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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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의 영성단편들 제 36 집

2011년·여름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표지 설명 : 20세기 독일의 조각가 Ernst Barlach의‘명상하는 사람’


편집 서언₩₩₩₩₩₩₩₩₩₩₩₩₩₩₩₩₩₩₩₩₩₩₩₩₩₩₩₩₩₩₩₩₩₩₩₩₩₩₩₩₩₩₩₩₩₩₩₩₩₩₩₩₩5 진 토마스 Conversatio Morum 서원 ₩₩₩₩₩₩₩₩₩₩₩₩₩₩₩₩₩₩₩₩₩₩₩₩₩₩₩₩₩₩₩₩₩₩₩7 김영희 테오필라 베네딕도 규칙서에 나타난 렉시오 디비나 ₩₩₩₩₩₩₩₩₩₩₩₩₩₩₩₩₩₩₩₩₩40 허성준 가브리엘 수도승생활과 노동 ₩₩₩₩₩₩₩₩₩₩₩₩₩₩₩₩₩₩₩₩₩₩₩₩₩₩₩₩₩₩₩₩₩₩₩₩₩₩₩₩₩₩₩64 허성석 로무알도 덕행의 어머니와 베네딕도 규칙서₩₩₩₩₩₩₩₩₩₩₩₩₩₩₩₩₩₩₩₩₩₩₩₩₩₩₩₩₩85 해리 하건, 양숙희 이사악 옮김 베네딕도와 행복의 추구 ₩₩₩₩₩₩₩₩₩₩₩₩₩₩₩₩₩₩₩₩₩₩₩₩₩₩₩₩₩₩₩₩₩₩₩₩113 아모스 슈미트, 김순복 베다 옮김 순명 ₩₩₩₩₩₩₩₩₩₩₩₩₩₩₩₩₩₩₩₩₩₩₩₩₩₩₩₩₩₩₩₩₩₩₩₩₩₩₩₩₩₩₩₩₩₩₩₩₩₩₩₩₩₩₩123 요한나 도멕, 이연학 요나 옮김 『천국의 사다리』₩₩₩₩₩₩₩₩₩₩₩₩₩₩₩₩₩₩₩₩₩₩₩₩₩₩₩₩₩₩₩₩₩₩₩₩₩₩₩₩₩₩₩₩144 요한 클리마쿠스, 허성석 로무알도 역주 네스테로스 아빠스의 둘째 담화 ₩₩₩₩₩₩₩₩₩₩₩₩₩₩₩₩₩₩₩₩₩₩₩₩₩₩₩₩₩169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피아문 아빠스의 담화₩₩₩₩₩₩₩₩₩₩₩₩₩₩₩₩₩₩₩₩₩₩₩₩₩₩₩₩₩₩₩₩₩₩₩₩₩₩₩181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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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서언 독자 여러분에게 부활의 기쁨을 축원합니다.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원고 들이 빨리 들어와서 부활시기가 끝나기 전에 인쇄에 들어갈 희망이 있습니 다. 그러면 저는 마음 놓고 6월 중순에 본국 휴가를 떠날 수 있겠습니다. 코이노니아 제36호의 기고문 아홉 편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어떤 균형 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 회원들이 저작한 성 베네딕도 규칙서와 생활 규범에 대한 세 가지 연구가 나옵니다. 이어지는 세 가지는 타 연합회 의 수도자들이 쓴 논문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부분은 저희가 번 역한 수도승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클리마쿠스와 요한 가시아노(자 연스럽게 발음대로 쓰고 불편하게‘카시아누스’ 라고 쓰지 않는 저의 고집 을 용서하십시오)의 세 가지 글이 나옵니다. 가시아노 담화집 번역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번에 낸 것 은 제15담화와 제18담화입니다. 제16담화는 오래전(코이노니아 제22집) 에 냈습니다. 그리고 제17담화는 가시아노와 그 친구 제르마노의 너무 개 인적인 문제를 다룬데다가 그 가르침에 윤리상의 문제가 있다고 느껴서 우 선 더 중요한 가르침이 담긴 담화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까지 저에게 이 일을 허락하실지 모르지만 이제 5년만 있으면 제24편의 담화집 번역을 다 마칠 수 있겠습니다. 가시아노의 문장은 지류가 많은 강 과 같아서 흔히 번역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그 문장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 는 작업이 필요해서 담화집 번역은 저에게 큰 도전이고 흥미로운 씨름입니 다. 그런데 이런 고전, 그리고 이것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멋진 강론을 원어로 읽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큰 은혜로 생각합니다. 사실 외국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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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울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기초를 배워도 어떤 언어를 알기 위 해서는 계속 많은 저서를 읽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번역은 항상 모자랍니다. 독자 여러분은 저희의 서투른 번 역문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저 건 너뛰시기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또 부탁하고 싶은 것은 좋은 기고를 제공하거나 번역할만한 글을 보시면 그것을 저희 편집위원에게 추천하십 시오. 이번에 협조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분도출판사에서 이 일을 담당하신 분들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희 부족한 노력이 독자 여러분의 수도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진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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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 Morum 서원 김영희 데오필라 수녀

들어가면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에 따라 전통적으로 정주 와 수도승답게 생활할 것(conversatio morum)과 순명을 서원한다.1) 이 글에서는 conversatio morum 서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이 우리의 conversatio morum 서원과 그에 따른 삶을 좀 더 이해하고 실제 로 살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라틴한글 사전에서 conversatio는‘뒤적거림, 교제, 친교, 대화, 생활양 식’을, mos는‘관습, 풍습, 품행, 관례, 습관’을 의미한다.2) conversatio 와 mos가 각각 나름대로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 다. 그러나 이 둘이 함께 쓰이면서 서원 내용이 되어 있을 때 그 서원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 conversatio morum은 베네딕도 성인 시대에는 아무 문제없이 사용되었 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베네딕도 성인 이후에 이 용어는 잘 이해되지 않았고,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필사가들은 이해하기가 훨씬 쉬운 conversio morum(품행의 개선)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해 왔었다. 그러 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conversio가 아니라 conversatio가 참으로 ‐‐‐‐‐‐‐‐‐‐‐‐‐‐‐‐‐‐‐‐‐‐‐‐‐‐‐‐

1) 참조. 베네딕도, 베네딕도 수도규칙, 이형우 역주, 왜관: 분도 출판사, 1991, 213. 2) 가톨릭 대학교 고전 라틴어 연구소(편), 라틴-한글 사전, 서울: 가톨릭 대학교 출판 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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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 Morum 서원

베네딕도 성인이 그의 수도 규칙에서 사용한 용어라는 것에 동의하며, 가 장 최근에 나온 베네딕도 규칙서 비교 비평본3)도 conversatio로 출간하 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작업도 conversatio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이 그의 규칙서 58,17에서 conversatio morum을 서원 내용으로 삼으면서 생각했을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베네 딕도 규칙에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원천자료들 중에서 더욱 중 요하다고 여겨지는 라틴어 성경과 베네딕도 성인 이전의 수도승 문헌들, 그리고 베네딕도 규칙 자체 안에서 이용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알아보겠다. Conversatio에 대해서는 이 용어를 의미론적으로 연구한 H. Hoppenbrouwers4)의 연구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Hoppenbrouwers에 의하면, conversatio는 동사 conversare(돌리다, 사귀다, 교제하다)의 명사형이 며, -versatio는‘돌아가는 행위’를 뜻한다. 이 conversatio는 항상 지속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시간 안에서 어떤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의미 한다. 앞에 붙은 con-은 결합의 의미이거나 강조의 의미로, con이 결합의 의미로 쓰였을 때 conversatio는‘-하게 처신하는 방식’또는‘함께 살거 나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며, 이때에 이 의미는 사회, 또는 공동체성을 지니게 된다. 결합의 의미가 아닌 conversatio는 conversari(-에 살다, 거 처하다, 지내다, 있다)의 명사형이며, conversari는 versari(살다, 거주하 ‐‐‐‐‐‐‐‐‐‐‐‐‐‐‐‐‐‐‐‐‐‐‐‐‐‐‐‐

3) Benedictus, Benedicti Regula, 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75, R. Hanslik(Ed.), Wien: Hölder-Pichler-Tempsky, 19772, 149. 4) H. Hoppenbrouwers, “Conversatio. Une étude sémasiologique”, Graecitas et Latinitas Christianorum primaeva, Supplementa I, Nijmegen: Dekker & van de Vegt, 1964, 4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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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있다, 종사하다)의 강조형이다. Hoppenbrouwers는 이 용어가 갖는 지속성, 역동성, 공동체성이라는 특성을 강조하며, conversatio morum 의 문법적 양식에 대해서는 B. Steidle의 설명 보충적 소유격(genitivus epexegeticus)5)을 받아들인다.

1. 성 경 이 글에서는 베네딕도 성인이 사용했을 성경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 예 로니모 성인이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성경을 사용한다.6) 불가타 성경 에 conversatio morum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conversatio와 그의 동사 conversor, 그리고 mos의 의미를 각각 찾아보겠다.

1.1. Conversatio 불가타 성경에서 conversatio라는 말은 27회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크게 일곱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1.1. 삶의 방식, 품행, 처신 Conversatio가 사용된 27회 중에 18회(신명 1,13; 토빗 14,17; 집회 ‐‐‐‐‐‐‐‐‐‐‐‐‐‐‐‐‐‐‐‐‐‐‐‐‐‐‐‐

5) 참조. B. Steidle, “‘De conversatione morum suorum’, Zum philologischen Verständnis von Regula S. Benedicti, cap. 58,17”, Studia Anselmiana 44, Roma, 1959, 136-144. 6) 참조. Bibliorum Sacrorum, Iuxta Vulgatam Clementinam, curavit Aloisius Gramatica, Typis Polyglottis Vaticanis, 1959; 사실 베네딕도 성인이 사용했을 라틴어 성경은 라 틴어 고전본 성경(Vetus Latina)이었으리라고 간주 된다. 참조. J. Gribomont, “La Règle et la Bible”, Atti del VII Congresso Internazionale di Studi sull’alto Medioevo, Spoleto, 1982, 355-389. 그러나 불가타 성경 역시 베네딕도 규칙보다 조금 앞선 고대 후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용어를 연구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되며, 특 별히 불가타 성경에는 성경 용어색인이 준비되어 있어서 작업상 편의를 위해 불가타 성경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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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 2마카 4,13; 6,23; 갈라 1,13; 에페 4,22; 1티모 4,12; 히브 13,7; 야고 3,13; 1베드 1,15.18; 2,12; 3,1.2.16; 2베드 2,7; 3,11) 가 삶의 방식, 품행, 또는 처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중 한가지만 을 보면,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 신(vestram bonam in Christo conversationem)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1베드 3,16). 이 문장에서 conversatio는 처신을 의미한다. 이 처신은 그리스도 안에 서 이루어지는 선한 처신, 품행, 생활 태도, 삶의 방식이며, 복수로 사용 되고 있다. ‘삶의 방식, 품행, 처신’이라는 의미를 가진 18회의 경우에서 13회는 ‘좋은 생활 방식’을 의미하고, 5회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생활방식을 의미 한다. 또한 복수로 쓰인 경우가 13회이며, 단수인 경우는 5회이다. 그러 니까 conversaito는 많은 경우가(18/27) 삶의 방식, 품행, 처신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보통 좋은(긍정적인) 생활 방식이며 공동체성을 띤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의 방식이 회개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는 전체 27회 중에서 한번 나온다. “병들기 전에 너 자신을 낮추고 죄를 지었을 때에는 회 개 의 태 도를 보 여라(in tempore infirmitatum ostende conversationem tuam)”(집회 18,21). 여기에서 conversationem은 conversionem으로 대치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이 회개라는 의미로는 이어서 볼 동사 conversor의 경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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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쳐도 전체 50회 중에 이번 한번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conversatio에 conversio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둘을 같은 개념으로 간 주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1.1.2. 생활, 삶 생활, 삶이라는 의미로는 3회 사용되었다(지혜 13,11; 15,12; 집회 38,14). “저희의 생명을 놀이로, 저희의 삶 을(conversationem vitae) 돈벌이 축제로 여기며 모든 것에서, 나쁜 것에서도 이득을 보아야 한다고 합니 다”(지혜 15,12). 이 경우에 conversationem vitae는 설명 보충적 소유격 양식7)으로, conversatio와 vita(삶)은 동의어로서 서로를 보완한다. vita는 일반적인 의미의 삶을 말하고 conversatio는 활동과 에너지를 품는 역동적인 의미 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성격을 규명한다. 우리의 conversatio morum 서원은 이와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

1.1.3. 시민 시민이라는 의미로 2회 사용되었다(에페 2,12; 필리 3,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 민입니다(nostra autem conversatio in caelis est).”(필리 3,20) 하늘의 시민으로서의 삶 역시 하나의‘삶의 방식’이다. 시민이라는 표 현에는 공동체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하늘의 시민은 특별히 영적인 성격 ‐‐‐‐‐‐‐‐‐‐‐‐‐‐‐‐‐‐‐‐‐‐‐‐‐‐‐‐

7) 참조.‘2.1.3. 설명 보충적 소유격 양식’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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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띤다.

1.1.4. 기타 나머지 경우들은 -를 향 하 여 돌 림(집회 18,24), 대 화(지혜 8,16), 백 성 으 로 여 겨 짐(집회 50,5), 사람들의 집 단(다니 2,11)으로 쓰였다. 이 경우들에서 conversatio는 복수로 쓰이거나‘-와 함께’와 같이 쓰여 져 공동체성을 띤다. 종합해 보면, 불가타 성경에 사용된 conversatio라는 용어의 주된 의미 는 생활 방식 또는 품행(18/27)이다. Conversatio가 들어간 설명 보충적 소유격 양식은 3회 사용되었는데, 1회(2마카 6,23:“conversationis actus”)는‘행동’과 2회(지혜 13,11; 15,12: conversationem vitae)는 ‘삶’과 함께 동의어처럼 사용되면서 의미를 보충 설명한다. 윤리성과 복 수, 단수의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특성

긍정

부정

중성

복수

단수

횟수

17

6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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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가(17/27) 긍정적인 의미로, 또한 복수로(19/27) 쓰였다. 그러니까 불가타 성경에서 conversatio는 대부분이 어떤 삶의 방식을 의 미하며, 이 삶의 방식의 특성은 긍 정 적이고 공 동 체 적이며, 구 체 적이고 현 실 적인 특성을 갖는다(두 경우, 즉 에페 2,12; 필리 3,20에서만 영적 의미를 지닌다).

1.2. Conversor 불가타 성경에서 conversatio의 동사형 conversor는 23회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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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생활하다’와‘대화하다(동거하다, 교제하다)’라는 두 가지 의미로 분류된다.

1.2.1. 생활하다 Conversor가‘생활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는 19회인데, 이들을 다 시 세분해 보겠다. ① 처신하다: 10회(1열왕 12,2; 사도 23,1; 2코린 1,12; 에페 2,3; 필리 1,27; 3,6; 1티모 3,15; 히브 13,18; 1베드 1,17; 2베드 2,18). “여러분은 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 활 을 하 십 시 오(tantum digne evangelio Christi conversamini)”(필리 1,27). 여기에서 conversamini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이 므로 복음적으로 잘 처신하는 것을 의미한다.‘처신하다’라고 쓰인 10회 중에 8회가 윤리적으로 잘 처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10회 중에 6회는 주 어가 복수이며 단수로 쓰인 나머지 경우들에서도‘너희 앞에’,‘하느님과 함께’,‘법과 함께’같은 표현들이 함께 사용되어 공동체성을 잘 드러내 고 있다. ② 살다: 5회(유딧 6,18; 바룩 3,38; 다니 4,9; 호세 4,14; 사도 11,26). 이중 3회는‘cum’(함께)이라는 접속사와 같이 사용되었고, 주 어가 복수인 경우도 3회이다. ③ 있다: 2회(1열왕 25,15; 마태 17,21). ④ 종사하다(전념하다): 2회(지혜 13,7; 집회 38,26). 이 경우들은 더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인 것들에 전념하는 부정적인 성격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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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교제하다, 대화하다, 친교를 맺다: 4회(집회 8,9; 39,3; 41,8; 히브 10,33). 여기에서 친교는 좋은 친교일 수도 있고 나쁜 친교일 수도 있으며, 개 인적일 수도 있고 공동체적일 수도 있다. 이 경우들에서 주목되는 것은 반복적인 특성인데, 친교, 교제는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시간 안에서 되풀 이되어 역동성과 지속성을 지니게 된다. 정리해 보면, 동사 conversor는 불가타 성경에서 사용된 23회 중 대부 분이‘생활하다’(19회) 또는‘교제하다’(4회)를 의미한다. 두 경우 모두 반 복 적이고 지 속 적이며 역 동 적인 특성을 갖는데,‘교제하다’뿐만 아니 라‘생활하다’의 경우도 단 한 순간만 살아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언 어 자체 안에 이미 지속적 성격이 들어 있다. 윤리적이 면과 복수, 단수의 관계에서 전체를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특성

긍정

부정

중성

복수

단수

횟수

13

6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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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불가타 성경에서 conversor는 많은 경우가 긍 정 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고, 주어는 대부분이 복 수이며, 주어가 단수인 경우에도 공 동 체 성을 드러내는 표현들이 함께 쓰인다.

1.3. Mos 불가타 성경에 이 말은 42회 나오는데, 영적이고 이념적인 것보다는 구 체적이고 실질적인 면들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관습(일반적인)’이라는 의미로 23회,‘전례(적관습)’가 5회,‘품행’이 5회,‘마치-처럼’이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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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으로’가 3회,‘본성’이라는 의미로 1회 사용되었다. 이 mos가 사 용된 의미에 따라서 그 윤리성과 복수, 단수의 경우들에 대해서 분석한 내용을 함께 보기로 하겠다. 의미 관습 전례 -처럼 방식(으로) 품행 본성 계 윤리성 + - +- + - +- + - +- + - +- + - +- + - +- + - +회수 1 4 18 1 0 4 1 3 1 0 2 1 4 1 0 0 1 0 7 11 24 21 5 5 3 1 0 35 단수 2 0 0 0 4 1 7 복수

불가타 성경에서 mos가 표현하는 의미 중 가장 많은 것은‘관습(일반 적인)’이며, 그것도 이 세상의 구체적인 관습들에 관계된다. 이들 중 대 다수는(18/23) 윤리성을 띠지 않으며,‘전례(적 관습)’를 의미하는 경우 들에서도 대부분(4/5) 윤리성이 없다. 그러나‘품행’이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대부분(4/5) 좋은 품행을 의미한다. 단수와 복수의 사용에 있어서는 전체가 주로 단수로 쓰였는데,‘품행’ 을 의미하는 경우에는 복수가 우세하다(4/5).

2 . 베네딕도 이 전 의 수 도 문 헌 들 이번에는『베네딕도 수도규칙』(이하‘베규’)에 더욱 많은 영향을 준 베 네딕도 이전의 수도 문헌들 중에서 카시아노의『제도서』와『담화집』, 그 리고『바실리오 규칙』을 살펴보기로 하겠다.8) ‐‐‐‐‐‐‐‐‐‐‐‐‐‐‐‐‐‐‐‐‐‐‐‐‐‐‐‐

8) 사실 스승의 규칙과 아우구스티노 규칙도 다루어야 하지만, 아우구스티노 규칙에서 라는 의미로 사 는 conversatio라는 말이 한번 사용되며(praeceptum 8,1),‘삶의 종류’ 용되는 이 말이 우리의 작업에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스승의 규칙에서는 conversio 만 나오고 conversatio는 한 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하지만 스승의 규칙은 베네딕도 규칙을 다룰 때 다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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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카시아노의 제 도 서9)와 담 화 집10) 카시아노의 제도서와 담화집에는 conversatio가 73회, conversor가 4 회, mos가 57회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이 용 어들을 그 시대에는 이 말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의미들을 표현하기 위해 서 자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베네딕도 성인 역시 어려움 없 이 이 용어들을 사용할 수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먼저 성경 인용과의 관계, 일반적인 의미, 그리고 이 용어들과 관계되 는 설명 보충적 소유격 양식을 살펴보겠다.

2.1.1. 성경 인용 카시아노의 제도서와 담화집에 나오는 73회의 conversatio, 4회의 conversor, 57회의 mos가 들어 있는 문장에는 다섯 개의 성경 구절이 인 용된다. 성경 인용에서 특이한 점을 하나 볼 수 있는데, 카시아노는 그의 글에 서“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 민 입니다(nostra autem conversatio in caelis est)”(필리 3,20) 라는 구절을 네 번이나 인용한다(제도서 6,6; 담 화집 3,6.7; 12,2). 그런데 그 중에서 담화집 12,2에서만 conversatio를 사용하고 다른 세 경우에서는 conversatio 자리에 municipatus(자유시민 권)를 사용한다. 그런데 불가타 성경과 라틴어 고전본 성경은 그리스어 ‐‐‐‐‐‐‐‐‐‐‐‐‐‐‐‐‐‐‐‐‐‐‐‐‐‐‐‐

9) J. Cassien, Institutions Cénobitiques, SC 109, J. C. Guy(Ed.),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65. 10) J. Cassien, Conférences I, SC 42, E. Pichery(Ed.),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55; J. Cassien, Conférences II, SC 54, E. Pichery(Ed.),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58; J. Cassien, Conférences III, SC 64, E. Pichery(Ed.),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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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vteuma를 주로 conversatio로 번역했다. 그런데 카시아노는 왜 세 번 이나 conversatio가 아닌 municipatus를 사용했을까? 아마도 conversatio만으로는 여기에서 표현하고 싶은 시민 혹은 시민권이라는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네 개의 다른 성경 인 용의 경우(시편 67,7; 1코린 15,33; 에페 2,3; 필리 3,6)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도 주지 못한다. 성경 인용이라는 면에서 볼 때 카시아노는 conversatio, conversor, mos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면서도 그 말을 라틴어 성경에서 인용하는 횟 수는 아주 적다. 카시아노(360-430)와 예로니모(347-419)는 동시대인 으로, 이 위대한 저자들은 거의 독립적으로 성경적 배경과 수도적 배경 하에서 이 용어들을 자주 사용했다.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카시아노가 불 가타 성경을 아직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불가타 성 경에서 이 용어들이 들어있는 문장의 내용들이 수도자들을 위해서 쓰여 진 카시아노의 글들에 큰 의미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2.1.2. Conversatio, conversor, mos의 일반적인 의미 카시아노가 사용한 conversatio는 대부분이(62/73)‘생활 방식’또는 ‘삶’을 의미한다. 카시아노의 글에서 이 생활 방식은 세속적이거나 수도 적일 수 있지만, 카시아노의 글 자체가 수도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삶의 방식은 대부분이 수도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관상 적’이라기보다는‘수덕적’특성을 지닌다. Conversor는‘처신하다’를, mos는‘관습’또는‘습관’,‘품행’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품행은‘악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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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 Morum 서원

이라는 말과 함께 동의어처럼 사용되어 교정되어야할 나쁜 습관을 의미 하게 된다. 카시아노에게 conversatio와 mos는 그 말 자체로는 윤리적 성격이 없는 중성적인 용어들로, 많은 경우 수식어에 의해서 그 성격이 규정된다. 그리고 때때로‘et’(그리고)이라는 접속사나 동의어 성격을 갖 는 용어와 함께 사용되면서 그 의미가 보완된다.

2.1.3. 설명 보충적 소유격 양식 카시아노의 글에서도 conversatio morum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 다. conversatio와 mos가 사용된 경우를 살펴볼 때 설명 보충적 소유격 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베규 58,17의 conversatio morum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후기 라틴어의 수도적 환경에서 이러한 양식의 사용은 자주 있었다.11) B. Steidle은 설명 보충적 소유격(genitivus epexegeticus)을,‘한 명사 에 실질적인 동의어가 소유격형식으로 첨가되어 있다’12)고 정의 한다. 이 양식은‘et’이라는 접속사와 함께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의미는 변 화 없이 세 가지 양식이 가능한데, 예를 들면: - de conversatione et moribus suis - de conversatione morum suorum - de moribus conversationis suae 이 셋은 결국 모두‘생활 방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그 생활 ‐‐‐‐‐‐‐‐‐‐‐‐‐‐‐‐‐‐‐‐‐‐‐‐‐‐‐‐

11) 참조. B. Steidle, “‘De conversatione morum suorum’, Zum philologischen Verständnis von Regula S. Benedicti, cap. 58,17”, 139. 12) B. Steidle, “Der Genitivus epexegeticus in der Regel des Hl. Benedikt”, Studia Monastica 2, 1960,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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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은 그의 품행들과 관계되는 생활 방식으로 이 두 말은 실질적으로는 동의어처럼 사용되면서 서로의 의미를 보완한다. 카시아노에는 이러한 양식이 여러 번 나오는데 여기에 conversatio와 mos가 함께 나오는 경우 한 가지만을 소개하겠다. “secundo de cognatione tua, id est de conversatione et moribus vitiisque prioribus(이전의 생 활 방 식 과 악 습 들 과 관 습 들)”(담화집 3,6,2). 여기에서 conversatione는 moribus와 동의어이다. 넓은 의미에서 conversatio, mores, vitii(악습)는 같은 의미를 지니며 서로를 보완한다. 따라서 이 생활 방식과 관습은 모두 악습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2.2. 바실리오 규 칙13) 397년에 루피노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된 바실리오 규칙에는 conversatio가 4회, mos가 8회 나온다. 그리고 conversatio는‘생활 방 식’또는‘품행’을, mos는‘습관’을 의미한다. 바실리오 규칙은 설명 보 충적 소유격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동의어들의 양식을 만날 수는 있다 (2,102; 2,105; 4,0; 6,4). 예를 들어“hanc vitam vel conversationem”(6,4) 에서 vita(삶)와 conversatio는 동의어처럼 사용되면서 각 용어는 서로의 의미를 보완한다.

3 . 베네딕도 수도규칙 베규에 conversatio는 10회, mos는 7회 나오며, conversatio morum ‐‐‐‐‐‐‐‐‐‐‐‐‐‐‐‐‐‐‐‐‐‐‐‐‐‐‐‐

13) Basilius, Basili Regula a Rufino Latine versa, 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86, Klaus Zelzer(Ed.), Wien: Hölder-Pichler-Tempsky,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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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베규 58,17에 한번 나온다.

3.1. Conversatio 베규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수도생활’이라는 말로 번역된다. 58,17 의 경우 conversatio morum suorum은‘수도승답게 생활할 것’으로 번 역되어 있다. 베규에서 이 conversatio가 표현하는 수도생활, 또는 수도 자다운 생활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베규에 서 conversatio가 사용된 문장들을 함께 살펴보겠다. 수 도 생 활 과 신 앙 에 나아감에 따라(processu vero conversationis et “수 fidei)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머리말 49). 베규 머리말에 나오는 이 conversatio는 수도생활을 막 시작한 수도자 들을 위하여 사용된다. 수도생활로 번역되는 이 말을 통해서 베네딕도 성 인은‘수도적 이상’이나‘베네딕도회적 수도생활’,‘수도원 안에서 지키 며 살아야할 모든 것’을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conversatio는 신앙과 함께‘나아감(processu)’이라는 표현으로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 며, 이‘나아감’은“그분 나라”(머리말 50)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함께 묶여 있는“수도생활과 신앙(conversatio et fidei)”은 둘 다 지속 적으로, 또 역동적으로 성숙된다. 신앙이 커갈수록 수도생활도 더욱 성숙 된 모습을 띠게 되며, 수도생활이 성숙할수록 신앙도 더욱 커가게 된다. 믿음은 수도생활의 기초, 또는 그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수도생활은 내적 신앙의 외적 표현이다. 신앙과 짝을 이루며 나오는 표현이 머리말 21에도 나온다:“우리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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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 과 선 행 의 실 천 으 로(fide vel observantia bonorum) 허리를 묶고 복음 성서의 인도함을 따라 주님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여기에서도 신앙 과 선행의 실천은 함께 나오는데, 선행의 실천은 신앙의 외적 표현이다. 이렇게 conversatio와 선행의 실천은 둘 다 믿음의 외적 표현으로 성숙한 conversatio는 선행의 실천으로도 드러난다. Conversatio, 신앙, 선행의 실천은 모두 다 복음 성서의 인도를 받으며, 주님의 길을 따라 그분 나라 에 이르기까지 계속 성숙되어 나아간다. “그들은 수 도 생 활 에 풋 열 심 에 서 가(fervore novicio conversationis) 아니라, 수도원 안에서 오랫동안 훈련을 받고 나서 많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악마와 대항하여 싸우는 법을 배우고, 잘 훈련되어 형제들의 진 지로부터 나와 광야에서 단독으로 싸움을 함에 있어 이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그들 자신의 손과 팔만으로 써 육체와 생각의 악습을 거슬러 싸우기에 충분한 이들이다”(베규 1,3). 은세 수도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 문장에서 conversatio, 즉 수도 생활은’초기의 풋 열심’의 성격을 띤다. 풋 열심한 conversatio가 참된 열정을 가진 성숙한 conversatio의 모습을 띠게 되려면 수도원 안에서 오 랫동안 훈련을 받아야 한다. 수도생활의 성숙은 수도원 안에서 많은 형제 들의 도움으로 악마와 대항하여 싸우는 법을 배움으로써 얻어진다. 잘 훈 련되어 성숙한 수도생활을 하게 된 이들은 이제 하느님의 도우심에 힘입 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의 육체와 생각의 악습을 거슬러 싸울 수 있다. 여기에서는 conversatio가 내적 투쟁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회 수도생활에서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싸우고, 은세 수도생활에서는 자 신의 손과 팔 만으로 싸운다. Conversatio가 갖는 강한 역동성과 지속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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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성숙되어 가야 하는 특성을 볼 수 있다. 비 참 하 기 짝 이 없 는 이 런 자 들 의 수 도 생 활(miserrima conver“비 satione)에 대해 말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편이 더 낫겠다” (1,12). 이 문장은 사라바이따와 기로바꾸스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들의 삶 을“비참하기 짝이 없는 수도생활”이라고 표현한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 수도생활 모습은 규칙이나 경험의 가르침으로 단련되지 않고(1,6), 행 실로써는 세속에 충성을 지키며(1,7), 목자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의 무리 안에서 살며(1,8), 자신의 뜻에 따라 살면서(1,9) 순명하지 않는다. 또한 항상 떠돌아다니면서 한 번도 정주하지 않고(1,11), 자신의 뜻과 탐식에 빠져서 산다(1,11).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이 수도생활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conversatio의 모습을 반추해 볼 수 있다. 즉 규칙이나 경험의 가르침으로 단련 되어, 세속을 따르지 않고, 목자 밑에서 순명하며, 떠돌아다니지 않고 정 주하며, 탐식을 멀리하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생활 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기로바꾸스들의 특징인 정주하지 못하는 것과 사 라바이따들과는 거리가 먼 순명은 베네딕도회 회 수도자들의 참된 수도 생활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들로서 58,17의 서원 양식에 제시된다. “그들 중에 평판이 좋고 생 활 이 거 룩 한(sanctae conversationis) 형 제들을 뽑아 십인장들로 세울 것이다”(21,1). 여기에서는 거룩한 수도생활을 십인장의 자질로 제시하고 있다. 형제들 에게 좋은 평판을 받으며, 생활이 거룩한 수도자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 키며 아빠스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21,2)으로 아빠스의 짐을(21,3)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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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어 맡길 수 있을 만큼 신뢰할 수 있고 성실하며,“생활의 공로(vitae 와“지혜의 학식(sapientiae doctrinam)” 이 있는 자(21,5)이다. meritum)” “침구는 수 도 생 활 의 방 식 에 맞 게 (pro modo conversationis) 자기 아빠스가 분배하는 대로 받을 것이다”(22,2). 여기에서 침구는 침대뿐만 아니라 침방에서 필요한 모든 비품, 또는 수 도생활을 하면서 필요로 하는 물질들을 의미한다. 수도자도 물질이 필요 하다. 그런데 물질을 소유하는 기준은 수도생활의 방식에 맞게, 즉 소박 하고 검소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수도생활의 방식에 맞게(pro modo conversationis)”라는 표현은 수도생활에서의 공통 기준을 말할 수도 있 고, 각자의 수도생활(수행)의 정도에 따른 기준일 수도 있다.14) 참고로 『빠꼬미오의 생애』에 보면 천사가 수도자 개개인의“삶과 습관의 정도에 따라서(pro modo conversationis et propositi)”15) 수도자들을 분리시키 라고 빠꼬미오에게 명령하는 부분이 나온다. 또한 아우구스티노 규칙에 서도 장상은 수도자 각자의 필요에 따라 음식과 옷 등을 분배한다(praec. 1,3-4). 마찬가지로 베네딕도 성인도 수도자 각자의 수도생활의 성숙도에 따라서 침구를 분배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수도 공동체 전체가 지켜야할 공통적인 기준도 있겠지만, 아 빠스는 수도자 각자의 삶의 방식, 즉 각각의 고유한 수도적 삶의 태도(성 숙도)에 맞게 침구를 결정한다. 이 침구들을 분배하는 기준은 아마도 세 ‐‐‐‐‐‐‐‐‐‐‐‐‐‐‐‐‐‐‐‐‐‐‐‐‐‐‐‐

14) 참조. La Regola di San Benedetto, Traduzione e commento di Anna Maria Quartiroli, Ed. Abbazia di Praglia 2002, Bresseo di Teolo, 182. 15) Vita Latina Sancti Pachomii 22, La Vie Latine de Saint Pachome traduite du Grec par Denys le petit, H. van Cranenburgh(Ed.), Societe des Bollandistes, Bruxelles, 1969,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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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방식과는 다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즉, 수도생활에 좀 더 진보하고 육체적으로도 건강한 사람은 더 거칠고 소박한 침구를 받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약한 사람은 아마도 더 편리하고 화려한 침구를 받게 될 것 이다. “누가 수 도 생 활(ad conversationem)을 하고자 처음으로 찾아오 면……”(58,1). 이 문장에서 conversatio는 물리적인 장소이며 공동체로서의 수도원을 가리킬 수도 있고, 또 이 수도원에서 하는 수도생활이라는 삶의 내용을 가리킬 수도 있다. conversatio를 원하는 지원자는 그의 정신이 하느님으 로부터 왔는지(58,2),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지(58,7) 시험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을 참으로 찾는 지원자의 내적 태도는 하느님의 일, 순명, 모욕에 열성을 다하는가(58,7)를 통해서 드러나고, 또한 그의 청원에 있 어서의 항구함(58,3)과 머무름(58,9.11.13), 그리고 규칙의 준수와 장 상에 대한 순명으로(58,14) 드러나게 된다. “수도원 안에서 차례는 이렇게 정할 것이니, 즉 수 도 생 활 의 때 와 생 활 의 공 적(conversationis tempus, ut vitae meritum)에 따를 것이며 또한 아빠스가 정하는 대로 할 것이다”(63,1).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이 문장의“수도생활의 때(conversationis tempus)”를 수도생활을 시작한 때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 표현은 두 가지 방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수도원에 처음 들어온 입회의 때를 가리킬 수 있고, 수도원에 입회하여 지금까지 수도생활을 하며 살아온 모든 시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처음의 경우는 시작, 순간적인 의미가 있으며, 두 번째 의 경우는 지속성의 의미가 있다.“수도생활의 때와 생활의 공적”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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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고 있는데,“생활의 공적”은 십인장의 자질에서도(21,5)“거룩한 수 도생활”과 함께 언급된 적이 있다. 아마도 수도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생활은 더욱 덕스러워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거룩한 수도생활의 한 요소이다. “우리가 이 규칙서를 쓰는 것은 수도원들 안에서 이것을 지킴으로써 어 느 정도 품행을 올바르게 하며(honestatem morum) 수 도 생 활 을 시 작 (initium conversationis)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수 도 생 활 의 완 덕(conversationis perfectionem)을 향해 달려 가려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이 있으니, 이것을 지 키는 사람은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73,1-2). 여기에서 conversatio는 수도생활 방식, 또는 수도자다운 삶을 의미한 다. 규칙의 준수를 통하여 어느 정도 올바른 품행의 삶을 살게 될 때 비로 소 수도생활을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 라 수도생활의 완덕을 향하여 더욱 달려가게 된다.‘달려간다’는 표현은 수도생활의 역동성을 강하게 드러내주며, conversatio에 있어서도 수도 자 개개인의 삶에 따라 시작과 완성 등 여러 수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2. Mos Mos는 베규에 7번 나온다(2,31; 31,1; 32,1; 36,9; 58,17; 72,5; 73,1).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보기로 하겠다. “또한 그는 영혼들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 질 을(moribus) 맞추 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2,31). 여기에서 기질이라고 표현된 mos는, 나이나 교육, 또는 여러 가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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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의해서 형성된 수도자들의 다양한 성품 들을 의미한다. “수도원의 당가로 선정될 사람은 공동체에서 지혜롭고, 성 품 이 완 숙 하 고(maturis moribus), 절제있고, 많이 먹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부산 떨지 않으며, 욕을 하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낭비벽이 없고, 오히려 하 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아버지 처럼 해야 한다”(31,1). 당가에게 요구되는 자질로 먼저 지혜와 성품의 완숙을 이야기 한다. 지 혜롭고 성품이 완숙한자들의 특징은 구체적으로 절제있고, 많이 먹지않 고, 자만하지않고, 부산떨지 않으며, 욕을 하지않고, 느리지 않으며, 낭비 벽이 없고, 하느님을 두려워한다. 이들은 또한 수도원 전체를 아버지다운 마음으로 보살필 줄 안다. 이 문장에 표현되어 있는 내용들 이외에도 31 장 전체에서 당가에게 요구되는 내용들은 완숙한 성품을 지닌 자의 모습 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아빠스의 명령에 순종하고(31,4.5.12.15), 하느 님께 헴 바칠 것을 분명히 알면서 행동하며(31,6.16), 겸손되이 (31,7.13.16),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형제들을 슬프게 하지 말며 (31,6.7), 형제들에게 불만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31,16), 수도원의 모든 것들을 제단의 축성된 그릇처럼 여겨 아무것도 소홀히 다루지 말며 (31,10.11), 온갖 염려를 다하여 병자들과 어린이들과 손님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줄 안다(31,9). “수도원의 재산, 기구들이나 의복들이나 그밖에 다른 물건들을 위해서 아빠스는 생 활 과 품 행 이(vita et moribus) 믿을 만한 형제들을 뽑 아……”(32,1). 여기에서 생활과 품행은 함께‘믿을 만한 품행의 생활’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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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음식은 극히 허약한 병자에게만 회복을 위해서 허락할 것이며, 회복되었거든 관 례 대 로(more solito) 고기(음식)을 금할 것이다” (36,9). 여기에서 mos는‘관습’또는‘관례’로 사용된다. 육 체 나 품 행 상 의 약 점 들 을(infirmitates suas sive corporum sive “육 morum)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72,5). 여기에서의 mos는 약점들, 즉 약하고 나쁜 품행들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규칙서를 쓰는 것은 수도원들 안에서 이것을 지킴으로써 어 느 정도 품 행 을 올 바 르 게 하 며 수 도 생 활 을 시 작 하 고(honestatem morum aut initium conversationis)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73,1). 이 문장에서는 우리의 conversatio morum서원에 나오는 두 용어가 순 서가 바뀌어 나온다.“이것을 지킴으로써”와“어느 정도 품행을 올바르게 하며”와“수도생활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 즉 규칙의 준수와 올바른 품 행과 수도생활의 시작이 밀접하게 연결된다.‘수도생활과 좋은 품행’의 약속은 그 바탕에 규칙의 준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수도생활은 규 칙의 준수로부터 시작되며, 이것은 올바른 품행으로 드러난다.

3.3. Conversatio morum “입회가 허락된 사람은 성당에서 그의 정주와 수 도 승 답 게 생 활 할 것 과(conversatione morum suorum) 순명을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 앞 에서 서약하고……”(58,17). 이 본문의 conversatio는 오랫동안 conversio로 대치되어‘그의 품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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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회개)’라고 해석해 왔었다. 여기에서는 먼저 conversatio morum이 라는 표현의 문법적 양식을 살펴보고, 베규의 다른 부분들에 비추어 보 며, 스승의 규칙과 비교해 보고, 마지막으로 수도서원 양식 안에서 살펴 보겠다.

3.3.1. Conversatio morum의 문법적 양식 Conversatio morum은 설명 보충적 소유격(genitivus epexegeticus) 양식으로 이것은 베규 58,17을 이해하는 열쇠일 수 있다. 이 양식에 의하 면 conversatio는 mos를 통해서 이해하고, mos는 conversatio를 통해서 이해한다. 이들은 각자가 조금씩 독특한 강조점을 지니고 있지만 거의 동 의어처럼 사용된다. 여기에서 morum(품행의)은 소유격으로 쓰여졌지만 ‘생활과 품행’이라고 말할 때처럼 첫 번째 말을 설명하거나 반복하여 강 조하는 것이다. B. Steidle은 암브로시오의『동정성에 대하여 De Virginitate』10,59에 서 우리의 것과 같은 양식을 발견했다: “Nostra conversatio in caelis est(필리 3,20: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 다), conversatio morum, conversatio factorum, conversatio fidei.”16) 이 세 표현을 암브로시오는 conversatio et mores(품행), conversatio et facta(실행), conversatio et fides(신앙)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 다. 마치 베규 머리말 49에서 신앙과 수도생활이 함께 나오면서 (conversatio et fidei) 서로를 보완하고, 신앙이 강조된 수도생활을 말하 ‐‐‐‐‐‐‐‐‐‐‐‐‐‐‐‐‐‐‐‐‐‐‐‐‐‐‐‐

16) Ambrosius, De Virginitate 10,59, Opera omnia di Sant’Ambrogio 14/2, Virginità e Vedovanza II, Biblioteca Ambrosiana(Ed.), Città Nuova, Roma 1989,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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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 것과 같다. 이들 셋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더욱 일반적인 표현인 conversatio morum은 이어서 나오는 다른 두 표현에 의해서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따라서 베규 58,17의 conversatio morum은 conversatio et mores와 같다. 베네딕도 성인은 서원을 하는데 ‘3의 형식’17)을 갖추기 위해서 이 설명 보충적 소유격을 사용한다. 따라 서 ‘정주(stabilitas)와 conversatione와 moribus suis와 순명 (oboedientia)’대신에‘정주와 conversatione morum suorum과 순명’ 이라고 표현한다.18) 결국 conversatio morum suorum은 수도생활 양식 과 좋은 품행을 의미한다. 좋은 품행의 수도생활이다. 수도생활 양식의 삶을, 즉 수도자다운 삶을 살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좋은 품행이 동반되 는, 또는 좋은 품행의 모습을 띠는 그러한 수도생활이다.

3.3.2. 베규의 다른 부분에 비추어본 conversatio morum 58,17의 conversatio morum을 머리말 49-50; 1,2; 58,7; 58,14의 내용들에 비추어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 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의 가 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 ‐‐‐‐‐‐‐‐‐‐‐‐‐‐‐‐‐‐‐‐‐‐‐‐‐‐‐‐

17) 베네딕도 규칙, 특히 58장에는 세 번이라는 횟수가 자주 등장한다: 58,1-16까지 지 원자가 서원을 준비하는 단계를 세단계로 나눌 수 있고, 수련기동안의 일을 3가지 로 말하고 있고(5절 공부하고, 먹고, 잠자고), 7절에서는 하느님을 찾는 구체적인 표현을 3개의 ‘O’(opus Dei, oboedientia, obprobria)에 대한 열정으로 묘사하고 있으 며, 이 준비기간에 규칙서를 3번 읽어주고, suscipe me도 공동체가 3번 받는다. 그 리고 서원양식의 내용도 3개로 되어 있다. 이 3이라는 숫자는 일반적으로 삼위일체 에 대한 흠숭의 표시이며, 최상급을 의미하여 끊임없는 반복을 의미한다. 18) 참조. B. Steidle, “Der Genitivus epexegeticus in der Regel des Hl. Benedikt”,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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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 인이 되도록 하자. 아멘”(머리말 49-50). 머리말 49-50과 58,17은 둘 다 수도생활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머 리말의 내용이 영적 인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58,17은 제도적이며 법 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한다.19) 정주의 개념은 머리말 50의“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항구히”로 표현되며, 순명은“주의 가 르침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로 conversatio morum은 앞의 45절의“주님을 섬기는 학원”20)에서의 수행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특별히“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이라는 문장으로 확인된 다.21) 결국 conversatio morum은 주님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려가는 삶이다. “첫째는“회수도자”들이니, 그들은 수도원 안에서 살며,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분투하는 이들이다”(1,2). 58,17의 서원 양식은 베규 1장‘수도승들의 종류에 대하여’에서 회수 도자들을 정의하고 있는 내용들과도 부응한다. 어떻게 보면 회 수도자들 을 정의하는 주요 요소들이 그들의 서원 내용에 들어있는 것은 당연한 귀 결일 것이다. 회수도자들은“수도원 안에 살며,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분 투하는 이들”이라고 정의된다. 여기에서“수도원 안에 살며”는 정주에,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는 순명에, “분투하는 이들”은 conversatio morum에 부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내면적으로“규칙”이 ‐‐‐‐‐‐‐‐‐‐‐‐‐‐‐‐‐‐‐‐‐‐‐‐‐‐‐‐

19) 참조. A. Borias, “Une nouvelle ition de la Règle de Saint Benoit”, Revue d’Histoire de la Spiritualité, 49, 1973, 125. 20) 참조. 맺는말. 21) 참조. A. Wathen, “Conversatio and Stability in the Rule of Benedict”, Monastic Studies 11, 1975,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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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 morum과도 연결된다. 이것은 기로바꾸스(정주가 없는)와 사라바이따(순명이 없는)들의 삶의 특징과 전적으로 대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은세 수도자들의 홀로 사는 생활과도 대조가 되는데, 은세 수도자 들은 공동체 생활 없이 홀로 분투하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conversatio morum 서원은 수도원 안에 정주하며 형제들과 함께, 아빠스에게 순명하면서 규칙에 따라 자신과의 싸움에 분투하겠다 는 것이다. “그는 그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지. 하느님의 일과 순명과 모욕에 열 성을 다하는지 보살필 것이다”(58,7). 58,17의 성당에서의 서원 약속, 정주와 수도자다운 생활과 순명은 58,1-16까지의 전 서원 준비과정 동안 받은 양성 내용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58,7은 이 서원 준비과정의 핵심이 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는 데,“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지”와 그의 구체적인 표현인 하느님의 일, 순 명, 모욕에 대한 열성은 모두 conversatio morum에 부응한다고 볼 수 있 다. 좀 더 세분해 보면, 순명은 말 그대로 나오고 있으며, 정주는 모욕에 대한 열성에 부응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느님의 일에 대한 열성은 시간 전례에 대한 열성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기도생활과 하느님을 중심으 로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에 대한 열성을 의미하며,22) 이것은 conversatio morum에 부응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conversatio morum 은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하는 모든 일에의 열성, 즉 하느님의 일에의 열 성을 의미하며, 정주와 순명을 기본으로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찾는 생활 ‐‐‐‐‐‐‐‐‐‐‐‐‐‐‐‐‐‐‐‐‐‐‐‐‐‐‐‐

22) 김영희 데오필라,“하느님 찾기(Quaerere Deum) - RB 58,7‘그가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지, 하느님의 일과 순명과 모욕을 (참아받는데) 열성을 다하는지’ 에 대하여” , 코이노니아 23집, 1998 가을, 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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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스스로 심사숙고하여 모든 것을 준수하며 그에게 명 하는 모든 것을 준행할 것을 약속하거든 그때에는 공동체에 받아들일 것 이다”(58,14). 58,17에서 공적으로 서원을 하기 전에, 정주에 대한 약속은 이미 9절에 서, 순명은 14절에서 약속한 바가 있다. 오랜 시험기간을 거친 수련자에 게 세 번째로 규칙서를 읽어준 후(13절), 그가 모든 것을 준수하며 그에 게 명령된 모든 것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면 그를 공동체에 받아들인다. 규 칙을 지키고 장상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마지막 약속에서 모든 것, 즉 규 칙을 준수함은 conversatio morum과, 명하는 모든 것을 준행함은 순명 과,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것은 정주와 연결된다.23) 그리고 이어서 15절에 “그날로부터 수도원을 떠나지 못하며” 라는 말로 정주를 다시 설명한다.

3.3.3. 스승의 규칙24)과의 비교 ① Conversatio와 conversio 스승의 규칙(이하‘스규’)에는 conversatio morum이라는 표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conversatio라는 용어도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conversio는 4번 나온다. 그런데 베규는 conversio를 한 번도 사 용하지 않는다. 베규에서 conversatio가 들어 있는 구절들로 스규에 부응 하는 부분들을 함께 비교해 보겠다. ‐‐‐‐‐‐‐‐‐‐‐‐‐‐‐‐‐‐‐‐‐‐‐‐‐‐‐‐

23) A. de Vogüé, “La formazione e le promesse del monaco in San Benedetto”, Ora et Labora(Milano) 48, 1993, 55. 24) La Règle du Maitre I-II, Sources Chrétiennes 105-106, A. de Vogüé(Ed.),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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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규 1,3“conversationis fervore novicio”. 스규 1,3“conversionis fervore novicio”. 베규 1,3에서 베네딕도 성인은 스규 1,3의 conversionis를 conversationis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두 규칙에서 이 내용들은 모두‘수도생 활에 풋 열심함’을 의미하며, conversatio와 conversio는 둘 다‘수도생 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베규 58,1“누가 수도생활을 하고자(ad conversationem) 처음으로 찾 아오면……”. 스규 90,1“어떤 이가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세속을 떠나 수도원에 들 어와 수도생활을 하겠다는(velle converti) 뜻을 밝히더라도……”. 90,6“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완전하게 하려는 사람은(in monasterio converti perfecte voluerit)……”. 90,60 “수도원안에서 살기를 갈망하고(in monasterio cupiens converti)……”. 여기에서도 베규 58,1의“수도생활(conversatio)을 하고자 찾아오면” 은 스규 90,1의“수도생활을 하기를(converter) 원하면”과 부응하며, 둘 다 수도원에의 입회를 요청하는 것이다. 스규에서 convertere(돌리다, 개 심하다, 방향을 전환하다)는 항상 수도생활을 받아 안는 의미가 있다. 스 규 90,6.60에서도“수도원에서(in monasterio)”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convertere는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런데 베네딕도 성인은 의도적으로 conversio와 converti라는 말을 피하 고 대신 conversatio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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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역사 안에서는 오랫동안 이 conversatio를 스규의 conversio로 바꾸어 사용해 왔었다. 왜냐하면 conversio는 회개라는 분명하 고 단순한 의미가 있는데, conversatio는 그 의미가 너무나 다양하여 이 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수도생활을 회개의 생활로 이해 해 왔다. 이 두 용어를 비교해 보면, conversio는 처음에 한 번 전폭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 회개하는 것 이다. 스규는 수도원에 입회하는 것을 죄 많은 세상으로부터 한 번 전폭 적으로 돌아서서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에 수도원 밖의 세상 은 죄가 더 많은 세상이라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이 그 안에 깔려 있게 된다. 반면에 conversatio는 삶의 양식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하느님께로 돌 아서는 회개의 생활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베규 머리 말 2.38; 2,18; 7,30; 63,7) 여기에서 회개라고 할 때에 이 회개는 수도 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돌아서는 삶의 양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다. 그리고 이때에는 수도원 밖의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이 내포되지 않는다. 수도원에 와서도 계속해서 돌아서야 하기 때문이다. 베네딕도 성 인에게 수도생활은 수도원 밖의 생활로부터 한 번 전폭적으로 돌아서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 밖의 세상에서 사는 것과는 좀 다른 방식으 로 살아가는 하나의 역동적이며 지속적인 삶의 양식이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생활을 표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conversio를 피하고 conversatio를 사용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수도생활이 conversio보다는 conversatio가 의미하는 수도생활에 대한 개념에 더 부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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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스규는 conversio를 사용하며 conversatio라는 말은 한 번도 사 용하지 않는데, 그것은 conversatio가 스규가 말하고자하는 수도생활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5)

② 베규와 스규의 서원 양식 “제게 읽어준 규칙서의 규율에 따라 당신의 수도원 안에서 하느님을 섬 기기를 원합니다(volo Deo servire per disciplinam regulae mihi lectae in monasterio tuo)”(스규 89,8). 스규의 서원 양식에는 베규에 나오는 세 가지 서원 양식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속에서 베규의 서원 양식에 들어 있는 내용들을 찾 아 볼 수는 있다.“수도원 안에서”라는 표현에는 정주가,“당신의”라는 말에는 순명이,“규칙서의 규율에 따라”는 conversatio morum이 부응한 다. 그리고“하느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은 앞의 모든 약속을 포 함하면서 다시 conversatio morum에 부응한다. 이 말은 베규 머리말 45(스규 시편주해 45)에 나오는“주님을 섬기는 학원(dominici scola servitii)”을 기억나게 한다.‘섬기다’는 말은 고대인들에게는 주인에 대 한 종의 온전한 종속을 의미했다. 수도생활은 자신을 하느님께 자발적으 로, 온전히 봉헌하여 어떤 의미에서 종처럼 종속되어서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종은 주인에게 영구적으로 종속되며, 주인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므로 근본적으로 정주와 순명을 살게 된다.26) 이렇게 볼 때 ‐‐‐‐‐‐‐‐‐‐‐‐‐‐‐‐‐‐‐‐‐‐‐‐‐‐‐‐

25) A. Wathen, “Conversatio and Stability in the Rule of Benedict”, 29. 26) A. de Vogüé, “La formazione e le promesse del monaco in San Benedetto”,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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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 morum서원은 규칙서의 규율에 따라 정주와 순명 안에서 하 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3.3.4. 베규의 수도서원 양식 베네딕도 성인은 베규 58,17에서 정주, conversatio morum, 순명이라 는 세 가지 서원을 하도록 하고 있지만 각각 독립된 세 가지 서원을 말하 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수도생활을 하겠다는 약속,27) 즉 수 도생활이라는 삶의 방식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르며 섬기겠다 는 하나의 약속을 하게하고 싶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베네딕도 성인은 이 58장에서 3이라는 숫자를 즐겨 사용한다.28) 그리고 서원도 3의 형식을 갖춘다. 수도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정주와 순명을 양쪽에 집어넣고 서원의 내용인 conversatio morum은 설명 보충적 소유격을 사용하여‘수도생활과 좋은 품행의 생 활’을 하나로 묶어 모두 3이라는 서원 양식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서원 양식에 있는 세 가지 표현은 세 가지 양상으로 표현된 하나의 약속 으로 결국‘좋은 품행을 갖춘 수도자로서 수도자다운 삶을 살겠다는 conversatio morum’서원이다. 그리고 이 안에 하 느 뇟 넺� 찾으며 주 뇟 넺 � 섬기는 수도자로서 살아야할 모든 내용들, 즉 정주와 순명, 겸손, 침묵, 사랑, 손님접대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 고 본질적인 두 요소는 정주와 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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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Lorenzo Sena, Appunti sulla Regola di San Benedetto, Monastero San Silvestro Abate, Fabriano 2002, 384. 28) 참조. 각주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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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말 Conversatio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은 의미가 부정확한 것이 라기보다는 그 의미가 너무 많다는 데에 있다. 불가타 성경에서 conversatio는 일반적으로‘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이‘삶의 방식’은 긍 정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아주 구체적이고 실천적이기도 하다. 또한 동사 의 경우에는 지속성과 역동성, 그리고 공동체성이 드러난다. 수도 문헌에 서 이 말은‘수도생활 양식’, 그 중에서도‘수덕생활’을 지칭하면서 그 의미가 좀 더 구체화되었다. Mos는‘관습’, 또는‘품행’을 의미한다. 불가타 성경에서 이 말은 일반 적으로 윤리성을 띠지 않는데,‘품행’이라고 쓰인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좋은 품행을 의미하며 이때에는 주로 복수로 쓰였다. 반면에 카시아노에 서는 악습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베규에서는 긍정적인 의미가 우세하다. 베규에서 conversatio는’수도생활’, 또는’수도적 삶의 방식’을 의미한 다. conversatio는 믿음과 함께 계속 성숙되며, 신앙의 외적 표현으로 선 행의 실천 등 구체적인 삶의 태도와 관계된다. 신앙과 선행의 실천, 수도 생활은 모두 복음 성경의 인도를 받아 주님의 길로 향한다. 참된 conversatio는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아빠스에게 순명하고, 규칙을 지키 며 형제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육체와 생각의 악습을 거슬러 싸우는 가운 데에 형성되고 성장된다. 베규에서 conversatio는 사라바이따나 기로바꾸스들의 conversatio처 럼 비참한 모습일 수도 있고, 십인장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거룩한 모 습일 수도 있다. 또한 초보자의 풋 열심한 모습일 수도 있고, 수도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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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단련을 통해서 얻어진 참된 열정의 모습일 수도 있다. 성숙한 수도 생활을 하는 자는 구체적인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의 성숙함이 드러 나게 된다. 개개인의 신앙과 삶의 성숙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여러 수준의 수도생활(conversatio)을 살게 되는데, 수도생활은 규칙의 준수를 통해서 어느 정도 올바른 품행의 삶을 살게 되며 이때에 conversatio를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통해 더욱 성숙되어 가며 완덕에 이르게 된다. 베규에서 mos는’품행, 관습, 기질’을 의미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 되는 경우를 아주 배제할 수는 없지만(72,5), 올바르고, 믿을 수 있고, 성숙한 좋은 품행이라는 의미가 우세하다. 완숙한 품행의 삶을 사는 수도 자의 모습은 절제 있고, 많이 먹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부산떨지 않으 며, 욕을 하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낭비벽이 없고, 하느님을 두려워한 다. 이들은 아버지다운 마음을 가지고 수도원 전체를 보살피고, 아빠스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느님께 헴 바칠 것을 분명히 알면서 행동하고, 겸손 되이, 모든 것을 절도 있게 하여 형제들을 슬프게 하거나 형제들에게 불 만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수도원의 모든 것들을 제단의 축성된 그릇처 럼 여겨 아무것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며, 온갖 염려를 다하여 병자들과 어린이들과 손님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준다. Conversatio morum은 문법적으로 설명 보충적 소유격 양식으로 복수 소유격인 morum은 conversatio의 의미를 강화하면서 conversatio의 동 의어처럼 사용되었다. 이 말은 결국‘좋은 품행을 갖춘 수도자다운 삶’을 의미하는데, 이 삶은 공동체 안에서 계속해서 역동적으로 죽을 때까지 성 숙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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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 morum 서원은 다른 두 개의 서원 즉 정주와 순명과 긴밀 한 관계를 가진다. 이 세 가지 서원은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 제로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 좋은 품행의 삶을 사 는 수도생활 양식의 삶을 살겠다는 하나의 약속이다. 베네딕도회 수도자 들은 conversatio morum 서원을 통하여 규칙에 제시된 구체적인 수도생 활 방식으로 좋은 품행의 삶을 살면서 특별히 이 수도원에서 형제들과 함 께 죽을 때까지 정주하고 순명하며 계속해서 육체와 생각의 악습을 거슬 러 싸우면서 하느님을 찾고 섬기기로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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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규칙서에 나타난 렉시오 디비나1)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I. 들어가는 말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고대 수도승 전통에서 전해져 온 고유 하고 독특한 영적 유산으로서 모든 수도자들의 중요한 영적 수행들 중의 하나였다.2) 그러므로 엄밀하게 렉시오 디비나를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만 의 고유한 영적 수행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베네딕도회 전통 안에서 이러한 수행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수 도회 역사를 살펴보면, 중세의 유럽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수도자들이 베 네딕도 규칙서를 따르고 있었기에, 그들에 의해서 이러한 수행은 폭넓게 공유되었고 베네딕도회 수도원 문화들 안에서 훌륭하게 꽃필 수 있었다. 성 베네딕도는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매일의 삶 안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진실로 사랑하고 온전히 실천하기를 바랐는데, 그는 이것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소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수행이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다.3)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렉시오 디비나가 베네딕도회 ‐‐‐‐‐‐‐‐‐‐‐‐‐‐‐‐‐‐‐‐‐‐‐‐‐‐‐‐

1) 이 글은 신학전망 153(2006년 여름, 70-89)호에 실렸던 글이다. 2) 고대 수도승 전통으로부터 내려온 성서에 대한 고유하고 독특한 영적인 렉시오 디비 (聖讀)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해 나(Lectio Divina) 수행을 필자는 오래 전부터“성독” 오고 있다. 이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성서 접근 방법이 아니라 정확히 수도승 전통에 기인한다. 이에 대해서는 참조. 허성준,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왜관: 분 도출판사, 2003. 3) 참조. Dom Sighard Kleiner, Serving God First, Cistercian Studies(이하 CS) 83, Massachusetts: Cistercian Publication, 1985, 82-83; Mattias Neumann, The Contemporary Spirituality of the Monastic Lectio, RFR 36, 1977,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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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에게 이토록 중요한 수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도는 자신 의『규칙서』(이하 RB)4)에서 오직 한 번만(48,1)‘렉시오 디비나’란 용 어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lectio란 말은 규칙서 여 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수도 자들의 개인 독서5)나 전례 중에 공동체적으로 듣게 되는 독서6) 또는 형 제들이 식사 중에 듣게 되는 식당 독서7) 그리고 형제들이 저녁 기도나 저 녁 식사 후에 함께 모여 듣게 되는 공동 독서를 언급하면서 공통적으로 lectio란 용어를 사용하였다.8) 그러나 이 글에서 우리의 관심은 전례 독 서, 식당 독서 혹은 공동 독서가 아니라 고정된 시간에 베네딕도회 수도 자들이 행했던 개인 독서의 수행인 렉시오 디비나이다. 만약 이러한 수행 이 진실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그렇듯 중요했다면, 어째서 베네딕 도 성인은 자신의 규칙서에서 오직 한 번만 명확하게 그 용어를 언급하였 을까? 이 물음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하나의 의문으로 남는다. 이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RB 48장을 자세 히 살펴보아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몇 가지 중요 한 사실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째, 렉시오 디비나와 위에 언급된 다른 독서들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된 다른 독서들의 경우는 공동 독서 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모든 수도자들은 각자 홀로 독 ‐‐‐‐‐‐‐‐‐‐‐‐‐‐‐‐‐‐‐‐‐‐‐‐‐‐‐‐

4) 참조. 베네딕도, 성 베네딕도 수도 규칙, 교부 문헌 총서 5, 이형우 역주, 왜관: 분도 출판사, 1991. 5) Regula Benedicti(이하 RB) 4,55; 8,3; 48,4.5.10.13-14.17-18.22; 49,4. 6) RB 9,5.6.9.10; 10,2; 11,2.4.5.7.9.12; 12,4; 13,11; 14,2; 17,4.5.8.10; 18,10.18; 24,4; 44,6; 45,1. 8) RB 42,3.4.5.7. 7) RB 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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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모여 한 형제가 독서하면 다른 형제들 은 그것을 경청해야 했다. 반면에 RB 48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렉시오 디 비나는 수도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각자 홀로 행해야 했던 영적인 수행이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수도자들이 한 곳에 모여 다 른 한 형제의 독서에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아니라, 각자 조용한 곳에서 홀로 본문을 읽고 듣는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RB 48,1에 사용된 렉시오 디비나와 그 이후에 나오는 lectio란 단어의 연관성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많은 학자들은 RB 48장에 나오는 lectio란 단어는 바로 RB 48,1의 렉시오 디비나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 에 동의하고 있다. 왜냐하면 RB 48,2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 이다.“우리는 이 두 가지 일들을 위한 시간은 이렇게 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여기에서 두 가지 일들의 의미는 이미 1절에서 언급한 육체 노동과 렉시오 디비나를 뜻한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본고에서는 RB 48장을 근거로 해서 베네딕도 성인이 의도하고자 했던 렉시오 디비나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II. 고 정 된 시 간 의 배 경 RB에 따르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해야 했다. 이러한 수행을 위한 고정된 시간의 준수는 이 미 고대의 여러 문헌들과 규칙서들 안에서 발견된다. 먼저, 3세기 히폴리 토(Hippolytus, 170-236)의『사도전승』(The Apostolic Tradition)에 의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모이지 않는 날에는 그 날 아침에 각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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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개인적으로 독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41항). 그리고 4세기 스페인의 수녀였던 에제리아(Egeria)의『예루살렘 순례』(The Pilgrimage to Jerusalem)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는 사순 시기동안 제1시 부터 제3시까지(대략 오전 7-9시) 매일 주교로부터 교리 교수가 있었는 데, 이때 신자들은 성서를 함께 읽고 배웠다고 한다.9) 예루살렘에서의 사 순절 기간 동안 행했던 공동 독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루의 시작에 행했 던 3시간 독서의 수행이 전파되는데 크게 공헌하였음을 우리는 400년경 의 여러 문헌들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의 펠라지 오, 이집트의 에바그리오, 동방의 위(僞)-아타나시오의 글들과 서방의 네 교부들의 규칙서들 안에서 이러한 근거들을 우리는 쉽게 발견하게 된다. 특히 펠라지오는 데메트리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매일의 노동 시간 전 에 3시간 독서를 하는 것은 하느님께 봉헌된 훌륭한 부분임을 지적하고 있다.10)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친구로서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에서 성인과 함께 수도 생활을 했으며, 아우구스티노가 떠난 후에 그 공동체를 책임졌던 알리피오(Alipius)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수도원 규정서(Ordo Monasterii)에서는, 제6시부터 제9시(대략 정오-오후 3시)까지 식사 전 에 수도자들은 독서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제3항).11) 이것은 수도자들이 육체의 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할 필요 ‐‐‐‐‐‐‐‐‐‐‐‐‐‐‐‐‐‐‐‐‐‐‐‐‐‐‐‐

9) 참조. Egeria, Diary of a Pilgrimage, George E. Gingras(trans.), New York: Newman Press, 1970, 123-125. 10) 참조. Adalbert de Vogüé, Daily Reading in Monasteries, CS 26, Massachusetts: Cistercian Publication, 289-290. 11) 참조. George Lawless, Augustine of Hippo and his Monastic Rule, Oxford: Clarendon Press, 1987,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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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배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400년경 쓰여진 성 아우구스티노 의『수도승들의 노동』(De Opere Monachorum)12)에서는, 독서를 위해 “따로 떼어진 시간”(seposita tempora), 즉 독서를 위해 보장된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13) 410년경 프랑스 남부의 레랭(Lérins)에서 쓰여진『네 교부들의 규칙 서』(RIVP: Regula Quattuor Patrum)에서도 아침에 독서를 위한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14) 즉 수도자들은 제1시부터 제3시까지의 시간을 하느님 께 온전히 봉헌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당시 수도 자들이 독서나 묵상을 어떻게 구분해서 행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독서(lectio)와 묵상(meditatio)이 비슷한 용어로 함께 혼용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네 교부들의 규칙서』에서 사용된‘Deo Vacetur’라는 표현이 독서와 묵상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515년경에 쓰여진『동방 규칙서』 (Regula Orientalis)에서는 명확하게 독서에 관해 말하고 있다. 즉 형제 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제3시까지 독서(lectio) 할 수 있다는 것이 다.15) 그 후 535년경에 쓰여진『교부들의 제3규칙서』(3RP: Tertia Regula Patrum)에서도 독서가 명확하게 언급되고 있다. 즉 형제들은 새 ‐‐‐‐‐‐‐‐‐‐‐‐‐‐‐‐‐‐‐‐‐‐‐‐‐‐‐‐

12) De Opere Monachorum은 성 아우구스티노가 400년경에 카르타고(Carthage)의 주 교였던 아우렐리우스(Aurelius)의 요청에 의해 집필한 것으로서, 이것을 통해서 우 리는‘수도자들의 기도와 일’ 에 관한 아우구스티노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13) St. Augustine, The Work of Monks, Mary S. Muldowney(trans.), vol.16, New York: The Fathers of the Church, 1952, 362-363. 14) 참조. Early Monastic Rules, Franklin/Havener/Francis(tran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82, 24-25: “A prima hora usque ad tertiam Deo vacetur.” 15) 참조. Early Monastic Rules, 72-73: “Quibus erit potestas legendi usque ad horam terti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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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기도 후부터 제2시까지 독서(lectio)에 전념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 다.16) 프랑스 투르의 마르티노(St. Martinus, 316/35-397)의 제자들 중에서 젊은 형제들은 성서를 필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 반면에, 성숙한 형제 들은 하루 온종일 기도에 전념하였다. 한편 동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카 르타고의 수도자들은 시리아의 메살리아니즘(Messalianism)17)과 같이 오직 독서와 기도만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요한 가시아노에 따르면, 이집 트 수도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육체 노동을 하면서 미리 외워둔 성서 본문을 끊임없이 암송하는 되뇌임 수행18)을 하였다. 그들은 명확하게 독 서를 위해 특별한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다른 시간들 안에 서 혹은 전례 안에서 성서 본문을 읽고 배웠을 것이다. 한편 라틴 수도자들은 위와 같은 극단적인 측면을 피하기 위해, 영적인 수행으로서 독서를 최소한 하루에 2-3번 배정하였다. 비록 독서는 노동 시간보다는 적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수도자들의 마음은 지상적인 것들로 부터 벗어나 마음의 깊은 중심에 언제나 하느님 말씀을 간직할 수 있었 다.19) 이러한 배경 하에 성 베네딕도는 규칙서 같은 렉시오 디비나를 위 ‐‐‐‐‐‐‐‐‐‐‐‐‐‐‐‐‐‐‐‐‐‐‐‐‐‐‐‐

16) 참조. Early Monastic Rules, 54-55: “Matutino dicto fratres lectioni vacent usque ad horam secundam.” 17) 메살리아니즘은 4세기 시리아에서 발생했던 이단으로서, 그들은 수도 생활에 있어 모든 일을 삼가며 지나치게 기도와 신비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영혼의 심 리적 체험과 성령의 은총을 동일시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참조.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334. 18) 필자는 이러한 고대 수도자들의 묵상 수행을“반추 기도” 라고 명하였다. 참조. 허 성준,“수도승 전통에 따른 성서 묵상법 반추 기도” : 神學展望, 115, 광주: 광주가 톨릭대학교출판부, 1996, 131-157; 동일 저자,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왜 관: 분도출판사, 2003. 19) 참조. Adalbert de Vogüé, Daily Reading in Monasteries, 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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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고정된 시간을 제자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III. 렉 시 오 디비나의 시 간 성 베네딕도는 RB 48장에서 계절에 따라 렉시오 디비나의 시간을 각 각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형제들의 식사나 혹은 성무일도 를 위한 시간 구분과는 다르다.20)『베네딕도 규칙서』(RB) 48장에서는 10월 1일과 사순절을 기점으로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는 반면에, 이에 대 비되는『스승의 규칙서』(RM)21) 50장에서는 9월 27일을 기점으로 두 시기로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22) 아무튼 베네딕도는 여름철 동안에 ‐‐‐‐‐‐‐‐‐‐‐‐‐‐‐‐‐‐‐‐‐‐‐‐‐‐‐‐

20) RB 8장‘밤에 바칠 성무일도에 대하여’ 에서는, 성무일도를 위한 시간을 두 시기로 구분한다. 즉 11월 1일부터 부활절까지의 겨울 시기와 부활절부터 11월 1일까지의 에 여름 시기로 구분한다. 한편 RB 41장‘형제들이 어느 시간에 식사해야 하는가’ 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절부터 성령강림 대 축일까지이고, 둘째는 성령강림 대축일부터 여름철 동안이다. 셋째는 9월 13일부터 사순절 시작까지이며, 넷째는 사순절 시작부터 부활절까지이다. 반면에 RB 48장 ‘매일의 육체 노동에 대하여’ 에서는 육체 노동과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시간 배정 을 다음과 같이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절부터 10월 1일까지이 다. 둘째는 10월 1일부터 사순절 시작까지이다. 셋째는 사순절 기간 동안이다. 21)『스승의 규칙서』 (Regula Magistri: 이하 RM)는 6세기의 작품으로 저자는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고대 규칙서들 중에서 가장 분량이 길며, 이전의 규칙 서들에 비하면 매우 체계적이고 정확한 규칙서이다. 이 규칙서는 RB에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던 고대 규칙서들 중의 하나로써 분량 면에서 RB보다 3배 가량 길다. 참조. The Rule of the Master, Luke Eberle(trans.), CS 6, Massachusetts: Cistercian Publication, 1977. 22) 스승의 규칙서는 두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즉 9월 24일부터 부활절까지의 겨울 시 기와 부활절부터 9월 24일까지의 여름 시기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RB 48장과 RM 50장 사이에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RB는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한 반면에 RM은 두 시기로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RB는 제일 먼저 여름철 시기 를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RM은 겨울철 시기를 언급하고 있다. 셋째, RB는 여름철 과 겨울철의 기점으로써 10월 1일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RM은 그 기점을 9월 24 일로 사용하고 있다. 넷째, RB는 겨울철에 대해서는 4구절을 할애하고 있는 한편 여름철에 대해서는 더 길게 7구절을 할애하고 있다. 반면에 RM은 동일한 30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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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부활절부터 10월 1일까지) 제1시부터 제4시까지 수도자들이 노동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일 수 있는23) 제4시부터 제6시(대략 오전 10-12시)까지 수도자들이 각자 홀로 렉시오 디비나 수 행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RB 48,4). 반면에 RM에서는 수도자들이 각 자 따로 하는 개인 독서가 아니라 함께 모여서 하는 공동 독서(common reading)를 육체 노동 후인 제9시부터 저녁 기도 전까지 행하라고 권고하 고 있다(RM 50,62). 이 점에서 드 보궤 신부는 RM에서는 독서가 바람 직하지 못한 시간에 배정되고 있는 반면에, RB에서는 독서가 하루 중 가 장 적합한 시간에 배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수도자들이 긴 육 체 노동 후인 오후에 독서를 할 경우, 피곤하고 지친 상태에서 독서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독서를 한다는 것이 인간 조건상 어려울 수 있다. 반면에 오전의 독서는 분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 려 집중해서 독서를 하기에 적합하고 바람직한 시간일 수 있다. 베네딕도 는 이런 측면에서 렉시오 디비나의 중요성을 직시하여 여름철 동안에는 오전에 독서를 위한 시간을 배려하였는지도 모른다. 베네딕도는 겨울철(10월 1일부터 사순절 시작까지)에는 렉시오 디비나 를 아침과 저녁에 배정해 놓은 반면에, 수도자의 노동은 제3시부터 제9시

에서 여름철과 겨울철의 시기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23) 반 젤러(Hubert Van Zeller)에 의하면, 베네딕도는 노동에 우선권을 두고 있기에 가 장 좋은 시간에 노동을 배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드 보궤 신부는 그 반대 로 베네딕도가 여름철 동안 가장 좋은 시간에 독서를 고려하였다고 주장한다. 더욱 이 드 보궤 신부는 렉시오 디비나의 측면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노동에 대한 지나 친 강조를 경계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조. Hubert Van Zeller, The Holy Rule, London: Sheed and Word, 1958, 295; Adalbert de Vogüé, Rule of St. Benedict: A Doctrinal & Spiritual Commentary, CS 54, John B. Hansbrouck(trans.), Massachusetts: Cistercian Publication, 1983,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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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배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때는 낮 시간이 짧고 밤 시간이 길기 때 문이었다(RB 48,10-11).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이 시기에 제2시까지 독 서에 전념해야 했고, 제9시경과 연이은 식사 후 저녁 기도 때까지 또한 독서를 해야 했다. 이러한 독서는 RM에서 제시하고 있는 공동으로 하는 독서가 아니라 개인 독서였다. 베네딕도는 겨울철에는 오침에 대해서 언 급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시기에 밤이 길기 때문에 잠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한편 RM은 제1시부터 제3시까지 서로 떨어진 장소에서 십인장들과 함 께 한 형제가 독서를 하고 다른 형제들은 그것을 듣는 공동 독서의 수행 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RM 50,10). 제6시경 후에 수도자들은 각자의 작업장으로 되돌아가서 제9시까지 침묵 중에 노동을 하게 되는데, 이때에 도 한 수도자가 책을 소리 내어 읽고 다른 형제들은 그것을 듣는 공동 독 서의 수행을 언급하고 있다(RM 50,27-30). 여기에서 보듯이 RM은 고 대 수도 전통 안에서 지켜오던 일과 독서의 수행을 동시에 하도록 제시하 고 있다. 반면에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그의 수도자들에게 일하는 중에 이러한 독서의 수행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그는 인간의 신체적 조건들 때문에 RM이 제시하는 그러한 방법을 행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 지 않음을 경험을 통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베네딕 도는 독서와 일을 서로 다른 시간에 배정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RM과 RB의 큰 차이점들 중의 하나이다. RB에 따르면, 수도자들은 특별히 사순절 기간 동안 기도, 마음의 통회, 자기 부정 그리고 독서에 전념해야 했다(RB 49,4). 형제들은 사순절 동 안에 읽게 될 책(Codex)을 사순절을 시작하는 시점에 각자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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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48,15-16). 그들은 사순절 동안 아침부터 제3시까지 독서를 하였 다. 여기서 독서한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단순히 눈과 머리로 본문을 재빨리 읽는 묵독 수행이 아니라, 입으로 작게 본문을 소리 내어 읽고 그 것에 귀 기울여 듣는 수행을 의미한다.24) 그러나 RM에는 사순절 동안 독서의 시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아무튼 RB에서의 이러한 수행은 공동으로 독서를 수행했던 RM과는 다른 개인 독서를 의미했다. 그리고 RB에 따르면, 일요일에 모든 수도자들은 독서를 위한 자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수도자들에게 다른 주간들에 부과했던 독 서 시간과 같은 의무 사항이 아니라 하나의 권고 사항이며 선택사항이었 다. 우리는 그 당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일요일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독서에 할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개인의 열 심의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일요일에 대개의 경우 노 동은 없었지만, 수도원을 위해 여러 가지 직무를 맡은 형제들은 예외적으 로 노동을 해야만 했다(RB 48,22). 예를 들면, 주방이나 손님의 집이나 혹은 병실 등에 해당한다. 반면에 RM에 의하면, 형제들은 일요일 미사 전에는 아무것도, 즉 노동이나 심지어 독서조차도 모두 자제해야만 했다 (RM 75,3-4). 그러나 미사 후에는 자기 침대에 가서 휴식을 취하던지 혹은 개인적으로 독서를 하든지 전적으로 자유에 맡겨졌다(RM 75,56). 이 경우에도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긴 시간을 독서에 할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체적으로 RM과 RB 가 서로 다른 독서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 하루에 최소한 24시간을 독서를 위해 고정된 시간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그러한 필요성 ‐‐‐‐‐‐‐‐‐‐‐‐‐‐‐‐‐‐‐‐‐‐‐‐‐‐‐‐

24) 참조. Hubert Van Zeller, The Holy Rule, 30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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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시간표에 독서를 위한 시간을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IV. 여유로운 시 간 의 필 요 성 RM에 따르면, 수도자들은 매일 제6시경 후에 다시 자신들의 일터로 돌아가서 일하는 동안에 교육받은 한 형제가 큰 소리로 어떤 책을 읽어야 했다(RM 50,27-28). RM은 항상 수도원 안에서 수도자들에게 조용한 시간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 노심초사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시간들 에 혹시라도 수도자들이 죄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 러한 이유 때문에 RM은 그의 수도자들에게 고요한 시간을 거의 허락하 지 않고 있다. 반면에 사막의 수도자들과 파코미오 수도자들은 일하면서 동시에 고요히 각자 기억하고 있는 성서 본문을 암송하고 기도하는 수행 을 하였다. 한편 RB는 이집트 수도자들과 RM처럼 수도자들이 노동 중 에 행했던 독서나 혹은 묵상 수행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앞 에서 언급하였듯이 아마도 베네딕도는 일하면서 동시에 말씀을 암송하는 이러한 영적 수행들이 우리 인간의 심리적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규칙서에서 그것들에 대해 서로 다른 고정된 시간을 배려하였던 것 같다. 베네딕도는 자주 lectio와 vacare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베네딕도의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독특한 생각을 우 리는 두 단어를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라틴어 vacare 는‘비어있다, 한가하다, 전념하다, 자유롭다’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 점에서 베네딕도는 독서란 한가하고 자유로운 시간에 전념해야 하는 영 적인 수행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반면에 RM의 저자는 vacare란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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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단어 자체가 함축하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는데, 혹시라도 형제들이 그 시간에 죄에 떨어질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RM은 vacare란 단어를 규칙서에서 모두 8번만(서언 3번; 8,7; 20,7; 50,4.10.38) 사용하였는데, 오직 한 번 lectio란 단어와 함께 사용하였다 (50,10). 반대로 RB는 vacare란 단어를 모두 12번(서언 2번; 43,8; 48,4. 10.13.14.17.18.22.23; 53,20) 사용하였으며, 그 중 6번은 lectio란 단어와 함께 사용하였다(48,4.10.13.14.17.22). 이것은 렉시 오 디비나가 일이나 활동적인 그 어떤 소임에도 얽매이지 않고 한가하고 여유로운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했음을 베네딕도 성인이 잘 알고 있었다 는 것을 드러낸다. 베네딕도는 이렇게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고요한 시간 의 필요성 때문에 vacare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한 반면에, RM의 저자는 단지 죄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시간을 피하고자 그러한 단어를 사용하기를 꺼렸던 것 같다.25) 비록 고대 라틴 문화 안에서 vacare란 단어가 간혹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곤 하였더라도, 동시에 이 단어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초기 교부들은 이 단어의 긍정적인 견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특별히 성 아우구스티노는 vacare란 단어의 가장 충만한 의미를 재발견 하였고(Serm. 270,5), 그래서 렉시오 디비나를 위해 따로 떼어진 여유로 운 시간(seposita tempora)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 예로니모 역시 일 요일에 성서 독서를 위해 자유로워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였는데(Ep. 22.35), 그는 자주 vacare와 lectio란 단어를 함께 사용하곤 하였다. 펠 ‐‐‐‐‐‐‐‐‐‐‐‐‐‐‐‐‐‐‐‐‐‐‐‐‐‐‐‐

25) 참조. Ambrose Wathen, Monastic Lectio, MS 12, 1976, 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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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오 역시 첼라씨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vacare와 lectio란 말을 함께 사용하였다. 한편 410년경 프랑스 남부 레렝에서 쓰여진『네 교부들의 규칙서』에서는 형제들이 제1시부터 제3시까지 하느님을 위해 자유롭게 되어 그 시간을 온전히 봉헌해야 했으며(Deo vacetur),26) 또한『교부들 의 제3규칙서』에서도 형제들이 제2시까지 자유롭게 되어 독서에 온전히 전념해야 했다(lectioni vacent).27) 아마도 베네딕도는 이전의 많은 수도 영성 작가들처럼 lectio를 위해 자 유롭고 여유로운 시간의 중요성을 직시하였으며, 그로 인해 RB 안에서 vacare와 lectio란 단어의 연결을 통해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고요한 시 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 같다.28) 렉시오 디비나는 본래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는 것이었기에, 독서를 위해 자유롭고 여유로운 시간이 수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29) 중세의 성 티어리의 윌 리암 아빠스도 같은 차원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위해 자유로운 시간의 중 요성을 그의 저서인『황금 서간』에서 강조하였다.30)

V. 렉 시 오 디비나의 방 법 그 당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렉시오 디비나 수행 을 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왜냐 하면 베네딕도가 규칙서에서 이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 ‐‐‐‐‐‐‐‐‐‐‐‐‐‐‐‐‐‐‐‐‐‐‐‐‐‐‐‐

26) Early Monastic Rules, 24-25. 27) Early Monastic Rules, 54-55. 28) 참조. Terrence G. Kardong, “The Vocabulary of Monastic Lectio in RB 48”, Cistercian Studies Vol 16.3, 1981, 174-176. 29) 참조. Ambrose Wathen, Monastic Lectio, 213-215. 30) 참조. William of St. Thierry, The Golden Epistle, Cistercian Fathers Series 12, Theodore Berkeley(trans.), Massachusetts: Cistercian Publication, 1971,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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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RB 48장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당시에 수도자들이 어떻게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하였는지에 대한 몇 가지 중요 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RB 48,5을 보면, 수도자들은 제6시 기도 후 식사를 마치면 두 가 지 선택 가능한 기회를 얻게 된다. 즉 수도자들은 식사 후 육체의 휴식을 위해서 각자 자기 침대에서 완전한 침묵 중에 쉴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때 나 지금이나 이탈리아는 지중해 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점심 식사 후에 더 운 날씨 속에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낮잠 혹은 오침(siesta)이 생활화되 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RB에 의하면 이것은 모두가 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누군가가 영혼의 양식을 위 해서 독서를 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은 우리들에게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즉 독서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다. 이러한 주의를 주는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에 독서한다 는 것은 천천히 눈으로 본 본문을 입으로 작게 소리 내어 읽고 그 내용을 귀로 듣는 수행이었다. 따라서 혹시라도 이로 인해 잠을 자고 있는 다른 형제들을 방해하지 않게 하려는 염려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렉시오 디비나는 낮잠과 같이 수도자들에게 영적으로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것이었다. 이러한 오침에 대해서 우리는 RB와 RM의 약간의 시각 차이를 보게 된다. RB에서는 오침이 모든 수도자들에게 부과되었던 의무 사항이 아니 라 선택 사항(RB 48,5)이었던 반면에, RM에서는 모든 수도자들이 예외 없이 이 시간에 잠을 보충하기 위해 낮잠을 자도록 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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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RM 50,56-58). 만약 수도자들이 자유로운 혹은 홀로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죄에 떨어질 수 있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스 승의 규칙서』는 이점을 염려했던 것 같다. 바로 이점이『스승의 규칙서』 의 중요한 특징들 중의 하나인데, RM의 저자는 언제나 형제들을 홀로 놔 둘 경우에 혹시나 그들이 죄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늘 하고 있다는 인상을 그의 규칙서 전체에서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RM은 언 제나 개인적인 측면보다는 공동체적인 측면을 강조한 반면에 RB는 어떤 면에서 각 사람의 개인적인 측면을 더 배려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 다. 그래서 RB는 오침 시간에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RM과 RB의 근본적인 차이점들 중 의 하나이다. 아무튼 고대나 베네딕도 성인 당시에 수도자들의 독서 방식은 침묵 중 에 본문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현대인들의 묵독 방법과는 달랐다. 그들 의 방식은 눈으로 성서를 보고, 입술로 작게 소리 내어 읽고, 귀로 들으 며, 마음에 깊이 새겨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는 독특한 영적 수행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세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였던 장 르끄레르(Jean Leclercq) 신부는 렉시오 디비나를 참으로 능동적인 독서라고 주장하였 다.31) 그는 중세 수도자들의 렉시오 디비나 역시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 행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만약 이러한 수행이 고요한 시간에 공동 침실이 나 혹은 다른 공동 장소에서 행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네딕도는 제6시 기도 후 식사를 마치고 ‐‐‐‐‐‐‐‐‐‐‐‐‐‐‐‐‐‐‐‐‐‐‐‐‐‐‐‐

31) 참조. Jean Leclercq, The Love of Learning and The Desire for God,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6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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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침 대신 독서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였던 것이다(RB 48,5).32) 즉 그들은 그 시간에 홀로 조용 하게 독서를 해야 했다. 이것에 근거하여 그 당시 수도자들의 독서는 성 서 본문을 작게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RB 48,17을 보면, 베네딕도는 렉시오 디비나 시간에 한 두 명 의 장로들로 하여금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였다. 이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당시에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렉시오 디비나를 한 장소에서 한 것이 아니라 수도원 울타리 전체의 조용한 곳에서 각자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RM에서 이와 같은 지시는 불필요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 상 십인장과 함께 일하고 공동으로 독서하며 기도하였기 때문이다. 즉 일 하는 중에 한 수도자가 어떤 책을 읽고 다른 형제들은 단지 그것을 들으 면서 일해야 했다(RM 50,10-11). RM은 십인장과 함께 일하는 동안의 공동 독서에 대해 언급한 반면에, RB 48장에서는 독서 시간 동안 그들 스스로가 입술로써 작게 소리 내어 읽고 듣는 개인 독서를 언급하였다. 그러한 독서 시간 동안 감독자들이 RM에서는 불필요했지만 RB에서는 필요했던 것 같다. 이점에서 우리는 RM과 RB의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 하게 된다. 물론 베네딕도 역시 공동 독서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RM에서 언 급하고 있는 일하는 동안이 아니라, 저녁 식사 후에 모든 이들이 함께 모 여 한 사람이 교부들의 담화집이나 다른 어떤 것을 읽고, 다른 이들은 주 의 깊게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RB 42,3-4). 그러나 이 ‐‐‐‐‐‐‐‐‐‐‐‐‐‐‐‐‐‐‐‐‐‐‐‐‐‐‐‐

32) 참조. RB 1980, Collegeville, Minnesota: The Liturgical Press, 1981, 249; Aquinata Böckmann, Commentary on the Rule of St. Benedict, Rome, 197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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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정확히 RB 4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렉시오 디비나 수행과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가 없다. 아무튼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오 직 한 번만, 즉 RB 48,1에서 명확하게 렉시오 디비나라는 용어를 사용하 고 있지만, RB 48,2 이하에 나오는 lectio란 용어도 말할 것도 없이 렉시 오 디비나를 언급하는 것임을 많은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RM 의 저자는 결코 규칙서에서 렉시오 디비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이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RM과 RB의 중요한 차이점들 중의 하나이다.33) 중세에도 독특한 독서 수행법, 즉 눈으로 본 것을 입술로 소리 내고 귀 를 기울여 듣고 마음으로 배우는 방법이 수도 전통 안에서 행해졌다. 성 티어리의 윌리엄 아빠스(1085-1148) 시대에도 독서 방법에 있어서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수행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34) 이것은 현대의 독서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다. 고대나 중세의 수도자들은 오늘날과 는 달리 더 쉽고 더 깊게 그들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을 새길 수 있도록 하였다.35) 한편 우리는 RB 48,23(“si quis vero ita neglegens et desidiosus fuerit, ut non vellit aut non possit meditare aut legere……”)에서 독서 에 대한 또 다른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위에서 보듯이 legere와 meditare, 이 두 용어는 RB에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

33) 참조. Adalbert de Vogüé, Rule of St. Benedict: A Doctrinal & Spiritual Commentary, 290. 34) 참조. William of St. Thierry, The Golden Epistle, 40. 35) 장 르끄레르 신부는 고대의 독서가 마음에 의한 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입술에 의한 배움임을 강조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참조. Jean Leclercq, The Love of Learning and The Desire for God, 19-22; RB 1980,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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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 두 용어가 서로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근 원적으로 이 두 용어는 고대 수도 규칙서들 안에서 명확하게 분리되거나 구분되어 사용되지 않았다.36) 그래서 이 두 용어는 고대 수도 규칙서들 안에서 동일한 종류의 영적 수행으로서 자주 혼용되어 사용되곤 하였 다.37) 솔직히 우리 역시 이 두 영적인 수행을 명확하게 분리할 수는 없 다. 사실 중세 때까지 수도자들은 렉시오 디비나 시간에 마음으로 그 본 문을 읽고 배웠으며, 기억 속에 몇몇 중요한 구절들을 간직하였다. 그리 고 그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때이든지 기억으로부터 그 구절을 떠올 려 끊임없이 반복하고 암송하였다.38) 아마도 베네딕도는 이와 같은 독특 하고 단순한 독서법을 수도자들에게 제시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수행은 인간 전 존재로서 행하는 단순하고 독특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 도 RM은 RB가 렉시오 디비나에 관해 제시하는 이런 내용들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VI. 렉 시 오 디비나의 대 상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렉시오 디비나 시간에 과연 무엇을 읽었을까? 그 당시 수도원들 내에 그렇게 많은 책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 다면 수도자들이 마음으로 배웠던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은 무엇이었을 ‐‐‐‐‐‐‐‐‐‐‐‐‐‐‐‐‐‐‐‐‐‐‐‐‐‐‐‐

36) 고대 수도 규칙서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예로, 레렝에서 쓰여진 규칙서인 네 교부들의 규칙서에서는 “Deo vacetur”라는 용어가 사용되지만, 교부들의 제2규칙서에서는 “meditatio”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제3 규칙서에서는 “lectio”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마카리오 규칙서에서는 “meditatio” 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동방 규칙서에서는 “lectio”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7) W. 투닝크, 평화의 길, 김 마리로사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80, 283. 38) Adalbert de Vogüé, Rule of St. Benedict: A Doctrinal & Spiritual Commentary, 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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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RB 전체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네딕도는 사순절 첫날에“형제들은 도서실에서 각자 책을 받아 사순 절 동안 차례대로 다 읽어야 한다”(RB 48,15)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서실로 번역된 라틴어 bibliotheca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규칙서 안에서 이 단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 지 않기 때문이다. RB 1980에서는 bibliotheca를 단순히 도서실로 번역 하고 있지만, 안스가리 문도(Anscari Mundo)는 그것이 도서실이라는 의 미보다는 오히려 성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성서란 여러 분책들로 묶여진 부피가 큰 책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교부들이 성서를 묘사하기 위해 bibliotheca란 단어를 사용하곤 하였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종종 오래된 문헌들 안에서 “Bibliotheca novi et veteris Testamenti”라 는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서 bibliotheca는 9개의 분책으로 제본 된 성서 전체를 의미했다.39) 이 점에서 현재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가 르치고 있는 아퀴나타 뵈크만(Aquinata Böckmann) 수녀도 4세기에서 6세기 동안에 성서 전체가 bibliotheca로 불려졌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녀는 그 당시에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성서의 9개의 사본으로부터 하 나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40)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학자들의 공통된 주장 안에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 하게 된다. 즉 수도자들은 성서를 렉시오 디비나의 일차적 대상으로 삼았 ‐‐‐‐‐‐‐‐‐‐‐‐‐‐‐‐‐‐‐‐‐‐‐‐‐‐‐‐

39) 참조. Terrence G. Kardong, “The Vocabulary of Monastic Lectio in RB 48”, 173. 40) 참조. Aquinata Böckmann, Commentary on the Rule of St. Benedic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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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점이다. 이것은 베네딕도가 다른 일체의 책들을 배제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 는다.41) 왜냐하면“끝기도 후에는 아무도 말하지 말 것이다”라는 RB 42 장에서는 형제들이 저녁 식사 후에 모두 함께 모여 교부들의 담화집이나 전기 혹은 감화를 줄 수 있는 다른 어떤 것을 읽을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 이다. 또한“이 규칙서 안에는 모든 의덕을 준수할 규율이 다 규정되어 있 지 않음에 대하여”에 관한 RB 73장에서는 성서 외의 다른 거룩한 책들, 즉 가톨릭 교부들의 가르침들이나 교부들의 담화집이나 제도서 혹은 그 들의 전기나 거룩한 사부『바실리오 규칙서』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성서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고, 또한 수도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잡다한 책들은 결코 그들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베 네딕도는 규칙서에서 성서를“하느님의 빛”(deificum lumen - Prol. 9), “주님의 소리”(divina vox - Prol. 19) 혹은“인간 삶의 가장 올바른 규 범”(rectissima norma vitae humanae - 73,3)으로 언급하고 있다. 비록 베네딕도가 규칙서 안에서 성서 외의 다른 책들을 추천하고 있을지라도 성서는 그것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본문이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세와 현대를 거치면서 베네딕도회 수도자 들은 렉시오 디비나 시간 동안에 점점 더 성서적이거나 영성적이지 않은 책들을 읽게 되었다.42) 이점에서 현대의 수도자들이 초기 수도자들처럼 렉시오 디비나의 대상으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에 대한 중요성을 직 ‐‐‐‐‐‐‐‐‐‐‐‐‐‐‐‐‐‐‐‐‐‐‐‐‐‐‐‐

41) 참조. Adalbert de Vogüé, Rule of St. Benedict: A Doctrinal & Spiritual Commentary, 286. 42) 참조. Terrence G. Kardong, “The Vocabulary of Monastic Lectio in RB 48”,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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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고 그러한 수행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아마도 현대의 수도 생활은 지 금보다도 더 충만한 열매를 맺었을지도 모른다.

VII. 렉 시 오 디비나의 과 정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렉시오 디비나는 단순한 독서가 아니다. 그것 은 수도승 전통 안에서 전해져 온 단순하고 독특한 성서에 대한 영적인 수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도 규칙서 안에서 렉시오 디비나 의 과정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성서의 말씀을 온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서 렉시 오 디비나 수행을 계속 실천하였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다. 사실 수도자들의 독서는 단순히 읽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묵상 을 향하고 기도와 더 깊은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고대의 문헌들 안에서 독서(lectio)와 묵상(meditatio)은 매우 유사한 수행이었다. 수도자들은 능동적인 독서를 통해 기억에 간직된 하느님의 말씀을 되뇌임으로써 독 서의 연장선 안에서 기도 수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묵상을 뜻하는 라틴어 meditatio는 희랍어 meleteˆ 에서 왔는데, 수도승 전통 안에서 이것 은 기억된 성서 본문에 대한 끊임없는 되뇌임 혹은 암송을 뜻했다.43) 그 래서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인 Apophthegmata에서는 meleteˆ 가 말씀에 대한 암송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파코미오 역시 meleteˆ 를 성서에 대한 암송으로 사용하였으며, 아우구스티노도 반복으로서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 우리는 고대 규칙서들 안에서 이러한 예들을 자주 발 견하게 된다. ‐‐‐‐‐‐‐‐‐‐‐‐‐‐‐‐‐‐‐‐‐‐‐‐‐‐‐‐

43) 참조. Columba Stewart, Cassian the Monk,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101-103; Jean Leclercq, The Love of Learning and The Desire for God,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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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고대 규칙서 저자들처럼 요한 가시아노도 자주 lectio와 meditatio 를 함께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두 용어를 정확하게 분리하지는 않 았지만 구별하였다.44) 예를 들면, 그는 담화집에서 수도자는 계속적인 묵 상이 자신의 정신을 채울 때까지 독서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14.10.2). 그러나 lectio와 meditatio를 구별할 수는 있어도 정확하게 분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두 용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정확히 분 리할 수 없는 동일한 영적 수행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lectio와 meditatio 를 분리할 수는 없을 지라도, 묵상은 독서의 연장이며 그리고 그것은 분 명히 수도자들을 더 깊은 단계로 인도하였다.45) 이점에서, 카르투지오회의 9대 원장이었던 귀고 2세(Guigo Ⅱ)는 이 러한 영적 과정을 사다리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로써 잘 설명하였다. 그는 수도자들이 이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영적 사다리의 4단계를 생각 하였는데, 그 첫 번째 단계인 독서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성서 를 주의 깊게 연구하며 읽는 것이라고 보았다. 두 번째 단계인 묵상은 이 성의 도움으로 숨겨진 진리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한 정신의 능동적인 작 용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셋째 단계인 기도는 악을 몰아내고 무엇 이 선한가를 찾기 위해 하느님께로 끊임없이 향하는 마음의 헌신적인 봉 헌이라고 보았으며, 마지막 단계인 관상은 정신이 하느님께 현양되어 거 기에 머무르는 단계를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46) 그는『수도승의 사 ‐‐‐‐‐‐‐‐‐‐‐‐‐‐‐‐‐‐‐‐‐‐‐‐‐‐‐‐

44) 참조. Columba Stewart, Cassian the Monk, 104. 45) 참조. Adalbert de Vogüé, Rule of St. Benedict: A Doctrinal & Spiritual Commentary, 291-292. 46) 참조. Guigo Ⅱ, The Ladder of Monks, Edmund Colledge/James Walsh(trans.), CS 48, Massachusetts: Cistercian Publication, 1979, 68; 허성준,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 오 디비나,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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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라는 자신의 글에서 이러한 단계들의 상호 관계에 대해 많은 문장을 할애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묵상 없는 독서는 메마르며, 독 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묵상 없는 기도는 냉담 하고,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47) 비록『베네딕도 규칙서』안에서 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에 대한 묘사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귀고는 나름대로 렉시오 디비나의 단 계들과 상호 관계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시도하였다. 사실 고대 의 많은 수도 교부들이 저마다 렉시오 디비나 수행에 대해서 직•간접으 로 언급하였지만,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구체 적으로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언급한 문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귀고는 수도자들의 렉시오 디비나 수행의 과정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해 줌으로써 렉시오 디비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현대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그 중요성이 있다고 본다.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자들이 가장 안전한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의 인도 를 따라 주님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마침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뵙게 되 기를 간절히 원했다(머리말 21항).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성서의 인도를 따라 안전하게 영적 여정을 가야 하는가? 이에 베네딕도는 구체적인 영적 수행으로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수행은 베네딕도 성인 이전에 이미 많은 수도 교부들이 실천하고 강조하였던 수행이었다. 특별히 고대 수도자들은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

47) Guigo Ⅱ, The Ladder of Monks, 82; 허성준,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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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하고 삭막한 사막이라는 환경을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옥토로 바 꾸었고 또한 황량했던 그 곳에 영성의 꽃을 풍요롭게 피울 수 있었다. 우 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수도 전통 안에서 전해진 렉시오 디비나 수행은 현 대의 독서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서 온 마음으로 말씀에 주의를 집 중하고 우리의 전 존재로 다가가는 단순하고 독특한 영적 수행이다. 수도 전통 안에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은 수도자들에게 어떤 선택적인 수행이 아니라 그들을 직접 하느님께 인도하는 본질적인 수행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고대 수도 전통으로부터 전해져 온, 그리고 베네딕도회 수도 전 통 안에서도 이어져 온 이러한 단순한 성독(Lectio Divina) 수행이 영적 인 갈증을 느끼고 있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빛을 제시해 주고 있다 고 본다. 그 빛은 오직 하느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어떻게 그리 스도인들이 일상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기도 하다. 현대의 분주한 삶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그리스도인 들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 안에서 타성에 빠지지 않고, 말씀 안에서 깨어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단순하고 안전한 영적인 수행이 바로 수도 전통 안 에서 면면히 전해져 내려온 성독 수행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행하는 말씀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은 분명히 우리의 수도 생활과 영성 생활 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그분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RB 머리말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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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생활과 노동1)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머리말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 안에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 소위 3D(difficult, dirty, danger) 기피현상이 만연되어왔다. 이런 일을 안 해 도 먹고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구태여 그런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 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과거에 비해 경제적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얘 기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노동의 경제적, 기능적 측면 만을 고려한데서 기인한다. 노동을 단지 생계유지의 수단으로만 간주한 다면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에는 경제적, 기능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영적 측면도 있다. 노동의 이런 측면들 이 고려될 때 비로소 노동의 참된 가치가 드러난다. 따라서 오늘날 3D 기 피현상은 노동의 참된 가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 겠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수도승생활 안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노 동에 대한, 특히 땀 흘려 일하는 육체노동에 대한 경시 풍조가 수도승생 활 안에 점차 팽배해져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수도승들 역시 힘들고 위 험하고 더러운 일 보다는 오히려 쉽고 안전하고 깨끗하고 고상해 보이는 일들을 선호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수도승은 자기를 포기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에 더욱 철저하게 동참하려는 자이기 때문 ‐‐‐‐‐‐‐‐‐‐‐‐‐‐‐‐‐‐‐‐‐‐‐‐‐‐‐‐

1) 이 글은 2010년 9월 부산 올리베따노 수녀회 월피정 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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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노동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알 때 비로소 이러한 현상은 극복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수도승 노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수 도승생활에서 노동의 위치와 개념을 살펴본 후, 노동의 동기와 목적, 그 리고 그 위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노동의 위 치 노동은 수도승생활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수도승생활 역 사와 초기 수도승 문헌들이 이를 잘 증언해 주고 있다. 수도승전통 안에 서 노동은 기도와 더불어 수도승생활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 특 별히 베네딕도회의 모토(motto)를‘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라 고 표현할 정도로 노동은 베네딕도회 수도승생활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초기 사막 교부들과 수도승들은 노동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하느님 찾는 삶의 일부로 간주하여 기도와 일치, 조화시켜 나갔 다. 그들에게 있어 노동은 기도와 분리된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바로 기 도의 연장(延長)이었던 것이다. 성 베네딕도 역시 자신의 규칙서(이하 성 규)의 한 장을 노동에 할애할 정도로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노동이 공동기도와 성독(lectio divina)과 더불어 수도승의 하루 일과를 구성하는 한 요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육체노동은 특히 시토회원들에 게 있어 그들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2) ‐‐‐‐‐‐‐‐‐‐‐‐‐‐‐‐‐‐‐‐‐‐‐‐‐‐‐‐

2) 참조. 조던 오먼, 가톨릭전통과 그리스도교 영성, 이홍근/이영희 공역, 왜관: 분도출 판사, 1991,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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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생활과 노동

이처럼 노동은 수도승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수도승생활 안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뒤따르는 절들 안에서 주어질 것 이다.

2. 노동의 개 념 노동은 크게 육체의 땀을 요구하는 육체노동과 지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정신노동으로 구분된다. 초기 수도승전통 안에서 노동은 일차적으로 손 으로 하는 육체노동을 의미했다. 정신노동 역시 수도승생활 안에서 나름 의 자리를 차지해 왔지만 본래 의미의 수도승 노동으로 간주된 것은 훨씬 후대에 와서이다. 수도승생활 역사를 통해 볼 때, 연구나 저술 등의 정신 노동은 비난받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특히 시토회 안 에서는 더욱 그랬다. 육체노동은 시토회 수도승생활에 있어 본질적인 것 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가난의 개념에서 나온 논리적 결 과로서 가난과 더불어 시토회 삶의 두 가지 특징 중 하나였다. 그들은 손 노동을 선호했다.3) 성 베네딕도가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성규 48장에서도 오페라 마누움(opera manuum), 라보르 마누움(labor manuum)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손으로 하는 육체노동을 가 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부들의 언어 속에 들어 있는 육체노동이라는 말은 육체적 고행, 손 으로 하는 일, 기도에 따르는 언동, 음식이나 수면의 절제를 모두 포괄한 다. 한마디로 말해 몸의 휴식을 막음으로서 영혼이 자체의 활동을 할 수 ‐‐‐‐‐‐‐‐‐‐‐‐‐‐‐‐‐‐‐‐‐‐‐‐‐‐‐‐

3) 참조. Augustine Roberts, Centered on Christ, Spencer: St. Bede’s Publications, 1979,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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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도록 그 자유를 확보하는데 공헌하는 모든 것을 일컬음이다.”4) 사막 교부들에게 있어 육체노동의 주된 내용은 바구니를 짜는 일이었다. 그들 은 바구니 짜는 것으로 유명했다.5) 바구니를 짜서 시장에 내다 팔아 그것 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성규에 나타난 육체노동은 주로 추수와 같은 농사일(성규 48장)과 수 공예(성규 57장)다. 그러나 성 베네딕도는 수도승의 노동을 단지 이런 직 접적인 육체노동에만 한정하고 있지는 않다. 성규 안에는 이외에도 수도 승들을 훈육하는 십인장(성규 21장), 주방봉사자(성규 35장), 객실담당 자(성규 53장), 당가(성규 31장), 병실봉사자(성규 36장) 등 공동체에 봉사하는 여러 소임이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규 48장을 통해 서 볼 때, 우리는 대다수의 수도승이 직접적인 육체노동에 종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수도승 노동을 육체노동에 한정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3. 노동의 동 기 3.1. 사 막 교부들에게 있 어

3.1.1. 생계유지 성경에서 노동은 전 인류에게 주어진 저주처럼 제시된다. 우리는 창세기 의 다음 말씀을 기억한다.“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 ‐‐‐‐‐‐‐‐‐‐‐‐‐‐‐‐‐‐‐‐‐‐‐‐‐‐‐‐

4) 펠라지오와 요한, 사막교부들의 금언집, 요한 실비아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88, 26-27. 5) 참조. Thomas Merton, The Silent Life, New York: Farrar, Strauss and Giroux, 195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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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 (창세 3,19). 수도승 역시 원죄의 결과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처럼 먹고 살기 위하여 노동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 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 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사 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 듭 지시하였습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 오”(2테살 3,7-8.10.12).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라’는 사도의 이 권고는 사회에 얹혀사는 기생 수도승들을 단죄하기 위하여 수도승 전통 전체를 통해 다시 취해지 게 된다.6)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는 오로지 기도에 바쳐진 삶을 살기를 원하는 수 도승들을 가르치는 일화들이 여럿 있다. 에우키트(Euchites) 라고 불리 는 여러 수도승이 압바 루키우스를 방문했다. 압바가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어떤 손노동을 하시오?”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우리는 손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사도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 합니다.”원로가 그들에게 식사를 하지 않는지 묻자 그들은‘한다’고 대 답했다. 그러자 원로는 그들에게 말했다.“식사할 때 누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까?”원로는 다시 그들에게 그들이 잠을 자지 않는지 물자 그들 이‘잔다.’고 말했다. 그러자 원로가 말했다.“잠잘 때, 누가 여러분을 위 해서 기도합니까?”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원로가 그들 에게 말했다.“나를 용서하시오. 하지만 당신들은 자신이 말한 바처럼 행 ‐‐‐‐‐‐‐‐‐‐‐‐‐‐‐‐‐‐‐‐‐‐‐‐‐‐‐‐

6) 참조.『성 안토니우스의 생애』50;『이집트 수도승들의 역사』I,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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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지 않는구려.”7) 한 수도승이 시나이 산에 있는 압바 실바누스를 찾아갔다. 노동을 하고 있는 형제들을 보고서 그는 원로들에게 말했다.“사라 없어질 양식을 얻 으려고 일하지들 마십시오. 사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압바 실바누스가 자기 제자에게 말했다.“자카리아, 이 형제에게 책 한 권을 내 주고 아무 것도 없는 독방으로 안내하거라.”그 수도승이 독방에서 아홉 시간을 보냈을 때, 그는 누군가 자기에게 식사하라고 부를까 해서 문에 주의를 기울였다. 아무도 오지 않자 그는 일어나 실바누스를 찾아가 말했 다.“오늘 형제들은 식사하지 않나요?”원로가 그에게‘한다’고 대답했 다. 그러자 그 수도승이“어째서 아무도 저를 부르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원로가 대답했다.“당신은 영적인 사람이라서 이 음식이 필요하 지 않기 때문이오. 육적인 우리는 식사하기를 바라고 이 때문에 일을 하 는 것이오. 당신은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좋은 몫을 택했소. 그래서 육적 인 양식을 먹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이 말을 들은 그 수도승은 “압바 저를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하며 뉘우쳤다. 원로가 그에게 말했 다.“참으로 마리아도 마르타를 필요로 하오. 우리가 마리아를 칭찬하는 것은 사실상 마르타 덕이지요.”8) “기도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에게‘왜 기도하지 않소?’라고 말하지 않 습니다. 일하는 사람도‘나는 일하는데 그는 아무 일도 안하는군’하고 말 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9) “기도와 시편낭송을 핑계로 노동을 소홀히 해도 괜찮은가?”바실리우 ‐‐‐‐‐‐‐‐‐‐‐‐‐‐‐‐‐‐‐‐‐‐‐‐‐‐‐‐

7)『사막교부들의 금언집』루키우스. 9) 위 마카리우스『강론』50.

8)『사막교부들의 금언집』실바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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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는 이렇게 대답한다.“게으름이나 수고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경건함을 핑계 삼아서는 안 된다.”10) 이처럼 사막 교부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에 따라 자신의 손으로 노 동함으로서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였다.11)

3.1.2. 한가함을 피함 교부들은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하기 위해 노동을 했다. 한가할 때 악마가 찾아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데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노동의 범위와 성격은 그들의 영적인 목적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이집트 교부들이 젊은 수도승의 열성과 그가 고행과 겸손에 얼마나 진보했는지 가늠하는 척도는 바로 노동에 항구함이라고 전하고 있다.12) 요한 클리마쿠스에 의하면 아케디아는 이렇게 말한다. “내 적들은 시편낭송과 손노동이다.”13) 사막교부들 역시 열심히 손노동 에 몰두하면 끈질기게 괴롭히는 아케디아를 몰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온갖 종류의 노동에 분주한 수도승은 유일한 노동에 정착될 수 없다.”14) 이 때문에 압바 마토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나는 처 음부터 고되지만 지속적이지 못한 노동보다는 가볍고 항구한 노동을 선 호한다.”15) 또 다른 금언 역시 말한다.“손노동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은 ‐‐‐‐‐‐‐‐‐‐‐‐‐‐‐‐‐‐‐‐‐‐‐‐‐‐‐‐

10) 바실리우스『대 수덕집』 의 긴 규칙 37. 11) 참조. 수도교부들의 모범 1,2; 카시아누스『담화집』24,12,2; RM 3,49; 83,17. 12) 참조. 요한 카시아누스『제도서』X,22. 13) 요한 클리마쿠스『천국의 사다리』XIII. 14) 수도승 안티오쿠스,『강론』XXVI, P.G. 89,1516. 15)『사막교부들의 금언집』마토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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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파괴이지만 평온한 노동 수행은 하느님 안에 쉼이다.” 이는 후기 비잔틴 영성의 견해와 일치한다. 칼리스테 크산토풀로스 (Calliste Xanthopoulos, 14세기 말)는 다음과 지적하고 있다.“가벼운 손노동은 아케디아에게 부리망과 같다.”

3.1.3. 고행 순종으로 행해진 손노동은 육체와 자기 뜻을 꺾는다. 그것은 육체의 욕 정들을 완화시키면서 육체를 굴복시켜 육체를 봉사로 이끈다. 그러나 과 도한 손노동은 피해야 한다. 노동으로 지치거나 피폐해진 육체가 영적 투 쟁과 본능을 거스른 싸움에서 더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실제 많은 땀을 수반하는 힘든 노동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희생과 인내를 요구한다. 노동이 힘들거나 혹독할 때, 노동이 요구하는 이러한‘자기부정’은 수도승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참회하는 훌륭하고 효 과적인 고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수도승 노동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어야 하기에 수도승에게 있어 노동은 단지 하나의 참회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16)

3.1.4. 환대 수도승은 자기 필요를 줄이기 때문에 적은 것으로 생활한다. 그는 노동 으로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병자와 고아)을 돕고 환대를 실천할 수 있 게 된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순례자들과 죄수들, 그리고 굶주린 이들에 게 음식을 줄 수 있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그들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 ‐‐‐‐‐‐‐‐‐‐‐‐‐‐‐‐‐‐‐‐‐‐‐‐‐‐‐‐

16) 참조. Thomas Merton, The Silent Life,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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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고 감옥에 갇힌 이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기 위해 충분히 노동을 하 는 이집트 수도승들을 일례로 들고 있다. “이집트 교부들은 어떤 이유로든 수도승들, 특히 젊은 수도승들이 한가 하게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에 대한 수도승의 열정을 보고서 그가 인내와 겸손에 있어서 얼마나 진보했는지, 그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지를 가늠한다. 교부들은 수도승이 누구에게서도 자기 생계를 위 해 어떤 것을 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노고를 통해 방문 객들과 순례자들을 돌보게 했다. 심지어 그들은 가뭄과 기아로 고통을 겪 는 리비아와 누추한 감옥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들에 보 내기 위해 많은 양의 식량을 모아 분배하였다. 이렇듯 그들은 자기 노동 의 열매로 이런 종류의 봉헌을 함으로써 주님께 영적이고 참된 희생제물 을 바친다고 생각한다.”17) 성 바실리우스는“어떤 목적과 자세로 노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노동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는 나에게 먹 을 것을 주었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계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노동을 해 야 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자문하면서 너희를 위하여 걱정하지 말고 옷에 대해 신경 쓰며 너희 육신을 위해 걱정하지도 말라.”18) 따라서 각자 자기 노동에서 가져야 하는 목적은 궁핍한 이들을 도와주 는 것이지 자기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바실리우스는 다 음과 같이 선언한다.“우리는 단지 육체의 고행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또 한 이웃사랑이 요구하기 때문에 노동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매개로 ‐‐‐‐‐‐‐‐‐‐‐‐‐‐‐‐‐‐‐‐‐‐‐‐‐‐‐‐

17)『제도서』X,22.

18)『대 수덕집』 의 긴 규칙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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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는 우리 형제들에게 자족의 수단을 주시기 때 문이다.”19) 우리는 사랑으로 생활하며 자기 노동의 열매로 자선을 행한다. 병자들 을 돕기 위해 노동을 했던 성 바오로의 예20)를 인용하면서 카시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우리는 자본의 수입을 통해서나 별도로 저축한 돈이나 다른 사람들의 관대함과 재산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노동의 수고와 땀을 통해 병자들을 돕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다.”21)

3.2. 성 베네딕도에게 있 어

3.2.1. 한가함을 피함 성 베네딕도는 성규 48장을 다음 말로 시작한다.“한가함은 영혼의 원 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손노동을 하고 또 다른 정해진 시간에 성독(聖讀)을 해야 한다” (성규 48,1). 베네딕도는 한가함을 영혼 의 원수라고 규정하고 육체노동을 한가함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 다. 한가함은 유혹, 특히 수도적 권태와 나태의 특별한 형태인 아케디아가 생겨나는 장소이다. 이는 노동에 대한 사막 교부들의 견해와 일치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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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수덕집』 의 긴 규칙 37. 20) 참조. 사도 20,35. 21)『제도서』X,18. 22) 참조.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Cistercian Studies Series 75, Massachusetts: Cistercian Publication, 1986, 45-46; Cletus M. Vadakkekara, “Prophets and Monks”, Cistercian Studies Quarterly 25(199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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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공동체 유지 사막 교부들은 단순노동을 지향한데 반해 베네딕도 공동체에서 노동이 더 확대되고 복잡해졌다. 공동체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은 필수적인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베네딕도 성인 은 매일의 노동에 관한 규칙 제48장에서“필요한 노동”(성규 48,6)과 “지역의 상황이나 가난으로 인해 직접 추수를 해야 할 경우”(성규 48,7) 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노동은 단지 영적, 금욕적 동기만으로 행해 지지 않고 공동체 유지라는 실제적, 경제적 동기로도 행해졌다.

3.3. 노 동 의 또 다 른 동 기 노동은 수도승 개인이나 공동체의 생계유지,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피함, 고행, 가난한 이에 대한 환대라는 전통적 동기 외에도 다음과 같은 동기를 갖는다.

3.3.1 창조사업에 동참 수도승의 손노동은 하느님께 대한 그의 순종을 실제적으로 표현해 준 다. 수도승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소임을, 비록 그것이 힘들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특별히 손노동 안에서 그는 세상의 창조 주이시자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협력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적섭 리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수도승은 노동을 통하여 이 땅을 새롭게 하시 고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을 돕는다.23) 여러 신학자가“하느님께서 이렛날 ‐‐‐‐‐‐‐‐‐‐‐‐‐‐‐‐‐‐‐‐‐‐‐‐‐‐‐‐

23) 참조. Thomas Merton, The monastic journey, Cistercian Studies Series 133, Massachusetts: Cistercian Publication, 199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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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쉬셨다”(창세 2,3)는 창세기 말씀을 하느님이 당신 활동을 연장하시 면서 인간을 당신 창조 사업에 협력하게 하신 초대로 해석하였다.24)

3.3.2.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노동은 또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과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수도승은 육체노동을 통하여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소외된 모든 이 들 특히 가난한 이들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각하게 되며, 또한 그들과 깊은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은 수도승을 가난한 이들의 삶에 더욱 가깝게 다가가게 함으 로써 그들과의 연대를 위한 새로운 형태가 된다. 더 나아가 고된 육체노 동에서 요구되는 땀과 고통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25)

3.3.3. 가난의 근본적 표현 수도승이 공동체 유지를 위하여 행하는 생산적 노동은 공동생활과 더불 어 수도승 가난의 근본적 표현이 된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에 충실한 수 도승은 가난서원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오늘날 수도승의 노동은 개인적 가난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가난을 위해서도 큰 중요성을 갖는다. 노동에 대한 수도승의 충실성은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 모두에서 수도적 가난의 요구에 대한 그의 충실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할 ‐‐‐‐‐‐‐‐‐‐‐‐‐‐‐‐‐‐‐‐‐‐‐‐‐‐‐‐

24) 참조. Dom Miquel, Eˆ tre Moine, Sources Chrétiennes 29, Paris: Les Editions Du Cerf, Paris, 1982, 180-187. 25) 참조. Elio Gambari, Religious Life, The Daughters of St. Paul, Boston MA: St. Paul Editions, 1986,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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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26)

3.3.4. 육체적, 정신적 건강 유지 육체노동은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실제 무리하지 않은 적 당한 육체노동은 수도승의 건강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일 과 운동은 별개라는 현대인의 인식 앞에서 이 말은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 상 일과 운동을 연결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은 않은 것 같다.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것이 성가신 것이 될 수도 있고 건강을 유지해주는 운동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노동은 또한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유익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음과 정 신을 맑고 깨끗하고 단순하게 해준다. 땀은 우리 마음과 정신을 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수도승생활의 직접적 목표인‘마 음의 순결’을 준비시켜 주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27)

3.3.5. 기도의 연장 노동은 기도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도와 일치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기도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수도 승 전통이 이를 잘 증언해 주고 있다. 실제 초기 사막 교부들에게 있어서 기도와 노동은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삶 안에서 조화와 일 치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노동은 곧 기도의 연장이 ‐‐‐‐‐‐‐‐‐‐‐‐‐‐‐‐‐‐‐‐‐‐‐‐‐‐‐‐

26) 참조. Augustine Roberts, Centered on Christ, 72-74; Elio Gambari, Religious Life, 295. 27) 참조. Thomas Merton, The Silent Life,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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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들은 하루의 모든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서 행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한스 엔드레스(Hans Endres)는“노동은 그것이 기도가 될 때 만 진정한 노동이다”라고 하였다. 너무 천사적인 기도가 노동의 법을 잊게 할 수 있다면, 과도한 노동은 기도의 법을 잊게 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독방에서 손노동을 하고 있는데 기도시간이 되면‘이 가 지들이나 작은 바구니를 끝내놓고 일어나야지.’라고 말하지 말고 즉시 일어나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금씩 기도와 시 간경을 소홀히 하는 습관이 들 것이오. 그러면 당신 영혼은 영적이고 육 적인 모든 일에 황폐하게 될 것이오. 그것은 당신 뜻을 드러내는 시초이 기 때문이오.”28) 따라서 기도하는 법과 노동하는 법을 모두 아는 사람에게는 노동이 기 도가 될 수 있다. 관상을 방해하지 않는 활동은 하느님과의 내적 친교 안 에서 지속된다면 그분과의 일치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노동과 기도는 수도승생활 안에서 수렴될 수 있으며, 그 수렴은 사랑으로 관통된 마음이라는 점에서다. 노동과 기도는 둘 다 사랑을 표현한다. 공동체에 대한 자아포기적 봉사는 기도와 같이 나 자신으로부터 다른 형제들에게 로의 움직임이며, 자기를 내어주는 움직임이자 사랑의 움직임이다. 노동 중에 하느님께 대한 의식적이고 사랑어린 인식은 권고할 만한 기 도의 형태이다. 이 경우 노동은 기도이다. 왜냐하면 내가 노동을 할 때 나 는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은 내 전 삶이 주님께 봉헌되었 다는 의미에서 기도인 것이다.29) ‐‐‐‐‐‐‐‐‐‐‐‐‐‐‐‐‐‐‐‐‐‐‐‐‐‐‐‐

28)『사막교부들의 금언집』

29) 참조.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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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노동의 동기는 그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생계유지를 위해서이고, 영적인 관점에서는 한가함을 피하기 위함이다. 또 금욕적 관점에서는 고행을 하기 위함이고, 애덕의 관점에서는 자선을 행하기 위함이다. 이 외에도 사회적 관점, 종말론적 관점, 인본주의적 관 점 등이 덧붙여진다.

4. 노동의 목 적 앞에서 언급한 수도승 노동의 전통적 동기들은 곧 노동의 직접적 목적 과도 같다. 그러나 수도승 노동의 궁극목적은 하느님께 보다 큰 영광을 드리는데 있다. 어찌 보면 다른 목적들은 부차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은 수도승생활의 전체적인 부분이며 우리 전존재의 궁극적 가치에 참여한다. 즉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는 좀 더 고차적인 목적 에서부터 모든 수도승적 수행은 그 가치를 지닌다. 수도승은 수도원 밖의 사람들과 똑같은 형태의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의 노동의 동기와 태도 그리고 접근은 궁극적으로 수도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형태 의 일을 하던 수도승으로서 해야 한다. 그때 그의 노동은 참다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처럼 수도승들은 단순히 그들 자신이나 수도공동체 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결국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 는 것이다.30) 우리는 성 베네딕도가 수도원 생산품 판매와 관련하여 1베 드 4,11에서 차용한 다음의 중요한 구절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다.“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이 영광받으시게 할 것이다”(성규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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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참조.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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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동의 조 건 수도승전통은 노동이 순종으로 겸손하게 침묵 중에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순종과 겸손, 그리고 침묵은 수도승 노동의 전통적 조건들로 간 주되어 왔다.

5.1. 순 종 노동에 있어 순종은 첫 번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 하거나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기쁘게 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수도승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끊어버 린 사람이다.31) 모든 일을 자기 뜻에 따라 하는 것은 참된 수도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무슨 일이든 순종의 정신으로 행하려는 자세가 중요 하다. 시소에스 교부는 이렇게 말한다.“결코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만을 해서는 안 된다.”32) 필자가 지난 몇 년간 생활했던 미국 사막 수도원에서는 각자의 소임이 매일 달라진다. 보통 주일 오후, 공동체 게시판에 다음 주간 소임 배당표 가 붙는다. 아빠스로부터 시작해서 지원자에 이르기까지 한 주간 동안 해 야 할 각자의 소임이 배당된다. 여기에는 사전 양해나 협의도 없다. 처음 에는 이런 상황에 적응되지 않았던 필자에게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을 자기 뜻을 포기하는 순종을 닦는 수행의 기회로 생각하기 로 하고 어떤 소임이 배당되든지 기쁘게 받아들이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 다. 그 후 더 이상 어렵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질수록 어떤 상황에 처해지더라 ‐‐‐‐‐‐‐‐‐‐‐‐‐‐‐‐‐‐‐‐‐‐‐‐‐‐‐‐

31) 참조. 성규 4,10.

32)『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시소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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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어떤 일이 주어지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참 자유 가 아닐까!

5.2. 겸 손 수도승 노동의 두 번째 조건은 겸손이다. 성 베네딕도는 규칙 57장에서 이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만일 수도원에 장인(匠人)들이 있다면, 그들은 지극히 겸손하게 자신의 기능을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 중 누가 자신의 숙련된 기능으로 인해 오만해져 자기가 수도원에 어떤 공 헌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 일을 그만두게 할 것이다. 만일 후에 그가 겸손해져서 아빠스가 다시 그에게 그 일을 하도록 명령하기 전에는 그 일 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성규 57,1-3). 수도승이 어떤 일을 하든 늘 깨어 경계해야 할 것은 교만이다. 그는 자 기 노동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여야 한다. 만일 하느님의 영광 대신 자신의 영광이 자리하게 될 때, 그의 노동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 게 하는 도구로 전락할 것이다. 베네딕도는 바로 이런 우려 때문에 어떤 수도승이 자기 기술로 인해 교만해 지면 그 일을 그만두게 하라고 권고하 고 있다. 실제로 어떤 장상도 이렇게 하기는 현실적으로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베네딕도 성인의 요구는 상당히 강하다고 하지 않 을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영혼의 구원 문제를 더 우선시 했던 성 인의 가치 중심과 지향 가치를 엿보게 된다.

5.3. 침 묵 수도승 노동의 세 번째 조건은 침묵이다. 너무 과도한 노동은 잠심과 침묵을 방해한다. 이에 스승의 규칙은 너무 힘든 농사일을 포기하도록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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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고 있다. 스승의 얘기를 들어보자. “재산이 우리 육신에 유익하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우 리를 짓누르게 되면 영혼에게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은 소유하 되 이런 불편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매년 임대료를 안전하게 받아 우리는 오로지 영혼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사 실 우리가 영적 형제들에게 그것들을 경작하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과중 한 노고를 지우게 되고 단식의 관습을 잃게 될 것이다. 또 억지로 단식을 하게 될 때 인간은 영혼이나 하느님보다는 자기 배를 위해 더 일해야 하 는지에 대해 자문하게 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수도원의 일로서 는 한 가지 기술직종과 정원 일로 충분하다”(스승의 규칙 86,23-27). 따라서 침묵과 잠심을 방해할 수 있는 과도한 노동은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노동 중에 침묵이 필요한 것은 늘 하느님 말씀을 경청 하기 위함이며, 우리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함이다. 노동 역시 기 도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요와 침묵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실상 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노동의 동기들이 시대에 따라 다양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수도승 생활이 요구한 노동의 조건들은 늘 변함이 없다. 수도승을 어설픔과 과도 한 몰두라는 두 극단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과거와 같이 오늘날 역시 순 종, 침묵 그리고 겸손은 진정한 수도승 노동의 기준들이다.33)

6. 노동의 위 험 모든 수도승적 수행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은 것처럼 노동 역시 ‐‐‐‐‐‐‐‐‐‐‐‐‐‐‐‐‐‐‐‐‐‐‐‐‐‐‐‐

33) 참조. Dom Miquel, Eˆ tre Moine, 188-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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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것은 수도승생활의 궁극목적인 하느님과 의 관계 안에서만 참된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노동은 하느님을 찾고, 하 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일 수도승이 노 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활동주의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다. 그 러나 우리는 노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제 노동을 하 다보면 노동 그 자체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활동주의는 기도와 노동의 일치와 조화를 깨며, 결국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생활을 파 괴한다. 따라서“활동주의는 결코 수도승적 현상이라 할 수 없다.”34) 수도승생활에서 기도와 노동 또는 관상과 활동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활동(노동)은 관상(기도)의 열매이며, 관상은 활동의 토대(근 거)이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된 개개의 실재가 아니며 또한 분리시켜서도 안 된다. 노동은 기도의 연장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고 노동 자체에 빠져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될 때“노동은 나 자신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하 느님으로부터 나를 감출 수 있게 한다.”35) 이처럼 노동은 하나의 도피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노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분주함을 유지하는 것은 형제들과의 충돌을 피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 는 환상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36) 수도원에는 언제나 해 야 할 일이 있고 그 중 대부분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 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종종 수도공동체 안에 활동주의(activism) 정신을 낳는다.37) ‐‐‐‐‐‐‐‐‐‐‐‐‐‐‐‐‐‐‐‐‐‐‐‐‐‐‐‐

34) 35) 36) 37)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60.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63. 참조.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64. 참조.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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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being)는 행위(doing)에 앞선다는 철학적 명구가 있다. 왜냐하면 ‘행위’는‘존재’의 토대 위에 세워지기에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처럼 단순히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떠한 활동보다도 더욱 깊이 있고 중요하다. 수도승생활의 주된 목적은 무엇보다도‘행하는 것’ (to do)이 아니라‘존재하는 것’(to be)이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교의 사랑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더욱 많은 것을 행하는 것이 마치 그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유일한 길인듯 그릇된 활 동주의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38) 만일 노동이 충분한 관상적 여가와 번갈 아 수행될 때, 즉 기도와 일치,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충만하고 여유 있 는 기도의 분위기 안에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의 노 동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익과 우리 자신의 영혼과 육신의 회복을 가져 다 줄 수 있을 것이다.39)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수도승 노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수도승생활 에서 노동의 위치와 개념, 동기와 목적, 그리고 끝으로 그 위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수도승 노동은 결국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이는 기도와 더불어 수도승생활을 구성하는 하나의 본 질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노동은 하느님과의 관련 하에서만 참다 운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수도승생활 안에서 노동은 기도와 일치되고 조 화를 이루어야 한다. 즉 기도의 연장이 되어야 한다. 만일 노동 그 자체에 ‐‐‐‐‐‐‐‐‐‐‐‐‐‐‐‐‐‐‐‐‐‐‐‐‐‐‐‐

38) 참조.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55. 39) 참조.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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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몰두하여 기도와 일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활동주의의 위험에 빠지 게 되며, 결국 수도승생활을 파괴할 수 있는 해로운 요소로 전락해 버리 고 만다. 따라서 기도와 노동은 반드시 조화될 필요가 있다. 노동에 대한 이러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되었을 때, 비로소 노동에 대한 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노동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세 상에 줄 수 있는 증거의 일부이다...수도원들은 인간이 어떻게 현대의 기 술문명과 자동화에 의해서 지배당하거나 인간성을 말살당하지 않고서 그 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40) 사실 수도승은 노동의 참된 가치를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41) 수도승의 노동 은 그 외적 결실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특별한 품위를 갖는다. 그것은 또한 모든 인간의 노동이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안에서 그 참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증거한다.42) 우리가 노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에 따른 올바른 자세를 가졌을 때, 우리는 노동을 더 이상 귀찮게 여기거나 기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 히려 그것을 거룩하게 생각하게 되고 좀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적으로 받 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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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Charles Cumming, Monastic practices, 48. 41) 참조. Elio Gambari, Religious Life, 295. 42) Augustine Roberts, Centered on Christ,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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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행의 어머니와 베네딕도 규칙서1) 해리 하건2) 양숙희 이사악 옮김

나는 몇 년 전에 키케로(Cicero)의“감사는 덕행의 어머니이다”라고 쓰 인 카드를 한 장 받았다. 성규를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성 베네딕도가“분 별력”을“모든 덕행들의 어머니”라고 부른 규칙서 64장 19절과 이 문구 가 유사하다는 것을 직감할 것이다. 이 유사성은 분명히 덕행의 어머니가 하나 이상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덕행의 어 머니가 있을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키케로(B.C. 106-43)는 그나이우 스 플란키우스(Gnaeus Plancius)를 변호하는 연설에서“신사 여러분, 저 는 모든 덕행의 영향을 받고자 하지만 감사할 줄 아는 것과 그렇게 보이 는 것보다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감사이외에는요. 왜냐하면 감 사가 모든 덕행들의 최고봉이고, 그 외 다른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말하였다. 나는 이 문구를 라틴 텍스트를 집대성하여 한 단어나 합성어에 해당하 는 상당한 양의 고대나 중세 라틴어를 찾아내는데 도움을 주는 Brepols’ software database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나는 운이 좋게“(모든) 덕행들의 어머니” 라는 구절이 30번 이상이나 등장한다 ‐‐‐‐‐‐‐‐‐‐‐‐‐‐‐‐‐‐‐‐‐‐‐‐‐‐‐‐

1) Harry Hagan O.S.B., “The Mothers of Virtues and the Rule of Benedict”: The American Benedictine Review, 60:4(Dec. 2009), 371-397. 원문 각주는 생략한다. 2) Harry Hagan O.S.B.은 미국 마인라드 대 수도원의 수도승으로 신학교에서 구약성경 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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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알아냈다. 몇 몇 저술가들의 선택은 매우 독특하다. 예를 들면 키 케로는 그리스도인 저술가들이 성찬례의 감사 분위기를 드러내는데 좋은 소재였을 “감사”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인물이다. 특히 절제 (temperantia), 겸손(humilitas), 분별력(discretio) 그리고 애덕(caritas) 의 4가지 덕이 주목을 받는다. 몇 몇 저술가들은 덕행의 어머니들을 하나 이상 언급하고 있는데, 요한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는 분별력 과 겸손을“덕행들의 어머니” 라고 칭한다. 그는 두 덕행이 자신의 핵심 사 상들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하여 직시하고 있다. 이 맥락은 분별력을 덕행들의 어머니로 선택한 베네딕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분별력과 관련된 단어들의 분석을 통하여 이 사 상이 규칙서안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고, 아울러 겸손과 애덕에 대한 베네 딕도의 생각과 이들 덕행과 분별력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 다. 나는 사실 이 세 가지 덕행들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그 리스도인 성숙의 원천(source)이자 수단(way)이고, 목표(goal)이므로, 베네딕도에게도 이 덕행들은 서로서로 연관된 덕행들의 세 기둥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1 . 고 전 적, 교부학적 배 경 1.1. 절 제: 검 약, 절 제, 극 기(Temperantia: frugalitas, sobrietas, et continentia) 키케로외에도 Brepols 데이터베이스는 덕행의 어머니에 대하여 말한 이 교인 저술가인 3세기 로마의 역사가 율리아누스 유스티누스(Julianus Justinus)를 언급한다. 그는 절제(frugalitas)를 덕의 어머니로 칭한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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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권 어원은 다소 잘못된 이미지를 주어 수덕생활에 있어 절제의 중요성을 드러내는데 실패한 듯하다. 옥스퍼드 라틴 사전은 절제(frugalitas)의 주된 의미를“삶에 항구함, 신중한 행동습관, 삼감, 자제”등으로 제시하고 있으 며, 부차적인 뜻으로만“알맞은 수입이나 재산” 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키 케로는“나는 알맞음과 삼감(modestiam et temperantiam)의 의미를 가지 고 말한다. 절제 고 덕행들의 최고봉이 되는 절제(frugalitas)를 언급한다” 에 대한 강조는 아우구스티누스도 왜 절제를 덕행의 어머니들 가운데 하나 로 삼고 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만일‘부족함, 결핍’ 을‘어리석 (fullness)은‘지혜’ 음’(foolishness)으로 간주한다면,‘가득함, 충분함’ (wisdom)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절제를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 라고 불렀는데 상당히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겉보기에 오리게네스(185-251)도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 같다. 루피 누스(Rufinus)가 번역한 레위기 강론에서,“그는 절제(sobrietas)가 바로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것처럼, 다른 면으로 만취(ebrietas)는 모든 악덕 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절제가 삼감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오 리게네스는 그의 폭넓은 성서 텍스트의 주해에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 적으로 사용하는 만취에 관심을 더 보이고 있다. 레오 대 교황(440-61) 은 특별히 자제(continentia)를 덕행의 어머니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한 다. 자제(continentia)의 어원은 때때로 정결과 기본적으로 연결되지만, 초세기 문학의 금욕생활 분야에서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락탄티우스(Lactantius, 250경-325, 역사가)는“플라톤은 절제 (frugalitas)를 모든 것보다 앞세운다”고 했다. 추측해보건대, 희랍어 절 제(so¯phrosyne¯, swfrosuvnˆ)를 보통 라틴어“절제”(temperantia)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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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한 것 같다. 헬렌 노스(Helen North)가 그녀의 방대한 연구에서 밝힌 것처럼, so¯phrosyne¯에 대한 개념은 아테네 도시국가(polis)의 전성기와 비극(悲劇)의 태동기에 처음으로 발전되었는데, 모든 질서와 도덕적인 절 제, 그리고 도시국가가 요구하는 제약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플라톤은 이 용어를 받아들여, 그의 저서『국가』(Politeia, Politeiva) 제4권에서 절제 를 자신이 구축한 인간 기본 덕목의 하나로 만들었다. 4추덕(virtutes cardinales)은 지덕(智), 의덕(義), 용덕(勇), 절덕(節)으로, 스토아학파 에 의해 채용되었고, 로마, 교회 교부들, 그리고 나중에는 중세와 르네상 스 시기의 문학과 예술에까지 파급되었다. 플라톤은 절제에 대하여『국가』에서“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절제의 핵심 은 통치자나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일 즉 본능적인 욕구와 먹고, 마시고, 쉬는 즐거움을 다스리는 일이지 않는가?”하고 묻는다. 절제는 기본적으 로 자제력(self-control)의 문제로 인간이 합당한 질서라고 판단한 것을 실천하도록 도와준다. 이 판단은 아래에서 보게 되듯이 현명함을 따르게 되어 있으며 절제는 그 판단대로 실행하는 능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는 플라톤의 기본 덕행들을 일목요연하 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역시 중용과 자제력을『니코마코스 윤리 학』(E¯ thica Nichomacheia)에서 수덕생활의 기초로 거론한다. 이 책에서 그는 기본덕행의 척도를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가 아닌 다른 쪽에서 택하 고 있는데, 덕스러운 사람이란 무엇이 옳은지 알고 감지한 사람들로 양면 의 극단을 피할 줄 알고 덕행의 균형 잡힌 길을 선택한 사람들로 이해한 다. 그는 이렇게 천부적으로 덕이 있는 사람들을 무절제한 사람들 (akolastos)과 대비하여 자제하는 사람들(so¯phro¯n)3)이라고 부른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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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두 부류의 사람 외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다른 두 그룹을 구별 한다. 그 두 그룹 사람들은 모두 무엇이 옳고 선한지 알지만, 자신들이 해 야만 되는 것을 항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재빨리 자신을 가다 듬고 덕행의 균형 잡힌 길을 선택하고 지켜 나가기 위해 자제력 (enkrateia)을 가져야 한다. enkrate¯s(ejgkrathv") 그룹 즉 자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애를 써서 스스로 중용을 지키지만,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들 (akrate¯s, ajkrathv")은 해야 할 것을 인식은 하지만 중용의 덕을 지킬 수 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자제력은 이런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 을 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절제나 그와 비슷한 덕행을 덕행의 어 머니라고 부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도승 전통에서, 자제력은 절제의 의미를 넘어 금욕(aske¯ sis, a[skhsi")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리스어 askesis는“운동선 수들에게”는“연습과 훈련”을,“철학분야에서”는“삶의 태도나 전문성” 을, 그리고 교회 내에서는“수도승생활, 혹은 금욕생활”을 뜻했다. 플라 톤은 존재 자체이고 완전하며 이데아의 영역으로서 신들의 본거지와, 되 어가는 존재이고 불완전하며 그림자에 불과한 인간세계사이에, 자신의 우주적 이원론의 구조 안에서 이제는 금욕생활에 대한 철학적 기준을 제 공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모든 불완전 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금욕자들은 하느님 과의 충만한 일치에 도달하기 위해 철저한 정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미온 적인 방법에 만족하지 않는 그들의 덕행에 대한 추구는 곧 완덕에 대한 추구가 된다. ‐‐‐‐‐‐‐‐‐‐‐‐‐‐‐‐‐‐‐‐‐‐‐‐‐‐‐‐

3) 자제, self-cont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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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정 의(Justitia) 그리스도인이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의 교사인 락탄티우스(약 250-325)는 정의를“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기본 덕행을 선택하였는데 이 또한 위대한 로마법의 유산으로 인 정되었다. 베로나의 주교 제노(재임 362경-380경) 또한“진정한 정의” 는“모든 덕행의 원천이며 어머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진정한 정 의”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성서적 정의인데, 이는 때때로“악행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어리석음과 대조된다.

1.3. 그리스어권에서 말 하 는 덕 행 의 두 어 머 니 들 : 고 요 와 기 도 (He- suchia, Proseuche-) 그리스어권에서“덕행의 어머니”를 언급한 예는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래도 나는 우연히 두 가지 경우를 발견했다. 스텔리오스 람포스(Stelios Ramfos)는 압바 루푸스(Abba Rufus)가“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칭한 고요(he¯suchia, hJsucija)가“수도승을 사나운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어 상처를 입지 않게 해준다”고 말한 것을 주목한다. 그리스어“고요”에 해 당하는 단어는 그 유명한 헤시키아(he¯suchia)이다. 이 단어는 헤시키아 기도 전통을 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헤시키아 기도 전통에서, 격정으로 부터 자유로와진 덕은 완전함과 기도의 원천인 고요를 가져다준다. 그러 나 여기서 압바 루푸스는 반대로 고요함이 덕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요한 클라마쿠스(579-649)의『천국의 사다리』(Scala Paradisi) 28번째 단계 제목은“거룩하고 복된 기도(proseuche¯, proseuch~), 덕행의 어머니에 대하여, 그리고 기도에 합당한 몸과 마음의 태도에 대하여”적고 있다. 다 시 말하자면,‘기도는 덕을 낳는다’는 반대의 주장도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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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순 명(Obedientia) 사막 수도승들 가운데 어떤 익명의 수도승은“순명은 모든 덕행의 어머 니이고, 하늘나라의 탐지기이며, 천사들과 함께 살게 해준다. 모든 성인 들은 순명을 통해 유순하게 되고 완전함에 이르게 되므로 순명은 모든 성 인들의 양식이다”라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신국론』 에서 순명을 피조물과 창조주 관계의 기초로 언급하며, 더 나아가 집회서 10장 13절을 인용하여 교만을‘모든 죄악의 시작’이라고 칭한다. 전통적 으로 에덴동산의 죄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라고 이해되어왔는데, 이런 의미에서 순명은 겸손의 표현인 것이다. 이 관점은 요한 카시아누스 에서도 드러난다.

1.5. 덕 행 의 어머니로서의 애 덕(Caritas) 아우구스티누스가 애덕(caritas)을 택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 이다. 아를의 힐라리오(315-367)는 애덕을“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칭한 최초의 사람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러니 컬하게도 히에로니무스 또한 애덕을 선택했다. 이미 위에서 절제를 언급 하였던 레오 대교황도 주님공현 대축일 설교에서 애덕을 덕의 어머니라 고 칭했다. 아를의 대주교 카이사리우스(Caesarius, 467-542)는 신자들 에게 겸손과 함께“모든 덕행의 어머니”로서 애덕을 사랑할 것을 권고했 다. 그는 애덕을“그리스도교의 바탕”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수도승들 에게 한 설교에서 이러한 견해를 재확인했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540 경-604, 재임 590-604)은 그의 두 편의 편지와『사목서간』(Regula Pastoralis)에서 애덕을 덕의 어머니로 삼았다. 애덕은 가장 큰 계명4)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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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이므로 애덕을 둘러싸고 여러모로 탐색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믿음, 희망과 사랑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 한다(1코린 13,13). 혹시 이것만으로 불충분하다면, 토마스 아퀴나스 (1225-1274)의 주장을 더 들 수 있다. 그는 애덕을 모든 다른 덕들의 목 적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라고 하였다.

1.6. 그 외 의 제 안 들: 재 능 내 지 천 재 성(genius), 선(goodness), 인 내(patience), 역 경(adversity), 신 중 함(modesty) 4세기 말로 추정되는 익명의 전쟁에 관한 저서『De rebus bellicis』에서 ingenii magnitudo를 덕의 어머니로 언급하는데, 톰슨(Thompson)은 그 것을“지적 능력”이라고 번역한다. 그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틴어 virtus는 vir, 즉‘사내’에 어원을 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Virtus는 무엇보다“진정한 남자의 품격, 용감한 정신, 결단, 용맹”을 뜻했고, 자주 “힘”(power)을 의미했다. 여기에서“개성과 정신의 탁월성”그리고“도 덕적 탁월성, 덕행, 선”의 의미가 파생되었다. 5세기에 몇 몇 저술가들은 제 나름의 의견을 명백히 밝혔다. 베드로 크 리솔로고(400-454)는“선”을 찬양하였고, 소(少) 아르노비우스 (Arnobius Junior, +455년 이후)는 인내를 찬미하였다. 세상에 대한 하 느님 통치를 옹호하는 견지에서, 마르세유의 사제 살비아누스 (Salvianus, 400-480)는“육체적 아픔으로 인한 고통은 강인함 (virtutum)의 어머니”라고 했다. 동정녀들에게 쓴 글에서 세비야의 주교 레안데르(Leander, 540-약 600년 경)는“정숙”(modesty)으로 번역되 ‐‐‐‐‐‐‐‐‐‐‐‐‐‐‐‐‐‐‐‐‐‐‐‐‐‐‐‐

4) 참조. 마르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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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verecundia를“모든 정덕의 어머니”로 삼았는데, 이는 수치심이 방패 막이가 되어 자제하고 겸허해지는 것을 암시한다.

2 . 요 한 카시아누스에 있 어 겸 손 과 분 별 자제력과 애덕에 이어서, 모든 악덕의 어머니인 교만과 반대되는 겸손 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Johannes Chrysostomus, 347-407)는 교만을“모든 악덕의 뿌리”, 겸손 을“모든 선의 어머니”로 삼았다.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약 485580, 수도승)는 겸손을“모든 덕행의 평화”라고 하며 교만을 모든 악행 의 어머니라고 칭함으로써 또 다른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교부들의 금 언』(Verba Seniorum)에서 압바 아가토(Abba Agatho)는 자신감 (fiducia)이 모든 욕정의 어머니이며, 지나친 자신감보다 더 나쁜 것은 없 고, 비록 수도승이 암자에 홀로 있을 때라도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 점이 수도승의 진보에 있어 최상의 것이다. 애덕을 세 번이나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우스 대교황도 욥기에 대한 주해에서 겸손을 덕행의 어머니로 두 번이나 언급한다. 아마도 이 경우의 가장 중요한 예는 겸손을 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부 른 요한 카시아누스(약 365-433)의 열아홉 번째 담화에 나오는 것인데, 이는 단지 화려한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회수도승의 핵심적인 과업을 함축한 것이다. 이 담화에서 요한 압바는 은수자와 회수도승의 목표를 대 조하며, 은수자는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만 큼 모든 세상적인 것을 벗어난 마음을 추구하나(담화집 19.8.3), 회수도 승은“‘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을 따르기 위해”(담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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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필리 2,8)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빠스에게 순종한다고 말한다. 필리피서의 그리스도 찬가에서 유래하는 이 견해는“겸손”과“순종”의 두 핵심 단어를 포함한다. 아마도 이 점은 회수도승 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 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압바 요한은“회수도승의 목표는 죽음에 이르 기까지 모든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복음적 완성의 구원요청에 따라 내 일의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담화집 19.8.3)라고 말한다. 겸손과 순명에 대한 십자가의 관계는 또한『제도집』4권에서 아주 중요 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요한 카시아누스는 수도생활을 시작한 초심자들 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양성 에게 혹은 그가“포기한 자들(renuntiantes)” 에 대해 규정하며, 포기는 단지 십자가와 죽음을 드러내는 표시일 뿐이라 고 언급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순명은 질서를 잘 유지하거나 규칙을 잘 지키는 것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포기한 사람들이 어리석게 보이 는 명령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아빠스에게 철저히 복종함으로 자기 개인 의지를 철저히 포기했다는 과감한 표시와 증거의 역할을 한다. 요한 카시 아누스는 복종의 극단적인 예를 들면서 순명의 급진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겸손에 대해서는 자기 부정의 과정과 실현을 포함하는 데까지 자 신의 이해를 확장시키고 있다. 압바 피누피우스(Pinufius)는 겸손에 대한 요한 카시아누스의 모델이 되었다. 이 존경받는 노(老) 압바는 수도원을 떠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곳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가장 낮고 멸시 받는 수련자가 되어 다른 이들이 어렵고 하찮게 여기며 역겨워 하는 일들을 해냈다. 그는 드러나지 않고 가능하면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를 원 했다. 요한 카시아누스에게 있어 겸손은 덕행의 완성, 순결한 마음과 사도 적 애덕으로 이끌어 주는 핵심 수단이며,“모든 덕행의 어머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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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둘째 담화에서 요한 카시아누스는“분별(discretio)”을 덕행들 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이미 첫째 담화 끝머리에서, 압바 모세는 요한 카 시아누스와 그의 친구 제르마누스에게“내가 당신에게 조금 더 모든 덕행 중에서 최고이자 첫 자리를 차지하는 분별의 고상함과 영예에 대하여 말 하고자 한다”고 하며, 분별을 일컬어“중용을 낳는 덕”이라 칭한다. 이 때 문에 압바 모세는 둘째 담화 전체를 분별에 할애하고 있다. 그는 원로들 이 어느 날 밤에 모여서 어떤 덕행이 수도승을 항상 악마의 올무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 다. 어떤 이들은 단식과 밤샘기도, 물질을 업신여기는 것에 대한 열성을 들었고, 다른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도피가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이들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드디어 압바 안토니우스가 분별만 이 수도승을 극단적인 극기생활과 악으로 유혹하는 태만에서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선언했다(담화집 2.4.4). 그러므로 분별은 중용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분별은 판단한 것을 실행에 옮기게 하는 중용과 자제력의 전제조건이다. 결론적으로 압바 모세는 분별을“모든 덕행의 어머니, 수 호자, 중재자”라고 불렀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분별을 현명함(prudentia)과 연결짓는데, 몇 군데에 서 그는 지혜롭고 신중한 분별에 대하여 언급한다. prudentia는 라틴어에 서“실질적인 이해나 지혜를 뜻한다. 요한 카시아누스와 다른 라틴 저술 가들이 일반적으로 이 단어를 그리스어 지혜(sophia, sofija–)나 현명 (phronesis, frovnhsi")5)을 의미하는 기본 덕목으로 번역하였다. ‐‐‐‐‐‐‐‐‐‐‐‐‐‐‐‐‐‐‐‐‐‐‐‐‐‐‐‐

5) 프로네시스: 필요한 결정을 내리고 시기적절하게 행동하는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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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아마도 우리는 우리들이 누구를 현명한 사람이라고 부르는지 생각해 봄으로써 현명함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즉 자신에게 무엇이 좋고 유익한지 잘 숙고해 볼 수 있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예를 들면 자신 의 건강이나 체력에 무엇이 좋은지, 몇 몇 단편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보 편적으로 대체로 건전한 삶을 위한 방법으로 무엇이 이로운지 아는 것이 다”(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 5장).

그래서 phronesis는 차츰 특별한 상황에서 판단한 것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지 아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prudentia를『담 화집』에서 단지 11번만 사용하나, 분별은 74번 사용하고,『제도집』에서 30번 사용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가 분별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표시이 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 discretio(분별)는 사막 교부들의 전통에서 유래 한 것이고, 그리스어 diakrisis(diavkrisi")를 번역한 것이다. 라틴어나 그 리스어 모두“구별하는, 결정하는”뜻을 가진 동사에서 유래한다. 최근에 안토니 리취(Antony D. Rich)는 그의 상세한 연구에서 초기 그 리스교와 수도승전통은 diakrisis에 신학적인 차원을 더하였다고 주장하 면서, 둘째 담화에서 압바 모세가 요한 카시아누스와 그의 친구 제르마누 스에게“분별의 은총과 덕행”을 가르친 것을 언급하고 있다. 리취는“덕 행”을 철학 전통과 관련된 것으로,“은총”(grace)을 신적 선물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이 두 가지 차원을 당시 널리 퍼져있던 은총과 자유의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의 일부분으로 본다. 동시에 그는 신 학적 차원은 그리스도교가 본래부터 이 개념에 기여한 부분에 속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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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것은 이미 신약성서에서 드러났고, 오리게네스(185경-254)와 에바그리우스(4/5세기)로 이어져 발전시켰다. 이 점은 리취의 특별한 공 헌이다. 그래서 요한 카시아누스는 분별의 영적 원천인 마음이 순결한 상 태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하느님의 것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리취는 분별력은 영성생활의 모든 면에서 매우 중추적인 역 할을 한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요한 카시아누스에게 있어 분별력은 구별 해서 식별해 내는 수단이고, 결정하기 위한 수단이다. 다른 저술가들과 같이 요한 카시아누스도 하나 이상의 덕행에 대하여, 이른바 겸손과 분별에 대해 어머니의 영예를 부여하는데, 존자 베다 (Beda Venerabilis)도 마찬가지이다. 혹시 요한 카시아누스가 실제로 다 른 덕행을 보다 더 선호한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위 에서 언급했지만, 그는 겸손을『담화집』에서 83번,『제도집』에서 77번 언급한 반면에, 분별은『담화집』에서 74번,『제도집』에서 30번 사용한 다. 이래서 겸손이 우월한 것같이 느껴질 수도 있으나, 둘째 담화에서 압 바 모세는“진정한 분별은 참된 겸손 없이 얻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다 른 곳에서도 요한 카시아누스는 분별과 겸손이 수도승 생활의 핵심 덕행 으로 서로 연결시켜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재확인한다. 한 덕행은 다 른 덕행 없이 얻어질 수 없다.

3 . 베네딕도의 규칙서에 나 타 난 덕 행 의 어머니인 분 별 력 규칙서 64장에서 베네딕도는“분별력을 덕행들의 어머니”(규칙서 64,19)라고 부른다. 이는 여러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베네딕도가 자료 로 사용한 요한 카시아누스의 둘째 담화에서 기인한다. 이 견해는 일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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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베네딕도는 요한 카시아누스의 것을 그대로(exact) 그리고 모두 (full) 인용하지 않았다. 규칙서는 어머니에 해당하는 단어 mater를 사용 하고, 둘째 담화는 generatrix를, 즉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더욱이 요한 카시아누스는 분별력을“어머니, 수호자, 그리고 모든 덕행들의 중 재자”라고 말한다. 베네딕도는 확실히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택해서 그것을 자신의 말로 표현해낸 것만이 아니라 성조 야곱이 말한 분별력,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 릴 것이다”(창세 33,13)를 첨가함으로써 전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 다. The Library of Latin Texts(CLCLT-5)는 이 성서구절에 대해 더 이 상 다른 자료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베네딕도의 유일한 언급은 그의 강조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분별력을 덕행의 어머니라고 칭한 것은 규칙서 64장에서 절정에 달한 다. 64장에서 아빠스의 자질은“생활의 공덕과 지혜의 학식”(규칙서 64,2)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지혜는 성서적이면서도 희랍적인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더욱이 아빠스는“하느님의 법에 정 통함으로써 거기에서‘새것과 옛것을 골라낼 줄 알아야 하고”(규칙서 64,9) 분별력은 옛것과 새것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형제들 을 책벌할 때에도 아빠스는“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규칙서 64,12-13). 분명히 아빠스는“악습을 기르도록 허락함이 아니고 …… 오히려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보이는 방법에 따라 현명하고 사랑의 (태도로) 악습을 근절시키라는 말이다”(규칙서 64,14). 여기서 두 번 사 용되고 있는 단어 prudenter는 위에서언급한 신중함, 사려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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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udentia)의 기본 덕목과 관련된다.6) 중용의 길과 대조되는 것이 64장 16절에“아빠스는 부산떨거나 소심하 지 말 것이며, 과격하거나 고집부리지 말고 질투하지 말며 너무 의심하지 도 말 것이다”로 명시되어 있다. 대조적으로, 아빠스는“용의주도하고 깊 이 생각할 것이고”그의 명령은“분별있고 절도 있어야(discernat et temperet)”(규칙서 64,17) 한다. 마지막 구절의 두 핵심 단어 discernat et temperet가 우리의 주의를 끈다. 명령은 순리대로 되어야만 한다. 즉 이해와 판단이 실천에 앞서는 것처럼, 분별은 절도(temperantia)보다 선 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빠스는“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하여,” “모든 것을 절도있게(temperet) 처리하며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 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규칙서 64,19). 20세기 초 규칙서를 주해한 폴 들라트(Paul Delatte)는 분별력이야말 로“성 베네딕도 영성의 전부”라고 대단한 찬사를 했다. 많은 이들도 이 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장들을 보기 시작하면 즉시 그 단어가 잊 혀지는 듯하다. 베네딕도는 64장 17절과 19절에서 discretio를 사용하 고, 그 외에는 70장 6절에서만 한 번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부사 prudenter도 64장에서 두 번 나타나지만,7) 다른 곳에서는 한 번만 나타 난다.8) 그러나, 규칙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단어들이 분별력 (discretio)을 중심으로 의미군(semantic field)을 형성하기 위해 같이 쓰 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사와 동사의 성격을 갖는 단어“mensura”(한도, 정도)는 15번이나 사용되는데 의복의 치수 혹은 일의 할당량9)을 언급할 때, 그리고 모든 경 ‐‐‐‐‐‐‐‐‐‐‐‐‐‐‐‐‐‐‐‐‐‐‐‐‐‐‐‐

6) 참조. 규칙서 64,12.14.

7) 참조. 규칙서 64,12.14.

8) 참조. 규칙서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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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 분별의 가장 명확한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사용된다. 결정은 신중하 게(consideratio)10) 이루어져야 하는데 특히 병자나 허약한 이들, 소년들 과 연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연관된다. 이들 모두 예외가 필요한 경우 이다. 유사하게 providus(선견지명이 있는)11)는 아빠스가 예견하고 적당 한 때에 결정을 내리도록 해준다. 공동체에서 어떤 형제를 파문할 경우에 서 드러나듯이, 여전히 베네딕도는 결정을 서둘러 내리도록 재촉하지 않 는다. 규칙서 63장 5-6절에서 베네딕도는 나이가 지혜의 결실을 드러내야 하 지만 반드시 나이가 분별력의 보증은 아니라고 명시한다. 그리고 소년들 로서“장로들을 심판한”다윗과 다니엘을 거론한다. 동사 judicare(판단 하다)는 utilis와 함께 3번 나타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높 이 평가된 실용적인 지혜를 의미하는“유용한, 잘 맞는, 합당한, 편리한” 의 뜻이다. sapientia(지혜)가 단지 두 번만 나오나 형용사형인 sapiens(지혜로운)는 10번이나 나타난다. 파문받은 형제들을 다루는 장에서 도 아빠스는“현명한 의사”로 불리우고, 지혜로운 형제들“센펙타 (senpectae)”(규칙서 27,2; 28,2)를 파문 받은 형제들에게 보낸다. 마찬 가지로 지혜로운 사람을 당가나 문지기로 선택하도록 되어있다.12) 베네 딕도가 53장 22절에서 언급한 것처럼,“하느님의 집은 지혜로운 사람들 에 의해 지혜롭게 관리되도록 할 것이다”(규칙서 53,22). 베네딕도는 특 히 형제들을 회의에 소집하는 것(3장), 당가에 관한 장(31장), 어떤 형제 ‐‐‐‐‐‐‐‐‐‐‐‐‐‐‐‐‐‐‐‐‐‐‐‐‐‐‐‐

9) Mensura(양, 겷): 규칙서 11,2; 24,1; 25,5; 30,1; 39장 제목; 40장 제목.2.8; 49,6; 55,8; 68,2; 70,5; mensurare: 31,12; 48,9; 55,8. 10) Consideratio: 규칙서 8,1(rationis); 34,2; 37,2. 3; 48,25; 53,19; 55,3; 20,21. 11) Providus: 규칙서 3,6; 64,17; providere: 55,8; praevidere: 25,5; 32,1. 12) 참조. 규칙서 31,1;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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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불가능한 일을 명령받았을 때를 다루는 장(68장)에서 이 점을 보다 상 세히 전개시키고 있다. 성서적 관점에서“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두려워함”이므로, 지혜는“주 님을 두려워함”과 관련이 있다.13)“주님을 두려워함(경외함)”은 하느님 의 계명을 지키도록 고무하여 지혜의 길을 걷도록 재촉한다. 그래서 규칙 서 머리말에서“아이들아 와서 내 말을 듣거라. 주님을 두려워함을 너희 에게 가르쳐 주겠노라”(규칙서 머리말 12; 시편 34,12)고 소리친다. 두 려워함에 해당하는 단어 timere, timor는 규칙서에서 22번 등장한다. 물 론 부정적 의미의 두려움도 있지만, 규칙서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늘 하 느님과 관련된 것으로 긍정적 두려움이다. 베네딕도는 수도원의 여러 곳 에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3장 11절의 아빠스, 5 장 9절의 순명, 7장 10절과 11절의 겸손의 첫째 단계, 31장 2절의 당가, 36장 7절의 양호 담당자, 53장 21절의 손님 책임자, 64장 1절의 아빠스 를 선출할 사람들, 65장 15절의 원장임명에서 아빠스에게 의견을 주는 사람들, 66장 4절의 문지기들이 그 예이다. 수도원에서 어떤 직책에 맞는 사람에 대한 언급은“주님을 두려워함”에 대한 중요성을 표현한 것으로, 주님을 두려워함의 성서적 기초는 지혜와 관련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분별과 연관이 된다. 베네딕도의 분별력은 그 자체로 또한 규정들에 대한 그의 균형 잡힌 접 근을 보여준다. 그는 머리말 46-48절에서“공정한 이치”에 맞게“다소 엄격한 점을 요구”하지만“거칠고 험한 것은 아무 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며, 거칠고 험한 것이 있다면“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

13) 참조. 시편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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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최소한의 것만 요구되는 상황이라면, 최소한의 것만 지키도록 제정하고 있다. 더욱이 아빠스는 음식과 음료, 잠과 의복, 보속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아빠스는 매사에 중용의 안내자이다. 베네딕도는 라틴어 단어 규칙(regula)을 주로 자신이 직접 쓴 규칙서를 언급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똑바로 선을 긋거나 측정하는데 사용되는 곧은 막대기, 잣대”를 의미한다. Regula는 측량과 관련된 단어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자신의 규칙서가 항상 결 정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아빠스에게 문서화된 것을 변경시키고, 조정하고, 해석할 재량을 주었다. 흥미롭게도, 규칙서 는 또한 형제들이 아빠스에게 순응할 것을 요구하기보다 아빠스가 자신 에게 맡겨진 형제들에게 몸소“순응하고 알맞게”해줄 것을 요구한다.14) 분명히 아빠스는 공동체를 위하여 분별력을 행사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련된 단어들 에 대한 연구 작업은, 비록 규칙서에서 단어 분별력(discretio)이 자주 등 장하지는 않지만, 들라트(Delatte) 아빠스가 분별력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성숙의 중용의 길이라고 주장하고 명확히 한 것처럼, 분별력은 규칙서 전 반에 배어있는 기본 정신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의미 군에 반드시 추가해야 할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부사“합리적으로” (rationabiliter)15)이다. 이 부사는 3번 등장하는데 매번 겸손과 함께 사 용되고 있다. ‐‐‐‐‐‐‐‐‐‐‐‐‐‐‐‐‐‐‐‐‐‐‐‐‐‐‐‐

14) 참조. 규칙서 2,32. 15) Rationabiliter: 규칙서 2,18; 7,60; 31,7; 61,4; 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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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rationabiliter cum humilitate) 61,4 이치에 맞게 또 …… 겸손을 가지고(rationabiliter et cum humilitate) 65,14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요청하고(rationabiliter et cum humilitate)

이러한 조합은 두 덕행 사이에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드러낸다. 들라트 (Delatte) 아빠스는“베네딕도에게 있어 겸손은 다른 여러 덕행들을 실천 하는 것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포괄적인 덕행,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요한 카시아누스처럼 들라트 아빠스도 분별력과 겸손을 꼭 같이 덕행의 어머니로 삼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과연 겸손이 베네딕도의 접근에서 그러한 으뜸을 차지하는 것일까?

3.1. 규 칙 서 에 드 러 난 덕 과 완 덕 의 원 천 과 수단으로서의 겸 손 물론 베네딕도도 요한 카시아누스의 자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스승의 것을 채택하여 겸손에 대하여 7장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베네딕도는 중요한 몇 군데만 어순을 바꾸고 주로 본문을 삭제하여 변화를 주고 있 다. 베네딕도가 전통에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삽입하고 있음을 보여주 는 후대의 장들과는 달리, 규칙서 7장은 폭넓은 맥락에서 스승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겸손에 관한 베네딕도의 이해를 알아보려면, 7장 이외에 다른 장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단어 겸손(humilis, humilitas, humilare)은 규칙서에 서 52번 쓰이는데, 7장에서만 29번 등장하고 나머지 23번 중 3번은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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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과 병행을 이루고 있으며,16) 20번은 베네딕도 고유의 것이다. 단어의 사용 횟수는 베네딕도에게 겸손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위해서는 독립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겸손의 모델로 피누피우스 아빠스를 들었는데, 나는 베네 딕도의 겸손에 대한 본보기로 규칙서 31장에 나오는 당가에 초점을 맞추 고 싶다. 당가는 수도원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시작하고, 실행하거나 혹 은 그만둘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힘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규칙서는 당가 의 기본 덕목으로 순명, 분별력, 그리고 겸손을 들고 있으며, 아빠스에게 순종해야 함을 세 차례17)나 강조한다. 이는 겸손을 과격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요한 카시아누스가 말하는 순명과 다른 것으로, 베네딕도는 순명을 조화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명령의 체계성을 보증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당가는 현실적으로 장상의 범주에 드는 것이 쉬운 편이나, 아빠스에게 대 한 순명으로 적당한 자신의 자리에 머문다. 둘째, 분별력은 당가가 모든 것을“절도있게”(규칙서 36,12)하도록 해준다. 만일 누군가 부당하게 청 하면 당가는“겸손되이 이치에 맞게”(규칙서 31,7)거절할 것이다. 셋째, 베네딕도는“당가는 무엇보다도 겸손을 지녀야 한다”(규칙서 31,13)고 말한다.“무엇보다”(ante omnia) 구절이 중요한데, 스승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는 반면에, 우리 규칙서에서는 6번이나 사용된다. 베네딕도는 각 경우마다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데, 이 구절에서는 당가에게 겸손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베르나르도 성인을 자신의 영적 안내자로 삼고 있는 ‐‐‐‐‐‐‐‐‐‐‐‐‐‐‐‐‐‐‐‐‐‐‐‐‐‐‐‐

16) RB 5,1=RM 7,1; RB 6,1=RM 8,1; RB 27,3(humilitatis satisfactio)는 RM 13,61; 30,30, 73,4에서 발견된다. 17) 참조. 규칙서 31,4-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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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케이시(Michael Casey)는 겸손을“진리를 살아내는”도구라고 주 장한다. 이런 관점은, 겸손의 덕이 당가에게 자신이 처한 현실적 실상에 접근하여 현실을 핑계로 삼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현실 감각을 제공해 준다. 결론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겸손은 당가가 공동체위에 군림하거나 혹은 자신의 직책 때문에 혹시라도 공동체안에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아준다. 우리는 수도원의 기술자들은“온갖 겸손을 다하 여 그 기술을 사용”18)하라고 권고하는 규칙서 57장에서도 이 점을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네딕도는 독서자와 선창자,19) 손님들을 맞이하는 사람들,20) 그리고 수도원에 거주하기를 원하는 사제들21)처럼 공동체에 서 봉사하는 사람을 다루면서도 겸손하라고 요구한다. 수도원의 원장과 사제들에 관한 장에서도 베네딕도가 주지하고 있듯이, 봉사하는 이들은 명예욕에 약한 사람들이므로 겸손의 덕을 갖추어야 봉사할 수 있다. 그래 서 베네딕도는 규칙서 2장에서“다만 우리가 선행에 있어 다른 사람들보 다 뛰어나며 겸손한 자로 드러날 때에 우리는 이 점에 있어 그분께로부터 구별을 받는다”(규칙서 2,21)라고 한다. 당가의 다른 사람들과의 적절한 관계에 대한 강조는 관계를 다루는 다 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겸손은 기도를 다루는 20장에서 두 차례22)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다. 겸손 의 덕은 또한 아빠스에게 의견을 제출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하는 덕목이 기도 하다.23) 마찬가지로 겸손의 덕은 장상에게 무엇을 청하거나 받아야 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합당한 태도이기도 하다.24) 마지막으로, 겸손은 ‐‐‐‐‐‐‐‐‐‐‐‐‐‐‐‐‐‐‐‐‐‐‐‐‐‐‐‐

18)“온갖 겸손” : 규칙서 3,4; 6,7; 20,2; 53,6; 57,1. 19) 참조. 규칙서 47,4. 20) 참조. 규칙서 53,6.24. 21) 참조. 규칙서 60,5. 22) 참조. 규칙서 20,1.2. 24) 참조. 규칙서 6,7; 34,4. 23) 참조. 규칙서 3,4; 61,4; 6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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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의 관계25)에서 생긴 상황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도 록 해주기 때문에 잘못을 교정해 나가는 절차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베네딕도에게 있어 겸손은 공동체 안에서 살고 공동체에 봉사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관계를 보장해 준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겸손을 죽음, 그리고 십자가와 관련시킨다. 겸손에 관한 규칙서 7장은 스승에 의해 수정된 이런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 나, 규칙서는 폭넓은 관점에서 요한 카시아누스에게서 발견되지 않는 점 을 강조하는데, 바로 분별력이다. 모세 아빠스가 둘째 담화에서 분별력을 덕행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카시아누스는 피누 피우스 아빠스를 겸손의 모델로 삼고 있다. 피누피우스 아빠스는 대단히 극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로서 겸손의 덕을 철저히 닦기 위해 익명성과 비 굴함을 선택한 인물이다. 베네딕도가 말하는 당가의 직책은“아무도 하느 님의 집안에서 혼란을 느끼거나 상심하지 않게”(규칙서 31,19) 해야 하 니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일도 상식적이고 자연스럽게 대해야 한다. 겸손 의 덕은 당가가 하루하루 현실적인 일들을 보고 이치에 맞든 안맞든 다른 사람들의 매일의 요구들을 분별력 있게 다루도록 해준다. 당가에게 요구 되는 겸손의 덕은 극적인 것도 아니고 잘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규칙서 가 말하는 겸손의 영웅적이고 위대한 면이 바로 이런 것이다. 겸손은 베 네딕도에게도 그리스도인 성숙을 향한 본질적 수단이지만, 요한 카시아 누스나 스승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지 않다. 베네딕도가 말하는 겸손은 분 별력으로 말미암아 보다 더 겸허함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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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참조. 규칙서 27,2; 45,1.2; 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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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규칙서에서 말 하 는 덕 행 과 완 덕 의 원 천 과 수단으로서의 애 덕 요한 카시아누스는 겸손의 목표를 사랑에 두었다.“진리 안에서 겸손을 소유하게 되면, 겸손은 즉시 당신을 두려움이 없는 더 높은 경지인 사랑 으로 인도해준다”(제도집 4.39.3). 요한 카시아누스는 사랑을 출발점이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완성으로 보 았다. 스승도 이 견해를 따랐다.26) 베네딕도 역시 사랑을 목표로 보았 다.27)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또한 사랑을 덕행의 수단으로 간주하였 다. 그래서 혹자는 심지어 사랑을 모든 덕행들의 원천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앙리 드 상트 마리(Henri de Sainte-Marie)는 규칙서에 나타난 사랑이 라는 단어를 분석하고 스승이 사용한 것과 대조하였다. 그는 베네딕도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만‘amor’라는 명사를 사용하고,‘amare’라 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이런 현상은‘amare’가“욕정의 요 소를 포퐈녃歐戍�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신 베네딕도는 인격적인 관 계를 강조하는 동사‘diligere’를 선호하여 사용한다. 이 단어는 규칙서에 10차례 등장하는데, 여섯 번은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스승과 병행을 이루고 있으며, 4번은 규칙서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4,70-71 연로(곐걛)한 이들을 공경(venerare)하라. 연소(곐少)한 이들을 사랑(diligere)하라. 63,10

그러므로 후배들은 자기 선배들을 존경(honorent)할 것이며, 선배들은 자기 후배들을 사랑(diligant)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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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참조. 스승의 규칙서 10,88.

27) 참조. 규칙서 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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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

아빠스는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diligat)할 것이다.

72,10

수도승들은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caritas)으 로 사랑(diligant)하고

매번 동사 diligere는 수도승간의 관계 혹은 아빠스와 수도승간의 관계 를 강조한다. 돔 앙리(Dom Henri)는 베네딕도가 명사 caritas를“항상 이웃과의 사랑을 의미할 때”사용하므로, 인간 상호관계를 말할 때 베네 딕도가 선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그의 의견에, 규칙서에서 단어 caritas는 네 가지 차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덧붙이고 싶다. 애덕 (caritas)은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근원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래서 아빠 스는“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규칙서 머리말 47), 그 리고“평화와 사랑을”(규칙서 65,11)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한다. 둘째, 애덕은 교정의 원천28)으로 작용한다. 셋째, 애덕은 순명의 동기가 된다. 마지막으로 애덕은 직접적으로 봉사와 연결되어 있다: 식탁봉사29), 손님 맞이.30) 그러므로 사랑의 덕은 그리스도인들과 수도생활을 하려는 이들 에게 목표이며 수단이다. 수도승이 가져야 할 좋은 열정에 관한 규칙서 72장은 삶의 길로서 사랑 에 관한 가장 명확한 명제들을 나열하고 있다.“수도승들은 지극히 열렬 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로 시작하여 수도승들이 이 열정 을 어떻게 실행할지 구체적으로 5가지 명제에서 묘사하고 있다. 각 사항 마다, 상대방이 수도승 행동의 초점이다. 나는 하나하나가 사랑의 구체적 ‐‐‐‐‐‐‐‐‐‐‐‐‐‐‐‐‐‐‐‐‐‐‐‐‐‐‐‐

28) 참조. 규칙서 27,4; 64,14. 30) 참조. 규칙서 53,3; 66,4.

29) 참조. 규칙서 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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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72,4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se invicem; 로마 12,10),

72,5

서로의(suas)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72,6

서로(sibi) 다투어 순종하고,

72,7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 려 남에게(alio)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72,8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caritatem fraternitatis caste).

이러한 표현들은 함께 살며 서로를 섬기는 가운데 전 생애를 걸쳐 서서 히 실현하는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분명히 이 장에서 보면, 사랑은 단순 히 목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성숙의 원천이며 수단이다. 여기에 베네 딕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덧붙이고 있다:“하느님을 사랑(amore)하 여 두려워 할 것이다”(규칙서 72,9). 규칙서 7장 67절에“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라고 명시되어 있듯이, 사랑과 두려움의 연관은 학자 들 사이에 토론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두 단어는 전통에서도 발견되 고, 내가 위에서 주장했듯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사랑은 성서적 지 혜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분별력의 영역에도 속한다. Amore는 다양한 형 태로 번역 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두 단어는 서로 반대되는 것도 아니고, 서로 떨어질 수 조차 없는 것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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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행의 어머니와 베네딕도 규칙서

흥미롭게도, 베네딕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언급한 후에 그리고 그 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말하기 전에 수도승들에게 아빠스를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caritate) 사랑 (diligant)해야 한다”(규칙서 72,10). 보궤 (Vogüé) 신부는 이것을“아 빠스를 하느님의 대리자로 간주하여 신학적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배치 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보궤 신부는 아빠스의 지위를 높게 해석하지만, 그 명제의 어조는 매우 따스하고 수도승을 아빠스 가까이 두고 있다고 주 장한다. 베네딕도의 인간관계에 대한 두 가지 핵심어, diligere, caritas는 매우 인상적인 한 쌍의 단어 즉“진실하고 겸손한”에 의해 다시 강조되고 있다. 진실하다(sincera)는‘성실한’의 뜻이고, humilis는 겸손과 사랑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미 규칙서 61장 4절에서 외래 수도승은“이치에 맞게 또 사랑에서 나 온 겸손으로”비평하도록 권고를 받고 있다. 이 구절은 분별력, 겸손, 그 리고 사랑, 세 가지 덕행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는 규칙서에서 세 가 지 덕행이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 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분별력 없 이 겸손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분별력은 사랑을 향해야 하고, 모든 사랑 은 반드시 겸손해야만 한다. 사랑에 대한 주제는“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규 칙서 72,11)는 베네딕도의 여덟째 명제에서 절정을 이룬다. 베네딕도는 이 표현을 치프리아누스의『주님의 기도』해설에서 인용하여 자신의 사랑 에 대한 가르침을 종합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목표이고, 사랑 은 길이다. 그래서 베네딕도는“그리하여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해리 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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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규칙서 72,12)라고 간청하신다. 우리는 이미 규칙서 4장 21절에서 베네딕도가 아타나시우스가 쓴『안토니우스의 생 애』에서 인용한“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 라”는 외침을 들었다. 이 표현은 다시“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더 낫 게 여기지 말라”는 43장 3절에서 반향되고 있는데 이 표현은 기도생활을 사랑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비록 베네딕도가 사랑을 덕행의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지만, 이 장은 이웃, 하느님, 혹은 아빠스에 대한 사랑이든 상관 없이 다른 이에 대한 사랑이,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않 음을 추구하는 이 삶의 초석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애덕 은 규칙서에서 그리스도인 성숙의 세 번째 위대한 수단이다.

결론 베네딕도 규칙서는 몇 가지 중요한 삼화음(三和音)을 제시하는데, 그 첫 번째는 5 장에서 7장까지 나오는 순명, 침묵, 그리고 겸손이다. 베네 딕도는 이 세 요소들을 금욕생활의 기초로 삼은 스승을 따르고 있지만, 분량을 축소시키거나 강조점을 다르게 하고 있다. 순명, 정주, 그리고 수 도승답게 생활할 것, 즉 수도서원으로서 다른 삼화음을 이루고 있는데, 베네딕도는 이것을 더 중요시한다. 오늘날 강조되듯이 세 요소는 서로서 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서원의 세 면일 뿐이다. 이 글에서는 베네딕도 가 제시하는 분별, 겸손, 그리고 사랑이 또 하나의 삼화음을 이루고 있음 을 주장하였다. 세 가지 덕행들은 규칙서 전반에 배어 있으며,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덕행은 고유한 방법으로 덕행의 어머니이고,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않도록 인도하는, 즉 그리스도인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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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행의 어머니와 베네딕도 규칙서

숙으로 이끄는 원천이고 수단이다. 비록 각자는 다른 덕행들보다 어느 한 덕행을 선호할지라도, 여전히 하나하나의 덕행은 베네딕도가 제시하는 수도승생활 구도 안에서, 여정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것을 충분히 제공하 기 위해, 다른 덕행들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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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와 행복의 추구 아모스 슈미트1) 김순복 베다 옮김

규 칙 서 에 서 본 인 생 의 목 표 와 길 에 대 한 고 찰: “보 라, 주 께 서 당 신 자 애 로 써 우 리 에 게 생 명 의 길 을 보 여 주 신 다”(성 규 머 리 말 2 0 ).

베네딕도는 규칙서가 높은 덕과 완덕에 이르게 하는 좋은 삶, 의미 있 는 삶의 길을 안내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무엇이 이 세상의 삶을 좋은 삶 이 되게 하는 것일까? 보람 있는 계획에 전념하는 것일까? 내가 달성할 도덕적이며 지성적인 성취인가? 높은 수준의 공동체 정신이나 단순의 가 치를 알게 되는 것일까? 본질적인 것에 집중 전념하는 것일까? 규칙서는 우리를 어떤 종류의 완덕에로 이끄는 것일까? 높은 덕에 다 다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규칙서 1장에 서술된 패덕한 수도승의 종류 즉 사라바이따와 기로바꾸스(떠돌이 수도승)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 을 것 같다. 사라바이따들은“혼자서 목자도 없이, 주님의 양떼에서가 아 니고 오직 자기네들의 무리 안에서 사는 자들이다. 그들의 법은 욕망의 쾌락이며, 자기들이 추정하고 선택한 것은 무엇이나 다 거룩하다고 하고 자기들이 원치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긴다”(RB 1,8-9). 그리고 기로 ‐‐‐‐‐‐‐‐‐‐‐‐‐‐‐‐‐‐‐‐‐‐‐‐‐‐‐‐

1) Br. Amos Schmidt(독일 Trier의 St. Matthias 수도원 수도승), “Benedikt und die Frage nach dem Glück”: Monastische Informationen, 117(1. März 200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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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와 행복의 추구

바꾸스들은“항상 떠돌아다니며 한 번도 정주하지 않고 자기의 뜻과 탐식 에 빠진 자들로서, 모든 점에서 사라바이따들 보다도 더 나쁜 자들이다” (RB 1,11)라고 서술되어 있다. 베네딕도가 보는 좋은 삶의 개념은 사라바이따와 기로바꾸스들 같이 아 무데도 매인데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생활과는 큰 대조가 되는 삶으로 서, 인간이 아무 방향도 없이 자기 멋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확고한 목적 과 확고한 규범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삶은 감각 적인 자제력과 관련되는 것이며, 모든 욕구가 다 충족되도록 허용하는 것 이 아니다. 사라바이따와 기로바꾸스들의 삶의 방식은 쾌락 추구와 무질 서한 충동을 따르는 것이다. 그들은 무절제한 변덕으로 한번은 이런 방향 을, 한번은 저런 방향을 취하며 윤리적인 행위에 주체성이 없는 것이다. 사라바이따와 기로바꾸스의 삶과의 특성상 차이점은, 베네딕도가 보는 바와 같이, 나 자신이 나의 삶을 결정한다는 의미로 주체성 있는 삶을 영 위하는 것이다. 베네딕도의 가르침은 성공한 삶이 되게 한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은 개 개인에게 삶의 자세와 태도를 통합케 하고 내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자극 하여 강인하고 굳건한 성품을 지니게 하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은 선행을 할 수 있게 할뿐만 아니라 선행을 필요로 하고 선행을 습관화 되게 하며 자아 행위의 바탕이 되도록 심정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성격의 내적 통합과 비교적 지속적 성향의 뿌리 내림이 없는 경우에는 그 릇된 목표를 지향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생행로에서 과실 과 빗나간 행위로 궁지에 몰리게 되고 결국 남에게 예속되도록 한다. 그 와 반대로 굳건한 성품은 명실 공히 자아실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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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분명한 윤리적 목표가 있는 그런 확고한 성격의 바탕 위에서만이 다 양한 삶의 위치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며, 입장, 행동거지, 주어진 여건, 발전 등에 대해 의미심장하게 깨닫게 되고, 중요한 것과 중 요하지 않는 것의 구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베네딕도의 눈에 비쳐진 사라바이따와 기로바꾸스들의 생활양식은 스스로 결정한 삶을 살도록 허 용하는, 구속력 있는 지침을 제공할 수 없다. 우선 베네딕도께서 그들의 생활양식에서 보는 바는, 문제성 있는 입장으로, 삶의 성공 가망성을 송 두리째 파괴하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이런 부정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복음과 고대 교회적 영성 을 토대로 하여 정주(stabilitas)를 중심에 두는 좋은 삶의 문화를 규칙서 에 담으려 기획했던 것이다. 좋은 삶의 문화는 각자에게 정주의 마음을 갖 게 하는데 탁월한 기여를 한다. 그 삶은 그리스도의 사명과 약속을 자기 삶의 기초로 삼아 마음에 각인하여 결심케 하고 그 문화는 각자에게 복음 의 가치와 복음의 기준에 의한 회심과 새로운 분별의 어렵고 힘든 길을 다 시 또 다시 새로 통과하도록 격려하고 돕는다. 그것은 베네딕도의 말씀과 같이, 지치거나 도망가지 않고, 주님으로 인해 참아 견디는 것이다. 베네딕도에 의하면,“복음 성서의 인도함을 따라”(RB 머리말 21) 살겠 다는 결심은 도덕적인 요구나 윤리적인 명령 이상으로 살겠다는 말이다. 즉 그렇게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덕에 나아가도록 노력하고, 윤리적 으로 수양을 쌓아, 성숙하게 되도록 힘쓰며, 덕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노 력하고, 선에 항구하도록 힘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네딕도는 한층 더 철저히 성서적인 사고에 근본을 두고, conversio 또는 conversatio morum에 의해 품행교정이 올바르게 잘 향상 되고, 윤리적 요구가 충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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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와 행복의 추구

된다면 다행이라 여긴다. 베네딕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수도 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새로운 동기를 부여한다. 누구나 회심하여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은, 질 높은 선행을 제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의 선하심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선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나는 내 뜻을 따르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 을 따르기 위해서 왔다”(요한 6,38)고 말씀하신 주 그리스도의 뜻을 따 르고, 자신의 뜻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 동기는 윤리적 노력의 토대가 되는 주님과의 결합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결합에는 가) 남을 대할 때 그 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고 나) 마지막 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희망으 로 어려움을 감수하고 역경을 견디어 내며, 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고 싶고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되고 싶은 갈망 등이 속한다. 예수님을 본받는다고 해서 윤리의 요구사항들이 약화되거나 감소되지 는 않는다. 오히려 예수께서는“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한 것처 럼 너희도 완전하게 되어라”(마태 5,40)고 하시며 이를 더 강화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의 의도는 더 많이 요구하거나 윤리적 이 상의 구현을 더욱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그 행동을 위한 새로운 동기를 제시하 려고 하는 것이다. 그 목표는 하느님 대전에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완 덕일 수는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려는 바로 그 사 상을 물리치시는 것이다. 그 새로운 동기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 지로 모시고 예수님의 형제자매로서 하느님의 가족이 되어 인간으로 가 능한 정도의 완덕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하느님이 우리를 예 수님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제안에“예”라고 답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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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된다. 이“예”라는 답은 다름 아닌 바로 하느님의 모상이 되게 해주 신다는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고, 우리를 친구와 동거인이 될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과의 결속을 다짐 한다는 표현인 것이다. 베네딕도는 주님과의 결속과 그 결속을 심화하려는 노력은 그 결속을 느껴 체험할 수 있고, 외형으로도 제대로 된 공동체에서“규칙과 아빠스 아래”(RB 1,2) 공동생활을 하는 장소라야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기로바 꾸스와 사라바이따는 명백히 그런 결합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 다. 그들에게는“순종의 노고”(RB 머리말 2)란 있을 수 없고, 아빠스를 자기들 앞에 세우고 싶지도 않으며, 그냥 그들의“욕망과 탐욕”을 따라 마음대로 살 뿐이다(참조. RB 5,12). 그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사 람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법이고, 그들의“비참하기 짝이 없는”(RB 1,12) 품행을 옳다고 보는 그들 자신의 판단이 규범인 것이다. 베네딕도에 의하면 복음의 인도를 따르는 길은 보지 않아도 되는 어떠 한 인생의 미래를 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종말이 성공일지 아니면 실패일지를 결정지을 길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그리스도 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참조. RB 72,11) 라고 한 요청은 심각하고 신중한 것이다. 베네딕도는“마침내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때가 이미 왔습니다”(RB 머리말 8)라는 성규 머리말에서처럼 우리를 인생 실 존의 최후 상황에로 몰아가며“하느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는 말씀 에 귀기우려 들을 것”(RB 머리말 9)과“자기 뜻을 버리고 참된 왕이신 주 그리스도를 위해 분투하고자 하는 자여, 나는 너에게 이 말을 하는 바 이다”(RB 머리말 3)라는 말씀으로 주님께서 복음에서 보여주신 길들을 따라 아무 구속됨 없이 온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나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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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와 행복의 추구

베네딕도는 인간이 자신의 전존재로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가는 길은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란 선을 사랑하고“선으로 악을 이기는”(로마 12,21) 보다 큰 정의실현을 위해 힘쓰는 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길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삶을 알아 찾게 하여, 우리를 하느님의 “장막”(RB 머리말 22.24)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우리가 갈망하는 목표 가 이루어지고, 완성되는“나라”(RB 머리말 50)에 도달케 하는 길인 것 이다. 베네딕도는 우리가 이 길을 깨닫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벅찬 감격을 받을 것이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벗 공동체를 이룬다면 그 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고 여기는 분이다. 베네딕도는 이 길에서 갖게 되는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 길 위에서 우리의 마음이 넓 어진다는 것을(RB 머리말 49.50) 소개한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 자기중심의 좁은 세상에서 나와, 하느님 창조의 넓은 세상에 로 들어갈 수 있는 역동적인 활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복음이 가르치는 길은, 성규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노력 방향과 실천의지의 방향을 자기주장의 요구, 자기 한계의 확장, 삶의 성공 쟁취 가 아닌, 다른 동기의 유발로 새로운 방향 전환을 해야 되는 길이다. 그래 서 복음이 가르치는 길은, 자기 삶을 승리로 이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자 연적인 충동에 역행되는 길이며, 장래가 보장되는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 길이고, 그 길에서는 자아인정(認定), 자아안전(安 全), 자아 성취 등은 포기해야 하고, 자신의 약점과 무능을 하느님의 선하 심에 맡겨, 그분의 섭리에 의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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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 찾아 얻는 것이 아니다. 베네딕도에 의하면 성공한 삶이란 오직 그리스도와 밀접한 생활의 일치와 그리스도를 따르 는 삶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성공한 삶은 생에 대한 욕망이나, 자기주장 의 관철이나 살아남기 위한 술수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파멸로 완성되는, 포기로써 얻어지며“제 목숨을 보전하려고 애쓰는 사람 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라고 한 성경 말씀을 삶으로써 풍성한 삶을 이루는 것이다. 이로써 관습 적으로 내려온 우리 삶에서 얻고 잃는 득실의 기준은 전도(顚倒)되고, 우 리가 하느님의 손에서 받은 삶이기에,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 리의 삶을 잃을지도 몰라 염려하는 근심 걱정은 사라지는 것이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다”(RB 5,11)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생활 패턴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도록 내맡기며, 우 리가 수고롭게 공들여 이루어놓은 삶의 확고한 버팀목을 포기하고, 자기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의 바탕을 두고, 하느님의 뜻대로 이끄심에 맡겨 드리는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 설정으로 베네딕도회 공동체 문화는 신뢰 문화와 아빠스와 관련되는 헌신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제들이 아빠스에게 하는 순 명과 형제들 상호간에 하는 순명은 이기적인 자기주장의 포기를 표현하 는 것이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과 형제 상호간의 삶에서 하느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문화는 인생의 계획을 자기 스스로 세울 수 없다는, 깊은 확신에 근거한다. 이 문화는 모든 그릇된 명 예심과 자아 성취에 대한 자랑을 거부하며, 공동체 안에서의 고집스러운 요구, 권리, 세력 등과 개인 생활 영역의 확장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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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와 행복의 추구

네딕도회적 생활문화의 기본 요소다. 그런데 이 포기는 목표가 아니라 그 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베네딕도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개념은 바람직한 상태에서 능란한 솜씨 로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맞는 기 호나 열정적 자애심 같은 것은 좋은 삶의 대상이 아니고, 권력, 영향력, 외모, 성공, 건강, 미모, 힘 등, 외적이며 육체적인 좋은 여건들 역시 좋은 삶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가 원하고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 역시 좋은 삶 의 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베네딕도의 행복론에 실망이 갈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행복”을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의미대로 “만족”,“건강”, 세련미 등으로 본다든지, 또는“성공”,“성취” 자기 가 능성 개발과 능력발휘라고 이해할 경우에도, 베네딕도의 행복론은 아마 도 잘 못 된 것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의미의 논제진행의 결말이 건강과 우정과 사회적인 인정, 직업적인 출세, 교육, 정신력의 개발 등등 인간적인 좋은 여건의 목 표들이 베네딕도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규 칙서에 언급된 음식과 음료, 옷, 일과 독서, 손님맞이, 성규 54 장의 친밀 한 사람들과의 교제, 환자와 약자에 대한 배려 등에 관한 규정들이 이 사 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좋은 것들은 베네딕도에게 삶의 포괄적 완성의 기반인 것이다. 그러나 완성은 부분적인 목표가 실현됨으로써 이 루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베네 딕도는 인간의 행복을 자연 발생의 순간적 행복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베 네딕도는 인간에게 떠오르는 헛된 행복에 대한 물음은 제쳐놓고,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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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을 하느님 대전에 다다르게 하는지를 묻는다. 베네딕도에게는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데 성공하는지, 하느님 안에서 자 기의 목표와 완전한 모습을 찾아내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완전히 구원되 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구원되는 행복은 순수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 이것은 인간적인 성취와 능력 밖의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먼저 주신 목표인 것이 다. 따라서 그 목표는 자신의 능력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덕행과 공로에 의한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순수 무상으로 받는 하 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에 의한 행복은 공로와 일의 성과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곳에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이룬 성과에서 자기만족을 하는 모든 독선적인 생각을 배제한다. 우리가 자기가 이룬 성과를 포기하 고 자기의 가능성과 자기가 이룬 업적을 드러내 알리기를 포기할 때, 역 설적이지만, 그제야 우리는 우리 행복의 실제적인 개척자가 되며, 그전에 는 우리 자신은 전연 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해야 했던 모든 것 을, 실제로 우리도 할 수 있게 된다. 행복 하고 싶은 우리는, 현재의 행복 이나 불행에는 관계없이, 행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 랑하신다는 그 행복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올 바른 판결을 내리고 확고한 신앙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하는 임무가 있다. 궁극적인 안정감을 바라며, 기쁨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우리의 삶을 얽어 매어 마비시키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갈망은 세속이 줄 수 있 는 어떠한 행복체험으로도 충족될 수 없다. 이 갈망에 대한 충족은 하느 님의 사랑의 선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 보다 인간 존재가 더 높여지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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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와 행복의 추구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한다. 베네딕도는 이 주님의 길이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목표로 인도한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다. 베네딕도는 우리에게 규칙서에 있는 말로 그 길을 알려 주었고, 생을 마감할 때 완전한 확신을 갖고 하느님을 향하여 양팔을 활 짝 펴서 하느님을 맞이하는 모범을 보이며 그 길을 알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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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 요한나 도멕1) 이연학 요나 옮김

1989년 11월, 당시 수석 아빠스께서 이 심포지움에서 순명에 대해 얘 기를 좀 해 달라고 초대해 주셨을 때, 저는 오래 망설인 끝에야 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서른다섯, 쾰른의 우리 공동체에서 3년 반 동 안 원장으로 봉사해오고 있던 차였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아주 연로하신 수녀님들과 아주 젊은 수녀님들로 구성되어 있어, 수도생활뿐 아니라 인 생살이 전반에 없을 수 없는 모든 문제들이 이 모든 상황에서 더 증폭되 었습니다. 어떻든 저는 이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순명의 주제를 마음 속에서 제 것으로 삼아, 우리 수도원이라는 구체적 상황 안에서, 그 리고 이 심포지움을 염두에 두고, 속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아마 이런 여 건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1992년 여 름 원장 직무를 마친 뒤, 저는 마침내 이 심포지움에 기꺼이 참석해 있습 니다. 순명은 두말 할 나위 없이 그리스도인 생활과 베네딕도회 생활을 특징 짓는 열쇠말 중 하나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의 첫 마디부터 시작해서 이 순명의 주제가 규칙서 전편을 꿰뚫고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규칙 서 서문의 한 구절을 중심으로 제 생각을 정돈해보고 싶습니다.“우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 주어진 선(善)에 따라 그분께 순종해야 할 것이니, 아 ‐‐‐‐‐‐‐‐‐‐‐‐‐‐‐‐‐‐‐‐‐‐‐‐‐‐‐‐

1) 독일 쾰른 수녀원의 Johanna Domek 수녀. 1993년 9월에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가졌던 심포지움에서 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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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

버지께서 분노하시어 당신 아들들(인 우리)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자”(베네딕도 규칙서(이하‘규칙서’), 머리말 6)2). 저는 학문적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규칙서와 오늘 우리의 삶을 토대로 해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 현실에서 제가 겪은 것을 이해해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 맥락에서 제게는 있는 그대로의‘사람’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제가 사람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사람이 중심 에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심에는 늘 하느님께서 계셔야 하고, 하느님께 바쳐야 할 사람의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헌신이 인 간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람을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주제를 조직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특정 영역들에 집 중하는 방식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 다. 서언은 대략 이런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 . 우 리 는 순명해야 합 니 다. 요컨대,“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에 따라 그분 께 순종해야 할 것이니, 아버지께서 분노하시어, 영광에 이르기까지 당신 을 따르기를 거부한 당신 아들들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하시는 일이 없도 록”(규칙서, 머리말 6)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좀 줄인 이 구절 에서, 아시다시피 성 베네딕도께서는 {스승의 규칙서}에 나오는 시편 주 해를 글자 그대로 인용하고 계십니다. 저는 여기서 세 가지 생각을 추출 해 보고자 합니다. ‐‐‐‐‐‐‐‐‐‐‐‐‐‐‐‐‐‐‐‐‐‐‐‐‐‐‐‐

2) 역자 주. 저자가 사용한 베네딕도 규칙서 번역본을 직역하였기에 우리말 번역본과 다소 다르다.


요한나 도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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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이와 같이’순명해야 함 -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에 따라 -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따르기

a . 늘‘이 와 같 이(ita enim)’순명하기 사람은 듣는 데서만, 그리고 듣는 만큼만 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의 일부분만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사흘 전에 들은 담화나 강론 따위를 다섯 명에게 반복해 보라고 해 보면 다섯 가지의 아주 다른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일은 말로 이 루어지는 소통의 차원에서도 생기지만, 비언어적(非言語的) 소통의 저 드 넓은 영역, 그러니까 인간 생활의 영적 인간적 차원에서는 더 자주 벌어 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리들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다 감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과 하느님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해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우리가 감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인간적 차원에서 더 주의 깊게 되도록 배워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늘‘이와 같이’순명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으로서 주의 깊은 자세와 따뜻하게 열 려있는 마음을 함양하면서 내적으로 늘 성숙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 으면 모든 순명은 영혼 없는 조형물처럼 미완의 것으로 남고 말 것입니 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도 못하며 그리스도의 순명과 닮은 것이 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물론 규칙서가 자연적이고 습관적인 순명에 대해서도 말하며, 이것 역시 필요하단 것도 사실이지만.) 어떻든,“이와 같이 순명한다”는 것은, 늘 바로 그 순간에 깨어있는 주의력을 예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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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해 나가는 자세를 뜻하며, 습관의 힘에 함몰되지 않고 늘 새롭고도 싱싱한 정신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찾는 자세를 뜻합니다. 외형적 ‘올바름’이나 관습에 대한 순응은 중요성에 있어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할 뿐, 그런 방향으로 너무 급히 순명을 실천하면 성령의 목소리를 듣지 못 하게 되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질서를 위한 모든 조처와 그 수용이 의미가 있으려면 인격적 성숙이 필 요합니다. 그래야만 순명의 시선이, 하찮아 보이는 일상사 속에서, 그리 고 외적 형식 및 규율과 관련된 일에서 가장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인적이 며 수도승적인 대처 방식을 찾게 해 줍니다.

b . 우리에게 주 어 진 선 물 에 따 라 순명하기 듣기 위해서 온 마음과 존재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듯, 각자는 자기가 받은 선물로써만 그것이 금방 눈에 띄는 것이든 아니면 긴 세월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든 순명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자 기의 고유한 방식으로만 응답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점을 설 명하기 위해 저는 다음과 같은 수녀를 모델로 생각해 봅니다. 그는 삶의 환경이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들과 넓은 마음으로 마주하면서 존재 깊은 데서부터 충실한 삶과 순명하는 법을 배워 나갑니다. 자기가 지닌 고유한 선물과 한계 안에서, 순전히 외적인 기준을 한참 뛰어넘는 참된 순명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오로가 필리 1,10에서 말하듯, 무엇이 정 작 옳고 중요한 것인지 분별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주 다 른 선물들을 지니고 있으니, 이는 우리 공동체들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요컨대, 진정한 순명은 과거에 흔히 실천해 온 바와는 다른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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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덜 획일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선택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참된 순명은 피할 수 없는 삶의 긴장 상황 안에서도 결국은 삶에 봉사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1코린 12,4-6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 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제와 봉 사와 떼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순명의‘기관(器官)’과 같습 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정한 선물을 남에게 위임할 수 없습니 다. 그 선물 때문에 지니게 된 책임 역시 마찬가지로 남에게 위임할 수 없 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을 그 사람으로부터 떼어 내는 일 역 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리 해서도 안 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것은 고약한 환상일 따름입니다. 우리 공동체들은 오직 각 개인의 순명과 개인에게 고유한 주어진 선물 들을 통해서만 세상과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 마땅한 봉사를 바쳐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c . 하느님의 영 광 에 이르기까지 따 르 기 규칙서에 따르면, 우리가 늘 이와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에 따라 순명하지 않을진대 상속권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니,‘영광’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따르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에 드는 길입니다. 물론 각자는 힘겨운 수고를 감당하며 이 길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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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온 세상이‘마음이 넓어져서’하느님의 영광에 이르길 갈망하고 있 습니다. 참된 순명은 사람을 작게 만들지 않고 크게 만들며, 노예가 아니 라 자유인으로 만듭니다. 비록 순명하는 인간이 자주 스스로를 꺾어야 함 이 사실이지만, 이로써 그가 구부정하게 뒤틀린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 다. 순명하는 인간은 결코 이 세상의 휘황찬란한 영광에 마음을 주지 않 으며 세상의 견고한 관습과 타협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빛나지는 않습니 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빛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높은 봉우리와 계곡, 광야와 사람의 마을, 평원과 깊은 심연 등 인생 여정의 모든 광경을 통과하여 걸으면서 점점 그윽해 집니다. 사람들은 그의 안에 있는 이런 아름다움을 눈치 채게 됩니다. 그것은 인격의 내면으로부터 고요히 빛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 하느님에 대한 증언으로서, 순명을 통해 사람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 터 비추어지듯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수녀님들과 공동체에 다 적 용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온 생애를 통해 십자가의 죽 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이 죽음은 깊디깊은 자기 포 기이자 동시에 드높여지시는 순간이었습니다(필리 2,5-11). 우리 역시 개인으로나 공동체로 그분을 영광에 이르기까지 뒤따른다면 바로 이 지 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어렵고 모든 것을 대가로 치러 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몸에 나쁘지 않습니다.

2. 순명의 여 러 동기와 형 태 제가 쓰는 사전은 순명을“권한을 지닌 이의 뜻에 복속하는 것”이라 정 의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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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왔다”(요한 6,38)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두 가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고 느낍니 다. 첫째, 완전히 다른 형태의 권위, 사람, 견해, 제도 등이 존재합니다. 둘째, 사람이 순종할 때에 완전히 다른 동기들이 존재합니다. 이 두 가지 (권위와 순종)는 다양하고도 묘한 관계로 서로 얽혀 있습니다. 어떤 형태 의 순종은 인생의 특정 단계에서는 좋고도 정당하지만, 그런 상태로 계속 남아 있으면 심각한 해를 끼칩니다. 예컨대 부모에 대한 어린 아이의 순 종의 경우, (부모의) 권위는 아이에 대한 보호와 안전을 책임져 줍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이런 이유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형 이 지닌 힘을 함께 나누어 누리게 하는, 형에 대한 순종의 경우도 있습니 다. 그러나 이런 식의 순종은 교회 권위나 수도 공동체 혹은 1500년을 이 어온 풍요로운 수도승 전통에서 말하는 권위에 대한 순종과는 다른 것입 니다. 나아가, 모든 집단에는 거부당할까봐 두려워서, 혹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서 순종하는 경우가 있고,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 좋은 평가를 얻으려는 욕구, 소속감의 필요나 순응해야 할 필요 등의 이유로 순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모든 형태의 순종들이 삶의 자연적 일부란 사실을 부인할 필요는 없 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늘 정화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와 교 회 생활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없는 것처럼 처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 중 몇몇은 사 실 오래 동안 교회 생활과 수도 생활에서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라‘열심’ 이나‘수행’이란 미명 아래 조장되기도 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도 왕왕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순명의 실천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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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인생의 모든 단계들을 거쳐 성장해야만 합니다. 순명은 분명 크나큰 선익임에 틀림없기에, 수도자들이 순명의 동기들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분명히 해 나가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순명이 더 좋고 성숙 한 결실을 맺게끔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순명 과 봉헌생활이라는 좋은 선물을 오용(誤用)하게 되고 그 결과, 공동체의 분위기나 하는 말들이 제 아무리 수도승답고 경건하게 비친다 하더라도, 실상은“하느님 섬김의 일(Opus Dei)”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을 하게 되 는 것입니다. 순명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늘 위기를 겪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명의 방향이 늘 올바른 것이 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 니다. 사람이 어른이 되고 자유로워지게 되어야만 비로소 옳은 의미에서 순명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훈련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처음부터 멋 있게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어른답게 말 하려면 집에서부터, 그러니까 우리 수도원에서부터 반대하는 법과 논쟁 하는 법,‘예’라고 말하는 법과‘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 다. 우리는 순명의 짐을 올바른 방법으로 지고 갈 수 있는, 튼튼한 어깨를 지닌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매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성 베네딕도께서 제대의 성물처럼 다루라고 이르 셨던, 수도원의 물품들보다 소중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 그 사랑 받는 지체입니다. 수도승 양성은 이런 방향으로 성숙하도록 확실히 도와 주어야 하고, 그리하여 점점 더 순명할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주어야 합니 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순명 서원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 다. 장상들은 삶을 더 수월히 해 준다는 미명 아래 개별 수도자들의 책임 을 지나치게 덜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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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사소하지만 두 가지 성찰을 해 봐야 한다고 느낍니다. 첫 째, 미성숙한 불순종이 있듯이 미성숙한 순종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써만 쉽게 분별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제가 ‘성숙하다’나‘미성숙하다’란 표현을 사용할 때, 저는 삶의 각 단계에는 그에 맞갖은 성숙도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태도가 삶의 한 단계에서는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단계가 지났는 데도 그대로 머물면 미성숙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 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성숙도는 이십대나 사십대의 성숙도와 다르기 마 련인 것이지요. 이런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순명의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우리는 수녀님들로부터 70년 전에 생각 하던 바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 다르지만 결코 덜 힘들진 않은 어떤 것 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한 수도자의 순명을 통해 공동체들 역시 하느 님께 더 잘 순명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분께서 각 공동체에 말씀하시는 바에 더 잘 귀 기울일 수 있게 될(참조. 묵시 2,29)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과 시대 상황 안에서 더 적절한 순명의 응답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순명은 늘 구체적 상황과 관련하여 바 쳐져야 합니다. 한 때 옳았던 순명이라 해서 다른 때에도 늘 옳을 수는 없 는 법입니다.‘상황과 관련된 순명’이라 함은, 우리 응답이 늘 획일적이 고 모든 시대에 일괄적으로 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종신토록 바치겠노라 성대하게 서약한 순명은 늘 구체적 상황을 감안한 것이어야 하며, 구체적 시간과 연관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순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순명은 특정한 날에, 특정한 수도원에서, 특정 한 나라나 대륙에서 그 상황에 맞게 실천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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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현대 세계라는 맥락에서만 우리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오늘날 만연한 무질서한 방종과 무관심에 반대되는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실천 방식은 알게 모르게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 반향을 울릴 것입니다. 순명은 구체적 인간관계 안에서 실천되 는 것이지, 결코“인간관계와 관련없이”실천되어서는 안됩니다(J.B. Metz). 저는 이 모든 이야기가“이와 같이(ita enim)”가 뜻하는 바라고 봅니다. 개별 수녀님들과 개별 공동체의 순명은 아브라함처럼 자유롭고 즉각적 이어야 충실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정주를 실천하는 우리 공동체들 안 에서도 하루하루만 사는 임시성(臨時性)의 감각으로써 자유롭고 유동(流 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고 마리아다우며 베네딕도회 원다운 순명의 태도로 성숙해 나가려면 무엇보다 우리 수도 생활의 여러 형태들은 임시적이란 사실 앞에서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3 . 탈렌트의 비 유 제가 지금껏 말하려 한 바를 예수님의 이 비유가 잘 표현해 준다고 봅 니다. 이 비유 역시 각 개인과 각 공동체에 함께 적용될 수 있습니다. 먼 저 마태오가 전하는 비유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 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 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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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오 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 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 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 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 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 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 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 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 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그러자 주 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 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 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 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 를 갈 것이다”(마태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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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우리에게“내가 준 선물로 네가, 너희가 이와 같이 응답했 더란 말이냐? 나를 이해하지 못했더란 말이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바를 귀를 바짝 세워 들어야겠습니다.“오늘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규칙서, 머리말 9b.10). 깨어서 더 옳고 나은 것을 식별할 줄 알아야겠습니다(참조. 필리 1,10).

4. 순명과 독 일 역 사 이미 말씀 드렸듯이 순명은 늘 현재라는 시간과 상황에 관련된 것입니 다. 순명은 역사를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짧게나마 독일 역사의 한 부분 에 대해 성찰해보고 싶습니다. 순명의 어떤 형태가 역사라는 큰 맥락에서 재앙을 초래했던 이 시기는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나 가며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심포지움의 발제자로 한 독일 수녀가 선택되 고 게다가 주제가 가난도 아니고 순명이라는 점은 특별하고도 적절하다 고 느껴집니다. 제 생각에, (히틀러의)‘제 3제국’시기를 겪은 후, (모든 나라와 수도원에도 존재하는) 권위라는 주제, 또 그 권위와 맺는 관계라 는 주제는 독일 수도승 생활에서 순명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두고 특별한 교훈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독일 수도자들에게 순명은 이제 언제나“아우슈비츠 이후의 순명”일 수밖에 없고, 늘 그런 성격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 역사의 한 시점에서, 너무 도 많은 사람들이“영도자시여, 명령만 하면 따르겠습니다!”라며 부르짖 었으며, 이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도 않았지만 이 끔찍 한 재앙을 막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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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50년 전 독일에서는‘순명’역시 대량 살상의 대재앙에 큰 역할을 담 당했던 것입니다. 올바른 순종이 그러하듯, 옳지 못한 순종 역시 반드시 생기게 마련인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이 시기를 그냥 없는 듯 넘길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 독일인이라는 그 사실로 말미암아, 깨 어있고 비판적인 안목으로 저러한 잘못된 태도 - 사실 이런 태도들은 오 늘날에도 모든 나라에 상존합니다만 - 밑에 깔린 인간학적인 전제들을 살 펴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필요하다면 지혜롭고도 단호 하게 싸울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생활의 가치들 사이에 우선 순위를 가리면서 책임 있고 성숙한 태도로써 말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폭넓은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더 영향력 있고 나 아진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입회하는 이들이, 참되고도 커다란 하느님 사 랑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안심과 확실함, 질서와 제도 등 을 갈구한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수도원에서 이 런 것도 추구한다는 사실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의 이런 경향을 우리가 더 부추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로 대해 주면서, 이런 경향을 극복하고 하느님께 바쳐지는 삶을 인생 의 본질적 동기로 삼도록 도와주어야 하리라 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독일의 베네딕도회 여성 수도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 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잘 겪어 아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역들에서는 다른 강조점과 지역적 특색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표현해 줄 수 있는 작은 예를 하나 들겠 습니다. 작년에 제가 로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3차선 도로의 교 차지점에 서 있었는데, 각각의 차선들은 물론 행선지까지 도로 위에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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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차량들이 우회전을 하려 방향을 틀면서 차 선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다섯 대의 차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혼잡한 흐름을 형성하였고, 경적 소리로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습니다. 독일이라면 이 같은 장면은 결코 볼 수가 없지요. 우리는 교통이 혼잡한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나 수도원에서 그런 것처럼, 정해진 제도 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세심하게 지킵니다. 그래서 각자가 지켜야 할‘차선’표시를 끔찍하리만큼 존중합니다. 이것은 물론 좋은 일이겠지 요. 그러나 적어도 독일에서라면, 이런 경향을 더 조장하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 오히려 로마에서처럼,‘3차선’으로 진행하게 되어있는 수도원 생 활 규정을 파기하고, 웃는 얼굴로 경적을 울려대며 마치‘5차선’인양 진 행할 줄도 아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최근의 독일 역사를 기억하고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는 권력의 영향력과 대중 조작술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날은 교육의 영역에서 대체로 개인의 책임과 비판 능력을 중시하는 양성, 즉 자유의 능력을 함양하는 양성에 더욱 중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경향은 수도 생활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바람직한 일이지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요 베네딕도회원으로 서 자유로운 순명을 할 수 있기 위한 필수적이고도 효과적인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5 . 베네딕도회다운 순 명 의 특 색 올바른 순명은 선익이지 결핍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포 기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이요, 자기 뜻과 갈망으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한 뜻으로 건너가는 과정입니다. 순명은 오직 자신을 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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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될 때만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더 자유롭고 성숙할수록, 혹은 더 욱‘인간’이 되어갈수록, 더 심오하고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고 바칠 수 있게 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생명에 이바 지하고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분의 해방하고 구원하는 복음으로 인격이 형성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바치는 모든 헌신은 외적 형태와 구체적 방법 및 몸 짓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한계도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베네딕도회원에 고유한 순명의 네 특징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a. 형제들은 하느님께 순명합니다. b. 형제들은 서로 순명합니다. c. 형제들은 아빠스에게 순명합니다. d. 아빠스는 하느님과 형제들, 그리고 사건들에 순명합니다.

b는 오직 a가 있음으로써만 가능하며, c는 a와 b를 실천할 때만 가능하 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d), 아빠스는 하느님과 형제들과 사건들에 순명해야 한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a. 하느님께 드 리 는 순 명 형제자매들의 순명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요, 그리스도보다 아 무것도 더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랑의 표현입니다(참조. 규칙서 5,2). 모 든 일에서 참으로, 그리고 늘 실질적으로 사랑해야 할 주님께 대한 사랑 의 표현입니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말하고 응답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 사랑의 지평에서 생기며, 이 사랑의 현존 안에서 생깁니다. 순명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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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의 응답이며, 하느님께 바치는 헌신의 자세이자 몸짓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수도승은, 사랑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자기 마음 대로 살면서 자기 원의나 욕망에 따르지 아니하고(참조. 규칙서 5,12) 자 신의 변덕을 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주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 의 뜻을 첫째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참조. 규칙서 5,7). 생기는 모든 일 에서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부르심과 요청을 감지하며 온 삶으로써 전적인 응답을 드리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참조. 규칙서 5,1). 날마다, 설혹 어두운 시기를 지내는 중에도, 선선히 순명하는 것입 니다(참조. 규칙서 5,16).

b. 형 제 들 상호간의 순 명 형제 자매들은 이러한 경청과 내적 순명의 여정을 무엇보다 공동체 생 활의 구체적 일상 중에서 신앙의 진실함과 하느님 경외의 마음으로 따라 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귀를 기울이 며,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표지를 읽어냅니다. 적어도 우리 사이에서는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며 서로 순종하 는 일은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상호 순명은 극단적으로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순명의 미 덕(참조. 규칙서 71,1)은, 하느님 앞에서나 세상 앞에서 머뭇거리며 생기 보다는 질서를 선호하는 엄격하고 완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 베네딕도는 순명하는 사람을 즉시 움직일 채비가 된 사람, 무엇을 들 었을 때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 늘 기쁘고 자발적인 사람으로 정의합니 다. 순명에 대한 바로 이런 표상을 기점으로, 우리는 관습적으로 이미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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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 여러 가치들을 재점검하고 잘못된 순명 실천을 바로잡아야 할 것 입니다. 순명할 줄 안다는 것은 복음과 전통의 곳간에서 옛것과 새것을 두루 꺼 낼 줄 아는 능력을 뜻합니다. 참된 인간적 만남으로부터 각자가 알 수 있 게 되는 충실함과 순명은 질서 유지와 어떤 종류의 질서든 간에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질서 유지는 어떤 때는 정말 필요한 것이란 사실에 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입니다.) 우리 공동체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듣습니까? 정말 우리는 기꺼이 서로 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요? 우리는 무엇을 감지하고 있습니까? 어떻 게 상호 순명을 실천하고 있는지요? a 항목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서 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의 표지들을 - 아무리 약하게라도 - 감지하지 못한 다면, 우리의 인간관계들은 더 이상 우리를 껴안아주는 그물망이 아니라 포획하여 옥죄어버리는 그물망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권력과 영 향력, 압력과 그 반동(反動), 조작과 강제, 형제애와 시스템과 종속 등이 서로 뒤얽혀 빚어내는 상황 가운데서, 늘 찾아야 할 하느님의 거룩한 뜻 을 보지 못하고 실제로는 하느님과 세상 상황에 응답하는 결정을(참조. 규칙서 3장) 내리지 못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고 불순명하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 그리스도의 몸을 불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경우 실제로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지켜보 는 것은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좋은 방향으로도 생각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에게 귀 기울일 때, 그 리고 들은 바에 흔연히 순명할 수 있을 때 생길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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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

목하고 싶습니다.

c. 아빠스에 대 한 순 명 저는 오직 자유롭고도 진지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세상과 자기 주변에, 그리고 자기 안에 생기는 일들, 흔히 감추어진 상태로만 드러나는 저 일 들에 대해 경청하려 애쓰는 사람만이 아빠스에게도 순명할 수 있다고 생 각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성숙한 수도승만이 그리스도의 대리 역할을 하는 아빠스에게(참조. 규칙서 2,2) 순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 람만이 한계가 있고 자주 약점도 드러내는 한 인간에게 순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도승이 미성숙할수록 아빠스에게 그가 이전에 좋게든 싫게 든 겪었던 상급자들의 모습을 투사하게 됩니다. 그는 그런 권위들에 대해 여러 이유로 종속되거나 아니면 거부하게 되는 것이지요. 미성숙한 사람 은 권위에 대해 자신이 지니게 된 속생각으로 말미암아 아빠스에게도 순 전히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볼 줄 모르고, 그렇다고 아빠스 안 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줄도 모르며, 결국 아빠스에게 올바로 반응할 줄 모릅니다. 다른 심리적 메커니즘들이 그를 옥죕니다. 참되이 순명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진정 내놓을 수 있기 위해 그는 이런 메커니즘들로 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는 순명의 서약을 채우기 위해 무엇보다 먼 저 자기가 아빠스 및 권위와 맺고 있는 관계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 러나 저는 이런 작업이 장상이나 수도자 양자에게 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단편적일 수 있는지 개인 체험으로 잘 알고 있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이고, 그 실현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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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께서 순명하는 수도승은 아빠스를 자기 으뜸으로 모시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참조. 규칙서 5,12) 보수적이고 안전 지향적이며 퇴행적인 정신을 뜻한 것이 아니었지요. 반대로 자기 뜻으로 부터 빠져나와 움직이고 전진하라는 부르심을 뜻한 것이었습니다.“영원 한 생명에로 나아가려는 원의가 간절한 사람들”(규칙서 5,10)이란 표현 이 바로 이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목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목 표를 눈앞에 분명히 세워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순명의 우선순위’는 제게 아주 중요한 문제 가 되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귀 기울일 때만 기도하는 사람은 형제자매 들과 아빠스에게 귀 기울이고 알아듣습니다. 순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d . 아빠스의 순 명 마지막으로, 아빠스 역시 하느님과 형제들 그리고 상황에 순명하는 법 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 베네딕도께서는 여 러 군데서 아빠스가 지닌 결정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래서 아빠스는 명 령하고 형제들은 오직 순종해야 할 따름이란 인상을 지니기 쉽습니다. 그 러나 사정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규칙서 어디에서도 아빠스에게 명 령하라고 부추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 기울이고 자신의 책임과 결점, 그리고 하느님 앞에 셈 바치게 될 것이란 사실에 대해 유념하라고 가르칩 니다. 어느 누구보다 아빠스야말로 분명하면서도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경청과 순명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이 아빠스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더 그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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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경청과 순명은 진지한(‘진지한’이지‘고집스런’이 아니란 사 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랑과 관계된 것이며, 늘 결정을 내리는 일과 관련된 것입니다. 1986년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의 피델리스 루페르트(Fidelis Ruppert) 아빠스는 순명과 결정 그리고 권위의 행사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제게 아주 중요한 배움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분 은 성 베네딕도의 관점에 따르면 아빠스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사실, 즉 단지 대리자일 따름이었단 사실을 짚어 주셨습니다. 이는 삶의 다른 영역 에서도 마찬가지란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짧은 기간 누가 다른 사람을 대리하여 결정권을 행사하고 일을 처리하는 경우 말입니다. 이 경우에 대리인은 얼마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얼마나 조심스레 처신해야 하는지, 한 마디로 얼마나 순명을 잘 해야 하는지 우 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원장이었을 때, 제 편에서 진지하게 노력했 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측면에서 늘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자매 들, 그리고 삶에서 생기는 사건들 앞에 순명해야 한다는 주제가 그때만큼 제게 절실히 와 닿은 때는 또 없었습니다. 이제 그 시절과 어느 정도 거리 를 두게 된 지금 돌이켜 보면, 저는 이 사실이 대단히 만족스럽습니다. 그 렇게 살지 못한 때가 잦았지만, 저는 늘 더 나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참조. 필리 1,10). 그리고 제가 또 한 가지 깨달았던 것은, 우리가 언제 나 각자에게 주어진 선물로써 하느님께 순명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아버지께서 분노하시어, 영광 에 이르기까지 당신을 따르기를 거부한 당신 아들들에게서 상속권을 박 탈하시는 일이 없도록”(규칙서, 머리말 6)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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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고단한 이 여정에서 각자의 한계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도울 수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더 자유로운 사람, 더 큰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서원의 순간 선택한 그 사랑에 응답하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온 삶으로써 마음을 활 짝 열고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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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사다리』 요한 클리마쿠스 허성석 로무알도 역주

해 제 『천국의 사다리』1)는 시나이의 요한 혹은 사다리의 요한이라 불리는 요 한 클리마쿠스(Ioannes Climacus, 570-649)의 유일한 대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모두 30개의 담화 혹은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는 다소 방대한 분량의 고전이다. 앞으로『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순차적으로 번역하여 소 개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우선 제1담화를 소개한다. 본문에 들어가기 에 앞서 해제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청 중 이 작품은 수도승생활 대부분을 은수자로 생활한 후 노년에 큰 공동체 의 장상으로 봉사했던 인물에 의해 씌어졌다. 따라서 회수도승들을 위해 서 저술한 은수자의 작품이라 하겠다. 요한이 염두에 두는 청중은 수도승 들이다. 하지만 그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애정 어린 돌보심을 분 명하게 언급하면서 자신의 담화를 시작하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시기를 원했던 모든 존재, 즉 믿는 자와 믿지 ‐‐‐‐‐‐‐‐‐‐‐‐‐‐‐‐‐‐‐‐‐‐‐‐‐‐‐‐

1) 본문 번역과 주해를 위해서는 Giovanni Climaco, La Scala del Paradiso, Intro.,Trad.,Note. Calogero Riggi, Roma: Città Nuova, 1996을 사용하였다. 해제는 John Climacus, The Ladder of Divine Ascent, by Colm Luibheid and and Norman Russell, Paulist Press, 1982, 1-66쪽과 허성석 편저, 수도승 영성사: 영성의 뿌리를 찾 아서, 왜관: 들숨날숨, 2011, 283-290쪽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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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자, 의로운 이와 의롭지 않은 이, 경건한 이와 불경건한 자, 욕정의 노예와 욕정에서 해방된 이, 수도승과 세속인, 똑똑한 자와 무지한 자, 건 강한 자와 병든 자,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의 생명이며 구원이십니다. 빛 의 유출이며 영들의 태양이신 하느님은 이들에게 다양하면서도 공정한 방식으로 당신 빛을 부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 기 때문입니다” 『 ( 천국의 사다리』1). 요한은 기혼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이 구원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주장 한다. 그는 순수함은 결코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지 적하면서 그 증거로 베드로 사도의 예를 인용한다.“베드로는 장모가 있 었음에도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다” 『 ( 천국의 사다리』14). 그러나 요한은 이런 식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보편성을 주장한 후 자신이 특별히 수도승들을 위해서 적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렇다면 이 작품이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인가? 분명 그렇지는 않다. 이 작품은 실제 수많은 기혼 그리스도인들 에 의해 널리 애독되어왔다. 저자의 본래 의도가 어떠하든 간에 이는 전 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 바실리우스가 진술하는 바와 같이 수도승생활 은‘복음에 따른 삶’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수도승이건 결혼한 사람이 건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일한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다. 그들 응 답의 외적 조건들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 길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2. 목 적 성 요한 클리마쿠스는 후대의 신(新) 신학자 성 시메온(St. Simeon, the New Theologian, 949-1022)과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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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ius Palamas, 1296-1350)처럼 개인적 체험의 필요성에 큰 강조점 을 둔다. 그가 아는 그리스도교는 교리와 규범에 대한 외적 수용 훨씬 그 이상이다. 아무도 남의 손을 거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각자 스 스로 알고 보고 맛보고 만지는 인격적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무엇 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그는 말한다. “참된 스승은 하늘에서 직접 영적 인식의 판을 받은 사람이다. 그 판은 하느님 자신의 손가락으로, 즉 능동적 조명 활동으로 새겨진 판이다. 그 러한 사람은 다른 책이 필요 없다. 교사들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베껴서 가르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 『 ( 목자에게 보낸 서한』1) 참된 스승이 개인적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가르침에 있어 그의 목적은 자기 제자가 직접 사물을 보고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승 의 역할이다. 요한은 아무도 안내자 없이 내적 여정에 착수해서는 안 된 다고 주장하면서 영적 스승의 역할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스승은 바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다.‘너 자신의 눈을 열고 스스로 보고 경 험하라.’그래서 요한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각자 직접 체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실존적 자세에 충실한 요한은 보통『천국의 사다리』에서 어떤 음식 을 어떻게 얼마나 언제 먹을지, 또 잠시간과 매일의 손노동 계획 등에 대 한 세부 지침을 주는 것을 삼간다. 기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 이다. 그는 영성체를 위한 준비나 그것의 빈도에 대한 권고도 하지 않으 며, 개인기도의 방법, 양식, 몸의 자세, 호흡법과 같은 것에 대해 특별한 가르침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 분명하다. 요한의 관심은 외적인 것보다도 내적인 것에 있다. 그에게 있어 문제는 물리적 금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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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겸손과 마음의 순결이다. 요한이 제공하는 것은 기교나 형식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규정이 아 닌 삶의 방향이다. 이 작품의 목적은 살아 있는 개인적 체험을 전하는 것 이기 때문에 요한은 종종 의도적으로 불가해하다.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 하시고 선사들이 공안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요한은 너무 쉽게 자신의 결 론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 이는 독자가 스스로 해답을 찾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자기 예들의 핵심을 불분명하게 하거나 의도적으로 한 생각에서 또 다른 생각으로 건너뛰는 것처럼 보일 경우, 이것은 보통 그의 부주의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목적에서 비롯 된다. 요한이 이런 수수깨끼를 제시하는 목적은 사목적이다. 즉 대답을 유도해 내고 독자를 신앙에 나아가도록 이끌며, 개인적 체험을 하도록 하 기 위함이다.

3. 문 체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런 목적을 가지고『천국의 사다리』에 특별한 문학 양식을 도입했다. 첫눈에 이 작품의 그리스어는 비약적이고 거칠지만, 이 책은 사실 섬세하고 의도적인 솜씨로 종종 시에 가까운 운율적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짧고 명확한 문장들, 함축적인 정의들, 역설적 경 구들을 좋아하는데, 그의 목적이 독자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기를 거듭하여 청중을 놀래게 해온 수도적 유머 감각으로 두드러 진 재밌는 예증을 드는 데에 뛰어나다. 일례로“수영을 하면서 동시에 박 수를 치려고 하는 사람과 같다” 『 ( 천국의 사다리』4). 요한의 기본 이미지는 야곱이 본 것(창세 28,12)과 같이 땅에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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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펼쳐진 사다리의 이미지이다. 작품 전체는 이 이미지를 둘러싸고 구성 되어 있다. 4세기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 스, 그리고 5세기 시리아의 테오도렛과 같은 초기 저술가들은 영성생활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한 단계씩 올라가는 사다리에 비유한 바 있다. 하지만 성 요한 클리마쿠스는 사다리의 비유를 훨씬 더 발전시켰다. 그의 사다리는 서른 개의 계단 혹은 단계로 되어 있고, 각 단계는 세례를 받기 전 그리스도의 감추어진 삶에서 매 해를 나타낸다. 요한의 사다리 이미지 의 독창적 사용은 그의 작품 전체에 독특한 맛과 통일성을 부여해주면서 즉시 독자의 주의를 끈다. 참으로 그의 상징적 사다리는 곧 동방 그리스 도교의 영적 상상력의 일부가 되었고, 자주 성화와 식당 프레스코화, 그 리고 장식된 필사본들에서 나타난다. 요한은 보통 아래 한쪽 편에 서서 두루마리를 잡고 사다리를 가리키고 있다. 수도승들은 위를 향해 올라가 려고 애쓰고 있고, 맨 꼭대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손을 뻗쳐 이 등정을 완 수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사다리 오른쪽에는 천사들이 등정하는 수 도승들을 격려하고 있고, 왼쪽에는 악령들이 수도승들을 딴죽 걸어 떼어 내려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나락의 용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천국의 사다리』서른 단계의 보충으로 요한은 또한 목자에게 보낸 서 한이라는 제목의 소품을 썼다. 여기서 아빠스 혹은 영적 사부의 임무를 묘사하고 있다. 종종 서른 한 단계로서 간주된 이 글도 라이투(Raithu)의 요한에게 준 권고이다. 『천국의 사다리』가 엄격한 의미에서 체계적인 작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요한이 꼼꼼한 계획에 따라 주의 깊게 자신의 단계들을 배열하였다는 점 은 분명하다. 요한은 초기의 돌아섬 혹은 회개로 시작하여 덕과 악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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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상세한 분석을 거쳐 신비적 일치로 끝맺으면서 영성생활 전체를 자 신의 목적 안에서 포용하고 있다.

4. 원 전 『천국의 사다리』의 주된 원전은 성경이다. 요한은 성경 본문을 폭넓게 인용한다. 그러나 본문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고 또 어떤 말들을 첨삭하 면서 매우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 그는 성경 본문을 금욕적 열쇠로 수 도승이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 요한이 가장 많이 인용한 성경 본문 은 시편과 지혜서, 그리고 마태오, 루카, 요한복음, 바오로 서간들이다. 요한은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바실리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 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작품을 읽었을 것이다. 특별히 하느님 관상, 욕정, 신화(神化)의 주제와 관련하여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의 작품도 읽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 오리게네스와 에바그리우스에게 깊 이 의존해 있지만 그들을 비난하면서 인용하고 있다. 그 외 종종 사막 교부들의 금언과 성 안토니우스 그리고 다른 사막 교 부들을 원전으로 인용한다. 카시아누스의 작품과 은수자 마르쿠스(5세 기), 디아도쿠스(5세기)의 작품도 인용했다. 그리고 영적 사부 주제와 관 련해서는 무엇보다 팔레스티나 가자 교부들의 영향을 받았다.

5. 중요성 『천국의 사다리』가 중요한 이유는 변이(變移)와 통합(統合)의 시대가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랍의 침입으로 인해 동방 수도승생활 의 중심이 그리스의 아토스 산으로 옮겨졌던 시대였다. 그리고 요한은 이 작품에서 이집트 사막 교부들과 가자의 교부들, 그리고 요한 카시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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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은 자기 선조들의 가르침을 통합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전 수도 승 전통을 충실히 반향하고 있다. 요한은 수도승생활의 정점, 곧 신적 빛에 의한 인간의 신화(神化)를 체 험했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알았던 수도승이다. 그는 이 길을 자기 수도 승들이 실천적 단계로 따를 수 있도록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신 적 빛에 도달했고 우리가 거쳐 가는 여정을 체험했던 한 수도승이 전해준 작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비잔틴 전통에 있는 교회가 자신의 금욕 전통 안에서 이 작품에 탁월한 위치를 부여했고 또 사순 제4주일에 특별히 그를 기념하도록 한 것은 바 로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였다.

6. 영 향 동방교회에서『천국의 사다리』의 영향은 무엇보다 헤시카즘 운동의 발 전과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눈물의 은사에 관한 신(新) 신학자 성 시메 온의 가르침과『고백에 관한 담화』에서 영적 사부에 대한 시메온의 이해 안에서 이 작품의 영향을 잘 볼 수 있다. 시나이의 성 그레고리우스는『천 국의 사다리』를 13번 인용하고 있고, 수도적 독서를 위해 공인된 저술가 들 목록에서 그는 요한 클리마쿠스의 이름을 첫 번째로 두고 있다. 이 작 품은 새로운 신학자 시메온과 팔라마스 논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15 세기 러시아에서 당대 수도생활개혁운동을 주도했던 대표적 두 거장, 닐 소르스키(Nil Sorskij, 1433-1508)와 그의 적대자 요셉 볼로코람스크 (Josif Volokolamsk, 1439-1515)에게서 이 작품의 영향을 볼 수 있다. 19세기 중엽 익명의 러시아 순례자 또한 이 작품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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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라틴 영성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동방교회에서 영성과 금욕 주의 교부들 가운데 요한 클리마쿠스에게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은 탁월한 분별의 은사에 결합된 그의 풍요로운 가르침 때문이다.

7. 구 조 이 작품은 30개의 담화(단계)와 부록과도 같은『목자에게 보낸 서한』 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은 크게 세상과의 결별(담화 1-3), 근본 덕행 (담화 4-7), 욕정과의 싸움(담화 8-23), 수행생활의 완성(담화 24-26)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담화 27-30)로 구분된다. 첫 번째 부분은 하느 님을 향한 영적 등정에 착수하기 위해 전제되는 세상과의 결별에 대한 내 용이고 마지막 부분은 관상생활에 대한 것이다. 첫 번째와 마지막 부분을 제외한 중간의 세 부분(담화 4-26)은 수행생활에 관한 것으로 요한은 상 대적으로 수행생활에 훨씬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전체 구조는 다음 과 같다.

1. 세상과의 결별 제1담화 : 포기 제2담화 : 내적 이탈 제3담화 : 외적 이탈 2. 수행생활 1) 근본 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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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담화 : 순종 제5담화 : 참회 제6담화 : 죽음에 대한 기억 제7담화 : 펜토스(Penthos) 2) 욕정과의 싸움 제8-13담화 : 분노에서 아케디아로 (非 육체적 욕정들) 제14-17담화 : 탐식, 음욕, 탐욕 (육체적, 물질적 욕정들) 제18-23담화 : 무감각에서 교만으로 (非 육체적 욕정들) 3) 수행생활의 완성 제24담화 : 온유, 단순성, 정직 제25담화 : 겸손 제26담화 : 분별 3. 하느님과의 일치(관상생활) 제27담화 : 헤시키아 제28담화 : 기도 제29담화 : 아파테이아 제30담화 :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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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요한의 사다리 라이투2)의 장상 요한 아빠스의 요청으로 보낸 시나이 산 수도승들의 장상 요한 아빠스의 금욕적 담화

영성생활 단 계 에 관 한 작 품 서 언: PG 632 B-C3) 1. 우리 선이시고 지고하신 절대 선이신 분으로부터 시작하면서 하느님 의 종들을 위한 담화에 서언을 부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느님이 창조 하시고 이성을 부여하신 모든 존재는 온전한 자유로 자기 처신을 결정하 는, 즉 그분의 벗과 참된 종이 되거나 아니면 그분께 보다 더 온전히 속하 지 않는 무익하고 낫선 이와 그분의 무능한 적대자가 되는지 결정하는 고 귀한 특권을 하느님께 부여받았습니다. 존경하는 벗이여, 참으로 하느님 과의 우정으로 결속된 존재들인 우리는 그분을 에워싸고 있는 이성적, 영 적 존재들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 능력이 부족함을 믿습니다.4) 실제로 ‐‐‐‐‐‐‐‐‐‐‐‐‐‐‐‐‐‐‐‐‐‐‐‐‐‐‐‐

2) 라이토(Raito) 혹은 라이투(Raitu)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근처의 수도원으로‘거룩 한 영혼’ 이자‘겸손의 모범’ 인 라이투의 요한이 설립하고 다스렸던 곳이다. 그는 자 기 수도승들이 천국 문에까지 이르는 사다리의 단계들을 밟고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클리마쿠스에게 새 판본을 요청했다. 3) 이 첫째 담화의 제목은 그리스 본문에서 번역되었다. 나머지 사각 괄호 안의 제목은 종종 살레시오회 트레비잔 신부(P. Trevisan)의 것들을 참조했지만 우리가 부여한 것 들이다. 여기서 제시된 본문은 제목이나 단락 구분이 없는 미뉴(Migne) 본문이지만, 인용의 용이함을 위하여 일반구분을 따른다. 4) 교부들의 그리스도교 플라톤사상을 바탕으로 한 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모델 은 천사이다. 무엇보다도 이집트에서 벗어난 모세처럼 세상을 떠난 수도승은 천사의 모방자이다. 수도승은 거룩한 무관심(아메림니아)의 길을 통해 창조된 사물들에 대 한 근심걱정에서 해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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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 대한 봉사에 준비된 존재들은 신속히, 중단 없이 그 뜻을 완수하 는 사람들입니다.5) 무익한 종들은 실제로 세례에 합당하게 되었지만 그 들이 서약한 (세례 때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6) 그 다음 하느님에게 서 멀어진 이들과 하느님과 겨루는 불신자나 이단자인 그분의 적대자들 을 심판합시다. 그분의 원수들은 그들 고유의 거부반응으로 주님 법의 멍 에를 뒤흔들 뿐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온갖 짓을 행합니다.7) 이 각 부류는 따로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다 검토할 수 없기 때문에 당장 그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종들이 정당한 권위로 우리에게 제안한 주제들에 대한 설명을 준비하도록 합시다.8) 그들은 우리를 초대하여 열 심히 다그치며, 우리는 순종의 힘으로 무능한 우리 손을 안심하고 그들에 ‐‐‐‐‐‐‐‐‐‐‐‐‐‐‐‐‐‐‐‐‐‐‐‐‐‐‐‐

5) 여기서 마태 25,26(게으른 종을 거스른)과 로마 12,11(열성에 있어 게으름을 거스 른)이 반향되고 있다. 신적 활동을 본받으려고 선택한 수도승은 항상 주님의 일에 전 력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수도승으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관대히 선행을 베풀어 빛나게 하시기 위하여 은총을 풍부히 하실 능력을 지니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6) 클리마쿠스는 수도승이 세례 받은 자의 모델이기를 바란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신분에 관계없이 욕정의 불을 순결한 사랑으로 끄고, 세상을 사막처럼 여겨 죄의 용 서를 의미하는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위해 순례의 길에 들어섰으며, 왕의 사제직을 교황직과 악령들이 접근할 수 없는 성전으로 간주하도록 불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7) 클리마쿠스는 이단을 뜻하는 신앙의 부족이나 어중간한 신앙을 하느님을 적대하는 쪽에 서 있지만 그분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앙에 빠지지 않고 뻔뻔스런 생활로 그분 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의 수준에 두고 있다. 적극적으로 하느님 법을 거부하는 적의 가 박해하는 적의보다 더 심각하다. 8) 클리마쿠스에게 있어 금욕생활의 토대는 모든 덕의 어머니인 순종이다. 그래서 그는 신적 빛으로 조명받은 자기 장상인 라이투의 요한 앞에 머리를 숙이면서, 펜으로 밖 에 설명할 수 없는 그의 무능한 종임을 인정하면서 그에게 순종하여 적고 있다. 반면 에 그는 적합한 색과 명암으로 수도승적, 그리스도교적 이상에 가까운 완전한 모습 을 스케치 할 줄 아는 탁월한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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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뻗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지혜에서 영감을 얻으며 펜을 잡을 것입니다. 그들의 순결한 마음속에 있는 엄격하고 유쾌한 겸손으로 그 펜 을 적시고9) 종이 위에보다는 오히려 영적 서판에 의지하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입니다.10)

담화 1 세상에 대 한 포 기 [하느님과 인간의 다양한 관계: PG 633 A-C]

2.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시기를 원했던 모든 존재, 즉 믿는 자와 믿 지 않는 자, 의로운 이와 의롭지 않은 이, 경건한 이와 불경건한 자, 욕정 의 노예와 욕정에서 해방된 이, 수도승과 세속인, 똑똑한 자와 무지한 자, ‐‐‐‐‐‐‐‐‐‐‐‐‐‐‐‐‐‐‐‐‐‐‐‐‐‐‐‐

9) 영적사부(수도원에서는 아빠스)에 대한 순종은 겸손의 표현이다. 클리마쿠스에게 있 어 순종은 따지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비판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도하게 따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미 첫 단계는 영적사부(1,6)의 안내 (1,3)를 요구한다. 둘째 단계는 자기 뜻을 거부하도록 권고한다(2,9). 서른 개 담화 가 이 금욕생활의 토대를 다루고 있다(4,15-45). 처음부터 영혼의 힘(1,4)과 영의 열 정(1,6), 에고의 죽음(2,8-9) 그리고 겸손한 신뢰(3,12)를 요구하는 물질적, 영적 순 례 전체의 포기이다. ; 신명 27,8:“돌들 위에 이 10) 참조. 2코린 3,7:“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 율법의 모든 말씀을 분명하게 써야 한다.”라이투의 수도승들은 아버지이자 스승이 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영적으로 기록된 새로운 율법판을 받아 줄 수 있고 영감 받은 언어로 선택된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새로운 모세 와도 같은 클리마쿠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클리마쿠스에게 있어 금욕적 순례의 목적지는 오로지 천상 예루살렘이다. 하지만 클리마쿠스는 수도승들이 수도원 밖으 로 순례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또 다른 형태의 순례, 즉 영적 안내자이자 파라오에 게서 벗어나 이집트에서 탈출한, 그리고 아말렉인들(욕정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새로운 모세인 장상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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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자와 병든 자,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의 생명이며 구원이십니다. 빛의 유출이며 영들의 태양이신 하느님은 이들에게 다양하면서도 공정한 방식으로 당신 빛을 부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 기 때문입니다.11) 불경건한 자는 이성적이고 죽을 운명의 본성을 지닌 자 로 영원하신 자기 주님의 실재를 부정하고, 의지적으로 생명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라 자신의 악한 뜻을 삶의 규칙으로 취하 며 하느님께 반대되는 것들을 선택하는 자는 충실한 자라고 속이며 법을 무시하는 자입니다.12) 그리스도인은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 올바르고 완전하게 성삼위에 대 한 신앙에 충실하면서 인간적 가능성에 따라 그리스도를 모방합니다. 하 느님의 벗은 다른 이들과 공동으로 자연의 정당한 선에 참여하고 자신 안 에 있는 선을 행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13) 우리는 유혹, 올가 미 그리고 소음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진 사람들을 본받고자 힘껏 노력하 는 사람을 자제력 있는 자라 말하고, 비록 계속해서 물질적이고 비천한 육신 안에서 생활한다 하더라고 영적 존재들의 무리 혹은 대열의 일부를 이루는 사람을 수도승이라고 말합니다.14) 그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행하 든 모든 상황에서 그분과 함께 오로지 한 가지 유일한 것, 즉 하느님의 율 ‐‐‐‐‐‐‐‐‐‐‐‐‐‐‐‐‐‐‐‐‐‐‐‐‐‐‐‐

11) 참조. 로마 2,11; 에페 6,9. 수도승들은 교계제도의 한 범주를 구성하지는 않지만 하느님께 사랑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적으로 가능한 만큼 하느님 아들에 의해 서 승화된 금욕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다시 사랑한다. 12) 하느님 법을 거부하는 불경한 자는 심판 때 견디지 못할 것이며 의인들의 모임에 끼일 수 없는 죄인처럼 파멸할 것이다(참조. 시편 11,5). 13) 주석가들에 따르면 여기서 클리마쿠스는 자연적인 선에 참여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 하면서 하느님 사랑에 빠진 성인들이 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14) 만일 수도승이 숭고한 정신으로뿐 아니라 정화된 몸으로 하느님과의 나뉘지 않는 일치를 지향한다면 육체를 위한 것에 대한 포기는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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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생활하기 때문에 수도승입니다. 그는 본성에 대한 부단한 폭행으로 감각들을 지키는데 있어 확고하고, 자기 육체를 거룩하게, 자기 입을 순 수하게, 자기 영을 밝게, 그리고 잠을 자건 철야를 하건 항상 통회하는 마 음으로 죽음에 대한 기억을 계속 생생하게 유지하는데 주의 깊습니다. 은 둔 혹은 세상에서의 분리는 우상화된 물질에 저항하는 열의와 본성을 초 월하는 것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본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상에서 분리된 사람에게는 하나의 목표, 하나의 안내자 그리고 많은 고행이 필요하다: PG 633C-636C]

3. 기꺼운 마음으로 이 세상 것들을 포기한 사람은 다음 세 가지 동기 중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분명합니다. 즉 장차 올 왕국을 위하여 혹 은 많은 죄에 대한 참회로 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 동기들 중 하나 때문이 아니라면 은둔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 주심 (agonoteta)15)께서는 우리가 어떤 목적을 부여하든 그것을 받아들이십 니다. 자기 죄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세상을 떠난 사람은 도시 밖 무덤 앞 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모방합니다. 즉 그는 줄곧 뜨겁고 강렬한 눈물을 흘리며, 마음에서 말없는 탄식을 쏟아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라자로와 같은 그에게 나타나시지 않는 한 그는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종들인 천사들에게“그를 욕정의 사슬에서 풀어주어 복된 아파테이아로 나아가 ‐‐‐‐‐‐‐‐‐‐‐‐‐‐‐‐‐‐‐‐‐‐‐‐‐‐‐‐

15) 아고노테타(agonoteta) 혹은 아틀로테타(atloteta)는 경기와 싸움의 주최자, 상을 얻 기 위해 운동장에서 다투었던 운동선수들의 심판관이나 주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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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하여라”16)고 명령하시면서 그러한 감정들을 일으키는 바위를 마음에 서 치우시고 죄악의 붕대에서 우리의 이 라자로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러 오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파라오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원 한다면 하느님 앞에 중개자이자 그분의 충실한 종인 모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인도 하에 있는 사람들이 죄의 바다를 건너고 욕정의 아말렉을 패주시키도록 하느님을 향해 치켜든 손을 유지하면서 금욕과 관상 사이에서 우리를 중재합니다.17) 아무도 필요 없다고 믿으면서 자기 재능에 기대는 사람들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모세를 인도자로 가졌고, 소돔에 서 탈출한 사람들은 한 천사에 의해 인도되었습니다.18) 이집트에서 탈출 한 최초의 사람들은 의학적 치료를 통해 질병에서 치유되는 사람과 같습 니다. 마치 자기를 도우러 달려오는 한 천사나 천사 같은 한 사람이 필요 했던 다른 사람은 비참한 육체의 타락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사람과 비 슷합니다. 사실 우리의 타락으로 생긴 부패한 상처 때문에도 우리에게는 유능한 의사가 절대 필요합니다. 비록 육체에 머물러 있다 하더라고 천국을 향한 등정에 착수한 사람은 참으로 계속 폭행19)을 당해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세상 포기 초 ‐‐‐‐‐‐‐‐‐‐‐‐‐‐‐‐‐‐‐‐‐‐‐‐‐‐‐‐

16) 참조. 요한 11,44. 죄의 죽음과 악습에서 돌아선 이들을 위한 길은 깊은 탄식의 길 이다. 눈물의 원천은 악습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요한 클리마쿠스에게 있어 아파테이아(apatheia)는 욕정들에 대한 거부인데, 이는 단지 금욕수행에 의한 부정적인 방법으로만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충동들을 그들 고유 의 목적으로 재정향함으로써이다. 17) 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인도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낮선 나라에서의 노예살이와 거기서 부과되는 노역에서의 해방에 대한 관상과 금욕은 필수불가결하다. 19) 참조. 마태 11,12. 18) 참조. 창세 1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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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그리고 확고하게 하느님 사랑과 순결한 삶으로 돌아설 때까지 그의 향략주의적 행위와 마음의 무감각은 확실한 통회의 길을 거쳐야할 것입니 다. 사실 특별히 게으른 생활에 젖은 사람에게는 그가 어떻게든 도살장 가 까이 서 있는 탐욕스런 개처럼20) 탐욕스런 정신이 단순성과 깊은 온유로 써 순수함과 애정 어린 순종을 열심히 사랑하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비통한 탄식에 결합된 참되고 적절한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욕정의 지배하에 있더라도 용기를 잃 지 맙시다. 우리가 비록 무력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신 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손을 그분 오른손에 두면서 우리의 연약함과 영적 무능력을 그분께 맡겨드립시다.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이런 깊은 겸 손을 유지한다면, 분명 우리 공로 이상의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름 답지만 힘든 우리의 이 경기, 정말 고통스럽지만 쉬운 경주를 시작하는 사 람은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는 불을 향해 들어가는 것처럼 또 다른 불, 즉 영적인 불이 자신 안에 거주하게 하려고 열심히 시합에 나갑니다.

[수도승은 큰 용기와 힘과 열정을 가져야 한다: PC 636C-637C]

4. 각 사람은 경기에 들어가기 전 시험을 받습니다.21) 그리고 그 자신 ‐‐‐‐‐‐‐‐‐‐‐‐‐‐‐‐‐‐‐‐‐‐‐‐‐‐‐‐

20) 개의 이미지는 호색과 뻔뻔스러움을 상징한다. 개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리석게 그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악령들로 불렸다. 21) 이 단락은‘하느님 사랑의 불을 받을 수 있는 힘든 투쟁으로의 초대로서 금욕생활 로의 부르심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 우리가 내린 앞의 결론에 연결된다. 왜냐하 면 옹기장이의 불가마 속에서처럼(참조. 집회 27,5) 금과 은을 서서히 녹이게 될 불 에 대해 언급될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잠언 17,3). 따라서 금욕생활을 시작하기 전 시험이 필요하다. 이는“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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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죄 받지 않기 위하여 오로지 쓴 나물을 섞은 빵을 받아먹고 눈물의 잔을 받아 마신 후에야 들어가게 됩니다. 참으로 세례 받은 모든 이가 그 자체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생략합시다.22) 훌륭한 기초를 놓기 위하여 초심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경멸하고 비웃으 며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삼중 구조로 된 훌륭한 기초에서 세 개의 기 둥, 즉 무구함, 단식, 절제가 솟아오릅니다.23) 그리스도 안에 유년의 무 구함을 사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실제 유년의 특성들을 모델로 취할 것입 니다. 유아들에게는 악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들 안에서는 결코 감추 어진 종양, 탐욕스런 배부름, 만족할 수 없는 배, 욕정으로 타오른 육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들 몫의 그러한 불을 갖게 될 때 아마도 그들을 위한 시간이 올 것입니다.24) 만일 그 선수가 경주 초기에 벌써 피곤함을 보이고 마치 스스로 기권하 려는 인상을 준다면, 참으로 얄밉고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25) 그러 므로 초기의 강한 공격에도 전혀 끄떡없고 이어지는 피곤한 순간에도 그

22) 23)

24)

25)

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 (로마 12,2)하기 위해서다. 이 시험은 1코린 11,28에서 다시 나온다.“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주님의 식탁은 말씀의 양식, 어린양의 살,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 에 관한 신, 구약성경의 또 다른 성찰들을 암시하고 있다. 뻔한 사실로서 생략된 나머지는 다음과 같다. 즉 모든 금욕가가 구원받는다고 볼 수 없는데, 이는 세례 자체와 마찬가지로 금욕이 구원의 보증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우주인 인간은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 영혼 자체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 져 있다. 따라서 땅으로서 인간은 지진이 일 때 하느님이 흔드시는 기둥들 위에 세 워져 있다(참조. 욥기 9,6). 클리마쿠스는 3이란 숫자를 선호한다. 1코린 3,1(내일의 두려움); 1베드 2,2(갓난아기들처럼); 마태 6,31(내일의 두려 움); 18,4(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야고 3,6(지옥 불을 끌어당겨 삶을 더럽히 는 불)을 반향하고 있다. 기쁘게 경주에 들어간 영혼이 시련으로 인해 기쁨을 읽게 된다. 그 때 깊은 겸손과 열렬한 하느님 기억으로 새로운 활력을 회복하게 된다. 경기장에 들어가는 순간부 터 약해지는 선수의 경우는 모순되고 불쾌하며, 이는 패배의 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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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사람은 남성답게 초기 열정에 대한 기억으로 고무되면서 득점을 얻 을 것입니다. 종종 그렇게 고무된 어떤 이들은 기력과 날개를 얻었습니 다. 영혼이 배신하여 그가 붙였던 거룩한 열정을 잃을 때, 그는 즉시 그러 한 상실의 이유를 다시 찾기 시작하고 초기의 모든 갈망과 모든 열정을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왔던 문과 다른 문으로 돌아 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순종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연적인 불이 처음엔 좋은 향 기를 내지만 끝에는 눈에 따가운 연기를 내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행동 합니다.26) 두 번째로 오로지 보상 때문에 순종을 받아들인 사람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도는 물방앗간의 맷돌처럼 돌아갑니다.27) 끝으로 하느님 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은거생활을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즉시 숲에 붙은 불에서처럼 점화되면서 확실히 항상 더 큰 불로 타오릅니다. 다른 한편, 바위 위에 벽돌을 쌓으면서 오직 집을 짓는데 전념하는 사람, 무른 땅에 기둥을 올리는 사람, 먼저 잠시 걸은 다음 신경과 근육이 더워지면 더 빠 른 걸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명하게 그 의미를 이해할 필요 가 있습니다.28) 우리 임금이신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우리는 열심히 달려갑 ‐‐‐‐‐‐‐‐‐‐‐‐‐‐‐‐‐‐‐‐‐‐‐‐‐‐‐‐

26) 두려움으로 움직인 사람은 두려움의 통회(compunctio timoris)에 이른다. 이 통회 는 완전한 두려움의 통회(=compunctio dilectionis)로 지탱되지 않으면 효력을 갖지 못한다. 27) 참조. 시편 119,112:“당신 뜻을 따르기로 내 마음 정하였사오니 그것이 영원한 보 상입니다.” 28) 초심자들은 이집트에서 주인의 채찍 아래 벽돌을 만들었던 노예들처럼 건축을 한 다. 은수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마치 불안정한 바위 위에 영적인 집을 짓는 것처 럼 여전히 불안정하다. 반대로 완전함의 사다리를 고결하게 오르는 사람들은 등반 가들에 비교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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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 이는 짧은 우리 인생을 다 마친 후 죽음의 날에 열매를 맺지 못하여 무익한 자가 되지 않도록 혹은 굶주림으로 죽지 않기 위함입니다. 군인들 이 그들 왕을 위하여 하는 것처럼 주님을 기쁘게 해드립시다. 사실상 군 복무를 마친 후에야 우리는 제대할 권리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야수 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아 주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훈련에 임하도록 합시다. 저는 실제로 전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약탈하러 갔다가 개 짓는 소리를 듣고 들어갔던 장소에서 즉시 도망쳐 나오는 사람 들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이룰 수 없었던 바를 짐승에 대한 두려움이 이룬 것입니다. 친구들을 존경하듯이 주님을 사랑합시다. 저는 종종 하느님을 슬프게 하고서도 염려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지켜보 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벗들과 약간 사이가 틀어진 것을 걱정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하든지 개인적으로 용서를 청하 거나, 아니면 친구들이나 선물을 통하여 옛 우정을 회복하려했던 것을 보 았습니다.29)

[부름에 즉시 따르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을 쉽게 해줄 것이다.: PG 637C-641A]

5. 포기의 시초에 우리는 온갖 시련과 고통을 감수하며 덕을 닦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보함에 따라 점차 전혀 혹은 별 수고 없이 덕 ‐‐‐‐‐‐‐‐‐‐‐‐‐‐‐‐‐‐‐‐‐‐‐‐‐‐‐‐

29) 디아도쿠스에 따르면, 시작하는 사람은 두려움을 정화의 약처럼 느끼고, 정화의 길 을 통해 이미 정화되었거나 진보한 사람은 사랑하거나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나 아간다. 사랑의 정도는 하느님이 야곱에게 보여주신 사다리에 도달한 단계에 비례 한다. 즉 하느님 사랑을 통하여 두려움에서 해방된 정도에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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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운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30) 인간 이성이 열정을 회복하고 선한 원의로 다스려질 때,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불을 통하여 충만한 기쁨으로 열심히 덕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31) 처음부터 하느님이 명령하시는 바를 기쁘고 열성적으로 준행하는 사람 들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금욕생활을 했음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그 멍에를 간신히 지고 가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그것을 질질 끌고 간다 하더라도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게 마지못해 억지 로 착수한 포기를 비난하거나 단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본 어떤 사 람들의 포기는 마치 도피하여 자신을 만나러 온 왕을 마지못해 따르고, 마 지못해하면서 계속 추종하며 그와 함께 왕궁에 들어가 연회에 참석하는 것과 같습니다.32) 실제로 저는 닥치는 대로 땅에 떨어져 후에 훌륭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씨앗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 경우도 보았습 니다. 저는 별난 질병이나 다른 이유로 병원에 입원한 어떤 사람을 지켜보 았습니다. 그는 의사의 세심한 치료로 자기 시력을 멀게 했던 안질에서 치 유되었고 바라던 성과보다 더 확고하고 확실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죄의 무게와 수 때문에 자기가 불림 받은 금욕생활에 부당 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 중에 여전히 더 죄를 짓기 위해 구실을 ‐‐‐‐‐‐‐‐‐‐‐‐‐‐‐‐‐‐‐‐‐‐‐‐‐‐‐‐

30) 참조. 성규 머리말. 베네딕도는 머리말에서“이제 잠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 (8), “오늘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10)는 등의 성경 구절로 세상으로부터의 이탈을 권고한 후, 지체하지 말고 즉시 거룩한 순종의 바위 위에 집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가 수도승생활과 신앙에 나아갈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 마음 이 넓어져 하느님 계명 길을 달려가게 될 것이다” (49). 31) 마지막 단계, 즉 썩을 몸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있는 1코린 15,54의 적응이다. 이 벗 어남 다음에 부활하여 슬픔도 눈물도 없이 부패하지 않게 될 것이다. 32) 참조. 마태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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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그의 나약함 때문에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고름을 짜내기 위해서 의사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은 바로 부패가 더 심한 곳이기 때문입 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병원에 자주 가지 않습니다.33) 지상의 왕이 신하들 가운데 누구를 불러 자기 앞에서 싸우라고 할 때, 우리는 지체하지도 구실을 찾지도 않고 그를 따르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 을 포기합니다. 왕들의 왕, 주님들의 주님, 신들의 신께서34) 당신 군대에 우리를 소환할 때, 그분의 최후 심판정에서 우리를 변호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어리석음과 소홀함으로 인해 거부당하지 않도록 잘 주의합시다. 세상사에 쇠사슬로 묶인 사람은 몸을 움직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 을 것입니다. 마치 발에 쇠사슬을 감고 걸으면서 자주 장애물에 부딪쳐 계속해서 상처를 입는 사람과 같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세상에서 사는 사 람은 세상사의 사슬에 묶여 있더라도 어떻게든 단지 손만 묶여 있는 사람 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만일 그가 수도승생활을 받아들이기 위해 달려가 기를 원한다면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은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사람의 조건에 있습니다. 저는 괴로움 없이 세상에서 사는 어 떤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저희가 부부생 활을 하고 세상 걱정에 사로잡히면서도 수도승생활의 선에 어떻게 참여 할 수 있겠습니까?”35)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여러분이 할 수 있는 ‐‐‐‐‐‐‐‐‐‐‐‐‐‐‐‐‐‐‐‐‐‐‐‐‐‐‐‐

33) 참조. 마태 9,12; 루카 5,31:“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 들에게는 필요하다.” ; 시편 50,1:“신들의 신, 주님 34) 참조. 신명 10,17:“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 께서 말씀하신다.” ; 1티모 6,15:“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 의 주님이신 분.” 35) 참조. 2티모 2,4. 이 질문은 마치 군복무에 소집된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에 게 세상사에 얽매이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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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하십시오. 즉 절대로 누구에게도 악담하지 마십시오. 도둑질하 지 마십시오.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누구를 모욕하거나 미워하지 마십 시오. 공동전례36) 참석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빈궁한 자에게 동정심을 가지십시오. 누구에게도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남의 배우자의 권리를 존중하십시오.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에게 주어야하는 것에 만 족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행한다면 여러분은 하늘나라에 서 멀리 있지 않을 것입니다.”37)

[순종 안에서 기쁨과 경외로 아름다운 경기장으로 달려갑시다.: PG 641A-644A]

6. 그러므로 우리 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과 경외로 아름다운 경 기장으로 달려갑시다. 우리가 그들을 지각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동정을 정탐합니다.38) 우리가 본성을 드러내자마자 그들은 우리 영혼에 해를 가합니다. 만일 우리가 겁에 사로잡힌 모습을 그들이 본다면 즉시 우리를 맹렬히 공격합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우리가 공포에 사로잡 ‐‐‐‐‐‐‐‐‐‐‐‐‐‐‐‐‐‐‐‐‐‐‐‐‐‐‐‐

36) 그리스어로 톤 쉬낙세온(ton synaxeon). 쉬낙시스(synaxis)는 성무일도나 성찬례를 위한 교회에서의 모임이었다. 여기서 평신도들은 주간 성체성사 거행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37) 참조. 마르 12,34. 38) 그리스도교는 2코린 13,9; 필리 3,1; 4,4; 로마 12,12; 2코린 6,10; 7,4; 8,2에 비추어 “일흔두 제자가 기 볼 때 기쁨의 메시지이다. 클리마쿠스는 무엇보다도 루카 10,17( 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 니다.’ ” )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거룩한 경외로 가득 찬 마음으로 회개 하라고 권고하는 토비 13,6을 염두에 둔다. 게다가 경외는 신적 봉사에 관대한 영혼 의 기쁨과 연결된다(참조. 시편 2,11; 마태 1,74; 로마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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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는 순간들을 식별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싸우기 위하 여 용기를 갖고 무장하도록 합시다. 분명히 누구도 용감한 마음으로 싸움 을 준비하는 자와는 싸우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갓 강해진 초심자들이 시작한 싸움은 덜 치열하도록 당 신 섭리로 안배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싸움을 완화시키셨는데, 이는 그들이 초대된 삶을 시작한 후 즉시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들인 여러분 모두 주님 안에 항상 기뻐하십시 오. 그리고 여러분의 부르심을 여러분을 위한 주님 사랑의 첫 번째 표지로 아십시오. 우리는 종종 주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방식을 통해서 그 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보다 빨리 승리의 월계관을 얻기를 바라시 기 때문에 처음부터 싸움을 허락하십니다. 하지만 용기 있는 영혼들을 보 셨을 때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 눈에 경기장의 고됨(나중에 어려움 없이 해소되는)을 감추십니다. 이는 만약 그들이 그것을 안다면 그 들 중 누구도 절대 세상을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젊은 날의 고뇌를 그리스도께 기꺼이 내어드리십시오. 그 러면 당신이 나이 들었을 때 성덕을 쌓으며 행동했던 것을 기뻐할 것입니 다.39) 젊었을 때 뿌렸던 씨앗들은 노년에 약한 이들을 지탱하고 용기를 북돋는 농작물을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젊을 때부터 열심히 일을 합시다. 단식의 경기장을 달려갑시다. 우리는 죽음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 입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나쁘고 위험스럽고, 간교하고 사악한 원수들 이 있습니다. 그들은 탐욕스런 손에 불을 가지고 있어 하느님 성전40)에서 ‐‐‐‐‐‐‐‐‐‐‐‐‐‐‐‐‐‐‐‐‐‐‐‐‐‐‐‐

39) 참조. 애가 3,27:“젊은 시절에 멍에를 메는 것이 사나이에게 좋다네.” ; 2코린 6,16:“우리는 40) 참조. 1코린 3,17:“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요한 클리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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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꽃으로 성전을 자극합니다. 그들은 무능력하고 잠을 자지도 않으며, 형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젊어서부터“질병과 쇠약을 피하기 위하여 네 육체를 소모시키지 마라”고 자기 원수들이 말할 때 그 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특히 우리 시대에 육체의 고 행을 선택하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41) 비록 누가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을 극기할 용의가 있다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악령의 목표는 바로 우리가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거나 태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후에 그 결과는 완벽하게 악령의 목표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관대함과 진리로 그리스도를 섬기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적 사 부의 도움을 구하면서 거주할 장소, 가져야할 태도, 정착할 암자, 준수할 규칙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거기에 그들의 개별 성향에 맞는 것 을 고려하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너무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모 든 사람에게는 회수도승이 어울리지 않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을 가진 사 람에게 은수처가 제공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각자 어떤 삶에 적합한지 검토할 것입니다.42) 일반적으로 수도승생활 제도는 크게 다음 세 가지 생 활양식으로 구분됩니다. 사막에서 홀로 싸우는 자의 생활양식, 다른 한 사람이나 두 사람과 평화로이 사는 자의 생활양식, 끝으로 공동체 안에 머무르면서 인내를 실천하는 자의 생활양식입니다. 전도서는 말합니다. ‐‐‐‐‐‐‐‐‐‐‐‐‐‐‐‐‐‐‐‐‐‐‐‐‐‐‐‐

41) 참조. 로마 8,13; 콜로 3,13. 42) 요한 클리마쿠스에게 있어 수도원(coenobium)은 더욱 안전한 장소이다. 지속적인 하느님 기억을 도와주고 분노를 극복하고 겸손을 배우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교 만의 악령은 은수자에게 세상으로 되돌아가 세상을 구원하라고 유혹한다. 암자는 영혼이 그 안에서 신랑과 결합되는 신방이다. 클리마쿠스는 처음부터 회수도승생활 과 독수도승생활 가운데 첫 번째 것을 보다 유익한 것으로 선택한다. 공동체 안에 서 애덕으로 단련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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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기울지 마십시오. 왕도를 걸어가십시오.’43) 이 중도는 많은 사람에게 적합한 길이니,‘외톨이는 불행하도다. 아케디 아44)나 잠이나 절망에 빠지면 그를 일으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45)라 고 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마태 18,20). 하지만 열정의 불이 절대 꺼지지 않게 돌보는 충실하고 슬 기로운 수도승이 누구이겠습니까?46) 죽을 때까지 매일 불에 불을, 열정 에 열정을, 열의에 열의를, 갈망에 갈망을 더하기를 절대 멈추지 않는 사 람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습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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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참조. 잠언 4,27. 클리마쿠스는 수도승이 이교의 극단주의와는 거리가 먼 스승의 인 고전적, 성경적 중용(mediocritas)의 길을 따르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때때로 화(聖化)의 이상한 형태들 안에서 나타나는 금욕가들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다. 44) 아케디아(akedia)는 영적 무기력 혹은 태만으로 수도승이 덕을 얻으려는 노력을 을리할 때 찾아오는 악령이다. 아케디아는 목적의식의 상실로 시작되어 절망과 적 죽음으로 끝난다. 46) 참조. 마태 24,45. 45) 참조. 코헬 4,9-10. 47) 참조. 루카 9,26.

길 성 게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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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테로스 아빠스의 둘째 담화 요한 가시아노 제15담화: 하느님이 주신 은사들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I 저녁기도 후에 우리는 관습대로 돗자리에 앉아서 원로께서 약속하신 담 화를 듣기로 했다. 우리는 우선 원로께 대한 존경심에서 얼마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로께서 우리의 조심스러운 침묵을 다음과 같 은 말씀으로 중단시키셨다.

지난번 담화에서 나는 영적 은사들의 성질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선배들의 전통에 의하면 은사들의 성질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치유하는 능력의 첫째 원인은 성덕에 의한 공로이다. 선택받은 모든 의 인들은 표징을 행하는 은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들과 많은 성인 들이 표징과 기적을 행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병든 이는 고쳐주고 죽은 이는 일으키며 나 병환자는 깨끗이 하고 귀신은 쫓아내시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 (마태 10,8). 둘째 원인은 다음과 같다. 교회의 건설이나 병자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 들이나 병자 자신들의 신앙 때문에 죄인들과 자격이 없는 사람들도 치유 의 능력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 하신다.“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주님, 주님, 우리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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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 이름으 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할 것인데 그때 나는‘너희를 도무 지 알지 못한다. 악행을 일삼는 자들아, 물러가라’하고 선언할 것입니다” (마태 7,22-23). 또 그와 반대로 병자들을 데리고 오는 이들이나 병자들 의 믿음이 없다면 치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도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을 실행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하여 루카 복음사가는“그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마르 6,5-6)고 했다. 또 주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엘리사 예언자 때에 이스 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그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습니다”(루카 4,27). 치유의 셋째 종류는 악령들의 장난과 꾸밈에 의한 것이다. 그런 경우에 는 많은 죄를 범한 것이 분명한 사람이 그가 행한 놀라운 표징 때문에 거 룩한 하느님의 종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의 악행도 본받게 되 고 이것이 비난의 계기가 되어 종교의 거룩함까지 모욕을 당한다. 아무래 도 그런 방법으로 악령들은 치유의 은사를 가졌다고 믿는 그 사람을 마음 으로 교만해지고 깊은 구렁에 빠지도록 한다. 악령들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성덕과 영적 열매가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공로 때문에 참지 못해 부마된 몸에서 도망치는 체 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신명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그가 말한 표징이 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자 하고 말하거든 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 다.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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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시는 것이다”(신 명 13,2-5). 복음에서도“가짜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서, 할 수만 있다면 뽑힌 사람들까지도 속여 넘길만한 큰 표징과 이적들을 보 여 줄 것입니다”(마태 24,24) 하는 말씀이 있다.

II 그래서 우리는 이런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절대로 경탄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그들이 모든 악습을 몰아내고 아주 깨끗한 생활을 하는 지 살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태에 이르기에는 남의 믿음이나 다른 어떤 원인이 소용이 없고 그것은 오직 각자의 정성에 따라 오는 하느님의 은총 의 결과이다. 이것이 실천적 학문1)으로 사도가 애덕이라고 부르는 것인 데, 사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과 천사들의 모든 언어보다도,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완전한 신앙보다도, 모든 지식과 예언보다도, 온 재산의 봉헌보다도, 심지어 영예로운 순교보다도 더 나은 것이다(참조. 1 코린 13,1-3). 사도는 은사들의 모든 종류를 열거하면서“어떤 이에게는 영을 통해 지혜의 말씀이 베풀어지는가 하면, 어떤 이에게는 인식의 말씀 이, 어떤 이에게는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 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1코린 12,8-10)와 나머지 은사가 베풀어진다고 하고나서 애덕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가 애덕을 한마디로 모든 은사들보다 높이 평가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이제 더욱 뛰어 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코린 12,31)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최고의 완덕과 행복은 저런 기적을 행함이 아니라 깨끗한 애덕에 있 ‐‐‐‐‐‐‐‐‐‐‐‐‐‐‐‐‐‐‐‐‐‐‐‐‐‐‐‐

1) 제14담화 역자 서문 참조(코이노니아 27집 p.201; 선집 6권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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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이 분명하게 증명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저 다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스러지게 되어있지만 애덕만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참조. 1코 린 13,8). 그래서 우리의 사부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었 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성령의 은총으로 그런 권능을 지 니고 있어도 특별하고 피치 못하는 필요의 경우가 아니면 그것을 전혀 실 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III 우리는 처음으로 스케테 광야에 거주하기 시작한 마카리오 아빠스가 죽 은 사람을 살렸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런 경우였다. 에우노 미우스(Eunomius)의 이단을 신봉하는 어떤 이단자가 변증법의 기술로써 참된 가톨릭 신앙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 그가 이미 많은 사람들을 기만 하였을 때 그토록 무서운 파괴를 크게 걱정하는 가톨릭 인물들이 복된 마 카리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에집트 전체의 단순함을 신앙의 파손으 로부터 살리기 위하여 복된 마카리오가 도착했다. 저 이단자는 변증법을 동원하여 마카리오를 공격하였고 그런 것을 배우지 못한 분을 아리스토텔 레스의 가시나무 숲에 끌고 가려고 했더니 복된 마카리오는 그 사람의 수 다를 사도께서 하신 것처럼 짧은 말씀으로 단절 시키셨다. 그는“하느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 (1코린 4,20)고 하면서“묘지에 가서 처 음 만나게 될 죽은 이 위에 주님의 이름을 불러 성서 말씀대로 행업으로써 우리 신앙을 증명하자. 그러면 그 죽은 이의 증언으로 올바른 신앙을 아주 명백하게 뒷받침하게 될 것이고 헛된 토론이 아니라 표징의 힘과 그르칠 수 없는 분의 판별로 밝은 진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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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자가 이 말을 듣고는 둘러있는 대중 앞에 체면상 우선 그 조건에 찬성하는 체 하면서 다음날 그 자리에 나와 있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이 구경거리를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큰 호기심으로 지정된 장소에 모 여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단자는 자기 신앙이 그릇됨을 의식한 나머지 너무 무서워 갑자기 에집트를 아주 떠나버렸다. 복된 마카리오는 대중과 함께 오후 세시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저 사람이 양심상 이 일을 피했다 는 것을 보고 그 사람에게 속았던 무리를 데리고 지정된 묘지에 갔 다……. (중략) ……마카리오는 아주 오래된 시신에 다가가서 이렇게 말 했다.“이 사람아, 멸망의 아들인 저 이단자가 나와 함께 이리 왔으며 그 가 서있는데서 내가 나의 신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면 저 사람의 속 임수로 무너질 뻔했던 이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일어났을 것인지 말해주 시오.”죽은 사람은 일어나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마카리오 아빠 스가 그에게 옛날에 살아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시대 에 살았는지 또 그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았는지 물어보았다. 죽은 사 람은 가장 오래된 임금들의 시대에 살았고 그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 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거기에 마카리오 아빠스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과 함께 평화 속에 잠을 자다가 모든 시대의 끝 날에 그리스도가 당신을 일으켜 주실 때까지 쉬시오.” 그러므로 온 주(州)의 위험을 막아야할 필요성과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 한 헌신과 진정한 사랑이 그 기적을 행하도록 마카리오를 강요하지 않았 다면 마카리오 스스로는 자기가 받은 능력과 은총을 영원히 숨겼을 것이 다. 그러나 그가 기적을 행한 것은 자기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것 은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온 백성의 이익 때문에 억지로 행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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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열왕기에서 읽을 수 있는 대로 복된 엘리아도 그렇게 했다. 그는 오 직 거짓 예언자들의 요술 때문에 흔들리는 온 백성의 신앙을 살리기 위하 여 장작더미에 얹은 제물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IV 아브라함 아빠스의 업적도 이야기할까? 그는 성품의 단순함과 결백 때 문에 하플루스(aJplou") 즉 단순하다는 별명을 받았다. 이는 오순절에 광 야를 나와 추수 일을 하기 위하여 에집트로 갔을 때 어떤 여인이 젖이 없 어서 병들고 반쯤 죽어가는 아기를 품고서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브라함 아빠스는 한 잔의 물에 십자가표를 그어서 여자에게 마 시라고 했더니 여자는 그것을 마시자마자 기묘하게도 말라버린 가슴에서 젖이 넘치게 흐르기 시작했다.

V 어느 날 같은 아브라함 아빠스가 어떤 마을로 가고 있을 때 비웃는 사 람들의 무리가 그를 둘러쌌다. 그들은 그를 놀리면서 무릎이 수축되어 여 러 해 전부터 걸을 수 없는 오랜 장애 때문에 기어 다닐 수밖에 없던 어떤 사람을 보여주고 그를 시험하려고 이렇게 말했다.“아브라함 아빠스님, 당신이 하느님의 종인지 아닌지 드러내 보이시려면 이자에게 본래의 건 강을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헛되지 않음을 믿겠습니다.”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 시고 몸을 굽혀 그 사람의 말라버린 발을 잡았다. 이 접촉으로 인해 굳고 구부러진 무릎은 즉시 곧아졌다. 그리고 그 장애인은 오랜 병으로 이미 잊었던 걸음걸이를 회복하여 기쁜 마음으로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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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이런 분들은 저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조금도 자랑스럽 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것들이 자신의 공덕이 아니라 오직 주 님의 자비에 의하여 행해진다는 것을 고백했고 사람들이 그 표징을 감탄 할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씀으로 인간의 영광을 거부했다.“형 제 여러분, 왜 이상히 여깁니까? 왜 마치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경건함으 로 그를 걷게 한양 우리를 바라봅니까?”(사도 3,12)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과 기적 때문이 아니라 오직 정성과 선행으로 쌓 이는 자기 덕행의 열매 때문에 사람을 칭찬해야한다고 판단했다. 사실 위 에서 이미 말한바와 같이 부패된 정신과 그릇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 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큰 이적을 행하는 일들은 흔하다. 그런 일에 대해 사도들이 염려해서“스승님, 어떤 자가 스승님 이름으로 귀신 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막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막지 마시오. 그대들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지지하는 사람입니다”(루카 9,49-50)라고 대답하셨지만 그런 사람들이 세말에“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 이름 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면 주님께서 그들에게“너희 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악행을 일삼는 자들아, 물러가라”(마태 7,2223)고 대답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덕의 공로로 표징과 기적의 영광을 친히 베풀어 주신 사람들도 이에 대해 우쭐하지 말 라고 이렇게 훈계하신다.“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지 말고 그대들 이 름이 하늘 책에 적혀있음을 기뻐하시오”(루카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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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그리고 모든 표징과 기적의 주재자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가르침을 따 르라고 당부 하셨을 때 당신을 진정으로 또 뛰어나게 모방하기 위하여 어 떤 것을 특별히 배워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제시해 주셨다. 그분은“와서 나에게서 배우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을 배우라고 하 시는가?“천상 능력으로 악령을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나병환자를 깨끗 하게 하는 것도 아니며, 눈먼 사람을 다시 보게 하는 것도 아니고 죽은 자 를 살리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내 종들을 통하여 행할 때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 인간의 형편은 하느님 찬양의 어떤 몫을 가지지 못한 다. 이것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이니 봉사하고 시중드는 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대신에 그대들은 내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나에게서 배우라”(마태 11,29)고 하셨다. 과연 모든 이가 보편적으 로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표징이나 기적을 행하 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것도 아고 모든 이에게 유익한 것도 아니며 모든 이에게 허락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겸손이야말로 모든 덕행의 스승이고 천상 건물의 가장 튼튼한 기초이며 구세주의 독특하고 위대한 선물이다. 탁월한 표징이 아니라 인 내와 겸손의 덕으로 온유한 주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그리스도께서 행했 던 모든 기적을 교만의 위험 없이 실행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한 영들에 게 명하거나 병자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거나 대중에게 어떤 놀라운 표 징을 보여주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은 그러한 연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도 그리스도와는 연관이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교만해서 겸 손의 스승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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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셨을 때에 하나의 유서 같은 것으로 제자 들에게 이런 것을 남기셨다:“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그리고 즉시 이렇게 덧붙이셨다.“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 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4-35). 그분은 “나처럼 표징과 기적을 행하면”이라고 하시지 않고“서로 사랑을 나누면” 이라고 하시는데 온유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음은 틀 림이 없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구마자로 자처하 고 경탄하는 무리 가운데에서 자기의 은사 - 실제 있든 그저 자부하든 를 열심히 과시하고 널리 퍼뜨리는 사람들을 덕성이 있고 허영심 없는 수 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헛된 일이다.“거짓에 의지하는 이는 바람을 먹으며 나는 새를 따라다닌다”(잠언?). 또 잠언에 나오는 다음 말 씀이 해당 되겠다.“바람과 구름과 비가 환히 드러나는 것처럼 거짓을 자 랑하는 자도 그렇다”(잠언 25,14 70인역). 그래서 우리 앞에서 저런 일 들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놀라운 표징이 아니라 아름다운 품행에 대하여 우리의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물어볼 것은 악령들 이 그에게 복종하는지가 아니라 사도가 묘사하는 사랑의 특징들(참조. 1 코린 13)을 지니고 있는지이다.

VIII 사실 자기 몸에서 음행의 불씨를 뽑는 것은 남의 몸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다. 또 분노의 사나운 충동을 인내의 덕으 로 다스린다는 것은 공중의 지배자들(참조. 에페 2,2)을 복종시키는 것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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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더 탁월한 덕행의 표시이다. 그리고 마음을 몽땅 갉아 먹는 근심을 자 기로부터 몰아내는 것은 남의 몸에서 쇠약함과 열병을 쫓는 것보다 훌륭 한 일이다. 끝으로 남의 육신을 낫게 하는 일보다 자기 영혼의 허약함을 치유하는 것은 훨씬 더 위대한 덕행이며 높은 단계의 발전이다. 영혼이 육신보다 더 숭고한 만큼 영혼의 건강이 더 중대한 것이며 영혼의 본질이 더 고귀하고 뛰어난 만큼 그 몰락이 더 위중하고 치명적인 것이다.

IX 육체의 치유에 대하여 주께서 복된 사도들에게“악령들이 그대들에게 복종한다고 기뻐하지 말라” (루카 10,20)고 하셨다. 과연 그 일은 자기들 의 권능이 아니고 그들이 부른 이름의 힘 덕분이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오 직 하느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지는 이 일들이 그들에게 행복이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들의 행복과 영광은 오직 그들의 이 름이 하늘에 적혀 있도록 해주는 생활과 마음의 깊은 결백에 의한 것이다.

X 우리가 말한 것을 선배들의 증거와 하느님의 말씀으로 뒷받침하기 위하 여 복된 파프누티우스(Paphnutius)의 이야기를 하겠다. 그분의 기적들이 일으키는 경탄과 순결의 은총에 대하여 생각한 것, 더하여 그가 천사의 계시로 알게 된 것에 대해 그분 자신의 말과 경험에 의거하여 가장 정확 하게 밝히겠다. 이 원로는 여러 해 동안 엄격하게 극기를 행했으므로 스 스로 육체의 욕정의 사슬로부터 완전히 석방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오랫 동안 악령들과 공개적으로 투쟁하여 그들이 자기에게 이제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건한 손님들이 방문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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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때 그는 제비콩 죽을 준비하다가 가마에서 갑자기 튀어 나오는 불꽃으 로 손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 일로 그는 대단히 근심하게 되었다. 그는 침묵 가운데 혼자서 궁리했다. 즉 불 보다 더 모진 싸움에 자신이 이겼는 데도 왜 불과 화목하게 지낼 수 없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또한 그는 일시적이고 미소한 이 외적인 불이 나와 화목하지 않으면 저 심판의 무서 운 날에 통과해야 할 꺼지지 않고 모든 이의 공과를 따지는 저 불이 나를 붙들지 않을까 스스로 물어 보았다. 그는 이런 종류의 슬픈 생각에 고민 하다가 갑자기 잠에 빠졌더니 주님의 천사가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파프누티우스, 이 현세적인 불이 너와 화목하지 못함에 대하여 왜 슬픔 에 빠지는가? 사실 너의 지체들 안에는 아직도 깨끗이 태워내지 못한 육 체의 욕정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 뿌리가 아직도 네 골수 속에 살아 있 는 동안은 그것이 너를 이 물리적 불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게 한다. 그 것이 너를 해치지 못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네 안에 있는 모든 충동들이 꺼졌음을 다음과 같은 증표로 알아낼 수밖에 없다. 발가벗은 아름다운 처 녀를 데리고 오너라, 만일 네가 그를 안아도 네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고 요하다는 것과 육체의 욕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면 볼 수 있는 이 불꽃도 바빌로니아의 저 세 젊은이들의 경우와 같이 너를 해치지 않고 너를 부드럽게 감싸 줄 것이다.” 원로는 이런 계시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제 시하신 위험한 실험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양심에 물어보 고 자기 마음의 순결을 성찰하니 자기 정결이 저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더러운 영들과의 싸움에 이겼다 해도 악령들의 모진 습격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불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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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테로스 아빠스의 둘째 담화

나에게 아직 달려든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은 결코 놀랍지 않다. 자기 속 에 있는 욕정의 불을 끈다는 것은 성호를 긋고 외부에서 습격해오는 악령 들의 행패를 최고의 권세를 가진 분의 힘을 빌려 길들이는 것과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서 그들을 부마된 몸에서부터 쫓아내는 것보다 더 위대한 권 능과 더 고귀한 하느님의 은총이다.

네스테로스 아빠스는 은사들을 올바르게 실행할 방법에 대한 설명을 이 렇게 마쳤다. 그분은 약 6마일이 떨어져있는 요셉 원로의 암자까지 가는 동안에 가르침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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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문 아빠스의 담화 요한 가시아노 제18담화: 수도승의 세 가지 종류에 대하여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I 우리는 위에서 말한 원로 세 분을 방문하고 그들의 담화를 듣고 우리 거룩한 동기 에우케리오(Eucherius)의 부탁대로 그 내용을 대체로 전하 였다. 그 뒤에 우리는 더 멀리 떨어진 이집트의 지방에 가겠다는 우리 의 욕은 더욱 뜨거워졌다. 거기에는 더욱 많고 더욱 완전한 거룩한 분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일 강의 일곱 개 강어귀에 위치한 디올코 스(Diolcos)라는 마을에 도달했다. 그것은 우리 여정의 필요성과 관계없 었지만 우리는 거기에 사는 거룩한 분들을 뵈려고 했던 것이다. 그곳에 옛 교부들이 여러 개의 유명한 수도원들을 세우셨다는 말을 듣 고 우리는 욕심 많은 상인들과도 같이 보다 큰 이들에 대한 희망으로 곧 불확실한 탐구를 위한 항해에 나섰다. 오랫동안 밀려다니면서 호기심 찬 눈으로 덕행의 높이로 솟아난 산들을 이리저리 쳐다보다가 어떤 아주 높 은 등대처럼 우리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피아문(Piamun) 아빠스였다. 그분은 그곳에 사는 모든 은수자들 중에 가장 연로했으며 그들의 사제였 다. 복음에 나오는 저 도시처럼(참조. 마태 5,14) 그는 높은 산의 정상에 계신 분으로 우리 눈에 비치게 되었다. 우리 계획을 벗어나지 않고 이 책의 한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하니, 이 분의 성덕에 대한 증거로써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눈앞에서 행해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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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문 아빠스의 담화

적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할 것 같다. 우리 의도는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한에서 저 성인들의 가르침과 수행에 관한 것들을 전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독자들 에게 제공하고 싶은 것은 악습을 고치는데 있어 무익하고 헛된 감탄만 자 아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생활을 위한 교훈이 되는 것뿐이다. 복된 피 아문은 우리를 대단히 기쁘게 맞이하고 적당하게 대접한 다음 우리가 타 지에서 왔다는 것을 보고 우리가 어디서 왔고 또 왜 이집트를 방문했는지 상세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완덕에 대한 욕망으로 시리아의 어떤 수도원에서1) 왔다는 것을 알아냈으니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II 나의 아들들아, 누구든지 어떤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그는 큰 정성으 로 자기가 알고 싶은 업종에 대한 공부에 몰두해야 하며 그 직업이나 학 문의 가장 훌륭한 교사들의 지시와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헛수고만 한다. 스승들의 정성과 근면을 본받지 않으면 그들과 비슷해지 려는 것은 헛된 욕심뿐이다. 우리 경험으로 어떤 이들은 그대들의 지방에 서 여기 올 때 오직 알기 위하여 형제들의 수도원들을 돌아다녔지만, 여 행의 목적이 되었던 규칙과 가르침을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고, 보았거 나 배웠던 것을 실제로 체험해보기 위하여 은둔할 암자를 찾을 생각은 없 었다. 그들은 본래 몸에 밴 습관과 수행을 고수했더니 어떤 이들은 그들 을 보고 진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핍을 피하기 위해서 거주하는 주 ‐‐‐‐‐‐‐‐‐‐‐‐‐‐‐‐‐‐‐‐‐‐‐‐‐‐‐‐

1) 가시아노와 제르마노는 베틀레헴의 어떤 수도원에 살다가 견학하러 이집트에 갔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로마 제국 시리아 지방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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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州)를 바꿨다고 나무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 기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이 지방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들이 단 식의 관례나 시편을 외우는 순서 뿐 아니라 입은 옷마저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지방에서 찾는 것은 자기 양식을 확보하는 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III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 그대들이 하느님 때문에 우리를 알려고 하는 욕망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대들은 초보자로서 저 쪽에서 배웠던 모 든 것을 다 포기해야 한다. 그 대신에 우리 원로들이 행하거나 가르치는 모든 것을 보는 그대로 지극한 겸손으로 따라야 한다. 만일 현재로서는 어떤 일이나 행동의 이유나 뜻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것을 보고 흔들리 거나 그것을 모방하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좋고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원로들이 가르치거나 행하는 모든 것 을 따지기보다 보는 그대로 충실히 모방하는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체험 과 함께 또한 모든 일에 대한 인식을 얻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 의하면서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은 끝까지 진리의 이치를 깨닫지 못할 것 이다. 사부들의 판단보다 자기 판단을 믿는 사람을 원수(마귀)가 보면 그 사람을 계속 유인하여 가장 유익하고 구원에 도움이 되는 일도 필요 없고 해로운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 사람의 선입견을 이용하는 약 은 원수는 그 사람을 속여 그가 불합리적인 자기 견해를 완고하게 고집하 게 하며, 꿋꿋이 지키는 자기 그릇된 입장에 의해 좋고 옳은 것으로 보이 는 것만 거룩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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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문 아빠스의 담화

IV 그러므로 그대들은 제일 먼저 우리 생활양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는 어디서 나왔는지 배워야 한다. 어떤 기술을 효과적으로 습득하고 그 기술 을 시행하는 열성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 창시자들의 성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집트에는 세 종류의 수도승이 있는데 그 중 둘은 훌륭하지만 셋째는 나태한 것으로 반드시 멀리해야 한다. 첫째 종류는 회수도자들 (coenobiotarum)이다.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면서 한 원로의 판 단에 의해 지도를 받는다. 이 종류의 아주 수많은 수도승들이 이집트 어 디에나 거주하고 있다. 둘째 종류는 독수도자들(anachoretarum)이다. 이 들은 먼저 (회수도자들의) 수도원(coenobium)에서 교육을 받고 수행의 완성에 이른 다음에 외딴 곳에 가서 고독을 택한다. 우리는 그 종류에 속 하고 싶다. 셋째 종류는 비난해야 할 사라바이따(sarabaitarum)이다. 각 종류에 대하여 순서에 따라 더 상세하게 다루겠다. 우리가 말한 대로 그대들은 먼저 이 세 종류의 창시자들에 대하여 알아 야 한다. 그것을 알기만 하면 피해야 할 생활양식에 대한 혐오가 나기도 하고 따라야 할 생활양식에 대한 갈망도 나게 되어 있다. 사실 누가 어떤 길을 택한다면 그 길은 그것을 따라가는 이를 반드시 창시자가 도달한 그 목표까지 인도할 것이다.

V 회수도자들의 생활은 사도들이 복음 선포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것 이 예루살렘에 살던 그 신자들의 온 무리의 생활이었다.2) 그것이 사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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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서 이렇게 묘사되었다.“신도들의 무리는 한마음 한정신이 되었으며 아무도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 다”(사도 4,32).“재산과 재물을 팔아서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 었다”(사도 2,45).“그들 가운데 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누구든지 밭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 것을 팔아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 발 치에 놓았고 사도들은 그 돈을 저마다 필요한 만큼씩 나누어 주었다”(사 도 4,34-35). 그 당시 온 교회가 그렇게 살았는데, 현재에는 그렇게 사는 소수의 사람들을 수도원에서 찾는 것도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사도들 이 돌아가신 뒤에 믿는 이들의 무리가 미지근해졌다. 우선 이교 민족들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일 때 사도들은 그들이 아직 신 앙의 초보자들로서 외교인의 관습을 쉽게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 들에게“우상에게 바친 고기와 피와 숨 막혀 죽은 짐승의 고기와 음행” (사도 15,29)만 피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초보자의 약한 신앙 때문에 이방인 출신의 신자들에게 허용한 이 자유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졌던 완덕을 점차적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대 출신이나 이방인 출 신의 개종자들의 숫자가 날로 늘어남에 따라 그리스도를 새로 믿게 된 사 람뿐만 아니라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들까지 본래의 엄격한 생활이 해이 해졌다. 몇몇 사람들은 나약함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허용된 일을 자기들 에게도 허락된다고 생각해 자기 재산을 지킨 채로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 해도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을 줄 알았다는 것이다. ‐‐‐‐‐‐‐‐‐‐‐‐‐‐‐‐‐‐‐‐‐‐‐‐‐‐‐‐

2) 공동수도생활이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설은 고대 수도생활 문 학에서 가끔 볼 수 있는데 역사적 근거에 바탕을 두었다기보다는 약간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론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독신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신자들이 공동소 유를 실천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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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직도 사도들의 열성을 지닌 사람들은 지난날의 완덕을 기억하 여 살고 있던 도시들을 떠나고 자기 자신이나 하느님의 교회가 좀 더 이 완된 생활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과의 교제를 멀리했다. 그들은 도 시들의 변두리 외딴 곳에 머물면서 사도들이 교회 전체를 위하여 제정했 다고 생각한 규정들을 개인적으로 따로 지키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우리 가 말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이완된 생활에 물들지 않은 제자들의 특별한 생활방법이 구현되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들은 점차 일반 신자들의 무리와 분리되었다. 그들이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사귀지 않으 며 세속생활을 멀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자 살고 따로 사는 그들을 수 도승(monachi)이나 혼자 사는 사람(monazontes)이라고 불렀다. 다음에 사람들은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그들을 회수도자(coenobitae) 라고 했고 그들이 사는 집을 수도원(coenobia)3)이라고 불렀다. 이것만이 가장 오래 된 수도승들의 종류였다. 이 종류는 생긴 연대만이 아니라 은총으로도 제 일이다. 이런 생활방법은 여러 해 동안 충실히 지켜져 왔으며 바울로 아 빠스와 안토니오 아빠스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흔적을 엄격한 수도원들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VI 위에서 말한 완전한 분들 가운데서는 마치 어떤 열매 잘 열리는 뿌리에 서처럼 거룩한 독수도자(anachoretae)들의 꽃과 열매도 나왔다. 아는 바 와 같이 조금 전에 언급한 바울로와 안토니오 성인이 그 생활양식의 창시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다른 사람과 달리 세심에서나 인내심이 부족해 ‐‐‐‐‐‐‐‐‐‐‐‐‐‐‐‐‐‐‐‐‐‐‐‐‐‐‐‐

3) coenobium, coenobitae: 그리스말 koinos(=공동)과 bios(=생활)이라는 말의 합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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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아니라 더 숭고한 발전과 하느님께 대한 관상을 열망해서 광야의 고 독함을 찾았다. 그렇지만 바울로 성인은 박해 때에 친척의 흉계를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광야에 들어갔다고들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말한 저 생 활양식에서부터 또 다른 완덕의 종류가 나왔다. 그 추종자들은 옳게 독수 도자(anachoretae), 즉 은수자라고 불린다. 그들은 인간들 사이에 살면서 마귀의 가려진 흉계를 억눌렀던 승리로 만족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싸우 면서 악령들과 대결하려고 과감하게 멀고 황량한 광야로 나아갔다.4) 그들은 일생동안 광야에 머무르던 세례자 요한과, 엘리아와 엘리사와, 사도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분들을 모방했다.“그들은 양가죽과 염소가죽 을 두르고 돌아다니고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습니다. 세상이 마뜩찮 아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 다녔습니다”(히브 11,37-38).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욥에게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누가 들나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느냐? 그의 굴레를 누가 풀어 주었느냐? 내 가 광야를 그의 집으로, 소금땅을 그의 거처로 삼아 주었다. 그것은 성읍 의 소란을 비웃고 몰이꾼의 고함을 듣는 일 없이 제 목초지인 산들을 기 웃거리며 온갖 풀을 찾아다닌다”(욥 39,5-8). 시편에도 이런 말이 나온 다.“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 구원받은 이들, 그분께서 원수의 손에서 구 원하신 이들……”(시편 106,2). 그리고 조금 더 가서“그들은 사막과 광 야에서 헤매며 사람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였다. 주리고 목 까지 말라 목숨이 다하여 갔다. 이 곤경 속에서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난관에서 그들을 구해 주셨다”(시편 106,4-6)고 했다. 예레미야도 그들 을 이렇게 묘사한다.“젊은 시절에 멍에를 메는 것이 사나이에게 좋다네. ‐‐‐‐‐‐‐‐‐‐‐‐‐‐‐‐‐‐‐‐‐‐‐‐‐‐‐‐

4) 고대의 사람들은 광야를 악령들의 본거지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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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홀로 말없이 앉아 있어야 하니 그분께서 짐을 지우셨기 때문이네” (애가 3,27-28). 그들은 심정과 행동으로 시편작가와 함께 이렇게 노래 한다.“나는 마치 펠리칸인 듯, 마치도 폐허의 부엉이인 듯 지붕 위의 짝 을 잃은 새와도 같이 잠 못 이루나이다”(시편 101,7-8).

VII 이 두 가지 수도승들의 생활양식은 그리스도교의 기쁨이 되었다. 그런 데 이 제도 역시 점차 열악해지다가 아주 고약하고 지조 없는 수도승들의 종류가 생겼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를 통하 여 교회의 시초에 돋아났으나 베드로 사도의 엄격한 처지로 잘린 해로운 나무가 새로 싹튼 것이다. 복된 사도가 내린 엄격한 언도에 대한 무서운 기억이 신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모든 수도승들은 그전 생활 을 가증스럽고 저주 받을 것으로 판단하여 아무도 그렇게 살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복된 사도는 저 새로운 범죄의 창시자들에게 회개의 기회 를 주지 않으며 보속으로 그들을 치유해주지 않은 채 그 치명적인 싹을 빠른 죽음으로 잘라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나가니 사람들 은 사도가 엄격하게 처벌했던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죄에 대하여 등한 시하거나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 일은 점차 몇 사람들의 안목 에서 사라짐에 따라 사라바이타들의 부류가 나타났다. 이자들은 수도원 공동체들을 벗어나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마련 하는 사람으로 이집트의 독특한 말로 사라바이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들은 복음적 완덕을 실제로 추구하지 않고 그것을 따르는 체만 하는 상기 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왔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버리고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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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의 완전한 포기를 택하는 사람들과 같은 영예를 탐내고 그들과 경쟁 하려고 했다. 이들의 마음이 너무 약해서 빼어난 덕행이 필요한 신분을 공연히 시도하거나 어떤 피치 못한 상황 때문에 수도생활을 택해서 수도 승들의 명칭을 들으려고 하지만, 그 생활을 모방하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 는다. 이들은 수도원의 규칙생활을 찾지도 않고 원로들의 지도를 받거나 그들의 전통에 의하여 자기 의지를 극복하는 법을 배우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그들은 정상적인 교육에 기초 둔 건전한 분별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형식상 또는 체면상 포기를 택한다. 어떤 때에 그들은 자기 집 에 머무르면서 수도승의 명칭만 누리고 그 전과 같은 일을 계속한다. 또 어떤 때에 그들은 스스로 암자를 지어 그것을 수도원이라고 부르고 그 안 에 자기 자신의 법과 재량에 따라 산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의 계명, 즉 매일의 양식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고 자신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말라는 계 명을 지키지 않는다. 그와 달리 의심하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을 깨끗이 포기하고 수도원 장상에 게 자신을 맡겨 자기 자신의 주인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이다. 그러 나 우리가 말한 대로 수도원의 엄격한 규칙을 피하고 둘이나 셋이서 암자 에 사는 이들은 아빠스의 배려와 명령을 받기 싫어 무엇보다 원로들의 멍 에를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기 뜻을 실행하고 어디든지 마음대로 다니며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를 누리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때에 수도원에 사는 사람보다 밤낮으로 바쁘게 살지만 그들 의 이념과 의도는 다르다. 그들이 일하는 목적은 그 결실을 당가 수사의 재량에 맡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저장할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다. 진정한 수도승과 사라바이타 양자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보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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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땀의 열매를 하느님께 기쁘게 바치는데, 후자는 내일만 생각하지 않고 불신한 마음으로 여러 해 동안 필요한 것을 미리 걱정하니 하느님이 거짓말하는 분으로, 아니면 궁핍한 분으로서 당 신이 약속하신 매일의 양식과 필요한 옷을 마련하실 수 없거나 마련하시 기 싫다고 믿는다. 전자는 온전한 마음으로 사물에 대한 완전한 이탈과 영원한 가난을 추구하는데 후자는 모든 재화를 넘치게 차지하려고 한다. 전자가 매일 배정 받은 일거리 이상으로 생산할 때 그것은 수도원에서 거 룩하게 사용하고 남은 것을 아빠스의 재량대로 감옥이나 여인숙이나 병 원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게 되어 있다. 그러나 후자는 매일 포식한 뒤에 남은 것을 낭비하는 취미를 즐기거나 돈 모으는 욕심을 채우기 위하 여 저장한다. 끝으로 그들이 덜 좋은 의도로 모아 놓은 것을 우리가 말한 것보다 더 좋게 나눌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그들은 회수도자들의 훌륭한 덕행 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 회수도자들은 수도원을 위하여 큰 수입을 얻어도 그것을 날마다 포기한다. 그들은 언제든지 순종과 겸손의 태도를 꼭 지키 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땀 흘려 마련한 물채 에 대한 권리도 버린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 노고의 결실을 매일 내어 놓음으로 첫 번째 포기의 열성을 끊임없이 새롭게 한다. 그러나 사라바이 타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줄 때에라도 그 일로 거만해짐으로 매일 같이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만 한다. 회수도자들은 인내와 엄격한 생활로 한 번 택한 신분에 헌신적으로 머물러서 한 번도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 기 때문에 매일같이 이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과 살아 있 는 순교자가 된다. 그와 달리 사라바이타들은 냉담한 그들의 의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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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묻히게 된다. 이 지역(provincia)에는 위에서 말한 수도승의 두 종류(회수도자와 독 수도자)의 숫자는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내가 가톨릭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녀온 다른 지역에는 저 사라바이타들의 셋째 종류가 아주 많고 거의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발렌스(Valens) 황제 치하에 아리우 스 이단에 속했던 루치우스(Lucius) 주교가 있었을 때 가톨릭 신앙을 지 키기 때문에 이집트와 테베 지방에서 폰투스(Pontus)와 아르메니아의 광 산에 보내진 우리 형제들에게 위문금을 전하러 다녔다. 그 때에 드물게나 마 어떤 고을에 회수도원의 생활을 보았지만 그쪽에서 회수도자라는 명 칭이라도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VIII 그런데 얼마 전에 우리는 어떤 넷째 종류가 돋아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람들은 독수도자의 모양을 드러내고 자랑한다. 그들은 수도생활을 시작했을 때 짧은 기간에 회수도자들의 완덕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 같지 만, 그 열성은 너무 빨리 식어 이전의 습관과 결점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 고 겸손과 인내의 멍에를 그 이상 참지 못해 원로들의 지배를 받기 싫어 한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암자를 찾아서 거기서 혼자 살기를 원한다. 이 런 방식으로 그들은 아무에게도 자극을 받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기들을 인내롭고 온순하며 겸손한 사람으로 보기를 바란다. 이런 제도, 아니 이 런 나태에 한 번 걸린 사람은 끝까지 완덕에 도달할 수 없다. 이런 방법으 로는 결점을 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결점은 자꾸 더 굳어질 것이다. 아무도 자극을 주지 않으면 결점은 몸속에 숨어 있는 치명적인 독소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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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감출수록 더욱 깊이 기어들어가 환자로 하여금 불치병을 앓게 한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암자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 사람이 치유하기보다 몰 라보기로 한 결점을 아무도 감히 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덕행은 결점을 숨김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결점과 싸움으로 생기 는 것이다.

IX 제르마노: 체노비움(coenobium)과 모나스테리움(monasterium)은 서 로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둘 다 같은 것입니까?

X 피아문: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이름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모나스테리움(monasterium)은 거주하는 집만 가리키는 말일 뿐이고 그 저 수도승들이 사는 장소를 가리키지만, 체노비움(coenobium)은 그 신 분의 성격과 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 수도승이 혼자 사는 집도 모나 스테리움(monasterium)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공동생활 을 하는 집만 체노비움(coenobium)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사라바이타 들의 단체들이 사는 곳도 모나스테리아(monasteria)라고 한다.

XI 이제 내가 보니 그대들은 수도승들의 아주 훌륭한 종류에 들어가서 이 생활의 기초를 배웠으며 지금은 갸륵한 수도원들의 도장에서부터 독수도 자들의 빼어난 수행의 산봉에로 옮아가려고 하네. 그대들은 그쪽에서 틀 림없이 배운 겸손과 인내의 덕을 진정한 마음으로 추구해야 한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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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면 어떤 사람처럼 사양하는 말로나 지나친 예의와 필요 이상 몸을 굽 힘으로써 꾸미는 거짓 겸손을 피해야 한다. 사라피온(Sarapion) 아빠스가 그런 꾸민 겸손을 재미있게 비웃은 일이 있었다. 그때에 자기 집에 겉모습과 말씨로 자기 자신을 극도로 굴욕 시 키는 사람이 왔는데, 원로는 그에게 관례대로 마침기도를 바치라고 권고 했다. 그러나 그 자는 그 요청을 단단히 거절했다. 그는 너무 많은 악습에 빠진 사람으로 모두에게 속한 이 공기를 들어마심에도 부당하다고 스스 로 말하면서 멍석에 앉는 것도 거절하고 차라리 땅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자기에게 발 씻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사라피온 아빠스가 보통 하는 훈시 가운데 그 사람을 인자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충 고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며 이렇게 튼 튼한 젊은이는 정처 없이 사방에 다니지 말고 차라리 원로들의 규칙을 지 키면서 암자에 앉아서 남의 자선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 지하라고 했다. 또 바울로 사도가 그런 형편을 피하기 위하여 복음선포를 하는 수고의 대가로 저런 대접을 마땅히 받을 수 있었음에도 차라리 밤낮 으로 일했고 그것으로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함께 봉사하는 일에 바빠서 스스로 작업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매일 양식을 마련했다고 말했 다. 그 말씀을 듣고 저 손님은 크게 마음 상하여 마음에서 느끼는 불쾌감 을 얼굴 표정으로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원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조금 전에 그대는 온갖 무거운 죄를 범했다고 스스로 고백 하여 그렇게 무서운 죄를 시인함으로 체면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 았는데 이제 이것이 무엇인가? 내가 그대에게 그저 간단하게 주의를 주었 을 뿐이고 모욕을 준 것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와주고 싶은 사랑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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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여주려고 했소. 그런데 내가 보기에 지금 왜 그대는 상당히 분개하 여 그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명랑한 얼굴 모양으로 그런 것이 없는 체 하 지도 못하오? 혹시 자기를 낮출 때에 그것은 그대가 우리 입에서“의인이 말하기 시작할 때 자기 자신을 고발한다”(잠언 18,7 70인역)는 말을 듣 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마음의 참된 겸손을 지켜야 한다. 그런 겸손은 몸이나 말로써 억지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자기의 비천함을 확신하 는 것이다. 그런 겸손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남이 믿을 수 도 없는 범죄를 스스로 자랑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남이 자기에게 무례 하게 뒤집어씌운 범죄를 무시해 당한 치욕을 온유하게 참고 마음의 평정 을 지킬 때이다. 그런 인내가 참된 겸손을 가장 명백하게 드러내고 빛내 준다.

XII 제르마노: 우리는 그런 평정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며 어떻게 보존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침묵을 지켜야 할 때 입을 다물고 말을 통제하지만 마음을 어떻게 온화하게 지킬 수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 말을 다스려도 우리 속마음은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으론 따로 떨어진 암자에 들어가 혼자 살지 않으면 아무도 온유함의 덕을 얻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XIII 피아문: 참된 인내와 평정은 마음의 깊은 겸손 없이 얻을 수도 보존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이런 샘에서 나온다면 암자나 고독의 뒷받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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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것도 필요 없다. 인내와 평정의 어머니와 보호자는 겸손이다. 안에 서부터 그 힘을 받고 있다면 밖에서 오는 어떤 도움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남의 자극에 격분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 안에 겸손 의 기초가 약하다는 증거다. 그래서 약간의 소나기가 닥쳐오면 우리 집은 큰 타격을 받아서 무너지려고 한다. 만일 원수들의 화살을 맞지도 않고 평정을 지킨다면 그것을 칭찬하거나 감탄할 인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유혹의 폭풍이 들이닥쳐도 동요되지 않은 채 꾸준히 지켜지는 인내만은 훌륭하고 자랑스럽다. 역경을 당하는 순간에 인내는 흔들리거나 깨지기 는커녕 더욱 튼튼해진다. 무디어진다고 생각할 바로 그때에 더욱 북돋아 진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인내’라는 말은 참고 견딘다는 의미를 지 니고 있다.5) 그래서 자기가 당한 모든 능욕을 화내지 않고 참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인내롭다고 부를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사람을 솔로몬은 마땅히 찬양한다.“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 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잠언 16,32). 또는“분노에 더딘 이는 매우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성을 잘 내는 자는 제 미련함만 드러낸 다”(잠언 14,29). 누가 능욕을 이겨내지 못해 격분한다면 그는 상대방의 무례한 짓이 그 죄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보다 그 분노는 자기의 약점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은 구세주께서 말씀하신 두 채의 집에 대한 비유와 같다. 그 중에 하나는 바위 위에 세워졌지만 다른 하나는 모래 위 에 세워졌다는 것이다(참조. 마태 7,24-27). 비와 강물과 폭풍은 두 집 에 똑같이 들이닥쳤지만 단단한 바위 위에 세워진 집은 심한 타격에도 전 ‐‐‐‐‐‐‐‐‐‐‐‐‐‐‐‐‐‐‐‐‐‐‐‐‐‐‐‐

5) 라틴어의 patientia(인내)는 pati(견디다, 고통을 당한다)라는 말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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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손해당하지 않았지만 불안하게도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은 즉시 무너졌 다는 것이다. 이 집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명백하게 보이는 것과 같 이 그것은 비와 강물이 들이닥쳤기 때문이 아니라 미련하게도 모래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죄인과 성인의 구별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인이 같은 모양으로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인은 크게 공격을 당해도 지지 않는 것과 달리 죄인은 작은 유혹에도 넘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의인이 유혹을 받지도 않고 이긴다면 그것은 칭찬할만한 굳셈이 아니다. 사실 역경을 맞아 싸우지도 않는다면 승리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시련 6)을

견뎌내는 사람은 복됩니다. 시련을 이겨낼 때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

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사도 바오로도 능력7)은 한가함과 향략에서가 아니라“약함 가운데서 완성된 다”(2코린 12,9)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이 있다.“오늘 내가 너를 요 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18-19).

XIV 나는 그대들에게 이런 인내의 적어도 두 가지 본보기를 제공하고 싶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떤 신앙심 깊은 여자에 관한 것이다. 그 여인은 인내 ‐‐‐‐‐‐‐‐‐‐‐‐‐‐‐‐‐‐‐‐‐‐‐‐‐‐‐‐

6) 라틴어의 temptatio는 시련과 유혹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7) 라틴어의 virtus는 능력도 되고 덕행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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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미덕을 대단한 열성으로 추구하느라 시련의 기회를 피하지 않을 뿐 아 니라 일부러 귀찮은 일을 찾음으로 그것을 통해 자극을 받고 시련을 견디 기로 했다. 이 여인은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사람으로 이름난 가문 출신이 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겼다. 그러다가 그는 복된 아타나시오 주교에게 가서 교회에서 부양하는 과부 한 사람을 달라고 했다. 자기가 그를 먹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요청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자매들 가운데 한 사람을 주십시오. 제가 그를 요 양하려 합니다.”주교는 자선 행위에 대한 그 여인의 열성을 보고 그녀를 칭찬하면서 모든 과부들 가운데 가장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을 뽑으라고 명했다. 주교는 너그럽게 주는 사람의 뜻이 잘못 받는 사람의 결점 때문 에 실패하지 않기를 원했고, 가난한 사람을 도움에 대한 상급을 바라는 여인이 그 가난한 이의 못된 처신 때문에 오히려 신앙심에 대해 손해 받 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인은 그 과부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 서 대단한 정성으로 대접했다. 과부는 그것을 지극히 겸손하고 온순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여주인은 자기의 친절한 봉사에 대하여 각 순간마 다 감사하는 말을 듣고서는 며칠 뒤에 다시 주교를 찾아 갔다. 그리고 주 교에게“저는 제가 돌보고 고분고분하게 섬길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주교는 아직도 그 부인의 뜻과 결심을 깨닫지 못하고 담당자의 실수로 부인의 요청이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약간 분개하여 왜 이 일 이 미루어졌는지 조사했더니 그 부인에게 다른 과부들보다 고결한 사람 이 보내졌다는 사실을 금방 알았다. 그래서 이제 그에게 가장 고약한 과 부를 주라고 몰래 명했다. 다시 말하면 화를 잘 내고 자꾸 싸우고 술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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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며 수다스러운 모든 여자들보다 가장 나쁜 사람을 뽑으라고 했다. 그 런 여자를 그전의 사람보다 훨씬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을 받은 부인은 그를 집에 데리고 그에게 앞의 사람과 같은 정성, 아니 더 큰 정성 으로 봉사했다. 그러나 자기의 지극한 친절에 대한 보수는 끊임없는 능욕 과 모욕, 책망과 욕설뿐이었다. 저 과부는 자기에게 잘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괴롭히고 학대하기 위하여 주교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고 큰 소리로 비난했다. 그래서 자기는 이제 고생 대신에 휴식이 아니라 휴식 대신에 고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입씨름을 쉴 새 없이 하다 가 염치없는 그 여자는 손찌검까지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오히 려 더욱 겸손하고 고분고분하게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저항함으로써 가 아니라 더욱 겸손하게 순종함으로써 그 미친 녀석을 이기는 법을 배웠 다. 이와 같이 그는 온갖 수모로 인하여 자극을 받으면서도 친절과 온유 함으로 욕하는 이의 발광을 달래보았다. 이런 수행으로 충분히 단련되어 자기가 원했던 인내의 완전한 덕에 도달하고 나서 위에서 말한 주교를 다 시 찾아갔다. 그는 주교에게 지혜로운 선택에 관하여 그리고 그 덕분에 좋은 훈련을 치를 수 있었던 일에 관하여 감사드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 제야 주교가 자기에게 가장 적당한 인내의 스승을 보냈다는 것이다. 자기 는 그 사람의 끊임없는 욕설을 통하여 경기장에서 쓰는 기름처럼 매일 튼 튼해져서 마음의 가장 높은 인내의 덕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주교님은 마침내 나에게 요양할 사람을 주셨네. 그 전 사람은 오히려 나 를 존경하고 나를 따르면서 편하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여성에 대해 이 만큼 말하고 말겠다. 이런 것을 되새김으로 우리는 감동할 뿐 아니라 부 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맹수처럼 암자의 울 속에 갇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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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면 우리 인내를 간직할 줄 모르지 않느냐?

XV 이제는 파프누티우스8) 아빠스에 관한 다른 실례를 밝히겠다. 그는 유명 하고 어디에서나 칭찬의 대상이 되는 스케테 광야에 살아왔으며 현재 그 곳의 사제이다. 그는 큰 열성으로 계속 고독함을 추구해서 다른 독수도자 들은 그에게 들소라는 별명을 지었다. 그것은 그가 언제나 혼자 사는 것을 어떤 타고난 동경처럼 즐겼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덕행과 은총으로 뛰 어나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훌륭한 분들도 그의 점잖은 태도와 변함없 는 항구성에 감탄했다. 그래서 파프누티우스의 나이는 어려도 그의 공덕 때문에 수도승들은 그를 어른으로 보고 원로와 같이 대해 주었다. 그래서 옛날에 성조 요셉을 미워하도록 형제들의 마음을 자극시킨 그 선망의 감정은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을 무서운 질투로 불타게 만들었다. 그는 파프누티우스의 아름다움을 모반 같은 흉한 때로 망치려고 다음과 같은 책략을 착상해 보았다. 파프누티우스가 주일에 성당에 가기 위해 암 자를 떠나 있는 시간을 이용해서 슬쩍 그의 암자에 들어가 그가 야자나무 잎사귀로 엮었던 멍석들 가운데 자기 책 한 권을 숨겨두었다. 그리고 자 기 짓을 잘 꾸몄다고 마음 놓고 자기도 깨끗하고 단순한 양심을 가진 사 람처럼 성당에 갔다. 그리고 모든 예절을 관례대로 거행한 다음 모든 형 제들 앞에서 파프누티우스 이전에 그 지역의 사제였던 이시도로 성인에 게 신고하여 자기 암자에서 누가 책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

8) 파프누티우스(Paphnutius)에 대해 가시아노의 셋째 담화 (코이노니아 선집 6권, 224 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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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을 듣고는 모든 형제들, 특히 사제의 마음은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에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그런 범죄에 대해 모두 대단히 놀랐다. 그런 일은 그 이전에도 그 광야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한 사람이 없었고 그 이후에 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일을 일러바친 사람은 모든 형제들을 성당에 머물러 있게 하고 그 동안에 몇 사람 뽑아서 모든 형제들의 암자 를 샅샅이 뒤지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이시도로 사제는 그 일을 세 사람에게 맡겼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침방을 돌다가 끝으로 파프누티 우스의 방에 가니 그 책을 음모자가 숨겨둔 대로 야자나무로 짠 멍석 가 운데서 발견했다. 조사단이 즉시 성당에 가서 그 책을 모든 이 앞에 내놓 았더니, 파프투티우스는 양심이 깨끗함에 대한 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도둑질을 시인하는 것처럼 철저히 사과하고 겸손하게 보속을 청했 다. 그는 이렇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둑질의 때를 말로써 씻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거짓말쟁이로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발견된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 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을 즉시 나간 파프누티우스는 낙심하기 보다도 하느님의 심판을 믿었다. 그는 끊임없이 눈물과 함께 기도하고 단 식을 세 배 더 엄격하게 지키면서 마음의 깊은 겸손으로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을 낮추었다. 약 두 주간 그는 영육으로 철저히 참회하여 안식일이나 새벽에 성당에 가서 영성체하지는 않고 오직 성당 입구에 엎드려 간절히 용서를 청했다. 그러나 숨은 모든 것을 목격하고 아시는 분이 그가 자신 을 괴롭히고 남이 자기를 욕하는 것을 그 이상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범죄를 꾸며내고 자기 자신의 것을 심술궂게 훔치면서 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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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교묘하게 손상시킨 자가 한 사람의 증인도 없이 저지른 것을 그 자신이 밝히게 되었다. 그것은 그 죄를 선동했던 마귀의 덕분이었다. 그 사람은 대단히 잔인한 악령에 사로잡혀 몰래 저지른 자기 책략을 모두 자 백했다. 이와 같이 고발과 속임수를 궁리한 그 동일한 자가 그것을 폭로 한 자가 되었다. 그런데 저 더러운 영은 그를 오랫동안 혹독하게 괴롭혔 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사를 받은 덕분에 귀신들에게 명령할 줄 아는 그 곳의 성인들이 기도해도 그는 해방되지 못했다. 심지어 이시도로 사제의 은총도 부족했다. 사실 그 사제가 주님의 너그러운 선물에 의하여 받은 은사가 뛰어나서 그분의 문턱에 도달하기 전에도 치유되지 않은 부마자 가 한 번도 업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분도 그 잔인하기 그지없는 귀신 을 쫓아낼 수 없었다. 그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젊은 파프누티우스에게 유 보해주셨다. 범인은 자기 암계의 대상이 되었던 바로 그 사람만의 기도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질투에 불타서 파프누티우스의 명예를 좀 깎아 내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그는 도리어 파프누티우스의 이름을 크게 불러서 자기 죄의 용서와 자기 징벌의 결말을 얻어야 했다. 이와 같이 파 프투티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앞날에 갖추게 될 성품을 예시했으며, 성숙 한 나이에 더욱 성장하게 될 그 완덕의 어떤 선(線)들을 이미 소년으로서 그어 놓았다. 따라서 우리가 높은 탑 같은 그분의 덕행에 도달하려고 한 다면 시작부터 그런 기초를 놓아야 한다.

XVI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위의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첫째, 그분의 변함 없고 굳센 마음을 바라보자. 우리를 공격하는 원수의 암계가 더 적으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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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평정과 인내를 더욱 열심히 추구해야한다. 둘째, 만일 우리가 우리 인 내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우리 내적 인간의 힘을 믿지 않고, 그 대신 에 암자의 봉쇄나 외딴 곳에 거주함이나 성인들과의 사귐이나 그 외에 우 리 밖에 있는 어떠한 것이라도 신뢰한다면 마귀의 유혹과 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꼭 확신해야 한다.“하느님 나라가 너희 안 에 있다”(루카 17,21)고 말씀하신 그분이 당신 힘으로 우리 마음을 보호 하며 굳세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중의 원수의(참조. 에페 2,2) 암 계를 함께 사는 사람의 도움으로 이기거나, 장소9)를 옮겨서 피하거나 단 단한 지붕10)을 덮어서 멀리할 수 있다고 믿지 말아야 한다. 파프누티우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그래도 유혹하는 자는 그 를 공격하기 위한 기회를 찾을 수 있었다. 담벼락을 쌓아 둔 것이나 광야 의 고독함이나 거기에 모인 그 많은 성인들의 공덕, 그 모든 것이 가장 악 한 그 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종은 대외적인 일에 의지하지 않고 어두운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분께 마음의 희망을 두었기 때문에 그 술책의 대단한 공격을 받아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기가 그만큼 큰 악행을 저지르게 한 자의 경우를 생각하라. 그는 고독을 누리 고 멀리 떨어진 집의 보호를 받고 사제 이시도로 아빠스와 다른 성인들과 의 친교 속에 살지 않았더냐? 그래도 마귀가 이룬 폭풍이 그를 모래 위에 만나서 그의 집에 몰아칠 뿐 아니라 그 집을 무너뜨렸다. 그러므로 우리 평정을 밖에서 찾지 말자. 그리고 남의 인내가 우리 부 족한 인내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는 것”(에페 2,2)처럼“사람의 원수는 바로 자기 집 식구들이다”(마태 ‐‐‐‐‐‐‐‐‐‐‐‐‐‐‐‐‐‐‐‐‐‐‐‐‐‐‐‐

9) 광야를 생각함.

10) 암자의 봉쇄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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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6). 사실 나에게 가장 친밀한 식구가 되는 나의 심정보다 더 무서운 원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깨어 있기만 하면 속에 있는 원수들은 우리 를 해칠 수 없다. 우리 식구들이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면 마음이 평화를 누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 똑똑히 생각해보자. 나 자신의 마음 이 불화 중에 있지 않는다면 아무리 악의를 품은 사람이라도 나를 해칠 수 없지 않느냐? 그래도 내가 다친다면 그것이 남이 공박한 탓이 아니라 나의 부족한 인내심의 탓이다. 그것은 많고 단단한 음식이 건강한 사람에 게 유익하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해롭다는 것과 비슷하다. 그 음식을 드는 사람의 병이 해치는 힘을 주지 않으면 그 음식을 먹어도 탈이 없다. 그래서 형제들 가운데 우리가 그런 시련을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로 평 정을 잃지 말고 세속 사람들 모양으로 악한 욕설을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 하라. 그리고 삐뚤어지고 흉악한 사람들이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 끼어 숨 어 산다는 일에 놀라지 말자. 우리가 이 세상의 타작마당에서 밟히고 부 서지는 동안에 깨끗한 밀속에 섞여 영원한 불에 넘길 지푸라기도 없을 수 없다. 그리고 천사들 가운데 악마, 사도들 가운데는 유다, 부제들 가운데 는 지극히 사악한 이단을 날조한 니콜라오스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참조. 욥 1,6; 마태 10,4; 사도 6,5; 묵시 2,15) 아주 악한 사람들이 성인들의 집단 속에 끼어 있음에 대해 놀라지 않을 것이다. 저 이단자 니콜라오스가 사도들이 봉사자로 뽑은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가 그 당시 제자들의 무리, 현재에 수도원에서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완전했던 그 제자들의 무리에 속했다는 것을 부 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저 광야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넘어 진 사람의 처참한 오욕을 생각하지 말자. 사실 그도 그 후에 그 오욕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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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많은 눈물을 쏟아서 씻었던 것이다. 그보다도 복된 파프누티우스의 표양을 눈앞에 두자. 수도자의 모양을 냄으로써 오랜 역사를 가진 시기의 악습11)이 더욱 악화된 저 자의 죄는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하겠 다. 그 대신에 우리는 파프누티우스의 겸손을 온 힘으로 따라 가자. 그 겸 손은 저 광야에서 누리는 고요함으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 가운데서 얻은 겸손이 고독 가운데서 발전하고 완숙된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기라는 병을 다른 악습보다 더 어렵게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병의 독약이 일단 몸에 들어가면 거의 나을 수 없 다. 이 역병에 대하여 예언자가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이제 내가 너 희 가운데 길들일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보내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예레 8,17). 그래서 예언자는 치명적인 독을 가진 도마뱀12)에 물린다는 것을 적절하게 시기에 비교한다. 사실 모든 악덕의 첫 번째 창시자와 으 뜸도 시기 때문에 망했고 시기 때문에 남을 망하게 했다. 마귀는 먼저 자 신을 망치고 그 다음에 시기의 대상이 된 인간을 멸망시켰다. 인간에게 죽음의 독약을 주입시키기 전에 그는 스스로 망한 것이다. 즉“악마의 시 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그를 모방한다”(지혜 2,24-25 라틴역)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 악덕의 병으로 망한 마귀가 속 죄로나 어떤 다른 약으로 치유될 수 없었던 것처럼 자원해서 그에게 물린 사람들도 뱀을 부릴 줄 아는 거룩한 요술사를 무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새우는 상대자의 죄가 아니라 그 행복 때문에 고통을 당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밝히기를 부끄럽게 생각하니 쓸모없고 맞 ‐‐‐‐‐‐‐‐‐‐‐‐‐‐‐‐‐‐‐‐‐‐‐‐‐‐‐‐

11) 마귀의 시기를 생각함(참조. 지혜 2,24-25). 12) 도마뱀 = basiliscus: 북아프리카에 산다는 지극히 강한 독을 가진 신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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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는 고발의 구실을 찾는다. 그 내용이 온전히 거짓이기 때문에 밝히 기 싫은 그 치명적인 병균이 골수에 숨어 있어 치료는 쓸모없게 된다. 그 일을 가장 지혜로운 그분이 적절하게 이렇게 표현했다.“뱀이 식식 소리 내지 않고 쏘면 뱀 부릴 줄 아는 사람도 소용이 없다”(집회 10,11 70인 역). 이것들만은 지혜로운 이들의 약이 고칠 수 없는 소리 없는 물림이다. 이 해독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는가? 달래면 더 거칠어지고 친절을 베풀면 더 부풀어지며 선물을 주면 화를 내는 것이다. 과연 솔로몬의 말 씀대로“질투를 누가 당해낼 수 있으랴?”(잠언 27,4) 한쪽에서 더 겸손 해지고 더욱 큰 인내를 가지며 더욱 풍요로운 선물을 주면 줄수록 시기하 는 사람이 더욱 크게 자극을 받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상대방의 멸망과 죽음 밖에 없다. 저 선조 야곱의 열한 아들의 경우를 보라. 그들의 질투는 죄 없는 동생의 큰 겸양으로도 진정될 수 없어서 그들은 성경말씀대로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질투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창세 37,4 70인역). 동생이 그렇게 겸손하게 달래도 그들의 질투는 가라앉지 않았다. 끝으로 그의 죽음을 원했던 형들은 그를 팔아먹음으로 그들의 질투를 겨우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시기질투는 모든 악습보다 더 해롭고 고치기 어렵다는 것이 틀림이 없다. 그 이유는 자기가 다른 악습을 끄는 바로 그 약으로 불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해를 당해 마음 상한 사람은 너그러운 보상을 받아 치유되는 법이고 또 모욕을 당해 분한 사람은 겸손하게 배상 을 제공할 때에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법이다. 그렇지만 네가 더 겸손하고 더 온순해지는 것을 느낄수록 더욱 마음 상한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겠 나? 탐욕 때문에 성내는 사람을 선물을 주어 진정시킬 수 있고 모욕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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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문 아빠스의 담화

에 마음 상하거나 복수를 좋아하는 사람을 칭찬으로 달랠 수는 있지만 시 기하는 사람은 남의 성공과 행복에 대하여만 화를 낸다. 그런데 시기하는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 일이 잘못되거나 소유를 잃거나 불행을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디 있겠나? 그래서 이 독뱀이 우리 안에 살아 있고 성령의 활동으로 생기를 얻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죽이지 않도록 우리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느 님의 도움을 꾸준히 청해야 한다.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나머지 뱀들의 독, 즉 육체적인 죄나 악습들은 쉽게 걸리기도 하지만 쉽게 덜어 버릴 수 도 있다. 그런 동물들은 육체의 상처 같은 흔적을 남기므로 몸이 위험할 정도로 부풀어도 하느님의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숙련된 요술가가 와서 적 합한 해독제를 투입하고 성경에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약으로 사용하면 그 무서운 독은 영혼의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 나 왕뱀13)이 쏟은 독과 같은 시기의 독기는 육체에서 상처를 느끼기 전에 종교와 신앙의 생명 자체를 끊어 버린다. 사실 시기하는 사람은 사람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한 다. 그는 형제의 행복밖에 탓하지 않으니 결국 인간의 잘못이 아니라 하 느님의 안배를 비난한다. 이것이야말로“위로 돋아난 쓴 뿌리”(참조. 히 브 12,15)다. 그것은 높이 돋아나서 인간에게 선한 것을 베풀어주시는 창조주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범죄로 당신께 잘못하는 사람들에게 왕뱀을 보내겠다고 위협하셔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아야 할 것이다. 물론 하느님은 시기를 일으키는 분이실 수는 없다. 그러 나 하느님이 좋은 것을 겸손한 이들에게 주시고 거만하고 악한 이들에게 ‐‐‐‐‐‐‐‐‐‐‐‐‐‐‐‐‐‐‐‐‐‐‐‐‐‐‐‐

13) 왕뱀: 주 12 와 같은 것.


요한 가시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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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시지 않던가?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바울로) 사도의 말씀에 따라 부도덕한 정신에 내맡길(참조. 로마 1,28) 사람들을 치고 없애는 것은 그분의 옳고 마땅한 판단이 될 것이다. 그것 은“그들은 신도 아닌 것들로 나를 질투하게 하고…… 나 또한 백성이 아 닌 것들로 그들을 질투하게 할 것이다”(신명 32,21 라틴역) 라는 말씀과 같다.

이런 담화로 복된 피아문은 회수도자들의 초등학교에서 더 높은 단계인 독수도자들의 신분으로 올라가려고 했던 우리의 갈망을 더욱 뜨겁게 불 타게 하였다. 그 뒤에 스케테에서 은둔생활에 대해 더 충분하게 알게 되 었지만 우리에게 처음으로 그 생활의 기초를 가르쳐준 분은 피아문 아빠 스이다.


제36집 발행일

2011년

발행인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편집인

진 토마스

왜관

편집위원

이장규 아타나시오

왜관

박정희 루나

대구

양숙희 이사악

서울

최미숙 마리 살루스

부산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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