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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NONIA

Contents

Editor’s Preface₩₩₩₩₩₩₩₩₩₩₩₩₩₩₩₩₩₩₩₩₩₩₩₩₩₩₩₩₩₩₩₩ Thomas Timpte, OSB My Life as Monk ₩₩₩₩₩₩₩₩₩₩₩₩₩₩₩₩₩₩₩₩₩₩₩₩₩₩₩₩₩₩₩₩₩₩₩₩ Francis Ri OSB RB, Principles for Reading and Commentary₩₩₩₩₩ Christian Schütz OSB Vow of Stability₩₩₩₩₩₩₩₩₩₩₩₩₩₩₩₩₩₩₩₩₩₩₩₩₩₩₩₩₩₩₩₩₩ M. Salus Tchoi OSB Benedict’s Peace ₩₩₩₩₩₩₩₩₩₩₩₩₩₩₩₩₩₩₩₩₩₩₩₩₩₩₩₩₩₩₩ Thomas Timpte, OSB Concerning the Epilogue to RB 7 ₩₩₩₩₩₩₩₩₩₩₩₩₩₩₩₩₩₩₩₩ Placide Deseilles The Monk and Impossible Tasks ₩₩₩₩₩₩₩₩₩₩₩₩₩₩₩₩₩₩ Jerome Kodell OSB Thoughts in Spiritual Life ₩₩₩₩₩₩₩₩₩₩₩₩₩₩₩₩₩₩₩₩₩₩₩₩₩₩₩₩₩₩₩ Daegu Priory The Sadness Corroding our Desire for God ₩₩₩₩₩Bernardo Olivera OCSO Collatio Prima Abbatis Chaeremonis = Coll.XI ₩₩₩₩₩₩ Joannes Cassianus The Korean Mission of the St. Ottilien Congregation₩₩₩₩₩₩₩₩₩₩₩Jeanne d’Arc Pak OSB

Vol. 33, 2008 Summer


성 베네딕도회의 영성단편들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표지 설명 : “Gero-Kreuz”: 가장 오래된 대규모의 십자고상, 970년경, 참나무, 독일 Köln 대성당


11. 편집 서언₩₩₩₩₩₩₩₩₩₩₩₩₩₩₩₩₩₩₩₩₩₩₩₩₩₩₩₩₩₩₩₩₩₩₩₩₩₩₩₩₩₩₩₩₩₩₩₩₩5 진 토마스 12. 나의 수도생활관 ₩₩₩₩₩₩₩₩₩₩₩₩₩₩₩₩₩₩₩₩₩₩₩₩₩₩₩₩₩₩₩₩₩₩₩₩₩₩₩₩₩7 이수철 프란치스코 13. 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24 크리스티안 쉬츠, 양숙희 이사악 옮김 14. 베네딕도회 수도서원: 정주 ₩₩₩₩₩₩₩₩₩₩₩₩₩₩₩₩₩₩₩₩₩₩₩₩₩₩₩₩₩₩40 최미숙 마리마 살루스 15. 베네딕도 성인이 말하는 평화₩₩₩₩₩₩₩₩₩₩₩₩₩₩₩₩₩₩₩₩₩₩₩₩₩₩₩₩₩61 진 토마스 16. 베네딕도 규칙서 제7장 맺음말에 대해서 ₩₩₩₩₩₩₩₩₩₩₩₩₩₩₩₩₩69 쁠라치도 드세예, 조성옥 에노스 옮김 17. 수도승과 불가능한 일들₩₩₩₩₩₩₩₩₩₩₩₩₩₩₩₩₩₩₩₩₩₩₩₩₩₩₩₩₩₩₩₩₩₩82 제롬 코델, 조성옥 에노스 옮김 18. 영성생활에 있어 생각의 문제₩₩₩₩₩₩₩₩₩₩₩₩₩₩₩₩₩₩₩₩₩₩₩₩₩₩₩₩₩90 포교 베네딕도회 대구 수녀원 19.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썩게 하는 슬픔 ₩₩₩₩₩₩₩₩₩₩₩₩₩₩₩₩₩₩₩135 베르날도 올리베라, 홍명선 엠마누엘 옮김 10. 캐레몬 아빠스의 첫째 담화 ₩₩₩₩₩₩₩₩₩₩₩₩₩₩₩₩₩₩₩₩₩₩₩₩₩₩₩₩₩162 요한 가시마노, 진 토마스 옮김 11. 성 오딜리아 베네딕도회의 한국선교(1909-1949)₩₩₩₩₩₩₩₩182 박보영 쟌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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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서언 해마다 날들이 무더워지면『코이노니아』 를 인쇄소에 넘길 때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전남 화순 전원의 암자에서 인사를 드린다. 이 곳 작은 공동체에 온지도 이제 4개월이 지났다. 우리가 이 새 수도원에서 아직까지 별 다른 활동을 할 수는 없지만 베네딕도회의 ora et labora의 리 듬 안에서 우리 여섯 형제들이 열심히 살고 있다. 나에게 노트북이 있으니 왜관의 큰 집에서 작업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본인은 한국어(제 2 외국어 아닌)를 제 7외국어로 배웠고 또한 컴퓨터를 잘 하지 못하지만 젊 은 형제들이 친절하게 도와주어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과거에『코이 노니아』 의 묶음이 100% 번역문으로 되어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형제자매가 직접 저술한 논문이 절반에 이르는 것이 특징이다. 고마운 일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기고를 기대한다. 왜관 수도원의 회원으로 특히 고맙게 생각한 것은 포교 성 베네딕도회 대구 수녀원의 박 쟌다르크 수녀의‘성 오딜리아 연합회의 한국 선교에 관 한 연구’ 이다. 이 글을 통해 본인이 계속 궁금하게 생각했던 몇 가지 점들 을 풀 수 있었다. 내년이면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 뜻 깊은 해를 맞이해서 성녀 오딜리아 연합회의 형제 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베네딕도 회원들이 이 글을 관심 있게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 본인이 언급하고 싶은 것은‘생각의 문제’ 에 대한 대구 수녀들 의 글이다.‘생각’ 들의 문제는 고대 수도자들의 큰 관심거리였다.『코이노 니아』 를 계속 보아온 독자들이 아는 바와 같이 이 문제를 처음 체계적으로 다룬 분이 에바그리스우스(Evagrius)였다. 에바그리우스가 8가지 ‘log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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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i’(생각)라고 했던 것을 가시아노가‘악습’ (코이노니아 30집, 141쪽 참조)이라고 불렀으며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하나를 빼고 7가지 죄종 즉 ‘칠죄종’ 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안셀름 그륀 신부가 이 가르침을 현대 심 리학과 연결시키는 일을 즐긴다. 이번에 대구 수녀들은 그와 비슷한 일을 한 미국 수녀회의 글을 간추려서 번역하고 새로 정리해서 옛 수도승들의 지혜를 우리 현대인들이 쉽게 소화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 수정 트라피스트회 수녀들이 그‘생각’내지‘악습’가운데 특히 수도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akedia’에 대한 트라피스트회 총장의 글을 번역하였다. 언젠 가 에바그리우스와 가시아노의 고전적인 고찰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 끝으로 글을 쓴 이들과 번역하며 수정한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분도인쇄 출판사 직원들에게 편집위원들의 이름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08년 6월 하순 진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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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도생활관 이 수철 프란치스코

1 . 수도자는 누구인가? 1.1. 하느님을 찾 음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하느님을 찾는 맛으로 살아가는 자가 수 도자이다. 과연 여러분은 무슨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가? 토마스 머 튼은 인간은 깊은 내면에서는 모두가 수도자라 했다. 수도원(monastery) 은 전통적으로‘하느님의 집’이라 부르며, 여기서 사는 수도자(monk)를 ‘하느님의 사람’이라 부른다. 이들이 하는 일은‘하느님을 찾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하루 일곱 차례 공동으로‘하느님의 일(Opus Dei)’인 기도를 바친다. 그러니 하느님은 수도자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의미라 할 수 있 다. 그렇다. 수도자는‘무엇을 하기 위해’가 아니라,‘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수도원에 왔다. 구체적 업적의 성취나 자기실현이 아닌 하느 님의 사람이 되어 충만한 존재로 사는 게 그의 궁극 목표다.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삶의 꼴이다. 지상의 보이는 그 무엇을 찾는 게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는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죽을 때 까지 하느님을 찾는 내적 여정 중의 순례자들이다. 언젠가 써놓은 자 메 꽃’을 나눈다. 7-8월에 버려진 밭둑에 가꾸지 않아도 줄기 작 애송시,‘메 차게 가지들 뻗어가며 꽃들 피어내는 나팔꽃 비슷한 야생화로 흡사 하느 님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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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도생활관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로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 피어내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어 수도자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을 찾는 갈망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 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그리움이, 사라지면 수도생활은 물론 영성생 활은 생기를 잃는다. 하여 수도자를‘갈망의 사람’,‘그리움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저절로 깨어있게 되고 기 도하게 된다. 여기서 마음의 눈이 열려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하느님 을 만난다. 여기서 갈망, 깨어있음, 기도, 개안(開眼), 마음의 순수, 만남 이 일련의 연쇄 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노력 만 강조하다 보면 우리의 삶은 고단해진다. 늘‘하느님을 찾는 사람’과 더불어‘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의식할 때 겸손할 수 있으며 균형 잡힌 영성이 된다. 사실 성경은 모두가‘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사람을 찾는 하느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젠가 써놓고 크게 위로를 받은‘고요한 호수가 되어’자작 애송시를 나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역설적이지만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자가 수도자이다. 이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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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님이 우리를 찾아주셨기에 하느님을 찾는 삶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큰 힘이요 위안이다.

1.2. 공동생활 가톨릭교회의 수도생활은 공동생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자에 겐 공동생활 자체가 힘든 수행이다. 힘들어도 공동생활을 통해 비로소 사 람이 되고 수도자가 된다. 애당초 공동체적 인간 존재이기 때문이다.‘사 람 못 된 게 중 되고, 중 못 된 게 수좌 되고, 수좌 못 된 게 부처 된다.’라 는 불가에 속담이 아주 시사적이다. 홀로의 은수생활은 함께의 공동생활 안에서가 바람직하다. 사실 수도공동체는 획일적이지 않고 함께와 홀로 의 균형과 조화를 충분히 배려하여 다양성의 일치에 주력한다. 수도공동체의 일원인 수도자는 세 측면의 신원을 지닌다. 첫째, 수도원은 영적 전장(戰場)이요 수도자는‘그리스도의 전사(戰 士)’다. 전통적으로 수도생활은 영적전투라 불리어 왔다. 이기적 자기와 의 싸움, 보이지 않는 악과의 싸움이다. 끊임없이 깨어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세상 악과, 또 이기적 나와 싸 워가야 하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인 그리스도의 전사가 수도자이 다. 그러니 수도원은 영적 전장이 되고 동료 수도자는 전우(戰友)가 되어 전우애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도고마성(道高魔盛), 도가 높은 곳에 마귀 가 들끓는다는 말이 있듯이 악의 세력과 이기적 나와의 치열한 영적 전쟁 터가 수도원이기도 하다. 사실 옛 사막의 수도자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악 마와 싸우기 위해 자진하여 영적전장인 사막을 찾았다. 둘째, 수도원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학원(學院)이요 수도자는‘그리스도 의 학인(學人)’이다. 평생 현역의‘그리스도의 전사(戰士)’이듯이,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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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졸업인 평생 배워야 하는 평생 학인이 수도자이다. 베네딕도 성인 역 시 그의 규칙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한다.‘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 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RB머리 45-46). 마태복음에서 예수 님 역시‘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 다.’(마태 11,29-30)하고 말씀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 역시 주님이자 스승인 당신께 배워야 함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학인인 수도 자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수행이 들음과 순종과 겸손이다. 겸손한 마 음으로 침묵 중에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 니 그리스도의 학원인 수도원에서 동료 학우(學友)들과 함께 평생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 살아야 하는 평생학인(平生學人)이 수도자이다. 셋째 수도원은 그리스도의 가정(家庭)이요 수도자는‘그리스도의 형제 (兄弟)’ 가 된다. 동료 수도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맏형으로 모신 수도가정 의 형제들이 되며 저절로 전우애(戰友愛)와 더불어 형제애(兄弟愛)가 형성 되기 마련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 72장에서 다음 같은 이상적인 형제공동체를 염원하고 있다. 내용이 너무 아름다워 대부분 인용한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 이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 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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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인도하실 것이다.”(RB 72,3-12). 그러니 수도공동체내의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전사(戰士), 그리스도의 학인(學人), 그리스도의 형제(兄弟)라는 세 측면의 신원을 지닌다. 이 세 신원의 창조적, 긍정적 긴장 중에 깨어있는 수행자로서의 수도생활이 가 능하다. 그러나 우선적 강조점은‘그리스도의 형제(兄弟)’에 있으며, 그 리스도의 형제 안에 포섭되는 전사요 학인이다.

2 . 수도자의 영 성 2.1. 수 행 의 동 기 와 목 표 수도생활(monasticism)은 수행생활(asceticism)이고 수도자는 수행자 (修궋者)이다. 수도자의 하루 삶 전체가 수행으로, 먹고 자고 입고 말하 고.... 수행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저절로 수행자가 아니라 처음 부터 배워 습관이 될 때 덕이 되고, 비로소 수행자가 된다. 수행의 동기는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본능적으로 수행을 통해 표현을 찾는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 문에 세상 재물의 포기가 가난이요, 결혼의 포기가 독신이요, 자기 뜻의 포기가 순명이다. 수도자 쪽에서 보면 포기이고 하느님 쪽에서 보면 봉헌 이다. 그러니 기도, 노동, 성독, 겸손... 모든 수행 덕목들이 사랑의 자발 적 표현들이고, 자발적 사랑에서 우러난 수행생활을 통한 마음의 순결이 요 내적 자유의 삶이다. 마지못해 또는 의무로서 살기보다는 자발적 사랑 으로 기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래야 수행생활은 무거운 짐이 되지 않고 기쁨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자발적 사랑의 표현이 포기의 수행들이고 이 런 수행은 자유를 목표로 하나 자유 자체가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수도자의 자유는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종을 목표로 한다. 사실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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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처럼 모두의 종이 되어 주님과 이웃을 겸손히 섬길 때 참된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다. 하여 저는 즐겨 교회와 수도원을 서비스업이라 칭하고 사제나 수도자는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 말한다. 이어 서비스업의 3대 요소, 즉 첫째 사람이 좋아야 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야 하고, 셋째 환경이 좋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2 . 2 베네딕도회의 영 성 2.2.1. 하느님만을 찾는 영성 이미 수도자의 신원에서 간략히 밝혔다. 수도성소 역시 하느님을 찾는 열정으로 식별된다. 수도자의 유일한 일은 하느님을 찾는 일이요 하느님 의 사람이 되는 일뿐이다. 하루 이틀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 지 하느님을 찾는 항구한 내적 여정 중에 있는 수도자들이다. 이들의 모 든 수행들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자 동시에 하느님을 찾는 방편 들이다. 수행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관상(觀想)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 한 번으로 끝나는 만남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고 만나는 삶의 여정이다. 태양을 향해 아무리 달려가도 태양은 늘 거기에 있듯, 하느님은 늘 달려가도 거기에 계신 분 같으나 이미 태양빛과 태양 열로 우리를 만나는 태양처럼 늘 우리를 당신 빛과 생명으로 만나신다. 누군가 수도원을 찾아 노(老) 수사님에게 물었다. “수사님은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노 수사님의 다음 대답 말씀이 지극히 평범하나 의미심장하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그렇게 살아갑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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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이르는 지름길의 첩경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아마 사람 수만 큼 하느님을 찾는 길도 다 다를 것이다. 단 하나, 좌절하지 않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 오르는 것이 다. 비단 수도자의 삶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의 여정이기도 하다. 하여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자포자기의 절망이 큰 죄라 고 한다. 백절불굴, 넘어지면 하느님 찾는 열정으로 곧장 일어나야 영적 탄력도, 영적 감수성도 손상되지 않는다. 2.2.2.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 수도자는 진공상태에서 막연히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성경과 규칙을 지도(地圖)로 하여 성령의 인도 하에 하느님을 찾는다. 구 심력과 원심력이 균형이 잡혀야 존재하는 공동체는 흡사 태양을 중심으 로 궤도를 형성하여 태양 주위를 도는 태양계 별들의 공동체와도 같다. 태양계 같은 공동체에 구심력으로 작용하는 태양 같은 중심의 그리스도 께서 계시기에 가능한 수도 공동체이다. 서로 좋아서 사는 게 아니라 중 심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기에 공존공생의 한 몸의 유기적 공동체이 다. 바라보는 중심인 그리스도가 없다면 공동체는 곧 공중 분해될 것이 다. 그리스도께서는 공동체는 물론 개인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이 된다. 매일의 공동전례인 미사와 시간경의 기도는 모 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확인하며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깊이 함을 목표로 한다. 2.2.3.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3대 서약 베네딕도회의 영성은 다음 3대 서약, 정주(stabilitas), 수도승다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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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 morum), 순명(oboedientia)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복음 적 권고의 청빈, 정결, 순명의 서약이 12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 립되기 이전 6세기경부터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이 세 서약을 해왔다. 첫 째, 정 주(定住) 서약은 늘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산이나 나 무에 견주는 게 좋겠다. 뿌리 없이 떠도는 불안과 두려움의 삶이 아니라 평생을 삶의 중심인 하느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공동체 안에 나무처럼, 산처럼 제자리를 잡아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안정과 평화의 삶이다. 현대 인의 영혼의 병은 고요히 머물지 못하고 침묵하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 정주의 뿌리 내림이 약해 왠지 모를 불안과 두려움에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말해야 하는 현대인들이다. 베네딕도 성인이 생각했던 이상대로 산 다면 수도자의 정주를 위해 수도원은 원내에 일터를 마련하여 각자에게 소임을 부여함으로 공동체 성원들은 원내에 가정집 같은 본원, 기도를 위 한 성당, 일하기 위한 농토나 작업장이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저절 로 봉쇄 관상 분위기의 형성과 더불어 자급자족의 수도가정 공동체가 된 다. 하느님만을 찾는 단순 소박한 공동생활 자체가 복음 선포의 선교가 된다. 파견(mission)으로서의 선교보다는 초대(invitation)로서의 선교 며,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기 때문에 수도원은 끊임 없이 찾아오는‘영혼들의 쉼터’가 되고 환대(hospitality) 영성의 중요성 이 크게 부각된다. 둘 째 서 약 은 수 도 승 다 운 생 활의 서약이다. 끊임없는 회개와 내적 쇄 신에 전념하는 삶이요, 모든 수행 덕목들을 충실히 준수하는 삶이다. 아 무리 좋은 환경이나 사람도 끊임없는 수행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 면 결국은 그 환경이 그 환경이 되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기 마련이 다. 바꿔야 할 것은 외적 환경이나 사람이기 보다는 마음이다. 마음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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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면 나날이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기위해 끊 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수도생활이다. 마음이 깨어 새롭게 살아나야 몸의 건강도 뒤 따른다. 하여 필자는 정주를 산에, 수도승다운 생활을 맑게 흐 르는 강에 견주길 좋아한다. 밖으로는 산 같은 정주에, 안으로는 강 같이 흐르는 내적 여정의 수도승다운 생활이다. “밖으로는 산/안으로는 강/산속의 강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강(江)이듯이,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수 도승다운 생활’의 수행생활이 없으면 수도자의 정주는 안주의 타성에 젖 은 생활로 전락하기 십중팔구다. 셋 째 서 약 은 순 명이다. 이 수행 역시 사랑의 자발적 표현이다. 의무로 하는 순명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에 순명이다. 진실한 순명은 성숙의 잣대이며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순명의 길을 통해 하느 님께 간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명하 셨다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고백했다. 하느님 말씀에 순명하고 장상에게 순명하고 규칙에 순명하는 수직적 차원의 순명과 더불어 형제들 상호 간 의 수평적 순명으로 나누기도 한다. 순명 없이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공동체 형성은 불가능하다. 가난이 나 정결보다 더 힘든 수행이 자기 뜻을 접는 순명의 수행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통해서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다고 한다 (히브 5,8). 어찌 보면 우리 삶의 여정은 순명을 배워가는 삶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다.‘산다는 것은 순명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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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마지막 최후의 순명이자 봉헌이라 일컫기도 한다. 일상의 크고 작 은 순명을 잘 해야 마지막 순명인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하여 필자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세 수도서약의 영성을 유행을 타지 않는 보편적 영성이라 말하고 싶다. 유행을 타지 않는 검정 양복처럼, 1500여 년 동안 유행을 타지 않고 계속 되어 온 세 수도서약의 영성이다. 가정공동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부부 신자들은 베네딕도회 수도자 들처럼 하느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가정 공동체 안에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간다. 타성에 젖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회개와 내적쇄신으로 내용상 으로는 이미 수도승다운 생활의 서약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 서로 사랑하 고 순명하며 살아가기에 화목한 가정생활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자의 세 서약은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건강한 그리스도교 가정공 동체를 위한 보편적이자 필수적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3. 하 루 일 과 3.1. 미 사 가톨릭 수도자들의 보이는 가시적 중심은 미사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 게 똑 같은 날은 없다. 매일이 유일한 새 하늘, 새 땅의 새 날이다. 삶의 이정표와도 같은 매일미사가 하루의 내외적 질서를 잡아 준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은 미사의 아름다움이다. 하루의 삶은 미사로 수렴되고, 미사는 하루의 삶으로 확산된다. 부단한 하느님에로의 수렴(收斂)과 세상으로의 확산(擴散)은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하다. 마침 저의 자작시‘온 세상을 제대로 삼아’라는 글을 나눈다. 언젠가 아침 떠오른 둥근 해가 마치 성체 처럼 느껴졌고 주님께서 불암산 가슴을 활짝 열고 미사 드리는 듯 했다.


이 수철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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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께서도/아침마다 미사를 드리신다. 산(山) 가슴/활짝 열고/온 세상 제대(祭臺)로 삼아 모든 피조물 품에 안고/미사를 드리신다. 하늘 높이/들어 올리신/찬란한 태양 성체(聖體)!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가슴마다/태양 성체 모시고/태양 성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미사는 가톨릭신자들에겐 영적 삶에 종합영양제와도 같다. 성경의 온전 한 이해를 위해서는 미사가, 미사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경이 필수 이다.

3.2. 공공시편기도 많은 부분을 노래로 바치는 것이 좋다. 읽는 것보다 노래로 하면 두 배 의 기도 효과가 있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한다. 3천 년간 검증된 기 도 교과서가 성경의 시편이다. 모두가 각자의 마음과 감정을 고스란히 시 편에 담아 시편을 자신의 기도로 바칠 때 공동체의 일치는 물론 성경에 기초를 둔 올바른 영성이 형성된다. 필자가 제일 사랑하고 좋아하는 기도 가 수도공동체가 노래로 바치는 시편전례기도다. 영혼에 찬미와 감사의 양 날개를 달고 하느님의 푸른 하늘을 훨훨 나는 기분이다. 좌우간 하느 님을 찬미하는 기쁨에 사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다. 지난 4월 말 쯤 배 평 생 한 번 만 이 라 도’ 꽃 만발했던 여기 요셉수도원의 배 밭을 보며 쓴,‘평 라는 글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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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건 하늘 향한 사랑의 고백이다 온 땅을/새하얗게 덮은/배꽃들/순결한 사랑 평생/한 번만이라도/하늘 임 향해/이런 사랑 활짝 꽃 피어 본적 있다면/두말할 것 없이/그 인생 성공이다.” 온 땅을 하얗게 덮은 배꽃들을 표현해 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마 침 인터넷에 올렸던 위 글에 대한 다음 어느 독자의 댓글에서 위로와 더 불어 깨달음을 얻었다.“지난 월요일 식물원에 나들이 갔을 때 가지마다 하얀 배꽃이 마음이 아렸는데... 임을 항한 사랑의 고백이었군요. 수사님 은 평생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꽃으로 피어내시는 봉헌의 삶을 사시는데요.”그렇다. 하느님 향한 사랑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시간이 여기 수도자들이 시편 성무일도를 바치는 시간이다. 시편을 노래할 때의 행복에 가득 찬 수도자들의 얼굴들이 마치 활짝 피어난 꽃들같이도 보인 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고백의 시편들을 노래 기도로 바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시(詩)와 노래(歌)와 고백(告白)과 기도(祈禱)가 하 나 되어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는 시간이자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관상기도시간이 공동시편기도 시간이다. 알게 모르게 이런 살아계신 하 느님 체험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깊게 하며 더불어 우리의 하느님 향 한 믿음, 희망, 사랑을 더욱 성장하게 한다. 이와 더불어 나쁜 기억으로 인한 마음의 내적 상처는 점차 치유되어 서서히 부정적 삶에서 긍정적 삶 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또한 잠재의식 안에 내재해 있던 악성(惡性) 이나 마성(魔性)도 서서히 정화(淨化)되고 성화(聖化)되어 전 존재의 변 형이 이루어진다. 한 번 고백으로 끝나는 시편공동기도가 아니라 평생 꾸준히 규칙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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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쳐야 풍성한 축복을 받는다. 기도생활에 특별한 비법이나 요령, 지름길 은 없다. 좋든 싫든 감정 따라 가지 말고 의지적으로 꾸준히 규칙적으로 기도 바치는 것을 습관화 하여 제2천성으로 함이 좋다. 영성생활은 습관 이요, 결국 습관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기도를 잘하는 방법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지금 여기서부터 기도가 잘되든 잘 안 되든 개의치 말고 실천하면 된다.

3.3. 성 독(聖 讀:Lectio Divina) 수 행 및 그 의 확 장 요즘 많이 보급되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성경독서)는 사막 수도자들 이후 오늘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전승되어온 성경독서법이다. 특별한 독서법이라기보다는 열심한 신자라 면 이미 알게 모르게 렉시오 디비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로 하 는 독서가 아니라 기도하는 자세로, 단순하고 겸손한 믿음으로 온몸과 마 음을 다해 하는 성경독서 수행이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깨어 눈으로 보고 입술로 소리 내어 읽고 귀로 듣고 코로 말씀의 향기를 맡으며 온 몸 으로 느끼며 읽는, 오관을 총 동원한 전인적 통합적 독서이다. 영적독서 와는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말 그대로 영혼이‘살기위해서’, 기도 가득 한 고요한 분위기에서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체화(體化)하기 위한 성경독서법이다. 하여 영적독서와 구별하여 ‘Lectio Divina’를 거룩한 독서, 성독(聖讀)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라틴 어 발음 그대로‘렉시오 디비나’라 부르기도 한다. 대개 수도자들의 렉시오 디비나는 12세기 카르투시안 수도회 원장 귀 고2세가 마련한, 읽으며 듣고(listening), 묵상(meditation)하고, 기도 (prayer)하고, 관상(contemplation)하는 4단계 방법을 따른다. 사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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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이전까지는 묵상, 기도, 관상 모두가 성경 안에서 이루어졌기에 성 경을 떠난 묵상이나 기도, 관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세 종류의 성경을, 즉 신구약 성경, 내 삶의 성경, 자연 성경을 예로 들면 서, 렉시오 디비나는 비단 신,구약 성경에만 국한 되는 게 아니라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관상하는 자세는 내 삶의 성경은 물론 자연 성경에 까지 확대되어 전 삶이 관상적이 된다고 강조한다. 위에서 인용된 저의 시들은 자연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한 결과이다.

3.4. 묵 상 수 행 매일 수도자들이 여러 차례 바치는 성무일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는 끊임없는 기���요 늘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사는 것이다. 역시 수도자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목표로 매일 두 차례 약 30분간 집중적으로 짧은 성구를 되 뇌이며 의식적으로 듣는 묵상 수행을 한다. 요즘 가톨릭교회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향심기도, 비움 기도, 기타 명상기도 등 모두가 원리는 동 일하며 유구한 수도승 전통 안에서 검증된 인류의 보편적 유산과 같은 묵 상기도다. 필자가 20여 년 간 수행해온 묵상기도 방법을 소개한다. 예전에는‘마 라나타’성구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동방수도승의 전통적 기도인‘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 (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 많은 저 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네 단락으로 나눠 호흡에 맞추어 약 30분씩, 오전, 오후 2회 바친다.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이‘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마음에 평화와 위로를 준다. 정해진 수행 시간뿐 아니라 여유 시 간에, 산책할 때, 잠자기 전, 성체조배 때, 미사 전, 마음과 몸을 추스르기 에 참 좋은 기도이다. 이런 짧은 기도의 끊임없는 반복 수행이 늘 주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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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 안에 살게 하며,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주며 내적 상처를 치유해주 고 분심을 없애 준다. 마침내 성무일도, 미사. 성독, 노동... 모든 수행을 집중하여 분심 없이, 갈림 없는 마음으로 할 수 있게 되고 말 그대로의 관 상적 삶이 실현된다.

3.5. 기 도, 일, 성 독(聖 讀:Lectio Divina)의 균 형 과 조 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베네딕도회 수도 가정의 가훈이 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다(the more spiritual...the more real). 하 늘 향한 기도가 이상이라면 땅에서의 일은 현실이다. 기도와 일의 균형과 조화는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 하는 잣대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삶 은 기도와 일, 그리고 성독이 대체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혹자는 기도에 있어서 신비가가, 일에 있어서 전문가가, 성독에 있어서 학자가 되면 이 상적인 베네딕도회 수도자라 한다. 몸의 균형과 조화가 지켜져야 건강하듯 기도와 일과 성독의 균형이 갖 춰질 때 건강한 영적 삶이다.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경우, 수도원 같은 조화와 균형의 일과는 아니더라도 부수적인 것들은 가능한 한 떨쳐버리고 본질적인 기도와 일, 성독이 어느 정도의 균형을 갖추도록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부수적인 것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이 낭비되며 삶의 조화와 균형이 깨지고 있는가. 과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기도와 일, 성독에 투자되는가? 기도와 일, 성독은 구별될지언정 분리되 지는 않는다. 성독은 기도에 자양분이 되고, 기도는 일에 스며들어 일 또 한 기도가 되게 한다. 세 요소가 서로 내적으로 순환관계를 이루며 상호 침투하면서 마침내 삶이 기도가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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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일과표의 중 요 성 하루 이틀, 며칠은 되는 대로 살 수 있어도 기나 긴 세월을 무질서하게 지내다간 얼마 못가 몸과 마음은 망가진다. 일과표의 중요성은 수도 전통 의 지혜이다. 평생 한 곳에서 단조로운 반복의 정주(定住)의 삶을 건강한 영육으로 늘 새롭게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일과표 덕분이다. 수도생활의 평범한 그러나 아주 중요한 지혜가 일과표의 준수이다. 밖으로는 언제나 그 자리의 산 같은 정주의 삶이 타성에 젖은 안주의 삶이 되지 않는 것은, 매일 일과표에 따라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 같은 삶이 이를 받쳐주고 있 기 때문이다. 일과표가 몸에 배면서 점차 안팎으로 자유로워진다. 외적 질 서와 내적 질서, 외적 안정과 내적 안정은 상응관계에 있다. 외적으로 균 형과 조화를 갖춘 일과표의 준수는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이런 기도와 일, 성독을 몸과 마음에 배게 하여 제2의 천성이 되게 한다. 일과표는 그대로 삶의 궤도를 뜻한다. 일과표라는 삶의 궤도에 따라 하 루를, 평생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이다.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삶, 감정 따라, 기분 따라 살지 않고, 삶의 궤도에 따라 살아갈 때 내적 고요와 안 정에 날로 깊어지는 내적 여정의 삶이다. 비록 세상 속에서의 삶에 수도 원과 같은 균형 잡힌 일과표는 힘들더라도 어느 정도의 질서 잡힌 하루의 일과표는 영성생활에 필수이다.

3.7. 마 무 리 몇 년 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모임에서 뚜렷이 부각된 문제는 셋으 로 요약되었다. 첫째는 수행정신의 이완, 둘째는 수도성소의 감소, 셋째 는 경제적 자립이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셋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수도자 본연의 수행에 충실할 때 성소문제와 경제문제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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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 수도 전통이 가르쳐주는 지혜다. 수행자로서 의 본연에 충실함이 우선이라는 이야기이다. 수도생활의 타락은 언제나 세속화와 부유화로 시작되었고 개혁은 늘 복음적 고독과 가난의 원천으 로 돌아감으로 시작되었다. 하느님으로 시작해 하느님으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수도자 의 하루 일과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는,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단순 소박한 본질적 삶이다. 전혀 환상이나 허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수도생활은 이벤트가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단순 평범한 생활이다. 신기하고 별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심심한 맛을 즐기며 충만한 존재를 사는 수도자들 이다. 모든 부수적인 것들은 떨어내고 본질적인 하느님 추구에만 몰두하 는 수도자의 모습, 마치 단풍잎들 다 떠나보낸 만추의 가을 나목(裸木) 같기도 하다. 하여 진정한 수도자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사 는 수도자이다. 죽음 있어 환상은 말끔히 걷혀 삶이 하느님의 소중한 선 물임을 깨닫는다. 매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평생을 하루처럼, 매일 새 하늘과 새 땅을, 영원한 현재의 오늘 만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수도자들이다. 마치 어둔 세상 밝히다가 떠오 르는 동녘 태양 빛에 사라져 가는 별들 같은 존재가 수도자들이다. 얼마 전에 써 놓은 글로 강의를 끝맺는다. “밤새/영롱하게 반짝이며/어둔 세상 환히 밝히다가 ‘주님/ 제 사명을 다했으니 이만 물러갑니다.’ 떠오르는/태양빛 속으로/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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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크리스티안 쉬츠1) 양숙희 이사악 옮김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6세기의 문서이므로 그 시대를 말해주고 그 시대 의 흔적을 반영한다. 규칙서는 이탈리아 중남부, 특히 남부 갈리아(Gaul) 지방과 동방 수도승생활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규 칙서는 자극을 받고 그 자극에서 발생하는 필요와 질문에 대해 응답한다. 또한 규칙서는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적응력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규칙을 주석할 때는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맥락을 명 심해야 한다. 이것은 사소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데 대단히 도 움이 된다. 그러나 규칙서는 고대 수도생활의 기원과 전통에 그 원천(sources)을 두므로 규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기준들보다 훨씬 더 폭넓게 접근해야 한다. 사실 원천들은 성규의 역사를 이루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규칙서의 가르침과 규정(attitudes and customs)을 보여 준다. 성규에서도 원천들은 계속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규를 형성하 고 그 해석에 도움을 준다. 이 과정에서 베네딕도는 성경의 증언, 수도생 활 창립자들, 선구적인 인물들, 수도생활의 영적 유산, 자신의 경험, 주위 환경조건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성규에는 전사(前史)를 형성한 다양한 ‐‐‐‐‐‐‐‐‐‐‐‐‐‐‐‐‐‐‐‐‐‐‐‐‐‐‐‐

1) Christian Schülz는 독일 Schweiklberg Abbey의 아빠스이다. 원래 Kommentar zur Benediktusregel에 실린 글을 Andrew Thornton(Saint Anselm Abbey in Manchester, NH) 이 영어로 옮긴 것이다. American Benedictine Review 58(2007년)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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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과의 대화가 나오는데, 그 최우선적인 관심은 한결같은 열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성규를 주석하는데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 한 전제조건이다. 성규는 1500년 전에 씌어진 이래 계속 전해져 오면서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150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는 역사의 여과를 통하여 규칙서 를 읽고 주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성규를 읽는 것은 확인과 풍요 (confirmation and enrichment)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상대화와 거부(relativization and rejection)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시간과 공 간, 종교심 그리고 해석의 차이로 빚어진 거리를 넘어 우리와 성규 사이 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인 형제자매들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 열망이 우리 모두를 회수도자 로 묶는 공통된 구심점이며 베네딕도와 베네딕도 이전의 수도승 선배들 과 함께 하느님을 향하게 한다.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수도승들이 체득 하고 발견한 경험들과 방법들을 시범적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성규에 서 다루고 있는 경험들을 우리도 체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느 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성규를 해석하는 공통기반이 되어야 한다. 성규 를 해석한다는 것은 각각의 고유한 방법으로 성규 자체와 현실과 경험에 의지한 대화이기 때문이다. 규칙을 설명할 때에는 언제나 이 해석이 어떠한 규범을 따르는지 분명 히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서의 특성 때문에 한 가지 이상의 해석이 가능하다. 현 주석은 무엇보다 규칙서를 영적 생활을 위한 지침서로 보는 데, 이러한 넓은 관점은 성규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 영적인 응용, 전례의 쇄신, 수도생활의 이론등과 같은 풍성한 관점들과 통합을 용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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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특히 다음의 관점들이 이 주석의 특징이다.

1 . 규 칙(regula)) 으로서의 특 성 성규는 자신을 규칙2),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초보자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3)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성규가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았으며, 동 시에 미래를 향해 계속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규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우리는 성경을 참된 규칙(regula)으로 간주했던 고대 수도생활 의 맥락 안에서 규칙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 한,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규범들, 구전전통, 전 기적인 본보기 혹은 아빠의 말씀들, 그리고 심지어 수도원의 문자화된 삶 의 방식 모두를 규칙(regula) 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규칙” (regula) 의 특성은 삶을 위한 안내, 지시, 질서, 그리고 지속성이다. 베네딕도의 규칙도 예외 없이 의도적으로 수도승의 삶을 돕고자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베네딕도는 가능한 한 우연성과 임의성을 제거하고 상 황과 개인에 구애받지 않는 공동생활을 위한 지침을 세우고 있다. 베네딕 도는 질서가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고, 긴장을 풀어주고, 평화를 이룩 하는 힘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사실 영성생활은 질서 지어진 삶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규칙의 이러한 특성에 근거하여 성규의 각각의 규정들을 읽 고 해석해야만 한다. 즉 각 구절의 의미는 전체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만 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이 주석은 성규의 어떠한 부분도 누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규칙서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

2) RB 3.7; 23.1; 32.5; 37.1f; 60.2; 64.20; 65.17; 66.8; 73. 참조 3) RB 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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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성경과의 조 화 베네딕도는 전통과 조화를 이루면서,“하느님의 권위로 (씌여진) 신. 구약성경의 말씀”을“인간생활의 가장 올바른 규범”4)으로 분명하게 제시 한다. 이것은 베네딕도가 성규가 성경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의 하여 인도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열망은 성규의 구성과 구조, 성규 전체의 정신과 언어 속에 퍼져있다. 성경과 성규는 분리될 수 없는 일치를 이룬다. 베네딕도가 삶에 필요한 가르침을 자주 성경말씀에서 인 용하거나 성경말씀에서 그 근거를 찾는 데에서 이러한 일치를 엿볼 수 있 다. 더욱이 성경 말씀과 성규의 말씀은 성규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통교하 고 있어 어느 것이 성경에서 온 말씀인지 혹은 성규 고유의 말씀인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사실 성규에는 성경 말씀이 분명히 인용되었음은 물론이고, 성규의 언 어 자체가 성서적인 용어, 개념, 이미지로 젖어 있다. 그래서 즉시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성규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은 분명히 성경말씀에 서 취한 것이다. 이것은 성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서적 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성규가 성경을 단일한 차원의 관점에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규의 중심은 성경 특히 복음이다.5) 이 복 음은 결정적으로“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義)”6)에 초점을 맞춘다. 결 론적으로 성규는 오로지 성경의 정신만을 따르며, 성경의 정신 안에서 그 길을 생각하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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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B 73.3.

5) RB 머리말 21 참조

6) RB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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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3 . 전통과의 연 관 성 베네딕도는 아빠스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할 때 마태오 복음 13장 52절 의 부유한 창고에서 새 것들과 헌 것들을 꺼내는 집주인을 모범으로 삼는 다. 여기서 우리는 성규 전체의 편집과 구조를 특징짓는 일종의 기본적인 원칙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가 전통을 대단히 존중한다는 사실이다. 그 래서 그는 자신의 표현, 의견과 경험들을 서술하는 것을 삼가한다. 이러 한 전통에 대한 그의 태도는 성규에서 교부들의 증언을 거듭 언급할 때7) 드러난다. 그는 교부들의 살아있는 지식이 생명을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속성의 요소를 강조하는데 이는 긴 세 월과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가치가 증명된 것이다. 그래서 베네딕도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수도원에서의 삶 또한 지속성을 요 구하며, 지속성을 전제로 하고 있고, 지속성을 기초로 하여 영위된다. 지 속성은 삶에 독립성과 항상성을 주고, 삶에 일정한 규범도 제시한다. 베네딕도는 전통을 존중하는 동시에, 경험을 또 하나의 결정적인 원칙 으로 삼는다. 사실 베네딕도는“경험”이라는 단어를 단지 두 군데에서만 언급하지만,8) 그가 원천들을 분별 있게 다루는 것을 볼 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성규를 썼다는 것이 명백하다. 분별의 덕 discretio)을 보면, 그 배후에는 주관성이나 임의성의 요소가 전혀 없다. 이 주석은 성규 본문의 각각의 원천들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베네딕도 가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베네딕도가 신중 하고 사려 깊은 마음으로 성규를 썼다는 것에서 그의 영성을 엿볼 수 있 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경험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규칙서 자체의 뛰어 ‐‐‐‐‐‐‐‐‐‐‐‐‐‐‐‐‐‐‐‐‐‐‐‐‐‐‐‐

7) RB 9.8; 18.25; 42.3; 48.8; 73.2, 4, 5. 참조.

8) RB 1.6;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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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특성인 동시에 베네딕도 인격의 탁월한 특징이다.

4 . 그리스도 중 심(Christocentricity)) 성규는 특정한 인용9)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택하고 있는 표현방 식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그리스도의 책(Christ-book)이다. 이것은 예상 외로 많은 구절에서 발견되는데 일부는 함축되어 있으나 사실 많은 구절 들이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이 성규를 머리말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하나로 묶어주는 요소이고, 우리가 성규를 그리스도의 규칙 (Christ-Rule)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리스도는 성규의 진정한 저자 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성규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신다. 이것은 역 사적이고 비판적인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이고 영적인 주장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원천들, 교부들, 전통에 대한 증언의 배후에 계시며 이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출발점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성규에서 베네딕도, 스승, 사막의 교부들의 말씀을 만난다기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만난다 고 할 수 있다. 성규에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말씀들은 공통적 으로 모두 그리스도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탁월한 교사이시 다. 베네딕도는, 요한 카시아노와 스승과 같이, 수도원을“주님을 섬기는 학원”10)으로 이해하는데 이 학원에서 그리스도는 유일한 스승이시다.11) 그분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그분 자신, 그분의 존재, 그분의 현존, 그분의 말씀과 본보기에서 넘쳐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베네딕도에게 모든 가르 침은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그리스 ‐‐‐‐‐‐‐‐‐‐‐‐‐‐‐‐‐‐‐‐‐‐‐‐‐‐‐‐

10) 머리말 45.

11) 마태 11: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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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도를 향(向)한다.12) 베네딕도는 성규 안에서 그리스도를“길”로서 제시한다. 규칙이 가르치 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길로서 순명, 겸손, 자기낮춤, 하느님을 두려워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 봉사, 침묵, 인내, 항구함, 고통과 사랑의 길이다. 베네딕도는 이런 덕행을 말할 때 항상 직 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이것은 성규의 다양한 말씀 과 행동들을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유일한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말씀하시고, 초대하시며, 모든 훈계와 가르침을 통하여13)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 이것은 성규가 얼마 나 그리스도의 빛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말하는지를 보여준 다. 우리는 성규를 주석할 때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베네딕도는 어떤 그리스도를 특별히 생각하셨을까? 묻지 않 을 수 없다. 그분은 바로 니케아 신경에 표현된 교회의 완전한 믿음의 그 리스도이시다. 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교회의 전례거행, 성무일도, 그리고 설교의 자명한 배경이다. 성규에서 베네딕도는 그리스도께 대한 교리를 명시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지만 명백히 이 전통을 따른다. 베네딕 도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현재 계시는 그리스도이다. 처형되셨으나 부 활하신 분이시며 다시 오실 주님으로 지금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고 역사 안에 영으로 활동하신다. 수도승 의“오늘”이 가능한 것도 바로 주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 님의 현존이 수도승의 삶과 믿음의 시간을 지배한다. 현재 계시는 그리스 도는 공동체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에서, 매일의 다양한 삶의 상황 안에서 ‐‐‐‐‐‐‐‐‐‐‐‐‐‐‐‐‐‐‐‐‐‐‐‐‐‐‐‐

12) RB 5.5,15= 루카 10:16. 참조.

13) RB 머리말 5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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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을 만나 주신다. 수도승의 모든 삶은 주님의 현존 안에서 행해진 다.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 이것은 수도승과 그리스도, 수도승 과 하느님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수도승은 모든 상황에서 그리 스도의 현존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따른다. 이 주석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5 . 세례영성(Baptismal Spirituality)) 규칙서에서 드러나듯이, 베네딕도는 수도생활이 초대 교회의 세례영성 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이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 인의 삶의 길을 제시하는 성규의 머리말에 잘 반영되어 있다. 즉 그리스 도인으로서의 삶의 시작은 수도승으로서의 삶의 시작과 밀접히 연관된 다. 베네딕도는 머리말에서 시편 15와 34편을 인용하고 해석하는데 이 시편들은 초대 교회 세례 입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성규전 체의 구성(framework)을 예시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세례의 신학적 의미 는 통일된 주제처럼 성규 전체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수도승에게 세례 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동시에 그 의미를 살아가게 한다. 베네딕도는 성규의 구조와 정신에서“부르심과 응답”이라는 주제를 강 조한다. 이는 초대 교회의 세례 문답과 신앙 고백과 긴밀히 연관된다. 세 례 안에서 부르시는 하느님은 수도생활 안에서 부르시는 바로 그 하느님 이시다. 이렇게 수도삶으로의 부르심과 세례로 부르심을 이어주는 끈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적극적이고 충 실한 응답은 수도승이 그의 세례의 의미를 받아들여 죽음에서 생명에 이 르기까지, 수난에서 부활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살아내는 것이다. 이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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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관성은 성규 58장에 잘 나타나 있다. 지원자가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이 되기까지의 과정, 회개, 시험, 그리고 수련소에서 서원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적인 과정은 세례의 각 단계들과 매우 유사한 용어로 묘사되어 있다. 이 연관성은 지원자를 받아들이는 예식과 조건들까지 확대되어 있다. 이 러한 암시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으로, 깊은 차원에서 수도생활에 관한 이해가 곧 세례의 본질에 대한 이해임을 말해준다. 더욱이 베네딕도는 수 도승을 초보자로 보는데, 이것은 세례영성이 성규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이 주석은 수도생활을 세례에 담긴 수도생활의 기원과 부차적인 요소와 연결시키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리하여 참되고 통일된 그리스도적 수도 성소의 안목을 제시하고자 한다.

6 . 교회로서의 특 성 이코니움의 암필로키우스(Amphilochius of Iconium)의“교회로서의 수도승의 존재”14)는 베네딕도와 그의 규칙이 보여 주는 태도(stance) 와 특성(character)을 정확하게 반영해 준다. 베네딕도는 가장 굳센 종류의 수도승인 회수도자15)를 중시한다. 이는 그의 교회론적인 관심을 반영하 는 것으로 수도원을 교회의 코이노니아(koinonia) 안에 있는 것으로 보 고 있으며 수도원 자체를 코이노니아로 이해한다. 실제로 그의 공동체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베네딕도는 시편 67:7; 132:1과 사도행전 2:44; 4:32-35을 인용하면서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을 보여준 다. 베네딕도는 사랑과 선행을 실천한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의 공동 ‐‐‐‐‐‐‐‐‐‐‐‐‐‐‐‐‐‐‐‐‐‐‐‐‐‐‐‐

14) Amphil., Haer. 159(CCG3): monazein ekklesiastikos.

15) RB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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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의 수도승들의 소유(재산), 노동, 그리고 필요에 대한 모든 내용의 본 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베네딕도가 수도원을 몸(corpus monasterii)16)과 지체(membra)17)의 이미지로 보는데 이는 1 코린 12,27의 교회는‘그리스도의 몸’임을 상 기시킨다. 베네딕도는 수도원을“하느님의 집”이라고 규정한다. 이 표현 이 여러 맥락에서 자주 나오는 것18)을 보면 수도원 공동생활의 실상이 얼 마만큼 이러한 이미지로 젖어있고 결정되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 외에 베네딕도는 성규에서 상징적이고 형상적인 일련의 단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면 모임, 양떼, 학원 혹은 제자들의 학원, 작업장, 진지 (acies fraterna)19), 가족, 형제애 등인데 이 단어들은 모두 베네딕도적인 회수도공동체를 교회로 정의한다. 수도 공동체의 삶에 관련된 다양한 구 조와 제도, 그리고 구성은 유사한 방향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 하느님 찬미의 실천과 구조, 단식의 실천, 초대 그리스도 교회를 모델로 한 조직과 속죄제도, 수도서원과 봉헌예식 등이다. 결국 베네딕도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신약 공동체의 삶에서 택하여 그의 수도 공동체의 상황에 적용한 모든 지시와 규정들은 교회적인 문맥 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특히 개인소유 혹은 노동에 관한 초대 공동체 의 모범적인 실천과 수도승들의 영적 수행의 일부 도구들을 들 수 있다. 그는 성규에서, 수도 삶이란 단지 수도원에서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더 넓은 교회로 사는 것을 뜻한다. 수도원의 교회성은 수도원 을 넘어 전 교회와 주변 지역의 교회까지 연결된다. 이것은 특히 하느님 ‐‐‐‐‐‐‐‐‐‐‐‐‐‐‐‐‐‐‐‐‐‐‐‐‐‐‐‐

16) RB 61.6. 18) RB 31.19; 53.22; 64.5. 참조.

17) RB 34.,5. 19) RB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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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의 집에“합당한 관리자”20)가 필요할 때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 네딕도는 수도승의 독서 목록을 언급할 때도“인정되었고 공인된 정통 가 톨릭 교부들”21)을 매우 중요시한다. 베네딕도 수도승들이 세례 받은 모 든 사람들과 함께, 교회로서 교회의 일원이 되어 교회의 한가운데에서 살 았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손님환대에서 잘 드러 나고 있다.22) 이 주석은 이런 관련성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7 . 영 적 인 차 원(Pneumatic Dimension)) 초대교회에서 수도승은 성령의 소유자로 간주되었다. 그레고리오 대종 이 베네딕도를 서술한 것을 보면, 베네딕도 역시 이러한 전통 안에 있음 을 알 수 있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베네딕도를“하느님의 사람이신 그분 은, 구속의 은총으로 간택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셨던 (주님) 한 분의 영을 지니고 계셨다”23) 고 묘사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베네딕 도의 특성을 성규의 분명한 표현에서 찾으려 한다면 당장에 실망할 것이 다. 베네딕도는 단지 두 군데에서만 하느님 영의 선물을 언급한다. 첫째 는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 주는 상태인24)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 로 완전해진 사람들에 대하여 말할 때이고, 둘째는“그리하여 각자는 성 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은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25)는 사순절에 관한 장에서이다. 이렇게 베네딕 도는 성령에 대하여 빈약하게 언급한다. 그렇다면 성규의 영적인 차원을 ‐‐‐‐‐‐‐‐‐‐‐‐‐‐‐‐‐‐‐‐‐‐‐‐‐‐‐‐

20) RB 64.3-6. 21) RB 9.8; 73.4. 22) RB 53장 참조. 23) 그레고리오 대종 대화집, 2, 8, 8-9. 교부문헌총서 11 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 기, 이형우 역주, 분도출판사, 1999년. 25) RB 49.6. 24) RB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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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 점을 문제화 하는 것 은 확실히 핵심을 파악한 것이 아니다. 분명한 언급 외에, 베네딕도는 성규에서 묵시적으로 존재론적 성령론 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완전함을 향하여 사는 수도생활의 기본적인 구 조에서 드러나는데, 수도승의 순명의 과정을 보면 온전히 성령에 감도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말에 인용된“들을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바를 들어라”26)는 말씀은 동시에 성규 전체의 서문 이다. 말하자면 귀와 소리는 영의“기관”(organs)을 상징한다. 규칙서 자 체는 수도승이 집중하여 폭넓게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들음은 수직적 일뿐 아니라 수평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성령의 소리를 감지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들음과 연관된 것은 성령에 의해 지도되는(directed) 가르침, 즉 성경과 성규, 무엇보다도 아빠스의 말과 모범으로 이루어지는 가르침이다. 성규 2장 3절은 로마서 8:15을 인용하고 있는데, 성령의 영향이 최대한 표현된 부분이다. 성령으로 가득 찬 외침,“아빠, 아버지!”의 고유한“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바로 기도의 자리이다. 이것은 수도승의 opus dei(하느님의 일)에서 드러나는 데, 하느님의 일은 원칙적으로 성령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고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다. 분명히 하느님의 일 자체는 성령의 영감27)에 기인한다. 근원적인 수도승적 덕행인 분별 또한 성령의 선물이다. 이 분별의 덕은 아빠스와 성숙한 수도승의 특징적인 표시로, 거짓 영을 분별해 내는 능력 이고, 사사로운 자기의지에 의한 월권(praesumptio)과 성령이 주신 선물 ‐‐‐‐‐‐‐‐‐‐‐‐‐‐‐‐‐‐‐‐‐‐‐‐‐‐‐‐

26) RB 머리말 11; 묵시 2:7.

27) RB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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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을 구별해 내는 능력이다. 이러한 분별의 과정은 수도승의 전 삶을 통해 확장된다. 규칙을 주석한다는 것은, 세례를 토대로 하여, 수도승의 본질이 되는 하느님의 영이 드러나는 지적이고 영적인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다. 성령 은 수도승의 삶에 활동하시는 분이시고, 영적 기술(ars spiritalis)에 특 성을 부여하시는 분이다.28)

8 . 종말론적인 지 향(志 向) (Eschatological Orientation)) 수도생활과 종말론은 항상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베네딕도는 이 관계를 실질적인 매일의 수도승 삶에 적용하고, 관련된 규정으로 반영시킨다. 성 규의 정신에(Rule’s line of thought) 드러난 종말론적인 주제의 핵심단 어들은,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회심, 되돌아감, 문책, 심판, 하 늘, 하늘의 고향, 영원한 생명, 웃음, 죽음, 멸망, 구원, 구조, 구하기, 치 유, 처벌, 지옥, 악마 등이다. 베네딕도는 성규 4장에서 종말과 심판(四 末)29)에 관한 개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사말을 보는 관점은 사 랑의 이중계명30)으로 집약되는 착한 행실이며, 죽음과 심판은 성규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의 학교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종말론적인 지향(志向)은 수도승이 삶 전부를 일관성 있는 하나의 과정 으로 보게 해 준다. 이 지향의 목적은 믿음에 근거한 세례와 그 안에 담겨 있는 본질이 점진적으로 완전하게 드러나는데 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십자가에서 영광으로 가는 과정이다. 이 내용은 성규에서“이후”가 아니 라“지금”을 강조하는데서 드러난다. 수도승은 종말을 미루는 것이 아니 ‐‐‐‐‐‐‐‐‐‐‐‐‐‐‐‐‐‐‐‐‐‐‐‐‐‐‐‐

28) RB 4.75.

29) RB 4.44-47. 참조.

30) RB 4.1절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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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것을 현재 순간(now)에 산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수도승은 기도하 면서 자신의 약점과 실패에 깨어있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그 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배운다. 이 모든 것들은 시간(tempus)에 대한 민감함, 특히 지금이“무엇을 위한 시간인지”를 주의 깊게 표현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지금”과“오늘”은 매순간 찾아오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단순한 일들에 깊고 진지한 가치를 부여해 준 다. 동시에 수도승은 그것들이 우리의 희망과 갈망이신 하느님께 비해 상 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주석은 현실과 신학적인 방향에 근거하 여 수도생활에 관한 종말론적인 관점을 합리적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물 론 지나치게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종말적 입장을 이용하거나 제한할 생각이 없다.

9 . 로마적인 특 성(Romanitas)) 성규는 비교적 일찍부터“Roman Rule”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자격은 성규의 보급과 채택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Roman”의 분류를 단지 규칙의 기원과 파급의 역사에만 한정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왜냐햐면 베네딕도와 그의 작품 모두를 로마적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지만 “Roman Rule”이라는 것은 규칙의 내용의 특성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 해주기 때문이다. 성규의 언어만 보더라도 로마적 사고, 그리고 삶과 연 관되어 있다. 이 영향력은 성규에 흡수된 일정한 명칭들과 표현방식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서 로마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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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규칙: 읽기와 주석을 위한 원칙들

성규에서 성규저자의 고전적이고 세속적인 교육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몇 가지 표현들만 가지고 베네딕도의 교육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성규에서 언어라는 도 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고, 그리고 효과적으로 구성의 기술을 사용 할 줄 아는 수사학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드러난다. 이외에도 그는 법에 능통하게 교육을 받았고, 로마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구조화에 대한 감각 과 자질을 지녔다. 베네딕도는 삶을 경험한 수도승으로서, 수도 공동체의 현실과 핵심적인 요소들, 그리고 수도공동체의 개개인에 대한 사려 깊고 명확한 눈을 갖고 있다. 베네딕도는 리더십의 자질,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책 임에 대한 감각, 사명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삶을 위한 체계를 세 울 수 있었다. 그 질서는 매우 설득력 있고 믿을만하다. 이것은 통합할 수 있는 능력, 한 사람 한사람에 대한 존중,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개 방성에 근거한다. 성규에 드러난 이러한 로마적 특성에 대한 묘사는 그레고리우스 대종의 대화집 2권(=베네딕도 전기)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로마적 세계의 분명 하고도 뚜렷한 묘사가 대화집에 흐르고 있다. 이 주석은 독자들에게 로마 적인 특성에 대한 의식과 감각을 주고자 적절한 부분에서 정보를 찾아내 고자 한다.

10. 시 사 성(Contemporary Relevance)) 분명히 표현된 것은 아니지만, 이 주석을 작성할 때에 생각했던 문제 중 하나는 시사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 주석은 현시대와 어떻게 연관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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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가? 연관성의 기준들은 다양하지만 사실 이것은 해석의 과정이 더욱 다양하다. 시사성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시대, 독자의 자질, 그리고 직 접적인 문맥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베 네딕도가 성규를 썼던 시대와 현대 우리시대와는 대단한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은 또한 성규에서 드러난 사고와 우리 시대의 사고 사이에 도 대단히 넓은 영적, 지적 공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백 때문에 성규에 대한 지식, 탐구, 역사와 관련된 재작업은 대단한 투자를 요구한 다. 성규 그 자체는 물론이고 초대교회와 교부들, 역사의 전반적인 배경 이 성규와 현대와의 연관성 작업에 관련된다. 이 점에서 정보와 번역의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성규와 현대 와의 연관성을 위한 첫 단계는 성규를 우리시대의 지식과 연구의 관점에 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항상“오늘”의 관점과 사고, 그리고 오늘 의 언어와 경험의 지평에서 행해진다. 우리는 이“오늘”이라는 시각을 떠 날 수 없다. 우리가 성규를 과거의 텍스트로 이해하려고 할지라도 그렇 다. 그 다음에 시사성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는 그보다 더 방대한 사항들 을 요구한다. 그것은 단순히 현시대에서 질문을 제기하여 대답을 하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문서가 우리에게도 질문을 하고 있고, 우리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연관성을 찾기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 다. 이것이 시사성 찾기의 둘째 단계이다. 결론적으로 그런 과정 끝에 현 재와 과거사이의 대화의 열매로 성규의 시사성 문제에 관하여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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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수도서원: 정주1) 최미숙 마리마 살루스

정주서원은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vita monastica)을 복음 권고를 따 라 가난, 정결, 순명을 약속하는 일반 수도생활(vita religiosa)과 구별 짓 는 서원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수도회 수도자들로부터 도대체 정주서원 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뿐만 아니라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우 리도 정주서원에 대한 오해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정주’라 고 하면 고정된, 변화 없는, 움직임 없는, 흐름이 없는, 고착된, 멈춘 상태 라고 생각한다. 특히 현대사회는 변화와 속도가 우상이다 보니 정주는 고 리타분하며 시대를 역행하는 무의미한 개념쯤으로 여기며 푸대접한다. 그런데 베네딕도 성인이 말하는 정주가 과연 그런 것일까? 우리 시대에 유익한 그 어떤 메시지도 던져 줄 수 없는 한 물 지나가 버린 그저 옛말일 까?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 나서는 작업은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우리에 게 유익할 뿐 더러 어쩌면 의무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먼저 정주라는 낱 말을 중심으로 출발하여 초기 사막 수도승들의 가르침과 베네딕도 규칙 서 안에 나타난 정주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정주 서원의 삶이 오늘날 어 떤 열매와 가치를 지니는 지 찾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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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2007년도“계속양성 교육” 을 위해 준비한 강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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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정 주 에 관 한 낱말들과 그 의 미 1.1. 베네딕도 규칙서에 나 타 난 정 주 에 관 한 단 어 들: stare가 가주 요 단어 규칙서에 사용된 정주에 관한 낱말은 대개 일곱 가지로 나타난다:2) firmare, perseverantia, perseverare, stabilire, stabilis , stabilitas, stare. 스승의 규칙서에는 perseverare는 많이 사용되고 stare가 적게 사용된 반 면에 베네딕도 성인은 stabilitas의 뿌리인 stare를 많이 썼다. Stare에 해당되는 희랍어 동사들이 신약성경에서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짧게라도 알아보는 것이 정주의 올바른 뜻에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여기서는 3가지를 통해 보기로 한다.

1.2. 신 약 성 경 에 나 타 난 의 미3) 1) sthkw 스테코 (견고히 서다, 서다): 총 12회 나타난다.4) 그 가운데 몇 구절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 에 서 본 적이 없다”(요한 8, 44).“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

2) Firmare 견고히 하다, 격려하다 (1회, RB 61,5); perseverantia 항구, 인내 (1회, 58,9); perseverare 항구하다, 지속하다 (3회, 머리말50; 7,36; 58,3); stabilire 확정 짓다, 견고히 하다 (1회, 61,12); stabilis 견고한, 흔들리지 않는, 항구한, 변함없는, 영속하는 (1회, 1,11); stabilitas 견고, 항구, 영속 (5회, 4,78; 58,9.17; 60,9; 61,5), stare 서다, 서 있다, 꿋꿋이 서 있다. 버티고 서 있다, 항구하다, 충실하다, 유지하다 (13회, 7,63; 11,9; 19,7; 43,4.5.7.10; 44,7; 58,11.13; 60,4; 61,9; 63,4). 이 외에도 persistere (항구하게 머무르다, 여전히 계속하다, 꾸준하다)가 3회 (25,3; 58,3; 60,2) 사용되었다. 3) 게르하르트 킷텔 , 게르하르트 프리디리히, <신약성서 신학사전> 1986, 요단출판사, 744 745. 4) 요한 1,26: 8,44; 로마 14,4; 1코린 16,13; 갈라 5,1; 필리 1,27; 1테살 3,8; 2 테살 2,15; 마르 3,31; 11,25; 묵시 12,4; 필리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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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수도서원: 정주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4, 4).“깨어 있 으십시오. 믿음 안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1 코린 16,13).“스테코”는 주로 바오로 서간에서 주요하게 사용되었는데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스 테코는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자리잡고 계속적 으로 서 있는 것을 말한다. 2) sthrizw 스테리조 (지지하다, 세우다, 힘을 북돋아 주다): 총13회5) 나타나는데 해당 성경구절들을 찾아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강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스도 덕분에 가능해 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힘이 생긴다는 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어떤 어려움에도 믿음이 견고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3) ijsthmi 히스테미 (수동법:서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무려 152회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신학적 관점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히스테미 는 먼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세울 수 있는 것은 능력을 나타낸다. 믿음 안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은 기쁨을 가져오며 (2코린 1,24) 그것은 곧 복 음 안에 서 있는 것이다 (1코린 15,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서 있는 은총에 들어오도록 길을 열어 주셨으므로 (로마 5,2) 우리는 은총 안에 굳게 서 있어야 하며 (1베드 5,12 )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 코린 10,12). 이렇게 온전히 서 있도록 기도는 우리를 도와 준다 (골로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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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루카 9,51: 16,26: 22,32; 사도 18,23; 로마 1,11: 16,25; 1테살 3,2.13; 2 테살 2,17: 3,3; 야고 5,8; 1베드 5,10; 2베드 1,12; 묵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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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stare” ”단 어 사 용 에 관 한 짧 은 역 사6) 이방인 저자들의 작품들에서‘stare’는 단지‘요동이 없는’, 순수하게 자연적인 상태,‘정신의 고요’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카르타고의 치 프리아누스(Cyprianus,+258)는 단순한 윤리적인 태도 즉“신앙과 덕에 항구한 것”을 묘사할 때‘stare’를 썼다. 4세기 초 박해시대 때는 순교자 들의 신앙을 위한 싸움을 가리켰으며 죽기까지 충실한 이들 곧“고백자 들”의 적극적인 저항과 불굴의 끈기를 나타냈다. 이는 역동적인 정주로서 죽음의 순간에 신앙 안에 서 있는 것이다. 4세기 평화시대에 이르러서 ‘stare’는 그리스도교 덕을 실천하며 하느님 계명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 한 순명 안에서 끈기 있게 노력하기 위한 싸움을 묘사한다. 이러한 말 뜻이 수도승 운동을 통해 바뀌었다. 요한 까시아노에 따르면 cella(독방, 움막) 에서 영혼은 홀로 자신뿐 아니라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 일 수 있다. 그래서 수도승들은“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네 개의 벽을 지 키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특히 이집트 수도승들에게는 비록 순례가 가능 한 환경이었다 하더라도 좋은 정주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2 . 초 기 사 막 수도승들의 가르침에 나 타 난 정 주7) 사막 교부들은 정주를 위한 장소로써 독방의 역할을 강조한다.“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젊은 수도승의 물음에 대한 교부들의 대답들을 들어 보자. 아르세니우스(Arsenius) 교부와 헤라클리데스(Heraclides) 교부는 ‐‐‐‐‐‐‐‐‐‐‐‐‐‐‐‐‐‐‐‐‐‐‐‐‐‐‐‐

6) A. de Vogue, “To persevere in the Monastery unto Death” (Stability in St. Benedict and Others), Word and Spirit 16 (1994), 125 158; J. Leclercq, Nuovo elogio della stabilit , OeL 48(1993), 98 107. 7) M. Kelly, “Reflections on the Significance of Stabilitas and Conversatio morum in Benedictine Commitment”, ABR 55 (2004), 251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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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시고 자라고 하면서, 그러나 움막을 떠나지 말라고 충고한다. 암 모나스는 움막에 앉아 조금 먹고 수도승의 마음에 세리의 말 (루카 18,13)을 유지하라고 한다. 더 나아가 모세 교부에게는 모든 것을 가르 쳐주는 것은 바로 움막이다:“너의 움막이 네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 이다”. 이런 가르침이 히에라가스(Hierakas) 교부 안에 잘 요약되어 나타 난다: 한 형제가 히에라가스 교부에게“한 말씀만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답하길:“너의 움막 안 에 앉아라. 그리고 배가 고프면 먹고 목이 마르면 마셔라. 단지 어느 누구 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마라. 그러면 너는 구원 받을 것이다”(Ierace 1). 히에라가스의 대답에서 우리는 세가지 단순한 요소들을 본다: 1) 장 소와의 관계 (너의 움막 안에 앉으라); 2) 몸과의 관계 (필요에 따라 먹 ��� 마셔라); 3) 다른 이들과의 관계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 지 마라).

2.1. 장 소 의 역 할 (너 의 움 막 안 에 앉 으 라) : 장소의 역할은 생각들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다.“자신의 움막 안에 머 무는 것은 ... 자기 생각들의 고삐를 잡는다는 뜻이다”. 마치 작은 영화와 도 같은 생각들을 조절하도록 해 주는 항구함의 필요성을 말한다. 안또니 오 성인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후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 가려고 할 때 어느 지휘관이 더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 그 때 성인은 이렇 게 대답하였다: “......‘물고기가 마른 땅 위에 잠시 나와 있으면 죽게 되듯이 수도승들 도 여러분과 함께 머뭇거리며 시간을 보낼 때 수도를 게을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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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물고기가 바다로 가듯 우리는 산속으로 속히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분 사이에 남아 있으면서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과 그가 했던 다른 말들을 모두 듣고 나서, 그 지휘관은 경탄하며 말했다.‘진실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종이요, 그가 하 느님의 사랑을 받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토록 위대하고 본 질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소?” <안또니오 생애 85>: 많은 학자들이 정주에 대한 열쇠로 보는 것이 바로 항구함이다. 드 보 궤에 따르면, 스승의 규칙과 베네딕도 규칙은 비록 단어들이 다르다 해도 수도원 안에 항구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항구한 것에 해당된다고 가르친다.

2.2. 몸 과 의 관 계 (필 요 에 따 라 먹 고 마 셔 라) : 몸은 수도승의 영적 탐구를 도와준다. 균형!

2 . 3 . 다 른 이 와 의 관 계 (어 느 누 구 에 대 해 서 도 나 쁘 게 말 하 지 않 는 것) : 장소를 바꿈으로써가 아니라 장소와의 관계에서 또 장소와의 관계로부 터 얻어지는 마음의 순결 안에서 보여지는 자비를 강조한다. 베네딕도 수 도승이면서 추기경이었던 Basil Hume에 대해 영국 웨스트민스트 교구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그의 눈은 언제나 먼저 하느님께 고정되었다. 그 리고 이 확고부동한 바라봄은 그를 연민 가득하고 관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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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B 안 에 나 타 난“정 주”의 의 미 정주서원에 관해 말할 때 요즘은 구별이 필요한 어떤 것이 있다. 즉 떼 어놓아야 할 두 부류의 수도승들이 있다: 정주하지 않는 수도승들 (기로 바꾸스, RB 1,10 11)와“숨어 있는 기로바꾸스”이다.“숨어 있는 기로바 꾸스”는 몸은 공동체 안에 있으나 마음은 결코 공동체 안에 머물지 않은 체 또 규칙에 대한 순명 없이 겉보기에는 죽을 때까지 회수도승 상태로 살아가는 수도승들로서 이들은 사실 아주 나쁜 수도승들로서 같은 공동 체 안에서 악을 행한다. 정주서원은 장소와 공간 안에서의 어떤 특별한 항구함에 대한 임무이며 회수도승은 자신의 수도원에서 순명을 실천한 다. 그러므로 정주서원을 말할 때 단지 기로바꾸스 뿐 아니라“숨어 있는 기로바꾸스”도 제외하여야 한다.

3.1.“Stabilitas 정 주” stabilitas는 RB에 5회 나타난다: 4,78; 58,9. 17; 60, 9; 61, 5

3.1.1) RB 4, 78: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부지런히 실행할 작업장은 수도원의 봉쇄구역 claustra monasterii과 공동체 안의 정주 stabilitas in congregatione이 다”베네딕도 성인은 유아들이 아닌 성숙한 성인들의 공동체를 원한다. RB 4,78은 4장의 종합인 동시에 정주의 종합이 들어 있다. 정주를 위해 서는 단지 같은 장소가 필요할 뿐 아니라 동시에 같은 사회적 그룹 안에 서의 항구함과 성실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같은 장소 곧 수도원이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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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며, 그 안에서 항구하게 살아가는 자세가 요구되며 마지막으로 함께 사는 수도승들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성실함이 요구된다. 그러기에 정 주는 장소적이고 시간적이며 사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1.1.1) stabilitas in congregatione 공동체 안에서의 정주 아퀴나타 뵈크만 수녀는 정주를 마음의 정주, 발의 정주, 순종 아래 정 주, 규칙 아래 정주, 공동체 안에서의 정주 이렇게 5가지 의미로 나누어 말한다. 그 중 공동체 안에서의 정주는 인격적 결속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주의 진정한 핵심이라고 한다.8) 요즘 유럽 경우 성소자 감소로 인해 본국 출신 수녀들 외에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출신 수녀들이 함께 살고 있는 베네딕도 공동체를 쉽게 볼 수 있다. 한 공동체에서 더 많은 수의 유럽수녀들과 함께 사는 아프리 카 수녀 경우에 가끔 고립보다 더 강하게“유배”를 당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관계 맺는 방법이나 호의를 표현하는 방법 등 서로 다름과 인 격적 미성숙 등으로 인해 공동체 생활이 숨막히는 골고타로 둔갑하게 되 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 안에서 느끼게 되는 이런 어려움은 각 수도승 을 참 거처이신 그리스도 안에 정주하도록 초대한다. 수녀들은 서로서로 를 통해 또 참으로 다양한 어려움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신 비를 통과할 것이다. 어둡고 안개 낀 길들을 통해 마음의 정주와 공동체 안의 정주는 견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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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코이노니아 선집 4, 462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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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 claustra monasterii 수도원의 봉쇄구역 (수도원 안에서의 생활) 정주는 모든 이들이, 전 생애를 통해 하나의 보이지 않는 실재를 향해 있는 누군가를 항상 발견하는 한 장소 안에 머무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5년 전에, 3년 전에 그리고 올해도 변함없이 한 수도원을 방문하여 쉼의 시간을 보내게 될 때 그는 분명히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기도하고 읽고 일하는 수도승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정주하고 있는 수도승들을 만 나게 된다. 수도승들의 정주는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해 있 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수도승들의 정주는 수도원을 찾아오 는 이들에게‘마음의 정주’를 가져다 준다. 이런 의미에서 아무리 작은 지원 공동체 경우에라도 정해진 시간에 기 도하고 독서하고 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일의 특성 때 문에 같은 시간에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지 못한다 해도 공동체에 남아 있는 단 한 명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중요한 언어가 될 수 있다. 수도원은 마치 신비의 표징인 성사처럼 세상이 창조주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명백히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3.1.2) stabilitas 단어가 나오는 나머지 해당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RB 58, 9:“만일 그가 자 기 의 정 주에 있어 항구할 것을 약속하거 든 2개월 후에 그에게 이 규칙서를 차례로 다 읽어주고” (2) RB 58, 17:“입회가 허락된 사람은 성당에서 모든 이들 앞에서 그 의 정 주와 수도승답게 생활할 것과 순명을” (3) RB 60, 9:“단 규칙의 준수와 자 신 의 정 주를 서약하면 (허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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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B 61, 5:“후에 만일 그가 자 신 의 정 주를 확정하기를 원하거든, 손님으로 있는 동안 그의 생활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니, 이러한 소망을 거절하지 말 것이다” 위의 네 구절에는 공통점이 있다. 곧“자신의 정주”에 항구한 것이다. 결국 정주는 자신의 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써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며 다 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다 른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공동체와의 관계 안에서“나의 자리”를 말한 다. 이는 단순한 현존 이상의 것이며 한 수도승이 자신의 자리에 실제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를 테면, 자연인으로서 자기 나이에 맞는 자리, 인격 성숙에 따른 자리, 신앙이 깊어지면서 조금씩 옮겨가는 자리, 수도 승으로서 지원기 때와 서원 후에 달라져야 하는 자리 이런“나의 자리”에 굳건히 서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3.2. 장 소 에 대 한 정 주 stabilitas loci9) “stabilitas loci”라는 이 형식은 RM에도 RB에도 없다. 8세기 말 이후 9세기에 나타나는데 서원의 고대 형태 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9세기 말 한 서원 양식을 보면 conversatio morum과 순명은 제외하고 오로지“장 소에 대한 정주”만 약속했다. 이는 베네딕도의 의도와 맞지 않다! 베네딕 도는 RB 4,78에서 분명히“수도원의 봉쇄구역”과“공동체 안에서의 정 주”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구하겠다는 약속은 특정한 장소에서 그 공동체의 매일의 시간표를 따르는 것, 모든 개인적인 소유를 포기하는 것 ‐‐‐‐‐‐‐‐‐‐‐‐‐‐‐‐‐‐‐‐‐‐‐‐‐‐‐‐

9) J. Leclercq, “la stabilita secondo la regola di san Benedetto”, OeL 35(1980), 10 17; T. Kardong, The Benedictines, Stability, 1988, 88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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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요구한다. 공동체의 정주는 구성원들 각자의 정주에 의지한다. 베네딕도는 소위‘엄격하고 영원한 봉쇄’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에게 봉쇄구역은 우상이 아니다. 수도원은 삶을 위한 장소였으며 경우 에 따라 외출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수도승들의 영적 유익 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수도원“안에”갖추도록 하면서 (RB 66,6 7) 동시에 어떤 일 때문에 밖으로 보내어진 경우를 말한다 (RB 51). 개인 수도승과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외출을 허가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기도 를 위해 돌아오는 짧은 외출이었다. 수도승 각자는 공동체 질서 안에 특별하고 한정된 자리를 가지고 있다 (RB 63, 1.4.8). 그래서 각 수도승은 공동체에서 자신이“서 있는”곳을 안다. 공동체의 정확한 질서는 성당, 식탁, 기타 여러 방법으로 배당된 의 자에 의해 상징된다. 공동체가 개인을 징계해야 할 때 자리 박탈에 의해 행해진다: 전례와 식사로부터 제외된다 (RB 23 28). 오늘날은 장상이 잘못한 수도승에게 전례와 식사 때 그의 자리를 박탈하는 경우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수도승 스스로 전례와 공동 식사 때 자신의 자리를 쉽게 박탈하며 사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수도원 안에서의 생활은 수도승이 공동체라는 장소 안에서 규칙에 순명 함으로써 실천해야 하는 정주의 한 부분이다. 정주는 봉쇄구역 안에서의 삶 그 이상의 것이다. 봉쇄구역은 정주의 한 결과이다.

3.3. 정 주 의 그리스도론적 의 미: 인 내10) Stabilitas loci 외에 윤리적이고 영적인 정주가 있다. 이는 내포된 의미 ‐‐‐‐‐‐‐‐‐‐‐‐‐‐‐‐‐‐‐‐‐‐‐‐‐‐‐‐

10) T. Kardong, The Benedictines, Stability, 1988, 88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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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훨씬 더 깊다. 이 정주는 베네딕도 성인의 언어로“인내”라 불린다. 베 네딕도는 그리스도론적 텍스트 안에서 항구함과 인내를 말한다. 여기서 는 명사“인내 patientia”11)와 부사“인내로이 patienter”12)가 사용된 본 문 가운데 몇 구절을 들여다 보자. 1) RB에서‘인내’가 처음 나오는 곳은 머리말 37절이다. 인간의 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너를 회개 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인내를 깨닫지 못하느냐?”(로마 2,4). 2) 머리말 50: 인내심 있는 지구력 (필리 2,8; 1 베드 4,13; 로마 8,17)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에 인내가 연결된다. 라틴어에서‘고통’과 ‘인내’는 같은 어원이다: pati (고통 받다, 수난하다, 견디다, 참다). 베네 딕도는 수도승 생활을 파스카적인 생활로 이해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희생적 죽음. 하느님께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일하고 식사하고 담화하고 등등 이런 삶이 언제나 새롭고 가슴 설레게 하지도 않 고 우리를 특별히 매료시키거나 흥분시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 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에 단호하고 항구한 것, 바로 이것을 살아가는 것이 수도승의 부르심이다. 3) RB 36,1 5: 베네딕도는 다시 그리스도의 고통에 밀접히 연결시킨 다 (마태 25, 36.40). 4) RB 58, 3.11: 수도생활을 하고자 처음 찾아온 사람을 4 5일 기다 리게 한다 (3절). 이는 베네딕도의 통상적인 환대와 반대이다! 뿐만 아니 ‐‐‐‐‐‐‐‐‐‐‐‐‐‐‐‐‐‐‐‐‐‐‐‐‐‐‐‐

11) Patientia 는 RB에 총 5회 나온다: 머리말 37. 50; 7, 35. 42; 58,11. 12) Patienter는 총 5회 나온다: 4,30; 36,5; 58,3; 68,2;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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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다시 온갖 인내심을 가지고 시험하라고 한다(11절). 수도승 훈련의 요 점은 수련자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오로지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우리 에게 확언하셨기 때문에, 그 진리는 어쨌든 베네딕도회 양성의 핵심이어 야 한다. 그래서 베네딕도는“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당하게 될 모든 어려움과 시련들을 그에게 미리 알려줄 것이다”고 분명히 말한다 (8절).

3.4. 요 약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순명과 conversatio morum에 항구함 없이는 정주는 없다. 정주 는 한 공동체에서 주어진 자리에서 수도승적 생활에 항구하고 신실함으 로써 한 수도승 공동체에 결합되는 것이다!! 우리는“죽을 때까지”(내 삶 의 전부를 통해) 이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특별한 역사와 (공동체의) 삶의 특별한 길을 가진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정주, 항구할 것을 서원한 다.13) 서원할 때, 성장을 위해 필요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참여하기로 (conversatio morum), 순명 하기로, 그 순명 안에 견디어 내기로 그리고 성장 안에 항구하기로 약속한다.14) 둘째, 정주는 장소적이며 시간적이고 사회적이다. 이 모든 것 (장소와 시간과 사는 방법)의 목적은 하느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RB 61,10). 정주의 모델은 하느님 아버지께 끝까지 신실하셨던 그리스 도이다. 그래서 수도승은 정주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 이르는 것이며 세 ‐‐‐‐‐‐‐‐‐‐‐‐‐‐‐‐‐‐‐‐‐‐‐‐‐‐‐‐

13) H. Lombard, “The Profession of Stability”, Tjurunga 58 (2000), 11 14. 14) P. Thompson, “Living Stability in the wake of Life's Changes”, ABR 52 (2001), 156 170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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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 때 약속을 더 굳건히 한다.

4 . 정주서원과 베네딕도회 수도승의 삶 4.1.“너 희 는 내 사 랑 안 에 머물러라”(요 한 15,9) 우리는“나의 공동체를 사랑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울타리를 사랑한 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원의와 생각이 공동체의 것과 충돌할 때 우 리는 너무나 쉽게 빨리 정주의 길에서 벗어난다. 한 수도원에 대한 깊은 애정과 확신을 가지는 것과 그 공동체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께 응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아버지께 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 10)를 사는 것이다. 정주 서원의 전체적인 목적은 바로 사랑 안에 정주를 얻는 것이다. 하 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것에 해당되는 정주이다. 그래서 공동체와 마음의 건강한 정주는 봉쇄구역을 넘어 뻗어간다. 만약 수도승이 참으로“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아간다”면 그 래야만 한다. 또한 수도승들은 여러 관계들을 맺고 있다. 공동체 안에서 동료 형제들 과 밖에서 찾아오는 손님들과 이웃 그리고 함께 일하는 이들과 날이면 날 마다 계속 관계를 맺고 산다. 나무가 굳건히 서 있으려면 비옥한 땅에 뿌 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것처럼, 베네딕도 수도승은“사랑의 정주”가 성장 하기 위해서 비옥한 땅 곧 굳건한 하느님의 현존에 뿌리 내려야 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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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수도승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하느님을 찾겠다는 나의 약속에 나는 깨어 있는가? 오늘 내 내면의 의향은 무엇인가? 나는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있는 곳에 견고히 서 있으며 열매 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나는 여전히 백일몽을 꾸며 그곳에서 도망가려고 찾고 있는가? 나는 나의 중심을 하느님께서 영구히 사시며 침묵과 고독 가운데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곳,‘내 마음의 방’에 두고 있는가?15) 공동체든 개인이든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지금 있는 곳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휴대전화로 끊임없 이 말하는 사람들처럼 수도승들도 끝기도 후나 피정 중에도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 람과 살면 잘 살 텐데 또는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는 다른 일을 하면 훨씬 행복한 수도자가 될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 아야 한다.

4.2.“물 위 를 걸어오너라”(마 태 14,28 31) 그리스도께서는 폭풍우 한가운데서 베드로를 부르신다 (마태 14,29 “오너라”). 내 삶에 위기가 있는 모든 때에 그리스도는 그 위기 앞에서 내가“fiat”을 하도록 나에게 도전하신다. 폭풍우는 멈추지 않으며 태양 도 나타나지 않으며 물은 순식간에 거울 같이 잔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위기의 한 가운데에 그리스도께서“나를 위한 보증인 도와주시는 분”(이사 38,13)으로 서 계심을 믿는다면, 그러면 바로 그곳이 폭풍우의 고요한 중심이다.16) 그래서 시편 작가처럼“하느님 제 마음은 든든합니 ‐‐‐‐‐‐‐‐‐‐‐‐‐‐‐‐‐‐‐‐‐‐‐‐‐‐‐‐

15) P. Thompson.

16) P. Thomp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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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편 57,8)라고 고백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나를 잡고 계실 것이며 나를 지켜주실 것이며 당신께서 약속하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임을 (창세 28,15) 믿으며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J. Leclercq는“신약에서 정주에 관한 단어는 신앙 곧 그 리스도인의 태도의 근본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근본은 우리 각자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독일 어에서‘신뢰하다’는 말은‘충실한’에서 파생되었고‘견고함’을 의미한 다. 그러기에 A. Böckmann에 따르면 정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대한 충실성이 구체화 된 것이며 무엇보다 하느님의 충실성에 대한 우리의 응 답이라 할 수 있다 (1테쌀 5,24).

4.3. 오 늘 날 베네딕도회 정 주: 문제들과 방 향 들 4.3.1) 문제들 오늘날 정주가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에게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 다. 그건 하나의 역설 때문이다. 즉 우리는 유동성과 역동성, 자발성에 관 한 이상과 동시에 고요와 명상에 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데 역설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요소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오늘날 정주를 살아가는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두 길 사이에 약간의 동요가 있다 하더라 도 정주는 분명 어떤 열매들을 맺을 수 있다고 본다.

4.3.2) 방향 먼저 내적인 정주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길고도 고된 싸움 후 에 도달할 수 있는 조화이다. 이 열매를 맺기까지 우리는 공동체 생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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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과 평범함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그건 바로 stare 머묾으로써 그리고 오랫동안 힘든 투쟁 후에 얻을 수 있다. 장소들과 공동체의 한계 안에 영적 싸움이 시작되고 마음의 평화는 긴 투쟁 안에 발견된다. 가끔 하느님의 일들에 마음이 고정되지 않는 약함을 체험할 때 오히려 바로 여 기에 마음의 정주의 시작이 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은 대화록(베네딕도 전기)에서 베네딕도 성인의 마 음이 하느님 안에 고정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는 (분의) 면전(안전)에서 당신 자신과 함께 홀 로 지냈다 habitare secum”(대화록II 3, 5.7.9).“내가‘존경하올 그분 께서 자신과 함께 살았다고’고 말한 것은, 자신을 늘 돌아보고 경계하셨 고, 창조주의 안전에 있는 자신을 늘 보고 계셨으며, 자신을 늘 성찰하면 서 마음의 눈을 당신 밖으로 (돌려) 더럽히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대화 록II 3, 7).“존경하올 베네딕도께서 고독 중에 당신 자신과 함께 사셨다 는 것은 생각의 빗장 안에서 당신 자신을 (늘) 유지하고 계셨다는 뜻이 다”(대화록II 3, 9).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에게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 하느님 현 존 안에 사는 것이다. 정신과 마음의 정주에 대한 목마름은 우리 안에 이 미 굳건히 현존하고 계신 하느님께로 단순하게 방향을 돌리는 것에서부 터 평화를 찾는다.17) 둘째, 자신에 대해 깨어 있음이다. 이는 자기 자신 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인내를 잃지 않는 것이며 빈정거림이 없으며 선심 쓰는 듯한 태도가 없는 개방성을 뜻한다. 매우 역동적이어야 한다. ‐‐‐‐‐‐‐‐‐‐‐‐‐‐‐‐‐‐‐‐‐‐‐‐‐‐‐‐

17) L. de Seilhac, 145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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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오 늘 날 정 주 서 원 의 가 치 지금까지 들여다 본 베네딕도회 정주 서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한 국 사회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몇 가지 제시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 째, 가정 파괴 현상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수도승이 어디를 가든지 그가 수도승이 되도록 그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은 바로 정주이다. 든든한 동반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수도승을 성실에로 돌아오게 하신다. 바로 이 성실성은 수도승들의 관계뿐 아니라 결혼한 부부들의 관계에서도 그 중심 에 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가정의 경우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 성 실하게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가정 파괴라는 극단에까지 이르고 있다. 바로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서로에게 책임 있는 사랑으로 자기 자리를 굳 건히 지키며 살아가는 (cf. 요한 15,9 10; 1요한 3,17 18) 베네딕도회 수 도승들의 정주가 분명히 하나의 가치로서 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둘 째, 세대간 관계 단절 현상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는 아마도 수도원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20대부터 90대까지 한 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다. 노년기와 청 년기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완고함이다. 청년기는 경험 부족에서부터 노년기는 과잉된 경험으로 인해 완고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또한 두 세대 사이에 놓인 중년기는 어떠한가? 여러 면에서 그야말로 혼동과 질서 사이 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시기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세대가 물리적으로 함께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정주가 가치를 지니는 것은 결 코 아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대화는 사랑의 새 이름”이라고 했다 (<봉헌생활> 74). 공동체 생활에 있기 마련인 크고 작은 갈등과 마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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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지 않고 대화로 풀어가고자 서로 노력하면서 항구하게 수도원에 머 무는 우리의 정주는 수도원 담을 훌쩍 뛰어 넘어 세상 사람들에게 힘이 되며 하나의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셋 째, 고인 물 위에 떠있는 나뭇잎 같은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에 방향 등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이 의미 있는 선택이고 삶인지, 어 디로 가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요즘 젊은이들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시간조차 없어 보인다. 대중홍보수단들이 미리 제시해 주면 그때그때 옷 도 걸음걸이도 머리 모양도 생각도 가치 척도도 바꾼다. 그러나 수도승들 이 지키고 서 있는 자기 자리, 모든 것 안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께 굳건 히 뿌리를 내리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수도원의 일상을 특별한 일을 하는 듯 항구하게 살아 가는 우리의 정주가 그들에게 분명 하나의 답이 된다. 젊은이들이 세상이 말해주지 않는 새로운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길, 그리 스도를 향해 가고 있는 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주는 고착된 것, 움직이지 않는 것, 변화가 없는 것, 흐름이 없는 것, 그저 고정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베네딕도회 공동체와 그 구 성원들은 미래를 향해 방향 지어진 살아있는 정주의 역동성을 살도록 부 름 받았다. 만약 강물이 흐르는 힘이 모자라 물이 흐르지 않으면 더 이상 강이 아닌 강과 같다. 반대로, 만약 흐르는 힘이 있어 살아있고 강물이 흐 른다면 결코 같은 물이 아니나 강은 항상 그대로 남아 있다.18) 바로 이것 이 정주의 역동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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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L. de Seilhac, 145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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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Braso G., La stabilita nella comunita (stabilitas in congregatione RB 4,78), Vita consacrata 15(1979), 1 9. Kardong T. G., The Benedictines, Stability, 1988, 88 94. Kelly M.,“Reflections on the Significance of Stabilitas and Conversatio morum in Benedictine Commitment”, ABenR 55 (2004), 251 264. Leclercq J.,“la stabilita secondo la regola di san Benedetto”, OeL 35(1980), 10 17. Leclercq J., Nuovo elogio della stabilit , OeL 48(1993), 98 107. Lombard H.,“The Profession of Stability”, Tjurunga 58 (2000), 11 14. Pfeifer M., 로마 안셀모 대학 신학부 수도승 영성 2006년 강의록“베 네딕도회 서원” Robert A., Centered on Christ

A guide to Monastic Profession,

Cenobitic Stability, Kalamazoo 2005, 203 242. Seilhac L. de, La professione di stabilita, in Secondo simposio internazionale delle Benedettine, Parma 1995, 145 162. Thompson P.,“Living Satability in the wake of Life’s Changes”, ABenR 52 (2001), 156 170. Vogüé A. de,“To persevere in the Monastery unto Death”(Stability in St. Benedict and Others), Word and Spirit 16 (1994), 125 158. 안셀름 그륀, 믿음, 성서와 함께,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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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퀴나타 뵈크만, 베네딕도 규칙서 제 58장, 코이노니아 선집 4, 462 465. Fagerberg D.W., 코이노니아 선집 2, 401. 신약성서 신학사전, 게르하르트 킷텔, 게르하르트 프리드리히, 요단, 1986, 744 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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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Pax-평화라는 단어는 예부터 베네딕도회의 중요한 모토의 역할을 하였 다. 규칙서에서는 베네딕도 성인이 이 단어를 그리 자주 사용하지는 않지 만 평화의 가치는 그에게 대단히 귀한 것이었다. 그가 로마 사람이었고 라틴말을 썼기 때문에 그의 평화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 사람들 이 pax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라틴말로 pax라는 말은‘박다’, 또는‘꽂다’,‘맺다’라는 뜻의 pangere라는 동사와 관련해 서 서로 간에 맞물리다 또는 맞춘다는 기본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 같 다. 로마인들에게 평화는 특히 서로의 계약 내지 조약으로 이뤄진다. 그 들의 평화개념은 항상 어떤 질서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평화를 tranquillitas ordinis 즉 질서의 조용함 혹은 질서 있는 안 온함이라고 불렀다. 로마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치하에 온 세상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 나라들이 로마인들의 지배아래 평화 중에 지낸 것을 pax romana 라고 불렀다. 물론 그것은 강제로 이룬 평화로서 우리 가 생각하는 평화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렇지만 베네딕도 성인에게도 질 서라는 평화의 조건 내지 요소가 중요했다. 그런데 로마사람들의 사고보다 베네딕도에게는 성서 말씀과 개념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샬롬(히브리어)과 신약성서의 이레네(그리 스어)에 그의 평화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그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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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는 조금씩 다르다. 샬롬은 굉장히 적극적인 말로서 안녕, 즉 필요한 모 든 것이 다 있으며 사람들이 넉넉하게 살고 행복을 누리고 있는 그런 상 태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서로의 화해·화평·친분이 포함된 다. 그리스말의 이레네는 조금 더 소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보통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 즉 싸움이 없고 조용하고 갈등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약성서 나오는 이레네는 대개 샬롬의 번역으로 볼 수 있다. 바울로는 편지의 서두에서 언제나 그 인사말로 시작 한다:“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우리가 은총이라고 옮기는 그리 스어의‘카리스’는 아주 그리스적인 개념이고 평화는 샬롬의 번역으로서 히브리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다.“pax”란 단어는 베네딕도의 규칙 서에 8번이나 나오는데 그 가운데 4 군데는 베네딕도의 사고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3가지 중에 하나는 특별히 깊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제가 보기에).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낱말의 사 용 1. 첫 번째 경우는 머리말 17절에 나오는 시편 인용인데“생명을 원하 고 좋은 날들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냐?”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원하거든, 네 혀는 악을 삼가고 네 입술은 간 교��� 말을 하지 말라. 사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아서 뒤따 라가라.”굉장히 좋은 말씀인데 베네딕도 성인은 여기에 깊은 뜻을 부여 함 없이 시편말씀에 나오는 여러 덕행을 열거하는 가운데 평화를 추고하 는 것을 행복을 찾는 조건으로 언급하는 정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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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pax라는 단어가 세 번 평화의 인사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53장에 베네딕도는 2번이나 손님에게 그런 인사를 드리라고 한다. 손 님이 오면“우선 함께 기도를 바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러나 악마의 속임수 때문에 기도를 바치기 전에는 이 평화의 입맞춤을(pacis osculum) 하지 말 것이다.” 63장에 이 말이 같은 뜻으로 나오는데 그 맥락은 질서와 서열에 관한 지침이다.“형제들 자신들이 가진 차례를 따라 평화의 인사와 영성체를 하고 시편을 선창하고 공동기도석에 설 것이다.”이 입맞춤은 고대부터 지중해 문화권의 인사법이고 성서에 여러 차례 서로 그렇게 인사하라는 권고가 나온다(예: 로마16,16; 1 코린 16,20; 2 코린 13,12; 1베드 5,14). 이 평화의 인사는 미사 전례의 부분이 되었으며 유교가 지배했던 문화권에 이런 풍습이 전혀 없었지만 이제 한국에서도 수도자들이“pax” 라고 하면서 이 정겨운 인사법을 즐겨 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규칙서 의 이 세 가지 경우는 뜻있는 예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3. 수도원 공동체 분위기로서의 평화라는 말이 두 군데 나오는데 우리 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이다. 4장 73절“착한 일의 도구”로“불목한 자와는 해가 지기 전에 화해하 라”는 말인데 라틴어의“in pacem redire”를 직역하면“불목한 자와 해가 지기 전에 평화로 돌아오라”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의미 즉 평화의 인사라는 의미가 포함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불목했으면 해가 지기 전 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라는 뜻도 될 수 있다. 그런데 물론 일반적으로 내 가 보기에 말로 마음으로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상 이것을 너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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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대로 지키려 할 때 역효과가 나올 수가 있다. 어떤 때는 자고난 뒤에 다음날 아침에 더 쉽게 이야기 할 수가 있다. 감정이 가라앉기 전에 억지 로 화해한다면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베네딕도는 에 페소서 4,26의 권고를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구절을 200 주년성서 에서“화를 낸 채 하루해가 저물지 않도록 하라”를 비교적으로 직역했다. 그 뜻은 될 수 있는 데로 빨리 화해하라는 것이다. 같은 4장 25절에“거짓평화를 주지 말라”(Pacem falsam non dare)는 말이 있다. 이것도 평화의 인사에 대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평화의 인사 할 때 거짓으로 하지 말고 진정으로,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일반적으로 어떤 기만 내지 위선을 생각한 것 같다. 성경을 보면 평화의 인사를 가장 심각하게 남용한 이는 유다였다. 영성체 하는 준비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거짓이 되지 않게 먼저 용서하는 것이 원칙이다. 또 다른 거짓평화가 있다고 생각된다. 베네딕도 성인이 생각하지 않았 을 것 같지만, 전제주의 평화 즉 로마 사람들이 말한 Pax Romana 또는 독재정권에서 말하는 평화다. 흥미 있는 예로서 1980년경 분도출판사에 서 당했던 사건을 들 수 있다. 그때에 군인이 자기 총을 버리는 그림과 함 께“거짓평화를 주지 말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이 나오는 빨간 색의 포 스터를 만들었는데 판매 금지를 당했다. 평화에 대해서 가장 진하게 나오는 말은 34장 5절이다:“이렇게 하면 모든 지체들이 평화 중에 지내게 될 것이다”(omnia membra erunt in pace)라는 말이다. 이 평화야말로 34장 앞부분의 규정들의 목표라고 하 겠다. 여기서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을 어떤 것으로 보는지 잘 드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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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체(membra)라는 말은 우리 규칙서에서 여기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울로 사도가 즐겨 쓴 비유다. 특히 고린토 전서 12장 12절~27절에 집 중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지체들은 모두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바울 로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대한 말씀인데 베네딕도는 수 도 공동체를 하나의 몸으로 바라본다. 이 비유를 두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우선 각각 다른 역할이 있다는 사실에 주의 할 수 있다. 인체의 눈, 발, 귀 와 같이 지체간의 서로 다른 기능이 있음을 바울로 사도는 상당히 부각시 킨다. 우리 실제 생활 속에는 재능과 소임이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생각 할 수 있다. 34장의 문맥은“모두 필요한 것을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 다. 필요한 것은 능력이나 소임에 따라서 분명히 다르다. 다음에 지체와 몸이 서로 연결된다는 점에 주의할 수 있다. 바울로 사 도가 말한 대로 한 지체가 아프면 모든 지체가 병든다. 또 한 지체가 기쁘 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한다. 다시 말해 나의 자세와 행동은 모든 회원 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지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다. 34장의 문제는 분배에 관한 것이다. 베네딕도의 표준은 사도행전 2장 과 4장에서 묘사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공동체다. 34장의 제목“모 든 이들이 필요한 것을 똑같이 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베네딕도는 “(성서에)기록된 바와 같이‘각자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줄 것이다’(사 도 4,35)로 대답한다.”그러니 똑같이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 다. 베네딕도는 계속 설명 한다:“이렇게 말함은 -이런 일은 없어야 되겠 는데- 사람의 차별을 두라는 뜻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을 고려하라는 말이 다. 적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말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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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많이 필요한 사람은 연약함에 대해 겸손하고 자비를 받은 데 대해 교 만하지 말아야 한다.”끝으로 베네딕도가 바라는 결과가 나온다:“이렇게 하면 모든 지체들이 평화 중에 지내게 될 것이다.”(RB 34,2-5) 이런 평화를 조성하는 것은 우선 아빠스 책임이다. 아빠스 다음으로 당 가실의 책임이 제일 크게 부각된다. 당가의 일에 관한 31장의 말은 원장 (65장)에 관한 말보다 길고 아름답다. 당가는 평화를 유지하고 퍼뜨려야 하는 사람으로 지극히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하며 자기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31장 끝에“이렇게 해서 아무도 하느님의 집 안에서 혼란을 느끼거나 상심하지 않게 할 것이다.”하느님의 집인 수도 원에는 평화와 반대되는 것인 혼란(perturbetur)과 슬픔(contristetur)이 없어야 한다. 원장에 대한 65장에 다시한번 평화라는 낱말이 나온다. 여기서 베네딕 도는“평화와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서”아빠스가 모든 것을 정해야 함을 언급한다. 당시 아빠스를 단체에서 선출한 다음에 교구장이나 이웃 아빠 스들이 그를 정식으로 세웠는데 가끔 아빠스의 대리자를 동시에 임명하 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런 관례를 강하게 반대하며 여러 가지 부작용의 위험을 지적하고,“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와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수도원 내의 임명권은 아빠스의 재량에 맡기는 것이 유익 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외부의 간섭이 없어야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 성하고 보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평화의 공동체 “평화” 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며 그 단어가 어디에 나오는지를 보면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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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딕도 성인이 생각하는 공동체성을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하면, 그것은 평화의 공동체이다.“평화의 길” (분도 출판사 19??)을 쓴 W. 투닝크는 이것을 잘 보았다. 이런 사상의 배경은 사도행전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을 보면 처음부터 수도생활의 목표를 사도 행전의 이용으로 표현한다:“너희가 하나로 모여 있는 첫째 목적은 한 집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이다.” (사도 4,32 참조). 갈동(Terence Kardong)의 지적을 따르면 베 네딕도는 RB 33장에서 스승의 규칙서와 요한 가시아노를 따르면서 우선 개인 소유의 포기를 강조한다. 33장 끝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도행전의 인용이 나온다:“기록된 바와 같이‘모든 것은 모든 이에게 공동 소유가 되어야 하며’ , 누구라도‘무엇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거나’ (사도 4,32 참 조)생각지도 말 것이다.” (RB 33,6) 개인 소유의 박탈을 강조하기 위하여 성인은 사도행전의 말의 순서를 일부러 바꿔 놓은 것 같다. 그와 달리 공동체 이야기를 하면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가며 처음 부터 사도행전의 말씀을 끌어낸다. 이것을 34장에서 잘 보게 된다.“각자 에게 필요한대로 나누어 주었다.”(사도 4,35) 라고 하면서 분배의 원칙 을 세운다. 여기 나오는 규정의 목적은 박탈이 아니고 공동체의 평화이 다. 베네딕도 성인은 분명히 사도행전에 묘사되는 초대 공동체를 평화의 공동체로 보았다. 그래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베네딕도 성인이 중요하 게 생각하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필요한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줄 안다. 적게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 많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데서 보면 수도원에 강한 사 람도 있고 약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RB 64,19). 이와 같이 강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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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필요하고 약한 사람은 많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 그 시대에 수도원 안에 자유인도 있고 노예도 있었으며 어린이와 노 인도 있었다. 그 당시에 자유인과 노예는 오늘날 인종 차별 만큼 큰 역할 을 했던 것 같다. 현재에 많은 수도원에는 인종이 서로 다른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는 서 로 민족이 달라도 같은 민족끼리 살 때 생기는 것보다 결국 더 크지 않다. 서로 다름에 대한 베네딕도 성인의 관심과 배려가 지극하다. 그는 거듭 이 점을 아빠스에게 당부한다. 그래서 consideratio(배려, 고려)라는 말 과 cura(배려, 돌봄)라는 말은 각각14번이나 나온다. 특히 노인들 어린이 들 등 약한 사람들에 대해 다룰 때 단어들이 상당히 많이 사용된다. 아빠스의 자질과 성격에 대해 말할 때에 베네딕도는 이 점을 강조한다. 아빠스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의 소유자라 야 한다. 그는“부산떨거나 소심하지 말 것이며, 과격하거나 고집하지도 말고 질투하지 말며 너무 의심하지도 말 것이니, (그렇게 하면) 잠시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RB 64,16) 현재의 경영자들이 베네딕도 성 인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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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규칙서 제7장 맺음말에 대해서1) 쁠라치도 드세예 조성옥 에노스 옮김

베네딕도 규칙서 주석가들은 규칙서 7장에 수덕생활에 대한 베네딕도 의 가르침 전체가 요약되어 있다는 데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베네딕도가 직접 쓴 부분은 그중 아주 일부일 것이다. 전체 구조는 가시아노의 제도 서(De Institutis Coenobiorum)와 비슷하지만, 이 거룩한 입법자는 그것 을 직접 참조하지는 않은 듯하다. 사실 7장은 스승의 규칙서와 약간의 차 이만 있지 거의 같은 것으로, 스승의 규칙서가 더 앞의 것이라는 설이 상 당수 비평가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이 사실은 규칙서의 문학 양식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놀라운 것이 아니 다. 수도승 저자들은 보통 독창성 여부에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오래 된 규칙서들은 대개 수도승 생활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들을 요약한 것 이었다. 아빠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규칙이 아니라 교부들로부 터 전해 내려온 가르침과 제도들을 그대로 지키고 그것을 단순하게 제자 들에게 전했다.2) 하지만 전통에 충실하다 해서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섞 이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살아있는 유산들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자신의 ‐‐‐‐‐‐‐‐‐‐‐‐‐‐‐‐‐‐‐‐‐‐‐‐‐‐‐‐

1) 이 글은 1959년, Collectanea Cisterciensia, (Oct.-Dec.1959)에 발표된 Placide Deseilles의 글로, 48년 만에 The American Benedictine Review (58:3, Sep. 2007)에 Dunstan Coleman의 영역으로 실렸습니다. 2) 가시아노, 제도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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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규칙서 제7장 맺음말에 대해서

마음에 새겼다 해도, 그것을 전할 때에는 때와 장소의 요구를 고려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가시아노가 이집트 수도승 관습들을 새롭게 서방 수도생활의 상황에 적용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 일 을 참으로 천재적으로 완성했다고 하겠다. 전통에 깊이 뿌리박은 베네딕도 규칙의 성격 때문에 규칙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종 그 원천이 된 자료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문 장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풋내기 독자들은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본문을 해석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다보면 규칙서 전체의 진정한 의미 가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규칙서 7장의 맺음말은 매우 중요하다. 7장 전체 본문에 서는 스승의 규칙서 저자와 베네딕도가 가시아노의 텍스트를 꽤 확장시 킨 반면, 맺음말은 큰 변화 없이 제도서의 절들을 그대로 옮겼다.3) 우리 ‐‐‐‐‐‐‐‐‐‐‐‐‐‐‐‐‐‐‐‐‐‐‐‐‐‐‐‐

3) 다음의 표는 세 텍스트 사이의 연관성과 차이점을 이해하게 한다. 제도서 4, 39

스승의 규칙서 10. 87-91

베네딕도 규칙서 7, 67-70

이상과 같은 증표로 진정한 겸손을 판가름할 수 있다. 이 겸손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 면 겸손은 너를 곧 더 높은 단계, 즉 두려움이 없는 사랑 에로 인도할 것이다. 이 사랑 으로 너는 이전에 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지키던 모 든 것을 별 어려움 없이 자연 스럽게 지키게 될 것이다. 다 시 말하면 이제는 무서운 처 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선 자체에 대한 사랑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모든 것을 지키게 될 것이다.

제자가 겸손의 이 모든 단계 를 올라가면서 하느님께 대 한 두려움에서 이 현세 생활 의 사다리를 잘 오르게 되면, 곧 주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 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 든 것을 이제는 별로 어려움 없이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이 좋은 습관에 대한 사랑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 게 될 것이다. 이제 주께서는 악습과 죄악에서 깨끗하여진 당신 일���을 위해 성령을 통 하여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 실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의 이 모든 단 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 승은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 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 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 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 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 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 이제 주께서는 악습과 죄악에 서 깨끗하여진 당신 일꾼 안 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 사실 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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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여기서 가시아노의 전체 가르침과의 관계 안에서, 또 전통적 수도승 영성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이 텍스트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글의 결론에 가서는 어떤 빛이 베네딕도 성인의 집필을 비추어 주었는지 보게 될 것이다.

가시아노의 영 적 단 계 들 가시아노는 그의 제도서나 담화집 어디에서도 수도승이 가야 할 영적 여정에 대해 완결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작품들을 대조하면서 해당되는 구절들을 상당히 많이 찾아낼 수 있고 그것들을 일 정한 순서에 따라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가능하다. 담화집 14장에는 영성생활의 중요한 단계들이 비교적 전문적으로 엄격 히 분류된다. 가시아노는 우선 수행(Scientia praktike 혹은 Scientia actualis)과 관상(Scientia théoˆ rètikè)을 구별한다. 그에게 관상은 수행 의 다음 단계로, 수행을 거치지 않고 관상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4) 수행은 자신의 길을 바꾸고 악습을 정화시키는 것으로, 악습과 싸우는 첫 단계와 덕행을 얻는 다음 단계로 나뉜다. 이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선 (善)에 항구하고 자연스러워진다. 수행의 첫 단계에서는 착한 행동을 하 더라도 마치 강제나 폭정 아래서5) 징벌을 두려워하는 노예나 최소한 어 떤 보상을 바라고 움직이는 용병처럼 행동하지만6), 두 번째 단계에 가면 가파르고 좁은 길도 기쁘게 오를 수 있게 된다.7) 그 때부터 영혼을 악습 에서 지켜주는 것은 선을 추구하고 덕행을 사랑하는 것이다. 애덕은 그리 ‐‐‐‐‐‐‐‐‐‐‐‐‐‐‐‐‐‐‐‐‐‐‐‐‐‐‐‐

4) 담화집 14,1-2: 코이노니아 선집 6 p.298-315. 6) 담화집 11,6-7: 코이노니아 33.

5) 담화집 14,3. 7) 담화집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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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를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우리를 불살라 영적 덕행의 열매를 거두게 하고, 그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향해서는 우리 안에 마땅한 혐오감을 일 으키기 때문이다.8) 이것은 아들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애덕으로 하느님의 모상과 이미 지에 도달한 이들의 상태라고 하겠다.9) 악습의 공격을 물리친 이들은 그 때부터 안전과 평화를 누리게 되며, 선에 항구히 머물러 갈라지지 않는 다.10) 이러한 마음의 순결은 애덕과 같은 것으로, 수도승이 하느님 나라 를 얻기 원한다면 모든 노력을 다해서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11) 분노, 성급함, 슬픔, 나태, 무자비함 등 정념부(情念部, the irascible part)에서 오는 악습(thymikon)12)은 이런 상태에 도달한 영혼 안에서는 인내와 관대함에 길을 비켜줄 수밖에 없다. 이 인내와 관대함은 모든 것 은 하느님의 연민에 빚을 지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굳건한 믿음에 서 나온다.13) 마음이 깨끗해진 수도승은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를 내 리시고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태양을 비추시는(마태 5,45) 하느 님 아버지의 모상 안에서, 모든 이를 향한 그분 마음의 고요한 사랑에 계 속 귀를 기울이면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14) 탈선한 이에게도 흘러넘 치는 연민을 느끼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용서 ‐‐‐‐‐‐‐‐‐‐‐‐‐‐‐‐‐‐‐‐‐‐‐‐‐‐‐‐

8) 담화집 11,6. 9) 담화집 11,7;11,9. 10) 담화집 11,8 가시아노는 이 머무름이 "의로운 사람은 하루에 일곱 번씩 넘어진다", "그가 비록 넘어진 것 같아도, 하느님의 은총이 그를 일으킨다. 이 재빠른 회복 덕 분에 영혼은 정의 안에 머무르는 상태를 잃지 않는다."(담화집 22,13; 22,7) 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다. 11) 담화집 1,7: 코이노니아 선집 6 p.173의 각주 1과 p174-178: "하느님 나라" 표현에 대해서는 각주 24 참조 13) 담화집 12,15. 12) 담화집 24,15. 14) 담화집 11,9: 코이노니아 선집 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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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의 자비는 모든 생명 있는 것에 퍼져나간다.(잠언 12,10).15) 욕망부(慾望部, the concupiscible part)와 관련된 악습들(èpìthymè tikon), 즉 간음, 재물에 대한 사랑, 악하고 저급한 욕망 등은16) 완전한 정결(perfect chastity)을 이길 수 없다. 완전한 정결은 초보자들의 부자 연스러운 억제와 거리가 먼 흔들림 없는 평온함이다. 더 이상 육적인 욕 정의 충동과 싸우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지독히 혐오하고, 항구하며 침범할 수 없는 순결(purity)로 지킨다.17) 애덕과 완전한 정결은 수행 의 결과인“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은 두 손바닥이며, 기쁨의 두 자매”이 다.18) 그러나 단식, 깨어있기, 딱딱한 바닥에서 잠자기, 손노동, 자선 등 엄격 한 고행을 꾸준히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런 마음의 순결(purity of heart) 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어느 누구도 혼자 서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19) 누군가가 마음의 순결에 아주 가까이 다가 갔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표지는 그가 더 이상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겠다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20) 완전한 겸손은 정상에 다다른 영혼에 게 접근하는 허영심, 시기, 교만, 주제넘음, 이단 등21) 이성부(굊性部, the rational part)와 관련된 영혼의 악습(logikon)을 치유한다. 수행의 열매인 마음의 순결은 관상으로 이어진다. 야곱의 이름, 즉‘가 로챈 자’라는 의미를 알아들은 수도승들은, 자신의 육체적 악습들을 극 기의 투쟁으로 다스리고, 이제 하느님의 순결을 관상함으로써‘하느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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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담화집 11,10: 동권. 16) 담화집 24,15. 17) 담화집 12,11. 18) 담화집 12,1; 담화집 12,6. 19) 제도서 12,13-16; 담화집 12,4. 20) 담화집 12,15. 21) 담화집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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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자’라는 뜻의 영광스러운 이름, 이스라엘이라 불리게 된다.22) 이제 영 혼은 육적인 욕정을 이겨내고‘영적 시온’, 즉‘하느님의 망대’가 되 며,23) 하느님 나라가 그 위에 세워진다.24) 관상 역시 두 단계로 구성된다.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하느님과의 일 치에서 나온 초이성적 빛”을 보는 관상의 첫 단계에서는 관상의 대상에 여러 가지를 포함한다. 가시아노는 때때로 천상적 세계를25) 보는 관상, 창조의 위대함이나 하느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면서 드러내시는 정의와 섭 리를 통해서,26) 특히 성서를 영적으로 이해하면서27) 만나게 되는 하느님 관상에 대해 언급한다. 관상의 둘째 단계는‘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상태’ (Dei solius intuitus)로28)‘불의 기도’혹은‘순수한 기도’라고29) 표현 한다. 영적으로 천사와 같이 새롭게 형성된 영혼은 육체의 굴레에서 풀려 나 거룩해짐으로써, 그의 전 존재와 마음의 모든 움직임은 단순하고 간단 없는 기도가 된다.30) 가시아노가 제3담화에서 묘사한 세 가지 포기는 영적 진보의 이 같은 여러 단계와 일치한다. 수행에 속하는 세상 재화의 포기는 잠언서에 해당 하는 것으로, 육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과 세속적 악습들을 잘라버리는 것 이다. 변덕스러운 경향들로부터 벗어나게 된 영혼은 수행의 끝에 마음의 순결을 얻는다. 이렇게 악습을 포기함으로써 영혼은 관상의 첫 단계로 인 ‐‐‐‐‐‐‐‐‐‐‐‐‐‐‐‐‐‐‐‐‐‐‐‐‐‐‐‐

22) 담화집 머리말; 12,11; 창세 27,36; 32,28 참조. 23) 담화집 12,11. 24) 가시아노에게 하느님 왕국은 분리될 수 없는 scientia veritatis et virtutum amicitia(담화집 1,13), 덕행의 훈련, 마음의 순결, 영적 지식(담화집 1,14)으로, 이 것은 에바그리우스의 개념인 apatheia와 theoria 이다. 26) 담화집 1,15. 25) 담화집 1,8. 27) 담화집 14,8-16. 28) 담화집 1,8. 29) 담화집 9,15,18,25: 코이노니아 선집 6 p.260. 30) 담화집 9,6; 10,7: 코이노니아 선집 6 p 256;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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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된다. 그러나 창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지혜와 위대함의 자취를 발견하 려면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초연해져야 한다. 이 길은 태양 아래 모든 것 이 헛되다는 전도서 구절을 상기시킨다. 마지막 세 번째 포기는 앞의 것 들을 완성하면서 산만한 대상들의 관상을 정화한다. 이것은 아가서에 해 당하는‘하느님만을 뵙는 관상’으로 나아가게 한다.31)

에바그리우스의 영 적 단 계 들 요약해본 바와 같이 가시아노의 가르침은 전체적으로 에바그리우스의 구조를 매우 충실하게 따른다. 그는 수행의 길과 관상 혹은 신비적 직관 (gnosis)의 길의 특성을 알렉산드리아 전통에서 가져왔다.“수행은 영혼 의 욕정부을 정화시키는 영적 원리로,32) 그 결과 욕정으로부터의 해방, 즉 미덕의 온전한 소유라 할 수 있는 아파테이아(apathéia)에 이른다. 아 파테이아는 분별있는 영혼의 평온한 상태로 친절과 정결로 드러난다.33) 애덕은 아파테이아와 함께 수행의 절정에서 발견된다. 애덕은 분별있는 영혼이 도달하는 높은 경지로 이 단계에 이르면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아 는 지식보다 더 사랑할 수 없게 된다.34) 인간의 지성이 가장 먼저 보게 되 는 근원적 애덕은 바로 하느님이기에, 애덕은 사물의 관상(théoˆ ria physikè)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35)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애 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그것은“겸손한 이 36) 라는 시편의 말씀과 같다. 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신다(시편 2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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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3) 34) 36)

담화집 3,6: 코이노니아 선집 6 p. 229-230. 32) Praktikos 1,50. Centuries, Suppl., 3: 코이노니아 31집 p.189 참조. Centuries 1,86. 35) Letter to Anatolios; PG 40,1221B. Letter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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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혹은 신비적 직관은 천상적 지식과 하느님의 심판과 섭리에 대한 지식을37) 포함하는 사물의 관상과 가장 중요한 지식인 성삼의 관상(théologia)으로 나누어진다. 거기에서 영혼은 하느님을 닮게 되며38) 기도39) 의 절정에 이른다. 가시아노의 글에서도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이 모든 요소들을 찾을 수 있지만 훨씬 덜 체계적이다. 각 단계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데, 이렇게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 의도적이다. 가시아노는 관상의 여 러 측면을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단계가 아니라 서로 완전히 분리되기 어 려운 다양한 양상들로 본다. 에바그리우스는 아파테아아, 애덕, 사물의 관상을 서로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연결되는 각기 다른 단계로 표현하지 만, 가시아노는 이런 구별을 희석시킨다. 가시아노의 담화집에서 마음의 순결, 애덕, 관상은 거의 같은 말이다. 하나의 진실을 표현하는 세 개의 다른 관점처럼 말이다. 가시아노와 에바그리우스의 다른 점은 기본원리 가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에바그리우스 역시 아파테이아와 관상의 실제적 일치를 모르지 않았다. 그가‘하느님 나라’의 이름으로 그 둘을 함께 묶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40)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에바그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 전통의 분류에 따라 변형시킨 더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를 보게 된다. 철학적 사변에 익숙하지 ‐‐‐‐‐‐‐‐‐‐‐‐‐‐‐‐‐‐‐‐‐‐‐‐‐‐‐‐

37) Centuries, 1,27. 38) Centuries, 5,81 인성이 본질적 은총을 선사받으면, 인성 역시 은총에 의해 하느님으 로 불릴 것이다. 그것을 창조하신 분의 모상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39) De Oratione, 60“만일 당신이 신학자라면 참으로 기도할 것이고, 참으로 기도한다 면 당신은 신학자인 것이다.” 40) Praktikos, 1,2; PG 40, 1222D“하느님 나라는 진정한 존재의 gnoˆsis가 동반하는 영 혼의 apathéi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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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던 초기 사막교부들은 영성생활에서 두 가지 중요한 단계만 구별했 다. 첫 단계에서, 영혼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거칠게 다 루어야만 한다. 이 투쟁의 끝에 하느님으로부터 온‘미덕’(dynamis), 성 령의 선물, 위대한 은사를 받는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선에 항구히 머물 면서, 그침 없이 하느님과 친밀해지므로(하느님에 대한 기억, 쉼 없는 기 ‘epignosis’of God), 기쁨과 활기로 채워져 영적 아버 도, 하느님 인식( 지의 역할을 잘 할 수 있게 한다. 이 두 단계는 안토니오 성인의 제자이며 후계자인 암모나스의 편지에서 쉽게 식별된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대가 알다시피 신뢰가 깨어진 이래, 인간과 모든 산만함에서 도망치지 않는다면 영혼은 마땅히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에 대항하여 덤벼드는 것들 의 공격을 마주하게 될 터인즉, 수시로 쳐들어오는 이 공격을 이겨 낸다면 하느님의 영이 그 안에 거처할 것이니, 슬픔은 바뀌어 기쁨 과 환희가 될 것입니다.41) 이 거룩한 덕을 얻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온 삶이 자유롭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일이 당신 안에서 쉬워질 것입니다. 사람 안에 덕 이 들어와 살기까지, 반드시 이렇게 수양해야 합니다. 즉, 명예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 오는 어떤 모욕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귀하다고 판단되는 세상의 이익을 멀리하는 것 이요, 온갖 육체적 쾌락을 미워하는 것이요, 시대의 모든 천하고 헛된 논리에서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밤이고 낮이 ‐‐‐‐‐‐‐‐‐‐‐‐‐‐‐‐‐‐‐‐‐‐‐‐‐‐‐‐

41) Letter 1,1; Ammonas, successeur de S. Anto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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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단식과 눈물로 덕을 청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주저 하지 않고 그대에게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번 주시 기만 하면, 그대의 생명은 휴식과 위안 안에 있게 됩니다. 그대는 하느님 면전에서 아주 강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고 그분께서는 쓰 인 그대로 당신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42)

비슷한 가르침이 마카리우스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모��� 선한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악 때문에 마음이 저항을 한다 해도 말입니다. 지금은 반 마음으로 마지못해 하고 있는 덕행에 점 차 익숙해져서, 매순간 옳은 것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 고 많은 덕과 사랑을 실천하며 영원히 하느님을 기다리게 될 것입 니다. 주님께서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자 계 속 자신을 혹독하게 대하는 좋은 뜻과 기질을 보시고, 또 모든 반 감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을 보 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내면의 원수들과 죄로부터 구해주시고 성령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막힘없이 주님의 모든 가르침을 살게 될 것이고, 그가 순수하게 열매를 맺을 때 오히려 주님께서 성령의 열매들을 주시면서 당신의 가르침을 그 사람 안 에서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기도를 허락하 실 것입니다. 내장에서 나오는 진정한 연민, 참된 미덕을 허락하실 ‐‐‐‐‐‐‐‐‐‐‐‐‐‐‐‐‐‐‐‐‐‐‐‐‐‐‐‐

42) Letter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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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모든 덕행의 실천은 이제 그에게 제 이의 천성이 될 것 입니다.43)

에바그리우스는 이 카리스마적 완덕을 분석하여 그것의“도덕적”차원 인 선을 수행하는 능력과 항구함은 수행으로 묶고,“관상적”요소는 théoˆrètikè의 두 단계, 즉 사물의 관상(théoˆria physikè)과 성삼의 관상 (théologia)으로 나누었다. 에바그리우스의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는 사막 교부들의 신비적 체험을 철학적 용어로 옮기면서 결과적으로 강한 지적 향기를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스케테 철학자 에바그리우스의 숨은 제자 들이44) 감히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가시아노는 에바그리우스와 4 세기 이집트 은수자들의 카리스마적 신비주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사실 원천이 되는 전통의 가르침을 참조하면서 그의 교훈을 이해하는 것보다 에바그리우스에게 충실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RB 7장 의 맺 음 말 이제 규칙서 7장 맺음말의 원천인 제도서의 구절들을 살펴보자. 7장의 맺음말은 가시아노가 수행 의 열매인 아파테이아와 애덕을 묘사하며 더 발전시킨 부분과 분명히 같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 안에서 이런 덕들이 관상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았다. 7장 시작 부분에서 설명한 하느님께 대 한 두려움, 세상 것들에 대한 경멸, 겸손의 성장은 사물의 관상 단계에서 성취되는 모든 정화 작업을 요약한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하느님의 모상 ‐‐‐‐‐‐‐‐‐‐‐‐‐‐‐‐‐‐‐‐‐‐‐‐‐‐‐‐

43) Macarius the Egyptian, Sur la garde du Coeur, 13; PG 34, 836C-837B. 44) 동방의 영성작가들은 오리게네스 이단 문제 때문에 감히 에바그리우스의 이름을 앞 에 내세우지는 못하면서 그의 사상을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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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완전히 회복하고, 수도승의 온 존재는 하느님과 또 모든 거룩한 것 들과 떨어질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태가 가시아노가 말하는 관상으로서45) 수도승이 도달해야 할 마음의 완덕의 궁극적 상태이다.46) 이제 규칙서 전체의 의미와 7장의 의미가 동시에 명료해진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가시아노의 제도서와 마찬가지로 관상을 다루지 않는다. 이 두 책의 목적은 오직 영적 기술의 첫 부분, 즉 수행 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 문이다. 이것은 어느 수도승 규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수도승들을 이런 수행의 도착지, 곧 아파테이아(악습과 죄악에서 깨끗하 여진 당신 일꾼 안에서), 완전한 덕행(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좋 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그리고 애덕(수도승은 곧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 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가 영성생활의 이 단계에서‘성령을 통하여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 다’라며 성령을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초기 신비주의 수도영성 에서 보이는 성령주의(pneumatism)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베네딕도는 규칙서의 다른 두 구절에서 이 영적 여정을 환기시키는데, 스승의 규칙서에는 그 구절들이 없기에 더 주목을 끈다. 머리말 끝에는 구원의 길을 관대한 마음으로 걷는 수도승은 마침내“마음이 넓어지고 말 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되는”그 상 태에 도달한다고 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규칙서를 끝맺는다.

그러므로 하늘의 고향을 향해 달려가려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초 ‐‐‐‐‐‐‐‐‐‐‐‐‐‐‐‐‐‐‐‐‐‐‐‐‐‐‐‐

45) 담화집 1,8: 선집 6 p.179.

46) 담화집 9,2: 선집 6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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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를 위해 쓴 이 최소한의 규칙을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 완수 하여라. 그리하면 마침내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위에 언급한 교훈 과 덕행의 더욱 높은 절정에47) 도달하게 될 것이다. (RB 73,8-9)

담화집 안에서 가시아노는 제도서에 포함된 악행과의 투쟁이나 수도승 규율에 관한 글에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을 관상하는48) 완덕의 절정 (perfectionis culmen)에 관한 가르침들을 덧붙였다. 베네딕도는 이 과정 의 첫째 단계만 다루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제한하고, 다음 단계에 대해 선 그의 제자들이 동방 수도승 영성의 고전들을 참조하게 한다. 그러나 규칙서 73장의 표현들을 보면 그에게 이 수도생활의 완덕(perfectio conversationis), 곧 완덕의 절정(celsitudo perfectionis)은 열심한 수도 승 생활의 마땅한 결과이다.49) 중세 수도생활 저술가들, 특히 성 베르나 르도50) 같은 시토회원들이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의 작품에서 신비신학의 요소들을 끌어낼 때, 그들은 이런 베네딕도의 정신에 완전히 충실했다. ‐‐‐‐‐‐‐‐‐‐‐‐‐‐‐‐‐‐‐‐‐‐‐‐‐‐‐‐

47) 영적부성을 행할 만한 수도승의 영적 성숙에 대해 표현한 것으로, 수도원의 십인장 에 관한 규칙서 21장 4절과 아빠스에 관한 64장 2절에 사용한 표현 sapientiae doctrina를 보라.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대화집>은 영적 아버지 역할의 카리스마 개 념이 아직 6세기의 이태리 수도승운동 안에 살아있었음을 보여준다. 48) 담화집 머리말. 49) 가시아노의 가르침 안에서 회수도승 생활과 수행praktike을 같은 것으로 보고, 독수 도생활과 관상théoria을 같은 것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가시아노의 생각을 몰아붙이 는 것이다. 가시아노는 완전한 수도승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도원에 머물 수 있다 고 했다. 그는 은수자들이 하는 끊없는 관상은 자신에게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겸손과 순명이 이를 보상할 것이라 했다. 이것은 관상을 하지 않는 활 동과 고유한 관상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완전함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해석은 명백히 가시아노의 이론과 상치된다. 담화집 제 19 담화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이 가시아노는 관상의 유일한 이상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을 인정한다. 50) St. Bernard, 아가 강해 I.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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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과 불가능한 일들1) 제롬 코델 조성옥 에노스 옮김

베네딕도 수도규칙 68장은 규칙서의 종결인 듯한 인상을 주는 66장 뒤 에 나오는 장으로, 일반적으로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원 생활을 되돌아보 면서 나중에 쓴 것으로 본다. 이 장의 제목“Si Fratri Impossibilia Iniungantur”는“어떤 형제에게 내려진 불가능한 일”(RB 1980)2), 혹은 “어떤 형제가 불가능한 일을 명령받았다면”(Kardong)3) 등으로 번역되 었다. 68장은 5장‘순명에 대하여’에 나오는 가르침을 확인하면서도 그 것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인간적 배려를 보여주는 규칙서의 백미(白眉)라 하겠다. 가시아노와 스승의 규칙서 저자도 수도승에게 주어진 불가능하거나 비 합리적인 명령들에 대해 다루었다. 그들에게 이런 명령은 겸손과 순명을 시험하는 방법으로서 덕을 연마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그 경우에는 아빠 스 스스로 자신이 명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 점 이 중요했다. 베네딕도는 바실리오 규칙의 견해들을 더 발전시킨다. 바실 리오는 가시아노나 스승의 규칙서 저자와 달리, 순명 문제에 있어서 아빠 ‐‐‐‐‐‐‐‐‐‐‐‐‐‐‐‐‐‐‐‐‐‐‐‐‐‐‐‐

1) Subiaco Abbey의 Jerome Kodell 아빠스님이 2003년 8월 미국 남자수도회장상모임에 서 한 강의로 The American Benedictine Review(58:4, Dec. 2007)에 실렸습니다. 2) RB 1980 : The Rule of St. Benedict by Saint Benedict, editors Timothy Fry, Timothy Horner, and Imogene Baker. 3) Benedict's Rule: A Translation and Commentary (1996) by Terrence G. Kar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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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 수도승 사이의 대화의 역할을 이해했다. 우리는 68장에서 현실주의, 인간존중, 그리고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수 도승은 어떤 여지도 없이 무리한 명령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 는 것이 아니다. 사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온순하고 참을성 있는 태도 로, 교만하거나 반항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긴장 상황에 서 아빠스와 수도승이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어떻게 함께 일하는 가이다. 진정한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수도승의 신앙, 즉 이 상호작용 안 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다는 그의 믿음에 달려있다. 어떻게 결정되 든 수도승은 그것이 자신의 유익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 래야 시큰둥하거나 투덜대지 않고 또 마지못해 하거나 화를 내지 않으면 서 사랑을 다해 순명할 수 있게 된다. 아빠스 또한 그런 믿음의 소유자로 연민과 이해심을 보이며 행동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장은 아빠스의 태도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아빠스가 다가가기 어려운 성격의 사람일수도 있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2절을 참고할 수 있겠다. 아빠스가 어떻게 행동하 든 상관없이 수도승은 진정한 결과를 주도하는 주체로서, 그것은 일이 어 떻게 실행되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정신으로 그 명령을 받아들였느냐 에 달려있다. 68장은 수도승의 성소를 보호해주는 고마운 장이다. 머리말 시작을 보 면 성소는 순명의 노고와 동일시된다. 순명은 마치 날카로운 무기를 사용 하는 싸움처럼 중대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이다. 이 일을 잘 해내기 위한 열쇠는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수도승의 능력으로, 수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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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수도생활 초기에 단번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 행의 여정 안에서 언젠가는 하게 되는 것이다. 5장 순명에 대한 가르침은 가시아노와 스승의 규칙서가 전하는 사막 교부들의 높은 이상주의를 그 배경으로 한다.“겸손의 첫째 단계는 지체 없는 순명이다. 이것은 그리스 도보다 아무 것도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일이며, 그 들은 서약한 거룩한 섬김 때문에, 또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영원한 생 명의 영광 때문에, 장상들로부터 어떤 것을 명령 받았을 때 즉시 하느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함에 지체할 줄을 모른다” (RB 5,1-4). 더할 나위 없이 멋있지만 대단히 단호하다. 여기엔 어떤 인간적인 오류 나 대화의 여지가 없다. 각이 분명하다. 이 가르침을 따르자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 선 수도승은 영웅적으로 비합리적인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물속에 가라앉든지 수영을 하든지, 아니면 그것 을 피해 결국 불순명에 떨어지든지 말이다. 그런 일이 용납되던 오래 전 에는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5장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모든 명령을 무조건 감당해 내거나 일방적으로 그만두는 것 말고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승의 순명은 아빠스 사무실에 순명 못하겠다는 쪽지 한 장 을 밀어 넣는 식의 일방적인 포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 역 시 자신의 뜻을 따르며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으로 결국 수도승의 서원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 이런 식으로 처신한 수도승은 훗날 뒤를 돌아보며 자기가 한 선한 일들조차 그것이 자신의 뜻을 찾은 것인지, 아니면 하느 님의 뜻에 순명한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 5장에서 말하는 순명 을 넘어서는 다른 규정들이 규칙서 안에 없다면 수도승은 나갈 길을 찾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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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막다른 구석에 몰릴 것이다. 다행히 베네딕도 성인은 68장에서 순 명의 이상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수도승을 존중하는 길을 열어준다. 수도 승 순명의 문제에서, 아빠스와 마찬가지로 수도승 역시 자신의 의견을 말 할 권리가 있다. 참으로 경청되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 다. 68장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때때로 더 좋은 의견을 젊은 사람에게 밝혀 주신다는 3장‘형제들의 의견을 들음에 대하여’와 71장과 72장에 나오는 상호 순명에 대한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이 규정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순명을 수행하는 데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수도승의 서원을 보호한다. 아빠스가 마지막 말을 하기 전까지는 수도승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 수도승의 말과 아빠스의 말 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될 수 있고 그러니 양쪽 다 존중되어야 한다. 수 도원 안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아빠스의 결정은 바뀔 수도 있고 그대 로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뜻을 전한 수도승은 이제 아빠스가 자신 의 입장을 알고 있음을 안다. 아빠스의 명령이 바뀌지 않더라도 수도승이 말하고자 한 것은 전달된 것이다. 수도승은 아빠스 때문이 아니라, 아빠 스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렇든 저렇든 순명하는 것이다. 순명을 다루는 5장과 68장의 접근이 서로 다르 지만 궁극적 현실은 같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에게 마지막 결정권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순명과 믿음을 모두 잃게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침착한 관용의 분위기가 68장 시작에 자리한다. 수도 승 생활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잘못 진행되거나 옳지 못한 판단을 할 수도 있고, 되어져야 할 일에 의견이 서로 다를 수도 ��� 다. 수도승 자신이 보기에 능력 밖의 일을 아빠스가 시킬 수도 있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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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는 그것이 수도승에게 어려울 수 있음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이 힘들고 불가능할 것 같다는 판단은 수도승 자신이 한다. 베네딕도는 여기서 어떤 수도승에게 할 수 없다고 예상되는 일을 아빠스 가 의도적으로 강요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첫 문장에 forte 즉, ‘만일’‘혹시’라는 부사가 덧붙여진다. 하지만 주어진 일이 수도승에게 너무 짐스럽다면, 대화를 하고 의논하는 중간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68 장 제목에‘impossibilia’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은 이런 일이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더 자주 발생할 수 있으며 사실 수도승 생활의 한 부분임을 짐작하게 한다. 주어진 일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해도 수도승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겸손의 넷째 단계에 의하면, 순명하 는 것이 가혹하고 부당하고 적의에 찬 것으로 매우 고통스럽다 해도 도망 쳐선 안 된다. 68장 1절에 나오는“받아들인다suscipiat”는 단어는 수도 승이 발하는 서원의“suscipe”를 상기시킨다.“주님, 주의 말씀대로 저를 받으소서(suscipe me, domine). 그러면 나는 살겠나이다. 나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RB 58,21). 계속되는 순명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수도승 서원생활에 나날이 주어지는 시험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 앞에서 수도승이 취할 우선적 태도는 비겁하게 우는 소리를 하지 말고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최소한 그것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갖고 일단 한 번 시도해 보는 것이다.‘받아들인다suscipiat’는 단어가 미리 암시하 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예”라고 응답하는 것은 믿음의 경기장에 서 싸우는 것이고, 서원의 약속을 잃지 않는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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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숙고한 후에도 그 일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어렵게만 생각된다면 수 도승은 아빠스에게 알려 주의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자기에게 최선이 무 엇인지 본인만 알고 아빠스는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수도승이 자신 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언제나 잘 알고 있다면, 수도승의 길을 따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수도승이 먼 저 결정할 수 있다면 수도생활이라는 모험은 계속될 수 없다. 도미니코회 전 총장 티모시 래드클리프는 수도 공동체 안에서 선거와 관련된 위험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나는 총회에 앞서 형제들에게 만일 장상으로 선출된다면 받아들이겠는지 먼저 물어보는 풍조에 늘 단 호히 반대하곤 했다. 어떤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스스로 판 단할 문제가 아니다.”순명하는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는“자기 자신이 누 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 리는 서원을 하면서 자신을 공동체(하느님)의 손에 맡긴다. 규칙서 68장 은 그 약속을 취소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준다. 어려움이 시작될 때, 아빠스나 수도승 모두 무엇이 최선인지 모를 수 있다. 아빠스의 의견을 무조건 하느님의 소리로 간주하는 스승의 규칙서 는 이를 인정하지 않지만 베네딕도는 그것을 인정한다. 68장이 말하고 있 는 것은, 아빠스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 일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닌 수도승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68,4). 수도승 자신 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는 아빠스의 필요 역시 존중할 줄 알 아야 하며, 방해가 없는 적절한 때에 이 문제를 아빠스와 의논할 수 있어 야 한다. 이 때 그는 참을성 있게patienter 자기 뜻을 밝혀야 한다.‘patienter’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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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patior’이라는 단어와‘열정passio’이라는 단어의 조합어로, 머리말 끝의 아름다운 문장에도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patientiam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머리말 50). 복음적 인내의 정신으로 수도승은“거만하거나 반항하거나 반대하지 않 으면서”자신의 생각을 알려야 한다. 이 문장에서 단어들을 분사형으로 쓴 것은(non superbiendo aut resistendo vel contradicendo) 이런 태도 가 어떤 특별한 상황에 일시적으로 보이는 응답이 아니라 평생 지속되어 야 할 태도임을 말해 준다. 자신의 생각을 아뢰는 조심스럽고 순종적인 태도는 suggestionem이라 는 단어에 표현된다. 이것은 주장하는 것도 타협하거나 최후통첩을 하는 것도 아니다. 목표는 높은 데 있다. 진정한 주제는 바로 수도승의 믿음이 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정당하지도 지혜로워 보이지도 않는데, 그럼에 도 수도승은 하느님께서 아빠스를 통해서 그를 위해 일하신다고 믿을 수 있는가? 만일 수도승이‘수도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BR 2,2)’인 아빠스와의 상호관계 안에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그를 위해 존재하신다 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수도승 생활에 하느님이 현존하 심을 믿을 수 있겠는가? 결정된 것이 결국 자신의 뜻과 어긋날지라도 그 것이‘자기에게 가장 유익하다고(RB 68,4)’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이 마지막 절로 요약된다.“하느님의 도우심을 믿으면서 사 랑으로써 순명할 것이다.”수도승은 진정한 자유를 찾아 수도원에 들어온 다.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그가 알아듣지 못했다면 베네딕도 성인이 이미 똑똑히 말한 머리말 3절의 다음 내용을 볼 것이다.“자기 뜻을 버리고 참 된 왕이신 주 그리스도를 위해 분투하고자 순명의 극히 강하고 훌륭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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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잡는 자여, 나는 이제 이 말을 너에게 하는 바이다.”이는 자기 뜻과 거짓자아의 족쇄를 끊어버리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자유를 받아들이라 는 초대이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는 아빠스와 공동체를 통해 일하고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겸손한 순종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68장은 순종의 싸움터에서 분투하는 수도승을 도와주고 보호한다. 만 일 순명함에 있어서 수도승이 따라야 할 기준이 5장뿐이라면 질문을 하거 나 대화를 청하는 것조차 쉽게 불순종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 68장은 숨 쉴 공간을 열어준다. 즉 수도승이 하느님께 믿음을 두 고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하느님 손에 맡기면서도, 자기 의견을 말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만일 아빠스가 뜻을 바꾸지 않거든, 그것이 하느님께서 그를 위하여 원하시는 것으로 알기에 수도승은 명령 받은 것이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것으로 확신하며“사랑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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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 난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는,“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 고 말 한 바 있다.‘생각(사고)’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여러 기능(능력) 들 중 한 가지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비인간화도 사실 생각에서부터 시작 된다. 많은 끔직스런 사건들도 대부분 끔직스런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진 결과이다. 자기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 람이며,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음은 많은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발견되는 공 통 요소 중 하나라 생각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칭기 스칸이 큰 아들 쥬치에게 제왕의 길을 가르칠 때, 첫째 덕목으로 꼽은 것 이 다름 아닌 절제였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 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고대 수도승들이 생각을 문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도승 전통에서‘생각’(그리스말로:logismoi)1)을 문제 삼게 된 것은 수도승 자신들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들은 생각들을, 수도 승의 주위를 배회하면서 영적 진보를 방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를 공격 해 오는 어떤 실체로 체험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고대 수도승들이 수도승 ‐‐‐‐‐‐‐‐‐‐‐‐‐‐‐‐‐‐‐‐‐‐‐‐‐‐‐‐

1) 기달벨도 보르몰리니,로기스모이, 코이노니아 28집,152-17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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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사탄과의 싸움(사막의 수도승인 성 안토니오의 생애 참조)이요, 그 것을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보았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 이다. 사실 고대 수도승이 성경이나 시편의 구절을 매일 마음속으로 중 얼거리며 외운 것은 생각들에 대한 통제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와 카시아노 (Joannes Cassianus)는 영적 여정에서 인간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았다. 영적 여정에 진보하기 위해 수도승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들을 다스려야 한다. 특히 카시아노는 담화집 제 5권에서 수도승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생각을 여덟 가지로 구분하여 하나하나 설명하였다. 탐식, 성욕, 소유욕, 분노, 슬픔, 영적 무기력, 허영, 마지막 으로 수도승을 교만에로 이끄는 생각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떻 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제시하였다.2) 그래서 고대 수도승들이 사막에서 수련했던 영적 투쟁이란, 다름 아닌 자신 안에 들어오는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과의 싸움이었다. 자기 생각을 다스리는 힘을 얻어 내적 평화에 이 른 수도승, 그가 바로 마음의 순결에 도달한 수도승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인디아나 주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의 Mary Margaret Funk 수녀님은 그의 책“Thoughts Matter”3)에서 카시아노의 여덟 가지 부정 적인 생각들에 대한 가르침을 현대 수도생활에 접목시켜 영적생활을 위 한 실천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제 소개하고자 하는 이 글은 대구 포교 베 네딕도 수녀원에서“Thoughts Matter”을 요약, 정리하여 8개월(2004 년)에 걸쳐 월 피정 자료로 사용하였던 것을 재통합, 정리한 것이다. 책의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부족한 그대로 함께 읽으 ‐‐‐‐‐‐‐‐‐‐‐‐‐‐‐‐‐‐‐‐‐‐‐‐‐‐‐‐

2) 코이노니아 30집,141쪽 각주 참조.

3) New York, Continuum Publishing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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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도움이 되겠기에 여기 싣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착각’ 에 대한 단락은, 고대 언어로 대면한‘생각의 문제’를 현대적 언어로 다 시 집어 보고자 첨가한 것이다. 다소 연계성이 결여된다고 느껴질지 모르 겠지만 수도여정에서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내용이라는 생각에서 함께 수록하게 되었다.

1 . 음 식 에 대 하 여(About Food)) 카시아노에 의해 다루어진 여덟 가지 생각 중 첫째는 음식에 대한 것이 다. 많은 경우 우리는 마음의 내적 움직임이나 느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러나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의식하는 것은 아주 중 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 욕구를 끊어버리기가 어렵 기 때문이다. 생각은 우리의 내적 세계의 일부이면서 우리의 외적 생활을 다스린다. 특히 음식에 관한 생각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서 본능적이다. 좀 유치한 것 같기는 하지만 음식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다른 욕망과 연결되는지 한 번 살펴보자. 아마 처음엔 단순히‘차 한 잔 마시고 싶다’ 는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것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 를 자극한다. 시계를 보니 아침 11시이다. 갑자기 허기까지 느껴진다. 이 때 먹고 마시고 싶다는 욕구는 갑절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런 생각들은 식당에 가는 번거로움 대신 자기 방 안에 전기 포트가 있으면 얼마나 좋 을까,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하는 생각에로 나아가 게 된다. 이러한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하나의 욕망은 다른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욕망의 반복은 결국 우리의 내적 고요를 깨뜨리고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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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고자 하는 원의마저 없애기에 마침내 자신을 하느님, 이웃, 그리고 자신의 참 자아로부터 자꾸 멀어지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음식에 대한 생 각을 다스릴 수 없다면 이보다 더 어려운 성적 욕망이나 미움, 분노와 같 은 감정을 제어하기는 더더욱 어렵지 않겠는가. 영적생활에서‘음식에 대한 생각’을 다스리기 위해 카시아노가 추천하 는 좋은 실천은‘단식’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단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카시아노가 말하는 단식은“음식과 음식에 대한 생각을 절제 하면서, 세끼 식사는 제대로 하되 간식은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단식하게 되면, 우리의 생각과 접촉할 기회가 많게 된다. 왜냐하면 음식과 음료에 대한 육체적 필요를 느낌과 함께 음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알아차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음식에 대한 생각을 의식화하기 위해서 카시아노의 가르침을 좀 더 들 어보자.“지정된 시간에 먹어라. 지정된 식사시간 전이나 후에 먹는 습관 을 없이하라.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하라. 그렇다고 또 너무 적게 먹으려 하지도 말라.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과 그 계절에 맞는 종류의 음식을 먹 도록 하라. 식단은 너무 희귀하거나 진귀한 것들로 만들지 말라. 건강에 해를 끼칠 만큼 음식을 부족하게 취하거나 혹은 몸의 유지를 어렵게 하는 종류들을 택하지 말라. 중용을 지켜라.” 카시아노의 이 같은 가르침은 무엇을, 언제, 얼마나, 어떻게 먹어야 하 는지 염려하는 수도승에게 기본원칙을 제시하기에 여전히 중요하다. 즉 수도승은‘정해진 시간에 먹고’,‘적당한 양을 섭취하고’,‘앞에 놓인 것’ 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적게 먹거나 너무 많이 먹는 것은 똑같이 해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행동이나 태도는 그 사람의 생각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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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려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행위는 다 른 생각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음식에 대한 첫 번 생각보다 더 강한 생각 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음식에 대해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하 기 위해서는 식별이 필요하다. 식별은 각자가 하느님 앞에서 해야 한다. 지금이 먹고 마시기에 옳은 때인지, 얼마만큼 먹고 마셔야 충분한 것인 지, 고급음식���나 특별음식이 우리의 신분에 맞는 것인지, 식습관은 어떠 한지 등을 알아내어 균형 잡힌 식사를 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수도자답게 살아가는 한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식생활에 질서가 잡힐 때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 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먹는 분량에 대해서 판단하려는 경향이다. 다른 사람의 식사분량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각자는 나 이, 건강, 소임, 노동의 양에 따라 필요로 하는 음식과 분량이 다르기 때 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먹어야 충분한지는 판단할 수도 없 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모두 알 수 없기 때문 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알맞게 먹는 실습을 하면 되는 것 이다. 우리가 음식에 대한 생각과 욕구를 다스리는 목적은 하느님께 대한 생 각으로 자신을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먹고 마시는 데 있어 균형 또는 중용을 지킬 수가 있다면, 다른 생각들, 즉 성욕, 소유 욕, 분노 같은 생각도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편식 이나 폭식하는 사람은 대인관계에서도 같은 모습을 드러낸다고 지적하고 있다. 요즈음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건강에 관한 관심이 높고 건강식품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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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또한 매우 크다. 식탁에 놓인 음식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면 물론 감사를 드리고, 그것이 설령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모든 것은 선하신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자세라고 본다. 만일 우리가 단순하고 기쁘게 음식을 섭취한다면 모든 음 식은 우리의 영육에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음식섭취의 동기는“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는 베네딕도회적 원 칙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성규 57, 9; 1 베드 4, 11). 일생을 두고 음식 에 대해서 평정을 유지하도록 습관을 들이는 것은 우리가 쌓아야 할 수덕 중의 하나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음식에 대한 생각이 줄어들기 시작할 때 점차 다른 의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의 절제는 마음의 깨어있음 과 기도에 영향을 미친다. 지나치게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정신은 혼미해 져 기도와 묵상이 어려워진다.

어떤 이가 원로에게 물었습니다. “제겐 어째서 부정(겘貞)의 유혹이 생길까요?” 원로가 대답했습니다. “너무 먹고 너무 자기 때문이야.”

2 . 성 에 대 하 여(About Sex)) 생각의 문제에 있어 카시아노가 제시하고 있는 두 번째 과제는 성에 대 한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성(sex)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승이 독신을 지키는 그 이유는 우리의 마 음을 하느님과의 만남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성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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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우리의 전통은 직접적인 방법보다 간접적인 수단들을 통해 그것을 잘 길 들이도록 충고한다. 우선 카시아노는 성적 욕구를 감소시키는 방법으로 먼저 단식과 기도를 추천한다. 다른 간접적 수단들로서는 육체적인 노동이나 훈련, 혹은 욕정 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아가 일상적인 양심성찰보 다는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떻든 축복되고 균형 잡힌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며 또 그렇게 하 기 위해서는“성에 대한 생각들”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 성에 대한 생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과 의식의 흐름을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하는데, 그 생각들이 우리가 걷기로 한 서원의 길에 상반될 때, 우리는 과감하게 그 생각들을 떠나보내도록 선택해야 한다.“그리스도의 바위에 이 생각들을 메어쳐 부수어야”한다. 그 생각들을 가지고 놀면 안 된다. 성에 대한 생각들이 들어오고 또 들어 오더라도 그 생각들과 놀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강도는 차츰 줄어들게 마 련이다. 또한, 우리는 외부 환경에 대한 선택도 잘 해야 한다. 즉 우리의 수도 생활에 걸맞지 않는 환경, 예를 들어 성욕을 일으킬 수 있는 환경을 피해야 하며, 우리 생활을 위험하게 할 만한 대인 관계를 적극적으로 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 역이기 때문이다. 성적인 위험은 대개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전된다. 먼저 식별되지 않은 생각들로부터 모든 매력적인 유혹이 시작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경 험이 자아를 성숙하게 할 것이라고 믿으면서‘사랑에 빠져 보는 것’도 좋 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한 생각은 특정한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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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행위를 스스로 허용하고, 마침내 시기, 질투, 외고집, 방해 등의 제 이차적 행위에 휘둘리게 된다. 자신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자기를 지 켜나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맺는 내밀한 약속이다. 특정 사람에 대해 느끼는 은밀한 매력을 정직하게 내려놓고 자기 마음에 파수병을 세워두 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일찍 의식의 스크린에 비춰볼수록 더 빨 리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이 때 자기기만의 함정이 여기저기 많이 있다. 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 해 카시아노가 추천하는 몇 가지 연습들을 소개한다. 먼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생각을 장로 혹은 다른 이에게 열어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속생 각을 드러내는 연습은 자기기만을 피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실 참된 분별 은 겸손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생각을 장로들에게 열어 보인다는 것은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입증한다. 둘째로는 성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 짧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다. 다 시 말해 성에 대한 생각을 기도문의 암송으로 대체하는 연습이다. 카시아 노가 추천하는 기도문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으로서,“하느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고자 순결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이에게 아주 유익한 전통이다. 순결의 덕을 쌓아가는 것에도 단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먼저 절제 생 활의 훈련이다. 수도자로서 우리의 절제는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 루어져야 한다. 이 절제의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순결의 삶도 가능 하다. 그리고 순결에 도달한 사람은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 의식 안 에 살아가는 은총을 받게 된다. 사실 우리 영성 생활의 목적이며 순결한 삶의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순결이란 깨끗한 생각을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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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sex)의 대상이 없는 상태, 하느님을 찾으려는 마음의 열망에 모든 생 각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자유롭고도 방해를 받지 않은 열정은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께는 사랑의 의탁을 그리고 이웃에게는 이기심 없는 봉사를 하게 한다. 오늘날 성에 대한 혼란은 성에 대한 생각 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인 삶에서도 그러하 지만 특히 영적 여정에서는 생각이 더욱 중요하다. 순결을 찾고 자기의 생각을 다스리는 일은 우리의 전 생애를 걸쳐 이루어져야 하는 훈련이다. 이렇듯 평생을 걸친 훈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진실한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영적 여정의 삶이다. 그러므로 순결은 영성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사실 순결한 마음만이 성에 대한 생각이나 유혹이 일어나는 즉시 그 생각들을 골라내도 록 도와준다. 자신을 완전히 내던져 꾸밈없이 단순하게 하느님 현존 앞에 서 있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순결이다. 우리가 온 마음과 영혼과 몸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할 때, 사랑하는 방법까지도 순결이 결정해 준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수련 중”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sex)에 대한 생각 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그 렇게 흔치 않을 것이다. 사실 성적 충동의 대부분은 의식 밑에 깔려 있기 때문에 보통으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기에 “우리”라고 하는 일반적인 유대 관계를 원활히 맺으면서도 단순히 그“우 리”관계를 넘어선, 말하자면 영적 여정의 동반자로서의 친구 관계를 형 성하여 겸손하게 서로 도울 수 있을 때 우리는 훨씬 큰 어떤 것을 얻게 된 다. 사실 겸손은 모든 것을 치유시키는 어머니이다. 겸손하게 마음을 열 고 공동체 안에서 살게 될 때 많은 유혹에서부터 또 거짓 자아로부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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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될 수 있다. 마음을 닫고 살 때 우리는 많은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명심 해야 한다. 우리가 매 순간 하는 생각들을 의식하면서 다스리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건전하지 못한 거짓 자아를 벗어나서 사 랑의 쟁기를 굳건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영성 생활의 목적이 하느님과의 일치라면 이는 다른 말로‘완전한 사 랑’의 추구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성 생활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찾아 얻으면서 동시에 이웃 도 찾아 얻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봉사한다. 그렇게 하려면 끊임없이 기도하고, 특히 관상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카시아노는 가르친다. 우리 가 마음의 순결에 도달하고자 갈망한다면 우리 의식 속에 하느님의 생각 만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순수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아 우리도 순수하 고 순결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내적 생각들의 포기를 실천할 때 진정한 영적 삶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우리 의 정신을 훈련시키는 포기의 실천이다. 초심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알아보기까지는 외부 환경이 대단히 중요하 다. 먼저 침실은 잘 정리 정돈되어 있어야 하겠다. 고요하지 않은 욕망들이 일어날 때 적어도 주변의 정리가 되어 있어야 다스리기가 좀 더 쉬울 것이 기 때문이다. 또, 우리 몸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실천하는 장소이다. 그러 니 몸도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하겠다. 생각을 다스릴 수 없이 되었을 때, 거 리를 갖고 침묵하는 것도 격정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좋은 방법이다. 종종 억눌려진 욕구는 우리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꿈속에서 나타난다. 과거에 해소되지 못했던 대립 관계를 꿈이 지적해 내기도 한다. 그래서 꿈에 관한 영적 지도에서는 네 가지 지침을 주고 있다. 첫째 잠들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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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기도 할 것이고, 둘째 가끔 철야 기도를 실천할 것이고, 셋째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에 헌신할 것이며, 넷째 강박적인 행위, 너무 많이 먹 거나 마시는 행위를 줄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권고를 다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자기 직전에 기도할 것과 강박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과 하루 종일 끊임없이 짧은 기도를 하는 실천은 가능할 것이다. 순결은 마음의 작업이다. 순결한 삶의 열매 중의 하나는‘순진무구’이 다. 이는 영혼이 활짝 열려 있고 마음이 갈라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느 님께 그리고 영적 지도자에게 아무런 비밀도 없으며 숨기고 있는 다른 내 적 갈망도 없다. 이중성을 가지고 있거나 표리부동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이는 그대로 믿을 수 있고 신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평화스럽다. 순결한 삶의 열매는 지금 바로 이 시간, 바로 이 장소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가 완전히 현존해 있기 때문이다. 깨달아 의식하자마자 곧 통찰되고 창조적 힘으로 행동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순결해지는 여정인 수도 생활 안에서“성에 대한”생각을 다루는 실습은 일생 동안 신중하게 해야 할 우리 모두의 작업이다.

3 . 물 질 에 대 하 여(About Things)) 오늘날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물질이 풍부한 시대이다. 수도원에 서조차 물자의 아쉬움을 느낄 수 없는 시대이다.‘물질만능주의’,‘풍요 속의 빈곤’,‘부익부 빈익빈’등의 표현들은 치유되어야 할 우리 시대의 현상들을 꼬집는 말들일 것이다. 카시아노는 수도승들의 영적 투쟁에 있 어 그 세 번째 대상으로 물질에 대한 생각을 제시한다. 여기서 카시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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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문제 삼는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물질에 대한 우리의 소유욕이다. 고대 수도승들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과 지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그 리고 물질은 앞서 살펴본 음식과 성에 대한 생각과 함께 육체를 가진 인 간의 기본 욕구에 속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영적 관점에서 보면 무 엇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이다. 물질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것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카시아노의 인도에 따른 세 번째 영적 실천의 목표는‘물질을 현명하게 사용하되 물질에 애착하지 않 는 것’이다. 수도승들이 물질에 대하여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며 수덕을 실천하는 목적은‘하느님을 찾는 마음’을 얻기 위함이다. 하느님을 찾는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하여 물질에 마음을 뺏기지 말아야 하기 때문 이다. 고대로부터 수도승들은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완전한 포기를 실천했다. 수도승은 아무 것도 개인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한 모든 것은 수도원에서 받았다. 그들은 개인 소유를 악의 근원이라 생각했 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개인 소유를 수도원에서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할 악습으로 보셨다(규칙서 33장).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물질에 대한 탐 욕은 우리의 영혼을 미지근하게 만든다. 탐욕은 물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사로잡 는다.“수도원에서 제공하는 물건들은 만족스럽지 않다... 수도원에서 주 는 물건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이러한 불만족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생각은 마침내 수도승을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이끌어 간다. 자기 마음에 드는 물건을 갖기 위해 바람직하지 않는 방법들을 찾게 된다. 자 신의 필요를 수도원에 의존하는 대신 외부 사람들에게 의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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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탐욕에 빠진 수도자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비밀이 많아지 며,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자기의 수도 서원을 지키지 못할 뿐더러 욕망 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살면서도‘나는 이런 것들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 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게 된다. 그들은 하찮은 이유에 의해서 도 수도원의 규칙을 어기며 공동체 안에서 불평의 씨앗을 뿌리고 다닌다. 공동체 의무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로든지 빠져나가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일한다. 기도 시간이나 단식, 밤 기도 등 은 마음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만 마음을 쓴다. 겸손, 애덕, 순명, 경건 같은 덕들은 탐욕의 그림자에 가려져 생각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 물질을 우상으로 숭배하게 된다. 수 도승 전통 안에서 물질에 대해 그토록 엄격하였던 이유는 이러한 탐욕을 후천적으로 얻는 악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승들이 처음부 터 그러한 악덕을 배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막의 교부들에게 물질은 영적 부를 얻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간주되 었다. 즉 교부들은 우리에게 물질에 대한 포기를 통해‘이탈의 삶’의 열 매, 곧 내적 자유를 얻도록 노력하라고 충고한다. 이탈의 삶은 우리로 하 여금 자신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내적 충족을 즐기면서 자신에게 주어 진 한도 내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카시아노는 많이 소 유했건 적게 소유했건 소유를 통해 물질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임을 우 리에게 일깨운다. 오직 포기의 덕으로써만 이러한 욕망을 근절시킬 수 있 다는 것이다. 탐욕에 빠진 사람은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끊임없이 소유하 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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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결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적이고 매우 실천적인 가르침인 것 같다. 카시아노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 님과의 관계가 자기 삶에 가장 중대하다고 참으로 믿고 확신하면 그 관계 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에는 하느님의 은총 이 따르게 마련이기에, 식별로써 영적 실천을 선택하여 행하면 좋은 습관 이 자연스레 형성될 것이다.“필요한 모든 것을 수도원에 의존하는 습관” 에 길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묘약이라고 그는 수도승들에게 말한다. 즉 수도승들은 아빠스로부터 옷이나 물건을 청해 받아야 하고, 그 외에 필요 한 행위에 있어서도 허락을 받고 해야 한다. 수도원 공동 창고에서 물건 이나 기구들을 꺼내 쓰고 좋은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도 필요한 훈련이 다. 이렇게 되면 수도승들은 자신을 위해 쌓아 놓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 고 초조해 할 필요 없이, 주어진 것들을 사용할 수 있으니 언제나 하느님 께 감사드리게 된다. 카시아노는 물질에 대한 바른 견해와 병행하여 일과 노동에 대한 가치 도 올바로 인식해야 함을 강조한다. 수도승들이 수도원의 여러 가지 업무 를 겸손하게 나누어 받아 일할 때 공동생활의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으로써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을 얻게 되며, 그리하여 하느님의 일에 자연스럽게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카시아노에 의 하면, 일 그 자체도 좋은 것이지만, 영혼의 일, 곧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 식의 훈련이야말로 수도승이 힘써야 할 일이다. 그래서 수도승은 몸으로 는 외적 일에 종사하지만 그 마음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더욱 성장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늘 깨어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일이 곧 기도가 되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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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아노는 우리가 기도에 진전을 보지 못하는 이유를, 수도 서원 때 약 속했던 물질에 대한 완전한 포기를 제대로 살지 못하고 세속적, 물질적 소 유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래서 수도승이 매일 실천해야 할 일은, 물질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생각에 떠오르자마자 곧 하느님의 현존 의식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차츰 물질에 대한 욕망이 줄어 들 것이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안에 현존하신다. 그래서 마음은 우 리가 찾고 있는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 마음이 물질로 가득 차 있다면 마음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다.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 마음의 거울은 더욱 혼탁하고 흐릴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기억을 통해 우 리는 언제나 마음 안에 상주하시는 하느님과 접촉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느 님께 대한 기억 곧 하느님의 현존 의식이 우리의 습관이 되도록 함으로써 물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기 억의 습관은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생각을 물리치고 짧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할 것이다. 베네딕도 회원으로서 우리는 완전한 포기의 생활 안에서 모든 것을 서 로 나누며 사는 사람들이다. 수도승인 우리에게 있어 물질은 소유의 대상 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이다. 물질을 탐욕 없이 필요에 따 라 수도원에 청하여 사용할 때, 그리고 물질에 대한 욕구들을 하느님 현 존 의식으로 바꾸어 가는 노력을 계속할 때, 우리의 욕망은 변모되어, 참 으로 사랑과 정의에 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리스도와 더욱 일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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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분 노 에 대 하 여(About Anger)) ‘분하다’는 생각은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경험하기 마련이다. 이 생각은 처음 단계에서는 가끔 일어나지만 그 횟수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습관적 이 되고, 때로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되며, 그러다가 분노를 터 뜨리는 데까지 가게 된다. 분노는 우리 안에서 사건이나 사물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흐리게 만들어, 우리 영혼의 눈이 올바른 판단과 식별을 할 수 없도록 빛을 잃게 만든다. 그래서 분노의 상태에서 는 매사를 쉽게 왜곡하게 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하게 된다. 위로 부터 오는 지혜를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자신만을 보호하는 자아(ego)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마음은 더욱 완고해 지고 한계를 모른 채 덤벼든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쉽 게 싸우게 된다. 기도할 수 있는 능력도 점차 감소되고 마침내 더 이상 식 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영적 삶을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식별의 삶 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기 위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영감이나 생각 들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 악한 영에게서 온 것인 지 식별하고 선택해야 한다. 분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적 식별의 능력 을 잃을 수밖에 없다. 결국 분노의 가장 큰 해악은 우리가 영적 일을 할 수 없도록 우리를 장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노는 하느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 특히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파괴 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카시아노에 의하면, 자주 폭발적으로 분노하는 사 람은 우울증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서는 모든 이의 평화를 깨뜨린다. 이 렇듯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해를 막기 위해 수도승은 무엇보다 평화를 찾 으며 분노를 일으키는 생각들을 없애기 위한 내적 작업을 해야 한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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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작업의 출발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분노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그 리고 분노 아래 깔려있는 숨은 동기를 보는 것이다. 사실 분노는 욕구 충 족이 좌절될 때 일어난다. 그래서 분노는 오히려 자신이 무엇에 애착되어 있는지를 보게 해 주는 거울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분노와 투쟁 하는 것은 우리에게 겸손을 배우는 기회가 된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분노 역시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운 후천적인 악습으 로 간주하였으며, 그러기에 새로운 실천과 훈련에 의해 분노의 습관을 없 앨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카시아노도 분노를 원죄로 인한 죄의 결과로 보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례 성사의 은총으로 죄의 경향을 극복 할 수 있고 분노의 뿌리를 우리 안에서 완전히 뽑아 버릴 수 있다고 가르 친다. 수도승으로서 우리의 목표는 마음의 순결이다. 나를 창조하신 하느 님,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마음이 투명해 야 한다. 마음의 투명함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고요히 가라앉히 는 아파테이아(apatheia= 평온)로써 이루어진다. 카시아노는 분노를 뿌 리째 뽑아버리고 우리의 목표인 마음의 순결에 도달하기 위해 다음의 다 섯 가지 테마들을 제시한다. 깨 어 있 음(vigilance)): 무엇보다 먼저 분노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가 우리의 모든 사고를 마비시키고 끝내는 오로지 앙갚음할 생각만 하게 만든다. 그러한 상태에서 기도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우리의 마음은 더 이상 성령이 머 무시는 성전일 수 없다. 화 해(Reconciliation)): 지극히 어렵겠지만 용서를 위한 어떤 실천이 필수적이다. 기도를 미루고서라도 이것이 먼저 이행되어야 한다. 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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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언짢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형제에게 먼저 손을 내밀라는 것이다. 사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직접적인 실천이다. 그래서 언제든 기회가 오면 화해로써 공동체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화해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 억(Memory)): 카시아노는“모든 분노, 미움, 보복의 생각들을 뿌리 째 뽑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기억조차 하지 말아야 한 다.”고 말한다. 우리의 의식에서 분노에 대한 생각을 없애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잊어버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분노 를 느낄 때마다 오히려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 마음의 방향을 바꾸도록 노 력하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약함을 볼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지를 다시금 깊 이 깨닫게 해 준다. 고독(Solitude): 우리는 종종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나 환경으로부 터 멀리 떨어져 있게 되면 우리가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다. 그러나 카시아노는 사실이 그렇지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분노의 뿌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화나게 하는 사람을 피해 홀로 있 으면 우리 앞에 놓인 다른 것을 향해 화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실천은 오히려 자신 안에 있는 분노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우리가 선택한 삶에서 만난 관계 안에 충실히 머무 는 것이다. 결국 분노는 회피를 통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면함으로써 내적으로 작업해야 하는 것이다. 자 유(Freedom)): 오늘날 우리는 분노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감정 자체는 윤리적인 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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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가톨릭 윤리학에서도 말한다. 분노는 갖가지 감정들 중 하나로 서 그 자체로는 윤리적이 아니다. 그러나 분노의 감정을 계속 마음속에 품거나 혹은 거부하는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분노만이 아니라 어떤 부정 적 생각이든 우리 안에 일어나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 것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도록 허용하거나 허용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유 의지의 문제란 뜻이다. 카시아노에 의하면 수도승은 한편으로는 자신 안 에 일어나는 부정적 생각을 살피고 그것들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Lectio Divina, 시편 노래, 노동, 단식 등의 영적 실천들을 통해 거룩한 생각들로 자기 마음을 채움으로써 부정적 생각이 그 마음을 차지하지 못 하도록 해야 한다. 결국 하느님께 대한 기억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는 훈 련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생각들은 자연스럽게 가라앉고 우리 마음 은 하느님과 직접 통교하는 관상적 상태에 있게 된다.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명상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카시아노에 의하면, 우리가 기도하러 성당에 들어갔을 때, 그 바로 전에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무슨 감 정을 품고 있었는지에 의해 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사실 카시아노가 말 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경험이 이를 입증한다. 외적으로 무릎을 꿇고 혹 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지만 내부에서는 이전에 하던 생각과 계속 대화 를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참으로 관상적 기도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평상시에 늘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고 거룩한 말씀이나 영적 훈련 으로 마음의 평온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동안 사랑하면서 동시에 분노할 수는 없다. 분노는 영성 생활에서 얻은 모든 진보를 말살해 버릴 만큼 파괴적인 힘이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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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상황에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분노가 우리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도록 허용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인도의 성자 Mohandas Gandhi의 손자 Arun Gandhi의 다음 말씀은 분노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말해준다.“나는 나의 할아버지에게서 어떻게 분노가 내 안에서 생기는지 알아내는 것을 배웠다.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하는 이유를 아 는 것은 비폭력의 시작이다. 화날 때마다 내 감정을 적어 놓기 위해서‘분 노의 일기장’을 만들라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작은 두려움들이 폭력의 씨앗이 되며,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분노에 대해 책임이 있다.”

5 . 슬 픔 에 대 하 여(About Dejection)) 우리의 영적 성장에 근본적인 장애가 되는 문제 중 하나가 수도원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습관적인‘슬픔’혹은‘우울증적 태도’이다. 카시 아노에 의하면‘슬픔’은 분노로부터 유래한다. 슬픈 생각들은 우울한 기 분을 동반하고 마침내는 실의의 상태로까지 빠져들게 한다. 살아가다 보 면 슬픈 생각들이 불쑥 드는가 하면, 이유 없는 슬픔이 덮치기도 한다. 그 러한 우울증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어두운 기분으로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리기 때문에 일상의 통찰력을 잃게 한다. 이렇게 슬픈 생각들은 사람을 완전히 우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파멸시키기까지 한다. 슬픔이 뒤섞인 울적함이 영혼 안에 자리 잡으면, 인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잠자리에서 조차 편히 쉴 수 없도록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한 기분은 아침에 해가 떠올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영혼은 순수한 상 태에서 점점 멀리 떨어지게 된다. 우울증은 우리에게서 기도의 기쁨을 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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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고 성경 말씀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게 한다. 우울함의 고통은 형 제에 대한 인내심을 감소시키고 형제들을 온유하게 대할 수 없게 한다. 건전한 사려가 어려워지고 마음은 안정을 잃는다. 때로는 극심한 절망감 으로 자살하려는 생각까지도 떠오를 수 있다. 슬픔은 우리 인간 영에 대 단히 해로운 것이다.“좀이 옷감을 못 쓰게 만들고 벌레가 나무를 해치듯 이 슬픔도 인간의 마음을 좀먹기”때문이다. 사막의 전통에 의하면 우울증으로 이어지는“슬픔의 생각들”에는 세 가 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이전에 있었던 해결되지 못한 분노이다. 둘째는 실현되지 못한 욕구 곧 욕구의 좌절이다. 즉 마음으로 계획한 바를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여길 때 힘이 빠지고 실망하는 것이다. 셋째 형태의 우울은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스런 것으로서 자신도 그 원인을 알지 못한 다. 사실 어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실의에 빠져 마음이 괴롭고 쓰디쓴 슬 픔과 냉소로 가득 차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현상을 화 학성(chemical) 우울증이라고 부르는데, 어쩌면 유전적일 수도 있다. 그 러나 카시아노에 의하면 많은 경우, 우울증의 원인은 우리 자신 안에 있 다. 과거에 상처받은 감정과 생각들을 깊이 또 높이 쌓아 두는 것이 문제 이다. 이런 감정과 생각들이 씨가 되고 되살아나서 아주 미미한 자극에도 반응하여 영혼을 압도하고 파괴시킨다. 그러면 결국 영혼은 어쩔 수 없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휩싸이게 되고 만다. 옛 성인들은 우울함에 빠진 육신, 정신, 영혼을 위한 치유 방법으로 다 음과 같은 다섯 가지 실천을 제시한다. 첫째,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울증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외로이 혼자 있으면 더 많은 혼돈에 빠질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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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기 때문에 계속 다른 이들과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사실 우울증의 근본 이유는 외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 안에 있다. 그래서 카시 아노는 우울증을 다스리는데 식별의 지혜를 지닌 장로의 도움을 받기를 권고한다. 둘째, 자신의 잘못과 행동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다.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 수 있고, 또 자신의 악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고 인정하게 되면 외부로부터의 악을 두려워할 필요 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 자신을 해치려는 생각을 물리치도록 해야 한다. 사실 실망과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은 신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계속해서 어둡고 우울한 생각들을 가질 때 자살로 이끄는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다의 종말은 우리에게 좋은 경종이 된다. 넷 째, 자신을 비하하는 생각들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모두 삼가 할 것이며 물리치도록 한다. 감정적으로 실의에 가득 찬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사 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다는 증거이다. 현실보다 더 많은 칭찬, 행운,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좌절하고 실의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 이다.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필요하다. 현실을 받아들 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들어 내는 생각들 때문에, 순명, 겸손, 인내, 식별, 내맡김과 같은 영적 수련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병적이며 음 울한 고통은 거부해야 한다. 건전하지 않은 고통은 자신에게로만 향하여 영혼을 더욱 깊은 슬픔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는 고 통 자체를 위한 고통은 가치가 없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 받기 위해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동참하게 되 고 은총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슬픔의 생각을 미리 알아내고,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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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며, 슬픔이 우울증으로 발전되기 전에 그 슬픔의 생각들을 어떻게 앞서 가로막을 수 있을까?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이 마음 안에 슬며 시 들어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자신 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 열매를 알아본다. 슬픔에 빠진 이는 행동이 거칠고 적의와 초조함을 드러내며, 동정심과 보살핌이 필요 한 사람들에게 조차 점점 더 무감각해지면서, 슬픔에 빠진 자신을 과시하 고 자살할 만큼 절망적으로 자포자기한다. 이처럼 건전하지 못한 슬픔은 힘을 소모시키고 영혼을 망가뜨린다. 또한 성령의 모든 열매를 파괴시키 고, 성령의 열매 대신 실의의 열매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슬픔이 이렇게 죽음으로 이끄는가 하면 생명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때로는 실망과 좌절이 우리를 깊은 회개의 마음에로 이끌어주고 우 리에게 구원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실의에 빠진 이는 오히 려 그 마음이 재빠르게 순명하고, 예의 바르며, 겸손하고, 친절하며, 온순 하고, 인내심이 많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완덕에 대 한 열망이 더욱 커진다. 고통에 뒤따라오는 은총을 기뻐하며 그것을 소유 하기까지 온유와 인내로 기다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영의 회심 (compunction of spirit)’이라고도 부르는 슬픔도 있다. 이러한 슬픔은 자신의 잘못이나 냉혹한 마음에 대한 진실하고도 건전한 회개로 이끈다. 이렇듯 건전한 슬픔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 가게 할 수 있지만 실의에서 나오는 슬픔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만 생각할 뿐,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한다. 건전한 슬픔은 미래를 희망하며 자 신을 벗어날 줄 알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희생을 감내할 용기를 가진다. 이 세상 삶은 지나가는 것이며 생활 안에서의 모든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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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들 역시 다 사라질 것임을 마음에 새기어 고통스런 체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거듭 생각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할 뿐 아니 라 더욱 깊은 슬픔으로 빠져들게 한다. 슬픔에서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스며드는 슬픔을 곧장 알아차리고 생각들을 잘 주시하며 관찰하는 것이 다. 알아차리는 즉시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며 그 생각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바위이신 그리스도께 그 생각을 내던 져 바수어 버려야 한다. 슬픔이 우리를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다만 현실을 직시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물리쳐 야만 한다. 부정적인 생각들 때문에 오는 우울증은 우리를 사로잡으며, 이유 없는 우울증은 깊은 절망감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관 심이 아닌 이탈로써 생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거나, 생각을 통제하면서 포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생각들, 변하는 기분 이나 감정들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는 매 순간마다 참 현실을,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깨닫도록 해야 한 다. 뿐만 아니라 우울증으로 인해 어두움을 체험할 때는 그 어두움이 사 라질 때까지 희망과 신앙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내적 여 정의 작업이 길고도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영적 여정을 열심 히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긴 영적 메마름의 터널을 체험한다는 사 실이 우리에게 위안과 격려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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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영 적 무 기 력(About Acedia:: 아케디아)4) 카시아노가 다룬 여섯 번째 생각은‘아케디아’이다. 아케디아는 영적 태만 혹은 권태, 영적 무기력, 영적 나태, 우울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흔히 그리스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사실 아케디아는 음식, 성욕, 물질, 분 노, 슬픔의 생각들을 이겨낸 사람, 즉 어느 정도 수덕을 닦으면서 영혼의 작업을 충실히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영적 피로와 함께 찾아온 다. 하지만 이것은 때때로 젊은이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영혼 에 자리를 잡고 영성생활에 큰 어려움을 주기에 수도승이 빠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하면서도 고질적인 영혼의 병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시편작 가는 이에 대해“밤에 덮치는 무서운 손, 낮에 날아드는 화살, 밤중에 퍼 지는 염병, 한낮에 쏘다니는 재앙”(시편 91,5-6)이라고 표현한다. 사막 의 은수자들 역시 이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요한 끌리마꼬는 아케 디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아침 9시경‘영적 태만’의 악마가 전율과 두통, 심지어 배탈까지 야기한 다. 오후 3시경 그는 기운이 거의 없어짐을 느낀다. 그리고 저녁이 준비 되면 그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러나 기도시간이 오면 그는 몸이 또 다시 무겁게 찌부러짐을 느낀다. 그가 기도할 때 아케디아의 악령은 그를 졸음에 빠뜨리고 불규칙적인 하품으로 각 시편 낭송을 방해한다.” 먼저 아케디아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살펴보자. 이것은 우 선 영적인 것에 대하여 모호하지만 불안한 심기를 느끼면서 시작된다. 매 일의 일, 기도, 공동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지만 거기서 아무런 만족을 얻 ‐‐‐‐‐‐‐‐‐‐‐‐‐‐‐‐‐‐‐‐‐‐‐‐‐‐‐‐

4) 아케디아에 대하여 베르나르도 올리베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썩게 하는 슬픔, 동 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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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기에 이러한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 게 된다. 즉 처음에는 영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싫기는 해도 아 주 부정적이지는 않다. 게으르고 열정이 없는 삶의 태도는 권태증이거나 만성 의욕부진, 만성 피곤증 등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차츰 어떤 것도 자신의 삶에 활력을 제공하지 못하며 영적인 것에 대해 무감각 하게 된다. 이러한 수도승은 일할 의욕도 기도할 의욕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나 성인전, 신심서적 같은 것은 멀리하게 되고 신심 깊은 친구와 함께 있는 것조차 부담을 가지게 된다. 그에게 있어 하루하루는 지루함 자체이다. 아케디아가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으면 영원한 삶에 대 한 가치, 내세에 대한 갈망 같은 것도 사라지고 만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내적인 부를 추구하는 수도생활은 가치가 없다’, ‘나의 수도서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그러기에 수도원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태는 아주 짧게 지속되다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어렵지 않게 극 복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오래 계속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기간이 오래 계속될 때는 영적인 목표를 향해 충분한 노력도 해보지 못하고 무의미하 게 수도여정을 끝마칠 수도 있다. 그래서 수도승이 아케디아에 빠진다는 것은 아주 위험스럽고 심각한 일이다. 그럼 아케디아에 빠진 수도승의 일상은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는 자기 수도원을 싫어하게 된다. 자신의 수도원에서는 영적 이득을 얻 을 수 없다고 믿기에 불평하며 한숨만 짓는다. 자신이 원장이 된다면 많 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꿈을 꾸지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자신의 현재 처지에 불만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수도원이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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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더 잘 맞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곳에 가면 자기가 훨씬 더 유용하게 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수도전통을 따라 생활하지도 일 하지도 않으며 항상 들떠 있기에 수도원에 살아도 사실은 그저 수도원에 거주할 뿐이다. 이런 수도승은 자기 공동체에서는 배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다. 그에게는 수도원의 음식마저도 불만스럽기에 자신의 공 동체에 오래 머물다가는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우는 소리를 한다. 수도원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은 수도원의 형제들에게로 번지게 되어 그 에게 형제들은 사랑도, 영성도 없는 사람들로 비춰진다. 그래서 형제들을 비난하면서, 형제들 중에는 자신을 위로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에게 영적인 것은 무용지물이기에 공동기도에 쉽게 빠지지만 그렇다 고 자기 방에서 기도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방에 머무는 것 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독(Lectio Divina)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덕행의 실천에서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에게 의미 있는 일은 손님을 맞이하거나 환자들을 방문하는 것뿐이기에 가까 이 또는 멀리 사는 병든 형제들을 방문해야 한다고 장상에게 청하며, 이 곳저곳을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는 자기가 가진 많은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늘 궁리한다. 그래서 혹시 자기를 찾아오는 손님은 없는지, 식사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살피 며 밖을 내다보곤 한다. 이러한 수도승은 아주 심한 노동이라도 한 것처 럼 늘 피곤을 느끼며 살아가기에 그의 소원은 잠을 실컷 자는 것이며, 가 끔 식탐에 빠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아케디아에 사로잡힌 수도승들의 생 활은 들떠 있고 무질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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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디아는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지겨움, 손노동에 대한 염증을 불러 일으키며, 하느님은 어디에서나 섬길 수 있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어디에 사는지에 달려있지 않다고 유혹한다. 그것은 수도승의 머리 속에 인생은 길고 영적 수행들은 매우 수고스럽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다. 카시아노는 이런 사람은 영적 통찰력도 없고 관상을 할 능력도 없다 고 본다. 그렇다면 아케디아로 인해 고통 받을 때, 어떻게 이를 극복해야 하는 가? 카시아노는‘모든 일을 마음을 다해 하라, 과도한 수면이나 영적 육 체적 노동을 피하려는 욕망을 몰아내라, 헛된 꿈이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들지 않도록 손노동을 하면서 현재 하는 일에 온 마음을 다���라, 자 신을 과대평가하여 영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앞서 있다고 믿고 싶은 유혹 에 빠지지 말라, 한 자리에 고요히 머물지 못하고 나다니고 싶은 것을 참 고 자기 방에 머물도록 하라, 아케디아에 빠지기 쉬운 경향을 가진 사람 은 아케디아에 빠진 다른 사람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와 함 께 지내서는 안 된다’라고 권고한다. 즉 무질서한 삶을 사는 형제들, 노동에 태만한 형제들, 외출, 방문, 대 화를 아무 때나 허락 없이 하는 형제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옛 담화집에 일하는 수도승에게는 마귀가 하나 붙어 있는 반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수도승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귀들이 들러붙어서 괴롭힌다는 이야기가 있다.‘자신의 시간’이 너무 많으면 영적 나태심을 키우기 쉽다. 그러기에 노동과 기도가 조화된 삶을 창조해 내는 것은 중 요하다. 아케디아를 이겨낸 후의 열매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득으로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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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동기를 정화시켜 영적 여정에 진보를 가져온다는 것과 손노동을 하며 노동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때때로 수도자는 긴 영적 여정에 지칠 수 있다. 영적 위로의 달콤함도 차츰 빛이 바래고 자기 가 노력하는 수련에 대한 보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도 않게 됨으로 낙담 하고 실망하게 될 수 있다. 이럴 때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서도 할 수 있 는 단순한 육체적 노동은 정신을 맑게 하고 순수하게 하여 수도생활의 시 초에 가졌던 동기를 되찾게 해준다. 그때 수도승은 또 다시 충실한 수도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수도자는 노동과 기도 사이에 아무런 차별 을 두지 않는다. 그에게는 기도가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는 기도와 노동이 조화를 이루기에 그 속에서 그는 여가를 맛볼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은 순수해진다. 따라서 아케디아를 이겨낸 영 혼은 큰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이 때 주의를 요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자신은 훌륭한 수도승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쉽 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허영심’혹은‘공명심’이라고 하는데, 카시아노 는 일곱 번째로 이것을 다루어 나간다.

7 . 허영심에 대 하 여(About Vainglory)) 허영심이란 자신이 행한 훌륭한 행위에 대하여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 음이다. 허영(虛榮)의 허(虛)라는 글자가 무(無), 환상(幻像), 공허(空 虛)를 나타내듯 허영심에 찬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선이나 영예로움이 하느님의 선하심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고 하느님께로 가는 영광을 교묘히 자신이 가로채어 실재(reality) 혹은 진실(truth)을 가려버리게 된 다.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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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이 생각을 채우게 되고 이렇게 되면 자아는 점차적으로 잠들어 식별 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그래서 허영심은 때로 시기나 질투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자신만이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발 견할 때 질투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좋은 것을 가진 그 사람 이 미워서 화가 난다. 다른 사람 안에서 보는 좋은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 께 감사드리기는커녕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속한 영광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것이다. 한편 극단적으로 자기 탓을 하며 자신을 깎아 내리는 자 기비하, 곧 실의(失意)도 허영심과 뿌리를 같이 한다. 허영은 자신을 추 켜올리지만 실의는 자신을 깎아내림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 는 겸손과 구별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허영에 빠지게 될까? 허영심은 대단히 미묘 해서 웬만해서는 허영에 빠졌다는 것조차 알아내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음식의 경우 자신이 누구보다도 단식을 더 잘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 고, 자신이 누구보다도 먹고 마시는 일에 중용을 잘 지킨다고 믿기도 한 다. 자신이 육체적으로 깡마른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수덕적이기 때문이 라고 생각한다. 한편 건강이든 능력이든 자기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핑 계 삼아 수도 공동체가 자신을 특별히 생각해주어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 리는 것도 허영심에서 비롯한다. 자신이 좀 더 좋은 조건 가운데 있었더 라면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혹은 어떤 특별교육 을 받고 나면 많은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자 신의 위대함을 상상하고 마음이 들뜨게 된다. 이런 식으로, 허영심에 사 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만들어 낸 공상의 세계를 방황하느라고 실제 자신 이 처한 현재 상황을 놓치고 만다. 허영심의 영향을 받게 되면 자아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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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 자신만만해져서 스승, 성경, 경험이라는 고전적 길잡이들을 무시하 게 되고, 그 대신에 자기가 원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집착하 게 된다. 그런데 수도승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수도 공동체 전체가 허영 심에 병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허영심을 치유할 방법은 없을까? 카시아노는 조언하 기를, 허영심의 근본이 되는 이유들을 찾아내고 허영의 생각들이 영혼 안 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현명한 장로에게 자신의 깊은 내적 생각들을 드러내 보이라고 한다. 허영은 성공에 매달려 살기 때문에 성공은 허영심 을 부채질할 수 있고, 따라서 혹시 조금이라도 자신의 영광을 찾지는 않 는지 상당한 주의와 경계로써 그 동기를 찾아내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는 말이다. 곧, 자신의 생각의 방향을 잘 파악하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자 신에 관한 생각이 너무 높거나 낮지는 않는지 잘 살펴 그 생각들을 교정 해 나감으로써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된다. 허풍을 떨며 자랑할 때, 경쟁심 이 생길 때, 자신에 대해 특기할 만한 얘기꺼리를 말할 때, 인정받으려 할 때, 혹은 영웅심에 사로잡힐 때 자신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허영심의 표 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도는 반갑지 않은 생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벽이다. 마음 안에서 기도가 자동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는 허영 심이 마음으로 들어올 수 없다. 카시아노는 자아 안에 들어온 허영심을 깨달음으로써 얻게 되는 몇 가 지 유익한 점들을 지적한다. 첫째, 식별의 은혜이다. 허영심의 경향을 극 복하게 되면,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시키고 싶어 하는 진짜 소명이 무엇인지를 식별할 수 있다. 손노동, 가르치는 일, 설교하는 일, 치유시키 는 일 무엇이든 다 좋다. 다른 사람들의 선망을 받을 목적으로 직업을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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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하느님의 뜻을 아무 의심 없이 확신을 가지고 따 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올바른 행동을 할까 하고 걱정할 필 요도 없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할 의도를 가진, 사랑에 찬 마음으로 식 별하면 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말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 요도 없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따라 살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칭 찬이나 망신 때문에 당하는 거북함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허영심이 없 어지면 오직 하느님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내적 균형이 잡히기 시작하고, 나아가 더불어 일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데 에도 누군가에게 더 잘 보일 필요가 없이 차별을 두지 않게 되므로 마음 에 평정이 오게 된다. 셋째, 마음이 자유롭기 때문에 혼자서 혹은 다른 사 람과 더불어 생각을 관찰하는 실습을 할 수 있다. 허영심을 극복하면 하 느님 영광의 현존 안에 깨어 있는 영적 느낌을 갖게 되면서 기도 중에 깨 달음이 오기 시작하므로 마음이 모든 것을 명확히 보기 시작하고 하느님 과 또 모든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깊은 평화와 고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혹시 허영심을 줄이려 노력하다가 오히려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자아는 기대감 속에서 살 때 언제나 실망하고 실의 에 빠지게 된다. 실의의 근원은 자아가 자부심을 갖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을 실상보다 너무 높이 두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훌륭한 행 위가 스스로에 대한 좋은 느낌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영적 여 정에서 헛된 일이다. 악하고 나쁜 것 같이 보이는 것들에게서 우리는 얼 마나 자주 유익함을 얻게 되는지? 그러므로 좋거나 좋지 않게 보이는 데 따라 감정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필요가 없다. 비록 잠시 실망스럽 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감정이나 생각 등은 함께 놀아주지 않으면 떠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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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만다. 그렇다면 자부심조차도 허영심이란 말인가? 자부심의 거부는 마 치 삶 자체를 부정하는 듯 하다. 자부심까지도 부정하는 이런 생각은 결 국 신경질환을 유발시키고 말테니까. 그러나 카시아노는 자부심이라는 것 자체가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자아가 마치 그것 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카시아노는 자기를 찾는 사 람들의 생각의 경로, 곧 인간이 헛되이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경로를 아래 와 같이 설명한다. 우선 무엇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후에 소외되고 마음이 상하고 혹사당한 듯한 느낌이 온다. 그렇게 되면 도움과 위로, 안정과 치 유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대개의 경우 이런 필요가 채워지지 못한 채 시 간이 경과하게 된다. 그러면 자아는 몸과 마음과 정신을 수습할 시간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아무도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구나. 내가 무 엇을 하든 상관 않는구나.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내 마 음 속을 정말로 이해하며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알아주는 사람의 위로와 친교가 필요한데... 이제 나는 결코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 다. 내 고통의 심연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 이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난 혼자 있고 싶어진다. 하지만 홀로 있노라면 외롭고 다른 사람들이 같이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정서적 혼란을 겪는 동안에 나는 일도 책임도 적게 했으면 좋겠 다. 그런 다음 내 감정이 정리되고 마음이 치유되면 나와 같은 처지를 겪 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테니까.” 하지만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생각은 위와 다르게 움직입니다. 그들 은 경외심에 가득 차 무릎을 꿇고 신발을 벗는다. 하느님께 봉헌할 것이 라고는 자신들의 발가벗은 알몸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귀를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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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열고서 의식 세계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헛된 욕망의 끈을 차츰 끊어 버리면서 은총이 부추기는 소리를 따라간다. 그들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이끌려 발소리도 가볍게 달려가며 사랑하는 하느님의 뜻이라면 다른 사 람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을 준비를 한다.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에 깨어 있는 영혼이라 할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를 향한 대화에서 시작해 자 아를 떠나 하느님과 타인을 향한 대화에 도달하기까지, 생각을 다스리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실습을 해야 한다. 곧, 어려움이 올 때 마지못해 대처 하기보다는 마음에 들어오는 생각들을 부지런히 깨어 관찰함으로써 더욱 큰 덕성스러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8 . 교 만 에 대 하 여(About Pride)) 수도승이 싸워야 할 여덟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 중 마지막 꼭대기에 놓 여있는 것이 교만이다. 사실 교만은 수도승이 그 동안 분투노력해 온 모 든 것을 무산시키는 가장 파괴적인 것이다. 그것은 영적 여정의 초보적 단계에서보다 오히려 어느 정도 진보했다고 느끼는 순간 몰래 우리 안에 끼어 들어와 그 동안의 모든 노력과 수련을 파괴해버리는 독과도 같다. 허영(vain glory)이‘내가 이룬 업적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 하는가, 그리고 나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가?’의 문제라면, 교만은 우리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것, 즉‘내가 누구인가’의 문제와 연관된다. 고대 수 도승들에 의하면 이러한 교만은 인간의 지성적 영역과 연관된 죄로서, 수 도승이 그의 영적 여정의 목표인 마음의 순결에 도달하기 위해 마지막으 로 극복해야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교만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영적 교만과 육적인 교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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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교만은 한 마디로 직접 하느님과 겨루는 자만심이다. 영적인 높은 깨달음에 이르렀으나,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의 죄이다. 그에게 하느님은 없어지고,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 에 가 있게 된다. 그의 생각은 하느님께 대한 직접적인 반항으로 가득 찬 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칠 수 있다. 혹은 ‘하느님이 계시더라도, 그분은 나를 벌하실 수 없다.’ ‘하느님이 선하다 면 우리를 벌하지 않을 것이고, 만일 우리를 벌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선 하지도 않고 나와 상관도 없다...’는 식의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이러한 영적 교만에 빠진 수도자도 수도 여정 초기에는 자신을 온전히 하 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기도와 단식, 묵상과 노동, 포기와 극기 등을 열심 히 잘 실천해 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 허영심을 경계하지 않음으로써 서 서히 모든 것이‘나’중심이 되면서 어느 사이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인 육적 교만(carnal pride)은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서, 자 아를 하느님보다 앞세우는 죄이다. 육적 교만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중요 성을 과장하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으며,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욕망, 정열이 모든 것의 법이 된다. 그리하여 자신만을 위해 산다. 육적 교만 역시 그 동안 생각의 수련으로 닦은 모든 것을 깡그리 무산시키기에 충분하다. 카시아노에 의하면 교만은 수도승을 공략하는 생각들 중 가장 파괴적인 생각이다. 교만은 우리가 닦은 덕들 중 어느 하나를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포함한 전인격을 공격하여 파괴시킨 다. 대천사 중 하나였다가 사탄으로 떨어진 루치펠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 는 기억하고 있다. 다른 죄들은 사람들을 거슬러 맞서지만 교만은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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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도전하는 죄이다. 그렇다면 교만은 우���의 일상 안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까? 교만이 우리 수도생활에 잠재해 있다는 뚜렷한 증거 중 하나는 우리의 영적 삶이 미지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영적으로 가장 진보하였다고 생각 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거나 양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거칠 며, 작은 일에도 쉽게 모욕감을 느낀다. 나아가 수도생활에 따르는 희생 이나 어려움에 대해 불평이 많고, 자기를 포기할 줄도 양보할 줄도 모른 다. 이러한 교만은 마침내 물질에 대한 탐욕까지도 다시 불러일으켜 선물 을 받으면 모두 자기 소유로 만든다. 심지어는 순종해야 할 자신의 장상 에게 조차 무례하며, 권위적이고, 적개심으로 가득 차, 인내와 애덕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그는 타인과 자신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의 충고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더러 충고나 권고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까지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자기 정당화, 합리화가 많으며, 잘못 된 주변에 대해 늘 타인을 향해 비난한다. 그러면서 모든 면에서 자신이 앞선다고 느끼기에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사실 교만의 가장 미묘한 점은, 이러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종종 인간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 런 사람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데 능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도승이 자신의 교만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그가 다시 마음의 순결을 찾을 수 있는지? 사실 교만한 사 람에게는 회심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 즉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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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의 빛으로 먼저 자신의 삶의 잘못된 방향을 깨닫고 마음의 회심을 체험 해야 한다. 참 자아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의 생각들을 다스리 기 시작해야 한다. 매일 Lectio Divina를 다시 실천하고 영혼의 중심에서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의 힘만으 로는 완전한 덕과 약속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기 도와 단식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 자신을 철저히 승복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항상 준비되어 있 으며,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시기에, 찾고 두드리 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우리가 서원 때 부른 봉헌의 노래 ‘Suscipe me-주님, 저를 받으소서, 그러면 저는 살겠나이다. 주님은 저 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는 현세 동안의 영적 여정에서 우리가 이 여정에 성실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간청의 기도이다. 우리의 몫은 일상 안에서 주어지는 작은 기회들에 대해 좀 더 깊은 사랑 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회심의 여정에 있는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더 욱 슬퍼하게 되고,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지며,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에 대한 사랑도 점점 커진다. 그리하여 그의 일상 안에 애덕과 동 정, 자비와 겸손, 인자함 등의 영적 열매를 맺게 된다. 또한 카시아노는 우리가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 겸손을 적극적으로 실천 할 것을 권고한다. 겸손만이 교만을 파괴할 수 있다. 겸손과 교만은 사실 두드러지게 서로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시아노는 먼저 수 도승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리고 교만에서 자신을 지 키기 위한 방법으로서‘회심’의 실천을 매일의 습관이 되도록 길들일 것 을 권고한다. 수도승이 매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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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그리워한다면, 이러한 찾음은 독선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결 코 아닌, 겸손에서 이루어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생각 없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완덕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그 자체가 교만으로 서 하느님께 죄가 된다. 오히려 완덕은 겸손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겸손은 허영에서처럼 자아를 높이지 않고 실의에서처럼 자아를 극단적으 로 낮추어 슬픔에 빠지지도 않는다. 겸손은 영적 무기력(Acedia)을 통해 서 얻어진 결과로서, 매 순간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살고, 자신 안에 드나 드는 생각들을 의식하게 한다. 그래서 무엇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또 무엇이 악마의 유혹인지 분별한다. 이러한 겸손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 가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은‘포기’이다. 자신의 소유물에서부터 다시 포기 를 실천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들에 대한 포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도도, 수도승이 겸손의 열두 단계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해 극복해야 할 교만의 열두 단계(Ladder of Pride)를 묘사한 바 있다. 즉 베르나르도는 수도승으로 하여금 자신이 교만의 어느 단계에 있 는지를 앎으로써 그가 겸손의 길에 얼마나 도달해 있는지를 점검해 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겸손과 교만은 서로 상반된 삶의 방향이기 에, 겸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교만을 쳐부술 수 있 는 확실한 길인 것이다. 카시아노에 의한 이 여덟 번째 생각인 교만은 사실 인간의 가장 근본적 이고 또 뿌리 깊은 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수련과 실천을 한꺼 번에 파괴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독이기도 하다. 만일 교만한 사람에게 는 회심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그가 결코 자신의 내면을 진심으로 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볼 수 있다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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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인정하고 있다면 이는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다.

9 . 착 각 에 대 하 여(About Illusion)) 고대인들에게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문제였다면 오늘날의 영성생활에 서도 생각들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과거나 지금,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한 시토회 아빠스인 Dom Bernardo Bonovitz는 영적 성장에 장애가 되는 문제들을 네 가지 로 지적한 바 있는데, 그 네 가지는 다름 아닌 고대 수도승이 문제 삼았던 인간의 생각/사고에 기인한다. 네 가지 문제란 생각의 분산(분심), 습관 적인 슬픔, 강박관념, 근본적인 착각이다. 이러한 지적은 사실 고대 수도 승 전통에서 직시한‘부정적인 생각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여덟 가지 생각의 문제’에 이어, 특히 모든 사람에게서 발 견되는 근본적인 착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우리 안에는 영성생활에 장애를 초래하는 몇 가지 뿌리 깊은 착각이 있 는데,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하겠지만 이 착각으 로부터 깨어나도록 작업도 해야 한다. 착각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에 착각 속에 있는 한 현실에 대한 많은 왜곡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 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원죄의 결과이다.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이성이 불명료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원죄 후 인간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 신을 바르게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우리를 부르신다. 진정한 자유는 진리를 통해 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 롭게 하리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우리가 착각과 왜곡에서 깨어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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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대면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으며, 또 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착각은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내가 우주의 중심이다’는 사고방식이고, 둘째는‘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생각이며, 셋째는‘나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좋은 것이다’는 생각이고, 마지막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다-삶은 나에게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 모두 는 어느 정도 이러한 착각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바로 그러한 착각 때문 에 더 많이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착각에서 생기는 고통은 우리 삶에 생 기를 감소시키고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을 훼방한다. 우리의 이성이 종 종 이러한 착각으로 왜곡되어 있기에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열정과 의지 또한 허약하게 된다. 네 가지 착각을 하나씩 다시 살펴보자.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는 착각은 놀랍게도 카시아노의 여덟 가지 부 정적인 생각들 중 허영과 교만에 아주 가까운 것이다. 허영과 교만은 덕 과 영성에 진보하고자 하는 수도승들이 극복해야 할 마지막 유혹들이다. 이 착각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은, 세상은‘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내 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고 생각한다.‘내가 우주의 중심이다.’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실존적 불안(Existential Anxiety)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러한 착각/생각은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안 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자신이 항상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기에 조금만 무시를 당하면 노발대발한다. 자신이 배려 받지 못하 면 참지 못한다. 매사에서‘내’가 중요하고,‘내’가 모든 것의 중심에 있 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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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한다. 자신의 관점을 떠날 수가 없다. 자신이 언제 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나’는 세상의 작은 부분일 뿐이 라는 사실이다. 내가 없어도 우주는 존재하고,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여 전히 지속되며 돌아간다. 나는 결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일상 안에서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명시적으로는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지 몰라도 일상 안에서 우 리의 태도가 그러하지는 않는지? 매사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제대 로 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관점이 항상 중요하며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이 조금만 무시를 당해도 분노하 게 된다면?.....우리 자신도 이 착각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표시일 것이다. 우리가 이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겸손할 수 없다. 그 렇다면 하느님을 뵐 수도 없다. 우리의 대인 관계 역시 원만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착각은‘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다.’혹은‘다른 사 람은 내가 느끼는 만큼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착각 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인식하고 공감하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자기연민에로 이끌어 마침내 영적 무기력에까 지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이 착각은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을 포함하고 있 다는 진리, 곧 고통은 인간 삶의 한 부분이라는 진리를 보지 못하거나 받 아들이지 않음에서 생긴다. 사실 모든 사람의 삶 안에 고통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 고 또 받아들이게 되면, 나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좁은 의식에서 벗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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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고통에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 게 될 때 형제애가 생기고 타인에 대한 연민이 자라며 서로의 고통을 감 싸주고 위로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형제적 공감은 우 리를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작은 형제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 에 눈 뜰 수 있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고통에 봉사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행복감이 자라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그 격심 한 고통 속에서도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결코 잃지 않으셨다는 사실 을 복음서는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사실 고통에 직면하여서도 타인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음은 성숙의 표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 로서 서로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자 기연민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다른 사람은 나와 같이 고통스럽지 않 다’는 이 왜곡의 실체를 꿰뚫고 삶의 보편적인 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임 으로써 타인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그 리스도인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 삶 안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착각은‘나는 좋은 사람이다.’는 생각이다. 그 귀결로‘내가 하 는 일은 모두 좋은 것(선)이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이 착각은 인간 안 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교만에서 나온다. 인간의 진실은, 우리 안에는 좋 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좋다.’는 독선에 빠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무감각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다. 사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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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다. 기분 좋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영성생활의 첫 출발은 이 사실 의 인식에서 시작된다. 이런 관점에서 수도생활의 초기 단계에서 이루어 져야 할 기본 과제 중 하나는 우리가‘늘’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며 오히 려 죄인이라는 현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느님의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이 깨달음은 영성생 활의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다. 자신이 사랑받는 죄인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약함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내 안에 일어나는 시기와 질투, 경쟁심과 분노 등, 나쁜 생각들을 솔직하게 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실로 내가 누구인 지, 하느님 앞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에 이르게 된 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식(Self-knowledge)이야 말로 영성생활의 출 발점이다.

네 번째 착각은‘삶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착각 때문에 슬프게 살아간다. 이 착각 안에는 다른 사람들이‘나의 몫’을 빼 앗아 갔다는 사고가 숨어있다. 이러한 사고는 이웃을 적으로, 경쟁자로 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을 늘 피해자로 의식하게 한다. 이러한 피해 의식 안에서 우리는 이웃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이웃을 진정으로 만날 수도 없 거니와 더더욱 사랑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러한 피해 의식 안에서는 우리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분노와 슬픔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삶은 결코 불공평하지 않다. 하느님께서 각 사 람에게 알맞게 배려하신다. 그가 준비한 만큼 혹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배려하신다. 결국 삶이 불공평하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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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나의 삶에 대한 내 책임을 회피하게 하고 나를 늘 피해자로 살아가게 만든다. 이와 같은 착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삶에 새로운 생기와 희망 이 생긴다. 그리고 타인을 축복할 수 있고, 또 타인이 받은 축복에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된다.‘삶은 불공평하다.’는 착각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은 다른 이가 받은 혜택이나 축복을 기도 안에서 축복해주는 것이 다. 다른 이들에 대한 축복의 기도는 우리 마음을 점차적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나가는 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적 대가들에 의하면 자기를 아는 것 (self-knowledge)이 영적 삶의 출발점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 작업은 우 리가 영성생활을 하고자 하는 한 놓아버리면 안 되는 실질적 도구이다. 이러한 인식 작업에 들어가는 첫 단계가 우리 안에 일어나는 갖가지 감 정, 생각에 대한 인식이라 생각한다. 사실 부정적인 생각의 뿌리를 찾다 보면 우리는 우리 사고 안에 숨어있는 많은 착각들, 왜곡들을 만나게 된 다. 우리가 영성생활에 참으로 진보하기를 원한다면 기도와 더불어 우리 의 생각들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의 의식 저변에 있는 사고의 왜곡들에 대한 통찰을 요구한다. 우리 삶 깊이 뿌리박고 있 는 착각들에서 깨어나야 한다. 사실 착각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도 헛되다. 에바그리우스나 카시아노를 비롯한 고대 수도승들이 일 찌감치 깨달았듯이 영성생활이란 어떤 면에서 결국 우리의 착각, 부정적 인 생각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식과 사고 속에 들어있는 착 각, 그리고 착각으로 말미암아 생긴 왜곡된 신념들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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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작업은 우리 노력만으로 이루 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바르티메오 처럼“주님,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으면서 하느님께 우리 내면의 실재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영적 눈’을 뜨게 해 주십사고 끊임없이 간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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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썩게 하는 슬픔1) 베르날도 올리베라 홍명선 엠마누엘 옮김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최근 몇 달 동안, 저는 저의 뇌출혈로 인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전통 적인 악덕,2) 이름하여 아케디아(acedia)라고 불리는 나태3)에 대해 읽고 묵상하고, 체험하고 투쟁하며, 분석하고 숙고할 시간과 기회를 가졌습니 다. 저는 이 회람에서 저의 묵상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문화적인 여 유나 결핍 때문에 현대 세계 안에 다양한 형태로 매우 널리 퍼져있는 것으 로서 나태는 전형적인 수도승적인 악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탐식, 육욕(肉慾), 탐욕, 분노, 슬픔(근심) 또는 자만(교만)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체험입니다. 이것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관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태의 현상과 체험 앞에서 적어도 네 가지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매우 단순화시켜서 그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내과 의사는 유기체의 에너지 불균형이라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

1) 2007년 초 엄률 시토회 총장이 회원드레게 보낸 서간 2) 악습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이 회람에서는 악덕으로 통일하였다. 3) 우리는 보통 그리스어의 아케디아를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지만(동권 .. 참조) 이하 에서는‘나태’ 로 옮기기로 했다. 무기력, 게으름, 태만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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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썩게 하는 슬픔

- 심리학자는 내부에서 오거나 충격에 의한 우울증 증상으로 말할 수 있 습니다. - 윤리학자는 죄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죄의 중대함은 완전한 의식과 확고한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 영적 동반자는 마음의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찾는 이들을 유혹하는 8 가지 로기스모이(logismoi 생각들)중의 하나에 관련된 것이 아닌지 에 대해 식별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 모두는 같은 현상을 앞에 두고 자신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자 신의 견해를 표현합니다. 모두 맞는 말을 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경우를 식별할 때는 소개된 모든 면을 고려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처럼 심 리학적인 것이 강조되는 문화에서는, 아마도 객관적이고 인격화되며, 적의 가 있고 치밀한 악의 실재를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악마 또는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이 회람에서 육화된 신앙, 삶으로 사 는 신앙을 의미하는 영성의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나태를 하느님 탐구와 하느님과의 만남을 간섭하고, 차단하며 빗나가게 하는 악 (惡)으로 생각합니다. 나태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과 수도승 생활을 하는 데에 끈기를 약화시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힘들고 슬픈 일이지만, 이 부식시키는 악덕이 무의식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봉헌생활을 포기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저는 나태를 영적 투쟁이라는 맥락, 즉 진정한 조국, 아버지의 마음을 향한 우리의 순례 여정에서 마음의 순결로 인도하 는 수도승의 맥락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주요 악덕 또는 대 4)와 관련된 전통, 특별히 나태에 관련된 것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 죄” ‐‐‐‐‐‐‐‐‐‐‐‐‐‐‐‐‐‐‐‐‐‐‐‐‐‐‐‐

4) 일곱 가지 큰 죄 곧 칠죄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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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전통에 따른 몇 가지 관점을 강조하고, 무엇보다 먼저 젊은 사람들에 게 그것을 전해주기 위해 풍부한 내용을 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1 . 우 리 가 물려받은 전 통 1.1. 대 죄 들(중 대 한 죄 들) 이집트 사막의 수도승들은 마치 하나의 샘처럼 다른 경향들을 발생시키 는에서 유래된 무질서한 경향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것이“대죄(중대한 죄들)” 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의 시초입니다. 에바그 리오 폰티코 (Evagrius Ponticus+399)는 이 교리를 체계적으로 작성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그는 은수자가 직면하고 격퇴해야할 여덟 가지 생각 들 또는 악한 경향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요한 카시아노(+425)는 이 교리를 서방의 공주생활에 도입했읍니다. 우리 모두 악덕 또는 대죄의 이 분류가 카시아노의 공주생활 제도서 이후에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604)는 그러한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 행하였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카시아노를 따르지만 몇 가지 특별한 요소는 그 자신의 것입니다. 그는 악덕의 순서를 바꿉니다. 나태는 목록에서는 사 라지고, 그 혀상들 중 몇 가지는 슬픔에 합쳐집니다. 시기(猜忌)를 첨가하 고 모든 죄의 뿌리이며 시작으로 여겨지는 교만을 목록에서 제외시킵니 다. 이것에서 그는 불가타 번역본에 따른 지혜문학을 따릅니다.“모든 죄 . (집회 10,13) 훨씬 뒤에, 허영과 자만이 하나의 의 시초는 교만5)입니다” 악덕으로 합쳐졌고 이렇게 칠죄종의 전통적인 목록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

5) 새 성경 번역: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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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13세기부터 서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요한 클리마쿠스(+650) 와 요한 다마스쿠스(+749)는 이 교리를 동방교회에 전하게 됩니다. 다음 표는 방금 이야기 한 것을 명확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리스어를 베껴 쓰는 것과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용서해주십시오. 이것은 이 두 언어를 모르는 분들에게도 제가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을 분 명하게 해줄 것입니다. 동방과 서방 목록의 차이점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질투(시기)는 다른 이의 선(善)때문에 슬퍼하는 하나의 모습입니다. 나태 는 슬픔(근심)에 결합되었고 게으름 또는 건강하지 못한 태만의 차원임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라틴 저자들의 관점은 무엇보다도 교의적이고 윤 리적인 반면, 동방의 영성 작가들은 주로 실천적이며 영성 생활의 질서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몇몇 신학자들은 훌륭하게 이 교리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들 가 운데 성 빅토르의 후고(Hugo of St. Victor), 베드로 롬바르도(Petrus Lombardus), 보나벤투라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두드러집니다. 이 마 지막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몇 세기 후에, 십자가의 요한은 그의 저서 어둔 밤에서, 이러한 악덕과 죄들이 영성생활에서 이미 충분히 나아간 사람들 안에서 나타나고, 그들 은“감각의 수동적인 밤” 으로 인해 고통 받기 시작한다고 훌륭하게 묘사 합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영신 수련에서 피정하는 사람에게 칠죄 종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라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그의 신심 생 활 입문에서 재미있고 실천적인 설명을 합니다. ‐‐‐‐‐‐‐‐‐‐‐‐‐‐‐‐‐‐‐‐‐‐‐‐‐‐‐‐

6) 새 성경 번역: 불륜, 200주년 성경: 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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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grius Ponticus

John Cassian

Gregory the Great

에바그리오 폰티코

요한 카시아노

대 그레고리오

Hoi genikotatoi logismòi

- Eight spirits or vices

- Seven capital sins

여덟 가지 주요 생각들

여덟 가지 생각들/ 악습들

칠죄종

(Practic 6-14)

(Institutes 6-12; Conferences 5)

(Moralia in Job 31)

프락티코스 6-14 - Gastrimargía 탐식

제도서 6-12

담화집 5

욥기의 윤리 31

- Gastrimargía 탐식 :

- ventris ingluvies

ventris ingluvies 배의 폭식(대식)

탐식

(gluttony 폭음폭식, 대식) - Envy 질투 (시기) - Porneia 음행6)

- Fornicatio 음행(색욕, 간통)

- Luxuria 음행

- Philargiría 탐욕

- Philargiría 탐욕:

- Avarice 탐욕

(돈을 사랑하는 것, 금전욕)

amor pecuniae 돈에 대한 사랑, 재물욕 (avarice 탐욕, 무질서한 욕망)

- Orge 분노(진노,성냄)

- Ira 분노(진노,성냄)

- Anger 분노(진노,성냄)

- Lype 슬픔(근심)

- Tristitia 슬픔(근심)

- Tristitia 슬픔(근심) (+aspects of acedia) 나태의 양상들

- Akedía 나태

- Acedia 나태 : anxietas 근심,불안 taedium cordis 마음의 권태 otiosit 한가로움, 무료

- Kenodoxía 허영

- Cenodoxia: 허영 iactantia 허영,과시,허식 vana gloria 헛된(빈,속없는) 영광

- Hyperephanía 교만

- Superbia 교만

- Superbia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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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끝을 맺기 위해, 가톨릭교회 교리 서의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악덕들은 그것과 반대되는 덕에 따라 분류할 수 있고, 또 성 요한 카시아노와 성 대 그레고리오를 따르면서 그리스도교 적인 경험이 식별한 중대한 죄7)(Peccata capitalia)와 연결시킬 수 있다. 중대한(Capitale)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것들이 다른 죄와 악덕들을 낳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만, 탐욕(인색), 질투, 분노, 음행, 탐식, 게으름 또는 나태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866)8) 계속해서 길을 열고,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다시 한 마디 합니다. 현대 심리학은 이 악덕들의 동기(원인)와 표현 양상들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사회학은 이 악덕들이 자주 사회적, 문화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며, 존중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고 조장되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우리에 게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자만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숨기고, 분노는 명 확한 단언으로 가면을 씁니다). 우리도“중대한 악덕들 또는 죄들” 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 다. 보통 더 근본적인 다른 죄들이 있지 않겠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다른 악들을 낳는 것은 아닌지? 또 이러한 중대한 죄들(칠죄종)이 여성들 또 는 다른 문화들 그리고 다른 종교들 특유의 무질서한 경향들과 일치하고 있지 않은지도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1.2. 나 태 의 악 나태의 현상에 대해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스케치하도록 시도 ‐‐‐‐‐‐‐‐‐‐‐‐‐‐‐‐‐‐‐‐‐‐‐‐‐‐‐‐

7) 죄종(罪宗), 곧 칠죄종을 말한다. 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옮김,「가톨릭교회 교리서」 , 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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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봅시다. 저는 오직 몇몇 영적 스승에게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들은 기초를 놓았고 오늘의 우리는 그 위에 다시 건축을 합니다. 나태에 대한 위대한 이론가는 에바그리오입니다.“이론가” 라는 것은 삶 으로 산 경험을 개념과 말로 표현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에바그리오는 나태의 다양한 표현들을 총명하고 익살맞게 소개합니다. 우리 모두 이 책 들을 알고 있고 최근 몇 년 동안 깊이 있고 명확하게 연구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것들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에바그리오의 가르침 중에 몇 가지 중심적인 면들 을 조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태는 격정적인 사고(思考) 와 감정이 혼합된 콤플렉스로 동시에 화를 잘 내고 욕정적인 감정을 먹이 로 삼으며 일반적으로 다른 모든 악덕들을 깨웁니다. 이것은 그 표현양상 들이 왜 극단적인 모순, 곧 게으름과 활동주의, 정체(마비상태)와 열광(열 중), 좌절감과 공격성, 선(善)으로부터 도피와 악에게 자신을 내맡김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래서 내적 분열의 한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슬픔(근심)은 나태와 쌍둥이 자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서로 닮았으나 똑같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훨씬 더 쉽게 자신의 악에 대한 대책 을 강구하는데, 나태에 걸린 사람은 그것에 완전히 포위됩니다. 슬픔은 일 시적이며 부분적인 경험인데, 나태는 지속적이고 총체적인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과 반대됩니다. “정오의 악마” 인 나태의 주된 표현양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적 동요 와 변화의 필요(생각들과 장소에 대한 방랑), 자신의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음식에 관한 걱정), 손노동에 대한 반감(태만과 게으름), 무절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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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주의(사랑이라는 망토 아래), 수도승적인 수행에 대한 소홀함(규칙준 수들을 경시), 몇 가지 금욕수행에 관련된 무분별한 열정(이웃에 대한 극 단적인 비판), 일반화된 낙담(우울의 시작)이 그것입니다. 나태는 다른 모든 악덕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써 그것과 상반된 덕 으로는 치료될 수 없습니다. 다방면의 치료법이 필요합니다. 즉 뉘우침의 눈물(구원을 애원하는 말만이 아닌 외침),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악습이 교묘하게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죽음에 대한 묵상(영원의 빛 안에서 현재를 자리매김), 인내와 저항 그리고 끈기(변상辨償받는 것을 피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희망을 두면서). 이 모든 처방들 또는 무기들이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은 쉽습니 다. 결국, 나태는 하느님으로부터의 하나의 도피이고, 오직 구체적이며 인 내롭게 그분의 얼굴을 찾음으로써만 치유됩니다. 요한 카시아노는 나태에 관해 에바그리오에게 빚을 진 사람이면서 그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린 사람입니다. 그는 에바그리오의 가르침을 따르고, 체계화했으며 자료들을 단순화시켰습니다. 그리스 말을 활용하였고 나태 를 권태 또는 마음의 불안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슬픔과 나태의 관계를 강 화시켜, 지금 두 자매는 쌍둥이 또는 복제품이 되었습니다. 한가함의 표현 양상이나 증상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약으로는 손노동을 처방합니다. 결 과적으로는 천진난만하게, 정오의 악마에게 영원히 자신을 숨기도록, 또 는 숨을 곳을 찾도록 허락하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 혹은 권태에 관한 카시아노의 가르침이 독창성 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나태의 자녀들” 을 언급하는 것인데 그것은 태만, 잠 많은 것, 함부로 행함, 불안, 방랑(유랑), 영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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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동요, 말이 많음 그리고 호기심입니다. 나태의 실상에 관한 카시아노의 중요성은 두 가지 면에서입니다. 그의 공로로 이집트 사막의 금욕생활이 공주생활의 토착화된 형태로 서방 수도 승 생활에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물려받은 교설을 체계화한 그의 노 력 때문에 그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섰읍니다. 이 전통의 계승 자들 중에 성 대 그레고리오가 있습니다. 위에서 이미 주목했듯이 그의 가 르침에서 하나의 이탈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나태의 악덕에 대한 몇 가 지 요소들이 슬픔(근심)이란 악덕에 포함되었을지라도 나태에 관한 언급 은 그의 주요 악덕들의 목록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레고리오는 나태의 악 이 신적인 선(善) 그리고 이 선과 관계되는 모든 선에 대해 슬퍼하는 것에 서 유래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성의 판단이 타락한 것입니다 즉, 선은 악처럼 악은 마치 선처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 안에서 나태(acedia)를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곳은 손노동과 독서에 할애된 48장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은 베네딕도가 카시 아노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48장은 이러한 말로 시작합니다.“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Lectio Divina)을 할 것 이다.”(RB 48,1) 싸워야할 악덕인 한가함 또는 게으름임을 주목합시다. 우리에게 제공된 무기는 일과 렉시오 디비나를 교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48장 후반부에 베 네딕도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순절 동안] 형제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에 한두 사 람의 장로들에게 책임을 맡겨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여, 혹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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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 독서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되는 게으른 (acediosus) 형제가 있는지 살피게 할 것이다. 이런 자가 없어야 하겠지만, 만일 있거든 한두 번 책망하고, 그래도 고치지 않거든 규 정된 벌에 처하여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형제 들은 정해진 시간 외에 서로 교제하지 말 것이다. 주일에도 여러 가지 직무를 맡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독서에 전념할 것이다. 만일 누가 너무나 무관심하고 게을러서 공 부나 독서를 하려고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든, 그런 사람에게는 할 일을 맡겨 놀지 못하게 할 것이다. 병들거나 허약한 형제들에게는 한가하지도 않고 과도한 일에 짓눌려 도망치지 않을 정도의 일이나 기술을 맡길 것이다. 그들의 연약함을 고려하는 것은 아빠스가 할 일이다.” (RB 48, 17-25)

방금 인용한 텍스트 안에서 성 베네딕도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을 고 려합니다. 첫 번째는 성 베네딕도의 생각으로 수도승 생활의 전형적인 시기(RB 49,1)인 사순시기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게으른 수도승이 받아야하는 벌 은 그의 체험(자세)이 단순히 게으름이나 약함이 아니라 죄라는 것을 우 리에게 보여줍니다. 그의 문제는 영적 실제에 관한 무관심과 싫증입니다. 한 편 그는 수도승적인 목적에 무익한 것들을 할 수 있는 힘과 흥미를 충 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두 번째 상황의 시간인 배경은 주일입니다. 노동 시간을 적게 하면서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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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와 묵상을 위해 좀 더 많은 시간을 갖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혹은 본의 아니게 소홀히 하거나 무관심하다면 한가함을 피하게 하기 위 해 어떤 일을 그에게 맡길 것입니다. 이 일의 목적은 실용적이고 생산적이 라기보다 더 금욕적이고 치유적인 것에 있습니다. 소홀함, 즉 주의 부족 또는 근면의 부족의 원인은 게으름이나 갈망 그리고 동기 부족일 수 있다 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베네딕도의 생각으로 나태한 것은 하나의 무관심 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위로를 방해하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부활을 기다리지 않는 것입니다! (RB 49, 6-7) 세 번째 상황은, 한가함에 쉽게 빠질 수 있는 환자들이나 약한 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베네딕도는 가벼우면서도 그들의 힘에 적당한 일을 맡기 도록 당부합니다. 슬픔에 관한 다른 내용의 계열들이 성규에 있습니다. 당가에게, 베네딕 도는 형제들을 슬프게(contristet)하지 않도록 강하게 권고하고, 매우 일 반적으로는“하느님의 집에서 아무도 혼란을 느끼거나 슬프게 하지 말 것 이다” (RB 31, 6-7; 18-19)고 규정합니다.“허약한 이들에게는, 주방 업 무를 위해 보조원을 주어 근심 중에 그것을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더 큰 공로와 애덕을 닦게 되기 때문이다.”(RB 35, 13)고 합니다. 그리고 들에서 일하는 것에 관련해서도 비슷한 것을 말합니 다. 슬픔(근심)은 진정한 수도승이 되는 것과 스스로의 손으로 일을 한 교 부들과 사도들을 본받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RB 48, 7-9). 이 세 가지의 내용에서 노동 환경은 일반적으로 나태의 조짐9)인 슬픔을 생기게 ‐‐‐‐‐‐‐‐‐‐‐‐‐‐‐‐‐‐‐‐‐‐‐‐‐‐‐‐

9) 이해하기쉽도록 영역(prelude 서곡, 전조)을 따랐는데원문의 스페인어 antecamara는 대기실, 홀이라, 는 뜻이고, 이태리어 anticamera는 현관, 현관의 홀, 대합실이란 뜻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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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런 경우에 병은 어떤 약의 효과를 없앤다. 일은 한 가함을 거슬러 더 이상 치료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한편, 영적 기술의 도구들 사이에서 다음의 것들을 발견합니다.“잠꾸러 기가 되지 말라, 게으르지 말라,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라, 뜨거운 영적 열 망으로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라,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두라, 거룩한 독서 를 즐겨 들어라, 시기하지 말라,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 망하지 말라.”(RB 4장) 이러한 착한 일들이 여러 방식으로 정오의 악마 인 나태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태에 관한 베네딕도의 개념은 공주생활의 제도서에서 요한 카시아노 가 제시한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나태, 한가함 그리고 슬픔은 항상 같이 나타나고 손노동은 그것들을 치료하기 위한 일반적인 약입니다. 그러나 규칙에는 독창적이고 중요한 두 개의 자료가 있습니다. 남, 녀 수도승들이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베네딕도는 나태를 이 렉 시오 디비나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제시합니다. 나태는 미각을 약화시키고 천상의 것들과 하느님 자신에 관해 맛 들이는 것을 방해합니다. 두 번째 로, 나태에 대항한 베네딕도의 위대한 처방은 수도승원의 울타리와 공동 체에 정주하는 것입니다! (RB 4, 78). 12세기의 시토회원들은 자신들의 독창성에 손상됨 없이 창시자 베네딕 도의 이 가르침에 충실한 증인들입니다. 그들 중에서 오직 한 사람인 리에 보의 엘레도(Aelred of Rievaulx)의 말을 들어봅시다.“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므로, 은둔자는 탁월한 열심으로 그것을 피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가함이 모든 악덕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가함은 음욕을 조장하고, 탈선(방랑, 배회)을 유발하며, 악습들을 먹여 살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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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의 원인이 되며 슬픔을 낳는다. 가장 나쁜 생각들의 씨를 뿌리고, 바람 직하지 않은 애정을 깨우며, 부정직한 갈망들을 불붙인다. 고독에 대한 권 태를 야기시키고 독방을 견딜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당신이 게으름을 피우 고 있는 것을 악령이 결코 발견하지 못하게 하시오. 그러나 이승에서 우리 영혼이 허무감을 느끼게 되면 결코 안정되지 않으니, 우리는 질서 잡힌 다 양한 일들을 통해 한가함을 피해야만하고 교대로 계속되는 노동으로 우리 의 고독을 보호해야만 한다”(은둔자의 생활, 6, 35 ; 참조, 스텔라의 이 사악, 강론 14, 1-4 ). 앞선 전통에 대해 유능한 전문가인 아퀴노의 성 토마스는 그의 신학대 전(Ⅱ-Ⅱ, 35)에서, 나태가 이중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나태를 인간의 영혼을 우울하게 하는 슬픔으로 생각 합니다. 그것은 어떤 물체가 산(酸)의 부식작용 때문에 차가워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에게 만족스러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식으로 영혼의 맥이 빠지게 하는 슬픔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나태는 사랑의 내적 행위를 거스르는 죄들 중의 하나입니다, 즉 나태는 애 덕이 즐기는 신적 선(善)에 대립하여 나타나는 슬픔의 특별한 유형입니 다. 이러한 슬픔의 결과로써, 행동하는 면에서 싫증을 내게 되고 하느님과 신적 실제들을 향한 비약을 마비시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나태의 심각성은 향주덕들의 여왕이며 인간과 하느님과의 우정인 애덕 (carita)에 반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감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토마스 성인이 우리의 영적 기쁨을 보호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다른 이들의 영적 기쁨을 촉진시키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성 그레고리오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아, 나태에서 유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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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목록들을 서로 조화시키고자 시도 합니다. 그는 실망(악을 이기기 위한 도움인 은총에 대한 불신), 소심함 (유혹에 대항한 싸움에서 마음의 비겁함), 규정들의 불이행(계명들, 교회 의 규정들, 그리고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의무들의 불이행), 원한(덕스러운 사람에 대항하여 그리고 영적 지도자에 대항한 분노), 악의(영적인 선들 을 거스른 미움), 금지된 것들에 관한 탈선(불안정, 장황한 이야기 그리고 호기심)을 언급한다. 나태는 성 토마스의 윤리신학 전체에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악덕은 행동하는 역동성 즉, 사랑(amor)을 쇠약하게 합니다. 더욱이 나태 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무엇보다도 그분과의 일치에서 오는 기쁨을 침 해합니다. 나태에 관한 이해를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슬픔(근심) 에 대해 한마디 더 덧붙입니다. 성 토마스에 의하면 슬픔(근심)의 대상은 자신의 불행(불운)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의 좋은 일(선善)이 마치 자 신들의 불행(불운, 악惡)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다른 이의 선(善) 때문에 슬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광 또는 탁월함을 감소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질투(시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Ⅱ-Ⅱ, 36 1 )10) 이야기 한 모든 것들은 나태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그것을 슬픔(근심), 한가함(또는 게으름) 그리고 질투(시기)와 결합시키는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

10) G. 달 사쏘-R. 꼬지 편찬/ 이재룡· 이동익· 조규만 옮김,「성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가톨릭 대학교 출판부, 19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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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는 : - 우선적으로 슬픔(근심)과 질투의 신학적인 형상입니다. 이것이 성 대 그레고리오와 성 토마스가 따르는 노선입니다. 그들에게 한가함 또는 게 으름은 나태의 결과입니다 - 두 번째, 실천적으로, 신적인 사항들과 관련한 한가함 또는 게으름의 유형입니다. 많은 영성 저자들과 수도승 저자들이 이 노선을 따라갑니다. 즉, 그들은 실제적으로 말하며 나태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결과에 따라 나태에 대해 고찰합니다. 몇 세기 후에, 나태는 영성 저술가들이 사용하는 어휘 안에 거의 나타나 지 않습니다만,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로욜라의 이 냐시오는 그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이 악덕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영의 분별에 대한 규범(영신수련, 313-336)에서, 이냐시오는“위로” (consolacion)라는 이름으로 신적 은총의 활동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것에 반대되는 것을“고독” (desolac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후자(고독) 대한 ���사에서 나태에 관해 다루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는 것은 쉽습니다. 들어 봅시다:

“믿음, 희망, 사랑을 더하는 모든 것과 사람을 천상적인 일들과 자기 영 혼의 구원에로 부르고 끌어당기는 모든 내적 기쁨을 위로라고 부르는데, 그 결과로 영혼은 자기 창조주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영신 수련 31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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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윤양석 옮김,「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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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규범12)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고독이라고 부릅니다.“마치 영 혼의 어두움, 혼란, 천하고 현세적인 것들을 향한 움직임, 희망도 사랑도 없이 불신으로 밀어 넣는 여러 가지 흔들림과 유혹에서 오는 마음의 불안 처럼 영혼을 완전히 게으르게 하고, 냉담하게 하고 비통하게 하여, 마치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영신수련, 317 ).13)

“하느님과 천사들의 움직임에서는, 원수가 밀어 넣는 모든 슬픔과 불안 을 떨쳐내면서 참된 기쁨과 영적 즐거움을 고무하는 것이 특징이고, 반대 로 원수는 표면적인 이유와 궤변 그리고 끊임없는 속임수를 쓰면서 이러 한 기쁨을 방해한다.” (영신수련, 329 ).14)

한 번 악을 확인하면, 이냐시오는 처방을 내립니다 :“변경을 하지 말고, 꾸준히 머물고, 반대되는 덕의 도움으로 악에 대항하라, 인내하라”… 그 리고 가능한 원인들을 설명합니다. 즉,“죄가 되는 영적 게으름, 자기 인식 을 도와주기 위한 시련, 모든 영적 선은 하느님의 은총임을 배우는 것”… (영신수련, 318-322 )15). 영신수련 결론에서 성 이냐시오는 나태를 대항 하여“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이라는 해독혈청을 제공합니다.“이 관상은 선 안에서 인내하기 위한 수련이며, 사랑 안에서 기쁨과 위로의 생명을 보 존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영신수련, 230-23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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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영신수련 316에서 말하는 영적 위로에 관한 것. 13)14)15)16) 윤 양석 옮김,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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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읽읍시다.“영적 나태 또는 게으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혐오하 기까지 하는 것이다.” (2094

17))

또,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도에 대항하는

유혹들과 관련하여,“나태는 금욕 정신의 해이함, 경계심의 감소, 마음을 보호하는 것의 부족으로 인해 나타나는 의기소침의 한 형태” 라고 말합니 다.(2733 18)) 이 두 본문에서 토마스 성인과 그에 앞선 전통의 영향을 발 견하는 것은 쉽습니다.

2. 맡겨진 전 통 살아있는 전통은 스스로를 새롭게 합니다. 계속해서 말하고 싶은 것들 이 새로운 것들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삶으로부터 솟아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여러분에게 빛을 주고 자극을 준다면 목 적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2.1. 말 의 의 미 akedia(나태)는 기본적으로 태만, 소홀함, 관심의 부족 등의 뜻을 지닌 그리스어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의 있는 것은 그 말을 번역한 라틴 어 taedium인데 그뜻은 권태 또는 싫증, 피로, 괴로움, 불쾌감 같은 것입 니다. 그러나 akedia의 개념은 거의 모든 서양어의 영성 어휘 안에도 존재합 니다. 이 경우 기본적으로 나태함 / 게으름 (열심의 반대어) 그리고 슬픔 / 괴로움(기쁨의 반대어)의 뜻을 갖습니다. ‐‐‐‐‐‐‐‐‐‐‐‐‐‐‐‐‐‐‐‐‐‐‐‐‐‐‐‐

17)1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옮김,「가톨릭 교회 교리서」 , 20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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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에서 acedia와 연관된 용어의 계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acer(날카로운, 매운, 타는 듯한, 신랄한), acetum(식초), acerbum(역경, 불행, 재앙) 등.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를 생각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 다. 마치 식초가 사람에게 신맛이 나게 하는 것처럼 나태에 걸린 사람은 신맛에 싸이게 됩니다. 사실, 단포도주가 시게 되었을 때 식초가 되고, 신 맛이 납니다. 같은 방법으로 사랑의 기쁨이 신맛이 날 때 나태로 변합니 다. 앞서 얘기한 것은 신맛을 본 사람은 신맛이 나는 사람 또는 영적이거 나 종교적인 모든 것에 관해서 신맛을 보게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 다. 이 토착화된 어원에 따라, 마치 신맛 나는 것이 냉기(성 토마스를 기 억합시다)와 관련되는 것처럼, 나태가 애덕의 열정을 식혀버리기 때문에 우리를 열의가 없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나태라는 단어를 번역해야 할 때 일본어는 다른 방식, 훨씬 더 직접적인 행로를 따릅니다. mu무 無- ki키氣 - ryoku료쿠力 단어를 활용하는데, 즉 mu 無(없음, 결핍), ki 氣(에너지), ryoku 力(힘, 능력)라는 뜻입니다. 또 한 iya이야 嫌 - ki키氣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iya嫌 이야 (귀찮게 되다, 피곤해지다, 심하게 싫어하여 피하다), ki氣키(에너 지)입니다. 동양 문화에서 ki氣라는 단어의 가치와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나태의 끔찍한 심각성을 이해할 것입니다. 나태한 사람은 피곤한 사람, 고 갈된 사람, 에너지와 활력이 없는 사람, 하느님과 타인 그리고 우주와의 조화를 증오하는 사람입니다.

2.2. 성경에서의 증 언 이제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두 개의 성경 본문을 봅시다. 아마도 그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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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수도승원 안 그리고 밖의 다른 곳에서 많은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이 격 정적인 생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탐구를 계속해서 비추어 줄 것 입니다. 첫 번째 텍스트는 지혜 문학 더 구체적으로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진 지 혜서에서 뽑았습니다. 읽어봅시다.“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 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 의 시기(질투)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 게 된다.”(지혜 2, 23-24) 이 텍스트는 신학적인 내용이 풍부합니다. 영 감을 받은 작가는 사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우리를 시기(질투) 했고, 이것 때문에 우리와 투쟁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기(질 투)가 무엇입니까? 다른 이의 선(善)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인 위대한 선(善) 때문에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를 거슬러 투쟁합니다. 사탄의 추종자들은 시기(질투)와 같은 영적 죽음을 경험하는데, 이것은 왜“세상” 이 하느님의 자녀들을 편안히 놔둘 수 없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아벨을 죽인“카인들” , 기쁜 소식 앞 에서 슬퍼하고 폭력적이 되는“헤로데들” 이 늘 존재하고, 자신들의 상식 에 따른 판단력으로 베타니아의 마리아의 사랑을 거슬러 불평을 하는“이 스카리옷들” 이 늘 존재합니다. 두 번째 텍스트는 시편에서 왔습니다. 성 예로니모의 작품(불가타 역) 라틴어 번역본에서 이처럼 읊습니다. Dormitavit anima mea prae taedio. (시편 118/119, 28)“내 영혼은 권태(지루함)로 잠을 잤습니다.” 70인 역의 그리스어를 염두에 두면, 예로니모가 권태로 번역한 것은 정확 히 나태(acedia)입니다. 그러면 그리스어에 기초가 되는 히브리어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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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까?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tugah = 슬픔, 고뇌(비탄)입 니다. 각 지방의 현대어로 된 번역본들은 다양합니다. 현대 한국어 번역본 19)은

이러한 스타일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제 영혼이 시름으로 녹아내

립니다”(새 성경),“나의 영혼이 괴로워 잠 못 이루오니”(공동번역 성 경),“내 영혼 슬픔에 겨워 눈물지오니” (최 민순 역 시편).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성서 구절은 성 대 그레고리오와 성 토마스가 실수하지 않 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해줍니다. 또한 카시아노는 나태를 잠과 연결 하였다는 것과 성 베네딕도는“잠꾸러기가 되지 말라”(RB 4, 37)고 권 고한 것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감을 받은 단어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습 니다. 히브리 원본은“나의 갈망(nefesh)은 슬픔으로 녹아내립니다.”라 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슬픔(근심)은 하느님을 향해 나 를 던지는 근원적인 갈망을 꺼버립니다. 우리는 잠언에 자주 등장하는 인 물인 게으름뱅이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 니다. 왜냐하면 그의 갈망은 그 자신을 자기 안에 갇혀있게 하면서 그를 죽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1,25 참조)

2.3. 투 쟁 그 리 고 무질서한 갈 망 들20) 영적 투쟁은 원죄 이후 바로 시작되었고 종말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나는 너(뱀)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 ‐‐‐‐‐‐‐‐‐‐‐‐‐‐‐‐‐‐‐‐‐‐‐‐‐‐‐‐

19) 이 문장의 성경 구절은 각 지방 고유의 언어(스페인어, 영어, 이태리어, 불어)로 번 역되었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을 적었습니다. 20) 갈망을 의미하는 단어인 스페인어 deseo, 이태리어 desiderio, 영어 desire는 우리말 에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다. 2.3. 투쟁 그리고 무질서한 갈망들의 본문 내용에서 문장에 따라 갈망이란 단어 대신 욕구, 욕망이란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스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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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일으키리니 네가 그의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그에게 너의 머리를 밟 히리라” (창세 3,15). 성 바오로는 구원의 신비에 대한 활동(콜로 2,15; 에페 6,11-12 ; 1코린 15,24-26)안에 이 싸움을 놓으며 우리에게 적합 한 영적 무기들을 제공합니다. (에페 6,11-17; 1테살 5,8; 참조 1베드 5,8-9 ) 우리 수도승들은 이 유산을 기꺼이 받았습니다. 그리고“그리스도를 위 한 병사”또는“그리스도의 군대” 라는 표현은 수도승 생활 처음부터 언급 된 표현들입니다. 우리 시토 사부들은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저는 싸우지만 허공을 치지는 않습니다...” 는 성 바오로 의 텍스트를 기억하면서 감탄을 합니다.“이것은 정말로 군대의 나팔입니 다, 이것들은 용감히 싸우는 용기 있는 대장의 말입니다”(모든 성인들의 축일을 위한 강론, 2,2). 어떤 결핍의 표현인 인간의 갈망들은 감정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즉 갈 망들은 정서를 움직이고 이것은 또한 격정적인 생각들을 불러일으킵니다. 폐쇄된 사이클 안에서 생각들은 갈망들을 자극합니다. 좌절된 갈망에 기 인한 분노라는 격정적인 생각은 복수하고자 하는 욕구를 초래할 수 있습 니다 ... 그리고 우리는 이미 전쟁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격정적인 생각들 또는 로기스모이(logismoi=생각들)에 대항하는 전통적인 투쟁은, 그 생각들에 기인하며 생각들에게 격정을 점 가하는 무질서한 욕구들을 거스른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 기 술을 사용하는 위대한 스승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욕구들(영들, 악

인어 deseo 소원, 소망, 욕망, 염원, 갈망 / 이태리어 desiderio열망, 욕구, 욕망, 희 구, 원함, 바람 / 영어 desire 욕구, 원망願望, 욕망, 식욕; 정욕, 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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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 생각들, 고뇌들, 애착들, 욕구들, 집착들, 본능적 욕구들, 의지, 악 덕들, 중죄들...)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금욕, 자기부정, 겸손을 통 한 일대일의 투쟁으로 이러한 욕구들과 싸우고 그것들을 없애버리도록 우 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결국,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신적 은총의 도움으 로 새로운 인간을 옷 입는 문제입니다. 싸움터에서는 삶과 죽음이 충돌합니다. 삶은 하느님 안에, 죽음은 그분 에게서 멀리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한편 기본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에 대한 기억 안에서 우리를 통합하고 우리 자신의 인격을 실현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기에 서 솟아나는 애정과 생각들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킵니다. 싸움터의 또 다른 극단은 하느님을 망각할 때에 생기는 인격의 분열입니다. 이 극단 근처에, 부정적인 대상이거나 목적인 우리의 악, 욕구, 애정 그리고 격정 적인 생각들의 원인(동기)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와 격정적인 생각들이 우리를 엄습해 올 때마다, 하느님에 대한 기억이 우리 안에서 흐려지면서 그분을 망각하고, 하느님에 대한 원천적인 우리의 갈망을 약하게 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분열시킵니다. 무질서한 주요 갈망들을 확인하고자 할 때, 우리는 다시 칠죄종 또는 주 요한 악덕들을 만나게 됩니다. - 음식에 대한 무질서한 갈망(욕구)들 : 탐식 - 성적 쾌락에 대한 무질서한 갈망(욕구)들 : 음행 (육욕) - 물질적인 부에 대한 무질서한 갈망(욕구)들 : 탐욕(=인색) - 채워지지 않은 갈망(욕구)과 이 좌절에 대항한 적극적인 반응 : 분노 - 하느님과 영적인 것들에 관한 갈망의 약화 또는 소홀함 : 나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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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러나는 것과 유명해지는 것에 대한 무질서한 갈망(욕구)들 : 허영 - 자신의 탁월함에 대한 무질서한 갈망(욕구)들 : 교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갈망(욕구)들은 쉽게 인정하는 점진적인 -점점 성장 하는 가운데- 흐름을 따라갑니다. 투쟁을 일찍이 시작할수록 승리의 가능 성이 더 많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 갈망(욕구)들 그리고 그것들과 연관된 감정들이 깨어남 - 일어나는 생각들과의 대화. - 그것들을 따르는 가능성 앞에서 매력 그리고 그것들 앞에 굴복하는 것 에 대한 두려움. - 그들을 격퇴하기위한 투쟁 또는 원수들 앞에서 파행(절뚝거림). - 그들 앞에서 패배 또는 승리. - 패배할 경우에 속박(투옥, 사로잡힘) 혹은 승리의 열매인 자유.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제시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일반원리를 살펴봅 시다. 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갈망이 아니라는 것을 항 상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형성하는 원초적이며 우리와 동일 시할 수 있는 유일한 갈망은 인격적으로 우리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타자와 다른 이들을 향해 우리를 열고 우리를 던지게 하는 갈망입니다. 두 번째로, 이러한 갈망들은 그것들이 야기시키는 감정, 생각들과 같은 방 법으로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다른 갈망 (욕구), 감정 또는 생각들로 갈망(욕구)들을 양육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비누거품처럼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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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법으로, 이 무질서한 갈망들과 싸우기 위해 4가지 전통적인 수 법을 아는 것은 유익할 것입니다. - 첫 번째 수법은 그것들을 알아차리자마자 즉각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망의 대상과 반대되는 것 또는 다른 어떤 것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일반적으로 반복적이고 강박적인 생각들이 일으 키는 갈망들을 다룰 때 유익하고 권고할 만한 것입니다. - 두 번째 방식은 무질서한 갈망을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한 갈망으 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울한 상태를 초래하는 자기 파괴적인 갈 망과 생각들에 대해 가장 적절한 해결책입니다. - 세 번째 방식은 갈망, 일어나는 감정들 그리고 원인이 되는 생각들의 전개를 단순하고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것들 은 우리를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강해지려는 목적을 달성하기전에 사라진 다. 이런 경우에, 느끼는 것은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방식은 이웃에 대한 봉사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하는 것인데, 사심이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방법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면, 이러한 무질서한 갈망들이 악덕 또는 악을 행하는 습관적인 형태로 변형이 될 때 그것과 반대되는 덕 - 절제, 정결, 관대함, 인내, 근면, 검소함, 겸손 그리고 사랑 - 에 대한 끈기 있고 한결같은 훈련 을 함으로써 그것들을 근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태를 거스른 투쟁에 관해 특 별한 말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그분께로 인도하는 방법들에 대한 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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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에 있어,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 애덕의 봉사, 깨어 있기 등 단순한 덕 들로만 그것과 투쟁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나태에 관한 위대한 스승, 에바그리오 폰티코와 동방과 서방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 모두는 일치하여 우리에게 말합니다. hypomone, hypomone, hypomone! 즉 인내와 끈기 입니다. 유혹의 순간에 마음에 떠오르는 구실(핑게)들이 타당한 것일지라도 독 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독방 한가운데 앉아 머물러 인내(hypomone)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곳을 습격하는 것, 특별히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힘든 존재이며 영혼을 최고도로 시험하는 나태의 악마를 용기 있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투쟁에서 피하여 도 망가는 것은 무능하고 소심한 영혼, 그리고 사람을 속이는 영혼이 되게 하 기 때문입니다. (프락티코스, 28) 예수님 당신께서도 이 덕을 영원한 구원을 위한 조건 같은 것으로 만드 셨습니다.“당신들의 인내(hypomone)로써 당신들의 영혼을 구원할 것입 니다.”(루카21,19) 지금 저는 저의 목소리를 베르날도 성인의 목소리와 결합하겠읍니다. 비록 우리들과 다른 배경에서 유래된 것일지라도, 다음 에 오는 권고는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사람들이 영광을 얻고 덕을 실현할 수 있 는 유일한 길, 그 길에 견인하도록 당신들에게 권고하는 것 외에 지금 나 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끈기 없이 싸우는 사람은 승리할 수 없고, 승리자는 팔마를 얻을 수 없습니다. 끈기는 힘에 활력을 더하고, 덕을 완성하고, 장점을 키워주고, 상을 받게 하는 수단입니다. 끈기는 인 내의 자매이고 견고함의 딸이며, 평화의 친구, 우정을 묶어주는 매듭,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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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감정을 지니는 모든 이들의 결합, 거룩함의 보루입니다. 끈기를 제외 할 때, 봉사는 더 이상 상을 받지 못하고, 은혜는 더 이상 감사를 얻지 못 할 것이며, 강함은 더 이상 찬양받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시작하는 사람 이 아니라,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편지 129,2)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느님께는 확실히 가능하다는 것 을 기억합시다.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오직 그분의 선물을 받아 들이기만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그래서 만약 정오의 악마, 나태를 거슬 러 투쟁하기에 우리가 너무 작거나 너무나 약하다고 느낀다면, 그 투쟁을 시작하기 위해 아퀴노의 성 토마스가 권하는 진정제, 샤워와 기분 좋은 낮 잠을 받아들입시다. (성 토마스, Ⅰ-Ⅱ 38,5 )21)

많은 것들이 잉크병 속에 남아 있는데, 혹시 다른 기회에 주제를 계속할 가능성이 있을런지요? 두 가지 조건에 달렸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저의 경험이 계속해서 성장한다면, 그리고 이 회람이 잘 받아들여진다면 말입 니다. 형제, 자매님들, 결론적으로 나태는 그의 다양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매우 명확한 하나의 내적인 상태입니다. 이 증오할만한 격정적인 사고는 사랑의 기쁨과 하느님께 속해있다는 기쁨을 썩게 합니다. 그러나 이 사탄 의 악덕에 관해 가장 더 한탄할 만한 양상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원초적인 갈망을 마비시키고, 얼어붙게 하며 괴롭히고 질식시킨다는 것입 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 우리들의 탐구는 이 갈망을 기초로 합니다. ‐‐‐‐‐‐‐‐‐‐‐‐‐‐‐‐‐‐‐‐‐‐‐‐‐‐‐‐

21) G. 달 사쏘-R. 꼬지 편찬/ 이재룡·이동익·조규만 옮김,「성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학대전 요약」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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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갈망은 수도승 생활을 수도승 생활답게 만듭니다. 수도승 생활은 신적 신비를 향한 금욕의 생활이며 그 신비를 신비로이 맛보게 합니다.

*** 이 회람은 이태리어에서 번역하였으며, 스페인어 원본과 영어를 참 고로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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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레몬 아빠스의 첫째 담화 요한 가시아노 제11담화: 완덕에 관하여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I 우리는 시리아의 수도원에 살면서 신앙의 기본 훈련을 받은 다음에 어 느 정도 전진하게 될 즈음에 완덕에 대한 더욱 큰 은총을 갈망하기 시작 했다. 그래서 곧 이집트로 가서 테베 광야의 가장 먼 곳까지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거기서 우리는 명성이 온 세상에 알려진 많은 성인들을 방문하 여 그들을 모방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을 알려고 했다. 그래서 배를 타고 텐네수스(Thennesus)라고 하는 이집트의 성읍에 도착했다. 그 곳은 사방이 바다나 소금물의 늪으로 둘러쳐져 있어, 그곳 사람들은 땅이 없으니 오직 장사에만 몰두하여 해상의 영업만으로 수입을 얻는다. 그들 은 집을 지으려고 해도 집 세울 토지가 없어서 흙을 배에 실어 멀리서 가 지고 온다.

II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때에 우리 소원을 대견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안배로 복되고 훌륭한 아르케비우스(Archebius) 주교가 마침 그곳에 와 계셨다. 이분은 본래 은수자들의 공동체에 계셨지만, 사람들이 그를 강제 로 파네피시스(Panephysis)의 주교로 세웠다. 그는 주교로서도 금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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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을 일생동안 지극히 엄격하게 지켰다. 그는 지난날의 겸허함을 완화 시키거나 얻은 명예에 대하여 거만해지는 일이 전혀 없었다. 사실 그분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가 자격이 있어서 그런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서른일곱 해 동안 은수생활을 해도 그 신분에 맞는 순결에 이르지 못해서 거기에서 쫓겨났다는 것이었다. 마침 이분이 위에서 말한 텐네수스의 주교 선출 때문에 거기에 와 있어서, 우리를 지극히 친절하게 대접하셨다. 그리고 이집트 내부에 사는 거룩한 사부들을 방문하려는 우 리의 소원을 알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우리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데에 사는 원로들을 가서 보시오. 굽 은 그들의 몸에서 그들의 노령을 알아볼 수 있으며, 그들의 얼굴에서 성 덕이 빛나서 그들의 모습만 보아도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내가 유감스럽게도 이미 잃어버린 것으로, 이제는 전할 수도 없는 것을 그대들 은 말이 아닌 그들의 거룩한 생활의 모범을 봄으로써 배울 수 있다는 것 이오. 그러니 복음에 나오는 진주(마태 13,45)를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 지만, 그것을 찾는 그대들에게 그것을 어디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줌으로써 이런 정성으로라도 내 결함에 어느 정도 보탤 수 있지 않 을까 생각하오.

III 그래서 주교는 그 지역의 모든 수도승과 같은 모양으로 지팡이와 배낭 을 가지고 우리를 자기 도읍인 파네피시스로 친히 안내하였다. 그 지역은 옛날에 아주 비옥해서 왕궁에 필요한 모든 식량이 거기서 나왔다고 하지 만, 얼마 전에 바다에 덮여 버렸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바다가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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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레몬 아빠스의 첫째 담화

를 넘어 거의 모든 동네를 무너뜨리고 그 풍요했던 지방을 소금의 늪으로 만들었다. 영적으로 이해하는 시편말씀, 즉“강물을 사막으로 바꾸시고 샘들이 마른 땅이 되게 하시고 그 사는 자들이 악한 탓으로 옥토를 소금 땅으로 바꾸셨도다”(시편 106,33-34)라는 말씀은 거기서 글자 그대로 이루어진 예언이 되었다. 그 가운데 약간 높은 곳에 있던 동네들이 있었 는데, 홍수로 그곳들은 섬같이 되었다. 그래서 본래의 인구들이 피난을 가고 난 후에 이 언덕들은 외딴 곳을 찾는 성인들에게는 원했던 고독의 장소가 되었다. 아주 나이가 많은 은수자 세 분, 곧 캐레몬(Chaeremon) 과 네스테로스(Nesteros)와 요셉이 그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IV 복된 아르케비우스는 우리를 먼저 캐레몬에게 안내하기로 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수도원에서 더 가까운 곳에 살았고, 그가 다른 두 사람보다 나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캐레몬은 이미 백 살이 넘었지만 정신만은 아 직 활기찼다. 그의 허리가 오랜 세월과 끊임없는 기도의 탓으로 구부러져 서 그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손을 앞으로 밀어 땅에 대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의 환한 얼굴과 그의 기묘한 걸음걸이에 대해 놀랐다. 그런데 그의 지체들이 이미 다 죽은 것처럼 되었어도, 그는 지난날의 극 기를 완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에게 교훈의 말씀을 간절히 청하며 오직 영성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분 은 깊이 탄식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노령으로 나약해져서 예전의 엄격함을 풀었으니 이제 말할 자신도 없어 서 그대들에게 무어라고 가르칠 수 있겠나? 나 자신이 하지도 않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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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남에게 가르칠 수 있겠으며, 내가 소홀히 하는 수행을 남에게 제시 할 수 있겠나? 그런 까닭에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 젊은 형제들이 나와 함께 살 것을 허용하지 않았네. 나의 표양으로 다른 사람의 극기생활이 이완해질까 염려했던 것이다. 사실 가르침을 친히 실천하여 듣는 이의 마 음에 새겨 넣지 않으면 스승의 권위가 아무런 효과도 낼 수 없는 것이네.

V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적지 않는 혼란을 느껴 이렇게 대답해 보았다: “물론 선생님께서 사시는 험한 고장과 젊은 사람의 힘으로도 견디어 내기 어려운 이 은수생활 자체가 이미 충분한 교훈이 된다고 할 수 있고, 선생 님께서 입을 여시지 않아도 그것을 보고 저희가 많이 배우고 깊은 감격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잠시라도 침묵을 푸시기를 부탁드리 는 바입니다. 저희가 선생님 안에서 보이는 덕행을 모방하지는 못해도 적 어도 그것을 경탄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을 저희에게 전해 주십시오. 선생 님께 계시된 저희의 미지근한 태도는 그런 은혜를 얻어내는데 합당하지는 않지만, 머나먼 여행을 위하여 했던 저희 수고를 생각해 주십시오. 저희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기초 교육을 받고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은 소망과 저희의 발전에 대한 열성 때문에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VI 이 말을 듣고는 복된 캐레몬이 말했다: 세 가지 일 때문에 사람들이 악행을 멀리하게 된다. 그것은 곧 지옥이 나 실정법에 대한 두려움이며, 천국에 대한 희망과 갈망이며, 선(善) 자 체에 대한 애착과 덕행에 대한 사랑이다. 우선 두려움이 악(惡)과의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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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싫어한다는 것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주님을 두려워함은 악을 미 워하는 것이다”(잠언 8,13). 희망도 모든 악덕의 침입을 차단한다:“그분 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시편 33,23 라틴역). 사 랑은 죄인들이 당하는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애덕1)은 언 제까지나 스러지지 않고”(1코린 13,8)“애덕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기”(1 베드 4,8) 때문이다. 그래서 복된 사도는 구원의 모든 요점을 이 세 가지 덕행의 완성으로 한데 모았다:“이제는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1 코린 13,13). 신덕 때문에 사람은 미래의 심판과 처벌을 무서워하여 악 과의 접촉을 피하게 된다. 망덕 때문에 우리 마음이 현세를 떠나 천상상 급을 기대함으로 육신의 모든 쾌락을 무시하게 된다. 그리고 애덕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영적 덕행의 열매를 뜨거운 마음으로 추구 해야 하겠다는 열정을 느껴 거기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철저히 미워하게 된다. 이 세 가지는 금지된 것을 피하도록 하느니만큼 모두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지만 그 우수함에 있어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전진을 원하지만 아직까지 덕행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 는 사람들의 것이고, 셋째는 하느님의 것이요 자기 안에 하느님의 모상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사실 하느님만이 아무런 두려움 도, 보상에 대한 아무런 요망도 없이 오직 선에 대한 사랑에 의해 활동하 신다. 솔로몬의 말대로“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 때문에 만드셨 다”(잠언 16,4 라틴역). 당신 선하심 때문에 자격이 있고 없고를 떠나 모 ‐‐‐‐‐‐‐‐‐‐‐‐‐‐‐‐‐‐‐‐‐‐‐‐‐‐‐‐

1) 원문에 충실하려고 대체로 라틴어의 amor은‘사랑’ , 그리스도교의 용어인 caritas는 ‘애덕’ 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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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풍부히 내려주신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범하는 모욕이나 악행 때문에 지치거나 흥분하시지 않는다. 그분의 선���심은 언 제나 완전히 남아있으며 그분의 본성은 변함이 없다.

VII 우선 종에게 해당되는 두려움의 단계가 있다. 그 단계에 대하여“일을 모두 하고 나서‘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하시오” (루카 17,10)라는 말 씀이 나온다. 그런데 완덕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그 단계를 떠나 그 보다 높은 희망의 단계로 올라간다. 이 단계는 종이 아니고 삯꾼에게 해당 된다. 여기서 사람은 보수를 기대한다. 죄의 용서를 받아서 벌에 대한 두 려움 없이 그는 자기 선행을 믿고 합의된 상급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아버지의 넓은 아량을 믿어, 아버지의 모든 것이 또한 자기 것이라 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아들의 정(情)에는 아직까지 이르지 못했다. 저 탕자의 경우도 그랬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과 함께 아들의 이름도 잃고 나서“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17) 라고 말하면서 그 이상의 것을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배불릴 수 없었던 돼지들의 꼬투리 - 그것은 악습의 더러운 음식을 의미한다 - 뒤에 그는 제정신이 들어 유익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충격에 그는 돼지들의 더 러움을 지겨워하기 시작했고 굶주림의 모진 고통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이미 종이 된 그는 보수를 받는 삯꾼의 위치를 갈망하게 되어 이렇게 말 했다:“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은 빵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서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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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 품꾼 가운데 하나로 써 주십시오”(루카 15,17-19). 그러나 그를 맞이하러 달려간 아버지는 이 겸손한 참회의 말 씀이 바랄 수 없던 과분한 자비로 아들을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작은 것을 허락함으로 만족하지 않고 즉시 아래의 두 단계를 뛰어넘게 하 여 이전에 가졌던 아들의 품위를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풀어 없어지지 않는 애덕의 은총에 힘입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보는 아들들의 단계에 서둘러 올라 서도록 하자. 그때에 우리는 천상 아버지의 모상과 닮아져서 참 아드님을 모방하여: “아버지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다”(요한 16,15)라고 부르짖을 수 있겠 다. 복된 사도도 우리에 대해 같은 것을 주장한다:“바울로나 아폴로나, 게파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나 미래나, 모두가 여러분의 것 입니다”(1코린 3,22). 구세주께서도 그런 모상과 닮으라고 우리에게 명 령하신다:“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48). 낮은 단계에 있을 때에는 선을 향한 열망이 종종 끊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가끔 나태나 쾌락으로 마음의 힘이 약해져서 일단 지옥에 대한 두 려움과 장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질 수 있다. 우선 그 단계에서도 어느 정 도의 전진이 가능하다. 우리가 벌에 대한 두려움과 상급에 대한 희망 때 문에 점차적으로 악습을 피하면 애덕의 단계에 넘어갈 가능성이 생긴다 는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 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벌을 생각합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사랑에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 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19). 참된 완덕에 올라갈 수 있는 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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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모양으로 우리도 사랑하는 길밖에 없다. 그 분이 오직 우리의 구원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오직 그분의 사랑을 보고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에서 희망으로, 희망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덕행 자체에 대한 사랑에로 오를 수 있 도록 지극히 열렬하게 노력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선 자체에 대한 애착에 도달하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가능한 한 끊임없이 선을 붙잡아 두게 될 것이다.

VIII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장래의 상급에 대한 희망으로 악습의 불을 끄 는 사람과 하느님께 대한 애덕과 친교로 말미암아 죄악과 불결함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의 차이가 크다. 후자는 정결에 대한 사랑으로만 순결의 덕 을 지니고 있으며, 이제 미래에 있을 상급을 쳐다보지 않는다. 또 그는 현 재 지니고 있는 덕을 즐기고 있어서 앞으로 받을 수 있는 벌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덕행에 대한 행복을 느껴 모든 일을 행한다. 이런 상태에서 사 람은 목격자가 한 사람도 없더라도 죄를 짓지 않을 것이고, 마음의 숨은 생각의 쾌감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깊은 뼛속까지 덕행 자체에 대한 애착을 보유하고 있어서 거기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 들이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지극히 혐오하고 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 다. 현재에 지니고 있는 선을 즐겨서 악덕과 육의 전염을 미워하는 사람 의 형편과 앞으로 받을 상급을 보고 금지된 욕정을 억제하는 사람의 형편 과 현재의 손해를 걱정하는 사람의 형편과 미래에 받을 형벌을 무서워하 는 사람의 형편은 각각 다르다. 끝으로는 선 자체 때문에 선을 떠나기 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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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은 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 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급에 대한 욕심으로 사 람이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 선을 행하기 때문이다. 두려움 때문에 악의 유혹을 뿌리치는 사람은 두려워할 대상이 없어질 때 좋아하는 일로 다시 돌아간다. 그래서 그는 늘 선행 안에 안정되게 머 무를 수 없다. 그는 정결이 주는 단단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누리지 못해 유혹의 공격에서 쉴 순간이 없다. 전쟁의 혼란을 겪으면 상처를 입게 되 는 법이다. 투쟁가운데 있는 사람은 용감하게 잘 싸우고 상대방에게 많은 상처를 입힌다고 해도 종종 자기도 적의 칼을 맞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악습의 공격을 이미 이기고서 이제 안전한 평화를 누리고 덕행 자체에 대 한 애착을 얻은 사람은 마음속에 깊이 박힌 정결의 손실보다 더 해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완전히 사로잡힌 덕의 상태를 꾸준히 지킬 것이다. 그에게 현재의 경결은 더없이 고귀한 보배이다. 그 래서 그는 불행하게도 덕행을 위반하는 일이나 악행에 물드는 일 자체를 무거운 벌로 여긴다. 그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더 착하게 살지도 않고, 아무도 없다고 해서 덜 착하게 살지도 않는다. 자기 행동만이 아니고 자 기 생각까지 심판하는 양심을 언제나 어디서나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어서, 그는 속일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그 심판에 자기를 맞 추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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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X 자기의 열성과 노고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고서 이런 상 태에 도달하면, 두려움이 지배하는 종의 조건, 그리고 주는 분의 선물이 아니라 보상으로 받는 상급을 바라는 품꾼의 조건을 벗어나 점차 양자(養 子)의 상태로 넘어가게 된다. 자녀들의 이 자세를 가지게 되면 두려움과 희망이나 탐욕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 애덕(참조. 1코린 13,8)이 영구히 계속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두려움과 애덕의 관계 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을 나무라시면서 각 형편에 해당되는 자세를 제시 하신다:“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며,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인데, 내 가 아버지라면 나에 대한 공경은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이라면 나에 대 한 두려움은 어디 있느냐?”(말라 1,6 70인역) 종이라면 부득이 두려움을 가진다. 왜냐하면“주인의 뜻을 알고도 매 맞을 짓을 한다면 매를 많이 맞 을 것”(루카 12,47-48)이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 애덕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비슷한 모습을 얻으면 선 자체 를 즐겨서 기쁘게 선을 행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인내와 온유함을 사 랑하기 때문에 이제 죄인들의 악행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오 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동정하여, 그들을 위하여 용서를 청할 것이다. 그는 주님의 자비로 해방될 때까지 그 자신도 그와 비슷한 정욕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육의 공격을 자기 노력으로 극복하지 않았다는 것, 오직 하느님의 보호로 치유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그르치는 이들에게 분노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을 깨달을 것이 다. 그래서 그는 온전히 고요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이렇게 노래할 것이다: “주께서 내 사슬을 끊어주셨나이다. 주께 찬미의 제사를 올리리이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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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115,7-8). 또는“주께서 이 몸을 돕지 않으신다면 어느덧 내 영혼은 지옥 속에 살았을 것을…” (시편 93,17). 이런 마음의 겸손 속에 머무르면 그는 복음이 말하는 이 완덕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다. 즉“원수를 사랑하 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 해 주고, 박해하고 헐뜯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 라” (마태 5,44; 루카 6,27)는 것이다. 그런 길로 우리는 다음 구절로 약 속되는 상급을 얻게 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얻을 뿐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된다:“그러면 하늘 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그분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 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 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 (마태 5,45). 복된 요한은 그 정도의 애정을 느 끼게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이렇게 말한다:“우리도 그분처럼 이 세상에 있으므로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1요한 4,17). 약하고 그르치기 쉬운 인간은 과연 어떻게“그분처럼”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하느님을 모방하여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온화한 마음의 애덕을 보여줄 때이며 선행을 선 자체에 대한 애착 때문에 행할 때가 아닐까? 그 상태에 도달하면 하느 님께서 우리를 진정한 양아들로 삼으실 것이다. 그 점에 대하여 같은 사 도가 이렇게 말한다:“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아무도 죄짓지 않습니 다. 하느님의 씨가 그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 났으므로 죄지을 수 없습니다”(1요한 3,9). 또는“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 나신 분이 그를 지켜 주시니 악한 자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1요 한 5,18). 이 말씀은 모든 죄가 아니라 오직 대죄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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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한다. 그런데 대죄를 멀리하고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이 지킬 생 각이 없는 사람에 대하여, 같은 사도는 다른 데에서 그런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누구든지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보거든 그 죄가 죽을 죄가 아니라면 하느님께 청하시오. 죽을 죄를 짓지 않은 이들 에게는 하느님이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도 있습니다. 그 런 죄에 대해 청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1요한 5,16). 한편 죽을 죄가 아닌 죄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지키거나 충실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그 죄에 물들지 않을 수 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속 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 진리가 없습니다.”또“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 고 말한다면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1요한 1,8.10). 성인이라도 말과 생각으로, 모르는 것과 잊는 것으로, 강제와 의지와 잠입으로 이루어지는 사소한 일에 실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죽을 죄라고 부르는 것과는 관계가 없 으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며 나무랄만한 것들이다.

X 위에서 말한 선에 대한 애착을 지니게 되어 하느님을 모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그는 주님과 같은 인내와 자비로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 하여 기도하며“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짓 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루카 23,28)라고 청할 것이다. 사실 남의 범 죄를 보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완고하게 심판하는 것은 악덕의 찌꺼기를 아직 다 씻어버리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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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증거이다. 바울로 사도가 율법의 완성이라고 부르던 자세, 즉“서 로 남의 짐을 져 주시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시오”(갈라 6,2) 라는 말씀으로 가리키는 자세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마음의 완 덕을 얻을 수 있겠는가? 또“분통을 터뜨리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 며 원한을 품지 않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는”(1코린 13,4-7) 애덕을 지니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완덕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뜻으로“의인은 제 가축의 심정도 측은히 여기나 악인의 내심은 자 비가 없다”(잠언 12,10 70인역)는 말이 있다. 그러니 수도승이 남 안의 악습을 인자함과 인정 없이 엄격하게 단죄한다면, 그가 바로 그 악습에 걸리리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완고한 임금은 불행에 빠진다” (잠언 13,17 70인역)는 말씀과“나약한 이의 말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 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잠언 21,13 70인역)는 말씀이 나온다.

꺋X I 제르마노 :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에 대해 아빠스께서는 박력 있게 훌륭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아빠스께서 는 하느님 사랑을 지극히 찬양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상 급에 대한 희망이 불완전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언자는 그 점에 대해 아주 다르게 생각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는“주님을 두려워하라, 그의 모든 성도들아. 그를 두려워하는 이는 아쉬움이 없나니”(시편 33,10)라고 했고, 또 상급을 내다보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 열 중했다는 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이 마음 기울여 언제나 당신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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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채우리니 받을 상급 때문이니라”(시편 118,112 라틴역). 사도 (바울 로)도 이렇게 말합니다:“믿음���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파라오 딸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부하고, 일시적으로 죄의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차 라리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물보다 더 큰 재산으로 여겼습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보상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히브 11,24-26). 이와 같이 복된 다윗은 상급을 생각하고 주님의 규정을 지켰다고 자랑했으며, 입법자 (모세)는 미래의 보상을 내다보고서 왕가의 양자라는 품위를 무시하고 이집트의 보물보다 모진 학대를 선호했다고 한다면, 그런 것들을 어떻게 불완전하 다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꺍X I I 캐레몬 : 성경은 각자 마음의 형편과 정도에 따라 우리 자유의지를 완 덕의 여러 단계로 초대한다. 모든 이들이 같은 덕성과 같은 의지와 같은 열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완덕의 화관 을 제공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서로 다른 완덕의 차원 과 정도 같은 것이 정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복음에서 약속되는 행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명백히 알아볼 수 있다. 하늘나라를 소유할 사람도 행복하고 땅을 차지할 사람도 행복하며, 위로를 받을 사람도 행복하고 배부르게 될 사람도 모두 행복하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하늘나라에 거처하는 것과 땅 - 그 땅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 을 차지하는 것은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 각한다. 마찬가지로 위로를 받는 것과 의로움의 충만을 누리는 것은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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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를 것이다. 그리고 자비를 입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뵙는 큰 영광을 즐 기는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2)“해의 광채가 다르고 달의 광채가 다르며 별들의 광채가 다릅니다. 별과 별은 그 광채로 구별 됩니다. 죽은 이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1코린 15,41-42). 이와 같이 성경에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복되어라 주님 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 (시편 127,1 라틴역)이라는 말씀으로 칭찬하고 그 말씀으로 그들에게 충분한 행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다른데서는“사랑 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벌 을 생각합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사랑에 완전하지 못합니다”(1요한 4,18)라는 말도 나온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영광이라고 하면서 “두려움으로 주님을 섬기라” (시편 2,11) 하고,“나의 종이 됨은 너의 위대 함이다” (이사 49,6 70인역)라고 하며,“주인이 와서 보니 시킨대로 하고 있는 종은 복됩니다” (마태 24,46)라고 했다. 그러나 한편 사도들에게“나 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 은 것을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15,15)라고 하셨고“내가 명 하는 것을 행하면 그대들은 내 벗입니다” (요한 15,14)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완덕의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과 주께서 우리 를 높은 단계에서 더욱 높은 곳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에 복되고 완전한 사람은 성경 말씀에 따라“덕행에 서 덕행으로”(시편 83,8 라틴역), 그리고 완성에서 다른 완성으로 나아 ‐‐‐‐‐‐‐‐‐‐‐‐‐‐‐‐‐‐‐‐‐‐‐‐‐‐‐‐

2) 캐레몬(또는 가시아노)의 해석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예수(혹은 복음사가)께서는 약 속하시는 행복을 다르게 표현하셨지만, 8가지 모두가 앞뒤에 나오는 하늘나라의 행 복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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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열심히 움직여서 그가 두려움에서 희망으로 올라가면 그는 다시 더욱 복된 단계, 즉 애덕으로 올라가라는 초대를 받 게 된다. 이와 같이“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마태 24,45)이 된 사람은 벗 들의 친분을 누리게 되며 양자의 신분에 넘어간다. 내가 설명한 것을 이 런 식으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영원한 처벌이나 성인들 에게 약속된 지극히 복된 상급을 내다보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 다. 그것은 오히려 유익하며 그런 일에 열중하면 행복의 시작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더 큰 확신과 이미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애덕 이 들어와서 그 사람을 종의 두려움과 품꾼의 희망으로부터 하느님을 사 랑하는 태도와 양자의 상태로 이끌어간다. 이렇게 애덕은 완전한 사람을 더욱 완전한 사람으로 만든다고 말할 수 있겠다. 구세주께서는“내 아버 지 집에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요한 14,2)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그리 고 별들은 다 하늘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해와 달의 광채, 또는 샛별과 나머지 별들의 광채 사이의 간격이 크다(참조. 1코린 15,41). 그래서 복된 사도는 애덕이 두려움과 희망보다 나을 뿐 아니라 크고 놀 라운 모든 은사보다도 낫다고 하면서 비교할 데 없이 뛰어난 애덕의 길을 보여준다. 그는 영적 은사들을 모두 나열한 다음에 애덕의 여러 측면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이제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 니다. 내가 사람의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할지라도 … 내가 예언 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있으며 산을 옮 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 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먹이기 위해 나누고 몸마저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 면 내게는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1코린 13,1-3). 보다시피 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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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레몬 아빠스의 첫째 담화

보다 더 귀하고 더 완전하고 더 고상한 것, 그리고 말하자면 애덕보다 더 영원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예언도 없어지고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사 라질 것이지만 애덕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기”(1코린 13,8) 때문이 다. 애덕 없이는 저 모든 위대한 은사들 뿐 아니라 순교의 영광마저도 헛 된 것이 된다.

XIII 이 완전한 사랑에 기초를 다지는 사람은 더욱 뛰어난 단계, 즉 숭고한 애덕의 두려움으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나 상급에 대한 탐욕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사랑에서 나는 것 이다. 아들이 인자한 아버지를 사모하는 경우와 형제간이나 친구간의 사 랑, 또는 부부간의 사랑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런 사람들은 정성과 존경 심이 가득한 애정으로 서로 대하면서 매 맞을 것이나 꾸지람을 들을 것을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가장 미묘하게 사랑에 거슬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긴장 속에서 행동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도 언제나 존 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여, 자기에 대한 상대방의 사랑이 약간이 라도 식지 않도록 조심한다. 이런 두려움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어떤 예언자가 멋지게도 이렇게 표현했다:“지혜와 지식은 풍성한 구원이 되고 주님을 경외함은 그의 보화가 된다”(이사 33,6). 이 두려움의 품위와 가 치를 그보다 더 명백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언자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 없이, 참된 지혜와 하느님께 대한 지식이 이루는 구원의 풍 성한 자산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죄인이 아니라 성인들에게 이런 두려움을 권면한다. 시편에서도“주님을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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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그의 성도들아. 그를 두려워하는 이는 아쉬움이 없나니”(시편 33,10)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주님을 두려워할 때 완덕의 아쉬움이 조 금도 없음은 틀림이 없다. 한편 사도 요한은 분명히 처벌을 걱정하는 공포에 대하여 말한다:“두 려움은 벌을 생각합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사랑에 완전하지 못합니다”(1 요한 4,18). 이와 같이 아쉬움이 없고 지혜와 지식의 보물고가 되는 두려 움과“지혜의 시작”(시편 110,10)이라고 부르는 불완전한 두려움 사이의 거리가 매우 크다. 후자는 처벌과 관련되기 때문에 사랑의 충만함에 이르 게 되면 완전한 이들의 마음에서부터 쫓겨나게 된다. 왜냐하면“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기”(1요한 4,18) 때문이 다. 그러므로 지혜의 시작이 두려움이라면 지혜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애 덕이 아니면 무엇일까? 사실 그 애덕 안에는 완전한 사랑의 두려움이 내 포되어 있으니, 이제 그 두려움을 시작이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보물고라 고 하게 된다(위에 참조). 그래서 두려움의 두 단계가 있는 것이다. 첫째 단계는 초보자, 즉 무서 워 떨면서 종의 멍에를 지는 이들의 단계이다. 여기에 대해 성경에“종이 제 주인을 무서워한다”(말라 1,6)는 말이 나오고, 복음에는“나는 그대들 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 다”(요한 15,15)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 지는 않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뭅니다”(요한 8,35)라고 말씀하 셨다. 이렇게 주님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애덕의 완전한 자유와 하느 님의 벗들과 아들들의 신뢰로 넘어가라고 우리를 격려하고 계신다. 마침 내 주님께 대한 사랑에 힘입어 종의 두려움을 이미 초월한 복된 사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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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로)는 아래의 단계를 무시하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더 높은 은혜를 베풀 어 주셨음을 이렇게 고백한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서움의 영이 아니 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2티모 1,7). 사도는 또한 하 늘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사랑으로 불타있으며, 하느님이 양자로 삼음 으로써 종에서 아들로 만드신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격려해준다:“여러분 은 또다시 불안에 떨게 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됨의 영을 받았습니 다. 이 영 안에서 우리는‘아빠, 아버지’하고 외칩니다”(로마 8,15). 그리고 예언자는 사람이 되실 때에 주님이 받을 영의 일곱 가지 선물을 열거하면서 이 두려움을 언급한다. 먼저“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과 효성의 영이다”하고 나서 중 점을 두는 것처럼 마지막으로“주님을 두려워하는 영이 그를 채우리라” (이 사 11,2-3 라틴역)고 말했다. 여기서 특별히 주의할 점은 앞에서 나오는 다른 선물과 달리 예언자가 주님을 두려워하는 영이 그 위에 머무른다고 하지 않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영이 그를 채운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이 영 의 힘이 그만큼 풍요로운 것이다. 사람을 한 번 차지하면 그 영은 어떤 부 분이 아니라 그 마음을 온전히 채우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두 려움내지 경외심이“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 사랑” (1코린 13,8)과 하나 여서 사로잡은 사람을 채울 뿐 아니라 다시 분리될 수 없고 영원히 그를 차 지하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으로는 전혀 약해 지지 않는다(그런 것은 밖으로 내쫓길 공포의 경우에 종종 일어나지만…). 이것이 예언서에서 말하는 완성에 속한 두려움이다. 인류를 구원할 뿐 아 니라 완덕의 본보기와 덕행의 모범이 되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신 주님께서 는 그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고 했다. 하느님의 참 아들로서“그분은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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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하지 않았으며 그분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 없었으니” (1베드 2,22) 그분은 벌을 무서워하는 종의 두려움을 가질 리가 없었다.

XIV 제르마노 : 애덕의 완성에 대하여 잘 들었으니, 이제 정결의 본질에 대 하여 몇 가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아빠스님이 말씀하신대로 애덕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영광과 모습이라는 높은 위치에 올라가게 된다고 해 도, 저희는 정결의 완성 없이 그 애덕의 절정에 이를 가능성이 전혀 없다 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알고 싶은 것은, 어느 정도의 영구한 정결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이 전혀 욕정의 충격을 받지 않는 상태가 가능할까요? 또는 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 한 번 도 그런 불에 타지 않을 정도로 이 육욕을 멀리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XV 캐레몬 : 주님과 하나 되는 사랑에 대해 언제나 배우거나 가르치는 일 은 가장 큰 행복이며 더없이 유익한 일이니 시편의 말씀대로 그 사랑에 대하여 평생 밤낮으로 묵상할만하다. 그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면, 그것이 한없이 주리고 목말라하는 우리 마음을 천상 양식으로 부양한다. 그렇지 만 우리 몸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구세주의 지극히 인자한 말씀대로 우리 짐을 지는 당나귀와 같은 육신이“길에서 기진하지 않게”(마태 15,32) 배려해야 한다. 왜냐하면“영은 간절히 원하지만 육신은 약하기” (마태 26,41)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을 보살펴서 그에게 약간의 음식을 먹여주자. 이렇게 기운을 회복하여 정신도 그대들이 알고 싶은 내용에 더 욱 주의 깊게 열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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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 리 말 이 글은 성 오딜리아 베네딕도회(Missionsbenediktiner von St. Ottilien)의 초기 한국 선교에 관한 연구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외부의 선 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발전해가던 중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de Paris)가 진출하면서 선교회의 활동이 시작 되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국 진출 이래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 으로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박해를 받으며 숨어 살아야 했으므로 선교지 한국을 온전히, 객관적으로 이해할 여유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피 흘린 대가로 얻은 선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식민권력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다.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도회원들의 한국관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는 다른 환경에서 형성되었다. 창설자 안드레아스 암라인1) 신부의 창설 이념과 초대 총원장 노르베르트 베버2)의 선교지침에 바탕 하여, 아래로 부터의 복음화를 모색하면서 선교지 한국에 대한 이해를 심화했다. 또한 ‐‐‐‐‐‐‐‐‐‐‐‐‐‐‐‐‐‐‐‐‐‐‐‐‐‐‐‐

1) Andreas Amrhein (1844-1927) 스위스 루체른주에서 태어났다. 선교 사제직의 꿈을 키우며 루체른과 튀빙엔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수련자로서 보이론 수도회에 입회하 였고, 1871년 성탄절에 안드레아 수사로서 수도서원을 한 다음, 1872년 7월에 사제 서품을 받���다. 2) Norbert Weber(1870-1956) 독일 남부 랑바이드에서 태어났다. 1885년 사제서품을 받고 1895년 쌍트 오틸리엔(St.Ottilien)에 입회하여 1896년에 서원했다. 이하 외국 인명 표기는 姓으로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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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박해시기가 끝나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더불어 독일 의 민간 식민지 잡지와 교회 선교지(宣敎誌)에는 한국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3) 요컨대 베네딕도회원의 선교는 한국에 대한 이해와 함 께 동반성장한 것이다. 이 글은 종래 교회사에서 굵직하게 다루어온 교회의 국가관이나 식민권 력과의 관계 등 거시적 담론이 아닌, 선교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와 접속 하고 인민대중의 삶을 담아내었던 교회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삶의 이야 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연구 시기는 베네딕도회가 진출한 1909년부터 해 방 후 북한 지역을 점령한 공산정권에 의해 남녀 수도회가 강제 해산 당 하는 1949년까지로 한정한다. 공간적 범주는 서울과 함경도 지역이지만 논지의 전개상 필요한 부분에서는 만주의 기록도 동원된다.

Ⅱ. 선 교 사 상 1 . 창 설 자 안드레아스 암 라 인 신 부 의 선교사상 쌍트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회는 1884년 문화투쟁의 와중에 독일 최 초로 외방선교를 위한 선교기관으로 라이헨바하(Reichenbach)에서 설립 되었고 다음해 9월 여성 지원자 4명을 받아들이면서 수녀회가 창립되었 다. 이는 뒤늦게 식민지 개발에 뛰어든 독일의 식민지정책과 연계된 것이 었다. 독일제국은 기독교 선교를 식민지에 끌어들여 식민지 정서를 이식 ‐‐‐‐‐‐‐‐‐‐‐‐‐‐‐‐‐‐‐‐‐‐‐‐‐‐‐‐

3) 하멜의 표류기 이후 1910년까지 독일에 소개된 한국 관련 문건은 1500여종에 달한 다. 이지은,《왜곡된 한국 외로운 한국》 , 책세상, 2006. 14쪽 ; 한국에 선교 사제로 오게 된 에카르트도 학창시절《한국》 (Ernst von Hesse-Wartegg, Eine Sommerreise nach dem Land der Morgenruhe, Dresden, 1894)이라는 책을 접하고 선교를 꿈꾸었 다.: 조효임,〈안드레 에카르트와 코리아 심포니〉 ,《음악과 민족》8호, 1994.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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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식민지의 질서와 평정을 이루는데 결정적 도움을 받기를 원했고4) 암라인 신부는 당국의 긴급한 필요에 적절히 부응함으로써 독일 내에서 수도원의 입지를 보장받으려 했다. 암라인 신부는 처음 사제직을 꿈꾸던 시절부터 유럽대륙을 기독교화한 중세의 수도원 선교운동에 깊은 감명을 갖고 있었다. 즉 베네딕도회의 수 도생활은 수도원의 울타리 안에서 엄격한 정주공동체(定住共同體)를 지 향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일시적으로 정주를 벗어나 이교 도지역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수도원을 중심으로 사제로서, 평수사 기술 자로서, 농경인으로서, 예술가요 학자로서 전체적 선교를 펼친 데 대한 적극적인 공감을 갖고 있었다. 교회 역사 안에 등장하는 이러한 베네딕도 회의 선교운동에 고무 받은 암라인은 자기 당대의 수도원 선교운동을 구 상하며 일찍이 동양의 선교에 관심을 두고 동양의 전통 안에서 기독교와 의 접합점을 찾는 데에 주의를 기울였고,《논어》를 번역하기도 했다.5) 암라인의 초기 구상은 이교도 국가에서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사도활동 과 본국에서 신심 깊은 수공업자들과 기술자들이 수도회 제3회원으로서 선교활동에 기여하는 간접 활동으로 이루어졌다.6) 나아가 그의 선교사상 의 특징은 선교 담당자들이 개별적인 선교사가 아니라 적어도 12인 이상 으로 구성된 하나의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베네딕도회 수도승이면서 동 시에 선교사로 활동하는 것이다. 즉 사제 한 사람이 활동하는 본당 사목 ‐‐‐‐‐‐‐‐‐‐‐‐‐‐‐‐‐‐‐‐‐‐‐‐‐‐‐‐

4) 이유재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본 식민지 조선〉 ,《서양사연구》32, 2005. 8쪽. 5) 백 쁠라치도(Placidus Berger),〈하느님이 하신 일-오틸리엔 수족과 툿징 수녀회의 출범〉 ,《옛 등걸에 새순이》 , 분도, 1985. 68쪽. , 라이헨바하 성요셉 선 6) A. Amrhein,《라이헨바하 선교요강 Reichenbach Prospectus》 교 출판소, 1880 : 대구 수녀원 (譯), 2006.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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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주의 직접선교가 아니라 중세 선교운동처럼 기술자, 의사, 예술가, 학 자, 교육자 등을 겸한 신부와 수사들이 함께 어울려 전체적인 선교를 하 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의 중심기지는 개별 성당이 아니라 수도원이 라야 했다. 수도원은 우선 공동체 생활을 통해 모범적인 가정으로 존재하면서 아이 들을 위한 양육원을 운영하고, 수사들이 직접 운영하는 수공업 공장과 농 업학교에서 현지인 젊은이들을 교육해야 했다. 또한 수도원은 그 자신의 생계유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농경과 축산을 향상 시키는 기술적, 교육적 장으로서 토지를 소유하기를 권고했다. 전례 의식 역시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중요한 선교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 는 평가했다.7) 요컨대 암라인 신부는 어떤 교구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 니라, 이미 있는 교구 내에서 전통적인 베네딕도회의 공동체적 수도원을 세워 교구 전체의 사목을 문화적으로 도와주는 선교방법을 생각했다.8) 이 9)과 러한 암라인의 사상은 점차 발전하고 다듬어져서《7가지 근본사상》 ‐‐‐‐‐‐‐‐‐‐‐‐‐‐‐‐‐‐‐‐‐‐‐‐‐‐‐‐

7) 참조 :《7가지 근본사상》 ,《라이헨바하 선교요강》 8) 백 쁠라치도,〈한국에서의 초기 베네딕도회의 선교방침〉 ,《한국교회사논문집 I》 ,한 국교회사연구소 1984. 776쪽. 9) A. Amrhein,《외방 선교를 위한 OSB 수도회설립 청원(서)의 7가지 근본사상 Die VII Grundgedanken der Eingabe zur Gründung der Congregatio OSB pro mission. , 1883년 청원서 형태로 작성되어 바이에른 지방 문화부에 송부되었고 1921년 ext》 슈트트가르트에서 비공개 인쇄물로 출판되었다. 7가지 근본사상이란, ① 베네딕도 수도회 선교활동의 전통을 부활시킬 선교수도원 모원을 독일에 세우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수족이 뻗어나가게 한다. ② 선교의 중심지는 수도원이 되어야 한다. ③ 수도 원의 인적 구성은 서원자, 수련자, 성소자 세 부류이고 이들의 양성은 수도원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④ 평수사들을 선교사로 양성해야 한다. ⑤ 성직자와 평수사와의 관계는 형제적 연대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⑥ 선교지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수녀 들이 협력해야 한다. ⑦ 이상의 7개 근본사상의 권위는 절대적임을 명시하고 있다. :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일곱가지 근본사상〉 ,《코이노니아》9집, 한국베네딕도수도회 연합,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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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라는 작은 책자로 비공개 출판되었다. 《라이헨바하 선교요강》

2 . 초 대 총 원 장 노르베르트 베 버 신 부 의 선교사상 1902년 12월 18일 초대 총원장으로 선출된 베버 신부는 1905년에 동 아프리카에서 그의 첫 번째 관할구 공식방문 중에, 마지마지(Maji-Maji) 폭동으로 내륙에 있던 다섯 개의 선교기지가 파괴되고 슈피스11) 주교 외 수사 2명과 수녀 2명이 희생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한 쓰라린 체험을 통해서 베버 총원장의 마음속에는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선교사들과의 연 대감이, 평화롭던 시기에 있을 수 있는 것보다 더욱 깊게 일어났다.12) 그 는 이 모든 체험들과 숙고를 2년 뒤에《온 세상에 나아가》13)란 제목의 소 책자로 출판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독일-동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초대 총 원장의 개혁 프로그램이었다. 1909년 베네딕도회가 아시아의 새로운 선교지 한국에 진출하자 총원 장 베버는 2년 후인 1911년 2월 22일에서 6월 24일까지 처음으로 한국 을 시찰했다. 한국내의 베네딕도회 분원들을 돌아보는 한편, 서울, 경기 도, 충청도, 평안도 일대에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지역을 방문하고 첫 여행 후 1915년《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제목의 여행기를 한국에 ‐‐‐‐‐‐‐‐‐‐‐‐‐‐‐‐‐‐‐‐‐‐‐‐‐‐‐‐

10) 각주 6참조 11) Cassian Spieß, (1866-1905) 동아프리카 남 잔지바르의 초대감목을 지냈다. 12) Son Chi-Hun, “Studien zur benediktinishen Missionsmethode von 1909 bis 1949 in Korea und in der Mandschurei”, Lizentiatarbeit, Universität München, 1996 : 선지 훈,〈1909년에서 1949년까지 한국과 만주에서 있었던 베네딕도회원들의 선교방법 에 관한 연구〉 , 15쪽. 13) Norbert Weber, Euntes in mundum universum, St. Ottilien , 1907. 14) Norbert Weber, Im Lande der Morgenstille, Reise- Erinnerungen an Korea (Mu nchen, 1915) 2판, St. Ottilien,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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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직접 찍은 300장이 넘는 사진을 담아 출판했다.14) 두 번째 한국 방문 은 1925년 5월 14일에서 9월 27일까지였는데, 베네딕도회 선교지역인 원산교구와 연길교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영화를 찍는데 몰두하였다. 여행 동안 찍은 필름은 35mm의 무성영화로 제작되었다.15) 영화는 특히 한국의 수공업활동(짚신 만들기, 베틀 짜기, 옹기제작)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하였고, 많은 비용을 들여 결혼식, 장례식 같은 큰 행사를 연출하기 도 했다.16) 또한 금강산 여행 소회를 담은《조선의 금강산에서》라는 책도 출판했다.17) 동아프리카와 한국 선교지를 시찰한 후 출판한 그의 일련의 저술들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베네딕도회적 선교의 기본 바탕 위에 선교지 현지 인의 경제적 자립과 종교의 사회적 기여를 강조하는 그의 선교사상과 지 침이 잘 드러난다. 그의 선교지침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자립의 힘을 길러내는 사회 개발 프로그램으로 연결된다.18) 그것은 외부에서 노 동자들에게 위압적으로 명령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주민들 안으 ‐‐‐‐‐‐‐‐‐‐‐‐‐‐‐‐‐‐‐‐‐‐‐‐‐‐‐‐

15) 이유재, 위의 글, 6쪽 각주 11 재인용 : Im Lande der Morgenstille , München 1927 제작. Eine koreanische Hochzeit, München 1927 제작. 영화는 1927년 6월 3일 뮌헨 인류학박물관에서 처음 상영되었고 언론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Bayerische Staatszeitung, 1927. 6. 4) 이 영화들은 그 후 1927년 여러 독일 대도시 극장에서도 상영되었고 오스트리아 짤즈부르그에서도 상영되었으며 1928년에서 1930년 사이 남부 독일 약 100개의 촌락에서 상영되었다.(Chronik Erzabtei, Jan. bis Mai 1927, 94-96쪽.; Chronik Erzabtei, Juli 1929 bis Jan. 1930). 한국에서는 1986년 왜관 수도 원에서 제작, 보급하였다. ,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507쪽 :《원산 16)《원산교구 연대기-내평본당 편, 1925년》 교구 연대기》 는 오틸틸리엔 본부에 올린 선교사들의 연혁 보고문 (Jahresbericht der Benediktiner-Mission von St. Ottilien, Korea) 중에서 한국에 관련한 부분만을 편역 하였다. 서울과 덕원수도원 연대기, 원산교구의 원산 성당 등 12개 성당의 연대기 로 구성되어 있으며 1923년부터 1938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17) In den Diamantenbergen Koreas, St. Ottilien, 1927 : 김영자(譯),《수도사와 금강산》 18) N. Weber, 위의 책, 1907, p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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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들어가 서로 협력하여 삶을 개선하고 확장해나가기 위한 공감과 유대 를 가지고 수도원이 그 중심 역할을 하는 데에 방점을 둔다. 그러기 위해 서는 수도원이 수도가정으로서의 모범과 협력을 입증할 수 있는 베네딕 도회적인 수도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제였다. 수도원과 수도생활의 활력으로부터 선교사는 선교활동에 필요한 힘을 얻는 것이고, 선교지에 대한 진정한 적응과 이해 역시 그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선 교사로서 외부 활동에 편중한 나머지 수도승으로서의 근본적인 자세인 내적 정주가 손상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한국 선교에 대해 그는 우선 선교정책과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지금까지 선교는 직접적인 사목활동에만 집중했지만, 이제는 외부 적인 문화성과로도 식민지배자들에게 인상을 남겨야 하고, 그로인해 천 주교가 명성과 영향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주교로의 개종은 현세 삶에서도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가난을 벗어 나야 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강하고 부유하고 안정된 유럽을 대표함으로써 동양의 문명민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므 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조선인들에게 긍정적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근 대적 상징성이었고 공공영역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들이었다. 베버는 이 를 위해서 무엇보다 학교, 병원, 사회복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는 조선 개신교가 훨씬 짧은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신자 수에서 천주교 를 추월한 것은 바로 풍부한 선교자금과 간접적 선교방법에 있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천주교회도 새로운 사회적 운동을 야기 시킬 수 있고, 상공 업 활동에서 하나의 전환을 초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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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했다. 한국에서 고교 졸업생들의 취업이 어려운 현실에서 교육의 실효 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전국에 있는 일자리를 다 일본인이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고등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천주교회가 공적 인 삶에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 교육은 꼭 필요했으며, 보통학교와 사범 학교는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교회가 신앙과 종교생활을 위한 사적 영역 으로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는 바로 새로운 제도 와 단체와 사업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존재해야 하며, 사회적 행위자로서 의미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19) 식민주의와 관련하여 베버가 무엇보다 날카롭게 관찰한 것은 식민주의 의 폭력성이었다. 일본은 조선 민중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도움으 로 동양의 지도적 세력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20) 많은 서양 여행자나 선교사들에게 일본의 한국식민지 지배는 소위 문명화론으로 정당화되었 다. 그러나 베버는 오히려 세속적 이익과 경제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일본 의 물질주의가 한국의 존귀한 이상적 정신을 말살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 가 컸다.21) 베버는 일본의 신문화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은 서양의 문화를 겉으로는 매우 유사하게 흉내 내는 데 성공했지만 내용을 채우는 데는 실패하였다고 보았다. 즉 물질주의적 정신이 지배적 이어��� 종교성을 억압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는 이상적 추구와 고 등문화로의 발전이 막혀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베버는 한국 의 고귀한 전통과의 단절을 요구하는 물질주의적 일본 식민지배 보다는 한국 전통의 긍정적 요소를 담아낼 수 있는 기독교화를 한국의 이상적 발 ‐‐‐‐‐‐‐‐‐‐‐‐‐‐‐‐‐‐‐‐‐‐‐‐‐‐‐‐

19) 이유재, 위의 글, 22-23쪽. 20) 위의 글, 31쪽.

21) 위의 글,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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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모습으로 여겼다.22) 그러나 베버와 베네딕도회원들의 의식 저변에 깔린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도 부정할 수는 없다. 베버는《조선의 금강산에서》라는 그의 저술에 서 일본인 화가와 조선 화가의 그림을 비교하며 유럽적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여부와 원근법과 구도의 관점에서 그림을 평가한다.23) 또한 원산교구 내의 12개 성당은 모두 서양식 건물이었고, 실내장식도 거 의 모두 독일에서 수입했다.24) 현지인이 가지고 있는 서양인에 대한 조작 된 기대가 어긋났을 때25) 현지인으로부터 호감을 잃고 냉대를 받는다는 것은 쓴 경험이었다. 베네딕도회원들은 기독교화가 곧 서양화는 아니라 고 말했지만26) 한국 사람들이 서양 선교사에게 바라는 서양 근대성의 기 대를 채움으로써 유럽의 우월함을 과시하려 했다. 더불어 조선의 옛 풍습 이 사라지는 대신 유럽식 복장과 머리모양을 위해 돈을 쓰고 서양달력을 쓰는 가정이 늘어나며 극장에 가고 자전거 경주와 올림픽 경기에 참여하 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동양이 서구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 꼈다. 그러나 적어도 천주교 선교사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유럽주의를 촉 진시키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기술하면서 유럽주의에 대한 성찰을 표명하 고 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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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위의 글, 29쪽. 23) N. Weber,《수도사와 금강산》 , 115쪽-116쪽 25) 위의 글, 24쪽. 24) 이유재, 위의 글, 23쪽. 26) 토마스 옴(Thomas Ohm), 〈조선의 교회 건축〉Kirchliche Baukunst in Korea, Werkblätter, April/Mai 1938. p. 27-33, 32 : 이유재 위의 글, 23쪽, 각주 41에서 재 인용. , 399쪽. 27)《원산교구 연대기-원산본당 1925년 1월-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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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한 국 진 출 과 수 도 회 의 발 전 1. 뮈 텔 주교의 초청과 한 국 진 출 베네딕도회는 1909년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요청에 따 라 서울에 진출했다. 교육과 복지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 우세를 점하는 개신교의 공세와 가장 긴급한 과제인 사범학교와 직업학교 문제 를 자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28) 뮈텔 주교는 유럽 각국을 돌며 수도회 를 방문하고 여러 수도회에 편지로 한국 진출의사를 타진했지만 모두 거 절당했다.29) 뮈텔 주교는 로마 포교성성으로부터 독일 쌍트 오틸리엔 베 네딕도 수도회와 접촉해보도록 하는 권유를 받아 마침내 1908년 9월 7 일 오틸리엔에 편지를 띄우고 14일 직접 방문했다. 1908년 당시 쌍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속 사제는 총 50명이었는데 이 중 아프리카에 23명, 독일 각지에 파견된 18명을 제하면 9명의 사제가 있을 뿐이어서 한국 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일만한 입장이 못되었다. 그러 나 동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된 후 자연 한국 포교지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30) 1909년 2월 25일에 사우어31) 신부와 엔쇼프32) 신부가 한국의 서울로 ‐‐‐‐‐‐‐‐‐‐‐‐‐‐‐‐‐‐‐‐‐‐‐‐‐‐‐‐

28) 김진소,〈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방침과 민족의식〉 ,《교회사연구》11, 1996. 31쪽. 29) 明洞天主敎會 편, 위의 책, 1987. 1907년도 보고서, 55쪽. ,《교회와 역사》53호, 1980.1.25 : 렌너 신부의 The Five 30) 렌너,〈원산교구사(1)〉 Branch Candlestick 중에서 원산교구에 관련한 부분들만 발췌하여 번역한 것을《교 회와 역사》 에서 8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하 한글 번역 인용은 렌너로, 번역에 포 함되지 않은 독일어 부분은 Renner로 표기한다. 31) Bonifatius Sauer (1877-1950) 독일 풀다(Fulda) 출생, 1909년 서울로 파견된 첫 선 교사로 덕원수도원장을 역임하고 초대 원산교구장을 지냈다(왜관 베네딕도 수도 , 2007. 14쪽 참조, 이하 NE). 회,《NECROLOGIUM (사망자명부 1909-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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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로 구성된 지원대 를 1차로 파견하였다. 베네딕도회의 서울 수도원 설립은 순조롭게 진행되 어 1909년 12월 13일 자립 수도원(Prioratus Conventualis)으로 승격되 었고 사우어 신부가 초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 5월 15일에는 대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되어 설립된 지 4년 만에 오틸리엔 수족 내에 두 번째 대수도원에 올랐다. 동아프리카 포교지가 붕괴되면서 제기된 베 네딕도회의 선교활동과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모색이 한국 선교 에 대한 열정과 빠른 성장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 수도회와 수녀회의 발 전 1) 수도회 베네딕도회는 1909년 한국에 진출하여 서울의 동소문 근처 백동(栢洞) 언덕에 수도원을 세웠다. 대지 10헥타르에 수도원과 학교와 기숙사, 정원 과 농장, 갖가지 작업장을 갖추었다. 수도원은 건평 225㎡(25m 9m) 단 층이었으나 1911년 회원이 증가하자 3층 건물로 증축하였다. 한국 진출 의 본래 목적은 한국인의 고등교육이었으므로 기술학교와 사범학교를 세 워 교육사업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고등교육과 교원양성을 바 라지 않는 일제 식민 당국에 의해 사범학교는 개교 2년 만에 문을 닫고 기술학교는 1910년 개교하여 1923년까지 현상을 유지하며 총 465명의 학생들이 적을 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선교지의 상황을 매우 급격하게 변화시켜 놓았다. 베 네딕도회원들은 이제 자신의 선교 사목지를 할당받아 교구사목에 나서게 ‐‐‐‐‐‐‐‐‐‐‐‐‐‐‐‐‐‐‐‐‐‐‐‐‐‐‐‐

32) Dominikus Enshoff(1868-1939) 독일 페를 출생, 한국에 첫 파견된 선발대 선교사였 으나 즉시 귀환했다.(NE 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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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본래 교육사업과 수도생활을 통한 간접선교가 목적이었던 베네 딕도회에 교구사목이 위탁된다는 것은 하나의 큰 변혁이었다.33) 1920년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원산교구를 인계 받았다. 다음해인 1921년 3월 19 일 북만주 교구로부터 북간도와 의란(依갿) 지역을 넘겨받아 매우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서울 수도원의 밭 일부를 인접해있던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에 7만 5천 엔에 양도하고 원산교구의 성당 설비와 해성 학교와 수녀원, 사제관 건축 비용을 충당했다. 마침내 1927년 11월 27 일, 수도원을 서울에서 덕원으로 이전하였다. 20여 년간 선교의 터를 닦 은 서울에서의 철수는 베네딕도회원들에게 큰 손실이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을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알력이 반영된 것이었고 독일은 패전국 이었다.34) 서울수도원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서울교구에 35만원에 인계 되었다. 수도원 이전 소식은 영문판〈서울 프레스(Seoul Press)〉에 긴 내용의 기사로 실렸다. 여러 해 동안 서울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벌였던 선교 및 봉사 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전에 대해 유감을 표현하는 기사 였다.35) 덕원에서 수도원 소유의 땅은 대략 임야 100헥타르, 밭 15헥타르, 논 7헥타르였다.(1949년 현재) 신학교 소유의 땅은 논 4헥타르, 밭 3헥타 르였고 인근의 10개 마을에 전답 440헥타르를 임대하고 있었다. 덕원수 ‐‐‐‐‐‐‐‐‐‐‐‐‐‐‐‐‐‐‐‐‐‐‐‐‐‐‐‐

33) 왜관 베네딕도 수도회, 위의 책, 1985. 160쪽. ,《교회와 34) 베네딕도회의 서울 철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 렌너 〈원산교구사(3)〉 역사》55호, 1980 ; N. Weber,〈베네딕도회의 서울 철수 문제-노르베르트원장의 서 , 한〉 ,《교회와 역사》65, 1981 ; 최석우,〈파리외방전교회와 베네딕도회와의 갈등〉 《경향잡지》 , 1988. 35) 빌리발트 쿠겔만, 위의 글, 51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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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의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총 높이 57m 건물로 1600여명을 수 용할 수 있었다.36) 1940년에는 함흥교구가 탄생하면서 분리되고 원산은 덕원과 함께 덕원면속구에 소속되었다.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는 처음부터 수도원 건립을 중점에 둔 것이었 다. 수도원 건립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모든 선교사들의 기도와 일과 생활의 중심점을 구축하는 것이다. 수도원은 수도자의 근원적인 힘의 원 천이 되는 매일의 기도와 전례를 장엄하게 구현하는 본부요, 회헌에 의해 의무화된 매년 최소한 6일 이상의 연피정(年避靜)과 매월 만 하루의 월피 정이 베풀어지는 영적 기지이며, 환자에게는 요양과 휴식을 주는 곳으로 선교활동에 필요한 영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충전하는 기지였다.37) 또한 모국으로부터 새 선교사들이 오면 한국어 교육과 선교학 강의가 펼쳐지 는 선교사 교육의 장이었으며, 기도와 노동의 조화 속에서 수도자의 정체 성을 다져가는 평생 수련의 학교요 가정이었다. 1909년 첫 선교사 사우어 신부를 비롯하여 1949년까지 파견된 베네딕 도회 선교사는 신부 56명, 수사 33명 총 89명이다. 북간도와 의란 지역 에는 인계 당시 14명의 신부와 6명의 수사를 파견하였다.38) 1954년 독 일 송환까지 사망자는 총 49명으로 평균 연령은 49세였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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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렌너〈원산교구사(4)〉 《교회와 , 역사》56호, 1980.4.25. , 6쪽 ;《 쌍트 오틸리엔 베 37) 참조 :《라이헨바하 선교요강 Reichenbach Prospectus》 네딕도회 회헌 Konstitutionen der Benediktinerkongregation von St. Ottilien》, St. Ottilien. 38) 왜관 베네딕도 수도회, 위의 책, 164쪽. , 39) 참조 : 성 베네딕도 왜관 대수도원,《NECROLOGIUM (사망자명부 1909-2007)》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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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녀회 베네딕도 수녀회의 한국 진출은 원산교구장 사우어 주교의‘현지인 젊 은 여성 교육’을 위한 초청으로 1925년 11월 21일 히르쉬40) 수녀 등 4 명의 수녀가 원산에 도착하며 이루어졌다.41) 베네딕도회가 제1차 세계대 전 패전 이후 새로운 사목지를 할당받아 원산교구를 맡게 되자 수녀들을 초청했던 것이다. 1921년 수녀들은 사우어 주교의 방문을 받고 최초의 초청 의사를 접했 다. 정식 계약은 1922년 체결되었다. 최초 초청 의사를 접한 지 4년 후인 1925년 4명의 수녀들을 파견하였다. 수녀들의 파견은 우선 무엇보다도 창설자의 근본사상에 입각하여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로서 본연의 임무이 다. 또한 쌍트 오틸리엔 수족의 수녀회로서 설립 초창기부터 수사들과의 선교협력은 당연한 것이었다.42) 첫 선교 수녀들이 한국 땅에 발을 디딘지 한 달 만인 12월말, 한국 지원 자 2명이 입회했다. 1927년 6월 6일 새 수녀원을 축성했다. 수녀원은 지 하 1층 지상 3층의 벽돌 건물이었다. 원산 수녀원은 정식 수녀원으로 승 격되어, 초대 수녀원장으로 히르쉬 수녀가 임명되었다. 수련원 또한 승인 되어, 모두 16명의 한국인 지원자가 새 수녀원에서 지원기를 시작했다. 1928년 5월 1일에 첫 청원자 9명을 배출하였다. 1930년 5월 24일에는 6명의 새 수련자에 대한 첫 착복식이 있었다. 이들 수련자는 1931년 5월 ‐‐‐‐‐‐‐‐‐‐‐‐‐‐‐‐‐‐‐‐‐‐‐‐‐‐‐‐

40) Mathilde Hirsch (1882-1952), 1925년 한국에 파견된 첫 선교 수녀이며 원산 수녀원 의 초대원장과 제4대 수녀회 총장을 역임했다.(BD 339쪽.) 41) 이정순,《원산수녀원사》 , 분도, 1987. 82쪽. 42) 1887년 동아프리카의 첫 선교지 푸구(Pugu)로 1명의 사제와 8명의 수사들과 함께 4명의 수녀들이 파견되었고, 푸구 선교지의 파괴 이후 재파견과 1905년 폭동 이후 에도 수녀들은 함께 재파견되었다. 참조 : 이정순,《원산수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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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첫 서원을 발했다. 사우어 주교의 주례로, 한국에서 베네딕도회의 첫 수녀가 탄생한 것이다. 원산수녀원의 첫 종신서원은 1934년 5월 26 일에 있었다. 한국인 5명 포함 7명의 수녀가 종신서원을 발했다. 1930년 5월 현재까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입회자 총 수는 37명이고 그중 퇴 회자는 15명이다.43) 수녀들의 사도직은 당초 사우어 주교의 요청에 따라 본당 활동과 특히 부인이나 여학생들의 교리교육과 입교에 큰 성과를 보였다. 처음 몇 년은 원산성당을 중심으로 전교활동을 하다가 점차 인근의 공소 전교, 그리고 원산 외의 지역에 분원을 신설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수녀들의 분 원은 신고산(1933년), 회령(1936년), 청진(1940년), 흥남(1948년) 등 이었다. 1925년부터 1949년까지의 사망자는 독일인 수녀 5명, 한국인 수녀 2 명으로 폐결핵이 주 사망원인(5명)이었다. 사망 당시 평균연령은 34세였 다.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가 한국을 떠난 수녀는 파견된 지 1년 만에 질병 치료차 독일로 돌아간 2명 수녀 외에, 총장에 피선되어 모원으로 떠 난 히르쉬 수녀와, 원장 임기를 마치고 본래 소임지 필리핀으로 돌아간 수녀 등 모두 8명이다. 1925년부터 1949년까지 독일 모원에서 파견된 수녀는 총 11차 파견에 31명(수련자 4명, 청원자 2명 포함)이고 이중 사 망 5명, 독일 귀환 4명, 총장 피선 1명, 본래 소임지 필리핀으로 돌아간 1명 외에 20명은 모두 1949년 5월 14일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피랍되었다. 해산 당시 한국인 수녀는 25명, 일본인 수녀는 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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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참조 : 이정순,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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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인 사제와 수도자 양 성 1) 신학교 교육과 한국인 사제 · 수사의 양성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초기 서울 시대에는 관할 교구가 없었으므 로 직접 사목을 담당할 사제 양성의 필요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 그 러나 원산교구가 설정되자 교구 내 사목을 담당할 한국인 사제의 양성은 시급하고도 현실적인 과제가 되었다. 베네딕도회는 서울 백동 수도원에 고유의 신학교를 설립, 1921년 11월 1일 문을 열었다. 서울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하게 되자 신학교도 1927 년 12월 1일 성 빌리브로르트(St. Willibrord) 신학교로 덕원에서 새롭게 개교하였다. 이후 1935년 2월 10일 함흥도청으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아 ���해 5월 14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44) 1936년 성삼주일에 연길교구 출신 김충무(갏忠武)와 한윤승(韓允勝) 이 서품되었다. 1921년 11월 1일 서울에 소신학교(少神學校)로 설립된 지 14년 6개월 만에 최초의 덕원신학교(德原神學校) 사제가 탄생한 것이 다. 이어 1938년 3월 21일에는 원산교구 소속 임화길(굟和吉과) 김보용 (갏寶容)이 사제품을 받고, 4월 최병권(崔炳權)이 서품을 받음으로써 베 네딕도회는 자기 교구 내에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여 선교에 동참시키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한국에서 현지인 수사 및 신학생들과 함께 성장하고 또래집단의 동료의 식을 북돋우기 위해 독일 본국의 신학생 7명을 한국에 조기 파견하여 양 성시킨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들은 신학생 신분으로 장차 사제 ‐‐‐‐‐‐‐‐‐‐‐‐‐‐‐‐‐‐‐‐‐‐‐‐‐‐‐‐

44) 베네딕도회의 신학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 장정란,〈외국 선교회의 한국 선 교 - 독일 베네딕도회의 원산교구시대(1920-1949)〉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중)》 , 가톨릭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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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품 후 소임하게 될 원산교구와 연길교구의 임지를 부여받고 한국으로 파견되었다.45) 수녀들 역시, 수녀원에 입회한 지 1년 내외의 수련자와 청 원자를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인 지원자들과 함께 성장하고 교감을 나누 도록 했다.46) 1949년 5월 11일, 수도원과 신학교가 공산정권에 의해 폐쇄되기까지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서품된 교구 신부와 베네딕도회원의 수는 40명 에 달했다. 1942년부터 1946년 5월까지 덕원신학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통합신학교 역할을 수행했다. 1942년 2월 16일자로 정식인가가 없었던 용산신학교가 강제 폐쇄되어 용산의 신학생들이 덕원신학교로 전학했고, 1943년에는 대구 유스티노신학교가 총독부에 의해 폐교 당하여 덕원으 로 전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3년 당시에는 본래 예정인원 60명을 초과하여 학생 총 수 100여명을 헤아리며, 해방 후 1946년 서울 과 대구신학생들이 돌아갈 때 까지 덕원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교육기간은 14년이었다. 2년은 예비과 과정으로 보통학교 교과를 보충 하고 다음 중등과 6년 동안 라틴어, 교리, 기하, 대수, 한국어, 일본어, 역 사, 지리, 화학, 물리, 독일어, 체조, 미술, 음악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이어 대신학교 과정으로 철학 2년, 신학 4년의 교육이 이어졌다.47) 덕원신학교는 탁월한 학덕의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다. 베네딕도회는 자 신들이 배출할 한국인 성직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교수가 필수적이며 특히 철학과 신학교수는 반드시 박사학위 소 ‐‐‐‐‐‐‐‐‐‐‐‐‐‐‐‐‐‐‐‐‐‐‐‐‐‐‐‐

45)《원산교구 연대기-덕원수도원 1937년 7월-1938년 7월》 , 356쪽. 46) 이정순, 위의 책, 155쪽 ; 겔트루드 링크(Gertrud Link),《하느님이 함께 하신 나의 생애》 , 분도, 2007, 147쪽. 47) 선지훈, 위의 글,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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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유럽보다도 교육의 가치를 훨씬 중요 하게 여기고 교육열도 더 높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48) 그 결과 덕원신 학교는 1921년 신학교 설립 이후 일제말기까지 한국에서 가장 많은 박사 학위 소지자 교원을 확보한 신학교였다.49) 신학교 교육을 통해 길러내는 성직수사가 아닌 평수사 후진 양성은 기 초 교육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숭공학교(崇工學校) 졸업자들만 후진으로 받아들였다. 1914년, 첫 지원자를 받아들였다. 1919년 성령강림절 때에 첫 번째로 3명의 한국인 형제들이 착복식을 갖게 되었다. 청원자들의 수 련기간은 만 3년이었다. 1920년 원산교구 사목에 임하며, 후에 서울에서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기면서 기술학교 졸업자 출신의 지원자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한국인 수사는 증가하여 13명에 이르렀다.50)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덕원수도원(1949)과 연길수도원(1946)이 해체 될 때에 현지인 후진들의 전체 수는 4명의 신부와 아직 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성직희망수사 8명이 있었고, 12명의 수사와 4명의 수련자가 있었다.

2) 수녀회의 수련소 교육과 수녀 양성 수녀회의 교육 기간은 지원기 1년, 청원기 2년, 수련기 1년으로 짜여졌 다. 수업은 집법, 규칙, 성가, 풍금, 라틴어, 교리, 국어, 독일어, 서원, 교 ‐‐‐‐‐‐‐‐‐‐‐‐‐‐‐‐‐‐‐‐‐‐‐‐‐‐‐‐

48)《원산교구 연대기-덕원수도원 1930년 7월-12월》 , 168쪽. 49)《함경도 천주교회사》 , 306쪽 ; 한국에 파견된 베네딕도회원 중 박사학위 소지자는 다음과 같다. Arnulf Schleicher, Honorat Millemann, Lucius Roth, Odilo Ramroth(이상 Dr. Theol), Chrysostomus Schmid, Fridolin Zimmerman, Olav Graf, 〈천주교회보〉 , 1951.1.14 ; 1951. Rupert Klingseis, Theodor Breher(이상 Dr. Phil), 8.1 참조. ,《쌍트 오 50) 라우렌쯔 킬거(Laurenz Kilger),〈우리의 선교활동에 있어서 방인 후진〉 틸리엔 선교지》 , 46호, 1941. 204쪽 : 선지훈 각주 211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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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성경, 수덕, 베버 총원장의 저술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한 복 만들기, 양재, 재단 등을 배웠고 책 메는 법과 피아노, 바이올린 등의 악기 다루는 법도 배웠다. 독일어 수업과 공동 휴게 시간을 이용한 독일 어 대화를 통해 의사소통이 향상되도록 노력했다.51) 1927년에는 슈미트 수녀52)가 독일인 선교사들을 위하여 조선어문법책을 만들어 100권을 필 경하여 그것으로 조선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슈츠 수녀53)도 서투른 한 국말로는 수업에 어려움이 있어 직접《재단법》책을 만들어 교재로 썼다. 1930년대 덕원수도원에서 한글 번역 책들이 출간되자 수업은 한결 풍성 해졌다. 기도는 라틴어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바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아침 기도와 낮기도는 라틴어로 암송하고, 저녁기도는 노래로 바쳤다. 히르쉬 수녀는 원장 겸 수련장으로서, 영성지도에 힘썼다. 덕원수도원으로부터 영성지도 신부가 와서 고해성사와 피정 지도를 했다. 일자리는 주방, 바 느질방, 빨래방, 집안일, 교리교사, 학교교사, 예비자방문, 공소사목과 매 일의 밭일 50분씩이 있었다.54) 원장 수녀는 독일의 은인에게 기부를 청하는 편지를 쓰는 한편, 독일과 미국의 잡지에 한국 선교에 대한 기고를 했다. 여기서 많은 희사금이 충 당되었다. 한국 은인과 외국 은인들의 희사금으로 수녀들은 총 117,322 평의 땅과 묘지 터 등을 매입했다.55) 수녀들에게는 해성학교 교사 월급 ‐‐‐‐‐‐‐‐‐‐‐‐‐‐‐‐‐‐‐‐‐‐‐‐‐‐‐‐

51) 이정순, 위의 책, 104쪽. 52) Chrysostoma Schmidt (1883-1962), 해성학교에서 음악을 담당했고 원산성당의 빈 민학교를 설립했다. (이정순, 위의 책 참조) 53) Eva Schütz (1899-1950) 원산 수녀원에서 양재를 담당했다. 24년간 한국에서 선교 하다가 강제수용소에서 선종했다.(이정순, 위의 책, 495-496쪽 참조) 55) 위의 책, 108-190쪽. 54) 이정순, 위의 책,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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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는 특정한 수입이 없었으므로 논을 사서 소작을 주어 생계를 해결하 고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비로 투자했다. 당시 소작 형태는 주인이 종자 와 비료를 대고 수확의 반을 가졌다. 수녀들은 전문인력의 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해성학교 교사와 유치 원 교사, 의료복지사업을 위한 간호인력 등을 위해 총 19명(한국인 17, 일본1, 독일 1)을 양성했다.56) 이들은 사범 교사자격 9명, 유치원 교사 6명, 간호사 2명, 의사 2명 등이었고 이중 퇴회자는 2명이었다.

4. 한국에 대 한 이해의 발 전 동아시아 선교지에 대한 오틸리엔의 관심과 지원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동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선교지에서의 직접적인 친화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수도원의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에카르트 신부57)는 신부들과 수사들에 게 극동의 언어와 문화에 관한 강의를 했다.58) 연피정 기간의 강의 중에 는 선교지 국가의 민족성과 관계된 전반적인 연구 역시 프로그램에 들어 가 있었다. 찜머만 신부59)는‘한국 민족의 유래에 대한 문제’와‘그리스 도 시대까지의 한국 민족의 역사’에 관하여 강연했다.60) 민속학자였던 찜머만 신부는 한국의 유적 발굴지 등을 돌아보며 1000건 이상의 민속학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61) ‐‐‐‐‐‐‐‐‐‐‐‐‐‐‐‐‐‐‐‐‐‐‐‐‐‐‐‐

56) 위의 책, 108쪽. 57) Andreas Eckhardt (1884-1974) 숭신학교 교장, 원산성당 초대 주임신부, 덕원신학 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조효임, 위의 글 참조) , 82쪽 58)《원산교구 연대기-서울수도원 1925년 5월-12월》 59) Fridolin Zimmerman (1900-1946) 1931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어 덕원신학교 교수와 회령성당 주임 신부를 지냈다. , 271쪽. 60)《원산교구 연대기-덕원수도원 1935년 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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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이해하고 체득한 지식은 외국에서 한국을 알리는 계기로도 작용 했다. 에카르트 신부는 일본에서‘동아시아의 박물학과 민속학을 연구하 는 독일협회’와 교토 제국대학에서 초청강연으로‘조선의 문화와 언어’ 주제 강의를 했다.62) 1928년 3월 23일에는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회 (Royal Asiatic Society) 초청으로 조선고대음악에 관한 슬라이드 강연 을 했고 이는 책으로 발간될 계획이었다. 에카르트 신부는 1926년 5월에 개교한 경성제국대학의 희랍어 초빙교수를 역임했고 뒷날 독일 뮌헨대학 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저술로는 한국학과 관련한 백삼십여 편의 논문 과《조선어 문법》63),《조선미술사》64),《조선의 동화와 야담》65) 등 23권 의 책이 있다.66) 한편, 선교사들은 베버 총원장의 선교지침에서도 강조하듯이 우선 한국 에 도착하면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였고 한국 이 ‐‐‐‐‐‐‐‐‐‐‐‐‐‐‐‐‐‐‐‐‐‐‐‐‐‐‐‐

61)《원산교구 연대기-원산본당 1933년-1936년》 , 482쪽 : 1946년 6월 26일 향년 46세 나이로 북한 계림에서 타계하자 그의 유물들은 평양의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원 , 88쪽. 산수녀원연혁 미발간타자본 1946년》 , 97쪽. 62)《원산교구 연대기-서울수도원 1926년 후반기》 63) 韓獨 사전을 비롯하여 한국어 관련 어학 책은 총 9권을 출판했다 ;《조선어문전》 Choson-a mundschon, Koreanische Grammatik, Seoul, 1925. etc.,(조효임, 위의 글 참조) 《에카르트의 조선미 64) 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 Leipzig, 1929 : 권영필(譯) 술사》 , 열화당, 2003. 65) Koreanische Märchen und Erzählungen, St. Ottilien, 1928. 66) 대표적인 논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언어와 글 그리고 인쇄기술의 발명〉 “Koreas Sprache und Schrift und Erfindung der Buchdruckerkunst”, Geist des Ostens, , “Der Konfuzianismus in Korea”, Hist. Polit. Blätter, 1914 ; 1924 ;〈한국의 유교〉 ; 한국, 그 역사와 문화》Korea, 〈한국의 시〉“Koreanische Poesie”, Der Gral, 1922 《 ; 한국의 음악, 가곡, 무용》Musik, Lied, Tanz Freudenstadt : Eurobuch-Verl.1968 《 in Korea , Bonn : Bouvier, 1968 ;《한국 문학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Literatur, Stuttgart, Kohlhammer, 1968 (조효임 , 위의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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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도 지었다.67) 이름은 발음이 유사한 것을 따르거나 이름 뜻에 부합하는 한자말을 골랐다. 그리하여 길 신부, 경 신부, 애덕 수녀, 김 수녀 등의 한 국식 성을 지어 선교지 신자들에게 친숙한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부록의 <표1>, <표3>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독일 이름의 발음과 유사한 한국 성 (姓)을 붙이고, 주의 깊게 고른 한국식 이름들에서 선교사들이 선호한 한 국말들이 흥미롭게 드러난다. 예컨대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옥락 안(玉갪安), 빌리발트 쿠겔만 신부68)는 공락도(孔갪道), 갈리스도 히머 신부69)는 임갈충(任竭忠), 엘리지오 콜러 신부70)는 경도범(景道範) 등이 었다. 남자 선교사들은 한국말에서 덕(德), 도(道), 충(忠), 인(仁), 락 (갪), 명(明)과 같은 낱말들을 선호하였고 수녀들은 순(順), 애(愛),정 (貞) 등의 낱말을 선호하였다. 덕원수도원의 덕원(德原)도 덕의 근원이라 하여 크게 의미를 부여하며 기뻐하고 이름 그대로 덕의 근원이 되는 복음 지역이 되도록 각오를 새롭게 하기도 했다.71) 수녀들의 한국사회에 대한 접속과 이해는 개방되고 드러난 사회성의 측 면보다는 내밀하고 사회 이면적인 측면이 강하다. 무속(巫俗)의 세계관에 둘러싸인 가족 풍토 안에서 천주교를 접하는 한국 여성들의 갈등과 아픔, 가난을 이기지 못해 목돈에 술집으로 팔려간 가련한 여인네들, 고부간의 갈등에서 놓여나기 위해 종교를 찾는 보통의 부녀자들을 접촉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어갔다.72) 수녀들은 툿징(Tutzing)의 모 ‐‐‐‐‐‐‐‐‐‐‐‐‐‐‐‐‐‐‐‐‐‐‐‐‐

67) 이유재, 위의 글, 24쪽. 68) Willibald Kugelmann (1894-1975) 덕원신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내평성당 등에서 사 목했다. (NE 37쪽 참조) 69) Callistus Hiemer (1884-1968) 원산수녀원 지도신부를 역임했다. (NE 30쪽 참조) 70) Eligius Kohler (1899-1963) 함흥성당 주임을 역임했다. (NE 28쪽 참조) , 88쪽. 71)《원산교구 연대기-덕원수도원 1927년 8월-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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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과 독일 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한국인 고유의 고귀함과 긍지에 대해 섬세한 필치로 소개하고 식민지 한국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73) 또 한 일제의 부당한 핍박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로 항변하지는 않았으나 억압 받는 한국인의 내면에 살아있는 가치에 대해서는 응원하며 반드시 오고야 말 광복의 순간까지 쓴 맛을 삼키는 한국인을 그려내고 있다.74)

Ⅳ. 선 교 활 동 1 . 교구사목 활 동 1911년 한국천주교회는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 분리되었다. 1920년 8월 5일, 함경남북도 지역이 서울에서 분리되어 원산교구로 설정됨과 동 시에 베네딕도회에 위임되어, 8월 25일자로 사우어 원장이 초대대목 즉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서울에서 북한 원산 대목구로 수도원을 옮김으로서 베네딕도회의 서울시대는 종료되고 덕원수도원 시대가 시작 되었다.75) 베네딕도회는 원산대목구가 설립된 이듬해 5월 1일 서울 대목구로부터 함경도 지역의 본당사목을 인수하였다.76)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인계 받 은 ���산대목구 기존의 성당은 원산, 내평 두 곳이었다. 베네딕도회가 원 산교구를 인수할 당시 함경도의 신자 수는 640명이었는데 수도원을 옮기 ‐‐‐‐‐‐‐‐‐‐‐‐‐‐‐‐‐‐‐‐‐‐‐‐‐

72)《원산수녀원연혁 미발간타자본 1946년》 , 49-50쪽, 87쪽. 73) 참조 : 이정순,《원산수녀원사》 74) G. 링크, 위의 책, 224쪽. 75) 원산교구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 장정란,〈외국 선교회의 한국 선교 - 독일 ,《한국 근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 교 베네딕도회의 원산교구 시대 (1920~1949)〉 회 (중)》 , 2005. 76) 明洞天主敎會 편,《서울敎區곐報》II, 1987. 1921년도 보고서,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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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전인 1922년에 벌써 869명이 영세하여 신자는 10,875명, 예비자 1,809명, 학교는77) 36개에 2,080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았다.78) 원산 교구에는 함흥, 영흥성당 등 10개 성당이 신설되었다. <표1> 원산 지역 본당별 교세표

교구사목은 무엇보다 본당을 중심으로 신앙 활동이 우선한다. 그 외에 도 빈민구제사업, 본당 취주악단과 청년 밴드 설립 및 음악회 개최, 천주 ‐‐‐‐‐‐‐‐‐‐‐‐‐‐‐‐‐‐‐‐‐‐‐‐‐

77) 1940년의 공식통계에서 인가학교가 12개, 미인가 학교가 15개인 것으로 보아 여기 서의 학교는 성당 내의 교리학교와 그에 준하는 교육기관으로 보인다. 베네딕도회 원들은 성당과 공소를 열면 교리학교나 야학교부터 설립했다. , 47쪽. 78)《원산교구 연대기-서울수도원 1923년 1월-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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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축제와 관련한 연극 공연 및 영화 상영,‘청소년연합회’(1928년),‘임 마꿀라타 여자청년회’(1930년),‘원산가톨릭청년회’(1931년),‘덕원가 톨릭소년회’(1933년),‘영흥가톨릭소년회’(1936년) 등의 청년 및 소년 활동, 해성학교를 중심으로 한 대운동회, 청소년대회 등을 열어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도 개방된 문화활동을 펼쳤다. 가난한 이웃과 병자를 방문하고 부녀자들을 돌보며 한 아기에게 대세 (代洗)를 붙이기 위해 4시간을 걸어서라도 찾아다닌 수녀들의 활동은 ‘이미 30년 전의 사건에 대한 불편한 기억’과 이전의‘현명치 못한 포교 방법’때문에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상황을 돌변시켰다.79) 또한 비신자에게도 개방적이고 활발한 교구사목은 교세가 척박한 지역이던 함 경도 일대를‘천주교 사업이 뿌리박힌 원산’80)으로 변모시켰다. 연대기 기록자는 1932년의《원산 일간지》의 통계를 인용하며 원산지역 내의 교세에서 개신교 4개 파를 다 합친 숫자보다 천주교 교우의 숫자가 더 높은 것을 보도하고 있다.81) 원산교구를 인계 받은 지 11년 만에, 교 세에 있어 30배의 열세를 보이던 천주교가 개신교를 따돌린 것이다. 연대 ‐‐‐‐‐‐‐‐‐‐‐‐‐‐‐‐‐‐‐‐‐‐‐‐‐

79)《원산교구 연대기-원산본당 1929년》 , 449쪽 ; 《원산교구 연대기-원산본당 1931 년》 , 466쪽 : 여기서 30년 전의 사건은 1895년에 발생한 원산 교안(敎案) 또는 '브 레 신부의 발포 사건'으로 불리는 교·민 사이의 충돌을 일컫는 듯하다. 원산성당 주임이었던 브레 신부가 성당 부지 내에서 꼴을 베고 있던 주민에게 공포를 발포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브레 신부는 추방되었고, 2년 후 재부임 하였으나 또 다시 성당 부지 내 우물을 둘러싼 주민과의 분쟁으로 소송을 겪었다. 원산 지근의 안변 교안에서도 선교사가 추방당하였다. 《 ( 함경도 천주교회사》 , 한국교회사연구소(편), 1995. 47-125쪽 참조) 교안은 1886년 한불조약 이후 외국인 선교사의 권한과 사회 적 입지가 커지면서 여러 가지 부조리가 발생하자 현지인들의 거부감이 증폭되어 폭발한 배외(排外)운동이다. 1887년부터 1908년까지 발생한 교안은 전국 142건이 며 함경도 지역은 총 11건이다. 천주교 교안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 박찬식,〈韓 , 강경포 지역의 天主敎 末 天主敎會의 성격과 敎案〉 ,《교회사연구》11. 2006 〈韓末 《사목》 , , 1974 . 會와 敎案〉 ,《한국학보》 , 1999 ; 이원순,〈敎案과 敎民條約〉 80)《朝鮮日報》1931.3.13. 사설 , 471쪽. 81)《원산교구 연대기-원산본당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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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저자는 지난 몇 년간의 개신교 쇠퇴와 천주교의 점진적 발전에 대해 계속 언급하고 있다. 즉 원산은 물론이고 한국 전 지역에서 개신교와 비 교해서 교육사업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 는 것은 천주교가‘개신교와 같이 현대 조선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제공하 는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참된) 종교적인 교회’라는 한 현지인의 다소 주관적인 말을 인용하면서‘천주교는 본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종 교’라는 자의식을 보이고 있다.82) 1940년에는 함흥교구가 탄생하였는데, 장차 조선인 사제에게 위임하 기로 된 자치교구라는 데서 의의가 크다. 이 때 원산은 덕원과 함께 덕원 면속구에 소속되게 되었다.

2 . 한 국 인 교육활동 1) 숭공(崇工) 기술학교 숭공(崇工)은‘기도하고 일하라’는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83) 1909년 처음 진출하자마자 준비작업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10년 3년제 과정으로 개교한 숭공학교는 목공, 정밀금속, 철공, 제차 부, 재단, 원예부 등의 과목을 두고 35명 내지 40명의 학생들을 꾸준히 유지했다. 4년 후인 1914년에는 25명 입학정원에 100여명 지원자가 몰 리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4명의 수사가 동원되고 자금 압박 이 심각해지자 학교는 운영조차 벅차게 되었다. 숭공학교는 만일 전쟁이 없었더라면 150명 내지 200명 정도의 학생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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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원산교구 연대기-원산본당 1931년》 , 472-474쪽. 83) 백 쁠라치도, 위의 글, 1984. 7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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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84) 직업학교는 이론과 실제의 수업을 두루 갖춘 현실성 있는 학교로 조직되었다. 매일 2시간의 학교 수업에 대비(對比)하여 8시간의 작업시 간을 작업장에서 보냈다. 학교수업은 주당 2시간은 종교, 3시간은 한문, 그리고 일본어 3시간, 산수와 작문 4시간, 그리고 제도 4시간으로 짜여졌다. 마지막 과정에는, 즉 마지막 학년에는 매주

<표2> 숭공학교의 연도별 학생 수 현황

( )은 助手-4년의 정규과정을 마친 학생들 가운데 원하는 사람을 2년간 유급으로 학교 에 남아있도록 한 제도, 표《함경도 천주교회사》, 1995, 197쪽.

2시간씩의 상업 부기 수업이 더 들어가 있었다. 등록금은 처음에는 수 업료와 기숙사비가 모두 무료였으나 그 후 5원을 받았고, 1919년부터는 매월 8원으로 인상되었다.85) 작업장에는 대체로 기계들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손작업이었고, 모든 학생들은 자기의 손일에 필요한 공구들을 직접 제작하는 일을 배워야 했다. 일제의 식민지 기술교육정책은 조선인을 미숙련 단순노동부분에 집약 시켜 조선인 노동력을 무제한 착취하는 데 있었다. 조선인 고급기술자는 ‐‐‐‐‐‐‐‐‐‐‐‐‐‐‐‐‐‐‐‐‐‐‐‐‐

84) 백 쁠라치도, 위의 글, 787쪽. 85) 1919년 민간소비지출은 1인당 연평균 74.1원이었다 : 주익종,〈일제시대 경제통계 2〉 《한국현대사연구》2, , 1998.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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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경성공고에서 조선인 졸업생들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 10-20명 수준으로 된다. 1910년 숭공학교 개교부터 1923년 폐교 당시 까지 한국 내의 전문학교 이상 조선인 공업 기술 인력은 1916년 개교한 경성공업전 문학교 출신의 68명이 전부였다. 1919년 제1차 조선교육령 하에서 공업 기술을 교육하는 학교로 경성공업전문학교 외에 간이실업학교 등 13개 교육기관이 있었고 조선인 기술 인력은 모두 377명이었다.86) 이러한 상 황 속에서 한해 입학 최고 50명까지 기록한 숭공학교의 교육은 그 기여도 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공업학교 입소에 제한을 두었던 조선인들의 입학 경쟁률이 평균 4:1 수 준이었다.87) 이는 유교사상의 기술 공업 천시 사상이 많이 변화되었고 기 술교육에 대한 욕구가 그만큼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건축, 응용화학, 토목 등 전문적인 공업기술교육은 1916년에 신설된 경성공업학교가 제도권 교 육의 효시이지만, 숭공학교와 같이 가구 목공, 기계, 철공 등 주변적 기능 에 속하는 공업학교는 1930년대에 비교적 활발하게 개설되어 1942년 통 계에는 제도권 내에 총 11개 공업계학교에 조선인 기술 인력은 4,483명 을 헤아린다.88) 전쟁시기에 접어드는 1930년대 말부터는 군수물자와 관 련된 본격 중화학 공업 교육기관과 공장이 한국 곳곳에 설치된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전문적인 고급 공업 기술 인력을 배출할 수 있는 장 치는 아니었으나 직업학교를 통하여 한국인 주민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또한 아프리카에서와 같은 심각한 빈곤을 막을 수 있도록 애를 썼다. 유 능한 직공의 양성은 견실한 신자 중산층 형성에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러 ‐‐‐‐‐‐‐‐‐‐‐‐‐‐‐‐‐‐‐‐‐‐‐‐‐

86) 김병관,〈日帝下 朝鮮人技術者의 形成過程과 存在樣態〉 , 충남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6. 88) 위의 글, 71쪽. 87) 위의 글,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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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숭공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패전국인 조국으로부터 어떤 재정적인 보증도 요구하지 못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920년 원산교 구를 맡게 되어 덕원으로 이전하면서 결국 숭공학교는 문을 닫고 이후 소 신학교로 운영되었다. 1919년에는 일제가 적국이라 하여 적산(敵産)으 로 독일 수도회 재산인 숭공학교를 몰수하려 했으나 임시방편으로 학교 운영권을 서울대교구로 이전하여 재산 몰수는 면했다. 현재 이 학교는 서 울 가톨릭신학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2) 숭신(崇信) 사범학교 1909년 첫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한 사우어 신부에게는 한국선교에 있 어서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되었다, 즉“이곳에 천주교인 교 사가 얼마나 부족한지, 그리고 천주교 교사양성기관의 조속한 설립이 얼 마나 필수적인 일인지”89) 알게 된 것이다. 심지어 천주교 학교 교사들도 대부분 이교도이거나 개신교 신자이고,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지적했는데 그나마 대개가 충분한 교육을 받 지 못했던 것 같다.90) 실제로 훌륭한 교육을 받고 또 숙련된 교사들이 천 주교 선교에는 부족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뮈텔 주교에게 있어서는“그 리스도교적 교사 양성이 가장 긴급한”91) 것이었다. 한국인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범학교인 숭신학교는 1911년 9월 16 일에 2년제로 개교했다. 강의는 초대 교장인 에카르트 신부와 니바우어 신부92), 한국인 교사 2명이 맡았다. 교과목은 종교, 윤리, 교육학, 한국 ‐‐‐‐‐‐‐‐‐‐‐‐‐‐‐‐‐‐‐‐‐‐‐‐‐

89) Korea Mission Field, 38호, 1909/10, 61쪽. 90) 상동. 91) 위의 책, 38호, 1909/10, 295쪽. 92) Casianus Niebauer(?) 비교적 한국말에 능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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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문법과 작문, 한문, 일본어, 세계사, 지리, 수학, 과학, 음악, 미술, 체 조 등이었다. 첫 입학생은 23명이었고 1913년 7월 1일 제 1회 졸업생은 17명이었 다. 그들은 교사가 되거나 교직이 아니어도 대부분 쉽게 취업하였다.93) 1912년에는 26명으로 늘었으나, 1913년에는 17명으로 줄었고, 1913년 에는 지원자가 4명뿐이어서 부득이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폐교의 근본 원인은 사범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있었다.94) 일제는 한국의 완전지배를 위해 종교와 교육 분리를 주장하며 선교사를 교육에서 배제하기 시작했고 기독교 선교 자체도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 규제가〈사립학교규칙〉(총독부령 제114호),〈개정사립학교규칙〉,〈포교 규칙〉으로 명문화 되었다. 사범학교 교육을 독점하려는 일제의〈사립학교 규칙〉발령으로 2년제 사범학교인〈숭신학교〉는 1회 졸업생 17명을 배출 하고 1913년 문을 닫아야 했다. 개정 보강된〈개정사립학교규칙〉은 기독 교 학교의 완전소멸을 목표로 한 정책95)으로, 사립학교를 식민지 체제 안 으로 완전히 편입 통제하는 방안이었다. 이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연이 어 발표된〈포교규칙〉은 일제의 강력한 종교규제 정책으로 교회설립의 절 차를 강화하고 상시 보고를 의무화 하는 등 교회 설립 자체를 어렵게 만 들었다. 위 규칙들의 발령 이후 천주교 신자증가율은 2,10%로, 자연증가 율에도 못 미치는 숫자를 나타냈다.96) 사우어 원장은 사범학교의 폐쇄 이유를 일제정부가 한국인 교사 양성을 원하지 않으며 한일합방 이후 점차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줄어들고 ‐‐‐‐‐‐‐‐‐‐‐‐‐‐‐‐‐‐‐‐‐‐‐‐‐

93) 장정란, 위의 글, 2003. 69쪽. 94) 빌리발트 쿠겔만, 위의 글, 497쪽. 96) 위의 책, 57-83쪽. 95) 윤선자,《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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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점, 교사들의 월급을 지불해야 할 프랑스 선교사들의 재정난, 그 리고 베네딕도 선교사들의 본당사목에 대한 원의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3) 해성학교(海星學校) 해성(海星)은 말 그대로 바다의 별로서 바른 인생길의 길잡이가 되는 성 모 마리아의 별칭을 그대로 따 온 이름이다. 넓은 바다에서 환히 비추어주 는 별처럼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지혜를 비추어줌으로써 장차 이 나라의 큰 별이 되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이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 당시 베네 딕도회가 세운 학교는 대개‘해성’ 이라는 학교명으로 통일했다.97) 1920년, 베네딕도회가 원산교구를 인계 받았을 때, 원산지역에는 기독 교 국민학교 2개, 남자중 1개, 여학교 2개, 여성 성서신학교 1개, 중국인 국민학교 1개, 영어교실 2개를 운영하고 있었다.98) 1921년까지 천주교 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원산지역에는 하나도 없었다. 1920년 교구 설립 당시, 원산을 포함한 전체 포교지를 통틀어 천주교는 4개 학교, 학생 수 는 220명이었다. 그러나 교구 인계 후 수도원을 덕원으로 옮기기도 전인 1923년에 이미 원산교구에는 36개 학교에 학생은 2,080명99)이었고 간 도지역에만 사립학교가 3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교구 인계 후 20년이 지난 1940년, 덕원면속구 독립 전의 원산교구 통계에 따르면 인가받은 학교 12개교, 남녀 학생 수 5,159명(신자 913명), 미인가 학교 15개교, 학생 수 1,425명(신자 723명), 교사는 남녀 83명이다.100) 연평균 1.15 개의 새로운 학교가 베네딕도회원들에 의해 태어난 셈이다. 말 그대로 ‐‐‐‐‐‐‐‐‐‐‐‐‐‐‐‐‐‐‐‐‐‐‐‐‐

97) 이정순, 위의 책, 126쪽. ,《교회와 역사》53호, 1980.1.25. 98) 렌너,〈원산교구사(1)〉 , 47쪽. 99)《원산교구 연대기-서울수도원 1923년 1월-7월》 100)《경향잡지》제928호, 194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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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이 있는 곳에 학교가 있고, 학교가 있는 곳에 성당이”101) 있었다. 해성학교는 빈민아동을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21년 5 월, 베네딕도회 초대 원산성당 주임으로 부임한 에카르트 신부가 빈곤층 아동을 위한 일종의 무료 야학 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원산교구 해성학교의 효시였다. 원산성당의 해성학교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처음 학생 수 7명으로 시작 한 야학강습소는 학생 수가 날로 증가하여 주간, 야간반으로 편성을 늘리 다가 설립 이듬해인 1922년 3월 7일, 4년제 남녀보통학교로 승격, 인가 받았다. 1925년 10월, 6년제로 연장하였다. 1928년에 15학급, 학생 689명, 교사 17명을 이루었다. 1928년에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44년 무렵 해성학교 총 학생수는 약 1천명에 달하였다. 해성학교의 교 사는 국가공인 후 교사자격증을 요하여 교사 충원에 매번 어려움을 겪었 다. 1926년부터는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교사로 활동했다. 수녀들은 총 9 명의 방인 지원자를 사범학교에 진학시켜 해성학교 교사로 양성하였다. 교과과목은 일반 공립보통학교와 동일하게 한국어, 산술, 일본어 등을 가 르쳤다. 종교수업은 방과 후 이루어졌다.102) 원산교구에서 베네딕도회의 활동으로 인한 교육 성장이 지역사회에 미 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19 년까지 한국인 취학률은 평균 4.2%이지만 1920년대 들어 취학률이 5.7%로 높아지고 1935년 23.8%, 1940년 41.5%로 급격한 성장을 보 인다. 1920년대 이후 인구 만 명당 사립각종학교 학생수를 보면 1921년 ‐‐‐‐‐‐‐‐‐‐‐‐‐‐‐‐‐‐‐‐‐‐‐‐‐

101)《가톨릭청년》41호, 쪽13, 1936. 102) 이정순, 위의 책, 124-126쪽, 166-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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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는 원산교구인 함남이 만 명당 10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 를 나타낸다. 이후로도 함남과 함북은 평균 수치를 두 배 이상 웃도는 높 은 취학률을 나타낸다.103) 보통학교 졸업 후 진로를 보면 1931년의 경 우, 가 졸업생 100명당 가사 종사가 75.5명이고 나머지는 상급학교에 진 학 17.1명, 관공서 1.1명, 은행, 회사 등에 취직 3.9명, 교원 0.1명 등이 다.104) 보통학교 졸업자의 취업률이 극히 미미하다는 점에서 사회이동효 과는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105) 그러나 이는 뒤집어 생각할 때 일 제강점기 국민의 15%가 보통학교에 진학하였고106) 이 보통학교 교육이 75.5%의 취학자에게 평생 동안 유일한 교육기회였다는 점에서 그 절실 함이 부각된다.

4) 해성(海星)유치원과 빈민학교 베네딕도수녀회 직영으로 운영된 해성유치원은 1927년 4월 1일 개원 하여 원아를 모집하였다. 유치원에 보낼 정도면 대개는 부유층이었지만 초창기 교육비는 거의 무료였다. 원아는 100명으로 제한을 두었지만 1941년에는 200명으로 늘어났고, 이후에도 60명씩 4학급으로 늘려야 했다. 1931년 9월 30일 정부로부터 정식 설립인가를 받았다. 1933년 4 월, 신고산 성당에서도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유치원 교육을 위해 6명의 수녀들이 일본에서 보모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유치원의 자모들 중에는 부유층의 후처들이 많아 젊은 수녀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 였다. 아직 유교적 관습이 뚜렷이 남아있던 당시였지만, 후처의 자녀라 ‐‐‐‐‐‐‐‐‐‐‐‐‐‐‐‐‐‐‐‐‐‐‐‐‐

103) 이규수, 〈일제시대사회통계; 교육추계〉 ,《한국현대사연구》1권, 1998. 57쪽, 61쪽. 104) 조선총독부학무국학무과,《학사참고자료》1937. 105) 참조 이규수, 위의 책. 106) 참조 : 위의 책,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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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입학에 제한을 두지 않았던 면모를 알 수 있다. 원아들은 수녀들을 매우 따랐으며 수녀들은 원아들 뿐 아니라 학부모를 대상으로 선교활동 을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유치원은 교육과 선교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훌륭 한 일터였다.107) 한편 해성학교의 입학이 어려운 처지의 빈민아동을 위해서 수녀들은 1926년 9월 1일부터 빈민학교인 호수천신학교(護守天神學校)를 개설했 다. 다 헐은 초가집 방 한간을 빌려 시작한 호수천신학교는 얼마안가 400 명이나 되는 아이들로 꽉 차게 되었다.108) 1938년 350명의 학생들은 3 개의 교실에서 오전, 오후 학급으로 나누어 공부하였다. 교과과정은 보통 초등학교의 교육을 따랐다. 1941년 4월에는 정식 국민학교로 인가를 받 아 검정고시 없이 바로 중학교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이에 따라 특과 4년 제에서 6년제로 연장하여 교육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더 이상 진학을 할 수 없어도 보통과 졸업 후에는 보조 간호사로 일할 수 있었고, 병원 실습 을 하며 정식 간호사 시험을 보는 경우도 있어 수녀들을 기쁘게 했다.109) 당시의 남자에게 편향된 교육기회 풍토 속에 학비가 저렴한 호수천신학 교에는 여학생 수가 월등히 많았다. 1945년 9월 1일, 수녀들은 지역주민 들의 요청에 따라 재봉과 수예 등 가사노동에 필요한 교육을 하는 효성여 자가정학교(曉星겿子家政學校)도 개설하였다. 지금까지 베네딕도회의 한국인 교육활동에 대해 숭공학교와 숭신학교, 해성학교, 해성유치원과 빈민학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교육을 통한 사회 적 기여를 목표로 하는 이러한 베네딕도회의 교육의 성과는 한국 천주교 회의 역사 안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었다. 1911년 베네딕도회의 ‐‐‐‐‐‐‐‐‐‐‐‐‐‐‐‐‐‐‐‐‐‐‐‐‐

107) 이정순, 위의 책, 168쪽. 109) 이정순, 위의 책, 165쪽.

108) 이정순, 위의 책,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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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학교 현황은 전국 119개에 학생 3,026명에 불과했으나 베네딕도회가 원산교구에서 교육 운동을 확장하며 적극 선교 에 나서던 1929년에는 총 200개의 학교에 10,156명의 학생 기록이 있 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 인가 학교에 한한 기록으로 미인가 교육기관은 훨씬 많았다. 베네딕도회의 진출은 파리외방전교회보다 훨씬 뒤늦었으나 교육선교에 있어서는 선구적이었다.110) 1935년도 각 교구의 인가받은 보통학교 수 를 비교해보면, 서울교구 4개교, 대구교구 2개교, 평양교구 3개교, 원산 교구 6개교, 연길교구 10개교다.111)

<표3> 천주교 학교 및 학생 수

이를 다시 선교회별로 살펴보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교구 6개교, 메리 놀회 소속 3개교, 베네딕도회 소속 16개교로 가장 많았다. 그럼에도 베네 딕도회는 더욱 많고 고등한 교육시설을 원하였다. 베네딕도회가 원산에 진출한지 10여 년만에 포교에 큰 성공을 거두며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개 ‐‐‐‐‐‐‐‐‐‐‐‐‐‐‐‐‐‐‐‐‐‐‐‐‐

110) 장정란, 위의 글, 2003. 109쪽. 《한국교회사논문집 , I》 , 한국 111) 노영택,〈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사업 연구(2)〉 교회사연구소, 1984, 256쪽. , 174쪽. 112)《원산교구 연대기-원산본당 1930년 7월-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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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교의 교세를 위축시켰는데 그 공을 교육선교에 돌리고 있다.112)

3 . 의 료 및 출 판 · 문화활동 1) 의료 활동 베네딕도회원들의 의료 활동은 지역의 작은 의원 수준에 그치는 것이었 으나 천주교의 자선사업에 대한 존경과 신임을 높여주었고 수도원이 널 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어 선교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1928년 그라머 수 사113)가 일본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자 그 해 봄에 수도원 안에서 질병과 상처치료를 위한 의무실을 개원했고 다음해 병원이 건축되었다. 한국인 김 플라치도(재환) 수사가 조력자로서 헌신적인 의료 활동을 펼쳤고, 임 종대세를 주었다. 극빈자에게 약은 무료였다. 당시 일회 진료비는 50전이었는데 하루 수 입은 38원에 지출은 인건비를 계산하지 않고도 35원이 들었다. 1928년 5월부터 1929년 1월까지 원산 약국에서 제공한 약값만도 2,720엔(500 마르크 이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선사업을 통해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 의 육체적인 곤경에 도움을 줌으로써 수도원과 성당이 널리 알려지고 외 교인들 사이에서 명망과 신뢰를 얻게 되었다.114) 1933년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1932년 1년 동안 덕원 병원에서는 진찰 21,065회, 약 조제 27,210회, 왕진 2,070회이다. 병원은 1933년 증축 되었다. 대기실, 진찰실, 붕대실, 전기방사선치료실, 약국, 수술실 등을 각 1개씩 갖추고 8개의 병실 겸 입원실도 만들었다. 수녀들 또한 1925년 도착하자마자 시약소를 개설하고 약초를 이용하 ‐‐‐‐‐‐‐‐‐‐‐‐‐‐‐‐‐‐‐‐‐‐‐‐‐

113) Ioseph Grahamer (1888-1950).

114)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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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간단한 치료활동을 시작했다. 게르스트마이어 수녀115)는 원산에서 25 년간 활동하며 2천명이 넘는 어린이에게 대세를 주었다.116) 1929년 4월 사우어 주교가 양조장 5칸 집을 사주어 시약소로 이용하면서 명칭을‘마 리아의 도움’이라 했다. 1928년 통계에 의하면 치료 환자는 4700명이고 그중 400명이 교리에 참석했다. 1929년 치료자는 400명, 왕진 치료자 395명, 총 795명이었 고 그중 영세자는 100명이었다. 1930년 치료자는 5400명, 왕진 4800 명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1938년부터는 최 리오바(崔信貞) 수녀가 간호 사로서 도움을 주었다. 시약소는 주일과 축일을 제외하고 매일 문을 열어 하루 평균 40-50명의 극빈자를 치료하였다. 무료 시약소는 원산, 신고 산, 회령, 청진의 4군데였다. 1941년 9월 24일, 수녀들은 함흥에‘성심의원’을 개원하였다. 원장은 일본의사 자격을 취득한 메펠트 수녀117)였다. 하루 평균 60-80명의 환자 를 돌보았다. 메펠트 수녀는 거의 매일 밤 12시까지 진료를 해야 했으므 로, 아침 식탁에서 수저를 든 채 잠에 빠져드는 광경도 흔히 볼 수 있었 다.118) 1927년의 원산대목구 통계에 따르면 4개 시약소에서 약 8500건을 투 약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개 의료사업을 통해 대세가 많이 주어졌다. 1927년 통계에서 성인임종대세는 81명, 어린이 임종대세 30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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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Fructuosa Gerstmayer (1898-1952) 시약소에서 빈민치료에 헌신한 수녀는 주민들에 의해‘독일의 유명한 박사수녀’ 로 불리웠다. (이정순, 위의 책, 498-500쪽 참조) 116) 빌리발트 쿠겔만, 위의 글, 532쪽. 118) 이정순, 위의 책, 205쪽. 117) Diomedes Meffert (1909-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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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판 · 문화활동 베네딕도회는 창설 초기인 1887년 오틸리엔 모원에서부터 인쇄소를 설치하여 포교 사업을 널리 알리고 은인들을 위한 간행물들을 많이 제작 하였다.119) 베네딕도회의 문화전파 사업은 출판과는 분리될 수 없는 깊 은 상관성을 지녔고 그것이‘토착화’ ‘현지화’의 정신과 부합함에 있어서 는 더욱 그렇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적 공헌 가운데 특히 문화적 면에서 는 크게 나누어, 첫째 새로운 문물 수용 및 신문화 건설, 둘째 교육 · 자 선 부분, 셋째 한글 보급 등으로 본다.120) 베네딕도회원의 출판사업은 한국에 진출한 이듬해 서울수도원에서 교 육사업과 함께 병행되어 1910년에 벌써《성 베네딕도 언행록》이라는 책 이 출판되었다.121) 1927년 덕원과 1939년 용정에 인쇄소를 설치하였 다. 제일 먼저 출판된 것은 한국어로 된 미사책이었다. 교리문답서와 신 자들의 기도서는 프랑스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1931년 대림 제1주일부터 주일미사와 축일미사의 양식은 한국어로 인 쇄되어, 미사참례자에게 배부되었다.122) 1932년 한국어로 번역된〈미사 통상문〉미사 전에 신자들에게 배부되었고 주일 강론을 통해 책자의 사용 법을 가르치며 익히도록 했다.123) 1932/33년 겨울에는 라틴어에서 번역 하여, 천연색 그림을 넣은 미사경본 소책자가 발행되었고, 37개 문항으로 ‐‐‐‐‐‐‐‐‐‐‐‐‐‐‐‐‐‐‐‐‐‐‐‐‐

119) 백 쁠라치도, 위의 글, 1985. 120쪽. ,《한국근현대사연 120) 노용필,〈1930년대 '한국사회에 미친 천주교회의 영향' 논의〉 구》27, 2003. 102쪽. 121) 백 쁠라치도, 위의 글, 1984. 783쪽. 용정수도원 연대기는 모두 선지훈 122)《용정수도원 연대기. 1932년 5월-1934년 9월》 , 237쪽. 의 논문에서 재인용하였다 ;《덕원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123)《용정수도원 연대기 1932년 5월-193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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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미사교리문답을 포함하여 약 80 쪽에 달하는 미사해설서가 1933년 가을에 덕원 인쇄소에서 발행되었다.124) 미사경본의 한국어 번역 사업이 시급히 필요했던 것은 전례에 있어 신 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수개월간 매주 일요일마 다 교리교육을 실시하고, 전례에 필요한 공동의 낭송과 라틴어 응송을 미 사 전에 미리 연습했다. 미사는 사제가 백성들을 향해 서서 선교지의 언 어로 바쳤다. 이로써 미사 내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말과 이해하기 힘 든 전례행위 때문에 미사를 드리는 사제와는 별개로 묵주기도만 드리는 신자들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미사경본의 주요고객은 원산과 연길의 자체 선교지역이었다. 평양지역 에서 선교하던 메리놀회(Maryknoll Missioners) 신부들도 번역된 미사 경본을 다수 주문하였고 프랑스 선교 지역에도 사용되었다. 천연색 그림 이 수록된《어린이용 미사경본》은 그 초판이 1936년에 5천부, 재판은 1937년에 8천부, 그리고 제 3판은 1942년에 간행되었다. 다양한 판본의 성무일도 개작 편집도 추진했다.《한국인 수녀들을 위한 기도서와 예식 서》 《쌍트 ,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회 형제들의 성무일도》,《성탄절 성무 일도》,《성주간 성무일도》,《주일과 부활절, 성령강림절과 사도들의 축일 저녁기도》 《성녀 , 아가다와 성녀 체칠리아 축일 성무일도》등이 발행되었 다. 세례지망자들과 성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 세례, 고해성사, 성 체성사에 대한 소책자를 만들어 교리교육을 더 실제적으로 지도하기 위 한 책자도 간행되었다.125) 미사책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성가책 역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작은 소 ‐‐‐‐‐‐‐‐‐‐‐‐‐‐‐‐‐‐‐‐‐‐‐‐‐

124)《원산교구 연대기-덕원수도원 1935년 1월-7월》 , 276쪽. , 333쪽. 125)《원산교구 연대기-덕원수도원 1936년 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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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자로 분류되어 발행되었다. 대중들을 위한 미사 노래책인《Liederbuch》 과《가톨릭 성가책》 《교구 , 성가책》등이 있다. 한국말을 배우기 위한 문법서 편찬도 필수적이었다. 1917년, 로머 신 부126)가 수도원 원장 재임 시 만든 3권짜리 독일역 한국문법책은 독일에 서도 발간되었다. 원산의 수녀들은 초기에 이 책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다. 1927년 슈미트 수녀가 조선어문법을 독일어로 완역하여, 모두 100권을 필경하여 사용했다. 1937년부터는 로트 신부가 만든 문법책을 사용했다. 1930년 덕원에 인쇄기가 들어온 후 독일어판《성 베네딕도의 규칙서》 를 로머 신부가 한글로 번역, 출판하여 수녀들은 옛 전통에 따라 청원식 때 그것을 수여할 수 있었다. 1931년에는 김성학(갏聖學) 신부가《회헌》 을 국역하였다. 1936년에는《허원》이 한글본으로 간행되어 수녀들의 양 성에 필수적인 교재가 되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제7호를 끝으로 종간된 덕원신학교의 교지《신우(神友)》는 유가지(有價誌)로서 최고 800 부까지 발행하였다.127) 베네딕도회의 인쇄소는 교회 서적 외에 학술서 적, 교양서적, 농업, 공업, 건축에 관한 기본서적들도 간행했다.

Ⅵ. 맺 음 말 베네딕도회 선교사에게 한국은 수도원 선교운동의 이상을 구현하는 땅 이었다. 이들의 선교는 대내적으로는 앞서의 동아프리카 선교와 달랐고, 대외적으로는 먼저 한국에서 활동 중이던 파리외방전교회와 다른 것이었 다. 동아프리카에서의 시행착오를 교훈으로 하여, 창설자의 선교사상과 총원장의 선교지침에 따라 수도원을 중심기지로 현지인과의 공감대 안에 ‐‐‐‐‐‐‐‐‐‐‐‐‐‐‐‐‐‐‐‐‐‐‐‐‐

126) Anselmus Romer (1885-1951) 덕원신학교 교장과 덕원수도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127) 장정란,〈 《神友》 연구〉 ,《교회사연구》26, 2006. 129-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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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간접선교를 이루었다. 한국에 정착하면서부터 이미 심중에 두고 있던 현지인 교육을 신속하게, 공을 들여 실행한 것은 토착화, 현지화 사목의 중심 고리였다. 별도의 신학과정 교육을 필수로 하지 않아도 되는 수녀들 은 특별히 많은 현지인 후진을 빨리 길러낼 수 있었다. 선교 연륜이 깊어 가고 같이 땀 흘리고 노동하며 한국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한국사회 와의 접속은 한국의 고유성에 대한 발견과 호의를 두텁게 했다. 교구사목은 베네딕도회의 본래 창설 목적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이를 통 하여 가시적인 성과들을 많이 내었다. 베네딕도회가 펼친 교구사목은 전 혀 알려지지 않은 시골마을에 불과했던‘덕원’을 문화와 선교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하였으며, 가장 선교하기 어렵다는 함경남북도를‘천주교 사업 이 뿌리박힌 원산’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평수사를 중심으로 한 노동 선 교는 단순히 가르치고 훈계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민들 가운데서 함께 땀 흘리고 호흡하는 종교로 다가서게 했다. 교육과 의료복지를 통해 교회의 자선적 측면을 부각시킨 것은 인민대중 의 가운데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되었다. 교육에서도 특별히 공업교육은, 종교가 하나의 사회적 운동을 야기 시키고 현지인들의 기술 중산층 형성 에 기여하여 빈곤 해결에 하나의 활로를 열어줌과 동시에 교회의 자산적 바탕을 돈독히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국민의 15%가 보통 학교에 진학하였고 그중에서 75.5%는 보통학교가 평생 동안 교육의 전 부였다는 점에서 한 때는 간도지역에만 베네딕도 선교사들에 의해 41개 학교가 세워졌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성당 내 에 정식 교육기관인 해성학교 외에, 조그만 공소마을에서도 문을 열면 우 선 학교부터 만들었다. 비록 그것이 교리교육을 위주로 한 간이 시설이었


박보영 쟌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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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해도, 교리교육을 위해서는 문맹을 깨쳐야 했고, 교육의 기본 혜택 이 주어져야 했던 면에서 최소한의 교육적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여성 교우들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은 유교 사회인 한국에서 수녀들의 활동은, 오늘 날에 있어서도 종교 제 단체의 일반적인 구성원 대부분이 여성인 것을 감안할 때 실효성 있는 것이었다. 여성의 개종과 입교를 통 하여 교회는 확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에게 상대적으로 교 육 기회가 적었던 당시에 수녀들의 빈민학교 최대 수혜자는 여성이었다. 일제강점기 여성들의 개화가, 문맹을 깨치고 근대시민사회의식을 고양하 며, 새로운 사회로의 전망을 구체화하는 잠재력으로 꾸준히 성장해왔음 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출판사업을 통해 한국 사회에 끼친 문화적 영 향 또한 큰 것이었다. 이로써 한국 사회와 접속하고 삶의 현장에서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성장해 온 베네딕도회의 선교 활동을 고찰해보았다. 당대의 일상성과 상 호접속의 관점으로 선교활동에 대해 접근하면서 선교활동은 종교를 매개 로 인민들의 살아가는 방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확인했다. 일방적인 교의(敎義)의 전달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피고 삶의 자리에서 나오는 필요에 상호 부응하는 것이 선교이다. 한국의 근대 형성기에 접목 된 베네딕도회의 선교활동은, 앞선 동아프리카의 선교에서 체득한 유럽 주의에 대한 자성적(自겛的) 경각심을 바탕으로 현지에 대한 보다 존경 어린 이해와 조응 속에 발전해나갔다. 이는 상호성이 전제된 선교의 건강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는 제단 위에서 설교만 하지 않는다. 종 교(선교)는 당대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서 제 자리를 만들어 내고 확장하며 동시에 당대와 당대 사람들에 의해 규정받는다.


KOINONIA

Contents

Editor’s Preface₩₩₩₩₩₩₩₩₩₩₩₩₩₩₩₩₩₩₩₩₩₩₩₩₩₩₩₩₩₩₩₩ Thomas Timpte, OSB My Life as Monk ₩₩₩₩₩₩₩₩₩₩₩₩₩₩₩₩₩₩₩₩₩₩₩₩₩₩₩₩₩₩₩₩₩₩₩₩ Francis Ri OSB RB, Principles for Reading and Commentary₩₩₩₩₩ Christian Schütz OSB Vow of Stability₩₩₩₩₩₩₩₩₩₩₩₩₩₩₩₩₩₩₩₩₩₩₩₩₩₩₩₩₩₩₩₩₩ M. Salus Tchoi OSB Benedict’s Peace ₩₩₩₩₩₩₩₩₩₩₩₩₩₩₩₩₩₩₩₩₩₩₩₩₩₩₩₩₩₩₩ Thomas Timpte, OSB Concerning the Epilogue to RB 7 ₩₩₩₩₩₩₩₩₩₩₩₩₩₩₩₩₩₩₩₩ Placide Deseilles The Monk and Impossible Tasks ₩₩₩₩₩₩₩₩₩₩₩₩₩₩₩₩₩₩ Jerome Kodell OSB Thoughts in Spiritual Life ₩₩₩₩₩₩₩₩₩₩₩₩₩₩₩₩₩₩₩₩₩₩₩₩₩₩₩₩₩₩₩ Daegu Priory The Sadness Corroding our Desire for God ₩₩₩₩₩Bernardo Olivera OCSO Collatio Prima Abbatis Chaeremonis = Coll.XI ₩₩₩₩₩₩ Joannes Cassianus The Korean Mission of the St. Ottilien Congregation₩₩₩₩₩₩₩₩₩₩₩Jeanne d’Arc Pak OSB

Vol. 33, 2008 Summer


코이노니아3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