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 제3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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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의 영성단편들

제 38 집

2013년·여름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표지 설명 : 성 베네딕도와 성녀 힐데가르트


편집 서언 ……………………………………………………………… 4

진 토마스

공동체 영성 …………………………………………………………… 7

허성석 로무알도

불평의 찬미 …………………………………………………………… 22

마이클 케이시, 손유택 예로니모 옮김

오늘날의 독신생활 - 통합적 접근……………………………………… 44

이레네 다발루스, 양숙희 이사악 옮김

그리스도교 묵상 - 겟세마니 트랍피스트 수도원에서의 담화 ……………… 74

존 메인, 허성준 가브리엘 옮김

현대 봉헌자와 관상기도 …………………………………………… 104

로렌스 프리만, 김한창 토마스 아퀴나스 옮김

하느님 현존 앞에 서기: 개인기도에 관한 가브리엘 붕에와의 대담 ………………… 126

김은영 호스티아 옮김

힐데가르트 시성에 관한 교황 베네딕도 16세 성하의 사도적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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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희 제노베파 옮김

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 166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천국의 사다리』 담화 4……………………………………………… 207

요한 클리마쿠스, 허성석 로무알도 역주

부활 강론 Ⅰ ………………………………………………………… 262

이니의 구에릭 아빠스, 장연옥 젬마 옮김


편집서언 금년은 사임의 해이다. 오딜리아 연합회에서도 올해 네 명의 아빠스들 이 사임했다. 새로운 직책을 맡은 예레미야 총재 아빠스는 네 수도원의 아빠스 선거를 감독하느라 바쁘다. 물론 온 세상을 놀라게 한 역사적인 사임은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경우이다. 이런 분들이 모두 사임하는 터 이니 『코이노니아』 편집장 역시 사임하고 싶다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본당 신부들은 70세로, 주교들은 75세로, 글을 다루고 묶는 일 을 하는 사람은 늦어도 80세에는 일에서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 다. 본인은 아직 건강은 좋은 편이지만 기억력과 집중력은 분명히 약해졌 고 기계 다루는 소질이 많이 부족하다. 후배들의 도움으로 컴퓨터 작업 을 하지만 원고가 많으면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 형제자매들의 번역문 을 감수하는 일은 계속할 수 있지만, 편집 책임은 더 젊은 분에게 맡기라 고 장상에게 곧 말하고 싶다. 이번 제38집을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많은 글이 준비되었다. 초기 1984년 제8집까지 『코이노니아』의 분량은 대체로 100쪽밖에 되지 않았 다. 지금처럼 풍성해진 것은 좋은 현상이지만 그만큼 편집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책이 두꺼워져 손에 쥐기는 불편하다. 현재 『코이노니아』를 일 년에 두 번 낼 정도로 자료가 모이지만 편집 작업이 두려운 것이 사실 이다. 이번에도 앞부분은 현대의 저자들이 쓴 수도승 영성에 대한 논문이 고, 뒷부분은 수도승 고전들이다. 그중 짚고 넘어가고 싶은 글은 기도에 관한 세 가지 글이다. 이번 집에 소개되는 존 메인(John Main, 19261982)은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하지만 베다 그리피스


5 (Bede Griffith)는 그분을 우리 시대 가장 좋은, 기도의 스승이라고 불렀 다. 존 신부는 영국 베네딕도회 일링(Ealing) 수도원 출신으로, 캐나다 몬트리올(Montreal)에 세운 분원에서 일반 신자들에게 관상적 기도를 지도하면서, 세계적인 기도운동을 창시하였다. 2006년에 대구 대교구 이 창영 신부가 그분의 책 한 권을 소개했다(『침묵으로 이끄는 말』, 분도출 판사). 이번에 우리는 그분 자신의 솔직한 증언과 그분 제자로서 현재 ‘그 리스도교 세계 묵 상 공 동체’( WC C M)를 이끄는 로렌스 프리만 (Laurence Freeman, 몬떼 올리베또 연합회 영국 수도원) 신부의 강의를 소개한다. 셋째로, 벨기에 쉐브토느(Chevetogne) 수도원 출신으로 스위 스 산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가브리엘 붕에(Gabriel Bunge)의 기도에 대한 회견을 실었다. 가브리엘 신부는 우리 시대에 에바그리우스 폰티쿠 스(+399)에 대하여 가장 깊이 연구한 분이다. 그는 단지 에바그리우스에 대해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했고, 그런 기도 분위기가 동방교회에 더 잘 보존되어 있기 에 2년 전 정교회로 개종하였다. 우리도 그만큼 철저하게 고대의 수도승 들처럼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도의 본질에 대하여 그의 글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 본인에게 특히 깊이 와 닿은 가브리 엘 신부의 말은 “하느님의 일이란 결국 인간이 내적으로 하느님 앞에 항 구하게 서 있음을 의미한다.”이다. 이번 집에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성녀 힐데가르트에 관한 공적 문헌을 소개한다. 예부터 베네딕도회에서 성녀로 공경해 온 힐데가르트는 작년 에 시성되어 보편교회에서도 성인으로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박사 로 선포되었다. 베네딕도회원들에게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요한 클리마쿠스와 요한 가시아노의 글에 대해서 새로 소개할 것은 없


6 지만, 구에릭 (Guerric) 아빠스에 대하여는 처음 듣는 독자들도 있을 것 이다. 베네딕도회 영성은 12세기에 시토회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신선한 꽃을 피웠다. 당시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베르나르도 성인은 널리 알려 져 있지만, 심오한 사고와 놀라운 웅변으로 사람들을 하느님과 깊은 기 도로 인도한 분이 그분만은 아니었다. 넓은 뜻으로 베르나르도의 제자라 고도 할 수 있는 영국의 엘레드(Aelred), 프랑스와 벨기에의 생티에리의 굴리엘모(William of St. Thiery)와 구에릭도 모든 베네딕도회원들이 알 아야 할 분들이다. 수정 트라피스트 수녀원의 젬마 수녀가 구에릭의 모 든 강론을 이미 번역했는데, 그 가운데 부활 강론 하나를 이번 집에 소개 한다. 그 글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에 성경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 잘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직책으로 바쁜 가운데 번역에 수고한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 다. 특히 봉헌회원 김한창 형제(왜관 수도원 봉헌회)와 손유택 형제(서울 수녀원 봉헌회)가 두 논문을 옮겨주셔서 참 기쁘게 생각한다. 그리고 깨 끗하게 인쇄한 분도출판사 직원들에게도 감사한다. 2013년 봄, 화순 수도원에서 진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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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1)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서론 2년 전에 이어 또다시 여러분들 공동체에 월피정 강의를 하게 되었습 니다. 이번에 제가 받은 주문은 ‘공동체 영성’이었습니다. 왜 이런 주제가 여전히 우리의 주 관심사인가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공동체 생활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함께 사는 삶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수도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공동체 영성이란 메뉴를 어떻게 요리해서 내어놓아야 고객만족이 될 지 조금 고민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맛있고 영양가가 있어야 요리사 입장 에서도 보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좀체 좋은 조리법 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잡탕 요리를 만들자고 생각했습니다. 때론 잡탕 요리가 기막힌 맛을 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영성, 이것은 베네딕도 영성의 중심요소 중 하나입니다. 베네딕 도 규칙서(이하 성규)는 함께 하느님을 찾는 회수도승들을 위한 삶의 지 침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어떻게 함께 조화와 평화를 이루며 살 수 있 는지 그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2) 우리가 ‘공동체 영성’이라고 할 때, 1) 이 글은 2012년 11월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했던 월피정 강의이다. 2) 참조. 허성석, “공동체 생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기술 -”: 『코이노 니아』, 제37집(2012년 여름), 7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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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

그것은 함께 조화와 평화를 이루며 하느님을 찾는 방법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 방법과 관련한 몇 가지 질문과 제 나름의 대 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왜 함께 사는가? 이 물음은 공동체 생활의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사는 이 유를 크게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 하나이기 때문에 공동체 생활의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unum in Christo)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란 한 몸을 뜻하는데 그리스도는 그 몸 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지체들입니다. 지체들이 머리를 중심으로 모여 모 든 것을 공유하며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가 좋은 모델입니다(사도 2,42-47; 4,3237).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기도와 봉사에 전념하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나눔과 친교의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 다. 이것이 초기 공동체 생활의 이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2) 하느님이 우리 각자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사는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 각자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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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내가 좋아서 함께 살 려고 선택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처럼 그들 각자도 하느님께서 선택하시 어 불러주셨기에 지금 이곳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이 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사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신앙 안에 한 가족 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 공동체입니다. 만일 내가 원하는 사람만을 선택해서 함께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 공동 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서로 취향이 맞는 사람끼리 생활하는 ‘끼리 끼리 집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 을 받은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와 일치를 추구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입니다.

3) 같은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서로 다른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함께 살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멀어졌던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4) 채워야 할 여백이 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는 우리 각자에게는 채워야 할 여백 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 리가 완전하다면 함께 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서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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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

부족을 채워가며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결핍 존재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공 동체 생활은 바로 이것을 전제합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란 없습니 다. 누구나 나름의 여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여백은 나와는 다른 사람 들이 채워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공동체 생활의 의미일 것입니다.

2. 함께 사는 것이 왜 어려운가? 공동체 생활은 서로의 부족함을 매워줌으로써 점차 완전을 향해 나아 가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디딤돌이라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공동체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이 아니라 늑대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즉,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로 느껴질 때도 종종 있습니다. 이것 은 우리 모두의 경험이 아닐까 합니다. 그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1)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보다도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 로 어떤 차이가 없다면 갈등도 반목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 로 성장배경도 성격도 취향도 관점도 생각도 생활방식도 다릅니다. 이러 한 다름 혹은 차이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 게 되고 늘 “저 사람은 왜 저런가?”라는 의문을 입에 달고 다니게 됩니 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 보니 자칫 잘못하 면 생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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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양성 안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나의 고유성입니다. 나 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양성이기에 잘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습 니다. 나의 고유성이 침해된다고 느낄 때 우리는 힘들어 합니다. 이처럼 각자의 고유성과 차이점이 우리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오고 긴장과 갈등 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차이는 오히려 우리를 풍요롭게 해줍니다.

2) 내가 강하기 때문에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척도도 판단기준도 ‘나’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생각과 태도 때문에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애(philautia)로부터 나옵니다. 자기애는 모든 어려움의 근원이고 우리가 묶여 있는 사슬입니다. 자기애가 강할수 록 공동체 생활은 더 어려워지고, 약할수록 더 쉬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나’(거짓 자아)로부터, 곧 ‘자기애’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3. 함께 살기 위해 전제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전제되어 야 합니다.

1) 동일한 지향점 먼저, 구성원 모두가 바라보는 곳이 같아야 합니다. 서로가 다른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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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본다면 참된 공동체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일한 이 상과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공유 비전(vision)이 있어야 합니 다. 지향점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는 곳은 공동체가 아니라 기숙사에 불과하며 모래알 집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산다고 하면서도 동상이몽식으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각기 다른 나름의 인간적, 세속적 이상과 목표를 지향하며 함께 숙식하며 살아갈 수도 있지만, 이것은 결코 참된 공동체 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2) 동일한 수단 공동체 생활을 위한 두 번째 전제는 동일한 수단입니다. 같은 이상과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취하는 수단도 동일해야 합니다. 즉, 동일한 규칙 이나 회헌, 관례서가 있어야 하며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 론 삶의 동일한 이상과 목표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길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이 다양한 영성을 낳고 그에 따 른 고유한 삶의 양식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영성을 살 수 없 고 온갖 삶의 양식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 다. 우리가 베네딕도회 수도자라면, 우리는 성규에서 베네딕도가 제시하 는 길, 즉 베네딕도회다운 수단을 선택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베네딕 도회원이면서 예수회나 프란치스코회 등 다른 수도회의 영성을 사는 것 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베네딕도회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는 베네딕도회 다운 수단을 받아들이고 베네딕도회 영성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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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일한 중심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는 동일한 구심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 어 구심점은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대리한다고 여겨지는 아빠스, 곧 장상 입니다. 공동체 각 구성원이 서로 다른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즉 그리스 도가 아닌 다른 것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가지고 있거나 각기 다른 장상 을 모시고 있다면, 파벌과 분열로 공동체 생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파벌입 니다. ‘내 사람’, ‘내 편’ 만드는 분파주의는 공동체 안에 분열과 대립을 조 장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또 그분을 대리하는 장상을 중 심으로 결속하고 일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그리 쉽 지는 않겠지만 참된 공동체 생활을 위한 전제입니다.

4) 자기포기 함께 살기 위해서는 또한 자기포기가 전제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수 도공동체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함께 하느님을 찾는 삶입니 다. 베네딕도 성인은 착한 일의 도구들에 대해 말하는 성규 제4장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버려라.”(성규 4,10) 하고 권고하십 니다. 자아포기는 곧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기를 포기 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도 참된 공동체 생활도 어렵습니다. 자 기포기는 장상에 대한 순종 그리고 함께 사는 형제들에 대한 순종과 양 보로써 구체화됩니다. 공동체 생활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각자의 개성이 나 취향에 대한 포기를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포기는 결코 개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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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성에 대한 말살이나 억압이 아니라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한 자발적 인 양보입니다.

5) 다름의 인정과 수용 공동체 생활에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서로의 다름 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공동체 생활 은 늘 갈등과 반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계속 삐걱거리게 됩니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수용 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위한 필수조건 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느님에게서 고유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내가 좋은 선물 을 받았듯이 다른 사람도 내게 없는 좋은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름의 자존감을 갖게 되고 더 이상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존감이 없을 때 우리는 남과 끊 임없는 비교와 경쟁,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각 자 자존감을 갖고 자기가 받은 선물에 감사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 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4. 우리는 과제는 무엇인가? 이제 우리가 보다 이상적인 공동체, 좀 더 나은 공동체 생활로 나아가 기 위해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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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양성 안에서 일치 이 문제는 다양한 차이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로 일치되어 살아가느냐라는 문제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는 각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부정이나 말살이 아닙니다. 일치는 획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개 인의 고유성만 주장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다 보면 개인주의가 팽배 해져 공동체의 일치는 어렵습니다. 고유성과 공동체성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각각의 고유성은 존 중하되 그것은 공동체의 공유 비전과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 고유성은 참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 고유성은 거 짓된 자아의 투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거짓 나’(僞我)로부터 자유로워 질수록 ‘참 나’(眞我)를 향해 진일보할 것입니다.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짧은 공동체 생활을 체험한 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각자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참 된 공동체 생활은 불가능하다.” 참으로 공동체 생활에 대한 깊은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각자의 이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바로 ‘거짓 나’ 의 이상으로부터 자유가 아닐까 합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우리는 ‘나의 이상’이 아닌 ‘우리의 이상’을 추구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때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2) 함께와 홀로의 조화 공동체 생활에서 ‘함께’와 ‘홀로’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홀로 있는 때를 마련할 필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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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함께 있음’, 이것은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친교의 때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홀로 있음’은 고독과 침묵의 때입니다. 이것이 필요 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함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사람들 로부터 물러나 고독과 침묵 중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람들 그리고 하느 님과 동시에 있기는 참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낄 수 있지만 홀로 있는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전적으로 하느 님 안에 몰입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두 순간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의 필요에 봉사하셨지만, 어떤 결정적 결단의 순간이라든지 유혹의 때 또는 재충전이 필요한 때에 는 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 홀로의 시간을 마련하셨던 것입 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시며 그분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사람들에게 로 되돌아가셨습니다. 고독과 침묵의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공 허함을 느낄 것입니다. 늘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친교를 나누는 것 같지 만 그의 마음은 부평초처럼 늘 떠다닙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에 늘 뿌리 를 두고 거기서 자양분을 끌어 올릴 때, 우리가 맺게 될 친교의 열매도 튼실할 것입니다. ‘홀로 있음’은 우리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 는 시간이요, ‘함께 있음’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자양분으로 열매를 맺는 시간입니다.

3) 공동체 의식 함양 보다 나은 공동체 생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 니다. 지금 사는 공동체와 형제들이 ‘내 집’, ‘내 가족’이라는 의식이 없다 면, 우리는 어떤 주인의식도 책임의식도 없이 늘 객(客)처럼 수동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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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살 것입니다. 공동체 의식이 있을 때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갖고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을 통한 점진적 과정입니다. 베네딕도회 삶에서 공동체 의식을 느끼고 함양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 은 공동기도와 공동식사 때입니다. 베네딕도는 잘못한 형제를 파문할 때 공동식사와 공동기도에서 제외합니다(성규 24-25장). 그만큼 베네딕도 에게 있어 공동기도와 공동식사는 공동체 생활에 본질적이고 중요한 두 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베네딕도회원에게는 공동기도와 공동식사는 특 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베네딕도회 영성은 공동체 영성이기에, 정해진 시간에 함께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눕니 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바로 한마음과 한 몸이 라는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줍니다. 공동기도와 공동식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해 나가게 됩니다. 이 외에도 공동휴게나 공동실습과 같이 공동체 생활에서 함께하는 다 른 시간들 역시 공동체 의식을 키워주는 중요한 수단들입니다. 비록 함께 하는 것이 성가시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현존하 는 것 그 자체도 애덕이고 자기를 비우는 수행일 것입니다.

4) 상향 평준화 공동체는 공동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눕니다. 동 일한 규칙과 관례, 생활규범, 일과표, 수도복, 같은 음식 등을 나눕니다. 심지어 기쁨과 슬픔도 나눕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과 관점, 의식수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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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

이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또 공동체 장상이나 양성 담당자들은 누가 특 출나게 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튀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시간이 감에 따라 정해진 틀에 갇히게 되고, 그 틀을 벗어나는 것 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소위 평준화되어 갑니다. 평준화된다는 것 자체는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향 평준화 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잘못하면, 인간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수 준이 점차 낮아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퇴보가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차원으로 진행될 때가 바로 하향 평준화되는 것이 라 하겠습니다. 공동체가 하향 평준화되어 간다면 그 공동체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상향 평준화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는 앞서가는 사람도 있고 뒤에 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두가 한 배를 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의 다음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두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 72,12)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한 배를 타고 함께 목적지를 향해 항해를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뒤처지는 사람에게 기준을 맞추고 앞서가는 사 람을 끌어 당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약한 이들은 기다 려주고 격려하면서 앞으로 나가도록 했고, 강한 이들은 앞으로 더 나아 가도록 고무시키십니다(성규 34,3-4; 36,8-9; 48,24; 64,19). 특히 아빠스 에게 하는 다음 권고가 좋은 예입니다. “강한 이는 더하기를 갈망하게 하 고 약한 이는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 64,19) 이것이 베네딕도 성 인의 매력이자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다투어 덕에 나아 가고자 노력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위해 하느님 찾는 일에 전념할 때, 그 공동체는 점차 상향 평준화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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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지향가치의 전환 우리는 세례와 수도서원을 통해 두 번이나 하느님께 돌아섰습니다. 첫 번째 돌아섬이 복음정신으로 돌아섬이라면, 두 번째 돌아섬은 수도정신 으로 돌아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돌아섬, 곧 회개란 우리 머리를 하느님 을 향해 완전히 180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 인간에서 새 인간으 로 거듭나는 것이며, 옛 삶의 방식에서 새 삶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옛 인간과 옛 삶을 지배했던 것이 세속적인 가치들이었다면, 새 인간과 새 삶을 지배하는 것은 복음적 가치, 수도적 가치들입니다. 세 례와 수도서원은 바로 세속적 가치에서 복음적 가치와 수도적 가치로 돌 아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포기했던 세속적 가치들을 다시 추 구할 수 있습니다. 지향가치가 복음적 가치와 수도적 가치로 변화되지 않아 여전히 우리 삶과 인격에 복음정신과 수도정신이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 생활 안에 세속적 가치들이 팽배하고 그러한 가치들을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나곤 합니다. 예컨대, 편의주의, 개인주의, 능력 위주의 비교와 평가, 윗자리 선호, 과도한 학구열,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걱정, 균형을 잃은 식습관, 개인적 이상 실현을 위한 노력, 과도한 취미생활과 여가활용 등입니다. 세속적 가치는 ‘나’를 지향하는 반면, 복음적 가치는 ‘너’를 지향하며 가난, 순종, 낮아짐, 자기희생 등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눈으 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역설적 가치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하시 는 길은 낮아짐으로써 올라가고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얻게 되는 길입니 다. 수도공동체 안에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낮추고 끝자리를 선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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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

는 모습,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의탁하는 삶의 자세, 내 뜻이 아닌 하 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모습은 바로 복음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얼마나 남 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도공동체 안에 복음적 가치나 수도적 가치보 다 인간적, 세속적 가치가 더 팽배할 때 참된 공동체 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나은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세속적 가치에서 복음적 가치와 수도적 가치로 지속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결론 지금까지 공동체 생활의 이유,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 공동체 생활의 전제, 그리고 보다 나은 공동체 생활을 위한 과제, 이 네 가지 물음의 대 답을 통해 공동체 영성, 즉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 니다. 이 모든 논의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는 우 리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그리스 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로 부르심을 받았고, 각 지체는 따로 떨어 져서는 불완전하고, 함께할 때 비로소 완전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하지 만 각 지체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이 초래되는데, 이러한 다양성 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로부터 자유가 필요합 니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같은 이상과 목표, 수단을 공유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양보하려는 자세가 있을 때, 공동체 생활은 가능합니다. 끝으로 보다 나은 공동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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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위해서는 개인의 고유성과 공동체성의 조화를 통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 하느님과 홀로 하는 고독 그리고 형제들과 함께하 는 친교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 지향가치의 전환, 즉 세속적 가 치에서 복음적, 수도적 가치로 전환을 통해 복음정신과 수도정신으로 무장하려는 노력, 끊임없이 공동체 의식을 함양해 나가려는 노력, 처진 이는 끌어주고 앞선 이는 더 나아가도록 북돋음으로써 공동체를 상향 평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일 때 공동체 생활 은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갈 것입니다. 이상으로 공동체 영성과 관련한 제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어 보았습니 다. 지금까지 경청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여러분 공동체가 그리스 도 안에 일치하여 기쁘고 신명난 공동체로 더욱 발전해 가기를 기원합니 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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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의 찬미1) 마이클 케이시2) 손유택 예로니모 옮김3)

옛날에 언젠가 한 동료가, 불평을 하면 “베네딕도 성인이 무덤에서라도 나오실 거야.”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불평은 성인이 엄하게 나무랐던 악습 이다. 그런데 어떻게 불평을 칭찬까지 할 수 있을까? 베네딕도 성인의 『수 도 규칙』(이하 RB)에서 상스러운 농담(scurrilitas: RB 6,8; 43,2; 49,7)이 나 큰 웃음과 마찬가지로 불평은 베네딕도 성인이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았던 품행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인이 불평을 혐오했음에도 불 구하고 우리 일상생활의 경험으로 볼 때, 성인의 이 금기는 웃음의 금기 보다 더 큰 효과를 얻지 못한 것 같다.4)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그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처럼, 여기에서도 비난의 대상인 불평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신중한 자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수도원에서 불평이 “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 켜 지옥으로 이끄는 쓰고 나쁜 열정”(RB 72,1)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 로는 공동체 생활의 불가피한 결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즉, 불평은 그 자 체로 별 해가 없는 동시에, 불평하는 구성원 개인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 1) Michael Casey, “In Praise of Murmuring”: Tjurunga: an Australasian Benedictine review, vol. 80(2011. 5), Sydney : Benedictine Union of Australasian. 2) 글쓴이는 타라와라 수도원의 수도승이다. 3)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 봉헌회원. 4) 여기서 글쓴이의 관찰은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를 따르는 남성 수도공동체에 국한된다. 다른 공동체에 대해서는 독자들 나름의 판단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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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수도원 전체의 활력을 저해하는, 어떤 심적 불안이 유익하게 표출된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불평이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떤 병적 징후를 드러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병적인 어떤 것이 치유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고의 출발점은 놀랍게도 베네딕도 성인이 RB 41,5에서 “정 당한 불평”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당한 불평’의 미묘한 의미를 음미하려면, 먼저 베네딕도 성인이 불평에 관해서 언급하 고 있는 다른 구절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텍스트 베네딕도 성인은 RB의 아래 구절들에서 불평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RB 4, 39 = RM 5, 445) “불평쟁이가 되지 말라.” “착한 일의 도구들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RB 4장에 나오는 이 구 절은 RM의 구절과 동일하다. 이 구절은 “주정뱅이가 되지 말라.”, “과식 가가 되지 말라.”, “잠꾸러기가 되지 말라.”, “게으름뱅이가 되지 말라.” 하 는 구절들 뒤에 오고, “험담꾼이 되지 말라.” 하는 구절에 앞서 있다. 그 런데 여기서 베네딕도 성인은 불평하지 말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 지는 않다. 5) 이 번역문에서 약자 RB는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Regula Benedicti ) 그리고 RM은 스 승의 규칙서(Regula Magistri) 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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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5, 14 = RM 7, 67 “이러한 순명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에게 감미롭게 되는 것 은, 명령받은 바를 겁내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무관심하지 않고, 불평이 나 싫다는 대꾸 없이 실행할 때이다.”6) 이 구절 역시 RM의 구절과 동일하다. 이 구절은 주어진 명령을 실행하 는 데 수반되는 여러 가지 자세들을 언명하고 있다. RM과 RB는 다 같이 군대식의 즉각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있지만, 종종 명령이 즉시 이행되지 못하는 여러 이유들이 있을 수도 있다. 즉각적인 실행을 요구하는 이유는 아빠스가 지시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에 근거한 다.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은 “아빠스는 주의 계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르 치거나 정하거나 명해서는 안”(RB 2,4) 되기 때문이다. 명령이 하느님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누구나 순명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 빠스의 무지, 편견, 자의에서 나온 것이라면 명령을 받은 입장에서는 갈 등을 느끼거나 큰 인내로써 순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RM보다는 RB에 서 이것을 더 우려하여 베네딕도 성인은 이를 별도로 다루고 있는데, 그 한 예가 68장 “어떤 형제가 불가능한 일을 명령받았다면”이다. RB 5,17-19 > RM 7,71-74 “만일 제자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순명하든지 또는 입으로 불평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마음속으로도 불평한다면 비록 명령을 완수했다 하더 라도, 불평하는 그의 속마음을 이미 들여다보시는 하느님께는 받아들여 6) 순종의 행위는 명령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그리고 양쪽 모두에게 ‘감미로운’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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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 또 이런 일에는 아무런 은총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며, 만일 보속하여 고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불평하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벌을 받 게 될 것이다.”

이 엄격한 구절은 명령에 대한 외적 반항보다는 내적 반항을 다루고 있다. RB의 이 구절은 RM의 구절과 흡사하지만 RM의 구절보다 짧다. 그리고 RM에는 명령을 받은 자가 아빠스는 물론이고 하느님께 불평하 는 내용이 있지만 RB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베네딕도 성인은 또 RM의 ‘보상’(reward) 대신 ‘은총’(grace)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위 구절은, RB 72장의 첫머리에 명시되어 있듯이, 주관적 성향에 따라 외적 선행이 이 루어진다는 베네딕도 성인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만일 그런 추측이 맞는다면 명령은, 그것을 받는 이에게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주어 그가 쉽사리 순종하도록, 내려져야 마땅하다. 혹독한 명령 은 십중팔구 상대방을 비뚤게 하여 명령받은 일을 실행한다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불평하게 될 것이다. “설탕 한 숟갈에 약이 잘 넘어 간다.” 라는 속담처럼, 불평은 재치 있는 말로써 예방할 수 있다. RB 23,1-2 “만일 어떤 형제가 반항하거나 불순종하거나 교만하거나 불평하거나 혹은 성규의 어떤 점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거나 자기 장로들의 명령 을 멸시하거든, 우리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의 장로들이 한두 번 그를 남 몰래 훈계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장로들이 어떤 형제를 훈계해야 하는 원인들을 나열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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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 형제의 어떤 특정한 잘못된 행위가 아니라 그의 반항적 태도를 염 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불평은 수도원 공동체의 명령에 대한 부정적 반응 의 한 형태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런 태도가 시정되지 않는다면 당사자 가 결국은 공동체로부터 퇴출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불평은 수도원 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게 만드는 심각한 내적 혼란의 명백한 외적 징후이 다. 베네딕도 성인은 다음 장에서 이러한 병증을 다루는 방법을 상술한 다. 어떤 방법도 효과가 없을 때 성인은 반항적인 수사의 추방을 명한다. RB 34,6-7 “무엇보다 먼저, 어떠한 이유로든지, 어떤 말이나 혹은 표시로라도 불 평의 악을 드러내지 말 것이며, 만일 이런 자가 있거든 더욱 엄한 벌을 내 릴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공동체에서 물자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 는 것이 불만과 불평의 잠재적 원인이라고 이해한다. 그는 공동체의 평화 가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적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애석 하게 생각하지 말 것”(RB 34,3)이라고 권한다. 위 구절에서 “드러내지 말 것”이라고 한 것은 내적 불평이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하 지만 내적 불평이 어떤 외적 표현을 통해서 표면으로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 불공정을 인식하게 된 사람은 쉽사리 진정될 수 없는 내적 혼란 을 겪게 된다. 가장 모범적인 수사라 할지라도 이런 혼란을 인내하기 위 하여 종종 갈등을 겪어야 할 것이다.7) 7) 이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주석한 바와 같다. 참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 (이하 SC), 29,5; Sancti Bernardi Opera (이하 SBOp),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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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35,12-13 “식사 한 시간 전에 주간 봉사자들은 정해진 분량의 음식 이외에 한 잔 의 음료와 빵을 미리 받아 (먹어서), 식사시간 동안 불평이나 지나친 노 고 없이 자기 형제들을 섬기게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특정 임무를 할당받은 이들이 불필요한 노고를 겪지 않도록 생활 제도가 잘 배정돼야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베네딕도 성인은 봉사자가 영성체와 식사 시간 사이에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RM의 지시(RM 21,8-10)를 뒤엎고 있다. 공동체에 서 불평을 해소하는 최선의 방법은 적절한 조치로써 불평을 사전에 예 방하는 것이다. 극기로써 맡은 일에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고 하면서, 봉 사자들이 부당한 고통을 겪도록 방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다. 그와 같은 부당한 처우는 지나친 엄격함이나 무관심 혹은 측은지심 의 결여 때문이다. RB 40,8-9 “만일 지방의 형편에 따라, 위에 기록한 (술의) 분량을 구할 수 없고, 훨 씬 적거나 혹은 전혀 구할 수 없는 경우에라도, 이런 지방에 거주하는 사 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할 것이며, 불평하지 말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점 을 권하는 바이니, 불평이 없도록 할 것이다.”

이 경우 불평은 수도원의 관리나 물자의 배분에 대한 것이 아니고 불 가피한 상황에 대한 것이다. 가난한 수도원도 있고 물자가 풍족한 수도 원도 있다. 상황에 대한 불평은 아빠스나 규칙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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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이 된다. 이와 같은 반항적 태도는, 매일의 초대송(시편 94편)에서 드 러나는 것처럼, 광야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불평을 연상시킨다. 이런 불평 은 음식이나 음료의 질에 대한 불평보다 더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RB. 41,5 “이처럼 모든 일을 조절하고 배치하여, 영혼들이 구원받게 하고 형제 들이 정당한 불평 없이 일하도록 할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의 이상적 공동체는 유토피아와 유사하다. 아빠스는 영 적 우선순위를 유지하면서 필요불가결한 제한을 두어도, 그 제한들이 타당하고 온건하며 합리적이라는 것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 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 그러나 결점 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RB 머리말 45-47) 있을 수도 있다. 아빠스가 영적 가치와 인간적 가치 사이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불평이 생길 것이다. 베네딕도 성 인이 그와 같은 불평을 ‘정당하다’(absque iusta murmuratione)8)고 간주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RB 53,18 “그들이 아무 불평 없이 봉사하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 보조원 들을 줄 것이다.” 8) 필경사들은 ‘정당한 불평’이라는 개념에 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필사본에는 iusta를 ulla로 바꾸어 ‘정당한 불평’을 ‘불평 없는’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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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불평을 야기하는 고난의 사전 예방 조치에 대하여 언급하는 또 다른 예이다. 그런데 ‘보조원’으로 번역한 ‘solacium’(이 단어는 직역하 면 ‘위안’, ‘위로’, ‘경감’이다)은 주관적 지원과 객관적 도움을 포함하는 뜻 을 가지므로, 보조원을 준다는 것은 정신적 보조와 물리적 보조를 모두 함의한다. 사람에 따라 능력도 다양한 법이다. 어떤 일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같은 일에 대하여 식은 죽 먹기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빠스가 일을 할당할 때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RB 55,7 “수도승들은 이 모든 것들의 색깔이나 품질에 대하여 투정하지 말 것 이다.”

이 구절에서는 다른 동사를 사용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문 제를 다루고 있다. 가령 아빠스는 옷이 수도원의 원칙에 부합되는 것인 지 그리고 수도승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지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 한다. 반면에 수도승들은 주어진 옷이 모양이 없다거나 좋아 보이지 않 는다고 해서 말썽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처럼 RB의 구절들을 정독한 독자들은 베네딕도 성인이 알려진 만 큼 정말로 불평을 엄하게 나무라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성인 은 불평이 공동체 생활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 명하지만, 모든 불평은 당사자의 잘못이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베네딕 도 성인은 공동체의 일을 수행하는 데에는 성자의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말하는 겸손의 제4단계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바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승들의 불안감을 조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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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무질서를 제거함으로써 불평을 예방하는 일이야말로 아빠스와 수도 원 관리자들의 과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2. 불평의 원인 곰곰이 생각해보면 불평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또 각각의 불평은 나 름대로 도덕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다. 수도원의 관리 자들은 불평을 부추기는 상황에 따라 개별적이거나 일반적인 불평 사례 들을 세분화한 다음, 그 사례들에 대하여 대응할 필요가 있다.

(1) 권리 의식 오늘날 수도원에 입회하는 많은 사람들이 강한 권리 의식을 지니고 있 다. 옛날보다 작고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의 입회자들은 나눈다거나 없이 지내는 경험을 그다지 겪지 않고 성장하였다. 집안 식구들이 그들이 필 요한 것이나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를 기대했던 것처럼, 그들은 수도원 공동체가 자기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 상이다. 하지만 큰 단체에 적응한다는 것은 종종 자신의 의지를 공동의 의지에 종속시켜야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받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좋아할 입회자는 없을 것이며, 몇몇 입회자들 은 걸핏하면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RB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수도승들은 특히 음식, 음료, 살림살이, 그리고 작업 배당 등에 대하여 불평을 많이 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사정 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적은 소유에 익숙했던 과거의 세대들은 보다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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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생활 관습에 적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권이 높이 평가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자기 삶의 여러 요소들이 타인에 의해 선택된다면 그것은 모욕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불만을 품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권리는 나날이 마시는 포도주의 양이나 여가를 누 릴 자유 등과 같이 사소한 것이거나 전문적인 공부를 하도록 허용해주 는 것처럼 복잡한 것일 수도 있다.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그렇지 않 은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대감이 무너졌다는 사실 자체가 불 평의 온상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개개인의 권리 의식이 지나쳐서 그것이 수도원의 이상 과 불합치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수도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 들은 그들이 입회한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수도회의 방식에 따라 생활하기를 기대하는데, 이는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마찬가지로 베네딕도회에서 서원한 사람들은 공동체가 그들이 충실하게 서약을 이 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를 기대하는데, 이 역시 그들의 당연한 권리 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생활양식이 변화됨으로써 주변화되 고 소외된 많은 수사들이 불평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불평에는 항상 객관적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불평의 문화”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불평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이를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RB 35,13; 41,5; 53,18).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이 여기에 딱 들어맞 는다. 모든 불평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지혜로운 처사이다. 불평의 표면적인 내용이 사소하고, 부적절하고,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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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할지라도 그 내면의 역학은 조사될 필요가 있다. 어떤 수도승은 수도 원 생활의 다른 분야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할 때 음식의 질을 탓한다. 반면에 수도원에서 수행한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인정받고 지원받는 사람은 불편한 공동체 생활에도 개의치 않고 영적 수련에서 열매를 거 두며, 험한 길도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음식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은 아마도 다른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일 것이다. 장상이 작 은 불평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보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 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관리자들이 작은 어려움에 공감하며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누가 그들에게 더 큰 문제를 털어놓겠는가? 근거 없는 불평도 객관적 근거가 있는 불평만큼이나 괴롭다. 오세르 의 조프리(Geoffrey of Auxerre) 아빠스는 성 베르나르도의 말을 인용 한다. “감정이 상한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마 음의 상처가 사소하거나 근거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사자는 큰 고통 을 겪은 것처럼 슬퍼한다.”9) 또 성 베르나르도는 실제로 상처를 입었거 나 상처를 입었다고 상상하는 사람의 정신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 는 마음속으로 불평하고 온통 분노와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입은 상처를 마음속으로 거듭해서 되새기 는 것뿐이다. 그는 기도도 독서도 할 수 없고, 거룩하고 영적인 어떤 것 도 성찰할 수 없다.”10) 비현실적인 기대감이 좌절될 때에도 역시 실망 하게 되는 것이다.

9) Patrologia Latina (이하 PL), 185,580c. 10) SC 29,4; SBOp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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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기력감 한 사람이나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전횡되거나 계급조직적인 공동체 는 지배집단 이외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력감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무 기력감은 분노를 낳고 주변화 의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기력의 상대적 개념은 개입과 참여이다. 하지만 모든 결정이 민주적으로 이뤄질 수도 없 고, 모든 이가 집행권을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만난 대 부분의 수사들과 수녀들은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문 을 받으면 간단히 해결되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공동체에서 결정되고 수행되는 모든 일들이 다 그들의 개인적 바람과 부 합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그들 의 바람을 말하고, 그것이 항상 바라는 대로 안되어도, 그것을 들어주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영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결정들이 합법적인 요건, 윤리적 기준 또는 영적 원칙을 내포하기는커녕, 재량권을 가진 사람들의 사적 기호에 따라 내려지는 현실적 판단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판단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사적인 이유나 양심 때문 에 그들의 결정에 분개할 것이다. 수사들이 어떤 제안이나 비판을 하거 나 관심사를 솔직하게 말할 때 공격받거나 처벌받지 않게 하는 구조적 장치가 없다면, 그들이 참여의식과 책임감을 갖고 공동체 운영에 동참하 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도원에서 가장 많은 불평의 원인은 재량권자들이 시간을 내어 구성원들에게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앰브로스 사우디(Ambrose Southey) 아빠스가 1985년 시토회 수 녀원장 총회에서 수녀원장과 달리 수도원장은 수사들의 삶에 대하여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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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11) 오늘날 회사의 경영진은 사원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라는 충고를 받 는다. 이것은 사원들로부터 최선의 노력을 이끌어내는 수단이자 재능 있 는 사원들을 붙잡아 두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소개된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면 상호신뢰가 조성되고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12) 자신 의 말을 경청해 준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관심사에 타인의 주목을 끌기 위하여 불평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재량권자들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귀가 열린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려 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긍정적 반 응을 보여줄 사람들을 본능적으로 알아보게 마련이고, 자신들의 말에 공감하고 경청하는 사람들 덕분에 무시당한 데서 오는 감정을 누그러뜨 리게 되어, 결국에 가서는 습관적으로 불평을 일삼게 된다. 불평을 들어 주는 친절한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불평자들의 독소 요인들을 걸러 내 주고자 희망하겠지만, 오히려 불평자들에게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 고 있다는 확신감을 부추기기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3) 사기 저하 불평은 불안감을 배출하고 타인의 동의를 구함으로써 부정적 의식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한 사람이나 소수의 사람들이 불만을 털어놓지만, 11) “아빠스들은 대체로 수사들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그들은 수도원에서 일 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도 않고 때로는 한심스러울 정도로 수사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아빠스들은 수사들과 정기적 면담을 갖지 않는다.” 12) 참조. Michael Casey, “Building Trust”: The Art of Winning Souls , Collegeville: Christian Publication,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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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그 불만의 원인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영적으 로 혹은 인내심으로 극복한다. 불평은 공동체의 기능장애를 나타내는 표징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불평의 동기가 상징적이거나 그 내용과 중요성이 일치하지 않아서, 불평의 진의가 종종 뒤늦게 파악되기도 한다 는 것이다. 가령 소음에 대한 불평은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음 자체가 아 니라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불평일 수가 있다. 이 경우 소 음은 보다 큰 고민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모든 불평이 다 말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수동적 공격성을 통해서도 불평의 언동과 같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실제로 수동적 공격성을 드 러내는 많은 행동들이 사실은 소외감을 나타내는 방식이며 그것들이 말 로 표현될 때 불평이 된다. 공동체 회의는 공동체의 사기 수준을 드러내 는 좋은 지표가 된다. 건전한 토의를 거쳐서 이내 합의에 이르는 단체는 아마 훌륭한 단체정신이 살아있는 단체일 것이다. 회의 도중에 교착상태 에 빠지고, 침묵이 흐르고, 누군가가 장광설을 늘어놓고, 암암리에 표현 의 자유가 제한된다면, 그러한 공동체는 아마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이 결여된 단체일 것이다. 이런 공동체는 일치된 행동을 뒷받침 하는 결속력이 없기 때문에 수수방관이나 타협 혹은 집행부의 결정으로 회의를 진행한다. 공동체의 사기는 공동기도의 질로써도 판단된다. 결석, 지각, 불참, 낮은 수준, 불협화음, 질서 문란 등은 공동체의 자부심 결여 를 나타낸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의식을 이처럼 형편없이 수행할 수 밖에 없는 공동체라면 다른 분야에서는 더 형편없을 것이 뻔하다. 공동체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훌륭한 구 성원 선발제도, 효과적인 양성, 예의 바름, 세련된 감정 표현, 회원의 복 지, 외부 대중의 평가 등은 모두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소속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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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에 만족감을 느끼게 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반면에, 지저분한 생활여 건이나 주변 환경, 권위적 운영, 자애로움과 친교의 결여 등은 공동체의 사기 저하를 가져온다. 이런 저해 요인들은 소속 공동체에 대하여 구성 원들의 부정적 의식만을 초래한다. 이 요인들이 시정되지 않는다면 가장 쾌활한 구성원들의 사기조차 저하될 것이다. 절망의 늪에 빠지면 불평하 는 모기들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4) 선택적 자애 1762년부터 1796년까지 독일 트리어의 성 막시민 수도원의 원장을 지 낸 빌리브로트 비트만(Willibrord Wittmann)보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들을 싫어했던 아빠스는 없었다. 1773년 그는 자기 수사들을 “도둑과 간 통과 소돔의 무리들”13)이라고 묘사하였다. 대부분의 아빠스들은 자기 가 돌보는 구성원들을 존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아빠스들은 베네 딕도 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만일 어떤 이가 선행과 순명에 있어 뛰어나지 않는 한, 어떤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지 말 것이다.”(RB 2,17) 필자의 생각으로는 말썽꾼보다 온순한 사람에 대하여 긍정적 느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만, 과연 이것 이 아빠스로서 적절한 대응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인식 이후에 애정이 온다기보다는 가끔 애정 이후에 인식이 오기 때문이다. 은혜와 특권과 특별대우를 받는 사람들은 필경 자신들을 위하여 은혜를 베푸는 사람 에게 아첨하고 강아지처럼 따르게 되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욱 인정을 13) Ulrich L. Lehner, Enlightened Monks: The German Benedictines, 1083-1740 ,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150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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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게 된다.14) ‘선택적 자애’는 사실 편애를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베네 딕도 성인은 이런 자세를 ‘사람들에 대한 차별’(personarum acceptio: RB 2,20; 34,2)15)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을 인정하면 그 이외의 다른 사람 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당하거나 ‘악마처럼 배척’(demonisation)을 당 하게 된다. 편애는 거의 언제나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사거 나 질투로 이어지고, 분노와 질투는 모두 불평의 원인이 된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아빠스의 임무가 자기에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다스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120년대 말에 성인은 라이날드 포이그니(Rainald of Foigny) 아빠스의 불평에 아래와 같이 응답하였다.

“수도원장이 진 이 짐은 나약한 영혼들의 짐이다. 왜냐하면 건강한 이 들은 짐을 지어줄 필요가 없으므로 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의 사람 중에 슬퍼하고 겁 많고 불평하는 이들을 보거든 그대는 그들의 아버지 이자 아빠스임을 알아라. 위로하고 훈계하고 꾸짖는 것이 그대가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그대는 짐을 지고, 짐을 짐으로써 그대는 치유하고, 치 유함으로써 그대는 짐을 진다. 건강하여 그대에게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 움을 주는 이가 있거든 그대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동류이고, 그 의 아빠스가 아니라 그의 동료이다. 왜 그대는 그대와 더불어 있는 어떤 이들을 문제 삼아 그들과 함께 있으면 위안을 받기보다 괴로워진다고 하 느냐?”16) 14) “권력을 잡은 사람들만이 사실상 타인들을 편애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갖 는 것이다.”: Terrence Kardong, “Respect for persons in the Holy Rule: Benedict's Contribution to Human Rights”: Cistercian Studies Quarterly, 27(1992), 204. 15) 이 용어의 출처는 로마 2,11이다. 16) Bernard of Clairvaux, Epistolae (이하 Ep.) 73,2; SBOp 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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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적이거나 걸핏하면 죄를 짓는 자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는 아빠스는 분명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대변하는 사람 이며,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처신하라는 그에게 주어진 명 령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아빠스가 말썽을 부리지 않거 나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대리 만족시켜주는 사람들에게만 호의를 보인 다면, 그것은 아빠스의 이상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찬동하는 사람들만을 가까이하는 아빠스는 스 스로 도움이 되는 중요한 정보의 출처를 차단시키는 꼴이 된다. 장 폴 사 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조언자를 선택함으로써 조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필자는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아빠스가 있 었는데, 그는 정식으로 자문회의 동의를 구해야 할 때마다 자기 구미에 맞은 사람들로 자문회를 재구성하고 상정된 안건에 대하여 자신이 원하 는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것을 단순 히 되풀이해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 리가 반드시 들어야 하는 의견은 듣기에 꺼림칙한 의견이어야 한다. 이미 사적으로 내려진 결정에 대하여 단순히 동의를 구하는 자문이라든가, 이미 내려진 결정을 보완해주고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기발한 아이디 어를 구하는 자문은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에서 세력권을 조성하면 그 동조자들은 일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겠지만, 그 세력권 외부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소외감을 느끼고 불평을 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떠도는 소문으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밖 에 없고, 이들의 견해는 논의되지도 않으며, 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들은 이들의 견해를 참고하지도 않는 타인들에 의해서 내려지게 된 다. 이러한 내적 세력권의 조성은 외적 세력권의 형성을 초래한다.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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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누리는 내적 세력과 주변적인 외적 세력 사이에 효과적이고 떳떳한 의견 교환도 없이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RB 3장 “형제들의 의견을 들음에 대하여”는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베 네딕도 성인은 중요한 문제는 공동체 전체의 의견을 듣고 처리하고, 덜 중요한 문제는 소수의 의견을 듣고 처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와 반대인 경우가 많다.

(5) 파벌 조성 공동체의 삶과 정책 및 행동 통일에 끼치는 큰 해독이 파벌의 조성이 다. 파벌로 갈라서게 되는 것이 성격 때문이든 정책 때문이든 경직된 대 립이라는 같은 결과를 빚게 되어, 한 그룹이 찬성하면 다른 그룹은 자동 적으로 반대하고, 한 파벌이 관리를 맡게 되면 다른 파발은 적대적인 자 세를 취하려고 한다. 공동체에서 작은 그룹들이 생기는 것은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상호지 원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병들 사이에서 서로 도움을 주기 위하 여 형성되는 ‘2인 1조’ 체제와도 같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이런 그룹들 은 그룹 외부의 사람들을 바보나 악질이라고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계속 존속하게 된다. 꼬리를 이은 소문이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별을 강화시 키고 해당 그룹의 장악력을 확대시킨다. 때로는 그룹 내에서만 통용되는 은어를 개발하여 그룹의 적으로 여겨지는 적당한 대상자를 골라 그에게 노골적인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스스로 즉자적 존재(Klasse an sich)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 즉 자신들이 외톨이로서 집단적 차별과 무시를 당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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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급투쟁을 시작하고, 결국 대자적 존재 (Klasse für sich), 즉 계급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가 되어 소리 높여 그들 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비난과 불평이라는 통상적인 수단을 동원 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력도 여기에 해당된다. 때로는 권리 주장 운동이 공개적이 아니라 속삭임으로 은밀하게 진행 되기도 한다. 어떤 중세의 작가들도 이를 중얼거림이나 수군거림(susurratio or mussitatio)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스치듯 지나가는 생쥐의 동 작을 연상시킨다.17) “우리는 은밀하게 유포되는 해로운 속삼임을 피해 야 한다.”18)라고 성 베르나르도는 말했다. 소문과 빈정거림은 공동체의 결집력을 와해시키는 특별한 힘을 갖는다. 막연한 비난은 직접적으로 대 처될 수도 없고,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귀에 거의 들어가지 않기 때 문이다. 막연한 비난이 공식적으로 이목을 끌게 되면, 이에 대한 과민반 응이 일어나 그 비난에 내포된 문제가 과장되기 마련이다. 파벌은 집단 적 불평을 야기하여, 불평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는 많은 사람들도 단 한 사람의 불평에 공감하게 한다. 따라서 파벌은 그 파벌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전체 공동체로부터 이탈하게 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공동 체에 다시 동화되려는 자연스런 경향을 해친다. 불평은 피해의식을 수반하여 기존의 동조자들을 결집시키고 새로운 동조자를 끌어 모으는 기치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법으로 제정된 상고(上告) 제도들이 실질적인 효과가 있어야 한다. 불평자들이 시찰관 들은 그들의 하소연을 시정하려는 의도도 없이 듣기만 하는 유명무실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면, 그들의 소외감은 깊어지기만 할 것이다. 그들은 17) 생쥐는 라틴어로 ‘mus’이다. 18) SC 29,4; SBOp 1,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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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네들이 반대만 일삼는 사람들로 낙인찍히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또 한 소수에 불과한 그들이 부당성을 아무리 지적해 봤자 해결책이 제시되 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6) 호전성 수도원에서도 다툼이 정상적인 상태이자 큰 위안거리라고 여기는 사 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네 적개심의 목표를 확인하고 그 목표를 깎아 내릴 온갖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 그들의 호전성 의 주요 제물은 장상들이지만, 그들은 때로는 안전하게 공동체에서 보다 신분이 낮은 막후인물들을 선택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런 인물들은 자 기방어에 충분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공동체의 주변부로 내려간 사람들은 십중팔구 타인의 행동을 날카롭게 관찰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머리는 자기네의 사생활을 침해한 사람들의 결함, 기행, 작은 결점, 악습 그리고 과실 등에 대한 정보들로 꽉 차 있다. 그들은 이런 정보들을 전략적으로 퍼뜨려 그들과 수도원의 이념 사이에 회색빛 완충지대를 조성하고,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들은 “완전한 사람은 없으니 날 내벼려 둬.” 하고 암시하는 듯하 다. 또 이런 정보들은 장상들이 그들의 미온적 태도를 나무랄 때 역공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런 호전성이 간단히 치유될 수 없는 심각한 병리적 결과일 수도 있다. 사회병질자들은 누구에게나 부담이 되지만, 영향력을 발휘하 는 경우도 있고 그들의 호전성에는 정당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 기서 문제는 그들이 창조적 해결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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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뿌린다는 데에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사회병질자들의 말이나 말 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들의 장광설에 노출되면 어떻 게 될까? 그것이 낙타 등위에 짚 한 오라기를 얹은 꼴이라도 낙타 등을 다치게 하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7) 정신적 배교 수도원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사실상 포기한 다음에도 수도원의 기본적 가치 기준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수도승들이 있는데, 이들은 공동체에서 불평을 늘어놓을 여지가 많다. 특히 계율이 훌륭하고 규율이 준수되는 공동체에서 더욱 그러하다. 수도승이라는 천 직에 더 이상 매력을 못 느끼는 자들은 열성적인 수도승들을 자기네 수 준까지 끌어내리려 한다. 그리고 단순한 형제들은 그들에게 그릇된 자비 를 베풀어 그들의 접근을 좀처럼 거부하지 못한다. 수도원의 기본적 가 치 기준을 거부하는 불평은 악 그 자체이다. 과거에는 이런 불평이 온갖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다.

3. 정당한 불평? 베네딕도 성인은 아빠스와 공동체의 관리 책임자들이 수도승들의 불 평의 동기를 근절함으로써 슬퍼하는 일이19)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 19) RB에서 사용된 라틴어는 ‘슬프게 하다’(contristare: RB 머리말,5; 31,6.7.19; 36,4; 48,7; 54,4) 와 ‘슬픔’(tristitia: RB 27,3; 35,3)이다. 참조. M. Larman, “Contristare and tristitia in RB: Indication of Community and Morale”: American Benedictine Review, 30(1979), 159-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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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짓밟힌 불쌍한 수도승들은, 분명 불평이 생겨난 데 대하여 연루되 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 평은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그리고 철저한 자와 해이한 자,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나올 수 있다. 보통 불평의 내용은 불평한다는 사실 자체 보다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주의 깊은 지도자는 분명 불평의 표면을 꿰 뚫고 그 근저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이 좀 과장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사실 나는 불 평을 칭찬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평을 묻어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불평 은 규칙과 강압적인 조치들로 잠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가 주는 교 훈은 그것이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20) 불평의 원인들을 감소 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그러한 강압적인 조치들은 바람직한 결실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불평은 개인적 윤리와 연관 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정당 한 불평이 생겨나게 하는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불평을 중단시킬 수 있다. 불평자들을 나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뿌리 를 잘라내야 초목이 시드는 법이다.

20) 필자는 우간다에서 실업을 불법화시킴으로써 실업을 없애려 했던 이디 아민의 시도를 기 억한다. 아민은 실업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투옥시켰다. 하지만 단 시일 내 에 우간다의 실업률은 상당히 늘어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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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독신생활 - 통합적 접근1) 이레네 다발루스 양숙희 이사악 옮김

오늘날의 ‘독신’에 대한 문제는 인류 역사에 나타난 중요한 세 가지 면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창조’, ‘인격’ 그리고 ‘여성’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세 가지는 오늘날 우리들이 처한 문화 안에서 독신의 의미를 재평가하라는 신호입니다. 또한 ‘신학’, ‘윤리’ 그리고 ‘영성’ 분야에서 세 가지 괄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 다. 그리고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지역문화와도 뒤얽혀 있습니다. 먼저 나는 새 모델의 이론과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새 모델 은 과거의 윤리적이고 틀에 박힌 서원의 관점에서, 보다 역동적인 개인의 성장과 진보로 관점을 변화시켰습니다. 새로운 모델은 기존의 문화 안에 내재한 인간 체험에 우선권을 두면서도 동시에 사회, 심리과학의 연구에 서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신 문제에 대한 이런 통합적 접근은 독신서원을 배출해 낸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축적된 지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나는 독신을 해석하는 데 있어 일관적이고 타협할 수 없는 통합적 모델 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구조는 독신생활의 구심점으로 중심인물

1) 원문의 제목은 “Celibacy - A Convergence Approach”이다. 이 글은 1993년 9월14일부터 23일까지 로마 성 안셀모 수도원에서 열린 베네딕도회 여성 수도자 심포지움에서 툿찡 포 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이레네 다발루스 총장님께서 “Monastic Profession Inculturated”라 는 주제 아래 하신 강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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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그리스도, 독신생활을 번성하게 한 교회의 지혜 그리고 우리들 믿음 의 역사를 토대로 하여 세워집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나는 양성부분에서 독신생활에 대한 몇 가지 미묘 한 문화적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이는 유럽, 아메리카, 아시 아,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의 고유한 개별 문화 상황(contextualization) 안에서 조명되어야만 합니다.

이론과 실천에서 주요한 세 가지 변화 창조(The Cause of Creation)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고 지키기를 원한다면, 세계 자원의 무자비한 파 괴와 소비를 향한 무절제한 개발은 우리들에게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 을 필요가 있다는 강한 의식을 불러일으켜 주었습니다. 이 의식은 타락 과 구원이라는 주류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결인 창조신학을 태동시 켰습니다. ‘창조신학’에서 자연과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자신 의 고유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연과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 구체 적 표현입니다. 인간 역시 창조된 존재로서 자신들이 온전히 성적 존재라 는 면에서 자신들이 사람임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창조신학과 맥을 같이 하여 자신들의 육체에 대한 가치와 존엄성을 발견했습니다. 과 거 ‘타락과 구원’의 신학에서는 육체의 부패와 나약을 강조했었지요. 창조에 대한 이런 숙고는 독신서원에 대해 신선한 빛을 선사해 주었습 니다. 우리는 성욕(sexuality)과 성적 금욕(chastity)이 서로 적이 아니라 친구임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유를 안겨주는 체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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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독신생활 - 통합적 접근

사실 건강하고 건전한 성욕은 자유롭고 사랑이 넘치고 생명을 주는 독 신서원을 위한 기반입니다. 우리는 수도생활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독 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은총은 성(sex)과 성욕을 잘 이해하고 기꺼 이 받아들일 때 성장합니다. 지상에서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에 담긴 신성인 성과 성욕은 하느 님께서 우리들에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다른 선물처럼 성과 성욕은 생명이신 하느님이 정 말로 누구이신지를 나누는 것입니다. 성과 성욕은 덧없고 순간적이지만 우리에게 다 내어주고 헌신하는 하느님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에 따른 책 임감으로 부담은 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합니다. 한 번의 성적 결합은 인간에게 영원히 생명을 선사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인간적이고 신적인 행위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 느님의 역사하심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행해지는 성적 결합에서 명 백하게 드러납니다. 성적 결합은 그 자체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아 름답고 심오하고 친밀한, 인격적이고 신적인 행위입니다. 제 생각에 성행 위는 하느님의 모든 선물 중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분이 소유한 모든 것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과 성욕을 주신 분의 뜻에 따라 살고, 모든 것이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수도자로서 우리가 하느님께 축성된 사람으로 성장하고자 한다면, 우 리는 이 선물이 가진 선(goodness)과 아름다움 그리고 힘을 느끼고 알 아들어야만 합니다. 이럴 때에만 우리는 서원을 통해 그분의 것을 그분 께 드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인가 부족한 것, 죄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 죄는 우리가 이 선물을 책임감 있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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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타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선 물 안에 있는 거룩한 부르심에 온전하게 응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는 그 선물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 때문에 이에 쉽게 도취하거나 성별된 집단(cults), 아스타르테, 아프로디테, 놀이친구(playmate and playboy!) 같은 성스러움의 상징으로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수도생활에서 독신자 는 금욕과 기도의 수행 없이 자신의 성적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건강하고 정상적 성 생활을 할수록, 축성된 독신생활의 요구를 살아낼 기회도 더 갖게 됩니다. 우리는 시작부터 금욕과 기도의 수행이 성욕의 힘과 아름다움을 독신 생활에 통합하기 위한 방법임을 제시해야 합니다. 충만함에 대한 갈망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원의를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적 이며 영적 존재인 우리는 정서적, 실존적, 그리고 심리적 충만함과 안정 을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육체, 감정 그리고 정서와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 어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만일 우리가 독신생활을 금욕과 기도생활에 의해 뒷받침된다는 측면에서 신중히 다루지 않는다면, 이 생활은 점점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독신자는 매우 신심적일 수 있지만 상당히 이지러 지고, 경직되고, 무감각하며, 폐쇄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독 신서원을 통해 자유를 누리며, 사랑하고, 친절하며, 연민을 갖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독신생활은 육체적인 면에서 죽 음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life-giving)이고, 생명을 촉진시키는 것입니 다. 달리 말하면 독신서원은 부정이 아니라 우리 육체에 대한 생명과 사 랑의 긍정적 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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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The Cause of the Person) 우리 시대에는 모든 생명체들이 위협을 느낍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 의 폭력과 인간 권리의 침해로 삶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음을 경험합니 다. 동시에 우리는 평화 건설과 정의 실현을 위한 협력으로 폭력에 맞서 기 위한 연대의 물결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교회 내에 서도 그렇습니다. 수도회들 또한 그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구조를 철저 히 보도록, 더 나아가 인간의 인격(cause of the person)을 향상시키도록 도전받고 있습니다. 인격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의식은 독신에 대한 사고에 영향을 미쳤습 니다. 우리는 이제 정형화되고 추론적 독신의 개념을 역동적 시각으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이 관점은 수도자들의 전인적, 심리적, 영적 성숙을 겨냥한 것입니다. 이 관점이 가져오는 결과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독신자 들이 갖는 우정에 대한 아름다움, 독신생활에 대한 열정, 정결생활에서 사랑을 향한 갈망, 사랑함에 있어 두려움을 벗어난 자유로움의 가치와 같은 인간의 가치를 향상시킵니다. 독신서원을 인격이란 측면에서 살펴보기 위해 먼저 심리적, 영적 충만 에 초점을 맞추도록 합시다. 이는 독신서원을 유용한 삶의 형태로 규정 짓기 위해 인간의 다양한 정서적 힘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입니 다. 이는 최우선적 자리에서 차선적이며 부가적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독신생활과 관련된 외적 규율과 규정의 체제를 검토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수도자들이 제도화된 독신의 이상이 주는 압력 때문에 가 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축성된 독신생활을 획일적 행동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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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을 억제하며, 신경증적 모습을 드러내고, 육체와 정신, 의지와 충동, 지향과 행동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독신 생활을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 그리고 자유롭고 균형 잡힌 인격의 성장과 어떻게 통합시킬지 이전보다 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 초점은 주님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고자 하는 독신자의 강 한 수도적 정체성의 기반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갈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포함한 갈등을 살아내고, 갈등의 원인과 증상을 이해하 며, 조화로운 균형의 상태까지 작업해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기(self)가 드러납니다. 이 자기발견(self-discovery)은 독신자 안에 내재 된 힘을 통합하는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독신자는 신중한 선택 을 하고 하느님을 찾는 동기를 마음에 간직하고 독신생활을 통해 그리스 도를 따릅니다. 신중한 선택과 순수한 동기는 독신생활에 있어 두 가지 전제조건입니다. 세 번째 초점은 수도자의 욕구와 가치를 포함한 모든 면에 초점을 맞 추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RB 4,29; 72,6)라는 베네딕도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양성에 있 어 시급한 과제는 육체적, 심리적 정감을 질서지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순간적 충동과 본성이 요구하는 가치들을 놓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서원에 대 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됩니다. 인격적 동기가 점점 핵심이 되어가고, 그 반면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독신자의 품행에 대한 법규들은 단지 부수적 인 것이 되어 갑니다. 수도생활의 동기는 종종 성과 인간관계에 대한 사람의 두려움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이런 성적 두려움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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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만 합니다. 단지 신심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독신생활에서 겪는 실패와 어려운 경험들을 극복할 수 있겠습 니까? 실패와 힘든 체험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께로 회두하는 데 재산 이 될 수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독신생활에서 베네딕도가 보여준 분별의 정신과 그분의 겸허한 배움의 자세를 통해 독신생활에서 겪게 되는 부정 적 경험과 긍정적 경험을 다룰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들은 정신분석 이 말하는 점진적 자기 회복 과정(self-reconstruction)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체험을 수용하여 2) 그 의미를 파악하고 3)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자신을 바로 세우며 4) 독신생활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로 자신을 다시 방향 지웁니다.

여성(The Cause of Women) 오늘날 우리 ‘지구촌’은 각종 미디어와 상업에서 성과 여성이 상품화되 는 성적 문화(sexualized culture)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여성들의 취약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수세기 동안 여성들은 재산분배, 사회/문화적 혜택, 그리고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성 들은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가난과 착취 그리고 삶의 모든 면에서 최악 의 상태였습니다. 이 점을 인식할 때, 우리는 여성의 존엄성과 성차별주의(sexism)와 가 부장제의 근본원인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만나게 됩니 다. 이런 여권주의자들의 관점은 현대 수도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게 독신 생활에 대해 아마도 가장 역동적이고, 단호하며, 생명 있는 통찰력일 것 입니다. 페미니스트의 입장은 여성의 몸과 마음, 정신과 영혼의 모든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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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일치시키고 통합시킬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을 향 해, 세상을 향해, 세상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자신이 가진 삶의 에너 지를 자유롭게 쓰도록 해줍니다. 현재 여성들은 억압에서 자유로, 또한 새로운 믿음과 영성으로 가는 여정을 다시 구상하고 표현하기 위해 분 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성들은 독신을 표명함으로써 자신들의 성적, 영적 정체성과 친밀감 그리고 생산성을 향한 자신들의 다양한 체험을 드 러냅니다.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과거 여성의 문화를 지배했던 자기비하 와 자아축소의 태도가 최대한의 자유와 하느님께서 주신 존엄성을 의식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갖는 태도로 변화하였습니다. 여성의 경험 가운데 정의에 대한 투쟁은 독신서원에 대한 독특한 차원을 드러냅니다. 일반적 으로 여성의 체험은 동시에 부정이며 긍정입니다. ‘하지 말라. 그러면 인 정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동하게 취급되지 않고 무시되었습니다. 그들이 순종과 봉사 를 받아들였을 때 그들의 위신은 떨어졌고 가정과 보수 없는 노동과 비 공식적 경제 분야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 은 양육하고 가정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상의 리듬 안에서 보 통 여성은 선택하든지 혹은 그 외에 대체할 것이 없었고 단지 자기완성 과 행복의 이상으로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긍정과 부정의 패턴이 작용합니다. 한편으로 남성들도 가정과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들은 선택의 기회가 있으므로 보통 이를 선택하 도록 강요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연민과 양육에 대한 능력이 인생 에서 성공의 토대로 부각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에 제한받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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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의 경험은 일종의 긍정-부정-긍정입니다. 저는 축성된 독신서원이 여성들에게 긍정-부정-긍정의 경험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은 먼저 한 인간으로서, 연구와 기도와 성찰을 통해 신중한 선택을 할 능력이 있음을 자각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만 여성들은 포기하는 것(부정)을 통합할 수 있는 서약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으로서 자유로운 선택(부정과 긍정)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그들은 독신서원에 대해 무의미한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선택을 한 사람 이라면 천박하고, 굴종적이며, 신심적이고, 자아를 말살하는 수녀가 될 수 있고, 성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이용당하며 자신의 가치를 떨 어뜨리는 행동을 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자신의 인격을 긍정하는 경험을 한 후에야 양성은 독신생활에 부과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다음 단 계인 포기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포기는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탄탄한 기반이 됩니다. 이는 자유롭게 선 택한 자기포기가 새로운 삶을 향한 모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독신생활에 대한 통합적 접근 (A Convergence Approach to Celibacy) 우리는 창조, 인격 그리고 여성의 각도에서 오늘날 세 가지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패러다임의 전환은 신학, 윤리, 그리고 영 성에 새로운 차원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독신서원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습니다. 때때로 다른 문화와 비교할 때 어떤 문화는 이 점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다음에 살펴볼 주제는 유대―그리스도교 문화와 전통에서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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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진 독신생활에 대한 것 중 타협할 수 없는 요소는 무엇인가 하는 것 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복잡하고 현대화된 상황 속에 있지만, 우리는 독 신생활이 몸으로 증거한 2000년 교회 삶의 지혜와 경험을 계속해 나갑 니다. 통합적 관점에서 나는 이 불변의 요소를 유대-그리스도교 유산의 축적된 지혜를 본보기로 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독신 - 육체를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넘김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모든 수도생활의 핵심이며 근본적 종교 체험입 니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수도생활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체험입니다. 축성된 독신생활은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를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정신과 삶을 나누도록 다그칩니다. 우 리의 독신생활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육체를 자진해서 바치신 주님을 철저히 따르기 위해 우리의 육체를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결하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모범을 따라 살아가게 됩 니다. 우리 정체성의 핵심, 즉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제자됨에서 이런 정신과 마음이 솟아나게 됩니다. 독신자는 자신을 봉헌하신 분을 환히 알아야만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 다. 독신자가 예수님을 모른다면 서약도 뜻이 없습니다. 독신자는 무엇보 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 점은 다른 어떤 행동과학을 통해서도 배울 수 없습니다. 만일 이것을 행동과 학으로만 하려고 한다면, 부족한 자신의 샘에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수도자는 성서와 항구한 기도,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서 배워야만 합니다. 수도자가 성서 말씀에 대한 열성적인 영적 탐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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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되신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과학과 사도직 활동 그리고 섬 김을 받는 사람들에게서도 배울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정체감을 줄 수도 없습니다. 증거를 한다는 것은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현 재화하는 것입니다. 증거자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면, 그분의 생각과 마 음을 깊이 알고 그분의 삶을 가까이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 능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만 상기하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 님께서 우리에게 되길 원하시는 하느님 자신의 인간적 드러내심이십니 다. 그분은 육을 취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다가갈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외견상 우리와 같은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과 행적 을 통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믿음, 전통, 관습, 가치, 역할, 행동규범, 우리의 갈망과 염원 그리고 꿈까지도 밝혀 주시고 의미를 부여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완성이시며 죽음의 정복자이십니다. 모든 역사가 그분으로부 터 시작되고 그분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연민을 느끼시는 참 인간이십니다. 독신생활에서 바로 이 예수 그 리스도께서 중심이십니다. 독신생활은 그리스도의 영감에 의한, 그리스 도가 지도하는, 그리스도를 초점으로 삼는 삶입니다. 다른 도전은 독신생활을 그리스도와 같은 모양으로, 도래할 하느님 나 라의 필요를 위하여 자신을 육체적으로 그리고 드러나게 넘기는 것으로 규명하는 것입니다. 독신이야말로 철저히 하느님 나라의 필요를 위해 축 성된 삶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독신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명에 뿌리 내리지 않는다면, 독신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푸라기 하나처럼 확 실한 토대를 잃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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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 - 육체를 교회의 생활과 사명을 위하여 축성함 오늘날처럼 자주 교회가 비난의 소용돌이 속에 처한다면, 수도자들은 좀 더 분명하게 자신들이 교회에 속함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이는 예수 님의 강생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과거 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세상 한복판에서 영(Spirit)으로 그리스도의 현존 을 존속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교회의 품 안에서 독신서원이 꽃피었 습니다. 그리고 그 품 안에서 생명과 거룩함을 분출했습니다. 예수님까지 소급되는 교회의 본질 중 하나가 봉사의 은사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 을 섬기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사랑은 계속 이어져야 만 합니다. 예수님처럼 초대교회에서 사랑으로 맺어진 유대는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결별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 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소외된 하느님 백성과 연대하 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200년 동안 사도행전 2장 42절 이 말하는 봉사(diaconia)의 특성을 지녔고, 돌봄의 활동을 통해 예수님 의 생명을 나누었습니다. 4세기에 교회는 제도화로 인해 생명력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반동으로 수도공동체들이 생겨났습 니다. 독신은 이런 교회 쇄신의 꽃이었고, 쇄신된 삶과 거룩함의 실질적 상징이었습니다. 교회의 삶에서 독신의 의미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생명을 증진시키고 인간성을 충만하게 하는 힘을 보는 것입니다. 독신생 활은 분명히 교회 안에서, 처음에는 우리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다음 에는 하느님 백성의 더 큰 공동체 안에서 생명을 주는 관계를 창조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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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의도되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독신생활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 로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사에 활력을 선사합니다. 이는 그들이 교회의 신비와 가까워지면서 갖게 된, 파견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 수도자들이 평화, 정의 그리고 우리가 사는 오늘 날 세상의 온전성(wholeness)에 민감한 감각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 부터 우리 문 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대중매체를 쉽게 접할 수 있고 정 보가 대중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더 자유롭게 기꺼이 복 종할수록, 우리는 세상과 자연을 포함하여, 평화와 정의 그리고 연대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더욱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독신자들은 자신들의 생명 나눔이 세상의 필요만큼이나 보 편적임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람은 연대성 안에서 자신들의 자유를 대변 해 줄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정결한 수도자들의 생명력과 창의력은 억압받는 사람들, 특별히 여성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구조를 변혁시 키는 봉사에 쏟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수도자들은 교회로부터 부여받 은 구원사명에 기여할 것입니다.

독신 - 육체로 자기 자신을 공동체에 증여함 베네딕도 규칙서와 전통은 독신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동생활의 본질상 독신은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는 수도성소에 대해 베네딕도회원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구체적 응답이 었습니다. 공동체와의 계약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재능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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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랑을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내놓습니다. 베네딕 도 자신은 규칙서에서 정결을 서원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어느 누구보다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라(RB 4,21; 72,11)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소유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아무것도 개인 소유 로 하지 말 것이며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도 그렇게 하지 말라(RB 33,4)고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는”(RB 72,8)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네딕도는 사랑, 몸, 그리스도, 공동체, 육 적인 것과 영적인 것, 이 모든 것을 따로따로 분리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 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느님, 그리스도, 공동체 그리고 자신을 향한 사 랑의 삶에서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분열된 세상 안에서 몸부 림치며 찾고 있는 통합적 시각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몸과 정신, 믿음과 실생활, 하느님과 공동체의 통합성은 규칙서 전체에 배어 있습니다. 저는 형제자매적 섬김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는 규칙서 72장이 공동체 구성원 간에 순수하게 사랑할 것을 아주 멋지게 촉구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공동생활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또한 상호수용과 존중은 독신상태를 지속할 수 있게 해줍니다. 독신자들은 사랑과 기쁨 안에서 인간적 연대의 지지 없이 독신생활을 살 수 없습니 다. 독신생활이 자유롭고 기쁠 때 구성원 서로 간의 생명과 사랑에 대한 감각은 향상되어 갑니다. 진실로 좋은 열정은 그 자체로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활력 있는 삶을 나누도록 합니다. 분명히 독신서원은 우리들이 사람들과 자유롭게 관계를 맺도록 도와 줍니다. 왜냐하면 독신서원을 통해 우리는 이성을 성적 상대로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사람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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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본능적 의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도자들은 다른 자매 수도자들의 사랑과 우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 나 수도자는 정서적, 본능적 욕망 그리고 실존의 한계에서 오는 것을 만 족시키기 위해 사람에게 의존하는 데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독신서원은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친절히 대하고, 연민하고 고통을 공감하는 데 민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줍 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이 우리를 대할 때, 우리가 그들 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야만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는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우 리의 필요를 위해 그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들에게 자신들 이 자유로우며, 그들 자신으로 우리 앞에 있을 수 있다는 인상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독신서원은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 정서적 필요를 충족 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찾지 않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독신서원이 가진 창조적 자유로움은 생명을 촉진합니다. 독신서원은 우리들이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선사합니다. 우리들이 그들 을 위협하지 않기에 그들이 우리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는 면 에서 그렇습니다. 이는 여성성에 대한 안전감을 가지기 때문에 나오는 감 각입니다. 이로써 변화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기고,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 를 맺을 때 자유와 생명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해줍니다. 독신서원을 사 는 수도자들은 무기를 갖지 않은 군인과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들은 독신서원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드러냅니다. 이는 삶을 부정하 는 것도 혹은 성욕을 부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독신서원은 바로 생명에 대한 확신이며, 참 생명을 갈구하는 오늘의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입니다. 독신생활은 보존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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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전해져야 합니다. 여기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와 관상’ 말입니 다.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을 더 많이 나누는 중재자(life-giving agents)가 되기 위해 신비가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의 생명력인 영으로 온전해지고 충만해져야만 합니다.

독신 - 문화에 대한 가시적 “충격적 치료” (Celibacy-Visible “Shock-Therapy” to Cultures) 교회 안에서 수도회를 영에 의한 “충격적 치료”라고 부른 사람은 멧츠 (J. B Metz)입니다. 수도회들은 교회의 정신이 안일하거나 혼수상태에 처 했을 때마다 생겨났습니다. 나는 이 충격적 치료의 효과를 독신과 문화 의 관계에 도입해 보고자 합니다. 독신은 경제·사회·문화면에서 현대 사 람들이 우선시하는 것들과 타협할 수 없는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우선시하는 것 중에 독신서원과 논리적으로 반대되는 몇 가지 것들을 생각해 봅시다. 현대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종교인이 그 이상 앞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쾌락과 만족의 문화에서는 한가한 사 람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선진국들에서는 특히 젊은이들이 ‘인간 실존 의 무의미함’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개인주의와 자 율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기계화와 합리성을 추진하는 자본주의 문화 가 지배적이다 보니 사람들은 이전보다 유희와 오락을 더 많이 추구합니 다. 그래서 동시에 불안과 좌절감도 더 많이 겪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 은 자유시장경제로 인하여 모든 실재를 사고팔고 소유하며, 자신과 타인 그리고 환경을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소유를 방어할 수 있다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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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합니다. 거의 모든 관계는 권세와 점령, 지배와 법에 의한 것이어서 이 성과 지배와 권세의 문화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성에는 느낌 이 없기 때문에 우리 문명에서 마음이 결여되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지구의 남부와 동부의 사정은 그와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 지역 의 경제와 사회 그리고 문화의 특징은 지배와 권세와 치부가 아니라 오 히려 종속관계와 저개발입니다. 제3세계는 가난과 기근, 폭력과 전쟁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는 극단적 경쟁과 끝없는 이윤과 소비만 생각 하는 서양 시장경제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시장경제의 선익을 누리려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제 선진국들이 과시하 는 발전과 물질의 풍요로움에 한몫 끼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서원은 현재 문명의 특징인 이기심에 대한 반립(antithesis)과 같 은 것입니다. 알로이시우스 피에리스(Pieris)와 세례자 요한 메츠(Metz) 는 우리의 서원을 대조 또는 대안 문화에 속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고대 에서 생긴 서원 생활은 그리스도교 예언직의 산물입니다. 인간성의 가치 를 높이 평가한다면 우리의 서원, 특히 독신은 인생의 뜻을 밝힐 수 있는 귀한 자원입니다. 서원은 생명과 사랑과 자유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독신 이라는 예언적 존재는 시장경제의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큰 도전 이 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여 자들의 공동체는 어디에 필요한가? 기도는 어디에 필요하며 관상과 극기 는 어디에 좋은가? 왜 남녀의 인간성이 상품화되는 것을 막아야 할까?” 독신생활은 인간이 만들어 내지 않은 해답을 제공해 줍니다. 남녀 인간 은 그들이 생산하거나 소비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귀중한 존재 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라.”는 성규의 말씀은 은총의 도래와 하느님의 현존을 제시해 줍니다. 축성된 독신은 문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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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인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폭력과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면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은 독신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들은 하 느님께 모든 희망을 걸고 시장의 세계로부터 해방됩니다.

문화의 차이를 드러내는 양성 성에 대한 자세와 생각, 가치들은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 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몇 가지만 간 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독신과 문화 앙골라에서는 독신생활을 일부다처제도라는 배경에서 바라보아야 합 니다. 그러나 브라질과 필리핀에서는 독신생활을 남성 우월주의(machismo)의 배경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일부다처 문화에서 독신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환경에서는 독신이 생명의 가치, 가정과 종족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또한 독신은 위대한 목표를 추구하는 길로서 오히려 민족과 사 회, 그리고 교회, 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길 이라는 것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또한 일부다처제도가 아프리카 사회와 경제를 위해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가치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 여 봉사하는 독신생활의 가치를 견주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브라질과 필리핀처럼 남성우월주의가 지배적인 문화에서는 남성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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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고가 남녀 모두에게 자신의 신원에 대한 태도와 사회 안에서 자신 들이 취해야 할 기본적 역할과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합리 적으로 독신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정할 때 남녀 모두 그런 현실을 감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녀 모두가 독신생활을 통해 남성우월주의 문 화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자유와 독립의 행위입니다. 서양의 자본주의 문 화에서는 독신생활을 남성들의 위치에 대한 불확실성과 관련시켜 생각 해야 하며, 여성들의 상품화와 대조시켜 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런 환경 에서 여성은 제공하는 값에 사고 팔리는 물건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시장 경제의 세계에 살고 있기에 남녀 간에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그 영 향을 받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독신을 위한 선택은 여성의 존엄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며, 그들이 당하는 상품의 위치에서 그들을 해방할 수 있습니다. 혼인생활과는 다른 독신생활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주적 사고와 행동의 기회입니다. 또한 오늘날 여성의 품위를 올 리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독신생활을 위한 양성은 건전한 신학과 영성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 전제가 되는 몇 가지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길 - 육화의 길 독신생활을 하고자 하는 지원자는 육화의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우선 자기 자신이 육체와 영이 결합된 존재임을 알고, 그런 자기의 현실 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육과 영은 서로를 온전하게 상호내재하 고 있기 때문에 몸과 몸에 속한 모든 것, 즉 성(sex)과 성생활(sexuality), 친밀성과 애정은 영적 생활에 속합니다. 건강한 인간에게는 이 두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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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서로 협조를 이룹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에 도 흐릅니다. 이와 같이 그 사랑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정감 안에 육화됨으로 하느님은 우리의 살과 피에 당신의 현 존을 선사해 주십니다. 몸과 영이라는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인 다면 지원자는 자신을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 다. 성과 성 생활, 자신의 감정과 친밀에 대한 동경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자신에게 속한 것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영광의 매개체이며 온 전히 생명인 하느님의 무한한 존재를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지원자는 이 선물을 적극적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그 안에는 부정적인 것, 성과 속의 알력 또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 간의 유한성과 불안정 때문에 양자간의 일치를 부인하는 경향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양자간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육화입니다. 지원자는 육 화, 즉 인간화에 봉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입니다. 여기에 바로 극기를 포함한 수행(Askese)이 필요합니다. 수행이란 영과 자기 자신 사이에 분리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생활을 의 미합니다. 수행의 역할은 육과 영으로 사는 참 삶을 확고하게 해줍니다. 지원자는 예외 없이 모든 사물 안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음을 체험해 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하느님의 것이 되지 못한 것은 변화(변형)되어야 하고 무르익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인 우리를 무의미함에서 구해 주실 때까지 피조물은 생과 사, 일치와 분열, 친밀함 과 소원함, 현존과 부재를 겪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은 바로 이 과정과 성 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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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과 친밀 독신자들은 예민하게 친밀에 대한 갈망을 감각으로 느낄 때를 겪게 됩 니다. 이 원의는 진실로 생명에 대한 갈망, 아니 더 충만함에 대한 갈망입 니다. 여성의 마음 안에서 이 갈망은 더 강렬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됨을 향한 친밀한 교감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는 여성이 생명을 양육하고, 잉 태하고 낳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은 이것이 생명에 대한 갈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여성은 갈망으로 인해 생명을 내어주고, 창 조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창조합니다. 물론 여성은 생명을 내놓고 품기를 원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여성의 마음에 심어주신 거룩한 원의라 는 것을 여성들은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한 존재에 게 생명을 준다는 것은 얼마나 거룩한 일(Opus Divinum)입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성들에게 독신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과 공동 창조자가 되는 다른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 길은 성모 마리아의 길로 단 지 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길 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권능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 일이 아니라 신적인 일입니 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여자들(수녀들, 독신자들)은 자기 생명 전체를 내놓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봉헌의 뜻입니다. 이런 일은 하느님과 함께 창조하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여성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느님께 서는 우리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갈 망은 참된 생명을 향한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채워질 수 없고, 대체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또한 대체물에서 위안을 얻지도 못합니다. 이 세상 에서는 단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행동으로 겨우 일시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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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을 맛볼 수 있을 뿐입니다. 평화와 안식은 오직 우리의 참된 고향 인 하느님께 사로잡힌 존재가 된다는 희망에서 솟아납니다. 그러나 지원자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친밀과 친교에 대한 갈망을 사 그라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원자는 이를 행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내줌으로써 소화해내야만 합니 다. 왜냐하면 독신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 다. 자비, 애덕, 부드러움,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 복음 전파를 위한 열성, 평화롭고 겸손한 공동생활, 세속적 안전에 대한 이탈, 수난에 대한 참을성, 용서, 새로운 것에 대해 귀를 기울임, 아픔을 주는 변화를 기쁘 게 받아들임 그리고 회심. 독신의 삶은 생명과 성욕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독신은 부활 때에 충 만하게 완성되는 생명과 사랑의 가치를 확증합니다. 독신은 깊은 관상적 기도와 사도직에 대한 진지한 투신 없이 살아질 수 없습니다. 독신자는 생물학적으로 생명을 낳을 수 없습니다. 독신자는 이것을 의식적으로 기 꺼이 결정하고 대체물을 찾지 않습니다. 독신자는 희망으로 삽니다. 독 신의 삶은 여기 이 세상에서 그리고 내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 라 생명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순결한 동정의 태는 생명을 잉태합니다. 그러나 수도자는 육체적으로 동정이지만 순결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개별 고유한 문화 안에서 독신자들 사이 의 친밀한 표현의 기준을 뜻있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접촉이나 포옹, 키스와 같은 친밀감의 표현은 아시아의 ‘no-touch 문화’에서부터 아 프리카의 ‘oral 문화’, 그리고 서구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성적(sexualized)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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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하는 문제는 자신들의 고유한 생활 문화와 전통과 조화를 이루는 것 으로 공동체에 의해 수용된 관습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화에 노출되기(Culture-Exposure) 독신자들은 문화에 노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긍정적 면과 부정 적 면을 동시에 수반합니다. 각각의 문화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객관적 으로 표현된 자료들을 봅시다. 사실이라면 감출 수가 없겠습니다. 문화 에 대한 식별에서 첫 번째 단계는 두려움이나 초조함 없이 단지 거룩한 무관심으로 드러난 실상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선이 아니라면 악일 수 도 없습니다. 최초의 타락과 죄의 맥락 안에서 생명은 회색이었습니다. 검거나 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우리 기준으로 저울질해 보 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전통 그리고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드러난 믿음에 대한 기준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문화가 정의의 빛 아래 드러날 때 진정한 색깔이 나타납니다. 받아들 일 수 없는 것이 문화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고자 하 면 다치겠지요. 우리는 그런 요소를 좀 떨어져서 안전한 위치에서 바라보 아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뒤로 물러나 문화를 본다는 의미에서 소 극적 문화 체험 혹은 부정적으로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 습니다. 축성된 정결한 사람이라면, X등급이 매겨진 것이나 도색 영화를 즐길 수 없습니다. 독신자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이 되기 위해 땅에 발을 디뎌야만 합니다. 문화에 대한 체험을 어디서 언제 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개별화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개인적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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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기준을 정합니까? 수도자는 깊이 기도 하고 신중하게 분별해야만 합니다. 독신자의 관심사는 주님께 대한 오롯 함, 말씀 선포, 형제자매에 대한 봉사입니다. 왜냐하면 수도자의 독신이 문제가 아니라 기쁨의 원천, 생명의 샘, 힘과 자유의 원천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수도공동체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군가 이에 연루되었을 때 스스로 떠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공동 체에서 제외됩니다. 달리 말하면 수도공동체는 받아들일 수 없고 허용 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합의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는 지역문화와 믿음 그리고 보편교회의 가치에 따라 신중한 분별을 한 후에 이루어져야 합니 다. 물론 어떤 공동체나 문화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허 용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하 다고 하겠습니다.

독신자의 사랑과 우정 수도자들 사이에 육화된 사랑, 추상적이고 플라톤적 사랑이 아닌 참 된 사랑이 실재합니다. 그리고 수도자들은 그런 사랑을 경험합니다. 조 만간 독신생활로 들어설 지원자들도 수도원에서, 대학에서 또는 사도직 현장의 성가대에서 이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제도적 형태로 이런 사랑을 표현해야만 합니다. 이 사랑이 느낌과 갈망, 그리고 고통으로 미소한 형제자매에게 하는 자비의 봉사에서 진실하다면, 이 사 랑은 그들을 신적인 사랑으로 더욱 깊이 이끌어 줄 것이고 잠시나마 충 만함을 선사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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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고유한 방법으로 그분 을 체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한계를 지닌 피조물이 이기 적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으 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신적 정체성을 확고히 드러내 기 위해 사랑과 봉사를 해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한없는 관대함과 내 어주심에 기초합니다. 나는 남녀간의 관계 모델로 삼위일체의 삶을 보는 것에 지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안에는 조금도 손상됨 없이 서로 간에 주고받음이 있습니다. 남성은 생물학적, 문화적, 영적, 즉 모든 면에서 여성 없이 사람 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현상은 어릴 때부 터 가족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수도생활로 들어선 지원자들은 독신자의 사랑과 우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과거에 경험한 박탈감 때문에 이런 것 들이 찾아 왔을 때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행 동할 때 일어납니다. 진실로 사랑하고자 할 때, 이런 수녀는 과거의 박탈 에 대한 경험으로 온전히 사랑하는 데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문제는 지 원자가 독신서원을 약속하기 전에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분 명 강요가 아닙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느낀 사람만이 자유롭게 진실로 사 랑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수도자는 하느님의 사랑은 자신의 제 한적 자아보다 더 크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무가치하 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체험이 부족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 신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런 경우에 바로 공동체는 서원생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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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애정을 찾고 있는 수도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공동체는 기도와 단식을 통해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더 잘 알게 됩니다. 우리는 독신생활에서 금욕생활과 기도생활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잊 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 독신자로서 사랑과 우정의 바른 길을 걷고 있 다는 참된 표시는 기도에 대한 열성입니다. 수도자는 주님과 대화하기를 즐깁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수도자는 하느님에 의해 인도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므로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다른 표시는 공동체와 활동에 대한 투신입니다. 공동체 안에 서 다른 수도자들과 친교에서 오는 기쁨과 친교를 맺는 능력은 모든 것 이 제자리에 있다는 또 하나의 표시입니다. 대체로 독신자의 우정은 수 도생활을 촉진시키고 미사성제에서 영성체를 고대하도록 합니다. 독신자는 우정에 있어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특히 수도생활에서 지원자는 남녀의 신체적 접촉에서 오는 호르몬과 생리 화학적 면을 알 아야 합니다. 육체적 접촉과 애정적 표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상황이 주어지기만 하면 본능적으로 저절로 일어 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신중함과 심리, 문화 그리고 의학 같은 과학적 측면이 제공하는 정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바로 이 지점에 기도와 단식이 필요합니다.

자기지도와 분별(Self-direction and Discernment) 수도자는 자신의 삶을 점점 더 스스로 방향 잡아 가야만 하는 시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이는 권위나 영적 지도자 혹은 규칙과 회헌의 역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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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자 스스로가 매일의 삶에서 끊임없는 선택 을 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방향 잡아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독신 생활을 하기 위해 지원자가 공동체 안에서 온유, 겸손, 기쁨, 사랑 그리 고 평화와 같은 ‘성령의 빛’에 따라 판단할 기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지원자 때 이 말을 듣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 다. 지원자들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감정에 깨어 있어야 할 때가 오리라 는 것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존재로서 느끼는 감각(성적 충 동)도 섬세하게 알아채야 합니다. 스피들릭(Spidlicj, SJ) 신부는 동유럽 의 젊은 지원자들이 사춘기를 뒤늦게 겪고 무엇이 성적 충동인지도 모 르는 채 수도원에 입회할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느낌(feeling), 의지(will)와 동의(consent)를 구별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분별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이것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성적 충동은 사람이 갖는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그래서 애정관계로 인해 일상에서 혼란이 일기도 합니다. 독신자는 자신 들의 경험을 사람이 되기 위한 힘 그리고 이 삶의 원천과 통교하기 위한 힘으로 만들기 위해 분별하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몇 가지 숙고해 볼 것이 있습니다. a) 독신자들은 자신들의 성욕, 질투에 대한 충동, 소유욕, 육체적 접촉 에 대한 환상을 원하는 것 같은 구체적 경험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 다. 혼란스러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이 어디서 기인하고 있습 니까? 분명히 드러나야만 합니다.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의도적으 로 마음먹고 이런 충동들을 쫓아가지 않는다면 해가 될 수 없습니다. 충 동이 본능적으로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닥칠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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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가진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겸손하게 되고 우리의 힘과 생 명과 사랑이 하느님뿐이라는 것,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사랑은 절대 로 바래지지 않습니다. 거짓 하느님은 당신을 경배하는 자를 위축시키고 우울함을 조장하고 자유를 앗아갑니다. 그러나 참된 하느님은 충만하시 고 끝없이 베푸십니다. b) 독신자들이 거짓 신에게 굴복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전통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깊이 있는 기도, 하느님의 뜻과 현존에 깨어 있음, 자매들과 정신과 마음으로 일치하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 찬에서 우리들에게 분별의 기준이 되는 이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 고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과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령 의 현존이 가져오는 결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입니다. c) 독신자들은 정서적으로 이런 충동을 느낄 때 마음과 정신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항구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육을 지닌 우리 실존의 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할 때 독신자들은 은총에 그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살과 피를 가진 육의 존재를 초월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독신자는 강한 정서와 감정과 능력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이런 경험을 통해 자 신의 봉헌을 새롭게 할 절호의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이는 서원생활을 새롭게 하고 다시 불사를 기회입니다. d)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성령 께 대한 서약을 새롭게 합니다. 마음의 혼란은 수도생활과 서원생활에 늘 있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실존적 헌신을 원하십니다. 이는 성장을 위한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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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 레즈비언 - 인간됨의 형태 (Homosexualiy/ Lesbianism - Modes of Being Human) 양성에서 독신생활과 관련하여 동성애자와 레즈비언을 공동체에 받 아들여야 하는 문제가 특별히 거론되어야 합니다. 동성애자와 레즈비언 은 동성에게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고, 이성에게는 별로 관 심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성과 갖는 성행위에 강한 불쾌감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위의 설명에서 양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 시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와 레즈비언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 됨의 하나의 방식입니다. 동성애자 혹은 레즈비언이라는 것 때문에 자동 적으로 독신생활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성과 성적 관계를 맺지 않고도 동성애자나 레즈비언일 수 있습니다. 또한 동성과 성행위에 빠졌 어도 동성애자나 레즈비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나 레즈비언이 완벽한 정결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위의 설명은 다양한 형태, 즉 철저한 이성애자(heterosexual)로부터 동성애자(homosexual)까지 아 우르는 스펙트럼에서 다양한 형태의 개인적 취향을 드러냅니다.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동성애 행동을 하는 사람은 수도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원자가 최소한 입회 전 5년 동안 그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면 신중하고 지혜롭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 로 가톨릭 사회 윤리를 찬성합니다. 동성끼리의 성행위는 비윤리적이고 비난받을 일입니다. 결혼 전에 이성간의 성행위가 간음인 것처럼 말입니 다. 실제로 성행위를 하지 않는 레즈비언을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문제는 지원자가 독신을 살아낼 수 있는가라는 기본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지원자가 자유롭게 동성 간의 성관계를 물리치고 정결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 나아가 지원자가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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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에 대해 양성 지도자에게 정직하고 개방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조 건에서입니다. 마지막으로, 레즈비언은 인간됨의 종류입니다. 이는 본인이 자유롭게 선택했거나 혹은 쉽게 혹은 크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처 럼 레즈비언도 하느님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우리들처럼 하느님의 은총과 기도와 단식 그리고 회원들과의 사랑으로 독신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레즈비언의 경우 수도생활에서 종종 뒤늦게 드러나므로 다루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매적 사랑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현재 양성에서 동성애 문제는 분명히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서구 의 문제입니다. 상대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경우 이 현상은 흔하지 않고 대단히 개별적입니다. 아프리카 공동체의 경우 생명을 전해주는 자 신들의 가치가 그 문화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언 급하는 것을 상당히 조심스러워합니다.

마무리하며 독신서원은 문화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현 시대의 문화와 윤리적 요구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 우리의 근원인 유대-그리스도교 유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원자가 독신생활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독신생활 이 각 문화의 상징들과 현실 상황 안에서 생겨나고 해석되어 살아져야 하며,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그 문화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드 러내야 한다는 것으로 미래의 전망을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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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묵상 -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의 담화 존 메인 허성준 가브리엘 옮김

로렌스 프리만(Laurence Freeman)의 소개글 1976년 11월, 존 메인(John Main)은 기도에 대한 강연을 위하여 토마 스 머튼의 수도원인 켄터키에 있는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초대 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그의 강연은 스승으로서 존 메인 자신의 삶과 우 리 시대의 영성사에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수도승으로서 수도승들에게 수도승 전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담화는 겟세마니 담화(Gethsemani

Talks) 라는 책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년이 넘게 다양한 직업 과 전통을 지닌 사람들을 이끈 존 메인의 영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담화는 기도와 영적 수행에 대한 소중하고 고전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 는데, 그 범위와 관련성에 있어서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 담화의 어조는 개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영적 전통이란 본질적으로 사람에게서 사람에 게로 전달되는 구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존 메인은 먼저 동양으로부터, 그런 다음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승들, 즉 사막교부들의 가르침 안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재발견을 통하여, 그 자신이 발견한 묵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자 신의 묵상의 길은 그를 영적 여러 전통들 사이 그리고 그러한 전통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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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물질주의와 불안의 황무지 사이를 이어주는 교량이자 스승으로서, 현대 세계 안에서 수도승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이끌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상의 삶 안에서 보다 순수하고 깊은 체험을 추구 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이 ‘순수한 기도’(pure prayer)의 단순한 수행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즉, 그가 묵상을 통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관상적 차원 을 깨닫는 길과 그럼으로써 우리를 찾고 계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삶으 로 돌아서는 길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는 것이다. 묵상자와 수도승은 본 질적으로 동일하다. 20년 넘게 입증된 이 책의 호소력과 유용성은 그리스도인에게 한 가지 본질적 소명이 있다는 존 메인의 확신을 잘 드러낸다는 데 있다. 그 소명 은 근원적인 제자 직분으로 부르심으로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을 향한 전폭적이고 자기 초월적인 방향 전환이다. 존 메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심연에서 그리스도 의 제자로서 충만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스승을 따르는 것은 성부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정신에서 마음으로, 지성적인 믿음에서 마음으로 느끼는 신앙으로 옮겨가도록 요 구된다. 이 의식을 심화시키는 움직임은 묵상 안에서 일어나고 방향을 잡아가는 것인데, 존 메인은 이것을 ‘체험’이라고 한다. 전통은 이러한 개 인적 체험을 꽃피우고 뒷받침하는 배경이다. 존 메인은 전통을 따르는 체험으로 되돌아갈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 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강조가 현대 영성의 신경을 건드렸음을 20년간 보아 왔다. 그리스도교의 제도적인 실패나 그 제도가 지닌 약점에 기인한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피상적 거부는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과 문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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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손상을 입혔다. 이 점을 직시하면서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전통 안에서 구도자로 머물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전 통적 영역과 보다 깊은 접촉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역사 적, 신학적 바탕을 둔 관상수행 없이 거기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바로 이 점이 존 메인이 그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 있 었던 이유였다. 관상적 체험(교회의 진정한 체험)이 공동체를 양육한다 는 그의 견해는 전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묵상 공동체들 안에 서 입증되고 있다. 즉, 가정, 교회, 병원, 학교 그리고 일터에서 매주 모이 는 수많은 소그룹 모임들이 그 예이다. 도시의 그리스도교 묵상 센터들 은 다양한 전통들에 속한 사람들이나 어떤 전통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의학에서 문학에 이르 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일 년에 한 번 존 메인 세미나를 지도한다. 달라 이 라마도 한 번 이 세미나에 초대되었다. 관상수행에서 얻은 그들의 영 감은 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나누어지고 있 다. 그리고 관상적 가르침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사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묵상의 열매들이다. 존 메인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묵상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다. 이 겟세마니 담화 는 그리스도교 묵상에 대한 존 메인의 첫 번째 공적 가르침이다. 여기서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후에 그가 사람들에게 묵상 을 소개할 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제들이다. 그에게 있어 묵상 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매력이며 어려운 도 전이다. 우리는 단순하다는 것을 쉽고 빠른 것으로 생각한다. 존 메인은 이러한 환상을 없애기 위해서 묵상을 기술이나 방법으로보다는 오히려 수행으로 말하기를 좋아했다. 단순성에 도달하는 데에 있어 일차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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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는 이전 스승들과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분심이라는 우리의 고질적인 상태가 있지만, 그 이면에는 우 리의 습관적인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단순성만이 단순하게 할 수 있고, 오로지 순수함만이 순수하게 한다. 그러므로 요한 가시아노의 ‘기도양식’[“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 소서.”(시편 70,2)]인 만트라(mantra)는 묵상자로 하여금 복음에서 말하 는 참된 행복들 중의 하나인 영의 가난과 마음의 순결로 인도하는 단순 성의 성사(sacrament)이다. 현대 영성의 추구는 확실히 사람들이 그들 인간성의 모든 측면과 맺는 관계 안에서 균형 있고 통합된 새로운 삶의 길을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 메인은 이것이 지혜롭고 성취할 수 있는 목표이지만, 선한 의지 그 이 상의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신을 단순하게 하고 마음을 정 화시키는 내적 여정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길 것을 요구한다. 존 메인 이 우리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던 묵상의 열매들은 우리 인격의 변화와 세 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응답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의 관계이다. 그 안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 사랑의 신 비와 초월 안에서 만나며, 거기에서 수행과 자유로운 추종이 어떻게 사 랑의 자유로움으로 이끄는가를 보게 된다. 이 아름다운 비전은 다음과 같은 그의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즉, 매일 두 차례의 일상적 묵상수행이 늘 우리 안에 현존하는 ‘기도의 강물’, 즉 예수님께서 인간 본성의 근본 적 진리로서 선포했던 ‘생명수’를 흐르게 한다는 것이다. 존 메인은 이전 수도승들과 마찬가지로 매일의 규칙적 기도수행이 우리를 지속적이고 끊이지 않은 기도의 상태에로 이끌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존 메인은 겟세마니에서 묵상에 대해 공개적으로 가르친 후, 여러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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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많은 테이프들을 내놓았다. 그것들은 그의 분명한 초점, 명쾌함, 그리 고 영적 관대함으로 새로운 세대에게 아주 신선한 영감을 주는 것들이 었다. 하지만 겟세마니 담화 는 나중에 그가 여러 방법으로 말했던 것들 이 상당히 단순하다는 사실과 몇 마디 말로 명확하게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책자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묵상에 대한 그리고 스승으로서 존 메인의 정신(spirit)과 그의 매력적인 태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소개서이다.

로렌스 프리만 국제센터 그리스도교 묵상을 위한 세계 공동체 1998년 11월

제 1 담화 : 존 메인 자신의 묵상 시작에 관하여 성 베네딕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저는 이 시간에 단순히 기 도에 대한 이론보다는 오히려 기도에 대한 충만한 체험과 이해를 여러분 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비인격적인 이론이 옳긴 하지만 그것은 영원 히 공중에 뜬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론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위 해서는 개인적인 상황에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 이론 은 올바르고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제가 처음으로 묵상을 알게 된 것은 수도승이 되기 훨씬 전으로, 말레 이 반도에서 영국 식민지 행정 공무원으로서 일할 때였습니다. 인도인이 었던 제 스승은 힌두교 수행자로서 쿠알라 룸푸르(Kuala Lumpur) 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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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사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공무나 다른 일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의 평화로움과 고요한 지혜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번 은 공무를 마친 후, 그가 기꺼이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 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우리는 기쁘게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에 게 종교를 갖고 있는지 물었고, 저는 가톨릭 신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런 다음 그는 저에게 어떻게 묵상하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이냐시오 묵 상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 그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그는 잠시 침 묵한 다음에, 자신의 묵상 전통이 이냐시오의 묵상과 매우 다름을 정중 하게 지적했습니다. 스와미(힌두교 수행자)에게 있어 묵상의 목적은 우 리 마음 안에 거하는 우주의 영에 대한 깊은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었습 니다. 그는 『우파니샤드』(Upanishads)의 다음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 는 모든 것들, 모든 일과 욕망과 향기와 맛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온 우주를 포용하고, 침묵 중에 모든 것을 사랑한다. 이것이 내 마음 안 에 있는 영이다. 이것이 브라만(Brahman)이다.” 그 스와미는 그러한 믿음과 의미를 담아 이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저 는 그에게 묵상하는 법을 배우고자 그의 제자로 받아 달라고 청했다. 그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묵상은 매우 단순합니다. 묵상하기만 하면 됩니 다. 당신이 배우고자 한다면 나는 당신을 가르치겠습니다. 내가 제안하 는 바는 이것입니다. 즉, 일주일에 한 번씩 내게 와서 나와 함께 묵상하는 것입니다. 묵상하기 전에 나는 몇 가지 사항을 언급하겠지만, 중요한 점 은 우리가 함께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그 수행자를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처음 방문 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묵상하기 위해서 당신은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자신을 고요하게 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전통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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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고요와 정신집중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 다. 우리는 만트라라 부르는 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묵상을 위해 당신이 할 일은 이 단어를 선택한 다음에 그것을 충실히 사랑으로 계속 반복하 는 것입니다. 거기에 묵상을 위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이밖에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함께 묵상하기로 합시다.” 그렇게 해서 저는 약 18개월 동안 매주 정기적으로 그 수행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의 옆에 앉아서 30분 동안 함께 묵상했습니 다. 그는 저에게 이 수행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하루에 2번 30분씩 묵상을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권했습니다. “나를 만나러 왔 을 때 하는 묵상만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하루 한 번 묵상하 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이런 수행을 하고자 한 다면 그리고 이 만트라가 당신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기를 바란다면, 최소 한 아침에 제일 먼저 30분간 묵상하고 저녁에도 30분간 묵상하는 것입 니다. 그리고 묵상 시간 동안에 당신의 마음 안에 생각이나 단어나 상상 이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 마디의 소리가 당신 만트라의 소리, 즉 당신의 말이 될 것입니다. 만트라는 조화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 이러한 조화가 울릴 때 우리는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 러면 그 반향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완전성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존재 안에 있는 모든 것과 깊은 일치를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조화는 당신과 모든 피조물과 모든 창조 사이에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 하고, 당신은 창조자와 일치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나는 자주 스와미에게 물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해야 합 니까?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수행해야 합니까?” 그러 나 스와미는 저의 이러한 어리석은 질문을 무시하고 참으로 그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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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지혜를 한마디로 요약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만트라를 되뇌십시오.” 이것이 18개월 동안 그가 말한 모든 것의 본질적인 핵심이었다. “당신의 만트라를 되뇌십시오.” 초월명상(T.M., Transcendent Meditation)의 발견과 비틀즈가 출현하 기 몇 년 전, 제가 더블린(Dublin)에 있는 삼위일체 대학에서 법학을 가 르치기 위해 유럽으로 되돌아 왔을 때, 저는 이런 묵상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먼저 동료 신부들에게 이 러한 주제를 거론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러한 제안에 그들 대부 분이 커다한 의혹과 심지어 적의를 가지고 저를 대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저는 다음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이 착한 사람들 이 예수회 스타일의 묵상법을 매우 충실하게 실행해 왔고, 그들 가운데 가장 열심한 사람들은 아침마다 정해 놓은 목록표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신기도를 준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매우 난해하고 다소 복잡하게 보였습니다. 1930년대 신학교에서 널리 추천된 차우타드 (Chautard)의 사도직의 핵심(The Soul of the Apostolate) 은 매우 신실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너무 복잡해 서 저를 더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아침과 저녁 묵상 순례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줄 곧 묵상에 점점 이끌려 들어갔고, 특히 아침과 저녁 시간은 저의 하루를 이루어 가는 진정한 축이 되었습니다. 이즈음(1958년), 제 조카가 중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제 조카의 죽음은 저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저로 하여금 모든 존재의 목적과 생과 사의 질문들에 직면케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제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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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전 존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 묵상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 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을 이러한 묵상 위에 세우기로 결정 하였고, 수도승이 되어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수도승이 되었을 때, 저에게 묵상의 또 다른 방법이 제시 되었습니다. 저는 베네딕도회 수련자로서 그것을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 새로운 방법은 소위 ‘능동의 기도’(prayer of acts)로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30분을 흠숭, 참회, 감사, 탄원의 행위로 보내는 것이었 습니다. 그러니 주로 정신으로 하느님을 생각하고 주로 마음으로 그분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상황을 “그것이 무엇이든, 있는 것은 옳은 것이다.”라는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1)의 말과 같이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형태의 기도에 점점 더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각하게 직면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 후에 제가 수도승으로서 점점 더 바빠지게 되자, 이러한 사실은 점점 덜 절박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생애에 이 기간은 커다란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무의 식적으로 저의 수련장은 제 삶의 중심에서 포기하는 것을 제게 가르치 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가장 거룩하게 생각했던 그리고 삶의 기초 로 삼고자 했던 수행을 포기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보다도 저는 하느님 위에 제 삶을 건설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다 음 몇 해는 제 영적 발전에 있어서 황폐한 시기였지만, 저는 항상 수도승 으로서 제 삶의 기초를 놓았던 순종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 내면 깊이 어딘가에 다음과 같은 믿음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

1) 알렉산더 포프(1688-1744)는 영국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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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방황하도록 저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길로 다시 부르실 것이 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 자신이 아니라 그분께 대한 위탁 에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모든 것이 긴급한 행동을 영원히 미루게 함으로써 좀 더 살아 있는 기도의 삶을 게을리하는 퇴보의 시기가 제게 왔습니다. 제가 워싱 턴 D.C.에 있는 성 안셀모 학교의 교장이 되었을 때, 저는 제 수도생활 중에 가장 바쁜 시절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당시 긴급한 과제는 새 과학 관 증축자금 모금, 대학 배치, 시험 평가 등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젊 은이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관해 뭔가를 배우고자 수도원에 찾아왔 습니다. 그는 어떤 힌두교 스승과 함께 지냈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교 의 가르침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가 공부할 첫 번째 책으로 어거스틴 베이커(Augustine Baker)2)의 거룩한 지혜(Holy Wisdom) 를 그 에게 주었는데, 이 책은 그를 몇 주 동안 고요하게 생각에 잠기도록 했습 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적이고 즉각적인 감동을 보인 것에 저는 놀랐습니 다. 제가 그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그 책을 함께 읽기 시작했고 곧이어 함께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베이커의 책에서 저는 기도의 단순성과 실재성 안에서 희미한 기도에 대한 이해와 함께, 몇 년간 단지 사무적이고 둔감했던 수도소명의 경이 로움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베이커의 책에서 ‘능동’과 ‘일반적으로 탄 식 기도라고 부르는 것들’을 다루는 부분에는 만트라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들어 있었습니다.3) 그는 확신을 갖고 호소력 있게 자신의 그릇된 2) 어거스틴 베이커(Augustine Baker, 1575-1641)는 영국 베네딕도회 영성의 대가로 신비주의 자이자 금욕주의자였다. 3) 참조. Augustine Baker, Holy Wisdom , London: Burns Oates & Washbourne, 1964,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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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글을 썼는데, 그 방향전환은 그를 어느 정도 올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권위 있게 다음과 같이 글을 썼습니다.

“전혀 연속적이지 않으며, 중요한 고독 속에 전혀 있지 않는 구송기도 는 명상의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거기에서는 관상기 도의 참된 정신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는 심지어 가장 위대 한 추상작용과 엄격한 금욕생활 안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가 시아노와 제르마노가 엄격한 회수도승생활 안에서 여러 해 동안 수행했 다 하더라도, 그들이 거룩한 은수자들의 순수한 영적 기도(이미지로부 터 자유로움)에 관한 담화를 들었을 때 놀랬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4) 베이커는 성 베네딕도가 가시아노의 담화집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강 하게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제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들에게 마음을 돌리게 했습니다. 내가 읽은 제10담화에서, 기도에 필요한 고요를 얻기 위해서 짧은 한마디 구절을 사용하는 수행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은 모든 사고의 부유하고 풍부한 것들을 통제하고 물 리쳐라. 그리고 한 음절의 가난함에 스스로를 제한하라.”5)

가시아노의 이런 언급과 지속적인 기도의 방법에 관한 제10담화를 읽 4) 같은 책, 같은 곳. 5) 요한 가시아노, 담화집, 10,11: 허성준 역주, 『스승님 기도란 무엇입니까?』, 생활성서, 2007, 204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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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서 저는 다시 고향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만트라의 수행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담화집의 지혜로운 가르침에 담겨 있는 요한 가시아노와 그의 친구 제 르마노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현대의 수많은 서구인들이 무언가를 찾고자 동양으로 가는 것처럼, 4세기의 이 두 젊은 수도승들도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자 스승을 찾아다니느라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살아 있는 전통을 찾고자 베들레헴에 있는 수도원으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대수롭지 않는 생활양식 으로 인해 크게 실망했습니다.6) 예로니모가 지적 논쟁의 불씨를 가지고 도착했을 당시, 그들은 이집트 사막을 향해 떠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 니다. 제9담화에서 가시아노와 제르마노는 이사악 아빠스를 방문하여 기도에 관해서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사악 아빠스는 단 순히 어떤 이론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들에게 분명하게 응답했습니다. 그 는 자신의 체험, 자신의 정제된 지혜, 즉 기도와 철야에 대한 지속적인 충실성 안에서 배운 지혜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가시아노와 제르마노는 그 거룩한 사람에게 매료되어 그의 말에 더욱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사악 아빠스가 지속적인 기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마치 그들이 찾고자 했던 스승을 발견한 듯 불타오르는 마음 으로 경청했고 온 마음으로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을 끊임없 이 회상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거룩한 사람이 오랫동안 수행 하였던 것을 우리의 삶 안에서 체득해야 한다.” 6) 참조.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17,10; “요셉 아빠스의 둘째 담화”, 『코이노니아』, 제37집 (2012, 여름),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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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 안에서 일깨워진 불타는 영으로 이사악 아빠스와 작별 을 고하고, 그들이 있었던 은둔처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많은 것들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유일한 것이 라는 것과 우리는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죽음 으로부터 예수님을 일으키신 그분의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그 분이 우리의 죽을 몸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 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이곳으 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룩한 아빠스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 은 것이 있다. 즉,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행해야 하는가? 어떻게 이러한 지속적인 명상과 기도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은 이사악 아빠스를 다시 찾아갔고, 조바심과 존경스런 어 조로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기도의 주제에 대해서 사랑으로 훌륭하게 말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금언들은 저희 눈을 거의 멀게 했습 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희가 어떻게 그것을 행해야 하는지는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젊은 이상주의자들의 이러한 열성에 이사악 아빠스의 응 답은 격려와 동시에 침착함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예견했다는 인상을 주었고, 그들 지향의 진정성을 시험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기도의 방으로 안내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생 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이미 이해 의 문 옆에 있으며,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기 시작한 사 람은 지혜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7)

7)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10,9: 허성준 역주, 앞의 책, 191-192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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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아노는 제10담화 서두에서 이사악 아빠스의 지적을 위해서 필요 한 문맥을 미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잘 해설된 ‘교의’가 매우 중요하 다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교의에 대한 무지는 무서운 신성모독 과 가톨릭 신앙에 대한 심각한 해악을 가져온다고 보았던 것입니다.8) 이 러한 장엄한 교의는 뒤이어 나오는 세라피온 아빠스의 이야기에서 매혹 적으로 개인화됩니다. 세라피온은 인간의 형상이나 유사성 안에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신인 동형론’ 이단에 떨어졌던 그 당시 사막 공동체의 많은 교부들 중 한 분이 었습니다. 가시아노의 논점은 이러한 것이 모든 그리스도교 기도에 상당 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우리 자신의 크기로 잘라낸다. 즉, 우리와 그분의 다름이라는 심연을 회 피하려고 편리한 우상과 울부짖기에 편한 후견인을 만든다. 이에 반해 서,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그분의 절대적인 초월성과 우리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그분의 온전한 친밀함 이다.” 이제 세라피온은 지식인 포티노(Photinus)를 통해서 이러한 기도에 대 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40년간 사막에서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던 세라피온은 ‘신인동형론’의 무익한 황무지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습니 다. 다시 한 번, 세라피온이 지도받은 가시아노의 가톨릭적 기도방법9)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습니다. 그것은 상상이 없는 기도, 한 음절을 반 복함으로써 그 자체를 통제하는 “가난의 기도”입니다. 가시아노는, 사막 의 은수자들은 세라피온이 가톨릭 신앙의 기도로 전향했다는 소식을 들 8) 참조.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서론; 허성준 역주, 앞의 책, 172-173. 9) 참조.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10,3; 허성준 역주, 앞의 책, 175-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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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 때, 그들 모두는 기뻐하며 그와 함께 기도하기 위해 왔다고 우리에 게 전합니다. 그러나 세라피온 자신은 눈물을 흘리며 가엾게 외쳤습니다.

“그들은 나에게서 나의 하느님을 가져갔다. 나는 지금 붙잡을 것이 아 무것도 없으며, 내가 경배하거나 말씀을 드릴 분도 알지 못하고 있다.”10) 가시아노는 담화집 서두에 이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그의 섬세함을 드러냈습니다. 그 섬세함이란 무엇보다도 세라피온 아빠스의 감동적인 전향 이야기를 통해서 이론을 지상으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즉, 인간의 사고로는 하느님의 완전한 초월성과 그 본 질적인 위치를 밝히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 로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녀야만 하 는 기도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기 도 안에서 제1동자(prime mover)는 주님이신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분의 첫 번째 활동은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가시아노의 ‘가톨릭 전통’ 안에 있 다면, 그리스도교 기도가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을 준비시켜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예수기도를 되뇌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가시아노는 우리가 한 구절, 즉 만트라를 말해야 한다는 이사악 아빠 스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권하는 한 구절은 “하느 님, 저를 구하소서.”(Deus, in adjutorium meum intende)입니다. 성 베네 딕도는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우리에게 이 구절로 각 시간경을 시작

10)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10,3: 허성준 역주, 앞의 책, 177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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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록 했습니다.

“이 만트라가 언제나 너희 마음에 있어야 한다. 너희가 잠자리에 들 때, 이 구절을 되뇌도록 하라. 심지어 잠잘 때도 그것을 반복하는 습관이 들 어서 너희 안에서 자리 잡힐 때까지 하라. 아침에 일어날 때 만트라가 다 른 모든 생각을 앞서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온종일 그것을 ‘마음의 은거 처’에서 끊임없이 암송해야 한다.”11)

순례의 비유는 우리가 삶을 반성하거나 혹은 우리 삶의 구체적인 부분 들을 반성할 때 종종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회의 길을 잘 묘사 하고 있습니다. 즉, 어거스틴 베이커가 우회를 거쳐 그리스도교 기도전통 으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한 것은 이집트 사막 여정에서 가시아노와 제 르마노의 물리적 수고를 묘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 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예수기도를 발견하기 위해 같은 순례의 길을 따 르도록 불리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내가 한 모든 이야기들은 제 자신의 제한된 체험 안에서 발견한 것들입니다. 저는 이것이 유일한 기도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 다. 물론 아버지의 나라에는 많은 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발 견한 유일한 방법이며, 이것이 위대한 단순함의 길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상적으로는 스승의 도움으로 각자 자신의 단어를 찾아 충실히 반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을 잘못 인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단어를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지, 실제로 아

11)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10,10: 허성준 역주, 앞의 책, 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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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과 저녁, 낮과 밤, 여름과 겨울에 그 단어를 되뇌십시오. 이 모든 것들 은 훌륭한 용기, 결단, 강인함을 요구합니다. 세라피온 아빠스를 기억하 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만트라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수도생활 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 줄 것이고, 그것은 여러분을 엄청나게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다음의 짧은 성경 말씀으로 이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 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 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게 하 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 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 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그리스 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12)

제 2 담화 : 신앙의 진리를 개인적으로 확증하는 방법인 묵상에 대하여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오늘 저녁에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묵상을 통하여, 우리의 종교 진리들에 대한 제 삶의 체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자이며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

12) 에페 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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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이며 형제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오늘 저녁기도 때 아름다운 전례 안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 각자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글자 그대로 ‘거룩함의 성전’입니다. 묵상은 단순한 과정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에 관한 진리,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 이웃 에 관한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매일 묵상 안에서 덧없는 인간 조건에서 야기되는 모든 것을 밀쳐두고, 하느님의 경이로움과 위대함, 그 분의 영속적인 현존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서 우리는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또한 경이로움에 대한 우리의 능력 을 자유롭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하느님을 발견 하는 것은 가치 있는 모든 것의 창조자인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13)와 더불 어 세상은 “하느님의 위대함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위에서 말한 것 중에서 핵심 단어는 ‘해방하다’(liberate)입니다. 묵상은 하나의 해방의 과정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이러한 진리들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단 순히 정해진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우리 응답의 형태는 매우 불완전하고 편협하며 이성적입니다. 단지 신경(creeds)과 신앙정식들(formulas)에 대한 요약일 뿐입니다. 그러나 묵 상기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적 현존을 충 만히 체험하게 됩니다. 이 충만한 체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적 현존 체험으로서, 즉 삼위일체적 삶을 우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동시에 신학적 혹은 수

13) 홉킨스(1844-1889)는 예수회의 회원으로서 영국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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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적 형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성 베드로의 말씀처럼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14)에서 이 체험이 이루어져 우리의 삶 을 살아 있게 하고 풍요롭게 하며 초월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묵상 은 배움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영어의 ‘주의 집중’(paying attention)과 불어 의 ‘기다림’(attente)이란 말의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교 신앙의 풍부함 그리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의 풍요로움을 발견하려 한다면 이 기본적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묵상 안에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인격적인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현혹되지 않고 평화 중에 머물며 창조에 대한 온전한 경이로움을 즐기는 것을 배움으로써 이것을 알기 시 작합니다. 이와 같이 충만한 마음으로 시편저자와 함께 다음과 같이 노 래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에 그저 당신께 감사합 니다.”15)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저는 우리 일상의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간과 되는 한 가지 진리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일상생활은 자주 단순한 일들 로 차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하느님에게서 유래한다는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기본적인 신조입 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어렸을 때에 그것을 기계적으로 배웠습니 다. 그래서 그것을 완전하게 깨닫지 못하고, 진부한 추상적 신조에 갇혀 있으며, 성령의 활동 안에서 그 참된 목적에 봉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히브리인들에게 열정적으로 권고했을 14) 1베드 3,4. 15) 시편 1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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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지녔던 그러한 마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 교리를 떠나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 다. 죽은 행위에서 돌아서는 회개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세례에 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해 새삼스럽게 기초를 닦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허락하시면 그렇게 할 수 있 을 것입니다.”16)

만일 사람들이 그들의 신적 기원에 대해 신앙 조항으로서가 아니라 직 접적으로 숙고한다면, 비록 어렴풋하게나마 우리 모두는 존재 안에 있 는 경이로운 분위기 안에서 매일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놀 라운 면은 창조자이신 하느님의 무한한 능력과 놀라움으로 인해 작아지 거나 위협을 받지 않고 오히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된다는 것입 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일생 동안 경외심을 지니고 살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형제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계시 안에서 우리 가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의 본성과 존재에 참 여하도록 불리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우리 각자는 동일하게 그리고 유일하게 무한한 가치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 부터 무에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에 의해서 우 리 모두 구원받았고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기원의 영구적 보증 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중요성과 가치의 항구한 보증으로서 당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 안에 거하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거룩한 성전

16) 히브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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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심! 바오로 사도가 히브리인들에게 권고했던 ‘성숙’은 그가 “그리스도교 기 본 원리들”이라고 언급한 논증적 작업들인 신조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 것은 오히려 단지 신조의 왜곡과 피할 수 없는 한계로부터 해방이었습니 다. 그리고 이런 성숙은 계속 발전한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한번 빛을 받아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 이, 또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힘을 맛본 사람들이 떨어 져 나가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회개하도록 만들 수가 없습니다.”17)

현재 우리 모두는 오직 신학적 이론 수준의 진리들에 너무 익숙해 있 습니다. 그러나 묵상에서 우리는 실제로 이러한 진리와 더불어 사는 것 을 발견하게 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살기 원하게 됩니다. 묵상기도는 신학적 명제에 관하여 숙고하는 지적인 훈련 이 아닙니다. 묵상에서 우리는 성부, 그의 아들 예수, 성령에 관하여 전 혀 숙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것들을 행하려 노 력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있고 자 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분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께서 성부를 계시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님 이 성부께로 가는 우리의 길이라는 것도 우리가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 나 진정 우리가 체험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 성령 의 능력입니다. 그 체험 안에서 그분의 아버지이며 우리 아버지의 현존

17) 히브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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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 조건인 피조물의 상태에 관해 숙고할 때, 우리 삶 에서 창조자와 피조물의 근본적인 관계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기도가 단지 과외의 일이거나 선택적 활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것은 단순히 의무도 아니다. 기도는 우리 존재의 모든 것에 대한 기본적 이고 근본적인 체험입니다. 달리 말해, 기도는 우리 존재의 기원과 정체 성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 본질적으로 기도는 우리 자신의 인간 본성 에 온전히 주의를 집중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의 피조성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 아 우구스티노는 매우 간결하고 놀랍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사람은 먼저 자신 안에서, 하나의 디딤돌을 만들면서, 스스로를 회복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일어설 수 있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 게 된다.18)

그러므로 묵상과 기도는 어떤 것을 ‘행하는’ 방법이 아니라, 누군가가 ‘되어 가는’ 길, 즉 우리 자신이 되어 가는 길입니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 되고 예수님에 의해 구원되고 성령의 성전인 우리 자신이 되어 가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묵상에서 우리는 생각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심지어 거룩한 생각조차도 넘어서야 합니다. 묵상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 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상기도에서 우리는 불림받은 사람으로

18) Augustinus, Retractationes , I (viii) 3: Patrologia Latina , XX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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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생각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분과 함께 있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분 현존 안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단순히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분이 우 리를 부르시는 그 존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하느님 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그 외의 것들은 저절로 주어지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 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우리 들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양 문화의 지나친 지적 활동에 영 향을 받아 왔으며, 스스로를 ‘이성적 피조물’로서 너무 좁게 제한하고 있 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을 메마르게 한 근본적 이유 중 하 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 인격적 응답은 약화되고, 기도에 대한 매우 빈약한 이해로 우리가 행하는 것은 오직 지적이고 장황한 말 들뿐입니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목적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로움 과 고요한 현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점차 우리 안에 있는 몇 가지 실재 중 하나가 아니라, 우리는 존재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의미와 형태와 목적을 부여하는 그 실재가 될 것입니다. 뉴먼 추기경(Cardinal Newman)은 이것을 “개념적 동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아무리 아름답고 진실하게 표현되었을지라도 말을 위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신비로운 일치로 들어갈 때, 우 리의 말은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모든 말을 초 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서 단순성의 길을 발견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저는 만트라의 길에서 이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시 가시아노의 말에 귀 기울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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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끊임없이 묵상함으로써 정신이 강해 질 때까지, 사고의 온갖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포기하고 거부하게 될 때 까지 이 기도의 형식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어야 한다.”19)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수도자들(사실상 모든 사람) 의 실제적인 위험은 살아 있는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나 이해 또는 투신보다는, 단지 신조에 응답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자 들에게 매우 심각한 위험은 믿을 교리들을 반복함으로써 독선과 자기만 족에 쉽게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정치가가 자유, 형제애, 평등 에 관해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과도 한 지적 활동의 결과, 대개의 경우 우리를 반쪽만 살아 있게 만듭니다. 좀 더 기분 나쁘게 표현한다면, 우리는 마치 반쯤 죽은 사람과 같다는 것 입니다. 그것은 엘리어트(Eliot)의 『대성당의 살인』에서 캔터베리의 여인 들의 진술처럼, 온전치 못한 삶의 환상 그 자체는 죽음을 초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사는 것과 부분적으로 사는 것. 그 조각들을 모두 줍는 …”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가난의 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삶 안에서 가난의 정신을 살도록 초

19)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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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의 처지에, 즉 하느님과 이웃에게 온전히 그리고 깊이 감응하기 위해 자기를 헌신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저는 수도자의 가난이 하느님의 모든 영광 안에서 그분의 경이에 대한 생생한 고백과 함께 고려된다고 봅니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 모든 존재가 존재이신 그분을 반영하고 나누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 이 우리가 구체적인 삶 안에서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다시 고려할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가난을 단지 포기와 같은 부정 적 용어들로 언급했는데, 그리스도인이 사는 가난의 상상할 수 없는 풍 요로움을 깨닫고 깊이 숙고한다면, 우리는 가시아노가 “숭고한 가난”20) 이라고 한 그러한 가난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약한 가난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부유함과 영광 의 진리를 확실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이러한 승인, 긍정, 수용 안에서 단지 소유물이 아니라 그분 안에 우리의 참된 부유함과 영 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의미에서 가난 의 정신은 우리 자신의 무한한 가치에 대한 확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소중한 대상입니다. 수도승들의 가난 서원은 개인적 가난이라는 단순한 포기라기보다는 오 히려 우리 삶 안으로 훨씬 더 깊이 들어가서 하느님에 대한 지속적인 체험 에 우리를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수도자로서 서약한 가난 은 돈과 물질적 소유물의 포기로 상징화됩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참 된 가난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포기는 물질주의가 주는 모든 소외된 경향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물질주의는 쉽게 우리 각

20)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10,11: 허성준 역주, 앞의 책, 204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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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주위에 울타리를 쌓습니다. 그 울타리는 중세 도시의 높은 성벽이나 도시 주변의 공장 구내를 지키기 위한 가시철조망처럼 실제적입니다. 이러 한 자기소외의 울타리 뒤에서 우리는 매우 안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우리의 안전은 이러한 주변 환경과 이웃들을 받아들이고 조화 롭게 사는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안전은 폭력에 의해 드러나는 지 속적 거절과 반감에 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립 을 위협하는 모든 사람을 가르치도록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은 이것이 묵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묵상(묵상기도와 관상기도) 안에서 우리는 근본적 가난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가시아노는 “한 구절의 가난에 우리의 정신 활동을 제한하라.” 하고 말합니다. 가시아 노는 그럼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한 풍부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확 언합니다. 우리의 ‘안전’은 부정적인 힘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 안에 있는 하나의 긍정적인 힘, 즉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체험되고 알게 되는 하느님 자신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 들에 권위를 부여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확신과 용기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포기’와 같은 용어를 사용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진정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그분의 선 하심에 대한 관상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진정으로 우리 자신에게 가까워질 때 비로소 이것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기도 자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음의 진리를 체험하기 위한 길입니 다. “목숨을 얻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 을 것입니다.”21) 그러나 우리는 먼저 준비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첫 번째

21) 마태.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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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는 묵상 안에서 한 구절의 가난함에 우리의 삶을 내어놓을 수 있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 리가 형제들과 함께 살며 존경받고 사랑받는다는 체험을 할 때, 우리는 전적인 가난과 포기를 실행하는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확 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아포기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 에서 ‘자아긍정’입니다. 묵상과 가난은 자아부정의 형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도 망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 자신을 찾고, 한 개인으로서 사랑받는 우리의 무한한 능력 에 대한 체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기주의와 거짓 자아에 바탕 을 둔 활동을 넘어서는 참된 자아의 조화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잘 입증됩니다. 제노아(Genoa)의 성녀 카타리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존재입니다! 그분 안에서 내 자아 가 구원된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22)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철저한 자기포기와 개인적 가난의 근원적 경험을 거쳐야만 합니다. 선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에 죽어야 하는지는 자아 혹은 정신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와 정신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는 우리를 잘못 인도하여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무지의 구름』에서 언급되는 대로,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영리함으로 그 단어를 분석하거나 설명”23)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 안에서 우리가 22) Evelyn Underhill, Mystics of the Church , London: James Clarke & Co Ltd, 1975, 51. 23) The Cloud of Unknowing , Penguin Books, 1961, Chapter 36. 우리말로 번역된 책은 『무 지의 구름』(성찬성 역, 바오로딸, 199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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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비실재(非實在)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포기의 고통은 우리가 비실재적인 것에 스스로 약속했던 정도와 환상을 실재로 보았던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에서 우리는 자아를 고립시키는 환상 을 제거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자아에 집중함으로써, 또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께서 구원하신, 성령의 성 전인 참된 자아에 집중함으로써 지속적 신앙 행위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제시한 그 역설 속 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것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기꺼이 스승의 명령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에 묵상은 신앙의 기도가 됩니다.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생명을 잃 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자아를 발견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 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한 것은 (성 아우구스티 노의 표현을 따르면) 하느님께 나아갈 기본적 디딤돌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확신을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단계란 더 이상 새롭게 발견한 자아를 쳐다보지 않고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서 타자에게 돌리는 단계입니다. 묵 상은 확실히 신앙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께서 나타나실 것 이라는 확실한 보증 없이 타자가 나타나기 전에 스스로를 뒤로하고 떠나 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난의 본질에는 소멸의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위험은 바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타자를 향한 신앙의 도약입니다. 모든 사랑에도 이런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짧은 묵상 수행에서 얻 은 체험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메마름의 과정이 지속된다는 것과 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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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을 계속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 기도의 발전에서 미묘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 중에 내면 깊이 들어가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포기하려 할 때, 완전한 가난으로 부 르심을 회피하고 되돌아간다거나 묵상을 포기한다거나 만트라 수행을 포기하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 중심의 기도보다는 자 기중심의 기도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강하게 받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마취된 기도’, ‘표류하는 경건심’으로 묘사되는 기도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가시아노는 이 기도를 “황폐한 평화”(pax perniciosa)와 “치명적인 혼수상태”(sopor letalis)라고 묘사했습니다.24) 이것이 바로 우 리가 넘어야 하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버리도록 초대하 십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 생명을 잃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시아노가 권고했듯이 한 단어에 우리 정신을 집중 하는 것은 우리 포기의 진정성을 드러내 줍니다. 기도에 대한 그의 가르 침을 따르면, 우리는 기도 중에 생각이나 상(像), 심지어 자아의식과 언 어와 숙고의 기반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지의 구름』 저자가 “노동의 시간”(the time of the work)이라 부른 기도 시간에, 왜 하느님의 이런 모든 선물을 포기해야 하는지 명확히 해야 합니다. 단순히 그것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 들이 자기이해와 통교에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수단들이라는 것을 부인 하는 것은 실로 모순입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사회적 혹은 개인적 관계 에서 그것들이 아무런 위치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포기하는

24) 참조. 요한 가시아노, 앞의 책 10,8; 허성준 역주, 앞의 책, 187-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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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전례적 응답의 전 과정은 언어와 몸짓과 형상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우 리에게 필요한 것과 온 세상에 필요한 것을 당신 이름으로 성부께 청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속적으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존재의 중 심에서 그분이 우리가 생명을 버림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부르셨 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 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모든 활동을 넘어, 활동 그 자체의 유일한 원리( 움직임의 원인과 결과)로 넘어가는 근본적 단순성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 존재의 가장 단순한 곳에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오직 존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 며, 존재를 유지시키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 외에 다른 존재 이유 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순한 존재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기쁨을 체험 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존 재하거나 혹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데, 바로 이 모든 것을 포기 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 앞에 단순하게 서게 됩니다. 가시아노가 권 고하는 한 구절의 가난은 묵상에서 우리가 생명을 잃음으로써 다시 얻 게 하는 수단이며, 우리를 무(nothing)가 됨으로써 모든 것(the All)이 되 게 하는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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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봉헌자와 관상기도1) 로렌스 프리만 김한창 토마스 아퀴나스 옮김

저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왜 베네딕도회 수도승이 되 었습니까?” 그때마다 대답에 앞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어느 사막교부의 말입니다. 그는 “수도승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라 는 질문을 받고, “수도승은 날마다 수도승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스스 로에게 물어보는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도 제가 받은 질 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똑같이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여기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왜 봉헌자가 되었습니까?” 아마도 그리스도교 수도회들 중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생활만큼 그 표현범위가 광범위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교사와 교육자 에서 농부와 은수자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 베네딕도께서는 성규에서 “수도승의 유형은 여러 가지”라고 하시고, 그중에서 회수도승 생활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또 말씀하시기를, 성규 전체는 고독의 사막에서 단독 전투를 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초보 자들을 위한 작은 규칙”(RB 73,8)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일정한 형태의 고독을 수도생활의 목표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고독의 의미는 개인의 소명 안에서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수도승의 1) 이 글은 2009년 10월 3일 이태리 살레시아눔에서 개최된 “제2차 세계 베네딕도회 봉헌자 대회”에서 로렌스 프리만(Laurence Freeman OSB)이 발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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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다각적으로 접근해 보면 지난 1600년 동안 베네딕도회가 하느 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는 풍부한 다양성과 적응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베네딕도회 수도승의 다면적 정체성은 봉헌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은 무슨 매력에 끌려 봉헌자가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삶의 무대 가 바뀔 때마다 어떻게 봉헌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젊은 부모로서 혹은 전문직업인으로서 혹은 은퇴 후에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많은 수도원들 이 문을 닫거나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역사에서 큰 위기를 맞이한 이 시대에 봉헌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닙니까? 저는 이번 제2차 세계 베네딕도회 봉헌자 대회(The Second World Congress of Benedictine Oblates)의 도전적인 주제 범위 안에서, 특히 관 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몇 가지 문제점들을 찾아보고 그 해결방안으 로서 묵상 수행법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베네딕도회 수도승의 생활은 복합적입니다. 전적으로 관 상적이지도 않고 전적으로 활동적이지도 않습니다. 수도승은 생활비를 벌어야 합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탁발수도승이 아닙니다. 이 점이 프란치스코회 수도승이나 불교의 탁발 스님과 다릅니다. 다시 말하거니 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관상과 활동의 차원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표현들이 가능한 것입니다. 『무지의 구름』(T he Cloud of Unknowing)2)에 따르면 어떤 삶도 완전히 관상적이거나 완전히 활동적 인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베네딕도회의 훌륭한 상식입니다. 관상과 활 동을 통합하면 의미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 2) 중세에 나온 이 책의 저자는 미상이다. 이 책은 기독교 신비주의를 다루는 관상수행의 안 내서이다. 『무지의 구름』(성찬성 역, 바오로딸, 1997)이란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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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을 의 미하는 것 같습니다. 장 르클레르(Jean Leclercq OSB, 1911-1993)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도승이셨던가요? 그렇다면 우리도 모 두 수도승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수 도승이 될 권리가 있습니까?” 베네딕도회 수도승의 삶과 복음의 중심에 는 이러한 정체성의 긴장이 있습니다. 이 긴장은 실로 인간의 삶 자체 안 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뇌의 이중 반구형의 구조(bi-hemispheral structure)에도 상보적(相補的) 긴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긴장을 베네딕도께서 는 성규에서 지혜롭고 훌륭하게 다루셨습니다. 수도승들과 봉헌자들은 같은 성규를 준수하지만 그 긴장을 다르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세속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갈등과 혼란이 만 연하고 종교와 영성에 대한 생각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도 우리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성숙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수많은 세대와 문화 속에서 축적된 성 베네딕도의 지혜가 지닌 잠재력과 가치는 엄청날 것입니다. 수도승은 맑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견실하게 뿌리 내려 성장할 수 있으며, 하늘의 새들이 둥지를 트는 하늘나라 나무 같으 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오늘날 수도승에게 필요한 성장은 성규의 관상 적 에너지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관상 생활의 회복 우리 시대에는 영적 경험을 추구하겠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흔 히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대다수는 그리스도교에서 예식이나 도덕적 교 훈이나 규칙들이나 순종을 제외하고서는 얻는 것이 별로 없다고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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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수도원은 이러한 서구인들의 ‘종교 거부’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베네딕도 16 세 교황께서 수도원들을 향하여 구라파를 새롭게 하고 ‘사랑의 문명’을 창조해 줄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수도원 제도는 순수한 매력을 지니 고 있으며 진정한 대안적 생활방식을 보여줍니다. 영화 “위대한 침묵”3) 의 엄청난 인기는 이를 분명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교회생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앙과 신학과 기도에서 관상기도의 복원이 널리 확산되어 왔습니다. 12세기 이 후, 기도와 신학의 분리에 이어 나타난 관상의 경시풍조, 관상이 점점 더 봉쇄수도회의 ‘전유물’이 되어가는 현상 그리고 16세기 이래로 사람들이 흔히 지녀온 관상에 대한 의구심은 모두 크게 감소되었습니다. 여러 형 태의 직업을 가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예전 같으면 엄격히 수도승들의 전유물로 여겼을 관상기도를 자기들의 기도 형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 이고 있습니다. 『봉헌생활』(Vita Consecrata)4)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관상기 도를 교회생활의 주류로 다시 도입할 것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수도공동체의 삶은 단순하지만 전체 교회공동체가 지향하는 목표를 가시적으로 대변합니다. 관상적 삶은 어떤 일보다도 더 값진 순수한 사랑 의 표현이므로 여기서 나오는 사도적, 선교적 효과는 엄청난 것입니다.”5) 3) 필립 그로닝(Philip Groning) 감독이 프랑스 알프스의 카르투시오회 수도승들의 일상생활 을 밀착 기록한 영화이다. 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권고 『봉헌생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5) 참조. 같은 책, 5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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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관상과 활동은 대립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공의회 이래로 모든 교황께서는 수도회에 대해서 관상생활을 새롭게 하고 이것을 하느님 백 성과 공유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예언자적 인물들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 비드 그 리피스(Bede Griffiths, 1906-1993), 존 메인(John Main, 1926-1982)이 있 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분들의 예언적 통찰과 실험들이 특이하여 혼란스럽기까지 하다는 사실입니다. 관상가들은 평지풍파를 일으켜 자기만족에 도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회는 얼마나 관상적인가? - 예언자의 응답 머튼은 자기가 속한 수도원 문화에 깊은 관상이 없다고 비판하였습니 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 루이 신부(Fr. Louis)로 알려진 것보다 수도원 밖 에서 ‘토마스 머튼’으로 더 유명합니다. 비드 그리피스는 자기 ‘영혼의 다 른 반쪽’을 찾기 위해 영국의 수도원을 떠나 인도로 가서, 거기서 깊은 영 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메인은 수도원의 독특한 관상기도법을 세상에 전 한 분인데, 사막전통의 ‘순수한 기도’(pure prayer)인 묵상을 토대로 새로 운 형태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그 후 이 수도원은 ‘담 없 는 수도원’이 되었으며, 동시에 독특한 새로운 봉헌자 생활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성무일도와 전례에 묵상을 포함시킨 것은 존 메인의 위대한 통찰들 중 하나입니다. 아래에 메인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하루 네 번씩 공동으로 묵상기도를 바칩니다. 이처럼 여럿이 몸과 마음을 함께한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공동 침묵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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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확증하는 것입니 다. 함께 묵상하는 것은 공동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위대한 방법입 니다. 이 시간은 우리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보물도 들어 있는 우 리의 마음과 예수님 현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타인들에게 개방하고 나누는 시간입니다.”6)

매우 현대적이며 예언자적인 이 세 분의 수도승들이 수도원과 교회 안 에 계셨다는 사실은 희망적인 신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이상 을 성취하기 위해 제도권의 ‘변두리’로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베네딕 도회의 영적 문화가 세상에 이바지한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현상 자체 가 우리에게 교훈이 되지 않습니까? 수도원생활은 그 성격상 예수님처럼 ‘주변적’(周邊的)인 것이 특징입니다. 이 생활은 변두리에 가장 가까이 있 을 때 최대의 가치를 발휘합니다. 수도원은 사막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합 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이며 또한 교계의 계층구조로부터의 도 피를 의미합니다. 사막의 수도승들은 사제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베네딕도 자신도 사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평신도 구조로 된 수도원에 사 제 신분을 도입하는 일에는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변두리 생활을 지속적 으로 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16세기 수도원의 전성시대가 끝날 무렵에 수도승들은 대부분 제도권 교회와 국가에 흡수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흔히 봉헌자나 평신도들의 수도생활은 영적 융통성이 많았으며 지위 에서 자유로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가대 수도승’(choir monk)7) 6) John Main, Monastery Without Walls, The Spiritual Letters of John Main , Norwich: Canterbury Press, 2006, 29. 7) 성대서원한 수도자를 뜻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는 성직수사들만 해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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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성직자의 지위가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그 가치가 평가 절하되었습 니다. 존 메인은 원래 수도원 입회 때 평수사가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 니다. 하지만 아빠스는 대학교수가 평수사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이 를 일축하였습니다. 수도생활의 영적 영향력이 약화된 것은 수도원의 주 변성 상실과 더불어 수도승과 성직자 사이 그리고 수도원과 종교적, 세 속적 기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혼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제도화와 교회의 중심 세력들이 수도승생활을 수용한 결과로 관상 경험의 질이 저하되었습니다. 중세 수도원 문화는 서양 문명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 입니다. 하지만 그 수도원 문화는 과연 얼마나 관상적이었습니까? 연구 에 의하면 큰 수도원들은 흔히 기도 제조공장과 같았으며, 반면에 보다 더 깊은 영적 생활의 중심은 오리려 수도원들의 영토 주변에 위치한 작 은 수도원이나 부속 농장들이었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의 관상적 요소들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서 우리는 성규를 면밀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성규에 무엇이 있고 또 무 엇이 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규에는 신비한 동방 수도 전통에서 전 수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베네딕도께서는 동방의 수도 전통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향수에 젖기까지 합니다. 베네딕도께서 평화를 삶의 ‘추구와 목표’로 강조하시는 말씀8)이 한 지 역과 가정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뜻으로 격하되는 때도 자주 있었습니 다(사회의 모든 기강이 무너지는 세상에서는 이것도 결코 작은 일은 아 니었습니다). 하지만 성인께서는 평화를 사막의 ‘헤시키아’(hesychia)로 8) 참조. RB 머리말,17.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시편 34,15) 공동번역 성서에서 이 시편 구절은 “평화를 이루기까지 있는 힘을 다 하여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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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이해하였습니다. 헤시키아는 관상을 일으키는 마음의 침묵과 고요를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황금시대로 회상하는 사막의 수도원 제도 안에서 수도승이 아빠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제자와 스승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께서는 생각의 통제를 끊임없이 강조하셨 습니다. 이는 사막 수행의 핵심인 마음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성인께서는 영적 발전을 겸손의 사다리로 설명합니다. 성규의 지향점은 관상의 상태 에 이르는 것입니다. 관상은 마음으로 하늘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방법 입니다. 만일 베네딕도회 수도승의 삶이 관상에 이르는 직접 통로가 되 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삶입니까? 교육, 사회사업, 책임 이 없는 고요하고 안정된 생활, 돌아오지 않는 도피, 주는 것 없이 받기 만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실로 수도생활을 방해 하는 위험 요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베네딕도께서 관상의 상태를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방법에 대 해서 특별히 강조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일(Opus Dei)과 성 독(Lectio Divina)만으로 충분할까요? 성인께서는 ‘아니’라고 대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초보자를 위한 작은 규칙” 안에 수도생활의 모 든 계율이 다 실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인께서는 매일 의 성무일도와 성독을 제외하고는 특정한 다른 형식의 기도를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성령의 직접 활동으로 수도승의 개인기도가 길어져서 규정된 시간을 초과할 수는 있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성규의 처음부터 72장까지 규정은 관상을 위한 최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마지막 장(제73장)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서 성인께서는 관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를 원하는 이들을 향해 다른 권위 있는 책들을 읽으라고 간략하나마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특히 요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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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노의 담화집(Conferences) 을 권하십니다. 성인께서는 수도승 양성을 위해 이 문헌을 매일 식사시간에 조금씩 읽게 하셨던 것입니다.

현대인과 관상기도 오늘날 우리 시대의 영적, 사회적 위기 극복을 위해 베네딕도회 수도승 과 봉헌자들의 공헌이 필요하다면, 베네딕도회의 기도 방법을 좀 더 면 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당연시해 왔던 것과는 다른 우선 사항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베네딕도께서는 미사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 도 그분의 공동체들은 미사를 매일 거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 다고 성인께서 미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 또는 존중하지 않으셨다는 뜻 은 아닙니다. 아울러 미사를 수도생활의 기본적 형성요소로 간주하지 않으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를 바칠 때는 주의를 다 기울이 고 마음과 소리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관상기 도 방법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신 바가 없으며, 다만 모든 기도는 관 상적인 방법으로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성인께서는 성규에 다 담지 못한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성인 자신과 성규에만 머무 르지 말고 우리의 전통 안에서 내면생활에 뛰어난 대가들(교부들)에게 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문제를 참신하고 명쾌하게 다룬 이가 성규와 그 이전 수도회 제도에 관한 연구가로 유명한 학자 아달베르 드 보게(Adalbert de Vogué)입니다. 그는 요한 가시아노에서 존 메인까지(From John Cassian to John Main) 라는 에세이에서, 이른바 성규의 ‘공백’(lacuna)을 지적하고, 빠진 고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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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주는 믿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현대 베네딕도회원들의 생활에 공헌한 사람이 메인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음은 드 보게의 말입니다.

“메인의 이야기에서 가시아노가 맡은 중개자 역할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습니다. 첫째, 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베네딕도 이후의 수 도 전통을 풍부히 하고 교정하기 위해 베네딕도 이전 학자에게 의존하 는 경우입니다. 방법은 약간 다르지만 베이커(Baker)9)가 이미 그러했듯 이 메인은 성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방치하거나 대충 채워놓은 공백 을 메우기 위해 성규의 원천으로 되돌아갑니다.”10) 존 메인은 1950년대에 수도승이 되고 나서, 동양에서 처음으로 배웠던 단순하고 비개념적·비표상적 형태의 명상법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 습니다. 동양의 기도형태는 기본적으로 외마디기도(monologistic 또는 prayer of one word)였으며, 나중에 이것은 ‘만트라’(mantra)라고 불렸습 니다. 훗날 워싱턴 D.C.에 있는 베네딕도회의 학교 교장으로서 매우 분주 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신비한 동양의 오솔길’ 여행에서 갓 돌아 온 어떤 학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단순하지만 예리한 질문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교 수도원 제도에 동양의 명상 수행에 해당하는 어떤 기도법 이 있습니까?” 기도 경험에 관한 매우 현대적 질문을 하는 이 젊은 구도 자를 돕는 과정에서 존 메인은 먼저 어거스틴 베이커, 그 다음 가시아노 9) 어거스틴 베이커(Augustine Baker, 1575-1641)는 영국 베네딕도회 영성과 기도의 스승이 었다. 10) Adalbert de Vogue, “From John Cassian to John Main: Reflections on Christian Meditation”: John Main: The Expanding Vision , ed. Laurence Freeman, Canterbury Press, Norwich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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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메인은 베네딕도께서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는 관상기도법이 중세 전통에 있었으며, 동방 교회에서는 이것을 ‘마음의 기도’로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 음의 기도’, 이것을 그는 그리스도교 묵상(Christian medit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드 보게는 서방교회에는 동방교회의 ‘예수기도’(Jesus Prayer)11)에 해 당하는 기도가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가시아노의 기도형식, 즉 만트라12) 그리고 ‘예수기도’와 유사한 기도 방법뿐만 아니 라 베네딕도께서 지적하신 방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베네 딕도회에서 대부분 잊혀지거나 무시되었습니다. 드보게에 의하면 존 메 인이 이것을 복구한 것은 우리 시대를 위해 매우 의미 있는 발전입니다. 그는 수도원 역사에서 예상 밖의 사건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베네딕도 께서 가시아노의 만트라를 채택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Deus, in adiutorium meum intende)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성무일도를 시작하는 기도문으로서 성무일도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 켜 줍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가시아노의 중개자 역할은 한층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 면 서방 수도원에서는 예수기도와 유사한 구절을 만든 적도 없었으며 그 리스도교의 어떠한 만트라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

11) 이 기도는 다음과 같다. “주 예수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아드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자 비를 베푸소서(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12) 참조. 요한 가시아노, 담화집, 제10담화; “이사악 아빠스의 제2담화”, 『코이노니아』, 제10집 (1985년 가을), 14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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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사악 아빠스께서 추천하신 만트라,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가 담화집 저자가 제안한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고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을 끊임없는 기도문으로 개발한 영 성 학파에 대한 소식도 우리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이 기도문을 끊임없 이 개인적으로 외우는 것이 가시아노의 목표였지만 우리는 이것이 전례 나 예식에서 사용되는 사례들만 접하게 됩니다. 이런 사정은 성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나 동시대의 동향인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13)의 수도원 또는 그 다음 세기에 나타난 프랑코-켈틱(Franco-Celtic) 수도원에서도 마 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이사악 아빠스께서 추천하신 기도를 크게 존중 하고, 그 풍부한 의미를 감지하는 것을 보면 그분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끊임없는 기도로 사용되지 않고 있으니 가시아노가 생각했던 목표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입니다.”14)

이사악 아빠스에 대한 열 번째 담화에서 가시아노는 이 기도법(즉 만 트라)의 이유와 신학과 단계들을 설명합니다. 이유는 주의산만의 문제 를 통제하기 위함입니다. 신학은 ‘단순한 기도 말’로 영적 가난에 이르러 예수님 부활의 영광 안에서 예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법의 단계들은 수도생활의 기본적 자기 수련 그리고 그 수련 의 일차 목표 달성, 즉 마음의 순결을 통한 하느님과 대면하기입니다. 존 메인은 묵상에 대한 가시아노의 기도방법을 발견한 순간부터 수도

13) 카시오도루스(Flavius Magnus Aurelius Cassoidorus, 477년경-570년경)는 고대 역사가, 정치가, 수도자(490-585)였다. 그는 540년 경 비바리움(Vivarium) 수도원 설립하였다. 14) Adalbert de Vogue,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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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학교장직15) 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후, 자기 수도원에 전형적인 봉헌자를 위한 평신 도 공동체를 세우고, 묵상을 토대로 이들을 베네딕도회의 일상생활 형 식과 구조에 맞추어 집중적인 수련을 시켰습니다. 미래에 대한 그의 꿈 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평신도 공동체가 확대되어 이른바 ‘담 없는 수도원’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 세계 묵상 공동체’(The World Community for Christian Meditation, WCCM)가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이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종류의 ‘베네딕도회 봉헌자 공동체’ (Benedictine Oblate Community)가 생겨났습니다. 더욱 최근에는 봉헌 자 공동체 안에 거주하는 봉헌자 신분(residential Oblate identity)이 형 성되었으며 그 출현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는 봉헌자가 종신 봉헌을 하고, 동시에 안정된 봉헌자 공동체 안에서 3년의 갱신 기간 동 안 거주 생활(residential life)에 전념하는 제도입니다. 2007년, 그리스도 교 세계 묵상 공동체와 봉헌자 공동체는 존 메인의 서거 25주기를 맞이 하여 교회법적 지위를 받았습니다. 세계의 영적 공동체가 이렇게 발전하 는 것을 보면, ‘묵상이 공동체를 만든다’는 메인의 통찰이 진실임이 증명 된 것입니다.

수도승과 봉헌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차원은? 존 메인은 사막 수도승들의 순수한 기도(oratio pura)가 유일한 기도방 법이라거나 또는 가장 좋은 기도방법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 15) 존 메인은 워싱턴 D.C.에 있는 성 안셀모 수도원 부속학교(St. Anselm's Abbey School)에 서 1970년부터 1974년까지 학교장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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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기도형식들을 대체하지는 못해도 성독과 성찬의 기도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메인이 그리스도교의 관상기도 회복에 이바지한 공은 세계의 수도원 들이 다 인정해 왔습니다. 비드 그리피스에게는 존 메인이 ‘자기 시대의 가장 훌륭한 영적 안내자’였습니다. 가시아노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교량 역할을 하였던 것처럼, 드 보게는 메인을 그리스도교 세계와 비그 리스도교 세계를 이어주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메인의 가르침 (묵상기도법)은 수도원 밖에서 더 널리 사용되어 왔습니다. 드 보게가 (성규의) ‘공백’을 지적한 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메인이 사용한 만트 라 묵상법을 도입한 수도공동체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묵상방 법은 침묵의 묵상시간을 성독과 성무일도와 미사시간에 통합하는 것입 니다. 물론 통상적으로 아침 묵상과 저녁 묵상을 성무일도와 성독과 일 상의 일들과 통합하여 기도하는 봉헌자들은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수도원들이 메인의 기도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닙니다. 마음의 침묵기도는 수도승의 ‘개인기도’이고 성무일도와 미사는 공동체의 ‘공동기도’라는 인식이 깊이 정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동체 기도에 묵상과 성무일도를 둘 다 포함하는 옛 전통도 있습 니다. 물론 이미 오래 전부터 확립된 관행과 관습을 지키는 현존하는 수 도공동체들이 이 옛 전통을 회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더 새로 운 형태의 베네딕도회 생활을 추구하는 단체들, 예를 들면 봉헌자 공동 체 같은 기구에서는 묵상과 성무일도나 성독을 통합하기란 그렇게 어려 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메인과 그리피스는 이러한 공동체가 미래의 수도 원 제도로 등장할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이 분들은 이 두 기도가 상보 적 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두 기도법이 서로 구별되고 다르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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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입니다. 묵상(meditatio)은 성독(lectio)과 다르고, 성독은 기도(oratio)와 다릅니다. 하지만 관상(contemplatio)은 모든 기도의 목표입니다. 묵상을 함께하는 것은 믿음과 사랑에 대한 강력한 체험입니다. 이를 통해서 공동체 생활에서 오는 상처와 마찰을 깊이 알게 되고 치유하기 도 합니다. 베네딕도회 공동체에서 성무일도와 미사참례 뿐만 아니라 묵 상을 함께하면, 개인과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차원에서는, 즉 그리스도 안에서는 수도승과 봉헌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봉헌자들 이러한 관상기도를 공유함으로써 얻는 일치의 경험이 베네딕도회 공 동체의 봉헌과 공동생활 형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입니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관상 기도에서 일치와 평등감이 생깁니다. 관상의 차원에서는 봉헌자들과 수 도승들이 하나이며 동등합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그들은 제자 훈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관상은 상호 섬김의 방 법이지 서열이나 스승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한 경쟁 방법이 아닙니다. 평등과 일치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규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멋지게 보여줍니다. 성규는 수 많은 세대에 걸쳐 시대 적응이라는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 습니다. 결국 성규는 서로 다르고 때로는 아주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면 서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길잡이입니다. 수도승들은 다른 모양의 봉헌을 한 사람들이 수도원에서 함께 사는 것이 정체성에 위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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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공동생활이 효과를 내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공동 관상기도 없이는 이러한 공동생활은 분명히 불가능합니 다. 이렇게 되면 봉헌자들은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을 사랑하지만 정식으 로 수도승이 되거나 그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수도승의 정체성과 소명과 의미, 이런 것들이 현대 수도원들이 직면하고 있는 난제들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소명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 식의 위기입니다. 이는 우리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가 아니면 옛날 형태를 고수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의 미 래는 이러한 도전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먼저 찾아 모험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베네딕도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성규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수도원들이 이것을 기억한다면 공동체 안에서 새로 운 형태의 서약이나 그와 유사한 제도를 발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는 옛 봉헌 형태에서 현대 환경에 적용될 수 있는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규는 매 우 실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생활이 진화하거나 적응하지 못하 면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수도승다운 생활’(conversatio morum)16)보다 더 적절한 서약은 없습니다. 이것은 흔 히 이상화된 ‘정주’(stabilitas) 서원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아 마땅합니다. 과거에는 한 수도원 안에 봉헌자와 수도승이 함께 거주하는 것은 이상 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변종과 연합이 매우 창조적이었습니다. 학자들 의 주장에 따르면 수도영성이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는 봉헌 형태의 다양

16) 이 단어들은 ‘생활개선’ 또는 ‘정진’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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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높았던 시기와 일치하였습니다. 봉헌의 깊이와 다양성을 역사적 관 점에서 관찰하면, 봉헌자 공동체들 주위에서 새롭고 보다 더 융통성 있 는 베네딕도회 수도승 생활의 형태가 진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드 그리피스는 이것을 확실히 직감하였으며, 존 메인은 성규를 준수하 면서 공동묵상을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생활에 대해서 건설적인 실험을 이미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네 번씩 30분 동안 함께 묵상합니다. 이것은 성규가 제 시한 ‘짧은 기도’입니다. 묵상은 성무일도 다음에 이어집니다. 우리는 성 무일도를 공동 성독의 한 가지 형식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경청 하는 것은 침묵 묵상을 준비하는 방법이 됩니다.”17)

공동체의 침묵 묵상 시간은 수도 전통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지 만, 오늘날에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봉헌자들은 세상의 삶을 통해서 이 관습의 복원, 즉 다양한 기도 형태에 대한 개방을 촉구합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 세계 묵상 공동체(WCCM) 소속 봉헌자들은 수련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1일 2회 묵상하는 수행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매일의 영적 생활에 성무일도와 성독을 짜 맞추어 넣는 방법을 배울 때 기도의 유익한 상호의존 관계가 나타납니다. 즉, 성경말씀이 침묵으로 이 어지고 침묵은 말씀에 힘을 실어줍니다. 5세기의 가시아노는 그의 열 번 째 담화에서 성독과 묵상의 결혼관계를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지 없는 만트라 기도가 더 깊은 성경독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7) John Main, Monastery Without Walls, The Spiritual Letters of John Main , Norwich: Canterbury Press, 20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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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랐습니다.18) 현대의 봉헌자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매일의 기도(성독과 전례와 마음의 기도)와 일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으며, 우리 시대를 위해 봉헌의 전통과 그 잠재 능력을 세상에 모두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봉헌자가 세속에 살든 거주 공동체에 살든 그것은 사실 문제 가 되지 않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이러한 균형과 자유로운 훈련을 쌓 은 봉헌자는 곧 다른 사람들에게 증인이 되고 교사가 됩니다. 이러한 발 전은 모든 형태의 그리스도 제자 훈련에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17세기에 어거스틴 베이커가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세상 안에 살면 서 관상생활을 하고 싶다면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 다. 외식의 기회와 TV나 인터넷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하지만 베이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훨씬 이전에 강조한 바와 같이, 관 상에 대한 소명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봉헌자가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의 관상적 차원을 복원한다면 오늘날 수많은 난관에 직면하고 있는 수도원 제도에 모범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봉헌의 재발견은 우리 시 대의 수도원 제도를 구하고 새롭게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봉헌제도(oblature)를 역사적으로 회고하는 것은 수도공동체의 재건 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봉헌제도가 어떻게 시대의 영적 요구에 반응해 왔으며 어떻게 수도승 기도라는 귀중한 유산을 항 상 간직해 왔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봉헌제도가 클뤼니 공동체에서, 규 모가 큰 회수도회에서, 작은 수도원에서 또는 독수도회에서 행한 여러 가지 합법적 역할과 기능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봉헌제도의 적응성은

18) 참조. 요한 가시아노, 담화집,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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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탄력성은 무정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전통을 해석함으로써 어떠한 특수 상황에 대한 창조적 반응입니다. 봉헌자는 자 기 자신과 재산을 조건 없이 수도원에 바쳤기 때문에 ‘세상에 죽은 사람’ (mortui mundo)으로서 여생을 공동체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즉, 완전 헌 신자(a plenus oblatus)와 성직자(a persona ecclesiastica)가 여기에 해당 됩니다. 또한 봉헌자에게는 수도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형제적 일치 안에 서 성규를 지키며 ‘속세에’ 사는 것이 도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 활은 아마도 역사에서 대부분의 봉헌자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 택을 위해서는 사람과 상황에 어울리는 다양한 적응방법이 고려됩니다. 아마도 지금은, 역사에서 가끔 있었던 또 다른 선택을 고려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 선택은 우리 시대의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큰 유익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베네딕도회 봉헌자들을 위한 주거 공 동체의 창설 같은 것입니다. 봉헌자들은 새로운 수도원 제도 안에서 형 제들을 섬길 수 있으며, 나아가 사심 없이 침묵기도를 갈망하는 세상 사 람들에게도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헌제도의 자유롭고 유연한 구조 는 다양한 종교인들의 기질과 사회 환경에 잘 어울립니다. 이러한 방법은 강력한 그리스도교 묵상과 기도 생활을 원하는 이들에게 놀라운 기회 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시대 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사람이신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 보여주신 복음적 겸손과 단순한 삶의 풍요로운 상속자가 되는 동시에 공헌자가 될 것입니다.”19)

19) Derek G. Smith, “The Oblate in Western Monasticism”: Monastic Studies, 14(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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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성규가 관상적 차원에서 과소평가되는 때가 흔히 있었습니다. 이는 아 마도 베네딕도께서 수도승의 내면적 여정보다 오히려 공동체 생활의 도 전과 구조에 관심을 집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봉헌 자와 수도승이 성규의 충만한 신비적 의미를 기억할 때, 그들의 소명은 더욱 풍요롭게 되고 융통성을 지니게 됩니다. 성규의 마지막 장인 제73 장에 비추어 보면, 성규의 세속적 세부 사항들에는 모두 관상 지향이라 는 상징적 의미가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수도생활의 목 표가 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에서 하느님 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초기 수도승들의 수행 목표 는 오로지 ‘끊임없는 기도’였습니다. 『베네딕도 전기』는 베네딕도 성인을 치유자, 영적 아버지 또는 신비주 의자로 표현합니다. 거룩한 광채에 싸여 온 세상을 바라보시는 성자에 대한 성인의 환시는20) 인간의 영혼이 홀로 있든 공동체 안에 있든 그 속으로 치유의 통찰력을 침투시킵니다. 이런 이유로 성규는 그리스도교 지혜문학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성규는 베네딕도회의 삶을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수도승과 봉헌자)이 사용하는 유일한 규칙입니 다. 여기에는 성직에 대한 편견이 없으며 사막의 전통이 그러하듯이 소 명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지도 않습니다. 직위의 구별에 집착하는 수도 승은 아직도 자유로운 수도승이 아닙니다. 자기가 수사나 수녀가 아니라 고 해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제자에 못 미치는 존재로 보는 봉헌자는 아

20) 참조.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베네딕도 전기』, 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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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도 자유로운 봉헌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로 하느님을 찾는 일’입니다. 평등과 형제애의 정신은 관상적 의식과 순수한 기도에서 직접적으로 얻는 열매입니다. 이는 현대인들의 정신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이런 정 신이 있기 때문에 봉헌의 옛 전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태가 현대적이고 융통성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규가 복음의 관상적 차원을 구현하게 된 것은 내면의 여정을 위해 극단으로 흐르지 않는 금욕적 토 대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수도생활의 새로운 형태 를 창조적으로 상상할 수 있고 용감하게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봉헌자 는 수도원에서 살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들은 베네딕도께서 직접 알고 계셨던 수도원들과 더욱 닮은 평신도 공동체에 살 수도 있습니다. 또는 봉헌자는 보다 더 전통적인 형태로, 세속에 계속 살면서 수도공동체의 영적 친구나 동료나 회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 헌신하 든 봉헌자는 기도와 일을 통해 하느님을 찾고 평화를 ‘추구와 목표’로 삼 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와 같은 혼돈의 시대에 베네딕도께서는 삶에서 위의 세 가지 영적 요소들의 성격을 우리가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전례적, 정신적 기도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도는 성숙하여 관상으로 이어져야 합 니다. 관상의 차원에서는 가시아노의 말처럼 “모든 생각과 상상의 보화” 를 포기해야 합니다. 노동은 돈을 버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노동 은 섬김이며, 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천국의 도래를 기다리며 정의로운 세 상을 건설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단지 스트레스와 근심에서 잠 시 벗어나는 지나가는 마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평화야말로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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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오늘날의 봉헌자가 베네딕도회의 삶 속에 잠재되어 있는 관상적 에너지를 회복한다면 성규가 이 세상에 주는 영적 영향력은 크게 증가 할 것입니다. 수도원들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기관들 도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서로 대화하는 방식, 교회를 운영하고 가정을 가꾸는 방식도 변화할 것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승들과 봉헌자들이 직 면한 도전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사부 성 베 네딕도의 지혜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일에서 대등한 파트너들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더 읽을거리 * 단행본 John Main, Community of Love , Medio Media, 2009. Laurence Freeman, The Selfless Self , Canterbury Press, 2009. Paul T Harris, John Main; A Biographical Memoir, Medio Media 2009. * 인터넷 웹사이트 그리스도교 세계 묵상 공동체 홈페이지: www.wccm.org 그리스도교 세계 묵상 공동체 이메일: welcome@wccm.org 그리스도교 세계 묵상 공동체의 봉헌자 공동체에 관한 정보는 Trish Panton(International Oblate Coordinator)의 이메일(Pantonamdg@ozemail.com.au)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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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현존 앞에 서기: 개인기도에 관한 가브리엘 붕에(Gabriel Bunge)와의 대담 김은영 호스티아 옮김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유일회적인 관계를 갖게 되며 동시에 풍성 한 전통으로 들어서게 된다. 은수자이며 종교 문필가인 가브리엘 붕에는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기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오늘 을 사는 우리들에게 유익하도록 교부들, 특히 동방 교회 교부들의 가르 침과 그들의 체험을 제시한다. 이 글은 디센티스(Disentis) 수도원의 브루노 리이더(Bruno Rieder) 수 사가 인터뷰한 내용이다.1) 리이더: 60년 전 신학자 칼 라너는 기도의 어려움과 그 축복에 관하여 (Von der Not und dem Segen des Gebetes )라는 책을 냈습니다. 가브 리엘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질그릇들 (Irdene Gefäße )이라는 책에서 지금 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기도의 어려움에 답을 주고자 하셨는지요? 이 책 이 10개 국어로 번역된 것을 보면 신부님의 의도가 적중한 것이기도 합니 다. 신부님께서는 왜 이 책을 쓰시게 되었는지요?

붕에: 이 소책자는 자기만의 탄생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2003년 에 선종한 동료 라파엘 수사의 부탁으로 이 책이 나오게 되었지, 저의 의

1) 이 대담은 독일 베네딕도회 계간지인 Erbe und Auftrag (2010년, 제1호, 22-38)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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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없었습니다. 저는 주로 에바그리오의 저서를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번역하고 주해했지요.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제 원의와는 전 혀 상관없이, 앞에 말한 것처럼 이 책 자체가 갖는 특별한 배경(前史)이 있습니다.

리이더: 이 책의 탄생 스토리가 신부님의 개인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요?

붕에: 관련이 있지요. 저는 소위 ‘혼종혼’(混宗婚, Mischehe)2)으로 태 어난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은 세례는 받으셨지만 신앙생활은 하지 않으 셨기에, 저에게는 교회라는 뿌리가 없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청소년들 처럼 저 역시 종교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청소년기에 흔히 그렇듯 저 스스로 종교를 찾아 나섰는데, 당시 저는 서방 종교에서 는 제가 찾던 것을 찾지 못하고 극동 종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50년대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동양 종교를 다루는 문헌이 흔치 않았기에, 제 주 변 친구들은 이런 저를 아주 이상한 동물인 양 취급했습니다. 학창 시절 우연히 동방 그리스도교와 초기 수도승생활을 알게 되었습 니다. 굉장한 독서광이었던 저는 책방이란 책방은 다 찾아다니던 중 “말 씀의 증거자들”(Zeugen des Wortes)이라는 얇은 소책자 시리즈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이 책들에는 그리스도교 문학의 값진 진수가 담겨 있었습 니다. 그뿐 아니라 첫 번째로 나온, 네 편의 러시아 순례자에 관한 진짜

이야기들 (Aufrichtige Erzählungen eines russischen Pilgers , 이하 『이름

2) 혼종혼이란 부부가 서로 다른 교파에 속함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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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순례자』)3)이라는 책도 있었습니다. 그 후 독일 본(Bonn) 대학을 다 닐 때, 엠마누엘 세베루스(Emmanuel von Severus)가 펴낸 짧은 가시아 노 선집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기도에 관한 두 개의 담화4)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한 대학 동기는 서품 후 얼마 안 되어 안 타깝게도 길을 바꾸게 되었는데, 그가 당시 저에게 준 얇은 책자는 우타 랑케 하이네만(Uta Ranke-Heinemann)이 아주 잘 선별한 『사막교부들의 금언집』(Sprüche der Wüstenväter)이었습니다. 이 책은 지금도 갖고 있습 니다. 이 책들 덕분에 저는 처음부터 동방교회 초기 수도승 생활의 진면목 과 본질에 대한 감각을 얻을 수 있었고, 몇 권 되지 않는 이 책들은 여전 히 제게 감명을 줍니다. 저는 책이 소개하는 수도승처럼 살아보려 했는 데, 아무튼 수도승 생활의 최종 목표에 대한 뚜렷한 표상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가시아노가 이론적이라면, 『이름 없는 순례자』는 아주 실제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도자들에게 항상 이 두 책자를 우선 권합 니다. 먼저 수도승 생활의 진면목과 본질에 대한 감각을 얻는 것이 중요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이 감각을 갖게 되면 오래된 것이든 새것이든 다 읽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진짜이고 어떤 것이 구성과 내 용에서 잘되어 있는지 저절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1961년 가을 그리스에서 두 달을 학생으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서 진짜 초기 수도승생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이콘’과 같 은 몇몇 훌륭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인지 1962년 가을 쉐브토 느(Chevetogne) 수도원에 입회했을 당시 저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된 상 3) 『이름 없는 순례자』, 최익철 역, 가톨릭 출판사, 2002. 4) 여기서 두 개의 담화란 요한 가시아노의 담화집에서 제9담화와 제10담화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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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였습니다! 이것저것 고민할 필요 없이 제가 읽었던 것들을 삶에 적용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저는 대학생 때에 이미 『이름 없는 순례자』를 읽 었고 예수기도(Herzensgebet)도 할 줄 알았지만, 예수기도 때 사용하는 묵주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혼잣말로 “그래 좋아, 순례자들이 걸어 가면서 기도했듯이 나도 그렇게 해 보자.” 하며 본(Bonn)의 궁정 정원을 지나 대학을 오가며 거리낌 없이 예수기도를 했습니다. 수도승이 되기도 전에 이미 저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익혔고, 한참 후 신학적 맥락 을 통해 좀 더 자세한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 개인사와 관련 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리이더: 라파엘 형제님도 이와 비슷한 연유로 에레모(Eremo)5)에 계신 신부님을 찾아 오셨나요?

붕에: 후에 라파엘이라는 수도명을 받은 그라찌아노(Graziano)는 아 주 젊은 나이에 에레모에 왔는데, 처음 5년간은 손님으로 지내다가 27세 에 수련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처럼 이 형제도 동아시아의 세계관에 아주 흠뻑 취해 있었습니다. 그는 이와 관련된 도서관을 하나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성 안토니오와 에바그리오 에 대해 얘기하는 데 반해, 그라찌아노는 밀라레파(Milarepa)와 요가난 다(Yogananda)에 대해 쉬지 않고 얘기했으니까요. 그는 당시 이미 다른 서적들, 동방교회의 영성물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이러한 것들

5) 에레모(Eremo)는 붕에 신부의 은둔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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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라찌아노는 수련자였을 때 자신의 성소를 시험해 보려고 갖고 있던 모든 책들과 실천 방법들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는 항상 가부좌를 틀고 는 인도식의 옷을 즐겨 입고 ‘명상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진정 그리스도 인으로 기도하고 기도 체험을 하고 싶다면 그리스도교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방식이 틀렸다고 했지만, 요지부동한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던 그라찌아노와 옥신각신하면 서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그가 내 말을 들으려는 생각을 할 때 가 왔는데, 그가 여태껏 몰랐던 세계가 열리고 갑자기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그는 저에게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도록 형제가 이에 관해 써야 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 을 사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이런 글을 쓸 마음이 없었고 더욱이 논쟁적이거 나 호교론적인 의도도 없었습니다. 수도승이 되고 나서부터 저에게는 모 든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 테신(Tessin)으로 가기 전 쉐브토느에서 18년간 해온 비잔틴 전례는 제 삶에 깊이 박혀 있 습니다! 이런 제게 그라찌아노는 아주 간단명료한 글들을 모아 주해하라 고 채근했습니다. 조금씩 써나가면서 결국 만들어진 이 소책자는 전반적 으로 모든 전례학자들도 잘 아는 내용들을 담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저는 평소 문제없이 여기던 상당의 부분들에 대해서도 무 척 고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서방교회에서 신앙의 내용과 방법 을 구분하는 일은 순전히 머리로 하는 추상적인 작용일 뿐 실재와는 부 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저는 이 사실을 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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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만 아는 것이었지요. 내면은 외면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말입니 다! 머리로는 내면과 외면의 구분이 당연하기 때문에 실재에서도 이런 구분이 성립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형을 받아들이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그 내용까지 받아들이게 되는 것 입니다. 저는 이 진리를 후에 어느 프랑스 청년 덕분에 아주 확실하게 깨 닫게 되었는데, 그는 의도적으로 힌두교의 내용을 표현양식과 함께 받 아들였습니다. 그는 터놓고 말하기를 외형과 내용 중 어느 하나만을 가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천진난만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질

그릇들 에서 저는 기도의 자세에 대한 예를 들면서 이런 사실이 그 자체 로 얼마나 단순한 진리인지를 밝히려 했습니다. 선불교의 명상가들은 도 대체 왜 모두 벽을 향해 또는 벽을 등지고 앉는가? 이슬람교도들은 왜 건물 구조와는 상관없이 항상 메카를 향하는가? 그리고 메카에서는 왜 카바(Kaaba) 쪽으로 몸을 돌리는가? 타국에 있는 유대인들은 왜 성전을 향하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오래 전부터 동쪽을 향하는가? 이렇게 서로 기도 방식이 다른 것은 그들 나름의 신앙론 때문입니다. 즉, 불교 신자들에게는 기도의 실제적인 대상이 없지만 유대인이나 이슬 람교도들은 신이 계신다는 특정한 곳을 향합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인 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향하는데,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통 하여 성부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생각하 듯이 내용과 관련 없는 표현양식 자체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연 유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리이더: 지난 세기의 60년대 교회 대변혁이 일어난 뒤, 기도에 대한 주 제는 기도의 ‘기술’과 ‘체험’을 묻는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전통 수도원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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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수도회들이 극동을 향한 일종의 순례운동을 벌인 셈인데, 요컨대 선 또는 요가에서 그러한 기술과 체험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붕에: 가까운 동방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비그리스도교인 극동으로 순 례운동을 벌였고 또 지금도 여전히 그런 추세인 것은 현재 서방 그리스 도교의 영성 상태 때문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말할 것이 많지만, 지금 다 루는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겠지요.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수도승들이 영 적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자기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에서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는 확실히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 로 동의하는 사실은, 찾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옛날에도 없었으며 어쨌든 그들이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갈라지기 전 초기 교회의 저 풍요로웠던 전통, 무엇보다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이미 이런 전통이 생경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곳 에서 찾고자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시한 세상에 대한 개방과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을 타종교까지 확장하는 에큐메니즘 때문에 그들 은 그런 한계를 당연히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사님이 언급하신 이런 현상의 뿌리는 실상 많은 서구 그리스도인들 이 느끼는 영적 공허에 대한 체험이 아닌가 합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공 허라는 것이 실제로 없지만, 현재 서구 그리스도교에 들이닥친 이 현상 은 학문적으로 전통의 단절 또는 전통의 붕괴라고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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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이더: 수도원 안에서도 ‘기도의 위기’6)가 있었고 또 여전히 있다는 것 입니까? 그렇다면 극동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겐 무언가 비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겠습니다.

붕에: 저 스스로는 이런 공허를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도 원 입회 전에 이미 동방 그리스도교와 수도승의 기원에 대해 학술로뿐 아니라 경험으로 알게 되는 기회도 있었고, 또 비잔틴 전례를 하는 쉐브 토느에 살면서 이미 충분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잔틴 교회가 정한 질서에 따라 신적 전례와 모든 성무를 거행할 뿐 아니라, 무 엇보다 개인이 수도승 생활을 구체적인 삶에서 ‘구현함’으로써 분열되기 이전 교회의 영적 전통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에 이런 사실을 모르던 저를 이렇게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입 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요. 젊은 수도승들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저는 종종 이들이 대체 ‘무엇을 바라고 자신을 내어놓았는지를 아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런 지식 없이 수도승이 되면 영적 성장 안에서 쉽게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곧 바로 “이곳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곳에는 아무것 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라는 느낌이 찾아 듭니다. 누구도 이런 상태를 계속해서 견뎌내지 못하므로 다른 곳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모든 이가 영적인 것을 찾아 나서지는 않습니다. 많은 이들은 수도 원 밖의 소임을 하다가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6) 참조. Karl Rahner, Von der Not und dem Segen des Gebetes , 196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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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자신을 내어놓았는지 알지 못하고, ‘수도 승’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 삶이 어떤 문제들과 특별 히 결부되어 있는지도, 모든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얻으려는 목표가 궁 극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 ‘암기’ 하듯 알아야 할 가시아노는 이 점에 대해 아주 명료하고도 분명하게 말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왜 매일 끝기도 전에 담화집 을 읽도록 강조하 여 말씀하셨습니까(RB 42,3)? 성인은 자신이 쓴 ‘초보자들을 위한 규칙’ 의 맨 마지막 장에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완전한 수도승 생활 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을, 여기 담화집 그리고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원전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시아노밖에 읽지 않더라도 “수도승 생활의 목표며 핵심인 마음의 완 덕을 드러내는 표징은 중단 없는 기도”7)라는 것을 한결같이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뒤따르는 질문은 ‘중단 없이 기도하기’란 도대체 무엇 을 의미하는지, 또 ‘마음의 완덕’에 어떻게 이를 수 있는지입니다. 결국 기 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연구하고 더 나아가 이를 체 험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수도승 생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리이더: 이와 결부해서 다음 질문으로 대체 기도란 무엇입니까?

붕에: 기도는 아래로는 땅에 단단히 박히고 위로는 하늘에까지 이르 는 아주 높은 사다리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는 성무일도를

7) 요한 가시아노, 담화집,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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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으로 바치거나 개인기도를 할 때 읊거나 염송할 수 있도록 형식화 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중간 단계들을 거쳐 하느님의 자비 로 창조주를 직접 뵙게 되면 마침내 하늘에 닿는 사다리의 마지막 지점 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에바그리오는 요한복음 4,23에 근거해서 이러한 상태를 “영과 진리 안에서(를 통해서) 성부께 흠숭을 드림, 다시 말해 당 신의 성령과 당신에게서 나신 성자 안에서(를 통해서) 성부께 흠숭을 드 림”이라고 묘사합니다. 가시아노밖에 읽지 않아도 수도승 존재에 대한 본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아들인 교부들의 가르침을 단지 전할 뿐 이라는 가시아노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시아노는 자신을 넘어 갈라지기 전 교회의 저 위대한 전통과 그야말로 수도승 생 활로 독자들을 인도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베네딕도 성인이 권고 하는 수도생활의 완덕(RB 73,2)이란 성인 스스로 거룩한 교부들에게서 발견했고 또 당신의 제자들도 발견하게 되는 이것입니다. 다른 교부들도 한결같이 말하는 이 전통이 본래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우리는 모릅 니다. 아마도 사도들 또는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아시겠 지만, 예로니모 성인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수도승들’이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맞지만, 그때 그들이 모두 은수생활이 나 수도원 내에서 독신을 지키면서 살았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런 특별한 생활양식은 안토니오와 파코미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리이더: 앞에 말한 공허감은 ‘신앙의 실천’이 말라 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신부님은 책에서 ‘신앙의 실천’은 무엇보다도 ‘내적인 행 위’, ‘기도’라고 이해하십니다. 이런 공허감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의 실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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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신부님께서는 질그릇들 에서 ‘교부 들’로 가는 중단된 다리를 새로이 타진하십니다. 기도의 실천을 쇄신하기 위해 왜 ‘교부들’이 중심 역할을 한다고 보십니까?

붕에: 영적 생활이 형식주의와 예식중심주의로 경직될 위험은 항상 있 습니다. 이는 동방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러시아 교회도 어느 시기에는 이런 경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벌써부터 경직된 종교생활 에 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예를 들어 닐 소르스키(Nil Sorskij)8)는 다시금 초기 본래의 삶을 살도록 했습니다. 고대 교부들이 보여준 규범적 인 역할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가시아노가 말한 수도승 생활의 영적 본질에 다시 도달하기 위해서는 생동감이 없는 예식중심주 의를 탈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대부분이 제도의 산물이고 외적 질서를 규정하는 데에 그치고 마는 쇄신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정신은 재형성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맨 처음 있던”9) 것을 실천으 로 살리는 것, 그러니까 고대 문헌을 알고 이를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필로칼리아』(Philokalie)10)는 수도승들과 신자들이 이해했던 저 광대한 정신적 쇄신운동이라는 빙산의 한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이곳 서구 교회에서 이루어낸 놀라운 산물들, 즉 교회 교부 들의 모든 훌륭한 총서를 마주할 때마다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이 작품 들이 많은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독일어로 된 교회 교부

8) 닐 소르스키(Nil Sorskij 1433-1508)는 러시아정교회 수도승이며 영성가였다. 9) 참조. 요한 1,1. 10) 성 니코디모스(St. Nikodimos, 1749-1809)와 성 마카리오스(St. Makarios, 1731-1805)가 편찬한 책이다. 국내에서 이 책은 『필로칼리아』(임성옥 역, 은성출판사)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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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와 그 뒤에 나온 책들은 안타깝게도 원전을 바탕으로 한 훌륭한 정 신적 출발과 쇄신운동이라는 빙산의 첨단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우리 서방 수도승 생활은 이런 원전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발달하지 않았는데 신학과 전례는 더욱 그렇습니다. 동방교회를 보면 아주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 다. 예를 들어 수 십 년 동안 무신론이 지배하던 러시아는 오늘날 고대 교부들과 현재 일부 번역을 통해 알려진 혁명 이전 시대의 자기 나라 교 부들을 책으로 엮고 있습니다. 러시아 수도승들은 이를 통해 영양을 받 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학문적 연구로 접근합니다. 그런데 우리 의 연구 방식은 왜 진정한 새로움을 일으키지 못합니까? 거룩한 교부들 의 가르침을 탐구할 뿐이지 살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리이더: 정신세계가 상당히 변했을 것이기에 기도에 대한 교부들의 글을 연구한다는 것은 단지 역사적인 관심 때문일 수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붕에: 정신세계는 시대의 유행처럼 변하겠지만 정신적인 삶에 깔려 있 는 근본적인 질문들과 목적 그리고 삶의 여정에서 이겨내야 할 장애물 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은수자로 사는 저는 그런 ‘비판적인 영들’과 실제 적으로 부딪치지 않습니다. 힘들게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실존적인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옵니다. 그들은 교부들의 문헌이 우리 시대와 자 신들의 삶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재빨리 파악합니다. 그래서 저 는 이 구도자들에게 제가 받아들였고 실제 생활에 적용했으며 그리고 제 삶 안에서 경험한 가치를 전달하려 합니다.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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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스스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서방 수도승들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지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지식이 삶과 구체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시간 낭비가 아닙니까? 전례 자체에서 새로움을 찾지 못하거나 오히려 역방향으로 흘러가 버린다면, 예를 들어 전례 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지식을 갖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러랭의 성 빈센시오(Vinzenz von Lérins)의 유명한 다 음 원칙을 제 것으로 했습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이가 믿 어온 것”(quod ubique, quod semper, quod ab omnibus creditum est). 여기 에 실제 삶으로 구현된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시다. 갈라지기 전 교회 교 부들의 가르침과 수행은 1800년이나 지나 이제 거의 잊히려 하지만, 저는 이를 가능한 한 실행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이 교부들의 가르침과 실천 으로 아주 잘 살아 왔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동방과 서 방을 다시금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교회 일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주제는 다른 자리에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질그릇들 을 사람들 손에 쥐어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책을 이리저리 뒤적이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십시오! 그 러고 나서 삶에 적용하십시오! 실행하지 않으려거든 아예 애초부터 읽 을 필요가 없습니다.” 동쪽을 향해 기도 방향을 잡는다거나 교부들이 철 칙으로 지키라는 ‘정향된 기도’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또 이 기도가 어 떤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는 각자가 시험해 봐야 합니다. 시도해 본 사람 은 태고로부터 해 온 이 기도가 단지 신학의 차원을 넘어 내면 깊숙이까 지 변화시킨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게 됩니다. 경험하는 것이 배우는 것입니다(Experientia doc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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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이더: 신부님은 실천을 강조하시네요.

붕에: 물론이지요. 예를 들어 많은 교부들은 “네 골방에 머물러라, 그 러면 네 골방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맞는지, 골방이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봐야 합니다. 말 만으로는 가르쳐 줄 수가 없습니다.

리이더: 신부님께서는 라파엘 형제에 관해서 “1년 후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기까지 오랜 투쟁이 있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파엘 형제가 그렇게 갑자기 변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기도가 축복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어떤 내적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까?

붕에: 라파엘 형제는 자신의 죽음 안에서 비로소 완성으로 가는 여정 의 시작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더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 는 그의 전기(Vita)를 썼는데, 제가 죽은 다음에야 읽히게 될 것입니다. 라파엘 형제에게는 항상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중요했고, 하느님께 로 올라가는 것이 그의 마지막 목표였다고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과 순수한 대화를 갈망했고, 이를 위해 분투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향하는 것도 이것이 아닙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독보적으로 말했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 창조된 하느님의 피 조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Fecisti nos ad Te, Domine, et 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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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escat in Te)1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 안에 머물지 말고 자신을 넘어서 그분께 향해야 합니다. 라파엘 형제는 특정한 비그리스도교적인 방법으로 기도하기를 멈추고 우리 주님 앞에 서 있는 자세, 엎드리는 것과 손을 위로 뻗치는 것 등, 제 가 후에 소책자에 쓰게 된 모든 방식들을 따라하기 시작한 순간에 이 사 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교 기도에서 무엇 이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물론 그는 하느님께 아무런 응답 도 받지 못한 것 같다고 나에게 오랫동안 하소연했습니다. 그때마다 저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도승이고 은수자인 우리는 어떤 기묘한 ‘체험’ 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주님 앞에 겸손히 서서 그분을 섬기 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을 읊는 것도 우선 섬기는 행위이 고 하느님의 일입니다. 자신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부들이 말하듯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그런 체험을 일으키실 것이지 만, 인간 스스로는 그런 체험을 유도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완 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계시의 하느님께서는 대상적 사물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 안에서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절 대적 의미의 위격이십니다. 동시리아의 위대한 신비가인 니니베의 이사 악(Isaak von Ninive)은 이 점을 성령 강림에 대한 다음의 말로 지적합니 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에게 그런 체험을 주 시는 것이지, 우리 편에서 그런 체험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저는 기도 중에 메마름을 느낀다거나 또 그와 유사한 것을 문제로 삼는 것은

11) 성 아우구스티노, Confessiones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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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자체가 항상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는 주관적 욕 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니베의 이사악은 주관적으로 ‘분심 하든지’ ‘잠심하든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들 은 심리적인 것이며, 그 부분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우리가 날씨에 미치 는 영향만큼 미소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동방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이 다시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교부들은 심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아주 섬세하게 구분하고, 감각 차 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성령의 작용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엄하게 경 고합니다! 성령의 작용은 아주 다른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 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혼동합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이면 서 서방 신비사상을 잘 알던 은수자 테오판(Theofan der Klausner)은 심 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혼동하는 것에 대해 항상 쓴소리를 했습니다.

리이더: 이런 주제는 바로 오늘날 아주 전염성이 강합니다. 지난 몇 년간 ‘신비주의’가 호경기를 맞았는데, 그것은 흔히 서구 취향에 맞는 소비성 신 심입니다. 가능한 빠르게 무엇을 체험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심리적인 차 원에 그치고 맙니다.

붕에: 바로 주객이 전도된 것이지요! 동시리아의 신비가인 야우셉 하 짜야(Jausep Hazzaya)는 말하기를, 참된 영적 체험은 가끔 하위 차원, 심 지어 육체적인 차원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는 정신에서 분출되어 흐르는 것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영양분이 필요치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 를 고집하면서 이를 갈구하면 쉽게 악마의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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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런 일을 쉽게 흉내 낼 줄 압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원하지 않던 환 상의 희생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의 교부들은 이것을 ‘플라네’(πλανη), 즉 ‘무서운 (자기)기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자가당착의 상태’(selbstinduzierte Zustände)라고 일컫는 이런 현상들을 에바그리오는 이미 알 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 상태를 모방하거나 흉내(anatypôsis) 내는 것이 하느님을 분노하시게 하는 끔찍한 오류라고 말합니다. 이런 행위는 작열 하는 한낮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면 눈 이 멀고 말지요! 감각에 의존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 야 합니다. 제가 분심과 영적 메마름 또는 이와 유사한 일에 좌지우지되 었더라면, 30년이나 되는 이곳의 삶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제 삶에서 어떤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 소임을 할 수 있 을 만큼 건강한 것에 만족할 뿐입니다. 그렇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았 음에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제가 한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채워 주셨습 니다. 저는 특별히 초자연적인 것을 욕심내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옛날 교부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한 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소박 한 내 성무와 보잘것없는 손노동을 하면서 나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관상의 영은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나에게 오 신다.” 관상을 하는 사람들은 관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이들에게는 관 상이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바그리오는 말하기를 “관상 의 경지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관상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마치 자는 동안 자신이 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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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이더: 일이 너무 많아서 개인 기도를 할 시간이 없다고 호소하는 신자 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붕에: 제가 에레모에서 만난 사람들 중 99퍼센트는 아주 평범한 신자 들입니다. 작년에는 몇 명의 사제들이 찾아 왔고 수도승들은 거의 드뭅 니다. 대부분은 여러 자녀를 둔 직장 남성들입니다. 일반적으로 결혼생 활과 직장생활에서 오는 갈등과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이 참다운 기 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에레 모를 찾아오는 것이니까요. 이때 각 사람들의 상황에 맞도록 해야 하는 데, 즉 그들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운용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 인과 다섯 자녀를 둔 가장이라면, 더구나 자녀들이 아직 어리다면 시간 조절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성적인 사람들은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납 니다. 저는 규칙적으로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잘 바치는 아주 평범한 신자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양이나 형태는 각 개인이 얼마나 어떻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와 영적 성숙에 따라 좌우되어야 합 니다.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맞는 자기만의 작은 ‘규칙’ 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규칙은 영적 성숙에 따라 수정되기도 하고 늘려 지거나 또 줄여지기도 합니다. 규칙적으로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는 것은 수도승들만의 특색이 아닙 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사도들도 하셨던 이 기도를 본래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계승해 왔습니다. 서방의 우리는 이런 초기 그리스도교의 관습을 지키는 마지막 증거자들이지만, 동방에서는 오늘날 여전히 평신도들이 이 사도들의 규칙을 지키면서 기도의 다른 방식이나 이에 버금가는 다른 무엇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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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이더: 수도승들이나 성직자들도 “기도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는 경 우가 없지 않습니다.

붕에: 어떤 사람들은 “나는 기도하지 않고 차라리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도와야겠어.”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웁니다. 하지만 자신이 기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현대 삶의 리듬이 극히 빠르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침기도, 일시경,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 등등을 포함한 우리 성무일과는 아주 다 른 리듬을 반영합니다. 옛날에는 한 시간 단위가 아니라 세 시간 단위로 하루를 크게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다른 리듬입니다. 오늘날은 초단 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바쁜 일상 안에서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서서히 수도승들도 이런 리듬 안에 들어서 있 습니다!

리이더: 이런 문제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부님께서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실천하십시오. 분심과 영적 메마름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 저 계속해 나가십시오.”라고 권하시는군요.

붕에: 에바그리오는 “기도를 잘한다는 것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 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우리가 많은 양의 내용을 소화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성무를 길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좋고 훌륭하긴 하지만, 하느님의 일이 가지는 의미는 결국 인간이 내적으로 하느님 앞에 항구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소위 ‘마음의 기도’(Herzensgebet)의 의도는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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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수도승들이 하던 이 기도 방식을 들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께 자주 바치는 이 간청을 ‘화살기도’(tamquam iaculatas)라고 불렀는데, 이 기도가 마치 창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 다. 에바그리오도 이 기도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당시 이 기도에 대한 확 정된 개념은 아직 없었지만 에바그리오는 ‘짧은’, ‘열정적인’, ‘중단 없는’ 기 도 등등으로 불렀습니다. 이 기도의 목적은 기도를 하루에 천 번, 이천 번, 오천 번 또 그 이상 줄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르러야 할 곳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기도의 목적은 언제 나 모든 것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하는 것인데, 그것을 그리스도인 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수도승들은 잠을 자면서도 이 기도를 계속한다는데, 그들의 마음이 항시 주님 곁에 머물러 있기 때 문입니다. 이 기도는 다른 기술적인 것이 필요 없이 단지 호흡과 연결되 었습니다.

리이더: 제가 처음으로 ‘예수기도’라는 말을 접했을 때, 이 기도가 일종의 요가 ‘기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닥에 누워 우선 숨을 들이쉬 고 내쉬기를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들숨과 날숨을 하는 동시에 예수기도의 공식을 하라는데, 저는 처음에 ‘이게 무슨 기도야? 이런 기도 는 절대 안 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붕에: 저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리이더: 예수기도를 이렇게 기술로 여기는 것은 실제 교부들의 의도나 가르침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기도는 말하자면 그런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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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팔려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술은 이제 인도나 일본에만 있 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있다는 식으로.

붕에: ‘화 살기도’ 그리고 가시아노와 에바그리오와 디아도 코 (Diadochos)와 또 다른 초기 교부들이 언급한 마음의 기도 또는 영적 수 행은 동방교회의 명상운동(Hesychasmus)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중세에 등장한 이 명상운동은 원래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하지 않는 기도의 방책 (Methode)입니다.

리이더: 기도의 방책이 그렇게 유래했다는 말이 아주 생소하게 들립니다.

붕에: 이슬람 지역을 포위했던 러시아 사람들은 이 기도의 기술 (Technik)이 수피들의 기도와 비슷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문헌 을 연구하는 비잔틴 학자들과 동방의 학자들은 오늘날 이런 직관을 인 정합니다. 저는 이런 식의 심리-신체적인 기술을 가진 어떤 고대 교부들 도 알지 못하고, 이런 기술이 고대 교부들의 정신과 부합한다고도 생각 지 않습니다. 이보다 훨씬 오래된 형태의 저 ‘짧고 강렬하며 항구하고 지 속적인 기도들’은 저절로 호흡과 연결됩니다. 여기에 다른 기술들은 불필 요합니다. 『안토니오의 생애』에서도 “항상 그리스도를 숨쉬라.”12) 하는 권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과 방법 문제가 아닙 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이름 없는 순례자』를 통해 알게 되고 단순히 받 아들인 이 영적인 수행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초기 수도승 생활

12)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 Vita Antonii ,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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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소급하는 것입니다.

리이더: 신부님은 ‘예수기도’를 책으로 알고 나서 지도자도 없이 이 기도 를 했다는 말씀이군요.

붕에: 그 당시 서방에서 어떻게 그런 지도자를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처음에 저는 네 개의 이야기가 실린 소책자를 갖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순례자가 걸어가면서 예수기도를 했다 하기에 저도 처음에 그렇게 했습 니다. 저도 모르게 이 정신적인 행위가 제 살과 피로 변했습니다. 21살 되 던 해에 저는 그리스에서 이 기도를 하는 수도승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 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연세가 많으셨던 세라핌 아빠 스는 실제 아주 높이 존경받던 영성가(Pneumatikos)이며 영적인 교부셨 습니다. 아빠스님은 나무로 만든 당신의 기도묵주를 제게 주셨는데, 저 는 이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 저는 예수기도에 관해 더 많이 읽으면서 이 교부에서 저 교부로 넘나들었는데, 결국은 항상 에바그리오에 멈추게 되었습니다. 교부들이 하나같이 에바그리오를 인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 그러면 직접 에바그리오를 알아봐야겠다.”라고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직 에바그리오에 관한 글들은 적었습니다. 에바그리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시 발굴되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에바그리오의 저서와 가 르침 그리고 제 삶의 여정을 통해, 점차 저는 이 모든 것이 도대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리이더: 에바그리오는 신부님의 기도 여정에서 아주 큰 역할을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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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에: 그렇습니다. 에바그리오는 기도에 관해 집필을 많이 했는데, 특 히 기도에 대하여13)라는 책의 전체 153장이 그렇습니다. 이 글은 제가 느끼기에 기도에 관한 글들 중 가장 고결한 것입니다. 저는 그의 『프락티 코스』(Praktikos)14)에 한 것처럼, 이 글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이 작업을 해왔지만 이를 완성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글 의 짤막한 장들에서 정신적인 깊이를 완전히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 능한데, 쓰인 것을 직접 체험하는 만큼만 그의 말을 알아듣기 때문입니 다. 따라서 에바그리오가 증거하는 경험에 한 발자국씩 접근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바그리오가 무엇에 대해 썼다기보다는 무엇에 관하여 증거한 것이기 에 그는 제게 중요합니다. 그는 은유와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 는 그가 자신의 경험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체로 그러한 것과는 달리, 에바그리오는 기도라는 주제를 새롭게 써나가기 위해 많은 서적을 읽은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을 많이 읽고는, 결국 열 권의 책에서 열 한 번째의 책을 만들어냅니다. 더 잘못된 것은 우리가 많은 책을 읽은 다 음 마치 우리 스스로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경험한 것처럼 생각하며 또 그 렇게 상상해봅니다. 그런데 에바그리오가 경험한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이 물음은 물론 순전히 학문의 차원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에바그리오는 길을 갈 때 사용하는 일종의 목발 또는 제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빗나가거나 심지 어 추락하여 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난간과 같습니다. 그는 가야 할 길의 숭고한 목표를 설명할 뿐 아니라 길에 숨어 있는 모든 위험 ~ )는 Patrologia Graeca , 79,1165-1200에 수록되어 있다. 13) 기도에 대하여(Περι προσευχηζ 14) 참조. 에바그리오 폰티코, 『프락티코스』, 허성석 역, 분도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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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관해서도 말합니다. 가장 높은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이 제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저는 올라갈 목표와 그곳으로 가는 길, 아울러 어떤 경로를 거쳐 그곳으로 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걸림돌들이 있는 지 가능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수도승들이면 대체로 그렇듯 말입니 다.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가능한 한 이 길에 대해 정확 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리이더: 위대한 스승들이 만들어 내는 기도의 학교는 이미 정상 가까이 다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이 학교를 통해 자신의 방식으 로 나아가면서 점차 잘 알아듣게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붕에: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목표는 같습니다. 살아 있는 스 승을 모실 수 없다면 글을 통해서 알아들어야 합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저는 러시아인들이 ‘스타르첸’(Starzen)이라는 호칭을 쓰는 참된 영적 사 부를 루마니아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바로 선종하신 사부 클레오파 (Kleopa)입니다. 그는 20세기 루마니아에서 가장 손꼽히는 영성가로 알 려져 있습니다. 사부 클레오파는 저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쳐주셨는데, 그는 기도 외에 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정말 옛날 교부셨는데 외모도 그러했습니다. 오랫동안 은수자 생활을 하신 클레오파 사부는 당신이 예전에 아빠스 로 있던 시하스트리아(Sihastria)라는 대수도원에 사셨습니다. 클레오파 사부는 제가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며 제게 맞는 것을 정말 잘 권해 주셨습니다! 저는 우선 그분께 아주 겸손히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여쭈었습니다. 그때 그는 제게 “이것은 중요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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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입니다. 제 말을 잘 들어보십시 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부는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단계에서 닥치곤 하 는 특유의 유혹들 그리고 기도가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올 때’ 일어나 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다시 말하는 것은 지나친 감도 있고 또 제 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사부의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이, 저는 사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에바그리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부가 말한 식으로 에바그리오를 읽어 본 적 은 없었지만 저는 그의 가르침을 즉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문자 그 대로 제게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영적 오르기의 어떤 단계에서는 더 이 상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그러니까 악이 아니라 선의 측면에서 다가오는 유혹들이 훨씬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클레오파 사부는 어디 에 위험이 있는지 그리고 고착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분 명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경험에서 나 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분을 찾기란 참 드문 일이기에 그분과 만남을 항 상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리이더: 마지막 질문입니다. 열심히 하느님을 찾는 젊은이들과 함께 있을 때 느끼게 되는 것은 이들이 성체조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가입니다. 성체조배는 역사적으로 중세 때에 시작된 것이지요.

붕에: 성체조배는 사실 서방의 전형적인 신심형태입니다. 왜 젊은이들 이 성체조배를 합니까? 이들이 결국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짐 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교회 신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전례가 아니라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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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스럽게 성체조배에서 하느님의 인격적인 현존을 찾습니다. 오늘날 미 사 전례 안에서 더 이상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 은 미사전례에 병행하는 신심행위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미사에 ‘성스러운 것’이 빠져 있다고 호소합니다. 하느님께서 전례의 중심에 계시지 않고 인간적인 ‘행위’가 중심을 차지한 다면, 그래서 신자들이 거룩함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다면 이 말은 맞습 니다. 인간 자체가 성스러운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런데 ‘성스럽다’는 것 이 무엇을 뜻합니까? 성스러운 것은 거룩함, 절대적인 거룩함을 비춰주는 것이고 하느님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본질적으로 거룩하시고 우리가 거룩하다고 하는 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께 바쳐졌기에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성인들의 경우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으로 감싸 안으셨기 때문입니다. 축성된 제병도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 는데, 젊은이들은 성체를 하느님 흠숭의 중심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명시적으로나 또는 단순히 실제적으로(de facto) 전례의 중 심이 아니라 할 때, 사람들은 하느님의 부재를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 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부재를 끝까지 견뎌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저희를 창 조하셨습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 저희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람 은 이렇듯 하느님을 향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전례 안에서 이런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성체조배 안에서 이 체험을 하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려 합니다. 이들은 아직 순수한 종교적 감성에 따라 몇 시간이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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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오늘날 우리의 전례가 얼마나 궁핍한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테르툴리아노가 말한 것처럼 영혼은 본성적으로 그리스도인(naturaliter christiana)이라는 좋은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념으로 이지러지지 않고 이 런 종교적 감성을 보존하는 젊은이들은 방해만 없다면 그들의 길을 찾 을 것입니다! 동방의 미사 전례는 그 양식상 성체조배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성체조배가 낯섭니다. 본 전례를 시작할 때 사제는 복음서를 들어 제대 위에 높이 올리고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의 나라는 찬미를 받으소서…….” 하느님 나라가 오시기를 주님의 기도 에서 우리는 이렇듯 애타게 간구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제대 위에서 하 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전례는 전례서에 반복되어 나오듯이 우리가 참여하는 천상전례를 반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성서에 근거해서 봅시다.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산 위에서 본 형상에 따라 천막과 장비들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또 히브 리서를 보십시오. 우리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몸인 휘장을 통해서 언제나 성부께로 나아가십니다. 우리가 거행하는 지 상의 전례는 결국 언제나 천상전례를 반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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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녀인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를 보편교회의 박사로 선포함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보내는 교황 베네딕도 16세 성하의 사도적 서한 신정희 제노베파 옮김

1. 저의 존경하올 전임자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빙엔 (Bingen)의 힐데가르트(Hildegard) 성녀의 서거 800주년을 기념하며, 이 독일인 신비가를 “자기 백성과 자기 시대를 위한 빛”이라는 말로 묘사했 습니다. 이 위대한 여성은 그녀의 거룩한 삶과 독창적인 가르침으로, 긴 인간 역사의 배경 속에서도 참으로 맑고도 분명하게 드러나 돋보이는 분 입니다. 모든 믿을 만한 인간적, 신학적 체험에서와 같이 그녀의 권위는 단순히 한 시대와 사회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랜 시대와 문화의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생각들은 어느 시대에나 타당성이 있는 것 으로 증명되어 왔습니다. 빙엔의 성녀 힐데가르트의 가르침과 일상의 삶은 대단히 조화로웠습 니다. 성녀에게 그리스도를 모방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은 최상의 관대함으로 단련되고, 성 베네딕도 규칙서의 빛 안에서 성서, 전례, 교부 학적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취하며, 끊임없이 덕행을 수행하는 것으로 나 타났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순명, 단순함, 애덕과 환대의 끊임없는 실행이 특히 눈에 띄게 드러났습니다. 완전히 주님께 속하고자 하는 갈망 속에 서, 힐데가르트 원장 수녀는 진귀한 재능과 예리한 지성 그리고 천상의 실재들을 꿰뚫어보는 능력들을 훌륭히 결합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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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힐데가르 트는 10 9 8년에 알 짜 이의 베르머스하임(A l z e y, Bermersheim)에서 귀족 가문의 부유한 지주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 다. 8살이 되었을 때, 디시보덴베르크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봉헌되었 고, 1115년에 서원하였습니다. 쉬폰하임(Sponheim)의 유타가 1136년경 에 세상을 떠나자 힐데가르트는 그의 뒤를 이어 원장 수녀가 되었고, 육 체적으로는 약했으나 영적으로 강인한 성녀는 수도생활의 쇄신을 위해 전적으로 투신하였습니다. 그녀에게 영성의 기초는 영적 균형과 수덕적 중용을 거룩함의 길로 여기는 성 베네딕도 규칙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힐데가르트가 받은 대단한 존경으로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가 증가함에 따 라, 115 0년경에 힐데가르 트는 빙엔 근처의 루페르 츠베르 크 (Rupertsberg) 언덕에 수도원을 세우게 됩니다. 그녀는 20명의 수녀들과 함께 그 수도원으로 옮겼고, 1165년에는 라인강 반대편에 또 다른 수도 원을 설립하여 두 수도원의 원장 수녀가 되었습니다. 수녀원 담장 안의 세계에서, 힐데가르트는 수녀들의 영적, 물질적 건강 을 보살폈고, 독특한 방법으로 공동체 생활과 문화, 전례를 육성하였습 니다. 외부 세계에 대해서도 그녀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 고 종교적 실천을 강화하며 카타리파의 이단적 성향에 대항하는 데 전념 하였습니다. 또한 글과 설교로 교회 개혁을 촉진하고, 성직자들의 생활개 선과 기강 확립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성녀는 처음에 교황 하드 리아노 4세 그리고 이후에는 교황 알렉산델 3세의 초대를 받아 당시 여 성으로서는 흔하지 않게 고난과 곤경이 따르는 여행을 여러 번 하였고, 심지어 공공 광장들과 쾰른(Koeln), 트리어(Trier), 리에주(Liège), 마인츠 (Mainz), 메츠(Metz), 밤베르크(Bamberg), 뷔르츠부르크(Wuerzburg)와 같은 대성당에서 설교를 하는 등 사도적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힐데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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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 저서의 깊은 영성은 그 당시의 일반 신자와 사회의 주요 인사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신학과 전례, 자연과학과 음악에도 후대에 길이 남을 만큼 단호한 쇄신을 불러왔습니다. 1179년 여름, 질병에 시달렸던 성녀는 같은 해 9월 17일에 빙엔의 루페르츠베르크 수도원에서 수녀들에 게 둘러싸여 성덕의 향기를 발하며 임종하였습니다. 3. 힐데가르트는 많은 저서들에서 오로지 하느님 사랑의 명확성을 알 리고 신의 계시를 설명하는 데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그녀의 가르침은 해석의 깊이나 정확성 그리고 관점의 독창성에서 탁월한 것으로 간주되 어 왔습니다. 성녀가 쓴 문장들은 진정한 ‘지적 명확성’이란 면에서 신선 한 것이며, 그녀의 글은 통찰력과 성삼의 신비, 육화, 교회, 하느님의 창조 물로서 감사해야 하며 존중되어야 할 인류와 자연에 대한 그녀의 명상의 포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작품들은 깊은 신비적 체험에서 탄생하였고,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통찰력 있는 성찰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성녀에게 어릴 때부 터 일련의 환시를 주었고, 그녀는 그 내용을 비서이자 영적 조언자로서 베네딕도회 수도승인 폴마르(Volmar)와 그녀의 수녀원 수녀인 리햐르디 스 폰 슈타데(Richardis von Stade)에게 받아쓰게 했습니다. 그러나 각별 하게 부각되는 것은 성녀를 격려한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특 별히 1147년에 성녀에게 글을 쓰게 하고 대중 앞에서 연설하도록 권한을 준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평가들입니다. 신학적 성찰 덕택으로 성녀는 그녀의 환시의 내용을 적어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과 신비주의에 대한 책들 이외에도 의학과 자연과학에 관한 작품을 썼으며, 성녀의 편지들은 현존하는 것만도 약 400편이나 될 만큼 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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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많습니다. 이 편지들은 평범한 사람들, 수도 공동체들, 교황들, 주교 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민 관료들에게 쓴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성 음악의 작곡가이기도 하였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저서 전집은 그 양과 질, 다양한 관심사라는 면에서 중세의 다른 어느 여성 작가와도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납니다. 힐데가르트의 주요 저서들은 쉬비아스 (Scivias), 책임 있는 인간 (Liber

Vitae Meritorum), 『세계와 인간』(Liber Divinorum Operum)1)입니다. 이 작품들은 그녀가 본 환시들에 관한 것들이며, 그녀가 하느님으로부터 받 은 임무는 그것들을 옮겨 적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관점에서 보면, 자 신의 편지들도 저서들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편지들은 하느님 신비의 빛 안에서 해석한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성녀의 관심을 보여 줍니다. 게다가 성녀가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행한 58개의 설교들도 있습니 다. 이 설교들은 복음서 해설(Expositiones Evangeliorum)로서, 전례주년 의 주요 축일과 관계되는 복음 구절들에 대한 문학적이고 윤리적인 해석 을 담고 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예술적, 과학적 작품은 주로 음악에 관 한 천상적 계시의 조화로운 화성(Symphonia Harmoniae Caelestium

Revelationum), 의학에 관한 피조물 성질의 다양성(Liber Subtilitatum Diversarum Naturarum Creaturarum), 원인과 치유(Causae et Curae) 그 리고 자연과학에 관한 물리(Physica)가 있습니다. 끝으로 그녀의 미상의

언어(Lingua Ignota)와 미상의 문자(Litterae Ignotae)처럼 언어학적 글들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이 글들에서 그녀는 자신이 발명한 미지의 언어 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독일어에서 표현되는 음소들로 구성되 1) 이 책은 우리말(힐데가르트 폰 빙엔, 『세계와 인간』, 이나경 역, 올댓컨텐츠, 2011)로 번역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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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습니다. 독창적이며 효과적인 문체로 이루어진 힐데가르트의 언어는 시적 표 현을 널리 활용하며, 상징, 경탄할 만한 직감, 예리한 비교들과 암시적인 은유들을 풍요롭게 표현합니다. 4. 예리한 지혜로 가득 찼으며 예언자다운 감수성을 갖고 있던 힐데가 르트는 계시의 사건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녀의 연구는 성경에서 시 작하여 발전하였으며, 연이은 연구에서도 성경에 견고하게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빙엔의 신비주의자 힐데가르트의 환시의 범위는 개별적인 문 제들을 다루는 데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전 체적인 통합을 제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녀는 자신이 본 환시와 뒤따른 성찰을 통해 우주의 기원에서 종말론적 완성에 이르기까 지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 결정은 성경의 빛 안에서 보면, 천상의 위계2) 설정에서 반역하는 천사들 의 타락과 우리 첫 조상들의 죄에 이르기까지 펼쳐지는, 대단히 긴 여정 의 첫 단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여정의 첫 단계 다음에, 하느님 아들의 구속 사업을 위한 육화 가 뒤따르고, 때를 맞춰 육화의 신비와 사탄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연장 되는 교회의 활동이 그 뒤를 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인 도래와 최후의 심판이 이 작업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힐데가르트는 자신과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 즉 하느님을 아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습니다. 이것은 신학의 기본적 과업입니다. 그녀는 문을

2) 이 표현은 천사들의 구품(九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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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들어가듯이 믿음을 통해서 인간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다는 완전히 긍정적인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항상 신비의 베일과 불가해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창조물 안에 서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창조 그 자체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연은 때때로 오류와 남 용을 초래하게 하는 정보의 일부 조각들만을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믿 음은 자연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한계 가 있고 불충분하며 판단을 그르치게 할 여지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무로부터 세상을 생기게 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모든 창 조물의 범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하나의 강물처럼 흐릅니다. 하느님 께서는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을 특별한 방법으로 사랑하시고, 반항한 천사들이 잃어버린 그 영광, 엄청난 존엄성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 므로 인류는 천사들의 품계 중에서 열 번째로 여겨집니다. 실로 인간은 삼위일체 중의 한 본성인 하느님을 자신 안에서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습 니다. 힐데가르트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제안한 노선으로 접근했습니다.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자기의 내적 구조에 유추하여 적어도 하느님 의 내적 생명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육화의 경륜과 하느님 아들의 인간적인 삶 안에서 이 신비는 인간의 믿 음과 지식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지고한 일체이시며 거룩하고 형언할 수 없는 삼위일체이신 분은 구약 법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 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의 새 법에서 이 신비는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로 나타났습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 아들의 십자 가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두 번째 ‘장소’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담겨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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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 에 인간은 듣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힐데가르트에게 노래, 특별 히 전례 성가에 관한 그녀의 가르침을 상세히 설명하는 기회를 주었습니 다. 생명을 창조한 하느님 말씀의 음성은 그의 창조물 안에서 표현되고, 창조적 말씀 덕분에 이성이 없는 존재들 또한 창조의 역동성에 포함됩니 다. 그러나 인간은 물론 자신의 목소리로 창조주의 음성에 응답할 수 있 는 피조물입니다. 이 응답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전례 의 축제를 통한 입의 소리와 덕스럽고 거룩한 삶을 통한 마음의 소리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삶의 전체는 조화롭고 교향곡과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5. 힐데가르트의 인간학은 성경 속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 창 조 이야기(창세 1,26)에서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영감을 받은 힐데가르트 의 우주론에 따르면, 인간은 전체 우주 안에서 계통 발생의 단계를 반복 하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창조의 바로 그 질 료로부터 인간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식적으로 하느님과 관 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접적인 시각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고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거울에 비친”(1코린토 13,12) 것처럼 희미하 게 일어납니다. 인간 안에 새겨진 신적 이미지는 지성과 의지로 구성된 인간의 이성에 있습니다. 지성 덕분에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고, 의지 덕분에는 행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몸과 영혼이 통합된 존재입니다. 독일 신비가 힐데가르트는 인 간의 육체적 물질성도 긍정적으로 제시하며, 심지어 인간 육체의 약함에 도 하느님의 섭리라는 가치를 부여합니다. 육체는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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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어야 하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은 허약하고 연약할지 라도, 이 연약함을 통해서 피조물다움과 겸손을 배우고 자만과 오만으 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힐데가르트는 낙원에서 자신들의 몸과 다시 결합하기를 기다리는 거룩한 이들의 영들을 환시 속에서 보았습니 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 명을 위한 궁극의 변모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바로 그 직관은 단연코 육체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여자와 남자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힐데가르트는 남성과 여 성의 상호 관계와 실질적 평등성이 인간조건의 존재론적인 구조에 그 근 원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죄의 신비 또한 인간성 안에 존 재하며, 역사상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나타났습니 다. 하와의 약함을 타락의 원인으로 보았던 중세의 저술가들과는 달리, 힐데가르트는 무엇보다도 하와에 대한 아담의 과도한 정열을 타락의 원 인으로 보았습니다. 죄인의 조건 속에 있을 때조차, 남자와 여자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사 랑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인간이 타락 한 후에는 그분께서 자비의 얼굴로 우리 인간을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지어 남자와 여자에게 벌을 주실 때에도 창조주의 자 비로운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조물 인간에 대한 가장 정 확한 묘사는 여정 중에 있는 인간, 순례자인 인간(homo viator)입니다. 고향을 향한 이 순례의 길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선한 것을 선택하고 악 한 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투쟁하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끊임없는 선의 선택은 덕스러운 삶을 낳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덕의 근원이므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명확히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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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와 친교 속에 덕스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덕성의 힘은 올바른 행동 을 가져오게 하는 성령, 믿는 이들의 가슴 속에 쏟아 부어진 성령으로부 터 비롯됩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은 그리스도와 같은 완전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6.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주님은 당신이 세운 교회에 성사들을 주셨습니다. 구원과 인간 존재의 완성은 인간의 의지적 노력만으로 성취 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이 교회에 부여한 은총의 선물을 통하여 이뤄 집니다. 교회 자체가 하느님이 인류에게 구원을 전달하기 위해 세상에 주신 첫 성사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영혼들’ 위에 세워진 교회는 정확 히 동정녀, 신부, 어머니로 여겨집니다. 즉, 교회는 천주의 모친이라는 역 사적이면서 신비적인 존재와 밀접하게 닮아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두 ‘기본 성사’(primary sacraments)로 볼 수 있는 삼 위일체와 그리스도 육화의 신비를 선포하고 보존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성사들의 집행을 통하여 구원을 전달합니다. 교회의 성사적 본성의 절 정은 성체성사입니다. 성사들은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고, 죄로부터 정화와 구원, 구속과 자애 등 다른 모든 덕들을 낳습니다. 그러나 반복 하여 말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삼위일체의 내적인 사랑을 나타내오셨기에 교회는 존속합니다. 주 예수는 탁월한 중개자 (mediator)이십니다. 예수는 삼위일체라는 자궁에서 나와 인간을 만나게 되고,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서 나와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아들 로서 예수는 육화된 사랑이고, 마리아의 아들로서 하느님 옥좌 앞에서 인류의 대리인(representative)이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과 관계는 단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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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영역 안에서만 존속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포함합니 다. 즉, 하느님에 대한 체험은 인간의 모든 외적, 내적 감각을 포함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한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오감을 통하여 행동합니다. 인간은 오감으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감을 통해서 인간은 활동할 때 현명하고, 지식을 쌓고, 지성을 발휘합니다. 바 로 이러한 이유로, 비록 인간의 오감으로는 하느님의 창조와 업적을 파 악하기란 어렵겠지만, 인간은 그분의 창조와 업적을 통해 하느님을 압니 다. 물론 믿음 없이 인간은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3) 다시 말하지만, 경험으로 하느님을 아는 이러한 과정은 성사들에 참여함으로써 충만해 집니다. 힐데가르트는 또한 믿는 이들의 개별 삶 안에서 모순들을 보았고 통탄 할 상황들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녀는 특별히 교의적인 면이나 평신도와 서품된 사목자들의 실천적인 면에서, 개인주의가 교만의 한 표현이며 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주요한 장애요소임을 강조 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가르침 가운데에 한 가지 두드러진 점은 봉헌된 남녀 수 도자들에게 향한 덕스런 삶에 대한 진심 어린 권고였습니다. 봉헌된 삶 에 대한 힐데가르트의 이해는 참된 ‘신학적 형이상학’(theological metaphysics)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해는 순명과 가난과 정결에 완전 한 투신을 끊임없이 촉진하는 힘과 원천인 믿음의 향주덕에 굳게 뿌리내 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권고들을 사는 봉헌된 사람은 가난하셨 고 독신을 사셨으며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경험을 나누고, 매일의 삶에

3) “Explanatio Symboli Sancti Athanasii”; Patrologia Latina , 197,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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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그분께서 걸으신 길을 따릅니다. 이것이 봉헌된 삶의 기본입니다. 7. 힐데가르트의 유명한 가르침은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그녀와 같 은 시대 글들의 가르침을 반향하고 한편으로는 부단히도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참고한 면이 발견됩니다. 성경의 내면화와 수도승 전례는 육화의 신비에 중점을 둔 그녀의 사상에서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상은 그 녀의 모든 글들을 관통하는, 내용과 형식의 깊은 일치로 표현됩니다. 거룩한 베네딕도회 수녀, 힐데가르트의 가르침은 순례자인 인간을 위 한 하나의 표지입니다. 그녀의 메시지는 오늘날 세계에 대단히 시의적절 합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그녀가 제안하고 실천하였던 가치들에 특히 민 감합니다. 신학적 연구에 생생한 자극을 주는 힐데가르트의 카리스마적 이고 사색적인 능력 그리고 그리스도 신비에 대한 훌륭한 묵상이 그러 한 예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문화, 과학, 당대의 예술과 교회 및 신학 사 이의 대화, 인간 완성의 한 가지 가능성으로서 봉헌된 삶에 대한 이상, 삶의 축제로서 전례에 대한 평가, 구조의 공허한 변화가 아닌 마음의 회 개로서 교회 개혁에 대한 그녀의 견해 그리고 자연(물론 자연 법칙은 침 해되지 않고 보호되어야 한다)에 대한 그녀의 민감성 등을 예로 들 수 있 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빙엔의 힐데가르트에게 보편교회의 박사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 세계에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며, 특별히 여성들 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힐데가르트가 여성의 가장 고결한 가치를 드 러냄에 따라,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는 또한 과학적인 연구와 사 목적 활동의 전망이란 양면에서 힐데가르트의 존재로 인해 빛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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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교회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에게 말을 할 줄 아는 힐데가르트의 능력은 그녀를 새 복음화의 확실한 증인이 되게 합니다. 거룩한 사람으로서 힐데가르트에 대한 평판과 그녀의 탁월한 가르침 때문에 1979년 3월 6일에 쾰른의 대주교이며 독일 주교회의의 의장인 요 셉 회프너(Joseph Höffner) 추기경, 주교회의의 추기경과 대주교와 주교들 그리고 뮌헨과 프레이징의 추기경이었던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 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께 빙엔의 힐데가르트를 보편교회의 박사로 선포할 것을 청하는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청원서에서 요셉 회 프너 추기경은 힐데가르트의 가르침은 12세기에 교황 에우세니오 3세에 의해 건전한 것으로 인정되었으며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고, 대중에 의해 찬양받아 온 그녀의 거룩한 삶과 저서들이 신뢰할 만하다고 강조했습니 다.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 주교회의가 제출한 청원서 이외에 다른 청원들 이 추가되었습니다. 우선, 빙엔의 힐데가르트라는 이름을 딴 아이빙엔 (Eibingen) 수녀원 수녀들의 청원을 들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공통 된 소망인 힐데가르트의 시성에 덧붙여 힐데가르트를 ‘보편교회의 박사’ (Doctor of the Universal Church)로 선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동의를 얻어, 시성성은 빙엔의 신비가에 대한 ‘시성과 보편교회의 박사 칭호 승인을 위한 심문요항’(Positio super Canonizatione et Concessione tituli Doctoris Ecclesiae Universalis)을 세밀히 준비하였습 니다. 이것은 많은 권위 있는 연구의 대상이 되어온 유명한 신학의 스승 과 관계되기에, 나는 교황령 “착한 목자”(Pastor Bonus) 제73항에 명시된 관면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2012년 3월 20일에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총회에서 힐데가르트의 시성과 교회 박사 칭호 부여를 위한 소송이 심리 되고 인준되었습니다. 소송의 발의자는 시성성 장관인 안젤로 아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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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o Amato) 추기경이었습니다. 2012년 5월 10일 공식회견에서 아마 토 추기경은 소송 상황의 내용과 위에서 언급한 시성성의 총회에서 사제 들의 만장일치투표에 관하여 상세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2012년 5월 27일 성령강림 주일, ‘신앙의 해’가 선포되기 전날이며 주교 시노드 총회가 시작된 날에, 성녀 힐데가르트와 아빌라의 성 요한 에게 교회박사의 칭호를 수여한다는 소식을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발표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도우심과 전 교회의 승인으로 이 선포가 실행되었습니 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많은 추기경님들과 로마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의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소송의 절차를 확인하고 청원자들의 청원을 기꺼운 마음으로 승인하면서, 미사성제 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많은 동료 주교들과 전 세계의 수많은 믿는 신자들의 소망을 채우면서, 시성성의 의견을 듣고 확실히 알아보며 충분히 숙고하여, 나는 완전한 사도적 권한으로 교구 사제인 아빌라의 성 요한과 베네딕도회의 수녀인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보편교회의 박사임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으로 선포합니다.” 이에 나는 이 서한이 영원히 유효하고 완전한 효력을 얻는다고 공포합 니다. 나는 이 순간부터 고의로나 혹은 모르고라도, 어떤 사람이나 어떤 권위 있는 기관에 의해서 제안된 어떤 반대도 그것은 부당하며 효력이 없는 것임을 확증합니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교황 재위 제8년, 2012년 10월 7일에 교황 베네딕도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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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요한 가시아노 담화집 제21담화: 오순절의 이완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I 위대한 테오나스 아빠스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서술하기 전에 그분이 수도생활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독자들은 이분의 공로와 은총을 더 명백하게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분은 아주 젊었을 때에 부모의 정성과 명령에 의하여 결혼의 끈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분의 경건한 부모는 아들의 정결을 염 려하여 실족하기 쉬운 청년기의 위험을 미리 막기 위해 합법적인 혼배가 좋은 약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테오나스가 아내와 같이 오 년째 지내다가 요한 아빠스를 만나게 되었 다. 그 아빠스는 놀라운 성덕의 덕분에 그 당시 자선비를 관리하는 책임 자로 선출되었었다. 이 책임은 누구나 탐내서 스스로 맡는 것이 아니고, 오직 연령이 높고 신앙과 덕행으로 다른 모든 이들보다 훌륭하고 뛰어나 다고 원로들이 일제히 인정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그 책임을 맡게 되어 있었다. 이제 위에서 말한 청년(즉, 테오나스)이 경건한 마음으로 이 복된 요한을 찾아갔다. 그는 다른 지주들과 함께 신심에 의한 봉헌물을 드리 러 간 것이다. 이들은 자기 수확에서 십분의 일 또는 맏물들을 서로 다 투어 그 원로에게 바쳤다. 원로는 이들이 많은 선물을 가지고 자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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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가시아노

몰려오는 것을 보아서 그들의 정성을 갚으려고, 사도의 말씀에 따라 육 적인 예물을 거두었으니 그들에게 영적인 것을 뿌리기(1코린 9,11) 시작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주었다.

II 내 자녀들이여, 그대들이 열심히 전하러 온 풍부한 기부에 대하여 나 는 참으로 기뻐한다. 내가 배정하게 되어 있는 이 경건한 예물을 기꺼이 받았다. 궁핍한 이들을 위하여 쓰게 될 맏물과 십일조를 그대들이 충실 히 바치는 것은 주님께 감미로운 희생제물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소유의 일부를 주님께 바쳤으니 그분께서 그대들의 모든 열매와 그 외의 모든 재산에 풍요롭게 강복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들은 이승에서 도 모든 재물을 넘치게 받게 되리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계명의 말씀 때 문에 믿어야 한다. “네 재물과 네 모든 소출의 맏물로 주님께 영광을 드 려라. 그러면 네 곳간은 그득 차고 네 소출은 포도즙으로 넘치리라.”(잠 언 3,9-10) 이 신심 행위를 충실히 실행하면 그대들은 구약에 속한 율법 을 완성한다. 그런데 구약의 지배를 받던 사람들이 그것을 어기면 불가 피하게 죄를 범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실행해도 완덕의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III 주님의 법에 따른 십일조는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봉헌불과 맏물 은 제관들에게 바치게 되어 있었다. 맏물에 대한 규정은 수확과 짐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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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가운데 오십분의 일을 성전과 제관들의 직무를 위하여 바치라는 것이었 다. 그런데 냉담한 사람들은 그보다 적게 드렸지만 열심한 사람들은 그 보다 많이 드렸다. 전자는 육십분의 일 정도로 계산하였고 후자는 사십 분의 일 정도로 계산했던 것이다. 율법은 의인들 때문에 있지 않다는 것 (1티모 1,9 참조)이 이렇게 드러난다. 의인들은 율법의 규정을 수행할 뿐 아니라 그것을 능가함으로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 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할 부분에 일부를 첨가함으로 그 신앙심이 계명 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IV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대로 아브라함은 그런 식으로 장래에 생길 율법 의 계명을 초월했다. 그는 네 명의 왕들을 이기고 나서는 승자로서 마땅 히 차지할 수 있는 전리품을 사양하였다. 소돔의 임금은 빼앗긴 물건을 다시 찾아 준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가지고 가라고 간절히 부탁했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에 손대지 않고 하느님 이름을 걸고 이렇게 부르짖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며 지극히 높은 하느님이신 주님께 내 손을 들 어 맹세하오. 실오라기 하나라도 신발 끈 하나라도 그대의 것은 아무것 도 가지지 않겠다.”(창세 14,22-23) 다윗도 율법의 계명을 초월했다. 모세 는 동태복수법을 정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박 해하는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그들을 위하여 주님께 열심히 기도하 고 슬피 울며 그들을 죽인 사람들을 벌하였다(2사무 1장). 엘리야와 예레미야도 율법 아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 은 허물없이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어도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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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 그리고 그와 같은 생활양식을 택한 사람들도 모세의 계명을 초 월했다. 사도는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서술했다. “그들은 양가죽을 두르 고 돌아다녔고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습니다. 세상이 마땅찮아 광 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 다녔습니다.”(히브 11,37-38) 레캅의 후손 여호나답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그들은 주님의 지시에 의해 포도주를 권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이렇게 대답했 다고 한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 레캅의 아들 여호나답께서 우리에게 ‘너희와 너희 아들들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하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 ‘집도 지지 말고 씨앗도 뿌 리지 말며 포도밭을 가꾸거나 갖지도 말고 그 대신 평생 천막에서 지내 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예레 35,6-7) 그래서 그들은 이 예언자로부터 다음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 게 말씀하신다. ‘레캅의 아들 여호나답에게서 언제나 내 앞에 서 있을 자 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예레 35,19) 이 모든 사람들은 십일조를 바침으 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재산 전체를 포기하고 차라리 하느님께 바쳤는 데, 그것의 대가는 인간이 전혀 줄 수 없다. 그것은 주님께서 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증명하신 것이다. “무엇을 목숨의 값으로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마태 16,26)

V 이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율법의 계명이 아니다. 그 대신에 “완전해 지려면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 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터이니.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마태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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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씀이 매일 우리 귀에 울린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소출의 십일조 를 하느님께 바치면, 우리는 아직 어느 정도 율법의 짐을 지고 있으며 복 종하는 사람들이 현세의 혜택만이 아니라 내세의 상급을 주게 될 복음 적 완덕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상급이 아니라 현세 생활의 위안만 약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것이다.” (레위 18,5)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이렇 게 말씀하셨다. “복되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니.”(마태 5,3)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 내나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사람 누구나 백배를 되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태 10,30; 루카 18,29) 옳은 말씀이다. 금지된 것을 피한 다는 것은 크게 칭찬받을 일이 아니지만, 우리의 나약함을 생각해서 사 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신 분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허락된 것까지 삼가 는 것은 더 칭찬할 만하다. 그래서 소출의 십일조를 충실히 바쳐서 주님의 옛 계명을 지키는 사람 들도 복음이 제시하는 완덕의 절정에 오르지 못한다면, 이것마저 하지 않는 이들이 그것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뻔히 보일 것이다. 율법 의 가벼운 계명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복음이 약속하는 은총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율법의 규정들이 가볍다는 것은 입법자가 명령하 는 어조로 증명된다. 그분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저 주한다. “이 율법의 말씀들을 존중하여 실천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 다.”(레위 27,26) 그런데 복음의 계명이 숭고하고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마태 19,12)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 다. 구약의 계명이 더 가볍다는 것은 격렬하게 강요하는 입법자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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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드러난다. “내가 오늘 너희를 거슬러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는 데 너희가 너희 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땅에서 망할 것이 다.”(신명 4,26 라틴어역) 그와 달리 복음에서는 숭고한 계명을 명령조가 아니라 초대로 표현해서 그 위대함을 알 수 있다. ‘완전하려면 가서 이것 이나 저것이나 해라’는 식이다. 구약의 경우에 모세는 법을 거절하는 사 람들에게도 면제될 수 없는 짐을 지웠는데, 이제 바오로는 원하는 사람, 완덕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에게만 권고를 베풀어 준다. 기묘할 만 큼 숭고해서 모든 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을 구별 없이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명령하거나 보편적인 표준처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도 모든 이가 은총의 초대에 응하도록 권고를 받는 것이다. 이래서 큰 이 들은 덕행을 완수하여 마땅하게 화관을 받을 수 있거니와,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에페 4,13) 이르지 못하는 작은 이들이라도 별들과 같은 큰 이들의 광채로 덮여서 숨어 있는 것 같지만, 율법에서 말하는 저주의 어둠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들은 현세의 재난을 당하지도 않고 영원한 형벌을 받지도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저 덕행의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 라고 계명을 통해서 아무에게도 강요하지는 않으시고, 유익한 권고로써 자유로운 선택을 불러일으키며, 완덕에 대한 열망의 불을 붙여주신다. 계명이 있는 곳에는 필요성이 있으며 따라서 형벌도 있다. 그래서 엄격한 법의 강요에 의해서 지킬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법에서 위협하는 벌을 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수나 상급을 받지는 못한다.

VI 복음의 말씀은 강한 이들을 숭고하고 뛰어난 곳을 향해 올려주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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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편, 약한 이들이 밑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해준다. 복음은 완전한 이들에 게는 충만한 행복을 주며 패배를 당한 약한 이들에게는 용서를 제공한 다. 율법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어떤 중간 위치에 둔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범법자들의 영벌을 받지도 않고 완전한 이들의 영광을 받지도 않 는다. 그런 상태가 얼마나 비천하고 불행한 것인지 현세 생활의 경우에 견주어 볼 때 잘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부유해지고 존경과 명예를 받을 것을 마다하고 오직 단정한 사람들로부터 범인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하여 만 노력하고 고생한다면 그는 비참해 보이지 않는가?

VII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복음의 은총 아래 살려고 하는지 아니면 율법의 공 포 아래 머물려고 하는지는 우리의 권한에 달려 있다. 각자가 자기 행동의 성질에 따라 그 양쪽 가운데 한쪽에 속하게 된다. 율법의 요구를 초월하 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끼게 되지만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율법에 빚진 사람으로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 누가 그리스도인이 라고 하면서 주님의 은총으로 해방되었다고 헛되이 자랑해도, 율법의 계 명을 어기는 사람은 복음의 완덕에 전혀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율법의 요구를 모두 채우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을 지킴으 로 만족하고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은총에 알맞은 열매를 내지 못하는 사 람도 아직 율법 아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복음의 소리는 “십일조와 맏물을 네 주 하느님께 바치라.”(탈출 22,29) 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 하게 될 터이니 그렇게 하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루카 18,22)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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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복음의 완덕이 너무 탁월해서 청하는 제자에게는 아버지의 장례 를 지내기 위하여 짧은 시간이라도 허용되지 않았다(마태 8,21-22). 인간 의 사랑이 요구하는 본분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힘에 뒤져 버린 것이다.

VIII 이 말씀을 듣고 테오나스는 복음적 완덕에 대해 끌 수 없는 열망의 불 로 타기 시작했다. 그는 말씀의 씨를 열린 마음으로 잉태하여 깊고 잘 가 꾸어둔 가슴의 이랑에 심었다. 그가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고 마음 아파 한 것은 원로의 말에 따라 자기는 복음의 완덕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 아 니라 율법의 계명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해마다 소 출 가운데 십분의 일을 자선을 위하여 지출해 왔지만 맏물에 대한 말도 듣지 못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만일 그 일을 완수했다고 가정한다 해도 원로의 말씀을 생각하면, 그는 아직도 복음의 완덕과 거 리가 멀다는 것을 겸손하게 시인했다. 그는 근심하며 집에 돌아갔다. 그 것은 회개를 자아내어 구원받게 하는 슬픔(2코린 7,10)이었다. 그래서 이미 자기 뜻과 결심을 굳힌 그는 큰 정성과 깊은 배려로 배우 자의 구원에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자기가 불타기 시작한 그 같은 열망 을 부인에게도 일으키기 위하여, 들었던 훈계와 비슷한 말로 그녀를 설 득해보고, 금욕의 정결을 지키면서 함께 하느님을 섬기자고 밤낮 눈물을 흘려 권고하였다. 그는 보다 나은 생활을 택하기 위해서는 회두를 늦추 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린이나 소년이나 청년도 노인과 마찬가 지로 갑자기 죽을 수 있으니 젊다고 해서 빨리 죽지 않으리라는 헛된 희 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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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IX 그러나 그가 꾸준히 간청해도 부인은 찬성하기를 아주 완고하게 거부 했다. 꽃다운 나이에 부부생활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 라서 만일 남편이 자기를 버린 다음에 자기가 어떤 죄를 범하게 된다면, 그것이 혼인의 계약을 깨뜨린 남편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고 했다. 거기에 대해 남편은 인간의 본성이 너무 나약하고 믿을 수 없어서 더 오래토록 세속적인 욕망과 사업에 연루되는 일이 위험하다고 했다. 반드시 취해야 할 선행이라고 깨달은 것을 멀리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알게 된 선을 무 시하는 것은 몰랐던 선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했다. 따 라서 그렇게 훌륭하고 천상적인 보물 같은 것을 찾아놓고도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을 그보다 더 낫게 여긴다면 자기가 이미 죄에 걸린다고 했다. 남녀노소가 완덕에 나아가야 된다고 하면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 시오.”(1코린 9,2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숭고한 덕행의 꼭대기에 올라가려는 소명을 받았다고 했다. 느리고 게으 른 사람들이 주저한다고 해서 용의 있는 활기찬 사람들이 멈출 수는 없 고, 주저앉은 사람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보다 앞에 달려가는 사람 들이 나태한 사람들을 재촉하는 일이 더 옳지 않으냐고 했다. 그래서 자 기는 세속을 버리고 하느님을 위해 살려고 세상에 대하여 죽기로 이미 굳게 결심했다고 했다. 그리고 만일 배우자와 함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사귀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면, 한 지체를 잃더라도 구원받는 것 또는 불 구자가 되더라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마태 5,20)이 온전한 몸으로 단죄를 받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우겼다. “모세가 사람들의 마음이 모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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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버리기를 허락했다면, 그리스도는 정결에 대한 열망 때문에 그것 을 허락하시지 않겠는가? 사실 율법만이 아니라 주님 자신도 부모와 자 식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지만 당신 이름 때문에 또는 완덕에 대한 열망 때문에 그들을 그저 무시할 뿐 아니라 미워하라고 하시지 않 았더냐(루카 14,26)?” 그런 애정을 버리라는 말씀 가운데 아내라는 명칭 도 나온다는 것이었다. 즉,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 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를 버린 사람 누구나 백배로 받을 것이요 영원 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19,8)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는 첫째 계명에는 이런 약속이 따릅니 다. ‘너는 복을 받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페 6,2-3) 하면서 아버지와 어 머니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첫 번째로 약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제 주님께서 당신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엄격한 의무까지 무시하라고 명하신다면, 당신이 선포하신 완덕에 어떤 것이라도 비교하는 것을 허용 하시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복음에서는 간음을 범하지 않는 경우에 배우자와 맺은 결혼의 인연을 끊는 사람을 단죄하는 것과 마찬 가지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정결에 대한 열망으로 육체의 멍에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백배의 상을 약속한다는 것이 명백하다.1)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당신이 드디어 깨달아서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일에 찬성한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을 섬기 면서 지옥의 벌을 함께 피할 수 있다면 나는 배우자로서의 사랑을 거부

1) 가시아노 자신의 입장을 알 수 없지만, 그가 여기서 소개하는 테오나스의 성서해석을 받아 들일 수 없다. 루카 14,26와 마태 19,8에서 예수님 말씀의 문맥을 보면, 그분이 현실적으로 부모나 아내를 멀리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보다 아무도 더 사랑할 두 없다(마태 10,37)고 하신 것이다. 테오나스의 결심은 그리스도교 윤리로 뒷받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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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더욱 열심히 사랑하겠다. 나는 주님이 당신 뜻 대로 내게 주신 협력자(창세 2,18)를 인정하고 존경하며, 그리스도 안에 서 끊이지 않는 사랑의 계약에 의하여 결합된 것을 배척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처음 제정하신 법에 의하여 나와 결합하신 사람을 멀리할 생각 은 없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당신은 창조주께서 원하셨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협력자가 아니라 속이는 자가 되어 나에게 도움을 주는 대신에 원수에게 도움을 준다면2) 입장이 달라진다. 만일 당신이 제공되는 구원을 스스로 빼앗길 뿐 아니라 내가 구세주의 제자 가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혼배성사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세 속적인 어떠한 애정이라도 나를 영적인 선과 분리시킬 수 없도록 요한 아빠스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말씀을 단호하게 내 것으로 만 들겠다. 그분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8,26)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말을 아무리 해도 아내의 뜻은 굽혀지지 않았다. 그 래서 복된 테오나스가 아내의 단단하고 완고한 마음을 보고 이렇게 말 했다. “내가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지 못해도 당신은 나를 그리스 도로부터 떼어낼 수는 없다. 하느님과 분리되는 것보다 사람과 분리되는 것(divortium, 이혼)이 안전하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극 을 받아 자기 결심을 즉시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늦어짐으로 써 뜨거운 열망이 식는 것을 막으려고 즉시 모든 재산을 일체 버리고 어 떤 수도원으로 달려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짧은 시간에 성덕과 겸손으 로 크게 빛을 냈다. 그래서 복된 요한이 이 세상을 등지고 주님께 가고,

2) 테오나스는 아내를 하와와 비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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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뒤떨어지지 않던 그의 거룩한 후임 엘리야도 별세한 다음에, 모 든 이들은 테오나스를 선출하여 제3대 자선비 관리자로 세웠다.

X 이제 아무도 내가 이혼을 장려하기 위하여 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결혼을 단죄하지 않을 뿐더러 사도와 함께 “모든 이의 결혼을 존중하고 부부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라.”(히브 13,4) 하고 말한다. 오직 그 위대한 분이 하느님께 봉헌된 수도생활을 어 떤 식으로 시작했는지를 독자에게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선의의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일이 좋든 싫든 나를 욕하지 말고 그 장본인만 칭찬하거나 나무라라는 것이다. 내가 이 일에 대하여 내 견해 를 밝히지 않고 그저 사실대로 그 일을 간단히 보고했으니, 나는 이 일을 좋게 보는 사람들의 칭찬을 구할 생각도 없는 것처럼 이 일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의 원망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그러니 그 일을 각자가 자 기 생각대로 판단해도 좋다. 그러나 이 일을 평가할 때 한 가지만을 주의 하기를 바란다. 사도들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테오나스에게도 주심으로써 당신의 판단을 보여주신 하느님보다 더 당연하며 더 거룩하 다고 스스로 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원로들의 입장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테오나스의 행동을 조금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자선비 관리자 선거에서는 지극히 훌륭하고 고귀한 많은 사 람들보다 그분을 앞세운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많고 영성 깊은 분들이 하 느님의 감도를 받고 내린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판단은 위에서 벌써 말한 바와 같이 놀라운 많은 기적으로 확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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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 그런데 지금은 약속한 담화를 기록할 시간이 되었다. 테오나스 아빠스 가 오순절 동안 우리 방을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그날 저녁기도를 바치 고 나서 잠시 바닥에 앉아 있다가 우리는 그쪽 수도자들이 오순절 동안 아무도 기도할 때에 장궤하지 않는 관례나 제9시(오후 3시)까지 아무도 단식하지 않는 관례를 왜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는지에 대하여 꼼꼼하게 알아보았다. 특히 우리가 시리아3)의 수도원들 안에서 이런 것을 그만큼 세심하게 지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더욱 궁금했다.

XII 이 질문에 대하여 테오나스 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더라도, 사부님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우리 시대까지 길이 지켜온 관례를 예부터 전해 내려온 대 로 꾸준히 지키고 존경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대들이 이에 대한 이유와 의미를 알고 싶으니까, 우리가 우리 선배들로부터 이 관례에 대 하여 배운 것을 간단하게 말해 주겠다. 그렇지만 성경의 증거를 꺼내기 전에 단식 자체의 본질에 대하여 잠시 말하고 싶다. 그다음에야 우리의 설명을 성경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싶다. 하느님의 지혜는 코헬렛을 통하여 모든 일, 잘되는 일과 잘되지 않고 3) 가시아노와 제르마노는 로마제국 시리아 주에 속했던 팔레스티나의 수도원에 살다가 이집 트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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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일에 알맞은 시간이 있다고 가르쳤 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 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할 때가 있다. 돈을 던 질 때가 있고 돈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 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 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코헬 3,1-3)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서 “모든 일과 모든 행동에 때가 있다.”(코헬 3,17)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코헬렛은 그 모든 것 가운데 언 제나 좋다고 할 것은 없고 오직 어떤 일이 적당하고 당연한 시간에 이루 어질 때에 좋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 어느 때에 알맞게 했던 그 일도 적당 하지 않은 때에 행한다면, 쓸모없고 해로운 일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본 질상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서 한 번도 반대의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예 외이다. 여기서 정의, 지혜, 용기, 절제 같은 덕목과 그와 반대되는 악습 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역으로 반대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행하 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좋은 것도 될 수 있고 나쁜 것도 될 수 있는 것들 은 본질상 한쪽에 속한 것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의 의도와 시점에 따라 어떤 때에는 유익하고 또 어떤 때에는 해롭다고 해야 하겠다.

XIII 그래서 이제 단식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알아보면서, 그것이 정의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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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 또는 용기와 절제처럼 언제나 좋아서 절대로 반대의 것으로 넘어갈 수 없는지, 아니면 단식은 중간의 것으로 가끔 유익할 수도 있고 가끔 빠 뜨릴 수도 있으며 또 어떤 때에 하면 안 되고 어떤 때에 빠뜨리면 잘하는 것인지 규정해야 되겠다. 만일 우리가 위에서 말한 덕행과 같은 것으로 단식이 본질상 선이라고 한다면 먹는다는 것이 나쁘고 죄를 범하는 것 이 되겠다. 왜냐하면 본질상의 선에 반대되는 것은 틀림없이 본질상의 악이라고 보아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는 그런 견해를 허락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음식 먹는 것이 죄라고 믿는 마음과 뜻으로 단 식한다면, 우리는 극기의 결실을 거들 수 없을 뿐 아니라 큰 잘못과 모독 죄를 범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씀 때문이다. “그들은 믿는 이들과 진리를 깨달은 이들이 감사하며 먹도록 하느님이 창조하신 음식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지으신 것들은 모두 좋으니 감사하며 먹으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1티모 4,3-4) “어떤 것을 더 럽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그것이 더러운 것이 됩니다.”(로마 14,14) 그래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누가 단죄되었다는 말씀이 없다. 그 식사와 연결되거나 그 후에 생긴 어떤 일 때문에 단죄를 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면 예외이다.

XIV 단식이 중간의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 의인으로 인정 받는 한편, 그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죄인이 되지 않는 것으로 명백히 알 수 있다. 다만 음식을 드는 것 자체가 아니라 먹음으로써 어떤 계명을 어 긴 탓으로 징벌을 받는 경우는 다르다. 그러나 어떤 것이 본질상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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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것이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그만둠으로 반드시 죄악 에 빠지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 없이 지내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본질상 악하다면 잠시라도 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행 하는 사람을 해치지 않을 때가 있을 수 없고 찬양할 만한 것으로 변할 때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하여 일정한 방식과 시기가 정해져 있으며, 그것을 지킬 때에 거룩해져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오염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분명히 중립적이다. 혼인, 농사, 재산, 은수, 밤새움, 거룩한 책의 독서와 묵상 등 그리고 우리가 지금 다루고자 하는 단식은 그런 일들이다.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것을 항상 추구하고 계속 지키라는 하느님의 계 명이나 성경의 말씀이 없어서 얼마간 그만두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계명으로 명령되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죽음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 러나 명하지 않고 그저 권고하는 일이면 그것을 행하는 것이 유익하지만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이런 일 가운데 어떤 일을 할 때 적어도 그 목적, 장소, 방식, 시기를 고려하여 지혜롭게 지키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런 것 가운데 어떤 것을 적당하게 행하면 유 익하지만 적합하지 않게 행하면 해롭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형제가 방문해 와서 그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친절 하게 받아들이고 반갑게 대접해야 되는데, 만일 누가 그런 경우에 엄격 하게 단식을 지키겠다면, 신심에 대한 칭찬을 받고 공로를 얻는 대신에 몰인정의 죄를 범하지 않느냐? 또는 몸이 기진하고 약해서 힘을 회복하 기 위하여 꼭 음식을 들어야 할 때 어떤 사람이 엄격한 단식을 완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구원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잔인하게 죽이 는 짓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축일에 음식을 즐기게 되어 있는데 누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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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단식을 굳게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가 그를 열심한 사람으로 보지 않 고 오히려 난잡하고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단식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노리고 창백한 모습을 드러냄으로 성덕의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단식은 오히려 해로운 것이 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대로 이미 현재에 상을 받은 사람들이다(마태 6,16). 또 주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의 단식을 지겨워한다고 하셨 다. 주님께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했 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즉시 그들을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를 밝히셨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 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 고 자루 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3-5) 그리고 단식하는 고행이 어떻 게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 가르치신다. 단식은 다음과 같은 일들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는 쓸모없다고 명백하게 밝혀 주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 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 는 이들을 내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 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 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 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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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며 말씀해 주시리 라.”(이사 58,6-9) 그러니 그대들이 보는 바와 같이 주님께서 단식을 본질 상의 미덕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식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행동에 의하여 좋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헛된 것이나 하느님께서 지겨워하는 것까지 될 수 있다. 주님께서 과연 “그들이 단식하여도 내가 그들의 호소를 듣지 않 겠다.”(예레 14,12)라고 하셨다.

XV 자비와 인내와 애덕, 그리고 위에서 말한 본질상 선한 덕행은 단식 때 문에 지킬 것이 아니라 단식을 그 덕행 때문에 지킬 것이다. 참으로 선한 그 덕목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단식하는 것이지, 단식이 그 덕목들의 목 표가 될 수는 없다. 육신을 괴롭히는 것이 유익하며 굶는 것이 좋은 것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오직 애덕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애덕은 면제되 는 시간이 있을 수 없는 변함없는 선이다. 의술이나 금세공의 기술이나 그 외에 세상 사람들이 실행하는 기술도 그 기술에 필요한 도구 때문에 실행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도구들은 기술을 실행하기 위하여 마련되는 법 이다. 그 도구들은 숙련된 사람에게 유익하지만 그 기술을 모르는 사람 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다. 이런 도구들의 경우에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것으로 큰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에 필요한지 모르고 그것들을 소유함으로써만 만족한 사람들에게 는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그 도구를 무엇을 만들기 위 함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두는 셈이다. 이와 같이 본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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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의 것들은 본질상 선한 것을 행하기 위한 것이고 본질상 선한 것은 다른 것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체의 선 때문에 행해지 는 것이다.

XVI 본질상의 선을 위에서 말한 중간의 것과 구별하려면, 다음과 같은 질 문을 하면 된다. 다른 어떤 일 때문이 아니고 그 자체로서 선한가? 언제 나 변함없이 좋아서 항상 그 성질을 보존하므로 전혀 그 반대의 것이 될 수 없는가? 이것을 빼거나 그만두게 됨으로 반드시 엄청난 피해가 생기 게 되는가? 이것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 본질상 악한 것이라서 전혀 좋은 것이 될 수 없는가? 이것으로 본질상 선한 일의 특성을 알아낼 수가 있 는데, 단식에는 그런 특성이 없다. 단식은 오직 마음과 육신의 순결을 얻기 위하여 유익하게 지켜지니까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필요한 것이 아니다. 육신의 충동을 다스리고 정신 이 고요해져서 창조주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단식은 언 제나 변함없이 좋은 것도 아니다. 보통 단식을 중단해도 우리는 아무 손 해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부적절하게 단식하는 것이 가끔 영혼을 해칠 수 있다. 그리고 단식과 반대되는 것이 본질상 나쁜 것이 아니다. 과식이 나 사치나 다른 어떤 악행이 동반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음식 먹는 것 을 즐기는 일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 럽히지는 않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힙니다.”(마태 15,11) 그런데 우리가 본질상 선을 그 자체 때문에 행하지 않고 어떤 다 른 일 때문에 행하면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거나 죄를 범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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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 선함 때문에 행해야 하고 본질상 선은 오직 그 자체의 선함 때문에 추구해야 한다.

XVII 단식의 성질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것을 항상 명심하면서, 마음과 정 성을 다하여 단식하자. 그러나 단식이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조건을 잊 지 말자. 다시 말하면 시기와 방법과 정도를 고려하여 단식에다가 우리 희망의 목표를 두지 말고, 단식으로 마음의 순결과 사도들이 가르친 애 덕을 추구해야 한다. 단식을 지키거나 그만두어야 할 특별한 시기들과 그 방식과 정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보면 단식은 본질상 선한 것이 아 니라 중간의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계명을 통해 선한 것으로 명하거나 악한 것으로 금하시면 때에 따라서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때에 금지된 것을 행하거나 명한 것을 빠뜨 리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정의와 인내, 절제와 정결과 애덕에 대하여는 정 한 시기가 없고, 마찬가지로 불의와 분노, 격정과 음탕, 시기와 교만 등이 허락되는 때는 없다.

XVIII 여기까지 나는 단식의 성질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제 성서 말씀을 인용 하여, 단식을 언제나 지켜야 하지도 않고 지킬 수도 없다는 것을 더 명백 하게 증명해야 할 것 같다. 복음에 의하면,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했던 것과 달리, 사도들은 천상 신랑의 친구와 손님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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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단식을 지키지 않았다.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으로써 가장 정당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과연 그들의 스승은 회개를 선포하는 위대한 설 교자로서 모든 백성에게 훌륭한 표양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들 이 먹는 여러 가지 식사의 종류만 사양할 뿐 아니라 보통 다 먹는 빵마저 도 몰랐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은 주님께 불평했다. “저희와 바리사이 들은 자주 단식을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마태 9,14)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면서 단식은 언제나 합당하거나 필 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축일 이 될 때나 사랑을 나누게 될 때에 음식을 먹어도 좋다고 지적하셨다. “신 랑이 함께 있는 동안 혼인잔치의 손님들이 슬퍼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는 단식할 것입니다.”(마태 9,15) 주님 께서는 당신의 부활 이전에 하신 말씀이지만 오순절을 제시하는 말씀이 다. 오순절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십 일 동안 잔 치를 즐기시므로, 그들은 함께 지내는 기쁨 때문에 단식할 수 없었다.

XIX 제르마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사십 일 밖에 제자들과 함께 머 무시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오순절 동안 내내 단식을 완화하고 점심을 먹습니까?

XX 테오나스: 그대들의 질문은 정당한 것이니 마땅히 그 점에 대한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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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하게 밝혀야 하겠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부활하신 지 사십 일 되는 날에 승천하셨다. 그분이 올리브산에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모습을 제 자들에게 보여 주신 다음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제자들은 거기서 십 일 동안 성령의 강림을 기 다렸고, 그런 다음에 오십 일 되는 날에 제자들은 기쁨 중에 성령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 축제의 숫자가 채워졌다. 이 숫자는 이미 구약의 예 표 가운데 나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일곱 주간을 마치고 제관들이 햇곡 식의 빵을 주님께 바쳐야 했던 것이다. 이제 사도들은 그날4) 백성에게 했 다는 설교를 통하여, 참된 햇곡식의 빵을 주님께 바쳤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이 진정한 햇곡식의 빵은 새로운 가르침으로 인하여 오천 명의 남 자들에게 제공되어 그들을 배불리 먹여 주었고, 그것으로 유대인들 가운 데서 그리스도인들의 백성을 맏배로 주님을 위하여 축성하였다. 그래서 이 열흘도 앞의 사십 일 동안과 같이 성대한 기쁨으로 경축해야 한다. 이 축제의 전통은 사도 시대부터 우리에게 내려왔으니 같은 법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기도 가운데 무릎을 꿇지 않 는다. 장궤는 참회와 슬픔의 표시이다. 그리고 그 까닭에 그 축제 기간에 우리는 모든 것을 주일과 같이 지킨다. 우리 선배들은 그때에 주님의 부활 을 공경하는 뜻으로 단식도 할 수 없고 장궤도 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XXI 제르마노: 축제가 오래 계속되면 우리 육신은 익숙하지 않은 쾌감을

4) 오순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추수감사절(보리 수확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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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느껴 이미 잘라낸 악습의 뿌리에서 다시 가시덤불이 싹틀 가능성이 없 겠습니까? 또는 익숙한 양보다 많은 음식을 먹으면, 우리 정신이 무거워 져서 종노릇을 해야 하는 몸을 다스리기 위해 수행을 엄격하게 할 수 있 겠습니까? 보통 먹는 음식을 더 많이 들거나 생소한 것을 마음대로 먹으 면, 특히 우리처럼 나이가 젊은 경우에는 예속된 지체들이 반란을 일으 킬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XXII 테오나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평가하고, 항상 남의 판 단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양심을 기준으로 삼으면, 위 와 같은 휴게 시간이 우리의 엄격한 수행에 방해가 될 수 없다. 다만 위 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관대와 극기의 정도를 똑똑히 저울질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양쪽의 지나침을 피해야 할 것이다. 쾌감의 무게가 우리 정신 을 내리누르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엄격한 극기가 육체의 부분을 내리누 르는 것인지를 진정한 분별력으로 분간하여, 경우에 따라 너무 올라간 쪽을 누르거나 너무 눌린 쪽을 올려주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 신을 경배하고 존경하기 위하여 올바른 판단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 를 바라신다. “임금의 영예는 판단을 사랑하기”(시편 99,4. 70인역) 때문 이다. 그래서 가장 지혜로운 솔로몬은 우리 판단이 한쪽으로 기울지 말 아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타일러준다. “네 의로운 소출로 하느님을 공경 하고 네 의로움의 열매로 그분께 제사를 드려라.”(잠언 3,9. 70인역) 우리 양심 속에는 순수하고 진실한 심판자가 자리하기에, 모든 이가 우리의 순결함에 대해 그르치더라도 그 심판관만은 틀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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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조심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정신을 차리고 있어 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잘못 분별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린다면, 극 기에 대한 조심 없는 욕심에 넘어가거나 아니면 지나친 이완에 대한 유 혹에 빠짐으로 우리가 가진 능력의 무게를 불균형한 저울에 달아보는 셈이다. 그러지 말고 저울 한 쪽에 마음의 순결, 다른 쪽에는 몸의 힘을 놓고 양심의 판단으로 양쪽을 재면서 우리 감정이 일방적으로 한쪽에 기울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절제 없는 극기나 지나친 이완으로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인다면, 과도한 이완이나 극기 때 문에 “네가 옳게 바쳐도 옳게 나누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았느냐?”(창세 4,7 70인역)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우리는 내장을 막 괴롭히면서 억 지로 자아내는 무리한 단식을 주님께 올바른 희생제물로 드린다고 믿을 지 몰라도, “자비와 정의를 사랑하시는”(시편 32,5 라틴어역) 주님께서는 “나 주님은 올바름을 사랑하고 번제물을 바칠 때 탈취를 미워한다.”(이 사 61,8 라틴어역)라는 말씀으로 그런 제물을 저주하신다. 반대로 자기들 이 행하는 일 가운데 바칠 만한 대부분의 것들을 자기 육신의 쾌락과 개 인의 필요를 위하여 써 버리고, 남아 있는 지극히 적은 것만 주님께 바치 는 사람들을, “주님의 일을 속이면서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48,10 70인역)라고 하시는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사기를 치는 일꾼으로 단죄하신다. 그래서 균형 없는 판단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에게, 주 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들은 하잘것없다. 사람의 아들들은 속이기 위하 여 저울에서 거짓을 한다.”(시편 61,10 라틴어역)라고 말씀하시어 마땅히 질타하신다. 그 까닭에 복된 사도(바오로)는 지나침에 현혹되어 한쪽에 만 기울이지 말고 분별과 절제를 지키라고 “여러분의 합리적 예배”(로마 12,1 직역)라는 말로 우리를 타일러준다. 입법자(모세)도 그런 것을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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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바른 저울과 바른 추, 바른 에파와 바른 힌을 써야 한다.”(레위 19,36) 솔로몬도 이 일에 대해 같은 원칙을 내 세운다. “서로 다른 저울추와 서로 다른 됫박, 주님께서 이 둘을 역겨워 하신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낸 올가미에 걸린다.”(잠언 20,10-11 70인역) 이제 우리 마음에 맞지 않은 추를 두거나 우리 양심의 창고 속에 서로 다른 됫박을 두지 않기 위하여, 여태까지 지키라고 말한 방식 외에도 명 심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는 관면을 주고 엄격한 규칙에 따 라 지켜야 할 것을 크게 완화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참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엄격하고 무거운 계명을 덮어씌우지 말 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런 짓을 한다면 주님의 계명이 가지고 오는 대 가와 열매를 서로 다른 추로 달거나 재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자신의 것 과 형제들의 것을 다르게 저울질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거짓 저울과 이중의 됫박을 쓴다고 마땅히 꾸짖으실 것이다. 이 일에 대해 솔로몬은 “ 서로 다른 저울질은 주님께서 역겨워하시는 것이고 속임수 저울판은 좋 지 않은 것이다.”(잠언 20,23)라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식으로 속임수 저울추와 서로 다른 됫박을 쓰는 죄를 범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욕심으로 혼자서 우리 집에 서 보통 행하는 것보다 더 엄격한 수행을 형제들 앞에서 과시하는 일이 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하느님 눈앞에서보다도 사람들 앞에서 더욱 극기 함으로써 거룩한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다. 이 병은 어느 다른 것보다 더 욱 피해야 할 뿐 아니라 가증스럽게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다룰 문제에서 약간 벗어나게 되었으니 이제 그 문제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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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III 우리가 위에서 말한 축제를 지낼 때에 허락된 이완이 육신과 영혼의 건강에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유익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축제의 기쁨 이 육체의 가시를 무디게 하는 법이 없고 저 원수(=마귀)는 축일을 생각 해서 얌전해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한편 정해진 관례대로 축제의 시기 를 성대하게 지내고, 다른 한편 유익한 절도의 한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적합한 정도의 이완을 허락하는 뜻으로 축제의 시기에는 제9시(오후 3시)에 먹게 되어 있는 음식을 좀 더 빨리 즉 제6시(정오)에 먹으면 넉넉할 것이다. 그러나 음식의 양과 질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그 것은 사순절의 극기로 얻은 육체의 순결과 정신의 결백을 오순절의 이완 으로 상실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식으로 얻은 것을 조 심 없이 배를 채움으로써 다시 잃고 쓸모없게 만들기 쉽다. 그리고 우리 는 우리 원수(마귀)의 교활함을 잘 알지 않느냐? 그는 우리가 어떤 축제 를 지내다가 순결을 방비하는 태도가 풀리는 것을 보면 우리를 더욱 세 게 공격한다. 따라서 우리 정신이 매혹되어 그 기강이 한 번도 약해지지 않도록 언제나 철저히 깨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위에서 이미 말한 대 로 사순절 동안 꾸준히 수고함으로써 얻은 정결을 오순절의 안식과 안 일함 때문에 잃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음식의 질 과 양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평일에 정결을 보호하기 위하여 먹지 않는 음식을 축일에도 멀리하자. 그렇지 않으면 축제의 기쁨 이 우리 안에 치명적인 육체적 충동들의 공격을 일으켜서, 우리의 기쁨 은 슬픔으로 바뀌고, 우리는 순결한 행복감으로 뛰놀던 마음의 탁월한 즐거움을 다시 빼앗길 것이다. 그러니 짧은 시간에 누리던 육체의 실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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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겨움이 지나면, 우리는 잃어버린 마음의 정결을 두고 오래 계속되는 슬픔의 눈물로 속죄하게 될 것이다. 그러지 말고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훈계를 헛되이 듣지 않도록 노력하자.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 켜라.”(나훔 2,1) 우리의 일상생활을 중단하는 축제 기간이 끊임없는 우 리의 금욕생활을 바꾸지만 않으면, 우리는 계속 영적 휴가를 즐길 수 있 겠다. 그래서 노예의 노동을 그만두게 된 우리는 “계속 초하룻날과 안식 일을 지내게 될 것이다.”(이사 66,23)5)

XXIV 제르마노: 육 주간의 사순절을 지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어떤 지방 에는 더 경건한 마음으로 칠 주간의 사순절을 지내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해도 주일과 토요일에 단식을 지키지 않아서 이 경우에도 40일의 숫자 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 방법에는 36일밖에 이르지 못하지요.

XXV 테오나스: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단순해서 그런 질문을 할 줄 모르지 만, 그대들은 다른 사람이 물어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세밀 하게 탐구하고 우리 수행의 뜻과 신비의 모든 진리를 온전히 알고 싶다 니, 나는 우리 선배들이 불합리적인 것을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다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이 일의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겠다. 모세의 율법에

5) 이것은 직역하면 “달에서 달, 안식에서 안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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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온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계명을 발표했다. “십일조와 맏 배를 네 주 하느님께 바치라.”(신명 14,22-23)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재산과 모든 소출 가운데 십분의 일을 봉헌하라는 계명을 받았다면, 우리 생활 과 활동과 생산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다. 이제 사 순절을 계산하면서 우리는 바로 그 일을 분명하게 완수한다. 일 년의 모 든 날을 열(10)로 나누면 서른여섯 날 반(半)이 나온다. 이제 일곱 주간 가운데서 주일과 토요일을 빼면 단식하는 날은 서른다섯 날이 된다. 그 런데 서른다섯 날에다가 (부활)주일 새벽에 닭이 울 때까지 토요일의 단 식과 그것을 연장하는 전야를 합하면, 서른여섯 날뿐 아니라 일 년 중 나 머지 닷새의 십분의 일까지 첨부하여 (단식일들의) 완전한 숫자를 얻게 된다.

XXVI 이제 맏물에 대해 말하자. 그리스도를 충실히 섬기는 모든 신자들이 그것을 매일 바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깨자마자 새로 나는 기분으로 잠에서 일어나, 자기 마음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기 전 그 리고 자기 가정에 대하여 무엇을 기억하거나 염려하기 전에 처음으로 일 어나는 생각들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친다. 그것이 대사제 예수 그리스 도를 통하여 참으로 자기 소출의 첫 열매를, 일상생활을 위하여 매일 거 듭되는 부활에 대한 영상처럼 봉헌하는 것6)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들은 또한 잠에서 일어난 다음에 찬양의 예물을 하느님께 드려서 혀의 첫째 6) 가시아노는 아침에 첫 생각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을 부활처럼 새로 받은 삶에 대한 감사제 로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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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으로 그분을 부르며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면서 예배드린다. 이와 같 이 그들은 찬가를 부르기 위하여 처음으로 입술의 문을 열어 하느님께 입의 봉사를 바친다. 그리고 그들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손과 발의 첫 째 제물을 드린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들은 먼저 기도하기 위하여 서 있 고 우선 개인의 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 손발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 해 손발의 기능에서 아무것도 뜯어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하여 발을 옮기고 그분을 찬양하기 위하여 발을 멈춘다. 이와 같이 그 들은 손을 펴들고 무릎을 꿇으며 온몸을 엎드림으로써 자기 동작의 모 든 맏물을 봉헌한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빌며 …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서 이 내 눈 은 새벽에 떠 있나이다.”(시편 118,147-148 라틴어역) 또는 “나는 새벽부 터 당신께 빌건마는”(시편 87,14)과 같은 시편 말씀의 내용을 다르게 실 행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고요하게 잠을 잔 뒤에 어두움과 죽음에 서 다시 빛으로 돌아오는 사람처럼, 정신과 육체의 모든 기능 가운데 아 무것도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감히 가로채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예언 자(=시편작가)가 앞질러야7) 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할 일과 감정과 세속의 걱정 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수(마귀)의 미묘한 유혹이다. 마귀는 우리가 아직 잠잘 때에 꿈 중에 헛된 공상을 침투시켜서, 잠깨어난 뒤에 그것으로 우 리 생각을 사로잡고 감싸서 우리의 가장 비옥한 맏물을 빼앗아 먼저 차 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위에서 인용한 시편 구절을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하면, 지극히 7) 위에서 인용한 시편 118,87 가운데 세 번이나 praevenire(=앞지르다)라는 동사가 나오지만 번역에는 그렇게 옮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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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여 아침에 처음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정성스레 주시하고 보호해 야 한다. 이렇게 해서, 시기하는 원수가 그중에서 어떤 것을 잽싸게 가로 채어 그것을 더럽힘으로써 주님께서 우리 맏물을 천하고 가치 없는 것으 로 거부하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원수를 앞지르 기 위하여 계속 정신을 차리고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미리 기다리는 고약한 습관을 그만두지 않고, 매일같이 쉬지 않고 자기기만으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마음의 열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즐겨 받아주시는 맏물을 바치려고 한다면, 지극 한 정성으로 특히 아침시간에 우리 몸의 모든 감각을 지킴으로써, 그것 이 모든 면에서 온전하고 티 없는, 주님을 위한 거룩한 번제물이 되어야 한다. 많은 세속 사람들도 큰 정성으로 그런 신심을 지킨다. 그들은 해가 뜨기 전에 혹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모든 행동과 작업의 맏물을 성당에 가서 하느님 면전에 봉헌하기 전에는 집안일과 이 세상에서 필요한 일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다.

XXVII 그리고 그대들은 지방에 따라서 사순절을 6주간 지내는 곳과 7주간 지내는 곳이 있다고 했지만 주간 수가 달라도 단식의 뜻과 방식은 마찬 가지다. 토요일도 단식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6주간을 정했고 그들은 일 주일에 여섯 번 단식을 지키는 것을 여섯 번 되풀이하여 서른여섯 날의 시간을 완수한다. 이와 같이 주간의 숫자가 서로 달라도 단식의 뜻과 방 식은 말한 대로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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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VIII 그러나 인간들의 무관심으로 이 관례의 뜻이 기억에서 사라졌기 때문 에, 하느님께 바치는 매년의 십일조(서른여섯 날 반(半)의 단식으로 바치 는 이 기간)를 사순절이라고 하게 되었다. 이 표현을 취해야 된다고 생각 한 이유는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십 일 동안 단식했다고 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머물던 사 십년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비롭게 광야를 통과하다가 쉬던 마흔 군데(민수 3,1-39)도 이 신비의 숫자에 잘 맞아떨어진다. 혹은 세무서의 관례 때문에 이 십일조가 사순절이라는 이름을 받았을까? 왜냐하면 임 금이 이득을 위하여 사람들의 수입 가운데서 징수하는 세금을 사람들 이 일반적으로 ‘제사십’8)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세기의 임금이 되시 는 분도 우리의 생활을 살기 위하여 우리에게 사순절의 합법적인 세금 을 징수하신다. 그대들이 꺼낸 문제와 상관없어도 사순절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기회 에 또 하나의 사실을 언급하고 싶다. 우리 선배들이 자주 보고했던 것인 데, 모든 수도승들이 이 시기에 옛 원수들의 족속이 가졌던 습관에 따라 특별히 심하게 공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때 수도승들이 자기 거처를 떠나도록 무섭게 강요를 당한다고 한다. 옛날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녀들을 잔인하게 억압했던 것과 같이 지금도 영적인 이집트인들이 참 된 이스라엘인 수도승 백성을 고되고 더러운 노동으로 꺾으려고 한다.9) 8) 사순절이란 quadragesima 즉 ‘제 40’ 이라는 말을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다. 9) 테오나스가 여기서 악령들의 공격을 말하고 있는지 이집트의 동네 사람들이 수도승들을 괴롭혔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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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좋아하시는 고요함을 누리기 위하여 이집트 땅을 떠나 구원을 주는 덕행들의 광야로 넘어가는 것을 방해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파라 오가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으르렁댄다. “그들은 게을러져 ‘가서 저희 하 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며 아우성치고 있다. 그자들 의 일을 더 힘들게 하여라. 그러면 그들이 일만 하느라 허튼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탈출 5,8-9) 과연 헛된 그들은 주님께 자유로 운 마음의 광야에서밖에 드릴 수 없는 거룩한 제사를 가장 헛된 것으로 여긴다. “죄인에게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역겨움이다.”(집회 1,25)

XXIX 의롭고 완전한 사람은 이 사순절의 법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이 미 소한 규정을 지킴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법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일 년 내내 쾌락과 속된 사업으로 바쁘게 지내는 사람들을 위하여 정해 놓 은 것이다. 사람들이 삶의 모든 날들 전부를 어떤 과일처럼 삼키는 대신 에, 엄격한 법으로 구속되어 적어도 그 시기에 주님께 시간을 바침으로 십분의 일을 주님께 헌납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의인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1디모 1,9) 의인들은 미소한 십분의 일만 아니라 자기 생애의 모든 시간을 영적인 일에 배정하여 십일조의 법에서 면제된다. 그 래서 우연하게 정당하고 거룩한 의무에 의한 필요성이 생기면 그들은 아 무 토의도 없이 이 단식의 규정을 기꺼이 늦추어 버린다. 그렇게 해도 그 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함께 주님께 바쳤으니 그 작은 십일 조에 대한 손실은 없다. 그러나 자원해서 아무것도 봉헌하지 않고 법적 인 의무 때문에 변명의 여지없이 십일조를 내어야 할 사람들은 만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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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한다면 무거운 사취(詐取)의 죄를 짓게 된다. 이와 같이 그냥 금지 된 것을 피하고 명령된 것을 실행하는 율법의 종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명백히 증명된다. 그와 달리 율법에서 허용되는 것을 이용하지 않 는 사람들이 참으로 완전하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대해 “율법은 아무 것도 완전하게 못했습니다.”(히브 7,19)라는 말씀이 있어도, 구약시대의 어떤 성인들이 완전했다고 하는 성경 말씀을 그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 다. 그들은 율법의 지배를 초월하여 복음적 완성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 들은 율법이 의인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법자와 반항자, 불경한 자 와 죄인, 독성자와 모독자(1디모 1,9-10) 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XXX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초대교회의 완덕이 순전히 남아 있는 동안 이 사순절의 관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 년 내내 한결같이 단식을 지켰으니 계명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법률의 강요를 받지 않고 엄격한 단식 기간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들의 무리는 사도들이 제정한 이 신심을 날로 더욱 멀리하고, (부화하는 닭처럼) 자기 재산 위 에 앉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사도들이 지시했던 대로 소유를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지 않고, 개인적 필요 때문에 지출하며 소유를 지킬 뿐 아니라 그것을 늘려고 노력했으니, 아나니아와 사피라의 행동을 본받음 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모든 주교들은 사 람들이 세속적인 걱정에 매여 있고, 말하자면 절제와 참회를 모르고 있 는 것 같아서, 그들을 다시 거룩한 일을 수행하도록 만들기 위해 단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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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규정을 정하고 십일조를 내도록 법으로 강요했다.10) 이 법은 나약 한 이들에게 유익해도 완전한 이들과는 상관없다. 그들은 복음의 은총 아래 있어서 자원해서 올리는 봉헌으로 법을 초월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가 밝히는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죄가 여러분을 지배해서는 안 됩 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 6,14) 사 실 충실히 은총의 자유 아래 머무는 사람 안에서 죄는 군림할 수 없다.

XXXI 제르마노: 수도승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안전 을 약속하는 사도의 그 주장은 거짓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는 그것이 너무 알아듣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복음을 믿 는 모든 사람들이 죄의 멍에와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롭다고 하지만 어 째서 세례를 받은 거의 모든 이들이 죄의 지배를 받습니까? 왜냐하면 주 께서는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입니다.”(요한 8,34)라고 말씀하 셨기 때문입니다.

XXXII 테오나스: 그대의 질문은 또 새로 끝없는 문제를 일으킨다. 경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비결을 설명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다는 것을 10) 사순절의 유래에 대한 가시아노의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 초대교회에서 언제나 단식 을 지켰다는 것과 공동소유를 보편적으로 지켜왔다는 주장은 사도행전의 기록에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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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로 그것을 다루고 간결 하게 설명해 보겠다. 그러나 그 조건은 그대들이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 듣는 대로 행동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이 아니라 오직 경험 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은 경험 없는 사람이 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로, 그것을 같은 열성으로 생활에 옮기는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알아듣 고 기억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우선 율법의 의도와 뜻 그리 고 은총의 질서와 완성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 을 전제한 다음에 그 원리에 의하여 죄의 지배와 죄를 쫓아냄에 대해 이 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율법에서는 결혼할 것을 중요한 것으로 명령하고 있다. “시 온에 자손을 두고 예루살렘에 가족을 둔 사람은 복되다.”(이사 31,9)와 “아기를 낳지 않는 돌계집은 저주받는다.”(출전 알 수 없음)는 말씀이 있 다. 그와 반대로 은총은 완전한 순결과 복되고 깨끗한 동정을 지키라고 우리를 초대한다는 것이 다음 말씀으로 밝혀진다. “아기를 낳아 보지 못 한 태, 젖을 먹여 보지 못한 가슴은 복되도다.”(루카 14,26)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를 …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루카 14,26)와 사도(바오로)의 말씀대로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시오.”(1코린 7,29) 다시 율법에서는 십일조와 맏물을 나에게 바치기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 (탈출 22,29)고 하지만, 은총은 “완전해지려면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마태 19,21)라고 말한다. 율법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탈출 21,24)라고 하면서 욕설과 모욕의 동태복수를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총에서는 받은 모욕과 당 한 매질을 배가함으로 우리 인내를 시험하려고 다음과 같이 두 겹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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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견딜 각오를 하라고 한다. “누가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다른 편 뺨 마저 돌려대시오. 누가 당신을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 하거든 겉옷 마저 내주시오.”(마태 5,39-40) 또 율법에서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지만 은총에서는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고 그들을 위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기 도를 바치라고 한다.

XXXIII 복음적 완성의 이 절정에 오른 사람은 이렇게 훌륭한 덕행으로 말미암 아 모든 율법 위에 도달하여 모세가 명한 모든 것을 작고 낮은 것으로 보 게 된다. 그는 오직 구세주 은총의 지배만 받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오 직 구세주의 도움으로 그 지극히 숭고한 지위에 올라왔다는 것을 인정 한다. “우리에게 선사된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쏟아진 하느님의 사 랑”(로마 5,5)이 어느 다른 것의 매력을 막아준다. 그런 사람은 금지된 것 을 탐내지 못하고 명령받은 것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의 모든 노력과 욕 망은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되어서 천한 것들이 주는 쾌락에 잡히지 않 을 뿐 아니라 허락된 것도 사용하지 않는다. 부부 상호간의 권리를 보장하는 율법의 경우에 음란한 행위를 막기 위 하여 남자는 한 여자에 매여 있지만 욕정의 가시를 피할 수는 없다. 일부 러 땔감을 제공할 때 불을 정해진 한계에 가두어도 밖으로 튀어서 닥치 는 대로 무엇을 태우지 않도록 막기가 어렵다. 밖으로 나가서 타오르지 않게 막아도 불은 억눌린 채로 계속 탄다. 의지 자체가 죄에 물들어 있어 서 부부행위의 습관 때문에 갑자기 간음으로 탈선할 수 있다. 그러나 구 세주의 은총을 받아 순결에 대한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들은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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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정의 모든 가시를 주님께 대한 애덕의 불로 태우기 때문에 미지근한 악 습의 재는 그들의 시원한 결백을 약화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율법의 종들 은 허용한 것을 사용함으로 금지된 쪽으로 기울어지지만, 은총에 의하 여 사는 사람들은 허용된 것을 무시하니 금지된 것을 아예 모른다. 결혼생활을 즐기는 사람 안에 죄가 살고 있는 것처럼, 십일조와 맏물 만 드림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더디거나 소홀함으로 질이나 양에서 또는 매일의 분배에서 죄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지칠 줄 모르고 자기의 것을 없는 이들에게 나누라는 명령을 받는 사람은 그가 그 일을 큰 신앙과 정성으로 하더라도, 가끔 죄의 올가미에 걸리는 일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주님의 권고를 무시하지 않고 모든 재산을 가난 한 이들에게 미리 분배하여 자기 십자가를 받고, 은총을 베푸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재산을 이미 그 리스도께 봉헌했으므로, 마치 남의 돈이 된 것처럼 경건하게 나누었으니 그에게는 생활비를 지녀야 하겠다는 불성실한 걱정이 없다. 그런 경우에 슬프게 꾸물거림으로 자선을 베푸는 좋은 기분이 약해질 위험이 없다. 이런 사람은 한 번 하느님께 바친 것이 이미 남의 것이니 자기의 필요성 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먹을 밥이 없지 않을까 하는 좁은 두려움 을 버린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발가벗음을 실천하면 하느님께서 자기를 하늘의 새보다 훨씬 더 잘 먹여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와 반대로 세상의 재화를 보존하면서, 옛 율법의 강제를 받고 소출의 십일조와 맏물 아니 면 돈의 일부를 나누는 사람은 특히 이 애긍의 이슬로 죄의 불을 식힌다 지만, 아무리 큰 아량으로 자기 재산을 처리해도 구세주의 은총으로 그 소유물과 함께 소유하려는 의욕까지 버리지 않으면, 죄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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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가시아노

마찬가지로 율법에 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뽑으려 하고 원수를 미워하려는 사람은 피에 젖은 죄의 통치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동 태복수법으로 당한 모욕을 갚으려고 하니, 원수에 대한 앙심과 미움을 보존하는 동안 항상 혼란스러운 격분으로 불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복 음적 은총의 빛 아래 사는 사람은 악에 항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감수함 으로써 이긴다. 그는 오른편 뺨을 때린 사람에게 지체 없이 자원하여 다 른 뺨을 돌리고, 속옷을 가지려고 자기에 대해 소송을 걸려는 사람에게 겉옷마저 내주며, 원수를 사랑하고, 비방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니 죄의 멍에를 버리고 그 사슬을 끊어버린다. 그는 율법 아래 살지 않는다. 사실 율법은 죄의 씨앗을 죽이지 못한다. 그래서 이에 대해 복된 사도가 하신 말씀이 옳다. “이전의 규정은 무력하고 무익하기 때문에 폐지되었 습니다.”(히브 7,18-19) 그리고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나는 그들에게 좋 지 않은 규정들과 지켜도 살지 못하는 법규들을 주었다.”(에제 20,25)라 고 하셨다. 그러나 은총은 악의 가지들만을 자르지 않고 해로운 의지의 뿌리까지 온통 뽑아준다.

XXXIV 그래서 만일 누가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완덕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 이면, 그는 은총 아래 머물러 죄의 지배 아래 억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은총 아래 있다는 것은 은총의 요구를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적 완덕의 충만함에 자신을 맡기기 싫은 사람은 누구나 세례를 받 은 사람이나 수도승이라고 자처하더라도, 은총 아래 있지 않고 아직도 법의 사슬로 묶여 죄의 무게에 눌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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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입양의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규정들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기초 위에 무엇을 지으려고 하며 그것을 무효화하지 않고 완성하려고 하신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이것을 전혀 모르고 그리스도의 탁월한 권고와 훈계를 무시하면서 주제넘은 자유를 주장한다. 그들은 너무 높아 보이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손댈 생각이 없 거니와, 모세의 율법이 초보자와 어린이 같은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라고 낡아진 것으로 업신여긴다. 이와 같이 그들은 (바오로) 사도가 저주 한 입장을 취하는 셈이니 해로운 자유에 빠져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었다?”(로마 6,15)11)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가르치신 높은 산봉에 오르지 않으니 은총 아래 있지도 않으면 서 율법의 작은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두 겹으로 죄의 지배로 억눌리게 된다. 그런 자들은 오직 해로운 자유로 그리스도를 멀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았다고 여기니, 베드로 사도가 빠지지 말 라고 우리에게 경계한 바로 그 구렁에 떨어진다. 그는 “여러분은 자유인 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라.”(1베드 2,16) 했던 것이 다. 복된 바오로 사도도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도록 부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여 죄의 지배를 벗어났음을 말씀하시고, “모름지 기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말라.”(갈라 5,13) 하여 율법의 계 명이 무효하다는 것이 악을 멋대로 행해도 좋다는 허락을 의미한다고 생 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자유는 주님께서 계시는 곳이 아니면 아무데 도 없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주님은 영이십니 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17) 11) 라틴어 본문을 잘못 읽는 것이다! ‘죄짓겠는가’(peccabimus)를 ‘죄지었는가’(peccavimus) 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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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가시아노

그러므로 나는 복된 사도의 이 말씀을 경험으로 그것을 깨달은 사람 들만큼 표현하고 설명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프락티케(Πρακτικη)12), 즉 실천적 학문 또는 수행 에 의한 지식을 완전히 얻은 사람이면 누구나 어떠한 설명도 전혀 없이 그 뜻을 명백하게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실천으로 이 미 배운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수고스럽게 토의할 필요는 없다.

XXXV 제르마노: 아빠스님께서는 우리 생각으로는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 매 우 난해한 문제를 환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장을 돕기 위하여 아직도 한 가지 더 설명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가끔 우리가 더 집중적으로 단식하고 기운이 빠지고 피로할 때에 우리 육신에서 더 큰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세밀하게 가르쳐 주십시오. 종 종 잠에서 깨어 불결한 액체에 때 묻은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양심의 가 책을 받아 자신 있게 기도하기 위하여 일어나기를 망설입니다.

XXXVI 테오나스: 그대들의 공부는 완덕의 길을 잠정적으로 알아보기 위한 것 이 아니고 끝까지 완덕에 나아가기 위한 것이니, 우리는 지치지 않고 이 담화를 계속할 수밖에 없네. 그대들이 꼼꼼히 알고 싶은 것은 외적으로 12) 프락티케(Πρακτικη)에 관해서는 참조. 요한 가시아노, “네스테로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코이노니아』, 제27집(2002, 가을),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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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나스 아빠스의 첫째 담화

드러나는 정결이나 할례가 아니라 숨어 있는 내적 정결이오. 그대들은 비 신자들도 숙명이나 겉꾸밈으로 지킬 수 있는 몸으로 드러나는 금욕에는 완덕의 충만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이 오직 자원해서 택하는 볼 수 없는 마 음의 순결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거기에 대해 사도는 이렇게 가르 치고 있소. “무릇 겉으로만 나타나는 유대인은 참 유대인이 아니요, 살갗 에만 드러나는 할례는 참 할례가 아닙니다. 속으로 유대인이라야 참 유대 인이며, 문자가 아니라 영으로 마음에 받은 할례라야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이 받는 칭찬은 사람들한테서 오지 않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로 마 2,28-29) 하느님만이 마음의 숨은 것을 파헤치신다는 것이오. 지금 그대들의 소원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없으니 그 문제를 우선 미 루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남은 밤시간이 짧아서 그동안 너무나 난해한 이 문제를 탐구하기에 모자라네. 우리가 이것을 옳게 가르치고 그대들은 이것을 마음에 제대로 새기기 위해서는 서서히 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 와 여러 생각들이 서로 떠들지 않는 고요한 마음이 필요하오. 공통된 순 결을 얻기 위하여 이것을 탐구해야 하는 것과 같이 완전무결의 은사를 받지 않았으면 아무도 이것을 전하며 가르치지 못하오. 여기서 우리가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빈말을 주고받는 토론이 아니라, 오직 양심 속에 지닌 신앙과 진리의 강한 힘이 우리에게 박아 줄 수 있는 것일세. 따라서 순결에 관한 이 지식과 교리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은 경험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 자체를 열렬하게 탐내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가르침을 깊이 깨달을 수 없소. 그런 사람은 진리를 공 허하고 발가벗은 말을 통하여 찾지 않고, 마음의 모든 힘을 다하여 그 진 리에 이르려고 하네. 다시 말해 그가 열망하고 추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수다스러움이 아니라 오직 내적 순결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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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사다리』 요한 클리마쿠스 허성석 로무알도 역주

담화4 거룩한 순종에 관하여 [수도원의 운동선수와 그의 무기: PG 677C-680A] 15. 우리 담화는 이제 경기에 뽑힌 투사로서 그리스도의 운동선수들 에게 향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논리적 순서일 것입니다. 즉, 항상 꽃이 열매를 앞서는 것처럼 외적, 내적 고립의 유배가 순종에 앞서 옵니다.1) 사실 이 두 덕행은 두 개의 황금날개로서, 성덕에 바쳐진 영혼은 이 날개 로 안전하게 하늘로 오릅니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성경 저자는 이에 대 해 노래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수행을 통하여 날 수 있고, 겸손한 관상 을 통하여 나를 쉬게 할 수 있는 비둘기의 날개를 줄 것인가?”(시편 55,7) 우리는 그러한 영웅들의 행위 자체에 관해 살펴보는 데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즉, 그들이 소위 목표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거나 장소를 옮기도 록 이끄는 온 갖 생각을 몰 아내기 위해 하느님과 그분의 조 교

1) 운동경기에 나가기 위해서는 물리적 훈련으로 체력강화를 돕는 단련이 필요한 것처럼, 영 적 전투에 임하기 위해서는 적을 격퇴할 수 있게 하는 영혼의 적절한 훈련에 의지하는 것 이 논리적이다. 그러한 훈련의 스승은 영적 지도자로서 그에게 어떤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 고 종속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영적 건물의 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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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사다리

(paidotriba)2)에 대한 신앙의 방패3)를 어떻게 잡는지, 독자성을 향한 그 들의 온갖 내밀한 욕망을 잘라내기 위해 영의 검4)을 어떻게 항상 빼어 들고 있는지, 온유와 인내의 덕들로써 이웃에 대한 온갖 폭력과 분노나 공격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러한 덕들의 철갑옷5)을 어떻게 입는지 말입 니다. 그들 장상의 기도인 구원의 투구로 잘 보호된 그들은 이제 발을 한 데 모았지만 굳게 딛고 있습니다.6) 그들이 한 발은 봉사를 위해, 다른 발 은 부단한 기도를 위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7)

[순종은 무엇인가. 영적 지도자의 현명한 선택: PG 680A-680C] 16. 순종은 사실 자기 생명에 대한 완전한 포기입니다. 그것을 증명하 기 위해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순종은 살 아 있는 지성을 가진 한 인격 안에서 지체들의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종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위험을 받아들 이면서 단순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보호에 온전히 의탁 하는 사람은 자기방어에 신경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위험 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항해할 것이고 잠의 고요에서처럼 여행할 것입니다. 2) 신체 훈련사. 영적 의미로는 영혼에게 인내와 희망을 훈련시키는 사람을 뜻한다. 3) 참조. 카시아누스, 담화집, 18,7; 히에로니무스, 서간, 22,34; 성 베네딕도, 『수도 규칙』, 1장. 4) 에페 6,17. 5) 에페 6,14. 6) 수행과 관상을 동등하게 조화하는 가르침은 카파도키아 교부들,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 누스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7) 기도는 아메림니아의 샘이다. 수도승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그리고 활동과 관상, 육체와 정 신, 금욕생활의 시작과 진보를 조율할 줄 아는 현명한 중개자인 아빠스에게 맡긴다. 그렇 게 순종의 규율로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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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자는 겸손의 부활을 위해 자기 의지를 매장하는 사람입니 다. 반응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는 겉 으로 보아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깊은 신앙으로 이 영 적 죽음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개인의 판단을 공동체 판단의 보고(寶 庫)에 두면서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용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죽음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초기단계는 내적 외적 의지로 뭔 가를 하는 것입니다. 중간단계는 때때로 노력을 요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마침내 완전한 무심과 무욕정이 다스리는 단계 입니다. 그 거룩한 수도승은 죽어 있든 살아 있든 자기 뜻을 행하려는 것 을 알게 되면 그때 고통과 고뇌를 당하고, 그 결과 자기 판단에 대한 책 임의 무게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법을 멍에(마태 11,29)로 매면서, 이미 경기장에 들어서기 위해 의복을 벗고 영적 인간의 증거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 다. 이 순간부터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놓인 짐을 여러분의 어 깨에 짊어지고자 노력합니다.8) 다른 사람의 팔로 이끌려져 이 광대한 바 닷물 속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자유를 팔고 이러한 계약에 서 명할 때를 살펴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좁고 어려운 길을 통 하여 가도록 그렇게 처해졌습니다. 이 길은 유일한 일탈의 위험을 안고 있는데, 곧 자신을 위해 사는 이디오리트미아(idioritmia)9)입니다. 소위 그 위험을 완전하게 피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영적이며, 하느님께 사랑스

8) 참조. 시편 55,23. 아빠스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그에게 우리의 모든 괴로움을 맡겨야 한다. 하느님은 의인이 흔들리게 하지 않으실 것이 확실하다. 9) 자기 리듬에 따라, 다시 말하면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당시 무질서를 야기 하면서 개인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한 금욕생활의 한 형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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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사람들의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은 죽 을 때까지 자신의 온갖 선행에서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현명하게 선택한 영적 사부에 대한 신뢰: PG 680C-681A] 17. 우리가 구원에 대한 참된 갈망으로 겸손하게 목을 구부리고10), 주 님 안에서 다른 이에게 우리 자신을 위탁하고자 결정할 때, 승선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즉, 지혜롭고 엄격하게 우리가 키잡이로 삼고자 하는 사람의 자질을 검토해야 합니다. 그가 이 명칭에 합당한지 아니면 단순한 탑승객인지, 의사인지 아니면 환자인지, 무욕정에 도달한 사람인 지 아니면 욕정들의 희생자인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항구가 아 닌 공해(公海) 상에서 끝나는 일을 피하게 되고 조난을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경견함과 순종의 경기장에 들어간 후에는 더 이상 함께 만족스럽지 않은 특별한 어떤 것 때문에 우리 심판관을 비평 하지 맙시다. 혹시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서 보듯이 그에게서 약간 일치하 지 않는 어떤 면을 보더라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비판하면서 우리는 순종에서 어떤 유익도 없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자기 지도자에게 한결같이 충실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악 령들이 우리 마음 안에 그들에 대한 불신을 심으려고 할 때, 악령들의 제 안을 물리치기 위하여 마음속에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생생한 완덕에 대한 가르침들을 필히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육체의 봉사11)에 10) 참조. 마태 11,29. 예수의 가벼운 멍에에 대한 성서적 기억은 불순종의 악에서 인류를 해 방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 주님의 순종을 상기하게 한다. 11) 클리마쿠스는 수도승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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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의가 있는 만큼, 그만큼 이 영혼의 신뢰가 싹틉니다. 불신의 암초에 부 딪히는 사람은 넘어집니다. 훌륭한 신앙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 두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4,23). 만일 당신의 이성이 장상을 판단하 거나 단죄하도록 당신을 이끈다면, 간음의 유혹에서 달아나듯이 그러한 유혹에서 달아나십시오. 그러한 악령에게 기회를 주는 일을 절대로 피 하고 그에게 접근할 구실과 여지를 주지 마십시오. 그 용에게 이렇게 소 리치십시오. “오, 사기꾼아, 장상을 판단하는 임무가 나에게 맡겨지지 않 았다. 오히려 그에게 내 심판관이 되는 임무가 맡겨졌다. 나를 판단하는 것은 그이지 내가 그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하는 수도승의 무기: 시편낭송, 기도, 신앙고백: PG 681A-B] 18. 교부들은 시편낭송을 무기로, 기도를 성벽으로, 진실한 눈물을 세 례의 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순종을 신앙고백의 증거라고 판 단했습니다. 순종 없이 욕정에 희생된 누구도 절대 하느님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자기를 거스른 판결을 무효화합니다. 겉으로 가 아니라 실제로 주님을 위한 완전한 순종은 심판에서 완전히 자유롭 게 해줍니다. 자기 뜻을 행하는 자의 표면상 순종은 죄의 짐에서 자유롭 게 하지 못합니다. 장상이 그를 견책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좋아질 것 입니다. 하지만 장상이 입을 다문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 겠습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면서 완덕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철저 한 순종에 대한 악령들의 사악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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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사다리

보다도 먼저 오로지 우리의 거룩한 심판관께만 우리를 드러냅시다.12) 하 지만 만일 그가 모두에게도 드러내라고 명령한다면, 그것은 공개적으로 드러난 상처들은 악화되지 않고 치유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공적 고백: PG 681B-684D] 19. 저는 목자이자 거룩한 심판관13)이 다스린 수도원에서 저를 몸서리 치게 했던 한 재판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그곳에 있었는데, 수도승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고 입회를 원했던 한 강도가 거기에 출두했습니다. 그 탁월한 목자이자 영적 의사 는 그곳의 생활양식을 준수할 수 있도록 약 7일간 침잠의 시간을 그에게 부여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그를 개인적으로 불러 그 들과 함께하는 공동생활이 좋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목자는 그가 진실 로 이 삶에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서 세상에서 어떤 나쁜 잘못을 범 했는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꺼이 모든 것을 고백할 준비 가 되어 있는 것을 보자, 그를 더 시험하기 위하여 그에게 “나는 당신이 모든 형제들 앞에서 그것을 고백하기를 바라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12) 엑사고레우시스(exagóreusis), 즉 장상이나 그 대리자에게 생각들을 드러내 보임은 공동 생활에서 그리고 공동체 전례와 접촉을 위해 주기적으로 있는 은수자들의 만남에서 경 청의 주제 가운데 일부이다. 성사적 고백으로 이어지게 될 이 관습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 재했다. 어떤 수도원들에서는 매일 저녁 이 수행이 이루어졌다. 후에 고백자는 아침기도 와 끝기도 때 혹은 다른 때 일종의 고백으로 죄를 용서받게 된다. 영적 사부의 임무는 참 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애덕으로 그 짐을 지고 악령들과의 싸움에서 그를 도와주는 것이 었다. 영적 사부는 치유의 벌을 줌으로써(1베드 2,14) 다소 책임감을 갖게 하면서(야고 2,12)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1요한 3,16). 13) 여기서 클리마쿠스는 순종과 참회의 삶과 관련된 모범적 일화들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이 첫 일화는 타노보(Tanobo)의 수도원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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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정말 자신의 모든 죄를 혐오했기 때문에 온갖 수치심을 극복하며 즉 시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면 알렉산드리아 시내 한가운데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후 실제로 그 목자는 330명의 자기 양떼를 성당에 소집하였고, 주일 미사 거행 중 복음 선포가 끝난 후 무고한 죄인으로 지명된 그를 소개하 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적당하게 때린 몇몇 형제들에 의해 손을 뒤로 묶 인 채 끌려 나왔습니다. 모직으로 된 거친 옷이 입혀졌고 머리에 재가 뿌 려졌습니다. 그 광경에 모두가 놀랐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무 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그렇듯 온화한 그 거룩한 장상은 막 성당 입구에 다다른 그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 니다. “멈추시오. 당신은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없소.” 목자가 신성한 장 소에서 자신에게 한 말에 놀란 그는 후에 우리에게 증언한 바처럼, 자기 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요란한 천둥소리를 들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완전히 질겁하여 공포에 사로잡힌 채 즉시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는 바 닥을 눈물로 적시며 땅에 엎어져 있는 동안, 자기를 구원하고 모두에게 진실한 겸손의 구원적 모범을 주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던 그 놀라운 의사께서 다시 한 번 모두 앞에서 자기가 범한 모든 잘못을 상세히 드러 내라고 명령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모두가 그것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즉 본성에 따르거나 거스른 인간과 짐승들과 함께 범한 육체의 죄들, 심지어 독살과 살인 그리고 듣기에도 글로 적기에도 민망 한 또 다른 극악무도한 행위들이었습니다. 고백을 마치자 그에게 삭발례 가 행해졌고 형제들의 무리에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후 그 성인의 지혜에 탄복한 저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어째서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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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믿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의사는 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첫째, 현재 고백의 길을 통해 그를 미래의 수치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였소. 오 요한 형제,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용서 받았기 때문에 이 목적은 달성했지요. 그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거기 있던 형제들 중 하나가 그것을 보증했기 때문이오. 그는 땅에 엎드린 그 강도가 점차 고백하고 있었던 죄를 펜으로 명부에서 지우는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았다고 나에게 말했소. 사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소. “나는 말했 네. 나는 내 죄를 주님께 고백하리라. 그러자 당신은 내 마음의 사악함을 없애주셨나이다.”(시편 32,5) 둘째, 형제들 가운데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 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을 그 고백으로 이끌기 위해서였소. 고백 없이 아무도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 잊을 수 없는 목자와 그의 양떼 옆에 서서 저는 정말 놀랍고 기억할 만한 다른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것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을 여 러분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들이 여전히 땅의 사람들 이면서 어떻게 이미 하늘의 거주자들을 모방할 수 있었는지, 그들의 생 활방식에 매우 탄복하면서, 그 수도승들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머무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14)

[애덕의 생활과 형제적 교정: PG 685A-688A] 20. 그들 가운데 깨질 수 없는 유일한 애덕의 유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경망스럽거나 무익한 말들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14) 아마도 2달 정도 머물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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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전혀 형제의 양심을 공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콜로 3,14; 로마 14,15; 1코린 8,13). 만에 하나 누가 어떤 반감을 드러냈다면, 목자는 그를 죄인처럼 수도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추방하였습니다. 한번은 형제들 중 하나가 그에게 이웃에 대해 나쁘게 말하자, 그 거룩한 사람은 즉시 그를 수도원에서 추방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 두 명의 악마, 즉 하나는 보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악마가 머물도록 하락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거룩한 사람들에게서 교훈적이고 감 탄할 만한 행동들 그리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주님의 말씀에 따라 생활 화한 형제애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형제애는 노동과 관상을 동일한 가치를 지닌 대상이 되게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신적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여, 더 이상 장상의 질책이 거의 필요 없게 되었고, 각 사람을 거룩한 철야로 나아가도록 자 극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한 온갖 거룩함으로 완수해야 하는, 잘 제정된 어떤 시간경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장상이 없을 때 그들 가운데 누가 때때로 불평을 하고 비판 하거나 무익한 말을 하기 시작하면, 또 다른 형제는 그가 망각한 것을 그 에게 상기시키면서 은밀히 신호로 그만두라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만 일 그 형제가 그것에 유의하지 않으면, 그를 질책했던 형제가 그 앞에서 참회의 부복15)을 한 후 가버렸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경 우, 그들이 항상 이야기했던 바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나 영원한 심판에 관한 생각이었습니다. 15) 자신의 참회를 증명하거나 하느님 경배를 드러내기 위해 땅에 부복하는 것은 수도승들에 게 전통적인 동작이었다. 부복은 장상에 대한 순종과 전적인 종속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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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그 공동체 주방장의 놀라운 공적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려 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그가 늘 자기 소임에 대한 생각에 몰입해 있고 동시에 부단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그러한 은사를 얻었는지 알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제가 집요하게 요구하자 그 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절대 사람들에게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 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관상을 얻기 위한 다른 온갖 수 단이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불을 보며 모든 것을 사를 불을 상기하면서 이 불의 환시를 관상하는 습관을 얻었습니다.” 완전함에 대한 또 다른 역설을 들어봅시다. 그들은 식탁에서조차 영의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복된 이들은 보통 은밀한 신호와 몸짓 으로 서로에게 내적 기도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들은 단지 이 따금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확실히 그들이 만나거나 모일 때마다 그렇 게 했습니다. 만일 누군가 잘못을 범하면, 모든 형제가 그에게 양해를 구 하고 그 문제를 장상에게 말하여 책임을 지고 벌을 받게 했습니다. 자기 제자들의 처신을 알고 있던, 이 위대한 영혼을 지닌 장상은 결국 보다 더 가벼운 벌을 주었습니다. 그는 사실 벌을 받는 그 사람이 무고하다는 것 을 잘 알았고, 정말 잘못을 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고 조사하기를 원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들 가운데 어디서 무익한 대화가 있었거나 음 란한 기억이 생각나게 했던가요? 만일 누가 이웃에 대하여 잘못을 범하기 시작하면, 또 다른 형제가 그 이웃에게 다가가 용서해 달라고 절을 하여 그에 대한 분노를 풀게 하였습 니다. 만일 그가 다툰 두 형제들 간에 어떤 식으로든 악감정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해가 지기 전에 서로를 화해시키기 위하여(에페 4,26) 장상 다음의 직권자에게 그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면 그 직권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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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하지 않은 그 완고한 형제들을 호되게 꾸짖으면서 다음과 같이 징계 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화해하기 전까지 음식을 들 수 없거나 그 수도원 에서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이런 엄격함은 결국 무익하지 않았고, 오히려 확실하고 풍부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단순한 원로들: PG 688B-688D] 21. 실제로 이들 중 많은 이가 수행생활과 관상생활에서, 식별과 겸손 에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천사들에게 합당한 삶을 살았 던 사람들, 공경할 만한 백발이자 어린이처럼 순종적인 사람들의 인상적 인 모습이 경탄할 만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영예는 겸손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50년 동안 완전하게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을 보았습니 다. 제가 그렇듯 큰 노고로 그들이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 제게 말해 달라 고 그들에게 청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깊은 겸손에 도달했을 때 온갖 공격을 몰아낼 수 있었다고 제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감각으로부터 완전한 자유에 이르렀고 온갖 중상과 모욕 앞에서 평화로 움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천사의 백발16)을 지닌,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절대적인 무구함에 도달한 것 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의지적인 노력과 하느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지 혜를 얻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단순성17)은 이중성과 반대되고 단 일성과 동일합니다. 반면 악은 인간을 보이는 외적 인간과 감추어져 있 16) 백발은 종종 천사들과 연결된다. 수도승생활은 지상에서 천사적 삶인데, 이는 참으로 이 삶에 도달한 사람들은 천사들과 같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사람들의 종들인 그들은 죄에 서 자유로워졌고 물질적 필요에서 가능한 한 자유로워졌다. 17) 이 개념은 둘이 하나 된 일치 안에 계신 주님의 속성으로서 단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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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내적 인간, 이 둘로 나눕니다. 거기에 있는 누구도, 헛소리를 하기 때 문에 우리가 노망든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하는 세속 노인들과 달리, 판단력이 없거나 어리석지 않았습니다(집회 25,4). 반대로 그곳의 모든 이는 정말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 매우 점잖고 유순하고 솔직하 고 순수하고 자연스러워보였습니다.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보 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면에서 그들은 악령들과 욕정들로부터 자 신을 돌보는 데 있어 용감하고, 확고한 정신의 눈을 가지고 하느님과 그 들을 인도하는 사람 안에서 마치 어린이들처럼 쉽니다. 오, 거룩한 사부 와 하느님께 소중한 당신 공동체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이 성인들의 덕과 하늘의 거주자들의 행위에 비견되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말할 시간 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평생을 할애한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저는 입을 닫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께 충실한 자 들의 열정을 찬양하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열정에로 여러분을 자극 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그렇듯 훌륭하고 땀 배인 참회 중 어떤 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처럼 수준 낮은 설명이 훨씬 더 풍부한 사실로써 장식될 수 있다는 점은 주제를 벗 어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꾸민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고 추측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종류의 의심은 그 유익함을 손상할 것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면 그 주제로 다시 돌아갑시다.

[수도승 이시도루스의 모범: PG 689A-689D] 22. 얼마 전 앞서 언급한 수도원에 알렉산드리아의 영향력 있는 고관 이었던 이시도루스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아직 거기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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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를 만났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목자께서 그를 맞이했지만, 그의 악하고 잔인하고 거만하고 무례한 성격을 확인해서 지혜롭게 악령들의 교활한 술책을 피하기 위하여 온갖 인간적 논증에 의지하려고 생각했습 니다. 그는 이시도루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그리 스도의 멍에를 목에 매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당신이 순종을 배우기를 바라오.” 그가 대답했습니다. “위대하신 성인이 시여, 저는 대장장이의 손에 놓인 쇠처럼 당신께 대한 순종에 저를 내어 놓습니다.” 그러자 그 비유에 만족한 우리의 성인은 즉시 이시도루스라 는 쇠를 잡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제련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여, 당신에게 명령하니, 수도원 문에 서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사부님, 저는 간질병을 앓고 있으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 시오.’라고 말하시오.” 실제로 그는 천사가 주님의 말을 듣듯 그 성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는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거기서 7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마침내 그 는 깊은 겸손과 함께 통회에 도달했습니다. 정해진 7년18)과 그가 보여준 비범한 인내 후, 우리가 찬양하는 그 목자는 그가 형제들 가운데 받아들 여지기에 또 사제서품을 받기에 충분히 합당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받아 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시도루스는 다른 이들을 통해 그리고 저의 보잘것없는 중재를 통해서 그 장소와 그 조건에서 그 과정의 끝에 이를 수 있게 해달라고 목자에게 계속해서 청했습니다. 그는 ‘끝’이란 용 어로 자기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은밀히 알아듣게 했습니다. 실제로 18) 어떤 수도승 규칙도 7년의 시험기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7년의 고행은 간음에 대 한 사도적 규정에 의해 요구되었다. ‘불순종의 간음’에 대한 마케도니우스 부제의 언급 때 문에 아마도 장상은 이시도루스의 오만을 간음처럼 다루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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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스승은 그가 그의 자리에 머물도록 허락했고, 10 일 후 그는 엄청난 무시를 당한 다음 영광 중에 주님께 건너갔습니다. 그가 죽고 7일 후 그는 그 수도원의 문지기도 주님께 데려갔습니다. 사 실 복된 이시도루스는 생전에 그에게 “제가 주님께 허락을 받으면, 즉시 저 세상에서도 당신을 떨어질 수 없는 제 동료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그가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순종과 하느 님을 모방했던 겸손에 대한 완전한 인정으로서 허락되었습니다. 이시도루스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저는 이 위대한 사람에게 문 앞에 서 있는 동안 무슨 생각이 들었었냐고 물었습니다. 이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저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제게 그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 는 말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제 죄로 인해 경매에 붙여진 노예처럼 생각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마지막 피를 흘릴 때까지 고되고 엄격하게 참회를 했습니다. 그러고 일 년이 지난 후 마침내 제 인내에 대한 하느님 의 상급을 기다리며 제 마음은 괴로움에서 해방되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시 일 년이 지났고 저는 비로소 제 마음속에서 제가 교부들을 보는 것 에 기뻐하고 그들 가운데 서면서 그곳에 살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 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신비들에 참여하고19) 그들의 모습이 저에게 주 었던 그 어떤 관상적 기쁨을 저는 누리기에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제 눈을 낮게 내리깔고 제 감정을 여전히 더 낮추면서 출입 하는 사람들에게 저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진심으로 청했습니다.”

19) 전례 집회 참석은 회수도승들, 라우라 수도승들 그리고 은수자들에게 있어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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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가득한 원로 라우렌시우스: PG 692A-692C] 23. 어느 날, 제가 그 위대한 장상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제 귀에 몸을 구부리며 그의 거룩한 입을 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우 연 로한 사람이 어떤 거룩한 생각을 하는지 보기를 원하시오?” 제가 그렇게 해주기를 청하자 그 성인은 두 번째 식탁에서 라우렌시우스라고 불리는 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는 48년 전부터 수도원에 머물렀고 수도원의 두 번째 사제였습니다. 그가 와서 강복을 받기 위해 장상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장상은 그를 향하지 않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상 은 그에게 음식을 들게 하지 않고 식탁 앞에 서 있게 했습니다. 점심식사 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장상은 한 시간 내내, 아마도 두 시간 동안 그 를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서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있던 하느님의 종에 게 시선을 향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으로 인해 저는 몹시 부끄러웠습니 다. 그는 완전 백발이었고 이미 80살20)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고, 우리가 일어섰을 때, 우리가 언급 한 그 성인이 그를 위대한 이시도루스에게 보내 시편 40편의 첫 구절21) 을 암송하게 했습니다. 성인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저는 그 원로에게 식탁 앞에 곧게 서 있으 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어 그를 성가시게 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 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장상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생 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내려진 명령이 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 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요한 신부님, 따라서 저는 사람들 20) 이미 영혼의 스승인 원로이다. 21) “주님께 바라고 바랐더니 나에게 몸을 굽히시고 내 외치는 소리를 들으시어.”(시편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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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식탁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제단 앞에서 기도하며 서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저는 그 목자를 신뢰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어떤 악 한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 다.’(1코린 13,5)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 하지만 만일 누가 단순한 삶 에 전념하고 성덕을 열심히 닦으면 더 이상 악마에게 장소나 시간을 주 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영적 지도법: PG 692C-693B] 24. 하느님 친히 이 둘째 장상과 그의 공동체에, 자기 양떼를 구원하기 를 바라는 그 사람과 같이 매우 지혜롭고 온유한, 하지만 의로운 사람을 당가로 보내주셨습니다. 한번은 그 원로가 이유 없이 그 사람을 거슬러 개입을 했습니다. 원로는 정말 이상한 방법으로 그를 성당에서 쫓아내기 까지 했지만, 모두의 선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따로 그 목자와 이야기하면서 그에 대해 변호했습니다. 저는 목자가 고발했던 그 사람이 결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내게 지혜롭게 말 했습니다. “신부님, 나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장상은 배고픈 아들의 입에서 빵을 뺏고 싶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오. 만일 장상 이 영혼들에게 월계관을 얻게 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며 그들을 인도한 다면, 그와 다른 이들에게 옳지 않고 통탄할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장상은 그들이 월계관을 얻기 위해 매순간 부당과 모욕, 굴욕 과 조롱 가운데서 싸운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세 가지 방식으로 심각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발을 견딜 때 얻게 되는 상급을 그 형제에게서 앗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형제들이 그 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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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게 될 모범에서 유익을 얻도록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인 세 번째는 종종 관대하고 인내심 있게 보이던 사람 역시 이미 상당히 덕 스럽게 된 후 장상의 돌봄과 견책을 받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온유와 인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토양이 아주 좋고 비옥하고 풍 요롭다 하더라도 멸시의 물이 부족하면 그것은 황폐해집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교만과 음욕 그리고 두려움의 부족이라는 가시들이 자라기 때문 입니다. 그것을 아신 위대한 사도께서는 티모테오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 쁘든지 꾸준히 타이르고 꾸짖으십시오.’(2티모 4,2)라고 쓰셨습니다.” 제가 그 참된 인도자에게, 우리 인간성은 연악하기에 많은 사람이 견 책이 옳건 그르건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나쁘게 반응한다고 애써 반 론을 제기하려 했기 때문에, 그 지혜의 자리22)께서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유대로 자기 목자에게 묶 인 영혼은 무엇보다도 그에게서 축복을 받고 치유를 받았다면, 비록 피 를 흘릴지라도 그에게서 분리되지 않소. 그는 다음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 오. ‘천사도 권세도 권능도 어떤 다른 피조물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 만일 그가 풀 수 없는 사슬 로 그렇게 묶여 있지 않다면, 위선적이고 거짓된 순종에 묶인 채 그가 여 기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이상할 것입니다.”

[충동적인 압바치루스와 그의 정화: PG 693C-694A] 25. 그 거룩한 사람은 참으로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권위는 오히려

22) 이 표현은 지혜가 그 안에 자리를 잡은 사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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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의 길을 지시해 주었고, 그리스도 께 흠 없는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 거기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질그릇 속에 담긴 지혜를 경탄합시다(2코린 4,7). 저는 그곳에 머물면서 경탄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수련 때부터 신앙과 인내와 불굴의 용기로 장상과 한참 후배들의 비판을 받아들였습 니다. 그는 저의 감화를 위해 형제들 중 하나가 그것을 저에게 설명하게 했습니다. 압바치루스라는 이름의 그 형제는 15년 동안 수도원에서 생활 했는데, 아마 모든 이 중 가장 나쁜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충동 적이었기 때문에 식사시간에 식탁 봉사자들이 그를 쫓아내는 것을 제가 때때로 보았다는 점에서입니다. 말하는 데 있어 거의 자연적으로 무절제 한 이 형제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압바치루스 형제, 나는 당신이 매일 식 탁에서 쫓겨나고 자주 저녁식사를 하지 않고 잠자러 가는 모습을 보는 데 어째서이지요?” 그러자 그가 저에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저를 믿으 십시오. 제 사부들은 제가 수도승으로 행동하는지 보기를 원하기 때문 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장상이건 다른 이들이건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때문 에, 저는 모든 것을 견디는 데에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15년 전부터 저는 제가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 그들이 저에 게 말한 바, 곧 그들의 제자들을 다루는 이 방법은 30년까지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를 생각합니다. 요한 신부님, 황금은 제련되지 않으면 완 전하게 정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집회 2,5).” 이 관대한 압바치루스는 제가 이 수도원을 떠난 후 2년을 더 계속 참 아 견디었습니다. 그런 후 이 세상을 막 떠나기 직전 그의 사부들에게 다 음과 같이 말하며 주님께 날아갔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감사드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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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주님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제 구원을 위해 제가 시험을 받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17년 동안 악령의 유혹 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인 그 목자는 끝까지 신앙을 고백 한 사람으로서 그를 거기에 묻힌 성인들 가운데 합당히 매장할 것을 명 령했습니다.

[부제직을 박탈당한 수석 부제 마체도니우스: PG 696B-697A] 26. 만일 제가 수도원의 수석 부제 마체도니우스의 뛰어난 덕행과 투쟁 들을 침묵의 무덤 속에 묻어둔다면, 성덕을 위한 사랑에 불타는 모든 이 에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께 주의하는 그는 주님공현 축일23) 이틀 전, 수도원 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할 허락을 집요하게 청했 습니다. 게다가 그는 도시에서 즉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축일 이 임박해서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선을 미워하는 악마가 장상의 허락을 받고서 갔던 수석 부제에게 걸림돌을 놓 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의 거룩한 축일을 위해 제 때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루 늦게 돌아왔고, 장상은 그에게 부제직을 박탈했고 가장 나중에 들어온 초심자들의 자리로 내려 보냈습니다. 이 거룩한 인 내의 부제, 충실한 수석 부제는 징계받은 사람이 마치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전혀 개의치 않게 사부의 처분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40일24)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장상은 지혜롭게 그를 자 23) 동방에서 클리마쿠스 시대에 공현은 빛의 축일, 삼왕 축일, 예수의 세레 축일이었다. 24) 40일의 참회는 40일의 사순시기 단식을 연상시킨다. 예수님은 사막에서 시나이에서의 모 세와 엘리야처럼 40주야를 단식하셨다(참조: 마태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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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자리로 되돌아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난 후 수석 부제는 자 기를 다시 이전의 징계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장상에게 간청했습 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시에서 제게 일어났던 일 때문에 제 잘 못은 용서될 수 없습니다.” 그 거룩한 장상은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고 단지 낮추어지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느님 종의 거룩한 열망을 들 어주었습니다. 그 후, 그 존경할 만한 백발 원로가 모두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 고 진실로 청하며 초심자로서 자신의 날들을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 습니다. 그는 이렇게 반복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불순종의 간 음에 떨어졌습니다.”25) 그 위대한 마체도니우스는 보잘것없는 저에게도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비슷한 비하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 - 그는 저를 신뢰했 습니다. - 저는 결코 지금처럼 이 싸움의 무게를 이렇게 가볍게 느꼈던 적 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비추어 주신 광채가 이렇듯 매혹적인 것 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타락하지 않는 것은 천사들에게 고유합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이 말하는 바처럼 그들에게는 타락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사람들은 타락할 수 있고 즉시 다시 일어설 수 있 습니다. 악령들만이 일단 타락하면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저를 신뢰했던 수도원의 선임봉사자(당가)에게서도 그러한 경험을 했 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동물들26)을 돌보았는데, 중대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의 굴속에 있는 뱀을 숨기지 25) 불순종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므로 그것은 악마와의 불결한 결합이요 하느 님께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다. 26) 수도원에 있는 짐 나르는 짐승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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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영혼의 의사에게 그것을 고백하면서, 즉 범한 죄를 곧바로 드러내면서 꼬리로 그 녀석을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그 행위를 끝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겸손하게 제 뺨 을 어루만지면서 웃는 얼굴로 제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가서 처음처럼 네 봉사를 계속하여라. 미래에 대해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 그래서 며칠 안에 완전한 치유에 이르고 기쁨과 떨림으로 제 길을 계속 달려가면서 저는 그에게 열렬한 신뢰를 주었습니다.”

[멘나의 무덤에서 난 순종의 향기: PG 697B-700A] 27.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바처럼 모든 피조물은 자기 종(種)에 따라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형제들의 집회에서 역시 진보와 영적 양성 이 달랐습니다. 영적 의사는 우연히 어떤 이들이 밖의 세상에서 수도원 을 방문할 경우, 자기를 과시하려 했던 자들의 정체를 폭로할 줄 알았습 니다. 그는 거친 언사를 사용하고 보다 비천한 일들을 그들에게 부과하 면서 그들을 시험했습니다. 이는 공동체에서 세속적인 모습들을 본 결 과 그들이 즉시 도망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거기서 본성 을 넘어서 있는 이상한 현상 하나를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인간 안 에 있는 허영심으로서, 이것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신을 감추면서 자기 자신을 추구했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제가 그 거룩한 장소에서 떠나기 일주일 전, 이 세상에 서 당신께로 불러간, 거룩한 삶을 살았던 한 신부를 위해 거행된 예식에 참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장상 다음의 두 번째 사제였고 놀라운 사 람이었습니다. 멘나(Menna)라고 불렸던 그는 그 수도원에서 59년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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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모든 성무에 봉사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 우리가 관습 대로 위령성무를 거행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그 성인이 묻힌 땅이 온통 감미로운 향내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장상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성 인이 안치된 관을 열게 했습니다. 관을 열자 모두는 향유의 향기가 두 개 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의 고귀한 두 발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 았습니다. 스승은 모두에게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이제들 보셨소? 엄청 난 그의 노고와 고통이 향유의 향기처럼 하느님께 전달되었소(민수 15,10 이하).” 정말 그랬습니다. 그곳 신부들이 이 거룩한 멘나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주었던 다른 많은 일들 가운데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통상적인 축복을 청하기 위 해 그가 장상에게 가서 저녁 메타니아(metania)를 하며 몸을 구부렸습니 다.27) 그러자 그의 순종의 은사를 시험하고자 했던 장상이 기도시간 때 까지 그를 땅에 부복해 있게 하였습니다. 결국 장상은 그를 축복하면서, 하지만 동시에 마치 자기 과시를 하고 인내심 없는 자처럼 그를 꾸짖으면 서 일어서게 했습니다. 장상은 그 성인이 너그럽게 그것을 견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모든 이의 감화를 위해 그 렇게 했습니다. 이 거룩한 멘나의 제자 하나가 장상의 그러한 행동의 이 유를 우리에게 충분히 밝혀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 다. “장상은 그가 자기 앞에 그렇게 무릎 꿇고 있는 동안 잠에 떨어지지 는 않는지 혹은 땅에 누워 있는 동안 시편집 전체를 기억으로 암송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하여 그를 마구 다뤘던 것입니다.” 저는 제 담화의 화관 에 끼워지는 보석과도 같은 이 장식을 덧붙이기를 소홀히 하기 원하지

27) 여기서 공경의 몸짓은 절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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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습니다.

[수도원은 애덕의 실천 때문에 은수처보다 더 선호할 만하다: PG 700B-701B] 28. 한번은 제가 저 관대하고 강건한 원로들 중 어떤 분들에게 헤시키 아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들은 웃는 얼굴과 즐거운 태도로 친절하게 저 에게 대답했습니다. “요한 신부님, 우리는 물질로 빚어졌습니다. 그와 같 이 우리 역시 물질적인 생활을 합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 연약함의 정도 에 따라 물질적인 삶을 거스르는 싸움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를 거슬러 항상 격노하고 무장되어 있는 악령들과 싸우기 보다는 때때로 잔혹하고 어떤 때는 동정심을 지닌 사람들을 거슬러서 싸우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이 다정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이제 저에게 주님 안에서 특별한 우정의 느낌을 갖고 허물없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 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참으로 현명한 분이시여, 만일 당신이 그리 스도 안에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 니다.’(필립 4,13)라고 말씀하신 분의 영혼의 저 힘을 지니고 있다면, 만일 성령께서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당신 안에 육화시키기 위하여 동정녀 에게 내려오신 것처럼 순수한 이슬처럼 당신에게 내려오시어 지극히 높 으신 분의 권능이 그분의 인내로 당신을 덮는다면(루카 1,35), 그리스도 처럼 순종의 수건으로 허리를 묶고(1베드 1,13), 헤시키아의 식탁에서 일 어나 당신의 부서진 영의 눈물로 형제들의 발을 씻어 주십시오(요한 13,4; 시편 51,19). 아니면 겸손한 생각들로 형제들의 발아래 조아리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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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당신 마음의 문에 엄격하고 깨어 있는 파수꾼들을 두십시오(시편 141,3). 방탕한 육체 속에서 헤매는 중에 걷잡을 수 없는 정신을 일치시 키고, 항상 움직임과 동요 속에 있는 지체들로 인해 흐트러진 정신 안에 서 부동의 헤시키아 수행을 하십시오.” 그는 역설 중의 역설을 강조하며 계속했습니다. “소란 속에서도 아무것 도 당신 정신을 방해하지 않게 하십시오. 혀를 억제하여 어리석은 논쟁 에 빠져들지 않게 하십시오. 하루에 일흔일곱 번(마태 18,22) 이 폭군을 대항해 계속 싸우십시오. 당신 정신의 모루 위에서 망치질을 하며 십자 나무와도 같은 당신 영혼의 나무에 못을 박으십시오. 조롱, 모욕, 비웃 음, 불의에 정신을 노출하십시오. 정신이 물러지거나 부러지게 해서는 절 대 안 됩니다. 정신이 고요하고 동요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당신 뜻을 벗어버리고 원래의 수치를 입으십시오. 그럼으로써 당신 자신을 벗 어버리면서 신앙의 갑옷으로 갈아입고(1테살 5,8) 경기장으로 들어가십 시오. 조교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기란 정말 드물고 어려 운 일입니다. 촉감이 음란한 공격을 가해 올 때 꼭 절제의 고삐로 억제하 십시오. 죽음에 대한 생각 속에 영적으로 머물러 있어 항상 육체적 위대 함과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눈을 제지하고, 늘 자신의 관심사 로 인해 형제를 단죄하느라 배회하는 정신을 확실하고 완전하게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이해로 가득하게 하십시오. 지극히 친애하는 신부님, 이로 써 모든 사람이 당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 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역시 다른 이에 대한 각자의 사랑이 다스리게 된 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요한 13,35).” 그런 다음 그 친애하는 벗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여기, 오로지 여기 이 공동체에 당신은 머물러야 합니다. 조롱을 마치 생명의 물(요한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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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럼 계속해서 아래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하늘 아래 즐거움을 줄 수 있 는 모든 것을 추구한 후 마침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형제들이 함 께 사는 것 외에 아름답고 감미로운 다른 어떤 것이 있던가?’(시편 133,1) 라고 부르짖었던 다윗처럼 말입니다. 그처럼 인내로운 순종의 선을 소유 할 자격을 갖추십시오. 만일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도원의 경기장에서 멀리 떨어진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면, 적어도 그들이 싸움에 서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여기서 멀리 있는 운동선수들(금욕가 들)의 삶을 찬양하도록 합시다.” 이 훌륭한 사부이자 최고의 스승은 마치 천사요 예언자처럼 싸우면서 그렇게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창세

32,23-31). 우리 둘 모두 거룩한 순종에 영예를 부여하는 데 유쾌히 동의 했습니다. 이제 이 교부들의 성스런 이 유일한 덕의 천국에서 나와, 보다 더 지상적28)이지만 역시 유익한 주제들로 돌아가겠습니다.

[작은 과실과 심한 징벌: PG 701B-704A] 29. 우리는 자주 기도 중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 때 그 복된 목자가 잡 담을 하던 어떤 형제들을 보고서 그들을 일주일 동안 성당 앞에 있게 하 여 참회의 표시로 드나드는 각 사람 앞에서 용서를 구하게 한 일이 있었 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놀라운 것은 그들이 성직자들, 즉 사제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서 시편낭송에 참여한 형제들 중 특별히 한 형제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찬가 후렴들을 노래하고 있을 때, 무엇보다도 그의 어떤 행동 방식에 있어서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마음의 열렬한 감 28) 클리마쿠스는 창세 3,18을 암시하면서 ‘아름답지 않고 가시로 가득한’ 주제들이라고 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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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것과 같았고 다른 이 들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거룩한 사람의 그러한 행동의 의미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저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숨기지 않고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한 신부님, 저는 보통 처음부터 제 생각과 정신과 영혼을 모아 ‘자, 우리 하느님이요 임금이신 그리스도께 엎드려 경배 드리자.’(시편 95,6)라고 그 들을 초대하며 그렇게 그들 모두에게 부르짖습니다.” 한번은 식탁을 준비했던 형제로 인해 얼마나 놀랐던지. 그는 자기 일을 하는 동안 허리띠에 작은 판 하나를 매달고 있었는데, - 제가 보고 후에 설명했던 바와 같이 - 거기에 하루 종일 그를 유혹했던 생각들29)을 적었 습니다. 이는 나중에 목자에게 모든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중에 저는 단지 그 형제만이 아니라 그곳의 다른 많은 형제들 역시 그 렇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들은 바처럼 장상이 그렇게 하 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30) 한번은 형제들 중 하나가 이웃을 생각 없이 말을 한 수다쟁이로 고발 했기 때문에, 고발한 그 형제는 수도원 문 앞에 내쳐져 일주일 내내 입구 앞에 머물며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또 다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하 는 일이 있었습니다. 영혼들을 사랑하는 그분이 그것을 알게 되자, 즉시 그 형제가 6일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에게 이 29) 이 생각들(logismoi)은 단순한 생각들이 아니라 내적인 자극들로서 그중 어떤 것은 악령 에게서 온 것일 수 있다. 장상은 어느 생각이 도움이 되고 어느 생각이 도움이 되지 않는 지 식별할 수 있다. 30) 이레네 하우저(I. Hausherr)에 의하면, “이 관습은 일반적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 수도원을 방문하기 전에 이 관습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는 이 관습을 더 이상 권고하지 않는다.”(I. Hausherr, Direction spirituelle en orient autrefois , Roma, 1955,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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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이 수도원에 머무르기를 원한다면, 당신 을 참회자들 무리에 두겠소.” 그가 참회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여 받아들 였기 때문에, 목자는 그를 자기 죄에 대해 울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유보 된 구역으로 안내하라고 명령했고, 그 명령은 실행되었습니다.

[이집트 형무소의 혹독함을 상기시키는 숙고들: PG 704A-704D] 30. 우리는 이 수도원의 어떤 구역에 대해 이야기할 시점에 이르렀습니 다. 제가 그것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는데 약간 더 이야기합시다. 그곳은 수도원에서 1마일 떨어져 있었는데 감옥이라 불렸고 매우 거친 장소였습 니다. 그곳에는 결코 주방의 연기가 보이지 않았고, 식사를 위한 포도주와 기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빵과 약간의 야채만 제공되었습니다. 이 감옥에는 수도성소를 배신한 사람들이 그곳을 나갈 희망 없이 족쇄 로 채워져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데 있지 않고 홀로 혹은 둘로 서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장상에게 그들 각자에 대해 어떤 확신을 주실 때까지 거기 머물렀습니다. 장상은 자기 대리자로서 공동체 를 이끌었던31) 이사악이란 사람에게 감옥 책임을 맡겼습니다. 이 사람 은 자기 수도승들에게 거의 완전히 중단 없는 기도를 요구했습니다. 수 도승들은 노동을 하고 영적 태만을 피하기 위해 많은 양의 종려나무 잎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2) 이것이 그들의 생활이었고, 이것이 실제로 야곱의 하느님 면전에서 살 31) 장상의 주 대리자로서 그 속죄의 감옥이 그에게 맡겨졌다. 32) 종려나무 잎은 바구니나 돗자리를 짜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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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던 사람들의 행위를 규정한 관습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람들의 노고 에 감탄하는 것은 좋습니다. 비록 각 사람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은 불가 능할지라도, 그들을 모방하는 것은 구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주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폭력을 행하는 데 전념 한 우리를 보시고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자책으로 갈기갈기 찢긴 우리 마음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때까지, 우리 죄들을 고발하면서 우리 죄에 대해 반성합시다.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제 속에 수많은 걱정 들이 쌓여 갈 제, 당신의 위로가 제 영혼을 기쁘게 하였습니다.”(시편 94,19) 적절한 때에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한 사람의 말을 잊지 맙시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많은 곤경과 불행을 겪게 하셨지만 저를 다시 살리 셨습니다. 땅속 깊은 물에서 저를 다시 끌어 올리셨습니다.”(시편 71,20) 매일 하느님이 보내시는 꾸짖음과 모욕의 길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기 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는 순교자들의 합창대에서 노래할 것이고 천사들 의 자유에 참여할 것입니다. 스스로 항상 온갖 종류의 경멸과 모욕을 받 을 만하다고 믿는 수도승은 복됩니다. 자기 뜻을 완전히 죽이면서 주님 안에서 자기 스승에게 삶을 맡기는 수도승은 복됩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오른편에 놓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장상과 형제들의 말에 대한 애정 어린 경청: PG 705A-705B] 31. 반면 합당하건 합당하지 않건 질책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구 원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힘들게건 평온하게건 질책을 받아들이는 사람 은 즉시 자기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당신이 영적 사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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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는 사부를 향한 당신의 자세들에 대해 사부가 충분히 알게 하시 면서 당신도 모르게 그를 당신의 친구가 되게 할 것입니다.33) 어떤 간계 이든지 뱀의 간계를 고발하는 사람은 사부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확 실하게 보여줍니다. 반면 사부에게 그것들을 감추는 사람은 사방으로 배 회하며 통과할 수 없는 길들을 갈 것입니다. 오로지 형제의 타락 앞에 통회의 눈물이 그리고 그들의 영적 진보와 은사 앞에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될 그때, 형제에 대한 참된 사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정당한 이유가 있는 의견이라 하더라 도, 자기 의견을 말할 때 그것을 관철하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악마의 흉 한 질병인 시기심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자기 동료들과 대화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아마도 장상들의 견책이 그를 치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더 월등하고 더 지혜로운 사람들과도 역 시 그렇게 처신한다면, 인간적인 수단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합니다.34) 말에서 유순하지 않은 사람은 행동에서도 그렇지 못할 것임이 분명합 니다. 작은 일에 불성실한 사람(루카 16,10)은 실제로 절대 굴복하지 않 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가 수고한다 하더라도, 거룩한 순종 없이 는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그가 형벌의 판결을 당하지 않더라도 말입니 다. 반대로 만일 그가 사부에 대한 순수하고 깊은 순종의 양심을 얻었다 면, 마지막 날을 잠처럼 기다리면서, 또 이별의 순간에 확실히 자신이 아 닌 장상이 해명할 것임을 잘 알면서 두려움 없이 자기 인생의 날들을 보

33) 제자들은 자기 뜻을 부정해야 하고 예술가의 손에 다루기 쉬운 재료가 되어야 한다. 그들 은 마치 혼이 없는 육체와도 같아서 예술가는 거기에 자기가 원하는 영을 불어넣을 수 있 다. 사부는 재료로 자기 예술을 표현하는 예술가와도 같다. 34) 참조. 로마 12,15; 요한 6,43; 1티모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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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것입니다.35) 주님 안에서 완전한 자유로 성부에게서 봉사직무를 받아들인 사람은 봉사 중에 걸림돌을 만나 애당초 그가 생각하지 못했던 피해를 당한다 고 해도, 자기에게 무기를 주신 분이 아니라 그것을 잡은 자기 자신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돌려야 합니다. 사실 그는 적과 싸우기 위한 도구를 받 았지만 마음속 무기처럼 처박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가 억지로 그 임무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경우, 그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기에게 그 임무를 맡긴 사람에게 자신의 무능력을 미리 설명했다 하더라도 두려 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가 실수한다 하더라도 치명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36)

[형제들의 모욕과 장상들(우리 생각을 다스리는 법의 제시자이자 중 재자들)의 명령을 겸손하게 경청함: PG 705B-708A] 32. 친애하는 여러분, 특별한 형태의 한 가지 순종에 대해서 약간 이야

35) 가자의 바르사누피우스는 서간 28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은 전적으로 순 종해야 합니다. 혹시 그것이 부당해 보인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당신에게 그것을 명령하 는 장상이 그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전통 안에서 이처럼 맹목적으로 보이는 순종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순종의 중요성 때문이다. 순종은 우리를 다시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성 베네딕도, 『수도 규 칙』, 머리말, 2-3). 하지만 성 베네딕도는 이런 맹목적 순종에서 자발적, 의지적, 전인적 순 종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하고 있다. 36)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봉사직무를 자유로이 받아들인 사람과 억지로 받아들 인 사람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후자를 더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 다. 아마도 전자의 경우는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를 받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점을 비판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는 본인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순종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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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합시다. 매우 맛있는 영적 양식을 식탁에 올리는 것을 정말 잊고 있었 습니다. 거기서 저는 주님 안에서 내적 쇠진에 이르기까지 복종하고, 자 기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던 사람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외적 공격들 앞 에서 용기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 면전에서 모욕을 당하며 그들 자신을 정복한 어떤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렇듯이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고 생각하는 영혼은 하나의 제동장치를 만납니다.37) 반면 겁 없이 잘못 을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영혼은 마치 어둠 속에 머물면서 계 속 잘못을 범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한 장상이 없을 때38), 역시 그가 인격으로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재한다고 상상합시다. 우리가 교 제, 담화, 음식, 졸음 또는 그의 마음에 안 드는 다른 온갖 행위를 피하지 않을 때, 우리는 참으로 순종에 대한 거부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스승이 없을 때 서자들은 마치 이득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지만, 반대로 적자들은 상실한 것처럼 괴로워합니다(마태 15,29; 마르 7,21). 한번은 순종이 어떻게 겸손의 획득에 유익한지 이해를 얻기 위해 더욱 탁월한 사람 중 하나에게 제가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제게 이 렇게 대답했습니다. “현명하게 순종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죽은 이들을 살리고, 눈물의 은사를 얻고, 더 이상 내적 싸움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 도, 이 모든 것은 영적 사부의 기도를 통해서 달성한 것이라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의 광기에 확실히 낯설고 반대되어 있을 것 입니다. 실제로 자기 수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의 도움으로 이루었 37) 참조. 시편 32. 자기 양심을 영적 지도자에게 드러내야 한다고 늘 생각하는 수도승은 자 기 자신에 대한 마음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이성이 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않 을 것이다. 말이나 노새의 사나움은 재갈과 고삐로 굴복된다. 38) 우리는 하느님 현존 앞에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장상은 하느님 심판의 대리자처럼 하 느님을 구체적으로 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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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단언하는 사람이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헤시키아 중에 살 면서39) 위에 언급한 행업을 완수한 사람은 실로 그것을 모릅니다. 교만 한 사람은 그가 성취한 것들이 그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조언하면서 그의 거룩한 행업들을 그에게 돌립니다. 그러나 순종하며 사는 사람은 적어도 그를 위협하는 두 적을 이미 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항 상 권위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종으로 남아 있습니다.”40)

[악령은 우리를 수도원에서 떼어놓기 위하여 고독을 갈망하게 한다: PG 708B-709A] 33. 악령은 이 두 올가미를 놓으며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과 싸웁니다. 처음에는 육체를 더럽히면서 마음을 무디게 하여 그들을 평상시보다 더 뒤집어 놓을 정도로 크게 동요시킵니다. 이제는 반대로 그들을 기도에 건조하고 메마르고 게으르게 하며, 졸리고 멍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금 욕적 경청(순종)에서 그들이 어떤 유익함도 얻지 못했고 전진하지 않고 후퇴했다고 확신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종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악 령은 우리에게 좋은 은사들처럼 보이는 것들을 하느님 뜻에 의해 빼앗기 는 것이 종종 우리를 겸손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숙고하도

39) ‘헤시키아’란 용어는 고요, 침묵, 정적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은수생활이라는 보다 특별 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헤시키아 중에 산다’는 말은 ‘은수생활을 한다’는 의미 로 이해할 수 있다. 40) 참조. 1티모 2,5. 스콜리아스테(Scoliaste)에 의하면, 클리마쿠스가 암시하는 두 적은 헛된 영광과 교만일 수 있다. 그러나 뒤에 오는 단락은 다른 두 가지를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 다. 즉 견딜 수 없는 낙담과 그 결과로 생기는 헤시카스트 생활을 위한 공동체 생활의 포 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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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41) 자주 인내로 정복된 - 적어도 어떤 이들에 의 해서 - 그 사기꾼은 두 번째 악령으로 대체됩니다. 이 두 번째 악령은 우 리가 여전히 그 사기꾼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이미 개입을 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속여 끌어당기려 합니다. 저는 처음엔 순종적이고 매우 참회하며 온유하고 자제력 있고 서약에 충실하고 더 이상 동요되지 않는 어떤 수도승들이 영적 사부의 보호 아 래 열심해졌다가, 후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불어넣기 위해 다 가온 악령들의 꾐에 속아 넘어간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 금까지 벌인 싸움에 대한 완전한 상급인 헤시키아 중에 살 능력이 있으 며, 이미 헤시키아의 삶을 떠나 아파테이아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 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혹에 넘어간 자들은 항구를 떠나 심해(深海)로 나아가 항해사 없이 비참하게 이 바다의 더럽고 짠 물속에서 위험에 처 하게 됩니다.42) 바다는 거칠게 휘저어져 파도의 동요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바닷물이 나무와 잡초 그리고 그곳으로 흘러간 욕정의 강들이 바다로 옮긴 온갖 종류의 타락을 다시 육지에 퍼붓기 때문입니다. 바다 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합시다. 심한 폭풍우 뒤에 고요가 옵니다. 때론 사부의 말을 경청하고 때론 경청하지 않는 사람은 때론 자기 눈 에 안약을 넣고 때론 생석회를 넣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씌어 있 습니다. “한 사람은 짓고 또 한 사람은 허무니 고생만 할 뿐 무슨 소용이 있느냐?”(집회 34,28)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아들이여, 교만의 영에 속 41) 교육상의 메마름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겸손으로 이끈다. 반면 실의는 교만의 열매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의 상실을 낳는다. 성급한 실의로 수도승은 형제들과 장상의 도움 없이 패배하게 될 그곳에서 평화를 희망하며 고독한 삶를 위해 공동체를 포 기하게 된다. 42) 스콜리아스테(Scoliaste)에 의하면, 더러움은 육욕을 상징하고 짠 것은 교만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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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마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야기하듯 당신 과오 들을 스승에게 드러내십시오. 수치심을 경험하지 않고서 수치심에서 자 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에게 썩은 부분을 드러내십시오. 그리 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사부님, 저는 부상당 했습니다. 제 상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제 방종의 결과입니 다. 다른 어떤 사람이나 영도 아니고, 어떤 육체적인 것이나 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 제 태만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고백할 때 단죄를 받아야 하 는 사람의 자세와 말투를 취하고, 머리를 땅에 수그리고, 가능하면 마치 그리스도의 발인 듯 심판관이신 스승의 발을 눈물로 적시십시오. 악령 들의 습관을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자주 당신에게 고백하지 말라고 유 혹하거나 마치 그 죄가 다른 사람들의 죄인 양 그것을 고백하도록 하거 나 이웃에게 우리 죄의 원인을 돌리도록 유혹합니다.

[의사요 항해사인 영적 지도자를 바꾸지 말라: PG 709B-712A] 34. 만일 습관이 모든 것에서 그것을 따르도록 몰아붙이게 한다면, 완 수할 선과 관련해서는 훨씬 더 그러합니다. 하느님은 위대한 협조자이십 니다. 결론적으로 만일 당신이 처음부터 온 마음으로 낮추어짐을 인내 로 달게 받는다면, 복된 평화를 얻기 위해서 여러 해가 아니더라도 충분 할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께 하듯이 당신을 도와주는 사람에게 행한 겸손한 고백이 굴욕이라고 믿지 마십시오. 실제로 저는 단죄받은 사람들이 진실하게 뉘우치는 태도로 고백하면서, 기도로써 심 판관의 분노를 자비로 바꾸고 그의 완고함을 부드럽게 했던 것을 보았습 니다. 그래서 선구자 요한도 세례 전 죄의 고백을 요구했습니다(마태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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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 1,5). 그가 자기에게 왔던 사람들의 죄를 알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 라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백을 한 후에도 공격이 계속된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 다. 교만과 싸우기보다는 악한 생각과 싸우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헤시카스트 교부들과 은수자들의 공적이 이야기되는데, 당신은 그들의 수준으로 올라가면서 너무 달려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최초 순교자의 겸손한 군대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43) 그 군대에서 죄를 범 하는 사람은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죄를 범한다 면, 무엇보다 더 의사가 필요합니다(루카 5,31). 도움을 받으면서도 바위 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일단 그러한 도움이 없어지면 발이 걸려 넘어질 뿐만 아니라 죽을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악령들의 힘 에 넘겨질 때, 악령들은 재빨리 덤벼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사실 은 그렇지 않더라도 합리적인 변명의 올가미로 우리를 집요하게 붙잡아 헤시키아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그럴듯하게 부추깁니다. 하지만 실제로 는 적의를 갖고 우리가 계속 넘어지고 상처를 입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로지 우리 의사께서 우리를 치료할 능력이 없다고 선언할 때에만 우 리는 다른 의사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사실 의사의 돌봄 없이 치료되는 사람들은 소수임을 생각합시다. 누가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 습니까? 평상시 노련한 항해사가 운전한 모든 배 역시 조난을 당하면, 그 항해사 없이는 반드시 길을 잃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 든 순종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아파테이아를 낳습니다. 다음과 같이 씌 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비천할 때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셨다. 우 43)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공동체와 함께 악령과 싸우셨고 사도들에게 그에 대한 사명을 주 셨다(마태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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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시편 136,23-24) 만일 그렇다면, 순종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아파테이아를 낳는다고 우리가 단언하는 것을 그 무엇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아파테이아는 순종의 딸인 겸손의 목적으로서 완전함을 향한 길입니다. 율법이 모세와 더불어 시작된 것처 럼 겸손은 순종과 더불어 시작합니다. 마리아가 회당을 완전하게 한 것 처럼 딸은 어머니를 완전하게 합니다.44) 영적 환자들은 하느님에게서 온 갖 처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 건강 때문에 어떤 의사 의 돌봄을 받고서 아직 완전하게 치유되기 전 그를 떠나 다른 의사의 돌 봄을 선택하는 사람들처럼 한다면 말입니다. 당신을 주님께 데려왔던 사 람의 손에서 달아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그에게 가졌던 그러한 공경심을 당신 삶에서 절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경험이 없는 평범한 병사가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 운 것처럼 내면의 욕정들과 싸움에 별로 훈련되지 않은 견습 수도승이 헤시키아로 건너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전자가 육체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면, 후자는 영혼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혼자보다는 둘이 낫습니다(코헬 4,9). 악한 성향들과 싸우 기 위해서 아들은 아버지와 결합하는 것이 좋으며, 둘은 성령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소경에게서 안내자를, 양떼에서 목자를, 여행자 에게서 마부를, 어린이에게서 그의 아버지를, 환자에게서 의사를, 배에 서 항해사를 빼앗는 사람은 양쪽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할 뿐입니다. 어 44) 마리아에 대한 유일한 언급으로, 마리아는 전체 교회에서 공경을 받았다. 특히 시나이에 서 테오토코스(Theotókos)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을 받았다. 초기 은수자들은 불타는 떨기나무 덤불 경당을 마리아에게 봉헌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세가 보았던 떨기나 무 덤불에서 마리아의 순결한 모성의 원형을 보았기 때문이다 (참조. E g e r i a , Pellegrinaggio in terra santa , trad. P. Siniscalco-L.Scarampi, Roma, 1985,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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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도움 없이 악한 영들과 싸우려는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장상들을 존경하고 형제들에게 겸손한 태도: PG 712B-713A] 35. 처음 의사에게 가는 사람은 병의 증세들을 그에게 드러냅니다. 순 종의 삶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온갖 겸손으로 자신을 개방합니다. 고통 의 완화는 전자에게는 건강회복의 표지인 반면, 점증하는 자기비판은 후자에게 건강회복의 표지입니다. 실제로 이보다 더 확실한 표지는 없습 니다. 당신 양심의 거울을 바라다보십시오.45) 만일 거기서 당신 순종을 반사하는 것을 본다면 다른 것을 찾지 마십시오. 헤시키아 중에 살면서 도 그들 사부에게 종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악령들만이 그들의 적대자입니다. 반면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은 악령들과 사람들 모두 와 싸웁니다. 즉, 전자는 늘 스승의 감독 하에 있기에 그의 명령을 매우 철저하게 준수하는 반면, 후자는 스승의 부재로 인해 자주 명령을 다소 소홀히 합니다. 게다가 부지런하고 노고를 피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이 들과 충돌로 어떤 과실을 범한다하더라도, 인내로 보상하면서 이중의 화관을 얻습니다. 여하튼 항상 경계하며 온갖 주의를 다 기울입시다. 배 로 가득한 항구는 무엇보다도 정신의 좀인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는 배 들을 쉽게 부딪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장상 앞에서 완전한 겸손과 침묵의 금욕을 실천합시다. 침묵하는 사람 은 철학의 아들로서 모든 면에서 인식을 얻기 때문입니다.46) 저는 침묵 하며 장상에게 순종한 어떤 사람을 지켜보았는데, 그의 순종이 겸손이 45) 참조. 카시아누스 담화집, 1,20; 1코린 11,28. 46) 영성적 의미로 인식과 학문은 단순하고 순수한 영혼의 경험과 윤리적 수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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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교만의 열매인 것을 보고서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가 어 떤 이득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완전하게 지배하며 깨어 있읍시다.47) 갑자기 공격당하지 않도록 경계합시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봉사를 기도 앞에 두어야 하는지 아는 데 주의합시다. 왜 냐하면 항상 모든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 당신 자신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루카 17,3; 1 티모 4,16).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도 그들보다 더 거룩하게 보이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아니꼬운 열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기분 상 하게 하고 온갖 행동에서 당신 안에 자만심을 자극하면서 두 가지 잘못 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태도와 말이나 신호로 그것을 외부 로 드러내지 말고 당신 영혼을 돌보십시오. 당신이 진정 이웃을 더 이상 경멸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행동하십시오. 반대로 다르게 기울어졌다고 느낀다면, 당신을 형제들과 같게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오로지 교만하지 않다는 점에서만 다르게 하십시오.48) 한번은 스승의 덕행들에 대해서 어떤 이들과 떠벌리곤 했던 경험 없는 한 제자를 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추수로 자신이 영예를 얻게 된다고 믿었지만 모두로부터 불명예 를 얻었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 다운 나무가 열매 없는 가지들을 가지고 있소?”

[어떤 경우에서도 모두에 대한 인내: PG 713A-716A] 36. 우리가 사부의 질책을 지극히 평화롭게 받아들일 때가 아니라 모 47) 참조. 2티모 4,5; 2코린 5,13; 1베드 5,8. 48) 참조. 마태 23장(바리사이들의 위선과 허영심을 거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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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사람으로부터의 모욕과 구타를 완전히 참아 받을 때, 우리는 참으로 인내하는 자들로 평가될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사부를 존경하고 그에 게 감사해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로부터 모욕도 기쁜 마음으로 마셔야 합니다. 마치 그것이 당신을 육욕에서 정화하기 위해 당신에게 건네진 생 명의 물(요한 4,10; 7,38)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그러한 경우에 바로 당신 은 순수함으로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순수함은 당신 마음 안에 하 느님의 빛을 깊이 퍼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형제들의 공 동체가 자기와 평화를 나눈다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자랑해선 안 됩니 다. 도둑은 항상 주변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말씀을 늘 기억하십시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우리는 죽음의 순 간에 우리 노고에 관한 참된 심판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도원은 지상의 천국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천사들이 거행하는 전례 에 우리 마음을 둡시다. 수도원이라는 이 하늘에서 이따금 누구는 마음 이 돌같이 무뎌지는 것(에제 11,19; 36,23)을 느낄 수 있고, 어떤 때는 거 기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통회로써 교만을 피하고 받아들인 노고에 대 한 위로를 받습니다. 작은 불이 많은 양의 밀랍을 녹입니다. 그렇듯 종종 우리가 우연히 당한 사소한 모욕은 즉시 마음의 모든 거칠음을 부드럽 게 하여 메마른 감각들에 달콤함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완고한 태 도를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언젠가 두 사람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들은 금욕가들의 눈물과 노고의 행위를 조사하기 위 하여 은밀히 숨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그들을 모방하기 위해서였 고, 반면 다른 사람은 그 거룩한 수행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그들의 수행 을 방해하기 위한 기회를 잡으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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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하게 침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당혹과 환멸을 자아내지 마십 시오. 서두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 행동과 진행을 늦추지 마십시오. 이는 모든 행동에서 미친 사람들이나 난폭한 사람들보다 실제로 더 나 쁘게 행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욥이 말하는 바와 같이(욥 13,1), 저는 그들의 천성에 따라 그렇게 습관적으로 더디게 행동했던 어떤 사람들 안 에서 자주 그와 같은 행동들을 보았습니다. 다른 때는 어떤 다른 사람들 에게서 마음의 통회를 경험하려는 열성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 다. 저는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악에 물드는 것을 보고 놀라기를 멈추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사람은 시편을 노래하기보다 시편을 암송(기도)함으로써 더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시편을 노 래하다보면 목소리들이 섞이지 않고 말마디들도 그 의미를 잃게 됩니다. 마음으로 부단히 기도하며, 산만해지기 쉬운 정신을 집중하며 그렇게 싸 우십시오. 하느님은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 분심의 방해와 싸우는 기 도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에 만일 당신이 방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낙담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항상 당신 정신을 다시 집중하십시오. 숨을 다할 때까지 항상 싸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엄청난 죽음을 치르더라도 육체적, 영적 싸움에서 절대 이탈하 지 않고 우리가 언급했던 유혹들을 쉽게 극복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살 고 있는 장소에 대해 늘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의 불안49)이라는 유혹을 극복할 것입니다. 그러한 불안은 항상 심각한 피해를 일으키며 반드시 증가할 것입니다.

49) 불안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의 감정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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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으로 이전하는 자의 불안정을 거슬러: PG 716A-716B] 37. 장소를 쉽게 바꾸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비난받을 만합니다. 장 소의 불안정보다 선업의 완수를 더욱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 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전에 전혀 몰랐던 병원에 의사를 보러 왔다면, 서두르지 말고 거기서 얼마나 경험을 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나그네처럼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그곳의 의사들과 봉사자들이 당신의 질병, 특히 영혼의 종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 이것이 당신이 찾았던 치료입니다. - 즉시 거기로 들어가 봉사의 계약서에 순종 으로 서명하면서 매우 비싼 가격으로 겸손을 사십시오. 천사들 앞에서 약속하고 그 답례로 당신 의지를 자유롭게 표명하는 증명서를 완전히 찢 으십시오. 당신의 불안정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속량하셨던 그 값을 무 가치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 당신이 매장될 때 까지 당신의 무덤이 되게 하십시오. 실제로 마지막 부활 때까지 무덤을 떠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은 수도원을 떠나는 것에 매우 주의해 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떠나 멸망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운 명에 처하지 않도록 주님께 간청합시다.

[찌꺼기, 게으름과 탐식, 허튼소리와 경솔로부터 순은과 같은 순종: PG 716C-717B] 38. 열정의 상실로 순종을 버겁게 느끼는 사람은 기도의 우선권이라 는 핑계에 의지합니다. 만일 반대로 그것을 버겁게 느끼지 않으면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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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불에서 피하듯 기도에서 달아납니다. 그래서 어떤 직책을 받은 사람 이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또는 무기력 때문에, 어떤 때는 허영심 때 문에 그리고 때로는 거짓 열정 때문에, 자기에게 그것을 요청한 다른 형 제에게 그 직책을 넘겨주는 일이 있습니다. 게다가 만일 당신이 수도서원 에 묶인 후 거기서 당신 영혼을 위한 유익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경우, 그것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한 장소에서 훌륭히 인내하 는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봉사가 다른 장소를 위해 한 장소를 포기하도록 이끄는 것처 럼, 수도공동체들 안에서 탐식은 특히 잘못에 떨어지도록 이끕니다. 일 단 당신이 탐식의 압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모든 자리가 당신에게 아파테이아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탐식이 당신을 지배하는 한, 당신은 모든 곳에서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맞게 되는 온갖 불행의 경우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스승이 덕행으로 빛난다면, 신적인 빛이 순 종하며 사는 사람의 눈을 비출 것입니다. 반대로 스승이 덕행이 부족하 다면 그의 눈을 어둡게 할 것입니다. 선을 미워하는 자는 빛의 반대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완전한 순종의 표상은 순은입 니다. 순은은 어떤 다른 종류의 물질들과 뒤섞인 후에도 그것들의 온갖 찌꺼기에서 항상 순수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열심한 사람들은 나태한 이들을 판단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들에게 더 무거울지 모르는 단죄를 받지 않기 위하여 주의합니다. 롯이 자기 동향인들을 공개적으로 단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로운 이 로 인정받았다고 믿습니다(창세 19장). 특별히 우리가 찬미가를 부를 때 동요되지 않고 고요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악령들은 동요를 통하여 기도 를 망치려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몸으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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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서서 우리 봉사를 완수하는 동안에도 하늘을 두드리면서 정신 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도록 합시다. 순종하며 사는 영혼에게는 심한 모 욕이나 무시는 쓴 술 맛과 같을 것입니다. 반대로 찬양과 영예와 칭송은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으러 가는 꿀의 달콤함과 같을 것입니다. 사물의 다양한 본성을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쓴 것들은 온갖 물질적 불 순함에서 우리를 정화화고, 달콤한 것들은 담즙을 증가시키기 때문입니 다. 하지만 주님 안에 우리를 인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에게 온전히 우 리를 맡깁시다. 비록 그들이 우리 구원을 위해 투여하는 약들이 건강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때 권위에 대한 우리 신뢰 가 겸손의 용광로 안에서처럼 검증되기 때문입니다. 이 도가니에서 우리 는 우리 신앙의 높은 차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처방한 약 들이 우리가 바랐던 것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 게 될 것입니다.

[진실하고 충실한 순종: PG 717B-720A] 39.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순종에서 겸손이 나오고, 겸손에서 분 별이 나옵니다. 위대한 카시아누스는 이 주제에 관한 자신의 작품에서 참으로 탁월한 방법으로 그리고 매우 정확하게 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 다. 그는 어떻게 분별에서 분명한 지각이 나오고, 이 지각에서 선견이 나 오는지 명시하고 있습니다.50)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 위대한 덕행을 위 해 마련해 두신 선들을 도착점에서 보면서 이 순종의 경기장에서 달려가 50) “참된 분별은 오직 참된 겸손으로 얻게 된다.”(카시아누스, 담화집, 2,10); 참조. 카시아누 스, 담화집, 4,9;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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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시편저자가 다음과 같이 노래 하는 바와 같습니다. “내 하느님, 당신 선으로 가련하고 순종하는 당신 종의 마음 안에 당신 현존을 준비하기를 원하셨습니다.”(시편 68,11) 당 신 삶에서, 18년 동안 육체의 귀로 자기에게 “구원되기를!”이라고 말했던 장상의 목소리 외에 전혀 그 어떤 소리도 듣지 않았던 그 위대한 운동선 수의 모범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그는 마음의 귀로 매일 “너는 구원되었 다.”라고 그를 안심시켜 준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말은 “구원되 기를!”과 같이 기원을 비는 불확실한 표현이 아니라 이미 결정적이고 확 실한 사실을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때때로 장상이 융통성 있고 관대하다는 것 을 알아차리고서 그가 자신들의 뜻에 따라주기를 강하게 요청합니다. 그 들은 자기 뜻에 굴복하면서, 서약한 포기로써 얻고자 했던 승리의 월계 관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은 자기 욕망을 만족하려는 위선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에 관한 어떤 다른 주제들 의 경우는 다릅니다. 장상이 예정한 목적들과 반대되기 때문에 결국 장 상이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리고 주어진 명령 수행을 중단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을 깨닫고 절대적으로 확신 한다 하더라도 명령을 계속 이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51) 악마는 자기 자신의 뜻을 거슬러 행동할 수 없습니다. 홀로든 공동체 안에서든 게으 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것을 납득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장 소를 옮기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거기서 우리 삶이 하느님을 기 51) 크레타의 엘리야에게 있어, 만일 첫 번째 행위가 식별에 훈련된 수도승의 행위이고, 두 번 째 행위는 보다 확실한 맹목적 순종이 필요한 초심자의 행위라면, 두 행위 모두 칭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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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게 해드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를 거스른 싸움은 우리가 싸움 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인내하는 순종의 모범, 아카치우스: PG 720A-721A] 40. 저는 여러분에게 털어놓아야 마땅한 한 사건에 대해 침묵하지 않 을 것입니다. 부당한 은폐나 편협한 인색으로 저를 더럽히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바의 요한52)이 제게 그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인 당신 역시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아파테이아의 영웅이 온갖 위선을 넘어 말과 행동에서 진실했다는 것을 압니다. 자, 이것이 그가 저에게 이 야기했던 바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제 수도원에 - 거기서 온 그 성인이 말했습니다. - 매우 태 만하고 무질서한 원로 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를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 니라 오직 진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저는 그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인 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기보다 더 젊은 한 형제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아 카치우스라는 이름을 지닌 그 형제는 단순한 감성을 지녔고 말하는 데 있 어 신중했습니다. 이 형제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엄청난 학대를 원로로부터 견디어야 했습니다. 원로가 박해와 모욕 으로뿐만 아니라 매일의 구타로 그를 힘들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 52) 사바는 대(大) 라우라의 창설자로서 532년에 사망했다. 성지들을 순례하려는 갈망에 사 로잡힌 그는 수도승적 이상에 매혹되었다. 5년 동안 은수생활을 한 후 팔레스티나에 수 도원들과 라우라들을 설립했다. 헤시카스트 요한 혹은 사바의 요한은 아르메니아 니콜폴 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교였고 후에 성 사바 수도원 혹은 대(大) 라우라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556년 10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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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는 다음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바처럼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마치 시장에서 산 노예처럼 매일 극단적으로 학대당한 그를 보면 서 그를 만날 때마다 자주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카치우스 형제, 잘 되어 갑니까? 오늘은 어떻습니까?” 그러면 그는 때론 멍든 눈을, 때론 상처 난 목이나 머리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의 종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매우 좋습니 다. 항상 견디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이에 대해 당신에게 상급을 주 실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그 무자비한 원로 밑에서 9년을 보내고 그렇 게 주님께 갔습니다. 그의 육신은 사부들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닷새 후에야 아카치우스의 장상은 거기 살았던 원로들 중 한 사람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사부, 아카치우스 형제가 죽었소.”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원로는 소식을 전한 원로에게 말했습니다. “원로, 확신하건대, 나는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소.” 그러자 다른 원로가 응수했습니다. “와서 보 시오.” 그 원로는 즉시 일어나 복된 금욕가의 장상과 함께 공동묘지로 갔 습니다. 원로는 죽었지만 실제로 살아 있던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 습니다. 마치 그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소리쳤습니다. “아카치우스 형제, 당신 죽었소?” 그 순종의 고귀한 모델은 죽은 후에도 순종하며 그 원로에게 대답했습 니다. “사부님, 항상 순종으로 봉사했던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겠습니 까?” 그러자 그의 장상이었던 원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앞에서 울며 쓰러졌습니다. 후에 아카치우스의 사부는 아빠스에게 무덤 옆 라우라53) 의 독방 하나를 청하여 거기서 여생을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교부들 53) 라우라는 은수자들의 느슨한 공동체(cenobium )이다. 하지만 이 라우라는 아빠스(higoumenos)의 권위 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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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내가 살인을 범했습니다.”라고 끊임없이 반복했습니다.

요한 신부님, 제 생각엔 그 망자에게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 그 위대한 요한 자신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기 이야기를 그 거룩한 인물에 게 돌리면서 마치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처럼 제게 말했습니다. 후에 저는 정말 그였다고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안티오쿠스 혹은 요한의 모범: PG 721A-721D] 41. 여기 또 사바의 요한이 저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시아54)에 있는 같은 수도원의 또 다른 수도승이 있었는데, 그는 반 대로 온화하고 자비로운 한 수도승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사부가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 그는 잘 생 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에게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자 기를 떠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원로에게는 또 다른 제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간청이 그에게는 전혀 곤혹스럽지는 않았 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에게 폰투스55)의 수도원들 중 한 곳을 위한 추 천서를 주면서 제자를 떠나게 했습니다. 그 수도승은 자기 장상을 떠나

54) 소아시아 교구는 엘레스폰투스(Elespontus), 프리지아, 피시디아, 리카오니아, 리디아의 주들과 실제로 말하는 아시아의 주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55) 폰투스 교구는 비티니아, 갈라찌아, 파플라고니아, 캅파도키아 I, 캅파도키아 II, 엘레노폰 투스, 폰투스 폴레모니아쿠스, 아르메니아 I과 아르메니아 II(4세기 말에)를 포함하고 있 었다. 소아시아 북부 지역인 폰투스는 유명한 그리스로마 왕국이었다. 폰투스는 처음부 터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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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도원에 도착하여 첫날 밤 꿈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들의 시험에 처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셈을 한 후 자신을 황금 백 파운드(대략 45.36 킬로그램)에 대해 지불불능의 채무자로 선언했습 니다.56) 그가 깨어났을 때 그 꿈을 해석하려 애쓰면서 말했습니다. “가 련한 안티오쿠스 - 이것이 그의 이름이었습니다. - 참으로 우리에게는 지 불해야 할 막대한 빚이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모욕과 고통을 당하며 맹목적 순종으로 3년 동안 그 수도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마치 그곳 수도승들과 아무 관 계가 없는 이방인과도 같았습니다. 그때 그는 또 다른 꿈에서 10파운드 빚의 탕감을 그에게 증언해 준 사람을 봅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제가 깨어났을 때 저는 제가 보았던 바를 이해하였고 속 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10파운드를 지불했는데, 언제 빚을 다 지불하겠는가?’ 제 스스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여운 안티오 쿠스, 더 많은 고통과 모욕이 필요하다.’ 그 순간부터 내내 비록 제 모든 임무를 완수하며 계속해서 수고했다 하더라도 마치 바보57)처럼 대응했 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도 제가 열성 있는 것을 본 사부들은 매정하게 수도원의 더욱 비천한 온갖 일을 제게 부과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다시 13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꿈에서 이전에 보았던 징수원들이 빚에 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증서를 제게 보여주기 위해 돌아오는 것을 보았 습니다. 사실 저는 수도원에서 저에게 일어났던 온갖 고뇌를 관대하게

56) 고대인들에게 꿈은 신들의 계시처럼 간주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교의 점을 반대했지 만, 성경에는 많은 해몽가들이 있었다. 쉬토폴리의 키릴로스는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꿈에 대한 해석은 영의 식별의 일부를 이루었다. 57)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말 살로스(Salós)는 겸손을 사랑하는 수도승을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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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었습니다. 제 빚에 대한 생각을 늘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 친애하는 요한 신부님, 이것이 지극히 지혜로운 요한이 자기가 경 험했던 바를 안티오쿠스란 인물에게 돌리면서 제게 이야기했던 바입니 다. 인내로써 자기 빚 문서를 참으로 관대하게 찢어버린 것은 바로 그였 습니다(콜로 2,14).

[겸손과 온유, 항구함과 깨어 있음의 스승 요한: PG 724A-725A] 42. 이제 완전한 순종 안에서 경청이 어떻게 그를 분별의 성인이 되게 했는지 들어보십시오. 이 사람이 성 사바 수도원에 살았을 때, 그의 제자 가 되려고 했던 세 젊은 수도승들이 그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들을 환대하여 맞아들였고 여행의 피로에서 원기를 회복시키려 노력 했습니다. 하지만 3일 후 원로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 의 자연적인 남색(男色) 경향으로 인해 여러분 중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 소.” 그러나 그들은 그가 바로 하느님의 종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간청하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어떤 식 으로도 그를 설득하지 못하자 그 앞에 부복하여 그곳 어디에서라도 그 의 규칙에 따라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그 원로는 양보했 습니다. 그는 그들이 겸손하게 자기 말을 경청하리라는 것을 알고 세 사 람 중 하나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이여, 주님은 당신이 한 영적 사부 밑 에 종속되어 고독한 생활을 하러 가기를 원하시오.” 반대로 두 번째 사 람에게는 “가시오, 당신 뜻을 하느님의 손에 내어맡기고 형제들의 수도 원 공동체에 정주하여 살면서 그분의 십자가를 지시오(마태 10,38).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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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하늘나라에서 확실히 보화를 얻을 것이오(마태 19,21).” 그런 다음 그 는 세 번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 이다.’(마태 10,22)라고 말하는 거룩한 말씀을 당신 영과 분리할 수 없는 동반자처럼 달고 다니시오. 그러므로 가시오, 만일 당신에게 가능하다 면, 비록 사부가 그리스도 안의 영적 안내자에게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질책에 있어 매우 가혹하고 엄격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절 대 그를 떠나지 마십시오. 매일 모욕과 멸시를 마치 꿀과 우유처럼 즐겨 마시십시오.” 여기서 그 형제는 위대한 요한에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사부님, 그런 사람이 태만하여 자기 의무를 지키지 않을 경우에도 말입 니까?” 그러자 원로가 말했습니다. “비록 그가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을 보더라도 절대 그를 떠나지 말고, 당신 자신에게 ‘친구,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가?’라고 반복하시오. 그러면 당신에게서 부푸는 교만과 타락시키는 불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적어도 진실로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얻고자 하는 우리는 덕행의 경기 장에 악의와 악행, 폭력과 비열한 행위, 원한과 분노를 가져오지 않고 오 히려 그 반대의 덕들을 가져오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 싸우도록 합시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놀라울 수 없습니다. 사실 인간 이 삶의 바다나 땅에서 홀로 어부나 농사꾼으로 일하는 한, 그의 왕을 거스르는 적들은 그를 대항해 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적들이 그가 왕의 휘장을 받고 방패와 창과 검으로 무장하고 군복을 입는 것을 보면, 이빨을 밖으로 드러내며 그를 완전하게 처치할 순간이 왔다고 생 각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졸음에 빠질 수 없습니다. 저는 부드럽고 훌륭한 어린아이들이 뭔가 유익한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지혜와 교양을 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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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오지만, 다른 이들과 대화를 통해 아주 다른 교육을 받으면서 폭 력과 부정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명한 사 람은 이해할 것입니다. 게다가 어떤 예술을 배우는 데 전념하는 사람이 나날이 거기에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어 떤 사람들만이 그 진보에 대해서 알 뿐 다른 사람들은 섭리에 의해 그것 을 모릅니다. 만일 은행가가 매일 저녁 그날의 손익계산을 한다면 그는 참으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매 시간 하는 바를 장부에 기록해 두지 않으면 전체를 잘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루 전체의 계산 을 밝혀주는 것은 그 부분적인 기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수도승이 질책과 책벌을 받는 것을 걱정하여 반박하는 것이 자 기에게 좋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공격자에게 즉시 용서를 청하는 데 있어 겸손 때문이 아니라 그 잘못에서 벗어나 오로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할 경우 그는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을 공격한 사람 앞에 침묵하십시오.58) 오히려 정신을 태워서 순수하게 비추는 달군 쇠 처럼 그 공격을 받아들이십시오. 오직 의사가 그러한 도구로 당신을 다 치료했을 때 그에게 용서를 청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가 화나 있을 때 당 신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58) 이것은 교부들이 매우 강조한 복음적 원칙이다. 즉 폭력이나 법정에 상소함으로써 응답 하지 말라는 의무이다(마태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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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처를 위해 수도원을 떠나게 하는 것은 악령이다: PG 725B725D] 43. 특별히 공동생활을 하는 우리는 아마도 공동체 생활 자체에서 오 는 다음의 슬퍼하는 욕정들을 거슬러 항상 싸워야 합니다. 즉, 한편으론 배의 고유한 욕구들을 만족하려는 무절제한 갈망과 다른 한편으론 온 갖 우울증에 쉬운 돌파구를 부여하려는 충동입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 로 악마는 또한 불가능한 덕행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켜 순종하며 사 는 사람을 유혹하듯이, 불합리한 제안들로써 고독한 생활을 하는 사람 을 유혹합니다. 만일 당신이 순종하며 사는 경험 없는 초심자들의 생각 을 살펴본다면, 양립 불가능한 생각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과 중단 없는 기도, 헛된 영광의 제거, 죽음에 대한 항구한 기억, 지 속적인 눈물의 통회, 분노에서 보다 완전한 자유, 마음의 깊은 침묵, 사람 들을 위한 불가능한 애덕과 같은 이상적인 금욕적 수행들을 갈망합니 다. 그러나 공동생활 초기에 하느님의 섭리는 그들에게 이러한 갈망들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속아 금방 되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 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원수는 확실히 그들이 그 이상들을 성 급히 추구하도록 부추기는데, 이는 그들이 수도원에서 실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게다가 그 악한 사기꾼은 순종하며 사는 사람의 환대, 형제들을 향한 그들의 사랑, 그들의 지속적인 대화와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봉사를 치 켜세우면서 독수도승들을 유혹합니다. 이는 그들 모두에게서 인내를 꺾 으려는 목적입니다. 고독 속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이것은 정말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노고가 하느님에 의해 용기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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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받고 그들의 싸움에서 그분의 도우심을 받은 사람들만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욕정들과 순종의 본성을 식별하도록 합시다. 그러한 식별을 통해 우리의 지도자를 선택하도록 합시다. 만일 음욕이 당신의 문제라면, 누 구든 환대하고 모든 이에게 식탁을 준비해 주는 기적행위자보다는 오히 려 음식 규제에 엄격한 안내자를 영적 운동경기의 개인교사로 선택하십 시오. 만일 당신 안에서 교만한 근성을 본다면, 인정 많고 이해심 있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거칠고 완고한 사람을 선택하십시오. 우리는 아직 우 리를 알기 전에 판단하는, 예측에 있어 오만한 의사를59) 찾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도 더 겸손하고 참으로 성격과 습관에 있 어 우리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야 합니다.

[만일 반응해야 한다면 장상을 공격하지 말라: PG 725D-728A] 44.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그 거룩한 사람 압바치루스60)를 모범으로 삼으십시오. 그 수도승처럼 장상이 마치 당신 옆에서 보고 있듯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 좋은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렇게 장상이 항상 있는 것처 럼 생각하면 당신은 절대로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끊임없는 장상의 질책 앞에서 오히려 그에 대한 큰 믿음과 사랑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당신 영혼 안에 보이지 않게 거처를 취하셨 고(로마 8,11), 지극히 높으신 분의 권능이 당신을 덮었음(루카 1,35)을 의 59) 의사는 단지 하느님의 중개자일 뿐이므로 머리를 치켜들고 무분별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 다(집회 38,1-4). 60) 참조. 요한 클리마쿠스, 『천국의 사다리』,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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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모욕과 경멸을 관대하게 견디는 기쁨 외에 다른 어떤 기쁨도 맛보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를 자극하여 그의 마음 안에 폭력과 화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당신을 거 슬러 울어야 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바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제 편에는 모 세가 있기 때문입니다(민수 16장). 결국 우리 사부를 거슬러 불충실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소홀히 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화나게 해드릴 때, 우리 영적 안내자는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영적 사부가 화나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하느님의 자비 를 빌어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 두 과실이 똑같이 단죄받을 만 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분별과 절제로 그 사실들을 검토해 봅시다. 어 떤 때는 우리를 질책하는 장상에게서 보상을 받은 것처럼 조용히 머물 러 있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다른 때는 매우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우 리에게 좋을 것입니다. 즉, 첫 번째 경우로서 만일 우리가 무엇보다도 모 욕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 침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 기서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경우, 즉 모욕이 다른 사 람들을 다치게 할 때는 애덕과 평화의 유대를 위해 방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유대가 깨질 것입니다.

[고독으로 나아가는 것을 서두르지 말라: PG 728B-728D] 45. 순종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순종이 얼마나 유익한지 우리에게 말해 줄 것입니다. 사실상 그런 다음에야 그들은 처음에 그들이 있었던 천국 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때 거룩한 무욕정으로 인도하는 길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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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를 인정하면서 우리는 모욕을 받지 않은 날을 큰 손실로 여길 것입니 다.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영의 확고한 힘을 얻습니다. 마치 바람에 강 하게 흔들린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고독 중 에 사는 수도승이 자신의 약함과 눈멂을 인정하면서 순종의 길로 들어선 다면, 그 역시 어려움 없이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다시 한 번 더 말합니다. 경주를 포기하지 않는 운동선수 들처럼 굳건하고 확고하게 머무르십시오.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 는 현자의 목소리를 경청하십시오. “금을 용광로에서 제련하시는 주님 (지혜 3,6; 1베드 1,7)은 당신 가슴에 받아들일 번제물(민수 15,24)처럼 여러분을 환영하시며 여러분이 수도원에 머무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 셨습니다.” 시작도 없으신 성부와 같은 흠숭을 받으실 성령과 더불어 그 분께 영광과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묵시 1,6). 자, 이것이 복음사가들 중 넷째와도 같은 네 번째 단계입니다. 여기서 운동선수는 두려움 없이 경주에 임합니다. 마치 요한이 베드로에 앞서 달려갔던 것처럼 말입니다(요한 20,4). 그 순서는 이제 순종 뒤에 참회가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을 받아들인 사람은 참회의 상징으로 세 워진 사람을 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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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강론 Ⅰ 이니의 구에릭 아빠스 장 연옥 젬마 역

편집자 서론 이니(Igny)의 구에릭(Guerric 또는 Werricho) 아빠스는 클레르보 (Clairvaux)의 베르나르도, 생티에리(Saint Thierry)의 윌리엄, 리보 (Rievaulx)의 엘레드(Aelred)와 함께 ‘시토의 네 복음사가’로 불린다. 이 네 분은 12세기 시토회 영성의 기초를 놓았다. 구에릭은 1070-1080년 사 이에, 현재 벨기에의 투르내(Tournai)에서 태어났다. 그는 투르내 대성당 의 의전사제(canonicus)와 대성당 소속 학교의 교수로 활약하였다. 그는 고독 속에서 기도 생활에 열중하기 위하여 한동안 대성당 근처 은둔처 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123-1124년경 유명한 젊은 아빠스 베르 나르도가 있는 클레르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베르나르도는 그를 붙 들고 수도승이 될 것을 권했다. 그래서 스승은 다시 제자가 되었다. 그는 베르나르도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1138년,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몸도 약했지만 이니의 제2대 아빠스가 되었다. 성서와 교부들의 신학을 깊이 알았기 때문에 아빠스로서 수하 수도승들의 훌륭한 스승이 되었 다. 시토회 아빠스들은 한 해에 적어도 15회 정도 수도공동체를 위한 강 론을 해야 했다. 그의 강론 가운데 54개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지 고 있다. 구에릭은 형제들에게 모국어로 한 강론을 점차 아름다운 라틴 어 문학 작품으로 편집한 것 같다. 구에릭은 1157년에 선종하였다.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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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그의 겸손하고 정열적인 성격과 신구약 성경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능력을 잘 엿볼 수 있다.

본문 예수님을 배고파하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 말 을 듣자 야곱은 제 정신이 들어 말하였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니 … 죽기 전에 가서 그 애를 봐야지.’”(창세 45,25-28) 지금 이 말을 들은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다 좋은데, 요셉이 오늘 이 축일의 기쁨,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과 무슨 연관이 있 소? 오늘은 부활인데, 당신은 사순절 음식을 우리에게 차려주는 것이 오? 우리 영혼은 과월절 어린양을 먹고 싶어하고, 오랜 단식으로 이 날 을 준비하며 기다렸는데! 예수님을 향한 연민으로 우리 마음은 불타고 있소(루카 24,32). 우리가 아직 그분을 뵈올 수 없고, 그분에 대해서 들을 자격이 없을지 모르나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있다. 우리가 배고파 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요셉이 아니다. 구세주이지 꿈쟁이가 아니다. 하늘 을 지배하는 분이지 이집트를 지배하는 지배자는 아니다. 배만 채워주 는(pavit ventres) 분이 아니라, 영혼을 채워주시는(pascit mentes) 분, 그 러나 굶주린 영혼만을 채워주시는 분! 적어도 당신의 설교는 우리가 갖 고 싶어하는 분, 그리워하는 분을 더욱더 그리워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소?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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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강론 Ⅰ

(마태 5,6)라는 말씀을 우리는 읽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더 큰 배 고픔을 느낀다. 어떤 사람이 잔칫상을 자랑한다면, 듣는 사람의 배고픔 은 더 커지기 마련이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때, 정말로 이 경청 은 우리의 ‘기쁨이자 즐거움이며 우리의 바숴진 뼈들은 춤출 것이다.’(시 편 50,10) 우리 뼈들은 사순시기의 보속과 슬픔으로 바숴졌고 무엇보다 도 그분의 고통으로 아파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분 부활의 기쁜 소식이 귀에 들리면, 기뻐 용약할 것이다. 그런데 왜 당신은 계속 우리에게 요셉 을 먹으라고 강요하오? 우리는 지금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예 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맛들일 수 없다. 더군다나 ‘우리의 해방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로 봉헌되시어’(1코린 5,7) 파스카 어린양 을 먹는 오늘은 …….”

요셉은 예수님의 표상 형제들이여, 제가 여러분 앞에 차려놓은 것은 달걀이나 호두 같은 것입 니다. 껍질을 벗기십시오, 여러분은 그 안에서 먹을 알맹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배고파하는 과월 절 양이신 예수님을 찾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깊이 숨어 있는 것일수록, 찾는 데 많은 노고와 섬세함이 요구될수록 그 맛은 더할 것입 니다. 요셉이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저에게 묻습니까? 제가 여 러분 앞에 내놓은 이야기가 오늘 이 축일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묻습 니까? 물론 어느 모로 보나 연관이 많습니다(로마 3,2). 이 설화를 여러분 의 기억에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러면 그 신비가 얼마나 큰 자비를 품 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전제조건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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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역자로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부 활하신 오늘,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문자”(1코린 3,6)에 대해 서 말씀하시고 성서를 풀이해 주십니다(루카 24,32). 만일 그렇다면 선조 들이나 예언자들 중에 누가 요셉보다 더 구세주의 모습을 분명하고 탁월 하게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라, 그러 면 그는 더욱 슬기로워질 것이다.”(잠언 9,9)라는 말씀대로 저도 그 사실 을 짧게 요약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신앙과 경건한 마음으로 요셉 의 이름을 묵상해 봅시다(창세 30,24). 그리고 그가 형제들보다 훨씬 깨 끗하고 잘생긴 사나이였고(창세 39,6) 그의 행동에는 결함이 없었으며 영 리했고 형제들로부터 팔아넘겨졌으나 그것은 그들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그리고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했으나 복귀되어 지배 자의 신분에까지 들어 높여져 영예를 누렸고 최종적으로 그의 공적을 치 하하는 의미에서 “세상의 구원자”라는 칭호까지 받았다는 것(창세 41,45), 이 모든 일을 신앙과 경건한 마음으로 생각해 본다면, “예언자들 을 통하여 나는 비유로 나타났다.”(호세 12,10 라틴어역)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합당한지,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을 야곱과 비교함 위에 언급한 것을 되돌아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고, 율법서와 예언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분명히 증명해 주고 있음에 기쁨과 경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로마 3,21).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신약의 신비를 너무 도 명확하게 말해주기 때문에 예언서를 들을 때, 이름이 다른 것뿐이지 복음을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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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야곱에게 아뢰었다, 요셉이 살아 있습니다.”(창세 45,26) 이 말 씀에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알려 주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다.”라는 말씀으로밖에 어떻게 달리 제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설명이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후손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모되는 모습, 말하자면 활동적인 싸움을 통해서 관조와 정적의 삶인 관상에로 넘어가는 것을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창세 32,23-28), 야곱이 육(肉)으로 이스라엘인(창세 35,11) 의 아버지인 것처럼, 그들은 참 이스라엘인, 즉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이 요셉의 죽음을 생각하며 실의에 빠져 슬퍼했던 것처럼, 그들도 자기들의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슬퍼했습니다. 그 분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주 어렵게, 서서히 그것을 믿었습니 다. 그러나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 이 컸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지금도 살아 있다고 야곱에게 아뢰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다만 어리둥절하여 그 말을 곧이들을 수 없었다.”(창세 45,26) 이 말 은 복음에 나오는 다음 말씀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가서 - 틀림없 이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말인데 - 예수와 함께 지냈던 이들에게 소식 을 알렸다. 그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살아 계시며 그에 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 그들이 돌 아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013) 루카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 자와 그밖에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모두 알렸다. … 그러나 사도들은 그 말 이 헛소리처럼 여겨져서 믿지 않았다.”(루카 24,9.11) 아마도 그들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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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지친 나머지 깊은 잠과 어리둥절함에서 막 깨어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한 말을 다 전해 듣고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 낸 것(마차)들을 모두 보자, 아버지 야곱은 제 정신이 들었다. 그는 ‘내 아 들 요셉이 살아 있다니, 이제 여한이 없구나!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 애 를 봐야겠다.’라고 하였다.”(창세 45,27-28) 사도들도 이와 똑같았습니다. 선물1)을 받기 전까지는 어떤 말도 그들을 깨닫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께서 직접 그들 앞에 나타나셨으나, 그들에게 선물을 불어넣어 주시기 전 까지는 자신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으로는 아무 확신도 주지 못했습니다.

성령을 받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셨다.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 았다.”(요한 20,26; 루카 24,36-3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께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23) 하고 말씀 하실 때나, 하늘로부터 같은 성령을 다른 은사와 함께 보내시자, 이 선물 들이야말로 그분이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 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증언하다 성인들의 마음과 입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진리요 부활이요 생명이

1) 선물이란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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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강론 Ⅰ

심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1요한 5,6). 사도들 역시 살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아직 의심했지만, 생명을 주 시는 성령을 맛본 후에야, “큰 능력으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였습 니다.”(사도 4,33) 그러므로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보다 마음 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육체의 외적 감 각보다 얼마나 더 힘 있게 내적 인간의 감각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지 요! 증언을 하시는 분이나 증언을 받으시는 분이 같은 한 성령이시니, 거 기에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요한 5,6-10). 그리고 유일한 성령 이시기 때문에 오로지 유일한 뜻과 완전한 통합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 그들의 생명 이 사건은 우리가 야곱에게서 읽은 사실 그대로입니다. 실의에 빠져 있 고, 실망과 좌절로 거의 매장되었던 그들의 정신이 되돌아왔습니다. 그렇 다면 아마 사도들 각자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나의 예수님이 살아 계시니, 이제 여한이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 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되기 때문에!’(필리 1,21) 그러니 이제 예 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가서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절하겠습니다(마태 28,16). 그 다음에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 고’(요한 6,40), ‘죽더라도 살게 되겠기 때문입니다.’(요한 11,25)”


이니의 구에릭 아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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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 나의 형제들이여, 그렇다면 여러분 마음의 기쁨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서 여러분에게 입증해 준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 니다. 여러분도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만,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이 살아 계시든지 돌아가셨든지 부활하셨든지 그분을 정말 사랑했다면, 그분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온 교회와 온통 일치하여 울려 퍼지는 것을 듣는 이 날, 여러분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용약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 니다. “예수님, 나의 하느님께서 살아계신다고 사람들이 나에게 전해 주 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피로에 지쳐 잠 속에 빠졌고 핍진하여 병들고 좌절로 의기소침해졌던 나의 영은 제 정신을 되찾게 되었다!” 왜냐하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렁찬 소리는 죄 속에 깊이 매장된 죽은 사람까지 도 제정신이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저승에 가셨다 돌아오실 때 우리를 그곳에 버려두고 데려 내오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절망과 망각 속에 매장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니 여한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당신 의 영은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 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나의 모든 것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벗이 품은 사랑은 얼마나 순수하며 그 목소리는 얼마나 충실 하고 우정에 잘 어울리는 말입니까! 그분이 살아계시면, 나도 살아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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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강론 Ⅰ

니다. 내 영혼은 그분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내 삶의 전부이며, 그분은 나의 충만함이십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데, 내 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그 이상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져 도 좋습니다. 예수님만 살아 계시면, 그 이상 아무것도 나에게 중요한 것 은 없습니다. 만일 그분 마음에 드시는 일이라면 내 자신마저 없어져도 좋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신 것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비록 그분이 자 신만을 위해서 사신다 하더라도! 이렇게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인간 의 모든 정서를 차지하여,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일 외에는 어떤 감정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 안에 사랑이 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게는 가난도 짐이 되지 않고, 상처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으며, 멸시도 상 처가 되지 않고, 불행도 경시되어 죽는 것도 이득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필립 1,21). 그보다 더할 것입니다. 그는 죽으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오 히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리라는 것을 알고 믿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죽기 전에 가서 그분을 뵈어야지!”(창세 45,28)

완전함에로 건너가는 도상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아직 그 정도로 마음의 순결함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더라도 길을 떠납시다! 갑시다, 가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갈릴래아의 거룩한 산에서 예수님을 만납시다! 가는 도중에 사랑은 자 랄 것이고, 우리가 도착하면 드디어 그것도 완전함에 도달하겠지요. 가 다보면 처음에 좁고 힘들었던 길도 넓어질 것이고, 약한 이들의 힘도 커 지겠지요. 야곱뿐만 아니라 야곱의 가문에서 그 누구도 길을 떠나지 못


이니의 구에릭 아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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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겠다는 핑계를 대지 않도록 가난한 노인에게 다른 선물과 함께 먹을 것과 마차까지 보내왔으니, 아무도 가난과 약함을 구실로 삼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노자이고, 그분의 영은 마차입니 다. 그분 자신이 양식이고 그분 자신이 병거이며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기 병이십니다(2열왕 2,12). 당신이 도착하기만 하면 모든 보화는 당신의 것 입니다. 이집트의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입니다. 그 나라의 가장 좋은 자 리를 당신의 요셉이 당신을 위해 준비해 놓았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옛날에 천사들과 여인들과 사도들을 보내신 분께서 지금은 친히 천국에 서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보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죽었고, 죽은 줄 알 고 사흘 동안 너희가 슬퍼했던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다.”(묵시 1,18)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고생 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살아 계시고 다스 리시는 그곳으로 여러분을 데려가 주시기를 빕니다.


제38집 발 행 일

2013년

발 행 인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편 집 인

진 토마스

왜관

편집위원

김석주 에제키엘

왜관

박정희 루나

대구

양숙희 이사악

서울

최미숙 마리 살루스

부산

인 쇄

분도출판사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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