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BRICKS - Travel with a dr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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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 W.B. Yeats

안데르센의 오덴세

CONTENTS 4

독일 맥주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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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선 삿포로 맥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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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와 꼼장어

겨울의 플라스크 , 광장의 봄

가라쓰, 사카모토야 여관 술집

막걸리가 익었으니 친구를 부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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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의 오덴세 글 miya

“그 중에서도 육지의 세계를 가장 동경한 공주는, 가장 오래 기다려야 할 뿐 만 아니라 말은 없고 생각이 많은 막내였다. 밤마다 막내 공주는 열린 창가 에 서서 물고기들이 지느러미와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는 검푸른 바닷물을 올 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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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댁은 남해의 조그만 어촌 마을이었다. 지금은 독일마을로 유명세를 타게 된 곳이

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외지 사람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동 트기 전 통통배를 몰고 나가 어망으로 생선을 낚아 내다 파는 게 마을 사람들의 생업이었다. 나 도 가끔씩 아빠를 따라 밤낚시를 나가곤 했지만, 드리운 낚싯줄엔 입질 한 번 없었고, 물고 기가 도망간다고 떠들지도 못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뱃머리에 턱을 괴고 앉아 깊이도 알 수 없는 검은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어쩌면 저 아래 아름다운 산호 성벽 뒤로 은은한 광채가 흐르는 진주로 뒤덮인 궁전이 있

을지 몰라.’

‘배 아래 인어공주가 얼굴을 빼꼼 내밀지는 않을까.’

바다 위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거품을 보며 인어공주도 이렇게 사그라져 갔던 걸까 그런 생

각을 하기도 했다. 인어공주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가슴에 구멍이 생겨났고, 그 사이로 냉 랭한 바다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북유럽 여행길에 잠깐 런던에 들린 G는, 홍대에서 커피나 한 잔 하자는 말투로 다음 주 토

요일 점심 코펜하겐København에서 만나는 거 어때, 하고 말했다. 일주일 후 나는 홀린 듯 코펜하겐 중앙역에 내려 스타벅스에 앉아 따뜻한 머그잔으로 손을 녹이고 있었다. 그 사

이 수염이 거뭇하게 자란 G에게선 제법 여행자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G와 나는 머릿속에

막 떠오르는 생각들을 뱉는 정도의, 음…, 나른한 사이였다. 오덴세Odense로 가는 기차 안, 우리는 말을 거두고 차창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코펜하겐에서 한 시간 남짓 달려 안데르센의 고향 오덴세에 도착했다. 겨우 4시였는데 안

데르센의 생가도, 박물관도, 기념품 가게마저도 Close 표지판을 내걸고 있었다. 이 마을

의 여행자는 G와 나 둘뿐인 것 같았다. 비는 톡톡, 우산 쓸 맛이 날 만큼 내리치고 있었다.

파스텔 톤의 돌바닥은 비를 머금어 반들반들 했다. 돌길을 따라 지붕 낮은 집들이 줄줄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창문을 기웃댈 뿐이지만 여행은 그대로도 좋았다. 그리고 너무 단 출해서 눈에 띈, 안데르센이 유년시절을 보낸 집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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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무대 위 눈부신 백조가 될 거라는 꿈을 안고 코펜하겐으로 상경했을 때, 안데르센

은 겨우 14살이었다. 연기와 노래보다 글에 더 재주가 있던 소년은 10년 후 동화작가로 명 성을 날리게 되지만, 가난한 유년시절에 대한 피해의식은 평생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인 관계는 서툴렀고, 정체성은 불안했다. 이를 덮기 위한 허영과 과시욕은 다시 외로움이 되 어 돌아왔다.

오덴세 거리 곳곳에 안데르센 동화 속 주인공들의 조각상이 있었고, 그 사이 훤히 보이는

곳 어딘가에 그의 동상이 있었다. 벤치에 외따로 앉아 있는 고독한 모습. 망토는 휘황찬란

해서 쓸쓸함을 더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동상으로 만드는 게 어떠냐고 했지만, 안데르 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동화로 불리고 있는 게 싫었다. 아

이들은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뿐 어른이 되어야만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로 그랬다. 어렸을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것을 어느 순간 실타래 풀리듯 스르륵

깨닫는 순간들이 온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대로 살았을 뿐인데, 그간의 경험이 젊음을 내어준 자리에 연륜과 나이테로 오롯이 자리하는 것이다. 감정이 휘몰아치고, 차라

리 추억마저 기억에서 다 뽑아내 버렸으면 싶은 사랑을 겪은 뒤 인어공주는 더 이상 동화 가 아니었다. 끝내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사람의 축복을 빌며 기꺼이 물거품이 되어 사 라지는 마음. 바보 같다 생각했던 인어공주의 마지막 선택은, 그때는 차마 이해하기 싫었 던 고결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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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인데도 봄은 아직이었다. 우산을 쥔 손이 제법 시렸다. G와 나는 골목 끝, 눈 여겨 두었

던 펍 Lørups Vinstue으로 들어갔다. 록 밴드의 앨범 재킷과 포스터로 벽면을 가득 채운

작은 술집이었다. 토르 같은 덩치의 웨이터가 추천한 오덴세 지역 맥주 알바니Albani를 비 워갈 때쯤, 바에 앉아 있던 Dan이란 사람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글 제민 “혹시 방해가 안 된다면, 덴마크 전통술 한 번 마셔보지 않겠어요?”

우리는 감기약 같이 꾸덕거리는 가욜Ga-jol을 시작으로, 40도가 넘는 아쿠아비트

Akvabitt, 슈납스Schnapps까지 연거푸 들이부었다. 센 술에 얼큰히 취기가 올라 대화 는 차츰 테이블을 건너뛰기 시작했다. 시시콜콜한 수다가 흐르는 동네 아지트 같은 술집 한 구석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30년 전 덴마크의 전설적인 록 밴드의 리더였다 한다. 그는 맥주를 홀짝이며, 벽에 걸린 가장 큰 포스터에서 자신의 모습을 가리켰다. 벽에 붙은 포스

터 속 록커와 맥주를 마시는 곳이라니,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에라도 있는 것 같았다. 펍을 나서자 다들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오덴세 조용한 카페에서 안데르센의 흔적을 찾아보자던 여행은 결국 이 술 저 술 진창 마

시러 온 꼴이 되었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때로는 술 한 잔이 절실한 이유가 되리라는 것을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

글쓴이 miya는 런던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지금은 서울 체류자. 대륙을 가리지 않고 오지를 휘젓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페에 나른하게 앉아 일기를 쓰고 엽서를 쓴다. 창밖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아져 걷기도 싫어져 버린. 아니, 아니, 나이 때문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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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맥주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글 프리드리히 융

아시다시피 독일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두 가지는 자동차 그리고 맥주입니다. 오늘은 맥

주 이야기인데요, 맥주에 대해 말하자면 정말 방대한 설명이 필요하나 간략히 말씀드리자 면 독일 맥주는 라거 맥주와 밀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라거 맥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맑은 노란 색의 맥주로 보시면 되고요, 밀주는 헤페Hefe로 불리는 곡물 효모가 들어간 맥주인데 우리나라 막걸리 정도로 보시면 무난합니다. 흔히들 독일 전 통 맥주라 일컬음 받으시는 바로 분들이 이분들이십니다.

대표적인 상표로 에르딩어Erdinger, 파울라너 Paulaner쯤 들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

독일대표 밀주 에르딩어는 ‘너무’라기보다…, 그냥 달아요. 저는 음식이건 술이건 단 건 무

조건 싫어합니다. 그나마 파울라너는 조금 봐 줄 만하지만요. 언젠가 한국에 잠시 머무를 때 이마트에서 독일 명품 맥주라고 써 놓고 외팅거Oettlnger를 팔던데, 이건 정말 아닌 거

라 생각이. 명품은 고사하고 이 외팅거는 그냥 싼 맛에 마시는 맥주인데, 독일 여행을 하실 기회가 있으시면 기차역에서 집 없이 어슬렁대는 독일 형님들을 유심히 보세요. 이분들이 특히 많이 드십니다. 생각나시면 꼭 살펴보시길.


좌. 파울라너Paulaner 라거 비어 / 우. 불칸Vulkan 헤페바이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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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특히 라인하이트게보트Reinheitsgebot(맥주 순수령)라 불리는 맥주 양조법

에 따라 딱 물, 호프, 말쯔 헤페malz hefe 이외엔 쓰지 말도록 법적 조치를 해놓았는데요, 요즘 독일 젊은 층들은 요즘 이 제도에 대해 호불호가 좀 많은 편입니다. ‘불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한마디로 아로마를 허용하여 맥주의 맛을 다양화시킨다는 취지인 듯합 니다만, 전 자연주의를 선호하는 인간이므로 물론 ‘호’입니다.

주변 벨기에, 네덜란드만 보더라도 아로마를 많이 써서 나름의 특색 있는 맛을 내고 있습

니다. 대신 알코올 도수가 7도에서 8도를 넘는 것들도 있는데, 진정한 독일 맥주 주당을 자

부하시는 분들 사이에선 “맥주의 알코올 도수가 6도 이상이면 이미 그건 맥주가 아니다.” 라고 하시며 아랫것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이상은 자칭 전문가라 칭하는 독일 및 유럽연 합 술꾼들의 의견이며 저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임을 알려드립니다.)

네덜란드에서 오신 휼펜Gulpener 라거와 벨기에 분이신 헤르톡 얀Hertog Jan도 나름

이분들 고장에선 나름 방귀 좀 뀌고 사셨을 양반들입니다만, 맥주의 고장에 살고 있으면서 이들마저 양반으로, 아니 맥주로 대할 수 없다는 대쪽 같은 아내의 추상같은 명령으로 ‘소 맥’으로 강등하여 흡입해 봅니다.


일단 오늘은 순전히 글감을 위해 원치 않는 알코올 순례를 하게 되네요. 금욕 금주를 통한

구도의 길을 일상생활에서 이뤄보겠다는 신념을 안고 사는 저인데 말이죠.

어느 토요일 오후 쉬는 날. (제 기준에서) 맛으로 세계 2위의 밀주를 파는 곳으로 옵니다.

왜 1위로 안가냐고요? 전 술이 고프고 1위 집보다 2위 집이 한 정거장 가깝거든요!! 그리

고 사실 1위 2위의 차이를 비교하자면, 마치 당구 다마가 400이 넘어가면 어차피 ‘가야시

자체 기준 2위의 밀주를 파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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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 전문 용어로 공을 모아 치는 기술. 국어를 사랑합시다!)’의 차이일 뿐이듯, 맥주도 그 런 겁니다. 그런데… 아뿔싸! 내부 수리 중이라고. 사장이 바뀌었대요. 이곳은 호텔과 겸 업을 하던 곳인데, 최근 호텔 영업만 이곳에서 하고 레스토랑은 이전하였답니다. 뭐, 개의치 않고 1위 집으로 걸어갑니다! 전화위복인 거죠. 그리하여 도착한 달마시안Dalmatien.

네, 그러네요. 개 이름이네요. 그러고 보니 그래서 제가 여기에서 달린 날은 늘 개가 돼서

나온 거였네요.

자체 기준 1위의 밀주를 파는 ‘달마시안’.


농담이고요. 사실 이 집은 사장님을 비롯해 크로아티아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곳인데, 모

두가 가족이라고 합니다. 가게 이름은 달마티아라는 유명한 크로아티아 해안 도시 이름에 서 따온 것이고요. 저는 이 집 사장 조카와 인연이 있어 알게 되었는데, 보석 같은 술집입니 다. 아니 레스토랑이죠.

전 맥주는 라거 말고 밀주를 즐겨 마십니다. 이곳에서 파는 툭허Tucher 밀주 생맥은 정

말! 지금 글로 쓰기만 했는데도 목이 간질간질하며 혈관에서 알코올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 다. 그러고 보니 위에서 구도니 절제니 했던 헛소리가 무색합니다만.

‘달마시안’에서 파는 밀주, 툭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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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도 독일 맥주를 비롯한 많은 내로라하는(?) 세계 맥주가 점점 보급되어 가

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순전히 맥주만 마시러 독일이나 유럽 전역으로 테마 여행을 나오시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독일에 오신다면 유명 상표 맥주보다 꼭 그 지역의 터주맥 주(?)를 드셔 보시길 권합니다!

독일 속담 중 이런 말이 있어요.

“하루에 맥주 한 잔을 마시면 좋다. 두 잔을 마시면 한 잔보다 좋다. 석 잔을 마시면 한 잔

마신 것만 못하다.” (필자 미상) 또는,

“네 시 전엔 맥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출처 : hornbach.de


글쓴이 프리드리히 융은 2003년 독일유학 중 우연히 독일 회사에 취직하여 현재까지 구 서독의 수도 (현재 독일의 행정수도)인 본에 거주중인 해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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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와 꼼장어 글굔짱


금요일 저녁,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길 거부한 지친 두 발은 전철에 놓여 신오오쿠보1)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 나의 혀를 잡아 끌어당기는 신오오쿠보의 메뉴, 엄밀히 얘기해 소주 안주는 꼼장어2)

볶음이었다. 꼼장어는 거의 접할 기회가 없는 일본 한복판이라는 이유도 있거니와, 대부분 의 한국 음식점의 대표 메뉴가 삼겹살에 편중되어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요 근래 꼼장 어 볶음이라는 메뉴는 나에게 있어, 본래의 고소함과 함께 지리적, 문화적인 의아함과 어 색함을 더한 매력적인 술안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신 오오쿠보 풍경 ⓒ白石准

1) 신 오오쿠보新大久保 : 도쿄의 비공식 코리아타운으로 대표적 번화가인 신주쿠 옆에 위치. 다양한 한국관련 상품을 파는 상점과 한국 음식점이 밀집해 있다. 2) 꼼장어는 곰장어를 일컫는 경상남도 사투리지만, 어찌됐든 어딜가든 “꼼장어”라 불린다. 일제강점 기 당시 일본은 부산에 꼼장어 가죽 공장을 지어 그 껍질을 공산품에 활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본격적 으로 꼼장어 고기를 팔고 먹기 시작한 건 해방 이후, 부산 자갈치 시장부터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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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오쿠보역에 도착한 후, 아는 형님과 친한 동생 둘이 운영하는 가게로 배고픈 발걸음

을 옮겼다. 가게에 도착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선 벌써 꼼장어 한판을 비우고 남 은 양념에 밥을 볶고 있었다.

가게 문을 염과 동시에 상상 속의 볶음밥은 현실의 불판 연기에 감겨 사라지고, 기다렸다

는 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나를 반긴다. “형 왔어요?”

“어. 여기, 친구도 같이 왔어.”

방금 전 문장까진 글 분량에 대한 걱정으로 동행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었지만, 난 절

대로 술을 혼자 마시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둘은 동생에게 서비스 안주를 요구하기 편하게 주방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별다른


고민 없이 꼼장어 볶음에 초록병 소주를 주문했다. 참고로 일본 음식점에서 한국 소주 한

병은 한국 돈으로 대략 만 원 정도다. 소주를 주문할 때 한국과의 차이에서 오는 무의식적 인 고민은 아주 가끔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눈치 빠른 동생이 서비스 안주로 달걀부침 두개와 함께 주문한 꼼장어 볶음을 내오자, 동

행과 나는 소주 한 잔씩을 부어 그날의 노고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꼼장어가 일본인 동행 의 입에 안 맞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술잔을 기울였다.

둥그런 철제 테이블에 놓인 ‘부르스타’, 그리고 그 위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꼼장어 볶음

은 대학시절 자주 들르던 청량리 어느 골목으로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얼마나 혼자서 청

량리를 배회하고 있었을까, 일본어로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가 무섭게, 청량리로 이탈하던 유체가 신오오쿠보로 급히 돌아오고, 빈 술병과 함께, 빈 그릇들도 하나둘 치워졌다. 꼼장어 집을 나선 후, 동행과 나는 가라오케

로 향했다. 일본의 가라오케는 술과 안주가 제

공되므로 2차 장소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나의 애창곡인 도쿠나가 히데아키(徳永英明:

일본의 중견가수. 애절한 창법으로 유명하다.) 의 레이니블루를, 동행에 앞서 한곡 부르고 있

자니, 노크소리와 함께 주문한 하이볼과 오렌 지 사와(한국의 과일 소주와 비슷한 술로, 영어 sour)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의 열창은, 하 이볼과 또 다른 술로 축인 촉촉한 성대에 힘입 어, 실로 오랜만에 새벽까지 이어졌다.

글쓴이 굔 짱은 국문학과를 다니는 내내 일본어를 공부하다 7년 전 도쿄로 떠나 은행 시스템 엔지니 어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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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에선 삿포로 맥주를 글 베르고트

비어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양복을 입은 신사, 맥주 맛 한 번 봐보자고 시골에서 상경한

촌뜨기, 문 열 때 들어와 문 닫을 때까지 죽치고 앉았던 애주가 혹은 중독자까지, 하루 800

명이 넘는 손님이 도쿄 신바시新橋의 ‘비어홀’을 찾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맥주는 돈 좀 만지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서양인이 그 이름을 지은 작명법만큼이나 비어홀 의 사업 방식은 혁신적이었다. 500mL <에비스 생맥주> 한 잔이 불과 10전이었고, 위장 이 작은 사람을 위한 250mL 잔도 한 푼 더 받는 거 없이 딱 반값이었다. 당시 괜찮은 식당

덮밥 한 그릇이 30전이었다. 오백 석 잔이면 덮밥 한 그릇보다 배가 더 부른 건 물론이거니 와 덤으로 기분까지 좋아졌다. 도대체 어떻게 전승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마차를 타

고 지방에서 올라온 한 촌부는 이곳에서 맥주라는 놈을 처음 맛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캬, 거 참 시원하다. 근데 좀 씁쓸하네.”


삿포로 맥주 박물관의 비어홀에서 <삿

포로 개척사(가이타쿠시開拓使)> 맥 주 한 잔을 시켜놓고 홀로 앉은 내 기분 이 딱 그와 같았다. 전날 마신 <삿포로 클래식> 여섯 잔이 채 내려가지도 않 았는데 이 잔을 비워도 되는 것인가,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한낮에 마시는 이 개척사 맥주가 해장술이 될지 이대 로 날 호텔 방에 처넣을 긴급영장이 될

지는 역시 마셔봐야 답이 나올 일이었 다. 평소 편의점 ‘수입 맥주 4캔 만 원’ 행사의 노예로 살면서도 삿포로 맥주 는 고려조차 해 본 적 없었는데, 삿포 로에 온 후로 주야장천 삿포로만 마시 삿포로 개척사開拓使 맥주.

고 있었다. 하긴 삿포로에선 “생맥주 한 잔 주세요.” 라는 말이 “<삿포로 클

래식> 한 잔 주세요.”와 동의어나 다름없다. 딱 한 번, 어느 식당이 <기린 생맥주>를 팔았 다. 그 기린 맥주를 마시며 이상하게도 나는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일본의 맥주 박물관을 찾는 이유는, 맥주 제조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는 물론 아

닐 테고, 공장에서 갓 나온 맥주를 마시기 위함이다. 어떤 곳은 견학을 마치면 한 잔을 무료 로 준다고 하고, 어떤 곳은 입장료에 샘플러 석 잔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삿포로 맥주 박

물관도 500엔을 내고 참여할 수 있는 프리미엄 투어가 있었지만, 나는 그냥 자유롭게 관 람하는 무료입장을 택했다. 그래서 그런지 맥주를 공짜로 주지는 않고, 그냥 내 돈 내고 자

판기에서 티켓을 사서 바꿔 마셔야 했다. 게다가 이곳은 말 그대로 박물관이지 현재 삿포

로 맥주를 생산하는 양조장도 아니었다. 삿포로에서 뭔가 시원한 걸 마셨다 싶으면 그게 < 25


삿포로 클래식>일 정도로 발에 치이는 맥주인데 굳이 이곳까지 와야 했나 의문스러워지는 순간. 하지만 나는 일종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전날 맥주 여섯 잔을 함께 마셔 준 일본인 류 가 이곳에 가보라고 권했기 때문이었다.

“홋카이도에선 삿포로 맥주”


*

*

*

류를 만난 건 내가 묵던 호텔 건너편, ‘인터내셔널 바’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인 술집

‘TK6’에서였다. 그 수식어를 허투루 쓴 건 아닌지 실제로 외국인 손님도 여럿 있었고, 잘 은 모르겠지만 인테리어에도 미국의 펍 같은 느낌이 배어있었으며, 무엇보다 주인이 손님

을 대하는 태도가 인터내셔널한 곳이었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던 그녀에겐 일본인 특 유의 사근사근한 서비스가 오래된 맥주의 거품만큼도 없었다. 걸걸하게 웃고, 손님이 사는 맥주를 절대로 사양하지 않으며, 유창하게 영어로 이야기하고 소리도 지르다가 뭔가 마음

에 들지 않으면 타박 주기도 서슴지 않았다. 실제로 실내 사진을 찍다가 다른 손님들하고 친해진 후에 허락을 받고 찍으라고 그녀에게 핀잔을 들은 나는 홀로 의기소침한 분위기 속 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버르장머리 없다고 이모에게 혼난 어린아이 같았다.

그때, 역시 홀로 온 류가 내 옆에 앉았다. 바 테이블도 거의 만석이었기 때문에 합석해도 되

겠습니까, 묻고 답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의 다른 쪽 어깨에는 벽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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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TV 속 축구 경기에 푹 빠진 뉴질랜드 남자의 건방진 어깨가 붙어 있었다. 누가 봐도 국적 도 다르고 동행 같지도 않은 우리 세 남자 앞에는 각자의 술 취향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었 다. 매끼 맥주를 마셨더니 이젠 좀 지겹다며 나는 진 토닉을 마시고 있었고, 류는 이 바에서 가장 저렴한 생맥주인 <삿포로 클래식>을 마시고 있었으며, 사람을 쳐다보는 것도 아주 건

방진 매력이 있던 뉴질랜드 남자는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 수입 병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가끔 민감한 손님도 있고,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요?”

역시 막 그즈음에 TK6의 사장은 나에게 당근을 던져주고 있었다. 나는 금세 기분이 풀어

져 진 토닉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아마도 하와이쯤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다가 고국으로 돌

아온 게 아닌가 싶은 그녀는 누구라도 허물없이 대하는 것으로 장사의 맥을 짚은 모양이었 다. 그녀는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한국이라고 답하자 류가 관심을 보였으며, 우리 는 간단한 통성명과 신변잡기를 공유하게 되었다. 곧 사장의 관심은 세 남자 중 그나마 가 장 멀끔한,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건방질 만큼 일본어도 유창하게 잘하던 뉴질랜드 남자에


게 집중되었다. 바 테이블에 홀로 앉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남

자는 삿포로에서 왔다고, 여기서 몇 년째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뉴질랜드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잠시 후에 들었다.) 어쨌든 술김에 남의 사정에 호기심이 생긴 나와 류는 자연스

레 귀를 그쪽으로 열어두었고, 서로 뉴질랜드 남자의 묘한 건방짐에 반감과 흥미를 동시에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누가 이걸 들여놓으라고 샘플로 갖다 줬는데 마셔들 봐요.”

나란히 홀로 앉은 세 남자의 꼴이 처량했거나 우스웠는지 사장이 맥주 한 병을 꺼냈다. 미

국 동부에서 온 <브루클린 이스트 IPA>였다. 라거보다는 에일을 좋아하는 나는 이미 한국

마트엔 쫙 깔린 지 오래라고 굳이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맥주는 이 나라가 앞서있 지 않나, 누구 말마따나 맥주 맛도 모르면서 괜히 망신이나 당하지 말자고 잠자코 모르는 척 삼 분의 일 정도 채워진 작은 잔을 받았다. 세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일본 맥주는 영 맛이 없는데 이건 괜찮군.”

그렇게 뉴질랜드 남자는 일본 맥주도 발아래로 놓았고, 어쨌든 IPA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음,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지만 류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마시던 <삿포로 클래식> 을 다 비울 때까지 사장이 맛보라며 준 맥주를 비우지 않았다. 그냥 <삿포로 클래식> 한 잔 을 더 주문할 뿐이었다.

“이게 제일 맛있어요. 마셔 봐요. 최고예요.”

오늘만 해도 두 잔은 마셨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마침 점점 늘어나는 술값이 부담스

러워진 찰나라 나는 류의 기분도 맞춰줄 겸 같은 걸 주문했다. TK6는 선불이었다. 천 엔 지 폐를 내고 맥주 한 잔과 500엔 동전을 받은 다음, 십여 분 후에 또 그 500엔 동전을 반납하 고 새 잔을 받아 마시는 게 핀볼 게임 마냥 즐거운 곳이었다.

어느 정도 취해서 그럴까, 밥집에서 반주로 먹을 때보다 <삿포로 클래식>은 시원하고 청

량하며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류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물여섯이고, 한 살 연상과 결혼한 지 갓 일 년이 됐는데 자정이 넘은 이 시각까지 혼자 술을 마시고 앉

아 있으며,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고 배우 중에선 특히 김태희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사람 29


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술은 삿포로 맥주였다. 구글 번 역기까지 켜둔 채, 더듬더듬 일본어로 말할 때는 존댓말을 쓰는데 더듬더듬 영어로 말할

때는 왠지 반말을 나누고 있는 것 같은 사이였다, 우리는. 슬슬 어지럽기 시작하고, 어느덧 새벽 한 시가 넘었으며, 축구 경기가 저렇게 길었던가, 흐리멍덩한 가운데 뉴질랜드 남자

는 아직 TV에 열중해 있었다.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은데 가장 궁금한 한 가지씩이 두 남자 에게 남아 있었다.

“이 시간까지 술 마시면 부인이 뭐라고 안 해?” “뭐라고 하지. 지금도 계속 문자가 오고 있어.”

이 친구, 주변 사람 속 썩이는 데 일가견이 있구만. 그러나 밤늦게까지 몸으로 하는 고단한

일을 한다고 하니 그게 뭔진 기억이 나지 않아도 그를 이해해 주기로 한다. 그리고 그도 그 순간 가장 궁금했던 걸 나에게 물었다. “내일은 뭐 해?”

딱히 계획한 바는 없다고 답하자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가 봐. 맥주도 싸고 최고야.”


*

*

*

일본 최초의 비어홀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마신 시골 남자의 말처럼 숙취 중에 마시는 <삿

포로 가이타쿠시> 맥주는 시원하고 씁쓸했다. 편의점에서 사 마실 수 있는 삿포로 캔맥주 나 이 도시에 온 이후로 줄곧 마셔왔던 생맥주보단 어딘지 모르게 탁한, 그것이 숙취 때문 인지는 몰라도, 말 그대로 고된 노동 이후에 어울리는 술이었다.

1869년, 에도 정부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홋카이도를 개척하기로 하고, 그 업무를

추진하는 ‘개척사’를 설립한다. 춥고 황량하다고 하여 본토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홋카 이도가 일본의 방화벽이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린 정착지로 떠오른 셈이다. 물론 미국 의 서부 개척 시대가 그러했듯 그 씨앗을 싹 틔우는 데 필요한 거름은 다름 아닌 인간의 피 였다. 홋카이도의 원주민이었던 아이누 족은 민족 말살 정책에 의해 학살당하고, 살던 집

을 빼앗겼으며, 지금껏 살아온 전통 양식대로 사는 것도 금지당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사회적 차별을 피해 자신의 뿌리를 숨긴 채 살고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우리와도 악연이 있는 구로다 기요타카는 개척사의 차관으로 부임했다가 곧 장관으로 올라서는데, 그것이 31


구로다의 잔인한 성격을 잡음을 없애는 데 잘 활용하라는 에도 정부의 노림수였을 수도 있 다. 또한, 평소엔 땅을 일구고 유사시에 전투를 하는 둔전병 역시 본토에서 죄를 짓고 도망 쳐 온 범죄자를 받아 그 머릿수를 채우기도 했다.

그렇게 개척과 침략의 종이 한 장 차이를 넘나들며 원주민의 반발을 정리해 나가던 이들은

홋카이도에서 벌일 수 있는 신식 산업에 눈을 돌렸다. 이들의 눈에 띈 건 홋카이도 땅에서 자생하던 품질 좋은 홉이었다. 또, 이 섬의 기후는 맥주의 원료인 보리가 자라기에도 적합 했다. 우연인지 어떤지 미국인 윌리엄 코플랜드가 요코하마에 일본 최초의 맥주 양조소를

지은 해도 개척사가 세워진 1869년이었다. (이 ‘코플랜드 맥주’가 바로 ‘기린 맥주’의 전

신이다.) 요코하마나 도쿄나 홋카이도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개척사의 일원들은 맥주라는 새로운 주류 산업으로 홋카이도를 부흥시키자는 마음 반, 언제 배를 통해 맥주를 받고 앉아 있나 직접 만들고 말지, 라는 당찬 개척 정신 반으로 삿포로에 맥주 양조장을 세

우기로 한다. 그것이 1876년이었고, 1877년 마침내 <삿포로 맥주>가 세상에 등장했다. 삿포로 맥주는 북극성을 상징하는 빨간 별을 달고 당당히 본토의 항구로 들어섰다. 지금 내 가 마시고 있는 <삿포로 개척사 맥주>가 바로 그때의 맛을 재현한 맥주였다.

개척의 역사에 드리워진 어둠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은 어쨌든 별개인가 아닌가, 생각하면

꼭 피처럼 쓴 것 같잖아, 나는 효모라도 가라앉아있다는 양 맥주잔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

니다, 그냥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입 안이 쓸 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쩐지 비겁해지는 것 같지만 <삿포로 클래식>이나 마실 걸 그랬다, 그렇게 잔은 천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

했다. 비어홀 저편엔 같은 회사 사람으로 보이는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들이 진을 치고 평 일 낮술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개척 시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일본 역

사책에도 누락된 일일 게 분명했다. 대신 일본 맥주의 역사만큼은 맥주 회사다운 꼼꼼함

으로 정리를 잘해 놓았다. 1882년, 개척사가 해산하면서 개척사 양조장도 민영화되어 ‘삿 포로 맥주’로 사명을 바꾸고, 일본 4대 맥주 회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경영 전


략 면에선 도쿄에 첫 비어홀을 만들고 <에비스 맥주>를 대접하던 ‘일본 맥주’라는 회사가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이 ‘일본 맥주’는 ‘삿포로 맥주’는 물론 아사히 맥주의 전신인 ‘오사 카 맥주’를 합병하여 ‘대일본 맥주 주식회사’라는 거대한 기업을 출범시켰다. 그러다 전후 1949년 9월, 독점금지법에 의해 다시 ‘일본 맥주’와 ‘아사히 맥주’로 분리되고 말았다. 아 시아를 지배하려는 일본제국은 오직 하나다, 라는 망상 때문이었는지 일본 정부는 전쟁 중 에는 <삿포로>니 <아사히>니 하는 고유 상표 사용을 금지했는데, 이 해부터 다시 각자의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을 풀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맥주’는 그들이 권리를 가진 <삿포로>나 <에비스>라는 상표를 쓰지 않고 제 이름을 딴 <일본 맥주>를 열심히 팔기 시 작했는데, 삿포로를 돌려달라는 원성이 워낙 자자해 결국 1956년에 <삿포로 맥주>를 되 살리기에 이른다. <에비스 맥주>를 부활시킨 건 1971년이었다.

맥주 맛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일본 맥주가 썩 맛있는 맥주는 아니라 하기도 하고, 촌부의 눈

도 번쩍 뜨이게 했던 <에비스 맥주>는 개중에서 훌륭하다고 엄지를 들어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삿포로에 가면 삿포로 맥주만 마시게 된다. 홋카이도 한정 판매라는 <삿포로 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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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을 “나마 비루(生ビ-ル)”라는 일종의 대명사 하나로 줄창 마시게 된다. 얼른 들어오라 는 아내의 재촉을 본척만척하는 류도, 일본 맥주는 별로라고 말하던 건방진 뉴질랜드 남

자도, 회식 중인 왁자지껄한 남녀 회사원들과 일 인석에 앉아 홀로 라면을 먹는 아저씨도, 하이네켄 로고와 헷갈린 바보나 맥주만 마시면 배가 부른데 어쩐지 이건 질리지 않는다고

감탄하는 나도 종국에는 <삿포로 클래식> 생맥주를 주문하고 만다. 싸고, 청량하면서도 물 탄 듯 밋밋하지 않은 이 술을 어떤 약속처럼 들이킨다. 이젠 일본인과 거의 융화된 아이

누 족의 후예들도 어디선가 이 술을 마시고 있을까. 침략의 역사와 슬픈 구전보다 빠르게 몸 안을 돌아다니는 알코올은, 어찌 됐든 얼른 기분이 좋아지는 편이 낫다고 우리를 속이 는 중일까.

글쓴이 베르고트는 여행 매거진 ‘브릭스’의 에디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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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플라스크, 광장의 봄 글 김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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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바르샤바. 쇼핑센터 ‘Arkadia’ 2층 선물가게에서 플라스크를 하나 샀다. 원래는

바르샤바 외곽의 마을 Targówek에서 만난 폴란드아저씨들이 소개해 준 악기점을 찾아

간 것이었는데, 악기는 사지 못하고 “For Life’s Great Adventures”라는 문구가 음각으 로 새겨진 동그란 플라스크만 사고 말았다. 불과 며칠 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남 대문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Apraksin Dvor’시장에서 CCCP(소비에트연방의 러시아어 약칭. 러시아 알파벳이며, “에스에스에스에르”라 읽는다)가 크게 프린트된 플라스크를 구

입했지만, 러시아와 긴장관계에 있는 우크라이나로 넘어갈 예정이어서 하나 더 구입했다. 플라스크는 예전부터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그에 비해 쓸 일은 많지 않아 사지 않고 있었다.

플라스크란 게 입구가 좁아 세척에 어려움이 있어 그 자체로 소독이 될 수밖에 없는 높은

도수의 술을 넣어 다녀야 한다. 한국에서 내 주머니 사정으로 살 수 있는 높은 도수의 술이 라곤 고량주 정도다. 그렇다고 고량주를 플라스크에 넣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하

바르샤바에서 구입한 플라스크.


고, 애초에 한국에서 플라스크를 품고 다니며 대낮부터 술을 홀짝대다가는 알코올중독으로 몰리기에 딱 좋다. 아무튼 그렇게 구입한 플라 스크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 깔때기를 꽂고 꼬

냑을 채워 넣었다. 불투명한 플라스크라 술이

얼마나 찼는지 알 수가 없으니 조심스럽게 조

금씩 따를 수밖에 없다. 쫄쫄거리는 소리와 함 께 향긋한 꼬냑의 향이 올라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성을 고려해서 산 작은 플라스크는 꼬냑 병의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넘쳐버린다. 하지만 그것도 그런대로 좋다. 병에 남은 술은 지금 마셔버리면 그만이니.

이번 여행에서는 거의 매일 꼬냑을 마셨다. 바

로 지난달까지만 해도 꼬냑은 영화에서만 보던

여행 중 마셨던 꼬냑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종류.

술이었는데 장족의 발전이다. 여행이 아니더라도 술을 자주 마시지만, 여행을 가면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마신다. 루틴을 벗어나 일상적이지 않은 장소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생활을 하는 것을 여행이라고 한다면, 술은 그 여행에 속히 빠져들게 하는 촉진제가 될 수 있다, 대 충 이런 식으로 말하며 그냥 시도 때도 없이 마신다.

이른 아침부터 마시는 맥주의 알싸한 향과 대낮부터 horseradish(서양 고추냉이)가 들

어간 보드카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온기를 느끼면서 우크라이나 키에프를 걸었다. 여행의 순간임이 기분 좋게 인식되었다.

사실 여행 일정의 절반이 보드카의 종주국 러시아에 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

까지만 해도 보드카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여행 계획을 얘기할 때 마다 지인들은 “러시아 는 역시 보드카지”라는 하나마나한 얘기를 했고, 나조차 벽 한 면이 수십 가지 보드카로 가

득 채워진 모스크바 마트 사진을 보고 흥분하여 반드시 1일 1보드카를 달성하리라 다짐했 39


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마신 보드카는 생각보다 입맛에 맞지 않았고, 대신 우연히 마시게 된 꼬냑이 그 기대를 대신했다. 보드카는 무색, 무취, 무향의 술이며 스트레이트로 마시기 보다는 다른 술이나 음료와 섞어 칵테일로 마시는 게 일반적이다. 그냥 마시기엔 밍밍하다

는 거다. 하지만 꼬냑은 풍부한 향과 깊은 맛을 지닌 술이라 스트레이트로 마시기에 적당 했다. 가격도 한 병에 만 원을 넘지 않으니 부담스럽지 않았다.

꼬냑으로 가득 채운 플라스크를 지니고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한 일인 줄 몰랐다. 폴란드

에서 플라스크를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로 넘어갔고, 몸

에 한기가 들 때마다 플라스크를 꺼내 몸을 녹였다. 초콜릿 향이 번지는 듯하다 불현듯 명 치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불타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8차선 도로를 막고 차가 다니지

못하게 한 키에프 독립광장 앞을 걸어 다닐 때에도 광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거리공연을 구

경하면서 꼬냑을 마셨고, 1950년대 생산된 러시아제 Fed-2 카메라를 사러 ‘Andriivs’kyi descent’ 거리를 뒤지고 다니다가도 틈만 나면 플라스크를 꺼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에

서는 꼬냑 한 병의 가격이 3, 4천 원 선이었다. 소주 2병 값에 꼬냑 한 병이라, 우크라이나 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키에프에서의 일정이 반을 넘어가던 날, 우크라이나의 대형마트 ‘Auchan’에서 눈썰매를

하나 샀다. 일정에 따라 점잖게 국립역사박물관에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앞마당에 들어섰 으나 언덕에서 눈썰매 타는 아이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들이 썰매를 타 며 만들어놓은 썰매자국에 새로 산 썰매를 놓고, 눈밭을 헤치며 언덕 아래에 도착하면 온 몸은 눈 범벅이 되었다. 언제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지, 입속에도 팥빙수 얼음가루 같이 곱

게 갈린 눈이 한 가득이었다. 아이처럼 두세 번 썰매를 타고 내려오자 어른이 될 시간이었 다. 플라스크를 꺼내 꼬냑 한 모금을 마셨다. 아파 오는 꼬리뼈를 치료하진 못했지만 확실 히 몸은 따뜻해졌다.


Andriivs’kyi descent 기념품 가게들의 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 끈질긴 설득과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의 카메라를 내게 팔아먹는데 성공했다.

우크라이나 국립역사박물관 앞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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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끝. 인천행 비행기를 타려면 모스크바로 가야했다. 키에프에서 모스크바까지 이동

수단은 15시간이 걸리는 기차를 선택했다. 새벽 1시에 키에프 중앙역에서 기차에 올라 알

수 없는 글자로 가득한 티켓을 들고 묻고 물어 겨우 우리 자리를 찾아냈고, 15시간을 함께

보낼 옆자리 우크라이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의 도움으로 매트리스를 찾아내고

침대를 펴고 자리에 이불을 깔았다. 기차 안에 불이 꺼지며 조용해진 실내는 코고는 소리,

소곤거리는 소리로 작게 채워질 뿐이었다. 여행의 피곤보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이 컸다. 2층 침대 아래 칸에 앉아 어제 밤 먹다 남은 치즈 한 조각과 귤보다는 오렌지 같았던 우크

라이나 귤을 펼쳤다. 그리고 가만 플라스크의 뚜껑을 열었다. 어두운 차창 밖은 러시아의 눈 덮인 벌판이었을 것이다.

일상으로 복귀한 지 보름. 3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겨울이다. 끝이 보이는 겨울을 참아내며

지난 주말, 나는 마지막 남은 꼬냑을 플라스크에 채웠다. 거리와 광장을 서성이며, 이것만 비우면 나의 겨울도 끝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플라스크는 책장 어딘가에서 다음 여행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겠지. 봄은 그걸로도 좋으리라.


글쓴이 김동재는 어쿠스틱 밴드 ‘신나는섬’에서 리듬 기타, 우쿠렐레, 보컬을 맡고 있지만, 전공은 탬버린과 숟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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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쓰, 사카모토야 여관 술집 글 이주호

대마도를 가운데 두고 가라쓰唐津와 부산은 마주보는 거리가 200km밖에 되지 않는다.

부산 앞바다에서 떠내려 온 쓰레기가 여기 닿아 쌓인다는 항간 풍문이 그럴 듯하기도 한 게, 아주 옛날 남해에서 표류한 배가 조류를 타고 이곳에 닿았다는 기록이 꽤 남아 있다. 표

류해 왔든 노를 저어 왔든 이곳에는 일찍부터 조선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두루두루 터를 잡 고 살아 왔다. 차별 없는 세상 따윈 꿈에도 몰랐을 시절이니, 여기가 그나마 사람대접 받으 며 연명할 수 있던 곳이었을 수도 있겠다. 거기엔 포구라는 동네의 개방성도 한몫했을 터 였다. 가라쓰唐津라는 지명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던 포구라는 말에서 왔다, 아니다, 옛 삼한 땅 한韓의 독음인 ‘가라’에서 왔다, 이런저런 유래와 별개로 사람 들고 나는 데는 포구 라는 동네가 민족이나 지배 집단에 구애를 덜 받는 곳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왜란이 터지고, 특히 정유년 이래 왜군이 다짜고짜 포로 포획에 열을 올리면서 포 구의 개방과 포용은 깨져버리고 만다. 10만의 조선 포로가 규슈 땅에 억류되었고, 그나마

살아 잡혀온 것만도 다행이다 싶게 목숨은 진즉 조선 산야에서 날아가고 귀와 코만 베어져 바다를 넘어온 이들도 거의 20만에 이르렀다. 이들은 지금까지 교토 미미즈카耳塚, 귀무 덤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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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쓰 성벽이 끝나는 곳에서 마이츠루舞鶴 다리를 건너 료칸이 많은 해안 마을을 지나

면, 400년 된 소나무 숲, 니지노마쓰바라虹の松原의 끄트머리가 얼핏거린다. 그때야 걸

어온 길을 되짚어 보니 가로수가 죄다 소나무다. 니지노마쓰바라는 길이가 4.5km, 폭이 500m나 되는 데다 바다와 꼭 달라붙어 있어, 이곳에 들어서면 걸어도 걸어도 보이는 풍 경은 소나무 아니면 바다다.

바닷가에 나갈 때마다 한국 쓰레기가 있나 유심히 살펴며 걸었더랬다. 이게 정말 바다 건너 온 것일까.


소나무 숲 안에는 낡은 호텔이 하나 있다. 호텔 이름도 ‘니지노마쓰바라’다. 숲을 종단하

는 2차선 도로에는 호텔로 가는 인도가 없어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솔밭을 걸어 찾아가야

한다. 주변을 둘러싸고 온통 소나무와 바다뿐이니 처음엔 배를 곯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 만, 호텔 안에 식당과 편의점이 있어 안락하고 든든한 일주일이 되겠구나, 마음이 놓였다.

아침을 먹고 해변을 따라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으면 숲이 끝나며 멀찌감치 기차역을 둔 마

을에 닿는다. 기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는 마을이라 해변에 앉아 숨을 고르고 배가 고파지기 전에 귀로로 들어선다. 산책길을 한 시간 정도 되짚어오다 보

면 도로가에 미니버스 한 대가 서 있다. 하이킹 여행객들이 꼭 들렀다 간다는 햄버거 가게 다. 여기 말고 점심 먹을 곳이 없기도 하지만 버거 하나를 겨우 다 먹고, 왜 대식가가 되지 못했을까 울먹이며 벤치에 떨군 빵가루를 털어낸다.

산책로에 찾아온 햄버거 버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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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 반의 산책을 마치고 방 안에 누워 기운을 차리면 한 건 없어도 여지없이 저녁 밥 생

각이 나고 만다. 처음 이틀은 뭐라도 한 잔 곁들이자 싶어 한 시간에 한 대 있는 버스를 타 고 시내로 나갔다. 가라쓰 역 앞 상점가엔 가라쓰 산産 도자기를 파는 가게들과 먹고 마실

가게들, 기념품 가게들이 위세 좋게 늘어서 있다. 하지만 문을 연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겨

울이라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게 일본인들이 걱정하는 인구 부족의 여파일지도 모르겠다. 간판 생김으로 봐선 10년 전쯤엔 저녁마다 성시를 이루며 불을 밝혔을 법한 거

리는 이제 주말인데도 서글프도록 발길이 드물었다. 그러니 어느 집이든 처마 아래 홍등을 내걸었으면 일단 들어가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3일째 되던 날 저녁. 버스 시간은 다 되었는데, 길 건너 사카모토라 쓰인 간판엔 대체 불이

들어 온 걸까 아닌 걸까, 가게 문을 열어보지 않고선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버스를 포기하 고 길을 건너 식당의 유리문을, 내 얼굴 크기만큼 소리 안 나게 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나이든 주방장이 TV 볼륨을 줄였다. 어디든 앉으시라. 손님은 없었다. 메뉴판에서 소라회, 오징어회를 고르고 맥주를 주문하자, 그는 카운터 위에 놓인 작은 수조에서 소라 하나를 꺼냈다. 용케 불화를 피한 청어들은 싱싱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너흰 내일 저녁이겠구나.

사카모토야 여관 식당은 주로 투숙객들의 아침과 저녁을 감당하는 곳 같았지만, 그 시간

만 피하면 가라쓰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생선을 앞에 두고 넉넉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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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도자기와 해산물의 고장답게 질박한 그릇에 빛깔 좋은 살점들이 얹혀 나오면 평소보 다 맥주 생각이 거세게 일었지만, 이곳에선 그냥 일본 소주를 마셨다. (맥주를 3000cc 이 상 마신다는 계산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는 게 더 쌌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문제지만, 소주 를 마시고 나면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사카모토야 여관 식당에 앉아 평균 60세가 넘는 사카모토야 사람들이 즐겨 보는 텔레비전

을 흘끔거렸다. 언제 가냐, 가라쓰는 좋더냐, 서울은 어떻더냐. 이 접시들이 가라쓰 도자기 입니까. 아무렴, 가라쓰에 왔으니 도자기나 사가시구료, 아리타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알 아주지. 아는지 모르는지, 이곳 도자기가 조선 포로들이 빚어낸 거라는 말은 서로 하지 않

았다. 호의는 가득하나 거리감은 또 그것대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이대로 사카모토야 여관의 낡은 욕조에 들어가 몸을 불리고 싶었다.


외국인 노예라도 손기술만 있으면 새 신분과 이름, 집을 얻을 수 있었다. 유럽의 도자기 열

풍을 일으켰던 이마리의 도자기, 세계 최대 도자기 축제가 열리는 아리타의 도자기, 모두 가 포구에서 하역된 인간들이 빚어낸 유산이었다. 그러나 양반이건 군자건 공인이 될 싹수

가 없는 이들은 별 수가 없었나 보다. 규슈 들녘 노예로 살아가든가, 대항해시대 갤리선을 타고 이역만리 노예로 팔려가든가. 루벤스 그림의 주인공이자 베니스 바다를 누빈 개성상

인 안토니오 꼬레아도 왜란의 포로, 갤리선의 노예였다.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한 조선인, 일본 도공들의 조상신. 바다에 떠넘겨진 삶이란 참 다채롭기도 하구나 하다가도, 노예로 끌려와 맨몸으로 목숨을 부지하던 질곡 같은 삶이라니,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웠을까 마음 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명인들이 남긴 찬란한 유산의 한적하고 먼지 쌓인 뒤안길 곁에 앉자 이래서 기술이구나 하

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소나무 숲과 바다에 발을 디디면 인생, 바다 아니 면 숲이겠지, 단순하고 명쾌해지는 것도 같았다. 손재주가 없는 나는 곧 저 너머로 돌아가

야 하겠는데, 낭패다, 거기 남아 살아갈 재주는 있다는 거냐. 소나무 아니면 바다라고 길은 이리도 명명백백한데 인생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걸어도 걸어도 내 삶은 왜 꼭 한 걸음 씩 늦는 걸까.

글쓴이 이주호 브릭스 편집장은 여행을 빌미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최근에 <도쿄적 일상>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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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가 익었으니 친구를 부를 수밖에 글 차영화

‘백세주마을’ 삼성점 ⓒ국순당


좋은 의미로 술은 서로 간 마음을 나눌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술자리는 좋

은 마음을 나누게 해 주는 자리가 되고요. 얼마 전 저에게도 좋은 술로 마음을 나눴던 뜻 깊 은 술자리가 있었습니다.

첫 사회생활을 함께했던 첫 직장의 동료들과 거의 10여 년 만에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한

달 간 합숙하며 신입사원 교육을 받기도 했고, 회사와 사회에 적응하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동기들이었지요. 제가 퇴사하면서 그 뒤로 모임을 피하게 되었고, 그렇게 서로 다 른 길을 가면서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술 한 잔 막 생각나는 잔뜩 흐린 어느 날, 연락처를 더듬어가던 중 그중 한 친구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망설이며, 혹시나 세월의 낯선 막이 생겼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수화기를 들 고 있었지요.

“야, 오랜만이다.”

첫마디에 걱정은 사르르 녹고 아껴두었던 얘기들을 수화기에 대고 한참 쏟아냈습니다. 약

속 장소를 잡고, 마음에 맞았던 동기들을 추가하여 모임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전화를 끊

고도 한동안은 여운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짜릿하고 흥분되는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친구에게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 따뜻함, 마치 어제도 만났던 친구마냥 반가운 마음이 하 루 종일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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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동네 마트만 가도 다양한 술들이 판매되고 있지요. 맥주, 소주는 물론 한국 전통주

인 약주와 탁주에다 위스키, 와인, 사케 등등. 카테고리도 늘어나고 제품 종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선택의 폭이 다양해짐과 동시에 새로 운 술 맛을 접할 때 느껴지는 희열이 무궁무진하게 늘어났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대인

거지요. 좋은 술의 정의에 대해 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술이 말 그대로 자신에게 좋은 술이 라 생각합니다. 기술적으로 한 발 들어가면 어떤 재료로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지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있는 술이 구분되겠지요. 다만, 어떤 술은 좋고 어떤 술을 나쁘다는 기준은 개인의 기호에 맡겨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전통주인 약주와 탁주, 그 중에서도 막걸리는 정확하게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기원

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술이 많

이 사라졌지만, 전통주를 빚는 방법과 음용법 등은 일반 소비자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복원되고 발전되어 다양하게 유지, 생산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여러 대외적 환경으로 소주와 맥주가 대표 주종으로 자리 잡았고, 거기에 다양

한 주종이 들어오며 주류시장이 변했지요. 저는 전통주를 나의(우리의) 오래된 친구로 생

각합니다. 맥주, 소주, 와인, 사케, 양주 등은 그 뒤로 만난 새로운 친구들이고요. 일반적으 로 사람을 사귀다 보면, 오래된 친구도 있고 새로운 친구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오래된 친구 를 선호하고,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새로운 친구만 사귀는 사람도 있고, 그런 게 아닐까 싶

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친구를 사귀어 나가듯 선호하는 술도 그렇게 구분되어 지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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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마침내 그날이 되었습니다. 10여년 만에 동기를 만나는 날. 30분 전부터 마음이 두근

두근 거립니다. 얼마나 변했을까? 어떤 이야기들을 하게 될까 궁금해집니다. 옛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약속장소는 제가 정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전통주 전문 회사 국순당에서 직영하는 전통 주점 ‘백세주마을’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로 한 것이지요. 오래된 친구들이 만나는 자리엔 오랜 친구 같은 막걸리가 제격 아니겠어요.

‘백세주마을’은 국순당 삼성동 본사 1층과 강남역, 종각역 서울에만 세 곳의 매장이 있습

니다. 프랑스 파리에도 한 곳 있으니 혹시 생각나시면 들러보세요. 다양한 전통주가 있고, 깔끔한 안주가 있습니다. 도심 빌딩 안에 최대한 전통 양식의 인터리어를 조화시키고 있지

요. 아직 전통주가 낯설고 부담스러운 분들이 전통주와의 거리를 좁혀보는 데 좋지 않을까 싶네요. 제 경험으로는 외국 바이어나 손님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겨 주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많이 방문해주세요!)


사무실에서 내려와 미리 예약해 놓은 자리에 앉아 있자니 이런저런 옛 생각이 들더군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동기 녀석이 보입니다. 곧이어 서둘러 퇴 근한 친구들이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살은 쪄서 몸은 후덕해지고 머리숱은 좀 덜 촘촘해졌 지만, 이목구비와 목소리는 예전과 똑같습니다. 만나자마자 핸드폰에 저장된 아이들 사진

을 보여주는 아버지가 된 것만 달라졌네요. 하지만 하는 짓은 예전 20대 철없던 시절과 똑 같습니다. 아니, 오늘만큼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예전의 기억들이 우릴 지배하게 놓 아둔 걸지도 모릅니다.

오랜 친구들을 위해 막걸리를 이것저것 종류별로 시켜 봅니다. “야, 이 막걸리 참 맛있다.”

평소에 막걸리를 즐기지 않는다는 친구도 벌컥 벌컥 잘도 마십니다. 술도 친구들도 어색함 이 없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좋아하는 술을 마시며 좋은 술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막걸리는 무르익은 친구들과 참 많이 닮았더군요. 다양한 해외의 술들의 고급화 전략에 우 57


리 전통주가 때로는 소외되고 저평가되기도 하지만, 막걸리 한 잔은 언제든 사람 사이 경 계를 풀어주고, 따뜻하고 포근한 마음으로 마주앉게 합니다.

술자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고, 10년 만에 재개되었던 우리의 이야기는 또 한 번 잠

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모이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 니다. 옛 친구의 가치를 다시 알게 되었으니까요.


혹시,

비가 오면 왜 막걸리와 전이 생각나는지 알고 계신가요? 1) 빗소리가 전을 기름 위에서 구 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해서 전과 잘 어울리는 막걸리를 찾게 된다는 설 2) 비가 오면 호르

몬의 영향으로 우울해지는데 막걸리에 들어 있는 트립토판이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동시

에 페닐알라닌이 활력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라는 설 3) 조상님들이 비가 오면 농사일을

할 수가 없어서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를 즐기셨기에 그런 삶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는 설. 확실하게 정해진 답은 없지만, 저에게는 세 번째 이유가 가장 맞는 것 같네요. 비 오는 날, 백세주마을로 막걸리 한 잔 하시러 오세요.

글쓴이 차영화는 국순당 마케팅본부 해외사업팀에서 막걸리를 포함한 전통주를 해외 48개국으로 수 출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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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매거진 BRICKS - 취중유람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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