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월례발표회 조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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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30.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우리신학연구소

기억의 지속과 확장을 위한 사회적 영성 조민아 / 미국 세인트캐서린대학교 조교수

지독하게 잔인했던 2014년 4월. 그 4월은 과거가 될 수 없다. 삼백 명 넘는 생명들이 바다에 방치되는 것을 우리는 보았고,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흐 릿했던 시간 안에 그들이 서서히 수장되는 것을 우리는 보았고,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살려 달라 는 호소가 불통의 바리케이트에 막혀 길바닥에 내쳐 지는 것을 우리는 또 보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출 줄 모르는 무리들이 바닥에 주저앉은 그들을 가차 없이 짓밟는 것마저 우리는 지켜보았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지켜보면서” 단 한 사람의 목숨조차 구할 수 없었던 믿기 힘든 현실. 공 공의 안전과 인권이 국가와 공동체로부터 유기된 채 사적 이윤의 시장에 내던져져 물어뜯기고, 그것도 모자라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언론에 의해 나날이 유린당하고 있는 이 참혹한 현실에 살아남아 버린 우리는, 아마도 떠난 이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날들만큼 긴 세월 슬픔과 수치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 해 80년의 봄처럼, 2014년 봄은 우리를 오래도록 짓누를 원죄가 될 것 이다. 아니다. 두려운 것은 사실 그 가늠 되지 않는 치욕의 세월이 아니다. 정말로 두려운 것은 망각 이다. 우리는 아마도 잊을 것이다. 망각은 이미 시작되었다. 아마도 지쳤을 것이고, 무능력을 인 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 봐야 별 수 없다는 패배주의와 양비론에 젖어 버렸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많은 일들을 잊어 왔다. 세월호의 비극은 사실 예견되고 있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삼성 노동자들,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과 생존 투쟁을 우리는 보았으되 잊어 버렸다. 땀 흘려 일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농민들의 한숨을 우리는 들었지만 귀를 막았다. 용산과 밀양과 강정마을 주민들을 향한 국가의 폭력을 알았지만 모른 체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의 하루살이 삶을 매일 목격하지만 매일 눈을 감는다. 입시 경쟁에 쫓겨 몸과 영혼을 망치고 있 는 아이들의 하루하루를 심지어 내 집에서 지켜보지만 어찌 할 수 없어 묻어 버린다. 세월호의 비극은 이 모든 비극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하기보다 잊는데 훨씬 익숙 하다. 결코 아물지 않을 상처가 될 기억과, 어서 빨리 잊고 싶어하는 욕구는 사고 한 달 후 전혀 개 선되지 않는 현실에 어지럽게 얽혀 공존한다. 곧 구조 될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세월호의 천진한 얼굴들이 뭍으로 띄워 보낸 영상들과 월드컵을 선전하는 “즐겨라 대한민국” 포스터가 동 시에 쏟아져 나오는, 이 도저히 화해될 수 없는 이미지 덩어리들이 같은 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현실은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영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나 는 사실 두렵다. “영성”이란 단어가 이미 상투어가 되었듯, 이 시점에서 던지는 내 질문 또한 상 투적인 질문이 되어 습관적인 애도와 희망에 물타기하며 결국 망각의 그물망을 넓히는데 기여하 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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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저 슬퍼하는 것, 대상도 불분명한 어떤 것을 그저 희망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 니다. 나는 “기억”을 요구하며 이 글을 시작한다. 빠르게 미끄러질 그날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그 기억에 단 한 점의 끈적한 의미라도 더하기 위해. 그러므로, 이 글에서 질문할 사회적 영성의 위치는 4월 16일의 상흔과 그것을 잊기를 종용하는 욕망 사이의 어느 지점이 될 것이다. 자극하 지 않는다면 쉽게 망각으로 끌려가 버릴, 그 불균형한 힘에 개입한다. 상흔과 망각. 그 두 힘의 대립을 나는 예수의 시신이 사라진 무덤 앞에서도 발견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을 배반하고, 죽어 가던 그를 유기하고, 제각기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 날의 수치 를 견디지 못해 서둘러 망각으로 도망치던 제자들을 제어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약했던 그들 이 어떻게 망각을 멈추고 기억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스승이 이미 떠난 자리에서 진리는 어떻 게 잊혀 지지 않고 살아 남았으며. 어떻게 그 모래알과 같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갈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질문들을 사회적 영성이란 화두와 연결하고자 한다. 사회적 영성이란, 제도교회와 교 리로부터 상대적으로 느슨한 이 신학적 사유의 틀을 통해 우리 시대의 빈무덤, 세월호의 기억을 지속하고 확장시킬 언어들을 재고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빈무덤 앞의 제자들처럼 혼란스럽고 수치스러운 우리들 또한, 그들이 예수에 관한 기억을 놓지 않았듯, 그날의 기억을 공동체의 기억 으로 재구성하고 공감의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1)

Ⅰ.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신학자로서, 아니 그보다 신앙인으로서 느꼈던 무력감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울부짖는 희생자 가족들 앞에서 신의 존재와 신의 정의와 신의 가호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 일인 지 나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처절하게 깨달았다. 영웅처럼 나타나 희생자들을 살려 내는 기적을 행사할 신, 책임자들을 낱낱이 찾아내 심판하고 벌하고야 말 신은 진작에 없었다. 그렇다고 차가 운 바다 속에서 죽은 생명들과 함께 떨고 있을 신, 팽목항 부두에서 흐느끼는 가족들을 껴안아 주고 있을 신은, 신학하는 나 자신을 위한 민망스런 합리화는 될지언정 희생자 가족들에겐 별로 쓸모가 없다. 신은 침묵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삼켜 버린 검은 바다가 떠올리는 무심한 태양을 매일 매일 바라봐야 하는 고문을 당하는 이들 앞에서 그 침묵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는 없다. 침묵하던 신은 기어이 파렴치한 종교인들의 말에 의해 난자 당한 채 쓰레기통에 버려 지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저 죽음의 바다 앞에서 신학적 상상력은 그만 용도 폐기 되어야만 하는가? 신학자들에게 위의 질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절망의 심연 속에서 어떻게 신에 대해 사유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적어도 신학자들에게는, 지극히 실존적인 질문인 동시에, 신학자이기에 감당해야 할 천형(天刑)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그리고 믿는다는 행위에 대한 사유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적 상상력을 포기 할 수 없는 이유는 또한, 불필요하고 무능하고 때로 해로워 보일지라도 신학은 여전히 비인간화한 세상 1) 본 글의 방법론은 미셀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저서 The Mystic Fable, vol. 1: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trans. Michael B. Smoth (Chicago, 1992)과 세르토가 남긴 다수의 논문들 중 특히 “”How Christianity is Thinkable Today?”와 “White Ecstasy” in The Postmodern God, ed. Graham Ward (Made, MA: Blackwell, 1997)과 “The Weakness of Believing: From the Body to Writing, a Christian transit” in The Certeau Reader, ed by Graham Ward (Malden, MA: Blackwell, 2000) 에서 착안되었다. 직 접 인용보다는 방법론적 인용이 많기에,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일이 각주를 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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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균열을 일으킬 파괴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타자성”을 근거로 하기에, 지배 사회질서 안으로 수렴되고 통치 이데올로기와 동일화 하지 않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2) 라고 노래하는 시인처럼, 모든 합리적 대안과 논리적 설명이 사라진 지평을 보며, 신학자는, “그러나 희망을 왜 포기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라고 매우 불합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고통과 절망의 현장에서 신학적 상상력이 폐기 될 수 없다면, 그러나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한다 면, 고통과 절망에 응답해 온 기존의 신학적 언어들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아도르 노(Theodore Adorno)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라고 말했다.3) 얄팍한 감성을 집어 치우고 사랑 타령 따위나 하는 그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흔히 곡해되고 있는 이 말은, 사실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 는 세상에서 삶에 대한 일체의 긍정이 가능한지를 역설적으로 일깨우는 말이다. 예술 행위 자체 가 삶에 대한 욕구의 반영일진대, 죽음의 시대를 걷는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도르노는 예술의 자율성이 전제하는 “절대적 자유”라는 것이 사회에 만연한 통제, 억압과 모순 관계를 이 루는 한, 예술이 갖고 있는 창조적 자명성은 사라져 버리며, 오히려 비인간화한 사회를 긍정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한다.4) 삼백이 넘는 생명이 백주에 바닷속에 수장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을 거치지 않는 시 쓰기는 애초에 시를 쓴다는 행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회피한 자위 행위에 불과하다. 시인이 죽음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의 시는 몸을 이탈하여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로 도피할 수 없다. 시인들은, 시 쓰기라는 숙명을 감당하는 이 상, 이 야만의 세상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시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피해 갈수 없다. 아도르노의 역설은 신학자들에게도 유효하다. 신의 초월성과 절대성, 그리고 그것이 제시할 비 전이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와 접점을 찾지 못하는 한, 그 초월성과 절대성의 언어에 기반한 신학 의 파괴적 잠재력은 발휘되지 못한다. 초월성의 극단화는 비인간화한 사회를 향해 아무 상관이 없는 비판을 제시함으로써 역으로 비인간화를 긍정한다. 차안(此岸) 너머에, 물(物)의 세상 저편 에 존재하는 신은 신을 대리하는 제도가 마련한 칙령으로 축소, 변질되거나(천주교), 현실을 자족 적으로 이해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내면의 환청으로 퇴행할 위험을 지닌다(개신교). 현실과 관계 맺기를 포기하는 신학은 망상에 불과하다. 신학자들은, 신에 대한 사유라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이상, 야만의 세상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신을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외면할 수 없다. 사회적 영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지점은 바로 이 질문이 제기되어야 할 지점과 맞닿아 있다. 사실, 고통을 대면하여 왜 그리고 어떻게 신을 사유하고 표현하는가라는 질문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탈식민주의 신학, 그리고 또 많은 신학들이 복음과 상황을 두 축으로 삼으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질문을 던져 왔다. 친숙하다면 친숙할 이 질문이 사회적 영성을 통해 낯설어 질 수 있다면, 아마도 “영성신학”이란 분야가 갖고 있는 특수성 때문 일 것이다. 샌드라 슈나이더스(Sandra M. Schneiders, IHM)는 영성신학이란 그리스도교 신앙 의 “경험”들을 연구하는 학문의 영역이라 정의한다. 신앙을 근원적 질문으로 삼되, 인간의 몸을 근거로,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경험을 위해 응답을 시도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2) 김남주,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중에서 3) Theodore Adorno, Kulturkritik und Gesellschaft. In: Lyrik nach Auschwitz. Adorno und die Dichter, Reclam, Stuttgart, 1995, S. 49. 4) 아도르노, 미학이론Aesthetic Theory (Bloomsbury Academic,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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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신학의 자료는 텍스트로 표현된 인간의 주관적인 신앙경험이다. 영성신학이 다른 신학 분야 와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주관적인 경험 자체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다른 분야들이 이 경 험이 표현된 현상과 방식을 근거 삼아 이론을 도출해 내거나 보편적인 구조를 찾는데 관심을 쏟 는 반면, 영성신학은 텍스트를 통해 기록된 경험 자체, 그 경험이 말해 주는 인간의 삶에 집중한 다.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분야가 아니라, 그 신이 인간의 삶 속에서, 또 인간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경험되는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5) 그러므로 영성 신학은, 슈나이더스가 리꾀르(Paul Ricoeur)의 표현을 인용해 주장했듯, “인간에 관한 과학” 이 다. 이런 점에서 영성신학은 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우회적이지만 가장 솔직한 통로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영성신학은 신의 현존을 완벽하게 표현할 언어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한다. 그 대신, 표현 불가능한 신비가 인간의 몸, 인간의 삶의 자리를 관통할 때 남겨지는 파장과 흔적 들을 주목한다. 해변의 모래사장에 찍혀진 발자국처럼,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는 꿈처럼, 형체도 없이 기억을 장악하는 향기처럼, 신비는 아스라하지만 강렬하게 우리 삶에 침투하며, 낯설고도 친숙한 흔적들을 남긴다. 영성신학은 그 흔적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영성신학 연구의 “본질적 요소”이라 일컬어 질 수 있는 것은 따라서 언어와 시공간의 바깥에 있는 신, 흩어져 있는 신비의 흔적들을 집중시키고 단일화하는 신/대타자 (the Other)가 아니라, 오히려 흩어진 채로 존재하는 수많은 소타자들(particular others), 그들이 저마다 다른 형태로 간직하고 있는 신/대타자에 대 한 기억이다. 영성신학은 신의 흔적을 제시하여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되, 신의 무게를 강요하지 않는다. 흔적들, 그 흔적을 간직하는 기억들은 언제나 파편으로 존재한다. 인간의 몸과 삶의 자리를 뚫 고 지나가는 신비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완전한 기억을 허락하지 않는다. 불완전하나마 (혹은 불 가능하나마) 원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또 그것이 단편적 이미지를 넘어서 하나의 의미로 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로지 나의 경험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때 발생한다. 고유하 고 독특한 한 개인의 경험인 것처럼 보이는 중세 신비가들의 신비체험조차, 그 체험들이 언어를 입고 의미로 발전되어 우리에게 전달되기 까지는 기록자들의 (“번역”을 동반한) 손과, 공동체/교 회의 검증, 첨삭, 신학화의 과정이 있었다.6) 따라서 영성신학은 제도교회와 교리에 얽매이지 않 으면서도 언제나 공동체적이다. 영성신학은 신을 향한 체험자의 열망이 신에게 닿거나 혹은 미끄 러지는 행위들을 포착하는 언어와 이미지에 관심을 갖는 동시에, 또 그 언어와 이미지들이 동시 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충격과 그에 대한 반응으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한다.7) 그 공동의 경험 을 통해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재구성되고, 마침내 공감의 영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쫓으며, 영성신학은 신비에 관한 조각그림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조각그림은 또 다른 기 억과 경험이 개입될 때 언제나 균열되고 해체된다. 그러므로 완성될 가능성은 영원히 없다. 언제 나 시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듯 신에 관한 기억을 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작 기억의 파편을 채 집하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신은 과연 살아 있는 신일까? 이미 숨이 5) Sandra M. Schneiders, Exploring Christian Spirituality: Essays in Honor of Sandra M. Schneiders, IHM (2006) 6) 힐데가르트 성인(1098-1179)이 처음 비전을 보기 시작한 것은 세 살 때였으나, 그녀가 팔마(Volmar)를 통해 자 신의 체험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1141년이다. 그 전까지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경험을 숨겼고, 그녀의 비전은 영성의 의미망 안으로 포섭되지 않았다. 7) Michel de Certeau, “Culture and Spiritual Experience,” trans. J.E. Anderson, Concilium, 19 (196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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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신의 몸을 해부하여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려는 검시관의 역할을 자청하는 것이 아니라면, 혹은 이미 떠나간 신을 애도하기 위해 그와 나누었던 추억을 공유하는 장례 절차를 마련하는 것 이 아니라면, 기억 너머의 “실체”보다 기억 자체에 고착하는 영성신학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고통의 현장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신을 사유하고 표현하는가라는 질 문과, 영성신학이 채집하는 신에 관한 기억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위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 해, 나는 신약성서가 기록하고 있는 고통과 혼란의 현장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어쩌면 세월호 이 후 한 달이 지난 오늘과 닮아 있는 그날, 죽음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던, 공포와 거부와 망각이 혼재하고 있었던, 그의 시체가 사라진 밤과 그것을 발견한 이른 새벽의 무덤가로.

Ⅱ. 빈무덤: “붙잡지 말라” (Noli me tangere), 대신 기억하라, 소문을 퍼뜨리라 1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 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 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 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3이 말을 듣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곧 떠나 무덤으로 향하였다. 4두 사람이 같이 달음질쳐 갔지만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다. 5그는 몸을 굽혀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에 들 어가지는 않았다. 6곧 뒤따라온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가 그도 역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7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8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9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10 두 제자는 숙소로 다시 돌아갔다 (요한 20:1-10)

예수의 부활발현 설화와 함께 등장하는 빈무덤 설화는, 아마도 가장 까다롭고 가장 표현하기 힘든 신학적 주제들 중 하나이겠지만, 대체로 부활 전승을 입증하거나 강화하는 증거로 채택되어 왔다. 가령, 칼 바르트 (Karl Barth)는 빈무덤이 직접 부활을 증언하지는 않지만,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호(sign)”라고 설명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빈무덤은 부정신학(via

negativa)적인 방식으로, 부활한 예수의 몸이 목격자들의 시야에 드러났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모 든 오해의 소지들을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부활 사건의 구체적이고도 객관적인 실재성을 입증한 다.8) 무덤의 공백이 역설적으로 부활 신비를 표현할 가장 적절한 이미지라는 바르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나는 빈무덤 설화와 부활발현 설화의 연속성과 부활의 객관적 실재성을 강조하는 바 르트를 비롯한 주류의 읽기에 일단 거리를 두며, 오히려 빈무덤의 발견을 통해 발생한 “단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진리 선포 방식의 급진적 변화에 주목하려 한다. 그날의 상황을 살펴보자. 빈무덤 사건을 전달하는 요한 복음서 기자의 문체는 숨가쁘고 혼란스 럽다. 바로 며칠 전, 제자들은 동료의 배신을 통해 무고한 스승이 잡혀 가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포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대신 스승의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무자비하 게 매질 당하고 고깃덩어리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는 스승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고 한다. 제자들은 다만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숨어 있어야 했다. 언제 그 폭력의 손길이

8) Robert Dale Dawson, The Resurrection in Karl Barth, (Great Britain: Ashgate Publishing Limited, 2007),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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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므로. 그러나, 아무리 철저히 숨는다 한들,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승이 죽어 가는 모습이 상상 속에서 떠오른다. 악몽이다. 죽음의 적막이 오히려 평화로울지 모 르겠다고 생각한다. 스승은 그렇게 사라졌다. 잔인한 기억만 남긴 채. 제자들은, 스승을 따르던 여인 막달레나 마리아로부터 이른 새벽 황망한 소식을 듣는다. 스승 의 시신이 사라졌단다. 새벽길을 재촉하여 달려온 그들은 무덤에 도착해 돌문이 굴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스승의 시신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아니면 스승을 남겨 두고 달아났던 죄책감이 텅 빈 무덤의 냉기를 타고 목을 죄어 올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꺼림칙했지만, 급한 성격을 누를 수 없어 기어이 무덤에 들어가 보고야 만 베드로는 스승의 부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동료에게 그 텅 빈 공간을 낱낱이 묘사하여 일러준다. 수의와 수건의 위치까지 언급하며, 아주 자세히, 그는 전한다. 스승은 이곳에 없다. 제자들이 예수를 잊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끌려가기 전, 예수는 그들에 게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 했다.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나 얼마 안 가서 다시 보 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너희가 근심에 잠길 것이나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도 했다.9) 예수는 여러 번 반복적으로 이 말들을 남겼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건만, 베드로도, 다른 제자도, 스승의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스승의 시신이 사라졌다. 누가 스승의 시신을 훔쳐 갔 는지 모른다. 파장이 적지 않을 사건이다. 어쩌면 불의한 세력들에 의해 스승이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결정적인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기억했어야 했다. 되살아나리란 그 말이 기억나지 않았다면, 스승이 아무 죄 없이 죽어 갔다는 사실이라도, 그것도 아니라면 스승이 그들 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라도 기억해 내야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승의 시신이 사라진 충 격적인 현장에서, 제자들은 기억을 포기했다. 상실의 상처가 너무 컸던 것일까? 혹은 죄책감이 너무 무거웠던 것일까? 아니면 시신이 사라져 스승의 무덤가를 찾아올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실 은 안도했던 것일까? 그들은 혼잣말로 되뇌었을지 모른다. 스승은 그저 사라졌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깨를 늘어뜨리며, 혼란스러워 하며, 두려워하며, 근심하며, 그 들은 숙소로 돌아간다. 그들은 그렇게 망각으로 도망친다. 직접 보았던 것, 직접 들었던 것들을 제자들은 그리도 쉽게 잊었다. 섣불리 그들을 비난하지 말자. 그들의 망각은 어쩌면 타당하다. 그들은 직접 보았기 때문에 믿었고, 직접 들었기 때문에 믿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보고 들을 스승은 없다. 스승은 사라졌다. 스승에 관한 이야기와 소 문들이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 는 말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스승 예수가 반 로마 정치범으로 처형된 이상, 제자들이 처한 정치적 조건 또한 위태롭다. 무슨 확신으로 죽음의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스 승의 말로를 따르겠는가? 흥미로운 것은, 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소문만이 여기저기 떠도는 혼란 스런 상황을 부활한 예수가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숙소로 돌아간 후, 부활한 예수는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그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의 말과 행동이 뜻밖이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뽀니!" 하 고 불렀다. (이 말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17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9) 마르코 복음 8:31; 마태오 복음 17:22; 루카 복음 9:22; 요한 복음16: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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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 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고 일러주셨다. 18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 서 자기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10)

막달레나는 다시 살아나리라 했던 스승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어쨌든 그녀 또한, 예수가 동산지기와 같은 평범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나타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 틈에 뒤에 와 서서 이름을 부르는 예수를 보고 그녀는 놀라 소스라친다. 그리고 예

수의 몸을 향해, 다시 달아날까 두려워서였을까, 황급히 손을 뻗친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의 손 을 뿌리친다. “붙잡지 말라.”10) 나를 건드리지 말라. 붙잡고 만져 나를 확인하려 하지 말라. 왤 까. 애타는 막달레나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한 피가 도는 몸의 온기를 전해 주었을 법도 한데,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간 제자들을 쫓아가 당장에라도 모습을 드러내며 똑똑히 보아 라, 내가 돌아왔다라고 말했을 법도 한데,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막달레나의 안타 까운 손을 거부했다. 대신 그녀에게 입소문을 내 달라고 청했다.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해라. 나를 대신하여, 내가 곧 하느님께로 올라갈 것을 그들에게 알 려라. 소문을 퍼뜨려라. 이 최초의 발현을 뒤따른 발현설화 대다수 또한 기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예수의 부활 사건에 극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의 부활은 가까웠던 이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만큼 초 라했을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 부활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거나 정체성을 천명하는데 소극적 이었다. 부활한 예수는, 심지어 제자들과 함께 엠마오로 향하는 길을 오랫동안 같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낯설었다. 나타났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 지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루카 24: 13-32).11) 예수는 확신이 필요한, 진리를 붙잡고 싶은 제자들의 욕구를 만족 시키는데 큰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그런 시도를 불편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러나, 이렇듯 가뭇없이 왔다간 예수의 출몰을 묘사하는 복음서의 모든 발현설화가 공통으로 기 록하고 있는 것은 “소문을 전하라”는 예수의 부탁이다. 가서 내 대신 전하라. 나에 관한 이야기 들을 퍼뜨려라. 예수의 청을 받은 제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누구는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 부치 고 나서 그의 부탁을 행동에 옮기기도 하고 (마르코 16:20; 요한 20:18), 누구는 그가 남기고 갔 다는 말을 믿지 않기도 하고(마르코 16:11-13), 또 누구는 자기들끼리 추억을 나누며 그를 애틋 하게 그리워하기도 한다(루카 24:32). 부활 이후 예수의 모습을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진리가 선포되는 방식(계시)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통해 직접 선포되던 진리는 이제 자취를 감추 었다. 이제 진리는 그를 알았던 자들의 기억에 존재하고 그들의 증언을 통해 전달된다. 진리 자 체(예수)가 명증성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제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 증언을 믿는 것뿐이다.12) 그 변화는 빈무덤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빈무덤이 보여 주 10) “붙잡지 말라”라는 뜻의 라틴어 문장 “Noli me tangere는” “만지지 말라” 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11) 예수의 부활발현 설화가 등장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1)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 (마르 16:9-11; 요한 20:11-18); 2) 두명의 제자에게 나타나심 (마르 16:12-13;루카 24:13-32); 3) 11명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마 르 16:14-18; 마태 28:16-20; 루카 24:36-49; 요한 20:19-23); 4) 승천과 선교의 시작 (마르 16:19-20; 루카 24:50-51). 이들 중 예수가 적극적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은 11명 제자들에게 발현한 설화들이다. 12) 이 부분은 미셀 드 세르토 (Michel de Certeau)의 “The Gaze of Nicholas of Cusa”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적용한 것이다. 이 글에서 세르토는 니콜라스 쿠사(Nicholas of Cusa)의 “On the Vision of God” (1453)에 드러난 “보는” 행위에 따라 드러난 진실과 다수의 증언을 통해 표현 되어지는 진실사이의 괴리에 관해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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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공백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죽음과 삶, 절망과 아주 미세한 희망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그 블랙홀 같은 공간에 남아 있는 것은 예수의 수의, 죽은 이의 흔적뿐이다. 제자들이 처음 목격 했던 당시, 빈 무덤은 그들이 이전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예수, 진리 자체를 시선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소실점이었다. 그러나 빈 무덤은 그와 동시에, 예수의 말과 행위들을 저장 하고 있던 제자들의 기억이 예수가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빈무덤 안을 엄습해 오던 상처의 기억에서 벗어나 어서 빨리 망각으로 도망치고 싶어하던 제자 들을 붙잡은 것은 “나에 관한 소문을 내 달라”하던 예수의 청이다. 혼자 그 청을 들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막달레나와 같이 오해를 무릅쓰고 혼자라도 나서 스승이 되살아났다는 소식을 전할 용기가 제자들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스승을 함께 기억하 는 동료가 있었고, 스승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 기억은 이 내 증언을 불러 일으켰고, 증언은 소문이 되었다. 너도 나도 단편적으로 갖고 있던 스승에 관한 기억들이 내 입과 동료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 오기 시작했다. 스승에 관한 기억들은 빠르게 회복되고, 빠르게 살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빈 무덤의 공백은 봇물처럼 넘쳐흐르는 기억과 증언과 소문들을 담을 거대한 공백이 되었다. 기억은 마침내 진리를 대신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체가 사라진 무덤이 줄 파장을, 그의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부재가 촉발시킬 엄청난 힘 을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마태오 복음에는 그들이 빌라도 에게 다급하게 몰려와 시체가 없어질 때를 대비해 경비를 삼엄하게 해 달라 부탁하는 장면이 등 장한다. 63 “각하, 그 거짓말쟁이가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만에 자기는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것을 저 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64 그러니 사흘이 되는 날까지는 그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 하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백성들에게는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떠들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심한 혼란 을 일으킬 것입니다.”(마태오 27:63-64)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들은 영리하게도 예수 부활의 소문이 예수가 살아 일으킨 소요보다 “더 심한 혼란을 일으킬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은연 중 그들이 파악했던 예수의 정 체성을 제자들에게로 전이시키고 있다. 63절에서 그들은 예수를 “거짓말쟁이(πλάνος)”라고 부른 다. 이어 64절에서는 제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다.13) 진리 선포의 담지자가 예수 한 사람에 서 제자들로, 익명의 다수들로 확장될 것을 그들은 진리 자체보다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움직이게 하는 소문 혹은 유언비어의 힘이 지배세력들을 위협하는 거대 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주목하고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로 신학화한 민중 신학자 안병무의 시각은 실로 날카롭다.14)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부활 발현 이후 걷잡을 수 없이 퍼지던 소문들을 Michel de Certeau, “The Gaze of Nicholas Cusa,” trans. Catherine Porter, diacritics 17 (1987): 2-38. 13) “κέλευσον οὖν ἀσφαλισθῆναι τὸν τάφον ἕως τῆς τρίτης ἡμέρας, μή ποτε ἐλθόντες οἱ μαθηταὶ κλέψωσιν αὐτὸν καὶ εἴπωσιν τῷ λαῷ Ἠγέρθη ἀπὸ τῶν νεκρῶν, καὶ ἔσται ἡ ἐσχάτη πλάνη χείρων τῆς πρώτης.”김근 수, [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68: “빈무덤이 예수 부활 보증하지 않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년 3 월 13일) 참고.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99. 14)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21 세기 민중신학: 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 김진호, 김영석 편저 (삼 인 출판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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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예수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했고, 그 기억을 통해 자신들이 누구인가 묻기 시작했고, 비로소 예수의 적대자들이 두려워 떨 만큼 엄청난 파급력을 갖춘 공동체의 기억으로 발전시켰다. 진리는 사라지고, 대신 진리를 경험했던 이들의 기억과 증언으로 채워진 빈 무덤은, 이제 어느 누구도 자신과 기억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 없이 혼자의 기억에 의존해 진리를 선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말하자면, 빈무덤 이후, 진리를 홀로 직접 대면하거나, 자신이 보고 기억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폐기 되었다. 빈무덤의 공백은 또한 신학적 유비 (analogy)의 가능성조차도 흔들어 놓았다.15) 진리 자체가 모습을 감추어 버린 한, 그리고 그 공 간에 수 없이 떠도는 명확하지 않은 기억들과 증언들을 통해서만 진리를 유추할 수 있는 한, 어 느 누구의 기억이 더 원형에 가까울 것이다, 더 정확할 것이다 판단할 기준은 없다.16) 좀 더 가 까운, 좀 더 정확한 기억을 요구하는 열망들은 물론 존재한다. 그 열망들은 수많은 작고 소소한 기억들 위를 유영하며 어떤 기억들에게는 더 높은 위치를 부여하고, 어떤 기억들은 소멸시켜 버 리는 권력을 행사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다른 열망들과 부딪쳐 공중분해 되거나, 추락하여 다른 기억들과 뒤섞여 버릴 뿐이다. 무덤은 비었다. 그는 사라졌다. 그러나 부재를 통해 그는 역설적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는 불멸 의 기호가 되었다. 이 불멸의 기호, 텅 빈 무덤은 누구나 신을 상상할 수 있고, 누구나 신에 대 해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급진적인 개방이요 허가(permission)인 동시에,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신의 모습을 그려 낼 수 없다는 준엄한 경고다.17) 이제 예수는 오로지 “나도 그를 기억한다,” “어쩌면 나도 그를 알 듯하다,” 라고 서로서로 조심스럽게, 끊임없이 의심하며, 그러나 그칠 줄 모르고 중얼거리는 수많은 이들의 증언 속에서만 그려 질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이들의 기억과 증언을 참고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홀로 예수를 “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안다”라고 하는 말은 “나는 예수를 아는 다른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라는 말과 일치한 다.18)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표현을 빌자면, “어느 누구도 혼자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오로지 다른 이들을 참고할 때만,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와 다른 그들의 생각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 때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19) 신이 침묵한 세상에서, 비어 버린 무덤 앞에서, 스승의 시신이 사라진 흔적 앞에서, 제자들은 망각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돌아왔다. 그들은 사람들의 기억이 자신의 기억을 지탱하는 한, 기억 과 기억이 엮이는 한, 진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이름 없는 이들이 기억하는 스승 예수를 만나러, 그들의 기억에 자신들의 기억 또한 얹기 위해.

15) De Certeau, “How is Christianity Thinkable Today?” 145; Fredrick Christian Bauerschmidt, “The Otherness of God” in Michel de Certeau—in the Plural, ed. Ian Buchanan, (Duke University, 2002). 358. 16) 유비는 모든 유비들이 모방하는 원형이 존재하며, 특수한 어떤 형태의 유비는 원형을 더욱 가깝고 정확하게 반 영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세르토가 유비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은 De Certeau, Ibid., 148. 참고. 17) De Certeau, “How is Christianity Thinkable Today?” 143-145. 18) Bauerschmendt, 358-359. 19) De Certeau, The Mystic Fable, 231, 258, and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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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사회적 영성: 기억의 지속과 확장 그가 사라진 무덤,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만들어 내는 북적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찬 빈 무덤의 기억을 안고 팽목항으로 돌아오자. 실종자 가족들은 아직도 잃어버린 이들의 이름을 부르 며 부둣가에 나와 앉아 있다. 서울과, 안산과, 진도를 오가며 유가족들은 울부짖는다. 우리는 마 치 그날 빈 무덤을 찾아간 제자들처럼 하릴없이 희생자들의 영정과 가족들 주변을 배회한다. 예 수의 시신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혼란스러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떨구던 제자들처럼, 우리는 오늘 이 현실이 혼란스럽고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삼백명이 넘는 생명들을 그렇 게 허망하게 잃어 버리는 동안 신이 과연 무엇을 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묻고 또 묻는다. 우리 는 예수의 몸에 손을 뻗어 붙잡으려 한 막달레나처럼, 신이 살아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신이 그저 손을 놓고 무력하게 혹은 잔인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믿음이 고통에 대한 처방이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는 우리는 신에 관한 인식론적인 존재 증 명 자체가 곧 처방이 되리라는 환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빈 무덤 앞의 예수는 뜻밖의 제안을 하고 있다. 고통과 혼란의 현장에서 예수가 제시한 것은 명증한 진리가 아니었다. 존재 증명이 아니었다. 그는 붙잡히지 않았다. 머물지도 않았다. 어떠한 처방도 내리지 않았다. 대신 곧 떠날 것을 상기시키며, 진리가, 자신에 관한 기억이 공동체를 통해 재생되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우리 에게 일러 주었다. 기억하라. 또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 그들의 기억을 자극하고, 소 문을 퍼뜨리라. 빈무덤 앞에서 예수가 건넨 부탁은 신을 사유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죽음으로써 기꺼이,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권위를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양 도했다. 진리는 무덤에서 사라졌다. 산산이 흩어져 사람들의 기억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의 몸을 입고 돌아왔다. 이제 그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몸을 통해서만, 그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에 관한 기억을 품고 산다는 것, 그 기억을 말로 꺼내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을 의미하며, 무 엇보다도 그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찾는 진리는 해체되고 재구성되기를 반복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실 너머로부터 “주어지고” “제시”될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에 관한 동일한 기억이 존재할 수 없듯, 그 기억에 기반하여 재구성될 진리 또한 이견을 끊임없이 동반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기억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불일치와 소란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로 성 장할 것이다. 따라서 야만의 세상을 살아가며 예수를 만나고 싶다면,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예수 를 만나고 싶다면, 예수가 부탁했듯,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 그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기억 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알아 볼 것이고, 마침내 그를 알아 볼 것이다.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빈무덤의 공백을 담아 낼 수 있는 신학적 상상력 과 언어다. 선언과 교리와 변증적인 수사학, 오늘 우리들의 신학적 사유와 언어를 지탱하고 있는 이들 견고한 표현 양식들은 빈무덤의 공백을 담아내기에, 세월호의 상실과 절망과 혼란과 불확실 함을 담아 내기에 적절한 그릇이 아니다. 선언은 입증된 기억을 요구한다. 교리는 권위를 갖춘 증언을 원한다. 변증에 요구되는 수사는 근원이 불분명한 말들을 혐오한다. 이들은 일관성 (unity)과 동질성(uniformity)을 원칙으로 삼기에, 다수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고통스런 웅 얼거림을 담아 낼 수 없다. 불확실한 기억과 소문들이 움직이고 퍼져 나갈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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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기억과 소문을 확장하고 지속하기에 지나치게 단단하고 무겁고 매끈하다. 빈무덤의 언어는 연약한 언어다. 수천 수만의 서로 다른 기억을 감싸 안을 만큼 품이 넉넉한 언어다. 결이 성근 바구니처럼 소문이 들고 날 수 있는 언어다. “우리가 진리를 갖고 있다”고 천 명하는 언어가 아닌, 갖고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그러므로 당신의 기억이 필요하고 당신의 참여 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언어다. 이 느슨하고 약한 언어는 질서와 체계와 명령을 준행하는데 익숙지 않다. 대신 흩어지고, 일탈하고, 저항하고 싶어한다. 홀로 높이 서서 희망을 선포하기엔 너무 가냘프다. 대신 군중들 속으로 낮게 숨어들어 희망을 추적한다. 원칙과 절차와 방식을 제시 하며 기도를 가르칠 권위도 없다. 대신 탄식 속에서, 분노 속에서 기도를 듣는다.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정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형체도 없이 웅얼웅얼 머리 속에서 맴도는 예수에 관한 기억들, 세상 밖에 나오기 두려워하는 기억들에 다가가기 위해 과감히 “기독 교 적인 것”을 포기한다. 그렇게 흩어진 제 각각의 기억들을 모아, 느리지만, 영영 불가능할 수 도 있지만 조금씩 예수의 흔적을 찾는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빈무덤의 상상력과 언어들을, 나는 사회적 영성이란 우회적이고 탈 권위 적인 신학영역에서 발견한다. 영성신학은 빈 무덤으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존재로 부터 출발하는 영역이 아니라 부재로부터, 흔적으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영성은 오직 기억에 의존하여 모인 수많은 이들이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기억을 꺼내 놓을 공간을 허락한다.

그리고 채 언어가 되지 못한 그들의 웅얼거림에 귀를 기울인다. 흩

어졌던 천개의 바람들이 서로 얽힌다. 목적도 지향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기억들이 뒤 섞여 공공 의 기억이 된다. 수동적이고 주어진 규칙에 의해 움직여 질 뿐이라 생각되었던 사람들이 기억에 의지해, 마침내, 움직인다. 고통과 혼란의 중심에서 설득력 있는 해결책이나 정치적 행위를 제시 하는 것은 사회적 영성의 영역이 아니다. 진리를 입증해 줄 권위도, 또 그 진리를 확인하고 선포해 줄 공식적인 언어도 가 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영성은 사회와 교회의 제도적 장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 로운 까닭에, 기민한 활동성이 있다. 부둣가를, 분향소를, 거리를, 학교를, 사무실을, 부엌을 넘나 들며 게릴라적인 방식으로 기억을 채집하고, 개개인의 것으로 남아서는 의미 없을 그 기억들을 다른 경험과 연결시킬 수 있다. 그 기억을 통해 거칠더라도 새로운 상징과 개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기존의 신학 언어들이 그려 놓은 의미 망에 갇혀 분출되지 못하고 있던 신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영성은 시인의 눈과 손을 닮아 있다. 시인은 직설적으 로 대상을 표현하지 않는다. 명령하지도, 입증하지도 않는다. 대신 사라져 버릴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저 그치지 않고 노래할 뿐이다.20) “어지러운 현(絃)들 속으로” 손가락을 넣으 며, “고통으로 부서진 가슴들을” 끈질기게 노래할 뿐이다.21) 기억이 뒤섞이는 공간, 사회적 영성이 활동하는 이 공간의 가능성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파편 으로 떠도는 작고 소소한 기억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메커니즘에 의식적, 무의식 적으로 포섭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 무질서한 공간은, 끊임없이 정체성을 요구하고, 규칙과 위 계를 만들어 내며, 기억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시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조작되거 나 재현된 기억을 자신의 기억이라 착각하고 살아갈 수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지배 이데올로 기와 제도에 포섭되고 균일화한 기억은 이내 급진성을 잃어버리고 정치인들과 선동가들의 상투 적인 레토릭으로 변질될 것이다. 마치 예수의 기억이 그렇게 변질되어 왔듯 말이다. 20) Mystic fable, 299 21) 이자크 카츠넬존 (Yizhak Katznelson), “첫번째 노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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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영성의 역할은 기억이 포섭되기 이전에, 균일화하기 이전에 표현될 수 있는 계기를 마 련하는 것이다. 그러한 계기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되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이들이 서로 만나 기억과 기억이 부딪칠 때 발생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영성은 “우리”라는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타자들을 지침 없이 불러낸다. 그리하여 기억의 파편들이 서로 부딪쳐 더욱 잘게 부서져 또 다른 이미지로, 언어로, 의미로 발화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작고 불명확하고 불안정한 기억들의 느 슨한 연대를 꾸려 내는 것이 사회적 영성이 제시할 수 있는 비전이다. “기억하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소박한 부탁은 예수가 그의 사람들에게 건넨 가장 최소한 의 요구이면서, 가장 본질적인 요구였다. 그리고, 이 부탁과 함께 예수가 가리킨 손 끝에는 사람 들이 있었다. 안락한 회당이 아니라, 완벽한 법전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었다. “기억해 달라,” “잊지 말아 달라,” 이 소박하지만 간절한 부탁을 오늘 세월호의 현장에서 우리는 다시 듣고 있 다. 이 부탁이 향하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을 보길 바란다. 끈질기게 모여들 사람들을. 교회, 교 리, 이념, 정치, 법, 제도, 체제가 아니라 사람들을. 망각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로서로 기억 을 지탱해 주는 사람들을. 기억에서 의미를 찾고 변화를 만들려는 사람들을. 그리하여 언젠가, 머지않은 내일, 우리는 세월호가 잃어버린 생명들을 끔찍한 참사의 희생자들로 기억하는 것이 아 니라, 마침내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는 세상을 열어 준 영웅들로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사회적 영성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로, 요구한다. “잊지 말라. 한 달 뒤에도, 1년 뒤에 도, 평생, 잊지 말아 달라.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당신이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다른 이에게 보여 줘라. 잊지 않았다는 소문을 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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