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BRICKS - Winter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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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투어 앤 미디어

Magazine BRICKS

Beyond Routine Into Curiosity Keep Sai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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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매거진 BRICKS

겨울 특집호

Walking in a Winter Wonderland 아이슬란드 남부, 살아있음을 실감하다

CONTENTS 4

오후로お風呂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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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서 눈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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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뢰겐스코그, ‘마이댄스 페스티벌’ 그렇게 당연한 그린란드의 겨울

노르웨이 오슬로, 내 영혼의 트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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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남부, 살아있음을 실감하다. 글 라이언(조대현)

빙하가 만든 풍경들 숨을 크게 들이 쉰다. 숨을 쉴 때마다 온몸이 아이슬란드의 맑은 공기에 반응한다. 내가 살

아있다는 실감,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 천혜의 자연을 상속 받은 아이슬란드 사람들. 하지만 화산과 빙하로 둘러싸인 이 땅에서 지금의 생활수준으로 끌어올리기까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순리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거라 생각해 보지만, 순리, 순리라… 아이슬란드는 겨울엔 보통 남부 지방을 여행한다. 스코가포스는 남부에서 가장 유명한 폭

포이다. 62m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언뜻 얼어있는 듯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면 아주 딴판이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폭포의 물줄기는 겨울에도 줄어들지 않아 접근하기 힘들다. 여름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야 제대로 폭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여름에 찾아 왔을 땐 그저 아름다운 전원으로만 보였던 인근 마을이, 한겨울인 오늘은 좀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해안 절벽의 주상절리는 화산이 폭발할 때 용암이 급격하게 식으면 서 생긴 암벽이다. 바닷물에 침식된 해안 절벽은 다양한 형태의 동굴을 만들었다. 오랜 시

간 파도가 깎아낸 자연의 조각품인 것이다. 남부의 주상절리를 볼 수 있는 ‘레이니스피아 라’는 레이캬비크의 상징인 하들그림스키르카 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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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오로라와 얼음동굴인데, 남부여행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즐길

수 있다. 그 중 ‘스비나펠스요쿨’이란 곳에서는 빙하트레킹을 즐길 수 있으며 영화 <인터스 텔라>의 얼음행성을 이곳에서 촬영한 이후로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빙하트래킹 후에는 ‘요쿨살론’으로 이동해 빙하를 근접한 거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압축된 유빙 때문에 이곳 의 빙하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뎠다고 한다. 시간의 개념이 무색해지는 곳에서 자연의 위대 함과 경외감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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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만남, 오로라 남부를 여행하는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았다. 비가 오는 바람에 얼음동굴은 고사하고 오로

라도 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구름이 이렇게 거대한 줄은 몰랐다. 물기를 머금은 까만 구름

이 온 하늘을 덮고 있어서 한번 들어가면 그 안에서 길을 잃을 것처럼 보였다. 몇 킬로미터 를 운전해도 구름 밑을 벗어나지 못하니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다행히 호픈을 지나면서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동부로 가는 길은 그래도 열려 있어

서 동부의 겨울 피오르드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다섯 시간 만에 에이일스타디르 에 도착했다. 장시간 운전에 지쳐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다가 아래층에서 여행의 감흥에 젖어 떠드는 외국인들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한


동안 다시 잠을 못 이루다가 오로라 지수와 날씨예보를 확인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이 많이 끼어 오로라는 볼 수 없나 생각한 그 순간, 하늘에 초록색 띠가 생겨났다. 뭔가 싶

어 봤더니 한 줄이 더 생겼다. 오로라였다. “덕진아, 오로라야!” 친구를 부르며 카메라를 챙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느새 동쪽에 한 줄이 더 생겼고, 북쪽에는 연속적인 짧은 줄 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구름이 흩어지며 별이 선명한 하늘이 나타나고, 이어, 오로라. 우리는 차를 끌고 어둠이

짙어진 산으로 차를 몰고 갔다. 거기서 기다리면 더 선명한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 대했다. 30분 정도를 기다렸지만 오로라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구름이 계속 몰려오더

니 눈까지 뿌려댔다. 그렇게 짧은 인상만 남은 오로라를 마음속에만 담아 가져와야 했다. “내일 북쪽의 미바튼 호수로 가면 더 선명한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야!” 서로 위안하고, 잠 09


시라도 오로라를 볼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선명한 오로라도 아니었고 결국 사진에도 담지 못했지만 ‘기다리고 노력하면 원하는 바

가 이루어진다’는 작은 진리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듯 사람의 인생도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 성공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오히

글 제민 려 부족해도 노력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것은 아닌지.

사람이 저마다 다른 외모와 성격을 가지고 있듯, 그 사람에 어울리는 성공도 저마다 다르

지 않을까. ‘돈으로의 성공’에 취해 있는 이들에게 성공의 여신은 너무 바쁜 나머지 이들 모

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 없는 모양이다. ‘나만의 성공’. 나만의 성공의 여신을 바라보고자 노력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찾아야 하는 게 더 문제긴 하겠지. 그래도 오직 그것만이 나 를 넉넉하고 행복하게 하며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위해 헌신해 줄 거라는 믿는다.

글쓴이 라이언(조대현)은 54개국, 162개 도시 이상을 여행한 여행 작가다.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편에 저서 <아이슬란드 링로드>가 소개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강의와 여행 컨설팅, 여행 칼럼 기고 등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의 <비지트 아이슬란드>를 비롯 한 다수의 여행 서적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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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있으나 날지 않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입니까?’ - 가끔, 날개가 있는 것을 잊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오후로お風呂의 추억 글 겨울베짱이

오후로お風呂1)의 추억.

일본에서 처음 조사를 했을 때의 일이다. 후쿠시마의 작은 간이역 인근에서 계획에 없는

일박一泊을 하게 되었다. 책자에 없는 곳이라 역장에게 민숙民宿할 만한 곳을 물어보았더 니 어딘가 전화를 걸어 역 앞의 집을 소개해주었다. 주인은 여든을 훌쩍 넘긴 할머니로 귀 가 잘 들리지 않았다.

기대했던 깔끔하고 정결한 일본인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집이었다. 아주 오래됐고 그만

큼의 세월의 때도 끼어있었다. 저녁을 하고 돌아오니 할머니는 TV를 틀어놓고 식사를 하 고 계시다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셨다. 깊은 욕조에 물이 채워져 있었는데 타월을 건네

며 연신 안을 가리키셨다. 샤워야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을 목욕물까지 받아두신 것도 황송

한데다, 나는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한국인이라 거듭 사양하며 할머니 하신 후에 하겠다 는 의사를 손짓으로 표시하였지만 기어코 나를 욕실로 밀어 넣으셨다. 욕조에는 물이 가득

담겨 ‘유레카’ 정도의 수위였는데 알 수 없는 부유물과 머리카락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

할머니가 눈이 어두워 못 보시는 게다.’ 생각되어, 아깝지만 물을 모두 비우고 대청소를 하 였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것 같아 스스로도 대견하여 ‘덕분에 목욕 잘 했습니다. 제가 청

1) 목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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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 했어요.’ 라며 할머니에게 보여드렸더니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할머니는 머릿 수건을 두르고서 이제나저제나 당신 차례만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였는데 텅 빈 욕조를 보

고는 갑자기 노발대발하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였다. ‘할머니 목욕물을 받아두었어야 했

나?’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 다시금 목소리를 높이다가는 한숨을 쉬더니 올라가서 자라는 손짓을 하였다.

다음 날, 아침을 드시고 계신 할머니에게 안녕히 주무셨냐며, 이제 떠난다 하였더니 밥을

먹으라 손짓하였다. 조식이 포함 안 된 것이라 사양하였으나 목욕을 강권하셨던 것처럼 권

하여서 마주 앉아 식사를 마쳤다. 감사를 표하고 식대를 드리자, 할머니는 어쩐지 노여움 이 풀리셨는지 돈을 돌려주시며 “가와이”라고 하셨다.

후쿠시마 조사 후, 니가타의 직조 공방을 살피고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여름 끝이어도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꽤 으슬으슬했는데 마침 물을 받아두었다며

목욕을 권하였다. 나는 ‘욕조에 물을 받아두는’ 일본인의 한결같은 친절함에 민망함과 의 아함을 느끼면서도 욕실에 들었다. 욕조는 향이 나는 나무로 짜여 있었고 혼자 쓰기에는

넓고 두 명은 족히 들어갈 정사각형의 고급 욕조였다.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겨 있어 숙박비 에 비해 과한데다 낭비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노곤한 몸을 녹인 후 마개를 뽑아 물을 뺐다.

거실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후쿠시마 할머니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가족끼리 목욕물을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일본은 덥기도 하거니와 습도도 높아 목욕을 자주 한다고는 들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두고 가족이 각자 샤워를 마치면 받아둔 물에 몸을 담가 반신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대개 아버지가 먼 저 하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후 물을 빼고 뒷정리를 한다고 한다. 나는 아차 싶어 부부 에게 사과를 하였으나 가끔 외국인들이 이런 실수를 한다며 그들은 웃어넘겼다.

이 문화엔 아직도 적응을 못하고 있지만 가끔씩 나는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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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니가타 어느 산중의 온천에는 한 마리 새가 날개를 적셔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추운 겨울의 뜨거운 온천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마성魔性의 힘을 지니고 있다. 친구들

에게 농담으로, 설국의 겨울을 나기 위해 ‘1일 1사케, 1주 1온천’을 하겠노라 말하였다. 마

침 조사지 다음 역인 무이카마치六日町2)에는 온천여관이 몰려있다. 온천 료칸 하면 떠오 르는 고급스런 느낌은 없지만 매주 온천을 돌아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였다. 시작은 무이카

ほてる木の芽坂의 사케바


마치로 해서 점차 반경을 넓혀가기로 하였다. 주로 조사가 없는 주말을 이용하여, 공중목 욕탕 온천에도 가보고 료칸 온천도 이용하였다.

트렁크를 끌고 온 첫 날, 선생님의 배려로 유명한 온천 료칸 ‘코시지소우越路莊’에 묵었

다. 온천의 원류原流가 시작되는 곳이었는데 천정이 높아서인지 공기가 차가워 자꾸 탕 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중公衆 온천인 ‘유라리아湯らりあ’는 자판기로 입욕권을 사고 샴푸 등도 구입할 수 있

다. 네 명이 옹기종기 붙어 앉을 정도의 작은 공간이라 당황스러웠으나 온천원류가 흘러 물이 뜨겁고 몸이 풀려 400엔의 저렴한 맛에 이용할 만 했다. 몸이 가뿐해지는 것이 매주 온천을 한다면 언젠가는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엔 료칸 온천이면서 방문객에

도 열린 온천 ‘호테루 키노메사카ほてる木の芽坂’를 갔는데 기대에 미치진 못했지만 몸

이 점차로 훈훈해 오는 느낌을 받았다. 네 번째는 스키 리조트 온천 ‘무이카 온센むいか 温泉’으로 마침 진눈깨비가 하염없이 내렸던 날이라 창밖을 바라보며 입욕入浴을 즐기 다 나오니 어느새 몸이 후끈해졌다.

마지막은, 식사를 하면 입욕료가 반값인 료칸 온천 ‘사카도조坂戶城’로 메인탕 외에 미

니 약초탕이 있고 매달 약초가 바뀌었다. 료칸은 낡은 건물로 낭만적인 느낌은 없었다. 그 러나 맛난 밥을 먹고 온천을 하거나 온천을 하고 배를 채우는 만족감은 설명하기 어려워

외관상 기대에 못 미치는 느낌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약초탕은 일인용으로 과한 듯하나 엄마와 딸이 함께하기에 적당한 원형으로, 수온이 알맞아 꽤 마음에 들었다. ‘이 번엔 덮밥을 먹었으니 다음엔 소바를 먹어야겠군’ 하며 돌아가는 밖은 추웠으나 몸은 뼈 속까지 시원하였다.

무이카마치六日町 이후론 여행객으로 붐비는 에치고유자와 및 인근 지역으로 온천탐

2) 무이카마치六日町의 온천지는 국민보건지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낭만적 온천여행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고시히카리 밥과 사케를 곁들인 소박한 방문에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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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넓혀갔다. 사케를 부었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간 유자와 역의 온천 ‘폰슈칸 사케부 로酒風呂’는 접근성 외의 매력은 없었으나 어쩐지 피부가 매끈해진 느낌을 받았다. 유자

와는 스키와 온천 리조트가 집중적으로 조성되어 고즈넉하거나 낭만적이거나 최신설비에 넓은 온천을 갖춘 곳 등 모두의 기호를 맞출 수 있는데 나는 인포메이션 센터 직원에게 살 짝 물어 ‘물’이 가장 좋은 곳과 ‘경관’이 좋은 곳을 추천 받았다.

‘물’이 좋다는 곳은 설국의 집필지 타카한 옆에 위치한 고민가풍의 오래된 온천 ‘야마노

유山の湯’로 야스나리도 여기서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원천源泉’이라고 할 때는 온천 원 류에 어떠한 것도 첨가하지 않은 탕이라는 말인데 이곳이 그러하였다. 작은 내부에는 대여 섯 명이 들어가면 비좁을 작은 탕이 하나 있을 뿐이었고 의자는 네 개만 놓였을 정도로 작 았다. 무엇보다 샤워기가 없어 온수, 냉수를 따로 받아 머리를 감아야 하는 불편함에 놀랐

다. 탕은 끊임없이 물이 받아져 흘러넘치고 사람이 들고 날 때 조금씩 더 넘쳤다. 은근하고 후끈하고 따끈한 물은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몸 안에 감돌아 마지막에는 나의 몸 안에 이러

한 훈훈한 기운과 열기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가 되었다. 온천을 나와 집으로 돌 아가는 동안에도 식지 않는 온기와 여운이 가득하였다. 이곳의 지인은 일 년 쿠폰을 끊어 놓고 온천이 쉬는 날만 제하고 온 가족이 저녁 후 매일 목욕을 하고 따숩게 하루를 마친다 니 무척 부러운 일이다.

다음 달엔 깊은 산중 ‘마츠노야마松の山’를 가 볼 생각이다. 어쩌면 눈 속의 새를 만날 수

도 있을까.


글쓴이 겨울베짱이는 방방곡곡 베 짜는 조사를 하거나 직접 베 짜는 것을 즐긴다. 눈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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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뢰렌스코그, ‘마이댄스 페스티벌’ 글 안태호


‘노르웨이’ 하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뭐니 뭐니 해도 입맛을 돋우는 연어? 교과서에서나

봤음직한 피오르 해안이나 오로라? 좀 알만 한 사람들은 북유럽의 높은 복지수준과 그만큼 살인적인 물가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기껏해야 두 번째지만, 햄버거 하나에 만 원 하는 나라로 다시 간다 하니 사람들이 물었다. “아니, 노르웨이에 대체 뭐가 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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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역에서 기차로 20분, 뢰렌스코그Lørenskog는 Langvannet라는 커다란 호수

를 아주 한적하게 둘러싸고 3만이라는 많지 않은 인구가 살고 있는 작은 도시다. 내가 이곳 을 찾아간 건 현대무용 축제 ‘마이댄스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런 유의 외국 축 제 앞에는 ‘세계적인’ 같은 말을 붙이는데, 나도 그런 표현을 써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당신은 몰랐던 겁니까, 하는 자부심 은근 깔고 갔으면 좋았으련만, 이 축제는 2014년에 시 작된 새내기 페스티벌이다.

몇 해 전 우연한 계기로 만난 기획자와의 교류가 어찌어찌 안 끊기고 이어져 온 결과다. 그

래도 기획자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일부러 찾아갈 정도니 화려하고 웅장한 뭔가가 있지 않

겠나, 글 뒷부분에 엄청난 경험담을 터뜨리려고 소박한 도시라는 암막을 치고 있다고 생각 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일단은 그냥 소소했다는 것부터 말하고 넘어가야겠다. 지역 젊

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업을 선보여 시민들이 손쉽게 문화예술에 접근하는


기회를 만든다.’ ‘시민과 예술가의 역량을 강화하고 성장을 조직한다.’ 어디서든 많이 봐 온 문구 아니던가? 이게 이 행사의 불씨를 일으킨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 축제의 놀라운 점은 어디선가 많이 봐 온 저 상투적 슬로건을 어떻게 눈여겨 볼만한 축

제로 만들어 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는 축제 기획자들이 모두 20대라는 것이다. 축제에

참여한 예술가이기도 한 카타리나 씨와 튜바 씨는 모두 20대 청년이다. 유럽이라는 지형 적·문화적 유리함이 있다고는 하지만, 20대 청년들이 10여 개국의 예술가들을 불러 모으

고 행사를 조직하고 진행한다는 건 예사롭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의 청년들을 떠올려 보자면, 한국의 현장에도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이 많이 있지만, 보통은 지 역의 공공재원을 두고 경쟁하는 단체들과 예술인들의 기득권 구조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 는 모양새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지역사회의 지지와 응원이다. 뢰렌스코그 인구는 고작 3만으로,

뢰겐스코그 ⓒChell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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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가 서진 않는 날엔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정선군보다도 못한 도시인데, 지역사회가

이 축제를 지켜보고 지원한다는 게 축제 곳곳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식당들은 예술가 들에게 식사를 후원하고, 뢰렌스코그에서 가장 큰 호텔은 예술가들은 숙박을 책임져 준다. 축제 당일에는 이웃들이 물물교환 장터를 열고, 다양한 먹을거리를 나누는 훈훈한 광경이 만들어진다.

올해는 축제가 공동체로 확장해 가는 모습이 더욱 확연했다. 축제의 오프닝은 시민들이

워크숍을 통해 만든 퍼포먼스와 활동한 지 50년이 넘었다는 포크댄스 동호회의 공연이었

다. 기획자의 어머니를 포함한 시민들의 공연은 ‘CITY TALK’라는 제목에 걸맞게 도시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작품이었다.

공연 참가자 한 사람이 퍼포먼스 중 내게 다가와 이야기를 건넸다. 지역에 대한 애정이 물

씬 담긴 말과 표정이었다.

“나는 뢰렌스코그를 좋아해요. 뢰렌스코그의 숲, 숲의 고요함, 숲에서 부는 바람, 숲에서

산책했던 기억, 달렸던 기억, 아이들과 놀았던 기억. 숲에선 휴대전화나 번잡한 것을 잊어 버리고 고요해질 수 있어요.”

전통 복식을 충실하게 갖춘 어르신들의 댄스가 관람객의 환호 속에 막을 내렸다. 최소한

70살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유쾌한 표정은 왜 인간들이 춤이란 걸 만들어 억지스럽게 몸을 흔들어 왔는지 아주 잘 설명해 주었다.

마이댄스 페스티벌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무대다. 대부분의 메인 퍼

포먼스는 시청 옆 공원에서 열리는데, 호수와 숲을 끼고 있는 풀밭에서 펼쳐지는 춤은 다 른 미사여구를 곁들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숲 한가운데서 기계음을 연주하며 새들과 교감하던 예술가, 지역 음악 동호회의 연주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시민들, 그 뒤 에 펼쳐진 맑고 드넓은 호수. 오래도록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모든 예술은 자연에서 받은 감동을 연장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날을 위해 어디서 읽었는 지도 가물가물한 이 말을 기억해 왔나 보다.

사실 노르웨이를 포함한 북유럽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부러웠던 건 풍요로운 녹지와 자연


환경이었다. 대학 시절을 지나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나는 한국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과 뚜렷한 사계절을 가진 세계 유일의 아름다운 나라라는 관념을 심장처럼 달고 다녔는데, 유럽의 자연환경은 내 건강을 위협할 만큼 충격이었다. 인공 구조물을 거의 배치하지 않고 수백 년 된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리 잡은 광활한 공원은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이번 축제에서 나는 ‘Eye of Tree’(배규자, 카나리나의 2인조 그룹) 공연이 가장 인상적

이었고, 세월호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진행한 것은 너무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축제 장터에서 캠페인을 진행하려 했다. 그런데 사전 워크숍에서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캠페인보다는 작품을 통해 내용을 공유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우리에게 절실 25


한 문제가 이들에게도 같은 밀도로 전달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보트피플에서부터 유럽 난민 문제에 이르기까지 배와 연동된 이미지와 상상을 작품에 활 용하기로 하고, 준비한 전단과 소품을 추가해 퍼포먼스를 구성했다.

이 축제의 남다른 점은 예술가들끼리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예술 축제

는 작품 발표 시기에 맞춰 방문한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돌아가기에 분주한

데 반해, 마이댄스 페스티벌은 일주일에서 열흘 가까이 체류하면서 예술가들이 워크숍과 활발한 대화를 통해 밀도 높게 교류할 수 있게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술가들은 서로의 나 라를 방문하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도모하기도 한다.


세월호 문제에 대해 콩코르디아호의 사례를 이야기하며 공감해 준 이탈리아의 클로리사

씨,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럽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역설하며 작업으로 이를 표현했 던 스웨덴의 한나 씨, 직장을 그만둔 내게 “창조적인 발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자신이 쓴 시집을 선물한 미국의 에릭 씨. 예술가들과 보낸 시간들은 정말 감사한 순간들이었다.

이쯤에서 어쩔 수 없이 한국의 상황을 한 번 더 이야기하자면, 한국의 축제 현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규모를 키우지 못해 안달이다. 작은 규모로 예술가들의 밀도 있는 교류를 매개

하고, 공동체와 결속력을 더해 가면 축제의 질도 높아지고 시민들의 참여와 호응도 늘어난 다. 마이댄스 페스티벌의 장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건 바로 이런 부분에서다. 기회가 된다면 이 페스티벌과 계속 함께하고 싶어지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마이댄스 페스티벌

연혁 : 2014년 시작, 올해로 4회째 개최시기 : 매년 5월

장소 : 시청 광장, 문화의집 등 로렌스코그 곳곳 홈페이지 : http://www.maidans.org

글쓴이 안태호는 문화 정책과 기획 일을 하고 있으며, 삶과 예술이 만나 섞여 드는 과정에 관심이 많 다. 토론 패널 섭외와 원고 청탁에 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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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서 눈을 보지 못했다 글 베르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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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톡홀름 스위트닝>이 흐르고 있었다. 재즈 카페였다. 공간은 두 평, 넉넉하게 봐 줘도

세 평을 넘지 않았다. 거기에 앰프 볼륨을 절반 이상 올려놨으니 공기보다 음악의 비중이 더 높은지도 몰랐다. 가끔 계단의 따낸면에 가려진 자리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했 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신문을 읽는 남자의 어깨를 훔쳐볼 수 있었다. 공기는 더 줄었을 텐

데, 숨쉬기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주인이 하얀 잔에 카페오레를 내왔다. 각설탕 하나를

넣고 스푼으로 꾹꾹 눌렀다. 재즈를 잘 몰라도 이 작은 공간이 사람 안으로 넘어져 들어오 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들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주인의 물음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우린 내가 어디서 왔는지 밝힐 필요는 없는 사

이였다. 그는 내가 카페로 들어서자마자 더듬더듬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이곳엔 한국 인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얼굴만 보고 내가 한국인인 걸 알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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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 사람들끼리는 역시 슬쩍 보기만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일까. 나

는 우연히 찾게 되었다고 답했다. 더 멋진 표현을 쓰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우리에

겐 서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없었다. 그가 우연이라도 찾아와줘서 고 맙다고 하길래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착각과 실수를 반복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제대로 전할 수 있었다면, 우린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꽤 깊은 속내를 주고받았 을지 몰랐다. #2

11월 말에 삿포로에 가면 눈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침 화이트 일루미네이션 기간이

겹쳐있었고, 사진 속 행사장은 항상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냥 일루미네이션도 아니고 화 이트잖아, 이건 일종의 약속이라고. 동물 모양의 조명 더미가 눈을 부르는 주문인 것도 아

닌데 나는 나흘 중 하루는 눈이 내리리라고 그냥 믿어 버렸다. 열차에서 내려 삿포로 역 바 깥으로 나왔을 때, 바람만 더럽게 차갑지 눈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내릴 기미도 없었다. 무 릎까지 푹푹 잠기는 흰 눈 대신, 저렇게 파란 건 정말 오랜만이네, 맑은 하늘만 실컷 보고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서울엔 이른 첫눈이 펑펑 내렸다. 너 왜 거기까지 갔다 왔느냐고 뒤대는 것 같았다.

그게 내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계획도 아닌데, 눈을 맞는다는 것 말고는 다른 계획이 없

었다. 남들 다 출근하고 한가한 아침에 스스키노 거리까지 걸어갔다가 노면 전차에 올랐

다. 점잖은 노인 네 분을 뵙고 역시 삿포로의 늦은 아침은 이런 느낌이군, 고개를 끄덕이려 다 긴 의자 위에 시선이 멈췄다. 청년 한 명이 비정상적인 자세로 의자 위에 누워있었다. 아

침까지 술을 마시다가 전차를 탔고, 그 상태로 몇 바퀴를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출근을 할 나이인지 등교를 할 나이인지, 아니면 이대로 하루를 끝내도 좋은 백수인지는 모를 일이었

다. 가끔 지하철 이 호선을 타고 그러는 친구가 하나 있어 반가울 따름이었다. 남자는 그렇 게 몇 정거장을 더 자다가 전차사업소에서 나타난 정복 차림의 직원들에게 끌려나갔다. 그 는 자기가 전차를 탔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폭설만큼은 아니지만 꽤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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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을 했으니 왠지 오늘의 운을 다 쓴 기분이었다.

세상 시름에 취한 자가 물러가고 그다음 정거장에서 나도 내렸다. 그래도 어느 도시에 처

음 왔으면 높은 곳 한 번은 올라가 줘야 하지 않겠나, 모이와야마 전망대에 갈 요량이었다. 원래 야경이 예쁘다고 하는데, 이 추위에 해도 없는 밤중 산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전

망대까지 이어진 로프웨이를 탈 수 있는 모이와산로쿠 역에 도착하자 표지판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십일월의 마지막 열흘 동안 로프웨이 정기점검으로 휴관한다는 안내문

이었다. 십일월 말이면 삿포로에 눈이 올 줄 알았고, 모든 로프웨이는 1년 365일, 큰 명절 빼고는 항시 운행하는 줄 알았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3

삿포로에 온 첫 날, 일기예보를 검색해서 며칠간 눈이 올 기약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혼

자 술집을 기웃거리기엔 아직 너스레도 없이 움츠러든 상태였다. 오오도리 공원이며 아케 이드인 다누키코지며 한참을 배회하기만 했다. 야근하는 사람도 없는지 회사 간판이 붙은

건물들은 줄줄이 불이 꺼져 있었다. 택시는 뒷문을 열어둔 채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렸다. 도요히라 강에서 불어온 바람은 삭삭 살갗을 뜨다가 도망가 버렸다. 거리는 스산하고 어두

웠고, 사실 그 분위기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눈이 오기 직전의 침묵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 다. 이러다가 기적적으로 눈이 쌓이면 조그만 술집에 들어갈 참이었다. 따뜻한 청주를 마

시며 뿌연 창문 너머로 그걸 바라볼 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편의점에 비치된 바구 니를 집어 들었다. 지금은 검지만 한 니카 위스키 한 병과 참치 마요네즈 삼각 김밥, 그리고 진짜 튀김이 들어있는 컵라면 정도가 나에게 과분했다. 끝내 눈은 오지 않았고, 편의점 음 식은 어느 것 하나 맛이 없는 게 없었다.

불을 끄고 좁은 침대에 눕자 공기청정기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만 들렸다.

조용한 사람들이 모인 호텔이었다. 어쩌면 컴컴한 사무용 건물 안에도 불을 끈 채 조용히 일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던 건지도 몰랐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날 반겨주기엔 다들 너

무 바쁘거나 떨어져 나간 파편처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눈이 오려면 한참이


나 남은 이 도시에. 문득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철저하게 관광객이기를 자처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잠들기 직전, 잘못 왔다 는 생각도 조금은 하고 말았다. #4

카페의 주인은 원래 말이 많은 사람 같진 않았다. 그저 무료한 수요일 오후, 평소에 볼 수

없는 유형의 손님이 나타나 그 또한 잠시 들뜬 모양이었다. “모이와야마 전망대에 가려다 가 로프웨이가 운휴라 허탕을 쳤지요.” 내 말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정기점 검 날짜도 확인하지 않았느냐는 의미라기보단 뭐하러 거길 가려 했느냐는 의미 같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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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라는 걸 그 표정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약 어젯밤 좁은 방안에서 느낀 바를 그에게 이해시킬 재주가 있었다면, 단순하더라도 마음에 새길만 한 제 언을 돌려받았을 것 같았다. 당장 삿포로 맥주 공장으로 달려가 싱싱한 생맥주를 들이키라

던가, 눈이 내릴 때까지 여기에 머물면 되지 않겠느냐라던가. 그리고 그는 내게 되물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눈을 보고 싶으냐고, 북해도가 폭설에 잠기면 그건 사람 목숨 이 오가는 위태로운 현실이지 전혀 낭만적인 상황은 아닌 거라고.

삿포로에 온 건 눈을 보고 싶어서였다. 아주 많은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서였다. 그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종 일으키는 발작 같은 것이었다. 눈에 파묻히

고 싶은 기분이었고, 그만큼 호되게 두들겨 맞아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지나가는 불량배 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것보단 훨씬 멋진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루하루 의미 없이 흘


려보내고 마음을 게으르게 놔두던 날들에 경종을 울리는 싶었다. 그러나 삿포로에 눈은 오 지 않았다. 로프웨이는 정기점검이었고, 이 재즈 카페를 나와 찾아갈 현대 미술관도 전시 준비로 12월 초까지 문이 닫혀있을 예정이었다. 나는 주인에게, 일본 드라마를 보면 이럴

때 “마스터”라는 말을 쓰고는 하던데, 여하튼 사람 좋아 보이는 오너에게 그런 것들을 털 어놓고 싶었다. 어느 것 하나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여행이라고. 여기에 오게 된 것 도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고.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주인은 어색한 미소로 포즈를 취했다. 그는 내게 줄 카페오레를 만들면서 재즈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흥겨운 몸짓이었는지 나는 그가 드럼을 치는 줄로만 알았다. 액정 화면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더 잘 찍을 수 있었는데, 아쉽기만 했다. 하지 만 다시 포즈를 청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나보다 먼저 와서 신문을 읽고 있던 손님의 두 번 째 커피를 내려야 했다. A컷 없는 B컷 사진이라고 하자, 나쁘진 않다, 뭐하나 계획대로 되

지 않은 덕분에 이런 말도 안 되게 멋진 곳을 발견했으니까. 이곳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했 다. ‘다방 연구소喫茶店硏究所’. Le cafe라는 다른 이름도 있긴 했지만 재즈와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다방 연구소’ 쪽이었다.

문득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의식했다. 좋은 음악은 그렇게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

다. “이게 무슨 곡이죠?” 1954년, 보스턴 하이햇 클럽에서 소니 스팃이 색소폰을 맡아 녹

음한 곡이었다. 제목은 <플라잉 홈>. 일기예보에서 눈이 오지 않겠다고 했으니 나도 집으 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하지만 그 전에, 내일은 오타루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쓴이 베르고트는 여행 매거진 BRICKS의 에디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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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당연한 그린란드의 겨울 글 밤하늘은하수

ⓒMads Pihl @Visit Greenland


크리스마스와 새해 휴가의 끝자락에는 학교 시험이 있었고, 후에 회사에 복귀했다. 사람

이 참 간사하게도 공부하면 일하고 싶고, 일하면 공부가 그립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 자’ 내 인생은 스무 살 이후로 그렇게 공부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사실 어떻게 그린란드를 알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분명, 고등학교 세계

지리 시간이었겠지만, 오랫동안 나의 비루한 상식으로 그곳은 이글루에 사는 에스키모들 의 땅이었다.

나를 움직인 건 한 장의 사진이었다.

어느 날, 나는 지구의 북반구, 그중에서도 위쪽에 위치한 새하얀 얼음덩어리 섬을 발견했

다. 분명 그린란드(Greenland, 초록 땅)라고 쓰여 있는데, 새하얀 섬이었다. 나는 인터넷 으로 Greenland의 이미지를 검색했다. 새하얀 빙하와 눈에 둘러싸인 알록달록한 색의 집 들, 세상에 이런 곳도 존재하는 구나!

그게 2010년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도쿄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하고 있었다. 나

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것들을 하고 싶다’고 자주 말하는 편이다. 그렇게 하는 것

이 내 꿈을 실현시키기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말해 버렸으니, 지키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거다. 일본에서 일하면서도 주변인들에게 “나는 여름에 그린 란드를 여행할 거야”하고 말하고 다녔다. 6개월간 모은 돈을 한 달 만에 다 쓰긴 했지만, 일

곱 도시의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닌 그린란드 여행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고, 결 국 내 삶의 모습을 바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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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그린란드의 회사 업무 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야근은 거의 없다고 봐

도 무방하다. 일이 끝나고 나서도 자기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출근할 때, 그리고 퇴근할 때에도 밖이 컴컴해서 기분

이 우울했었다. 하지만 이제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퇴근길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이제 겨울이 가고 있는 건가? 봄이 오고 있는 건가?’라고 생각할 때 즈음, 하얀 눈은 아직 제 역할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는 듯 찾아오고 또 찾아온다.

마치 영화 <투모로우>를 보는 듯한, 재난 영화 같은 날씨가 며칠 간 계속된다. 하루는, 공

부도 일도 쉬는 날이어서 창밖으로 그 엄청난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 날씨에 차들이 다니는 것도 신기하고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을 걷는 것도 너무나도 신기했다.

눈보라를 헤치며, 한 엄마가 두 아이가 탄 썰매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심한 눈

보라에 뒷자리에 탄 아이가 그만 썰매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엄마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몇

발자국 앞으로 더 썰매를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썰매에서 떨어진 작은 아이는 이내 곧 울 음을 터뜨렸고, 그제야 엄마는 아이가 썰매에서 떨어졌음을 인지했다.

ⓒMads Pihl @Visit Greenland


ⓒMads Pihl @Visit Greenland

오늘 아침도 밖은 눈보라로 가시거리가 5미터도 되지 않는 날씨였다. 제설차와 제설 작

업인부들은 그 거센 눈보라 속에서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하고 있었다. 출근 직전, 나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눈이 덜 쌓였을 큰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평소에 다니

는 지름길을 택해서 눈과 추위를 덜 맞이할 것 인가. 나는 평소대로 지름길을 택했고,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허리까지 쌓인 눈 속에서 ‘아, 왜 여기로 왔지?’ 후회해도 늦었다. 한번 들어선 지름길을

뒤돌아 나갈 수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길을 걷고 있지 않았다. 길은 없어진 지 오래고, 마

치 내가 북극의 탐험가라도 된 듯,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나만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가끔 부모님께 연락이 오면 늘 눈길, 빙판길 조심하라고 하는데, 눈에 허리까지 파묻혔으 니 넘어질 수도 없다. 평소보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회사에 무사히 도착해 동생에게 이 엄청났던 출근길 이야기를 톡으로 들려주었다. 눈이 허리까지 왔다고 하니, 얼마 안 왔다

며 콧방귀를 뀌었다. 내 키가 크지 않다는 게 함정이지만, 정말 눈이 많이 왔다. 믿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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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이 날은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이런 눈이 재앙이었나 보다. 그린란드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출근길이 아니었나 싶다. 제설작업이 끝난 퇴근길은 출근길보다 훨씬 수월

했다. 바깥은 분명히 추웠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등에 땀이 흥건했고 언덕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다리와 어깨에 힘을 너무 많이 줬는지 피곤하기까지 했다.

‘아, 눈이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거야.’ 하고 생각하다 보니, 나는 그린란드에 있고

지금은 겨울이다. 눈은 거침없이 와야 하고 놀랄 만큼 추워야 당연한 나라다. 가끔, 엄청

난 눈보라 속을 걸으며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그냥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참, 나 그린란드에 있지.’ 나는 그렇게 너무나도 당연한 그린란드의 새하얀 겨울 속에 있다.

글쓴이 밤하늘은히수는 세계 최대 섬인 그린란드에 사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그린란드 대학교에서 West Nordic Studies 전공으로 사회과학석사과정 중에 있으며, 그린란드 관광청 (Visit Greenland)에서 Student Assistant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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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릭 입센의 무덤


노르웨이 오슬로, 내 영혼의 트롤 글 이주호 언뜻 보니, 헨리 입센의 옛집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인 것 같았다. 문고리를 잡고 흔들어 봐

야 판명날 일이지만 날이 추워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싶지 않았다. 각박하게 짧은 해에 왕 궁, 카를 요한Karl Johans 거리, 그룬네르뢰카Grunerlokka를 거쳐 입센의 묘지까지 걸

으려니 마음이 급하기도 했다. 조상 묏자리도 분간 못하면서 빈번하게 남의 묘지나 찾아다 니고, 집 떠나 봤자 뭐 뾰족한 하루 계산이 없다.

꿈에 만나도 말 한 마디 못 나눌 외국인들의 무덤을 찾아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했더랬

다. 내 나름 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지만, 너무 거창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누굴 만나도 잘 먹히질 않았다. 내가 찾아가는 무덤의 주인들은 다들 고인이 되고 나서야 작품으로 알게 되

고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내게는 그 인생 자체가 작품일 수밖에 없었 다. 지구상의 공간을 점유하고 실존하던 인간이란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안다는 수 준이 그 옛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루시’도 한때 생명이었다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덤을 찾아와 육체가 지상에 남긴 최후의 흔적, 막 숨이 진 육체가 안장되던 순간

을 되짚다 보면 그가 나와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약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인생만 봐서 는 실감할 수 없었을 ‘인간의 위대한 삶’이 정말로 실재했구나, 그러다 보면 나의 마지막도 느닷없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삶은 온갖 순간적이고 쾌락적인 장치들로 삶이 영원히 지속 될 듯, 나의 가족,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조차 믿을 수 없을 만치 허황된 일로 여

기게끔 만들었지만, 위대한 인간의 묘비 앞에 서면 죽음만이 명백하고 삶은 허망, 허상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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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왕궁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시리아. 어디에서 왔든 모두가 노르웨이 사람입니다. 소녀를

사랑하는 소녀, 소년을 사랑하는 소년 모두가 노르웨이 사람입니다. 야훼를 믿는 사람, 알 라를 믿는 사람, 신을 믿지 않는 사람 모두가 노르웨이 사람입니다.”

올해 나이 여든이 된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가 작년 가을 자신의 집 앞마당을 밟고 있는

천여 명의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국가라면 애국자로 늙는다는 게 그리 추하 지 않을 지도 몰라, 잠시 그런 생각도 했었다. 21세기까지 왕을 해먹는 집안이라니 위세 좀

보게나 싶겠지만, 이 왕궁에 살게 된 지 고작 3대째다. 18세기 노르웨이 왕은 덴마크에 있 었고, 1814년 나폴레옹 군에 부역하던 덴마크와 싸워 이긴 스웨덴이 전리품으로 노르웨

이를 할양받자 노르웨이에서 빚어지는 모든 일은 오슬로가 아니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결정되었다.


1884년 자유당의 지도자 스베르드럽이 의회 다수를 확보하며 노르웨이 책임 정부를 수

립했지만, 자주권은 늘 국경 밖의 문제였다. 민족주의자들과 진보 정치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헨리 입센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스칸디나비아를 넘어 유럽에서 가장 존경 받는 작가 헨리 입센이 노르웨이 독립에 한 마디 보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입센은 왕 궁 정원을 거쳐 카를 요한 거리로 이어지는 산책을 나서거나, 늘 가는 Grand Cafe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독일 맥주를 마셨다.

“나는 혁명에 찬성합니다. 다만 당신들의 혁명이 한 개인의 자유, 모든 인간들의 정신적인

자유를 위한 혁명이라면 말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혁명이 정치적 혁명에 그치는 것은 아닌 지 걱정입니다. 스웨덴은 노르웨이를 간섭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정치적 혁명이라는 것은 왕의 국적이 바뀌거나, 지배하는 무리가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정치 싸 움은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헨릭 입센의 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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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시 바이킹의 역사, 노르웨이 민족, 웅장한 자연을 담아 보고자 편력하던 때가 있었

다. <브란>, <페르귄트>가 그 일단락이었다. 그러나 1876년 2월 24일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제작비를 많이 들였던 공연 <페르귄트> 개막에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그의 음 악을 싫어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노르웨이 정신이란 게 있기나 한지, 국가란 게 찬 양할 만한 것인지, 작품에 담으려 했던 모든 생각들이 불명확해졌던 까닭이다. 내가 쓴 모 든 것이 나태한 국민들과 부패한 정치가들에게 큰 세상을 바라볼 필요 없이 자발적으로 노 르웨이 땅 안에 고립되어 살아가라고 독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3년 뒤 1879년, 입센은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에 머물며 그의 대표작 <인형의 집>을 탈고

했다. <인형의 집>은 남편의 사랑스런 인형, ‘귀여운 종달새’ 노라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

며 남편이 사랑한 것은 자신의 지위와 체면이지 노라 자신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집을 나 간다는 내용의 희곡이다.

“우리는 완전한 자유예요.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고, 남에게선 아무 도움도 받지 않을 거

예요.”

이 작품이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작품을 비판하고 거부하던 사람들이 내세우던 근

거들이 하나둘 허위로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언론과 학자들은 일제히 노라의 과격한

가출을 비난했고, 노라 역을 맡은 배우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연기를 할 수 없다며

그 부분을 수정해주길 요구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거부의 역사는 채 10년을 가지 못했다.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 먼저 나 자신부터 가르쳐야 해. 나 자신과 세상을 알기 위해 완전

히 홀로 서야 해.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만큼이나 나 자신에 대한 의무도 있어.”

노라의 말은 도덕적으로 너무나 해로워 관객들이 용납할 수 없을 거라는 평론가들의 장담

과 달리 불과 몇 개월 만에 가장 도덕적이고 매력적인 여성의 외침이 되어 갔다.


그룬네르뢰카에 있는 예술학교의 공연 포스터

저 교회 뒤가 오슬로에서 공연장이 가장 많은 그룬네르뢰카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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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네 시간을 서성이다 도착한 입센의 묘비에는 망치 하나가 음각으로 그려져 있을

뿐 아무런 헌사가 붙어 있질 않았다. 망치라, 그 먼 빙판길을 돌아 돌아 망치라. 무덤을 나와

다시 20분을 걸어 그룬네르뢰카로 되돌아가 문 앞에 공연 시간표가 적힌 카페로 들어갔다. “오늘은 종일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선 갈등하고 투쟁하고 패배에 괴로워하는

전투가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입센에 관한 이것저것을 검색했고, 어렵사리, 무덤에

새겨진 그림이 토르의 망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센은 나태하거나 거만하거나 극심한

절망에 빠져 한 줄도 쓸 수 없게 될 때마다 자신의 영혼에 트롤이 산다고 생각했다. “산다 는 건 마음과 영혼에 자리 잡은 트롤과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쓴다는 건 나 자신에게 마지막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죽어서도 트롤과의 싸움을 멈출 수 없었는지 그는 묘비에다 트롤을 때려잡던 토르의 망

치를 새겨 넣었다.


“망치로 치고 또 쳐라, 생명의 등불이 가라앉을 때까지. 희망도 아닌, 여명도 아닌.”

<페르귄트> 이후 그의 작품에는 국민도 민족도 아닌 하나의 목숨들이 내는 목소리들이

담겼다. 소녀는 소녀를 사랑하기 위해, 소년은 소년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 완력과 싸워야 했고, 국적과 종교에 상관없이 그저 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면 눈앞에 보이는 실패 속으로

외롭고 처참하고 걸어 들어가야 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정치적 타협으로 보장받을 샛길이 인간을 사랑하려는 인간이 택할 길일 수는 없었다.

“이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된 건, 모든 사람들은 국가, 민족, 이념이 아닌 자기 자신이 내

건 깃발을 뱃머리에 달고 항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후 여섯 시. 벤조, 기타, 콘트라베이스를 든 밴드의 연주가 시작될 즈음, 나는 맥주 한 잔

을 더 주문했다. 내 손에 들린 망치는 얼마나 무르기에 이토록 더딘 인생 흥얼거리기만 하 는 걸까, 내 영혼의 트롤은 널찍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 유튜브나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래도 이런 국가라면 10년쯤 애국자로 살아봐도 좋을 텐데, 이름 난 장수의 선단을 선망해 보기도 했지만, 가벼운 망치나마 근근이 들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 작은 쪽배에 내 이름 적 힌 깃발 한 장 돛대에 내걸고서 세상 떠다닐 날도 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글쓴이 이주호 브릭스 편집장은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최근에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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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매거진 BRICKS - 겨울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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