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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학연구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공동포럼(2012.05.21.)

구약성경의 신’들’

1

- 구약성경의 ‘가시’와 ‘달’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 우리신학연구소 주원준 (한님성서연구소)

I. 들어가며 1. 구약신학, 구약학, 고대근동학 2. 활발한 교류와 신들의 흔적 3. 탈신화화, 재신화화, 종교사비평, 영향사 II. 달 1. 메소포타미아: 강한 달신 2. 별 볼일 없는 서쪽의 달신 3. 구약성경의 달 · 아브라함: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 안식일과 초하루 · 신명기의 반反일월성신 신학 · ‘달신의 산’을 ‘호렙’으로 · 욥이 전해 주는 고대 근동의 정서 · 달은 피조물일 뿐 · 창세 1장, 탈신화의 헌장 III. 가시나무 1. 가시 있는 떨기나무 2. 길가메쉬 서사시: 돈오頓悟의 가시나무 3.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가시나무 4. 교부: 가시덤불에 나타나신 분이 가시관을 쓰셨다! IV. 나가며: 그러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

1.

이 발표문은 20012년 5월 21일 ‘우리신학연구소’와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의 공동 포럼에서 사용될 것으로서, 졸저 『구약성경과 신들 - 고대 근동 신화와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한님성서연구소, 2012)의 일부 내용에 기초했다. 또한 2012년 5월 19일 치러진 “문문”(文文) 창립기념 학술대회의 원고와 일부 내용이 같다.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2

I. 들어가며 이 발표는 ‘정보’와 ‘성찰’을 나누고, ‘제안’에 대해 토론하기 위한 것이다.

1. 구약신학, 구약학, 고대근동학 한국의 구약학계를 볼 때, ‘구약신학’에 대해 관심이 편중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구약신학’은 구약성경의2 ‘신학’을 다루는 학문이다. 곧, 구약성경의 구원론, 인간론, 신론, 메시아론 등을 다룬다. ‘구약학’은 구약성경과 관련된 ‘모든 것’이 대상이다. 이를테면 구약성경과 관련된 다양한 언어, 역사학‧사회학적 비교연구, 이웃 민족의 종교‧문화적 비교연구 등을 다룬다. 구약학은 자연스레 고대근동학3과 밀접한 학문이다. 이 세 학문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구약신학 < 구약학 < 고대근동학

필자는 이 세 학문의 관계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정식(formula)를 시도해 보았다.

1. 신학적으로 말해서, 구약신학은 구약학의 꽃이며, 구약학은 구약신학의 기초다. 2. 구약학과 구약신학은 고대근동학의 기반 위에서 더욱 풍부해진다.

두 번째 정식과 관련해서 부연할 것이 있다. 구약학과 구약신학이 고대근동학의 성과에 더 철저히 기반하는 것은 신학이 다른 학문(이른바 ‘세속학문’)과 고립되지 않고 대화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장점도 있다. 이는 현대세계와 소통하는 신학을 생산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며 신학 연구의 수준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이 세속학문에서 고립되거나 세속학문과 적대적으로 대립하던 시대에 교회는 불행했다. 그런 불행한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세속학문과 더 잘 소통하는 신학을 생산하는 일은

2.

구약학의 연구 대상을 ‘히브리 성경’(HB)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지만, 이 글에서는 ‘구약성경’으로 칭하겠다. 첫째 성서(Erstes Testament; Primary Testament;

3.

Nwavrh)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구약신학(alttetamentliche Theologie)과 구약학(alttetamentliche Wissenschaft)의 바탕이 되는 고대근동학(古代近東學)의 약자로 영어권은 ANES(Ancient Near Eastern Studies)를, 독일어권은 AO(Altorientalistik)를 쓴다. 이 지역을 ‘근동’이 아닌 ‘중동’(中東, Middle East)으로 일컬어야 더

올바르지만 ‘고대근동학’은 학술적으로 널리 통용된다. 학계의 관행이 이렇기 때문에 동일한 지역을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부른다. 현대적 사건을 일컬을 때는 대개 ‘중동’이란 말을 쓰고(중동 정책 middle eastern policy), 고대의 ‘문헌과 문물’을 일컬을 때는 ‘근동’이라 한다(고대 근동 문헌 ancient near eastern texts).

졸저 『구약성경과 신들』, 15-16 각주2.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3

중요하다. 구약학과 고대근동학의 중요성을 부인할 신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구약학적 강의는 구약신학에 비해 매우 빈약한 실정이고, 고대근동학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현실인식에 기반해서 최근 필자는 졸저를 통해서 고대 근동학이 구약학과 구약신학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음을 보여주려 시도했다.

2. 활발한 교류와 신들의 흔적 구약성경의 다양한 배경적 요소 가운데 언어는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언어로 기록된’ 문서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뮌스터

학파의

오경형성이론(Münsteraner

Pentateuchmodell)에 따라 구약성경의 의미있는 최초의 편집본을 기원전 9-8세기경 ‘예루살렘 역사서’(JG)로

인정한다면,4

당시

사용된

히브리어는

이미

2천

5백년

정도의

선역사(Vorgeschichte)를 지녔다는 점도 인정하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시작된 기원전 33세기경 고대 이집트도 찬란한 문명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 때 부터 고대 근동에서는 이른바 ‘문명’이 시작되어 문자 생활이 본격화된다.5 이 지역을 가장 넓게 통일한 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제에게 무릎 꿇기까지 약 3천 년 동안, 고대 근동은 인류사의 첫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 세계의 작은 일부였다.

4.

Zenger, E.(Hg.), Einleitung in das Alten Testament (Stuttgart 2002), 120.

5.

고대 근동의 언어를 계통에 따라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언어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다음을 보라. 주원준, 「고대 근동어」, 트롭퍼, 『우가릿어 사전』, 17-29. 동부셈어: (1) 아카드어 서부셈어 중부셈어 - (북서셈어)

- (3)가나안어: (4)페니키아어, (5)히브리어 - (6)우가릿어 - (8)아람어

- (9)고대 아람어, (10) 삼알어, - (11) 제국아람어 - (12) 중기 아람어: (13) 팔뮈라어 (14) 나바태아어, - (15) 후기아람어: (16) 유다아람어, (17) 시리아어, (18) 만다어

- 북아랍어

- (19) 아랍어

- ? (23) 고대 남부아랍어: 스바어, 마인어, 카타반어 ... (20)남부셈어

- 에티오피아어: (21) 게에즈어, (22) 암하라어 ...

기타 셈어: (2)에블라어, (7) 아무르어, (24) 신남부아랍어 비셈어: (25) 수메르어, (26) 후르처, (27) 우라르투어, (28) 히타이트어, 하트어, (29) 루비아어, (30) 쿠쉬어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4

아래 그림처럼6 언어에 따라 고대 근동은 대략

지역으로

나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수메르, 아카드, 아시리아, 바빌론 등이

자리잡았던

곳으로서,

아나톨리아

아카드어로

대표되는 동부셈어의 무대다. 이집트 지역은 남부셈어를

사용했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동부셈어

언어적 환경이 급변한 곳이고, 레반트(또는 북서셈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은 대개 북서셈어를 사용하였고 주로 교역로 역할을 맡았다. 고대

근동인들은

활발하게

교류했다.

남부셈어

고대이스라엘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약소국’이이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주변 민족과 물건을 교환하고 영수증을 주고받았으며, 외교문서를 교환했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문화와 종교에 익숙해졌다.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는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다채롭게 뒤섞인 문화를 먹고 자랐다. 이렇게 이 나라에 다양한 문물이 흘러 들어오고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들의 경전에서 고대 근동 종교의 영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고대 근동 신화의 자국이 크게 남은 이유다. 유일신 신앙의 경전인 구약성경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인간에게 전해준다. 하지만 구약성경이 쓰여진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섬겼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이 수많은 ‘신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3. 탈신화화, 재신화화, 종교사비평, 영향사 불트만Bultmann이 제시한 ‘탈신화화’(脫 神 話 化 , Entmythologisierung)는7 본디 신약성서학에 쓰인 개념이다. 불트만은 신약 시대의 세계관이 신화적임을 지적했다. 이런 세계관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크게 차이 나므로,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이 오해 없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이런 신화의 언어를 벗겨 내서, 곧 ‘탈’脫 신화화해서, 그 알맹이를 합리와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탈신화화’는 고대에 발생한 의미를 현대인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해석학적 틀을 제시하는 훌륭한 방법론이다.8 시대를 뛰어넘어 의미를

6.

그림은 졸저 『구약성경과 신들』, 17쪽.

7.

Bultmann, R., “NT und Mythologie”, in: Offenbarung und Heilsgeschehen (Göttingen 1941), 27-69.

그의 학문적 업적을 요약한 것으로는 다음을 보라. Schmithals, W., “Bultmann”, TRE 7, 387-396. 8.

‘의미의 현재화’(sinnliche Vergegenwärtigung)를 이룰 수 있는 방법론이다. Hübner, K., “Mythos I”, TRE 23, 607.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5

해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필터filter 또는 교량을 제공한 것이다.9 신약성서학에서 널리 수용되는 이 이론은 고대 이스라엘의 믿음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유일신 신앙이라는 독특한 믿음을 보존한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의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그저 받아들인게 아니라, 자신의 야훼 신앙에 맞춰 섭취하고 소화하여 고유한 믿음을 지켜 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테면,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자, 그들의 최고신 아후라마즈다를 부르는 호칭 ‘하늘의 하느님’이 고대 근동 전역에 확산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은 이 호칭을 야훼 하느님께 드렸다. 새 호칭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일종의 신학적 ‘반론’이자 ‘맞대응’으로 볼 수 있다. 곧, 참된 ‘하늘의 하느님’은 야훼뿐이시라는 고백이 이 호칭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호칭은 고대 페르시아 종교의 껍질를 벗고, 야훼 신앙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이렇게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고대 근동 종교의 표상을 탈신화화해서 야훼 신앙으로 소화했다. 이를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화’와 ‘재신화화’(再 神話化, Remythologisierung)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탈신화화와 재신화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본문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다. 큰 나라의 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그 권위를 추락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신’도, 달‘신’도, 태양‘신’도 없다. 야훼 하느님은 단 나흘 만에 대제국의 높으신 신들 대부분을 ‘만드셨다.’ 아무리 그들의 권능이 대단해 보여도 그것들은 오직 피조물일 뿐이다. 고대 근동의 정치·종교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약소국 이스라엘이 ‘감히’ 이런 신학을 천명하는 것이 놀랍다. 이 글에서는 두 가지 방법론이 더 사용되었다. 우선 종교사 비평(Religionsgeschichtliche Kritik)이다. 역사비평의 일종인 이 방법론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종교가 고대 근동 세계와 어떻게 역동적으로 관련 맺었는지, 어떤 것을 수용했고, 어떤 것을 독립적으로 발전시켰는지를 묘사한다. 그 기초방법론으로서 고대근동학과 비교종교학이 가장 중요하다.10 끝으로 이 글의 본론은 한 모티프가 후대에 전승되어 전승 안에서 영향을 끼치며 발전되는 과정인

9.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불트만의 의도는 신화적 언어라는 ‘외피’를 ‘벗겨 내 버리기’보다는 그 외피를 ‘해석’하자는 것이지만, 그의 주장은 신화적 외피 속에 들어 있는 복음 선포라는 ‘알맹이’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경향은 그가 활약하던 1920-30년대 독일 지성계에 이성주의와 실존주의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사정과 관련 있다. Fergusson, D., “Entmythologisierung”, RGG4, 2, 1329-1330. 일부 학자는 탈신화화는 결국 탈복음화Entevangelisierung 또는 탈선포화Entkerygmatisierung의 길을 터 주었다고 비판했다Fergusson, “Entmythologisierung”, 1330; Buri, F., “Entmythologisierung oder Entkerygmatisierung der Theologie”, H.W. Bartsch, Kerygma und Mythos, vol. 2, Diskussionen und Stimmen zum Problem der Entmythologisierung (Hamburg 1965), 85-101.

10.

라이너 알베르츠, 『이스라엘 종교사 I』, 강성열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37.52.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그동안 한국의 신학계는 역사비평 방법론을 문학비평의 일부로 좁게 해석하는 경향이 은연중에 있는 듯하다. 필자는 역사비평의 일파인 종교사 비평을 시도하여 ‘대중의 흥미를 끄는 역사비평’에 도달해 보려 시도했다.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6

‘영향사’Wirkungsgeschichte를 기술한다11 특히 특정한 모티르의 ‘번역’을 중심으로 영향사를 정리하는 과정을 영향사 비평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I. 달 1. 메소포타미아: 강한 달신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달신 숭배의 대표적 고장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의 종교 가운데 달신이 왕권 신학의 핵심 상징으로서 종교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곳은 고대 메소포타미아가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12 달과 해에 대한 관념은 동양 전통과 수메르 전통이 완전히 다르다. 동양의 음양설에서 해와 달은 양과 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해는 달보다 세고 크며 우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수메르는 정반대다. 달신月 神 난나는 태양신日神 우투의 아버지다. 분명히 달신이 태양신보다 우월한 존재다. 또한 달은 왕권의 상징이었다. 맑은 밤하늘을 쳐다보라. 가장 밝은 달이 마치 임금이 되어 수많은 별을 거느리는 것 같지 않은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밤하늘의 달을 이렇게 생각했다. 달은 ‘별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인간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내리며, 정의를 판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달신의 신학은 자연스레 왕권 신학과 연결된다. 달신 숭배에서 초하루는 무척 중요했다. 달이 서서히 기울다가 그믐이 되어 밤하늘에서 사라지면, 달이 저승에 갇혔다고 생각했다. 달의 죽음이다. 하지만 초하루가 되면 달은 부활한다. 밤하늘에 손톱만큼 달이 보이기 시작하는 매달 초하루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절기다.13 뒤에서 보겠지만, 구약성경에서도 초하루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런 고대 근동의 풍습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달신은 태양신과 별신과 함께 ‘천체의 삼신론’astral triad을 이룬다. 물론 달신이 중심이다. 나보니두스 임금의 비문에서 보듯, 달, 해, 별과 임금을 함께 묘사한 것은 신바빌론 제국 이전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비교적 흔하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임금들은 달신 숭배를 바탕으로 왕권 신학을 정립했다. 이를테면 젊은 임금 아수르바니팔은 부왕 에사르 하똔(2열왕 19,37 참조)을 따라 하란의 달신 신전으로 순례해야 했다. 이스라엘을 침략했던(2열왕 17,3; 18,9) 살만에세르 3세는 하란의 달신 신전을 재건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살만에세르 3세와 아수르바니팔 임금은 정복한 서쪽 땅에 달신 숭배를 전파했다. 이렇게

11.

시각을 조금 바꾸어 후대 전승에 수용된 역사를 지칭할 때는 수용사Rezeptionsgeschichte라고 한다.

12.

Bram, “Moon”, Encyclopedia of Religion, 9, 6171.

13.

Schmidt, DDD, 586.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7

신아시리아 제국의 임금들은 하란의 달신 신앙을 꾸준히 퍼뜨렸다.

2. 별 볼일 없는 서쪽의 달신 고대 근동의 동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하늘신과 달신이 매우 중요한 신이었지만, 서부에서는 그냥 ‘신들’ 하나다. 우가릿 신화에서는 태양신이 훨씬 중요했다. 태양의 여신 ‘샵슈’SÛapsûu는 신들의 재판관 노릇을 하기도 했고, 바알 다음 가는 유일한 2인자로 불린 적도 있다.14 그는 ‘영원하신 태양’sûpsû

{lm 또는 ‘신들의 빛’nrt ilm이란 칭호를 얻기도 했다. 우가릿과 가까운 히타이트 제국에서 태양신을 왕권의 상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런 태양 중심 사상을 고대 히타이트 종교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15 이렇게 달신의 위치가 뚜렷이 다름을 보여 주는 문헌이 오른쪽 토판이다. 이 토판은 ‘병을 고치는 주문’을 담고 있다. 문헌의 서두에 최고신 일루가 주관하는 신들의 잔치를 묘사한다. 이 잔치에서 야리후는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런 문헌은 신화 연구자에게 무척 소중하다. ‘신들의 잔치’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잔치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따라 신들의 서열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만신전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텍스트가

되었든

그림이

되었든

상관없다.

상석에

앉을수록 중요한 신이고, 말석으로 갈수록 하위신이다. 그렇다면 달신 야리후의 자리는 어디일까? 그의 위치를 묘사하는 4-8줄을 우가릿어 원문에서 직접 옮기면 다음과 같다.16

야리후는 몸을 숙였다 마치 개처럼 뼈를 발라 먹었다 식탁 아래에서 (그를)

아는 신은

그를 위해 음식을 놓아 주었다 하지만 그를 모르는 신은 회초리로 식탁 아래

(그를)

때렸다.17

y{db . yrh˙ km . k[l]b . yqtqt . th˙t . tlh√nt . il . d yd{nn y{db . lh√m . lh w d l yd(nn y[.]lmn h˙t√m . th√t . tlh√n

놀랍게도 달신 야리후는 아예 식탁에 앉지도 못한다! 체면이 말이 아니다. 게다가 식탁 아래에 몸을

14.

KTU 2.42:6-7.

15.

Collins, The Hittites, 175; 미에룹, 『고대 근동 역사』, 242.

16.

우가릿어 문법과 사전은 다음을 보라. 트롭퍼 지음, 주원준 개역, 『우가릿어 문법 』, 『우가릿어 사전』.

17.

KTU 1.114:4-8.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8

숙여서 개처럼(!) 먹는다. 살코기는 다른 신들이 먹고 남은 뼈를 발라 먹는다. 처절하고 불쌍하다. 그나마 평소에 알던 신들은 동정하듯 음식물을 놓아 준다. 인정 없는 신들은 회초리로 때리기도 한다. 사람이 식사할 때 어슬렁거리는 개 떼를 몰아내는 듯한 분위기다. 이런 달신의 모습은 메소포타미아의 달신과 너무도 다르다. 그곳에서는 천 년 넘게 왕권의 상징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두 지역의 독자적인 달신 숭배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달신을 야리후로 칭하는 우가릿 지역에는 처음부터 메소포타미아와 구별되는 달신 숭배 문화가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태양의 여신이 훨씬 중요했다는 반증도 된다. 이렇게 다른 달신 문화는 과연 구약성경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런 고대 근동의 지식을 바탕으로 구약성경을 들여다보자.

3. 구약성경의 달 - 아브라함: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달신 숭배의 중심지는 우르와 하란이었다. 우르는 수메르 시대부터 달신 숭배의 중심지로 이름 높았고, 후대에는 하란이 우세했다. 앞서 보았듯, 나보니두스 임금은 우르의 달신 숭배를

부활시켜

마르둑

사제들의

미움을

샀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큰할아버지이자

그리스도교인에게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이 바로 우르 출신이다. 그가 나이 일흔 다섯에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떠난 이야기는 ‘순명의 모범’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창세 12,1-9). 그런데 그는 길을 가던 도중에 하필 하란에 이르러 ‘자리 잡고 살았다.’ 꽤 오래 머물렀단 뜻이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테라는 아들 아브람과,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라이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칼데아의 우르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자리 잡고 살았다(창세

11,31; 참조: 창세 15,7).

더는 근거가 없으므로, 여기에서부터는 학자들도 별 수 없이 추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아브라함과 그 일행은 적지 않은 규모로 움직였을 것이다. 적어도 ‘할아버지-아버지-손자’의 3대가 움직였다. 가축과 하인도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75년이나 살지 않았는가. 그의 대가족과 하인들은 고향 우르의 언어를 썼고, 우르의 문화에도 정통했으며, 고향 땅의 주신主神 과 관련된 신화와 의례에 친숙했을 것이다. 경유지로 하란을 선택한 것도 두 도시의 이런 종교적 공통점이 이유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정황 증거뿐이다. 아브라함과 그 일행이 달신 숭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필자도 퍽 궁금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어 안타깝다.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가 과연 아브라함에서 시작했을까? 그는 ‘믿음의 조상’이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심증일 뿐이다. 어쨌든 고대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9

메소포타미아에 널리 퍼졌던 달신 숭배는 고대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최소한 간접적으로, 무척 깊숙히 관여했다.

- 안식일과 초하루 지금부터 초하루가 중요하게 취급된 성경 구절 일부를 들어 보겠다. 초하루를 중요하게 챙겼던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적 일상을 조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초하루가 보름보다 확실히 더 중요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종교적 관습을 따른 것이다. 바빌론 제국에서 『 에누마 엘리쉬』를 대중 앞에서 낭독하는 성대한 아키투 축제도 초하루 축제였음을 기억하라. 우선 2열왕 4장을 보자. 자식 없는 한을 안고 사는 수넴 여인이 등장한다. 예언자 엘리사는 그녀의 극진한 정성에 탄복하여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 이렇게 해서 아들을 하나 얻지만 이 여인의 기구한 팔자는 끝나지 않는다. 그 귀한 아들이 어느 날 그만 돌연사한 것이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녀는 남편에게도 알리지 않고 예언자를 찾아 나선다. 그러자 영문을 알리 없는 남편이 묻는다. 왜 갑자기 예언자를 찾아 길을 떠나느냐고. 오늘이 무슨 중요한 날도 아니지 않느냐고. 대표적 축제일인 안식일도 아니고 ‘초하룻날’도 아니지 않느냐고.

남편이 물었다. “왜 꼭 오늘 그분에게 가려 하오? 오늘은 초하룻날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니지 않소?”(2열왕

4,23)

사무엘기 상권 20장은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을 묘사한다. 일부 학자들이 동성애의 혐의가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두 친구는 ‘목숨처럼 사랑’하였다(1사무

20,17).

요나탄은 친구 다윗의 목숨이 걱정되어

이렇게 말한다. 요나탄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일은 초하룻날이니, 자네 자리가 비면 아버지께서 자네를 찾으실 걸세”(1사무

20,18).

위 말에서, 이스라엘 왕실에는 ‘초하룻날’에 특별한 전례와 식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초하룻날은 이렇게 고대 근동의 일반적 문화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초하룻날 특별한 전례를 행했을 수도 있고, 그날에 맞춰 의미 있는 일을 벌였을 수도 있다. 사실 초하룻날은 이스라엘의 전례력에서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레위인은 성경에 기록된 종교적 절기를 엄밀히 지키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조직과 임무를 자세히 규정한 성경 구절을 보면, 레위인은 물론 안식일을 지켜야 했고, ‘초하룻날’도 지켜야 했다.

또한 안식일과 초하룻날과 축일에 주님께 번제물을 바칠 적마다, 법규에 따라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0

정해진 때에 주님 앞에 바치는 일을 맡았다(1역대

23,31).

혹시 이 종교적 절기를 나열한 ‘순서’가 의미 있을까?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는 안식일, ‘초하룻날’, 그리고 기타 축일의 순서로 중요했을 것이다. 초하룻날은 그저 그런 보통의 축제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언자들도 빠질 수 없다. 아래 예언자들의 말씀은 맥락과 구체적 메시지가 모두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초하루가 안식일과 견줄 정도의 중요한 축제로 인식되고 있었음은 공통이다. 우선 이사야 예언자는 거짓 경신례를 경고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기름진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우면 무엇하겠는가.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종교적 축제를 ‘초하룻날’과 안식일에 아무리 열어도 소용 없다. 마음이 우선이다. 예언자는 묻는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이사

1,13).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다. 사회적 불의를 대단히 민감하고 격렬하게 고발했다. 그는 경제적 착취를 일삼는 불의한 기득권 세력을 질타한다. 그들은 도량형을 속이는 비열한 자들이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다. 겉으로는 종교적 축일을 잘 지켜 경건한 체한다. 늘 ‘초하룻날’과 안식일을 지키는 듯 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축일을 어서 빨리 지내고 물건을 내다 팔 궁리만 한다. 도량형을 속여 막대한 이익을 낼 생각에 여념이 없다.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아모

8,4-5).

호세아는 일명 ‘사랑의 예언자’다. 그는 하느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바람난 여인으로 묘사했다. 그런 배신자 이스라엘에게 축제는 필요 없다. 참된 기쁨의 축제가 모두 사라졌다. 바람난 이스라엘에게는 ‘초하룻날’도 안식일도 모두 소용없다.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1

그 여자의 모든 기쁨 축제와 초하룻날과 안식일 그 여자의 모든 축일을 없애 버리리라(호세

2,13).

초하룻날을 중히 여기는 관습은 유배 이후에도 이어졌다. 유배가 끝나고 고향에 돌아온 백성들은 기쁨에 넘쳤다. 예루살렘 시온 산에 새로 주님의 성전을 정성 들여 지었다. 마음껏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매일 번제물을 바쳤고, ‘초하룻날’과 모든 거룩한 축일을 지켜 제물을 바쳤다.

그 뒤로 그들은 일일 번제물 외에, 초하룻날과 주님의 모든 거룩한 축일에 드리는 제물, 그리고 주님께 자원 예물로 드리는 모든 이의 제물을 바쳤다(에즈

3,5).

느헤미야기도 귀환의 기쁨을 전한다.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은 주님의 성전을 지상 최고의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하느님 집의 전례를 정성스레 다듬어, 꼼꼼하고 정확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안식일 제물 다음에 ‘초하룻날 제물’도 빼놓지 않았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규례를 정하였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 집의 전례를 위하여 해마다 삼분의 일 세켈씩 바친다. 이는 두 줄로 차려 놓는 빵, 일일 곡식 제물, 일일 번제물, 안식일 제물, 초하룻날 제물, 축일 제물, 거룩한 예물, 이스라엘을 위하여 속죄 예식을 거행하는 속죄 예물, 그리고 우리 하느님의 집에서 하는 모든 일을 위한 것이다”(느헤

10,33-34).

유딧기에서도 여전히 초하루는 중요했다. 경건한 여인 유딧의 행실을 전하는 다음 구절을 보라. 초하룻날 뿐 아니라 그믐날도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였다. 그리고 과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안식일 전날과 안식일, 그믐날과 초하룻날, 이스라엘 집안의 축제일과 경축일 말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단식하였다(유딧

8,6).

- 신명기의 반反일월성신 신학 하지만 아무런 비판이 없었을까? 유일신 신앙을 키워 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 달신 숭배가 별다른 저항 없이 수용되었을까? 물론 아니다. 고대 근동의 일반적 또는 문화적 관습으로 이해될 수 있는 초하루 축제였지만, 이런 초하룻날 숭배의 근원이 되는 달신 숭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구약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달신 숭배를 극복하는 신학적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신명기계D 신학자가 닦은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2

신명기의 길이고 둘째는 사제계P 신학자가 닦은 창세기의 길이다. 신명기의 길은 ‘직접 경고’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이스라엘에서 달신을 절대 숭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달신 숭배를 이스라엘 신앙에 위협이 되는 요소로 인식한 것 같다. 요시야 임금은 달신 숭배를 아예 없애려 하였다. 그는 신명기 개혁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바알 숭배는 물론이고 일월성신 숭배도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런 것들을 섬기던 자들을 다 “내쫓았다.”

그는 또 ... 우상 숭배 사제들을 내쫓았다. 또한 바알과 해와 달과 별자리들과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분향하던 자들도 내쫓았다(2열왕

23,5).

신명기계 신학자는 달신 숭배에 대단히 예민하다. 신명기 본문은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그리고 거듭하여 달신 숭배를 경고한다. 달을 숭배하는 자는 성별을 막론하고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어, 해나 달이나 별 같은 어떤 천체를 보고 유혹을 받아, 그것들에게 경배하고 그것들을 섬겨서는 안 된다(신명

4,19).

해나 달이나 ... 그것들을 섬기고 경배할 경우, ... 너희는 그 악한 짓을 저지른 남자나 여자를 성문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

17,3-5).

- ‘달신의 산’을 ‘호렙’으로 ◦ 이런 신명기계 신학자들의 ‘반反 일월성신 신학’을 염두에 두고 신명 4,19을 다시 한 번 새겨 보자. 십계명을 받는 지명의 변화가 이해될 것이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어, 해나 달이나 별 같은 어떤 천체를 보고 유혹을 받아, 그것들에게 경배하고 그것들을 섬겨서는 안 된다(신명

모세오경에 십계명은 두 번 나온다(탈출

20장; 신명 5장).

4,19).

그런데 장소가 다르다. 탈출기에서는 시나이

산(19장)이지만, 신명기는 호렙 산(4장)이다. 탈출기의 ‘이집트 탈출 전승’은 대체로 신명기보다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곧, 신명기계 신학자들은 탈출기의 ‘시나이 산 전승’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반일월성신 신학’을 강하게 주장하던 신명기계 신학자들에게 ‘시나이’라는 이름은 불편했을 것 같다. 이 이름 자체가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 달신인 ‘신’Sˆän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시나이’ 산의 이름은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3

‘나의 신’Sˆän-ai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신명기 저자는 이 이름을 호렙으로 바꿈으로써 달신 숭배를 연상할 수 있는 이름을 피하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시나이’를 ‘호렙’으로 대체한 전승이 구약성경에 자리 잡게 되었다.18 신명기 문맥의 흐름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현재 신명기 본문을 읽어 보라. 신명 4,10-14에서 호렙 산을 거론하고, 곧이어 4,15-19에서 우상 숭배를 경고한다. 우상 숭배 금지의 핵심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신명기는 일일이 그 형상을 나열하는데, 사람의 형상(남녀)도 만들 수 없고, 동물의 형상(짐승, 새, 기어 다니는 것, 물고기)도 안 된다. 끝으로 천체의 형상(해, 달, 별)도 금지한다. 만일 호렙 산이 아니라 시나이 산이었다면, 고대 이스라엘인은 약간의 혼동을 느꼈을 것이다. ‘달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분부하신(4,15-19) 하느님이 바로 뒤에서는(5,1-22) 달신의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다니!’ 이렇게 느꼈을 법한 고대 근동인들의 종교심을 헤아린다면, 이 마지막 금지 조항과 ‘시나이’Sˆän-ai라는 이름의 신학적 충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명기계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신명기 본문에서는 이런 ‘종교심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신명기계 신학자는 달신 숭배를 직접적으로 경고했을까? 아마도 당시 고대 근동의 국제 정세 때문일 것이다. 신아시리아 제국의 팽창은 달신을 중심으로 한 왕권 신학의 팽창이기도 했다. 실제 이스라엘에는 강대국에게 무릎 꿇고 그 종교를 수용한 임금이 많았다(2열왕 21,1-18 등). 이스라엘처럼 약소국이었던 삼알 왕국의 경우도 비슷하다. 조상 때부터 모시던 민족 고유의 신이 신아시리아 제국의 달신과 같은 신이라고 고백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활동하던 신명기계 신학자들의 ‘반일월성신 신학’은 주변 강대국에 맞서 이스라엘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노력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신학적 태도는 신명기 개혁의 가장 강한 후원자인 요시야 임금의 외교 노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왜 ‘시나이’라는 이름이 하필 ‘호렙’으로 대치된 것일까? 도멘Dohmen은 시나이 ‘광야’(탈출 19,1.2; 레위 7,38; 민수 1,1.19 등)에 주목한다. 히브리어로 ‘호렙’ 폐허’를 뜻하는 ‘하랍’

brj이다.

bérOj의

이 어근의 능동분사형인 ‘호렙’

bérOj의

어원은 ‘마르다,

의미는 ‘마른 곳’, 곧

‘광야’라는 뜻으로서, 시나이 ‘광야’를 연상시키려고 의도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또한 칠십인역LXX이 이 이름을 옮긴 형태도Χwrhb 능동분사형이 확실한데, 이렇게 지명에 능동분사형이 쓰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도멘은 ‘호렙’이 ‘인공적 이름’Kunstname이라고 주장한다.19

- 욥이 전해 주는 고대 근동의 정서 한편 달신 숭배를 경고하는 목소리를 신명기 밖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욥기를 보자. 욥은 의로운

18.

시나이 산에 대한 어원학적 추론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 이름이 달신을 ‘연상시킨다’는 데는 학자들이 폭넓게 동의한다. Frevel, “Horeb”, LThK3, 273; Dohmen, “Sinai/Sinaiüberlieferung”, RGG4, 1332.

19.

Dohmen, “Sinai/Sinaiüberlieferung”, RGG4, 1332.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4

사람이다.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 그 가운데 ‘달신 숭배를 하지 않았다’는 고백이 있다. 그는 달에 유혹되어 입맞춤을 보낸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일은 ‘죄악’이요, ‘하느님을 배신하는 일’이다.

내가 만일 빛이 환하게 비추는 것이나 달이 휘영청 떠가는 것을 쳐다보며 내 마음이 남몰래 유혹을 받아 손으로 입맞춤을 보냈다면 이 또한 심판받아 마땅한 죄악이니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일세(욥

31,26-28).

구약성경의 종교심은 때로 이렇게 우리네 정서와 다르다. 한민족이라면 휘영청 떠가는 달을 보며 감상에 젖는 일이 무슨 큰 죄가 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밝은 달에 입맞춤을 보냈다고 왜 주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나? 보면 볼수록 너무도 다른 종교심이다. 달 아래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月下獨酌, 장강長江에 비치는 달 그림자를 잡으려 했다는 이태백李太白을 시선詩仙으로 치는 동양문화권에서는 이런 이스라엘의 종교심을 헤아리기 어렵다. 민족 고유 명절인 추석을 쇠고, 강강수월래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로서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마음이다. 그렇다. 고대 근동 고유의 종교심을 헤아리지 못하고는 구약성경을 절대로 옳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과와 종교학과에서 고대근동학에 대한 관심이 초라하리만큼 적고, 일반 신자들의 인식도 한참 모자란 형편이다. 저 달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품을 뿐이다.

- 달은 피조물일 뿐 구약성경에는 달신 숭배를 직접적으로 경고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하늘에 떠 있는 저 밝은 달은 ‘신’이 아니라 그저 ‘피조물’일 뿐이라고 정의하면 된다. 곧, 달신 숭배를 극복하는 다른 길은 달을 탈신화하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신학적 고백은 밤이나 낮이나 가장 밝은 빛은 하느님 한 분뿐이요, 해나 달은 모두 하느님께서 그 자리에 두신 것이라는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의 신학적 성찰에 기반한다. 아래에서 보듯 이런 성찰은 운문에서 훨씬 자주 보이는데, 창조 시편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창조 시편의 새로운 신학적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야훼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해와 별 등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고백은, 그런 것에 깃든 강대국의 큰 신들이 야훼 하느님의 발 아래 굴복한다는 말이다. 이는 ‘고대 근동 세계관의 전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작은 나라였다. 큰 제국의 위협에 시달렸고, 늘 조공을 바쳤다.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일부가 유배 길에 나선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정신 세계는 독특했다. 거대한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5

제국의 큰 신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먼 옛날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야훼 하느님 한 분만이 유일한 신이고, 저 제국의 거대한 신은 그저 그분이 손으로 만드신 것, 그분이 저마다 제 자리에 두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학을 키워 나갔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시편

8,4).

그분께서 시간을 정하도록 달을 만드시고 제가 질 곳을 아는 해를 만드셨네(시편

104,19).

밤을 다스리라 달과 별들을 만드신 분을.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9).

그렇기 때문에 야훼 하느님은 달보다 훨씬 높으신 분이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왕권 신학의 상징이었던 달에게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신다. 달은 신이 아니라 우리처럼 주님을 찬양할 존재일 뿐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하느님의 명령 없이 달은 우리를 해칠 수 없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해와 달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반짝이는 모든 별들아(시편

148,3).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다. 낮에는 해도,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시편

121,5-6).

이사야 예언자도 이런 신학에 동참했다. 해와 달이 우리를 비추는 것보다 하느님의 영광이 비추는 것이 훨씬 기쁜 일임을 노래한다. 욥기의 신학도 같은 맥락이다. 하느님보다 더 밝은 빛은 없다. 밤하늘의 달도 별도 소용 없다. 오직 주님의 빛만이 모든 이를 비춘다.

해는 너에게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달도 밤의 광채로 너에게 비추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이사

60,19).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6

누구 위에 그분 빛이 떠오르지 않으랴? … 보게나, 달도 밝지 않고 별들도 그분 눈에는 맑지 않건만(욥

25,3-5).

- 창세 1장, 탈신화의 헌장 이렇게 구약성경은 크고 작은 신들을 야훼 신앙을 바탕으로 탈신화한다. 그래서 구약성경 여기저기에 고대 근동의 큰 신들에 대한 탈신화의 성찰이 흩어져 있다. 이런 신학적 성찰을 집대성한 본문이 바로 창세 1장이다(1,1-2,4ㄱ). 야훼 하느님이 삼라만상을 만드신 분이라는 말은, 그분이 만물에 깃든 어떤 신들보다도 우월하시고, 세상의 어떤 것도 하느님의 권능에 견줄 수 없다는 고백이다. 하느님이 나흘 만에 만드신 하늘, 땅, 해, 달은 수메르 시대부터 대제국의 주신들이었다. 수메르 만신전의 가장 중요한 일곱 신은(하늘, 바람, 산, 물, 달, 태양, 금성) 마치 원로원처럼 세상의 운명을 결정했다. 창세 1장은 이런 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그 권위를 추락시켜 버린다. 하늘‘신’도, 달‘신’도, 태양‘신’도 없다. 야훼 하느님은 단 나흘 만에 대제국의 높으신 신들 대부분을 ‘만드셨다.’ 아무리 그들의 권능이 대단해 보여도 그것들은 그저 피조물일 뿐이다. 약소국 이스라엘의 사제계P 신학자들은 이렇게 대담했다. 결국 창세 1장은 단편적으로 흩어진 ‘고대 이스라엘의 탈신화 본문’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창세 1장에서 약소국 이스라엘 신학자들의 무한한 용기와 옹골찬 담력을 느낀다. 이런 강인한 영성이 구약성경에서 유다인들이 보여 준 신앙이라고 느낀다. 그들은 고대 근동 세계에서 절대 쉽지 않은 일을 이루어 내었다. 이런 면에서 창세 1장은 토라를 여는 본문으로 손색이 없고, 거대한 주변 민족의 다양한 신화와 종교에 맞서 고유한 신앙을 지키려 한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적 프로젝트의 결론이라고 하겠다. 창세 1장은 고대 이스라엘 탈신화화의 헌장憲章이다.

II. 가시나무 가시나무는 고대 근동 종교와 구약성경을 꿰뚫는 상징이자 신약성경의 핵심 상징이요 유다교와 교부들의 성찰에도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 나무다. 이 나무를 다루며 필자는 성경 번역의 문제도 함께 언급하겠다.

1. 가시 있는 떨기나무 히브리어로 다음의 나무는 ‘거룩한 나무’의 종교적 상징성이 서로 통한다. 또한 둘 다 가시가 달렸다.

– ‘떨기나무’ [스네ː]

h‰nVs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7

– ‘가시나무’ [아타드] 천주교

『 성경』 과

dDfDa 또는 [스바크] JKAbVs 개신교

『 표준새번역』 의

탈출기(출애급기)

3장에서

하느님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불이 붙었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 주변은 하느님이 현현하신 지극히 거룩한 장소다. 계시를 접한 모세는 이 거룩한 곳에서 신을 벗고 예를 갖추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결국 종교적 경외심에 휩싸여 얼굴을 가리고 만다. 절대자를 체험한 다음 모세의 운명은 극적으로 바뀐다. 그런데 모세의 하느님은 과연 어느 나무에 현현한 것인가. 필자는 『표준 국어 대사전』의 ‘떨기나무’ 항목을 찾아 보았다. 이 낱말은 ‘관목’을 의미하고, 한자어 ‘관목’灌 木 을 순우리말 ‘떨기나무’로 순화한다고 설명한다. 곧, 하느님은 관목에 현현하신 것이다. 대부분의 영어와 불어 번역본도 이 낱말을 ‘관목’(또는 ‘덤불’ bush, buisson)으로 옮긴다. 그런데 독일어 역본들은 한결같이 ‘가시덤불’(Dornbusch 또는 ‘가시떨기’?)로 옮긴다. 독일어 공동번역Einheitsübersetzung,

루터역Lutherbibel,

엘버펠더역Elberfelder이

같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가 없다. 실제 이 관목은 가시가 있다.

시나이 반도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가시덤불. 전승에

따르면

떨기나무와

같은

모세가

하느님을

종種 이라고

뵈었던

한다.

현재도

전세계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온갖 영험한 효과를 바라며 이 나무를 향해 앞 다투어 손을 뻗기 때문에 사진처럼 나무의 아랫부분은 잎사귀가 다 빠지고 앙상한 가지에 가시 뿐이다. 이 나무에 순례객들이 손을 뻗다가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고는 한다.

© 주원준 2004

필자는 고대 근동의 종교적 상징성의 차원에서 ‘가시’를 살려 번역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가시’는 고대 근동 종교에서는 물론이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도 핵심적인 상징어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이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8

가시에 얽힌 고대 근동의 종교심을 들여다보자.

2. 길가메쉬 서사시: 돈오頓悟의 가시나무 인류 최초의 장편 서사시인 『 길가메쉬 서사시』 의 마지막 장면이다. 장편의 대하 드라마 같은 이 영웅 서사시의 후반부터 영생을 얻으려는 종교적 모티프가 이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한다. 길가메쉬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체험하고 영생을 원했다. 길가메쉬는 태초의 홍수를 겪고 살아남은 우트나피쉬팀을 만나 생사의 비밀을 듣고 싶었다. 결국 죽음의 강을 건너 그를 만났지만, 우트나피쉬팀은 야속했다.

길가메쉬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의

길가메쉬를

보고

우트나피쉬팀의 아내가 마음이 움직여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길가메쉬는 여기까지 오느라고 지쳤어요. 진이 다 빠졌지요. 자기 땅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무엇을 선물하실 거죠?”20

그러자 우트나피쉬팀은 마음을 바꿔, 그에게 신의 비밀을 알려 준다. 그런데 그 영생의 비밀은 바로 ‘가시덤불’이다! 가시에 찔리면 그토록 바라는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과연 영원히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작정 영원히 살기만 하는 것인가? 해골같은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 산소 마스크로 간신히 유지하는 ‘영원한 삶’이 과연 의미있을까? 물론 아니다. 진정한 영생, 곧 고대부터 인간이 찾아 헤매던 것은 ‘영원한 젊음’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길가메쉬 서사시』는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영생은 ‘다시 젊은이가 되는 것’이다. 가시나무에 찔리면 다시 젊은이가 된다! 이게 신의 신비다.

“길가메쉬 … 네게 비밀을 말해 주겠다. … 식물이 하나 있는데 … 가시덤불 같은(ki-ma ed-de-et-ti) … 그 가시는 장미처럼 네 손을 찌를 것이다. 네 손이 그 식물에 닿으면 너는 다시 젊은이가 될 것이다!”21

드디어 길가메쉬는 원하는 바를 얻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곧장 그 가시덤불을 움켜 쥐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나고 따끔거리며 쓰라렸을 것이다.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무릅쓰고 가시덤불을

20.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09), 310.

21.

김산해, 『길가메쉬 서사시』, 310. George는 이 낱말을 ‘가시관목’ box-thorn으로, Hecker는 ‘가시덤불’ Dornstrauch로 옮겨 ‘가시’를 빠뜨리지 않았다. 아카드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은 다음을 보라. George, A.R., The Babylonian Gilgamesch Epic - Introduction, Critical Edition and Cuneiform Texts, vol. I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720; 한편 독일어 번역문은 다음을 보라. Hecker, K., “Das addkadische Gilgamesch-Epos”, TUAT III/4, 737.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19

덥썩 움켜쥐는 길가메쉬의 모습은,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반드시 무릅써야 한다는, 고통은 진리로 인도하는 지름길이라는 고대 근동의 지혜를 말해 주는 것 같다.

(길가메쉬는) 손은 찔렸지만 식물을 움켜잡았다.22

영생의 비밀을 얻은 그는 기쁨에 겨워 이 가시나무의 이름을 ‘늙은이가 젊은이로 되다’로 짓는다.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 길가메쉬는 이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 한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깨달음을 팔아 돈과 명예를 구하지 않는 법이다. 영웅은 진리를 아낌없이 나누고 싶어한다. 그는 고향으로 이 가시나무를 가지고 가서 노인들에게 먹이고 싶어한다. 모두가 젊음을 얻는다면 이 얼마나 좋을소냐! 하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피곤에 지친 그가 샘에서 목욕하는 사이, 뱀이 이 나무를 물고 달아나 버린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진리는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필자는 여기서 이 서사시의 통찰을 읽는다. 신적 진리는 어떤 면에서 지극히 허무한 것이다. ‘늙은이가 젊은이로 되다’는 이름의 가시나무, 곧 영생의 식물이 없어졌으니 그는 헛수고를 한 셈인가? 아니다. 오직 그 가시나무를 움켜쥔 순간의 체험만이 그의 손과 마음에 남았다. 참된 깨달음은 이렇게 찰나의 순간만 허락하는가. 진리에 찔린 행복한 기억, 아득한 ‘돈오頓悟의 시각’은 언제 다시 찾아올까. 거짓말 같은 깨달음의 체험이 남아 있기나 한 것일까. 상처가 아무는 것 처럼 깨달음은 지워지는 것인가. 동양문화권에서 자란 필자에게 이 이야기는 불가의 돈오돈수 논쟁을 연상시킨다. 또한 고대 근동인의 고통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도 전해준다. ‘가시에 찔린 아픔’은 깨달음에 대한 훌륭한 비유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가 이 정도의 ‘성찰의 깊이’를 보여주려면 그 이전에 인류는 과연 얼만큼의 종교적 체험과 성찰을 축적했단 말인가. 필자는 이 본문을 주해하며, 고대 문헌의 본문이 가리키는 아득한 무게감에 공명할 수 있어 행복했다. ‘가시에 찔린 아픔’이 느껴지는 듯 했다. 구약성경은 이런 문헌적‧문화적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이미 구약성경이 등장하기 이전에 인류는 수준높은 종교를 누리고 살았다. 고대 근동인의 삶과 성찰은 구약성이 탄생하고 자랄 수 있게 된 거름같은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구약성경은 ‘배타성의 책’으로 이해될 수 없다. 셀 수 없이 많은 체험의 축적을 전제하고, 깊이있는 대화와 교류를 통해 준비된 책이다.

3.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가시나무 『길가메쉬 서사시』의 아카드어 원문에서 가시덤불을 뜻하는 낱말은 [엣데투]eddetu다. 동부셈어인

22.

김산해, 『길가메쉬 서사시』, 311.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20

dDfDa이다.

아카드어의 이 낱말에 대응하는 히브리어는 [아타드]

23

이 낱말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상징하는 ‘거룩한 나무’의 표상으로 사용된다.24 곧,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가시나무는 최고의 신적 신비를 상징하는 점이 같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번역본은 이 낱말을

그냥 ‘덤불’, ‘관목’ 등으로 옮기지 않고, 반드시

‘가시덤불’(Dornstrauch, box-thron), ‘가시관목’(Dornbusch, thornbush, buck-thron 또는 가시떨기나무?)으로,

‘가시’를

넣어서

옮긴다.

일부

성서학

관련

사전DDD에서

가시나무와

떨기나무를 한 항목에서 다루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떨기나무(또는 가시덤불)를 가리키는 낱말을 칠십인역LXX은 [바토스]βάτος로 옮겼고, 이 그리스어 낱말은 신약성경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우리말 『 성경』 과 『 표준새번역』 은 ‘바토스’를 대개 ‘떨기나무’가 아닌, ‘가시덤불’로 옮겼다(루카 6,44-45). ‘가시’를 살렸으니 좋은 번역이다. 하느님이 ‘불타는 (가시)떨기나무’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탈출기 3장은 예수 시대에 이미 누구나 아는 대목이 되었다. 그냥 ‘바토스(=가시덤불) 대목’이라고 햐면 통했다. 모세의 책에 있는 ‘바토스’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마르 12,26; 참조: 루카 20,37)

그런데 위 대목을 『성경』과 『표준새번역』은 모두 ‘떨기나무 대목’으로 옮겼다. 같은 복음서에서 한 곳에서는 ‘가시덤불’로, 다른 곳에서는 ‘떨기나무’로 옮겼으니 절대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필자는 고대 근동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이 대목을 ‘가시덤불 대목’으로 옮기는 것은 어떨지 제안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펴본 ‘가시’에 대한 성경의 상징을 봐서도 그렇고, 신약성경 내의 번역의 일관성을 봐서도 그렇다. 이 그리스어 단어가 그냥 관목이 아니라 가시가 달린 덤불, 곧 ‘가시덤불’을 의미함은 그리스어 사전으로도 확인된다.25 성경에서 ‘가시’의 상징성은 ‘그리스도의 가시관’에서 절정에 달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로마 병사는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유다인들의 임금님”이라 조롱했다(마태 27,27-31; 마르 15,16-20; 요한 19,2-3). 수난 사화 가운데 이 장면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래서 예수님 머리에 씌운 이 ‘가시관’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종교적 심성이 머무르는 자리가 되었다.

23.

dDfDa”,

Tawil, “

in: An Akkadian Lexical Companion for Biblical Hebrew: Etymological-Semantic and

Idiomatic Equivalensts with Supplement on Biblical Aramaic (New Jersey 2009), 14.

24.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저, 『구약성경의 신들』, 183-189를 보라.

25.

Danker, “I

βάτος”,Lexicon, 171. 그냥 관목bush이 아니라, ‘가시관목’thorn-bush로 설명한다.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21

4. 교부: 가시덤불에 나타나신 분이 가시관을 쓰셨다! 신약 시대에 유다인들이 탈출기 3장의 ‘가시덤불 대목’을 잘 알고 있었음은 성경 밖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예수님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유다 학자 필론은 훌륭한 성경 주석가이자 철학자요, 관상적인 신비가였다.26 그는 『모세의 생애』라는 작품에서 ‘가시덤불 대목’을 서술하며 이 나무를 설명한다. 그 바토스는, 앞서 말했듯, 가장 연약한 종류의 것이었으며, 분명히 가시가 존재했기에 손에 닿으면 사람을 찌릅니다.27

그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가시’와 ‘불’의 상징성을 설명한다. 필론의 이 대목을 읽으며, 필자는 필론도 고대 근동의 종교심을 계승하였다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필론은 길가메쉬에 대해서 알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길가메쉬 서사시 토판이 발굴되고 해독된 것은 18세기의 일이기 때문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교부들도 가시의 상징성을 잘 알고 있었다. 2세기의 교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교사이신 그리스도』라는 문헌에서 이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떠올리는 탁월한 성찰을 보여 준다. 그는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그리스도를 이 ‘가시’라는 상징으로 성찰하며 삼위일체의 신비까지 접근한다.

그분은 맨 처음 가시덤불에 나타나셨으며, 훗날 가시로 둘러싸이게 되신 것입니다.28

성 클레멘스는 ‘가시’라는 단 하나의 상징을 성찰하여 신약과 구약의 핵심을 요약했다. ‘모세에게 가시덤불로 현현하신 그분께서는, 가시관을 쓰심으로서 진면목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불타는 가시덤불에 싸인 성부와 가시관을 쓰시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보여 주신 성자는 한 분이시다!’ 이렇게 탈출 3장의 현현과 그리스도의 가시관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핵심적 상징이다. 이를 저마다 ‘떨기나무’와 ‘가시관’으로 번역하면, 이들 간의 강한 상징적 연결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중세를 거치며 가시관의 ‘가시’는 그리스도 수난의 극치점을 보여 주는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중세 교회 미술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가시덤불’로 현현하신 하느님이요, ‘가시관’을 쓰신 그리스도이니, 거룩한 말씀을 ‘가시’ 안에 모시는 것이 온당하다. 그리하여 13세기까지 성경의

26.

케네스 솅크, 『필론 입문』, 송혜경 옮김, (한님성서연구소 2008), 21-22.

27.

Philo, De Vita Mosis, I. 68. 그리스어 원문과 대조한 다음 책을

권한다. Colson, F.H. et al., Philo - with an

Enlgish Translation, (Boston 1926-1962), 311. 다음은 원문대조가 아니지만, 영어 번역문은 더 읽기 쉽다. Yonge, C.D., The Woks of Philo: New Updated Edition - Complete and Unabridged in One Volume

(Henrickson 1993), 456. 28.

Clemant of Alexandria, Christ the Educator, VIII, 75. Wood, Christ the Educator, 158. 필론의 인용은 n43을 보라.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22

테두리 장식이나 성화의 테두리 등에 가시 장식이 즐겨 사용되었다.29 이렇게 후대 교회의 역사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심이 머무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구세사의 가시나무’라 할 수 있다.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인쇄한 성경. 하느님의 말씀을 ‘가시’로 장식한 점이 눈에 띤다.

III. 나가며: 그러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 끝으로 다음의 질문에 답하며 마무리하겠다.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성(authenticity)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남는가?’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종교에 이웃 민족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년 약소국 이스라엘은 이웃 나라에 영향을 주기 보다는 주로 영향을 받는 쪽이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상징들은 원래 고대 근동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고유성은 없는 것인가? 심하게 말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는 고대 근동 종교의 일부일 뿐이요, 짜깁기라고도 할 수 있는가?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사실 고대 이스라엘의 배타적 고유성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곧,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거의 모든 요소에 대해서 고대 근동적 기원을 논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자존심 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런 사실은 구약성경이 전해 주는 믿음의 본질과,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을 깨닫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분명히 고대 이스라엘에는 독특한 ‘종교적 태도’가 있었다. 우리는 흔히 그럿을 유일신 신앙이라고 부른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큰 제국의 문물과 종교적 상징을 무작정 받들고 수용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신앙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성찰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이런 독특한 태도를 ‘고대 이스라엘의

29.

Nitz, “Dornenkrönung”, LThK, 3, 346.


주원준, 구약성경의 신‘들’- ‘가시’와 ‘달’ 23

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영성은 삶의 태도다.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의 특징은 한 분만을 경외하고, 그분께만 몸과 마음을 바치려는(신명 6,4-5) 굳건한 태도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성이란 어쩌면 ‘빈 것’空 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비워져 내버려진 상태가 아니다. 빈 듯 보이지만 사실은 꽉 차 있다. 무엇으로 꽉 채웠을까? ‘한 분을 향하는 태도’로 채워져 있다. 크게 비어 있기에 타자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한 분을 향하는 태도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을 소화하고 새롭게 재창조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의미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을 본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고대 근동 종교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역사적이고 외형적인 의미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성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크게 인정하는 신학이 필요하다. 그래야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이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대근동학은 구약성경을 이해하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완전히 비운 상태에서 한 분을 향해 사는 태도를 가르친다. 배타성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종교간의 대화를 촉진하는 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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