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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배달부 1 토요일 오후, 잔시스는 그날 밤 초대받은 파티의 참석 여부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같이 사는 오빠 윌리엄은 고고학 조사단의 일원으로 그날 아침 그리스로

떠났기 때문에 의논 상대가 없다. 잔시스는 쓸쓸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이제 제 몫을 단단히 하는 고고학자가 됐으므로 앞으로 이런 경우가 잦아질 것이다.

옛날이 그리워 추억을 떠올리자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그 무렵의 그들은 짓궂은 짓만

골라서 하는 4인조 악동이었다. 가장 나이 어린 소피가 언제나 대장이었다. 그녀가

꾸미는 장난에 언니뻘 오빠뻘이면서 끌려다닌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다. 나이가 많은 세 사람이 양처럼 순순히 소피의 명령을 따랐으니.

소피와는 반 년 정도 만나지 못했다. 요전에 만났을 때도 변한 데라곤 전혀 없었다. 그

개구쟁이도 벌써 스물한 살, 하지만 변할 가망은 없어 보였다.

데비는 일 년 이상이나 무소식이다. 데비는 항상 이즐과 배낭을 메고 불쑥 나타나곤

했는데 밤에는 이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아침이면 '그럼, 또 만나!'라고 기약 없는 인사만 남기고 떠나 버린다.

그리고 한 살 위인 윌리엄, 그는 이번의 발굴 조사로 고고학자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니, 런던의 기지인 이 아파트에 돌아오는 것은 점차 뜸해질 것이다.

오늘 밤의 파티 문제로 잔시스의 마음은 되돌아왔다. 그런데 프림로즈의 파티에는 가는

게 좋을까?

바로 어제, 잔시스가 파티에서 돌아오자 윌리엄은 그때까지 자지 않고 있다가 놀랍다는

소리를 질렀다.

"어렵쇼, 빨리 오는구나!"

계속 춤을 추어대고 야단법석을 떠는 게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파티장에서 가장

나중에 돌아오던 잔시스가 어느 샌가 가장 먼저 돌아오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나도 어른이 된 거야.'

어제가 잔시스의 스물세 살 생일이었다. 여태껏 남자친구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열에 들뜬 것 같았던 슈와 함께했던 나날들… 잔시스는 급히 생각을 떨쳐 버렸다. 그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프림로즈의 파티는 이미 나의 격에 맞지 않는다. 오늘 밤에 모일 멤버들을 잔시스는

머리에 떠올렸다. 에이드리언 헤이워드도 틀림없이 초대되었을 것이다. 그는 너무나

끈덕지다. 에이드리언은 잔시스한테 완전히 반해 계속 추근대고 있다. 슈와의 일로

상처를 입고 연애라면 넌더리가 나는 잔시스는 넌지시 그를 타일러 보았지만 막무가내다. "꼭 당신의 사랑을 받고 말겠어!"

상대가 전혀 열을 올리지 않는 것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는 듯 그는 일방적인

선언을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잔시?"

틀림없는 소피 목소리다. 그녀는 잔시스를 애칭으로 부르는 극히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어머나, 소피!"


잔시스의 마음은 들떠서 대답했다. 상대가 소피라면 인생은 따분하지 않다. "조금 전에 네 생각을 했었어. 잘 있었니?"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어 전화했어. 미안해, 조금 늦은 감이 있어서." 소피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른 말로 떠들어댔다.

"어제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아빠 엄마와 조금 옥신각신했거든." "무슨 일이 있었니?"

소피의 경우, '부모와의 다툼'이라면 또 무슨 큰일을 저지른 게 탄로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묻지 않은 게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라니까."

소피가 입버릇처럼 대답을 하자, 잔시스는 소리없이 웃었다. "난 최근에는 아주 얌전해졌는걸, 믿어지지 않겠지만." 물론 잔시스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진 않았다.

"지금 마침 홀을 지나가던 참인데, 너한테 줄 선물이 테이블 위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잖아. 그걸 본 순간 전화를 하지 않았던 게 생각난 거야. 내가 선물을 직접

전달해야겠어."

"나도 꼭 만나고 싶어."

잔시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소피가 제멋대로 굴어 귀찮은 것 따위는 지금

생각나지 않았다. 윌리엄이 그리스로 떠났다고 잔시스는 이야기했다.

"그럼, 그의 방을 사용할 수 있겠구나. 나는 어디고 상관 안 해. 정말이야." 그리고 아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요즘은 요리도 해."

잔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소피에게 요리를 맡겼다간 통조림 스파게티를 얹은 토스트를

먹게 되겠지.

"2인분의 요리라면 나도 어떻게든 할 수 있어."

오 년 전부터 오빠와 둘이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잔시스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언제 올래?"

"그래. 오늘 밤은 파티에 가. 그래서 말야…" "멋지구나."

초대받지도 않은 장소에 태연하게 얼굴을 내미는 천연덕스러운 면이 소피에게는 있다. "당장 갈게!"

잔시스는 전화를 끊자 윌리엄의 방으로 가 침대 시트를 갈았다. 그 근사한 스포츠카를

나는 듯이 달려, 버킹검샤에서 소피가 들이닥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잔시스는 침대를 정돈하자, 2인분의 햄샐러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며

이것이 주말이 끝나면 소피가 돌아갈 때까지 마음편하게 지낼 수 있는 마지막 한때라고 생각했다.

"소피, 어서와."

문을 활짝 열고 잔시스는 소피를 환영했다.

소피의 발치께에 눈길을 준 잔시스의 얼굴이 약간 흐려졌다. 거기에는 잔시스가

상상하고 있었던, 자그마한 주말여행용의 가방이 아닌 유별나게 큰 슈트케이스 두 개와 화장품 케이스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 파티에 입을 드레스를 정할 수가 없어서 말야."

소피는 잔시스의 녹색 눈동자가 흐려지는 것을 보자 순진하게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서 잔뜩 가져왔구나."

생긋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는 소피의 얼굴엔 어느 누구라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용하기로 되어 있는 방에 두 사람은 짐을 날랐다. "좋구나, 이 아파트는."

소피는 재빨리 구두를 벗어 던지고 잔시스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너는 참 운이 좋아. 잔소리 많은 부모와 함께 살지 않아도 되니 말야."

소피를 바라보며 웃고 있던 잔시스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소피는 알고 있을 텐데,

나와 윌리엄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하셨는가를. 리틀브라맨튼의 집을 처분할 때, 그녀의 아버지는 오누이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했던 것이다.

"너희들도 열여덟 살과 열아홉 살이 됐구나. 이제 부모의 슬하를 떠날 때가 온 것 같아

아파트를 두 채 사기로 했다. 한 채는 내것, 한 채는 너희들 것."

소문난 난봉꾼인 터킨 랭필드는 장성한 아들딸과 함께 살고 있으니 자유롭게 매일 다른

여자를 집에 데려올 수 없어서 따로 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니?"

잔시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소피는 어떤 일을 떠올린 듯 깜짝 놀라며 사죄의

빛으로 쳐다봤다.

"미안해, 잔시스. 부모님의 이혼을 아직도 마음 아파하고 있는지 몰랐어." "그렇지 않아."

잔시스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당시에는

괴로왔지.

아버지가

야반도주나 다름없는 이사를 했으니."

집을

팔고

우리는

리틀브라맨튼에서

힘이 빠진 듯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소피와 나란히 잔시스도 앉았다. "너의 어머님은 아버님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가한 모양이던데."

소피는 잔시스가 이미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나?" 잔시스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하지만 너는 그때 고작 열여섯 살이었을 텐데…"

"나는 예전부터 아둔한 금발 아가씨는 아니었잖아." 상기된 얼굴로 소피가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는 엉뚱한 짓을 노상 했잖니? 그날 밤 난 나에겐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지겨울 정도로 듣게 됐던 거야."

오히려 당당해진 소피의 말투에 잔시스는 어이가 없어졌다.

"너의 양친이 이혼한 걸 디너 파티장에서 알았어, 잔시. 하얀 테이블 보를 씌운 테이블에

몇 갈래로 가지가 뻗은 촛대를 놓아 불을 환히 밝히고 모두들 유쾌하게 떠들어댔지.

어쨌든 나는 짜증이 난 거야. 거기에 나오면 안 된다고 부모님은 말했거든. 그래서 난 식탁 아래로 숨어든 거야. 그렇지만 식탁의 대화가 따분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너의 아버님 이야기가 나와 정신이 번쩍 들어 귀를 곤두세웠지. 다음 날, 네게 알려 주려는 생각에서…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어. 너의 아버님은 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던 거야. 이 지방의

바람둥이로서 유명한 너의 아버님이 어머님한테 복수를 당했다는 것이야. 너의 어머님과

바니 다비스톡의 비밀스러운 로맨스에 의해서 말야. 두 사람의 사랑은 이 년 전에 그가 페로즈톱의 아파트로 이사온 날부터 시작된 것 같다고 했어. 그리고 너도 윌리엄도

장성했으니까, 너의 어머님은 아버님의 곁을 떠났다는 거야."


잔시스로서는 부모님에 대한 정리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쪽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의 상황은 소피의 말 그대로다.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바니

다비스톡과 재혼해서 지금 취리히에서 살고 있다.

식사를 하면서 소피는 그녀들이 자란 마을에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모두가 이 마을을 떠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정말 따분하니까." 소피가 내뱉듯이 말하면서 짐을 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를 하면서 잔시스는 부모의 이혼에 대해 생각했다. 옛 추억을 생각나게 만드는

소피의 이야기에 갖가지 괴로운 기억이 겹쳤다. 어머니도 운다는 걸 알았던 게 열한 살 때였다. 어머니는 곧잘 혼자서 울었고, 울지 않을 때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계셨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말을 하려 들지 않는 이유를 안 것은 열네 살 때였다. 그때까지

잔시스는 집안의 어두운 분위기를 어머니의 탓으로 여겼고, 어째서 어머니가 늘상

아버지에게 심술궂게 대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의 냉전의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잔시스가 열네 살의 생일을 맞은 직후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윌리엄과 데비는 시골길을 8킬로쯤 거슬러 올라간 곳에서 주말을 보낼 캠프를 치기 위해 먼저 떠났고, 잔시스와 소피는 그들이 제대로 해놓았는지를 확인하러

가기로 했기 때문에 에린튼 댁으로 소피를 마중하러 갔다. 도중에 잔시스는 현기증이 나

자전거에서 떨어졌다. 무릎이 까졌을 뿐 대단한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구토가 멎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었다.

잔시스의 아버지는 이름이 알려진 사업가로, 사업상 스케줄을 구실로 항상 집을 비웠다.

그런데 어제 출장을 떠난 아버지의 차가 현관 앞에 주차해 있는 것이었다.

잔시스는 깜짝 놀랐다. 친구들의 아버지는 주말을 대개 집에서 보내는데 유독 자기의

아버지만 왜 일을 하는 건지 그녀 나름대로 불만을 갖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아버지의 차를 보고 약간 기분이 좋아진 잔시스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무릎의 상처를 치료 받으려고 홀에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거실에서 들려오는 말다툼 소리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때의 어머니의

목소리를, 잔시스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평소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앙칼진 목소리로 악을 쓰며 아버지를 나무라고 있었다. 흡사 상처를 입은 암호랑이처럼 어머니는 셀 수 없이 많은 아버지의 비행을 낱낱이 들추어 내어 아버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마음대로 떠들어 봐요, 사립탐정에게 뒷조사를 시켰으니까요."

잔시스는 너무나 창피해 그 자리에서 울컥 토할 뻔했다. 그 때, 고함을 지르며 언성

높이기를 그친 아버지가 조소하는 투로 빈정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래, 당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당신은 나와 헤어지지 못해. 알고 있겠지. 당신

같은 위선자가 진실일변도라니. 무리한 얘기지."

재빨리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탄 잔시스는 핸드 브레이크를 찾았다. 거의 매일 어머니가

학교로 마중오기 때문에 핸드 브레이크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풀자, 차가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겨!"

외치는 윌리엄의 목소리도 벌벌 떨고 있는 잔시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움직이는 차에서 잔시스를 끌어내려 준 윌리엄의 침착한 태도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네 사람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저 혼자 굴러가는 리무진은 화단과 잔디밭을

돌파하고 담을 향하고 있었다. 유리가 깨지는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차가 이윽고

멎었다는 것, 헤드라이트 한 개쯤은 박살이 났으리란 것을 네 사람은 알았다.

충격으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마냥 우뚝 서 있었다. 그 때, 소피가 목이 졸려서

금방 숨이 넘어가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엄청나게 큰, 당시의 잔시스가 보기에는


3미터 이상이나 됨직해 보이는 거인이 집에서 나오더니 긴 다리로 성큼성큼 급히 걸어서 사고 현장을 조사하러 갔다. 이윽고 뒤돌아서 네 사람을 보는 거인의 표정은 흉악함, 바로 그것이었다. "튀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것일까, 소피는 열 살인데. 미동도 않던 개구쟁이들은 단번에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윌리엄도 데비도 잽싸게 소피의 뒤를 쫓았다.

세 사람은 잔시스도 바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했을 테지. 그런데 화가 난 거인이 곁으로

다가와서 내려다볼 때까지 잔시스는 못박힌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잔시스는 토하진 않았다. 그 대신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의식을 회복한 그녀는 자신이

소파에 누워 있는 걸 깨달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냉정하고 침착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가세요, 이 아이에게 당신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게 할 수는 없어요." 그 이후 현기증과 졸도의 발작은 반 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한창 자랄 때는 현기증을 일으키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의사의 말대로 성장함에 따라 발작은 점차 뜸해졌다. 하지만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작년 슈를 만나기까진 변함없었다. 그 전에 그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낼 거야. 연애 따윈 절대로 하지 않을 테야. 서로를 증오하며 욕하는 사이로 변할 그런 결혼을 무엇 때문에 해. 절대로 사양하겠어,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슈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을 때, 자신의 그러한 신념이 어리석기 그지없음을

깨달았다. 슈에게 프로포즈를 받으면 당장에 결혼하기로 ���자. 부모님과 같은 경우이긴

하지만, 우리는 달라. 슈를 신뢰할 수 있고, 나도 그를 배반하지 않을 거야. 잔시스는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성실성이 잔시스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슈는 결혼하자고 제의하지 않았다.

'당신의 전부를 갖고 싶어, 사랑하니까'라고 말하긴 했지만.

잔시스는 그에 호응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에 얽매였었는지, 지금도 잘 알 수가 없다.

있는 힘을 다하여 슈의 품에서 빠져 나와서 '미안해요, 달링' 하고 사과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절한 친구로부터 슈가 잔시스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다른

여자한테 얻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자, 일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잔시스는 믿어지지가 않아 넋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슈를 추궁하다 점점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바로 어제 잔시스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그가 그 사실을

인정했던 것이다.

"당신이 나의 요구에 응해 주기까지 금욕을 맹세한다고 말한 적은 없어." 슈는 노골적으로 말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잔시스는 슈를 응시했다. 슈에게 있어서 나는

공격 목표에 지나지 않았던 거야. 여자의 이름만 기재된 주소록에서 아직 별표가

표시되지 않은 아가씨였던 거야. 나의 이름에 별표가 그려지면 나와의 데이트는 새로운 여자가 등장하기까지일 테지. 그렇게 잔시스는 단정했다.

그런 연유로 슈와의 교제는 작년 5월로 끝났다. 지금은 1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버렸지만, 결혼에 있어서 성실성이 잔시스는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이 사람이라면 평생 사랑할 만하다고 느꼈을 때, 남자 쪽도 같은 감정임을 확신하게 되는 때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끝낸 것은 8시가 지나서였다. 소피는 대담하게 노출된 드레스를

골랐다. 대단히 매력적인.

"소피, 멋져. 너도 알고 있겠지만."


잔시스는 감탄했다.

"너도 나쁘지는 않아."

소피는 조심스럽게 찬사를 마주 보내면서 다크골드의 아름다운 머리칼을 지닌 친구를

부러워하는 눈길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곤 잔시스의 진한 녹색과 연한 녹색으로 배색된 헐렁한 드레스를 칭찬했다.

"나보다 노출은 적은 편이지만 너야말로 점점…"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소피는 생긋 웃으며 말투를 바꾸었다.

"약속해, 잔시. 너는 캄캄한 구석에 숨어서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게끔 해주겠다고." "놀리지 마, 소피."

잔시스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소피의 차로 두 사람은 출발했다.

"언제든지 마음내키면 이 차로 돌아가도 좋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게

되면 말이야."

소피는 계속 농담을 했고, 그때마다 둘은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녀들은 삼십 분 후에

프림로즈의 집에 도착했다.

프림로즈가 직접 현관으로 마중을 나왔다. 한 사람의 불청객이 서 있는 것을 보고도

그녀는 귀찮아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했다. "정말 잘 왔어."

잔시스가 소피를 소개하자, 프림로즈는 생긋 웃었다.

"짝 없는 남자 손님이 많이 왔거든. 망토부터 맡기고 안으로 들어가요. 이제 짝이 거의

맞겠는데…"

소피는 금방 사람들과 친해졌고 인기를 모으는 존재가 되었다. 잔시스보다 한결 신나

하며 파트너와 춤을 추었다.

파티는 잔시스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잔시스는 자칭 숙녀 사냥꾼이라고 우쭐거리고

있는 반스 케터링으로부터 구애를 받았는데도 아무런 자극도 느끼지 못하자 역시 나이를 먹었나 봐, 라고 생각했다. 반스가 계속 따라붙어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두고 춤을 추었다.

그녀의 금발이 물결치듯 흩날렸다.

반스와 춤을 추면서 문 쪽으로 눈길을 주자, 에이드리언 헤이워드가 등장했다. 아아,

지겹게 되었구나.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던 기분이 갑자기 시들해졌다. 에이드리언도 그녀를 발견한 듯 뚫어져라 응시했다. 밉살스러워. 저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는 얼굴. 오늘 밤 잔시스는 에이드리언의 사랑의 하소연에 장단을 맞추어 줄

기분이 아니다. 반스 손에 힘이 들어와 그에게 바싹 안겨지는 것을 잔시스는 느꼈다. "여긴, 좀 덥지요?"

단둘이 있고 싶으면, 좀더 그럴싸한 말로 유인할 수 없는 걸까? "네, 그래요?"

잔시스는 침착하게 상대가 넌지시 암시하는 뜻을 모르는 체하며 대답했다. "나는 쾌적한데요."

반스는 싱긋이 웃으면서 잔시스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테이프 덱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곡은 뎀포가 빠른 곡인데도 만일 반스가 사랑의 말을 지껄이며 엉뚱한 행동을 하면 한 대 갈겨 버리겠다고 마음으로는 벼르고 있으면서도, 에이드리언의 화가 난

눈길을 느낀 잔시스는 일부러 웃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에 용기를 얻은 듯 반스의 팔에 힘이 들어왔다.

잔시스는 상대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의식적으로 그를 밀어내면서 에이드리언

쪽을 보았다. 그가 계속 이쪽만 쳐다보고 있었기에 서로의 눈길이 마주쳤다.


하는수없이 잔시스가 힘을 빼자 생각대로 되어 우쭐해진 반스는 점점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소름이 끼치는 것 같은 혐오감을 느끼면서 잔시스는 에이드리언을 슬쩍 훔쳐 보았다.

갑자기 그가 가엾게 생각되었다. 에이드리언의 슬퍼 보이는 얼굴, 이런 잔혹한 짓은

계속할 수 없어. 어처구니없는 짓은 그만두도록 반스에게 말해야지… 그때, 에이드리언의 배후에 서 있는 키가 후리후리한 남자가 잔시스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너무해, 저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니! 저렇게 경멸에 찬

표정은 본 적이 없어. 저 사람은 틀림없이 나와 반스와 에이드리언의 관계를 알아챈

모양이야. 그렇다면 즐거운 체하는 나의 연기는 대성공인걸. 하지만 그것과 저 사람과는 어떤 관계가 있담? 나를 무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반스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졌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냉정하게 수습해야만 된다…

그러나 왜 그런지 잔시스의 목소리는 쉬어 있어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낯선 사나이의 표정에 동요된 것처럼.

"반스, 전… 전 더 이상 춤추고 싶지 않아요."

반스의 눈이 번쩍 빛났다. 갑자기 쉬어 버린 자신의 목소리가 상대에게 어떠한 인상을

주었는지, 잔시스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반스는 자신이 그녀를 동요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겨워, 이런 쓰레기 같은 녀석! 오늘 밤은 이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아. 소피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담?'

잔시스는 먼저 돌아가도 좋은지 어떤지를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반스의 포옹으로부터 빠져 나오자, 잔시스는 미소를 지었다. "안 됐지만, 다른 사람이나 찾아보라구요."

반스가 자신의 미소를 그렇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면서 잔시스는 그 자리를 떴다.

경멸의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사나이는 아직 문가에 서 있었다. 지금은 방 안의

여자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휘둘러 보고 있었다.

"암사슴을 찾아 헤매는 수사슴이 또 한 마리 있군."

잔시스는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 밤 모여든 아가씨 들은 이 남자의

상대로서는 조금은 어린 듯싶다. 삼십대, 핸섬하지는 않지만 여자들의 관심을 충분히 끌 만한 사람이다. 슈처럼. 슈라고? 오래간만에 그에 대해 따스한 감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여, 잔시스."

나오고 있는 그녀에게 에이드리언이 말을 건넸다. "난 그만 돌아가겠어요."

잔시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차로 바래다 달라고 에이드리언을

꼬드기는 것과 같은 말이다. 밖에 잔시스의 차가 없다는 걸 에이드리언은 알고 있을 테니.

"안녕하세요."

잔시스는 겸연쩍어 인사를 했지만, 댄스를 신청하려는 듯한 상대의 눈치에, '잠깐

화장실에'라고 속삭이듯 말하고는 난처한 상황을 슬쩍 모면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뒤에 서 있는 예의 그 남성은 문을 막아선 채 비켜서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면 몸이 스치고 말겠지. "실례합니다."

잔시스가 말을 건넸지만, 상대는 들은 척도 않았다. 무시해 버릴 심산이로군. 나는 그가

좋아할 타입이 아닌 거야. 잔시스가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비난을 담은


몹시 싸늘한 잿빛 눈동자와 부딪쳤다.

이 사람,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서로가 아는 사이든 아니든 이렇게

혐오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 "지나가게 해 주세요."

잔시스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남자는 길을 비켰다.

잔시스는 그의 곁을 지나며 '잘 해봐'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굳이 뒤돌아서서

남자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어 총총히 계단으로 향했다.

남자의 매서운 표정으로부터 벗어나자 전에 어딘가에서 그를 만난 듯한 느낌은 흐려졌다.

역시 착각이야 잔시스는 화장실로 소피를 찾으러 갔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수없지. 하지만 모처럼 이층까지 올라왔으니, 망토를 찾아오기로 하자.

전번 파티 때 휴대품 보관소로 쓰였던 방의 문을 열고, 손을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2

불빛이 방 안에 가득 넘쳐 흘렀다. 그러나 침대 위에 코트류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방으로 가려고 뒷걸음질치다가 잔시스는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쳤다. 그녀는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둘렀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반스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야무지게 쏘아 주려고 뒤돌아선 잔시스는 상대의 진지함을 깨닫자 망설였다. 반스의

눈은 그의 생각을 뚜렷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막…"

잔시스는 그렇게밖에 말할 짬이 없었다. 캄캄했지만 문에 다가가기에는 아직 이르다.

입구 가까이에는 당당한 체격의 반스가 버티고 서 있었다. "침대 곁인가, 잔시스?"

조용히 반스가 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도 쩔쩔매고 있었다.

잔시스는 '그래요'라고 대답하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기다렸다가 상대가 움직이면

문으로 뛰어갈 심산이었다. 소피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요란하게 웃어댈 테지. 소피에겐 신기하지도 않은 일일 테니까. "네, 침대 곁이에요."

잔시스는 마주 속삭이고는 도망치는 데 대비해서 온몸을 긴장시켰다.

반스가 움직이는 기척에 잔시스는 재빨리 문 쪽으로 나갔지만 예상이 빗나간 데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놓아요, 반스! 저는 그럴 생각이…" 반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안 돼요…"


공포가

잔시스의

몸속을

꿰뚫고

지나갔다.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버둥거렸지만 반스의 태도는 역시 완강하여 쉽사리 놓아 줄 것 같지 않았다.

뿌리치려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반스에게 저항하는 상태로 얼마 동안이 흘렀을 때, 확 불을 켜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방 안이 환해졌다.

반스도 몸을 꼼짝 않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문을 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불빛에

익숙치 못한 눈을 들었을 때 잔시스의 시야를 가로막는 물체가 있었다. 그녀는 튀기듯

일어섰다. 조금 전 아래층에서 그녀에게 차갑고 매서운 눈길을 퍼부어 대던 남자가 두 사람을 불결한 것인 양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 아래층에서 남자의 곁을 지나올 때, 그가 내뱉았던 말의 의미를 잔시스는

그제야 이해했다.

"당장 나가 주세요, 여기서." 반스가 말했다.

잔시스가 거기에 대해 항의하려 했을 때, 불이 꺼졌다. 남자가 방을 나간 것이다.

잔시스는 긴급 행동으로 옮겼다. 반스가 알아차리기 전에 침대에서 내려서 문을 향해

달려갔다. 좀전 자기를 바라보던 남자의 표정을 생각하자,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반스에게 저주의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를 여기까지 오게끔 부추긴 것은

자신이며, 에이드리언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짐짓 드러내 보이려고 한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잔시스는 다른 침실을 신중하게 들여다보며 돌아다니다가,

이윽고 침대 위에 어지럽게 핀 꽃처럼 코트가 쌓여 있는 방을 찾아냈다. 산처럼 쌓인 코트 가운데서 자신의 망토를 잡아당기다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잔시스는 몸을 도사렸다.

긴장하여 귀를 기울였다.

'스프링이 삐걱거리는 소리! 이상한데, 침대 위에는 아무도 없는데…'

바닥까지 드리워진 침대 커버를 들춰 보니, 놀랍게도 소피의 금발이 나왔다. "소피!"

잔시스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짓이야? 너, 어째서 거기에… 누구와 함께 있니?" "혼자야."

주정뱅이에게

휘말려서

여기에

숨은

것일까?

소피답지가

않아.

잔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잔시스라면 충격으로 일주일 정도는 누워 있을 만한 상황이라도 여느 때의 소피는 깔깔거리고 웃어넘겨 버리는데.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소피?"

잔시스는 매섭게 추궁했다. 초대하지도 않는 사람을 데리고 나타난 책임을 느낀 것이다.

소피는 일순 생각에 잠겨 말을 망설이더니 이윽고 잔시스를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상대라고 결론을 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너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테니, 솔직히 이야기하겠어."

그렇게 많은 짐을 들고 들이닥친 이유를 소피는 이야기했다. 주말을 보내고 돌아가리란

생각을 하고 있는 잔시스에게 소피는 잔시스만 괜찮다면 아주 한 달 정도 묵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모두가 아빠와 엄마 탓이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소피는 머리만을 내밀 뿐 계속 침대 밑에 있었다.

"아빠가 좀 과로한 기미가 보여서 엄마가 설득해 배여행을 떠나게 된 거지. 거기까지는

좋아."


잔시스는 언제나 눈을 번뜩이며 감시하는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이 연하의 친구가 보낼

나날들이 금방 상상이 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요전에 아빠와 엄마가 집을 비웠을 때의 파티가 힘에 겨울 정도로

요란한 것이어서 혼줄이 나도록 야단을 맞았지. 집의 일부를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거든. 기가 차서!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외삼촌 댁으로 축출당한 거야."

그렇지만 도대체 왜 소피가 침대 밑에 숨어 있어야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소피가 도와 달라는 이유도.

"엄마는 신경이 곤두서 있고, 아빠는 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용돈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거야."

소피는 오싹하고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잠시도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사람들과 꼼짝없이 함께 있어야 하고 어디든지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게 된다는 건 정말 끔직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소피의 아버지는 딸의 응석을 잘

받아주기로 유명하지만 어머니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부모님이 안 계신 동안 소피가

가만히 집에 붙어 있을 리 없으므로 외삼촌에게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린튼 부인의 남동생 역시 엄격한 사람으로 소피를 철저하게 감시할 것이다.

"정말이라니까, 잔시. 외삼촌 댁은 따분하기 짝이 없어. 시내와는 몇 킬로나 떨어져

있는데다가, 외삼촌은 모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죽어라 일만 해. 나는 정말 외톨이 신세야."

소피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일할 필요 따윈 없다구. 외삼촌은 외조부님한테서 엄청난 유산을 받았으니까. 그런데도

날마다 별채 연구실에 틀어박혀 시험관만 만지작거리고 있는걸. 그러니까 만일 내가

한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엄마한테 고자질할 건 뻔해. 그렇게 되면 아빠는 용돈을 주지 않을 거야, 평소에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지만." 소피는 하소연 투로 말했다.

잔시스는 빙그레 웃으며 소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자 표정을

굳혔다. 소피는 과장되게 떠벌리는 버릇이 있다. 용돈만 해도 아버지한테서 쓰고 남을 정도의 액수를 받고 있다.

잔시스의 머리에는 다른 의문이 생겨났다. "시험관이라니?" "외삼촌은

농학자야.

온세계에서

채취해

연구한답시고 하루 온종일 흙만 만지거든."

흙에

어떤

곡물이

성장하는가를

어쩌면 소피의 외삼촌은 정말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굶주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라들이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게 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한 달 동안 성미가 깐깐한 늙은 과학자 밑에서 보내야 하는 것은 소피에게 너무 심한 처사라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침대 밑에 숨어야 하는 이유를 아직 알 길이 없다. "나

말이야,

있었거든…"

오늘

오후

코츠월드에

있는

외가댁에

외삼촌과

소피는 처음으로 실토를 했다. "오늘 오후라구? 하지만…"

"하지만 나는 너한테로 온 거야."

잔시스가 놀라자,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소피가 거리낌없이 말했다. "전화는 했지? 우리 집에 간다고."

함께

가기로

되어


잔시스가 그렇게 넌지시 떠보자 소피는 머리를 천천히 모로 저었다. "전화도 안한 거니? 알리지 않은 거야?" "그렇다니까."

"소피 너도 참! 외삼촌이 얼마나 걱정하시겠니? 그리고 네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걸 알게

되면 노발대발하실걸." "알고 있어."

소피는 갑자기 풀이 죽었다.

"이번에 외삼촌을 만나게 되면, 넌 어떤 지경을 당하게 될지도 몰라."

잔시스는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하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책임감있게 행동하도록 깨우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은 이미 나를 만난 듯싶어."

소피는 태연자약해져 있었다. 유머감각이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내가 어째서 이런 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뭐라구?"

잔시스는 믿기 어렵다는 눈길로 소피를 응시했다.

"외삼촌이 여기에 왔다는 거니? 그럴 리가 없지. 무리야. 너도 우리 집에 오기 전에는

누구네 파티에 가는지 몰랐잖아." "있다니까, 여기에." 확신하는 말투다.

"어떻게 여기를 알아냈는지 나도 알 길이 없어. 아까 화장실에 갔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현관 쪽에서 늦게 도착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 돌아봤어. 난 눈을

의심했지. 토프 외삼촌이 있을 줄이야. 다행히 나와 눈이 마주치진 않았지만, 밖에 세워 둔 나의 차를 봤을 거야. 들키고 말았을 거야, 틀림없이." "어머나."

잔시스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떻게 잊을 수 있담. 조금 전까지 상상하고 있던 소피의 외삼촌은 등이 구부정하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아슬아슬하게 코끝에 안경을 걸치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기억의 문이 활짝 열린 지금 그가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잔시스는 알아차렸다.

'소피의 말 그대로인 거야. 나도 이 눈으로 보았는걸― 두 번씩이나. 처음엔 아래층에서,

두 번째는 조금 전의 그 방에서.'

역시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옳았다. 만났던 것뿐만이 아니다. 열두 살일

때, 잔시스는 그를 평생 증오하기로 맹세했는데 그것을 잊고 있었다니… "난, 외삼촌한테 안 가겠어." 소피가 울음소리를 냈다.

"절대 싫어, 잔시스! 그렇지만 외삼촌은 아빠 엄마하고의 약속을 지키려고 나를 찾기만

하면 곧장 코츠월드로 끌고 갈 거야."

잔시스도 소피의 처지가 되어 걱정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소피의 부모는 그녀가 아무리

제멋대로라 해도 그의 저택에 머물게 하다니 너무하다. 소피가 그렇게 무섭고 냉혹한 남자의 감시 속에서 한 달간이나 견디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함께 외삼촌을 만나 줄게…"

소피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자 잔시스는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게 되어, 소피를 내게

맡겨 달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리한 얘기다. 토프에게 반스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당하고 말았으니…

토프의 위치에서는 잔시스와 반스의 관계는 오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잔시스를 어떤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을는지. 외삼촌으로서 조카를 책임지겠다고 누나 부부에게 약속한 이상, 보호자의 역을 잔시스에게 위임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잔시, 좋은 수가 있어."

그녀는 잔시스보다 잔꾀를 부리는 데 훨씬 능숙하다. 잔시스는 소피의 계획이 너무

과격하지 않는 것이기를 바랐다. 배수관을 타고 내려가는 따위는 할 수 없어. "잔시, 너 혼자 먼저 돌아가 달라고 부탁해도 되겠어?"

"마침 잘 됐어. 실은 난 집으로 돌아가려고 망토를 가지러 왔는걸." "눈을 똑바로 뜨고 있어야만 돼."

소피는 벌써 마냥 흥분해 있었다.

초대해 준 상대에게 간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파티에서 돌아가기도, 이렇게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출발시키는 것도 처음이다. 더욱이 이런 밤늦은 시간에… 소피의 모건을 타고, 잔시스는 파티장을 떠났다.

이 수밖에 없다. 만일 토프가 모건을 뒤쫓아온다 해도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 소피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잔시스임을 알게 된다면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잔시스는 오늘 오후 소피가 와서 이 차를 며칠 맡아 달라고 했다고 하면 된다.

아파트 가까이까지 오자 잔시스는 차의 스피드를 줄였다. 백미러를 들여다보고 아무도

뒤쫓아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토프 킹맨은 소피의 모건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면 당연히 어딘가로 가고 말았다고 생각할 테지.

'그건 그렇다 치고, 토프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소피의 행방을 안 것일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리겠는걸.'

아파트에 도착한 잔시스는 만일에 대비해서 자신의 차를 차고에서 꺼내고 대신 모건을

집어 넣었다. 토프는 소피를 찾아 런던 시내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다가 프림로즈의 집

앞에 서 있는 모건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잔시스는 문제의 차가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차고에 넣은 것이다.

소피는 몇 시쯤에 돌아올까? 상황에 따라서 또다른 계략을 짜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기다리지 말고 자도 좋다고 말하긴 했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잔시스의 머리에서 일순 소피도 토프도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 다리를 내던지듯 쭉 뻗고 주저앉아, 문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데비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장난꾸러기 4인조 중의 한 사람으로 오빠 윌리엄과 같은 스물네 살. 일 년 만에 나타난,

잔시스의 소중하고도 소중한,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다. "데비."

잔시스가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

잔시스의 기억 그대로 밤색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떴다. "오늘 밤 자고 가도 될까?"

조금도 변함없는 투로 말하면서 데비는 벌떡 일어났다. 소꼽동무로서 거리낌없이 그는

잔시스를 꼭 끌어안았다.

"엽서쯤은 보내 주어도 괜찮지 않았겠니!"

데비에게 말을 하면서 잔시스는 현관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배가 고프지 않아?"

데비가 주방에서 좋아하는 빈즈토스트를 먹고 있는 동안, 잔시스는 급히 자기 침대의

시트를 갈았다. 데비는 내 방에서 재우는 게 현명하다고 잔시스는 판단했다. 만일 소피가

밤늦게 돌아와 여벌 열쇠로 문을 열고 곧장 윌리엄의 방에 갔다가 검고 더부룩한 머리의


남자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웃사람들의 잠을 깨울 만큼 큰소리로 비명을

지를 것이다. 여자 둘이 윌리엄의 방에서 옷을 입은 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기로 하고, 피로해 보이는 데비를 푹 자도록 해 줘야지.

윌리엄을 하루 차이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 데비는, "소피는 만나고 있니?" 하고 물었다.

"좋은 질문이야, 그건."

잔시스는 그녀의 정상적인 생활이 오늘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굉장한 기인이야, 그애는."

이 말 역시 데비가 마음에 들어하는 대사로, 그도 소피를 몹시 좋아한다. 모두 다

그렇지만.

"그러나 나의 기억에 따르면, 예전엔 너도 말썽을 피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 "은퇴한 연금 생활자 말투 같은데."

잔시스가 말허리를 꺾어 놓자 데비는 싱긋 웃었다.

"나의 기억이 맞다면 오늘 토프 킹맨은 그 사람답지가 않아. 그때는 너의 엉덩이를 냅다

후려갈기고는…"

"딱하군요, 데비 나리."

잔시스는 짐짓 거드름을 피며 말했다.

"어린시절에 상처입은 자존심에 대한 위로 따윈 당신은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군요." 잔시스는 침대에 누워 토프 킹맨을 평생동안 증오하겠다고 맹세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방학중이었다. 에린튼 댁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넷이서 천천히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우와! 저길 봐!"

모두의 눈이 일제히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향했다. 소피의 집 앞에는 번쩍번쩍

윤이 나는 잘 닦인 검은 리무진이 주차해 있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 잔시스는 특별히

가슴을 설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소년들의 눈에는 특별한 것으로 비친 듯 그 차의

구조에 관해서 왁자하게 떠들며 토론을 벌였다. 네 사람은 리무진에 바싹 다가가 찬찬히 살펴 보았다.

"이거, 누구 차지?" 윌리엄이 말했다.

"토프 외삼촌 거야." 소피가 참견했다.

"아, 한번 타보았으면."

열광하는 데비는 열세 살, 기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할 나이였다. "키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어." 윌리엄이 아는 체했다.

"나는 움직일 수 있어."

돌연 소피가 큰소리로 외쳤지만 모두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도 움직일 수 있어."

잔시스도 말참견을 했다. 의기소침해져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소피를 보자 의협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 결과 모두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며 자신의 허풍을 증명해야 할 궁지에 몰렸다.

"간단해."

재빨리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탄 잔시스는 핸드 브레이크를 찾았다. 거의 매일 어머니가


학교로 마중오기 때문에 핸드 브레이크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풀자, 차가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겨!"

외치는 윌리엄의 목소리도 벌벌 떨고 있는 잔시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움직이는 차에서 잔시스를 끌어내려 준 윌리엄의 침착한 태도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네 사람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저 혼자 굴러가는 리무진은 화단과 잔디밭을

돌파하고 담을 향하고 있었다. 유리가 깨지는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차가 이윽고

멎었다는 것, 헤드라이트 한 개쯤은 박살이 났으리란 것을 네 사람은 알았다.

충격으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마냥 우뚝 서 있었다. 그 때, 소피가 목이 졸려서

금방 숨이 넘어가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엄청나게 큰, 당시의 잔시스가 보기에는

3미터 이상이나 됨직해 보이는 거인이 집에서 나오더니 긴 다리로 성큼성큼 급히 걸어서 사고 현장을 조사하러 갔다. 이윽고 뒤돌아서 네 사람을 보는 거인의 표정은 흉악함, 바로 그것이었다. "튀어!"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 것일까, 소피는 열 살인데. 미동도 않던 개구쟁이들은 단번에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윌리엄도 데비도 잽싸게 소피의 뒤를 쫓았다.

세 사람은 잔시스도 바로 따라오리라고 생각했을 테지. 그런데 화가 난 거인이 곁으로

다가와서 내려다볼 때까지 잔시스는 못박힌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째서 이런 사고가 났지?"

거인은 근엄한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잔시스는 거짓말은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저예요…"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면서 떠듬떠듬 말했다. "제가 핸드 브레이크를 풀었어요."

더 이상 거인은 기다리지 않았다. 몹시 야윈 잔시스를 무릎 위에 안아올리고 엉덩이에

사정없이 손바닥 세례를 퍼부어댔던 것이다.

잔시스의 공포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그 대신 분노가 자리잡았다. 그 전 주에

잔시스는 어머니로부터 은밀한 속삭임을 들었던 것이다. "너도 이젠 숙녀의 대열에 끼게 된 거야."

라고. 그런데 거인은 잔시스를 어린아이 취급을 했으니…

토프 킹맨은 잔시스를 일으켜 세우고 그녀의 반항적인 얼굴을 홀린 듯 쳐다보았다.

새빨개진 얼굴에 녹색의 눈동자를 증오로 반짝이면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소녀를.

아우성을 치든지 울음을 터뜨리기는커녕 격렬한 증오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데

당황해 하던 토프를 잔시스는 떠올렸다.

그는 멍청하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잔시스의 이마를 덮고 있는 고수머리를 쓸어올려

주었고, 조용히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본 것같이 뇌까렸다.

"너는 정말 아름다운 아이로구나. 내가 너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구나."

이것이 엉덩이를 때린 데 대한 사과의 말임을 잔시스가 알아차린 것은 훨씬 나중이다.

그때는 점심식사의 식탁에 앉을 수도 없을 만큼 아픈 엉덩이의 아픔보다 증오가 더 컸다. 그런데도 울기를 거부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운 아이라고 한 말조차 비위에 거슬렸다.

어머니는 숙녀라고 말했지만, 잔시스는 구두를 신은 발로 힘껏 토프를 걷어찼다. 그의

정강이에 한 방 먹인 것을 생각하자 몸이 오그라들었지만, 그것으로 악마의 저주가 풀린 것만 같았다.


"당신 따윈 딱 질색이에요! 당신… 야수예요!"

그리고는 잔시스는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다리가 어떻게 되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숙녀의 엉덩이를 때리다니 용서할 수 없어! 정강이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뒤쫓아올 것이다. 놀랄 정도로 긴 다리로 성큼성큼 잔시스를 따라잡을 게

뻔하다. 그러나 그는 뒤쫓아오지 않았다. 다른 세 사람은 내리막길의 끝에서 잔시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앙, 잔시!"

소피는 잔시스에 대한 동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서 오만하게 머리를 발딱 쳐들고 활개를 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결코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로 무거운 상처였다.

초인종 소리에 잔시스는 몽환 상태에서 정신을 차렸다. 어렴풋이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자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소피가 지금 돌아와 데비와 이야기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실내복을 바로 여미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고 데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 일어났어?"

이것이 그 특유의 아침인사다. "손님이 왔어."

"주전자를 올려 놓았죠, 착한 데비? 커피를 마시고 싶어."

잔시스는 거울 앞으로 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급히 빗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표정, 빗질을 해도 부스스한 다크골드의

머리칼로 거실로 나온 그녀는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손님은 소피가 아니었다.

잔시스는 실내복의 앞자락을 꼭 여몄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그

남자였다.

토프 킹맨은 잔시스와 소피의 계략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의 표정은 당신의

엉덩이를 때렸을 때 난 아무래도 몹시 멍청했던 모양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3

잔시스는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부스스한 몰골이 마음에 걸렸지만, 아직 8시밖에 안

되었고 간밤에는 파티가 있었으니까 이해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굳은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상대에게 재빨리 변명할 말을 찾고 있는 자신이 지겨워져서 잔시스는 방 한가운데로 힘차게 들어섰다.

"어서 앉으세요, 킹맨 씨."

당당한 여주인의 태도로 잔시스는 의자를 권했다.


"곧 돌아올 테니 잠깐 기다려 주시겠어요? 손님이 와 계셔서…"

말꼬리를 흐리면서 잔시스가 주방으로 가려고 할 때, 데비가 나타났다. "일찍 떠나야 하는데, 늦은 듯싶어." "어머나."

잔시스는 실망했다. 간밤에는 데비가 너무나 피곤해 보였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했는데도. 잔시스는 토프 킹맨이 원망스러웠다― 그의 출현으로 데비가 요즘 일

년간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윌리엄도 데비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편지로 알려 주면 기뻐할 텐데. "아침식사는 어떻게 하고?"

잔시스는 데비의 굶주린 배에 베이컨으로 그를 잔뜩 채워서 보낼 심산이었다. "손수 만들어 먹었어, 마이 러브."

데비는 잔시스의 마음을 안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잔시스는 등뒤의 토프 킹맨을 돌아보았다. 앉으라고 했는데도 그는 아직 그대로 서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데비도 이 적의를 알아차린 걸까? 그 눈에 장난기가 번뜩이는 것을 잔시스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오래 사귀어 왔기 때문에 데비가 지금, 벼르던 한마디를 내뱉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토프 킹맨의 뺨을 갈기고 싶어 근질근질 좀이 쑤신다는 듯… "그럼, 나는 실례하겠습니다."

데비는 소피의 외삼촌에게 순진스럽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잔시스

쪽으로 돌아섰다.

"네 침대를 사용하도록 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오랫만에 맞은 좋은 밤이었어."

그 말을 들은 토프 킹맨이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불청객의 경멸에 가득찬

눈초리를 슬쩍 보기만 해도 잔시스는 알 수 있었다. 토프는 잔시스와 데비의 관계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생긋 미소를 지으며, 잔시스는 데비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정신 차려!"

데비에게만 들리게 잔시스는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저기까지 바래다 줄게요." "달갑지가 않나 보군."

현관으로 나가며 데비가 말했다.

거실로 통하는 문은 닫혀 있었다. "너 화났니?"

데비가 물었다.

"저 돌대가리 아저씨가 억측을 하는 것이 싫어서지. 그 사람의 의견 따위는 우리완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 그렇지만 만일 그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을 네가 달가워하지 않으면, 사실을 말해 주고 오겠어."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아."

잔시스는 또 일 년간 데비를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하자 그와의 사이에 응어리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의 생각 따윈 아무래도 좋아." "정말?"

"당연하지."

데비는 잠시 침묵을 지키면서 잔시스의 진심을 살폈다.


"그럼, 또 만나."

그는 국민학생 같은 얼굴을 웃음지어 보였다. "파리에서 엽서를 띄우지."

잔시스는 토프를 기다리게 해놓고 옷을 갈아입을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 초조해 하는

얼굴로 보아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는데도 금방 돌아오지 않는 잔시스를 찾아서

이리로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지금보다 얇고 야한 속옷 차림의

모습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잔시스의 입장은 점점 더 불리하게 된다. 거실로

돌아가니

토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킹맨은

아직도

본래의

위치에

있었다.

그는

곧바로

"조카를 만나고 싶은데…"

"그건 무리예요, 킹맨 씨."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속일 수가 없었다. 소피와 달리 음모극에 서투른 잔시스는 이미

상대를 킹맨으로 부르고 말았다. 이쪽에서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만 것이다. 무리란 말은 이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무리라니? 랭필드 양, 그 아이가 여기 없다고 말하고 싶은가? 침실은 두 개지?"

그는 눈뜬 장님은 아니다. 데비를 전송하는 동안 토프는 문을 헤아리고 각 방의 배치를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있었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그의 입매가 멋지다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윤곽이 뚜렷한 관능적인 입술. 토프 킹맨이 자제심을 버리고 미소짓는다면

마음이 흔들릴 거라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소피가 있지, 여기에?" 유도심문하는 토프.

분노를 참느라 입술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잔시스의 내심을 읽으려는 듯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의 눈길을 되쏘아보자 무의식중에 몸이 떨려 잔시스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네, 있긴 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요." 잔시스는 거짓말을 했다.

초조한 듯 몸을 움직이려 드는 토프를 본 잔시스는 황급히 덧붙였다. "간밤에 우리는 파티에 갔었거든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을 이야기해 버리고 말았구나, 하고 잔시스는 곧 후회를 했다.

토프는 말썽꾸러기 조카를 찾기 위해서 아파트를 뒤지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공격을 개시했다.

"나도 거기에 갔었어."

토프는 내뱉듯이 말하고 이어 음험하게 다그쳤다.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의 아파트에 소피가 묵게 하리라 생각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야!"

그 말을 듣자, 잔시스는 얼굴을 붉혔다. 너무 서툴렀어. 그에게 간밤의 파티 이야기

따위를 일부러 말하다니.

토프 쪽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잔시스와 시시한 수작을 벌이고 있을

생각은 없다는 듯한 태도다.

"조카에게 전해 줘요. 정오에 우리 집으로 함께 갈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토프는 쌀쌀한 태도로 잔시스에게 지시를 했다.

"이 말도 전해 줘요. 또 바람을 맞힌다면 나는 손을 떼겠다고. 단, 그애 부모에게 즉시

전보를 치겠다고."

가엾어, 가엾다구, 소피는.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혔다.

잔시스는 자신이 겁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명령조로 호통을 쳐대는 토프를


'알겠습니다, 각하'라고 맞장구를 쳐 놀려 줘야겠다는 마음은, 노려보는 그의 눈길을

깨달은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괴물이다! 가엾은 소피, 지금 같은 장면을 한 달

동안이나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되다니!

잔시스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커피를 끓이려고 주방으로 갔다. 데비가 끓여 놓은

뜨거운 물을 다시 데우고 아직도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끓였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소피가 등뒤로 문을 닫고 있었다. "신사가 찾아왔었지?" 소피의 말이 빨랐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어. 위기일발이었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전에 무시무시한

기세로 걸어오고 있는 토프 외삼촌을 발견했어. 다행이야 들키지 않아서." 잔시스는 잠자코 거실로 향했다. "어마, 창백해 보이는데."

잔시스의 안색을 살피며 소피가 말했다. "그에게 호되게 당했니?"

"정오에 데리러 온다더라. 이번엔 네 차례야." "미안해."

토프와 맞닥치지 않은 것에 흥분한 소피는 들떠 있었다. "난, 도망칠 거야…"

"네가 함께 가지 않으면 부모님께 전보를 칠 모양이던데." "농담이겠지!"

소피가 볼멘소리를 질렀다.

"치사해, 그런 짓은! 그렇게 했다가는 일 년간 용돈을 받지 못할걸."

커피를 마시면서 잔시스는 소피에게 그녀의 외삼촌이 한 말을 한마디도 빠짐없이 그대로

전했다. 단, 반스와 옥신각신하는 걸 목격당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그 일을 토프는 오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데비의 실없는 말까지 들었을 테니, 조카를 맡기기에 알맞지 않은 사람으로 단정하고 있을 것이다.

소피는 데비를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을 섭섭해 했지만, 토프가 친구를 모욕한 일에

대해서는 몹시 분개했다.

"그럴 수가. 토프 외삼촌더러 사과하라고 할게, 잔시. 이번에 만나면, 난…" "그와 함께 갈 작정이니?"

"하는 수 없잖니? 전보를 쳤다 하면 우리 부모님은 정말 허겁지겁 되돌아오실 거야."

두 사람은 목욕을 하고 진 팬츠와 스웨터로 갈아입었다. 잔시스는 소피를 도와 어제

풀었던 짐을 다시 슈트케이스에 챙겨 넣었다.

소피와 얘기를 나누던 중 잔시스는 토프가 간밤의 파티에 나타나게 된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아마 토프 외삼촌은 이 아파트에 나를 찾으러 왔던 모양이야." "여기에?"

잔시스는 괴성을 질렀다. 잔시스는 간밤에 십일 년 전의 토프와 만남을 또렷이 기억해

내고, 그가 자신과 소피의 우정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리라 여기고 얼마나 신나 했던가.

"그 사람, 우리가 계속 만나고 있는 건 모르지?"

"내가 외삼촌 앞에서 네 이름을 들먹였을 가능성은 있어. 가끔 아빠 엄마랑 외삼촌 집에

가곤 했으니까."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그렇지만 여기 주소까지는 말하지 않았지?" 잔시스는 인정하면서도 소피에게 물었다.

"아마 그럴 거야. 아무리 외삼촌의 머리가 비상하다 해도 내가 여기에 왔다는 건

모르리라 생각했어. 그렇지만 외삼촌은 여기에 왔어. 그리고

남자와도 만났어."

에이드리언인가 하는

"에이드리언? 에이드리언 헤이워드 말이니?"

"으응, 아무래도 에이드리언은 너한테 얼이 빠진 모양이더구나. 그는 파티장에서 네가

보이지 않자 몹시 걱정하더라. 네 차가 고장이 나 있을 텐데 하면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여기서 너의 외삼촌과 마주쳤고…" "문 앞에서."

"알 만한걸…"

"불쌍한 프림로즈는 두 사람의 불청객을 영접하게 된 거지."

우스꽝스럽지도 않은데, 잔시스는 웃어 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프에 대해 점점

울화가 치밀었다. 그 감정을 소피에게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을 했지만, 정오가 가까왔을

무렵에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란 소리까지 듣고도 얌전하게 물러섰던 일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졌다. 그가 사과하도록 해야지. 천벌을 받을 사람!

십일 년 전에 입은 상처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어서, 토프에 대한 증오는 그때의 두

배가 되어 불타올랐다. 아아,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을까? 그러나

데비의

일을

토프에게

해명하겠다고

소피가

말을

꺼냈을

때,

잔시스의

마음속에서는 심술이 멋대로 생각하라지, 하고 속삭였다. 잔시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소피가 데비와의 관계를 해명한다고 해도 반스와의 일은 밝혀지지 않은 채 남는다.

남자가 한 사람 줄었다고 토프 킹맨의 잔시스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알았어."

소피는 잔시스의 마음을 읽은 듯 장난스럽게 히죽 웃었다. "너 '바람둥이 여자' 행세를 하고 싶은 거지?"

시계바늘이 정오를 가리켰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외삼촌 각오가 대단하시군."

소피는 연극조로 말했지만 입으로 떠벌리는 만큼 명랑한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오빠 방에 있을게."

잔시스는 토프 킹맨과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어머나, 잔시. 나 혼자 버려 두지 말아 줘. 나는 앞으로 한 달 동안 외삼촌과 살지

않으면 안 된다구."

소피는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내가 떠날 때까지 함께 있어 줘."

소피에게는 언제나 내키면 천연덕스럽게 눈물을 흘리는 특기가 있다. 잔시스가 망설이고

있는데, 또다시 초인종이 연달아 울렸다. "제발!"

소피의 볼에 눈물이 타고내렸다. "알았어."

잔시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소피가 눈물로 젖은 볼을 훔치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뚝 그쳤다. 소피를 그냥 둔 채,

잔시스는 현관으로 나갔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그녀는 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과 마찬가지로 슬랙스에 스웨터 차림의 토프 킹맨이 서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잔시스도 입술을 꼭 다물고 그를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외삼촌."

거실로 들어선 토프에게 소피가 얌전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좀처럼 화를 낼 수

없게 만드는 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정말 몹쓸 아이지요?"

그러나 소피의 외삼촌은 이미 면역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소피야말로

정말

구제불능이라고

잔시스는

두려���하지 않는 친구의 행동에 감탄했다.

생각하면서도,

닥쳐올

고난에

조금도

"준비는 다 됐니?"

상대가 조카가 아니라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는 투였다. "전 골치가 아파요." 소피가 말했다.

두통은 금시초문이었지만, 말을 듣고 보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잔시스는 소피의 연기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기운이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다. 파티에서 소란을 떨다 온 후 소피는 한숨도 자지 않았으니까. "골치가 아픈 건 내 쪽이야."

무정한 외삼촌은 냉정하게 말했다.

"소피 에린튼이란 말만 들어도 두통이 나는걸. 너는 아스피린을 먹으면 낫겠지만, 내

쪽은 넉 주일이나 지나야 나을 것 같다."

놀랍게도 소피는 외삼촌의 신랄한 유머를 재미있어했다. 소피는 외삼촌에게서 얼굴을

돌렸다.

"전, 정말 골치가 아파요. 유행성 독감이 퍼지고 있다던데, 걸린 걸까?"

그때까지 완전히 무시되고 있던 잔시스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피의 계획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유행성 독감을 핑계로 외삼촌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을 토프에게 납득시키면, 그는 조카를 나에게 맡길지도 모른다. 토프 킹맨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니, 너를 괴롭히고 있는 건 이틀간 술에 취해 있었던 게 원인이야, 아가씨. 간밤의

파티에서 거침없이 실력을 발휘하던데, 놀랍더군. 그러나 매일 밤 술로 지새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잔시스는 비난의 화살이 자기에게 돌려지자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토프가 한번 슬쩍 쳐다보자 잔시스의 기세는 꺾였다. 그는 소피에게로 돌아섰다. "짐은 어디에 있지?"

"침실에요. 가져오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던 소피는 '윽!' 하고 신음하면서 외삼촌 쪽으로 비틀거렸다. "아아, 외삼촌, 난 속이 메스꺼워요!"

잔시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소피의 얼굴에는 정말 핏기가 가셔 있었다. 토프도 그녀의

안색을 알아차렸다. 즉각 두 사람은 힘을 합해 소피를 의자에 앉혔다.

꾀병일까― 십 분 전까지 생기있게 있었는데. 아무리 소피라 해도, 이렇게 갑자기

안색을 바꿀 만한 재주는 없을 것이다.

잔시스는 급히 아스피린과 물을 가져왔다. 토프는 그것을 받아들자, 조카에게 먹도록

했다.

"잠깐 누워 있으면, 곧 나을 거예요." 소피는 기운차게 말했다.


"차를 될 수 있는 한 빨리 달리도록 하지." 그것이 토프의 대답이었다.

소피는 질려 버렸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잔시스가 숨이 막힐 것 같아

참견을 했다. 적어도 친구 집인데, 이렇게 잔혹한 제안을 하다니 잔시스는 아연실색했다. "잔시스도 함께 가도 괜찮지요? 제 간호를 해 달라고 부탁하겠어요." 소피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잔시스의 손은 차가워서 기분이 좋아요."

황급히 잔시스는 소피의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움츠렸다. 그러나 최초의 충격이

지나가고 보니,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하기 전에 토프가 와 달라고 하지 않을 건 뻔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가 어떻게 거절할지 두고보자. 소피에게 대답하는 토프를, 잔시스는 지켜보았다.

"너의 친구에게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와 달랄 수는 없는 것 아니니?" 잔시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토프는 조카를 타일렀다. "랭필드 양에게는 선약이 잔뜩 있는 모양이던데."

거기에서 그는 잔시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잔시스는 내심으로 아무리 보아도 토프는

잔시스를 손님으로서 집에 초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조카가 납득할 이유를 찾느라 애쓰고 있었다.

소피와 토프가 자신의 회답을 몹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잔시스는 일부러

침묵을 오래 끌었다.

한쪽은 잔시스가 가겠다고 말해 주기를, 또 한쪽은 물론 사교생활이 바빠 동행할 수

없다고 거절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잔시스의 타이밍은 완벽했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인 토프에게서 애원하고 있는

소피에게로 시선을 옮기고, 다음 말을 들었을 때의 토프의 꼴을 상상하고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이렇다 할 약속은 없어요. 소피가 독감에 걸렸다면 제가 간호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린 절친한 친구니까요."

잔시스는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안간힘을 다해 참으면서 토프가 이 난국을 어떻게 뚫고

나갈까 몹시 기다려졌다. 그의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가 난처해 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니 신나는걸! 토프를 곯리는 기분에 잔시스는 도취해 있었다. "그러면…"

토프가 입을 열었다. 너무 기뻐한 나머지 잔시스는 방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집에 오는 걸 기꺼이 환영하겠어." "어머나!"

잔시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승리의 쾌감이 무참할 정도로 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토프는 진심일까? 설마? 어쩐지 그가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가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을 토프도 알아차린 것 같다. 그의 눈이 전투적으로 빛났다. 맨

처음 맞붙은 싸움의 승리자가 토프라는 사실을 잔시스는 알고 있다. 장난감총에 맞은 것 같은 잔시스의 얼굴을 토프는 차분히 구경하고 있었다. "난처한 일이라도 있는 거요?" 토프는 다그쳤다.

아아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체하는 성격이면 좋았을 텐데… "그런 건 없어요."

목소리는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화풀이 대상을 찾지 못한 분노가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분간 우유를 넣지 말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예요."

마음에도 없는 초대를 했는데도 토프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가 곧 소피 쪽으로

돌아선 것은 아마 조카가 정말 아픈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겠지. 잔시스는 그렇게 지레짐작을 했다.

소피는 의자에 기댔고, 졸린 듯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정말 순진하게 보였다.

4

삼십 분 후에, 토프가 운전하는 차는 런던을 출발했다.

잔시스에게 있어서는 사태는 최악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소피의 탓이다. 그녀는 졸린

눈으로 '몸을 쭉 뻗고 느긋하게 쉬려면 뒷좌석이 좋아'라고 말하며 뒷좌석에 탔다. 벌써

제법 기운을 차리고 있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잔시스는 토프의 옆에 앉아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 출발하기 전에 그는 가정부에게 잔시스의 방을 준비시키기 위해 전화를 빌리고 싶다고 말한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는 이미 토프의 저택이 있는 코츠월드의 마을을 달리고 있었다. 토프 킹맨― 잔시스의

옆에 앉아 있는 이 음울한 남자는 침묵의 맹세라도 한 것 같았다. 운전에 열중해 있는

토프를 두세번 훔쳐 보고 그의 빈틈없고 고집세어 보이는 턱의 선에서 잔시스는 판단했다. 이런 형의 남자는 자기 쪽에 승산이 있을 때만 싸움을 거는 거야. 하지만 나는 단념을 하지 않을 거야.

찬스만 있다면 득점을 하고 말겠어. 지금까지의 대 싸움에선 번번이 패했지만.

차가 사설도로로 들어섰다. 잔시스는 여기가 목적진가요, 라고 묻는 눈길로 토프를

바라보았다. 짙은 흑발을 짧게 깎아 단정하게 빗고 있는 토프는 무척 핸섬했다.

토프에게는 뭔가 독특한 매력이… 이크,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배반이야. 잔시스는

당황했다. 토프는 적이야. 이런 사람을 멋지게 생각하다니, 당치도 않아.

웅장한 저택 앞에 차가 서자, 마흔 살 가량의 활발해 보이는 부인이 가벼운 걸음으로

돌계단을 내려왔다.

잔시스는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음울한 침묵에서 해방되는 것이 무엇보다 다행하게

생각되었다. 세 사람을 마중한 부인은 가정부 페기 헤밍즈였다.

헤밍즈 부인은 둥근 얼굴에 함박 웃음을 띠우며 잔시스에게 손을 내밀고, 잠들어 있는

소피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길로 들여다보았다. 외삼촌은 조카를 깨웠다. "아가씨가 두 분이나 저택에 와주시다니, 멋진 일이네요!" 부인은 환성을 질렀다.

"소피는 어디에 가든지 명랑한 사람이니까요."

잔시스가 부인의 환영 인사말에 비꼬아 대답하자, 토프가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와일드필즈 매너라 불리는 이 저택은 정말 따분한 곳인 듯싶다는 잔시스의 암시를 그는 캐치한 모양이다.

토프를 초조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진 잔시스를 그는 단호하게 무시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토프는 두 사람을 저택 안으로 맞아들이고, 이층 안내는 헤밍즈

부인에게 맡기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홧김에 술을 마시러 간 거야, 틀림없이― 유쾌해서 견딜 수 없는 잔시스는 헤밍즈 부인의 뒤를 따라가면서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인은 소피를 부축해서 침실로 데려갔다. "소피의 간호를 제가 할까요?"

잔시스가 물었다. 손님이 한 사람 늘어서 부인은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늘어났을 테니. "괜찮아요, 랭필드 양."

헤밍즈 부인은 상냥하게 대답했다.

"나는 전에 간호원이었는걸요. 사정이 있어서 그만두었지만… 그러니까 이번에 솜씨를

발휘하고 싶어요."

잔시스는 어안이벙벙했다. 헤밍즈 부인이 전직 간호원이었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데리고 왔지? 토프는 자기가 고용하고 있는 가정부가 가지고 있는 자격증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소피를 침대에 눕히고 나자, 부인은 잔시스 쪽으로 돌아섰다.

"자, 갑시다. 방을 안내하겠어요. 그리고 식당에 가벼운 식사를 준비해 놓을게요."

절대로 아래층엔 내려가지 않겠어, 소피가 자고 있는 동안에는― 잔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토프와 단둘이 식탁에 앉기보다는 차리리 배고픈 게 났지. "식욕이 없어서요."

잔시스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따가 만나자고 소피에게 말할 심산으로 뒤돌아선

잔시스는 너무 놀라 말을 잃었다. 방에서 나가는 부인의 등에 조심스러운 시선을

보내면서, 소피는 잔시스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입가를 실룩거리며 재빨리 윙크를 하는 것이다.

소피도 참,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인걸!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해 잔시스는 입을 꼭

물었다. 역시 그녀는 꾀병을 앓았었다.

안내된 잔시스의 방도 소피의 방과 거의 같은 구조였다. 환하고 널찍했으며 통풍도 잘

되었다. 잔시스가 가져온 슈트케이스는 이미 날라져 있었다. 어느 옷을 입을까 잔시스는 망설였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집에서 떠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도망치려는 기색은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어쨌든 오늘 밤은 묵어야 되겠지… 소피는 언제까지 꾀병을 앓을 심산일까? 슬슬 마음을 고쳐먹도록 해 주어야지!

짐을 다 풀고 나자, 잔시스는 무료하기 그지없어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갖고 온 책을

읽을 기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토프와 맞닥뜨릴 각오로 아래층에 내려간다는 건 더구나 언어도단이다.

두세 시간이 흘렀을 무렵, 잔시스는 소피의 방으로 갔다. 소피는 이미 환자 연기를 하는

데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단시간의 수면으로 완전히 원기를 되찾아 기력이 넘쳐 보였고, 눈은 번쩍번쩍 빛났다. "고마워, 와 주어서!"

소피는 환성을 질렀다.

"침대에서 빠져 나와 너를 찾으러 갈까도 생각했지만, 외삼촌에게 들키게 되면 곤란하다

싶어 참고 있었던 거야. 화났니, 내가 한 짓에?" "화를 낼 것까지 없잖겠니?" 잔시스는 빈정거렸다.

"그래, 화가 나 있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야. 좋아. 그렇지만 현기증이 났던 것은


사실이야, 네 아파트에서."

소피는 음울한 얼굴하고 있는 잔시스의 비위를 맞추려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말이야, 야단스럽게 밤을 샌 탓이야. 거리로 친다면 장장 30킬로미터

정도는 신나게 춤추며 돌아다녔을 거야!"

이렇게 솔직하게 나와 어쩔 수 없이 두손을 들고 말았다.

소피의 계략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서 시비를 걸려던 잔시스였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데 언제까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넌, 데비와의 일은 우리 외삼촌에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 그때부터 난 둘

사이에 뭔가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걸." 소피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네가 그와 다툴 거라곤 생각했지. 그렇지만 말이야. 너 같은 방식으로 외삼촌을

몰아세워 봤자 소용없어, 잔시. 그렇게 시비조로 나오면, 상대가 네 속셈을 눈치채지 않니.

너한테는 우리라 함께 못 와야 할 볼일은 없었으니." "난처했니?"

"으응. 전에 너한테 귀띔해 주어야만 했던 건데… 네가 외삼촌을 패배시켰다고 생각해도

말이야. 그는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 명수니까 조심해야 해. 어딘가 이상한데,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역으로 조종을 당하고 있거든."

그렇다면 소피는 잔시스와 토프의 사이가 험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잔시스에게

간호를 부탁한 것이 아닌가. 게다가 토프도 그것을 싫어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 잔시스의

성격도 완전히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니, 그러한 토프에게 잔시스가 도전하리란 것도 계산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토프가 잔시스를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니!

"너는 나를 일부러 부추긴 거니?"

잔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소피에게 '엉뚱한 애 같으니!'

하고 잔시스는 불평했다.

"여기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도록 해, 응?" 소피는 애원조로 말했다.

"갑자기 병이 나은 변명을 함께 궁리하자구. 내일은 일어나야 하니까, 반드시."

그때 문이 열리고, 토프가 들어왔다. 최고급의 맞춤인 다크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신사답게 잔시스에게 정중하게 목례하고 나서 조카에게 말을 건냈다. "기분은 어떠냐?"

조카의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하는 토프의 표정은 종잡을 수 없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외삼촌." 소피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두통도 멎었고, 숨쉬기도 편해졌어요." "여기 공기는 병에 아주 좋지."

아무래도 토프는 독감에 걸렸다는 조카의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정말 모를 일이다! 처음부터 소피가 꾀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내가 소피의 간호를 하러 오는 것을 무엇 때문에 토프는 승낙했을까? "사오 일 자고서, 용태를 보도록 하지."

토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을 들었으니 소피는 기가 꺾이겠지. 그것을 토프가

놓칠 리 없다.

그런데 소피는 양순하게, '네, 그럴게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토프는 또 한 사람의, 그로서는 초대하고 싶지 않던 손님을 향해 돌아섰다.


"방은 쾌적한가?"

나무랄 데 없는 주인 역할을 하고 있다. "네, 대단히 좋습니다."

잔시스도 역시 나무랄 데 없는 손님의 태도로 응수했다. "그거 다행이군."

시원스럽게 말하고 나서, 토프는 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오늘 밤 외출하지만 저녁식사는 집에서 하고 나가겠어. 홀에서 한잔 할까, 식사

전에?"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부담없이 권유하는 세련된 토프의 매너에 잔시스는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넋을 잃고 멍하니 있을 잔시스가 아니었다.

"실례지만 사양해도 되겠지요? 헤밍즈 부인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소피와 함께

여기서 식사를 하고 싶은데요."

토프가 나가자, 소피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지나치게 정중한 대화의 그늘에 숨어 있는

불꽃 튀는 접전을 소피는 분명히 간파한 것이다.

"너의 용기에는 언제나 감탄해, 잔시. 넌 만만치 않은 상대를 정말 잘 다룬 거야." "그것은 사교상의 예의지."

잔시스는 친구와 외삼촌이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다고, 소피가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소피다. 소피가 이 싸움에 참견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헤밍즈 부인에게 쓸데없는 수고를 끼치고 싶지가 않아 잔시스가 다 먹고 난 두 사람의

저녁식사 쟁반을 가져가려 하자 소피가 캐롤이나 크레이반 부인을 시키라고 했다. 케롤은 마을 아가씨로 시간제로 일하고 있고, 저택에 묵을 손님이 있는 날이면 저녁 무렵부터 크레이반 부인도 일하러 온다고 했다.

크레이반 부인이 쟁반을 들고 나가자, 느닷없이 소피가 괴상하고 얼빠진 소리를 질렀다. "어마! 큰일났어. 깜빡 잊고 있었어. 오늘 밤 데이트 약속이 있는데."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9시 15분 전이잖아. 그 사람, 벌써 네 아파트에 나를 마중하러 왔을 거야." "내 아파트에!"

"훗훗, 어젯밤 파티에서 알게 되었지. 그에게 전화를 해볼까?" 소피는 침실의 전화로 눈길을 돌렸다. "토미라고 그러던가. 빨강 머리의…" "토미 밀러야."

잔시스는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소피에게 냉담하게 말했다. "안 됐지만 그의 전화번호는 몰라."

"외삼촌은 틀림없이 런던의 전화번호부도 갖고 있을 거야. 아래층에서 가져다 줘. 부탁해,

잔시."

소피는 졸라댔다.

잔시스는 안심이 되었다. 토프를 화제로 삼을 때 소피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친애의 정이

담겨져 있었다.

"네가 정말로 그를 싫어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어. 외삼촌 말이야…" 잔시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니?" 소피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야. 나는 말이야, 단지 골동품투성이인 이 저택이 싫다는 거야.

게다가 인적이 드믄 산속이니…"


소피는 과장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난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야― 잔시스는

골똘히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일층의 바닥을 막 밟았을 때, 넓은 홀에 면한 문이 열리면서 서른 살 정도의 아름다운 금발 미인이 나타났다. 그 뒤엔

토프가… 아뿔사, 하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토프는 이미 외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층으로 뛰어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토프와 금발의 여성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련된 금발 미인으로부터 저울질하는 듯한 눈길을 받자, 잔시스는 그 자리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열패감을 느꼈다. 상대는 롱드레스에 모피 코트 차림인데, 자신은 진

팬츠에 스웨터를 걸쳐 마치 골목대장 같은 꼴이다. 두 사람은 막 외출하려는 참인 듯싶다. 이 여자가 오늘 밤 토프의 진짜 상대군. 나는 저녁식사에 초대된 귀찮은 방해꾼에 지나지 않는다.

토프는 금발 미인을 아이린 포브스라고 소개했다. 잔시스는 악수하려고 했으나, 상대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잘 어울리는 오만한 한쌍이군, 하고 생각하면서

잔시스는 두 사람 곁을 빠져 나갔다. 주방은 오른쪽이었던가… 토프와 금발 미인이 홀에 있는 동안에는 전화번호부를 찾고 싶지 않다. "무슨 볼일이라도?" 토프가 물었다.

'당신한테 볼일은 없다구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어, 헤밍즈 부인은 어디에 있나 싶어서…" 잔시스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녀는 남편의 시중을 들러 갔을 거요." 토프가 말했다.

그때 아이린 포브스가 초조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곧 갈 테니 차 안에서 기다려 줘요, 아이린."

아이린이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토프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잔시스는 싸늘하게 내뱉았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전화를 걸까 하는데, 번호가 생각나지 않아서요." "그럼, 전화번호부를 가지러 왔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토프는 전화 박스로 걸어가 밑에 있는 장을 열었다. "어디?"

그는 몸을 굽히면서 물었다. "런던의 M항(項)이에요."

토프의 변죽울리는 표정을 본 잔시스는 일부러 태연하게 대답했다. "벌써 남자들이 그리워졌는가, 잔시스?"

전화번호부를 손에 든 토프는 빈정거리면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매서운 말투로 다짐하듯

말했다.

"여기에 있는 동안은 나의 조카를 타락시킬 만한 행동은 삼가해줘."

분노로 녹색의 눈동자를 빛내면서, 잔시스는 토프의 손에서 전화번호부를 낚아채자,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잔시스는 일 초라도 더 거기에 머문다면, 토프에게 손바닥 세례를

퍼붓고 말 것 같아서였다. 그런 호령조의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았고, 그에게 잔시스라고 불린 것도 싫었다. 언젠가는 복수할 테야! "야, 제법이야. 찾아왔구나."

잔시스가 돌아오자마자, 소피는 명랑하게 떠들었다.


잔시스는 소피가 전화번호를 찾는 동안은 참고 있었지만, 찾고 난 후에는 그만 자야

되겠다고 말했다.

"나도 역시 피곤해."

소피는 기분좋게 하품을 했다.

"이따금은 너도 쓸만한 일을 하는구나, 잔시!" 눈을 뜨자, 아침의 차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캐롤이라는 아가씨가 날라온

것일 테지. 앞으로 오 분만 더 자야지, 생각하며 잔시스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오 분간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기세좋게 문이 활짝 열리면서 소피가 뛰어들어왔기 때문이다. "수수께끼가 풀렸어."

호들갑스레 알리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는 꽃무늬 실내복 차림의 소피가 사랑스러웠다. "수수께끼라니?"

잔시스는 반문했다. 원기왕성한 소피에게 대항할 만한 가운은 없어, 윤기 흐르는 금발을

손으로 쓸어넘기면서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토프 외삼촌 말이야."

잔시스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잔시… 너의 주소를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를 알아냈단 말이야." 잔시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알아냈단 말이지…"

"나를 마중하러 온 외삼촌은 우리 집에 내가 없자 가정부인 메이나드 부인에게 물어본

거야. 그녀는 내가 너의 아파트로 떠났다고 가르쳐 줬겠지. 슈트케이스를 몇 갠가 들고, 수 시간 전에 잔시스라는 분의 집에 머물기 위해 간다고 전화를 하던걸요, 라고

덧붙이면서."

"하지만 내 주소는 어떻게 알았지? 메이나드 부인은 모를 텐데?"

"그게 말이야. 아직 너한테 주지 못한 선물, 기억나지? 난 너무나 황급히 집을 나섰기

때문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홀의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고 온 거야." "홀의 테이블 위에?"

잔시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메이나드 부인은 홀에서 그것을 발견한 거야, 틀림없어. 선물에는 네 이름과

주소가 큼직하게 씌어져 있으니까."

"거기서 그녀는 나의 주소를 읽고는…"

"그래서 외삼촌은 너의 아파트로 가 에이드리언과 대면하게 된 거야."

이것으로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소피의 이야기에는 어딘지 미진한 여운이 있어. 아침

일찍 토프가 그녀의 용태를 보러 왔었냐고 잔시스는 물었다.

"외삼촌은 아마 내가 아직도 도망치지 않고 이 집에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왔을

거야."

소피는 일순 심각해지는 듯하더니, 이내 평소의 밝은 얼굴을 되 찾았다. "오늘 우리 둘이서 즐겁게 지내도록 하자, 잔시." "토프가 사오 일 누워 있으라고 했잖니?" 잔시스는 소피에게 주의를 주었다.

"겁을 준 것뿐이야. 외삼촌은 기분이 좋다면 오후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도 괜찮다고

말했거든. 그런데 유감스러운 게 있어. 외삼촌의 차로 여기에 오다니… 난 내 차가 아니면

미덥지가 않아. 물론 이것 역시 외삼촌의 계략이겠지만."


"설마."

잔시스로서는 생각도 못해 보았던 일이다.

"정말이야. 네가 짐을 꾸리고 있을 때에 먼저 출발해 버리자고 외삼촌을 꼬드겨 보았지.

너는 나중에 내 차로 오면 되리라 생각하고서 말이야." 소피는 유쾌한 듯이 웃었다.

"너도 오고 싶지 않았겠지만, 외삼촌도 네가 와 주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되어,

그가 이 아이디어에 얼씨구나 하고 동의하리라 생각했지. 네가 혼자 남겨졌으니 오지

않을 거라 그가 여기며… 나는 물론 알고 있었어, 잔시. 너는 결코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는걸. 그런데 외삼촌이 너를 기다려 함께 가자고 말하는 바람에 놀라고 만 거야.

내 차의 보험은 소유주 본인 외엔 혜택을 못받게 되어 있는 사실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어."

"뭐라구!"

잔시스는 비명을 질렀다. 프림로즈의 파티에서 모건을 나는 듯이 몰아 집에 돌아왔던 걸

생각하자 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말도 안 돼. 보험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주었어야지, 하고 소피를 책망한다 해도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라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두번 다시 그 차를 운전하지 않으면 되는 것야. 그보다도 오늘은 소피가 너무 엉뚱한 일을 계획하고 있지 말기를 잔시스는 바랐다.

아침식사의 테이블에서 소피와 잔시스는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소피는 포스트를

먹으면서, 헤밍즈 부인은 자동차 사고 이후 간호원을 그만두었다고 잔시스에게 귀띔해 주었다.

"운전하던 그녀는 찰과상 하나 입지 않았는데, 남편은 중상을 입은 거야. 그 사고의

후유증으로 그녀의 남편은 자신감을 상실하고 말아서 부인이 곁에 없어서는 안 되게 된 거야."

"어머나, 가엾어라."

"정말 안 됐지. 그래서 헤밍즈 부인은 간호원을 그만두고 이 집에서 일하게 된 것이야.

여기의 전 가정부였던 티밍즈 부인이 관절염이 몹시 심해져서 그만두게 되었거든. 그녀는 지금은 마을에 있는 외삼촌의 집 중 한 채에서 살고 있어." 옆길로 빠졌다가 소피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헤밍즈 부인은 외삼촌에게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 부부가 늘 함께 있게 해 주니까.

그래서 외삼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 주지. 그렇지만 그녀는…" 소피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익살로써 매듭지었다.

"나를 우습게 생각하는걸. 티밍즈 부인은 내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었는데 말이야." 아침식사 후 소피는 마을로 가자고 했다.

"마을 회관의 게시판을 보러 가. 오늘 밤에 요란한 파티가 있을지도 몰라."

베란다에는 휠체어를 탄 헤밍즈 씨가 있었다. 외투로 전신을 감싸고 두툼한 모포를 무릎

위에 덮고 1월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스케치북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소피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그의 눈엔 생기가 없어 희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는 남자로 보였다. 소피가 떠나려고

할 때, 저도 모르게 잔시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마을까지 산책을 가려고 하는데, 함께 가시겠어요?"

헤밍즈 씨는 잠시 어안이벙벙한 모양인지 잔시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 무거워서 당신은 밀지도 못해요."


잭 헤밍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머나, 그렇지가 않아요. 저희 쪽은 두 사람인걸요."

잔시스는 기다렸다. 갑자기 이 불행한 남자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다. 이 남자에게

생기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두려워하시는군요."

잔시스는 슬며시 상대를 떠보았다. 그녀의 권유를 받고 상대는 다소 생기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당신을 구름의 정상까지 데리고 가, 거기서 손을 놓아 버리면 되잖아요." 헤밍즈 씨의 얼굴은 한층 밝아졌다.

"페기가 허락할지 물어보지 않으면…"

잔시스가 부인을 불러 사정을 이야기하자 부인은 망설임을 담은 표정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가보시겠어요, 당신?"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가가 젖었다. "담배를 피우며 생각을 해보지."

부인의 눈에 글썽이는 눈물의 의미를 잔시스는 나중에 부인으로부터 설명을 듣기까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근에 그는 전보다 더 깊이 실의에 빠져 좋아하는 파이프 담배마저 피우지 않았는데, 잔시스의 제의를 받고 조금 나아진 것 같아 기뻐 눈물이 솟구쳤다고 했다.

"충분히 조심할 테니 염려 마세요." 잔시스는 부인에게 속삭였다.

쉴새없이 조잘거리는 소피가 휠체어를 밀고, 세 사람은 차도를 내려가고 있었다. 때마침

별채에 무엇인가를 가지러 가기 위해 연구실에서 나온 토프가 차도를 내려가고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 그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셋 중 누구 한 사람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5

잔시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을까지는 멀어서, 세 사람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헤밍즈

씨는

아내에게로

반짝인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돌아갔다.

그의

눈은

생기로

"미안해요, 늦어서."

잔시스가 헤밍즈 부인에게 사과했다. 소피가 끼어들었다.

"티밍즈 아주머니의 집에서 커피 대접을 받았어요. 그분은 다리가 아파 행동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잔시스가 커피를 끓이는 사이에 헤밍즈 씨와 난 그분을 격려해 주었지요." 점심식사 후 객실의 창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소피는 말했다.

"잔시!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내가 정말 좋은 일을 했구나, 하는 기분 말이야."


"어머나, 그래?"

소피의 말에 놀란 잔시스는 소피가 갑자기 센치해졌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네가 헤밍즈 씨에게 함께 마을에 가자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네가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나 생각했지만, 헤밍즈 씨와 보낸 시간은 정말 즐거웠어. 정말이지, 난생 처음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거야."

"너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선 없어서는 안 될 존재야. 청량젠걸 너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골칫거리일까?"

소피는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잔시스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잔시, 오늘 밤 마을 회관에서 열리는 디스코 파티에 가볼래?"

잔시스는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남아돌아가는 소피의 에네르기가 조금이라도

소비된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도 좋아. 하지만 너는 아직 환자니까, 우선 외삼촌의 허락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니?" "이런 사소한 일도 허락을 받아야 하다니."

소피는 투덜거리면서도 잔시스의 말대로 했다.

"그럼, 지금 갔다올게. 마침 잘 됐어, 휴식시간이니까."

성급한 소피. 혼자가 되자 잔시스는 슬슬 런던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꺼내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소피는 싫어하겠지. 그러나 원기 발랄한 소피로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잔시스는 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간호한다는 명목으로 여기에 왔으니까.

그런데 잔시스는 묘하게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간밤에 토프와 언쟁을

하고 난 직후는 일 분이라도 더 여기에 묵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 나의

목표는 토프를 철저하게 혼을 내주는 것이다. 런던으로 돌아가 그와 떨어져 있으면

복수할 수가 없잖은가.

잔시스는 자신의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복수심에 놀라고 있었다. 이러한 기분은 처음이다.

나를 만날 때마다 내가 빨리 돌아가 주었으면 하고, 토프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여기에 머물러 있는 보람이 있는 거야.

도대체 나에 대해 자기 좋을 대로 말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잘못된 거야. 잔시스의

마음은 결정되었다. 좋아, 당분간 여기에 있기로 하자, 가능한 한 온갖 찬스를 잡아서 못살게 구는 거야.

토프를 응징하기 위한 맹세를 새롭게 가다듬고 있는데, 소피가 뛰어들어왔다. "믿어지니, 첫눈에 반한다는 게?"

소피의 얼굴은 불그스름했고, 눈동자가 빛났다. "믿어지지 않는데."

아이구 맙소사, 또 시작이로구나 잔시스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슈에 대한 감정이

급진전을 보이며 불타오르긴 했지만, 만난 순간에 그렇게 된 건 아니다. "외삼촌에게 조수가 있어.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 나는."

소피는 황홀경에 빠져 잔시스의 대답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꿈을 꾸는 것 같아서 나는 내 몸을 꼬집어 봤어." "외삼촌은 가라고 허락하셨니?" 잔시스는 소피에게 물었다.

"가다니? 어딜? 아아, 디스코 파티. 응, 오케이야."

그렇게 말했을 뿐, 소피는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고 말았다.

그날 밤은 토프도 외출하기 때문에 일찍 저녁식사를 했다. 아이린 포브스와 뜨거운

데이트를 하겠군, 틀림없이. 썩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잔시스는 몹시 불쾌했다. 미스


포브스, 농담도 통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그러나 토프에게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릴 이유는 없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소피는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지, 계속 웃었다. "가레스 로건은 마을에 살고 있나요?"

소피는 토프를 향해 재빨리 핵심을 믈었다.

"아니, 그는 5킬로 정도 떨어진 도즈브리지 시내에 살고 있지." 소피는 토프의 말이 떨어지자,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나요? 매일 출근하나요?"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어조로 한 마지막 질문은 '그는 결혼했나요?'였다.

토프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고 있었다. 조카의 특별한 감정을 알아차린 건지 어떤지

잔시스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독신이야."

토프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못을 박았다.

"소피, 그의 하루하루가 따분하리라 생각해서 활기를 불어 넣으려 계획하고 있다면 아예

그만두려므나. 가레스는 고지식할 정도로 착실한 청년이고,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즐거워서 연구에 열중하고 있으니까. 꾸준한 연구 생활이 너로 인해서 방해받으면

곤란하거든."

소피의 표정은 천진난만함을 쏟아부은 것 같았다.

"어마나, 제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요? 다만, 그가 조금 쓸쓸해 보여서 잔시와

격려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토프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힐끗 잔시스를 쳐다보았다. 토프가 특히 가레스와 어울리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나로군.

토프는 나를 일방적으로 남자를 유혹하여 함락시키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여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잔시스는 토프를 마주 노려보았다. 두고 봐요, 토프 킹맨.

언젠가는 틀림없이…

"오늘 아침 잭 헤밍즈를 데리고 마을에 나간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야?"

토프와는 한마디도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 잔시스는 대답을 소피에게 맡겼다. 소피는

잔시스를 재빨리 쳐다보고 자기가 대답을 해 주길 바라고 있는 걸 눈치채고 토프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 일로 책망을 하시겠다면, 제 생각이에요."

"책망을 하다니, 당치도 않아. 오후에 잭을 만났는데 열심히 스케치를 하고 있더군.

그렇게 원기있는 모습은 오래간만이야." 소피는 생긋 웃었다.

"어머! 그렇게 된 거라면, 잔시스예요, 잭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한 사람은."

잔시스는 오로지 식사에 전념하는 체했다. 한시라도 빨리 디스코 파티에 가고 싶다.

빨리 이 저택을 벗어나 긴장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홀로 나가자, 토프가 여느 때와 같이 겉보기에는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당신에게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잔시스."

이렇게 상냥한 태도는 소피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잔시스도 격식을 차린 목소리로 응수하고, 토프의 서재로 따라갔다.

궁금해 하는 소피를 문밖에서 따돌린 토프는 잠깐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다크 슈트에

말쑥한 하얀 셔츠. 토프가 점점 멋져 보이는걸, 하고 잔시스도 멍하니 생각했다.

토프는 빨간 드레스 차림의 잔시스를 찬찬히 언제까지나 훑어보고 있었다. 잿빛


눈동자는

매서웠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다크

골드

머리칼은

드레스의

빛깔과

조화되어

한층

내 쪽에서는 절대 먼저 말하지 않겠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잔시스는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매서운 표정으로 토프는 입을 열었다. "남자는 모두 당신이 마음먹기 나름이구먼." 어느 모로 보나 정면 공격인데! "대단한 통찰력이군요."

잔시스도 싸움을 걸었다.

잔시스의 빈정거림을 토프는 무시했다.

"런던에서 당신의 대담한 행동을 보니, 당신은 만나는 남자 모두를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더군."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남자들 스스로 따라오는걸요." 잔시스는 바람둥이 처녀 같은 태도로 반격했다.

토프는 그 말도 무시하고 잔시스를 싸늘하게 응시하면서, 자신이 목격한 잔시스의

행동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언 헤이워드는 당신에게 푹 빠져 있으니, 당신의 낙승일걸. 같이 춤을 춘 남자,

그 남자와도 대단하더군. 당신들이 벌인 행각을 나는 이 눈으로 목격했지. 볼만했어." "그랬을 테지요."

잔시스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더군. 이튿날 아침 당신의 아파트에서, 나는 당신이 전혀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보았지. 게다가 여기에 오기가 무섭게 잭 헤밍즈를 홀려 기분좋게

만들었고. 당신들 세 사람이 돌아오는 장면을 보았어. 웃고 있더군, 잭이!"

그것은 소피와 함께 있으면 누구라도 명랑해지기 때문이며 게다가 같은 병자인 티밍즈

부인을 만나, 누군가를 원기있게 해 주고 싶다는 욕구가 헤밍즈 씨를 눈뜨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아주 질이 나쁘다는 뜻이군요. 할 이야기라는 것이 그것인가요?"

거만한 말투라고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거만함이 토프는 마음에 들지 않을

테지―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잔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이야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군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나름대로 증거를

갖고 있는 모양이니까…" "그래요."

토프는 그녀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나 확신을 할 만한 뚜렷한 단서를 잡을 때까진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겠지."

과학자다운 말씀이시군.

"당신은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고…"

고집불통인 당신에게 변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아예 없고요.

"이것만은 분명하게 밝혀 두고 싶어. 여기서 재미보는 것은 마을회관 안만으로 한정해

줘요."

잔시스의 눈썹이 꿈틀하고 치켜올라갔다. 그녀는 기가 막혀 망연히 토프를 응시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씀은…"

잔시스는 헐떡였다. 그게 아니야.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잔시스의 동요에는 까딱도 않고, 토프는 쌀쌀하게 잘라 말했다.

"내일 아침 차가 당신의 방에 날라졌을 때, 당신의 침대에 숨어있는 사나이를 우리집

고용인이 발견하는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다는 거야."

요란한 기세로 잔시스의 손이 토프의 뺨을 쳤고, 그 소리에 그녀도 놀랐다. 일순 토프의

표정은 충격으로 인한 분노로 바뀌었다. 의외의 일격이었다. 그는 잔시스를 붙잡자

난폭하게 입술을 겹쳤다. 마치 벌을 주듯이.

양쪽 다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었다. 한쪽이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려 하면, 상대는

더욱 힘을 가해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잔시스는 토프의 양팔에 휘감겨서 꼼짝할 수도 없었다.

"상대가 새파란 애송이라면 당신의 강경한 태도에 놀라는 것으로 끝낼지도 모르지.

나에겐 통하지 않아요, 아가씨. 난 반드시 앙갚음을 하지!"

그러나 잔시스는 토프의 빈정거림과는 달리 눈동자에 스치는 따스한 빛을 보았다. 곧

눈빛은 얼음처럼 싸늘해졌지만.

잔시스가 보기엔 토프의 자제심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의 바보 같은 장난에 동참할 생각은 전혀 없어."

토프는 상기해 있는 잔시스의 얼굴을 차분하게 관찰했다.

"당신, 진정될 때까지 여기 있다가 가도 좋아. 흥분한 모습을 소피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 토프가

초라도

머물렀다면,

잔시스는

그에게

다시

한번

손바닥

세례를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분노로 부들부들 떨려서 비틀거리며 가장 가까운 의자에 다가가서 잔시스는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욕설을 거침없이 토프에게 퍼부었다.

자존심을 짓밟아 버린 남자에 대한 증오심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잔시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여기에 머물기로 하자. 계속 머물면서 온갖 기회를

이용해 그를 괴롭히자.

이런 생각을 하며 잔시스가 십오 분 가량 토프의 서재에 앉아 있자, 소피가 그녀를 찾아

들이닥쳤다.

"외삼촌은 외출했어. 이젠 괜찮니?" "코트를 가져다 줄래?"

소피는 헤밍즈 부인으로부터 회중전등을 빌려왔다. 지금부터 가야 하는 길에는 가로등이

없기 때문이다.

"외삼촌이 우리를 차로 태워 주겠다고 말했는걸." 걸으면서 소피가 말했다.

"하지만 둘이 싸움을 하고 난 뒤라, 네가 싫어할 것 같아 사양했어." 두 사람은 잠자코 걸었다. "싸운 게 아니니?"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조금 전 서재에서 일어났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토프가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 이유를 꾸며댈 시간이 잔시스에게는 필요했다. "네가 토프 외삼촌과 함께 있으면, 불꽃이 튀는 듯한 느낌이 드는걸." "그냥… 싸움은 하지 않았어."

조금 전에 벌어진 사건의 충격이 목소리에 드러나지 않게 잔시스는 조심했다.

"외삼촌은 말이야. 네가 정말 디스코 파티에 갈 만한 상태인지 어떤지 알고 싶어하셨어.


그리고… 나에게 너를 부탁한다고 말했어." "정말?"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소피는 살며시 말했다. "고마와요, 외삼촌." 고마와요라니?

소피는

자기

멋대로

모양이야… 잔시스는 은근히 분개했다.

하게만

주면,

감사의

말이

절로

나오는

둘은 투 스탭으로 춤을 추면서 마을 회관으로 갔지만, 먼저 문을 열고 목을 쑥 들이민

소피가 황급히 몸을 빼며 문을 닫았다. "안 돼, 들어가서는."

시체라도 본 것같이 소름이 끼친다는 투로 말하는 소피를 쫓아, 잔시스는 마을 회관을

뒤로 했다. 소피는 가까운 벽에 기대자 웃음을 터트렸다. "요란한 파티치고는 너무했어, 잔시." 소피는 킥킥 웃었다.

"춤을 추고 있는 아이들은 틀림없이 열여섯 살 이하였어." 웃음을 그치자, 그녀는 곧 다음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자 그러면, 마을의 선술집은 어떨까? 가보지 않을래?"

술집 '빨간 라이온'은 활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구석에 진을 치고 있는 두 노인은 흡사 붙박이 가구처럼 꼼짝도 않고 있었으며, 다른

손님은 없었다.

소피는 혼자서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맥주에 진저에일을 탄 샨디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잔시스는 건성으로 듣고 있다가, 흠칫 놀라 맞장구를 치곤했다. 밉살스러운 사나이에

대한 분노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소피는 잔시스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마실

것을 반 정도도 마시지 않았는데도 돌아가 텔레비전을 보는 편이 낫겠다고 말을 꺼냈다.

특별히 두드러진 게 아무것도 없는 이 마을을 소피는 이미 '최후의 변두리'라 부르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잔시스는 토프에 대해 생각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소피와 텔레비전

앞에 앉긴 했어도, 여느 때라면 대굴대굴 구르며 웃을 정도의 재미있는 코메디였지만 오늘 밤은 조금도 우습지 않았다.

소피도 신명이 나지 않는지 일어나서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 댔다. 잘 웃고 떠드는

소핀데… 그녀가 가레스 로건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은 정말인지도 모른다. "그만 잘까."

소피가 말했다.

텔레비전에선 윌리엄이 매주 열심히 보곤하던 스파이극의 최종회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윌리엄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스파이의 정체를 알고 싶을 텐데, 오빠는.

"이 시리즈, 윌리엄이 노상 보던 거야.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고, 편지로 알려 주고

싶어."

잔시스는 말했다.

소피는 침실로 올라갔다. 잔시스는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오 분도 되지

않아서 텔레비전으로부터 관심이 벗어나 있었다.

토프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잔시스는 황급히 텔레비전으로 관심을 돌렸다.

틀림없이 그 멋쟁이 아이린 포브스와 함께 있겠지. 또다시 잔시스의 관심은 텔레비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아이린이라면 토프도 대환영이겠지.

잔시스는 하���을 하며 폭신한 소파에 기댔다. 깨어 있으려고 눈을 깜박거렸지만…


시계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 안에 들어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토프는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끄고 잔시스에게 다가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손을 뻗었다.

6

긴 터널에서 빠져 나온 듯, 잔시스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이 집의

주인에게 안겨 있는 것을 깨달았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잔시는 허둥거리지는 않았다.

잔시스는 그의 눈초리가 따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간, 서재에서의 사건이 생각나

튀기듯 그를 밀치며 일어섰다. 그때 토프가 조용히 말했다.

"볼성사납게 소파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어서 방으로 안고 가 침대에 뉘어 주려고…" "어머나."

부드럽게 놀람의 소리를 지르며, 몽롱한 수면의 안개가 걷히는 것을 잔시스는 거부하고

있었다. 토프가 나에게 이렇게 다정할 수 있다니… "너무 그렇게 신경과민일 필요는 없어." 다시 싸늘해진 목소리.

순간 잔시스의 뇌리엔 아이린의 영상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얼굴이 확 붉어짐을 느꼈다.

이게 무슨 저주받을 짓이람. 황급히 돌아서서 문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망치듯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그 심술궂은 말투를, 그는 다시 쓰고 있었다. "나와는 재미가 없단 말이지."

토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잔시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잔시스가 반스와 데비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잔시스는

노려보았다.

구역질이

난다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보고

있는

토프를

"이제 그만 가서 자!"

상대의 고압적인 말투에 잔시스는 발끈했다.

나를 매춘부처럼 몰아세우다면, 도대체 자기는 무슨 대단한 사람이나 된다는 건가? 그를 노려본 채 꼼짝도 않는 잔시스를 토프는 다그쳤다.

"디스코 파티에서는 수확이 없었던 모양이고, 사랑에 굶주린 채로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건가?"

정말 밉살스러운 사람! 그때 토프가 술을 가지러 가느라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면,

잔시스는 화가 난 나머지 다시 한번 그의 뺨을 갈겼을 것이다.

토프는 자기 잔에 스카치를 따랐다. 잔을 집으려던 그는 아직 잔시스가 그냥 있는 데

놀란 모양이다.

"뭐지, 그 표정은? 나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하는 건가?"


"너무 잘난 체 우쭐거리지 말아요." 잔시스의 분노는 폭발했다.

"당신처럼 독단적이고 무엇이나 다 아는 체하는 거만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흥분한 잔시스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비난의 말을 퍼부어댔다.

"나 같은 건 당신과 같이 깨끗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나도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감정을 지닌 인간이에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잔시스는 계속해 댔다.

"마치 성인군자 같은 표정이니,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나요? 아프지 않다면 이상하지요.

당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슬슬 빠져 나와 주위를 돌아보는 게 어떨까요? 당신의 충격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말씀드려 두지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20세기예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그 정도에서 잔시스는 한숨 돌렸다.

토프는 시원스러운 얼굴로 냉정하게 잔시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잔시스의 활활 타오르는

공격적인 언설도 그에게는 전혀 충격을 주지 않는 것일까? 더 이상 상대를 공박할 말도 없어서, 잔시스는 문으로 향했다.

문에서 그녀는 뒤돌아보았다. 냉담하게 마주 바라보는 토프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지금

막 꺼지려 하는 불꽃에 기름을 부은 듯 다시 비난의 말이 떠올랐다.

"연애 상대를 정하는데, 전 약간 까다롭지요. 당신처럼 주변머리 없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에겐 전혀 흥미가 없어요."

잔시스는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토프의 눈이 실처럼 가늘게 떠지는 것을 보자 흡족했다.

드디어 토프도 동요된 것이다. 그녀는 침실로 뛰어올라갔다.

이긴 거야―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잔시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마지막 한마디로, 나는 토프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너무 기뻐서 잠을 자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토프가 계단을 올라오는 기미는 없다. 그는 아래층에서 자신의 성격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나는 답답한 사람이라고. 스카치 한 병을 비운다 해도 좋을 정도지.

승리감에 도취된 잔시스가 마냥 들떠 있을 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잔시스의 침실 앞에서 머뭇거리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토프는 홧술

따윈 마시지도 않은 거야― 잔시스의 들떴던 기분은 금세 시들해졌다. 나한테서 무슨 말을 들어도 토프는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던 거야.

조금 전의 득의만면했던 기분은 어디로 가고 말았는지, 잔시스는 완전히 의기소침하게

되었다. 스코어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득점은 없어졌으며, 토프의 '잔시스 인상'에 또 한 가지 '수다쟁이'라는 명칭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때 잔시스는 귀를 곤두세웠다. 문 밖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토프가 들어섰다. 그의 등뒤에서 문이 조용히 닫혔다.

소리를 지르려 해도 성대가 마비된 것 같아서 잔시스는 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떡 벌어진 우람한 어깨,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토프는 다가오고 있었다. 잔시스는

조금 전 그에게 퍼부었던 조소의 말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해댈까? 토프는 본을 보여주기 위해 온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불안감이 잔시스를 엄습했다. 토프는 강해 보였다. 힘줄이 불거진 팔을 보자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저는…"

잔시스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사과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 잔시스."


바로 곁에까지 다가온 토프의 숨결에서 술냄새가 풍겼다. 역시 취한 거야.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모르고 있는 거야.

"당신은 내게 말했지. 내가 살고 있는 답답한 시대에서 벗어나 20세기를 살아가라고."

아아,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는데. 기분나쁘게 번쩍이는 그의 눈을 보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네, 하지만…"

잔시는 말꼬리를 흐렸다.

"말했잖아, 네가 주변머리 없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라고." 토프는 쉬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해야만 되겠다 싶어서."

그는 역시 취해 있다. 술이 취하지 않았다면 결코 할 리도 없는 짓을 토프는 해치운다.

입 안이 바싹 타들어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잔시스를 곁눈질하면서, 토프는 느닷없이 시트를 젖혔다. 긴장하고 있는 잔시스의 귀에 토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의 솜씨를 차분히 구경하고 싶군, 아가씨."

붙잡으려고 내민 토프의 손에서 잔시스는 몸을 슬쩍 비켰다.

토프는 균형을 잃고 허공을 허위적거리다 엎어졌다. 그는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의 어깨가 경련하듯이 떨렸다. 잔시스는 쏜살같이 문으로 달려가 등뒤로 재빨리 한번

슬쩍 쳐다보았다. 토프는 엎드린 채 있어서, 얼굴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얇은 잠옷만 걸친 채 잔시스는 복도로 뛰어나갔다.

토프가 나오기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말아야지. 소피의 방에서 재워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잔시스는 가려다 말고, 외삼촌을 경모하고 있는 조카의 심정을 헤아리고 멈칫했다.

가게 된다면, 그녀의 외삼촌은 취하기만 하면 손님한테도 손을 뻗칠 정도의 무뢰한이라고 소피에게 떠들어대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

잔시스는 하는수없이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집의 주인을 원망하면서, 잔시스는 응접실의 소파에 주저앉았다. 토프도 이따금

릴렉스해져서 곤드레만드레 취하기도 하는군― 약간 놀라운, 뜻밖의 발견이었다.

방 안은 싸늘해지고 있었다. 중앙난방장치가 자동으로 꺼졌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이런

상태일 테지.

얇은 잠옷 차림의 잔시스에게 냉기가 엄습했다. 나는 이런 곳에서 앉아 폐렴에 걸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토프는 나의 침대에서 따스하게 편안히 자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잔시스는 삼십 분도 채 못 되어 추위로 파르르 떨면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살며시 계단을 올라갔다.

잔시스는 침대의 발치께에 놓아둔 가운을 가져오려는 생각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방 안에 들어와 보니 스탠드는 켜진 채 있고, 토프는 불빛에 등을 돌리고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잔시스는 문득, 스코어를 동점으로 만들자. 아니, 그 이상으로 토프 쪽에 큰 마이너스

점수를 줄 만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 것일까?

하지만 내일 아침 분해 어쩔 줄 몰라하는 토프의 얼굴을 상상하자 통쾌했다. 그래,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예의범절에 몹시 까다로운 토프 킹맨, 선악의 판단에

엄격한 토프 킹맨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내 침대에 나와 함께 누워 있는 것을 알게 되면, 까무러칠 정도로 충격을 받게 될 테지.

잔시스는 발소리를 죽이고 문으로 다가가 소리가 나지 않게끔 문을 닫았다. 토프가 깨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침대로 돌아가서, 조용히 시트를 들어올리고 숨을 죽이며


그의 옆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따스하니 기분이 좋은걸― 깊은 잠의 늪에서 서서히 깨어나면서 잔시스는 몸부림을 쳤다.

뭔가 딱딱한 것이 방해가 되었다.

무어지, 이건? 움직이는데! 크게 또렷이 떠진 잔시스의 눈에 비친 것은 켜진 채 있는

스탠드와 곁에 누워 있는 토프. 그도 막 눈을 뜨고 일어나 앉으려 하고 있었다.

토프는 잔시스를 응시했다. 그의 아연실색한 얼굴을 얼핏 본 잔시스는 간밤에 생각해

냈던 아이디어가 너무나 무서운 것이었음을 깨닫고 속으로 후회했다. "저…"

"도대체…"

토프도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잤다는 사실을 토프는 나름대로 그것을 해석하고 있다. 그의 표정에서

그렇게 알아차린 잔시스는 이내 그녀 쪽에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토프는 무례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태연했다. 잔시스는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지만, 토프에게 화난 얼굴을 들켜서는 난처할 것 같아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무해요."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서 상대가 들을 만큼 큰소리로 나무라듯이 울부짖었다. "아아,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기대한 대로 어안이벙벙해진 그는 침묵하고 있었다. 한참 후 이윽고, 토프의 당혹한

목소리가― 잔시스의 기대에 부합되는― 들려왔다. "어떻게 할 생각이라니, 무엇을?"

"당신은, 설마…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잔시스는 일부러 신음해 보였다. 황급히 서둘러 대답할 거야 없겠지. 좀더 혼을 내

주어야지.

"그렇게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었으니…" "나는 취해 있지 않았어."

힐난하는 듯한 어조의 반박을 당하자, 잔시스의 결심은 점점 굳어졌다. 좀더 철저하게

혼을 내 주어야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곤드레만드레 취했던 주제에. 거짓말쟁이! "술에 취하지 않은 제정신의 당신이라면 그런 일은 하지 않았을 테지요." 잔시스는 개탄했다. 대단한 연기력이 요구되었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연 토프는 냉정하게 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얘기해 주겠어?"

잔시스는 토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뜨자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에서 회복된 모양이다. 그가 사태를 이상하게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잔시스의 예측으로는, 지금쯤 토프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있어야 하는 건데.

토프가 침착한 체 못하게 다시 궁지에 몰아넣고 싶었다. 그래서 잔시스는 얼굴을 돌리고

애수를 곁들인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렸다.

"전… 어젯밤까지는 처녀였어요. 아아, 그런데도 너무했어!"

여기에서 소피라면 내키는 대로 울 수 있으련만. 잔시스는 눈을 감았다. 매달리면서

사과할 토프에게 눈속의 표정을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매달리기는커녕 토프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곤드레만드레 취해 여기로 와서 당신에게 무례한 짓을 했다고 얘기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해 봐…" 잔시스는 끝까지 시침을 뗐다.

"당신이 그런 분일 줄은 생각지도 않았어요, 토프."

묘하게도 진짜로 모욕을 당한 기분이 되었다. 취해 있었든 맑은 정신이었든, 토프는

그녀 따위에겐 애초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리한 아픔을 느낀 잔시스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이젠, 나가 주세요."

맥빠진 목소리로 잔시스는 말했다.

"소피가 뛰어들어올지도 몰라요. 무엇보다도 차를 가져오는 캐롤에게 들키면 난처하지

않겠어요?"

토프가 여기에 계속 있으면서 사실이냐고 계속 다그친다면, 잔시스는 마음이 약해져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고백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잔시스를 흘끗 쳐다보았을 뿐,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또다시 잔시스의 분노는 거세게 불타올랐다. 정말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침식사의 테이블에 앉았을 때도 잔시스의 화는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아주 얌전한데."

늦잠을 자다가 이제야 막 식탁에 앉은 소피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무 일도. 소피, 나는 이제 집에 돌아가도 상관없겠지?'

잔시스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문이 열리고 토프가 들어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굿모닝."

토프의 간단한 인사였다.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 열심히 일한다고, 어떻게 돼나요?"

외삼촌의 간단한 인사에 부아가 난 소피의 신랄한 공격에 적당히 대답한 토프는 공격의

화살을 잔시스에게 돌렸다.

"아침식사 후에 나의 서재로 와 주겠어, 잔시스?"

아주 상냥하게 부탁하는걸. 소피가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잔시스는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커피를 마시는 데 열중했다. "됐다. 됐어."

소피의 두뇌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연���소로 가서 가레스와 단둘이 있을 수 있겠군. 될 수 있는 한 오래 토프

외삼촌을 붙잡고 늘어져, 잔시."

소피는 잔시스의 창백한 안색을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잠깐! 너, 설마 외삼촌을 만나러 가는 것이 불안한 건 아니지?" 소피는 한순간 가레스에 대해서 잊어버렸다. "내가 따라가 줄까?"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

그렇게 말했지만, 잔시스는 내심으로 가지 말까 하고 진짜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토프를

만나는 게 두려웠다.


"뭐라고 생각하니? 외삼촌이 네게 할 말이. 이러다간 자칫 습관적이 될지도 모르겠어.

간밤에 우리가 마을로 떠나기 전에 두 사람은 사이좋게 이야기하잖았니?" 소피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어지간해, 두 사람 다…" "그 정도만 해둬."

잔시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머나, 미안."

소피는 생긋 웃으면서 친절하게도 보충설명까지 했다.

"외삼촌은 늙은이가 아니야, 잔시. 고작 서른일곱인걸. 너와 어울리는 나이야. 응, 어떨까,

만일…"

"그만해 줘, 소피."

잔시스는 매섭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소피는 달리 할 일이 없어 심심하게 되면, 중매라도 설 모양이다. "유감인데. 네가 나의 외숙모가 되면 좋을 텐데."

잔시스가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소피는

"잠깐 실례해도 되겠니?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싶어. 가레스를 만나러 가기

전에."

하고 제 방으로 가버렸다.

홀로 남은 잔시스는 서재에서 만나고 싶다는 토프의 말에 응할까 말까를 망설였다.

토프가 만나고 싶다는 이유는 알고 있다. 그건 내가 그를 다그치는 속셈이 뭔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아무래도 그가 퍼부을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토프가 이번 일을 두 사람 선에서 끝내려 하는 데는 감사해야 한다.

자업자득이라고 체념하고 그와 대결하자. 겁을 먹고 오들오들 떨고 있진 않겠어.

잔시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서재로

향했다.

격론을

끝내고―

토프가

냉정하게

얘기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걸― 그가 나가 달라고 말하기 전에 런던에 돌아가겠다는 것을 먼저 말하자. 지금의 잔시스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7

"앉아요, 잔시스."

명령조로 권하는 토프에게서, 잔시스는 권위의식과 자제심을 느꼈다.

잔시스가 앉자 토프도 앉았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오늘 아침에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만, 이젠 분명히 말해 줘. 당신이 노리고 있는 것,

즉 목적을 말해 봐요." "목적이라니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내가 공갈을 쳐서 돈이라도 우려 내려는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잔시스는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특별한 목적 같은 건 없어요."


그녀는 내뱉듯이 말했다. 매우 빨리 자제심을 잃어버린 자신에 비해 보기에도 아주

냉정한 토프가 밉살스러웠다.

"그리고 저를 간교한 여자라고 취급하는 듯한 말투는 그만두세요! 간밤의 당신은…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제 방에 들이닥치셨죠? 와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잔시스는 마냥 허풍을 떨면서 대꾸했다. 잠시 생각하고 나서, 토프는 말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했다고 그러는 거야… 유혹했다는 거야? 강간이라도 했다는 건가?"

잔시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토프는 나의 방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의 기억이 없기라도 한

것일까?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씀인가요?" 대담하게 잔시스는 물어보았다.

"당신의 방에 간 것은 기억하고 있어. 당신의 침대에 쓰러진 것도. 그러나…" 토프의 시선이 잔시스를 스치고 지나가 창 저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뒤는 모르겠어. 그 이후, 오늘 아침 당신의 팔꿈치가 등을 쳤을 때까지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아요."

됐어! 잔시스는 마음속으로 기뻐 날뛰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지금까지 잔시스가

실컷 맛본 패자의 기분을 토프에게 맛보게 할 때가! "그런가요?"

짐짓 거드름을 피며 말하면서 잔시스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토프는 아직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나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거야.

"내가 당신을 강제로 폭행한 거요?" 토프가 조용히 물었다.

당연히 '그래요'라고 대답해서 주눅이 든 토프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도, 잔시스의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제지하는 감정의 소리가 더 컸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아가 치밀어서 무릎께에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된 셈이지요. 하지만…"

"당신에게도 잘못이 전혀 없진 않다는 말인가?"

토프가 말끝을 이어받았다. 꺼져가던 잔시스의 복수의 결의는 토프의 말을 듣자 전보다

더욱 불타올랐다.

"그렇게 된 셈이지요."

토프를 쳐다보는 녹색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당신처럼 경험이 풍부한 분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죠."

그때 잔시스의 머리엔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토프의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다시 눈을 내리깔고 비통한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그러나 최악의 사태에 대해선…" "최악의 사태라구?"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낀 잔시스는, 상대에게 준 충격을 확인하고 싶어 고개를

들었다. 지금쯤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여주게 된다 해도 괜찮을 거다.

그런데 충격을 받은 것은 오히려 잔시스 쪽이었다. 아연실색해야 할 토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어서, 잔시스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무서운 침묵이 토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잔시스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이윽고 분노

어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군, 그것이 당신의 목적이었군! 당신은 자신의 난잡한 행동의 결과를 정당화시켜

줄 얼간이, 즉 아이의 아버지가 될 인물을 찾고 있었군."

발끈 화가 난 잔시스는 자제심을 잃고 의자에서 발딱 일어섰다. 지독한 생트집인걸.

또다시

나를

바보로

만들다니.

후려갈기려 했다.

멋대로

나를

궁지에

밀어넣다니.

그녀는

토프를

그러나 토프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나 잔시스의 양손을 꽉 잡고는 단단히 눌렀다.

잔시스의 시퍼런 서슬로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토프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잘못했어' 하고 사과하는 뜻밖의 매력을 보였다.

"용서해 주겠지? 내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어도, 나로서는 기억이 없으니…"

토프의 사과를 받고, 잔시스의 분노는 다소 진정되었다. 토프는 그녀를 의자에 도로

앉히고, 자기도 본래의 의자에 다시 앉고, 진지한 눈초리로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잔시스."

천천히 이야기를 하는 토프의 잿빛 눈동자가 잔시스에게 최면을 건 듯, 그녀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당신에 대해 대단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게 되지." 그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서 먼저 당신에게 이야기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날 밤 파티에서 당신과

춤을 추었던 플레이보이 타입의 사나이에 대한 당신의 그 태도는 도대체 뭐지?"

토프의 꿰뚫는 듯한 눈초리에 사로잡히자, 잔시스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사실 반스와의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기에 잔시스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에이드리언 헤이워드가 저… 제게 관심이 많아서…

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본인에게 분명하게 전했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결혼해 달라느니 어쩌느니 하고 치근덕거려서…" 토프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토프는 다음 말을 재촉했다. "제가

반스

케더링과

에이드리언이 들어와서…"

춤을

것은,

하룻밤

내내

치근덕거릴

얼굴을

하고

잔시스는 한숨을 돌렸다. 지금은 자신에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잔인한 짓을 했다고 여겨지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에이드리언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마침

반스가

제게

치근덕거리며 말을 걸어왔고, 에이드리언이 그것을 보고 있기에, 저는 반스를 딱지 놓는 대신 좋을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지요."

"반스가 이층까지 따라 올라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군?"

"당연하지요. 저는 그때 이미 파티에 넌더리가 나서 망토를 가지러 이층으로 갔으니까요.

프림로즈가 망토를 어느 방에 두었는지 몰라서 찾고 있는데, 반스가 내 뒤에서 덮쳤지요.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에 그 방으로 떼밀려 들어갔어요. 그리고 불이 켜졌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서 있었던 거예요. 그 후 저는 곧장 그 방에서 나왔어요." "그리고는 이내 당신과 소피는 파티장을 떠났군."

'아니예요, 소피는 달라요'라고 말한다면 친구를 배반하게 되는 것이어서, 잔시스는

간단하게 '네'라고만 대답했다.

"그런데 데비는 어떻게 된 거지?"

잔시스는 리틀브라맨튼 시절의 장난꾸러기 4인조의 이야기와 그날 밤 데비가 자신의


아파트에 머물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토프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는 것을 느낀 잔시스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편이 훨씬 즐겁다는 것을 느꼈다.

"윌리엄의 방에 소피의 짐이 있고 해서, 저는 소피와 함께 자기로 한 거예요. 데비가

'당신 침대를 사용하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라고 말한 것은 말 그대로예요. 별난

말투긴 하지만 그다운 행동이죠. 저는 그런 점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 뒤에 이어지는 침묵은 한없이 길게 생각되었다.

"나는 당신을 고통스러운 지경에 빠뜨리고 만 것 같군."

침묵을 깨는 토프의 말에 잔시스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면, 당신과 결혼하는 것일까?" "결혼이라구요!"

깜짝 놀란 잔시스는 소리쳤다.

"그럴 수가… 저를 바람둥이 여자로 오해했다고 해서 결혼까진 하지 않아도…"

토프의 눈초리가 뜨겁게 보이는 것은 화가 난 탓이 틀림없다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당신은 설마 간밤에 우리가 저지른 짓을 잊은 건 아닐 테지?"

확 얼굴이 붉어지는 잔시스를 토프는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나의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고 싶지 않아."

"저…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닌지도 모르는걸요."

잔시스는 이제 와서 앞의 말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그런 짓을 해서 어리석고 무책임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신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야 그렇지만, 그러나… 잠시 형편을 두고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해 두면, 멋지게 속아넘어갈 거야. "아니. 잔시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

이미 토프의 마음이 굳어졌다는 것이 그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간밤의 행동에 대해선 정말 속죄하고 싶어. 나는…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난폭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평생 마음이 괴로울 거요. 나는 결코 당신에게 걱정을 끼칠 만한 짓은 하지 않을 생각이야. 어쨌든, 당신을 돌보겠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야, 잔시스로서는 시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장에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저는…"

당신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구요, 라는 말을 잔시스는 하지 못했다.

토프는 승낙을 받기 전에는 그녀를 서재에서 내보내지 않을 기세였다. 잔시스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혼자가 될 필요가 있었다.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잔시스는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급히 덧붙였다.

"당장에는 안 돼요. 저…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어요."

잔시스에게 필요한 것은 토프와의 결혼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 궁지에서

피할 방법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방심하지 말라는 소피의 충고를 나는 잊고 있었구나. 토프를 패배시켰다고 의기양양해 있는 동안 오히려 그의 뜻대로 되고 말았으니. "나도 슬슬 연구소로 돌아가야겠어." 토프는 그렇게 말했다.


"소피는 내가 없으니 좋은 기회다 싶어 가레스를 귀찮게 하고 있을 테니."

안도감이 몸의 구석구석까지 번졌다. 드디어 토프로부터 해방됐어, 그렇게 생각하며

문으로 향하고 있는 잔시스의 앞을 토프가 가로막았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지금은 당신과 내가 약혼한 것쯤으로 해두지. 나는 당신을

돌보겠어. 그것을 잊지 말도록 해." 그렇게 그는 선언했다.

토프가 문을 열어 주자, 잔시스는 등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은 기세로 뛰어나갔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뒤쫓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토프 킹맨은 웃을 만한 신경을 지닌

남자가 아니며, 약혼이란 말을 듣고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사실에 일일이 마음쓸 만한 남자는 아니다.

잔시스는 침실에 틀어박혔다. 토프가 나와 결혼하려 하다니.

한층 믿기 어려운 것은 내가 그것을 승낙한 것이다. 그와는 결 혼하지 않겠어. 당연한

일 아닌가.

잔시스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약혼중임을 이용해서, 지금까지

토프로부터 당한 수많은 모욕에 대해 기꺼이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최후에 웃는 것은 토프라는 소피의 생각을 뒤집어 버리고 말아야지.

토프는 성가신 지경에 빠지게 될 거야. 그도 정말로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부터 몇 주일이든 그를 계속 속이며, 될 수 있는 한 오래 마음졸이게 하고 나서, '제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직 눈도 코도 보지 못한 아이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와 결혼할 필요는 없겠지요'라고 말하자고 생각하고 있는데, 소피가 뛰어들어왔다. "가레스가 말이야…"

말하려다 말고 잔시스의 얼굴을 보더니 소피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나, 크림을 마음껏 먹은 고양이처럼 황홀한 표정이군. 어떻게 된 거니?" 황급히 잔시스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보였니?"

소피의 천진난만함을 믿고, 잔시스는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소피의 기선을 제압했다. "가레스와는 만났니?"

소피는 보기좋게 먹이에 걸려들었다.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잔시. 남자에 대해서 이런 기분이 된 것은 처음이야! 가레스는 말이야…"

열에 들뜬 소피의 얼굴을 잔시스��� 찬찬히 바라보았다. 자기자신, 사랑의 고통으로

상처입고 괴로워했었던 과거를 떠올려서 친구의 행동에 공감을 하려 했지만, 잔시스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미 고통스럽지 않은 자신을 알아차렸다. 슈를 생각해도 이제는 괴롭지가 않았다. 그와의 일을 나는 극복한 거야! 기적이나 다름없어,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이 놀라운 발견으로부터 잔시스가 겨우 회복되었을 즈음, 소피는 살며시 말했다.

사랑하는 기분을 친구가 알고 있는 모양이니, 과장해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너도 알고 있지?"

거기서 소피는 갑자기 꿈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머리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그밖의 것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누구니? 응, 잔시."

자신이 아는 남자의 명단이 소피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그녀는

놀라움의 소리를 질렀다.


"잠깐!"

소피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부르짖었다. "토프 외삼촌이니?" "토프?"

잔시스는 흠칫해서 같이 소리를 질렀다. 정말이지, 소피는 상상력이 너무 극단적이야. "그렇지, 잔시?"

다그치는 소피에게 잔시스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것을 소피는 화제를 돌리려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역시, 그렇구나."

소피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은 얼핏 보기엔 서로 미워하는 것 같지만 노상 둘이서만 서재에서 밀담을

나누더라니. 그런 관계였던 셈이군."

모든 것을 시시콜콜하게 캐묻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번 달라붙으면 찰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소피다. 잔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잔시스는 토프를 훌륭한 외삼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피에게 그의 방종한 생활 태도. 간밤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자신의 방에 숨어들었다는 것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외삼촌도 같은 감정이니?"

소피는 벌써부터 흥분된 기색으로 물었다.

"당치도 않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니?"

몹시 당황하며 딱부러지게 부정한 잔시스는 자신이 토프를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머나, 잔시. 외삼촌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뭘로 확신해? 분명히 모르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여자와 단둘만 있을 기회를 만드는 남자는 없어. 너, 군침을 흘리면서 우리 외삼촌을 바라보고 있으니, 모르고 있는 게 아니니?" "군침을 흘린다구!"

잔시스는 빽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소피. 너는 정말 어쩔 수 없구나…"

"그럼 외삼촌은 무엇 때문에, 너와 서재에서 만났니?" 소피의 호기심엔 두손 들었다. "비밀이야."

잔시스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어머나."

소피도 지지는 않았다. 빈틈없이 잔시스의 허점을 노렸다. "저… 그가 네게 고백이라도 했니?"

퉁명스럽게 잔시스는 딱 잘라 말했다. "여부가 있겠니."

자신이 계속해서 왜 이런 실수를 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지껄이고 만 것이다.

취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잔시스는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고, 소피의 얼굴에는 알

만하다는

반성했다.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현명한

소피는

자신이

너무

지나쳤음을

즉각

"외숙모님이라 부르지 않을 테니, 나의 행동을 가로막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 "소피, 작작해 둬!"

잔시스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지만,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돌렸다. 상대가 소피고 보면,


언제까지나 화를 낼 수가 없다.

다행히 소피는 두번 다시 토프에 대해서 입에 올리지 않았고, 대신 가레스의 이름을 몇

번이나 화제에 올렸다. 그는 스물여섯 살, 토프와 마찬가지인 일벌레로, 킹맨 교수의

열렬한 숭배자인 모양이다. "교수!"

잔시스는 놀라움의 소리를 질렀다.

"어떤 집에서도 남에게는 비밀이란 것이 있게 마련이지." 소피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두 사람이 오후의 차를 마시러 가기 위해 홀을 지나려 했을 때의 일이었다. 소피가

신기하게도 정색을 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키가 후리후리한 약간 깡마른 청년이 들어선 것이다.

더부룩한 밤색의 머리에 아래위가 붙은 하얀 작업복 차림의 이 남자가 바로 소피가 자주

화제에 올렸던 가레스 로건임이 틀림없다. 소피가 입을 뻥끗하지 않은 경우는 결코

없는데, 하고 잔시스가 생각한 것도 한순간, 소피는 잔시스를 소개한다는 구실로

가레스를 불러세웠다.

"우린 지금 차를 마시러 가는 참이에요."

잔시스와 무뚝뚝하게 악수를 하고 가려는 가레스를 소피의 목소리가 뒤쫓았다. "함께 가시는 게 어때요?"

"교수님이 서류를 기다리고 있어서 곤란해요."

가레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서재로 모습을 감추었다.

두 젊은 미녀가 차를 마시자고 권했다가 거절을 당했는데도 소피는 기분이 상한 기색도

아니었고 오히려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잔시, 내 사랑의 전도는 다사다난하겠는걸."

그날 밤, 저녁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 잔시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이만하면 나의 피앙세는 식욕을 잃거나 하진 않겠지. 잔시스가

선택한 드레스는 오렌지빛의 빌로도 이브닝, 둥글게 팬 네크라인으로부터 아름다운 크림 빛깔의 목이 시원하게 드러났고, 긴 소매가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잔시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묶어올린 머리로 시원스러운 목덜미가 더 한층 매혹적으로 보였다.

어째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며 흥분되는 것일까? 마지막 카드는 이쪽에서 쥐고 있는

거야. 이번의 승부는 나의 것이야. 나는 토프가 역전의 명수라는 소피의 말에 구애를

받고 있는 거야. 토프에게 어떤 강점이 있는 거지? 그는 간밤에 나의 침대에 쓰러지고 나서부터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걸.

어쨌든 오늘 밤은 내내 소피와 같이 있기로 하자. 토프가 또 서재에서 만나자고 해도

두통을 핑계로 거절해야지… "앗!"

노상 그렇듯이 위세좋게 뛰어들어오던 소피는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화사하게 걸치고

있는 잔시스를 보자 기성을 질렀다.

"빨리 외삼촌의 얼굴을 보고 싶은걸. 자 어서 가, 그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머나, 오늘 밤엔 집에서 식사하는 거니, 그이?"

잔시스는 자기는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응접실에 토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잔시스는 안도했다. "한잔 어때?"

소피가 권하는 알콜을 정중하게 거절한 잔시스는 토프가 외출한 게 틀림없구나, 멋대로

판단하고 문을 뒤돌아보니, 입구에 토프가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한순간, 그는 나의 마음을 눈치챈 게 아닐까, 하고 잔시스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토프가 다가섰다.

"실로 아름답군, 잔시스."

토프의 다정한 말을 잔시스는 믿지 않았다.

그는 진정일까? 적어도 약혼자니까, 이 정도로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여느 때와 달리 자신감이 없어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요'라고 중얼거린 그녀는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는 데 어이가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어떤지, 이미 토프는 손수 셰리를 따라 마시고 있는 소피에게

다가가 묻고 있었다.

"오늘 하고 싶은 장난은?"

"전 이미 얌전해져 버렸어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천진스러운 얼굴을 하며 소피는 대답했다. "전 마음을 바꾸었어요, 외삼촌."

"진심이라면, 이젠 걱정할 게 없겠군."

빈정거릴 때 토프의 입가는 한쪽 끝이 실룩거리며 치켜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제법

괜찮은데, 잔시스는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아예 칭찬을 하고 싶지가 않아. "가레스의 일은 몇 시에 끝나지요?" 소피가 물었다. 조수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조카에게

말했던

토프이지만,

가레스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9시에서 5시까지 일한다고 소피에게 가르쳐 주고는 또 한쪽 입가를

치켜올리면서 말했다.

"그러나 우린 일에 열중하기 일쑤여서 5시를 넘기는 건 다반사지." "그럼, 초과 근무한 몫만큼 휴가를 주면 되겠네요."

소피의 인정 어린 말투에 토프는 소리내어 웃기조차 했다.

토프가 웃자, 그가 입가를 치켜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잔시스의 마음은 산란해졌다.

토프의 인간다운 면은 보고 싶지 않아.

잔시스는 토프가 그녀가 아는 그대로의 냉혈한이기를 바랐다. "반한 거냐?"

토프가 농담투로 소피에게 물었다. "그런가 봐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의 소피의 대답.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토프는 유쾌하고 재치있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어제와는

딴판으로 돌변해서 잔시스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듯이 신경을 쓰고 있었다.

소피가 간밤의 텔레비전 프로의 이야기를 꺼냈다. 잔시스로선 환영하고 싶지 않은

화제였다. 잔시스가 혼자 남아서 본 드라마가 재미있었는지 어땠는지를 소피가 물어온 것이다.

"어쨌든 윌리엄에게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가르쳐 주어야 하잖니?" 소피는 외삼촌 쪽을 향했다.

"윌리엄은 잔시스의 오빠예요." "알고 있어."

토프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머나, 알고 있다고요?"

소피는 의미심장하게 반문했다. "잔시스한테서 들었지."


"그래요?"

토프와 잔시스를 번갈아 쳐다보는 소피의 표정에는 두 사람이 어떤 다른 이야기를

했을까 하는 호기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이윽고 은근히 속을 떠보기 시작했다. "우리 네 사람은 언제나 함께 몰려 다녔지요."

소피는 토프가 데비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지 어떤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너와 잔시스, 그리고 윌리엄과 데비 말이냐?" 네 사람의 이름을 토프는 줄줄 주워섬겼다. "너, 역시 외삼촌에게 이야기했나 보구나?" 소피는 명랑하게 잔시스를 돌아다보았다.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거지, 나와 같은 날 밤에 너의 아파트에서 묵었던 사람이 우리와

형제나 다름없는 데비였다는 것을 외삼촌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건 말이야." 소피는 옛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한 목소리로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나도 데비를 만나고 싶었는데…"

소피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재빨리 토프를 보았다. 토프도 소피를 쳐다보았다.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진 않겠어, 라고 그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재미있군, 점점 알 만한데 그래. 소피, 확실히 그날 밤 잔시스의 아파트에서 묵었던

거야?"

소피의 천부적인 얼렁뚱땅 꾸며대는 재능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회전하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잔시스는 소피의 마냥 응석을 부리는 대꾸에 놀라고 말았다. "끝내 들통나고 말았군요."

그러나 예의 모건을 잔시스가 운전하고 아파트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자 토프는

재미있어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화를 냈다. 소피가 그날 밤 그의 눈을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잔시스가 모건을 운전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 차 보험은 너 이외의 사람이 운전했을 땐 혜택을 못 받아." 토프는 소피를 막 야단쳤다.

소피의 귀여운 얼굴에서 일순 미소가 사라졌다.

"만일 잔시스가 사고를 일으키기라도 했다면, 그녀 자신이 부상을 당했든 타인을

말려들게 했든, 보상은 일체 못 받는 거야. 만일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너의 아버지는 도리없이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죄송해요, 외삼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피는 말했다. 토프의 태도는 매서웠다.

"너는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야. 내가 맡아 있는 동안, 그 차를 런던에 두고 온 것은 잘한

일이야."

"그렇군요."

소피는 지극히 양순해졌고, 게다가 '이젠 침실로 돌아가도 돼나요?'라고 물어서 잔시스를

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이따금은 쓸 만한 말을 할 때도 있군."

눈에 눈물이 가득 괸 소피로부터 잔시스에게로 토프의 시선이 옮겨졌다. 잔시스는 소피와 함께 일어섰다.

"당신이 소피를 위로할 필요는 없어."

다짜고짜의 명령에 잔시스는 다시 앉았다. 소피는 나갔고, 토프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아가씨의 눈물은 이층에 도달하기 전에 말라 있을 거야. 그보다도 우린 나름대로


의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어. 그렇지?"

잔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 밤 토프의 몇 가지 새로운 측면을 보게

되었다. 토프의 웃음소리와 밝은 얼굴 표정에 잔시스는 이끌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을 때의 그의 얼굴은 딴사람처럼 모였다. 그리고 위엄있게 보호자의

역을 해내는 그도 보았다. 이 극단적인 양면성에 잔시스는 혼란을 느꼈다. 무심코 사실을 털어놓는 일이 없기 위해서는 사태를 똑바로 보면서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토프가 지금부터 꺼내는 이야기는 나와의 결혼을 굳히는 문제일 것이다.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조금 전 토프가 소피에게 화를 내는 모양을 떠올리고, 그런 분노가 자신에게 돌려진다는 생각만 해도 잔시스는 두려웠다. 8

두 사람은 식당에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토프와 단둘이 있게 될 경우 잔시스는

두통을 핑계삼아 자리를 피할 셈이었으나, 이미 늦어 버리고 말았다. 날카로운 토프는 그런 변명이 이내 거짓이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말 테지. "한잔 어때?" 토프는

여유있는

태도로

술을

권했다.

잔시스의

예상과는

달리

공격적이지도,

험악하지도 않았다. 여느 때의 토프라면, 간밤의 어리석은 짓을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몹시 저주하고 있을 텐데. "아니예요, 괜찮아요."

잔시스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계속 그를 속이기 위해서는 머리를 맑게 해둘 필요가

있다.

"앉으시지."

토프는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그 역시 오늘 밤은 머리를 맑게 해둘 심산인 모양이다.

소파를 피해, 잔시스는 일인용 의자를 택했다. 그런 모습을 본 토프의 볼이 미소로 움푹

팬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상대가

간파한 걸 안 잔시스는 투쟁심을 새롭게 가다듬었다.

토프는 잔시스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곧바로 약혼 이야기를 꺼내기는커녕,

그는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서 잔시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균형잡힌 몸매와 윤이 흐르는 다크골드의 머리칼로 토프의 시선은 움직였다. "당신은 어렸을 적에도 미인이었지, 잔시스." 토프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꺼냈다.

"어른이 된 여자 쪽이 더 아름답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걸."

잔시스가 미인이라는 토프의 발언은 예상 밖이었다. ���욱 의외인 것은, 그가 십일 년

전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마… 그때의 저를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잔시스는 침착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전혀 다른 화제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토프에게 지면 안 돼, 라고 또 한번 다짐했다.

"그렇게 강한 증오가 담긴 아이의 눈을 대한 적이 없었는걸. 그때 나는 당신의 엉덩이가

아닌 가슴에 큰 상처를 입힌 것 같더군."


잔시스는 잊어버린 체할 수도 없었다. 조금 전에 설마…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으니, 자신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미 폭로한 셈이다. "그때는 당신을 증오했어요." 잔시스는 시인했다.

"저는 열두 살이고, 아가씨라는 말을 들을 무렵이었으니까요." "그런, 내가 어린아이 취급을 했단 말이군." 토프는 그렇게 주석을 달았다.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차는 전날 산 새 차였으니 화가 난 건 당연하지." 토프는 잔시스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물었다. "지금도 나를 증오하고 있나, 잔시스?"

"나의 마음이 어떻든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요?" 잔시스는 오만한 태도로 대꾸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토프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조금은 얘기해 줘도 좋지 않을까? 곧 우리는

결혼할 거니까."

곧 결혼한다구! 잔시스는 머리를 똑바로 쳐드는데, 꽤나 힘들어 했다. 나의 각본대로

되어 가는군― 우리는 결혼할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토프의 별난 주장에, 내가 찬성하고 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나의 진심을 알게 되면, 토프는 결혼 이야기를 없었던 걸로 할 테지. 토프의 얼굴에 예의 그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마치 간밤 일로 우리 사이가 확정이 된 것 같은 말투군." 잔시스는 확 얼굴을 붉혔다.

"결혼이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예요." 잔시스는 태연한 체하며 대꾸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토프는 도도하게 고자세를 취하고 있는 잔시스를 교묘하게 한방 먹였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당신이 그렇게 요조숙녀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잔시스는 잠자코 있었다. 대화의 진행 방식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혼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도 준비나 절차 문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신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그렇게 멋대로 상상하지 말아요."

잔시스의 의지력은 평정을 잃고 있었다. "의왼걸."

토프는 점점 짓궂어졌다.

"당신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남자들이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건 정말 믿을 수

없는데?"

드디어 잔시스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숨통이 막히는 듯한 강한 분노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잔시스의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린 토프는 다시 정색을 했다. "그렇게 흥분하지 말아요. 내가 지나쳤다면 사과하지."

어느 샌가 토프는 잔시스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에 옮겨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자, 눈물을 닦아요."


잔시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기운이 나며 동시에 다시 분노가 불타올랐다. "당신이 그렇게 나를 추궁할 권리는 없어요."

"알았어요, 알았어. 이젠 그만해. 난 그저 약혼자로서 당신에 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을 뿐이었어."

그의 변명에 잔시스는 조금 누그러졌다. "좋아한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예요."

자신도 모르게 잔시스는 이렇게 내뱉고 있었다.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었죠."

얕은 한숨과 함께 슈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동안의 침묵으로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래서?"

토프의 물음에 그제야 정신이 든 잔시스는 고개를 들었다. 잔뜩 긴장한 토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이람. 잔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재빨리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실패였다. 그녀보다 토프가 더 빨랐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잖아?" "뭘 원하세요?"

지친 표정의 잔시스가 물었다.

"그 남자와의 얘기를 좀더 알고 싶어." 토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도대체 이 남자가 왜 이러지. 잔시스는 어지러웠다. "뭘 더 알고 싶죠?"

토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와 나의 사랑법이 달랐다고 할까요. 그의 요구를 난 들어 줄 수가 없었어요. 그러는

날 그는 이해하기 어려워했죠. 그리고 나를 다그치기까지 했어요. 그때 이미 그의 화려한

스캔들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의 여성 편력 명단에 내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어요. 정말이지, 그의 명단에 올려진 수많은 이름 중의 하나로 남고 싶지 않았거든요."

말을 끝낸 잔시스는 옆눈으로 토프를 흘끗 훔쳐 보았다. 그는 쉽사리 잔시스의 말을

수긍하는 것 같았다.

토프도 그런 명단를 가졌을까? 잔시스는 한순간 의심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떨쳐

버렸다. 적어도 그는 그런 딱지가 덜 떨어진 것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겨워

슈보다 토프 쪽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정말이지 다시 방으로 되돌아가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으면… "가게 해 주세요, 토프."

침묵을 깨며 잔시스가 말했다.

또다시 몇 분간의 침묵이 흘렀다. 잔시스는 아무런 생각도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벽에 걸린 19세기풍의 커다란 시계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때 잔시스의 어깨에 뭔가 묵직한 것이 얹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토프의 따사로운 눈길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픈 상처를 건드렸군." 따뜻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애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마 흥분했기 때문인가 봐." 그러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 이제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 얘기를 해보자구." 지극히 만족한 말투였다.


잔시스는 과히 기분좋지 않았다. 뭐야, 심문관 같은 표정이잖아. 순간 패배감이 엄습해

왔다. 일어서야 한다. 그런 다음, 저 성자 같은 표정이 일그러지게 만들어 줘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런 태도도

취할 수가 없었다.

"먼저 결혼 날짜를 잡아야겠지."

잔시스의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지금 진실을

밝혀 버릴까? 아니야, 지금은 너무 일러. 좀더 사태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자. 그래야만

일격에 케오시킬 수 있을 거야. 잔시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자신을 좀 가다듬을 수 있어 한껏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게 서둘 필욘 없잖아요?" "아니지, 빠를수록 좋아요."

토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곤 그녀를 살며시 일으켜 세웠다. "날 봐요, 잔시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나를 믿어."

신뢰와 애정을 담뿍 담은 그의 잿빛 눈동자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아, 이 사람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또 나는.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상기된 잔시스의 뺨을 그의 커다란 손이 감쌌다. 잔시스는 멈칫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자러 가겠어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토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의 눈빛이 슬퍼

보여 갑자기 그가 가엾게 여겨졌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무너지기 전에 빨리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와 자신의 방에 들어선 잔시스는 재빨리 방문을 걸었다.

그러곤 불도 켜지 않은 채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좀전의 그의 태도는 결코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은? 그에 대한

전의(戰意)가 점점 소멸되어 감을 느꼈다.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그녀를 감쌌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피곤하였으나 머릿속은 더 맑아졌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런 채로 몇 분이 지났다.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잔시스는 마음을 정했다. 내일 오전중에 될 수 있는 한 빨리 여기에서 떠나도록 하자. 나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 겪는 패주다. 하지만 무언가 미진한 느낌이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계 바늘이 l0시가 지나 있었다. 10시 10분!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간밤의 기억이 와락 되살아났다. "드디어 일어나셨군."

밝게 미소짓는 소피, 그녀는 잔시스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말이야. 무엇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너와 토프 외삼촌을 단둘이

있게 만들었는지 몰라. 그런데 잔시스, 일이 이렇게 빨리 진전되리라고는!" 소피는 기쁜 듯이 환성을 질렀다. "이렇게 빨리라니?"

잔시스는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었다는 거지?"

"외삼촌은 그다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너와 약혼했다고 얘기할 때의 그


표정은 정말 볼만하더군."

잔시스는 눈을 감았다. 의식이 몽롱해지고 있었다.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토프는 정말

나와 결혼할 생각인 거야. 내가 도망치려 하는 걸 꿰뚫어보고 손을 쓴 거야. 여기에 나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만일 내가 약혼을 부정한다 해도 토프에게는 최후의 수단이 있다―

그는 내가 임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소피에게 알리면 되는 것이다. 내가 소피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당연히 토프도 그것을 알게 된다. 소피는 가족에게 비밀을 지킬

만한 사람이 아니다. 최후에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하는 것은 바로 나, 잔시스 랭필드가 아닌가.

"또 자거나 하진 않겠지, 잔시!" 소피가 다그쳤다.

"너한테서도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어 줄곧 기다렸어."

잔시스는 눈을 감았지만, 어떻게 하겠다고 정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소피는 아주 즐거운 모양이었고,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잔시스는 토프가 점점 밉살스럽게 여겨졌다. "이야기하다니, 아무것도 없는걸."

잔시스는 애써 명랑한 체했다. 없는 감정을 떠올리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빨개지는 것을 보니, 나에게는 말 못할 이야기가 많은가 보구나." 소피는 싱긋 웃었다. "그것은 비밀인걸."

잔시스는 서툰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쯤에서 소피는 물러섰지만, 그날은 온종일 명랑해 보였다. 그러나 잔시스는 기분이

점점 침울해졌다. 토프의 행동에 대한 분노와 그를 괴롭히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번갈아

잔시스를 들볶았다. 동시에 그 욕망과 병행하여 그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점심식사 때엔 토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잔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흥, 우리가 노상 연구실에 찾아가야 할 팔잔가 봐."

어떻게 해서든 희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소피가 말을 꺼냈다. 잔시스가 경계하는 눈길을

돌리자, 그녀는 덧붙였다.

"설마 외삼촌이 너를 내쫓지는 않겠지."

"나는 토프와 이야기하고, 너는 가레스와 이야기한다는 뜻이니?" "괜찮은 아이디어지?" 소피는 생긋 웃었다. 잔시스는 당황했다.

"토프는 바쁠걸. 그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

소피는 기묘한 눈초리로 잔시스를 보았다. 토프를 만날 기발한 아이디어에 잔시스가

재빨리 동의하지 않는 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런 건 절대로 안 돼."

그렇게 말하고는 잔시스는 음식으로 눈길을 떨어뜨렸다.

소피는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잔시? 너, 우리 외삼촌을 만나는 것이 부끄러운 거니?" 잔시스는

처음이었다.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기가

거북한

느낌은

그로부터 소피는 잔시스에게 몹시 다정하게 대했다. 소피에게서 가레스를 만날 기회를

빼앗은 것을 잔시스가 꺼림칙하게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두 사람은 오후 산책을 나갔다. 저택의 옆쪽으로 펼쳐진 광활한 들판을 산책하고,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돌아왔다. 잔시스의 볼은 빨갛게 달아올아 있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산토끼 굴에 다리가 빠져 다치기도 해서거니와 황혼과 경주라도 하듯 전력 질주를 했기 때문이다.

홀로 들어선 잔시스는 흠칫했다.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토프와 맞닥뜨린 것이었다. "어머나, 외삼촌."

소피가 소리를 질렀다.

"우린 산책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돌아섰다.

잔시스는 그럭저럭 다리를 옮길 수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점점더 짙은 빨강으로 물드는

볼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 굿 이브닝."

잔시스는 다가오고 있는 토프의 신사복 단추 언저리께에 시선을 준 채 간신히 인사했다. "여어."

토프의 목소리는 짐짓 명랑했다. 그것은 소피가 있기 때문이라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오후에 외삼촌과 가레스를 만나러 연구실로 가자고 했지만, 잔시스가 부끄러워해서…

이젠 완전히 당황해서 몸둘 바를 모르는군요."

소피의 쓸데없는 참견에 토프의 시선이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것을 느끼며, 잔시스는

발딱 머리를 들었다. 잿빛 눈이 그녀를 사로잡고 떠나지를 않았다. 그런 얄팍한 꾀에

넘어갈 줄 알고. 네가 생각하고 있는 정도는 알고 있지, 지난밤의 일로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고 확신하는가 보군. "어머나, 외삼촌."

소피가 침묵을 깼다. 여느 때의 이 시간이라면 스웨터에 작업복 바지 차림일 토프가

슈트를 입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오늘은 일찍 끝냈군요, 특별한 날이라서?"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야."

"잔시스에게 줄 반지를 사러 가나요?" "저는 그런…"

잔시스는 반지 따윈 필요없어요,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눈길을 느끼자 말이 목구멍 안에서 사라졌다. 잔시스는 이러한 영향력을 자신에게 행사하는 그에게 새삼 증오를 느꼈다.

"염려하지 말아, 너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잔시스에게서 시선을 돌린 토프는 조카에겐 싱긋 웃어 보이며 상냥한 말로 대꾸했다.

토프의 차가 차도를 향해 달려가자, 소피는 저택에서 뛰어나가고 있었다. 만일 토프가

약혼반지를 사러 간다고 말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라고 물었을 테지.

잔시스는 점점 화가 났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다.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토���는 나의 손가락 사이즈를 모른다. 그렇다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소피가 뛰어들어왔다. "빨리 코트를 입어. 외출하는 거야." "외출을 하다니?"

잔시스는 반문했다.

"가레스가 돌아가는 걸 붙잡았어, 네가 도즈브리지에 급하게 사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지. 그는 우리를 태워 주려고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난, 별로 살 게…"


잔시스의 말을 소피가 잘랐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이 내가 가레스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야. 그러니까

네가 외삼촌에게 선물할 물건을 사고 싶어한다고 가레스가 생각하게끔 만드는 거야." 소피의 재촉에 못 이겨 잔시스는 이미 홀로 나서고 있었다. "꼭 뒷좌석에 앉아 줘, 부탁이야."

이윽고 잔시스는 가레스 로건의 세단 뒷좌석에 앉았다. 소피가 일단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그 날랜 솜씨란― 잔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뒤의 일은 잘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가레스는 별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 옆에 진을 치고 있는 소피의 애타는 꼴이라니… 가레스의

쌀쌀한

응대도

소피에게는

거의

먹혀들지

노력가로서의 소피에게 만점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않아서,

잔시스는

끈덕진

도즈브리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내리겠어요?" 가레스가 물었다.

"쇼핑센터 옆에요."

잔시스 대신 소피가 대답했다.

대답해 주어서 고맙군, 하고 이 도시의 지리에 생소한 잔시스가 생각했다.

차가 서자, 잔시스는 이제야말로 내가 나설 차례라는 듯 재빨리 차에서 내려 가레스에게

인사를 했다.

"시청 앞에서 기다릴게."

소피는 차 안에 버티고 앉아서 움직일 기색이 없다.

잔시스는 홱 등을 돌려 뛰어가 가레스로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시청이 어디에 있지? 잔시스는 체념한 듯이 웃었다. 전혀 모르겠는걸.

근처 빌딩의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물어, 시청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

모퉁이를

돌아

맞은쪽의

높은

빌딩이

시청임에

틀림없다고 짐작했을 때, 잔시스는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토프가 보였다. 더욱이 곁에는 예의 여자가… 이 밀회를 위해서 토프는 그렇게 차려입었음에 틀림없었다. 잔시스는 대혼란에 빠졌다.

명치를 한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스스로 나와 약혼했다고 떠들고 다니던

사람이…!

그때 토프와 아이린은 멈춰 섰고, 그가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는

잔시스는 구역질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둘은 너무나 잘 어울렸고 무척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격정이 잔시스를 사로잡았다. 아이린 포브스가 미워. 이 손으로 눈에서

불이 번쩍 나도록 그녀의 뺨을 갈겨 주고 싶다. 토프가 저 따위 새침떼기와 어울리다니, 말도 안 돼!

토프는 아이린을 리드하면서 잔시스 쪽으로 걸어왔다. 잔시스는 살며시 모퉁이를

돌았다. 또

헛구역이

치밀어올라,

잔시스는

골목길로

뛰어들어갔다.

지금의

잔시스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건물의 벽에 기대 서서 등에 느껴지는 싸늘함에 몸을 내맡겼다. 사건의 충격은 점차로 가시고 있었다.

토프와의 약혼을 진정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내가 지금 목격한 광경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을 쥐어뜯기는 듯한 기분이 되다니, 이러한 기분은 처음인걸. 고통스러워서 참을 수 없는 이 감정은… 질투! 약혼을 발표한 날, 자신의 피앙세가 말쑥하게 옷을

갈아입고 다른 여성을 만나러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을, 그녀는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아니, 인정할 수 없는 감정으로 잔시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잔시스는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

9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린 잔시스가 쇼핑을 하고 있는 사이, 소피는 약삭빠르게 가레스와

같이 차를 마시고 왔다. "다 샀니?"

잔시스에게 말을 건넨 소피는 다시 가레스의 차에 재빨리 올라타고 창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가레스가 말이야, 다음 버스를 타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니까, 다시 차로 데려다

주겠대. 친절하지?"

돌아가는 길에서도 가레스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한 그에게 소피는 찰싹 매달려

있었고, 잔시스에게는 별 관심도 쓰지 않았다. 토프의 웃는 모습이 또다시 떠올랐다. '질 나쁜 바람둥이 같으니.'

잠시동안이나마 그에게 주었던 마음을 증오로 바꾸면서 잔시스는 뇌까렸다. 슈에게서

받은 상처가 다시 덧난 느낌이었다.

슈를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만큼 깊게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배반에 직면하고 무서울 정도의 고뇌를 경험한 잔시스지만, 그것은 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뢰를 배반당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던 신뢰의 줄을 그가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프는

다르리라

기대를

했었다.

물론,

순간적이긴

했으나.

그런데

토프에게서마저도 배반당하고 만 것이다. 잔시스는 몹시 큰 상처를 입었다. 이성적으로 되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토프와의 약혼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토프 쪽은 진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소피에게 발표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가 채 하루도 넘기기 전에… 잔시스의 가슴은 고통으로 꽉 차 버렸다.

한순간이나마 그로 인해 동요했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자, 가레스에게 인사말도 하는 둥 마는 둥 소피와 그를 남겨 두고

잔시스는 침실로 급히 올라와 버렸다.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안색은 창백했고, 무섭게

떨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빠져 나가 버린 듯한 허탈감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잔시스는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이런 어이없는 패배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토프는 저녁식사에 돌아오진 않겠지. 다행이야. 그만하면 자신을 가다듬을 시간은 충분하다.

그런 엄청난 모욕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토프를 지워

버리려 애쓰며, 그녀는 부산하게 움직였다. 옷장을 열고, 좀 야한 검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에게 져서는 안 돼.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미소를 지으며 태연을

가장했다. 그러면서도 막연한 불안감은 떨어 버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계단을 내려와 응접실로 발을 들여 놓은 잔시스는 주춤했다.

간밤과 마찬가지로 디너 재킷을 걸친, 여유있는 모습의 토프가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뭘 마시겠어, 잔시스?"

지극히 유쾌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그리곤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려 했다. 순간 잔시스는 한 걸음 물러서며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분노가 깃든 힘있는 목소리였다.

동요의 기색이 그의 얼굴을 스쳤으나, 역시 그는 여유만만했다. "악성 병에라도 걸린 건가?"

빈정거리는 토프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잔시스의 어색한 표정과 그가

손가락이라도 댄다면 바짝 움츠러들 것 같은 모습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화가 났지?"

잔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를 한번 으쓱했을 뿐이다. 소피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갓 약혼한 사람들끼리 다투는 꼴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잔시스는 애써 미소를 띠고 목청을 돋우었다. "샴페인을 한 잔 주시겠어요, 토프?"

생각 같아선 한 병을 통째 마셔도 양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내키진 않았으나 자신의

상태를 눈치채이기 싫어 억지로 식탁에 앉은 잔시스는 전혀 식욕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마지못해 앉아 있을 때, 소피가 도즈브리지로 나갔던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진작 말했으면 내가 태워다 줄 수도 있었는데."

토프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치를 살피듯이 잔시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시내에 나간

것과 잔시스의 태도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실은요, 외삼촌."

소피는 서슴없이 함부로 말했다.

"외삼촌에게 편승을 부탁하긴 난처한걸요, 저는." "알 만하다. 너는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냐." 토프의 이해는 빨랐다.

"언제까지냐구요?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진 마세요." 소피는 뾰로통해졌다.

"이번에는 불장난이 아니예요, 외삼촌."

조카를 쳐다보는 토프의 입가엔 웃음이 흘렀다. "그래? 그렇다면 성공을 빌겠어, 아가씨."

토프는 소피를 향해 포도주잔을 들어올리고는 빈정거리듯이 덧붙였다.

"덕분에 네가 나타나는 곳마다 일어나던 바람은 적어도 멎게 된 셈이로구나." 소피는 생긋 웃었다.

"바로 그렇다니까요!"

잔시스는 간밤에 써먹을 작정이었던 두통의 구실을 오늘 밤에 유용하게 써먹으려고

찬스를 노리고 있었다. 소피는 커피를 마시고 나자, 테이블에서 일어서려 했다. "삼십 분만, 잔시스와 단둘이 있도록 해 주겠니?"

잔시스가 꾀병을 쓰는 것보다 먼저, 토프가 소피를 향해 말했다. 삼십 분은 고사하고 오


분간도 싫다는 듯한 표정으로 잔시스는 토프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모른 체했다. "잠깐 상의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그 말투가 잔시스에게 협박조로 들렸다.

소피는 명랑하게 '물론이죠'라고 말하며 잔시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찰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토프는 말을 꺼냈다. "이젠 우리 둘뿐이야. 무엇 때문에 화내고 있는지 말해 봐." "뭘 말인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토프가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걸 잔시스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잔시스가 화내고 있는 원인이 두 사람에게 관계된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토프는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필요하다면, 깊은 밤까지라도 여기에 계속 눌러앉아 있을

심산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억눌러 왔던 분노가 다시 잔시스를 엄습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잔시스는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았다.

"저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아! 이게 아니었는데.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애정이 그녀를 혼란 속으로 빠뜨리고

만 것이다.

토프는 지금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잔시스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계속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했다는 말인가? 별안간 초조해져 서성이기 시작한 잔시스에게 토프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이유를 얘기해 줄 수 있겠어?"

감정을 정리하려고 무진 애를 쓴 듯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를 모욕한 주제에,

능청스럽게도 그 이유를 묻고 있다니. 더 이상의 침묵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킹맨 씨, 당신은 '성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요." 토프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그가 저주스러웠다.

"제게 있어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에요."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잔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그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자 한다면, 나에게 있어서도 성실이나 신뢰는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일하는 데 있어서나 지금 우리의 화제에 올라 있는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그래요."

제법 진지한 말투다. 아이린과 함께 있던 그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잔시스는 믿었으리라.

또 한참을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 토프가 묻기 시작했다.

"왜 그런 얘길 꺼내는 거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듯한 말툰데."

뻔뻔스러워! 잔시스는 토프의 뺨을 냅다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발끈 잔시스의 목소리는 날카로왔다.

"사람에게 모욕을 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더군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토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시내에서 내가 아이린과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했나 보군. 그래서 제멋대로 그

알량한 상상력을 발휘했고." "얼버무리지 말아요."

분노와 수치감으로 볼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잔시스는 소리쳤다.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행위를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그 비굴한

모습이. 그리고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꾸민, 그 구역질나는 웃음이. "당신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더군." 조용히 토프가 말했다.

잔시스는 당황했다.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말투다. 그러나 태연한 체해야

한다.

"꽤나 많은 걸 알고 계시는군요."

토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누그러졌고 상냥해지기까지 했다. "부모님으로 인한 충격이 아직까지 크게 남아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아는 체하지 말아요."

잔시스는 어색하게 부정했지만, 토프는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좋아했던 남자와 잘 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군. 아버지로 인해 당신은 모든

남자를 믿지 못하게 되고 만 것 같아, 나까지도 말야." "그만둬 주세요. 그렇지 않아요."

잔시스는 화를 내면서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비약이에요. 부모님의 일 따윈 나완 상관없어요." 거의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잔시스는 겨우 대꾸했다.

아버지라니, 내게 있어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러면

안 돼. 일어서야지. 재빨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또 실패였다. "놓으세요!"

토프를 뿌리치며, 잔시스는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토프는 잔시스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잠자코 내 말을 들어봐요."

다정하게 잔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놓아요."

그렇게 되풀이 말하고 있는 잔시스의 목소리는 어느 새 힘을 잃고 있어, 그녀의 귀에

맥없이 여운으로만 번졌다.

증오해야 마땅할 토프에게 안겨 있다니,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잔시스는 눈물이

쏟아졌다. 우는 얼굴을 토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잠시 그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잔시스의 등을 토닥거리며, 토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과는 오늘 아침 전화로 만날 약속을 한 거요. 그녀는 시청의 도시계획국에

근무하고 있거든."

"데이트였을 테지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잔시스가 물었다.

"하여튼 한시라도 빨리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나 전화로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거든."

아아, 점점 지독한 꼴이 되는구나, 잔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토프는 아이린에게

달려가서 정말 실수로 약혼을 하고 말았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남의 입을 통해 아이린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직접 들려 주고 싶었던 거야.

아이린은 나를 어리석고 우스꽝스럽다고 여기고 있겠지! 잔시스는 토프를 밀치고 나서

눈물에 젖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웃었겠지요?"

비통한 목소리로 잔시스가 물었다.


"웃다니?"

토프가 되물으면서 한손으로 살며시 잔시스의 눈물을 훔쳤다.

"아니, 웃지 않았어. 앞으로 만나기 힘들 거라는 얘기를 했는데, 웃을 리가 없잖아?"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을…"

잔시스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아아, 토프!"

잔시스는 토프에게 매달리며 그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토프는 아버지와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아아, 토프."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잔시스는 토프를 속였던 자신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에 비해서, 나는 얼마나 유치한가. 새로운 부끄러움으로 그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를 믿고 있겠지?"

머리 위에서 조용히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믿고 있어요. 미안해요…"

"이젠 됐어. 당신이 아주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다는 것은 잘 기억하고 있어. 부모의

언쟁을

들을

때마다

당신의

감수성은

심하게

상처를

입곤

했겠지.

보이프렌드에게서 받은 상처까지 겹쳐, 당신의 마음은 꼬여 있었던 거야."

게다가

예의

토프는 손수건으로 잔시스의 눈물을 닦아 주며 이렇게 끝을 맺었다. "나를 믿어요, 잔시스. 우리 결혼하자구."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토프는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진실을 얘기해야 할 때인 것 같다. 토프로 하여금 잔시스와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잔시스는 망설였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나를 경멸하겠지. 그러나 그를 계속 속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저… 당신을 신뢰하고 있어요."

잔시스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토프의 표정이 그 뒷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잔시스는 도저히 계속할 수가 없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표정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건 견딜 수 없다. "아이린은 당신을 좋아했지요?" 그녀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그게 당신이 말하려는 거였어?"

되묻는 토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잔시스는 다시 얼굴이 확 붉어짐을 느꼈다.

"그녀는 나의 소꼽동무야. 당신과 데비처럼 우린 아직 한번도 서로를 이성이라 느껴본

적이 없어."

더 이상의 확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당신의 의문이 다 풀렸다면… 이번에는 당신이 나의 물음에 대답해 줄

차례야."

토프의 질문은 결혼건이었다. 하느님, 용서해 주세요. 저로서는 토프의 프로포즈를

거절할 수가 없어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토프."

"좋아. 자, 그러면 오늘은 여러 가지로 마음을 졸였으니 피곤할 테지. 일찍 자도록 해요."


잔시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에게 잘 자라는 인사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그곳을 나왔다.

하룻밤의 숙면으로 원기를 회복한 잔시스는, 침대에 누운 채 간밤에 잠에 빠져들기

전까지 생각했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 이야기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좀더

여유를 두고 기회를 잡아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결정한 잔시스는 가벼운 마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서둘렀다.

계단에서 막 발을 떼려는 순간, 소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시, 잔시, 빨리 와 봐."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우리 외삼촌이 말이야. 인도엘 가게 됐나 봐." "뭐, 인도에?"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응, 오늘 아침에 그가 하고 있는 실험이 잘못 되었다던가 하는 전화가 와서,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내일 아침 인도엘 가야 한대." "인도!"

잔시스는 소피가 코앞에 쑥 내민 토스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토프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잔시스는 완전히 풀이 죽었다. 그러면 나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지?

소피는 명랑했다.

"외삼촌이 이 나라를 떠나 있는 동안이 나에겐 절호의 찬스야!"

행복스러운 듯이 얼굴을 빛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연구소에 출입할 이유를 이것저것

궁리하며, 소피는 가슴을 설레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풀 죽은 잔시스의 존재를 느끼고 재빨리 말했다.

"어머나, 잔시! 난 정말 얼마나 자기 중심인지… 네 생각은 조금도 않고." "괜찮아, 다들 그렇지 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잔시스는 대답했다.

그날 밤 잔시스는, 침대에 들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쯤 되는 걸까?

다음 날은 한번도 토프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이야기할 찬스가 없었다.

주방에서 헤밍즈 부인과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잔시스는 토프를 보았다. 그녀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창으로 토프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오겠지. 내

모습은 괜찮을까? 머리는 말쑥하게 빗겨져 있는 걸까? 스웨터와 진 팬츠보다 판탈롱

슈트가 오히려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토프는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그에게 모습이 보이도록 하려고, 잔시스는 일부러

창가에 서 있곤 했다. 그날 토프는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헤밍즈 씨와 몇 마디 말을 나눌 시간 정도는 있었던 모양이다. 우울증에서 해방된 헤밍즈 씨는 밖에서 열심히

스케치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끝내면 들어오겠지.

잔시스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가슴을 두근거렸지만, 또다시 허탕을 쳤다.

뚜벅뚜벅 차고로 향한 토프는 차를 몰고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틀림없이 긴급하게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시내로 사러 간 것이겠지. 잠시 시내에서 아이린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구역질을 느끼게 한 무서운 질투는 일지


않았다. 나는 토프를 신뢰하고 있는 거야. 그가 아이린을 만난다 해도, 그것은 우연이지.

그렇게 한낮을 보내고 지금은 어느 덧 밤 l1시. 마음속에서 예의 밉살스러운 괴물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는 아이린과 단순한 친구 사이였을까? 만일 아이린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러 간 것이라면, 그냥 두지 않겠어. 잔시스는 격분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만나면서도 내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알릴 작은 시간마저 만들지 않나니.

가벼운 노크 소리가 그녀를 괴로운 망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었다.

누굴까? 소피는 아닌 모양이다. 그녀라면 질풍처럼 뛰어들어올 것이다. 잔시스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토픈가? 그에 대한 적의는 느슨해졌고, 분노도 사라졌다. 대신 수줍음이

자리잡았다. 투명하게 비치는 잠옷이 마음에 걸려, 시트를 턱까지 끌어올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역시 토프였다. "일은 끝났나요?"

목소리를 가다듬어 잔시스가 물었다. "좀 들어가도 되겠소?"

문턱에 서서 그가 물었다. "네, 그래요."

피로의 거무스름한 그늘이 그의 눈 언저리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자, 잔시스는 지금까지

그에 대해 화를 내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지금, 간신히…"

잔시스의 침대 곁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그가 말했다.

"깨어 있어서 다행이군. 내일은 일찍 떠나야 하기 때문에 당신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잔시스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뿌듯함으로 꽉 찼다. 토프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려 했다. 그리고 내게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내가 없을 때에 소피의 감시를 부탁해." 그가 웃으며 얘기했다. "아, 그야 물론이죠."

잔시스 역시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가레스를 너무 괴롭힌단 말이야." "당신은요?"

라고 말하려다 말고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토프의 행동을 지켜봤다. "이걸 껴 봐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방형의 케이스에서 토프가 꺼낸 것은 작은 에메랄드 반지였다. "아름답군요!"

잔시스는 숨을 죽였다.

"마음에 든다니, 기쁘군. 당신의 눈동자에 어울리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에메랄드지.

당신에게 오늘 이것을 주고 싶어서 도즈브리지의 보석상에 이 반지가 있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시내까지 다녀온 거야." "어머나!"

잔시스는 감탄의 소리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았다. 토프는

이렇게 바쁜 날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시내까지 약혼반지를 사러 간 것이다.

잔시스는 죄책감으로 몸둘 바를 몰랐다. 정말 아름다운 반지다. 나는 낄 자격이 없어.

토프가 이것을 사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그만두게 했을 텐데. 간밤에 이러한 것은

모두 중지시켰어야만 했다. 토프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안 된다고 거절했어야만 했다.


"토프."

용기를 상실하기 전에 잔시스는 서둘러 말했다. "토프, 당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아, 그만둬요, 인사말 따윈 필요 없어요."

토프는 잔시스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잠시 후 그녀를 안은 채로 토프가 말했다. "이걸 한번 껴 보지 않겠어?" "저는… 저…"

잔시스는 더듬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한순간만이라도 토프가 고른

약혼반지를 끼고 싶다. "여기로군."

토프는 그녀의 왼손을 잡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잔시스는 행복했다. 반지는 꼭 맞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녀는 토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바싹 껴안는 서슬에, 그녀의 얼굴을 들고 토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포개고 있었다. "그만 갈게, 잘 자요." 잠시

후 들먹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얘기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토프가

조그만

소리로

그를 이대로 보내긴 싫었다. 내일이면 그는 떠난다. 단 며칠이라도 그와 헤어져

있는다는 건 큰 고통이었다.

"빠른 시일 내로 돌아올게. 그러면 그 후부터는 영원히 같이 있어."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가 얘기했다. 그리곤 문을 향해 돌아서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가지 말아요. 토프, 아아, 제발, 여기 있어요!' 그러나 그건 목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았다.

조용히 문이 닫히고 멀어지는 발소리. 그녀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그녀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10

뭔가 딱딱한 것이 볼을 찔러 잔시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곤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밝게 빛나는 자그만 반지를 발견했다.

모든 것이, 엄청난 기세로 한꺼번에 떠올랐다.

토프와의 입맞춤을 생각하곤 잠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곤 그가 인도로 떠났음을

상기했다. 우선 소피를 만나야지, 그리고 이 반지는 당분간 빼놓기로 하자. 소피의 수다에

말려들긴 싫으니까. 그때 소피가 평소와 같은 기세로 뛰어들어왔다. "잔…"


말을 건네다 말고, 소피는 입을 다물었다. "어머나, 가엾어라. 눈이 부었잖아!" 그녀는 침대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울었구나, 착한 잔시. 그는 곧 돌아올 텐데." 소피는 드디어 반지를 발견했다.

"멋져! 외삼촌도 좋아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잔시스는 소피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늦어 버린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들뜬 기분은 사라지고, 잔시소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도

토프에게 진실을 고백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문제가 어려워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단순한 치기로 인한 장난이

동기였었는데.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자신을 나무라는데도 지쳐서,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나의 방으로 와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잖아.

다시 이틀이 지나자, 잔시스는 화가 났다. 이 따위 반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또 이틀이 지나자, 이번엔 그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훌륭한 피앙세로군!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전화 한 통 해 주지 않다니. 하기야 가레스의 말에 따르면, 토프는 유럽과 연락을 취하기 힘든 지방에 있는 모양이긴 하지만.

토프의 귀국날이 박두함에 따라, 자신이 토프의 진정한 약혼자가 될 수 없음을 잔시스는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수시로 변하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어, 기회가 닿는 대로 고백하리라 굳게 결심했다.

석 주일 가까이나 집을 비운 끝에, 드디어 토프는 귀국했다.

그날, 잔시스와 소피는 산책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소피가 연구실에 들러 보자는 말을

꺼냈다.

"만일 가레스가 우리를 보았는데, 내가 들르지 않고 지나친다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니?"

그러나 연구실의 창 안에 서 있는 사람은 가레스가 아니라 토프였다. "외삼촌이 돌아왔어!"

소피는 환성을 지르며 연구실의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소피는 잔시스가 뒤따라오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돌아보았다. "잔시스, 왜 그래?"

잔시스는 고개를 모로 저으며 사양했다. 토프의 뒷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잔시스의

감정은 산란해졌다. 그의 앞에 서려면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돼…

"잔시스, 너도 참, 딱해. 결혼할 사인데, 그렇게 부끄러워할 것 없잖아." 소피가 웃으며 말했다.

잔시스는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웬만한 일에는

좀처럼 울지 않는 아가씨로, 슈와 헤어졌을 때도 이렇게 자신을 잃지 않았다. '결혼'을 생각하자, 또 머리가 아팠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나면 끝이다. 토프는 화를 내며

돌아설 것이다.

침실로 향하고 있던 잔시스는 갑자기 돌아섰다. 소피에게서 내가 자신의 귀국을 알고

있다는 걸 듣고 토프가 인사하러 올지도 모른다. 잔시스는 황급히 오른쪽으로 돌아

응접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토프가 올 경우, 그와 침실에서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

토프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흥분되었다. 잔시스는 떨리는

손으로 재킷을 벗었다. 그때 현관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힘차고

침착한

발소리는

토프의

발소리다.

토프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라이트그레이의 슈트가 멋지게 어울렸다. 그 모습을 보자 잔시스는 가슴이 저렸다.


토프는 잔시스를 바라보���,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말없이 그가 다가왔다. 토프와

같은 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잔시스의 마음은 흔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인산가, 하필이면! "그저 그래."

오래간만에 듣는 토프의 목소리는 경쾌한 음악처럼 잔시스의 귀를 간질였다. "일은 잘 해결되었나요?"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잔시스는 느꼈다. 아아, 토프의 탓이야. "응."

토프는 짧게 답했을 뿐, 잔시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문적인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가 물었다. "당신 쪽은 어때?"

토프는 잔시스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아니예요."

잔시스는 자신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싫었다. 그래서 곧 고쳐 말했다. "사실은, 좀… 그러나 막 돌아오신 참이니 나중에 말씀드리죠."

아아, 난 얼마나 비겁한 겁쟁인가! 토프야말로 나의 꿈과 희망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인데, 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니…

토프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잘라 말했다. "걱정거리가 있다면 당장 말하는 게 좋아."

꼭 해야 한다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단호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냥 나중에 할게요."

"분명히 해요, 잔시스."

토프가 명령조로 말했다. 그의 그러한 말투가 잔시스를 자극했다.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토프의 위압적인 태도에 자극을 받아, 잔시스는 끝내 내뱉고 말았다. 토프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는 잔시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내게 불만이 있다면 시원히 얘기해 봐." 잔시스는 우물우물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또 눈앞이 흐려졌다.

토프는 잔시스의 마음을 꿰뚫어본 듯 미소하면서, 결혼할 수 없다는 그녀의 선언 따윈

완전히 무시하고는 상냥하게 말했다.

"우린 훌륭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잔시스. 첫째 남자와의 교제로 상처입은

당신이 걱정하는 건 이해가 가. 그렇지만 이젠 잊어버려. 다 지난 일이잖소. 그리고 날 믿어요."

"당신을 신뢰하고 있어요. 그러나…"

토프는 아직 미소하고 있었다. 이번엔 격려의 말을 했다. "아무것도 두러워할 것 없어, 마이 디어."

마이 디어라니― 이렇게 다정한 상태로 나가면 나는 그의 발치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두려운 건 그것이다. 이 결혼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어떻게 말해야 그가 이해해 줄까…

토프는 잠자코 있었다. 잔시스는 절벽의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얼마만큼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토프는 진지해 보인다. 잔시스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으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마침내 잔시스의 기색을 살핀 토프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지 못하게 유산 상속의 권리에 조건을 붙여

놓았어. 미술품이나 막대한 부동산을 나의 명의로 하기 위해서는 결혼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 딸려 있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얼떨떨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잔시스는 갑자기 확 머리가

맑아졌다.

"당신은 그… 상속을 받기 위해서 결혼을 한다는 말인가요?" 토프는 침착하게 수긍했다.

"부정할 수는 없지. 그러나 그것이 내가 당신과 결혼하려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야." "또 다른 이유는."

잔시스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미인이며 머리가 비상하고, 게다가 우리의 아이가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고."

잔시스는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이건 정말 너무 잔인하다. 그러나 토프는

여유만만했다.

"곧 당신은 나와 결혼하게 될 것이고, 아이를 낳게 되겠지."

누구 마음대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잔시스는 지금이야말로 모든 걸 고백하고 이

지겨운 게임을 깨끗이 끝낼 찬스라고 생각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토프. 전 아이는 낳지 않아요, 절대로. 물론 당신과 결혼도 하지 않을

것이고요."

"나도 그렇게 서두르고 있는 건 아니야." 토프는 여전히 냉정했다.

이 파렴치한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잔시스는 정말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서 앉지 그래. 꼭 성난 수탉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도대체 그는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이미 잔시스의 이해 능력 밖의 사람 같았다. "자, 이쪽으로 와요, 잔시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잔시스를 이끌었다. 그러나 잔시스는 가지 않았다. 토프가 손을 내밀었다.

"나의 잔시스, 사랑스러운 나의 작은 새."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작은 새가 된

느낌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 잡힌…

"내주 금요일에 결혼식을 했으면 좋겠어. 그때쯤이면 소피의 부모님도 참석할 수 있을

테니."

결국 잔시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와는 항상 이런 식이다. 정말 그는 나의

적수가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버텨 봤자 아무 이득도 없다. "내주 금요일이라고요?"

잔시스는 놀라움의 소리를 지르면서 토프 쪽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기다렸다는 듯 토프는 그녀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곁에 앉혔다. "난 하루라도 빨리 당신을 내 곁에 있게 하고 싶어."

얼마나 듣고 싶어한 말인가. 오싹하는 흥분에 사로잡혀 잔시스는 엉겁결에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내가 싫지만… 책임감 때문에…" 토프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잔시스는 자신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름을 느꼈다.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하하하."

토프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또 웃음을 터뜨렸다.

잔시스의 입가에도 살그머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둘은 나란히 앉았다.

토프는 결혼식 준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잔시스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한번 결정을 해 버리면 우물거리지 않는 토프의 불 같은 성미에 숨도 쉴 틈 없는 느낌으로. "식에 초대할 사람은?" 토프가 물었다.

"오빠인 윌리엄은 참석 못할 것이고, 아버지는 결혼식에 참석할 분이 못 된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스위스에 살고 있지만, 형편이 닿을지 어떨지…"

어머니에 대해서는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알고 질투의 감정마저도 알게 된

잔시스는 요즘 전보다 더욱 어머니를 동정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어머님도 못 오신다면, 당신은 정말 차분한 기분일 수가 없겠군 그래." 순간 잔시스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토프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때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소피가 뛰어들어왔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설치는 품이

보통 흥분한 게 아닌 것 같다.

"내일 가레스를 쉬게 해 줄 수 없어요?" "넌 노크할 줄도 모르니?"

토프가 비난하는 투로 쏘아붙였다.

"미안해요, 외삼촌. 가레스가 여쭤 보겠다고 했지만, 전 참을 수가 없어서요." 어쩔 수 없는 아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토프가 물었다. "그래, 도대체 널 그렇게 흥분시킨 게 어떤 일이니?" 소피의 표정은 금방 환해졌고, 목소리는 들떴다. "피크닉을 가려고요, 우린."

소피는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소리쳤다.

내일은 2월 1일. 피크닉에 걸맞은 계절이 아니라는 것쯤은 토프도 알고 있었다. "소피, 가레스도 너와 만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니냐? 피크닉이라니?" 소피는 생긋 웃으며 조금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내일 하루면 돼요. 외삼촌, 제발."

"하루고 이틀이고간에 대체 지금 몇 월인데." 토프의 반응은 냉담했다.

마침내 소피는 응원을 청하듯 잔시스를 쳐다보았다. 순간 잔시스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저 말이야, 다음주 금요일에 들러리를 부탁해도 될까?" 곁눈으로 토프를 살짝 훔쳐 보며 잔시스는 말했다. 소피는 탄성을 지르며 그녀를 껴안았다.

이튿날, 소피가 없는 저택 안은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결혼식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하고 토프가 묻자, 잔시스는 스스로도 뜻밖인 대답을 했다.

"리틀브라맨튼의 낡은 교회가 어때요? 거긴 정말 아름답거든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잔시스는 당황했다.

"아마, 그건 너무 무리겠죠. 전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정말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그 교회에서 결혼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토프에게 알아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토프를 속이는 것은 통하지 않았다. 당장 그는 교회 목사와 연락을 취했고, 모든

수속을 끝마쳤다.

그날 저녁 소피가 돌아왔을 때, 소피의 양친이 신부의 부모 역을 맡아서 잔시스를

결혼식장까지 데려다 주었으면 좋겠다는 토프의 의견은 요란한 환성과 함께 쾌히

받아들여졌다. 소피는 다짐하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해, 잔시. 그러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은 무척 섭섭해 하실 거야. 너는 우리

아빠와 엄마의 마음에 쏙 드는 아이니까, 더욱 기뻐하실 거야. 너를 집에 데려올 때마다 나는 항상 잔소리를 들었지. 잔시스 랭필드 같이 착한 아이의 본을 좀 받아라 하는." 소피는 그녀의 어미니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수다를 떨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결혼식날이 가까워옴에 따라, 잔시스의 마음은 자꾸만 불안해졌고 회의까지 일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잔시스는 좀더 자주 토프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신혼여행 기간 동안 토프는 일할 수 없으니까.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으리란

건 잔시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요일, 목요일, 토프를 만나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자 그가 일부러 만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역시 토프는 마지못해 결혼하려는 거야. 홀에서 그와 엇갈리며 지나쳤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기조차 했다. 오렌지 빛깔의 드레스, 정성들여 빗어올려 묶은 머리. 그것은

잔시스가 최고로 아름답게 보이고 싶을 때의 치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녀의 모습을 힐끗 보고는 무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운데, 그렇지만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는 무리인걸."

그리고는 급한 서류가 어쩌구저쩌구 중얼거리면서 서재로 가버리고 말았다.

결혼식이 일주일 후로 박두한 날, 잔시스는 싸움을 걸고 싶을 정도의 기분이 되어 내일

런던의 아파트로 돌아가겠다고 말을 꺼냈다. "그럴 필요가 없잖아!"

토프는 잔시스를 큰소리로 나무랐다. 이것이 결혼을 앞두고 약혼자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일까, 라고 잔시스는 생각했다.

잔시스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를 사려면, 아무래도 런던에 가야 해요." "아쉬운 대로 도즈브리지의 쇼핑센터에 사면 되지 않아?" 토프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잔시스는 그의 머리에 커피잔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요!"

목소리를 쥐어짜듯 소리친 잔시스는 일어서서 문으로 걸어갔지만, 즉각 토프에게

붙들렸다.

"도대체 당신은…"

토프는 싸울 듯한 기세로 잔시스를 돌려세웠다. 그러나 눈물을 글썽이는 잔시스의 눈을

본 순간, 그의 분노는 사라졌다. "잔시스."

그녀의 팔을 꽉 붙잡고 토프는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이 있으니 집 안이 밝고 즐거워서 그래. 당신 없이 지내는 날은 하루뿐… 결혼식

전날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잔시스는 어느 새 자신의 성급함을 뉘우쳤다. 토프는 전혀 변하지 않았어.


"아까는 제가 잘못했어요."

잔시스의 목소리는 점점 잠겨 있었다.

"그렇지만 불안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잔시스는 토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정이 넘쳐 흐르는 따스하고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느닷없이 토프는 잔시스의 팔을 놓았다.

"내일 몇 시쯤 출발할 예정이지? 내 차로 데려다 주겠어." "고마와요."

잔시스는 토프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어리둥절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가레스가 주말에는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했으므로, 소피는 어차피 그와 떨어져 있어야

할 바에는 자기도 런던에 가겠다고 했다.

"잔시, 내 차에 네 짐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싣고, 일요일에 여기로 돌아오기로 하는 게

어떻겠니."

잔시스는 그 아이디어에 따르기로 했다. 이틀간 자신의 아파트에 묵었다가 곧장

리틀브라맨튼의 부모님께로 돌아가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소피는 월요일에 가레스를 만나고 나서 리틀브라맨튼으로 돌아갈 심산일 테지. 사랑이 만들어 내는 조화에 잔시스는 내심 웃었다.

잔시스는 이따금 토프에 대해서 참을 수 없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도 토프가 없는 건

견딜 수가 없다. 다음에 그를 만나기까지의 며칠간이 일 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겨울 거라는 생각을 잔시스는 했다.

이튿날 런던까지 데려다 준 토프는 잔시스의 아파트에서 차를 한잔 마시자 이내

일어섰다.

"현관까지 바래다 드리겠어요."

그러면서 잔시스는 소피를 바라보았다. 소피는 두 사람의 아쉬워하는 이별의 장면을

보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을 테지.

잔시스는 토프와 함께 홀로 나서자 거실의 문을 닫았다. 토프는 벌써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어 여기를 떠나는 게 몹시 기다려진다는 듯이 보였다. "그럼, 금요일에."

그렇게 말하며 토프는 문을 열었다. '금요일에.'

잔시스는 마음속으로 되받았다. 토프의 담담한 작별인사를 받자 잔시스의 가슴에 아픔이

솟구쳤다.

토프가 뒤돌아선 것은 그때였다. 문이 요란하게 닫히고, 어느 새 잔시스는 토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순간, 잔시스의 비참한 기분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매달리는 그녀를

토프는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의 입맞춤보다 먼저 거실에서 소피가 나타났다. "어마, 실례. 외삼촌이 돌아가는 소리가 난 것 같아서." "너는 정말…"

토프가 소리쳤다. 그리곤 잔시스의 볼을 다정하게 손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금요일에, 잔시스." "네, 금요일에요, 토프."

잔시스는 맥없이 되풀이 말했다. 소피와 있는 동안은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잔시스의 물건을 모두 꺼냈다. 소피의 모건으로는 몇 번 왕복해야 할 만큼의 양이었다.

"일부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운반하도록 해야겠다."


소피로서는 보기드문 실질적인 의견을 꺼냈다.

소피가 돌아가 버리고 나자, 잔시스는 생각에 잠길 시간이 남아돌 정도로 많았다.

소피는 화요일에 다시 런던���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때 둘이 '양장점 순례'를 하기로

약속했다.

월요일, 예의 그 의문이 다시 되살아났다― 토프는 진실로 나와 결혼하고 싶은 것일까?

동요한 나머지, 잔시스는 그 사실을 전화로 추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 끝이

얼어붙은 것처럼 감각이 없어서 다이알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 사실은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야.'

라고 하면 어떡하지? 대신 잔시스는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천천히 돌렸다. "결혼?"

터킨 랭필드는 수화기에다 대고 기성을 질렀다. "금요일이라고. 이번주냐?"

결혼할 만큼 장성한 딸이 있다는 걸 생각하곤 기막혀 할아버지의 모습이, 잔시스의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어디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소는…"

아버지는 리틀브라맨튼에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마을에서 바람기에 서리를 맞은

아버지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라도, 딸의 남편될

나타내도 좋으련만.

사람이 누구인가 정도의 관심은

잔시스는 이어 스위스에 전화를 했다. 그쪽은 연결이 안 되었다. 어머니는 선모리츠에

갔는데, 두 주일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가정부의 말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소피가 나타나자, 잔시스는 다시 바빠졌다.

"엄마는 벌써부터 미칠 듯이 좋아하고 계셔. 너와 외삼촌의 결혼이 너무나 기뻐서." 운전용 장갑을 벗는 시간마저도 아깝다는 듯 소피는 말했다.

"네가 목요일까지 여기에 있다니, 농담하는 게 아니냐고 엄마는 말했는걸. 오늘 안에

쇼핑을 끝내고, 나와 함께 오라는 거야."

잔시스는 건성으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둘은 이 가게 저 가게를 맹렬한 기세로 돌아다니며, 첫 양장점에서 하얀 모자를 샀다.

소피와 쇼핑을 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잔시스는 시종 유쾌했다. 그녀와는 언제든지

명랑하게 지낼 수 있으니, 혼자 아파트에서 그 악몽 같은 불신감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리틀브라맨튼에 가는 편이 낫겠다는 기분이 되었다.

쇼핑백을 몇 개씩이나 들고 아파트에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지쳐 녹초가 되었다. 재빨리 구두를 벗어 던지자 소피는 소리쳤다.

"아이구 맙소사! 차를 한잔 끓여 주지 않겠니, 잔시? 이 화끈거리는 발을 식히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겠어!"

잔시스가 차를 끓여 오자, 소피가 말했다.

"좋았어. 차를 마시고 나면, 우린 오지를 향해 출발하는 거야. 엄마에게 전화해서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가겠다고 할게."

잔시스로서도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이내 그날 산 물건과 또 다른 걸 잔뜩 넣은

슈트케이스를 싣고 소피의 차와 잔시스의 차가 잇달아 출발했다.

차는 어느 샌가 낯익은 리틀브라맨튼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잔시스가 예전에

살았던 집 앞을 지나, 잠시 후 에린튼 댁의 차고에 두 대의 차는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소피의 부모가 모습을 나타냈다. 에린튼 부인은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던 가족을 만난 듯 열렬히 잔시스를 포옹하며 진심으로 환영했다. "머물도록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에린튼 아주머니."


토프보다 열 살 정도 연상인 부인은 잔시스의 감사의 말에 겸연쩍어하면서 말했다. "이미 우린 시누이 올케 사인걸. 포라라고 불러 주렴." "나는 단이라고 해."

에린튼 씨도 잔시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피와 꼭 닮은 파란 눈동자, 아내에 이어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다니엘이라고 불러도 좋아. 포라는 별나게 새침할 때밖에 다니엘이라고 불러 주지

않으니까!"

이렇게 멋진 환대의 한때도 지나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다. 저택 안이 정막에

휩싸였을 무렵, 런던에 팽개쳐 버리고 온 예의 불안이 또다시 잔시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물론 토프와 결혼하고 싶다. 하지만 토프 쪽은? 영원히 그를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다니, 나는 너무 지나치게 내 중심대로가 아닐까? 토프는

성실성을 중요시하고 있다.

결혼은 서로가 상대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결코 깰 수는 없는 맹세인데… 아아,

결혼할 때, 누구나 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미칠 것만 같아…

11

결혼식 전날인 목요일이 되자 잔시스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그날 밤 이래 토프는 너무 냉담했어― 저녁식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있던 잔시스는

또다시 미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열의가 없는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마찬가지라는 심사로 있는 걸까…

제지하고

있지?

토프는

이미

나와

결혼한

것이나

돌연 잔시스는 목을 졸린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어머나, 나는 토프에게 말하지 않은

거야! 잔시스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음을 느꼈다.

그 사실을 토프에게 말하지 않은 채 어떻게 그를 다시 대하려 하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잔시스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 생각밖에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돼. 토프에게 말해야만 해― 나는 거짓말을 했다고. 그날 밤, 사건의 진상을. 아아, 토프에게 이야기해야만 해, 내일이 되기 전에.

토프에게는 그렇게 성실할 것을 강조했던 내가 어떻게… 잔시스는 죄책감으로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을 말하지 않고서 토프와 절대 결혼할 순 없어. 그러나 사실을 알고 나서도 토프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할까? 기세좋게 방으로 뛰어들어온 소피에게 잔시스는 긴장으로 핼쓱한 얼굴을 돌렸다. "잔시!"

부르짖으며 소피가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니? 유령 같은 얼굴을 하고."


"난… 토프를 만나야만 해."

거의 무의식중에 지껄인 말이 자신의 귀에 들렸을 때, 잔시스는 안절부절못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소피의 몹시 난처해 하는 기색을 알아차리자, 잔시스는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소피!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난 토프를 만나지 않으면 안 돼." 잔시스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살피며 소피가 조심스레 얘기했다. "외삼촌에게 전화해서 이쪽으로 오라고 할까?"

소피는 긴급 사태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묻지 않았다. "안 돼!"

잔시스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외쳤다. "내가 만나러 갈 테야."

터져 나오는 반대의 말을 소피는 삼키고 말았다.

아직 진 팬츠 셔츠 차림인 잔시스는 급히 옷장을 열었다. 웨딩드레스를 보자 한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그녀는 양가죽 재킷을 꺼내며 걱정스러운 얼굴의 소피에게 돌아섰다.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줘."

밖으로 나설 때까지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포라와 단에게 한마디 양해의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갈 길이 급했다. "좋아."

잔시스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본 소피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운전 조심해."

잔시스가 와일드필즈 매너의 차고에서 차를 내리기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평소 착실한 운전 솜씨를 지닌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차를 몰고 왔는지도 전혀 기억이 없었다. 저녁식사를 걸렀기 때문일까. 공복감으로 잔시스는 현기증을 느꼈다.

차에서 내려 돌계단을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면서, 잔시스는 토프가 제발 있어 주기를

기원했다. 설사 몇 시간을 기다리는 한이 있어도 토프와 만나야만 한다.

홀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잔시스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일이 없도록

안간힘을 다하며 서 있었다. 그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예상과는 달리 헤밍즈 부인이 아니었다. 불빛을 받으며 토프가 서 있었다. "들어와요."

평온한 목소리였다. 누나의 집에 있어야 할 잔시스를 보고도 그는 별로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잔시스는 다리가 굳어 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토프의 손이 뻗쳐 오며 재촉을 했다.

그에게 팔꿈치를 붙잡힌 채 그녀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토프는 재킷을 벗는 잔시스를

잠자코 거들어 주고는 역시 아무 말없이 창문 쪽의 테이블로 술을 가지러 갔다. 두 개의 잔을 들고 돌아온 토프는 하나를 잔시스에게 내밀었다.

"알콜을 마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보이는 안색이군, 당신은." 그는 조용히 말했다.

토프가 권하는 대로 잔시스는 한 모금 마셨다. 브랜디였다. 내가 브랜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토프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러나 곧 잔시스는 깨달았다.

토프는 그녀의 병적인 쇼크 상태를 알아차린 것이다. 서둘러 한 모금 더 마시고는

가까이의 테이블 위에 글라스를 놓았다.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앉은 토프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라도 하듯 잔을 단숨에 비웠다.


우선은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잔시스는 다짐했다. "저는… 꼭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토프." "내일까지 기다릴 순 없었나?" "네."

잔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처한 사람이군."

목소리는 평온하고 조용했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 관계를 이대로 지속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결국 나완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이미 그의 목소리는 평정을 잃고 몹시 떨렸다. "네… 아니예요. 저… 저는…"

"얘기는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신뢰와 성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잖아?"

토프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분노로 차가와진 얼굴을 경직시키고는 잔시스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건 그렇지만…"

토프는 그녀가 더 이상 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건 그렇지만이라니. 그럼, 당신이 왜 여기 왔는지 말해 봐!" "그것은… 저는…"

토프의 분노에 기가 질려서 잔시스는 자존심을 내팽개치려 하고 있었다. 아아, 그녀는

자제심을 잃지 않으려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지, 지금 성실에 대해서 말했죠?"

잔시스는 말을 떠듬거리며 꼴깍하고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내일 저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요.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저, 저는

당신의 신뢰를 저버리고 말았어요."

잔시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토프는 의자에서 일어나자 무서운 기세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격노한 토프는 자제심도 내팽개치고 잔시스의 몸을 난폭하게 흔들어댔다. "당신은 런던에서 그 남자를 만난 모양이군."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런 게 아니예요."

잔시스는 너무나 놀라서 다급하게 말했다. 이러한 토프를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하얘졌다.

"그런 게 아니예요. 틀려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요."

토프는 더 이상 잔시스를 붙잡고 있다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를 억지로 소파에 다시 앉혔다. 너무나 거칠게 다루어지자 잔시스는 뒤로 발딱 튀기듯 일어섰으나, 토프가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럼 빨리 말해, 그게 뭔지."

계속 소리치며 다그치는 토프의 기세에 잔시스는 더 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제가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게 아니예요. 이 말을 한다면, 당신이 저와 결혼할

마음이 우러나지 않을 것 같아서…"

잔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토프가 자제심을 되찾았는지 어떤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말꼬리를 돌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 봐요."

난폭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토프는 평소의 그다운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저는… 당신을 속이고 프로포즈를 하게 만든 거예요." 잔시스는 고백했다.


토프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속였다니?"

토프는 천천히 반문했다.

이것은 잠깐의 휴전인 거야. 토프의 목소리는 화내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아… "어떻게 속였다는 건가, 잔시?"

흥미가 이끌린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것이… 저…"

토프는 잔시스의 옆으로 와서 소파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팔을 얹었다. "아아, 토프."

쓰러질 것 같은 심정으로, 잔시스는 토프를 향해 돌아섰다. 격려를 해 주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 화가 나 있는 건 아니야. 가슴이 두근거려 그녀는 눈을 돌렸지만, 기운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빠른 속도로 얘기를 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한 침대에서 지냈지요. 그러나…"

기력이 점점 위축됨을 느낀 잔시스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니까… 당신은 한번도 제 몸에 손을 대지 않았어요."

잔시스는 긴장하며 몸을 도사렸다. 조금 전처럼 토프의 분노가 다시 폭발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토프는 뜻밖의 말을 해서 잔시스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알고 있었어."

부드러운 어조였다. "뭐라구요!"

잔시스는 헐떡였다.

"하지만… 어떻게? 당신은 취해 있었고, 정신을 잃었는데." "정정하기로 하지."

토프의 팔이 소파의 등받이에서 잔시스의 어깨로 살며시 옮겨졌다.

"내가 취해 있었다는 것은 당신의 생각이야. 나는 정신을 잃기는커녕…"

믿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토프를 응시하고 있던 잔시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날 밤의 일은 전부 분명하게 생각해 낼 수 있어." "정말인가요?"

원망기가 서린 잔시스의 목소리는 조금 높았다. 토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도즈브리지에서 강연을 했었어. 그 때문에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지만,

저녁식사 때나 그 전에도 나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거든."

충격으로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잔시스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녀가

토프를 속인 것이 아니고 실은 자신 쪽이 속임을 당한 것을 깨닫게 되자, 잔시스의 볼은 금세 상기되었다.

얼굴을 붉히고 있는 잔시스를 바라보던 토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날 밤 내가 마신 술은… 잔시스, 강연에서 돌아와 마신 한 잔의 위스키뿐이야." "하지만."

잔시스는 또 한번 부정했다.

"당신은 곤드레만드레 취해 제 침대에 쓰러져서는 꼼짝도 않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토프가 고개를 저었다. 한쪽 입가가 평소처럼 치켜올라가 있었다.

"어깨를 떨고 있었던 것은 웃음을 참느라 그랬지.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어지간히


고생깨나 했지. 침대에서 총알같이 뛰어나가는 당신의 몰골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웠어." "뭐라구요?"

잔시스는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미안해, 잔시스. 당신은 그날, 상당히 심한 말을 나한테 해댔지. 거기에 부추김을

받아서, 그런 말투는 고치라고 당신을 다그치기 위해서 나��� 당신의 방에 들이닥쳤던

거야. '고집세고 융통성 없는 잔소리꾼'이 아닌 때도 있다는 걸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지.

아침까지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구."

"하지만 당신은 제 침대에서 주무셨잖아요. 돌아와 보니 당신은 의식이 없었어요." 잔시스는 항변했다.

"잠들어 있었지, 나는." 토프는 고쳐 말했다.

"당신의 성미가 급한 건 체험으로 알고 있었으니. 틀림없이 당신은 나를 내쫓기 위해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

당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대사를

이것저것

궁리하면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지. 그러는 사이에 바빴던 하루의 피로가 몰려와서 그만 깊이

잠들어 버렸던 거야."

잔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피의 경고를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어야만 했다―

토프를 옴쭉달싹 못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형세는 역전되어 버린다는. 토프는

깜쪽같이 밧줄을 풀고 빠져 나갔어. 나는 결국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 거야.

저택의 주인에게 유혹당한 손님 행세를 하고 있던 나― 그걸 알고 있었던 토프. 화를 내는 게 당연한데, 왠지 잔시스는 화가 나지 않았다. 토프는 다시 잔시스의 가슴을 흔드는 말을 했다. "덕분에 나는 당신을 더욱더 잘 알게 되었지."

잔시스는 뭐가 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채, 안간힘을 다해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런데 그런 걸 알고 있으면서… 저와 결혼을 하려 했나요?" "지금도 그럴 생각이야, 잔시스."

그 말을 들은 잔시스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안도감을 느꼈다. 게다가

이어지는 토프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정신이 아뜩해지며 방 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어.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저는…"

잔시스는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토프가 상냥하게 말했다.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군. 생각보다 멋지게 꾸몄던 모양이군, 내가." 어떻게 된 영문이람?

"그렇지만 숨길 필요가 있었던 거야."

토프는 잔시스의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내게 강한 적의를 갖고 있었지 않아?"

"어머나, 알고 계셨군요? 제가…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처음엔 확신할 수 없었지. 그러나 곧 알게 됐어. 당신의 어린시절에 관한 얘기를

듣고서."

이제 토프의 표정은 진지해져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당신이,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으며 복수하기 위해서 그랬을

뿐이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무척 초조했지." 잔시스는 가만히 말했다.


"그런 일이…"

"이만하면 당신을 속인 데 대한 보상이 되는 셈인가, 나의 귀여운 아가씨." 이제 그의 목소리엔 장난기까지 섞여 있었다.

"망아지 같은 당신을 내 곁에 두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썼던가를 당신이 안다면… 그걸

이해하겠소, 잔시스?"

"그럼요, 토프. 이제 전 모든 걸 이해해요. 저는 어린애가 아닌걸요." 잔시스는 기쁨에 넘쳐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당신이 슈인가 하는 자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정말 참기가 힘들었어. 그러나 난 그가

당신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걸 알았지."

그의 예리한 통찰력에 놀란 잔시스는 조금은 완고해 보이는 듯한 옆모습을 흘끗 훔쳐

보았다.

"그리고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성장 과정을 알고 나서는 당신이 안고 있는 문제가

뭔지도 알게 되었지. 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지, 잔시스. 누구보다도 그걸 강렬히

요구하면서도 당신은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토프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의 모든 걸

꿰뚫어보고

느낌이었다.

있었던

것이다.

잔시스의

가슴은

후련해졌다.

모든

응어리가

풀어진

"아아, 토프."

잔시스는 목이 메었다. 그의 커다란 사랑이 전신을 휘감아옴을 느꼈다.

"아까 출입구에 서 있는 당신을 보았을 때는 정말 당황했었지.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토프는 잔시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이야말로 토프에게 나의 진심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얼마나 그를 원하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는지를.

"아아, 토프, 사랑하고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토프가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그는 잔시스를 힘껏 껴안았고, 그녀 역시

기꺼이 자신을 내맡겼다.

"사랑해요, 토프. 그런 줄도 모르고 전 당신이 나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바보 같으니…"

토프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시내에서 아이린과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나와는 절대 결혼할 수 없노라고 당신이

소리친 그 밤, 난 확신할 수 있었지. 당신은 결심을 바꾸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거기에 앉아 있었지만,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내가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야." 잔시스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아아, 토프, 저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당신과 아이린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정말 비참했어요.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어요, 두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아요."

"괜찮아, 마이 달링. 나의 마음은 당신뿐인걸." "하지만 당신은 짓궂게도 절 놀리셨어요." "당신 쪽은 어떠했고?" 토프의 역습이었다.

잔시스의 얼굴이 빨개졌고, 토프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의 용수철 같은 반응을 보는 건 사실 내게는 즐거운 일이었지."


"지독한 사람!"

토프가 교묘히 자신을 놀린 것을 깨닫자, 잔시스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관만 하고 있었던 건 결코 아니야. 그놈의 파티에서 추억 속의 소녀가

변모한 모습을 보았을 때는 견딜 수 없도록 언짢은 기분이었지. 하지만 소피가 당신

아파트에서 빈사상태의 가련한 백조 연기를 하며 당신에게 간호를 부탁했을 때, 나는 당신을 붙잡을 기회다 싶어 흔쾌히 승낙했지. 그것은 정말 핑계에 불과한 것이었어.

헤밍즈 부인은 간호원 출신이거든. 그러나 당신을 좀더 가까운 곳에서 관찰하고 싶어 당신에게 내 집에 와 주기를 부탁했지."

잔시스의 눈은 이제 행복으로 도취되어 있었다. 괴로움에 떨었던 지난 일주일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불현듯 그녀는 어떤 걸 생각했다. 그건 아이린이었다. 잊어버리려

했지만 끈질기게 자신을 뒤쫓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 그녀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이린을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은 언제였지요, 토프?" 별 망설임없이 토프는 얘기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내게 처음 싸움을 걸었을 때가 아닌가 하는데. 그때의

당신은 확실히 지금보다도 매력적이었지." 그는 익살까지 덧붙였다.

잔시스는 생긋 웃었다. 이제 문제라곤 아무것도 없다. 토프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지금 그의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다. 그리고 안겨 있으면 알 수 있다. 그리고 내일은 토프의 아내가 되는 날. 더할 나위 없는 환희에 감싸여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꿈을 꾸는 듯한 눈길로 잔시스는 토프를 응시했다. 전화 벨이 울렸다. 순간 두 사람은 현실로 돌아왔다.

"소핀지도 몰라요. 제가 떠날 때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두손 들었어!"

토프는 신음했다.

역시 소피였다. 잔시스는 괜찮다고, 토프는 조카를 안심시켰다. 이어 소피가 무슨 말을

했는지, 토프는 수화기를 잔시스에게 건네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당신이 받았으면 해, 잔시." "여보세요."

잔시스는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솟구쳤다. 전화를 끊으면서도 잔시스는 여전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어머니였어요…" "알고 있어."

토프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득 잔시스는 깨달았다. "당신의 배려였군요?"

잔시스의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당신이 내일 어머님이 참석하기를 바라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래요. 하지만 어떻게…"

흐르는 눈물을 더 이상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소피에게서 들었지. 당신이 스위스에 전화를 했는데, 어머님이 선모리츠에 가시고 안

계셔 통화를 못했다고. 돈에 구애받지 않는 바니 다비스톡이니, 최고급 호텔에 묵을 거라 짐작했던 게 맞았어. 어머님은 만사 제쳐 놓고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하시더군.


당신이 떠나고, 십 분 후에 도착한 모양이야." "너무너무 좋은 토프."

잔시스의 눈에는 사랑이 넘쳤다. "고마와요, 정말 고마와요!"

"말 외에 감사의 표시가 있을 텐데?" 토프는 비아냥거렸다.

금방 두 사람은 와락 끌어안았다. 잠시 후 토프가 살며시 그녀를 떼어 놓았다. "리틀브라맨튼으로 저를 돌려보낼 심산이군요?"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야. 내일부터는 싫어도 매일 같이 있어야 될걸." 익살은 여전했다.

"내일은 종일 피곤할 테니, 당신도 좀 쉬어야 해요. 자, 나의 신부님."

잔시스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일의 아름다운 시간을 위해서 그는 나의

순결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기꺼이 할 수 있으리라. 그의 세심한

배려에 잔시스는 다시 한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중한 사람. 그의 아내가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잔시스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잔시스는 토프에의 사랑으로 촉촉히 젖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토프, 저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사람을 만났군요." 잔시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내일 교회에서 만나요. 당신 매형에게 매달려서 제단으로 걸어들어오는 저를 못

알아보시면 안 돼요."

잔시스가 바라고 있던 그대로 토프는 웃었다.

"좋아, 스위트 하트, 재킷을 입어요. 당신의 차는 놔두고 가지, 허니문에서 돌아와

일부러 가지러 가는 수고를 덜게."

허니문― 아름다운 말이야! 내일 토프와 단둘만의 멋진 세계를 꾸미는 날이다. 그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나는 마음껏 웃을 수 있으리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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