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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보수주의 형성과 그리스도교 포럼>, 일곱 번째 마당

2012.8.27.

순수한 신앙의 폭력성

: 보수적 개신교인들(복음주의 분파)의 종교적 성향에 대한 하나의 추론1) 김현준(연구집단 카이로스,

서강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수료)

I. 머리말 1. 연구의 목표 및 취지 나날이 그 정치적․종교적 보수성을 더해 가고 있는 개신교에 대한 평가들에서 개신교는 성스러움 혹은

종교 본연의 가치를 잃고 특정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보수 진영 교회들이 자신들을 특화시키기 위해 초월적이고 순수한 종교적인 특성을 강조 하는 상황에서 탄생한 한계분화의 전략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보수적) 개신교인들은 단지 (보수적) 정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보수성은 순수한 종교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종교 본연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왜

한국에서 종교적인 순수성은 세속과 차별성 없는 보수적인 행동양식으로 표현되는가?

한국사회의 보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주로 확인되는 진보적 가치담론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이중적

태도와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노동(자/조합)와 비시민에 대한 적개심, 호모포비아, 이슬람포비아, 제노 포비아 등은 이러한 개신교 보수분파들의 실천적 신앙(문화)구조에서 재생산되고 강화되는 것으로 보인

다. 또한 보수적 신앙고백의 내용들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수사가 아니라, 나름의 기독교적․복음적 가치 를 지키기 위한 신앙의 자율성과 진정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신교의 보수적 구조는 정치공간

좌표상에는 “합리적 우익”으로, 개신교에는 “세련되고 부드러운 외양”을 지닌 집단으로 묘사되기도 한

다.2) 물론 기존의 연구들에서 ‘정치적 보수=신학적 근본주의’, ‘보수 개신교=주류’의 등식은 통계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일반적 경향으로서 전혀 잘못된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개신교적” 가치를 추 구하는 주류 개신교는 단지 정치적 입장의 보수성만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치적 성향은 한

개인의 모든 성향들의 체계가 정치적 공간이나 맥락 하에서 정치적인 형식으로 표현되는 성향에 불과하

며, 정치적 성향은 항상 종교적 성향과의 변증법을 통해서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이자 인

류학자인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러한 (종교적인) 분류체계의 인지도식이나 성향, 실천적 감각

의 총체를 (종교)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했다. 또한 문화사회학자 알렉산더(Jeffrey C. Alexander)는 구조주의와 해석학, 그리고 상징인류학의 전통을 참조하여 성과 속의 상징질서나 문화구

조(코드와 내러티브)의 자율성을 사회적 행위의 원인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이론들을 따른다면, 개신교

상징체계(신앙적 지식담론들)는 개신교 외부(세속)의 효과가 내적인 번역의 과정에서 유물론적으로 생 성되는 것이며 이는 다시 외부에 전달됨으로써 사회적 효과를 발휘한다. 개신교의 구조적으로 보수적인

1) 이 글은 김현준의 제4회 심원청년신학포럼에서 발표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복음주의”(2008)와 석사학위논문(2009)의 일부를 토대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미완성된 프로포절 원고이므로 인용이나 무단전제를 금합니다. 2) 김진호(2007)는 개신교회를 “군부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급성장한 대형교회(선발대형교회)”와 “민주화 시대 이후 급성장한 대 형교회(후발대형교회)”로 구분하고, 이들은 “서로 다른 신앙 문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데올로기로 “극우 적”인 선발대형교회뿐만 아니라, 우익이기는 하되, “합리적 우익”인 후발대형교회의 “세련되고 부드러운 듯”한 외양을 가진 개 신교를 “미학적 기독교”라고 되었다고 표현한 바 있다.

- 김현준 ‧ 1 -


특징은 이러한 상대적 자율성인 개신교 장의 보수적 굴절의 메커니즘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독특한 변형을 이룬 한국의 보수적 신앙문화에 대한 이해는 그러한 소재들이 반영된 담론들(문 화코드)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이른바 '보수적 종교성'이나 '종교적 보수'로 지칭됨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비교적

일관되지 않은 그러한 개신교의 신앙적 성향과 감각을 타자 및 타자의 지식담론에 대한 인지적․감정적

재현(문화번역)의 문제로 이해하고, 이에 부합한다고 여겨지는 일부 사례들을 참고함으로써 개신교 분 파적 특징(근본주의나 복음주의)들을 넘어서 개신교인들의 일반적 관념과 실천이 순수한 신앙의 결벽증 적인 추구와 그로 인한 불안에 있다고 추론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것이 한국사회의 보수성에 시사하는 바를 찾아보고자 한다. 2. 종교적 성향 이론 ‘종교성’(religiosity, religiousness)은 신자의 종교적 능력과 실천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종교성

은 기본적으로 종교를 신앙하는 “한 개인의 종교적 성향”(religious disposition)으로 정의된다(한내창, 2001).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내면화된 믿음 체계나 태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종교적 정체감이나 애착 도, 의례나 조직 활동의 참여 정도 등을 의미하기도 하는 등 매우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

다. 종교성을 개인 내면의 ‘성스러움’(김종서, 2006: 168 각주 11번)이라고 설명하는 방식도 일관된 개

념으로서 그다지 만족스러운 정의는 아니다. 문제는 개인의 내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스러

움’(being religious)(노길명․한내창, 1997: 111)을 어떻게 측정하고 이론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른바 종교성을 총체적․다각적 시각, 이른바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구조’로 보자는 주장은 종교

사회학계의 종교성 정의의 곤혹스러운 현실을 반영한다. 현재까지의 연구들에서 종교성을 측정하는 지 표의 대강을 요약․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종교 소속(affiliation), 종교적 투신(commitment) 혹은 열성

도, 의례와 집단 참여 빈도, 교리 지식의 정도, 헌금의 열성도, 이념적 차원이나 종교적 정향 등. 이러한

지표들은 교리의 습득과 같은 지식적 차원과 종교적 궁극적 가치와 이해관심의 문제인 신념적 차원, 그

리고 행위자의 수행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종교성의 다양한 차원들을 포착하기 위 해 다양한 지표와 척도들을 제안하고 있다(김병서, 1995; 한내창, 2001을 보라).

이러한 종교성에 대한 연구들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특정한 맥락에서 드러나는 종교적 실천들을 변

수화하고 종교성의 지표로 삼는다. 이는 결국 종교성이 표출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으로 측정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종교적 실천들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한 종교성이란 종교적 맥락에

따른 구체적이고 다양한 실천들을 표상하는 종교성의 지표들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성이 외부의 물적 조건과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의 단순한 반영은 아니다. 종교성, 즉 기복신앙과 같이 개신교

의 특정한 종교적 성향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만 보는 외부주의적 관점은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 정체

성(예컨대 복음주의)과 아닌 것들을 어떻게 구별해 내며 어떻게 신앙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동시에 신앙

적(종교적)이지 않은 것들을 배척해 내는 능동적 분류행위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종교

적’(개신교적)이라는 것은 종교적인(개신교) 언어를 구사하고 종교적(개신교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종교인(개신교인)들의 집단적 자기규정이다.

종교성은 주관적 종교적 경험이나 의례와 같은 행위의 의미들이 표면화된, 즉 측정 가능해진 것이지

만(또 신자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이며 의도적인 종교적 성향의 표현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객

관적 종교문화와 구조적 요인, 즉 종교장의 논리에 의해 구조화된 인지체계이자 체화된 성향들의 체계

이라는 점에서, 또한 사적인 행위규칙이 아니라 간주관적인 의미체계 하에서만 행위자들은 서로를 이해 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규칙들을 준수할 수 있는 능력인 아비투스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개별자 아비투스(individual habitus)는 집단을 표현하고 반영하는 한에서 내재 화된 구조의 주관적이지만 비개인적인 체계, 지각, 개념, 행위의 공통적 도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동일

한 계급 구성원들의 단일한(singular) 아비투스는 다양성을 지닌 동일함의 원리인 동형성(homology) 관 - 김현준 ‧ 2 -


계 안에서 통일된다. 성향들의 각각의 개별적 체계는 계급과 그 궤적 안에서 그 입장의 단일성을 표현 하는, 다른 체계들의 구조적 변형이다(Bourdieu, 1990: 60). 마찬가지로 개인의 종교성(individual habitus)은 종교장과 조응된 집단 아비투스(group habitus)의 편차 내에서 이해된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행위자들의 (의식적․무의식적) 실천(practice)과 그것의 사회적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 장(field)과 더불어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도입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실천 을 “객관화된 생산물과 역사적 실천의 육화된(incorporated) 생산물 간의, 구조와 아비투스 간의 변증법

이 이루어지는 장소(the site of the dialectic)”(Bourdieu, 1990: 52)라고 규정한다. 즉 실천은 구조화

된 동시에 새로운 구조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자의 실천은 구조에 종속되기만 한 것도, 완전 히 창조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실천이나 신앙적 담론과 같은 종교적 생산물들도 ‘초월적’이

고 ‘선험적’(이라고 주장되는) 순수한 종교적 경험을 재현함으로써 자율적 이념으로서 개신교의 신념 및 가치(체계)의 탈맥락적 진리성을 보증하고 정당화하는 ‘신학’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도 없고, 외부의 물

적 조건과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의 단순한 반영인 이데올로기만으로도 볼 수 없다. 종교적 성향들도 구 조화된 동시에 구조화된 실천을 낳는다.

II. 본론 1. 복음주의적 패러다임 개신교인에게 ‘복음’은 구원을 주는 ‘목적이자 수단’(stake)으로서 참된 기독교적 가치의 표상이나 상

징이다. 대다수의 한국교회와 목회자들, 신학자들은 스스로를 복음적이라고 자처(김명용, 2005: 74)하

며 이를 직접적으로 표방하는 복음주의는 ”주류교단 내의 흐름(trend)”(양희송, 2005)이 되었다. 아울러

구원론과 선교론도 복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즉 ‘구원’과 ‘선교’도 복음의 정의와 맞물

려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복음(福音, euangelion; Gospel), 특히 이 복음에 대한 실천적 입

장이나 집단적 성향을 표현하는 ‘복음주의(evangelical; evangelicalism)’나 ‘복음주의적(evangelical)’,

‘복음주의자(evangelicals)’라는 개념은 상당히 논쟁적이다. 김경재(2002)에 따르면,

한국 신학계나 목회현장에서 가장 불분명하게 사용되는 어휘 중 한 가지가 ‘복음주의’라는 단어다. 유럽신학 계에서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말할 때에는 가톨릭 신학에 대비하여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곧 신학 진영 일반 을 의미한다. 또한 미국에서 태동하고 성장해온 오순절 운동 전통 및 교회성장론적 선교신학 써클에서는 대 체로 성령은사, 성경권위, 선교사명, 그리고 교회성장을 강조하는 신학적 운동을 말할 때 ‘복음주의’라고 칭 하면서, 굳이 세계교회협의회(WCC) 신학적 노선과 차별하는 신학표지로 사용되곤 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 국 신학자 중에는 근본주의적 보수 정통신학, 자유주의적 신학 및 진보주의적 신학운동을 견제하면서 신학 적 중용의 길을 걷는다고 자부하는 신정통주의 신학 입장(주로 칼 바르트 신학 계열)을 ‘복음주의 신학’이라 고 말하기도 한다. 요점을 말하자면,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자기들이 수용하고 지지하는 신학적 견해가 가장 성경적이고, 정통적이고, 건전하고, 사도전승의 정통신학을 이어받는 신학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 로서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남용하는 신학적 특권용어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렇게도 좋은 용 어 ‘복음주의’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한국 교계와 신학계에서 지극히 불분명함으로, 교통 정리되어 안정되기 전까지는 당분간 신학적 전문용어로서는 모호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2002: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복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강력한 매력과 헌신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빈번히 애용되고 있다. 개념상의 모호함이나 신학적인 논쟁에도 불구하고 ‘복음’이나 ‘복음주의’는 개신교 내에서 종교행위를 할 때에는 별다른 문제없이 사용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교파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기 개인의 신앙이 이천년 전 예수 및 사도들의 원초적

복음과 직결되어 있으며 진정한 복음에 대한 준거집단의 해석이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많

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정의하는 것은 자기 확신을 위한 선언적 의미가 있 는 것이다(류대영, 1998 :121). 복음주의자(an evangelical, 또는 evangelicals)들은 복음주의 신학 혹은

복음주의에 대한 신학적 정의를 종교적 경험과 개신교의 신념 및 가치(체계)를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율 - 김현준 ‧ 3 -


적인 이념으로서 초월적이고 선험적이며 탈맥락적인 ‘순수한’ 진리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령 신학자들은 복음주의(evangelicalism)3)를 규범적이고 마치 윤리적인 행동강령인 것처럼 정의하는 경향

이 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신학자들조차 복음주의에 대한 신학적 정의를 매우 조심스러워한다

는 사실은 복음주의가 단지 추상적인 신념체계나 이념 그 이상임을 시사한다. 놀(Mark A. Noll)은 “복 음주의적 원동력의 역사는 늘 변동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부연함으로써 복음주의가 다양한 신앙전통 이 교류하면서 형성된 역사적 실체라는 측면을 주목하고,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자신의 작업이 복음주의를 ‘규정’(Prescribe)하기보다는 ‘기술’(Describe)하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양희송, 1999). 분명, 일반적 용법으로서 ‘복음주의’는 하나의 이념이자 신학적 규범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상대적으로 복음의 내용보다는 ‘복음(주의)에 대한 믿음’이 끊임없는 상징투쟁의 과

정 속에 있으면서도 그 투쟁의 전제로서 신성한 가치(illusio)인 하나의 교의(doxa)로서 유지되고 있음

을 보여준다. 이 ‘복음주의자’라는 집단적인 자기이해는 순수하게 신학적인 논쟁의 결과물만도 아니고

정치․사회적 입장이나 성향에 의해 경도되는 이데올로기적 범주만도 아니다.5) 즉 ‘복음적’ 혹은 ‘복음주 의’를 표방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자기 선언적 행위는 사적인 행위규칙이 아니라 이 개념의 사용규칙 혹

은 신앙적 질서와 실천, 복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아는 행위자들의 체화

된 실천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쿤(Thomas S. Kuhn)은 이러한 실천과 문제풀이의 집합을 ‘패러다임’이 라고 불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복음주의에 대한 이러저러한 규범적 정의들은 보다 제도화된 복음

주의 교파나 단체, 그리고 그들의 교리(신학)에 일상적 복음주의의 감성이나 실천감각을 투사하고 일치 시킨 것으로서 복음주의 패러다임이나 복음주의 아비투스의 부분집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복

음주의는 이미 정립된 신학 체계를 따르는 윤리라기보다는 종교적 상황에 따른 실천적 대응이 반복되고 패턴화된 역사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마치 미술사의 다양한 양식 스펙트럼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

는 것처럼(김동일, 2008 참조) 신자의 종교적 실천들은 하나의 종교적 양식(style), 곧 종교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보편화된 실천양식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복음’이나 ‘복음주의’, ‘구원’, ‘사랑’, ‘정의’, ‘복’, ‘은혜’와 같은 개신교인의 개념(notion)들은 신학적 진리주장의 정의로서가 아니라 구조화된 실천

으로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종교 아비투스의 관점에서 ‘복음전도(evangelism)’를

중시하는 복음주의나 오순절 카리스마운동, 기복신앙 등은 단지 추상적인 일반원리가 아니다. 신자들의 ‘기독교적’, ‘복음적(evangelism)’, ‘복음주의적(evangelical)’ 실천은 객관화된 종교적 생산물과 복음주의

적 실천의 체화된 역사 간의 변증법이 이루어짐으로써 순간순간 현실화되고, 그럼으로써 ‘복음주의’나

‘기복신앙’이라는 일반화된 명칭이나 신학적인 정의를 갖게 된다.

종교 영역에서 종교적인 것을 특징짓는 이름들은 차이 속에서, 그리고 차이를 통해서 정당한 이름으

로서 존재하고 또 호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교적 정체성들은 “관계의 공간에서 관계적 위치들을 점

유하는 한에서 존재하고 존속”한다(Bourdieu, 1998:31). 가령 한국개신교의 특정한 종교적 정체성 중에

하나인 복음주의나 기복신앙은 그것의 내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이해로 대표되는 신학 혹은 신학적 내용 을 통한 규범적 정의에 앞서 이 정체성을 자타가 인정하는 행위자 집단들이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사 실과, 특정한 성향과 아닌 것들 간의, 그것들의 범주에 대한 분류의 동학이 그들 간의 차이에 의해 발생

한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복음주의나 기복신앙은 그것에 대립되는 다른 여러 정체성

들이나 종교적 성향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역사적인 변천과정을 거쳐 왔다. 한국 개신교인들은 대립과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종교 성향 밖의 특성들을 수용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기존 특성들을 버리거나 3) ‘복음주의’란 영어 evangelicalism의 번역어이다. 영어로 evangelicalism의 어근은 evangel인데, 헬라어로 ‘복음’을 뜻하는 유앙 겔리온(euanggelion)에서 기원한다. evangelism은 ‘복음전도’, evangelization은 ‘복음화’로 번역한다(양희송, 2002). 4) 복음주의에 대해, 놀(Mark A. Noll)은 역사가 데이빗 베빙톤이 주장한 회심주의(Conversionism), 성경주의(Biblicism), 행동주 의(Activism), 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라는 설명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성경이 가지는 최고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성령의 주권,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복음전도의 우선,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등 크게 여섯 가지 확신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양희송, 1999). 5) 이런 점에서 어떤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복음적인 교회라고 자처하는 교회가 참으로 복음적인 교 회일까? 무엇이 복음일까? [중략]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주의 신 학이라고 스스로의 신학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면 복음주의 신학에 속해있지 않는 신학자들은 복음적인 신학자가 아니라는 말 인가?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복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편협하게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김명용, 2005:74)

- 김현준 ‧ 4 -


재의미부여하면서 개신교적으로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련의 통일된 경향

들을 만들어왔던 것이다. 무엇이 복음주의인지 아닌지, 기복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신자들의 감각은 개신교 장 내에서 상이한 집단들 간의 투쟁의 역사를 통해 체화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복음주

의’(evangelicalism)를 “정교한 이념체계”가 아니라 “역사적 정황에 따라 발전해온 복음주의 운동

(evangelical movement)”(양희송, 2005)으로 보자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한국개신교인들의 (의 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특정하게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실천은 그 실천의 진정성과 진리를 독점적으로

표상하는—게다가 그것이 신학의 힘을 입어 ‘복음주의’나 ‘기복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구조화됨으로써 개 신교적인 신앙문화나 종교성을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역사, 특히 보수적 개신교의 역사도

참된 기독교적 가치로 믿는 ‘복음’의 실천적 정의와 헤게모니에 대한 투쟁의 역사로 다루어질 수 있으 며, 복음주의자들의 ‘복음주의(신학)’ 혹은 ‘복음주의적 실천’이라는 것도 복음주의라는 (이름의) 한계 내에서 새로운 복음주의적 의미를 창출해 내는 과정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단지 신학적 입장이나 단순한 신념체계나 종교적 관념이 아닌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으로 구성

된(constituted) 복음주의는 사회공간에서 그 개념을 놓고 벌어지는 분류투쟁으로 구성되는 동시에 분류 투쟁을 (재)생산한다. 왜냐하면 개신교 장에서 복음주의는 이 투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규칙 (rule)이자 투쟁의 목적이 되는 판돈(stake)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개신교 장은 ‘복음’, ‘(성경적) 진리’, ‘선교’, ‘구원’, ‘사랑’과 같은 개신교적 가치 담론와 개신교 그

자체에 대한 정의 내리기의 투쟁공간이다. 대립과 경쟁상태에 있는 진영들 간의 개신교인들은 서로 자

신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신념과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한다. 이를테면 ‘성

경적’임을 내세우는 행위는 그 보증임과 동시에 투쟁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다. 개신교 용어나 개념들은 정의 내리기 투쟁의 산물인 동시에 조건이 된다. 이러한 정의 내리기 투쟁은 새로운 개신교,

무언가 기존의 개신교(정통)와는 다른 개혁적 개신교(이단)에 대한 통제를 통해 기존의 제도화되어 있 는 개신교를 보호하고 기득권자들의 상징자본을 유지하려는 과정이다.6)

종교장의 게임 규칙은 대량생산장이라는 특성 때문에 다른 장들과 달리 그 체계화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다. 개신교 장 역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 경계선이 모호하다. ‘그리스도인’, ‘복음’ 등

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의들은 외적 힘을 굴절 시키는 개신교 장 내의 역학관계와 투쟁과정, 그리고 사회적 협상과정을 통해 지배적인 흐름이 성립되

기 마련이다. 이러한 정의들은 항상 경쟁적 집단들 간의 공통의 토대(doxa)와 투쟁의 한계 및 방식 (rule)을 정해주는 동시에 투쟁의 목표(stake)가 됨으로써 의미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7)

2. 세련된 복음주의적 성향 탄생의 역사적 맥락 1970~80년대 보수 개신교 내부의 유의미한 분화가 이루어졌다. 당시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친정

부적이었으며 개인의 영혼구원과 복음전도만을 강조하고 현세적 위로와 내세구원을 얻는 대신 현실안주

나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전[前]천년왕국주의)8)를 가졌던 보수진영의 근본주의 신앙에 대한 반발(류대영, 2009: 117-118 참조)에서 세상과 현실에 대한 부분적 긍정성(후[後]천년왕국주의)과 비

교적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추구하며 적극적으로 ‘복음주의(evangelicalism)’9)를 표방하는 집단이 출현했

6)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는 천주교의 중앙집권체제와 교황으로 대표되는 사제의 권위를 부정하는 교회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가 아닌가! 따라서 개별교회의 위상은 크지만 그 개별교회를 완전히 통제할 궁극적인 방법은 없다. 교단은 기본적으로 개별지역교회들의 연합체이다. 7) 블루어는 이러한 개념적용의 협상 가능한 성격을 “의미한정주의”(meaning finitism)이라고 부른다. 개념은 사전에 그 용법을 일일이 규정할 수 없으며 미래를 향해 열린 외연을 갖는다는 것이다. 8) 세상은 타락으로 인해 종말로 가고 있으며 세상의 종말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이 왔으며 예수가 기존의 세상을 불로써 다 멸망시키고 예수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천년왕국을 세운다는 종말신학. 따라서 염세주의적 신앙을 낳았다. 반면 후천년왕국 주의는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세상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나타낸다. 9) 한국의 복음주의는 때로는 개혁주의와 혼동되거나 심지어 근본주의와 구별없이 사용되기도 하며 다양한 하위 범주를 갖고 있 다(정재영, 2008: 48). 예컨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 개혁파 복음주의자, 재세례파 복음주의자, 오순절파 복음주의자,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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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분화는 1950년대 이후 지나치게 분리주의, 반지성주의, 폐쇄주의로 흐르는 것에 반발하여 신학 의 보수주의(근본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기독교인의 사회 문화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려는 공동체 형성으

로 이해할 수 있다(박용규, 1998: 292). 80년대부터는 대학캠퍼스선교단체(para-church)10) 출신 목회

자들이 교회로 정착하면서 보수-진보 개념보다 복음주의자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이런 정체성을 강조하

는 교회와 개신교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박용규, 1998; 양희송, 2005).11) 즉 “복음주의적 대중”이

출현한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칭하는 이유를 단지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선

호와 기능의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는 없다. 일부 스스로를 복음주의권에 속했다고 믿었던 기독교 역사

가들은 초기 한국교회의 성격을 자신이 속한 교회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복음주의라고 칭했다(류대영, 2009 :118). 근본주의자들을 비롯한 보수 개신교인들은 무차별적으로 사용됨으로써 무

의미해지고 희석된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재강조하고 재전유함으로써 신학적․교리적 정통성을 인정받고 자 했다. 동시에 기존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보수 개신교를 ‘근본주의’로 낙인찍는 차별화 전략을 통

해 이른바 “꼴통보수”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또한 개념의 모호함에 힘입어 신앙전통의 외연을 넓힘으로

써 개념투쟁의 우위를 확보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보다 근본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 에 대립함으로써 자신들의 차별적 입장을 구축했다. 물론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과 동일한 근본주의 교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성서고등비평, 민중신학, 해방신학, 토착화 신학 등 보다 급진

적인 신학들과도 대립했다. (미국에서도 신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중간적인 정체성을

갖는다. 미국 개신교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한국 개신교에 거의 그대로 이식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세속

화된 사회의 현대주의나 진보적인 신학에 대한 반대는 여전히 보수적인 복음주의적 분파에게도 기본적 으로는 이미 전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분화의 쟁점은 사회참여나 문화에 관한 입장이나 실천 적 태도에 있었기 때문에 복음주의자들의 정체성은 근본주의 교리체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정서나 태 도,

실천으로

차별화된다.

복음주의의

분파의

출현은

근본주의적

성향으로

‘표준화

(standardization)’된 보수 개신교 내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강조하는 ‘한계분화(marginal differentiation

)’12)인 것이다. 소박하게 보자면 한국의 복음주의는 진보 개신교와 보수 개신교의 사이에 위치한(김명

복음주의자, 가톨릭 복음주의자 등의 규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신앙의 ‘표준화’에 입각해 복음주의자들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희송(2005)에 의하면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정교한 이념체계(ideological system)라기보다는 역사적 정황에 따라 발전해온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 movement)”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복음주의를 운동으로 보는 관점은 투쟁을 통한 참된 복음을 구현하고자 하는 동기와 실천에 대한 강조를 함축하는 입장으로서 복음주의를 종교 아비투스 로 보는 이론적 방향과 일정부분 공명한다. 10) 참고로 IVF(1956), CCC(1958), UBF(1961). 괄호안은 설립연도. 11) 그 이전부터 ‘복음주의’란 용어가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가톨릭과 구분되 는 루터파와 칼빈파를 통칭한 개신교 전체를 지칭했고(박상증, 1992; 양희송, 2005), 본래부터 신학적 주장이나 이념체계라기 보다는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하고 발전한 신앙갱신과 전도 및 선교운동이었다. 그러다 성서고등비평을 수용하는 근대주의(자유 주의 신학)의 도전으로 성경의 근본적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수호하는 근본주의로 후퇴했다가 적극적인 대응과 보다 열린 태도로 다시 나타난 것이 ‘(신)복음주의’이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운동으로서의 복음주의를 표방하여 연합과 일치를 추구 했다. 여기에서 ‘복음주의’ 개념은 “성서에 대한 신뢰와 경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한 흐름”(박명수, 1995: 99)을 강 조하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명수는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이전”의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와 그 이후의 “근본주의” 를 구별하여 규정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복음주의를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나 좁은 의미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로 규정하든 간에 자유주의 신학과의 대립을 우선시 한다는 점에서 학생선교단체의 “복음주의 운동” 이전의 복음주의는 “근본주의”라고 부 를 수 있다. 다시 말해 근본주의는 자유주의(혹은 근대주의)와의 대립에서 탄생했고, 복음주의는 근본주의 교리의 토대 위에서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와도 대립하지만) 근본주의와의 결별을 중요한 동기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명수의 서술 역시 근본주의와의 차별성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주의의 외연을 넓히고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것 은 한국의 복음주의를 비롯한 차별적인 신앙양식들의 출현과정이다. 이수인(2004)은 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들이 도외시했던 사회적문화적 ․ 개입을 선언했다는 차이를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신)복음주의 운동이 미미하고 신봉자들이 많지 않았다는 강인철(2003)의 주장의 맥락 하에서 한국적 상황에서는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를 구분할 실익이 없다고 주장한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 교리의 신봉자들을 기반으로 발생했으며 또한 복음주 의의 비교적 진보적인 사회적문화적 ․ 개입도 보수적인 근본주의 교리에 결박당하기 쉽기 때문에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다. 복음 주의와 근본주의는 동일한 근본주의 신학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주의가 신학적 자유주의와 동시에 근본주의로 부터 구별짓기를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사실은 복음주의자들의 보다 세련된 종교 아비투스를 이해하는 데 있 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자와 동일한 교리를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정치적․정서적 차이를 보인다. 종교집단을 교리신학적 차원에서만 분류하는 것은 실제 신자들의 실천과 감각적인 차이를 은폐한다. 12) 버거(P. Berger, 1982)의 개념으로, 종교적 시장상황에서 각 교파가 자신들의 신앙고백적 유산(상품)을 타 교파와 구분할 필 요성에서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시장 내부 분파의 정체성 차별화를 설명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본고에서는 보수

- 김현준 ‧ 6 -


룡, 1988: 106-107) “중도진영”(김명배, 2007: 248)일 수 있다.13) 이러한 입장은 한국 교회가 토착화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의 양극단을 체험한 후에 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기 때문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정재영, 2008: 48). 또한 근본주의자와 복음주의자의 대립은

사회․문화적인 대립인 동시에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 신학적 대립이다. 근본주의자 박형룡14)은 (신[新]) 복음주의의 ‘사회복음(Social Gospel)’을 진보 진영의 신학과 싸잡아 비판한다.

신복음주의 운동은 [중략] WCC와 로마교회에 아첨을 자행하면서 재래의 정통주의 복음주의는 교회의 사회 적 의무에 등한하다느니, 교의 문제로 교회를 분리하는 분리주의자들이라느니. 과학을 무시하는 몽매주의자 들이라느니 하여 정통주의에 비난을 퍼붓는다. 신복음주의는 사회복음을 전하되 구령복음(救靈福音, 개인 영 혼구원-필자 주)을 전하기에 태만하지 않으니 WCC와 다르다고 그들은 스스로 변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 회적 활동의 방식에서 WCC를 따라가거나 결국 WCC가 하듯이 무신론 유물론에 기초한 공산주의와 악수하 게 될 때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은 교회 합동운동(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칼 운동-필자 주)에 찬동하되 성경 을 믿으면서 그리하는 점에서 WCC와 다르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과학에 맞도록 해석한다 하 여 진화론과 성경 고등 비평에게 문을 열어 주니 큰일이다.(박형룡, 1976: 401)

박형룡의 주장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간의 대립은 근본주의와 진보적인 개신교 간의 대립만큼이나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립된 사회적 문제의식이나 정치적 입장은 신학적 대립으로 표면화된

다(표현양식을 취한다). 다시 말해 진보적 혹은 적극적 사회적 실천은 신학적인 의미부여(표현양식)를

통해서만 평가된다. 구조개혁이나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과 진보적 사회참여는 곧바로 공산주의로 환원 되는 것이 아니라 과격함을 수반하는 정치․사회적 실천의 투쟁방식이 비성경적이라는 평가와 공산주의에 대한 무신론이라는 신학적 평가가 하나로 범주화될 때, 단순히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닌 신앙의 본질적 인 문제로서 당연하게 인식된다. 다시 말해 보수 진영에서 상징자본을 많이 가지고 투쟁에 참여하는 신

자들 일수록 사회참여의 문제를 상식이나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앙(복음)의 본질적이고 신학적인 문 제로서 받아들인다. 물론 개신교 신앙과 신학적 해석은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단순히 은폐하는 기능

(이데올로기)으로서 작동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수 개신교인의 아비투스는 적극

적인 사회참여(WCC)와 공산주의를 동일한 범주로 인지하고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종교의 구조 와 성향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각각의 담론들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추출해 내고 그것을 하나로 범주

화하는 능력을 갖는다. 개신교인의 정치․사회적 실천은 항상 개신교의 구조적인 논리와 인지구조에 의해 중개되는 것이다.

3.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 경향 개신교 장과, 개신교 장과 상동적인 외부 장들(전통종교문화의 장, 경제장, 정치장) 그리고 사회적 세

계 하에서 구조화된, 구원이나 복을 추구하는 개신교인들의 아비투스는 ‘복음주의’나 ‘기복신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복음주의적인 실천이나 기복적인 신앙행위를 낳는다. 가령 복음(Gospel; Good News)을 영적인 것으로 보거나 복음전도(evangelism) 및 복음화(evangelization)를 중시하는 복음주의자들의 태

도와 실천, 그리고 복음의 현세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기복신앙(health-wealth Gospel)15) 등은 구원이

나 복에 대한 종교적인 욕망과 기대를 현실의 객관적 조건에 맞추는 개신교 행위자의 공리주의적이고 진영 내부의 분화과정에 대입한다. 1980년대 이후 보수 진영에서 집중된 교파 및 교단분열이, 신학적인 이유는 그저 수사에 불과할 정도로 교회정치적인 요인 이 강하게 작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한계분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이 교파나 교단이 아니라 신자들의 실천 양태를 표상하는 집단적 종교성향이나 이념형들을 하나의 유의미한 분파로 보고자 했다. 13) 이런 점에서 정강길은 복음주의를 “온건주의”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뉴스앤조이, 2005/7/19). 14)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예장합동) 총신대학교 신학교수이자 목사로서 이 교파 내에서는 “정통보수주의 개혁신학”의 아버 지라고 할 수 있다.

15) 한국적 ‘기복신앙’과 서구-미국적 현상인 ‘health-wealth Gospel'은 동일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 나 여기서는 구원과 복음의 현세적 이익을 강조하는 신앙문화이자 메시지라는 점에서 상호간의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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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적인 기복적 아비투스의 산물이다. 최종철(1996a; 1996b)은 이러한 개신교인의 전통적인 종교

적 성향의 원형을 ‘무속신앙’(한국적 천년왕국주의)에서 찾고 이것이 ‘현세적 공리주의’ 아비투스를 형성 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이 전통적 성향이 서구의 내세지향적이고 종말론적인 ‘천년왕국주의’16) 신학의

특성과 친화성을 가짐으로써 “저 세상 지향적인” 근본주의 종교아비투스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현세지향적 성향과 내세지향적 성향의 모순을 “현세 지향적 근본주의”라는 이중

구조로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인의 종교 아비투스는 현세지향적이든 내세지향적이든 구체 적인 방향을 가진 성향 그 자체라기보다는 개신교장과 행위자가 처한 사회적 맥락 가운데에서 방향성을 드러내게 하는 성향들의 체계(system of dispositions)이다. 바로 서구의 사회적 맥락과 신학 하에서 형

성된 내세지향적 종교 성향과 한국의 사회적 맥락과 전통 하에서 형성된 현세지향적 종교 성향이라는 각각의 성향들을 당대의 사회적 환경 하에서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일관된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는 체계가 종교아비투스인 것이다. 즉 현세지향적 종교성이든 내세지향적 종교성이든 개신교인의 종교성이

란 공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개신교인의 종교아비투스가 산출하는 지표적(indexical) 실천인 것이

다. 예컨대 독재‧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개신교인은 내세지향 및 현실도피적인 종교성(영혼구원의 복음)

을 발전시키고 유통(전도와 교회성장)시킴으로써 권력의 비호와 야합 아래 유무형의 이득을 취했다. 반

면 절차적 민주화를 달성한 ‘87체제’ 이후에는 정치권력의 압력이 없어졌으므로 더욱 적극적인 현세적 실천강령(사회참여 및 사회적 책임의 신학)을 강조함으로써 이득(사회적 신뢰라는 상징자본과 교세 위

축을 돌파)을 획득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확보됨에 따라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는) 내세지향 적 복음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적어졌던 것이다.17)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처음부터 내세지향적

종교성을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현세의 삶을 위해 내세지향적 신앙을 (무의식적으로) 전략적으로 발전시

켜 왔으며 내세지향을 통해 진정으로 현실적인 이익을 취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18) 내세지향적 종교성

에 대한 다음의 설명은 무의식적이지만 종교적 보수주의에 부합하는 행위자들의 전략을 시사한다. 4. 순수한 신양 양식의 문화구조: 복음주의적 에토스

복음주의 흐름을 특징짓는 키워드는 소그룹 성경공부, 경건의 시간(Quite Time), 제자양육, 강해설

교, 기독교세계관 등이다(양희송, 2005: 4). 이 중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추구한 성서의 원리와 문화의 원

리가 바로 ‘문화선교’와 ‘사회참여’의 이론인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문화관’이다. 정재 영에 의하면,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과 같이 전통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수 신학 의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현재의 변화를 파악해서 사회에 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자 한다. 그러기위해 성서의 원리뿐만 아니라 문화의 원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가 들은 기성교회가 지나치게 탈정치화하고 보수화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회 책임을 강 조하기 시작하였다.(정재영, 2005:51)

개인윤리운동뿐만 아니라 문화소비자 운동을 벌여온 시민단체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기윤실)〉 16) 천년왕국주의는 크게 전천년왕국주의, 후천년왕국주의, 무천년왕국주의로 구분된다. 여기서 최종철이 주장하는 내세를 강조하 는 한국 개신교인의 신앙은 주로 전천년왕국주의와 관계가 깊다. ‘전(前)천년왕국주의’는 하나님과 메시야가 다스리는 천년왕국 이 도래하기에 앞서(前) 예수가 재림하여 세상을 불로 심판한다는 근본주의 신학의 종말론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인류의 끝없 는 타락으로 종말이 온 후에 신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사상으로 역사의 암울한 미래상을 그리고 있다. 인류문명과 현세의 가치 를 부정하기 때문에 내세를 지향하게 된다. 반면, 진보사관인 ‘후(後)천년왕국주의’와 대비된다. 한편, 무(無)천년왕국주의는 세 상의 종말에 앞서 천년왕국이 없다는 신학적 입장이다. 17) 강인철(2007)에 따르면, 보수교회가 민주화 이후, 정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반공주의’ 이념 때 문이다. 18) 최형묵(2002)은 이러한 내세지향적 신앙을 “타계적 복음화의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타계적 복음화의 신학은 저 세상에서의 영혼의 구원을 강조한 까닭에 현실의 문제를 등한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타계적 복음화 신학의 진정한 효과는 현 실의 문제를 외면하게 하기보다는 현실의 모든 문제를 개인화내면화하는 ‧ 데 있다. 그것이 ‘타계적’이라는 것은 현실의 모순관 계를 은폐시키는 한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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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도자이자 복음주의 대형교회인 서울영동교회를 설립한 손봉호에 따르면 개인윤리를 토대로 하는 사회참여와 문화변혁의 목적은 “기독교 문화의 건설”(김명배, 2007:721)에 있다.

이러한 도덕적 우위를 바탕으로 사회전체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 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변화와 개혁의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 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 문화가 기독교적인 문화가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 기회를 놓쳐버려 모든 것들이 안정되어 버리면, 그때는 뚫고 들어갈 틈이 없어지게 된다. 지금이 적기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고 변화와 개혁의 주체가 되어서 우리의 문화를 성경적으로 이끌어야 한다.(손봉호, 35-36)

4-1. 기독교 세계관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19)과 ‘기독교 세계관(a christian world-view)’20) 담론은 적극적

인 정체성으로서의 복음주의를 호출하고 그 진영을 구성한 문화적 동인이라고 볼 수 있다. 로잔언약은

본래 1974년에 선언되었지만 이에 근거하여 사회참여를 인식한 복음주의 운동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로잔언약의 방향을 공식적으로 표방한『복음과 상황』의 창간(1991년)으로 현실

화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87년 이전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강조는 자칫 진보 진영에

서 취했던 정치적 저항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참여를 선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

한 입장은 한편으로는 맑스주의 이론 및 급진적 실천과 다른 한편으로는 소극적 신앙(근본주의) 사이에 서 양자에 대해 비판하고 구별짓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로잔언약은 개신교인의 의무로서 개인의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도(evangelism)에 사회적 책임

(social responsibility)을 추가함으로써 신앙과 실천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 선언이다. 이른바 ‘신(新)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전도와 사회참여, 두 가지 모두가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주장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사회참여가 불의한 사회구조를 변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소외된 이웃을 위 한 자선적 사회봉사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과, 여전히 사회참여보다 전도의 우위를 견지한다(박종 천, 1995:37).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 및 기독교 문화관 이론은 사회참여와 세상의 모든 영역(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기독교’ 혹은 ‘성경’적인 인식원리를 제시하는 방법론으로서 복음주의적 대형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제자훈련 등의 교육과정을 통해 보급되었다. 이러한 담론들은 “기독교적으로 살지 못하는” 기존의 보수

적 신앙에 대한 반성으로서, 기독교적인 현실인식과 신앙갱신의 동기를 가진 이론체계이다. 성과 속, 천

국과 지옥, 교회와 세상과 같은 이분법적 대립처럼 기독교적(성경적) 정치․문화 대 비기독교적(성경적)

정치․문화의 대결을 통해 세상 정치․문화의 기독교화(Christendom, Constantinianism)21), 즉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동력을 얻는 동시에 보수 개신교인들이 간과했거나 무지했던 사회․문화적 영역들에 대한 관

심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기독교 세계관 이론은 기독교적 행위문법의 일반화를 추구한다. 다시 말해

“보수 개혁주의”적 행위문법이 분화된 다양한 사회적 영역들에서 실천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고, 또 19)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대회에서 선언된 신앙고백문. “하느님의 선교”와 사회구원 개념을 주장한 WCC를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보고 반발하는 맥락에서 발생한 복음주의자들의 선언이다(김명배, 2007:218). 빌리 그래함은 로잔대회의 목적 중의 하나가 WCC의 방콕대회에 대한 도전임을 분명히 했다(김은수, 1997:61에서 재인용). 15개 항목 가운데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제 5항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전도와 사회적 관심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여겨 사회참여를 소홀히 해온 사실을 참회한다. 비록 인간들 상호 간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고, 사회적 행동이 복음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니지만 우리는 복음전도와 정치사회적 참여가 모든 우리 기독교인들의 의무임을 믿는 다.(김명배, 2007: 220에서 재인용). 즉 선언의 내용 그 자체는 영혼구원의 우선성을 강조하지만 국내에서는 약간 다른 효과를 낳는다. 전반적으로 영혼구원만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인 복음 이해에 사회구원을 환기시킨 것이다. 20) “성경적 세계관”과 동의어로 쓰인다. 한국의 기독교세계관은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에서 일어난 신(新)칼빈주의라는 신학운동 의 산물이며 '개혁주의적 세계관'이다.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헤르만 도이벨트 등의 일련의 네덜란드 신학자들을 가 리켜 신(新)칼빈주의라고 부르며, 이들의 신학적 입장이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의 저작권을 주장하게 되었다(양희송, ). 21) 재세례파 평화주의 전통에 서 있는 침례교 목사 김기현( )은 문화변혁을 모토로 하는 개혁파(칼빈주의) 기독교세계관을 제국 주의적 승리주의, 콘스탄틴주의(기독교왕국화)라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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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만 한다는 규범을 제시한다.

하지만 한 개인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은 각 분야들의 실천적 각론을 아는 것이라기보다

는 기독교 세계관 이론의 핵심(hardcore)인 기독교 그 자체나 복음 그 자체를 그것이 아닌 범주들과 정 확히 구별해 내고 선별해 내며 지적할 수 있는 덕(프로네시스)을 갖추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실 천적 지혜는 복음주의적 장 안에서 복음의 순수성에 대한 의심을 체계적으로 기각하는 무의식적 의식적 학습과정과 의례 내에서 체화된다. 그래서 이러한 지식담론들에 대한 학습은 그것들의 내용보다도 그것

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강화한다. 그러한 장에서 주장된 특정한 형태의 ‘복음’이 모든 것을 해석 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원리라는 믿음은 복음이 사실상 사회적 관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실천능

력과 진리값을 갖는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은폐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세계관의 구체적 적용보다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독교 그 자체의 원리가 있다는 믿음만을 지속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외부에서 들어오는 불안의 요인들을 차단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 이론은 사실상 기독교적 가치의 적용보다는

이것이 기독교적―엄밀히 말하면 특정한 개신교 교파의―가치 그 자체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재생산하는

데에 더 방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도 그러한 기능을 한다. 예컨대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적

(또는 성경적) 정치, 기독교적 학문, 기독교적 과학, 기독교적 예술, 기독교적 음악, 심지어 “기독교적

요리법” 등으로의 확대 적용을 표방한다. 그래서 기독교적·성경적·복음적인 것과 아닌 것의 구별이 중요

해지고, ‘복음적’ 혹은 ‘성경적’이라는 수사는 기독교적 가치와 진리를 담보해주는 수식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일 복음의 내용이 순수한 관념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 보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

서 복음의 내용에 대한 신자의 신앙은 (그리스도교 전통들 중에서도 예전을 비교적 경시하는 개신교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항상 복음의 내용을 수행하는 종교적 언어적 장치들에 대한 신앙으로 쉽게 치환된

다. 내용의 의미를 보증해 주는 것은 그것을 수반하는 (비복음적, 또는 아디아포라) 형식인 것이다. 예

컨대 소위 ‘기독교적’으로 살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언제나 예배나 기도와 같은 종교 의례인 것이

다(우리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예배에 성공하면 주중 일상에서도 승리한다”와 같은 모토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고로 존 스토트나 로잔언약이 강조하는 복음전도의 우선성은 ‘복음’으로 구성된 일상적

종교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단지 신학적 입장의 선언인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복음

전도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해 배타적인 것으로서 규정되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 곧 ‘복음’

을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실천적 ‘장치(dispositif)’일 수 있다(이 장치는 제자훈련이나 전도폭발과 같은

교회 교육 커리큘럼과 각종 전도법을 메뉴얼화한 신앙서적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전도’는 ‘복음’의 내용을 해명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실천적 효과를 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실

천 전략을 배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복음전도와 함께 제안된 사회참여(세속적 실천)는 개인적 선

행이든 사회봉사이든 정치행위든 그 외양적 형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언제나 복음전도의 개념적 범주 안 에 포섭되고, 그럼으로써만 ‘정당한’ 복음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복음주의적 개신교인들이 사회참여

그 자체의 정당성과 의미를 상상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실상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구분은 순수한 종교적 의미화 실천과 세속적 의미화 실천이라는 이분법에 다 름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 이론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적인 내용을 강조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규범 이 내용을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은 칼빈주의의 승리주의나 콘스탄티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학습과정이나 의례적 실천 과정에서 신자의 종교 아비투스는 보다 많은 종교적 상징자본을 가

진 개신교 장의 지배자의 아비투스를 모델로 삼고 모방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보면 개신교

성직자의 사목권력의 지배를 받는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22) 기본적으로 아비투스의 현상유지 성향은 기 22) 기독교 세계관 담론(이하 기세 담론)은 신학과 본질상 차이가 없으나 사목권력의 작동 및 유지와 평신도 대중의 효율적 지배 를 위해 학문적 성취내지는 발전과 상관없으며 끊임없는 대중적 소비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신학이라는 학문장의 게임의 규칙 에 지배받기보다는 목회적 영역에서의 유용하다는 점에서 신학이지만 신학이 아닌 것처럼 활용된다. (편의상 "유사신학"이라고 하자) 또한 신학이 아닌 척해야만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한 평신도 일상에 대한 목회권력의 침투와 신학적 지배 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기세담론의 이론적/실천적 부정합성 내지는 난해함이 발생할 경우, 성직자들은 얼마든지 기세담론의 본령인 신학으로 후퇴할 수 있다-이 말은 유사신학담론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성직자는 상징자본을 손해 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평신도가 할 수 없는/하기 어려운 신학적 논의들은 성직자에 대한 평신도의 말 그대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 그래서 카리스마를 선사한다. 그러면서도 유사신학체계를 통해 평신도의 삶에 언제나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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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교 세계관의 실천이나 복음주의적 실천의 원리가 되는 복음의 ‘저작권료’(종교적 상징적 잉여자본)가

흘러들어가는 곳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복음과 구원은 신자 개인이 공정한 종교시장에서 획 득하고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순수한 복음이라는 환상은 단지 개인의 이익관심(interest)에 근

거한 것이 아니라, 집단 내 행위자들의 아비투스의 일치, 특히 지배적 아비투스와의 일치에 기반한다.

결국 복음이 세속적인 것을 적대함으로써 획득된다고 믿는 개신교 신자일반의 아비투스―소위 ‘복음주 의’로 명명된 아비투스는 복음과 비복음, 종교와 사회 사이에서 조정되고 관철된 개신교 장의 지배행위

자들의 아비투스에 다름 아니다. 4-2. 기독교 문화관

‘87년 체제’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달성은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자유를 가져온 동시에 문화적 욕

구의 증대로 이어졌고, “대중문화의 발전”과 “소비문화의 확산”(이수인, 2002: 270), 여가산업과 같은

“대체 종교” 혹은 “기능적 대행물(functional equivalent)의 발달”(이원규, 1992; 1996b)은 세속문화에

대한 신앙적 관심을 더욱 증대시켰다.23) 또한 이러한 권위주의 국가의 민주적 이행이라는 정치적 상황

의 변화는 시민사회의 활성화와 더불어 이에 자극된 측면으로서 사회참여에 대한 보수교회의 허용성을 증가시켰다(김성건, 1997; 이수인, 2002 참조).

이와 함께 이 시기 보수 개신교회들은 80년대 후반부터 둔화되기 시작해서 90년대 뚜렷해진 양적 성

장의 지체(이원규, 1996a; 1996b; 곽창대; 강인철, 2002)와 개신교의 사회적 공신력의 하락24)을 이른 바 ‘문화선교’와 ‘시민운동(문화소비자운동)’을 통해 돌파하려는 의지를 나타냈고 이는 직간접적으로 어

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25) 다시 말해 문화선교는 당시 사회문화적 상황과 보수진영 전반에 걸친 개신교

의 성장지체와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으로 말미암은 사회적인 동시에 신학적인 “선교전략의 변경

그러나 평신도는 가능한가? 평신도는 곧바로 신학을 성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평신도가 지적인 능력이 낮다는 의미가 아 니라 종교사회적 조건이 신학에 대한 평신도의 접근이 불리하다는 문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직자는 무조건 신학 을 잘 할 수 있는 것일까? 신학을 하는 사람이 신학자/성직자가 아니라 성직자가 하는 것이 곧 신학이다. 한국교회에서 일반적 으로 평신도의 소위 "설교"가 성직자의 "설교"와 본질적/내용상으로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평신도의 그것은 "설교"가 아닌 " 간증"으로 승인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학이라는 문화생산물은 생산장과 생산공정, 사회적 맥락 하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여 기서 두 행위자 간에 성찰과 (기독교적) 실천의 시간차 혹은 속도의 간극이 발생한다(만일 평신도가 신학적 성찰을 통해서 일 상을 성찰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녀는 이미 신학을 하고 있는 것이지 기세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학적 사고라는 신학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신학은 신학으로서 승인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평신도 신학"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이것의 방점은 "평신도"에 있는 것이지 "신학"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의 "신학함"과는 거리가 먼 성직자가 만들어낸 평신도를 "위한" 신학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기본적으로 성직자의 영역은 교회/목회라는 직업 그 자체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지 않겠지만 평신도의 경우, 문제상황이 닥칠 때마다 각론을 내지 못하고 원론적 신학으로 물러나버린 성직자의 기세는 (교회를 직장으로, 목회를 직업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역시 여전히 세속적 삶/문제/요소들 속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반론은, 가능한 반론이긴 하지만, 그것은 성직자가 평신도에 대한 이른바 "목회"를 포기하지 않는 한, 공감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 간극 때문에 성직자는 쉽게 평신도에게 신앙이나 신앙적 결단이 부족함을 책망할 수 있는 것이다. 성직자는 기세담론의 원론을 말하기 쉽다. 다시 말해 성직자의 "무례함"-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은 평신도와 세속에 대한 목회(권력)적 욕망에서 오는 유사신학 체계/체제의 개 발로 인한 행위자들 간의 적응/수용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메커니즘이 목회를 가능하게 한다. 23) 필자 역시 87년 민주화로 인한 대중문화의 발전과 소비문화의 확산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수인(2002)의 경우, 소비문화의 확 산과 대중문화(기능적 대행물)의 발전은 종교적 호소력을 저하시켰고 이로 인해 신비주의적 신앙관의 쇠퇴를 가져와 보수교회 는 종교시장에서 기회영역(opportunity field)을 상실했다는 데에 주목한다. 반면 필자는 오히려 이것이 보수진영으로부터 분화 한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성찰과 새로운 성장의 기회로 활용되었음에 주목한다. 문화를 선교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문화선교, 기 독교 문화관의 논리가 바로 그 사례이다. 24) 공신력 하락의 구조적인 원인들에 관해서는 강인철(2001; 2002)을 참조하라. 25) <기윤실>의 문화소비자운동은 개신교의 (선한)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개신교의 사회적 공신력을 회복하려는 “문화선교” 의지와 동일하다. 즉 세상을 변혁하려는 복음주의적 기획과 동기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물론 시민단체 인 <기윤실>이 교회의 양적 성장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문화선교연구원 정재후 목사의 대안제시가 문화선교의 목적을 잘 보여준다: “비기독교인들도 보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동을 담은 작품들을 만들자. 기독교 세계관 을 가진 작품들이 일반 만화계로 진출하여 선교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겠는가?”(정재후, 2000: 30) 김영일(2001)은 대형교회로 옮긴 청년들의 인터뷰를 근거로 청년들은 보수 진영의 ‘딱딱한’ 신앙양식을 답습하기엔 너무 젊었 다. 세상의 대중음악 형식을 빌려 교회음악에 접목시키려했고, 설교 못지않게 찬양에 비중을 두고 싶었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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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시도하라는 구조적인 압력”(강인철, 2002: 46)의 산물인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문화사역’26) 혹은

‘문화선교’에 나섰고 “이제 문화는 목회의 새로운 코드로 자리 잡았다”(최소란, 2005: 15)고 선언했다.

문화선교는 “대중문화 양식들을 교회에 잘 접목”(이수인, 2005: 287)하는 것이며, “소비사회적인 대중문

화의 일부 감각적 측면을 목회에 도입하여 신앙의 상품으로서 가치를 강화하는” 이른바 “문화목회”(김진 호, 2007: 5)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27)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 서 있는 복음주의는 1990년대 이후

문화를 기치로 내세움으로써 보수적 근본주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떨어버리고 “보수세력의 헤게모니 (hegemony) 확장”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강인철, 2005).

이러한 복음주의권의 문화선교의 이론가가 바로 프란시스 쉐퍼이다. 과장된 감이 있지만 성인경에 따

르면 “뛰어난 선생이요, 20세기가 낳은 영향력 있는 대표적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성인경, 1995)이

다.28) 프란시스 쉐퍼는 미국 복음주의 지성인의 모델이었으며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그의 『기독교

문화관』등의 책들은 비교적 꼼꼼한 주제와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어 문화사역의 구체적인 이론과 방향 을 제시했다. 그의 해석틀은 주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두 가지 범주에 의해 구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본주의 문화에 의한 미국사회와 세계의 위기를 경고하며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운동을 지지했고, 소위 키에르케고르 실존주의의 ‘절망의 선’ 이후 진리의 타락과 오염을 염려했다. 그의

문화관이나 사상은 소박한 실재론과 외연적 의미론에 기대어 성경을 통한 기독교적 진리의 직접적이고 투명한 인식을 당연시하는 논리에 기반한다(김현준 이원석 정정훈, 2009 참조).

쉐퍼는 1935년을 기점으로 미국이 '절망의 선'을 넘었고, 그 결과로 인본주의라는 세속사상이 지배하는 나라 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타락한 현실에 대비하여 미국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아름다웠던 시 절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미국독립혁명기로부터 '절망의 선' 이전의 시기이다.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 은 미국독립혁명이 기독교적 합의에 기초하여 수행된 하나의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쉐퍼의 주장, 즉 기독교적 합의가 미국의 건국 정신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이라는 주장은, 이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화에 근 거한 막연한 믿음에 불과하다. 그는 (특히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 미국의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이 애착을 가지는 기독교 정신(구체적으로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 미국이 건국되었다는 신화를 공유하는 듯하 다(김현준 이원석 정정훈, 2009: web-page 21).

이러한 쉐퍼의 문화관은 보수적인 기독교학계에서 이론적 근거로 학습되었고 출판물과 교회와 선교단

체의 교육을 통해 응용 재생산되었다. 복음주의의 사회참여와 기독교 세계관 및 문화관을 실행한 기윤

실 문화전략위원회가 엮고, 강영안, 신국원 등 이 집단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리더십들이 공저자로 참여 한『대중문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1998, 예영커뮤니케이션)는 단순화된 형태의 분류체계와 소박

한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는 쉐퍼의 기독교 문화관이 (그들이 직접적으로 인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6) “선교”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강한 기독교적 색채”에 대한 일반인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문화선교”라는 용어보다 “문 화사역”이 선호되었다(이정석, 2006: 27)는 증언에서 문화사역이 선교(전도)의 효율성을 증대하려는 의도된, 그러나 문화선교 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전략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27) 진보 진영에서도 “문화선교”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문화와 선교의 결합이나 선교의 문화적 방식으로서 이해하는 보수 진영 과 달리, 문화를 “선교의 본질”(김문환, 1997: 155)로서 이해한다. 이국헌은 “문화-프로테스탄티즘” 혹은 “문화종교주의”와 복음주의 진영의 “문화선교”를 구별한다. 문화선교 개념은 문화로 인 해 종교적 본질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성찰이 배제된 문화종교주의와는 달리 “종교를 문화의 본질로 승화시키려는 문화변혁적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국헌, 2008: 64). 한편 강남의 개신교 신자들이 보여주는 신앙적 문법을 이국헌은 “문화 종교주의”라고 부른다(이국헌, 2008: 63). 그에 따르면 문화종교주의란 “종교를 개인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이자 본질로 삼는 영적 체험의 대상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저 종교생활을 일종의 문화적 향유로 여기는 정신”(이국헌, 2008: 63-64)이다. 이러한 관점은 복음주의 집단을 “문화종교주의”를 추종하는 부정적인 집단과 “문화선교”를 추구하는 긍정적인 집단으로 구분하는 결 과를 낳는다. 그러나 이는 문화를 향유하는 신자들의 주관적인 신앙적 진정성을 무시하는 것이자 문화선교의 선교적 가치를 정 당화하고 문화선교 논리의 문화적 욕구 해소의 기능을 은폐하는 관점일 뿐이다. 다만 이데올로기화된 “문화선교”의 신학만이 있을 뿐이다. 이국헌의 “문화종교주의”와 “문화선교”의 논리는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보수진영의 문화선교의 논리는 궁극 적으로 문화를 수단화하는 문화종교주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28) 쉐퍼에 대해 한국의 대표적인 쉐퍼리안이자(한국 라브리 대표) 복음주의 리더십인 성인경의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우리는 복 음주의권에서 그의 상징적 지위와 사상의 소박한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쉐퍼는 1912년 1월 30일 미국 펜실바니아의 독일계 미국인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온갖 질문과 갈등을 안고 자유주의 교회에 몇 년간 출석했으나 교회에 서는 무신론이나 불가지론 외에는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스스로 성경을 철학과 비교해 보기로 하고 읽어가던 중 철학책을 덮어버리고 성경을 6개월간 읽고 난 후에야 "모든 문제들이 성경 속에서 통일된 사상 체계로 연결되어 마치 실타래 가 풀려지듯이 다 해결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쉐퍼는 18세였다.”(성인경,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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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복음주의 분파의 일반적인 문화관으로 정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이다. … 문화이론의 근간이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세계관에서 보면 인본주의는 희망과 발전을 바라보지만 결국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전제하지 않는 인간만의 해방 추구는 결국 스스로의 자멸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화이론의 기본 시각이 마르크스주 의적 혁명론을 뼈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과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기독교 세계관과 상치할 뿐만 아니 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전제로 한 신본주의와 그 뿌리와 지향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근본이 서로 다르다 고 할 수 있다(김연종, 1998: 102)

5. 소결 독특한 종교적 에토스(성향)와 논리구조를 가진 집단―여전히 우리는 이러한 집단을 ‘복음주의’나 ‘세

련된 복음주의 분파’ 정도로 밖에 지칭할 수 없지만―의 탄생과 성장은 사회적 압력을 굴절시킴으로서 얻어지는 개신교 보수분파의 내부갱신, 즉 개신교적 가치의 순수화의 전략의 맥락에 서 있는 것으로 보

인다. 세련된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 비해 사회적 변화와 성장의 지체라는 외적 위

기를 진보 및 이전 세대와의 차별성과 분명한 적대 하에서 신학교리의 강화가 아닌 그것의 외적 요소, 즉 문화목회와 기독교 문화관과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보다 대중적으로 순화된 신앙담론과 이를 유통시 키는 일종의 전위의 역할을 한 문화선교단체와 기독교시민단체들의 네트워크를 확장시킴으로써 기존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을 제치고 참된 복음주의 신앙의 헤게모니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 교회의 대형

화는 하나의 자원으로서 기능했다. 세련된 복음주의자들은 대형교회를 성장시켰다. 복음주의는 한국교회

급성장의 신학적 요인이다(박종천, 1995: 37). 복음주의적 전도신학은 교회 성장론에 의거하여 흩어지 는 교회보다는 모이는 교회를 선호했기 때문이다(박종천, 1995: 39). 박용규에 의하면 대표적인 복음주

의 교회와 인물로는 할렐루야교회 이종윤 목사, 강변교회 김명혁 목사,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영동교회를 세운 손봉호 장로를

들 수 있다(박용규, 1998 :99). 이른바 “중산층 비성령운동형 대형교회”(서우석, 1994)이자 “세련되고 부드러운 듯”한 외양을 가진 “합리적 우익”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후발대형교회”(김진호, 2007a;

2007b)29)들이다. 이 분파는 부분적으로는 진보적 시민운동과 연대하는 등 다소간의 진보적 입장을 보

이기도 하는 “개혁적 보수분파”이지만 교회나 교단이 관여하는 사학재단의 운영이나 지교회 설립과 같 이 이해관계가 걸린 결정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교회갱신운동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나타냄으로써 사회적

힘을 추구하는 교권세력의 연합을 만들어 내는 “대세추수적 보수분파”이기도 하다(이수인, 2004). 때문 에 “개혁적 보수세력”이 진정으로 “탈(脫)보수”인가하는 강인철의 의문은 정당하다.

복음주의적 사회운동 세력, 다시 말해 위의 도식에서 ‘개혁적 보수’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적 책임의 자 각’ 혹은 ‘사회참여의 개시’가 과연 ‘탈(脫)보수’를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중략] 개혁 적 보수세력은 이념 및 운동방법 면에서 진보세력과의 차별성을 명확히 부각시키고 있다. 나아가 신복음주 의운동이 WCC 노선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자유주의와 미국의 ‘도덕적 다수운동’(Moral Majority)으로 대표 되는 근본주의를 넘어 제 3의 길을 추구한다고 주장하기는 하나, 음란 퇴폐문화 추방운동, 양서 권장운동, 과소비 추방운동, 스포츠 신문 불량만화 추방운동 등 기윤실이 중점적으로 전개해온 사회운동의 내용은 ‘도 덕적 다수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 ‘그리스도교 신우익’(Christian New Right)의 사회운동 프로그램과 여 러 모로 유사하다.(강인철, 2002: 47)

III. 결론을 대신하여: 가설의 제안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나 기독교 문화관 같이 한편으로는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에토스나 이론으로서 29) 김진호에 따르면 이는 민주화 시대의 합리성을 보다 잘 체현함으로써 시대착오적이지 않은 신앙문화를 보다 잘 구현하여 급 성장한 대형교회이다. 그는 이러한 개신교를 “미학화된 기독교”라고 부른다(2007a: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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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한 문화구조가 교회교육 등을 통해 신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각인됨으로써 보수적 이데올로기 및 세 력의 확산, 특히 근본주의적 신앙이 세련된 신앙의 저변에서 유지되거나 강화되는 현상의 토대를 놓았

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독교뉴라이트는 이러한 흐름이 정치적으로 추동된 단적인 사례이지만 그러한

조직체와는 별개로 한국 개신교의 전반적인 보수적 흐름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요인이나 실천의 논리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복음주의 분파 내부에서 보다 급진적인 사회적 실천들(가령 촛불집회, 촛불교회 등)이 나타났을 때,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로 자처한 주류 복음주의자들이 거부감을 드러내었다는 사실에서 흔히 근본주의로

명명된 뿌리 깊은 특정한―인지적 적대(cognitive antagonism)―신앙 성향의 부활(?)을 확인하게 된다.

복음주의자의 대부분은 결코 진화(진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수적 성향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이다. 그 이유는 단지 사회 정치적 보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개신교 내부의 변동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즉 개신교 전반의 보수성 강화는 급진적인 신념을 실천하는 개신교

의 진보적 흐름에 대한 반발의 측면이 있다. 다만 주류에서 이탈한 이들―그들을 복음주의 좌파로 부르

던 무엇으로 부르던 간에―에게서 변화의 가능성이 닫혀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찍이 베버는 종교개혁 이후 사적인 결단의 문제가 되어버린 칼뱅주의적 구원에 대한 평신도들의 일

상적인 불안을 자본주의 정신을 구성하거나 최소한 그것과 공명하는 문화적 동기나 실천적 동력으로 이

해했다. 세련된 신앙 양상 역시 그것은 홀로 존재하는 양식(style)이 아니라 근본주의나 ‘개독교’라는 비 난과 급진적 실천 사이에서 동요하는 불안의 신앙 양식이다. 이 불안한 위치에 놓인 세련된 신앙 양식 은 그 불안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폭력적 본색을 드러낸다. 예컨대 청부론은 기복신앙에 대한 비난 위에

서만 비교우위를 점하는 정당하고 세련된 사회적 신앙적 실천인 것이며, 부르주아 윤리라는 비판이나 급진적 사회운동에 직면해서는 개인윤리나 복의 근원인 은혜라는 본령의 논리와 자리로 도피함으로써

그만의 진정한 ‘세련미’를 완성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세계관론도 근본주의를 타자로 설정함으로써 설 명될 수 있는 동시에 급진적 사회운동(예컨대 맑스주의나 민중신학적 실천) 및 비판이론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드러낸다는 사실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세계관론에 정향되어있는 신자는 비사회

참여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에토스를 대할 때는 사회적 실천의 각론을 잘 아는 비판이론가처럼 행세하는 반면, 기독교세계관론에 정향되어 있지 않은 사회적 실천에는 복음주의적 에토스―즉 개신교적 실천의 보편적 원칙을 방어하는 신학의 전도사가 된다.

개신교의 보수적 성향이나 정체성을 포착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적대적) 감수성

이나 인지구조를 개신교의 지식담론을 참조해 볼 수 있다. 역사적 맥락 가운데에서 임의적으로 상정된 어떠한 적에 대한 문화구조적 인식이나 재현(인지적 적대)은 타자(적)의 경험을 재현하는 방식―주로

왜곡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구조를 개신교는 순수한 ‘복음’이나 절대적 기독 교 원리로 치환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설립되고 치환된 문화구조는 그것의 설립에 필수적이었던 타

자들을 오염원으로 간주하는 섬세한 배제를 수행함으로써 ‘절대적인 성스러움’을 유지하려는 종교집단의 결벽증(편집증)적인 태도의 산물이다. 마치 성스러운 것에는 반드시 오염의 상징물이 필요한 것처럼 순

수한 복음은 타자의 영혼에 대한 적대와 실용적인 이용을 동반한다. 소위 ‘복음의 핵심’에 대한 집착은

복음 안에 수많은 생명들(actant)을 밀어내고 삭제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핵심 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신비로만 남는 듯이 보인다. 흔히 초월적 계시로 정당화되는 이 지점이 바로 권력의 장소이며 권력자가 주권을 갖는 곳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회적 고통일 수도 있고 사회에

대한 이론일 수도 있으며 초월적 경험일 수도 있을 타자의 경험들은 복음 안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것인 지도 모른다. 기독교라는, 복음이라는 실재는 점점 더 편협하고 왜소해져가는 것만 같다.

추후 보수적인 개신교 혹은 개신교 보수분파의 역사적 헤게모니 블록을 연구하고 그들의 사회구조와

문화구조가 진보적 가치담론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보수적 가치는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더욱 구체적 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참고문헌(생략) - 김현준 ‧ 14 -


[토론을 위한 참고자료] 연도 보수진영의 정치적 태도 복음의 정의

70

80

2000

정치적 타협/순응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개혁주의

영혼구원 (복음화) 보수

↕진보/보수간 신학적 정치적 차별화

04한국기독당 07시청앞 04한기운 집회 (뉴라이트)

후발대형교회, 문화선교 ↕문화적 차별화 78사랑의교회 87기윤실(손봉호) (옥한흠) 89낮은울타리 85온누리교회 98문화선교연구원 (하용조) 91복음과상황

(헤게모니 확장) 04기독교사회책임 사랑의교회(오정현)

➜세련된 복음주의 (복음주의 우파)

삼일교회(전병욱)

↕정치적 차별화 ➜복음주의 좌파 촛불교회(연대) ➜에큐메니칼

wcc 74 로 잔 언 약

정치 사회 문화

87 민시 주민 화사 회 활 성 화

92 서 태 지 데 뷔

9798 01 02 03 국 I 9 참 이반 핵 민 M 11 여 라 반 의F 테 정 크 정 러 부 전김 국 부 민 대 회

04 한노 무 국현 기 독탄 핵 당 파 병

05 기뉴 독라 교이 사트 회 책 임

08 08 기 광 독 우 민 병 주 촛 당 불 집 회

< 그림 > 개신교 보수진영 분파의 분화과정과 핵심적 대립지점

신학적 분류 강인철

개신교 유형분류

이수인 서우석 김진호 김지방 구교형 정정훈

신앙담론

대표집단 및 인물

➜복음주의 촛불반대

사회선교 00뉴스앤조이 05성서한국 02교회개혁실천연대 05복음과상황

+ 급진적 행동 (사회선교) 하느님의 선교 사회선교

2008 적극적 정치참여

89한기총

↕ 선발대형교회(조용기) 74엑스플러

+ 사회참여

90

칼빈주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수구적 보수

개신교 보수분파 (신)복음주의

에큐메니칼

개혁적 보수 ? 대세추 개혁적 퇴행적 보수 수적 보수 보수 혼합계층 성령운동형 중산층 비성령운동형 대형교회 대형교회 선발대형교회 후발대형교회 (수구 우익) (합리적 우익) 중산층 복음주의 진보적 기독교 전통적 신정통 세계관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뉴라이트 보수교회 교회 운동그룹 운동그룹 신앙적 보수주의 개혁적 복음주의 87년형 복음주의 로잔언약 (개혁주의) 개혁주의 기독교세계관 포스트 하느님의 선교 영혼구원(복음전도) 기독교문화관 해방신학, 민중신학, 기독교세계관론, 개인윤리 문화선교 사회선교 사회선교 전천년주의 복음전도+사회참여 축복(기복) 총체적 복음화 청부론, 고지론, 한기총, 예장합동, 여의 온누리(하용조), 사랑의 교회개혁실천연대, 뉴 도순복음(조용기), 영락 (옥한흠), 소망(곽선희), 스앤조이, 복음과상황, 기장, 향린(김경호) 교회(한경직), CCC(김준 삼일(전병욱), 학생선교 박득훈, 방인성, 구교 곤), 금란(김선도) 단체들, 기윤실 형, 양희송

< 표 > 개신교 유형 분류

- 김현준 ‧ 15 -


[기독교세계관론자들의 세계관(복음주의적 인지구조)을 해명하기 위한 보론]

기독교 ‘세계관’의 전성찰적(pre-reflexivity) 성격 : 기독교 세계관론자들의 이론적 오류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문제 제기: 기독교 세계관론자들의 세계관 이해 기독교세계관론자(칼빈주의적 개신교 신학자)들은 세계관을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eye), 즉 세상을

보는 관점(perspective)”(이승구, 2003: 13)으로 정의함으로써 비판자들에게서 세계를 근대적인 방식-

시각적 이미지-으로 이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기독교세계관론자들(이하 기세론자)은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이후 단지 시각적 관점이 아니라, 실천적 태도라는 설명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정작 ‘관점

(perspective)’이라는 개념의 이론적 함의를 놓쳐버림으로써 세계관이 실제 어떤 층위에서 형성되고 또

논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

해서 갖고 있는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Wolters, 1992: 13)이라는 이들의 세계관 정의는 표면적

으로는 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들에 대한 이들의 설명에서 대상 혹은 세계를 주 목하여 본다는 뉘앙스를 가진 ‘관점’은 ‘신념의 포괄적인 틀’, 간단히 말해 ‘믿음’이라는 해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적어도 분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이승구는 세계관에

대한 여러 다른 정의들에 대한 이론적 통합이나 합리화를 전혀 수행하지 않고 있다. 관점은 곧바로 삶

과 동일시된다. 세계관이란 왈쉬와 미들톤이 말하는 대로 ‘지각의 틀(perceptual framework)’이며, ‘사물

을 인지하는 방식’이고, ‘삶에 대한 시각(vision of life)’이요, ‘삶을 위한 시각(vision for life)’이다.이들

의 설명에서 세계관의 정의 혹은 개념들 간의 간격은 설명되지 않은 채 넘어가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 로는 지각 혹은 인지와 사회적 삶 및 집단적 문화에 대한 연결고리가 설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

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들과 우리에게 가능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과 기독교인의 관점은 자연스 럽게 일치될 수 있는 것일까?

기세론자들의 세계관 이해에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1) 근원에 대한 근원을 묻는 방식: 세계관이 문화와 삶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면서 또다시 세계관을 결정 하는 최초의 인자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2) 세계관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미들톤과 왈쉬에 따르면, 세계관과 그것의 언어적 형성을 결정하는 최초의 인자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세계관은 궁극적인 신 앙의 결단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우리는 주장하고자 한다. [...]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 라서 우리가 채택할 세계관이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의 결단이 우리의 세계관의 윤곽 을 정해준다(40-41).

결론적으로 말해서 세계관은 신앙의 ‘결단’을 기초로 하고 있지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세계관의 변

동이 부분적으로는 ‘게슈탈트 스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세계관(문화, 사회) 없이는 신앙의 결단조

차 가능하지 않다. 만일 세계관이 신학이론이나 교리라면 가능하다. 이론적 입장의 채택은 (그것을 행위

자가 실제로 믿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의식적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기세론자들이 원하는 바는 무엇일까? 세계관은 이론인가, 아니면 실천인가? 하지만 기세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세계관이 이론이 아 니라 믿음이나 종교적 신념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면 다른 세계관들을 비평하는 근거의 정당성은 어

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세계관들(종교들)을 판단하고 평가하여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기세 론은 이론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기세론자들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 김현준 ‧ 16 -


2. ‘세계관’에 대한 사회학적 이해 <그리스도인의 비전>에서 ‘vision’이 함축하는 바는 단순히 ‘시각’은 아닐 것이다. 시각 내지 관점은

(기세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것은 아니다. (색안경의 비유가 이를 설명해 주지 않

는가) 그러나 기세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순수하지 않은 시각이 순전히 ‘개인적인’ 선입견인 것처럼 여 기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기독교적 종교성을 개인적인 영성으로 종교적 선택을 실존적인 선택만으로

여긴 기독교적 에토스나 전통에서 기인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순수성의 이데올로기이다. 미들 톤과 왈쉬가 “세계관은 언제나 공유”되며 “공동적”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관을 결정하는 최

초의 인자를 “신앙의 결단”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에서 이들이 세계관의 집합적/자연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뒤르켐에 의하면 종교적 신념은 세상을 ‘세속적인 것(profane)’과 ‘성스러운 것(sacred)’으로 분리한

다. 즉 생활세계의 모든 사실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고, 종교현상을 성스러움의 영역으로 취급한다. 성/

속 구분의 본래적 이유는 알 수 없다. 즉 성스러움의 근거를 그것들의 내재적 특성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부족의 신성과 세속에 대한 분류가 사물들의 본질적 속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집단이 진

화시키고 유지시켜온 사회적인 분류라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들은 하나의 상징(symbol)으로서 성스러운 것을 성스럽게 하는 외부적인 요인 즉 사회나 집단을 상징한다. 이런 분류도식은 서로 다른 집단(의 집 합의식)에 따라 가변적이며, 따라서 어떤 분류도식이 어떤 다른 도식보다 더 인식론적인 우위를 가진다 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칸트의 선험적인 카테고리가 뒤르켐에게는 바로

‘집합적’으로-사회의 구조와 도덕을 통해 부여된-선험적인 카테고리가 되는 것이다. 즉 사회의 구조가 사고의 범주들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지식과 믿음은 인간의 문화나 역사를 초월하는 고정된 실재의 객

관적 투영이 아니고, 사회집단의 집단적인 산물이다. 집합의식은 ‘사회적 사실’이며 동시에 행위자들(집 단)의 분류도식이다. 도덕의식도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로서, 개인의 사고와 인식, 정당성

에 대한 개념을 지배하는 집합의식이다. 사회적 사실은, “사물로서 취급”되어야 하고, “개인에 외재하며 개인을 통제하는 강제력을 갖는 행위, 사고, 감정의 방식으로 구성된다.” 사물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변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사실은 특정한 단일 개인을 초월하는 외재적(external)이고 강제적 (constraining)인 것이며, 무엇보다 집합적인 것이다. 그리고 집합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이다(그 반

대는 아니다). 그래서 개인의 의식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심리적 현상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것이다. “사

회적 사실들은 그것들이 속하는 사회 체제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어서 그것과 분리되어서는 이해될 수 없다.” 개인은 이미 수립된 구조와 기존의 신념, 가치, 규범의 체계 속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이 같은 구

조적/상징적 사실들은 본래부터 개인에 외재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회구조 속에서 역할수행방

식을 배우고, 규범을 준수하고, 기본적 가치를 받아들임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어떤 것이 존

재한다는 것을 느끼고 감지하게 된다.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협력하여 어떤 사회구조, 신념, 가치 및 규 범을 창출했다하더라도, 이와 같은 사회적 사실들은 그 창조자에 외재하는 발현적 실재(emergent

reality)가 된다. 이러한 외재성은 구속감과 강제성을 수반한다. 더욱이 사회적 사실은 사회구조의 일원

이 되기를 원하고 집합체의 규범, 가치, 신념을 승인하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 ‘내면화’된다. “(사회적 사

실)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에게 신념과 행위를 강요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부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상 우리들 자신과 통합된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사

실이 지배하는 세계가 생활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계약의 전계약적 토대’와 같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살아간다(자연적 태도). 이러한 지식은 당연한(taken for granted) 것이고 암묵적

(implicit)인 것이다. 이 자연적 태도는 세계에 대한 의심들을 판단 중지(epoche)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태도이다. 즉 우리의 사회세계는 우리인간들이 지닌 근거없는 ‘믿음’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

이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또 이를 통한 사회적 행위 및 사회(제도화) 성립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 나 이러한 자연적 태도는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성원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다.

- 김현준 ‧ 17 -


3. 전-성찰적인 세계관을 성찰하는 문제 대표적으로 제임스 사이어의 <코끼리 이름짓기>에서는 세계관에 대한 기독교적 정의를 다루고 있는

데, 특히 세계관의 전(前)-이론적 성격에 대한 오해가 이들의 논의를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이어

는 “최근의 복음주의적 정의들”이라는 챕터에서 오르와 카이퍼, 도여베르트에게 영향을 받은 후예들이 공유하는 세계관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세계관은, (1) (2) (3) (4) (5)

한 개인의 전반적인 사상과 행위의 토대가 되는 전이론적, 전제적 개념들에 뿌리박고 있으며, 범위가 포괄적이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상적으로는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사물과 관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실재)에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굳이 비이성적이지는 않더라도 이성에 의해 최종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결단의 성격을 가진 신념이다.

여기에서 사이어의 오해가 드러난다. 전이론적 세계관의 본질은 명제화된 ‘개념’이 아니다. 개념은 다양

한 실천이 배태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이나 맥락, 문화나 사회를 ‘이론화’한 것일 뿐이다. 기세론자들은

이 점을 간과한다. 세계관은 “개념들을 모아 놓은 것 이상이다”(존 콕) 전이론적이라는 것은 성찰되기

이전에 모든 것을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기 받아들이는 상태로서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다만 논리적 정

합성(혹은 합리적인 설명가능성)은 사후적이거나 동시적인 이성의 작용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기

세론자들에게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세계관이 자신들에 의해서 성찰되었다 는 사실, 즉 이론화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결단’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기세론자들이 세계관의 결단을 강조하는 이유는 전이론적이고 전성찰적인 세 계관을 이론의 차원에서 설득하기 위함이다. 즉 기세론자들은 세계관이 결단의 성격을 가질 수 있으려

면 그것은 이론적 차원에서 성찰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이승구는 암묵적인 세계관을 외현적인

층위에서 다룸으로써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했다. (이를 그의 책 <기독교 세계 관이란 무엇인가?>의 저술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도 일반적으로는 그저 그의 의식 가운데 암묵리의 세계관으로 있을 뿐, 외현적인 세계 관으로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문제 삼고 논의하고 말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 안에 있어서 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인도하는 세계관을 좀 더 명확히 하고 외현화 시키 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 암묵리에 있는 세계관을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이승구, 2003:16-17).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세계관’이란 성찰하기 이전에 행위자들에게 주어진 전제, 가정, 지식, 신념들이라

면, 이승구를 비롯한 기세론자들은 기독교인의 암묵적 지식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사실상 기독교인(특

히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가진 신학자들)이 이상적인-성경적인!-기독교인으로 상정한, 기독교인의 세

계관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 세계관이란 그리스도인이 가진 세계관을 뜻한다”(이승구, 2003:16)면 지금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가졌다고 하는 세계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기세론자들은 기세에 들어갈 내용을 먼저 말하기 일쑤이다. 그것은 철저히 신학적인성경적인 것이라고 하겠지만-이론이 전이론의 내용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은 세계관이 기독교적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앞세움으로써 세계관

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결과적으로) 피해가고 있다. 한국 기세론자들의 교과서인 <그리스도인의 비 전>은 세계관을 문화와 삶의 근원으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미틀톤과 왈쉬는 세계관을 ‘정신적’(39)인

것으로서 이해함으로써 세계관이 ‘신앙적 결단’으로 비교적 쉽게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준다. 최근 한국의 기세론자들은 이러한 관점에 대한 약점과 비판을 의식해서 세계관이 ‘이론’이 아닌 ‘실천’이 라고 주장하면서 ‘전(前)이론’, ‘의식되지 않는 세계관’, ‘일상적 세계관’, ‘생활세계의 세계관’, ‘암묵리의 세계관’이라는 개념들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의들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 라, 여전히 미들톤과 왈쉬처럼 신앙적 결단으로 쉽게 변경되지 않는 실천의 함의를 읽어내지 못하고 있 다.

- 김현준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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