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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의 여자 1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일러가 점화되지

않는다.

에마는

난처한

표정으로

보일러를

노려보았다. 새로 장만할 때가 되었지만 시골 목사인 아버지의 보잘것없는 수입으는 당분간 그런 사치는 바랄 수가 없다. 에마는 한숨을 쉬며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탐스럽게 물결치는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 투명할 만큼 새하얀 살갗과 큼직한 회색 눈동자를 또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에마의 그 눈동자 속에는 깊은 지성과 유머가 숨겨져 있지만 어지간히 안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간파해 내지 못할 것이다. "언니, 여기 있었구나. 제발 날 좀 도와 줘.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졌어." 동생 카밀라가 도와 달라느니 어쩌느니 하고 떠들어대는 걸 전혀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일러 고장에 정신이 팔려 처음에는 동생의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동생이 다가와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느니, 데이비드와는 이제 끝장이라느니 하며 히스테릭하게 울기 시작했을 때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이런 상태로 봐서는 늘 있어온 지난날의 대수롭지 않은 <실수> 이상의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금발에 자그마한 몸매의 카밀라는 섬세한 외모와는 딴판으로 곧잘 성가신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천진난만한 아름다움은 곧 버릇없고 제멋대로의 무분별한 방종과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웬일이니, 캐미? 데이비드는 너한테 폭 빠져 있는데…" "캐미라고 부르지 마. 데이비드가 그 호칭을 싫어한다는 건 언니도 잘 알고 있잖아. 아, 어떡하면 좋지. 정말 큰일났단 말야." 어느 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얘기해 보렴." 주방 테이블에서 의자 두 개를 들고 와서 앉으며 에마는 동생이 의자에 앉기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에마가 l0 살, 카밀라가 6 살이 됐을 때였다. 그때 이후로 에마는 어머니노릇을 해왔다. 카밀라 역시 매사에 언니를 의지하고 언니의 치마폭에 싸이는 버릇이 배어 버렸다. 도대체 오늘은 또 무슨 문제일까. 결혼식 준비로 데이비드의 어머니와 말다툼이라도 한 건

아닐까.

데이비드

터너와

약혼한

후로는

흥분하기

잘하는

카밀라도

조금은

어른스러워졌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결혼식 날짜가 가까와짐에 따라 오히려 눈물도 흔하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도 잦아졌다. 카밀라는 진정으로 데이비드와 결혼하고 싶은 걸까. 데이비드와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과잉보호하는 어머니한테 데이비드가 꽉 쥐여 있는 것이 에마로서는


걱정스러웠다. 카밀라가 행복한 생활을 해나가려면 미래의 시어머니와 친하게 지내는 법부터 배워야 할 텐데. 곤란한 것은 터너 부인이 정말 형편없는 속물이라는 것이었다. 터너 씨는 대단한 부자로 데이비드가 4 살 때 이 마을로 이사해 왔다. 데이비드와 동갑인 에마와 동생 카밀라가 그의 학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두 자매의 친척 덕택이었다. 아버지의 삼촌 뻘 되는 사람이 유명한 중령으로 남작의 딸과 결혼을 했던 것이다. 양친이 그 친척과 왕래하지 않는다는 사실 따위는 터너 부인에겐 문제가 되지 않은 성싶다. 그러한 친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들 자매는 아들의 소꿉동무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된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건 20 년이나 지난 일이다. 오늘에 이르러 목사의 딸이 자신의 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이 터너 부인에게 있어서 탐탁한 일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유복한 터너 집안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저택에 살고 있다. 부인은 <자선가 터너 부인>으로 행세하기를 좋아해, 마을 축제는 으레 터너 집안에서 열리곤 했다. 에마는 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밀라가 그의 아들과 결혼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그 데이비드가 어머니의 치마폭에 휩싸여 지내왔다는 사실은 그녀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터너 부인은 툭하면 "좀더 나은 짝을 고를 수도 있었는데." 하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카밀라는 자기는 데이비드를 사랑하고 데이비드 쪽에서도 마찬가지니까 둘만 마음을 합치면 모친의 그러한 심술 따위는 대항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마는 내심 그것을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카밀라는 데이비드처럼 되도록이면 편하게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형이다. 데이비드가 부잣집 청년이 아니었더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카밀라는 목사라는 아버지의 직업에 따르게 마련인 가난이 지겨워 불평을 해대기 일쑤였다. 금발에다 귀엽게 생긴 그녀는 뭇사람들의 응석받이로 자라나 뭐든 제멋대로 해왔다. 친구집에 초대되어 휴가를 보낸 적도 자주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카밀라의 새 옷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변통해 와야 했다. 에마는 그런 일로 해서 동생을 부러워해 본 적은 없었다. 용모도 달랐고 성격도 완전히 달랐다. 십대 초반부터 에마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데이비드 같은 청년과 결혼하는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에마는 지금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대학을 나와 이곳 지방 텔레비전 방송국에 취직한 에마는 이내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게 되었는데, 지금 그녀는 전국망을 가진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옮기라는 권유를 끊임없이 받고 있는 것이다. 아침 뉴스 방송을 몇 해째 계속하다 보니 슬슬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최종목표로는 일류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만에 하나 행운이 닿아 자신의 프로그램을 갖게 된다면… 하지만 아무리 운이 따른다 하더라도 그건 먼 후일의 일일 것이다. 상사인 로버트 에반스가 추천하는 텔레비전 방송국에서의 업무는 어떤 것일까? 비록 응모할 사람이 자신뿐만은 아니겠지만, 로버트의 말로는 그 자리가 에마 자신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에마는 미인인데다 머리도 좋으니까. 불쾌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그 두 가지가 없으면 이 세계에선 성공하지 못하거든." 에마는 그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남자는 능력 여하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여자의 경우는 그 외에 용모가 수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까닭이다. 동생 카밀라에게 비할 바는 못되지만, 에마 자신도 자기가 꽤 매력적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있다. 사실 날씬하고 우아한 몸매와 차분한 그녀의 태도에 매력을 느끼는 남자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에마가 런던 방송국에 응모했다는 기사가 지방신문에 실린 다음날, 터너 부인은 이만저만 법석을 떤 것이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일은 데이비드가 가장 싫어하는 거라서… 신문보도야 제법 그럴 듯하게 나와 있지만 그런 일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어?" 마치 에마의 누드 사진이 신문의 연예란에 실리기라도 한 듯한 소란이었다. 그녀는 터너 부인이라는 사람이 원래 좀 우스꽝스러운데다 나이도 많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데이비드까지도 모친의 말을 곧이듣고 에마 때문에 카밀라가 터너 집안의 며느리로서는 걸맞지 않다는 뜻을 넌지시 비칠 때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밀라는 현재 22 살이다. 자기 일은 자기가 처리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냐고 입밖으로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삼키며 에마는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니?" "지난달에 피오나 집에 초대받은 것 기억하고 있지?" 피오나 블레이크는 카밀라의 학교친구다. 그녀는 햇병아리 모델로 런던의 아파트에서 2 명의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의 양친은 가정이 부유한만큼 딸이 모델 업계에서

성공할지

어떨지를

문제삼지

성공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않았지만,

에마는

내심

그녀가

모델로서


"피오나가 억지로 나를 파티에 끌고 갔어. 난 가고 싶지 않았는데…" 동생의 넋두리를 듣자니 에마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카밀라에게 있어서 제게 불리한 일은 모두 누군가의 책임이고 자신은 항상 피해자인 것이다. "피오나는 그 파티가 드레이크 하우드가 주최하는 것이기 때문에 꼭 가고 싶었던 거야." 드레이크 하우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최근에 부쩍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사업가로 스캔다 사를 손에 넣었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게다가 대단한 부자인 듯하다. "그 사람이 <마초>라는 잡지를 인수했단 소릴 듣고서 피오나는 혹시 그 잡지의 모델이 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마초>라고! 피오나가 거기에 나가길 원하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애냐? 머리엔 머리카락만 붙어 있는 모양이지. 부모님이 대체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건 선정적인 남성 잡지잖아?" "요즘엔 모델로 유명해지려면 그런 데에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애야 아무래도 좋아. 그보다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봐라. 설마 그애가 너더러 모델이 되라고 꾄 건 아니겠지?" 에마는 눈살을 찌푸리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카밀라는 데이비드와 결혼할 작정이면서도 할리우드의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단지 몽상이나 하고 있을 뿐 실제로 해보려는 억척스런 오기는 없지만. 카밀라가 세차게 머리를 저어 부정했기 때문에 에마는 안심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험난한 세계에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이애에게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게 아니라니깐.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그리고 데이비드한테 절대로 말하지 마. 만약 그가 알았다간 분명하게 처신을 못한다고 야단일 테니까."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니?" 걱정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나타나지 않도록 에마는 되되록 평정을 가장했다. 드레이크 하우드에 관한 소문들이 머리를 스친다. 대단한 노력으로 오늘의 지위를 쌓아올렸다고 한다. 얼마 안 되는 밑천을 크게 불렸다느니, 건축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건축회사를 차렸다느니, 35 살인 오늘날까지 착실히 기업을 확장해서 지금은 자신이 이룩한 제국에 군림하고 있는 빈틈없는 수완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획득했다느니… <마초>도 스캔다 사를 인수할 때 함께 손에 넣은 것이리라. 그러니까 그의 기업 중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부분일 것이다. 판매부수도 대단치 않아 경쟁 출판업자로부터 문을 닫게 만들어 버리겠다고 도전을 받고 있는 잡지였다. 그건 그렇고, 그의 제국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 이 잡지에 하우드라는 사내가 얼마만큼 심혈을 기울일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피오나 정도를 모델로 쓴다고 해서 판매부수가 늘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피오나와 그 파티에 간 거로구나. 그래서?" "그리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낯선 침대에 누워 있는 거야…" "곁에

낯선

남자가

누워

있지는

않고?

터너

부인이

얘길

들으면

틀림없이

기뻐하겠다." "난 혼자였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가, 아니면 술 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난 깜짝 놀라서 어서 그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만약

데이비드가 그런 꼴을 보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그래서?" "드레스는 입은 채였으니까 침대에서 나와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어. 하지만 아무도 안 만났어. 밖으로 나왔더니 마침 빨간 페라리가 서 있더라구. 열쇠가 꽂힌 채로… 그래서 난… 그걸 타고…" "뭐라고?" 에마는 동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넌 운전을 잘 못하잖니? 운전하는 걸 싫어했으니까. 게다가 면허도 없잖아?"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 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어. 택시를 부른다는 것도 어려웠고… 운전 정도야 문제없다고 생각했지. 한데 차가 너무 커서…" 우선 카밀라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마는 눈을 감았다. "그래서 어딜 들이받았니?" "돌기둥.

이른

아침이라

도로엔

달리는

차라곤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우유배달차가 나타나는 바람에 당황해 버린 거야. 커브에서 잘못 핸들을 틀어 도로기둥을 들이받고 말았어. 난 차에서 뛰어내려 막 달렸어. 그러다 운 좋게 택시가 지나가기에 그걸 타고 피오나의 아파트로 간 거야. 그녀에게 그 얘길 했지. 그런데 피오나가 드레이크 하우드에게 고해바친 거야. 지금 그 사람은 차를 훔쳐서 망가뜨렸다는 이유로 날 고소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어." 카밀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문에 나면 내가 하룻밤을 드레이크네 집에서 묵었다는 게 알려지게 되고, 데이비드도 알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그는 결코 나와 결혼하려 들지 않을 거야. 그이 어머니가 결혼을 못하게 할 게 뻔해…" 아마 그렇게 되겠지. 에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동생도 그렇지만 피오나도 어쩌면 그렇게 한심한 짓만 골라하고 다닐까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하우드 씨를 만나서 양해를 구해 보지 그랬니? 자초지종을 얘기하면 용서해 줄지도…"


카밀라는 진저리를 쳤다. "언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그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야, 또 무례하고. 피오나는 그런 점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난 싫어… 도저히 만나러 갈 순 없어. 게다가 그 변호사로부터 어느 새 연락이 왔더군. 손해를 배상하라는 거였어. 그렇지 않으면 고소를 하겠대. 하지만 잘 알다시피 내겐 그럴 돈이 없잖아…" "그래 어떻게 해줬으면 싶은 거니?" 언제나처럼 에마는 어느 새 동생의 뒤치다꺼리를 자청하고 있었다. 카밀라는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이 낯빛이 환해지며 말했다. "오, 언니. 난 틀림없이 언니가 도와 주리라 생각했어. 그 사람을 만나서 설명을 좀…" "뭘

설명하라는

거니?

집에서

잤다는

사실이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알려지면

곤란합니다라고? 손해배상은 또 어떡하구?" "그 사람은 돈 따윈 문제삼지 않을 거야. 돈이야 쌔고쌘 부잔걸. 그 사람은 말야, 아마 내가 상대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서…" "어머, 너한테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쉽사리 용서해 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제발 어떻게 좀 해줘. 그 사람을 만나러 가서 잘 좀 얘기해 봐. 결혼식까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어. 이 편지엔 7 일 이내에 손해배상을 하지 않으면 법적 수단에 호소하겠다고 돼 있고." 그 사람은 단순히 협박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에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평판이나 성장과정을 생각해 볼 때 그렇게 쉽게만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싶다. "카밀라, 데이비드와 정말로 결혼하고 싶은 거니? 돈 문제라면 그와 의논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상대에게 몇 천 파운드씩이나 융통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고 생각해? 데이비드에게 말하면 반드시 그의 어머니 귀에 들어가게 돼. 그의 어머니가 나와의 결혼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건 잘 알고 있잖아? 난 데이비드와 결혼하고 싶어. 언니, 난 언니완 달리 직업여성 따윈 되고 싶지 않아. 그저 평화롭고 안락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 카밀라는 은연중에 뒷말을 강조하고 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에마는 잠자코 있었다. "편지를 보여 줘." 그 편지를 받아 본 에마는 왜 카밀라가 그렇게 떨었는지 이해가 갔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속셈인 것이다. 어떻게든 그를 설득시킬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설마 그 사람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려는 건 아니겠지? 자세한 사정 얘기가 그를 통해 신문기자한테 넘어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마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릴 거야." 카밀라는 사뭇 애원조로 말했다. "그 사람 차를 부순 일이 그 정도 뉴스 거리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카밀라, 넌 좀 과장이 심한 것 같애." "그 사람이 차가 부서진 걸 알고 얼마나 격분했는지 언니가 몰라서 그래. 피오나 말로는 그 차를 산 지 얼마 안 된대. 언닌 만나본 적이 없어서 상상이 안 가겠지만 그 사람은 우리들관 다른 인종…" "소문대로 아직 가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라고 말하고 싶은 거니? 얘 카밀라, 이젠 좀 어른이 되렴. 그렇지 않으면 터너 부인과 같은 진짜 속물이 되고 말아. 어쨌든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보겠지만, 변상은 어떡할 셈이니? 데이비드가 주는 용돈으로 분할해서 배상할 수 있겠니?" "글쎄… 아예 변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설득했으면 좋겠는데… 언닌 어떻게 생각해? 사실 그 사람에겐 그만한 돈쯤은 대수롭지 않은 거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배상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야. 내가 너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어 주고, 그 사건을 잊어버리고 싶겠다." "언닌 정말 고지식해. 데이비드도 학교 선생님 같다고 했어. 그러니까 혼기를 놓쳐 직장에나 다니고 있다는 거야." 에마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동생의 바보스러운 행동과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사건을 언니에게 떠맡겨 버리기만 하면 제 할 일은 끝나 버리리라고 생각하는 안이한 속셈 때문에 은근히 화가 났던 것이다. "나 같으면 데이비드와 결혼할 바에야 차라리 직장을 택하겠다. 그 사람은 식어 버린 풀빵같이 쓸모없는 사람이야." 카밀라는 자리를 박차고 주방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에마는 좀 지나쳤나 싶어 후회했다. 카밀라는 비판적인 말을 듣는 걸 싫어했다. 바로 그 점이 매사를 자신의 뜻대로 끌고 나가는 방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마는 변호사가 보내온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일은 되도록 빨리 처리해 버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에마는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 낡은 타이프라이터로 드레이크 하우드에게 면담을 신청하는 편지를 단숨에 쳐내려 갔다. 어차피 다음주엔 면접을 보러 런던에 가야 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카밀라의 사고 문제가 하우드 씨와 잘 합의된다면 좋으련만…


배상금을 전부 탕감해 달라는 카밀라의 생각은 안이하다고밖에 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분할해서라도 지불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보자. 카밀라가 어째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했는지 그 사정을 이해해 주기만 한다면 과히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아니, 그건 안 된다. 카밀라가 그것을 덮어 두면 하니까. 방법이 없다. 운에 맡기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에마는 편지를 봉하고 우표를 붙였다. "잊지 마, 억지로 꾸미려 들지 말라는 걸 말야. 평소의 에마 그대로면 돼." 상사인 로버트 에반스가 면접에 관해 이것저것 걱정해 주는 얘기를 들으며 에마는 상을 찡그렸다. "모두들 에마를 응원하고 있어. 에마는 외모도 괜찮고, 침착한데다 지적이니까.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는 시청자들에겐 에마의 인간성이 아주 돋보이는 모양이더라구."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건 알지만 그녀는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상사를 위해서라도 꼭 면접시험에 붙고 싶다. 텔레비전 방송국에 입사해서 처음 화면에 나올 기회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로버트였다. 어려울 때마다 자신을 가지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45 살의 갈색 머리를 한 무뚝뚝한 이 남자는 유머도 있고 야심도 만만찮았다. 에마는 그런 그를 좋아했고 존경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좀더 다른 유형의 여자였다면 그런 존경심과 경애의 마음만으로도 로버트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버트는 아내를 배반할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직업상 그에겐 유혹이 많았지만 그것을 냉정히 거부하는 그의 용기 앞에서는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에마

자신도

몸가짐이

단정했지만

그것은

목사의

딸이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연유한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에 따르는 도덕관념을 자식들에게 강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카밀라의 어머니 역할을 떠맡아야만 했던 운명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던 것이다. 에마는 자존심이라는 것에 비중을 두며 살아왔다. 그것 없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자기자신과 맞서서 살아가야 한다. 그녀의 경우, 남의 이목보다는 자기자신의 도덕관념 쪽이 훨씬 더 자신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처자식 있는 남자와의 연애 같은 것은 생각조차도 하기 싫었다. 아내를 배신하는 남자가 애인에 불과한 여자에게 얼마만큼 정절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의심과 질투에 빠져든다는 것조차 역겨웠다. 게다가 성적인 매력이라는 걸 잘 모른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해서 무참한 결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 모든 것을 팽개치면서까지 사랑을 나누고 싶은 남자를 아직 만나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런 에마를 카밀라는 냉정한 여자라고 비판했다. 과연 그녀는 차가운 여자일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자신의 육체를 존중했으며 육체의 반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자신은 불완전한 것에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이 텔레비전 방송국 동료이긴 했지만 종종 데이트를 즐긴 남자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친밀해질 기미가 보이면 곧 교제를 끊어 버렸던 것이다. 야심가이기 때문에 그런다고 남자들이 수군대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확실히 야심은 있었다. 일로써 성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남자가 나타난다면…? 그때는 지금 일에 쏟고 있는 정열을 모두 그 남자에게 쏟을 것이리라. 에마는 냉정하고 자제심이 강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내부에 숨겨진 정열은 자신도 두려울 정도로 뜨거웠다.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은 바로 그 정열을 어떻게 하면 제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에마는 로버트에게 함빡 미소를 보냈다. "준비는 끝났어요. 새 옷도 샀고…" 면접을 위해 정성들여 고른 옷은 짙은 올리브색의 맞춤 숙녀복으로 에마의 피부와 머리 색깔에 잘 어울렸다. 웃옷은 정장 스타일이었고 몸에 꽉 죄는 타이트 스커트는 앞뒤가 터져 있었다. 자칫 천박하게 보일지도 모를 만큼 트인 그 사이로 에마의 길고 가는 다리가 엿보였다. 점잖은 듯하면서 유혹적인 점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 옷을 샀던 것이다. 로버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내일의 면접위원은 자신의 의상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하니 내심 웃음이 나왔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오니 드레이크 하우드의 변호사로부터 편지가 와 있었다. 하우드 씨는 면담에 응하겠다는 것이며 그 날짜와 시간은 에마가 희망한 날짜와 시간으로 되어 있었다. 하루에 두 가지 용건을 함께 처리할 수 있을 테니 무척 다행이었다. 카밀라에게 그 얘길 했더니, 이제 막 잊을 만한 그 혐오스런 일을 기억에 되살려 남의 죄책감을 부채질하고 싶은 거냐고 도리어 에마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몇천 파운드의 배상금이 얽힌 문제치고는 비교적 얘기가 잘 풀려 나가 난 무척 놀라고 있단다. 데이비드에겐 얘기했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는 물론 이해해 주겠지만 행여 어머니한테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오늘은 뭐랬는지 언닌 알기나 해?"


에마는 동생이 미래의 시어머니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아예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은 터너 부부와 한 집에서 살기로 되어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독채 하나를 자유롭게 쓰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카밀라는 벌써부터 그곳을 어떤 식으로 꾸밀까 구상중이다. 그녀는 터너 부인이 전통적인 콜팍스나 파울러 가구 같은 옛날 세간을 사용하도록 허락해 준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에마는 동생에게는 그런 말을 하진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카밀라는 데이비드와 결혼하면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실제로는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은 생활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카밀라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면접 전날 밤은 런던에서 묵기로 했다. 옷에 구김이 진 채로 면접장소까지 직행하긴 싫었기 때문이다. 에마는 그다지 비싸지 않은 호텔에 예약을 해두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서재를 들여다보았더니 아버지 리차드 코트는 설교를 구상중인 듯했다. 딸이 들어온 것을 알자 그는 웃는 얼굴로 마주보았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은 어딘지 사람을 끄는 데가 있어서 교회에 나오는 부인들 중에 어떻게든 제 2 의 코트 부인으로 들어앉으려는 적극적인 부인도 있었지만, 에마의 추측으로는 부친이 독신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옥스퍼드 대학에 친구가 몇 명 있어 주말휴가를 얻으면 옛날 학생시절을 회고하며 그들과 지내는 것이 낙인 듯싶었다. 대단한 독서가이기도 하며, 외모로 봐서는 조용하고 온후한 인물로 보이지만 내면은 강철같이 강건한데 바로 그러한 강한 면을 에마가 닮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결코 하는 법이 없다. 어떤 점에서는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인데도 표면상으로는 온화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그런 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양편의

주장을

공평하게

들어주는

데도

뛰어났는데

그것도

에마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특성이었다. "내일 밤에는 돌아오겠어요." 면접은 오전에 있고, 오후에는 드레이크 하우드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카밀라는 신경이 무척 곤두서 있는 것 같던데 결혼식 일로 어떤 말썽이라도 생긴 거냐?" "사랑스런 신부가 될 거예요." 아버지는 때로 보지 못하고 넘겼으려니 생각되는 일을 정확히 보고 있어 주위를 놀라게 하는 때가 있었다. "유순한 면이 있어 카밀라는 그런 대로 다행이다만, 데이비드 같은 남자완 짝이 될 수 없을걸." "물론이에요."


그녀는 미소지으며 아버지의 말에 동의했다. "제 2 의 터너 부인이 될지는 모르지만 말예요." "아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넌 꾄협한 인간은 아냐. 어쨌든 일자리를 얻게 됐으면 좋겠구나." 에마는 아버지의 말이 진심임을 느끼고서 기뻤다. 왜냐하면 혹시 에마가 그곳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맡고 있던 목사관의 가정부, 비서, 기타 여러 가지 일을 맡아 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렵잖게 다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역까지는 에마 자신의 차로 갔다. 차는 역장이 맡아 주기로 했다. "취직이 꼭 됐으면 좋겠네요." 아무래도 마을사람 모두가 에마의 런던 행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한데 드레이크 하우드와의 일은 어쩐다지? 에마는 자신의 면접보다도 그와의 면회가 훨씬 걱정이었다. 열차는 l0 분 늦게 왔지만 좌석은 많이 비어 있었다. 런던까지는 l 시간 반 가까이나 걸려 에마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그래서 역에서 호텔까지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이번 일이 잘되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고, 가는 곳마다 유명인사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일에 자기가 익숙해질 수 있을까? 에마는 개인적 자유가 침해되는 것은 싫었다. 지금까지는 지방 방송국에 있었으므로 그런 문제는 없었다. 로버트는 그 점에 대한 의견을 지나치게 나타내지 말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었다. 하긴 그런 일이야 차차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게 될는지도 모른다. 2 비서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은 에마는 내심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정대로 면접시간 3 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방안 반대쪽을 보니 관엽식물이 늘어서 있고 거울처럼 닦여진 한쪽 벽면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침착하고 우아한 자세로 그녀를 되쏘아보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자기 아닌 다른 여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텔레비전 관계에 종사하기 시작한 이래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자신의 모습이 자꾸 낯설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십대 소녀시절엔 그저 키만 껑충한 재주없는 아이로, 밀라와 같은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와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동료 하나가 근처의 모델스쿨에서 교양 코스를 들어보면 어떻겠냐고 권해 주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강의를 수강하고 지불한 돈은 실로 효율적인 투자였던 셈이다. 에마는 미인은 아니었으니 물론 모델이 될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한 살리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제 그녀의 행동거지는 차분하고 자신에 차


있다. 그녀 자신은 잘 모르고 있지만 그 우아한 모습, 밤색 머리와 투명한 살갗의 아름다운 대비는 남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다. 로비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에마는 그들을 신경쓰진 않았다. 이 일자리에 응모한 사람이 그녀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 혼자서만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다른 지원자들의 면접은 오늘이 아닌 모양이다. 정확히 l0 분을 기다렸을 때 비서 책상의 벨이 울렸다.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방은 크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꾸며져 있었다. 면접관은 세 사람으로 모두가 남자였다.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과시해서는 안 돼." 로버트는 면접시의 마음가짐에 대해 거듭 주의를 주었었다. "시험관은 응모자의 능력을 보고 싶어하는 거야. 물론 얼굴도 예뻐야겠지만 말야." 구태여 그런 주의를 받지 않았어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자임을

과시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

심지어

언젠가는

부친에게서

너무

무뚝뚝하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대체로 남자들이란 자기를 존중해 주기를 바란단다." 언젠가 에마가 경멸에 찬 시선으로 한 신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아버지가 나중에야 넌지시 주의를 주며 했던 말이다. 그녀는 당시 그 남자의 아첨하는 듯한 겉치레 말에 진절머리가 났던 것이다. "넌 만사를 어렵게 만드는구나. 일부러 험난한 길을 선택하고 싶어해. 한발짝 옆으로 물러나서 바라보는 여유도 필요하지 않겠니?" 아버지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처세술을 좀 배우긴 했지만 에마로서는 그렇게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무는 일이 자주 있다. 직선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판이었다. 그 점에 대해선 카밀라로부터 "언니 같은 사람은 너무 전투적이라 남자들이 싫어하는 거야." 라고 그야말로 가차없이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면접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질문에는 막힘없이

대답했고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자연스럽게 표명하기도 했다. 일거일동이 주목받고, 말 한마디 한마디 점수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가, 결국 그것이 선택의 기준이 되겠지. 어쨌든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없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자기다움을 잃어선 안 된다. 에마는 그것을 명심하고 면접에 임하고 있었다. 면접관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중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곳에서 일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직장을 그만두는 데는 별문제 없겠죠?"


에마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계약이 체결되는 걸까? 다른 지원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물론 없습니다. 단지,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코트 양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말을 계속했다. "마지막에 가장 좋은 것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존의 지론이었는데, 그게 실증된 셈이군요. 그건 그렇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래층 관리부로 가서 계약서를 작성했으면 합니다. 실제로 텔레비전 앞에 설 때까진 짧은 기간이지만 훈련기간이 있습니다. 아마 잘해내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선전용 사진도 찍어야 하구요. 매스컴에 선전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한마디 … 달리 좋은 표현방법이 없어 아마 불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여성 뉴스 캐스터는 신변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게 좋아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물론 에마는 알아들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전혀 거리낄 바가 없었다. 여자에게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다고 에마가 불만을 털어놓았을 때, 로버트는 세상은 다 그런 것이 아니냐고 머리를 저으며 말했었다. 다음 한 시간은 계약을 맺는 데 걸렸다. 봉급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런던에서 생활해 나가는 데 별 지장은 없을 듯했다. 게다가 의상비가 과외로 듬뿍 가산되었다. "우선 무엇을 입고 나올 것인지 의상부에 가서 상의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의상에 대한 취미까지 테스트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것이 엄격하게 심사받고 있는 저녁 뉴스 프로에서 자신이 수행할 역할은 실로 큰 것이었다. 경쟁 방송국에서 오랫동안 계속 방영해 온 드라마 프로의 시청자를 어떻게든 이쪽으로 끌어와야만 하는 것이다. "자, 이제 됐습니다." 계약을 마치고 사무실로 나올 때 담당자는 말했다. "당분간은 할 일이 없습니다. 2 주일 후부터 출근하십시오." 그때 옆문이 벌컥 열렸으므로 에마는 반사적으로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곳에서 나온 사람은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한 남자로 어딘지 모르게 권위와 힘이 넘쳐 보였다. 남자는 면접관들 중 한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더니 시선을 에마에게로 옮겼다. 여자를 섹스의 대상으로밖에 평가하지 않는 듯한 노골적인 그 시선에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에마의

눈동자가

잔뜩

흐려지면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언저리가

약간

위로

당겨올라가며 남자의 표정이 우스꽝스레 일그러졌지만 여전히 시선은 그녀의 가슴께에서 집요하게 맴돌고 있었다. 이토록 화가 난 것도 오랜만의 일이다. 분노로 손가락이 부르르 떨려와 그것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꼭 쥐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없애려고 더


한층

긴장했다.

필사적으로

무관심을

가장한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들자,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눈과 마주쳤다. 일찍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깊은 초록색 눈동자였다. 에마는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초록색 눈은 신뢰할 수 없는 성격을 나타낸다고 하지 않는가? 한순간 에마는 만족감에 젖었지만 다음 순간 분노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남자는 일부러 그녀의 몸을 스치듯 하며 복도로 나갔던 것이다. "함께 점심을 했으면 좋겠는데 공교롭게 오후엔 예정이 꽉 차 있어서…" 옆에 서 있던 면접관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약속이 있으니까요." 방송국을 나와 로버트에게 전화를 할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시계를 들여다보곤 그만두기로 했다. 지금 그는 저녁 뉴스 준비로 한창 바쁠 것이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알려도 늦지는 않다. 에마는 성공을 천천히 음미해 보고 싶었지만 웬일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드레이크 하우드와의 면담을 앞두고 긴장되어 있는 탓이라고 생각하며 택시를 잡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조금 전의 그 무례한 남자 생각이 나자 새삼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대관절 그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진 모르지만 높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 자리에 있던 면접관이 은근히 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한데 난 어째서 두번 다시 만나지 않을 남자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내게 노골적인 흥미를 보인 사람이 뭐 그 남자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텐데 말야. 그토록 뻔뻔스러웠던 사람은 없었기 때문일 거야. 그 남자의 초록색 눈동자에 번뜩이던 짓궂은 표정이 뇌리에 떠오르자 또다시 분노를 느꼈다. 그 남자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토록 강렬하게 남자임을 의식케 하는 사람은 이전엔 거의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형은 아니지만… 에마는 레스토랑 이름을 운전수에게 말했다. 그녀는 혼자서 식사를 하게 된 걸 무척 다행으로 생각했다. 생각할 일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우선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문제였다. 누군가와 공동으로 아파트를 빌어 얼마 동안 살다가 천천히 독신용을 찾으면 될 거다. 헌 봉투 뒷면에 대충 필요한 돈의 총액을 적어본다. 새 옷이 필요할 테지만, 지금까지 입던 것도 있으니까 그렇게 여러 벌을 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행하는 것보다는 고전적인 형을 고르기로 하자. 아마 프로의 성격상 그러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또 뭐라더라 … 남자에게는 허용이 되면서 여자는 어째서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건가? 다행스럽게도 에마에게는 난처한 일 따윈 과거, 현재를 통틀어 한번도 없었다. 가령 그 남자… 에마는 갑자기 또 아까 그 남자를 생각한다. 그 남자라면 과거로 운운되지도 않을 것이다. 자조하듯 입을 삐죽거리며 그 남자 생각은 이제 그만두라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리곤 주문한 해물 샐러드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느긋하게 식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긴장감을 없애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에마는 아침의 면접시험보다 앞으로 있을 면담 쪽이 훨씬 더 두려웠다. 하여간 카밀라는 문제야. 그애 때문에 속상한 일이 물론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어쨌든 괘씸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를 망가뜨렸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애당초 남의 차를 끌어내다니, 정신이 어떻게 됐던 게 아닌지 몰라. 낯선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당혹해했을 동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젊은이들의 도덕성을 까다롭게 문제삼는 터너 부인, 얼마 안 있으면 데이비드도 똑같은 소리를 입에 올리게 될 것이다. 유머가 없으니 영락없이 융통성없는 목석 같은 사람이 될 게 뻔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카밀라는 사실을 전부 내게 말해 준 것일까? 카밀라는 데이비드와 약혼하기 전에는 남자친구가 그야말로 우글우글할 정도로 많았다.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교태부리는 것이 능숙해서 귀여운 금발의 외모와는 딴판으로 아주 섹시한 데가 있다. 드레이크 하우드가 관심있어하는 눈치를 보였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과음한 카밀라를 빈 방 침대에 눕힌 건 취기를 깨우려고 한 것뿐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우드에게선 정상참작의 여지는 전혀 없을 성싶었다. 변호사의 편지는 냉혹한 것이었다. 커피를 다 마신 다음 계산을 마치고 일어섰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을 3 분 남기고 있었다. 에마를 태운 택시는 오피스 빌딩 앞에서 멈췄다. 사람의 눈을 현란케 하는 현대적인 로비, <보그> 잡지의 모델처럼 세련돼 보이는 접수구의 안내양은 에마가 다가가는 것을 아무 표정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이크 하우드의 이름을 대자 안내양은 약간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에마 같은 평범한 여자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었다는 표정이었다. 최근 그의 이름이 부쩍 사교란에 오르내렸다. 그는 으레 자기 잡지의 모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고 한다. 드레이크가 선정적인 잡지 <마초>를 손에 넣은 것은 다각적 기업의 일환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경쟁 잡지의 도전을 선뜻 받아들여 감소일로의 판매부수를 늘려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은 의외였다.


그는 자신의 잡지에 모델 특집기사도 내게 하는 모양이었다. 에마는 여자들이 자기의 미모에 의거해 생계를 이어가는 걸 그다지 나쁘다고 생각진 않았지만, 그런 여자를 사진에 싣거나 실제로 이용함으로써 돈을 버는 남자들에게는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선정적인 잡지에 나오는 여자들은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피오나 경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에마로서는 그것이 끔찍한 일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작년 여름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낼 때의 일이다. 카밀라는 에마가 가슴을 드러낸 수영복을 입으려 하지 않자 크게 화를 냈었다. "다들 입는데 뭐…"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도 따라 해야겠다는 건 에마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우선 에마의 흰 살갗이 금세 타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장님께서 만나시겠답니다. 맨 끝 엘리베이터로 올라가 주세요." 안내양은 어딘지 귀찮아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마는 자기가 26 살이며 누구나가 선망하는 일자리를 막 손에 넣고 오는 길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버튼을 눌렀다. 위의 로비에는 안내양 못지않은 미모의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가볍게 노크하고 나서 그녀는 방문을 열고 에마를 들여보냈다. 넓직한 그 방에선 런던의 고층건물들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거대한 장미나무 책상이 놓여 있고 바닥엔 고동색과 황색 카펫이 전면에 깔려 있었다. "코트 양…" 에마가 완전히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는 틈을 타서 상대편에서 선수를 쳐왔다. "일을

맡게

같더군요.

프로가

시작되어

텔레비전에서

뵙게

되길

고대하겠습니다." 그가 바로 드레이크 하우드라는 걸 에마는 금방 알아차렸다. 다만 그가 얼마 전 면접 때 복도에서 마주친 사내와 동일인물임을 납득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때 그 남자가 보냈던 노골적인 시선을 떠올리고는 분노와 긴장으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 남자는 그때 벌써 자신이 누군지 분명 알고 있었으리라. 바짝 긴장이 되어 에마는 이리저리 생각을 굴린다. 한데 어떻게 그는 면접이 있다는 걸 알았을까? 그가 나타났을 때 면접관이 은근히 나타내던 경의를 떠올리며 에마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아셨죠>라든가 <묘한 인연이군요> 하는 따위의 말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천만의 말씀. 카밀라의 친구인 피오나가 전화를 했음이 틀림없다.


정말 남자다운 남자라 할 수 있을 만큼 눈앞에 있는 남자는 매 력적이었다. 비록 자리에 앉아 있지만 키가 크고 늠름한 체격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고급스런 신사복은 고급 양복점에서 맞춘 것이리라. 머리는 짙고 숱이 많아 목덜미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피부는 햇볕에 그을은 올리브색이었고, 거만한 남성미를 느끼게 하고 있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에 위압되어 버릴 것만 같다. 일거일동이 자신에 넘쳐 있는 이 남자는 여자를 결코 남자와 동등하게 생각진 않으리라고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래 감상이 어떻소?" 에마가 관찰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가 짓궂게 물었다. '이것저것 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매스컴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리는 분들을 실제로 뵙게 된다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군요." "정말이오?" 그는 양미간을 좁혔다. "코트 양이 유명세에 굴복할 리가 없을 텐데… 아니, 그런 건 당신한텐 안 어울려." 에마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다. 그도 그렇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오늘의 용건을 떠올리고는 꾹 참았다. "하루에 두 번이나 만나다니 정말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군." 에마를 놀려대는 것이 그로서는 무척 재미있는 모양이다. 재미뿐만 아니라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이란 측면에서도 몹시 만족스럽다는 듯한 투였다. "때론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죠."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에마는 자신을 타이른다. 눈앞의 남자와 맞서려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곤란할 것이다. "편지를 드렸으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동생 때문에 찾아뵈었습니다. 사장님의 차로 경미한 사고를 일으킨 것 같더군요." 에마는 되도록이면 빨리 화제를 자신으로부터 카밀라의 일로 바꾸고 싶었다. 한순간 드레이크의 눈썹이 찌푸려지더니 눈이 험상궂게 빛났다. "경미한 사고라? 도난사고에다 몇 천 파운드의 수리비가 드는 그 사건을 <경미한 사고>라고 말하는 겁니까? 동생은 어째서 자기가 직접 오지 않은 거요?" 어쩌면 이것은 카밀라에게 접근하기 위한 책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에마의 뇌리를 스쳤다. 일전에 카밀라가 암시한 그런 관계로 끌어들이려는 책략. 그는 자기가 요구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음을 흐뭇한 기분으로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약혼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제가 오게 됐습니다."


카밀라가 약혼했다는 사실 앞에 그가 낙담했는지 어떤지는 드레이크의 표정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고 비로소 난 상황을 알게 됐지요. 차가 사고를 당했다는 얘길 들으면 누구라도 놀랄 게 아니겠소?" "카밀라는 사장님이 주최한 파티에 갔다가 좀 과음을 했던 거예요." 에마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도저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 보니 어딘지도 모르는 곳의 낯선 침대에 누워 있는 걸 알고 당황해서…" "허, 어째서죠? 그 침대에 다른 누가 있기라도 했나요?" "제가 알기로는 혼자였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 차를 훔쳤다는 말이오?" 훔쳤다는 따위의 험악한 말은 사용하지 말아 줬으면 싶었지만 그녀는 잠자코 못 들은 체했다. "이른 아침이라 택시를 부르려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아니, 그보단 앞뒤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던 겁니다." "침착한 언니완 닮지 않았다는 얘기로군요. 당황한 까닭은 물론 약혼자 때문이겠군. 즉 내 집에서 잤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다는 얘기겠지. 두 사람 사이는 대체 어떤 사이요? 어떻게 결혼할 마음이 생겼을까?" "사랑하기 때문이죠." 하우드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글쎄, 과연 그럴까 … ? 여하튼 그에게 진상을 말할 정도로 그 사랑이 깊진 않았던 게로구만."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보다 변상건 말인데요, 수리대금을 분할지불할 수 없을까 하고 동생은 걱정하고 있어요. 한꺼번에 지불한다는 건 정말 도저히 힘들어요. 그런 큰 돈이 동생에겐 없어요." "하지만 약혼자한텐 있지 않소. 그 정도 능력도 없다면 아마 결혼하겠다고 하지도 않았겠지만." 상대방의 빈정대는 듯한 말투에 에마는 언성을 높였다. "말씀은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결혼도 하기 전에 그런 돈을 변통해 달라고 부탁할 수야 없지 않겠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분할지불이 가능하다면 물론 이자도 계산해 드릴 테니까요." "걱정하는 게 아니오, 코트 양. 왜냐하면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으니까."


드레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큰 키와 당당한 체격에 비해서는 무척 가벼운 동작이었다. "동생이 현금으로 지불하지 못할 형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 생각한 변상방법이 있긴 한데…" "고소하지 않는 대신 카밀라에게 몸으로 때우길 요구할 작정이라면 그건 당치도 않은 생각이에요." "당신이야말로 잘못 생각했소. 내가 생각한 변상방법이 동생과의 잠자리를 요구하는 것 따위가 아니오. 당신이 우리 잡지에 나와 주었으면 하오." 순간 에마는 까무러칠 뻔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하우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상대방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자 이번엔 몸이 확 달아올랐다. "제가요? 하지만 전 모델도 아니고 그런…" 착란된 사고력을 되찾으려는 듯 에마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돈 때문에 벗다니 말도 안 된다 이거요? 하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잡지에 낼 만한 가치가 생기는 게지. 판매부수를 늘릴 좋은 방안이 없나 하고 머리를 짜고 있던 참인데 아주 안성맞춤으로 당신이 떠오른 셈이오." 드레이크는 값을 매기듯 에마의 주위를 걷기 시작했다. 옷을 끌러내리고야 말 것 같은 그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운 시선에 에마는 상대의 얼굴을 힘껏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타이틀이 벌써 눈에 선하군. 냉정한 뉴스 캐스터, 에마 코트. 꿈에 본 모습을 현실에… 재미있는 특집이 될 게 틀림없어." "돌았어요?" 드레이크는 일소에 부쳤다. "유감이지만 난 선견지명이 훌륭하단 말야. 물론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지." "오늘 아침 스치듯 지나쳤을 때 이미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군요." 그때 이미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솟구쳐 올라왔다. "흥분하지 말아요. 당신에 관해 내가 알아야 할 만한 것들은 모두 예의 그 편지가 도착한 지 10 분도 지나지 않아 자세히 내 귀에 들어와 있었소." "내가 그 시험에 합격하도록 손을 썼다… 그런 거군요?" "상당히 머리 회전이 빠르군. 역시 머리 좋은 여자는 달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서 좋거든. 자, 손을 썼기로서니 어떻다는 거지? 당신은 지금 일을 손에 넣지 않았소?" "그래서 날 어떻게 이용할 생각이죠?" "당신이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하도록 해주려는 것뿐이오. 변상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절하는 건 마음대로지만…"


"거절하면 카밀라를 고소할 건가요?" 드레이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몇천

파운드나

되는

손실을

입고도

가만히

있을

남자가

있을까?

에마

코트가

직업여성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반쯤은 운이 좋았기 때문일 게요. 나 역시 운이 아주 강한 편이오. 당신의 편지가 온 날 나는 어떻게 판매부수를 늘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소.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경쟁 잡지사가 판매부수로 내기를 걸어왔거든." "그건 알고 있어요. 그것과 내 누드 사진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코트 양이 아니라 <뉴스뷰> 프로그램의 새로운 캐스터 누드가 가치가 있단 말이오. 얼핏 보아 냉정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인상을 준다는 건 자신도 잘 알고 있겠지? 사실 줄곧 당신이 어떤 식으로 나올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소.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마 나와 같은 의견일 거요. 즉 도전적으로 받아들이지. 그런 냉정한 에마의 다른 면을 보여 주는 거요." "싫어요!" 저도 모르게 에마는 소리치고 있었다. 눈은 뭐가 씐 사람처럼 부릅떠졌다. "그 따위 일은 절대로 승낙하지 않겠어요!" "그럴까?" 드레이크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동생에 대한 소송준비를 해야겠군. 가능한 한 여러 매스컴을 해 뉴스를 흘려보내도록 변호사에게도 알리고." 그것이 허세가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협박을 실천에 옮길 것이다. 카밀라의 행실을 알게 된 터너 부인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신문이란 신문은 모두 침소봉대해서 기사를 쓸 게 분명했다. 에마는 이 자리에서 빨리 빠져나가 카밀라에게 교섭은 실패로 끝났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카밀라의 약혼은 어찌될 건가? 터너 부인이 아들에게 파혼하라고 다그칠 게 분명하다. 그런저런 걱정이 에마를 괴롭혔다. 침착하게, 그것도 아주 재빠르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고 에마는 내심 스스로를 타일렀다. 어떻게 빠져나갈 길이 없을까? 카밀라도 드레이크도 둘 다 정말 혐오스럽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사진을 찍을 수밖에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그렇게 호락호락 사진을 이용하게 하지는 않을 테야. 이번 새 직장을 포기하게 된 이유를 로버트에게 설명할 일을 생각하면 에마는 몸이 굳어진다. 하지만 날 이해해 줄 것이다. 그렇더라도 고향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할 수 없게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쨌다는 건가. 세상 체면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는 직업을 찾으면 될 게 아닌가. 우선 드레이크를 골탕먹이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에마 코트 본인으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누드 사진… 끔찍한 생각에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았지만 그런 눈치를 보여서는 안 된다. "자, 어떡할 거요?" "승낙하겠어요. 그전에 카밀라에 대한 모든 소송을 철회한다는 증서를 써주세요." "물론이지. 모든 여자가 에마 코트 양처럼 이해가 빠르면 얼마나 좋을까. 코트 양하고는 어떤 합의가 이루어지리라는 예감이 들었었지." 드레이크는 그녀를 놀려댈 작정인 모양이었지만 그를 상대할 생각은 없다. "언제 제가 증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증서를 손에 넣을 때까지는 상대방이 하라는 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 하우드는 에마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불쑥 말했다. "촬영이 시작되는 대로지." "믿어도 되겠죠?" 에마의 날카로운 눈은 드레이크의 광대뼈 언저리가 희미하게 붉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약속은 지켜, 협정서를 작성하기로 할까?"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드레이크의 사무실을 나왔다. 내일 아침, 쪽지에 적힌 주소로 스튜디오를 찾아가야 한다. 카밀라에 대한 소송을 단념한다는 취지를 기술한 각서는 그곳에서 받기로 되어 있다. 호텔로 돌아와 하룻밤 더 묵을 절차를 밟고 나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카밀라가 얘기할 게 있는 모양이다." 일 때문에 시간이 걸리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카밀라를 바꿔 주었다. 카밀라는 수화기를 들기가 무섭게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 만났어?" "응, 소송하지 않기로 해주겠대." 카밀라를 위해 그녀가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대가에 대해 얘기해 본댔자 소용없는 노릇이다. 별로 순교자를 자처할 생각도 없고 희생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 길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뿐. 게다가 카밀라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정은 에마의 오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로버트에게는 전화하지 않기로 했다. 면접에 관한 자초지종은 집에 돌아가서 얘기하면 된다. 다행스럽게도 텔레비전 방송국과의 계약서엔 아직 도장을 찍지 않았다. 어째서 그만두는지 사정을 알게 되면 방송국으로서는 차라리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드레이크의 선정적인 잡지에 등장한 것을 알고서 그녀를 써줄 방송국은 있을 턱이 없다.


씁쓸한 기분에 왈칵 설움이 복받치는 것을 가까스로 눌러 참는다. 어깼든 드레이크의 의도를 무산시켜 버렸다는 만족감만은 맛볼 수 있었다. 그런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좀체로 없다는 걸 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냉혈한이다. 자기의 목적만 냉철하게 계산하고, 에마의 의사 따위는 염두에도 없었다. 에마의 경력에 흠이 갈지도 모른다는 것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짐짓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야유가 가득 찬 그 가면 뒤에는 여자를 멸시하는 얼굴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내일의 괴로운 일을 생각하자 몸 속까지 떨려옴을 느꼈다. 그날 밤 목욕을 마친 후, 에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매를 자세히 살펴봤다. 호리호리하게 균형이 잡힌, 정말 아름다운 몸매였다. 이 나체를 카메라맨 앞에 드러내야 하다니,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다. 잠도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만 두려운 상상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느끼며

에마는

뜬눈으로 캄캄한 어둠과

대적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닥칠

일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얼마나 모욕적인 일인가?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3 마침내 아침이 되었다. 눈꺼풀이 천근이나 되는 듯했고 기력이 없어 아침을 먹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샤워를 끝내고 빠른 동작으로 수수한 속옷을 입었다. 축축한 천에 손이 닿는 순간 전율이 흐른다. 견딜 수 없다. 나체를 남 앞에 드러내 놓다니. 에마는 화장실에 가서 심하게 토했다. 이 자리에서 사라질 수 있다면… 모든 것으로부터 모습을 감출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습성이 되다시피 오랫동안 카밀라를 감싸주는 역할을 해온 자신. 지금에 와서 도망칠 수는 없다. 단지 다행인 것은 묘한 허탈감 덕분으로 멍하니 있을 수 있다는 것. 드레이크로부터 건네받은 주소를 운전사에게 말하자 택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적지에 당도했다. 스튜디오는 우아한 테라스 하우스로 지어져 있어, 이런 종류의 장사가 얼마나 벌이가 잘 되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씁쓸한 기분으로 요금을 건네주곤 차에서 내렸다. 벨을 누르고 나서 문이 열릴 때까지 한참이 걸렸다. 에마와 같은 또래인 듯한 아가씨가 초라한 진 바지에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났다. "들어오세요, 하우드 씨로부터 연락받았어요." 아가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긴장한 것 같군요. 하우드 씨가 아마 그럴 거라고 미리 말씀은 했지만… 이쪽이에요." 그녀의 뒤를 따라 좁은 복도를 걸으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에마는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여자고 더구나 자신과 같은 또래였으므로 안심은 했지만, 드레이크 하우드와 이러쿵저러쿵 자기 얘길 했으려니 생각하자 속이 메스꺼웠다.


"이리로 들어오세요." 그곳은

호화롭게 꾸며진 스튜디오였다.

커다란

침대가

스튜디오를

온통

차지하는

듯했는데, 그 위로 스포트 라이트가 비춰지고 있다. 크림색의 반들반들한 공단 시트가 침대 위에 깔려 있다. "드레이크의 착상이에요. 난 팻 데블린이에요." 상대 여자가 자기 소개를 했다. "원래 이런 일은 하지 않아요. 드레이크가 억지로 떠맡겨서 부득이 할 뿐이죠. 이것도 그의 착상이에요." 불쑥 침대를 가리키고 나서 눈살을 찌푸린다. "저 시트는 당신 머리색과 좋은 대조가 될 거라나요. 커피 들겠어요?" 얼이 빠져 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에마는 고개만 끄덕였다. 좌우간 현실을 직시해야지… 이런 일이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드레이크가 맡겨둔 게 있어요. 촬영이 끝나면주라고. 저기 있어요." 에마는 두툼한 봉투에 눈길을 던졌다. 드레이크는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하기야 그것마저 의심하지는 않았었지만. "당신 괜찮아요?" 팻이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듯 물었다. "네, 처음이라서 약간 흥분이 될 뿐이에요." "게다가 망설여지기도 하겠죠. 뭣하면 다시 생각해서 그만둘 수도 있어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떨고만 있으면 곤란해요, 사진에 그렇게 나오니까요. 드레이크가 당신에게 얼마나 지불하는진 몰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닐 것 같은데, 그렇잖아요?" "아녜요, 꼭 해야 해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도저히 그 여자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했다간 상대방의 충고에 의지가 꺾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류가 저기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에마의 자존심은 대가 없이 그것을 잡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행여 이제 곧 찍을 사진이 이 세상에 드러날 경우에 그것은 뉴스 캐스터 에마 코트가 아니라 일자리에서 떨려난 에마 코트의 사진이 될 것이다. 소송을 취소할 대가를 드레이크 하우드는 요구했다. 에마는 거기에 동의는 했지만 자기 이외에 그 누구도 거기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 시작할까요?"


팻 데블린은 이런 종류의 사진이 전문은 아니었지만 약 2 시간에 걸쳐 작업하는 동안 에마는 그녀가 대단한 프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정열적인 작업과정에 에마는 녹초가 되다시피했던 것이다. "머리를 내려 보세요." 에마는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는데 처음 몇 장면을 시험적으로 찍어 보더니 팻이 말했다. "계속해도 되겠어요?" 옷을 벗으라고 지시할 때도 팻은 일일이 확인하듯이 말했다. "정말 괜찮죠?" "네." "좋아요, 그럼 계속합시다." 상상했던 것처럼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최악의 사태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잡지가 잘 나가기 시작하고 있으므로 되도록 에마의 사진을 품위있는 작품으로 만들라는 엄격한 지시를 받았노라 팻이 말했다. "할 수 없어요. 나도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니 그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 당신 머린 드레이크의 말마따나 무척 아름답군요." 팻은 시트 위에서 에마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면서 덧붙였다. "차라리 눈을 감는 편이 낫겠어요. 눈에 기분이 나타나 있는걸요. 고문을 견디고 있는 듯한 표정은 못 써요. 좀더 밝은 표정이라야죠. 뭔가 즐거운 일을 생각해 보세요."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란 언젠가 드레이크도 이 포즈를 사진으로 보게 된다는 것뿐이다. 에마가 너무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팻은 결국 촬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마는 속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조소하고 있었다. 팻이 갖다준 커피는 고마왔다. "괜찮아요, 거의 다 끝났어요. 내가 처음 찍은 누드 사진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였어요. 좀 지나면 당신도 익숙해질 거예요…" 드디어 크림색 공단 속옷을 벗으라는 말에 에마는 오싹해져서 다시 한번 진저리를 쳤다. 촬영용의 공단 속옷은 선정적이어서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런 옷이었다. 연인에게 보이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자신의 몸에 걸쳐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흘렀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뜨거운 목욕물로 마음껏 몸을 씻어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의 이런 경험을 머리에서 깨끗이 지워 없앤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당신의 소중한 것,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세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팻이 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


"나도 촬영도구를 정리하는 대로 돌아갈 거예요. 이런 일을 하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네요. 이 일이 괴로왔을 텐데, 용케 무사히 끝냈군요. 어째서죠?" 에마가 말없이 도리질을 하자 팻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로군요. 아파트에 돌아가서 현상을 시작할까 해요. 드레이크가 독촉하기 전에.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그 사람의 주문은 가끔 있었지만 대개 공업 사진이 주거든요. 어쨌든 패션 잡지 일이나 건축현장에 관한 일만 하다가 모처럼 이런 일을 하게 돼서 저로선 즐거웠어요." "처음부터 모두 듣고 싶군." 집에 돌아오자 에마는 제일 먼저 로버트에게 전화를 했다. 두 사람은 지금 가까운 바에서 음료수를 앞에 놓고 주저앉아 있다. "전 그 일을 맡을 수 없게 됐어요."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에마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로버트는 에마가 돈 게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운 듯 멍한 표정이었다. "에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그들은 당신한테 마음이 있단 말이야. 그리고 그런 일을 맡았으면 하고 바랐던 거잖아." "꿈이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변했어요." 로버트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이유라도 들려 줘야 할 게 아냐. 설마 이유가 남자 때문이라고 말하진 않겠지? 난 에마가 좀 지각있는 사람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대가 어긋난 것 같군. 에마는 일로 성공하고 싶어하는 줄 믿고 있었다구. 그걸로가 아니라 말야." "그것이라면 사랑을 말씀하는 건가요? 여자라면 모두 사랑을 원하고 있죠." 로버트가 전혀 엉뚱한 결론으로 비약하고 있지만 그냥 버려 두기로 했다. 다른 납득할 만한 이유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는 진상을 털어놓고 로버트에게 매달려 울고 싶은 심정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자제심이 맞서 싸우고 있다. 만약 숨김없이 고백한다면 로버트와의 사이에 그어놓은 선을 넘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에마로서도 로버트가 자기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대로 밀고 나간다면 다신 헤어날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이다. 하지만 후회할 게 뻔하다. 로버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으며, 에마는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는 애정을 공유할 마음은 없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크다는 걸 진정으로 알고 있기나 해?" 엄숙하게 내뱉고 로버트는 잔을 비웠다. "그래, 이제부터 어떻게 할 셈이야? 우리하고 함께 다시 일할 건가?"


에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애인이 집에 들어앉아 있기를 원한다는 뜻이야?" 그는 화가 바짝 난 듯이 다그치듯 말했다. "정말 그런 게로군." "내일 사표를 내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길 원한다면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마의 가슴은 갈갈이 찢어지는 듯했다. 달리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시치미를 떼고 계약서에 사인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상대측은 거기에 제약을 받아 누드가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다고 해도 그녀를 해고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쪽의 난처한 처지를 생각해 볼때 도저히 그런 뻔뻔스러운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로버트가 집까지 바래다 주었지만, 줄곧 입을 다문 채였다. 유급휴가가 있었으므로 퇴직통고 기간까지 일할 필요가 없게 된 에마는 두번 다시 직장에는 가지 않았다. 퇴직한 것을 알고서도 부친이나 카밀라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고마와라, 결혼식 준비에 단단히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는걸." 카밀라다운 제멋대로의 반응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부드러운 어조로 에마가 집에 있어 주니까 기쁘다고 하셨다. "내일이 결혼식이라니 믿어지지 않아." 카밀라는 몇 번이나 이 말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은 카밀라 방에서 카리브 해 일주의 신혼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 용케 드레이크 하우드에게 소송을 취소시켰어." 에마가 런던에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그 사건에 대해 동생이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언니가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니, 말도 안 돼. 데이비드 쪽은 학교 친구로 굉장한 부자래." "터너 부인이 젊은 들러리를 원하기 때문이야. 데이비드네 쌍동이 자매라면 정말 귀여울 거야." "날씨는 좋을까?" 피로연은 저택의 정원에서 하기로 돼 있었다. 며칠째 좋은 날씨가 계속돼 잔디도 잘 말라 있고 기온도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그 정원이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에마도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터너 부인은 콘월드 경 내외를 초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더 한층 만족하고 있었다. 런던에서의 그 사건 이후로 드레이크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새로운 뉴스 캐스터가 발표된 후였으므로 과연 그쪽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는 며칠 동안 아주 조마조마했다. 잔뜩 긴장된 마음으로 상대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자 그 열도 식어 버렸다. 보복할 수단이 없어서 단념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번 일은 그에게 있어서는 따끔한 교훈이 됐을 거라고 은근히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사람은 더 수치스러운 일도 요구할 수 있었을 거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에마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개인적으로 욕되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단순히 장사에 이용하려 한 것뿐이다. <마초>와 라이벌 잡지와의 치열한 경쟁도 요즘 와서는 완전히 잠잠해져 버렸다. 예상했던 대로 그것은 철저히 계획됐던 것임에 틀림없다. 카밀라의 결혼식이 끝나면 직장을 찾아야 할 텐데… 아버지 친구인 대학교수가 여름방학 동안 연구조교를 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일을 한번 해볼까? 정치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에마로서는 적합한 일인지도 모른다. 연구 주제 자체도 흥미로왔다. 이대로 언제까지나 아버지의 잔심부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아버지는 천연덕스럽게 에마에게 여러 가지로 대역을 맡기고 있었다. 지금은 에마도 자처해서 하고는 있지만 조만간 견딜 수 없게 되리라. 에마의 조수로서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속기 실력은 다소 모자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텔레비전 일에는 두번 다시 복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매스컴에 나오게 된다면 당장에 예의 그 사진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폭로기사 전문인 신문이 그냥 덮어 둘 리가 없다. 누구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을 때까지 다른 적당한 직장에서 일하다가 다시 방송계에서 일할 수 있게 된다면 좋으련만…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로버트와의 우정이 깨져 버린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해명할 여지는 있었지만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사실은 로버트가 좀더 반대해 주기를 바랐었다. 진상을 꼬치꼬치 캐물어 주었으면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카밀라의 결혼식 날 아침은 축복이 가득한 쾌청한 날이었다. 더할나위없는 6 월의 맑은 아침이다. 동생은 어쩌면 이렇게도 모든 축복을 받았을까… 침대 속에서 잠이 덜 깬 에마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밀라 자신은 결코 그렇게 생각지 않으리라. 진 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에마는 아래층으로 급히 내려갔다. 카밀라는 전통적인 신부의 아침식사를 침대 속에서 먹겠다고 말해 왔던 것이다. 에마가 터너 부인을 도우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다.


에마는 한숨을 쉬며 주방문을 열고는 <장화 신은 고양이>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밖으로 내보내 주었다. 태양 주위에 희미하게 안개가 끼어 있다. 이런 날은 덥게 마련이다. 오늘처럼 6 월의 영국 시골 특유의 아름다움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날씨도 그렇게 흔치 않다. 그녀는 주위의 정적을 즐기면서 맑은 대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셨다. 도시의 떠들썩함도 좋지만 때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아침식사를 들고 이층에 올라가니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교회에서의 예식을 직접 주관하기 때문에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할 역할은 아버지의 사촌형 뻘이 되는 먼 친척이 맡기로 돼 있었다. 이 사촌형이라는 사람이 명문가 출신이라서 터너 부인은 몹시 감격한 모양이지만, 테드 아저씨의 괴이한 언행을 보고서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하는 의문이 들자 좀 우스웠다. 에마가 아는 한 그 아저씨는 언제나 투박한 고동색 트위드 슈트만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조상의 옷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의 구닥다리였다. 그러나 오늘은 남자들 복장이 모닝코트로 지정되어 있었다. 테드 아저씨에게도 알리기는 했지만 만전을 기하기 위해 에마는 옷을 부탁해 놓았다. 문제는 사이즈가 맞느냐는 것이다. 카밀라는 아직 자고 있었다. 고운 피부, 베개 위에 탐스럽게 흩어져 있는 곱슬곱슬한 금발. 저 용모만으로도 데이비드는 나름대로의 보상을 받은 셈이라고 에마는 동생의 잠든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섬세하고 가냘픈 용모를 유지하기 위해 카밀라는 무척 애를 썼다. 지금도 여전히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기미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카밀라의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데이비드는 카밀라에게 홀딱 반해서 응석을 받아 줄 것이다. 그것이 카밀라가 바라는 바겠지만, 그런 그의 장점을 인정해서 감사하고 노력해 준다면 두 사람은 행복하게 될 것이다. "언니, 속옷 좀 꺼내 주겠어?" 욕실에 가려던 카밀라가 응석이 담긴 목소리로 부탁했다. "l0 시에 미용사가 온댔어. 그러니까 지금 샤워해야 해." 새하얀 새 속옷은 본드 가의 최고급 가게에서 산 것이다. 에마가 혼수감으로 선물한 것이다. 카밀라가 부드럽고 얇은 포장지를 열었을 때, 에마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때 그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크림색의 공단 천이 피부를 감아오던 감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터너 부인을 도우러 가야겠다." 욕실 밖에서 에마는 카밀라에게 말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올게." "정말 빨리 와야 해. 테드 아저씨한텐 질렸어. 꽃 문제도 있고." 마구 지껄여대는 카밀라의 넋두리를 한쪽 귀로 듣고 다른쪽 귀로 흘리며 에마는 집을 나섰다. 터너의 저택까지는 차로 l0 분도 안 걸린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포도 위를 달리는 차는 에마와 맞은편에서 오는 우유배달차뿐이었다. "그 댁은 북새통이더군요." 우유배달부가 명랑하게 말을 걸었다. 터너 부인이 한번 무슨 일을 벌였다 하면 만사 뒤죽박이 되고 만다. 그 때문에 부인은 중년의 사촌 동생을 비서 겸 말벗으로 고용해서 집안의 책임을 전부 그 여자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 로라 패츠를 에마는 좋아했다. 그녀가 참고 견디느라 얼마나 고충을 겪고 있는지는 에마로서도 짐작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저택에서 에마를 맞이한 사람은 바로 그 로라였다. "일은 잘돼 가고 있어요?" "그럭저럭. 대형 천막도 쳤고 요리사도 제시간에 도착해서 주방일을 전담하고 있어요. 날씨도 좋고… 카밀라는 어때요?" "신부처럼 단장하고 있죠. 도와 드릴 일 없어요?" "아침식사 준비를 잘하고 있는지 베리 부인 쪽을 좀 봐 주세요. 손님에다 요리사까지 겹치니 숫자가 엄청나요." "네, 좋아요." 가정부 매리는 기분이 좀 언짢아 보였다. "이렇게 손님들이 많아서야 원. 내가 할 일없이 빈둥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가정부를 달래고 나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카밀라의 들러리를 설 소녀들은 벌써 옷을 다 갈아입고 있었다. 두 소녀를 위해 카밀라가 고른 것은 물방울 무늬의 얇은 감으로 만든 드레스였고, 자신의 신부의상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풍의 레이스와 리본이 달린 호화로운 것이었다. 특별히 도울 일도 없었으므로 에마가 돌아가려고 하는데, 터너 부인과 마주치고 말았다. 체격이 좋은 부인은 마치 엔진을 전격 가동시킨 군함처럼 보였다. "에마 양, 설마 돌아가려는 건 아니겠죠?"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군요. 로라가 정말 잘하고 있는걸요. 그래서 테드 아저씨와 아버지가 걱정돼서 가보려고…" "음, 그렇겠군. 한데 꽃집이 말이에요, 어쩐지 믿을 수가 없어서 당신한테 감독을 부탁할까 했는데?" "잘되고 있어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요. 아참, 친구분한테서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어요. 약간 놀랐지요. 아마도 대단한 남성 같았거든요…" 친구? 도대체 누굴까. 짐작되는 사람은 로버트밖에 없다. 에마는 기뻤다. 직장을 떠난 데에는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로버트가 생각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터너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허가를 받은 행동은 로버트답지 않았지만 자기의 괴로운 상황을 간파해 준 게 기뻤다. 식은 l 시에 시작된다. l2 시가 되도록 에마는 정작 자기자신의 준비를 하지 못해 무척 다급했다. 노란색 공단 슈트를 입을 작정으로 이층 침실에 걸어 두었지만, l0 시부터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준비가 도무지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했던 대로 테드 아저씨는 여느 때의 그 양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런대로 한바탕 소란을 피운 후에 빌어온 옷을 억지로 입히자 풍채 좋은 백발의 신사가 탄생했다. 신부화장을 끝낸 미용사가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데이비드가 보내준 빨간 장미 부케를 카밀라의 방으로 갖고 가더니, 막 폭발할 듯한 모습으로 카밀라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내 머리 좀 봐. 그리고 이 화장, 정말 이게 뭐야!" "예쁘구나. 자, 데이비드가 보낸 거야." 하지만 동생은 아름다운 장미를 거들떠볼 생각도 않는다. "테드 아저씨는 어때?" "어느 모로 보나 신사야. 샴페인 한 잔 하겠니?" 동생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에마는 아래층으로 샴페인을 가지러 갔다. 이때를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둔 게 있었다. 곧잘 흥분하는 카밀라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전히 기분이 언짢은 듯했지만 의상을 갖추고 나자 카밀라도 평정을 되찾는 듯했다. 가까스로 에마는 자신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노란색 슈트는 그녀의 갈색 머리에 잘 어울렸다. 동생처럼 미용사의 손을 빌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가 자기에게 신경이나 쓸 것인가? 카밀라가 마치 공주 같은 차림으로 중앙통로를 걸어나가자 여기저기서 단성이 터져나오고 그것이 한층 엄숙한 분위기를 고조시켜 갔다. 에마는 맨 앞줄에 있었다. 원래는 모친이 앉아야 할 자리다. 미리 자리에 앉아 있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로버트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피로연에선 볼 수 있겠지. 자기도 모르게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꾸짖었다. 그렇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드레이크는 그 사진을 어떻게 할까?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흐른다.


식이 끝나고 저택으로 향하는 차에는 손님들이 가득했다. 에마는 테드 아저씨와 아버지를 태우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교회문을 나서는 순간, 바로 문 옆에 주차하고 있는 짙은 주홍색 페라리를 보게 된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말자. 드레이크일 리는 없잖아. 무엇보다 그가 카밀라의 결혼식에 무슨 볼일이 있을라구? 그냥 아는 정도에 불과하잖아. 저것은 아마 데이비드의 부자 친구의 차일 거야. 에마 일행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테드 아저씨에게 손님을 맞이하는 길목에 계시도록 당부하고서 그녀는 축하선물들이 쌓인 객실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완 달리 집안은 조용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거기에 있을 수만은 없다. 밖으로 나오자 햇살에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다. "어머 에마 양, 어디에 숨어 있었죠?" 터너 부인의 위압적인 어조에 에마는 홀로 조용히 있고 싶은 기분을 깨끗이 포기해야 했다. "친구분께서 아까부터 찾고 있었는데." 로버트가?

눈을

깜빡거리며

위를

쳐다본

에마는

새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드레이크의 매서운 시선이 자신을 뚫어지듯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마, 잘 있었어?" 저항을 허락치 않는 드레이크의 억센 팔이 그녀를 껴안았다. 감미로운 목소리였지만 강한 의지가 숨겨져 있다는 초록색 눈동자가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의 상쾌한 입김이 닿자 소름이 끼쳤다. "당신 정말 매력적이야." 주위 사람들에게도 들릴 만큼 큰 목소리였다. 개중에는 결혼식을 취재하러 온 지방 신문의 카레라맨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자 에마는 긴장으로 몸이 굳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다니! 드레이크를 떠밀치는 에마의 손바닥에 그의 심장의 고동이 전해져 왔다. "키스해…" 드레이크가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분노와 거부감, 그 두 가지 감정이 뒤얽혀 그녀는 피가 끓는 듯했다. 놓아 달라고 소리치려고 입을 막 벌리려는데 그의 입술이 덮쳐 왔다. 따뜻한 남자의 입술은 아주 능숙하게 그녀의 입술 위를 움직였다. 경쾌하면서도 기분 좋은 충격이 번진다. 자신의 반응이 믿어지지 않는다… 에마는 몸을 떨었다. 상대방에게 응한 것이 아닌데도 그가 입술을 떼자 그녀의 입술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조소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에마 양도 여간 아니군요. 어째서 얘길 안했지요?" 터너 부인은 흥분이 되는 듯 언성을 높였다. 대관절 드레이크는 터너 부인에게 무슨 얘기를 했을까? 설마 발가벗고 잡지용 사진을 찍었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지. 터너 부인의 목소리는 사뭇 감탄하는 듯했으니까 말이다. "언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카밀라의 화난 목소리가 들린다 "난…" "저 간신히 에마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우리의 약혼 발표에 관한 동의 말이죠. 그렇지, 에마?" 이런 얼토당토않은 행동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말을 부정하려는 에마의 기세를 막으려는 듯 드레이크는 주위의 카메라맨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에마의 사진을 찍어 주십쇼, 정말 아름다우니까. 나도 아름다운 스냅 사진을 하나 갖고 있지요. 그렇지?" 드레이크는 자신에게 비장의 카드가 있다는 걸 그녀에게 상기시켜 준 것이다. 카밀라는 에마와 드레이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드레이크는 에마에게 무슨 말이든 말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재빨리 카밀라를 칭찬했다. "여어 카밀라 양, 정말 멋진 신부가 되셨군요. 그리고 이분은 필경…" "데이비드예요." 카밀라는 굳은 표정으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리고는 에마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에마는 동생에게 드레이크가 이곳에 나타난 것은 그 사고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에마는 데이비드가 다소 험상궂은 눈초리로 카밀라를 쳐다보는 걸 곁눈질할 수 있었다. 애써 감추려고는 하지만 필시 데이비드는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카밀라도 그의 그런 기색을 눈치챈 모양이다. "드레이크 씨는 제가 런던에 있을 때 만나뵌 적이 있어요."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말을 했지만, 데이비드는 그녀의 말에 조금도 누그러지는 듯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당신 부인 덕택에 제가 에마를 알게 되었지요." 드레이크는 아주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에마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만약 드레이크라는 인물을 잘 몰랐다면, 지금 그의 말은 데이비드를 안심시키기 위한 사려 깊은 말로


생각했을 것이다. 에마는 그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그와 같은 인물이 아무런 목적 없이 이곳까지 올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자 데이비드, 우리 테드 아저씨께 인사드리러 가요. 아빠 대역을 하시느라 무척 힘드셨을 거예요." 카밀라는 이제 막 남편이 된 데이비드의 팔을 끌었다. 그는 마지못해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4 터너 부인은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 곁에서 맴돌다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겨우 부인에게서 해방되자 에마는 드레이크를 손님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갔다. "어쩔 셈이죠?" "뭘 말야?" 드레이크는 에마를 향해 능글맞은 웃음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진 알고 있겠죠?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에마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았다. "단순한 친구 이상인 것처럼 본다는 말이겠지? 자, 여기선 좀 곤란하니까 천천히 식사라도 하면서 얘기하는 게 어때? 조지 호텔에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한 테이블을 예약해 놨어. 이번 주말을 거기서 묵을 예정이거든." 상대방의 뻔뻔스러움에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있다가 그녀는 그만 거절할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언제 왔는지 부친과 테드 아저씨가 나란히 두 사람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아 에마, 여기 있었구나." 아버지는 예의 그 애매모호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그렇담 이 젊은 분은 터너 부인이 그토록 열심히 강조하던 바로 그분이겠군." 드레이크가 그를 향해 내밀어진 아버지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나누었을 때, 에마는 새삼스럽게 그의 남성다운 활달한 움직임에 약간 놀랐다. 그녀 아버지의 미적 외관이랄까 어떤 연약함과 대조되어 강렬하게 드러난 그의 남성적 힘이 그녀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당신이 무슨 사업을 하고 계시다는 얘긴 들었소." 아무런 거리감 없는 아버지의 상냥한 말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들 세 사람은 한동안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드레이크 역시 옥스퍼드 출신이었다. 부친과는 다른 학부였지만. 테드 아저씨가 주식으로 손해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에마는 살그머니 그 자리를 떴다. 하지만 부친의 눈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호기심 어린 표정이 떠올라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이다. 만약 정말로 드레이크가 친한 친구라면 지금까지 에마가 왜 얘기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신 모양이다. 피로연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맛있는 게 많았지만 음식에 손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거듭 샴페인을 홀짝이며 곤두선 신경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 했지만 드레이크의 행동을 생각할 때마다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째서 이런 곳까지 와서 사람을 못살게 구는 걸까? 여행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올라간 카밀라를 도우러 갔을 때 그녀는 무서운 얼굴로 언니에게 대들었다. "도대체 그 사람은 뭣하러 왔대? 어떻게 언니가 그를 초대할 수 있냐구? 언니도 알다시피…" "내가 아니야. 터너 부인이 한 짓이야. 그 사람이 터너 부인을 건드려 나와 친한 사이라고 믿게 한 거라구.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짐작도 안 가지만." 에마는 속으로 그것이 텔레비전 일을 그만둔 것과 관계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드레이크가 어떤 행동이든 취해 올 거라는 불안감은 죽 갖고 있었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이 몇 주일이 지났으므로 이제 막 상대가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던 참이었다. "데이비드는 내가 그 사람을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 자꾸 의심하고 있어." "처음부터 사실 그대로 데이비드에게 털어놓았더라면 차라리 수고를 덜었을지도 모르잖니. 내가 너라면…" "미안하지만 언니는 내가 아니잖아. 어쩐지 언니가 그 사람의 매력 앞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아. 하긴 드레이크 하우드 같은 인물은 흔하지 않지. 하지만 경고해 두겠는데, 드레이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를 갈아치우는 사람이라구. 그는 언니 같은 타입은 좋아하지 않아. 육감적인 여자를 좋아하는 타입인데, 그것도 모델이라든가 여배우라든가…" 그렇게 혼자 중얼대며 거울을 보고 있는 동안 카밀라는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아참, 그렇지. 어째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 사람 언니를 핑계로 날 만나러 온 게 틀림없어. 그래 맞아, 그게 확실해." "하필 네 결혼식장에 말이니?" 에마는 갑자기 동생에게서 까닭 모를 분노를 느꼈다. "넌 어쩌면 그렇게도…" "어머 질투하고 있는 거야? 그래요, 언니는 늘 내게 질투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 일을 자꾸 데이비드에게 말하라고 한 거야. 우리 사이가 틀어지도록 말야. 드레이크는


내 언니니까 흥미를 가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언니를 거들떠보지도 않을걸. 그 사람이 바라고 있는 건 바로 나야. 그걸 말하러 온 거야. 그 사람은 결혼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결혼한 지금은…" "그래서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그 사람하고 바람을 피울 수도 있다는 얘기니? 넌 얼굴은 미인일지 몰라도 머리는 텅 비었구나.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니? 널 질투하고 있다고? 오히려 가엾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상 더 심한 말이 터져나올까 봐 에마는 방을 뛰쳐나와 버렸다. 급히 복도를 지나던 그녀는 계단에서 옷을 갈아입던 데이비드와 마주쳤다. "에마, 드레이크 하우드란 사람 카밀라하고 얼마나 친했었지?" 동생을 감싸주는 일에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언제나 카밀라에게만 유리하게 처신해 오지 않았던가. "직점 물어보지 그래요?" 그녀의 대답은 어느덧 사나운 말투가 되어 있었다. "에마, 바로 여기 있었군. 한참 동안 찾아다녔어." 언제 나타났는지 드레이크가 가까이 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차가운 초록색 눈이 에마의 상기된 볼과 화난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불과 30 분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이에요." 데이비드가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드레이크는 넉살좋게 에마의 허리를 감으며 바싹 끌어안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뜻밖의 행동에 그녀는 자세를 허물어뜨리며 상대방에게 쓰러지듯 기댔다. "그 30 분이 너무 지루하더라고." 한쪽 손이 에마의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숨결이 이마에 닿는다. 데이비드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보기 민망한 자리를 피했다. 허를 찔렸기 때문에 이렇듯 심약한 심정이 되는 걸까? 어쨌든 이렇게 안겨 있으니 기분은 좋다. 남성의 품안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 이렇게 상큼할 줄이야…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드레이크가 다정하게 보호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고 생각하다니, 이 사람은 단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걱정하며 염려하는 듯한 연기를 말이다. "놓아 주세요." 주먹으로 상대방의 가슴을 밀어붙이며 힘껏 몸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드레이크는 웃고

있었다.

비록

소리는

웃음이었지만

잔물결처럼

그의

가슴

한복판으로부터

솟아나오고 있는 웃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을 치켜떠 보니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웃음을 참으려는 듯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뻔뻔스런 웃음을 흘리지 마세요. 도대체 뭐가 우스운 거죠?" "왜 그 일을 포기했지?" 더 이상 드레이크는 웃고 있지 않았다. 냉정하고 주의깊게 에마를 응시하고 있다. 일순 당황한 에마는 입술을 꽉 다문다. 지금은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대답 안할 셈이군. 그렇다면…"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릴 일말의 틈도 주지 않고 드레이크의 입술은 어느 새 그녀의 입술에 포개져 있었다. 고통스럽다고도 잔인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드레이크의 부드러운 입맞춤은 경험이 풍부한 탓인지 이내 에마의 관능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혼란상태에 빠져 버렸다. 마치 십대 소녀와 같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 이런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 답을 구하기엔 자신의 경험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에마의 감각을 아예 마비시켜 버릴 작정인 듯했다. 온갖 테크닉을 구사하며 그녀가 이런 경험에 익숙지 않음을 알고는 더욱 거침없이 공격해 온다. 겨냥은 확실했다. 필사적으로 다문 에마의 입가를 따라 뜨거운 드레이크의 혀끝이 움직인다. 이윽고 틈을 만들어 침입하려고 한다. 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 에마는 필사적으로 방어하려 했지만 드레이크에게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리자 에로틱한 충격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항복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열정을 간신히 참아오던 참이었다. 저항하던 주먹은 어느 새 드레이크의 가슴에 얌전히 얹혀져 있었다. 드레이크가 입술을 놓아 주지 않으므로 에마의 고개는 위를 향한 채 곧 부러질 것만 같았다. 간신히 얼굴을 돌려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알았어요. 대답하면 되잖아요." 짙은 초록색 눈동자에 압도된 듯 에마는 눈을 감았다. 이글거리는 듯한 따가운 눈길이 그녀의 살갗을 태워 버릴 것 같았다. 냉혹한 지배욕으로 에마를 굴복시켰으니 이제 만족했는가 싶었는데 그의 진지한 시선은 그와는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너무 늦었어…" 겹쳐진 입술이 움직이며 다시금 뜨겁고 깊은 여운을 그녀의 입술에 전하기 시작한다.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이 에마의 머리를 어루만지자, 그에 따라 에마는 활처럼 몸을 휘었다. 가슴은 드레이크의 육중한 가슴에 눌리고 입술은 그의 의도대로 열렸다. 드레이크의 어깨에 꽉 매달리지 않았다면 몸이 휜 채 뒤로 넘어졌을 것이다. 아무런 저항없이 상대에게 순종하는 입술. 억제하려 했지만 그 자제심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내부로부터 마구 용솟음치는 욕망을 그녀는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그 여운을 즐기며 드레이크의 입술은 에마의 입술을 떠났다. 떨리는 에마의 입술을 드레이크의 손가락이 애무한다. 비취처럼 짙은 색을 담은 초록색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그녀를 태워 버릴 것만 같다. "자, 텔레비전 일을 왜 포기했는지 말해 봐."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요?" 드레이크로부터 몸을 빼자 새로운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올랐다. 이 까닭 모를 분노는 어쩌면 자기자신에 대한 분노인지도 모른다. 드레이크가 유도한 반응이 역겨워서일까? 자기를 유혹해서 성공한 드레이크. 그에게 순순히 응해 버린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에마는 달리기를 한 뒤끝처럼 씩씩거렸다. 온몸이 쿡쿡 쑤시며 화끈거린다. 드레이크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그런 허세를 부리며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몸안을 흐르는 전율이 그와는 다른 사실을 고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에마는 그를 무시하듯 거칠게 내뱉었다. "당신의 의도가 뭔지 빤히 알면서 그 일을 하겠다고 계약할 순 없었어요!" "즉 방송국과 계약하지 않는 한 내가 그 사진을 이용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군?" 에마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드레이크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당신은 그 사진을 어떤 식으로라도 이용해서 날 모욕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다만 그럴 경우, 모욕을 당하는 건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에마 코트지 뉴스 캐스터로서의 내가 아니라는 거죠. 판매작전의 도구로 이용되다니, 어림도 없어요." "그래서 지금 하는 일에는 폐가 되지 않는다는 건가?" 에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왠지 에마는 드레이크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뭐라고 대답할 것인지를 시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엔 사표을 냈어요." "실업중이라는 얘기로군…" "그래요, 하지만 내 사진을 게재한 잡지가 나온다면 여기저기서 끄는 사람이 많겠지요. 그게 언제쯤일까요?" "그야 당신에게 달렸지. 지금은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 나중에 충분히 검토해 보겠어. 그건 그렇고 당신이 선뜻 단념한 데는 정말 놀랐어. 보통 여자라면 십중팔구는 일단 그 계약서에 사인을 해놓고 일이 표면화되어 말썽이 나면 그 뒷처리를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게 마련인데." "내가 l0 명 중에 1 명이라니 유감이군요."


발소리에 뒤돌아보니 카밀라가 이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에마는 무시한 채 요염하게 드레이크에게 웃음을 던지고 있다. "이렇게 허를 찌르다니, 정말 나쁜 분이에요!" 카밀라는 드레이크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며 아양을 떨었다. "데이비드는 질투로 미칠 지경인가 봐요." "허, 그래?" 드레이크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섞여 있었다. "지난번에 있었던 일을 아직 그에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경박한 태도에서 일변하여 카밀라는 화들짝 놀라 드레이크로부터 손을 뗐다. "설마 당신들, 얘기하거나 하진 않겠죠?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약속은 이미 언니하고 했소. 계약을 했거든. 그리고 난 그 계약을 깨뜨릴 생각이 없소." 드레이크는 카밀라의 어깨 너머로 에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7 시에 데리러 오겠어." 그의 어조에는 더 이상 저항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듯했다. 집에 돌아온 것은 6 시였다. 아버지와 테드 아저씨는 옛날 얘기에 정신없이 빠져 있었다. 방에 들어가면서 에마는 애써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드레이크와 식사를 함께 한다… 어떻게 나가지 않고 넘길 수는 없을까? 아까는 철부지 십대 소녀같이 행동했었다. 자제심이라든가 침착성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지 않았던가. 드레이크의 키스 한번에 그렇게 흐물흐물 늘어져 버리다니! 키스 정도로 그렇게 정신없이 허물어지진 않을 텐데, 아마 카밀라와의 말다툼이 작용한 탓일 게다. 아니면 결혼식 준비로 피곤해 있었다든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드레이크의 성적 매력에 굴복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까지 자신이 감각적으로 마비되리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런 경험이 없었더라도 말이다. 에마는

거의

기계적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의상생활이

취미인

카밀라와는 달리 에마는 옷이 별로 많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최근에 사둔 캐롤라인 찰스의 옷을 골랐다. 검은색 타이트 스커트에 허리를 강조한 흰 재킷의 투피스로, 보기에 따라서는 화려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옷이었다. 검정 스타킹에 하이힐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다. 담백한 흑백의 대비와 정통성이 은은한 멋을 풍기고 있다. 드레이크는 7 시 정각에 나타났다. 모습이 보이기 전부터 페라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정지하는 걸 내려다보던 에마는 울컥 화가 치밀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빨간 차라니, 나서기 좋아하는 주인과 꼭 닮았군 그래." 하지만 이 두근거림은…?


드레이크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에마는 창문에서 몸을 돌려 벨이 울릴 때쯤에 맞추어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애교 있으면서도 점잖게 ― 이런 표정으로 드레이크를 맞이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에마는 현관 문을 열었다. 에마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드레이크는 느릿느릿을 입을 열었다. "멋진데, 정말 근사해." 왠지 모르게 이 말은 에마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방으로 뛰어올라가 옷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가 마치 자기를 위해 특별히 몸치장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태도에 화가 났다. 게다가 길들인 개에게 뼈다귀를 던져 주는 듯한 저 말투. 예상과는 달리 그의 운전은 신중했다. 에마가 그의 차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드레이크는 두말없이 얘기를 시작했다. "이 차엔 내 소년 시절의 꿈이 담겨 있어. 연료 면에서는 시대에 역행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말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뭐지? 이 차 때문인가? 아니면 나 때문인가?" "차는 무생물이니까요." "그렇다면 나를 말하는 거군."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갑자기 나타나서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걸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야 없지 않겠어요?" "나한테서 어떤 반응이 있으리란 걸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 그대로 묵인하고 불문에 붙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겠지?" "특별히 관심을 끌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예요." 에마는 드레이크의 어조에 나타나는 친근감을 일부러 무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나의 도덕기준이 그 일을 하는 걸 떳떳치 못하게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에요. 방송국에 폐를 끼칠 게 뻔했으니까요." "당신의 그 도덕기준이라는 것, 정말 막강한 것 같군. 우선 동생을 비호하고, 나아가 장래의 고용주까지도 지켜 주는 셈인데… 이왕이며 내게도 좀 적용시켜 주지 않겠어?" "당신한테도라구요?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한테도 보호 따위가 필요한 건가요?" "그걸 안다면 놀랄 거야. 자, 그건 식사 때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지.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군." 조지 호텔의 협소한 주차장에 능숙한 솜씨로 주차시키는 드레이크의 모습을 에마는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차를 돌아 문을 열고 그녀를 안내하는 드레이크의 일거일동은 무척 정중하면서도 세련되어 있었지만 그런 것에는 절대 속지 않겠다고 에마는 내심 다짐하고 있었다.


겉모양이 좋다고 해서 드레이크가 늑대가 아니라는 보증은 없다. 제아무리 양가죽을 뒤집어쓴들 본성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두 사람의 자리는 창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정원이 바라다보였다. 이 건물은 전에는 여관이던 것을 호텔로 증축한 것 같았다. 아름다운 정원은 강변까지 뻗어 있었는데, 해마다 여름철이면 이 호텔의 경관과 요리사의 평판을 듣고 많은 도시 손님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런데 아까 오후에 말씀하시려다 만 얘기는 뭐죠?" 요리를 시키고 나서 에마가 입을 열었다. "먹고 나서 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드레이크를 보니 또다시 화가 치민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자기라는 식이 아닌가. "그렇게 화만 내고 있으면 소화에 지장이 있을걸." 에마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드레이크. 어째서 평상시의 자기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바보스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에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요, 제가 화나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어요. 어린애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당신은 몹시도 자신만만하군요." 에마는 아무리 당신이 잘난 체해 봤자 당신 역시 나약한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자제력 문제지. 에마, 난 헛되이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진 않아. 에마와는 달리 난 싸움을 싫어한다구."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의 눈길을 대하자 오늘 오후 계단에서 있었던 그와의 입맞춤이 떠올랐다. 뜨거운 것이 혈관을 타고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에마는 앞에 놓인 접시로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자제력이 강한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드레이크를 훔쳐보면서 에마는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에마는

아직

그가 자기를 찾아온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무척

궁금했지만 그녀는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사실 커피가 나올 즈음에는 호기심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결코 먼저 묻지는 않아야지. 드레이크 스스로 입을 열게 하리라고 다짐했다. 커피 다음에는 브랜디였다. 에마는 식후의 술은 거절했다. 식장에서 샴페인과 포도주를 제법 마셨는데,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과음이라고 할 정도이다. 게다가 드레이크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머리가 맑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에마가 스스로를 자제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드레이크는 진작부터 알아차린 것 같았다. 브랜디 잔을 손바닥으로 덥히면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마, 정말 당신에게는 갈수록 감탄하겠는걸." "그런 찬사는 정말로 받고 싶어하는 여자를 위해 아껴 두시지 그래요?" "바보스런 동생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녀의 새신랑을 보고 약간 놀랐지. 그는 에마와 결혼하는 편이 훨씬 행복할 텐데…" "데이비드가 사랑하는 건 카밀라예요." 에마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에마 자신도 두 사람의 결혼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남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구나 카밀라를 욕한다면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순결한 부인이길 기대하지나 말아야 할 텐데." 그 한마디에 에마는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래? 데이비드가 그런 점에 있어 아주 까다로운 남자란 건 에마도 잘 알잖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과 달리 카밀라는 처녀가 아니지. 오! 그렇다고 내가 지금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말하고 있는 건 아니야." 드레이크는 자신의 말이 에마에게 미칠 영량을 가늠하려는 듯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은 자연히 드러나게 마련이야. 에마가 이제까지 애인이 없었다는 게 일목요연한 것과 같은 이치지." 에마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잠자코 있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래?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인가? 애인이 없었다는 게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수치스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아요." 거짓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금세 탄로날 뿐이다. "지금까지 그럴 만한 남성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에요." "어떤? 요컨대 잠자리를 같이할 만한 남성을 말하는 건가? 여태까진 그랬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지 않아?" 드레이크의 너무나도 뻔뻔스런 태도에 에마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가 암시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체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다. "대단한 자부심이군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 같은 인간하고는 침대에 갈 생각이 없다?"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에마가 한 말의 뒤를 이었다. 부정한다면 드레이크의 말을 오히려 강조하는 셈이 되어 버릴 것이다. 대신 에마는 아예 그의 말을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그녀는 침착을 가장한 채 되물었다.


"날 만나러 온 이유가 뭐죠? 사진이 나오는 날을 가르쳐 줄 작정이었나요?" "음, 그것도 그렇지만…" 그녀를 응시하는 드레이크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금부터 내가 설명을 할 테니, 군말없이 끝까지 잠자코 들어주겠어?" 에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작하지. 알다시피 그 잡지는 내가 인수한 기업에 묻어온 거야. 처음엔 부수를 늘려 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바꿨어. 내 취미에 맞는 일도 아니고…" 잠시 숨을 돌리고 그는 에마를 응시했다. "지금은 그걸 어떤 작자에게 팔려고 내놓았어. 그런데 곤란한 문제가 생겼어. 그 사람은 욕심을 내고 있으면서도 내 조건을 그대로 들어주려 하질 않아. 난 내가 원하는 값으로 팔고 싶고. 그런데 문제는 계약이 성립될 때까지 그 잡지에 매달려 일하고 있는 친구들이 그걸 눈치채면 곤란하다는 거야. 살 사람은 미국 사람인데 작년에 내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그들 부부를 만났지. 그때의 그들은 부부사이가 아니었지만." 그 말에 에마는 어떤 낌새를 알아채곤 즉각 되물었다. "혹시 당시의 그 여잔 당신의 애인?" "뭐, 그런 셈이지. 친한 친구였어. 결국 가일스는 그 여자에게 결혼을 신청했지만, 난 그럴 생각은 없었어. 그래서 비앙카는 그를 택했지." 그는 시선을 떨구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일스란 친구 질투가 심해서 말야… 나이도 비앙카보단 훨씬 위지. 그런데다 그 여잔 나와 옛날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게 역력해. 가일스와 흥정하려는 마당에 거북한 얘기가 아니겠어?" "그건 그렇겠죠. 부인을 빼앗기려는 마당에 당신에게 유리한 흥정을 할 리는 없지요. 하지만 그 일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짐작이 안 가?" 드레이크는 그녀에게 씁쓸한 미소를 보내더니 말을 계속했다. "비앙카는

예전의

우리들의

관계를

남편에게

폭로하겠다고

나를

협박하고

있어.

가일스로선 비앙카는 여신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런 사실을 안다면 큰일이지. 그래서 내쪽에서도 비앙카에 대한 약간의 예방책을 강구했다는 얘기지."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건지 에마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의혹에 찬 눈으로 드레이크를 바라보자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에마의 볼에 닿았다. "사진을 게재하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 그들이 흥정을 위해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내 약혼자 역할을 해주겠어?"


어째서 그런 일을 나한테 부탁하는 걸까? 그녀로서는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이 풀렸다. 에마는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근사하군요. 나라면 나중에 진짜로 결혼해 달라고 애원할 걱정은 없다는 뜻이군요." "대단히 날카롭군 그래. 비앙카를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데는 약혼자를 내세우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때 바로 그 생각도 했지." "난 싫어요." 일어서려는 에마의 손을 드레이크가 꽉 붙잡았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그는 조롱하듯 말했다. "하지만 좀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데이비드 말인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그런 판에 당신의 누드 사진이 잡지를 장식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에마는 궁지에 빠진 셈이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이 남자는 사람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는 가히 천재적이라고 할 만했다. "어떡할 거요?" "저한테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요?" 에마는 토라진 듯 대답했다. 다만 사진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드레이크를 믿어도 될까? 본능적으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잡지에서 손을 떼는 마당이니 그 사진을 사용할 데도 별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경영주가 이름도 모르는 영국 여자의 누드 사진에 흥미를 보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글쎄… 하긴 당신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겠군 그래." 사뭇 즐겁다는 듯 드레이크가 말했다. 그 모습에 에마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마치 도전이라도 하듯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하겠어요. 당신이 보기엔 과연 당신의 그 여자친구가 당신과 내가 약혼했다는 말을 믿을 것 같아요?" 일순간 드레이크는 한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에마는 빈정거리듯 말을 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죠? 난 당신이 좋아하는 육감적인 여자들과는 거리가 멀고, 또… 당신이 이미 지적했듯 아직 처녀란 말이에요." 드레이크의 콧방울에 경련이 이는 것을 보자 에마는 자기가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스럽게도 비앙카는 동성간의 문제에는 굉장히 둔해지거든.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외에는 보지 않는 여자니까. 그건 그렇고 에마, 나를 조롱하는 건 그만두는 게 몸에 이로울 거야." 웨이터가 계산서를 갖고 왔다. "따끔한 맛을 보기 전에 미리 조심하는 게 좋아." 5 드레이크는 한번 결정하고 나면 완고할 정도로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인간인 듯싶었다. 에마는 왼손 약지에 반짝이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날 밤 전화로 통화한 대로 그는 아침 일찍 약혼반지를 갖고 왔던 것이다. 지난 일주일 동안 한번도 드레이크와 만나지는 않았지만 전화는 매일 걸려왔다. 에마는 부친이 자기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그녀의 삶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버지로서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어서 어젯밤 에마는 그와 약혼할 작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카밀라 결혼식 전에 공표해서 그애의 입장을 어렵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거예요." 에마는 내심 이런 거짓말을 하는 자신과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만든 드레이크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부친은 이 이야기를 듣고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너의 젊은 친구도 그럴 테지만, 너 역시 약혼기간이 길어지는 걸 원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넌 다른 사람들은 짐작도 못할 뜨거운 정열을 내부에 숨겨 두고 있으니까." 전혀 예기치 못했던 부친의 말에, 드레이크의 키스에 자극받아 흥분으로 몸을 떨었던 그날의 일이 떠오르자 에마는 절로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로서는

위장약혼이

오래

계속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에마는

마음속으로는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안달하면 할수록 드레이크는 즐거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찬연히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보는 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드레이크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한 시간쯤 전에 온 드레이크는 에마의 부친에게 따님을 아내로 맞고 싶다고 정식으로 구혼을 했다. 그리곤 아버지와 잠시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에마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지나친 것 같아 화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서재에서 나온 두 사람은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진상을 안다면 저렇게 웃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내심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하지만 공평하고 냉철하게 사태를 보는 아버지다. 딸에 대한 정 때문에 일방적으로 드레이크를 탓하진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좀더 정이 깊은 부친이 되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남들은 그런 부친을 에마가 닮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냉철한 듯한 에마의 성격은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것이었다. 에마는 자신의 성격을 곰곰이 분석해 보고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틀에 자신을 끼워맞춰서 생활해 온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본래의 에마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부과한 역할을 연기해 온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오랫동안. 그런데도 드레이크는 단 두 번의 짧은 만남으로 에마의 길들여진 성격 밑에 정열적인 얼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간파해 버렸다. 그것이 에마는 두려웠다. 드레이크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에마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일이 까다롭게 돼버렸습니다. 이쪽으로 와달라고 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우리들이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돼서 …

현재로선 상대방이 피리를 불면 이쪽이 춤을 춰야 될

입장이거든요. 약 2 주일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간다고?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걸까? 사뭇 궁금한 듯한 얼굴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드레이크가 에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부드러운 말투로 얘기를 꺼냈다. "이번 주말에 뉴욕으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약혼 파티를 열 시간이 없어. 참으로 유감이라고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있던 참이야, 에마. 가일스는 미국을 떠날 수 없는 업무를 안고 있다는군. 이쪽에서 가지 않으면 안 돼. 비앙카가 친절하게도 자기들 집에 머무르도록 배려해 주었어." 세 사람은 격식대로 샴페인으로 약혼을 축하했지만, 그동안 죽 에마는 화를 내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드레이크는 제멋대로 계획한 것일까. 우선 나한테 의논했어야 하지 않는가. "이만 실례하고 제 약혼녀를 식사에 데리고 나가고 싶습니다." 드레이크가 정중하게 부친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섰다. 에마는 따라서 일어났지만 무슨 보호자나 되는 것처럼 드레이크가 손을 내밀자 몸이 떨리지 않도록 꾹 참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드레이크의 손이 닿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이 엉터리 약혼녀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이 싫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으로부터 기만이라는 독소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의 손을 세차게 뿌리치고 싶었지만 부친이 보고 있으므로 그럴 수도 없었다. 드레이크는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해 놓은 모양이다. 부친을 함께 청하지 않은 것은 가일스 일행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협의하기 위한 생각에서이리라. 그의 차에 탄 에마는 입을 다문 채 한참 동안 분노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간신히 냉정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에 간다고요?"


"비앙카가 정한 거야." 그가 되받는다. "내가 꾸며낸 거라곤 생각하지 마. 하긴, 예상 못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 여잔 권모술수에 능하니까,

자기

땅에서

싸우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거야.

우리들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별의별 수법을 다 쓸걸. 당신도 조심해야 할 거야." "우리 약혼을 알고 있어요?" 그녀는 사뭇 빈정대며 말했다. "참 용감도 하시군요, 드레이크. 고작 여자의 치맛자락에 숨어서 무슨 싸움을 한다고." "그렇지 않아, 이건 아주 맹렬한 싸움이 될 거야. 비앙카뿐이라면 다루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어머, 어떤 식으로요? 예를 들면 그 여자의 침대에 들어가겠다는 건가요? 그런 일은 무리잖아요? 남편이 지키고 있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도 덤비는군 그래." 드레이크가 정면공격을 피하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연기를

잘하더군.

지금도

질투하는

듯한

기색이

자연스럽게 나오는걸. 그런 식으로만 해준다면 비앙카도 우리의 약혼을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순간 에마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질투라니! 하지만 확실히 그렇다. 비앙카와 드레이크가 사이좋게 지낸다는 상상만으로도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다. 그런 자신이 매우 싫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앙카가 만일 남편에게 당신과 애인 사이였다고 한마디라도 말하면 끝장 아녜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가일스는 굉장한 부자니까. 비앙카가 바라는 건 권력이야. 자기 뜻대로 사람을 부리고 싶은 욕망뿐이라구. 실제로는 권력욕인데도 그걸 다른 감정으로 숨기고 있는 그런 여자야. 게다가 비앙카는 날 단념하지 않고 있거든." "어지간히 자존심이 만족되시겠네요. 그래서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죠? 당신의 침실 밖에서 불침번이라도 서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주겠어?" 에마를 응시하는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그 깊이를 더해간다. "훨씬 좋은 방법이 있지. 함께 침대에 들어가면 되잖아." 에마가 몸이 굳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껄껄 웃었다. "걱정하지 마. 거기까지 희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돼요. 나 역시 거기까지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이를 악물면서도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드레이크의 웃음에 에마는 불안해졌다. 하지만 용케 눈치채이지 않고 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에마는 자신이 지켜온 도덕률이 드레이크의 손이 닿자마자 맥없이 무너져 버리고, 그가 자극하는 관능적인 기쁨에 자신을 내팽개쳐 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전율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쁨은 단순한 육체적인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강렬한 욕구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애정은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지만 이 정염은 내버려 둬도 무성하게 자라나는 잡초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에마는 식사 도중에 거의 말이 없었다. 드레이크가 마침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설마 두려운 생각이 든 건 아니겠지?" 사실 에마는 자신이 두려웠다. 그가 자신의 내부에 일으키고 있는 감정의 폭풍에 압도당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비앙카에게? 아니면 당신에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당연히 무섭죠. 이렇게 일방적인 얘길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당신과 비앙카는 그 점이 서로 잘 맞는 게 아닌가요? 지금까지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당신과 겨눌 수 있는 사람은 비앙카 정도라고 생각해요." "그럴까?" 드레이크가 웃어젖히자, 에마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결혼상대로 비앙카 같은 여자는 딱 질색이야. 그건 그렇고, 출발 이틀 전쯤 런던에 와주었으면 싶어. 호텔은 예약해 둘 테니까. 옷도 사야 되고, 머리형도 고쳤으면 해." "내 모습이랑 옷이 당신 마음에 안 든다니 참 안 됐군요. 하지만 난 이대로가 좋아요. 싫다면 다른 약혼녀를 찾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자, 화내지 말고.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한 게 아니잖아. 내 마음에 드는 걸로 말한다면야 당신이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그 아름다운 머리를 내 베개에 펼치고 있는 모습이겠지 …

에마를 생각해서 새 옷이며 머리 스타일을 말했던 거야.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여성이 자신감을 갖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를테면 갑옷과 같은 것이지." "비앙카와 맞서는 데 필요하다는 거군요." 에마는 그보다는 사실 드레이크가 말한 자신의 누드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사진 몇 장 중에 그가 말한 것과 비슷한 포즈가 있었던 것이다. 그 사진을 드레이크가 봤으리란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보지 않았으니까."


에마의 속마음을 훤히 짐작한 듯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멍하니 상대방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다. "팻이 사진을 보내 주긴 했지만 보지 않았어. 봉투도 뜯지 않은 채 그냥 금고에 넣어 버렸으니까." 그 말에 에마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자신의 그러한 감정변화를 드레이크에게 눈치채이고 싶지 않아 도리어 되받아 쏘아붙였다. "질릴 정도로 봐서 그림을 달달 외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그런 사진을 찍혔다는 자기혐오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상대방의 분노에 불을 댕긴 말임엔 틀림없었다. "엿보는 취미는 없어, 에마. 마음먹기에 따라선 에마의 나체를 보는 것 역시 나로선 아주 쉬운 일이란 걸 잘 알아? 그뿐인가? 직접 만져볼 수도 있지 …

지난 일을 가지고

끙끙거리는 짓은 이제 그만 해둬. 분명히 잡지부수를 늘리려고 생각하고 있을 땐 그 사진을 이용할까도 생각했어. 에마가 텔레비전 캐스터가 되고 4 개월쯤 지난 뒤에 낸다면 센세이션을 일으킬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

날 너무 몰아세우지 마.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날 궁지로 몰아넣고 싶은 거야?" 마음만 먹으면 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드레이크의 말이 거슬려서 에마의 대답은 더 표독해졌다. "당신은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한 도구로밖에 보지 않나요? 그렇게 당하는 사람의 감정 따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 같군요!" "다른 사람들은 내 감정을 염려해 줄까? 당신 자신이 더 잘 알 거야. 내가 나름대로는 그래도 꽤 배려를 했다는 걸 말야. 그땐 일부러 여성 카메라맨을 이용했잖아." 드레이크의 말은 지당했다. 카메라맨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서 얼마나 다행스러워했던가.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해 있었다.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돼. 이번 일이 끝나고 잡지에서 손을 떼게 되면 예의 그 사진도 태워 버릴 테니까. 그러면 잊어버릴 수 있겠지?" "물론 사진은 태워 버릴 수 있겠죠. 하지만 잊을 순 없어요." "인간에게는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있는 법이야." 그의 어조는 신랄했다. 이상하게도 드레이크는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어째서일까? 에마에게는 숨기고 있지만 그녀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비앙카를 사랑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드레이크 같은 강한 남자가 오히려 자기에게 달라붙는 여자 하나 다루지 못한다는 건 이상한


노릇이다. 아니면 비앙카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기 때문에 그는 내심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에마는 애가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런던에서의 이틀 동안은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미장원에 갔더니, 에마의 긴 머리는 그대로가 더 아름답다며 멋지게 묶는 법을 몇 가지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드레이크의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제부터 수행할 역할을 위해 필요한 경비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에마는 낭비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비앙카는 세상물정에 밝고 세련된 여성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나름대로 치장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변하는 분위기의 차이에 에마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그녀가 무엇을 사든 전혀 참견하지 않았고, 그녀도 무엇을 사는지 말하지 않았다. 이틀째 밤, 두 사람은 에마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바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드레이크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방에 갖다두겠어." "그게 뭔데요?" 드레이크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당신이 빠뜨리고 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 식사하지."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여자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드레이크와 의견을 교환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갑자기 그는 내일 아침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려면 이젠 슬슬 돌아가야겠다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l0 시도 안 된 시각이었다. 에마는 로비를 가로질러가는 드레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정말 일찍 잠을 자고 싶어선지 아니면 밤늦게 데이트가 있어서 그러는지를 생각해 봤지만 짐작할 수가 없었다. 방에 돌아와 불을 켜자 선물상자가 눈에 띄었다. 드레이크가 보낸 것임을 생각해내고는 그 상자의 라벨을 보았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가게였지만 화려한 포장으로 미루어 볼 때 고급전문점의 상품임이 분명했다. 몇 겹으로 싸인 물건의 감촉이 손에 닿는 순간 에마는 깜짝 놀랐다. 드레이크가 선물한 것은 특별주문으로 만들어진 고급 속옷이었다. 확실히 그의 애인들이나 걸칠 만한 세련된 것이다. 크림색 공단으로 된 브래지어의 화려한 레이스를 에마는 가만히 어루만졌다. 지나치게 섹시하지도 않고

제법

품위를

갖춘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가

골랐다고

생각해서인지 자꾸만 요염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되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가 군소리 못할 좋은 반환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자신이 속옷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앙카가 드레이크 말대로 정말 그런 여자라면, 에마와의 약혼이 사실인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탐색하려 들 테니까.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려고 조심은 하고 있었지만 에마는 생전 처음 하는 콩코드 여행이 내심 무척 즐거웠다. 보통 때라면 이런 호화스런 비행기 여행은 자신의 신분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드레이크의 사업상 이 비행기에 탄 것이지만 잠깐 동안의 사치인만큼 그냥 즐기기로 했다. 그런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린 듯 드레이크가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에마는 화가 나서 얼굴을 외면했다. 자신의 기분을 숨기지 못했던 것이 분했던 것이다. 무릎 위의 움켜쥔 손 위로 드레이크의 커다란 손이 포개졌다. "에마를 보고 웃는 게 아냐. 뭔가에 감동하고 있는 사람을 본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에마는 고슴도치처럼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있는데 … 그렇게 무서운 얼굴은 하지 말아 줘. 지금 우리 둘은 연애하는 중이어야 하니까." "우리가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나만 그래야 한다는 건가요?" "남자보다야 여자 쪽이 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까? 뉴욕에서의 일은 걱정 안해도 돼. 나도 착실히 내 역할을 할 테니까 에마도 잘해 주길 바래." 뉴욕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막상 목적지에 당도하니 무척 긴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드레이크에게 눈치채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심정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무 겁내지 마, 걱정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구." "가일스가 잡지사를 인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어. 종업원들의 생활을 고려하면 그렇게 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니 할 수 없지. 기업강화의 일환으로 인수한 모회사에 딸려온 것일 뿐, 나 자신은 거기에 쏟을 정력도 없고 흥미도 없어. 여성을 상품으로 내세우는 잡지는 좋아하지 않거든. 여성 자체는 좋아하지만." "그렇다는 건 나도 알아요." 비행기 안에서도 에마는 드레이크가 정말 매력적인 남성임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매력에 이끌려 몸을 맡기면 어떻게 될까? 드레이크는 어떤 여자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남자다. 침대를 함께했다고 해도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단지 일시적인 기분풀이에 불과할 뿐 더 이상의 의미는 없으리라. 그러나 자신으로서는 자존심을 던져 버리는 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닌 것이다. 포드 부부의 집은 뉴욕 주에 있었다. 웅장하면서도 호화롭기 짝이 없는 대저택이었다. 수위에게 방문을 알리자 문이 열렸다. 입구에서 현관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저택이긴 했지만 이렇게 세상과 격리되어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인이 문을 열고 공손히 드레이크에게 인사했다. "어머, 드레이크…" 흑백의 체크 무늬 타일을 깐 바닥에 하이힐 소리가 나더니 이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발에 키가 크고, 어디 한 군데 흠 잡을 데 없는 그 여자의 모습은 도저히 진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왔다. 에마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드레이크가 이번 일 때문에 쇼핑을 시키는 등 신경을 쓴 것도 당연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미용이나 몸치장에 대단히 많은 돈을 쓸 것이다. 나이는 에마보다 위인 듯했지만 정말 아름답다. 모델처럼 호리호리한 몸매에 걸쳐진 실크 드레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드레이크와 팔짱을 낀 비앙카의 몸에서 발산되는 동양적인 요염한 향기가 에마를 감싼다. 진홍색의

손톱이

드레이크의

몸을

더듬더니

이윽고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끌어당긴다. "어서 와요, 드레이크. 당신의 귀여운 약혼자 분은 우리가 키스를 해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아요." 경멸조의 <귀여운>이란 말이 귀에 들어오자 에마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고 말았다. "글쎄요, 무척 신경이 쓰이는데요." 비앙카를

차갑게

쏘아보며

그녀는

드레이크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때문에

드레이크는 비앙카를 포옹할 수가 없었다. 에마를 응시하는 드레이크의 눈에 나타난 표정은 놀라움이었을까? 한번쯤은 에마도 드레이크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가 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가. 세 사람의 모습도 필시 꼴사나운 것이리라. 느린 발걸음 소리가 등뒤에서 들리자 비앙카는 재빠르게 몸을 뺐지만 여전히 타는 듯한 시선은 에마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여보, 손님이 오셨어요." 발소리의 주인공은 50 대 후반의 남성으로, 키가 크고 머리가 희끗희끗했지만 젊었을 때는 상당히 미남이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나이 든 사람 특유의 강한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에마와 드레이크에게 번갈아 가며 웃음을 보이고 나서는 손을 내밀어 드레이크와 악수를 나누었다. "놀랐는데? 약혼자를 데리고 온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이렇게 만나고 보니 사실이었군. 굉장한 사람을 골랐어. 운이 좋은 편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드레이크의 미소가 에마의 붉어진 얼굴에 애무하듯 던져졌다. 마주잡은 손을 들어올려 드레이크는 에마의 손에 키스했다. 몸을 빼고 싶었지만 그것은 생각뿐, 그녀는 살갗에 와닿는 드레이크의 입술에 황홀해지고 만다. 그의 손이 닿으면 언제나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그의 머리를 만지고 싶고 그의 몸과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자신을 불태워 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한눈에 갓 약혼한 사이임을 알겠군 그래. 지금 약혼녀가 자네를 보듯, 비앙카가 날 뚫어지게 봐준 게 언제였더라? 이거, 늙은이가 질투나는걸." 에마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어쩌자고 그런 바보스런 행동을 했을까? 도저히 드레이크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비앙카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당신이 드레이크는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한 것은 드레이크였다. "방으로 안내해 주지 않겠어요? 좀 지쳤거든." "물론이지, 베이츠더러 안내하도록 이르겠네. 저녁식사 때까지 누워 쉬게. 앞으로 2 주일간 사업 얘기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침실은 훌륭했다. 전문 실내장식가가 손을 댄 것이 분명했다. 욕실과 화장실이 붙어 있고, 가지고 온 옷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옷장도 넓었다. 이런 것이 진짜 부자의 생활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러운 마음은 없었다. 가일스는 재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라든가 가정의 화목이 결여되어 있다. 비앙카가 냉혹한 한마디를 던졌을 때 가일스의 입이 굳어지며 눈꼬리가 올라기는 걸 에마는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의 애인이 약혼자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드레이크가 옳았다. 비앙카는 역시 아주 곤란한 여자인 것 같다. 정말로 약혼한 입장이었다면 비앙카의 악의에 찬 빈정거림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여행가방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꺼낼까말까 망설이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하녀나 아니면 다른 누가 할 일인지도 모른다. 자칫 세상물정에 어두운 비천한 신분이라고 비앙카에게 멸시당할까 봐 에마는 형편을 두고 보기로 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나중에 손수 해도 될 것이다. 언뜻 침대 뒤쪽의 문이 눈에 띄었다. 열쇠도 꽂혀 있다. 드레이크의 침실로 통하는 문일까? 돌려 보니 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열쇠는 이쪽에 있고, 게다가 드레이크는 비앙카를 상대하기에도 바쁠 테니까 날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야. 만찬에는 무엇을 입으면 좋을까? 드레이크에게 물어보려면 잠자리에 들기 전인 지금이 좋을 것이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 손잡이를 돌려 옆의 침실로 발을 들여놓았다. 에마의 방과 거의 비슷한 구조였다. 드레이크는 창가에 서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드레이크…" 에마의 목소리에 몸을 돌린 드레이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밤엔 어떤 차림이 좋을까요?"


넥타이를 풀고 단추를 열어젖힌 가슴팍으로 짙은 가슴털이 드러나 보인다. 에마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구태여 정장을 할 필요는 없겠죠?" "음." 드레이크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진다. 다섯 발짝쯤 에마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왔다. 그리곤 그녀를 품에 껴안으며 그녀의 저항엔 아랑곳없이 사나운 기세로 입술을 덮쳤다. 숨이 끊어질 듯하다. 에마는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드레이크의 한쪽 팔이 에마를 힘껏 당기자 세찬 가슴의 고동이 전해져 왔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다리는 마치 강철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욕망의 늪으로 빠져 버리고 싶다 … 갑자기 사지가 마비된 듯 에마는 저항을 단념했다. 애원과도 비슷한 소리를 지르며 드레이크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의 몸은 드레이크와 일체가 되려는 것 같았다. 에마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 단지 그의 손이 등에서 가슴으로 움직여 단단해진 가슴의 뾰족한 끝을 만지작거리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맨살에 닿은 따뜻한 손의 감촉에 그녀는 몸을 떨며 드레이크의 입술 아래에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아이 망칙해! 드레이크,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요. 당신 약혼자에게…" 비앙카의 목소리를 듣고 에마는 얼어붙은 듯 몸을 경직시켰지만 그는 꿈쩍도 않고 그저 잠깐 입술을 떼며 목쉰 소리로 비앙카에게 대꾸했다. "지금은 안 돼, 손을 뗄 수 없어." 비앙카의 뻔뻔스러움은 참으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만약 에마가 드레이크에게 그런 취급을 당했으면 풀이 죽어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녀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비앙카는 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레이크, 당신 변했군요. 언제부터 사업보다 섹스가 중요하게 됐죠?" "섹스란 말은 부적당해. 사랑이라 표현하면 모르겠지만." "사랑이라고요?" 비앙카의 표정이 변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이 에마와 드레이크를 번갈아 가며 노려본다. "설마 이 여잘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작정은 아니겠죠?" "작정이고 뭐고가 어디 있어? 난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거야. 자,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머무는 걸 재고하는 수밖에 없어. 호텔로 옮기는 건 상관없지만, 가일스가 그 이유를 알고 싶어할걸." 다시 한번 두 사람을 노려보더니 비앙카는 으름장을 놓으며 나가 버렸다.


"날 속이려 해봤자 그렇겐 안 될 거예요! 뭘 노리고 있는진 모르지만 당신은 결코 나한테 무관심할 수 없을 거예요. 이곳을 떠나기 전에 당신에게도, 귀여운 약혼자에게도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줄 테니 그리 알라구!" 6 만찬회에 참석한 에마는 실제로 자기가 좌중에 참석하고 있다기보다는 마치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행동거지를

관객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내부에 그렇듯 강렬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드레이크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내부 깊숙한 곳의 정열을 일깨워 준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느라 에마는 좌중의 분위기에 쉬 동화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늘밤의 만찬도, 또 비앙카의 행동거지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써 그녀를 즐겁게 했을지도 모른다. 비앙카는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지금 그녀는 드레이크의 마음을 끌려고 별의별 아양을 다 떨고 있다. 남편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고, 에마에 대해서는 쌀쌀맞기 짝이 없어 적개심을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일스가 아내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에마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체했다. 비앙카는 자기과시라는 올가미에 걸려 있는 모양이다. 문득 카밀라가 생각난다. 여러 가지 면에서 동생은 이 여자와 닮은 데가 많다. 장차 비앙카와 같은 자기도취에 빠진 어리석은 여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마침내 식사가 끝났다. 요리는 최고급이었지만 비앙카도 에마도 식욕이 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제각기 달랐지만 … 분위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여겼는지 거실로 옮기자고 가일스가 제안했다. "오늘밤은 장사 얘기는 없는 걸로 하지." 가일스가 드레이크를 보며 웃었다. "여행에 지친 사람을 붙잡고 페어 플레이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어머, 여보." 커피를 타면서 비앙카가 가일스에게 독을 품은 한마디를 던졌다. "드레이크가 당신보다 얼마나 젊은지 잊으셨어요?" 순간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졌지만 드레이크가 잘 받아넘겼다. "젊을지는 모르지만 가일스의 말이 맞습니다. 게다가 우린 일찍 자고 싶기도 해서…" 드레이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에마를 보았으므로 그녀는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드레이크의 욕망 어린 시선에 에마는 진짜로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진 것이다. 에마의 곤혹스런 얼굴을 보고 비앙카는 짐짓 웃음을 터뜨렸다. "저 여자를 어디서 찾아냈죠? 요즘 세상엔 보기 드문 순진한 아가씨네요!"


"비앙카의 말에 신경쓰지 마십시오." 가일스는 에마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좌우간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드레이크도 자신의 결혼상대로는 아주 훌륭한 여성을 골랐단 말입니다. 신통할 뿐이오." 가일스의 노골적인 찬사가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어 부정하고 싶었지만 아내를 보는 그의 눈에 고통의 빛이 어려 있음을 보고는 그만두기로 했다. 뭔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앙카는 남성의 주목을 받는 생활에 익숙해져서인지 여성과 교제하는 기술은 깡그리 잊어버린 듯합니다. 특히 그 여성이 당신처럼 매력적이고 여성답게 부드러운 분이면 더욱 그런 것 같군요. 드레이크는 사업가로서도 빈틈이 없지만, 결혼상대를 고르는 재주도 대단한 사람이야." 비앙카가 남편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정말 그 말씀이 맞아요, 여보. 이런 말이 있잖아요. 평범한 결혼을 원한다면 예쁘지 않은 여자를 선택하라는." 드레이크와의 결혼이 진짜였다면 그녀의 말은 에마에게 무척 가혹한 말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에마는 미인은 아니었으니까. 구태여 비앙카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과거 일 년간 드레이크가 데리고 다닌 여자들을 생각해 보면, 자신은 확실히 그런 여자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에마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위장 약혼이다. 드레이크와는 아무런 감정적인 연관도 없는데 어째서 비앙카의 신랄한 비평에 기분이 나빠진다는 말인가?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이렇게 자존심이 상해서 구원을 요청하듯 드레이크를 응시하다니… 마음의 동요로 인해 에마는 드레이크가 허리에 손을 감으며 자기 곁으로 바짝 붙어앉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드레이크의 따스한 마음은 정말 믿음직스럽다. 안심한 듯 한숨을 쉬며, 마음의 동요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그녀는 드레이크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역할과 진실의 구별이 불가능하게 돼버린 것 같다. 배우라도 되었더라면 좋았을걸. 가짜 역할을 이렇게까지 진짜처럼 연기해낼 수 있으니 말이다. "에마에겐 성형수술 따위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있지요." 드레이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만약 진짜 약혼자라면 드레이크의 이 말이 얼마나 기쁠까. 비앙카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드레이크가 말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러고

보니

비앙카는

신이

만들어낸

자연스런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인공적으로 만든 아름다움을 하고 있다. 에마는 연상인 이 여성에게 처음으로 가련함 같은 것을 느꼈다.


사랑해 주는 남편이 있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니… 그 남편이 설사 드레이크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앙카는 만족할 줄을 모르는 여자인 것이다. 비앙카는 에마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아무래도 적으로 치부해 버린 것 같다. 드레이크의 약혼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드레이크에 대한 경쟁상대로서 에마는 완전히 비앙카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이층으로 돌아왔다. 호화스럽지만 서먹서먹하기만 한 거실을 나오게 되어 에마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침실 앞에서 머뭇머뭇 망설이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드레이크는 자기 방의 방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의를 벗어서 내던지면서 드레이크는 어깨 너머로 에마를 돌아보았다. "아까는 고마왔어. 어쨌든 기가 막힌 여자야. 우리들 사이를 어떻게든 갈라놓으려는 심보지." "정말 약혼한 사이라면 지금쯤 우리는 대판 싸움을 벌이고 있겠죠?" 비앙카가 교묘하게 암시한 드레이크의 여자에 대한 기호 같은 걸 머리에 떠올리며 에마가 대꾸했다. 비앙카는 어떻게 해서든 에마가 자신감을 잃도록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드레이크가 얼마나 매력적인 남자인가를 입에 올림으로써 은근히 자기와의 관계도 암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싸움?" 거울에 비친 드레이크의 모습이 에마에게도 보인다. 고급 흰색 실크 와이셔츠가 그의 남성미를 한층 강조하고 있었다. 정말 매력적이다. 에마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명치께가 꽉 죄어지는 것 같았다. 머리로는 자기가 싫어하는 유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육체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끌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에마는 세련된 몸가짐 밑에 숨겨져 있는 이 남자의 본성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비앙카는 생각 이상으로 벅찬 상대야."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 그 여잔 자기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어." "한때 자신과 관계있었던 여자를 어쩌면 그렇게도 매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요? 경멸할 수밖에 없는 여자만을 늘 택한다면, 정신분석의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나한테 정신적인 결함이 있다는 거야? 틀렸어, 경멸하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대부분의 남자들은 무의식중에 성격도 머리도 좋고 게다가 인상도 좋은 여자를 바라고 있어. 하긴, 이 세 가지를 다 갖춘 여자를 찾기란 좀처럼 힘든 일이지만 …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을 책망하면 곤란해."


여성일반에 대한 드레이크의 냉철한 분석에 에마는 약간 정색을 하며 항변했다. "여성을 무턱대고 낮게만 본다든가, 여성의 육체만 보지 말고 남성이 좀더 진실한 눈으로 평가를 한다면 여자도…" 드레이크가 웃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비앙카도 에마를 모욕하기에 앞서 적을 좀더 잘 알아야겠는걸. 저 냉철한 표정 뒤에 과연 얼마만한 정열이 숨어 있을까?" "난 보통의 지성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에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개인으로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도 많구요." "그 분야 중 하나가 내가 아니라니,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지 몰라. 에마, 우리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까?" 그는 어느 틈에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곳에 와 서 있었다. 그대로 몸을 던져 저 품에 안기고 싶다. 어처구니없게도 에마는 지금 그가 애무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격렬한 감정에 놀라,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밀어냈다. "그렇게 되다간 일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그럴까? 조만간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될 거야. 지금은 아니더라도 또 뉴욕에서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언젠간 에마는 자신의 육체의 모든 비밀과 그 열정을 내게 폭로하고 말 거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드레이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에마는 그런 상황을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떨렸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와 똑같은 사탕발림을 들었을까. 그런 줄 알고 있지만, 에마는 그걸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의 내부에 그를 부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그에 끌리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자신의 어떤 점이 드레이크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지금까지 사귀어 본 적이 없는 부류의 여자니까?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라면 단순히 정복욕에 자극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자신이 처녀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이리라. 에마는 드레이크에 대한 분노를 스스로 불러일으키려고 했으나, 거만한 드레이크에게 마음으로는 반발하면서도 육체가 빨려들어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에게 굴복하고 싶어하는 건 바로 육체였다. 그런 격렬한 욕망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억제할 수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에게서 헤어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에마는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문은 잠가 놓지 말라구, 비앙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하인에게 우리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하라고 시켰을지도 모르거든." "정말로 그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는 증거를 보이고 싶어요?"


"비앙카는 자신의 미모라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 여자의 무기는 그거야. 하지만 그게 쓸모없게 된다면… 그 여자는 결코 믿진 않을 테지만." 드레이크의 위축되고

어조는 냉담하면서도 확고했다.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에마가 드레이크는

은연중에

비앙카를

아까보다는

두려워하여

부드럽게

얘기를

계속했다. "에마, 세상엔 그런 식으로 무기를 휘두르며 살아가는 인간이 제법 있어. 비앙카는 자신의 욕망이나 자신감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 오늘밤의 가일스에 대한 처사를 봤지?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비앙카 쪽이야. 그러니까 에마, 결코 방심해서는 안 돼. 그 여잔 정말 위험하니까. 무엇에 홀린 사람만큼 무서운 건 없어." "당신한테 홀렸다는 말이군요."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 일에 홀려 있다는 거야. 자기가 갖고 있는 힘으로 남자를 굴복시키는 것, 자기의 생각을 관철하는 일에 홀려 있어. 난 우연히 그 여자의 목표가 된 것뿐이야." 얼마나 냉담한 말인가. 결국 자기한테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는 드레이크를 비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한다는 건 드레이크가 사람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진, 말하자면 관찰력이 뛰어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것은 자기까지도 그 날카로운 관찰력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마는 드레이크의 욕망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제는 자신의 내부에서 싹트고 있는 격정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에마가 잠에 떨어진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드레이크에 대한 평가는 시시각각 변했다. 그는 원래 복잡한 인간인데다, 계속해서 차례로 새로운 얼굴을 보이기 때문이다. 에마는 처음으로 불을 보는 어린애처럼 델 줄 알면서도 그 찬란한 빛에 넋을 잃고 있었다. "야단났네, 대체 지금 몇 시죠?" 제복을 입은 하녀가 커피 잔을 들고 들어오자, 에마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8 시입니다." 아침식사 시간을 어긴 건 아닌가 에마가 걱정하자, 가일스와 드레이크는 9 시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다고 하녀가 대답했다. 에마는 남자들과 함께 식사를 해도 좋고 이 집의 안주인처럼 침대에서 먹어도 되니까 좋을 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부자들의 생활이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뿌듯했지만 늦은 아침까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건 질색이었다. 새삼 에마는 비앙카의 행동에 화가 난 가일스가 잡지사의 인수에 난색을 표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가일스 자신은 좀체 빈틈을 보이지 않는 사업가라고 에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어딘가 약점이 있게 마련이고, 가일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비앙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앙카가 냉혹한 말을 했을 때 가일스의 눈에 나타난 괴로운 표정을 그녀는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인 이상 가일스도 아내가 자기에게 냉담한 것을 드레이크 탓으로 돌리기 쉬울 것이다. 가일스가 드레이크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에 질투심도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닐까? 드레이크는 지금 한창때라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다. 하지만 가일스는 그렇지 않다. 에마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하녀가 일러 준 식당으로 내려갔다. 에마가 들어가자 드레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녀의 팔을 잡고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그녀의 몸에는 전율이 흘렀다. 뭔지 모를 긴박한 공기를 느낀 에마는 드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의 담판은 보류예요?" 에마의 물음에 가일스가 답했다. "비서가 아파서요. 진행과정을 기록해 두고 싶은데, 테이프레코더는 아무래도 좋아하지 않아서…" 기계에 약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가일스가 마치 야단맞은 소년처럼 멋쩍은 표정을 짓는 게 에마는 몹시 우습게 느껴졌다. 거대한 기업체의 회장이나 되는 유능한 남자가 테이프레코더 하나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지금까지 그녀는 그런 예를 더러 본 적이 있다. 그럴 때 그들의 변명이 한결같이 어린애 같았던 것도 이상하게 일치하고 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비서노릇을

대신할까요?

속기실력은

남보다

과히

뒤떨어지지

않으니까요." "음, 그러면 되겠군." 가일스가 뭐라고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드레이크가 찬성했다. "에마, 오 내 사랑,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니까요."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하녀가 점심을 알리러 왔을 때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계략을 짜고 공격을 하며 거기에 반격하는 등, 두 사람의 호적수가 서로 있는 힘을 다해 흥정에 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흥정을 보고 있으려니 상황은 드레이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점심때까지의 교섭으로 드레이크는 현재의 직원들을 양도하고 6 개월간은 전원 그대로 둔다는

조건으로까지 몰고갔다.

그밖의

다른 교섭이

타결되면

흥정은

드레이크의

성공으로 끝나게 된다. 에마는 긴장하며 속기를 계속했다. 이제까지의 토의내용은 빠짐없이 적었다. 그리고 몇 군데 자기자신의 간결한 메모도 삽입해 놓았다. 점심식사를 하면서도 얘기는 계속됐다. 가일스는 도중에 감격한 듯 드레이크에게 찬사를 표했다. "미인에다 총명하면서도 여성다와. 당신은 정말 아내를 잘 선택한 것 같소." "대단히 매력적이란 뜻이군요." 드레이크가

기쁜

듯이

에마를

향해

웃는다.

그의

그런

표정에

에마는

약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동요될 것만 같다. 동석한 비앙카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거침없이 내뱉었다. 험악한 모습으로 독살스럽게 입을 삐죽거리면서. "여보, 이 애숭이 아가씨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드레이크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지 못해요. 이용당하고 있는 거라구요. 난 나가겠어요!" 갑자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밤은 친구 부부와 칼턴에서 회식이 있어요. 어느 정도 공식적인 모임이라 할 수 있는데, 에마, 초라하지 않은 의상을 갖고나 있는지 모르겠네? 안 됐지만 내 건 빌려 줄 수 없을 거예요, 너무 작아서." 너무 작다구? 에마는 치수를 추측해 보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느긋하게 웃어 보였다. 여기에 있는 건 드레이크를 위해서이므로 자기가 개인적으로 화를 내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 "비앙카를 용서하시오." 가일스가 더듬거리며 아내를 변명하는 건 정말 보기에도 딱할 정도였다. "최근 상태가 안 좋아요.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탓인가 봅니다. 오히려 나쁘게 작용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름다운 사람이 곱게 나이를 먹기는 정말 힘든 것 같소." 가일스의 심정에 동정이 일어 에마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려운 때에 방문을 해서 정말 죄송하군요." "그렇다고 두 사람의 결혼을 단념한다든가 하는 짓은 하지 마시오, 드레이크." "당치도 않습니다." 드레이크가 에마를 응시하며 말했다. 에마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싶었다. 이성적인 판단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 눈길만 갖고도 사랑을 나눌 수가 있을 것 같다.


점심식사 후 교섭은 재개되었고, 에마는 신중하게 속기를 계속했다. 일이 끝난 건 오후 5 시였다. 불편한 자세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몹시 피곤했다. 욕탕에 들어가 편안히 몸을 쉬고 싶었다. 오늘밤엔 무엇을 입어야 할까? 밖에서 식사를 한다고 하니 수수한 옷차림이 좋을 것이다. 옷장을 열고 옷가지들을 살펴보던 에마는 보랏빛 실크 드레스로 정했다. 머리색깔과 드레스가 어울릴지 자신이 없지만, 고운 살결을 돋보이게 하고 눈동자를 아름답게 보이게 해줄 것이다. 그 드레스로 결정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8 시까지는 출발하지 않을 테니까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 가지고 온 책 한 권을 들고 욕실에 들어갔다. 비싼 화장품이 즐비했지만 냄새를 맡아 보니 모두 애마에게는 너무 진했다. 이 집 여주인의 취미인지는 몰라도 짙고 선정적인 것이었다. 에마는 늘 사용하는 샤넬을 쓰기로 했다. 욕조는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그녀는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 어느 새 책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런 사치를 누려본 지가 얼마나 됐을까? 집에서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으며, 욕실도 카밀라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으니 그녀로서는 좀체 기회가 없었다. "에마?" 드레이크가 부르고 있는데도 에마는 한참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르는 소리가 가까와져서야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드레이크… 여기예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드레이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당황해서 얼른 타월로 몸을 가리며 홍당무가 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음, 샤넬 N0. 5 군." 드레이크의 시선은 천천히 에마의 온몸을 살핀다. "어서 나가 주세요!" "세 번이나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익사한 건 아닌가 생각했지." 에마는 몸을 가려야겠다는 생각에 옷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그녀와 옷 사이에 우뚝 서서 가로막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하며 에마가 떨어뜨린 책을 집어들고는 자못 흥미롭다는 듯이 책장을 넘기고 있다. "좀 나가 주세요. 옷 좀 입게요." 그녀는 몹시 화가 났다. "약혼녀의 매력적인 모습을 남겨 두고 사라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난 당신의 약혼녀가 아니예요. 이건 단순한 거래가 아니었던가요? 기억하세요? 함부로 욕실에 들어을 권리는 없다구요." "하지만 난 분명히 몇 번씩이나 불렀는데…"


"나가 달라니까요!" "뭘 두려워하지, 에마? 바다에 가면 더 많이 노출시키면서."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건 위험신호다. 에마는 드레이크의 매력에 질 것만 같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여자로서의 자신의 허약함을 어쩔 수 없이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무척 놀랐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거기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오늘밤 일로 얘기해 둘 게 있어서 왔어. 비앙카의 심한 말에 생각난 게 있었거든." "가운을 입을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러면 천천히 들을 게요." 에마는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이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듯한 투로 말했지만 드레이크의 짓궂은 표정을 보니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이대로가 더 근사하겠는데. 당신이 화내는 것을 보니 즐겁기도 하고 …

화를 내면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변하거든. 뭘 걱정하지? 혹시… 이게 아닐까?" 드레이크의 팔이 긴장으로 굳어진 에마의 몸을 감싸안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에마가 노려보았지만 태연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긴장을 풀어, 다치게 하진 않을 테니까." 몸에는 상처를 입지 않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상처는 어쩌란 말인가. 자신이 얼마나 드레이크에게 매혹되었는가를 에마는 다시금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몸에 전류가 흐른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위험할 정도로 드레이크에게 빠져 버렸던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이토록 매료될 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감정이 개입될 리가 없는데… 난 단순히 육체에만 끌리고 있을 뿐이야… "에마, 피하지 말고 날 똑바로 봐." 그녀가 무엇인가 생각에 골몰해 있자 드레이크가 날카로운 눈으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뭘 생각하지? 에마는 어딘가 먼 곳을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동생 일이에요…"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잊어버려. 다만 이 순간만을 생각하는 거야." 그의 입술에 에마는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몸을 움츠렸지만 곧 온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성으로는 억누를 길 없는 내부로부터의 강한 욕망에 이끌려 그녀는 양손으로 드레이크의 목을 감싸안으며 그 짙은 머리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드레이크의 집요함에 못 이겨 에마는 입술을 열었다. 몸에 전율이 흐르고 타오르는 욕망으로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듯했다. 그의 손이 허리에서 천천히 올라와 타월로 가려진 가슴을 헤치고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한다.


찌르는 듯한 기쁨이 온몸을 엄습하자 에마는 드레이크의 애무에 날아갈 것 같았다. 몸의 깊은 중심으로부터 전율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고서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해보았다. 소용없었다. 아득해지는 관능이 에마를 마구 들뜨게 했고 눈꺼풀 너머로 드레이크의 나신이 아른거린다. 불길이 에마의 육체를 태워 버릴 듯이 타오르며 명치부근에 충격이 온다. 드레이크가 두 사람 사이를 경계짓던 타월을 치워 버린 것도 알지 못했다. 그의 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몸을 바싹 끌어당긴다… 자신도

모르게

관능의 늪에 빠져 버린

것을 에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드레이크의 숙련된 손에 의해 미친 듯이 타오르는 남성적 체취에 취해 있던 그녀는 강한 의지로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드레이크의 사랑?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육체에만 흥미를 갖고 있는 인간이 아닌가. 그녀가 더 이상 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드레이크는 짙은 초록색 눈동자를 흐릿한 에마의 회색 눈동자에 접근시켰다. "겁이 난 거야? 새삼스럽게 왜 이러지? 당신은 날 못 견디게 원하고 있으면서…" 승리를 과시하는 듯한 드레이크의 눈빛… 에마는 옆으로 몸을 비켰다. "네, 옳아요. 하지만 육체만으로 만족할 순 없어요." 드레이크가 얼굴을 찡그렸다. 몸을 가누어 타월을 감고 나서, 에마는 다짐하듯 한마디 쏘아붙였다. "설마 내가 당신에게서 처음으로 욕망을 느낀 거로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그녀의 조소를 머금은 말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도 26 살이에요. 지금까지 육체적인 욕망에 끌렸던 남자가 없을 리가 없죠. 하지만 이미 몇 년 전부터 난 결심했어요. 육체뿐인 욕망에 굴복하지 않기로. 정신적인 면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싫어요." "애정을 수반하지 않은 섹스는 안 된다는 말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꿈을 쫓아서 인생을 허무하게 보내고 말아. 당신만 해도 그래. 그런 걸 손에 넣을 자신이라도 있다는 거야? 천만에, 그런 식으로 자신의 윤리관 속에 도피해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있을 뿐이야. 요는 겁쟁이라는 거지. 그런 건 미덕도 아무 것도 아니야. 지상의 즐거움을 놓칠 구실이 될 뿐. 섹스 자체를 목적으로 즐기는 게 뭐가 나빠? 당신이 말하는 사랑 같은 건 실체도 없는, 머릿속에만 있는 환상에 불과해." 드레이크의 한마디 한마디가 에마의 가슴을 찌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떤 사고방식의 남자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속에서 아무리 외쳐 봐도 거기에 응해 줄 순수한 감정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은 남자인 것이다. 그녀는 드레이크를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이크는 그렇지 않다.


"에마, 나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사랑하고 있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당신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봐야겠어. 그런 입에 발린 말을 원하다니, 난 그런 여자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만 둬요, 드레이크. 헛된 짓이에요. 서로가 애정이 없다면 난 싫어요. 육체적 욕망만을 채울 게 아니라 참사랑을 갖고 싶은 거예요." "육체적 욕망? 참사랑? 위선자군. 내 팔에 안겨 욕망으로 번민한 건 누구였지? 자신을 속이는 건 괜찮아. 하지만 나는 속지 않아. 욕망 때문에 잠 못 이룰 밤을 위해 기억해 두라고. 당신이 부탁만 한다면 언제든지 그 욕망이 채워지도록 거들어 주겠어."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격렬한 말도 드레이크의 조소에 일축되고 만다. "당신은 무지개를 쫓고 있는 거야. 보물찾기를 하고 있는 셈이라구. 사실 에마 코트는 지적으로나 성적으로나 날 흥분시킨 최초의 여자라고 할 수 있어. 우린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해. 다만 에마가 그걸 깨달을 즈음엔 이미 때가 늦을걸…" "당신의 흥미가 이미 다른 여자에게 옮겨진 후라는 얘기군요. 미안하지만 드레이크, 난 몇 주일 사귀다가 그럼 안녕 하고 헤어지는 건 정말 못 견뎌요." "전연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드레이크의 웃음은 위협적이었다. 이윽고 드레이크는 휑하니 자기 방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방문을 잠갔다. 그런 말을 한 이상 드레이크가 제 발로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것은 어린애 같은 반응이었다. 에마는

자조하듯

이렇게

방문을

잠근

것은

드레이크를

막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기자신을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책으로써. 그날 밤 식사 때 드레이크는 에마 따위는 전혀 관심없다는 듯 다른 여자 손님과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에 에마는 속으로 질투심이 끓어올랐지만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런 에마의 불안감을 비앙카가 손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방심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에마는 남은 스테이크 조각을 아까부터 들쑤시고 있었다. 가일스의 친구 부부는 40 대 중반의 사람들로, 그 남편의 은근히 고압적인 태도에 에마는 비위가 상했다. 아내 쪽은 지나칠 정도로 남편에게 아양을 떠는 양이 보고 있기만 해도 역겨웠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훈이기도 했다. 남편이 원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 시종 애교를 떨고 안달하고 있는 아내, 드레이크와 결혼한다면 에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물론 기적이라도 일어나기 전에는 드레이크와 결혼 같은 걸 할 리도 없겠지만. 리타 뱅가드의 아름답게 화장한 얼굴 이면엔 남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는 가련한 여인의 얼굴이 엿보였다. 에마는 그런 결혼생활은 딱 질색이었다. 인생을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남자, 웃음을 함께하고 화목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아직까지 독신인 건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꿈을 쫓고 있다? 드레이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에마는 동화의 나라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에마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으므로 차가 집에 닿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앙카가 맹렬하게 공격해 왔다. "싸움이라도 했어요? 걱정할 건 없어요. 화해하는 덴 더블베드가 제일 좋다고들 하니까요. 게다가

침대에서의 드레이크는 물을

만난 물고기

같거든요.

그렇다는

얘기일

뿐이지만…" 지금 비앙카는 위험한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가일스의 못마땅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이 여자가 자중하지 않았다간 호되게 봉변을 당할 텐데 하고 에마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니 황송하군." 드레이크는 비앙카의 빈정거림 따윈 개의치 않는 듯했다. "가일스, 우리가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여행의 피로가 이제야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알고 있어, 사교 모임은 이틀쯤 후에나 열 걸 그랬군. 나라면 여행으로 쌓인 피로가 회복되는 데 적어도 이틀은 걸리곤 하지." "하지만, 여보, 당신은 드레이크보다 30 년이나 연상이잖아요." 그 응석조의 말 뒤에 숨겨진 가시에 에마는 자신이 아픔을 느꼈을 정도였다. 가일스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술 한잔 하자는 것을 거절하고 부리나케 계단을 오르는데 드레이크가 뒤따라왔다. 그녀의 팔을 잡고 드레이크가 속삭였다. "저 두 사람을 보고 나서도 사랑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는 거야?" "비앙카는 단 한번도 가일스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느껴져요." 에마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가일스 쪽은 부인을 숭배하고 있지만."


"한쪽은 애정이 있지만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다, 그런 일방통행 같은 애정은 당신의 뜻엔 맞지 않겠지?" "비극의 시작이죠." 그렇게 대답한 에마 자신은 드레이크에게 몸을 던지며 사랑해요라고 고백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현재의 관계만으로 만족하겠다고 호소하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에마는 자신의 침실 앞에서 발을 멈췄다. 오늘밤 내 눈으로 육체적인 매력이 넘치는 존 뱅가드 같은 남자의 결혼 실태를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던가. 그가 풍기는 성적 매력은 에마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주위의 여자들에게 자기가 어느 정도로 매력이 있는가를 단단히 의식하고 있는 남자. 그러면서도 자기 아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 무신경한 남자. 존은 그의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과 침대를 함께한 적이 있다고 드레이크는 에마에게 은밀하게 속삭였었다. 자신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말했으리라. 그 순간 에마는 저도 모르게 아내인 리타 뱅가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었다. 성형수술로 주름을 없앤 40 대의 아름다운 얼굴 이면에 숨어 있는 고뇌를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남편은 이젠 그 아내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꼴을 나 자신도 당해 보고 싶다는 건가.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당신은 언제나 그런 표정이 되지. 도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설마 카밀라 생각을 했다고 하진 않겠지?" 드레이크가 거칠게 에마의 팔을 잡았다. "뱅가드 씨 생각을 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그녀의 팔에 드레이크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에마는 아파서 무의식중에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뭐야,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어?" 그 목소리는 처음으로 듣는 어조였다. 낮고 분명치 않은 그 목소리에 에마는 등줄기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어쩔 셈이야? 밤새도록 당신 때문에 모든 근육이 삐걱거리고 있는데 시치밀 떼고 존 뱅가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었어? 그 녀석이 침대에선 어떻게 할까 상상해 본 거야? 비앙카에게 물어보지 그랬어?" "그것도 괜찮은 생각인데요." 드레이크의 어처구니없는 짐작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지금 굴복했다간 이대로 그의 침대에서 함께 밤을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간 내일 아침엔 후회의 눈물을 흘릴 게 분명했다.


"비앙카라면 기꺼이 자상하게 가르쳐 줄 거예요. 내친김에 당신의 테크닉까지도 빼놓지 않고 얘기해 줄 게 틀림없어요."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에마는 뒤이어 찾아든 침묵에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매스컴의 과장된 보도에 익숙해져 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다기로 방금 한 말은 너무 지나쳤다. 드레이크에게 잡힌 팔은 멍이 들었다. "그 여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필요는 없어." 드레이크의 분노에 찬 가라앉은 목소리는 신경과민이 된 에마를 한층 더 두려움에 떨게 했다. "내가 직접 개인교수를 해주지." 그가 무서운 기세로 에마의 침실 문을 열었다. 에마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남성들은 명문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중류계급의 자제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훨씬 거친 환경에서 억세게 살아온 남자다. 거역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비책이라고

본능적으로

깨달은

그녀는

괴롭히고

복종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덤비는 드레이크의 입술을 꼼짝도 않고 견디고 있었다. 드레이크의 이가 보드라운 에마의 입술을 깨물자 무의식중에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피가 번져 나온다. "어디 한번 해보자구." 그녀의 귓전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야릇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당신도 인간답게 정열에 불타오를 수 있다는 걸 보여 봐. 설마 불감증이란 성적 냉담으로 위장하려는 의도는 아니겠지?" 이런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피가 마를 것 같다. 드레이크와 만나기 이전의 에마라면 얼마든지 냉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드레이크에 의해서 깊이 잠들어 있던 관능이 눈을 뜬 것이다. 드레이크를 통해 자기 내부의 뜨거운 감정이 끓게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그에게 몸을 던져 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하지만 에마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드레이크를 사랑함으로써 오는 괴로움, 사랑하고 있다는 걸 드레이크가 알아차리게 될 때의 슬픔. 이 두 개의 짐을 등에 짊어지고서 살아갈 수는 없다. 순간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에마의 의식 속에서 번뜩였다. "날 건드리지 말아요! 내가 스스로 원하기 전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말을 천천히 반복하는 동안 에마는 자신을 되찾았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건 성적인 욕구충족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에마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이 타는 듯한 눈동자의 광채는 욕망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두 사람은 다만 서로를 노려보고 날카로운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빌어먹을, 정말 차디찬 여자군!" 드레이크가 긴장을 깨뜨리고 중얼거렸다. 그가 발길을 돌려 막 나가려는데 비앙카가 계단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비앙카는 침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재빠르게 에마의 부어오른 입술을 봤던 모양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에마를 노려보고 나서 드레이크에게 쏘아댔다. "어머, 약혼녀에게 무슨 짓을… 드레이크! 마치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떨고 있잖아요?" "질투하는 거야, 비앙카?" 이런 말을 하다니 … 드레이크 역시 지금 자기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닌가 에마는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무서운 표정은 보고 있기만 해도 몸이 떨렸다. 비앙카의 굶주린 듯 열오른 시선과 분노로 얼룩진 드레이크의 시선이 교차한다. 비앙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갔지만

드레이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는 욕구불만으로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일까? 불만이라고 한다면 에마 역시 불만에 차 있다. 드레이크의 애무로 자극받은 격렬한 욕망은 그녀의 관능을 뒤흔들어 놓은 상태인 것이다. 드레이크처럼 경험이 풍부한 남자라면 더 빨리 욕망에 불이 붙어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저렇게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어쨌길래요?" 비앙카는 빨간 입술을 씰룩거렸다. "당신의 순진한 약혼녀로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난 안 그래요." 에마를 완전히 무시하고 비앙카는 드레이크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손목을 잡고 유혹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본다. 에마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지만 설마 바로 눈앞에서 그런 꼴을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비앙카는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태도다. 이런 경우엔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까? 드레이크와의 계약을 무시하고 성질대로 한다면 당장 상대방의 눈을 할퀴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그런 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약혼녀로서의 품위는 지켜야 하니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이 집에 머물고 있는 이상 드레이크의 약혼녀노릇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드레이크한테서 아직 그만 두자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다.


만약 그가 그럴 생각이라면 비앙카가 꼬리를 치는 이 판국에 기쁜 얼굴을 할 게 분명하다. 사업과 여자 중 하나를 택하라면, 드레이크는 서슴없이 사업을 택할 것이다. 에마는 혼란스럽던 생각이 정리되자 즉시 실천에 옮겼다. 그녀는 드레이크의 팔에 손을 얹으며 바싹 다가갔다. "드레이크,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구태여 연기를 하지 않아도 목소리는 충분히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내가 가르쳐 드리지!" 비앙카가 날카롭게 외쳤다. "드레이크는 당신을 내세워서 날 멀리하려 하고 있는 거예요. 가일스에게 진상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거든요. 당신은 단지 이용물일 뿐이에요." 너무나 정확하게 맞혔으므로 에마는 순간 멍해졌다. "비앙카는 지금 히스테리 상태야." 드레이크는 침착하게 가차없는 목소리로 비앙카에게 응수했다. "가일스와 만나기 전, 한때 우리 두 사람이 연인관계였다는 건 에마도 잘 알고 있잖아? 비앙카는 그때의 망상에 사로잡혀서 지금 수치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고 있는 거야." "당신, 날 좋아했잖아요." 비앙카의 목쉰 소리는 비명에 가까왔다. 에마는 마음이 아팠다. "과연 그럴까? 그 반대였겠지. 악착같이 매달린 건 비앙카였어." 비앙카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이었다. 드레이크의 팔을 놓으며 사납게 씨근댔다. "당신… 어쩌면 그렇게도…" "야비한 남자냐, 이 말이지? 그래 난 그런 놈이야. 신사다운 데라곤 하나도 없지. 내 기억엔 바로 그 점이 당신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은데?" "좋아요. 이애와 결혼할 테면 해요. 어서 침대로 끌고 들어가시지 그래? 하지만 가일스한테 우리 일을 얘기하겠어요. 그것으로 이번 거래는 끝장이에요." "가일스가 상식이 있는 남자라면 이혼신청을 하겠지. 지금까지 비앙카의 농간을 참고 있었던 건 가일스를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젠 진절머리가 나. 어서 그에게 말할 게 있으면 말해 봐!" 7 이렇게 긴장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거울에 비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에마는 만사가 귀찮게만 여겨졌다. 사흘 전, 비앙카가 분노를 폭발시킨 이후로 집안 분위기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긴장이 감돌았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것은 가일스와의 교섭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일스의 비서도 병이 나아 출근하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 짬짬이 그 여자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재치도 있고 마음씨도 고운 이 비서는 아무래도 가일스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얄궂은 인생인가. 드레이크의 말처럼 사랑이란 도달할 수 없는 열반인지도 모른다. 비앙카의 저기압은 대단한 것이었다. 두통거리는 그녀뿐만이 아니다. 드레이크의 존재 자체가 에마에게 불러일으키는 긴장감 또한 적지 않았다. 그가 옆의 침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심란했다. 억센 그의 육체는 에마를 충분히 관능의 늪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여자에 따라서, 조용히 사랑에 감싸여서 가정을 이룩하고 자식을 키우면 만족한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자신은 그런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드레이크에게 몸을 맡기고 나중에 혼자서 그 결과를 짊어진다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하고 고민할수록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에마는 곤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레이크가 바라보기라도 하면 신경은 더욱 날카롭게 되고 갈망은 심해졌다. 그날 밤 이후, 드레이크의 자제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이 무척 불만이었지만 그것은 에마가 먼저 원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드레이크는 가일스와 함께 고문 변호사를 만나러 나갔다. 어쩌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마음이 이토록 심란한 건지도 모른다. 커다란 저택이었지만 갇혀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혀 시내에 나가서 윈도쇼핑이나 할까 에마는 생각했다. 이곳에 와서 한번도 외출한 적이 없었기에 기분전환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외출하고 싶을 때는 집사인 반스에게 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차를 준비해 줄 거라고 가일스가 말했었다. 에마는 즉시 그에게 연락했다. 혼자서 뉴욕의 거리로 나가게 할 수는 없다는 반스를 설득하여 한 시간 후에는 가일스의 호화스런 자동차에 타고 있었다. 눈이 어질어질해지는 뉴욕의 번화함, 그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에마는 메이시 백화점의 패션 매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미국여성은 개성적이고 세련되어 있어 깜짝 놀랄 정도의 미인도 보았지만 부럽지는 않았다. 완벽을 기한 나머지 그 여자들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기 때문이다. 격렬한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그 여자들은 얼마나 고달플까. 에마는 잠깐 쉴 만한 커피숍을 찾았다. 여러 가지 구경은 했지만 물건을 사지는 않았다. 위험할 것 같아 아예 돈을 많이 갖고 나오지 않았고, 드레이크가 준 크레디트 카드도 그냥 두고 나온 터였다. 오늘 외출할 마음을 먹은 것은 폐소공포증에 걸린 것 같은 상태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드레이크와의 사이에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굉장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드레이크는 뉴욕과 같은 세계의 어떤 대도시에서도 마음 편히 자신의 장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이지만 자신에겐 시골의 고요함이 더 어울렸다. 거리의 떠들썩함과 열기를 한 시간 가량 바라보고 있는 동안 에마는 드레이크의 품으로부터 자기자신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에마의 진지에 던져진 공을 자신이 다시 던지지 않는 한 게임은 진전되지 않는 것이다. 요는 자신이 결심을 굳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이론상으로야 그렇게 간단하지만 …

강렬한 햇살에 에마는 눈을 깜빡거렸다. 인도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는데 한순간 그녀는 뒤쪽으로부터 떠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옆구리를 몹시 아프게 쥐어박혔다. 반사적으로 옆을 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그녀를 쳤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후회가 뇌리를 스쳤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핸드백을 채가게 내버려 둘 걸 그랬다. 중요한 게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주마등처럼 온갖 생각들이 에마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빠개질

듯이

머리가

아프다.

팔이

비틀어올려진

모양이다.

주위의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나만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가는가 보다… 공포가 에마를 엄습했다. "에마?"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굉장히 걱정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손을 휘저었다. "아직 의식이 들지 않은 모양이군." 그 목소리는 무척 걱정되는 듯한 어조다. 손에 넣고 싶은 건 무엇이든 가차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온 한 남자의 목소리임을 알고서 에마는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심하게 머리를 얻어맞았으니 뇌진탕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적어도 2 시간 동안은 관찰해 봐야겠는데…"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미국인인 모양이다. 에마는 첫 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에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침대 가까이로 바싹 다가섰다는 걸 그녀는 뺨에 느껴지는 숨결로 알 수 있었다.


간신히 눈을 뜨자 그녀의 몸에 충격이 흘렀다. 이렇게 짙은 초록색 눈동자는 처음이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 이것은 전에도 본 적이 있다는 확신이 떠올랐다. "에마… 괜찮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증명이나 하듯 남자의 콧방울 옆에 주름이 잡혀 있다. 에마가 손을 올리니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의아해하는 듯한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가 준 거야'라고 말한다. 마치 '당신은 내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왠지 에마는 안심이 되어 신뢰하는 표정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우린 약혼한 거예요?" "생각나지 않아?" 남자가 눈을 응시하자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통증과 쓰러졌을 때의 막연한 불안감이 되살아난다. 크고 넓은 주택이 어렴풋이 떠올랐는데, 그곳에 돌아가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자기가 미국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튼 짧은 기간 여기 머물러 있게 된 모양인데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뭐 생각나는 게 있어, 에마?" "약간… 아파서 쓰러졌다는 거…" "일시적인 기억상실이지요. 그러니까 얼마 동안 용태를 지켜봐야겠습니다." 미국 사람이 말한다. "아, 가지 마세요… 제발."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그녀는 부탁했다. 손을 내밀자 눈앞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낯선 환경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당신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에마를 놔두고 가진 않아." "드레이크, 방금 소식을 대강 들었소만… 어떻게 된 일이오?" 지금 방에 들어온 남자는 거의 기억에 없다. 약혼자라고 자칭하는 남자보다 훨씬 연상이었지만, 매력있는 인물임엔 틀림없다. 호감이 가면서도 연민의 정이 함께 느껴지는 것이 에마로서는 이상했다. "아직 어질어질한 모양입니다. 여기에 혼자 놔두고 싶진 않지만, 영국행 비행기에 태우기에는 아직 무리고." "그건 안 돼. 당치도 않아. 우리 집이 좋지 않겠소? 간호원을 부탁하면 되지." "싫어요… 아무도 필요없어요." 그녀는 드레이크라는 남자에게 자기는 당신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없다고 호소하고 싶었다.


의사 같은 남자는 여전히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은 허락하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만." 하지만 에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약혼자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결국 의사는 퇴원을 인정했다. "병세가 조금이라도 달라지거든 반드시 연락해 주십시오. 아시겠죠? 잠만 잔다든가, 또는 괴로와하는 기색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가벼운 뇌진탕 정도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나쁜 상황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기억상실은 어떻게 됩니까?" "타격의 후유증과 마비가 깨면 회복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 이틀 정도 기분이 나쁜 건 방법이 없습니다. 어쨌든 운이 좋았어요." 의사는 심각한 어조로 마지막 한마디는 에마를 향해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전 쓰러진 것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에마는 강도를 당한 거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경찰이 보고 있어서 이곳으로 데려다 주었지. 게다가 운이 좋았던 것은 에마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게 있어서 병원에서 나에게 연락을 한 거야." 의사가 그 뒤를 이었다. "머리의 상처는 중증으로 보입니다만, 외상으로 끝난 것도 다행이었죠. 스무 바늘은 꿰맸을 겁니다. 그래서 어질어질한 거지요. 마취 때문에. 타박상도 약간 있소. 그건 그렇고, 뉴욕 거리를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누가 주의를 주지 않던가요?" 몇 종류의 서류에 기입이 끝나고서야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 벤츠는 이곳에서 체재하던 집주인 것이고, 자기들이 미국에 와 있는 건 어떤 상담문제 때문이라고 차 안에서 드레이크가 말해 주었다. "에마, 당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은 변호사와 만나고 있을 때 들었지요. 드레이크가 그토록 놀라는 걸 본 건 처음이었소." 가일스라는 남자가 덧붙였다. 에마는 갑자기 슬퍼졌다. "죄송합니다." 드레이크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은 자기의 사고로 하루의 일정을 망친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것을 보면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마는 아직 머리가 멍한 상태였지만 기분은 가벼웠다. 어느 한 부분에 나사가 빠진 것 같은 편한 기분이랄까. 이상하게도 에마는 자기가 누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부친과 신혼인 동생이 있다. 드레이크에게는 친근감이 가면서도, 한편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느 정도로


친한 사이였는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사랑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루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다. 드레이크는 그녀를 안고 집에 들어가겠다고 우겨댔다. 그의 품안에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두 사람 사이가 최근에 막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드레이크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지쳐 있었다. 내일 물어봐도 된다 …

졸음이 밀려온 에마는

드레이크가 방문을 열고 커다란 더블베드로 자신을 옮기는 것을 멍한 상테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무리는 금물이야." 이불을 들추고 에마를 거기에 눕힌 그는 시트를 그녀의 목까지 끌어올렸다. "수면제를 놓았어. 잠은 무엇보다 좋은 약이니까." 드레이크가 발길을 돌리려 하자 에마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입 언저리가 일그러져 있다. "여기 있어 줘요… 버림받은 기분이에요. 나, 언제나 이렇게 응석을 부리나요?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도 드는데…" "분명히 아니지. 에마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독립심이 강했으니까. 그래서 오늘 같은 사고를 당한 거야." 그는 에마의 손을 풀고 일어섰다. 에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키스는 안해 주세요?" "정말로 원해?" 이것이 약혼녀에게 하는 말일까? 에마는 그것이 이상했다. "어째서 안 되죠?"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가일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영국에서 전화가 와 있어." "가봐야 돼. 곧 돌아올게." 드레이크는 방문 쪽으로 향했다. 왠지 마지막 한마디가 마음에 걸렸지만 여전히 이유는 알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서서히 파도 사이를 표류하듯 어둠 속으로 떨어져 갔다. 8 목이 마르고 꿈자리가 어찌나 뒤숭숭하던지 에마는 바짝 긴장이 되어 잠에서 깼다. 종잡을 수 없는 무서운 꿈이었다. 자세한 건 생각나지 않지만 왠지 마음이 슬픔으로 혼란스러워져 있었다.


침실이 어두워서 램프를 켜려고 손으로 더듬는데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마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침대에서 내려가려는데 문이 열리고 가느다란 빛이 방안으로 비쳐 들어온다. "에마, 괜찮아?" 드레이크의 목소리를 듣자 안도감으로 오히려 마음이 약해졌다. "네 … 잠깐 공포증에 사로잡힌 것 같은 느낌이에요 … 눈을 떴는데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서…" 드레이크는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어때?" "저…" 드레이크가 이렇게 옆에 있기만 해도 마구 가슴이 뛴다. 그것을 억제하려 했기 때문에 에마는 저절로 비통한 목소리가 되었다.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에마는 드레이크가 잠옷 차림인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도 자고 있었다는 얘기다. 드레이크가 연 방문 저쪽은 붙은 방이라는 말이 되는데…? 에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우리들이 각각 딴 침실에서 자고 있는 건 무슨 이유죠?" 생각할 사이도 없이 질문이 튀어나와 버렸다.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에마는 머뭇거렸다. 지금 기억에 떠오르지 않지만 이 집 안주인이, 아무리 약혼을 했다고는 하지만 결혼식도 올리기 전부터 침실을 함께한다는 건 당치도 않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에게 각각 따로 침실을 마련해 주었다는 얘긴가? "가일스 씨의 부인이 이렇게 하도록 한 건가요?" "그것도 한 가지 이유지." 그것이 하나의 이유라고? 방은 충분히 따뜻한데 에마는 몸을 떨었다. 원시적인 본능에 자극받은 에마는 머뭇머뭇 얘기를 꺼냈다. "드레이크, 오늘밤은 함께 있어 줘요. 가일스 씨의 부인은 모를 거예요. 우리들이 한 침대를 쓰는 걸 부인이 반대한다면 …

아침 일찍 당신 침대로 돌아가면 되잖아요?

오늘밤은 어쩐지 혼자서 자기가 싫어요." "당신 침대에 들어갔다간 단지 함께 누워 있는 것만으로 끝나진 않을 텐데…?" 순간 에마는 우리 두 사람이 싸움이라도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밤은 당신이 필요해요…"


드레이크의 따뜻한 육체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될까. 그것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전하면 좋을지 안타까왔다. "우린 오랫동안 애인 사이였나요?" 드레이크가 잠옷을 벗어 버리고 침대 커버를 밀어붙였으므로 에마는 쭈뼛쭈뼛하면서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지?" 드레이크의 매끈매끈한 육체를 보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던 흥분이 불쑥 치밀어오르며 자칫 넋이 달아나 버릴 듯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렸을 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받은 짓을 할 때의 그 호기심 어린 경험과 비슷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바보 같아 …

에마는 불을 끄려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불빛을 받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인다. "그냥 켜두지." 드레이크의 사나운 목소리에 일찍이 몰랐던 관능이 꿈틀거린다. "에마를 그대로 바라보고 싶어. 우리 둘이 오래 전부터 서로 사랑하게 된 건 아냐. 한데 왜 그런 걸 묻지?" 드레이크의 꿰뚫어 버릴 듯한 저 눈길은 시트 아래에서 발그레 홍조를 띠고 있는 내 육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에마는 생각했다. "왜냐구요…? 글쎄… 제 자신의 반응이 어쩐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횡설수설 대답 했다. "무슨 뜻이지?" 한쪽

팔꿈치를

괴고

그녀를

들여다보듯이

하면서

드레이크는

상반신을

기울였다.

부드러운 불빛이 갈색 피부의 건강미를 돋보이게 했다. 손을 뻗쳐 저 아름다운 육체를 만지고 싶다. 에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부끄러운 짓인 것 같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어쩐지 자꾸만 금지된 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의 기억상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글쎄, 왜 그렇게 생각했지?" 자신의 감각과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 드레이크의 육체적 유혹과 자기의 반응이 말로 잘 표현되지 않아서 에마는 머뭇거렸다. "저어, 당신이 … 압도당할 정도로 육감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멋져서 난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아요. 마치 평소의 내가 어디론가 가버린 것 같은 심정인걸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에마는 자신만의 세계를 완강히 고수하는 그런 유형이니 내가 압도할 듯이 육감적인 게 불쾌한 거야."


일부러 에마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드레이크의 눈에 희미한 번뜩임이 일렁거린다. 그녀는 드레이크에게 뻗치려던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어쩐지 자기답지 못한 짓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위험신호가 깜박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드레이크를 만지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짓을 해선 안 된다고 명령하는 것이다. 타박상과 마취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억압되어 있던 욕구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보는 거야?" 드레이크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는 당황했지만 정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을 만지고 싶어요. 하지만…" "괜찮아." 그의 숨결이 에마의 피부를 태운다. 드레이크는 잠긴 목소리로, "사랑해 줘." 라고 말하며 입술로 에마의 민감한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짜릿한 흥분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손끝이 드레이크의 탄력있는 피부를 더듬는다. 그러자 관능의 물결이 밀어닥치며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어쩌면 드레이크를 만져보는 것도, 또 이런 식으로 애무를 받는 것도 처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드레이크의 손길이 몸에 닿자 에마는 타는 듯한 욕망을 느꼈다. 드레이크의 입술이 그녀의 피부에 낙인을 찍듯이 움직여 감에 따라 에마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거기에 담겨진 절박한 감정… 무엇이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는지는 잘 몰라도 이 간절한 욕망만은 약혼자에 대한 애정의 증거임이 분명하다.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에마가 뿜어내는 환희의 숨결에 이끌린 듯 드레이크는 몸을 떨었다. 드레이크가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자 진주빛 가슴의 융기가 드러났다. 테이블의 불빛이 보드라운 복숭아 같은 피부에 장미빛을 드리운다. 드레이크의 손이 에마의 몸의 곡선을 더듬고 있다. 에마는 몸을 뒤로 젖히고 그 애무를 견디려고 애썼다. 낮게 가라앉은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에마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 강렬한 열정에 에마의 육체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키스해 줘." 에마의 입술은 드레이크의 격렬한 키스에 굶주린 듯이 응했다. 그의 손이 에마의 가슴에 닿자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감싼다.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서도 살며시 눈을 떠보니 자신의 새하얀 몸이 햇볕에 그을은 갈색 피부와 겹쳐져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뒤엉킨 두


개의 육체를 본 에마는 심장의 고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그녀는 몸을 활처럼 젖혔다. 드레이크의 등을 가볍게 손으로 쓸자,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그가 에마의 부드러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드레이크의 허리로 내려가자 그가 신음 소리를 낸다. 그녀는 자신의 손 밑에서 드레이크의 허리가 바짝 죄어드는 것을 느꼈다. 희열의 신음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다. 드레이크는 입술을 에마의 목으로 옮기고 곧이어 손으로 애무하던 가슴으로 서서히 옮겨갔다. 드레이크의 뜨거운 혀가 더욱더 불타올라

에마의

가슴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더욱더

에마의

관능을

부채질했다. 그녀는 드레이크를 꽉 껴안은 채 환희의 소리를 지르며 그의 몸에 더욱 자기의 몸을 밀착시켰다. 드레이크의 혀가 에마의 피부를 애무하자, 그녀도 강렬하게 반응했다. 드레이크가 연신 신음 소리를 흘리며 손으로 그녀를 더듬자 뜨거운 불길이 에마의 혈관을 타고 마구 달린다. 에마가 몸을 뒤로 젖히자 드레이크가 지체하지 않고 허리를 감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의식중에 에마는 열정적으로 드레이크에게 응하고 있었다. 드레이크의 혀가 에마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며 가볍게 약을 올리듯 키스를 퍼붓는다. 그는 동작을 늦추며 에마가 공포감에 휩싸이지 않도록 능란하게 그녀의 육체를 인도해 갔다. 그에 응해서 에마도 양손으로 드레이크의 매끄러운 등을 쓸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는 에마의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 드레이크의 육체가 주는 그 중압감과 밀착된 뜨거움으로 인해 에마는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환희와 고통이 한 데 어우러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고통은 아득한 감각의 저편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에마는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실망으로 몸이 떨렸지만 어느 틈엔가 구름과 같이 휘감겨 오는 잠의 마력에 휘감겨 들어갔다. 눈을 떴을 땐 한밤중이었다. 드레이크에게 몸을 바싹 밀착시키려고 몸을 움직이자, 자고 있으려니 생각했던 그의 가라앉은 속삭임이 들렸다. "이렇게 하다간 두 사람 모두 한잠도 자지 못해." 그 말에 완전히 잠이 깼다. 아까의 모순된 자신의 기분이 머리에 떠올랐다. 실망감이 에마의 가슴에 퍼져간다. 자기뿐만 아니라 드레이크도 만족을 못 느꼈던 것이 아닐까? 드레이크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입밖에 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왜 그래?"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도 드레이크는 그녀의 불안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당신이 얘기해요."


맥없는 에마의 말투에 어딘지 자조적인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에마가 곤혹해하는 이유를 곧 눈치챈 것 같았다. 팔을 뻗어 그녀를 더욱 자기쪽으로 힘껏 끌어당긴다. "에마, 꼭 얘기해야 할 게 있어… 우린…" "뭔가 나한테 잘못이 있는 거예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생각하나요?" 에마는 불안한 듯 몸을 뒤척였다. 두 사람 사이에 혹시 성적 불일치라는 고민이 있는 게 아닐까, 그것 때문에 침실을 따로 쓰고 있었다는 얘기…? "에마에게 잘못이 있다니?" 드레이크는 어안이벙벙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마에게는 그밖에 달리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순간 긴장으로 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아, 당신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어. 아냐, 에마는 아무 데도 이상이 없어." "그러면, 왜?" "쉿!" 드레이크의 타는 듯한 입술이 에마의 입을 막고 숙련된 솜씨로 애무하며 또다시 관능이 눈뜨게 만든다 …

두 사람의 사랑 행위는 이번에는 천천히 진행되어 갔다. 에마는

드레이크의 애무에 호응하며, 마치 햇살 아래 활짝 피어오르는 꽃처럼 본능이 명하는 대로 요동쳤다. 이윽고 진짜로 절정에 이르러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된 에마는 대응할 기력도 없이 드레이크의 품안에서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오늘 아침은 기분이 어때?" 드레이크는 단정한 몸차림으로 에마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약간 찡그리고 있다. "괜찮아요." "어지럽진 않아? 기억상실이 악화된 것 같지는 않고?" "전혀." 드레이크가 불붙인 육체의 불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나른하고 감미로운 사랑의 여운을 만끽하고 있는 에마는 몸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다. "오전중엔 침대에 누워 있도록 해. 난 가일스와 함께 우리 변호사한테 갈 거니까. 오후에 돌아오면…" 아침식사 쟁반을 들고 하녀가 들어왔기 때문에 드레이크는 말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몸을 굽혀 에마의 볼에 키스했다. "돌아와서 얘기를 계속하지…" 얘기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걸까 … 대관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뭔가 숨기고 있다면… 기억상실은 일시적이라곤 하지만, 정말 기분 나쁜 것이었고 맥이 빠진다. 그렇다고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드레이크는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걸 모두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몽롱한 상태도 하루 이틀밖에 더 계속되진 않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으니 곧 모든 걸 알 수 있게 되겠지. 안정이 되지 않아서 에마는 샤워를 하기로 했다 오전중엔 내내 할 일이 없어 따분했다. 드레이크가 없으니까 쓸쓸하다. 이 불안감은 단순히 뇌진탕의 후유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화장이라도 할 생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문이 열리는 것이 거울에 비친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드레이크가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들어온 사람은 생면부지의 어떤 여자였다. "어머! 기분이 어떠냐고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군. 드레이크는 애인으로선 최고였겠죠?" 비앙카! 그렇다. 이제 생각났다. 이 여자가 누구인 것을 알자 에마는 구역질이 났다. "드레이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때까지만 당신을 이용하고 그리곤 끝이에요.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곧 다른 여자들에게로 전전할 테니까." 비앙카는 에마의 약혼반지를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난 다 알고 있어요. 가일스에게 우리 사이를 숨기려고 당신을 방패로 삼고 있다는 걸. 우리가 과거에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말예요. 상담을 성공시키고 싶어서 숨기고 있는 거죠. 드레이크는 당신을 용케 속일 수 있었지만 나한테는 그게 통하지 않아요. 우선

그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도저히

드레이크가 좋아할 타입이 아니거든요." 에마는 시커먼 어둠이 입을 벌려 자기를 삼켜 버리는 것처럼 여 겨졌다. 비앙카의 볼에 칠한 연지가 너무 진하다고 생각하면서 에마는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곳은 비록 고독한 공간이긴 했지만 자신을 지켜 주는 곳이기도 했다. "에마?" 곧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차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드레이크가 방에 들어설 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는 체했던 것이다. 그녀에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대로 자기를 내버려 두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 머리에 떠오른 건 비앙카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에마는 사실 드레이크와 약혼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앙카가 눈치채서는 곤란하다. 에마가 실신하자 깜짝 놀란 비앙카는 가정부를 부르러 갔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두 사람이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을 정도였다. 간신히 침대까지 가서 누우며 두 사람을 방에서 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누우면 기분이 좀 가라앉으려니 했는데 머릿속은 더욱 빙빙 돌 따름이었다. 치욕감과 자기 모멸감이 번갈아 가며 에마를 괴 롭혔다. 기억이 분명히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하루라는 시간이 흘러가 버린 뒤였다.


아, 그런 추태를 부리다니 …

그 꼴을 드레이크에게 보인 것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드레이크는 에마가 기억상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역이용해서… "약혼자가 돌아왔는데 키스도 안해 줄 거야?" 드레이크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그녀는 격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를 때려눕혀서 자기가 느끼고 있는 치욕감을 얼마간이라도 보상받고 싶다. 하지만 그를 책망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정작 책망받아야 할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몸을 던지지 않았던가. 무척 마음이 아팠지만 그것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다 한들 결코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으리라… "도저히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데요, 드레이크." 냉정하게 말한 건 스스로 생각해도 잘한 것처럼 느껴졌다. "난 다시 기억을 되찾았어요. 유감스럽게도 몇 시간 늦은 것 같지만." 분노가 어린 드레이크의 눈동자와 붉게 물들어 가는 얼굴 표정에 에마는 놀랐다. "그렇게 됐군. 생각했던 것만큼 자기의 도덕관념이 견고하지 못한 데 충격을 받은 모양이군 그래. 하지만 에마, 인간은 누구나 완벽할 순 없어." "뭘 말하고 싶은 거죠? 난 그때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던 거예요…" "아냐, 당신은 다 알고 있었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라고 있던 것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야. 당신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래서 내 자신이 한심한 거예요." 그녀는 씁쓸하게 대꾸했다. 드레이크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눈이 험악하게 변했지만 에마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9 뉴욕에서의 일을 끝까지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의지력과 자제심이 필요했는데, 에마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잘 견뎌냈다. 계약을 맺을 때까지는 드레이크의 약혼녀노릇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다. 게다가 도중에 도망가는 꼴을 비앙카에게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괴로움은 여전했다. 교섭이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고도 또 일주일이나 걸렸다. 그동안 드레이크가 자신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에마는 무척 신경을 썼다. 본심과는 정반대의 무관심을 가장하고, 비앙카의 빈정거림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드레이크가 에마 따위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하는 노골적인 모욕에서부터 음흉한 복선이 깔린 언사에 이르기까지, 비앙카는 계속해서 공격을 가해 왔지만 에마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에마가 양쪽의 적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동안 마침내 교섭은 쌍방이 합의하기에 이르렀고 조인의 날이 다가왔다.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에마는 드레이크를 죽 피해 왔는데, 그 역시 함께 있을 때는 아주 조심조심 대하는 눈치였다. 순결을 뺏긴 데 대한 보상을 요구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에마가 경험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것을 무시하고 에마와 사랑을 나누었으니 단순히 자신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아 버렸다는 게 그녀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몇 번인가 드레이크가 그 일을 얘기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에마는 얼굴을 외면하고 무시해 버렸다. 그럴 적마다 드레이크는 왜 안 된다는 거냐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를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그날 오전 내내 교섭의 마무리에 골몰해 있던 드레이크는 몹시 지쳐 있는 듯했다. 피부의 윤기도 사라지고 신경은 날카로와져 있었다. 전의 드레이크의 태도는 야유가 가득 찬 우수 어린 태도였는데, 에마가 기억을 되찾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난 이래로는 시큰둥한 표정과 신중한 태도로 변해 있었다. 자신이 기억이 없을 때는 그 틈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실망해서 저러는 걸까. 훨씬 전부터 드레이크는 우리 두 사람이 결국엔 그렇게 될 거라고 말해 왔지만 그렇게 비열한 수단을 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다만 웃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었다.

한마디

거짓으로라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힘 따위라곤 전혀 없었을 텐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거야? 에마의 의사와는 달리 애정없이 당신의 육체가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거야?" 얼마나 가혹한 말인가. 너무나도 애가 탄 나머지 에마는 드레이크를 사랑하고 있다고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꾹 참았다.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애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결코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럴까요?" 에마가 입을 열자 드레이크는 무척 긴장된 표정을 보였다. 마치 무슨 결정적인 말이라도 나올까 두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쩐지 우리의 기억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군요. 즐겼다는 따위의 말은 도저히 사용할 마음이 없어요." 자칫 약해질 것만 같은 마음에 채찍질을 가해서 그렇게 말하고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드레이크는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번뜩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끝난 일이야 … 침실 문을 열며 에마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속삭였다. 계약도 끝났고 두 사람은 오늘밤 비행기 편으로 런던에 돌아가는 것이다. 얼마나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가. 뼛속까지 지쳐 있었다. 몸도 마음도 갈갈이 찢겨져 있다. 사랑에 굶주려 있지만 그것을 달랠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다 해도, 그대로 애인으로서의 관계가 지속되었다 해도, 에마의 마음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건 드레이크의 정열만은 아니었다.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드레이크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그 소망은 에마의 영혼을 심하게 흔드는 듯했다. 모든 정력을 빨아들이고 의지의 힘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릴 정도로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까지 침식하고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두 사람은 거의 말이 없었다. 한마디라도 입을 열면 목이 메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만 같아 두려웠다. 거의 런던에 도착할 때쯤 되어 드레이크가 불쑥 말을 꺼냈다. "괜찮아, 에마…?" "전 아무 할 말이 없어요. 우린 거래를 한 거니까요. 난 자신의 계약을 이행했어요. 그것으로 끝이에요." 에마는 그의 변명을 막기라도 하듯 빠르게 말했다. "빈정대고 있군!" 에마는

도저히

드레이크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가

없었다.

겨우

그녀는

입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당신의 말대로 된 셈이군요. 결국 그렇게 되리라고 당신은 선언했었죠." 드레이크의 비열함만을 책망하며 상대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에마는 간신히 자기자신을 지탱했다. "당신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무슨 할 말이 있어요? 그렇게 하지 않고선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로 남자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없었던가요?" "내게 요구한 건 당신이었잖아." 목이 쉰 듯한 드레이크의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아파온다. 저 목소리엔 그의 진정한 심정이 나타나 있는 듯한데… "네, 그래요. 그때 난 당신을 약혼자로 완전히 믿고 있었으니까요." "에마, 당신은 내가 속였다고 책망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데 있어선 당신이 한 수 위야. 그것보다 그때 에마가 날 약혼자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믿었던 건 어째서인지 얘길 해봐." 진실을 말했다간 드레이크에게 나의 본심을 눈치채이고 만다… 에마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글쎄요, 그걸 알 수 있다면 나도 좋겠어요. 지금까지의 경험 가운데 그날 밤의 일만큼 이해할 수 없는 건 없어요." 드레이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콧날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면 자기에게 화를 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묵묵히, 그러나 싸늘히 긴장된 심정으로 세관을 통과해 밖으로 나와서 택시를 탔다. 벌써 밤 10 시가 넘었기 때문에 드레이크는 자기 아파트에서 자고 가라고 권했다. 에마가 쌀쌀맞게 괜찮다고 대답하자 그의 볼이 붉어졌다.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가엾게 여겨졌다. 드레이크가 더 이상 자기와 말다툼할 의사가 없는 듯해서 그녀는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가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내리자 에마는 겨우 안심을 했다. 사치인 줄은 알지만 늦은 시각이었으므로 그대로 택시로 집까지 가기로 했다. 지쳐 있었기 때문에 런던에서 호텔을 잡는 수고가 귀찮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집이 주는 편안함이 그리웠다. 마치 상처입은 짐승이 보금자리로 돌아가듯이 에마는 자기에게 익숙한 장소에서 보호받고 싶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피곤한 몸을 택시의 가죽 시트에 깊게 묻었다. 예상했던 대로 관사의 불은 꺼지고 주위는 암흑이었다. 밤에 외출할 일이 없으면 부친은 비교적 일찍 침실로 올라가 버린다. 갖고 있던 열쇠로 현관을 열고 홀에 짐을 내려놓은 다음 에마는 침실로 올라갔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낯익은 자신의 방…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곳을 나갔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사이에 얼마나 자신의 인생이 변해 버리고 말았던가. 드레이크를 사랑하게 된 사실, 그것으로 괴로와하고 노골적인 그의 욕망에 저항도 해보았지만 그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침대에 들면서 그녀는 쓰라린 추억을 짓씹고 있었다. 내일은 앞으로의 인생설계를 다시 세워야지. 하지만 그것은 내일 생각할 일이다. 지금은 다만 깊은 수면과 망각, 그것만이 자신에게 필요했다. 되도록 깊이 잠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에마가 예상하지 못한 첫 번째 문제는 부친이 이토록 걱정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점이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성격이 맞지 않아서 파혼했노라고 아주 간단하게 부친에게 말했다. 부친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아주 신중하게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너희 두 사람의 성격은 잘 맞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카밀라와는 달리 네게는 너를 이길 수 있는 강한 성격의 남자가 아니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약한 인간한테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까."


에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와의 약혼을 파기했다고 해서 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에마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아버지의 친구이신 카터 교수의 일 말인데요, 아직 사람을 찾고 있나요?" 부친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딸을 보고 있었지만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비어 있을지도 모르지. 알아볼까?" "네, 좀 부탁해 주세요.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어요." "도망치다니, 너답지 않구나." 그녀는

다만 어깨를 으쓱했다.

진상을

털어놓더라도

이러쿵저러쿵

말할

아버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전말을 얘기하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바르는 것과 같은 괴로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기분이 후련해질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탄하거나 고민하거나 하는 시간을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오후 짐정리를 끝내고 에마는 산책을 나갔다. 조만간 카밀라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결혼생활을 하고 있을까? 아버지도

아직 만나지

못한

같던데.

데이비드와 카밀라가 지난주에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건 아버지로부터 듣고 있었다. 에마가 가볍게 노크하자 로라가 문을 열어주었다. 언제나처럼 에마를 보더니 사뭇 기쁜 얼굴로 맞아 준다. "벌써 뉴욕에서 돌아왔어요?" 그녀의 눈은 재빠르게 에마의 왼손으로 쏠렸다. 그리고는 반지가 없는 왼손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숨을 죽이며 긴장하는 눈치다. "보는 대로예요.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아서… 그래서 여행도 일찌감치 끝냈어요." 로라는 곧이들은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지요. 카밀라를 만나러 오셨죠?" 에마가 홀에 들어서자 로라는 한쪽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로라가 고마왔다. "카밀라는 거실에 있어요. 난 커피를 준비하겠어요." 카밀라는 잡지를 보고 있다가 에마가 들어가자 뭔가 불쾌한 표정이다. "어머, 정말 예쁘다." 에마의 어조는 어린애를 달래는 투였다. "그을은 게 참 보기 좋구나, 카밀라. 바베이도스는 어땠어?" "그저 그래. 뉴욕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 드레이크는 어디에 있수?"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아니?" 에마는 냉담한 표정이 되지 않도록 살짝 웃어 보였다. "파혼했단다." 카밀라가 에마를 응시하며 막 입을 열려고 할때 데이비드가 들어왔다. 그는 아내에게 다가가더니 다정하게 키스를 했다. "집을 관리한다는 건 정말 지긋지긋한 노릇이야.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으면 마음도 들뜨고." 데이비드가 진심으로 카밀라를 사랑하고 있는 듯해서 에마는 내심 부러움으로 가슴이 죄어드는 듯했다. 드레이크가 이런 식으로 나를 생각해 준다면 … 그런 마음이 얼굴에 나타났던 것 같다. 카밀라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었다. "안색이 나쁜데, 괜찮겠어?" "괜찮아." 순간 어지러웠지만 에마는 거짓말을 했다. "시차 때문이야 어젯밤 늦게 돌아왔거든." "언니는 파혼했대요." 카밀라가 남편에게 보고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에마는 부친에게 그랬듯이 약간 어깨를 으쓱했다. "특별히 극적인 일이 있었던 건 아니야. 다만 인생관이 서로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았을 뿐이야." "그런 거라면 내가 진작에 가르쳐 주지 않았수." 카밀라는 우쭐해서 말한다. 언제나 자기 혼자 각광을 받고 싶어하는 성격의 카밀라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은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 끝난 거군.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여름 동안은 카터 교수님 연구의 자료정리를 도울 생각이야." "그런 식이니 드레이크와 잘 맞지 않는 게 당연하지. 그런 건 그 사람 취미에 맞지 않는다니까." 데이비드가 아내를 쏘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카밀라는 종종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해서 남편을 놀라게 하곤 한다. 신경이 둔한 데이비드는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은 카밀라의 술책이 드러난 것 같았다. "그 남자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그런 거야 신문을 보면 누구라도 알죠. 이상하군요? 질투를 하다니. 언니,

"어머 …

미안하지만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가 주지 않겠어? 우린 오늘 저녁 시어머님 친구분 댁에 식사초대를 받았거든. 난 준비를 해야 해." "시간이라면 충분히 있잖아. 게다가 에마는 당신 언닌데, 모처럼 이렇게…" "나도 이젠 집에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괜찮아요. 즐거운 식사시간이 되길 바래." 집으로 돌아오면서 대체 무엇 때문에 카밀라가 남편을 저런 식으로 대하는지 에마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벌써 결혼생활에 싫증을 느낀 걸까? 질투하는 남편을 보고 즐기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자기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카터 교수의 일자리는 아직 있었다. 적당한 사람이 없는 탓도 있었겠지만 쥐꼬리만한 급료를 보고 올 사람이 없다는 게 더 분명한 이유였다. 지금의 에마에게는 드레이크의 존재를 잊기 위해서는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조건이 나쁘다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추억이란 마음대로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마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도 않았다가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눈깜짝할 사이에 체중이 3kg 이나 빠지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홀쭉해진 뺨에다 수심이 가득한 자신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일은 재미있었다. 학생이 없는 케임브리지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곳 같아, 낮잠을 자다가 혼자만 남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에마는 이러한 침체된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초조한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신은 드레이크의 압도하는 듯한 존재감에 굶주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에마는

이곳으로

오고

나서

번이나

카밀라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퉁명스러운 응대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구실에 가니까 전화를 해달라는 카밀라로부터의 전갈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전화를 걸자 로라가 나왔다. 카밀라를 부르러 간 사이에도 에마는 이것저것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언니유?" "그래,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니?" "데이비드 때문에 그래. 너무 완고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뭐라구?" 카밀라의 얘기는 과장이 많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신중하게 들을 필요가 있다. "내가 드레이크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는 거야. 무척 화를 내고 있어. 아무리 해명을 해도 들으려고 하질 않아. 언니, 어떻게 좀 해주지 않을래?"


"뭘 어떻게 하라는 거니? 네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데 내가 설득한다고 곧이듣겠니?" "언니랑 둘이서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면 돼. 언니, 도와 줘요. 데이비드는 이혼하자고 할지도 몰라." "그럴 수가…" 자신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카밀라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언닌 몰라요. 난 어쩌면 임신인지도 몰라. 하지만 데이비드와는 당분간 아기를 갖지 않기로 했는데, 그걸 말하면 누구의 앤지 모른다고 몰아세울 게 뻔해. 어떻하면 좋지. 유산도 생각했지만…" "안 돼, 카밀라. 그건 말도 안 돼." 카밀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옛날부터 카밀라는 아기 낳는 일을 지독히도 겁냈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최근에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어른이 된 거라고 에마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정서가 불안정하면 태아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가 없다. 만약 데이비드가 진심으로 카밀라의 불륜을 의심하고 있다면…? 에마는 장차 일어날지도 모를 불행한 일을 성급하게 상상해 보았다. 카밀라는 여전히 울기만 할 뿐이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려고 노력하면서 동생에게 울음을 그치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지, 언니? 무서워." 카밀라는 겁을 먹고 있었다. 연극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 데이비드하고 얘기를 나눠 볼까?" "안 돼, 그런 정도로는 소용이 없어." 카밀라의 목소리는 필사적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어. 언니와 드레이크가 함께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납득할지도 몰라." "그건 불가능해." 드레이크와 만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해 온다. "우리 약혼은 깨진 거야. 계속해서 만나는 시늉을 해달라는 따위의 부탁은 도저히 못해. 우선 데이비드가 믿지 않을 거고." "믿게 해야 돼." 카밀라는 발작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고함을 질렀다. 수화기를 잡은 에마의 손은 핏기가 없어지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카밀라… 얘, 카밀라…" 에마는 동생을 달래려고 몹시 노력했다. "도와 줄 마음이 없는 거지?"


카밀라는 화가 난 듯 말했다. "우리가 이혼하게 돼도 상관없다는 거야? 알았어! 언닌 내가 싫은 거지?" "카밀라, 그만 해. 너도 정말…" 에마는 결국 언제나 이런 식으로 동생에게 양보해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침착하라는 거야? 데이비드는 이혼을 들먹일 거야. 난, 무서워…" 카밀라의 신음 소리는 어렸을 때의 일을 생각나게 했다. 에마는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알았다, 캐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드레이크에게 연락해서, 둘이서 이쪽으로 와줬으면 해." 에마가 승낙하자마자 카밀라의 어조는 매우 사무적이 되었다. "다음주에 디너파티를 열 테니까 드레이크와 함께 참석해 줘." "하지만 데이비드가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까?" "괜찮아. 걱정없어. 언니는 케임브리지, 드레이크는 런던에 있으니까 어느 새 다시 화해를 했는가 보다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나선 어떻게 되니? 거짓 약혼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순 없잖니." "그럴 필요는 없어. 이 소동이 가라앉고 나서 아기 얘기를 하면 그만이지. 그런 다음엔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이번뿐이야." 에마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태어날 아기 일만 아니었다면 쌀쌀하게 거절했을 테지만 언제나 감정적인 동생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두려운 건 사실이었다. "알았다, 드레이크에게 전화해서 부탁은 해보겠지만 그에게서 못하겠다고 나올 수도 있어." 그날

밤 에마는

드레이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에

올라

있지

않은

그의

전화번호를 아직 약혼중일 때 드레이크로부터 건네받았었다. 왠지 에마는 그 전화번호를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던 것이다. 드레이크와 자기를 연결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것만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곧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마가 이름을 대자 그는 크게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한 태도가 그녀로선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꼭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눈치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기분 탓이겠지 …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은 유혹을 간신히 물리쳤다.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드레이크 곁에 누가 있는 건 아닐까. 내 뒤를 이은 다른 여자 … ?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이건 어디까지나 카밀라를 위한 일이야. "에마잖아? 이거 놀라운데, 대체 무슨 일이지?" "좀 부탁할 게 있어서…" 상대의 비웃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그녀는 자신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마, 설마 임신했다고 말할 작정은 아니겠지?" 전화를 끊어 버리고 싶다. "아뇨, 그런 게 아니예요." 이를 악물고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그런 일이라면 결코 당신에게 알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아요." "아아 그래, 이곳에 돌아와서는 바빴겠지?"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울려 온다. "아버지가 된다는 뉴스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도저히 말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에마는 용건을 가까스로 전했다. "그래서?" 그녀가 어물거리자 드레이크가 재촉했다. "카밀라한테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약속했어요." 간신히 드레이크에게 부탁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다음주 디너파티를 연다는데 우리 둘이 함께 참석하면…" "어허, 당신으로부터 초대라니. 놀랐는걸, 에마. 어지간히 대담한데?" 에마는 드레이크가 일부러 자기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굴욕감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여자에게서 초대받은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허풍을 떨 것까지는 없잖아요?" "그런 경우는 대개 어떤 은밀한 속셈이 있어서 초대한 거지. 당신의 초대도 그런 종류인가? 에마, 나하고 침대를 함께하고 싶어서 초대하는 거야?" 에마는 드레이크와 사랑을 나눈 그날 아침의 감각이 자신의 몸에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드레이크를 소유하고 싶다. 그에 대한 갈망이 에마의 몸을 휩쓸자 실제로 아픔을 남기고 간 듯이 생각되었다. 드레이크의 사랑을 원한다. 이것을 채워 줄 사람은 드레이크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지금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에마가 잠자코 있자 드레이크가 쌀쌀하게 말했다. "나하고 침대에 같이 드는 일은 두번 다시 없을 거라고 한 당신의 말을 잊고 있었어. 때로는 그 자존심이 당신 스스로도 야속하게 생각되지 않아?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자존심이 상하는 건 스스로 용서하지 않겠지?" 드레이크의 말에 에마도 가만 있지 않았다. "당신과의 사랑 행위가 재미없어서 침대를 같이할 기분이 안 난다면 어떨까요. 아마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런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에마의 몸은 드레이크의 손이 닿는다는 생각만 해도 확 달아오르는 듯했다. "허, 그래? 혐오감을 나타내시는데, 당신은 정말 거짓말도 곧잘 하는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그날 밤 내 이름을 정열적으로 외쳐댄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게다가 당신의 반응만 하더라도 … 아냐, 그만두지.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온 건 아닐 테니까." 에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드레이크가 계속 말했다. "좋아, 에마. 카밀라의 파티에 함께 참석하기로 하지. 몇 시에 데리러 가면 되지?" 7 시 반에 오도록 당부하고 깍듯이 인사를 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은 악몽에 시달렸다. 흥분한 탓이라고 자신을 달래보았지만, 부은 눈으로 다음날 아침 잠을 깬 에마는 꿈 속에서 줄곧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이상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아침을 먹으면서 에마는 자신을 꾸짖었다.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어서, 그와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긴장감으로 몸이 굳어질 정도다. 하지만 결코 그런 걸 드레이크에게 눈치채여서는 안 된다. 에마는 진실한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닝커피를 마신 후 에마는 자기는 케임브리지에 일을 하러 온 것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일을 하고 있으면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 일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나은 처방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바람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몇 시간 동안을 줄곧 집중하려 해봤지만 결국 단념하고 말았다. 드레이크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강한 탓인가? 아니면 일의 내용이 치료약의 구실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일까. 일을 하고 있어도, 5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에마는 드레이크를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려왔다. 잊어야 해, 드레이크의 일은 모두.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10 일곱시 25 분. 앞으로 5 분 남았다. 드레이크가 지금 당장 와주었으면 하는 마음과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상반된 생각이 에마의 내부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에마는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있을까? 길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야. 에마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타일러 본다. 이런 사랑의 흥정은 카밀라의 장기인데 하고 씁쓸하게 생각했다.


드레이크는 7 시 반에 정확히 왔다. 차가 와서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문이 탕 닫히는 소리 …

에마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절대로 창가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드레이크가 도착하기 전에 문을 연다거나 그런 짓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갖가지 충동을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드레이크를 본 순간 지금까지 억누르고 있었던 아픔과 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에게 그냥 안겨 버리고 싶었다. 그 욕구를 억누르는 데는 대단한 의지력이 필요했다. 파티복 차림의 드레이크는 정말 세련된 모습이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힘차고 당당한 걸음걸이는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드레이크의 민첩한 움직임에 에마는 정글에서 은밀하게 돌아다니는 짐승의 모습을 떠올렸다. "준비는 다 됐어?" 에마가 드레이크를 향해 발을 내딛자 그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오늘밤을 위해서는 무엇을 입을까? 에마는 몇 시간이나 고민했었다. 이토록 망설여 본 적은 없었다. 자기 최고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 그러나 법석을 떨었다는 듯한 인상은 엿보이고 싶지 않다. 망설이던 끝에 그녀는 산뜻한 실크 투피스를 입기로 했다. 우아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주는 옷이었다. 예산을 크게 초과하는 비싼 옷이었지만 그만큼의 가치는 있었다. 드레이크는 에마의 홀쭉한 모습에 만족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에마는 그 눈길만으로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야위었군." 드레이크의 관찰력은 에마를 놀라게 했다. "그래요?" 참으로 멋없는 대답이야. 에마는 언뜻 어깨를 움츠렸다. "설마 실연의 괴로움으로 번민했기 때문은 아닐 테지?" 순간 그녀는 얼어붙는 듯했다. 어쩌면 저렇게도 냉혹한 말을 할까. 하지만 져서는 안 된다. 억지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듯 에마는 드레이크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방금 한 말에 별 의미는 없는 성싶었다. 창백해진 에마의 얼굴을 보고 있는 드레이크의 눈은 특별히 어떤 속셈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에마가 야윈 그 진짜 이유를 알고서 말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드레이크도 좀 수척한 듯하다. 그날 밤 이후로 처음 에마는 드레이크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런가?" 냉엄하면서도 찌르는 듯한 드레이크의 어조에 그녀는 당황했다. "뭐가요?"


에마가 가볍게 되물었다. 대답을 하는 대신에 드레이크는 에마의 얼굴에 살짝 손을 댔다. 얼굴이 양손에 감싸인 채, 싫어도 드레이크의 눈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버렸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이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달아오르고 화끈거려 그녀는 몸을 빼고 싶었다. 순간 드레이크의 손바닥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 하지만 그런 추태를 부리기 전에 몸을 떼어 놓지 않으면 안 돼! "날 속일 생각은 말아 줘." 여전히 드레이크의 목소리는 엄하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잘 알지? 그래 당신이 몸도 마음도 모두 바칠 수 있는 남자는 찾았어?" 드레이크의 비웃는 듯한 말투에 에마는 야멸차게 응수했다. "물론이죠." 대답은 짧았다. 에마는 자신이 순간적으로 드레이크의 말장난에 휘말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 자신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가 아니라면 남자와 침대에 들지 않겠다고 드레이크에게 선언한 걸 여전히 야유조로 물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방금 한 대답에 드레이크는 잠시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이 힘없이 에마의 뺨에서 떨어졌다.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카밀라가 우릴 걱정할 테니까, 떠나죠." 얼어붙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에마가 말했다. "물론 카밀라를 기다리게 하진 말아야지." 차 안의 두 사람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 앉아 있었다. 에마가 한 말 가운데 뭐가 못마땅해서 드레이크는 저렇게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이윽고 카밀라의 집에 도착했다. 카밀라의 시무룩한 태도에 에마는 기분이 상했다. 두 사람이 온 걸 귀찮아하는 듯한 표정이다. 대관절 난처한 게 누구지? 오늘밤의 디너파티도 그녀의 발상이 아닌가. 허탈한 마음이 에마의 가슴을 스쳤다. 데이비드는 에마에게 어설프게 키스를 하고는 드레이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정말 감쪽같이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에마는 데이비드를 훔쳐보며 감탄했다. 질투심으로 가득 찬 젊은 남편의 표정은 어디를 봐도 나타나 있지 않았던 것이다. 카밀라는 좀 과장이 심하므로 이번에도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식사준비를 거든다는 핑계로 에마는 남자 둘을 거실에 남겨 놓고 주방으로 갔다. 카밀라는 가정부 베리 부인과 얘기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불쾌한 듯한 얼굴을 에마에게 돌렸다.


"시어머님께서 오늘밤 파티를 달가와하지 않아. 어떤 친구분과 식사를 하시기로 되어 있는데, 우리도 함께 가자고 말씀하셨거든. 그 친구분은 데이비드가 정계에 진출하면 신세를 질 분이야." 도대체 일을 부탁한 게 어느 쪽이지? 에마는 가정부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은 목소리로 카밀라에게 쌀쌀하게 말했다. "오늘밤 일은 내 발상이 아냐. 네가 데이비드가 질투해서 곤란하다고 했기 때문에 드레이크에게 연락을 해서…"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메리 부인이 말을 걸어왔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으로 중단되었다. 에마는 나중에 동생과 단단히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분개하며 거실로 돌아왔다. 카밀라가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와 남자들을 식당으로 재촉했다. 데이비드와 드레이크는 특별히 적대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감쪽같이 숨기고 있는 거라면 데이비드는 에마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연극에 능한 거겠지. 지방의 정계에 투신한다는 게 어쩌면 데이비드에게 적합한 활약의 장(場)인지도 모른다. 에마의 우려와는 반대로 식탁은 화기애애했다. 데이비드가 독일산 포도주를 잔에 따라 주는 모습을 지켜보던 에마는 문득 그것이 벌써 세 잔째임을 깨달았다. 긴장하고 있는 탓일까? 좀 정도가 지나치다… 에마는 드레이크의 표정을 엿보려 했다가 곧 후회하고 말았다. 그녀의 시선에 엉키듯 드레이크가 똑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확 달아올라 얼른 외면했다. 몸이 떨렸다. 데이비드가 얘기를 꺼냈다. "여성은 가정에 있어야 해요. 아이가 있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유감이지만 그 이론엔 찬성하기 어려운데요." 드레이크의 말에 에마는 놀랐다. "생활고 때문에 일을 하는 여성 가운데는 아이와 지내는 시간이 가장 좋다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자식을 둔 주부라도 더욱 자기의 직업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건

이상론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의

부인이

직업을

갖고

싶다고

한다면

허락하시겠습니까?" 데이비드가 다그쳤다. "허락의 문제가 아니겠죠. 내가 생각하기엔 좋은 결혼이라는 건 부부가 서로 협력한다는 데 있다고 봐요. 아내가 자기 일을 갖고 싶다면 가능한 한 조력을 아끼지 않을 작정입니다. 아내 쪽에선 남편더러 일도 취미도 그만두라고 강요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아이가 생기면 어떡하죠?" 카밀라가 끼어든다. "그렇게 되면 주부는 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내게 가부를 묻는다면 예스입니다. 하지만 아내도 그렇게 하고 싶은가 아닌가가 중요하죠." "처형은 방송국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까?" 의기양양한 듯한 데이비드의 말투다. 세 사람의 눈이 에마를 주시했다. 드레이크의 말은 기뻤지만 고통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의 길을 택할 때 그것을 존중해 주려는 드레이크의 넓은 도량을 알게 된 것은 기뻤지만, 자신이 그 여자가 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니 슬퍼졌다. 세 사람 가운데 에마가 직장을 그만둔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은 드레이크뿐이다. 만약 내가 드레이크와 결혼해서 아내가 된다면 그때도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어려운 선택이에요 … 남편이랑 아이에게 모든 시간을 바치고 싶은 생각이 절반, 가정 밖에서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고 싶다는 자기 성취욕이 절반이라고나 할까요. 아무래도 애들 교육이 끝나면 다시 일에 돌아간다는 게 나 같은 사람에겐 이상적일지도 몰라요." "아니지, 그럼 안 되지." 드레이크의 말투가 너무나 단호했으므로 에마는 놀랐다. 드레이크를 얼핏 쳐다보다가 혹시 감추고 있는 본심이 드러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얼른 눈을 돌려 버렸다. "에마는

그렇게

하기에는

아까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야.

나의

조력자로서 활약해 주길 바래. 큰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고독하고 불안정한 자리라,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과 그 무게를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으니까." "부부가 함께 일을 해서 잘된 예가 없지 않을까요?" 데이비드가 말했다. 에마는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레이크의 말이 불러일으킨 몸 속의 폭풍우와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할 가능성이 없는 장래의 일을 자못 자신하듯 말하다니, 얼마나 남의 마음을 휘저어 놓고 있는지 알고서 하는 얘기일까. 아니,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에마는 자기가 드레이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지금은 전보다도 더 드레이크를 사랑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있고 남자로서 강하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


"포도주를 꽤 마신 것 같으니까 브랜디는 권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된 거요? 평소에는 잘 안 마시더니." "오늘밤은 나 자신의 껍질을 깨뜨려 보고 싶은 기분이에요." 에마는

데이비드에게 쌀쌀맞게 대답했다.

요즈음

식사가

불규칙했던

탓도

있지만

오늘밤은 여느 때와는 달리 포도주를 석 잔이나 마셔 에마는 머리가 붕 뜨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하필이면 데이비드의 설교를 들어야 하다니. "그러니 브랜디를 마셔야겠어요. 듬뿍 말이에요." 작별인사를 나눌 때쯤에는 에마도 과음을 후회하고 있었다. 기분은 가벼워졌으나, 몸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에마는 데이비드가 드레이크를 질투한다는 얘기가 대체 무슨 얘긴지 카밀라에게 확인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묘한 것은 그 디너파티는 드레이크와 에마를 위해 베풀어졌다는 공치사를 내세우는 듯한 태도가 카밀라의 표정에서 보였다는 점이다. 걱정돼서 찾아온 것은 드레이크와 에마 쪽인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차로 향하면서 에마가 그런 인상을 얘기하자, 드레이크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를 삐죽거렸을 뿐이었다. 차를 타고 안전벨트를 맨 후 등을 시트에 기대기 무섭게 눈을 감았다. 세상이 굉장한 속도로 돌고 있었다. 신나게 잘도 도는구나 생각하던 중 어느 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보니 주변이 캄캄해 어디에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드레이크, 도대체 어디죠?" 손목시계를 보고 에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럭저럭 두 시간이나 달리고 있는 것이다. "드레이크, 여기가 어디죠?" 대답이 없어서 그녀는 자꾸 되물었다. "벌써 2 시간이나 차에 타고 있어요." "우리 집에 가는 중이야. 천천히 당신과 얘기를 하고 싶어서." 너무나도 담담한 그의 어조에 에마는 공포를 느끼며 말도 꺼낼 수가 없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당신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드레이크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

그렇게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동안

취기가 말끔히 가시는 듯했다. "그거 유감이군. 하지만 단념해 줘야겠어. 달리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드레이크의 말이 맞다. 하지만 이렇게 당돌한 방법으로 자기를 집에 데려가겠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얘기를 할 셈일까? 일자리를 마련해 주려는 걸까? 아니면 강제로라도 관계를 갖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뉴욕에서 돌아와 3 주일이나 연락하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에마가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차는 좁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타이어가 현관 앞의 자갈 위를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양쪽에는 관목이 심어져 있는 것 같다. 차가 멈추자 불빛 속으로 솟아오를 듯이 서 있는 것은 튜더 왕조풍의 농가였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자꾸 증축된 것인 듯, 조화가 안 되는 곳도 보인다. "그리운 우리 집이야. 자, 내리지. 안아서 내려 줄까, 에마?" "걸을 수 있어요." 짐짓 위엄이 담긴 목소리를 냈지만 마음속으로는 겁을 먹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손을 댄다면 … 그런 생각만으로도 떨리는 에마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걱정할 건 없어. 드레이크는 날 사랑하고 있지 않으니까 말야… 드레이크의 집은 무척 호화로우리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정말 뜻밖이었다. 흰 벽과 검은 대들보로 지탱되는 이 집은, 정말 아늑한 기분이 들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가 있었다. 어린애가 놀고 개가 뛰어다니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이리라. 복도의 크림색 벽과 칠을 하지 않은 낡은 대들보의 조화에 에마는 더 한층 이 집에 호감이 갔다. "서재에서 쉬고 있도록 해. 이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 파티복은 영 거북해서." 드레이크는 성급하게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에마는 드레이크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을 채찍질이라도 하듯 그가 말한 방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벽면이 온통 책장으로 장식된 서재는 진짜 남성 취향의 방이었다. 신경이 과민해져서 아무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책장에 꽂힌 책 제목을 멍하니 눈으로 쫓고 있는데,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놀라움이 몸 전체를 감싼다. 다시 한번 소리가 나지 않을까 해서 그녀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에마는 현관 홀로 다시 가서 망설이듯 소리를 쳤다. "드레이크, 괜찮아요?" 대답이 없다.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불러봤으나, 여전히 대답이 없다. 그제서야 에마는 후닥닥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드레이크?" 머뭇거리며 방안에 들어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드레이크는 커다란 침대에 상반신을 드러내놓고 앉아 있었다. 남성용 화장수의 톡 쏘는 듯한 냄새가 코를 몹시 자극한다. "화장대에서 향수병이 떨어졌어. 그 바람에 셔츠 위로 물벼락을 맞았지. 방안의 냄새 고약하지 않아?" "냄새 좋은데요…"


드레이크의 보기좋은 몸매에 정신을 뺏겨 에마는 저도 모르게 쌀쌀맞은 어조가 됐다. 자연스런 대화조차 제대로 못하다니… "그렇게 생각해?" 일어선 드레이크는 소리지를 사이도 없이 에마를 향해서 팔을 뻗어왔다. "아아… 에마, 사랑해." 착 가라앉은 드레이크의 목소리. 취한 건 에마가 아니라 드레이크인가 보다. 그녀의 어깨에 드레이크의 손가락이 파고들고, 벗은 상반신에서 발산되는 열기가 그녀를 휩싸며 억눌린 욕망을 폭발시킬 기세다. "에마!" 드레이크가 신음했다. 그의 손이 팔을 미끄러져 내려와 손목을 꽉 잡더니 에마를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애태우듯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기쁨으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했지만 드레이크의 탐하는 듯한 혀의 움직임에 에마의 입술은 결국 열리고 말았다. 시간도 현실도 모두 정지돼 버린 듯한 느낌이다. 마법에 걸린 두 연인이 인간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세계로 힘차게 달려가는 것 같았다. 드레이크가 자신의 옷을 벗기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피부가 자신의 몸에 밀착했기 때문에 안도와도 같은 샘솟는 기쁨에 취해 있었다. 그가 에마를 안아올려 침대에 눕히고 몸을 겹쳐왔다. "에마, 정말 아름다와. 정말 여자다운 모습이야 … 에마의 몸은 구석구석까지 기억하고 있지만…" 드레이크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여성미 넘치는 곡선을 사랑스러운 듯 더듬어가고 있다. "그날 밤의 당신의 모습을 구석구석까지 분명하게 뇌리에 새겨 두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기억 같은 건 실물에 비교하면 태양과 별만큼이나 차이가 있군." "반짝이는 별이 훨씬 좋아요." 드레이크의 애무에 관능의 불이 붙은 에마가 띄엄띄엄 대답했다. "기억 속에선 지금 내 손이 애무하고 있는 비단 같은 피부의 감촉은 되살아나지 않거든. 내가 만지면 에마의 몸에 전율이 흘러. 내 육체에 반응하는 당신의 전율이…" 드레이크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자 에마는 사고 자체가 그 격렬함 앞에 정지하는 것 같았다. 양팔을 드레이크의 목에 감고 불타는 그의 피부에 손가락을 댄다 …

에마는

이대로 자기가 돌아올 수 없는 깊은 정염의 늪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드레이크가 가볍게 만지기만 해도 육체는 통증을 느끼고 희열에 떨린다. 에마의 반응을 한층 더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 드레이크는 뜨거운 입김을 그녀의 귀 속에 계속 불어넣는다.


갈망, 고뇌, 애정, 모든 것이 한 데 어우러져 하나의 커다란 물줄기가 되어 에마를 압도했다. 이 열에 들뜬 것 같은 그녀의 반응은 한층 더 드레이크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마치 화인을 찍는 듯한 드레이크의 입술이 에마의 곡선을 타고 흐르고, 바야흐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애타게 갈망하여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육체를 태우고 있었다. 에마가 갑자기 활 모양으로 몸을 젖히자 드레이크가 에마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는 기쁨이 자기의 깊은 속으로부터 샘솟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드레이크 없이 살아 있을 수 있었다니… 얼마나 이 사랑에 굶주리고 있었던가. 좀더 드레이크의 가까이에 있고 싶다. 드레이크에 의해 자신의 내부에 잠들어 있던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며 에마는 관능의 절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그와 결합했을 때도 확실히 기쁨이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듯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짐으로써 상대를 환희에 휩싸이도록 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람이 동시에 사랑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완전한 파트너가 된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에마! 아아, 에마!" 드레이크의

목소리는 그녀의

몸 위에서

떨리고

있었다. 희열이

커다란

파도처럼

밀어닥치며 자신을 덮쳐 버릴 듯한 그 순간, 에마 역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드레이크의 이름을 웅얼대고 있었다. 그의 품안에서 만족을 맛보며 편안히 몸을 맡기고 있는 그런 상태에서 꼼짝하기도 싫었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있나를 생각하는 것조차도 굉장히 힘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에마의 눈꺼풀은 굳게 닫혔고, 동그랗게 꼬부린 몸은 드레이크에게 안긴 채였다. 눈을 뜨자 어느덧 주위는 밝아 있었다. 눈을 뜨기 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상쾌한 권태감이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에마는 눈을 감은 그 상태에서 기지개를 켜고는 걸치고 있던 이불을 밀어붙였다. 자연히 에마의 자태는 관능적인 선을 그렸다. "사랑을 취한 여인의 모습이로군 그래." 드레이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에마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몸을 움츠리며 이불을 끌어올리려 손을 뻗었다. 순간 그 손을 드레이크가 눌렀다. 이렇게 가깝게 드레이크가… 에마는 눈을 떴다. 짧은 잠옷 차림으로 수염이 자란 드레이크가 눈앞에서 에마의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에마?" 드레이크가 쓸씁한 어조로 물었다.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거야? 보아하니 당신이 찾아냈다는 애인도 대단한 녀석은 아닌 것 같군. 어젯밤의 당신으로 판단하건대 당신은 나 이외의 남자와 육체적 기쁨을 맛본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던데." "그래요? 그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얘기군요." 에마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잘 생각도 않고 드레이크의 말에 응수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어젯밤의 두 사람의 행위를 단순히 육체의 욕망만을 만족시킨 것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서로의 애정에 도움을 주지." 드레이크가 에마의 말을 받아 계속했다. "하지만 당신이 찾아냈다는 남자는 당신의 욕망을 채워 줄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아. 당신의 육체가 그것을 단적으로 고백하고 있거든. 당신의 육체는 날 갈망하고 있어. 내게 굶주려 있어!" 경멸하는 표정으로 자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말을 일부러 한마디 한마디 강조하고 있었다. "부정해도 소용없어." "난 취해 있었어요." 에마는 낮게 중얼거리고는 드레이크로부터 얼굴을 외면했다. 달리 체면을 세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냈느냐고 물었을 때 어째서 무심코 그렇다고 대답해 버렸을까. 그 남자가 누구인지 언제까지 숨겨둘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에마다운 얘기군." 드레이크의 눈은 싸늘하고 엄숙했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의 선입관에 현실을 무리하게 뜯어맞추려고 한단 말야. 오늘 아침에도 취해 있다고 하지는 못하겠지?" 에마는 머리를 저었다. 이 침대로부터, 드레이크로부터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지금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당신의 지론이 조리에 닿는 것인지 시험해 보기로 할까?" 드레이크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순간 에마는 몸을 움츠리며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드레이크의 동작이 더 빨랐다. 한 손으로 그녀를 침대에 밀어붙이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쥐고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일순간이지만 공포가 에마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녀는 몸을 경직시켰다. 드레이크의 입술의 다가와서 에마의 입술을 덮치자 천천히 희열이 몸 전체로 퍼져나가 육체가 녹아나는 것 같았다. 드레이크의 애무에 자신의 육체를 굴복시켜서야 되겠는가. 에마는


싸울 태세로 몸을 뒤로 젖혔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었건만 오히려 상대의 욕망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안 돼!" 드레이크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분명하지 않다. 그는 에마의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응시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루종일이라도 좋아. 당신과 내가 얼마나 육체적으로 잘 어울리는지, 얼마나 멋진 느낌을 가질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겠어. 한순간 한순간 그것을 충분히 볼 수 있게 해주지." "사랑이 없는 관계가 무슨 가치가 있다는 거죠?" 에마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말을 배신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당신에게 있어서 말인가? 쓸데없는 소릴 하는 게 아냐, 에마." 에마의 주홍색으로 물든 얼굴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드레이크는 응시하고 있다. 서로 사랑을 나눌 때,

"어젯밤

당신도

충분히

즐겼지 않아? 복습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드레이크의 손만 닿아도 자신이 그것을 방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에마는 잘 알고 있다. 드레이크의 손가락이 에마의 가슴 끝 부분을 원을 그리듯이 만져 온다. 어떻게든 저 손가락의 움직임에 응하지 말아야 하는데… 타오르는 관능을 억누르고 있다는 건 고문을 견디는 일과 다름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에마의 육체는 전율하며 드레이크에게로 향한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와 처음에는 부드럽게, 이윽고 점점 아플 정도로 접촉해 온다. "자, 내가 싫다고 말해 봐." 가라앉은 듯이 뜨겁게 탁해진 목소리로 드레이크가 말한다. 그녀를 내리누르는 그의 육체도 에마처럼 욕망을 느끼고 있음을 안 그녀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날 갖고 싶지?" "사랑이 없이는 싫어요, 드레이크" 에마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드레이크의

사랑을

하는데… "제발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아요." "괴롭힌다고?" 순간 드레이크는 에마의 양팔을 잡고 끌어내렸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드레이크가 사납게 대든다.

부정하려고

했다.

현실로

돌아가야


"내 애간장을 끊어 놓고서… 마법이라도 있다면 내가 당신을 어떵게 생각하는지 그대로 보여 주고 싶어. 그런 마법이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어. 에마는 나한테 육체적으로 반하고 있는 거야. 그건 당신도 부정하지 못하겠지. 둘이서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는지 가르쳐 주겠어." "그러다 당신이 나한테 싫증이 난다면? 그땐 어떡할 거예요?" 에마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난 당신이 사귀었던 과거의 여자들과는 달라요. 그런 건 못 참아요." "당신에게 싫증이 난다고?" 에마가 알지 못했던 드레이크의 한 단면이 그 목소리에 엿보였다. 에마는 드레이크가 쓰라림을 느끼는 유형의 인간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아아, 에마.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걸 왜 몰라. 처음에 카밀라 일로 당신이 면담을 신청해 왔을 때, 사실 난 잘라 거절하고 싶었어. 그후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지. 당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당신을 만났지." 드레이크는 자조하는 듯한 웃음을 떠올렸다. "만난 순간 당신을 소유하고 싶어서 고민할 정도였어. 잡지의 사진을 찍는 걸 에마가 승낙했을 땐 솔직히 기뻤어. 즉 당신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구나 하고 안심했지. 그런데 당신은 텔레비전을 그만두었어. 그때 에마에 대해 가졌던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 증명된 셈이야. 외면적인 아름다움뿐만이 아닌, 에마는 마음도 생각하는 것도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그는 잠시 옛일을 떠올리듯 말을 끊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새롭게 에마와 사귀고 싶었어. 하지만 언제나 그 사진이 걸려서 우리를 방해하리란 걸 알고 있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일을 꾸며서 에마가 나와 약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몰아넣은 거야. 당신을 궁지에 몰아놓고 열심히 당신의 마음을 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항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에마가 빈정거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대로 됐군요." "그래." 드레이크의 어조는 신랄했다. "당신이 날 진짜 약혼자로 생각했을 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에마가 알까? 당신이 나를 원했을 때 난 그런…"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드레이크는 지친 듯 머리를 저었다.


"그날 밤 에마를 품에 안아선 안 됐었어. 그 시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어. 에마, 시도해 보지 않겠어? 우리들 두 사람이 지금의 관계로부터 지속적인 것을 만들어 보지 않겠어?" 놀란 기색을 눈치채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녀는 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영속적인 관계라구요? 그건 당신이 그야말로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잖아요?" 에마는 차갑게 말했다. "그런 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전의 일이야." 드레이크의 담담한 어조에 한순간 에마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멍하니 있는 사이에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에마가 찾아냈다는 남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그 녀석을 사랑할 리가 없어.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 나와의 관계에서 그토록 불타오를 리가 없지. 누군진 모르지만 에마는 그 녀석을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 사람은 당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에마는 가슴속에서 샘솟는 짜릿한 기쁨을 억누르며 쌀쌀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드레이크? 그건 바로 당신인걸요." 그리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드레이크를 향해 계속 말했다. "사랑해요." 순간 드레이크가 몸을 쓱 뺐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반은 얼굴을 외면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드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가엾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면, 잊어 줘.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직은 더 믿어져. 지금의 우리들의 관계로도 결혼해서 오래도록 잘 살 수 있으리라고 난 믿고 있어. 난 거짓 사랑, 거짓 희망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드레이크." 에마는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드레이크를 껴안았다. 눈부신 미소를 띠고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이건 연극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가엾은 건 바로 나예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

당신이 나를 원하는 건 단순히 섹스 상대로서뿐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내가 사랑과 욕망이 결부되지 않으면 싫다고 말했을 때, 내가 바라고 있던 것은 당신에게 욕망의 상대로서만 필요한 게 아니고 정신적으로도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나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설마 날 사랑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 알게 했다가는 당신이 그걸 자신에게 편리하도록 이용해서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려웠어요." "어지간히 비비꼬아서 생각했군." 자조하는 듯한 드레이크의 어조였다. "벌을 받은 셈이지. 결혼하면 평생 에마를 놓지 않을 거야." 에마는 놀리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물론 그렇지 않으면 결혼은 안해요." 드레이크는 머리를 숙여 에마에게 키스했다. 에마의 몸과 하나가 된 드레이크의 육체, 그 심장의 고동이 에마의 몸에 울려퍼진다. 드레이크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니. 그래,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야. 그 생각은 기쁨이 되어 에마의 몸 구석구석에 퍼져갔다. 드레이크가 침대에 나란히 눕자 그녀는 꿈꾸는 듯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정말 이상해요. 데이비드가 당신과 카밀라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

카밀라가

디너파티를 열어 우리 두 사람을 억지로 초대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우린 서로 진실을 모른 채 끝나 버렸을 거예요." 드레이크가 잠옷을 벗고 있던 손을 한순간 멈췄다. 아침 햇빛이 드레이크의 멋진 구릿빛 육체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쳐 에마는 비단같이 매끄러운 그 육체를 애무했다. 환희의 물결이 그의 몸에 퍼져가는 것이 전해 오자 에마는 자신의 몸 역시 기쁨으로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두려운 얼굴로 조용히 얘기를 꺼냈다. "털어놓을 게 있어."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지 않으면

된다는

걸까?

사랑하고

있다고 맹세한

것은

거짓말이었다는 걸까…? 아니 그렇게 냉혹한 사람은 아닐 텐데. "실은 이번 일은 카밀라한테 내가 시킨 일이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차를 망가뜨렸을 때

우리

집에서

잤다고 데이비드에게 말하겠다고

협박했지.

허풍을

것은

확실하지만… 데이비드에게 얘기할 마음은 없었어. 덕분에 카밀라는 당신한테 허둥지둥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고 당신은 진정으로 동생을 사랑하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동생을 도와 주리라고 생각했거든. 만약 내가 직접 당신에게 접근한다면 도망칠 게 뻔했으니까." 드레이크는 진지해진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에마를 만나고 싶어서, 에마를 갖고 싶어서 난 미칠 것 같았어.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과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잘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어제 저녁 에마를 만난 순간 에마한테 폭탄을 맞은 기분이었지.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말에 질투심으로 미칠 것 같았어. 누군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으면서 내게 그토록 정열적으로 반응을 보이다니, 믿을 수 없었지. 어쨌든 당신을 침대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 거야. 우리들 사이의 벽을 어떻게 해서든지 무너뜨려 버릴 필요가 있었던 거지. 당신에게는 나밖에 없다는 걸 가르쳐 주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난 향수병을 떨어뜨려 깨뜨렸어. 내 비명에 당신이 이층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어머, 어떻게 그런 짓을! 나로선 당신의 품에 안겨 침실로 들어가서 로맨틱한 무드 속에 사랑을 나누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까지의 에마의 저항을 생각하면… 에마가… 그렇게 견고한 벽을 만들어놓고 지키고 있었으니,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어?" "어쨌든 성공한 셈이네요." 에마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드레이크의 애무에 응했는지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음, 그건 그렇지만 또 하나 약속하기 전에는 이 침대에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마. 나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해 주겠어?" "어머 내 말을 믿으세요?" 에마는 드레이크를 놀렸다. "정열에 들떴을 때 한 말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아냐, 그건 틀려." 드레이크는 머리를 저었다. "정열에 애정이 따른다면, 그것은 어떠한 사랑의 묘약보다도 진실을 자백시키는 힘이 큰 게 아닐까? 엊저녁에 에마를 안으면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또 필요로 하는가를 당신에게 고백하지 않는다는 건 피를 쏟는 듯한 자제심이 필요했었어." 드레이크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에마 말대로야. 애정이 없는 관계는 실체없는 그림자와 마찬가지야. 날 사랑한다고 말해 줘. 자, 당신이 직접 말하는 것을 이 귀로 똑똑히 듣고 싶어." 드레이크의 사랑의 맹세는 거짓이 없는 것이었다. 에마는 확신을 갖고서 "사랑해요." 하고 몇 번이나 드레이크의 귀에 속삭였다. 가만히 그 말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그의 목에 키스를 하고,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 근육질로 싸인 배에 키스를 퍼부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다음 말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자, 결혼한다고 말해." 에마는 못 들은 체하고 계속 키스만 퍼부었다. 그러자 갑자기 드레이크가 몸을 일으켜 그녀를 덮치더니 이제까지 그녀가 한 것처럼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언제 이것이 폭발할 듯한 욕망의 점화선이 되었는지는 모른다. 밀물처럼 욕망이 덮쳐와서 어느 새 그녀는 드레이크의 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사랑한다고 속삭이자 그녀는 뜨겁게 이에 응했다. 드레이크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인생에서 더 이상 뭘 바랄 게 있을까. 이 침대에서 드레이크는 그것을 증명해 주었어. 그의 팔은 결코 나를 놓지 않을 것이다. 에마에게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정답게 마주앉아 얘기를 나눌 것이다. 단지 지금은 둘만의 행복한 선물을 교환하고 싶을 뿐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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