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_산업통상자원부 경제다반사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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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월 CONTENTS

■역동적인 ‘청마의 해’ 2014년의 핫 키워드는? ■설탕이 부의 상징이었다고? ■아날로그 시리즈 비디오테이프 ■탈모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 서울가발박사 장만우 명장을 만나다 ■IT를 만나 진화하는 생체인식기술


2014년 2월호 > 通하는 테마

역동적인 ‘청마의 해’ 2014년의 핫 키워드는? 2014년 갑오년은 가슴에 불을 안고 태어난 ‘청마’의 해라고 합니다. 동양에서는 청마를 상서롭고 창의적 힘을 가진 동물로 보고 있는데요, 2014년 갑오년은 말이 지닌 역동성과 청색의 창의력이 더해져 매우 활기차고 크리에이티브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분석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몇 가지 예측이 나와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와 한국트렌드연구소, KT경제경영연구소 등이 발표한 2014년 대한 민국 핫 키워드입니다. 특히 지난 2009년부터 매년 새로운 소비트렌드를 읽어주는 서울대 소비 트렌드분석센터는 2014년이 ‘뜻밖의 결과를 내는 다크호스의 해’가 되길 바라며 2014년 10대 소비트렌드를 ‘DARK HORSES’로 정리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또, 한국트렌드연구소는 복·융합 시대를 이끌 새로운 해법으로 2014년의 문화코드를 ‘7가지 블렌딩 레시피’에 비유했고, KT경제 경영연구소는 기술의 변화가 무쌍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2014년에 주목할 산업 양상을 짚어 시장을 바라 보는 관점을 제시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예측한 2014년 대한민국의 핫 키 워드들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가볍지만 미세하게 파고든다? ‘2014 소비트렌드’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이기도 한 김난도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책으로 발간한 <트렌드코리 아 2014>는 올해의 소비트렌드를 짧지만 강력하고, 작지만 깊은 힘 을 가진 키워드로 정리한 것이 특징입니다. 김 교수가 이 책에서 제시한 10개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참을 수 있는 ‘스웨그’의 가벼움(Dear, got swag?) 힙합 뮤지션이 으스대는 기분을 묘사할 때 쓰는 용어인 스웨그는 쉽게 말해 거들먹거리다, 뻐기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김난도 교수는 스웨그의 문화적 특성을 자기모순이 있 더라도 스스로 만족하는 멋, 본능적인 자유로움, 기성의 것과 선긋기로 요약합니다. 즉, 경 박한 여유와 허세까지 겸비한 스웨그는 한마디로 ‘경박단소한’ 사회적 경향으로 정의되는 데, 김난도 교수는 이런 추세를 참기 어렵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회적 흐름으로 진단 하고 있습니다.

2. 몸이 답이다(Answer is in your body) 이것은 정신노동에 지친 현대인들이 말 그대로 몸을 쓰는 텃밭 가꾸기, DIY, 등산 등 직접 만지고 느끼고 움직이는 노동적 가치를 통해 몸과 마음을 피로를 해소하려는 일종의 ‘노동 테라피’를 즐길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3. 초니치, 틈새의 틈새를 찾아라(Read between the ultra-niches) 기존의 니치(틈새)를 넘어 초(超)니치로 시장이 더욱 세분화될 것이란 전망입니다. 김 교수 는 책에서 “니치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 초정밀한 소비자 욕구에 맞춰 극세분화 된 시장이 형성될 것”이며 “대다수가 아니라 극소수가 원하는 ‘흩뿌려진 니즈들이’ 대안”이라고 진단 했습니다.

4. ‘어른아이’ 40대(Kiddie 40s) 탈권위적 사회 분위기와 다양한 해외 문화를 경험한 40대가 바로 소년의 감성을 그대로 지 닌 ‘어른아이들’이며, 이들이 미용·여가·문화 등의 방면에서 2014년의 문화와 트렌드를 이 끌어가는 선도자로 떠오를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5. 하이브리드 패치워크(Hybrid Patchworks) 각양각색의 헝겊 조각을 이어붙인 공예품을 의미하는 것처럼, 융합과 조합의 가치 창출이 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는 관측입니다. 김 교수는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다양한 산업 이 결합하거나, 개별 영역의 특성을 교배하는, ‘잡다한’ 조합을 통해 패치워크가 시장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낼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6. ‘판’을 펼쳐라(Organize your platform) 기업이나 정부는 판(환경)만 조성하고 소비자 스스로 아이디어, 상품, 기술, 사람을 모아 ‘판 을 펼쳐’ 나가는 새로운 소비환경을 말합니다. 김 교수는 아이디어·상품·기술·사람이 한곳 에 모여 예상치 못한 수익과 시너지를 발생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낸 ‘판 1.0’시 대가 2014년에는 새로운 판 2.0시대로 넘어갈 것이라 관측했습니다.

7. 해석의 재해석(Reboot everything) “이미 익숙한 것에 약간의 낯섦을 더해 최첨단 기술을 익숙하게 만들거나 익숙한 가치를 신 선하게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이 시장에서 포착된다.”고 말하는 김 교수는 이런 해석의 재해 석 전략이 가장 안전하면서도 실패율이 낮은 혁신의 방편이 될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8. 예정된 우연(Surprise me, guys!) ‘예정된 우연’을 가장한 탄탄한 시나리오가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마케팅 수단 이 될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김 교수는 그 예로 매월 실력 있는 신진 디자이너들이 만든 패 션 아이템을 70~80%싼 가격에 보내주는 서비스인 간호섭 홍익대 교수의 ‘바이박스’를 들 었습니다. 보낸 사람의 안목을 신뢰하지만 내용물을 모르기 때문에 늘 선물을 받는 것 같은 흥분을 느끼게 되는 새로운 경험인 것입니다.


9. 관음의 시대, ‘스몰브라더스’의 역습(Eyes on you, eyes on me) 국가나 정보기관 같은 ‘빅 브라더’가 지배하던 세상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정보 노출로 다수의 작은 감시자들인 ‘스몰 브라더스’가 생겨나 이들이 사람들을 감시하는 ‘감시 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10. 직구로 말하라(Say it straight) 경쟁의 격화로 경쟁사의 제품을 깎아내리는 비교 광고들과 상대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대중 문화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본격적인 직설화법의 시대에 우리나라가 들어섰다는 분석입니 다. 직설화법은 때로 매우 공격적으로 비치지만, 이를 통해 대중은 위계질서에 갇힌 수직적 소통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과 수평적 소통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흐름을 형성할 것이라 고 이 책은 관측합니다.

김난도 교수는 10가지 키워드의 머릿글자를 묶어 ‘DARK HORSE’라는 단어로 정리했고, 이를 우리가 마주하게 될 2014년의 소비트렌드로 정의했습니다.

복융합 시대를 이끌 새로운 해법 ‘2014 블렌딩 레시피’ 한국트렌드연구소의 키원드도 재미있습니다. 이 연 구소는 복·융합 시대를 이끌 새로운 트렌드로 다음 일곱 가지를 제시하며, 공간, 감각, 교육, 화폐 등 다 양한 영역에서 전과 다른 ‘트렌드적 탈출’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출처: 한국트렌드연구소

1. 엔돌핀 디시(Endorphin Dishes) : 먹방, 짜파구리 같은 창의적인 레시피 개발에 이어 음식이 ‘심리적 허기’를 해소해주는 하나의 컨텐츠로 자리 잡을 것,

2. 엔분의 1잡 (1/n Job) : 한 사람 안에서 여러 가지의 가치가 나누어져 가치의 경험, 노 하우, 노동력 등이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낼 것,


3. 거리 트레킹(Street Trekking) : 거리에서 새로운 사람이나 제품, 문화를 만나고 그 안 에서 어울려 소통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문화가 창출될 것,

4. 넷샵(Netshop) : 디지털 수단을 소유한 소비자의 변화에 대응해 오프라인 매장이 모바 일을 결합한 새로운 전략을 내놓아 온·오프라인이 결합된 디지털 체험 트렌드를 형성할 것,

5. DMZ(Design Miracle Zone) : 경제적 불안정, 세대 간의 갈등, 빠른 변화, 경쟁 등 더 욱 다양해지는 불안들을 마음산업과 만난 공간에 디자인, 문화 등의 감성요소를 더해 사회 적 불안을 치유하는 트렌드를 만들 것,

6. 라이프 코더(Life Corder) : 일상을 편리하게 해주는 디지털 기능이 개인의 일상을 재 단해 디지털의 진화가 인간의 라이프스타일도 재정비해주는 현상이 나타날 것,

7. 탈주화폐(Escape from Money) : 최근 주목받고 있는 비트코인과 같이 디지털을 기 반으로 발행되는 가상화폐가 주류 화폐의 대체, 보완재로 사용되는 현상도 확산될 것이라 는 전망입니다.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 2014 ICT 이슈 보고서 스마트폰의 등장은 문화와 산업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이 런 점에 주목해 최근 ICT 산업분야별 주요 키워드를 선정해 현재 시장 상황 분석과 내년 시장 관 전 포인트를 제시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연구소가 뽑은 통신 분야의 키워드는 알뜰폰(MVNO)과 사물인터넷(IoT)입니다. 스 마트폰 및 LTE의 확산속도가 둔화되면서 알뜰폰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며, 그간 공공재나 산업시 설물 등에 한정되어 있던 사물인터넷 산업이 가전, 자동차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물론 창조경제 정책 지원에 따라 더욱 활발히 논의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둘째로 미디어 및 포털 분야는 스마트폰을 통한 OTT(Over The Top)서비스 이용의 확산과 모


출처 : KT 경제경영연구소

바일메신저의 글로벌 플랫폼 경쟁, 모바일 광고 시장의 다변화된 광고기법입니다. OTT서비스 란, 기존의 통신 및 방송 사업자와 더불어 제 3사업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드라마나 영화 등의 다 양한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인터넷 동영상서비스를 말하는데, 이 연구소는 OTT서비스가 2014년에 질적 성장과 함께 해외 및 인터넷 사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시화되면서 미디어 시장의 커다란 활력소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 IT서비스 및 제조 분야는 신성장 동력 발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포스트 스마트폰 단말 기로서 웨어러블 단말기의 안착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스마트기기의 사용 증가에 따라 모바일 정보보안 및 정보보호 등의 기능도 중요해질 것으로 KT연구소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IT 연계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2013년의 최대 화두였던 빅데이터 산업이 보다 뚜렷한 골격을 만들 어갈지의 여부와, 모바일을 넘어 오프라인까지 연계되고 있는 모바일 커머스 시장의 발전 가능 성은 어떨지 등을 2014년의 중요한 이슈로 관측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키워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새로 시작된 2014년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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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호 > 뻔(fun)한 자원이야기

설탕 부의 상징 달콤한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고된 일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단 것을 먹으면 피로와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지요. 당분이 뇌를 활성화시켜 행복감을 느끼 게 하는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의 분비를 증가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행복감을 안 겨주는 단맛의 원천, 설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천연감미료 설탕은 탄수화물로 포도당과 과당이 결합한 이당류인 자당(蔗糖, sucrose)입니다. 분자식은 C12H22O11로 사탕수수, 사탕무, 사탕단풍 즙액의 주성분이지요. 설탕은 이들 즙액에서 추출한 원당을 세척, 용해, 탈색, 여과, 농축, 결정, 분리, 건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정제된 설탕은 고운 은백색을 띱니다. 이것을 가열하면 색이 누런 황설탕 이 되고 황설탕에 카라멜 색소를 넣으면 흑설탕이 됩니다. 설탕의 원료인 원당은 열대·아열대 지 역의 경우 사탕수수에서, 한대·온대에서는 사탕무에서, 한대에서는 사탕단풍에서 채취할 수 있 습니다. 설탕은 공업용으로도 쓰이는데, 주로 가죽 제조의 유화제, 전기도금의 촉매제, 화학약품·알코 올·기타 의약품의 원료 등으로 사용됩니다.

설탕의 어원과 유래 설탕을 뜻하는 영어 단어 슈가(Sugar)는 인도 범어의 사르카라 (sarkara)에서 왔습니다. 사탕(Candy)도 사탕수수 진액을 고체 형태로 굳힌 범어 칸다(Khanda)에서 왔지요. 설탕은 기원전 325년 인류 역사에 처음 등장합니다. 알렉산더 대 왕의 인도원정대가 인더스 강에서 ‘꿀이 흐르는 갈대(사탕수수)’ 를 발견했다는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요. 사탕수수는 서기 1000년 경 스페인을 지배한 무어족에 의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됩 니다. 이후 200여 년간 스페인 지역에서만 재배됩니다.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

사탕수수는 콜럼버스에 의해 미주 대륙으로도 전파됩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향한 두 번째 항해 때 사탕수수를 배에 싣고 가서 서인도제도에 심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사탕수수는 중남미 로 빠르게 전파됩니다. 16세기 초엔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에 설탕공장이 세워집니 다. 1794년에는 독일 과학자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Andreas Marggraf)가 사탕무에서 설탕 을 추출해 내 유럽지역에 사탕무 산업이 크게 발달하게 됩니다.


이인로의 ‘파안집’ 에 등장한 설탕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명종 때 설탕이 처음 등장합니다. 이인로의 ‘파안집’에 처음 기록된 설탕은 중국 송나라에서 후추와 함께 들어왔고 귀한 약재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일본 은 우리나라에 공장을 세워 설탕을 생산합니다. 하지만 그 양이 작아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지요. 6.25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순수 국내 자본으로 설 탕을 생산합니다. 제일제당공업(현 CJ제일제당) 은 일본에서 들여온 설비에 원당을 넣고 몇날며칠 기계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설탕은 나오지 않고 애 꿎은 기계만 자꾸 고장이 났지요. 그러던 1953년 11월 5일 제일제당공업은 갖은 시행착오 끝에 드 디어 설탕생산에 성공합니다. CJ제일제당과 CJ그 룹은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1955년에는 삼양사가 설탕 생산에 뛰어들었고, 1956년에는 대한제당도 이에 합류합니다. 설탕 을 찾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자 동양제당, 금성제당, 한국정당, 해태제과 등도 이 사업에 진출하 지요. 그 결과 설탕은 공급과잉 사태를 맞았고 가격은 폭락하고 맙니다. 결국 일부 업체들이 생산 을 중단했고, 설탕산업은 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3사 체제로 굳어집니다.

국내 설탕업계의 성장 정부는 1950년대부터 1994년까지 설탕을 수입제한 품목으로 지정해 국내 산업을 보호했습니 다. 2010년까지도 수입 설탕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지요. 덕분에 설탕 3사는 오랫동안 호황을 누 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들 기업이 수년간 가격 담합을 했다는 사실을 적 발해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2010년부터는 관세율을 낮춰 경쟁을 촉진하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했습니다. 현재 국내 설탕시장은 1조 원 규모이며 이 가운데 수입 설탕의 점유율은 14%입 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의 1인당 설탕 섭취량은 22kg으로 1953년의 984g에 비해 20배 이상 증가 했습니다.


설탕의 인기와 변신 설탕은 명절 선물로 큰 인기를 끌었습 니다. 1960년대만 해도 최고급 선물은 단연 설탕이었지요. 당시 설탕의 백화 점 판매가격은 6kg에 780원, 30kg에 3,900원이었습니다. 일반 서민들에겐 너무 비쌌지요. 설탕은 돈 많은 사람들 만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이었습니다. 설 명절에 선물로 들어온 설탕 포대 수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바로 미터였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지요. 이처럼 고급품으로 부유층의 사랑을 받 았던 설탕은 1970년대에 대중화되면서 일반적인 선물로 자리를 잡습니다. 1953년 2만3900t 정도 생산되던 설탕은 최근 95만t으로 40배가량 증가했습니다. 반면, 가격은 많이 떨어졌습니다. 당시 설탕 값은 1근당 300환으로 소고기 가격의 두 배였다고 합니다. 최근의 설탕 값은 백설탕을 기준으로 했을 때 1kg에 1,700~1,800원선입니다. 한우 등심 1등급 1근 값 이 4만~5만원이니 설탕 값이 1/30수준으로 떨어진 셈입니다. 설탕과 각종 감미료가 넘쳐나는 요즘 설탕은 건강을 염려하는 소비자들로부터 비만의 주범으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업체들은 설탕의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설탕보다 200배 단맛이 강한 인공 감미료 아스파탐을 개발해 대체재로 사용하고 있고, 먹으면 살이 빠지는 기능성 설탕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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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호 > 아날로그 시리즈

이런 문구 기억나십니까? ‘옛날 어린아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 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 로써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90년대 영화를 보려 비디오테이프를 VTR(video tape recorder)에 넣으 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항상 나타나던 공익광고 문구였습니다. 이 문구는 워낙 많이 알려져 한 때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로 쓰이기 도 했죠. 당시 이 영화 비디오테이프들은 녹색과 붉은색의 표지 색 깔로 청소년용과 성인용을 구분했고, 그때만 해도 VTR은 엄청난


인기를 끌어 ‘안방극장’이라 불리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각 가정마다 하나쯤은 보유하고 있던 재산목록이었습니다. 자연 대여소도 많이 생겨 ‘으뜸과 버금’, ‘영화마을’ 같은 유명 체인점들이 생 겨나 성업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풍속도가 되었지만, 당시 신작 영화가 나오면 사 람들이 줄지어 대여소로 몰려들었고 인기 있는 영화는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며칠씩 기다려 야 했습니다. 이렇게 구한 영화들 가운데 소장하고 싶은 것들은 VTR 본체를 친구 집에 들고 가 몰 래 녹화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과 PC로 드라마나 영화는 물론 DMB로 TV까지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지만 당 시만 해도 영화를 집에서 본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정보기술(IT)의 발달로 DVD와 스 마트폰에 밀려 이제 사라지고 국내 생산마저 중단된 추억 속의 미디어기기, 비디오테이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비디오테이프 산업의 시초 비디오는 영상이나 TV의 영상 신호 또는 그러

한 영상들을 재현하는 전자기기나 장치 등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 용어는 음성 신호나 관 련 신호를 생성하고 재생하는 기기들을 가리키 는 오디오와 전통 영상 기록 매체인 필름과 비 교하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가정용 VTR이나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줄여서 비디오라 부르 기도 합니다. 영화 필름은 셀룰로우즈라는 재 질에 특수유제를 사용하여 이미지를 감광시키는 광학과정을 통해 영상을 기록하지만, 비디오는 카메라 렌즈가 포착한 이미지를 전자 신호로 전환시켜 자성을 띤 비닐테이프에 자기형태로 기록 합니다. 이렇게 기록된 영상은 영화처럼 현상이나 프린트라는 번거로운 작업을 거치지 않고도 재 생기인 VTR을 통해 즉시 볼 수 있고, 이미지가 이전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조작을 해 영상 효과를 쉽게 구사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테이프가 탄생하게 된 유래는 이렇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 TV가 본격 보급되어 방송 산 업이 호황을 누렸을 때 업계는 미국 동부 지역의 시청자와 서부 지역 시청자가 서로 같은 프로그 램을 시청하도록 하기 위해 생방송을 촬영해 필름을 만들고, 그것을 동서로 멀리 떨어진 스튜디오 로 가져와 송출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암펙스사의 직원인 레이


돌비와 찰스 진스버그는 비디오테이프 녹화장치(VTR)라는 영상기록 및 재생 장치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텔레비전 카메라에서 화상을 포착해 그 영상을 자기 테이프에 저장하는 획기적인 장치를 1956년 4월 암펙스사가 대당 5만 달러에 시판하자 단 4일 만에 500만 달러의 주문이 쏟아 졌고, 이를 계기로 이 회사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암펙스사가 새로운 장치로 시장을 휩쓸자 1968년 일본의 가전메이커 빅터사(JVC)와 소니사도 이 VTR을 출시했습니다. 비디오테이프 생산과 관련한 기술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0년대였습니다. 1975년 일 본의 소니사는 자체 기술로 소니 베타라는 방식의 가정용 VTR을 내놓았고, 이에 맞서 빅터사는 VHS 방식의 VTR을 내놓았습니다. 소니사가 개발한 가정용 베타 방식은 1cm 정도 넓이의 자성 테이프에 VHS 방식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화상을 녹화할 수 있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초기 1시간 남짓하던 녹화시간도 1980년대에는 3시간 15분까지 늘어났습니다. 반면 빅터사의 VHS 방식은 카세트의 크기가 크고 테이프 감는 속도가 느린 반면 최대 2시간 분량을 녹화할 수 있었고, 1980 년대에는 3시간까지 녹화가 가능했습니다. 소니는 VHS와의 차별화를 강조하기 위해 화질이 더 욱 선명한 Beta-HiFi, Hi-Band, 카메라 일체형 VTR, ED-Beta 등의 규격을 내놓았고, 빅터사는 도시바, 파나소닉 등 다른 가전업체들과 제휴해 연합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결국 시장은 기술적으 로는 뒤떨어지지만 값이 싸고 물량이 풍부한 VHS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후 VTR시장에서는 VHS가 표준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베타방식의 소니 제품은 VHS와 호환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밀려나 소수 영상 전문가들의 기기로 사용되며 힘을 잃었습니다.

호황을 이루던 국내 비디오테이프 산업 우리나라에 비디오테이프 산업이 시작된 것은 1981년부터입니다. 이 해에 국내에 처음으로 비디 오 프로덕션이 설립되었고, 이때부터 국내 비디오산업은 ‘제3의 스크린혁명’으로 불리며 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수 부유층을 시작으로 외제 VTR이 보급되며 수요를 만들자 비디오테 이프의 제작도 시작되었습니다. SKC 천안 공장에서 1984년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네 번째로 비디오테이프를 개발해 한 달에 1,300만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생산해 냈고, 1995년에는 연간 1 억5,000만 개를 생산해 전 세계 비디오테이프 수요의 12%를 차지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VTR 의 보급이 더욱 활성화 되면서 국내 가전 3사가 VTR 제작에 뛰어들자 SKC는 그야말로 화려한 전 성기를 누렸습니다. 이후 비디오테이프 생산에 새한미디어, 금성사, 코오롱, 동양폴리에스터 등이 뛰어들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VTR이 본격 보급되자 국내시장은 삼성, 금성(현LG), 대우의 3파전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일 본과 합작해 VTR 생산에 나섰습니다. 1990년대가 되자 경쟁은 극에 달했습니다. 1991년 4월 삼


성은 슈퍼 VHS VTR을 시판하면서 시장을 석권했습니다. 일명 ‘SV9900S’라 불리는 이 제품은 선 명도의 바로미터인 수평해상도가 4백본 이상에 하이파이 음질을 채용해 기존의 VTR을 획기적으 로 향상시켰습니다. 이에 맞서 금성은 같은 해 5월 캡션VTR을 출시해 삼성의 돌풍에 맞섰습니다. ‘GHV400’으로 명명 된 이 모델은 내장된 캡션모듈을 통해 영문자막이 TV화면에 나타나도록 만든 것으로, 구간 반복, 특정 장면 바로 찾기 기능 등을 내장해 학생들의 어학 학습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에 반해 대우에서는 복사 기능을 강조한 트리플데크 비디오 시스템을 내놓았습니다. 모델명 ‘DMS6000’ 제품은 여러 개의 비디오테이프를 동시에 복사·재생할 수 있도록 1대의 VTR에 3개 의 VCR 시스템을 구성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제3의 스크린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 쟁으로 이 당시 국내 VTR 보급률은 57%에 달했습니다. 이는 가구 수로 따져봤을 때 거의 두 집에 한 대꼴이 넘는 것입니다. 으뜸과 버금, 영화마을 등 비디오 영화 대여업소가 최대 호황을 맞아 동 네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것도 이 당시의 일입니다.


홈 비디오용 매체 CD의 등장 이렇듯 비디오테이프와 VTR의 등장으로 1990년대에 는 가정에서도 마음껏 영화를 시청하는 이른바 ‘홈 비디 오’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나 VHS는 자성을 띤 비닐을 영상 저장 매체로 삼기 때문에 수명의 한계가 있 었고, 관리를 잘못하면 테이프가 훼손되어 화질이 크게 나빠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디오테이프의 이러한 물리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 1982년에 생산이 시작된 ‘CD(Compact Disc)’와 이후 이 기술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한 DVD(Digital Versatile Disc)였습니다. 디지털 방식으로 데이터를 담는 CD는 수백 번 재생하거 나 복사해도 원본의 품질이 저하되지 않고, 크기도 작아 휴대가 편리하다는 장점을 무기로 VTR을 빠르게 시장에 서 밀어냈습니다. 하지만 CD 역시 태생적인 한계는 있었습니다. 디스크의 용량이 700MB 정도로 제한되어 한편의 영화를 고화질로 담으려면 최소 2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CD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온 것이 DVD입니다.

DVD·인터넷·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몰락한 비디오산업 1995년에 개발된 DVD 역시 CD의 경우처럼 필립스사와 소니가 최초로 개발한 제품입니다. DVD 는 영화의 화질이나 음향이 월등히 뛰어났고, 디스크의 용량이 4기가에 달해 데이터 저장 용량이 매우 크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1996년부터 DVD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비디오테이프는 시 장에서 힘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했고, DVD는 컴퓨터 데이터 저장 및 재생의 대명사로 시장을 차 지했습니다. 이후 비디오시장은 DVD 플레이어의 제작과 생산으로 빠르게 대체되었고, 대여점들 도 DVD타이틀 위주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 조류에 따라 비디오테이프는 이제 더 이상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습니다. 2003년 LG전 자가 비디오테이프 생산을 전면 중단했고, SKC 역시 2005년 비디오테이프 생산 중단을 선언했습 니다. 지난 2012년 말에는 그동안 유일하게 비디오테이프를 생산하던 코스모신소재(구 새한미디


어)도 관련 사업에서 철수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DVD대여점과 DVD타이틀 역시 이제는 점 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소비자의 감상 패턴이 변했기 때문 입니다. 지난해 발표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국내 음반 및 비디오물 임대업체 수는 2000년 1만 5,466곳에서 2011년 974곳으로 무려 93.7%나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같은 기간 종사자 수도 2만 3,551명에서 1,579명으로 거의 같은 비율로 감소했습니다. 이에 따라 1999년 9,000억 원에 육박 하던 국내 홈비디오 시장은 2012년 말 현재 230억 원대로 급속히 축소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 비디오 대여점에서 며칠씩 기다리지 않습니다. 디지털과 스마트 시대인 지금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 스마트패드, 스 마트TV 등 다양한 기기로 즐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 생활은 더욱 즐겁고 편리해졌지만, 아쉽 게도 옛날 VTR로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던 아날로그 시대의 감성을 느끼기는 어려워졌습니다. 디지털 방송과 IPTV 같은 뉴미디어는 더욱 발전해 우리의 삶은 앞으로도 더욱 흥미롭고 다채로워 질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스마트폰으로 수렴되는 디지털 기술이 우리에게 엄청난 편리함과 거듭되는 영상의 혁명을 선사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갈수록 외로워진다는 것입니다. 학 교나 카페 안, 전철 안에서도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는 대신 스마트폰만 들여다봅니다. 옛날 구형 TV에 물린 VTR로 선명하지 않은 화질로 인디애나존스와 다이하드를 손에 땀을 쥐고 보며 같이 웃고 떠들던 친구들도 이젠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기술의 발전이 오래된 구식 기술을 없애는 게 아니라 오래된, 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의 감성을 없애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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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호 > ZOOM 人

탈모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

서울가발박사 장만우 명장을 만나다


여러분은 한번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먼 미래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머리털 이 없는 ‘대머리’ 시대가 될 것이다!’라는 예측 말입니다. 2013년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 라의 탈모인구가 1,000만 명에 달하며 특히 20~30대의 비율이 45.8%로 가장 많이 늘어났다 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미래에 대한 탈모 예언이 틀린 말 같지만은 않습니다. 탈모를 겪는 이들 의 가장 큰 고민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과, 자신감을 잃는 일일 것입니다. 대 부분의 탈모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간혹 치료가 힘들거나 회복 속도가 느려 치료 과정에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서울 영등포에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평생 ‘가발’ 만을 연구해온 분이 있는데, 그가 바로 ‘서울가발박사’의 장만우 명장입니다. 일찌감치 미용사 의 길로 들어섰다가 스무 살 때 시작된 탈모 때문에 가발 박사로 인생이 바뀌었다는 명장을 만 나보았습니다.

고불고불 파마머리에 넋이 나간 소년 늘 그렇듯이 인연은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이용 기술을 배운 형이 마을에 이발소를 차렸고, 손님 들이 많아지자 일손이 필요했던 형은 동생을 불 렀습니다. ‘손님들 머리 좀 감겨 달라’는 형의 부 탁을 받아들인 장 명장은 자연스레 이용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읍내에 나갔 다가 신기한 장면을 하나 목격합니다. 미용실 안 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다란 막대기로 머리카 락을 고불고불하게 만드는 광경을 본 것이었습 니다. ‘어떻게 머리카락이 고부라질 수 있지?’ 하 는 생각에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던 소년은 그날 부터 이발사 대신 ‘미용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형에게서는 미용기술을 배울 길이 없어 애가 타 던 소년은 17살 되던 해에 고향 청양을 떠나 대도 시인 대전으로 갑니다. 그때 잘 곳조차 없었던 그는 남의 집 처마 밑에서 거적을 덮고 잠을 자기 도 했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미용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그는 무작정 미용학원 을 찾아가 학원 원장에게 미용기술을 가르쳐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대전 중앙시 장 앞에 있던 ‘중앙미용학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장은 남학생은 받아줄 수 없다고 그의 요청


을 단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그 당시 미용기술은 ‘여자들의 기술’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 문이죠. 무작정 고향을 떠나온 길이었기에 누구보다 사정이 절박했던 장만우 명장은 다시 한 번 원장을 찾아가 애원을 했고, 그의 딱한 사정과 절박한 처지를 알게 된 원장은 그를 제자로 받 아주었다고 합니다.

스무 살에 시작된 탈모로 뒤바뀐 인생 학원에 어렵사리 입학은 했지만, 장 명장의 학원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당시 미용기술을 배우려면 원생들은 머리를 길러 동기들과 서로 모델 역할을 해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기르는 일이야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가 ‘남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남 녀 사이에 낯가림이 심해 그의 모델이 되어주려는 동료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때 그의 모델 이 되어준 사람이 학원 원장이었습니다. 실기연습을 하려면 파마, 염색, 드라이, 고대 등을 자주 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형편없이 망가져버리는데도 원장은 흔쾌히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술을 배운 그는 단 두 달 만에 합격증을 따내 원장과 주위 원생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어렵사리 미용의 세계로 들어선 그에 게 전혀 생각지 못했던 시련이 찾아옵 니다. 갓 스무 살에 ‘탈모’가 찾아온 것 입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빠지던 머리 카락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무섭게 빠지 기 시작했고, 2~3년이 지나자 그만 이 마부터 정수리까지 머리카락이 완전 히 빠지고 말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반대머리였습니다. 명색이 미용사인 데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되니 주변사람들의 시선이나 놀리는 말이 견디기 힘들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직접 가발을 만들어서 썼어요. 그런데 막상 써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바람 불면 벗겨질까 걱정, 티가 날까 걱정, 또 계속 쓰고 있자니 땀이 차 고 가려워서 아주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점들을 개선하려고 안 해본 게 없어요. 가발을 잘 못 쓰면 머리가 아예 안 나는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더 편안하고 감쪽같은 가발을 만들고 싶었


고, 그래서 자꾸 연구를 하게 되었지요.” 바람 불어도 끄떡없고, 누가 봐도 티 안 나고, 아무리 오래 쓰고 있어도 땀이 차거나 가렵지 않 은, ‘내 머리’ 같은 가발을 만들기 위해 장만우 명장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고 합니다. “지금 아내도 이 ‘가발’ 덕분에 만난 거예요. 처음부터 가발을 쓰고 만나서 결혼까지 했는데, 신 혼여행 다녀와서는 고백을 했죠.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엄청나게 놀라더라고요(웃음). 머리가 빠질 때는 무척 속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부모님이 나한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 바 로 이 ‘대머리’가 아닐까 해요. 탈모가 안 왔으면 지금 이렇게 가발로 세상의 인정을 받는 일은 없었을 거잖아요. 그리고 나처럼 머리가 빠져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이 일이 얼마나 신나고 보람된 일인가요. 저는 이 일을 하게 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특히 우리 부모님께.”

다시 찾아온 시련, 그러나 위기는 늘 그에게 기회였다 그러나 가발사업을 잘 해나가던 그에게 시련은 다시 찾아왔습니 다. “가발 일을 하다가 사기를 당 했어요. 그래서 보름은 차에서, 보름은 집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오래 해야 했죠. 하루 3~4시간 을 자고 일하면서 한 달에 명함 을 라면 박스로 3박스씩 찍어서 돌렸어요. 한겨울에는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스티커도 붙이고, 그때 하나밖에 없던 전철(1호선)을 타고 돌아다니며 머리가 벗겨진 사람만 보면 명함을 줬어 요. 그러면 한 칸마다 10장씩은 돌리게 되더라고요. 지하철이 열 칸이면 한번만 타도 백장을 돌 리게 되고 하루에 열 번이면 천장을 돌리는 거잖아요. 을지로나 종로 쪽에 가서 시장이나 상점 주인들한테도 명함을 많이 돌렸어요. 명함에 사진을 넣기도 했지만 가서 가발을 벗어 보여주면 다들 신기해했어요. 물론 고충도 많았어요. 머리 빠진 사람들은 머리에 대해 예민하기 때문에 명함을 건네다가 뺨도 여러 번 맞았어요. 생각해 보면 지금처럼 명함, 간판, 자동차에 사진을 넣 어서 광고하는 건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 같아요. 가발 쓰기 전하고 쓰고 난 뒤의 모습을 보 여줘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내 모습을 찍어서 그걸로 광고를 한 거죠. 그래서 아들 녀석이 어렸


을 때는 내 차만 보면 기겁을 하고 도망갔어요. 친구들한테 놀림거리가 되니까 말이죠.”

사업철학은 진심어린 마음과 커트 기술 지금 명장인 그에게 찾아오는 손님은 무척 많습니다. 그가 명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손 님을 대하는 진심어린 마음과 기술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오래 쓰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 은 특허 받은 기술과, 뛰어난 미용기술을 가진 명장만의 가발 커트 노하우, 그리고 진심으로 손 님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어우러져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머리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연구를 할 수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게 가장 소중한 자 산인 거죠. 탈모가 없는 사람이 실험 대상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머리 빠지 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저는 손님들을 절대로 소비자로 생각하지 않아 요. 그 사람들하고 같이 고민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아픔을 해결해주는 동료가 되고 싶죠. 요즘은 20~30대 남녀가 손님으로 많이 오고, 가끔은 5~7살짜리 어린아이도 와요. 물론 청소년 들도 오고요. 어찌 보면 나이대가 없어요. 그걸 보면 얼마나 마음이 짠한지 몰라요. 결혼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는데, 탈모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서 아무 것도 못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거든요. 어린아이들도 친구들한테 놀림거리가 될까봐 유치원도, 학교도 안 가려고 하고요. 잔뜩 풀죽은 아이가 엄마 손잡고 와서 가발을 맞춰 쓰면 얼굴이 꽃 피듯이 활짝 펴요. 그거 보는 맛으로 이 일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가발을 맞출 때 중요한 건 머리와 가발이 구분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잘못하면 턱이 지거든요. 그래서 쓰는 사람의 머리카락과 가발이 자연스럽게 연 결되게 머리끝을 붓 끝처럼 커트해주는 게 중요해요.”


한국 가발의 우수성과 관리 노하우를 알리는 것이 꿈 장만우 명장의 꿈과 목표는 한국 가발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것과 이·미용기술자들에게 가발 커트 및 관리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가발기술은 일본이나 미국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 뛰어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작 그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 다. “제 가장 큰 꿈은 우리나라 가발 기술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우리 이·미용기술자들이 모두 가발 커트와 관리를 할 줄 알았으면 해요. 왜 냐하면 가발은 관리가 참 중요하거든요. 물론 저에게 직접 찾아와서 관리를 받는 사람들도 많 지만, 그게 힘들 때는 그분들이 일반 미용실에 가서 다듬곤 하거든요. 그런데 보통 미용사들은 가발 커트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조심스러우니까요. 그런데 노하우를 조금만 알면 그게 어 렵지 않아요. 일본 같은 경우는 모든 미용실에서 가발 커트가 가능해요. 가끔 저에게 가발을 만 들어 간 사람들이 머리가 엉망이 돼서 찾아와요. 가발과 손님 머리를 티 안 나게 연결하려면 머 리카락 끝을 붓 끝처럼 만들어야 하는데, 미용사들이 그걸 모르니까 그냥 싹둑싹둑 잘라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바로 티가 나요. 그러면 그 가발은 머리를 다시 심어서 또 제작을 해야 돼 요. 그러면 시간도 돈도 많이 들죠. 가발은 수공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최하 30만원부터 150만원까지 하죠. 그 비싼 가발을 망치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요. 돈도 돈이지만 손님들은 또 가발이 수정되기 전까지 어색한 가발을 쓰고 다녀야 해서 스트레스를 받고요. 그 래서 제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우리나라 이·미용사들도 가발 커트를 할 줄 알고, 그들이 아예 가발까지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미용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가발을 만드는 게 이치 에 맞거든요. 그리고 새해에는 남성용 패션가발을 한번 만들어볼 생각이에요. 여성용 패션가발 은 많은데, 남성용은 없으니 욕심내서 시도해보고 싶죠(웃음).” 장만우 명장은 지금도 대전에 계신 형님과 만나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가발 연구를 하고 있다 고 합니다. ‘세상에 단 한사람만을 위한 가발을 만드는 일은 무에서 유를 끌어내는 창조 작업과 같다.’고 힘주어 말하는 장만우 명장에게서 오랜 세월 가발을 향한 집념과 철학을 읽을 수 있었 습니다. 가발을 통해 손님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을 주는 그 명장에게 ‘가발 박사’라는 타이틀 은 그가 쓴 가발만큼이나 꼭 맞고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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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호 > 通하는 테마

IT를 만나 진화하는 생체인식기술


정보기술(IT)이 날로 발전하면서 보안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요즘, 빈발하는 해킹 범죄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생체인식 기술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새롭게 부각되는 생체인식 기술은 어떤 특징 이 있고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첨단기술을 다루는 기업 연구소 등 출입인원의 철저한 통제가 필요한 기관에서는 오래전부터 개 인의 신분 확인을 위해 출입증과 같은 보안 시스템을 운영해 왔습니다. 하지만 보안 시스템이 발 달할수록 이를 뚫는 기술 역시 진화해 왔고 이제는 더 이상 ‘카드’ 형태의 출입증으로는 이를 막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스마트 기기가 발달하고 금융 거래에 온라인 결제가 보편화되 면서 해킹을 통한 사이버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증가하는 보안 위협에 대 한 기술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생체인식 기술입니다.

영화에 먼저 등장한 생체인식 기술 생체인식 기술 중에서도 가장 먼저 쓰인 기술은 지문인식입니다. 이는 지문의 골이나 곡점 등을 파악해 신원을 확인하는 기술인데, 어떤 사람이 타인과 같은 지문을 가질 확률은 10억분의 1에 불 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문인식은 비교적 기술이 단순하기 때문에 쉽게 위조할 수 있 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등장 가짜 지문 (출처: ‘007 -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일례로 1971년 제작된 007시리즈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서 제임스 본드가 가짜 지문을 엄지손 가락에 붙여 지문인식기를 간단히 통과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다양한 영화에 서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와 지문인식기술은 쉽게 위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최근 에는 아이폰5S의 지문인식 시스템 역시 영화와 비슷한 방법으로 보안을 해제하는 동영상이 공개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생체인식기술은 다방면으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문 외에 얼굴이나 목 소리, 손의 혈관, 홍채 등 사람마다 개별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신체 각 부위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 지요. <스타트랙-다크니스>, <맨 오브 스틸>,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 근래에 크게 흥행한 영화 들을 보면 철통같은 보안시설을 출입할 때 홍채나 얼굴, 손의 정맥 등을 스캔해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홍채나 정맥 인식 같은 생체인식기술은 지문인식과 달리 일상생활에서 흔적이 남지 않고, 고유 패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밝혀지지 않아 복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특히 홍채는 사람이 태어난 후 18개월에 걸쳐 모양이 생성되는데, 한 번 생성된 모양은 평 생 변하지 않는 것은 물론 위변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패턴이 복잡하다고 합니다.

진화한 생체인식기술, 현실에서 적용되고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생체인식 시장 규모는 2010년 866억 원에서 2013년 3,500억 원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특히 최근에는 스마트 폰 같은 IT기기는 물론 보안기업에서 생체인식 기술을 적극 채택하고 있어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세에 있습니다. 생체인식기술을 적용한 해외와 우리나라의 사례도 눈여겨 볼만 합니다. 영국 바클레이은행은 자산 투자·관리 서비스 고객의 신 원을 음성으로 확인하는데, 정확도가 99.6%에 달한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체크카드나 신용카 드 없이 손바닥의 정맥 패턴을 분석해 금융 거래자의 신원을 인증하는 자동화기기가 도입됐습니 다. 우리나라 보안기업인 에스원은 지난해 4월 얼굴 인식 시스템을 자사의 보안체제에 적용한 ‘페 이스체크S’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올해 상용화 예정인 이 기술은 출입하는 사람의 얼굴을 카메라 가 1초 이내에 인식해 미리 등록된 사용자만 통과시키고, 다른 사람들은 일반, 주요인물, 임시, 출 입금지 같은 리스트를 만들어 출입을 통제하는 시스템입니다. 글로벌 기업인 애플 역시 얼굴인식 기술을 아이폰 차기버전에 탑재한다는 계획 아래 미 특허상표청에 관련 특허 등록을 마치고 이스 라엘의 3차원 영상 인식 센서 제조 기업 ‘프라임센스’를 3억6,000만 달러에 인수했습니다. 우리나 라 삼성전자의 움직임 또한 애플에 뒤지지 않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2년 이미 홍채인식기술 관련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출시한 갤럭시S4의 경우 스마트폰이 사용자의 눈 동자와 얼굴을 인식해 화면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스마트 스테이’ 기능을 선보였습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현재 홍채 인식 시스템을 얇은 스마트폰에 들어갈 만큼 소형화하는데 주력하 고 있습니다. 아마도 빠르면 올해 출시하는 갤럭시S5에 이 기술이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체인식기술이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보안전문가 브루스 슈나이어는 “누군 가 비밀번호를 알아내 생체 정보를 바꿔버리면 원래 주인이 새 생체정보를 등록할 수 없는 문제 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또한 개인정보 측면에서 생체정보의 유출도 아직 논란 거리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12억의 인구를 대상으로 생체정보를 수집하는 인도의 ‘아드하르’ 프 로젝트와 미 연방수사국(FBI)의 생체정보 구축사업인 ‘NGI’를 들 수 있습니다. FBI는 2014년 운용 을 목표로 손바닥 지문, 홍채 정보, DNA 프로필, 음성 프로필 등을 포함한 생체인식 데이터베이스 를 구축 중이지만, 개인의 생체정보 수집이라는 측면에서 시민단체와 소송을 벌이는 중입니다. 인 도의 ‘아드하르’ 프로젝트 역시 시스템 관리와 정보 수집을 맡은 업체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자금을 지원받은 사실이 공개되면서 물의가 일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생체인식기술의 당면 문제는 기술의 발달이 아니라 개인정보 보호 및 인권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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