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경희문학회 문맥 2021-2022년 서른한 번째 문집
경희문학회 문맥
2021-2022년 서른한 번째 문집 두근두근
두근두근
경희문학회 문맥 2021-2022년 서른한 번째 문집
초판 1쇄 찍음 2022년 11월 18일
초판 1쇄 펴냄 2022년 11월 26일
지은이 강민숙 김현채 류한정 문현식 박태빈 성인화 안혜민 이동현 이유진 하태훈 펴낸이 문현식 책임편집 김은서 편집 강민숙 디자인 문현식 제작 윤형식 제작처 쿼토 펴낸곳 경희문학회 문맥 주소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학생회관 313호 전자우편 khu.moonmek@gmail.com 인스타그램 @khu.moonmek
Ⓒ 강민숙, 김현채, 류한정, 문현식, 박태빈, 성인화, 안혜민, 이동현, 이유진, 하태훈, 2022, Printed in Seoul, Korea
*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저작권은 각 작품의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무단 전재 및 복제,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 본서에 실린 글 일부는 경희문학회 문맥 2021년 서른 번째 문집《풍선껌》(https://celpium.github.io/bubblegum/ index.html)에 실린 것을 다시 실은 것입니다.
두근두근 경희문학회 문맥 2021-2022년 서른한 번째 문집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가. 빅뱅 이후 약 137억 년의 시간이 지난 동안 우주에는 수많은 분기점이 있었다. 그 많은 갈래를 지나 나와 너는 여기에 존재한다. 기적 같은 만남의 신비를 느끼면서 ‘네’가 겪어 온 여러 사 건을 짐작한다. 그 안에는 희와 비, 기대와 좌절, 희망과 우울이 연속되는 심장 박동으로 엉켜 있다. 그 맥박을 나 의 것처럼 고요히 느껴본다. 지난 문집의 수록작과 더불어 신입 작가들의 작품도 수록하였다. 모든 작품들은 ‘문맥’을 구심점으로 공전 궤 도를 돌고 있다. 이때 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질서를 바로 세웠다. ‘문’맥이라는 행성계의 ‘맥’락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2022년 11월, 책임편집 김은서
들어가며
목차
52 영접 55 강민숙 56 가산의
7 들어가며 13 이유진 14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31 김현채 32 다른 나라 43 하태훈 44 만들어지지 않은 시간 45 고양이 심바 47 코팅된 사진은 불에 타지 않았다 48 여름밤 49 2018년 11월 15일, 겨울 51 박태빈
세계 58 세상만사 부지불식
113 문현식 114 서울의
122 오늘의
125 안혜민 126 이
150 풍선껌
61 이동현 62 공화국의 자손들 68 군인의 국적 70 기차역 72 신도시 75 아차산의 빨치산들 83 옥상의 노을과 성 니콜라우스 93 접사接寫 95 주황색 마을 100 축생도 102 회기동의 이민자들 107 성인화 108 각자의 기억으로 슬픈 우리에게 110 하루의 슬픔은 견뎌낼 수 있나요
기쁨과 슬픔
저녁은 가슴조림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99 류한정
200 두근두근
202 문학적 재능(1996) / 태도의 품격
205 나가며
이유진
오늘도 머리가 빠졌다. 그게 무슨 문제냐 싶겠지만 내 머리 빠짐은 조금 특이한 양상을 띤다. 하루 한 번 꼬박꼬 박 한 줌 정도의 양을 뱉어내는 것이다. 구체적인 시간은 매번 다르지만, 하루 한 번인 것은 확실하다. 누워 있다가, 앉아 있다가, 걷고 있다가 뭔가 신경 쓰여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덩그러니 머리카락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다. 그러 고 나면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내 놓지 않는다. 감거나 말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힘을 주어 당겨도 무슨 고집인지 절대 내어주지 않는다. 그냥 당긴 부분이 아플 뿐이다. 내 머리에 대고 ‘너 대체 왜 그러는 거야?’하고 타일러도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 하긴 내가 윽
이유진 소설
14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떨구기 시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지하게 걱정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때는 두개골 바깥이 아니라 속이 어떻게 된 건지 들여다보아야 할 테니까. 전체 양으로 봤을 때는 숱이 조금씩 줄어드는 중이라
박지른다고 다시 평범하게 한두 올씩 온종일 땅바닥에 머 리카락을
고 확신한다. 머리 끈을 세 번 돌리면 딱 맞게 묶였던 작년
이맘때와는 달리 같은 머리 끈을 네 번 돌려 묶어도 머리 가 고정되지 않는다. 애초에 머리숱을 신경 써 본 적이 드 물어서 처음에는 바닥 청소를 수시로 할 필요가 없어 간 편하고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줄어든 게 피부 에 와 닿는 이 시점에서는 마냥 좋아할 수가 없다. 머리에 말을 걸어 버릇을 교정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인간으로서 주인으로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건 안 될 일이다. 다행히 나는 이미 해답을 찾았다. 머리가 하루 한 번 머리카락을 뱉어낸다면, 나는 하루 한 번 머리카락 을 얹으면 되는 것이다. 가발을 구매한 건 지난 3월 말이었 다. 정수리에 올린 후 가발에 달린 핀으로 떨어지지 않게 고정하는 부분 가발. 잘 관리하면 진짜 머리카락처럼 거
의 티가 나지 않는다. 숱으로 따지자면 내 두피에서 나오 는 털 덩어리 보름 치다 . 처음에는 착용이 서툴고 귀찮고 내 결점에 대한 인정 같기도 해서 사 놓고도 사용하는 것을 꺼렸지만 최근 몇
달은 거의 매일 착용 중이다. 그 시발점은 똑똑히 기억한
다. 엄마 친구 수연이모와의 만남이었다. 엄마와 피가 섞 인 것은 아니지만 엄마의 친구들을 부르는 것이 으레 그렇 듯 어느새 굳어진 호칭이다. “S야. 요즘도 잠을 못 자니?” “글쎄요……. 왜요?” 이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 다. 누가 봐도 걱정스러운 얼굴.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15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감정을 다른 것으로 받아들일 여지 없이 드러내는 것은
그의 오랜 장기였다. 내가 시큰둥하게 묻자 얼굴에 나타나 는 감정의 농도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하루에 얼마나 자는 거야?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 왔어. 얼굴색도 말이 아니고. 밥은 잘 챙겨 먹니?” “당연하죠. 아 참. 저번에 병원 예약해주신 거 감사해 요. 약 꼬박꼬박 잘 먹고 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내가 너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지? 너희 엄마가, 아니다. 이런 말은 아직 그렇겠지. 그냥 네 몸 잘 챙기라고. 응?” 그렇게 말하며 이모가 내 손을 끌어다 잡았다. 차갑 고 조금 축축했다. 거북해서 곧 몸을 의자에 기대는 척 손 을 빼자 이모도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다시 거뒀다. 역시 이모에게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 다. 그냥 좀 마른 얼굴, 다크서클만 보여주고 머리카락에
대해선 말 안 하는 게 낫다고. 이모는 엉터리 의사를 믿 고 있었다. 그가 나의 정신을 정상 궤도에 오르도록 도와 줄 것처럼. 하지만 이모를 만난 그때나 지금이나 내 정신 은 고쳐 놓을 필요 없이 멀쩡하다. 그 증거로 내 유일한 이 상 사항,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삼가고 있지 않 은가? 헛소리로 치부당할 말을 함으로써 몸에 듣지도 않 는 약을 더 타올 바에는 말도 안 꺼내는 편이 좋았다. “네.
이유진 소설
16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죽겠어요.” 그러고 하하 웃자 이모는 왠지 놀란 듯 입을 벌렸다가 나를 따라 웃었다. 하여간 숨기는 데는 젬병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어떨 땐 반갑지 않다.
이모가 먼저 자리를 떠나고 나는 카페에 남았다. 창
밖에는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집과 멀지 않은 거리여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산책할 겸 우산을 가져다 달
라고 할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그냥 그치기를 기다렸다
나갈 요량이었다. 카페 안에서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 소리
나 다른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다가 뒤통수가 가려
워 긁어보니 어김없이 머리카락 뭉치가 떨어져 나왔다. 짙 은 갈색 뭉텅이. 그걸 겉옷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묵혀 두었던 가발을 꺼냈다. 이모를 만나고 나니 역시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전 3개월간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대개 세 가지 또는 그 세 가지의 다양한 조합이었다. 걱정하는 얼굴, 긴가민 가하는 얼굴, 은근히 지겨워하는 얼굴. 전부 그만 보고 싶 었다. 다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핀을 고정 했다. 요령이 없어 엉성하게 올려놓은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얼굴이 좀 괜찮아 보였다. 웃어봤다. 거리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내가 얼마나 잘 숨기고 있는지는 나를 대하는 회사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정한 절차가 있다. 처음엔 조심스러운 떠보기. ‘힘든데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
17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는 뜻을 내포한 미소를 지으면 그들은 안심하고
더 하다 제자리로 돌아간다. 엇비슷한 걸 몇 번 반복하다 보면 몇몇 사람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기 마련이다.
게 해서
그에 대해 감사하지만 괜찮다
몇 마디를
그렇
나오는 것이 ‘요즘 좋아 보인다.’ 이쯤에서 긴장은
거의 다 풀리지만 그렇다고 이전과 아주 같은 태도로 날
대하지는 않는다. 지지부진해 보여도 참을성을 가져야 한
다. 그러다 마침내 ‘산 사람은 살아야지’의 순간이 온다. 여
기가 관건이다. 제법 무례한 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
만 동시에 그 누구도 내가 여기서 울거나 화내길 바라지는
않는다. 이때 내가 잘 숙련된 배우처럼 조용한 사무실 한 가운데서 의연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들을 만족시키 면, 관객들의 환호성과 박수갈채 대신 가벼운 위로와 말을 꺼낸 이를 향한 타박이 이어진다. 그때가 완전한 끝이다. 어려울 것 하나 없었다. 가발 사이에 엉겨 있는 머리 카락만 제때 떼어내 아무도 모르게 재빨리 주머니에 넣으 면 됐다. 내가 나사 하나 빠져 있던 때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곧 깨끗이 잊혔다. 나조차도 가끔 잊을 정도다. 회사에서 일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사방이 어두워 져 있다. 어느새 또 해가 빨리 떨어지는 계절이다. 바람이 견딜 수 없이 차가워서 두꺼운 옷을 잔뜩 여민 채 뛰다시 피 걸었다. 저녁 약속이 있었다. 건물 앞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기다린 지 얼마 안 되어 Y가 회전문을 통과해 모습을 보였다.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늦게 나와서 미안. 오래 기다렸어?” 7시 35분. 약속 시간에서
이유진 소설
18
미안한
고작 5분 지났는데도 정말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이런 Y를 나는 좋아할 수밖 에 없다. 나는 일부러 짓궂게 굴었다. “응. 엄청나게 오래 기다렸어. 그냥 가버릴까 했는데.
좀만 더 늦게 나오지.”
“그럴 걸 그랬나? 농담이야. 내가 밥 살게.”
빙그레 웃는 그를 흘겨보다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
다. 그도 더 활짝 웃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딱히 목적지라 할 곳 없이 쏘다
녔다. 우리는 이런 식이다. 둘이 있으면 만 보는 너끈히 걷 는다. 추운데도 개의치 않고 돌아다니게 된다.
Y는 내게 특별하다. 내가 만난 사람 중 나를 가장 모 르고 그래서 나를 가장 잘 안다. 처음 만난 건 내가 사람 들에게서 ‘완치’ 판정을 받기 전 고등학교 동창 채정과 술 을 마시던 와중이었다. “응, 누가 뭐라든 난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난 끝! 까 지 살아남을 거야.’ 두고 봐……. 어? 잠시만. 여보세요?”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동료 욕을 하다가 어느 방송에 나온 디자이너의 성대모사를 하고, 그러다 갑자기 진정해 서는 울리는 전화를 받는 게 웃겼다. 그렇다고 소리 내어 웃을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덩그러니 있었다. 채정과 함께 있으면 웃어야 할 때 웃지 않고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아도 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좋았다. 정작 자기는 웃어야 할 때 두 배로 웃고 울어야 할 때 두 배로 울면서도 그랬다. 나는 내 앞에서 전화를 받게 내버려 두고 가만히 고기를 집어 먹었다. “여기 내 친구도 있는데? 알겠어, 기다려봐.” 귀 한쪽을 막고 악쓰다시피 통화를 하던 채정이 나를 보고 물었다.
19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야, 여기 누구 한 명 불러도 돼?”
“누구?”
“Y라고, 너는 모르는 애. 괜찮은 애야. 한번 친해져 봐.”
“됐어. 그 사람 언제 온대? 올 때까지만 같이 있어 주게.”
10시까지 온다던 사람이 11시가 돼도 오지 않았다. 그사이 채정은 술을 쏟아붓다가 뻗어버렸다. 난처했다. 쓰 러진 채정을 앞에 두고 그의 친구가 오든 말든 데리고 나 가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 고민하던 때 가 게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길쭉한 사람이 앞으로 쏟아 지듯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숨을 몰아쉬며 누군가를 찾는 듯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같은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사람을 봤는지 서둘러 이쪽으로 왔다. 채정이 말했던 Y였다.
“안녕하세요. 정이 친구이시죠? 이제 와서 죄송합니다.”
“아뇨, 뭘요. 이제라도 오셔서 다행이네요.”
“아, 이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채정, 정아. 일 어나봐.”
시계를 보니 곧 12시였다. 슬슬 빨리 들어가 푹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며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다 하는 수 없이 그 가 해야 할 일을 내가 알려주기로 했다. 마침 채정이 마신 술값이 과한 감이 있었다. “알려드릴까요?” “네?” “어떻게 할지요. 늦게 오셨으니까 대신 계산하고 내일
이유진 소설
20
쟤한테 받든가 말든가 하세요. 그리고 정이 집에 데려다주 게 좀 들어봐요. 전 못 들어요.”
아차, 이 사람도 취했구나, 하는 얼빠진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근래 들어 내가 뭘 하든 애써 이해하려, 참아내려 하는 기색이 없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나도 모 르는 새 정말로 취했는지 이번엔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기 분이 들었다. 그날 밤엔 마음을 고쳐먹고 채정을 데려다주고도 그 와 함께 오래 걸었다. 술기운인지 머리가 붕 떴다. 몇 달간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가볍고 무거운 말들이 두서없이 입 밖으로 마구 튀어나왔다. 그런 중에도 알고 나면 Y의 얼굴 이 다른 사람들과 같아질까 몇 가지 화제는 걸러 말했다. Y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는데도 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에 황당해하면서 장단을 맞춰주었다. “너 진짜 이상해. 오늘 처음 봤는데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이상해.” “술 마셔서 그래.” 그에겐 아주 아주 늦게 털어놓기로, 늦게 들키기로 다 짐했다. 그런 덕분에 지금도 그는 내 곁에서 피로한 얼굴 너 머를 보고 나는 그 곁에서 피로한 얼굴을 잊는다. 다크서클 따위 한 번도 안 가져본 것처럼 말끔한 인간이 된다. Y와 있 는 동안에는 머리카락도 항상 멀쩡하다. 그 점이 참 좋다. 걷다 보니 번화가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늦은 밤인 데도 길가에 사람이 많았다. 주변 건물들은 하나같이 깨 끗한 벽에 노란 조명을 은은히 켜 놓았다. 사람들 말소리
21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에 묻히지 않으려고 서로에게 고개를 뻗어가며 큰 소리로
대화해야 했다. 대부분 쓸데없는 말이었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듯이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실없이 웃 으면서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좁았던 인도가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살을 맞대지 않아도 될 만큼 넓어졌을 때, Y가 문득 손가락으로 어딜 가리켰다. “저기 봐.”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느새 광장이었다. 사람들이 혼자서, 아니면 모여서 지나가거나 멈춰 섰다. 다들 Y가 가리킨 곳을 올려다보고 미소 지었다. 몇 미터 앞 광장 한가운데에 트리가 우뚝하다. 옆에서 벽면에 크리스마스 영상을 재생 중인 백화점과 키가 비슷 할 정도다. 가지마다 아름다운 오너먼트들이 주렁주렁 매 달려 있다. 주먹보다 작은 것부터 머리통만 한 것까지, 번 갈아 반짝이면서 밤이 새도록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은 광경을 연출했다. 어디선가 캐럴도 들려왔다. 겨울이라 분명 추워야 할 텐데, 훈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 각마저 들었다. 모두가 완벽하다 할 순간이었다. “정말 벌써 크리스마스다.” Y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감탄했다. 나도 속으로 동 의했다. 그래, 정말 벌써 크리스마스다. 오늘까지 어떻게 잊고 지낼 수 있었을까? 가슴이 욱신거렸다. 목도리를
이유진 소설
22
정 리하는 척 머리를 쓸자 어김없이 머리카락 뭉치 한 줌이 쥐어졌다. 주머니 안에 손을 넣으며 지금은 안된다고 생각 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안 된다고. 차라리 수연이모 앞이
나 회사 사람들 앞이 낫다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아파?”
당황한 기색을 느꼈는지 Y가 날 쳐다보고 물었다. 입 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의 얼굴에서 는 절대 볼 일 없었으면 했던 표정이 금방이라도 떠오를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니, 괜찮아. 그런데 나 급한 일이 생각 나서 먼저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아! 그래. 시간이 늦었네. 데려다줄게.” “아니야. 넌 좀 더 구경하다 들어가.” 데려다주겠다는 Y와 과장되게 웃으며 실랑이하다 아 쉽게 손을 흔드는 그를 뒤로하고 집을 향해 걷는다. 걸음 걸음이 무겁다. 과도하게 큰 몸에 들어 있는 것처럼 발을 내디딜 때마다 시야가 심하게 덜컹거린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이 마가 뜨겁다. 몸에 남은 기운을 다 써서 수연이모에게 전 화를 걸었다. 다행히 통화 연결음이 세 번 흐르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무슨 일 있어? 웬일이야. 네가 전화를 다 하고.” 반가운 목소리에 화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냥 목소리 를 짜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이모. 우리 집에 좀 와 주실 수 있어요? 저 기절할 것 같아요.”
“지금? 갑자기? 어, 일단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이모가 다급하게 뒤이어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 걸 제대로 들을 새도 없이 정신을 놓았다.
23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작년 12월. 아직 크리스마스가 오려면 며칠이 남았는
데도 사람들은 기대감으로 가득 부풀어 있었다. 각종 음
악 차트에는 머라이어 캐리, 왬 등의 노래가 슬금슬금 상
위권으로 올라왔고 구세군 냄비가 거리에 보이기 시작했
다. 이른바 공기에서도 크리스마스 냄새가 나는 나날이었
다. 회사 로비에도 근사한 트리가 놓였다.
“진짜 크리스마스긴 하네. 트리도 놓고.”
“좋은데 그래도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에이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인데, 이렇게라도 기분 내 는 거죠. 예쁘기도 하고. 난 25일 후에도 좀 더 놔뒀으면 하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특별한 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회사 분위기가 평소보다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들뜬 티를 내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브 밤에 예약한 케이크를 찾고 선물을 산 후 귀가해 여유로 운 휴일을 보내겠다는 간소한 계획도 있었다. 23일 저녁까지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다. 크리스마 스이브의 이브, 사람들에게 때 이른 ‘메리 크리스마스’를 건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 다. 참았다가 이틀 후에 내리면 참 좋을 텐데, 화이트 크리 스마스는 역시 물 건너갔나 싶었다. 대신 오늘 실컷 보자 하고 멈춰 서서 눈을 구경했다. 가로등 아래 황금색으로 빛을 내며 떨어지는 눈송이들. 평화로웠다. 집에 가서 엄 마에게도 눈이 내리고 있다고 말해주려고 다시 서둘러 발 길을 옮겼다.
이유진 소설
24
“엄마! 엄마, 밖에 눈 와. 빨리 봐야 해. 그칠지도 몰 라. 엄마! 자?” 호들갑 떨며 들어선 집 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는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대답이 없기에 나는 엄마가 일찍 자는 줄 알고 방과 거실 을 지나쳐 안방으로 갔다. 이불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 았다. 옷장 문과 서랍장이 열려 있는 모양이 묘하게 어수 선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나는 서둘러 안방을 나 와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헤매는 동안 평소에는 딱 적당한 크기라고 생각했던 집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찾기까지 한세월이었다. 마지막 방으로 향할 땐 반대로 집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결말이 감당할 수 없이 빠르게 확정되었다. 그는 배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내가 발견했을 때 이 미 숨이 멎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은 감은 채였 다. 다행이다. 그렇게 아주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니었다. 불행이다. 그렇게 눈 내리는 바깥을 나와 함께 보지 못했 다. 죽은 것은 엄마였는데 다행과 불행은 모두 산 내가 떠 안았다. 지금 와서는 그게 또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르는 동안 많은 사람이 서둘러 왔다가 서둘러 갔다.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 모두 에게 진심이 담긴 애도를 기대할 순 없고 그래서도 안 된 다는
25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걸 안다. 엄마라면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 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사람들 은 어깨에 눈처럼 축제를 묻히고 와서 절하는 동안 그걸 무심코 땅에 떨어트렸다. 수연이모와 채정, 그리고 엄마의
가까운 가족 몇 사람이 삼 일 내내 내 옆을 지켜준 덕분에
나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있어도 괜찮았다. 가만히 앉
아 있다가 누군가 앞에 오면 절. 그리고 다시 가만히 앉아
있기. 그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발인이 끝나자 수연이모도 채정도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망설였지만 결국은 각자의 일로 떠나고 나 혼자만 남았
다. 장례식장 바깥은 싸늘하기만 했다. 귀에 익은 울음소 리가 들려오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심란했다. 그날 종일 먹지도 않고 거리를 걸었다. 공백은 고작 삼 일뿐이었지만
마치 십 년 전에 외국을 여행하며 보았던 것이 십 년 후 여
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보려는 사람처럼 그렇게 했 다. 아직 트리를 치우지 않은 곳은 많았다. 그러나 캐럴은 거의 들려오지 않았고, 내가 예약한 케이크는 당연하게도 이미 폐기되어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가 엄마를 따라 증 발한 것 같았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계속 걷다가 마침내
회사 앞 그 가로등 밑에 섰다. 하늘은 그때와 달리 밝았고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머리 가 간지러웠다. 손으로 쓱 훑으니까 무언가 잡혔다. 내 머 리카락 덩어리였다. 엎드려 있는 이모가 가장 먼저 보인다.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오후 1시의 햇살이 창밖에서 들어오고 내 손등에는 큰 바늘이 꽂혀 있다. 얼마나 여기 있었는지 모를 이모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이모, 나 깼어요.”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
이유진 소설
26
는가 싶더니 울먹울먹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내가 네 말만 믿고. 당연히 금방 괜찮아질 리가 없는데. 다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네 엄마 얼굴 어떻게 보니?”
“그동안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지금 이렇게
와 주신 것도요. 엄마도 고마워할 거예요. 계속 괜찮다고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그런데요. 이모, 저 무서워요.” “아이고 다 알지. 그동안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까? 세 상에 너 혼자인 것 같지? 그래도 내가 있고 정이도 있고. 다들 네 옆에 있어. 네가 부르면 언제든 함께 있어 줄 사람 들이…….” 감격에 찬 이모의 얼굴은 참 보기 좋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아뇨. 그것도 그건데, 죄송한데 저 링거요. 빠질까 봐요.” 이모는 ‘필요하면 말해. 알았지?’, 하면서 나가다 말고 몇 번을 뒤돌아보다가 마지못해 병실을 떠났다. 확실히 나 쁜 사람은 아니다. 잊지 않고 앞으로 더 잘 해드려야겠다 는 생각이 든다. 방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내 옆 기계에서 나는 짧은 삐 소리만 일정하게 들려온다. 나는 일으켰던 몸을 다시 뉘었다. 머리 왼쪽 서랍장 위에 내 휴대폰과 함 께 메모가 붙은 머리 끈 몇 개가
27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같은
자가
—괜찮다고
놓여 있다. 이모가 쓴 것
메모를 읽기 전에 휴대폰 먼저 확인했다. Y에게서 문
와 있다. 기절한 어젯밤에 온 문자다.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려서. 내가 혹시
뭐 잘못했을까? 어디 불편한 건 아니지? 이거 보면 연락해 줘. 걱정돼. 회사 스트레스 때문에 두통이 와서 그랬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적어 도 두통은 사실이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 건지 뭔지 머리 가 계속 울린다. 이모가 두고 간 머리 끈은 평범한 검은색이다. 메모에 는 이렇게 쓰여 있다. —맨날 다 늘어난 걸로 묶고 다니고. 오늘도 그랬길래 새로 사 왔어. 옮길 때 그거 조금 흔들렸다고 바로 풀리더라. 이런 거 신경 쓸 새도 없었지? 네가 고생이 많다. 푹 쉬어. 나는 다시 머리 끈을 들어 올렸다. 정말 그랬을까? 정 말 그 정도로 늘어났던 걸까? 겉으로 보기엔 이전에 쓰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정수리에서 가발을 떼어 내려놓고 새 머리 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한 번, 두 번. 두 바퀴 돌리 니 고정되었다. 베개에서 머리를 떼고 샅샅이 살펴보았다. 머리카락 뭉치는 없고 두세 가닥이 흩어져 묻어 있다. 이번 엔 겉옷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난밤에 분명히 여기 넣었다. 그러니 내 이상한 머리 빠짐이 사실이라면 여기 들어있어 야 마땅하다. 그런데 없다. 털 덩어리는커녕 단 몇 가닥도. 링거를 다 맞고 나서, 약과 부분 가발을 양손에 하나 씩 꼭 쥐고 병원을 나왔다. 병실에 뭘 두고 온 기분이 들었 는데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닌 듯해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바깥은 작년 이맘때처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만연해 있 다. 병원 정문에도 풍선 트리가 서 있다.
이유진 소설
28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목마다 서 있는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크리스마스 생각을 하다가 엄마의 장례식 생각을 하다가 내 머리카락 생각을 했다. 머리를 몇 번이나 쓸었 지만, 그때마다 나오는 것은 없었다. 작년 내가 잃었던 삼 일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문득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브와 크리스마스이브와 크 리스마스가 엄마 같다. 모두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곧 엄마가 올 것 같다…….
29 …Gave you my heart but the very next day
김현채
비행기가 굉음을 일으키며 지면을 구르던 바퀴를 접 었다. 비행기는 예정보다 조금 연착되어 느지막한 오후에 출발했다. O는 몸이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을 체감하며 작은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지표면 부근 을 데우는 빨간 노을이 참 근사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 지만, 한동안은 못 볼 풍경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이것저것 눈에 담고 싶었다. 대략 일주일 먼저 비행기에 올랐을 Q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비행기의 앞코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상상했을 것이며 비행기 바퀴가 다시 펼쳐질 순간만을 고대했을 것이다. O는 창문에 둥글게 박 힌 노을을 카메라에 담았다. Q가 들뜬 마음에 놓쳤을 순 간들을 일단 모아 보고 싶었다. 노을이 지고 기내에는 실내등이 들어왔다. 비행기는 오랜 시간 동안 어두운 하늘을 날다가 간간이 구름을 통 과했다. O는 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잠에 서 깼다. 그는 환경에 이렇게까지 자신이 예민할 수 있다
김현채 소설
32
다른 나라
는 사실에 낯섦을 느꼈다. 그러다 담요를 고쳐 덮고 몸을 뒤척일 때면 불현듯 다시 Q가 떠올랐다. Q는 사람의 인 기척 때문에 깰 만큼 얕은 잠을 자는 편이라고 했다. 불현 듯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흔들 것처럼 몸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것이 Q가 자신의 나라를 떠난 이유였다. 이 나라에서는 잠을 잘 못 자겠어. 계속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Q는 바 테이블에서 유리잔을 닦고 있던 O에게 그렇 게 말했다. Q는 O와 똑같은 시간대에 마감을 하면서도 한 번도 사담다운 사담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O는 그 물음에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 는 닦던 유리잔을 내려놓고 Q를 바라보았다. 다른 나라에 가보면 되죠. 그렇게 가볍게 대답한 것은 Q가 자신에게 어 설픈 농담을 던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렇 게 오랫동안이나 자리를 지켜왔던 Q가 쉽사리 제 보금자 리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이기적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O는 그때 Q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 억나지 않았다. 테이블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 뭐라 중얼거 렸던 것 같은데. O는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Q의 옆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짧은 잠에 빠졌다. *
다른 나라
33
비행기 바퀴가 크게 덜컹거리며 땅에 발을 붙였다. O
는 부스스한 머리를 몇 번 긁적이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
다. Q가 가고 싶다던 나라에 도착해 있었다. 담요를 개고 가방을 챙기는 사람들로 주변이 부산스러웠다. O도 낯선 이국의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비행기에서 내렸다.
O는 Q가 혼잣말처럼 던지곤 했던 희망사항들을 떠올렸
다. Q는 그 이후로 떠날 것을 예고라도 하듯이 여태 하고 싶었던 것들을 종종 O에게 말하곤 했다. 그 나라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대. 친분이 많이 쌓 여서 막역한 사람들도 많고.
O는 그때, 여기에도 당신과 막역한 사람들은 많지 않 냐고 말하고 싶었다. Q는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사 람처럼 주변에 사람이 꼬이는 인물이었다. 바에서도 Q에 게 안부 인사를 건네고 허심탄회하게 고해성사를 하는 사 람들이 많았다. 쉬는 시간마다 심심치 않게 그에게 걸려 오는 전화를 보면 그 기질이 단순히 직종에만 국한된 것 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O는 뜬금없이 Q가 그런 말들을 할 때마다 자신이 알던 직장 상사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 였다. 직장에서의 모습만 보고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겠나 싶어 O는 괴리감과
김현채 소설
34
수긍을 반복하곤 했다.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 를 털어놓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지금은 그가 해준 말 빼고는 이 먼 이국의 땅에서 그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짐을 찾
단지 이해가
O는
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Q가 해준 이야기를 하나둘씩 되새 겼다. 맑은 강이 흐르는 다리. 사람 수가 적은 한적한 레스 토랑. 고양이들이 지나다니는 고요한 밤거리. 뭐 하나 구 체적인 것이 없었지만 O는 그것들이 떠오르는 것만으로 도 감사하게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 조촐한 가방을 찾은 O는 공항 밖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급하게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는 예상보다 훨씬 외진 곳에 있었다. 평소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는 O였기 때 문에 인적이 드문 곳을 선호했지만, 교통편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택시 기사가 난감한 얼굴로 차 앞을 손가 락으로 휘적거릴 때쯤 O는 어렴풋이 그 상황을 이해하고 는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 기사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길을 가리키며 최대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설명하 는 듯했다. O는 대충 방향 정도만 익힌 다음 택시 기사에 게 목례를 하고는 차를 떠나보냈다. 택시 기사가 가리킨 방향대로 걷다 보니 택시가 왜 이 곳까지 들어오지 못했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시가지에 규
다른 나라
35
칙성이
시
그와 별개로 풍경은 단 란하니 보기 좋았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높은 건물은 세월이 흘러 군데군데 누렇게 바랜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 의 작고 알록달록한 양말과 옷들이 빨랫줄에 가득 널려있 었고 어떤 집 창문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고소한 냄새가 풍
없고 길도 구불거려서 한 번 차가 잘못 들어가면 다
돌리기도 애매해질 것 같았다.
겨왔다. 아마 이 건물들은 가정집이 모여 사는 모양이었다.
O는 Q가 말한 친근감이 이런 것에서 밀려오는 것인 지 잠깐 생각하다가 조금 더 좁은 골목을 향해 들어갔다. 골목에 들어서자 어떻게 만든 것인지 모를 높은 계단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까 택시를 돌려 보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O는 두 사람이 지나가기 에도 버거운 좁은 계단을 오르며 대로변의 게스트하우스 를 구해야 했다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다행히도 계단을 오른 이후부터는 쉬웠다. 계단 막바 지부터 오른편에 게스트하우스 간판이 보였기 때문이었 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1층에서 창 문을 활짝 열어둔 상태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선잠을 자 고 있었다. 건물이 좀 낡았는지 문턱을 밟자 끼익거리는 괴기한 소리가 났다. 할머니는 그 소리에 깨어나 푸근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고쳐 신고는 O에게 다가왔다. 올 손님 이 그밖에는 없었는지 할머니는 특별히 이름이나 숙박 기 간을 묻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라오라는 듯 계단을 올랐 다. 할머니는 2층에 올라와 복도 끝에 있는 방문을 열었 다. 방은 창문이 제법 크게 나있는 넓은 방이었다. O는 예 약한 방에 비해 너무 좋은 방을 받은 것 같아 어색하게 손 짓을 해가며 예약에 오류가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항상 게스트하우스가 빌 때마다 그 방을 내어준다고 말하고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O는 짐을 제대로 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몸을 눕혔다. 형이상학적인 패턴이 그려진 천장과 누런빛의 전등이 시야를 메웠다. 하나같이 익숙한 것이 없는 나라였다. O는 가물거리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
김현채 소설
36
보았다. 이른 저녁 수평선에서부터 샛노란 노을이 둥둥 떠
올랐다. O는 눈을 감으며 Q가 같은 노을 아래 저녁밥을 먹고 있을 것이란 상상에 빠졌다. *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일어난 O는 입맛이
없어 저녁을 거르고 싶었다. 하지만 1층에 있던 할머니는 근처에 맛있는 가게가 있다며 조금이라도 좋으니 먹어보라 고 권했다. 거절에는 소질이 없던 O는 별수 없이 1층 주방 테이블에 앉았다. 할머니는 오래된 수화기를 들고 익숙하 게 저녁을 주문했다. 그는 할머니가 시키는 메뉴가 무엇인 지 묻지 않고 들어올 때부터 활짝 열려있던 게스트하우스 입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선 선했다. 할머니는 주문을 마쳤는지 수화기를 내려놓고 덩
달아 입구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말투로 O에게 말을 걸었다. O는 정확히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문을 열어두는 것은 일종의 관습인 듯했다. 밤이 찾아올 때면 사람 몸을 흐르는 영혼과 비슷 한 것 ―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제 몸에 둥근 원을 여러 번 반복해 그렸기 때문에 대충 그런 것이라 예상했다. ― 이 밖을 나가 주변을 돌아본다고 믿는
다른 나라
37
것 같았다. O는 자신의 영혼은 얼마나 멀리 갔다가 돌아올지 생각해보고 싶었지 만,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이 나라의 모습은 너무 적었다. O가 신비로운 가치관에 잠시 생각을 빼앗긴 사이, 밖 에서 자전거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렸다. 시킨 음식이 도착
한 듯했다. O는 할머니 대신 음식을 받기 위해 몸을 일으
켰다. 수수한 웃음소리를 내는 사람이 게스트하우스 문턱 에 음식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O가 음 식에 향해 있던 시선을 올릴 때쯤 맑은 웃음소리가 멎었다. Q가 낯선 복장으로 낯선 음식을 든 채 O 앞에 서 있었다. *
Q는 벌써 이 나라의 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 었다. 원어민에 비해 약간 어눌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는 그 런 것은 개의치 않고 가족을 만난 것처럼 할머니에게 인 사를 했다. 세 사람은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Q의 몫이 따로 없었지만, 음식을 조금씩 나눠 세 명분으 로 만들어 먹었다. O는 음식 맛이 어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에서 잘라온 것처럼 그가 눈앞에 있다는 사 실에 영 현실감이 없었다. 식사를 끝나고 뒤처리를 하며 할머니는 O와 Q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는지 잠시 방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가라고 했다. Q도 어쩐지 말을 하 고 싶은 표정을 짓는 것 같아서 O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 없이 계단을 올랐다. 네가 여기 왔다는 게 사실 좀 실감이 안 나네. Q는 창문 근처의 티 테이블 의자에 기대어 O를 바라 봤다. 그의 시선이 꼭 옛것을 더듬는 듯해서 O는 시선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김현채 소설
38
저도 실감이 안 납니다.
내가 얘기할 때마다 반응이 영 시큰둥했었잖아. 약 간… 그래, 가고 싶은 여행 가세요. 난 컵이나 닦을게요. 이런 느낌이었거든.
O는 실제로 그것과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구태여 그것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질문에 하나씩 답을 내놓다 보면 그가 점점 자신을 의아하게 볼 것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었다. O는 이 나라에 온 이유를 명확하게 설 명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Q에게 서 풍기는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하얗던 피부는 땡볕에서 음식을 날랐기 때문인지 군데군데 탄 것 이 보였다. 항상 반듯하게 넘기고 있던 머리는 바람에 날 려서 흐트러져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잠을 잘 잡니까?
Q는 턱을 괴고 금세 어둑해진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O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늦잠까지 자. 몇 번 그래서 식당에서 잘릴 뻔했어. 다행이네요.
다른 나라
39
O는 문득 제 앞에 앉은 사람이 먼 타국의 사람이고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떠올려봤다. 그
가 하는 말의 일부만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이해했노라 고
개를 끄덕이는, 그로부터 겉돌게 되는 상상. 그것은 어쩌
면 이미 현실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찬 바람이 창문을 넘
어와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머리카락을 매만지
지도 않았고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해준 영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의 영혼이 있다면, 그 것은 창문 너머로 날아가 높고 낮은 건물 사이를 제집처 럼 돌아다닐 것만 같았다. 바람을 타고 수없이 많은 영혼 이 방을 들락날락하는 것을 따라 Q도 세상을 보고, 미련 없이 잠을 잘 것 같았다. O는 그날 밤, 그중 하나의 영혼이 창문가에 앉아 다가오는 황혼을 바라보는 꿈을 꿨다.
김현채 소설
40
하태훈
느닷없이 마주친
만남의 의의는 미완일 수밖에 없으니
어디에 두어도 부끄러울
침묵을 채우는 순간
그럴 때면 찾아오는
텅 빈 맥주 캔
환한
웃음 머금은 장난들
추억에 알코올을 꽂는 이유란
44
하태훈 시 만들어지지 않은 시간
고양이 심바
꼬리를 살랑 흔드는 건, 꼬리가 있기 때문이죠
귀엽다는 말은 지겨워요
해는
매일 봐도 싫었구요
어젠 모르모트와 산책을 했죠
귀 하나는
덫이란 걸 알았죠 참치 맛 츄르는 맛있으니
어서 내 눈을 가려줘요
하지만 철창은 끔찍해
귀를 잘라도, 땅콩을 잘라도
괜찮아
하지만 철창은 끔찍해 차라리 눈을 가져가 철창이 보
이지 않도록
친구들은 환관이라 놀리지만
연인이든 애인이든 야옹
모르모트와 섹스는 하지 않으니까요
사료를 먹는 건, 사료가 있기 때문이죠
귀를 왜 두 개나? 들리지 않는걸
들을 필요가 있나요?
고양이 심바
45
식빵을 굽는 건
앉아있을 뿐이죠 귀엽다는 건
눈은 두 개를 가져가줄래요?
46 하태훈 시
코팅된 사진은 불에 타지 않았다
미련이 불면으로 바뀌는 밤에
쌓여있는 편지에 불을 피워
잠시라도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답장 대신 써 내려간 자기소개서엔
나, 하나 있지만
나여야만 하진 않고
밝아오는 하늘이 무서워도
심리 검사지는 내가 건강하다 말했다
떠나고 싶어 탄 열차는 내선 순환
자동 응답기는 언제나 망설임이 없으니
찍히지 않은 밤을 세어보곤 했다
코팅된 사진은 불에 타지 않았다
47
해가 길어 밤이 귀한 여름에
공복에 먹은 저녁을 토해냈다
잠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하늘은 밝았고
해가 지고서야 떠난 산책
가로등과 가로수가 번갈아 서 있고
호수 앞 벤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우연을 운명이라 발음해서
지금 홀로 앉아 있구나
가능하다면
해가 뜨질 않길
서둘러 잠을 청했다
하태훈 시
48
여름밤
국적
다섯 번 정도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무너지고 있는 집과
마른 들풀이 있는 곳들을 움직이는 체하면서 움직이
다 보면
우리 열찬 어디론가 도착할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접사로, 날거나
떨어지거나 그만 목표를 놓쳐버리던가 아님
이곳은 광장이었나요 아니면 궁한 자들의 다락이었 나요 뭐라도 되었다면요
오늘과 어제 그리고 작금의 세월은 낡은 전신주들의
시대 혹은 그러할 뿐인 시절 모든 감정은 세습되거나 선출되고 모든 분위기는 떫은맛입니다 그래서 떫은 것들만이 남은 들녘에서도 능선을 따라 공손하게 맞절을 해요 신사라 불러주실래요?
이동현 시
68
신사들, 아가리들, 속절없는 석고대죄를!
내일 우린 몇 마디나 걸을 수 있을까요, 들풀은 말라 버렸는데 환하게 켜진 가로등,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가죽. 지겹게도 어느새 혹은 불현듯이
다락은 넓게 트여 해거나 등이거나 하는 빛들은 까까머리를 비추기 시 작한다
군인의 국적
69
천체를 보기 위해 남하한 시간
부러진 새와 압사한 새들을 목격하곤 한다
그럼 모든 곳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야 하고
예컨대 모텔 샴푸로 머리를 감으며 노동에 대해서 생
각하는 일과
당신과 내가 마주보고 앉아
별이 빛난다는 밤을 말했던 사연과
노파들이 쥐어주는 전단지들을 상냥히 받아들거나 노파들의 행선지를 손수 찾아주는 일 옷을 여미고 다니는 입김이 새어 나오는 아침엔 방충망은 없어 벌레들이 붕붕거리며 날곤 했다 거기는 달도 보이고 운도 좋으면 별도 보이지만 너는 아스팔트가 싫어 도시를 떠났다는데
이동현 시
70
기차역
나는 모텔의 샴푸로 머리를 감으며
어제의 과음과 오늘의 숙취를 후회하며
붕붕거리곤 하는 모기들을 두 손으로 잡았다
어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울었던 친구는 몸을 긁으며
“미안했어”라고 말하고
나른한 보살 같은 슬픈 얼굴을 하며 태운 담배 냄새는
작은 방에서 빠지지 않고
친구가 헛구역질을 하며 한강을 걸어서 건넌 다음
기차를 타며 되돌아갔을 때는
당신에게 이런 식으로 써지는 편지를
부리나케 쓰곤 한다
기차역
71
불을 끄면 산과 산 위로 놓인 남양주로 가는 길과 남
양주로 가는 사람들이 남기곤 했던 데스마스크들이 매장
되어 있는 언덕이 있고 데스마스크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데스마스크를 보러 왔다 신도시에는 사람들이 사는 데도
사람들의 밀도가 부족하거나 건물의 층수가 부족하거나 소음이 부족하거나 하여 신도시에 살기가 싫어진 사람들 은 야경을 축조하곤 했다
불을 끄면 야경 가운데서 들리는 소리들에
식은땀을 흘리고 신음할 시간 길을 잃는 것과 데스마스크를 씌우는 것 종이를 펼치면 종이의 누렇게 바랜 정도에 따라 서로의 경중이 나뉘고 아침의 해변의 푸른색 입김과 불을 끄면 보이는 야경
이동현 시
72
신도시
야경 위에 올라탄 경비원들의 허리를 넘겨다보면 “할머니 오늘은 코감기에 걸렸어요 약은 알약이 좋아 요 가루약은 쓰거든요” 하며 자전거에 올라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어린애가 있고
어린애가 그날 밤 눈이 붉은 눈으로 가져다준 사진에 는 녹슨 철길의 웅덩이에 비친 얼굴에 쓰여진 낙서, “가루약은 쓰거든요”
새로운 도시의 고양이는 목에 작은 종을 찼고 종은 밤에 붉게 빛났다
철과 석회로 짓고 있는 건물은 낮에도 신음하여 해가 질 때 사진기를 들어 야경을 담았다 가루가 된 마당에서 고양이는 주저앉은 채
“엄마, 요즘은 데스마스크에 얼마가 들까요” 내가 그것도 몰라서 미안하고 내일은 그것마저도 알 아서 미안해 웅덩이에서 대체 무엇을 본 거니 우리의 야경 에는 별들을 위한 공간은 없었는데 이미 불은 꺼졌는데 우리네 작은 머리론 해변에서 뿜곤 하는 입김만 기억한단다
신도시
73
황동색 가면에 푸른 김이 서리기 시작한단다
74 이동현 시
Ⅰ. 겉과 겉에 없던 것들과 있어야 할 것들과
이미 무너진 바위 끝
늘 소름이 돋고도 사나워지길 바라며
깍듯한 말들을 바위 끝에 던졌던
짐짓 우울했던 목소리들
스스로를 품어버린 산꼭대기의 방문자들
오금이 저리고 오금이 저리었다 머리 위로 지나간 말 위
말 위에서 사납게 달려버린 바보들
눈에 핏발이 선 사내들
딱 절반의 천치 같음으로
보상 없는 충정으로 오금 저렸던 어제 일로
막연히 당연히 화가 났다 굴렁쇠가 되는 상상을 한다는 것이다
화가 난 채 힘을 조금씩 모아 결국엔 매섭게 유영하 는 우리 자랑스러운 우주선과 혀가 아리거나 사람이 아 린, 아린 날들 바보들
맘 편히 화낼 수도 없구만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아차산의 빨치산들
75
아차산의 빨치산들
맘 편히 화를 내는 원형의 스테인리스 스틸 굴렁쇠
굴러떨어지는 우리 굴렁쇠
바위 끝에서 발사!
넌지시 화가 난 말 탄 사내들의 빛바랜 초상화들
무심코 그려버린 낙서들
눈에는 핏발이
눈에 핏발이 든 저녁, 내일 학교를 빠져야지, 뇌까리 고, 서로의 눈을 비비는 사랑스러운 동창들, 미간에 조약 돌을 조준하던 나날들
76
시
이동현
Ⅱ. 카페에서 우는 사람은 같이 앉아 있는 사람한테 어떻
게 그따위 시답잖은 소리를 하냐며 흐느낀다
사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너는 모르고
우리도 사실 매년 혁명을 준비하는 꼭꼭 숨어있는 이
란의 혁명가들처럼 은밀한 단수방송으로만 세상을 알 수 있는데 사실 네가 무슨 말을 할지 나는 모르고
핏발이 들어버린 눈, 부끄럽지도 않니 그런 눈으로는 혁명을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란이나 금성이나 목성에서의 실패한 혁명을 궁리하겠니 동전의 재질마저도 못 정했는데 음울한 백인이 음울한 말투로 음울한 세상을 읊조리면 막연히 당연히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울고 싶었니 그래서 오늘 너는 울고 있는 거니
아차산의 빨치산들
77
소스라치게 파리한 그날 그때의 목소리로
화가 난 나머지 예전에도 없었던 커피 냄새나는 숨결로
산 위 꼭대기와 평탄한 능선에서
사람이 없어 재미없는 그때의 궤도에서
우리 자랑스러운 우주선을 타는 미미한 감도로
비밀단수방송에서는
남자애. 파리한 남자애. 서슴없이 속삭이는 남자애.
강철 같은 우리의 믿음… 바위는 돌멩이가 되었고
울고 싶었니
나른하게도 활강하는 우리는 사람들과 굴렁쇠들
이란 혁명군 우주군 만세!
이동현 시
78
Ⅲ. 아차산 중턱 소나무 숲 냄새 익숙하고 향긋한 소나무 냄새
소나무 가지에 걸린 화가 난 굴렁쇠
막걸리에 취한 언덕 위의 사람들 물을 사는 사람 둘
눈이 새빨개진 채 내일 학교를 궁리하는 스스럼없는
시련과 내밀해지고 엄밀한 와중에야
순진해지길 원하는 이란 민중당 총서기 동지 종이접기에도 실패한 나머지 내일 봐요 바람 사이에서도 난 너를 볼 수 있는데 미간의 과녁을 모으는 늠름한 명량한 도굴꾼들 말 위를 달리다 전사한 장렬한 온달들은 커피를 마시며 묘지의 수들을 세고 빼며 시름거리며 앓으니 내일의 우주에선
아차산의 빨치산들
79
미미한 감도로 음울하게 굴렁쇠를 잃어버려 미간에
서는 주름이 서리었다 숲의 냄새와 당신을 향한 멋모르는
사랑으로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는데
어때, 어떤가요, 승인해주겠어요?
이동현 시
80
81
시를 쓰고야 만 거야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처럼 아빠도 죽고 말 거야 사랑하는 내 사람 평강공주가 그리도 되고 싶었소? 오, 엄마가 주검 더미에 갇혀 버렸지
아차산의 빨치산들 부치고야 만 편지 아빠는 팔레비가 도망갈 때 조국은 평등한 빨갱이 나 라가 될 거라고 말했지 눈물을 머금은 채 감격을 머금은 채 기분 좋은 도사림과 당신 따위로 충만한 채! 그렇지만 아빠는 노태우가 당선될지도 모르는 바보였는데 말 이지 그러니깐 아빤
동생은 갇혀 있고
나는 가뒀지
그런 거지
그런 거야
82 이동현 시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했을 터
너는 그때까지는 내 옆에 있을 것이다
곤두선 내 털을 보면 나도 비슷하다면서, 그래도 완전히 같은 건 아니라면서 비릿하게 웃어주 었으니깐 몇 년이 흘렀지만 이곳은 여전히 천장이 있는 옥상이 었고 마지막으로 복된 자가 되는 자는 다음 사항을 목격하 곤 했으니까 빨간 색, 빨간 상징, 띠, 원과 일종의 달콤한 동그라미 안녕 이라 말을 하곤 하는 우리를 일컬어 혹자는 호모사피엔스라고 하거나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고도 한다
옥상의 노을과 성 니콜라우스
83
옥상의 노을과 성 니콜라우스
사실 일가친척들이 내 따귀를 후려갈기기 전에는 나
는 말을 할 줄도 몰랐을걸?
걸을 줄만 알았지
아기의 두뇌엔 무시무시한 스파이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무서운 시절
모든 간악한 첩자들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한다면
우리가 존재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단 소리도 된다 하겠다
우리는 산뜻한 의미로는 홀로 산 적이 없었거니와
옥상의 이미지는 썩어가는 담배꽁초와 갈색 웅덩이 에 지나지 않았고 이미지에 대한 어림없는 환상과 거짓 향수鄕愁로 사람들이 옥상을 찾게 된 거다 온통 휩싸일 수도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의 조국은 망해 있었고 새로운 조국의 언어 덕분에 할아버지는 평생 조선어를 하면 혀가 무뎌진 것이었으니
이동현 시
84
모든 유망하지 않음
모든 무가치한 것들
오래된 먼지들이 드디어 자근자근 창문을 쓰다듬기
시작했고 어기영차! 만들어진 하나의 사탄, 일종의 알사탕, 일종의 자랑스러움, 어느 정도의 연대 태양은 마침내 등분된 채
눈을 관통해
커피잔 속 얼음 조각들은 마침내 모두 녹아버렸다 저녁이 덜 되었을 때 사설 양로원에 봉사를 하러 간 다. 양로원은 평화로워 보인다.
옥상의 노을과 성 니콜라우스
85
노인 하나의 눈에는 구멍 이 뚫려 있거나 닫혀 있다. 그와 난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 지 못했다. 뿌옇거나 아무것도 없거나 우리는 살았는가도 말하지 못한다는 건실한 사랑과 어둠과 건실한 사랑
친구는 그날 애인과 헤어졌고 우리는 그날도 오후 11시까지 앉아있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러니 “내 묫자리에 봉분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소. 내 사 체 혹은 그 일부 혹은 그 잔해가 자유롭게 떠돌거나 그랬 으면 좋을 텐데. 이미 좁은 세상, 이미 넓은 사람의 영역, 그곳에 우리 죽은 이들이 서 있거나 누울 공간을 세상은 허락하였어도, 나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미래 와 개인적인 오래된 이상 또한 그리 말하고 있소.” 이미 그렇게 될 텐데 내가 밝은 날을 제시하면 ―감당할 수 있어요? 상전을 어떻게 두 분을 모시냐는 어리석은 생각과 말을 한다는 믿음으로 무장한 시인들
이동현 시
86
마침내 모든 시인들은 물구나무를 서고
징글벨. 징글벨, 모든 악몽이 예지몽이 되고 예언자가 되어 태양을 마주하는 큰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너는 있고 나도 있다 주께서 이미 세상을 승리하였어도
우리가 번제를 한다는 것은
모든 귀신들이 세상을 알음알음 알기 시작했다는 것
도 된다는 것 마귀들이 번뜩이면 빛이 나기 시작하고 말았다
마귀와 나는 신기루와 헛것과 옥상에 대해서 말했다 마귀와 내가 그 오랜 시간 동안 의견을 나누면서도 오직 서로 동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 날이 춥고, 당신이 아프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한 것, 우리 아프진 말자
옥상의 노을과 성 니콜라우스
87
할아버지는 코를 골며
예전의 조국을
차디차게 저주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금강산, 나는…
적은 것들 받아 적은 것들
율법이 공고된 이후
처음으로 장어를 구워 먹기 시작한 사람들
해가 지는 어느 멋진 맑은 날
우리는 스스로 사람이 되고
우리는 스스로 걷고 걷거나
뛰다 발바닥이 아프거나
마귀들 또한 광택이 나고
할아버지는 평생 동안
88
이동현 시
할아버지는 평생 동안
망해버린 조국이 의아했으며
망해버린 조국이 왜 자신을 그리도 능멸하였으며
새로운 조국 또한 의아한 것들투성이었으며
새로운 조국이 왜 자신을 그리도 능멸하였으며
어느새 빙글거리면서 웃으며
왜 한 치의 묵상도 우리는 하지 못했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가 공평하게 못나다는 생각을 할 때 해가 두 개 뜬다는 예지몽을 꾸곤 했다 커피를 태운다는 공장에서 일했다는 늙은 벗은 내가 마시는 커피의 가격을 듣고는
옥상의 노을과 성 니콜라우스
89
나를 의아해하며 저주하기 시작했고
할아버지는
여행을 가자고 했으면서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거나 죽었거나
할아버지는 죽었거나 돌아가시거나
어느 날 들은 모든 질문에 대해서
참으로 망측하다는 생각을 한다
역으로 질문하지도 않고도
나는 망측했기에
할아버지는 여행을 가고 말았다
저 모든 말들이
배우지 않아도 그저 주어져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 을 한다
밤이 된다면
니콜라우스가 그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오랜 파업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동현 시
90
기복에 관한
소극적인 자기 부정과
조그마한 기복
비릿한 웃음과
일종의 너. “저 방향으로 쭉 가면 공항이 보이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여행을 가는 건가요?”
“가 보면 알겠죠.”
채색하지 않은 모든 밑그림과
채색되지 못한 모든 산타클로스
모든 피부와
모든 털
일종의 단백질들.
옥상의 노을과 성 니콜라우스
91
모든 니콜라우스와 젊은 조부의 이름으로!
전진!
92 이동현 시
파렴치한 아침과 오후쯤 나는 말하는 나를 보았다
말하는 나는 카메라들이 보낸 얼굴들 또한 본다
그렇게 우린 각자 코가 삼척인 채로
운이 좋게 살거나
그런 말조각을 이어붙이거나
운전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잠을 자거나
헛구역질을 한다 마음대로 폐허를 탐구하거나
늙은 여자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옆에 앉아 있는 너는
허리를 굽히지 말고
그래 저 지평선을 바라보며 살 곳을 찾으라 하면 서울 내지 기타 등등의 한국에서 지평선을 보는 게 쉬운 줄 아냐며 빙글거리며 웃을 테다
너는 평원에서 오지 않았어 김제나 나주 같은 곳에서 오지도 않았지 당신 말에서는 산 냄새가 나
접사接寫
93
접사接寫
가문의 선산先山의 냄새가 나
그곳에선 아무도 평야의 말을 쓰지 않아
그 카메라 내놓으세요, 할머니
오늘도 파렴치해지고
각자 코가 삼척인 채로 현금을 셀까요?
야트막한 산과 언덕과 달동네 굴다리와 민자역사民資驛舍
대로변 숨겨진 곳에서
카메라들이 보낸 얼굴들을 보면서
사실을 덜 깬 잠을 자면서.
94 이동현 시
산은 사실 단순하여 많은 답을 해주지 않았지
그러니
그곳에 살거나 다녀온 사람들은
한도 끝도 없이 범상해지지 못했다는 옅은 죄를 지어
상당히 쓸쓸해지는 벌을 받았다
난 어느새 죽어 날 가두었고
난 어느새 살아 날 가두었네
갈증을 풀려면 구름 속 구름으로 들어가면 나는 어느새 살아서 날 미워하고 난 아무 말도 없이 내 목을 만지며 노래여야 할 노래를 이미 지어 부르고 있네 번뜩일 주황색 이내 부끄러워 지나친 역전 광장의 비둘기
주황색 마을
95
주황색
마을
난 가물거나 저물어 시대를 말하지 그댈 가릴 주황색 플랫폼 위 회색 새 속삭임 목소린 이내 메아리에 묻혀 저물었다 오래된 예식장에는 보험회사들이 자리 잡아 메아리 속에 메아리를 지었고
시장은 떡볶이 가게가 있던 시장은
현수막과 쇠 파이프로
이동현 시
96
오래된
천막과
가려진 채 자본과 사람을 기다리지 그들이 아는 사람이었을 때는 역 앞에서 담배와 현금을 구걸하는 사람이 어느 정 도 딱 얼굴만을 기억하는 상황에서 다시 만날 때는 반가운 티를 내면서
하해와 같은 반가움과
약간의 역겨움으로
현금이 없는 미안함으로
손님이 없는 찻집에서
사장과 그의 딸이 학교 숙제를 가지고
세상을 잃은 듯한 고함으로 싸움을 하고
씨발, 엄마는 왜 그 지랄이지?
나는 일기를 쓰기 싫은걸?
저기 저 아저씨도 아는데
숙제는 씨―발
개좆같은 거잖아
그치? 그럼 다시 나는 눈을 감고 산에서는
메아리를 만들 때
화를 내는 것처럼
비가 오고
주황색 마을
97
비가 좀 많이 오고
시장에 사는 사람들이
다시 어느 시장으로 쫓겨나거나 하는 시점에
딸이 사실 일기가 괜찮은 수단의 거짓말거리라는 것
을 알 때쯤에
건물이 눈에 익기 시작한다
낙서들이 기억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발가락이 으스러져
오른쪽 발가락이 하나도 없는 비둘기는
어딘가를 노려보며
헥헥대면서
예전에 지나친 전문대의 정문에 등을 기대며
머리가 사실 살짝은 아픈 채로
저기 저 씨발
오늘 뭐 하세요
이동현 시
98
답해보세요 오늘은 또
어디서 나를 가두었죠
주황색 마을
99
더 이상 넌
시대는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며
말하지도 않았고 그와 같이 나도 아는 애가 왜 그랬냐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이미지들, 먼지투성이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찡그린 채 하늘을 보는 것
늙은 말들, 축생도를 그리기 시작했던 친구는(이미 친구가 아닌 지도 모른다) 조금은 다른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 든 뒤틀림과 왜곡과 당신 마음속 한 조각 남아버린 발가 락 같은 선함과 사랑은 무서울 듯이 아려와 빠를 듯이 허 나 느리게만 전진할 것 같은 빗속의 자동차들
이동현 시
축생도
100
친구야 너는 오랜만의 생각으로 고민하는 고무장갑 의 빛깔과 향으로 그때 그대로의 김치를 재구성한다 질긴 분홍색의 장갑으로 축생도에 첨부할 짐승들의 이름들과 모습들 그리고 옳게 된 행방을 고민하고 또 궁리하기 시작 한다
고민하기에 너무 아픈 날엔 도시 외곽의 또 다른 도
시의 외딴 동네의 중학생 또 다른 동네에 서식했던 짐승
들의 이름을 눈을 감은 채 혹은 가린 채 억지로 끼워 맞추 기 시작했으니
너는 그렇게 담배와 고기와
우리 같은 것들을
세상과도 같은 웃음과 보살 같은 은덕으로 멀리하기 시작한다
축생도
101
회기동의 이민자들
친구가 졸업을 하고 이사 가는 날
방에 먼지가 많고 짐을 치우고 버리고
달구지는 굉음을 내며 오전의 바닥을 긁어서
우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 먼지를 털었다
버려진 책들이 계단에서 흐르듯이 쏟아졌다
고개를 숙인 채 먼지를 털며 먼지를 마셨다
빌려온 수레 덕에 바닥에서 굉음이 났고 무게에 질린 우린 몇 가지의 시시껄렁한 글들을 찢어버렸다
새로운 반지하엔 예전의 세대가 남긴 자국, 흔적 혹 은 흉터가 있어 농향이 가득 담긴 술내가 역겨워서 몇 가지의 속눈썹은 떨리는 채로 가지와 향채와 감자 가 힘겨워서
이동현 시
102
헤이룽장성에서 온 남자는 뉴스를 보면 대마를 피다
감옥소에 간 친구가 그리웠고
먼지 같은 날에는 먼지가 많았고
손은 뭔가 따갑고
장갑이 있었으면 했고
버려진 책들의 제목과 남겨진 책들의 장르와
물은 아래로 흐르고
시시껄렁한 말들의 흔적과 침대 밑으로 숨겨진 내일
의 말들이
창문으로 스민 빛을 난반사했을 때
입에는 어제와 여름의 날벌레들이 스며서 허리가 아 픈 채로 외로운 말들이 불 위를 가르면 손목에는 시계가 채워져 있다 책은 왜 그리로 가고 거기 있던 늙은 남자는 미소를 지었는가 술내는 그리도 역겨웠는가
회기동의 이민자들
103
오만가지색의 라이터들은 연료가 반쯤 채워진 채로
오후를 빛내었다
거대한 종이 박스는 결국 새집으로 이사하지 못한 채 로 버려졌고
버린 것과 남긴 것 모두 누군가의 지하실로 끌려갔다
헤이룽장성에서 온 부부의 가게는
그날의 장사가 끝났으니
몇 가지의 방법으로 중력에 대든다
밤에는 몇 번 기침을 한다
104 이동현 시
성인화
각자의 기억으로 슬픈 우리에게
삶의 정면
소재의 일부가 아니고
관심의 측면이 아닌
2.5차원에서 바라보는
유한한 선분이거나
뭉개진 왼손 중지나
너덜거리는 오른 발목
아니면 피가 흐르는 최씨의 귓구멍이지만
눈물로 형용되는 삶의 보편은 아니라고
성인화 시
108
10월 16일. 나흘 전인 10월 12일은 내가 입대한 날. 2 년이 참 빠르게 지났다. 그 지난함이 아주 짧게 압축되었 다는 게 새삼스럽다. 2년 전, 내가 가졌던 슬픔은 어떤 것 인가. 그때의 슬픔은 하루 치 슬픔이 아니라, 긴 시간 동 안 퇴적된, 우울이었다. 하지만, 단절과 단절의 시간을 지내면서 깨달은 것은, 나는 단지 하루만큼 슬펐을 뿐이라는 것. 짧은 하루도 어 쩌면, 무거운 슬픔을 밀어 넣기에 충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하루만 견뎌내면 다시, 하루가 있다는 사실. 비엔나 소시지처럼, 내 하루의 부산물들을 묶어 놓는 일.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사흘을 보냈고, 어제는. 10월 15일이다. JTBC 뉴스를 봤다.〈“대학 대신 공장 간 딸이”…20대, 소스 배합기에 껴 숨져〉. 숨이 턱 막혔다. 119에 신고되었지만, 이미 사망한 후라 바로 장례식장으 로 옮겨졌다고 했다. 너무 아팠다. 또래인 청년들이 노동 현장에서 죽은 뉴스를 읽을 때마다 아프다. 자꾸 누군가
성인화 수필
110
하루의
수 있나요
슬픔은 견뎌낼
가 그들을 몰아냈다는 생각. 손톱이나 발톱을 깎듯이 잘 라냈다는 생각이 든다. 발전소 컨베이어 벨트가, 유압 프레스가, 지하철 스크 린 도어가, 공장 배합기가, 무섭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서 운 것들. 나는 그 무서움을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는 오늘 도 그 앞에서 또는 옆에서 또는 위와 아래에서 삶을 이어 나간다. 10월 16일은, 엄마가 태어난 날이다. 그리고 부산에서 대학생들이 항쟁을 벌인 날이다. 그리고 탈주범 지강헌이 총에 맞아 죽은 날이다. 엄마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대학 생들은 남포동과 시청 앞에서 일어났고, 지강헌은 북가좌 동에서 죽었다. 그 일들이 한 번에 일어나진 않았지만, 모 두 하루에 일어났다. 그 하루, 하루라는 말이다. 하루의 슬픔을 견뎌내고도 죽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하루의 슬픔은 견디지 못해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며, 어떤 하루가 덮쳐와 큰 슬픔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날은, 분명히, 슬프다. 나는 내게 그 슬픔을 물어보는 힘으 로 하루를 산다. 그리고 다짐한다. 남은 힘이 있다면 다른 슬픔에게도 하루를 물어볼 것. 그러고도 힘이 남는다면, 기도할 것.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 하루만 견디면서 살 게 해주세요.
하루의 슬픔은 견뎌낼 수 있나요
111
문현식
나는 서울 사람이다. 나는 북한산 아래 강북구 우이 동에서 태어나 기억이 나지 않는 5년의 시간을 보내고 1기 신도시 경기도 군포시의 당동 수리산 아래에서 유년 시절 을 보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도봉구 창동으로 이사 를 오면서 ‘서울’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는다.
서울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똥통 학교’였다. 대부분 자가를 보유하고 있는 안정적인 가정 환경에서 개 교한 지 10년 남짓 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적어도
욕을 일상적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하지만 80년대에 지어 진 빌라촌과 90년에 지어진 주공 아파트 를 끼고 있던 창 원초등학교 학생들의 말솜씨(?)란 신도시 아이들의 그것 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씨발 소 리에 그렇지 않아도
문현식 수필
114
서울의
기쁨과 슬픔
당동초에 친구들을 두고 억울한 마음 으로 전학을 온 나에게는 그들의 욕 소리가 다가설 수 없 는 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똥통 학교라 여기던 학교에서도 사람이란 게
어찌저찌 적응하기 마련이어서 새 초등학교 친구들과도
어찌저찌 친분을 쌓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사 온 지 1년이
지나 본격적으로 서울을 누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초등학 생인 내가 아직은 못 미더웠는지 동네를 떠나서 멀리 나가
는 것에 상당히 엄격했다. 하지만 한창 닌텐도를 들고 포 켓몬스터를 즐기던 나는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배포하 던 쉐이미가 어찌나 갖고 싶었던지 영등포까지 같이 가줄 시간도 없었고 애들끼리 갔다 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엄마를 뒤로하고 ‘엄마 몰래 쉐이미 찾아 창동에서 영등 포까지 대장정(?)’을 꾸리게 된다. 나는 매주 토요일에 다니던 성당 주일 학교 시간을 핑 계로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왔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 두 명과 함께 1호선 지하철에 올랐지만, 부모님 없 이 처음 타보는 지하철이었기에 열차의 행선지조차 하나 하나 확인해야 했던 우리는 찬찬히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
보며 겨우 하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열차가 영
등포역에 도착하자 우리는 난생 처음 와보는 공간에 기대 반 걱정 반인 마음으로 열차에서 내렸다. 역사의 계단을 이리저리 오르내리고 복잡한 역사를 빠져나와 10m쯤 되 는 긴 횡단보도를 건너서 붕어빵과 계란빵을 파는 노포들
서울의 기쁨과 슬픔
115
을 지나자 드디어 타임스퀘어 광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임스퀘어는 허허벌판 신도시에서 자라 온 나에게 말 그대 로 ‘서울의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시내’라고는 산본역 근 처의 ‘산본 중심상가’밖에 본 적이 없었던 5학년은 건물 이 걸어도 걸어도 끝없이 이어지고 이제껏 본 적 없는 몇 십 층 건물이 쇼핑몰 옆에 서 있는 것에 압도되었다. 그
타
생경한 감각을 뒤로하고 타임스퀘어 바깥의 광장을 지나
1번 게이트를 열고 길고 긴 환형 복도 끝에서 마침내 쉐이 미 배포 장소를 알리는 피켓을 발견했을 때, 나는 엄마에 게 했던 거짓말이 헛되지 않았다는 보상감과 이 여정의 터 닝 포인트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안도감에 기쁜 마음으로 닌텐도를 꺼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스마트폰도 없던 시 절에 초등학생 셋이서 서울의 양쪽 끝을 가로지른다는 생 각을 했다는 게 참 겁이 없다 싶지만 그런 5학년들의 치기 를 받아줄 수 있을 만큼 서울은 잘 발달한 도시였다. 그렇게 처음으로 서울을 누리게 된 나는 서울과 함께 자랐다. 중학생 때는 영화가 보고 싶어서 하루에도 두세 편씩 영화를 보러 다녔고 대학로, 영등포, 왕십리, 용산, 강변, 여의도, 압구정, 미아, 홍대입구까지 서울에 안 가 본 CGV가 없을 정도였다. 3학년 때는 매주 월요일 수요일 마다 강남 삼성동에 있는 서울시립청소년센터에서 디자인
수업을 들었고, 수업이 끝나면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홍 대 수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즈음에는 밤이 참 아 름다워서 어느 날 갑자기 기분을 내 상수동을 거닐다가 새 벽 1시에 집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3학년 말에는 방배동 에 있는 프로젝트 교육 기관에 다니며 색다른 경험을
문현식 수필
116
했 고 고등학생 때는 도봉구에서 용산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디자인을 배웠으며 친구들과 광화문 ‘창조경제혁신센터’ 에 공간을 빌려서 밤새 과제를 할 수도 있었다. 아울러 서 울시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청소년 무료 혜택을 열렬히 이용하며 심미적 취향을 만들어 가기도 했다. 내가 서울을 누리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다양하고 훌륭한 경험
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배포하는 쉐이미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며 아빠와 싸웠던
밤에 집을 나가라는 말을 듣고 진짜 집을 나가서 광화문 할리스커피에서 밤을 새우고 들어오는 그런 일은 정말 하
지 못했을 것 같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 집값이 상대적으 로 너무 비싸니 지방에 새 거처를 마련하는 게 어떻겠냐 는 어머니의 제안을 들었을 때 ‘내 모든 레거시와 헤리티
지가 서울에 있다’며 절대 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반발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수도권 의 23개 지하철 노선과 다른 지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문화 시설은 나를 나로 만든 재료이자 기반 이면서 커다란 모험과 기회였고 서울의 큰 기쁨이었다. 그렇지만 서울이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은 비싸다. 엄마가 서울을 뜨자고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 다. 충북대를 다니는 형 덕분에 알게 된 것인데, 충북대
대학가와 삼성, SK 반도체 공장을 근방에 두고 있는 청주 는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생활에 충분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인프라를 갖추고 있을지라도 재개발 을 앞둔 청주의 아파트는 1억 대밖에 하지 않았다. 그 가 격의 차이가 이제는 대체 불가능한 상징자본으로서의 서
서울의 기쁨과 슬픔
117
울을
‘헤리티지’를 들먹일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생각해보면 서울의 첫인상으로 남아있는 ‘똥통 학교’ 의 이미지는 서울의 눈부신 발전과 상징자본 뒤에 가려진 그림자였다. ‘이렇게 낙후된 환경일지라도 기어코 이 가격 을 지불하고 서울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절박함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기야 당장 나부터 ‘레거시’와
이 씨발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들의 모습을 만든 게 아니
었을까. 서울의 인프라를 누려야만 다음 세대의 경제적 성
장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서울이 아니라면 그 어떤 도
시에서도 이런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서
울의 빌라촌에, 옥탑방에, 반지하에 밀어 넣고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밀려 들어왔고 그 덕분에 많은 경험을 누리며 성장했으며 지금도 서울에 자가를 두고 통학을 한다. 피할 수 없는 메트로폴리탄의 운명이면서 서울의 기쁨 뒤에 가 려진 서울의 슬픔이었다. 부모님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서울의 기쁨을 누리며 자란 나는 서울의 슬픔에 차차 적응하고 있다. 이제는 쉐 이미를 얻기 위한 대장정을 꾸리는 게 아니라 아파트 한 채를 구하기 위한 대장정을 꾸린다.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값이 직장인의 20년 치 월급이라는 말은 이제 놀라운 얘 기가 아니다. ‘서울에 내집마련’이라는 원대한 꿈을 향해 앞으로 몇 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해야 할지 가늠해본다. 서울시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을 종종 드나들려면 적 어도 은평구 정도에는 살아야 하지 않을까(참고로 서울의 아파트값 순위를 뒤에서부터 매긴다면 대강 1, 2위가 도봉
문현식 수필
118
근처의 갈현2동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참고로 옆 동네 갈현1동이 연신내 역에 더 가깝지만 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뒤 3~5억 정도 값이 올랐다 슬프다). 그렇게 쳐도 2~3억을 모으려면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누리면서 살 수 있을지 까마득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연준의 고금리 정책으로 하늘 높은 줄
구와 강북구이고 3위가 은평구다 슬프다). 기왕이면 3호 선과 6호선과 GTX가 지나가는 연신내역
모르고 오르던 집값이 꺾이고 있다는 것 정도랄까(물론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슬프다). 이제는 내 자신의 일부가 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고 또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야 할까. 내려가도 까마득히 높은 서울의 집값과 다른 것들은 다 올라도 꿈쩍하지 않는다는 월급을 생각해보면 별다른 슬 픔 없이 누렸던 서울의 기쁨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다 시금 깨닫게 된다. 아빠는〈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종종 자연으로 돌 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산 아래 에서 자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을 향한 귀소 본능이 조금은 남아서 당동의 아파트를 고를 때에도 꼭 수리산 바 로 아래에 있는 아파트를 골랐던 아빠는 이제는 도시를 떠나서 한적한 시골에서 사는 것을 꿈꾼다. 그런 아빠를 보면서〈나는 자연인이다〉가 그렇게 잘됐던 데에는 서울 에 발을 붙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살아왔던 사람 들의 허무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서울에 집 한 채 갖기 위해 평생을 쏟아부은 사람들이 끝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그 허무함이 돌고 돌아 자연을 향한 동경으로 귀 결된 것은 아니었을까. 나 역시 서울의 슬픔을 감내하면서 도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서울의 기쁨과 슬픔
119
모른다는 생각. 서울의 기쁨을 온전히 다 누리기에는 서울의 슬픔이 너무 견고하고 단단 해서 차마 손도 대지 못할 거라는 생각. 티끌 모아 티끌이 라는 자조가 세상을 유영하고 영혼까지 끌어모아 하락장
다. 어쩌면 서울의 기쁨을 누리기 위한 고단한 노력이 결 국에는 헛수고가 될지도
을 맞이하는 요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서울의 기쁨과
슬픔이 조금은 무난해지고 무던해지기를 바라본다.
120 문현식 수필
오늘의 저녁은 가슴조림
오늘의 저녁은 가슴조림
짜증의 냄새가 코를 간질이거나
고개를 돌리는 형상
콘센트가 달린 식탁에서 자이글은
새빨간 불빛을 밝히고 있죠
숨이 졸여주는 가슴은 토할 듯이 맛나서
매일이 한 젓가락씩 입에 넣어줘요
살지 않으려면 먹어야 한다고
헐레벌떡을 들이키며 말하죠 어쩔 수
없어요 달콤한 디저트는
멀어지는 컨베이어 벨트
회전 디저트집에서는 사카린이 가득한 쮸쮸바를 돌 리죠 한번 집었다간 순식간에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요
의자가 편안할 때까지 밥이 아닌 반찬만을 삼키며 골고루 먹어야 하죠 음식을 남기면 못 써요 숨이 어르고 달래고
문현식 시
122
내일의 저녁은 가슴조림
설거지는 나의 몫이죠
그릇에 붙은 밥풀은 수세미를 피할 수 없어요
내일은 가슴이 알맞게 익어야 할 텐데
생각하며 저녁을 준비하죠
오늘의 저녁은 가슴조림
123
안혜민
복도에 구두가 또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를 안내해준 직원은 입꼬리를 올려 상냥하게 웃었다. “여깁니다, 들어가시죠.” 꽤 널찍한 방에 면접관 한 명이 앉아있었다. 땀이 나 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인사를 하고는 그의 앞에 덩그러니 놓인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김혜원… 씨?” 그는 손에 든 서류를 뒤적였다.
“최근 2년 동안 어떤 일을 하셨는지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면접관이 말했다. “고양이를 길렀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쥐었다.
“그렇군요. 어떤 고양이죠?”
면접관은 흥미롭다는 듯 안경을 추켜올렸다.
안혜민 소설
126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아주 착해요…. 애교도 많고요. 아, 육포를 좋아해요.”
“육포를 좋아한다… 흠.”
면접관은 잠깐 생각에 빠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군요.”
익숙한 어조였다.
그는 나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양이가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 니까?”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육포를 문 고양이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면접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양이가 제게 기쁨이 돼준다는 게 제일 크죠. 집에 가 면 저를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는 거요. 그게… 제일 좋아요.” 나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다. 나는 말을 마치고 입술 을 깨물었다. “그렇군요.” 면접관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질문은 이 정도로 하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수고했어요. 이제 가보셔도 좋습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펫으로 된 바닥에 고양이 털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면접관의 눈을 피해 재빨리 치마를 털며 내가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127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정장 치마를 입고 버스에 오르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낑낑대며 간신히 자리에 앉으려는데 핸드폰까지 울렸다.
“여보세요?”
―응, 나야. 바빠?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내 퉁명스러운 말투는 금세 머
쓱해졌다.
“아, 아니야. 말해.”
―응, 지금 부동산이야. 엄마가 말했다.
―괜찮은 집 찾았어. 계약하려고. “그래? 잘됐네.”
엄마는 응, 하고 대답하다가 재채기를 심하게 했다. “괜찮아?” 엄마는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어제 좀 춥게 잤더니. 하루 종일 이러네. 나는 잠깐 할 말을 고민했다.
“그 작은방… 역시 좀 춥지?”
―그런대로 괜찮아. 새벽에 좀 바람이 많이 들어와서 그렇지.
“그럼 오늘은 내 방에서 잘래?”
―어?
내 말에 엄마는 살짝 놀란 것 같았다.
―그래도 돼?
“내 방은 난방이 잘 되잖아. 난 거실에서 자도 돼.”
―아…. 아냐.
안혜민 소설
128
엄마가 대답했다.
실망한 목소리 같았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그럼 계약해야 해서. 이따 집에서 봐.
“응.”
나는 전화를 끊었다. 면접이 끝났을 때보다 더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야옹―”
고양이가 화단 앞에 앉아있었다. 온몸이 흰색인데 꼬 리만 까만 고양이다.
―그럼 어머니는 아직도 너 회사 다니는 줄 아시는 거야?
유라가 말했다. “응. 오늘 면접도 얘기 안 했어.” ―괜찮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엄마잖아. “어차피 엄마는 곧 집 구해서 나갈 건데 뭐. 그때까지 만 얘기 안 하는 거야. 혹시 나중에 다시 보더라도 그땐 내 가 취준생이 아닐 거고.”
―너… 엄마랑 계속 안 보고 살려고?
“언젠 보고 살았냐. 지금이 더 어색해.” 고양이가 흙에 뒹굴기 시작했다. 나는 멀찍이서 눈으 로만 지켜보았다. ―너도 참. 이번 기회에 잘해보지. 어머니도 그러고 싶어서 너한테 같이 살자고 하신 거 아냐?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유라의 말에 기뻤다면 혼자 버 텼던 15년의 세월에 잘못이라도 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29
다행히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아니야, 그런 거. 진짜로 갈 데가 없는 것 같더라. 할 머니 장례식장에도 캐리어를 끌고 왔었다니까.”
―그래? 뭐…. 유라는 거기까지만 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제3자가 오지랖을 부려도 괜찮은 범위까지만. 딱 내가 엄마에게 두 고 있는 거리만큼이었다.
―어릴 때 너희 집 놀러 가면 아줌마가 맛있는 거 엄 청 많이 해주셨었는데. 너, 그래도 엄마 있으니까 요즘은 즉석요리 같은 거 안 해 먹지? 나는 화제를 돌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곧 유라는 같 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때까지 직장 상사 욕을 실컷 했다. 늘 그렇듯 유라가 집에 도착하면 통화는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그건 나만의 근무였다. 어느새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
다. 아파트 화단에서 그만 퇴근할 시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나는 이미 불이 켜진 집으로 들어섰다.
“그래, 어서 와. 일찍 퇴근했네?”
티비 소리가 시끄러운 거실에는 만두 냄새가 진동을 했다.
“만두 사 왔는데, 먹을래?”
나는 엄마가 보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었다.
“밥 먹고 왔어!”
벗어 던진 정장에는 보풀이 잔뜩 일어있었다. 벌써 그
안혜민 소설
130
렇게 많이 입었나?
“참, 아까 집으로 네 친구한테서 전화 왔었어.”
엄마가 거실에서 소리쳤다.
“집으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응. 지희 기억하지? 너 초등학교 때 엄청 친했던. 네 핸드폰 번호를 몰라서 집으로 전화가 왔더라고.”
속이 울렁거렸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반가움만이 묻 어났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희 결혼한대. 너한테 청첩장 보낸다고, 번호 좀 알 려달라더라.” 나는 방에서 나와 엄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15년 전 머리 위에 돋아났던 두 귀가 여전히 뾰족이 보였다. “세월 참 빠르다…. 벌써 지희가 결혼을 하는구나. 너 희 둘 책가방 메고 손 붙잡고 다니던 게 생생한데. 언제 커
서 결혼을 한다고, 참….”
살랑살랑 바닥을 쓸고 있는 건 만두에 집중하느라 바 쁘게 움직이는 꼬리였다. 나는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늘 주방에 서 있던 엄마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두 귀도, 살 랑거리는 꼬리도 없는 엄마.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 근데 왜 자꾸 사다 먹어.”
나는 거실 쪽을 등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집에서 해 먹지.”
진한 만두 기름 냄새가 거실에 진동했다.
“그냥. 이게 편해.”
엄마는 짧게 대답했다.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31
*
오늘의 출근지는 서점이었다. 나는 신간 코너를 둘러보다가 에세이집을 하나 집어 들었다. 겉표지를 장식한 고양이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똑 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엽죠?”
점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이번 에세이집에 실린 사진들, 전부 다 고양이 협회 에서 극찬을 받았어요.”
점원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더니 말 했다.
“고양이를 좋아하시나 봐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갔다.
익숙한 표정이다. 나를 다 간파했다는 얼굴.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분도 쉽게 읽으실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요. 한번 도전해보세요.”
“전….”
왜인지 어제 아파트 화단에서 본 꼬리만 까만 고양이 가 떠올랐다.
“괜찮아요. 전 고양이를 키우거든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점원의 눈이 커졌다. “아… 그러시군요. 죄송해요, 제가 몰라뵙고….” 나는 당황해하는 점원을 여유롭게 위로했다.
안혜민 소설
132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점원은 재빨리 다른 책 몇 권을 가져와 내밀었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내일 죽어도 그루밍은 해야겠 어〉. 요즘 고양이 집사들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통하는 산 문집이에요. 고양이 ‘치즈’ 아시죠?”
내 여유로움은 그 잠시를 못 참고 곧 눈 녹듯이 사라 졌다. “…네? 누구요?”
“셀럽 고양이 치즈요! 어머, 모르세요? 고양이 키우는 분들은 다 아시던데.”
나는 재빨리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연히 알죠. 치즈는… 왜요?”
“그 치즈가 추천해서 화제가 된 책이에요. 꼭 한번 읽
어보세요, 저도 당장 사서 읽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알고 보니 점원은 치즈의 열렬한 팬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치즈의 사돈의 팔촌 근황까지 듣고, 손에는〈내일 죽어도 그루밍은 해야겠어〉를 든 채로 나는 서점을 나왔다. 초등학생 때 나에게는 징크스가 있었다. 모르는 사람 에게 먼저 말을 걸면 얼굴이 새빨개져서 속을 다 들키게 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치즈를 부러워했는지도 모르 겠다. 전학생에게는 모두가 먼저 말을 걸었으니까. “인사해라, 얘들아.” 담임이 말했다. “이번에 전학 온 치즈다. 자, 치즈, 친구들에게 인사 하렴.”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33
치즈는 야옹,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반 아이들은 모
두 박수를 쳤다.
“그럼 치즈는… 저기 혜원이 옆자리에 앉아라.”
치즈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옆으로 왔다. “야옹.”
치즈가 상냥하게 인사했다.
“나… 나도 잘 부탁해.”
나는 볼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치즈는 금세 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졌다. 다들
치즈의 윤기 나는 노란빛 털을 칭찬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나는 치즈와 가까워지기 힘들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가 끝난 뒤, 집에 오자마자 내가 치즈 이야기를
하자 엄마가 말했다.
“너도 좀 적극적으로 다가가 봐.”
엄마가 말했다.
“걔도 전학 첫날이라 낯설었을 텐데.”
나는 엄마의 조언대로 다음 날 치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나는 땀이 나는 손을 연신 문지르며 말했다.
“피… 필통 예쁘다.” 치즈가 눈을 깜빡였다. “야옹.”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치즈는 겉보기와는 달리 말도 많고 친근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은 치즈와 친해진 내가 못마땅한 건지 그냥 관심이 없는 건지 나를 모르는 척했다.
안혜민 소설
134
“치즈야.”
반장은 치즈를 유난히 좋아했다. 쉬는 시간이면 우리
자리로 달려와서는 치즈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이거 가질래? 난 하나 더 있는데.”
치즈는 반장이 건넨 샤프를 받아들었다. 샤프에는 달
랑거리는 장식이 매달려있었다.
“야옹.”
치즈의 눈이 반짝였다.
반장과 치즈는 자주 어울렸다. 점심시간에도 우리가 밥을 먹고 있으면 치즈를 찾아 친구들과 몰려오곤 했다. 하지만 늘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반장이 나에게 처음 말을 건 점심시간, 급식에는 생선 가스가 나왔다.
“야옹.”
치즈는 생선가스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오랜만에 기
분 좋게 밥을 먹었다.
“혜원아, 잠깐만.” 반장은 평소와 달리 친구들과 서두르며 달려오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응?” 반장은 신이 난 건지 모를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우리가 방금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싫은지 투표를 했거든? 근데 너를 뽑은 사람이 세 명이나 나왔어.” 나는 잠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반장을 멍하 니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아니, 반장을 그렇 게 똑바로 본 게 처음이어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135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반장은 씰룩거리는 입꼬리로 상냥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할 말을 찾고 있는데 순간 치즈가 보였다. 치즈
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야옹.”
치즈는 짧게 말하고는 다시 생선가스를 한입 베어 물
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짜고짜 엄마 앞에서 울음 을 터뜨렸다.
“엄마 때문이야!” 내가 소리쳤다. “엄마가 치즈랑 친하게 지내라고 했잖아. 난 별로 그 러고 싶지도 않았다고!”
눈물범벅이 된 내 시야로는 엄마가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했다. “이제 치즈가 날 싫어할 거야. 나랑 친구 하고 싶어 하 지 않을 거라고.” 엄마의 머리 위에 뭔가 돋아났다. 고양이 귀다. “사과해! 나한테 사과하라고!” 엄마는 사과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엄마는 사과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 탓을 할 수는 없었다. 고양 이가 되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나는 기꺼이 배신을 당하기로 했다.
안혜민 소설
136
―이건 전부 엄마 때문이야.
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내 걱정과 달리 학교에서는 반장도 치즈도 아무 일 도 없었다는 듯 나를 대했다. 계속해서 치즈와 다녀도 괜
찮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나였다. 치즈가 입꼬리 로 웃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확실하지 않다. 그때부터 눈 앞은 흐릿해졌고, 나를 배신한 친구들은 하나둘 고양이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그 주, 우리 반은 자리를 바꿨다.
“안녕! 너 공책 예쁘다.”
옆자리가 된 유라는 먼저 말을 거는 애였다. 유라 옆 에서 내 얼굴은 빨개질 일이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유라를 집으로 데려와 놀았다.
“너희 엄마 떡볶이 진짜 잘 만드신다.”
유라가 말했다.
“분식집에서 사 먹는 것보다 맛있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와 함께 있는 동안 내 곁에는 치즈도, 성가신 고 양이들도 없었다. 엄마도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분명했다. “어? 이게 뭐지?”
유라가 떡볶이 국물에서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순간 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양이 털이었다. “털…?”
유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양이 털인 것 같은데?”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37
“맞아.”
나는 재빨리 말했다.
“우리 집, 고양이 키워.”
유라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고양이? 한 번도 못 봤는데?”
나는 유라의 눈을 피했다.
“지금은 없어. 벼… 병원 갔어.”
그때 누군가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구나. 좋겠다!”
유라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고양이 키우고 싶다. 부러워.”
유라가 가고 나자 집 안은 고요해졌다.
“엄마!”
나는 소리치며 거실 불을 켰다.
“엄마, 왜 불을 끄고 있어?”
부엌도 마찬가지였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
방으로 향하려는데 거실 탁자에 놓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나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할머니랑 잘 지내. 쪽지가 내 손에서 힘없이 꾸겨졌다. “이러면 어떡해. 이러면…. 진짜 거짓말이잖아.”
나한테 부럽다고 했는데. 요리 잘하는 엄마.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순식간에 전부 사라져버렸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혜민 소설
138
“이건 전부….”
내가 중얼댔다. “이건 전부 고양이 때문이야. 나한테 고양이가 없 어서….” *
지희의 결혼식은 참 뻔했다. 직원들이 뛰어다니는 커 다란 예식장에 뷔페,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잔뜩 모아 놓은 것 하며 내가 여기 있다는 것까지. 나는 예식이 시작할 때쯤 도착해 아무 데나 앉았다.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한 시간 동안 나는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채 하객으로 합법적 근무 중이었다. “네, 그럼 이번에는 신부 친구들과 사진 촬영 있겠습 니다!”
사진 기사가 소리치자 사람들이 단상 앞으로 달려 나 왔다. 다들 신이 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했다.
“아가씨, 안 올라가요?”
나는 깜짝 놀라 옆에서 불쑥 말을 건 아주머니를 쳐 다보았다.
“신부 친구들 지금 사진 찍는대요.”
“아… 전….” 나는 재빨리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 고양이를 키워서요. 괜찮아요.” 아주머니는 내 말에 미친 사람을 보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39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아주머니의 반응에 당황했다.
“네? 그러니까 전….”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단상 쪽을 보았다.
지희가 나를 보고 있다. “고양이를… 키운다고요.”
지희가 나를 보고 있다.
지희는 입 모양으로 똑똑히 ‘혜원아’ 하고 불렀다. 그 리고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단상 위에는 화려한 신부도, 치즈 고양이도 없었다. 별거 아닌 이야기에도 금세 친해졌
던 내 어린 짝꿍만이 서 있었다.
“아가씨 부르는 것 같은데?”
아주머니는 지희를 가리켰다.
“얼른 올라가 봐요!”
“다녀왔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거실은 티비가 틀어진 채로 먹다 만 배
달 짜장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나 는 예식장에서 받은 쇼핑백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던졌 다. 한숨 돌리려는데 탁자 위에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큰 소리로 불렀다. “전화 왔어!” 화장실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핸 드폰을 들었다.
안혜민 소설
140
“여보세요?”
부동산에서 온 전화였다.
―네. 유미주 씨죠?
“아, 아닌데요. 전 딸이에요.”
―아, 따님이시구나. 아버지가 안 받아서 여기로 전화 했어요. 내일 계약하러 3시까지 오시면 된다고 말 좀 전해 줄래요?
“네?”
내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일 계약하러 오라고 아버지께 말 좀 전해달라고요. “아버지요?”
―네. 집 보러 오신 분이요. 딸이라면서요. “그건 맞는데…. 계약하는 사람이 유미주 씨 아니 에요?”
상대는 내 말에 짜증이 난 듯했다. 종이를 뒤적이는 소리가 나더니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유미주 씨요. 남편분 한상원 씨. 두 분이 내일 계약하기로 한 거 맞죠? “한상원 씨요…?”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누구―” 흐릿하던 게 선명해진다. 나는 할머니의 장례식장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까만 고양이들이 조금씩 사람들로 변해갔다. 귀는 축 늘어진 머 리카락이 되고, 꼬리는 어딘가에 감춘 채 새카만 상복을
141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입고 눈앞에서 어지럽게 지나다녔다.
엄마는 그때쯤 나타났다. 입구에서 누군가와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키가 큰 남자였다. 그는 엄마에게 캐리
어를 건넸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잠깐이면 돼. 집 구할 때까지만 있을 거야. 엄마가 말했다.
나는 탁자 위의 짜장면 그릇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두고 가려고 했는데.”
나는 쇼핑백에서 답례품으로 받은 떡을 꺼내 탁자 위 에 던졌다. 짜장면 그릇이 엎어지며 사방에 검은 얼룩이 졌다.
“이번에는 내가….”
여기에 성의 없는 쪽지를 써놓고 사라지려고 했는데. *
“정말 너무 귀여워요. 작가님, 이런 고양이를 매일 보 는 기분은 어떤 기분이에요?”
나는 기자의 질문에 행복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인터뷰 내내 분위기가 좋았다. 기자는 나에게 끝으로 고양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 었다. “흠, 글쎄요….” 내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혜민 소설
142
“일단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고양이를 키우면서
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거든요. 물론 좋은 쪽 으로요. 고양이가 없었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네요. 아마 매일을 사는 이유를 잃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나는 말을 마치는 즈음에 눈물을 훔쳤다. 기자도 마 찬가지였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가 말했다.
“오늘 인터뷰 너무 좋았어요. 신간 정말 잘되시길 바 랄게요.”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엄마의 목소리였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다.
“김혜원 씨 되시죠?”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 둘은 다짜고짜 나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경찰입니다. 김혜원 씨를 사기죄로 체포합니다.” 그들은 나에게 쇠고랑을 채우더니 미란다 원칙을 읊 기 시작했다. “비키세요.” 문 앞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버티는 엄마에게 그들이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어머님도 업무방해죄로 처벌받습니다.” “우리 혜원이는 아니에요!”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143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이건 오해라고요! 이거 놔요!”
남자들은 엄마를 밀치고 나를 끌고 갔다. 엄마는 멀
어지는 나에게 계속 소리쳤다.
“혜원아! 엄마가 꼭 도와줄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응? 알았지?”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 며 손을 흔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엄마의 얼굴 앞으로 현 관문이 세게 닫혔다. 고양이 털이 사방에 휘날렸다.
“아휴, 이게 뭐람!”
나를 붙잡고 있던 남자가 투덜대며 손을 휘휘 내둘렀다. “하여튼 고양이는 털이 문제야. 털이 좀 많이 날려 야지!”
다른 남자는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 고양이 털 알레르기 있는데….”
화단 앞에 경찰차가 서 있었다. 얼마 전에 꼬리가 검
은 고양이를 봤던 그 화단이었다.
“잠깐만요.”
내가 말했다. 남자는 대꾸하려다가 심하게 재채기를 했다. “에취!”
그는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왜, 왜 그래요?”
“여기도 고양이가 있어서요. 경찰서 가기 전에 고양이
밥을 주고 가야 할 것 같은데.”
나를 붙잡은 남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어쩔 수
안혜민 소설
144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어딨는데요?”
나는 화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두리번거렸다.
“이 근처에 있어요. 아마 여기 어딘가에…”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확 낚아챘다.
“혜원아!”
나는 유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 유라야.”
“어떻게 된 거야? 사기죄라니… 아니지? 그렇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야 해. 이제 그만 사실대로 말해야 해.
“사실… 맞아.”
내 말에 유라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뭐?”
“고양이 키운다는 거, 거짓말이었어. 너한테 거짓말한 거라고.” 나는 유라를 쳐다보았다. “너 어떻게 그런 짓을….” 유라의 표정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익숙한 표정이었 다. 그 진절머리 나는 표정에 무언가가 목에서부터 끓어올 랐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고!”
유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경찰관 한 명이 코를 훌쩍였다.
“나한테도 있었어, 고양이. 치즈도 있었고, 엄마도 있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45
었고, 어엿한 직장도 있었다고! 근데… 근데….”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물이었다.
“하나씩 없어져. 내가 자꾸만 잃어버려. 그러니까 어
떡해? 나도 사람답게 살아야지! 나도 남들한테 자랑할 고
양이 하나쯤은 필요했다고.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나는 경찰관들에게 몸을 돌려 소리쳤다.
“잡아가요, 그렇게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으면 감 방에 처넣어요! 이제 상관없으니까!”
그때 주차된 차 밑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옅은 갈색의 고양이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나에게 다가 왔다.
“뭐… 뭐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양이는 내 다리에 꼬리를 휘감 았다. 그러고는 기분이 좋은 듯 갸르릉거리기 시작했다.
“얘는… 누구예요?”
재채기를 하던 남자가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다. “그쪽 고양이에요?”
“아니요.”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야옹―” 갈색 고양이는 나에게 몸을 부비적댔다. “에취―!”
재채기 소리가 나자 고양이는 놀라 울고는 도망가버 렸다.
“아이고, 알러지가…. 에취―!”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안혜민 소설
146
“그만 가요.”
남자들은 나를 경찰차에 태웠다. 차창으로 나를 지
켜보는 유라가 보였다. 유라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
알람이 미친 듯이 울렸다. 수요일. 엄마가 이사 가는 날이었다. 나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아침 일찍 밖으로 나 왔다. “야옹―”
아파트 화단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멈 춰 서서 고양이를 찾으려고 주변을 살폈다. “혜원 씨?”
뒤를 돌아보자 키가 큰 남자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는 경직된 얼굴로 다가왔다. “한상원이라고 해요.”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지금 출근하는 거예요?”
그가 물었다.
“아….”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엄마 잘 때 일부러 나왔어요. 그냥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47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저씨는… 엄마 데리러 오신 거예요?”
“아, 네.”
나는 애매하게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잠깐만요, 혜원 씨.”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남자는 몇 발자국 나에게로 다 가왔다.
“엄마,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네?”
“보니까 얘기 안 한 것 같아서. 혜원 씨 집에 일부러 온 거라고 얘기 안 했죠?”
남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 곧 지방으로 발령 가요. 사실 미주 씨가 이사 가 기 전에 혜원 씨랑 잠깐 살고 싶다고 부탁한 거예요.”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딸이랑 지내보고 싶다고요. 옛날 일, 후회한다고 했 어요.”
문득 남자가 입은 옅은 갈색 코트가 보였다. “엄마랑 지내는 건 어땠어요?”
나는 화단을 다시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사라지고 없었다. *
안혜민 소설
148
“다녀왔습니다.”
집은 불이 꺼진 채 어두웠다. 나는 부엌 불을 켜고 저
녁으로 사 온 포장 국수를 내려놓았다.
식탁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연락해. 쪽지에는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전화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나는 피식 웃었다. 방 한구석에 낯익은 쇼핑백이 보였다. 결혼식 답례품
은 이미 꺼냈는데, 여전히 뭔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쇼핑 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빨간 목도리. 엄마가 내 여덟 살 생일날 떠준 거였다. 나는 목도리 를 꺼내 목에 둘렀다. 털이 코를 간지럽혔다.
“거울 봐봐. 어때? 엄마가 엄청 열심히 만든 거야. 마
음에 들어?”
하얀 털로 뒤덮인 얼굴에 빨간 목도리를 한 내가 보였
다. 여전히 여덟 살이었지만 나는 달라져 있었다.
―잘 어울리는데?
엄마가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야옹.”
이 각박한 세상에 고양이가 필요해
149
프롤로그. 벌써 여덟 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반시우는 머리를 긁으며 책상 위 고지서 더미에 새로 온 독촉장들을 던졌 다. 다 쓰러져가는 빌라에서 뭔 관리비를 걷는다는 건지.
컴퓨터 화면 위로 글자가 깜빡였다. 〈반 고흐의 라이브 방송〉. 한숨부터 나왔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도 할 이야기 가 없었다. 방송에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연 이 필요했다. 이대로라면 카메라를 사는 데 쓴 돈도 날릴 날이 머지않았다. 반시우의 눈길이 독촉장들과 어지럽게 섞여 있던 광고 지에 머물렀다. 편의점 앞에 새로 생긴 분식집 광고지였다. “나한테도 그런 사연이 있었다면….” 스스로 뱉은 말에 놀라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안혜민 소설
150
풍선껌
가 않았다. 뭐 어때. 반 고흐도 인생의 절반을 교회에 미
쳐 살았는데. 이건 종교 같은 거였다. 사연에는 사람들이 몰리고, 사람들이 몰리면 돈이 생길 것이다. 그럼 더 이상 뭐에 쓰 는지 알 수도 없는 관리비 같은 건 문제도 아니겠지. 반시우는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늘 입 고 다니는 겉옷 주머니 속 꾸깃거리는 껌 종이가 만져졌 다. 수신음이 끊기는 순간, 초조하게 껌을 짓이기던 손가 락을 멈추었다. ―왜?
달갑지 않은 목소리다. 하긴, 거짓말을 들킨 뒤로 연 락은 처음이었다.
“이 풍선껌, 내가 씹으면 어떻게 돼?”
―무슨 뜻이야?
“너 요즘 취직 준비한다며.”
한참 뒤에야 한 마디가 들렸다. ―그런데?
역시 이게 통할 줄 알았다. 반시우는 급하게 덧붙였다.
“내 이름 예쁘다고 했었잖아. 바꾸고 싶지 않아?” ―너야말로 왜 바꾸고 싶은데?
“…내가 돈이 좀 필요해.” ―돈?
더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다.
“나 인터넷 방송 하는 거 알잖아. 거기에서 네 사연
을… 자세한 건 됐고, 그냥 빨리 말해. 할 거야, 말 거야?”
반시우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풍선껌
151
―글쎄.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이 름이라고. 이내 반시우는 고개를 내젓고 다시 통화에 집중 했다.
아니야, 대단한 이름은 아니지만 대단한 사연이잖아.
“마지막은 꼭 남겨두고 싶다고 했잖아.”
반시우가 힘을 실어 말했다.
“살면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거라 고. 그러니까 네 번째는 나로 해. 가서 면접도 붙고―”
―너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반시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묻기도 참, 가장 듣고 싶 지 않았던 질문을 골라서 묻는다.
―이제 와서 따지거나 돌려달라고 할 생각은 없어. 그 냥 이해가 안 돼서.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숨기고 싶을 때마다 녀석들은 거기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꼭 티를 냈다. “…말하면 바꿔 줄 거냐?” 반시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상황에도 절박하기만 한 기분이 꽤 처참했다. ―글쎄.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고개에 힘을 풀었다. “부러워서.” 반시우가 말했다. 혀끝에 감도는 언어의 감촉이 진실 인지 거짓인지 아직은 확실하지 않았다.
“부러워서 그랬다. 네 이름이.” 잠시 대답이 없었다.
안혜민 소설
152
시곗바늘이 한 바퀴를 돌아오는 순간, 대답도 왔다. ―좋아. 배에서 무언가 꾸르륵댔다. 배고픈 건지, 화장실이 가 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둘 다 배에서 시작되는 일 들이니 상관은 없다. 이미 섞여서 알 수도 없게 됐다. ―좋아. 해보자. 전화가 끊어졌다. 깜빡. 깜빡. 〈반 고흐의 라이브 방송〉. 반시우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 깜빡이는 글자를 멍 하니 쳐다보았다. 이제 정말이 되는 건가? 풍선껌을 입에 넣고 씹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해보 았다. 포장지를 뜯어서, 입에 넣고 씹는다. 천천히, 마른 나 무토막 같던 껌 조각이 질겅질겅해진다. 단물이 조금씩 빠 질 때까지 입안에서 굴리다 보면 어느새 단단하면서도 말 랑한 고무공이 되어간다. 후우우. 후우우우. 입에서 풍선이 튀어나온다. 시야로 불투명한 풍선이 점점 비집고 들어온다. 깜빡거리는 컴퓨터 화면을 가릴 만 큼 커졌을 때, 펑 하고 풍선이 터졌다. “아.” 익숙한 글자가 있던 자리에 무언가 낯선 게 자리 잡고
풍선껌
153
있었다. 내 것인 줄 알고 한참을 들고 있던 가방 안에서 남
의 물건을 꺼내든 기분이었다.
〈김김밥의 라이브 방송〉.
글자가 몇 번이나 깜빡였을까. 그 낯선 문장은 점차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같이 편안해졌다. 반시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방송이 이토록 설레는 것이 얼
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후―하.”
숨을 잔뜩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달칵.
방송 시작을 알리는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
〈반시우 潘施優〉. 김김밥은 주민등록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랜만 에 바뀐 이름이었다. 여자들이 많이 쓰는 이름은 아닌 게 분명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았다. 이번 기회에 머리도 숏컷 으로 자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베풀 시施 자를 쓰는구나. 어울리지는 않는 한자다. 걔한테도, 나한테도. 처음 이름이 바뀐 것은 중학생 때였다. 같은 반 윤다 영은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똑 떨어지는 단발을 한 여자 애였다. 참 자기 이름처럼 생겼다, 고 김김밥은 생각했다. 평범한 이름을 가진 애를 보면 늘 부럽다는 생각은
안혜민 소설
154
했었지만, 그게 다였다. 자신도 그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우연히 윤다영이 필통 안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껌을 하나 가져가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윤다영!” 김김밥은 다음 날 조회 시간, 자기 이름이 불리자 왜 윤다영이 대답을 하고 킥킥대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얼 굴을 붉히고 있는지, 이 예쁜 이름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왜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에도 이름은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다영아, 오늘 영어 숙제 했어?” “윤다, 매점 가자!” 처음에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쁜 이름을 갖는 꿈이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날이면 가끔 꿨었기 때문이다. 어제 집에 가는 길에 동네 꼬마들이 김밥집 앞 에서 평소보다 심하게 놀려대긴 했다. 그것도 아니면, 문 방구 앞에서 명찰을 주워줬던 잘생긴 오빠의 표정이 순간 변하는 걸 봐버려서 그런가? 꿈이 아니라는 건 금세 분명해졌다. 매일 저녁 아무리 잠들어도 아침이면 엄마는 “다영아, 밥 먹어라!”하고 부르 는 것이었다. 늘 이쯤에서 누군가가 산통을 깨듯 진짜 이 름을 불러주면 꿈에서 깼었는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효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주일 쯤 지났을 때였다. 윤다영, 이라고 박힌다면 괜찮을 것 같 아 태어나서 처음 예쁜 이름 스티커를 뽑으러 간 날, 인쇄 된 스티커에는 익숙한 세 글자가 도로 박혀 있었다. 꽤 속 상해서 밤새 울었었다.
풍선껌
155
“사기꾼 이름이라서 그런가, 그렇게 좋은 이름은 아 니네.”
민자영은 주민등록증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떨떠름
한 표정으로 돌려주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 것 같아?”
민자영이 껌을 짝짝 씹으며 물었다.
“한 달? 아님 일 년? 지난번에는 반년이었지?”
김김밥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긴 하다만. 나도 모르겠어.”
주민등록증을 도로 지갑에 넣으면서 김김밥은 눈살 을 찌푸렸다.
“그보다 너 그 껌 좀 조용히 씹어. 나 트라우마 있다.”
“껌 씹는 재미로 살면서 웬 트라우마.”
민자영은 보란 듯이 턱을 더 바삐 움직였다.
“좀 즐겨. 오랜만에 얻은 행운인데.”
동아리 회장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소개팅이라도 시켜줄까?”
“즐기긴 뭘 즐겨, 지난번에 기억 안 나?”
김김밥은 널브러진 책들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연애는 아무것도 안 속이고 시작하는 게 나아.” “원래 서로 속고 속이는 게 연애거든.” 민자영이 쏘아붙였다. “그리고 지난번이라니, 차이지도 않았잖아. 네가 괜히 찔려서 찬 거지.” 김김밥은 말없이 가방을 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혜민 소설
156
“나 먼저 간다. 내일 아침 일찍 면접이야.”
민자영은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다시 김밥 되기 전에 얼른 철썩 붙어라.”
문을 닫고 나오면서 김김밥은 문 앞에 붙은 삐뚤빼뚤
한 글씨를 읽어보았다.
〈작명 동아리 ‘명명’〉.
작명 동아리 회장인 민자영은 사주팔자에는 관심도
없었고 작명소는커녕 점집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목사 님네 고명딸이었다. 실은 그저 사전을 뒤적이거나 예쁜 이
름 짓는 것을 좋아했을 뿐인데 늘 어느 한쪽이 떨어졌거 나 무언가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다니는 데다가 시 커멓게 눈화장을 해서 축제 때면 동아리 부스에 타로점을 보려는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세 번째로 이름이 바뀌기 직전, 김김밥은 적당한 사 람을 찾을 요량으로 부스에 줄을 섰다. 성경책에 기반하 여 연애점과 취업점을 오십 명쯤 봐주고 난 뒤인지라 민자 영은 김김밥의 첫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개명?”
민자영이 되물었다. “어어, 잘 찾아왔어. 얼른 앉아.” 아무렇게나 뻗친 민자영의 단발머리가 기쁨으로 흔 들렸다. “이름이 뭔데?”
김김밥은 민자영의 이름이 뭘까 잠깐 생각했다. “김김밥이요.”
풍선껌
157
민자영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간 당혹스러움이 천막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뭐?”
“김, 김, 밥.” 김김밥은 천천히 한 자 한 자 다시 불러주었다. “성씨 김金 자 두 번에 밥은 그냥 한글이에요.”
“어어, 그래.” 민자영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드디어 작명다운 작 명을 할 수 있었던 게 기뻤던지도 몰랐다. 성경책을 덮고 치워두었던 사전을 펼치는 그녀의 손가락이 다급해졌다.
“어디 보자, 평소에 좋아하는 이름이나 단어 같은 거 있어?”
김김밥은 고개를 내저었다. 김밥이나 만두만 아니면 괜찮았다.
“그냥 무난한 걸로요.”
“순우리말? 아님 한자어? 뭘 더 선호해?”
“상관없어요.”
민자영은 한참을 사전을 뒤적이다가 김김밥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하며 끙끙댔다.
“김아영? 김아라는 어때? 아리따울 아 娿 자를 써 서…. 아님 아예 바다나 사랑 같은 건 어때? 김바다, 김사 랑……. 성이랑 좀 안 어울리나?”
“아, 성은 상관없어요.” 김김밥이 말했다.
“성이 상관없다고? 혹시 어머니가 재혼하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안혜민 소설
158
김김밥은 민자영의 반짝이는 눈빛에 순간 사실대로
털어놓을 뻔했다.
“그냥 재미로… 정해보는 거라서요. 어차피 개명은 못 하거든요.”
민자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부모님이 못 하게 해?”
“뭐… 비슷해요.”
민자영은 김김밥을 한참 쳐다보더니 이내 무릎을 탁, 쳤다. “이게 좋겠다.”
사전을 덮고 다시 펼친 건 성경책이었다. “에스더, 김에스더. 어때?”
작명에 재능이 없는 작명 동아리 회장은 연락처를 건 네며 반드시 김김밥의 마음에 드는 이름을 찾아주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김김밥은 매일 공강 때마다 동방에 붙 잡혀 몇 시간씩 민자영이 늘어놓는 온갖 이름들과 씨름해 야 했다. 꼬박 한 달을 채우기 며칠 전, 김김밥은 결국 사실을 털어놓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동방은 여전히 들락거리 게 됐지만.
풍선껌
159
름이
민자영이
보고된
“이 풍선껌으로 풍선을 불기만 하면 그 사람이랑 이
바뀐다고?”
포장지에 쌓인 풍선껌을 마치 새로 학계에
생물처럼 들여다보았다. “말이 되냐. 이거 편의점에서 잔뜩 파는데?”
김김밥은 고개를 내저었다.
“벌써 해봤어. 그 아저씨한테서 산 것만 그래. 나한텐
이 한 통이 전부야.”
민자영은 그 말에 풍선껌에서 손을 놓았다.
“이거 얼마나 오래된 거냐. 먹으면 죽는 거 아니야?”
김김밥은 껌을 보관하던 통에 다시 소중하게 넣었다. “안 죽어. 아직까지 아무도 안 죽었다, 뭐.”
“그럼 개명 얘긴 뭐야?”
민자영이 두 손에 턱을 괸 채 물었다.
“부모님이 못 하게 한다며.”
김김밥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해도 원래대로 돌아가. 나도 왜 그런지 모르 겠어.” 두 번째로 이름이 바뀐 다음, 김김밥은 마침내 풍선껌 이 그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 던 날, 김김밥의 가족은 20년 동안 살던 집을 팔고 이사를 했다. 김김밥의 가족이 졸업식에 간 사이 묵은 짐들 사이 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던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우연히 책 상 서랍에서 발견한 풍선껌을 무심코 하나 씹은 것이었다. 빛나는 졸업장을 받고 펼쳐 든 순간, 김김밥은 자신의 이름이 있어야 할 곳에 ‘박지상’이라는
안혜민 소설
160
세 글자를 발견하 고 담임 선생님께 졸업장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지상아?” 김김밥은 기념사진을 찍는 내내 얼굴도 모르는 아저 씨의 이름에 쫓겨 다녔다.
“박지상, 같이 사진 찍자!”
“지상아, 졸업 축하해!”
마침내 부모님이 “우리 지상이, 너무 기특하다.”며 눈 물 지었을 때 김김밥은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한 달 동안이나 이름은 그대로였다. 김김밥은 대학 입
학식 날까지 이름이 바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좋을지 아닐지 매일 밤 고민했다. 아무렴 박지상이 김김밥보다는 낫 다는 결론에 다다른 다음 날, 김김밥은 학원에서 받아든 운 전면허증에 찍힌 익숙한 이름을 보고 심한 욕을 내뱉었다. 〈태백산 포장이사〉. 집에서 굴러다니던 명함에서 박지상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전화를 걸어보았 지만, 중학생 때 윤다영이 이름이 바뀌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듯, 박지상 또한 이름이 바뀐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풍선껌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라니 뭘 말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날 학생 방에서 풍선껌 같은 걸 먹고 좀 기분이 이상해 지긴 했어요. 어릴 때 생각이 나더라고. 학생 그날 고등학 교 졸업식이었죠?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
풍선껌
161
김김밥은 다시 김김밥으로 돌아와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다. 하지만 전부 다 돌아온 건 아니었다. 윤다영이라고 이름을 적었던 교과서. 박지상이라고 인쇄된 졸업장. 이름 이 바뀐 동안에 일어난 일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만, 그날 내가 졸업하는 것처럼 괜히 뿌듯하더라고. 난 중 졸이거든.”
*
처음 김김밥을 본 것은 동양 철학을 가르치는 교양 수 업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출석이 불리는데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두 눈을 의심한 건 교수님도 마찬가지였다. 김 김밥이 네, 하고 대답하는 순간 온 강의실의 이목이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 순간 강의실을 휘어잡은 단 세 글자. 반시우는 그 세 글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똑똑히 보았다. 얼마나 대단한 권력인가, 반시우는 강의 시간 내내 김김밥의 뒤통수를 뚫 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름이 권력이라는 것쯤은 초등학생 때부터 알고 있 었다. 출석 번호가 빠를수록 선생님은 이름을 먼저 외웠 고, 이름이 독특하면 오래 기억했다. 칠판 앞으로 나와 문 제를 풀게 시키거나 콕 집어 말을 걸 때면 늘 그런 아이들 이 선택받았다. 반시우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저 타고난 것으로 선택받는 소수가. “이름이 참 예쁘시네요.” 불쑥 다가가서 말을 걸기에는 적절치 못했던 멘트였 는지도 모른다. “저 남자친구 있는데요.” 김김밥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런 멘트를 하기에 적 절치 못한 이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남자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대 건물 근처에서
안혜민 소설
162
목격할 수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여자애도 함께였
다. 분명 같은 수업을 들었었는데…. 한규선. 맞다, 한규선 이라는 애였다. 남자친구한테 거하게 차였다면서 조별 발 표 날에 잠수를 타는 바람에 유명했었다.
“내 친구가 분명히 봤다고 했어.”
한규선이 소리치고 있었다. 언성이 꽤 높아져 사람들
이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친구 전화라면서 받았다며. 내 이름으로 저장되 어 있었고.”
“나도 그건 잘….”
남자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잘못 저장되어 있었나 보지.”
한규선의 손에는 분홍색 편지지가 들려 있었다. 감사 의 달 이벤트 때 받은 거였다. 5월 한 달 동안 학생회 우체 통에 넣어두면 학번과 이름으로 편지를 대신 보내 주는
이벤트였다.
“이 편지도 네가 쓴 거 맞잖아!”
“내가 쓴 게 맞긴 한데….” 남자가 김김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난 분명히 여자친구 이름으 로 보냈는데―” “무슨 소리야? 여기 규선이에게, 규선아, 한규선! 똑 똑히 적혀 있잖아!” 한규선이 편지지를 남자의 눈앞에 펄럭거리는 내내 김김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니들 때문에 내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 알아? 멀
풍선껌
163
쩡한 사람을 불륜녀로 만들어 놓고 모르는 척이야?”
김김밥은 화가 난 게 아닌 것 같았다. 다들 남자가 바
람이 났네, 여자가 쇼를 하고 있네, 쑥덕대는데 혼자서 다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우두커니 남 일처럼 둘의
말싸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야.”
마침내 김김밥이 말했다.
“뭐?”
한규선이 김김밥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한테 쓴 편지야, 그거.”
“무슨 개소리야. 여기 써 있는 내 이름 안 보여?”
김김밥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용을 읽어보면 알 거 아냐. 나한테 쓴 거야.”
한규선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질러댔다.
“지금 그게 중요해?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지 아 냐고!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지켜보는 내내 한규선은 펄펄 뛰기도 하고 소리도 지 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둘에게 뭔가를 요구한다기보 다는, 요란을 피워 소문이 퍼지게 해서 과 사람들에게 자 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식당에 서 밥을 먹다가 머리카락이 나와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 하는 반시우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에너지 소비였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포효하는 사자와 같았달까. 동물의 왕국에서는 역시 목소리 큰 놈이 이기 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김김밥은 여기서도 이 세렝게티의 주인공이었
안혜민 소설
164
다. 한규선이 아무리 포효하며 자기 영역을 지키려고 해도 이 사자는 태어나길 우두머리로 태어났다. 반시우가 목격 한 사실은 이것이었다. * 간밤에 꾼 꿈에 개가 나왔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 만, 김김밥은 문자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냅다 핸드폰을 침 대에 집어 던졌다. 〈안녕하세요, 반시우 님. 귀사에 지원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귀하를 채용할 수 없음 을…〉 벌써 몇 번째 받는 탈락 문자였는지 셀 수도 없었다. 저 문자를 받는 날마다 똑같은 기분 나쁜 꿈을 꾼다는 것 만 기억이 났다. 늘 이름이 처음 바뀌기 전날 문방구에서
만났던 잘생긴 오빠가 나왔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안 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복숭아 이야기를 했던 건 분명 한 것 같은데 말이다. 아마 그 골목 어딘가에 개 한 마리 가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핸드폰이 웅웅거렸다. 민자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야, 기사 봤냐? 대박이다, 대박. “무슨 기사.” 김김밥은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언니는 그럴 여유가 없단다. 나 오늘도 최종 떨어졌어.”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반시우 말이 야, 반시우. 완전히 돈방석에 앉았다고. 네 이름으로.
풍선껌
165
“내 이름으로?”
―야, 이 새끼 이래도 되는 거냐? 처음 봤을 때부터
사기꾼 짓만 골라서 하더니만 이젠 지가 뭐라도 된 양 네
이름 가지고 장사를 하잖아!
“….”
―이름은 대체 언제 돌아와? 조금 있으면 벌써 일 년이
야. 언제까지 저 여우 같은 놈이 잘되는 꼴을 봐야 하냐고!
전화를 끊고 민자영이 보내 준 기사를 확인했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는 이미 익숙한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인기 BJ 김김밥, 방송에서 수입 공개! 재벌급 자산?〉
〈괴상한 이름으로 유명세 떨쳐 … BJ 김김밥, 실명 인 증한 영상 조회수 200만 돌파〉
그 유명하다는 영상을 하나 틀었다.
반시우의 상기된 얼굴 위로 별이 박힌 풍선들이 잔뜩 날아다녔다. 부러웠다고 했던 말을 믿었던 건 아니었는데. 역시 돈 이 필요하다고 한쪽이 진심이었나보다. 저게 갖고 싶었던 거구나. 반시우가 불었던 풍선은 터 지고 없지만, 사람들은 그걸 채워주기라도 하듯 풍선에 무 언가를 채워 넣고 후후 불어 보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어 떻게 되는 거지? 하나씩 불 때마다, 그 안에 갖고 싶은 것을 가득 채워서 불 때마다, 무엇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걸까. 그게 꽤 허무하다는 건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펑, 하기 직전까지 터져버릴 것같이 속을 꽉꽉 채우고 있 던 것들은 이미 어디론가 흩어져버리고 없었다. 아아, 풍
안혜민 소설
166
선 같은 거에 넣어두는 게 아니었는데. 소중한 내 반짝이
는 이름 스티커, 졸업장, 남자친구….
김김밥은 천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거기 꼬마 아가씨, 풍선껌 하나 살래?”
늘어난 츄리닝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메로나를 문 사 람에게 그런 말을 한 것부터 의심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복숭아 향이어서 맛있는데.”
아니, 동네 문방구 앞에서 저렇게 잘생긴 오빠가 풍선 껌을 팔고 있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저, 저요?”
나는 재빨리 입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쓱 닦았다. “응. 아까부터 쳐다보고 있었잖아?”
잘생겼길래 힐끗힐끗 쳐다봤는데 눈치챘나 보다. “아뇨, 전 괜찮아요. 풍선껌 별로 안 좋아해서….”
최대한 정중하게 이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그는 포기 를 몰랐다. “그럼 한 개 그냥 줄게. 맛만 봐.” 거절할 새도 없이 남자는 포장지를 벗겨서 껌을 들이 밀었다. 진한 복숭아 향이 진동했다. “자. 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든 풍선껌은 금세 먹던 메로나와
풍선껌
167
함께 어우러져 입안에서 오묘한 맛을 만들어냈다. 복숭아 맛 메로나랄까. 물론 이 복숭아는 흙과 햇빛, 물 그 어느
것 하나 만나보지 못한 실험실 출신의 복숭아였다. 그렇
게 생각하니까 뒷맛이 씁쓸했다. 실험실에서 태어난 건 이
복숭아의 탓이 아닐 텐데.
“아까 봤는데 철권 잘하더라.”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요령이었다. 짓궂은 동
네 꼬마들은 오락기 앞으로. 분식집 앞에서부터 나를 알
아보고 쫓아오는 탓에 오랜만에 동전을 좀 썼다. 오늘따라 손목이 자유자재길래 신나게 이겨 먹은 걸 다 봤나보다. “그냥 좀, 하하.” “여기 중학교 다녀?” 남자는 문방구 건너편에 보이는 학교 정문을 가리켰다. “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반색을 했다.
“이야, 이거 후배님을 몰라봤네! 나도 이 중학교 출신 이야. 졸업한 지는 꽤 됐지만.” 그는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 꼬마 아가씨.” 꽤 능수능란한 잡상인이다. 그는 학연을 통해 풍선껌 판매를 시도하려는 듯 보였다. “후배님, 혹시 이거 필요 없어? 필기할 때 쓰면 완전 편한데. 새로 나온 펜인데, 가격도 단돈―” “저,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남자가 본격적으로 세일즈를 시작하려는 듯하길래 서둘러 몸을 돌리는 순간, 무언가가 주머니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굽힐 새도 없이 남자가 먼저 주워 들었다.
안혜민 소설
168
“어, 떨어뜨렸다.”
남자의 눈길이 떨어뜨린 명찰에 머물렀다. 그에게서 명찰을 받아드는 순간, 남자의 표정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 나갔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뭐, 때로는 대놓고 놀리는 동네 꼬마들이 나았다. 철권이라도 맥일 수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잠깐만.” 무언가가 내 손에 쥐어졌다. 풍선껌이었다. 이미 뜯어진 채로, 작은 통 안에는 포 장된 껌이 다섯 개 남아 있었다. “저기, 전 별로 살 생각이 없다니까요.” 뜯어져 있는 데다가 꽤 오래된 것 같아 인상이 찌푸 려졌다. “풍선껌 불 줄 알아?”
남자가 말했다. 그는 잘생긴 얼굴로 싱긋 웃었다. “불어 봐. 그럼 소원이 이루어진다.”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그는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영업장으로 돌아갔다. *
빈센트 반 고흐. 반시우가 꿈꾸던 이름은 그런 거였다. 모두가 알고, 특별하다고 이야기할 이름. 하지만 개명은 충분하지 않았 다. 타고난 게 아니었으니까. 그건, 첫 데이트 날 몰래 향
풍선껌
169
수를 뿌린 것을 들키는 것만큼 굴욕적인 일이었다.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반시우 는 전공을 살린 미술 컨텐츠를 때려치웠다. 그 대신 삼 센 치도 안 되는 시커먼 카메라 구멍에 몇 시간이고 아무 말 이나 지껄이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접속자가 사오십 명 정도 늘어난 것도 있었지만, 그편이 훨씬 더 쉽기도 했다. 듣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말도 안 되는 말을 말이 되는 것처럼 하면 그만이었다. 카메라 구멍 속 사람들은 반시우가 하는 말을 받아들 였다. 정말 믿는지는 몰랐다. 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구멍에 말을 쏟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들은 믿지 않으 면서도, 믿고 싶어서, 또 듣고 싶어서 매일 이 구멍 아래로 모이는 것이었다. 공개적인 사랑과 전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 시우는 축제 부스에서 그 이상한 여자애를 다시 만났다. 〈명명 明冥 작명소〉. 손으로 썼는지 삐뚤빼뚤한 글씨가 박스 조각 위에서 춤을 췄다. 학교에 이런 이상한 동아리도 있었나. 꽤 줄이 길었다. 거의 마지막으로 차례가 되어 천막 안으로 들어섰는 데, 큰 눈을 꿈뻑거리는 김김밥이 앉아 있었다. “어서오세요.”
안혜민 소설
170
뭐 때문에 그렇게 긴장이 됐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름이 참 예쁘시네요, 하던 순진한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서 그랬을 것이다. 그게 분명했다. 아니면 이런 재수 없는
여자애 앞에서 땀이 날 리가 없었다.
“저… 여기는―”
“타로점 안 봅니다. 저희는 작명만 해요.”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애가 껌
을 짝짝 씹으며 끼어들었다. 잔뜩 뻗친 단발에 마스카라
가 시커맸다.
“개 고양이 이름은 오천 원, 사람 이름은 만 원이에요.” “뭘 작명해드릴까요?”
김김밥이 물었다.
이렇게 생겼구나. 똑바로 마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기억 속에서는 더 까무잡잡하고 말랐던 것 같았는데, 어 딘가 이름처럼 하얗고 동그랗게 생겼다.
“제 이름이요.”
반시우가 대답했다.
“본인 이름이요? 개명하시는 거예요?”
반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반시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반고흐예요.”
푸흡, 하고 옆 테이블 여자가 웃었다. 김김밥은 두 사 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아, 반 씨시구나.”
사전을 뒤적이는 김김밥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어디 보자….”
“본명이세요?”
옆에 테이블 여자가 진한 마스카라를 칠한 얼굴을 들
풍선껌
171
이밀었다. 반시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개명하시려고요? 이름 완전 멋있는데.”
등골이 괜히 저릿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코 딱지만 한 까만색 천막이 꼭 카메라 구멍 안에 있는 것 같 았다. 습관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야아, 힘드셨겠어요. 이름으로 힘든 사람이라면 여 기도 한 사람 있죠.”
마스카라는 김김밥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리 김김밥이, 동지를 만났네?”
마스카라가 말했다.
“어때, 저렇게 힘들어하시는데. 풍선껌 하나 정도 양 보해드려.”
김김밥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흐 님은 개명하시면 되잖아. 난 못 하니까.”
“왜요?”
반시우가 불쑥 물었다. “그게… 설명하자면 길어서요.”
얼버무리는 김김밥 뒤로 눈을 반짝이는 마스카라의
입이 가벼워 보였다. 미대의 반고흐는 그날 일일 포차에서 거하게 돈을 쓰기로 했다. *
“거기 아가씨, 이것 좀 가져가.”
늘어난 츄리닝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메로나를 문 취
준생에게는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안혜민 소설
172
“복숭아야. 가져가서 먹어.”
세일도 경조사 때만 하는 슈퍼마켓 아주머니가 웬일
이지, 했는데 복숭아를 담은 검은 봉지 뒤로 웬 꼬마가 불 쑥 튀어나왔다.
“우리 아들이 너무 팬이래. 같이 사진 한 번만 찍어주 라, 응?”
아니, 이번 주에 들은 어떤 탈락 사유보다도 황당했다. “저, 저요?” 김김밥은 재빨리 입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쓱 닦았다. “응. 아까부터 봤는데, 누나 맞죠? BJ 김김밥!”
아주머니 등 뒤에서 나온 꼬마가 김김밥을 대뜸 가리 키며 소리쳤다. “저 사진 좀 찍어주세요.”
“하하, 꼬마야, 네가 뭘 좀 오해한 것 같은데….” 문득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아니, 며칠째였지?
그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민자영이었다.
“대박, 대박, 대박!”
민자영이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함박웃음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민자영은 화면을 연신 들여다보았다.
“이거 진짜냐? 꿈 아니지?”
“어째 네가 더 신난 것 같다.” 김김밥이 말했다.
풍선껌
173
“아이, 너 잘된 게 기뻐서 그러지!”
민자영은 오버를 하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말이 되냐? 300만 구독자를 보유한 개인 방송
BJ라니. 너 이제 인생 폈다!”
“근데 이상하네.”
김김밥이 말했다.
“왜 원래대로 안 돌아왔지? 원래 이름을 뺏긴 쪽이 원 하는 걸 가져가는데.”
“가져갔잖아.”
민자영이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일 년 동안 실컷 돈 벌었으면 됐지. 이제 주인한테 돌
려줘야지.” 주인이라. 김김밥은 포크로 복숭아 한 조각을 하나 찍어 베어
물었다. 아주 단 과즙이 터져 나와 입안에서 스멀스멀 자
리를 잡았다.
“있지, 자영아.”
김김밥이 말했다. “나 요즘 계속 이상한 꿈을 꾼다.”
“꿈?”
민자영이 복숭아를 쩝쩝대며 되물었다.
“어떤 꿈?”
“그냥 잘생긴 남자가 나와.”
“그리고?”
민자영이 눈썹을 까딱였다.
“…복숭아 얘기를 했던 거 같아.”
안혜민 소설
174
“개꿈이네.”
민자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가 나한테 풍선껌을 줬어.”
김김밥이 말했다.
“무슨 말이야?”
“그냥 요즘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
김김밥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양철통을 집어 들었다. 안에는 마지막 풍선껌이 들어있었다.
“혹시 내 이름도 누군가랑 바뀐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뭐?”
“생각해봐. 폭탄 돌리기 게임 같은 거야. 폭탄은 탄생 해버렸고,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누군가에게 떠넘기기 시 작해. 그렇게 계속 옆 사람에게 폭탄을 떠넘기는 거지.” 민자영은 피식 웃었다. “그럼 진짜 김김밥은 누군데? 그 아저씨?”
김김밥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름이 바뀐 사람은 그 사실을 기억 못 하잖아. 내가
개명을 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면? 이게 풍선껌
때문에 바뀐 이름이라면 말이 돼. 난 내 원래 이름을 기억 못 하는 것뿐이고, 내가 모르고 그 사람의 마지막 풍선껌 을 먹은
풍선껌
175
거지.” 민자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 말대로라면 사람들은 모두 폭탄을 맞을까 봐 무 서워서 서로에게 떠넘기기만 했다는 거네.” 김김밥은 민자영이 천천히 복숭아를 씹어 삼키는 것 을 지켜보았다.
“풍선껌이라는 거, 정말 그게 다라고 생각해?”
“무슨 뜻이야?” 김김밥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가 말했잖아. 풍선껌은 소원을 들어주는 거라고. 근데 사람들이 고작 그렇게 풍선껌을 썼을까? 누가 폭탄 을 맞을까, 누가 그 불쌍한 당첨자일까 서로 눈치나 보면 서 책임을 떠넘기면서?”
김김밥은 복숭아를 힘주어 꾹꾹 씹었다. 맛이 떫어진 것 같았다. “아님 뭔데? 이게 특권이라도 된다는 거야?”
민자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김김 밥은 몰랐지만, 민자영이 새로고침 버튼을 누를 때마다 구독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 “자, 너 하나 줄게.” 김김밥이 건넨 풍선껌의 의미가 동정인지 동질감인지, 그것도 아니면 술기운에 한 실수였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저 그걸 받아들었을 때 반시우는 자신이 조금의 죄 책감을 느꼈다는 것과, 그보다
안혜민 소설
176
더한 성취감을 느꼈다는 사실만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은 언제라도 그저 그 풍선껌을 씹으면 되었다. 그게 왜 망설여졌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마치 잘못한 것을 들키길 바라는 사람처럼, 매일 몇 번이고 반성문을
쓰듯이 작명 동아리방 앞에 왔다가 다시 돌아가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에서 친구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 을 들은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우연으로 본명을 들켰을 때, 김김밥은 놀 란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내 말을 믿지 않았다는 건가. 그건 조금 화가 났다.
“야, 너 이름 뻥이었냐?” 민자영이 따지러 다가오는 험악한 얼굴 뒤로, 김김밥 의 무덤덤한 얼굴은 반시우에게 동맹 종료를 알렸다. 모른 척하고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뺏기기 싫었다. 넌 타 고난 거잖아. 넌 아무 노력도 안 했잖아. 내가 아니야. 배신은 네가 한 거지. 다시 독촉장이 쌓이기 시작했다. 일 년 동안 깨끗했던 책상이 다시 널브러진 종이들로 뒤덮였다. 거기에 적힌 숫자들은 지난해보다 몸을 불린 채 로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할 이야기가 많아졌을 때부터 뭔가를 사들이기 시작 한 것 같다. 속이 텅 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풍선을 불 때 너무 깊게 숨을 불어넣은 게 문제였던 것 같다. ―풍선을 분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이름을 뺏긴 쪽이 원하는 걸 하나 가져가거든. 소원을 들어주는 풍선껌이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반시우는 같은 자리에 앉아서 깜빡이는 컴퓨터 화면 을 응시했다.
풍선껌
177
〈김김밥의 라이브 방송〉.
하지만 아무리 불어도, 풍선껌은 김김밥의 소원만을
이루어주는 것 같았다.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섞여버려서, 걔가 가져간 게 내 돈인지 자신의 이름인지 헷갈린다. 속
이 또 울렁거렸다. 띵동. 새로운 업로드를 알리는 알림이었다. 달칵. 〈김김밥의 명명 明冥 작명소〉. 또 그 둘이다. 변함없이 책상에는 너덜너덜한 사전을 펴놓고, 벽에는 까만 천을 둘러놓고 나란히 앉아 있다. 뭐 가 좋다고 저렇게 깔깔대는 거지. 실시간 댓글이 끊임없이 카메라 구멍 위로 빨려 올라갔다.
구멍은 그 많은 말들을 잡아먹듯이 빨아들였다. 화면 앞에서 반시우는 하릴없이 구멍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구원해줄 그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아아, 구멍에서 뭔가 쏟아진다. “풍선껌….” 자기 방의 책상인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잔뜩 놓인 물 건들 사이로 카메라 앵글에 익숙한 양철통이 잡혔다. 통 안에 든 건 마지막 풍선껌이겠지. 반시우는 알고 있었다. 김김밥은 저 껌을 씹을 생각이 없었다. 이번이 마 지막, 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아저씨 이름으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니까? 진짜 웃기지 않냐? 아하하하.”
안혜민 소설
178
민자영이 배를 잡고 웃다가 일일 포차의 플라스틱
이블 위로 양철통을 흔들었다.
“그 졸업장 아직도 있지? 위 사람은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였으니 이 상을 수여합니다. 이름, 박, 지, 상.”
“없어, 졸업장.”
김김밥이 쏘아붙였다.
“버렸냐?”
민자영이 고개를 갸웃댔다. “그럼 두 번째도 실수였네. 세 번째도 실수였어?” 반시우가 묻자 김김밥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아마 민자영 손이 미끄러져서 그런 거였지.” 민자영은 머쓱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얘가 전부터 입버릇처럼 얘기했었거든. 풍선껌에 대 해서 알게 된 순간, 벌써 어떻게 쓸지 다 정해놨다고. 세 번 째는 소개팅할 때, 네 번째는 취직할 때, 마지막은 보험용.”
“그게 무슨 말이야?”
반시우가 웃음이 반쯤 섞인 소리를 냈다. “너도 알겠지만, 가끔 이름 갖고 이상한 소리 하는 놈 들이 있잖아. 우리 김김밥이도 몇 번 당했었거든.” 민자영이 김김밥의 어깨에 손을 감싸며 말했다. “비열한 새끼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할 것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풍선껌
179
테
번째 타깃을
할지
정하고 엄청
가 도움을 좀 준
“그렇게 말하면
네 개인적인
핑계로 거절하고 알바 떨어뜨리고. 암튼 세
누구로
못
고민하길래, 내
거지.”
네가 엄청 선심 쓴 것 같은데, 그냥
복수에 나 이용한 거잖아.”
김김밥이 투덜댔다.
“왜, 아무 죄도 없는 피해자 만드는 것보다야 낫지?”
민자영이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 번째는 한규선이라고, 맨날 갔잖은 핑계 대고 팀 플 빼먹는 재수 없는 애가 있었는데, 우연히 밤새 술 처먹 고 정신 못 차리면서 수업에 왔길래 내가 술 냄새 제거에 최고라고 슬쩍 껌 하나를 줬지.”
뒷이야기는 반시우도 모르지 않았다. 반시우는 그때 그 불쌍한 피해자들 중에 민자영도 있었구나, 그제야 알 게 되었다. “뭐, 끝은 아름답다고 보긴 어려웠지만. 나름 성공적 인 복수였어, 그치?”
민자영의 말에 김김밥은 민자영의 어깨를 손가락으 로 쿡쿡 찔렀다. “그러니까 나 말고 네, 복수라고, 너.”
“그럼 세 번째는 소개팅, 네 번째는 취직. 다섯 번째 는? 마지막은 뭘로 쓸 거야?”
반시우의 질문에 김김밥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 쓸 거야, 마지막 껌은.”
“안 쓴다고? 왜?”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갔다. 다행히 다들 신경 쓰기에는 너무 취해있었다. “일종의 보험이랄까.” 김김밥이 피식 웃었다. “살면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거. 그 정도는 있어야 살맛이 날 것 같아.”
안혜민 소설
180
“야아, 그냥 장렬하게 끝내고 잊어버려!”
민자영이 두 팔을 쫙 펴고 소리쳤다.
“뭐 어떠냐, 김김밥이! 김, 김, 밥! 좋잖아!”
민자영이 움직이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양철통이 거
세게 흔들렸다. 무심코 통을 집어 들었을 때, 반시우는 김 김밥과 눈이 마주쳤다. “너도 해보고 싶어?” 김김밥이 불쑥 물었다. 반시우는 속을 들킨 것 같아 당황했다. “뭐, 뭐?” “난 딱히 행운이라고 생각 안 해.” 김김밥이 덤덤하게 말했다. 반시우는 그 자리에 앉은 자신이, 김김밥의 눈에는 빈 센트 반 고흐처럼 보일까 생각했다. 그건 세상의 그 어떤 화폭보다 근사한 장면이었다.
“껌은 내 소원이 아니라, 풍선을 분 사람의 소원을 들어 주는 거야. 이름을 뺏긴 쪽이 원하는 걸 하나 가져가거든.” 반시우는 김김밥이 자신에게 풍선껌을 뺏기고 싶지 않 다고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도 원할 때 원하는 이름으로 평범하게 살 수 있 잖아.” 반시우가 애써 말했다. “내가 빌리는 건 고작 며칠이잖아. 그게 더 거지 같아.” 김김밥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풍선껌 같은 거, 애초에 주지나 말지. 그럼 그냥 쭉 불행했을 텐데.”
풍선껌
181
김김밥은 끝내 풍선껌을 건네주었고, 행복을 맛보게 해주었다. 반시우는 화면 속 양철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보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원래 보험은 일어 나지도 않을 불행을 걱정하는 멍청이들이나 드는 거지. 아 니, 그냥 사고를 내면 될 것이었다. 그럼 보험이 필요할 테 니까.
클릭을 몇 번 하자 화면에 어지럽게 정리되지 않은 파 일이 떴다. 있어야 하는데. 반드시 있어야 해. 미친 사람처 럼 스크롤을 내려댔다. 찾았다. 〈비상연락망〉. 원하는 이름을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 릿속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번호를 입력하고 보니까 꽤 미친놈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젠 돈보다도 더 큰 무언가가, 사명감 같은 게, 나는 여기 이 구멍 아래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몇 번의 자극이면 될 것이었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그저 목소리가 클 뿐이다. 이것저것 잔뜩 쏟아내어 두면 사람들은 알아서 원하는 걸 골라갈 테다. 그저 김김밥이 알기만 하면 되었다. 네 이름이 얼마나 쪽팔리는 건지. 얼마나 얼른 바꿔 야 하는 건지. 반시우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안혜민 소설
182
마지막 풍선껌을 도둑맞은 것은 병원이었다.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올라온 영상 때문에 악플과 각
종 루머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제보자는 대학 시절, 김김밥이 자신이 그녀의 남자친구와 바람을 피 웠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며, 제대로 된 해명도 없이 결백을 주장하는 자신을 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교생활을 제 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꽤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린 지 두 달 만에 정신 과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옆자리에 하얀 얼 굴에 똑단발을 한 여자가 앉는 것이었다. “윤다영?”
젖살이 빠진 것만 빼면 똑같아서 한눈에 알아보았다. 반가움과 놀라움 중에 굳이 꼽으라면 둘 다 놀라움이었던 것 같지만, 어딘가 다들 의기소침해져 있는 이곳에서 말동 무가 있는 것은 꽤 괜찮았다. “너 방송하는 거 봤어. 유명하더라.” 윤다영이 말했다. “우리 학원 애들이 엄청 좋아해.”
윤다영은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뭐, 나쁘 지 않아, 라고 했지만 일을 시작한 지 반년 만에
풍선껌
183
*
라고 생각했던 게 공황장애라는 걸 알았다. “하루 종일 교실에만 있다 보면 그런 게
나가고 싶은데 나가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생각.
종일 그
스트레스
있어. 여기서
거라는
매일, 아니 하루
생각을 반복해.”
분위기상 그래야 할 것 같아 인터넷 세계의 익명성과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엮어 대강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
명했다. 윤다영은 알 것 같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름 얘기,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 보니까
좋더라. 예전에는 되게 싫어했잖아.”
“내가 그랬나?” 김김밥은 멋쩍게 웃었다.
물론 그랬을 테지만, 이젠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마 풍 선껌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이름보다 더 신경 써야 할 게 생겼으니까. “너 혹시 기억나? 2학년 때쯤에, 서로 이름 스티커 붙 여주는 거 유행했었던 거.” 윤다영이 말했다. “다들 너한테 스티커 받고 싶어 했던 거 알아? 네 거 는 다들 달라고 해서 금방 다 없어졌잖아. 나도 네 거 붙이 고 다니면 학원에서 애들이 다 한 번씩 물어보고 그랬어. 이건 누구냐고. 진짜 이름이냐고.” 뭔가 머쓱한지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뭐라고. 참 철이 없었어.” 김김밥은 그렇다면 자신은 여전히 철이 들지 않았다 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그거였다. 윤다영이 나를 기억 하는 이유는 학원에서 받았던 그 몇 초간의 관심 때문이 었고, 나는 이름 스티커를 팔아야만 반에서 주목을 받았 다. 그리고 여전히 이름을 팔아 돈을 벌고 있었다. “이름보다도, 그런 거 있잖아. 이름 때문에 다들 쳐다 보는 거. 그걸 다들 부러워했던 거지.”
안혜민 소설
184
“다들 부러워했다고?”
김김밥은 윤다영이 이름이 바뀌었던 것을 기억하는
지 궁금했다. 혹시 기억한다면, 저런 말은 못 하겠지.
“응. 넌 뭐랄까… 다들 기억하는 애잖아. 지금도 그렇 고. 어딜 가던 너한테 주목할 수밖에 없으니까.”
습관적으로 가방 속에 넣어둔 양철통을 만졌다. 이게 나를 평범하게 만들어 주긴 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면, 그날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다. 목숨처럼 여겼던 껌을 대가 없이 건네는 것이란 그렇 게 어렵지 않았다. 술기운에 착각한 건지는 몰라도, 그날 따라 풍선껌이 너무 무거웠다. 두 개나 남았구나. 처음으 로 그렇게 생각했다. 민자영이 자신의 이름을 고래고래 외치는 것도, 즐겁 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즐겁게 하는 것도 싫었다. 반시우도 그렇게 말했었다. 부럽다고. 그날도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부러워할 것 없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소원에 대가가 따른다는 건,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름이 바뀔 때 마다 다시 돌아온 풍선은 늘 전보다 몇 배는 더 커져 있었 다. 벌써 차례가 돌아왔나 초조했다. 다음 사람에게 얼른 넘겨야 하는데. 이러다간 또 폭탄을 맞게 생겼다. 펑, 하고 터지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하하하, 나는 아니다. 너구나, 너. 이번 판의 불쌍한 애는 너야. 그래서 알고 싶었다. 이걸 너에게 주면, 나는 가벼워
풍선껌
185
질 수 있을까?
내가 풍선을 불면, 나도 가벼워질까?
정말 만에 하나 반고흐가 풍선을 불어준다면, 사람들
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게 뭔지 조금은 알 수 있을지도 몰 랐다. 김김밥보다는 빈센트 반 고흐가 사는 세상이 조금 은 나을 것도 같았다. 세상은 원래 낯선 사람에게 조금 더 친절하니까. *
〈처음 댓글을 달아봅니다〉. 미끼를 던진 지 이미 너무 오래 지났다. 이대로 아무 것도 못 잡고 돌아가나 하고 있었는데, 낚시 바늘을 문 것 은 엉뚱한 사람이었다. ‘태백산 불곰’이라는 아이디의 그는 서툰 타자로 길고 장황한 말을 늘어놓았는데, 대충 요약하자면 20년간 포장 이사 일을 하면서 그렇게 특이한 이름을 가진 고객은 처 음 봐서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얼마 뒤 회사로 자신 의 이름이 적힌 졸업장을 택배로 받았다. ‘김김밥’이라고 적힌 수신인에 그녀가 누구였는지 떠올랐다고 했다. 뭐가 뭔지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택배는 문득 그에게 진짜 졸 업장을 받고 싶다는 용기를 주었다.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 하고,
안혜민 소설
186
대학에 가고, 한에 맺힌 듯 대학원까지 갔다. 그는 끝내 지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며, 고맙다는 이야기로 긴 글을 마무리 지었다. 법적 자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연 락을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구멍 아래에 모인 사람들은 원래 이렇다 할 이유 없
이 누군가를 미워하다가도, 왜 그랬는지 까맣게 잊어버리
곤 한다. 태백산 불곰의 댓글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잠재우지 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들이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그저 제보자가 증거 물로 제시한 편지가 갖는 법적 효력이 약해지고 또 다른 증거물인 졸업장에 의해 기각되었을 뿐이었다. 재판장은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피고인 김김밥은 풀려났다. “정말 그건 평생 안 쓸 생각이야?” 병원에서 마주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정신과 같은 곳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해왔다. 나와는 평생 상관없는 곳. 한번 발 을 딛게 되면 내가 얼마나 엉망인지 인정해버리는 꼴이 될 것이었다. 댓글을 하루에도 열댓 개씩 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따라 달기 시작하는 잔인한 말들이, 마치 나를 따르 는 작은 병사들 같았다. 하나둘씩 병사들은 내 밑으로 잔 뜩 모여드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 이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줬다. 다시 반시우의 라이브 방송을 시작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다. 넌 나한테
풍선껌
187
그렇게 대꾸하는
법원에서는
서
이
할 말이 그거밖에 없냐?”
김김밥은 좋아 보였다.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는데, 같은 병원에
같은 진료실을 나서는
여자애는 여기서조차 자신이
특별하다는 듯이 굴었다. 화가 치밀었다.
“인터넷 방송, 정말 하고 싶은 일이야?”
반시우는 딱딱하게 물었다.
“평범해지고 싶어 했잖아, 너. 이제라도 그건 나한테
넘기고 남들처럼 취직 준비 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겠어?”
김김밥은 가방 안에서 익숙한 양철통을 꺼냈다. “어차피 이게 있는 한 난 평범한 적이 없었어.”
반시우는 통을 당장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유를 생각하거나 과정에 납득하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 였다. 그저 반사적으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싶었다.
“그걸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뭔데?”
반시우가 말했다. “좋아하지도 않잖아. 간절하지도 않고. 난 간절해. 간 절하게 필요해.” 김김밥은 반시우를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간절한데?”
“이름.”
반시우가 대답했다. “네 이름이 간절해.” 김김밥은 양철통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재판은 어떻게 됐어?”
자기가 고소해놓고는 안부 묻듯 말하고 앉았다. 반시 우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 있는 거 안보이냐. 정신과 상담이 요구된다나 뭐라나.”
“태백산 포장이사, 너도 그때 자영이가 얘기한 거 기
안혜민 소설
188
억나지?”
김김밥이 말했다.
“그 아저씨가 최근에 연락이 닿았는데, 변호사 되셨대.
고맙다면서, 법률 자문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더라.”
“그래서?”
반시우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금 나한테 그 아저씨를 소개라도 시켜주겠다는 거야?”
“응. 변호사 구할 돈도 없을 거 아니야.”
김김밥이 대답했다.
“됐어, 기껏해야 벌금이나 물 텐데.”
“그럼 벌금 낼 돈은 있어?”
반시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상관인데?”
김김밥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양철통을 내밀 었다.
“이걸로 내라.”
“뭐?”
“말했잖아, 이게 소원을 들어준다고.”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반시우가 알고 있던 동물의 왕국은 단순했다. 사자로 태어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살 아남기 위해 달리고, 사자는 이들을 사냥한다. 그저 살아 남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그날 교양 수업 강의실에서도, 미대 건물 앞에서도, 작명소 부스 안에서도, 일일 포차에 서도, 나는 그걸 하고 있었는데.
풍선껌
189
왜 이 이상한 애는, 자신이 사자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 왜 내게 풍선껌을 내미는 걸까? 여기가 동물의 왕국
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럼 여긴 어디지?
반시우는 포장지를 벗기고 껌을 입안에 넣었다. 복숭
아 향이다.
잘근잘근, 질겅질겅, 금세 걸쭉했던 작은 공이 입안에 서 뛰어놀았다.
어딘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것들이, 폐의 가 장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느새 입 한가득 차 버려서, 당장 내뱉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온 힘을 다 해서, 그러나 부드럽게 내뱉었다. 후우우― 그러면 가볍게 가볍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아, 이제야 알겠어. 여기는 놀이공원이었다. 우리 건너편의 사자는 사람 들에게는 관심도 없는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다음 은 얼룩말을 보러 갈 차례다. 내가 달려 나가자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며 뛰지 말라고 외쳤다. 가는 길에 만난 풍선 을 불어주는 아저씨가 내게 방금 만든 풍선 칼을 건넸다. 나는 신이 나서 풍선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지나가던 여자애가 잔뜩 흩뿌리고 간 비눗방울이 터져버렸다. 펑! * “자, 복숭아 반 여러분. 먼저 자기소개를 해볼까요?”
안혜민 소설
190
긴 머리에 볼이 유난히 발그레한 복숭아 반 선생님이
말했다.
“윤다영입니다.”
윤다영이 말했다.
“저는 박지상이에요.”
박지상이 손을 번쩍 들었다.
“한규선이요.”
한규선이 말했다.
다들 마지막 남은 사람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여자아이는 머뭇거렸다.
“저, 저는 김김밥이라고 합니다.”
누군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규선이 웃음을 참고 있었다.
윤다영은 갑자기 선생님을 쳐다보더니 김김밥을 가리 켰다. “선생님, 쟤 이름이 이상해요.” 복숭아 반 선생님은 윤다영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가 르쳤다. 사과도 하게 했다. 하지만 김김밥은 그날 이후로 복숭아 반에서 가장 이상한 애가 되었다. “오늘은 폭탄 돌리기 놀이를 할 거예요.” 복숭아 반 선생님이 말했다. “자, 이 풍선이 폭탄이에요. 얼른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않으면 터져버리니까 조심해요!” 아이들이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손에서 손으로, 분홍색 풍선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김김밥이 다섯 번째
풍선껌
191
로 풍선을 받은 순간,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시간 종료!”
아이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김김밥은 풍선을 발로 밟
아 터뜨려버렸다.
펑!
“꺄악!”
한규선이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김김밥 이상해요!”
김김밥은 규선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네가 더 이상해!”
한규선이 울기 시작했다. 김김밥은 복숭아 반 선생님 께 혼이 나야 했다.
자리에 돌아왔을 때, 옆자리에 앉은 박지상이 무언가 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
박지상이 말했다. “고마워.” 김김밥은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달았다. “난 네 이름, 멋진 거 같아.” 박지상이 말했다.
“아까 한규선을 무찌른 것도. 우리 이거 갖고 같이 놀래?”
블록 장난감이었다. 김김밥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
람은 놀이 시간 내내 아주 근사한 성을 만들었다.
“나도 같이해도 돼?”
안혜민 소설
192
윤다영이 다가왔다. 윤다영은 성 주변에 갖고 놀던
형들을 배치시켰다.
“이것도 붙여줘.”
한규선은 직접 그린 깃발을 내밀었다. 복숭아 반 선생
님은 가위와 테이프로 깃발을 멋지게 잘라 붙여주었다.
“성 이름은 뭘로 하지?”
박지상이 김김밥에게 물었다.
“음….”
김김밥은 잠시 고민하다가 선언했다. “여긴 김김밥의 성이야.”
띵동. 깜빡 졸았나 보다. 김김밥은 잠을 깨려고 애쓰며 의자에서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진료대기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이 보였다. “김김밥 환자분?”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옆자리에 앉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네.” 김김밥이 대답하자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실 들어가실게요. 다음 반시우 환자분 대기해주 세요.” 주섬주섬 일어서려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자신 을 여전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풍선껌
193
인
“이름이 참 예쁘시네요.”
그래, 다 집어치우자. 이 말이 듣고 싶었다.
김김밥은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에필로그.
그날은 하필 유치원에서 안전교육을 받은 날이었다.
부모님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장소에서 움직이지 말고 부
모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릴 것. 다 같이 꼭꼭꼭, 잊지 맙시 다, 세 번 합창까지 하고 왔는데 놀이터에서 실컷 놀다 보 니 문득 엄마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혼자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한 게 문제였다. “으아아앙, 엄마아―” 무서워서 막 눈물이 났다. 선생님 말대로 그냥 거기에 서 있을걸.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어, 엉엉엉. “꼬마야, 왜 울어?” 전봇대같이 키가 큰 오빠였다. 오빠는 울지 말라고 메로나도 사주고 엄마가 자주 못 먹게 하는 풍선껌도 사 줬다. 분홍색이라서 골랐을 뿐인데 복숭아 맛 좋아하는구 나, 라고도 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었다.
불
안혜민 소설
194
“풍선껌
줄 알아?” 내가 고개를 내젓자 오빠는 풍선껌을 입에 넣고 열심 히 씹었다. 오물오물, 어제 애니메이션에서 본 다람쥐가 생 각나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자, 봐봐.”
오빠가 우물대며 말했다.
후우우. 후우우우. 입안에서 불쑥 풍선이 튀어나왔다. 점점 커지는 껌에
손을 대려고 하는 순간 펑, 하고 터졌다.
“어때, 재밌지?”
오빠는 나를 놀이터까지 데려다주었다. 가는 내내 우 리는 풍선껌 한 통을 전부 불었다.
“어? 다 먹었네.”
내가 빈 통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때 오빠의 주머니 사이로 삐져나온 분홍색 포장지가 보였다. “여기 또 있다!”
내가 손가락으로 껌을 가리키자 오빠는 당황한 얼굴 로 풍선껌을 주머니 속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건 안 돼.”
“왜?” 내가 말했다. “나 한 번만 더 해보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빠는 계속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몇 번이나 고집을 부리자, 오빠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내 눈높이에 맞춰 쭈그 려 앉았다.
“이건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이건 사실 마법의 풍선껌이야.”
오빠가 속삭이듯 말했다.
“마법?”
내가 되묻자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선껌
195
“이걸로 풍선을 불면 소원이 이루어져.”
오빠가 말했다.
“에이, 거짓말이지?”
내가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오빠는 이걸로 벌써 몇 번이 나 소원이 이루어졌다, 뭐.” “진짜?”
오빠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원이 뭐였는데?”
“그건….”
오빠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나는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이지롱, 하고 간지 럼이라도 태워주기를 바라기에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는 거.”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빠는 하나 도 안 이상한데. 정말 진짜로. 나는 두 팔을 휘적대면서 열 심히 설명했다. 오빠는 싱긋 웃어주었다. “봐봐, 풍선껌이 소원을 들어준 거라니까?” “엄마!”
놀이터에는 엄마가 있었다. 오빠는 나와 헤어지기 직 전에 왼쪽 주머니에서 껌 하나를 꺼냈다.
“이거, 하나 줄까?”
마법 풍선껌이라고 했는데, 아까 먹었던 복숭아 맛이 랑 똑같이 생겼다.
안혜민 소설
196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엄마가 못 듣게 귓속말을 했다.
“잘못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어떡해?”
오빠도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걱정 마. 열 밤만 자면 다시 돌아와.”
열 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이었다. 매년 내 생일 도, 크리스마스도, 놀이공원에 가는 날도, 그보다 훨씬 긴 약속도 잘 참았으니까. 잘 가, 멀어지는 오빠를 향해 열심히 움직이는 내 손 에는 마법의 풍선껌이 들려 있었다. 엄마가 뺏기 전에 주 머니에 넣어야지. 아주 아주 간절한 날에, 몰래 입에 넣고 씹을 생각이었다. 아무도 모를 거야. 풍선을 후, 하고 부는 것만 안 들킨다면.
풍선껌
197
류한정
200 류한정 시 두 근 두 근 6 온온함과 신기함과 호기심과 기대와 설렘과 들뜸과 까르르 깔깔깔깔 껄껄껄 끼득끼득 이히히힛 7 기다림과 의문과 의심과 의혹과 갑갑함과 97과 낭패스러움과 알쏭달쏭함과 떨떠름함과 1 8 희망과 궁금함과 섭섭함과 야속함과 어이없음과 2 9 초조와 언짢음과 패기와 75와 용기와 자신감과 다급함과 3 10 실수와 도전 4 11 히죽거림과 고심과 억제와 59와 고민과 근심과 염려와 회한과 으이구 5 12 기막힘과 불편함과 참을 수 없는 질문과 6 1 시도 7 2 허탈함과 허무함과 지루함과 갈망과 갈증과 8 3 훗훗함과 가정과 공상과 추측과 가설과 54 와 간구와 후덥지근함 불면과 어이없음과 9
201 두근두근 4 번뇌와 상상과 꿈과 망상과 예상과 심란함과 씁쓸함과 10 5 추측과 헛됨과 괘씸함과 속앓이와 11 6 달갑잖음과 아이쿠 아휴 아하하 12 7 그저 그런 후련과 텁텁함과 가소로움과 쉬고 싶은 덤덤함과 13 8 가뿐함과 피곤함과 멍멍함 14 9 끝 15 10 11 12 |
202 류한정 시 문학적
/
품격 1. 실험 목적 :
2. 실험 원리 :
3. 실험 방법 :
4. 실험 결과 :
5. 결론 및
:
6. 참고 문헌 :
재능(1996)
태도의
오월 (안개 낀) 신평리에서 나르시스를 위하여
탁류
원숭이와 폐허에서 밤의 노래(를)
세월
고찰
찌그러진 모습으로 / 상처, 그 언저리 /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신춘문예
급한 공지에도 좋은 작품을 맡겨주신 회원분들께 감 사드립니다. 빡빡한 기한에 밤새워 원고를 교열하고 늦게까
지 조판 과정을 지켜봐준 쑥, 책의 구조를 짜고 설계한 은 서 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3년 만에 다시 연락 주신 쿼토
측과 낯선 연락에도 선뜻 후원해주신 광고주님들께도 감 사 인사를 전합니다. 펜데믹으로 비대면 기간을 겪으며 회장으로만 만 3년 을 채우고 동아리를 떠납니다. 한편으로는 크나큰 위기이 기도 했지만 지나고 나니 성장을 가져다준 기회였습니다. 다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때, ‘글을 쓰고 글에 대 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이어가 성장과 의미의 공간을 남겨주신 선배님들 께 감사를 올립니다. 남은 분들도 이 공간을 마음껏 누리며 이어가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2022년 11월, 회장 문현식
나가며
“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가. 빅뱅 이후 약 137 억 년의 시간이 지난 동안 우주에는 수많은 분기점이 있었 다. 그 많은 갈래를 지나 나와 너는 여기에 존재한다. 기적 같은 만남의 신비를 느끼면서 ‘네’가 겪어 온 여러 사건을 짐작한다. 그 안에는 희와 비, 기대와 좌절, 희망과 우울이 연속되는 심장 박동으로 엉켜 있다. 그 맥박을 나의 것처 럼 고요히 느껴본다.” ―‘들어가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