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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년 7 월 14 일 제 3 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제 176 차 월례포럼

21 세기,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강 남순 Texas Christian University, Brite Divinity School 교수

I. 21 세기, 왜 코즈모폴리터니즘인가: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귀환

21 세기,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WWJD)?”

1896 년 미국의 캔자스 주의 토페카(Topeka)라는 한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찰스 셸던(Charles M. Sheldon) 목사는,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What Would Jesus Do)?”라는 부제를 가진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In His Steps) ”라는 책을 쓰기 시작하여 1897 년에 출판이 되었다. 베드로전서 2 장 21 절에 나오는 구절(“follow his steps”) 을 따라서 제목으로 만든 이 책은 31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래 책으로 출판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쓴 것이 1

아니라, 매주일 자신의 교회에서 소설 형식으로 만들어서 하던 설교를 모은 것이다. 이 소설 형식의 설교에는

헨리

맥스웰(Henry Maxwell) 목사가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는 어느 주일예배 시간 도중에 30 대 초반의 남루한 집 없는 행인의 돌연한 등장으로부터 전개된다 (예수의 나이와 유사한 30 대 초반의 청년 행인을 등장시킨 것이 흥미롭다).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후에 유명하게 된 그 물음은 예배 도중 교회문을 열고 들어와 교인들 앞에 서서 자신의 곤경을 호소하다가 급기야는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있던 목사 앞에서 쓰러져 버린 그 행인의 호소로부터 나온 말이다. 소설 형식의 연재를 매주 설교에서 함으로서 그 교회는 그 다음의 이야기 전개를 궁금해 하는 교인들로 인해 점점 차고 넘쳤다고 한다. 첫 설교가 나가고 나서 사람들은 그 쓰러진 행인이 과연 살을까 죽을까 등을 서로 예측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다음 주일을 기다렸다고 한다. 아마 지금처럼 영화나 TV 등 다양하게 즐길수 있는 매체들이 없던 시대에, 매 주일 교회에서 듣는 설교는 “주말 연속극” 같이 그 다음회의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끄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 저작권 문제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이 연재소설 형식의 설교는 그 도시의 지역 신문에 실리다가 나중에 책으로 묶여져서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이 되었는데, 판권 문제가 없어서 오히려 대중들에게 확산되기가 용이해서

3 천 만부까지

팔렸으며, 한때는 성서 다음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졌다고 한다. 미국

내에서만도 16 개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유럽과 호주 등에서는 50 여 개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으며 21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구 소련에서도 출판되었는데, 금서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한때 영국 런던에서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제본되어 거리에서 300 만부가 팔리기도 했다고 한다.

2

기독교의 위력이 강력한 미국 내에서는 이후로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What Would Jesus Do)”라는 이 글귀가 “WWJD ”라는 약자로 통용되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보수적 기독교계에서는 찬사를, 진보적 기독교계에서는 비판을 받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 또한 보수적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차용되면서, 자신들과 Page 1 of 23


동일한 보수적 신앙을 지니지 않은 기독교인들이나 또는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심판적” 글귀로 종종 쓰여지기도 했다. 이것은 “WWJD 산업”의 붐을 일으기키도 하면서 이 글귀가 쓰여진 차의 뒤에 붙히는 스티커나 티셔츠 등이 유행하기도 하고, “예수라면 어떤 차를 운전할까(What Would Jesus Drive)?” 등의 광고들도 한때 상당히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알코올이나 엄격한 안식일주의 같은 문제에 있어서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으나, 사회적인 여러 문제에 대하여는 사실상 매우 “급진적인 사회정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셸던은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 성서에 충실하고자 하는 복음주의적 측면과 사회정의에 관심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적 측면, 개인적인 것과 사회구조적인 측면, 그리고 사회적 의식과 예언자적 정치 등 다양한 두 축들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이 던지는 물음,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는 사실상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들이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각기 다른 신학적 입장들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의 방향이나 특성들을 규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보수, 중도, 또는 진보 등의 라벨들을 넘어서 이 물음과 진지하게 씨름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구화, 전쟁, 폭력, 테러, 생태위기, 난민문제, 가난과 기아 등의 무수한 문제가 산재해 있는 이 21 세기에, 학문적/사회정치적/신앙적 고민과 맞닿아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현장에서 주변인들과 살아감을 함께 나누던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나는 교리에 갖힌 예수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예수의 시선”이 어떠했을까에 대하여 상상해 본다. 그 시선은 분명 한

사람의 인종, 국적, 성별, 종교, 성적 성향, 장애 등 다양한 종류의 사회-문화-정치적 경계들을 넘어서서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을 고귀한 존재로 바라보고, 그 개별인들의 존재론적 평등성과 존엄성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연민과 따스함을 지닌 “우주적 시선 (cosmopolitan gaze)”이라는 것—이것이 나의 “신학적 상상력”에 의한 예수의 시선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어느 특정한 제도화된 종교적 교리에 감금되고 축소되어 버리게 되며, 따라서 “예수따름”의 의미는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난 이 세계에서 설 자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시선”을 지니는 것—이것이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조우하기 위한 첫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귀환

20

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코즈모폴리터니즘

담론은

다양한

분야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귀환”이라고 하는 이유는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 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그 기원이 그리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로부터 유래하고 있으며, 이마누엘 칸트 이후 한동안 잊혀진 것 같았던 이 담론이 현대에 이르러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사상적 기원은 그리스 철학에 두고 있으며 특히 디오게네스 (Diogenes of Sinope)가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에 통상적인 답인 “시노페의 시민” 이라고 하지 않고,

“나는 우주의 시민이다(I am a citizen of the cosmos)”라고 답한 사실에 두고 있다. 디오게네스의 이 대답이

“세계시민(cosmic citizen/ world citizen)”이라고 종종 번역되는 “코즈모폴리턴(cosmopolitan[kosmopolitès])”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게 된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두 가지 답, 즉 자신이 태어나거나 소속된 지리적 공간, 그리고 동시에 모든 인간이 사실상 “우주” 에서 온 존재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인간의 “소속”에 대한 이해를 확장했다는 의미에서 그 철학적 의미가 부상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이 현대에 다시 부상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겠으나 특히 지구화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민족주의, 다문화주의, 이주문제 등 이전의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다루어야 할 복합적인 문제들이 새롭게 등장했기 Page 2 of 23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구화 이후 지리적 경계가 모호해지고 다양한 문제들이 사실상 한 사람의 지리적 조건에만 제한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특히 인권이나 세계정의의 문제가 어떻게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서 조명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하고, 이마누엘 칸트에 의하여 세계평화를 위한 실천적인 의미의 정치적-도덕적 담론으로 제기된

코즈모폴리터니즘이 21 세기에 들어선 지금, 철학, 법학, 정치학, 사회과학,

문화학의 분야에서 새로운 조명을 받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민족-국가의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지구적 정의(global justice)나 세계 민주주의 또는 세계시민성(world/global citizenship) 등의 개념을 강조하려는 정치학, 경제학, 법학, 또는 이주노동자들이나 다문화주의의 문제들과 연관된 논의들을 하는 문화학, 그리고 관습적인 의미의 정체성, 소속감 또는 시민권 등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려는 이론가들을 통하여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다양한 양상을 띄고 등장하면서 새로운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현대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위기들은 이제 더 이상 한 민족국가의 지리적 경계 안에만 제한될 수 없다는 특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서 지리적 경계를 넘나드는 이주민들, 경제난민, 정치적 난민, 전쟁난민, 국적없는(steteless) 난민들, 또는 지구온난화나 국제 테러리즘 등의 문제들은 이전의 민족국가적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시각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전에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상의 위기들을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이 전개되면서,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대두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까지 신학 분야에서는 다른 분야에서처럼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조명이나 활발한 논의가 없었다. 나는 모든 인간 개개인들이 어느 특정한 한 국가나 지역에만 소속되었다는 협소하고 배타적인 의미의 시민의식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서서 “우주의 시민”이라는 개별인의 두 가지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철학적 담론으로만이 아니라, 성서에서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코즈모폴리터니즘적 가치의 구체적인 실천적 방안들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이웃사랑, 연대, 환대 등과 같은 기독교의 주요 가치들을 이 공공세계에서 보다 복합적으로 드러내고, 더 나아가서 구체적인 실천적 의미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코즈모폴리터니즘: 이해와 오해

21 세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조명되고

있는

“코스모플리타니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코스모폴리탄”이란 누구를 지칭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사실상 매우 복잡하다. 이 개념들에 대하여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나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에도 각기 다른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 개념의 정의나 실천적 적용의 문제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담론들인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같은 담론들이 한 가지가 아닌 무수하게 복합적인 양태로 전개되고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의 내용과 양태를 규정하는 형용사들의 종류를 보면,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실천적 이해와 그 적용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종류에는 비교적, 비판적, 문화적, 대화적, 차등적, 도덕적,

유기적,

정치적,

탈식민적,

정착된(rooted),

상황규정적(situated),

서발턴(subaltern),

노동계층적,

지방적(vernacular), 또는 시장 코즈모폴리터니즘 등이 있다. 나는 이 연재에서 주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코즈모폴리터니즘에 관심하면서 이 담론들이 어떻게 이 21 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철학적, 신학적, 그리고 종교적 문제들과 연계되는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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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귀환”이후, 이 담론에 대한 각양 각색의 부정적 또는 긍적적 평가들은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왜곡된 이해들이 무엇인가라는 복합적인 측면들을 세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A 라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할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A 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오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A 는 B 가 아니다” 라는 형식을 이론가들은 종종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코즈모폴리터니즘은 OO 이다” 라는 이야기에 대하여 본격적인 문을 열기 전에, “코즈모폴리터니즘은 OO 이 아니다” 에 대하여 살펴보자.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위계적 가치관을 지향함으로서 지배하고, 총체화하고, 보편화하는 “거대담론”이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추상적인, “얼굴없는 보편주의(faceless universalism)” 또는 단순히 얼굴이 덧붙여진 보편주의가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인간 개개인의 상황이 지닌 “특수성의 부정”이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세계에 대한 “서구 중심적 밑그림”이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문화적 상대주의”가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사회정치적 헌신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권력자의 이득의 강화”에 공모하는 담론이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위로부터의 지구화 (globalization from above)”의 폐해들과 연결되어 있는 담론이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문화적 차이들 사이의 권력의 편차들에 대하여 무관심하면서 그 문화적 차이를 무비판적으로 강조하고 칭송하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담론이 아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단일화 또는 획일화”를 모색하는 담론이 아니다.

나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이라는 담론과 그 실천적 적용의 가능성들에 대하여 관심하는 이들이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오해 또는 피상적 전이해를 넘어서서,

21 세기 이 세계가 고민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반응하는 방식으로서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심오한 의미들과 조우하는 문을 열게 되기를 바란다.

이론과 실천: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서

기독교가 인류의 역사에서 “억압”과 “해방”의 두 가지 상충적인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서구세계에서 기독교는 다양한 신학적 담론들을 근거로 해서 구체적인 배제와 억압적 기제를 정당화하여 오기도 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 연대와 책임, 그리고 사랑과 연민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해 왔다. 여성,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이교도들에 대한 기독교의 폭력, 박해, 그리고 억압들은 다양한 신학적 담론들과 교회의 교리들을 통해서 정당화되고, 강화되고, 유지되어 왔다. 예를 들어서 중세 500 여 년 동안 자행되어 온 3

“마녀화형”은 기독교의 악마론에 대한 교리 속에 포함된 “마녀들의 망치 (Malleus Malleficarum [Der Hexenhammer]) 라는 문서를 통해서 여성들에 대한 폭력, 죽임 등의 “실천”이 신의 의의를 위한 일들로 정당화되어 왔다. 이와는 상반된 예로 해방신학, 페미니스트 신학, 생태신학, 또는 탈식민주의 신학 등과 같은 신학 담론/운동들은 기독교가 생태계를 포함한 Page 4 of 23


공공세계와 연계하고 인간의 자유와 해방, 포괄과 연대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 해방적 “실천”의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신학적 “담론/이론” 들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 가시적/불가시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구체적인 “실천/운동”의 영역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운동/실천”과 “이론/담론”이 서로 상반되거나 또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통상적인 이해는 1960 년대 이후 활발하게 출현하기 시작한 다양한 사회변혁운동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론-실천”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의 한계와 위험성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두 진영—“이론가들” 과 “운동가들”—에 모두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들이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기제들은 사실상 다양한 “이론들”에 의하여 조직화되고 운영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작업과 그 맥락을 깊이에서 이해하는 것이 “운동/실천”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현실에 깊숙히 뿌리 내린 “이론”은 진정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사실은 반성차별운동, 반인종차별운동 등의 과정에서 많은 운동가/실천가들이 체득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학-목회, 이론-실천, 앎-삶 등을 양극적 축에 놓는 것은 우리의 현실의 다양한

작동기제들의 근저에 감추어져 있는 깊이의 본체는 보지 않고, 빙산의 일각만을 보면서 그 실체의 전부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이라는 담론이 세계 현실의 변화를 모색하는 아주 작은 귀퉁이에서의 “운동/실천”이 될 수 있다고 내가 보는 이유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시작은 마치 예수의 비유에서처럼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애정과 소중함을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가지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국적, 인종, 성별, 계층, 종교 등등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범주화되는 통계적 숫자나 복수적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고 존귀한 신의 형상을 닮은 “얼굴”로서 받아들이라는 “존재론적 상상력”을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중요한 “이론”이며 동시에 “실천/운동”이라고 본다. 이러한 담론은 실천의 공간 속에서 개인에게 또는 집단에게 그 인식론적 근거를 제공하며, 동시에 하나의 담론은 그 운동/실천에 뿌리내려 있는 다양한 상황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어야 한다. 현대의 영향력있는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인 프랑스 철학자 질 들레즈(Gilles Deleuze)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부분적이거나 파편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이론은 언제나 지역적이며 제한된 상황에만 관계되어 있어서, 그 이론이 그 제한된 특정한 상황을 넘어서서 다른 상황에 적용될 때에는, 이미 그 상황과 거리를 갖게 된다. . . . 더 나아가서 한 이론이 다른 특정한 상황이나 영역에서 적용되기 시작할 때, 그 이론은 장애물, 벽들, 그리고 차단물 등과 대면하게 되어 마치 릴레이 경주처럼 또 다른 양태의 담론들이 요청된다. . . . 실천이란 한 이론점(theoretical point) 에서 다른 이론점으로의 릴레이 경주의 한 쌍과 같다. 어떠한 이론도 벽에 부딪히는 일이 없이 발전될 수 는 없으며, 실천은 이러한 벽을 뚫어나가기 위하여 요청되는 필요한 것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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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에는 들레즈는 “이론은 연장상자” 와 같은 것이며, 그 연장을 만든 사람(signifier)과는 사실상 아무 관계가 없다고 강조한다. 연장의 존재 의미는 그 연장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지, 그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연장을 아무도 쓰지 않으면 무용한 것이 되듯, 이론도 아무도 쓰지 않는다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

들레즈와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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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에서 미셸 푸코는 “이론은 실천이다” 라고 분명하게 역설한다. 또한 탈식민 담론의 “삼위일체”중의 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야트리 스피박은 그녀의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world)”라는 명사를 동사화한 “worlding” 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이론을 창출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표상하고 만들어 감으로서 (worlding the world) Page 5 of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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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매우 중요한 실천을 창출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들의 “이론-실천”의 문제에 대한 관점은 이 두 축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일반적인 이해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고 본다. 망치라는 연장으로 집을 지을 수도 있기도 하고 파괴할 수도 있듯이, 어떠한 특정한 담론/이론은 파괴적으로 쓰일 수도 있고, 창조적으로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것은 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고 그 세계를 위해 다양한 자리에서 씨름하고 헌신하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점이라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니체의 초인 사상이 히틀러와 나치에 의하여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절대화하고 유대인과 같은 타민족을 하위존재로 규정하는 사상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파괴적으로 차용되었듯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서구적, 엘리트적, 제국주의적 멘탈리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쓰여질 위험성은 언제나 있다. 이러한 것은 현대의 주요 담론들이라고 일컬어지는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초기 여권운동은—다른 여타의 사회변혁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반지성주의, 반이론주의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그래서 페미니즘 이론을 구성하고 글을 쓰고 가르치고 강연하는 아카데미아에서의 이론가들에 대하여는 “상아탑”에서 공리공론만 하는 이들이라고 간주하면서, “현장”에서 데모하고 피케팅을 하는 등 직접 몸으로 투쟁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운동/실천”을 하는 이들로 간주하는 성향이 강했다(이 “상아탑”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그 냉소주의적 시선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권운동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운동가 자신이 운동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의미부여하게 하고, 타자를 설득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효과적인 운동전략과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이 현실의 깊숙하고 복합적인 작동기제를 들여다 보게 하는 “이론”적 분석 없이는 운동의 지속성이 그 힘을 잃게 된다는 경험, 그리고 이론/실천의 이분법적 이해의 한계와 그 위험성을 자각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반이론주의나 반지성주의의 한계가 조명되고 비판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렇게 이론과 실천/운동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이들이 여전히 다수라는 사실을 “운동현장”에서 나는 종종 접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은 “현장”의 복합성과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러한 “현장”에 대한 매우 단일한 시각이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현장”은 하나의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층으로 세분화되어 작동되는 매우 복합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자신을 보고, 타자를 보고, 세계를 보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이론—이 이론이 만들어지고 가르쳐지는 공간도 이 현실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실천/운동의 현장”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들레즈가 역설하듯 “이론은 연장상자” 와 같은 것이며, 푸코의 주장처럼 “이론은 실천”이라고 본다.

따라서 “좋은 이론은 좋은 운동”이라는 것—즉

“좋은 이론”을 통하여 자신의 인식론적 시각이

변화하고, 그 변화 속에 타인들을 “설득”하여 그 변혁운동의 열정을 나누게 함으로서

비로소 진정한 “실천/운동”이

가능하게 된다고 본다. 여기에서 “좋은” 이론과 “나쁜” 이론이라는 매우 단순한 듯한 구분은 잠정적인 구분이며, 무엇이 어떤 특정한 이론을 “좋은”

또는 “나쁜” 이론으로 만드는가의 문제는 보다 복합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논의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점검해야 할 물음들은 다음과 같다.

무엇이 과연 “진정한 운동/실천”인가?

“누가” 그 운동/실천의 범주와 내용, 그리고 방향을 규정하는가?

어느 특정한 이론/담론은 구체적인 정황에서 어떠한 “기능”을 하고 있는가?

그 이론/담론은 “누구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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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물음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비판적 성찰을 함으로서 이론 또는 운동의 무비판적 당위성이 도전받기도 하고, 또는 그 의미성과 적절성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되기도 한다. 이론 없는 운동/실천은 “왜”와 “무엇”에 대한 설득력있는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며, 반대로 구체적인 실천적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은 메마르고 추상적인 이론/담론들은 “어떻게”라는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그 진정성을 상실한다. 즉 이론과 실천은 각기 상반된 축이 아니라, 서로 밀고 당기는 두 사람의 “춤추기”와 같은 기능을 하는 분리될 수 없는,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관계 속에 있다. 만약 코스모폴리니즘이라는 한 담론/이론이 효과적인 “연장”처럼 누군가를 통하여 특정한 상황에서 그 기능을 잘 발휘하게 된다면, 그 담론은 지금 현실세계(reality)나 또는 반대로 순진한 이상적 세계 (ideality) 안에 갖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축의 한가운데에 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열정과 구체적인 작은 실천들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한 민족국가나 지리적 경계, 성별, 인종, 종교 등의 경계를 넘어서는 정의, 평등, 평화의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낮꿈 (daydream)” 을 꾸게 하는 중요한 인식론적 기제가 될 것이다. 21 세기에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는 담론으로서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하게 하고, 재개념화함으로서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나” 주변의 무수한 타자의 “얼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담론이 될 것이다.

II. 코즈모폴리턴 유토피아 에의 갈망 :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

지역주의를 배제한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무의미하고, 코즈모폴리터니즘을 배제한 지역주의는 맹목적이다. --울리히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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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지구적 위기에 직면한 인류 공동체

21 세기에 들어서 현대 사회는 이전 시기에 경험하지 못했던 다양한 지구적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들에서 이제는 그 누구도 한 개별적 개인이기만 하거나 국가이기만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들어선 것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새로운 담론으로 재출현하게 된 것은 이러한 지구적 위기상황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구적 위기상황들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인류는 어떻게 이러한 위기들에 “함께” 대처해야 하는가

또한

이러한 “함께-의식”은 어떠한 윤리적 또는 정치적 의식들에 근거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들을 가지고 구체적인 대안적 사유방식과 실천방안들이 다양한 분야의 이론가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자면, 첫째, 지구 온난화와 같은 기후변화의 위기, 둘째, 유엔이 제정한 “밀레니움 발전목표 (MDGs—Millennium Development Goals)” 에 거의 진전이 없다는 것, 셋째, 핵 재앙의 위협의 위기 등으로 묶어 볼 수 있다. 장 뤽 낭시(Jean Luc Nancy)는 현대인들이 직면한 위기상황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현대의 비관적인 상황들에 대하여 말한다.

세계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가설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측면을 면밀히 조명한 후 귀결되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파괴한다”는 것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또는 세계가 스스로를 파괴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조차 알아내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불확실성 Page 7 of 23


속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이 세계가 파괴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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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지구적 위기상황의 구체적인 문제들은 무엇인가를 간력하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의 변화는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재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 지구 공기의 이산화탄소 양이 초기 산업시대보다 35%나 더 많다고 한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상상할 수 없는 위기를 불러일이키는 것으로서, “테러리즘의 위협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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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기후의 변화로 인해 다양한 생물체들이 멸종되고

있으며, 생태계 구조는 물론 사회경제적 구조들이 파괴되고 있다. 파괴적 힘을 가진 강력한 태풍들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며, 극단적인 가뭄이나 홍수로 인해 인간들을 포함한 무수한 생명들이

파괴될 것이고, 이로 인한 거대한

인구이동들이 불가피한 상황이 될 것이다. 이러한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한 대처방안은 지구적인 공동대응을 통해서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유엔이 제정한 “밀레니움 발전목표”에 진전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위기를 야기시킨다. 유엔은 밀레니움이 시작되는 2000 년에 “유엔 밀레니움선언”을 채택하면서 그 당시 유엔에 소속된 189 개 국의 국가들과 또한 23 개의 국제기구들이 2015 년까지 여덟 가지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한 지구적인 공동의 연대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 따른

여덟 가지의 “유엔밀레니움 발전목표”는 1)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의 근절, 2)

보편적 초등 교육의 달성, 3) 젠더 평등과 여성의 권한 부여, 4) 아동 사망률의 감소,

5) 임산부 건강의 증진, 6)

HIV/AIDS, 말라리아, 그리고 다른 질병들과의 싸움, 7) 환경의 지속가능성의 보장, 그리고 8) 발전을 위한 지구적 파트너십의 개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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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년부터 2015 년까지 이러한 목표들을 이루기 위하여 유엔을 통하여 다양한 일들이

전개되어 오고 있지만,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에 아직도 산재한 문제들이 여전히 심각한 양태로 위기를 생산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인 45%가 세계은행이 제정한 하루 2 달러로 생활한다는 “빈곤의 기준미만” 인 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18%는 하루에 1 달러로 생활하는 최저 빈곤 기준에 밑도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극도의 가난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약자 중의 약자들은 대부분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며, 또한 이들은 다양한 자연재난들에 의하여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함으로서 중층의 희생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불평등적 구조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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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핵 재앙의 위협이 더욱더 가중되고 있다는 위기이다. 핵 재앙의 위협은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삶에서는 별로 눈에 보이는 것 같지 않지만 세계 도처에서 여전히 다양한 핵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위기들은 심각한 핵 재앙의 위기 상황으로 인류를 내몰고 있다. 우리는 종종 이 세계가 점점 “작은 세상”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이 세계는 그 누구도 탈피할 수 없는 “작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 우주, 코즈모(cosmo)는 더 이상 낭만적인 개념이 아닌 위기에 직면한 “공동운명체”로서의 의미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험 사회” 담론으로 잘 알려진 울리히 벡은 그의 “코즈모폴리턴 선언”에서 현대 사회의 “위험의 지구성(globality of risk)”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위험”과 “책임성”은 근원적으로 상호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영토적 구분을 넘어서서 “위험을 공유하는 탈영토적 공동체,” 즉 “코즈모폴리턴 공동체”라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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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코즈모폴리턴 공동체에의 이상과 갈망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주요한 역사적 분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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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국가라는 영토적 경계를 넘어서는 “탈영토적 공동체”에 대한 이상으로서의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한 관심이 다각도로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것에 대한 가장 커다란 우려 중의 하나는 이 코즈모폴리터니즘이 한 개인이 구체적으로 속한 가족, 지역, 국가 등을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우려는 한 사람의 “정체성”의 범위와 그 기능에 문제들과 관련 있다. 견유학파와 스토아주의 철학에서 발전되기 시작한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철학적 사유구조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의미 깊은 성찰을 하도록 한다. 즉 인간은 두 가지의 “소속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하나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의하여 규정되는 “지역적 소속성”이고, 또다른 하나는 지리적 영토와 상관없이 우리 모든 인간이 우주에 속한 시민이라는 “우주적 소속성” 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 규정하는가라는 정체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해진다. 자신의 인종, 성별, 종교, 정치적 입장, 성적 성향, 직업, 또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국가, 집단, 또는 지역 등에 따라서 자신이 이 세계 내에서 어떠한 존재인가를 스스로 규정하는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코스모폴리턴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대립적 이원론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우리의 사유방식은 언제나 “A 아니면 B”라는 공식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 이분법적 사유방식을 비판하는 이들은 “모두(both-and)” 사유방식을 칭송하면서 그것을 “선택(either-or)”적 사유방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하곤 한다. 그러나, “A 아니면 B (either-or)” 사유방식의 대안이 “A 와 B 모두 (both-and)”라고 보는 것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선택”이 아닌 “모두”라는 대안제시가 여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첫째, 이 공식은 여전히 A 와 B 가 각기 선명하게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며, 둘째, 이러한 대안의 제시는 “’선택’(either-or) 또는 ‘모두’(both-and)” 라는여전히 다른 양태의 대립적 이원론의 사유방식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코스모폴리턴 정체성”을 모색하는 것은 단지 “A 와 B, 두 가지 모두”라는 공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A 와 B 가 각기 선명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개별적인 축이 아닌, 서로 얽히고 섥힌 실타래처럼 존재한다는 것,

즉 A 와 B 의 근원적인 상호연관성과 분리불가능성의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인간이 이 코스모스에 속했다는 것은 개별인 자신이 의식을 하든 하지 못하든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며, 어느 특정한 나라, 지역, 집단 등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과 대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서 한 개별인들은 상충하는 이익관계들,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 관심, 환대, 이득의 우선성을 부여하는 문제들 등 다양한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다층적 정체성의 조건들을 근원적으로 외면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입시다. 하나는 신들과 모든 인간을 끌어안는 진정으로 위대한 공동체이고 . . . . 또다른 하나는 우리가 출생한 곳에 의하여 규정된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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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즈모폴리터니즘의 철학적 기원과 그 역사적 전개의 방향을 규정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다. 『위험사회』의 저자이며, 앞서 언급한 “코즈모폴리턴 선언”을 쓰기도 한 울리히 벡은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왜곡된 양태를 “독재적(despotic)

코즈모폴리터니즘”

이라고

명명하고,

본래적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코즈모폴리터니즘”이라고 명명한다. 벡이 이러한 해방적 코즈모폴리터니즘을

“해방적(emancipatory)

“고대 코즈모폴리터니즘(스토아주의)”,

“계몽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 (임마누엘 칸트)”, 그리고 “근대 코즈모폴리터니즘(카를 야스퍼스와 한나 아렌트)” 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반면,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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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의 시기”, “칸트의 시기”, “아렌트의 시기”, 그리고 “누스바움의 시기” 등 네 부분으로 나누는

내가 조명하고자 하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은 특히 세 가지 측면을 담고 있다. 첫째, 인간 한 사람의 유일한

“개별성(singularity)의 윤리”를 수용하며서 모든 인간의 무조건적 평등성을 강조하는 것, 둘째, 사적 공간만이 아니라 정치와 Page 9 of 23


같은 공적 영역에서 모든 인간의 상호인정과 수용의 의미, 셋째, 정의와 인권의 적용 범주의 확장의 의미 등 세 가지 측면을 우선적으로 수용한다.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이러한 측면을 가진 코즈모폴리턴 사상의 뿌리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 우주적 시민의식과 존재론적 평등성

서구에서 코즈모폴리터니즘 담론의 그 철학적 기원은 그리스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견유학파인 시노페의 디오게네스(Diogenes of Sinope: 390-323 BCE )로부터 시작하여 스토아 학파인 제노 (Zeno)가 그 개념을 보다 발전시켰다. 소크라테스가 디오게네스보다 더 먼저 이 개념을 썼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에 통상적인 답인 “아테네”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세계/우주”에서 왔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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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통상적으로는 디오게네스가 “나는 우주의 시민(kosmopolites)”이라고 말 한 것이 “코즈모폴리턴” 이라는 개념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견유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진 디오게네스는 자신을 “집없는 망명자, 매일 먹을 빵을 구걸해야 하는 방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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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일컬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사실은, 디오게네스나 다른 그리스 철할자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코즈모폴리턴”이라는 개념으로 흔히 연상하는 다문화적 취향, 태도, 또는 가치들을 지닌 사람, 또는 모든 곳을 고향처럼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거나, 또는 지리정치적 맥락에서 문자적인 의미의 “우주적 시민성”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그리스 철학자들의 “우주의 시민”이라는 은유적 표현은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동료시민으로, 공동 거주자들로, 이웃으로, 또는 친구나 친척으로 대하는 이상적 평등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모든 인간이 사실상 이 우주에 속한 “동료 인간”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존재론적-가족관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평등적 시각에서 보자면, 인종, 성별, 시민권, 국적, 종교 등 무수한 조건들이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귀결되며, 더 나아가서 모든 인간에게 정의나 공평성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나 다른 모든 생명체에 대한 “보살핌의 당위성”에 대한 정당성을 찾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동시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직접적인 공동체적 공간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다른 인간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들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코즈모폴리턴” 이상은 그리스 철학만이 아니라 히브리 사상이나 도교철학 등 다양한 문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스토아주의 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제노(Zeno of Citium [334-262 BCE])는 디오게네스의 “우주적 시민성(cosmic citizenship)”을 보다 적극적인 양태로 발전시킨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디오게네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제노는 그의 “하나의 법 아래 있는 우주적 도시” 라는 “코즈모폴리턴 유토피아” 를 제창함으로서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기초를 놓았다. 제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코즈모폴리턴 유토피아에의 꿈을 펼친다.

우리 인간은 모든 다른 사람들을 동료 시민으로, 같은 지역주민들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마치 한 무리의 가축들이 함께 풀을 뜯어 먹으며 공동의 방식에 의하여 함께 양육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 모든 인간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과 질서를 유지하는 하나의 길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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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는 전통적인 정치적 경계들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이 이 우주에 속하는 동료 시민으로서, 같은 거주민으로서 공동의 사랑을 나누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을 나누면서 이러한 세계를 이루어 나가기 위한 보편적 법 아래 모든 인간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정치적 체계에 대한 이상을 제시한다. 견유학파와 제노의 사상은 키케로(Marcus Cicero: 106-43 BCD), 세네카(Seneca: 4 BCE—65 CE) 그리고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CE 121-80) 등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예를 Page 10 of 23


들어서 아우렐리우스는 이 우주를 전 인류를 위한 “공화국(Commonwealth)” 또는 “공동의 도시 (Common City)”로 표상함으로서 코즈모폴리턴 사상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만약 마음(mind)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라면, 우리를 합리적 존재로 만드는 이성도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 . 이러한 조건이라면, 법 역시 모두에게 공동적인 것이며, 우리는 모두 한 시민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모두는 하나의 법 아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또한 이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공화국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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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철학자에 따라서 고유한 특성을 지니며 다양하게 발전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 다양성을 묶어서 몇 가지로 요약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복합적인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커다란 주제들만을 찾아보자면, 대체적으로 세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스토아주의자들은 인간을 “이성적 능력을 보유한 존재”라고 보았고, 이 점을 모든 인간의 도덕적 가치의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특성은 인간들 사이의 교제나 우주적 공동체에 대한 요청성의 가장 근본적 틀로 간주되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적 능력을 보유한 존재라는 인간 이해는 스토아주의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지역적 경계를 넘어서 우주로까지 확장하게 한다. 둘째,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모든 인간은 두 개의 공동체에 속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즉 하나는 자신의 출생지에 따라 결정되는 “지역적 공동체”이고, 또다른 하나는 모든 인간이 속한 보편적 “인류 공동체”이다. 세네카는 하나의 태양 아래 함께 살아가는 운명을 지닌 이 “인류 공동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볼 때에,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인간의 지역성을 간과한다는 윌 킴리카(Will Kymlicka)와 같은 학자들의 비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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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역성”을 포용하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주요한 측면에 대한 이해를 간과했다는 점에서 그

설득력을 잃는다. 세네카를 비롯한 현대의 코즈모폴리턴주의자들도 이 두 가지 공동체를 의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코즈모폴리터니즘은 단순한 지역적인 소속감만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적 입장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코즈모폴리턴 사상에서 강조하는 것은 한 개별 인간은 “출생의 사건”에 의하여 소속하게 된 공동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종족”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공동체, 즉 코스모스에 소속된 존재라는 의식도 늘 가져야 하며,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민족국가적 영토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서서 “인류”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정치적 의무들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코즈모폴리턴 정신은 “국경없는 의사회(Doctors Without Borders)” 라든지 다양한 기구들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다. 셋째,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인간의 이성은 우주적인 “자연법(natural law)”과 조화 속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진정한 법은 자연과 일치 속에 있는 올바른 이성이며, 그러한 법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고, 불변하는 영원한 것이라고 본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현대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정치적 논의에서 중요한 전거를 제공하고 있다. 스토아주의는 로마제국의 기독교화 이후 막을 내렸지만, 스토아주의 사상은 이후 기독교의 철학적/신학적 구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왔다.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영향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마르틴 루터 등의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 모든 인간들의 평화로운 공존, 그리고 자연법 사상은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영향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서 신토마스주의 사상가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84-1566)는 자연법에 대한 유대-기독교적 입장을 확장하여 미국 원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고 그들에게도 평등한 자연법적 권리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호소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인간이며, 이들은 모두 합리적 이성적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 사실만이 그들을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이다 . . . 그러므로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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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카사스나 또는 살라만카 학파(School of Salamanca)의 창시자이며 최초로 “사람들의 권리(the rights Page 11 of 23


of peoples)”라는 개념을 제시한 철학자로서 근대로의 이행에 주요한 초석을 놓은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 1492-1546) 와 같은 학자들은 인간이 만든 실정법이 어떤 특정한 그룹의 인간들에 대하여 폭력과 말살을 정당화한다면, 이는 신이 내려준 “자연법”에 거스르는 것이며, 따라서 신의 의지에 반대하고 대항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모든 인간이 지닌 자연적 권리(natural rights)에 대한 주장이 이렇게 유대-기독교적 이해로부터 기인했지만, 이러한 기독교 사상가들의 사상적 자취를 더듬어 올라가 보면 그들 이전의 스토아주의 사상과 같은 철학적 사유들에 영향을 받았음을 감지할 수 있다. 프라시스코 데 비토리아도 다음과 같은 사상을 피력함으로서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을 반영하고 있다. 첫째, 모든 인간은 이성적 능력을 보유한 합리적 창조물이라는 점,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법”이 있어야 한다는 점, 둘째, 인간이 만든 실정법들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것은 이러한 “보편적 법”에 따라 끊임없이 견주어 보아야 한다는 점, 셋째, 모든 인간이 신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으로서 지닌 이성적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들은 사실상 공동의 운명을 지닌 존재라는 점, 넷쩨, 이렇게 공동 운명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법에 의하여 운영되는 정치적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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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이러한

존재론적 평등성을 반영하는 “우주적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코즈모폴리턴 유토피아”의 비전을 강하게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토피아적 사유”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코즈모폴리턴 유토피아: 급진적인 존재론적 평등 세계에의 갈망

고대 그리스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실천적 영역에서의 구체적 담론을 형성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우주(cosmos)”의 개념도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개념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견유학파라든지 제노와 같은 거주 외국인(metic), 사회적 주변부인들, 그리고 권력없는 이들에 의하여 모든 인간의 보편성과 그 보편적 평등에 대한 개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이러한 고대의 코즈모폴리턴 사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통치자에 의하여 온 세계를 하나의 법 아래 두고자 하는 “제국의 형성”의 정치적 야망을 정당화하는 데 차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서 언제나 볼 수 있듯이, 어떤 특정한 이론/담론은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형성되고 적용될 때에 그 의미와 기능은 각기 다른 결과를 가지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론”은 “연장”을 담은 상자와 같아서 그 연장을 누가,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쓰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와 구체적인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망치를 이용하여 타자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이 있다 해서, 망치 자체의 무용론을 제기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 사상이 제국주의적 야망을 정당화하는 데 쓰여질 수 있다 해서, 이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의 평등성과 존엄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인간들 모두가 인간으로서의 평등과 권리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의 본질적 의미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제노가 꿈꾸던 모든 인간들의 평등 공동체인 “코즈모폴리턴 유토피아”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사 11:6)” 다니는 하나님 나라의 유토피아적 비전과 매우 닮아 있다. 토머스 모어의 1516 년 소설 『유토피아』를 통해서 만들어진 개념인

“유토피아”는 문자적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U-topia, no place)”를 의미한다. 그러나 유토피아에 대한 개념을 보다 복합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단순한 “불가능성”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유토피아적 사상의 다양한 양태와 그 기능들을 복합적으로 분석하는 최초의 시도를 한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은 유토피아란 “현실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기존하는 현재 질서의 틀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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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방식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만하임은 단순히 기존하는 현실구조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유방식

모두를 “유토피아적”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즉 기존의 현실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혁명적 Page 12 of 23


가능성”을 제시해야 “유토피아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만하임은 근대 유토피아적 사유의 시작을 토머스 모어가 아닌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의 재세례파(Anabaptist)운동으로부터 연유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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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맥락에서,

만하임이 제시하는 두 가지 유형의 유토피아, 즉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유토피아”와 “상대적으로 불가능한 유토피아”에 대한 제시는 주요한 통찰을 준다. 현재의 사회구조에서는 불가능한 사유가 기존의 현실이 바뀌었을 때에는 그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전환될 수 있는 유토피아가 있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사유는 기존의 현실이 지닌 다양한 문제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과 열정을 지속하게 하며, 구체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연다는 의미에서 만하임은 유토피아적 사유가 단지 부질없는 꿈이 아닌 새로운 변혁적 사유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에 대한 이해에서 보자면, 스토아주의 코즈모폴리턴 유토피아는 기존의 세계가, 변할 수 없는 절대적 현실이 아님을 상기시키고, 더 나아가서 모든 인간이 국가적/지리적 경계를 넘어서 한 시민이고, 가족이며, 친척이며, 또한

동료로서

대우하고

대우받는

감정이입(cosmopolitan empat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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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갈망을

제시한다.

울리히

벡이

강조하는

“코즈모폴리턴

이 개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양한 그룹들과 국가들 사이에서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진보된 정의, 평화, 평등의 세계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디디며 “포용의 원(circle of inclusion)”을 확장하게 될 것이다.

III. 세계의 “영구적 평화”를 위하여: 도덕적 나침판으로서의 코즈모폴리턴 정의 모든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 대우하지 않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적 정언명령이다. --임마누엘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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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구적 평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목적의 나라”을 향하여

코즈모폴리터니즘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세계를 꿈꾸고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려보는 “시적 상상력”이 부단히 요구된다. 만약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이 국적, 인종, 성별, 언어, 종교들을 넘어서서 모두가 친척이나 친구 또는 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면 우리 앞에는 어떠한 세계가 펼쳐질까. 이 지구상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와 존엄성, 그리고 그들의 권리와 자유가 평등하게 보장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세계에서 살게 되는 것일까. 그 누구도 “수단”이 아닌 “목적” 자체로 간주되고 대우받는 28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까. 이러한 세계를 “목적의 나라 (Kingdom of Ends)” 이라고 명명하고, 그러한 새로운 세계의 비전을 제시하며 처음으로 “국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촉발시키고, 상호의존적이고 연관된 사회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우리가 해야할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철학자가 바로 18 세기의 임마누엘 칸트이다. 타자들에 대한 개방성과 포용의 윤리라는 두 가지 코즈모폴리턴 원리는 코즈모폴리터니즘 사상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특히 스토아주의 철학 이후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윤리적, 정치적 영역 속에 구체적으로 접목시킨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에서 보다 분명하게 예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784 년에 나온 “코즈모폴리턴 관점에서 본 보편적 역사를 위한 사상”에서 칸트는 인류 종족을 위한 가장 큰 문제는 정의를 보편적으로 관장할 수 있는 시민사회를 성취하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1795 년에 출판된 “영구적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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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에서는 이 세계에 평화가 영구화되기 위하여 첫째, 세계 시민의식, 둘째, 환대에 대한 Page 13 of 23


보편적 의무들, 셋째, 이 지구 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기 위한 목표 등을 제시한다. 칸트의 이러한 사상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현대 문제들과 접목되면서 논의되고 있다. 칸트의 “목적의 나라” 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은 이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인간들은 이 코스모스에 속한 “동료 시민”이며, 따라서 자유로운, 평등한, 상호의존적인, 그리고 합리적 존재로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는 원리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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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든 인간을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 한 인간 개개인이 그러한 본래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칸트에게서 중요한 요소인 “합리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인가 하는 것은 사실상 논쟁적 이슈가 되지 않는다고 나는 본다. 예를 들어서 한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닌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을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 둔다면(근대주의가 흔히 빠지는 오류처럼),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여러가지 한계를 지닌 사람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그 가치를 폄하할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지닌 “얼굴” 그 자체만으로,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인정되고 그 권리가 보장되는 세계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목적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 사상을 잘 드러내는 원리가 되는 것은 타자들에 대한 개방성과 포용의 윤리라고 할 수 있는데, 칸트의 “목적의 나라” 개념은 이러한 원리들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전거를 제시한다. 기독교인들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처럼, 칸트는 그의 “목적의 나라” 라는 개념을 통하여 정치적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윤리적 이상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실현불가능성”의 측면이 있다고 해서,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는 윤리적 정언명령의 의미와 그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윤리적 정언명령을 통하여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미래 세계의 공동체를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촉구된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윤리적 이상은 “나”와 “너”들의 근원적인 상호연관성에 대한 이해를 강화함으로서 새로운 의미의 “우리됨(we-ness)”을 증진시키는 데 주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목적의 나라” 라는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지속적으로 참고해야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주적 시민사회”의 참 모습에 대한 비전을 “기억”하게 함으로서 이 현실세계를 보다 나은 세계로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을 유지하게 한다.

코즈모폴리턴 정의와 권리: 사회-정치적 실천에서의 도덕적 나침판

칸트는 “코즈모폴리턴 관점에서 본 보편적 역사를 위한 사상(1784)”을 필두로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진실이지만 실제 현실에 적용하지 못한다’는 통상적인 말에 관하여(1793),” “영구적 평화: 철학적 스케치(1795 년 초판, 1796 년 개정판),” 그리고 “권리론에 관한 서론(1797)”을 출판하기까지 프랑스혁명 이전과 이후 12 년의 기간에 걸쳐서 그의 코즈모폴리터니즘 사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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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칸트의 코즈모폴리턴 정의와 권리는 이후 다양한 학자들에 의하여

차용되고 발전되어 왔는데, 칸트는 그의 유명한

“영구적 평화”에 대한 글에서 코즈모폴리턴 권리와 보편적 환대의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지구의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차원으로 이 우주적 공동체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 권리의 침해가 일어났을 때 그것은 모든 곳 에서 느껴진다. 코즈모폴리턴 권리(cosmopolitan rights)라는 사상은 사실상 단지 환상적이거나 과도한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국제적인 권리에 관한 불문율이 인류의 보편적인 권리로 변혁되도록 보완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오직 이러한 조건 아래서만 우리 인류는 영구적 평화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진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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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지구상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지닌 상호연관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상호연관성에 근거하여 코즈모폴리턴 권리 사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런데 이 “영구적 평화”에서 칸트가 강조하는 것은 어떤 “자선”이 아니라, “권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가고 싶어 하는 지역에 갈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은 적대가 아닌 “환대”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칸트의 코즈모폴리턴 환대나 권리 사상은 이 지구 위에 거하는 어느 인간도 다른 인간보다 더 커다란 권리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란 없다는 모든 인간의 “존재론적 평등성”에 근거한다. 칸트는 이러한 코즈모폴리턴 권리와 환대는 나라들 간의 영구적 평화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인류가 발전시킬 수 있는 모든 본래적 역량들을 담고 있는 모체(matrix)이며, 인류가 이룬 업적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최고의 척도가 된다고 칸트는 강조한다. 칸트의 코즈모폴리터니즘에서 주요한 기본적 전제가 되는 것은 첫째, 인간 개개인들은 평등하게 궁극적인 도덕적 관심의 단위를 대변하며, 우리 인간이 지닌 역량들은 보편적 정의의 조건 안에서만 비로소 온전하게 발전될 수 있다는 것, 둘째, 보편적 정의(universal justice)를 달성하는 것은 구성원의 국적이나 지엽적인 정치적 소속 또는 출생지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에 근거하여 구성되는 코즈모폴리턴 시민사회의 보다 광범위한 양성을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셋째, 코즈모폴리턴 법의 유일한 관심은 보편적 정의의 모체를 확립하고 코즈모폴리턴 헌법을 제정하는 기본적인 규범적 원리들을 형성하는 데 있다. 칸트는 이어 이러한 코즈모폴리터니즘 사상을 가지고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나라들이 생각해야 할 세 가지 원리를 제시하는데, 첫째,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의 원리,” 둘째, 모든 사람들이 국민으로서의 하나의 공동의 법에 의존하는 “의존성의 원리,” 그리고 셋째, 모든 사람들의 시민으로서의 “법적 평등성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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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은 “한 인간이 이곳에 살든 저곳에 살든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지, 그 사람은 세계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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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코즈모폴리턴 사상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즉 한 인간이 보다 확장된 인류 공동체에 속하는 인간인 한, 지리적으로 어디에 사는가의 차이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가장 기본적인 평등 원리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이 확장된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이 세계의 평등한 시민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정의가 보장되고 자유와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사실상 기독교적 표현으로 하자면, 한 인간이 속한 국가나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지닌 존재라는 표현과 다름없다. 만약 타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낭만적 또는 영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의미에서도 적용한다면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기독교적 인간 이해와 그 존재론적 평등성에 대한 적극적인 사회-정치적 실현 가능성을 지닌 철학적 표현이며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지닌 주요한 의미는 칸트 시대에 부상하던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통인 적극적 의미의 보편주의를 확산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칸트로부터 촉발된 “코즈모폴리턴 권리”의 개념은 서양에서 발전되어온 “인권”과 “우주적 시민권(cosmic citizenship)” 에 관심한다. 지구화 이후 이러한 칸트의 코즈모폴리턴 정의와 권리의 개념들이 다양한 학자들에 의하여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주민들, 이주노동자들의 문제, 난민들, 국적 없는 이들, 또는 망명자들 등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주요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개별적 국가들의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현대의 이슈들을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중요한 “도덕적 나침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차원에서의 세계 정치적 또는 경제적 불평등과 불의의 정도는 50 년 또는 100 년 전의 세계가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며, 미래에 더욱 그 불평등의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Page 15 of 23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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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비록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의미의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계가 점차적으로 긴밀하게 상호연관성을 지닌 방식으로 구성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결국은 “코즈모폴리턴 정황”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세계의 평화를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이 지구 위에 거하는 모든 이들의 존엄성과 그들의 정의와 권리를 존중하고 지켜내는 코즈모폴리턴적 삶의 방식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지구적 “상호연관성”의 강조가 지닌 특이한 점은 그것이 지구화의 경험이라는 경험주의적 근거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호연관성을 “자연의 의도” 또는 “섭리”로까지 본 점이다. 물론 칸트의 “자연의 의도”에 대한 개념은 지나치게 기계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지구화 시대에 우리가 경험하는 상호의존적 상황—그 상호의존적 상황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불의와 불평등의 문제들, 인권유린이나 기아, 또는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정의와 인권, 그리고 평등과 평화를 확산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당면한 과제 앞에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인류에 대한 범죄”: 코즈모폴리턴 정의의 프락시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그의 책『존재와 다르게』 37 의 헌사에서 “민족사회주의자들[나치즘]에 의하여 암살된 6 백만의 사람들과 가장 친밀했던 사람들, 그리고 반유대주의와 동일한 양태로서 타자들에 대한 증오심에 의하여 희생된 희생자들, 38

나라들, 그리고 종교들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라고 밝힌다. 레비나스는 이 헌사에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과 다른 종류의 증오의 희생자들을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서 “인류에 대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어느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그 증오에 따른 범죄는 사실상 그 특정한 “집단”에 대한 범죄만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것이다.

즉 어떠한 근거에서든지 타자에 대한 증오란 결국 인류에 대한

증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대인이든 집시이든 흑인이든 또는 베트남사람이든 그러한 증오의 희생자들은 모독과 죽음, 고통과 박해를 당하는 포로로서 사실상 “인류”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어떠한 근거에서든지 타자에 대한 증오는 악, 범죄, 그리고 불의의 근원으로서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심오한 통찰을 주고 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과 국적이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동료인간”으로 “동료시민”으로 간주하고 대우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하여 대응하는 것은 참으로 달라지게 될 것이다. 타자에 대하여 동료인간 또는 동료시민이라는 시선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사람이 개인적이든 사회-정치적으로든 어떠한 억압을 경험하게 될 때, 그 억압이 단지 여성에 대한 억압, 흑인에 대한 억압,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억압, 유대인에 대한 억압, 장애인들에 대한 억압,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 또는 미등록(undocumented) 이주노동자에 대한 억압으로만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억압”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다양한 종류의 억압이란 결국은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억압이며 증오이기 때문이다. 나치가 유대인들, 집시들, 노숙인들 또는 동성애자들을 박해하고 죽일 때 그것이 단지 그들에게만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온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위 “최종 해결(Final Resolution)” 이후 나치는 그 당시 약 9 백만이었던 유럽 유대인들의 2/3 인 6 백만 명을 죽였는데, 그 중에는 1 백만의 어린이들과 2 백만의 여성들, 그리고 3 백만의 남성들이 있었다. 또한 병원에 있던 20 만 명의 정신적/육체적 장애인들을 “안락사 프로그램”을 통해 죽였으며, 20 만 명의 집시들, 또한 폴란드인이나 러시아인들과 같은 인종적 소수자들, 또는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여호와의 증인들, 동성애자들 등 무수한 이들을 학살했다. Page 16 of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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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개념은 1945 년 8 월 8 일 런던 회의에서 국제군사법정(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헌장에 반영되었고, 이후 뉘렌베르크 재판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되었다. 이 헌장의 제 6 조에 나온 “인류에 대한 범죄”는 “구체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기 전 또는 전쟁 중에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된 살해, 학살, 노예화, 이송, 기타 비인간적인 행위: 범죄를 저지른 국가의 국내법 위반여부와는 상관 없이 법정의 관할권 내에서 범죄의 실행 또는 범죄와 관련하여 정치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사유로 저지른 탄압” 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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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헌장 제 6 조는 특히

민족국가보다는 “개인의 책임(individual responsibility)” 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 즉 한 개인은 한 국가의 법을 단지 따랐을 뿐이라고 하는 것으로 자신이 행한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한 정당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 특히 모든 인간을 “동료인간”으로 보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하는 코즈모폴리턴 권리 개념에 근거한 “인류에 대한 범죄” 개념의 공공적 확산은 이 세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코즈모폴리턴 권리 개념은 1948 년 12 월 10 일 공식적으로 발표된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세계인권선언문의 제 1 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sic]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라고

밝힘으로서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사상적 근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더 나아가서 세계인권선언 제 2 조에서는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과 같은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 없이,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 더 나아가 개인이 속한 국가 또는 영토가 독립국, 신탁통치지역, 비자치지역이거나 또는 주권에 대한 여타의 제약을 받느냐에 관계없이, 그 국가 또는 영토의 정치적, 법적 또는 국제적 지위에 근거하여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함으로서 정의와 권리에 대한 규정에서 “국가들 사이(inter-national)” 의 정의과 권리개념으로부터 “코즈모폴리턴” 정의와 권리 개념으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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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선언문에서 명시한 바는 이론적으로는 “모든” 인간들이지만, 그 실천적 적용에서는 유엔에 속한 국가들에 소속된 사람들의 권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실천적 한계를 지닌다. 그렇다면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물음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사람이 한나 아렌트이다. 아렌트는 칸트의 코즈모폴리턴 권리와 환대의 개념에 근거하여, 유엔과 같이 “국가들간”의 연합체들이 제시하는 세계인권선언은 “국가 없는 사람들(the stateless)” 에 대한 인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고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권선언과 그 실천은 여전히 그 연합체에 속한 “국가들 사이(inter-national)”의 상호 동의와 협정들에 의거해서만 작동되며, 결국 그러한 국가들 넘어서(trans-national)의 영역은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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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우리에게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의 개념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인간의 권리”는 말 그대로 단지 “인간이기에 지니는 권리”라는 의미이다. 즉 그 인간이 특정한 한 “국가의 시민” 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이 지구 위에 거하는 “인간”으로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국가에 의하여 작동되는 실정법의 “특정성”과 인간의 국가적 소속과 상관없이 인간 개개인들에게 적용되는 자연법/윤리적 의무의 “보편성” 사이의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두 축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는가는 현대 세계의 지속적이고 당면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국가 없는 이들, 고향을 상실한 이들(Heimatlosen)을 어떻게 동등한 “동료인간”으로 대할 것인가. 이 물음에 자크 데리다는 그의 강연을 담은 책,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용서에 관하여』에서

“한 개인이 불의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은신할 수 있는” 피난처의 역할을 하는 “자유 도시(free city)”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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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이 “자유 도시”라는 개념은 현대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난민들에 대한 환대의 문제 등 민족국가의 경계 넘어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의 해결을 모색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지구화 이후 더욱 가중되고 있는 Page 17 of 23


문제들은 이 세계의 상호연관성의 현실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국가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의식과 구체적인 실천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여기에서 인권이 특정한 국가의 실정법에서 보장되는 그 “특수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인권의 “보편성”이 긴장관계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으로 상호배타적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사유 속에서 그리고 그 사유들이 반영된 한 국가의 틀 안에서도 사실상 “특정 공동체”의 포용의 원을 조금씩 넓히는 정책과 법률이 제정된다면, 국가적 경계에 제한된 그 “특정 공동체”는 점차로 다양한 인간들을 끌어안는 “코즈모폴리턴 공동체”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선생이며 동시에 친구와 동료의 관계를 일생동안 유지했던 카를 야스퍼스 역시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개념의 초석을 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당시 나치와 협력관계를 가졌던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야스퍼스는 나치의 12 년간의 통치하에서 나치의 반대자로 또한 희생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 역시 뉘렌베르크 재판을 칸트적 코즈모폴리턴 비전과 연결시킨다. 종전 후 독일에서는 “대학의 재건을 위한 위원회”가 “죄과가 없는 교수들(unincriminated professors)”로 간주되는 열세 명의 교수들로 구성되었으며, 야스퍼스는 그 중의 한 위원으로서 독일 대학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44

1946 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행한 “독일 대학의 지적 상황”에 관한 강연의 일부가 포함된 『독일의 죄에 관한 물음들』이라는 책에서,

야스퍼스는

인간의 범죄적(criminal), 정치적, 도덕적,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네 가지 죄책을 구분한다.

“범죄적” 그리고 “정치적” 죄책은 공적인 반면, “도덕적” 그리고

45

“형이상학적” 죄책은 사적이다. “범죄적” 죄책은

객관적 증거와 명료한 법들에 의하여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야스퍼스는 모든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국가에 의하여 자행된 범죄적 행위에 의하여 그것이 자행되도록 허용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죄과가 있으며, 그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죄책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모든 독일인들은 각기 한 46

사람 한 사람이 자신 속에 “내가 어떻게 죄책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철저하게 자신을 검증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그의 “도덕적 죄책”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죄책을 “집단적”으로 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은 결국 이러한 도덕적 죄책의 문제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양심과 회개의 공간을 열어놓은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이러한 도덕적 죄책이 존재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형이상학적 죄책”은 나 아닌 모든 다른 “인간들과의 절대적 연대성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야스퍼스는 자신이 “나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이 있다”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이 있다”고 고백한다.

47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도덕적/형이상학적 죄책이 자기 동정이나 또는 자만심을 통해서 야기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죄책은 신 앞에서 선 존재로서의 “겸허와 절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야스퍼스는 예레미야서 45 장 4-5 절을 인용하면서 결론 내린다. 종전 후 독일에서 서양 인문주의를 재개념화 하고

독일 철학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카를

야스퍼스보다 더 기여한 인물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정한 집단적 개혁과 변화는, 범죄적 또는 정치적 죄책만이 아니라, 모든 개개인들이 자신 속의 “도덕적 죄책”과 그 다음에 “형이상학적 죄책”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고 하는 야스퍼스의 통찰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흔히 한 사회나 집단의 변화와 개혁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공적이고 외면적인 조건”만 생각했을 때 무수한 변혁운동은 실패를 거듭한다. 외면적으로 공평한 법의 제정과 실천을 변화시키는 것과 한 개개인들의 의식과 가치체제라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조건”의 변화가 동시적으로 수반되어야 진정한 변혁의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칸트, 아렌트, 그리고 야스퍼스가 기다렸던 “코즈모폴리턴 정의”가 점진적으로 홀로코스트나 다른 전쟁범죄들을 다루는 국제법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 개념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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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함께 칸트를 넘어서서

신학이나 철학 등 어떠한 분야든 소위 “위대한” 사상가들의 삶과 다양한 측면들을 파헤쳐가다 보면 예외 없이 그들의 “어두운 이면”들과 만나곤 한다. 예를 들어서 무수한 철학자/신학자들이나 교부학자들의 남성중심성과 여성혐오사상은 이제 새로운 발견도 아닌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내가 칸트의 글들을 다양하게 접하면서 내 속에서 커다란 실망과 딜레마로서 씨름했어야 했던 것은 그의 익히 알려진 남성중심성이 아니라,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인종적 편견과 차별적 사유방식을 접하고서였다. 한 사상가의 “위대한” 이론/철학/신학적 사유 이면에 그와 상충하는 또 다른 사상적 줄기와 마주했을 때 느끼게 되는 실망의 무게가 더욱 무거운 것은 어쩌면 우리 속에는 “순수성”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이러한 “순수성에 대한 욕구(desire for purity)”가 부정적으로 작동되는 경우는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지켜내려고 했던 나치에서나 또는 인종차별과 같은 다양한 차별주의의 근저에 자리잡아 왔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치는 물론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부에서도 그리고 1967 년 이전의 미국에서도 각기 다른 인종간의 결혼은 “불법화”되었고, 이러한 결혼금지법의 이면에는 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순수성”을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지켜내겠다는 “순수성에 대한 욕구”가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성에 대한 갈망은 한 사상가가 지닌 상충적인 사유방식과 대면하면서 다시 발동되는지도 모른다. 칸트의 코즈모폴리턴 정의와 환대, 그리고 권리와 같은 참으로 중요한 사상이 세계의 영구적 평화에 대한 염원을 사회-정치적으로 구체화시키려는 다양한 노력의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칸트는 참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런데 그의 지독한 인종적 편견에 대하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프리카의 철학자 이매뉴얼 에제(Emmanuel Chukwudi Eze)는 데이비드 흄이나 칸트, 그리고 헤겔과 같은 18 세기 서양

철학자들의

“인종”에

관한

글들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그들이

의식적

“백인유럽중심주의”가 유럽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고 지적한다.

또는 48

무의식적으로

지녔던

칸트는 “흑인(Negroes)” 과

“백인(whites)”을 가장 기본적인 인종이라는 전제하에 인류의 인종을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 또는 칼무키안 인종, 그리고 힌두 인종 등 네 가지 범주로 나누면서, 이러한 인종을 그들이 태어난 지리적 조건들과 연결시킨다. 특히 습기 차고 더운 지역은 동물들이 성장하는 데 좋은 조건이지만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인간이 살게 될 때에는 동물처럼 강하고 육체적인 노동에는 적합하지만, 모든 흑인들에게서처럼 지독한 냄새가 나고 게으르며, 지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노예제와 같은 제도들을 통해서 왕에 의하여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49

더 나아가서 그는 가장 완벽한 이상적인

인종은 숭고함(the sublime)과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겸비한 독일인이라고 함으로서,

50

나치의 독일 민족에 대한 맹목적

찬사와 유사한 입장을 드러낸다. 칸트는 대학에서 72 개 종류의 과목들을 가르쳤는데, 그중에서 인류학 24 번, 지리학 48 번, 논리학 54 번, 형이상학 49 번, 도덕 철학 28 번 그리고 이론물리학을 20 번 가르쳤다. 대학에서 과목수를 줄이려고 할 때도 칸트는 지리학 과목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칸트는 일생 동안 자신이 사는 도시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지만, 지리학에 대한 관심은 지대해서 지리학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처음으로 도입한 이후 은퇴할 때까지 40 여 년 가르쳤다.

51

인간의 인종들을 그들의 지리적 자연조건과 연결시킨 칸트의 인간 지리학(human geography)은 그가 지닌 인종적 편견의 “이론적” 근거가 되면서, 그의 “모든 인간”을 끌어안는 코즈모폴리턴 사상과 상충하는 결정적인 오점을 남긴다. 그런데 칸트가 지닌 이러한 패러독스는 이미 16 세기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추상적 보편주의”의 문제와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적 삶에 깊게 뿌리내리지 않은 “위로부터의” 보편주의가 근대의 거대담론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듯이, 칸트의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의미를 구체적 정황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Page 19 of 23


“칸트와 함께 그러나 칸트를 넘어서는 사고(thinking with Kant against Kant)”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칸트는 개인적으로 아마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인종에 대한 편견적 이론은 여전히 인종차별적 의식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러나 이론이나 담론은 하나의 “연장”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그 연장을 만든 사람(signifier)에 대한 관심보다, 그 연장을 어떻게 활용하여 쓰는가라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말을 다시 상기하며, 칸트와 “함께”

칸트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작업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칸트의 코즈모폴리턴 사상과 함께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칸트의 백인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탈식민주의적 사유방식의 비판성과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역사적 분기점들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과제에 대한 책임성이 무엇보다도 요청된다.

종교—불가능성에의 열정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은 이 기존의 현실구조에서는 전혀 가능한 것 같지 않은 “불가능한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이라는 주제에 대한 생각을 하면, 우선 부딪히게 되는 물음은, “나” 자신만이 아니라 무수한 “너”도 이 우주에 속한 시민이며, 나와 같은 동료시민으로서의 평등성과 권리, 그리고 그 존엄성을 인정하는 이 “코스모폴리탄 시선”이 과연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라는 것이다. 또한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국적, 종교, 인종, 계층, 성별등 무수하게 사람들을 범주화하는 경계들을 홀연히 넘어서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동료시민”들이라는 그 우주적 흥겨움을 함께 나누고 기뻐할 수 있는 꿈을 꾸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맴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가능성에의 물음들은 우리에게 종교의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예수의 가르침들은 사실상 무수한 불가능성에로 자신을 기투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나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이나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며, 이 삶의 현장에서 배고픔, 목마름, 헐벗음, 이방인됨, 병듬, 감옥에 갖힘 등과 같이 다양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어떠한 경계도 긋지 말고 환대하고 돌보라고 하며, 또는 타자에 대하여 무한한 용서를 하라고 한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교리, 예식과 전통의 집합체로 생각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이해를 뒤집는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종교적 교리가 아닌, 내가 타자와 어떠한 관계속에서 살아가느냐라는 것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과 의무는 타자의 인종, 국적, 종교등으로 갈라지는 어떠한 종류의 경계조차 훌쩍 뛰어 넘는 것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전하거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예수의 가르침은 사실상 코즈모폴리터니즘이 지향하는 가치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은 예수의 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열정”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며, 종교란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책임성과 환대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불가능성에의 열정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존재하고 있는 기존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계에 대한 꿈꾸기를 포기 하지 않으면서 인간 모두를 신의 자녀로서, 고귀한 존재로서 보는 그 시선은 국가적 경계, 종교나 인종적 경계를 훌쩍 뛰어 넘고 있다. 인간이 지닌 사회문화적, 생물학적, 또는 종교적 조건들과 경계들에 대한 편파성을

넘어서는

사유를 함으로서, 우주에 속한 시민이라는 새로운 코즈모폴리턴 시민성의 강조는, 모든 인간을 신의 자녀라고 보는 그 시민성과 닮아 있다.

______

** 이 자료는 <기독교 사상> 2014 년 3, 4, 5 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Page 20 of 23


1

Charles Monroe Sheldon, In His Steps: What Would Jesus Do (1897. New York: Cosimo Classics, 2010).

2

이 책은 다음 사이트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http://www.gutenberg.org/ebooks/4540?msg=welcome_stranger

또는 http://www.kancoll.org/books/sheldon/ 다음 사이트에서는 저자인 셸던 목사가 1935 년에 쓴 서언(Forward)도 볼 수 있다. http://www.ssnet.org/bsc/ihs/ihs.html 3

이 문서는 1486 년 독일의 가톨릭 성직자이며 재판관이었던 하인리히 크라머(Heinrich Kramer: 1430-1505)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다. 이

문서의 저자는 크라머 이외에 제임스 스프랭어(Jakob Sprenger: 1436-1494))도 공동저자로 되어 있으나, 스프랭어의 이름이 첨가된 것은 크라머가 자신의 글에 보다 공적인 권위를 부가하고 싶은 생각에 그의 이름을 공동저자로 만든 것이라는 것이어서, 주저자는 크라머로 보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생각이다. 독일에서 출판된 이 문서는 대부분의 희생자가 여성들인 중세 “마녀화형”을 “하나님의 일”로서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사용되어져 수많은 종교재판관들의 마녀박해의 지침서로 쓰였다. 이 문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을 참조하라. Heinrich Kramer and James Sprenger, Malleus Maleficarum: Or The Hammer of Witches, trans. Montague Summers (1486. Forgotten Books, 2008). 또한 이 책은 다음 링크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http://www.malleusmaleficarum.org/downloads/MalleusAcrobat.pdf 4

Gilles Deleuze, as quoted in Michel Foucault, “Intellectuals and Power: A Conversation between Michel Foucault and Gilles Deleuze,” in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Selected Essays and Interviews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0), 205-206. 5

Gilles Deleuze in Michel Foucault, “Intellectuals and Power,” 208.

6

Foucault, “Intellectuals and Power,” 208.

7

Gayatri Chakravorty Spivak, The Postcolonial Critic: Interviews, Strategies, Dialogues, ed. Sarah Harasym (New York & London: Routledge,

1990), 7. 8

Ulrich Beck, Cosmopolitan Vision, trans. Ciaran Cronin (Cambridge, UK and Malden, MA: Polity Press, 2006), 7.

9

Jean-Luc Nancy, The Creation of the World or Globalization, transla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François Raffoul and David Pettigrew (New

York: SUNY Press, 2007), 35. 10

David King, “Climate Change Science: Adapt, Mitigate, or Ignore,?” Science, vol. 303, no. 5655 (January 9, 2004): 176.

11

“유엔 밀레니움 목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의 유엔 웹사이트를 참고하라. http://www.un.org/millenniumgoals/bkgd.shtml.

12

보다 자세한 내용들은 유엔의 “인간개발리포트 (Human Development Report ) 2013” 를 참고하라.

http://hdr.undp.org/sites/default/files/reports/14/hdr2013_en_complete.pdf. 13

Ulrich Beck, “The Cosmopolitan Manifesto,” in World Risk Society (Cambridge, UK: Polity Press, 1999), 1-18.

14

Seneca, De Otio, 4.1, in Seneca: Moral Essays, vol.2, trans. John W. Basore (1932;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187, 189.

15

Ulrich Beck, Cosmopolitan Vision, trans. Ciaran Cronin (2004; Cambridge, UK: Polity Press, 2006), 45. 그의 “코즈모폴리턴 선언 (The

Cosmopolitan Manifesto)”은 다음 책의 서문으로 나온다. Cf. World Risk Society (Cambridge, UK: Polity Press, 1999), 1-18. 울리히 벡은 그의 공저 『장거리 사랑 (Distant Love)』의 제 4 장에서

“Cosmopolitan Communities”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데, 그것이 한국어로

“지구적 공동체”로 번역된 것은 “global”과 “cosmopolitan”의 본질적 차이를 간과한 번역이다.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백-게른스하임, 『장거리 사랑 』, 이 재원/홍찬숙 옮김 (새물결, 2012), 제 4 장을 참고하라. 16

Robert Fine and Robin Cohen, “Four Cosmopolitan Moments,” in Conceiving Cosmopolitanism: Theory, Context, and Practice, eds. Steven

Vertovec and Robin Cohe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137. 17

Patrick Hayden, Cosmopolitan Global Politics (Burlington, VT: Ashgate, 2005), 12.

18

Diogenes Laërtius, Lives of Eminent Philosophers, vol. II, trans. H.D. Hick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25), 39[Book VI:38].

19

Plutarch, “On the Fortune of Alexander,” in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ed. A. A. Long and D. N. Sedley, vol. I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429. 20

Marcus Aurelius, The Meditations of the Emperor Marcus Antoninus, edited with translation and commentary, A. S. L. Farquharson, vol. I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53[Book I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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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Cf. Will Kymlicka, “Citizenship in an Era of Globalization,” in Democracy’s Edges, ed. Ian Shapiro and Casiano Hacker-Cordon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킴리카는 민족국가의 범주를 벗어난 “코즈모폴리턴 시민권”의 개념의 제도적 실현불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22

Bartolome de las Casas, A Short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 ed. Nigel Griffin (London: Penguin Books, 1992), 14.

23

Cf. Francisco de Vitoria, “On Civil Power,” in Political Writings, ed. Anthony Padgen and Jeremy Lawrence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24

Karl Mannheim, Ideology and Utopia: An Introduction to the Sociology of Knowledge (1936; New York: A Harvest/HBJ Books, 1985), 192.

25

Mannheim, Ideology and Utopia, 35.

26

Beck, Cosmopolitan Vision, 5.

27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On a Supposed Right to Lie because of Philanthropic Concerns, trans. James W.

Ell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93), 36. 28

“왕국 (Kingdom)”이라는 용어는 남성중심적이며 동시에 “왕”과 “신하”를 전제하는 위계주의적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어서 나는 영어로

“친족들의 나라”를 지칭하는 “Kindom of Ends”라고 변형하여 표기한다. 물론 “친족”이라는 용어 역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그 남성중심성을 피해 갈 수 없지만, 적어도 “왕”이라는 직접적인 남성중심성을 넘어서서 보다 수평적 관계의 친족세계를 지향하는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왕국”보다는 훨씬 구제가능성이 있는 용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29

Immanuel Kant, “Idea for a Universal History with a Cosmopolitan Intent (1784),” Perpetual Peace and Other Essays on Politics, History, and

Morals, trans. Ted Humphrey (Indianapolis and Cambridge: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83). 30

Immanuel Kant, " Perpetual Peace: A Philosophical Sketch," Kant's Political Writings, ed. Hans Reiss, trans. H.B. Nisbe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31

Immanuel Kant, Grounding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On a Supposed Right to Lie because of Philanthropic Concerns, trans. James W.

Ellngton (Indianapolis: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93), 39 32

이 네 편의 글을 모두 볼 수 있는 책은 다음과 같다. Kant, “ Idea for a Universal History from a Cosmopolitan Point of View (1784),” “On the

common saying ‘This may be true in theory but it does not apply in practice (1793),” “Toward Perpetual Peace: A Philosophical Sketch (published 1795, revised 1796), and “Introduction to Theory of Right (1797),” Kant’s Political Writings, ed. Reiss. 33

Kant, "Perpetual Peace," Kant's Political Writings, 107-108.

34

Kant, "Perpetual Peace," 99.

35

Marcus Aurelius, The Meditations (Indianapolis: Hackett, 1983), 10:15.

36

Charles Beitz, "Does Global Inequality Matter?," Global Justice, ed., Thomas W. Pogge (Oxford: Blackwell, 2001) 106.

37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trans. Alphonso Lingis (1974;

Pittsburgh: Duquesne University Press, 1998). 참조, 『존재와 다르게: 본질의 저편』, 김연숙, 박한표 옮김 (인간사랑, 2010). 38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39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The Holocaust,” Holocaust Encyclopedia. http://www.ushmm.org/wlc/en/?ModuleId=10005143.

40

“Charter of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August 8, 1945,” quoted in Michael R. Marrus, The Nuremberg War Crimes Trial 1945-46: A

Documentary History (Boston: Bedford Books, 1997), 52. 한글 번역문은 다음을 참조할 것. http://www.ushmm.org/outreach/ko/article.php?ModuleId=10007722 41

한글 전문은 다음을 참고하라. http://www.ohchr.org/EN/UDHR/Pages/Language.aspx?LangID=kkn. 1 조에 나온 “형제애(brotherhood)”는

포괄적 언어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으로 부재하였을 때 작성된 것이니 “인류애”와 같이 양성포괄적 언어로 수정되어야 할 용어이다. 42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New York: Schocken Books, 2004), 379.

43

Jacques Derrida, On Cosmopolitanism and Forgiveness, trans. Mark Dooley and Michael Hughes (London and New York: Routeledge, 2001), 9.

이 책은 데리다의 사상의 정치적이고 윤리적이 측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코즈모폴리터니즘” 에 대한 강연은 1996 년 “작가들의 국제의회 (International Parliament of Writers)”에서 행한 연설이며 특히 난민들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고, “용서”에 대한 강연은 남아프리카에서 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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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Mark W. Clark, “A Prophet without Honour: Karl Jaspers in Germany, 1945-48,”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37, no. 2 (April 2002):

204. 45

Karl Jaspers, The Question of German Guilt, trans. E. B. Ashton (1945; New York: Capricorn Books, 1961), 61.

46

Jaspers, The Question of German Guilt, 63.

47

Jaspers, The Question of German Guilt, 71 &72.

48

Emmanuel Chukwudi Eze, Race and the Enlightenment: A Reader (Malden, MA: Blackwell, 1997).

49

Immanuel Kant, “Of the different races of human beings,” Anthropology, History, and Education, ed. Günter Zöller and Robert B. Louden, trans.

Mary Gregor, et a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95. 50

Kant, “On the feeling of the beautiful and sublime,” Anthropology, History, and Education, 59.

51

J. A. May, Kant’s Concept of Geography and its Relation to Recent Geographical Thought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0),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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