나 영양제, 약품 등을 주입할 때 쓰는 관 모양의 기구)법 절차까지 설명해 준 사람이 바로 그 흑인 의사였다. 그는 그들에게 위안과 실낱 같은 희망의 빛을 주었다. 여인이 활짝 웃으며 그와 악수를 하고 그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했다.


벤 코플랜드 박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인걸요. 남편께선 l 홀 바로 아래 중환자실에 계십니다. 그 옆에 남편을 모니터로 만나 보실 수 있는 방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 가셔서 기다리십시오] 그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환자를 면회할 수 있는 방으로 갔다. 벤이 레이먼에게 다가오며 말했다.[때로는 기적이 일어나지. 그 환자가 실려왔을 때 난 그 사람의 회생 가능성에 커피 한 잔도 걸지 않았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때로는 정말로 운이 좋기도 해] 레이먼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쭉 폈다.[일주일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아직 대기중이야. 자넨 집에 가겠지?] 벤이 빙그레 웃었다. [운 좋은 친구야, 자넨] 그는 천만 다행으로 자신이 지옥에서 겨우 건져낸 다른 수술 환자 두 명을 살펴보러 가면서 동료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평소 같으면 평온할 일요일에 비상 수술이 세 건이나 있었다. 온몸이 쑤시고, 무척 고단했다. 그러나 그건 기분 좋은 피로감이었다. 그는 창가에 멈춰 서서 병원 본관 꼭대기에 있는 불 밝힌 거대한 십자가를 고요한 만족감 속에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기도는 때때로 응답을 받는다. 오늘 저녁 나의 기도처럼. 그는 자신이 시술한 또 다른 환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길 건너에 있는 오키프 시립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는 퇴원 준비가 된 환자를 살펴보기 위해 디카터에 있는 에모리 대학에도 가야 했다. 그는 회진을 모두 끝내고 집에 갔다. 혼자다. 그의 아파트는 널찍하지만 갑부의 집은 아니었다. 그는 하바나의 배리오(스페인의 어권지역)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버릇 때문에 단순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피오 바로하의 단편 소설 <쿠엔토스>를 골라 놓고 서글프게 웃었다. 그 책에는 <이사도라가 레이먼에게, 내 모든 사랑과 함께> 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다. 그의 아내는 2 년 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가 한 외교관을 수술하기 위해 외국에 나간 사이에 죽었다. 조금만 보살펴 주었더라도 그녀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밤새 혼자서 지독한 고열과 씨름하다 죽었다.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 집에 없었다니... 얄궂기도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간호사인 아내의 사촌 노린에게 이사도라를 맡기고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이사도라를 혼자 놔두었고 해외에서 돌아왔을 때 이사도라는 이미 죽은 뒤였다. 미처 손을 써볼 수도 없었다. 그는 아직도 노린이 부주의했다고 비난한다. 그녀가 애타게 해명하려고 했지만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의 죄가 명백하지 않은가?


그는 책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표지를 어루만졌다. 20 세기 초반의 유명한 스페인 소설가 바로하는 작가일 뿐 아니라 내과 의사였다. 레이먼은 작가 가운데서는 그를 가장 좋아한다. 이 작품집 속에는 항생제가 발견되기 전 마드리드 배리오에서 바로하가 보낸 생활 모습이 풍부하게 그려져 있었다. 모든 작품 속에 고통과 비극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들과 함께 의망이 들어 있었다. 희망은 나의 도구이다. 다른 것이 모두 실패해도 더 숭고한 힘, 즉 기적이 일어날 수 잇는 희망에 대한 믿음이 나에겐 여전히 있다. 오늘 저녁 기적 하나가 응급실에 남편을 둔

부인에게 일어났다. 나는

기뻤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를

보았기에. 나와

이사도라가 그랬듯이. 적어도 처음에는... 레이먼은 한숨을 쉬고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아...] 그는 안에 든 음식들을 뒤적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세계적으로 유명한 심장병 외과의사인 세뇨르 코르테로, 넌 오늘밤 저녁 식사로 냉동 닭고기랑 설익은 브로콜리로 만찬을 즐길 거야.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그대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고개를 들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정확하게 자정까지 대기중이었다. [코르테로입니다]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레이먼?]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화 너머로 한 마디만 듣고도 그 목소리를 너무 잘 알앗기 때문이다. [그렇소, 노린.] 그가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일이오?] 역시 낯익은 망설임이 있었다. [숙모가 숙부의 생일 파티에 당신이 올 건지 알고 싶어해요] 얼마나 과장된 말인가. 노린은 숙모, 숙부와 결코 친밀하지 않다. 게다가 이사도라가 죽은 뒤로는 더욱 소원해졌다. [언제요?] [언제인지 알잖아요] 그는 노여운 한숨을 쉬었다.[다음 주 일요일에 비번이면 가겠소. 당신도 갈거요?] [아뇨] 그녀는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의 흔적도 나타내지 않고 말했다. [선물을 오늘 미리 드렸어요. 두 분은 주말까지는 시내에 안 계실 거예요. 그래서 나더러 당신한테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알았소] 다시금 짧은 침묵이 있은 뒤에 그녀가 말했다.[당신이 갈 거라고 숙모한테 전할게요] 그는 수화기를 꽝 내려놓았다. 그는 아내의 죽음과 노린을 절대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집에 있었더라면 아내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분노는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한을 품고 그것을 증오심으로 키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사도라를 잃은 아픔을

덜려고

했다. 그는

노린이 이사도라를

사랑했다는 것을 잊으려 했다. 노린을 증오하는 것이 그에겐 위안이고 구원이었다. 하지만 노린은 그를 부당하다거나 비이성적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줄곧 그에게서 벗어났을 뿐이다. 그녀는 세인트메리

병원

길 건너에

있는

오키프 시립

병원의

중환자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다. 가끔 그는 그 병원을 회진차 방문했다. 그런 때에도 그는 그녀를 골칫거리쯤으로 대했다. 그녀는 의사가 될 재능과 지적 늘력이 있는대도 간호대학을 나왔다. 온건하고 냉정한 그녀는 지금 스물다섯 살이다. 하지만 노린의 삶에 남자는 없다. 레이먼의 삶에서 여자가 없듯이.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커피 한 주전자를 끓였다. 그러곤 이사도라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금발과 그토록 다정하게 웃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파란 눈을 쓰라린 슬픔 속에 떠올리며 웃음지었다. 이사도라는 아름답고 절묘한 위엄과 예의 범절을 갖춘 숙녀였다. 집안도 매우 부유했다. 이제 켄싱턴 부부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노린 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돈을 쓸데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녀에겐 아파트도 있고 직업도 있으니까. 그는 자신이 노린을 생각하고 있다는 데 스스로 놀랐다. 6 년 전 이사도라를 만난 이래로 그는 늘 노린을 수수께끼 인물로 여겼다. 이사도라는 사교적이라 언제나 남자들과 시시덕거리고 함께 있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노린은 이렇다 할 사회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근면하고 내성적인 수습 간호사였는데 그녀에겐 직업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았다. 레이먼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토록 일에 열성적인 여자가 어떻게 제 사촌에게 그리도 태만할 수 있었을까... 분명 그녀는 이사도라를 질투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결을 헤매고 있는 사촌을 거의 이틀밤 동안이나 아파트에 혼자 내버려둘 수 있을까? 장례식 직후에 그의 동료 한 명이 이번 사건으로 노린의 처지가 얼마나 비극적인지에 대해 얘기했다. 그렇지만 그는 노린이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쏘아붙이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을까? 물론 오래 전 일이고, 그 말을 한 동료 의사도 오래 전에 뉴욕 시로 옮겨갔다. 그는 애써 마음속에서 그 생각을 몰아내 버렸다. 그 주 일요일 오후, 그는 비번이었기에 약속대로 생일 선물인 금시계를 갖고 이사도라의 아버니 핼 켄싱턴의 집으로 갔다. 표범 가죽 무늬의 실크 카프탄을 단정히 걸치고, 이사도라만큼이나 샛노란 머리칼을 깔끔하게 틀어 올린 메리 켄싱턴이 현관에서 그를 맞이했다.


[레이먼, 와주어서 정말 고맙군] 메리 켄싱턴은 그의 팔을 잡으며 열렬하게 환영하고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노린한테 전화하라고 부탁한 건 사과하네. 자네가 어디 있는지 찾을 시간이 없었거든. 자선활동 때문에. 자네도 알지?] [괜찮습니다] 그는 자동으로 말했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노린은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할 십자가야. 불행히도 우린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때 교회에서말고는 못 본다네] 그는 장모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두 분이 기르셨잖아요] [그러니 내가 그 애에게 뭔가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메리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앤 남편의 하나뿐인 형의 자식이었어. 그 애 부모가 죽었을 때 우린 그 애를 입양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그 앤 늘 방해가 되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 앤 노처녀가 될거야. 옷도 부랑자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처럼 입고 파티 장소에서는 얼마나 의기소침한지.. 난 절대 그 애를 파티에 초대하지 않을거야. 그 앤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어릴 때도 그랬어. 하지만 이사도라는 정말로 예쁘고 사랑스러웠지. 이사도라는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것이었더. 물론 노린은 내 어머니와 함께 지냈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녀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노린은 늘 짐이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레이먼은 자신을 원치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찾아온 불쌍한 어린 소녀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노린을 사랑하지 않으세요?]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세상에 , 그런 그림자 같은 아이를 누가 사랑할 수 있겠나?] 그녀가 냉담하게 물었다. [그 애를 좋아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애 때문에 우린 이사도라를 잃었어. 절대 잊을 수 없네. 자네가 그럴 수 없듯이 말이야] 그녀가 그의 팔을 토닥이며 덧붙였다. [우린 모두 그 앨 너무나 그리워해] [네...] 이사도라의 아버지 핼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안락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의 대머리가 머리 위의 크리스털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그는 보고 있던 요트 잡지에서 눈을 떼었다. [레이먼! 와주어서 정말 고맙네!] 그는 잡지를 옆에 놓고 사위에게 다정하게 악수하기 위해 일어섰다. [조그만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세련되게 포장된 꾸러미를 핼에게 건네며 말했다. [고맙기도 하지] 핼이 환하게 웃으며 꾸러미를 풀었다. [스포츠 시계군, 바로 내가 갖고 싶어하던 거야. 이건 요트 클럽에 갈 때 차고 가면 아주 제격이겠어. 고맙네. 레이먼!]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쁩니다] [노린이 지갑을 선물했네] 메리가 멸시조로 말했다.] [뱀장어 가죽이지] 핼이 고개를 흔들며 덧붙였다.[도무지 생각이 없는 애야] 레이먼은 노린이 사는 곳과 그녀가 비번일 때 입는 옷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돈이 넉넉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것은 그녀가 숙모와 숙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뱀장어 가죽 지갑은 값비싼 것이다. 그는 그녀가 그토록 오만한 숙부의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뭔가를 희생했을지도 모른다로 생각했다. 그는 가난이 뭔지 알기 때문에 아무리 변변치 않은 선물이라도 받으면 고마워한다. 그는 노린이 이사도라에게 줄 결혼 선물로 크리스털로 된 꽃봉오리 모양 꽃병을 고른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이사도라는 무심하게 그것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여자 친구가 갖다 준 아일랜드 제 리넨 탁자보를 보고 열광했다. 그러자 그녀와 같이 온 한 남자 간호사가 큰소리로 한마디했다. 노린은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촌에게 고상하고 하찮은 물건을 사주기 위해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될 외투를 팔았다고.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벌개진 이사도라는 곧 그 꽃병을 집어 들고 수선을 피웠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노린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슬펐다... [내 말 듣고 있나, 레이먼?] 핼이 중얼거렸다. [내 말은, 언젠가 주말에 같이 요트 여행을 하자는 걸세]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요] 레이먼은 흥 없이 대답했다. 그는 이 사람들과 함께 있기가 불편했다. 그들은 재력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친구들을 선택했다. 레이먼이 유명하고 유복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열살 때 부모님과 함께 쿠바에서 탈출한 레이먼 코르테로는 유망한 사윗감으로 환영받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 그걸 절실히 느끼고 있다. 요즘 들어 이런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왜 마음을 어지럽히는 거지... 그는 최고급 도자기에 내온 케이크와 커피를 먹고 나서는 일어섰다. 그러고는 바깥에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그 거대한 벽돌 저택을 돌아보았다. 그 집은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그는 그토록 다정한 장인 장모가 이사도라가 죽은 뒤부터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며 은색 메르세데스를 자신의 아파트로 몰고 갔다. 이토록 공허한 느낌을 갖기는 장례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마 과로 때문일 거야. 나는 일주일쯤 쉬어야해. 바하마로 날아가서 며칠간 해변에서 느긋하게 쉬면 괜찮아질거야. 그럼 원기가 회복될 거야.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오색 조명들로 타오르는 아름다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흘끗 둘러보았다. 그 세련된 빛은 아름다운 이사도라를 생각나게 했다. 그녀는 달콤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노린에게 자신의 스웨터들을 제자리에 두지 않았다고 사납게 욕하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도 노린은 자신을 변호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옷들을 다시 정리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이사도라는 그를 의식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는 이사도라와 그녀의 부모는 노린을 가족의 일원이라기보다는 하녀처럼 취급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위해 심부름을 하고, 전화를 걸고, 파티를 위해 음식 배달업자와 밴드를 섭외하고, 초대장을 썼다. 그녀가 시험 공부를 할 때에도 가족들의 요구는 그치지 않았다. 한 번은 레이먼이 시험을 잘 보려면 집중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자 나머지 켄싱턴 가족 세 명이 무표정하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사도라가 결혼한 직후 켄싱턴 부부가 가정부를 고용하고 노린이 그 집에서 나오기까지 그녀의 의무는 무자비하게 계속되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끓였다. 자신이 노린을 그토록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마음 편치 않았다. 켄싱턴 부부를 위한 파티는 전에도 있었지만 노린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이사도라가 독감이나 감기 같은 성가신 병에 걸렸을 때처럼 노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 가족들은 그녀의 존재를 잊었다. 그러자 이사도라의 폐렴과 노린의 부주의함이 떠올라서 그는 새삼스레 화가 치밀었다. 이사도라는 결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 아무리 노린이 숙부의 가족에게 나쁜 대접을 받아 왔다 할지라도 이사도라를 죽게 내버려둔 잘못의 변명은 될 수 없었다. 그는 노린에게 동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녀 때문에 아내가 죽었다는 생각에 조그만 동정마저도 경멸로 가득 찼다. 그는 혼자 바하마의 외딴 섬에서 고독을 즐기며 엿새를 보냈다. 해변을 거닐며 신혼 여행 때 이사도라와 함께 보낸 행복한 나날들을 고통스럽게 회상했다. 순탄치 못한 부부 관계였지만 여전히 아내가 그리웠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난 흰머리를 발견하고 전에 없이 나이를 느꼈다. 이제 재혼해서 아들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군. 이사도라는 아이를 원치 않았다. 그는 그 문제로 그녀를 압박하지 않았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피 묻은 칼로 지평선을 내리치듯이 유난히 생생한 일몰을 응시하며 한숨을 쉬고, 다정하게 소곤거리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장관을 마음속에 새기고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니... 나는 혼자다. 해변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정답게 노는 아이들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아마도 이제 과거가 아닌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가 찾아왔나 보다. 2 년이란 세월은 긴 시간이었다. 그는 일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오키프 시립 병원에서 막 수술을 마쳤다. 세인트메리 병원과 에모리 병원의 환자들 외에 이 병원에도 그의 환자가 세 명이 있었다. 그는 야간 간호사가 누군지 알고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간호사 대기실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평소처럼 머리를 틀어 올린 채 흰 간호사 복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건 노린이 차가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오늘밤은 당신이 근무하는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수술 가운 차림인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난 필요할 때는 언제든 일해요.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수술 환자가 있었소. 나는 병원 세 곳에서 일하고 있소. 여긴 그 중 한 군데고] [기억나요] 그녀의 두 손이 상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의 환자 해리스씨가 구토가 심해요. 약을 넘기지 못해요] [그 환자의 진료 기록부가 어디 있소?] 그녀는 환자의 병실로 가서 문간 벽에 걸린 쇠바구니에서 진료 기록부를 꺼내 그에게 건네 주었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구토는 지난번 교대 때 시작했군. 왜 그때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소?] [어떤 간호사들은 12 시간 교대로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오늘 오후에는 입원 환자 외에도 새로운 환자가 네 명이나 있었어요. 모두가 위급했고요]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소] [네, 그렇죠] 그녀가 그에게 펜을 건네며 자동으로 말했다. [선생님이 지금 조치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진료 기록부에 새로운 처방을 기적거리고 나서 환자를 진찰하고 얼굴을 찡그린 채 나왔다. [카테터가 어젯밤에 제거되었다가 오늘 아침에 다시 끼워졌더군. 누가 카테터를 빼냈소?] 그가 느닷없이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걱정 말아요] 그는 그녀에게서 대답을 들으리라 생각지 않고 무겁게 말했다. 그녀의 두 뺨은 빨갰지만 나머지 얼굴은 창백하고 조금 부어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전에는 몰랐는데... 그것은 심장병 환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안색이었다. 그녀가 진료 기록부를 제자리에 꽂아 놓으며 말했다. [이번 교대조 기사들은 너무 바빠서 쉴 시간이 없어요. 그 환자 옆에서 얼음 조각을 먹여 줄 사람을 두면 좋겠어요] [그 환자에겐 가족이 아무도 없소?] 그는 그녀의 배려에 감동을 받았다.


[유타 주에 아들이 있어요. 이리로 오는 중인데, 내일까진 도착하지 못할 거예요] [어렵게 됐군] [아주요] 그때 그는 거품 컵과 플라스틱 물주전자를 들고 홀 쪽으로 종종거리고 가는 환자의 아내 가운데 한 명을 흘끗 바라보았다. [ 저 부인은 어딜 가는 거지?] 노린이 두 눈을 빛내며 웃었다. [자메이카 출신 기사인 호크 부인이 그녀에게 얼음 기계와 커피 자판기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 뒤로 그녀가 모든 사람의 일손을 덜어 주고 있어요. 그녀는 필요한 때면 수건과 담요를 가져가기까지 해요] [흔히 있는 일 아니오?] [글쎄요, 간혹 자신의 남편이 물을 원한다면서 우리에게 물을 갖다 달라고 하는 여자들이 있어요] [간호사들은 그런 일에 익숙하지] [간호사들은 더 많은 시간과 더 적은 환자들과 더 적은 서류 처리와 더 적은 의료 분쟁을 걱정하는데 익숙하죠] 그녀는 대꾸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 괜찮소?] [좀 피곤해요. 이번 교대조의 다른 사람들처럼. 해리스씨를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구토가 계속되면 알려 줘요] [네, 선생님] 그녀는 깍듯하지만 쌀쌀맞게 말했다. 그의 검은 눈이 그녀의 잿빛 눈과 마주쳤다.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있소, 그렇지 않소?] 그는 방금 깨달았다는 듯 불쑥 물었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것이 나의 방침이에요] 그녀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는 그 병동을 떠났다. 하지만 딱 꼬집을 수 없는 뭔가가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노린은 자신을 배반한 심장 박동을 안정시키려고, 그토록 오랫동안 남몰래 마음을 바쳐 온 키 크고 검은머리의 남자를 지켜보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이사도라가 그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노린의 심장은 두 조각이 나버렸다. 그러나 그 검고 다정한 눈과 육감적인 미소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쁘고, 남자들과 잘 어울리는 이사도라가 그 남자랑 결혼했다. 그녀는 장장 6 년 동안 고통스런 그 비밀을 간직해 왔다. 그녀의 신생은 희생과 의무로 점철된 것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사랑 같은 건 없었다. 자신을 마지못해서 받아들인 그 거대하고 외로운 집으로 갈 생각에 그녀는 망연했다. 그녀는 이사도라의 하녀였고, 숙모의 비서였고, 숙부의 심부름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사촌의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혼자서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는 그는 그녀의 잘못도 아닌 일로 그녀를 미워하고, 비난한다. 이사도라가 죽고 난 뒤에도 그를 여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노린은 허드렛일을 하면서 그와 과거와 고통을 차단하려고 애썼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2 노린은 자신의 외로운 아파트로 돌아갔다. 고양이나 개 아니면 친구가 되어 줄 뭔가가 있다면...그러나 아파트에서는 애완 동물을 키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배관이 낡아빠지고 벽에선 칠이 벗겨지는, 아담하고 오래된 남부식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입주자 네 명은 그곳을 가정으로 생각했고, 건물 바로 뒤에는 작은 차고도 있었다. 노린은 자신의 차가 주는 자유를 좋아했다. 비록 작고 낡긴 했지만. 병원에서 적잖은 봉급을 받고 있지만 적자를 면하려면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 숙부의 집에서 살 때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정은 늘 공허했다. 지금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적어도 독립했다. 그리고 사랑과 친구가 결핍되었다 해도 그건 전혀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사도라가 죽은 뒤 레이먼이 새 아파트로 이사를 나간 일을 떠올렸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마지막 시간을 보낸 현장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나를 비난하고 있어. 그녀는 그 사건 직후에 몇 번이나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에 빠진 그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는 처음 만남 이래로 그녀에게 부여한 매정한 이미지를 더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를 본 때를 기억했다. 그녀는 숙부의 저택에 어울리는 당당한 재규어에서 내리는 그를 맨 처음 보았다. 검은 머리칼이 햇살에 반짝였고, 차분한 회색 정장이 운동 선수 같은 체격을 더욱 단단하고 압도할 것처럼 보이게 했다. 노린은 그가 집안으로 들어설 때 잘생긴 거무스름한 얼굴에서 칠흑 같은 검은 눈을 보고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녀가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듬자 레이먼은 거의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보냈다. 그러고는 재빨리 무관심한 소개를 끝내고는 노린에게서 눈을 돌려 아름다운 이사도라에게 갔다. [그가 널 알아봤다고 생각하지 마] 그날 저녁 이사도라가 깔보듯 말했다. [아무리 부러운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봐도 소용없어. 그렇게 자생긴 남자가 널 두 번 다시 바라볼 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깔깔대며 덧붙였다.


노린은 그렇게 품위를 떨어뜨리는 파란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네 것인 줄 알아, 이사도라]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잘 기억해 둬. 난 그 남자랑 결혼할 거야] [그 사람이 청혼했니?] [아직 아니야] 이사도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할거야] 그리고 겨우 두 달 뒤 이사도라와 레이먼은 결혼했다. 결혼식 이틀 전 이사도라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웨딩드레스를 가지고 수선을 피우는 동안 레이먼이 부엌문간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서는 노린이 오븐에서 케이크를 꺼내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왜 결혼식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저요?] 부엌에서 노린이 열기로 땀을 흘리면서 물었다. 그가 그녀의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그런 옷 말고는 절대 안 입소? 청바지하고...] 그가 거무스름한 손을 저었다. [티셔츠간은?] 그녀는 케이크를 접시에 올려놓고 쿠키 담을 그릇을 씻었다. 그 동안 그가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사도라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소?]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이 싫었다. 마음을 들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이사도라는 집안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엔 너무 예뻐요] [질투하는 거요? 그녀는 예쁜데 자신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조롱조의 질문에 그녀의 연한 잿빛 눈이 번득였다. 그녀는 꼿꼿이 서서 열기와 노기로 빨개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저에게

부족한

자질을

상기시켜

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거울을 볼 능력이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하셨나 보지요?] 처음으로 그의 눈이 번쩍거렸다. 그가 노려보자 마침내 그녀의 가슴속에서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럼 당신은 가정부가 아니오?] [그렇게 빈정대는 걸 보니 당신은 결코 신사가 아니군요] 그녀는 학교에서 배운 완벽한 스페인어로 말했다. 결코 신사가 아니라는 그녀의 공격에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고는 정말 대단하다며 가까운 친구나 친척사이에서만 쓰는 말을 했다. [왜요, 내가 스페인어로 말해서요?] 그녀가 영어로 물었다. 그는 빈정거림 없이 웃었다. [이사도라는 스페인어를 조금도 못하오. 적어도 아직까지는. 가장 필요한 단어는 가르쳐 줄 셈이오. 물론 공적으론 쓰지 않겠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그가 이사도라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자신을 자극한 방식을 희미한 호기심을 갖고 돌이켜보았다.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 부부가 결혼 1 주년을 기념할 때 그것은 더욱 악화되었다. 노린은 자신이 파티에 초대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갈 계획이 없었는데 레이먼이 차를 보냈다. 핼과 메리 켄싱턴은 손님들 앞에서 열렬히 그녀를 환영하고 나서는 무시해 버렸다. 이사도라는 노린이 파티에 온 것이 몹시 화가 난 듯, 레이먼이 없는 틈을 타서 거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만큼 손가락을 세워서 그녀를 부엌으로 그고 갔다. [여기엔 웬일이야?] 이사도라가 무섭게 다그쳤다. [난 널 초대하지 않았어!] [레이먼이 우겼어] 노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사도라의 섬세한 금빛 눈썹이 휘어졌다. [오라...]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이가 복수를 하는군] 그녀가 거친 신음소리를 내며 덧붙였다. [그이가 뉴욕에 수술하러 가고 없는 동안 내가 래리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이야. 그이는 도통 집에 있질 않아] 그녀는 노린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이가 너를 바라볼 때 별이 보인다고 상상하진마] 그녀는 열을 내며 계속했다. [내가 질투하게 만들려고 널 오게 만든 것뿐이니까] 노린은

숨을 죽였다.[맙소사, 이사도라, 그는 날

좋아하지도

않아! 언제나

모른

척한다구!] 이사도라의 새파란 눈이 좁아졌다. [넌 이해 못해. 넌 정말 어린애야, 노린] 그때

레이먼이

굳은

얼굴로

부엌으로

들어왔다.

[왜

여기에

숨어

있소?]

그가

이사도라에게 물었다. [손님들이 많은데] [그래요, 물론이죠] 그녀가 노린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화풀이 상대로 노린만을 남겨 둔 채 휙 손님들에게 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랬다. [정말 청소부답군] 그는 그녀의 청바지와 티셔츠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중요한 날 입을 드레스도 없소?] [난 오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가 화를 내며 대답했다. [당신이 오게 만들었지!] [그 이유는 하느님이 아시지] 그가 다시 한 번 싸늘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그에게 대꾸할 말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는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싫소?] 그가 싱크대로 그녀를 몰아치며 중얼거렸다. [ 놀랍군. 당신 같은 여자가 남자라 할지라도...]


그녀는 그의 어조에 몸을 떨며 방어하듯이 셔츠 위로 가슴을 끌어안았다. [당신은 결혼한 남자예요] 그녀가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옆구리에 있던 그의 두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그녀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이 그녀가 줄 수 없는 대답을 요구하며 그녀의 눈을 쏘아보았다. [온갖 일을 다 하는 하녀!] 그가 조롱했다. [당신은 요리사에 가정부에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다 하는 사람이오. 성자 노릇이 지겹지도 않소?]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난 지금 가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그의 가슴패기가 치솟았다. [ 어디로 가고 싶지? 나한테서 멀리?] [당신은 내 사촌 동생하고 결혼했어요]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물론 그렇지. 그 성스러운 얼굴과 몸뚱이를 가진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는 모두 내 거지. 다른 남자들은 내가 가진 것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지. 이사도라는 영리하고 아름답지] [그래요, 그녀는 ...사랑스러워요] 그의 분노는 무서웠다. 그 검은 눈은 칼처럼 그녀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미워하고 있어.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나는 한 번도 그를 해친 적이 없는데... [난 하바나의 배리오에서 자랐소]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 부모님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했소. 대학을 마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 우리가 미국에 왔을 때 우리는 지위와 부를 얻었소. 나의 일부는 여기 잇는 저 사람들에 대한 경멸밖에는 아무 것도 없소] 그가 거실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주어진 자신들의 환경에 만족하고, 가난이 영혼에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건 모르는 사람들 말이오]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그의 얼굴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당신은 가난을 알기 때문이오] 놀랍게도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알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당신 부모님은 농부였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 숙모랑 핼 숙부와 사이가 좋지 않으셨어요] 그녀가 털어놓았다. [주위 여론이 아니었다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난 고아원으로 갔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고아원이 당신에게 훨씬 더 나빴으리라 생각하오?] 그때 그녀는 그 질문에 발끈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켄싱턴 가족 - 숙부와 숙모, 그리고 아름다운 이사도라 - 과 함께 사는 자신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는 알고 있는 듯했다.


한편으로 그녀는 이사도라가 그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그의 어린 시절이 성인이 된 그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절대 궁핍한 환자를 거부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사도라는 그의 그런 면모를 싫어했다. [그인

부랑자들에게

돈을

줘,

믿을

있겠어?]

이사도라가

결혼

번째

크리스마스에 노린을 물었다.[우린 그 일로 말다툼을 심하게 했어. 그 사람들은 지구의 쓰레기들이야. 그런 사람들한테 돈을 줄 순 없어!] 그때 노린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노숙자들을 위해 자신이 아껴서 모은 것들을 자주 기부했고, 공휴일엔 음식 배급 자원 봉사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놀랍게도 정장 위에 앞치마를 걸친 레이먼을 발견했다. [그렇게 충격받은 것처럼 보지 마시오] 그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병원 의사 가운데 절반은 한두 번씩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이런 곳에 와요] 그녀는 한 시간 동안 그의 옆에서 수프를 펐다. 그 도시의 희망 없는 빈민들이 뜨거운 식사를 위해 따스한 홀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적은 수입과 머리를 가릴 지붕에 고마워했다. 어린애 두 명을 데려온 한 여인이 한 끼니의 음식을 받고 고마워하자 그녀는 눈물일 핑 돌았다. 레이먼은 손수건을 그녀의 손안에 쥐어

주었다. [울지

말아요] 그가 스페인어로

속삭였다. [당신은 눈물을 흘릴 것 같지 않아요] 그녀가 이색적인 향기가 풍기는 새하얀 손수건으로 눈가를 조심스레 닦으며 투덜거렸다. 그가 부드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보이오? 난 내 환자들을 진심으로 염려하오. 나도 목석이 아니오. 환자들을 잃었을 대는] 그녀는 수프로 눈길을 돌리고 그릇에 퍼담는 일에 몰두했다. [라틴 계 사람들은 모든 일에 열정적이에요]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웅얼거렸다. [모든 일에 대해서...]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어저로 대꾸했다. 그녀가 손수건을 돌려주려 하자 그는 거절했다. [당신 베개 밑에 둬요. 그럼 꿈이 당신 인생의 공허를 보상해줄 거요] 그녀는 어리둥절해져서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자 그가 제정신을 되찾은 듯 딱딱하게 말했다. [실례했소] 그러곤 손수건을 그녀의 손에서 빼앗다시피 가져가서 마치 그게 화를 돋우는 듯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몇 해 동안 다른 사건들도 있었다. 한 번은 레이먼이 이사도라에게 재규어를 쓰지 못하게 하자 이사도라가 자신을 시내까지 태워다 달라고 노린을 부른 적이 있었다.


그녀가 거실에서 나오는 데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마음대로 쓸 거예요] 이사도라가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난 사치를 누릴 만해요. 나에겐 남편이 없으니까! 당신은 눈만 뜨면 사무실 아니면 병원에서 보내죠! 우린 함께 식사하지도 못하고 잠자리도 같이하지 못하잖아요...!] [이사도라!] 언쟁이 더 심해지기 전에 그녀는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큰소리로 이사도라를 불렀다. [노린이

여기에

웬일이지?] 노린이 거실

쪽으로

걸어가서 열린

문 앞에서

잠깐

머뭇거리는데 레이먼이 무섭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쇼핑 센터까지 나를 태워다 줄 거예요] 이사도라는 화가 난 상태로 그에게 쏘듯이 말했다. [당신이 태워 주지 않으니까!] 그녀가 노린 쪽을 흘끗 보았다. [아, 들어와, 그림자처럼 거기 서 있지 말고!] 레이먼이 매섭게 노린을 흘끗 보았다. 그 눈빛으로 보아 그녀가 비번일 때 복장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근무중일 때는 말쑥한 차림이지만, 비번일 때는 늘 농장 처녀처럼 입고 있었다. [솔직히, 노린, 다른 옷은 없니?] 이사도라가 화를 내며 물었다. [난 다른 옷은 필요없어] 노린은 자신의 봉급으로는 아파트 임대료와 자동차 기름 값도 겨우 감당하기 때문에 예쁜 옷 따윈 어림도 없다는 점을 사천에게 알려 주지 않고 대답했다. [정말로 경제적이군] 레이먼이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사도라는 자신의 가방과 캐시미어 스웨터를 쳐들며 그를 노려보았다. [노린하고 결혼할 걸 그랬네요. 노린은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옷도 부랑자처럼 입잖아요. 아마 아이들도 좋아할 거예요] 노린은 크리스마스에 시내의 음식 배급소에서 레이먼과 함께 있었던 이을 기억하며 낯을 붉혔다. [부랑자들이 어떻게 입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지?] 레이먼이 아내에게 차갑게 따졌다.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이사도라는 몸서리를 쳤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넣어야 해] 노린은 음식을 그토록 고마워하며 받던 그 여인과 두 어린애들을 기억하고 뱃속이 거북해져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말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빌어먹을, 좋을 대로 쓰시오] 레이먼이 아내에게 말했다. 이사도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런 말을 쓰다니. 그런 욕은 절대 하지 않았잖아요] [그 전엔 그럴 이유가 없었지]


이사도라는 신음 소리를 낸 뒤 노린에게 뒤따라오라고 쌀쌀 맞게 신호를 보내고는 유유히 걸어나갔다. 이사도라는 죽기 일주일 전에 가벼운 기관지염에 걸렸다. 레이먼은 한 외교관의 심장 수술을 하기 위해 동료 의사 한 명과 외국에 나가야 했다. 이사도라는 자신도 따라 가겠다고 애원했다. 하지만 레이먼은 몸도 안 좋은 데 비행기 여행을 하는 건 아주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거절했다. 레이먼은 오키프 시립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노린을 찾아가 자신이 없는 동안 이사도라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복수할 방법을 찾을 거요] 그가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를 잘 지켜봐 줘요. 그리고 병세가 나빠지면 그녀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약속할게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악화되면 병원으로 데려가요. 그녀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폐가 손상되어 있고, 천식도 있소. 폐렴은 치명적이 될 수 있소] [제가 잘 보살필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그의 검은 눈이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녀와 조금도 닮지 않았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얼굴이 긴장했다. [상기시켜 줘서 고마워요. 떠나기 전에 덧붙이고 싶은 다른 모욕은 없나요?] 그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모욕으로 한 말이 아니었소] [물론 아니죠]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당신이 내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건 알아요, 레이먼. 하지만 나도 정말로 이사도라를 염려해요. 그녀를 잘 보살필 거예요] [당신은 탁월한 간호사요] [아첨할 필요 없어요. 그녀 곁에 있겠다고 이미 말했잖아요] 놀랍게도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그녀를 돌려 세웠다. 그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난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아첨 따윈 안 하오]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특히 당신한테는] [됐어요] 그녀는 아프게 쥐고 있는 그의 손을 풀려고 애쓰면서 동의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팔을 얼마나 단단히 잡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그녀가 왜 비행기를 탈 수 없는지 이해시켜요. 내 말은 듣지 않으려 하니까] [그려죠.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같이 가고 싶어하는 걸 기뻐하세요]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 수술에 참가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그녀의 애인이오] 그가 짧게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래서 그토록 가고 싶어 안달하는 거요] 노린은 충격을 받았다. [몰랐소?] 그가 아주 부드럽게 물었다. [난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하오] 그가 퉁명스레 덧붙였다. [내가 아무리 섹스를 오래하고 무슨 짓을 해도 그녀는 하룻밤에 한 남자 이상을 필요로 하오. 그리고 나는 병원에서 집에 돌아오면 뼛골이 빠지지] [제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속삭였다. [그런 얘길 나한테 하면 안 돼요] [왜 안되오?] 그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누구한테 말하겠소? 나에겐 가까운 친구도 없고,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형제도 없는데. 이 세상에 나에게 다가올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소, 지금까지는] 그가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젠장, 노린, 제기랄!] 그는 그 말을 하고는 충격으로 하얗게 질려 떨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병원에서 유유히 걸어갔다. 그녀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왜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지를... 그녀는 그날 밤 그들의 아파트로 갔다. 이사도라는 얼음처럼 차가운 2 월의 빗속에서 얇은 잠옷 차림으로 발코니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레이먼이 아파트에서 나간 뒤로 이사도라는 줄곧 거기 나와 있었다고 불쌍한 파출부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파출부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맹렬한 말다툼이 있었고, 의사가 나간 직후에 부인이 빗속에 나가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리 달래도 이사도라는 안으로 들어가지 안았다. 게다가 이미 심하게 기침을 하고, 열이 40 도를 오르내리고 있는데도 의사에게 알리지 못하게 했다. 노린은 즉시 발코니로 가서 파출부와 함께 이사도라를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러곤 옷을 갈아 입혔다. 하지만 그러느라 언제나 약한 노린의 심장이 이상스럽게 뛰었다. 노린이 숨을 헐떡이는 동안 파출부는 자신의 남편이 이미 전화를 두 번이나 했고, 몹시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야 했다. 노린은 그녀를 보내기 싫었지만 눈물을 글썽이는 가여운 여자를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노린은 파출부를 보내고 나서 이사도라의 심장 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이사도라의 호흡은 불규칙했고 의식도 없는데다 열이 굉장히 높았다. 그녀는 구급차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발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웃에게 대신 전화를 부탁하려고 홀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그녀는 이제 정말로 겁이 났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녀는 홀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더듬어 찾았다. 하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으로 갔다. 4 층밖에 안 되니 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왠지 이사도라의 폐가 망가졌다는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이사도라가 죽을지도 오른다... 그녀는 놀라운 힘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아파 왔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발을 헛디뎠고 그와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는 것말고는 어떻게 된일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흰옷을 입은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사촌에게 돌아가야 하다는 걸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녀의 팔을 토닥이더니 주사를 놔주었다. 그녀가 병원에서 나와 레이먼의 아파트로 돌아간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파출부가 이미 이사도라가 죽은 걸 발견한 뒤였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이사도라가 병원으로 옮겨지기 전에 레이먼이 집에 돌아온 것이다. 노린은 구급 요원들이 이사도라의 시신을 들고 막 나왔을 때 문 앞에 도착했다. 레이먼은 노린을 보고는 스페인어로 욕설을 퍼부어 댔다. [오, 제발, 설명하게 해줘요] 그녀는 혼자서 앓다가 불쌍하게 죽어 간 이사도라에게 일어난 상황을 깨닫고 애원했다. [제발, 내 잘못이 아니에요. 내 말을 들어 줘요...!] [내 아파트에서 당장 나가!] 레이먼이 이젠 영어로 소리쳤다. [이 일로 죽을 때까지 당신을 증오할 거요. 노린. 내가 살아 잇는 한 절대 용서하지 않겠소! 당신이 그녀를 죽게 했소!] 나중에 장례식장에서 노린은 숙모와 숙부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숙모는 그녀의 뺨을 때렸고, 숙부는 그녀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레이먼은 그녀를 내쫓아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장례식장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순간부터 그녀의 숙부와 숙모가 숙부의 생일 며칠 전에 커피를 마시러 오락 초대할 때까지 추방된 사람이었다. 레이먼은 그녀에대한 증오의 감정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녀의 죄책감은 이사도라의 남편과 부모의 태도로 더욱 커지기만 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오직 일만을 생각하고 살았다. 다시는 친척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용서마저도. 3 오늘은 길고 힘든 오전이었다. 이미 까다로운 바이 패스(중요한 동맥 등이 막혔을 때 우회로를 만들어 혈행을 좋게 하는 수술)을 한 건했고, 판막 교체 수술이 점심 시간 뒤에 또 있었다. 오늘은 원래는 비번이지만 당번 의사가 독감을 심하게 앓는 바람에 대신 오키프 시립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점심 식사 쟁반을 들로 혹시 빈자리가 있나 둘러보았다. 하지만 하나도 없었다. 유일한 빈자리는 노린이 차지한 테이블에 있었다. 그는 샐러드 접시와 커피 너머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구석진 곳으로 가서 바닥에 앉았다. 노린은 낯을 붉히는 자신에게 화를 내며 접시 위로 눈길을 떨구었다. 저 남자에 대한 미운 감정들에서 빨리 도망칠 수 있다면...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면... 그가 갑자기 식사 쟁반을 맞은쪽 탁자에 내려놓고 의자를 빼자 그녀는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는 그녀가 놀라는 모양을 보고 재미있어했다. 그는 무릎 위에 냅킨을 펼치고 샐러드 접시의 플라스틱 뚜껑을 벗기고 포크를 집어들었다. [차마 바닥에 앉아서 식사할 수가 없어나 보죠?] 그녀는 덤덤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 참치 샐러드 쪽으로 머리를 숙이기 전에 잠깐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당신은 그런 짓을 너무나 잘 하잖아요?] [뭘 잘 한다는 거요?] 그녀는 입안 가득 과일을 삼키고 나서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나를 무시하는 거 말이에요. 당신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날 무시했어요. 그저 내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짜증스럽게 한다는 듯 말이에요] [엉뚱한 소리하지 마시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시계를 흘끗 보았다. [난 당신이 12 시 30 분에 점심 먹으러 간 줄 알았소] 그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날 피하는 거군?] [물론이죠] 그녀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잖아요. 당신이 말할 필요조차 없어요] 그녀는 그 역시 블랙 커피를 가져왔다는 걸 알아채고는 자신의 블랙 커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옆모습을 훑어보았다. 이사도라만큼 예쁘진 않지만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근사했다. 머리카락은 금발이나 연한 밤색은 아니지만 사람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동자는 파란색이라기보다는 잿빛이고, 절대 화장을 안 한다. 그녀는 늘 깨끗하고 말쑥한 모습이지만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적당한 머리 모양과 복장을 갖추면 그녀도 훨씬 매력있게 보일 것이다. 그의 눈이 그녀의 목덜미의 두툼한 쪽에서 가늘어졌다. 그는 그녀가 머리를 늘어뜨린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머리를 푼다면 어떻게 보일까...? 그녀는 자신을 살피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뺨을 물들였다. [바늘 끝의 나방이 된 느낌이에요] 그녀가 웅얼거렸다.[그만 좀 노려볼 수 없어요?] 나를 도끼 살해범쯤으로


생각한다는 건 알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까진 없잖아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난 한마디도 안 했는데...] 그녀가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잿빛 눈에는 환멸과 고독감이 가득했다. [그래요. 물론 안 했어요. 당신은 라틴계일지 모르지만 더 이상 라틴계처럼 행동하진 않아요. 당신은 분노를 터뜨리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목청껏 욕을 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표정만으로도 다른 의사들이 팔을 저으며 화를 내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지요, 눈이 대신 말하니까요] 그의 검은 눈이 좁아졌다. [그럼 그 눈이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소?] [이사도라의 일로 나를 비난한다고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를 증오한다고. 매일 아침 그 관에 있던 사람이 이사도라 대신 나였기를 바라며 깨어난다고] 그의 턱이 조여지고 눈이 번들거렸다. 당신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녀가 무겁게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면 하고 바랄 때가 있어요.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당신들은 조금도 믿지 않았어요. 나는 이사도라와 함께 자랐어요. 그녀는 때로는 잔인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내킬 때면 상냥했어요. 나도 그녀를 그리워해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상한 방법으로 그녀를 사랑했군] 그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그녀가 죽도록 아파트에 혼자 내버려두었으니...] 그 말이 나온 순가 그는 깊이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노린은 눈을 감았다. 요즘 자주 느낀 것처럼 현기증이 이고 숨결이 짧고 바트게 나왔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릎 위해서 두 손을 꽉 잡고 침착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레이먼은 탁월한 외과 의사다. 그가 너무 가까이에서 바라본다면 나의 상태를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조금 뒤 안정을 찾은 그녀가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가야 해요] [잠은 좀 잤소?] 그가 느닷없이 물었다. [내가 죄책감 때문에 잠도 못 잘 거라는 뜻인가요?] 그녀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네, 맞아요. 만일 내가 할 수만 있었다면 이사도라를 구했을 거예요] 그녀는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는 사람처럼 핼쑥했다. [당신은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소] 그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말하려고 했어요. 당신들 모두에게 말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듣고 싶군]


[2 년이나 지났어요] 그녀는 쟁반을 집어들었다. [그때는 기쁘게 얘기했겠지만 지금은 굳이 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녀의 눈은 감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이제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몸을 돌려 접시를 놓기 위해 자동 쟁반 반납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직원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레이먼의 검은 눈이 쓰라린 후회를 담고 그녀를 뒤쫓았다.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난 때를 기억하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는 한 자선 만찬에서 이사도라를 만났는데 그들은 곧바로 호감을 가졌다. 레이먼은 이사도라를 집으로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했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애틀란타 주 변두리의 거대한 조지아 식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가 레이먼을 소개했을 때 그녀의 부모는 거실에서 심야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얼마나 유명해지고 있는지를 듣기 전까지는 그를 쌀쌀맞게 대했다. 그때 노린은 두 손으로 해부학 책을 들고 테가 큰 안경을 콧등에 걸친 채 난로가의 커다란 안락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자신과 이사도라가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노린의 눈에 떠오른 표정을 그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 부드러운 잿빛 눈이 따스한 비밀로 가득한 거대하고 찬란한 불꽃처럼 불타올랐다. 그는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에서 자신이 그녀를 불타오르게 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이사도라밖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린은 야릇한 웃음을 살짝 띠고 뒤로 물러났다. 그로부터 몇 주 뒤, 그가 이사도라에게 구혼하는 동안 노린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식에 초대되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이사도라가 노린을 하녀 취급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노린을 주위 사람들 사이에 포함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사도라는 노린을 시기했다. 이사도라는 노린을 끌어내리고 환영받지 못하거나 열등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법을 즐겨 찾았다. 이사도라는 아름답고,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위엄 있고,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노린과는 달리 내면은 텅 비어있었다. 이사도라의 그런 질투심 때문에 그들은 지독한 말다툼까지 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이 들은 말들을 기억하며 속으로 몸서리쳤다. 그는 모든 것을, 심지어 그것까지 노린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 책임은 똑같이 나에게도 있는데... 그는 옆 테이블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바람에 상념에서 깨어나 손목 시계를 흘끗 보고 부랴부랴 점심을 마저 먹었다. 일하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일과를 마친 노린은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갔다. 시시각각 숨이 가쁘고, 욕지기가 나고, 심장 박동이 너무나 불규칙해서 괴로웠다.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너무나 피곤해서 저녁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미처 깨닫기도 전에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자 기분도 나아졌고, 심장 박동도 덜 변덕스러운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 일해야 했다. 만일 직장을 잃으면 의료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자신에게 필요한 판막 수술을 받기 위해선 그것에 의존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상된 판막이 누출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문의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또한 새는 판막을 가지고는 오래 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사도라가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도움을 얻기 위해 얼마나 절박했을까를 떠올리며. 레이먼이 지금 그 일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하다니, 비극이다.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셈이니까. 나는 이미 나의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대가를 지불했어. 그를 사랑하는 함정에 또다시 떨어지지 않을 거야. 고독이 더 안전해. 노린은 폐렴에 걸린 이사도라가 차가운 빗속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레이먼과의 말다툼이 어떤 것이었는지 늘 궁금하게 생각했다. 이사도라는 자신은 기관지염 항생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우겼다. 나중에 노린은 침대 매트리스와 스프링 사이에 항생제가 가득 든 병이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사도라는 레이먼이 프랑스에 데려가 주지 않는다고 그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지만 파출부는 그가 떠나기 전에 맹렬한 말다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레이먼은 자신이 이사도라를 데려가지 않자 그녀가 자신을 벌주는 거라고 얘기했다. 그뿐 아니라 애인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이사도라가 자신의 결혼 생활을 완벽하게 묘사하려 했지만 노린은 그보다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사도라가 이 세상에 없는 지금도 레이먼이 왜 그 결혼을 우상화하려는지 노린은 알 수가 없었다. 이사도라가 진짜로 죽을 작정이었는지, 아니면 오기였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이사도라는 손상된 폐가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레이먼은 이사도라가 일부러 찬 빗속에 오랜 시간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사도라의 시신을 발견한 파출부는 충격을 받고 쓰러졌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먼은 노린이 이사도라를 혼자 두고 나갔기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레이먼이나 이사도라이 부모는 노린의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저주하며 2 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노린은 이사도라와 함께 자라면서 사소한 말다툼은 했지만 정은 있었다. 그러나 켄싱턴 부부는 노린을 그들의 인생 밖으로 내쫓았다. 그녀는 출근해서 큰 어려운 없이 근무를 했다. 하지만 호흡 곤란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그날 오후, 그녀는 메이콘에 있는 자신의 주치의에게 진료 예약을 하고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를 받았다. 서글서글하고 상냥한 의사는 각종 검사를 한 뒤에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들어보았다. [당신은 간호사요. 언제 심장이 정상으로 기능하지 않는지 구별할 수 없소?] [아뇨, 하지만 그냥 심계 항진이었길 바랐어요] [그래요. 그런데 그 판막이 전보다 조금 더 새고 있소.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하오. 그것도 당장. 당신을 놀라게 하고 싶진 않지만, 만일 그 판막이 어느 날 갑자기 망가진다면 병원까지 옥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오. 그 점을 알고 있소?] 물론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레이먼의 냉담한 적대와 비난을 하루 더 받지 않아도 되는, 구원이라고 가끔 생각한다는 말을 어떻게 의사에게 할 수 있겠는가? 난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으로 죽을 거야. 내 심장은 망가졌어, 여러 가지 면에서. [마이어 박사한테 말해서 당신의 수술 날짜를 잡게 해야겠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인이 된 당신의 사촌이 레이먼 코르테로와 결혼했잖소. 그는 가장 뛰어난 심장 수술 의사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수련했소. 그가 수술할 수 있잖소?] [그분은 제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 몰라요. 저도 알리고 싶지 않고요] 그녀가 딱 잘라서 말했다. [이유가 뭐요?] [그가 저를 미워하기 때문이에요. 저의 건강 상태에 관해 조금이라도 소문이 난다면 전 직장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런 일이 생기면 전 의료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돼요. 병원에서 제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안다...] [당신을 해고하지 않을 거요] [할지도 몰라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중환자실의 환자를 책임지는 간호사들은 건강 상태가 최상이어야 해요. 전 저의 한계를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전 만일을 위해서 간호사를 한 명 더 두어야 한다고 우겼어요] 그녀가 어렴풋이 웃었다.[물론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단 말이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결국은 우리 모두 그렇죠] 그 역시 얼굴을 찡그린 채 일어섰다. [너무 오래 미루진 마시오. 오키프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해요. 내 환자들이 거기 있어서 모든 소문을 듣고 있소] 그가 그녀의 여윈 얼굴을 살펴보았다. [코르테로의 아내가 죽었을 때 당신이 그녀 곁에 없었던 이유를 왜 그에게 말하지 않았소?]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녀가 느슨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가 저를 계속 미워하는 게 전 더 편해요. 제발, 이유는 묻지 마세요] [그러겠소. 하지만 곧 조치하겠다고 약속해요] [그럴게요]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얼마동안이나 일을 못할까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에요...]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단체가 있소. 그리고 당신의 숙모와 숙부께서 세인트메리 병원에 소아가 병동을 기증했소. 분명 그들이 도와 줄 거요] 그녀는 깔깔 웃었다. [그들은 레이먼보다 더 저를 미워해요. 만일 제가 수술대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저를 위해서 울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이 세상 주구도] 그녀는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병원을 나섰다. 심장 박동을 안정시키고 혈액을 묽게 만들고, 수술을 받기 전에 아주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도록 의사를 설득하여 받은 처방전을 움켜쥐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보여] 그녀가 병동으로 들어오는데 브래드 도널드슨이 투덜거렸다. 브래드는 좋은 기사로 그는 4 년 전 노린과 동시에 오키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비록 동료로서의 우정일 뿐이지만 그녀에게 그는 유일한 진짜 친구였다. 브래드는 응급실에서 레지던트로 일하는 젊은 여의사를 사랑하며, 애를 태우고 있지만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그가 금발 머리를 갸웃하며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안색이 아주 나빠] [알고 있어] 그녀가 고른 호흡을 했다. [괜찮을 거야. 의사가 심장 박동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약을 처방해 주었어] [나한테 말해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건 내 문제야. 내가 처리할게] [너 때문에 걱정이야] 그가 웅얼거렸다. [자신들이 아플 때 절대 인정하지 않는 게 간호사들이야?] [아니야]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도덜드슨,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너무 그러지마. 우리에겐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어. 자, 어서 일 시작하자] [넌 너무 자신을 내보이지 않으려 해] 그가 과장되게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한 판막 환자가 노린의 근무가 끝나기 한 시간 전에 병동으로 실려 왔다. 그녀는 하얀 양식에 휘갈겨 쓴 서명을 보고 레이먼의 환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 여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녀는 몹시 놀란 것처럼 보였다.


노린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끈적거리는 피부에서 잿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당신은 심장병 병동에 와 있어요. 뭐든지 필요하면 이 단추를 누르기만 하세요] 노린은 그 여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침대 곁의 벽에 붙은 단추를 대주며 말했다. [알겠죠?] [목이 말라요] 여자가 목쉰 소리로 말했다. [너무...목이 말라요] [곁에 있어 줄 가족이 있으세요?] 노린이 물었다.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맥없는

대답을

한숨과

함께하고는

눈을

감았다.[이

세상에...아무도] 그 불쌍한 여인 때문에 노린은 가슴이 아팠다. 옆에 앉아 손을 잡아 줄 친구 한 명 없이 외롭게... 노린은 레이먼이 알지 못하도록 메이콘에서 수술을 받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브래드마저 곁에 앉ㅇ 있지 않을 것이다. 그건 서글픈 생각이었다. [얼음을 좀 갖다 줄게요] 노린이 약속했다. [조금 도움이 될 거예요. 약도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금방 오세요] 노린은 서둘러 얼음 기계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얼음을 채우고 있던 다른 환자의 아내 한 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남편은 오렌지 주스도 손수 따를 수 있고, 얼음도 가져올 수 있어요. 그래서 난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간의 말벗일 뿐이에요] 노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다면 방금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온 환자에게 얼음을 먹여 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녀는 가족이 아무도 없는데, 갈증이 지독하거든요] [그럼 내가 해줄게요, 불쌍한 사람. 우리 집안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보호자가 줄을 섰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연속극을 볼 정도로 회복되었거든요] 그녀가 킬킬댔다. [그이가 침대에 일어나 앉아서 다시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를 거예요. 난 그이를 잃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은 강해요. 회복되셔서 저도 기뻐요. 당신이 곁에 있어 준다면 찰스 부인은 아주 고마워할 거예요] [나도 뭔가 할 일이 생겨서 기뻐요] 노린은 그녀를 찰스 부인에게 소개해 주고 간호사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찰스 부인에 관한 중요한 정보들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브래드가 그녀 옆에 잠깐 멈춰 서서 말했다.[그렇게 카페인을 많이 섭취해야만 견딜 수 있는 거야?]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그렇진 않아] [몸 생각 좀 해] 그가 미소를 띤 채 그녀의 어깨에 큰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때 병동으로 들어오던 레이먼이 그 모습을 보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간호사 대기실 앞에서 발을 멈추고 노린을 노려보았다. 뒤늦게 그를 알아본 노린은 순간 긴장했다. [찰스 부인을 보고 싶소] 그가 딱 잘라 말했다.[시간을 낼 수 있다면...] 그러고는 정말로 낯이 붉어진 브래드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따라오세요] 노린은 브래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찰스 부인의 병실로 가는 길을 레이먼에게 안내했다. [고맙습니다] 레이먼을 본 찰스 부인의 한 손을 뻗으며 약하게 말했다.[ 선생님이... 제 생명을 구했어요] [별 말씀을요] 그가 부인이 내민 손을 잡았다. [통증에 대한 처방을 해두었으니까 필요할 때 드세요. 아프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휴식이 최선입니다. 하루쯤 지나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우리가 알려 드려야 할 가족이 있나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모두 죽었어요. 하지만 그린 부인이 얼음 조각을 먹여 주고 있어요. 그건 이 상냥한 아가씨의 덕택이랍니다] 레이먼이 노린을 흘끗 보았다. [당신이 일손을 덜었겠군?] 부드럽지만 비난하는 투였다. 노린은 그 말을 무시하고 찰스 부인의 가느다란 몸뚱이 위로 시트를 반듯하게 펴는 데 열중했다. [필요하면 부르기만 하세요] [아니에요] 친젛한 대답이 나왔다. [당신은 나한테 정말 잘해 주었어요] [부인처럼 좋은 사람에겐 친절하게 대할 수밖에 없죠] 노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레이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환자를 진찰하고는 병실을 나왔다. [어떻게 내 환자의 간호를 방문객에게 맡길 수가 있소?] 병실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그가 발끈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노린은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어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린 부인의 남편은 퇴원해도 좋을 만큼 회복되었고, 아내가 지켜보는 걸 바라지 않아요. 게다가 그린 부인은 할 일을 원했고, 저는 선생님의 환자에게 5 분마다 얼음을 먹여 줄 시간이 없어요. 저도 제 임무를 알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에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어요. 선생님.] 그녀가 신중하게 덧붙였다.[그린 부인이 시간을 내주겠다고 자청했어요. 제가 부탁한 게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레이먼은 브래드의 친밀함에 화가 났고,그런 것에 신경쓰는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난 내 환자들의 진료 기록부가 끊임없이 어떤 변화라도 있으면 알려 주시오. 새벽 3 시라도 상관없소]


[네, 선생님] 그녀는 진료 기록부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그녀는 부정맥(심박의 리듬이 고르지 못하고 불규칙한 상태)이에요] [수술을 너무 오래 미루었소. 한 발만 늦었어도 위험할 뻔했소. 지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까 그 환자를 주의깊게 관찰해요] [알겠습니다] 판막 수술에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그녀는 초조해졌다. 만일 내가 너무 오래 미룬다면? 내가 찰스 부인보다 젊긴 하지만 나에게도 부정맥이 있는데...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괜찮소? 당신 심장 박동이... 이상한데] 그가 그녀의 상의가 불규칙하게 들썩이는 걸 눈치채고 물었다. 그 말을 듣자 그녀의 호흡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요...] 그녀는 너무 낮아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고 연극조로 말했다.[너무 흥분돼요...!] 다행히도 그는 스페인어로 뭐라고 투덜거리고 나서 몸을 돌려 유유히 걸어가 버렸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4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걱정에다 업무의 부담 때문에 노린은 이틀 뒤 결국 앓아 눕고 말았다. 그녀는 독감이라고 둘러대고 병가를 냈다. [이러지마] 부래드가 문병을 와서 침울하게 말했다. [자포자기하고 수술을 받지 않으면 너 스스로를 죽이게 될 거야] [나에겐...3 주가 더 필요해... 돈을 더 저축하려면] 그녀는 너무 힘들고 숨이 차서 창백해진 채 설명했다.[그래야 집세를 낼 수 있어... 내가 회복되는 동안] [이 고집 불통 멍청이] 그가 투덜거렸다. [왜 너의 가족들은 네가 이렇게 아프다는 걸 전혀 모르니?] [그들은 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아. 그리고 가족이라야 숙모하고 숙부뿐이야. 부모님은 자동차 사고로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 [그들이 너를 길렀잖아. 널 염려하시지 않니?] [조금은 걱정했겠지. 이사도라가 죽기 전에는] 그녀가 서글프게 덧붙였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끝난 일이야] [정말 안됐어] 그가 무겁게 말하고는 그녀의 손을 토닥거렸다. [뭘 좀 먹을 수 있겠어? 내가 수프하고 샌드위치를 가져왔는데] [고마워. 나중에 먹을게. 지금 당장은 아무 것도 삼킬 수 없을 것 같아] [의사에게 전화할게]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아직 안 돼. 아침엔 나아질 거야. 난 알아. 그리고 병가를 냈으니까 이틀은 쉴 수 있어. 분명히 그 정도 시간이면...]


[침대에 누워 있어] 브래드가 사정했다. [무리하지 말고] [알았어] 브래드는 조금 더 머물고 나서 교대 근무를 하러 갔다. 그가 가고 나자 그녀는 전보다 더 큰 외로움에 휩싸였다. 그녀는 수프도 먹지 않고 밤낮 없이 잠을 잤다. 그리고 그날 오후엔 기분이 조금 나아졌지만 회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출근하는 날 아침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현관을 나서던 그녀는 어디선가 애처로운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울타리 아래에서 조그만 새기 고양이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어머나, 불쌍한 것...] 그녀는 달콤하게 속삭이며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고양이가 머리를 그녀의 턱에 문지르며 연방 가르랑거렸다. 그녀는 근심스런 미소를 띠었다. 이 아파트에선 애완 동물을 기를 수가 없는데... 그렇지만 새끼 고양이 한 마리쯤은... 그녀는 고양이를 외투 밑에 쑤셔 넣고 자신의 방으로 도로 올라갔다. 층계참에 다다랐을 때는 숨이 찼다. 그녀는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는 상자 밑에 신문지를 깔고 집을 만들어 주었다. 이 고양이 때문에 만일 여기서 쫓겨난다면 다른 곳을 구하면 돼. 하지만 새끼 고양이를 얼어붙을 듯한 찬 빗속에 내버려둔다면 고양이는 곧 죽고 말거야. 그럴 순 없어. 그녀는 고양이가 자신의 벗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작은 자동차에 올라탔다. 가슴속에 따스한 빛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차가 움직이질 않았다. 엔진이 고장난 것이다. 수술을 받을 때까지는 버텨야 하는데...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버스 정거장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그 날은 유난히도 길었다. 진짜로 병동 간호사 두 명이 독감으로 결근하는 바람에 노린은 이중으로 교대 근무를 해야 했다. [이건 말도 안 돼]그녀가 숨을 고르느라 벽에 등을 기대는 모습을 지켜보며 브리드가 투덜거렸다.[이런 상태론 곧 쓰러질거야] [난 일해야만 해] 노린은 몸만큼이나 힘없는 목소리로 브래드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대신 일을 맡길 사람도 없고... 알다시피 난 이틀이나 쉬었잖아]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아파트에서보다 지금이 더 나빠 보여] [고마워. 너는 정말 좋은 친구야]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할 일 없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가 막 하려던 질문이군]


문간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와서 돌아다보니 레이먼 코르테로가 한 손에 클립보드를 들고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여기서 일하지 않소? 어째서 내 환자가 혈액 희석제를 오후 5 시에 복용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소] 그가 그녀에게 진료 기록부를 흔들어 대며 말했다. 노린은 그를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의 마음은 몸만큼이나 피로했다.[어떤 환자요?] [헤이스 씨]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지금은 오후 8 시오] [제가 깜빡 잊고 있었군요] 그녀가 비참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벽에서 몸을 떼었다.[즉시 복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회진하는 동안 다른 환자 세 명의 진료 기록부도 점검할 거요] 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분명히 해요...또 다른 실수가 없도록] 그가 브래드 쪽을 노려보며 그녀를 따라갔다. [그건 브래드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을 시작했다. [아, 그건 알고 있소] 그의 눈이 번쩍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처럼 그는 노골적으로 시시덕대는 것에 약하지]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난 시시덕대지 않았어요] [마음대로 얘기해요. 당신이 헤이스 씨에게 약을 갖다 주는 동안 기다리겠소] 그녀는 헤이스 씨에게 약을 주고 다른 진료 기록부들을 모두 두 번씩 점검했다. 바이털 사인(혈압. 맥박. 체온. 호흡을 가리키는 의학용어) 은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린 씨의 소변 양을 깜빡 잊고 측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큰 소리로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이 일을 보고하진 않겠소] 레이먼이 회진을 끝냈을 때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실수하면 바로 관리 부장에게 갈 거요. 내 환자를 간호사의 무능 때문에 위험하게 만들진 않을 거요] [전 무능하지 않아요] [근무 시간에 도널드슨과 놀아나면서...] 그가 냉정하게 덧붙였다. [그런 게 아니고...] 그는 더 이상 변명을 듣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그는 불쾌한 기분을 참으려고도 하지 않고 근육질 몸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병동 밖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노린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날이 갈수록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정도가 짙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엇으로도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브래드가 흡입제 투약을 위해 환자에게 호흡기를 작동시켜 놓고 병실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갔어?] 그가 희망을 품고 물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내가 정말로 큰 실수를 했어. 누군가 죽을 수도 있었어] [약 한 번 조금 늦게 먹는다고 죽진 않아] 그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내가 좀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내가 너를 대신해야 했는데...] 그가 다정스레 한 팔을 그녀에게 둘렀다.[기운 내, 넌 이겨낼 거야] [오, 하느님. 그러면 좋겠어] 그녀가 약하게 말하고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한 시간만 견디면 난 집에 갈 수 있겠다] [의사를 만나봐] 브래드가 진지하게 말했다.[넌 모험을 하고 있어] 그녀의 두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런지도 몰라. 돈 몇 푼이 그리 중요하진 않은데 말이야. 고양이 좋아해?] 그녀가 희망을 갖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씩 웃었다.[난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어. 왜?]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잊어버려] 그녀는 간신히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바깥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칼로 내리치는 듯한 레이먼의 말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빰 위의 얼음 같은 빗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레이먼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환자들을 한 번 더 돌아보기 위해 병동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혈액 희석제를 예정보다 늦게 투여한 환자를 주의 깊게 진찰했다. 다행히 좋아지고 있었다. 그는 노린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투약을 늦게 하거나 진료 기록부에 기록을 하지 않는 건 그녀답지 않았다. 그는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브래드를 만나러 갔다. 브래드는 마지막 병실에서 자신의 장비를 가지고 막 나오는 참이었다. [왜 노린이 투약을 늦게 했소?] 그가 퉁명스레 물었다. 브래드의 입이 샐쭉해졌다. [노린은 아파서 이틀 동안 출근도 못하다가 겨우 오늘 출근했어요. 그런데 마침 다른 간호사가 독감으로 결근하는 바람에 이중 교대를 해야 했어요. 그러니 그녀가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게 무리도 아니죠] 레이먼은 긴장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그랬군] 브래드는 레이먼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로 노린을 잘 보셔야 할겁니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무슨 뜻이오?] 브래드는 그에게 말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비밀이 아니라 노린의 비밀이라는 생각이 말문을 막았다.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잊어버리세요.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거든요] 그는 그 말을 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레이먼은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그는 노린에게 사과하기 전엔 자신이 잠들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항복하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돌려 노린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달려갔다. 그가 나타나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여긴 어쩐 일이에요?] 노린은 파란 줄무늬 잠옷을 목덜미에서 움켜쥔 채 물었다. 그녀는 침대에 있었던 듯 맨발이고 부스스했다. 겨우 9 시 30 분밖에 안 되었는데... [도널드슨 말이 당신이 오늘 이중 교대 근무를 했다고 하더군]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난 몰랐소] 그녀의

눈썹이

휘어졌다.[그게

중요해요?

나를

속단하는

당신의

주된

취미

아니었나요?] 그의 눈썹이 한데 모아졌다.[ 난 당신을 경멸하는 걸 좋아하지 않...] 그는 아파트 안에서 나는 부드러운 소리에 멈칫했다. [이게 무슨 소리요?] 그때 조그만 털뭉치 하나가 부엌에서 야옹거리며 구르듯 달려왔다. 그는 그걸 보고 기가 막혔다. 그 동물은 그녀의 발보다 더 작고, 몹시 마르고, 굶주린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들어 턱 밑에서 꼭 껴안았다. 고양이가 연방 가르랑거렸다. [여기서는 애완 동물을 기를 수가 없어요. 하지만 찬비를 맞고 헤매고 있는 고양이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어요. 너무 조그맣잖아요] 그가 이사도라의 죽음에서 노린의 역할에 대해 정말로 의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 그는 그녀의 품에 안긴 그 작은 새끼 고양이에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졌다. 그녀의 숙모는 노린이 집에 데려온 수많은 길 잃은 짐승들에 관해 불평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학대받는 동물들을 구조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녀는 길 잃은 새끼 고양이도 그냥 모른 척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사랑한 사촌을 희생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너무나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사도아라의 죽음을 너무 쉽게 그녀의 타승로 돌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레이먼의 구릿빛 얼굴에서 갑자기 핏기가 가신 걸 눈치채고 고양이를 더욱 움켜쥐었다. [할말이 아직 남았나요?] 그녀가 따지듯 물었다.[난 몹시 피곤해요] 그는 그녀를 꿰뚫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병든 것 같고, 두 볼에는 밝은 반점들이있었다. 호흡은 변덕스럽고, 빨랐다. 뭔가 잘못되었어... [의사를 만나 보았소?]


[감기 때문에요?] 그녀가 깔깔대며 허세를 부렸다[저절로 나을 텐데 굳이 의사를 왜 만나죠?] [차안에 내 진찰 가방이 있소] 그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변덕스런 심장은 더욱 거칠어졌다.[주치의가 있어요] 그녀가 잇새로 말했다.[그리고 당신이 나를 진찰하게 할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죽어간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녀가 매정하게 덧붙였다.[해부용 칼을 든 당신을 절대 믿을 수 없어요. 그런 유혹은 당신에겐 지나친 걸지도 몰라요!] 그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어떻게 감히!] 그녀는 너무나 아파서 그 검은 눈으로 노려보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피곤해요] 그녀가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제가 쉴 수 있도록 그만 가주세요] 그는 머뭇거렸다. 분명 뭔가 잘못되었는데... 그는 문득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죄책감이 느껴졌다. [당신은 몸이 안 좋소] 그는 방금 그걸 깨달은 듯이 부드럽게 소리쳤다. [난 피곤해요] 그녀가 되풀이했다.[감기에 걸린 뒤로 너무 빨리 침대에서 일어났고, 너무 많이 일했어요. 내일은 괜찮을 거예요. 그걸 말해 줄 의사는 필요 없어요] 그녀는

광대뼈가

높고,

그녀의

입은

모양과

크기가

알맞고

사랑스럽다.

피부는

크림색이고, 약간 상기되었다. 그는 등뒤로 길게 묶은 머리를 푼다면 어떻게 보일까 새삼 궁금했다. [제발 가세요] 그녀가 초조하게 되풀이했다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그녀가 염려되었다.[건강 검진을 받아 봐요, 적어도] [기꺼이 그러죠, 하지만 오늘밤은 안 돼요. 이제 자러가도 될까요?] 그가 거친 소리를 내고 뒤꿈치를 돌렸다. [내일 아침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으면 집에서 쉬시오] 그가 쉰 소리로 말했다. [감히 나한테 지시하지 마세요]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좋을 대로 할 테니까] 그는 어깨 너머로 그녀를 흘끗 보았다. 그녀는 독립심과 지성과 영혼을 갖춘 한 여인이었다. 이사도라는 그를 잡기 위해 그의 의지에 굴복하고, 그의 자아에 아첨하고, 그의 열정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사도라는 지성적이지 않았고, 결코 정면으로 싸우지 않았다. 그녀는 동정을 얻기 위해 토라지고, 스스로 자초한 병에 걸리곤 했다. 그리고 절대 비에 젖은 고양이 때문에 두 손을 더럽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잘 자요]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나가다가 잠깐 멈칫했다.[문을 꼭 잠가요]


그녀는 물러서는 그를 노려보다가 문을 쾅 닫고 나서 잠갔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고, 두 무릎이 후들거렸다. 뭣 때문에 그가 나를 보러 왔을까? 정말로 낮에 나에게 혹독하게 대한 일을 사과하러 온 것일까? 그녀는 그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집까지 왔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집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집으로 가는 레이먼 역시 자신이 왜 그녀의 집까지 찾아갔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검소한 생활 방식 - 장식도 없는 알뜰한 가구들 - 이 눈에 선했다. 그녀는 확실히 숙부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봉급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걸 그녀가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기 때문일까? 그는 아내의 죽음에 대해 자신만큼이나 노린을 비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며칠 후, 그는 만찬 자리에서 켄싱턴 부부에게 노린의 생활 방식에 관해 단도 직입으로 물어 보았다. [그 애는 잘 벌고 있어] 메리 켄싱턴이 거만하게 말했다[게다가 우린 노린에게 아무 빛이 없어. 그앤 이사도라의 죽음에 책임이 있어. 그런데 어떻게 자네가 그애를 염려할 수가 있지?] [아파트에서 길 잃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더군요] 메리가 한 손을 휘저었다. [노린과 그 지저분한 동물들이라니! 그앤 끝없이 동물들을 우리집으로 데려왔지. 우리가 수의사에게 얼마나 자주 찾아갔는지 기억도 할 수 없어] [그애는 언제나 자비로웠지] 핼 켄싱턴이 동의했다. [내 형님에게서 그런 마음씨를 물려받았지] 그가 슬프게 회상했다.[형님도 그랬어] 레이먼의 검은 눈이 좁아졌다. [그렇게 자비로운 여자가 아픈 사촌을 일부러 죽게 내버려둘 리가 있겠어요?] 켄싱턴 부부는 둘 다 말문이 막힌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그가 조용히 물었다. [정식 면허를 갖고 있는 간호사인 노린이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고사하고, 어떤 인간이 죽도록 내버려둘 만큼 무감각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부부는 아무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이사도라가 죽고 2 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들은 마침내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를 요즘에 만나 본 벅이 있으세요?] 그가 그들에게 물었다. [핼의 생일 며칠 전에 커피 마시러 오라고 초대했지] 메리가 시인했다.[사람들이 뭐라고들 해서...왜?]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녀가 아픈 것 같아요] 레이먼이 말했다.[안색도 나쁘고 조금만 힘들어도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아요. 그녀의 주치의가 누군지 아세요?] [그애가 우리집에서 나간 지 오래됐어] 메리가 말했다.


[그래서 우린 그애의 사생활을 몰라] [그녀가 종합 건강 검진을 받은 적이 있나요?] 그들은 둘 다 멍하게 보였다. [글쎄, 그앤 늘 무척 건강했어. 굳이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갈 필요가 없어 보였지] 메리가 거의 방어하듯 대꾸했다. 그는 그들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병원 보험과에 있는 친구에게 찾아가서 노린을 채용할 때 종합 건강 검진을 요구했는지 물어 보았다. [글쎄, 그래, 그랬을 거야] 담당 직원이 동의했다.[하지만 그게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 그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어쩌면 다른 어딘가에 있을지도...] [그만둬] 그가 포기하고 말했다.[거기에 뭔가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만일 있다면, 새로운 법에선 먼저 존재하는 조건을 기초로 해고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그래, 물론 그렇지] 그는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나왔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노린의 이상한 행동과 그녀가 품고 있을지도 모를 건강상의 비밀을 끝까지 파고들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그는 그녀를 강제로 진찰할 수는 없었지만 관찰할 순 있었다. 그는 다음 한 주 내내 오키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회복기에 있는 환자가 몇 명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일을 지나친 주의를 끌지 않고도 해낼 수 있었다. 그들이 그린 부인의 진료 기록부를 검토하는 동안 그는 겨우 노린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숨가쁜 목소리를 듣고, 블라우스 칼라 아래서 퍼덕거리는 맥박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의 곁에 있음으로써 노린이 흥분하고 있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고 언젠가 노린이 짓궂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 말을 진지하게 새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확연하게 반응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기다란 손가락이며 갸름한 얼굴의 잡티 업는 피부와 섬세한 입 모양에 담긴 우아함을 주의 깊게 보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사도라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은 노린에 관한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녀를 빤히 보았을 때 그녀가 어떻게 얼굴을 붉혔는지, 자신이 이사도라의 부모와 같이 있을 때 그녀가 어떻게 피했는지, 그녀가 업무 외엔 왜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없었는지... 그녀는 몇 년 동안 여러

방법으로

나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일부러

피했다.

지금까지는.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녀의 동공이 확대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이사도라에겐 느끼지 못하던 감정이었다. 그는 이사도라와 결혼한 뒤 끊임없이


말다툼을 했다. 그녀는 아이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이사도라는 아이를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일들을 기억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노려보실 필요 없어요] 노린이 들고 있던 진료 기록부로 눈길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전 투약을 지체하지 않았어요] [그런 게 아니었소]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시선이 힘겹고 불규칙하게 들썩이는 그녀의 심장 위로 떨어졌다. 그녀가 그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그의 크고 우아한 몸과 닿는 것이 너무나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검토하실 진료 기록부가 더 있습니까?] 그녀가 불안정하게 물었다. 그는 가운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주치의를 만나서 종합 건강 검진을 받도록 해요] 그가 대뜸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깜짝 놀라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병을 앓고 있고, 그걸 숨기려 하고 있소. 그렇지만 그런 건 있을 수 없소. 이런 식으론 계속 일할 수 없소] 그녀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나...난 검진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가 자신의 건강에 관심을 갖는 것에 당황한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가 재촉했다. [의사가 다이어트할 때 비타민 B12 가 더 필요하다고 하며 철분제를 한 병 주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그걸로는 이게 설명이 안 되는데...] 그가 그녀의 목을 살짝 건드렸다. 맥박이 변덕스럽게 뛰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당황해서 그에게서 몸을 확 뺐다. [코르테로 박사님] 그녀는 그의 이름을 겨우 내뱉었다. [저는 저의 신체 조건을 박사님과 공유할 의무가 없습니다. 당신은 제 의사가 아니에요!] [물론 아니오. 하지만 난 여기 의사요]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난 당신에게 다시 건강 검진을 받을 것을 명령하고 있소. 그리고 그 서류의 복사본을 내야 할거요. 당신은 이 일을 미룸으로써 당신이 간호하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건강까지 위태롭게 하고 있소] 그녀는 자신에게 반격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지각을 지녔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는 내가 자신의 환자에게 실수를 할까봐 걱정하고 있다. 코르테로 박사가 자기 아내에게 보여 준 다정함과 관심을 가지고 나를 바라봐 줄 거라고 잠깐이나마 생각했다니... 그녀는 하얀 레이스 운동화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좋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이건 경쟁이 아니오]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고통과 패배감으로 약해진 어조로 말했다.[주치의를 만나 볼게요]


[기꺼이 이성을 찾아서 기쁘군] [걱정 마세요] 그녀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환자들을 고의로 위태롭게 만들진 않을 테니까요]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 때문이 아니고...]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사무적으로 말했다.[저는 교대하기 전에 할 일이 많아서요] 그녀는 진료 기록부를 가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호사 대기실로 걸어갔다. 레이먼은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전보다 더욱 머리가 복잡했다. 5 노린은 아침을 먹기 전에 블랙 커피를 한 잔 마셨다. 하루를 어떻게 견뎌낼지 겁이 났다. 그녀는 욕실 거울 앞으로 가서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규칙한 심장 박동은 오늘따라 더욱 심했다. 그녀는 뒤따라오는 고양이를 흘끗 보고는 자신이 멀리가 있는 동안 고양이를 돌봐줄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오늘이 최우선 임무일 것이다. 당분간은 돈에 대해선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싱크대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귀에도 변덕스럽고 거칠어진 심장 박동 소리가 두렵게 느껴졌다. 그녀의 의사는 요즘엔 아주 간단한 수술이라고, 사람들이 자주 받는 수술이라고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건강하고, 강인하니까 잘 이겨낼 거라고 덧붙였다. 물론 그럴 거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레이먼에게 부탁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고 바랐다. 그는 그 분야에서 최고다. 그러나 설령 그에게 부탁한다고 해도 그는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를

너무나

미워하니까. 그녀는 문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처음은 아니지만 차가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그녀는 손목 시계를 보고 신음 소리를 냈다. 버스를 타려면 뛰어가야 했고, 이미 늦어 있었다. 그녀는 차안에 열쇠와 가방을 놔둔 걸 깜박 잊은 채 차문을 잠갔다. 그녀는 절망감을 느끼며 차 유리 너머로 가방을 노려보았다. 지갑과 신용카드, 아파트 열쇠...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그녀는 먼저 해야 할 일부터 하자고 결정했다. 차와 가방은 나중에 걱정하는 거야. 다행히 그녀가 입고 있는 비옷에는 버스 요금과 간식값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열쇠가 필요하지 않을 테고, 아래층에 살고 있는 집주인이 따로 열쇠를 갖고 있으니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그날은 춥고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그녀는 모퉁이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헉헉대고 달려가서 버스에 올라탔다.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 박동이 다르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그녀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별안간 무서울 만큼 희미한 것이 점점 환해지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응급 환자가 수술실로 실려 올 때 레이먼은 이미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환자였다. 그의 동료 가운데 한 명이 벌써 카테터 요법을 실시해 두었다. 그건 곧 구조 시간을 넘겨 악화된 심장 판막이 누출 중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그는 그것을 보철물 판막으로 교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미지의 여인이 수술을 복잡하게 만들만한 의학적 조건이 아니기를 바라야 한다. 수술이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수술팀이 모였을 때, 산소 마스크가 이미 그녀의 얼굴에 씌여져 있었고, 그는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그녀의 피부는 크림빛이고 아주 부드러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수술로 기다란 흉터를 남기는 것이 유감스러웠다. 수술은 거이 네 시간이나 걸렸다. 수술이 끝났을 때 레이먼은 수술뿐 아니라 자신의 봉합술에 만족하며 허리를 폈다. 그녀에겐 가벼운 흉터만 남게 될 것이다. 만일 그녀가 비용을 댈 수 있다면 나중에 좋은 성형 외과 의사를 추천할 수도 있는데... 그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구가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부드러운

크림색

피부뿐이었다. 그녀의 심장은 강하고, 가벼운 기관지염 증세를 제외하고 양쪽 폐는 훌륭한 상태였다. 그녀는 다른 잠에서는 건강한 것 같았다. 그녀가 중환자실로 실려 가고, 그는 그녀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시간도 없이 다음 수술을 계속했다. 몇 시간 뒤, 여전히 수술 가운을 입은 채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살려 낸 그 젊은 여인을 보기 위해 중환자실로 갔다. 그녀는 통상의 기계들에 연결되어 있었고, 심폐 기계의 거대한 호흡 튜브가 아직도 입에 물려 있었다. 그러나 침대가에 멈추었을 때 그는 자신의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는 숨을 쉬느라 목이 메었다. 기사가 노골적으로 호기심을 보이며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 환자는 바로 노린이었다. 그녀는 손상된 심장 판막 때문에 쓰러진 것이다. 그녀의 심장이 나빴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아무도 몰랐다니! 평소의 차분함을 잃은 그는 책임 간호사를 손짓해 불렀다.[ 이 환자의 신원은 미상이라고 들었는데!] 그가 거칙게 말했다. [신원을 증명할 만한 것이 없었어요] [그녀는 내 죽은 아내의 사촌이요!] 그가 옆구리에다 주먹을 불끈 쥐고 쏘아붙였다. [그녀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절대 수술하지 않았을 거요!]


간호사는 그의 분노를 느끼고 움찔했다. [누군가가 그걸 알았더라면... 저희는 그녀가 극빈자인 줄로..] [그녀는 간호사요] 그가 짜증스럽게 말을 잘랐다.[오키프 시립 병원 심장 병동에서 일하고 있소]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절망적으로 병을 앓고 있는 그녀를 부당하게 대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여기로 왔죠?] 간호사가 묻고 있었다. [게다가 신분증도 없이? 틀림없이 지갑이 있었을 텐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는 마취 때문에 백짓장 같고 무표정한 노린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고는 튜브들이 연결된 그녀의 작은 손을 쳐다보았다. 짧은 손톱은 끝이 둥글고 매니큐어도 칠해져 있지 않았다. 그녀는 우아하지만 능력 있는 손을 가졌다. 그리고 나쁜 심장과 손상된 판막을 가졌다. 그런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왜? 내가 경멸과 혐오를 지닌 채 자신을 죽게 할까봐 두려워서? [그녀가 어떻게 해서 여기로 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간호사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만둬요] 그는 무뚝뚝하게 마하며 몸을 돌렸다.[내가 직접 알아보겠소. 이 환자에게 변화가 있으면,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나에게 알려 줘요] [네, 박사님] 그는 또 다근 수술 환자를 보기 위해 멈추었다가는 노린쪽을 마지막으로 근심스레 흘끗 보고 응급실로 내려갔다. 노린이 버스 안에서 쓰러져서 아무런 신원 증명도 없이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왔다는 것을 밝혀내는 데는 몇 분밖에 안 걸렸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을 때 누군가 그녀의 가방을 가져갔나 보다고 그는 추측했다. 그는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든 비닐 주머니를 가지고 그녀의 아파트로 갔다. 그는 열쇠가 없어서 아파트 주인을 찾았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문이 잠긴 채 차 속에 열쇠가 있더군요] 남자가 덤덤하게 말했다. [가방하고 소지품이 모두 그 안에 있었소. 그녀는 버스를 타려고 뛰어가는 것 같았소. 그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뛰어가야 했지. 속이 많이 상했을 거요] [위기 일발이었습니다] 레이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 심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며칠간 집에 못 올 겁니다] 집주인이 깜짝 놀랐다.[그렇게 조용하고 상냥한 아가씨가... 언제나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잘 웃더니... 그녀가 보고 싶을 거요. 내 아내와 내가 빨리 회복되길 바란다고 전해 주시오. 아가씨 방에서 가져가야 할거라도 있소?]


[아뇨, 지금은 없습니다. 그녀한테 물어 본 다음에 필요한 게 있으면 가지러 오겠습니다] 그는 고양이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파트 주인은 그녀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줄은 모를 것이다. [만일 내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소. 당신은 친척이오?] [네] 레이먼이 설명 없이 말했다. 그는 저녁 실사를 하러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병원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그녀는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레이먼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청진기로 그녀의 새로운 금속성 판막이 규칙적인 리듬을 확인했다. 그것은 열렸다 닫혔다 할 때 부드럽게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그 판막은 몇 년간 그녀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다. 이제부터는 조금만 애써도 호흡이 곤란해지거나, 심장이 변덕스런 리듬으로 뛰거나, 피로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린

구내

식당에

앉아

그녀가

언제

처음

자신의

심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녀의 판막 상태로 보아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그녀는 분명히 알았다. 왜 그녀는 자신의 증세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심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녀의 숙모와 숙부는 알고 있었을까? 이사도라가 죽고 나자 켄싱턴 부부는 그 자신처럼 노린을 비난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손목 시계를 보았다. 노린을 수술한지 여덟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노린이 안정을 취하고 있는 칸막이 방으로 가서 거친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연결된 여러 가지 모니터들을 점검했다. 모두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까? 그는 그녀 위로 몸을 기울이고 불쑥 그녀를 불렀다.[노린...] 그러자 별안간 그녀의 두 눈이 활짝 떠졌다. 뜻밖의 반가운 반응에 그의 심장은 펄쩍 뛰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의식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눈이 그의 검은 얼굴을 호기심에 차서 따라왔다. 분명 의식이 없어. 마취 효과가 가시지 않은 거야. 그는 그녀의 동공을 검사한 뒤 청진기로 그녀의 심장 박동을 확인했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호흡기 튜브가 제거되어 있었다. 그녀가 침을 삼키려고 했다.[너무...목이 말라요] 그녀의 목소리는 약하게 떨려 나왔다. 그는 보관되어 있던 약솜을 꺼내 그것을 그녀의 입 속에 발라 주었다.


[우리가 끄는 마취제요] 그가 설명했다. [맛이 고약하고 입안을 좀 건조하게 만들지.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요] 그녀는 안심하는 듯 졸음에 겨운 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여긴 ...웬일이세요?] [당신이 수술실로 실려 왔는데 아무도 당신이 누군지 몰랐소. 내가 수술했소]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말도 안 돼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그렇소. 하지만 난 당신 얼굴을 못 봤소. 당신인 줄은 꿈에도 몰랐소] 그녀는 눈을 뜨고 있느라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마이어스 박사님이...서운해하실 텐데] [마이어스 박사?] [메이콘...계시는. 주립 병원에...그분이...수술하기로...다음 주에]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두서없이 말하고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그녀는 밤새 잠을 잤다. 그는 그러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집으로 가서 메이콘에 사는 마이어스라는 심장병 외과 의사의 전화 번호를 찾아보았다. 그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가 전화에 대고 레이먼에게 말했다.[그런데 내 환자에 관한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내 죽은 아내의 사촌인 노린 켄싱턴입니다] 레이먼이 말을 꺼냈다. [아, 노린] 그가 웃음 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술대에 올려놓기 어려운 아가씨죠. 무슨 말인지 아시죠? 2 년 전에 난 애틀랜타의 고급 아파트에 사는 친구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웬 젊은 여자가 계단참에 쓰러져 있는 걸 관리소장이 발견하고는 나더러 도와 달라고 했어요. 난 그녀를 진찰하고 지방 병원으로 데려갔죠. 그 병원에서 엑스선 촬영과 초음파 심장 진단을 했어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판막이 조금 새고 있어서 내가 수술을 권유했는데...그녀는 수술을 거부했어요. 그리고 줄곧 몸이 불편한 사촌에 관해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그녀에게 가봐야 한다고 했어요. 난 그녀 자신의 증세가 더 염려할 정도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녀에게 진정제를 먹여서 안정될 때까지 밤새 머물게 했습니다] 이사도라가 죽어 가는 동안에... 레이먼은 두 눈을 감았다. 노린은 부주의한 게 아니었다. 노린은 쓰러졌던 것이다. [심장 마비였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주 경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돼요. 비록 심전도(심장의 수축에 따른 활동 전류를 곡선으로 기록한 도면)나 초음파 심장 진단상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곧 회복되었지만 내가 그녀를 계속 관찰해야 한다고 고집했지요. 한 달쯤 전에 누출이 증가하기 시작해서 그녀더러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수술 날짜를 잡으라고 우겼습니다. 그녀는 이미 여러 증상을 보이고 있었어요] 레이먼의 침묵이 그에게 전해진 듯이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그녀는 어떻습니까?] [오늘 아침 버스 안에서 쓰러졌습니다. 신원 미상의 환자로 실려와서 제가 응급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이 다 끝난 뒤에야 그녀의 신원을 알게 되었지요] [나원, 상황이야 어쨌든, 그녀는 최고의 치료를 받았군요. 그녀가 그토록 훌륭한 선생님 손에 있다니 안심입니다. 괜찮아지겠죠?] [바이털 사인들이 수용 범위 내입니다. 그리고 의식이 있어요. 더 지켜봐야겠지만 완전히 회복되리라 기대합니다] 그가 천천히 숨을 쉬었다.[난 그녀에게 심장병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얘기를 못 들었어요] [그렇게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녀가 아무한테도 말을 안 했어요. 가까운 친척이 한 명도 없는 외로운 아가씨 같아요] [그녀의 부모는 돌아가셨지만 그녀를 받아 준 숙모와 숙부가 계시는데...] [물론이죠, 하지만 친척들이 예기치 않은 아이들을 떠맡게 되었을 때 어떤지 모르시죠? 그들은 절대 친자식으로 여기질 않아요] 레이먼은

여전히

충격을

삭이려

하고

있었다.[그녀가

숙부댁에서

살았다고

얘기하던가요?] [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 방에 왔을 때 여권을 신청해 놓고 출생 증명서를 가지고 왔어요. 그녀는 해외에서, 제 3 세계 같은 곳에서 취직할까 생각 중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녀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이런 일이 생겨서 다행입니다. 내 환자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군요. 그녀가 회복되면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죠. 그녀에게 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를 진료한 것 외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그녀를 살아 있게 해주셨습니다. 다음 번에 애틀랜타에 오시면 한 번 들르십시오. 전 세이트메리 병원에 있습니다] [그러죠. 선생님도 메이콘에 오시게 되면 찾아 주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는 전화를 끊고 자신은 노린에 대해 모르는 게 정말 많다고 생각했다. 켄싱턴 부부는 그녀의 심장에 관해 알고 있을까? 그걸 밝혀야 한다. 그는 그들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행을 가서 다음 주까진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자동 응답 메시지만 드렀다.


그는 열쇠 수리인에게 노린의 차 문을 열게 해 소지품을 꺼냈다. 그녀의 가방을 갖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자 고양이가 그를 맞으러 달려왔다. 그는 반쯤 굶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양이를 들어 올려 자신의 상의 아래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아파트 문을 도로 잠그고 떠났다.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을 몇 가지 샀다. 고양이는 버릇이 잘 들었는지 그의 옆좌석에 앉아서 기분 좋게 가르랑거리기만 했다. 그가 다시 집으로 왔을 때, 고양이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가 얼마나 외로운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는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날 받은 의학 잡지를 펼쳤다. 고양이가 그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와서 편안하게 몸을 말고 목을 가르랑거리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중환자실에 전화를 걸어 노린의 상태를 물었다. 다행히 좋아지고 있었다. 다음날 늦어서야 그는 노린을 체크하기 위해 중환자실로 갈 수 있었다. 그의 일정은 하루 온종일 꽉 차 있었다. 그녀의 침대 옆에 멈춰 섰을 때도 그는 여전히 수술 가운을 입은 채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진찰하고 모니터들을 잣하고, 그녀의 심음을 들어보았다. [나는...괜찮아요. 언제 집에 갈 수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너무 성급하다고 생각지 않소?] [목이 말라 못 견디겠는데 물도 주지 않으려 해요] 그가 일러바쳤다. [게다가 저 키 작은 금발 간호사는 내가 물어 볼 때마다 무시해요] [내가 혼내 주겠소] 그가 기분 좋게 약속했다.[당신은 내일 오전 중에 특실로 옮겨 갈 거요. 당신을 돌봐줄 간호사를 고용하겠소] [필요 없어요] 그녀가 움찔하더니 숨을 쉬려고 멈추었다. [...당신의 도움 따윈!] [고맙소. 난 당신 몸이 좋아지고 있어서 기분이 좋소] 그는 화를 내는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지못한 듯 싱긋 웃었다. [그래, 당신은 확실히 좋아졌소. 나중에 다시 오겠소] 그녀는 아직도 마취의 후유증을 느끼며 눈을 깜박거렸다. [자고 있어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고분고분 눈을 감았다. 그는 키 작은 금발 간호사에게 노린을 잘 돌보라고 부탁한 뒤 중환자실을 나왔다. 마지막 수술은 운이 없었다. 환자는 레이먼의 실력으로도 살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는 허무한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슬픔을 보고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니...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때 여자 목사 한 명이 어디선가 나타나서는 슬픔에


빠진 가족들을 떠맡았다. 정말 고마운 목사들이라고, 그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생각했다. 그들은 다이야몬드를 걸칠 가치가 있다. 그는 그날 밤 중환자실로 걸음을 옮겼다. 금발 간호사와 교대한 명랑하고 젊은 흑인 간호사가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커다랗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선생님 환자들은 내일이면 일어나 앉을 수 있지요, 그렇지요?] [그럴 것 같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들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어요. 아까 켄싱턴 양에게 저녁을 먹였는데 남김없이 먹었어요. 식욕이 왕성해요] 그가 웃음지었다.[잘됐군요. 악화된 데는 없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바이털 사인도 양호하고, 순간순간 좋아지고 있어요] [고맙소] 그는 노린의 침대가로 걸어가며 말했다. 노린은 이제 의식이 완전히 돌아와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있었다. [당신이 수술했죠?] 그녀가 따졌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당신이 누군지 몰랐소. 당신에겐 신분증이 없었소] [차안에 가방을 둔 걸 깜빡 잊고 문을 잠갔어요. 출근 시간이 늦어서 버스를 타려고 뛰어가야 했어요] 그녀는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며 병원 가운 밑의 가슴패기를 만졌다. [아파요] [곧 좋아질 거요. 버스를 타려고 달린 것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소. 쓰러질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하오?] [아무 것도 못 느꼈어요] 그녀가 회상했다. [바닥이 나를 향해서 올라 왔고, 난 코가 부러지는 줄 알았어요. 그 다음은 사방이 온통 하얘졌어요] [통증은 없고?] [내 기억으론 없었어요] 그녀는 그의 굳어진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말했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군요] 그녀의 따스한 마음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힘든 날이었소. 게다가 환자 한 명을 잃었소] [안됐군요]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늘 있는 일이지. 하지만 가슴 아픈 건 언제나 똑같소] 그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안색이 훨씬 좋아졌군] [언제 직장에 복귀할 수 있나요?] [당신이 좋아지면]


그녀가 그를 쏘아보았다. [난 일을 안 하면 굶어 죽어요] [아니, 그렇지 않을 거요. 당신의 병원 보험은 최고의 혜택을 줄 거요] [어떻게 아셨죠?] [내가 알아봤소. 당신은 벌써 컴퓨터에 올라 있소. 내가 당신 이름을 올렸소. 그건 그렇고, 당신 숙부한테 전화했는데 안 계시더군] 그녀의 눈이 커튼으로 옮겨갔다.[그분들을 귀찮게 만들 필요 없어요. 병원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당신은 그들의 조카요. 그들은 당신을 염려하고있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문제로 그와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내일 동관 3 호실로 갈 거요] [심장 병동이군요. 전체가 특실이죠. 거긴 간호사가 부족해요. 내가 거기 누워 있다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런 일은 없을 거요. 당신은 탁자에 있는 모니터에 연결될 거소 누군가 줄곧 지켜볼 겅. 게다가 기사들이 병동 내에 쫙 깔려 있소. 염려 말아요. 그리고 당신만을 간병할 간호사를 쓸거요]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난 그럴 돈이 없어요!] [진정해요. 괜한 신경쓰지 말고] 그가 주의를 주었다. [당신은 내 가족이오. 내가 지불할 수 있소] [아뇨, 난 아니에요] 그녀는 그 말을 씹어뱉었다.[난 친척도 없고, 아무도 없어요] 그는 그녀의 눈에서 분노와 적대감을 읽었다. 2 년 동안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녀를 무조건 비난해 왔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당신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개인 간호사가 당신을 간호할 거요. 아침에 체크하러 오겠소] 그는 그녀의 대답을 듣기 위해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문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우람한 등을 지켜보며 주먹으로 침대를 사납게 쳤다. 그러자 가슴이 아파서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진통제 필요해요?] 간호사가 얼른 다가와서 물었다. [네, 부탁해요] 그녀가 예쁜 간호사한테 대답했다. 간호사에 대한 레이먼의 얘기는 농담이 아니었다. 다음날 저녁 작고 포동포동한 여자가 뜨개질 가방을 갖고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폴리 플림이라고 소개했다. 그러고는 얼음 조각을 갖다 주고, 주기적으로 바이털 사인과 카테터를 체크하고 매번 격려해 주었다. 브래드는 그녀의 병실에 들렀다가 그녀가 훌륭한 간호를 받고 있는 걸보고는 즐거워했다.


하지만 노린이 벌써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를 하자 매우 걱정스러웠다. 그는 의사가 퇴원을 허락하지 않기를 바랐다. 노린 혼자선 도저히 살 수 없었다. 6 노린은 심장 병동에서 이틀을 보내고 나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맨 처음 논리적으로 생각한 것은 자신의 아파트에 있는 불쌍한 고양이었다. [내 고양이 말인데] 그녀는 브래드가 병실에 들르자 애원하듯 말했다.[내 아파트에 혼자 있어. 먹을 것도 물도 없이 며칠씩 거기 있었어. 죽을 거야!] [아, 그 고양이...] 브래드는 생각에 잠겼다.[고양이 걱정은 하지마. 그 고양이는 코르테로 박사님과 같이 살고 있어] 그녀는 깜짝 놀라 그를 보고 헐떡거렸다.[레이먼하고?] [그렇다니까. 상상해봐. 난 그가 동물을 싫어하는 줄 알았어] [나도] [넌 절대 못 믿을 거야, 가가 고양이 얘기하는 걸 들으면, 목걸이랑 온갖 장난감을 사주고...같이 잔대] [맞아. 믿어지지가 않아. 지금 농담하는 거지?] [회진 돌 때 물어봐] 그가 얼굴을 찡그리고 말했다. [틀림없어] 노린은 그 이야기가 엄청나게 부풀려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이사도라가 말한 적이 있었다. 레이먼은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싫어해서 자식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파티와 모임을 좋아하고 유별나게 깔끔한 사람이라고 이사도라는 무심코 덧붙였다. 플림 간호사는 그녀의 저녁 식사를 가지러 구내 식당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노린은 쓸쓸한 심정으로 외롭게 자신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느라 레이먼이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청진기를 가지고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가 차가운 금속을 그녀의 헐렁한 환자복 밑의 가슴패기로 기울이며 투덜댔다. [평소처럼 편하게 숨을 쉬어요] 그녀는 그의 검은 피부와 두껍고 반듯한 검은 머리카락과 촉촉한 검은 눈이 보이지 않도록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빤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너무나 괴로웠다. 그는 그녀가 눈을 뜨는 걸 지켜보며 물었다. [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녀가 그에게 알려 주었다. [나도 알고 있소] 그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식욕은 어떻소?] [주는 건 뭐든지 다 먹어요]


[아니, 그렇지 않소. 당신은 젤리 과자하고 수프말고는 모두 남기지. 그러면 안되오.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오] [가스라 찼어요] 그녀가 대들 듯이 말했다. [뱃속에 음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그렇다면 처방을 해주겠소] 그가 진료 기록부에 기록을 했다. [음식을 다 먹도록 해요, 안 그러면 정맥으로 공급할 테니까] [알았어요] 그녀가 무겁게 말하고는 그에게 눈을 돌렸다 [내 고양이는 어때요?] 그가 검은 눈을 반짝거리며 싱글거렸다. [고양이 두 마리가 먹을 만큼 먹어 대고 있소] 그녀는 그의 겉옷을 째려보았다. [돌봐 줘서 고마워요] [그 고양이는 전혀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소] [믿을 수가 없군요. 당신은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아니면 나를, 그녀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아직도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았나?

나는

동물을

좋아하는데... 동물을 잘 돌볼 시간이 없고, 아파트가 개나 고양이에게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기르지 않고 있을 뿐인데. [통증은 어떻소?] [참을 만해요] 그는 그녀에게 주입되고 있는 수액에 연결하기 위해 혈관에 삽입해 놓은 션트를 검사하려고 그녀의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션트(혈액을 다른 길로 흐르게 만든 측로)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언제였소? 사흘 이상 제자리에 머물지 않도록 메레디스가 언제나 갈아 놓는데...]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메레디스가 아니라 애니가 했어요. 그리고 간 지 하루도 안 됐구요] 션트들은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찌를 혈관을 찾느라 허둥거릴 필요가 없도록 삽입해 놓는 것이다. 심장 수술을 받은 환자는 혈관이 막히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의 다슨 손을 들어 올렸다. [핸드 크림을 늘 쓰나 보군]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을 문지르며 한 마디 했다. [피부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소] 그녀는 얼른 손을 빼냈다. [일하는 손이에요. 모델의 손이 아니고] [알고 있소, 노린] 그녀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내심 놀랐다. 그는 피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빨리 떠나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노린이 자신의 손길을 싫어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결혼 1 주년 기념일 파티 때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부엌에 있던 그녀를 떠올렸다. [나중에 체크하겠소]


[고맙지만 그러실 필요 없어요. 플림 양이 아주 잘해요] 그는 그녀의 냉정함에 부아가 치밀었다. [차라리 존에게 회진을 시키는 게 낫겠소?] 그가 자신의 수술팀 조수 이름을 대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신만 괜찮다면] 그녀가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의 분노가 생각지도 않게 맹렬해졌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의 진료 기록부를 쟁반에 놓고 병동을 떠났다. 노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만 더 있으면 여기에서 나갈 수 있어. 조금만 회복되면 레이먼이 일하지 않는 병원에서 일자리를 찾아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생명을 빚졌지만 영혼을 빚진 건 아니다. 더 이상 그를 위해 나를 고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몇 달 전에 레이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제 3 세계에서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생각으로 여권을 신청한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비춰 보면 그 꿈은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하니 창문을 응시하며 숙모와 숙부가 정말로 여행 중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노린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단지 책임 의식과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녀를 받다들였을 뿐이다. 그녀는 그들의 인생에 들어온 불청객이었고, 언제나 가족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다섯 번째 바퀴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레이먼을 짝사랑하지도 않을 것이고, 숙모와 숙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이사도라가 죽은 게 내 탓이라고 비난해도 신경쓰지 않을 거야. 나는 새 직장과 새 아파트, 새 인생을 얻을 거야. 회복되는 대로 미래를 계획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치열하게 살 거야. 그녀의 생각을 모르는 레이먼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의 아파트로 차를 몰고 갔다. 그는 자신이 노린을 보러 가거나 간호를 감독하는 걸 그녀가 원치 않자 몹시 화가 치밀었다. 내가 그녀의 목숨을 구했는데도 그녀는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가 음료를 한 잔 따라 안락 의자에 무겁게 앉자 곧 고양이가 따라왔다. 녀석은 그의 몸 위에서 몸을 말고는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적어도 넌 날 반기는구나] 그가 멍하니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고양이가 곁에 있는 것이 좋았다. 고양이는 그가 인생에서 놓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그는 텅 빈 아파트와 고독과 슬픔과 고립감 속으로 돌아왔다. 이사도라가 살아 있을 때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가득한 집이었다. 그는 이사도라가 경멸하는 의학 잡지를 읽을 수 있는 평화와 고요함이란 사치를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이사도라는 그와 사는 생활 속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이사도라는 동물과 어린애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족을 만들어 보자고 했을 때 그녀가 웃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녀는 몸매를 망치고 갓난아기의 노예가 될 거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고상한 가구에 고양이털이 닿는 것 싫어했고, 개들은 그저 골칫덩어리라고 여겼다. 아이들처럼. 그는 이사도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이가 있는 가정에 대한 꿈을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아이들이 있는 동료를 늘 부러워했다. 그들은 결혼하고 몇 개월 뒤부터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이사도라는 죽기 전 몇 달 동안 지나치게 술을 마셔 댔다. 그녀는 그를 속이고, 협박하고,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비난을 해댔다. 그러다가

마침내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그녀는

그에게

욕정을

일으키는

여자는

노린이라고 사납게 비난했다. 물론 그게 처음은 아니었다. <노린은 절대 당신을 원치 않을 거야. 그녀는 남자를 무서워하는 데다 더구나 당신이라면...> 그는 이사도라가 한 말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는 음료를 홀짝거리며 이사도라와 벌인 말다툼을 떠올렸다. 이사도라는 그의 일과 환자들에 대한 헌신과 비상시에 집을 비우는 것을 싫어했다. 한 번은 어떤 환자의 아내가 레이먼을 바꿔 달라고 하는 걸 거절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 남자는 심장이 정지되어 있었고, 다행히도 다른 의사가 그를 구해 주러 갔다. 그 일은 레이먼이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일주일 전에 벌어졌다. 그리고 이사도라는 기관지염에 걸린 채 겉옷도 입지 않고 차가운 비를 맞으며 걸어다녔다. 그는 노린에게 이사도라와 함께 지내며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프랑스로 갔다. 노린은 사촌을 간호하기 위해 휴가를 포기하고, 선선히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처럼 노린이 이사도라를 죽게 내버려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한 마디도 변명할 수 없도록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린의 경미한 심장 마비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다. 그와 켄싱턴 부부는 무려 2 년간이나 잘못도 업서는 그녀를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벌을 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손길과 도움을 거절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크게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오만하게 노린을 정죄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노린을 무자비한 살인자로 낙인찍을 수 있었을까? 나는 그녀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그때도 이사도라의 건강을 핑계로 프랑스로 데려가지 않았지만 사실은 데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와 이사도라는 말년에 끊임없이 싸웠다. 더구나 프랑스로 떠나던 그날은. 양심이 새록새록 그를 괴롭혔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노린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사도라를 지켜 주지 못했지만 나는... 나도 이사도라의 죽음에 한몫했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찌 노린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만일 노린에게 나의 잘못을 보상할 시간이 있다면...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순 없겠지만 그녀의 인생을 조금 더 편하게 해줄 순 있을 것이다. 켄싱턴 부부에게 얘기해서 그들을 이해시키고 노린의 누명을 벗겨내야 한다. 그건 나에게 달려 있다. 다음날 노린은 브래드의 부축을 받아서 병동 주위를 세 바퀴 돌았다. 걸음으로써 새로운 판막이 쉬지 않고 움직이고, 폐를 맑게 해주고, 기력을 되찾게 해준다. 그녀는 며칠만 있으면 혼자서도 걸을 수 있게 될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적어도 레이먼이 병동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를 보는 순간 그녀의 두 눈에 생기가 없어지고, 웃음이 사라지고 갑자기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손이 브래드의 긴 팔을 꽉 붙잡았다. [좋소] 레이먼이 화기를 잃는 그녀를 못 본 척하고 말했다. [당신한테 필요한 건 바로 걷는 거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해요. 더 빨리 회복될 테니까] [이번이 세 바퀴째입니다] 브래드가 말했다. [점점 잘하고 있어요] [그래, 그렇군] [우린 계속 움직여야해] 그녀가 브래드에게 말했다. [가만히 서 있으면 휘청거리게 돼] [브래드, 301 호에서 찾고 있어요] 간호사 한 명이 브래드를 불렀다. [샤프 씨의 호흡 기계 약이 떨어져 간다고 하던데] 브래드의 얼굴에 노린을 그대로 버려 두기가 싫은 표정이 드러났다. [노린은 내가 도와주겠소] 레이먼이 브래드의 자리를 맡으려고 가면서 말했다. [환자한테 가보도록 해요] [네, 선생님] 브래드가 노린에게 미안한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그녀는 방금 사형 집행인에게 넘겨진 사람처럼 보였다. [나를 잡는다고 죽진 않소] 레이먼이 그녀의 손을 자신의 팔에 올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 걸어요] 그녀는 걸었다. 그를 미워하고, 다른 직원들의 호기심에 찬 눈길들을 미워하며... 의사가 회진 도중에 짬을 내서 환자에게 걸음을 걷게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통증은 어떻소?] 간호사 대기실에 돌아갔을 때 그가 물었다. [나아졌어요] 그녀가 잇새로 말했다. 그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천천히 자신이 옆으로 끌어당겨서는 마침내 그녀의

병실로

돌아왔다. 그가 그녀를

침대에 쥐고, 슬리퍼를

벗겨 주고, 산소

실린더에서 호흡기 튜브를 빼고 벽걸이에 다시 조정했다. 그러고는 청진기로 그녀의 심음을 들었다. 그동안 그녀는 레이먼에게 무력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의 검은 눈이 그녀의 연한 색 눈과 마주쳤지만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아파요] 그녀가 불안하게 말했다. [처방을 해주겠소] 그는 시트를 그녀의 허리까지 끌어 올렸다. [따뜻하오?] [그럼요] 그녀는 시선을 그의 넥타이로 내렸다. 느리고 깊이 들이쉬는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당신 고양이가 궁금하지 않소?] 그녀는 호흡을 조정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잘 있나요?] [물론이오. 집에 가서 다시 보게 되면 반가울 거요] [네...] 그가 보일 듯 말 듯하게 웃었다. [난 그 고양이에게 익숙해졌소] [세상엔 집 없는 고양이들이 얼마든지 있어요] 그녀가 애매하게 말했다. [당신이 없는 동안 당신 고양이를 돌보면 나중에 방문할 권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소]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두 눈을 치떴다. [난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요] 그의 눈꺼풀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그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조용히 물었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알고 있잖소. 당신은 틀림없이 내가 끝내는 모든 걸 알아낼 거라고 생각했을 거요. 당신이 심장 마비를 일으켰고, 그래서 이사도라르 혼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고 난 기절할 뻔했소] [난 몇 번이나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아무도 내게 어떻게 된 이인지 묻지 않았어요]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나는 2 년 동안 살인자 취급을 받아 왔어요. 내가 그 모든 걸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똑바로 일어섰다. [아니, 나라도 잊을 수 없을 거요. 사과하겠소]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사과한다고 해서 당신이 지나간 2 년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진 않소. 정말로 미안하오]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눈까풀을 내리깔았다. [당신은 몰랐어요] 그녀가 생기 없이 말했다. [그분들도 몰랐고요. 아,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녀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며 비참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죽었어요! 그리고 그건 내 잘못이었고! 난 내가 집에 가야 하는 이유를 의사한테 더 강하게 이해시켜야 했어요!] 그는 그 말들이 마치 자시의 배를 찌르는 비수처럼 느껴졌다. [노린!]그가 부드럽게 외쳤다.


그때 문이 열리고 브래드가 레이먼의 거무스름한 얼굴을 비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들어왔다. [그만 좀 괴롭힐 수 없어요?] 그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당할 만큼 당했단 말이에요!] [그래, 맞소] 괴로움 가득한 노린의 눈에서 창백한 뺨 위로 굴러 떨어지는 눈물을 지켜보며 레이먼이 잦아든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난 돕지 못했소] 그가 몸을 돌려 열린 문가로 걸어갔다. [진통제를 보내겠소. 그녀에게 먹여줘요] 브래드는 대답하지 않고 티슈를 뽑아 노린에게 건네주었다. 레이먼은 홀로 내려갔다. 노린의 얼굴에 흐르던 눈물... 전에도 그녀의 눈물을 보았지만 그때는 무정하게 외면해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가슴이 몹시 아팠다. 그는 냉대와 적대감으로 보낸 세월이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노린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 노린은 개인 간호사 플림을 내보냈다. 더 이상 레이먼의 도움에 고마워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 그녀는 짐꾼과 함께 택시를 타러 나가다가 심장 병동 문 앞에서 겥싱턴 부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돌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들을 흘끗 보았다. [레이먼한테 얘기 들었다. 지금 퇴원하는 길이니?] 숙부 핼이 말을 꺼냈다. [네, 전 제 아파트로 돌아가요] 그녀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여기엔 왜 오셨어요?] 핼은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네가 큰 수술을 받았잖니] [우린 여행 중이었어] 숙모가 덧붙였다. [오늘에야 돌아왔단다. 우리가 알았더라면 분명히 네가 여기서...] [굳이 미안한 척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두 분은 의무 때문에 오신 거예요. 아무도 수군대지 않을 거예요. 그럼 전 몸이 안 좋아서 집으로 가봐야겠어요] [옛날에 쓰던 방을 써도 된다] 숙모가 다급하게 말했다. [너를 돌볼 간호사를 둘 테니...] [전 제 아파트로 가요, 메리 숙모] 그녀가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하지만 넌 혼자 살잖니] 숙부가 끼여들었다. [혼자서는 지낼 수 없어] [전 오랫동안 혼자 살아 왔어요]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는 그들에게 냉담하게 말했다. [전 그게 편하고 좋아요] 그녀가 짐꾼에게 고갯짓을 하자 그가 그녀를 홀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켄싱턴 부부는 어안이 벙벙해서 나란히 서 있었다. 노린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아주 오래 전에 집으로 데려온 그 조용하고 다소곳하고 수줍음 많은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레이먼이 그 애가 예전 같지 않다고 했잖아요] 메리 켄싱턴이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가 그 애를 너무 심하게 대했어요]


[우리 세 사람 다 그랬소] 그녀의 남편이 조용히 동의했다. [그 애가 해명하려 했을 때 우리가 들어주었더라면... 끔찍한 일이오. 그 애가 죽을 수도 있는 상태였는데, 우리는 알지도 못했소] [우리 곁으로 데려와요] 그가 유머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고는 두 손을 호주머니 속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우선 뭘 좀 먹으로 갑시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그때

고급

정장을

차려

입은

레이먼이

직원용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노린은 어디 있죠?] 그가 켄싱턴 부부에게 물었다. [택시를 타려고 아래층으로 갔네] 켄싱턴 씨가 무겁게 말했다. [우리하고 말도 안 하려고 해] [택시오?] 그는 그 말을 하고는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아래층 로비에서 그녀를 발견하고는 그녀의 뒤로 가서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자동차를 임시로 세워 둔 곳으로. [뭐...뭐죠?] 노린은 깜짝 놀라 물었다. [잭, 내 대신 이 문 좀 열어 줘요] 그가 짐꾼을 불렀다. [택시 걱정은 말아요, 내가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네, 선생님] 젊은 남자가 그를 도와 씩씩대며 항의하는 노린을 조수석으로 태웠다. [난 택시를 타고 싶어요] 그가 운전석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자 그녀가 항의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항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병원 현관에서 빼내 고속 도로로 빠지는 작은 도로로 몰았다. [당신 차를 타고 가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화를 내며 말했다. [조용히 해요. 흥분하면 몸에 해로우니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몸이 편치 않아서 더 이상 그와 싸울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욕지기와 통증과 싸웠다. 참으로 험난한 아침이었다. [당신이 그분들을 이리로 보냈나요?] 고속 도로로 들어섰을 때 그녀가 물었다. [켄싱턴 부부? 아니오. 그분들이 오늘 돌아온다는 걸 알고 전화를 걸어 당신이 수술을 받았다고 했소. 몹시 놀라시더군] [왜죠?] 그가 그녀를 흘끗 보았다. [당신이 그 집에 살 때는 건강하게 보였기 때문이오] [거긴 집이 아니었어요] 그녀가 창 밖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당신은 언제나 집안의 가구 같았소]


[물론 그랬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구의 한 조각이었어요.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건 바뀌지 않겠죠. 건강 회복되면 해외로 일하러 갈지도 몰라요.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할 거예요]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치 우주 공간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놀라운 느낌이었다. [당신은 적어도 3 개월 동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하오] 그가 퉁명스레 말했다. [당신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해두었소. 그걸 거부하도록 놔두지 않겠소] [3 개월 동안은 당신이 시키는 대로하겠어요] 그녀가 동의했다. [그렇지만 그 뒤에는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당신은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하오] 그가 꼬집어 말했다. [그리고 혈액 희석제와 심장 조절제를 먹어야 하고, 투약한 걸 면밀하게 기록해야 하오] [당신이 좋은 의사라는 걸 증명해 보일게요] 그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몇 분 뒤, 그는 자신의 아파트 앞에 차를 대고 도어맨에게 열린 트렁크에서 가방을 가져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 나서 노린을 들어 올려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뭐... 하는 거예요?] 그녀가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요] 레이먼은 그녀를 진정시키고 도어맨에게 말했다. [내 사촌은 심장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막 퇴원했네. 그녀가 혼자 지낼 수 있을 때까지 나와 함께 지낼 거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선생님] 젊은 남자가 레이먼이 사는 층의 단추를 누르고 웃으면서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그들 셋은 올라탔다. 노린은 레이먼의 강한 두 팔에 무기력하게 안긴 채 자신이 반응을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널빤지처럼 뻣뻣해졌다. 그는 내가 이사도라의 사촌이기 때문에 친절을 베푸는 것 뿐이야. 그리고 나를 혼자 내버려둔다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걸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야. 숙모와 숙부가 병원까지 찾아온 것도 바로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잖아. 레이먼이 자신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는 성큼성큼 아파트 앞으로 걸어가서는 문을 여느라 그녀를 잠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도어맨에게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었다. [열쇠는 경비실에 맡겨 주게, 내가 곧 내려가서 찾을 테니] [알겠습니다, 선생님. 쾌유를 빕니다, 아가씨]


그가 떠나자 레이먼은 그녀를 손님용 침실로 데려가서 침대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그대로 있어요] 그는 그녀가 기댈 수 있도록 베개들을 받쳐 주었다. 그러고는 조금 뒤 과일 주스와 약을 가져왔다. 그를 따라 고양이가 나타났다. 녀석이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 큰 소리로 가르랑거렸다. [그 동안 잘 있었니?] 그녀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친구가 되어 줄 거요. 난 회진도 하고 환자들도 봐야 하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오겠소. 전화는 여기에 있으니까 뭐든 필요하거든 아래층에 전화해요. 플림 양이 다시 올 거요] 그는 자신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플림을 해고한 사실을 노린에게 일깨워 주었다. [난 여기서 지낼 수 없어요] [당신은 혼자서 지낼 수 없소. 켄싱턴 부부와 함께 지낸다면 몰라도] [싫어요. 당신은 나를 돌보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무엇 때문에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죠?] 그 순간 그에게는 회진과 환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그는 침대에 앉아 그녀를 아주 부드럽게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7 [당신에게 부담을 줄 생각은 아니었소] 그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대고 말했다. 그의 검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서 머리칼을 부드럽게 떼어 쓸어 넘겼다. 그녀는 그의 가슴패기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난 여기서 지내고 싶지 않아요] [그래, 나도 알고 있소] 그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 게 몹시도 괴로웠다. [제발...] 그녀가 속삭였다. [브래드가... 잠깐씩 들러서 돌봐 줄 수 있어요] [브래드는 일을 해야 하오] 그가 명쾌하게 말했다. [그가 당신을 돌볼 순 없소]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지낼 수는 없잖아요!] [노린, 당신은 아무 걱정 말고 간호사가 도착하면 그녀의 도움을 받고 쉬어요] 그가 냉담하게 말하고는 그녀를 떼어내 베개에 기대 주었다. 그러고는 티슈를 한 장 뽑아 그녀의 붉어진 눈을 살살 두드렸다. 그녀는 지독하게 처참해 보였다. 그녀는 너무나 여위고 창백했다.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올 테니 그걸 먹어요] [음식은 필요 없어요] [먹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한 입식 먹여 주겠소]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수척한 얼굴과 잿빛 눈동자 속에서 그녀의 고통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연약함에 보호 본능을 느끼고 서늘하고 축축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당신을 돌봐 주겠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잠을 자봐요] 그는 몸을 숙이고 그녀의 입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오겠소] 그는 충격을 받은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일어섰다. [내가 가기 전에 도울 게 있소?]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 뜻밖의 애무가 어떤 동기에서 나왔을까 생각했다. [침대에 있어요. 곧 간호사가 와서 당신을 도와 줄 거요]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억였다. 그가 거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왜 키스했는지 물어 보고 싶지 않소?] 그녀의 두 뺨이 금방 빨개지고, 그녀의 손가락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녀가 거북해하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셈은 아니었는데... [이제 편히 쉬도록 해요] 그는 아무 감정 없이, 거의 직업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멈춰 서서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을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난 이 녀석을 모기라고 부르오. 언제나 주위에서 잉잉대거든. 당신이 좀더 적절한 이름을 생각해 보시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고양이에게서 그녀의 손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미안하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소. 아따가 봅시다] 그는 침실 문을 열어 둔 채 몸을 돌려 나갔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파트를 나가기도 전에 그녀는 벌써 자고 있었다. 간호사 플림이 그날 오후에 왔다. 노린은 이제 의식이 맑아져서 폴리 플림이 50 대이고, 교련 담당 하사관처럼 행동하는 편안하고 친절한 여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플림은 레이먼이 포장된 음식 상자를 갖고 나타나자 접시들을 내오고, 커피를 끓이고, 과일 주스를 따랐다. 그러고는 노린이 포크로 구운 닭고기를 찍어 입 안으로 넣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저런, 맛이 없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래도 먹어야 해요. 난 이젠 약을 가져올 테니까 당신이 먹어요] 플림이 나가자마자 노린은 포크를 내려놓고 접시 위에 있는 과일과 살짝 볶아 익힌 아스파라거스와 맛있는 롤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배고프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걸 먹을 수 있겠어? 그녀는 마치 자신이 레이먼의 아파트에 침입한 훼방꾼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가 사랑하는 이사도라와 함께 쓴 그 방은 아니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 그는 틀림없이 악몽을 되풀이하는 것 같을 거야.


[왜 안 먹고 있소?] 그는 셔츠와 넥타이를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녀의 방으로 왔다. 편안한 옷차림이지만 세련되고 훨씬 더 육감적으로 보였다. [노력 중이에요] 그녀는 접시를 보며 방어적으로 말했다. 그는 그녀 침대가에 슬며시 앉더니 과일을 찍어서 그녀의 입술로 가져갔다. [싫어요] 그녀가 항의했다. 그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과일을 유혹하듯이 슬며시 밀어 넣었다. 그녀는 그가 틀림없이 키스를 상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위를 흘끗 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어둡고 반쯤 감겨 있었다. 정말 미남이라고 그녀는 비참하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토록 육감적이고 욕심 나는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더 가까이 몸을 기대고는 그녀의 입술을 간질이듯이 말했다. [먹어요] 그녀는 억지로 입술을 벌려 과일을 받아먹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가 입고 있는 흰색 가운 위로 드러난 흉터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심장 박동이 그녀를 흔들고 있었지만, 그건 규칙적이고 빨랐다. 숨길 수 없는 증거가 되는 새 판막이 그녀의 심장 속에서 열렸다 닫히며 찰칵거리는 소리를 냈다. [통증은 좀 수그러들었소? 필요하면 진통제를 먹어도 되는데...] [쑤실 뿐이에요] [여기가?] 그의 긴 손가락이 가운 속 흉터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강한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것이 즐거운 듯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한 손을 그녀의 머리 옆 베개로 가져가더니 분주하게 음식을 한 숟가락 떴다. [그러면 안 돼...] 그녀가 속삭이듯 항의했다. [아니, 되오] 그는 한 입 받아서 삼키는 그녀의 입을 지켜보며 천천히 육감적으로 먹여 주었다. 그녀의 심장은 계속해서 마구 뛰었다. 그녀는 그에게 반응하는 연약하고 비겁한 자신의 몸뚱이가 싫었다. 레이먼은 즐거웠다. 그녀가 적어도 자신에게 냉담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건 그가 그녀에게 준 고통을 보상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반응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연약함이 자존심을 채워 주고, 쾌감과 함께 오만해지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살아 있음을, 남성임을 느껴 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약 먹을 시간이에요] 나이 든 여인이 들어와서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레이먼에게 건넸다. [담당 의사를 이렇게 가까이 대하니 기분 좋지요?] 그녀가 놀리면서 나갔다. 레이먼은 알약을 그녀의 입안에 넣고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삼킬 수 있도록 강한 팔로 일으켜서 지탱해 주었다. 하마터면 그녀의 단단하고 예쁜 젖가슴이


드러날 뻔했다. 레이먼의 눈이 가슴으로 떨어지는 걸 본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얼른 등을 뒤로 기댔다. 그의 눈이 그녀와 마주쳤다. [난 의사요] 그가 그녀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는 곧 침대에서 일어나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저녁 식사를 마저 끝내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확인하려 다시 오겠소. 난 서재에서 할 일이 좀 있소]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심장이 거칠게 뛰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번득이는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훨씬 젊은 노린, 자신이 빤히 보면 얼굴이 발개져서 숨고, 볼품없는 옷을 입고 뒷걸음치던 노린...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사도라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노린에게로 흘러가던 그의 관심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과거나 너무도 새생하고 현실 같았다. 그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과거를 돌이켜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왜 자신이 그토록 자주 그녀를 무시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일부러 그녀를 적대시하면서 여러 해를 보냈다. 그는 기억들을 한쪽으로 접어놓고 노린이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그 방을 나왔다. 그 주 토요일에 브래드가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나타났다. 하지만 그 일은 그 자신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를 무척 화나게 했다. 브래드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자 노린은 감동받고 즐거워했다. 그는 브래드가 노린의 창백한 뺨에 몸을 숙여 키스하자 그녀의 입술에 다정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자신이 그녀에게 소홀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서재로 돌아가서 문을 곧게 닫았다. 노린의 애정생활은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며. 그는 벽에 걸린 이사도라의 초상화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것은 결혼 직후 그녀가 유명한 화가에게 부탁해서 그린 것이었다. 파란 도자기 같은 눈동자는 벽처럼 감정이 없었다. 그 화가는 아름답고 천박한 이사도라의 정수를 진정으로 포착했다. 얄궂게도 이사도라는 그 그림을 좋아했다. 술을 따라서 의자에 앉아 홀짝거리고 있는데 고양이가 달려와 그의 무릎에 뛰어오르더니 몸을 말고 가르랑거렸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적어도

고양이만큼은 나를 좋아하는군. 그때 플림이 웃음소리가 나는 침실을 흘끗 보며 서재로 들어왔다. [요리사더러 저녁 식사를 30 분 미루라고 할까요, 선생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괜찮겠죠. 두 사람은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으니까] [몹시 피곤해 보이세요, 선생님. 제가 뭘 좀 갖다 드릴까요?] 그가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필요한 건 다 있어요, 고마워요.] 그녀는 침실 쪽을 흘끗 보며 투덜거렸다. [꽃 한아름이라니... 갓 퇴원한 사람한테. 꽃들이 폐를 틀어막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 생각 못하죠, 그렇죠?] 플림이 물러나자 레이먼은 침실 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이사도라가 애인을 데려왔을 때는 지금의 반만큼도 성가시지 않았는데...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플림이 그를 부드럽게 흔든 것은 한 시간 뒤였다. [전화요?] 그가 즉시 깨어나면서 물었다. [아뇨, 선생님. 저녁 식사예요. 도널드슨 씨는 돌아갔어요] [아...] 그녀는 손에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이것들을 식당으로 막 가져가는 참이에요] [노린이 그러라고 했어요?] 그가 냉담하게 물었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물어 보지 않았어요, 선생님] 그녀는 꽃을 가지고 식당으로 갔다. 그는 침실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침대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욕실에서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도와 달라고 부를 수 없었소?] 그가 투덜댔다. 그리고는 그녀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를 들어올려 침대로 옮겨갔다. 그녀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 옆에서 균형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깜짝 놀랐군, 왜요?]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좀 내려 주세요...] 그는 그녀의 불안스런 요청을 무시하고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볼품없는 옷과]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뒤로 물러나고 있소, 이유가 뭐요?] [당신에겐 그런 걸 물을 권리가 없어요] [어쨌든 대답하시오] [싫어요] 그녀가 우겼다. 그는 노린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않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놓고는 자유로운 한 손을 그녀의 젖가슴 바로 아래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그의 강한 손목을 애원하듯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들을 아주 부드럽게 펼치며 내내 계산하는 눈초리로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의 검지가 그녀의 단단한 젖꼭지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의 손목을 쥔 손이 풀어지기 시작하며 신음 소리를 냈다. [내 사랑] 그는 자신들이 있는 곳과, 열린 방문과, 지난 날 따윈 생각지도 않고 그녀의 한 쪽 어깨에서 가운을 벗겨 내고는 부드럽고 따스한 젖가슴을 입술로 눌렀다. [레이먼...] 그녀는 그의 검은 머리칼을 두 손으로 쥐어뜯으며 흐느끼듯 소곤거렸다. [아... 하느님...안 돼요!] 그러나 그녀의 거친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몸뚱이는 그의 따스한 입에 더 가까이 가려고 고통스럽게 활처럼 휘어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준 쾌락에 몸서리를 쳤다. 그는 자신의 입술 아래서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머리를 들고 자신이 입으로 그토록 탐욕스레 눌러댄 그녀의 부드럽고 예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고 붉은 수술 자국이 난 흉골을 지나 크림빛 피부로 올라가 충격으로 휘둥그래진 눈까지. 그녀가 가운을 잡았지만 그의 손길이 그것을 막았다. 그는 그녀의 가슴을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방안에서 크림빛 홍조를 띤, 단단하고 부드러운 곡선에 매혹당한 채. [저녁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박사님!] 플림이 밖의 어디선가에서 소리쳤다. 레이먼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의 눈길이 노린의 눈과 마주쳤다. 그는 자신에 대한 그녀의 무기력한 반응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벗은 몸을 탐욕스런 눈길로 한 번 더 내려다보고는 신음 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그러고는 침대와 문을 등진 채 자신을 괴롭히는 욕망의 악령과 싸우면서 창 밖을 응시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플림이 불렀다. [박사님?] [곧 가요]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 선생님. 뭘 갖다 줄까요, 켄싱턴 양?] [아뇨, 고마워요] 노린은 가까스로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기만 해요!] [네, 고맙습니다] 노린은 레이먼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이 수치스럽기만 했다. 그는 식사를 하러 나갔다가 조금 뒤에 돌아왔다. 욕망으로 번득이는 눈빛을 안고. 그녀는 그를 보고는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진통제 두 알을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는 약을 그녀의 입에 넣어 주고 나서 그녀가 물잔을 드는 걸 도와주었다. 그러고는 컵을 치우고 이불을 그녀의 허리까지 끌어내렸다. 어둡고 뒤숭숭한 그의 눈이 그녀의 당황한 눈과 마주쳤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그의 단단한 손가락들에 막혀 버렸다. [살다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소] 그가 소곤거렸다. [그럴 땐 말을 한다는 자체가 신성 모독이오] 그는 그의 말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눈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는 숨을 죽였다. [잠을 자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두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깊고 깊은 잠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녀는 고집스럽게 아무런 일도 없었던 척했다. 그러나 레이먼은 그녀의 행동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만지자마자 그녀의 몸은 그의 것이 되었다. 이제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식에는 애정이 섞인 오만함이 있었다. 마치 이미 그녀를 소유한 듯이, 그리고 그녀의 옷 속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나 한 듯이. 그녀는 그가 자신을 안다는 사실에 날이 갈수록 불안해져서 진통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행히 간호사 플림이 둘 사이의 완충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이 편안했다. 그가 다정하고 세심하게 걱정해 주는데도 노린은 그를 조금도 신뢰하지 않았다. 레이먼은 이사도라를 강박적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내가 심장 마비로 이사도라를 지킬 수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해서, 그리고 단지 심장 수술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슬픔과 분노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내게 다정한 것은 폭풍우 전의 고요일 뿐이야. 내가 다시 회복되면 레이먼은 평소의 복수심에 찬 사람으로 돌아갈 거야. 나는 그에게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을 거야. 병약한 것은 위험해. 만일 내가 그에게 속수 무책으로 끌린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그는 그것을 이사도라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이용할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그녀는 레이먼이 오자 눈에 띄게 냉담한 태도로 스스로 움츠러들었다. 레이먼은 노린을 품에 안았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녹초가 될 때까지 일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너무나 연약한 상태이며, 자신의 집에 머무는 손님이고, 자신은 현재 상황을 이용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스스로 깨우쳤다. 하지만 그는 몇 년 동안 너무나 강하게 억눌러 온 그녀에 대한 감정을 이제는 통제하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노린이 갑자기 쓰러져서 본의 아니게 자신이 수술을 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도 그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면... 이사도라와 결혼한 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최선을 다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너무나 잘 숨겼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진실한 감정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사도라에게 평생 헌신할 것을 고백했고, 세상 사람을에게 가장 진실한 사랑을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웃음과 거짓말 뒤에는 철저히 맞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차갑고 생명 없는 결혼이 있었다. 그는 이사도라의 미모에 눈이 먼 나머지 노린과는 정반대인 그녀의 천성을 보지 못했다. 그는 수술과 수술 사이의 아주 짧은 휴식 시간 내내 병원 구내 식당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였다. 이사도라의 죽음으로 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얼만 황폐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를 그토록 자주 혼자 내버려두었다는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서 노린을 더욱 비난했다. 노린은 이사도라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렀다. 병든 그녀에게 그런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2 년을 보냈다니... 켄싱턴 부부도 자신과 똑같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핼의 전화를 받았는데, 핼의 말에 따르면 노린은 병문안을 가겠다는 그들의 제의를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그들은 자신처럼 다시 시작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노린은 그렇지 않은 게 명백했다. 그는 커피를 다 마시고 몸을 일으켰다. 노린이 브래드에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궁금했다. 브래드는 그녀에게 꽃을 갖다 주기도 하고 몇 시간씩 곁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는 브래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미워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손목 시계를 흘끗 보았다. 일하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자신에게 일이 있다는 것이 요즘엔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상념을 지울 수 있으니까. 병원에서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가자 켄싱턴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들이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우리가 그애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고 싶네] 핼이 단도 직입으로 레이먼에게 말했다. [그래] 메리가 조용하게 덧붙였다. [틀림없이 뭔가 있을 거야. 수술비와 회복하는 동안 드는 비용, 일을 못하는 동안의 월급...] [그앤 우리한테 말하지 않을 거야] 핼이 급하게 아내의 말을 잘랐다. [그렇다고 그앨 나무라지 않네. 우린 그저 돕고 싶을 뿐일세. 우리가 그동안 크게 잘못했어] 그가 불편하게 덧붙였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이먼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우리 세 사람 모두가 너무나 쉽게 그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녀는 그날 밤 경미한 심장 마지를 일으켰습니다] 전에 그들에게 그 얘기를 했지만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못을 박았다. [노린은 의사에게 이사도라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의사는 그녀가 안정을 취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하고 안정제를 놓았어요] 그는 탁자 위에 두 손을 겹치고 반짝거리는 손등을 응시했다. [노린은 그 점에 대해서까지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 자신의 감정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지요. 그녀도 이사도라를 염려했습니다. 그녀는 장례식에 가는 것도,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어요. 심지어 슬퍼하는 것마저...] 메리는 눈물을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조카를 잔인하게 밀쳐내 버렸다. [우린 그애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줄 몰랐네] 메리가 중얼거렸다. [우린 그애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건강 검진을 받았는지도 확인하지 않았어] [우린 노린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네] 자기 모멸감으로 가득한 얼굴로 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 그애가 올해 내 생일에 뱀장어 가죽 지갑을 사주었네. 레이먼, 자네도 기억할 거야. 그건 그애가 일 주일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을 텐데, 난 그걸 받고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농담까지 했네] 그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아. 그애는 우리한테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기를 찾아온다며 비난했네. 그애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겠지] 그가 눈을 치떴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네. 우린 그애가 심장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진정으로 충격을 받고 슬펐네. 우린 그애룰 만나고 싶네. 자네가 뭔가 해줄 수 없겠나? 우리 마음을 그애한테 좀 전해 주겠나? 적어도 우린 그애에게 재정적으로 도울 수 있네] 레이먼은 그들을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8 노린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그녀에게 키스한 이후로 그녀는 아주 두꺼운 조개껍데기 속으로 숨어 버렸다. 레이먼이 곁에 있을 때는 유난히 수줍어하고 근심스런 얼굴을 라는 노린을 걱정한 플림이 어느날 그에게 얘기를 했다. [큰 수술을 한 뒤라 아픈 건 당연하겠지만 그 나이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져야 해요. 그런데 그녀는 영 안절부절 못해요. 선생님이 곁에 계실 때면 그게 심해지더군요]


그는 포도주색 가죽 안락 의자에 앉아 지친 등을 기댔다. [나도 눈치챘습니다] 그는 플림에게 맞은쪽의 검은 가죽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노린과 나 사이에 과거에 오해가 있었다는 걸 아시죠?] 그가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플림은 팔짱을 꼈다. [그녀가 말하더군요] [그건 모두 나의 잘못이에요. 그녀가 위독한 상태에 있던 내 아내를 혼자 내버려두어 죽게 했다고 그녀를 비판했어요] 플림이 뭔가 말하려 하자 그가 한 손을 쳐들고 막았다. [제발 끝까지 들어줘요. 하지만 지금은 노린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녀의 숙부와 숙모처럼 나도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린 그 점을 깨닫고 그녀에게 사과하려고 해요. 그런데 노린이 우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원치 않아요] 그가 두 손을 펼쳤다. [우린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어요.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그렇지만 우리는 화해를 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녀가 허락하질 않아요] [그녀는 아직도 몹시 고통스러워해요] 플림이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런 큰 수술 뒤에는 혼란스럽게 마련이지요] [나도 알아요] 그가 동의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 가운데서 그런 큰 수술을 한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라...] [그녀에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뿐이에요. 참고 기다리세요] [안타깝게도 난 기다리는 데는 소질이 없어요] 그가 어렴풋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노력해 보죠]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건 그렇고, 도널드슨 씨한테 더 이상 꽃을 가져오지 말라고 했어요. 꽃은 건강에 좋지 않아요. 더구나 수술 직후에는. 그 사람도 그 점을 알아야 해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즘에 또 온 적이 있나요?] 지금은 그녀가 정말로 불편해 보였다. [이틀에 한 번씩 오후에 와요, 선생님도 아실 줄 알았는데요...] 그녀가 나가자 그는 근심스런 얼굴에 검은 강철 같은 눈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는 브래드가 계속 찾아온다는 말을 듣자 화가 났다. 다음에 또 찾아오면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따끔하게 말해 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분별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다음 주 금요일에 도널드슨에게 문을 열어 주고, 노린은 아직까지 여러 방문객을 상대할 수 없다고 말해 주기 전까지는. [왜죠?] 도널드슨이 퉁명스레 물었다. 레이먼은 말문이 막혀서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도널드슨의 방문을 금지하는 데 정말로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피곤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습니다] 도널드슨이 검은 눈을 번득이는 레이먼에게 말했다. 레이먼은 문틀에 힘없이 기댔다. [그녀는 내가 기대한 만큼 빠르게 회복되지 않고 있소] 그가 조금 뒤에 말했다. [진통제를 먹는데도 밤에 잠을 못 자고 있소. 그리고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도널드슨의 턱이 치켜 올라갔다. [아마도 환경 탓이겠죠. 저는 그게 선생님이 도울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감춰진 적의일지라도 그녕는 느낄 테니까요. 그녀는 언제나 긴장해 있어요] 도널드슨의 말은 레이먼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그는 그걸 받아들일 만한 분별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나 오랫동안 노린을 비난하고 적대시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에 강제로 데려다 놓고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화를 내고 있다니... 그토록 많은 걸 기대하다니... 난 분명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그녀의 회복에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야. [그녀에게 물어 봐요] 레이먼이 말했다. [그녀의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냐고. 플림 양이 따라가면 많은 도움이 될 거요] [정말로 관대하십니다, 선생님] 도널드슨은 놀라며 말했다. 레이먼의 검은 눈썹이 휘어졌다. [내가 충격을 주었소, 도널드슨?] 젊은이가 불안스레 자세를 바꾸었다. [선생님이 노린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그는 노린의 침실 쪽을 향해 고갯짓을 하고는 서재로 돌아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시 울적해졌어?] 브래드가 노린의 방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침대 위의 그녀 옆에 앉았다. [코르테로 박사님이 네가 원한다면 당장 아파트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셨어. 플림 양을 보내 주신대. 그러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녀의 숨결이 급하게 빠져 나갔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진짜 구원. 레이먼 곁에 있는 건 고문이다. [언제?] [네가 원하면 지금이라도 갈 수 있겠지. 너한테 그 얘길 하라고 하셨어] 그가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넌 여기가 싫지, 그렇지?] 그녀는 눈길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주 친철해. 그렇지만 난 내 주위에 낯익은 물건들이 있는 내 집에 있고 싶어. 나는 그에게 방해가 돼, 비록 그가 그렇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사람들도 부르지 않았어] [사람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웅얼거렸다. [여자들] [무슨 소리야, 그가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인다는 얘기는 전혀 못 들었는데... 그는 노구하고도 데이트하지 않아. 아직도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아] [그래] 그녀는 그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는 이사도라에게 사로잡혀 있었어. 심지어 장례식 때 관에서 그를 끌어내야 할 정도였더] 그녀는 그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부인을 몹시 사랑하신 게 분명해]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했어. 그래서 나를 그토록 미워하는 거야. 그 일이 있가 저에는 그렇게 비판적인 사람이 아니었어. 그가 나에게 그녀의 간호를 맡기고 갔는데, 내가 그녀를 죽게 했어...]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두렵고 근심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도 그녀를 사랑했어] 그녀가 쉰 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사도라는 자신이 원할 때는 친절했어. 그녀는 너무 예뻤기 때문에 망가진 거야.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망쳐 놓았어... 나까지도] [미모는 얄팍한 거야] 그가 냉담하게 말했다. [사람의 성격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시간 나면 바람 쐬게 해줄게]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 그가 그녀의 손을 토닥거렸다. [너도 데이트 안 하지?] 그가 중얼거렸다. [네가 가질 수 없는 어떤 사람 때문에 애태우느라]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레이먼은 나를 기꺼이 떠나 보낼 참이다. 그렇다면 이 아파트에 내가 있는 것이 싫었던 게 분명하다. 그녀는 그 키스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나 외로운 탓에 충동적으로 한 키스일 뿐이야. 내가 아닌 다른 여성이었다 하더라도 똑같았을 거야. 그녀는 베개에 등을 기댔다. 플림이 따라오면 어떻게든 그녀의 급료를 마련해야만 할 것이다. [그에게 물어 봐]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언제 떠날 수 있는지] 브래드가 그걸 물었을 때 레이먼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준비를 하겠소] 그가 브래드를 배웅하며 말했다. [내가 그녀한테 말하겠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브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낯익은 환경에서라면 그녀가 더 빨리 회복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제 아무리 편하다 해도 자기 집만 못한 법이죠] [나도 이해하오] 레이먼은 브래드의 뒤로 문을 닫고는 노린의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머뭇거렸다. 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단단히 포갠 채 베개에 몸을 기대고 딱딱하게 굳어져 앉아 있었다.


[원한다면 오전에 가도 좋소] 그가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플림 양이 쇼핑에서 돌아오면 말하겠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소] 그는 그녀의 발치께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고양이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고양이는 데려갈 수 없소] [알고 있어요] 그녀가 슬픈 듯이 말했다. [내가 잘 돌봐 주겠소] 레이먼이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짜증스런 소리를 냈다. [노린, 왜 여기 머물지 않으려는 거요? 당신에게 필요한 건 다 있는데. 도널드슨도 자주 찾아오고. 무엇 때문에 그 외로운 아파트로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안달이오?] 그녀는 수척하고 지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 집이니까요. 그것이 내가 가진 전부예요] [무슨 뜻이오?] [난 혼자서 산다는 뜻이에요. 난 혼자 사는 걸 좋아해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불편해요] [사람들이 아니라 나랑 같이 있는게 불편하다는 뜻이군] 그녀는 긴장했다. [그래요] 그가 침대로 다가갔다. 그의 검은 눈이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군]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가 날카롭게 말했다. 마치 자신의 생명이 거기 달린 듯 그녀는 두 손을 서로 꼭 잡고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그를 쳐다보지 않을 거야. 그녀를 붙들지 않기 위해 그는 두 손을 호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그의 격한 감정을 자극했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그녀가 조금 뒤에 말했다. [정말로 고마워요. 당신이 내 생명을 구해 주었어요. 나를 위해 당신의 사생활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어요] [당신 표현대로 내 사생활은 아주 외로운 거요] 그 말에 그녀는 깜짝 놀라 그의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사름들을 불러 즐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소. 당신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언제나 그랬잖아요] [이사도라가 살아 있을 때였지] 그가 동의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수척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사도라는 파티를 자주 열었소. 그녀는 사람들과 음악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소. 난 내 사무실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냈소. 한 번도 집에서 조용히 의학 잡지를 읽거나 논문 준비를 할 수가 엇었으니까. 그녀는 신혼 때부터 내 직업을 원망하며 내가 일을 포기하기를 원했소. 당신도 알고 있었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그 분야에서 최고예요. 당신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는지 그녀는 몰랐나요?] [그녀는

관심이

없었소]

그가

간단히

말했다.

[이사도라의

유일한

관심은

자기

자신이었소.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조금도

견혼새해서도

동정할 줄 모르고 그저 자기를

희생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거요.

욕구나 욕망에만 관심을 그러다가

결국

파멸하고

두지. 말지,

이사도라처럼] [그녀는 언제나 아주 행복한 것 같았어요.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얼굴을 꾸며내게 마련이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가 생각에 잠겼다. [우린 이상적인 행복한 부부의 환신이었소, 그렇지 않소? 그런데 그 밑바닥에는 이사도라의 질투심과 불만이 있었소. 그리고 그녀는 길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기 위해 접접 더 알코올과 파티에 의존하게 되었지]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소. 그녀는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소. 그러나 그녀의 내면은 차가웟소. 그녀에겐 미모와 그 뒤의 얄팍한 애정말고는 줄 게 아무것도 없었던 거요] 그는 노린을 조용히 응시하며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나치게 피임에 집착했지] [하지만 그녀는 당신이 아이들을 원치 않는다고 했어요] 그녀는 무심코 말해 버렸다. [난 아이들을 원했소] 그녀는 문득 직감으로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아이들을 무척 예뻐했다. 그러나 그가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사도라의 말만 듣고 그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정열에 몹시 굶주려 있엇소]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굶주리다 못해 죽을 지경이었지. 그래서 내가 당신한테 절제를 못한 거요. 여인으 반기는 입과 매달리는 팔의 고상함 같은 건 나한테는 과분한 거였소. 난 그런 걸 전혀 몰랐소. 이사도라는 나의 명성과 부와 이름을 원했지, 날 원하진 않았소] [그녀는 당신을 숭배했어요] 그녀가 항의했다. [내 돈을 숭배했지] 그가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리고 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그녀에겐 애인이 있엇소.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 남자를 포기하지 않았소. 그녀가 죽을 때도 그 사람이 거기 간다는 걸 알앗기 때문에 나랑 같이 파리로 가고 싶어했소.


자기를 집에 두고 가면 복수하겠다고 나한테 경고까지 했소] 그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두 눈에는 고죄가 가득했다.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했지. 그녀가 할 수 잇는 가장 비열한 방법을 복수한 거요. 그녀는 죽었고, 그녀의 죽으에 대한 죄책감을 나한테 남겨 주었소] [당신은 나를 탓했어요] [내 자신을 탓했지] 그가 성을 내며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요. 당신을 탓하는 것이 내가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소] 스는 어둡고 진지한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과거에 내가 당신에게 퍼부은 그 모든 거친 말과 비난으로 내 스스로를 저주하게 만든 건 당신의 부드러움이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은 나에게 이사도라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소] [이해가 안 돼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겟소] 그가 우울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모르오. 난 당신에게 나를 보여 줄 수 없었소. 우리가 가까워지면 위험했기 때문이오] 그녀으 눈이 어리둥절한 빛을 띠었다. [이해가 안 되오?]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네]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그는 천천히 침대로 와서 그녀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심장이 미칠 듯한 흥분으로 폭발할 때까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자, 이해가 되오?] 그가 들릴 듯 말 듯하게 물었다. [여기... 느껴 봐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시의 가슴패기로 가져가 손바닥을 심장에 대고 눌렀다. 그의 심장 역시 그녀 자신의 심장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의 어두운 눈에서 그녀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과 똑같은 혼란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헤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얼굴에서 욕망만을 보았다. 그는 나를 원해. 하지만 그건 사랑에서 나온 욕망이 아니라 오감의 신체적 속임수일 뿐이야. 단지 그뿐이야. 그녀는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손을 이불 위로 떨어뜨렸다. [알아요] [내가 보기엔 아는 것 같지 않은데] 그가우울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알게 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소] 그가 말을 하려는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 하나를 갖다 댔다. [노린, 당신이 나한테 이끌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소. 난 여러 해 동안 당신이 나를 미워하게 만드느라 너무 열심이었지] 그건 웃기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지 전혀 모르고 단지 내가 자신을 원한다고만 생각하고 있더. 그녀는 그에게 본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눈길을 떨구고 다시 베개에 몸을 기댔다. 그는 그녀의 그런 행동을 두려움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몸을 일으켰다. [좋소] 그가 조용히 말했다. [천박한 속임수는 쓰지 않겠소. 모두들 당신이 호전되지 않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느끼는 것 같소. 만일 당신이 아파트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보내 주겠소. 당신이 필요한 거라면 뭐든 가져가도 좋소. 고양이만 빼고 뭐든지] 고양이가 몸을 쭉 폈다가 등을 동그랗게 말자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가 고양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눈치챘다. 이사도라가 아파트 안에 들여놓지 못하게 한 동물들과 그가 갖지 못한 아이들 때문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그가 눈을 치뜨고 그녀의 눈에 드러난 표정을 붙잡았다. [나 때문에 슬퍼하는 거요, 노린?]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조금은요] 그녀가 스페인어로 중얼거렸다. 그가 침대로 다가왔다. [당신의 억양은 완벽하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스페인 어를 말하는 것만큼 잘 이해하오?] [가끔은요] 그녀가 시인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아요. 쿠바 사투리를 가장 잘 이해하죠, 스페인어 교수님이 하바나 출신이었거든요] [우리는 단어에서 S 를 빠뜨리거나 건너뛰는 경향이 있지] 그가 곰곰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럼 내가 스페인어로 말해도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군] 그가 따져보며 덧붙였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돌볼 수 있을 만큼 좋아질 때까지 여기 머문다면, 내가 저녁마다 바록사를 읽어 줄 수 있는데] 그녀는 손바닥 밑의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이사도라가 <패러독스, 레이>를 당신한테 선물했지요?] 그녀가 회상했다. [당신이 그녀 대신 골라 준 책이었지] 그 대답에 그녀는 놀랐다. [이사도라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니까. 그녀는 지루한 언어라고 생각했고, 바로하 같은 스페인 작가들을 경멸했소] [바로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예요. 그는 반역자였지만 고생과 가난에 대해 많이 알았어요. 사람들에 관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알았지요] [물론이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는

의사였소]

그가

싱글거렸다.

[쏘리야를

좋아하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바람둥이 돈 후안>] 그녀가 인용했다. [그 특별한 작품을 기억하다니...]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주를 받는 그 돈 후안과는 달리 쏘리야의 돈 후안은 착한 여자의 사랑으로 지옥에서 구원받았소] [그래요. 훌륭한 소설이에요] 그녀는 어깨를 움직여 긴 한숨과 함께 베개에 등을 기대다가 수술 부위로 손을 가져갔다. [오래 지나면 흉터가 많이 없어질 거요] 절개한 부분을 만지는 그녀를 지켜보며 그가 한 마디 했다. [내가 생각해도 잘 꿰맸거든]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의 솜씨는 천하가 알고 있죠] 그녀의 시선이 그의 눈께로 올라갔다. [나한테 정말 친절하게 해주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 친절이 죄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물론 그런 생각도 한 적 있어요] 그의 두 손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그건 죄책감하고는 상관이 없소. 적어도 더 이상은 아니오] 그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당신을 돌보는 게 좋소, 그게 이상하지 않소? 예전에는 한 번도 누군가를, 더욱이 시중들 필요가 있는 사람을 우리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소] 그의 입이 비틀렸다. [나는... 당신이 여기에 있는 데 익숙해졌소] 미소가 사라졌다. [당신은 당신의 아파트가 싫어질 거요]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플림 양이 곁에 있다 해도] [당신이 곁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발끈해서 물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오] 그의 목소리는 깊고 진지했다. [당신이 나의 일상에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당신은 잘 깨닫지 못할 거요. 당신은 여기에 꼭 맞소] 그녀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이 있는 쪽으로 한 발짝 더 내딛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포위되고, 갇힌 느낌이었다. [여기 있어요] 그가 거칠게 말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난 당신한테 방해가 돼요] 그녀는 숨이 찼다. [그리고 브래드가 찾아오는 걸 당신은 싫어하잖아요...] [당신 친구는 참을 수 있소]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방해가 되진 않소] 그녀는 망설였다. 머물고 싶지도 않았지만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 가까이 있는 건 모험이다. 그는 아직도 내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인지 모르지만 내가 길게 머문다면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심장이 말할 수 없이 두려웠다. 노련한 의사인 그가 곁에 있다면 적어도 심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고양이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고양이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의 요리사가 만든 식사에 근사한 침실... 그녀는 자신의 합리화에 화가 치밀어 그런 유혹을 던지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여기 있어요] 그는 유혹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매일밤 책을 읽어 주겠소] [바로하?] 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건 뭐든지] 그가 쉰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램프 불빛 밑에서 그윽하고 벨벳 같은 목소리로 스페인 시를 읽는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얼굴이 붉어졌다. [육감적인 시는 아니오] 그가 놀렸다. [우린 당신 심장이 제대로, 정상으로 뛰길 원하오. 그런데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소]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정말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고양이가 몸을 쭉 펴고 그녀의 어깨에 대고 하품을 하더니 그녀의 목께에서 몸을 말았다. 고양이의 부산한 움직임에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칼이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신 머리를 감아야겠군. 플림 양이 내일 감겨 줄 거요, 당신이 그걸 견딜 만하다면]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리를 내려뜨려 보았소?] [자주는 아니에요] 그녀가 고백했다. [일할 때 방해가 되고, 잠을 자려 할 때면 눈과 입에 거치적거려요. 자를까 생각해 봤지만, 난 긴 머리가 좋아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는 잠깐 그녀를 응시했다. 두 손과 맨 가슴에 그녀의 풍성한 머리칼의 감촉을 느끼는 걸 상상하며... 그는 숨을 죽인 채 몸을 홱 돌렸다. [플림 양한테 짐 꾸리는 걸 그만두라고 말하겠소]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갑자기 레이먼과 함께 사는 것이 하나의 생활 방식이 되어 버렸던가. 그녀는 정말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먼 역시 자신이 떠나는 걸 정말로 원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소] 그가 열린 문가에서 말했다. [당신 숙모와 숙부가 병문안을 오고 싶어하시오, 몹시] 긴장하는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며 그가 말했다. [당신이 그분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소. 하지만 그분들은 잘못을 바로잡고 싶어하시오] 그녀는 무력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은 사랑이나 다정함이 없던 긴 세월로 가득했다. 그녀의 커다란 잿빛 눈 속에는 벌어진 상처가 있었다. 레이먼은 그녀에게 되돌아가서 그녀의 손 하나를 크고 따스한 손으로 꼭 잡았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을 거요, 노린. 그렇지만 용서하지 않고는 싸움은 절대로 끝나지 않소. 우리는 모두 과거 속에서 사는 걸 멈추고 새롭게 출발해야만 하오] 그는 그녀의 슬픈 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와 함께 여기에서 시작합시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소?] 그녀의 손가락을 둘러싼 그의 손이 죄어드는 걸 느꼈다. [물론이죠] 그녀는 그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난 당신이 느낀 것처럼 당신을 탓하진 않았어요]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당신은 몰랐소, 노린]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어둡고 부드러운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들 알았어요. 당신은 나를 미워했죠]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미워하려 했을 뿐이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소] 그의 눈이 고통스러운 듯이 가늘어졌다. [슬픔은 나중에 오는 행복을 붙잡기 위해 우리들 속에 깊은 자국을 새긴다는 속담 들어 본 적 있소? 난 당신이 그 속담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오. 당신이 행복해지는 걸 본다면 난 매우 기쁠 거요. 당신의 숙모와 숙부도 기뻐할 테고. 우리를 밀어내지 말아요]


그는 설득력이 강했다. 그녀는 꿰맨 자리가 불편해서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찡그렸다. [좋아요] 그녀가 조금 뒤에 말했다. [그분들이 그렇다면 노력해 보죠]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까지 들어 올려 숨이 막힐 만큼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녀는 그런 행동에 정말로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손을 거둬 가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난 지금 회진을 돌러 병원으로 가봐야 하오. 하지만 내일 밤에는 당신이 좋다면 책을 읽어 주겠소] 그 생각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그에게 매혹당한 채 마주 웃어 주었다. [그러면 좋겠어요]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즐거운 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나 역시 당신에게 책을 읽어 주고 싶소. 나중에 오겠소] 방에서 나가는 그를 지켜보며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금방 바뀐 것처럼 느꼈다. 그녀의 진짜 관심은 그의 동기였다. 그가 나에게 매력을 느끼고, 지난 일을 뉘우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 속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돌보는

그의

배려는

절묘하고

부드러운

데가

있었다.

심지어

신혼

이사도라에게조차 보이지 않던 부드러움이. 이 모든 일들을 결코 풀지 못할 수수께끼 같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안락한 공간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달콤했다. 그날밤 그는 그녀의 침실 문가에 멈춰 서서 한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몸이 회복되면 직장으로 복귀하고 싶소?] 그가 불쑥 물었다. [물론이죠] 그녀는 그의 질문과 진지한 표정에 호기심을 느끼며 대답했다. [난 내 일을 좋아해요, 레이먼] [나도 그건 알고 있소. 하지만, 만일 당신에게 다른 의무들이 있다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그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그럴 리 없겠지. 그만 둡시다. 어쨌든 너무 빠르니까] 그는 그녀에게 웃음을 보냈다. [잘 자요] [당신도요. 한 번도 충분히 자는 걸 못 본 것 같아요] 그녀는 별 생각 없이 덧붙였다. 그는 그녀의 관심을 차가운 피부에 닿는 따스한 손길처럼 느꼈다. [괜찮소. 그 길고 외로운 세월 동안 일은 나에게 구원이었소] [처음 이 나라로 왔을 때 힘들게 살지 않았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힘들었소. 당신도 역경과 가난을 알겠지?] [네. 나의 부모님은 무척 가난했어요. 넉넉할 때가 한번도 없었죠] [어떤 사람들에겐 그렇지] 그가 쓰디쓰게 말했다. [이사도라는 같은 계층의 여자들보다 열 배쯤 부자였소.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을 고마워하지 않았소.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귀찮아했소] 그가 그녀를 따스하게 응시했다. [무료 급식소에서 당신이 음식을 나눠 주는 동안 옆에 서서 당신 얼굴을 지켜보던 때가 기억나는군. 그 춥고 배고프고 겁에 질린 사람들... 그들을 신경쓰는 사람은 너무나 적지] [그래요] 그녀는 그의 지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난 당신에 관해서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그녀가 느릿느릿 말했다. [당신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돈 없는 환자를 치료해 주었어요] [나의 재주는 하느님에게서 온 거요. 선물이지. 난 모든 선물은 대가로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그리고 그 선물의 일부는 덜 운 좋은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걸] 그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나는 당신을 수술하고 나서 그 재주를 하느님께 더욱 고마워했소. 당신은 죽을 수도 있었소] [확실히 내가 갈 때가 아니었어요] [회복실에서 산소 마스크를 쓰지 않은 당신 얼굴을 보았을 때 내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당신은 절대 모를 거요. 모든 잔인한 짓들이 되돌아와서 나를 괴롭혔소] 그는 힘에 겨운 듯이 문에 몸을 기댔다. [이사도라 때문에 우린 당신을 지독하게 괴롭혔소. 내가 당신한테 한 말들을 절대 잊지 못할 거요. 언젠가는 그런 말을 한 나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길 바라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소. 그녀는 자신을 데려가 주지 않으면 복수하겠다고 했소. 내가 떠날 때 그녀는 죽을 정도로 몸이 나쁘지 않았소]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네, 맞아요. 하지만 이사도라는 몇 시간 동안 속옷 바람으로 차디찬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어요, 일부러. 그래서 그렇게 악화된 거였어요. 그 파출부는 돌아가야 했고, 나는 이미 몸이 좋지 않았어요. 그때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했는데...] 그는 숨이 콱 막혔다. [맙소사, 왜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간단히 말했다. [폐렴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이사도라가 몰랐던 게 분명해요. 나는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전화는 불통이 되었고, 곧 전기까지 나갔어요. 나는 이사도라를 도와 줄 사람을 찾으려고 애타게

계단을

더듬거렸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내가

균형을

잡으려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당신은 원수에게 은혜를 베풀었소]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맙소사, 노린!] 그는 그 말을 한 뒤 문을 박차고 그녀에게서 떠났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그러나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베개에 등을 기대며 생각했다. 그가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9


다음날 오후, 플림은 노린에게 샤워를 시켜 주었다. 욕조 목욕은 아직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몇 군데를 절개했다. 심장 카테터를 삽입하기 위해 한 곳, 흉부에 배출 튜브가 있던 자리에 두 곳, 그리고 실제 심장 수술을 하기 위해 절개한 흉부 중앙에 한곳... 그녀는 항균 비누로 절개 자국들을 부드럽게 씻어야 했다. 그녀는 레이먼의 집에 청동으로 장식한 거대한 거품 목욕 욕조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직 그 안에 들어갈 순 없었다. 그녀는 플림과 함께 그 넓은 아파트 안을 걸어다니다가 그것을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그래도 이제는 샤워는 자주 할 수 있소, 조금 더 혼자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레이먼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예쁜 흰색 가운을 입고 플림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었다. 숱 많고 긴 금발을 말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하죠] 레이먼이 플림에게서 드라이어를 가져가며 말했다. [요리사한테 저녁에는 남아메리카 음식으로 준비하라고 전해 주세요. 난 파지타나 시마클을 먹고 싶은데, 두 사람은 어때요?] [멋지게 들리는데요] 플림이 웃으며 말하자 노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요리사가

발리

만들

있는지

알아볼게요.

그리고

저는

가게에

다녀와야겠어요. 항균 비누가 떨어져 가거든요] 그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헤어 밴드나 리본도 사와요. 노린의 머리를 묶을 수 있게] 플림이 쿡쿡 웃으며 대답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 그럴게요] 노린은 가라앉은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괜찮아요?] 그녀는 자신에게서 이사도라의 마지막 몇 시간에 관한 얘기를 들은 그가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염려되었다. [물론이오.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그렇게 괴로워한 것도 당연하오] [네, 그랬어요. 하지만 당신이 전에 말했듯이 우린 과거 속에 살 수 없어요. 이사도라는 죽었어요. 그 무엇으로도 그녀를 살려내지 못해요] [나도 알고 있소. 우린 처음부터 맞지 않았소. 그런데 남자는 자주 욕망에 눈이 멀거든] 그가 노린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은 집안의 가구 같았소] [일부러 그랬죠. 내 자신을 드러낼 때, 특히 남자들이 주위에 있을 때면 이사도라가 복수하는 방법이 싫었어요] 그녀가 차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진 않았지만. 그리고 당신은 날 미워했죠]


그는 웃지 않았다. [그렇지 않소] 그의 어두운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은 진실을 몰랐지만 이사도라는 알았소. 그녀는 내가 당신한테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했소. 그걸 알고 있었소?] 그녀는 숨을 죽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못 알아듣겠소? 난 당신을 내 주위에 오지 못하게 하려고 당신을 조롱했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요] [아직도 나를 싫어해요?] 그녀는 그가 하고 있는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맙소사...] 그는 무겁게 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러고는 침대 위의 노린 옆에 바싹 앉아 헤어 드라이어를 켰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날리며 다른 손으로는 드라이어를 잡고 따스한 바람으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그녀는 그에게서 향수와 비누 냄새를 맡았다. 매끈한 밤색 피부의 근육질 얼굴이 무척이나 가까이 있었다. 그는 지금껏 본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갖고 있다. 그리고 짙은 속눈썹은... 그는 그녀가 꼼짝 않고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아주 조금만 돌렸다. 그의 검은 눈이 그녀의 회색 눈을 응시하자 그녀는 온몸으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드라이어를 끄고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의 숱 많고 긴 머리채를 그러쥐고 탐닉했다. [당신의 머리를 꿈꾸곤 했소] 그가 고요한 가운데 소곤거렸다. [당신이 머리를 틀어 올려서 기뻤소. 왜냐하면 그걸 만지고 싶은 유혹이 내 속에 너무 강렬했으니까] 거의 숭배하듯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머리칼을 다시 건드렸다. [그런 기분이 어떨까 생각했소, 그 우아한 머리칼을 내 두 손으로 잡는다면, 내 입술에 댄다면...] 그녀가 숨을 헐떡이자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쳐들고 그녀의 두 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내가 당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당신은 몰랐소, 그렇지?]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네] 그녀는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저...전혀 몰랐어요!]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 나서 헤어 드라이어를 집어들고는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물론 나도 당신한테 절대 말할 수 없었소] 그가 조금 뒤에 말했다. [하지만 그런 탓에 난 당신에게 그토록 냉소적이고 불친절하게 대했소. 당신을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당신이 내게서 멀어지게 한 거지] 충격을 받고 쏘아보는 그녀의 눈과 마주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편으로는, 노린, 나는 당신의 인생을 고문하면서 지난 6 년을 보냈소] 그녀는 거의 매혹당한 것처럼 호기심을 드러내놓고 그를 빤히 보았다. [일종의 속죄로서 나를 여기 머물게 한 건가요?]


그의 어깨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었을 거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오] 그의 눈이 그녀의 가느다란 몸 위로 내려갔다가 수척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림자 속에 살아왔소. 태양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느낌이 어떤 건지도 잊고. 하지만 당신이 여기 온 뒤로는 집에 오는 것이 즐겁소] [또 다른 환자에게로요]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환자가 아니오. 보물이지. 당신에게 자물쇠를 채워 잘 간수해 두고 싶을 뿐이오. 다른 사람들과 나눠 갖기가 싫소] 그녀는 눈을 치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농담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어둡고 소유욕이 아주 강하게 보였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자 불안해졌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읽고 빙그레 웃었다. [괜찮소. 더욱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소, 당신이 원한다면. 하지만 당신이 완전히 회복되면...그땐 조심하는게 좋을 거요] 그가 부드럽게 위협했다. [난 당신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요] 그녀는 얼떨떨해서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는 이미 떨어진 뒤였다. [숙모와 숙부를 만나 볼 마음이 있소?] 그녀는 이마를 찌푸렸다. [네] [그들은 정말 많이 들라졌소, 당신도 느낄 수 있을 거요] 그가 약속했다. 그의 시선이 길고 진한 금발 속에 자리잡은 그녀의 얼굴 위로 옮겨갔다. [당신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르겠소] 그가 쉰 소리로 중얼댔다. [난 당신이 아직도 무척 쇠약하다고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소] [왜요?] 그녀는 아무 생각없이 물었다. [당신을 베개 위에 뉘고 당신이 신음할 때까지 당신 몸에 키스하고 싶기 때문이지] 그녀는 낯을 붉혔다. [레이먼!] 그가 한 손을 쳐들었다. [우리 둘 다 지금은 당신이 그런 취급을 받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난 그저 앞으로 있을 일을 경고하고 있을 뿐이오] [위협인가요?] [천만에. 달콤한 약속이지]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떤 모양의 반지가 좋을지 생각해 보도록 해요]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을 더듬거렸다. [난 반지를 끼지 않아요] 그는 그녀의 왼손을 쳐들고 손톱이 짧은 긴 손가락들을 바라보았다. [백금을 좋아하오?] 그가 웅얼거렸다. [당신 안에 감춰진 그 모든 불과 어울리려면 아마도 루비가 좋겠지] [왜 나에게 반지를 주고 싶어하죠?] 여전히 혼란에 빠진 채 그녀가 물었다.


[난 당신을 내 인생 속에 갖고 싶소] 그는 간단히 말했다. [당신에겐 도널드슨말고는 정말로 아무도 없잖소] 그 이름을 말하면서도 그는 성마르게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난 당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그가 숨김없이 덧붙였다. [난 그를 좋아해요...아주] 그녀가 항의했다. [하지만 그는 당신에게 맞는 남자가 아니오. 그는 당신을 떨리고 얼굴이 빨개지게 만들지 못하오] [왜 그래야 하죠?] 그녀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장래성 있는 애인은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하오. 당신을 달콤하고 금지된 생각과 갈망으로 떨게 만들지 않으면 안되오.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구 때문에 당신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어야만 하오. 그를 보기만 해도 쾌감을 느껴야 하오. 하지만 당신은 도널드슨에게서 그런 느낌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소]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 위로 그이 눈이 가늘어졌다. 몸을 덮고 있는 시트를 만질 때 그녀의 두 손이 살짝 떨리는 걸 그는 알아챘다. [그렇지만 당신은 나에게는 그런 걸 느끼고 있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추워요] 그녀가 고집스레 말했다. [그리고 열도 있는 것 같아요!] [나에 대한 열이지] 그가 동의했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도 당신에게 똑같은 열을 느끼고 있소. 존경과 감탄과 다정다감함과 욕망과 함께] [당신하고 같이 안 자요] 그녀는 쌀쌀맞게 말했다. [지금 당신 상태로는 거의 불가능할 거요] [정말이에요, 절대로!] [난 매우 집요한 사람이오] [오늘 떠나겠어요!] [안 되오] 그는 그녀의 분노에 웃음을 보냈다.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하오. 플림 양이 돌아오면 같이 점심을 먹고, 그 다음엔 당신의 숙모와 숙부께서 문병을 오시면 그들을 만나야 하오. 그리고 밤이 되면 내가 바로하를 읽어 주겠소] 그녀는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공포를 읽고 몸을 숙였다. [다시는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겠소] 그가 통렬하게 말했다. [신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거짓말도 절대 안 하고] [나한테서 바라는 게 뭐죠?] 그녀가 쉰 소리로 물었다. 그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말하기가 힘들었다. [모르겠소, 노린?] 그는 더욱 몸을 숙여 키스했다. 하지만 욕망이나 욕정에 찬 키스가 아니라 그녀가 느낄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러운 애무였다. 플림이 빈 수프 그릇을 갖고 나간 직후에 숙모와 숙부가 왔다.


[우린 더 빨리 오고 싶었다] 숙부가 말했다. [그런데 레이먼이 네가 더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구나] 그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숙였다. [혹시 불편한 건 없니?] [없어요. 레이먼이 아주 잘 돌봐 주고 있어요. 전 그의 환자예요] 그녀는 얼른 덧붙였다. 자신이 그들의 딸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인상을 풍기지 않기 위해서. [이사도라는 죽었어] 메리 켄싱턴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가 죽자 우린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 애를 성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애는 성인이 아니라 그냥 여자였어, 노린. 그 애와 레이먼 사이가 어땠는지 우린 알고 있다. 그러니 네가 이 아파트에 있음으로 해서 누군가의 성스러운 기억을 짓밟고 있다고는 생각지 말아라] 그녀는 서글프게

웃음지었다.

[우리가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몰랐던

유감스러울 뿐이다. 이사도라가 죽은 뒤 우리가 너를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구나. 우린 네가 용서하기만을 바랄 뿐이란다] [우리는 네게 뭔가를 해주고 싶단다] 숙부가 덧붙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는 몹시 불편해 보였다. [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인정하기가 쉽지 않구나] 숙모와 숙부가 너무나 비참해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에게 계속 반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나

마음이

부드러웠다.

[두

분이

말에

귀를

기울이시도록 노력을 안 한 저에게도 잘못이 있어요] 노린이 조금 뒤에 한결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저에게 완전히 죄가 없는 건 아니에요. 이사도라는 저 때문에 죽었어요] [하느님이 죽을 시간이라고 결정하셨기 때문에 죽은 거야] 메리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이사도라가 죽은 뒤로 많이 달라졌다. 넌 그렇게 생각지 않겠지만, 너의 숙부 생일 직전에 너를 부른 건 소문 때문이 아니었어. 우린 너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어] [물론 열심히 애썼다고 할 수 없지] 그는 남을 의식하는 미소를 띠고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단다. 우리는 네가 우리 곁으로 오면 좋겠어. 요즘 우린 펵 쓸쓸하단다] [저도 그래요] 노린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며 시인했다. 그들은 지쳐 보였다. [찾아 뵙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 때 말이에요] [우리와 같이 카리브 해로 가도 된단다] 메리가 속으로 기뻐하며 제안했다. [햇빛 아래에서 느긋하게 쉬면 몸에도 좋을 거야. 간호사 일이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야] [맞아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일인걸요] [그래도] 숙부가 덧붙였다. [두 달 동안은 일할 수 없지 않니? 그 동안 휴가를 다녀오는 것도 해로울 것 없지] [생각해 보렴] 메리가 부추겼다.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그들이 떠날 때까지도 어색하긴 했지만 분위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 좋았다. 때가 되면 그들도 가까워질지 모른다고 노린은 생각했다. 그들이 떠나고 나자 레이먼은 한 손에 청진기를 들고 플린과 같이 들어왔다. [진찰하려는 것뿐이오] 그는 플림에게 필요한 만큼 옷을 벗기라고 지시한 뒤 그녀를 안심시켰다. 진찰을 마친 그가 고개를 쳐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밸브 소리가 아주 좋소. 물론 처음 몇 주 동안은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지만] [숙모와 숙부가 카리브 해에서 휴가를 보내는 데 나를 데려가고 싶어하세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멀리는 안 되오. 당신은 병원 가까이에 있어야 하오. 뭔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표정을 보며 그가 쉰 소리로 덧붙였다. [큰 수술을 받은 지 며칠 안 되어 해외로 나가는 게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오!] [아, 그렇군요] [여행은 안 되오. 수술한 날로부터 3 개월이 지나기 전까지는] 그는 발꿈치를 돌려 걸어 나갔다. 노린은 왜 그가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는 내가 숙모, 숙부와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는데... 그는 나갔다가 밤늦게야 돌아왔다. 그녀는 가라앉은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병원에서 일하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급 수술이었소] 그가 설명하며 침대가의 의자로 쓰러졌다. [이미 늦은 뒤였지. 그 남자는 살아나지 못했소. 임신한 그의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소] 그가 손바닥으로 의자 팔걸이를 쳤다. [젠장, 사람들은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왜 생각지 못하는지 모르겠소. 그 사람은 심장이 몹시 나쁘다는 걸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병원에 가질 않았소. 심지어 호흡 장애와 흉통이 생기기 시작했는데도. 그는 사무실에서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왔는데, 심장의 주요한 부분은 이미 죽어 있었소. 죽어 있었다고! 나는 죽은 심장 조직을 대체할 수가 없었소. 죽은 심장은 다시 살릴 수가 없소. 나는 그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소] 노린은 그를 위해 두 팔을 벌렸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거친 숨을 들이쉬고는 그녀의 가슴을 압박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그녀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칼 속에 얼굴을 파묻고 그녀 머리 옆의 베개들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뺨이 젖은 걸 느끼고 슬프게 웃음지었다. 그건 그녀가 레이먼을 사랑하는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금욕주의자처럼 모든 감정을 숨기고 아무 것도 안 느끼는 척하지 않았다. 그는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사내였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그녀는 그의 숱 많은 검은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결국 죽을 사람과 살 사람을 결정하는 건 하느님이에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레이먼.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구요] 그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았다. [당신은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지 않았소?] 그가 갑자기 그윽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네. 하지만 나중에 숙모 숙부랑 같이 교회에 다녔어요. 지금도 근무가 없는 주일에는 나가요] 그는 고개를 쳐들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은 아직도 촉촉했다. [나는 미사나 고해 성사를 하러 자주 가진 못하지만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소. 때때로 이런 경우엔 그 신앙심이 나를 지탱해 주지] 그녀의 손가락 끝이 그의 단단한 턱을 더듬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무척 좋았다. [환자를 잃는 것이 가슴 아프다는 걸 알아요. 환자를 잃으면 간호사인 나도 가슴이 아픈데 당신은 오죽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는지 생각해봐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쉬며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그를 만지는 것이 좋았다. 그녀의 눈빛에 감출 수 없는 다정함이 드러났다. [당신은 아이들을 좋아하지? 작년 크리스마스 때 당신이 소아 암 병동에서 아이들과 놀아 주고 난 뒤 끝내는 홀에서 우는 걸 보았소] 그녀도 그 일을 기억했다. 레이먼은 그때 그녀를 발견하고, 둘 사이의 적의에도 불구하고 발을 멈추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그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친절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 애들은 너무 어려요. 그런 아픔과 절망을 알기엔 너무나 어려요] [언젠가는 암을 정복할 수가 있을 거요] 그가 그녀에게 약속했다. [아, 그러길 바래요] 그녀는 그의 눈을 살펴보았다. [기분이 나아졌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식사는 했어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소. 하지만 지금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은 먹었소?] [감자와 브로콜리 수프를 조금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나도 가서 한 그릇 먹어야겠소. 뭘 좀 더 먹겠소?] [아뇨, 고마워요. 혹시 고양이 봤어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부엌에서 과자를 먹고 있는 걸 보았소]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입술로 가져갔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몸을 숙여 서늘한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댔다. [바로하를 듣고 싶소?]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네] [몇 분 내로 오겠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굶주린 사람처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누군가에게 부드러운 위로를 받아 보긴 평생 처음이었다. 결혼 초에 환자 한 명을 잃고 낙담할 때 이사도라는 위로는커녕 짜증만 냈다. 이사도라는 결코 그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젠 괜찮아요?] 그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괜찮소. 저녁 먹고 오겠소] 그는 바로하의 <패러독스,레이> 제 1 장을 그녀에게 읽어 주었다. 그녀는 대부분을 이해했고, 일부 낯선 동사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그가 도와 주었다. [나는 특히 셰익스피어가 여성이라고 맹세하는 그 대목이 특히 좋아요] 그녀가 킬킬대며 말했다. 그가 그녀를 따라 웃었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지? 그는 뛰어난 작가였소] [당신은 스페인어를 참 아름답게 읽어요. 밤새도록 듣고 싶지만 당신은 쉬어야 해요] 그가 책을 덮었다. [당신도 마찬가지요. 아직도 아프오?]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네. 꿰맨 자리가 가장 거슬려요. 거기가 근질거리고 불편해요] 그가 킥킥 웃었다. [그건 낫고 있다는 뜻이오] 그가 안심시켜 주었다. [잠드는 데 특별히 필요한 거라도 있소?] [진통제 두 알이면 돼요. 중독이 되거나 하진 않겠죠?] [설마 당신이 중독되도록 내가 주의를 소홀히 하겠소?] 그가 꾸짖고는 약병에서 알약을 꺼내 그녀의 손에 넣어 주고 물 마시는 걸 도와주었다. [미안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가 잔을 치우고 말했다. [푹 자요] [언제 다시 바깥에 나갈 수 있지요?] [다음 주에 날씨가 좋으면 산책을 합시다] [바깥 세상을 보고 싶어요] [당신을 데리고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하지만 포근하게 입어야 할거요. 당신 아파트에 코트 있소?]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재킷이 있어요]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고는 나가 버렸다. 일 주일 뒤, 어느 화창한 날 그는 발끝까지 오는 사파이어 색 벨벳 코트를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그녀가 항의했지만 그는 세일 매장에서 싸게 샀다면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품위 있게 포기하고 그의 팔에 매달려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을 나섰다. 레이먼은 그녀를 부축해 천천히 회전문을 통과하여 길거리로 나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한 상인이 그녀를 치며 화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그녀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얼마 전에 심장 수술을 받았소] 레이먼이 위협적인 검은 눈으로 그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서 빨리 걸을 수가 없는 거요. 당신이 양보할 수도 있었잖소!] 그 남자는 노린을 자세히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걷는 것만으로도 힘들다는 걸 안 것이다. [미안하오] 그가 중얼거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라니까] 레이먼이 투덜댔다. [신경쓰지 말아요] 부드러운 코트와 잘 어울리는 털모자를 쓴 그녀가 그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그는

그녀를

더욱

안전하게

붙잡고,

아직도

분노로

번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소] 그가 성을 내며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쇠약하고 다치기 쉽기 때문이야. 금세 두 눈에 눈물이 솟았다. [그만...] 그가 장갑 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설명했다. [당신이 나를 염려해 주니까 기분이 얼마나 근사한지 몰라요. 이건 감격의 눈물이에요] 그의 턱이 긴장했다. [그 놈을 때려눕혀야 했는데...]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당신에게 매달리는 한 난 괜찮아요. 아, 레이먼. 바깥에 나오니 정말 좋아요!] 자신의 얼굴을 향해 쳐든 그녀의 얼굴이 어찌나 예쁜지, 그는 주먹으로 복부를 맞은 듯했다. 그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숨을 죽였다. [뭐가 잘못됐어요?]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당신이 너무 사랑스럽게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코트하고 모자가 정말 멋져요] [그 안에 있는 여자는 아름답고. 그리고 겉모습만 아름다운 게 아니오] 그가 덧붙였다. [방금 당신처럼 커다란 잿빛 눈동자와 그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를 지닌 딸아이가 있다면 얼만 멋질까 하고 생각했소]

10 그녀는 땅바닥이 자신의 밑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느꼈다. 하지만 그의 팔이 조심스럽게 붙잡고 있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소] 그는 걱정이 되어 즉시 말했다. [너무 멀리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괜찮아요] 그녀는 그에게 기댔다. [멀리 나왔기 때문이 아니에요. 난 당신이...] 그녀는 남을 의식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말아요. 내가 방향 감각을 잃은 것뿐이에요] [난 당신이 내 딸을 낳아 주면 좋겠다고 말했소] 그가 되풀이 말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꼼짝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얘길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걸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난 우리가 이미 반지 얘기를 했기 때문에 아기 얘기는 자연스러운 마무리 같았소] [반지... 당신은...결혼 반지를 얘기한 거예요?] 그녀가 외쳤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뭐라고 생각했소?] [크리스마스 선물이오] 그녀가 더듬었다. [아마도 탄생석 반지일 거라고] 그는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별안간 나를 완전히 믿어 주길 기대할 순 없겠지. 결혼 얘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는 조급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커다란 잿빛 눈동자를 깜박거리지도 않고 그의 잘생긴 얼굴에 고정시켰다. [의사의 삶은 소모성이오] 그가 행인들이 주위를 지나는 동안 그녀를 살며시 붙잡은 채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에겐 나만의 시간이 있소. 그리고 당신과 가족을 부양할 만큼 벌고 있소] 그녀는 두 뺨이 화끈거렸다. [당신은 단지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노린, 우리 둘은 정말 잘 어울리오, 그걸 몰랐소? 나랑 함께 있으면 행복하지 않소?]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두 손이 긴 코트의 캐시미어 털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뇨, 하지만 너무 빨라요. 나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고 싶어요.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녀가 눈을 치떴다. [내가 아기를 가질 수 있나요?] 그의 뺨이 붉어지자 그녀는 그를 째려보았다. [지금 당장이 아니에요] 그녀가 투덜댔다. [내 말은 인공 판막을 단 내가 임신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거예요] [물론이오] 그가 불안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용서해줘요. 난 당신 상태에 맞는 체위 방법과 수단을 생각했소] 이제는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하게 된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난 아기를 좋아해요] [알고 있소. 나도 그렇소] [하지만 숙모와 숙부께서...] [기뻐하실 거요] 그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두 분 역시 아이들을 좋아하시오. 손자를 갖는 것이 두 분의 가장 큰 소망이었소] 그가 훅 숨을 들이쉬었다. [그분들은 이사도라가 아이를 싫어한다는 걸 모르고 계셨소] 그녀의 눈길이 그의 딱딱한 얼굴로 올라갔다. 레이먼을 진지한 구애자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그가 수호 천사이며 누군가를 돌보기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기분 좋았고,


그녀는 그걸 즐겼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의 신의가 없이는. 그는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졌다. [시간을 갖고 생각해 봐요] [그럴게요] 그녀가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얼굴을 찡그린 채 주위를 둘러보며 웅얼거렸다. [교통을 방해하지 말고 걷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녀는 숨이 끊어질 듯이 웃어대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좋아요] 그는 그녀를 부축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의 손을 잡자 자동으로 맥박이 만져졌다. 그녀의 맥박은 강하고 규칙적이었다. 그가 빙그레 웃었다. [운동을 하면 더 빨리 회복될 거요] 그는 응급 환자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녀와 매일 산책을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다시 몇 달이 지나갔다. 그녀는 체력과 원기를 회복했고, 흉부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고요한 아파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책을 읽어 주었다. 그는 걱정거리를 그녀와 함께 나누었고, 그녀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신체적으로는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결혼하고 싶다고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심장병 전문의를 정기적으로 찾아가고, 매주 응혈 주기를 점검하고, 약을 먹는지 확인하며 그는 남아메리카 사람답게 노발대발했다. 그녀는 그를 설득하려 했다. [그렇다고 당신이 나를 위해 해준 모든 것을 고마워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당신은 나를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내 생계는 내가 해결하고 싶어요. 나에겐 집이 있어요.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당신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소] 그가 입씨름을 했다. [아직 너무 이르오] [여기에 석 달이나 있었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난 직장으로 복귀해도 좋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어요.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굴죠?] 그는 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자 원기를 회복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전에는 플림과 함께 남겨 두는 것도 걱정스럽고 못 미더웠는데... 그런데 지금 그녀는 화색이 돌고 심장은 새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훌륭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최소한 시간제로는 거뜬히 근무할 수 있었다. 그녀를 이 집에 붙잡아 둘 더 좋은 구실이 있다면, 하고 그는 바랐다. 혼자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 지...


[고양이는 데려갈 수 없소] 그녀를 떠나지 못하게 할 언쟁거리를 찾으며, 그가 마침내 말했다. 그러고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그녀와 마주 섰다. [고양이가 슬퍼하겠지] [바보 같은 소리예요] 그녀는 확신 없이 말했다. 자신 역시 고양이뿐만 아니라 레이먼 때문에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동정이 아니란 걸 확신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슬픔을 참아야 한다. [당신 혼자선 행복하지 않을 거요] 그가 성을 내며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괴로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은 전에는 몰랐던 과거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어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는 건 당연했어요. 그리고 당신 스스로도 말했듯이 당신에겐 돌봐 줘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의 턱이 올라갔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당신과 함께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의 감정을 못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군] [나를 그토록 정성껏 돌봐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완전한 타인에게 친절했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어요. 그게 당신이거든요] [우쭐하게 만드는군. 그러면서 당신 자신의 가치를 더럽히고. 아마도 내가 당신이 인생에서 그렇게 조금만 기대하게 만들었나 보오. 내가 당신을 모질게 만든 거요] 그의 억양이 더욱 두드러졌다. 마치 그런 말들을 하는 것이 난처하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듯이. 그가 어찌나 처참하게 보이는지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더 이상 모질지 않아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메리 숙모하고 핼 숙부는 나에게 정말 잘해 주셨어요. 이젠 삼촌댁에 가는 걸 좋아하게 될 거예요] [그들을 따라 해외로 가선 안 되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은 너무 이르오] [당신의 동료가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그녀가 발끈해서 말했다. [왜 그 친구의 말을 듣는 거요?] 그가 추궁했다. [그가 당신 상태에 관해서 뭘 안다고? 당신을 수술한 건 나요!] 그의 눈은 번개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그녀는 그에게 매혹되었다. [지금은 당신이 흥분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녀가 달래듯이 말했다. [괜찮아질 거라고!] 그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한 손으로 검은머리를 긁어댔다. [난 이제 누구하고 얘기하지? 내가 환자를 잃었을 때는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결심을 지키기가 힘들었지만 그녀는 해야 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조심스레 만졌다. [나는 전화만큼 가까이 있어요] 그녀가 약속했다. [언제든 당신이 좋을 때 전화할 수 있어요. 당신은 이제 나의 친구예요] 응시하는 그의 눈을 마주 보지 않은 채 그녀가 덧붙였다. [서로 얘기하는 친구] 그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다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 위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내 친구가 되고 싶소? 그럼 나를 쏴 죽이시오]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속삭였다. [그게 친절한 행동일 거요]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난 절대 당신을 해칠 수 없어요] [내 인생에서 걸어 나가는 건 해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자기 보존이죠] 그녀가 웅얼거렸다. 그는 그녀를 두 팔로 안고 바싹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의 아파트를 떠나기로 한 것이 올바른 결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몸을 던졌다. 그의 입이 그녀의 입을 소유하기 위해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가볍고 부드러운 키스는 점점 더 깊고 집요해졌다. 그녀는 그의 깊고 거친 신음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바닥에서 완전히 들어 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녀의 두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고, 그녀는 그의 열정이 요구하는 것과 똑같이 강렬하게 키스를 되돌려 주었다. [내가 덜 양심적이라면] 그가 쉰 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침대로 데려가서 내 곁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사랑을 나눌 텐데. 하지만 당신은 아직 한 번도 남자와 사랑을 나누어 보지 않았을 거요, 그렇지?] [네] 그녀가 속삭였다. 점점 더 몸이 떨려 왔다. 그는 그녀를 바닥에서 완전히 들어 올려 이마를 맞대고 부드럽게 안았다. [그럼 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촉도 내가 처음 맛보는 거요?] 그가 소곤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자만에 빠졌어요] [난 굶주려 있소] 그는 그녀의 입에 다시 키스했다. [사랑받고, 요구받고, 위로받는 데 굶주려 있소. 당신은 나한테 천국을 보여 주고 나서 지옥으로 보내고 있소, 직장 때문에!] [어머, 아니에요.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의 입과 뺨과 길고 오만한 코를 만지며 얼른 말했다. [직장 때문이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해요!]


[내 사랑!] 그는 신음처럼 말하고 그녀에게 뜨거운 키스를 했다. 그녀에게 그렇게 많은 고통을 주었는데도 그 말을 듣다니... 그는 꿈도 꾸지 못한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듣자 깊은 나락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의 입 아래에서 자신의 입을 끌어내 그의 뜨거운 목에 입을 맞추었다. 절개 부위의 아픔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당신은 나를 보내야 해요] 그녀가 비참하게 속삭였다. [왜?] 그녀는 귓전에서 울리는 그 그윽한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야 당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있어요]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쳐들고 그녀의 부드럽고 슬픈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감정이라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 서서히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소?] 그가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며 무겁게 물었다. [이사도라는 알았는데. 그녀는 그걸 갖고 나를 괴롭혔소. 당신한테 이 댸기를 했는데...] [이사도라가 그렇게 말한 건 단지 육체적인 것이잖아요] 그가 허허 웃었다. [육체적인 것?] 그의 눈길이 그녀의 얼굴에서 미끄러져 자신의 품안에 있는 몸으로 내려갔다가 도로 올라왔다. [이런 노래가 있소, 노린]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올랐던 곡이오. 노랫말은 남자가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는 여자의 눈 속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아이들을 볼 수 있다고 되어 있소] [그래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는 자극적인 노랫말뿐만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부끄럽게도 당신 숙모네 집 부엌에서 당신을 본 날, 난 당신 눈 속에서 내 아이들을 보았소] 그가 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며 속삭였다. [그런데 난 결혼한 상태였소. 큰 죄를 지은 줄 알고도 그걸 되돌릴 수 없으니,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지] 그의 눈이 감겼다. [나는 그 대가를 치렀고, 당신에게도 대가를 치르게 했소. 그리고 우린 둘 다 아직도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오] 그녀는 다시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도 지지 않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아무 것도 은폐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심장이 그녀의 눈 안에 들어 있었다.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와 결혼하고 싶었나요?] 그녀가 쉰 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오] 그가 간단히 말했다. 그의 두 눈이 그녀의 얼굴을 숭배하듯 쳐다보았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거요. 내 마음과 내 영혼과 내 생명을 다해서]


그녀는 창백한 뺨 위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꼈다. [울지 말아요] 그가 키스로 눈물을 훔치며 속삭였다. [그만, 그만 울어요. 당신이 그렇게 떠나길 원한다면 막지는 않겠소. 그렇지만 우린 만나야 하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린 채 고통스럽게 몸을 떨며 계속 울었다. [내 사랑] 그는 그녀의 젖은 얼굴에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를 퍼부었다. [아, 울지 말아요. 제발... 당신이 이렇게 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소] [난 당신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흐느꼈다. [난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만

했소.

그런

감정을

인정하는

불명예스러웠을 거요. 난 유부남이었으니까. 내 신앙심으로는 결혼은 평생을 지켜야 되는 거였소] [알아요] 그녀는 젖은 뺨을 그의 뺨에 대고 비볐다. [그것 때문에 떠나려고 했어요. 난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이 단지 나를 동정한다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는 그녀를 더욱 바싹 안았다. [당신을 사랑했소. 내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소. 당신과 같이 여생을 보내고 싶소. 당신의 아이들을 갖고 싶소] [나도 당신의 아이들을 갖고 싶어요] 그녀가 고백했다. [나는 되도록 빨리 결혼하고 싶소] [그래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자꾸 도망치려 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나랑 결혼하면 집에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할거요] 그녀는 그의 목덜미의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구조 활동은 할 수 있어요] 그는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기가 생길 때까지?]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그때까지는. 그리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간 뒤에. 나는 나의 일이 정말 좋아요] [당신은 정말 유능하지] [늘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죠?] 그가 그녀에게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나를 괴롭히려면 내 유령을 끌고 다녀요] 그녀는 굳어진 그의 입에 살짝 키스했다. [미안해요] [아, 아니오. 나는 그렇게 쉽사리 상처받지 않소] 그가 중얼거리며 그녀의 입술 위로 몸을 숙였다. [나는 위로를 받아야 하오] [이렇게요?] 그녀는 느리고 은근한 쾌감을 주는 키스를 했다. 그느 두 사람이 모두 흔들릴 때까지 그녀와 똑같은 강도로 키스를 되돌려 주었다. [나의 심장, 이 키스는 위험한 거요] 그가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을 살피며 말했다. [우리는


교회에서 결혼할 거요. 그리고 당신은 하얀 드레스에 면사포를 쓰고. 그런 다음 우린 첫날밤을 맞이하겠지] 그녀는 낯을 붉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이미 첫날밤을 보냈다고 생각해요. 브래드한테서 들었어요]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친구가 또 찾아왔소?]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아주 잠깐 동안이오. 당신이 속단하기 전에 말하는데, 그는 병원에 있는 누군가를 몹시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그가 말하기 전에 그녀가 덧붙였다. [우린 그냥 친한 친구예요. 그뿐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그와 친구 관계를 유지해도 좋소] 그가 단호히 말했다. [그를 질투하면서...] [물론 무척 질투하오] 그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하지만 친구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한 거요. 난 당신을 믿으니까 당신이 친구라고 하면 더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을 거요]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닥에 세워 놓았다. [이렇게 가벼운 몸인데도 안고 있으니까 점점 무거워지는군. 하지만 결혼하면 당신을 안고 문턱을 넘겠다고 약속하겠소] [그 약속을 지키게 하겠어요] 그녀는 온 마음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사랑을 음미했다. [어둠 속에서 당신을 내 품에 안는 것을 꿈꾸어 왔소.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까 내가 소망하던 것 이상이군] 그가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그리고 내가 당신의 첫 남자라는 건 나에겐 말할 수 없는 선물이오. 그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라오] 그녀는 오랫동안 간호사 생활을 했는데도 당황해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감추었다. [두렵지 않지?] [네] 그녀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난 당신을 흠모해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는 그녀의 머리칼에 키스했다. 결혼을 발표하고 나자 노린이 걱정하던 모든 일들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큰 행복감 속으로 사라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장 놀라운 일은 숙모와 숙부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 기쁨이었다. 메리 숙모가 즉시 결혼 준비와 계획을 떠맡았다. 노린은 숙모의 조직 능력에 감탄했다. 물론 노린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약혼한 뒤에는 숙모 집으로 들어가라는 레이먼의 권유로

노린은 숙모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숙모와

더욱

가까워졌다. 그는 자신들의 결혼 생활에 해가 될 나쁜 행실과 소문이 생기는 걸 원치 않는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그런 결심을 굳게 지키기 위해 결혼 서약을 할 때까지는 그녀를 만지기를 거부했다. 그는 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자신의 생각에 단호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다정 다감함은 그녀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영원한 원천이었다. 그녀는 더욱 행복한 나날을 보냈고, 그 역시 그랬다. 약혼한 뒤로는 브래드 도널드슨은 노린을 찾아오지 않았다. 잘된 일이라고 레이먼은 생각했다. 레이먼은 참을성 있는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여자 문제에선 그렇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녀의 친구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될 거라고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레이먼은 결혼식 전에 노린을 데리고 나가 저녁 식사를 몇 번했는데, 언제나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 속에는 불꽃이 이글거려서 그녀는 그를 조심하게 되었다. 결혼식 전날 저녁, 그녀가 숙모네 전용 도로에서 자동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그가 그녀에게 한 팔을 두르고 부드럽게 말했다. [날이 갈수록 나에 대해 불안해하는데, 이유를 말해 줘요] 그녀가 그에게 기대자 그의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난 남자를 잘 몰라요] 그녀가 고백했다. [괜찮을까요? 내 말은, 당신은 산채로 잡아먹을 듯이 나를 바라보는데, 난 당신에게 충분할지 자신이 없어요] 그가 킬킬 웃었다. [충분할 거요. 하지만 이제 나도 두려운 게 있다는 걸 고백해야겠소] 그녀가 눈을 치떴다. [나에 대해서요?] [나는 당신의 순진함에 위축이 되오. 내가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 당신의 몸이 내 몸을 갈구해야 할 거요] 그녀는 얼굴을 그에게 비볐다. [그럴 거예요. 그런 건 조금도 걱정되지 않아요] [당신은 내 인생에 무수한 여자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당신이 이사도라하고 결혼했을 때가 30 대 초반이었죠] 그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는 그녀의 턱을 쳐들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나는 아내에게 충실했소. 그리고 그녀가 죽은 뒤로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사랑스런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당신 다음에 또 다른 여자는 절대 없을 거요] 그녀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고 순수한 기쁨에 차서 그에게 기댔다. [우리는 내내 행복하게 살 거예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신화 같은 얘기지] 그가 속삭였다. [하지만 부부가 노력하면 오래 갈 거요] [우리의 신화는 영원할 거예요]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거요] 그녀는 그에게 다정하게 키스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굳히며 그녀를 떼어놓았다. [이젠 나한테 키스하는 게 좋지 않아요?]


그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너무나 좋아하오. 내일 밤엔 키스보다 훨씬 더한 걸 기대해도 좋소] [<훨씬 더한 거>라는 대목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가 킥킥 웃었다. [나도 그렇소. 그럼, 잘 자요!] [당신도요] 그녀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11 결혼식은 엄청나게 큰 행사는 아니지만, 중요한 사건이었다. 레이먼과 노린은 목사 앞에서 결혼 서약을 했다. 레이먼과 노린의 병원 동료와 친구들, 그리고 노린의 숙모와 숙부가 참석했다. 식이 끝난 후에 조그맣지만 흥겨운 피로연이 켄싱턴 부부의 집에서 있었다. 노린은 자신의 방이었던 침실로 들어가 화장을 고치고, 니트 정장을 입었다. 그 차림으로 레이먼과 함께 남캘리포니아의 찰스턴으로 짧은 신혼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낯익은 윤곽에서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그렇지만 두 눈, 그 커다란 잿빛 눈동자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녀는 한 번도 진정으로 행복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가엾은 이사도라를 생각해 보았다. 이사도라의 삶이 그렇게 별안간 비극으로 끝난 것은 유감이었다. 노린은 이사도라를 잃은 것에 대해 언제나 조그만 죄책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이사도라가 위독하다는 걸 의사에게 이해시키고, 구급차를 보내 달락 할 수만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여하튼 나는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야 하고, 그것을 지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레이먼과 함께하는 나 자신의 인생을 진실 속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녀 뒤에서 방문이 열리고, 아주 잘 어울리는 하늘색 저장 속에 분홍색 실크 블라우스를 받쳐입은 메리 켄싱턴이 들어왔다. 그녀는 조카를 보고 방긋 웃었다. [도와줄까?] 노린은 고개를 저으며 거울에서 몸을 돌렸다. [이사도라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슬픈 듯이 말했다. 메리의 눈이 흐려졌지만 잠깐뿐이었다. [노린, 우리 가운데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순 없어]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일은 예정된 대로 일어난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지는구나. 우리 모두가 이사도라를 버려 놓았다. 네 숙부하고 내가 그 애를 네게만 맡겨 두고 떠난 게 잘못이었어. 레이먼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따지고 보면 너는 가장 책임이 적은 사람이야. 왜냐하면 넌 그 애를 돌보려다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우린 네가 얼마나 위독했는지 아무도 몰랐단다. 더 이상 너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단다] 그녀의 얼굴은 진지했다. [네 숙부와 내가 이사도라의 장례식에서 너에게 한 일을 얼마나 후회하는지 말해 줄 수 있다면 좋겠구나. 레이먼도 똑같이 느낄 거라고 확신한다]


[다들 모르셨잖아요] 메리가 슬프게 웃었다. [난 많은 걸 몰랐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몇 년간 너를 부려먹었지. 내가 너한테 지운 책임들을 뭐든지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말고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알게 해주지 그랬니] 노린도 웃었다. [숙모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했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어요. 숙모는 저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에게 가정을 주셨잖아요. 고아원에 넣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 일은 절대 없었을 게다. 가족은 가족이니까] [이 집에서 한 번도 학대받거나 구박받지 않았어요] [하지만 넌 정말로 행복하지도 않았어. 이젠 행복하길 바란다, 노린] 그녀가 진실하게 말했다. [너와 레이먼 둘이서] 노린은 충동적으로 숙모의 뺨에 어색하게 키스를 했다. [고맙습니다] 메리는 노린을 다정하게 껴안았다. [너는 이제 우리에게 남은 하나뿐인 딸이야] 그녀가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 [이따금 우릴 찾아오길 바란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서] 따스해진 눈빛으로 그녀가 덧붙였다. 노린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아이를 몇 명 갖고 싶어요] [고대하고

있으마.

자,

이젠

새신랑에게

보내

주어야겠구나.

조바심치는

것처럼

보이던데!] 찰스턴으로 가는 길은 멀었지만, 비행기 안에선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사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레이먼은 가다가 자주 차를 세워 노린이 내려서 다리를 쭉 펴게 했다. 그녀가 너무 지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다. 한 번은 파이와 커피를 먹기 위해 멈췄는데, 그는 그녀가 먹는 동안 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손을 놓아줄 수 없는 양.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에 사랑의 증거가 더욱 뚜렷했다. 그 검은 눈동자에 담긴 다정함이 그녀의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했다. 그가 그녀의 맥박이 빨라지는 걸 느끼고 은밀하게 웃음지었다. [자, 이제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모든 면에서 나의 것이오.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오] [나에게도요] 그녀가 쉰 소리로 동의하고는 소유욕을 드러내는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 전부를 바쳐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파란 토파즈로 된 약혼반지 위에 아람다운 금반지를 끼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에게 수줍어했다.


레이먼 역시 그녀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커다란 금반지를 끼었다. 그것은 그가 그녀만큼이나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한다는 걸 의미했다. [고양이가 메리 숙모의 가구들을 너무 많이 망가뜨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판자로 둘러싸 놓을 걸 그랬나 봐요] [우리가 집에 가면 고양이가 천장에 매달린 망 속에 있는 걸 보게 될 거요] 그가 쿡쿡 웃었다. [당신의 숙모와 숙부랑 아주 즐겁게 지낼 거요. 두 분도 그놈을 좋아하시니까]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홀린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가 무심코 말했다. [내가 평생 꿈꿔 온 것들이 모두 실현된 것 같아요]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가 한껏 싱글벙글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요. 그럼 당신이 꿈꾸는 게 아니란 걸 증명해 보일 테니까] 그녀는 그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그의 눈 속에서 갑자기 세차게 타오르는 어두운 불꽃을 보는 순간 시선을 떨구었다. 그들은 조금 위 찰스턴에 있는 고급 호텔에 도착했다. 레이먼은 겉보기엔 참을성 있게 호텔 수속을 하고 나서, 짐 가방을 스위트룸으로 갖다 준 벨보이에게 팁을 주었다. 그렇지만 방문이 닫히고 벨보이 뒤로 문을 잠그자마자 노린을 두 팔로 들어 올려 곧장 커다란 침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느끼고 만지고 맛보고 싶은 강한 욕망 때문에 미처 침대 시트를 젖히기 위해 멈추지도 않았다. [너무...빠르오?] 그가 그녀의 열렬한 입술에 대고 소곤거렸다. [피곤하오...?] 그녀는 대답 대신 자신의 긴 두 다리로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러자 처음에 느낀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고, 두 사람을 그토록 길게 부정한 압도하는 듯한 열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둘 사이의 열정이 어지나 폭발적이고 허기지고 열렬하고 미친 듯한지,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완전한 정장 차림이던 두 사람이 다음 순간에는 너무나 가까워져서 그녀는 그의 몸 속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따스한고 부드러운 알몸을 입과 두 손과 두 눈으로 맛보았다. 그녀의 두 손이 놀라워하며 그를 만지고, 그녀 자시의 몸과 함께 그의 따스한 청동 같은 몸뚱이를 느끼는

걸 즐겼다. 그는 순간순간 점점

갈망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숙련된 애무가 서서히 점점 더 공격적이 되어갔다. 그가 그녀를 침대에 뉘고 그녀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그녀를 탐색했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자 그는 부드럽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녀의 가슴을 누르는 입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는 그녀 위로 엎드려 두 팔로 자신의 체중을 지탱한 채 경이와 충격과 기쁨이 담긴 그녀의 눈을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을 그녀의 몸과 합치기 시작했다. [생각한 그대로요, 내 사랑...] 그녀는 경외감과 약간의 공포감 속에 그의 힘과 정력을 느꼈다. 그녀의 두 손이 그의 두 어깨에서 조여들었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벌리는데 그가 초조한 숨을 토하며 움직였다. [아프오?] 그의 얼굴에는 그녀를 위해서 억제하는 노력이 드러났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타는 것 같아요] [그래. 하지만 괜찮을 거요]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한 손이 둘 사이로 움직였고, 그는 그녀가 충격을 받아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거라고 예상하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미안해요] 그녀가 초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요, 당신을 몰아붙였으니까] 그가 부드럽게 말하고는 그녀의 몸이 오그라들도록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그녀를 건드렸다. 하지만 고통스럽진 않았다. [그래] 그가 그녀의 눈을 지켜보며 말했다. [이것이 빠져 있었소. 이러면 달콤한 긴장을 만들고, 당신의 몸이 나를 갈망하게 만들어서 고통마저 즐거움으로...아, 그래, 그래...] 그녀는 손톱으로 그의 등을 후벼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주고 있는 쾌감이 그녀를 새로운 갈망으로

신음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만지고 또

만지기를

바랬다...아, 그래, 그래! [레이먼!] 그녀는 기쁨으로 흐느꼈다. 그녀의 긴 두 다리가 주저 없이 그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녀는 그를 느끼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강의도 듣고 책도 읽었지만 지금 자신의 모든 신경을 따라서 욱신거리고 있는 감각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아픔이 조금 주춤하고 난 뒤로는 갑자기 그를 완전히 자신의 일부처럼 느꼈다. 그녀는 그를 빨아들였고, 그 다음에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몸을 떨면서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한 몸이 되어 느리고 안정된, 달콤한 리듬 속에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그 강렬한 쾌감의 원천을 발견했을 때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흐느끼며 지켜보았다. 그들은 함께 나눈 쾌감을 절정에서 잠시 정지한 채 밀착된 상태로 가쁜 숨을 쉬며 서로를 응시했다. [믿을 수가 없어] 그가 숨을 토했다. 그의 얼굴은 열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욕망으로 긴장한 채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래요]


[다시 할 수 있소?]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 그녀는 기쁨에 겨워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했다. [난 괜찮아요] [이런 느낌은 처음이오, 한 번도 없었소] 그가 섬세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다 그녀가 숨을 죽이는 것을 알고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입으로 몸을 숙였다. 그녀는 그를 보고 깔깔거리고 나서 신음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그러고는 열정에 몸을 맡긴 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몸 속으로 몸을 활처럼 휘었다. 그건 마치 무지개를 타고, 따스한 와인에 몸을 담그고, 기쁨을 호흡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려 몸서리를 치며 더 세게 매달렸다. 절정의 기쁨은 끝이 없는 듯했다. 긴장한 나머지 근육이 아팠지만, 맞서 싸우기엔 너무나 달콤했다. 마침내 그녀는 완전히 기진 맥진해서 할 수 없이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가 그녀의 축축한 머리를 다정한 두 손으로 쓸어 넘겼다. [당신은 정말 탐욕스럽소] 그가 부드럽게 속삭이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녀가 고백했다. 그러고는 사악하고 비밀스럽게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 아주 섹시해요] 그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당신도 그렇소, 내 사랑. 우린 이제 완전히 하나요. 부부, 한 몸. 한 영혼] 그녀가 그의 입을 만지자 그의 입술이 오므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사랑해요] 그녀가 쉰 소리로 속삭였다. [당신 혹시...] [내 사랑!] 그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말했다. 그의 입이 그녀의 얼굴 전체를 짓이겼다. [어떻게 지금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걸 의심할 수가 있소? 아니면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가 남녀간에 흔한 거라고 생각하오?] [흔한 게 아닌가요?] 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내 사랑. 우린 서로를 사랑하고 있소] 그의 손이 아직도 그녀의 몸을 쓰다듬어 갔다. 그녀가 쾌감으로 잔물결을 일으키는 걸 그는 느꼈다. [섹스는 또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된다는 걸 뜻하오. 단순히 신체의 결합만이 아니오. 비록 섹스가 아름답긴 하지만. 그런 정신과 마음, 그리고 영혼의 합일이오] 그는 허기진 듯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누구하고도 이렇게 충족을 느끼지는 못했소. 오직 당신뿐이었소] [사랑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듯이, 나의 심장] 그가 속삭이고는 그녀에게 키스하자 그의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달아오르고 불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이 육감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엉덩이를 살며시 멈추게 했다. [하지만 이젠 쉬어야 하오. 당신이 무리하게 하진 않겠소, 비록 당신의 달콤한 몸에서 끝없는 기쁨을 발견하지만 말이오] 그녀는 한숨을 쉬고 웃음을 띤 채 그를 쳐다보았다. [흥을 깨는 군요] [천만에] 그가 킥킥대며 그녀에게서 살며시 몸을 떼었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잠을 자요, 잠깐 동안. 당신이 쉬고 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소] 그녀의 심장이 펄쩍 뛰었고, 그가 손 아래로 그걸 느꼈다. [정말로 강하게 뛰는군, 그렇게 심하게 망가졌던 심장치곤...] [더 이상 망가진 심장이 아니에요. 강하고 성실하고 당신에게 헌신적이죠] [마땅히 그래야지.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는 정말로 찬란하오, 노린... 나중에는 집안 가득 아이들도 있겠지...] 그는 순수한 기쁨으로 한숨을 쉬었다. [내 잔이 기쁨으로 넘치나이다 [나 역시 그래요]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두 눈을 감았다. 어찌된 셈인지 나쁜 기억들은 모두 사라지고, 다가올 희망찬 나날만이 있었다. [그런 행복은 꿈도 꾸지 않았어요] [나도 마찬가지요] 그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이젠 잠을 자도록 해요.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고 서로 쾌감을 느끼는 세계에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당신은 지쳤소.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살펴야 하오] 그녀는 졸음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럼 당신이 필요할 때는 내가 보살펴 줄게요] 그녀의 눈이 감겼다. [정말로 멋진 크리스마스가 될 거예요] 그도 웃었다. [당신을 리본으로 묶어서 트리 밑에 둘 거요, 내 사랑. 당신은 내가 받고 싶은 가장 멋진 선물이니까] 그녀는 그의 가슴에 더욱 얼굴을 비비며 부드럽게 소리내어 웃었다. [사랑해요] 커튼이 쳐진 창문밖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창틀을 두드리는 희미한 소리보다 레이먼의 심장과, 그녀의 것에서 금속성으로 속삭이는 강한 고동 소리가 더 컸다. 그녀는 인생에서 레이먼을 안고 있는 것보다 더 커다란 기쁨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망가진 심장은 진정으로 치유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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