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문학회 문맥 2019년 스물아홉번째 문집 신당의밤

경희문학회 문맥 2019년 스물아홉번째 문집 밤의 당신
경희문학회 문맥 2019년 스물아홉번째 문집 신당의밤

초판 1쇄 찍음 2019년 11월 15일 초판 1쇄 펴냄 2019년 11월 23일 개정판 펴냄 2022년 8월 29일 지은이 가 은 강우석 김민영 노혜린 박경도 안혜민 윤정준 이동현 이성은 이한나 하태훈 펴낸이 윤정준 책임편집 문현식 편집 송유연 안혜민 이동현 최정연 표지 권담윤 디자인 문현식 제작 윤형식 제작처 쿼토 펴낸곳 경희문학회 문맥 주소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학생회관 313호 전자우편 khu moonmek@gmail com 인스타그램 @khu moonmek Ⓒ 가은, 강우석, 김민영, 노혜린, 박경도, 안혜민, 윤정준, 이동현, 이성은, 이한나, 하태훈 2019, Printed in Seoul Korea *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저작권은 각 작품의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무단 전재 및 복제,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밤의 당신 경희문학회 문맥 2019년 스물아홉번째 문집


여는 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우산이 떠올랐다고 고백하고 싶다 내리는 비에 우산을 펼치고, 평소와 다른 무게로 거리를 걷는다.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그 무게가 서툴러 서로의 우산 끝을 스친다. 길 끝에서 땅이 마르기 바란다. 혹은 비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어째서 삶에 자꾸만 비가 내리는지. 그러다 보면 양비론의 일신론 같은 우둔한 어구가 머리에 스치 고, 우산 쓰는 것을 멈출 수 없어 희미한 우울을 삼키고, 당신이 쓴 우산의 색이 여전히 궁금하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미래를 상상한 다. 나는 우산의 안부가 이전과 같은지 물으며, 우산을 쓴 모양 으로 내달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스칠 수 없어 우산 살을 잔뜩 구기며 부딪히겠지. 그때 당신 우산의 색을 볼 수 있 을까 2019년 11 윤정준월
차례 7 여는 말 12 신주(神主) 14 연목구어(緣木救魚) 16 성인식 18 크레바스 22 그날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23 피터팬 증후군 2 26 새벽 교회 28 만인의 목구멍 32 탐조 58 생의 기록 62 일 65 메두사 노혜린이한나안혜민가은하태훈이성은
70 문손잡이 72 검은 풀 74 상자의 테라피 75 컵의 반지름 추정 80 불안 106 밤의 당신 107 밑동과 타일과 4호선식의 로망 109 서부해안, 2001년 경 111 당신이 짖은 이유 114 버마재비 광시곡 120 야윈 무지개 121 남부여행 124 월광과 투창 125 온전한 둔갑술 126 3차원 지리서 ―덴마크식 아이스크림 130 극의 도시 148 ○ 155 감사의 말 김민영윤정준이동현강우석박경도

잔뜩 잃은 얼굴들이 거리를 행진한다 저마다 잊은 것들을 짐작하면서 열 수 없는 것들은 반드시 돌이킬 수 없는 것과 같고 당신은 그 잔상이 대체 무엇이라고 믿는가 이성은

이성은 시12 신주(神主) 수많은 기둥 사이에서 당신은 선택해야 할 때. 어린아이는 자연스럽게 솜사탕과 풍선에 끌렸고 까마귀는 반짝이는 것에 사활을토끼는매료되었으며네잎클로버에걸었다 甲은 부끄러움에 죽었고 乙은 죽여서 이름을 떨쳤다 丙은 죽음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재산을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소년은 당연하게 운명적 사랑을 믿었고 공작은 온몸을 치장하는 것에 개는몰두했으며밥그릇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었으므로 언젠가
신주(神主) 13 시들어가는 꽃과 선명한 조화 중 어느 것이 더 아름답냐고 물었을 때 까마귀는 역시나 보석을 골랐고, 까마귀의 눈으로. 영원이란 글자가 익숙한 당신은 무덤에 친숙하지 않은 눈을 가졌고 무엇을 택하든 설득은 당사자의 몫, 인간은 특별히 뛰어난 종족이므로 스스로를 논리적 비약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성은 시14 연목구어(緣木救魚) 혹시안녕 나 울고 있니? 총을 가져다줄래? ―제발 부탁이야 수렁을 끌어와 줘 ―나 혼자선 못하거든 나무 위 물고기가 파닥이는데― 참 보고 있기 힘든 광경이군 안 그래요, 다들? 어쩔 수 없지 뭐 빨리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아 괜찮아 또 모르잖아 갈라지지 않을 수도 ―총을, 총을 가져다줘 아직 감각은 살아있으니 더 격하게 파닥이면 그러다 바다로 빠지는 거지
연목구어(緣木救魚) 15 속이 다 드러났는데 방법은 이거 하나입니다 준비하시고, 탕―!
이성은 시16 성인식 지금부터 축복의 카운트 다운을―! 온몸에 장식용 조명을 칭칭 감고 삶을 위하여! 삶을 위하여! 삶을 위하여! 달팽이를 먹거나 고양이를 삼키는 것 시위를 히키코모리가하거나되는 것 철인 3종에 도전하거나 한강 물에 빠지는 것 멀쩡히 말하는 걸 잊을 때쯤 폭죽이 터졌습니다 맥주손에최초로쥐어진한잔
성인식 17 끝을 위하여 끝을 위하여 끝을 위하여 다 같이 ―나는스무고개를둘러앉아누구입니까? 세상이 빙빙 돌고 있어요 나는 더 이상 앞뒤를 구별할 수 없고 질문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걸 멈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자라지 않는 …결국은 상실입니까? ―쉿, 여기는 꿈과 환상의 나라를 망치와 황금으로 완성하는 곳, 예의를 갖추십시오 정답을 맞히는 자에게는 바르게 토하는 법을―
이성은 시18 크레바스 돌아가십시오, 여기는 당신의 땅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듣고 저는 옆으로 몇 걸음을 옮겨 이 땅에 닿았습니다. 한발을 들어 뒤로 내딛고는 어느 땅이든 내가 서 있는 것이 어색한 게 아닌가 하고, 그렇지만 되돌아가는 이 상황만은 익숙하다 여기며 저는 상한 홈을 한 걸음, 건너뛰었습니다. 영원한 경계는 없습니다, 누군가 말했고 빛이 있는 한, 어둠은 영원하다고 대답을 속삭였습니다. 사실 상한 것은 걸음 하는 발이었고 경계는 그 자리에 있으며 저는 단지 두 팔로 버티면서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크레바스 19 우연한 만남이 없기 때문인가, 진정한 위로는 무엇인가 구덩이의 끝을 재고… 잿빛의 땅을 상상합니다. 마치 중간이 있는 것처럼 근데 결국 그마저도 한걸음에 불과했고 끝내 갈라지는 건 단 하나의 의지란 걸 물기 어린 목소리는 그 사실을 반복했습니다끝없이크레바스의기억하고서끝을향해되돌아감을 .

시간을 붙잡고 싶어. 초조함은 여유를 앗아가고. 사랑한다 말하면 이 순간을 붙잡을 수 있을까 하태훈

하태훈 시22 그날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맑은 하늘에 구름 하나가 흉터처럼 새겨져 있었다 하늘에선 새가 떨어졌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늙은 사내가 단상에 올라갔다 모두가 꼿꼿이 얼어붙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눈물을 삼켰다 애국가가 울렸다 손을 눈썹 위에 올렸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손은 그대로 눈썹 위에 있었다 어깨가 아파져 왔다 손을 내리면 어른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23피터팬 증후군 2 “사람이라면 가슴 속에 한 마리의 파랑새를 키워야지. 내 가슴에도 한 마리 키울 거야. 가슴에 넓은 바다를 만들어 훨훨 날게 할 거야. 하얀 하늘과 푸른 바다, 그리고 짙은 파랑새. 나 는 파랑새를 기다리는 피터팬이니까.” “환자분, 상담은 끝나셨고 카운터에 가셔서 진단서 받으시 고 내일 입원하시면 돼요.” 치료한 지 한 달이 지나자, 그는 가슴 속에선 파랑새가 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의 갈비뼈 모양이 새장과 똑같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도. 가슴 속의 파랑새의 날개를 찢어 버리고 난 후에야 그는 퇴원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으며 가슴 안에는 폐와 심장, 기관과 식도로 가득 차 있다고 배웠다. 그런 데 왜 가슴을 두드리면 ‘텅, 텅’ 빈 소리가 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피터팬 증후군 2

사람들은 말합니다. 무용한 것에 시간 쏟지 말라고. 문학이 무용한 것일까, 고민하다 여기까지 왔습니 다. 한 자씩 남길 때마다 조금 더 나다운 삶으로 가는 것을 보니 어쩌면 정말 무용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었는지 모릅니다 의미 있는 것을 좇는 사람들이 많 아졌으면 합니다. 자연히 글이 제 몫의 유용함을 비 출 때까지 쓰고 또 쓰겠습니다. 가은

가은 시26 새벽 교회 아버지를여기 부르짖는 자들이 있다 징그러운 벽돌담 첨탑 아래서 내 죄를 사하여 주소서 열 살배기 딸내미를 등지고서 스물 줄 허벅지를 더듬고 온 손아귀가 연신 맞닿으며 내 뉘일 곳 천당이기를 구원이 지척이오 침 흐르는 입술이 말한다 신이 감복토록 머리를 조아립시다 쿵, 쿵, 허덕이는성부천장에서벽에서바닥에서쿵벽으로천장으로십자가로성자는우릴보시오심장이식도를타고 넘어
새벽 교회 27 뇌까지 재단의너머리에골고타로들어찼으니데려가시오화관얹고나할것없이촛불을깨뜨릴 듯이 베드로의 닭은 죽었는데 들어찬 포도주 바다에 떠오르는 성령 너의 죄를 사하노라 허공에 메아리만 운다
가은 시28 만인의 목구멍 허 교수 입안에는 벌레가 살았다 살고 있다 점만치 작던 것 이 손가락 두 마디를 넘어도 아무도 말하지 않아 끓어오르는 궁 금증을 참기가 어렵지만 혼자서만 입 열기는 아무래도 골치가 아파 어제는 횡격막을 배웠다 허 교수는 말을 뱉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다고 폐부가 말의 근원이라고 소리치려다 말았다 벌레를 지키려고 어디서 본 것 같지 우리 작년 겨울 교회에서 설교하던 목사 혓바닥에도 꼭 너 같은 게 있었는데 언젠가 연구실로 찾아 가서 허 교수 목구멍을 내려다보며 기도로 손을 넣어 쥐어 버릴 거야 그 전에 벌린 내 입안으로 침을 뱉으면 어쩌지 너는 잽싸 게 들어와서 목구멍이 지 집인 양 똬리를 틀 텐데 나는 얼이 타 서 아무 말도 뱉을 수 없어 아무 말도 영영 잠깐만 목이 간지러 우니 움직이지마
만인의 목구멍 29

안혜민

안혜민 소설32 탐조 옛날 옛적에 있었다던 잉카 문명에는 상위 계층으로 올라 가기 위한 시험이 있었다 시험에 응시한 사람들은 4년 동안 혹 독하게 교육받는다. 참가자 각자의 능력과 자질을 길러주며, 상 위 계층에 걸맞은 정신 교육도 받게 한다. 그런 뒤에 최종 시험 을 거쳐서 당락을 가르는데, 그 종목은 다름 아닌 ‘달리기’였다. 참가자들은 정해진 장소까지 5마일 정도의 경주를 펼친다. 경기 전날, 시험 관리자들은 언덕 정상에 미리 암염조각상 을 줄지어 세워둔다. 이 조각상은 다양한 동물들의 모양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매, 독수리, 야생오리, 벌새, 여우, 뱀의 순서다. 경기에 응한 사람들은 달리기 경주를 해 정상에 도착한 순 서대로 가장 고귀한 조각상부터 차지하게 된다. 가장 고귀한 새인 매부터 쓸데없는 파충류인 뱀까지. 매를 차지한 이는 가 장 강한 잉카인이 되고, 뱀을 차지한 이는 가장 약한 잉카인이 된다 툭. 읽고 있던 영어 지문 위로 내 샤프심이 부러졌다.
탐조 33 “자, 그럼 출제 요소는 어떤 게 있느냐. 먼저 빈칸추론을 내 기 참 좋은 지문이다.” 머리가 벗겨진 영어가 칠판에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요 하던 교실이 금세 서걱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진다. 나는 욕을 하 며 샤프심을 찾아 필통을 뒤적거렸다. 겨우 샤프심을 넣고 고개 를 드니 벌써 다음 문장을 나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필기를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주변 애들은 여전히 정신없이 같은 걸 받아적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소처럼 까마귀들이 전깃줄에 잔뜩 앉아있다. 나는 매나 독수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분명 여우나 뱀이 아닌 새였다 어디에 서야 할지 모르는 까마귀였 다 사람들은 까마귀를 도시에서 쫓아낼 궁리만 하고 있었고, 나는 전깃줄을 떠나기가 무서워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런 까마귀를 지켜보는 형이 보였다. 형은 아빠의 카키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 새들이 날아간다. 아직 입김이 나오던 겨울의 끝자락, 아빠 는 나와 형을 데리고 산에 갔다. 아빠 손에 이끌려 새벽같이 버 스에 몸을 실으면 나는 정신없이 잠만 잤다. 깨어보면 처음 보 는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딱딱한 흙바닥, 쓰러져가는 가게들, 그리고 앙상한 산 아빠가 우리를 데려가는 산은 늘 인적이 드물었다. 어렴풋 이 기억나는 아빠는 카키색 모자를 쓰고 어린 나만 한 카메라를
안혜민 소설34 목에 맨 모습이었다. 새가 나오는 곳은 얼어붙어 있었다. 남의 집에 발을 들인 우리는 숨죽여 걸었다. 아빠가 카메라를 들어 올린다. 나는 추위에 떨며 아빠를 쳐 다봤다. 집에 가자고 조르고 싶었다. 너무 졸리고 추웠다. ―아빠. 아빠. 아빠는 쉿,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구부려 사진을 몇 장 더 찍어댔다. ―형. 나는 아빠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형에게 다가갔다. ―형. 나 졸려. 형은 나를 힐끗 보더니 이내 다시 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형이 웅얼댔다. ―응? “드디어 왔다!” 눈이 번쩍 떠졌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택배 상자 사이에 파묻힌 형의 얼굴. 나는 방 안을 가득 채운 상자들을 보며 어안 이 벙벙했다. “이… 이게 다 뭐야?” 나는 헛것을 보는 줄 알고 눈을 벅벅 비볐다. “형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돈 좀 썼다.” 형은 행복한 표정으로 택배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택배 상 자에는 커다랗게 카메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또 카메라 샀어? 아니, 이게 다 몇 개야!” 나는 잠이 확 달아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탐조 35 “어허! 일하다 보면 이 정도는 필요해.” “백수가 일 같은 소리 한다.” “말조심해! 전문 탐조가에게 그게 무슨 실례야.” 나는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지만 형은 새 카메라에 흠뻑 빠 져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서둘러 이 상 황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야, 근데 밥이 없더라.” 방을 나서는 나에게 형이 말했다. “뭐했냐, 너. 밥도 안 해놓고 말이야.” 나는 화를 억누르며 형을 쏘아보았다. 형은 정말 모르겠다 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카메라에 집중했다 “그러게…, 고3이 밥도 안 해놓고 뭘 했겠냐.” 거실로 나온 나는 한숨을 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형은 까먹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올해 고3이 되었다. 덕분에 올겨 울은 나에게 오직 문제집과 인강, 그리고 놀고먹는 형을 위한 가사 노동의 시간이었다. 엄마는 회사 일이 바빠서 늘 우리가 잠든 뒤에 오고 새벽같이 나갈 때가 많았다. 고로 방학 내내 나 는 저 기생 식물 같은 인간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형은 아직 나라에서 청년이라고 불러주는 파릇파릇한 스물 다섯이지만 외모는 거의 실직 당한 아저씨에 가까웠다. 올해로 백수 2년 차. 집에 있을 때는 꾀죄죄한 몰골로 하루 종일 뒹굴 거리거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카메라를 사들였다. 카메라를 사 는 건 탐조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침을 대충 차리니 어떻게 알았는지 형이 나타났다. 형은 냉큼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들더니 국을 한 술 떠먹었다.
안혜민 소설36 “캬, 간이 딱 맞네. 식당 차려도 되겠다.” 그런 칭찬 하나도 안 고맙다. 왜 내가 그런 칭찬을 들어야 하는 거냐. “형. 오늘은 제발 나 학교 간 동안 빨래 좀 해놔. 나 이제 모 의고사 준비 땜에 늦게 온단 말이야.” “아, 미안하지만 형 오늘부터 출장 간다. 모레나 올 거야.” “출장?” 나는 어이가 없어서 반박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겨울 철새를 탐조하기 위해 강릉에 다녀오려고.” 형은 ‘출장’이라는 말을 잘도 했다. 그래도 가서 뭐라도 생 산적인 일을 할 생각인가 싶었다 “탐조가로서 이번 강릉 출장은 아주 중요해 회…! 회를 먹 을 예정이거든.” 역시나. 목적은 그거였냐. 형은 강릉 식도락 여행을 떠날 생각에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헤, 홍게찜, 전복회, 그리고 광어….” “나 학교 간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형이 물었다. “속이 안 좋아.” 나는 대충 둘러대고 집을 나섰다. 속이 진짜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빠도 새를 보러 나를 데리고 바닷가에 간 적이 있었 다 형은 바쁘다며 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아빠가 사준 회 한 접 시를 혼자서 다 비웠다.
탐조 37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형은 대학에 입학했다. 교대 수석 입학이었다. 그때 난 그게 대단한 건지도 잘 몰랐지만, 적어도 학생 시 절 형은 12년 내내 학교에서 모범생이었고, 방학식을 하는 날이 면 상장을 한가득 들고 왔다. 숙제를 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형 에게 달려가는 것이 내게는 당연했다. 형은 남을 도와주는 걸 좋아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모든 게 달라진 건 내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때였다. 선생님은 내 성적이면 외고를 노려볼 만하다며 엄마를 부추겼 다. 나도 바람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에게는 내 실력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게 있었다 형이었다 “형! 나 이것 좀 봐줘.” 나는 생활기록부를 들고 형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늦은 저 녁, 형은 방바닥에 혼자 앉아있었다. 내가 종이뭉치를 내밀자 형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뿐, 받아들지 않았다. “민수야.” 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자퇴했다.” 나는 그해 지원한 외고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최종 합 격자 발표가 나던 날, 형은 아빠가 죽은 뒤 처음으로 탐조를 하 러 떠났다. * 학교에 도착하니 8시쯤이었다. 교실은 아직 한적했다. 남 들보다 일찍 왔다는 생각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겨울 방학에도
안혜민 소설38 나는 거의 매일 학교에 갔다. 오전에는 특강을 듣고, 오후에는 자습을 했다. 필요해서 특강을 듣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강 사실을 생활기록부에 기록하기 위해 들었다. 다들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도 안 할 수가 없었다. 애들은 특강을 듣고 나면 다시 쓸모 있는 수업을 듣기 위해 학원에 갔다. 옆자리에는 오수가 앉아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이 녀석 이 공부를 하는 광경을 보게 되다니, 내가 고3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고3이 된 지 이제 두 달,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애들도 책을 펴기 시작한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오수는 너무 무섭게 집중을 하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단어장을 꺼냈다. 8시 40분 수업 종이 쳤다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고 애들 대여섯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특별반 애들이었다. 차림새를 보 니 한참 전에 학교에 온 모양이었다. 손에는 문제집이며 공책이 잔뜩 들려 있었다. 단어장을 펼쳐놓고 아침잠과 사투하던 나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김민수.” 하지만이었다. 녀석도 특별반이다. 뿔테 안경 뒤에서 나를 관찰하는 표정이 애매하다. 하지만은 깡마른 몸으로 두 손에 짐 을 한가득 들고 자기 몸집보다 큰 가방을 메고 있었다. “어, 안녕.” 하지만과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어릴 적에는 곧잘 어울렸 는데, 언제부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들끼리는 여전히 친 해서 가끔 곤란하다 “뭐하냐?” 그렇게 문제집을 한 아름 안고도 남들이 뭘 하는지가 궁금한
탐조 39 가, 라고 생각해버렸다. 나는 단어장에 어정쩡하게 손을 올렸다. “어, 그냥.” 하지만은 단어장을 쓱 훑더니 그제야 씩 웃었다. “이 단어장 그럭저럭 괜찮지. 근데 너무 쉽지 않냐?” 그 뒤로도 한참을 단어장에 대해 논설한다. 뭐라는 걸까. 난 그냥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오후 2시. 쉬는 시간에 오수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얼마 전 생긴 쇠창살 얘기를 했다. 학교에 와보니 창문이 느닷없이 세 줄의 두꺼운 쇠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누군 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는 거였다 “파이프 생기고 괜히 더 의식된다니까.” 오수가 말했다. “전엔 누가 생각이나 했다고.” 다른 애들도 쇠창살이 생기고 나서부터 창문을 힐끗대기 시작했다. “저렇게 창살까지 만들어 놓으니까 반이 진짜 감옥 같다.” 멍하게 창살 사이로 창밖을 보니 까마귀 몇 마리가 날아다 녔다. 오후 4시. 자습에 슬슬 이골이 나서 책에서 고개를 드니 하 지만이 교탁 앞에 나가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영어에게 뭐라 고 속닥거린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던 몇몇 애들이 눈길 을 주었다하지만의 말을 듣고 영어는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딱 히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그… 그러네, 라고 중얼
안혜민 소설40 거리면서 창가로 향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은 까마귀 떼였 다. 한두 마리도, 몇십 마리도 아니라 수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새카맣게 줄줄이 이어서 하늘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하늘을 뒤 덮을 정도였다. 하지만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영어는 이 리저리 뛰어다녔다. 뭔가 창문을 가릴 만한 것을 찾는 모양이었 다. 우리 반 커튼은 찢어진 지 오래여서 영어는 반에 굴러다니 는 체육복을 주워 다가 쇠창살에 널었다. 까마귀들은 여전히 그 틈새를 날아다녔다. “야, 그냥 새들이 지나가는 거구먼. 별것도 아닌 거 같고 유 난이야.” 누군가가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은 살 짝 얼굴이 붉어지더니 자리에 앉았다. 나는 까마귀 떼로 시커먼 창밖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내가 그렇게 비상식적인 사람도 아니고.” 쉬는 시간. 하지만이 같이 다니는 특별반 무리에게 투덜 댔다. “평소 같았으면 그랬겠냐? 우리 고3이잖아.” 특별반 무리는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럴만하지. 3모도 이제 얼마 안 남았고.” “그 까마귀 때문에 신경 쓴 시간 이것저것 합치면 거의 자 습시간 20분은 날렸을걸.”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분위기만 봐서는 까마귀가 사 람 하나 죽인 모양이었다. “학부모회에 얘기할까?”
탐조 41 무리 중 누군가가 말했다. “까마귀 떼들,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지나가더라고.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지 않아?” “맞아. 그냥 두면 오늘 같은 일이 또 생길 텐데.” 상대가 까마귀라니, 참 재미있는 싸움 구경이 될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후 6시. 더 이상 자습을 하기는 싫어서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집에 일찍 온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근데 민수야.” 엄마가 말했다 “아까 지만이네 엄마랑 통화를 했는데.” “으응.” 나는 대충 대답했다. “무슨 까마귀 얘기를 하더라. 까마귀 때문에 학부모회에서 학교에 항의를 할 거래.” 하지만의 엄마는 학부모회 간부다. 하지만… 그냥 하는 소 리인 줄 알았더니. 진짜 학교에 항의를 할 생각인 줄은 몰랐다. “까마귀?” 형이 눈을 번뜩였다. “무슨 일인데?” “아니, 얼마 전부터 까마귀 떼가 학교 주변을 계속 왔다 갔다 하거든 근데 그게 공부에 방해된다고 애들이 항의를 했나 봐.” 형은 입을 삐죽였다 “뭐 그런 일로…. 새들 좀 날아다니는 거랑 공부가 무슨 상 관이지?”
안혜민 소설42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고3이잖아. 떨어지는 꽃잎도 공부에 방해가 되는 예 민한 시기.” “근데 문제는 문제야.” 엄마가 말했다. “까마귀들이 시내 전깃줄에 쭉 앉아서 잠을 자는데 그것 때 문에 정전도 되고, 배설물 때문에 차가 뒤덮일 정도래.” “으웩.” “아무튼 민원이 들어온 곳에 시청 직원이 가서 레이저 장비 로 까마귀를 쫓아주나 봐. 지만이 엄마 말이 너희 학교에도 곧 간다더라.” 나는 그렇군, 하고 다시 밥에 집중했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대화가, 형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형은 그날로 그렇게 고대하던 강릉 여행을 취소했다. * 학부모회가 ‘까마귀 사건’으로 난리를 피운 지도 2주가 지 났다. 나는 개학을 했고, 엄마가 말한 대로 학교 측은 학부모들 을 달래기 위해 시청에서 사람을 불렀다. 시청 직원은 생각보다 작은 레이저 건을 달랑 들고 왔다. 레이저 건을 쏘면 초록색 빔 이 나왔다. 발표할 때 쓰는 레이저 포인터 같은 거였다. “야, 저 아저씨 또 왔다.” 오수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야자 시간이 되면 까마귀들은 잠을 자기 위해 전깃줄 위에 앉았다. 빽빽하게 전깃줄을 채운 까마귀 떼의 모습을 멀리서 보
탐조 43 면 가끔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시청 직원은 나름 부지런히 와 서 레이저를 쏘아댔다. 하지만 까마귀들은 잠깐 달아났다가 금 세 돌아오곤 했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살고 싶다.” 오수가 말했다. “뭘?” 내가 이해를 못 해 묻자 오수는 내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저 아저씨, 공무원이잖아.” 나는 끙끙거리며 레이저 건을 휘두르는 직원을 다시 내다 보았다 그렇게 말하니깐 시청 직원이 전문 장비를 든 새 전문 가로야자보였다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오수가 애매한 표정으로 나 를 쳐다보았다. “잘 가라.” 나는 서둘러 반을 나와 특별반 전용 자습실로 향했다. 모의 고사가 끝나고 나는 특별반이 되었다. 형은 내가 특별반이 되었 다는 말에 오, 그러냐, 고 짧게 대꾸하더니 곧 택배를 여는 데 집 중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많은 것이 변했다. 쉬는 시간이면 한 번도 말해 본 적 없는 애들이 나에게 모 르는 문제를 물어보러 왔다. 중상위권을 오가는 애들 사이에서 는 내가 갑자기 유행의 선두주자가 되어있었다 내가 쓰는 문제 집이 뭔지 확인하고 싶어 했고, 내가 어느 학원을 다니는지 알 고 싶어 했다. 오수는 나에게 더 이상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됐다. 공
안혜민 소설44 부하기 싫다, 는 말을 할 때면 내 눈치를 보았다. 이제 나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없다는 것 같았다. 달라진 건 오수 본인 만이 아니었다. 생활기록부를 확인하던 날이었다. “야, 오수 너 상장이 꽤 많다?” 한 녀석이 오수의 생활기록부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어, 그러게. 야, 좀 봐봐.” 애들은 모여들어 오수의 생기부를 구경했다. 오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꽤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어쩐지. 민수가 너랑 다닌다 했다.” 내 옆자리에는 이제 오수가 아닌 하지만이 앉았다 따로 공 부하는 자습 시간 동안만이지만, 특별반은 나를 그렇게 정의했 다. 하지만 옆에 앉아도 괜찮은 사람. 그리고 오수가 내 옆에 있 는 이유를 납득하고 싶어했다. “김민수. 넌 신경 안 쓰여?” 자습을 하다말고 하지만이 속닥였다. 얼굴이 잔뜩 구겨진 채로 하지만은 창밖을 눈짓했다. 초록색 레이저 불빛이 밤하늘 을 신나게 누비고 있었다. “아, 진짜. 저게 더 신경 쓰이네.” 하지만은 여전히 까마귀가 불만이었다. 나는 까마귀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어려웠지만. 얼마나 고민할 게 없으면 까마귀 가 불만일까 나는 하지만을 부러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탐조 45 특별반이 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올 즈음이었다. 내 일상은 대체로 평범하게 흘러갔다. 그날도 평 소와 다를 게 없었다. 학교에 도착해 교실로 올라가려는데 복도 끝에 낯익은 뒤통수가 교장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순간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았다. 잘못 봤겠지, 하고 나는 계단을 올랐다. 조회 시간이 되고, 작대기를 휘두르며 담임이 교실로 들어 왔다. 다들 1교시 영어 숙제를 하느라 귀담아듣지 않았다. “마지막 전달 사항이다.” 담임이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지난번에 까마귀가 공부에 방해된다고 신 고한 녀석들이 있었다.” 담임은 녀석들, 에 힘을 주며 투덜대듯 말했다 “이에 대해 학부모회가 나서서 항의를 했는데, 알다시피 그동안 제대로 대처가 되지 않았다.” 그랬지. 나는 레이저 장비로 까마귀를 쏘아대던 시청 직원 을 떠올렸다. “그래서 이번에 학교에서 전문 탐조가를 모셔 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몇몇 애들이 책에서 고개를 들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탐 조가, 라는 단어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매일 학교에 오셔서 작업을 하실 거니까, 이제부 턴 까마귀니 뭐니 쓸데없는 거에 관심 두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 도록.” 담임은 작대기로 교탁을 괜히 몇 번 내리치고는 이상, 하고 나가버렸다.
안혜민 소설46 쉬는 시간, 매점에서 돌아오니 반 애들이 창문에 모여 쇠창 살 틈새로 열심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무리에 합류한 내가 본 것은 교정 한복판에 서 있는 한 남자였다. 나는 순간 두 눈을 의 심했다. 그 남자는 형이었다. 형은 아빠의 카키색 모자를 쓰고 자기 몸만 한 삼각대를 설치하고 있었다. 시청 직원이 레이저 건 을 들고 오곤 했던, 까마귀들이 자주 나타나는 길목이었다. “야, 전문가라 그런지 다르긴 다르다.” 내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카메라 봐. 장난 아니게 비싸 보이는데?” 형의 뒤통수는 한눈에 봐도 신이 나 있었다. 가벼운 몸놀림 으로 카메라를 설치하더니 괜히 한숨을 내쉬며 장비를 꺼냈다 우리의 시선을 의식하는 게 분명했다 “야, 다 자리에 앉아라.” 영어가 교실로 들어오며 소리쳤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영어에게 한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 가자마자 형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따졌다. “뭘 어떻게 돼? 취직한 거지.” 형은 씩 웃으며 말했다. “취직? 형, 진짜 탐조가도 아니잖아. 교대 나왔잖아.” 나는 교대, 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교대 중퇴지 그리고 동생아, 그런 건 중요 하지 않단다.”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형의 눈빛은 어딘가 익숙했다. 형 이 아빠에게 “공부할 게 많아서요.”라고 할 때면 슬프게 변하던
탐조 47 아빠의 그 눈빛이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게 있지는 않거든. 학교에나, 취 직에나.” “뭔 소리야.” 나는 어색함에 괜히 입을 삐죽댔다. “됐다. 야, 오늘 저녁 메뉴는 뭐냐.” 형은 그 뒤로 매일매일 학교에 왔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에도 왔다. 내가 학교에 가기 싫어서 몸부림친 날도. 평 소에는 그렇게 누워있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 나보다 더 신이 나서 학교에 갔다 반 아이들은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는 형을 경외와 선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다보았다. 형은 늘 똑같은 차림에 자기 몸집 만 한 카메라를 들고 왔다. 그리고는 하루 세 번, 시간을 맞추어 까마귀들을 관찰했다. 새들은 여전히 학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런데도 형이 있고 없고는 달랐다. 하지만만 봐도 그랬다. 형이 온 뒤로 하지만 은 더 이상 까마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어떤 불평도 없었다. 그런 하지만을 속으로 비웃었던 내 머릿속은 중간고사 기 간 내내 엉망진창이었다. 문제를 풀려고만 하면 머릿속에서 까 마귀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형이 인정받았다. 인정받을 이유 가 없는데. 공부를 하면 내가 형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건지, 문 제를 풀면 형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건 확실한 거였는데 말이다 내가 오수보다 낫고, 하지만보다 별로 인 사람이라는 거. 그리고 중간고사를 본 뒤 나는 특별반에서 떨어졌다.
안혜민 소설48 * 아빠는 반도체를 다루는 작은 회사에 다녔다. 평범한 집안 에서 태어나 평범한 대학을 갔고, 평범한 회사에 취직한 거였 다. 성격도 조용조용하고 무난했다. 그런 아빠를 특별하게 만들 어주는 건 새였다. 아빠는 주말이면 탐조를 하러 가까운 산이라 도 나갔다. 우리가 태어난 뒤로는 꼭 우리를 데리고 갔다. 방학 을 하면 좀 더 멀리까지 갔다. 우리는 눈이 살짝 쌓인 강변에 앉 아 차례대로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과묵한 아빠와 새를 보러 가는 건 즐거웠다 산에서는 조용 히 해야 했으니까 거기서는 쉿, 하는 아빠와 말없이 새를 보는 시간이 대화와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에서 우리는 소리 없는 대화를 했다. 형과 나는 금세 컸다. 형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특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주말에는 아빠와 나 둘만이 집을 나섰다. 형이 시험이 있어서요, 라며 거절을 하면 아빠는 새를 보듯 형 을 쳐다보았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야만 잘 보이는 새, 가깝지 만 멀리 있는 새처럼 형은 우리와 거리를 두었다. 거리를 두어 야만 한다고 본인은 생각하는 듯했다. 공부를 해야 했으니까. 하는 게 옳다고 다들 생각하니까. 형을 집에서 볼 시간도 적어졌다. 수험생이 된 형을 우리는 찾아 나서야 했다 우리는 새를 보러 산을 오르듯 형을 찾아 나 섰다 그리고 언제나 새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새 를 관찰할 뿐이었다. 지켜볼 뿐이었다.
탐조 49 특별반에서 떨어지고, 내 자리가 전용 자습실에서 사라졌 다. 자리를 바꾸던 날, 새롭게 내 등수를 차지한 애가 한껏 상기 된 얼굴로 다가왔다. 자리를 내주고 교실을 나오는데 문에서 하 지만과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나오며 나는 애써 괜찮 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특별반에서 떨어진 것은 별일이 아니었 다. 난 원래 특별반이 아니었으니까. 교실로 돌아오자 오수가 나를 반겼다. 오수는 내가 돌아와 서 내심 기쁜 것 같았다. 아니면 나 혼자서 괜히 그렇게 생각하 는지도 몰랐다. 나는 내 탓을 하고 있었다. 성적이 떨어졌으니 까. 그건 무조건 내 잘못이었다. 시간은 차곡차곡 흘렀다 형은 여전히 매일 학교 교정에 와 서 탐조를 했다. 이제 형의 존재는 모두에게 익숙해졌다. 우리 도 모두 학교에 매일 왔으니까. 이상할 게 없었다. 모두가, 형까 지도, 그게 괜찮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야, 김민수. 매점이나 가자.” 오수가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말했다. 우리는 매점에서 과자를 몇 개 사서 쩝쩝대며 교정을 걸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참새들 몇 마리가 학교 건물 위로 날아다녔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까마귀들이 안 보이네.” 오수가 갑자기 말했다. “그 전문가가 오더니 진짜 없어졌나 봐.”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뭔 소리냐 이제 곧 여름이니까 없어진 거지 겨울 철새 잖아.” “까마귀가?”
안혜민 소설50 오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러냐, 고 중얼대더니 이내 수 학 공부가 힘들다는 얘기를 시작했다. 문득 내가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여름이 오고 있었 다. 까마귀는 그래서 사라진 거였다. * 여름은 탐조의 계절이 아니다. 한낮에 새를 보기 힘들고, 탐조를 하러 가면 더운 날씨와 엄청난 모기 때문에 고생만 한 다. 나뭇잎들은 점점 더 빡빡해져 새들의 모습을 가리고, 번식 기가 끝난 새들의 노랫소리도 사라져서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어렵다아빠에게 사고가 난 것은 늦여름, 형이 수능을 두 달도 채 남겨두지 않았을 때였다. 밤늦은 빗길에 난 교통사고였다. 중환 자실에 누운 아빠를 보며 나는 엄마를 따라 울었다. 형은 울지 않았다. 그리고 변함없이 매일 학교에 갔다가 자습실에 갔다. 하지만 밤늦게 돌아온 형은 늘 눈이 빨개져 있었다. 기말고사가 가까워지자 하지만은 책상에 집게로 종이 파일 을 꽂아 칸막이를 만들었다. 옆 사람이 의식되면 집중이 안 된 다나 어쩐다나. 옆에서 보면 나무색의 파일만 보였다. 하지만은 그 속에서 몇 시간이고 파묻혀있었다. 하지만이 만든 파일 칸막 이는 금세 반 전체에 유행처럼 퍼졌다 내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6월 모의고사를 망치고 본 기말 고사는 그야말로 초토화였다. 담임은 기말고사가 끝나자 진학 상담을 시작했다. 나는 상담 내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네네, 하
탐조 51 고 땅을 쳐다보았다. 담임은 반 1등인 하지만의 성적을 들먹이 기까지 했다. 상담을 마친 나는 얼이 빠진 채로 영어 수업을 들 으러 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수업을 듣고 영어가 써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 옛날 옛적에 있었다던 잉카 문명에는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시험이 있었다. 시험에 응시한 사람들은 4년 동안 혹독하게 교육받 는다. 참가자 각자의 능력과 자질을 길러주며, 상위 계층에 걸맞은 정신 교육도 받게 한다. 그런 뒤에 최종 시험을 거쳐서 당락을 가르 는데, 그 종목은 다름 아닌 ‘달리기’였다. 참가자들은 정해진 장소 까지 5마일 정도의 경주를 펼친다 경기 전날, 시험 관리자들은 언덕 정상에 미리 암염조각상을 줄지어 세워둔다 이 조각상은 다양한 동물들의 모양을 하고 있다 왼쪽부 터 매, 독수리, 야생오리, 벌새, 여우, 뱀의 순서다 경기에 응한 사람들은 달리기 경주를 해 정상에 도착한 순서대로 가 장 고귀한 조각상부터 차지하게 된다. 가장 고귀한 새인 매부터 쓸 데없는 파충류인 뱀까지. 매를 차지한 이는 가장 강한 잉카인이 되 고, 뱀을 차지한 이는 가장 약한 잉카인이 된다. 툭 읽고 있던 영어 지문 위로 내 샤프심이 부러졌다 “자, 그럼 출제 요소는 어떤 게 있느냐 먼저 빈칸추론을 내 기 참 좋은 지문이다.” 머리가 벗겨진 영어가 칠판에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요
안혜민 소설52 하던 교실이 금세 서걱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진다. 나는 욕을 하 며 샤프심을 찾아 필통을 뒤적거렸다. 겨우 샤프심을 넣고 고개 를 드니 벌써 다음 문장을 나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필기를 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주변 애들은 여전히 정신없이 같은 걸 받아적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뭔가를 지켜보는 형이 보였다. 형 은 아빠의 카키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밖으로 나갔다 학교 뒤뜰에는 여 전히 형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형이 내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보았다. 형은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갔다 대더니 망원 경 너머를 가리켰다. 형이 가리킨 곳에 조용히 앉아있는 까치가 보였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난간에 걸터앉았다. 까치는 꼬리를 이리 저리 움직이며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입을 열었다. “형.” 내가 말했다. “까마귀 말이야. 따뜻해지면 떠나갈 거 알고 있었지?” “당연하지.” 형이 즉각 대답했다 “까마귀를 쫓아달라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야.” “근데 왜 여길 매일 온 건데?” 내 말에 형은 코웃음을 쳤다.
탐조 53 “너도 매일 왔잖아.” “난 학생이잖아!” 형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형을 보다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형이 원하는 대 답인 것 같았다. “형은 수능 날 시험 보러 간 거, 후회해?” 형은 가방에서 카메라 렌즈를 꺼내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 다. 해가 지고 있었다. 수능 날, 형은 시험을 치러 갔다. 아빠는 그날 새벽에 상태 가 악화되었다 그리고 시험을 마친 형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사라지고 없었다 형은 여전히 울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도.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나에게 말했다. 교대에 갈 거라고. 그 래서 나는 형이 교대에 가는 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 줄 알았다. 형은 계속 멋지고 훌륭한 형일 줄 알았다. 사실은 갇혀서 날지 못한 게 아니었다. 까마귀는 그냥 제 발로 교실을 걸어 나오는 것이 무서워 전깃줄에 매달려 있었다. “너 아빠랑 한강 갔던 날 기억나냐?” 형이 말했다. “그날 엄청 추웠잖아. 밖에서 덜덜 떨면서 새도 엄청 보고 어묵도 사 먹고.” 형은 낄낄댔다 “다음 날 네가 감기 걸려서 아빠는 엄마한테 엄청 혼났지만.” 주변이 고요했다. 이렇게 형과 조용히 있는 것도 오랜만이
안혜민 소설54 었다. 아니, 내가 새를 보러 나온 것이 오랜만이었다. 형은 이미 한참 전에 다시 시작하고 있었는데. 까치가 푸드덕, 하고 날갯짓을 했다. 나는 형의 가방에서 쌍안경을 꺼냈다. 렌즈 너머로 다른 가지에 옮겨 앉은 까치가 보 였다. 목까지 오는 새카만 깃털이 꼭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 같 다. 까치를 지켜보는 나는, 처음으로 새가 아니라 탐조가였다.
탐조 55

이한나

이한나 시58 생의 기록 지저분한 색으로 뒤덮인 나방이 번져있는난다 주홍빛을 향하여 거세게, 단숨에, 번져있는날아든다 주홍빛을 위하여 뜨거운 공기를 폐부에 밀어넣고 맑았던 눈을 태운채 재가 된 날갯짓을 거듭한다
생의 기록 59 * 나방의 생을 당신은 평가할 수 있는가. 그는 진리를 위 해 열성을 다했다. 타인의 시선에는 헛된 행위에 지나지 않았음 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생명을 태웠다. 나는 초고의 2연 1행에 ‘거세게, 단숨에, 무참히’라고 썼지만 수정했다. 그의 삶을 내가 참혹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다만 실존했던 그의 생을 종이 에 담아낼 뿐이었다. 언젠가 또 한 마리의 나방이 내 곁에 다가올 수 있겠지. 그 또한 불빛에 몸을 던지고 사라진다면, 나는 훗날 그의 삶을 추 억하겠다 꽃 한 송이 태우며 재에 한마디를 담아 하늘로 올려 보내리라. ‘너의 불같은 정열이 주홍빛을 삼키길 바랐어.’

노혜린

노혜린 시62 일 후라이가 노란 건 병아리가 노란색이어서야? 아침을 먹던 조카가 내게 물었다 인간은그러게 살구색인데 왜 인간이 흘린 피는 그토록 붉을까 그렇게어쩌다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자 이런 질문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수 없는 일 없는일 일 내가 간단한 악의를 품는 동안에도 내일과 오늘이 친밀하다 생계가 인간적인반복되고죄가
일 63 양 쪽에서 동시에 타들어 간다 너무 차마가능한이야기와많은이미지가세상살아남은노란색이 흘러내린다 쉽게 지워지는 흔적이 접시에 남는다 조그만 악의에도 간단히 사라지는 어떤 아무리일은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이런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은 계속 운어쩌면일어난다피는좋게남은사람들의 날씨 언제나 붉을 수밖에 없는 빈난한 아침이 굽은 목을 천천히 펴고 창문 너머로 노란
노혜린 시64 국물을 흘리고 있다 조카가 잠든 식탁 위로 조금씩 빛이 새어든다 조카의 얼굴이 환해진다 가끔 짐작조차 되지 않아 정체를 알 것만 같은 것이 있다
메두사 65 메두사 옛집 더러운 화단 구석에 수선화가 있었다 키가 커졌고 나날이 노란 얼굴이 되었다 곰팡이 주근깨를 품고서 아침마다 피어나던 수선화는 어느 날 아침 죽어버렸다 나는 아직 축축한 흙덩이 속으로 두 손을 밀어넣었다 오늘의 꿈 속에서 정신 나간 여자의 머리칼이 잡혔다 한 움큼 흙과 함께 수선화의 목덜미가 덜렁였다 덥힌 물을 부어주었던 겨울 아침 죽어버린 수선화처럼 다 좋은데, 목이 좀 짧다 목덜미가 고개숙였다구겨지도록그자리에서
노혜린 시66 나는 수선화가 되어갔다 어느 날 집을 나가버린 개의 양철 밥그릇에 수선화를 옮겨 심는다 목덜미를 비틀어 얌전히 흙 위에 올려둔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지 저 사람들 나쁜 사람 아니야 매일 호흡한다조금씩까만 흙 안에서도 누군가 숨 쉬는 것 같다 가스 밸브를 열어 놓아도 밤이 되면 얼굴을 하얗게 하고 원룸을 나선다 고개 숙인다 아침이 올 때에 나와 닮은 얼굴을 보아야 하므로, 그것이 나와 같은 이목구비를 지녔으므로 목이 아파서 불에 냄비를 올린다
메두사 67 냄비에 물을 올린다 수선화의 얼굴이 하얘진다 마저 죽지 않은 꽃잎들이 삐걱이며 목을 추스른다 원룸 창밖으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선의와 선의가 모여 물에 나를 빠뜨린다 오늘의 꿈 속에서 온 동네를 내가 달리고 있다 처음으로 집을 나가본 개처럼 달린다

언젠가 자랑스러운 작품을 문집에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박경도

박경도 시70 문손잡이 문손잡이는 문의 언어이고 문의 언어로서 문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문의 너머만을 상상했었기에 문손잡이는 시선에 더럽혀지지 못했다 문손잡이는 찐득한 손길마다 더러움이 더해지고 손의 그림자는 문손잡이의 그림자에 쌓여 간다 그림자는 끝없이 추락한다 다양한 지문으로 뒤덮이는 문손잡이가 있고 익숙한 지문으로 침잠하는 더러움도 있다 문 너머의 사람을 생각하며 문을 연다는 강박 돌아가지 않는 문손잡이가 많고 문손잡이가 빠지기도 하고 끝없이 회전하는 문손잡이가 있다 손은 각자의 형태의 문손잡이를 만지며 더러워진다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찾는 사람들은 문손잡이를 잡고 맥박을 전한다
문손잡이 71 문손잡이를 놓을 수 없다 문손잡이의 그림자에 계속 손의 그림자를 포갠다 여러 방법을 시도하며 문손잡이를 돌린다 노크는 문손잡이를 대하는 하나의 태도일 수 있다 손은 꿈으로 조형된 손잡이 앞에서 손잡이를 찾아 헤맨다
박경도 시72 검은 풀 인천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한 노인이 다리를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고 열차 안 사람들의 발등에 검은 풀이 자랐다 열차는 좌우로 흔들리고 햇살은 앞서 간 햇살의 안부조차 물을 수 없다 검은 풀이 열차를 뒤덮자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얼굴을 가린다 노인의 웅크린 척추에서 투명한 바다를 볼 수 있을까 노인의 곧은 척추를 상상했다 언어가 도달한 곳조차 잃어버리고 그래서 노인은 노약자석에 펼쳐진 직선들에 탑승하지 못하 는 것이리라열차가서고 문이 열릴 때마다 검은 풀이 역사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검은 풀을 밟고 열차에서 타거나 내 렸다 나는 성급히 열차에서 내리는 도중에 노인의 그림자에 내 검은 풀을 두고 내렸다
검은 풀 73 열차는 척추 위에서 덜컹거렸다
박경도 시74 상자의 테라피 도시가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어요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넘어졌고 향수가 아스팔트에 스며들었다 사람들이 등을 밟고 그냥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었고 향기다발이 콧속으로 들어갔다 도로는 직각으로 후회했다 나와 그들 각각 사이에 두 줄의 향기가 있다 코로 목소리를 마시기로 했다 그들의 발바닥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거품처럼 귓바퀴가 흩어지면서 공중에 거대한 귓구멍이 떴어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며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수많은 향기의 중첩이 자욱하다 나는 정신분석학으로 잠을 잤다
컵의 반지름 추정 75 컵의 반지름 추정 잠에서 깨어 책상을 보니 분홍색 예쁜 컵이 있어 신경질이 나서 그 컵을 벽에 던져 깨버렸다 이웃에게 컵을 물어내라고 다그쳤다 땅이 부족해진 인간은 수직의 사회를 일구었다 입에 침이 고이면 눈치 없이 땅에 뱉었다 쑥스러움을 갈아 예리하게 만들 었지 허리는 더 이상 가늘어지지 않았다 더위를 상쾌하게 팔에 끼웠다컵은 오만 원짜리였고 이웃은 화내지 않았다 오줌 줄기를 개미 무리가 있는 쪽으로 돌린 것과 친구의 아 내 뺨을 때린 것과 책이 물에 젖은 것과 나는 콜라를 마셔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 컵은 엄마가 사다 놓은 것이었다 모른 체하고 깨진 컵 조각을 몰래 엄마의 외투 주머니에 넣 었다 오늘따라 컵에 물이 들어 있다 노란 물에 개미들이 둥둥 떠 있어 겁에 질려 도망쳤다
박경도 시76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별이 눈에 들어왔고 눈물이 내 뺨을 때리자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박았다
컵의 반지름 추정 77

더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강우석

강우석 소설80 불안 나 우울한 거 같다고 그럴 수 없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고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말했다 자신만으론 어려운 증상 이었다. 증상을 내보이면 두려운 것이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지만 여태 며칠 동안은 두려움마저 가물해져서 망설일 수 가 없었다. 그는 말해버렸다. 어머니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듣고 나서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오른 어깨 를 습관적으로 조몰락거리다 살금살금 그를 꼭 안아주었다. 어떤 아들인데 우리 아들이. 어머니는 안은 두 손을 풀고 그의 어깨에 왼볼을 파묻으며 티비 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의 고백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이 잠시 믿기지 않았다. 그는 울 준비도 내심 했는데 울음은 커녕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가아 어머니가 물었다 그는 아무 단어라도 똑바로 발음할 의지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어머니는 옆으로 그대로 축 늘어져서 티비를 보았다. 그는 방문을 닫고 침대에 백 다이빙으로 누웠다. 얼마 지나지
불안 81 않아서 본격적으로 관자놀이를 기점으로 머리통이 팽창하고 머 리칼이 허전하게 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것은 실제로 가만 히 고요했다. 하지만 머리카락과 얼굴 크기의 안전에 대한 확인 욕구랄지 확인 요구랄지 ―그는 이걸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 는 대단하고 얄미운 그것에 굉장히 순종했다. 그는 핸드폰을 정 수리 위쪽에 대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평범한 정수리였다. 그는 다시 사진을 찍었다. 여전히 평범했지만 아까와는 다른 정 수리였다. 각도라든지 빛이라든지 머리숱의 배열이라든지 어쨌 든 사소한 것들을 그는 포착했다. 그는 대머리가 될 것 같은 두 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동시에 그는 완벽한 일관에 미치는 중이 었다 그는 언제든 이것에 몰두할 수 있었고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대머리가 되면 거의 죽을 것 같았다 거의 죽는다고 봐야 지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생각을 할 뿐이지 실제로 죽지 는 못했다. 그는 계속 사진을 찍고 확인하고 찍었다. 그러다 그 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제풀 에 지치기만 해서 찝찝한 상태였다. 침대 시트라도 보송해서 다 행이었다. 그는 한참 더워지고 뻣뻣해진 몸을 가지고 무참히 누 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피로했지만 잠을 잘 만큼 차분하지 못했다. 눈을 오랫동안 뜨고 가끔씩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누워 있었다. 그제 양념 고깃집에서 봤던 노인들의 테이블이 떠올랐다. 흰색 과 남색이 섞인 슬레진저 츄리닝 상의를 입고 정수리 머리가 텅 벗겨진 할아버지가 그 자리의 리더처럼 보였다 나머지 세 명의 노인들은 리더와 비슷한 유의 복장으로 양껏 웃으며 맞장구를 치는 쪽이었다. 크고 촌스럽고 음탕하고 그러므로 주책스럽고 추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 오가는 걸 들었다. 그는 노인들의 테
강우석 소설82 이블을 보았다. 그는 땀이 났고 혐오감정만을 강하게 알 수 있 었다. 혐오 혐오! 자막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그는 혐오로 가득 찼다. 그는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가득 찬 혐오. 무슨 혐오인 건지. 그렇지만 그는 단순히 혐오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더없 이 막막해져서 자신에게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야 나 나갔다 올게. 왜? 안 먹어? 이제 다 구웠어. 박이 의아하게 물었다. 그럴 틈이 없다.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우린 그냥 먹는다. 난 몰라. 다 먹어도 몰라. 알아서 해 라는 식으로 말하고 짤랑하는 문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짤랑 날카롭고 시끄러운 밤공기를 맞았다 네온사인 에 비하면 간간이 사람들이 지나갔고 팔 차선 도로엔 차들이 많 게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모든 소리가 신선했다. 그는 상쾌하 게 어깨를 펴며 팔을 몇 번 돌렸다. 그는 자신이 부정적인 자석 같다고 자학했다. 그러니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더니 잠시 안정되었다. 그는 여유를 오랜만에 가져보는 것이라 기뻐했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곧 조급해졌다. 그는 이미지를 다시 넓게 눈에 담았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딱 보아도 움직이는 것들이 있었고 건물들도 네온사인으로 번쩍거리고 있었고 신호 등도 깜빡이고 있었고 도로 바리케이드도 안전띠를 둘러서 검 은색 노란색으로 번갈아서 빛나고 있었다. 그의 조급함을 선의 를 담아 따라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움직이는 것들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뛰고 싶었다 그는 전력으로 뛰어가고 싶어졌다 뜀박질에 전력을 다하면 몸이 부유하는 순간이 있었 다. 찰나의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확실하고 높은 쾌락이었다. 그 는 그 쾌락이 그리워졌다. 사실 쾌락이라면 아무거나 괜찮았다.
불안 83 어디로 갈까.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뛰는 게 그가 진짜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집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막상 그곳에 들어가면 또 다를 거였다. 그는 뛰기로 마음먹고 나서 고깃집 유리창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창을 콩콩 몇 번 두드 렸다. 그다음 친구들이 그를 보고 나서야 그는 냅다 뛰기 시작 했다. 그가 한턱을 내기로 한 자리였다. 한턱을 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뛰고 싶은 것이다. 그의 의도가 신속히 함축된 노 크를 친구들은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고 멀뚱거리다 서로 눈을 번갈아 맞추어보다 그를 뒤 쫓았다. 그는 훅훅 뛰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땅에 계속 붙었다. 그는 뒤꿈치를 들어도 봤지만 속도 에 유의미한 가속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녹슨 바캉스 자전 거를 종아리에 검댕을 묻혀가며 타는 기분이었다 기분 나쁜 쇳 소리가 숨소리였다. 그는 틀렸다는 걸 알았다. 뒤늦게 쫓아온 박이 그의 뒤 옷자락을 움켜쥐었고 그는 순순히 멈췄다. 야 왜 그래. 진짜 왜 그래. 박이 헐떡이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판단이 안 선다 나. 그는 눈을 내리깐 채로 건조하지만 숨을 가 득 섞어서 말했다. 그와 박은 함께 고깃집으로 다시 갔다. 내가 해? 라고 박이 슬쩍 조심히 물었지만 그는 아니 아니 미안. 하고 고깃값을 계산했 다. 박을 포함한 친구 셋과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다음은 어 디를 갈까 그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집에 가겠다고 조 용히 말했다 기분 좋은 날에 자꾸 왜 그러는 거냐고 면박을 주는 친구들과 달리 박은 정말로 일그러져 있기만 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면 박을 주는 애들이 멍청하게 느껴져서 화가 났다. 하지만 그는
강우석 소설84 축 늘어진 표정을 계속 치켜올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박은 큰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그런가 하고 무심하지만 조금 어 리광을 부려 대답했다. 박이 다시 큰일이다 하고 말했다. 고맙다. 잘 가. 그가 양쪽 입꼬리를 벌벌 떨면서 올리며 말했다.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지만 고맙다. 잘 가. 모두 진심이었다. 그 는 이걸 우연이라고 여기지 않으므로 기분이 미세하게 나아졌 다. 박을 포함한 친구들이 떠나갔고 그는 뒤돌아서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금세 무서워져서 울음을 터트리려다 이내 층에 도착해 코를 들이마시며 머금고 머금고 머금었다. 그는 티 나지 않는 심호흡을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옷을 갈아입다가 미 처 갈아입지 않고 자위를 끊임없이 두 번 했다 그는 같이 있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누군가 같이 있어 준다면 다시 혼자 있고 싶어질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도 않고 성기만을 빠르게 만졌다. 자위는 폭발적이어서 첫 번째 에 그는 발기가 덜 된 상태에서 사정을 해버렸다. 그는 이제 사 정하는 순간마저 불편스러웠다. 그는 그래서 한 번 더 했다. 정 액을 닦지도 않고 다음 자위에 돌입했다. 두 번째에는 정상적으 로 사정을 했다. 그는 속옷도 입지 않고 맨 엉덩이로 방안을 불 규칙적인 원을 그리며 돌아다니다가 흐물흐물거리며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맨 엉덩이가 차가웠다. 죽음은 방방 걸어 다니 다가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콩콩콩콩 떨어대면서 손톱을 양 껏 깨물어 뜯다가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 다. 근데 무엇도 하기 싫다. 무엇들은 죄다 불편스럽고 무서운 것투성이다. 그럼 무엇도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이제 자위를
불안 85 할 필요가 없으니 잘 된 건가? 머리 자라는 데는 단백질이 다라 던데. 괜히 단백질 낭비를 안 할 수 있는 기회인가? 그는 에이포 용지에 광란하게 썼다. 무엇도 하지 않으면 머리도 빠지지 않고 머리도 커지지 않고 턱 도 비뚤어지지 않을 텐데. 그런데 무엇도 하지 않으면 돈은 어 떻게 벌지. 돈이 없으면 진짜 기본적으로 살지를 못하지 않나. 무엇을 할 수는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건 가짜 인생이지. 줄곧 찝찝하게 기계처럼 살고 마는 거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지금 은 무엇도 하기 싫은 게 나야. 그럼, 만약 끝나지 않는다면, 무 엇도 하기 싫은 나 가 눈치도 없이 편안히 자리를 고정하게 된 다면 진짜 나는 엄마 아빠한테 빌붙게 되겠지 엄마 아빠 돈을 까먹다가 정말 다 까먹게 되면? 부모 돈을 다 까먹은 나인가? 그게 나인가? 그게 나일 것인가? 그는 덧붙여서 썼다. 그는 글 을 자동으로 썼다. 그렇다 해도 그는 무엇도 하지 않지는 않았 다. 글을 바라볼 때 박의 표정을 찾았다. 일그러진 표정을 떠올 렸다. 그는 잠시 마음이 너그럽게 움츠러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직접 느끼지 못할 정도의 아주 옅은 안도감을 느 꼈다. 그는 입에서 더운 구취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요즘 그는 숨을 입으로 쉬어댔다. 물 좀 갖다 줘. 그가 힘내어 말했다. 물 좀 갖다 줘. 물 좀. 엄마 물 좀! 그가 소리 크게 말했다. 화를 내진 않았다. 내가 하인이니 아들?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물 한 컵을 가져주면서 귀엽게 툭툭댔다 그는 어머니가 들어 올 때 무의식적으로 글을 온몸으로 가렸다. 오히려 더 유별나게 보이는 행동이어서 어머니는 내심 그가 가
강우석 소설86 린 것을 보려고 했지만 물을 놓는 것이 끝나자 그냥 나갔다. 그 는 물을 마시지 못하고 얼굴을 울상으로 구겼다. 눈물보다는 구 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나는 행동이나 상황 때문이 아 니라 울음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오랫동안 구겨진 표정 때문 에 그냥 헛구역질이 나는 거였다. 그는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순 식간에 얼굴을 사악 폈다. 그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자신의 표정 을 얼추 인지했다. 그는 이 의도치 않은 전환이 경쟁력이 있을 만한 연기재능이라고 뜬금없이 긍정하고 상상에 돌입하려 했 다. 하지만 몰입이 따라주지 않아 포기했다. 그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바빴다. 하지만 가만히는 조금만 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과부하 상태로 보냈다 사실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을 지정할 수도 없었다 그는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만히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에는 삼백 플러스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카톡 방이 새로 생겼다. 스무 명이 넘는 인원들이었다. 그는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모두 읽어볼 생각에 의무적인 피로를 느끼면서 마 음이 급박해졌다. 웬일이니 우리가 스물이라니 웬일이야 너무 반갑다 우리 만나야지 스물이니 술도 마셔야지. 그러면서 그때 이야기해야지 그때 그랬었잖아 그렇고 그랬지 그래서 그랬었다 니까 너무 반갑다. 빨리 만나야 해. 그나저나 어디 붙었다며 웬 일이야 너가 거길 웬일이야 걔도 거기 붙었다며 정말이지 거긴 말이야. 그는 어지럽게 쿤쿤 뛰는 심장 앞에서 하이 하는 적절한 길이의 메시지를 남겼다 오 하이 하이 하이 오랜만이야 잘 지냈 니 여러 명에게서 답장이 오고 이전 삼백 플러스의 대화와 비슷 한 식으로 전개되려는 차에 박이 초대되었다. 관심은 순식간에 박에게로 쏠렸다. 그는 마음을 판단하기도 어려운 기분이라 순
불안 87 식간에 서러운 감정에 사소하게 집착했지만 박의 목소리와 언 어를 떠올리면서 간신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었다. 박은 인기가 없었는데 여자애들과 그렇게 잘 어울렸다. 그는 박 의 등장에는 여자애들의 카톡이 대부분인 것을 보고 떠올렸다. 박은 친절하고 귀엽게 답장해주고 있었다. 박과 여자애들의 관 계에는 혹시나 싶어서 남겨두는 스스럼이 거의 없었지. 그래도 박은 나이스 가이였지만 여자애들은 아니었다. 여자애들은 박 에게 매우 내추럴하고 부끄러운 감정들을 털어놓거나 투척했 다. 그런 일에도 박은 늘 귀여우려 하고 친절하고 다정한 행동 으로 반응했다. 박의 본성이었다. 소중한 매력이었다. 그는 세 상의 모든 선함 중에서 작위적인 것들을 뺀다면 선함은 멸종위 기에 처할 거라 믿었다 그 와중에 단톡방에서는 박은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뉘앙스로 카톡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이름도 호명되었다. 그럼 같이 오겠네. 둘이 친구잖아. 김이 말했다. 그는 단톡방에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모임에 가야 할 지 고민했다. 그에겐 극적인 기대감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주 처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하면 극적인 기대감을 포착하고 잡을 수 있었지만 그는 이미 어딘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어서 처음부터 생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칫하면 떨어질 차여서 오직 매달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연이 올 것 같아. 박이 그에게 연락해왔다. 연? 그래 연 거의 확실해 애들한테 슬쩍 물어봤거든 오겠다고 했 대. 오랜만에 보고 싶은 건가? 벌써 오 년 전이야. 날 그렇게 순정하게 만들지 마.
강우석 소설88 가자아. 그래. 가자. 그는 다급하기도 편안하기도 해서 홧김에 말했다. 박은 바꾸는 건 없어. 말했어. 하고 즐겁게 답장했다. 연이라니. 마법 같네. 잘 자. 기분이 나아진 것 같네. 그는 그렇다고 답장했다. 그는 갈 때 같이 가자고 덧붙였다. 알 겠다는 박의 답장을 확인하고 그는 핸드폰을 놓았다. 그는 화장 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입꼬리를 올려보고 고개를 숙여도 보 고 거울 앞에서 한 시간가량을 보냈다. 그것이 허무해질 때 즈 음 그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버지가 퇴근해 와 계셨다 야 무 슨 화장실에 그렇게 오래 있냐 하고 아버지는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걸어가는 아버지의 손에 살짝 부딪혔다. 바톤터치! 라는 단어가 불쑥 떠올랐다. 그는 우스워서 웃었다. 그는 적당한 아침에 깼고 무사히 모여있는 마음에 안도하는 나 머지 아침을 보냈다. 그는 소파에 앉아서 내일을 그렸다. 김이 걸리긴 했지만 마음이 들떴다. 김과는 일 학기 내내 붙어 다니 다 김이 이 학기 때 전학을 갔다. 김을 본 지 삼 년 하고 반이 넘 었다. 김도 내일 온다면 그가 대학에 붙은 걸 알게 될 것이었다. 그는 놀라워하는 김을 상상했다. 김 덕분에 더 많은 애들 ―힘 이 있었던 애들― 과 어울릴 수 있었다. 관계는 무엇보다도 실 물이었다. 그는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고 살 았다 김은 유독 그를 건드리면서 놀았다 책가방에 칠판지우개 를 넣는 것 신발주머니 오 층에서 떨어뜨리기 열댓 명이 몰려 들어서 헹가래 치고 바닥에 떨어뜨리기. 깔고 뭉개는 햄버거 하 기. 가끔씩 때리기. 아득할 정도로 화가 날 수 있었지만 그때는
불안 89 평범한 일이었다.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 힘이 있는 애들도 당하면 바로 즐겁게 다음 타깃을 설정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가 타깃이면 거의 모두 김이 주도한 것이었다. 너무 뻔한 일이어 서 그도 알았고 김도 알았고 아마 모두가 알았다.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겐 중요했다. 그는 놀이가 취향에 맞지 않았지만 학교를 다녀야 했으니 공평해 보이는 피해에 위안을 얻으면서 즐기려고 집중했다. 김도 오네. 박이 문득 문자를 보냈다. 마침 김을 생각하던 차에 연락이 와 서 신기했다. 몰랐어? 뭐 어때 솔직히 싫잖아 불편하잖아 박에겐 여자 친구들이 있었다. 박은 그 애들과 즐겁게 귀엽게 지 냈다. 힘 있는 애들은 박이 장난을 거부하려고 할 때면 박을 한 심한 새끼라고 말했다. 박을 때리진 않았다. 그는 그 말에 은근 동조했었다. 그는 그 단어에 솔직히 쾌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 도 남들처럼 박의 행위가 불편하고 질투도 났다. 물론 아무도 질 투를 느낀다는 것은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단숨에 잊 으려 했다. 사실 거의 모든 남자애들은 여자애들 앞에선 뭐든지 오버했다. 성찰이 희귀한 때였다. 박은 어쩌면 아예 관심이 없었 는지도 몰랐다. 박은 많이 져주었고 그건 특히 오해의 소지가 많 은 일이었다. 그는 박을 한심한 새끼라고, 비록 입 밖으로 내뱉 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박이 언젠가 뉘앙스를 느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언젠가 뉘앙스를 내뱉었다고 느꼈었기 때문이 었다. 그는 박과 있을 때마다 아주 가끔은 두려워졌다. 내일 연이랑 같이 갈까? 박이 그를 갑자기 건드렸다.
강우석 소설90 어차피 가면 보잖아. 굳이? 셋이 봅시다. 연락해 놓을게. 그래. 혹시 내 마음 읽어? 이쯤이면 다 읽을 수 있어. 난 일단 감이 좋잖아. 그치 너는 감이 좋지. 인정이야. 내일 봐. 그는 오늘 상상을 많이 했다. 모두 내일에 대한 짧은 상상들. 오 랜만에 만난 여러 사람들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무렵에도 그 에게 여전히 대화가 맴돌고 다들 그에게 감탄하고, 놀리는 애들 도 있었지만 그것도 순수한 편의 감탄이고 악의적인 태도는 적 어도 없는 중이고 그는 계속 겸손을 떨고 겸손 겸손 겸손 그가 떠는 겸손마다는 당연히 폭죽 같은 감탄이 있었고 그는 그러다 한번 상상 이상의 감탄을 맞고는 자지러지듯이 당당해진다 대 충 이러한 내용이 쪼개져 각각의 상상들로 나뉘었다. 상상들은 당연히 대개 흐지부지 마무리되었지만 그는 매번 뿌듯했다. 그 래 난 이제 E대생이지. 확실히 성취했어. 변함이 없지. 그는 중 얼거리면서 조커 같은 긴 미소의 웃음을 실실했다. 이따금 소리 지르기도 했다. 아 살 것 같다. 아아아으으. 적어도 내일까지는 그는 지금 상태로 예비 E대생일 것이었다. 이 사실은 틀림없이 믿을만했다. 그는 새로운 상상을 했다. 연 과 박과 그가 내일 나누게 될 현실적인 대화들을 그려보려 했지 만 지브리스튜디오에나 나올 법한 산뜻한 봄 톤의 중학교 하굣 길에서 셋이 손을 잡고 나풀나풀 뛰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뛸 때마다 꽃잎을 휘날렸다 그와 박과 연은 셋끼리 깊지 않게 친 했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거의 모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관계 는 즐겁기만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연을 좋아했다. 그에겐 늘 긴 장의 관계였고 결국 학년이 마무리되기 전에 관계는 마무리되
불안 91 었다. 그의 사랑이 소문이 났다. 그는 그때 모든 곳에 있었다. 그는 아무 데도 있고 싶지 않다가도 혹시 연에게 있을 수 있을 까 하는 희망이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소문은 한 달 가량쯤 되 었을 때 희망과 함께 연에 의해 단숨에 멎었다. 싫어. 싫어. 왜 이래. 연이 말하면서 도망갔다. 그와 연을 겹겹의 원으로 둘러 싼 애들은 다들 누구를 보려고 했다. 이리저리 두리번 두리번거 렸다. 새빨개진 그를 두고 점점 흩어졌다. 모두 흩어지진 않았 다. 몇몇이 남았다. 박도 있었다. 그를 어루만질 듯 만지지 않다 가 한 명이 그의 어깨나 등에 손을 대기 시작하니 그제야 다들 그에게 손을 얹었다. 그는 서서히 진전되게 웃었다. 그리고 말 했다 아 씨발 쪽팔린다 애들은 따라 웃으면서 다양한 말을 했다 으휴 불쌍한 새끼 야 좀 더 남자답게 나갔어야 해. 연도 그렇게 도망을 가냐. 너 생각 도 안 하고. 아 존나 쪽팔리겠다. 야 됐어. 그냥 잊어. 솔직히 연 별로잖아. 키도 작고. 그래. 연보다 이쁜 애들 많지. 어차피 한 달 남았다. 이제. 그럼 졸업이야. 그는 그날 온통 고민했다. 그날 가야 하는 학원에 안 가지는 않 았지만 안 가느니만 못하는 만큼 다른 것을 생각했다. 그는 고 민 끝에 결정을 했다. 그는 소문이 끝나고야 소문대로 행동했 다. 반 아이들이 모두 있는 단톡방에서 시도 때도 없이 연을 불 렀다. 사랑한다는 식으로 고백했다. 국어 시간에 책을 읽어보 게 시키면 다음 읽을 사람을 지목할 때 연을 지목했다. 은은한 함성소리가 길게 나왔다 연에게 직접 무엇을 하진 않았다 연 을 교실이나 복도에서 지나칠 때 그는 눈도 마주치기 힘들었다 남은 학기 한 달을 그렇게 보냈다. 그는 연과는 다른 고등학교 에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가서 연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쭉 돌
강우석 소설92 이켜봤다. 그는 그것들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연은 그 를 싫어할 자유가 있었다. 연의 의사도 없이 무려 서른 명은 넘 게 연을 둘러쌌다. 그의 의사도 아니긴 했다. 그도 느닷없이 둘 러싸진 것이다. 마성의 강강술래같이 한명 두명씩 호기심을 가 지고 원을 두껍게 만들었다. 연은 거절이 과격하긴 했지만 욕을 한 것도 아니었다. 물리적인 폭력을 쓴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내일 연을 본다면 모임에 가서가 아니라 셋이 있을 때, 기 왕이면 박이 없을 때, 모임에 가는 길에 꼭 눈을 마주치고 말을 해야 했다. 미안했다고. 연이 사과를 안 받아주면 어떡하지. 너 가 한 짓이 폭력이라고. 사람이 그렇게 무서워도 되냐고. 연이 따박 따박 대꾸했다 비장한 연, 냉소적인 연, 태연한 연, 눈물 을 훔치는 연, 아예 흐느끼는 연, 그를 마구 치는 연 다양한 연 이 그렇게 대꾸했다. 그는 모든 연을 감당할 자신을 꿋꿋이 지 켜냈다. 그는 모든 연을 그의 마음으로 살포시 눌렀다.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나쁨을 보았다. 오래도 록 잠에 들기 전까지 응시했다. 그는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자 신의 나쁨이 익숙해져서 지겨워질 때쯤 그 무렵 생각이 흐릿해 지면서 잠이 들었다. 굉장히 늦게 잠이 들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컵 마셨다. 왜 이리 일찍 일어나셨대 오늘은. 어머니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 다. 엄마도 물 마셔 그가 한 컵을 더 따르고 어머니한테 건넸다 그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아 홉 시간이 남았구나. 약속은 여섯 시였다. 약속이 기다려지면서 은근 현실을 감각하기가 어려워졌다. 아홉 시간 뒤면 정말 그
불안 93 자리에 가 있게 되는 걸까. 상상을 하면 할수록 대상은 신처럼 받들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 대상은 무엇이든 가능했다. 지금 처럼 ‘신적인 약속’ ‘신적인 시간’ 도 가능하고. 그는 아홉 시간 뒤에 하게 될 수 있는 말들을 중얼거리면서 집 이리저리를 걸어 다녔다. 어제 성실하게 했던 상상 덕분이었다. 그는 그러다가 웃통을 벗어버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직사각형의 하얀 욕조 에서 따뜻한 물을 맞았다. 그는 당장 열한 시에 그냥 나가야겠 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자유롭게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영화를 볼까 생각했다. 영화를 혼자 본 적은 없었다. 영화를 혼자 보게 되면 정말 스물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시간짜리 영화 가 요즘 대부분이니 영화가 끝나면 거리를 산책하다가 박과 연 을 보고 그리고 약속에 같이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서둘러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몸에 로션을 발랐다. 베란다 에 햇볕이 가득했다. 거실에는 그보다 적은 햇볕이 있었다. 그 는 벗은 윗몸으로 햇볕을 따뜻하게 받으며 머리를 털었다. 아버 지가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면서 이제 금방 나른해지려 하는 그 를 치고 지나갔다. 식탁에 놓인 토마토 주스 한 컵을 한 번에 들 이키고 곧바로 신발장에 가 구두를 허겁지겁 신고 나간다. 하고 나갔다. 그는 예 잘 다녀오세요. 하고 아버지가 나간 문이 닫히 고 말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도어락 소리가 겹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거짓말처럼 사악 조용해졌다. 그는 아버지가 그 의 말을 못 들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랬다 면아버지는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었다 회색 고철이라 하기에 딱 맞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아니면 엘리베이터에 타서 내려 가며 거울을 보는 동안. 자동차에 타고 액셀러레이터를 한참 밟 고서 서울의 많은 근교 어디쯤에서 출근길 정체를 겪고 있는 동
강우석 소설94 안. 회사 차량으로 바꿔 타고 거래처를 향해 이리저리 구로구 도심을 헤매는 동안. 아까 그 근교 어디쯤에서 퇴근길 정체를 겪는 동안. 회색 고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현관문을 여는 동안. 아버지는 외로움을 적어도 한 번은 겪을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는 앞으로 아버지가 토마토 주스를 마실 때부터 잘 다녀 오시라고 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햇볕에서 벌떡 벗어나서 나갈 채비를 했다. 그는 핸드폰에 이어폰을 끼우고 이어폰을 귀 에 끼우고 신발을 신었다. 나갈게. 했다. 문을 열려고 할 때 어 머니가 허겁지겁 기다리라면서 뛰어왔다. 그는 나가려다 말고 현관에 섰다. 어머니는 성수를 가져왔다. 작은 플라스틱 분무기 에 앞으로들어있었다밖에나갈 때는 꼭 엄마한테 뿌려달라고 해 알겠지? 나갈 때마다 뿌리라고? 엄마 집에 없을 때는 어떡해. 혼자라도 뿌리고 나가. 이마에다 십자가 모양으로 이렇게 뿌리 면 돼. 어머니는 그의 이마에 십자가 모양으로 성수를 발라주며 말했다. 나는 종교 안 믿잖아. 앞으로도 안 믿어. 그래도. 지금은 아니라도. 그는 종교 얘기가 참 터무니없다가도 이마의 물기를 괜히 의식 했다. 한번 만지려다가 주저하다가 결국 만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 있게 밖으로 나와 걸음을 옮겼다. 영화관까지는 삼십 분은 걸어야 했다.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그는 그냥 걷기로 했 다 따뜻한 날씨였다 그는 사람들을 지나치고 마주치며 영화 관으로 나아갔다 영화관까지 가는 거리엔 도로가 거의 없었다 다 도로를 끼지 않은 인도였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모두 보려고 노력했다.
불안 95 영화관도 한적했다. 그는 한적한 영화관은 난생처음이어서 낯 설었다. 티켓 창구는 다섯 곳 중 한 곳에만 사람이 있었다. 번호 표를 뽑으려 하니 그 사람이 그냥 오셔도 되세요 하고 말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창구로 갔다. 무슨 영화 관람하세요? 그는 상영시간표가 주기적으로 갱신되고 있는 모니터를 멀뚱히 응시했다. 바로 십 분 뒤에 하나 있어요. 레버넌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나와요. 액션 영화. 그거 볼게요 그거 주세요 사람들은 많이 봐요 그러더라고요 자리는 화면에서 골라주세요 여기. 맨 뒤 여기로 주세요. 그는 티켓을 겸하는 영수증을 받아들고 스낵 코너에서 팝콘을 살까 하다가 바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그는 핸드폰 전원을 끄 고 광고를 보았다. 백석이 넘는 좌석이었는데 드러나 있는 머리 들은 드물었다. 열 명도 안 되거나 딱 그 정도 될 법 싶었다. 그는 영화를 보는 도중 핸드폰 전원을 켰다. 그는 계속 눈을 가 리고 고개를 숙이느라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액션 영화가 맞긴 한데 초밀착야생고어가 앞에 붙는 게 더 정확해 보였다. 초밀착야생고어 액션 영화. 그는 잔인한 것을 무지 싫어했다. 잔인함의 절박한 간지러움이 소름 끼쳤다. 그는 러닝 타임을 검 색했다 백오십이 분이었다 이제 막 구십이 분이 남았다 그는 진지하게 나갈지 말지 주저하다가 일단 화장실을 다녀오기로 했다. 영화관 화장실은 냄새와 분위기가 평균적으로 좋았다. 그 가 손을 씻을 때 박에게 전화가 왔다.
강우석 소설96 핸드폰이 꺼져 있던데. 아 영화 보느라. 연은 그냥 가겠대. 그래? 계속 말끝 흐리길래 그냥 내가 굳이 그럴 필요 없겠다고 가서 봐도 될 것 같다고 말했어. 깔끔하네. 역시 감이 좋아. 아쉽겠지만 네 시 반쯤 볼까? 저녁 간단히. 나 배가 안 고파서. 그럼 다섯 시 반쯤 볼까? 그래 그쯤 매일 보던 언덕 앞에서 거기서 봐 그래. 봐. 그는 다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곰 과 싸우고 있었다. 곰은 총을 맞아도 아랑곳 않고 돌진했다. 무 려 샷건 같은 총이었는데도. 어쨌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살아남았다. 생매장을 당해도 살았다. 그는 계속 살았다. 그는 그걸 꾸역꾸역 지켜보았다. 그는 점점 허기가 졌다. 이제는 쌓 인 눈이 아니라 내리는 눈 알갱이에도 피가 묻을 지경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톰 하디를 마구 뒤쫓고 있었다. 마치 박이 그를 쫓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와 박이 결코 초라하 게 생각되지 않았다. 말 하고 카메라워킹 하고 총 하고 칼 하고 수염 하고 굵은 이목구비 하고 낭자 하는 피 같은 건 다 있어 보 이지만 사실 없어도 되는 것이었다 영화가 드디어 끝났고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으면서 마 음을 추스르려고 했다. 그는 영화를 괜히 봤다고 생각했다. 두
불안 97 시간 반 동안 폭력을, 그것도 극 고어적인 폭력을 마주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는 박에게 전화했다. 그냥 밥 먹을까. 뭐해. 연 없어도? 그것 때문 아니다. 안 먹고 싶었다가 그냥 갑자기 먹고 싶어진 거야. 누가 뭐래. 언제 봐. 빠를수록 좋아. 나 지금 밖이야. 언덕에서? 그래 언덕으로. 응 모임언덕에서장소까지는 박과 만나기로 한 언덕보다는 지금 위치에서 더 가까웠지만 그는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은 집 근처였다. 여 유롭게 도착해서 근처 흔들 벤치에 앉아 몸을 왔다 갔다 몇 번 을 하니 박이 왔다. 여어. 박이 손바닥을 전부 내보이며 인사를 했다. 그는 손을 들었다 내렸다. 박이 좋은 곳을 찾아봤다며 핸드폰 화면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아무 데나 괜찮았기 때문에 좋다고 했다. 박은 여행을 가게 되었다고 말을 꺼냈다. 쿠바로. 일단 하 바나로. 나머지 일정은 아직 미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갑작스러 운 중남미에 웃음 지었다. 위험하지 않나. 혼자? 스물 기념으로 가족여행으로. 며칠 동안? 삼 주 쿠바만 돌려고 멋있네. 그는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음성은 바람이 빠진 것 처럼 들렸다. 박은 여행 얘기를 계속했다. 체 게바라가 쿠바 사
강우석 소설98 람인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체 게바라 광장에서 정열적인 포즈로 사진을 찍어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는 나중에 둘이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은 웃었다. 똑같은 정열적인 포즈로 같이 찍는거야. 쿠바는 드라마에도 나오고 예능에도 나오고 카밀라 카베요의 하바나가 시작이었을까. 무엇이 시작이었는지는 몰라도 쿠바는 매력이 생겼다. 티비에서 쿠바는 색이 강렬하고 다양했다. 거의 모든 곳과 것. 일단 회색이 없었다. 아예 없진 않겠지만 아무튼 회색의 분위기에 휩싸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국기에 보라색도 있구나. 그는 쿠바하면 쿠바 국기의 보라색스러운 줄 무늬가 바로 떠올라서 낯설었다 쿠바는 너무 멀었다 식당 앞에 도착했다 식당은 로데오거리에 있는 건물 삼층에 있 었다. 미국 가정식 컨셉을 잡은 식당이었다. 그는 우리 동네에 이런 것도 있었냐고 박에게 넌지시 말했다. 박은 메뉴를 보고 잠발라야를 시켰다. 그는 미트볼 스파게티를 시켰다. 박이 계산 을 하고 그가 박에게 스파게티값을 이체했다. 모임 장소는 근처 였다. 그는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은 고려도 하지 않았다. 그건 끔찍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는 늦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 피 제시간을 지키는 애들도 분명 드물 것이었다. 시간을 지키는 건 왠지 지는 일 같았다. 다른 애들도 하나같이 줄곧 늦게 오는 걸 보면 다들 그런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른들 과의 약속과는 달랐다. 어른들은 진지하게 혼내고 잔소리했다. 스물이 되고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십 분 늦었는 데 점장은 좀 늦었네요 하고 머리를 실망스럽게 갸웃거리더니 면접을 보는 중에 도저히 안되겠다는 듯이 늦고 그러면 안 좋아 요. 앞으로는 잘 지켜야 될 거예요. 한 마디를 껴 넣었다. 그는
불안 99 채용되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는 우울해서 분명 일을 몇 번 그르칠 가능성이 높았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럼 면 접 날에 지각한 일은 다시 소환돼서 그를 다그치고 해고하는데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서 보탤 것이었다. 하여간 그는 이런 생 각을 불현듯 했어도 지금 늦을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갈까? 박이 문득 말을 꺼냈다. 아직 이십 분 남았는데. 지금 가면 얼추 도착할 것 같은데. 일찍 가 있게? 할 것도 없고 나쁘지 않잖아. 그는 솔직히 정말 나빴지만 늦어야 하는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 하고 그냥 그러자고 했다 일찍 가면 지는 것 같다는 말을 솔직 하게 할 수 없었다. 드디어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그는 일부러 보폭을 작게 했다. 일부러 편의점에 들러 오백 미리짜리 물을 샀다. 그들은 다섯 시 오십오 분에 도착했다. 다섯 명 정도가 미 리 와 있었다. 전부는 아니고 몇 명과 악수를 하고 오랜만이다 뭐해 잘 지내지 를 연발했다. 미리 들어갈까? 박이 말을 꺼냈다. 다들 그러자고 했다. 점원에게 자리 안내를 받는 도중에 세 명 이 더 왔다. 어 야야. 오랜만. 어디 앉아야 하니. 세 명 중 한 명이 그의 어깨 를 만지며 한기 가득한 입김을 내뿜었다. 어어 저기 그는 오랜만이라는 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여덟 명은 구석에 긴 테이블 자리로 안내받 았다. 긴 테이블은 워낙 길어서 여덟 명이 앉아도 허전했다. 그 래도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렇고 서로서로 간간이 본 사이
강우석 소설100 들이 있었다. 지그재그로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대 화는 엉기면서 슬슬 왁자지껄하게 합쳐졌다. 야 E대생. 무슨 일이야. 삼 년 만에 본 여자애가 그에게 말을 건 넸다. 운이 좋았지. 어쩌다 보니. 그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겸손. 그렇지. 나와 줘야지. 담임 이거 들으면 어떨까. 여자애가 여덟 명의 관심을 모으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담임 안 믿을걸. 말이 되는 상황이어야지 이게. 수업 시작하기도 전에 앞으로 불려가서 엎드려서 맞았던 거 기 억나냐? 그는 기억나지 하고 짧은 몽둥이와 둔탁한 타격감을 기억했다. 그는 그런 폭력이 마냥 싫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문제아가 되는 기분이 근사했다. 네 명이 더 왔다. 연도 오고 김도 오고 나머지 인원도 하나둘씩 모여서 결국 모두가 모였다. 야 연 얘 E대 붙었대. 어때. 아까 그 여자애가 연에게 말했다. 와. 대단. 연은 난처한 표정으로 물개박수를 쳤다. 야 너 왜 이리 유난이냐. 사귈 거야? 어느 남자애가 말했다. E대생에 이 정도면 오케이지. 나쁘지 않지. 여자애가 그에게 어 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그는 쑥스러워서 야아 하고 어깨를 빼려 고 했다. 여자애는 앞자리 애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 는 브이 포즈를 잠시 취하고는 멋쩍게 어깨를 뺐다 야 E대 붙었다며 축하한다 김이 그에게 악수를 권하며 말했다 고맙다. 나 말고 다른 애들도 많아. 붙은 애들. 그가 얼떨결에 악수를 받아주었다.
불안 101 넌 반전이잖냐. 대단해. 김이 웃으며 말했다. 너 전학 가고 처음 보네. 그는 목소리를 낮고 굵게 냈다. 여기 애들은 몇 번 자주 봤는데, 애들 볼 때 같이 나오지. 같이 불렀을 텐데. 시간이 애매했지. 야 그래서 E대 간 거 아니냐? 내 덕이야 아주. 나 안 봐서 간 거야. 야 영향 있지. 분명 있어. 옆에서 남자애가 껴들었다. 반갑다 진짜. 그는 대화를 끊고 싶어서 말했다. 으휴. 김이 갑자기 일어나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헝클어뜨 렸다. 아 나도 공부 열심히 할걸. 김은 자리에 앉아서 덧붙였다. 야 나중에 복수하는 거 아니냐 너한테 남자애가 그와 김을 번 갈아 보면서 말했다 박이 한참 여자애들과 조잘대고 있는 와중 에 그를 곁눈질로 보았다. 뭔 복수. 그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남자애에게 웃어 보이 려고 노력했다. 김한테 너 많이 맞았잖아. 복수할 만하잖아? 야 말을 그렇게 하냐. 같이 논 거지. 다 그랬잖아 그때. 김이 과 장한 서운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너 얘만 골라서 팼잖아. 틈만 나면 울리겠다고. 울 때까지 때린 다고. 진짜 그거 버틴 너도 인정이다 진짜. 남자애가 그에게 엄 지를 올렸다. 야 왜 그러는데. 김이 얼굴을 두 손으로 쓸었다. 이 학기 되고야 살았지 이 학기 때는 평화로웠지 그치 남자애 가 그에게 말했다 이 학기 때 재밌었지. 그가 말했다. 일 학기 땐 재미없었어? 김이 그에게 물었다.
강우석 소설102 솔직히 재밌긴 했잖아. 김이 그에게 물었다. 재미없진 않았잖아. 김이 그에게 물었다. 아 알았어. 김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어렸어 그때. 김이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 진짜야. 김이 그에게 다시 악수를 권했다. 그는 악수를 했다. 그는 새빨갛게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모두 가 그의 알몸을 지켜보았다. 그는 모두의 시선 한참 아래에 쭈 그려 있었다. 그는 단숨에 추락했다. 그는 다시 아무것도 모르 겠는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는 정수리 사진을 찍고 싶은 열망에 정수리를 더듬거렸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 었다 그의 E대 이야기도 종종 나왔다 그는 이야기에 귀 기울 이지 않고 연을 보았다 그는 연에게 사과할 수 없었다 그는 어 떻게 사과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과를 할 수 있을까. 사과를 할 수 있을까. 사과를 할 수 있을까. 감히. 그는 계속 질문했다.
불안 103

이동현

이동현 시106 밤의 당신 이제 세상으로 세상을 호흡할 것이다 오늘어쩌면밥을 먹고 목이 잘리면 이른 시절에 밥을 찾고 어둔 시절에 세상으로 세상을 호흡하고
107밑동과 타일과 4호선식의 로망 떫은 얼굴을 하고 있는 당신에게 힘껏 문드러졌다고 하려 한다 갖은 조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벌린 채 허리를 숙인 채 눈을 치켜뜨며 믿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말들이 뻗어나가길 희망한다 더하고 더해 약간은 뺀 약간의 거추장스러움을 부러워한다 큰어쩌면타일은 거북하고 작은 타일은 촌스러워, 한숨에서는 한여름에도 김이 서려 나온다지, 젊은 사내의 뒷목에는 머리털이 엉켜 있다 저들의 배에 흉터가 즐비하기에 흉터를 가로지르며 난 밑동과 타일과 4호선식의 로망
이동현 시108 그 시시콜콜하고 지리멸렬한 역사와 사연과 일화와 일상 덕분에털이 그만큼 자랐다는 현상 뼈의 마디마디마다 박아온 기포들이 터지는 소소한 기쁨 젊은 새치를 달밤에 비추며 걷는 그 길 고달픈 도피로 모호한 영역에서도 온몸을 사선으로 배치해 의문을 품는다는 의문을 부끄럽게도 품은 바람에 밤엔 사각형들의 무더기들을 손수 장사지냈다 모른다 간주하는 것들 어머니와 나는 각자의 방법으로 화장실의 물때를 지우곤 하였다 나지막한 욕을 허공에 퍼부으면서
109서부해안, 2001년 경 기어다니는사람또한언제나다시일어나곤했다는무수 한증언들을손수부정한다. 인천 사이다를앞바다에서팔곤돈을 벌곤 하던 장사치가 그만 어젠가 내일인가 죽고 말아서 그의 영전에는 오고 다니던 곳의 벽화를 바쳐야한다 이젠 장사치의 눈이 기억나질 않고 곱뿌cup의 형태도 더 이상 기억나질 않아서인지 그곳에는 더 이상 벽화가 없다 맘에 드는 날엔 바다나바다를보자보러가자누군가와먹고마시고사이다는너무달다며 고개조차 같이 저을 때와 서부해안, 2001년 경
이동현 시110 벽화 앞에서 찍은 사진에선 왜 옆을 보고 있냐는 질문엔 그저꽃게처럼살뿐이라고대답한다.
당신이 짖은 이유 111 당신이 짖은 이유 죽어버렸다고그때바퀴벌레가그곳에서도드디어 당신께 말할 수 있겠다 노상 밝은 곳에서도 모든 곳의 일치에 대해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논하기에 모든 새벽과 아침과 중천에 뜬 해와 해질녘 노을, 하늘에 잔상으로 남는 빛과 구름이 낀 자줏빛 밤하늘과 거기서 자라난 모든 상상과 나와 공상과 삶과 나의 지친 어 깨가 글씨가 흐릿해진 책 뒤에서 비좁은 허공에 가냘픈 다리를 걸친 채 죽은 벌레가 오줌이 마려웠다는 걸 알아버린 난 획기적인 방식으로 낄낄대기 시작한다 그러면 어느새 바람이 불거나 내가 상승하거나 상승하고 개는 나를 처음으로 보듯이 매섭게 짖어대어 그렇게 위와 아래에 갇힌 채 새롭거나 오래된 말을 꺼내본다
이동현 시112 “이 곳은 내 것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 걸” 밤의 택시가 미친 듯이 달리는 새벽의 서울 아니면 아침의 경기도 그러니 오전의 민주공화국 택시가 만들어낸 매서운 바람 위로 청승맞은 넋두리를 바 람과 땅과 그의 숲으로 어쩌면 내 개에게도 보내노니… 모든 位의 당신들이 탄식하고 읍하면, 모든 나와 개와 바퀴벌레들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을 궤적과 언어와 당신들로 춤을 그것이추면모든 까닭이라 평생을 배워왔다며 모든 이들의 양친과 양친의 양친들이 쉰 목소리로 차디차 게 고한다면바퀴벌레가죽어버린채로영영죽어버린채로어떤재생과회생의말도붙일수없는채로죽어버린채죽어있었으며그날나는무릎과손가락과눈알과함께당신이 아픈 채로
당신이 짖은 이유 113 획기적인 방식으로 깔깔대며 모든 위상의 바람과 당신들을 조용히 울며 막는다 발등과 발등과 발바닥과 발바닥으로 당신들의 촉감을 예상하기 시작한다
이동현 시114 버마재비 광시곡 〈얍얍〉 그만이 안다는 골목, 석회로 지은 불상이 있다고 한다. 정 신만이 또렷한 버마재비도, 해탈을 위한 여정을 시작할 것이 다. 버마재비는 월광을 만끽하며 일평생 늠름하기로 맹세한다. 성조 없는 언어 속에서도 추억이 볕을 막을 수 있다는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었다지만, 이는 분명 거짓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재현하는 날에도 굳이 불상을 찾았어도 아무 일도 없던 듯이 늙어서 스러진다는 소식과 함께 우리가 병렬적으로 무너질 때를 대비해 그저 빙긋거리기를 관두고 살아있기 위해서 부를 자장가, 자장가는 〈자장자장〉
버마재비 광시곡 115 꿈조차 밉고 힘겨워 당신이 떠난 나머지 나는 도저히 1. 병적인울음소리를골똘히탐구하면 2. 끽끽끽끽喫喫喫喫하는연기만이샘솟는다. 즉 격자무늬 속 회색 속삭임에도 우울감 즉 체화된 상식과 그로 말미암은 상대적이지 않은 박탈감 즉 회색 속삭임이 있는 것이다그러니깐잿빛불상이기어코마음대로 죽어버리는 방법에는 정의롭다는 노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닥을 몇 번을 핥아야 나는 배탈이 나나요? 바닥을 몇 번을 기어야 우리는 빌어먹고 사나요? 3 구름으로 城을지어서환희에찬다면이름이생각나지 않는공터를질주했다고전해진다
이동현 시116 〈찰칵〉 3 1. 여전히 그때의 그가 질주하고 있다는 해석을 이끌어 내기로한다막간의노랫말 또한 아가야, 아가야, 그 간악한 술책을 내 모를 줄 알았느냐, 아 가야, 아가야, 말하지 않으면 곧 이가 시릴 것이다 말에 대한 책임을 지시지, 옥玉색 지팡이, 지팡이의 문신, 합체. 〈얍얍〉 4. 경우에따라선사람도사람을모를수도있는것이라말 는형과하던어린벗을지금이해하기로해도이제는죽고없는쌍둥이누나의종아리에는마치선인장처럼생긴반점이있었다기억이끌어내려졌으니 5 어렸을적선인장을커터칼로자르던급우를악에받힌 말로모욕했으니
버마재비 광시곡 117 6. 쌍둥이들은이미죽고없던시대에서도그모욕은원체 못된것이라 7. 제게형과누나의무덤을그누구도알려주지아니합니다 8. 양친은이를비밀로묻어두기로. 〈붕〉 대로에서 이륜차는 맹렬히 달렸다 아해兒孩가 질주하는 시대, 우린 13명이 필요하지 않다(김해경, 1934) 9. 위에서, 옆에서요리조리달립니다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10. 돌부리에걸려넘어져서뼈가부러진다면빨간약을바 르고 나에게 지팡이를 건네줘요, 다시 시작도 못하게 한다면, 부목을몇개대어야지오래된지팡이에게
이동현 시118 시대는 지팡이에게 결함이라는 수식어를 주었지만 찔러도그는 물기를 확인할 수 없는 죽은 선인장을 봐서도 얕은 돌무덤에 참배하지는 않을 것이니 생일 때는 선물로 배추씨를 받을 거야, 라고 벗에게 말했고 우리는 골고루 먹는 어린이들, 이라며 급우들을 선동했다면 겨울날에 장례식장을 가기 위해 정장을 맞춰야 한다면 울음소리를 들으려 귀를 막았다 쌍둥이들을 생각해보려고 목을 졸라 보았다 눈을 감으려 눈을 감고 밥을 먹으려 밥을 먹 었다 때론 귀에서도 떠나갔다는 10. 푸른버마재비의행방을찾 는다 선인장 모양 귓불 지하실의 월세 이십일만 원, 관리비 별도. 별도의 공간에서 서식하는 늠름한 버마재비
버마재비 광시곡 119 11. 시대가꿈풀이를당신께요청하는날에도또다시나에게부적합하여당신도더이상나를찾아오지아니한다
이동현 시120 야윈 무지개 (모든 정은 힐긋거리거나 찡긋거리는 불에도) 우린 하지 못할 밥을 하고 고치지 못할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에 강림한 것이다 서성이다 안부라도 건네받으면 꽤 괜찮은 하루가 되길 기어이 가려질 내가 진다는 것 어깨에 짐을 메고 있었지만 배경으론 기어이 기어 나온 위풍당당한 무지개가 어깨에 짐을 멨다. 바람이 불었다. 무지개를 실제로 본 적 은 많지 않거나 아니면 없을 거다. 본 적 없는 사람의 안부를 물 은 적이 있다. 서울에도 안개가 꼈다는 말을 믿지 못한 어진 이 들이 도처에 똬리를 틀고야 만 것이다. 쉿쉿! 뱀 같은 놈들! 여긴 더 못 있겠어!
남부여행 121 남부여행 1. 땡볕은 모름지기 억겁을 곱해 지고 사는 자의 것인 법이요, 사랑하는 이들이 미워하기를 쉬이 여기니 파헤치고 파헤쳐 그들과 함께 살아갈 것 2 모두 태워버려라, 모두모두 그건 이제 안 쓰는 거야 문도까먹었거든닫아버릴 거야, 너희 보기가 좀 무서워야지 3. 아, 아, 그들이 절 기다려요 그러니 모두 타 버리길 4 걱정 마 정말로, 오늘 본 건
이동현 시122 응달, 음영, 음지, 그림자, 그늘, 폐건물과 고양이 폐건물에 남은 사람 물고기, ‘훨훨 나는 금붕어’ 그런 거였거든 5. 물고기의 넋이 훨훨 날아가 바다에서도 그를 볼 수 없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들려왔다. 6. 폐건물에 누워있던 염기가 복부에 스며들어 바다처럼 팽창한 고양이가 죽었다는 예감이 들 뿐 소문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바다에 물고기를놀러갔다잡으러 간 모양이다 7.
남부여행 123 해처럼 바다처럼 물들었던 탓으로 어설프게 역한 소금맛을 느끼기 위해 어떤 방향이라도 누우면 그렇게 휩싸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동현 시124 월광과 투창 측면으로 행진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벽을 넘지도 않고 핥거나 입맞춤을 퍼붓기도 하고… “뭐하고 지냈니” 서로의 피고름을 빨아주며 서로를 귀한 사람이라 말해주는 것이고 귀가 길고 다리가 튼실하면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니 때론 붉어진 눈을 부라리며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네 정오의그렇죠창은 멀리도 날아가 알비노들의 땅에 도착하고 말았으니 이곳은 한 줌의 역사도 품지 못할 겁니다
온전한 둔갑술 125 온전한 둔갑술 이 벽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다시 그 벽을 넘어. 또 다시 벽을이스스로넘어…그림자가되는세상에선벽또한그리할것이다벽은또한깊지도않고새롭지도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다 시 또 그 벽을 넘어… 상처와 죄, 죄와 상처, 왜 들지도 않을 볕을 찾는지, 추접스 레 구는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아서 별안간 일어나 다시 넘을 벽을 찾는 것이다 진심으로 광대가 되고 싶었던 적도 없어서 꿩처럼 머리만 숨길 것이다 머리만 숨죽인 동네에서 얼굴에 문신을 그리겠다 쓸 일도 없어 쓰기가 싫어서 벽을 넘고 넘으면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곳으로.
이동현 시126 책에는 무언가 스며들어있는 것 같아 책을 갈기고 갈겨 죽을 해 먹었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말이야 모여 사는 동네가 만약에, 있다면 다른 축도 걸을 수 있었을 텐데 혹시나 하면, 역시나 할까봐 음악은 시작되고 볼륨은 아마도 내가 올리지 않을까 싶어 La quamiet , Taniminian ! Gettente namuniguet ― Häagen Dazs. 왜, 왜 일생동안 증명했건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지 아이참, 딸기맛이 환장할 정도로 좋아 사러 간 아이스크림 필립 아저씨는 과연 나를 사랑해줄까? 3차원 지리서 ―덴마크식 아이스크림
3127 차원 지리서 ―덴마크식 아이스크림 모르갔어그건. 응. 정말로.

모든 언어가 떠나간 계절에, 나는 내 심장을 덥석 베어 물고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떠나네. 윤정준

윤정준 소설130 극의 도시 매일밤, 한걸음앞으로장거리여행을떠난다 벌레의 삶을 가늠해본 적 있던가. 더욱이 지렁이의 삶을. N이 사육 상자 속 깔린 흙에 검지를 한 마디 쑤셔 넣은 채 까닥 거렸다. 습기를 머금은 흙 아랫부분이 짙게 드러났다. 지렁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검지에 묻은 흙을 털어낸 후에 다른 네 손 가락 끝으로 다시 흙을 짚었다. 지렁이들이 느끼지 못 할 만큼 가볍게. 이번에는 눈을 감고 비단을 매만지듯 미세한 입자들이 지문에 닿는 촉감을 느껴나갔다. 지렁이는 이 흙의 느낌을 알 까. 지렁이의 삶을 공상해 봐도, 부단히 흙을 섭식해 분변토를 배설하다가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는, 단편적인 내용을 빼면 N 이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N의 주된 업무는 자리 지키기였다 빌딩 일 층에는 방이 다섯 개 있었고 그 중 하나에서만 하루 대부분을 보냈다 세간 은 간단했다. 여태 한 번밖에 켜진 적 없는 지시사항 확인용 모 니터를 포함해 생존과 업무에 필요한 물건들이 필요한 만큼만
극의 도시 131 있었다. 그는 주로 가운데 놓인 책상에서 많은 것을 해결했다. 앉아서 자리를 지키다가, 한쪽 구석에 쌓인 음식을 가져와 먹고 바닥에 누워 잤다. 음식은 모두 똑같은 보존식품이었고 잠자리 는 요와 이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이러니저러니 평가하 지 않았다. 자리를 지키는 것이 업무의 전부는 아니었다. 때때 로 N은 하루 세 번 정도 순찰을 나갔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 은 아니었으나, 묘연한 이끌림을 느끼며 건물을 나갔다. 건물 바깥에는 도시 외곽까지 이어진 방사형 도로가 있었다. 그는 어 디론가 가보고 싶다거나 이쪽으로는 가기 싫다는 생각 없이 발 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선 구역도 규칙도 무 용했다 배회와 다름없는 순찰이 끝나면 늘 같은 자리에서 똑같 은 네 글자짜리 보고서를 썼다 이번에도 N은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내용없음. 천 번도 넘게 작성한 보고서지만 그는 숫자를 세지 않았고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의식한 적 없었 다. 몇 달 전 모니터를 통해 전달받은 지시사항을 이행한 것과 그즈음 넘겨받은 지렁이가 없었다면, 지금도 그는 여전히 자리 만 지키는 셈이었다. * C는 예정된 의식을 치르기 위해 무대 뒤쪽에서 때를 기다 렸다 이 새벽 연극에서 아직은 할 일이 많았다 지휘자로서, 참 여자로서.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 분위기를 입맛에 맞게 고조시 켜야했기에 그는 열중했다. 연극을 이끌고 관객들을 어르면서,
윤정준 소설132 무엇보다 연기를 살펴보며 배우들의 잘잘못을 가려야 했다. 자신이 떠드는 대사에 무대 전체가 어떻게 호응하는지, C 는 유심히 관찰과 통솔을 반복했다. 그의 극장에서 대사는 배우 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장르건 가리지 않고 준수한 연기를 해 내는 베테랑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벙어리였다. C의 자신이 대행하는 대사에 맞춰 배우들이 열연한다는 공연원칙을 어기지 않고 지켜왔다. 극장주이면서 연출과 제작을 맡은 그는 자신의 방법이, 자신이 옳다고 되뇌었다. C가 탄성과 함께 마지막 장을 열었다. 고가도로에 열띤 대 사가 울려 퍼졌다. 랜턴 아래에 엎드린 주연 배우는 느리게 온 몸을 움츠렸다 피고 있었다 주연이 지나간 뒤꽁무니를 따라 흔 적이 생겼다 무대에 깔린 부드럽고 축축한 흙에,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그는 배우의 움직임에 히죽이는 얼굴로 끄덕이며 자 신의 목소리 연기에 취하고 있었다. 그래요. 난여전히당신의너제트예요. 아니. 아니야. 당신은나의나비야. 더블민트야! 어째서요. 갈리마르?난하나도변한것이없는데. 당신은, 수컷이야! 절정의 순간에 관객들이 다시 재잘댔다. 한바탕 소요에도 C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객들이 공연 내내 떠들고 있었지만, 그들이 겨우 발 하나 올릴 수 있는 객석에 앉아 떠드는 습성을 가졌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귀여운 것들. 그는 하던 일을 계 속했다 대사를 하면서 무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C가 토해내듯 단말마를 지르고, 주인공의 자살 장면으로 마침내 극이 끝났다. 그는 앞니로 깔끄러운 혓바닥을 긁었다. 곧 해가, 조명이 밝아올 것 같았다. 그는 뒤돌아 옷매무새를 가다듬
극의 도시 133 고 안면에 힘을 주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커튼콜 준비를 마친 그가 무대 앞으로 나섰다. 놀란 관객들 몇몇이 자리를 떴다. 걷히고 있는 어스름 아래로 휘광의 둔덕이 오르는 중이었 다. 닳아버린 도시의 그림자가 고가도로 위로 길게 눕기 시작했 다. C가 고개를 숙여 퇴장 인사를 올리고는 재빨리 무대 뚜껑을 열었다. 꿈틀거리는 지렁이들이 상자 안에서 득실거렸다. 그는 주연인 갈리마르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길이가 C의 손만큼 길 었고 두께도 길이에 걸맞았다. 그는 갈리마르의 유독 도톰하고 흰 환대를 짓눌렀다. “머저리 같은 새끼! 자살할 때 몸을 배배 꼬았어야지! 내가 그렇게 애처로운 비명을 내질렀잖아!” 지렁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세차게 버둥댔다 C는 지렁이 를 곧장 도로에 내동댕이치려다가 말았다. 아차차, 이렇게 뒈져 버려선 안 되지. 그는 먼저 끝이 거칠고 두꺼운 손톱을 세워, 주 둥이 부분을 거칠게 뜯어냈다. 근육이 끊기면서 지렁이가 뻣뻣 하게 몸을 뒤틀었다. C의 손가락에 힘이 점점 세게 들어가더니, 이내 가드레일에 지렁이를 내려쳤다. 가드레일에 지렁이가 부 딪힐 때마다, 지렁이의 몸은 넝마처럼 헤지며 살점이 떨어져나 갔다. 몸에서 붉은 피가 삐져나오고 있었다. C는 마지막으로 지 렁이를 고쳐 잡고, 손톱으로 환대를 찢어나갔다. 손톱 끝을 타고 느껴지는 자극에 C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쾌감과 함께 타오르는 요의를 느꼈다. 고가도로 바닥에 지렁이를 내던지고 바지를 내려 오줌을 갈겼다 지렁이는 죽어가는 중에도 염분에 반사적으로 근육을 움찔거렸다 그는 틈을 주지 않고 마무리했 다. 움찔거리는 지렁이를 밟아 바닥에 질질 끌었다. 갈수록 밟는 힘이 강해져 지렁이의 파편이 아스팔트 사이로 갈려 들어갔다.
윤정준 소설134 “이제 끝입니다. 다음에 보자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것들!” C가 손을 휘저었다. 참새들이 철조망과 나뭇가지 위에서 일어나 짹짹거리며 날아갔다. “어휴 저 수다쟁이 녀석들.” 관객을 모두 떠나보낸 C는 극장 뒤 진입로로 향했다. 바지 는 내린 채였다. 서서히 발기되는 음경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다른 모양으로 덜렁거렸다. 구석진 그늘에 그가 앉았을 때 음경 은 이미 단단하게 핏줄이 불거져있었다. 그는 수음하기 위해 음 경을 꽉 움켜잡았다. * 지시사항을 수행하고 돌아온 N 은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간간히 스쳤고, 그는 그때마다 생각을 이어보려 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지렁이는. 이렇게 시작되면 그것이 끝이 었다. 이음새를 채우기가 헐거웠다. 애당초 그는 이음새가 있었 던 적이 없었고 헐거운지도 몰랐는데, 정확하게 그렇다기보다 는 그런 것에 가까워서 그의 생각은 수초 뒤에 사라질 옅은 안 개 같았다. 겨우 열렸던 생각은 재빠르게 봉합됐다. 부질없다 는, 그에게 그나마 익숙한 생각이자 희미한 생각과 욕구 중에 그나마 명료한 것으로. 자리를 고쳐 앉으려는지 N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딱딱한 철제의자가 크게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반사적으로 움 직였다. 팔이 덩달아 움직이며 책상 위에 놓인 볼펜이 떨어졌 다. 고개 돌린 그는 생각했다. 볼펜이 떨어졌다.
극의 도시 135 떨어진 볼펜은 N에게 줍거나 두거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줍든 말든 딱히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 지금이 아니면 언젠가 몸이 가는대로 될 노릇이었다. 문득 그는 전에 한 번도 들었던 적 없는 생각이 선명하게 들어, 실행에 옮겨보기로 했다. 볼펜 이 떨어졌으니 의자에서 일어나 줍고 일어난 김에 순찰을 나가 자.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떠올린 대로 실행한 N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평소와 같은 바깥 풍경이 보였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과, 균열이 간 채 무너 지다 만 건물과, 터조차 말끔한 곳이 일정한 규칙 없이 늘어서 있었다. N은 발걸음을 따라 육교로 갔다. 육교 위에서 고개를 돌리면 낡고 부서진 건물들과 방치된 선로와 자갈이 있는 쪽까 지 한 눈에 보였다 그는 앞만 보고 걸어 육교를 내려왔다 간간 히 와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로에 있던 자갈이 무너진 철책을 넘어와 있어, 불규칙한 골을 가진 파도처럼 인도에 깔려있었다. 그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여느 때와 같이 특별히 생각하는 것은 없었고 순서나 방향 따위도 잊은 지 오래였다. * C는 갈리마르와 한바탕 즐기고 짐을 챙겼다. 참새들이 있 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리는 연극은 한편으론 참새가 있어야만 열리는 셈이었다. 그는 지렁이 상자를 들고 다른 참새 들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두세 마리로는 부족했기 에,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모여 앉아 떠들만한 가지가 많은 나무 나 전봇대가 있는지 살폈다. 그는 고가도로를 내려와 통조림에 든 옥수수를 퍼먹으며
윤정준 소설136 그 아래를 따라 걸었다. 오래된 도시에는 빛바랜 것들이 가득했 다. 참새가 앉아 수다를 벌이고 있는 나무를 발견했을 때 C는 이미 세 통째 먹은 옥수수 통조림을 버리며 맛이 없다고 구시렁 대고 난 참이었다. 그가 던진 깡통이 요란스럽게 구르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어딘가에서 잠깐 정적을 즐기고 있던 참새들이 놀라 지저귀었다. 날갯짓과 흔들거리는 나뭇가지가 하나 되어 우수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참새 울음소리가 난 쪽으로 발 걸음을 돌렸다. 아. 참새를 향해 그가 짧게 감탄했다. 참새의 수 다 소리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C는 참새들의 높은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가지가 높게 뻗 은 키 큰 나무에 작은 깃털 뭉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 다 그는 지렁이 상자를 내려놓고 짐 가방에서 뚜껑이 열린 통 조림을 꺼내, 말려놓은 옥수수 알갱이를 나무 아래에 뿌렸다. 그가 뒷걸음질 치자 뜸을 들이던 참새들이 몰려들었다. 파닥이 는 날갯짓에 부산스런 소리가 한바탕 일었다. 먼저 온 참새들이 총총 뛰어다니며 이리저리 뿌려진 옥수수를 쪼아댔고 뒤늦게 온 참새들도 그 옆으로 끼어들었다. 먼저 온 참새 등 위로 올라 타는 녀석도 있었다. 그는 참새 구경을 하며 지렁이 상자 안으 로 썩은 옥수수를 넣었다. 잘 먹어라. 인사도 덧붙였다. 그때 참새들이 급히 날아올랐다. 그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 다. 참새가 떠난 나무 밑과 다시 멀리 올라앉은 나무 위를, C는 번갈아 봤다. 자신의 애완시간을 방해받았다는 느낌에 입술이 굳어가고 있었다 양팔로 상자를 껴안은 그는 이질적인 소리를 알아차렸다 무언인가가 자갈을 건드리는 소리가 긴 간격으로 들렸다. 그는 잔뜩 이지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극의 도시 137 * N이 돌아오는 길도 정해진 방향은 없었다. 갔던 길을 역순 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발걸음이 한 번쯤은 우연히 그렇게 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는 무작위로 회귀 했고 소요 시간은 안중에 없었다. 그의 발은 나름대로 신뢰할만 해서 순찰은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어영부영 거처에 도착한 N 은 근처에서 온전한 보도블록 하나를 발견했다. 건물 옆에 두 기둥만 오벨리스크처럼 서있는 그곳은, 원래 앞쪽 보도블록들이 부서져있었다. 빠짐없이 부서 져있어, 온전한 보도블록을 보기 전까지 그는 그 난잡한 모양 그대로가 블록 모양인 줄 알고 있었다 N은 어떤 블록이 온전한 블록으로 바뀌었다는 것, 누가 바 꾸어 놓았고 그렇다면 왜 그랬으며 예전에는 모두 부서져있었 던 것이 확실한 가를 생각하진 않았다. 온전한 블록을 보고 온 전한 블록이 있다고 그저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는 멀쩡한 블 록 넘어 다리를 뻗었고 완전히 지나쳤을 때, 익숙지 않은 생각 이 그에게 다시 일어났다. 건물에 들어가면 먹을 것을 들고 이 층으로 가서 지렁이에게 주겠다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 신을 미약하게나마 사로잡은 느낌을 따랐다. 사로잡히는 느낌 은 그에게 걸리적거리면서도 다급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지만, 그는 거부한 적이 없어서 거부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분변토가 있는 흙 위로 보존식품을 흩뿌린 후에 열었던 사육 상장 뚜껑을 다시그덮었다이후로 N의 머릿속에 지렁이가 더 자주 떠오르기 시작 했다. 자주라고는 해도 자리를 지키는 원래 일에 비해 꽤나 드
윤정준 소설138 문 일이었다. 온갖 공상을 하거나 의문을 가지는 것도 아니었 다. 지렁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련의 행동이 그의 일상에 들러붙 었을 뿐이었다. * 방해자를 죽인 C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이 도 시에 토끼가 있을 리가 없었다. 땅을 파야 보이는 지렁이와 찾 아다녀야 볼 수 있는 참새가 전부인 도시에 토끼라니. 그에게 토끼는 머릿속에나 있는 생물이었다. C는 자신을 방해한 것이 고작 토끼 한 마리였음을 확인하 고는, 토끼의 양 귀를 한 손에 움켜쥐었다 붙잡힌 토끼는 별다 른 반응이 없었다. 그는 토끼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에 앞서 토 끼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잠시 생각했다. 일단 귀엽지 않 아서 애완동물로서 가치가 없었다. 그럼 배우나 관객으로 써볼 까. 그러기에 토끼는 벙어리나 수다쟁이가 아니어서 맡을만한 역할이 없었다. 애완용이 못될 생물에게 지렁이와 참새가 꿰찬 숭고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모욕적이었다. 물론 연출이나 극 장주는 더더욱. 토끼가 극장주라는 것을 상상하자마자, 그는 토 끼의 머리를 바닥에 뭉개기 시작했다. 처형은 바닥에 피가 스며 들고 얼굴 가죽이 찢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토끼는 처음에 사람 울음소리 같은 괴성을 내지르다가 경련으로 뒷다리를 떨며 잠 잠해졌다 그는 지친 숨을 몰아쉬고 토끼를 툭 내려놓고 외쳤다 “씨발! 이게 아니야!” C는 널브러진 토끼를 걷어 차버렸다. 참새들은 몇 마리만 나뭇가지 위에 남아있었다. 그는 토끼가 망친 애완시간 동안 지
극의 도시 139 렁이 상자를 붙잡고 골똘히 의심했다. 토끼가 나타나게 된 것은 상관 놈이 들인 것이 분명하리라. 어떻든 간에 도시를 관리하 는 그 놈이 아니라면 토끼가 나타날 수가 없었다. 도시의 모든 것에 관여하면서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주제에, 새벽 연극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한참이 지나 그는 자신이 모르는 사 이에 도시에서 많은 것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있을 수도 있다 는 힘없는 결론을 내려야했다. 이 폐허의 주인이 아니고 될 수 도 없다는 것에 C는 다시 화가 났다. 그는 흙을 찾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다시 참새들이 나무에 모이고 있었다. 새벽 연극은 계속 되어야했다. 무엇보다 빈자리 캐스팅이 시급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연극 준비를 마친 C가 무대 안에 물을 가득 쏟아 부었다. 관객들은 여느 때처럼 수다를 즐기고, 그는 흥건하게 젖은 무대 아래에서 배우들이 기어 올라오길 기다렸다. 배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자 그는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알런, 알달린링을낳고. 알달린링, 안다이사트를낳고. 안 다이사트, 온너제트를낳고…참했노라, 가알리마르! 양팔을 하늘로 뻗고 삼킬 듯한 눈빛으로 고가도로 극장을 내려다보는 C는 마치 지배자처럼 보였다. 쏟아내는 대사가 극 장에 울려 퍼지자 관객과 배우도 그와 함께 승천하는 듯했다. 그는 자신만의 세상에서 완고하게 완전해지고 있었다. 새벽 막 바지에 그는 끝까지, 그의 커튼콜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열 성을 다했다 C는 낯선 빛을 보았다. 그는 망아를 경험하는 것이라 여기 며 창세기처럼 공연장을 주물렀다. 빛은 미동 없이 다가왔다.
윤정준 소설140 빛은 어느새 극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뒤늦게야 또 다른 방해자가 나타났다는 걸 직감했다. 아직은 해가 뜰 때가 아니었 다. 도망치건 때려눕히건 다른 행동을 해야 했지만, 그는 연극 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지배자였다. 지배자여야 했다. 끝내 C는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정면으로 빛을 받은 그의 얼 굴이 폐막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N은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 C는 N의 거처로 연행되었다 강제로 진행된 것은 없었다 N은 자연스럽게 멈춰 섰고, C는 그에게 다가가 자신을 향한 손 전등을 밀어내리고 지렁이 상자를 넘겼다. C에게는 어떤 구속 도구도 채워지지 않았다. N은 도시에서 처음 발견한 생존자에 대한 보고서를 적기 시작했다. 내용없음. N이 온점을 찍자마자 C가 보고서를 구겨서 뒤편으로 집어 던졌다. 그는 빈 종이를 N에게 내던지며 말했다. “사람 하나가 왔다고 써.” N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C를 바라봤다. C는 N 맞은편에 서서 연극에 대한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말소리는 또박또박하면서도 빨랐다 폐허라기에는 파괴된 적 없 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여서 마치 온 도시를 상대로 연 설을 펼치는 듯했다. N은 끼어들지도, 그럴 이유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C가 말을 마쳤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극의 도시 141 “왜 말이 없어. 써라. 내가 말한 대로. 사람 하나가 왔다. 써!” C가 역정을 냈다. N은 사람 하나가 왔다고 보고서를 쓰는 것이 무슨 내용이 있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내용 없음.’이라고 보고서를 써왔던 것도 펜을 잡은 손가락이 그렇게 움직였기 때 문이지 그가 내용이 없다는 것을 분별해서는 아니었다. C가 가 만히 있는 N의 손을 붙잡아 펜을 쥐여 주고 종이 위에 올려놓았 다. N이 썼다. 사람하나가왔다. 보고서를 마치자 그때까지 한 번도 작동한 적 없던 업무 지 시용 모니터가 켜졌다. N의 눈이 돌아갔다. C는 그 눈빛을 읽 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이야기했다 “사형이겠지 그러면 뭐가 있겠어 즉결처분이야 널 죽여 버리고 이 답답한 자릴 뜨고 싶은 기분이 드는군. 정작 중요한 걸 못 했는데, 제기랄. 재밌는 생각이 하나 든다. 들어봐. 네 손 가락 가죽을 벗겨서 근육과 뼈마디가 드러난 손으로 또 똑같은 ‘내용 없음,’을 쓰게 하는 거지. 피가 난 김에 보고서 밑에 지장 도 찍고. 그리고는 네가 정말 목소리를 낼 수 없게 성대를 도려 내고 혀를 깊게 잘라 입술에 꿰매버려서 널 진짜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C는 히죽거렸다. “아 참. 이때 중요한 건 네가 과다출혈로 죽는 걸 막는 건데. 네 놈 방에 적당한 도구가 없지만, 꼴사나운 걸 좀 보고 싶기도 하니까… 음 그래 기어 다니게 만드는 거야 그럼 이 방이 좀 향기로워지겠군 …이제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다 소용없어 잠깐 사이에 내가 너처럼 변해버린 걸지도. 말하고 나니 재수 없군. 난 완전해지고 싶었어. 완전해지고 있었어! 빌어먹을 상관 자식
윤정준 소설142 은 날 왜 여기 가둬놓은 거지? 의미가 어쨌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커튼콜 말이야. 내일 새벽에 고가도로로 가자. 도망칠까 걱정하지는 말고. 너한테는 걱정이란 것도 없겠지만….” 말을 마친 C는 지렁이 상자를 들고 이 층으로 갔다. N은 계속 자리를 지켰다. 지시 사항이 덩그러니 띄워져 있었다. 사람하나. 사형. 둘은 새벽녘에 출발했다. C가 N의 등을 떠밀었기에 가능 한 일이었다. C는 N을 대신해 손전등을 들고 곧장 고가도로로 향했고 N은 뒤따랐다. 도착한 고가도로에 배우와 관객이 있을 리 만무했다 C는 평소라면 연극 중이었을 것이라며 구시렁대 고는 연극을 하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대사를 토해내면서 온 팔다리를 휘둘러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맥없이 가드레일에 걸터앉아 고개를 떨궜다. “이건 아니야.” C는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N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초점이 있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눈. 흐리멍덩하면서도 동공 안에는 사라지지 않을 알맹이가 있 는 것 같은 눈. 그 눈에 C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C는 자신의 눈 을 보기 위해 N의 얼굴을 붙잡고 가까이 들여다봤다. 좌우로 들 여다봐도 자신의 눈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는 멀찍이 얼굴 을 뒤로 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이 먹이 사슬의 정점인 이유를 알아? 그건 인간이 최 고로 수다쟁이이기 때문이지 인간이 말이 제일 많거든 말이 적은 놈들은 말이 많은 놈들한테 잡아먹히는 거야. 알아들어? 또 아가리를 다물고 있네. 그러니까 네가 죽어야 하는 거야. 내
극의 도시 143 가 아니라. 네가. 네가 죽어야 한다고.” C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N은 여전히 같은 눈빛이 었다. C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N의 눈앞에 날 선 잭나이프 를 들이밀었다. 가만히 서 있는 N의 눈을 다시 들여다봤지만, 여전히 C는 자신의 눈이 어떤지 볼 수 없었다. 잭나이프가 햇빛 의 미광에 반짝였다. C는 가드레일 위에서 태양을 맞이하며 잭 나이프를 머리 높이 들어 올려 자신의 고간을 수차례 내려찍었 다. 망설임은 없었다. 새어나오는 신음보다 잭나이프가 거칠게 박히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힘이 빠진 C의 육신이 N을 향해 떨어졌다. N은 무의식적 으로 팔을 뻗어 C를 받아냈다 떨어지는 몸뚱아리의 무게를 견 디지 못해, N은 주저앉았다 “지렁이 이제 네가 키워. 2층에 올려다 놨으니까. 이제부터 네 소관이야.” N은 대꾸하지 않았다. C는 N의 품 안에서 천천히, 피에타 처럼 죽어갔다. * N은 지렁이의 삶을 가늠하다가, 문득 지렁이들을 직접 보 고 싶다고 생각했다. 죽은 C는 지렁이가 일곱 마리라고 했었다. 또 지렁이를 보려면 물을 부어 숨 막히게 해야 한다고도. N은 물을 가져왔다 그는 분변토 밖에 없는 흙 표층에 물을 부어 놓 고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지렁이들은 흙 위로 기어 올라 오지 않았다. 그는 물을 한 번 더 부어넣고 일 층으로 내려가 보 고서를 썼다. 그는 똑같은 보고서를 썼지만, C가 죽은 이후로
윤정준 소설144 똑같은 네 글자를 적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손은 더 이상 저절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절로 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필요한 시간은 더 길어졌다. 그는 힘을 바짝 세 워 보고서를 천천히 적어나갔다. N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물 을 부어 둔 사육 상자 안에 지렁이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축축 한 흙 위에서 자취를 남기는 모습이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 다. 그는 지렁이의 삶을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음에도, 기어 다 니는 지렁이들을 보면서 곧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이음새를 채 웠다. 지렁이가 태어나 교미하고 죽는 긴 공백을 그는 머릿속에 서 스쳐멈췄던보냈다새 울음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짹짹거리는 소리 가 가깝게 들려 위를 보자, 창가에 참새 한 마리가 앉아 상자를 향해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는 참새와 지렁이를 모두 살피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여섯 마리 뿐이었다. 의아하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창가의 참새가 상자 안 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참새를 막으려고 손을 급히 뻗었다. 부 지불식간에 잡힌 참새가 그의 손아귀 안에서 필사적으로 울었 다. 한 마리가 사라졌다면 참새가 잡아먹은 것일까. 생각 끝에 서 그는 무엇인가 스멀거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참새의 목 을 비틀어 버려야 한다는 신경이 다른 팔을 타고 올라와 그는 손을 펼쳐 들려고 했지만, 부질없다. 생각이 멈췄다. 참새는 힘 이 약해진 손아귀에서 벗어나 도망가 버렸다 그는 비어있는 손 과 여섯 마리만 남은 지렁이들을 번갈아 보며 도시에서 홀로 아 득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N은 오랜 시간이 지나 일 층으로 내려갔다. 도시를 떠나기
극의 도시 145 위해 짐을 챙겼다. 바깥의 보도블록이, 도시 밖으로 일직선으로 향하는 보도블록이 온전하게 바뀌어있었다. 다시꿈인지아득히멀어진다.

이해의 한계, 앞으로 몇 억 세대가 지나더라도 엿볼 수 없는 우주의 비밀. 내 의지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 났어. 내 모든 지성은 언제나 그 의지를 위해 봉사해. 하지만 영원히 채울 수 없는 독은 아무리 노력을 쏟 아 부어도 차질 않고, 나는 그만 지쳐버렸어.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도록 명령받은 내 저주받은 육신이 더는 움직이지 않아. 나는 이미 죽어 있는데, 내 입을 통해 말을 하고 내 손을 통해 글을 쓰는 넌 누구지? 부탁이니 내게 더 이상 고통을 겪게 하지 마 그저 시 간이 나를 이 세계에서 깨끗이 쓸어 없애버리도록 놔 줘. 김민영

김민영 시148 ○ 나의불안, 기이한불면 세겹진거짓세계의주인이잠을청한다 “광상에사로잡힌시민들이여! 내이야기가그대들을자유롭 게하리라.” #1. 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atur이름을 바 꾸면, 그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선형방정식의 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를 취합니다; 0: 그것은 유일한 의지, 무한한 변위를 지닌 공간 밖의 공간 입니다. 1: 저 불가해한 심연이 내 욕구의 원천입니다. 공공연한 세계 의 비밀을 엿보는 행위, 비극을 빚어내는 추문에 나는 귀를 기 울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만물에 작용하는 원칙이란 결국 어떤 사물에도 작용하지 않음을……. Infinity: 나는 이내 멈췄습니다 아니, 나는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멈춰야만 합니다 비극을 들여다보던 나 자신이 비극 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미진하게도 땅에 엎드려 경배하던 우상들은, 변증법
○ 149 적인 희망의 새 시대를 약속하였으나…… 미친 상상이었습니 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로만 완성됩니다. 그것이 내가 마 음 깊이 소망하던 바입니다. 나는 힘을 잃어 쓰러진 채로 종종 우화를 생각합니다. 시인 이, 끝없이 놓인 펄 위를 참방참방 걸으며 수평선을 향해 나아 가고 있습니다 나는 시인이 갯바닥에 남겨 놓은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그를 조소했습니다 그곳에는 완전한 바다도 완전한 하 늘도 없어 다만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형국이었습니다. “땅과 하늘의 경계조차 구분 짓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실해지 겠다는 겁니까?” 그 말을 들은 시인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시인의 앞에서 길을 이끄는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내 등 뒤에는 우 리가 지나쳐 온 수평선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가 아닐는지 도 모릅니다. 수평선의 무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한 선에 이르면, 다음 선을 향해 나아갈 뿐인 끝없는 환원……, 나 는 이제 그중의 무엇이 우리의 목적지인지도 갈피를 잃게 되었 습니다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atur.”
김민영 시150 나로서는 이 이야기가 우화인지 극화인지 실제로 있었던 일 이었는지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나는 밤낮을 죽어 가는 사람이 예로 겪는 환상에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일어나 걷고는, 다시 쓰 러집니다. 내가 걸어야 할 경로에는 나를 앞질러간 발자국이 수 두룩한데, 이것도 한 사람의 것인지 여러 사람의 것인지 구분할 길이 없습니다. 내겐 더 이상 아무런 바람도 없습니다. 다만 내 발자국을 뒤따라오는 누군가가 나의 소박한 묘지명을 보고 세 상 사람들에게 알릴 적에, 내가 겪었던 고통을 헤아려 나의 삶 을 비웃지 않았으면 합니다. #1.1. intermission 나는이미죽어있는데, 내목소리를취하고나를비명밖으 로끌어내는너는누구지? 부탁이니시간이나를이세계에서깨끗이쓸어없애버리도 록놔줘. (아홉 제사장이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데, 하나같이 녹슬고 오 래 돼서 못 쓰는 물건들뿐이다 박물학자가 이들의 목록을 소 상하게 작성한다 그 예물들이란 쇠붙이가 붉게 물들어 만지기 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면도날, 파랗게 곰팡이가 핀 볍쌀, 약 제 대신 누룩이 들어 있는 데오도란트, 그리고 미봉책에 불과한
○ 151 포옹 따위다. 예물을 전부 제단에 바치자 수석 제사장이 목청을 한 번 가다듬고는 목에서 안테나를 길게 빼낸다. 그리고 계시인 듯한 방언을 쏟아내는데 박물학자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녹음기 를 켜고 기록을 시작한다.) #2. speculum mundi세계의 거울 고백도세겹진거짓세계속에어떤나는파멸을바라고거짓 , 약속도거짓, 형상을부조하는언어까지거짓 오직유일하되오직그것뿐인나의사랑, 네가내목을치기 전에내스스로목을자르겠어. 눈감지못하는사자의육신이비천한정신을땅바닥에내팽 개칠때, “ 구주여내사나운영혼이곳에잠드니 , 다가올날을평안히대비하소서!”


감사의 말 올해도 문집에 작품을 실어주신 부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 다 소중한 작품을 맡겨주셔서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편집팀의 유연님, 동현님, 정연님, 혜민님 바쁘신 와중에 힘써주 셔서 감사드립니다. 표지의 삽화를 그려주신 담윤님, 감사드립 니다. 준-중간고사의 고난에도 좋은 그림을 그려주셨습니다. 올 해에도 쿼토에서 도와주셨습니다. 매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문맥의 스물 아홉번째 문집입니다. 스물 아홉번째 문집이 나오기까지, 그 긴 시간을 견뎌주었던 모든 분들께 심심한감사 의 인사를 올립니다. 제가 만드는 두번째 문집입니다. 전의 것보다는 조금 더 낫 기를 바랍니다. 내년에는 세번째 문집으로 뵙겠습니다. 아마도. 2019년 11 문현식월
곧 눈이 내릴 것이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미래를 상상한다. 나는 우산의 안부가 이전과 같은지 물으 며, 우산을 쓴 모양으로 내달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 는 더 이상 스칠 수 없어 우산살을 잔뜩 구기며 부딪 히겠지. 그때 당신 우산의 색을 볼 수 있을까.―여는 말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문들 앞에서 주저하고 되돌아보는 마음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