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잡아 주세요》

손을 잡아 주세요

경희문학회 문맥 2023년 서른두 번째 문집

경희문학회 문맥

2023년 서른두 번째 문집 손을 잡아 주세요

손을 잡아 주세요

경희문학회 문맥 2023년 서른두 번째 문집 초판 1쇄 찍음

2023년 11월 28일

지은이

강민숙 권가현 김동현 김현채 성인화 송승준 안지완

기획

김현채

초판 1쇄 펴냄

편집

디자인

제작처 펴낸곳

2023년 12월 2일

임지호 정담이 조서연 지송주 이유진 이유진

강민숙 문현식 마이스터

경희문학회 문맥

주소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로 26

전자우편

khu.moonmek@gmail.com

인스타그램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학생회관 313호

@khu.moonmek

Ⓒ

강민숙, 권가현, 김동현, 김현채, 성인화, 송승준, 안지완, 임지호,

*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의 저작권은 각 작품의 지은이에게 있습니다.

*

정담이, 조서연, 지송주, 이유진, 2023, Printed in Seoul, Korea.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서 무단 전재 및 복제,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손을 잡아 주세요

경희문학회 문맥 2023년 서른두 번째 문집

들어가며

테라스 하나 딸린 작은 동방, 그곳에서 온전히 함께

뒤섞인 개개인의 색채를 담고 싶었다. 매주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호흡했던 이야기들을 각자의 그림으로 상기할 수 있기를, 그것이 당신에게 다양한 빛깔의 세계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란다.

올해 동방에서 나누었던 여러 작품을 비롯하여 합평

에서 나누지는 못했으나 작가들이 문집에 싣기를 희망하

는 작품들을 몇 작품 함께 수록하였다. 작품이 가진 또렷

한 색감과 환대로 이뤄진 조화의 과정을 떠올릴 수 있도 록, 작가들의 세계 배치에 신경 썼다.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 공통의 시간을 한 권의 책으로 다시 경험할 수 있 다면 행복할 것 같다.

2023년 11월, 기획 김현채

목차 7

들어가며

13

강민숙

14

고양이에게

17

리을

21

안지완

24

해상 마천루 붕괴 현상

26

톱질

29

요철

18

22 25 27

31

아포칼립스의 밤

붕어

Rest in Flag 심폐용서술

이유진

32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51

지송주

52

몰약 — Myrrha

77

권가현

79

손톱

78

마음은 손톱과도 같아서

81

조서연

83

소포우편

82

비로드, 벨벳, 우단

84

강물이라는 증거

87

자세히 보면 완전한 암흑

91

성인화

86

88

고사리 장마

템포 프리모

92

당신이 될 수 없는 당신에게

95

카톡방

97

김동현

93

98

무인도

횃불잡이

127

김현채

129

꽃이 푹 익었다

128

시에스타

130

바다평과

133

송승준

150

돌아보면 화살이 박혀있다

134

바리캉

154

조로(早老)

157

정담이

160

사람 믿지 말라던 사람

164

기억이

158 162

진한 기쁨

삶의 대비점

166

필사적 기록

171

임지호

195

나가며

172

손을 잡아 주세요

강민숙

고양이에게 나는 네가, 나는 네가

나를 추억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설령 내가 울면서 네 안신을 묻더라도 남몰래 묻어 둘 수 있도록

오로지 새 삶을 살아갈 너를 위해서 매번 물끄러미 바라보던 참새의 등을 타고서라도

분홍빛 발바닥이 부르트게 쫓아다녔던 모기를 따라

서라도

몸을 비집어 넣던 백 원짜리 종이박스에 숨어서라도 어쩌면 그 작고 귀여운 네 발로라도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리라 믿는다 나는 너를 붙잡지 않으려

헛된 구실을 만들고 구식 변명 쏟아지지만 네 이름 도려낸 절망을 붙들고

네 호흡 잘라간 초승을 분지른다 버리고 버려지지 않았으나 나의 살내음은 여전히 14

강민숙

시

네가 건넨 순애로 가득하고

그게 얼마나 찬란한지 알았더라면 다정을 배제한 일상에

홀로 두는 일은 없었겠지

모든 게 후회라서 속삭이는 혀마저 아리다 내 세월 들어 줄 이 찾다가 허전하면

네가 슬픔만 들었던 것 같아 또 눈을 감아 버리지 나와 교집합을 이루었던 너의 청춘 낭만 젊음 사랑

처럼 모든 게 보드랍지는 않아서 오늘도 맹인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나를 걸어 둘 동공이 필요해

마름모꼴 어둠에 나를 집어 넣어야 해 나는 표구가 되어야 해

반려라는 집요함과 평범한 눈빛은 우주의 진앙까지도 가라앉히니

부질없다 굳어 버린 입술은 들썩이지 못한다 내 호흡기는 네 흔적으로 가득하잖아 겨우 전전하는 과오투성이 밤에 고양이에게

15

텅 빈 허공 핥아 내리는 울음 소리 들리니까 나의 고양이

야옹아 부르면 이름대로 대답하던 나는 네가 숨 쉬었으면 좋겠다

16

강민숙

시

리을 젖은 목소리로 부르면 녹아 내려서

땅이 잠길 정도의 숨을 뱉어 올리던 읽는 것만으로 희미해지는 이름 너는 참 이상한 재주가 있지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면서

마지막에는 꼭 산 사람도 목매달게 하는 것 단단한 벽 뒤에 숨어서 밭은 숨 죽이며 결국은 진동하는 분류로

푸름이 몰려올 때마다 함부로 입힌 음성은 축축하고

촉촉하고 칙칙하고 퍽퍽하고 푹푹 울고 폭폭 찌고 그러다 네가 옷을 벗으면

설타음을 막아 서고 흘러가게 해 줄게 너의 야윔에 어떤 주석도 얹지 않던 그 발음으로 돌아가자

리을

17

아포칼립스의 밤 글리터로 범벅된 핀을 꽂고 탄산수를 와인잔에 따라

요 이런 흉내는 이제 익숙하죠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했잖

아요 징그럽게 커다란 보름달 아래에서, 우리 각자의 서사 를 위해 치얼스, 잔이 부딪히고 목구멍이 따가워도 웃어

야 하는 우리들, 어딘가 불안해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법

을 배웠어요 잘 있어요? 당신이 사랑하던 목련은 자살 소 동을 벌이던데

언젠가 여기를 백색왜성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

죠, 그러나 침 한 번 삼키고 나니 캄캄한 방이고, 이런 것

역시 익숙하죠 우리 모두 겪었어요 딱 스물하나만큼, 우린

뭐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스물두 번째 생일이 지나고 나면 모두 사라질 것 같다는 불안감, 옆에서 블루 스를 추는 친구들의 눈동자를 봅니다

모두 짝을 지어 빙글빙글 돌아가고 파티장도 빙글빙

글, 피부 아래로 경동맥이 선명해지는 걸 느껴요 이런 게 살아 있는 거지! 살기 위해 손목을 가르던 이 모 씨가 생각

나요, 누군가 외치고 모두들 최대한 입을 크게 벌린 채 깔

깔, 백야가 까마득히 하얘져요 우리는 영원할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들면 천천히 드리우는 적란운 샴페인 비가 내립니다 18

강민숙

시

사라지는 표정들, 끊기는 음표들,

하지만 다시 한번, 누군가 외치네요 무알콜이라네!

(일동, 탄성을 지른다) 살아나는 음악들, 한껏 구부러지는 표정, 웃음을 멈

추지 않은 채 온몸을 흠뻑 맡겨요 입을 가득 벌리고 맛보 는 빗방울, 끈적하고 달콤합니다 이제 달이 저물어 가네

요 파티가 끝나 갑니다 격식 차린 세미 정장은 던져 버리 고 힘차게 망가질 시간이에요 내일이 오고 코를 막으면 사 라져 버릴 기억들이지만, 마지막 파티의 마지막, 우리의 마 지막을 위해 한 번 더 치얼스!

아포칼립스의 밤

19

안지완

붕어 정제된 이마

코로 마신 물

덮어씌우는 잠 깨우지 마 자리끼를 엎질렀다며?

어디 흘러넘칠까요 깜빡

말도 하고 웃기도 하는데 정제된 물

코로 자는 잠

덮어씌우는 이마 떨어지는 0

을 삼키는 얼 굴 얕으니 탓 하지 마

말도 하고 웃기도 하는데

숨은 참고 고개를 내밀어 보고된 바 없음 22

안지완

시

자장가 하나 모르나 귀먹은 적 없다

중추에 물을 붓고 삼키라 한들 뻐끔 0을 뿌린 다음 덮어씌우시겠습니까 깨우지 마

붕어

23

해상 마천루 붕괴 현상 소금물이 모래 대신 흐르는 사막

그 한가운데의 맨 꼭대기에 사는 남자의 연인이 1999년 불타는 백로의 품에서 익사했다 장례는 머리칼을 주워 치렀다 해저 분화구가 백골을 숨길 때까지 쌓인 그의 슬픔 해발 1km

비 갠 뒤 흰 물보라에

구름 떼 천천히 날아가 버리고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

지르는

그런 날에도 연인은 1999년 익사했다 무덤이 깊은숨을 들이쉴 때

그와 슬픔은 쓰나미에 부서질 요량이다 높았던 만큼 기꺼이

24

안지완

시

Rest in Flag 아프려 애써 머물러 외친다 고 끊어낸 잔가락에 미치다 못해 연거푸 날뛰어 휘 몰아친 지난날에 못이겨 다시 거짓말 없는데 도 날세운 수직선에 묶여 희게

줄곧 쉼

몇억 광년씩 무슨 무슨 자리에 앉아 부대끼리 나부끼

면 그만이다

바람에 베이는 곳 없이

별 아닌 깃발로 말하는 재귀반사의 목소리 이 빛으로 풍속을 잰다면

앞니 먼저 희게 들려 주길

Rest in Flag

25

톱질 목제 수레바퀴 돌아가는 마찰음은 이명 시집처럼 회고라도 쓸 때는 정신증 환자 남은 글자는 고성방가 되어 날아갔는데

그루터기에 싹이 돋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26

안지완

시

심폐용서술 공중에 머리를 디뎠어

용서가 뛰지 않으니 돌팔매질해 줘, 나를 |

요 줘 해

용서 발 제 좋아요 돌팔매질쯤이야

밧줄 먼저 끊어 드릴게요 하나 둘 셋 !

아 아 아

아아 아 아

심폐용서술

27

네? 안 들려요 ㄴㅓㅎㅡㅣㄹㅇㅛㅇㅅㅓㅁㅗㅅㅎㅏㄴㄷㅏ—· 네? 준비 조준 숨이 붙은 그를

용서 위하여 위하여 사격 사격 사격 사격 사격 사격 위하여 위하여 사격 사격 사격

사격 사격 사격

더는

않으니

사격해

28

안지완

시끄럽지

너그러이

드릴게요

시

요철 팽창을 거듭하는 생명은 천천히 바깥쪽으로 몰린다

모른 척한다 모르고 싶다 부푼 응어리가 비쳐 아릅답콸콸

콸콸콸콸 콸 콸 콸 콸 찢어지며 쏟아지는 달리기도 껍데기

의 두께처럼 0으로 치달았다 너와 내가 같다고 확인해야 하는가

요철

29

이유진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구운 고기를 입에 밀어 넣으면 깊은 뱃속으로부터 신

물이 올라온다. 일주일 전부터다.

지지난주 금요일 그가 오랜만에 돌아왔다. 한 손에

소고기가 든 봉지를 들고서였다. 노란 봉지였다. ‘궁각고

기집’ 글씨 위에 갈색 소가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 게 뭐냐고 물었고 그는 선물이라며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9시였다. 고기 굽기는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냐 물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결국은 굽게 되었

다.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구우면서 눈물을 참았다. 식탁 에 내려놓은 노란 봉지 속 소의 눈이 어딜 향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실은 날 향하고 있을까 두려웠다. 붉은 살이 익 으며 누린내를 풍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나하게 먹을 시

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부 구웠다. 접시에 고기와 쌈 채 소를 담고 심호흡했다. 소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뒤돌 아서자, 봉지는 잔뜩 구겨져서 상 한편으로 밀려나 있었

다. 그 봉지를 치운 것도 내내 식탁에서 내 등을 바라보고 32

이유진

소설

있던 것도 그였다. 하지만 알고 나서도 그 누리끼리한 눈알 을 잊을 수 없었다. 눈알을 떠올리면서 밥알을 삼켰다. 맞 은편에서는 말도 없었다. 접시에 있는 살점이 하나둘 그

의 뱃속에 들어갔다. 고기가 사라질수록 마음이 놓였다.

그가 질겅질겅 씹고 있는 게 내가 아니라는 안도와 나였 어야 한다는 울분이 목을 막히게 했다. 물이 끝도 없이 들 어갔다. 고기가 몇 안 남았을 때였다. 내가 반찬도 없이 밥

만 씹고 있단 걸 뒤늦게 알아챈 모양이었다. 한 점을 집어 다정하게도 내 숟가락 위에 올려 주었다. 식사가 끝나가는

참이라 김이 올라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직 기름이 굳지 않은 채였다. 윤기가 돌았다. 거절해선 안 됐다. “씹어.” “응.”

그의 표정을 살피고 다시 입을 뗐다. “고마워.”

항상 한 번은 봐준다던 그의 말은 이번에도 지켜졌다.

숟가락을 입 안에 넣고 말한 대로 씹었다. 기름이 배

어 나왔다. 기름이 입안 곳곳에 들러붙은 게 느껴졌다. 당

연한 일이었다. 거의 동시에 당연하지 않은 작용도 일어났

다. 위에서 산이 올라와 고기 기름과 섞였다. 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헛구역질하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의자를 빼며

일어섰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면서도 계속 토기를 억눌렀다. 역시 두 번은 없었다.

그 뒤로 이틀간 목이 따가웠고 그는 그 이틀간 집에

있다가 밤인가 새벽인가에 떠났다. 언제인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가 옆에 없길래 떠났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33

음을 알았다. 누웠을 곁을 만져 보니 조금은 따뜻한가 싶

었다. 늦은 식사 막바지에 그가 내게 먹였던 고기 온도가 딱 이랬던 것 같았다.

오랜만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일식집에 간다고 했다. 초밥은 먹을 수 있다. 고기 누린내 아닌 생선 비린내는 충분히 참는다.

점심인데도 매장 안에 사람이 적어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들어갔다. 약속이라도 한 듯 ‘점심 특선(8p)’ 네 개를

시켰다. 내 맞은편에 은수가 앉았다. 그는 오전동안 잔뜩 지친 모양이다. 의자에 거의 널브러졌다. 은수만이 아니라

모두가 에어컨 온도를 과하게 낮춰 놓은 사무실에서 일하

다가 잠깐 더운 밖에 나왔다고 그새 땀을 흘렸다. 각자 입

은 윗옷을 움켜쥐고 팔락거린다. 잠시 아무도 말이 없다. 물컵을 네 개를 모아 물을 채운다. 소리가 유난히 크다. 마

지막 컵을 빈 채 두고 급해 보이는 세 사람에게 물을 건네 주었다. 은수가 받은 즉시 다 마시더니 기다렸다는 듯 말 을 토해낸다.

“여름 다 된 게, 사람들이 화가 많아졌어. 왜 욕을 할

까 싶으면서도요. 나도 욕하고 싶어요.” “그래도 그 사람들 안쓰러워.”

“안쓰러운 것도 많아. 난 내가 제일 안쓰러워.”

“언니, 생각해 봐. 텅 빈 집 안에 사각팬티, 메리야스

차림으로 앉아서. 부채질하면서 폰에 대고 침 튀기는 변 태 아저씨. 비참해요. 그거.”

“내가 언제 그 자식 메리야스 찢어 버릴 거야. 죽죽

34

이유진

소설

갈기갈기.”

유치한 구석이 있는 저주를 외면서 더위를 물리친 건

지 다들 얼굴이 한결 편안했다. 듣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주성 언니, 근데 왜 텅 빈 집이에요? 애들은? 부인

은? 아까 보니까 식기세척기 얘기던데.”

의외의 물음이라는 듯 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진상이어도 아내나 애들 있는 데서 그렇게

욕하겠어? 어디 보내고 혼자서 지랄하는 거겠지. 아, 아냐. 그딴 게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을 리가 없다. 그냥 자기 손

으로 설거지하는 것도 귀찮아서 시킨 거야. 게으른 돼지 새끼.”

말이 끝나자마자 종업원이 조리대에서부터 초밥을 들

고 다가왔다. 언니가 그에게 텔레비전을 틀어 달라고 했

다. 때마침 낚시 예능이 한창이다. 가장 왼쪽에 있는 흰살 생선 초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쳐다보니 한때 날렸다

가 지금은 한물간 개그맨이 줄을 빠르게 감고 있다. 긴장

감 있는 배경 음악이 출연자들의 탄성에 묻히다가 말다가 한다. 그들은 잔뜩 흥분해서 서로 말을 주고받기보다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같다. 이야, 대물입니다. 내 가 낚았다. 아, 저 자식. 내 것보다 크냐? 어? 내 것보다? 이 게 스릴이죠. 낚시의 참맛. 한 단어가 귀에 꽂혔다. “스릴이 무슨 뜻이었죠?”

“글쎄. 너는 그 버릇 못 버리는구나? 그냥 못 넘기고

알려고 드는 거.”

“난 언니 그런 면 나름 직업병 같아. 손에 땀 쥐게 하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35

고 그런 거 아닌가? 스릴러라는 말도 있고. 잠시만.”

은수가 초밥을 씹다 말고 휴대전화를 켜서 검색한 단

어 뜻을 읽어 주었다. ‘공연물이나 소설 따위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거나 마음을 졸이게 하는 느낌’이랬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물고기나 잡으면서 간담이 서늘할

게 뭐람. 저것들 인생에 어디 진짜 스릴이 있긴 하겠어? 팔 자도 좋다.”

나는 “우리 인생에는 어디 진짜 스릴이 있고요?” 하

려다 말고 다시 텔레비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가 이제 물고기를 클로즈업했다. 누구의 것인

지 모를 두 손이 그 몸뚱이를 줄자 위에 고정했다. 은색 아

가미가 펄떡거린다. 숨이 찬가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한 다. 눈깔이 이리저리 깔딱깔딱 돌아간다. 필사적인 움직 임이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내려는 오기로도, 자기의 죽음

을 한낱 유희 삼는 모욕을 잊지 않으려는 발악으로도 내

겐 보인다. 그 눈깔을 주시하고 있자니 불현듯 이상하다. 눈꺼풀 덮이지 않은 죽음이라니. 누군가 모욕을 주려고 작

정한 것 같다. 어떤 인정 많은 이가 손바닥으로 덮어 감겨 주려 할 때 감겨 줄 눈꺼풀이 없다는 건 우습지도 않은 농

담이다. 너무 모욕적이라 먼 옛날 마차에 매달려 흙바닥 을 뒹굴어야 했다던 전사의 시체까지 떠오른다. 기이한 움

직임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되자 화면에 대 고 마구잡이 기도를 하게 된다. 마음속으로 감아, 감아,

아니면 차라리 보지 말고 죽어, 했다. 그러나 물고기는 뻐 끔거리기를, 눈알을 회전시키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눈이 감기지 않아서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왠지 나까지 숨이 밭 36

이유진

소설

다. 결국 얼토당토않은 기도가 이뤄지기 전에 화면이 먼저 전환된다. 비친 사람들은 금방 그것을 잊은 듯 다른 생선, 더 큰 생선을 잡으려고 낚싯대에 몰두하고 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도 잊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방금 희뜩한 눈깔은 나만 봤는지 각자 앞에 놓인 초

밥을 간장에 찍어 삼키느라 여념 없다. 쉴 틈 없이 운동하

는 그들의 턱이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재촉하는 것 같아 나도 얼떨결에 두 번째 초밥을 집어 들었다. 그런

데 살이 살 같지 않다. 쫀득하기보다 오독오독 깔깔하다. 아까 생선 눈을 날것으로 씹는다면 이런 식감일 듯하다.

순간 참을 수 없이 메스껍다. 손바닥을 입술 아래 대고 뱉

어 눈깔인지 살인지 확인하고픈 충동이 인다. 손가락으로 잔해를 헤쳐 이 역겨움의 원천이 무엇인지 찾아볼 용의도 있다. 세 사람과 함께 있지 않았다면 정말 그랬을 걸 꾸역

꾸역 삼켰다. 물을 마시며 생선이 잘못된 건가 식당을 둘 러보니 다들 잘만 식사를 이어 나가고 있다. 긴가민가하

다. 하나 더 먹어 보자 싶어서 보니 다음 놓인 건 연어 초 밥이다. 번지르르한 주홍빛이 척 보기에도 연어인 걸 살을

들어 올려 밥과 생선 사이에 없어야 할 게 있지는 않은지 보고 먹었다. 입 안에 넣자 신중이 무색하게 상태가 더욱 나쁘다. 부패한 듯한 쉰내와 피 맛까지 느껴진다. 참을 수

없어 급하게 휴지를 뽑아 입을 막았다. 어리둥절 쳐다보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목 깊은 데 손가락을 넣어 배 속에 있던 것까지 토해 냈다. 혹시나 변 기를 확인했다. 눈동자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로 입을 여러 번 헹궜다. 아무리 헹궈도 썩은 피 맛이 남아 있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37

다. 나머지는 도무지 먹을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둘러대고 먼저 사무실로 돌아왔다. 진이 빠졌다. 이게 어떻게 된 영 문인지 모르겠다.

오후에는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우리 사무실

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무실에 비해선 대우가 후한 편

이다. 하지만 업이 업인 만큼 모욕적인 언사를 들을 각오 는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돈을 들여 산 물건이 불만족스

러울 때 사람들은 예민해진다. 기질이 부드러운 사람이든 거친 사람이든 정도는 다르지만, 평소와 달리 목에 긴장

이 생기는 건 같아서 듣기에 마냥 편안하기만 한 목소리는

드물다. 그래도 부드러운 사람이 대하기 낫단 건 말할 것

도 없다. 거친 사람은 말을 하기도 전에 그 티가 난다. 주 먹을 휘두르고 싶어 안달 나 들이쉬는 숨은 다른 숨과는

다르다. 그 소리가 들리면 일단은 내 숨을 죽인다. 일을 시 작하고 얼마 안 돼 익힌 제1원칙이나 다름없다. 귀는 있지 만 입은 없는 척하기. 얼굴을 맞대고 상대할 때보다 전화

너머로 상대할 때 더 어려운 기술이다. 이 짓도 숙련이 되 는지 지금 와서는 잘 해내지만, 초반에는 ‘야, 너 죽었냐.’ 하는 윽박을 듣기 일쑤였다. 윽박을 여러 번 들은 날에는 큰 목소리들이 서로 뭉치거나 따로 놀며 나를 따라온다.

차밖에 안 다녀서 차 소리밖에 안 스치는 퇴근길에도 목 소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귓가에 맴돈다. 예전에는 그걸

떨쳐 내기 위해 집에 돌아가는 내내 혼잣말을 되뇌었다. 너무 쉽게 죽었어. 죽은 줄 알았지?

어느 하루는 그 말을 집 안에까지 들고 들어갔다가

38

이유진

소설

그에게 들켰다. 어떤 남자가 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한

날이었다. 꼭 나를 노렸다고는 못하지만 결국 내가 들었 다. 설명은 자세했다.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과감 하게 베어 낼 수 있는지 감히 짐작조차 못 했다. 남자의 머 릿속에선 얼굴 없는 내 육체가 산산이 부숴졌을 것이다.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를 잘랐듯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머리통에 들어가 둥둥 떠다니는 고깃덩어리를

보았다.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토막이었다. 핏물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아 먹기는 글렀지만, 단면은 깔 끔한 게 수준급의 칼솜씨였다. 전화기 너머 남자는 순간 해체 기술자였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의 손에 걸려들었다 면 웬만한 짐승은 모르핀 투여 없이도 순한 눈을 한 번 끔

뻑이기 전에 머리가 잘려 나가 랩 포장 되었으리라. 거기에 다른 짐승은 없고 다만 내가 있어서 오직 나만이 깔끔히 손질되어 랩 포장 됐다. 따라서 그나마 죄책감은 없었다.

토막 난 그날도 어김없이 목소리 여럿이 나를 따라왔

다. 도축의 목소리가 매우 커서 다른 소리는 묻히다시피

했다. 녀석은 몹시 끈질겼다. 보통 사라져야 할 길목에서 도 사라지지 않았다. 현관에 들어서는데도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체념하여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센서 등이 켜지

고 익숙한 남자 신발이 보였다. 그의 신발이었다. 아침에 나갈 땐 없던 것이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목소리 쫓는 목소리를 멈춰야 했다. 그가 들으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게 선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말을 뱉는 게 아니

라 말이 날 끌고 다녔다. 말이 나를 숙주 삼았다. 차마 들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39

어갈 엄두를 못 냈다. 그래서 신발장에 몸을 기대고 “너무 쉽게 죽었어. 죽은 줄 알았지? 너무 쉽게 죽었어. 죽은 줄 알았지?” 했다. 시간이 지나 머리 위 전등이 꺼졌다. 그쯤 되자 내가 내 몸 바깥으로 나가 내 얼굴을 보고 내 목소리 를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앵무새 우짖는 소리가 났다.

분명 문이 열린 것 같았는데 거실에 들어서는 사람이

없자 이상했는지 그가 현관까지 나왔다. 정신 차리고 보

니 어느새 내 앞에 있었다. 등도 켜지지 않게 슬그머니 와 서 얕은 어둠 속에 눈 흰자가 번뜩였다. 왜 그러냐고 묻지

도 않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

라 불안했다. 무슨 일이든 지연되길 바랐다. 한편으로는 당장 벌어져서 이 공기를 깨트려 주었으면 싶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권리도 내게는 없어서 그저 기다렸다. 초조했

다.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믿 을 수 없었다.

“너무 쉽게 죽였어. 죽은 줄 알았어. 너무 쉽게 죽였

어. 죽은 줄 알았어…….”

그는 내 말을 변주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웃는 낯이

몹시 즐거워 보였다. 쉬고 있는 입이 없어서 거부하거나 멈 추지 못했다. 그래서 주문은 이어졌다. 낮에 전화기를 통 했던 음성이 그의 입을 통해 재현되었다. 날 따라오던 목 소리에 그의 목소리가 합류했다. 얼굴을 알 수 없던 이의

얼굴이 마침내 현관 앞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와 함께

사는 얼굴이었다. 일하는 동안 남자가 저미는 게 진짜 나는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였던 게 다 소용없어졌다. 머리에 열 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언젠가 맞았을 때처럼 뜨끈했다.

40

이유진

소설

무섭고 소름 끼쳐서 달아나고 싶었다. 뵈는 것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좁은 집 안에서는 달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뛰어들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눈을 감고 날 그냥 두길 바랐다. 와중에 입과 혀 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어느새 따라와 이불 밖에서 속삭 였다. 너무 쉽게 죽였어? 응? 죽지 않았어? 죽은 줄 알았

어. 죽은 줄만 알았어. 너무 쉽게 죽였어. 죽은 줄 알았지. 동굴 속에서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말을 해서 감당할 수 없

이 많은 메아리를 듣고만 있어야 하는 기분이었다. 듣다 보니 그와 내가 정말로 같은 말을 하고 있단 착각도 들었 다. 그는 더 이상 날 따라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할 말을 내가 미리 따라 하고 있었다. 누구의 말이 누구의 말 앞에, 또는 뒤에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죽었는

지 죽였는지 헷갈렸다. 죽음이 쉬운지 어려운지도. 헷갈리

다가 마침내 말을 멈췄다. 성대가 지치고 기운이 다 빠지 고 나서였다. 내가 멈추자, 그의 목소리도 조금 이어지다 서서히 잦아들었다. 사과해야 했다. “미안해.”

“괜찮아. 재미있었어.”

옷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침대에서 나갈 용기가 나

지 않아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이 되자 온몸이 아팠다. 그와 함께 한 어느 때보다도 흠씬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

다. 막 잠에서 깨고 어제가 기억나지 않아 멍이 들었나 했 다. 거울을 보자 몸은 파랗지 않았다. 살피고서는 가슴만 이 아팠다.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41

이후 버릇을 고쳤다. 대신 매일 밤 잠들기 전 어떤 상

상을 하기 시작했다. 낮에 나를 저민 사람을 밤에 내가 저

미는 것이다. 그 사람을 본 적 없지만 무척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나는 그 구체적인 몸을 자른다. 조각이 내 새끼

손톱만큼 작아질 때까지 정성 들여 자른다. 톱으로 한 번 그을 때마다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진다. 이 모든 건 내 머

릿속에서만 일어난다. 다치는 이 하나 없다. 단지 피 있고 뼈 있는 그 마네킹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아껴 마지않 는 그와 똑 닮았단 것만이 마음에 걸리는 하나다.

일식집에서의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났다. 이제 조리된

들짐승에 더해 조리 안 된 생선도 먹지 못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점차 나아질 거라 믿었던 증상이 차도를 보이지

않고 심해지기만 한다. 이제는 길을 가다 형상을 보거나 냄새를 맡아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어쩐지 봐서는 안

되는 걸 보고 맡아서는 안 되는 걸 맡는 것 같다. 거의 본

능적인 영역에서의 회피다. 그것들에게서 질병의 예감이

강하게 풍긴다. 인간 고기를 먹고 미쳐 버렸다는 개들이 저절로 연상된다. 한때 먹이였던 것이 어느새 그렇지 않게 되기라도 했나 보다.

먹는 게 까다로우니 외식은 물 건너갔다. 대책으로 도

시락을 싸와서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가 식사 시간에 꺼내

먹는다. 함께 식사하던 사무실 사람들은 가볍게 아쉬움을 표했으나 진심은 아니고 그냥 하는 말인 듯했다. 그게 차 라리 맘 편하다.

퇴근하려고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좀 들었다 42

이유진

소설

고 그새 익숙해진 도시락통의 무게가 손목에서 덜렁거린 다. 계단을 내려가 막 건물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

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은수다. 내게 같이 가자 고 했다.

“가는 방향도 같은데 같이 가요. 언니 왜 이렇게 오랜

만인 것 같지?”

좁은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지만 서로 깊은 속은 말하

지 않아서 이렇게 친하게 구는 건 의외다. 그가 붙임성 좋 게 내 팔과 자기 팔을 엮었다. 아직 일을 시작한 지 오래되 지 않아 개인주의가 강한 일터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힘든

가 싶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침울한 기색이 비치는

것도 같다. 일한 지 얼마나 되었냐고 묻자, 며칠 지나면 두 달이라고 했다.

“거의 다 적응됐어. 패턴 몇 개만 외우면 다 거기서

거기던걸요.”

정말이냐고 물으면 나올 대답이 빤하다. 아무 말 없

이 천천히 걸었다. 곧 다리가 나왔다. 밝은 가로등이 촘촘 히 서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에 따라 그림자가 나와 은수를 중심으로 돌고 또 돈다. 희미해졌다 진해졌다, 짧 아졌다 길어졌다 해서 구경하는 맛이 있다. 난간 너머 강

말고 땅바닥을 보고 걸으라고 이렇게 해 놓았나 하는 실

없는 생각이 든다. 다리 중간쯤 와서 은수가 내게 슬며시

머리를 기댔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떨쳐 내지 않고 놔두 었다. 그가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언니.” “응?”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43

“왜 그렇게 못되게 굴까요?”

말할 수 있는 바가 없다. 그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입술을 뗐다.

“그러면 기분 좋아지나 봐요. 난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정정당당하지 못해. 비겁해.” “낮에 누가 뭐라고 했어?” “늘 그렇듯요. 알면서.”

알면서도 물은 게 맞았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은수가 웃었다. 그리고 공기를 훅 들이마셨다가 뱉으며 말 했다.

“아무튼. 원래 때릴 땐 맞을 마음도 먹어야 하는데.

아무리 잘 싸워도 한 대 먹을 수 있잖아요.” “그렇지.”

“누굴 해치기가 너무 편리해졌어. 그런 마음 없이도

때릴 수 있게 된 거야.”

“그러게. 이거 복수도 못 하겠고.” “왜요? 복수해요. 우리.”

“에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복수해요.”

막무가내 투정에 웃으며 걷는데 한순간 옆에서 인기

척이 사라졌다. 은수가 진작에 걸음을 멈춘 줄도 모르고 나 혼자 몇 걸음 더 걸은 거였다. 뒤에서 언니, 하는 목소 리를 듣고 나서야 깨닫고 돌아보았다. 가로등 불빛에서 애 매하게 벗어나 있어 그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는

끊임없이 차가 지나다닌다. 분명 뭐라고 한 것 같았는데 시끄러운 차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다.

44

이유진

소설

“응? 다시 한번만.”

은수가 다가오지도 않고 크게 소리쳤다. 이번에는 제

대로 들린다.

“우리 꼭 죽여 버려요! 만나면요!”

농담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꽤 진지한 태도로 못을 박아 두려 했다. “꼭이요!”

나도 입술 앞에 손을 모아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어. 꼭!”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짐작건대 만족한 듯하

다. “저 갈게요!” 하고 거침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

작했으니까. 어리둥절하다. 정말 가려는 건지, 어딜 가려 는 건지 모르겠다. 그사이 거리가 벌어져 뭘 물을 수도 없 다. 가만히 작아지는 등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계속 작 아져서 마침내 점 정도 크기가 되었다. 그의 회전하는 그

림자도 점점 작아지며 그를 따라갔다. 혹시 그가 날 돌아 볼까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은수는 보이지 않았다. 들어 보

니 무단결근이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다음 날에도 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슬슬 걱정되어 문자를

보내 보았지만 답장은 없었다. 전화해도 받지 않긴 마찬가 지였다. 은수의 결근이 며칠 지속되자 그의 자리를 다른

직원이 채웠다. 워낙 대체가 잦은 일이어서 사무실 사람 들은 거의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게 안 됐다. 이전에 다리 위에서 나눈 대화 때문인지 마음에 찌꺼기가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45

남았다. 사람들에게 은수 소식을 들은 바 있는지 묻고 다

녔다. 다들 고개를 저었다. 내 하는 양을 보고 주성 언니 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만둔다고 말하기 어려웠나 보지. 어린애들이 그래.

누가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힘들면 그냥 안 나와 버려.”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니 냉정한 일단락과 달리 얼굴

에 피곤과 불안이 가득했다. 보자마자 알았다. 진심이 아 니라 나와 자신을 위안하려는 변명이란 걸. 노력에 비해

효과는 초라했다. 언니조차 자기가 한 말에 조금도 설득된

기색이 아니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헛발질에 가까웠다. 하 긴 내가 떠올리는 걸 그가 떠올리지 못할 리 없었다. 내가

사무실에 막 들어왔을 때조차 언니는 여기서 가장 오랫동 안 일을 한 축에 속해 있었다. 자연히 볼 꼴 못 볼 꼴 다 보

고 이런 버릇을 들였겠거니 가늠이 됐다. 그런 그에게도 나와 유사한 예감이 스쳤다는 사실에 공포가 더 커졌다.

계속 나오지 않는 은수를 계속 생각한다.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눈앞에 걸어 다니는 그를 본다. 어느 방향

에서 보든 항상 뒤통수다. 그는 꾸준한 속도로 걸어 점처 럼 작아질 때까지 멀어졌다가도 아예 갔구나 싶으면 어느

새 다시 바짝 다가와 있다. 이 움직임을 하루 종일 반복한 다. 영상처럼 어떤 질문도 끝나지 않는다. 살아 있을까 아 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전자였으면 하는데 따질

수록 후자가 더 유력해 보인다. 죽여 버려요, 말하고 꼭 죽 어 버렸을 것만 같다. 확실치도 않은데 그를 책망하게 된

다. 실은 다리를 걷던 밤 잡을 수 있었는데도 잡지 않은 나 46

이유진

소설

를 책망하게 된다.

은수를 보지 못한 날이 늘어날수록 입맛이 점점 까다

로워진다. 먹을 수 있는 게 꾸준히 줄어든다. 저번에는 마 트에 갔다가 표지판에서 젖소를 보고 유제품을 포기했다.

포장지의 닭을 보고 계란을 포기했다. 포기당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의지와 별개로 재난처럼 일어난

다. 일단 보면 씹을 수 없고 삼킬 수 없다. 평범한 식사가 동족상잔이다. 이제 식료품 코너에는 발을 들여놓기도 꺼 려진다. 거기엔 각종 시체가 번쩍이는 포장에 싸여 늘어져

있다. 그 수가 많아 다 세어 볼 수 없을 정도다. 사람들은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잘린 팔다리를 향해 태평하게 몇 마

디 뱉는다. 시식하고 맛있다 맛없다 한다. 살 것처럼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다. 사냥꾼의 박제를 칭찬하는 것처럼,

약탈한 문화재를 감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한다. 토기 오 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짐승의 고기를 다 먹지 않기로 한 건

아니다. 생각건대 어떤 고기는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즐 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종 류라 이전의 나라면 절대 욕심내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욕구가 너무 강렬해 누를 수 없는 요즘은 그걸 위해 가방

속에 식칼까지 넣고 다닌다. 그 짐승은 예고 없이 나타나 기 때문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매일 밤 집 문을 열기 전 잠시 그 앞에 가만히 서 있

는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문 뒤에 그가 있을지 없을지 알 길이 없다. 그렇기에 어쩌면 고대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나를 가득 채운다. 그 순간의 긴장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47

을 즐긴다. 마트에 가는 누구도 이런 쾌감을 겪어 본 적 없 으리라 확신한다. 여느 때처럼 칼을 꺼내 손잡이를 꽉 쥐

고 은수의 뒤통수를 본다. 복수해요. 우리 꼭 죽여 버려 요. 만나면요. 어디선가 들려 오는 음성이 있다. 그러겠다 대답하고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이건 도축도 낚시도 사냥

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투우에 가깝다. 살아남아 전리 품을 쥐고 싶다.

빨간 천이 펼쳐지듯 센서 등이 켜진다. 내려다보니 남

자 신발이 있다. “왔어?”

부드러운 목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입 안에 침이

고인다.

48

이유진

소설

지송주

몰약 — Myrrha

1.

커튼의 존재는 햇살의 부재로 입증된다.

시각적으로 어떠한 심미적 여흥도 없는 커튼을 계속

보았다. 태초부터 저기에 있었던 것 같다. 내 말은, 커튼이

방의 인테리어에 한 몸처럼 잘 어울린다는 얘기가 아니다.

커튼이 너무나 몰개성해서 저것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인간

의 의도라곤 일절 개입되지 않은 것 같다는 뜻이다. 저런 것을 굳이 누가 목적을 가지고 달았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커튼은 애초부터 저기에 있었다. 이 방

의 벽이 오르기 전부터, 이 빌라가 세워지기도 이전에, 어 쩌면 이 지구가 시작되던 순간부터. 흰색 물감 잔뜩에 베

이지색과 회색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 듯한 옅은 색상의 커튼은 거기 있다고 구태여 의식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너 무 쉽게 상실해 버릴 것 같았다. 그나마 현실감이 있었던 건 표면에 흐르는 선뜩한 약간의 광택뿐이었다.

커튼 너머에 토가지 화분이 있다. 짐작만으로도 나는 52

지송주

소설

커튼 한 장의 무게조차 견뎌낼 수 없었다. 고개를 모로 돌 렸다. 시선은 매끈한 커튼과 더 미끈한 벽을 스쳤다. 플라

스틱 모니터를 보면서도 이것을 이루는 질료가 무엇을 어

머니로 하고 있는지를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잘게 부서 지고, 열을 가하고, 불규칙성이라고는 남아 있을 수 없을

때까지 정제한, 완전히 통제 아래에 있는, 무기물. 무기물

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딱딱하고 모서리 졌는지. 나무로 만든 책장과 걸상이 간신히 유기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으나, 유기물이 가지는 표면의 흥미로운 울툭불툭

함을 모조리 상실한 상판을 아무리 매만져도, 하나의 티 끌도 손끝에 걸리지 않았다. 소름이 끼칠 만큼.

방부 처리된 상판은 몇십, 아니 몇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울창하고 울울한 제 고향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졌다. 이윽고 온순한 미이라가 되었다. 세상 끝

까지 달아나다 결국 나무가 된 미르라처럼. 그 위에 엎드 린 내가 며칠 만에 흰 피부에 붉은 울혈과 푸른 시반이 피

고 배는 가스로 가득 부풀고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것과 다르게 말이다. 온통 무기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나는 유일하게 전력을 받지 않고서도 숨을 뱉 어 내고 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신묘한 발전기관이었다. 너 역시 그럴 것이었다.

나는 혹여 유일이라 해도 무이하고 싶진 않았다.

성능이 무색하게도, 발전기관은 가동을 멈춘 지 두

달여쯤 되었다. 지독한 잠이 몰려왔다. 나태에 허덕이며 몸과 정신, 시간이라는 세 개의 톱니바퀴는 서서히 어긋

났다. 작년만 해도 분명 아침과 낮, 한밤이 칼로 자른 듯 몰약 — Myrr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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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는데 올해는 아침낮저녁한밤새벽그리고다시아침이 이

어졌다. 아침이라는 장이 마치면 일어나야지, 낮이라는 막

이 내리면 잠깐 화장실도 가고 심호흡도 하고 다시 돌아와 야지 했지만 나만 외떨어진 관객인 이 연극에 도통 끝은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 씻겨 내려가 생각이라는 게 자리를 잡고 착상하지 못했다.

두 개의 톱니까지는 서로 맞을 때가 왕왕 있었다. 그

럴 땐 눈은 떠져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벽과 책상과 커 튼이 있었다. 눈을 뜨기도 감기도 싫어 안달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 가만히 뜨고 있었다. 머잖아 다시 눈이 감겼 다. 얼굴에 낀 텁텁한 기름 막과 덥수룩한 머리카락, 아무 리 미뤄도 삼 주에 한 번은 잘라야 하는 손톱만이 내 생체

기관이 아직도 최소한으로는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 다. 장장 두 달의 시간 동안 세 개의 톱니바퀴는 제멋대로

각자의 회전축을 감돌다 가까스로 맞물렸고, 그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간만에 의자에 앉은 나는 그래서 또-또다시 커튼을

보다가, 문득 한 달은 자르지 않았는데도 손톱이 말끔하 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사는 감람빌라 203호의 창

문에서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려 바로 아래를 바라보면 1 층 102호의 철제 발코니 가장 잘 보이는 곳, 거기에 토가 지 화분이 있을 것이다.

발코니라 해도 겨우 한 뼘 남짓인지라 조금 넓이가 있

54

지송주

소설

는 창틀에 가깝지만, 화단 가꾸는 일을 인생 두 번째 낙

이라 하던 주인 아주머니는 그 공간을 내심 자랑스러워하 는 듯했다. 꽃기린, 아이비 옆에 고추와 상추가 있었고, 이 어서 행운목, 물꽂이한 고구마와 산세베리아가 다닥다닥

자리 잡고 있었다. 먹는 것, 못 먹는 것 구분 없이 잔뜩 늘

어선 화분들은 거실 한편까지 기세 좋게 차지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말대로라면 돈 주고 산 것보다 주워 온 것이 더 많았다. 중구난방인 화분의 색과 크기는 차마 정돈되었다 고는 할 수 없었으나 나름의 규칙성에서 비롯한 안정감이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먹고 자란 건지, 화분들은 본래의

단정한 모습은 어디 가고 하나같이 우악살스럽게 컸다. 아 주머니들은 사람이든 화초든 먹이고 찌우는 데에는 일가 견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 주인 아주머니가 제일 아끼는 게 토가지 화분이

었다. 그래서 해가 잘 드는 발코니 왼쪽 맨 끝에, 내 방 창

문 바로 가까운 곳에 놓였다. 내가 토가지 화분을 처음 마 주한 건 올해 초봄이었다. 203호에 입주한 지 일주일을 갓

넘긴 무렵이었다. 메스꺼운 속을 달래기 위해 가볍게 산책 을 다녀오는 길에 발코니에서 화초에 물을 주고 있는 아

주머니와 마주쳤다. 아주머니와는 방을 보러 왔을 때 처 음, 입주할 때 잠깐 인사를 하며 두 번 보았으니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아주머니는 부산스럽게 쫓아 나와 나를 맞았고, 차 한잔하며 얘기라도 좀 하고 들어가라 하셨다.

거실에 잔뜩 들어선 화분도 그날 제대로 보았다. 아

주머니는 집이 좀 어수선해 미안하다며 멋쩍은 듯 웃었다.

적적해서 하나둘 들여온 게 어느새 이만큼이나 되었다고 몰약 — Myrrha

55

한다. 아주머니는 식탁에 마주 앉아 연신 내 팔과 손을 쓰

다듬으면서 밥은 잘 먹냐고, 몸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아주머니 덕분이었다. 서글픈 처지에 보증금을 건네는 나

의 표정에서 숨기지 못한 수심이 비쳤는지 아주머니는 말 없이 이백만 원을 꺼내 다시 돌려주셨다. 이삿날 짐이 많

지 않아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손사래를 치는 내게 한사코 홀몸은 서럽다며 거들어 주시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발코니로 손을 뻗어 화분 하나를 가리켰

다. 꽃도 열매도 없어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대추방울토마

토 묘목이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한쪽 가지 중간에 검은 절연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그 위로 솟은 가지에 달린 이

파리의 생김새가 아래랑 다른 게 보이냐고 물었다. 듣고 나니 그런 듯도 했다.

“방울토마토에다가 까만 둥근달가지를 접붙인 거예

요.” 상처가 잘 아물어 준다면 여름에는 한 나무에 두 열

매가 맺히는 걸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아주머니는 안방에서 낡은 성경책을 가져와 펼쳤다. 겉표지는 손 모양 그대로 닳아 있었다.

“로마서에 보면, 돌감람나무 가지가 하나님 도우심으

로 참감람나무에 접붙어서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는즉, 여기 봐요. 접붙임이라는 건 죽은 가지가 산 뿌

리에 붙어서 새 생명의 역사를 얻게 되는 거예요.” 아주머 니는 토마토 가지 화분, 내 멋대로 토가지라 이름 붙인 화 분에 짧게 눈길을 주었다. 이내 성경을 식탁 위에 펴놓은 56

지송주

소설

채 오른손을 본인의 가슴께에 두고 왼손은 내 손을 겹쳐 잡아 내 배 위에 올린 후 눈을 감았다.

“우리 아가도 애기 엄마라는 굳은 뿌리에 태로 접붙

었으니까… 인제 하나님 영광 받아 쑥쑥 자랄 거예요. 엄 마 혼자 애 키우는 게 서러운 일이지만서도 또 열심히 살 다 보면은 금방 좋은 날 올 거예요….” 그 이후부터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드문 드문 아멘, 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신은 믿지 않지

만, 내게 신은 없지만, 막연하게 앞으로 안온한 일만 생길

것 같았다. 아주머니 손과 내 손 저 아래 어딘가에서 새끼 손톱 반만 한 심장은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3.

저절로 우러나오는 삶에의 욕구는 퍽 감동스러웠다.

코소보 내전을 겪었던 사람의 회고를 읽은 적이 있다.

전쟁이 길어지고 추위가 다가올수록, 법전의 표지는 해지 고 도덕경에 두껍게 서리가 낀다. 다행히 그와 그의 가족 들은 폭격의 한복판을 빗겨 난 외곽에 살았으나 자원이

턱없이 모자랐다고 한다. 수도가 끊기고 전기는 내려갔다. 뱃길과 찻길이 막혀서 이내 암시장이 성행했다. 그들은 얼

지 않기 위해서 아무 집에나 들어가 문짝과 문틀, 바닥의 마루 할 것 없이 뜯었다. 태울 수 있는 건 샅샅이 긁어모아

서 불을 지펴야 했다. 한정된 동네이다 보니, 여러 집을 전 전하다 보면 한 곳에 사람 무리가 두셋씩 모일 때도 있었

다. 대부분 다소 거리를 두고 봐도 못 본 체하며 지나갔으

나, 상황이 여의찮으면 무력으로 충돌하는 경우도 이따금 몰약 — Myrr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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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어졌다. 그렇게 밤사이 새로 길거리에 버려진 송장은 며 칠이 지나면 영문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뜯어먹을 헌 집이 점점 부족할수록, 잦아졌다. 널브러

진 육신을 치우던 익명의 사람도 더는 예우를 차릴 여력이 없었다. 인간의 존엄이란 허세에 불과했다. 마을 사람들 은 무감해졌다. 그는 총을 든 남자와 칼을 든 남자가 서로

대치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본 적이 있다고 했다. 예까지 오면 새삼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권

총을 가진 남자가 더 유리할 거라고 믿는다. 그 역시 그랬 다. 그러나 총 든 남자는 방아쇠를 매만졌을 뿐 끝내 그것 을 당기진 못했다. 자기 목에 칼날이 들어와 박히는 순간

까지도 말이다. 그는 남은 숨을 내뱉으면서도 자신의 주저 함을 이해하지 못하던 남자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

다. 총을 들었던 남자는 육체의 고통보다 자신에 의한 배

신감이 더 뼈저린 듯 보였다. 그는 글을 갈무리하며, 생존

에는 신체가 건장하냐, 무력이 있느냐보다 삶에 대한 의지

가 강렬할수록 유리하다고 되뇌었다. 자신에게 다짐하듯 나지막하게.

그렇게 보면, 나는 생존경쟁이라는 방석 뺏기 게임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은 방식으로 태어났다. 한 줌이라도 더

먹고 마시려고 큰 소리로 울어대는, 자기보존의 방석 위에 안간힘을 쓰고 엉덩이를 눌러 붙이려는 것들을 마주보기 가 두려웠다. 나는 언제나 방석을 빼앗기는, 애초에 게임에

참여하는 건 싫고 이기는 건 더욱이 바란 적이 없으니 방석 을 내주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그런 쪽이었으니 말이다.

58

지송주

소설

“하나를 앗아가면 두 개를 가져와야 한다, 무슨 수

를 써서라도!” 나의 어머니는 ‘무슨 수’를 유난히 또박또박 발음했다. 어머니는 생존욕이 모든 걸 정당화할 수 있다

고 믿는 사람이었다. 말이 무색하게 나는 하나를 빼앗기 면 빈손을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울기만 하는 아이였다. 분 해서가 아니라 왜 돌려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통 모르겠는 데, 어머니가 채근할 게 두려워서 울었다. 어머니가 원하

는 대로 나는 알뿌리를 박고 더 내어줄 게 없는 양 씩씩거 렸지만 실상 뿌리는커녕 발바닥조차 땅바닥에 맞붙어 있

지 않았다. 억지로 고함을 내지를수록, 발은 지면과 점점 멀어져 갔다. 입시를 마치고 그저 그런 4년제 대학에 들

어갈 때쯤엔 머리가 대기권을 벗어나 숨을 쉴 수 없을 경 지에 이르렀다. 나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존재를 표표 히 나부껴 어머니로부터 벗어났다. 대학은 채 마치지 못했 다. 자퇴라고는 하지만 이미 졸업하기엔 민망한 학점이었

다. 수업 대신에 그럼 여행이나 취미 같은 데 몰두했나 하

면 그건 또 아니다. 그렇다고 문란한 생활을 하거나 이를

위시한 여타 부도덕한 짓도 하나 한 게 없다. 나는 아무것 도 안 했다. 어떤 행위에도 작위를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내리 3년을 육가공 공장 생산직으로 지냈다.

전기충격으로 눈 감긴 닭의 두 발을 회전하는 레일에

나란하게 끼운다. 단순한 업무이지만 원초적인 혐오감 때 문인지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시급은 괜찮았다. 목도 발 도 깃털도 온기마저도 여전하다. 잃은 건 이어질 삶뿐이

다. 물구나무선 닭은 자포해 팔을 헤 늘어뜨리고 있다. 기 몰약 — Myrrha

59

계에 들어가 털이 뽑히고 참수당한 뒤, 발목까지 달아나 야 비로소 익숙한 상태의 생닭이 된다. 가지런한 핑크빛

몸뚱이들이 수십 줄씩 빠르게 깜빡이며 어디론가 끌려들 어 가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한 현대미술 작품 같았다.

꼭꼬, 그제와 같던 어제와 같아야 했을 오늘이던 어

느 날,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다기엔 꼭,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닭 울음이 났다. 생닭의 배에 귀를

대 보았다. 잘린 목에서 흘러나오는 건 아니었다. 간헐적 으로 나던 닭 우는 소리는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더니 쉴 틈 없이 울려댔다. 한 겹의 소리는 두세 겹으로 두텁게 포 개졌다. 머리를 가득 에운 닭 소리에 정신이 가마득해 왔 다. 무색무취의 닭 기백 마리가 공장의 푸른 우레탄 바닥 을 잔디로 알았는지 고개를 꺼뜩거리며 거닐고 있었다.

나는 모든 존재가 죽으면 풍선처럼, 아니면 젤리처럼

영혼이 빠져나와서 대기에 떠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수십만 년간 나유타의 생명이 찰나와 억겁을 살다 스러졌 으니 이 대지 위 공기가 꽉꽉 찼겠구나, 내가 영혼을 들이

마시고 있구나 생각했다. 숨쉬기가 불편해졌다. 영혼의 파 편이 들숨에 끌려들어 와 헤모글로빈에 의해 내 온몸을 순환한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나고서야 날숨에 붙들려 해

방된다. 뒤섞이고 엉킨다. 젤리가 담긴 찻잔 안을 티스푼 으로 마구 휘저으면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잘게 조각이 나는 것처럼.

만성적인 산소 결핍에 시달리던 내게 네가 찾아왔다.

확정적 고의는 아니고 미필적 고의에 가까웠다. 어쩌면 아 60

지송주

소설

기가 생길지도 몰라… 그러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모자 를 씌워주고 내 삶을 전부 바쳐야지. ‘삶을 전부 바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실감하지도 못하면서 입에 감기는 대로 뱉어댔다. 나의 정조는 단단한 바위보다는 축축한 습지에 기초를 두었지만, 그것도 음울한 빛깔의 꽃이 얼핏 설핏

핀 곳에, 착상의 단계를 벗어난 이상 나는 더는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검사를 받았을 땐 이미 6주가 지나있었다. 초음

파 사진에는 흰 바탕에 까맣게 멍울진 콩알이 하나 박혀있 었다. 뚫어져라 보니 꼬리를 말고 있는 올챙이 같기도 했다.

그래 보여도 심장 소리가 났다. 들어도 들어도 지겹지 않았 다. 이제 내겐 두 명분의 숨이 필요하다. 곧장 공장을 그만

뒀다. 공장 기숙사에서도 나와야 했다. 여태껏 애꿎은 닭 발만 어루만지던 나는 바깥세상에 완전히 무뇌한 문외한

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닭 울음소리에서 벗어나 풍부한 공 기가 넘실거리는 곳으로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마음만 앞 서 순서가 뒤죽박죽인 홀로서기를 수습해 준 건 소피였다.

그녀는 두 번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다. 종일 소리 나지 않는 웃음을 짓지만 헤어질 무렵

에는 꼭 두 번을 돌아보곤 했다. 다른 친구들은 만나면 뗄 수 없이 소중하다고 갖은 호들갑을 떨다가, 헤어질 순간이 다가오면 자못 아쉬운 표정을 보이다가도, 다신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갔다. 이 또한 그들에겐 솜털 정도의 무게감

밖에 되지 못한 내 업보겠지만. 반면 소피는 저가 아쉬워 서 한 번, 내가 아쉬울까 또 한 번 고개를 돌려주었다. 임

신 초기라 절대 안정해야 할 나를 대신하여 소피는 묵묵 몰약 — Myrrha

61

히 시내부터 외곽까지 훑으며 다리품을 팔았다. 결국 8주 무렵에는 감람빌라 203호에 입주할 수 있었다.

축복받은 극히 예외를 제외하고, 6주부터 12주까지가

마의 고비라고 한다. 그것도 평지가 아니라 에베레스트산

을 오르듯 급격하게 가팔라진다고 했다. 나는 입덧이 유난

스러운 편이었으며, 대체로 잠은 잘 자는 편이었지만 가끔

밑이 빠지는 고통이 있었다. 실밥 하나에 지나치게 서러울

때가 있는가 하면 뚜껑이 잘 안 따진다는 사소한 이유로 화가 치밀어오르곤 했다. 입덧 때문에 못 먹는 음식은 더

못 먹게 되었지만 동시에 먹덧이 찾아왔다. 앉은 자리에서 초코파이 한 통을 다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한밤중에 편

의점에 종종거리며 다녀오는 날이 많았다. 여력이 남지 않 으면 염치도 체면도 없이 주인아주머니나 소피를 찾았다.

맥락 없이 드센 감정과 쓸데없이 간절한 욕구에 적응

하기란 녹록지 않은 일이다. 자기 주관이 뚜렷할수록 버텨

내기 힘들단 게 자명했다. 하나 애당초 그런 게 있지 않은 나에겐 하루하루가 날로 새로웠다. 라따뚜이가 모자 속에

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조종하면 실력 없는 요리사 손에 서도 훌륭한 진미가 탄생한다. 5센티도 안 되는 라따뚜이

가 나를 부여잡고 이리저리 보여주는 세상이 얼마나 짭짤

달콤하던지. 민숭민숭하던 인생에 가장 다채롭던 순간이 었다. 내 삶을 다 바칠 수 있었다. 임신이라고 했을 때, 공

장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우라고 했다. 친정도 없는 엄마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얼마나 있겠냐고 물었다. 너와 함께할 삶을 그려봤다. 나는 어린 너를 먹이기 위해 무슨 62

지송주

소설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할 것이다. 고되고 고달프지만 엄마라

면 응당 그렇게 살아야 한다. 너는 내 가장 그럴듯한 핑계

가 된다. 사춘기가 온 너는 나에게 이럴 거면 왜 낳았냐고

윽박지르고 날 원망한다. 그래도 괜찮다. 고작 이것 밖에

네게 줄 수 없다. 비록 내 손은 다 닳고 부르텄지만 네게만 은 늘 미안하다. 그 미안함마저도 내겐 가장 귀중한 선물 이다. 네가 네 삶을 살아가도록 내 삶을 기꺼이 남김없이 써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살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한참 손톱을 보고 있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

다. 끼익, 연 지가 오래라 문이 많이 뻑뻑해졌나 보다. 소피

였다. 무심결에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머리도 전혀

자라지 않았구나.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소피는 꽤 놀란 듯했다. 매주 찾아왔지만 항상 문은 굳게 닫혀 열

리지 않았다고 했다. 열린 문이 새삼스러울 만큼 오래. 나 는 좀체 한잠이 깨지 않아서 그랬다고 미안하다 말했다.

별말 하지 않던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와 식탁 의

자에 앉았다.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소피는 얼마 되지 않

아 다시 일어났다. 내 대답이 볼품없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대화 내용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피

는 검은 봉다리를 식탁 위에 얹어두고 그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 같았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고 있으니 아마 그렇게 말한 게 맞을 것이다.

“…그래도 굶지 마. 입맛 돋울 수 있게 복숭아 좀 샀어.

달고 새콤한 거 좀 먹으면 입에 침이 좀 돌 거야. 또 올게.” 내가 무엇이라고 답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몰약 — Myrrha

63

4.

소피를 보내고 그길로 식탁에 주저앉았다. 반들거리

는 봉다리에 보송한 복숭아들이 수줍게 담겨있었다. 그러

고 보면 복숭아를 먹은 지가 언젠지 가물가물했다. 임신 하면 무엇을 하고 하지 않아야 하는지 어렴풋한 감도 없었

던 내가 제일 믿는 구석은 주인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한결같이 든든했다. 그렇다고 한들 지나치게 사소한 부분

까지 일일이 다 물어보자니 나도 아주머니도 못 할 일이었

다. 요즘은 검색이 잘 되어 있어서, ‘임산부가’까지만 치면 내가 알고 싶었던 게 다 나왔다. 복숭아는, 그랬다, 찬 기 운이 있어 산모가 많이 먹어선 안 된다고 했었다.

먹어서 안 될 건 없었다. 지금은 말이다. 한데 소피가

알지 못한 게 있다. 나는 이제 배고프지 않는다. 끊어질

듯 주릴 때만 입을 대던 인스턴트 야채죽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도리어 허기에서 벗어나고 나니 상쾌하기까지 했 다. 몸은 허전하지만 가뿐했다.

사고가 고르게 평평하다가도 까무룩 땅이 꺼지곤 했

다. 걷기 힘들 정도로 싱크홀이 났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 생활을 영위하다가 불현듯 제자리에 멈춰서기를 여러 번

이었다. 땅거미가 어둑하게 내려와 시야를 좀먹었다. 매번 같은 질문을 했다. 너는 왜 날 떠났을까.

두 팔과 다리로 처음 땅을 디뎠을 순간부터 자각하는

지금까지 내가 원한 건 모조리 내 손이 닿지 않을 곳에 있 었다. 책장 위에 분명 끄트머리가 보였다. 손을 뻗고 까치 64

지송주

소설

발을 들어도 검지, 중지 끝만 살짝 닿는다. 시도하면 할수

록 안쪽 깊숙이 숨어버렸다. 있는 대로 올려다보느라 뻐 근한 고개를 짚으면서 내 꼴이 우스웠겠다고 생각했다. 관 심 없는 척했다. 그러면 바보처럼 간절해지지 않을 수 있

었다. 너는 닿지 못할 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고, 그 래서 조금은 마음을 놓고 갈망해도 되지 않을까 했다. 예

상은 궤적을 저 멀리 빗나갔다. 너는 내 아둔한 머리로는 어림조차 못 한 방식으로 나를 떠나갔다.

조짐은 있었다. 수시로 아랫배에 뭉근한 통증이 느껴

졌다. 으레 그렇겠거니 참았다. 통증은 저를 알고도 아는

체도 안 하는 게 골이 나, 있는 대로 날을 세웠다. 뱃속 여 린 살을 에는 것 같았다. 자궁 부정 출혈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 팔을 붙들고 너의 안녕부터 물었다. 초음파상으 로 내막 안쪽 오른편에 8cm, 그리고 너를 끼고돌아 살짝

뒤편에 5cm의 종양이 있었다. 신속한 진단을 위해 정면 만 한 장 찍었는데도 비치는 게 벌써 두 개였다. 정밀검사 에서 더 나타날지도 모른다. 자궁근종 중에서도 점막하

근종이라고 해서 자궁 내막 바로 아래에 생기는 건데, 태 아와 너무 가까워 경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호르몬 때문 에 임신 4주 차에서 12주 차까지는 종양이 더 비대해진다

고 한다. 오늘로 10주니까 아직 2주나 남았다. 의사는 이

정도면 생리통도 심하셨을 텐데…하며 말끝을 흐렸다. 내 안색을 살피며 이보다 더한 경우에도 무사히 출산한 경우

가 드물지 않게 있으니 부디 낙담하지 말라고 했다. 산모 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그래도 조용한 분투를 이어가

고 있는 태아에게 더 큰 짐을 지우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몰약 — Myrrha

65

마음을 다잡았다. 저보다 큰 종양과 어깨를 부딪치며 불 편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는 건 너인데, 내가 뭐라고 삿되 게 투정을 부리겠는가. 최선을 다해 몸조리했다. 신선하고 영양가 있는 끼니를 먹었다. 그리고 가볍게 산책했다. 향

하는 데 없는 기도를 드렸다. 몸과 마음가짐은 경건을 초 월해 성스럽기까지 했다.

태동이 없었다. 심장 소리가 멈췄다고 했다. 17주 차 6

일이었다.

안다. 나도 안다. 원인은 명확했다. 피할 수도 없었다.

내 선에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했다. 유산이 제법 흔한 일 이고 3할은 이유조차 규명할 수 없다는 진실도, 그거라도

아는 게 다행이라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가혹한 땅거미는 시도 때도 없이 어둠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아주 약

간, 일말이라도 내 잘못은 없는지, 내가 도대체 뭘 해야 했 는지 물었다. 자책으로 실을 자았다. 부유하던 후회들이 거기 걸려들었다.

네 삶에 대한 충동을 목발 삼아 나는 이미 불구가 된

내 삶을 절뚝거리며 걸어 보려 시도했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나의 비겁은 모호한 기도로는 쉬이 용서받 지 못할 불경이었다. 목을 조여오는 무신경한 종양 덩어리

도 집요하게 밀어내지 못한 건 너를 이루는 나의 유전자가 지나치게 가벼운 탓이겠지. 나는 너를 보내며 종양과, 널

다시 만날 가능성까지도 송두리째 적출했다. 나는 흘려보 낸 것들만큼 더 가벼워졌다.

66

지송주

소설

5.

솜털이 보스스한 복숭아의 살갗은 얼마간 서늘한 기

운을 머금었다가 삽시간에 물러 버렸다. 덥고 습했다. 군

데군데 누런 욕창이 생겼다. 모공으로 벌건 진물이 끈적하 게 배어 나왔다. 꼭지는 검게 졸아붙었다. 실낱같은 단내 가 코를 스쳤다. 밤이 찾아오면 복숭아는 자신이 언제 붉 었냐는 양 어둠을 한가득 머금었다가 해가 뜨면 다시 내

뿜었다. 그래도 말끔하게 토해내지는 못했다. 날이 갈수록

검푸른 물이 여러 번 덧칠한 듯 서서히 배어들었다. 머금 을 수 있는 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온 방에 칠흑 같은 파도 가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도 벽과 천장과 커튼은 제 몸의

모든 구멍을 막아버렸다. 열리지 않음은 죽음과 같다고 했

던가. 어스름은 결코 스며들지 못하고 반질반질 윤이 나는 표면을 따라 그대로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새벽이 다가

오면 어둠은 썰물처럼 남김없이 빠져나갔다. 물이 들지 않 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문 낮, 광활한 방 안에는 검은

물방울 하나 맺혀있지 않았다. 이 공간에 오직 복숭아 서 너 알만이 젖어 들 줄을 알았다.

낮과 밤이 몇 차례 순서를 바꾸었다. 나는 뜬눈으로

지새웠다. 짙은 자줏빛으로 농익은 과육은 거죽이 점차 가라앉았다. 베어 문 듯 푹 파인 자국이 남았다. 녹아내 린 살점이 검붉은 진액과 뒤섞여 질척질척했다. 농염하게 무르익은 냄새는 사뭇 중독적이었지만, 과실이 본래의 싱 그러움으로 더는 돌아올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 지독하게 달짝지근한 시취였다. 한껏 썩어갈수록, 생은 충만해진다.

몰약 — Myrrha

67

얼마나 오랜만에 이런 냄새를 맡았는지를 헤아려 봤

다. 떠올렸다. 내가 얼마나 이 냄새를 필요로 했는지를. 낙

엽이 썩는 냄새부터 비 맞은 나무껍질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 수명을 다한 늙은 짐승의 살이 부패하는 냄새까지

내 비강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다 지금처럼 한 번씩 나를 저리게 했다. 타들어 가듯 썩는 냄새는 항상 풋내와 같이

났다. 연한 풀이 새로 돋아나는 냄새와 갓 태어난 새끼의 미처 닦지 못한 태반 냄새가 주검의 냄새와 섞여 들었다.

땅 위에 부패가 스미고 나서야 새로운 생명이 움틀 수 있 었다. 그걸 알기에 썩어들어가는 것은 있는 힘을 다해 넓

게, 가능한 한 멀리 닿고자 했다. 이미 마친 삶이 노련했으 므로 태동하는 삶은 그 속에서 강건한 본모습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썩는 것은 언제부터 부끄러운 것이 되어 버렸을까. 부

패한 쓰레기 냄새에 코를 막으며 한시라도 바삐 그것을 격 리하라고 한다. 인지하지 못할 세상의 어디 구석진 곳에

숨기라고 한다. 그 쓰레기가 온전할 때, 제 배를 불렸음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 온전함을 누가 취했는지 알면 서 모른 체 한다. 부패는 생과 분리되었다. 생은 여느 때

보다 순결하다고들 말한다. 썩어들어가는 것들을 버리고 매끈한 벽을 세웠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삶으로부터 저를

가두는 일이었다. 사정없이 썩은 것들의 냄새를 맡았던 적 이 언제이던가, 빨아들일 양분도 없이 병들어 갔다.

복숭아 살은 하나같이 뭉그러졌다. 그 속에서 보호받

고 있던 단단한 씨앗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과육은 흥 68

지송주

소설

건하게 검은 봉다리 바닥에 고여있었다. 어디로 빠져나왔 을지 모를 즙이 살짝 새어 나오기는 했다. 그래도 대부분

얇고 질긴 비닐 안에 얌전히 머물러 있었다. 생득적 본능 을 따라 과육은 표토 안에 서려 들어 제 아끼는 씨앗의 거 름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그럴 순 없었다. 여기

는 2층이었다. 지면은 저 아래에 있다. 도달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 그 전에 저를 둘러싼 이 봉지가 썩

어야 한다. 그리고 상을, 바닥의 장판과 철근을, 벽지를, 시멘트를 다 녹인 후에야 다다를 수 있다. 거기에 채 닿기 도 전에 과육은 증발하여 말라붙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랜만에 맡은 군내가 마냥 비관

적이지만은 않았다. 비록 부패치고는 과하게 단정하고 억 압받기는 했으나 하여튼, 달큰하게 썩어들어가는 복숭아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가느다란 줄기의 바람이 그리워졌 다. 반은 들떠서, 나머지 반은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6.

햇살은 집요하게 커튼의 존재를 반증했다.

오후 다섯 시의 해는 내려와 내 시선에서 커튼과 수

평을 이뤘다. 물론, 아직 커튼을 걷지는 않았으니 모든 건 내 추측일 뿐. 커튼은 안간힘을 다해 등을 지고 햇빛을 막

아보려고 했으나, 네모난 윤곽을 두르는 빛의 띠까지 가 릴 수는 없었다. 햇살은 커튼에 후광처럼 드리웠다. 커튼

은 햇살의 존재를 딛고 자신을 관철하려 했지만 고작 1미 터 남짓의 폭으로 반경 69만 킬로미터의 거대한 빛덩이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해는 그 시도가 가련한 듯, 강렬한 후 몰약 — Myrrha

69

광으로 너그러이 커튼의 존재를 증명해 주었다. 빛의 자비 는 흘러넘쳐 부드럽게 방 안을 비췄다. 내 두 눈에 직선으 로 쏘아대는 광선은 각별히 번뜩였고 유달리 끈질겼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햇빛이 날카롭게 얼굴을 가로지

를까 싶어 조심스럽게 천천히 커튼을 걷었다. 의외로 햇살 은 거세지 않았고, 볼에 간지럽게 닿는 느낌이 났다. 신선 한 공기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코에 병아리콩과 닮은 뾰루지가 있다는 이유로 키케

로라 이름 붙은 자는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달아나지 않고 별장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모든 운명은 예견되어 있

되 달라지는 건 오직 사건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국한한 다. 피할 순 없다. 그렇다면 겸허히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그래서 저를 치러 다가오는 병사에게 순순히 닦은 목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

순간이 온다. 더 이르거나 늦거나. 그걸 알면서도 난 도래 하는 순간을 최대한 미뤄보려고 했다. 이번에도 순조롭게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내 반생은 얽매는 당위로부터 도망

치는 과정이었으므로. 길이 아닌 곳을 걸었다. 그러나 내 가 맹지라고 생각하고 걸었던 곳은 지금 이 순간으로 향

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내게 예비 되어 있는 길이었다. 이 제 반드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했다.

길쭉하지만 통통한 대추방울토마토는 오종종하게 맺

혀있었다. 햇볕을 많이 쬐는 꼭대기는 빨갛고, 아래로 내 려가면서 주황부터 노랑, 초록으로 익어 있었다. 방금 물

을 준 듯 열매마다 물방울이 여럿 매달려 있었다. 마른 목 70

지송주

소설

을 축이고 난 뒤라서 그런지 한결 생생해 보였다. 내가 봐 야 할 것은 이게 아니었다. 자잘한 가지에 달린 잎과 토마 토가 무성해서 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하

며 시선을 돌리다 토마토 무리 뒤에 수줍게 숨어있는 새까

맣고 둥그런 가지를 발견했다. 가지는 이름대로 둥근달처 럼 탐스럽고 포동포동했다. 표면엔 하얗고 보드라운 윤이 났다. 더 자세히 살피고 싶었지만 짙은 검보라색 달은 아 직 보름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토가지 나무는, 가지가 접붙었던 토마토 나무는 저번

에 보았을 때보다 한 뼘 정도 키가 크고 녹색이 짙어졌다.

절연테이프로 감겨 있던 접합부는 살과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것 같은 커다란 흉터가 남았다. 잘린 가지를 살 리고 싶어서, 잘린 가지는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서로 떨

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을 게다. 더 억세고 질겨져야만 했다. 흉 자국은 치열하지만 절박했던 시행착오의 산물이 었다. 나무는 제 새끼만 아니라 영문 모르게 와서 상처를 남긴 둥그런 가지도 새끼로 품었다.

각막이 약해진 게 느껴졌다. 너무 오래 해를 보지 않

았나 보다. 겨우 이 정도의 햇살에도 눈이 참을 수 없이 시 렸다. 망각 아래에 침잠하던, 소피의 말이 수면 위로 점점 떠올랐다.

“엄마 힘들까 봐 먼저 갔나 보다. 엄마, 저 때문에 아

프지 말고 잘 사셔야 해요, 하고.”

그녀는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다. 너는 우울하고 슬

프다고 했다. 그것을 자각해야 한다고 했다. 그 정도면 병 몰약 — Myrrha

71

이라고 했다. 누구라도 그 정도 고통은 다 겪고 산다고도

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했다. 먼저 간 네가 기

뻐하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너는 약을 먹어야 한댔다. 그 러기로 했다. 나는 네가 비록 영혼이 되었다고 해도 구태 여 나를 돌아보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래도 난 유 일하게 내가 가졌던 너를 애도하고 싶었다. 얼마가 걸리든 좋았다. 미소 지을 때도 있겠지, 씁쓸한 기억도 있을 거고. 때로는 망연하기도 할 것이다. 그 속에서 많이 상하더라

도, 내가 견딜 수 없더라도 감정의 질곡을 온전한 모습으 로 겪고 싶었다. 그게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일

테니까. 소피는 그건 정상이 아니라고 했고, 그래서 그냥 그러기로 했다.

상담사는 일반적이지 않을 정도로 슬프면 약의 도움

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게 어느 정도냐고 물었다. 감정 이 2주 이상 지속되면 그렇다고 했다. 그럼 내가 너를 떠올

릴 수 있는 시간이 보름뿐인 거냐고 했다. 그건 아니고, 뭐 든지 적당한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게 적절한 슬픔인가,

나는 계속 자문했다. 단순하게 감정의 실마리가 느껴지

면, 약을 먹었다. 화학결합 물질은 효과가 과하게 좋아서,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기물 감염,

심장에서부터

소피, 네가 내게 주려던 구원은 심장을 엇나가 나의

폐를 예리하게 관통했다. 다정이 가득 차올라 생긴 폐부 종은 숨 쉴 때마다 나를 자극하는 이물감으로 느껴졌다.

72

지송주

소설

고쳐보려고 했다. 폐가 제기능을 하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두 동강 난 오른쪽 폐는 더는 서로 붙을 의지가 없어 보였다. 나는 폐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아무리 골몰해도 그들을 설득할 만한 타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강철 심장이랬나, 쪼개져서 다시 붙지 않는다 는 측면에서 나는 강철 심장일지도 몰랐다.

7.

왼쪽 볼이 딱딱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 처음 햇

살을 받았던 부위였다. 피부에 바른 석고가 점점 말라가

는 느낌이었다. 아니다, 피부 위에 석고가 얹힌 게 아니라 아예 피부 껍질이 석고를 적신 붕대로 교체된 것 같았다. 왼 볼을 중심으로 하여 동심원을 그리듯 햇살이 닿은 부 위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오른팔을 보았다. 털도 핏줄

도 온데간데없이, 맨질맨질한 도자기처럼 차갑고 균일했 다. 산란하여 표면에 흩뿌려진 햇빛은 푸른 기운을 머금

은 채 반짝였다. 기이하기 가없으나 한편으로 그지없이 찬 란했다. 부셔서 감았던 눈은 더는 떠지지 않았다. 눈이 있 었던 곳은 가느다란 실금만이 남았다.

먹지도 자지도 않아도 돼, 의미를 가지려 하지 않아

도, 무엇을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돼, 더는 미안해하지 않

아도 돼. 속삭이는 소리는 벽과 천장과 책상과 커튼에서 들려왔다. 혹은 신의 계시일 지도, 아니면 내 섬망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내가 무기물에 주어지

는 무기한의 억겁을 얻었다는 것은, 그게 은총일지 저주일 지 모를,

몰약 — Myrrha

73

몰약을 바른 나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입고, 그대로 고꾸라져 이어 붙일 수 없게 산산이 부서졌다.

74

지송주

소설

권가현

마음은 손톱과도 같아서 자른다

자란다

다시 자르면

다시 자란다 자르지 않으면

얼마나 자랄지 그대로 두면

언제까지 자랄지 널 그대로 둘까 아님

다시 자를까 흠 난

자름의 연속 넌

자람의 연속

78

권가현

시

손톱 너무 짧게 자른 탓인지 손끝이 아리다

그리고 조금 가려워

남김없이 깔끔하게 자르고 싶었는데

손톱이 다시 자라날 때까지 기다려야 아픔이 없어지겠지

애초에 조금은 길게 남겨 둘 걸 그랬나

손톱

79

조서연

비로드, 벨벳, 우단 겨우내 편지를 기다렸다

우편함 앞 의자에는 눈이 자주 쌓였고

상한 천을 깔고 앉아 모르는 말로 적힌 쪽지 중국집 전단지

실종된 개들의 이름 황색신문

수학선생의 벽보

아스팔트 깨진 모양을 읽는 동안 새들이 식사를 즐겼다 알던 거리에는 불이 꺼지고

모든 주목 열매가 조심스럽게 멀어질 때까지 편백은 침묵을 지켰지

나이든 덩굴들이 드리우는 그림자 청신한 고요

점차 몸을 불리는 청동 웅덩이 속에서 오래된 편지가 천천히 씌어지고 있었다

82

조서연

시

소포우편 지난여름 당신이 불렀을 때

그때 추웠어요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나는 목도리도 장갑도 없는데

계속 해 걸어 가 뭉게구름들의 속삭임을 무시할 순

없었고 저녁 식사에 제때 도착하지 못할 게 분명했어요 사 람들이 웅크린 모양은 멀리서 보면 말없는 장갑 같았어요 촛불이 켜지는 걸 지켜봤어요 피부들이 흘러내리자 나는 달리는 법을 잊었어요

여기서부턴 굴러 내려가면 돼 매뉴얼을 따르자 눈물이 멎었고 창문이 모두 닫혔습

니다 이윽고 도시가 입술 앞에 있었습니다

소포우편

83

강물이라는 증거 밤 강 방향으로 걷는다

강 옆에 긴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바람이 불면 잦아드는 중얼거림

자전거를 타고 도착하는 누군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일제히 비켜 주는

다섯 개의 발자국 죽은 사람의 머리 위에도 하늘은 있다 우리는 우르르

쏟아지며

와르르 터뜨리며 강가를 쏘다녔다

물집이 다 터지자 붉은 살이 드러났다 저 신발에서 이 신발로

열차가 느려지면 어김없이 덜컹인다

지하철에서 비참함을 팔고자 애쓰는 사람처럼

매혹과 질투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려는 사람처럼

눈을 너무 질끈 감아 새는 빛을 모르게 된 사람처럼 골똘한 미움 속에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처럼

크고 늙은 자동차가 정원으로 미끄러지며 작고 어린

선인장을 모두 살해했다고 새들이 와서 알려주었다 오래

전 바다에 풀어놓은 새들이었다 새들은 높이 날고 낮게 84

조서연

시

날며 시끄럽게 싸웠다 허공을 핥아보면 강물의 맛이 났고

다음 역에서 내린 건 강가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강물이라는 증거

85

고사리 장마 계절의 완만한 이마를 겪은 적이 있습니까 땀이 맺혀 둥근 그림자를

곤히 잠든 오렌지의 공포를 아십니까 바구니 안에서 이어지는 열대를요 한편 여전히 여름이 여기에 있다 반대편 대륙에서 누군가 전하자

풋내가 밀어닥치죠 사이클론같이 빨랫줄에 걸린 억겁이 한가히 흔들립니다

다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그의 의견입니다 내 정원에 고사리를 꺾으러 오세요 두려워 마세요 부드러운 탄식들은 바람이 두려워 웅크리는 거니까

86

조서연

시

자세히 보면 완전한 암흑 억새로 짜인 작은 집에선 그리워할 사람이 없어 잠자코 양파나 깠다

밤에는 발밑이 열리듯 추락하는 잠이었다 창밖으론 너그러운 개울이 묵인했던 유리병들이나 배꼽 없는 수박 이기적인 유령들이 펄떡이며 상류로

낮에는 모래에 묻은 어제가 돌아와 머리칼을 빗질하고 수프를 먹이고 여기부터 저기까지 걸었다

저녁에 모래알의 궤적은 숲으로 이어졌다 숲의 어두운 부분에서 풀썩, 개울이 흐르기를 번복했다

물가에서도 당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완전한 암흑

87

템포 프리모 네가 알이었을 때 나는 소년이었어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말 못 하는 물고기였어* 나는 무두질된 부드러운 가죽이었어

설익은 열매 속 가느다란 수술이었어

내 피부를 두드리던 망치로부터 나는 걸어나왔다 모루와 불티가 다투어 속살거리는

아 그 연한 거짓말의 리듬을 나는 알았어 길은 단조의 음계 속으로 이어졌으며 내 수레 속 작은 단지에서는

흰 발톱들이 돋아나길 계속했단다 지느러미 물갈퀴 발가락의 간결한 절차를 따르며

우리는 별과 벌의 트릴에 실려 전파되었지

*

진은영의『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시인의 말’ 속 엠페도클레스의 말.

88

조서연

시

성인화

당신이 될 수 없는 당신에게 비가 와서 버스를 탔다 내리는 비가 비가 내려서 당신

생각이 났다 이제는 당신이 더욱 잘 어울리는 당신 당신이 라 부를 네가 없다 네가 없어서 (슬펐다) 비가 내려서 버

스를 탔다

하늘이 보이는 하늘의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 하늘

에 있는 구름이 붉다 노을빛에 국수를 말아먹고 싶은 하 루야 버스는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강물이 강물 소리를 낸 다 부푼 강이 울고 있다

너는 없고 당신이 될 수 없는 당신이 있다 당신이 될

수 없는 당신에게 이건 국수 삼키는 소리고 이건 강물 소 리야 너는. (울지 마)

92

성인화

시

무인도 섬나라는 없다 섬만 있다

섬에 사는 나라들만 있고 대륙은 없다

결백을 주장하는 자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죄가 많다고 말한다 대륙은 더 비싼 마스크를 쓰는 방식으로 더 깨끗한

공기를 마신다

그러니까 공기를 사서 마신다는 말이네요, 섬나라는

말한다

섬나라는 더 투명한 페트병을 사는 방식으로 더 맑은

물을 마신다

그러니 물을 사서 마신다는 말이네요, 대륙의 말

둘은 전기요금이 인상되는 방식으로 사랑을 확인했다 플라스틱 대신 종이를 쓰는 방식으로 서로를 걱정했다 살생하지 않는 생은 비루하다고 연신

물고기에게 밥을 주던 섬나라가 수제비처럼 몸을 던

졌다 그 무렵

대륙은 송사리를 사냥하는 왜가리를 보고 있었다 어느 편도 들 수 없어서 대륙도 몸을 던졌다 우리는 무인도를 사랑했을까요 무인도라뇨

갈 수는 있지만 도착할 수는 없대요 무인도

93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섬에 살고 있대요

94

성인화

시

카톡방 천장에 살던 사람이 죽어서 온종일 벽을 붙잡고 울었어 저런, 어쩐다니

지키지 못할 말들이 많아졌어 지킨 말들을 지키기 어려워서 지키지 못한 말들이 많아졌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사라지고

사람만이 살아 남아서 소년은 미친, 정신 나간 새끼

옆집 아저씨가 변압기에 맞아 죽었어

집에 그늘을 들이는 사람들은 줄었고 전봇대를 모르는 아이들이 많아서

일터보다 일자리가 빨리 준다더라 그래서, 옆집 그년은 대준다니

아니, 거리보다 차가 빨리 늘었대 에이, 씨팔

카톡방

95

김동현

횃불잡이

‘노예 제도는 굉장히 효율적인 제도다. 35%의 사람

들이 나머지 65%의 경제적인 기틀을 마련하고 있는 제도

라니! 얼마나 아름답고 완벽한 제도인가! 이상주의자인 히

틀러가 주장한, 자본과 이성이 생명보다 월등히 가치 있 다는 명제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황금률의 가장 중요한 예

시인 셈이다. 찬양하라, 국민이여! 환호하여라, 세계여! 우

리가 가장 아름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을 기뻐하라! ... (후략)’

— 이대용의 ‘평범함 속 놓치고 있는 황금률의 제도’

중에서

2027년 6월 30일 21시 46분 35.109초. 서울경찰청 2

층 제1 취조실.

삭막하고 차가운 공기가 깔린 공간은 자기 보호 의식

을 생기게 했다. 자신을 위해 변호하고 변명하는 이 공간 에서 침묵을 지키는 청년이 홀로 앉아 있었다.

98

김동현

소설

청년은 자신의 마지막 계획을 위해 고요를 지키고 있

었다. 첫 요청 후 침묵을 이어 가던 청년은 문득, 청년은 자기 손목에 걸려 있는 차가운 수갑을 바라보며, 안도감

을 찾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 로했다. 수갑을 차고 있음으로써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

다고, 자신의 두려움을 마음의 그릇에 내리눌렀다. 그러

나 억눌린 두려움은 이미 깨지고 부서진 마음의 그릇 안 에서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덜컹!

그 긴장감 넘치는 삭막한 공간에 문이 열리며 2명의

남성이 걸어 들어왔다.

“쟤가 날 찾았다고?”

“네. 그렇습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기성 경

정님.”

“알겠어. 들어가 봐.”

모든 게 귀찮아 보이는 얼굴을 한 40대 초반의 형사

가 청년 앞에 앉고 나머지 한 남성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방을 떠났다.

“네가 횃불잡이냐?”

늙은 형사는 문이 닫히자, 수갑을 차고 있는 청년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예, 맞습니다.”

항의의 침묵을 깬 청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형사의 얼굴부터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자기 손까지 흩어보았다.

청년의 왼손부터 형사의 의자까지의 거리는 청년이

횃불잡이

99

대충 가늠해 보니 40cm였다.

‘40cm, 그때 내가 본 아이의 키와 비슷하네.’ 라고 청년은 뜬금없이 생각했다.

“이기성 형사님 맞으시죠? 노예 전문 처리반 소속.” “허, 너 내 뒷조사했냐? 왜, 협박이라도 하려고?” “아뇨, 그 정도로 깡다구가 있진 않아서요.”

청년은 긴장으로 인해 축축해진 등줄기를 느끼며, 떨

리는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청년은 지금 느끼는 긴장감이

어디에서 왔을지 생각했다. 아까 마음의 그릇에서 새어 나 와 버린 두려움이 원인일까, 아니면 자신의 계획이 끝을

향해 올바르게 달려가고 있음에 대한 흥분이 원인일까.

청년은 어떤 것이 원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느끼는

긴장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긴장감의 전염성은 이 대화에 중요한 포문을 열 열쇠가 되어 줄 수 있기에.

“형사님은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실 분이니까요.”

목소리를 가다듬은 청년은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뭐? 내가 왜 네 이야기를 들어?”

늙은 형사는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 똑똑히 들어, 횃불잡이. 내가 너에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2시간 13분 24.891초야. 이 이상 시간을 들

이면, 후배가 준 금액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고. 알아?”

“난 너 때문에 손해 보기 싫거든. 그러니까 내가 질문

할 때까지 조용히 있어.”

늙은 형사는 초반보다 훨씬 구겨진 얼굴로 노트북을

두드렸다. 늙은 형사는 할 일도 많은 상황에서 취조까지 100

김동현

소설

해야 하는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중한 내 시간을 이런 허접한 상황에 낭비하다니, 전 인류적인 손 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L-F900423+1.”

늙은 형사는 청년이 말한 코드를 듣고 타자를 두드

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커진 홍채. 열린 땀구멍. 자그마한 손 떨림이 늙은 형사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늙은 형

사는 쓰나미처럼 밀려 오는 당혹감을 마음의 그릇에 미처

담지 못했다. 늙은 형사는 당혹감에 휩쓸리듯 청년을 향 한 두려움을 느끼며, 청년의 얼굴이 있을 만한 곳을 쳐다 보았다.

“제가 인터넷에 올린 문서, 영상, 그리고 선언문. 모두

L-F900423+1과 관련 있으니까요.” “…….”

청년이 지킨 침묵과 다른 침묵이 시작되었다. 이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 바뀌었다. 긴장감이 전염되었

다. 그토록 차가웠던 공기는 늙은 형사의 손목을 시리게 만들었다. 이제, 손목에 수갑을 차고 있는 존재는 청년이 아니었다.

“너, 그걸 어떻게.”

“이제 제 이야기에 관심이 생기셨을까요?” 청년은 늙은 형사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청년과 늙은 형사는 한동안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늙은 형사는 눈빛으로 청년에게 묻고 있었다. 청년은 그 런 늙은 형사의 눈빛을 눈웃음을 지음으로써 넘겼다. 늙

은 형사는 청년의 눈웃음에서 이야기를 들어야 모든 일이 횃불잡이

101

해결된다는 의사를 읽었다. 자신이 끌려다니는 이 상황이 늙은 형사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궁지에 몰린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젠장, 들어 보면 되잖아. 오늘 더럽게 재수 없는 날

이구만.”

청년은 늙은 형사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조용히

웃음을 지어 보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과거사를 정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2022년 5월 11일 오전 11시 36분 44초. 한국 대학교

지하 1층 제명길 명예 교수 연구실.

윗사람이 나를 부르는 일은 굉장히 떨리는 일이다. 특

히, 이 교수는 볼 때마다 왼손으로 펜을 잡고 있는 나를

고깝게 보고 있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도 이와 관련된 일이 틀림없다. 나는 늙은 교수가 내게 쏟아붓는 감정들 을 버릴 그릇을 마음 한편에 준비했다.

마음의 그릇을 끝으로 준비를 마친 나는 문고리를 잡

았다.

“아, 자네 왔나?”

“예, 교수님. 어쩐 일로 저를?”

교수 연구실의 문을 열자, 종이를 넘기고 있는 늙은

교수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늙은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나름 인정받고

있는 교수였다. 그는 논문을 자주 내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치에 관한 논문에 대해서는 완벽한 결론을 내기로 유명 한 교수였다.

102

김동현

소설

“일단 앉게. 걸어왔을 텐데 숨 돌릴 시간은 줘야지.

뭐 마시겠나?”

“저는 물이면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

늙은 교수는 훑고 있던 보고서를 잠시 내려 두고 옆

에 있던 찻장에서 흰 찻잔 2개를 꺼내 물을 담았다. 늙은

교수는 내 앞에 찻잔의 손잡이가 오른쪽으로 오게 두고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뜬금없지만, 가치는 어디서 생성된다고 생각하나?” “예?”

교수는 내가 왼손으로 찻잔을 감싸 들며 마시는 모습

을 보고 순간 말을 꺼냈다. 나는 질문의 의도를 떠올리다,

소문으로 이 교수가 모성애의 가치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는 사실을 떠올렸다. 분명 이 교수는 자신의 위대함을 내 의견을 통해 확인하고자 함이 틀림없다.

“하하, 글쎄요. 무언가 특별하니까 가치가 생성되는

것 아닐까요?”

나는 웃음으로 교수의 질문을 무마하며 그를 쳐다보

았다.

“가치는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게야.”

“특별하고 다른 것들은 사회에서 뒤처지지. 특별함은

현대 사회에서 족쇄와 다를 바가 없어.”

교수는 나의 대답을 예상대로 비웃으면서 찻잔에 담

겨 있는 찬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평범함에서 멀어진 것들은 노예로 전락하기

마련이지.”

“노예요?” 횃불잡이

103

“그래, 노예. 우리와 다르기에 마땅하게 다른 취급을

받는 ‘것’들 말이야.”

노예 제도가 부활했다. 그것도 80년 전에. 노예 제도

가 시행되고 나서 사람들의 생활이 많은 면에서 바뀌게

되었다. 우선 일반인들은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국 민연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으며, 취업하지 못해도 살아가

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복지가 탄탄하게 자리 잡 았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해 준 노예들에게 주어진 권 리는 없었다. 노예들에게는 인권, 자연권이 보장되지 않았

으며, 살아가며 민간인들과는 격리된 삶을 살아가 피부로 노예 제도가 어떤 것인지는 느끼기 어려웠다.

“노예들 대부분이 범죄자 신분들인 건 알고 있지?” 교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사회 부적응자들이네. 다름을 추구하는 그

들은 마땅히 처벌받아야지.”

늙은 교수는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음의 그릇 무게가 늘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름 내 마음의 그릇 수용량이 넓다고 생각했지만, 이 교 수만 만나면 얼마 안 가 그릇의 깊이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특별하고 다른 것들은 사회에서 뒤처지지. 특별함은

현대 사회에서 족쇄와 다를 바 없어.”

“난 그래서 자네가 남들과 같이 똑같아졌으면 좋겠네.”

늙은 교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

가 읽고 있던 보고서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어떤 주제도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네.”

104

김동현

소설

늙은 교수는 들고 온 보고서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노예 제도에 관한 부정적 고찰’

내 보고서다. 과제로 제출한 나름의 열정을 가지고 적

었던 보고서다. 늙은 교수가 내 보고서를 앞에 내려놓는 순간, 마음의 그릇에 담아두었던 불안감이 요동쳤다. 속 이 울렁거렸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 음이 강하게 들었다.

“다시 해 오게. 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용납할 수

없어.”

늙은 교수는 나의 떨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냉정

하게 말했다.

“자네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런 보고서를

낸 건가? 정말 이런 보고서로 좋은 성적을 받아낼 수 있다 고 생각한 건가?”

마음의 그릇에 담아 두었던 불안감이 다른 형태로 바

뀌며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써 온 노력을 보고 다시 써 온다면 기본 점

수는 주겠네. 그러나 기본 점수 이상은 안 돼.”

늙은 교수의 말을 나는 더 이상 듣기 힘들었다. 감정

의 덩어리들이 마음의 그릇 허용량을 넘겼다. 분노와 불 안감은 마음의 그릇에서 벗어나 내 오장육부를 헤집고 다 니는 듯했다. 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결국 나는 버티지 못하고 그릇을 엎어 버린 듯했다.

“전 교수님과 다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가치는 다

름에서 나옵니다.”

“자네, 아까 내 말을 들어 놓고 그런 말이 나오는가?

횃불잡이

105

모두가 같은 것을 지향해야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이 야! 서로 다른 존재를 추구한다면 자본이 분산되어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고! 이런 세상의 기본적인 법칙을 무시하 는 건가?”

늙은 교수는 불쾌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

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미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상황을 관조하고 있는 나에게는 소용없는 협박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증명해 주시죠. 교수님이 가장 잘하시는 방법

이잖습니까. 다름이 왜 가치가 없고 같음이 왜 가치가 있 는지. 저에게 증명해 주시죠.”

“허, 좋네. 자네 같은 사람을 그냥 사회에 내놓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뻔히 보이니 내가 자네의 생각을 고쳐 주겠네.”

늙은 교수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보고서에 어

떤 주소를 적어 나에게 주었다.

“거기 적힌 주소는 내 개인 실험실 주소라네. 지금부

터 47시간 뒤에 그 주소에서 보지. 만약 오지 않는다면, 앞으로 자네가 받게 될 내 평가 중에서는 좋은 점수를 기 대할 수 없을 걸세.”

나는 늙은 교수가 내미는 보고서를 받고 바로 교수

연구실을 나왔다. 뒤에서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 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더 이상 늙은 교수를 상대하기 싫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

기면서 나는 늙은 교수에 대해 생각하며 마음의 그릇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선 마음의 그릇에 남아 있던 찌꺼기를

조금씩 뜯어 내었다. 이 찌꺼기는 늙은 교수가 나에게 자 106

김동현

소설

신의 세상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느낀 답답함, 왼쪽 벽에 붙어있던 이 찌꺼기는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대한 반항심, 바닥에 붙어 있는 이 찌꺼기는 나를 무시하는 행 동들에서 비롯된 불안감이었다.

그렇게, 마음의 그릇에서 모든 찌꺼기를 뜯어 내었을

때 머리에 올랐던 열이 식어 가고 있었다. 왜 후회가 시간 차를 두고 온다고 하는지 깨달았다. 머리가 차가워지자,

내 미래나 다름없는 성적을 평가하는 늙은 교수에게 내가

한 행동이 생각났다. 내 손으로 내 대학 생활을 망쳤다는 생각이 회상을 따라 등장했고, 이런 생각에 나는 얼굴을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망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던 유일한 한 마디였다.

2022년 5월 13일 오전 10시 36분. 제명길 명예 교수

개인 실험실.

실험실의 첫인상은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실험실이라

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곳곳 에 설치되어 있는 유치장. 공기의 유동마저 막을 정도의

두꺼운 방음 소재.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헌 옷을 입고 있 는 물체 하나와 늙은 교수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자네 10초 늦었네.”

“예, 교수님. 죄송합니다.”

초장부터 내 마음의 그릇에 부담을 주는 늙은 교수였

다. 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교수를 제쳐 두고 나는 물건에 시선을 옮겼다. 인간이지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 횃불잡이

107

였다. 그것은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가슴팍을 덮

을 만한 크기의 보자기를 안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뚫어

져라 쳐다보다가 나를 향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늙은 교수를 바라보았다.

“증명하라고 했었지.”

늙은 교수는 불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예, 교수님. 근데 그게.”

“내가 최근 모성애 연구를 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 교수님.”

“그래서 최근에 여성 노예 하나를 구했는데,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무시다. 그 무시가 나에게 더욱 부담감을 주고 있었

다. 이런 부담감은 늙은 교수가 말한 바를 깨닫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했다. 그 교수는 나에게 노동을 시키려

는 듯했다. 내 주변 인물들이 하지 않는 ‘다른’ 행동, 다른

행동이 얼마나 힘든 행위인지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 간 듯했다.

“자네가 직접 다름이라는 개념을 경험해 보게. 그들

이 왜 그런 취급을 받고 어째서 가치를 잃고 노예가 되었 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게야.”

“…예, 알겠습니다. 교수님.”

이런 방식으로 증명받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렇

기에 거절의 말을 입 밖으로 내려고 했지만, 순간 교수 연

구실에서 내가 한 행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늙은 교수가 말한 성적에 관한 이야기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에게 또 반항하는 모습은 정말 위험하다고 내 뇌가 판 108

김동현

소설

단했나 보다. 내 입은 뇌가 흘린 전기 자극에 따라 움직였 다. 뇌 속의 결정은 감정의 뇌를 활성화했다. 나는 성적에

휘둘리는 내가 너무 싫어졌다. 스스로 화가 났다. 나를 억 압하는 사람에게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무릎 꿇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다가왔다. 이런 감정을 마음 의 그릇에 밀어 넣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신물이 났다. 그 럼에도 나는, 어김없이 늙은 교수에게 학습된 표정과 말투 로 대하고 있었다.

나의 동의 의사를 들은 교수는 나와 헌 옷을 입고 있

는 노예를 이끌고 한 면이 통유리로 설치되어 있는 방으로

갔다.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공간은 3면의 흰 벽, 회색 철

판으로 되어 있는 바닥, 그리고 먼지 하나 없는 공허한 공 간이었다.

그 공간을 접한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너무

나 인공적이었다. 자연적인 물체는 하나도 용납할 수 없다 는 의지가 보였다. 모든 것이 인공적이고 기계적이었다. 나 는 이 공간이 늙은 교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어 렴풋이 생각했다.

“노예 데리고 들어가게. 나중에 실험 자원으로 써야

하니 상품 확인에 특히 신경 많이 써 주게.”

늙은 교수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나에게 선고를 내리고

방을 나섰다.

교수가 방을 나서고 나서 나는 관심을 노예에게로 돌

렸다. 이 노예는 교수를 따라 움직일 때부터 나를 계속해

서 쳐다보고 있었다. 저 늙은 교수에게 보고서에 대한 이 야기를 들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나에 대해 어떠한 횃불잡이

109

부분에서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저기, 혹시 보고서 쓴 학생인가요?”

노예는 교수가 곁을 떠나자마자 나에게 차분한 목소

리로 물었다.

“아, 네. 맞습니다. 교수님께 이야기 들으셨나 보네요.”

“나이 드신 분들이 다 그렇죠.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

말하시는 걸 너무 좋아하셔서요.” “그런가요?”

그 여성 노예는 포대기에 감싸져 있는 물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품에 있는 건 저 주세요. 제가 밖에 가져다 놓을게요.”

“아니에요. 제가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서요. 그

나저나 노예에게 존칭이라니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여성 노예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나에게 말했다.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예? 아, 예. 해도 됩니다.”

“저는 평범함에서 먼 사람인가요?”

확실히 이 노예는 늙은 교수에게 나와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를 들은 것이 틀림없다. 여성 노예는 무심한 눈

빛을 한 채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무심한 눈빛 속에 서는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듯, 나에게 바라는 답이

나오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런 눈빛에 나는 굳어 버렸다.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이 노예가 나에게서 원하는 답이 무

엇일까. 이 생각이 내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 속에서 송곳 처럼 튀어나온 생각이 내 뇌를 거치지 않고 입을 통해 튀 어나왔다.

110

김동현

소설

“저와 다르긴 하지만, 글쎄요. 평범하다고 느끼는데요?”

여성 노예는 내 대답을 듣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

다. 드디어 찾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누구보다 행복해하 는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품속의 보자기에서 헌책을 꺼 내 나에게 주었다.

‘Das Kapital’

“이건 뭐죠? 책인가요?”

“네, 역사 속에서 이름이 사라진 인물이 적은 미완성

된 책이죠.”

“이걸 왜 저에게 주시는 거죠?”

“음, 이 책을 완성해 주었으면 해서요.”

“제가요? 전 일개 학생이고 이 책에 무슨 내용이 있는

지도 모르는데요. 거기다가 제가 왜 그 일을 해야 하죠?”

“저 교수의 다름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싶지 않나요?”

나는 노예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노예의 말이 마음

의 그릇에 깊게 가라앉아 있던 감정을 건드렸고, 그 감정 은 내가 노예에게 순간적으로 반응하게 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이야기 전해 들었다고. 저였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맞는 것 같군요.”

여성 노예는 나를 향한 웃음을 잃지 않고 가벼운 말

투로 말했다.

“그게 이 책을 완성해야 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죠?”

나는 내가 당황했다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가시 돋친

말투를 노예에게 던졌다. 그러나 그 노예는 어떠한 변화도 없이 나를 향해 계속해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이 책은 당신과 같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횃불잡이

111

쓴 책이거든요.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유일한 소통 방 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라고요?”

“네, 아주 놀랍게도. 약 200년 전에 이런 상황을 걱정

했던 한 인물이 있었어요. 비록 지금은 잊혔지만.”

“당시 상황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도 탄

압받고 홀로 쓸쓸히 죽어 갔죠. 후대에 다른 이들의 도움 을 받아 자신이 시작한 이 혁명을 꽃피게 해 줄 사람을 위 해 이 책을 남기면서.”

노예는 헌책의 표지를 쓰다듬으며 당시 작가의 마음

을 회상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 책을 완성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여성 노예는 책과 함께 보자기 안에 있던 작은 생명

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얼마 전까지 평범한 가정의 아내였어요. 남편

의 수입도 충분해서 남들 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죠. 심지어 작은 생명도 저희에게 찾아와서 얼마나 행복했는 지 몰라요.”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듯이 허공을 쳐다보며 말을 이

었다.

“남편은 가정과 직장에 관한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죠.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남편은

가정에 더욱 신경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저

녁, 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에는 볼 수 없었 던 굴을 발견했어요.”

“굴이요? 땅굴 말하시는 건가요?”

112

김동현

소설

“네, 땅굴이요. 딱 사람 한 명이 기어갈 수 있을 정도

로 작은 굴이었어요. 그리고 그 굴속에서 작은 아이가 기 어 나왔어요.”

그녀는 차갑고 공허한 이 방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녀는 지금 포대기를 하고 땅굴에서 나오고 있는 작은 아 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놀랍다는 표정 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내려 다보고 있었다.

“전 아이를 보고 신고하려고 했어요. 목줄이 있었거

든요, 아이의 목에. 핸드폰을 찾으려고 고개를 내렸는데,

포대기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던 내 아기와 눈이 마주친 거 예요.”

그녀는 보자기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아이에게 웃음

을 지어 보였다. 어머니가 지으시는 그 웃음이었다. 포근

한 웃음. 그 미소는 나에게도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 는 단서를 주었다.

“그때, 제 아기가 얼마나 이쁜 웃음을 지어 주던지,

그 웃음 속에서 저 아이의 신고를 막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저는 이상함을 느꼈어요. 내 아이와 저 아이의

다름과 같음은 뭘까? 이 질문은 세상의 어느 부분이 뒤틀 려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작은 아이로부터 시작된 제 의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져만 갔고, 같고 다른 부분에 국한되었던

시각이 점점 넓어져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점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보자기 속 아기가 칭얼거리자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 횃불잡이

113

고 잠깐 보자기를 좌우로 흔들어 주었다. 칭얼거림의 주인

공은 좌우로 흔들리는 안정적인 리듬에 편안함을 느꼈는

지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며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런 아기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의구심이 커지던 저녁, 남편이 집에 잠깐 들고 왔던

증거 물품들을 가져다 달라고 하더군요. 그 증거 물품 중 이 책이 들어 있었고, 홀린 듯이 이 책을 펼쳐 읽어 보았어

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독일어를 공부했어서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거든요.”

나는 이때 정체불명의 제목이 독일어라는 것을 깨달

았다. 이 책이 어떤 이유로 증거 물품이 되었는지는 모르

겠지만, 왠지 이 책이 꺼려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는 많은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부르주

아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같은 단어들 말이에요. 이 책

을 읽고 저는 용기를 내기로 했어요. 그날 이후로 저는 하 루에 한 번 땅굴에 찾아가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도 와주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말하면서 열망을 담은 눈빛이 되었다. 그때 당

시에도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후엔 어떻게 되었나요? 설마….”

“누군가 제가 하는 일을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한 거

죠. 이 작은 아기도 저와 함께 있었단 이유로 저와 같은 신 세가 된 것이고요.”

그녀는 힘겹게 웃으며 아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114

김동현

소설

담긴 의미를 이번에는 읽어 낼 수 없었다. 나는 그녀 마음

의 그릇이 얼마나 넓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과거사를

말하며 감정에 휘둘리는 그러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마

음의 그릇이 넓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문 득 그녀를 바라보며 들었다.

“제 첫 번째 혁명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어요. 실패

한 혁명의 대가는 크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의 또 다른 면 을 보고, 계급이 하락하는 것까지 견뎌 내기 힘들 정도로

요.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책을 완성할 생각도 못 했 고, 할 수도 없었죠.”

“그때의 일은 후회하지 않으세요?”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겨난 궁금증을 툭 내뱉었다.

“혁명에는 피가 꼭 동반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

피가 헛되지만은 않네요.”

그녀는 나를 향해 웃으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제가 들고 있는 이 횃불을 당신에게 넘겨주려

고 피를 흘린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마음속 어딘가가 뜨겁게 달궈

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복받치는 느낌은 그녀가 내미는 횃불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내 두 손에 들려 있는 이 헌책 을 나는 겉옷 속에 넣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흰 벽에 숨겨져 있던 문이

열리며 늙은 교수가 들어왔다.

“이만 나오게. 오늘은 이쯤이면 충분한 것 같군.”

횃불잡이

115

늙은 교수는 한심한 눈초리로 나와 노예를 쳐다보았

다. 그의 눈빛을 보고 있던 나는 순간 욱하는 감정을 마음

의 그릇에 담지 못했다. 마음의 그릇에 담기지 못한 감정 이 나타나는 과정은 순식간이었다. “저, 교수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그럼. 제가 드린 것 꼭 봐주

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나의 말을 끊으며 늙은 교수의 의견에 동의한

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녀가 나의 실수를 막아 준 것을

뒤늦게나마 눈치챘다. 그녀는 내 겉옷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느끼며 조용히 교수를 향해 걸어갔다. 교

수는 그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선 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늙은 교수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유리를 통해 내가

있었던 공간을 볼 수 있었다. 밖에서 본 그 공간은 이제 차

갑기만 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 공간의 가운데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는 큰 불빛과 작은 불빛이 환하게 그 공간을 비 추고 있는 듯했다.

“이제 다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달았나? 그들

이 얼마나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 사상을 가진 책 임으로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말이야.”

“교수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저 사상에 어

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저 사상을 가지기만 해도 저렇게 인생을 망친다는

사실을 알고도 말인가? 자네는 자신의 인생이 아깝지도 않은가?”

116

김동현

소설

교수는 내 보고서를 다시 훑어보더니, 이내 답답하다

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번 한 번으로 자네가 바뀐다면, 진작에 내가

바뀌라고 했을 때 바뀌었겠지. 알겠네. 그럼 내가 실험하 기 전까지는 저 노예 관리를 자네에게 맡기겠네.”

늙은 교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눈

빛에 담긴 감정을 순식간에 지우고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나는 처음으로 이 교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나를

한심하게 쳐다본 그 눈빛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예측하기 힘들지만 내일 다시 그녀를

만나 나의 세상을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마음의 그릇이 가벼워짐을 느끼며 나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내 품에 있는 헌책은 내 몸에 맞춰 앞뒤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2022년 5월 14일 오전 10시 36분. 제명길 교수 개인

실험실.

2022년 5월 25일 10시. 제명길 개인 실험실.

2022년 5월 29일 오전. 개인 실험실.

2022년 5월 30일. 실험실. .

횃불잡이

117

. .

2022년 5월 31일. 실험실.

처음으로 그녀를 만나고 나서 수많은 시간이 지나갔

다. 우리는 긴 시간 동안 서로의 다른 세상을 공유했다. 책

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비방하기도 하고, 반박하기 위해

칼을 갈기도 했으며, 서로의 의견이 맞아 기뻐하는 순간 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이해

해 갔다. 어느 정도 친밀감이 형성되자 그녀는 나에게 작 은 생명을 소개했다.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보자기 속에 는 40cm 정도 되는 평균보다 살짝 작은 아이가 있었다.

아직 어려 말은 할 수 없지만, 웃는 모습이 예쁜 귀여운 아 기였다. 이런 아기와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나와 는 다르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녀가

준 책을 읽을 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졌다.

내가 이 책을 다 읽어 갔을 무렵,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혁명

을 위한 준비가 끝났음을, 책의 뒷부분을 채울 수 있다고 직감했다.

오늘 나는 8시쯤에 일어났다. 그녀에게 준비가 끝났

다는 말을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나는 빨리 준비를 마치고 향수를 골랐다. ‘blue ocean’

“오늘은 청아한 느낌의 향수로 가야겠다.”

이제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노예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

다. 그녀와 만날 때는 동등한 한 사람을 만나듯이 향수 하 118

김동현

소설

나하나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9시 30분, 이제 그녀를 만

나러 출발할 시간이다. 내가 실험실에 도착했을 때는 10 시 10분쯤이었다.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자 지겹도록 본 흰 콘크리트가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약간 격양된 모습으로

그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방은 평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띄고 있었다. 가운을 입고 있는 늙은 교 수, 그는 통유리를 통해 방 안쪽 상황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무언가 분위기가 다르다. “자네 왔구만.”

늙은 교수는 나를 보고선 약간 무심한 얼굴로 나에

게 말했다.

“자네에게 다름의 위험성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

을 주었다고 생각하네.”

“교수님, 저에게는 아직 다름을 느낄 시간이 더 필요

합니다.”

나는 항상 교수에게 말했듯이 그녀와의 만남을 위해

거짓을 말했다.

“자네는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내가 저 노예의 꿍꿍

이를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갑자기 마음의 그릇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

하지 못하고 늙은 교수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다름을 느끼기는커녕, 다름에 빠져들어 가서 세상의

기준을 흩트려 놓으려고 하고 있어! 자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내가 직접 다름이 어떻게 사용되고 버려 지는지 보여 주겠네.” 횃불잡이

119

나는 늙은 교수의 말을 듣고 몸이 결박되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가 나를 밧줄로 묶어 놓은 것처럼 답답함

이 내 몸을 지배했다. 이런 상황에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 다는 듯이 늙은 교수는 자신의 옆에 있던 붉은 버튼을 눌

렀다. 그 버튼은 어쩌면 내 마음의 그릇을 박살 내는 장치 였을지도 모르겠다.

늙은 교수가 버튼을 누르고 나서 처음에는 다른 점이

나타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방 안에 있던 그녀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

섰다. 그녀가 일어서자 나는 그제야 바닥이 왜 철판으로 이뤄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일어나고 나서 아주 작은 움직임을 취했다. 발

을 천천히 굴렸다. 아주 천천히, 그러다 조금씩, 조금씩 발

을 굴리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매캐한 냄새가 그 속도에 맞춰 점점 심해져 갔다. 곧이어 그녀는 하나의 괴 이한 춤을 추는 듯했다.

온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두 발을 굴리며 뛰는 자세로

서서 춤을 춘다. 춤이 빨라진다. 막 빨라진다. 온몸을 휘

두르며, 보자기와 온몸을 뒤틀면서 춤을 춘다. 더, 더, 더,

더, 더, 더, 입술이 움직이고 성대가 비명을 지른다. 더더 더더더더더, 춤이 빨라진다. 곧이어 클라이막스가 올 것처 럼. 오페라를 하며, 탱고를 춘다. 허공을 붙잡으며 소리 지

른다. 비명 지른다. 공허다. 그 공허한 공간이 드디어 그녀

를 선택의 순간으로 몰아넣는다. 참는다. 참는다. 꾹 참는 다. 버티자. 제발 버티자.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러다, 120

김동현

소설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힘을 주고 있던 팔에 힘을

천천히 풀어냈다.

보자기는 아래로, 또 아래로 떨어졌다.

우리는 마주 보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살가죽이 뜯어져 나간 발을 움직여 보자기 위로 그 위로

올라섰다.

다른 소리가 울린다.

짓이겨진다.

빨갛고 검어진다.

소리가 멎어졌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 . .

그 후 시간이 지났다. 마음의 그릇 두 개가 무너져 내

렸다. 두 생명이 끝을 맞이했다. 늙은 교수는 나에게 말했 횃불잡이

121

다. 모성애와 생존 본능의 가치를 저울질할 수 있던 최고

의 실험이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내 마음의 그릇은 무너져

있었다. 그녀는 실험이 끝난 뒤에 아직 식지 않은 철판으 로 몸을 던졌다.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가 흘리 는 눈물은 검은 자국을 남기며 순식간에 증발했다. 늙은

교수는 만족한 듯 보였다. 그는 한쪽에 설치해 둔 카메라 를 챙겨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나에게 뒷정리를 부

탁하며. 철판이 식고 문이 열렸다. 고기 탄 냄새가 진동하 는 그 공간에 나는 두꺼운 가죽 신발을 신고 철판에 올라

섰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옷과 머리가 타 버려 보이는 그 녀의 목덜미에는 코드가 적혀 있었다.

‘L-F900423+1’

그녀의 검은 몸 앞에서 내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이제, 검은 눈물 자국은 생기지 않았다.

2027년 6월 30일 23시. 취조실.

“그 후로 저는 한동안 집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어요.

세상이 어지간히 무서워야지.”

나는 그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앉아 얼굴을 구기고

있는 늙어 버린 형사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난 정의를 수호했을 뿐

이야.”

형사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부서져 버린 마음의 그릇을 고치는 일을 치워두

고 피를 흘린 일을 이어 나가기로 결심했어요. 한 4년 전에.”

“그 후로 전 L-F900423+1과 관련된 모든 일을 조사

122

김동현

소설

했어요. 물론 이 헌책을 완성하는 일도 병행하면서.” 나는 품에 두 손을 넣고 헌책을 꺼냈다.

“드디어 주인 분께 돌려 드리네요. 받으세요. 부족한

부분은 제가 채워 넣었어요.”

나는 형사의 손에 묶여 있는 두 손으로 억지로 헌책

을 쥐여 주었다.

늙은 형사는 손을 떨었다. 이전보다 더 심하게 떨었

다. 만지면 안 될 것을 만진 것처럼,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처럼 온몸을 떨었다.

“난, 난 옳은 일을 한 거야. 난 세상을 위해 희생한 사

람이라고.”

형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형사도 나를 쳐다보았

다. 내 눈동자는 그녀의 따스함을 담지 못했나 보다. 그는 내 눈을 보더니 대뜸 헌책을 나에게 던졌다.

“그년이 잘못한 거야! 난 어쩔 수 없었어! 왜 이 책을

읽어서! 죽어서도 나를 힘들게 해! 잘해 줬으면 됐잖아! 누 구보다 신경 써 줬으면 내게 이러면 안 되지!”

나는 형사를 바라보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

왔다.

“하하하, 그래서 당신이 신고했어요?” “…뭐?”

“당신이 당신 손으로! 당신의 아내와 아기를 신고했

잖아요! 당신이! 그깟 자리와 계급을 지키겠다고! 부르주 아들에게 횃불잡이를 갖다 바쳤잖아요!”

“아니야! 나는 아내가 아니라 사회 부적응자를 신고

한 거야! 난 틀리지 않았어!” 횃불잡이

123

늙은 형사는 빨개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만약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넌! 넌 나보다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어!”

늙은 형사는 노트북에 사진을 띄워 나에게 보여 주었다.

“서울, 베이징, 도쿄, 베를린, 워싱턴D.C. 모든 나라

의 수도에서 네가 일으킨 반란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줄 알아! 왜 혁명에는 피가 필요해서 그랬나?”

형사는 과거의 무게를 피하려고 나의 혁명 내용을 꺼

냈다.

“후, 피를 흘리게 된 건, 아파요. 누구보다도 내가 괴

로워요. 늘 괴롭고 고통스러워요.”

나는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임을 피하지 않을 거예요.”

“하, 성인군자 납셨네. 그래서 세상이 바뀌었나? 네가

만든 대통령 공석, 같은 정권이 다시 잡았어. 노예 제도는 변함없이 존재하고, 아직도 사회는 부자들이 지배하고 있 어. 이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나 있나?”

늙은 형사는 나를 공격적으로 밀어붙였다. 취조실에

서 늙은 형사는 상대해 왔던 사람들이 하던 자기 보호를

자신이 하는 상황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 형사를 앞에 둔 나는 그녀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세상 탓, 남 탓을 하는 그의 태도가 상당히 거슬렸다.

“맞아요. 결국 저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어요. 대신,

전 세상 속 사람을 바꿨어요. 사람들이 살아 가면서 가질 신념과 기준을, 저는 바꿨어요. 그거 아세요? 이 혁명은

200년 전부터 시작되었어요. 이름 모를 한 명의 철학자가 124

김동현

소설

후대를 위해 이를 갈며 준비했어요. 그런 혁명은 여러 횃

불잡이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다 제 손에서 꽃을 피운 것

뿐이에요. 정권이 바뀌지 않았다고요? 대신 저는 사람들 이 거리에 나와 노예들의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게 이끌어 냈어요. 노예 제도가 유지되더라도, 힘이 약하면 뭉쳐서 목소리를 내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어요. 세상

은 부자들이 지배하죠. 그래도 프롤레타리아들이 언젠가 는 뚫을 수 있는 부자들 사이의 구멍을, 저는 만들었어요. 당신들의 세대는 우리에게 말했잖아요. 축복받은 세대라 고, 물질적인 부분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는데 세상에 바 라는 게 많다고.”

나는 늙은 형사의 눈을 직시했다. 어쩌면 형사를 보

고 있는 게 아닌, 그 세대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당신들이 놓친 정신적인 부분을 챙기고 있을

뿐이에요. 당신들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간 것 들, 우리는 그 부분에서 분노하고 화내고 있는 거예요.”

나는 늙은 형사를 쳐다보다가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

는 언제 피를 흘린 걸까. 남편에게 배신당했을 때, 아니면

내가 보는 앞에서 꽃이 지는 것처럼 무너져 갈 때. 확실하

지는 않지만 나는 그녀가 흘린 피를, 그전의 횃불잡이들 이 흘려온 피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 피가 헛되지 않 았음을 느끼며, 왠지 그때 그 미소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횃불잡이

125

김현채

시에스타 우리 차도에 눕자

한 뼘 인도에 발을 담가도

붉게 부푼 숨이 가라앉지 않잖아 순백 우산을 노란 실선에 꽂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귀가 먹먹한 게 꼭,

물 냄새 나는 입으로 살라고 말하던 여행객

수박 하나 먹어도 되냐는 가벼운 부탁이었다던데

그 사람, 날이 더워지면 다시 계곡에 놀러 올지도 몰라 실(失)없이 햇볕을 쬐는 거야

습기 없는 농담에는 섣부른 애정도 증오도 없어 얼룩덜룩 타버린 숨이 사랑스러울 때까지 한 뼘도 다가가지 않고 잠을 자는 우리

128

김현채

시

꽃이 푹 익었다 끓는 물에 장미꽃을 데쳤어 향이 설익은 것 같아서

꽃은 얼마나 익혀야 벅찬 향이 나는지 너는 알 텐데 여린 이가 빠진 것도 잊은 채 네가 웃는다면, 네 덕에 궁금한 걸 참아내는 법을 배웠어 어엿한 어른이야

달걀 프라이를 쪼개 먹던 네가

초여름 풀을 집에 들였냐며 묻는데

나는, 허리가 이상하게 굽은 식물을 우연인 척 화병에 넣었어 잘 익은 꽃이야

곧 있으면 제철이 다가온대

꽃이 푹 익었다

129

바다평과 내가 처음 당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당신은 땅을 치며 울었어 내 사과는

투명한 바다로 씻은 말쑥한 소년 같았는데 우리의 상고(上古)적에 붉은 열음은

사랑하는 이의 아득한 작별이었다고 첫인사는 배 두 척의 엇갈림이고

청새치는 나이 먹지 않은 사람 손에서 자라 마지막 철자는 사과

나는 언어를 일부러 잃고

당신과 가루처럼 가벼워진 과일을 그물 바다에 던지고

나의 이름을 가르쳐 줘

130

김현채

시

송승준

바리캉

들들들 바리캉의 진동이 뇌리에 찍혀 들어갔다. 등골

을 타고 복숭아뼈까지 수직 강하 한 그 내밀한 진동에 순 간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친

구들이 낄낄대는 소리와 머리카락이 바닥에 나뒹구는 걸

본 후에야 비로소 내가 머리를 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다 미는 건 안 미는 것만 못하지 않을까?”

삭발이 두려웠다. 외마디의 질문은 회전 초밥집 컨테

이너 벨트 위의 아무도 손대지 않아 차게 식어버린 계란말 이같이 이발소 안을 빙글빙글 겉돌았다. 친구 놈들은 허 공만 바라보며 허투루 웃고 있었다. “얘는 두상이 안 예뻐.”

내 머리를 잡고 있는 이발사가 정적을 깼다. 직업 정신

이 투철한 이발소 아주머니는 단호히 확언했다. “삭발하면 안 돼. 12mm로 해.”

나나 병철이나 동욱이의 의사는 고려하지 않은 일방 134

송승준

소설

적인 명령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감사한 명령이었다. 친구

놈들은 약간 고심하는 표정이다. 저들끼리 쑥덕댄다. 내 머리의 미래를 결정한 그녀였다.

“그럼요. 전문가 누님. 누님 느낌가는 대로 밀어주이

소. 한두 번 밀어본 게 아니잖습니까예.”

병철이가 너스레를 떤다. 그녀는 자기 조카뻘인 병철

이에게 들은 누님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활짝 입 꼬리를 올리며 내 머리를 민다.

춥다. 거울 속의 내가 낯설다. 삭발 후 주위에 사람들

없이 출입구 거울에서 혼자서 마주한 나다. 다른 사람이

내 옷을 입고 있다. 이목구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는

내가 알던 나보다 훨씬 더 투박하게 생겼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담배 냄새가 득달같이 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메웠

다. 열려있는 복도 창과 아직 남아있는 익숙한 냄새에 아 빠가 집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을 열자 내부 현관문이 열려있다. 나사가 헐거워졌는지 신경 써서 닫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닫히지 않는다. 현관

문이 그 꼴이 된 지도 몇 개월인데 아무도 손댈 생각을 하

지 않고 있다. 문에 붙여 놓았던 크리스마스 장식은 26일 이 되자마자 곧장 떼어 버린 우리 가족이 말이다. 가끔 집

안까지 담배 내가 들어오면 그 때문에 적막하던 집이 소란

스러워지기도 했다. 덜 닫힌 문을 고쳐 닫으며 들어간다. 가지런히 벗어놓은 구두에서 광이 난다. 때 묻고 편하기만 한 내 운동화가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보인다. 무엇에 질려

압도되는 내가 안쓰럽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아버지와 눈이 바리캉

135

마주쳤다. 차라리 머리가 그게 뭐냐고 비웃었으면 좋았으

련만 아버지는 그냥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감정이 결여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는 날 본체만체 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내 방 문고리를 열었다. 흐트러진 이불 위에 몸을 뉘

며 널브러졌다. TV 뉴스 소리가 내 방까지 흘러들었다. 안 방엔 아빠만 있는가 보았다. 뉴스 소리가 거슬린다. 이불

을 뒤집어쓴다. 정전기는 이제 일어나지 않았다. 이불 밖에

는 뉴스 소리가 아직 들린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얼굴

의 힘을 풀었더니 눈앞이 먹먹하니 붉고 푸르게 얼룩얼룩

했다. 이불에 가려지지 못한 발을 안으로 오그리며 끌어모 았다. 눈꺼풀 밖으로 따뜻한 것이 희미하게 흘러내렸다.

따스함이 느껴진다. 배가 출렁출렁 움직이더니 몽롱

했던 정신의 초점이 맞추어진다. 엄마가 나를 깨우고 있었 다. 배 위의 손이 어째 거칠다. 꽤 오랜만에 본 엄마의 눈 주위는 약간 더 주름져져 있었다. 머리에 대한 언급이 첫

번째였다. 무슨 결심인지는 몰라도 공부는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 투의 말이었다. 대타로 일 간다고 말하는 엄마에 게 아빠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지금쯤 병원에 가 있지 않

겠냐는 말은 무덤덤했다. 현관문 닫히는 신묘한 기계음이 집안에 휑하니 울렸다. 손으로 부스스해졌을 머리를 잡으

려 했다. 없었다. 잡히는 머리도 없었고 부모님도 집에 없 었다. 배가 고팠다. 냉장고를 열었다. 복잡한 냄새들의 섞

임이 나와 마주했다. 밥을 하고 찬을 꺼내 먹을 마음이 사 라졌다. 배는 고팠다. 라면이나 먹을까 하여 선반을 열었 136

송승준

소설

다 가슴이 찡해졌다. 집에는 라면도 없었다. 가을도 아닌

데 하늘이 광활한지 벌써 해가 높이 떠 부식거리 하나 없 는 찬장 안에 번득번득 드리워져 내 아픈 가슴을 밝혔다. 장을 보아야겠다. 장을 본다고 하고 대형 슈퍼마켓에 가

서 패키지로, 뭉텅이로, 한 봉지 가득 들고 올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밖에 나간다는 생각에 머리를 감았다. 머리

를 감았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금세 다 말라버 렸다. 새끼 고슴도치의 보송함이랄까. 그래도 뭔가 허했

다. 핸드폰이 침대 위에 있었는지 발발거리는 진동음이 부

드럽게 집 안에 퍼졌다. 어딘가에 놓아두었던 전화기는 항 상 뒤집힌 채 울렸다.

처음 듣는 노래였다. 마트에서는 빠른 비트에 최신곡

이 흘러나왔다. 시장이나 가게보다 마트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처럼 의미 없이 읊조리는 가사들이 다분하다. 라면

이라는 것은 새로운 도전의 대상으로 고르기에 부담 없는 대상이다. 눈 가는 곳마다 광고했던 먹고 싶었던 라면을

낱개로 두 개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묶음 포장 되어있는

평소 먹던 라면을 버릇처럼 집어서 ‘툭’ 장바구니에 담는 다. 계란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누군가에게 찍혀지기를 기 다리며 식어가는 시식코너의 닭갈비 굽는 냄새가 다가왔 다. 혼자 왔기에 쉽게 다가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복은

예상치 않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법, 사지 않을 것을 다짐

하면서 초록색 이쑤시개를 하나 들었다. 오늘 입에 들어 간 첫 음식물에 침샘이 한껏 흥분해 양 볼에 고인다. 눈을 마주친 닭갈비 굽는 아주머니는 내가 탐탁지 않아 보이는 바리캉

137

표정이다. 내가 사지 않을 것을 그녀도 아는가 보았다.

굵직한 얼음들이 뿜는 냉기와 여러 종류의 생선 비린

내를 뚫고 수많은 계란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코너에 도

착했다. 각기 다른 포장지를 덮고 있었지만 사실상 각각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르스름한 포장지의 계란을

집었다. 10개가 들어 있다. 유정란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

게 적혀있다. 순간 머릿속에 수탉과 암탉이 포개어져 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괜스레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조심스 레 내려놓고 초록색의 또 다른 계란 뭉치를 집는다. 이것

또한 유정란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슨 풀을 먹고 자란 닭이 낳은 계란이란다. 다시 내려놓고 가격을 살핀다. 달

걀들 주제에 천차만별 다들 제각각이다. 가만히 계란들을

바라본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무엇을 먹고 자신을 낳았 는지에 따라 가격이 매겨진 것들이 담긴 외형상 똑같아 보 이는 녀석들, 그중에 같은 부모를 둔 형제와 함께 포장된

것은 몇 개나 될까. 지글지글 구워지는 계란 프라이의 형 상이 뇌리에 들어서면서 난 그만 피식 웃고 만다.

진열대 가장 하단부의 계란 한 판을 생각하면 떠오

르는 승복 색의 판에 분홍빛 플라스틱으로 덮인 한 판의 계란이 눈에 들어왔다. 따로 무언가를 내세우며 구매를

촉구하며 발악하는 포장지와 달리 정말 간단한 포장이었 다. 심지어 가격도 쌌다. 잡다한 수식 없이 정감 가는 갓

공장에서 나온 것 같은 그 한 판은 장바구니에 들어가기 에는 너무 컸다. 마트에 울리는 노래는 곡과 곡 사이의 공 백 없이 이어졌다.

138

송승준

소설

체조 선수들이 평균대에서 넘어지는 것은 실수를 범

해서가 아니다. 균형을 잃었다는 건 실수라기보다는 자기 확신이 흔들렸거나 깨졌다는 걸 의미한다. 사이코패스는

실수하지 않는 부류이다. 행동에 확신이 차 있는 사이코패 스는 그래서 무섭다. 지금 나는 두렵다. 계란판 위에 라면 위의 대파 한 뿌리와 매끈한 감자칩 한 봉지가 눈이 덜 녹

아 질척대는 인도로 떨어질까 두렵다. 혹시나 신발이 발칵 젖어 버릴까 사뿐사뿐 걸어왔던 길을 더 느릿느릿해진 발

걸음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타닥타닥 들리는 발소리에 미 끄러질까 떨렸다. 이대로 몇 발짝 더 걷거든 정말 고꾸라

져 버릴 것만 같아 숨을 깊게 들이쉬며 멈추어 섰다. 바닥 만 보고 걸어오다 돌아본 길은 한적하고 덤덤했다.

차도 저편에 한쪽 모퉁이가 출입문에서 떼어져 파르

르 떨어대는 현수막이 눈길을 끌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자주 갔던 설렁탕집이었다. 3대째 내려왔다는 게 사실인 지 확인할 길 없는 전통을 자랑스레 내다 걸은 집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횡단보도를 건너가 보았다. 현수막 에 쓰여 있는 내용인즉슨 미성년자인지 모르고 학생들에

게 술을 팔았다는 명목으로 영업정지를 당해서 사과의 말 씀을 손님들께 올린다는 것이었다. 테이블 위로 의자가 뒤

집혀 올려져 있었다. 학생으로 믿어지지 않았을 외형의 학 생들, 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내가 교내 복

도에서 마주하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영업정지 당한 그 음식점 안에서는 생기 없는 한기가 흘러나온다. 자질구레

한 쓰레기가 밝혀지지 않은 채 폐가 같은 분위기를 한껏 살려 주는 커다란 “24시” 네온사인 밑에서 너저분하게 나 바리캉

139

뒹군다. 쾌활하게 손님을 맞던 사장님의 웃음소리와 계산

대 뚝배기 속 박하사탕이 떠올랐다. 늦겨울 눈이 내 신발, 양말까지 스며드는 감각에 화들짝 다리 한 짝을 들어버렸 다. 대파가 떨어져 질척대는 눈 위에 뿌리를 곧게 박았다.

문 저편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안다고 할지라도

초인종 소리가 울리면 꿈쩍 놀라기 마련이다. 아리따운 여

자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소스라치게 설렘을 느꼈 을 한적한 일요일 오전이다. 익숙한 냄새와 함께 우리 집

안으로 걸어들어온 건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1.5L짜리 콜 라 한 병을 든 병철이었다. 허우대 멀쩡한 녀석이 입고 있

는 파란 상의에 빨간 하의는 초등학교 때나 만져보았던 기

다란 막대자석을 연상시켰다. 안녕이라든가 하는 시답지 않은 인사말로 정적을 깨려는 찰나에 그보다 한 발짝 빠르 게 병철이는 특유의 웃음소리로 내 말끔한 머리를 반겼다. “니네 집 오랜만이다.”

병철이는 콜라를 식탁 위에 올려두더니 어슬렁어슬

렁 집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자연스

러운 공간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나 와 나이를 견주어 볼 만한 가구들이었다. 무슨 미술관 돌

아보듯 찬찬히 바라보는 뒷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부

엌으로 가서 황금빛 양은 냄비를 찾아들었다. 2인분을 끓 인다고 해서 1인분 넣을 물의 양에 두 배를 부으면 안 된

다. 가스 냄새에 코가 순간 시큰하다. 파랗게 발발대는 가 스 불에 냄비를 올렸다. 병철이가 나를 불렀다. “요새 찍은 건 없어?”

140

송승준

소설

무슨 말인지 싶어 다가가니 병철이가 보는 것은 가족

사진이었다. 요새는 찍지 않았다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연례행사인 양 찍던 가족사진도 그 일 이후로 끊

어진 것 같다. 가족사진 속 나는 환히 웃고 있다. 내 좌우

의 사람도 환히 웃고 있다. 그 웃음을 마주한 지 너무나 오 랜만이어서인지 낯설다.

“어머니 일 안 하지 않으셨나?”

병철이가 느닷없이 아픈 데를 족집게처럼 짚고 나왔다. “요새는 하셔.”

내 답변의 목소리가 어두웠는지 병철이는 고개를 살

짝 돌려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전에 계란빵 해주실 때 진짜 맛있었는데….”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 못한다. 식당 일 나간다는 말

을 듣고는 당연히 서빙 일을 하겠거니 생각했을 정도로 못 한다.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계란빵이었다. “계란빵 해줄까?”

“물 끓는다. 스프 넣어.”

듣고 보니 부엌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

다. 스프를 넣자 거품이 보스스 일어났다. 후 불어 가라앉 혀 본다. 면을 조각내서 넣을지 그냥 넣을지는 항상 고민

이다. 반으로 쪼개지 않고 꾹꾹 눌러 담는다. 끄트머리가

젖은 파와 차분히 배열된 계란을 봉지에서 꺼냈다. 개수대 의 물을 튼다. 찬물이 흘러나왔다. 파를 씻는다. 풀이 죽

어있던 파의 색채가 살아난다. 물 안에는 어떤 겨울의 냉 기가 서려 있다. 춥다. 수도꼭지를 닫는다. 파를 흔들어 물 기를 털어낸다. 개수대 밑을 연다. 역시 이곳에 부엌칼이 바리캉

141

꽂혀 있다. 칼을 꺼낸다. 도마 위에 파를 놓는다. 반을 자 른다. 한쪽을 다시 잡고 썰기 시작했다. 약 스무 번의 칼

질. 얄팍한 파 조각들이 도마 위에 존재한다. 부글부글 물

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칼을 놓는다. 갈기갈기 찢긴 듯 그 것은 의외로 나름의 규칙성을 갖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

무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들어 불어준다. 달걀판을 열 어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계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란 노른자가 퐁당 라면 속에 빠져들었다. 파를 쓸어 담고 노 른자를 터트렸다. 뜨겁게 끓어가는 라면 국물에 두 가지

색채는 순식간에 뒤섞여 들어갔다. 입김을 불자 적나라하 게 요동치는 표면이 드러났다. 어지러운 섞임을 가만히 보 고 있자니 어딘가 그 움직임들이 의미 있어 보였다. “이거 예쁘지 않냐?”

병철이와 빤히 눈을 마주했다. “안 예뻐.”

단호한 부정에도 그 복잡한 끓음이 조화로워 보였다.

젓가락으로 면을 건져 살피니 거의 다 익은 것 같다. 나는

혹 질서가 없는 상황을 보며 질서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 겠다.

손을 수건에 대고 문지른다. 라면은 먹고 바로 닦아야

씻기 편하다. 시답지 않은 개그 프로를 틀어 놓고 콜라를

병째로 들이켜고 있다. 별말 없이 콜라병만 오가다 병철이

는 채널을 돌려버렸다. 소파에 삐딱하게 누워 구시렁구시

렁 대부업체를 비꼬기 시작했다. 늘씬한 여성이나 아기자기 한 캐릭터가 나오지만 궁극적으로는 빚에 허덕이라고 강요 142

송승준

소설

하는 꼴 아니냐며 궁싯거린다. 가만히 그렇지, 그렇지 편을 들어주다 문득 우리 집은 빚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액수로 어림잡아 생각해 보지만 내가 유추한 금액 이 비슷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콜라병 안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몇 방울 더 느끼려 할 때 병철이가 말했다. “나는 네가 진짜로 삭발할지 몰랐다 야.”

내 뒤를 보며 미소를 띠고 있음에 틀림없는 목소리다. “나도 내가 진짜로 할지 몰랐어.”

“네가 하자고 해놓고 너 빼고 다 가위 냈을 때 진짜

웃겼어.”

가위 바위 보를 5명이 했을 때 바로 한 명을 골라낼

수 있는 확률은 현실적으로 높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 확률로 져 버렸다. 왜 삭발을 걸고 내기를 했느냐고 묻

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제안할 때 이미 본능적으 로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머리를 민다면 세상이 조 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잘못되었던 것 같다. 일 상은 평범했고 받아 놓은 욕조 물처럼 담담히 잔물결도

없었다. 어떤 일이 펑 하고 터지거나 그것을 바라보고 싶

었지만 펑 하니 터지는 것은 없었다. 두피에 식은땀이 흐 르는 차가운 감각이 서렸다. 텔레비전 속 하하 호호 웃음

소리도 유쾌하지 않았다. 히죽거리는 병철이만이 내 삭발 을 의미 있게 만들고 있었다.

턱에 난 수염 하나를 잡고 뜯어보려고 좀처럼 뜯기지

는 않았다. 까끌까끌 난 염소수염을 문질러본다. 난 이미

중학생 때부터 성인 요금을 내고 버스를 탔다. 면도를 할 바리캉

143

까. 수시로 면도를 한 지는 서너 달 정도 된 것 같다. 면도

기를 찾아 화장실을 살피지만 항상 있던 자리에도 없고 장 안에도 없었다. 에프터셰이브도 없어진 걸로 보니 아

빠가 가지고 나간 것이 분명하다. 종종 같이 사용하는 몇

안 되는 물건을 말도 없이 가져가 버리니 순간 짜증이 복

받쳐 오를 때가 있다. 편의점에 가서 일회용 면도를 사 와 야겠다. 그것으로 면도를 해본 적은 없지만 한 번 가지고

나간 면도기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다. 입맛만 다시

다 화장실을 나왔다. 병철이가 집에 돌아간 지 다섯 시간

쯤 지났을까. 엄마의 잔소리 투 목소리가 생각나 책을 펼 쳤었다. 활자들이 내 눈을 따갑게 쪼았다.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눈으로는 읽히고 있었지만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

다. 밥을 나가서 먹겠다고 다짐한 것은 책을 놓고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였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을 한 것도 아 닌데 허기는 일정한 시간대마다 찾아온다. 밥을 먹고 싶었

다. 윤기가 고슬고슬 흐르는 흰 쌀밥을 먹고 싶었다. 하루

에 한 끼는 밥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려서부터 내 안 에 뿌리박힌 관념이다. 밥통 안의 눅눅하게 식어버린 밥은 우리 집 가전제품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했고 저

녁을 밖에서 먹을 것을 추천했다. 늙은 전자레인지에서는 요새 마이크로파가 새어 나오는 것 같다. 해가 벌써 저물

어 간다. 표면이 푸석한 패딩을 걸쳐 입었다. 문고리를 잡 으면 항상 심호흡을 하게 된다. 아까보다 추워져 있을 바 깥 공간을 생각해 본다. 인기척 비슷한 알싸한 감각이 등

뒤로 느껴져 집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인사할, 내게 인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44

송승준

소설

모처럼 바람이 불지 않는 저녁이어서인지 거리에 사

람들이 평소보다 많다. 밥으로 무얼 먹을까 하고 기웃거리

며 걷는데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혼자 밥을 먹는다

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장 먹고 싶은 것은 양념이 잘 저 민 돼지갈비이지만 나 홀로 고깃집에 들어가 1인분 시키기

에는 돈도 아까울뿐더러 종업원이나 옆 테이블 시선에 견

디지 못할 것이다. 식당에서도 가족 외식들로 분주할 시간 에 달랑 1인분 시키며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나를 달갑게 받아들일 리 없다. 뜨끈한 국밥이나 먹을까 싶어졌다. 목 적지가 생기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윙윙 멀리서부터 경찰

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신호등을 마주했다. 무단횡단하 기 애매한 폭의 거리이다. 사이렌을 켜놓고 빨간불을 지키

는 경찰차와 신호등을 기다리는 대여섯 명이 있어 혼자 넘 어가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슬쩍 옆 사람을 살피다 눈을

마주쳤다. 내 허리 정도 키의 작은 여자아이였다. 잡고 있 던 엄마 다리를 꼬옥 더 잡는다. 방긋 웃어주자 아이의 얼 굴이 일그러지면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엄마 파란불.”

아이가 엄마의 치마폭을 당긴다. 엄마는 자기 치마를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쫄래쫄래 걷기 시작했 다. 초록불이 왜 파란불일까. 이상한 생각이 머리에 들어 왔다. 빨간불 반대의 의미로서 파란불이라 불리는 것일까. 푸른 초원.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두워진 하늘 에 은근한 파란색이 도드라져 보였다.

바리캉

145

시선은 나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일부러 손님이 아

무도 없는 국밥집을 찾아 들어왔건만 식당 아주머니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장사가 한창일 시간일 때 사 람이 없는 이유는 역시 맛이 없어서였다. 어지간해서는 맛

없을 수 없는 국밥이 맛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음식

점을 가도 있을 공깃밥 하나가 더더욱 달게 느껴졌다. 저 들끼리 속닥거리는 식당 사람들의 모습이 거슬렸다. 주방 사람들까지 나와서 쑥덕대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는 들리지 않았다. 꼭 우리 엄마와 같은 직종의 사람들

이다. 엄마는 무얼 하고 있을까. 혹 그 가게도 이곳처럼 장 사가 잘 안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든다. 계산하려 카운터

로 다가가 눈을 마주쳤다. 내 겉모습에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다. 거스름돈을 받고 뭉텅이로 모여 있는 사탕 바구

니에서 레몬 맛 사탕을 하나 집어 들었다. 더 어두워진 하

늘을 보다가도 식당 아주머니들의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 은 점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편의점 간판은 여타 다른 상점의 그것보다도 더 진한

빛을 뿜고 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알바는 나를 쳐다보 지도 않은 채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정형화된 복장의 알 바생은 어느 편의점에 가나 마찬가지였다. 태도가 만사 귀 찮아 보였지만 갓 교대를 했는지 아직 눈에 생기는 있다. “일회용 면도기 어디 있어요?”

알바는 나를 보고는 어딘가 살짝 당황한 듯 말을 더

듬으며 손을 들어 안쪽을 가리켰다. 멍하니 초점 없이 서 있었던 게 분명하다. 손끝은 수전증이 있는지 떨어진 거리 146

송승준

소설

에서도 보일 만큼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잡지 옆에 있을 겁니다.”

먹을거리와는 거리가 먼 잡화들이 놓여있는 진열대였

다. 생리대와 같은 사는 동안 한 번도 사볼 것 같지 않은

물건에서부터 우비나 종이컵 등 필요할 때 안 보이는 것들 이 놓여있다. 무엇을 고를까 고민할 필요도 없게 면도기는

딱 하나 남아있었다. 언제나 그럴 것이다. 달랑 하나 남아 있는 물건은 선뜻 집어 들기가 어줍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화장실 거울을 보니 삐끗 나온 염소수

염이 눈에 걸린다. 아까보다 더 유난한 것이 아무래도 내

가 의식해서일까 싶다. 그러고 보니 딱 하나 남아있던 그 면도기라도 집어 왔어야 했던 것일까 싶어 아쉬웠다. 생각 할수록 삐끗한 염소수염이 영 거슬린다. 손바닥을 댈 때

마다 까끌까끌 찔러오는 것이 여간 신경이 쓰였다. 신경이 라는 것이 그렇다. 잊은 듯이 넘어가면 잊히지만 한번 들

쑤신 후로부터는 실제보다 두세 배는 족히 부풀어 올라서 압박하기 십상이다. 새삼 아버지가 면도기를 말없이 가져

가 버린 것이 거슬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아들

이 쓰는 면도기를 슬쩍하다니. 뭔가 하나라도 더 두고 가 야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나는 속으로 끌 혀를 차 며 다시 주섬주섬 옷을 걸쳤다.

병철이라도 있었으면 아마도 둘이 깊어져 가는 밤길

을 오래 쏘다니며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혼자 였다. 엄마? 순간 떠올랐지만 이렇게 예고 없이 불쑥 찾아 바리캉

147

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끝에는 다시 염소

수염이 걸려들었다. 이제는 염소수염 이외는 아무것도 떠 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 염소수염이 난제였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다.

이제는 아버지의 부재가, 아버지와 면도기의 부재가 짜증

을 넘어서서 원망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어쩐다?’ 머 릿속을 온통 헤집고 다니는 생각은 염소수염의 처리 문제

였다. 보이는 것들마다 다 눈에 익은 것이 아마도 동네 거

리를 멀리 벗어나지 못했나 보았다. 짜증은 또 다른 짜증

을 불러왔다. 겨우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지 못하는 자신과 신호음이 가는 대도 불구하고 전화 를 씹고 있는 병철이까지 모든 것들이 나와는 상관없이 저 들 의지대로만 흐르고 있었다. ‘어쩐다?’ 다시 염소수염의

까끌까끌 찔러오는 감각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 면 버릇이라는 것이 어쩌면 기억을 따라가는 것인지도 모 를 일이었다. 친구들과의 가위바위보, 내가 꼴찌를 한 결

과와 머리를 민 일, 병철이의 방문, 화장실과 면도기의 부

재, 국밥집, 달랑 하나 남은 면도기 그리고 그다음의 기억 이 영 떠오르지 않는다. 내 기억의 무엇이 또 필요하지? 얼 핏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무엇을 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가 싶을 때 문득 눈앞에는 이발소가 있었다. 아, 그 거였다. 어쩌면 단박에 시원하게 염소수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이발소였다. “계세요?”

이발소 안은 조용했다. 손님도 없고 이발사인 아주머 148

송승준

소설

니도 없었다. 오늘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온통 다 부 재인지 싶어서 기분이 착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기분에 털

썩 의자를 재꼈다. 이발소의 의자는 거의 마법 수준이었 다. 아무리 말똥말똥한 맨정신으로 앉아도 자신도 모르게 슬금슬금 졸음이 쏟아지고 마는 신비한 마법을 가지고 있 었다. 한참 잠 속에 빠져 있는가 싶었는데 어렴풋이 무슨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나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응?”

눈앞에는 이발사 아주머니가 바리캉을 들고 있었다.

‘왜? 머리가 좀 길었나?’ 꼭 그렇게 묻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도리질을 치면서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잠결에 서 빠져나오지 못한 몸은 경직돼 있었고 그저 눈만 이리 저리 굴리기만 할 뿐이었다. 들들들 바리캉 특유의 내밀

한 진동음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의 손이 경직

을 깨트리고 뛰쳐나가서 이발사 아주머니의 바리캉 쥔 손 을 잡아당겼다. 간발의 차이로 바리캉이 염소수염을 지나 가기 시작했다. 들들들 바리캉의 진동이 뇌리에 찍혀 들 어갔다.

바리캉

149

돌아보면 화살이 박혀있다

열람실에서 나와 집에 가는 길이었다. 가방이 무거워

엘리베이터를 탔다. 열린 문 옆으로 책 한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바랜 색의 책자들이었다. 그 맨 윗편에 있는 녀석

은 나와 동갑내기인 ‘1997년 1학기 종합강의시간표’였다. 과사무실에서 보관하다 내다 버렸나 보다. 몇 가지 재미있 는 부분이 있어 소개해 본다. 경영학과 과목으로 ‘마아케

팅원론’이 개설되어 있다. 배우면 뭐든 마아니 팔 수 있을 것 같은 이름이다. 생물학과에는 새박사로 유명한 윤무부 교수님의 ‘조류학’ 강의도 열려있다. 왜인지 타 과목들과

다르게 ‘鳥類學’이란 한자 표기를 고수하고 있었다. 지금 열렸으면 무조건 들어보려 시도했을 거다. 하이라이트는

우리 과 강의였다. 화학과 과사무실에서 버린 것으로 유추 할 수 있게 우리 과 교수님 몇 분의 이름이 형광펜으로 줄

쳐져 있었다. 아직 계신 교수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었 다. P 교수님은 올해도 ‘물리화학1’ 과목을 강의하고 계시 니 그 강의가 나에게는 형뻘이나 다름없게 된다.

150

송승준

수필

시험이 끝나고 첫 수업은 으레 교수님들의 시험에 대

한 코멘트로 시작된다. 풀어보니 어땠냐고 묻는 분도 계

신다. “고개 끄덕여서 다 아는 줄 알았는데, 하나도 모르 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ㅠㅠ” 하시며 수업의 향방을 걱정

하기도 하신다. 과목마다 시험의 형식뿐 아니라 추구하는 방향도 다르기에 시험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공부하는

방식을 이리저리 틀어보며 맞춰가야 한다. 수업에서 소개 된 어떤 테크닉을 찾아보다 과학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

구나 감탄하며 깊이 알아보았는데 시험문제에는 한 세 줄 쯤으로 간략히 적으라 해서 아쉬웠다. 아미노산 20종류

를 외우라고 하셨는데 구조까지 다 그리라는 문제가 나왔 다. 과학쟁이들의 블로그를 돌다 쉽게 외우는 팁을 얻었는 데 기회가 되면 내 방법으로 개선한 버전을 블로그(네이버

에 ‘송영감댁’ 검색)에 포스팅해 보겠다. 시험지를 부검할 기회가 있던 과목은 유기화학이 유일했다. 교수님 오피스

에 찾아간 결과 추가 점수 2점과 아몬드를 얻었다. 올라간 2점보다 아몬드가 더 고소했다.

중간시험이 끝난 이후로 스케줄에 변화가 생겼다. 과

외돌이가 한 명 늘어났고 스터디 모임은 하나 줄어들었다. 평소에 공부하는 시간은 늘려볼 심산이다. 학교생활에 대

한 적응은 어느 정도 끝난 거 같다. 변동 없이 계속 빼먹지

말고 해야 할 것들도 있다. 그중 하나는 아침 챙겨 먹기이 다. 확실히 아침부터 빨빨거리고 학식을 먹으러 가면 하루 가 길어지는 느낌이 든다. 매주 수요일 부총장이나 교무처

장같이 학교에서 높으신 분들이 공짜 아침을 챙겨주는 행 사를 한다. 조금 늦으면 줄이 너무 길어져서 수요일엔 10 돌아보면 화살이 박혀있다

151

분 일찍 나가는 게 좋다는 경험치가 생겼다. 매일 커피를

마시는 ‘늘품’과 ‘이문동커피집’보다도 더 마음에 드는 곳 을 찾았다. 일주일에 세 번은 더 방문하는 거 같은데 이곳

은 카페인가 약국인가. 카페인 포션을 제공하면서 공간 또 한 무척 예쁘다. 심지어 컵케이크와 바스크 치즈케이크도 직접 만드는 데 정말 맛있다. 11시쯤이면 갓 구워내 열기 를 날린 컵케이크를 맛볼 수 있는데 근처라면 꼭 가보기 바란다. 네이버에 ‘유유에스프레소’를 검색해 보자.

시험이 끝나고 5일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셨다. 한동

안은 술을 자제해 볼까라는 생각을 하지만 내일 일어날 일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1997년의 P 교수님은 2023년에

‘물리화학1’ 수업을 할 것을 알고 계셨을까. 나중에 뵈면 여쭈어봐야겠다. 동아리방에서 사촌동생을 데리고 서울

어딜 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을 때 건너편에 앉은 눈이

땡그란 친구가 물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산다고 생각해? 아니 무슨 그런 걸 술도 한 잔 걸치지 않고 묻다니! 의아하 였으나 추억이라고 답했던 다른 녀석의 대답을 곱씹어 본 다. 오늘의 일상도 몇 년 후에는 추억으로 남겠지. 2049년

에 이 글을 읽으면 26년 전의 난 레몬 에클레어를 베어 물 며 오픈 랩 행사를 가기 전 새로 세팅을 마친 노트북을 두

들기고 있었지 하고 추억에 잠기리라. 과방에서 실험수업 보고서를 쓰겠다 선언하고 동방에 와선 고양이처럼 널브 러지곤 한다. 무엇을 하리라 내뱉는 선언의 화살들이 솟구

쳐 날아가다 툭툭 빗나가도 어딘가에는 분명 떨어져 박혀

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당신이 뒤돌아볼 그날을 기다리 며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박혀있다.

152

송승준

수필

조로(早老) 비 한 줌이 간절하던 날에 비집고 나온 아이에게는

개미가 되어 떼 중의 하나로 어느 벌레를 물어뜯는 꿈이 생의 첫 꿈이었다 하드만

애의 손은 검은머리 할애비를 닮아 북신하여 몇 아지매들이 오물조물 만지기도 하였고

집안 어른이 매긴 제삿술에 얼떨해 캉캉 웃든거이 한자리 때 일이라지 열 아홉 해가 지나

들은 말 중 꼽자면 점잖다는 소리가 참 많은

턱이 돌아간 사내는 뻑뻑한 노안을 가지었고 팔이고 다리에 검은 풀이 자라

문득 제가 무덤인가 하는 망상을 했다더라 처녀 볼 같은 촉기는

허파에나 있어서 바람 들 일 없었다는데

시간 될 적마다 연필이고 젓가락이고 빙글 거리는 손버릇 하나 생기어서

괜히 핀잔 듣기도 했는데 말이다

154

송승준

시

뜬금없이 허나 자주

반백년 자리 지키던 돌에 으창창 소리 지르고 삐쭉 나온 새끼 싹에 고백했다지 그래 별일 없어 잠잠하다가도

총 소리 대포 소리보다 빨리

어디로 달려가 뜬 거인지 아니 뜬거인지

지 어매가 와도 구분 못할 눈 빨짝 열어 쏘아부치는, 젊음의 칼자루를 입에 물어 말도 아닌 소리 내삐는,

아직 덜 죽은 검객이 되었다지 그래

조로(早老)

155

정담이

진한 기쁨 기쁨,

기쁨은 한순간 들뜨고 마는 것이 아니다 단번에 폭풍처럼 몰려오는 것이 아니다 기(起),

일어난다

가라앉은 가슴 속을 살랑이게 할 그리하여 쁘-음

불규칙한 시간차를 두고 서서히 서서히 밀려온다

몸의 가장 바깥부터

움씰움씰 세포를 타고 올라와 그 발음처럼

미지근한 물에서

찻잎의 알갱이가 하나하나 퍼져 나가듯 넓디넓은 바다에서

잔잔한 파도가 끊임없이 일렁이듯 점점 들끓고

발효된 미소가 배어 나오고 158

정담이

시

핏줄이 몸 밖으로 펄떡펄떡 뛰고 극도로 음미하고 만끽할 수 있는 진한 기쁨은

찰나의 격동이 아니라 고조되는 요동이다 곱씹을수록 우러나는 평생의 파동이다

진한 기쁨

159

사람 믿지 말라던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두터운 손으로 내 발목을 힘껏 움켜쥐고 나아가지 말라고 저 너머는

온갖 거짓과 배반으로 넘실거리는 검은 공기라고 발목을 잘라내고서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발버둥 쳤지 너는 도대체

겁이 없는 거냐 순진한 거냐

아님 멍청한 거냐!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사람다운 사람끼리 이루어진 모습이기를 정직한 푸른빛으로 가득해서 160

정담이

시

섣부른 충고를 뒤엎고 나오기를 잘했다고 그렇게 자유로이 춤추는 제 모습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내 발목을 붙잡았던 손을

맞잡고서 함께 그곳으로 향할 수 있길

사람 믿지 말라던 사람

161

삶의 대비점 생사를 넘나드는 날카롭고 빨간 현장의 소리를 들어 보면

싱거운 농담으로 퍼지는 웃음소리에

어떠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앙상한 두 뼈로 겨우 서 있는 외로움을 느껴보면

사람 사이에서 진득하게 부대끼는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도달점이 없는 눈동자로 무한한 허공을 응시하며 잉여로운 시간의 흐름을 마주하면

또렷한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눈 속에

불타는 빛이 출렁인다는 걸 알 수 있다

끌고

세상 모든 게 좌절의 연속으로 와닿는 몸뚱아리를 이 다녀 보면

건강한 신체로 힘껏 뛰어오를 순간을 진심으로 만끽할 수 있다

해와 달이 바통을 주고받으며 계주를 내달리는 속에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의 날들을 162

정담이

시

보내 보면

안온하고 무용한 일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생각과 언어와 행동이 모두 다른 바깥의 사람을 만나 보면

내 생각과 언어와 행동이 새로운 세계로 뻗을 수 있다 앞서간 옹(翁)의 옆에 서서 위대한 삶의 흔적과 깊이를 헤아리면

나의 얕은 삶과 또한 젊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범위와 방향과 정도와 깊이가 무자비하게 늘어날 수

있도록

삶에 방문하는 모든 변화구를 최선으로 감싸 안자

삶의 대비점

163

기억이 안나 분명 우리 웃으면서

무슨 대화를 했는데 혼자였다면

불쑥불쑥 드나들었을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야기 해맑은 웃음소리와 고독한 발자국들

매일 다른 구름 모양과

나뭇잎 색의 사소한 변화

솜털로 읊어 보는 바람의 온도 이 모든 것이 차단된 채

투명한 장막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던 시공간 세상의 중심이 되어 전진하던 우리들의 발랄한 발걸음

봄바람을 가르며 바람이 되고자 했던 푸르른 바람 화창하게 피어나는 꽃의 대화들 하나도 안 나 하나도 164

정담이

시

안나

기억이

기억이

165

필사적 기록 아침 여덟 시 사십 분부터 다섯 시 사십오 분까지

온종일 힘겹게 수능을 봤다 단 십 분 동안

대학을 좌우할

숨 막히는 면접을 봤다 한 시간 십오 분 동안

교수님의 난해한 강의를 들었다 아니다 십구 년 인생의 모든 시간을 들여 수능을 치른 거다

평생의 세월을 압축해 면접으로 내보인 거다

이십이 년 동안 쌓아온 지식 전부를 이용해 수업 내용을 받아들인 거다 시를 쓰는 지금의 나도 166

정담이

시

시를 읽는 지금의 당신도 어제의 내가

어제의 당신이

그 어제의 내가

그 어제의 어제의 당신이 그 먼 나와 나와 내가

아득히 먼 당신과 당신과 당신이 내가 내가

당신이

쌓이고 겹치고 붙고 불어나 두터워졌다 무수한 점들로 존재하는 나를 찾아가기 위해선

무수한 점들로 존재할 나를 찾아나가기 위해선 지금 내가 할 일은 기록뿐이다

어디로든 여행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자

방향을 놓쳐 헤맬 때 의지할 수 있는 이정표이자 내가 내 손으로 만든 인생 최고의 적금 악랄한 시간이 휩쓸고 가며

녹슬고 변색되고 잊혀지고 잃어버린다

필사적 기록

167

순간순간의 내가 영원히 보존되어 반짝일 수 있기를 그래서 한다

필사적 기록을

168

정담이

시

임지호

손을 잡아 주세요

벌써 다섯 번째 집이었다. 송이가 찾는 사람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겨드랑이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온몸이 찝

찝했다. 그녀는 길치인 스스로를 저주했다. 골목과 계단이 모세혈관처럼 이곳저곳 뻗어 있어 지도가 하등 쓸모없었

다. 다른 집들을 다니며 일일이 수소문을 하는 수밖에 없 었다.

언덕배기의 동네는 낡은 다세대 주택으로 빽빽했다.

소형차를 몰고 왔지만 집들이 하나같이 진입할 수 없는

좁은 곳에 있었다. 마치 미로와 같아서 얼마 가지 못해 막

다른 길이 나왔다. 그녀는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교 회 주차장에 도착했다. 붉은 담벼락과 초록빛 옥상이 알 록달록하게 섞여 있었다. 지도를 확인하니 원래 목적지에 서 20분이나 멀어져 있었다. 반대로 온 것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주차권을 끊겠냐고 물었

다. 헌금함처럼 생긴 주차 로봇이었다. 로봇은 더 가까이 다가와 결제를 진행하라고 했다. 송이는 콧방귀 끼며 자리 172

임지호

소설

를 떴다. 동네를 헤매며 꽃집과 세탁소, 작은 보습학원과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외관의 카페를 보았다. 더위에 못 이긴 그녀는 카페를 택했다. 하얀 외벽에 푸른색 지붕을 한, 산토리니 풍의 인테리어였다.

송이는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

문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데도 밥 한 끼 가격이었다. 테 라스까지 합하여 네 개의 테이블밖에 없었다. 누가 이런 데를 오려나. 그녀가 중얼거렸다.

유리컵에 물기가 송골송골 맺혔다. 입을 벌린 채 에어

컨 바람을 쐬고 있는데 열린 문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녀석은 의자 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요즘에도 고양이가 있구나. 열심히 발을 핥아 단장하

는 녀석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청소 로봇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후로 길거리 동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밤새 술

을 마시고 해가 뜰 무렵 집에 들어갈 때면 로봇에 끼어 반 토막 난 새끼 고양이 사체를 보곤 했다.

이 동네에서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건 그런 까닭인지도 몰랐다. 그때 녀석이 털을 곤두세우고

송이 쪽으로 뛰어왔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자기보다

한참 키가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다른 한 손에

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둘이 나누는 대화에서 송이는

기시감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노인의 옆에 있는 건 아이 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돌봄 로봇, 효 봇이었다.

— 도와드릴까요, 어르신?

손을 잡아 주세요

173

송이가 노인에게 눈높이를 맞춘 채 다가갔다. 옆에 있

던 효봇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도 지지 않으려 눈을 맞추었다.

— 괜찮은데. 우리 시돌이가 할 수 있지?

노인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름까지 붙

여가면서.

— 그럼요, 할머니. 제가 할 수 있어요.

시돌은 능숙하게 화면을 눌러 메뉴를 주문했다. 그들

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고양이는 맞은편에 엎드려 상황 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갈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다. 녀석 의 뒷다리가 잔뜩 구부린 스프링처럼 부풀었다.

희고 기다란 팔이 카운터에 일회용 컵을 내려놓았다.

새하얀 김이 폴폴 올라왔다. 노인, 그러니까 시돌이 주문

한 것은 뜨거운 우유였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가 자기 키 보다 높은 계산대를 올려다보았다.

— 할머니. 메뉴가 나왔어요.

노인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컵을 집었다. 손이 덜덜

떨려 잔이 넘칠 듯 말 듯한 것을 보고 송이가 나섰다.

— 컵은 이리 주세요.

그녀는 마시던 커피도 놓아 두고 밖으로 나갔다. 노

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 나왔다. 고양이는 모두가 나간 것을 확인하더니 의자 위로 올라가 아예 몸

을 뻗고 있었다. 햇살은 그새 더욱 뜨겁게 내리쬐었다. 송 이는 여전히 김이 나는 컵을 들고 말했다.

— 보건사회연구원에서 나왔습니다.

노인의 손을 잡고 있던 시돌이 그녀를 주시했다.

174

임지호

소설

— 사람을 찾고 있어요. ✽ 노인을 따라가는 길은 점점 복잡해졌다. 그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인지, 손을 잡은 시돌이 이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러다 그 사람을 찾지 못한 채 길을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송이는 망설이는 동시에 차를 어디다 세워 두 었는지 생각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가 건물이나 가게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서

도맛소리가 들려오고 아무렇게나 널린 빨래가 눈에 들어 왔다. 언덕의 경사는 더욱 가팔랐다. 계단의 수는 가늠하 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송이는 다시금 지도 앱을 확인 했지만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시돌은 이따금 뒤를

돌아 송이를 쳐다보았다. 길치인 그녀를 한심하게 보는 기 분이 들었다. 송이는 그런 시선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효봇은 그녀가 사회복지사로 일하기 시작한 이듬해

에 출시되었다. 대화를 기반으로 사용자에게 맞춤형 돌봄

을 제공하는 로봇이었다. 7세 어린이의 모습을 했지만 간

단한 간병과 디지털화된 업무를 도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서적인 교감을 위해 설계된 대화 알고리즘은 독거노인 돌봄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지역 노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효봇 이용자가 되자 담

당 부서가 새롭게 꾸려졌다. 이는 복지관 업무 형태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그걸 전달하는 손을 잡아 주세요

175

것도 잘하는 건 아니다. 대학에서 형편없는 수업을 들어

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노인들에게 장기요양 보험제도나 재가노인지원서비스 같은 것을 쉽게 설명하는

일에는 복지사보다 효봇이 나았다. 그것은 송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직원은 효봇에게 제도에 대한 지식을 위임하고 로봇 관리 업무나 행정 업무에 집중했다.

송이는 사람의 얼굴을 한 돌봄이 진정한 의미의 돌봄

이라 믿었다. 면대면으로 할 수 있는 복지 업무에 더욱 신

경을 쏟았지만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변화를 위 해서는 다른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틈틈이 야간 대 학원에서 복지 정책학을 공부해 학위를 땄다.

그 결과 이직에 성공해 원하던 일을 맡을 수 있었다.

돌봄 로봇 실태분석 및 제도 개선을 위한 전수 조사에 따

른 파견 근무를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웃 지역의 효봇 이용자 명단에서 익숙한 이름과 생년월일을 발견했다. 한 지아. 이 년 전 효봇 실종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효봇과 함께 실종되었던 치매 노인이 숨진 채 발견된

일이 있었다. 같은 날 노인의 손녀가 자택에서 수면제와 살

충제를 섞어 마신 채 발견되어 응급실에 실려 갔다. 다행 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의 일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경찰에 자수한 내용에 따르면 그날 한지아는 할머니를 살 해할 목적으로 효봇을 조작한 후 자살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녀가 효봇 제작사의 직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화제가 되었지만 각종 언론 인터뷰와 취재를 거부했기 때 문에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었다. 이어진 재판에서 그 176

임지호

소설

녀는 징역형을 면하고 집행유예로 끝났다. 오랜 간병으로 인한 심신미약이 인정된 터였다.

이슈는 금세 다른 이슈로 잊혀 갔다. 송이는 한지아가

지금 무얼 하며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파견 지역이 아 님에서 선뜻 자원하여 이곳에 온 까닭이었다.

슬슬 숨이 차기 시작했다. 겨드랑이가 다시금 젖어오

고 있었다. 그에 반해 노인은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시

돌과 지팡이에 의지할 뿐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한참을 걷다가 까마득한 높이의 계단을 맞닥뜨리자 송이 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노인에게 물었다.

— 어르신, 어디쯤 왔나요?

— 응, 다 왔어, 이제.

계단을 오르고 그렇게 십 분을 더 걸어서야 그들은

멈춰 섰다. 남회색으로 칠한 철제 대문 앞이었다. 노인이 시돌의 손을 놓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쇠끼리 맞부딪혀 짤 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문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아니, 어르신, 저는 그게 아니라…….

— 날도 더운데 어서 들어와.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어둑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

다. 송이도 대문을 넘어서다 잠시 멈칫했다. 시돌이 문가 에 서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시선 을 피해 몸을 낮추어 현관으로 들어섰다. ✽ 손을 잡아 주세요

177

불을 켜지 않아 창가로 들어오는 빛줄기 사이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작은 거실은 송이와 노인, 시돌 이 둘러앉자 꽉 찼다. 노인은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왔 다. 차가운 병에 담긴 비타민 음료였다.

송이는 음료를 마시며 낯선 노인의 집에 들어온 것이

얼마 만인지 떠올렸다. 이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매우 낯

선 감각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한참은 흐른 느낌이었다. 그녀는 현장에서 반찬 배달 업무를 했다. 그때도 이런 골 목 동네를 누비며 하루에 마흔 가정 가까이 방문했다. 사 수 덕분에 미아가 될 걱정은 없었지만 육 개월이 지나도 길이 눈에 익진 않았다.

노인은 시돌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송이는 이때다 싶어 정적을 깼다.

— 한지아라는 여자를 아시나요?

노인이 서서히 감기던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 이름은 잘 모르지만 경로당에 자주 찾아오는 젊

은이는 있지.

송이는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그녀를 아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 언제 언제 오던가요?

— 글쎄. 어제도 왔던가?

송이는 경로당의 위치를 물었다. 노인은 직접 데려다

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지 못했 다. 시돌이 노인의 손목을 붙잡고 막아선 까닭이었다.

— 할머니. 빨래는 다 갰어요? 집안일 끝내고 옛날이 178

임지호

소설

야기 해 주신다고 했잖아요.

세탁기 앞에 빨래 더미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아이고, 참 그렇지, 내 정신 좀 봐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

고 세탁실로 들어가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무얼 하려던 건지 완전히 까먹은 것 같았다.

송이는 세탁실로 향하는 시돌을 붙잡아 손목에 휴대

폰을 갖다 대었다. 곧바로 화면에 이런저런 정보가 떴다. 노인의 나이는 84세로 경증 치매가 있었다. 치매 노인과

생활하는 효봇은 의무적으로 치매 케어 기능을 설정해야

했다. 시돌은 스탠다드 모델이었으므로 정해진 시간에만 산책하러 나갈 수 있고 그 외에는 집 안에서만 생활하도 록 유도하는 기능이 있었다.

치매 환자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방

금까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까먹고 혼란에 빠질 때가 많으

므로 ‘방금까지 설거지하겠다고 했잖아요.’라든가, ‘약 드 실 시간이에요. 밥 먹고 약 드셔야죠.’ 하며 일상적인 일을 언급하면 그대로 따른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빨래를 개고 있는 노인을 보며

송이는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올해 예순이 된 그녀의 엄

마는 치매 초기 증상을 보였다. 병원에 가서 검사받을 때

엄마는 날짜나 집 주소, 주민 번호 따위를 잘 기억하지 못 했고 간단한 연산을 틀리기도 했다. 치매가 진행되고 있다

는 결과에 따라 약을 처방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 홀 로 있어 주말밖에 시간이 되지 않아 송이는 효봇 구독을 놓고 망설였다.

손을 잡아 주세요

179

효봇은 구독료와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옵션과 기능

이 정해져 있었다. 요양원에서 쓰는 것은 효봇을 매개로 보호자와 환자가 소통 가능하기도 했다. 그녀는 엄마를 요

양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효봇을 구독한다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중간 이상 단계를 하고 싶었다.

스탠다드 모델의 구독료는 최신형 휴대폰 할부금 정

도였다. 그 위로 갈수록 요양보호사 월급에 맞먹는 가격이 되었다. 복지관에 있을 땐 본사 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효

봇을 소개했는데 막상 구독을 앞두고 제작사에 전화를 걸 어 이것저것 따졌던 스스로가 우스워 보였다. 그새 시돌 은 노인을 돕고 있었다.

송이도 옆에서 빨래 개는 일을 거들었다. 세탁실은 습

하고 무더웠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바지를 접으며 경로당 위치를 묻자 노인은 뜬금없는 말로 그녀를 다그쳤다.

— 아니, 우리 시현이 언제 왔어. 할미한테 말도 안

하고 온 거야?

그녀는 어느새 송이를 손녀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니,

아예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들어오면서 벽에 걸린

액자를 보았다. 사진에는 딸과 손녀로 보이는 젊은 여자 들이 있었다. 노인은 송이에게 그동안 건강했는지, 학교는

졸업했는지, 엄마랑은 잘 지내는지, 속사포같이 질문을 쏟 아냈다. 그녀는 대충 얼버무리며 마른빨래를 집어 들었다. 땀은 멈출 줄을 몰랐다.

장롱에 옷을 넣고 나온 노인은 구겨진 지폐를 꺼내어

송이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녀가 거절해도 역부족이

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들은 이따금 괴력을 발휘했다.

180

임지호

소설

송이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세 시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지도를 보니 경로당은 십오 분 거리에 있었다. 길 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가면 될 것 같았다.

— 벌써 가려고?

송이가 문가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의 눈에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효봇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 네, 할머니. 저 또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그래. 몸 조심히 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효봇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

깨를 주무르는 손마디에 힘이 실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

인은 끝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송이도 허리를 굽혀 인 사했다. 대문은 바닥을 긁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 경로당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효봇과 손을

잡고 가는 노인 무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왔다. ‘무더위 쉼 터’라고 쓰인 문을 열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녀를 맞 이했다. 안에는 다섯 명의 노인과 네 대의 효봇이 있었다.

효봇의 모습은 다양했다. 남자아이도 있고 여자아이

도 있었다. 개성 있는 옷을 입었는가 하면 머리 모양도 제 각각이었다. 노인들 각자의 취향이 반영된 셈이었다. 빗질 해 가며 애지중지 다루는 노인도 있었다. 한 노인은 바둑

을 두며 옆에 효봇을 앉혀 두고 수를 하나하나 설명 중이 었다.

손을 잡아 주세요

181

그 모습을 보며 송이는 복지관에 있을 때 마주쳤던

노인과 효봇이 떠올랐다. 초반에는 순 엉터리라며 욕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인들은 점차

효봇을 친손주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송이의 팀에서 효봇

콘테스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누가 더 이쁘고 멋있게 효봇 을 단장시키는지 대결하는 것이었다.

송이는 경로당의 노인들에게 남회색 대문 집에 다녀

왔다는 이야기로 말을 걸었다.

— 아, 시돌이네 집. 알다마다.

효봇의 머리를 빗던 노인이 말했다. 학부모가 누구누

구 엄마, 아빠라고 불리듯이 경로당의 노인들은 저마다 지

은 효봇의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다. 송이가 만난 노인이 딸과 손녀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복받은 집이라고 덧 붙였다. 그 집 자식들이 다 효녀야, 효녀.

효녀. 영케어러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

다. 복지관에서 ‘효봇을 이용하는 영케어러 자조 모임’을

꾸린 적이 있었다. 그들은 10대~30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가족의 간병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도움이라고는 효봇에게 받는 것이 전부였다. 대부분 비정 규직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어 그마저도 가장 저렴한 모델이었다.

그들이 나눈 대화는 서로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내용

이었다. 돌봄도 노동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

을 대신 감당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나 가족이 감당해

야 할 문제만은 아니에요. 그때는 몰랐지만 송이도 곧 영 182

임지호

소설

케어러가 될 터였다. 그들의 말을 떠올리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한지아도 이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노인들은 한동안 화제를 돌려 수다를 떨었다. 송이는

그 틈을 타 효봇들을 스캔했다. 연령대는 70대부터 90대 까지였고, 그중 치매 노인은 없었다. 정보를 저장한 뒤에

송이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한지아에 관해 물었다. 경 로당의 노인들은 얼마간 토론을 벌이다가 그녀가 현재 방

문 요양 일을 한다고 결론에 이르렀다. 말없이 바둑을 두 던 노인 중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 그 자매가 우리 원식이하고 친해. 그는 덩치가 크고 눈썹이 짙었다.

— 좀 있으면 올 시간 다 됐네.

그는 지폐 몇 장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어느 효봇도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송이만 그를 따라나섰다. ✽

눈썹이 짙은 노인은 효봇도 없이 성큼성큼 걷는 모습

이 퍽 건강해 보였다. 송이는 그의 걸음걸이를 따라가느라 애를 먹었다. 어림잡아 180은 넘는 키였다.

그는 지나가면서 다른 노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하나같이 효봇과 함께 걷고 있었다.

— 어르신은 로봇도 안 쓰시고 참 건강하시네요.

송이가 인사치레로 던진 말이었다. 연세가 어떻게 되

느냐고도 물었다. 그의 나이는 여든아홉이었다. 그녀는 깜 짝 놀라 물었다. 그럼 아드님은요? 손을 잡아 주세요

183

그의 아들 원식 씨는 마흔다섯이었다. 발달 장애를

가져 복지관을 옮겨 다니느라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녀 야 했다. 지금은 데이케어센터에 다닌다고 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은 노인과 보낼 터였다. 이미 초

고령에 접어든 노인이 40대의 장애인 아들을 돌보는 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상태일 것이라고 송이는 짐작했다. 그녀

는 자기 이력을 밝히고 노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아들을 시설에 보낼 생각은 없는지, 돌봄 로봇을 쓰지는 않는지 등등. 그는 단호했다.

— 살아 있을 때까진 내 가족, 내 손으로 지킬 거야.

이윽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아내는 원식

씨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운이 안 좋았다. 터진

자궁 혈관으로 양수가 들어와 폐혈관을 막은 탓이었다. 이후 그는 아들과 평생을 함께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아

들을 돌보는 전문가 수준의 노하우가 있다고 자부했다. 그 래서 다른 이에게 아들을 맡기는 것은 안심할 수 없다고.

노인은 말할 때만큼은 송이와 발걸음을 맞춰주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차지 않았다. 맞은편 담벼락

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무지 개와 미소 짓는 아이들. 담벼락 한편에 놓인 짙은 평상에

노인이 앉았다.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송이도 따라 앉았

다. 붉은 벽돌의 외벽에는 글자가 하나 떨어져 나가 ‘태평 맨숀’이라고 적혀 있었다.

— 이제 올 때 됐다.

노인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지아는 원식

씨의 활동 보조인 일도 하고 있었다. 눈썹이 짙은 노인과 184

임지호

소설

는 그녀가 동네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교회에서 만났

다고 했다. 송이가 낮에 마주친, 이곳의 풍경이 한눈에 내 다보이는 바로 그 교회였다.

— 생긴 것도 참하고, 우리 원식이한테도 잘하고. 아

주 착해.

그때 언덕 너머로 두 남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

지아와 원식 씨였다. 그는 한눈에 보아도 거구였다. 담벼 락 위로 머리가 솟아있었다.

— 원식 씨 잘 가요.

모자를 푹 눌러쓴 한지아가 말했다. 노인 옆에 앉아

있는 송이를 보고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원식 씨는 꼭 붙들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고 크게 흔들었다. 한지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바로 뒤를 돌았다. 송이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 지아 씨 잠깐만요.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송이는 자초지종을 설명했

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저 지아 씨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냐. 횡설수설하고 보니 눈썹이 짙은 노인과 원식 씨는 자리를 피해 집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맨션의 지하에 불이 들어 왔다. 그녀는 자포자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그럼 따라와요.

✽ 가로등이 동시에 번쩍하고 길을 밝혔다. 한지아는 가 손을 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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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내내 말이 없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었지만 후덥지근한 날씨는 여전했다.

그녀의 집은 3층짜리 주택의 옥탑방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옥탑으로 향하는 계단을 따로 올라가야 했 다. 현관문이 낮아 한지아는 한참을 숙이고 들어갔다. 송 이도 고개를 살짝 내려야 했다.

현관문에서 거실까지, 뜯지도 않은 택배 상자들이 수

두룩했다. 키 높이만큼 쌓인 채 벽을 이루고 있었다. 바닥

에는 포장지와 접힌 박스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하나같 이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소파 역시 잡다

한 물건들로 뒤덮여 형태가 보이지 않았다. 주전자, 섬유 유연제, 원피스, 전동칫솔, 인형, 구두, 로션, 비타민, 속옷.

한지아는 문고리에 모자를 아무렇게나 걸었다. 머릿

결은 여전히 고왔다. 방은 바깥에 비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히려 가구가 없어 텅 빈 느낌이었다. 한쪽 구석

에는 무릎 높이로 쌓인 노트가 줄을 이루었다. 검정 표지 에 금박으로 ‘복지관’이라고 적힌 글자가 얼핏 보였다. 한

지아가 노트 사잇길을 터서 옷장을 열었다. 옷가지 사이로 무언가 앉아 있었다. 효봇이었다. 예의 해맑은 얼굴을 한 채로. 송이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 퇴사하면서 많은 돈을 받았어요.

그녀는 효봇을 꺼냈다. 전원이 켜지면서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와 함께 효봇은 두 다리로 섰다.

— 대신에 모든 것에 침묵해야 했죠. 어떻게 된 일인

지, 왜 그런 건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됐어요.

그녀는 더미에서 노트를 한 권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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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호

소설

— 칠월 이십삼 일 열두 시 십이 분. 지아가 머리를 쓰

다듬어 달라고 하지 않는다. 칠월 이십사 일 다섯 시 사십 칠 분. 지아가 집에 가자고 한다. 다리를 전다. 칠월 이십오 일…….

그녀가 말을 멈추고 노트를 송이에게 펼쳐 보였다.

‘지아가’라는 주어로 시작된 문장들이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각각의 문장 옆에 날짜와 시간이 있 어 일종의 일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 효봇이 오늘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말을 안 했

는지, 어제와 달라진 것은 무엇인지 빠짐없이 기록한 거예

요. 고장이 났다는 둥, 말을 듣지 않는다는 둥, 할머니는 마치 악성 민원을 넣는 학부모처럼 따지고 들곤 했어요.

그녀는 ㈜효봇의 고객지원팀 소속이었다. 효봇은 소

프트웨어 업데이트와 겉을 감싸고 있는 섬유를 세탁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교체가 필요했다. 사생활 침해 문제로 고 성능의 통신 장비 탑재가 금지된 탓이었다. 그녀는 담당

고객들의 상담 및 민원 전화를 받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 꽤나 곤란했죠. 담당 직원은 제가 아니었는데 말

이에요.

송이의 기억에도 할머니는 효봇과의 애착 관계가 끈

끈했다. 반찬을 전달하러 방문할 때면 늘 밖으로 나와 송 이를 마중 나갔다. 효봇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나왔다.

— 할머니의 마지막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곁

에 있던 효봇은 멀쩡한데 할머니는 처참했죠. 피 냄새가

진동했어요. 처음에는 할머니인 줄도 몰랐어요. 머리가 완 손을 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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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히 뭉개졌으니까요. 그때 발치에 있던 무언가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어요. 잘려 나간 귀였어요. 반짝이던 건 할머

니가 늘 하고 다니던 진주 귀걸이였죠. 제가 첫 월급을 받 아 사 드린 거였어요.

송이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지아의 말 때

문이 아니었다. 잠자코 있던 효봇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 았기 때문이었다.

✽ 한동안 효봇 실종 사건을 놓고 찬반 여론이 갈렸다.

찬성 측은 돌봄 로봇 규제가 한 번의 사고로 섣불리

판단할 일이 아니며, 많은 이용자와 간병인 그리고 가족

들이 도움받는 상황을 본다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반대 측은 애초에 로봇을 도입하면서 변질되기 시작 한 돌봄의 의미를 재점검해야 할 때라며, 효봇의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고 했다.

효봇에게는 감정이 없다.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

니 노인의 변덕과 욕설, 때때로 보이는 폭력성에도 별다른 타격 없이 일정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치

매 환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잠에서 깨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대상에게 효봇은 외출을 삼가도록 해 안전을 보장한다.

이런 입장은 대부분 간병 노동을 담당하는 가족들과

요양보호사, 그리고 요양병원 간호사들이었다. 특히 효봇 188

임지호

소설

을 이용자들은 ‘돌봄 로봇은 살인 로봇’이라는 자극적인

언론 보도에 강하게 반발했다. 로봇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 나 이용자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그러니까 돌봄 제 공자의 입장에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 효봇에 문제가 없는가? 복지계와

의료계가 오랜만에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이번 일이 돌봄

로봇의 허와 실을 드러냈다고 이야기했다. 터질 게 터진 셈이었다고.

처방과 치료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돌봄의 영역은 기

계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 전문의들의 소견이었다. 퇴행성 질환의 경우 약물과 예방, 그리고 입원이 필수적인데 돌봄 로봇으로 인해 병원에 오는 시기가 늦어지면서 골든 타임 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효봇이 모니터링에는 도움이 되지만 이용자 개개인에

따른 섬세한 설계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실용성이 떨어

진다는 것은 복지사들의 의견이었다. 이를테면 노인, 장애

인, 어린이 각각에 맞는 돌봄 서비스는 제공할 수 있겠지 만 노인이면서 장애인이거나 장애인이면서 어린이일 경우 에는 효봇이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송이는 이런 주장들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돌봄 제공자 모두가 생각과 판단하기를 멈췄다는 것. 효봇이 AI라는 이유로 복지 현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사람이 맡을 수 있는 업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할머니가 사라진 것을 최초로 신고한 사람은 송이였 손을 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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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반찬 배달을 하다 보면 집에 아무도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땐 집 문고리에 반찬을 걸어두고 왔다. 할머니 집이 그랬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 찾아갔을 때 봉지는 그대로였 다. 복도에는 악취가 가득했다.

송이도 그런 일이 처음이라 이웃에 수소문했지만 지

난 일주일 간 보지 못했다는 말들뿐이었다. 경찰에 실종 신고를 접수하자 한지아에게도 연락이 갔고, 쓰러져 있던 그녀는 응급실로 보내졌다.

효봇에 내장된 GPS 덕분에 위치는 어렵지 않게 찾았

다. 수색이 문제였다. 지도상으로 효봇은 돌산 한복판에 있었다. 경찰은 18시간의 탐색 끝에 효봇의 손을 잡은 채 싸늘하게 식은 할머니를 발견했다.

— 상을 치르면서 차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있죠.

유골함을 받고 나서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참 는 게 더 힘들었어요. 해방감이 이런 거구나. 그때 처음 알 았죠.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 말이에요.

인근 병원에서 단출하게 장례식이 치러졌다. 조문객

과 화환도 많지 않았다. 송이는 팀원들과 함께 조의를 표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때였다. 그날 이후로 송이 는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한지아는 말하다 잠시 멈출 때 손으로 입을 가리는

습관이 있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를 입술에 갖다 대고 곰

곰이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길쭉하고 새하얀 손

가락이 창백한 입에 닿을 때마다 어떤 말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올지 기대하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지금도 여전했다. 입술을 잡아 뜯듯이 했다.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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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호

소설

말하기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송이는 효봇이 붙잡고 있는

손을 놓으려 했지만 여의찮았다. 그때 한지아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송이의 손목을 붙잡은 효봇의 손과 그 손을 붙 잡은 한지아의 손이 뒤엉켰다. 세 개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 — 효봇은 어려운 걸 쉽게 설명하는 재주는 타고났지

만 쉬운 걸 어렵게 설명하면 일종의 충돌이 일어났죠. 그 점을 파고든 거예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효봇은 송이에게서 떨어

져 벽을 보고 있었다.

— 효봇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용자의 돌봄이에요. 육

체적, 정서적 모두에 해당하죠. 그런데 이건 로봇 3원칙처 럼 절대적인 건 아니에요. 알고리즘 안에는 결국 풀어야

할 문제가 최우선이 되도록 설정되기 마련이죠. 그러니까 이런 문제를 던져보는 거예요. ‘죽음이 뭐야?’ 효봇은 쉽게 대답하지 못해요. 그때 빈틈이 생기는 거죠. 잽싸게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해요. ‘존재가 뭐야?’ 이런 식으로요.

그녀는 들고 있던 노트를 다시 펼쳐 보였다. 송이는

여전히 효봇이 있는 쪽에 신경이 갔다.

— 철학책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요. 그때 깨달

은 건 결국 관념적인 것들은 일종의 말장난이라는 거였 죠. 커다란 농담 같은 것. 효봇은 농담을 이해하지 못해

요. 그래서 농담을 풀어야만 하는 난제로 인식하는 거예

요. 그때 죽음에 대한 인식, 존재에 대한 인식을 슬쩍 흘 손을 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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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주면 혼란에 빠지죠. 그때부터는 이용자의 안전은 안중 에도 없어지는 거예요.

송이는 문을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지아는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스르륵 넘어가는 소리에 송이는 소름이 돋았다.

— 회사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문제였어요. 그제야 한지아는 고개를 들었다.

— 침묵을 지키는 대가로 받은 것들이죠.

그럼에도 그녀는 왜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을까. 송

이가 물었다.

— 의무가 아니라 노동이 되었을 때, 내가 처한 상황

이 아니라 남의 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졌어요.

난생처음으로 이 일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녀는 뒷짐을 지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한 뼘 정도

위에서 송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그게 다예요.

그녀는 동정을 바라지도 그렇다고 이해를 바라지도

않았다. 송이는 한지아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았다. 어 쩌면 그녀는 송이가 찾아온 목적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 그때 이후로 다르게 생각하기로 결심했어요. 저보

고 새 출발 하라고 신께서 목숨을 살리신 것 아닐까요. 할

머니는 더 이상 없지만, 할머니의 빈자리를 잘 간직하고 저를 위해 살아가려고요. 그동안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살아왔다면, 이젠 제가 잘사는 것이 중요해요. 이제야 앞 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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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호

소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단함이 있었다. 지금 송이가 듣

고 있는 소리도 같았다. 방 안을 꽉 채우는 소리였다. 무덤 덤한 표정에서 나오는 기운이 말에 더욱 힘을 실었다.

— 그러니까 송이 씨.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효봇이 고개를 돌렸다. 송이와 눈이 마주쳤다. 한지

아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무엇 하나 읽어낼 수 없었다. 그저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골목의 가로등 불빛은 띄엄띄엄했다. 조금만 걸어도

어둠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졌다. 송이는 차를 향해 걸었다.

골목 저편에서 소리가 났다. 누군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처 럼 들렸다. 그 사이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걸려 와 있었

다. 하나는 엄마, 다른 하나는 ㈜효봇, 마지막은 선임이었 다. 송이는 어디로 통화를 걸어야 할지 망설였다.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 송이, 저녁은 먹었어?

그녀는 마치 누가 지켜보기라도 하듯 고개를 크게 끄

덕였다.

손을 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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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많이 서툴고 또 바쁘게 문집 제작이 진행되었음에도

소중한 작품들 맡겨 주시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낼 수 있도록 해주신 모든 회원분들께 감사합니다. 작품

들을 섬세하게 교정, 교열해 준 유진이도, 문집 디자인에 힘써준 민숙이도, 문집 제작에 관해 자문을 구했을 때 같 이 고민해 주신 여러 회원분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대학교 삼 년을 전부 동아리와 함께 했다는 사실이 믿

어지지 않네요. 시간이 굉장히 빨리 지나갔습니다. 작년 겨 울에 이어 멋진 작가님들의 작품 곁에 제 작품도 올릴 수

있어 행복하고, 책임 편집을 통해 문집에 기여할 수 있어 기쁩니다. 문집이 나올 때쯤이면 지금보다 날이 많이 춥겠 네요. 따뜻한 겨울 보내시길 바라며, 이 책이 그 겨울 옆에 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 되길 바랍니다.

2023년 11월, 경희문학회 문맥 회장 김현채

“빨랫줄에 걸린 억겁이 한가히 흔들립니다

다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그의 의견입니다 내 정원에 고사리를 꺾으러 오세요 두려워 마세요 부드러운 탄식들은 바람이 두려워 웅크리는 거니까”

― 조서연,〈고사리 장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