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채용예정자 - 출판편집자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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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초점이 향하는 곳은 바로 사람

마다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책은 시공

간을 뛰어넘으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유

일한 매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

강가연

https://bit.ly/ editoryeonny

다정함은 우리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면밀하고 주의 깊게 바라볼 때 구현됩니다.

― 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책 읽기

제가 졸업한 학과를 말할 때마다 매번 돌

아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슨 교육과?”

수십 번 같은 질문을 받아온 저는, ‘○○

교육과’가 아닌 ‘교육학과’를 졸업했습

니다. 대학 진학 전에 사람들은 분명한 과

목이 없어 교사가 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제 선택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

들 저마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

했고 사람을 마주하는 활동을 생각했을

때 떠올랐던 일은 교육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육은 다양한 사람이 엮여 있

으면서 성장과 변화를 꾀하는 행위였고

그 점에 매료됐습니다. 주변 사람의 염려

에도 불구하고 저는 교육학과에 진학했

습니다. 교육학과 강의에서 아동, 특수 아 동, 청소년, 성인, 노인 등 다양한 사람과 그들의 삶을 접했습니다.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고 싶어 복수 전공으로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에서 사람을 넓고 깊 게 알아갔습니다. 교육 봉사, 동아리, 아

르바이트 등을 통해 더 직접적으로 사람

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활 반

경 바깥의 사람도 접하고 싶었고 그럴 때

람에 대한 호기심에서 독서를 시작했고

책을 읽으며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

었습니다.

책과 함께 사회를 읽어나가는 편집자

사람에 대한 관심은 사회에 대한 관심으

로 이어졌습니다. 대학생 때 만든 독서

모임에서 『비폭력의 힘』, 『사람, 장소, 환

대』,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등을 읽으

며 차별과 폭력에 대한 민감성을 길렀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확장했습니다. 대외

활동으로 SNS 시사 에디터로 활동하며

사회 이슈를 하나 선별해 카드뉴스를 주

1회 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콘텐츠로 독

자에게 사회적인 메시지를 알리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이 즐거움을 미래

진로와 연결하고 싶어 고민하다 보니 편

집자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편집자를 꿈꾸면서 사회에 관한 관심은

당위로 바뀌었습니다. 시대를 끌고 가는

책은 아닐지라도 시대에 뒤처지는 책을

독자는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즈덤

하우스 박태근 본부장님의 ‘시장조사 워

크숍’에서 약 10년 치의 베스트셀러를 확

인했습니다. 시대에 따라 독자가 원하는

책의 주제와 형식이 변하는 것을 파악했

습니다. 이 경험으로 시대 흐름을 따라가

는 것이 편집자의 덕목임을 배웠습니다.

이를 놓지 않기 위해 인문사회서 읽기 동

아리 ‘NCT 19 ’를 만들었습니다. 페미니

즘, 퀴어, 환경 등을 주제로 다룬 책을 읽

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 후 글을 썼습

니다. 동아리에서 사회를 예민하게 살펴

보며 사유를 확장했고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하는 태도를 배웠습니다. 서평 무크

지 『교차』를 읽는 동아리 ‘횡단보도’에도

가입해 깊은 학술 담론과 이를 연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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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현재 논의되고 있는 쟁점

을 놓치지 않고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편

집자가 꼭 가져야 할 사회를 향한 예민

한 태도를 배웠으며 이를 잃지 않으려 합 니다.

파는 일’에 대해 인터뷰했습니다. 독서 인

구가 줄어드는 세상에서 여전히 책이 가

진 힘을 믿고 독자에게 꾸준히 전하는 일

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를 알리고 싶었습

니다. 녹취록을 풀면서 소리라는 매체를

글이라는 매체로 바꿔내야 했습니다. 문

체를 정돈하고 행간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인터뷰이의 말을 하나

의 주제로 맞춰가며 독자에게 전하고 싶

은 메시지가 명확해지도록 다듬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이 경험으로 편집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초점화

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사

회적으로 의미 있는 주제를 선정해 그 주

제가 잘 표현될 수 있는 기획으로 발전시

키는 것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기획과 편집을 더 배우고 싶어 ‘창비 편집

자학교_부산’을 수강했습니다. 현직 편집

자의 노하우가 담긴 강의를 들으며 출판

세계에 입문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익

히며 다양한 돌봄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

을 기획하고 편집할 때 독자가 가장 중요

한 요소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잊지 않고 독자에게 초점을 맞추

는 편집자가 되려 합니다.

사람과 맞닿은 책

출판학교에서 단행본을 여러 번 기획했

습니다. 그중 처음으로 기획한 책은 도시

락 레시피를 담은 실용서입니다. 이 책의

기획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

는 평소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곤 하는데

출퇴근길에 도시락 가방을 들고 있는 사

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걸 볼 수 있었습 니다. 사회 이슈와 매체를 확인하면서 저

만의 생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

가 상승으로 점심 외식이 부담스럽다고

호소하는 직장인이 많다는 사실을 뉴스

에서 종종 확인했고 유튜브에서 도시락

레시피 영상이 점점 주목받고 있음을 파

악했습니다. 일상에서 우연히 관찰한 사

람들의 삶의 모습이 제 머리에 쌓여갔고

사회에서 다시 사람으로

사회 변화가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에 영

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따라 바뀌

는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양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와 동물권

에 대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의식을 바꿨

고 채식에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습니다.

저 또한 제 삶이 달라지는 것을 체감하기

도 했습니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를 읽고 환경 문제를 인식했고, 『왜 비건인가?』를 읽고 동물권에 눈떴습 니다. 그 후로 『날씨와 얼굴』에서 동물권

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읽었고, 『비건 자 취요리 노트』를 참고하여 직접 비건 음식

을 만들었으며 의식을 실천으로 이어봤 습니다. 사회가 변하면서 달라진 개인의

생각과 일상이 내밀한 방식으로 담긴 책

이 에세이이며, 바뀐 생각을 실제 삶에 적

용할 수 있도록 도우며 사람의 성장을 도

모하는 책이 실용서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 이끌려 에세이와 실용서를 기획하

고 편집하고 싶어졌습니다.

편집은 초점을 맞추는 일

대학생 때 한 교내 공모전에 참여해 인

터뷰를 기획하여 완성 원고로 만들었습

니다. 출판문화에 관심 있던 저는 서점 경

영인을 대상으로 ‘읽지 않는 시대에 책을

은 인터뷰집 기획안도 작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가 원하는 책과 그런 책의

꼴을 상상했습니다. 여기서 만난 동기들

과 공부 모임을 조직해 편집자의 관점에 서 책의 만듦새, 구성, 톤 앤드 매너 등을 꼼꼼히 뜯어봤습니다. 한 권의 책이 어떤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기 위해 책의 구성

요소를 유기적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

을 배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배움과 경험

의 기회에 꾸준히 뛰어들었고 출판학교

에 도전했습니다.

출판학교에서 배우고 싶었던 기획과 편

집을 풍부하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길벗 김민기 실장님의 ‘기획의 이해’에서

는 책의 주제와 독자를 상세히 설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터틀넥프레스 김

보희 대표님 강의 ‘논픽션 편집 워크숍’에

서는 책의 물성과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

는지에 따라 독자의 경험이 달라질 수 있

음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강의 내용을 단행본 제작 실습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원고를 최대한 꼼

꼼하게 읽으며 저자의 집필 의도를 파악

하려 했고 그 의도가 어떤 독자에게 닿으

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떠올렸습니다. 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원고의 모든 꼭지를

꼼꼼하게 분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목

차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이를 통해 책

구체적인 기획으로 이어졌습니다. 앞으

로도 이처럼 사람들의 일상을 면밀히 들

여다보고 이를 책에 담는 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

편집자를 꿈꾼 순간부터 지금까지 편집

자가 된 저의 모습을 상상해왔습니다. 상

상할 때마다 매번 다른 모습이었고 시간 이 흐를수록 만들고 싶은 책도 다양해졌 습니다. 출판학교에 오기 전에 작성한 첫 기획안은 다양한 돌봄 노동자의 목소리

를 담은 인터뷰집이었고, 출판학교에서 처음 기획한 책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반 영한 도시락 레시피집이었습니다. 제가 만들고 싶은 책은 분야도 주제도 다르지 만, 공통점은 ‘사람과 맞닿은 책’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궁금해 책을 손에 쥐던 저는 사람을 담는 편집자가 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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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활동한 요리 동아리.

강민영 Instagram @b__kilgi

찾습니다

삶에 시달리던 사람은 그저 마술사가 이 이야기 속에서

벌이는 모험을 점점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 곽재식, 「신들의 황혼이라고 마술사는 말했다」

영상의 시대에 책을 사랑해서

책은 아주 어릴 때부터 저의 가장 친한 친

구였습니다. 핸드폰도 컴퓨터도 없는 제

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

였으니까요. 세계문학 전집, 청소년 소설

과 교양, 인터넷 소설과 함께 저는 자라났 습니다. 자유롭게 영상 매체를 접할 수 있

게 된 후부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과

관련되지 않은 직업을 가질 거라곤 상상

도 하지 못했습니다. 국어국문학과 진학 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한 전공 수업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을 배

웠습니다. “도덕적 과제에서 해방된 문학

은 더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

며, 그저 오락이 되었다.” 이는 문학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던 제게 매우 큰 충격으

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오락의 측면에

서는 책보다 드라마나 영화 등의 영상 매

체가 훨씬 인기가 많습니다. 독서 인구는

꾸준히 줄어들어 2022 년 통계에 따르면

1 년간 책을 한 권 이상 읽은 성인 비율은

50 % 미만입니다. 자연스레 다음 질문들 이 떠올랐습니다. 책 읽는 사람들이 이렇

게 적은데 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을 만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확실한 것은 여전히 제게는 책이 영상

보다 편리하고 유익하고 재미있다는 것

입니다. 저와 같은 독자들이 아주 많은

수는 아닐지라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

니다. 그들을 만족시키는 책을 만들고 싶

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책을 만드는

일의 의미일지 모릅니다. 단 한 명의 독자

에게라도 깊이 가닿는 일.

그러기 위해선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성

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아리 ‘횡

단보도’에서 국내외 다양한 인문사회서

를 다룬 서평 무크지 『교차』를 꾸준히 같

이 읽어나가며 책이라는 매체가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공론장의 역

할까지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

습니다. 동아리 ‘북플릭스’에서는 영화를

보고 얘기를 나누며 책을 기획해보는 활

동을 하고 있습니다. 영상 매체를 탐구함

으로써 책만이 전할 수 있는 콘텐츠를 찾

아내는 방법과 책의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보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더 효과적이

고 아름다운 책의 만듦새를 상상하려 했

습니다. 이 고민은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며

계속해나가려 합니다.

BOOK EDITOR 16
당신의 필요를

무엇보다도 재미를

오락을 목표로 하는 책에 관심이 많습

니다. 저는 재미있는 책들로 독서를 시작

한 독자입니다. 북스의 ‘역사를 만든 여왕

리더십’ 시리즈가 기억에 남습니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와 순정 만화 느낌의 일

러스트, 각색을 통해 역사 속 여왕들의 일

대기를 흥미롭게 담은 시리즈입니다. 리

뷰를 보면 이 시리즈의 팬들이 꽤 있다는

걸 알 수 있고 저도 서점에 갈 때마다 신

간을 찾아볼 정도로 좋아했습니다. 역사

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지는 않지만, 독자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준 책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단지 재미있기 때

문에 널리 읽히는 책.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드물지

만 웹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어

떤 사람들은 자극만을 추구한다며 웹소

설을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락만

을 위한 독서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

닙니다. 피로에 지친 출퇴근길과 하굣길

에 쾌감과 위안을 주는 이야기가 무가치

한 것일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정

말로 자극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잘

쓰인 작품들을 보다 보면 독자를 끌어들

이는 자극적인 요소와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볼 만한 점들이 얼마나 균형감 있 게 그려졌는지 감탄이 나오곤 합니다.

이런 일은 비단 웹소설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특히 유아, 청소년과 문학 분야

에서는 재미를 가장 큰 목표로 하는 책들

이 더 많아져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미

있는 책이 많아질수록, 즐거운 독서 경험

이 늘어날수록 꾸준한 독자가 많아질 것

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읽는 기쁨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최근 인

기를 끌었던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

은 고통뿐인 삶을 사는 주인공이 웹소설

을 통해 구원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책

의 편집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준을 흐리기

하지만 재미없는 이야기가 이 세상에 꼭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좋은 책

이란 감동을 주고 유익한 정보를 담은 책

일 것입니다. 그런데 감동과 유익을 정하

는 기준은 절대적일까요? 저는 학부 전공

수업 ‘고전문학과 젠더’를 듣고 그에 대 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수업은 젠

더적 관점으로 한국 고전문학을 독해하 는 수업입니다. 대부분의 조선 여성들은

한문을 교육받지 못했고 여성들의 글쓰 기는 금기시되었습니다. 따라서 남아 있

는 자료의 수도 얼마 없을뿐더러 완성도

역시 높지 않습니다. 문장은 서투르고 내 용은 횡설수설합니다. 당연히 재미도 없 습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당대 남성 지식

인의 것입니다. 완성도와 아름다움과 재 미를 평가하는 기준을 달리해야만 조선 여성들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 니다.

현대의 기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기준으로부터 소외되는 목소리는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장애인, 퀴어, 저학력

자, 빈자 등 소수자의 목소리가 그러할 것

입니다. 그렇게 가려지는 목소리가 담긴

책들은 어떤 기준에서 보면 완성도가 낮

고 재미없는 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고 불리면서도 읽

히지 않는 이 시대에, 주류 기준에 맞는

책만을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

류 기준을 힘껏 흩트리면서도 필요한 독

자를 정확히 겨냥하는 메시지를 담은 책

을 만들고 싶습니다.

트랜스젠더 당사자 안드레아 롱 추가 쓴

『피메일스』는 도발적인 문체로 불편하

고 거슬릴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입

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

키며 그런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게 빨

리 닿을 수 있었고, ‘람다문학상’ 논픽션

분야의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좋

은 책이란 아주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지

는 못하더라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반드

시 가닿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책

이 될 수 있는 글을 잘 포착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만

들고 싶습니다.

소통을 통해 기획하는 편집자

독자가 중심이 되는 책을 만들고자 합

니다. 출판학교 기획 특강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책을 편집하는 것은 독자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

니다. 수업에서 책의 기획 의도와 타깃 독

자, 편집 요인 등을 분석하고 유추해보았

고, 이를 인문사회 독서 동아리 ‘NCT 19’

에서도 이어갔습니다. 퀴어, 환경 등 최신

담론과 관련된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하

며 책과 독자를 연결하는 연습을 하고 있

습니다. 책을 읽고 독자를 상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네 책방 투어 동아리 ‘책

방곡곡’에서 여러 책방들을 방문하여 독

자들과 직접 마주치고 그들의 손과 시선

이 멈춰 서는 책들을 관찰해보기도 했습

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기획이 어떤 독자에

게 어떻게 닿을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생

각하고 계획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 니다. 단행본 제작 프로젝트에서는 소설

주인공의 특성과 줄거리를 고려하여 예 상 독자를 스스로 어른스럽다고 생각하 는 청소년으로 잡은 뒤, 제목과 구성, 표 지 문안 등 책의 모든 요소를 예상 독자에 맞추어 정했습니다.

책은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독자와의 소통만큼 여러 동료들과 소통 하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저는 편집자반 의 소셜 팀에서 활동하며 개인 인터뷰를 진행하고 여러 콘텐츠를 기획하면서 편

집자반의 소통을 도우려 노력했습니다.

또한 단행본 제작 프로젝트에서 청소년

소설 팀의 팀장을 맡아 여러 팀원들의 의 견을 수렴하여 일정과 편집 규칙 등을 확

정하고 마케터반과 소통했습니다. 팀원

들의 생각이 모두 달라 편집 규칙을 정할

때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좋은 책을 만들

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잊지 않으면

서 의견을 조정하자 모두가 수긍하는 결

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동료와

원활히 소통하고 독자가 원하는 책을 아

는, 세상에 필요한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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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책방곡곡’에서 간 서점 아침달.

https://bit.ly/ 3QRKfMB

나는 말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 거트루드 스타인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배웠습니다. 물상

을 달구고 주조해 새것으로 벼려내는 금

속공예는 책 만드는 일과 닮았습니다. 공

예가와 편집자는 정성 어린 노동으로 재

료를 세공해 작품으로 빚어냅니다. 공예

가의 재료가 쇠붙이와 보석이라면 편집

자의 재료는 글과 사람입니다. 글이라는

자재를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일, 그리하여 쓰는 이와 읽는 이를 연결하는

편집자의 일을 오랜 시간 희망했습니다.

소재와 재료를 살피다

대학에 입학한 2018년, 창비가 운영한 대 외 활동에 참여하며 편집 업무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해부터 열 달 동안 창

비 마케팅부에서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

를 했습니다. 독서 플랫폼 책씨앗의 웹사

이트를 관리하며 광고 배너와 카드뉴스

를 내규에 따라 제작했습니다. 저는 추천

도서 목록을 만들기 위해 서지 정보를 엑

셀에 수집하는 일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달마다 700권이 웃도는 책을 분류했기에

손이 많이 가고 빠듯했지만, 출간 도서 대

부분을 살피며 출판 동향을 익힐 수 있었

기 때문입니다. 퇴근 후에는 서점에서 궁

금한 책을 찾아봤습니다. 가장 먼저 간 곳

은 사회과학 서가, 그중에서 저는 아프고

나이 든 몸으로 사는 법을 탐구하는 책을

살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독서는 질병

과 돌봄, 장애학과 퀴어 이론, 페미니즘과

환경, 인문사회서 전반으로 뿌리를 뻗었 습니다.

널리 알리는 데에 앞장서다

1년 동안 동아시아의 홍보부 인턴으로 근 무하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를 관리했습니다. 동아시아의 비문

학 도서와 허블의 과학소설로 약 400 건

의 온라인 콘텐츠를 주도적으로 만들었

습니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

똑한 여자들』의 SNS 홍보 전반을 담당하

며 베스트셀러 도서 출간과 배포의 모든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

의 거의 모든 온라인 홍보 콘텐츠를 만들

고 발행해 독자로부터 유의미한 반응을

얻었습니다. 근무한 지 열 달이 지날 무렵

동아시아 대표님께서 홍보 업무의 전권

을 제게 일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습

니다. 이후 유료 광고를 검토하고 주력 도

서의 온라인 서점용 카드뉴스를 제작하

는 등 업무 범위를 넓혔습니다.

허블 편집부와 제5 회 한국과학문학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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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공하는 편집자
곽성하

진행했습니다. 500 여 편의 응모작을 하

나하나 검토하며 장르문학과 순문학, 웹

소설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글을 읽었습

니다. 이를 통해 작품이 무사히 빛을 발하

도록 작가와 원고를 보호하는 편집자의

일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후 예심과 본

심, 최종심, 시상식 진행을 보조하며 신예

작가를 알리는 큰 규모의 행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보낸 3 년은 온통 충만한 기억뿐입니다.

제가 경애하는 한국과 세계 곳곳의 출판

인에게 있어 책은 저물어가는

사양산업

의 산물이 아니라 무엇이든 상상하고 도

전하는 가능성과 실험의 장입니다. 외서

수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바탕으로, 저는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디자인 스튜

디오 다인프린트와 영문 메일을 수차례

주고받으며 그들의 아트북 『AXIS 』를 수 입했습니다.

책과 편집의 의미를 묻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

자들』로 많은 독자를 만났습니다. 어떤

독자는 이 책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손을 잡아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

는 아픈 사람의 서사를 책으로 만드는 일

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질병

과 함께 살았기에 얻었던 생사에 대한 통

찰, 새로운 가치관과 태도 같은 긍정적인

면에 더불어 고립감, 불안함, 두려움 또한

함께 사유하는 책, 아픈 사람이 더 잘 아

고 외로움을 떨쳤듯, 친구들과 수전 손택, 에이드리언 리치, 오드리 로드, 토니 모리

슨의 저작을 읽고 자기 안의 무른 부분을

용기 있게 내비치는 글쓰기의 힘을 실감

했듯, 저에게 그 책들을 경유한 모든 대화

가 여전히 희망이자 편집자를 지망하는 동기입니다.

복잡하고 낯선 세계를 이해하다

출판학교의 기획 수업에서 주제 선정부

터 자료 조사, 필자 선정과 내용 구성, 타

깃 독자와 패키징까지, 책을 만드는 데 있

어 어느 하나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는 것을 몸소 익혔습니다. ‘퀴어의 나이

듦’을 주제로 단행본 기획서를 만든 워크

숍으로 저의 안일함을 돌아봤습니다. 노

년의 퀴어에 대한 책을 구상하며 저는 제

가 모르는 삶을 숙고 없이 축소하고 쉽게

단순화했습니다. 나중에는 문제를 알면

서도 바로잡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겪어

본 적 없는 삶을 상상하는 것이 힘들었다

고 토로하니 김희진 대표님께서는 겪어

금속공예학과

책을 통해 사람들과 마주하다

3년 동안 유어마인드에서 주말 스태프로

근무했습니다. 유어마인드는 독립 출판

물과 아트북을 판매하는 서점이자 서울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주최사 입니다. 독립 출판물은 저술, 디자인, 제

작, 배포, 홍보 등 출판 전반을 소수 인원 이 맡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는 조

악해 보일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유어

마인드의 책들은 저마다의 목소리와 외

양으로 뾰족이 빛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고유한 이

야기를 펼쳐 보인다는 것, 그 모습대로 받

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유어마인드는

제게 가르쳐줬습니다.

아시아의 예술 서점 운영자들이 권하는

아트북을 소개하는 전시 「아시안 아트북

클럽」의 진행을 도우며 수많은 서점과 출

판사를 조사했습니다. 퇴근 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이상하고 아름다운 책을 구

경한 일요일 밤, 대만과 일본, 중국과 홍

콩에서 책이 날아오기를 고대한 평일의

하루하루, 그렇게 들인 책을 보며 감탄하

는 손님에게 다가가 책과 출판사의 대단

함을 자랑한 토요일 낮, 유어마인드에서

플 수 있는 사회에 보탬이 될 책을 줄곧

편집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책

의 독자를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없었

습니다. 그 만남은 과장이나 경시 없이 정

확한 언어를 빚어내는 편집, 그리고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출판

의 책임에 대해 질문하게 했습니다.

출판학교에 와서 비로소 저는 편집이 저

에게 어떤 의미인지 돌아봤습니다. 한때

는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새로운 책으로

건너가는 게 어려웠습니다. 저는 책을 덮

음으로써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책 안의

존재가 맞닥뜨린 고통은 계속된다는 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가만히 앉아 읽기

만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무엇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아는 것

에 지나지 않을 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회

의한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편집자를

계속 꿈꾼 이유는 미약할지언정 책을 통

해 인간이 변화한다고 믿고 싶기 때문입

니다. 『짐을 끄는 짐승들』, 『타자들의 생

태학』으로 저에게 있던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범주가 산산이 무너

지는 경험을 했듯, 『새벽 세 시의 몸들에

게』, 『몸의 증언』,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과 장애를 개인의 사적인 비극이 아 닌 사회의 담론으로 사유하는 언어를 얻

본 적 없는 삶이 왜 궁금한지 생각해보라 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고백하건대 아직도 대표님의 조언에 대 한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저

는 미지의 사람들과 낯선 세계를 이해하

도록 돕는 책의 힘을 믿습니다. 이를 출판 학교 기획 동아리에서 베스트셀러 도서

를 분석할 때도 실감했습니다. 저는 한국

계 미국인 저자가 자신의 인종차별 경험

을 쓴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에 이민자

들과 사실상 분리된 일상을 살고 있는 한

국 독자가 어떻게 그리 공명할 수 있었는 지 궁금했습니다. SNS 리뷰와 언론사 서

평을 살펴본 결과 독자들은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노동자로서, 퀴어로서, 지 방 거주자로서, 약자로서 자신이 느껴왔 던 소수적 감정에 빗대어 저자를 이해하 고 있었습니다. 책은 복잡한 사정과 맥락 을 들려줌으로써 완전히 알 수 없는 타인 의 가까이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내 안에 만 머물지 않고 널리 뻗어나가는 책, 언어 화되지 못한 감정에 이름 붙이고 불가해 한 사건에 주석을 달며 세계를 받아들일

실마리를 보여주는 책에 기대왔습니다.

앞으로 제가 만들 책도 그러하면 좋겠습

니다.

19
재학 시절 책을 모티브로 한 예술 장신구 를 만들었다.

김나무

https://zrr.kr/ 8FOH

저에게 이 책을 선물한 게 당신이었군요

편집자가 원고를 잘 돌보면, 원고도 편집자를 돌본다.

디자이너와 주고받은 편지들. 원고의 감상을 나누고 편집 방향을 함께 고민했다.

책 네트워크

어느 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작정 기

획안을 쓰다 생각한 것, 책이 먼저일까, 독자가 먼저일까?

원고를 만지며 독자-책-작가-편집자 중

누가 먼저고 뭐가 가장 중요한지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보다는 이들을 거대한 네트워크로 바

라볼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원고는 편집자를 만나 변화하

고, 그러는 중에 편집자도 전과는 다른 사 람이 됩니다. 그렇게 책이 된 원고는 독

자를 변화시키고, 독자는 잠재적 저자이

자 편집자가 됩니다. 책이 가진 의미도 시

공간을 넘나들며 계속해서 변화할 것입

니다. 그러니 책의 발신자는 저자와 편집

자이면서 동시에 독자이기도 하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이 연쇄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는 세

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

니다. 모든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잠

재성을 갖고 있다는 믿음도 생겨났습

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뒤엎는 성급함

이 아닌, 적당히 부족한 이야기로 독자와

함께 무한한 가능 세계를 써나가기. 제가 책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책의 마음을 실천하기

좋은 책이 좋은 실천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는 확신이 있습니다. ‘5월 문학’을 공부하

던 중 우연히 『광주, 여성』을 만났습니다.

5 · 18 광주민중항쟁 참여 여성들의 구술

기록이었습니다. 마침 저는 베트남 민간

인 학살을 알리는 프로젝트 팀 ‘연꽃아래’

운영 위원으로서 5 월 광주 역사 기행을

기획 중이었고, 『광주, 여성』을 토대로 광

주 항쟁의 여성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

을 제안했습니다. 가두방송을 했던 송희

성 선생님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고, 광

주 YWCA 옛터, 양동시장, 국군광주병원

등 많은 여성이 활약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중심으로 광주 걷기 코스를

짰습니다. 한 참여자가 “이제 광주에 오

면 이들이 먼저 떠오를 것 같다”고 했을

때 책은 분명 몸과 마음을 움직인다는 확

신이 들었습니다.

대학 장애인 인권 동아리 회장으로 활동

할 당시 장애학 세미나 기획에 열중했습

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그리고 『장애학의 도

전』입니다. 여전히 비장애인 중심적인 교

내 환경에 대해 부원들과 진솔한 이야기

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교내 ‘배리어프

리 애플리케이션’을 제작해보자는 아이

디어가 탄생했습니다. 모든 구성원이 더

편리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각 건물

의 문제점들을 데이터화하여 건물별 장

애인 화장실 위치, 엘리베이터 위치, 문턱

이 없는 출입문 위치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마음을 실천하는 일

BOOK EDITOR 20

에는 용기와 꾸준함이 필요하다’는 말이

제 일상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기획의 기쁨과 슬픔

기획을 할 때면 기쁘면서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럴 때 출판학교에서

동료들과 선생님의 따끔한 피드백을 받

고 기획안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퀴어 가족’을 주제로

에세이 앤솔러지를 기획하는 수업에서

는 차별적인 저자군을 발굴하기 위해 열

권 넘는 참조 도서를 옆에 쌓아놓고 조원

들과 몇 시간씩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

데도 선생님께 “정답을 정해놓고 저자에

게 원고를 요청하는 느낌”이라는 피드백

을 받았을 때는 가슴이 따끔했습니다. 주

제에 너무 ‘과몰입’한 나머지 편집자의 영

역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생각과, 이런 식

의 기획안이 오히려 저자의 상상력을 제

한할 수도 있다는 배움을 얻었습니다. 편

집자는 분명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누군

가를 가르치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좋

은 편집자는 저자가 통통 튀는 재밌고 새

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바탕을 설계해

주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함께 신문을 읽고 책을 기획하는 동

아리 ‘리커버리’, 베스트셀러와 좋아하는

책의 역기획안을 써보는 동아리 ‘김밥부’

에 빠지지 않고 함께 했습니다.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책이 되는 미래를 상상해보

는 일은 변함없이 즐겁습니다.

니다. 출판학교에서 신유물론 철학 스터 디에 들었고, 신유물론 계보의 바탕이 되 는 들뢰즈-스피노자 철학 강좌를 신청하

기도 했습니다. 문예지 읽기 동아리 ‘구황

작물’에서는 현재적 이슈들과 더불어 그

것에 대응하는 한국 문단의 흐름을 읽어 나갔습니다. 종합해보니 올해 인문사회

비평의 흐름을 대표할 만한 키워드는 ‘비

인간’이었습니다. 격주 주말마다 들었던

강연 「알아야 바꾸는 길고양이와 공존하

는 삶」에서도 비인간 동물과 상호 돌봄으

로 공존하는 방법을 강조해서 다루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

와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도 ‘비인간’이 었습니다. 내가 경험하고 공부해온 것들

이 커다란 그물망으로 연결되는 모습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전 시에서 ‘가능성 있는 모든 결합’이라는 키 워드를 뽑아 기획안을 작성했습니다. 현

대 철학을 공부하며 알게 된 ‘행위자 네트

워크 이론’과 ‘객체 지향 존재론’ 등을 배 경으로 한 인문교양서였습니다. 출판학교에서만 배울 수 있는 가장 특별

한 것이 있다면 바로 디자이너와의 협업 입니다. 디자이너와 공감대를 쌓으며 즐 겁게 작업하고 싶다면 편집자가 북디자 인을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렇게 북디자인 비평 동아리 ‘디진스’에 들 었고, 북디자이너의 에세이와 인터뷰집

을 함께 읽었습니다. 디자이너와 편지 형

식으로 원고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편집

방향을 구체화했던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직접 원고의 장소를 찾아가 원

고가 가진 고유한 이미지를 연상해보기

도 했습니다. 원고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몰입으로 편집 집중도를 높일 수 있었습 니다.

먼지처럼 꾸준하게

이 모든 것들은 꾸준할 때 먼지처럼 쌓일 것입니다. 그리고 꾸준함은 건강함으로

도 우리가 느슨하고 꾸준하게 연결되기

를 바랍니다.

이곳에서는 지치고 힘든 날에도 마음만

은 평온했습니다. 마침내 내가 있을 곳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어딘가로 이끌어준 건 언제나 책이 었습니다. 나를 돌보았던 책들에게 보답

하는 마음으로 문장을 쓰다듬는 편집자 가 되고 싶습니다. 한 권의 우주를 독자에 게 선물하는 그날까지, 먼지처럼 꾸준하 겠습니다.

보고 듣고 나누는 편집자

한 편집자 선생님은 경험과 지식은 먼지

처럼 쌓인다고 했습니다. 최대한 많이 보 고, 듣고, 나누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 에 제가 그리던 편집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다행인 건 제가 느리고 더딘 독서가 주 는 성장의 어지러움을 사랑한다는 점입

길러진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함이란 내

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동료들이 모두 건강한 편집자가 되기를

바라며 체력 관리 동아리 ‘나무와 운동’을

만들었습니다. 각자가 건강을 위해 실천

한 것들을 공유하고 서로 북돋워줄 공간

이 있다면, 힘들 때도 위로와 용기를 얻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출판학교가 끝나

21
원고의 장소에 머무르며 찍은 사진.

사랑은 전대미문으로 남는다.

― 서한나, 『사랑의 은어』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이 될 때

고등학생 시절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관 심이 많아 연극부 무대 팀장을 맡았고 일 상적인 소재로 광고와 다큐멘터리를 제

작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세상에 없던 우리 들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섬세히 다루어

완성된 결과물로 내놓는 작업에 매료되

었습니다. 가장 큰 원동력은 ‘이야기’와

‘이야기하는 주체’였습니다. 아직 완벽히

형태를 갖추지 않은, 진솔하고 그렇기에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 조각들이

세상에 불러일으킬 소란을 기대하며 그

여정을 함께 견디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

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외면할 수

없는 폭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

었고 『흰』은 고독한 용기와 희망을 주었

습니다. 그렇게 저는 익숙하게 여겼던 세

상 너머를 배우고 상상할 수 있는 학과로

진학하길 바랐고, 인류학과 사회학을 전

공하며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

졌습니다. 인류학의 매력은 중층적인 맥

락 속에서 텍스트(문화)를 해석하여, 개

인의 목소리가 단 하나의 구조로 환원되

는 것을 경계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

니다. 하지만 ‘여성 영화’를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쓸 무렵 개인의 경험을 왜곡 없이

해석하여 기록하는 일에 의구심을 가지

게 되었습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안에서 강조하는 인류학자의 ‘성찰

성’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

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끊임

없이 자신을 수정하면서 타 문화에 근접

하려는 태도는 편집자가 되어서도 잊지

않을 삶의 방향성입니다. 박태근 본부장

님이 추천한 『듣기의 윤리』를 읽으며 억

압된 고통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관

습을 무작정 따르지 않는 집요하고 창의

적인 편집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또 여러

기획 수업에서 타깃 독자에 따라 책을 포

지셔닝하고 어떤 독자가 어떤 책을 왜 읽

을까 고민하는 과정은 이 직업이 특정한

사람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는 무게를 가

졌음을 실감케 했습니다.

글이라는 세계 곁에 오래 머물기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경험하는 일을 좋

아했던 저는 영화 「벌새」를 보고 큰 감명

을 받아 영화 연기에 도전했습니다. 마음

맞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시작한 영화 팀에

서 기획 제작 팀원 및 배우로 활동하며 총

아홉 편의 중 단편 영화를 제작하고, 마지

막 상영회에서 관객 60여 명을 만나는 뜻

깊은 자리를 가졌습니다. 3 년간 작가와

BOOK EDITOR 22
한 사람이 품은 이야기의 끝없음을 따라서, 함께 걷는 편집자
김수지 Instagram @isl_uni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긴밀히 소

통하며 대본을 완성했습니다. 글로써 한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보람을 주었고, 늘 붕 떠

있던 저는 처음으로 글의 곁에 오래 머물

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완성도 높은

캐릭터를 만들어가고자 했던 집념은 대

본을 치밀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습

니다.

단행본 제작 실습을 하면서 제대로 된 방

향으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의심될 때가

많았습니다.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

고 디자이너와 서로 의지하며 책을 만드

는 과정에는 정답이 없었고, 저는 책의 중

심을 잡기 위해 흔들릴 때마다 날것의 원

고로 되돌아갔습니다. 책의 물성을 갖추

고 세부적인 요소를 결정할 때, 처음 원고

를 읽고 기록해둔 중심 문장과 메모가 중

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이현정 편집자님

강의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 세상과의 접

점을 찾는 통로가 될 것’이라는 말이 기억

에 남았습니다. 그 의미가 이제야 분명해

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필요한 이야

기를 적재적소에 세상에 내보이려면 내

가 무엇을 느끼는지 그것이 세상과 어떻

게 접점을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편집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편

집자는 원고의 강점을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그것을 잘 다듬어 독자에게 매력적

으로 다가갈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드는 사

람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니다. 그중에서도 공동체의 느슨한 연결

을 나타내는 의례적 행위로서 일상의 짧

은 인사가 가진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

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득 이 사회의 고립

과 단절이 초래할 미래가 두렵기도 했습

니다.

한국 사회라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

아가며 한 걸음 앞서 희망을 본 사람들

이 그 희망의 내용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한국문학을 좋아하게 된 즈음

이기도 합니다. 박솔뫼 작가의 『미래 산

책 연습』을 읽고 산책자의 맑은 눈을 상

상했고, 배수아 작가의 『멀리 있다 우루

는 늦을 것이다』를 읽고 제대로 보고 기

억하겠다고 비장하게 다짐했고, 임솔아 작가의 『최선의 삶』을 읽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시그리 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와 김행숙 의 『사춘기』, 김유림의 『별세계』와 박솔 뫼의 「발문」, 전혜린의 에세이를 처음 읽 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고, 잃어버린 길 위에서 오래오래 외칠 목소리로 여깁 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SNS 를 통해 근황

과 관심사를 파악하고, 다양한 웹진을 이

용하여 작가의 신작을 훑어보고, 영화 비

평과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며 단어와 문장

이 만드는 풍부한 관계성을 탐구하는 일

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책은 아무 정답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늘 방황하던 제게 동경의 대상이자 이야기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

져 비로소 이곳을 직시하게 만드는 매개

체가 책이라면, 더 많은 이들이 책을 통해

방황할 용기를 얻고 자기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길 바라게 되었습니다. 『문학과 사

회 -하이픈』, 『한겨레 S 커버스토리』 칼

럼, 다양한 철학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기획

서를 작성하고 의견을 나누는 동아리 활

동을 하며 동료들의 관심사와 평소에 무

엇을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등을 마음껏

로 살고 싶었습니다.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지 고민할 때마다 문학성을 갖춘 글 을 떠올립니다.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이

점점 사라지는 시점에 이야기가 주는 울

림은 독자에게 강렬한 체험으로 다가갑

니다. 작가와 직접 소통하지 않고, 텍스

트를 사이에 둔 채 각자의 세상을 펼치는

‘읽기’는 불투명한 공간에서 나누는 ‘대

화’의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편집자로

서 내용의 특별함으로 이야기에 접근하

기보다 이야기의 형식에 집중하여, 독자

가 개입할 수 있는 여백과 여운을 남기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디자인 수업과 제작 수업을 들으면서 책

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독자의 독서 경험

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

보희 대표님 강의에서 책을 펼치고 닫을

때까지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단계화하

여 상상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기획한 「시-일상 스핀오프 시

리즈」는 시와 시의 비하인드 산문을 함

께 실어 시가 어려운 독자에게 친근히 다

가갈 수 있게 했습니다. 단순히 시를 해석

하는 산문이 아닌 형식에 제약이 없는 논 픽션 글로, 시를 쓰는 과정의 앞뒤 맥락을 살피며 풍부한 읽기 방식을 제안하는 실 험적 글쓰기의 장을 열고자 했습니다. 서

한나 작가의 『사랑의 은어』와 오성윤 작 가의 『짧은 휴가』는 에세이의 개운함을 머리끝까지 체험시켜주었습니다. “에세

이가 가진 능력은 다중화하는 것, 무한히

파열시키는 것”(브라이언 딜런, 『에세이즘』, p 21 )에 걸맞은 여행 에세이를 기획하고 싶습니다. 에세이를 읽는 일은 정해진 길

을 이탈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여행의 묘미

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행 의 마지막 장면을 담은 에세이 「라스트데이」 기획을 통해 마지막이자 끝인 것은

문학, 방황할 용기를 얻기까지

아예 다른 사람도 완벽히 나인 상태도 아

닌 경계에서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경험은 ‘몸’에 관한 다양한 상상력을 불

러일으키는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헤르

베르트 플뤼게의 『아픔에 대하여』, 김현

경의 『사람, 장소, 환대』, 에리카 피셔-리

히테의 『수행성의 미학』을 읽으며 몸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매료되었습

듣고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나의 세상을 펼치고,너의 세상을 들으러

“책은 세상의 빛을 보기 전까지는, 태어 나고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비정 형의 무엇”(마르그리트 뒤라스, 『뒤라스의 말』, pp 80~81)이라는 글을 읽고, 좋은 이 야기를 발견하는 눈을 갈고닦아 책과 세

상의 방황하는 영혼을 연결하는 매개자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생겨나고 맺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 새로운 시작을 앞 둔 이들이 찾게 될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23

김수진

https://bit.ly/ 3QQjSXm

상상하는 편집자

그렇게 낯선 우리는 서로를 길들인다 책은 우리의 공감을 확대하고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이니까.

― 노지양, 홍한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사진전 「어노니머스 프로젝트」에서 찍었다 장면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출판학교에 들어온 이후 정신없는 일상

을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틈틈이 목적

없는 독서를 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번

역 수업을 들으며 번역가의 일에 관심이

생겨 노지양, 홍한별의 『우리는 아름답

게 어긋나지』, 홍한별의 『아무튼, 사전』

같은 에세이를 읽었고, SF 단편집인 김보

영의 『얼마나 닮았는가』를 읽을 때는 등

굣길 지하철에서 별안간 눈시울을 붉히

고 혼자 벅차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출

판학교의 짧은 방학 기간에는 홀로 강릉

으로 떠나 숙소 침대에서 아니 에르노의

『여자아이 기억』을 읽으며 무수히 많은

페이지를 접어두었고, 스마트폰을 내려

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해질 즈음 요

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식성으로 따지자면 이것저것 읽기를 좋

아하는 ‘잡식 독자’입니다.

책 너머에서 말 거는 사람을 상상하기

대학을 다니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험공부나 과제를 하러 도서관을 들락

거리다 보면 자연스레 빼곡한 서가에 눈

이 닿았습니다 책 냄새를 맡으며 서가 사

이를 거닐고 있을 때면 풍족한 기분이 들

곤 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좋아하는

저는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다양한 세계

를 접하게 해주는 책이라는 매체가 좋았

습니다 세계의 다양함을 알려주는 매체

는 책 말고도 많았지만, 빨리 감기를 하지

않고 성실하게 눈과 손으로 활자를 따라

가야만 끝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책의 매

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좋아했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

는 늘 작가만을 떠올려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출판편집자’라는 직업을 알게 되

었습니다 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다

른 사람의 글을 가장 먼저, 가장 깊게 읽

는 독자가 편집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 너머에서 말을 거는 것이 작가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이거다!’ 싶었습

니다 원고를 엮어 책에 물성을 부여하는

사람, 책의 자리를 마련하고 독자에게 잘

인도하는 사람. 그것이 제가 처음 생각한

편집자의 상이었습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걸어온 길

학교를 졸업한 직후부터 편집자가 되

고자 여러 군데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2020 년에 출판학교에 지원했지만 낙방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에 대해서

도, 편집자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지금

BOOK EDITOR 24
책과 독자가 맞닿을 지점을

보다 더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주변에 편

집자의 업무와 취업에 대해 물어볼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 책 만드는 일과 관련된

일이면 뭐든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

로 취업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국어 교재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

었습니다 단행본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강의와 교재가 결합된 콘텐츠를 여러 학

원에 유통하는 회사였습니다 업무 특성

상 텍스트를 읽어야 할 일이 많았고, 교과

서에 수록된 문학 작품이나 모의고사에

출제된 비문학 지문들을 읽는 일이 즐거

웠습니다 짧은 경험이 될 줄 알았던 회사

생활이 2 년 넘게 지속되자 단행본 출판

사에서 편집자로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

이 다시 커졌습니다 편집자가 될 기회를

찾으려 퇴사 후 올해 초에 출판학교에 다

시 도전하게 되었고 결과는 합격이었습

니다.

출판학교에 입학한 후 저의 세계는 분명

더 넓어졌습니다 어디서도 듣기 힘든 다

양한 편집자분들의 특강을 통해 독자가 아닌 편집자로서 책을 바라보는 관점을

많이 배웠습니다. 번역가분들의 강의는

외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민감하게 다듬어가는 과정

의 치열함을 잠시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시

간이었습니다 다양한 강의 중에서도 터

틀넥프레스 김보희 대표님의 강의를 통

해 책을 구조적으로 살피는 연습을 했던

기억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물성을 지닌 책들이 왜 이런 모양으

로 만들어져야 했을지 예상해보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어떤 인

상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 책을 만든

사람이 상상한 독자는 어떤 사람이었을

까? 그들이 상상한 독자에 나도 포함되었

을까? 책을 만드는 사람은 분명 어떤 의

도를 담아 책을 만들었을 텐데, 드러내고

싶은 의도가 독자에게 잘 전달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을 했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편집자 출판학교 편집자반에는 다양한 동아리 가 있습니다. 편집자로서 경계를 넓히고

싶다는 생각에 번역 동아리인 ‘번역자들’

과 인문사회 독서 동아리인 ‘NCT 19 ’에

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문학이나 인

문사회 분야의 편집자가 되지 않더라도

번역문을 읽는 감각을 키우고 다양한 사

회 현안에 관심을 갖는 경험, 데이터를 쌓

아놓는 경험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직업적 역량을 생

각하여 들어간 동아리였지만 활동을 하

면서 읽고 쓰고 텍스트를 뜯어보는 일 그

리고 동아리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

는 일의 순수한 기쁨을 많이 느끼고 있습

니다

‘번역자들’에서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

의 언덕』 판본을 비교하며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구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 에드거 앨런 포의 「붉

은 죽음의 가면극」과 오 헨리의 「가구 딸

린 셋방」의 원문을 실제로 번역해보는 활

동을 진행했습니다 각자 번역한 원고를

구성원들과 공유하고 어떤 표현이 더 적

절한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번역문을 매

끄럽게 다듬는 감각을 길렀습니다

‘NCT 19 ’에서는 매달 정해진 주제(페미

니즘, 퀴어, 환경 비건, 노동) 안에서 각자 다

른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모

임 전에는 노션에 해당 분야의 책을 최대

한 찾아 리스트업 해놓고, 그중에 읽고 싶

은 책을 각자 골랐습니다 모두가 같은 책

을 읽고 토론했더라면 하나의 책을 놓고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

었겠지만 이 방식은 공통 주제로 출간되

는 도서들의 경향을 살필 수 있었다는 점, 독서 후 보도 자료나 편집 비평 등의 짧

은 글을 작성하고 공유함으로써 편집자

의 관점에서 책을 읽고 나누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읽

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과 타

인이 읽은 책을 소개받는 경험을 둘 다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편집자는 작가와 번역가 그리고 독자 사

이에 서서 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전달하

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의 경험이 앞으

로 편집자로서 일할 때에도 도움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책과 책, 책과 독자,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대학을 졸업할 무렵 다른 사람들과 책 이

야기를 하고 싶어 동기들과 함께 독서 모

임을 만들었습니다 저를 제외한 다른 친

구들은 책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었지만

꿈꾸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저희는 ‘한 달에 책 한 권쯤은 읽는 교양 인이 되어보자’는 포부를 내걸고 3 년 동 안 모임을 지속했습니다 매달 돌아가며

발제자가 되어 책 선정과 그달의 발제를

맡았습니다 고르는 책은 분야에 제한이

없었습니다 저는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

들을 위한 변론』, 천선란의 『천 개의 파

랑』, 김진영의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지』 같은 책들을 골랐습니다. 한 친

구가 제가 고른 책이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다’고 말했을 때 느꼈던 충만한

기쁨을 잊지 못합니다 이 모임을 통해 책

이 우리의 세계를 조금 더 넓혀줄 수 있

겠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출판학교에서 느낀 가장 큰 기쁨 중 하나

는 제가 혼자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책의 세계를 접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저

는 다양한 책을 즐겨 읽지만, 언제나 서로

가 서로와 맞닿을 수 있는 책에 관심이 많

습니다. 타인의 삶에 비추어 나의 삶도 돌

아보게 하는 에세이, 대중에게 친근한 인

문교양서를 비롯해 여러 분야를 가로지

르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책과 독자가 맞닿는 지점을 언제나 고민

하는 편집자가 되겠습니다 책이 놓일 자

리를 상상하며 책과 책이, 책과 독자가, 독자와 독자가 서로의 마음을 열고 만날

수 있는 세계를 꿈꾸겠습니다 더 많은 독

자와 만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지금까지

처럼 정진하겠습니다

25

김예빈

http://bit.ly/ 3QMrURb

사람과 경험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 편집자

나에게는 수많은 눈이 있다. 그래서 외로울 틈이 없다.

―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경험의 파도에 흠뻑 빠지는 법

중학교 한국사 선생님이 첫 수업 때 하셨

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점수도 중요

하지만 나의 수업 목표는 앞으로 여러분

이 교보문고 역사 분야 서가 앞에서 책을

뒤적일 수 있는 사람, 박물관에서 유물을

들여다볼 때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수업에서는 앞

글자를 따서 암기하기보다 역사 교과서

에 적힌 문장의 출처를 확인하는 법, 같은

사건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을 때 활용하는 도구를

배웠다. 역사 공부를 ‘경험’한 것이다. 선

생님의 말씀대로 수업을 열심히 듣던 친

구들과는 지금도 흥미로운 역사책의 출

간을 공유하고 박물관과 유적지에 함께

놀러 가 하루를 다 쓰기도 한다.

이후로 나는 하나의 배움에서 파생되는

지식이나 감정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사

람으로 자랐다. 인상적인 경험 뒤에는 늘

관련 강의를 찾아 듣거나 책을 읽고 때로

는 현장에 찾아가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

게 흠뻑 몰입했던 하나의 경험은 끊임없

이 내 안의 바다에서 순환하다가 적절한

기회를 만나면 파도처럼 또 다른 경험이

되어 밀려오곤 했다. 제주에서 살 때 찍은

풍경 사진과 에세이 강의에서 쓴 글은 독

립 출판 수업에서 책으로 만들어져 다양

한 독립 서점에서 판매되었고, 취미로 도

예를 배우면서는 예술가에게 관심이 생

겨 예술 분야 책을 읽고 전시와 강연에 찾

아갔다. 이러한 경험으로 을유문화사 서

포터즈에 선발되어 편집자와 독서 모임

을 했으며 『인생, 예술』의 저자인 윤혜정

국제갤러리 이사를 인터뷰했다. 이후 자

연스럽게 출판계에 관심이 생겨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앞으로도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일에 기웃

거리는 사람으로 살며 그 안에서 배우고

느낀 것을 책에 잘 녹여내는 편집자가 되

고 싶다. 독자들에게도 경험이 되는 책, 경

험을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 될 수 있게!

편집자 하지 말라는 말

편집자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후 한겨

레 출판편집스쿨을 수료하고 웅진지식하

우스에서 편집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아이러니하게

도 “편집자 하지 마라”였다. 당시에는 현

실적인 근무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BOOK EDITOR 26

만 출판학교에 다닌 뒤 그 염려가 다른 의

미로 다가왔다. ‘신화는 여전히 살아 있

음’을 주제로 한 단행본 협업 원고를 받고

나서부터 신화 이야기가 들리면 자꾸 멈

춰 선다. 사람들이 신화에서 무엇을 궁금

해하는지 엿본다. 서점과 전시, 심지어 광

고에서 본 단어들을 제목과 부제 시안에

붙였다 뗀다. 문득 편집자란 일의 고민이

일상생활에 침범하는 순간을 자연스럽

게 받아들여야 하는 직업임을 깨닫는다.

때로는 버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

았다면 거짓말이다.

편집자 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가 피부로

와닿았음에도 여전히 이 직업을 희망하

는 이유는 그 모든 과정 곳곳에서 즐거움

과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리

스 로마 신화에만 익숙했던 독자였기에

신화의 여러 참고 도서를 읽으며 우리가

왜 다양한 문화의 신화를 접해야 하는지

배웠다. 최근 영화 「인어공주」 주연의 인

종 논란도 동양 신화가 널리 읽혔더라면

다르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콘텐츠 제작자와 소비자 그리고 획일화

된 문화적 상상력에 문제의식을 가진 사

람들에게 이 책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의도를 담은 『신화를 표절하다-훔치고

싶은 스토리텔링, 그 아래 숨은 신화』 기

획안을 발표했고, 협력 출판사 대표님께

“원고의 핵심인 ‘스토리텔링에 신화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잘 이해했고 ‘표절’이라

는 콘셉트를 잘 뽑아낸 기획”이라는 평가

를 들었다. 이렇듯 원고를 성실하게 이해

하여 사회와 맞닿은 의미를 감각적으로

찾아내고, 독자에게 적확한 언어로 전달

할 수 있는 기획자로서 능력을 키워가고

있다.

사람을 탐험하는 편집자

“도대체 몸이 몇 개야?” “왜 이렇게 동아

리를 많이 해요?” 정규 수업 외에 자발적

으로 만들어진 동아리 아홉 개에 참여하

여 책을 읽고 과제를 제출하는 모습을 보

며 동기들이 내게 물었다. 다양한 대외 활

동을 했던 대학생 때도, 퇴근 후 여러 독

서 모임에 나갔던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들

었던 질문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사람들 이야기 듣는 게 좋아서”였다. 여

러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면 낯선 세 계를 탐험하는 기분이 든다. 같은 것을 보

고 얘기하더라도 각자가 살아온 궤적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다를 때, 다른 의견으로 충돌하다가 서로 이해하

려고 질문할 때마다 나의 세계는 한 뼘 더

넓어졌다. 그런 순간이 좋아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자꾸 찾아

가게 된다.

특히 출판학교에서는 책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점이 재밌었다. 베 스트셀러를 포함한 다양한 책의 기획안

을 거꾸로 작성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나

의 기획안을 써보는 ‘김밥부’, 인문 분야

에서 한 가지 주제의 책을 읽고 편집 비

평 및 보도 자료를 작성하는 ‘NCT 19’, 북 디자인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디진스’, 이

외에도 신문이나 영화 같은 타 매체에서

기획 아이템을 찾는 동아리, 인문 잡지 읽

는 동아리 활동 등을 했다. 동기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생각을 꾹꾹 눌러 말할

때, 서로의 글이나 기획안에 정성스러운

피드백을 건넬 때 피곤해도 동아리 많이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듣

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가

까이 일하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반에서 함께하

는 사람들을 잘 안내하고 조율하는 편집

자, 이야기가 모이는 곳에 찾아가 사람들

의 말을 소중히 듣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책만이 뾰족하게 할 수 있는 질문으로

돌고래출판사 김희진 대표님의 ‘인문사

회서 기획 워크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팀원들끼리 기획 주제를 정하고 관련 자

료를 조사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우리

조는 최근 이슈가 되었던 ‘영아 유기’를

선정했다. 명확한 주제였기에 기획이 수

월할 거라 예상했지만 착각이었다. 오히

려 기획 보도와 다큐멘터리, 논문에서 비

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차별화된 키

워드와 콘셉트를 정하기가 어려웠다. 대

표님 역시 “책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현실을 나열하고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어 정책을 제안하는 일은 다른

매체에서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조사한

자료가 모두 책 안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편집자는 문제의 맥락 전체를 파악해야 한다”라고 조언하셨다.

이후에는 영아 유기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자료를 다시 조사했다. 역사적으로

나의 첫 출판물이 서점에 놓이던 순간.

는 이 주제를 어떻게 인식해왔는지, 뇌과 학과 진화생물학 등 과학에서는 어떤 연

구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해외 도서와 논 문을 검색했다. 다양한 관점을 접해보니

우리가 영아 유기를 법적인 측면으로만

납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

게 되었고 이 문제를 양가적으로 볼 수 있 는 사람의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아

이를 유기하지 않은 ‘미혼모’가 느끼는 영

아 유기에 대한 공감과 분노를 주제로 하 는 책을 기획했다. 하나의 주제에서 파생

된 자료를 넓게 조사하다 보니 오히려 콘 셉트가 점점 더 정확해진다는 교훈을 얻 었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 것이고 이 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 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 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 38 ). 그렇다면 정확하게 인식하는 책은 무엇일까? 내가 위로받았던 책을 떠올려 봤다. 여러 직업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통 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기 계발서 『모든 것이 되는 법』, 평소 관심 있던 장애학, 여성학을 퀴어학과 교차시

키며 논의를 새롭게 확장시킨 에세이 『망

명과 자긍심』, 노키즈존이 논란이던 시점

에 모두 간과하던 어린이의 인격을 생각

하게 한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와 같

은 책들이 떠올랐다. 분야에 상관없이 뾰

족하게 질문하는 책만이 정확하게 독자

를 위로할 수 있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빈틈과 결핍 사이를 날카롭게 비집

고 나오는 편집자가 되려고 한다.

27

김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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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kr

애정을 연료로 삼아

움직이는 편집자

나의 시는 한사코 나이면서

나와 다른 것, 나 아닌 것, 낮은

것, 분열된 것, 작은 사람들을

향해 가는 하기의 작용이다.

― 김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저에게는 힘차게 걷는 습관이 있습니다.

한의원에서 “다른 신체에 비해 비교적 다

리가 얇으니 자주 걸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속도와 자 세를 의식하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학부

시절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걷기를 통해 장소

로 직접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배웠습니다. 이후 저는 힘 있게 걸으면서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얻고, 할 일을 하

기 전 태도를 다잡았습니다. 무엇이든 찾

아가서 직접 해보는 사람이 되고자 했습

니다. 다음은 편집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

어본 과정입니다.

새로운 독서의 길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세종학당’

교원으로 키르기스스탄의 한 대학교에

서 한국어 교육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의 교리를 따르는 여학생에게 주 로 가르쳐야 할 단어는 ‘집안일하다’였

습니다. 그 단어가 그들의 생활을 대표했 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몸소 경험했습

니다. 하지만 제 반에는 일찍 결혼하는 대

신 직업을 갖길 원하는 학생들이 많았습

니다. 저는 한국으로 유학 가기 위해 열

심히 공부하는 여학생들을 모아 방과 후

쓰기 수업을 개설했습니다. 그 수업에서

한국의 사회와 문화 이야기를 들려줬습

니다. 그들에게 페미니즘, 퀴어와 같은 새

로운 개념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놀라

던 학생들에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

고 싶었지만, 저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여성 문학과 인문

사회서를 주로 읽었습니다. 엘렌 식수의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을 읽고 가부장

제를 해체하는 여성적 글쓰기를 발견했

습니다. 도나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

문』을 읽고 성과 종 구분을 넘어선 존재

의 가능성을 배웠습니다. 일라이 클레어

의 『망명과 자긍심』을 읽고 퀴어이자 장

애인인 당사자의 이야기를 통해 깊이 공

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여

성에서 기계, 퀴어, 장애인 등의 소수자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습니다. 모르는 영

역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독서를 시작

했지만, 책은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게 해

줬습니다. 저는 책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소수자의 이야기를 읽고 즐거웠

습니다. 이전에는 몰랐던 감각을 깨우쳤

기 때문입니다. 소수자성의 고유명사를

대명사로 바꾸는 경험이 오직 책을 통해

BOOK EDITOR 28

가능하다고 깨우쳤습니다.

서점 운영의 길

소수자의 영역을 자각하게 된 저는, 디바

이스만 있다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온

라인 서점 ‘모이’를 기획해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책은 쉽사리 팔리지 않았습니다.

팔려면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느

꼈습니다. 직접 읽은 책 중 동시대 2030

여성 독자에게 필요한 책을 신중히 골랐

습니다. 가스라이팅이 화두가 되었을 때

가해자에게서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의 희생자들』을

찾아 소개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올가 토카르추크와 아니 에르노의 작품

을 소개해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도 했습

니다. 그뿐만 아니라 책마다 큐레이션 노

트를 작성했습니다. 앤 카슨의 『녹스』의

노트를 쓰기 위해 ‘기억’과 ‘애도’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윤경희 번역가 강연을 들

으며 책에 깊이 몰두했던 경험이 떠오릅

니다. 출판사 책 소개, 옮긴이의 서문, 독

자 리뷰 등을 참고해가며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렇듯 진심을 담은 큐레

이션을 보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

서 칼럼 요청이 왔고 한 출판사에서 큐레

이션에 관한 책 집필 의뢰가 왔습니다. 어

떤 저자에게는 직접 감사하다는 연락이

왔고 한 독자는 제가 쓴 노트를 사고 싶다

고 했습니다.

편집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건 이렇

게 고생하더라도 책을 향한 애정이 갈수

록 커졌기 때문입니다. 서점 운영 경험은

편집자로서 기획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책을 설명하는 글을 쓰는 데 좋은 자양분

이 되어줬습니다. 책을 소개하던 열정으

로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 출판학

교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배웠습니다.

구성의 길 수업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독자에게

필요한 책을, 독자가 읽기 쉽도록 구성하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막연한 기

획 아이디어를 입체적인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아 유기’를

주제로 동료들과 함께 다섯 번의 방대한

자료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문제

와 가장 밀접한 미혼모의 목소리를 담은

책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사회의 시

선으로부터 숨은 당사자를 찾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익명으로나마 공

개된 소수의 짧은 인터뷰를 보며, 이대로

포기한다면 이들의 목소리를 그냥 지나

치는 거라고 느꼈습니다. 마땅한 저자를

찾지 못해 주제의 방향까지 틀고 나니 얼

굴 없는 미혼모의 목소리가 계속 생각났

습니다. 이후 다시 영아 유기 주제로 돌아

와 뉴스 취재 팀의 행적을 좇아서 미혼모

의 내밀한 이야기를 찾아냈습니다. 미혼

모의 고통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아기 퍼

가기 시대』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섬세

하게 깨달았을 때, 여성 홈리스의 이야기

를 담은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를 참

고해 책의 구성을 구체적으로 상상했을

때, 아이디어는 점차 책이 되어갔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편집자의 일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나칠

뻔했던 목소리를 책으로 기록해 독자가

기억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기획 과정 곳

곳에서 누린 기쁨은 사회문제에 깊게 몰

두할 끈기를 제게 심어주었습니다. 제가

치열하게 책을 상상하며 그 안의 목소리

에 감응했듯, 책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이

끌고 책 밖으로 독자를 행동하게 하는 것

이 편집자가 책을 만드는 이유라고 깨달

았습니다.

책 만드는 길

저는 단행본 제작 프로젝트에서 ‘변화를

통해 위대한 나’를 만드는 자기계발 심리

학 원고를 맡았습니다. 처음에는 책을 직

접 만들어본다는 게 설레었지만 400 쪽

에 달하는 분량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

했습니다. 난생처음 교정교열을 하면서

때로는 불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번역

을 왜 이렇게 했을까? 왜 앞의 내용을 반

복해서 말할까? 그때 “맡은 원고를 사랑

하라”는 담임 교수님의 말이 들렸습니다.

편집자가 원고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

도 사랑할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태도를 다잡기 위해 이 말을 노트북의 대

기 화면으로 해놓았습니다. 또한 제 마음 보다 책의 말을 먼저 듣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습니다.

책에서 저자가 주로 상담하는 내용은 일

상의 문제라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콘셉

트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건 제목

이기에 ‘일상’, ‘탈피’, ‘변화’의 키워드를

이리저리 조합해봤습니다. 챗GPT 를 활

용해 제목 시안을 100 개 뽑아보고, 마케

터반 동료에게 부탁해 제목을 투표해보

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임시 책을 제

본하고 표지 위에 제목 시안 열 개를 뽑

아 자르고 붙여 구체적으로 상상해봤습

니다. 이후 가장 어울리지 않는 제목부터

가려내는 일을 했습니다. 교정교열은 자

기계발서 분야 특성상 빠르고 쉽게 읽히

는 것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교정부장을

자원해 교정교열 지식을 습득하려 노력 했습니다. 지금은 연습이기 때문에 소통 과정이 생략됐지만, 역자와 소통해 교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정아 번역가님 의 수업을 들으며 역자와 어떻게 소통해 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원고에 관해 솔직 하게 의견을 나누는 자세가 기본이었습

니다. 또한 책 수다를 나누면서 가까워졌 습니다. 기획할 책을 추천받고 실제로 훗

날의 협업 제안을 받으면서 번역가와 관

계 맺기를 경험했습니다. 언젠가 같이 책

을 만들 날이 올까요? 원고를 사랑하는

방법 중 마지막은 협업자와 우호적으로

일하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출판학교를 나가는 길

동료들과 함께 여러 출판사 탐방을 다니 고 있습니다. 습관처럼 힘 있게 걷던 저는 어느새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출판사에 도착했지만 제 주위에

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편집자의 걸음걸

이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자 합니다. 폭

넓게 원고를 살펴보기, 독자가 듣고자 하

는 책의 말을 떠올리기, 꼼꼼히 문장을 의

심하기, 같이 걷는 협업자와 동료를 배려

하기. 저에게 책을 만드는 일은 독자의 문

제를 발견해 해결하고 색다른 곳으로 이

끄는 일입니다. 뭐든지 직접 해보는 열정

으로 함께 걷고 싶습니다.

29
서점을 운영했을 때 독자에게 직접 받은 손편지.

김혜원

https://bit.ly/ 47HRVXQ

말해본 적 없는 자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논픽션 편집자

나는 미술을 할 때, 나중에는 시를 짓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생기를 되찾았고, 그 속에서 자유를 발견했다. 왜냐하면 내 육체가 비물질화되고, 내 정체성이 떨구어지고, 내가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모든 글이 이 자유를 인증했다.

―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에서도 해를 바라보며 뛸 수 있다.

이해하는 재미

고등학교에 다니며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고 문예창작학과에 가기로 결심했습

니다. 책과 관련된 진로를 걷게 된 첫 계 기입니다. 평소에 『아이는 왜 폴렌타 속

에서 끓는가』, 뒤라스의 『연인』 등 자전

소설을 즐겨 읽다가 본격적으로 자기 이

야기를 하는 논픽션에 빠지게 된 건 『달 몰이』, 『이제 당신의 손을 보여줘요』, 『알 고 싶지 않은 것들』, 『나의 사유 재산』을

읽고부터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감

각과 생각을 이해하는 읽기가 재밌었습

니다. 리차드 세넷의 『살과 돌』, 테리 이 글턴의 『유물론』 등에서 텍스트가 전달

하고자 하는 정보 자체를 이해해나가는

순간의 재미도 계속 저를 책 곁에 남아 있 게 했습니다.

이해하는 편집자

출판학교에서 터틀넥프레스 김보희 대

표님의 ‘논픽션 편집 워크숍’을 듣고 저

는 물성으로서의 책을 만드는 것의 즐거

움을 깨달았습니다. 수업에서는 책의 목

차, 본문 배치 순서와 세부 편집 요소, 도

판 위치 등을 뜯어보며 책의 전반적 구성

에 대한 편집자의 의도를 유추했습니다.

그리고 그 요소가 없거나 다른 곳에 있을

때 독자의 경험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편집자의 의도와 독자

의 경험을 책 속에서 계속 찾고 이해하려

하다 보니, 저는 제가 ‘독자’와 ‘책’에 동시

에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 속으

로 빨려 들어가 편집자의 마음으로 독자

를 만났습니다. 이제 서점이나 집에서도

책을 펼칠 때, 그 책을 만든 편집자의 의

도와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저 또한

편집자의 마음가짐에 가까워지고 있습

니다.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말하기의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서, 표현

된 것과 표현이 거부된 것 사이에서, 듣

기의 윤리는 충실한 듣기와 동시에 그것

을 넘어선 듣기를 지향한다. 그것은 (…)

이야기가 드러내지 못하는 거부와 부재

의 영역에까지 집중하며, 이야기하는 방

식과 스타일에도 주목하는 민감한 듣기

이다”(김애령, 『듣기의 윤리』, p 151)

BOOK EDITOR 30

『듣기의 윤리』는 위즈덤하우스 박태근

본부장님이 마지막 수업에서 선물해주신

책입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충실히 듣

는 일, 저에게 있어 그러한 편집자의 태도

가 발휘될 수 있는 분야는 르포르타주, 수

필, 기행문, 산문, 전기, 에세이, 회고록을

포괄하는 ‘논픽션 문학’입니다.

제가 출판학교 단행본 프로젝트에서 선

택한 원고는 1950년 이후 한국 현대사 시

기를 전쟁고아로 살아남아 출판인이 되

어 국가보안법으로 수감된 적도 있는 한

개인의 에세이입니다. 단행본 원고를 선

택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저는 원고를

읽다가 몇 번씩 눈물을 흘릴 정도로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완전 원고가 되기 전

의 문장들은 거칠고 투박했음에도 저는

원고에 완전히 몰입했고, 그가 표현하는

치열한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달되

어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논

픽션 문학의 특징인 저자의 진솔한 경험

과 언어에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태도를

지녔습니다. 원고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읽

어나갈 때,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동이나

감흥의 강도를 크게 느낍니다. 저는 그만

큼 저자의 목소리를 흡수하고 경청할 준

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고스란히 느낀

저자 본연의 목소리를 판단하거나 평가

내리지 않고, 그대로 살려내 책에 담을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또한 ‘여성이자 퀴어, 유색인종 이민자 그

리고 무슬림’의 정체성을 모두 가진 남아

시아 출신 저자의 논픽션 문학 『히잡 부

치 블루스』의 외서 번역 출간을 기획했습

니다. 저자는 코란을 퀴어적 시선으로 읽

고 해석하며 유색인종 이민자라는 이유

로 미국 학교에서 겉돌며 청소년 시절을

버텨냅니다. 우리는 전쟁고아가 우리 주

변에 존재할 것이라고, 무슬림과 퀴어의

정체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저는 보

이지 않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고

그것을 기꺼이 경청하고 싶습니다. 논픽

션 문학은 지금까지 은폐되었고 무시되

었으며 갇혀 있던 주체들의 목소리를 세

상 밖으로 내보낼 환풍구이자, 더 충분히

듣기 위한 담론장을 형성할 창구입니다.

내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저는 문예창작과 비평 수업에서 바르트, 크리스테바, 들뢰즈 등의 철학과 라캉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텍스트를 처음 접했습니다. 3 학년 때는 도서출판 길 이

승우 실장님의 ‘출판편집의 이해’ 강의 과

제로 『1417년, 근대의 탄생』을 읽고 인문

학의 매력을 깨달았습니다. 졸업 이후에

도 『반딧불의 잔존』, 『진리와 방법』 등의

인문· 철학 서적을 혼자 읽다가 출판학교 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여기서 철학 읽는 동아리 ‘조명가게’

와 신화학 종교학 읽는 동아리 ‘신종 독 서 모임’을 구성해 두 개의 동아리를 운영 하는 동아리장이 되었습니다. ‘조명가게’

에서는 아렌트와 벤야민, ‘신종 독서 모 임’에서는 엘리아데와 장 뤽 낭시 등을 강 독하고 동아리원들과 책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집니다. 편집자반에서

책 읽는 동아리를 두 개나 만들어 운영하

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

는 분야에서 자발적으로 모임을 주도하

고 이끌 정도로 열정적이며, 좋아하는 일

을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외향적인 성격, 그리고 그 분야 를 집단 지성으로 다 같이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하는 탐구심 또한 지녔습니다.

이외에도 읻다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인문

사회 서평 무크지 『교차』를 읽는 동아리

‘횡단보도’에 참여해 『인간 불평등 기원

론』, 『몸 페미니즘을 향하여』 등의 사회

과학 서적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접할 수

있었으며 늘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두는 ‘보 편 교양인’이라는 편집자의 덕목에 다가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모여

여러 책을 읽고 이야기하면서 지식을 넓

히는 과정에서 저는 인문교양 및 사회과

학서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쌓아나갔습

니다.

외서 편집에도 흥미가 많아 영어 번역 동

아리 ‘번역자들’에서 활동했습니다. 문학

동네, 을유문화사, 민음사 총 세 권의 『폭

풍의 언덕』 번역본을 동시에 읽고 동아리

원들과 번역 상태를 대조해 셋 중 무엇이

제일 좋은 번역인지 토론했고, 에드거 앨

런 포의 단편 「붉은 죽음의 가면극」과 오

헨리의 「가구 딸린 셋방」을 직접 번역해

동아리원과 서로의 번역을 합평하는 모

임을 진행했습니다. 원문 번역이 모두 끝

난 뒤에는 자기 번역을 자체적으로 교정

교열하여 더 나은 문장을 만드는 편집자

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책 속에서 수영하기

2019 년에 처음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했 습니다. 물을 좋아하는데도 수영할 줄 모 른다는 게 부끄러워서 배웠던 수영을, 1 년 내내 일주일에 여섯 번씩 다녔던 적 도 있습니다. 4 년이 지난 요즘도 종종 수 영장에 갑니다. 수영은 제가 좋아하는 일 에 대한 꾸준함이자 제가 편집자로서 건 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운동법입 니다.

수영을 시작하려면 일단 물을 믿어야 하 듯, 저는 제가 만들 책의 힘을 믿습니다.

제가 앞으로 만들고 싶은 책은 소수적 감 정의 언어화를 시도하는 논픽션 문학입 니다. 『마이너 필링스』 저자 캐시 박 홍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그가 인종차 별을 당할 때 느낀 우울과 분노, 불안, 수 치심 등을 ‘소수적 감정’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책에서 그 감정들을 구체화하고

보편적인 언어로 끌어올려 설명하길 시

도합니다. 저는 그처럼 한국의 소수자들

에게 더 내밀한 차원으로 접근하여, 그들

이 당사자의 몸으로 직접 자신의 ‘소수

적 감정’과 감각을 핍진하고 풍부하게 서

술해내는 인문학 에세이를 만들고 싶습 니다.

수영의 네 가지 영법 중 자유형은 이름과 다르게 자유롭지 않습니다. 정확한 자세

와 정확한 타이밍, 정확한 호흡으로 움직

여야만 앞으로 빠르고 힘 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논픽션 문학 혹은 인문사 회 교양서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따라 앞으로 정확한 자세로 헤엄쳐 나갈 것입 니다. 그렇게 출판업계라는 풀에 오래도 록 몸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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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입을 잘한다. 밥 아저씨 영상을 보다가 울 정도로.

박세린 https://bit.ly/ 45uG1ih

책의 생명력을 연잇는 편집자

다른 존재의 운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 이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 박혜영, 『느낌의 0도』

광고로 인문학하다

세상에 널리 알림. 또는 그런 일. ‘광고’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대상

을 주목시키는 방법을 배우고자 광고를

전공했습니다. 외면받는 사람들과 사회

의 면면을 널리 전하고 싶었습니다. 왜곡

되고 얼룩지고 기울어진 문제들이 마음

에 걸릴 때 쓰라린 분노를 어디에 어떤 방

식으로 표출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삼키

거나 삭이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투사

하고 싶었습니다. 어느 것도 묻히지 않게

계속 퍼 올려서 나르는 일을 하겠다고 다

짐했습니다.

광고는 저에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도

달시키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담

을 수 있는 내용물은 다르지만 광고와 책

을 만드는 일은 닮았습니다. 필요와 욕망

을 발견하는 일, 모든 사람 중 단 한 명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장점을 조명하고 원래도 빛나던

부분은 더 효과적으로 빛내는 일은 오랜

기간 길러온 자세입니다. 이제는 편집자

가 되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하

도록 만드는 데 사용하고 싶습니다.

책의 지구력을 키우는 태도

종합 출판사에서 마케터로 1 년 이상 일

하면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

어 독자에게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

의 수고가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었습

니다. 그 노고를 알기에 마케터로서 책의

운명을 한 권 한 권 목도하는 일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부담감을 떨치고

책의 명을 연장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습

니다. 신간 마케팅을 담당하며 한정된 자

원을 적확히 운용하여 독자와 관계 맺기, 그리고 협업자들과 능률적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체득했습니다. 여기에는 설득력

있는 근거와 논리를 갖추는 태도가 바탕

이 되어야 했습니다. 독자에게 콘텐츠로

소구하거나 내부에서 향후 홍보 계획을

의논할 때 이의 근간이 되는 시장과 독자

성향, 원고를 분석한 근거를 토대로 소통

하고 방향을 수립해왔습니다. 까닭 없이

는 쉼표 하나도 찍지 못하는 건 편집자도

매한가지입니다. 편집자는 판단하고 조

율하는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글과 사

람 앞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일도 까닭을

가지고 소통하겠습니다.

박혜진 편집자님은 출간 이후의 편집자

BOOK EDITOR 32

가 취할 수 있는 온당한 태도로 책의 지구

력을 키우는 일을 언급하셨습니다. 책의

특성상 신간이란 명분을 업고 홍보할 수

있는 기간은 매우 짧습니다. 마케터에게

는 홍보를 앞둔 신간들이 다달이 줄 서 있

기 때문에, 신간이 먼지 쌓인 구간으로 전

락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은 편집자에

게 더 중요한 몫일지도 모릅니다. 독자는

어떤 사람이고 어디 있을까? 필요와 접점

을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을까? 독자들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에

게 어떤 자원이 있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

을까? 책을 선전하는 입장에서 스스로 끊

임없이 되뇌었던 이 질문들은 편집자에

게도 유효하고 필수적인 질문들입니다.

편집자가 되어서도 질문을 좇아 탐색하

고 탐독하겠습니다. 독자에게 밀접한 형

상으로 기획하고 편집하고 소개하여, 원

고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시장에서 오래

견딜 수 있는 힘으로 이끌어내겠습니다.

도달률을 높이는 기획 출판학교의 단행본 제작 워크숍에서 저

는 변화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도움을

건네는 자기계발 외서를 맡았습니다. 많

은 강의에서 거듭 강조했던 원고의 강점

을 극대화하는 콘셉트의 원칙을 상기하

며 편집 기획을 세웠습니다. 우선적으로

저자가 이 텍스트를 통해 독자에게 가장

전달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고

자 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파트인 「부

정과 자기계발」이 원고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이 부분까지 읽어야 독서의

의미가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

여 독자가 텍스트를 끝까지 읽도록 유도

하는 것을 편집 기획의 주요 과제로 설정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이 책의 메시지가

필요한 독자를 분석했습니다. 자기계발

과 변화에 대한 욕구가 왕성한 독자라면

‘클래스 101’과 같은 온라인 강좌 역시 적

극적으로 소비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심리학 클래스’라는 콘셉

트를 도출했습니다. 온라인 강좌의 완강

과 커리큘럼이라는 개념을 빌려 와 본문

내에 완독률을 구현함으로써 독자에게

‘이 과정을 완주하여 내 것으로 만들겠다’

는 학습 목표와 의지를 고취시킬 수 있으

리라 판단했습니다. 원고의 방대한 분량

과 개념들이 줄 수 있는 부담감을 콘셉트

로 완화시켜 접근성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원고의 편집 방향을 직접 기획해보고

행하면서, 이 단계가 책의 도달률과 수명 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절감했습 니다. 콘셉트 설정은 독자에 대한 정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작업입니다. 김민

기 실장님은 기획 강의에서 콘셉트는 일

종의 작전 명령서로 내비게이션, 시뮬레 이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포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하나하나 피

부로 와닿았습니다. 김보희 대표님께 배

운 독자 경험을 강화하는 배치 및 목차 설

계 역시 단행본을 작업할수록 그 효용성

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작업하며 느

낀 감각들을 잊지 않고 더욱 연마하겠습

니다.

「쓰리 빌보드」의 한 장면. 단 세 줄의 광고판으로 세간 을 뒤흔들었다.

뭉툭한 단어가 뾰족해질 때

편집자는 언어를 다루는 사람인 만큼 언 어를 의심하는 태도를 항시 가져야 한다

는 가르침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출판학

교에서 김경원 번역가님께 외국어를 모 국어로 옮길 때 고려해야 될 사항들을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원문에 충실함

이 결코 일대일 치환을 의미하지 않으

며 문화적 간극을 메우기 위한 고민이 편

집자와 번역가 모두에게 필요함을 깨우

치는 시간이었습니다. 김영진 대표님은

menopause ’를 ‘폐경’과 ‘완경’ 사이에서

어떤 번역어를 택할지 고심했던 일례를

들어 단어의 사회적 맥락을 재검토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

워주셨습니다.

출판학교 동기들과 함께하는 번역 동아

리에서 단어를 고르고 놓는 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첫 활동으로 『폭풍의 언덕』

세 판본의 특성을 비교해보았습니다. 이

를 통해 번역가와 출판사가 추구하는 방

향성에 따라 원문이 같아도 다른 원고가

될 수 있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이후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극」

원서 전문을 정기적으로 각자의 문장으

로 번역 후 피드백을 주고받았습니다. 번

역 강의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떠올리며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 전

달력을 높일 수 있을지 고심했습니다. 비

슷한 뜻을 가진 다른 단어들을 대입시켜

보거나 어순을 바꿔보며 연습했습니다.

번역본에서 동아리원끼리 차이를 보이는

단락을 살피고 각자의 번역 의도와 그렇

게 판단한 이유를 공유하는 일도 텍스트

를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로의 번역본에서 어떤 단

어를 선택하고 어떻게 문장을 표현했는

지에 따라 원고의 성격이 바뀌는 것을 눈

으로 확인하며, 단어를 민감하게 의식하 는 감각을 몸소 익혔습니다.

게으른 단어 사용이 원고뿐 아니라 기획

단계에도 방해된다는 사실을 여러 실습

과 시행을 거치며 깨달았습니다. 단어를

관습적으로 기술하면 기획이 헐거워 보 였습니다. 기획안에서 뭉툭한 부분이 어 딘지 찾고 본질을 정확히 설명하는 단어 로 다듬기를 연습하며 책의 상이 명료해 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넘실거리는 상상력 소수적 존재의 보이는 것 너머를 증언하 고 다층적으로 조명하는 책을 비중 있게 읽어왔습니다. 『마이너 필링스』, 『가족 을 구성할 권리』,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 이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 똑한 여자들』과 같은 책들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익숙하게 통용되는 관점에 절여지고 속고 있었는지를 일깨 웠습니다. 익숙함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나의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책들을 좇았습니다.

수전 손택은 작가란 세상 모든 일에 관심 을 갖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편집자 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시간, 공간, 환경에 놓인 존재들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 소리를 담아내고 싶습니다. 누구나 자기 삶을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자원을 되살리는 힘이 책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현실에서 미끄러지는 메 시지들이 안착할 때까지 끈질기게 이야 기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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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수 https://bit.ly/ 44myJMr

책 만드는 일을 오래오래 사랑하기

예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 오지 마.

대신 그림을 봐.

아니면 수선화를 기다리든지.

― 메리 올리버, 「썩은 그루터기에서, 무언가」

농담을 사랑하는 편집자 “어이구 이 화상아.” 제 작은누나가 저에 게 제일 많이 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애

정과 짜증이 적절히 섞인 타박이죠. 어

릴 때부터 들어왔는데도 영 적응이 안 되 는 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 타박과 놀림이 제가 책과 친해진 계기이기도 합

니다. 누나들이 어린 저와 놀기 귀찮다고

저를 따돌리고 둘만 놀러 간 덕에 저는 눈

물을 흘리며 방에서 어린이 전집을 읽을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독서는 제

일상이 되었고 저는 학교에 다닐 때도 거

의 도서관에 상주하는 학생이었습니다.

특히 소설을 제일 좋아해서 전공을 선택

할 때도 큰 고민 없이 어문 계열을 골랐습

니다. 그렇게 들어간 불어불문학과 생활

은 마냥 즐겁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언어

를 배운다는 기쁨, 이전에는 고려하지 않

았던 희곡이라는 장르와의 만남, 단순히

문학을 읽는 것을 넘어서 문학 자체에 대

해 고민해보는 것 등 생각지 못한 풍성한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책과는 좀 가까웠던 것 같지만 편

집자와는 영 멀었던 제가 그걸 직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만화책을 읽다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변병준 만화가가

배수아 작가의 소설을 만화로 그린 『프린

세스 안나』에 나오는 인물이 편집자였는

데, 당시 저는 책을 떠올리면 기껏해야 저

자, 출판사, 독자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했

던 터라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책을 좋

아한다고 말해놓고 정작 이런 것도 모르

고 있었구나’라는 부끄러움 반, ‘그런데

정확히 편집자는 무슨 일을 하는 거지?’

라는 궁금증 반으로 편집자가 어떤 직업

인지 자세히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 편집자라는 직업

에 매력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

습니다. 기획부터 제작과 판매, 그 후에

독자에게 회자되기까지 책의 모든 생애

주기를 함께한다는 그 느낌이 정말 궁금

했습니다. 이후 출판학교에 대해 알게 되

었고 부족하나마 열의를 다해 준비하여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함을 사랑하는 편집자

저는 편집자를 지망하기 전까진 좁게 읽

는 독자였습니다. 주로 소설을 좋아했고

에세이도 종종 읽으며 만화나 웹소설도

즐겨 봤습니다. 「스카펭의 간계」 등의 연

극에 참여하며 희곡에도 관심을 갖게 되

었고요.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흥미가

BOOK EDITOR 34
번역 모임에서 즐거운 한때.

가는 책 위주로만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

니 책을 아주 다양하게 읽는다고는 못 할

수준이었죠. 그러나 편집자를 지망하고

나서 어떤 분야든 일정 수준 이상의 감식

안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어 독서

영역을 넓히려 노력했습니다. 특히 출판

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는 동기들이 추천

해주는 책과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다

루는 책, 제가 개인적으로 읽어야겠다 생

각한 책 등 읽어야 할 책이 매일 쌓였습

니다. 처음에는 그 중압감에 질리기도 했

지만 그러한 ‘먼지를 쌓는 과정’이 다 편

집자 생활에 도움이 될 거라는 터틀넥

프레스 김보희 대표님의 말씀을 떠올리

면서 차근차근 읽어나가자고 생각했습

니다.

저만 이러한 고민을 한 것은 아니었기에

비슷한 생각을 품은 동기들과 함께 인문

교양 동아리 ‘적재:적소’를 만들어 다양한

책을 읽고 머리를 모아 의견을 나누었습

니다. 특히 ‘적재:적소’에서는 읽은 것을

바탕으로 간단한 서평과 표지 문안을 작

성하거나 기획 의도, 콘셉트를 추측해보

는 등의 작업을 병행했는데, 읽는 데서 끝

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활동과 수업에서

다루는 내용으로 연계할 수 있어서 큰 도

움이 되었습니다. 모임에서 다뤘던 것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은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입니다. “가끔씩 당

신의 몸은 다른 누군가의 유령이 사는 집

이 된다”라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되

는 글은 세계가 유대인이라는 범주를 어

떻게 타자화하고 그 방식으로 택한 ‘죽

은 유대인 숭배’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

용하고 있는지, 한편으론 그 박해의 역사

가 얼마나 오랜 반복의 구조를 가지고 있

는지 낱낱이 밝히고 고발하는 내용을 담

고 있습니다. 그에 공감하는 한편 해설에

서 언급된 것처럼 시오니즘과 관련된 문

제가 책과 나 사이에 하나의 장벽으로 작

용하는 느낌이 들었기에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파악하려 『희생자의식 민족주

의』를 연계하여 읽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편집자

번역 모임 ‘번역자들’에도 가입했습니다.

김경원, 김정아 번역가님들의 수업을 들

으며 관심이 생겼기 때문인데요. 『폭풍

의 언덕』 번역본을 비교해보며 좋은 번

역이란 무엇인지, 그걸 위해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되었습 니다. 단편소설을 직접 번역해보기도

는데 외서 번역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문을 교정교

열할 때 특히 신경 써서 봐야 할 게 무엇

인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고요. 무엇

보다 언어에 대해 더 세밀하고 섬세한 감

각을 갖춰야만 더 많은 책을 다룰 수 있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번역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지

만 그래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이

야기의 힘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

실 출판학교에 들어오고 지망 분야에 대

한 고민이 깊었는데 이런 경험을 한 뒤, 제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이야기의 힘을

한 번 더 믿기로 하고 문학 분야를 주로

편집하고 싶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예지나 웹진을 비롯해 비교적

사적인 지면도 찾아보는 등 기존에 좋아

하던 작가들에 더해 신인 작가들을 알아 보려 노력했습니다. 또한 문학 편집에서

기획이 가능한 영역은 무엇인지, 문학에

서 교정교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문

학 편집을 주제로 강의하신 많은 선생님

들께 배움을 청했습니다. 조금 의외일 수

도 있지만 제가 평소에 즐기던 웹소설에

서 새로운 길을 찾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는 단순히 취미로만 여겼는데 위즈덤하

우스 오가진 실장님의 강의를 들으며 ‘이

렇게 크고 넓은 분야를 가까이 두고도 알

아차리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

거든요.

그런가 하면 출판학교에 와서 새로운 분

야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돌고래출판사 김희진 대표님의 인문교양

서 기획 강의를 들으며 자연스레 인문교

양 분야에도 큰 관심이 생겼습니다. 인풋

이 없으면 아웃풋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 후로 다양한 도서를 접하는 것을 우선

했습니다. 그리고 논문에서 출발하는 기

획도 많다는 말에 평소 관심 있게 보던 논

문 중 기획으로 발전시킬 만한 것들을 정

리했습니다. 최근에는 「도시 구성체로서

의 학군: 서울 노원구 중계동 은행사거리 를 사례로」라는 논문을 봤습니다. 학군을

‘도시 구성체’라는 개념으로 살펴보며 그

형성 과정을 우연적 요소의 결합으로 파

악하는 내용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를 기

여름은 미처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으로 학군의 형성 역사, 계급성을 살펴

보고 출생률이 급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까운 미래에도 학군이 여전히 공고할

것인지 아니면 무력화될 것인지 조망해

보는 책을 기획해볼 수 있겠다 생각했습

니다.

사랑하기를 사랑하는 편집자

많은 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해, 사랑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에 관해 조망해보았습

니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금방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을 가벼운 태도라고 여길지

도 모르지만 저는 그게 제 재능이며 장점 이라고 여겼습니다.

“한때 네가 사랑했던 어떤 것들은 영원 히 너의 것이 된다. 네가 그것들을 떠나보 낸다 해도.” 시인 앨런 긴즈버그를 다룬 「킬 유어 달링」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 사입니다. 이 대사를 듣고 “자아 안팎의

경계가 최대한 유연한 몸을 만들고, 그 몸 으로 목소리와 몫이 더 작은 사람들을 만 나고, 그것을 통해 또 변형된 몸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는 것”(나영정 외, 『페 미니스트 모먼트』, p 134 )을 활동가로서의 목표와 지향이라고 밝힌 나영정 선생님 이 떠올랐습니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 이 그것을 나의 일부로 만드는 일이라면, 그리하여 자아와 세계의 경계를 흐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습 니다.

편집자반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어떤

편집자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오래 일하는 편집자, 늙어 죽을 때까지 일

할 수 있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고 답했습 니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편집자로서 사

람들이 사랑하는 책을 만들며 가능한 한

오래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35

서윤아

http://bit.ly/ watchandcheeze

달려라 서윤아!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편집자

도축장 같은 현실 속에서도 문명사회의 빛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 빛은 한때 인간성이라고 불렸었지. 그가

바로 그 빛들 중에 하나였네.

― 웨스 앤더슨,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오지라퍼’, 책을 만나다

타고난 오지라퍼인 저는 세상과 타인을

향한 남다른 관심으로 영화를 전공했습 니다. 정의를 수호하는 히어로보다 일상

을 수호하는 보통의 사람들 이야기, 주 류 담론이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

기를 듣고 싶었고 세상을 향해 그 이야기

를 함께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학부 시절

상계동 지역의 재개발 단상과 철거민 인

터뷰를 담은 첫 단편 르포르타주를 취재

하고 제작하며, 소외된 목소리를 담아내

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기도 했습

니다.

첫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라는 매체 특

성상 관객에게 주제에 대한 충분한 설명

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해 많은 아

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작한

르포르타주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노랑

의 미로』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제 퇴거를 통보받은 동자동 쪽방촌 입

주민들을 한 명씩 호명하며 그들의 궤적

을 추적하고 사회적 분석을 덧붙여 입체

적인 함의를 만드는 과정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깊이 있는 설명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 기획 의도와 내용을 꼼꼼

히 전달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자가 생각

할 수 있는 질문을 남겨두는 것은 많은 매

체 중 오직 책만이 할 수 있는 일 같았습

니다.

무엇보다도 「가난의 경로」라는 칼럼에서

출발한 글이 580 쪽의 책 한 권으로 완성

되기까지 저자 곁에서 함께 원고의 방향

을 잡아주고 의미와 깊이를 더해주었다

는 편집자라는 직업에 마음이 끌렸습

니다. 정보 과잉 시대에서 의미 있는 원고

를 발굴하고 선별하여 하나의 기획으로

소개하는 일은 원고를 쓰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지금 우

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좋은 이야기들을

그냥 흘러가지 않도록 꽉 붙잡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넓은 오

지랖에서 출발한 그 마음이 저를 출판편

집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가장 필요한 곳을 발견하는 눈

출판학교에서는 좋은 기획을 발견하고

원고에 숨겨진 가치를 발굴하는 편집자

의 안목을 얻고 싶었습니다. 출판계 선

배들의 다양한 특강을 들으며 그분들의

출판 철학과 통찰을 습득하고 저만의 시

선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특히 돌고

래출판사 김희진 대표님의 강의에서 많

BOOK EDITOR 36

은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의 사회적 이슈

를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를 다양한 관점

에서 살피며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

는 방법을 익혔고 단행본이라는 매체만

이 할 수 있는 일과 질문에 대해 고민했습

니다.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신경다양성과

교육에 대한 조별 기획안을 만들고 발표

했습니다. 신경다양성 교육과 관련된 담

론을 여러 방면에서 관찰하고, 논의가 뻗

어나갈 수 있는 방향을 직접 지도로 그려

보며 최대한 넓게 사고를 확장했습니다.

다음으로 단행본, 칼럼, 논문, 영화와 전

시 등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료 조사로

논의를 뾰족하게 좁혔습니다. 주제와 전

혀 상관없어 보이는 실용서에서 기획 아

이디어를 얻거나 유튜브 영상에서 좋은

이야깃거리를 발견하며 출판편집자만의

질문을 찾는 일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지

금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체계적인

담론의 장을 만들려면 편집자는 어떤 자 세로 공부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반비 최예원 편집장님의 강의에서는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책의 기획

과정을 살피며, 단행본 개발 과정에서 원

고의 가치를 유지하고 그 이상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한 편집자의 역할을 배

웠습니다. 개인의 경험과 통찰이 사회적

인 것으로 논의될 수 있도록 살을 덧붙이

는 것이 출판편집자의 역할이라고 생각

했고, 인문사회서 읽기 동아리 ‘NCT 19 ’

에서 출간된 책의 보도 자료와 기획서 등

을 새롭게 작성해보며 그 역할을 간접적

으로 경험하고자 했습니다. 독자의 관점

에서 읽었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원고

의 가치를 발견한 후 어느 부분을 어떻게

강조할 것인지 고민하여 편집자적 글쓰

기로 완성하는 과정이 뜻깊었습니다.

가장 먼저 달려 나가는 발

출판학교에서는 나의 기획을 더 많은 사

람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도 배웠

습니다. 위즈덤하우스 박태근 본부장님

의 강의에서 온라인 서점 세 곳의 베스트

셀러 목록을 살피며 오늘날 독자가 필요

로 하는 책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편집자

의 시장 감각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길벗 김민기 실장님 강의에

서는 특정 독자를 찾는 방법과 그들에게 다가가는 법, 그들을 브랜드의 충성 독자

로 바꾸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배운 내용을 적용하고자 원전 오염에 관 한 사회과학서 기획을 만들 때는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공동행동’

에 참여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활동하

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예상 독자와

예상 저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지

금 이 공론장에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무

엇인지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런 현장 취재 경험 덕분에 더욱 현실에 밀

착된 기획안을 구상하는 것이 가능했습

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발로 뛰며 저자와

독자는 물론이고 시급한 논의를 직접 찾

아다니는 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

기획안의 유사 도서 및 경쟁 도서를 조사

할 때는 카시오페아 민혜영 대표님께서

알려주신 시장 분석 사분면을 활용하여

경쟁 도서를 체계적으로 분류했습니다.

특히 『인생실험자』 단행본 기획안 작성

과정에서 자기계발과 심리학 분야의 책

을 사분면 위에 정리했고 그 안에서 제 단

행본 기획의 포지셔닝을 확실히 정했습

니다. 포지셔닝을 정하고 나니 더 날카

로운 패키징과 문안을 고안할 수 있었습 니다. 그 외에도 본문 디자인 보는 감각을

키우기 위해 인디자인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연습했고 디자인 동아리 ‘디진

스’ 활동을 하며 북디자인 레퍼런스를 만

들었습니다. 기획한 책이 가장 필요한 곳

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도착할 수 있

도록 기획과 편집 외에도 마케팅, 디자인

등 제작 과정 전반을 고민했습니다.

가장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하기

매일 아침 한 시간 반이 넘는 등굣길에서

꼭 하는 일은 주요 언론사의 신문 1 면을

확인하고 중요한 기사와 칼럼을 골라 개

인 페이지에 정리하는 일입니다. 이 중에

서 단행본으로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

는 내용은 기획 아이디어라는 라벨로 따

로 표기한 후 주말이 되면 시간을 내어

해당 주제에 대한 자료를 편집자의 관점

으로 넓게 조사합니다. 일주일만 지나도

50개 가까이 쌓이는 뉴스와 다섯 개쯤 되

는 기획 아이디어를 보며 여전히 이렇게

책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바로 그곳에 지금 필요

제2차 일본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공동행동 (2023, 서울시청).

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회과학서를 만

드는 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

『더티 워크』, 『전사들의 노래』처럼 전통

적인 사회과학서부터 『전쟁 같은 맛』 같

은 사회과학 에세이와 논픽션 기획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회과학서

편집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문학 편집

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정보 기술

의 발달로 점차 분야의 경계가 흐려지는

만큼 편집자 역시 분야를 넘나드는 도전

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판학교

생활 중 기획한 「좀비 권하는 사회」는 그

러한 시도의 연장선이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단행본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되 매체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담

론을 만들 수 있는 기획에도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노마드랜드』가 보여준 논픽 션 장르의 성공적인 영상화가 사회과학

서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여러 시도를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편집자는 가장 필요한 곳 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편집자입니다. 그

러기 위해 항상 엔진을 켜두겠습니다. 타

고난 ‘오지라퍼’인 성격을 십분 살려 세상 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원동력 삼 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이야 기를 찾아 달리는 편집자가 되겠습니다.

37

양동혁 Instagram @mindologyst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고 읽을 줄 아는 인문사회 편집자

아아, 이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서 다시 조립할 수 있다면.

― 오마르 하이얌, 『루바이야트』

보편 교양을 지향하지만

자기만의 분야가 있는 편집자

나는 ‘내가 읽은 책들을 바탕으로 내가 읽

을 책을 만드는 사람’이란 편집자의 정의 를 좋아한다. 편집자란 존재는 실제로 이 럴 것 같고 이래야 할 것 같아서다. 출판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지금 갖고 있는 관

심사와 지금까지 축적된 공부 사이의 연

결 고리를 모색 중이다. 그동안 절반은 목

적의식적으로, 나머지 절반은 욕망을 따

라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읽어왔다. 최

근 5 년간 읽은 책의 분야별 비중을 산정

해보면 ‘문학 : 인문학 : 사회과학 : 기타

= 2 : 3 : 3 : 2’ 정도가 될 것 같다. 한국

문학만 편독한다 싶으면 세계문학 서가

앞으로 갔고, 소설만 읽는다 싶으면 시

집을 펼쳤다. 자연과학을 읽는 게 큰 자

산이 될 거란 믿음으로 ‘가늘고 길게’ 읽

고 있다. 잡지를 좋아한다. 새로운 분야

나 대상을 알고 싶으면 잡지를 찾아보는 편이다. 문학, 인문사회, 과학, 재즈, 건축, 브랜드, 사진, 영화 등 주제를 가리지 않

고 읽는다. 특히 『매거진 B 』를 읽으며 최

신 트렌드, 상품을 파는 브랜드의 철학과

전략을 배울 수 있었다. 제현주의 『내리

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

서』, 『일하는 마음』을 읽고 직장인으로서

일을 대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일과

삶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일을

하며 자신을 성장시키고 싶은 사람이 어

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학에서 198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 시, 1990 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 현대 철학, 문학 이론 및 비평을 주로 탐독했다 대

학원에서 1960 1970 년대 지성사 문화

사, 1980 년대 민주화 운동과 학생운동

에 관련된 문헌과 학술서를 들여다봤다

『1960 년을 묻다』, 『원본 없는 판타지』,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같은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대학원에서 배운 게 있다면

역사를 읽는 독법과 태도였다 현재의 관

점을 투사해서 역사를 납작하게 평면화

하지 않으면서 불균질하고 불투명한 역

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독법을 지향

하고 있다

오래 가기 위한 지구력을

기르는 중입니다

출판학교 수업에서 만난 제철소 김태형

대표님께 들은 말이 뇌리에 박혔다 책

BOOK EDITOR 38

을 싫어하지 말라고 책이 싫어질 만큼 일

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편집자 생활

은 외부적인 조건뿐 아니라 내부적인 상

황으로 인해 오래 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타인을 궁금해하

는 열린 마음, 책을 좋아하는 감정이 소진

되지 않게끔 자신을 회복하는 기술이 필

요하다고 느꼈다. 내가 선택한 건 달리기

였다 수업 시간을 좀 더 능동적이고 생산

적으로 보내기 위해, 그리고 귀가 이후에

도 읽고 쓸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달

리기를 재개했다 대학원 재학 시절부터

체력 유지를 위해 7km 달리기와 등산을

즐겼다 군 복무로 단절된 루틴을 회복하

고자 노력했다 장마 전까지 사나흘에 한

번꼴로 7km 씩 달렸고, 폭염주의보가 이

어지자 헬스장에 등록해 유산소와 웨이

트 운동을 병행했다 딱 한 번 10km를 달

린 적이 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

이 수십 번 들었으나 꾹 참고 뛰면 그만

큼 더 뛸 수 있는 몸이 된다는 사실을 알

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막막함에 대처하는 요령이 조금 생겼다

10km 를 생각하면 막막하지만 1km 를 열

번 뛴다고 생각하면 할 만해진다 힘든 구

간을 지나면 괜찮은 구간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

는 꾸준한 사람이 되고 싶다

현장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공부

이렇게 평소 체력을 관리해둔 덕분에 수

업 시간 이후에 학술 행사와 강의를 들

으러 다닐 수 있었다 7 ~8 월에 필로버스

에서 『사람, 장소, 환대』의 저자 김현경

의 8 주 강의를 수강했다. 관심 있는 저자

의 후속작을 상상하며 기획하는 방법이

있다고 배웠다 강의 내용이 『사람, 장소, 환대』에 인용된 사상가들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형식이어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 심화되었는지 확인해볼 수 있

는 자리였다. 관심 있는 저자의 글, 강연, 인터뷰, 학술 발표 등 모든 활동을 꾸준히

따라가려고 노력 중이다 6 월 10 일 토요

일, 학술 행사 ‘청년의 일상, 청년의 노동’

에 참석했다 내가 기획하고 싶은 책 중

하나는 ‘어른이 되지 못한’ 청년이 많아지

고 있는 오늘날 ‘청년 이행기’에 놓인 청

년 세대의 삶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변

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청년학’ 사회

과학책이다 학술 발표가 기획안의 주제

와 맞닿아 있어 기획안을 보강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6 월 2 일 금요일, 탈시설 기

획 토론회 ‘성매매 여성과 시설의 역사’를

보러 갔다 마케터반 동료의 권유로 즉흥

적으로 따라간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새

로운 문제의식을 얻을 수 있었다 다양한

현장을 발로 뛰어다니기 위해 운동을 꾸

준히 할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

타인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인터뷰집과 에세이를 즐겨 읽는다 블로

그에서 자기만의 관점으로 책을 읽고 글

을 쓰는 이를 보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블로그 이웃들에게 주도적

으로 연락해서 만남을 가진 적이 몇 차

례 있다 그중 몇 분과는 친구 사이가 되

었다. 이런 성향이 저자에게 왜 내가 당신

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밝히고, 함께 어떤 책을 만들고자 하는지 제안하

는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 각한다 출판학교에서 소셜 팀으로 활동

했다. 다섯 명의 동료, 세 팀의 동아리를

인터뷰하며 동료들의 밀도 높은 이야기

를 들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길벗의 김

민기 실장님과 터틀넥프레스의 김보희

대표님 수업에서 독자의 욕구와 관심사

를 궁금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

웠다. 독자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편집자

가 되고자 한다

독서 모임을 하고 싶어지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새로운 지식의 지도를 그리고자 서평 무

크지 『교차』를 읽는 동아리를 조직했다

『교차』의 편집진이 ‘제1독자’로 편집자를

상정했던 만큼 예비 편집자 동료들과 잡

지를 함께 읽었을 때 시너지가 극대화될

거란 기대가 컸다 실제로 내게 생소한 의

학과 종교학 서적을 다룬 서평에 대해 동

료들이 감상과 비평을 나눠 준 덕분에 인

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었다 또한 다양

한 분야의 신진 연구자와 아직 국내에 출

간되지 않은 해외 저서에 대한 정보를 얻

을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신새벽 편집자

는 편집자가 지식 생산의 주체로서 글을

좀 더 썼으면 좋겠고, 편집자들끼리 서로

작업한 책에 대해 편집 비평을 주고받는

길고양이 전문 잡지 『매거진 탁! magazine tac! -연구 와 고양이』의 홍보 영상 문안을 작성했다.

‘편집 공동체’를 역설했다. 『교차』 1 호에

실린 편집자들의 대담을 읽고 각자의 자 리에서 지식 장을 따로 또 같이 생산하는

편집자의 느슨한 커뮤니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배울 점이 많은 동료들과 좀 더 긴밀하게

교류하기 위해 8 월부터 『문학과 사회하이픈』을 읽는 동아리 ‘구황작물’에 합

류했다. 동시대의 이슈를 파악하고 이를

긴 호흡으로 구조적으로 사유하는 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출판학교에 다니면서 블로그에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 강의 뿐 아니라 동료들에게 배울 점이 많아 그 들의 말을 흘려버리지 않게끔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일상 기록에서 기획안의 아 이디어를 얻기도 해서 기록하는 습관을 계속 유지하려 한다. 앞으로 ‘인문사회과

학’ 현장의 학문적 성과를 독자의 현실에

접목시키고, 독자와 호흡할 수 있는 언어 로 다듬어 생기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 좋은 논픽션, 인문사회책은 좋은 이야기 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삶이 무엇 인지 생각하게 하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 게 하는 책의 힘을 믿는다.

39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남겨주는 편집자

으로 어린이· 청소년 문학 전문 비평지

『창비어린이』를 구독했습니다. 한국 어

린이 문학의 지난 20 년을 평가하고 다가

양현석

Instagram @con_note_

어린이 문학이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괜찮아”라고 말을 건네는 책

어린이 청소년책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

이들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건네기 위해 서라고 생각합니다. “괜찮아”는 한 아이

가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말입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

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이 어린이· 청소

년책이 지닌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금 못나도, 실수해도, 남들과 달라도, 무

엇보다 잠시 멈춰서도 괜찮다는 말을 건

네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은

타인을 향한 사랑이라 말하는 『마당을 나

온 암탉』, 가치 있는 삶은 나다운 모습을

찾아 떠날 때 시작된다는 『꽃들에게 희망

을』, 때때로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을 선

택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 『연어』. 모두

저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네주었던 책입

니다. 이런 책들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이 청소년 분야의 편

집자가 되어 독자 옆에서 오래도록 읽히

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분야를 공부한다는 마음

올 미래를 내다본 창간 20 주년 특집호에

서 『로봇의 별』과 『봉주르, 뚜르』 같은 좋

은 동화들을 여럿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독자와 평단에서 칭찬받은 작품을 많이

읽어보며 좋은 작품을 알아볼 수 있는 눈

을 키우고 있습니다. 책을 읽은 후에는 개

인적인 감상과 책이 가지는 의미를 짧은

서평 형식으로 적고 SNS 에 꾸준히 게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기록은 문

학에서 시작해 인문과 비평의 영역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

소년 문학의 세계』, 『우리에게 우주가 필

요한 이유』 등 평론가의 책을 읽으며 작

품을 깊이 있게 해석하는 방법을 연구하

고 있습니다. 다양한 독서 경험과 기록이

쌓일수록 어린이 청소년책에 대한 이해

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

고 있습니다.

저는 출판학교 단행본 프로젝트에서 청

소년 소설집 원고를 선택해 편집했습

니다. 편집 기획안 작성을 시작으로 교

정교열, 제목 선정, 판형과 본문 디자인

을 결정하는 등 한 권의 책을 만들며 편집

자로서 수많은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마다 결정 기준은 책을 읽을 청소년 독

자였습니다. 제가 만든 책이 독자에게 조

금 더 친절하게 다가갈 방법을 고민했습

니다. 소설 전반에 입말을 적극적으로 살

리고 독자가 평소 사용하지 않는 단어나

표현은 사용 빈도가 높은 것으로 대체했

습니다. 장소가 바뀌거나 인물의 회상이

길게 이어질 때는 앞뒤 문단과 충분한 여

백을 두어 독자가 차이를 인식하도록 배

려했습니다. 저의 작은 고민과 결정이 모

여 원고가 책이 되고 이 책을 통해 독자에

게 위로와 용기를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보람

을 느꼈습니다.

BOOK EDITOR 40

직접 책을 만들며

대안 학교 교사로 2018 년부터 2022 년까

지 5 년간 일했습니다. 저는 수업에서 쓰

일 책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제가 만든 다

양한 책 중 ‘로컬북 프로젝트’를 소개하

고 싶습니다. 당시 저는 여행과 다양한 교

과를 융합하는 수업을 구상하고 있었습

니다. 생태, 역사, 예술, 인물 등 다양한 지

식을 4 박 5 일간 현장에서 배우는 기획이 었습니다.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

저 다양한 과목의 지식을 융합해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는 지역과 장소를 선정했

습니다. 지역 선정이 끝난 뒤에는 그곳에

서 다룰 수 있는 주제를 선별했습니다. 그

러나 가장 큰 문제는 책이었습니다. 시중

에 다양한 여행 도서가 있었지만, 기획 의

도를 만족시키는 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직접 책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다루

는 내용이 방대했기 때문에 혼자서 모든

글을 쓸 수 없다고 판단했고 학생 저자들

을 섭외하여 원고를 청탁했습니다. 원고

진행 정도를 파악하고 피드백을 주는 등

원고가 완성될 수 있도록 저자들을 도왔

습니다. 완성된 원고를 입수한 후에는 맞

춤법과 띄어쓰기를 점검하고 독자가 이

해하기 쉽도록 단어와 내용을 다듬었습

니다. 마지막으로 주제의 유사성을 기준

으로 목차를 만들어 적절한 순서로 구성

했습니다.

이외에도 프로젝트 수업을 다년간 진행

하며 코로나, 가족 다양성, 미디어 리터러

시, 사랑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습니다.

저는 수업을 자유롭게 구상하는 기획자

로 일했기 때문에 사회 이슈와 트렌드에

대한 더듬이를 바짝 세워야 했습니다. 여

러 책과 뉴스레터를 통해 지금 우리 주변

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일이

우리에게는 어떤 질문을 던져주고 있는

지를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이러한 경

험은 새로운 주제를 배우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또 직접 수업에

쓰일 책을 만들며 꼭 필요한 내용을 누구

나 알기 쉬운 단어와 표현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풍성한 지

식을 담고 있더라도 읽는 사람의 눈높이

를 배려하지 않는 글은 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주제에 관한 관

심과 정보를 효과적이고 정확하게 전달

할 방법을 고민한 경험은 어린이 청소년

교양서를 만들 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 각합니다.

편집자로 오래 달리기 위해

책 만드는 일을 꾸준히 오래 하고 싶은

마음으로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편집

자로 일할 때 필요한 집중력, 끈기, 친절 함은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에서 나온다 고 생각합니다. 편집자가 되기로 결심

한 올해 3 월 1 일부터 현재 8 월 21 일까지 322 86km 를 달렸습니다. 달리기를 통해 몸의 힘뿐 아니라 마음의 힘도 키울 수 있 었습니다. 달리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 힘

든 걸 하고 있나 싶은 순간이 종종 찾아옵

니다. 그때마다 어제보다 조금만 더 달리

자고 인내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마

침내 더 먼 거리를 달리게 되었을 때 성취

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편집자로 오래

일하기 위해 앞으로도 꾸준히 달릴 생각 입니다.

편집자는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편집자

로서 그 부분이 부족하다는 고민이 있었

습니다. 그래서 출판학교에 다니며 인문

교양서를 읽고 토론하는 동아리에 참여

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노력했습니다.

『현대철학 매뉴얼』, 『아카이브 취향』, 『다

른 방식으로 보기』, 『사람들은 죽은 유대

인을 사랑한다』 등을 읽은 후 동료들과

기획 의도, 편집의 장단점, 책을 읽으며

생각한 새로운 기획 아이디어에 관한 이

야기를 나눴습니다. 또 책의 장점을 잘 드

러낼 수 있는 카피와 보도 자료를 써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혼자라면 발견하기 어

려웠을 책을 접하며 인문교양서의 매력

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동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책에

대한 여러 해석을 들을 수 있었던 경험은

지적인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새로운 책

과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동아리 활동은 편

집자로 오래 달리기 위한 기초 체력을 키 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이야기, 돌림노래처럼

그 이야기가 떠나지 않는 책

어떻게 하면 책 만드는 일을 오래 할 수

있을까요? 갈수록 책을 읽는 사람은 줄어

간다고 합니다. 영세한 출판 산업이 마주

할 어두운 미래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여

기저기에서 들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

안해하지 않고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마

음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저는 출

판학교에서 여러 선생님을 만나며 이 질

문에 대한 해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바 로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사랑이 모든 일 을 가능하게 합니다. 책 만드는 일을 즐 거워하고 내가 만든 책으로 세상을 이롭 게 하겠다는 사명감, 무엇보다 책을 향한 사랑이 오래도록 편집자로 일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책과 독자를 사 랑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 래도록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이야기, 돌림 노래처럼 그 이야기가 떠나지 않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41

과학, 인문, 예술을 겸비한

‘잡종’ 편집자

성/여성, 이성/감성…. 이런 고민을 나누

기 위해 출판학교에서 신유물론 동아리

를 운영하고 있다. 신유물론은 이원론을

염세정

https://bit.ly/3P8P6Yz

과학과 철학은 유사한 방식으로 놀라움을 다룬다. 과학과 철학의 경우에 놀라움은 빈 곳, 어딘가 더 발전의 여지가 있는 곳에 이르게 하는 터널의 구멍이다.

― 이언 보고스트, 『에일리언 현상학, 혹은 사물의 경험은 어떠한 것인가』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과학 영재, 철학도가 되다

책은 한 사람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 한 권의 책 때문

에 과학과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두 학문

을 가로지른 사람이 여기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3년간 울산 강남영재교육원

을 다녔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며 자연스럽게 과학자를 지망했다.

『우주 양자 마음』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책에서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 스티븐 호킹과 과학철학자 에브너 시모니, 낸시

카트라이트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물

질과 정신의 교차로를 추적한다. 그들의 논의가 엇갈리는 지점이 과학이 아닌 철 학의 층위라는 점이 흥미로워 철학을 전 공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에서 심리철학, 과학철학, 예술철학

처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분과를 즐

겁게 공부했다. 그러나 철학을 통해 정말

로 배운 것은 단 하나다. 철학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의심하고 질문

하며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다. 철학은 내

게 ‘보편성’ 너머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 었다.

요즘 가장 의심하고 있는 것은 이분법적

구분이다. 문화/자연, 인간/비인간, 남

거부하는 새로운 철학적 사조다. 편집자

반, 마케터반의 동기들과 관련 책을 읽

고 인류세, 동물권, 젠더 등의 문제에 대

해 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

눈다.

신유물론자 마누엘 데란다는 이분법의

문제는 이원성 자체가 아니라 실재하는

개별적 존재들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

라고 말한다.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책이 어떤 미디어보다도

예민하게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

기에 내 인생을 바꿔준 ‘책’을 이제는 만

들어보려 한다.

예술하는 일 그리고 편집하는 일

철학과 함께 내게 경계 바깥을 보여준 것

은 예술이었다. 어릴 적부터 글을 쓰기 시

작해서 2018 년엔 「낭만역학」 외 네 편으

로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최종심에 올

라 “시와 비시의 경계를 외줄 밟는 듯한”

개성을 지녔다는 평을 받았다. 영화제나

미술관도 두루 다녔다. 분야를 막론하고

이목을 끄는 작품엔 공통점이 있었다. 종

종 과학이나 철학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시적인 아름다움을 느낀다. 과학과 철학

과 예술은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려

는 시도라는 점에서 닮았다.

괴테는 “시문학은 보편적인 것을 생각하

거나 그것을 암시하지 않은 채 특수한 것

을 표현한다. 이 특수한 것을 생생하게 파

악한 사람은 ( ) 보편적인 것을 동시에

함께 얻는다”(괴테, 『잠언과 성찰』, p 190)라

고 말한다. 예술은 물론이고 과학이나 철

학 역시 세상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모두는 눈앞

의 구체적인 것을 통해 세상에 대해 말하

려 한다.

출판학교에 다니며 편집 역시 마찬가지

BOOK EDITOR 42

임을 느꼈다. 같은 원고도 편집자마다 달

리 해석한다. 교정교열엔 정답이 없다.

독자에게 전해야 할 온전한 의도도 완벽 한 문장도 없다. 그럼에도 편집자는 누군

가 읽을 한 권의 책을 만든다. 더불어 선

배 편집자님께 항상 “기획은 뾰족해야

한다”라는 조언을 듣는다. ‘특수한 것을 생생하게 포착’한 기획일수록 오히려 독

자와 사회에 잘 가닿는다. 이는 작년 출

판계를 휩쓸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

는다』부터 최근 출간되어 좋은 반응을 얻

은 『전쟁 같은 맛』, 『사랑을 담아』까지 회

고록이 인기를 끄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반드시 한 사람의 인생을 소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3 쇄를 찍은 『게임:

행위성의 예술』은 게임의 예술적 본성을

다루는 철학서지만 개인의 가치 추구 문

제 및 예술 산업과 사회의 관계까지 첨예 하게 건드린다. 이 책처럼 협소한 주제를

뚫고 그 너머를 생각하게 하는 책을 만들

고 싶다.

원고 속에 숨은 말을 찾아내는 편집자

출판학교에서는 협력 출판사가 제공한

원고로 단행본 제작 워크숍을 진행한다.

포레스트북스의 신화학 원고를 받은 후, 기획 단계에서는 핵심 독자와 콘셉트를

설정하는 데 집중했다. 저자 및 역자와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모

든 선택에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다. 워크

숍 과정을 통해 책의 만듦새와 차별성을

결정할 근거는 원고 내부에 있음을 깨달

았다.

신화학 원고는 세계 전역의 신화와 이

를 차용한 다양한 현대 작품을 읽기 쉽

게 제시한다. 또한 「여신과 여성의 신화」

라는 장이 따로 있다. 『최초의 신화 길가

메쉬 서사시』나 『롤랑의 노래』 같은 책

이 서브컬처 향유자의 관심에 힘입어 성

공한 사례가 떠올랐다. 두 책은 원전 번역

서임에도 다른 신화학 분야 도서에 비해

20 ~30 대 여성 독자 비율이 월등히 높다.

이 원고는 매끄러운 문장과 여성 신화라

는 요소 덕분에 서브컬처를 즐기는 젊은

여성에게 보다 매력적인 책이 될 수 있다

고 판단했다.

하지만 단순히 신화 속 여성 이야기만으

로는 핵심 독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이 원고가 웹진 연재에서 출

발한 점에서 착안해 저자가 글을 연재한

다른 웹진을 찾아보았다. 남성 중심적인

기존 신화를 비판하는 글, 신화적 모티프

가 녹아 있지만 여성을 능동적으로 그려

낸 서브컬처 작품을 소개하는 글, 여성 서

사가 어떻게 현대의 신화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글 등을 발견했다. 기획안에서

는 해당 연재물을 싣고 일관된 흐름을 위

해 차례를 소폭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처음엔 역자에게 무례한 행동일 것이라

생각해, 연재물을 직접 번역해서 단행본

작업을 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

만 출판사 대표께서 좋은 책을 만들기 위

해 번거로움을 무릅쓰는 사람이 훌륭한

편집자가 될 수 있다며 추가 원고 수록을

권장하셨다. 매체의 특성과 원고의 분위

기에 맞게 글을 번역하는 일은 어려웠으

나, 덕분에 신화라는 소재와 함께 문화의

재현 양식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사유

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

고유하지 않아서 고유한 편집자

편집자의 업무 영역이 갈수록 확장된다

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는 고충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기쁨

이다. 저자와 독자, 기획과 마케팅, 상품

과 콘텐츠, 이론과 실천 사이에서 모든 것

을 도맡지만 무엇 하나에만 매진하지는

않는 직업. 좋아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

고 여기저기 한눈팔며 살아왔으니 천직

인 셈이다. 덧붙여 마지막으로 한 가지 욕

심을 부리자면, 출판사와 소비자까지도

연결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독자와 가까워지기 위해 마케터반의 동

기와 협업하여 도서 소개 숏폼 채널을 운

영했다. 책을 소개할 때마다 출판사보다

저자나 책의 내용을 강조하게 되는 것을

느꼈다. 물론 최근 여러 출판사가 브랜딩

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다른 산업의

브랜드가 지닌 영향력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어떻게 사람들을 출판사의 가치관

에 공감하게 만들 것인지, 책과 독자가 아

니라 브랜드와 소비자로서 만나게 할 것

인지가 요즘의 관심사다.

편집자는 결국 책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여러 마케팅 이론을 경유하여 독자의 욕

망에서 출발하는 기획법을 알려주신 편

집자님이 기억에 남는다. 수업을 듣기 전

까지는 기획안을 작성할 때마다 만들고

싶은 책을 읽어줄 사람을 상상했을 뿐, 사

람들이 읽고 싶은 책을 그들에게 쥐여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이 독자가 읽고 싶은 책이

되도록 사회를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

경계는 이미 흐려졌다. 편집자라는 직업, 책이라는 매체뿐만 아니라 도서 분야도 그렇다. 요즘 나오는 많은 책이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 에세이 가운데 어느 분야 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다. 이제 편집자 는 불균질한 이야기를 다각도에서 이해 하고 시장에서 적절한 자리에 놓일 수 있 게끔 해야 한다. ‘잡종’인 내가 이런 시대 에 편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커다란 행 운이라고 생각한다.

43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이고호

https://bit.ly/3qHYysr

다는 적재적소 편집자

그리고 자신의 모든 애착을 떨쳐버린 이 자아는 아주 이상한 모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아마존’의 미리보기 기능으로 영어를 공부합니다.

머리말: 독서 인생 주석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

은 학자이자 편집자인 사람이 한 시인의

유작 시에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진행됩 니다. “인간의 삶이란 난해한 미완성 시

에 붙인 주석 같은 것”(p 89 )이라는 문장

이 소설 구조를 고스란히 요약합니다. 저

는 이 인용에서 이상적 편집자상을 찾 아봅니다. 복잡한 세상을 집요하고 섬세

하게 의심하는 태도를, 책이라는 주석으

로 삶의 신비에 접근하는 자세를 탐색합

니다. 그 과정은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는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답을 찾고자 우

선 저는 제 인생에 주석을 달아보려고 합

니다.

13~25행: 사랑하는 글쓰기로

‘1등 기획안’을 만들다

중학생 때 추리소설을 읽고 쓰는 ‘푸아

로’라는 도서부 동아리를 개설했습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을 탐독했던 저는

동아리 활동에 진지하고 즐겁게 몰두했

습니다. 고등학생 때 두 달 동안 학교에

서 진행한 성동혁 시인의 수업을 들었습 니다. 김이듬의 『히스테리아』,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

국』을 읽으며 한국문학에 빠졌습니다. 연

필로 쓴 시를 친구들에게 매주 낭독하는

일은 문학이 대화의 장으로 이어지는 순

간이었습니다. 두 활동에서 느낀 호기심

과 순전한 기쁨은 제가 문예창작학과를

꿈꾼 계기였습니다.

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를 전공하며 ‘동튼’이라는 소설 학회에 가입했습니다.

소설을 쓰며 좋은 문학이 무엇일지 고민

했습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블라디미르 나보코

프의 소설을 읽고 그 문체와 구조를 스스

로 공부했습니다. 좋아하는 작품들의 원

문과 번역서를 대조하며 영어 공부를 병

행했습니다. 「정의로운 장두씨」라는 단

편소설로 교내 문학상인 ‘하옥미 창작기

금’의 소설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매년 학

회 문집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교정교

열을 담당하며, 문장을 쓰는 데 필요한 세

심함과 집중력을 체득했습니다.

‘푸드뱅크’에서 군 대체 복무를 한 경험은

제게 문학 밖의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독거노인, 장애인, 청소년 가장, 비혼모

등 기초 생활 수급자와 차상위 계층 대상

자가 푸드뱅크를 이용합니다. 문학이라

는 상아탑에 열중했던 저는 사회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훗날에 그 변화

는 코로나19 이후의 푸드뱅크 상황을 다

루는 사회과학서 기획안으로 발전했습

니다. 그곳에서 지역아동센터와 교류할

BOOK EDITOR 44
세상에 주석을

일도 많았습니다. 저는 매주 수요일 오전

에 『돌 씹어 먹는 아이』, 『숨은 신발 찾기』

같은 훌륭한 한국 동화책을 직접 선정해

서 아이들에게 낭독했습니다. 1 년 동안

이어진 독서 멘토링으로 아이들과 교감

하며 책의 공공성을 되새겼습니다.

2022 년 6 월에 ‘한겨레 출판편집스쿨

79 기’를 수료했습니다. 저는 선생님들

께서 실제 편집자의 하루와 비슷하게 구

성한 커리큘럼으로 출판 공정을 미리

들여다보았습니다. 7 주 동안 오전 10 시

30 분부터 오후 4 시 30 분까지 ‘일하며’

2차대전과 관련한 인문서 한 권을 기획하

고 편집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동료들

과 ‘부글부글’이라는 토론 모임도 만들었

습니다. 편집자의 시각으로 『김용균, 김

용균들』, 『헌법에 없는 언어』, 『사이보그

가 되다』 등을 읽고 사회과학서 기획 방 법을 분석했습니다.

202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진행한 ‘창비 편집자학교_서울’ 수업을 수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고전의 말투-번역가가 매 만진 단어들」이라는 책을 기획했습니다.

사전과 작법서와 아포리즘을 뒤섞은 ‘옮

긴이의 말’이라는 콘셉트의 번역 에세이

기획안입니다. 번역가가 ‘번역 일기’로 쓴

간결한 작가론이면서 고전 작가들 문체

를 분석하는 작법서로 구성해서 차별점

을 만들었습니다. 좋은 기획에 근접하고

자 유사 도서와 핵심 독자를 분석하며 좌 표평면으로 기획안의 포지셔닝을 설정했

습니다. 제 기획안은 수업 내 익명투표에

서 1등 기획안으로 선정됐습니다.

열정과 희망을 배우며 출판사 사장이 되

는 과정을 그린 원고입니다. 에세이 문법 을 파악하고자 교보문고에 가서 편집자

의 시각으로 에세이 매대를 둘러보았습

니다. 인터넷 서점들의 베스트셀러도 매

일 훑어보았습니다. 길벗 김민기 실장님, 터틀넥프레스 김보희 대표님, 위즈덤하

우스 박태근 본부장님께 구체적으로 배

운 시장 조사 및 핵심 독자 설정 방법을

제작에 활용했습니다. ‘20 ~30 대 여성 독

자’라는 문장을 떠올리는 수준에 머물렀

던 제 상상력은 실제 서점에서 책을 사

는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즉물적인 시

장 감각으로 그 사람의 나이와 얼굴과 취

향 등을 상상했습니다. 그 후에 디자이너

와 의논하며 판형, 표지, 서체, 기획 의도, 콘셉트, 목차 등을 결정했습니다. 이 모

든 과정을 『삶을 받아쓰다-책으로 씻어

낸 생의 얼룩』이라는 제목으로 집약했습

니다.

안온북스 이정미 대표님 수업 시간에 「말 장난으로 배우는 영단어-문학 천재들

이 알려주는 단어 암기법」이라는 인문교

양서를 기획했습니다. 셰익스피어나 워

즈워스 등이 사용한 언어유희로 영단어 를 소개하고 그 말장난이 사용된 작품들 로 영문학 세계를 요약하는 기획입니다.

수많은 영문학 작품을 직접 찾아서 목차 를 구성했습니다. 익살스럽게 기획한다

면 재미있는 책이 될 것 같다는 대표님의

논평을 들었습니다.

동기들과 함께 기획안을 작성하며 모의

기획 회의도 경험했습니다. 반비 최예원

편집장님 수업 때 인류학자 정헌목 님의

『릿터』 연재 원고로 「인류학으로 떠먹는

SF」라는 제목의 기획안을 써보았습니다.

복잡한 인류학적 개념을 소설, 영화, 게 임, 드라마 등의 SF 이야기로 쉽고 재미 있게 정리했습니다. 원고 모니터링을 진

행하며 저자와의 소통 과정도 체험했습

니다. 돌고래 김희진 대표님 수업 시간에 ‘영아 유기’와 ‘해외 입양’이라는 키워드 로 ‘디아스포라 퀴어 예술가’와 관련한 다

양한 자료를 조사했습니다. 유튜브 콘텐

을유문화사 최원호 편집자님, 카라칼 김 영진 대표님, 다다서재 김효근 대표님, 이 현정 편집자님 수업에서 외서 기획 과정 을 살폈습니다. 아마존, 굿리즈, 리터러

리 허브에 직접 접속해 독특한 외서를 조 사했습니다. 국내 서적과 공생하는 훌륭

한 외서가 무엇일지 숙고했습니다. 그 과

정에서 ‘아마존 미리보기 번역가’라는 정

체성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매주 주말 마다 아마존의 미리보기 기능으로 외서

번역을 연습하며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서양철학 공부 모임 ‘전기가오리’에서 운

영하는 ‘영어 텍스트 읽기를 도와드립 니다’도 신청했습니다.

두 동아리 활동으로 다독의 중요성을 알 아갔습니다. 인문교양서를 읽는 동아리

‘적재:적소’를 만들었습니다. 철학, 에세 이, 예술, 역사, 인류학, 사회과학 등 다양

한 분야의 책으로 적재한 지식을 알맞은 자리에 놓는다는 취지의 동아리입니다. 『현대철학 매뉴얼』, 『아카이브 취향』, 『다 른 방식으로 보기』, 『사람들은 죽은 유대 인을 사랑한다』,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자본주의 리얼리즘』 등을 읽고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기획 의도와 콘셉트를 분 석하고 기획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카피 및 표지 문안 작성을 연습했습니다. 『문 학과 사회 -하이픈』을 읽는 문예지 동 아리 ‘구황작물’에도 들어갔습니다. 다양 하고 자유로운 문학관과 시의적절하고

정치적인 윤리관을 글쓰기로 정리했습 니다.

꼬리말:

당장 일할 수 있는 준비된 편집자 오랫동안 편집자 취업을 준비했습니다. 문학서와 인문교양서와 사회과학서를 읽 으며 ‘제너럴리스트’를 꿈꾸었습니다. 단 행본 제작 역량을 여러 출판 교육으로 길 러왔습니다. 그 과정을 독서 인생 주석으 로 간추렸습니다. 지금껏 쌓아온 각양각 색의 경험들로 저는 세상에 질문하는 책

을 만들고 싶습니다. 복잡한 사회를 단순

26행: ‘제너럴리스트’와

‘아마존 미리보기 번역가’를 겸업하다 출판학교에서 단행본 제작 워크숍으 로 다산북스의 에세이 원고를 편집했습 니다. 고아이자 전과자인 사람이 책으로

츠나 인터넷 기사보다 자세하고 예리한

사회과학서를 기획하는 일이 어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료들과의 유익한 협

업 과정으로 수없이 구성을 수정하며 더

나은 기획안을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하고 단일한 동기로 설명하는 책이 아니 라, 난해한 미완성 시에 단 주석처럼 세계 에 물음표를 끝없이 제기하는 책을 소망 합니다. 불가해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 해하려고 책이라는 주석을 늘려가는 편 집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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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Instagram @thisstreetis

기꺼이

문을 열 준비가 된 편집자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시인에서 편집자로

중학교 1 학년 때 국어 선생님께서 숙제

하나를 내신 적이 있습니다. 다음 주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시 한 편을 가져와 친구

들에게 소개하고 직접 낭독까지 하는 것 이었습니다. 강제로 시킨 숙제는 아니었 지만 저는 친구들에게 좋은 시를 들려주 고 싶었습니다. 다음 국어 시간에 시를 가

져온 친구는 저를 포함하여 단둘이었습

니다. 친구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저

는 정호승 시인의 「너에게」를 낭독했습

니다.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

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문장으로 누

군가에게 위로를 주는 시를 쓰고 싶었습

니다. 자발적으로 했던 숙제를 계기로 꿈

을 키웠고 예술대학에 입학하여 문예창

작학을 전공했고 오랜 습작 끝에 2020 년

가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여 본격적

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

지 두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시집을 묶는

과정에서 정말 훌륭한 편집자들과 작업

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 다 할 수 있는 일

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책을 묶으면서 저

는 저자의 마음으로 편집자의 마음을 헤

아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만난 편집자는

모두 원고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를 누구

보다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최초 의 독자였습니다. 아름다운 한 편의 글이

세상에 나올 수만 있다면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사랑하

는 일에 자긍심을 갖고 보람을 느끼는 이

들을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또한 오

랜 시간 시를 쓰면서 갖게 된 가장 큰 능

력이 지구력과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었

기에, 저도 출판편집자가 되어 제 장점과

능력을 발휘하여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

람이 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이상하고 웃긴 이름 ‘잘읽잘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사유하기를 거부했다

면 이 일을 시작하고 싶다는 용기가 생기

지 않았을 듯합니다. 저는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경유하게 되는 사유와 시대의 맥

락이 늘 궁금했습니다. 이러한 지적 호기

심을 가지게 되자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찾아 ‘잘읽잘쓴’이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

었습니다. “잘 읽어야 잘 쓴다”는 이름에

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글을 더 잘 쓰

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

습니다. 하지만 3 년 넘게 모임을 계속할

BOOK EDITOR 46

수록 저는 텍스트에 담긴 언어를 보다 섬

세하고 다채롭게 읽는 능력을 키우는 재

미에 푹 빠졌습니다. 그동안 친숙하지 않

았던 분야의 책을 고르고 용기 내어 함께

읽으면 독서 감각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

습니다. 특히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의 『시간과 물에 대하여』 같은 사회과학

책을 만났을 때 느꼈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후 위

기처럼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문제

를 다루면서도 개인적 경험이 생동하는

책을 저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

하게 들었습니다. 이외에도 김원영의 『실

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으면서 장

애와 소수성이라는 정체성을 원론적으

로 말하지 않고 ‘잘못된 삶’에 대해 ‘소송’

한다는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는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 은유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읽고 ‘현장

실습생’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부딪쳐야

했던 부당한 문제들과 생생한 언어로 들

려주는 이야기가 담긴 사회서에 깊은 관

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책방에서의 1년

아직 직업에 따른 고민이 지속될 즈음 저

는 ‘최인아책방’이라는 곳에서 일하기 시

작했습니다. 여러 일을 하면서 저는 북토

크를 준비할 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북

토크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수

많은 품이 듭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몇

십 개의 의자를 깔고 독자들을 기다리는

시간을 저는 무척 사랑했습니다. 이 시

간은 우리가 서로 다른 언어를 품고 만

나 공동의 감각을 획득하는 일과도 같았

습니다. 이 시간을 꽉 채우기 위해 몇 번

의 회의를 하고 홍보물에 씐 글자 하나를

몇 번씩이나 수정하는 사람들과 일했습 니다. 최인아 대표님과 정치헌 대표님은

제가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살려 직접 낭

독회 행사를 기획할 기회를 주시기도 했

는데, 이 경험이 제게 큰 자산이 되었습 니다. 저는 봄과 여름을 잇는 릴레이 낭독

회를 기획했습니다. 행사 콘셉트를 짜고

작가들을 섭외하고 대본을 작성하고 진

행을 맡았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우리에

게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다양한 콘텐츠

들이 많은 노력과 정성이 모여 탄생하는 결과물이라는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일은 그저 힘든 노동에 불과하다는 점 또 한 깨달았습니다.

출판학교에 다니는 즐거움 글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출판학 교에 들어가기를 결심하고 합격하여 수

료한 경험은 제 인생에 더없이 값진 시간 이었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전환점 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직접 기획안을 쓰 고 단행본을 편집하고 수업을 들으며 편

집자가 독자에게 책 한 권을 건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얼마나 치열하게 고 민하고 텍스트를 세공하는지 풍부하게 배웠습니다. 특히 김보희 대표님의 ‘논픽

션 편집 워크숍’ 수업을 들으면서 편집자

는 편집자만의 시선으로 책을 분석하면

서 틈틈이 ‘먼지’를 쌓아야 한다는 말을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책을 기획하고 만

들 때 필요한 아이디어는 쉽게 보이지 않

고 공중을 떠다니는 먼지처럼, 단번에 오

지 않기 때문에 꾸준히 주변을 살피며 책

에 담긴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뜻이었습

니다. 책이야말로 우리 일상 저변에 제공

되는 하나의 ‘상품’이라는 점을 다시금 배

웠습니다.

설득력 있는 기획안을 쓰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끊

임없는 관심과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저

는 김희진 대표님이 진행한 ‘인문사회서

기획 워크숍’에서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퀴어 가족’이라는 개인적으로 다소 낯선

주제로 단행본 기획안을 썼습니다. 동료

들과 함께 기획안을 쓰면서 단어 하나 가

지고도 끈질기게 사유를 덧입히고 주제

를 섬세하게 다루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 습니다. 또 마케터반 동료들이 기꺼이 협

업을 요청한 덕분에 기획한 단행본이 시

장에 진출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마케팅

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이

후 저는 제가 원하는 편집자 모습을 그리

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책을 많이 팔면

좋겠지만, 그것보다 우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목소리를 담아 누군가의 삶을 바

꿀 가능성을 담은 책을 내는 편집자가 되

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동료들의 힘을 받아

부반장을 맡았습니다. 저는 모두가 원만

하게 교육과정을 수료할 수 있도록 강에 놓인 교량 같은 위치를 자처했습니다. 평

소 동료들의 의견과 고충을 최대한 듣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했고 틈틈이 사 기 증진을 도모했습니다. 이를 통해 편집 자가 배양해야 할 소통 능력을 더욱 키울 수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지 말고 박소란 시인이 쓴 「감상」이라는 시에는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박

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p 64 )라는 구절 이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시무룩한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편집자가 되고 싶 습니다. 누구는 저편의 세계에 있는 이

를 위해 문을 함부로 열지 말라고 할지 모 릅니다. 하지만 이편이든 저편이든 문을 열지 않는다면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일 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편

집자는 기꺼이 문을 열 준비가 된 사람입 니다. 저편의 세계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

디는 이들을 향해 힘차게 문을 열어 이편

의 세계를 보여주고 문턱을 넘나들어 문

이 아닌 통로를 만드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저를 끈기 있는 성실로 채우겠 습니다.

47
낭독회 행사 홍보 포스터가 나왔다!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편집자

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코로나19 의 유행

으로 인해 졸업 논문 발표회가 취소되었

습니다. 졸업 논문을 제출만 하고 넘어가

이도영

https://bit.ly/45zr7rt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성찰력과 주도력을 쌓다

대학 4 년 동안 저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

었습니다. 첫 번째 깨달음은 제가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교 2 학년 때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이라는 책을 접했습

니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 저는 동물 윤

리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어차

피 죽일 거면서 살아 있는 동안 잘 키우면

뭐 하냐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동

물 해방』을 읽으면서 제가 종차별주의자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상대방

의 주장과 근거를 비아냥과 냉소적인 태

도로 거부하지 않고 상대방의 주장을 제

대로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

달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다른 책을 읽

을 때도 주장과 근거를 더 정확히 이해하

고 받아들이고자 노력했습니다.

두 번째 깨달음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

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교에 들

어가서 『장자』를 접했습니다. 저는 『장

자』를 읽으면서 진심으로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안의 고유한 것

은 무엇인지, 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은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찾아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대학교 3 학년 때 졸

업 논문을 미리 제출하고 발표할 예정이

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4학년 졸업하기 전

졸업 논문 발표를 했습니다. 학과 학생 전

체 앞에서 제가 쓴 글을 발표하는 것은 무

척이나 떨리는 일이었고 발표를 준비하

면서 고생해도 별다른 이득이 남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1년간 열심히

쓴 글과 제 생각을 남들 앞에서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득이 없

더라도 가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 남들

의 시선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것이 진정

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깨달음

을 『장자』에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부터 길러온 성찰력과 주도력

은 출판편집자로서의 역량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

고자 노력했던 흔적들이 모여 사회에 꼭

필요한 질문을 할 수 있는 편집자로 성장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콘텐츠를 제작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 동기들과 함께 고

전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습

니다. 처음에는 영상을 만들어 채널에 올

려도 조회 수가 거의 오르지 않고 반응이

없었습니다. 동기들과 함께 유튜브 채널

을 진지하게 바꿔나갔습니다. 저는 그 과

정에서 채널의 성격을 확실하게 잡고 대

본 작성, 녹음, 영상 제작 등으로 구체적

인 역할을 분담하는 것을 주도했습니다.

회의를 통해서 간략한 텍스트로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영상 구성을 변경하

고 유튜브 쇼츠를 이용해서 채널을 홍보

하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

과, 정체되어 있던 구독자 수는 100 명을

넘었고 영상 종합 조회 수는 11 ,000 회를

기록했습니다. 콘텐츠를 제작할 때는 주

도적으로 분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

을 알 수 있었습니다.

BOOK EDITOR 48
불편한

이 과정에서 협업할 때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 또한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결

과를 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팀원들 간

의 의견 충돌이 많았습니다. 하나의 결

과를 내기 위해서 의견을 소통하기가 어

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언제나 그

랬듯이 저는 책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읽고 인간

관계의 하수는 타인의 태도를 따라 자신

의 태도를 결정하지만, 인간관계의 고수

는 주체적인 행동과 태도로 상대방의 태

도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 팀원들과 대화할 때 팀원들이 잘

한 점을 먼저 말하고 수정해야 할 부분을

이야기하고 팀원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제가 먼저 상대를

인정하니 팀원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습니다. 저는 상대의 업무 영

역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더 좋은 결과물

이 나온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출

판학교에서도 단행본 협업과 조별 과제

등에 임했습니다. 앞으로도 상대를 존중

하는 방식으로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는

출판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

먼지를 쌓다 출판학교에서 이현정 편집자님이 진행

하신 ‘해외 도서 편집 워크숍’을 들으면서

출판편집자가 회사에서 어떤 책임과 역

할을 갖는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편집자

의 가장 큰 책임과 역할은 계약을 이행하

는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저는 일을 잘하는 편집자란 좋은 기획안

을 쓰고 편집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이현정 편집자님께서

는 일을 잘하는 편집자란 계약을 잘 이 행시키는 편집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출

판업의 모든 활동은 출판 계약서를 중심

으로 이루어지고 그 계약들은 반드시 일

정한 기간에만 유효한 계약이라는 사실

을 알게 되었습니다. 계약이 제대로 이행

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은 편집자밖에 못

하는 일입니다. 계약이 제대로 이행될 수

있는 시간을 철저히 계획하고 상황에 맞

게 조율하고 확보하며, 만약 시간이 충분

하지 않거나 본인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외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계약

을 이행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

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아직 전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어

려움들을 극복하는 편집자라는 직업에

더욱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돌고래 김희진 대표님의 ‘인문사회서 기

획 워크숍’에서는 좋은 기획을 하기 위해

서는 촘촘히 생각하고 철저한 자료 조사 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퀴어 가족’이라는 주제로 조별 과제

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퀴어 가족

이라는 주제에 맞추기 위해서 퀴어의 이

야기를 통해서 다양한 가족을 보여주는

앤솔러지 에세이를 기획했습니다. 김희

진 대표님의 피드백을 받는 과정에서 저

희 조원들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을 위해 서 저자들의 입체적인 경험을 욱여넣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획안을 쓰는 과정에서도 주제

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가 족 혹은 퀴어라는 단어만을 강조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이후에 기획할 때

주제와 관련된 자료들을 최대한 넓게 조

사하고 주제의 역사성을 먼저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출판학교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경험은

‘단행본 제작 워크숍’이었습니다. 저는

한때 출판사 돌베개의 대표였던 임승남

씨의 자전적 에세이 원고를 맡게 되었습

니다. 저는 너무 과거의 이야기이기 때문

에 독자들이 저자의 상황에 몰입하기 쉽

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고

기획안을 작성할 때 독자들에게 임승남

이라는 입체적인 인물을 어떻게 소개할

것인가를 가장 신경 썼습니다. 저는 발문

을 소제목 아래에 배치하고 임승남의 삶

과 현대사를 정리한 도표를 책 말미에 배

치하여 독자들이 저자를 조금 더 쉽게 이

해할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원고 수정

단계에서는 사실관계 확인을 중점적으로

보았습니다. 1960 년대부터 1990 년대의 과거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관계가 완

벽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러

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소한 단

어나 맥락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실관

계 확인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저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좋아합

니다. 평소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이

나오는 기부 광고를 보면 마음이 불편했

습니다.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가던 중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연민만 을 표시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현대인 의 위선을 비판하는 책이었습니다. 수전 손택은 연민은 휘발성이 강한 감정이기 때문에 연민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쩌면 보

고 싶어 하지 않는 위선들을 제대로 바라 보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타인의 고통』과 같이 불편한 진실 을 마주하게 하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너무 불편해서 행동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책을 만드는 인문사회 편집자가 되 려고 합니다.

49

최서영

https://bit.ly/45h5xYq

나와 너를 우리로 연결하는 편집자

흔치는 않지만, 세상에는 몬테로소의 분홍 벽을 꼭 찾아가야 하는 고양이가 있다.

― 에쿠니가오리,『몬테로소의분홍벽』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수잔 콜

린스의 『헝거 게임』,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 시리즈를 읽고 자랐습니다. 극

한의 상황에 놓인 주인공들과 나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일을 좋아했고 그들을

따라 모험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건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고

만다는 위로도 받았습니다. 아빠와 함께

서점과 만화방에 자주 갔는데 아빠는 꼭

한 권만 고르게 했습니다.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고. 앉은 자리에서 첫 권을 다 읽

고 다음 날 서점에 갈 때까지 기다리던 시

간은 지금 생각해도 설렙니다. 책은 변하

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으며 환상으로 가

득 찬 세계라서 좋아합니다.

세상이 지옥 같더라도 사랑은

별 의미 없이 오랫동안 남는 기억이 있지

않나요? 친구가 초등학생 때 자주 신은

물방울무늬 양말 같은. 그중 한 선생님의

메일 주소가 데페이즈망으로 시작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 단어가 우리 주변의 사

물을 그것이 놓일 수 없는 낯선 장소와 조

합하는 방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때 처

음으로 알았습니다. 제가 기묘한 이야기

에 끌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과 비슷해서

이지 않을까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지옥

같더라도 사랑은 존재한다고 보여주는

문장을 발견할 때면 온종일 그 글자 사이

에 파묻혀 지내고 싶습니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

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으며 외부

와 단절된 마을에서 기이한 일들이 벌어

지고 그 사건이 큰 위화감 없이 서술되는

것에서 소름이 쭈뼛 돋았습니다. 소리 없

이 썩어가는 고립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또한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와 최은영

의 「모래로 지은 집」, 임현의 「거의 하나

였던 두 세계」처럼 인간의 자기기만성에

서 비롯되는 일상 속 균열을 포착해내는

소설도 좋아합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모두 영상이나 다른 매체로 대체할 수 없

는 텍스트만이 가진 장점으로 서늘한 순

간을 묘사한 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텍스트 다듬기

교외 연합 독립 출판 동아리에서 1 년간

원고를 쓰고 각 300 쪽 분량의 책 두 권

을 제작한 경험이 있습니다. 동아리원들

이 쓴 글을 어법에 맞게 교정하고 잘못된

내용을 교열하면서 창작자의 의도를 훼

손하지 않도록 충분히 의견을 묻고 수정

안을 제시하는 과정이 즐거웠습니다. 목

차를 정리하고, 내지 레이아웃에 인디자

인을 이용하여 글을 배치하는 역할을 수

BOOK EDITOR 50

행했습니다. 텍스트를 다듬는 일에 몰입

하면서 편집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

니다. 내가 좋아하면서 일과 배움을 함

께 하는 직업을 갖는다면 꾸준히 할 수 있

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연구 간행물을 교

정하는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비문과

오탈자 수정, 용어와 띄어쓰기 통일, 도표

숫자 확인과 같은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오류 사항을 발견하

고 정리하는 작업이 재밌었습니다. 메모

를 촘촘히 다는 바람에 박사님께서 불쾌

하실 수 있겠다는 걱정도 처음에 들었습

니다. 그러나 그분이 사비로 상품권을 보

내주시며, 꼼꼼히 해줘서 고맙다고 하셨

습니다.

출판학교의 ‘외서 기획 강의’를 듣고 이국

의 언어를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옮겨 고

치는 작업을 실제로 해보기 위해 번역 동

아리 ‘번역자들’을 만들었습니다. 영미 문

학의 퍼블릭 도메인들 중 『폭풍의 언덕』

을 선정해 문학동네, 민음사, 을유문화사

번역본을 원문과 한 줄씩 비교해 분석했

고, 그 이후에는 호러를 주제로 잡아 에

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극」과

오 헨리의 「가구 딸린 셋방」을 번역하고

모임에서는 최종적으로 어떻게 편집하

면 좋을지 토론했습니다. 번역은 원문이

국내 독자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언어

를 변환하는 일이나, 오늘날의 독자에게

설득력이 없는 원문이라면 그 작품을 어

떤 모습의 한국어 판본으로 출간해야 할

지 고민해보았습니다. 번역을 하나의 독

립된 영역으로 인정한다면 내용의 큰 줄

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편집자도 함께

자연스러운 문장을 만드는 데에 적극적 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 니다.

중간자로서 말하기

편집자는 책 한 권을 완성하기까지 중간

자로서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논의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적확한 언어로 말하며

끈기 있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 생활 중

2 년 동안 국어 학원에서 복습용 문제를

만들고, 학생들이 틀리거나 헷갈리는 문

제를 해설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은 원장님이 강의 중간에 한 학생을 데리

고 나와 제게 맡겼습니다. 그 학생이 시험

직전까지도 진도를 맞추지 못하자 원장

님이 제가 그 학생을 전담하도록 맡겼습

니다. 그 학생이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거

나 교재를 가져오지 않아도 끝까지 붙잡

고 가르쳤습니다. 이 일로 그 학생은 꾸준

히 저와 수업했고, 저는 다른 선생님들로

부터 인내심 좋고 침착하게 가르친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천시 심곡동 종합사회복지관에

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자살률이 높은 동

네의 고시원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우울

증 척도 검사를 진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고시원에 방문하여 임의로 인터뷰를 진

행하는 동안 보여주기식 활동을 한다며

비난하는 분을 만났습니다. 낯선 봉사자

가 불쑥 찾아와 민감한 주제를 묻는 것이

원인이었기에, 그분의 말에 공감하며 저

는 대화를 나누고자 찾아온 사람으로 생

각해달라고 설득했습니다. 다행히 그분

은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셨습니다. 이

렇듯 의사소통의 딜레마에 빠지더라도

분명한 언어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편

집자가 되겠습니다.

을 뜨고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작품은 장애인 차별이라는 문제의식과 함께 새

로운 주인공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불효를 저지른 대가로 인물들이 불구가

되었다는 설정이나, 그들이 사회에서 규

정한 정상성으로 단순히 편입되는 결말

은 아쉬웠습니다. 저는 두 주인공이 끝까

지 장애를 가진 영웅으로 활약하고 다양

한 몸들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사회를

상상한 이야기를 발표했습니다.

주류에서 밀려난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

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고 출판학교의

인문사회서 읽기 동아리 ‘NCT 19 ’에서

는 페미니즘, 퀴어, 환경, 노동을 주제로

한 책들을 읽으며 편집 비평을 작성했습

니다. 국내 언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는 LGB 와 트랜스젠더(T) 사이에서 일

어나는 갈등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숀

페이의 『트랜스젠더 이슈』를 읽고 성소

수자가 하나의 공동체로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추가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저 는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혐오당하는 집 단을 가시화하여 다양성을 존중하는 책 을 기획하고자 합니다. 그 책이 이슈로 소

비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독자를 넓은 세 계로 안내할 수 있도록 출판의 전 과정에 서 더욱 예민하게 질문하겠습니다.

우리를 연결하는 편집자

우리는 저마다 드러나지 않은 사연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양이 가족이 삽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묻기

대학에서 고전문학 스터디에 참여해 격

주마다 고전문학을 현대적으로 다시 읽

고 썼습니다. 고전소설 속 주인공이 현실

의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몇 장을 넘기면

유쾌히 해결해버리고 마는 것이 재미있

고, 판본마다 다른 결말을 여러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여성과 장애인을 악인으로 표

현하여 가부장적 이념을 공고히 하는 경

향이 주류적이었으나, 기존 영웅소설의

문법을 위반하는 「한후룡전」류의 작품들

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한후룡과 임허

영은 불구의 몸으로 사회에서 분리되어

고난을 겪지만 결국 부처의 보상으로 눈

기호 한두 가지 정도는 품고 삽니다. 인형 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말은 쉽게 하지 만, 이승우의 「칼」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 럼 아버지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칼을 수 집한다는 이야기는 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있는 소수자 성을 모두의 이야기로 공유하고 확장하 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편 집자는 중간자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 행해야 합니다.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와 독자의 관심사를 맞춰 기획하고, 저자의 표현을 존중하되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 합니다. 앞으로 텍스트를

세밀히 다듬고, 중간자로서 적확히 소통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물으며 이야기로 우리를 연결하는 책을 만들겠 습니다.

51

최주희

https://bit.ly/3sqIETZ

아직 우리에게 오지 못한 책들이 있으니까

제가 땅을 조금 가질 수 있을까요? (…) 거기에 씨를 뿌리고, 자라게 해서, 살아나는 것을 보려고요.

― 프랜시스 H. 버넷, 『비밀의 화원』

그 책 뭐야? 재미있어?

중학교 2 학년 때, 쉬는 시간마다 허겁지

겁 『토지』를 꺼내 읽고 있으면 몇몇 아이

들이 다가와 그렇게 묻곤 했다. 『오만과

편견』, 『폭풍의 언덕』,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을 때도 그랬다. 『반지의 제왕』 때는

조금 달랐다. “그거 영화로만 봤는데. 책

도 재밌어?”

사심 없는 독자로 오로지 책 속에 파묻히

고 싶었던 때는 그런 질문들이 조금 귀

찮다고 생각했지만 출판학교를 다니면서

부터 서점이나 카페, (드물지만)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을 목격하면 나

도 모르게 같은 질문을 한다. 무슨 책이에

요? 그 책 재미있어요? 물론 실제로 말을

붙이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그러고

는 표지를 슬쩍 훔쳐본다. 읽고 있는 표정

은 어떤지, 책에 완전히 빠져들었는지 아

니면 지금 살짝 지루한지도 살펴본다.

편집자의 마음을 조금씩 배워가기 시작

하면서 매일 거리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

람들이 정말 다양하다는 사실을 새삼스

럽게 깨닫는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극작

을 공부하며 언제나 텍스트 내부 깊숙한

곳으로 향했던 시선이, 아직 책이 되지 못

한 텍스트의 예상 독자와 확산 독자를 고

민하는 동안 어느새 주변으로, 바깥으로,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

록을 들여다보면서 편집자는 비평가가

아니라는 말을 떠올린다. 편집자는 수많

은 책 중에서 이 한 권의 책에 기꺼이 돈

을 지불한 독자의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

역기획안을 쓰면서 그 태도에 조금씩 가

까워지는 연습을 한다.

책을 책답게 만드는 것

1 쇄를 찍는 건 2 ,000 명의 사람들을 설득

하는 일이라고 했다. 상상 속에서 2 ,000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같은 책을 사 가는

장면을 그려봤다. 2 ,000 명의 서로 다른

가방 속에 같은 책이 들어 있는 상상도.

‘시장조사 강의’를 들으며 출판이 문화

산업이면서 제조업이라는 사실과 시장

이 제공하는 명쾌한 숫자들의 의미를 편

집자가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

BOOK EDITOR 52

요한지 배웠다. 책이 정신적 유산이자 서

점 매대에 놓이는 상품이라는 사실은 책

의 경쟁력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하는 중

요한 기준이 되었다. 매체가 이렇게 다

양해졌는데,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다양

해졌는데 왜 하필 책을 읽어야 하지? 책

은 무엇이지? 스스로도 곧잘 던지곤 하는

이 근본적인 질문들에 궁색해지지 않도

록 책을 더욱 책답게 만드는 편집자가 되

고 싶다. 책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곧 한 묶음의 글을 손에

쥐고 읽으면서, 언어가 자신의 깊이와 위

력을 드러내 보이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보다 더 근사하고 의미심장한 사건은 없

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획 워크숍’에서 편집이란 경험을 설계

하는 일이며 편집자의 역량에 따라 독자

가 책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질적으로 달

라진다고 배웠다. 편집자가 독서를 차별

화된 경험으로 제공할 수 있으려면 일상

에서 먼지처럼 쌓이는 자신의 관찰을 주

의 깊게 의식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단행본 제작 실습’을 통

해 실제로 체감하고 있는 것처럼, 편집은

정말 수많은 가능성과 방향으로 열려 있

어서 편집자 각자의 개성과 성품, 가치관

에 따라 같은 원고라도 결과물이 완전히

달라지는 특징을 가진 작업이었다.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을 포함해 스스로 납득 가능한 근거를 발

견하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 편집자가 내

리는 크고 작은 모든 선택이 독자가 책에

서 얻는 경험의 질을 좌우한다고 생각하

면 책을 책답게 만드는 일에 늘 세심함과

책임감으로 임하고 싶다. 일상 속에서 찾

은 유효한 근거들을 쌓아나가면서. 김보

희 대표님이 알려주신 목차 분석 도구로

전체 설계 의도를 실질적으로 파악하는

연습도 계속하고 있다.

종이에도 결이 있는 거 아세요?

‘인디자인 강의’에서 디자이너 선생님이

던진 질문. 계속 곱씹게 되었는데 그 이

후 ‘제작 수업’을 들으면서 어린 시절 특

별히 좋아하던 책을 소중히 안고 이따금

쓰다듬기도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책

의 물성이 주는 매혹을 무의식적으로 느

끼면서 책이 더 좋아졌던 것 같다. 종이책

은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

아남았고 사라지기는커녕 그 가치는 계 속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환

경은 종이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어

떤 글이 종이책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

를 조금 더 명확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그 로 인해 종이의 결과 감촉과 여백을 느끼

면서 읽는 행위가 독서의 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편집자가 더욱 잘 이해 하고 작업해야 함을 배워가고 있다.

또한 문장을 교정교열하는 일과 책의 판

형 및 폰트를 정하는 일이 연결되어 있고, 원고의 숨겨진 모티프를 파악하는 일과

표지를 디자인하고 홍보하는 일이 연결

되어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한 권의 책

이 유기적 협업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

라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편집자는

저자, 디자이너, 마케터, 번역가, 제작 담

당자, 인쇄 제본소 등 다양한 사람들과 계

속해서 소통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

음을 알게 되면서 종이에도 결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한다. 종이의 결을 무시

하고서 책을 만들 수는 없듯이, 협업 과정 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미묘한 결들을 볼

줄 알고 조율할 수 있는 편집자가 되기를 꿈꾼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

더 이상 밀리언셀러는 없다, 출판은 이제

절대 주류 미디어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산

업 구조 자체가 붕괴되고 있다는 말들을

들으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라는 구조의 한계와 지속 가

능성에 대한 위기감 반대편에는 문화적

다양성이 확장되면서 오히려 더욱 마이

너한 세계에 접근하는 시도가 가능해지

고 그에 따라 오리지널리티, 곧 자기 자신

에 집중해서 콘텐츠를 풀어내는 것이 가

장 중요해진다는 전망이 있었다.

문화의 최전선에서, 온갖 취향과 트렌드

와 사상이 범람하는 출판 시장에서 가장

나답게 할 수 있는 일의 단서를 찾자면

‘세계관’에 있는 듯하다. 나는 사람이 책

을 읽으며 진정한 앎과 쉼을 누리기를 원

한다. 그리고 그건 진실된 인격과 마주하

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다. C S. 루

이스의 에세이 『오독』을 통해 “한 편의

글이 아주 좋은 글인 것처럼 읽으려고 시

도”(p 45 )해본다는 수용적 자세를 발견

하고서 의심의 해석학이라는 포스트모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고 싶다(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p. 34).

니즘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기를 비

로소 멈출 수 있었던 경험, 승자와 성공

에 대한 뿌리 깊은 통념에 도전하는 애덤

그랜트의 『기브앤테이크』를 통해 자기

계발서가 실용성과 인간성에 대한 통찰

을 모두 담아낼 때 메시지의 효과가 그 어

떤 분야보다 증폭된다는 걸 느낀 경험은

책이 단지 이론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것

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지는 장

소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저자를 ‘만나게’

해주는 이러한 책들은 읽기 전으로는 결 코 되돌아갈 수 없다. 에세이나 논픽션은

특히 저자 자신의 성품과 목소리가 독자

에게 보다 명확하게 가닿는다는 점에서

소설에 버금가는 매력을 느끼는 분야로, 『겸손한 뿌리』의 한나 앤더슨과 같이 아 름답고 깊게 진리를 열어 보여주는 저자 들을 발견해 소개하고 싶다.

어쩔 수 없는 한계와 틈새에도 불구하

고 언어가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관계

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분주하고 고된 일상을 살면

서 기다리고 있는 아직 오지 않은 책들이

있다. 그들이 먼저 기꺼이 사서 읽고, 충 만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 고 싶은 그런 책. 같은 책을 읽으면서 즐 거이 ‘우리’가 되는 그 일을 위해 나는 편 집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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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정 Instagram @hohoruru_

누가 이런 걸

여기에 가져다 놨지?

여기 서서 보면 혼자 다르게 보이고 왜 혼자 다르게 보일까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는 것이 좋아서요.

― 박솔뫼, 『미래 산책 연습』

이상하고 아름다운 책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너는 어디서 이런 이상한 것들을 가져오

는 거야?” 가까운 이들에게 자주 듣곤 하 는 말입니다. 오래된 헌책방에서부터 먼

나라의 작은 서점 사이트까지 찾아다니

며 수상하고 좋은 책들을 만나는 일을 서

슴지 않았습니다. 책이 가진 좋은 이상함 은 무엇일까요? 이상함은 일그러짐, 어긋

남, 뒤틀림, 낯섦, 생경함 등의 감각을 공 유합니다. 이는 굳어진 대상 a 의 입체적 인 측면을 모두 살펴보는 일을 필요로 합 니다. 들리지 않던 것을 듣는 일에서도, 보이지 않던 것을 보는 일에서도, 그렇게

세계에 입체적인 여러 단면을 추가하여

새로이 인식하게 될 때 세계는 한층 더 복

잡하고 선명하고 이상해집니다. 이처럼

이상하고 아름다운 책들은 모두 이런 좋

은 균열과 틈새를 만들고, 이는 독자들에

게 새로운 가능성의 행로가 됩니다.

틈새와 균열의 자리를 면밀히 살피기

출판학교에 오기 전 약 2년간 칼럼니스트

하미나 씨, 비거니즘 웹매거진 「오프」를

운영하는 안담 씨가 여는 글방에 참여하

여 다양한 분야의 칼럼, 에세이, 소설 등

의 첨삭 활동을 했습니다. 글방이라는 자

유로운 글쓰기 공동체는 퀴어, 비거니즘, 페미니즘, 성 노동자들의 윤리 등 동시대

를 살아가는 다층적인 목소리들이 나타

나는 공간이었습니다. 글방 동료들과 함

께 원고가 가진 생생함이 더 간명하고 깊

게 독자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하려면 어

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여러 분야

의 글을 오랫동안 퇴고한 경험은 글의 방

향과 흐름을 살피는 넓은 저변의 안목을

갖추게 했고, 이는 편집자로서 기본기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이 목

소리들이 꾸준히 이어질 수 있는 장을 이

어가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

게 되었습니다. 책은 바로 이러한 목소리

들이 존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반이자

독자와 세계를 연결하는 하나의 판이자

장일 것입니다.

책의 판과 장을 설계하는 일

편집자는 책이 하나의 판임을 인식하고, 책이 놓일 수 있는 맥락과 장을 파악하고

설계해야 합니다. 책의 낯설고 생경한 목

소리는 훨씬 더 세밀하고 설득력 있게 배

치해야 독자에게 가닿을 수 있습니다. 그

러기 위해 편집자는 표제지부터 간기면

까지 유기적인 흐름을 고려해야 하고, 책

내/외부를 구성하는 편집 장치를 여러 각

BOOK EDITOR 54

도에서 해부해보며 요소 하나하나가 독

자에게 어떤 경험으로 다가갈지 고민해

야 합니다.

하나의 글도 어떤 방식으로 제안하고 기

획하느냐에 따라 조응이 달라집니다. 저

자의 이름, 출판사의 백리스트, 독자들의

문화적 취향 코드 등 다양한 요인들로 인

해 독자의 읽기 방식과 경험 방식도 새롭

게 조율됩니다. 이를 중점으로 단행본 협

업 원고를 작업했습니다. 원고는 대중문

화 작품을 통해 다양한 세계 신화를 소개

한 것이었습니다. 웹진에서 연재된 원고

의 특성을 살려 마치 독자들이 매거진을

열람하는 것처럼 키워드 위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목차에 소제목을 달았고, 따로

흐름이 없던 기존 목차에 일관성을 주기

위해 ‘이야기’라는 키워드를 잡아 새로 목

차를 구성했습니다. 또한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신화’를 전하고 싶다는 저자의 의도

를 중점으로 하여 신화는 모든 이야기 속

의 구조와 같다는 것에서 착안해 『이야기

의 뼈들』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는

주제를 관통하는 적확하고 뚜렷한 콘셉

트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또한 오프라인

서점에서 디자이너와 함께 판형과 종이

의 질감 등을 직접 보고 만지며 적극적으

로 소통하고, 어떤 감각으로 책이 전달되

고 느껴질지를 독자의 관점에서 구상해

보며 책의 전체적인 판을 만들어나갔습

니다.

최원호 편집자님의 ‘세계문학 강의’에서

는 「시리즈-두 겹의 풍경들」을 기획했

습니다. 평소 좋아하던 세계문학 작가들

인 발레리아 루이셀리, 테레지아 모라, 아

고타 크리스토프, 다와다 요코 등 흩어져

있던 작가들을 이중 언어와 디아스포라

감각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어 설득력 있

는 새로운 읽기 경험을 제안하는 시리즈

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시리즈라는 형식

으로 할 수 있는 브랜딩의 효과를 인식하

게 했고, 책에 새로이 맥락을 덧붙여 만들

어보고 책이 놓일 장을 구체적으로 설계

해볼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키워드를 쌓고 연결하며

지형도를 그려보기

김희진 대표님의 ‘인문사회서 기획 수업’

에서 ‘노년 퀴어’의 구술 생애사를 바탕으

로 하는 단행본 기획안을 조원들과 만들

만화부터 독립 출판물까지 책의 디자인, 판형, 주요 구 절 등을 수집해놓는 폴더.

었습니다. 퀴어들의 노년이라는 주제는 좁고 확고한 영역이었지만 자료 조사 단

계에서 기획 방향이 방대해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조원들과 함께 이 주제가 어

떤 특정 그룹 안에서만 소화될 수 있는 언

어나 톤으로 이야기되지 않도록 타깃 독

자를 연구자나 대학원생에서 퀴어가 아

닌 노년이나 청년들로 재설정한 다음, 단

행본 한 권으로 풀 수 있는 분량으로 질문

을 좁혀 키워드를 쌓고 연결하며 다듬었

습니다. 이는 책만이 할 수 있는 질문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주제와 문제의식

을 구체화하는 연습이 되었습니다.

또한 편집 기획 분석 동아리를 만들어 조

장으로 활동하며 부원들과 함께 인문사

회, 에세이, 비평, 문학 등 다양한 도서 분

야의 베스트셀러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책까지 두루 살펴보며 책의 기획을 다각

도에서 해부하고 분석해보았습니다. 어

떤 책은 어려운 기획임에도 어떻게 독자

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는지, 혹은 흥미로운 기획임에도 왜 판매 지수

가 낮은지 등 기획의 관점에서 접근 방식

을 다양화해보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타깃 독자를 설정하고, 그에 정확하게 다

가가는 연결 고리를 만드는 감각을 훈련

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편집자는 자신만의

키워드를 쌓고 연결하며 새로운 지형도

를 그려보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안은

별 문화 연구자가 정지돈 소설가와의 대

담에서 사용한 모빌리티 개념을 수집했 습니다. ‘모빌리티’, 즉 이동에 관한 이야

기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나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소설

과 소설이 관계 맺는 방식 등에 적용하여

범용성이 넓으면서도 이동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개념이었습

니다. ‘그렇다면 내국인과 외국인의 정체

성 사이의 이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하

여, 이동의 관점으로 사회적인 관계를 사

유해보는 안은별 연구자의 에세이를 기

획했습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정체성, 언어와 언어 사이의 이동에서 나

아가 ‘목적 없는 이동’, ‘평범하여 후경화

된 이동’으로 관심을 확장하여 이동성이

라는 키워드가 두드러지는 국내 작가의

소설을 선별하였습니다. 저자가 서평과

대담 형식으로 이야기해보는 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비슷할 수 있는

주제를 관점이 다른 키워드로 접근하여

자신만의 방식대로 구획하고 차별화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다양하고 문제적인 글들을 탐독하

고 꾸준히 축적했습니다. 읻다출판사의

서평 무크지 『교차』를 읽는 ‘횡단보도’ 동

아리에 참여하여 철학, 사회학, 정치학, 의학사, 과학사, 인류학 등 폭넓은 분야를 가로지르는 글을 읽고 쪽글을 쓰며 이야 기를 나누었습니다. 현재 활동하는 흥미 로운 작가들을 부지런히 리스트업 할 수 있었고 현재 지식-학술의 장에서 어떤 사안들이 교차하고 있는지에 관한 지형 도를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기본기에 충실한 편집자

이처럼 각 분야에 맞게 깊게 두루 살펴보 는 눈을 가지고 적확하고 뾰족한 질문을 하는 책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들리지

않던 것을 들으며, 보이지 않던 것을 보며

‘누가 이런 것을 여기에 가져다 놨지?’ 같

은 생경한 질문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새 로운 가능성으로 안내하고 싶습니다. 이 상하고 아름다운 책들이 좋은 균열과 틈 새를 만들 수 있도록 원고의 가능성을 최

대한 이끌어낸 제안의 형식으로 책을 만 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글의 안팎을

섬세하게 살피며 책이 독자에게 잘 가닿 을 수 있는 세밀한 행로를 설계하고 싶습 니다. 무엇보다 책의 만듦새를 보고 책이 놓일 자리를 만드는 기본기에 충실한 편 집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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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범

Instagram @mindle_nov

소중함으로 성장하고 싶은 편집자

그런데 막상 내 삶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영수, 『애호가들』

출판학교 등교를 위해 매일 버스를 탑 니다. 낯선 사람들과 서울로 향하는 길은 아직도 새롭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어딘 가로 흩어져 자신의 일상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의 그 꾸준함을 좋아합니다. 하루 하루 쌓인 경험의 소중함을 내 것으로 만 들고, 제가 만든 책이 다시 독자의 소중한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밥상을 차리기 위해

2017 년 입학한 문예창작학과에서 책과

더욱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송지현의 『이 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정영수의

『애호가들』 등 한국문학을 주로 읽으며

현실의 문제에 발을 붙이며 지나간 시간

을 견디고 감내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 니다. 이규빈의 『건축가의 도시』, 카렌 라 드너의 『바빌론의 역사』 등 인문교양서

와 역사서에도 관심을 두고 책을 읽었습 니다. 책을 좋아했고, 같이 책을 읽는 사 람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렇기에 학교에

서 다양한 사람과 같이 책을 읽고 활동하 기를 즐겼습니다. 그 근간에는 ‘좋아하는

일을 하자’는 막연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인문대학 사무실에서 장학생으로 일했으

며, 독립 출판을 하는 선배들과 같이 출판

물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소설 학회를

운영했고 학과 학생회 및 편집부에서 일

했습니다. 작년부터는 ‘좋아하는 일을 직

업으로 할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이 들

었습니다. 그 고민 끝에 출판편집자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고, 출판학교에 들어가

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학과에서 학생회장과 편집부장을 수행했

습니다. 책의 안팎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학과 편집부에

서는 문집을 제작하고 학회 문학 앤솔러

지를 기획, 제작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편

집부원들과 함께 회의하며 책의 방향성

을 잡아나갔습니다. 교정교열과 디자인,

제작까지 출간 과정 대부분을 스스로 공

부하며 다양한 직군의 협업을 이해하고

조정하기가 어려운 것임을 몸소 느꼈습

니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기획부터 발간

까지 한 경험으로 이후 출판학교의 수업

과정에서 단행본 출간 과정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작고 소중한 경험 쌓기

어린 시절엔 그저 책 읽는 것이 즐거웠습

니다. 그러나 이제는 편집자의 시각으로

책을 대하려 합니다. 책이 주는 메시지의

힘을 알았기 때문이고, 누군가는 그 메시

지를 통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음을

BOOK EDITOR 56
경험의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책의 그림자에는

어둠 속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의 고민과

대답이 있습니다. 출판학교에서 책을 배

우며 그 그림자의 무게를 실감합니다. 그

렇기에 책을 만들고 배우는 이 순간을 소

중히 쌓아가고 싶었습니다.

동료들과의 동아리 활동은 문학에만 안

주했던 저에게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설렘을 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독서 취

향의 폭도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인문사

회 도서를 읽고 분석하는 동아리 ‘적재:적

소’에서는 책의 가치를 분석하고 기획의

아이디어를 발굴했습니다. 신문을 같이

읽는 ‘리커버리’에서는 현재 사회의 담론

을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문제의

식을 생각했습니다. 신화와 종교 서적을

읽는 ‘신종 독서 모임’에서는 쪽글로 독서

소감을 공유하며 새로운 관심 분야를 알

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확

인하고 분석하며, 관심이 가는 책들의 표

지와 내지 등을 분석하고 그것이 책 읽기

의 경험을 어떻게 가져오는지도 살폈습

니다. 책이 단순히 종이에 글을 흘린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텍스트가 주는 최고의

경험을 주기 위한 고민의 집합체라는 것

을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출판사

뉴스레터와 인터넷 뉴스 기사를 확인하

며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메모하는 습

관을 들였습니다. 이런 활동들이 기획의

씨앗을 만든다고 믿습니다. 저의 지식 근

력 키우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책 바깥의 당신을 위해 책을 들여다보며 ‘나’라는 최초의 독자 를 생각합니다. 책은 정교한 제조물인 동

시에 독자에게 닿을 수 있는 최고의 경험

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책의 의미

는 빛을 잃고, 독자들은 책을 신뢰하지 않 기 때문입니다. 편집자는 무에서 유를 만

드는 창작자가 아닌 유에서 새로운 유를

발견하는 기획자입니다. 책의 방향성이

독자의 요구와 맞물리게 하는 것이야말

로 편집자의 첫 번째 역할이라고 생각합 니다.

‘단행본 제작 워크숍’에서 맡은 원고의 방

향성도 독자의 만족도에 기반을 두었습

니다. 원고는 기존 신화 도서들과 달리 소

개하는 신화의 폭을 넓고 쉽게 설정했으

며, 대중문화와의 연결점을 통해 ‘살아 있 는 신화’를 강조했습니다. 원고의 차별성 과 함께 아마존 및 해외 서평 사이트, 독

자 블로그 등을 조사하며 음악과 게임, 영 화 등 대중문화로 재생산된 신화의 이야 기에 흥미로워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파 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대

중문화를 이끄는 신화의 조각, 다시 독자

에게 스며드는 신화 이야기”라는 카피를 만들었고, 최종적으로 『스며드는 세계 신

화-이야기의 시대, 신화로 되돌아가다』

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독자를 생각하며 책의 꼴을 고민하다 보 니 자연스럽게 원고를 이해하게 되었고, 기획에 하나의 방향성이 생겼습니다. 책

을 만드는 과정에 재미를 붙이자 원고의

내용과 구조를 더 자세히 파악하고 싶었 습니다. 인도 신화와 북유럽 신화 등 생 소했던 분야를 공부하며 신화 분야에 관

심을 키웠고 역사와 신화 분야의 베스트

셀러를 분석해 기획을 보강하기도 했습 니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라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저에게 새로운 관심사를 만

들어주었습니다.

기획의 시작은 다른 이들의 관심에서 출

발합니다. 저는 학창 시절 농사를 짓고 화 단을 가꿨습니다. 식물과 가까워지며 밭

의 곤충들로 시선을 옮겼고, 꽃을 가꿀 때

마다 주위를 떠돌던 꿀벌에 관심을 두었

습니다. 꿀벌의 개체 수 감소에 맞춰 기업

들이 양봉을 시작하는 사례에 흥미를 느

꼈고, 꿀벌의 부재와 기후변화, 그리고 기

업의 ESG 경영을 엮은 인문 에세이 「꿀 벌을 살리는 기업」 기획안을 만들었습

니다. ‘인문사회서 기획 워크숍’에서 제

관심은 신경다양성 교육이었습니다. 아

동 센터에서 일하며 다양한 아동의 모습 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팀 활동으 로 동료들과 신경다양성의 정의와 담론

을 조사했고 다양한 신경다양성의 범주 와 고유한 신경다양인의 모습을 발견했 습니다. 기획은 ‘신경다양인들의 사회생 활을 세밀히 묘사하는 르포르타주’로 콘 셉트를 잡았습니다. 세밀한 자료 조사를 기반으로 한 콘셉트로 「당신의 색깔은 무 엇인가요」라는 제목의 기획안을 완성했 습니다.

관심에서 출발하는 기획

대학 시절 출판 수업으로 기획안 작성을

연습했던 적이 있습니다. 단행본과 앤솔

러지, 시리즈를 기획했고 그 경험은 출판

학교 기획 워크숍에 더욱 집중하는 계기

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수집한

기획의 씨앗들을 아이디어로 발전시키

고, 콘셉트와 의도를 더해 기획안으로 만

들었습니다. 기획의 폭을 넓히며 동료들

과 선생님들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문

학과 교양, 역사 분야에 관심을 더욱 두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출발선 오늘도 버스를 탑니다. 낯선 사람들과 편 도 두 시간 삼십 분의 여정을 시작하며, 제 생활과 생각이 편집자를 꿈꾸기 이전 과 많이 달라졌다고 느낍니다. 편집자가 된 미래의 저 또한 변해 있을까요? 변화 를 좋아하지만, 몇 가지는 변하고 싶지 않 습니다. 이를테면 꼼꼼하고 사려 깊은 편 집자가 되고 싶은 마음, 경험의 소중함으 로 성장하고 싶은 마음, 책을 읽을 독자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독자를 고민하게 하 고, 우리 인식과 생각의 폭을 넓히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 책이 독자에게 닿아 책의 물성과 정신에 힘입어 삶의 행복으 로 이끌기를 바랍니다. 텍스트의 가치와 독자를 잇는 연결 고리로서 이제 출발선 에 섰습니다. 편집자라는 도로를 꾸준히 달리고 싶습니다.

57

이야기를 포착하고

설계하는 편집자

애정이 점점 커졌고, 대학 졸업을 1 년 앞

둔 무렵 저도 그런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홍연진

http://bit.ly/45oN9Nm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 장일호, 『슬픔의 방문』

책으로 미세하게 새로워지는 경험

이슬아 작가는 서평집 『너는 다시 태어 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의 서문에서 이렇 게 말했습니다. “나로는 안 될 것 같을 때

마다 책을 읽는다. 엄청 자주 읽는다는 얘 기다. 그러고 나면 나는 미세하게 새로워 진다”(p 7). 저는 이 말이 책 읽는 많은 사 람의 마음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미디어의 등장으로 책이 설 곳은 점점 줄어드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독서를 통해 마음의 양식을 채

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독자가

아직 많습니다. 저 또한 세상이 막막하게

느껴지거나 스스로 알맹이가 없다고 느

낄 때마다 책으로 손을 뻗었고, 책은 그때

마다 좋은 길동무가 되어주었습니다.

대학 때 독서 모임을 운영하며 읽었던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는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일상을 점검하도록 했으며, 청

년 담론을 다룬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와 같은

책은 제가 속해 있는 청년 세대와 한국 사

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습니다.

책을 통해 조금씩 변화한 경험이 하나둘 쌓이면서 책이라는 매체를 향한 관심과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출판 관련 서적을 찾아보던 중, 15 년 차 편집자가 쓴 『내 인생도 편집이

되나요?』라는 에세이를 읽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파악한 편집자는 저자의 생각

을 아름다운 물성을 가진 책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하

는 기획자였습니다. 삶이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책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왔고, ‘가

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과 ‘여러 분

야의 사람들과 협업하는 것’은 제가 오래

도록 꿈꿔왔던 일이었기에 출판편집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출판의 흐름을 익히는 시간

출판학교에서의 시간은 출판 공정을 살

펴보고 직접 경험해보는 과정이었습

니다. 다양한 특강과 워크숍을 수강하

며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

를 배웠습니다. 이현정 편집자님의 ‘출판

의 이해’와 ‘해외 도서 편집 워크숍’에서

는 책 한 권이 만들어지기까지 전체 과정

을 살펴보며 단계별 편집자의 업무를 배

웠습니다. 책 만드는 일의 중심에 서 있

는 편집자는 항상 전체를 조망하고 마감

을 기준으로 역산하여 일정을 관리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

니다. 박태근 본부장님의 ‘시장조사 워크

숍’에서는 분야별 베스트셀러 분석을 통

해 해당 분야의 보편적 특징과 최근 경향

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분

석한 분야인 ‘에세이’의 경우, 다양한 에

세이 시리즈의 등장과 인플루언서 저자

의 강세가 눈에 띄었고, 사회 이슈를 다룬

에세이가 늘어나며 에세이와 인문사회

분야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음을 파악

할 수 있었습니다.

출판학교의 핵심 프로젝트인 ‘단행본 제

BOOK EDITOR 58

작 워크숍’에서는 협력 출판사가 제공한

원고로 각자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경험을

합니다. 저는 다산북스의 에세이 원고를

맡아 편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원고

는 전쟁고아 출신으로 생계형 범죄를 저

지르던 인물이 책을 통해 갱생의 의지를

다지고 군사독재 시기 출판업에 몸담으

며 『전태일 평전』 등을 출간하는 이야기

가 담긴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원고를 파

악하는 과정에서 이 원고만의 빛나는 부

분을 찾고, 지금 이 시점에 이 이야기를

출간하는 이유를 고민하며 기획안을 작

성했습니다. 저와 동일한 원고를 편집하

는 학생들이 모인 조 ‘얼킴’의 조장으로

서 조원들과 편집 규칙을 정하고, 조 내부

의 일정 및 의견을 조율하며 교정교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자이너와 협

업하여 기획의 콘셉트와 예상 독자층을

고려한 책의 상을 구체화해나가고 있습

니다.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

을 경험하며 다양한 협업자와 효율적으

로 소통하는 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기획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다

출판학교에 들어와서 가장 막막했던 것

은 ‘기획안 개발’이었습니다. 출판학교 입

학 전에는 막연히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고만 생각했지, 어떤 아이템을 가지고 어

떤 저자와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

구체적인 상이 없었습니다. 출판학교

의 여러 기획 강의를 들으며 깨달은 것은, 결국 기획은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에서 기획의 씨앗을 찾고, 그것과 독자

의 접점을 찾는 일이 기획의 핵심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김보희 대표님의 ‘논픽션 편집 워크숍’에

서 다양한 책을 분석하며 책이 독자에게

어떤 경험을 주는지 느끼고, 편집자의 설

계 의도를 파악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편집자로서 책의 여러 요소를

어떻게 설계하여 독자가 어떤 경험을 하

게 할지 고민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게 되

었습니다. 주제별로 조를 나누어 조원들

과 함께 하나의 기획안을 개발했던 김희

진 대표님의 ‘인문사회서 기획 워크숍’도

기억에 남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자료 조

사와 조별 회의, 발표 및 피드백 과정을

통해 기획을 더욱 뾰족하게 다듬어나가

는 연습을 했습니다. 기획에 대한 막막함을 해소하기 위해 편

집 기획 연습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아리에서는 매달 각자 한 권

의 도서를 선정해 콘셉트, 타깃 독자, 유 사 도서와의 차별성 등을 분석하고, 자신

의 기획 아이템을 발전시켜 기획안을 작

성하는 연습을 합니다. 다양한 기획 강의

에서 배운 이론들과 동아리원들의 피드

백을 참고하며 앞으로 만들고 싶은 책의

구성을 촘촘하게 만드는 연습을 하고 있 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

저는 얇고 넓게 퍼진 취향의 소유자입

니다. 책도 에세이, 사회과학, 인문교양, 문학, 자기계발, 실용, 청소년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가 특히 주목하는 분야는 ‘에세이’입니다.

『에세이 만드는 법』에서 이연실 편집자

는 “에세이는 자서전·자기계발서·인

문서·르포·실용서 등의 속성을 아울러

갖고 있다”(p 22 )라고 말하며, “한 권의

책을 에세이 매대에 놓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이 책이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지

닌 독자나 별난 취향과 명확한 독서의 목

적을 지닌 한정된 독자가 아닌 대중 독자

에게 두루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보편성과

일상성을 지닌 책이라고 선언하는 일과

같다”(p 22~23)라고 말합니다.

저는 에세이의 이러한 ‘경계 없음’과 ‘보

편성’, ‘일상성’에 매력을 느껴 학창 시절

부터 에세이를 줄곧 읽어왔습니다. 최근

에는 ‘좋아하는 마음’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낸 이지수 번역가의

『아무튼, 하루키』, ‘슬픔’이라는 키워드

로 개인적 경험과 사회 이슈를 연결한 장

일호 기자의 『슬픔의 방문』과 같은 독서

에세이를 인상 깊게 읽고, 저자의 이야기

를 책 속 문장과 함께 풀어내는 기획 아이

템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또 젊은 세대에

만연한 ‘중독 문화’를 생생하게 보고하며

파헤치는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와 같

이, 사회과학서이지만 저자의 경험이 바

탕이 되며 에세이의 성격을 띠는 책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에세이와 인문사회

분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출판 흐름 속

에, ‘지금, 여기’를 함께 살아가는 개개인

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비추는 책을 만들고 싶습 니다.

출판학교에서의 배움을 통해 단행본 한 권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노력과 시간, 비 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몸소 느낄 수 있 었습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만들 때 편집자로서 어떠한 태도로 임해야 하는 지 공부하고 고민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 습니다. 또한 저의 관심 주제와 연결된 독 자의 니즈를 파악하여 기획에 반영하고, 콘셉트를 기준으로 책의 다양한 요소를 효과적으로 설계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 니다. 이러한 배움과 경험을 바탕으로, 독 자와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책을 만 들기 위해 부지런히 이야기를 ‘포착하고 설계하는’ 편집자가 되고자 합니다.

59
블로그에 독서 기록을 꾸준히 남겨왔다.

홍우성

https://bit.ly/3E88775

인문·사회학과 문학을

가로지르는 기획편집자

더라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학교 밖에선

친구들과 모임을 하다가 서울시 청년허

브의 지원을 받아 웹사이트 「oz 」(ozozoz

org)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oz」는 누구나

참여해 자신의 캐릭터와 방을 만들고 글

을 올려 나누는 문학 플랫폼입니다. 사회

에서 소외돼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소통하며 살아갈 힘을

얻길 바랐습니다.

“오로지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해 우리에

게 희망이 주어져 있다”(발터 벤야민, 『괴

재밌는 아이디어 생각 중.

다시 일어서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자연스레 편집자를 지망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출판학교 편

집자 과정에 지원하고 최종 면접 탈락이

라는 고배를 마신 후, 문학과 인문교양서

를 주로 내는 출판사의 경력 편집자 모

집 공고에 신입으로 지원해 채용되었습

니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했기에 몸으로

부딪히며 기초를 배워나갔습니다. 기획

부터 교정교열, 홍보까지 출판 과정을 두

루 익히며 실무를 수행했습니다. 철학자

의 인터뷰집과 페미니즘 회고록 번역 출

간을 기획하며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으

나 회사의 사정으로 6개월 만에 퇴사했습

니다. 그 후 새로운 출판사에 지원하기 전

체계적인 교육으로 편집자로서의 역량

을 더 높이기 위해 출판학교에 입학했습

니다. 출판사에서 일해본 경험과 다시 도

전하는 마음을 바탕 삼아 오래 일할 수 있

는 편집자로 거듭나겠습니다.

현실에 발붙이고 현실에 개입하기 출판학교에서 계간지 『문학과 사회-하

이픈』을 함께 읽는 동아리 ‘구황작물’을

만들고 활동했습니다. 문학과 사회의 얽

테의 친화력』, p 192 )는 문장을 마음에 새

깁니다. 제게 주어진 희망이 저 자신이

아니라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

는 말은 어쩐지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었

습니다. 그제야 저 자신을 위한 희망 또

한 가지게 된 듯했습니다. 소외된 타자들

을 위한 희망을 생각할 때 비로소 자신의

희망을 긍정할 수 있었습니다. 구조 안에

서 쉽게 지워지는 몫 없는 이들의 목소리

에 주목하겠습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에도 기꺼이 끼어드는 개입의 태도가

없다면 타자들이 처한 사회문제를 실천

적으로 사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현

실에 발붙이고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편

집자가 되고자 합니다.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교양서 기획

편집 특강’의 개인 기획안 과제로 인문사

회 에세이 「엉망진창」을 기획했습니다.

기획안은 취약한 사회적 조건들을 공유

하는 청년 비평가인 윤아랑과 이연숙이

자신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서신으로 이

루어집니다. 이론적 배경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와 구성원들이 겪는 정신

질환의 연관성에 대한 지적에서 착안했

오로지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해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져 있다.

― 발터 벤야민, 『괴테의 친화력』

힘 한가운데에서 비평을 수행하는 『하이

픈』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썼습

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화록과 글을 웹

페이지에 공개해 동아리 구성원이 아니

습니다. 더욱이 퀴어라는 소수자성은 그

러한 연관성을 강화시킬 것이라 생각했

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디디에 에리봉이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보여주는 것처

BOOK EDITOR 60

럼 자신의 삶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사회

적 글쓰기를 전범으로 삼습니다. 이에 더

해 서신이라는 형식을 택함으로써 어떤

정체성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두 삶이 교

차하며 합치하기도 어긋나기도 하는 대

화의 문학성을 담고자 합니다.

함께 배우며 만드는 기쁨

저에게 출판학교는 환대의 장소였습 니다. 선생님들과 친구들로부터 지식과

지식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등교하는 아침마다 크고 작은 설렘을 느

꼈습니다. 경쟁보다 함께 가는 것이 중요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설령 제가 경쟁

을 요구하는 구조에 놓이더라도 함께라

는 가치를 잊지 않으며 다른 가능성을 상

상하고 모색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 또한 세상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같은 마음으로 출판학교 ‘단행본 제작 워 크숍’에서 『신화와 바나나』를 책임 편집 했습니다. 편집자반 친구들의 도움을 얻 고 디자이너와 협업을 하면서도 ‘책임’

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

니다. 소통할 때는 아집에 빠지는 걸 주

의하는 동시에 자신이 관철하려는 지점

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

나의 책을 여럿이 함께 만들면서도 그 과

정을 총괄하며 결과를 책임지는 편집자

의 역할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원고

는 신화학자인 저자가 오늘날 영화, 게임

등의 대중문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신화 이

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쉽고 친숙한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저자에게

공감해 그 의도를 최대한 살려 편집했습

니다. 책의 첫 장부터 주요하게 등장하는

바나나형型 신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인

간을 상징하는 바나나를 제목에서 신화

와 병치했습니다. 고대 인류의 세계 인식

을 담은 신화는 대중문화의 기저를 이루

며 현대까지 살아 있고, 이는 인간의 관계

성과 유한성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

은 것과 통합니다. 또한 호기심을 불러일

으키고 인상에 남는 제목인 ‘신화와 바나

나’와 어우러지며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

는 표지 디자인을 디자이너와 함께 고민

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획을 통해 독자들

이 신화를 쉽고 흥미롭게 접함으로써 신

화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세계와 인간

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얻기를 기대했습 니다.

이제는 팔고 싶다

좋은 책에 대한 고민만으로는 부족하다

는 것을 출판학교 ‘시장조사 워크숍’을 통 해 배웠습니다. 온라인 서점들을 비교, 분 석하는 강의를 듣고 베스트셀러 목록을

꾸준히 살펴보는 습관을 얻었습니다. 타

깃 독자를 정할 때는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책을

많이 팔기 위해 필요한 시장 감각이란 빠

르게 변하는 시장을 파악하고 따라가면

서도, 변하지 않는 점을 포착해내는 것임

을 배웠습니다.

진지하고 문제적인 내용을 가볍고 재미

있는 형식으로 전달하며, 책의 물성을 적

극적으로 내세워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

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

람들이 책에 담긴 질문과 이야기를 재미

있다고, 자신의 삶에 필요하다고, 멋져서

따라 하고 싶다고,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

겠다고 느끼게끔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

하려 합니다. 저는 신자유주의가 약속했

으나 만족시키지 못한 사람들의 욕망에

주목하며,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은 개인적

인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을 함께

고려할 때 진정으로 가능한 것임을 매력

적인 형식으로 보여주고자 합니다.

앞서 소개한 기획안 「엉망진창」의 형식

을 인문사회 에세이로, 더 구체적으로는

서신 교환으로 설정한 것도 같은 고민에 서 비롯했습니다. 최근 출판 시장에서 인

문학, 사회학, 과학 등 학문 분야의 정교

함을 부담스럽지 않은 에세이 형식에 담

아내는 책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는 현상 에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기존에

‘감성 에세이’로 대표되던 에세이 장르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보다 다양해지는 동

시에 내용 측면에 대한 기대 또한 높아지

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엉망진창」의 예상 저자를 자기 삶

을 서술함에 있어 취약한 사회적 조건들

에 관한 구체성을 기대할 수 있는 당사자 로, 그리고 학문적이고 분석적인 측면을 기대할 수 있는 평론가로 설정했습니다.

또한 서신 교환이라는 형식은 독자들에

게 내밀한 발화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들여다보는 느

낌으로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인문학과 출판업의 위기’라는 말은 오랫 동안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저는 현 상황 을 다른 관점에서 되짚어보고 위기라는 이름의 잠재력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고 자 합니다. 사람들의 지식에 대한 갈망이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책 을 지성의 상징으로 여기는 에너지 또한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들이 순진함이나 이상에 머 무르지 않고, 윤리적이고 탁월한 출판 전 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계속 고민하고

실천하고자 합니다.

학교에서 함께 배우며 책 만드는 기쁨을 제 안에 간직한 채로, 이제는 더 넓은 세 상으로 나가 회사에 소속된 편집자로서 사회의 독자들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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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보러 간 전시가 닫혀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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