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노니아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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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의 영성단편들

제 37 집

2012년·여름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표지 설명 : 안토니오 성인이 살던 굴의 입구


편집 서언 ……………………………………………………………… 5

진 토마스

베네딕도의 신비 사상 ………………………………………………… 7

아퀴나타 뵈크만, 김옥주 마리 테레즈 옮김

아빠스, 강한 이들, 약한 이들 간의 역동적 관계를 통해 바라본 성규에서의 회수도자의 정체성 ………………… 37

배성분 돌로레스

공동체 생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 71

허성석 로무알도

하느님 찾기와 수도승들의 문화 ……………………………………… 85

교황 베네딕도 16세, 김순복 베다 옮김

수도승생활과 사목 …………………………………………………… 99

데이빗 톰린스, 엄미정 에바마리아 옮김

경청하는 침묵 …………………………………………………………114

데이빗 톰린스, 최길자 안젤라 옮김

생존을 넘어서-서방 수도승 생활의 미래는? ……………………… 134

도나토 올리아리, 문정희 토비아 옮김

초기 수도승 문화에 나타난 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 …145

골룸바 스트와트, 양숙희 이사악 옮김

성 바실리우스의 편지 2 …………………………………………… 162

성 바실리우스,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천국의 사다리』 2부 ……………………………………………………174

요한 클리마쿠스, 허성석 로무알도 역주

요한 아빠스의 둘째 담화 …………………………………………… 190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피누피우스 아빠스의 담화 ……………………………………………219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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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서언 이번 코이노니아 37호에는 12편의 글을 모을 수 있었다. 편집순서는 어 디까지나 임의적이라고 하겠지만 오래전부터 우리는 보통 앞부분에 베 네딕도 규칙서(RB) 해석을 두었으며 뒷부분에는 고전의 역본을 두었다. 이번에도 앞에는 규칙서에 대한 3편의 논문을 배치했다. 넷째 글부터 범 위는 넓어진다. 고대 수도승 생활에 대한 전문가이며 우리 한국인 수도 자 몇 분의 은사인 골룸바 스트와트(Stewart)는 고대의 교부들이 성경 말씀, 그중에도 특히 시편 말씀을 어떻게 기도에 적용했는지 살펴보았 다. 그 내용으로 현대 수도자들의 기도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바 이다. 그리고 교황 베네딕도는 파리에서 문화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사들 에게 하는 강좌를 통하여 중세기 수도승들이 어떻게 서양 문화의 기초 를 놓았는지를 명석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문화를 발전시키 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하느님을 찾으라는 베네딕도의 주문을 따르다 가 자연스럽게 문학, 미술, 음악 등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교황의 식견에 감탄하고 우리 선배들의 업적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하는 강연이라고 본다. 다음은 호주 트라피스트회의 대윗 톰린스(Tomlins)의 두 가지 강의인 데, 베네딕도의 정신을 일반인들에게 퍽 넓게 전하는 내용이다. 여덟 번 째로 나온 올리아리(Ogliari) 아빠스의 글은 서양의 수도원들이 경험하 는 위기에 대하여 취해야 할 자세에 관한 생각들이다. 우리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이 세계화 시대에 서양의 수도원들이 당하는 도전들은 우리에 게도 다가올 수 있는 것들이고, 그 가운데 일부는 이미 와 있다고 볼 수 도 있다. 그래서 올리아리 아빠스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다가올 미래를


6 대처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같다. 고전의 문헌 가우데 허 로무알도 신부는 요한 클리마쿠스의 번역을 계 속했고, 수도생활에 관한 바실리우스 성인의 두 번째 편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가시아노 담화집을 번역을 마치려고 하는 본 인은 이번에 담화 두 편을 한국말로 옮겼는데 17편 가운데서는 그리스 도교 윤리에 어긋나는 부분을 생략했다. 구약성서를 이용하는 가시아노 는 거짓말을 상당히 쉽게 허락하는데 사실 그 시대에는 거짓말에 대한 가르침은 아직 애매했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거짓말은 진리 자체이 신 하느님께 언제나 반대된다고 명백하게 가르친 다음에야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작년에 뮌스터슈바르작(Muensterschwarzach) 수도원에서 따로 재단을 만들어서 132년만에 가시아노의 저작을 새로 번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1879년에 나온 독일어 역본을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하니 현재로는 독일어보다 한국어 번역이 더 앞선 것이 사실이다. 이제 4편의 담화만 더 하면 담화집을 다 볼 수 있는 데 만일 출판하려고 한다면 아직도 많은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에도 코이노니아 내용은 두 개의 논문만 빼놓으면 모두가 번역문 이다. 바쁜 가운데에서 어려운 번역 작업에 수고한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인쇄를 맡은 분들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글을 보실 모든 형제자매들은 미비한 점을 너그럽게 지나치고 그 안에 영혼에 유익한 영 양분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2012년 봄, 화순수도원에서 진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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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의 신비 사상: 베네딕도 규칙서 안에 나타난 영적 역동성 아퀴나타 뵈크만 김옥주 마리 테레즈 옮김

‘베네딕도회 신비사상’에 관한 모임1)에서 올 해 참석자들은 규칙서를 포함한 고대 원전들에 주목하고 있다. 여러 세기 동안 많은 사람이 이 문 제와 관련된 위대한 보화를 들추어내면서 베네딕도회 신비사상을 설명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주제가 학술모임의 주제가 될 만큼 당면한 문제 라는 사실은 최근까지 수도승 생활의 신비적 차원에 대한 충분한 설명 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베네딕도의 규칙서가 신비적 측면들을 포함하는 영적 여정을 다루지 않는다고 교육받아 왔다. 그러 나 원전들의 문맥 안에서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주의 깊게 읽을 경우, 거 기에서 베네딕도회 신비사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많은 흔적 들을 발견하게 된다. 베네딕도회 신비사상은 영적 진보라는 주제, 곧 역동적 영성과 밀접하 게 결부되어 있다. 사전에 따르면, ‘역동성’(Dynamik)이란 에너지의 작용 과 반작용이라는 상호작용이거나 혹은 에너지에 의해 야기되는 원초적 인 움직임이다. 인간의 역동성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언제든지 한 사람 이상이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두 개의 가설을 소개하고 싶은데, 먼저 역 동성의 근본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으로, 우리의 에너지 영 1) 1996년 6월 27일부터 30일까지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교구의 가톨릭 아카데미가 보 이론(Beuron)에서 “Back to the Sources: The Spirituality of the Fathers”라는 주제로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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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은 하느님의 에너지와 함께 교감하는 중에 하느님의 에너지가 완전하 게 우리를 움직일 때 까지 발전을 해 나간다. 반면에 두 번째 것은 여정, 움직임, 성장과 같은 것들은 우리를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인도 하니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가장 깊은 신비를 만나고 인류와 깊은 연대를 찾게 된다. 따라서 역동성은 다양한 방향으로 작용을 한다. ‘신비적’이란 단어를 쓸 때 나는 새로운 양태의 존재를 경험하는 아주 커다란 이벤트를 생각한다. 그것은 말로 충분하게 표현하기가 불가능하 다.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이 인간 안으로 돌진함을 의미한다. 그럴 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그 체험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신비적인 경험의 진실성에 대한 근거는 다음 것들을 포함 한다: 즉 성서 와 교회의 가르침에 일치되고 성사 생활을 풍요롭게 해 주고, 신·망·애 의 성장을 도모해 준다. 그러한 경험에 높고 강력한 에너지가 유동적이 며 역동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베네딕도 규칙서에서의 역동성이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물 을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최종의 목표인 종말론적 완성, 즉 하느님 나라 일 것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보다 직접적인 지상의 목표가 있는데, 베네 딕도 이전 스승들이 “마음의 순결”, “연속적인 기도”, “사도적 사랑” 등으 로 부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 지상에 존재하는 동안 우리를 이끌어 주는 규칙서의 강한 내적 역동성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주는지에 대 한 의문이 강하게 생긴다. 규칙서가 신비적 체험으로 이끌어 주는가? 아 니면 공동체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가? 이런 식으로 질문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나는 먼저 규칙서의 역동적인 영성의 일반적인 국면을 밝혀 보는 것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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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시작해서 규칙서 안의 역동적인 어휘를 먼저 살펴볼 것이며, 이어지 는 장에서는 규칙서 안에서 이 영성을 사용한 머리말과 규칙서 7장 49절 과 52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72-73장 등 일부 텍스트를 보고자 한다.

1. 규칙서의 역동적 어휘와 그 의미 1.1. 여정, 길(via, iter)의 중요성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여행 중에 있는” - 이 표현은 실제로 수도원 밖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 수도승들을 발견하는지……. 이 사실은 놀랍기만 한데, 심지어는 겸손의 열 두 단계에서도 나온다. 베네딕도 성인은 거룩 함의 테두리를 봉쇄구역 담장 안에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고 선을 긋지 않았다. 흔히 ‘보내다’(dirigere)라 일컫는 단어는 순명 아래 여행하는 형 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인다. 시작 부분에서는 그 길이라는 단어가 또 한 삶의 방식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길은 우리에 게 바르게 보여 지더라도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않는 길(7,21)과 구 별된다. 우리는 매일의 여정에서 우리 실족이나 장애물뿐만 아니라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알려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길이 아 닌 우리 자신의 길에 유념해야 한다. 그 길은 아주 좁을 수 있지만(5,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느님 계명의 길이며 구원으로(머리말 48) 인도하는 길로 마침내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고 삶이 풍요로워 지 는 하느님의 장막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 길을 따르셨으며 (머리말 21), 그래서 우리도 회피하지 말고 복음의 인도 하에 따라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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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창조주께 곧장 가게 된다(73,4).

1.2. 움직임이 어떻게 묘사되었는가? ‘걷다’(ambulare)라는 표현은 규칙서 도처에 나오는데 겸손과 순명으로 행해져야 한다. (5,12; 7,3). ‘가다’(ire)라는 단어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원하는 바를 따르지 말고 어디서나 불순종 인(67,7) 부패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 것이며 하느님께로 가야할 것이다 (58,8; 71,2).2) 그러나 그 단순한 걸어감은 베네딕도에게는 충분하지 않 은 듯 보인다. 그는 ‘뛰어가다’(currere), 그리고 ‘서두르다’(festinare)와 같 은 단어를 선호한다. 이는 머리말 13절에 있듯이 사랑이 우리를 몰아가 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생명의 빛이 있는 동안에 달려라”(머리말 13).3) 수도승은 수도생활의 완전함을 향해(73,2) 그리고 천상의 고향(73,8)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선한 일을 통해서 그 길의 목적지에 다다르도록 재촉하며 사랑의 감미로움(머리말 49)으로 달려간다. 이 역동성은 하느 님에 의해 시작이 된다. 그 분은 우리를 도우러 빨리 오신다(ad adiuvandum me festina 18,1; 35,17). 그것은 규칙서의 특징으로 그 움직임은 한 방향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참조. 1,6 이하). ‘길’(via)이란 여행 뒤에 집에 돌아오는 것(redire 67,3)뿐만 아니라 아버 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포함한다(머리말 2). 또한 평화 중에 자기 형

2) ‘오다’(venire)라는 단어는 특별히 수도생활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다(규 칙서 58장; 60장; 63장). 3) 베네딕도는 스승의 규칙서에서처럼 요한 12,35에 나오는 ‘걸어가다’(ambulare)를 ‘뛰다’ (currere)로 바꾸었다(참조. 이태리어 역본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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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에게 돌아서는 것도 필요하다(4,73 수평적 차원). 저자의 역동적인 의지는(예를 들어 pervenire나 perducere처럼) 접두어 ‘per’와 함께 움직임의 단어 안에서 명백해 진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장막으로, 영원한 생명(머리말 22; 42)으로, 천국으로 들어 높여지기를 (7,5) 혹은 우리 창조주께(73,4; 참조. 72,12)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 뿐 만 아니라 규칙서 72장의 표현대로 지상에서의 최고의 덕인 열렬한 사랑 (73,2; 73,9)을 향해 나가기를 의미한다. 상승의 이미지는 다른 연관성을 불러일으킨다. 산을 오르는 중에 속력 을 내라고 재촉할 수는 없으나, 꾸준하게 진전하며 나아갈 수는 있다. 사 다리의 비유는 7장의 기본 틀이다. 베네딕도는 그의 선임자인 스승의 규 칙서와 달리, 수도승이 계단을 오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베네딕도는 겸 손의 맥락에서 항상 높여짐을 사용했고, 겸손으로 스스로 낮추면 우리 는 높아지고, 교만으로 우리는 낮춰진다.

1.3. 여정의 과정 우선 주목할 것은 시작한다는 동사들이다. 무슨 선행을 시작하기 (inchoare) 전에, 우리는 하느님께 그것을 완성시키시라고 간절히 청할 것 (머리말 4)이라고 하며, 규칙서 끝 부분에서 규칙서는 역설적으로 초보 자를 위한 규칙(inchoationis regula)이라고 한다(73,8).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수도승 자신이 아직도 초보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실에서부터 진보는 드러난다(참조. 규칙서 73장). 머리말에서 우리는 좁은 길에서 시작하는 한 젊은이를 보며(incipere, initium, 머리말 48), 마지막 장에서는 단지 수도생활을 시작할 뿐인 것으로 말한다(init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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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nis, 73,1). 겸손의 마지막 단계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것을 사 랑으로 드러내게 되어 자연스럽게 두려움 없이 실천하기 시작한다(7,68). 이러한 여정에 진보(processus)가 있다. 수도생활과 신앙생활의 진보란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다(머리말 49). 수도승은 계속 더 좋은 것을 향해, 결국은 하느님을 향해,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하느님 안으로 나아가야 (proficere) 한다(2,25; 62,4). 이 지상에서 한 인간이 완덕에 도달할 수는 있는 것일까? 베네딕도는 그 명사를 규칙서의 끝에 오직 두 번 만 사용했다(73,2). 그는 교부들의 가르침이 완덕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대로 고수하는 반면에 그 자신의 규칙은 하찮은 것으로 간주했다. 겸손이 완전한 사랑(7,67)으로 이끌지 라도 이는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베네딕도의 고유 텍스트에는 하느 님만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임을 강조한다(perficere, 머리말 4).

1.4.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우리는 이 길을 우리 스스로는 시작할 수가 없고 좋은 열정(72,1.2)으 로 이끌리게(ducere, perducere, adducere) 되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에 의해 이끌리게(per-ducat, 72,12) 된다. 베네딕도에게 그리스도의 길은 먼저 성서의 인도(머리말 21)를 통해 가장 잘 나타나며 또한 교부(73,2) 들의 가르침으로도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그 여정에 함께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몸소 길 을 닦아 놓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5,11)과 영광(머리말 7)을 향해 그 분을 따르는(sequi)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란 평화를 추구하고 그 분이 가신 발걸음의 뒤따르는(sequi) 것으로(그리스도는 인격화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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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마음의 욕구를 따르지 않고(3,7 이하)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며 (4,10) 또한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주워진 명령을 수행하는 것으로서의 순명(규칙서 5장)4)과도 같은 것이다. 베네딕도는 규칙서의 첫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한 형태로 주어 지는 순명을 강조하고 있다. 규칙서의 끝부분인 72장 7절에서 그는 그리 스도를 본받는 것을 남에게 유익이 되는 것(72장의 핵심)으로 요약한다 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본받으면서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것이 다. 규칙서를 스승처럼 따름(3,7)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여정을 따름(72,12)을 의미하며 수평적 차원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하 느님에 이르는 수직적 차원에 까지 방향 잡아줌을 의미한다.

1.5. 유혹과 어려움 베네딕도가 ‘desidia’(게으름, 나태)라 부르는 멈춰버리고 싶은 우리 욕 구는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참조. 머리말 2; 73,7; 48,23). 도망가려는 유혹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초보자는 구원의 길에서 즉시 도망치지 말아야 하며(머리말 48), 아빠스는 연약한 형제가 어떤 일 때문에 물러나지 않도록 모든 것을 고려할 것이다(64,19; 48,24). 구원의 길에서 누구도 도망치지 말 것이나 죄나 교만, 하느님을 망각함이나 지옥 으로부터는 도망칠 것이다(머리말 42; 4,69; 7,10). 우리는 악으로부터 멀 어질 것이나 규칙의 가르침으로부터는 멀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의미론적으로는 영혼들을 다스린다(regere)는 의미가 포함되며, 더욱이 하느님께로 향하 는 길 위에서 영혼들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포함된다(참조. 2,31.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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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 더구나 방랑(vagare)에 대해서는 더욱 경고하는 바인데(1,11; 66,7), 그런 충동은 내적 혼란에서 오며 우리를 잡념으로 빠지게 한다. 그 런 상태는 혼자서 자기 자신을 견디기 어려울 때에 생기는 것이다. 그와 달리 겸손의 네 번째 단계에서는 이렇게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그 상황 을 포기하거나 물러나지(discedat) 말고 견디어 낼 것을 조언해 준다 (7,36). 왜냐하면 인내의 역동성이 바로 역경을 통해 더 강해지기 때문이 다.

1.6. 서로를 향한 움직임 안의 역동성 일정한 곳을 향해 달려온다는 뜻인 ‘occurrere’ 동사는 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부터 형제들이 식사나 전례나 혹은 끝기도 전 독서를 위해 한 장소에 모일 때 사용하는 동사다. 공동생활의 이러한 교차점에서 함께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도승은 성무에 함께 하도록 가장 빠르게 서 둘러야 하며(43,1), 자리에 도착해서는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은 다 른 일보다 우선적으로 Opus Dei(성무일도)를 바치러 서둘러야 하며 (22,6), 그렇게 하도록 서로 격려해야 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 투어 존경하면(63,17; 72,4) 그 공동 업행은 보다 활기를 갖게 된다. 규칙 서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우리의 개인적인 역량에 의지하지 말고 공동체 와 함께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손님들에게 마주 달려가며(53,3) 그들에게 여정의 동반자가 되 어 준다(socientur, 53,4).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따뜻한 사랑으로 즉 5) ‘물러가다’(recedere), ‘떨어져 나가다’(discedere), ‘떠나다’(relinquere) 등의 단어에 대한 연 구는 이 단어들이 같은 느낌을 가진다고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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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적인 응답을 해준다. 이 주제를 더 확장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 진 모든 이들과 함께 목표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6) 그러므 로 역동성은 우리 안에서, 또한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과의 양측 사이에서 생겨난다.

1.7. 그는 하느님을 향해 더욱더 나아가야 한다(62,4) 나아감(proficere)은 ‘더욱더’(magis ac magis)(62,4) 나아감을 말한다. 규칙서 안에서 ‘더욱’이라는 표현은 “남에게 더욱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 을 따를 것”(72,7) 이라고 하며 겸손을 다루는 문맥 안에서 찾아볼 수 있 다. ‘더욱더’라는 표현은 성장해 나가는 역동성을 가리킨다. 이 점에서 우 리는 한 방향으로 쭉 뻗은 길을 따라 전진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차라리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혹은 나선형의 길을 따르는 것을 말 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또 하나의 질문은, 왜 베네딕도는 ‘하느님께’(ad Deum)라는 표현보다 문자 그대로 표현인 ‘하느님 안으로’ (in Deum)라는 표현을 말했는가? 그는 ‘ad Deum’이라는 표현을 우리들 의 마지막 목표(예를 들어 58,8)를 위하여 사용했다. ‘하느님 안에서 존재 하기’(In-Gott-Sein)와 ‘하느님 안으로 성장하기’(In-Gott-Hineinwachsen) 가 둘 다 어마어마한 역동성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다.

6) 만약 우리가 ‘지체 없이’(sine mora), ‘즉시’(mox), ‘서두르다’(festinare), ‘서둘러’(festinanter) 라는 표현이 사용된 문맥에서 이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들이 순명이나 순명 안에서 달 려가기 위해서(5,1.4)만이 아니라, 전례(22,6)와 형제적 관계를 위해서도 서두르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당가는 지체 없이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빨리 제공해 야 하며(31,16),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지체 없이 상대방 앞에 빨리 엎드려야 하며(71,8), 가 난한 사람에게 즉시 대답해야 한다(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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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서 62장 4절은 본래 사제들에게 지시된 것이지만, 이미 상술한 것 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이 내용을 모든 수도승에게 적용해 볼 수 있다. 누가 이 문장을 규칙서 62장 2절부터 4절까지의 근접 문맥에서 분석한 다면, 그 나아감이란 형제들 ‘위에 스스로 높아지는 것’(e-latio, super-bia) 이나, 아빠스 ‘앞에서 감히 행하는 것’(prae-sumere)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수도승은 겸손과 봉사로 형제를 존경하고, 그의 스승으로 생각하는 규칙서의 규율과 아빠스께 순종해 야 한다. 이는 한 사람을 치켜 올리거나 경쟁하는 역동성이 아니라, 규칙 서와 아빠스 아래서 함께하는 가운데,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분 안에서, 영원하신 하느님께 이르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은 규칙서에 따라 서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 제 규칙서 58장으로 눈을 돌려 보자. 이 장은 형제들의 입회 절차에 대 한 장이다. 이 장에서는 어려움과 고됨을 거쳐 하느님께(ad Deum) 가는 것을 가르친다(58,8). 이 맥락에서 ‘하느님을 찾음’의 역동적 개념이 부각 되는데, 이는 아마도 교부들이 말하는 베네딕도회원이나 그리스도인 삶 의 보편적인 개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는 지원자에게 해당되는 것인 데, 지원자의 역동성이 특별히 전례와 순명과 일반적인 의무들이라는 연 결 구조가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향해 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과 그의 이익을 향해가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58,7).

규칙서에 있는 역동적인 영성: 규칙서는 수도생활을 보금자리로 말하 지 않고 오히려 여정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단지 걷기만 하 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다함께 서둘러 나아간다. 우리는 규칙과 아빠스 아래서 순명과 겸손, 무엇보다 사랑으로 달려 나간다. 역동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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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둔다. 이 역동성이 일정한 목표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며, 혹시나 느슨해진다 하더라도 나를 도와줄 같은 길 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 다. 결국 하느님은 이 여정 위에서 우리를 향하여 서두르신다(ad adiuvandum me festina, 18,1; 35,17). 기본적으로 이 여정은 순수한 그리스도 인 여정이다.

2. 규칙서 머리말 49절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 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짧지만 특징적인 이 구절은 베네딕도가 개인적으로 스승의 규칙서에 첨가한 문구 가운데 절정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베네딕도 는 수도승이 어렵게 시작한 후에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 달려가게 될 것을 약속한다. 규칙서 머리말 48절에서 베네딕도는 마태오복음 7장 13절에 의거하여 좁게 시작함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복 음사가에 따르면, 생명에 이르는 길 전체가 좁다.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 11장 28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가 가볍 다’(suave)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베네딕도는 다음 시편 118편에서 그 해답을 발견한다. “주께서 이 마음 넓혀 주시면 당신의 계 명 길을 달려 가리이다”(시편 118,32; 규칙서 머리말 49: dilatato corde …… curritur via mandatorum dei). 우리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앞으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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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것은 계명과 성서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베네딕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 같다. 영적이거나 신비적 체험들이 객관적인 현실 안에서 이루어진다. 2. 마음은 넓어지나 길이 넓어지는 것 은 아니다. 이것은 어려움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내 일상이 굳이 바뀔 필 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나의 마음이 넓어지면 나는 현실을 다르 게 볼 수 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3. 교부들의 문헌에 의하면 넓은 마음은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인격적인 현존과 힘을 포함한다. 이 시 편 구절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을 대표적으로 인용해 본다. 암브로시우스 (Ambrosius)는 “그 길이 좁을지라도 우리 마음이 넓어져서 성부 성자 성 령의 거처가 될 것이다”(『시편 제118편 주해』 4,27)라고 한다. 아우구스티 누스(Augustinus)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바로 그곳이 넓은 곳이다. 하느 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그 넓은 곳 안으로, 즉 우리 마음 안으로 사랑을 부어 주신다”(『시편상해』 118편 제10설교 6장)라고 말한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Hilarius Pictaviensis)는 “우리의 마음은 넓어져서 그 안에 성부와 성자의 신비가 거하게 되며, 성령께서는 자신에 게 어울리는 장소에 머무르시듯이 그 안에서 기뻐하신다”(『시편주석』 118,12)라고 한다. 비록 수도승 자신이 수동적 태도를 취할지라도, 그는 서둘러 달리기 때문에 하느님의 활동 안에서는 그가 전보다 더욱 적극적 (aktiver)이 된다. 역동성은 하느님의 현존과 힘을 통해 강해진다. 베네딕도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inenarrabili dilectionis dulcedine)7) 안에서 달려간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신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적 경험을 그 한 마디로 말한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 7) 1베드 1,8은 ‘말할 수 없는 기쁨’(exsultabitis laetitia inenarrabili)을 언급한다. 이 표현은 문 맥상 믿음, 사랑, 희망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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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사랑의 일치이다. 예로니모(Hieronymus)에 의하면 하느님을 사랑하 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수월해진다.8) ‘감미’(dulcedo)라는 단어는 인 간의 감각을 비롯하여 이러한 내적 체험이 그 사람 전체에 포함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본 논문 제1장에서 알아 보았듯이 베네딕도는 수도승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기 를 원한다(참조. 규칙서 72장 두 번째 단락). 이런 의미에서 머리말 49절 은 머리말 50절과 연관 된다: 수도승은 수도원에서 인내롭게 참고 기다 리는 가운데 성장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게 된 다. 기쁨과 고통 이 두 가지는 모든 신비가들이 제시하는 바와 같이 한 짝을 이룬다. 수도승은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열망으로 불탄다. 최종 목 표와 눈앞의 목표 사이, 그리고 개인의 여정과 공동체의 여정 사이에도 아무런 거리가 없다. 이제 머리말 전체를 한 번 살펴보자. 주어진 주제와 관련해서 머리말 의 첫 째 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연속적인 진보를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생 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8개 내지 10개의 소(小)단락을 찾을 수 있는데, 말하자면 매번 새롭게 시작되며 순 환 과정을 묘사한다. 그 단락들은 대부분 주님의 주도로 ‘먼저’(prae) 시 작된다. 즉 주님의 부르심, 주님의 자비, 주님의 초대로 시작되는데, 인간 의 편에서의 귀 기울임과 개방, 혹은 이러한 비슷한 경우를 통해 주님께 응답한다. 그 다음에 사람은 달려가고, 행동하며, 가끔은 아주 역동적으 로 선을 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단락들은 대부분 인간에게서부터 주 8) 예로니모 편지 22,40; 참조.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주해』 48장 1절: “사랑하는 이는 고 생하지 않는다”(Qui amat, non labor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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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로 적극성을 넘겨주거나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 을 맺는다. 세 개의 예를 들어 보자: 머리말 1-4: 경청해야 할 사람은 아들 혹은 딸 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의 선물로 이에 대해 그 들은 경청하고 적극적인 역동성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해 준다. 머리말 14-20: 주님은 일꾼을 찾으시고 우리는 그 분께 귀 기울이고 따르며, 악 을 피하고 선을 행할 것이다. 그러면 그 분의 귀는 우리에게 열려질 것이 며, 그분은 “ecce adsum”(나 여기 있노라)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 다. 이는 확실하게 객관적인 현실에 바탕을 둔 하나의 강도 높은 체험이 다. 머리말 23-32: 하느님 나라의 장막을 쳐다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 르침에 귀 기울인다. 우리는 악마의 유혹을 따르지 않고 선을 행해야 한 다. 아주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에 의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Operantem in se Dominum magnificant:머리말 30). 이 구절은 머리말 49절과 관련이 있 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현존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 분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여기서 주제의 관점에서 우리는 활동이 하느님께 넘어갔다 고 아니면 새로운 활동은 하느님 안에서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는 하느님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움직이신다. 이 신비 체험 은 아주 역동적이며 단순히 체험들 안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우리를 초 대해 주지는 않는다.

영성 생활은 확실하게 일직선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선 형식 으로 발전해 간다. 머리말은 8번 내지 10번의 순환을 거듭하여 명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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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들은 모두 엇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다. 그들은 삶의 여러 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매번 우리 생활은 새로 시작되지만 과거는 되풀이 되지 않고, 새로운 지평에서 계속 나아간다. 역동적인 영성은 하느님 안에서 닻이 내려진다. 그 분이 시작하고 마치신다. 그 분 안에 인간의 활동과 인 격의 감수성이 뿌리를 박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하느님과 인간 에너 지의 상호 교류이다.

3. 규칙서 7장의 전체로서 7장의 맺음 말 수도승 전통의 폭넓은 흐름은 규칙서 7장의 기본 틀을 이룬 야곱의 사 다리를 영성 생활의 여러 단계를 묘사하는데 사용해 왔다. 모든 옛 문헌 들과 그림들에서 사다리는 하늘까지 올라간다. 베네딕도의 규칙서 역시 7장 시작부분에서 그렇게 서술한다.9) 하지만 사실, 베네딕도는 그의 원 천인 스승의 규칙서와는 달리 그 사다리를 이 지상에서 끝내도록 한다. 이 전망은 또한 머리말 49장에서도 조명된 바 있는데, 그에게 이는 중요 해 보인다. 우리 지상의 삶에는 기쁨과 안락함과 우리가 ‘신비적’이라 일 컬을 수 있는 은총의 발현들이 있다. 삶이 모두 고뇌나 짐, 고문이나 희 생도 아니며 우리가 기쁨, 즐거움, 행복과 모든 선한 것을 하늘에서만 나 누는 것(이는 스승의 규칙서의 관점이었다)도 아니다. 사다리의 발판들은 위로 인도하기 보다는 아래로 인도한다. 겸손은 계 속해서 애를 써야만 하는 높은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겸손하게 산다는 9) “우리가 만일 겸손의 최고 정상에 이르기를 원하고, 또 현세 생활의 겸손을 통해서 오르게 될 천상적 들어높임에 속히 도달하기를 원한다면……”(규칙서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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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우리의 나약함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이는 은총 안에 사 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특별히 나약한 현실 안에 기반을 굳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보다 깊은 하느님 체험의 영적 길로, 언제나 보다 명 확한 자아 인식의 길로 인간을 이끄신다. 베네딕도에게 겸손은 얻어낼 수 있는 하나의 덕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장해 깊어지는 체험이다.10) 이 주제와 관련하여 7장의 끝부분은 중요해 보인다. 베네딕도는 어떻 게 수도승이 늘상 마음으로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해야 하 는지를 묘사하며, 그래서 그의 전 존재가 이 ‘예수기도’(혹시 우리가 이 이름으로 칭한다면)를 표현해야 하는 것을 묘사한다. 대체로 고대에는 루카 복음 18장에 나온 세리의 기도가 ‘예수기도’의 원형(原型)으로 사용 된 듯하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완전한 사랑은 온전히 하느님의 업적이다. 우리는 비어있는 그릇이 되어,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부어질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비참함을 인정하면 그것들은 우리 손을 비 우게 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간구하기 위하여 손을 내뻗치게 하는 기회가 된다. 사람이 도달하게 될 ‘하느님 사랑’(caritas Dei)이란 ‘하느님께 드리 는 사랑’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시는 사 랑’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혹시나 동일 소유격(Genetiv der Identität)으로 ‘하느님인 사랑’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는 1요한 4,18의 성서적 문맥의 영

10) Grün, Anselm & Dufner, Meinrad: Spiritualität von unten(Münsterschwarzacher Kleinschriften, 82), Münsterschwarzach 1994, 34; 한국어 번역판 참조. 안셀름 그륀·마 인라드 두프너 저, 전헌호 옮김, 아래로부터의 영성, 왜관: 분도출판사, 2001; 참조. Louf, André, “Humility and Obedience in Monastic Initiation”, Cistercian Studies 18(1983.4), 26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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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받은 단어이다.11) 용이하게 선을 행하는 것은 은총의 한 표현으로 그 자체가 역동적이 다. 규칙서와 그 원천인 RM(스승의 규칙서)는 이 맺음말의 뿌리가 되는 가시아노의 원문에다 ‘습관적으로’(ex consuetudine) 또는 ‘좋은 습관으 로’(ex consuetudine bona)라는 말을 각각 첨가했는데, 이는 이제 수도승 은 수도원의 관례를 마음으로부터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 진다. 7장 68절에서 수도승이 규율준수를 시작한다는 말은 흥미롭다. 겸 손의 열 두 단계 이후 무한의 지평이 열려진다는 뜻이다. 7장 69절에서 베네딕도는 스승의 규칙서로부터 가져온 문장에다가 ‘그 리스도의 사랑으로’(amore Christi)라는 표현을 삽입하는데, 모든 것을 다스리는 동기는 ‘선’(das Gute)이 아니고 ‘선한 분’(der Gute)이다. 다시 말 하면 덕행이 아니고 인격이다. 베네딕도 규칙서에서는 모든 것이 그리스 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결국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모든 사랑과 역동 의 원천이며 우리 모든 갈망의 대상인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 스도의 사랑으로’라는 표현에서 ‘Christi’를 주어적 소유격(genetivus subiectivus)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은 이제 인간의 결정된 역동성이 될 수 있다. 7장 69절에서는 ‘덕행에 대한 즐거움’(delectatione virtutum)으로 모든 것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베네딕도는 겸손의 첫 번째 단 계에서 ‘쾌락’(dilectatio)의 문에 죽음이 가까이 와 있다고 경고한다

11) 참조. 1요한 4,16ㄱㄴ.19: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었습니다. 하 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Credidimus caritati quam habet Deus in nobis. Deus caritas est. diligamus Deum, quoniam Deus prior dilixit 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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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 그래서 ‘delectare’ 단어는 부정적으로도 쓰였다.12) 베네딕도는 스승의 규칙서로부터 따온 말을 마지막 구절(70)에서 글자 그대로 옮겨 썼다. 우리는 이제 악덕과 죄로부터 자유롭다. 이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보는 겸손의 열두 단계와 대립되는 표현처럼 보인다. 이것은 신비 체험 이면으로,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영적으로 성장하면 사람이 독 선에서 떠나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과 사랑의 경험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갈 수 있다. 70절에서 활동은 성령께로 넘어간다. 덕행 안의 기쁨과 편안함, 사랑 등 이 모든 것 은 이제 그분 현존의 ‘증표’(demonstratio)이다. 여정의 첫 번째 시기에 있는 수도승은 일꾼(operarius)으로 불리우며, 그는 덕행을 위해 금욕(ascesis)과 극기를 실천하며 노력한다. 하지만 핵 심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겸손의 네 번째 단계부터 시작되는 여정의 두 번째 시기에서 이것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7장의 끝부분에서 는 하느님의 역동성을 받아들이는 일이 기본이 된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 난다. 그 결과는 수도승이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아니고, 이전에 영웅적 인 행위로 하지 않고 두려움에 싸인 노력으로 그렇게 했더라도 그는 이 제 아주 편안하며 자연스럽고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둔다. 혹시 외적인 변 화가 없을지 몰라도 내면에서는 모든 것이 달라진다. 역동성, 그것은 안 에서부터 작용하고, 매일의 사건들에 영향을 주지만, 무조건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귀한 공동체 구성원이며 권능 있는 사도 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준비된 도구이며, 항상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맺음말은 우리에게 삼위일체적 전망을 보여주는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12) 규칙서 7,31: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를 즐겨하지 않으며”(desideria sua non delectetur implere); 참조. 규칙서 33,7: “지극히 나쁜 악습을 즐기는”(nequissimo vitio delect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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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시는 사랑13), 그리스도께 드리는 우리의 사랑(아니면 우리 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활동을 언급한다. 우리는 이것을 삼 위일체의 신비와 성삼의 내적 역동성 안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겸손의 네 번째 다섯 번째 단계를 되돌아보자. 먼저 우리는 나쁜 형제들로 인한 박해와 중상을 경험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수도승을 본다. 그의 첫 번째 반응은 묵묵히 인내로 견디어내는(sustinere)것이다. 그러나 이 네 번째 단계의 중반에 “그들은 하느님의 보답에 확실한 희망 을 걸고 기뻐하며,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 아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냅니다’라고 말한다”(규칙서 7, 29)라고 씌어져 있 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가 강하게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우 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참조. 로마 8,37). 이 신비적 인 체험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어려운 상황 안에서 예기치 않게 오고, 그리스도가 행하고 가르치셨듯이 우리가 견디어내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면, “그들은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해 준다”(maledicentes benedicent: 7,43). 그러나 더 나아가도 된다. 누군가는 자신이 희생제물로서 그리스도의 뒤를 영웅적으로 따르면서 참아 견딘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 다. 하지만 더욱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는 공동체의 비참한 상황이 자신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을 수 있 다. 과연 나 자신은 우리 수도 공동체보다, 교회 공동체보다 더 나을까? 13) 베네딕도는 스승의 규칙서의 ‘주님’(Dominus)을 자신의 규칙서 7장 67절에서 ‘하느님’ (Deus)으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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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완고함과 부당한 면들이 내 안에 있을까?14) 이런 식으로, 다섯째 단계에서부터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숨기는 대신에 그 책임을 지고 자신의 죄와 악을 고백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핵심 문장이 “주님이 좋으시니 그 분께 고백하라 그의 자비는 영원하시다”(7,46)는 표 현이다. 겸손의 열둘째 단계에서처럼,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면, 하느님의 자비가 곧장 우리에게 다가오고, 그분 자비가 우리 안에서 활 동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제 남에게 자비로워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신 역동성은 수직적 차원뿐 아니라 수평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 장을 재고해 보면서, 우리는 역동성이 지속적인 (단계를 하나씩 올 라가는) 선상이 아니라, 반복과 후퇴처럼 보이는 단계, 거듭 새로 시작하 는 것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고행과 기도 안에서의 성장 4.1 규칙서 49장 이 장에 의하면 수도자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과 같아야 하는데, 이 는 우리가 부활절을 향한 역동성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삶처럼 우리가 언 제나 열정적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잠심, 독서, 기도를 하고, 또한 (‘농담’scurrilitas을 포함한) 외적인 즐거움에 대한 포기는 영적인 기쁨이

14) 참조. Bonhoeffer, Dietrich, Gemeinsames Leben, München 14/1973,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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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도록 도와준다. 기쁨은 규칙서의 이 장에서만 명사로 두 번 쓰여 졌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머리말 49-50절에서 말한 것처럼 영에 의한 기 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며 마음이 넓어지고, 기쁨으 로 달려간다는 것이다.15) 이 기쁨은 특징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 음이라는 빠스카(Pascha)와 함께 일어난다. 이 신비는 모든 수행과 영적 역동성의 핵심이다. 부활절은 매년 지내지만, 매번 다르게(희망하기론, 좀 더 깊게) 거행된다. 우리는 한 해가 한 바퀴가 되는 나선형을 생각할 수 있겠다. 규칙서에 따르면 영적 역동성은 전례에 근거를 두기에 교회의 전례주년이 기반이다. 베네딕도는 우리 각자가 자유의지로 무엇인가를 봉헌해야 한다고 말 하는데, 이는 규칙서에서 처음으로 개인의지(voluntas propria)를 긍정적 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갈망 내지 열망(desiderium)도 비슷한 평가를 받 는다.16)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베네딕도 규칙서 7장의 맺음말에서 ‘즐거움’(delectatio)은 덕행에 대한 기쁨으로 긍정적으로 변화되었다. 이 는 이제 그 역동성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린 인간 갈망의 순수함을 향 해 내딛는 여정이다. 베네딕도는 우리에게 의지와 열망, 기쁨을 근절하도 록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다시 숙성시키고 방향을 새롭게 잡 으라고 경계하는 것 같다. 이제 모든 노력은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들의 15) 신약성경은 고난과 박해 중의 기쁨에 대해 말하는데, 예를 들면 마태 5,12; 콜로 1,24; 1베 드 4,13 등에 나타난다. 참조. 사순시기 중 기쁨에 관한 주제: Belsole, Kurt: Joy in Lent, Rome 1993. 16) “각자는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자발적으로 바 칠 것이다(ut unusquisque super mensuram sibi indictam aliquid propria voluntate…… offerat…… cum spiritalis desiderii gaudio……)”(베네딕도 규칙서 49,6-7); 참조. Vogüé, Adalbert de, “La conversion du désir dans le chapitre de S. Benoît sur le Carême(RB 49)”, Collectanea Cisterciensia 56 (1994), 13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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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락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4.2 규칙서에 의한 내적 기도 안에서의 성장 내적 기도는 베네딕도가 우선권을 두었던 ‘하느님의 일’(Opus Dei: 43,3)과 성독(聖讀, Lectio Divina)이라는 객관적인 버팀목을 지니고 있 다. 베네딕도는 독서를 위하여 유익한 시간을 배정한다. 이 시간에 수도 승들은 자유롭게 또한 한가롭게 (vacare lectioni-베네딕도 규칙서 48장 에 6차례나 언급됨) 독서를 한다. 방해물이 전혀 없어야 할, 전례와 성찬 례 거행을 위한 성당(oratorium)은 개인적인 내적 기도를 바치기에도 좋 은 분위기를 제공해야 한다.17) 특별히 전례거행 후에는 개인이 이 기도 를 바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기도생활의 내면화를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베 네딕도는 전례가 전체 삶을 형성하기를 원하며 베네딕도 자신에게서 유 래한 표현을 담고 있는 규칙서 19장의 정점인 7절에서처럼 마음이 노래 를 부르는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기를 원한다. 더구나 베네딕도는 하느님 께서 항상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겸손의 첫째 단계) 하느님의 현존 안에 서의 삶을 다음과 같은 내용과 연결시킨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심을 우리는 믿는다. 그렇지만 특히 하느님의 일(Opus Dei)에 참례할 때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사실을 믿을 것이다”(19,1-2). 그는 Opus Dei가 하느님 현존 안에서 항구히 살 수 있게 도와준다고 보았다.

17) 베네딕도 규칙서 52장; 참조. Böckmann, Aquinata, “Vom Oratorium des Klosters(RB, Kap. 52)”, Erbe und Auftrag 72(1996), 21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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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는 비록 그가 직접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되풀이 하여 바치는 화살기도나 어쩌면 ‘예수기도’까지도 알았던 것 같다. 베네 딕도는 일부 시편/성경 구절들, 예를 들어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저를 도우시고 위로하신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같은 구절들을 명백 히 채용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일상적인 일들과 함께 반복할 수 있었다. 베네딕도는 ‘예수기도’의 가장 짧은 형태인 “기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을 시간전례 안에 도입했다(9,10; 17,4.5.10). 규칙서 7장에서 그는 수 도승이 하느님이 명하신 것을 “마음속에 늘 생각”(7,11)하고,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가 “언제나 자기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7,65)을 늘 기억할 것을 강조한다. 베네딕도는 수도승이 점점 더 하느님 현존에 사로잡히기 를 원하는 것 같은데, 이를 위해서 그는 우선 입으로 말하고, 마침내는 자연히 마음으로부터 기도하게 되는 짧은 성경 구절을 추천하는 듯하다. 행동은 인간으로부터 하느님께 넘어간다. 이로써 삶은 통합된다.18) 또한 베네딕도가 규칙서에서 기도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에다 덧붙 인 두 가지 짧은 부분이 우리 주제의 특색을 잘 드러낸다. 그는 전례규정 들의 마지막 장인 규칙서 20장과 공동체의 하루 일과(日課) 규정들의 마 지막 장인 규칙서 52장에서 개인적이고 내적인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는 데 그 내용은 비슷하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중에 개인적으로 바치는 기도를 격려하며, 그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하며 눈물과 마음의 열정으로 일어나는 것이라야 한다. 규칙서 20장 4절에서 베네딕도는 자유롭게 구성하는 개인기도란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 18) 참조. Böckmann, Aquinata, “Gebet nach der Benediktusregel”, Erbe und Auftrag 64 (1988), 10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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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이라는 조건을 첨가한다. 베네딕도는 마음기도라는 영역에서 하느님의 영감을 가장 존중한다. 우 리는 은총의 영감에 열려지고, 감동받도록 내맡겨야 한다(하느님으로부 터 시작된 역동성!). 이러한 첨가는 “그냥 들어가 기도할 것이다”(52,4)라는 규칙서 52장의 핵심적인 표현과 일치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감동받도록 자 신을 내어맡기고,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affectus)을 따 른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이는 단순해진다. 기도가 점차 단순해진다 는 것은 영적 스승들의 전통과 부합한다. 우리는 주의하면서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시켜 주시고, 이끄시며, 만져 주시는 것을 허락한다. 이런 맥 락에서 베네딕도는 기쁨이라던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음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며, 다만 수도승들을 위한 규칙서가 할 수 있는 한 그러한 길이 어떻게 깊은 기도의 경지에 들어가는지 약간만 암시할 뿐이다. 단 순함은 눈물, 마음의 열정, 내면화와 같은 다른 특성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 장에서 수평적 차원이 두 차례나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베네딕도 답다. 우리의 기도는 타인을 방해해선 안 된다(52,3.5). 내면을 향한 역동 성은 수평적 차원에 소홀하지 않는다! 규칙서 21장에서 시작되는 수도원 내의 생활 규율과 조직을 다룬 부분 의 끝은 성당에 대한 52장이다. 성당은 모든 장소의 정점이다. 하지만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 것이다”(53,1)로 시작하 는 규칙서의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에서 낯 선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대한 흠숭(adorare)이 언급되고, 바로 그 곳에서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전례를 거행하며(“기도를 바칠 것이 다”), 바로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과 손님들과 함께 성경을 읽는다(“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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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법을 읽어줄 것이다”). 이것은 건강한 기도 생활이 성장하는 방향 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전례와 독서에서 중요한 역할 을 하신다면, 그 전례와 독서의 내면화는 아빠스나 성경, 성당 안에서 뿐 만이 아니라, 모든 작업실에서, 모든 형제들 안에서, 특별히 친하든 싫든 간에 병든 형제들과 약한 형제들 안에서(규칙서 36장), 그리고 외부에서 공동체로 찾아오는 사람들 안에서,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낯선 이들 안에서(참조. 규칙서 53,15; 66.3-4),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도 록 도와줄 것이다.

역동적 영성, 그것은 하느님을 향하고, 마음의 내면을 향하며, 이웃을 향한 것! 이는 규칙서의 끝에 가서야 더 명확해질 것이다.

5. 규칙서 72-73장 여정이라는 소재는 규칙서 72장의 시작에서 즉시 나타난다. 72장 1절 과 2절은 병렬구조와 반의구조를 이루면서 작더라도 중요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좋은 열정은 죄로부터 분리시키나 나쁜 열정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죄와 나쁜 열정의 반대는 덕행이 아니며, 지 극히 열렬한 사랑조차 아니다. 우리는 덕이라는 이상을 향해 애쓰게 되 어 있지만, 좋은 열정은 좀 다른 것 같다. 2절과 12절을 비교한다면(수미 쌍관구조), 앞에는 좋은 열정이 이끌어가는 것(이는 사람들 안에 있는 강력한 힘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람들이 불러일으킨 지극히 열 렬한 사랑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이지만 12절을 볼 때에, 그리스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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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시며, 더구나 힘차게 이끄시는 분(여기서는 단 순히 라틴어 ‘ducat’을 사용하지 않고, ‘per-ducat’을 사용했다는 것을 이 렇게 설명할 수 있다)이시다. 이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 가? 우리의 모든 덕행은, 사랑을 향한 우리의 강한 노력은 (우리를 둘러 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열정으로 가득한 세상’에 서 좋은 열정의 균형을 가져오는 데에 넉넉하지 않다. 우리의 덕행은 결 국 우리 자신이 이것을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바로 우리 부서진 상태에서 우리가 사랑과 좋은 열정의 화신인 그리스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 스도께 대하여 우리 자신을 열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는 다시금 인간 적인 역동성에서부터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역동성으로 전환 하는 것이다. 규칙서 72장의 중반인 7절에 복음의 역설이 포함된다. 자기 목숨을 잃 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며(참조. 마태 16,25),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 매를 맺는다(요한 12,24). 이기적인 역동성, 즉 나에게 유익한 것, 혹은 나에게 유익하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노력은 악순환으로 이끌어간 다. 행복을 삶의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은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 만 우리는 실제로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내뻗침으로써 자아실현 에, 행복한 삶(머리말 15)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베네딕도는 이 웃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고, 또 이로써 결국 주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 로 삼는 구체적인 길을 보여준다. 인간을 향한 역동적 영성은 그리스도 를 향한 역동적 영성과 동시에 일어난다! 베네딕도 규칙서 72장은 베네딕도 규칙서의 유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베네딕도는 이 장에서 가장 자기답게 되었으며, 스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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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서로부터 가장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역동적 영성은 스스로 열정 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시도록 내어 맡기고, 그리스도보다 그 어떤 것도 더 낫게 여기지 않으며, 그분 사랑 안에서 타 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이는 아주 구체적인 신비사상이며, 자유와 사랑 의 삶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붙들어서, 우리를 다함께 인 도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깊은 연대가 바로 거기에서 드러난다. 규칙서 27장에서 우리는 이 ‘다함께’(pariter)가 어디까지 이르 는지 알 수 있다. 한 형제가 양 무리에서 벗어나 길을 잃었다면, 아빠스는 그를 쫓아가고, 지혜로운 형제를 뒤따라 보내며, 공동체는 그가 다시 공 동체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어디로 이끌어가는 것인가? 그것은 앞서 언급한 모든 차원의 사랑으로 인도한다. 이와 함께 규칙서는 신비 체험으로 이 끌어 가는가? 규칙서는 신비 체험들을 함축하며 장려한다. 하지만 베네 딕도회적 신비사상과 그리스도인 삶을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사랑이다. 규칙서 72장과 함께 비교해 볼 때에, 규칙서 73장은 규칙서의 절정으 로 보이지 않는다. 이 규칙서를 지킴으로써 사람들은 어느 정도 품행을 올바르게 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게 된다.19) 베네딕도는 8절에서 “초보 자를 위해 쓴 최소한의 규칙”이라고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도움’(73,8) 으로만 채워나갈 수 있다. 이 말은 거칠고 아주 역설적으로 보이며, 이 때 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 종장(終章)의 필자를 베네딕도가 아닌 다른 사 람에게 돌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이 규칙서에 대해 베네딕 19) “어느 정도 품행을 올바르게 하며 수도생활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aliquatenus vel honestatem morum aut initium conversationis)…… 초보자를 위해 쓴 최소한의 규칙을 (minimam inchoationis regulam)……”(규칙서 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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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자신 이후에 그렇게 가차 없는 판단으로 말할 수 있을까?20) 나약함을 의식하는 것이 발전의 표시인가? 영성적인 삶은 여기에서 거 론된 유기적 발전의 단계를 지닌다.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를 초보자들 의 첫 단계를 위해 썼고, 좋고도 넓은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마음을 썼 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성장이 있다. 이를 위하여 세부규정이라는 의미 의 규칙은 더 이상 필요 없다. 한 사람이 영적 생활에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인간의 모든 행위는 크신 하느님 앞에서 더욱 상대화되고, 더욱 부 당하게 보인다. 영적 삶의 시작에 우리는 혹시나 많은 선한 의지와 노력 으로 무엇인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단계는 필요하다. 하지만 조금씩 그러한 환상은 사라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게서 이런 종류의 모든 자기 확신을 가져가 버리신다. 우리는 그러한 경 험들을 통해서 모든 것을 자비로운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마음이 생긴다. 베네딕도는 자기 수도승들을 게으르고 악하게 살며 소홀히 지내 는 사람으로 묘사한다(73,7). 그러나 바로 이 표현은 그들이 하느님 곁에 있다는 표현이다. 그들은 겸손의 열두 단계 위에 있는 수도승과 마찬가지 로, 그들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신비 체험의 부정적인 측면). 베네딕도 자 신처럼 그러한 수도승은 공동체를 떠나려 하지 않으며 다른 길을 찾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시작하려는 노력과, 이 노력이 하느 님 은혜로 가능하다는 낙관주의와 연결된다. 규칙서의 종장은 가장 역

20) 약해지는 감정을 나타내는 이 구절들은 그의 규칙서 내에 나타나는 다른 표현들과도 일 치한다(아마도 그의 생애에 말년에 덧붙인 듯하다. 참조. 18,24; 40,6과 49,1-3). 이 모든 텍스트는 베네딕도가 자기의 나약한 수도승들과 연대할 줄 알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 는 ‘우리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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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적인 장 하나로, 우리를 넓은 곳으로, 영원하신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규칙서를 되돌아보면서, 규칙서의 역동적인 영성을 통해 형성된 사람 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영적 체험과 신비 체험은 전 인간을 사로잡 는다. 그래서 그가 지극한 열정(그리스도 자신임)으로 달리며 이웃의 유 익을 배려한다.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혹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 안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행한다. 그의 삶은 성령, 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충만함을 위하여 비어있다. 그는 깊은 영적 기쁨 을 누리며, 성숙해져서 은총에 대해 더욱 열려 있으며 소박하고 단순한 사람이 되었다. 인간의 노력은 승화하여 선을 향하여 방향을 잡는다. 그 는 성경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전례 생활의 건강한 토대로부터 결코 자신을 떼어내지 않는다. 특히 규칙서 끝 부분에서는 모든 영적 체험이 수직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수평적 차원으로도 인간을 더욱 사랑하는 존재로 만든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이니 사도 바오로와 함께 “약함 안에 있는 강함”(2코린 12,9)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베네딕도는 커다란 자유와 은총에 대한 강한 신뢰를 찾게 된다(참조. 머리말 4 “무슨 선행을 시작하든지 주님으 로 인해 마치도록 간절한 기도로써 청할 것이니”).21) 이렇게 하여 인간 은 항상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할 것이다(“operantum

21) 규칙서 28,4-5: “이러한 노력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함을 보거든, 더 큰 방법을 사용할 것 이니, (아빠스) 자신과 모든 형제들이 그를 위한 기도를 바쳐,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주 님께서 연약한 형제에게 건강을 주시도록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특징적인 상황을 다음 과 같이 묘사할 수 있다: 네가 모든 것을 투자했는데 아무 소득이 없다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 간청하라.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며,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완고한 형제 와 불쌍한 공동체, 그리고 죄인인 너를 낫게 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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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se Dominum magnificent”, 머리말 30).

역동적 영성은 양쪽 측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앞질러 오시고 완성하신다. 그리고 인간은 경청하고 대답하고 행하며 선행을 하 려고 노력한다. 그면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니, 하느님 앞에서 서서 히 비우고 가난하게 되어, 하느님께서 그를 채우실 수 있게 된다. 역동성상호간에 작용하는 에너지! 하느님에게서 오는 역동성, 인간에게서 하느 님께로, 이웃에게로 가는 역동성! 인간 마음의 내면으로 향하는 역동성 은 형제와의 연대감을 강하게 해 준다. 규칙서는 어디로 인도하려고 하 는가? 하느님께로, 하느님 안으로, 마음의 깊은 내면을 통하여, 공동체의 안과 밖의 이웃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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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스, 강한 이들, 약한 이들 간의 역동적 관계를 통해 바라본 성규에서의 회수도자의 정체성1) 배성분 돌로레스

회수도공동체는 역동적 공동체이다. 그 안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건강한 이, 병든 이, 나이든 이, 젊은이 등. 공동체는 각각 특유 의 기울어진 경향들을 가진 개별적인 인간들로 구성된다. 베네딕도 성인은 공동체의 이러한 구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개별적 인간들 간의 역동적 관계로 인해 공동체의 평화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어 려움들을 예상한다. 현대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같은 어려움들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우리들의 인간적인 약함 들을 이해하는 것과 함께 베네딕도 성인이 규칙서에서 의도한 형제적 사 랑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회수도자들은 이러한 역동을 통하여 단지 함 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회수도자이다. 수도승은 수도 삶 안에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 아야만 하지만, 또한 공동체 안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상태에 깨어있어 야만 한다. 그렇게 회수도자들은 그들의 삶 안에서 “참으로 함께 사는 것”의 의미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영적 여정은 회수도자의 정체 성을 찾는 하나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고를 통하여 베네딕도 성인이 생각한 아빠스와 강한 이들, 약한 이들의 모습과 그들 간의 역동적 관계, 이에 따른 회수도자의 정체성을 1) 이 글은 로마 안셀모 대학 수도승 신학부에서 아퀴나타 뵈크만 수녀의 지도로 쓴 Diploma 논문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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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규에서의 회수도자의 정체성

살펴봄으로써 성인이 간직했던 역동적 시각을 배우게 되기를 희망한다.

1. 베네딕도 규칙서 안에서의 강함과 약함 1.1. RB2) 안에서의 약한 이들 베네딕도 성인은 인간적 연약함에 대하여 매우 넓고도 깊은 이해를 가 졌다. 그리고 그의 규칙서는 이러한 깊은 통찰 위에 씌어졌다. 따라서 약 한 이들에 대한 관심은 RB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인간적인 연약함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용어들을 사용한다. ‘infirmitas’(약함)라는 단어는 6번 나타나며 (27,9; 34,2; 34,4; 39,1; 55,21; 72,5), ‘infirmus’(약한, 쇠약한, 잘 못 견디 는)는 16번(4,16; 27,6; 28,5; 31,9; 36,1-4.7-10; 40,3; 42,4; 48,24; 64,19), ‘aegrotus’(병자, 환자: 39,11), ‘aegritudo’(병, 병약함: 35,1), ‘fragilis’(허약 함: 64,13), ‘inbecillis’(약한: 35,3), ‘inbecillitas’(연약함, 쇠약함: 37,2; 40,3; 48,25), ‘delicatus’(약한: 48,24), ‘male habens’(병자: 27,1), ‘simplex’ (우둔한: 2,12), ‘pusillanimis’(소심한 사람: 48,9), ‘morbidis’(병자: 2,8), ‘debilis’(쇠약한: 27,7; 36,9; 39,11)등을 볼 수 있다. 이 용어들은 성규 안 에서 단순히 신체적인 연약함만이 아니라 또한 성격적인 연약함, 지성의 연약함, 영혼의 연약함, 복음서 안의 약한 이들 등 여러 종류의 인간적 2) 이하 ‘베네딕도 규칙서’(Regula Benedicti)를 가리킬 때, ‘성규’, ‘규칙서’ 혹은 약어 ‘RB’로 표기하며, 규칙서의 장과 절을 나타낼 때에는 ‘RB’표기를 생략하고 장과 절만 표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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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1.1.1. 신체적 연약함을 가진 형제들 이는 병자들(4,16; 31,9; 35,1; 36; 39,11; 48,24.25; 72,5)과 노인과 어린 이들(4,70.71; 31,9; 37,2)로서 그들의 나이에 따른 연약함을 지닌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심한 노동을 완수할 수 없으며, 규칙의 모든 규정들을 남들처럼 엄격하게 지킬 수 없는 사람들로서, 이 신체적으로 연약한 이 들은 수도승들의 착한 일의 대상이다. 일상과 관련된 많은 장에서 이 신체적 연약함을 언급하면서 베네딕도 성인은 “ante omnia”(모든 것에 앞서: 6회 나옴: 2,33; 31,13; 34,6; 36,1; 40,9; 48,17)라는 강력한 표현과 함께 지극한 돌봄을 당부하며, 2개의 장 (36장, 37장) 전체를 이들을 위해 특별히 할애한다. 특히 36,1의 “모든 것 에 앞서 모든 것 위에”라는 강조는 병자들에 대한 사랑 가득한 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수도생활과 이전의 교부들 의 규칙들에서 병자 돌봄은 이미 언급되고 있으나, 베네딕도 성인만이 병자들을 돌봄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한다. 1.1.2. 성격적 연약함을 가진 형제들 또 다른 연약함은 성격의 연약함이다. 예를 들어 모두가 같은 필요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서, 어떤 이는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어떤 이는 적게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약 한 이의 필요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4,2.4; 39,1; 48,9; 55,21; 40,3; 35,3). 이와 관련된 절들은 신체적 연약함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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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또한 신체적 연약함으로 인한 성격적 약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 리고 이 연약함은 귀족 집안에서 온 형제들의 나약함의 종류를 포함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39장에서 2개의 접시를 마련하는 이유는 개인적으 로 어려움을 가진 이들에게 선택의 가능성을 주는 것, 즉 번갈아 먹는 것이 아니라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1.1.3. 지성의 연약함을 가진 형제들 베네딕도 성인은 시간의 경과로 해결되지 않는, 지적 능력에서의 타고 난 연약함(42,4; 2,12)을 고려한다. 또한 그들의 나이와 지성에 합당한 방 식으로 다루어져야만 하는 소년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30,1.2). 1.1.4. 영혼의 연약함을 가진 형제들 성인은 영혼의 병듦으로 인해 잘못을 저지르고 파문된 형제들을 ‘약 한 이들’이라고 부르며(27,6; 28,5; 27,1; 2,8; 참조. 72,5), 특히 23장부터 30장은 잘못을 범한 형제들의 ‘치유’로서의 교정을 다룬다. 23장의 속죄부분의 시작에서 영혼이 연약한 이들의 소위 ‘나쁜 품행’ (죄가 되는 내적 태도)을 보게 되는데, 즉 반역, 불순종, 교만, 불평, 멸시 (23,1) 등이며, 이는 영적 돌봄의 범위에 해당된다. 그러나 파문의 벌은 자신의 잘못을 이해할 능력을 가진 이에게만 그 역할을 하게 된다(참조. 23, 4-5). 1.1.5. 복음서의 연약한 형제들 또한 그는 복음서의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가난한 이들(4,14; 31,9; 66,3; 53,15), 헐벗은 이들(4,15), 고통 받는 이들(4,18), 슬픈 이들(4,19),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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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과 순례자들(31,9; 53,1.15)의 연약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약한 이 들과 병자들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31,16: 마태18,6; 53,1: 마태25,35; 36,2-3: 마태 25,36). 이 연약함은 수도원 밖에서 찾아오는 이들의 연약함이며, 수도승에게 어떤 종류의 도움이라도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수도승들은 주님의 말 씀에 따라서 이 약한 이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성인은 모두가 차별 없이(참조. 4,8; 53,1) 수도원 안에 존경을 다하여 받아들여지기를 원하 며, 오히려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진정으로 맞아들이게 됨(53,15)을 강조한다. 1.1.6. 지나친 불편함을 느끼는 형제들 베네딕도 성인은 단지 연약한 이들 만이 아니라 매일의 노동 안에서 있을 수 있는 형제들의 지나친 불편함을 고려한다(35,12-13; 38,10). 그는 주방의 봉사자들에게 불평이나 지나친 노고 없이 봉사할 수 있도 록 시간 전에 정해진 분량 이외의 약간의 음료와 빵을 미리 받을 수 있도 록 허락한다(35,12). 그러나 동시에 그는 주님의 축일에는 이 음식을 취 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격려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독서자에게도 너무 힘들지 않도록 물 탄 포도주 1컵을 마시도록 약간의 호의를 베푼다 (38,10).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배려와 각자의 삶의 거룩한 원칙 사이 의 균형이 존재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약한 이들과 이런 상황들에 대해 아빠스와 공동체가 취해야 할 태도를 언급하면서, 아빠스 또한 스스로 자신의 연약함을 보 고(64,13) 자신의 결점을 고쳐야 한다(2,40)는 의무를 강조한다. 그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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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이들이 숙고해야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데, 바꾸어 말하면 모든 인간 의 타고난 연약함과 모든 형제들의 근본적인 동등함을 제시한다. 모든 이들이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며, 또한 모두는 자신의 잘못의 보속, 결함 의 고침이라는 의무와 권리를 갖는다(46장).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어떤 종류의 연약함을 갖는다. 모두는 구체적 인 현실 안에서 약한 자일 수 있으며, 자신의 연약함을 감싸 안으면서 함 께 살아간다. 이렇게 약한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언급들을 성규에서 볼 수 있으며(27,7; 27,9; 64,19), 이는 또한 강한 이들과 관련된다. 약한 이들 과 강한 이들, 이 두 부류는 모두 하느님 앞에, 그리고 아빠스 앞에 있다.

1.2. RB 안에서의 강한 이들 1.2.1. 가장 굳센 수도승들인 회수도자들 1장에서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승들의 여러 종류들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굳센” 수도승들(1,13)이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분투하면서 수도원 안에서 사는 회수도자들(1,2)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성규는 바로 이 회수 도자들을 위하여 쓰여졌다. 그들은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분 투하기 위하여 순종의 극히 강하고 훌륭한 무기를 잡고(머리말 3) 하늘 의 고향을 향해 달리고자 하는 열정과 신속함으로(73,8) 날마다 하느님 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머리말 9), 신앙과 선행으로 무장한다(머리말 21).

왜 베네딕도 성인은 회수도자들에 대해 ‘가장 굳센’, 가장 강한 자들이 라고 부르는가? 무엇이 여기에서 성인이 의도하는 강함일까? 최상급 ‘fortissimum’은 베네딕도 성인 고유의 표현이다. 그는 수도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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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magnum’(위대한)이라고 부르는 RM 1,75절을 의도적으로 수정한다. Kardong에 따르면 이 표현은 머리말 3절의 순명의 극히 강한 무기를 암 시할 수 있으며, 순명은 장상이 없는 은수자들로부터 회수도자를 구분 한다. 이 경우 회수도자의 “가장 굳셈”은 아마도 순종의 강함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fortissimum’이 회수도승의 숫적 우위를 가리키는 ‘매우 많 은’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Quartiroli에 따르면 베네딕도 성 인은 단지 수도공동체 내의 삶에 대한 높은 평가를 표현하기 원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개인적인 투쟁을 해나가기에 잘 훈련된 독수도자들은 회수 도자보다 더 강해 보인다(1,5). ‘회수도자’(coenobita)란 용어는 공동 삶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koinòs bìos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 함 께 사는 수도승들은 형제들의 도움으로(1,4) 악마를 거슬러 싸운다. 이 영적 투쟁 안에서 ‘형제들의 도움으로 싸우다’, 즉 “함께 싸우다”는 회수 도승들의 ‘강함’이며, 회수도영성의 필수적인 특성이다. 아니 오히려 형제 관계 안에서 아무도 이 힘을 잃어버려서는 안되며, 이런 의미에서 형제적 교정은 이 ‘형제들의 도움’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militare’라는 용어는 전쟁에서의 더 외적인 강함으로 느껴지며, 또한 RB의 이전 번역본들은 이 용어를 영적 투쟁의 의미에서 ‘투쟁하다’ 는 말로 번역해 왔다. 그러나 베네딕도 성인의 시대에는 이 ‘militare’를 규칙의 규율 하에 순명하는 섬김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하였으며, 최 근의 번역들은 이를 ‘섬기다’로 번역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어떻게 ‘servire’와 ‘militare’라는 두 용어를 사용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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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는 ‘servire’라는 용어를 어떤 대상(하느님, 사람, 물질 등)과 함께 구체적 관계 안에서 사용하였다. 반면 ‘militare’는 수도승의 섬김의 종합 처럼 드물게 사용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특별히 순종의 섬김 안에 있는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수고스러움(머리말 2; 72,5; 참조. 58,8)을 표현하면서 스스로의 자유의지(‘libenter’: 1,1; 4,55; 참조. 머리말 17.22.42; 7,5; 58,11)로 순종의 길,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에 분투하기를 초대한다.

베네딕도 성인에게 수도승의 길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다. 규칙의 서 두로부터 그는 우리에게 수도 삶을 하느님께 되돌아감(머리말 2)으로 표 현한다. 이 되돌아감은 수고를 동반한 어려운 되돌아감이고, 참 왕의 인 도 하에 싸우는 투쟁(머리말 3) 이며, 주님의 길을 걷는 것(머리말 21)이 다. 그러나 단순하게 걷는 것은 그에게 충분치 않다. 그는 다른 단어를 선 호한다. ‘달리다’(correre: 머리말 13.22.44.49; 27,5; 43,1), ‘급하게 가다’ (festinare: 18,1; 22,6; 35,17; 73,2; 73,8)가 그것이다. 여기서 그는 우리를 사랑으로 밀어붙인다. 생명의 빛이 있는 동안 수도승은 달리고(머리말 13), 선행을 완수하면서 수도 삶의 완전에로(73,2), 하늘의 고향에로 서 둘러 가며(73,8), 그리고 그 걸음의 끝에 사랑의 감미로움으로 달린다(Pr 49). 그러나 이 달림과 서두름의 태도는 고립된 형상이 아니다. 오히려 하 느님의 부르심은 머리말 8절에서 모두에게 전개됨으로 시작하여, 72,12 의 하느님은 “모두 함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신다”까지이다. 즉 수도 승은 많은 형제들이라는 동반자들 속에서 그의 ‘달림’을 달린다. 특별히 상호 섬김으로 특징 지워지는 형제적 관계는 구원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다. 사랑의 힘에 떠밀려, 형제들의 도움으로 싸우며, 하느님과 형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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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하게 상호 섬기면서 모두 함께 달리는 동안, 모두는 영원한 생명으 로 함께 나아간다. 이 역동적 강함이 회수도자의 ‘모두 함께’의 참된 강함 이다. 1.2.2. 가장 굳센 수도승들의 모델로서의 아빠스 아빠스의 선출에는 2개의 선출기준이 있는데 생활의 공덕과 지혜의 학식(64,2)이 그것이다. 이는 수도연령과 별개로 사람과 그의 역할을 평 가하는 기준이며, 이 기준에 의해 공동체의 수장으로 선출된 수도승은 ‘maioris’(으뜸: 2,1)의 명칭인 ‘아빠스’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더 확실하게 표현하면, 수도원의 아버지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아빠스는 신앙으로 그 의 대리자(63,13)로 세워진 것이다. 즉 집주인이 종들 중의 하나를 종들 의 우두머리로, 집의 대리자로 세우듯이 그리스도께서 그를 하느님의 집 의 으뜸으로 세우신 것이다. 여기서 이 ‘으뜸’은 타이틀이 아닌 자질의 표현이다. 성규 전체에서 ‘순 종’은 회수도자의 으뜸가는 자격조건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순종을 하느 님께 되돌아가는 수단으로 간주하고(머리말 2), 5-7장에서 다룬 세가지 위대한 덕의 하나로 본다. 그리고 회수도자는 이 순명의 극히 강하고 영 광된 무기를 잡고(머리말 3),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으며 (72,7), 공동체 안에서 살면서 규칙과 아빠스 아래서 섬긴다(1,2). 이런 회수도자들은 단순하게 ‘순종하는 이들’(73,6)이라 불리운다. 아빠스 역 시 이들 순종하는 수도승들 중의 하나이며, 또한 이들의 으뜸이다. 모든 수도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의 말과 행실의 가르침에 서 배우면서 그에게 순종하며,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길을 함께 달린다. 다시 말하면 아빠스는 이미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가시적인 모델이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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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불리우는지 항상 기억하면서(2,30; 2,1), 형제 들과 함께 달리는 회수도자의 으뜸의 모델이어야만 한다. 1.2.3. 둘째 모델로서의 ‘더 책임 맡은 형제들’ 아빠스는 돌보고 이끄는 자신의 책임을, 그의 과제를 완수하기에 적합 한 몇몇 수도승들에게 위임한다. 즉 당가(31장), 십인장(21장), 간호사 (36,7), 손님들의 방을 돌보는 형제(53,21), 문지기(66장), 상처를 돌볼 줄 아는 장로들(46,6), 연로하고 지혜로운 형제 센펙터(27,2), 원장(65장), 수 련장(58,6) 등이다.

적합한 사람들을 선택하는 기준은 요구되는 ‘자질’과 함께 관련 장들 안에 표현된다. 당가의 경우 31장의 첫 머리부터 베네딕도 성인은 그 업 무의 실행에 필요한 요인들을 포함하여 10개의 자질을 나열한다(31,1-2). 그리고 형제들과의 개별적 관계 안에서, 그 누구나를 위한 기민함 안에 서, 수도원의 재물을 돌봄 안에서 특히 이 자질들은 구체화된다. 성인은 이 직무에 대한 두드러진 평가와 함께, ‘전 공동체를 위한 아버지’(31,1)라 는 표현처럼 이 직무가 매우 아빠스에 가깝다는, 아빠스에 관한 두번째 지침(64장)과의 확실한 병행을 보여준다. 아빠스의 선출을 위해 세워진 기준들(64,2)은 또한 십인장들을 위해서도 유효하다(21,4).

이 책임을 맡은 형제들은 그들의 섬김 안에서 고유한 책임을 갖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편적이고 근본적이며 깊은 제한이 있다. 즉 모든 책임 자들은 그들의 직무를 아빠스에 대한 순명 안에서 겸손을 가지고 행해 야만 한다는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특히 형제들과의 공동체 관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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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더 책임을 가진 이들, 즉, 원장 (6 5 장 전체), 당가 (31, 4 5.7.12.13.15.16.), 십인장(21,2.5)에 대해 명백하게 겸손과 순명의 중요성 을 강조한다. 구체적인 삶 안에서, 이 ‘더 책임 맡은 형제들’은 공동체 내 에서든 수도원 밖에서든 아빠스로부터 맡겨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빠 스가 섬기듯이 그들 사이에서 섬기면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기 위한 회수도자의 순명의 길 안에서 함께 달리는 것이다. 이 형상은 아빠스와 형제들 간의 중개 역할로서, 강한 수도승들의 둘째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2.4. 약한 이들 앞의 강한 이들 규칙서 내에는 위에 언급된 약한 이들과 그와 대비되는 강한 이들(건 강한 이들) 간의 대조적 형식의 표현들이 많다. – 육체적으로 약한 이에 대해(36,4-5.8.9), 성격적으로 약한 이에 대해(34,3-4; 40,3-4; 55,21), 지성 이 약한 이에 대해(2,12), 영혼이 약한 이(27,1.2-3.6; 2,25), 복음서의 약 한 이들에 대해(53,15). 베네딕도 성인은 매일의 삶 안에서 언제나 나타나는 앞에 언급한 다양 한 약점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구체적 상황 안에서 약 한 이들의 연약함을 고려한다. 극진한 연민(27,9)과 같은 약한 이들에 대 한 성인의 이 사랑은 대조적인 두 개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너희가 살 쪄 보이는 것은 취하고 연약한 것은 버렸다”라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경고(27,7)와, 99마리는 그의 산에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 아 데려오시는 착한 목자의 자애로운 모습을 닮는 것(27,8)이 그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성규에서 단지 약한 이들을 돌봄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 라, 약자들과 함께 공동체와 규칙의 주체인 강한 이들을 같이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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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형제적 관계를 고려하면서도 수도 삶의 완전함에로 나아가기 를 원하는, 약한 이들의 앞에 존재하는 강한 이들의 풍성한 열망을 격려 한다. 게다가 그는 선행과 순명과 겸손 안에서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수 도승들을 언급하면서, 이 기준을 하느님과 아빠스의 ‘선호함’의 유일한 전제조건으로 사용한다(참조. 2,17.21). 64,19(“……모든 것을 절도 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 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에 나타난 종합적인 베 네딕도 성인의 전망은 성인의 고유 표현이며, 이는 단지 약한 이들과 강 한 이들, 약한 이들과 아빠스 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또한 약자에게 허용 하는 것들과 다른 수도승들의 건강한 규칙 준수를 보호하는 것 간의 ‘균 형’이기도 하다. 성인은 구체적인 삶 안에서 항상 분별을 가지고 중용과 건강한 균형의 길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결정은 그의 정신세계 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급진성은 내적 태도에 관계되는 것이지 외적인 형태에 관련되지 않음이다.

1.3. 성규에 따른 회수도자들의 ‘가장 굳셈’의 내용과 근원 베네딕도 성인은 성규에서 인간의 타고난 약함들을 언급하지만, 반면 타고난 강함은 말하지 않는다. 성규의 강함은 2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 다. 일반적으로 개별 수도승들의 강함은 자신의 수도 삶 안에 보여지는 육 체적, 수덕적, 영적 강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강함은 하느님의 선물 (34,3; 40,4)이다. 즉 성인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약함을 정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단지 하느님의 절대적인 강함만을 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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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한 이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뛰어난 규칙준수에 대하 여 교만해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 안의 좋은 것들이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을 알며(머리말 29), 그들 안에서 일하시 는 하느님을 찬미한다(머리말 30-31). 이 강함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 리의 구원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의 ‘강함’이 며, 이렇게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수도승 안에 채워진 하느님의 은총 의 강함이기에, 오로지 주님으로 인한 강함이다. 그러므로 무슨 선행을 시작하든지 주님으로 인해 마치도록 간절한 기도로 청하며(머리말 4), 마 치 초보자처럼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실행에 옮긴다(73,8; 1,13). 베네딕도 성인에게 동일한 회수도 삶을 시작하는(참조. 2,20) 모든 회 수도승들은 가장 강한 이들이다. 이 회수도자들의 총체적 힘은 회수도 자들의 형제적 관계로부터 샘솟는 역동적 힘이며,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 으로 작용한다. 이 ‘동일한 강함’을 전제하며, 성인은 우리에게 위에 말한 강함과 약함 간의 관계적 대조의 구체적 목록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역동 안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돕고, 상호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모두 함께 영원한 생명에로 달리는 회수도 삶의 역동적 비전으로 우리를 이끈다. 어떻게 주님께서는 수도 삶에 이 역동적 힘을 주시는가? 머리말에서, 주님은 언제나 주도하시는 분으로 보여지며(머리말 14), 오히려 모든 장소 와 모든 시간 안에서 항상 바라보고 계시며, 동반하시고 도우시고 지탱 하시는 분이시며, 은총으로 그들을 지켜주신다(머리말 41). 이러한 주님 의 은총은 아빠스, 형제 공동체, 규칙, 영적 조언, 거룩한 독서, 기도, 일 등 구체적 삶의 모든 형태 안에서 수도승들에게 역동적으로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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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성인에게 그의 규칙은 그 목적에 대하여 볼 때 너무 작다(참 조. 73,8). 아니, 그 이상으로 겸손의 장은 어떻게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가리키지만(7,67), 또한 이는 시작이며 은총이다. 인간이 영 적 삶에 진보하는 만큼 모든 인간적 활동은 상대적이 되고, 하느님의 거 대함 앞에 부적합해 보인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의 체험을 통해 인 간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나온 선물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 로 수도 삶의 여정은 강한 이, 거룩한 이, 영웅의 그럴듯한 여정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이, 가난한 이, 죄인의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삶 의 다양한 시기 안에서 영성의 역동성은, 인간의 행동과 감도의 시너지 속에서, 시작하고 마침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안에 뿌리내린다. 결국 거 룩한 힘과 인간의 힘의 동의가 요구된다. 이 역동적 힘은 수도승들을 영 원한 생명으로 함께 나아가게 한다.

2. 규칙서 안에서의 아빠스와 약한 이들, 강한 이들의 관계 2.1. 아빠스의 역할 수도원 안에서 아빠스는 믿음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 그 러나 또한 아빠스는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드러내신 그리스도처럼 영적 아버지이며(참조. 2,2-3), 단지 그리스도에게 목소리를 빌려주는 스승이 며(참조. 2,4-6.11-29), 그리스도께서 양떼를 맡기신 목자요 의사이다. 또 한 주님의 법의 전달자이며(참조. 2,4; 64,9), 하느님의 집의 관리인이며 (64,5.7.21), 모든 형제들을 위한 착한 종이다(6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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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스는 영혼을 다스릴 책임(regere animas: 2,31.34.37)을 가진다. 수 도원의 실제 수도 삶에서 아빠스는 지나가는 것들 또한 돌보지만(참조. 64,17), 맡겨진 영혼의 구원은 가장 중요한 직무이다(참조. 2,33). 아빠스 는 그의 양들 한가운데에 섬기는 자로, 그러나 또한 감독하는 자로, 공동 체의 ‘눈’으로서 존재하며, 깨어있으며, 선견지명과 신중함으로 모든 것을 배치한다. 장상은 수도승 앞에 끊임없이 그리스도인과 수도승 생활의 최 종적 목표, 즉 그리스도 왕국에 동참하는 행복을 제시한다.

2.2. 모든 수도승들에 대해 아빠스가 가져야 할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태도 아빠스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영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서 공동체를 돌본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 구원의 중요성과 자신 의 명칭, 자신이 맡은 직무의 무게와 어려움, 그리고 주님 앞의 헴바침을 잘 알고 항상 기억하며 자신의 직무를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베네딕도의 공동체는 엄청난 권위와 능력을 지닌 아빠스의 공 동체이거나 맹목적 순종의 공동체가 아니며, 오히려 장상의 절대주의에 주의하면서 각 수도승의 책임 있는 행동을 수반하는 성숙한 공동체를 지향한다. 그는 언제나 진지하게 듣는 자로서 모든 형제들에게 열린 귀 를 가지고 있다. 모든 이의 의견을 경청하며, 형제들은 그들의 어려움과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 아빠스와 대화할 수 있으며, 공동체는 적절한 요 구를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수도승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수도생 활에 대해 각자의 책임을 갖는다. 그는 다스리기보다 섬기는, 모든 이의 봉사자이며, 섬김의 권위로부터 나오는 최고의 행복을 알려주어야만 한다. 수도원의 형제들은 종속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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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동료 즉 함께 일하는 자이며, 그 동료들 안에서 아빠스는 두려움 보다 사랑 받는 존재로서 형제들의 유익과 참된 자유를 위하여 섬기며, 아빠스는 그의 수도승들과 함께 그들처럼 걷는 인간이다. 실제로 베네딕 도는 아빠스의 자질에 대하여 언급할 때 어떤 지배의 형태도 고려하지 않으며, 단지 교회 안에서 그의 섬김을 어떻게 감지하는가를 표현한다. 이러한 베네딕도의 공동체는 서로 다투어 섬기는 사랑의 달림 속에서 필요한 모든 일이 평화 중에 이루어지고 유익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역동 적인 공동체이다. 이 평화의 공동체를 위하여 베네딕도가 제시하는 아빠스의 자세는 64 장에서 긍정적인 자질과 부정적인 자질로서 언급된다. 분별, 정결, 절도, 자비, 현명함과 사랑의 태도, 부산떨지 않음, 소심하지 않음, 과격하거나 고집 세지 않음, 질투하지 않음, 너무 의심하지 않음, 신중함 등……. 그러 나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성장과 평화를 위해 중요한 아빠스의 기본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다. 2.2.1. 모두에게 동일한 사랑 아빠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신 것처럼(2,20) 모든 수 도승들을 같은 방식으로 동등하게 사랑해야 하며(2,22)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2,16; 34,2).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이며 동등하다는 바오로 신학 위에 세워진 이런 태도는 참된 공동 삶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이다 (참조. 갈라 3,28; 로마 2,11). 2.2.2. 누구에게나 동일한 규칙 아빠스는 누구에게나 관련된 공적에 따라 같은 규율을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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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이는 모든 이들에 대한 처리의 동등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베네딕 도는 공동체의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편애에 대하여 다만 선행과 순명 이라는 기준을 세우며(2,17.21), 오히려 3번의 언급(2,16 차별 말라 2,17; 더 사랑하지 말라; 2,22 동등하게 사랑)을 통해 모든 이가 같은 애정으 로 사랑 받는 존재이어야 하며 다 같이 적합한 교정으로 치유되어야 하 는 존재라는 더 적극적인 차원의 사랑으로 이끌고 있다. 2.2.3. 각자에게 적합함 아빠스는 각자의 다양한 기질과 본성과 능력에 대해 각 사람에게 최 고로 유익하게 생각되는 방법에 따라 맞추어야 한다(2,31-32; 64,14). 베 네딕도는 아마도 각 개인의 다양한 주체적 상태가 삶의 여정의 일부라고 전제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아빠스는 융통성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각 사람의 필요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는 지를 닮으며 형제들의 상태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육체의 문제이든 영 혼의 문제이든 간에 아빠스는 각자의 상태에 따라 알맞게 돌보고 타이 르거나 설득하거나 책벌해야 한다.

‘교육하다’는 단지 누군가를 위해 행하고 섬기는 것 만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의미의 차원에서 오히려 ‘함께 존재하다’이다. 이는 ‘사랑’이며, 인간 을 환영함이며, 인간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함께 존재함’이다. 인간에 대 한 이런 주의 기울임은 개인의 자질을 드러내고 도우며 성장하도록 격려 한다. 성규는 특히 수도승의 성장이 심각한 방해를 받고 있을 때 그 개인 에 따른 배려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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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약한 이들에 대한 아빠스의 태도 규칙서의 많은 장에서 베네딕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약한 이들의 연약 함을 고려하라고 권고한다. 아빠스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리고 공 동체의 으뜸으로서 다른 이들보다도 더욱 그리스도의 사랑을 살아야 한 다. 우리의 연약함을 지고 우리의 고통을 가져가신 야훼의 종은 아빠스 와 그분과 함께 인내에로 초대된 모든 이들의 모델이다. 그리고 여기서 베네딕도는 효과 있는 치료를 기대한다. 약자와 강자의 병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약자에 대해 관대하 게 견디는 능력은 넓어진 마음의 증거이다. 공동체의 모든 형제들은 서 로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도록 초 대되었다. 다른 이들의 약함을 참아 견딘다는 것은 바실리오에 따르면 약한 이의 연약함을 돌보면서 가져오고 없앤다는 것이며, 강한 이의 참 회와 항구함과 건강함으로 약한 이들이 돌보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 동 속에서, 공동체는 건강해지고 구원으로 함께 나아가게 된다. 2.3.1. 예외적인 약함을 ‘고려함’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의 이상은 베네딕도 성인에게 하나의 기준이 된 다(34,1):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나눔”. 아빠스는 항상 치우침 없이, 수 도자들의 인간적 약함들을 고려해야(34,2; 37,2; 37,3; 48,25; 55,20.21) 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인간에 대한 구체적 감수성을 가지고 약한 이들 의 약함을 고려하며 모든 이를 위한 기준을 정하면서도, 영혼의 구원이 아빠스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필수조건임을 몇 가지 표현들을 통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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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rupulositate”(40,2): 약간의 주저함을 가지고 이는 베네딕도 성인의 고유의 표현이다. 40장에서, 베네딕도는 각자에 게 하느님에게서 주어진 선물들이 다름을 확신하기에, 모든 이를 위한 획일적 기준을 정하는 데에 불편해 한다. 이는 성인의 인간에 대한 존경 의 종교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 깊은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승의 참 유익을 위하여 규칙들을 정한다. - “sufficere”(39,1.3.4; 40,3): 충분할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승들에게 단순한 삶의 스타일을 요구한다. 개인 의 필요에 대하여 획일적인 기준을 정하지 않으며, 지나친 부족이나 또 한 어떤 종류의 과잉의 소유도 경고한다. 충분하다는 이 표현은 ‘만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필리 4,11-12) 사도 바오로의 모범을 따라 이냐시오 성인이 ‘무관 심indifferentia’이라고 부른 정신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런 삶의 형태로 수도승들은 어떤 결핍에도 불평할 필요를 갖지 않는다. - “consentiamus”(40,6): (적어도……) 합의하도록 하자 사도 바오로의 모델을 따르면서, 베네딕도 성인은 금주의 힘이 하늘에 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생각을 펼친다. 따라서 이를 의무로 할 수 없으며 단지 하느님께서 반기실 제물로 ‘제안’할 뿐이다. 성 인은 금주를 드문 일로 예상하지만, 여기에는 2가지 음식의 경우(39장) 처럼 그의 깊은 불편함이 내재되어 있다. 그는 도래한 변화를 받아들이 면서도 고대 전통의 엄격함을 그리워하며, 40,6에서 수도승들에게 포도 주가 부적합함을 천명하는 구절을 인용한다. 매우 민주적인 성인의 이 표현은 형제들에 대한 존중과 수평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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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처럼 ‘돌봄’(cura) 베네딕도 성인은 ‘돌봄’이라는 용어를 특히 약자들과 관련하여 사용한 다. 또한 그에게 이 단어는 각자의 구원을 기억하면서 행하는 사랑과 관 심, 참여와 주의의 표현이다. 아빠스는 착한 목자처럼 그에게 맡겨진 양들 중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모든 부지런함과 최대의 신속함으로써 약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특별 히 아빠스는 병자들이 소홀히 취급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가져야 한다. 2.3.3. 현명한 영혼의 의사처럼 ‘행동함’ 아빠스는 관대함과 사랑으로 병든 영혼을 돌볼 책임을 받았다. 아빠 스는 많은 연민을 가지고, 현명하고 자비로운 의사처럼, 모든 방법과 노 력을 다하여 영혼을 구원에로 이끌기 위하여 모두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수도승의 개인적 상태에 따라 현명하게 가르치 고, 교정하고, 훈계하고 꾸짖는다. 악습이 자라도록 두지 않으며, 각자에 게 가장 유익해 보이는 방법 안에서 사랑과 신중함으로 그 싹을 자른다. 모든 교정 규정에서, 그의 염려는 돌봄이며, 벌은 항상 치료적이다. 베 네딕도 성인이 처벌에 대하여 언급할 때 늘 천상에 대한 그리움과 나란 히 언급하는데, 이는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으로 영원히 지속하는 생명을 그리워하도록 수도승을 자극하는 것이다(4,46). 수도승의 생활이 결국 사랑으로 피어나도록, 아버지께로 돌아온 방탕한 아들의 사랑으로 이끌며, 이렇게 파문된 수도승이 공동체 안으로 다시 일치하는 것이(참 조. 27,9) 이 현명한 의사의 역할이며 행위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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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의 누구라도 타인에게 기대어 살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마치 하숙생이나 자선의 대상으로 취급된다면, 그런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약한 이들이 진정 그들의 형제요 회수도승임을 기억하면서, 아빠스는 온 힘을 다하여 약한 이들을 돌보 고, 그들과 함께 달린다.

2.4. 강한 이들에 대한 아빠스의 태도 아빠스는 강한 이들을 구원의 길에 나아가도록 권고한다: 더 민감하 고 감수성 있는 제자들(2,12)에게는 그의 말로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고, 온순하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다정하게 더욱 정진할 것을 권하며 (2,25), 강한 이들의 풍성한 갈망을 격려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 신 특별한 상급을 기억하게 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미덕과 인내를 권유한다(36,5; 34,3; 40,4). 그러나 강한 이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에 성장해 나감과 동시에 결 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약한 이들의 존재이다. 약한 이들과 강한 이들은 공동체에서 서로 상호작용을 가지는 동반자이다. 그들과 함께 규 칙을 지키고, 함께 성장해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손해가 아니며, 오히 려 진정한 성장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참된 길이다. 아빠스는 이러한 공동체의 정체성과 회수도자의 참된 사랑의 힘과 성장의 역동적 원리를 강한 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RB의 수덕적 차원을 볼 때 강한 이들과 관련된 ‘절제’(abstinentia)는 단 1번만 언급된다(40,4). 오히려 베네딕도 성인은 중용의 관점(39,10: parcitas; 39,1.3.4; 40,3: sufficere)을 보여준다. 그는 수도승의 내면을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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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하여 수덕을 규정한다. 수도승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여 공동체에 최소 의 기준을 제시하고, 각 개인에게 스스로의 수덕적 노력을 위한 공간을 제시하면서, 단지 수덕과 관련하여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열린 자세만을 언급한다(39-40장). RB의 수련은 모든 종류의 뽐내기라는 경박함을 포 기한다. 이렇게 ‘조금 밖에’ 눈에 띄지 않는 수덕을 행하는 수도생활의 영 웅들의 모임에 섞이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여기에 오히려 ‘참된 포 기’가 요구된다. 그리고 이것이 아빠스가 강한 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포 기와 순종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이 규칙서 내에서 하는 강한 요구 중의 하나는 불만에 대한 경고 이다. 보통 불만은 불만족(34,6; 40,8-9)에 기초하며, 명령에 대한 드러난 또는 숨겨진 반역(5,17-19)이며, 결국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공로자 역할 을 하기에, 성인에게는 우선적으로 근절해야 할 대상이다. 이에 성인은 일반적 경고(4,66-67)에 더하여 한 장을 더 할애(34장)하여, 강한 이들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불만을 수도생활의 가치 속에서 설 득하며, 아빠스가 뿌리뽑아야 할 공동체의 성장을 가로 막는 악습으로 서 강조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끈다.

2.5. 아빠스가 항상 지녀야만 하는 분별 강한 이들과 약한 이들에 대한 행동양식은 임기응변이 아니며, 그리고 약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란 온 공동체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빠스의 분별의 원칙은 선입견이 없는 개 방성과 스스로에게 의문부를 붙임, 모든 이에 대한 진전한 존경, 건전한 균형과 신앙의 열린 눈이라는 분별의 태도를 지니고서, 강한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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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구하는 바를 행하고 약한 사람들은 물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아 빠스는 자신과 다른 형제의 한계를 제대로 알고 그 한계 안에서 함께 성 장할 수 있도록 일관성 있는 분별에 따라 결정해야만 한다. 성인이 아빠 스의 분별의 기준으로 생각한 것들을 몇 가지 구체적인 표현에서 볼 수 있다. 2.5.1. ‘더 유익함’이라는 기준 (3,3; 참조. 32,2; 72,7) 아빠스는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과 상황과 환경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 리를 들어야 한다. 성인은 우리에게 자주 주님께서 젊은 이들에게 더 좋 은 것을 드러내 보이신다(3,3)는 그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아빠스 는 모든 형제들에 대해 열린 귀를 항상 가지고, 형제들의 생각을 들은 후 에 나름대로 생각해야 하며, 더 유익할 것(3,2)을 행해야 한다. 또한 작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원로들의 조언의 목소리를 항상 들어야만 한다 (3,12). 그의 분별은 일회적이거나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극히 허약한 병 자의 치유 후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고기를 금하는 것은 단순히 형평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형제의 삶의 구원을 위하여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 이다. 아빠스는 공동체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최고의 유익인 영혼들의 구원을 향하여 더 유익한 것을 찾으며 분별을 지속해야 한다. 2.5.2. ‘불평할 정당한 이유가 없도록 함’이라는 기준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승들의 불평의 악습을 강하게 금지한다. 그러나 또한 아빠스는 모든 것을 영혼을 구원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약한 이이 건 강한 이이건 모든 수도승들이 불평할 정당한 이유 없이(41,5) 그들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배치해야 한다. 즉 아빠스의 명령들은 모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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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한 불평을 줄이기 위하여, 분별과 중용(64,17)의 특성을 가지고 항상 주의 깊고 신중해야만 한다. 그리고 성인은 이를 위하여 아빠스에게 배 려의 권한을 규칙으로 제시하고 있다(참조. 39,6-9; 40,5-7; 41,4-5; 35,1213; 38,10). 2.5.3.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함’이라는 기준 ‘ne quid nimis’(64,12), 즉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이라는 문장은 아빠 스의 하나의 행동양식이다. 이 균형은 단지 교정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 라, 오히려 그의 모든 결정들에 대해 고려(64,17-19)되어야 한다. 왜냐하 면 그의 숙고는 언제나 모든 수도승들의 영혼의 구원을 향하여 있기 때 문이다. 그렇게 분별을 가지고 강한 이들이 구원의 길에서 항상 노력하 고 나아가도록 하면서 동시에 약한 이들이 뒤로 물러날(머리말38; 48,24; 64,19) 동기를 갖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2.5.4. ‘전체 양떼를 보호함’이라는 기준 아빠스는 약한 이들 - 잃어버린 양들 - 을 양우리로 다시 데려오기 위 하여 최대의 부지런함과 많은 연민을 가지고 돌보며, 마지막 한 마리 양 까지 찾아오고 싶어 하는 착한 목자의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며 모든 방 법을 동원하여(참조. 28,1-5)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나 또한 한 마리의 병 든 양이 온 양 무리를 전염시킬(28,8) 위험성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 하면 전망은 항상 형제들의 일치, 공동체의 일치이기 때문이다. 추방이 라는 단죄(28,6-7)는 전체 공동체를 끌어안은 책임을 가진 아빠스에게 있어서 무리를 보호하는 최후의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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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경계함 아빠스는 자신의 약함을 항상 바라보아야만 하며(64,13), 모든 이들을 보살피면서 “자기에게 되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 라”(4,9)는 자비롭고 겸손하신 주님의 명령과 함께 “부러진 갈대를 꺾어 버려서는 안 된다”(64,13)는 말씀을 기억해야만 한다. 사실 어느 누구의 지식도 단편적이며 누구든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리고 이것을 성인도 잘 알고 있기에, 규칙의 여러 곳에서 ‘이렇게 해야 한 다’고 이상을 내세우고는, 어떤 현실의 장애를 인식함에 따라 본래의 의 도를 바꿔서(예를 들어 11,11-13; 49,1; 40-5-7; 68장 등) 고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빠스는 자신이 다른 형제들과 같이 약한 인 간(참조. 2,20)이며, 함께 같은 길을 달리는 동등한 동반자로서 자신 또 한 공동체 형제들 안에서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회 수도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약한 이들의 태도 공동체는 두 가지 수준의 삶이 있다. 이상적 수준으로서 기도, 노동, 식사, 휴식, 독서와 순종의 리듬이며, 또한 공동체는 노력하는 개인들, 즉 그 이상을 구체화하고 거기에 본질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분투하는 개인 들로 구성된다. 이상으로 제시된 수도 생활 안에서 구체적인 약함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회수도자의, 인간의 근본조건이다(참조. 49,2; 40,6). 한 주체로서의 회수도자가 하느님과 타인과 자신과의 관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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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주체적 온전성을 더 크게 이룩할 때, 그는 수도승 생활의 객관적 이상 을 더 충만하게 살게 되며, 공동체가 더욱 건강해지고 강해진다. 수도승 개인과 장상은 문제, 실패, 죄, 영적 죽음들을 하나의 도전으 로, 은총의 선물로, 성령의 생명 안에서 성장하는 기회로 보고 그에 응답 하여, 치유와 성장을 체험하도록 나아갈 수 있다. 이때 순종은 올바른 주 체성이 주관주의로 타락하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강력한 무기이며, 매우 치유적인 것일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공동체 안의 그 누구의 주체성도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각 자는 주체성과 자기 중심적인 주관주의를 혼동하여 자기의 뜻으로 사는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특히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배려되고 돌보아져야 하는 약한 이들의 주체성은 외적인 의존의 형태로 인해 더욱 과소평가되 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약한 이들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자신의 주체성을 온전히 살지 못하 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자신의 약함을 안고 회수도자 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지혜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 회수도자 로서의 자신만의 길, 구원의 길에서 도망치지 말고 멈춤 없이 형제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들 또한 달려야 한다.

3.1.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겸손하기 규칙서 내에서, 약한 이들은 아빠스와 모든 형제들에게서 모든 상황 안에서 배려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더 필요한 사람은 더 사랑 받는 자 또 는 더 가치 있는 자로 믿으며 교만해 져서는 안 된다(참조. 34,4).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의 참된 체험을 통해 모든 것을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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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자비로 인해 받음을 알게 된다. 모든 우리들의 한계들과 가난함은 하 느님께 손을 열도록 우리를 빈 손이 되게 한다. 인간은 빈 그릇이 되고,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부어질 수 있다. 약한 이들은 자신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을 수 있는 겸손에 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약함을 통해, 이 작아짐을 통해 겸손으 로 성장하는 것이 약한 이의 몫이다.

3.2.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섬겨지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베네딕도 성인은 약한 이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 어야 한다고 훈계한다. 그는 그들이 형제적 관계를 생각하면서 고려하고 숙고하고 묵상할 능력이 있음을 믿으며, 단지 약한 자의 행동에 대한 훈 계만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약한 이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섬김을 받고 있음(참조. 36,4)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돕는 형제들 이 슬퍼하지 않도록 그들의 돌봄에 적합한 방식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약한 이들은 형제적 조화 안에서 그들이 해야 할 바를 해야 하 며, 다른 방식의 상호 섬김으로 구원 사업 안에서 위치한다.

3.3. 회수도자의 정체성을 잊지 말기 약한 이들은 ‘규칙과 아빠스 밑에서 분투하는 이들’(1,2)이라는, 회수도 자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약함 때문에 멈추기 를 원하는 마음과 도망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주체적인 한 인간으 로서의 자유란 그가 그렇게 신중히 준비해 얻은(참조. 58장) 회수도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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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정체성을 어떻게 의합하게 지켜나가는가에 관계되는 것이지, 그것을 취소하는데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늘의 고향(참조. 73,8; 4,46) 에 도달하기 원하는 자신의 참된 갈망을 기억하면서, 항상 자신의 구원 과 치유를 진심으로 희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또한 약함에도 불 구하고 서로에게 책임이 있는 역동적인 회수도자 공동체의 한 일원이며, 그의 다른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 겸손과 순명과 참된 희망에서 우러나오는 약한 이들의 참된 힘은 주님의 힘이며, 그는 이렇게 공동체 의 역동적인 달리기에 참가하며, 이렇게 모두 함께(pariter: 72,12)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순명한다.

4. 강한 이들의 태도 베네딕도 성인이 이상으로 바라는 모든 수도승들의 생활은 언제나 사 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49,1). 그러나 성인은 매우 현실을 잘 아 시는 분이다. 이 수도 삶의 이 이상적 수준과 수도승들의 현실 간의 차이 와 내용들을 잘 알고 있으며(49,2), 그래서 주저하는 마음으로(40,2) 약 한 이가 물러서지 않고 강한 이가 갈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도록(64,19) 서로 충분하다는(39,3.4) 동의를 구하며 권고한다(40.6; 49,3). 성인에 따르면 수도승의 응답은 전 삶에 걸친 섬김이다. 순종과 하느님 의 일, 상호 섬김, 손님 섬김이 강조되며, 이는 수도승의 평소의 섬김의 분 량이다. 성인은 성령의 즐거움과 자발성과 같은 섬김의 태도를 권고한다. 그러나 이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빠스의 허락과 동의에 따라 섬기 는 순종과 겸손이다(49,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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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규의 공동체의 원리인 순종과 침묵, 겸손 그리고 형제애, 의견을 경 청함, 분별, 인간의 존엄성을 고려함, 건강한 균형 등의 조화로움 안에서 내적 자유와 기쁨, 평화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평화는 기본적으로 각 개인의 마음의 평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분별의 열매로서의 전체 공동 체의 평화이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 그러나 지나치지 않음’이라는 베 네딕도 성인의 공식에 따라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산다. 그러나 이들을 ‘가장 굳센 수도승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진 실로 함께 사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규칙서 앞부분 에서는 순종의 형태로 강조되지만, 끝부분에서는 다른 이의 유익을 찾 는 것으로 이해된다(72,7).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 다투어 존경하고, 상호 순종하며, 서로의 육체적 정신적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견디며, 형제적 사랑으로 서로 섬기고, 언제나 다른 이의 유익을 찾는 것이다. 이 삶은 공동체 내에 성장하는 역동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상호 동의의 역동 속 에서 수도생활의 ‘길’을 달릴 때, 그 길 위에는 우리를 지탱케 하는 다른 존재들이 존재한다. 이 길을 형제들과 함께 서둘러 달리면서 수도승은 외적으로는 그대로인 매일의 삶을 안으로는 완전히 다르게 살아내는 넓 은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상적으로 제시된 이런 강한 회수도승의 태도 이면에는 언제 나 현실이 있다. 성인은 불평을 반복해서 엄금한다. 특히 포도주를 다룬 40장에는 ‘ante omnia’(무엇보다도 먼저: 40,9)라는 표현으로 강조된다. 강한 이들은 부족해도 불평 없이 하느님께 감사하며,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48,7). 사도 바오로의 삶의 자세(필리 4,11-13)처럼,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알며 어느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주님에 힘입 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며 순종함의 자유를 누리는, 온전한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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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종이 되기를 희망하여야 한다. 강한 회수도승의 이 보편적인 태도들은 구체적인 실생활 속에서, 특히 약한 이들을 만날 때, 그리고 공동체의 책임을 나누어 받은 이들이 그들 의 직무 안에서 형제들을 만날 때 실현된다.

4.1. 약한 이들 앞에서의 태도 규칙서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대조형태’의 표현들이 있다. 성인은 자주 약한 이들에게 말할 때 또한 강한 이들에게 향한다. 아빠스의 명령 을 따르면서, 강한 이들은 불평과 슬퍼함이 없이, 아니 오히려 하느님의 선물인 자신의 강함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34,3; 참조. 40,4), 구 체적으로 약한 형제들을 사랑하면서 함께 구원의 길에 나아가야만(참 조. 2,12.25; 64,19) 한다. 강한 이들은 공동체 전체의 평화를 기억하며 주 님께서 그들을 낫게 해 주시도록(28,4-5) 약한 이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병으로 인하여 이상한 행동이 몸에 익을 수 있는(참조. 36장) 약한 이들 을 모든 경우에 견뎌야 한다. 그렇게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평화 중 에(34,5)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강한 수도승의 열정은 아주 구체적인 방 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특별히 그가 다른 이들을 만날 때의 태도는 그의 사랑을 특징지을 것이다. 병자의 돌봄의 우선권에 대한 3중의 단언으로서 병자를 돌봄은 공동 체 전체의 의무이며(36,1), 따라서 강한 이들은 사랑에 찬 이해를 가지고 약함 이들의 약함에 대하여 특별한 주의를 가져야만 한다. 여기서 ‘주의 를 가지고 깨어있음’은 어떤 행동적인 태도라기보다, 상대를 받아들이고, 그를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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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있는 태도를 의미한다. 34장에서 ‘강함’은 ‘필요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강한 이들 은 자기 자신의 필요성을 슬픔 없이 감소시키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므로 기쁨은 항상 참으로 영적인 선물의 표시인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강한 이들은 더 필요함을 가지는 약한 이들을 섬기는 목표에로 자기 자신의 필요성을 줄여간다. 강한 이들 만으로 또는 약한 이들 만으로 배타적으로 구성된 공동체 는 스스로 자멸된다. 강한 이들과 약한 이들의 변증법적인 공존은 공동 체와 그들의 역사적인 연속성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는 약한 이들이 강하게 되는 문제를 다룸이 아니며, 또한 강한 이들이 그들 스스로 ‘약 한 이들과 함께 있는 약한 이들’이 되는 것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 게 존재할 것인가’, 즉 함께 사는 것을 다루는 것이다! 이 둘 모두 서로서 로 삶의 원천이다. 일치에로 나아가는 것은 ‘나’로부터 ‘우리’에로, 자기 주 장의 본성적인 무질서함에서 상대에게 동의함으로 나아가는 능력일 수 있을 것이다.

4.2. 공동체에서 더 책임을 맡은 형제들의 태도 성규에서는 ‘돌봄’이라는 단어를 특히 약한 이들, 병자들, 어린이들, 손 님들, 가난한 이들, 순례자들, 파문당한 이들과 관련하여 사용한다. 성인 에게 이들은 더 우선적인 이들이며, 하느님을 찾고 발견할 수 있는 특전 을 받은 장소이다. 책임을 맡은 형제들은 아빠스의 지도에 따르면서 최대로 신속하게 맡 겨진 이들을 돌보아야만 하며, 규칙을 지킴에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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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해야만 한다. 그들의 섬김은 수도원 안에서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개되며, 따라서 공동체 평화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당가는 병자들과 어린이들, 손님들과 가난한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전 공동체의 아버지처럼 돌보아야만 한다. 그는 형제들 이 슬퍼하지 않도록 해야만 하고, 부당한 청함에도 경멸이나 거만하지 않게 합리적으로 겸손하게 거절해야만 한다. 또한 모든 신속함으로, 아 무 소홀함이 없이, 중용과 마음의 평온함을 가지고, 아빠스의 명령에 따 라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행한다. - 십인장(21장)은 하느님의 계명과 아빠스의 배치에 따라 모든 것에 대 하여 교만함 없이 그들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돌보아야만 한다. - 간호하는 형제(36,7)는 병자들을 인내심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부지런함과 신속함을 가지고 돌보아야만 한다. - 손님들을 맞아들이고 섬기는 형제(53,17.21)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 는 자세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특히 가난한 이들과 순례자들에 대 한 신속함과 현명함으로 맡겨진 손님들을 돌보아야 한다. - 문지기(66장)는 수도원에 찾아온 이들을 현명함과 성숙함, 가장 준비 된 모습,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온갖 온유함과 열정적인 사랑 으로 응대해야 하며,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다. - 영신적 장로들은 자신과 형제들의 상처를 모든 이에게 폭로하거나 알 려지게 함이 없이 돌볼 줄 안다(46,6). - 연로하고 지혜로운 형제 센펙터(27,2)는 영혼이 약한 이들을 남모르 게, 현명함과 특별한 돌봄으로 위문하며, 용기를 주고, 보속하도록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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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위로한다. - 원장(65장)은 교만함이 없이 섬겨야 하며, 아빠스에게 순명해야 하 고, 규칙을 준수하는 데에 다른 이들보다 더 신속하여야만 한다. - 수련장(58,6)은 수련자들을 온갖 주의와 영혼을 얻을 수 있는 능력 을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당가, 병자를 보살피는 이, 문지기와 손님을 맞이하는 이들의 섬김에 대해 요구된다. 이들은 하느님의 시야에로 들어 가, 겸손의 첫 단계의 행동처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본다. 카시아노가 “인내는 연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강인함의 표시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처 럼, 약한 이들과 함께 하는 강한 이들의 인내는 회수도자의 확장된 사랑 이며, 다만 은총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진실로 함께 살 수 있다.

결론 수도원은 완전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다 양함으로 인해 자신의 이상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 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의 무거운 짐이 아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아픈 형제들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시각을 제거한다. 성인은 규칙서 전체에 걸 쳐 다양한 인간적인 약함들과 각자의 주관성을 이해하면서 형제들의 동 등함을 전제한다. 모든 수도승들은 각자의 다른 조건에 따라 강한 사람 일 수 있고 약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현대 공동체는 베네딕도 시대의 공동체와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수도승들은 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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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규에서의 회수도자의 정체성

의 ‘산물’ - 즉 포스트 모더니즘, 개인주의, 핵가족 사회 등 - 이기 때문이 다. 현대 사회에는 ‘진실로 함께 사는 것’을 어렵게 하는 요소들이 많기 에, 우리는 이 어려움을 안고 이 공동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회수도자로 서 우리들의 정체성을 찾아야만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RB는 더 약한 이들, 이해와 도움이 더 필요한 이들의 편에 있다. 아빠스와 강한 이들은 최대의 신속함으로 자신들의 위치에서 약한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불평과 불편함 없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 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관대하게 돌보면서, 그 안에서 강한 이들은 하느님 의 구원의 길을 달린다. 그러나 약한 이들의 편에서 보면 그들 또한 겸손 과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회수도자로서의 정체성을 항시 기억하면서, 그들의 삶의 형태 안에서 공동체의 ‘함께 달림’에 참여한다. RB의 공동 체는 모든 수도승들이 이러한 사랑의 일치 속에서 사는 공동체이며, 서 로가 서로의 삶의 샘이 되며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이다. 이 역동 속에서 모든 이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으로 함께 달리며, 강한 이들과 약한 이들로 구성된 이 공동체는 베네딕도의 평화로 특징 지워지는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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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생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기술 허성석 로무알도

머리말 공동체 생활,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이 나름의 경험을 통해 얻은 필자의 결론이다. ‘공동체’란 말은 ‘한 몸’이란 뜻이다. 하지만 단순히 물리 적인 일체(一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뜻으로도 하나임을 전 제한다. 곧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 마음이 갈리고 뜻이 다르면 한 몸을 이루었다고 해도 참된 공동체라 할 수 없다. 한 마음 한 몸을 이룬 다는 것이 어디 말같이 그리 쉬운가! 그래서 조화로운 공동체 생활은 구 성원 모두가 끊임없이 노력해서 이루어야 할 과제이자 이상이다. 공동체는 생각과 관점, 성격과 성향이 서로 다르고 다양한 성장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구성된다. 따라서 서로의 차이점을 안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수도공동체뿐만 아니라 가정공동체, 본당공동체 등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함께 사는 기술의 습득여부에 따라 공동체 생활은 걸림돌도 될 수 있고 디딤돌도 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영적 기술을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 안에서 찾아보려 한 다. 베네딕도 규칙(이하: 성규)은 그야말로 함께 조화와 평화를 이루며 사는 지혜로운 기술을 제시하고 있다. 이 소고에서는 주로 성규 6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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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생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71-72장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기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상호공경 공동체 생활을 위한 첫 번째 기술은 상호공경이다. 베네딕도는 공동체 의 차례와 구성원 상호관계에 대해 논하는 성규 제63장에서 이렇게 말 하고 있다. “후배는 선배를 공경하고 선배는 후배를 사랑할 것이다”(성규 63,10). 여기서는 선후배의 관계에서 서로 가져야할 태도를 말하고 있다. 즉 공경은 후배가 선배에게, 사랑은 선배가 후배에게 드러내는 태도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성규 제4장에도 나온다. “연로한 이를 공경 하라. 연소한 이를 사랑하라”(4,71-2). 또 후배가 선배를 부르는 ‘공경하올 아버지’란 뜻의 ‘논누스’란 호칭(참조. 63,12)에도 공경이 전제되고 있다. 이 뿐 아니라 형제들 역시 자기 아빠스를 공경해야 한다(참조. 63,13-14). 이상에서 보면 공경은 분명 아래서 위를 향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 에게 익숙한 일반적 사회통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배가 후배를,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공경할 수는 없는가? 경직된 위계제도나 권위적인 사회 안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 러나 베네딕도는 단순히 위를 향한 공경에서 더 나아간다. 그는 성규 제 63장 17절에서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로마 12,10)라는 로마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수도승들을 상호공경으로 초대하고 있다. 특 히 수도승이 가져야 할 좋은 열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규 제72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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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공경하기를 먼저 하라”(72,4)고 권고하고 있다. 베네딕도는 모든 면 에서 형제들이 서로 다투어 공경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선배 역시 후배 에게 공경심을 보여주어야 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베네딕도 공동체의 새로운 면모가 아닐까 한다.

사실 공경에는 선후배, 장상과 수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따로 없고, 모든 이가 서로 공경해야 한다. 베네딕도는 편향적 공경이 아니라 보편적 공경을 강조하고 있다. 선행의 도구에 관한 성규 4장 8절, “모든 사람을 공경하라”는 구절은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는 스승의 규칙(이하: RM) 병행 구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RM 3,8)는 구절에서 의도적으로 ‘네 부모’를 ‘모든 사람’으로 바꾸었다. 또 성규 제53장에서도 “모든 이에 게 합당한 공경을 드러내라”(53,2)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베네딕도에게 있어 공경은 모든 이가 서로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으로 보편적이며 상호 적이다.

상호공경은 조화로운 공동체 생활을 위한 중요한 영적 기술 중 하나이 다.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 공경심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고 정중하게 대할 때 공동체는 갈등과 불목에서 평화와 일치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호공경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가정공동체나 수도공 동체 안에서 또 어떤 인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공경한다는 것이 얼마 나 힘든 일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공경심이나 존경심이 없기에 서로 무례하게 막 대하게 된다. 종종 수도생활의 연륜 과 상관없이 수도자들이 거칠고 무례한 모습을 보게 된다. 수행은 분노 에서 온유로 나아가는 과정과도 같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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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고 무례하게 된다는 것은 수행의 길을 역행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상호공경은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리 스도께 대한 사랑이다. 베네딕도가 성규 제53장에서 “모든 이에게 합당 한 공경을 드러내라”(성규 53,2)는 이유는 “방문하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 도처럼 맞이할 것이다”(성규 53,1)라는 환대의 원칙에서 잘 나타난다. 또 성규 제63장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빠스는 그리스도를 대리한 다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아빠스’라고 불려야 한다. 그가 그것을 요구해 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공경과 사랑 때문이다”(성규 63,13). 여기 서 볼 수 있듯이 공경의 궁극적 대상은 그리스도이다. 결국 상호공경은 그리스도론적 동기를 갖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공경하게 될 것 이다. 무심코 남에게 드러내는 거칠고 무례한 행동은 결국 그리스도께 대한 것임을 늘 명심한다면 서로 다투어 공경하라(참조. 성규 72,4)는 베 네딕도의 가르침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것이다.

2. 상호사랑 베네딕도가 제시하는 공동체 생활을 위한 또 다른 영적 기술은 상호 사랑이다. 베네딕도는 성규 제63장 11절에서 “선배는 후배를 사랑할 것 이다”라고 말한다. 또 성규 제4장 71절에서도 “연소한 이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사랑의 경우는 위에서 아래로 향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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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이란 말이 있듯이 사랑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보여주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경우 역시 선배에게만이 아니라 후배에게도 해당한다. 윗사람뿐 아니라 아랫사람도 윗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성규 여러 곳에서 사랑이 상호적임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은 수도승이 가져야할 좋은 열정을 말하고 있는 성규 제72장 8절이다. “순수한 형제 적 사랑을 실천할 것이다”(72,8). 형제들은 서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한 다. 베네딕도는 우리에게 “애덕을 저버리지 말라”(성규 4,26)고 촉구하고 있다. 장상과 형제들의 관계에서도 상호사랑의 권고가 나타난다. 베네딕도 는 아빠스에게 “형제들을 사랑하라”(성규 64,11). 또 “모든 이를 한결같 이 사랑하라”(성규 2,22)고 권고한다. 동시에 형제들에게도 “자기 아빠스 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라”(성규 72,10)고 한다. 그리고 아 빠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사랑받도록 힘써야 한다” (성규 64,15)고 함으로써 아빠스 역시 형제들의 사랑을 받는 대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베네딕도는 심지어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한다(참조. 성규 4,31). 그 동 기는 물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성규 4,72)는 권고가 이를 잘 말해준다. 형제들 상 호간의 사랑, 장상과 형제들 간의 사랑 외에 자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 이 베네딕도의 가르침이다. 이처럼 베네딕도에게 있어 사랑은 연령이나 성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주고받는 상호적, 보편적 성격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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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공경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베네딕도는 사랑이 공경을 동반한 다고 가르친다. 사랑은 정중하고 공경은 항상 사랑을 포함한다. 사랑 없 이 상대방을 공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공경을 드러내지 않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 를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서로 사랑하려 노력한다면 그 공동체는 평화로울 것이다(참조. 성규 34,5; 65,11). 하지만 공동체의 평 화를 유지하기는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상호공경과 상호사랑의 정 신은 지나간 옛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오늘날 수도공동체들 안에 과연 이러한 정신을 찾아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때론 서로에 대해 너무 무례 하고 공격적이 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만일 우리 안에 공경 대신 무 례가, 사랑 대신 미움이 팽배할 때, 우리는 수도생활에 나아가면 갈수록 말할 수 없는 미움(↔사랑)의 감미로 마음이 좁아져(↔넓어져) 하느님의 계명 길을 거슬러(↔달려) 가게 될 것이다(참조. 성규 머리말 49).

3. 상호순종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 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세 번째 영적 기술은 상호순종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것이 순종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다. 그래서 보통 장상에 대한 형제들의 순종을 이야기한다. 이것 은 전통적 순종의 개념으로 다분히 수직적이다. 베네딕도는 성규 제5장 에서 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빠스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성규 2,2)으로 믿기 때문에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 빠스에 대한 순종의 근거이다. 또 수도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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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참조. 필리 2,8)를 본받는다. 순종은 결 국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며, 성부께 순종하신 ‘그리스도처럼’ 하는 것이 다. 이처럼 순종의 신학적 동기는 그리스도께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베 네딕도는 순종이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자연적 으로 나온다”(성규 5,2)고 말하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순종의 토대를 그리스도께 굳게 놓으면서 새로운 차원으 로 나아간다. 그는 장상에 대한 순종에서 더 나아가 형제들 상호간의 순 종을 권고한다. 성규 제71장은 ‘상호순종’ 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는 바처 럼 순종의 수평적 차원을 말하고 있다. “모든 이는 순종의 미덕을 아빠 스에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형제들끼리도 서로 순종해야 한다”(71,1). 상 호순종을 규정하는 성규 제71장은 하느님께서 장상을 통해서 뿐만 아니 라 형제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따 라서 형제들은 서로 순종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가게 된다 는 것이 베네딕도의 가르침이라 하겠다. 베네딕도는 성규 제72장에서는 “서로 다투어 순종하라”(72,6)고까지 한다. 순종하는데 서로 경쟁하라는 것이다. 순종의 이 수평적 차원에 대한 강조는 분명 베네딕도의 새로움 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형제들 상호간의 순종이 가능한가? 더군 다나 어떻게 선배가 후배에게 순종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 역시 순종의 그리스도론적 토대에서 나온다. 우리가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 안에도 그분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상호순종은 그렇게 어렵게만 다가오지 않 을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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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 노력하게 되고 서로 순종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모두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종의 본질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상호순종의 구체적 자세들을 알 수 있다. ‘순종’(oboedientia)의 개념은 ‘듣다’라는 라틴어 동 사 ‘아우디레’(audire)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순종의 일차적 의미는 ‘듣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으로만 끝난다면 참된 순종은 아닐 것이 다. 순종은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즉 들음으로 시작해서 들은 것 을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고 하겠다. 결국 순종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신 다. 그 말씀을 경청하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중 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올바른 실천이 나온다. 하느님 말씀을 잘 못 듣고 그분 뜻을 엉뚱하게 알아들을 때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

잘 듣기 위해서는 침묵과 마음의 개방이 전제된다. 마음을 열고 침묵 중에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경청할 수 있다. 마음을 굳 게 닫아걸고 있거나 침묵하지 않으면 결코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음 성을 들지 못한다. 형제들 통해서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을 열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순종은 또한 겸손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베네딕도는 “겸손의 첫 단계는 지체 없는 순종이다”(성규 5,1)라고 말하며 이 둘의 긴밀한 상호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담의 교만은 불순종을 낳았고 예수의 겸손 은 순종을 낳았다. 전자는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고 후자는 생명을 가 져다주었다. 이처럼 겸손은 순종의 토대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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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순종이란 들음과 실천, 마음의 개방, 침묵, 겸손과 연결된다. 따라 서 상호순종의 자세란 먼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각자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의견이나 생각만을 주장하는 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 어 있기에 참된 인격적 통교가 어렵고 늘 엇박자가 난다. 그래서 형제의 말이나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경청하려는 자세는 공동체 생활에서 매 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닫힌 마음은 남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 중에서만이 경청이 가능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를 아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지혜를 터득할 때 보다 원활한 공동체 생활이 가 능하지 않을까! 끝으로 겸손의 자세이다. 겸손이란 정확한 자기 인식에 서 나오며,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한 다. 공동생활의 어려움 중 하나는 서로의 차이점에 대한 수용이다. 서로 성격과 취향, 생각과 행동이 다르기에 갈등과 긴장이 생긴다. 이러한 차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겸손의 단계에 오 를수록 점차 수월해 질 것이다. 상호순종에서 나오는 또 다른 자세는 하 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자세이다. 하느님 뜻의 핵심에는 바로 사랑이 있 다. 그래서 순종은 사랑과 긴밀히 연결된다. 서로 순종하는 것은 곧 서로 사랑하는 것과 같다. 상호순종의 길을 통해 우리의 공동체 생활은 한결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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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호봉사 끝으로 영적 기술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상호봉사를 말하고 싶 다. 베네딕도는 주간 주방봉사에 대한 성규 제35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제들은 서로 봉사해야 한다”(35,1). 또 “사랑으로 서로 봉사할 것 이다”(35,6). 상호공경, 상호사랑, 상호순종의 자세에서 서로에 대한 봉사 가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봉사는 공경, 사랑, 순종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상호봉사 역시 그리스도론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형제에게 하는 봉사 는 결국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네딕도는 공동체 안팎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잘 영접하라고 한다. 공동체 안에서는 특별히 병자(성규 36장)와 노약자들(성규 37장), 공동 체 밖에서는 손님들, 특히 가난한 이와 사회적 약자, 순례자들, 신앙의 가족들(성규 53; 66장)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봉사를 강조하고 있다. 이 처럼 우리 봉사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께 있다.

봉사 혹은 섬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상 대를 위해 내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기인한 이런 봉사의 자세가 없다면 공동체 생활은 삭막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모두가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 것만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공동체 라기보다는 일종의 기숙사와도 같을 뿐이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기쁨과 평화, 사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서로 섬기려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은 공동체에 참다운 활력을 불어넣고 공동체 안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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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영적 기술의 동기는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관건은 그리스 도를 만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 안에 현존하심을 믿는다면 자연히 각 사람을 함부로 막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안 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한다면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봉사하게 될 것이다.

맺음말 베네딕도는 성규 제1장 13절에서 회수도승을 네 부류의 수도승 중 ‘가 장 강한 부류’(fortissimum genus)의 수도승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로 제시되고 있는 독수도승이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때 회수 도승보다 영적으로 더 강하고 뛰어나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베네딕도 는 독수도승을 ‘수도승생활 초심자의 열정에서가 아니라 수도원 안에서 오랫동안 시험을 거친, 즉 형제들의 진지에서 잘 훈련된 이’(참조. 성규 2,3.5)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수도승은 수도공동체 안에 서 수행을 통해 단련된 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회수도승에 게 ‘가장 강한’이라는 최상급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는가?

필자의 소견으론, 개인적으로 비교해 보았을 때는 분명 회수도승은 독 수도승보다는 약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걸 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어 서로의 부족을 채워줄 때 더 강해질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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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때 비로소 회수도생활은 베네딕도의 표현대로 가장 강한 부류의 수도승을 양성하는 학교가 될 것이다. 반대로 공동체 생활은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영적 기술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때 그렇다.

이처럼 공동체 생활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나 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성 베네딕도가 제 시하는 영적 기술들은 바로 디딤돌이 되게 하는 수단들이다. 공동체 생 활에서 상호공경, 상호사랑, 상호순종, 상호봉사라는 이 영적 기술들을 얼마나 적절히 잘 사용하느냐가 우리의 과제이다. 따라서 이런 영적 기 술들을 터득하고 그것들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공동체 생활은 걸 림돌도 될 수 있고 디딤돌도 될 수 있다.

이 모든 기술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동력은 바로 그리스도께 대 한 사랑이다. 베네딕도는 “모든 것에 앞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라”(성규 4,21)고 말한다. 또 “아무것도 그리스도보다 선호하지 말라”(성규 72,11) 고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공동체 구성원리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하나’(unum in Christo)로 불림을 받았다(참조. 성규 2,20; 갈라 3,28; 에페 6,8). 또한 그리스도는 공동체 모든 구성원을 일치시키는 핵이 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몸, 한 마음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구성원 각자가 그리스도를 향한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나아간다 면 이 영적 기술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때 상대방 안에 현존하신 그리스도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모두 함께 영원한 생명 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 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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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생활에는 무엇보다도 깊은 신앙과 지극한 인내가 필요하다. 하 느님을 찾아 나선 이 여정, 이 불편한 삶은 깊은 신앙으로 무장하지 않고 서는 결코 마칠 수 없다. 또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다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참조. 성규 72,12) 공동체 생활은 서로의 결점과 한계에 대한 지극한 인내 없이는 도 저히 불가능하다. 이에 베네딕도는 공동체 생활을 위한 주옥같은 권고 라 할 수 있는 성규 제72장에서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72,5)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공동체 식탁에서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형제가 농 담반 진담반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만약 내가 함께 살 사람을 선택한다 면, 여기 있는 사람 중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 웃었지만 전적으로 공감하는 눈치였다. 그렇다. 공동체는 내 선호에 따라 함께 살 사람을 선택하여 모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우리 각자를 불러주셨기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신앙과 인내로 결코 쉽지 않은 이 여정을 함께 걷 는 것이다.

우리 삶은 적자인생임을 명심해야 한다. 본전생각하면 그리스도의 길 을 따를 수 없다. 그 길은 바보의 길이다. 낮아짐으로써 올라가고, 자기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얻는 역설의 길이다. 이 길은 사랑 없이는 갈 수 없 는 길이기에 결국 사랑의 길이라 하겠다. 사랑의 길은 자기애(philautia) 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즉 거짓 자아(false self)에서 참된 자아 (true self)를 찾아가는 여정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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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생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의 다음 말씀을 늘 명심하도록 하자. “진정 우리 가 수도승생활과 신앙에 나아갈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 마음이 넓어져 하느님 계명 길을 달려가게 될 것이다”(성규 머리말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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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찾기와 수도승들의 문화 루르드 성모 발현 15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한 교황님의 사도적 프랑스 방문(2008년 9월 12일~15일) 세계 문화 대표자들과의 만남에서 하신교황 베네딕도 16세의 말씀: 파리, 베르나르도 회관에서 2008년 9월 12일 금요일

교황 베네딕도 16세 김 순복 베다 옮김

추기경님, 친절하신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현재 클레르보의 베 르나르도 성인의 영적 아들들이 세운 역사적인 장소에 모였습니다. 이 장소는 추기경님의 전임자인 고 쟌마리 루스티거(Jean-Marie Lustiger) 추기경이 그리스도교 사상과 현 사회의 지성적 예술적 흐름 사이의 대화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세운 것인 줄 압니다. 특히 정부의 대표로 참석하신 문화부 장관을 비롯하여 기스카르 데스탕 (Giscard d'Estang) 장관과 시락(Jacques Chirac) 장관에게 인사드립니다. 또한 유네스코 (UNESCO)의 대표님들과 파리 시장님과 기타 부서 책임자들에게 함께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프랑스 학술원의 저의 동료들, 제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그분들에 대한 인사를 놓치지 않으렵니다. 브로글리(Broglie) 왕 자님의 따뜻한 말씀에도 감사 합니다. 우리는 내일 오전에 다시 만날 것 입니다. 저는 프랑스 회교 공동체의 대표님들께서 초대에 응해 주셔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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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찾기와 수도승들의 문화

모임에 참석하신데 대해 감사드리며 이 라마단(회교도의 사순시기-역자 주) 시기에 은혜 많이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다양한 세 계적 문화를 대표해서 오신 친애하는 손님들과 존경하올 대표님들에게 저의 따뜻한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저녁, 서방신학의 기원과 유럽 문화의 근원에 대해 말씀 드 리고 싶습니다. 처음에 제가 우리가 모인 이 장소가 의미심장한 상징적인 곳이라고 말씀 드린 것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이 장소는 수도승 문화 와 결부된 곳입니다. 젊은 수도승들이 자신의 성소를 좀 더 깊이 깨닫고, 수도승으로서의 삶을 좀 더 충실히 살기 위해 여기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곳은 수도승 문화와 연관된 곳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해 줄 것이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냥 과거의 세계를 만나보는데 지 나지 않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서방 수도승의 본질 자 체를 숙고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유럽 역사에서 수도 승들이 해낸 영향력을 고찰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민족들의 대이동으로 기존 문화가 완전히 파괴된 가운데 새로운 국가들이 우후죽순(雨後竹 筍)으로 형성되었을 때, 그래도 수도원에는 고대 문화가 살아남아 있어 그 고대 문화에서 서서히 새로운 문화의 싹이 터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어요? 무슨 동기로 사람들이 수도원에 몰려들었던 가요? 그들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던가요?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살았던 가요?

그들의 동기는 굉장히 기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Quaerere Deum’, 즉 하느님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영구적이며 안정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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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연 없는 혼란의 시대에, 본질적인 것, 참으로 중요하며 믿을 수 있 는 것을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을 찾게 되었던 것입 니다. 그들은 비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을 찾고 싶었고, 오직 진짜 중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간에서 는 그들이 취한 행위가 ‘종말론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러나 이것을 세상의 종말이나 그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하는 현세적 인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인간실존의 의미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 들은 일시적인 것을 찾지 않고 영구적인 것을 찾았습니다. 바로 ‘Quaerere Deum’ 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어둠 속에서 찾아 헤매거나, 길 없는 광야의 탐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이정표를 달아주어 그들이 그 이정표에 따라 길을 똑 바로 찾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길은 성경책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음에는 말씀의 문화가 요구되었습니다. 쟌 레클레 륵 (Jean Leclercq)에 의하면 서방 수도승들에게 종말론과 문법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입니다(참조. L'amour des lettres et le désir de Dieu,p14). 하느님을 갈망(désir de Dieu)한다는 것은 말씀을 사랑 (l'amour des lettres)하는 것인데, 그 말씀은 모든 차원에 침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경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고 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언어의 비밀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하고, 언어 의 구조 또한 이해되어야 하며, 언어의 표현력 역시 알아야 하는 것이었 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세상의 학문이 중요했던 것입니 다. 학문은 언어를 바르게 이해하는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데는 말씀의 문화가 필요했기에 수도원에는 말씀의 길을 제시해 줄 도서실이 꼭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 길을 구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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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주기 위해서 수도원에는 학교도 있어야 했습니다. 베네딕도는 수 도원을 ‘dominici servitii schola’, 즉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고 불렀습니 다. 수도원은 ‘eruditio’(양성), 즉 인간 형성에 기여하는 곳이라는 겁니다. 교육이란 결국 인간이 하느님 섬기기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지요. 그러나 그뿐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교육에는 말씀의 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지성의 형성도 역시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 찾음의 본질이 되는 말씀의 문화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 찾는 길을 열어주는 말씀 과 그 자체가 길이 되는 말씀은 공유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습 니다. 말씀은 각자의 마음을 꿰찌르는 것입니다(참조. 사도행전 2,37), 그 레고리오 대 교황님은 말씀은 마치 예리한 송곳으로 잠자는 우리 영혼 을 찔러 하느님을 위해 깨어있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참조. Leclercq, p.35). 그러나 말씀은 서로에게도 깨어 있게 하지요. 말씀은 단 지 각 개인의 길에서 신비적 잠심을 유도할 뿐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여 정에서도 함께 잠심하도록 이끕니다. 그 때문에 말씀은 그냥 생각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말씀을 올바르게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Rabbi 식 학교에서와 같이 수도승들에게도 개인의 독서는 육체적 활동과 맞먹 었습니다. 쟌 레클레륵은 수도자들이 의미를 밝히는 형용사 없이 독서 (legere, lectio) 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 노래하거나 필사하는 것처럼 육채 와 정신을 함께 사용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참조. p.21).

다시 한 걸음 내딛어야 되겠군요.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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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걸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특히 하느님은 시편에서 우리가 하 느님께 여쭐 말씀을 알려주시며 우리의 삶이 그분과의 높고 깊은 대화 를 통해 그분을 향해 나아가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시편은 우리가 어 떻게 시편을 노래할 것이며, 어떻게 악기로 반주할 것인지 항상 제시해 주니다. 하느님 말씀의 기도는 언어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거기에 음악이 동반되어야 충분해집니다. 그리스도교의 전례 음악 중에 두 편의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의 노래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즉 그 하나는 예수님 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영광(Gloria) 찬미가이고, 다른 하나는 이사 야 예언서 6장, 바로 하느님 면전에서 부른 세라핌의 거룩하시다 (Sanctus)라는 찬송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천사들과 함 께 합창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며, 마침내 그 말씀을 최상 목표에 도달하 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쟌 레클레륵은 이 제목에 대해 다시 더 언급하 기를 “수도승들은 인간이 받은 구원의 신비를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에 합당한 멜로디를 찾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클뤼니 수도원의 살아 남은 얼마 안 되는 기둥머리(柱頭)에는 그리스도론적 상징으로 여겨지 는 각 음조(音調, 토누스)가 새겨져 있습니다(참조. p.229).

베네딕도는 그의 권위 있는 규칙서에서 수도승들이 시편기도를 노래 할 때의 모습을 “Coram angelis psallam Tibi, Domine(주님, 천사들 앞 에서 당신께 시편을 노래 하리이다)”(참조. 시편 138,1)라는 시편말씀을 인용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공동기도를 할 때는, 하느님 나라 의 광활한 광장에서 수많은 하늘나라 시민들과 함께 천체의 음악이며 우주 조화의 근원인 높은 수준의 음악을 합창하며 기도 한다 는 것을 의 식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수도승들이 사소한 실수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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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부른 시편노래를 비판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노가 전해준 플라톤 전통의 표현을 사용한 클레르보(Clervaux)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심각한 통찰력에 공감이 갑니다. 그는 잘못 불러 뒤죽박죽이 된 노래는 ‘이질지 대(異質地帶, regio dissimilitudinis)’로 추락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아우 구스티노는 회개 전의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이 말을 플라톤 철 학에서 빌려 왔던 것입니다(참조. 고백록 VII 10,16).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범죄로 하느님을 떠남으로써 하느님과 멀리 떨어진 ‘이질 지대’에 추락 했습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하느님을 반영할 수 없게 되어 하느님과 다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자신과도 다 르게 된 것입니다. 베르나르도가 인간이 범죄로 추락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과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이 구절을 수도승들의 잘못 부른 노 래에 견주어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히 강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은 베르나르도가 얼마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입 니다. 이것은 음악의 문화가 존재의 문화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수도승 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의 위대함과, 그 말씀이 요청하는 참된 아름 다움에 어울리는 방법으로 기도하고 노래해야 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 니다. 하느님과 대화하고 싶은 내적 요구와 하느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으 로 하느님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 내적 요청에 따라 서양 음악의 위대한 전통이 수립된 것입니다. 그것은 작곡가들이 자기 자신을 내세워서 남기 려는 자신의 ‘창작력’ 과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창조 자체 음악의 내 적 법칙에 ‘마음의 귀’를 주의 깊게 열어서 창조주께서 세상과 인간 안에 심어 준 음악의 본질적인 형태를 알아듣고. 하느님다운 고귀한 음악을 찾아냄과 함께 참 인간존엄성의 음악을 찾아내어, 순수 하느님의 고귀한 음향이 울려나오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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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찾는 데서부터 서방 수도생활 안에 발전된 말씀의 문화를 어 느 정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간단하게나마 수도승들이 만났던 말 씀의 책과 책들의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순수 역사적 이며 문학적인 차원에서 고찰할 단순한 책이 아니고, 천년 이상의 세월 속에 편집된 문학의 집합체이며, 이들 책 내부의 일치는 분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이 긴장은 우리 그리스인들이 구약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스라엘 성경에 이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들이 소위 성경주석의 열쇠로 신약성경을 이스라엘의 성경에 연결시키 고, 이스라엘 성경을 그리스도에게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볼 때 그 긴장 이 더 커집니다. 일반적으로 좋은 이유에서 신약에서는 성경(Bible)을 “the Scripture”라는 단수형으로 부르지 않고, “the Scriptures”라는 복수 형으로 부르는데, 이는 성경책들 모두가 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 말씀이라는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수형의 사용은 하느님 의 말씀은 인간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고, 하느님은 오직 인간의 중 재와 말과 역사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명확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말씀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특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현대적 방법으로 말하면, 성경책들의 일치와 그 책에 있는 말씀의 성질은 순전히 역사적인 방법만으로는 파악 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요소는 복잡다단하고 인간적입니다. 이런 관점 에서 보면 첫 눈에 중세기적 표현방식이 황망하게 보입니다. “littera gesta docet-quid credas allegoria……”(참조. 덴마크의 아우구스티노 Rotulus pugillaris, 1).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문자는 역사를 가르치지 만 네가 믿어야 할 것은 비유가 말해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론 적이며 성령론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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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것을 더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해가 있어야 하고, 성경이 공동체 안에서 생겼고 공동체가 성경으로 살기 때문에 성 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공동체 안에서 일치 를 이루고, 공동체 안에서 선경 전체의 연결된 의미를 드러냅니다. 다시 한 번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말씀에는 넓은 차원의 의미가 있고, 그 넓 은 차원의 의미는 역사를 이루는 말씀이 살아 있는 공동체에서만 드러 납니다. 의미가 넓고 다양하다고 해서 말씀의 가치가 상실되는 것은 아 니고 실제로는 충만한 아름다움과 위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교가 단순히 고전적 의미의 책을 대 표하는 책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 다(참조. par.108). 그리스도교는 이 복잡다단한 인간 역사의 실체를 통 해 말씀의 신비가 퍼지는 Logos 자체를 받아 들입니다. 성경의 이 독특 한 구조는 시대에 따라 항상 새로운 도전이 됩니다. 이 성경의 구조는 본 질상 오늘날 우리가 근본주의라고 칭하는 일체를 배제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 자체의 진의는 결코 성경 본문의 문자와 같지 않기 때문입 니다. 하느님 말씀 자체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초월성과 전체의 내적 움직 임에 따르는 생명 진행을 이해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전체의 역동적인 일치에서만 많은 책들이 하나의 책이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이 하시는 세상에서의 활동은 인간의 말과 인간의 역사에서 드러납 니다.

이 제목의 드라마는 전부 성 바오로의 서간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그 는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2코린 3,6)라는 강력한 표현으로 문 자를 초월해야 된다는 것과 전체를 보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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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다시 이어서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 다”(참조. 2코린 3,17)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오로에게 더 가까 이 다가가서 들어보면 자유의 영에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 고, 자유에는 내적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성경 말씀에 대한 크고 넓은 시야를 갖게 됩니다. 즉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 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 3,17). 자유를 주는 영은 성경 주 해를 하는 개인의 이념과 견해가 아닙니다. 그 영은 그리스도이고, 그리 스도는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성령과 자유의 말씀으로 더 앞으로 나아갈 지평선이 열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관적인 자유의지에는 개인과 공동체가 문자 자체에 충실할 의무보다 더 높은 새로운 의무, 즉 통찰력과 사랑에 충실할 의무를 지녀야 하는 분명한 한 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무와 자유의 긴장은 성경 주해에서의 문 자 문제보다 훨씬 더 커서, 수도승 생활에 대한 고찰과 그들의 활약에 결 정적 영향을 주었고, 거기서 유럽 문화의 특징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 긴장은 오늘 우리 세대에도 새로운 도전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은 두 극단의 양극 현상으로, 그 하나는 주관적 자유방임(自由放任)이고 다른 하나는 광신적인 근본주의(狂信的 根本主義)입니다. 오늘의 유럽 문화가 의무는 없고 자유만을 잉태한다면 필연적으로 근본주의적 광신과 주관 적 자유방임의 손에 놀아나는 격이 될 것입니다. 의무 없는 자유방임은 자유가 아니라 자유의 파괴입니다.

지금까지는 베네딕도가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는 전제 하 에 말씀하신 내용에서 “Ora”, 즉 기도에 대해서만 탐색했습니다. 사실 기 도가 수도승 생활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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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우리가 적어도 수도승생활의 두 번째 성분인 “Labora”, 즉 일(노동)에 대해서도 간단하게나마 고찰하지 않으면 수도승 생활을 불완전하게 탐 색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육체노동은 노예의 몫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참 자유인이며 현명한 사람에게는 오직 정신적인 일을 마꼈 고, 육체노동은 정신세계의 고차원의 일을 감당할 수 없는 낮은 사람들 에게 마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인 전통은 아주 다릅니다. 모든 위대 한 Rabbi(스승)들은 육체노동의 직업을 함께 가집니다. Rabbi인 동시에 이방인 세계의 복음 선포자이며 천막제조공인 바오로도 자기의 노동으 로 생활비를 충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외 없이 유다 스승들의 전통 이었습니다. 수도승들은 이 전통을 물려받았습니다. 육체노동은 그리스 도교 수도승생활의 구성요소입니다.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에 학교에 대해서 특별히 따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실제로 우리가 보 아 왔듯이 가르침과 배움이 전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규칙서 중 한 장은 분명히 육체노동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참조. RB 48장). 아우구 스티노는 저서 중 한 권을 전부 노동에 관해 썼습니다. 유다 사상에서 받 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 요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태야 될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을 변호하기 위해 “지금 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 5,17)라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그리스-로마의 세계는 창조주 하느님을 몰랐습니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최고의 신이 물질의 창조를 하기 위해 손을 더럽혀가 며 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세상을 “만든 자”는 하느님 보다 낮은 신 (神)인 데미우르고스(Demiurgos 세상창조자-플라톤의 학설)라는 것입 니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은 다릅니다. 오직 한분의 하느님이 창조자라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일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 과정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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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은 인간 그리스도로서 역사 안에서 힘든 일을 해냈습니다.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 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하느님 자신이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그 창조는 끝없이 계속됩니다. 하느님은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인 간의 일은 하느님의 일하심을 닮은 것이며, 인간은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누어 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은 말씀의 문화 뿐만이 아니라 노동문화에도 관여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럽의 존 재, 유럽의 정신, 세상에 미친 영향 등 그 모든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정신은 인간이 이룬 일과 역사가 창조 사업에 동참된 것임을 알아야 이 동참이라는 어휘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나올 것입니 다. 이런 평가가 없는 곳에서는 인간은 교만해져서 창조주인 하느님과 동등한 신분으로 세상일을 하게 되어, 그렇게 세운 세상은 빨리 파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민족대이동 전의 옛 제도는 무너진 상태에서, 수도승들이 취한 기본자세는 ‘Quaerere Deum’, 즉 하느님을 찾겠다는 확 고함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이것은 참으로 사필귀정(事必歸 正)의 철학적인 자세였다고 말할 수 있지요. 무너진 제도에 연연하지 않 고 그를 뛰어 넘어 영원과 진리 자체인 하느님을 찾는 자세를 취했으니 말입니다. 수도승이 된 사람은 넓고 높은 길을 출발했지만, 신속히 그가 필요로 하는 방향을 찾아냈습니다. 그 방향은 성경 안에서 하느님이 친 히 하신 말씀을 듣고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먼저 하느님을 알기 위해 힘써야 했던 것입니다. 비록 수도승생활 의 길은 엄청나게 멀리 뻗은 길이었어도 그 길은 진정 수도승이 받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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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 속에 내재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수도승의 찾음 속에 이미 찾아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참음이 가능하게 되도록 먼저 찾으려는 의지를 일깨울 뿐 아니라, 그 찾는 길이 말씀 안에 숨어있 다는 것과 그보다도 그 말씀 안에서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가야할 길을 보여 주셨기에, 그 길을 따라 하느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첫 활동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람들에게 전한 말 이 삶이 되도록 확신을 주는 선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안 에 있는 길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먼저 밖으로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필요 성을 알리는 전형적 표현방법이 베드로의 첫째 서간에 나오는데, 중세기 신학에서 신학자들의 업무를 위한 성경적인 기본이 되었던 그 구절을 옮 기면, “여러분이 품은 희망의 근거(logos)에 관하여 물어도 해명(apologia)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Logos는 Apologia가 되어야 합니다. 즉 말씀은 해명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속한 그룹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포교적인 선포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냥 그들의 신앙에서 나오는 내적 인 요구로 말씀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 의 하느님이시며,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여주신 참 하느님이시고, 마지막 엔 사람으로 파견하신 당신 아드님 안에서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심으로 써, 모두가 갈망하고,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기다렸던 답을 주신 하 느님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보편성과 하느님을 향 해 열려진 이성의 보편성이 그들에게 하느님을 선포할 이유인 동시에 의 무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민족성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는 문화적 관습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관계되는 진리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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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인간을 찾아 인간 문제를 해결하려는 ‘외적 활동’인 그리스도교 선교 의 기본 구조는 성 바오로가 아레오파고에서 말한 연설에서 볼 수 있습 니다. 아레오파고는 탁월한 정신계가 최고 수준의 문제를 만나 토론하 는 학술의 광장이 아니라, 새로 유입된 낯선 종교 문제를 다루는 법정이 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바로 바오로가 여기서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 같군(사도 17,18)”이라고 비난 받았던 곳입니다. 이 비난 에 바오로는 대꾸하기를,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신전들을 살펴보니 ‘알려지지 않은 신에게’라는 말이 새겨진 제단도 있습디다. 나는 여러분 이 알지 못한 채 공경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알려주고자 합니다”(사도 17,23). 바오로는 알려지지 않은 신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알지 못하고 또 이제 아는 분, 즉 ‘모르다가-아는 분’을 선포합니다. 결국 알기 위해서 찾는 분, 그러면서도 다시 모르게 되며, 알아낼 수 없는 분 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심연의 사고(思考)와 감정은 아무튼 하느님이 존 재해야 된다는 것을 압니다. 최초 우주 만물이 시작될 때, 그것은 맹목적 우발사건(偶發事件)이 아니라 자유에 기인하는 것이어서, 비합리성이어 서는 안 되고, 창조적인 합리성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모든 이가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로마 1,21)에서 분명히 말한 것 과 같이, 여하튼 그분을 안다 할지라도, 생각으로 창안해낸 하느님은 전 연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 지식은 비현실적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 다.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께 다가가지 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분께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도인의 새로운 선교는, 하느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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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모든 백성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맹목적인 사실이 아니고, Logos 자체이며, 이 사실은 우리 육신 안의 영원한 이성적 현실 인 “Verbum caro factum est”(요한 1.14), 즉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 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간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적 인 현실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받아 드리기 위해서는 항상 하느님의 겸 손에 응답하는 인간의 겸손, 이성의 겸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현대의 우리가 당면한 상황은 바오로가 아테네에 있었던 시기의 상황 과는 여러 가지로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많음에도 불 고하고 여러 가지 유사한 점도 있습니다. 우리의 도시는 아테네의 도시처 럼 제단들과 여러 신상(神像)들이 없습니다. 이제 하느님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모르는 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질문은 그 많은 신상들 뒤로 숨겨두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했 던 것처럼, 현대의 신 부재(神不在)에서도 역시 신에 대한 질문이 침묵 중에 쇄도되고 있습니다. “Quaerere Deum”, 그래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 님이 나를 찾아내도록 하는 것은 지난 시대보다 덜 필요한 것이 아닙니 다. 하느님에 관한 질문을 비과학적인 주관적 영역으로 몰아넣는, 순 실 증논적 문화(實證論的文化)는 이성의 항복과 인간의 가장 높은 가능성 의 포기로 인해 인간성이 추락되는 매우 중대한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 을 것입니다. 유럽 문화를 건설한 하느님의 찾음과 그분의 말씀을 들으 려는 준비된 자세는 오늘에 있어서도 진정한 문화의 기본으로 남아있어 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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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 생활과 사목 목자적 보살핌에 대한 성 베네딕도의 통찰1) 데이빗 톰린스 엄미정 에바마리아 옮김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전달하도록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되었다.”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제10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 선언은 내가 ‘우리 자신이 바로 교회’임을 이 해하게 된 중요한 핵심이다. 더불어 이 말은 신앙인인 우리가 주목할 만 한 가치가 있다. 교회인 우리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 러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도록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되었다. 이것 은 교회 사명의 분명한 본질인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사명이 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속한다. 우리는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 고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굳이 학위를 받 거나 선교지역을 찾아 외국 땅으로 건너갈 필요는 없다. 오늘, 여기에서,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우 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전하는 예 수님의 사명을 이미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승도 예외는 아니다. 그

1) 2009년 10월 27일 호주 멜버른에 있는 성 패트릭 가톨릭 대학교에서 열린 제3차 연례 월리 실버스터 기념 강연으로 Tjurunga 78(2010), 5-14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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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자신들의 특별한 방식으로 이 사명을 수행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 는 교회로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타 인과 나눌 특권과 책임을 지닌다. 오늘 밤, 교회의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월리 실버스터(Fr. Wally Silvester) 신부님을 기억하는 이 강연에서 나는 베네딕도 성인의 목자적 보살핌에 대한 몇 가지 식견을 나누고자 한다. 그는 인간의 마음과 복음 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셨다. 베네딕도의 이러한 통찰은 그가 생 존했던 당대부터 현재까지 수세기에 걸쳐 그를 현명한 안내자로 만들었 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는 시토회 수도승들은 교구신부, 활동수 도회 회원들, 다양한 연합회나 혹은 봉사자들의 행적과 비교될 만한 수 도원 외부사목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상호 보살핌과 봉사를 요 구하는 친밀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 내가 발표하고자 하는 것들이 여러 분이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여정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 을 드러내고 전함에 있어 어떻게 그들에게 봉사해야 하는지를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베네딕도 성인은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학업 을 위해 로마에서 짧은 시간을 보낸 뒤에 그는 수도승이 되어 수비아코 에 수도원을 세웠다. 후에 몬테 카시노에 다른 수도원을 설립한 뒤 540년 경에 돌아가셨다.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대화집』 제2권에서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 책에 따르면 성인은 530년경에 규칙서를 썼는데 이것이야말로 성인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임 에 틀림이 없다. 규칙서는 머리말과 73개의 장으로 길지 않고 합리적이 고도 간결하게 작성되었다. 이 규칙서는 공동체 안에서 규칙과 아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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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살아가는 회수도승들을 위해 작성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라틴어 전례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서방 수도승들의 규칙서가 되었다. 더욱이 규칙서는 수도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주 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찾는 많은 이들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영적 생활의 현명한 안내자인 그의 규칙서를 찾는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규칙서가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를 연구하도록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은 50년의 나의 수도생활에 버팀목이 되었고 더욱이 지난 21년 간 타라와 라(Tarrawarra)에 있는 우리 공동체를 돌보는 동안 나는 아빠스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서 영감과 격려를 얻고자 노력했다.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두 가지 측면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하나 는 아빠스와 공동체 사이, 즉 아빠스의 목자적 보살핌인 수직적 관계이 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 회원들간의 상호 보살핌과 봉사인 수평적 관계 이다. 또한 수평적 관계는 수도원의 손님에까지 확장된다. 베네딕도가 두 가지 입장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오늘 밤 주제와 관련된 의미가 있으며 더 나아가 이 둘은 서로를 비추어준다. 베네딕도 성인은 다음과 같이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아빠스는 남 을 지배하기보다는 유익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RB 64,8). 이것은 분명히 개별적이고도 모든 상황의 사목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간단히 말해서, 사목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우선되어 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 다”(요한 10,10)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목자적 보살핌을 이해하고 있는 착한 목자이다. 타인보다 자신을 강조하는 것은 “다만 삯꾼”(요한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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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목에 대한 헌신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 숨을 내어 놓는”(요한 10,11) 전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베네딕도가 아빠스 에게 “그의 목표는 다른 수도승들에게 유익한 도움이 되어야 함을 인식 하도록” 요구하는 배경이다. 역사적으로 종종 아빠스들은 이 ‘목표’를 충 분히 인지하지 못했다. 권력과 지위는 어떤 특정 공동체의 아빠스들에게 기억상실증을 유발시켰다. 아빠스들과 다른 ‘하느님의 종들의 종’들은 자 기가 책임을 진 이들을 위해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어 주는 대신(참조. 요한13,1-16), 이들 위에서 “세도를 부렸다”(루카 22,25). 베네딕도는 우리 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관계를 너무 쉽게 왜곡한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우리는 그가 제시한 방향을 주시하며 우리의 목표가 다른 사람에 게 이로움이 되도록 우리의 여정을 늘 살펴야 한다. 이 분명한 목표의 문제는 성인이 아빠스에 대해 쓴 다른 장에서도 찾 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의 삶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 기며, 이 세상의 덧없는 것과 일시적인 것에 너무 큰 관심을 보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는 중요한 ‘영혼들의 보살핌’을 맡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 야 한다”(RB 2,33-34).

일 또는 재산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돌보는 것을 첫 자리 에 두어야 한다. 성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도 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RB 2,35). 베네딕도회 아빠스는 다른 많은 봉사 직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업무에도 책임이 있다. 특히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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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빈약할 때는 일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 맡겨진 이들의 삶…… 영혼의 보살핌”이 최우선이어야 한다. 몇 년 전 베 리 성 에드먼드(Bury St. Edmund) 수도원의 연대기를 읽었다. 그 곳은 중세 영국의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수도원 중의 하나였다. 나는 아빠스 들이 법적이고 행정적인 문제에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것에 놀랐 다. 혹자는 아빠스가 수도원의 원장에게 공동체를 위한 목자의 일을 위 임했기를 바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맡겨진 이들을 소홀하게 다 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그 반대, 즉 재정 관리를 위임하고, 자신은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 여기서 베네딕도가 가르치는 것은 교회 안의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 교황, 사제, 본당 사목자, 부모인 우리 모두는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생각 해야 하는 소명이 있지 않는가? 우리의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달리 행 하는 것은 복음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진리에 대 해 일관된 증언을 하셨다. 우리 각자가 마음에 들어 하는 본보기가 있을 텐데 나는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여인과 나눈 대화(요한 4,1-42) 를 좋아한다. 그곳에서 그분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종교와 문화의 두 경계선을 넘어 그녀를 만나셨다. 요한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여인과 이 야기하고 있는 그분을 발견하고 놀랐다”라고 우리에게 전한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자신의 개인적 권리와 고유성을 인정하여 예수님께서 유대 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어 자신에게 다가오신 사실에 대해 비슷한 반응 을 보였다. 안식일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과 같은 예수님의 태도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그 분은 바리 사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 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고 하자.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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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것을 잡아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니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 12,11-12). 그분이 바리사이 들을 놀라게 한 것은 “사람이 양보다 훨씬 더 귀하다”라고 말한 것뿐만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보다 더 귀하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세상 만물은 인간을 그 중심과 정점 으로 삼고 인간에게 질서 지어져야 한다는 의견에는 신자이건 비신자이 건 일치한다”(12항). 그러나 이것은 이론일 뿐 현실에서는 자주 빗나갔다. “먼저 찾으라……, 그러면 그 외의 것도 곁들여 받을 것이다”라는 예수님 의 지혜와, “덧없는 것과 현세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한 베네딕도 성인의 경고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우리 삶 에서 사람들을 하찮은 자리로 내몰게 되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이는 모 든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사례는 가정생활에서도 일 어날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 서, 더 많은 물질과 교육기회를 아이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더 긴 시간 일 하려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면 불행히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부부 와 자녀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결국 그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어 깨어질 만큼의 긴장 관계가 되고 만다. 성장해야 할 것이 침 체되고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빠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첫 자리에 두도록 가르치셨던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도 이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의도에 반하여 어떻게 빗 나가는지 정기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 들을 보살피는 일을 가볍게 다루거나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베네딕도 성인은 사람을 중요하게 다루기 위해서 어떤 것이 개발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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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하고 어떤 것을 피해야 하는지 그 행동의 범위를 제시하셨다. 나는 피 해야 할 것들을 먼저 짚어보고자 한다. 베네딕도는 아빠스로서 부적절 한 성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소란을 부리지 말고 소심하게 굴 지도 말 것이며, 과격하거나 고집하지도 말고 질투하지 말며 너무 의심하 지도 말 것이다”(RB 64,16). 베네딕도는 항상 ‘그가 무엇을 했느냐’보다 는 ‘그 자리에서 그가 어떻게 했느냐’에 더 관심을 두었다. 또한, 대화의 상대가 가능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 더 마음을 쓰셨 다. 예를 들면, 그는 수도승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수용하기가 불가 능하거나 어려운 이유를 아빠스와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도승에게 솔직하게 말하라고 격려하는 한편, “적당한 때에 인내성 있 게 자기의 불가능한 사유를 장상에게 말씀드릴 것이다. 이것은 거만하거 나 반항하거나 반대하는 태도로써 하지 않아야 한다”(RB 68,2-3)고 조 언한다. 베네딕도는 우리의 내재된 성격 특히 주관성에 대한 관심이 탁월했다. 그는 최상의 결과는 자신의 내면이나 타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소심하게 의제를 설정하거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거나 황소처럼 돌진하거나 이유 없이 소 리를 지르거나 수다를 떨어서는 긍정적인 결과를 이룰 수 없다고 믿었 다. 그래서 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도승에게 어느 한쪽도 어지러운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을 때인 “적당한 때를 선택할 것”을 권고하는데 그 ‘적당한 때’란 상대방이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을 때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는 그 이유들을…… 인내성 있게 말해야 한다”며 이치에 맞게 행하는 것을 중히 여긴다. 잘난 체 한다거나 잘못을 파헤치려는 자세는 좋은 결 과를 가져올 수 없다. 성인은 이런 이유로 “흥분하고, 근심하고, 극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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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완고하며, 질투하고, 지나치게 의심하는” 성격들은 아빠스나 어느 누구의 사목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공동체에 대한 그의 권고는 그런 사람을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 안에 는 이러한 부정적인 성품들이 조금씩 존재한다.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사목을 개선하고자 하는 관점의 목표는 이런 특성들 이 만들어내는 잡음을 가능한 최대로 의식하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또한 목자적인 관계를 도와주는 긍정적인 태도와 행동을 제안한다. “두려움을 받기보다는 사랑 받기를 힘써야 한다”(RB 64,15). 이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사랑 받기 위해 자신의 요구를 성취하 라는 의미는 아니다. “악습을 기르도록 허락함이 아니고, 오히려 이미 말 한 바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에게 유익하게 보이는 방법에 따라 현명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로 악습을 끊어버리게 하라는 것이다”(RB 64,14). 베네 딕도는 사랑하는 아버지나 어머니 일지라도 때로는 어느 정도 모진 사랑 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관계가 두려 움보다는 사랑일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 받기 위해 애쓰는 것은 “분별과 사랑”을 지니고 사 랑하는 대상의 잘못들을 고쳐 주고 각자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없애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베네딕도 성인이 아빠스에게 수도승의 의복에 대해 “그것을 입는 사람 들에게 너무 짧지 않고 알맞게 해줄 것이다” (RB 55,8)라고 강조하는 것 을 들을 때마다, 내 입가에는 항상 미소가 번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런 태도는 또한 그의 목자적인 실천에도 적용된다. 그는 아빠스에게 “어 렵게 요구되는 짐을 지는 것…… 각 수도승들에게 적합하도록 그 영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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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스리고, 다양한 기질을 맞추고, 유순하게 책벌하며 격려”(RB 2,31) 하도록 하였다. 그는 “아빠스는 각자의 성질과 지성에 따라 자신을 순응 시키고 알맞게 해주어야 한다”(RB 2,32)고 가르친다. 팔 남매 중 하나로 태어나셔서 여섯 명의 자녀를 두셨던 나의 어머니께서 “우리는 모두 다르 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이 지혜를 터득하고 계셨던 것 같다. 이러한 “다양한 기질”을 위한 봉사에는 베네딕도가 “모든 덕행의 어머니”(RB 64,19)라 일컫는 식별과 분별의 선물이 기본 전제로서 요구 된다. 베네딕도는 “식별과 분별함에는…… 조심하고 깊이 생각해야 한 다”(RB 64,17)고 하면서, 모든 것을 잘 배치함으로써 “강한 사람들은 전 진하게 하고 약한 사람들은 물러나지 않게”(RB 64,19) 하는 것이 아빠스 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목자적 직무는 재능의 특수성과 각 개인의 한 계성, 주어진 은총, 이룩한 성장의 단계를 고려해야 한다. 베네딕도는 우리 각자의 상처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았다. 아빠스로서 상처의 실체에 대해 이해하는 출발점은, 그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바라 보는 것”(RB 64,13)이라고 생각했다. 사목에서 가장 안전하고 신뢰할 만 한 방법은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치유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인 식의 토대로부터 타인을 사목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개선하며 온유함과 연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꺼서는 안 된다”(이사 42,3; RB 64,13)고 베 네딕도는 동시에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의 필요를 정직하게 아는 것은 분 투하는 동료 수도승들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사목적 책임은 특권 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 베네딕도가 말한 대로 아빠 스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을 깨달 아 “다른 이들에 대해 셈을 조심하는 동시에 자신의 셈에 대해서도 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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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이며, 자신의 훈계로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고치게 함으로써 자기의 결점도 고치게 되는 것이다”(RB 2,39-40).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보살핌에 관한 베네딕도의 사목적 충고는 복음 에 견고한 기반을 두고 있다. “아빠스는 잘못을 저지른 형제들에 대하여 온갖 염려를 다하여 돌볼 것이다. 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든 사람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마태 9,12; RB 27,1). 의료적 치료의 비유는 영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사목할 때 치유자가 사용 할 수 있는 방법을 얻기 위해서이다. 베네딕도는 “아빠스는 지혜로운 의 사의 처방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며, “진정제를 사용하고, 권유의 기름 을 발라주며, 성서의 약을 사용하고, 마지막으로 파문이나 태형의 불지 짐을 사용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도 모든 노력이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함 을 보거든, 더 큰 방법을 사용할 것이니, 자신과 모든 형제들이 그를 위 한 기도를 바쳐 전능하신 주님께서 연약한 형제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시도록 할 것이다”(RB 28,3-5)라고 가르친다. 그가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 형제에게 감화를 주는 누군가를 중재자로 내세우는 것이다. “흔들리는 형제를 지원할 성숙하고 지혜로운 형제는 겸손하게 그가 지나 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위로해야 한다”(2코린 2,7).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히려 “그가 더 많이 사랑 받는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2 코린 2,8). 그리고 “모두가 그를 위해 기도”(RB 27,3-4)해야 한다. 성인의 주된 관심은 법과 질서 그 자체보다 무엇이든 “수도승들에게 유익한 것” 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자비와 사랑은 베네딕도의 사목활동에 있어 가 장 중요한 본질이다. 그는 “자비가 판단 위에 승리하도록” 해야 한다(야 고 2,13)고 강조한다. 그로 인해 “자기 자신도 자비를 받게”될 것을 강조 한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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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 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RB 64,10-12)라는 말은 이를 구체적으로 잘 드러낸다. 베네딕도가 사목적 접근에서 선택한 일관성 있는 원칙은 유연성이다. 그는 각자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 적절한 수단을 찾을 것을 조언한다. “아 빠스는 자기의 교훈에 있어서 항상 사도께서 말씀하신 방식을 따라야 할 것이다.” 즉, “타이르고 간청하며 질책해야 한다는 것이다”(2티모 4,2). 그래서 “때에 따라 엄격하게도 하고 온순하게도 하여, 준엄한 스승과 어 진 아버지의 정을 드러내라는 말이다. 규율을 지키지 않고 침착하지 못 한 사람에게는 약간 엄하게 타이를 것이며, 순종하고 온순하며 인내심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덕에 나아가도록 설득시키고, 소홀히 하는 자와 거만한 자는 엄하게 책벌하라”(RB 2,23-25)고 권고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초점을 돌려 베네딕도가 공동체 회원들 간에, 수도 승들과 일반 사회의 공동체 간의 수평적 관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고 거기서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베네딕도는 “많은 형제들의 도움”(RB 1,4)으로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RB 58,7) 친 밀한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해 규칙서를 썼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가 강조한 형제애 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는 “수도승이 가 져야 할 좋은 열정”이라고 제목을 붙인 규칙서 제72장이다. 여기서 그는 규칙서를 끝맺기 전에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가장 진솔한 것들을 망라 하였다. 앞서 서술한 “착한 일의 도구들에 대하여”(RB 4)가 다소 포괄적 인 내용을 지닌 긴 격언의 모음인 반면 제72장은 공동체 회원들 간의 사 랑이라는 단일한 주제로 구성된 훨씬 짧은 격언들의 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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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로부터 분리시켜 지옥으로 이끄는 쓰고 나쁜 열정이 있듯이, 악습에서 분리시켜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좋은 열정도 있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 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로마 12:10), 육체나 품행 상의 약점들 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복종하고, 아무도 자기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 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RB 72장).

존중, 인내와 자기 초월적 사랑은 베네딕도 공동체에서 관계를 나타내 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무도 자신이 가진 것 에 대한 사용권을 주장하지 않고, 소유한 모든 것을 공유하였다”(사도 4,32; 요한 2,42-47; 4,32-35)라는 예루살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상을 모델로 한 공동체이다. 하지만 이 “공유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으 로 인해 항상 상처받기가 쉬웠다. 따라서 베네딕도는 사도행전에서 루카 가 묘사한 “일치된 마음과 영혼”을 키우고 보장하는 요소들 즉,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 모든 인간과 모든 공동체에 존재하는 불가피한 약점들 에 대한 지극한 인내, 타인의 선익에 대한 관대한 우선적인 선택 등을 강 조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동료 수도승에게 형제의 순수한 사랑을 보 여주는” 일상에서의 사목은 상호간에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상호 간의 사목은 여러 가지 상황 안에서 “사랑으로써 서로 봉사”(RB 35,6)하라는 가르침에서 잘 드러난다. 그 하나는 식사를 준비하고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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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식당복사이다. 베네딕도는 “병 때문이나 중요한 직책을 맡은 경우 가 아니면 아무도 주방 당번에서 면제 받지 말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더 큰 갚음과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RB 35,2)라고 가르친다. “허약 한 사람에게는 보조원을 주어 근심 중에 이것을 행하지 않도록(RB 35,3)” 약한 이들을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 나아가 성인은 병든 사람이 공동체의 “가장 큰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환자 들이 소홀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세심하며 주의 깊은 형제”(RB 36,7)로 하여금 그들을 돌보게 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 여 베네딕도가 인용한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6)라 는 하느님의 말씀은 공동체 모두에게로 적용된다. 만일 위와 같은 상황 이 발생하면 수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책임감 있게 자신을 내어 놓아 야 한다. 이미 언급한 공동체 내의 또 다른 사목은 다른 종류의 어려움 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베네딕도 성인의 사목은 “손님들”에 대한 사목이다(RB 53장). 히브리와 그리스도교 성경은 환대의 의무를 크게 강조하였다. 심지어 사막에 은둔자로 살았던 수도승들조차도 이를 신성 한 의무로 여겼다. 이들은 손님을 환대하기 위해 때로는 침묵과 단식의 두 규칙을 깨트리는 일도 있었다. 성 예로니모는 로마인 공동체에게 “환 대를 추구”(로마 12,13)하라고 한 성 바오로의 가르침에 일련의 주석을 달았다. 그는 “손님에 대한 우리의 초대는 다시 말하면 입술로만 말하는 단순한 가벼운 말들이 되어서는 안되고, 마치 그들이 우리의 재산을 훔 쳐 가는 강도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을 필사적으로 붙들어야 한다”(편지 125)라고 기술했다. 베네딕도는 그의 전임자이며 주된 출처인 익명의 스 승과 비교하여 환대에 대해 훨씬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찾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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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RB 53,1)라고 기술하 였다. 수세기를 통해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는 공동체들은 수도원에 객 실을 갖추었는데 이는 특별히 명명된 지금의 피정 집과 반드시 같은 것 은 아니다. 베네딕도의 환대는 “적절한 경의를 특별히 믿음의 가족들(갈 라 6,10)과 순례자들, 모두에게 표해야 한다”(RB 53,2)는 보편적인 것이 었다. 사실, 타라와라에서 우리는 가톨릭(사제, 수도자, 평신도), 다른 교 파의 그리스도인, 유대인, 이슬람교도,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확실한 믿음이 없이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매일 같이 우리 를 찾아오는 것을 체험한다. 이는 우리 수도원이 21세기의 다문화와 다 종교가 지배하는 호주에 위치한 것과 잘 일치한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우리는 손님이 자신의 내면을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친숙한 공 간을 마련해주는 우리의 책임으로 이해한다. 이는 숙박시설, 동료 손님 과 친교를 나눌 테이블, 공동체 기도에로의 초대, 영적 지도의 기회 그리 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친교의 공간을 포함한다. 이 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인간 존재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모든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날마다 베풀 수 있는 사목으로써 성 바오로 가 지속적으로 강조한 “환대의 추구”이다. 친절한 말 한마디나 미소의 사 목은 가벼운 취급을 받거나 무시 받지 말아야 한다. 베네딕도는 구약성 경을 인용해서 “친절한 한마디가 최고의 선물보다 낫다”(RB 31,14: 집회 18,17)라고 한다. 베네딕도는 제자들에게 항상 “복음의 인도함”(RB 머리말 21)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 상호간의 섬김을 강조하는 베네딕도에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종이신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모 델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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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요한 13,15)와 같이 우리가 서로 섬기면, 섬기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 인 동시에 섬김을 받은 이 또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마태 25,31-46의 마지막 심판 장면의 말씀인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은 공동체, 상호간의 사목 그리고 수평적 관계들 에 관한 베네딕도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근간이 된다(RB 4,15-16; 36,2-3; 53,1).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 이다”라고 그리스도 공동체의 형제자매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한 것은 베 네딕도 성인 영성의 핵심이었다. 다시 이 성찰을 시작했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으로 돌아가 보 자. “교회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전달하도록 그 리스도로부터 파견되었다.”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목적으로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전달하도록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셨다. 성 바 오로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하느님의 사랑” (로마 8,39)으로 설명한다. 여러분과 나는 우리 형제와 자매들에게, 사랑 이신 보이지 않는 하느님(요한 1,18; 1요한 4,8.12.16)을 보여 주도록 부르 심을 받고 파견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모든 장소에 “하느님 의 사랑이 눈으로 보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로마 5,5)을 세상에 나누고 전달해야 한다. 오늘 밤 우리는 베네딕도 성인의 지혜를 함께 나 눔으로써, 우리 각자가 가족, 교회,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하느님 사랑의 계시자, 하느님 사랑의 전달자라는 소명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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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하는 침묵 데이빗 톰린스1) 최길자 안젤라 옮김

오늘 저녁에 여러분과 함께 제 생각을 나눌 수 있도록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침묵이라는 주제로 얘기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저는 강의 제목을 좀 더 명확하게 ‘경청하는 침묵’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흔히 사 람들은 시토회 혹은 트라피스트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수도 회를 침묵과 연결 지어 생각합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글 들을 통해 대중들 마음속에 그러한 연상이 확고해진 것 같습니다. 저는 침묵이 수도승들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모든 사람에게도 매우 중 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수도원에 들어간 후 우리 고 모님이 처음으로 저를 면회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저렇게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여기 오래 있지 못할거야”라고 기사에게 말하며 우셨답 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고모님의 우려는 그로부터 적어도 50년간은 - 제 가 아직도 타라와라(Tarrawarra) 수도원에 살고 있으니 - 빗나간 것이지 요? 그런데 사실은 고모님 말씀이 전적으로 틀렸다고도 할 수 없겠습니 다. 사실 저는 아직도 제 안에서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을 이미 백번이나 썼으면서도 또다시 써오도록 숙제를 받는 초등학교 어린 1) David Tomlins OCSO는 오스트레일리아의 Tarrawara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승이다. 이 글은 2009년 Melbourne에서 한 강의를 수도회 잡지 Tjurunga 77권(2009), 61-72에 게 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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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모습을 보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 훈련을 통해 완전히 교정되 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말에 가치를 두고 존중합니다. 그리 고 여러분도 만일 말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오늘밤 제 이 야기를 들으러 여기까지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막스 피카르드(Max Picard)가 “말과 침묵은 서로에게 속한다”2)라고 한 말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침묵은 우리가 말하기를 그칠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정 적으로 단지 언어를 자제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며, 우리가 제 뜻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조건 이상의 것이다. 언어가 사라질 때 침묵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가 사라졌기 때 문에 시작 된 것이 아니다. 언어의 부재는 그저 침묵의 존재를 더욱 드러 나게 할 뿐이다……. 침묵은 인간의 기본구조에 속한다.”3)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며, 이 침묵의 세계로부터 말은 하나 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 형성하는 법을 배운다. 침묵의 세계 와 말의 세계는 서로 마주한다. 말은 침묵의 반대개념이지만, 그것은 적 이 아니라 단지 다른 쪽일 뿐이며 침묵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을 통해 서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진정한 말은 사실 침묵의 메아리 외의 2) Max Picard, The World of Silence, Stanley Godman, Wichita(Kan.): Eighth Day Press, 2002, 16. 3) Picard, 같은 책,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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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이 아니다.”4) 데이빗 아텐보로(David Atthenborough)는 사람을 “충동적 소통자”5) 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의 말 씀에 의하면, “사람이 소통하고 또 소통되고자 하는 열망은 -마치 물고 기에게 지느러미, 새에게 깃털처럼- 인류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핵심 요소로 보입니다.”6)

토마스 머튼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언어의 가치를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으면 침묵의 참된 가치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실재는 침묵 속에서 중 재자 없이 직접 대면하기 때문이다. 먼저 말이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지 않으면 우리는 침묵 그 자체 안에서 이 실재를 발견하지 못한다.”7) 1950년대에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다그 함마슐드(Dag Hammarskjold) 가, 말에 대한 존중이 한 개인으로서 또는 인류로서, 인간 발전의 중심에 있다고 강조한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교육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말을 존중하도록 하는 것이 4) Picard, 같은 책, 26-27. 5) David Attenborough, Life on Earth, London: Collins, 1979. 마지막 장의 제목. 6) Attenborough, 같은 책. 308. 7) Thomas Merton, Thoughts in Silence, New York: A Doubleday Image Book, 1968,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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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사람은 지적, 정서적, 윤리적 성숙에 필요한 교 육을 받을 수 있다. 말을 존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세심한 주의와 오 염되지 않은 진실한 사랑으로 사용하는 것- 한 사회나 인류의 성장을 위 해 본질적인 것이다. 말의 남용은 인간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다리(교각) 밑을 파내거나 우물물에 독을 풀어놓는 것과 같 이, 인간의 기나긴 진화 여정을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한가한 말은……’”8)

이 말들은 출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 탐색을 위해 쓴 것입니다. 말에 대한 존중과 함께 다시금 개인적인 자유, 고독, 침묵을 소홀히 함에서 오는 메마름에 대하여 자신에게 말합니다.

“속이 빈 계란 껍질은 뭇 바람에 흔들리면서 여기저기로 떠다닌다. 그 안에 노른자도 없고 자기성장에 필요한 영양분도 없이 껍데기 밖에 없기 때문에 가볍기 그지없다. 보기 좋은 혼합물일뿐! 개인의 자유에 대한 고려나 존중 없이 그저 웃기기만 하는 품위 없는 말, 진중하지 못한 말은 껍데기일 뿐이다.”9)

그는 또 자기 경험에 비추어, 그가 직무상 참여하는 외교관들의 칵테 일 파티에 대해서도 “빈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어떤 방법 8) Dag Hammarskjold, Ma rkings,1.8.1955, Faber Paper Covered Edition, Leif Sjoberg&Wystan Hugh Auden trans., London: Faber and Faber, 1964, 101. 9) Hammarskjold, 같은 책,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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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든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내면의 원천들을 보충하지 않고, 끝없는 잡담으로 자신을 고갈시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 다. 그는 또 계속해서, 충동적으로, 절제 없이 새어나와 마음을 흩어뜨리 는 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교적인 사람이 되려면’- 관례상 침묵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이야기 하고, 가짜 친밀함과 만남의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서로 교제하는 등, 인 간적 상황의 한 예이다. 우리의 영적 자원을 남용함으로써 오는 소진상 태, 그것은 소규모로, 인류가 영적 죽음의 지옥에서 스스로 채찍을 가하 는 수많은 방법들 중 하나다.”10)

저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중요한 직책을 맡아 사교에 투신해야 했던 한 사람의 경험에서 얻은 매우 흥미로운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격 의 통합을 위해서는, 즉 우리 각자의 건강과 성장을 위해서는 말과 침묵 의 리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데이빗 말루프(David Malouf)도 홍보매체에 지나치 게 노출될 때 받는 정신적 중독에 대하여 비슷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도 뉴 사우스 웨일즈 문학상 수상식에서 “말을 귀담아 들음” 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습니다. “일간지의 잡다한 내용 - 음식, 유행, 기근, 여행, 운동, 흉악범, IT, TV, 연예인 가십, 식당 소개, 영화 광고, 책 소개, 정치, 스포츠 등 - 이 모든

10) Hammarskjold, 같은 책,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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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그것을 즉시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 밖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는 다. 다음 날 신문이 나올 때 그것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야 새로 생산 되는 내용을 실을 수 있으니까. 그것은 24시간마다 채워져야만 하는 블 랙홀과 같다. 이런 생각들은 작가인 나를 소름끼치게 한다. 우리는 말로 써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다. 정보를 쏟아내는 산더미 같은 글들은 우리 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수준의 독서는 눈동자나 신경을 자 극하는 정도일 뿐이다.”11)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소로우는 인간의 삶에 대하여, “깨어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나는 지금까지 온 전히 깨어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리는 깨어 살기를, 우리 스 스로 깨어 있기를 다시 배워야 한다. 기계적인 도움으로서가 아니라 새벽 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이 말을 마치고 그는 월든 호숫가로 떠나 그곳에서 2년 반을 살았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로지 삶의 본질적인 요소와 마주하며 깨어 살고자 숲으로 왔 다. 나는 숲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내 죽음에 이 르렀을 때 내가 살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싶지 않았다. 삶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체념하 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삶의 모든 진수를 빨아들이며 깊이 있게 살고 싶었 다.”12) 11) David Malouf, Address at the New South Wales Premiers Literary Awards, 2001. 12) Henry Thoreau, Walden, New York: A Signet Classics, 66. Henry David Thoreau(18171862)는 1845년, 본질적이고 단순한 삶을 살고자 Massachusetts의 Concord 근처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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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기를 통하여 수도승들은 “의식하며 살고자 하는” 것과 유사한 하 나의 갈망, 즉 온전히 깨어 살고 싶은, 충만하게 살고 싶은 갈망을 지니고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갈망을 파괴하는 소음으로부터 일정한 거 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독과 침묵의 다양한 방법들을 찾게 되 었습니다. 이집트 사막은 인간의 내면성을 보존하고 심화하는 인격적인 장소의 상징이 되었지요. 수도승들이 소음과 이전의 직업에서 요구하던 바를 다 벗어났을 때 그 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일가요? 그중 하나는 bedlam(정신병원과 같은 스 산한 장면)! 평화라는 낭만적인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침 내 혼자”라는 경험은 종종, 적어도 시초에는 극히 불유쾌한 경험일 수 있 습니다.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미혹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 그들의 마음과 대면했는데 그곳은 자주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들과 두려움의 싸움터 같았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보쉬 (Bosch)와 달리(Dali)가 그린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을 많이 보셨을 것입 니다. 그들은 성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나오는 악마 와 싸우는 극적인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사 막 교부들의 금언집』에 여러 번 나옵니다. 루이 부이에(Louis Bouyer)가 성서와 복음적 내용으로 그 현상을 해설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광야에 서의 예수님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현상들 아래에 있는 심오 한 심리적 사실들에 대하여 얘기를 계속합니다. 그의 말씀을 여기에 인 용합니다.

Walden 호숫가로 물러났다. 그는 1862년 9월 까지 그곳에 살았으며, 체험한 바를 1854년 에 처음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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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야기하는 수행자들은, 거룩한 저술가들과 특히 그리스도를 추종하면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고독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어두운 세력들을 발견하고 직면하게 해 준다. 혼자 있을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갈등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은밀히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갈등들은 자기가 해결 하거나 건드리기조차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고독은 일종의 무서운 시련 으로서 우리의 피상적인 안전의 껍질을 깨부수고 터뜨리기 때문이다. 고 독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미지의 심연을 열어 준다. 우리가 공부하 는 전통이 인정하듯이 고독은 이러한 심연들이 늘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발견한 우리 영 혼의 깊이일 뿐 아니라, 거기에 잠복해 있는 어두운 힘 -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한 불가피하게 그 노예로 머물 수밖에 없는 어두운 세 력들이다. 사실 신앙의 빛으로 조명되지 않으면 이러한 인식이 우리를 파 멸시킬 수도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무사하게 이 ‘극악의 신비’를 우리 에게 열어 주실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과거에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 셨듯이, 오늘도 우리 안에서 그것을 성공적으로 대면하실 수 있다.”13)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침묵의 제한된 범위가 아니라, 고독 안 에서의 삶입니다. 그러나 침묵은 종종 마음의 어두운 골방으로 들어가 는 문을 열어주어, 우리 자신에 대하여 미처 알고 싶지도 않았던 일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침묵이 이러한 내적 갈등에 대하여 말하도록 허용하 고, 그들을 대낮의 빛으로 데려가는 치유의 첫 단계입니다. 13) Louis Bouyer, The Spirituality of the New Testament and the Fathers, Mary P. Ryan trans., London: Burns&Oates, 1963,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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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침묵에 대한 초기 수도승들의 체험은 분열된 마음과 이러한 상 태에 수반되는 내적 소음에 대하여 밝혀 줍니다. 그러한 발견은 고통스 럽지만 건전한 것입니다. 그 시대의 위대한 영성지도자들 -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345-399)와 요한네스 카시아누스(360-432/435)는 마음의 병들과 이러한 악습의 원 인들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처방과 치료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 은 여덟 가지 주요 악습들, 열정들 또는 “생각들”이라 부르며 - 탐식, 음 욕, 탐욕, 분노, 슬픔, 아케디아(무감동, 열정 없음), 허영, 교만입니다. 이 러한 열정들, 즉 무질서한 사랑들이 내적 소음과 마음속 아우성들의 원 천입니다. 그 “생각들”은 고독이나 침묵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전부 터 이미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물리적인 고독과 침묵은 무질서한 사랑들을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일단 자기 안에 파괴적이며 분열시키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 면, 우리는 “마음의 순결”을 지향하며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침묵은 “깨어 있는 삶”의 한 형태로서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자기 인식을 촉진 시킵니다. 경청의 첫 번째 필수 단계는 상처받은 마음의 고통스럽고 무너 지는 체험에 귀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청이 마음의 순결을 향하여 성장하도록 이끌고, 사방으로 마음이 찢기는 내적 분열을 치유하여 서서 히 평화와 참된 침묵을 피어나게 합니다. 압바 또는 암마 라고 부르는 경험이 많은 사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치유된 원로와 제자와의 관계도 수도승 탐구의 기본구조에 속합니 다. 전형적으로는 깨어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제자가 압바나 암마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의 상처 일부를 드러내 보이면서 “제가 구 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이와 같은 역동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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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는 먼저 경청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 질문을 던진 사람 이 대답을 듣기에 관심이 없다면 그런 수행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과 가슴으로 경청하려는 갈망이 없이는, 그리고 주어진 충고를 따르 려는 의지가 없다면 거기에는 참된 제자 직분이 없는 것입니다. 사막에 살았던 분들의 창의적이며 드높은 인격적 관계에 대해서는 사막 교부들 의 말씀이나 규칙서들 모음집에 문학 작품으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공동 체에서 제자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베네딕도 성인이 표현했듯이 “규칙 과 아빠스 밑에서”(베네딕도 규칙서<이하 RB> 1,2) 사는 생활양식을 택 하였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의 첫 구절은 매우 신중하고 의미가 깊습니다. “오,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네 마음의 귀를 기울여라”(RB 머 리말 1). 이것은 분명히 성 베네딕도가 제자됨의 기본틀에서 말하는 그 노고에 속한 것으로서 경청하는 마음을 갖도록 초대합니다: “경청하여 라……. 네 마음의 귀로.” 규칙 제 6장에서도 명확하게, “말하는 것과 가 르치는 것은 스승에게 적합한 일이고, 침묵하는 것과 듣는 것은 제자에 게 합당한 일이다”(RB 6,6)라고 합니다. 여기서 베네딕도가 말하는 침묵은 경청, 즉 내적 경청, 마음의 귀로 듣 는 것입니다. 이것은 침묵의 보다 긍정적인 면으로서 치유와 지도, 여유 로움을 찾는 마음의 침묵입니다. 물리적 침묵은 부차적인 것이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더 깊은 침묵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줍니다. 우선 적으로 그것은 수용적인 태도에 관한 것으로서, 수도원 안에는 특별한 양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의식있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 고유한 필요와 형식을 취합니다.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많이 경청 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용적 태도를 취하기만 하면 - 우리가 다른 이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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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또 우리 자신에게 열려 있기만 하면 -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도자나 구루, 상담자, 또는 심리치료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천천히 걸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상을 위한 공 간을 만들기만 하면 삶 자체가 나의 스승입니다. 나는 우리 시사 만화가 인 마이클 루닉(Michael Leunig)이 지은 기도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둠 속에서 구멍을(아마도 환기 구멍) 응시하며 이렇게 기도 합니다.

“지혜를 구하며 기도합시다. 생각을 멈추고 우리 마음을 비웁시다. 소 음을 내지 말고, 침묵 중에 우리 마음에 귀를 기울입시다. 산채로 파묻 혔던 심장에 말입니다. 고요하게 기다리며 주의깊게 경청합시다. 저 아 래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기진맥진한 외침, 희미한 두드림, 멀 리 저 속에 갇혀 있어 잘 들리지 않는 느낌들, 도움을 요청하는 그 울부 짖음. 우리는 파묻힌 그 마음을 구조해낼 것입니다. 그것을 밖으로, 빛과 공 기가 있는 곳으로 이끌어 내어 보살펴주고, 그 이야기를 존중하며 경청 할 것입니다 - 마음의 아프고 숨막혔던 이야기, 어둠과 갈망의 이야기를.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느낌들이 햇볕으로 나와 살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 리하여 우리는 다함께 다시 안정과 기쁨을 찾게 될 것입니다.”14)

“깨어있는 삶”은 우리를 경청하는 침묵으로 초대합니다. 데일리 강 출 14) Michael Leunig, When I Talk To You: A Cartoonist Talks To God, Kansas City: Andrews McMeel Publishing, 2006; 오리지널 한정판은 Harper Collins Australia에서 2004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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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으로 매우 인상적인 원주민 여인 미리암-로즈 운군메르-바우먼 (Miriam-Rose Ungunmerr-Baumann)은, 자기네 종족이 동료 오스트레 일리아 이웃들과 나눌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 이러한 장점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갈망하고 있지만 그녀는 이미 가지고 있는 그 재능 - 그들 언어로 다디리(dadirri) 라고 합니다. 다디리는 “내면의 깊은 경청” 그리고 “고요하고 깊은 깨달음”15)이라고 그는 설명하였습니다. 그 는 자기가 이 선물을 어떻게 습득하게 되었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날마다 우리 종족의 고유한 교육 방법을 통해서 배웠다. 경청함으로써, 자연이 내 주위에서 펼쳐주는 것을 바라보면서 배웠으며, 우리 부모님들과 어른들의 고요한 묵상을 따라하면서 배웠다. 나는 나 를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이 침묵과 고요한 평화의 옷으로 나를 감싸주 기를 기다렸다. 나는 고요함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그 고요 속에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위대하신 영을 체험하기 시 작했다. 오늘도 숲속으로 사냥하러 나갈 때, 나는 종종 나무들 사이에, 또는 언덕 위나 billabong16) 옆, 강가에 앉도록 이끌려지고, 단순하게 그 분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된다. 나에게는 이것이 가장 친근하고,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이다.”17)

우리들 모두가 숲이나 강가로 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기 15) Miriam-Rose Ungunmerr-Baumann, Compass, Vol. 22, Autumn/Winter 1988, 9. 16) 호주 원주민어: “물 고인 곳” 17) Miriam-Rose Ungunmerr-Baumann in Aboriginal Women By Degrees, Their Stories of the Journey Towards Academic Achievement, Mary Ann Bin-Sallik(Ed.), 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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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으로, 우리가 다디리와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비슷한 장소를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습니다 - “단순히 그분 현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막스 피카르드는 침묵의 여러 형태 중에 몇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 다.

“침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형태로 자기를 계시한다: 고요 한 새벽에,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나무들의 조용한 열망 속에, 고요히 내리는 밤 속에, 소리 없이 바뀌는 계절들 안에, 흐르는 달빛 속에서, 침 묵의 비처럼 밤 속으로 방울져 내림에서,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영혼의 내적 침묵 안에서. 이러한 침묵들은 이름이 없다. 이렇게 이름 없는 침묵 과는 대조적으로, 침묵으로부터 솟아나는 말은 더욱 명료하고 뚜렷하 다.”18)

피카르드가 “내면으로 향하는 영혼의 침묵”에 대하여 쓴 그곳에서, 미 리암-로즈는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외부 환경이 어떠하든, 결국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깊은 샘”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더욱 확실하게 그리스도인의 관점을 취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각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그 책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들은 히브리 성경의 계시에 근거하고, 그에 추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 4 복음서와 신약의 다른 서간들에 나오는 계시들 - 더없이 소중히 여깁니다. 하느님

18) Picard, 앞의 책,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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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하느님 체험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로 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 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합니다. 사도들 바로 다음 세기에 살았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마그네 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분이신 하느님께서, 침묵으로부터 나온 당신 자신의 말씀 곧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기를 계시하셨다” 라고 썼습니다.19)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습니다(요한 1,18). 아무도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로마 11,33). 아무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내재하는 지식과 사랑의 완전 한 통교인 침묵을 꿰뚫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 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 는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넘치는 사랑으로, 인간을 당신의 삼위일체적 생명에로 끌어당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머리말을 그 토록 장려한 말들로 시작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l,1)

그는 성경을 시작하는 말들, 즉 창세기의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창조 의 말씀 - “생겨라” - 을 하셨을 때를 언급합니다. 요한은 곧 이어서 이렇

19)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마그네시아인들에게”, 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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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2-4)

그리고 더 나아가 요한은 머리말에서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를 선포합 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사람들을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침묵 을 깨뜨리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브 1,1). 그리고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 니다”(히브 1,2).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 서 알려주셨습니다”(요한 1,18). 침묵으로부터 나온 말씀,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생명이신 말씀”, 그 말씀을 사도들이 들었고, 눈으로 보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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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만졌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1요한 1,1). 사람이 되신 말씀을 통 하여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점점 많아집니다. 온전히 자유로운 자기 계 시를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인격적인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 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고 뽑은 사람들”(마태 11,27)이라고 하십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이러한 친교의 놀라운 풍요로 움으로 우리를 모아줍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 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1요한 1,3). 침묵으로부터 나온 말씀이 우리가 실재에, 즉 하느님 신비의 부요함 에 이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종의 제자 직분입니다. 그것은 한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받아들 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점을, 즉 하 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나치 치하의 루터교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수행에서 말과 침묵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 다. 여기에 그의 글 중에 한 단락을 인용합니다.

“올바른 말은 침묵으로부터 나오고, 올바른 침묵은 말에서 나온다. 말 이 지껄임을 의미하지 않듯이, 침묵도 벙어리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 다. 벙어리 상태는 고독을 창조하지 못하고, 잡담은 우정을 만들지 못한 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 그리스도인의 하루는 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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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공동예배와 기도시간처럼 말씀을 위해 정해진 시간이 있듯이, 침묵 을 위해 정해진 시간도 필요하다 - 말씀 아래 있는 침묵과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침묵. 특별히 말씀을 듣기 전후의 시간들이 그러하다. 말씀은 수 다스러운 사람에게 오시지 않고 자기 혀를 절제하는 사람에게 오신다. 성전의 고요함은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의 표지이다. 침묵에 대한 무관심과, 심지어 부정적 견해까지도 있다. 그들은 침묵 이 말씀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시를 비하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침묵 을 일종의 종교의식의 제스처로, 말씀 저쪽에 달하려는 신비적 갈망으 로 잘못 해석하는 견해로서, 침묵과 말의 본질적인 관계를 놓친 것이다. 침묵은 하느님 말씀 아래에 있는 사람의 단순한 고요함이다. 우리는 말 씀을 듣기 전에 침묵한다. 우리의 생각이 이미 말씀을 향하고 있기 때문 에……. 우리는 말씀을 들은 후에 침묵한다. 말씀께서 아직도 말씀하시 고 우리 안에 머무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를 시작할 때 침묵한 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 말이 되셔야 하기에. 그리고 잠들기 전에 침묵 한다. 우리의 마지막 말도 하느님께 속하기에. 우리는 오로지 말씀을 위 하여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경시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말씀을 존중하고 영접하기 위함이다. 침묵은 말씀을 기다리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그로부터 축복 을 가져온다. 그러나 수다스러움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는, 침묵은 따로 배우고 실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참된 침묵, 참으로 고 요함, 그리고 참으로 자기 혀를 제어하는 일은 오직 영적 고요함에서 나 오는 진지한 결과이다. 이렇게 말씀 앞에 고요히 머무름은 하루 전체에 영향을 준다. 우리가 말씀 앞에서 침묵하기를 배우면, 하루 동안 침묵과 말을 관리하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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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게 될 것이다.”20)

침묵은 하느님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게 해주며, 하느님의 은혜로운 자 기계시에 대한 우리의 협조적 자세입니다. 이러한 침묵은 외적 침묵으로 서 - 소음, 혼란스러움 또는 정당한 대화로부터 잠깐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욕망, 두려움 혹은 다른 집착들로부터 떠나는 내적 침묵입 니다. “침묵은 하느님 말씀 아래에 있는 사람의 단순한 고요함입니다.” 수도승 전통에서는 언제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매우 강조 해왔습니다. 그것은 베타니아의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주님 발치에 앉 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천천히 읽 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 하기 전에, 하는 동안에, 하고난 후에도 지속적인 침묵이 요구됩니다. 침묵은 참으로 마음으로 경청하도록 도와 줍니다. 간단하게 그리고 끝으로,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추리하는 작업들이 당연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지라도, 마지막에는 단순하게 되는 것이 통례입니다. 다비(Darby)와 조안(Joan)21)이 젊은 날 사랑에 빠졌을 때, 그들은 말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러나 해가 거듭되면서 그들은 각자 일과 독서, 글자 맞추기, 음악 감상들 을 하면서 고요히 상대방의 현존 안에서 깊이 행복을 느끼는 경지까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서로에게 현존 합니다. 기도도 비슷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높은 의식의 수준을 떠나, 더 깊고 고요한 수준으로 내려옵니다. 요한네스 카시아누스는 독자들에 20) Dietrich Bonhoeffer, Life Together, London: SCM Press, 59-60. 21) 부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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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기도의 단순화를 위해서, 기능들의 침묵을 심화하기 위해서 준비하 라고 하면서, 짧은 시편 한 구절을 추천합니다.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시편 69,2). 이 기도는 말씀에 대한 사고하는 경청을 허용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결코 적절하게 파악될 수 없는 하느님의 실재를 더욱 단순하게 흡수하는 길을 열어줍니다. 성경 안에서 계시로 전달된 개념이나 표상들은 하느님 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필요하며 중요한 단계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말이 나 표상 또는 개념도 하느님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요한네스 카시 아누스는 시편의 짧은 문구를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계속 묵상함으로써 튼튼해질 때 까지 우리 마음이 끊임없이 매달려야 할 처방이다. 그것은 다양한 생각 들의 풍요로운 자료들을 배제하고 스스로 이 가난한 한 구절로 제한하 여, 참된 행복 가운데 첫 번째 진복에 이르도록 준비시켜준다. ‘행복하여 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느님의 비 추심으로 그는 하느님께 대한 다양한 지식에로 오르게 되며, 이제부터 더욱 빛나고 더욱 거룩한 신비로 고무되기 시작한다.”22) 14세기 영국의 미지의 영성가, 『무지의 구름』 저자는 다른 많은 신비 저 술가들과 함께 독자들을 바로 이 지점에로 인도하려고 했습니다. “하느 님의 조명으로 하느님께 대한 다양한 지식에 오르게 되고, 이제부터 더 욱 빛나고 더욱 거룩한 신비로 고무되기 시작합니다.” 외적 침묵은 더 깊

22) 요한네스 카시아누스, 담화집,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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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침묵과 지식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수단이지만, 그것은 저절로 얻어지 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전 생애가, 특히 사랑의 삶이 그 기본적인 준비입니다. “깨어 있는 삶”은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준비시 켜줍니다. 마지막에 “조명”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존 메인(John Main)의 묵상 그룹과 향심기도는 현대인들이 침묵을 통 해서 관상생활과 기도로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운동들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하느님의 사랑이 침묵의 시간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압 니다……. 그러나 소음과 혼란 가운데서 하느님을 찾아야하는 사람을 위해서나, 관상에 몰두하는 사람을 위해서나,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전인적 침묵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열어주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과, 다른 이의 신비에로 열어주는 형 제애에도 침묵이 필수 조건입니다.”23)

23) 교황 바오로 6세, 복음의 증거, 4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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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넘어서 - 서방 수도승 생활의 미래는? 도나토 올리아리1) 문정희 토비아 옮김

세상은 기존의 가치관들이 급속도로 변하여 지금까지 우리 삶의 토대 가 되었던 안정된 생활에 큰 혼란을 초래할 정도로 점점 더 혼돈의 도가 니가 되어 가고 있다. 더구나 영적인 가치에 무관심한 세상에서 수도생활 과 세속사회-저명한 사회학자 Z. Bauman의 표현에 따르면 ‘유동적 사회’ (a liquid society)-는 서로 인접해 있지만 통교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교회 안에는 이런 부조화의 모습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자주 교회의 꽃으 로 이야기 되는 수도생활은 실제로 잘 이해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수도회들이 세상과 교회의 관심을 끌기위하여, 과 거 수도회의 영화로움과 뛰어난 예술품 뿐 아니라 고매한 수도승들의 자 태와 생활모습들로 잘 꾸민 멋진 출판물들을 수단으로 사용하는데서 비롯된 것 같다. 우리는 대중매체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행사들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가치로운 일이지만, 수도생활 재확립을 위하여 온 힘 을 다하여 기쁘게 투신하기 보다는 결국 “생존”(survival)의 몸부림이 될 위험이 훨씬 더 크다. 수도생활 재확립에 대해 숙고해 볼 때, 현재의 문화 1) 도나토 올리아리(Donato Ogliari)는 이탈리아 최남단 노치(Noci) 수도원의 아빠스이다. 이 글은 2007년 4월10-13일 마테라(Matera)에서 개최된 이탈리아 베네딕도 수도회 장상모임 에서 강연한 것을, 테렌스 카르동(Ter rence Ka rdong)이 영역하여 The Amer ican Benedictine Review(61:2, June 2010)에 실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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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토에서 강하게 요구되는 것은, 회수도생활의 증거(the cenobitic testimony)이다. 오늘날 수도원이 하느님을 찾고 형제적 사랑을 나누며,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일반사회와 교회에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수 도원의 이러한 측면이 순수한 영적인 봉사와 사도직보다 더 우선적인 수 도회의 특징이 되어야한다고 본다.

인내와 통찰 이러한 기본적인 회수도회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동체들은 인 내와, 통찰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충고가 아니다. 수도원 안에서 인내를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연약함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서 차라리 체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성이 있다. 우선 향수병에 빠져, 의식 없이 과거에 집착하여 기존의 안전함을 누 리고자 하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유일하게 변하지 않으시는 분 - 참조. 히브 13,8)의 빛으로 위기상황을 개선해서 활기를 불어넣고, 현재의 문제들을 수용할 필요성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 다른 위험은 이러한 회상의 유혹-현재를 과거의 획일화된 틀에 맞추기를 좋아함-과 정반대되는 유혹인데, 그것은 안일하고 미성숙한 낙 관론으로 미래에는 마치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가 소명에 더욱 충실하기보다, 환상에 젖어 현실을 회피할 위험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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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감을 되찾고, 조직적인 기술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미래를 더욱 신 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나약함을 직시하고,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며, 우리가 나약한 순간에 더 욱 힘이 되어 주신다는 확신으로 격려를 받는다.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미래를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인내 하며 공동체생활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록 미래가 매우 불확실하 더라도, 맑은 샘물처럼 우리의 생기를 회복시켜주고, 삶을 희망차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소극적인 태도로 기다릴 것이 아니 라, 겸손과 신앙 깊은 인내로써, 통찰하고 투신하며 맞이해야 한다.

우리의 도전 이제 우리 미래에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몇 가지 도전들을 간략하 게 개관하고자 한다. 미래는 위기상황을 애써 모면하기만을 바라지 않는 한, 도전들을 대응하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다.

- 진리 수도원들은 이미지와 외모,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풍조 속에 서 참된 진리를 보존해야 한다. 이 진리는 궤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이고 참되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우리를 허 망한 것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준다. 우리의 소명은 겉모양보다 -심지어 사도직마저 얽매이지 않고- 존재 자체의 중요성(primacy of being)을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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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내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진리가 충만하고, 선행을 열심히 실천하며, 각광을 받지 못하는 ‘변두리’(marginality) 삶을 기꺼이 살아간다. 우리가 이러한 도전을 잘 극복한다면, 진리를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으 로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방 문자들은 진실된 공동체 분위기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자신들의 영 적 에너지를 회복하게 된다. 수도원을 방문하는 형제자매들은 흔히 큰 아픔을 겪고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찾아오지만, 우리의 단순 소박 한 생활과 수도원의 침묵과 명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실존과 종 교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이들은 기운을 회복할 뿐더러 희망의 빛을 안고, 자신들의 삶의 여정을 힘차게 계속할 수 있게 된다.

- 친교 ‘친교’는 진리를 추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친교의 기반은 신실하고 깨끗한 형제적 관계이다. 친교관계는 격식 없이 사랑으로 충고 하고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즉 아주 단순 소박하고, 화합하 고자 끓임 없이 노력하며, 서로를 결속시켜주는 상호의존관계를 인식하 고, 개개인의 다양성을 조화롭게 하나로 묶어주는 관계이다. 이러한 친 교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 참된 공동생활을 하기위해서 세대 변화를 또한 잘 해결해야 한다. 전 통세대와 신세대 간에 교류가 잘 이루어지도록 서로 경청하고, 수용해야 한다. 전통세대는 선배 수도자들로 대표되고, 신세대는 현시대의 특징인 전자세대(e-generation)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숙하고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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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이다. 오늘날 이 두 세대 간의 소통은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 졌 다. 이것은 현대의 언어, 문화 구조체계들이 과거의 것들과 다르기 때문 이다. 두 세대 간의 친교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상대를 만나려고 노력 하고 서로 수용하는 것이다.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친교에 방해 만 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성소개발과 양성 이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또 다른 아주 어려운 도전은 공동체들의 노령화와 성소자 감소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녀를 낳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깊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즉 우리는 ‘여전히 성소자들을 받아들여 동반해주고, 우리가 받았던 수도생활의 기본 원 칙들을 성소자들에게 전수하여 결실을 이루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양성이라는 중요한 주제에 관하여, 지난해 이탈리아 수비아코 연합회 관구총회에서 Monica della Volpe 총장 수녀가 흥미로운 강론을 했다. 우리의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을 인용하면: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확히 확인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공동생활 설계(life project)는 훌륭하고, 우리 자신들뿐 아니라 다른 사 람들에게도 유익하다는 사실과 공동체는 이것을 전수할 능력이 있고, 전수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 공동 생활 설계를 한마음으로 추구 한다면, 이것은 실제로 가능하다.”

아주 설득력 있는 말이다. 지금 수도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수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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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보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사랑의 유대로 서로 결속시켜주고 함께 걸어가도록 계획하기 보다는 서로 묵인 하며 그저 동거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곳. 수도 삶의 개선(conversatio monastica)에는 큰 관 심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곳. 충실히 소명을 증거하기보다 서로 이웃 해서 살아가는 곳. 이 외에도 이런 저런 부정적인 상황들이 계속 드러나 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간절하게 찾고 있다 고 볼 수 없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가 모든 구성원이 생활할 수 있는 진 정한 공동생활 설계를 전파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 정서 과거세대와 비교해 볼 때, 신세대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자유롭게 생활하고 감정표현을 하는 것이다. 상대를 수용하는 정서적인 측면은 과 거 양성분야에서 따분한 사고방식으로 소홀이 취급되었지만, 정서의 긍 정적인 가치와 정서가 주는 안정과, 성숙함, 자유, 해방을 통하여 대인 관 계 안에서 재발견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온정을 나누고 수용하는 표 현을 하는 것이 아직도 미성숙하다.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생활에 아주 중요한 온정과 형제애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한다.

- 영성 지난 해 연례 모임에서 수석 아빠스가 다른 이들에게는 식상한 이야기 일 수 있지만, 내 마음에 크게 와 닿았던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 는 미래 수도생활의 의의는 개인과 공동체 차원에서 성독(Lec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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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ina)을 발견하는 것에 크게 달려있다고 강조하셨다. 성독에 관한 이 야기와 저술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이 말이 다소 실망 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수도회들이 성독을 실제로 잘 실행하고 있는지, 수도여정 및 수도회가 선택할 문제가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본래의 중요한 안내자로 실재로 삼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독이 적어도 수도회 사목의 고유한 분야가 되었는지 살펴보아 야 한다. 곁들여서 우리와 친분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수도회를 “성독의 학교”(schools of lectio divina)로 보고 있는지 간단한 조사를 해볼 수도 있다 . 그러면 전례기도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전례기도는 사람들이 수도 회와 교류하는 대문 역할을 한다. 마음과 목소리와 함께, 기도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기도가 되는 몸동작도 소홀함 없이, 전례의 특 징과 장엄함을 살리기 위해 쏟는 정성을 통하여, 우리가 어느 정도 전례 에 비중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비록 보기에는 단순하고 간소한 전례 예식이더라도, 전례가 잘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안 에 내포되어 있는 풍요로움을 전하며, 전례가 가지고 있는 은총의 빛을 환히 비추게 된다.

- 재평가 공동체 생활을 그 리듬, 활동과 함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능 력에 알맞게 조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특히 현재 우리가 처한 어려 운 상황에서 이러한 조정은 더욱 절실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중요했던 사 도직의 규모를 점차적으로 축소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사도직을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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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하고 수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수도회의 보호주의 속에 갇 히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사실 공동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해결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소 희생이 따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서, 적합한 다른 해결책들을 찾아야 하는지 잘 살 펴보아야 한다.

- 문화 우리 모두 다소 영향을 받고 있는 공동체의 위기 상황으로 인하여, 공 동체의 문화 수준과 특성이 지나치게 손상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도직과 그에 따른 요구 사항들이 과중할 때, 연구와 양성을 꾸준 히 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런 경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에 생존하고자 애쓰는 위기상황에 빠져, 저축해 놓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기 쉽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부딪히는 도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전에 비축해 놓은 것을 가지고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새롭게 변모하도록 노력해야한다. 공동체 안에 미래를 위해 필요한 전략 을 구상해서, 상세히 설명해 주고, 준비할 수 있는 조직(think-tank)을 가 지고 있는 수도회는 거의 없는(솔직히 말하면 없음) 실정이므로, 수도회 들과 연합회들은 서로 협력하여, 최대의 힘을 발휘해야 할 시점에 도달 한 것 같다.

- 공동체와 연합회 관계 수도회마다 자치권을 원하지만, 자치권을 행사함으로써 특별히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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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넘어서

운 시기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사실을 또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공동체의 회원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삶의 질이 아주 저하 되었을 때, 사실상 조정을 해주고 도와주는 것이 어렵다고 본다. 단지 위기의 순 간 뿐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친밀한 협동체계를 강화해 가는 것은 같 은 연합회 내 공동체 상호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참조. 이미 시행되 고 있는 이탈리아 Subiaco 연합회의 기초양성 프로그램). 또한 같은 나라 에 있는 연합회들2)이 서로 협력하면 역시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다. 트 라피스트(Trappist) 총장 아빠스인 베르나르도 올리베라(Dom Bernardo Olivera)는 2002년 수도회 공식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시토 수도회(Cistercian Order)와 함께 일해야 할 시기가 도래 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서방 시토회의 귀중한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베네딕도회 총연합(Benedictine Federation)도 함께 협력해서 일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3)

이것은 아주 대범한 선언문이다. 이러한 예언자다운 진취성으로, 우리 수도회의 경우 편협한 경쟁심을 개선 할 수 있을까?

2) 도전적인 의견: 과거의 수도회 개혁이 전적으로 중앙집권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 은, 협력단체들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을 깊이 심사숙고하게끔 한다. 3) 엄률 시토회 총장 베르나르도 올리베라(Dom Bernardo Olivera), ‘허약하고 불안한 공동체’, in La Scala, A.I.M. Insert, 2003/III, p.75.


도나토 올리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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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지체 수도회들은 지역교회 내에서 손님 환대, 전례 봉사, “말씀의 학교” (school of the Word: lectio divina) 뿐 아니라 영적지도와 고해 성사 등, 여러 사목 활동을 이미 하고 있다. 더구나 어떤 수도회들은 봉헌회원들 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수도원은 신앙의 빛 안에서 매일 하 느님을 찾는 “성령의 실험실(Laboratories of the Spirit)”(‘성령의 오아시스’ 라는 말은 너무 낭만적이다)로 인식되어야한다. 신앙의 길은 힘겹지만 인 간의 논리성과 이해타산을 뛰어넘는 위로가 또한 있다. 이 성령의 집에 서 우리는 매일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천상희망 을 품고 기쁘게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수도회들이 교구나 일정한 수도원 구역에서 마치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요새”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교회의 살아있는 지체임을 인식하고, 그 활동에 동 참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명이다.

결론 우리가 직면하는 도전들을 실생활에서 겪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설명 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도전들과 맞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의 깊게 상황을 살피고,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슬픔, 좌 절 그리고 두려움에 짓눌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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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넘어서

없이 사는 사람(참조. 에페 2,12)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 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희 망의 빛을 단 한순간도 잃지 않는다. 우리의 위기 상황에서, 힘에 겨운 현 실 때문에 성소의 아름다움이 시들고, 부르심에 대한 고결한 응답이 약 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매일의 힘든 소임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말 아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단지 ‘생존’(survival)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것을 항상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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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수도승 문화에 나타난 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1) 골룸바 스트와트2) 양숙희 이사악 옮김

수도승 삶의 모든 면에 침투하여 영적인 힘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일으키고 지탱하는 성경말씀

지난 수십 년간 많은 학자들이 초기 수도승 생활의 수행과 지적 삶에 성경 텍스트 특히 시편이 미친 중추적 역할에 대하여 훌륭한 연구를 하 였다. 또한 기도로 짧은 성경 텍스트를 반복하는 수행에 대한 연구도 활 발히 이루어졌다. 이는 방법의 간결성 때문에 “단음절”(monologistic)기 도라고 불리며, 시편과 다른 신심 수행에서 성경 텍스트를 보충하기 위 하여 폭넓게 활용되었다. 이 글은 성경 텍스트의 중심적이고 탁월한 위 치에 대한 몇 가지 가정들을 초기 수도승 문화에서 중요한 두 저자 알렉 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약 293-373)와 요한 카시아누스 (Johannes Cassianus, 365-435)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1) “The Use of Biblical Texts in Prayer and the Formation of Early Monastic Culture”, The American Benedictine Review 62:2(2011년 6월), 188-201. 2) Columba Stewart, O.S.B., 미국 미네소타 St. John's Abbey 소속 수도승. Saint John's School of Theology-Seminary에서 monastic studies를 가르치며 Executive Director of the Hill Museum & Manuscript Library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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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

영적 수행의 모든 면에 침투한 성경 텍스트 간에 긴밀한 연결은 분명 히 전통적 수도승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성경은 전례적으로 개 인적으로 읽혔고, 설교와 훈화의 원천으로 사용되었으며, 수도승 문학에 영감을 주었다. 특별히 시편과 다른 성서적 “서정시”(odes) 혹은 “찬가” (canticles)들은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수도승 기도의 골격이 었다. 성경 말씀의 수덕적 암기 수행은 이런 성경 텍스트의 광범위한 활 용을 잘 보충해준다. 텍스트 특히 시편과 이와 유사한 성경 말씀의 내면 화는 독신생활이나 단식과 같이 눈에 띄는 수행훈련보다 더 기본적이고 차별화되는 본질적이고 확실한 수도승적 수행이었다. 성경 텍스트에 대 한 전적인 몰입은 초세기 수도승들에게 말씀, 비유, 그리고 자기표현의 상징으로 체험과 사건을 해석하는 방법과, 공동 담화를 위한 근거를 제 공하였다. 이는 또한 보이지 않은 세계(imaginative world)를 일으키는데 도 기여하였다. 이런 광범위하고 견고한 성서적 환경은 악령(demons)과 세상(the world)의 적대 세력에 대해 피신처를 제공하면서 수도승 생활 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성경 텍스트가 수도승 문화에서 권위 있는 위치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특전적인 위치는 분명 성경 텍스트가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는 권 위에서 기인한다. 시편이 수도승의 성서적 삶의 문화에서 왜 그렇게 중심 적이었을까? 시편은 유형상 텍스트 자체가 다루기 용이한 길이이다. 또 한 1인칭과 2인칭 형식의 개인적 성격으로 인해 전례적으로 쓰였고, 개인 신심 수행에도 안성맞춤으로 쓰일 수 있게 만들어졌다. 전형적으로 시편 은 하느님을 부르며 호소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보편적 인간 경험의 다 양한 면을 드러낸다. 또한 시편은 감사와 찬미의 어조로 끝을 맺는 문장 구조를 가져 이성적으로 공감할만하며 실용적이다. 시편을 통해 긍정적,


골룸바 스트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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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강한 느낌들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최소한 잠정적 해결책을 끝머 리에 배치하면서 시편을 마무리 짓고 있다. 전례와 수도승 삶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4세기 전(全) 교회에 퍼진 “시 편 운동”(psalmodic movement)3)의 출현에 대해 주목한다. 이 시기에 이 집트 수도승 운동과 긴밀히 연관된 저자들은 풍부한 신학적 구도에서 시편이 인간의 체험을 표현하는데 독보적으로 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하 였다. 아타나시우스는 357년경에 쓴 자신의 저서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서 시편을 기도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묘사하고, 완숙한 시기의 작품으 로 여겨지는 『마르첼리누스에게 쓴 편지』에서는 이 점을 명백하게 말한 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끊임없는 기도’(unceasing prayer)에 대해 말하는 열 번째 담화4)에서 아타나시우스에 근거했을 것 같은 시편 69(70)5)의 한음절 반복 기도방법을 제시한다.

『마르첼리누스에게 쓴 아타나시우스의 편지』 아타나시우스는 우리가 그의 이름과 고질적인 병으로 고통당했을 것 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열심한 수행자에게 그의 작품을

3) “시편운동”은 4세기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시편의 사용이 널리 퍼진 것과 수도승 생활뿐만 아니라 폭넓게 전 교회에 영향을 미친 것과 연관되는 현상을 묘사하는 용어로 James McKinnon에 의해 만들어졌다. “Desert Monasticism and the Later Fourth-Century Psalmodic Movement”, 『Music and Letters』 75, 1994 505-21. 4) 『담화집』, “카시아누스의 열 번째 담화(이사악 아빠스의 제 2담화)”, 코이노니아 제10호 (1985년 겨울), 왜관: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148-167. 5) 히브리 시편 구분에 따르면 시편 70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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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

헌정한다. 허약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마르첼리누스는 자신을 성경연구 특히 시편연구에 바쳤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학식이 있는, 아마도 가상의 인물인 것 같은, “원로”(old man)와의 담화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나눈다. 우리는 “원로”라는 용어의 사용과 아타나시 우스의 이집트 수도승 수행에 대한 견실한 친숙함 때문에 편지의 내용 을 후대의 다른 수도승 문학작품 때문에 알게 된 전통들과 연결짓는다. 특히 요한 카시아누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 전통들을 생각하게 된다. 편지 자체는 폭넓은 독자층을 겨냥한 것이어서 그리스와 시리아 전통에 서 시편 (Psalter) 텍스트를 보완하는 표준이 되기도 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편지의 많은 부분을 시편에 접근하는 정통 교부들의 방식을 소개하는데 할애한다. 그는 많은 시편들이 성서의 역사와 주제들 의 요약임을 주목한다. 즉 창조에서 출애굽, 유배까지 다루고 있는데, 이 는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 “동산”(garden,

)이다. 그는 시편의 문학유형(psalmodic genre)은 고유

한 찬가(song)를 가지고 있는 성경의 다른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며, “군 왕”(royal) 시편은 메시아를 지칭한다고 예언된 전통적 이해를 따른다고 본다. 또한 헤르만-요셉 지벤(Hermann-Josef Sieben)에 따르면, 아타나시 우스는 육화 ‘안에서’(in)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시편에서는 육화 ‘이전에’ (before) 이미 들을 수 있다고 본다. 아타나시우스는 시편과 성경의 다른 책들의 차이를 강조한다. 시편은 “영혼의 행동 모델(

)”을 가지고 있어 다른 성경 책들이 갖지 않은

실제적 적용력을 지닌다. 유혹에서 감사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직면하 는 다양한 상황에 시편은 각자가 겪는 체험을 ‘어떻게’(how, 고 ‘무슨’(what,

) 이해하

) 응답을 할 것인지 알려준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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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바 스트와트

도께서 시편에서 당신의 모범적인 생활양식(

)을 보여 주신다고

보고, 이런 윤리적 적용을 자신의 그리스도론적 해석과 연결시킨다. 시 편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추종에 대한 본보기를 제시한 다. 바로 “육화” 그 자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지상적 인간과 천상적 인간의 전형이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 비교하여6), 시편은 수덕적인 면에서 인간 실존의 모든 면, 즉 영혼의 상태와 생각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반면에 성경의 다 른 책들은 읽는 이들에게 경탄과 모방을 위한 말씀과 행적을 제시하는 질적 가치를 지닌다. 이와 같이 성조들에 관해 다루고 있는 말씀들은 그 들 자신과 예언자들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언급인 반면에 (메시아적 시편 혹은 예언적 시편 외에) 시편 말씀들은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들에 게 개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가 마르첼리누스에게 쓰기를,

“시편을 읊는 사람은 시편을 그 자신의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는 마 치 시편이 자신에 대하여 쓰고 있는 것처럼 시편을 노래한다. 그는 시편 이 누군가에 의해 읊어지고 있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에 관해 말하고 있 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시편을 외운다. 그 리고 무엇을 읊든 간에, 그는 마치 자신이 그것을 한 것처럼 하느님께 들 어 올린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전통적 거울의 비유를 시편에 적용한다. 마르 첼리누스는 그 거울을 통해 노래하는 내용을 자기 존재로 경험하고, 자

6) 이는 아타나시우스가 즐겨 쓰는 방식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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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

기 영혼의 “움직임”으로 “인식”(

)한다. 그뿐만 아니라 텍스트

를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노래하는 텍스트를 “감지하고”(sense) “느끼는”(feel) ‘체험’(experience)을 한다(

).

단순히 시편을 읊거나 노래하는 것을 듣는 사람도 이와 유사한 효과 를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듣는 말씀을 의식할 때 갑자기 통회가 일어나 회개를 하고,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배우며, 말씀으로부터 힘을 받아 기쁨을 느끼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아타나시우스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에 대한 ‘기억’과 삶의 방향(

)을 ‘수

정’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강한 개인적 동일시의 증상과 치료를 강조한다. 아타나시우스는 『마르첼리누스에게 쓴 편지』의 대부분을 각 시편의 해 석을 적용하는데 할애한다. 그는 시편유형에 따른 분류와 다른 시편들 도 언급하면서 정경순서에 따른 주해를 제시한다. 각 시편은 각자가 “자 기 영혼의 움직임과 상태를 알기 위해 ‘주관적으로’ 읽을 수 있고, “유형 과 교훈”을 발견하기 위해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편지의 중간 부분을 예언적 어투로 특별히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시편으로 끝맺는다. 시편의 최고의 유용성은 시편이 갖는 ‘수행적인’(performative) 성격이 다.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선포되거나” “알려진” 것이 시편에서 읊어지 고 있다. 노래를 통해 소리로 “발설해 내놓은 것”은 텍스트 자체가 대단 히 개인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텍스트 자체가 본능적이 고 감정적임을 말해준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악적 조화와 감정 관계에 대 한 전통적 희랍식 이해에 근거하여,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시편 낭송자의 안정된 내면 상태와 연결시킨다. 그는 또한 곡조를 붙여 시편을 읊는 것(노래)은 즐거움이나 흥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 흐르는 생각(

)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표시이며, 곡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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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낭송(melodic reading)은 잘 정돈되고(

) 헷갈리지 않는

이해의 상태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간결하게 나타나고, 후에 에 바그리우스(345-399)의 수도승 심리학 이해의 핵심인 플라톤적 영혼의 삼화음(三和音)구조를 인용하여, 균형 잡힌 감정 상태의 목표를 “그리스 도의 마음을 지녀야”(1코린 2,16)한다는 성서적 당위성에서 해석한다. 욕 구와 저항으로 엇갈리는 제멋대로인 감정을 진정시켜 이성의 통제아래 안정시킴으로써,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조율 되어간다. 그래서 “모든 조직과 움직임들”안에서 온 존재는 영적 음악 (

)에 봉사하게 된다. 아타나시우스가 이어지는 장에서 그 이

미지를 다시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종종 인간체험의 잘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영(Spirit)의 인도아래 육체의 악기를 동반하면서 점점 잘 조화 된 오케스트라의 악기처럼 정돈 되어 간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것 자체 가 갈망하던 것을 이루었기에 치유적이며 이미 얻은 조화로움을 표시해 준다. 이런 내적 상태와 외적 행위간의 완벽한 조화는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을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중재자가 되게 한다. 아타나시 우스는 얼핏 황홀한 움직임(ecstatic transport)에 대해 암시한다. 그는 이 런 영혼의 상태는 마음을 선한 이미지들, 미래의(천상의) 영생에 대한 갈 망, 격정을 벗어남, 그리고 가장 최고의 선만을 가진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는 데로 옮겨가게 해준다고 말한다. 아타나시우스는 다윗이 악기를 연주하여 사울을 진정시킨 것을 언급하 면서 성서적 분석이 분명히 철학적 영감을 보충하는 것 같다고 본다. 물론, 시편의 진정한 위력은 결정적으로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는 것 에서 기인한다. 이는 영감을 받은 시편 저자와 성령(Spirit) 자신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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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

두 가지 차원에서 거론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마르첼리누스에게 쓴 편지』에서 독자가(수신인) 시편의 말씀들을 마음대로 변경시키지 말 고, 대신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ipsissima verba) 시편저자들이 시편을 그들 자신의 기도로 인식한다는 것과 독자와 함께 기도하게 된다는 것 을 확신시키는 권고로 마무리짓고 있다.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과 텍스트 가 하나 됨은, 독특하게 탁월한 매개체를 통해 공동 중재안에서 수세기 를 뛰어넘어 하나로 엮어져, 기도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과 성서저자 를 하나로 만들어 준다. 아타나시우스는 마르첼리누스가 시편을 감도한 영을 기쁘게 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주님은 성서 말씀 안에 현존하신 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아타나시우스는 편지의 처음부터 끝 까지 시편은 다양한 상황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유익하게 작용함을 강 조한다. 또한 그는 마지막 장에서 텍스트의 불가침성(inviolability)을 강 조하면서 특별히 시편으로 악마에게 대항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 시점에서 “원로”는 편지의 수행적인 분위기를 상기시키면서 담화를 이어간다. 이 장들에서 시편의 용도는 해당 유혹에 대응하는 “반대되는 성경구절”(antirrheticus)7)의 활용이라는 보다 더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 아간다.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이미 나타났듯이, 독특한 수도승의 기 도인 이 수행은 단음절 되새김(monologistic meditation) 기도이다. 이 기 도 형태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나타난 악마에게 대항하는 방법인 십 자성호 긋기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은 다른 효과적 수행들

7) Antirrhetic. 해당 유혹과 반대되는 성경말씀을 사용하여 유혹을 이기는 것으로, 에바그리 우스 폰티쿠스의 『안티레티코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에 이르기까 지 악한 생각과 경향들을 거슬러 싸우는데 도움이 되는 성경본문들을 제시한다. 『수도승 영성사』, 허성석, 들숨날숨, 2011,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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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관련이 있다. 악마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성경문구나 예수님의 이름 을 부르는 것은, 수도승적 세계에서 유혹에 반대되는 성경구절 암송기도 (antirrhetic prayer)가 갖는 신학적 근거, 기억된 성경말씀, 그리고 시편낭 송(psalmody)과 실용적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미 이교인 대담자 첼수스와 한 오리게네스 논쟁에서 드러난 것처럼 분명히 주술과 유사한 데가 있다.

요한 카시아누스의 열 번째 담화 요한 카시아누스는 아타나시우스보다 약 50년 후에 쓴 책에서 단음절 로 된 시편 기도(monologist psalmodic prayer) 방법을 소개한다. 이는 놀 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 그리고 분명히 그의 영향인 - 아타나시우스의 시편 활용에 대한 통찰력을 포함한다.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와 열 번째 담화 사이에 또 다른 유사점들이 있다. 아타나시우스의 『마르첼 리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원로”와 카시아누스 의 아홉 번째 담화와 열 번째 담화의 ‘끊임없는 기도’를 말하고 있는 스케 테스의 이사악 아빠스는 지혜로운 이집트 수도승의 가르침을 전달한다. 아타나시우스가 『안토니우스의 생애』와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에 서 의도한 것처럼, 카시아누스도 수도승생활의 초보자들을 위해 이 글 을 썼다. 그는 남부 갈리아에서 갓 태동한 라틴 수도승 삶의 튼튼한 기초 로, 더 나아가 수도승 삶의 궤도 수정을 위해 주로 이집트 수도승 삶의 전반적 개관을 소개한다. 아타나시우스 이후 동방과 서방 수도승 세계에 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하고 진보한 사건은 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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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에서 특히 지적(知的)으로 세련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와 “키다리 수사들”8)의 무리와 관련된다. 4세기말부터 동 지중해 교회를 혼란에 빠 트린 오리게네스 논쟁은 이집트에 대변동을 가져왔고, 지적(知的)이고 세련된 수도승 삶을 지지하는 무리들을 흩어버렸다. 이런 와중에 시편낭 송과 단음절 기도(psalmodic and monologistic prayer)에 대한 수행과 이 론은 계속 발전해 나갔다. 카시아누스가 제시하는 끊임없는 기도 방법은 원래 그가 의도한 『담 화집』의 끝맺음으로,9) 그의 가르침의 절정이다. 이는 금욕적 훈련과 신 비적 기도를 가능케 하는 방법으로, 수도승의 전(全) 삶을 통해 수행 해 나가야 한다고 독자에게 들려주는 일종의 작별인사(valediction)이다. 아 홉 번째 담화의 길고도 자상한 설명과 열 번째 담화의 여러 장들 다음 에, 카시아누스는 드디어 시편 69(70)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10)에서 유래하는 “단음절 기도”로 구성된 자신의 방법을 소개한다. 열 번째 담화에서 이사악 아빠스는 자신의 가르침은 오직 “실천적인 체험”(practical experience, experientia actualis)에 의해 “순수함”(purity) 의 문 앞에 이르러, 이미 그 문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8) 5세기 이집트 니트리아 지역에 살던 이집트 수도승의 무리 가 운데 암모니우스 (A m mon ius), 디오스코루스(Dioscor us),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에우티미우스 (Euthymius) 등 4명의 수도승을 말한다. 이들은 키가 크고 외견상 남의 이목을 끌었으며 엄격한 단식과 정결, 성서에 대한 지식으로 유명하였다. 또한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 게네스 신학에 대단한 지지자들이다: 참조. Wikipedia. 9) 『담화집』은 이집트 스케티스와 켈리아의 15명 원로들이 한 24개의 담화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1-9 담화, 두 번째 부분은 11-17 담화, 세 번째 부분은 18-24 담화이다. 그는 제 9 담화와 제 10담화에서 의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끊임없는 기도’에 대해 언급한다. 10) 참조. 새 성경 시편: “하느님, 어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시편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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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시키면서 그의 가르침을 시작한다. 이사악 아빠스는 자신의 말을 듣 는 젊은 수도승들은 “순수기도”의 문을 통과하여 “체험의 손으로” 순수 기도의 가장 깊은 내면과 접촉하고 그 깊은 내면에서 안식을 얻었음을 주목한다.11) “실천적인 체험”(practical experience)과 “순수기도”(true prayer) 용어는 에바그리우스에 의해 정교하게 발전된 수도승 생활의 체 계적 구조를 상기시킨다. 카시아누스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스승의 사 상체계에 충실하다. 열 번째 담화에서 핵심요소로 사용되는 비유는 “순 수기도”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제시하는 에바그리우스의 『악한 생각들에 관하여』(On the Thoughts)의 마지막 장을 반향한다. 이 점은 카시아누스가 “실천적 체험”12)으로 요약한 수행적 훈련에 대한 관심을 포함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승은 덕행의 손으로 “성서의 문을 두드릴 때” “성령의 감도를 받은 말씀이” 결코 자신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카시아누스는 자신의 기도양식(formula)을 소개하면서 모든 시편에 대 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한 구절(one verse)로 수렴한다. 이로 인해 이 기도양식은 성경의 광범위한 활용과 중요성에 대한 축소판(microcosm) 이 되었다. 카시아누스는 이 구절은 “인간 본성에서 기인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포함하며, 그 자체로 충분히 그리고 넉넉히 공격을 포함한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아타나 시우스가 시편을 정경순서에 따라 분류한 것처럼, 카시아누스는 에바그 리우스의 여덟 가지 악한 생각에 따라 분류하여, 자신이 선택한 구절에 들어맞는 다양한 상황을 제시한다. 11) 『담화집』 10,9,1-2. 12) 에바그리우스의 프락티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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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

카시아누스는 한 구절(single verse)을 끊임없이 되새기라고 권하면서, 이 기도 양식이 다양한 다른 수행들안에서 주의력을 키우고 유지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에, 기도하고 있는 시편의 나머지 부분이나 성경의 다른 책들에 대한 독서와 되새김을 계속해도 된다고 말한다. 이 기도양식은 기도를 방해하는 생각을 뚫고, 자연이 마음이 이 성서 텍스트에서 저 성 서 텍스트로 방황할 때, 다시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이 기도 양식 은 계속적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과 연결되게 해준다. 이 점에서 아타나 시우스를 생각하게 된다. 카시아누스는 이 양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확실한 점은 “하느님을 아는 다양한 지식을 넘어, 점점 더 고양되고 더욱 더 거룩한 성경의 신비로 양육되기 시작한다”고 주장한 다.13) 수도승은 바위 뒤에 숨은 “오소리”처럼 한 구절을 끊임없이 되새 김으로 시작하여,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산을 바라보고,14) 확신에 차서 점점 더 안정적으로 성경의 높은 경지를 꿰뚫으며, 여기저기 둘러보는 “이성적인 숫사슴”15)이 되어간다. 이렇게 수도승은 성경말씀으로 양육되어, “시편이 드러내는 느낌들을” 알게 된다. 또한 시편이 예언자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 의해 쓰 여진 것처럼, 자신의 깊은 통회에서 우러난 자신의 기도로 노래하게 된 다. 수도승은 시편이 과거 언젠가 예언자들에 의해 쓰인 것일 뿐만 아니 라, 매일 자신에 의해 실행에 옮겨지고 완성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바 로 시편을 자기 자신을 향한 것으로 간주한다. 체험을 통하여 수도승은 텍스트의 “혈맥과 골수가 드러남”을 알아차리면서 그 텍스트의 내면으 13) 『담화집』 10,11,2. 14) 『담화집』 10,11,4. 15) 참조. “높은 산들은 산양들의 차지 바위들은 오소리들의 은신처”(시편 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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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빠져든다. 수도승이 각 시편들을 노래하거나 기록하면서 “마음의 감 정”(cordis affectus)을 나눔으로써, 시편 저자처럼 되어가고, 시편을 따라 가기보다는 그 의미를 먼저 살아가게 되며, 어휘들을 이해하기 전에 말 씀들이 가진 능력(force, virtus)을 알아챈다.16) 우리는 시편을 기도하면 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루는 수많은 일상의 실패와 성공을 기억한 다. 카시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시편에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다 표현되어 있다. 우리 는 시편을 통해 겪은 것들을 더 잘 이해하고, 스승에 의해 인도되듯 감정 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으며, 가장 투명한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내면 에서 일어난 것을 들여다본다. 그래서 시편을 단순히 듣거나 기억한다기 보다 눈으로 본 것으로 파악한다. 우리는 느끼기 때문에 시편이 본성적 으로 주어진 것인 양 마음의 심연(深淵)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본질로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시편의 의미를 텍스트를 읽는 것에 의해서가 아 니라, 체험에 의해 바로 그 의미를 관통하게 된다.17)

아타나시우스의 요점과 비유를 놀라울 정도로 요약하고 있는 카시아 누스는 두 작품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제시하는데, 다음과 같이 도표화 할 수 있다.

16) 『담화집』 10,11,5. 17) 『담화집』 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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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

열 번째 담화

인간의 모든 생각들과 감정들을 포함한 시편들

10,13-15,30

10,3,5; 11,6

다양한 상황들에 적용되는 시편들

10,12,15-25,30,32

10,3-15

반명제(antirrhesis)로 유용한 시편들

33

(참조. 10,3-15)

자기 자신에 대한 것처럼 노래하는 시편들

11

11,4

자신에 의해 쓰인 것 같은 시편들

11

11,5

느끼고 체험한 시편내용

12

11,6

영혼의 거울로서 시편들

12

11,6

비록 편지의 초기 라틴어 번역본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분명히 카 시아누스는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놀라 운 일이 아니다. 카시아누스 자신은 그리스어를 읽을 수 있었고, 분명히 편지가 널리 알려졌던 이집트 수도승 문화에서 다년간 지냈다. 그리스어 수도승 문학의 영향, 특히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영향이 카시아누스 의 작품 구석구석에 배어있다. 아타나시우스 또한 유명한 『안토니우스의 생애』18)뿐만 아니라 카시아누스가 손쉽게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었을만 한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료를 취했을 것이다. 이 또한 놀 라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아타나시우스와 카시아누스의 의견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시편의 효과 부분에서는 차이 를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타나시우스는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마음을 조화시킴을 강조한다. 아타나시우스처럼 카시아누스도 어딘가 에서 목소리와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는 보편적 권고를 한다. 그러나

18) 카시아누스 시대에 적어도 두 개의 라틴어 번역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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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기도 가르침의 핵심인 황홀하고 신비적 체험의 “불같은 기 도”(fiery prayer)19)를 덧붙인다. 이는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타나시우스가 단지 실마리만 보인 것을 훨씬 넘어선다. 아타나시우스 와 다른 점은 다음의 비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

위로의 시편

28-29

이해력을 가지고 노래하기

29

열 번째 담화 (참조. 『제도서』 2,1-2)

신비적인 기도로 이끄는 시편을 노래하기

(참조. 『담화집』 9,26,1)

신비적인 기도로 인도하는 양식

10,12,14; 11,6

카시아누스가 언급하는 황홀한 기도 형태 또한 기도에 대한 에바그리 우스의 가르침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 에바그리우스가 가장 최고의 기도 를 “순수하고” “형상이 없는”(imageless) 것으로 묘사한 반면, 카시아누 스는 에바그리우스의 기도 특징에 고귀하고, 잠시 지나가는 희열에 넘친 면을 강조하면서 결정적으로 체험의 질을 추가시킨다. 그는 가장 기본적 기도부터 가장 진보한 기도에 이르기까지 어떤 기도 형태든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어휘, 이미지(형상), 혹은 상식적 지각을 뛰어넘어 이런 기도 상태로 인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카시아누스는 아홉 번째 담화의20) 일 반적 그리스도인 기도에 대한 긴 설명과 그 뒤에 나오는 열 번째 담화의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수도승적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런 체험이 가능하 다고 말한다. 이는 간청, 기도, 전구, 그리고 감사의 기본적인 “네 가지 종 19) 불덩이 같은 기도. 20) “카시아누스의 아홉 번째 담화 - 이사악 아빠스의 제 1담화”, 코이노니아 제8호(1984 봄), 왜관: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7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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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양성에서 성경 텍스트의 사용

류의 기도”로부터21) 주님의 기도에서, 혹은 카시아누스가 “통회”(compunction)의 양상으로 설명하는 다양한 양태 안에서 솟아날 수 있다. 카 시아누스가 제안하는 “기도양식”을 되풀이하는데 전념하면서 “민첩하게 흐르는 마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마음의 고양(excessus mentis) ……, 영적 느낌으로 충만, 가장 거룩한 의미가 드러남,22) 눈에 보이지 않 으며 천상적인 것에 대한 관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같은 기도,23) 소리나 문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과 그리움을 자아내면서 모든 감각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선” 성령의 방문으로 말할 수 없이 드높아져 불덩이가 된 마음의 지향으로24) 어떤 형상도 없 는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기도의 분위기를 자아 낼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경험에 대 한 일말의 기미도 없다. 이에 대한 그의 무(無)언급은 알렉산드리아 그리 스도교 전통의 주된 흐름 안에 존재하는, 황홀한 기도 체험에 대한 불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카시아누스의 작품들에서는 그런 단어들이 발견 되고 있다. 이는 카시아누스 작품 연구의 수수께끼이다. 이 글은 시편낭 송에서 카시아누스의 신비적 기도를 소개하고자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중심 논제는 가장 근원적이고 참으로 평범한 수도승 삶의 핵심 수행이 (시편낭송) 인간이 하느님을 대면하는 높은 경지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카시아누스의 공로는 아타나시우스의 시편에 대한 면밀 하고도 지각 있는 설명에 유익한 보충을 한 점이다.

21) 1티모 2,1. 22) 『담화집』 10,10,12. 23) 『담화집』 10,10,14. 24) 『담화집』 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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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과 질문들 아타나시우스와 카시아누스는 시편의 규칙적 반복 수행은 성경의 다 른 책들의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는 기초이며, 개인적 표현 수단이고, 윤리적이고 심리적 성장의 도구이며, 악마의 유혹에 저항하는 무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카시아누스는 시편 69(70)25)에서 택한 단 음절 기도양식을 자신의 황홀한 기도에 대한 개괄적 가르침과 연결시킨 다. 아타나시우스와 카시아누스 모두 성경말씀을 통해 양성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시편의 수도승적 수행에 대해 확신에 찬 설명을 제시한다. 흥미있는 많은 질문들이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시편과 영감을 받은 말씀의 능력을 강조할 때, 수도승 저자들은 어떻게 언어, 번역, 그리고 텍 스트의 정확성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했을까? 어떻게 그들은 시편에서 취 한 문학적 언어들을 자신들의 매일의 삶의 언어와 연결시켰을까? 어떻게 초기 수도승 생활에서 수도승 교육이 문법이나 공적 언어를 익혀야 하 는 필요에 접근했을까? 이런 중요한 질문들이 더 연구될 필요가 있다.

25) 그는 시편 69(70)를 아홉 번째 담화와 열 번째 담화에서 기도에 대한 다양한 양식의 절정 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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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실리우스의 편지 21) 성 바실리우스 허성석 로무알도 옮김

해 제 이 서간은 358년, 바실리우스가 폰투스(Pontus)에 있는 자기 가문의 소유지 안네시(Annesi)로 물러나 생활할 때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 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로서 수도승생활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서간에서 바실리우스는 자신의 금욕적 이상과 안네시 생 활을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레고리우스를 이 삶으로 초대하고 있다. 특히 이 장소의 아름다움에 대해 열성적으로 묘사함으 로써 친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한다. 이 작품은 금욕적 수행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여기서 바실리우스는 복음적 삶의 원칙과 방식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바실리우스는 서두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해야 할 바에 관해서, 그리고 그로 써 우리를 구원으로 안내하는 인도자였던 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에 관해서 이제 당신께 설명하고자 합니다.”

1) 본문 번역과 각주를 위해서는 Basilio di Cesarea, Opere Ascetiche, cura di Umberto Neri, trad. di Maria Benedetta Artioli, Unione Tipografico-Editrice Torinese: Torino 1980, 625-34쪽을 사용하였고, 해제는 같은 책 23-24쪽과 허성석 편저, 수도승 영성사: 영성의 뿌리를 찾아서, 왜관: 들숨날숨, 2011, 184-186쪽을 참조하였다.


성 바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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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우스는 분명 엄청 큰 이점을 가지고 있는 고독한 장소로 물러났 다. 고독이 욕정들을 완화하고 영혼에서 욕정들을 완전히 잘라내도록 이성에 필요한 공간을 부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 신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며 세상에서의 진정한 분리 로 얻게 되는 보다 깊은 고요는 물리적으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육체에 순종하는 감각에서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있다고 말한다. 이 은거(anacoresi)는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에 사로잡힌 관상인 기도로 채워진다. 동시에 욕정들과 인간적 교설들을 거스른 고된 싸움은 완성의 기본도구인 지속적 성경묵상으로 안내되고 유지된다. 금욕생활에 대한 이런 정의와 이 생활을 떠받치는 바실리우스의 원칙들에 대한 언급에 일련의 실천적 규정들이 따라온다. 즉 어법, 몸의 자세, 수도복, 일과, 식 사, 잠, 밤중기도 등이다.

이 작품은 아직 경험이 없고 여전히 플라톤주의적 언어와 개념에 치우 쳐 있는 바실리우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또 당시 과장되고 허세적인 금욕주의로 기승을 떨치고 있던 에우스타티우스의 영향도 보여주고 있 다. 다음 구절이 좋은 예이다. “땅을 향한 슬픈 눈, 무관심한 외모, 헝클 어진 두발, 지저분한 의복은 저자세의 겸손한 경청자에게 부합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후 바실리우스 사상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바실리우스가 젊은 시절에 쓴 이 작품에는 이미 매우 풍 요로운 통찰들로 이루어진 그의 많은 생각이 담겨져 있다. 특히 사막 교 부들의 금언집에 나타나는 주제들을 한데 묶고 있는 기도에 대한 훌륭 한 정의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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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실리우스의 편지 2

본 문

그레고리우스에게 1. 나는 벗들의 자녀들에게서 드러나는 그들 부모와의 유사성으로부 터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 모양으로 당신 서한을 알아보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먼저 여기서의 생활상과 그 방식에 대해 제대로 모른다면, 당신이 말했던 바, 곧 이 장소2)가 당신 영혼 안에 우리 생활을 향한 어떤 충동 을 낳기에 충분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맞는 생각이었습니 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약속으로 보장된 행복에 비해 이 지상의 행 복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는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나에 관해 말하자면, 내가 밤낮 이 고독 속에서 행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이처럼 나는 도시의 일들과 엄청난 죄악의 기회를 포 기했지만 여전히 내 자신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나는 바다에서 경험이 없어 항해 중에 큰 어려움에 처하여3) 뱃멀미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도 같습니다. 즉 그들은 배의 거대함 때문에 불안해합니 다. 배가 커서 더 크게 파손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보트나 나룻배로 건너가지만 도처에서 멀미로 고생하고 곤궁을 당합니다. 사실 멀미와 담 즙은 그들과 함께 이동합니다. 2) 폰투스의 이리스(Iris) 근처 안네시를 말한다. 바실리우스는 다른 서간에서 자신이 금욕생 활을 했던 이 장소에 대해 매우 감탄석인 용어들로 이야기하였다. 3) 바실리우스는 서간 223,824b에서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 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자신의 삶을 위해 동일한 여정을 선택하는 어떤 형제를 만나기 를 바랐습니다. 그것은 그와 함께 현세생활의 짧은 파도를 건너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성 바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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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우 역시 다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 안에 타고난 욕정 들4)을 지니고 다니며, 도처에서 같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 고독 으로부터 큰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해야 할 바에 관해서, 그리 고 그로써 우리를 구원으로 안내하는 인도자였던 분5)의 발자취를 따르 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에 관해서 이제 당신께 설명하고자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2. 정신을 고요6)하게 유지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 두리번 거리며 곁눈질하는 눈은 자주 높은 곳을 바라보거나 낮은 곳을 바라보 기에 더 이상 앞에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다 면 보는 것이 분명해지도록 눈은 그 대상에 고정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이 많은 세상걱정으로 여기저기 분산될 때, 진리에 확고히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예를 들면, 아직 결혼의 사슬로 묶이지 않아 격렬한 욕망과 억제할 수 없는 본능과 욕정적인 사랑으로 동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미 혼인을 하여 걱정거리들로 혼란스런 사람도 있습니다. 즉 만일 그에게 자

4) 바실리우스는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이 나온다”(마태 15,19)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악 한 것들은 우리 자신 안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5) 그리스도를 뜻한다. )는 동시에 정신집중, 침묵, 외적 내적 고독, 하느 6) 고요를 뜻하는 그리스말 헤시키아( 님과의 일치를 뜻하기도 한다. 이 용어는 수도승 영성사 안에서 고독의 상태, 정신의 고요 상태, 하느님 안에 머무르기 위해 필요한 인간 전 존재의 침묵, 즉 외적 조건들을 통해서 역시 추구된 필요한 한 가지 것(참조. 루카 10,42)에의 내밀한 집중을 나타내기 위한 전문 용어가 된다. 때때로 이 용어는 오직 내적이고 영적인 측면에만 혹은 그것을 도와주는 외 적 조건들이나 그 두 가지 모두에 언급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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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실리우스의 편지 2

녀가 없다면, 그는 자녀를 갖기를 열망합니다. 만일 그에게 자녀가 있다 면, 그는 자녀교육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는 부인을 돌봐야하고 가정을 염려해야하며, 식솔들을 다스려야 하고, 계약에서 손해를 보고 이웃과 다투고 법정에서 싸우며, 상업에서 위험에 처하고 농사로 수고합니다. 매 일 그의 영혼은 어둡습니다. 밤에는 그날의 걱정거리들을 자기 안에 모 으고, 이 같은 일들에 대한 환영으로 정신을 빗나가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곧 세상으로부 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분리는 물리적으로 세상 밖으 로 나가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을 육체에 순종하는 감각에서 떼 어내고7), 도시도 없고 집도 없고 자기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벗들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재산도 없고, 생계유지 수단도 없고 사건들도 없으며 친 지들과의 관계도 없고, 인간적 가르침에 무지하게 되는데 있습니다. 즉 모 든 신적 가르침의 날인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마음을 사로잡았던 나쁜 관습에서 유래한 가르침들을 잊 어버리면서 마음이 그것에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초에 새겨진 글자들을 지우지 않으면 거기에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이미 얻은 관습에서 유래하는 선입견8)을 제거하지 않으면 영혼에 신적 교의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고독한 장소는 엄청 큰 이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욕정들을 완화하고 영혼에서 완전히

7) 자신의 존재방식을 통하여 또 다른 세상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탈의 영적 특성에 대한 강조는 당시 일반적인 것으로 이미 오리게네스에게서 나타 난다. 오리게네스는 “장소로써가 아니라 행위로써, 지역을 바꿈으로써가 아니라 생활방식 을 바꿈으로써 분리되십시오”(Leviticum XI, 1, PG 12, 530d)라고 말한다. 8) 각 사람은 세속적 생활습관과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하 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성 바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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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거하는데 필요한 공간을 이성에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수들이 길들여질 때 쉽게 정복될 수 있는 것처럼 욕망, 분노, 두려움, 슬픔과 같 은 영혼의 이 해독한 고질병들은 일단 고요에 의해 가라앉아 더 이상 지 속적 발병으로 심해지지 않는다면, 이성의 힘으로9) 쉽게 치유됩니다. 그 러므로 바로 우리 장소와 같이 사람들과의 교제에서 자유로운 이런 장 소는 밖의 사람들 중 누군가에 의해 지속적인 금욕수행을 방해받지 않 게 해줍니다.10) 그 다음 거룩한 생각들로 영혼을 살찌우는 신심수행이 있습니다. 지상 에서 천사들의 합창대를 모방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이겠습니 까? 또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찬가와 찬송가로 창조주를 공경하는 것 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다음 이미 태양이 찬란히 비출 때, 도처에서 기도를 동반한 노동으로 돌아서고, 소금으로 양념하는 것 처럼 찬가로 우리 노동을 양념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이겠습니 까? 찬가들로부터 오는 위로는 영혼에 기쁨을 가져다주고 슬픔을 거두 어줍니다.11) 그러므로 고요는 영혼을 위한 정화의 원리입니다. 혀가 인간의 일들을 말하지 않고, 눈이 아름다운 색상과 육체의 아름다운 조화를 고려하지

9) ‘이성의 힘’이라는 표현은 스토아적 개념이다. 스토아학파에 의하면 영혼은 상반된 두 개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이성적 힘과 비이성적 힘이다. 10) 바실리우스에 의하면, 눈을 통해서건 귀를 통해서건 죄에 대한 어떤 유혹도 받지 않기 위 해서, 그리고 영혼 안에 우리가 보고 들은 사물에 대한 어떤 형상이나 자국도 머물러 있 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거주에 있어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는 우리의 이전 생활습관 역시 극복할 수 있다. 11) 이 찬가들은 무엇보다도 시편들이 분명하다. 바실리우스에게 있어 시편낭송은 우리 생각 의 요란한 파도를 가라앉히면서 영혼에 평화와 평정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그날의 수고 안에서의 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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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실리우스의 편지 2

않으며, 청각이 쾌락으로 만들어진 선율과 사람들이 내뱉은 비열한 말 들을 들음으로써 영혼의 활기를 앗아가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사실 그 러한 것들은 영혼의 능력을 가장 크게 빼앗습니다. 정신이 더 이상 외적 사물들로 인해 분산되지 않고 감각들로 인해 세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그 자신을 통해 하느님 생각으로 고양되며, 그 아름다움으로 조명된 영혼은 자기 본성에 대한 망각에 이 르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더 이상 음식에 대한 관심이나 의복에 대한 염 려와 같은 부차적인 것들로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참조. 마태 6,25). 그는 세상걱정에서 자유로워져 영원한 보화를 얻기 위한 공부에 전념하 여 절제와 굳셈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두 일반범주 아래 정의와 현명과 다른 덕들이 어떻게 세분화되며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합당하게 행동하는 법을 인간에게 어떻게 알려주는지 배웁니다.12) 3. 그러나 적합한 것을 발견하기 위한 최상의 길은 영감 받은 성경에 대한 되새김입니다. 사실 성경 안에서 완수해야 할 바를 위한 권고들도 발견되고 복된 사람들의 생애들도 기록으로 전달됩니다. 그들은 마치 하 느님께 맞갖은 삶을 위한 살아있는 이콘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의 생애가 우리에게 제시되어 선업을 본받게 합니다.13) 잠시 멈추어 그것을 주시한 다면 각자 부족하다고 느끼는 모든 면에서 공공병원에서처럼 자기 병에 맞는 유용한 약을 발견할 것입니다.14) 그렇듯 절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12) 스토아학파에게 있어 덕은 네 가지이니, 곧 현명, 절제, 굳셈, 정의이다. 이 덕들은 일련의 성경인용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적 문맥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13) 바실리우스는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생생하고 유효한 표상으로서 성인들의 생 애를 바라볼 필요가 있고, 거기서 발견되는 선을 행할 필요가 있다. 14) 성인들의 생애가 여기서는 성경에서 이끌어낸 모범들이다. 따라서 성경은 가장 크고 훌


성 바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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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요셉의 이야기를 읽고(참조. 창세 37-50) 그로부터 절제에 적합 한 행위들을 배웁니다. 그는 단지 쾌락에 대해 자제력 있는 요셉을 발견 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덕의 옷을 입은 요셉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 다. 굳셈은 욥에게서 배웁니다. 그는 자기 인생이 완전히 전복되어 한순 간에 부자에서 가난한 자가 되고 사랑스런 자녀들을 잃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의연한 태도를 오지했습니다(참조. 욥 1,13-22).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그는 자기 영혼의 감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를 위로하러 왔지만 자기를 모욕하고 고통을 더해준 친구들로 인해 격분하 지도 않았습니다(참조. 욥 6,21). 그리고 만약 누가 온유하고 동시에 강한 영혼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보고자 원한다면, 그렇게 죄를 거슬러 분노를 사용하고 사람들 에게 친절을 보여준다면, 그는 전투행위에서는 용기 있지만(1열왕 17,4849) 원수들에게 원한을 갖는데 있어서는 인자하고 마음의 동요가 없는 다윗을 발견할 것입니다(1열왕 24,5 이하). 모세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큰 분노로 항의하지만(참조. 탈출 32,19 이하), 자기에 대한 비방은 온유한 마음으로 견딥니다(참조. 민수 12,1-13). 바로 화가는 다른 화상(畵像)을 취하여 자주 그 원본을 바라보면서 그 림을 그릴 때 자기 예술작품에 그 특성들을 전달하는데 주의를 기울입 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덕행에서 완전해지고자 노력하는 사람도 생 생하고 효과적인 표상인 성인들의 생애를 바라보고 모방을 통하여 거기

륭한 약방이며, 온갖 질병을 돌보는 장소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 오리게네스에게서 나타 난다. 그는 “말씀은 온갖 약의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바실리우스 역시 이런 생각 을 자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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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실리우스의 편지 2

서 발견하는 선을 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4. 독서에 이어지는 기도는 영혼을 더욱 맑고 활기 있게 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 다음 영혼 안에 하느님 생각을 분명 하게 각인시키는 훌륭한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내주(內住), 즉 하느님 기억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입 니다.15) 지속적인 하느님 기억이 세상걱정으로 중단되지 않고 정신이 갑 작스런 욕정들로 동요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하느 님의 벗은 이 모든 것을 피하며 그를 방종으로 유혹하는 욕정들을 거부 하고 덕으로 이끄는 행동방식에 항구하면서 하느님께 피신합니다. 5. 무엇보다도 먼저 말의 사용에 있어 서투르지 않고 논쟁심 없이 묻고 영예를 추구함 없이 대답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유익한 어 떤 것을 말할 때 그의 말을 끊지 마십시오. 허영심으로 남의 말에 끼어들 려고 열을 내지도 마십시오. 말하고 듣는데 어떤 기준을 정할 필요가 있 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우고 시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가르칠 필요 가 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어떤 것이 있다면, 나쁜 여인들 이 서자를 적자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듯이 그것을 감추지 마십시오. 오 히려 우리 생각에 영향을 준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할 필요가 있 습니다. 말투와 관련해서는 소리가 너무 작아 귀가 잘 들리지 않거나 너 무 커서 짜증나게 하지 않도록 중간 정도가 더 좋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 15) 바실리우스의 금욕적 체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근본적 통찰, 즉 그리스도인 삶에 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하느님 기억(memoria Dei) 개념은 이후 그의 전 생애를 지배 하게 되며 더 명확히 되고 강화된다.


성 바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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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해야 할 말을 우리 자신 안에 미리 정리한 후에 말을 해야 합니다. 농담으로 즐거움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위로로 호감을 사면서 만남에서 상냥하고 대화에서 부드러울 필요가 있습니다. 거칠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배제되어야 합니다. 책망할 때조차 그렇습 니다. 사실 당신이 먼저 겸손하게 낮아질 때 교정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 에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종종 예언자 나탄이 사용했던 질책의 형식 도 유익합니다. 그는 죄를 지었던 다윗에게 자기가 직접 처벌규정을 부과 하지 않고 대신 다른 사람의 경우를 들면서 그의 죄에 대해 스스로 재판 관이 되게 했습니다(참조. 2열왕 12,1 이하) 그렇듯 자기 자신에 대한 판 결을 스스로 선언한 후 다윗은 더 이상 자기를 고발한 사람에 대해 불평 할 수 없었습니다. 6. 게다가 땅을 향한 슬픈 눈16), 무관심한 외모, 헝클어진 두발, 지저 분한 의복은 저자세의 겸손한 마음에 부합합니다. 이는 마치 망자를 애 도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우리 안에서 저절로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17) 투니카는 허리띠로 몸에 조여져야 하지만, 띠는 여성 들이 하듯이 허리 위로 올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게으른 자가 하듯 띠를 느슨하게 하여 투니카가 늘어지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걸음걸 이는 활기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영혼의 헤이함을 드러낼 것입니 16) 성 베네딕도는 겸손에 대해 말하는 규칙 7장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겸손의 열 두째 단계는 수도승이 자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뿐 아니라 자기 몸으로도 항상 겸손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공동기도(하느님의 일) 중에나 성당이나 수도원 경내나 정원 에서나, 길에서나 밭에서나 어디에서든 또 앉거나 걷거나 서 있을 때나 항상 머리를 숙여 땅에 시선을 고정할 것이다”(성규 7,62-63). 17) 외적 태도에서 역시 참회자에게 고유한, 그리고 주님께서 ‘복되다’고 선언하셨던(참조. 마 태 5,4) ‘탄식’(penthos)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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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실리우스의 편지 2

다. 그렇지만 과격하고 거드름 피워서도 안 됩니다. 이는 영혼 안의 무분 별한 충동들을 보여줄 것입니다. 의복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인데, 곧 겨울과 여름에 몸을 적당하게 덮 는 것입니다. 화려한 색상과 정교하고 부드러운 가공품을 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옷의 미적 측면만 바라보는 것은 여성들이 이국적 색상 의 화려함으로 그들의 볼과 머리를 염색하면서 장식을 하려는 것과 같 기 때문입니다. 투니카도 충분히 두껍게 하여 그것을 걸치는 사람이 몸 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다른 옷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 다. 신발 역시 저렴한 것이어야 하지만, 제작된 용도에 부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복에 있어 그 필요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음식에 있어서도 빵은 그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고 물은 건강한 사람의 갈증을 해소시킬 것입니다. 야채로 된 주요요리는 육체가 수행해야 할 바를 완수할 수 있 도록 육체의 힘을 유지시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식사에 있어 게걸스런 탐식을 드러내서는 안 되고, 쾌락에 대해 균형과 평정, 그리고 절제를 유 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식사하는 순간에도 정신이 하느님 생각에서 멀어 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18) 오히려 우리 몸의 요구에 적합한 다양한 음식 이 얼마나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의 제공에 기인한 것인지를 숙고하면서 우리 음식의 본성과 그것을 섭취하는 몸의 체질조차 하느님께 영광을 드 리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식사 전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바, 곧 지금 우리에게 18) 바실리우스는 식탁에 앉아서도 기도하고, 빵을 먹으면서도 그것을 주신 분께 감사드리 고, 약한 육체를 강하게 해주는 포도주를 마시면서도 이 선물을 아끼지 않으신 분을 기억 하라고 한다.


성 바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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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는 것이나 장차 올 때를 위해 마련해두신 것 모두에 합당한 방식으 로 행해져야 합니다. 식사 후 기도는 베풀어주신 바에 대한 감사와 약속 된 것에 대한 간구의 행위로 행해져야 합니다. 유일한 식사시간이 정해져야 합니다. 항상 주기적으로 되돌아가는 동 일한 시간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 24시간 중 오직 이 시간만 육 체를 위해 소비될 것입니다. 금욕가는 다른 시간들을 정신의 활동에 사 용할 것입니다. 잠은 가벼워야 하고 잠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소박 한 식사의 자연적 결과와도 같습니다. 즉 중요한 일들을 돌보는데 전념 할 수 있기 위해 잠을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깊은 잠에 빠 진 사람들은 나쁜 환상들에 여지를 줄 정도로 이완되는 지체들과 더불 어 매일의 죽음을 체험합니다. 반대로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한밤 중은 다른 사람들의 아침과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밤의 고요는 영 혼에 공간을 제공해줍니다. 그 때는 눈도 귀도 소음이나 해로운 환상들 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오직 자신 안에 집중된 정신만이 하느님께 일 치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정신은 죄에 대한 기억으로 스스로를 교정 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정신은 악을 피하는 것을 규칙으로 정하고, 그의 열정이 정신에게 하도록 시키는 바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19)

19) 마테오스(Mateos)는 기도지침과 관련하여 이 편지에 나오는 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하고 있다. “이 문헌은 우리에게 다음 순서를 묘사한다: 찬가와 찬송가로 된 아침기도, 손 노동 중의 기도, 하나의 소시간경으로 끝난 것으로 보이는 성경 묵상, 식사 전후기도로 된 하루 한 번의 식사, 식사전후기도 마지막 기도들은 끝기도의 초기 형태일 수 있다. 끝 으로 한 밤중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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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사다리』 요한 클리마쿠스 허성석 로무알도 역주

담화2 욕정과 근심에서의 자유 [모두와 모든 것에서의 이탈: PG 653B-656B] 7. 진정 주님께 대한 사랑에 바쳐진 사람은 참으로 장차 올 왕국을 찾 아 얻으려 노력하면서, 실제로 최후 심판과 벌을 늘 기억하면서, 진지하 게 이 세상을 떠날 것을 두렵게 생각하며 재물이나 소유, 수입, 부모, 세 상의 명예, 친구나 형제들에 대해서, 즉 지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갈망 하지도 않고 생각하거나 걱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1) 오히려 그 모든 태 도와 그에 대한 온갖 걱정과 심지어 자기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조차 자 유로워지고 혐오할 것입니다. 이런 이탈로 발가벗겨지고 아무 걱정과 어

1) 거룩한 무관심(amerimnía)의 첫 단계는 소유로부터의 이탈, 하느님 섭리에 맡김, 내일을 걱정하지 않음(“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마태 6,34)이기 때문)이다. 걱정들(mérimnai) 은 말씀의 씨앗을 압도하는 가시들과도 같다(루카 8,14). 만일 ‘하느님의 가족’(에페 2,19) 이 되는 것을 방해할 경우, 부모나 친구들은 원수가 된다(마태 10,36)는 점을 기억한다면 가족에 대한 정당한 요구에서 오는 걱정과 우리가 돌봐야 하는 이들(1티모 5,8)에 대한 걱 정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탈은 루카 14,26의 다음 구절에서 복음의 역설적인 형태로 표현 된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요한 클리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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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주저함도 없이 그는 시선을 계속 하늘로 향하며 거기서 도움을 구하 면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2) 시편저자가 “제 영혼이 당신 께 매달리나이다”(시편 63,9)라고 말하는 바처럼, 혹은 또 다른 저자가 특 별한 표현으로 이렇게 확언하는 바와 같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따르 는데 절대 지치지 않았고, 사람에게 날들과 휴식을 바라지 않았나이다” (참조. 예레 17,16). 가장 큰 수치는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인간이 아닙니다. - 또 임종의 순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불필요한 다른 엉뚱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의 가르침이니, 곧 하늘나라에 부당한 자가 되지 않도록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기에는 여전히 세속 일들(우리가 그 한 가운데 살고 있든지 우연히 그런 일들을 만나든지 간에)에 연루되는 경향을 띠며 쉽게 세상 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점을 잘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아버지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라”(루카 9,60). 우리가 세상을 포기한 후 악령들은 여전히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자비롭고 인정 많은 세속인들을 부러워하게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런 덕들이 없는 것에 대해 후회하게 합니다. 우리 적대자의 목적은 우리를 세상으 로 되돌아가게 하거나 수도승으로 남아 있으면서 절망에 빠지도록 이끄 는 거짓 겸손에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교만으로 세속인들을 경멸할 수 있지만, 절망을 피하고 희망을 2) 참조. 시편 121,1-2: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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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으려는 우리의 열의 때문에도 그렇게 하기 쉽습니다.3) 그러므로 자기 가 거의 모든 계명을 준수했다고 주님께 대답했던 그 젊은이에게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경청합시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 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예수께서는 그 청년이 자선을 받아야할 정도로 궁핍해지도록 강하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므 로 긴박함과 열정으로 그분 길을 따르기를 바라는 우리는 주님께서 세 상에서 머물러 있는 모든 이를 죽은 자들처럼 단죄하시리라는 점도 숙고 해야 합니다.4) 주님은 그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려 했습니다. “육체 적으로 죽은 이들을 영적으로 죽은 세속인들이 장사지내도록 내버려두 라.”5) 그러나 부(富)는 그 젊은이가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그의 막대한 재산을 팔라 고 그에게 요구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입니다.6) 이에 대 해 확신을 가집시다. 그리고 우리 부르심에 따르는 엄청나게 큰 영광에 대한 약속으로 만족하도록 합시다. 3) 수도승의 두 가지 유혹은 자기 신분에 대한 과도한 평가와 세속적 조건에 대한 과도한 평 가이다. 이것은 마치 금욕생활이 세속에 있는 사람들이 도달하는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 하는 것처럼 절망하게 할 수 있다. 클리마쿠스는 양쪽 의미 모두에 있어 지나칠 필요가 없 다고 말한다. 두 번째 범주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거룩한 세속인이 금욕가에게 가장 큰 영적 긴장을 위한 자극이 되어 야 한다. 사실 세속인은 헛된 영광과 방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반면, 금욕가는 영적 은 사들에 의해 완전함을 향하는 것이 보증되는 신분으로 산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두에게 구원을 위한 은총을 부여하신다. 4) 죽은 이들은 생명을 잃고 죽음의 어둠속에 있다: 참조. “죄지은 자만 죽는다”(에제 18,4);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5) 마태 8,22의 적용. 6) 이 문제는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시대에 제기되었다. 모든 사람이 신앙으로 불리 었다. 지상 재물에 대한 실제적 포기는 신앙의 첫 단계(세례)이다. 금욕적 포기는 부자 청 년과 예수님이 만난 순간에 사도들이 부르심을 받았던 둘째 단계를 이룬다. 그러나 구원 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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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넓은 길과 수도원의 좁은 길: PG 656B-657A] 8. 이제 철야와 단식, 수고와 고뇌 중에 생활하며 세상에 머무는 사람 들이7) 후에 세상으로부터 마치 검증과 경험의 장소로 나아가듯이 수도 승생활로 나아갈 때, 어째서 그들이 받아들였던 금욕에 더 이상 항구하 지 않고 이제는 그것을 거짓되고 위선된 것으로 판단하는지 이해하려 노 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들 자신이 땅 속에 심었지만, 마치 허영심 의 진창과도 같은 시궁창에서 물을 공급받고 찬양으로 자양분을 받은 묘목들처럼 많은 덕이 끝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황량하고 접근할 수 없는 땅에서 세속적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악취 나는 물이 끊기게 되자마자 즉시 시들어 말라 죽습니다. 수생식물은 본성상 불모지 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움으로 세상의 고뇌에서 벗어난 사람이 여전히 모든 감 각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는 실제 소중한 대상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큰 절제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다음 사실을 잘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확인한 바처럼 많은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걱정과 생각들, 수고와 주의 깊은 돌봄을 통하여 자기 육체 가 기우는 남용을 피하는데 성공합니다. 반대로 수도승생활을 통하여 괴로움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육체의 움직임들로 더럽혀지게

7) 이 구절은 세속인의 덕이 어떤 점에서 수도승의 덕과 구분되는지를 분명히 하면서 앞 문단 에 다시 밀접하게 연결된다. 수도승은 진흙이 식물에 생기를 주는 것처럼 겸손 안에서의 순종으로써 진보하게 되지만, 자신의 반항적 감각들의 생물학적 반응들의 병적 이상에 빠 질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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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좁고 험한 길을 걷는다고 공언하면서도 계속 넓 고 편한 길에 머물며 빗나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에게 주의 합시다 (참조. 마태 7,14). 다음에 언급되는 것들은 당신에게 좁은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식욕의 절제, 철야 때의 올바른 품행, 일정량의 물을 마심, 소 량의 빵, 모욕과 야유와 조롱 혹은 조소의 쓴 잔, 자기 뜻의 포기, 성가시 게 구는 행동들을 인내함, 당신이 경멸감을 느낄 경우 불평하지 않음, 당 신에 대한 악담에 유감을 표명하지 않음, 당신이 전혀 존중되지 않는다 고 화내지 않음, 당신을 단죄하는 사람 앞에 겸손을 드러냄 등입니다.

[세 가지 포기: 세상, 자기 뜻, 헛된 영광: PG 657A-657D] 9. 우리가 이야기한 길들 중 이 좁은 길을 따르려고 선택한 사람들은 복됩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참조. 마태 5,10). 이 세 가지 포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영광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첫 번째 포기의 대상은 모든 (세속적) 관심사, 사 람들, 심지어 부모입니다. 두 번째 포기는 자기 뜻의 포기와 관련됩니다. 세 번째 포기는 순종에 따라오는 헛된 영광을 포기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나와 떨어져 있어라. 세상의 부정한 것에 손대지 마라”(참조. 이사 52,11). (바깥 세상에 있는) 그들 중 누가 기적을 행했고, 죽은 이를 부활시켰으며, 악령을 몰아냈던가? 아무 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수도승들에게 상급으로 주어졌습니다.8) 세상 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행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8) 사도 20,24; 히브 11,37; 로마 1,22-24; 마태 5,39-42에 따라 사도들은 금욕생활의 모델들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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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과 은둔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포기한 후 악령들이 우리 마음 안에 부모에 대한 기억과 형제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때, 기도라는 무기에 의지하도록 합시다. 영원한 불에 대한 생각으로 성가신 마음의 유혹을 끄도록 합시다. 만일 누가 이제 어떤 것 앞에서도 초연하다고 느끼면서, 그것이 없자마 자 즉시 괴로워한다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젊은이들은 육체적 사랑과 쾌락에 훨씬 더 많이 기울기 때문에 그들이 열심히 수도 승생활을 하려 할 때도 깨어서 온갖 악한 쾌락을 멀리하면서 단식과 기 도 수행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참조. 마르 9,29). 이렇게 해서 결국 이 후 그들의 상태는 처음 보다 더 나쁘지 않게 될 것입니다(참조. 마태 12,45; 2베드 2,20). 생명의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잘 아는 바와 같 이 마지막 해변은 구원과 파멸의 요소들을 거둬들입니다. 계속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광활한 바다의 큰 파도에서 탈출한 항해자들의 항구9) 에 있는 난파선을 보는 것은 비참한 광경일 것입니다. 자,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롯의 아내가 아니라 롯을 본받아 탈출 (참조. 탈출 19,12 이하; 루카 17,28-32)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서둘러 이 단계를 오르십시오.

9) 항구는 보통 구원의 상징이지만, 욕정들의 위험한 단계를 극복했다고 믿으면서 소홀함으 로 패배하는 사람이 빠지는 위험의 표지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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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3 유배에 관하여

[자유로운 결단으로 금욕적 순례를 시작함: PG 664B-664D] 10. 금욕적 고립을 통하여 거룩함을 추구하려는 목적에 방해되기에 고 향에 버려두었던 것을 바라보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포기에 주 목하도록 합시다. 그것은 군중 속에서 발견되지 않는 숨겨진 지혜와 현명 에 따른 순종의 태도, 보이지 않는 목적을 위한 감추어짐, 비천한 사물들 에 대한 열렬한 마음의 내밀한 묵상, 하느님만을 향한 영혼들 안에서의 경멸, 사랑의 충만함, 그리고 깊은 침묵 중에 헛된 영광에 대한 거부를 요구하는 유배입니다. 비록 주님의 추종자들이 영원하고 강렬한 신적 사랑의 불로 태워졌다 하더라도 이런 영적 자세는 처음엔 자기 친척들로부터의 분리 때문에 그 들에게 힘들 것입니다. 그러한 분리는 모욕과 슬픔을 낳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세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훨씬 더 요구됩니다. 유배가 위 대하고 찬양을 받을만한 영혼의 표지가 되면 될수록 그만큼 영적 식별 을 요구합니다. 열성으로 받아들인 모든 고립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 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모든 예언자가 자기 고 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참조. 마태 13,57). 하지만 우 리는 그 고립이 헛된 영광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은 아닌지 관찰할 필 요가 있습니다. 사실 금욕적 유배는 전적인 분리를 받아들이는데, 이는 당신의 가장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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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생각조차 절대 하느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유배 는 만족할 수 없는 통회의 열망을 낳고 통회를 실천하기 위한 수단들을 부여합니다. 이 유배자는 당신과 다른 사람들의 온갖 세속적 행위를 피합 니다.10) 그러므로 도피하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지 마십시오. 세상에 묶여 있는 다른 영혼들 때문에 고립을 받아들일 결정을 미루지 마십시오. 강도 는 당신이 예기치 못할 때 오기 때문입니다(참조. 루카 13,39). 많은 이가 어떤 게으른 이들이나 우유부단한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하 면서 그들과 함께 파멸로 끝납니다. 왜냐하면 불은 결국 꺼지기 때문입니 다. 당신이 화염을 느끼자마자 짧게 자르십시오. 당신은 그 불이 언제 꺼 져 당신을 어둠속에 버려둘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참조. 요한 12,35). 모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거 룩한 사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들이여,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2).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로마 2,21) 이렇게 사도는 모두가 적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마도 다 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해명해야 된다는 점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PG 664D-665C] 11. 이미 유배 중에 있는 당신은 배회하는 선정적인 악령으로부터 당 신을 지키십시오.11) 왜냐하면 고립이 그에게 당신을 죽일 기회를 주기 10) 유배는 도피(phugé)이고, 수도승은 지상 고향에서 유배된 사람(phugópatris)이다. 수도원의 은신처에서 그는 쉽게 철야할 수 있고, 욕정의 불을 끄고 악한 생각들을 물리칠 수 있다. 11) 참조. 시편 91,6: “어둠 속에 돌아다니는 흑사병도 한낮에 창궐하는 괴질도” 독수도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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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육정들로부터의 자유이지만, 그런 자유의 어 머니는 고독입니다. 주님을 위해 금욕적 고립을 사는 사람은 욕정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것에도 속박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세상 을 버렸다면, 세속과 접촉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콜로 2,21). 본래의 욕정 들은 이미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와는 자기 뜻과 달리 천국에 서 쫓겨났지만, 수도승은 자유의지로 자기 고향에서 유배되었습니다. 하 와는 천국에서 불순종의 나무를 갈망할 수 있었고, 수도승은 고향에서 육의 친족들에게 순종하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고향에서 당신을 넘어지게 하는 자극을 피하십시오. 열매가 눈에 띄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것을 맛보려는 충동을 크게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도들이 행하는 교활한 방식에 주의해야 합니다(참조. 요한 8,24). 그 들이 우리가 한 여성의 모습 앞에서 자제하는데 성공할 경우 받게 될 보 상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세상에서 분리되지 말라고 제안한다면, 그들 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정반대로 행하도록 합시다. 얼 마 후 친족들로부터 멀어진 우리가 마침내 경건과 통회 혹은 절제를 실 천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전에 우리를 죄인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유익한 모범을 줌으로써 많은 사람을 감화시킨다는 구실로 고향으로 되돌아갈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후에 만일 우리 가 언변에 능하고 박식해지게 된다면, 악령들은 항구에 잘 보관된 물건 들을 바다에 흩어버리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영혼들의 구원자이자 스승 들로서 세상 한운데 뛰어들도록 부추깁니다. 그래서 롯의 아내가 아닌 롯을 모방하도록 노력합시다!(참조. 창세 9,26) 그 영혼은 자기가 떠나왔 게 고유한 정오의 악령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녀석이 우리로 하여금 고독, 지상낙원, 영 적 자유의 고향을 단념하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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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장소로 되돌아가면서 지혜의 소금을 잃을 것이며(참조. 마태 5,13), 마 침내 선을 향한 이동을 중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십시오. 그리고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마음 이 이집트를 향해 있는 사람들은 무욕정(아파테이아)의 땅, 예루살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어린이의 단순성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금욕생 활을 시작했지만, 정화된 다음 아마도 자기 자신을 구원한 후 다른 이들 을 구원하기 위해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을 관상하는 은사를 받았던 위대한 모 세조차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도록 보내졌을 때 이 세상의 상징 이집트에 서 많은 위험과 이집트에 고유한 어둠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부모를 슬프게 할 만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주이시자 구세주 이신 반면 부모는 자주 자기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형벌의 위험에 처 하게 하며 그들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유배 중에 다른 친해하는 친구와 사랑할 다른 형제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PG 665C-668B] 12. 유배자는 그 지역 어법에 낯선 사람처럼 이질적인 언어를 사용하 는 사람들 가운데 거주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우리에게 해로운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 고향을 떠나 고립되는 것입니다.12) 만일 우리가 고독한 삶을 선택했다면, 늘 그렇듯이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는 우리 스 12) 세상에서의 이탈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이탈 없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 이 둘 은 타국에서의 영적 순례자, 크세니테이아(xeniteía)가 되기 위한 조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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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이십니다. 그분은 육의 부모를 떠나신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습니다”라는 말을 들으셨을 때도 그 렇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좋은 주님이시요 스승, 아파테이아의 모범이신 분은 즉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대답하시며 당신의 비정함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죄의 무게를 견디는데 있어 당신과 함께 수고할 수 있고 또 그러기를 원하는 당신의 동료가 당신 아버지가 되게 하십시오. 당신의 부정을 씻을 수 있는 통회가 당신 어머니가 되게 하십시오. 하늘을 향해 달리는 경주에서 당신과 함께 수고하고 싸우는 자가 당신 형제가 되게 하십시오. 죽음에 대한 부단한 기억이 당신 삶의 동반자가 되게 하십시 오. 마음의 탄식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되게 하십시오. 육체를 종 으로, 거룩한 천사들을 친구로 삼으십시오. 만일 천사들이 당신 친구가 된다면 당신의 임종 순간에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들이 그분을 찾 는 이들의 세대라네”(시편 24,6).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부모에 대한 갈망 을 끕니다. 두 가지 갈망을 갖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신 분의 말씀을 경 청하십시오. 또 같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다음 말씀도 경청하십시오. ‘나 는 부모와 자녀들의 평화, 나를 섬기기 위해 선택된 형제들 간에 평화를 주러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세상을 사랑 하는 사람들로부터, 영적 인간을 물질적 인간에게서, 마음이 겸손한 이 들을 헛된 영광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갈라놓기 위해 전쟁과 칼을 주러 왔다’(참조. 마태 10,34). 주님은 당신께 대한 사랑 때문에 행하는 이 전투를 기뻐하십니다. 당신 애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제대로 못 보는 일이 없도록 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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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주의하십시오. 말하자면 이는 당신 밭이 거의 물로 침수될 때 당신 이 이 싸움의 홍수로 압도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당신 부모와 친구 들의 눈물이 그 점에서 당신에게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 으면 그들의 눈물이 영원히 당신에게 눈물을 자아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마치 꿀벌이나 말벌처럼 당신을 에워싸 당신에게 각자 자 신의 슬픔을 터뜨릴 것입니다. 그때 결코 주저함 없이 즉시 당신의 죽음 을 생각하고 당신 영혼의 눈을 늘 하던 것으로 향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고뇌를 고뇌로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 친구들은13)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리라고 우리에게 보증함으로써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것 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보다 좋은 선을 향한 경주를 방해하는 것 이기 때문에 우리를 속일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결국 그들의 뜻하는 대로 우리를 잡아당길 수 있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범과 하늘로부터의 유배자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 PG 668B-669A] 13.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분리는 덜 안락하고 더 낮고 비참한 땅에서 의 유배를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욕정들 과 함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에게 당 신 혈통의 고귀함을 감추십시오. 표정과 행동으로 다른 이에게 당신 영 예를 뽐내지 마십시오.

13) 참조. 미카 7,6: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 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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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창세 12,1)14)는 말씀을 들 은 저 위대한 사람보다 유배를 완전하게 갈망했던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미지의 땅으로 불림을 받 았습니다. 때때로 주님은 이 위대한 유배자의 발자취를 걷는 사람을 영 광스럽게 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러한 영광을 주셨 다 하더라도, 우리를 겸손의 바위 위에 두면서 영혼의 시선을 그것에서 떼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가 삶의 위대한 이상으로서 고립의 유배를 선 택했기 때문에 악령들이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늘에서 땅으로 유배되신 분을 기억합시 다. 그러면 우리가 영원히 그 모델을 완전하게 따를 능력이 없음을 보고 겸손해질 것입니다. 친척이든 낯선 사람이든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 점차 우리를 세상으로 잡아당겨 통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릴 수 있다면 달갑지 않을 수 있습니 다. 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다른 눈으론 땅을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 한 것처럼, 친척이든 낯선 사람이든 모두로부터 내적, 외적 고립으로 유 배되지 않은 사람이 자기 영혼을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뇌하고 괴로워할 때, 우리의 품행은 개선되면서 성덕을 향한 확고한 방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 고 우리 품행이 거의 완전에까지 이른 후에도 역시 많은 고뇌 후 그 품행 은 한 순간에 파괴될 수 있습니다. 세속인들이나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 과의 부적절한 교제는 기록된 바와 같이 좋은 품행을 파괴합니다(참조. 지혜 2,6; 1코린 15,35).

14) 이 전형적인 성경의 유비는 ‘지상 순례’라는 일반적 개념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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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세상을 포기한 후 거기로 되돌아가거나 거기에 가까이 가는 사람은 그 올가미에 걸릴 것입니다. 비록 그가 더럽혀지지 않는다 하더라 도, 그들의 타락을 단죄하면서 그 역시 더럽혀질 것입니다.

유배 중에 있는 수련자들이 꾸는 꿈에 관하여15)(PG 669B-672B) 14. 실제로 인식의 원천인 우리 정신이 그 종착지에 완전하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정신은 온갖 종 류의 무지로 채워져 있습니다. 말씀은 영혼의 이 부족한 인식을 드러냅 니다. 마치 목이 음식들을 식별할 때 하듯이, 들음을 통해서 우리가 개념 들을 구별하듯이, 또 태양이 눈의 약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말입니 다.16) 그러나 사랑의 법은 우리 능력을 극복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합니 다. 그러므로 저는 고집하고 싶지는 않지만 유배에 관한 담화 후에, 아니 면 차라리 그 담화 중에 꿈에 관해 어떤 언급이 있어야 할 것처럼 보입니 다. 우리를 속이는 자들의 이 속임수에 관해 우리가 무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17) 꿈은 육체가 쉴 때 일어나는 정신의 동요입니다. 환상의 능력은 지성의 능력이 꾸벅꾸벅 졸 때 눈의 감지를 왜곡시킵니다. 그러므로 환상의 순 간은 생물학적으로 깨어 있는 육체 안에 정신이상의 순간입니다. 그것이 15) 제3담화의 부록인 14절은 클리마쿠스의 본문에서 이 제목으로, 특히 ‘거짓 꿈의 예언자 들을 거슬러’란 제목으로 되어 있다. 16) 감각적, 지적 지각의 가치에 대한 의심은 철학적, 수사학적 공통 지점이다. 참조. “네 무지 를 부끄러워하여라”(집회 4,25). 여기서 육적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반대되는 영지와 로고스에로의 클리마쿠스의 호소가 시작된다. 17) 꿈은 자주 불결함에 희생된 영혼의 악마적 환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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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하는 것은 실체 없는 환영입니다. 제가 여기서 꿈에 대해 말하려고 결심한 이유는 확실합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 집과 친척을 포기하고 하 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유배로 고립된 후, 우리를 괴롭히는 악령들은 꿈으로 속임수를 써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들은 죽음이 임박한 우리 친척들, 우리 때문에 슬퍼하고 파괴된 이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자, 우리가 그것을 하기를 바랐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꿈을 믿는 사람은 그 림자를 잡을 수 있다고 믿으며 자기 그림자를 뒤쫓는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헛된 영광의 악령은 꿈에서 예언을 하는데, 매우 교활하게 미래를 예 측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그 예견들이 현실화될 때 우리가 놀 라워하고 마침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믿게 하여 오만해지게 합니다. 악령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악령은 예언자이고, 그의 제안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도 그는 오류의 영원한 스승입니다.18) 영적 존재인 악령이 허 공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또 막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추측하고 쉽게 속는 사람에게 꿈에서 그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가 예언적 예지를 통하여 미래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들도 사실 죽음을 예측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악령들은 자주 빛의 천사들로 모습을 드러내거나(참조. 2코린 11,14), 순교자들의 탈을 쓰고 나타납니다. 꿈속에서 우리가 천사나 순교자들에 게 다가간다고 믿을 때 그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때 그들은 우리를 거룩하지 않은 기쁨과 오만 속

18) 참조. 요한 8,44: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 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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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밀어 넣습니다.19) 이것은 당신에게 그들의 간계를 알게 해주는 표 지일 것입니다. 천사들은 꿈에서 우리에게 형벌과 심판, 그리고 하느님에 게서의 분리를 보여주면서 잠에서 깰 때 우리가 두려워하고 통회하게 합 니다. 반면 악령들은 우리가 수면 중에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 하면 깨어 있을 때 역시 우리를 계속 속입니다. 꿈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부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 모든 꿈을 불신하는 사람은 매우 현명합니다. 단지 형벌과 심판을 예시하며 당신을 경고하는 꿈만을 신뢰 하십시오. 하지만 가장 심각한 걸림돌인 절망 역시 악령에게서 옵니다. 자, 이것이 삼위일체의 수인 세 번째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오른 사람 은 더 이상 오른쪽도 왼쪽도 바라보지 않습니다.20)

19) 사탄은 거의 거짓 감미로움으로 영혼을 위로한다. 20) 클리마쿠스는 항상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3의 의미에 주목한다. 전자의 경우, 죄와 욕정, 생각과 행위, 순간과 단계, 형이하학과 형이상학 등에서이고, 후자의 경 우는 금욕과 덕의 형태, 적과 싸우기 위한 무기, 영성생활의 단계, 원인과 결과, 삼중 영혼 의 부분과 특성 등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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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아빠스의 둘째 담화 요한 가시아노 제17담화: 서약을 지킴에 대하여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I 담화가1) 끝나고 밤의 침묵시간이 와서 거룩한 요셉 아빠스는 우리를 쉬게 하기 위하여 따로 있는 방에 안내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말 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 때문에 밤새도록 잘 수 없 었다. 그래서 우리는 방을 나가 대략 백 걸음정도 떨어진 곳에 앉았다. 이 와 같이 밤의 어두움이 우리가 은밀한 가운데서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우리가 앉자마자 제르마노 아빠스가 깊 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II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는 진퇴양난에 빠졌네. 참 비참하게 되었네. 이 거룩한 분들의 원리들과 그들의 생활자체가 영적 생활에 무엇 1) 참조. ‘가시아노의 제16담화’, 코이노니아 제22호(1997, 가을), 왜관: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83-104; 코이노니아 선집 제6권(교부), 왜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2004, 316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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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장 유익한지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가 장상들에게 한 약속 때문에 유익한 것을 택할 수 없네. 우리가 곧 수도원2)으로 돌아가 겠다는 약속만 없다면 그렇게 많은 훌륭한 분들의 표양에 의지하여 더 욱 완전한 생활을 위한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집에 돌아가면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 머 무름으로써 우리 소원을 풀기로 한다면 우리가 발한 맹세는 어떻게 되겠 나? 우리는 간단하게 이 지방의 거룩한 분들과 수도원들을 방문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온다고 장상들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이런 식으로 고민하면서 우리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결정해야할지 도 저히 알 수 없어 우리는 그저 탄식함으로써 우리의 딱한 사정을 확인했 다. 우리는 단호하지 못한 여린 마음과 타고난 소심함을 후회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자신들의 이익과 의도를 제쳐놓고 우리를 붙들려고 했던 분들의 요청에 따라 지극히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 래서 우리는 잘못된 우리의 부끄러움을 한탄했다. 그 부끄러움에 대하 여 “죄를 짓게 하는 부끄러움이 있다”(잠언 26,11: 70인역)하는 말씀이 있다.

III 그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근심을 끝내기 위하여 그것을 원로의 의견, 아니 그분의 권위에 맡기자. 우리 문제를 그분에게 말씀드리고 그 2) 가시아노와 제르마노는 팔레스티나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살다가 견학하러 에집트에 온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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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 단정하는 무엇이든지 천상에서 얻은 해답처럼 우리 모든 고민 마감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자. 주님께서 친히 이 거룩한 분의 입을 통해 우리 에게 대답하실 것을 그분의 공덕과 우리의 믿음 때문에 의심하지 말자. 주님의 은혜로 가끔 믿는 사람들이 자격 없는 사람으로부터,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인으로부터 구원에 유익한 말씀을 들은 일이 있다. 주 님께서는 대답하는 사람의 공덕이나 물어보는 사람의 믿음 때문에 그런 은혜를 내리신다.” 거룩한 제르마노 아빠스는 나의 이 말씀을 기꺼이 받 아들였다. 그는 그것을 내가 혼자서 한 말이 아니라 주님의 영감을 받고 한 말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는 곧 오실 원로와 곧 시작될 밤기도 시간을 기다렸다. 우리는 원로에게 보통 때와 같이 인사하고 기도와 시 편낭송을 규칙대로 바친 다음 밤에 쉬었던 그 돗자리에 다시금 습관대 로 앉았다.

IV 존경스러운 요셉이 실의에 빠진 우리 모습을 쳐다보고는 거기에 대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여 옛 성조 요셉의 말씀을 빌려 우리에게 “오 늘은 어째서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느냐?”(창세 40,7)고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저 투옥되었던 파라오의 시종들은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해몽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와 달리 우리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는 데 우리 고민을 덜어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로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우리 문제를 풀어주신다면 일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요셉 성조의 이름만이 아니라 그의 성덕도 지닌 원로는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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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대답했다: “인간의 생각을 주님의 은혜로 치유할 수 있지 않는가? 터 놓고 말해보게.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대들의 믿음에 따라 우리 조언 으로 약을 마련하실 수 있다.”

V 제르마노: 우리는 아빠스님을 뵙고 영적인 기쁨과 풍요로운 열매를 얻 은 다음에 우리 수도원에 돌아가 아빠스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조금이라 도 모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 장상들을 사랑한 탓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그렇게 약속했던 것은 여러분의 뛰어난 생활과 가르침 을 저 수도원에서도 어느 정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러나 이제 우리가 큰 기쁨을 얻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로 우리는 우리 구원을 돕는 것으로 인식한 이득을 구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주님께서 동정녀 모태라는 궁정에서 찬란히 나오신 그 동굴에서3) 그분을 증인으로 삼고 모든 형제들 앞에서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하면 우리는 영적 생활의 엄 청난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서약을 무시하고 이 지역에 살면서 저 맹세보다 우리 완덕에 유익한 것을 앞세우면 우리는 거짓 맹세라는 위험한 낭떠러지를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빨리 돌아감으로 맹세의 조건 을 채우고 나서 서둘러 이쪽에 달려 돌아온다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영

3) 베들레헴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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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덕행의 발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잠시 미루는 것이라도 위험하 고 해로운 것입니다. 사실 가능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갔다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옴으로써 우리 서약에 충실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될 수 없습 니다. 한번 돌아가면 우리 장상들의 권한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우리 사랑을 생각할 때 그것이 우리를 단단히 묶어서 이 지방에 돌아올 가능 성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VI 잠시 침묵을 지킨 다음에 복된 요셉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 지역에서 영적으로 더 크게 진보할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

VII 제르마노: 그쪽(베들레헴)에서 우리를 가르친 분들에게도 크게 감사해 야 하겠습니다. 그분들은 어려서부터 큰일을 해 볼 용기를 주었고 자기 들이 누리는 행복의 맛을 엿보게 함으로써 고귀한 완덕에 대한 갈증을 우리 마음에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판단을 믿을 수 있다면 여기서 배운 것과 저쪽에 받는 교육에 비길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뿐만이 아닙 니다. 따라갈 수 없는 여러분의 순결한 생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우선 여러분이 의도한 철저함의 결실이지만 우리 생각으로는 좋 은 환경의 덕분도 큽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진 탁월한 완덕을 본받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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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잠시 지나치면서 받는 교훈이 부족합니다. 도움을 받기 위하여 이곳 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매일 교육을 받아야 우리 마음의 무 딤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VIII 요셉: 우리가 약속과 함께 정한 일을 실제로 수행함은 건전하고 완전 하며 우리 신분에 아주 알맞은 것이다. 그 이유로 수도승은 아무것도 급 하게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 경솔하게 약속한 것을 억지로 수행해야 하 거나 더 고상한 것을 발견해서 돌아섬으로 자기 서약을 위반하지 않도 록 미리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건전한 상태 에 대하여 토의하는 일이 아니고 병든 상태를 치유하는 일이다. 그대들 이 처음으로 무엇을 해야 했을 일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이 이 파선의 위 험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지혜롭게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사슬로 묶이지 않고 어떤 조건에 걸리지 않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유리한 것 가 운데 가장 유익한 것을 택할 수 있지만 불리한 상황을 꼭 피할 수 없다면 양쪽 손해를 비교하면서 더 가벼운 손해를 당할 것을 택해야 한다. 이제 그대들의 말을 들으니 그대들은 경솔한 서약을 해서 무엇을 택해 도 양쪽에서 큰 손해를 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제 더 쉽게 참을 수 있는 손실이 생기는 부분, 아니면 보속으로 더 쉽게 씻을 수 있는 부 분을 택해야 한다. 그러니 저쪽 수도원에 살았을 때보다 여기 머무르는 것으로 더 큰 영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또는 크나큰 손해 없이 그대들의 서약을 지킬 수 없다면 거짓말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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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당하는 손해를 택하는 것이 낫다. 그렇게 해도 그것은 한번으로 지나 가는 일이고 그 이상 다른 죄를 짓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대들 이 말한 더 미지근한 생활로 돌아가는 것은 그대들에게 끝없이 계속되 는 손실이 될 것이다. 구원에 더 유익한 쪽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경솔한 결정을 바꾼다는 것은 허용될 뿐 아니라 칭찬할 일이다. 잘못된 약속을 고치는 것은 항구성을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했던 것을 바로잡 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성경 말씀으로 명백하게 뒷받침할 수 있다. 거기 서 많은 이들이 제정한 것을 완수함으로 죽음은 강하게 되었다는 것과 그 반대로 많은 이들이 제정한 것을 떠남으로 이득을 보고 구원을 받았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IX 그 두 가지 경우를 성 베드로 사도와 헤로데의 예로 뚜렷하게 증명할 수 있다. 베드로는 맹세처럼 굳힌 결심 즉 “영원히 제 발을 못 씻으십니 다”(요한 13,8)라는 주장을 철회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불멸의 일치를 얻게 되었는데 그가 만일 자기 말을 고집했다면 그런 행복의 은혜를 빼 앗겼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헤로데는 함부로 발한 맹세를 끝까지 지킴으로 주님의 선구자를 죽이는 잔인한 살인자가 되었다. 헛맹세에 대 한 쓸데없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단죄를 당해 자기 자신을 영원한 죽음 의 형벌에 넘겼다. 하는 일마다 우리는 목표에 따라 우리 길의 방향을 정 해야 한다. 그러다가 더 적절한 계획의 가능성이 나타남으로 그 길이 나 빠지는 것을 보면 맞지 않는 계획을 버리고 더 좋은 계획에 넘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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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옳다. 그것은 결정한 일을 완고하게 사수하여 더 큰 죄를 짓는 것보다 낫다.

X 제르마노: 우리가 영적으로 이익을 보기 위하여 착수한 우리 의도를 볼 때 우리는 아빠스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계속 함께 지내고 싶습니 다. 사실 우리가 우리 수도원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이 고귀한 이상에 서 다시 떨어질 뿐 아니라 그쪽 열등한 생활수준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말을 할 때면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시오. 거기서 더 보태는 것은 악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 입니다”(마태 5,37)라는 복음의 계명은 우리에게 큰 불안을 줍니다. 그렇 게 중요한 계명을 범한다면 어떤 좋은 일로 다시 배상할 수 없을 것 같습 니다. 한 번 나쁘게 시작한 일은 그 뒤에 좋게 끝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XI 요셉: 이미 말한 대로 모든 일에 있어서 보아야 할 것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 뜻하는 바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 라 그것을 하는 그의 지향을 살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나중에 좋은 결 과가 난 일에 대하여 단죄를 당했고 또 어떤 이들은 도리어 비난 받을 일 을 통해 최고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자가 일이 좋게 끝난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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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득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가 나쁜 의도로 일에 착수하여 일어난 좋 은 결과가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것을 수행하려고 했던 의도 때문이다. 후자가 비난 받을 일을 시작해도 손해 보지 않은 이유는 그가 하느님을 무시하고 죄를 짓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필요하고 거룩한 목적을 두고 하 는 수 없이 일을 잘못 시작했던 것이다.

XII 이것도 성경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다. 구원을 이루는 주님의 수난보다 온 세상에 더 유익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 그래도 그것은 그 도구가 된 배반자에게 유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이에 대하여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을 위해서는 좋았을 것입니다”(마태 26,24)라는 단정이 나올 만큼 그 일이 그이에게 해로운 것이었다. 자기가 한 일의 결실이 아 니라 자기가 의도하고 바랐던 결과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 그리고 속임수와 거짓말은 얼마나 비난받을 일이냐? 외부인에게 해도 안 되겠지만 형제나 아버지에게 했으면 더욱 나쁘지 않느냐? 그렇지만 성조 야곱은 그런 일을 해도 단죄나 비난을 받지 않고 도리어 영원한 유 산의 축복을 얻었다.4) 그것이 옳게 된 일이다. 왜냐하면 야곱은 현세의 이익을 탐내서가 아니라 영원한 성화를 얻을 것을 믿어서 맏아들을 위 한 축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유다는 인류의 구원을 의도해서 가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모든 이의 구원자를 죽음에 넘겼던 것 4) 여기서는 가시아노의 성서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창세기에서는 야곱의 속임수를 그저 보고하지, 찬성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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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래서 양쪽 사람이 생각했던 계획과 결심한 뜻에 따라 자기 행동 의 대가를 받았다. 전자가 사기를 범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처럼 후자는 구원을 지향하지 않았던 것이다. 행동하는 사람의 뜻과 달리 생기는 좋고 나쁜 결과가 아니라 각자가 애초 마음에 두었던 것에 따라 공평하게 대가를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가장 정의로운 심판관께서는 그런 거짓을 감행한 야곱이 변명이 설 뿐 아니라 칭찬 받을 사람이라고 여기셨다. 왜냐하면 그런 거짓말 없이 그 는 맏아들의 축복을 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고 축복에 대한 욕망으로 발생한 일을 범죄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다시 말 해 그 축복의 은총을 얻어 낼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었다 해도 형에게 그 렇게 해로운 길을 택했더라면 성조 야곱은 형에게 하느님께서 행동의 결 과가 아니라 마음의 의도를 따지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전제해놓고 이제 이 모든 것을 미리 설명하는 계기가 된 문제로 돌아오 자. 그러니 그대들은 왜 자신들을 그런 서약에 묶어 두었는지 먼저 그 이 유를 밝혀주게.

XIII 제르마노: 첫째, 저희가 말한대로 저의 원로들을 슬프게 하거나 그들 의 명령을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짧은 생각 으로 만일 여러분들의 생활을 보고 말씀을 들음으로 훌륭하고 완전한 어떤 것을 배운다면 그것을 수도원에 돌아가서 실천할 수 있으리라고 믿 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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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V 요셉: 이미 말한 대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지향에 따라서 보상을 받거 나 단죄를 받는다. 그것은 “그들의 판단이 엇갈려 서로 고발하거나 변호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숨은 속을 심판하실 그날에 드러날 것입 니다”(로마 2,15-16)라는 말씀과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들을 그들의 행동과 생각과 함께 모으러 올 것이다”(이사 66,18: 라틴역)라는 말씀과 같다. 내가 보는 대로 그대들은 완덕을 얻겠다는 갈망 때문에 그 맹세의 사 슬로 자신을 묶은 것이다. 그 방법으로 완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은 좀 더 잘 판단하게 되어서 바로 그것 때문에 완덕의 산봉 우리에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네. 그래서 본래의 의도와 맞 지 않는 일만 따라오지 않다면 결심한 바와 반대되는 일이 생겼다고 생 각하지 말라. 기술자가 도구를 바꾼다 해서 그 직업을 버리는 것도 아니 고 여행자가 더 곧고 짧은 길을 택한다고 해서 누가 게으르다고 하지 않 는다. 이와 같이 이 경우에도 경솔한 계획을 고치는 것은 영적 서원을 위 반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현재와 미래 생명의 약속을 지 닌”(1티모 4,8) 경건함을 추구해서 실행하는 모든 일은 시작할 때에 어렵 고 거슬리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책망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게 칭 찬 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경솔한 서약을 깨뜨려도 그 목표, 다시 말 하면 결심한 경건심의 추구를 간직하기만 하면 비난할 일이 없다. 우리 는 이 모든 것을 행하는 이유는 오직 하느님께 깨끗한 마음을 드리기 위 한 것이다. 그대들이 그 일을 이 지방에서 더 쉽게 완수할 수 있다고 판 단한다면 억지로 했던 약속을 바꾸는 것이 그대들에게 해로울 수 없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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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그대들이 그 서약을 하게 된 그 목표 즉 완전 한 순결이라는 목표를 주님의 뜻에 따라 더 빨리 얻게 되는 것이다.

XV 제르마노: 아빠스님 말씀이야 말로 참으로 합리적이고 지혜롭습니다. 그것만 듣고는 저희 약속에 대한 걱정을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 나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전례를 볼 때, 다시 말해 경 우에 따라 언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은 약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구실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 을 금지하는 말씀들은 참으로 무겁고 무섭습니다. 예언자는 “당신은 거 짓말하는 자를 모두 없애시오며”(시편 5,7), 또는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 혼을 죽인다”(지혜 1,11)고 말씀하셨습니다.

XVI 요셉: 멸망할 자들에게나 더구나 멸망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멸망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성경 가운데에는 이단자들이 자기 오류를 뒷받침 하는 말씀도 있고, 유대인들이 믿음을 거부하도록 도움을 주는 말씀도 있으며 교만한 비신자에게 걸림돌이 되는 말씀들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 가 그런 성서 구절을 버리거나 삭제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런 말씀을 경건 하게 믿고 부동하게 간직하며 진리의 기준대로 설교해야 한다. 남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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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성서가 서술한 예언자와 성인들의 처 리방식(oeconomia)을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저들의 연약함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거짓말만이 아니라 독성의 죄까지 범하지 않도록 조 심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성서의 내용을 기록된 그대로 인식하고 성 인들의 행동이 착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5) 게다가 악한 뜻을 가진 자들에게는 거짓말을 할 길을 막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일들 이나 우리가 이미 말한 일들의 진리를 부정하거나 비유적 해석6)으로 약 화시키려고 수고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타락한 뜻만 해도 그들을 충 분히 죄짓게 하니 저런 성경말씀의 권위가 그들에게 무슨 손해를 끼칠 수 있겠느냐?

역자의 설명: 17장-20장에서 가시아노(또는 요셉 아빠스)는 성서구절을 묘하게 해석 함으로써 어떤 때 거짓말을 할 수 있거나 해야 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성서해석을 너무 제멋대로 하는 것이며 진실을 요구하는 윤리도덕 에 너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이 부분을 생략했다. 21장에서도 가벼운 거 짓말을 권하지만 너무 세심하지 않으면 그 정도는 거짓말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고 일부는 그저 일반 예의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5) 가시아노의 오류! 소위 성조들의 행동 중에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은 적지 않다. 6) “비유적 해석”은 원문에는 ‘allegoria’(본디 ‘우화’)인데, 아구스티노와 같은 교부들은 윤리 적 판단을 피하기 위해 예를 들어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를 우화로 취급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예표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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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I 이제 피할 수 없고 우리도 거의 매일 부딪힐 수 있는 일들의 예를 들겠 다.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원하든 말든 할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곤란한 경우가 있다. 저녁식사를 굶기로 했는데 저녁시간에 어떤 형제가 와서 식 사를 했느냐고 물어본다고 하자. 단식하고 있는 우리 고행을 숨겨야 되 나? 아니면 사실대로 말해서 그 덕행을 드러내야 하나? 주님께서는 “단 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숨어계신 아버지께 드러 내라”(마태 6,18)고 하고 “오른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 6,3)고 하셨는데, 그 명령대로 한다면 우리가 꼭 거짓말을 하게 된 다. 그러나 금욕의 덕행을 공개한다면 “진실히 말하거니와 그들은 보상 을 다 받았습니다”(마태 6,2)라는 복음의 말씀이 우리를 내리친다. -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하자. 어떤 수사가 나에게 음료를 제공하는 경우인데 그가 내 방문에 대한 기쁨으로 마시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잔을 절대로 마실 수 없다고 단단히 사양했다고 하자. 그 수사가 내 무릎들에 땅에 엎 드리고 있으며 이런 봉사가 아니면 그가 애덕을 실천할 수 없다고 믿는 다는 것을 볼 때 내가 그에게 억지로라도 양보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내가 처음부터 말하고 결의한 것을 고집하는 것이 옳을까?

XXII 제르마노: 첫째 경우에 우리는 금욕을 물어보는 이에게 밝히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틀림없이 낫다고 믿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도 거짓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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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둘째 경우에는 우리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생길 필요 없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런 언명으로 우리를 묶지 않 아도 형제가 제공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한번 거절한 다음 에 흔들림 없이 우리 결심을 고수할 수 있습니다.

XXIII 요셉: 저런 종류의 결심들은 틀림없이 그대들이 말한 대로 수도생활의 초기교육을 받은 저 수도원들의 관례를 따른 것이다. 그곳들의 지도자 들은 자기들의 뜻을 형제들의 휴식에 앞세우고 한 번 결심한 것을 아주 완고하게 관철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배들은 달랐다. 그들 의 신앙은 사도들과 같은 기적들을 통해 증명되었지만 그들은 자기 결심 을 딱딱하게 고집하는 것보다 올바른 판단과 분별의 정신으로 모든 것 을 실행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연약함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자기 결 의를 고수하는 사람들보다 더 풍부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여겼다. 그 들은 교만하게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우리가 말했던 식으로 필요하고 겸 손한 거짓말로 금욕을 감추는 것이 더 고결한 미덕이라고 가르쳤다.

XXIV 피아문(Piamun)아빠스는 이십오 년 뒤에 어떤 수사가 자기에게 제공 한 포도와 포도주를 망설임 없이 즉시 받아들였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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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의 미덕을 밝히는 것보다 자기 습관을 버리고 그 수사가 가지고 온 것을 든다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나는 우리 선배들이 주저하 지 않고 했던 또 한 가지 일을 기억한다. 후배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강론 중에 자기가 행한 기적이나 업적을 언급해야 할 때 그들은 그 이야기를 남이 행한 것처럼 전했다. 그것도 뻔한 거짓말이 아니면 무엇인가? 우리 도 후배들의 신앙을 북돋아주기 위하여 내놓을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 겠느냐? 그렇기만 한다면 우리도 그들의 그런 꾸밈을 가책 없이 모방할 것이다. 불합리하게 진실을 지키기 위하여 듣는 이들을 감동시킬 것을 부적당한 침묵으로 덮거나 자기가 한 것으로 사실대로 말하면서 해로운 자랑을 하는 것보다는 저렇게 다른 색칠을 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낫 다. 이방인들의 스승(바울로)도 우리에게 명백하게 그런 교훈을 주었다. 그는 자기가 받는 엄청난 계시에 대해 말할 때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은 것처럼 이렇게 표현했다.7)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 는데,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나 는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몸을 떠나 그 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낙원까지 들어 올려 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2코린 12,2-4).

7) 바울로가 독자들을 속였다고 볼 수 없다. 문맥으로는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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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V 모든 것을 짧게 열거할 수 없다. 성조들과 무수한 성인들은 거의 모두 어떤 경우에 거짓말을 했다. 어떤 분들은 목숨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떤 분들은 강복을 받기 위하여, 어떤 분들은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어떤 분들은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어떤 분들은 하느님께 대한 열성으로, 어 떤 분들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거짓말에 도움을 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 열거할 수 없어도 모두 지나칠 수도 없다. 예를 들어서 복된 요셉이 정에 못 이겨 왕의 생명을 걸고 형들을 범죄 자로 몰았다. 그는 “너희는 염탐꾼들이다.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자들이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어 아우를 데려오너라. 그동안 너희는 옥에 갇혀 있어라. 너희 말이 참말인지 시험해 보아야겠 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내가 파라오의 생명을 걸고 말하건데 너희는 정 녕 염탐꾼들이다”(창세 42,9.16)라고 했던 것이다. 요셉이 자비로운 거짓 말로 그들에게 겁을 주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와 동생을 다시 보지 못 했을 것이고 그 무서운 결핍 가운데서 그들을 먹여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형들을 자기를 팔았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했 을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로 그 형제들에게 겁을 주었다고 책망하는 것보 다 위험을 꾸며냄으로 자기를 미워했고 팔아넘긴 형들을 유익한 참회로 인도했다는 것을 거룩하고 착한 일로 칭찬해야 할 것이다. 형제들이 그 고마운 고발에 몰렸을 때 그들의 양심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은 거짓 으로 몰린 죄가 아니라 옛날에 범했던 죄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 로 말했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 가 우리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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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창세 42,21). 내 생각에는 그들이 이 고백으로 지극히 잔인한 죄로 괴롭힌 동생의 용서 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얻어주는 겸손 때문에 하느님에게도 그 엄청난 죄의 용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에 대해 생각하자. 그는 첫 번째로 내린 판결에서 거짓말 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의 선물을 나타내지 않았느냐? 저 여 자가 거짓말로 덮었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자기도 지극히 영리하게 조작한 거짓말을 이용했다. “칼을 가져오너라. 그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1열왕 1,23-25)고 한 것이다. 임금이 꾸민 잔혹함은 참 어머니의 동정을 일으켰지만 가짜 어머니의 찬성을 얻었다. 그래서 진리가 명백하게 드러났으니 임금은 판 결을 내렸다: “산아기를 죽이지 말고 처음 여자에게 내 주어라. 저 여자 가 그 아기의 어머니다”(1열왕 3,27). 이 판단이 하느님의 감도에 의하지 않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마음이 고요할 때나 충격을 받을 때나 결정한 모든 것을 수행해 야 하지도 않고 수행할 수도 없다는 것을 성서의 다른 증언에서 얼마든 지 배울 수 있다. 성서를 보면 성인이나 천사들,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 도 정해놓은 것을 자주 변경시켰다. 예를 들어 복된 다윗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맹세로 뒷받침했다: “내가 내일 아침까지 나발에 속한 모든 사람 가운데 벽에 오줌을 누는 자를 하나라도 남겨 둔다면, 하느님께서 다윗 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셔도 좋다”(1사무 25,22). 그러나 즉시 부인 아비가일이 중간에 들어와 남편을 위하여 빌 때 그는 그 위협을 취소하 고 부드러워졌다. 그는 잔학한 행위로써 자기 언약을 지키는 것보다 자기 결심에 대한 위반자로 보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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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지만 그대가 급히 와서 나를 만나지 않았 던들 나발에게는 내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 벽에 오줌은 누는 자 하나도 남지 못할 뻔 했소”(1사무 25,34)라고 했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마음의 충동에 의하여 너무 경솔하게 맹세한 다윗의 황급한 행동을 본받지 말 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누그러워지고 결심을 취소한 일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선택된 바울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쓴 편지 가운데 그곳에 돌아갈 것을 조건 없이 약속했다: “나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여러분에게 가겠습 니다. 사실 나는 마케도니아를 거쳐 가려고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함 께 한동안 지내든가 아예 겨울을 나든가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여러 분의 도움을 받아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1코린 16,5-7). 그리 고 둘째 편지에서도 그 일을 다시 언급했다: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나 는 먼저 여러분에게 가기로 계획하였습니다”(2코린 1,15-16). 그러나 중 간에 더 적합한 계획이 생겨 그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똑똑하게 고 백 했다: “그런데 내가 이런 결심을 하면서 변덕이라도 부렸다는 말입니 까? 내가 계획하는 것이 세속적으로 계획하는 것이라서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말입니까?”(2코린 1,17) 그 다음에 그들을 방문함으로 그들에게 부담을 주고 그들을 슬프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약속을 깨기로 했 다는 이유도 맹세와 함께 설명 한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인 으로 불러 세우렵니다. 내가 아직도 코린토에 가지 않고 있는 것은 여러 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다시 슬픈 일이 있을 바에야 여러 분에게 가지 않기로 결정했던 바입니다”(2코린 1,23; 2,1). 소돔에서는 천사들이 롯의 집을 들어갈 것을 거부하면서 “아니오, 광 장에서 밤을 지내겠소”라고 했으나 조금 후 그들은 롯의 요청에 못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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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정한 계획을 바꿨다. 성경 말씀대로 “롯이 간절히 권하자 그 들은 롯의 집에 들어갔다”(창세 19,2-3)는 것이다. 천사들이 롯의 집에 들 어갈 것을 만일 미리 생각했다면 그의 초대를 사양하는 것이 꾸민 일이 었다. 한편 초대를 진정으로 거절했다면 그들이 결심을 바꿨을 것이 분 명하다. 내 생각에 성령께서 이런 일들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이런 선례를 보고 우리 결심에 너무 완고하게 집착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결심한 것은 계속 우리 재량 밑에 있어야 하고 우리 판 단을 온갖 법의 구속에서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민첩하게 유익한 판단이 부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우리가 적합 하다고 판단한 것을 미루거나 거부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그 쪽으로 넘 어갈 수 있다. 더욱 숭고한 예를 들겠다. 히즈키야 임금이 심각한 병으로 들어 누워 있었을 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가가서 “주님께서 이렇 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 을 것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히즈키야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말씀드렸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 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 십시오.’ 그러고 나서 슬피 통곡하였다.” 그 뒤에 그에게 다시 다음과 같 은 말씀이 내렸다: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영도자 히즈키야에게 말하 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제 내가 너를 치유해 주겠다. 사흘 안에 너 는 주님의 집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 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내 고, 나 자신과 다윗을 생각하여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2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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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이것이 얼마나 명백한 증거인가? 주님께서는 결정을 고수함으로 인정 없는 분으로 보였을 것이지만 자비와 애정 때문에 차라리 당신 말 씀을 취소하시려고 했다. 그래서 임금의 청을 들으시고 이미 결정하신 죽음 대신에 그의 수명을 십오 년으로 연장시킨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에게 무서운 언도를 내려 “삼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70인역)고 하셨지만 그들의 참 회와 단식을 보시고 하느님은 그 냉정한 언도를 곧 완화하여 아버지다운 사랑과 자비로 돌아서셨다. 그들이 회개하리라는 것을 미리 아시면서 주 께서 그들을 바로 그 유식한 참회로 부르기 위하여 도시의 멸망을 위협 하셨다고 한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형제들을 지도하는 사람 들이 교정이 필요한 형제들에게 실제 단행할 것보다 더 엄한 것을 위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회개를 보시 고 나서 저 엄격한 언도를 바꿨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에제키엘을 통 해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어도, 그가 자기 죄악 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33,14-15)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보아 도 우리는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한 번 결정한 일 을 완고하게 고수할 것이 아니라 필요성에 의해 위협한 것을 자비롭게 완 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니네베 사람들만 특별히 너그럽게 대하셨다고 생각하지 말 아야 할 것은 예레미야 예언서에서 볼 수 있다. 거기서 주님께서는 보편 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실 것을 늘 선언하시면서 필요 할 때 우리 공로를 보시고 당신 언도를 서슴지 않고 바꿀 것을 다음과 같 이 약속 하신다: “나는 언제든지 어떤 민족이나 나라든 뽑고 허물고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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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버리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민족이 내가 이른 대로 죄악에 서 돌아서면, 나는 마음을 바꾸어 그들에게 내리려고 하였던 재앙을 거 두겠다. 나는 언제든지 어떤 민족이나 나라든 세우고 심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민족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 을 저지르면 나도 마음을 바꾸어 그들에게 베풀고자 했던 복을 거두겠 다”(예레 18,7-10). 또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 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 그들이 그 말 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 의 악행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려는 재앙을 거두겠다”(예레 26c-3).8) 이런 증언들은 우리가 우리 결심을 완고하게 고집하지 말고 이성과 판 단력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우리는 항상 더 좋은 것 을 선호하고 택해야 하며 더 유익하다고 판단한 쪽으로 서슴지 않고 넘 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오묘한 안배에 대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분은 누구든지 생기기도 전에 그 끝장 을 다 알고 계셔도 그분은 일반적인 질서와 순서에 따라, 즉 모든 것을 인간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정리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 권능과 당신이 가진 형언할 수 없는 선견에 따라서가 아니 라 사람들이 현재로 취하는 행동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신다. 그 기준 에 의해 그분이 사람을 뿌리치시거나 끌어주시기도 하고 매일 은총을 부 어주시거나 거절하시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사울의 선택으로도 명백히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 신 선견 지식으로 그의 고약한 끝장을 모르실 수 없었지만 그를 수만 명

8) 여기서 가시아노는 예레미야를 에제키엘과 혼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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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스라엘 군사들 가운데서 택하여 왕으로 축성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울이 그 당시 지닌 생활의 공로에 보답하는 것이지, 앞으로 범할 죄를 생각하시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울이 버림받은 뒤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택에 대하여 뉘우치시는 것처럼 거의 인간적인 말과 감정으로 사울에 대하여 개탄하여 “나는 사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는 나 를 따르지 않고 돌아섰으며 내 말을 이행하지 않았다”(1사무 15,11)고 하 시며 또 “사무엘이 사울을 슬퍼하였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위 에 임금으로 세우신 일을 후회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뒤에 하느님께서 이렇게 이행하신 일을 당신 재량대로 일상 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해 주실 것을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밝히셨다: “내가 의인에게 반드시 살 것이라고 하였어도, 그가 자기의 의 로움만 믿고 불의를 저지르면,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도 기억되지 않 은 채,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악인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어도, 그가 자기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여,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고 강도짓으로 뺏은 것을 배상하고, 생명의 규정들을 따르면서 불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 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죄악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 는다. 그 대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였으니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33,13-16). 그리고 당신이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뽑아주신 백성이 갑자기 큰 죄를 저질렀을 때 주님께서 당신 자비로운 눈을 돌리셨으나 입법자 모세는 그 들을 위하여 전구하였다: “아, 주님, 이 백성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 들을 위하여 금으로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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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주십시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탈출 33,31-33). 다윗도 예언의 영을 받아 유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저들을 생명 책에서 지워버리소서”라고 하소연한다. 그리고 그 들의 죄가 너무 커서 구원을 주는 회개를 할 수 없음을 “의인들의 명부 에 끼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69,29)라는 말을 덧붙여 표현했다. 그리고 유다에서 예언자의 저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잘 볼 수 있다. 그는 (예 수님을) 팔아넘긴 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마태 27,5). 그러므로 자기 이름이 지워진 뒤에 다시 회개하여 의인들과 같이 하늘의 명부에 적혀질 수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선택에 의해 사도직 을 받았을 때 유다의 이름도 산 이들의 책에 적혀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 다. 그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지 말고 그대 들 이름이 하늘 책에 적혀 있음을 기뻐하시오”(루카 10,20) 라는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타락하여 하늘에 적혀 있 던 이는 땅에 던져졌다. 그래서 그 이와 그 이와 비슷한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말씀이 잘 들어맞다: “주님 당신은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 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예레 17,13). 또는 “그들은 내 백성의 모임에 들지 못하고 이스라엘 집안의 명단에 오르지도 못하며 이 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다”(에제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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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약을 지킴에 대하여

XXVI 침묵으로 지나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유익한 원칙이 있다. 수도승에 게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만일에 우리가 분노나 다른 감 정에 넘어가 자신을 맹세로 묶어 놓았다고 해도 양쪽의 이치를 맑은 정 신으로 견주어 본 다음에 건전한 판단으로 더 적합하다고 본 쪽으로 지 체 없이 넘어가야 한다. 구원과 성덕에 유익한 일을 놓치는 것보다 우리 의 말을 어기는 것이 더 옳다. 우리가 기억한 대로 생각이 있고 경험 많은 교부들은 이런 종류의 결심을 한 번도 취소할 수 없고 완고하게 고수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밀랍이 열에 물러지는 것처럼 이성으로 물러져서 더 적합한 길이 나타나면 망설이지 않고 더 좋은 쪽을 택했다. 그와 달리 우리 경험으로는 자기 결심을 완고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이성이 없고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XXVII 제르마노: 아빠스께서 풍부한 말씀으로 명백하게 설명한 내용에 따른 다면 약속을 깨뜨리는 사람이나 완고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수도 승은 아무것도 정해두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맹서하고 다짐하나이다. 의로우신 당신 결정을 지키리이다”(시편 118,106)라는 시 편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맹세하고 다짐한다는 일은 결정 한 것을 부동하게 지키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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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VIII 요셉: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구원에 꼭 필요한 계명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신분을 거스르지 않아도 빠뜨릴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 는 것들이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엄격하게 단식하는 것이 나 포도주나 기름을 전혀 들지 않는 것, 또는 일제 외출하지 않는 것이나 끊임없이 독서와 묵상하는 것 등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원할 때에 행 할 수도 있고 필요할 때에 문제없이 빠뜨릴 수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 서 약과 우리가 선택한 삶에 대한 손실이 아니다. 그러나 주된 계명을 지키 기 위하여서는 아주 확고한 결심이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죽음도 마다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는 흔들림 없이 “맹세하고 다짐하나이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사랑의 고요하 고 귀한 완전성에 때가 묻지 않도록 차라리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해야 한 다. 그와 비슷하게 정결을 깨끗이 지키기 위하여 맹세가 필요하고, 신앙, 절제, 정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을 변함없이 꾸준히 지켜 야 한다. 여기에 대한 아무리 작은 실족도 죄악이다. 그러나 몸의 단련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고(참조. 1티모 4,8)하신 말씀이 있는 것과 같이 위에 서 언급한 금욕행위의 경우에는 우리가 주장한 것이 맞다. 성덕을 얻을만한 더 확실한 기회가 생겨 그런 단련을 늦추는 것이 좋 을 것 같으면 그것을 빼고 자유롭게 더 유익한 쪽으로 넘어가자. 그런 것 들에 대해 우리를 속박하는 법은 없다. 우리가 얼마간 그런 몸의 단련을 빠뜨려도 그것이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계명을 잠시라도 벗어난 다면 죽을 위험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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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IX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비밀을 지키려고 했던 어떤 말이 우 연히 입 밖에 뛰쳐나온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에 듣게 된 사람에 게 그것을 숨기라고 강요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들리 면 상대방이 그것을 떠벌릴 충동을 별로 받지 않기 때문이다. 들은 형제 는 그것을 그저 이야기 하다가 별 의미 없이 지껄인 말로 보고 꼭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지 않던 바로 그 까닭에 가벼운 것으로 생각 할 것이다. 그와 달리 그대의 요구에 따라 상대방이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한다고 해도 그 내용을 오히려 더 빨리 털어놓을 것을 의심할 수 없 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그대를 슬프게 하고 상대방을 헛맹세하는 사 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마귀가 온 힘으로 그를 더욱 무섭게 공격할 것이 기 때문이다.

XXX 그럼으로 수도승은 육체의 고행에 관한 한 아무것도 성급하게 단정하 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극을 받은 원수가 율법을 지키듯 이 실행하는 것을 더욱 빨리 위반하도록 그를 강요할 것이다. 은총의 자 유를 누리는 사람이 자기가 지켜야 할 법을 정하면 스스로 치명적인 종 살이를 택하는 것이다. 그 결과를 보라: 자기가 본래 해도 되는 것, 감사 하면서 하면 칭찬마저 받을 수 있는 어떤 것들을 만일 이제 부득이 행한 다면 그가 법을 어기는 죄인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율법이 없는 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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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법도 없다”(로마 4,15) .

우리는 복된 요셉의 가르침을 하느님의 신탁처럼 받아들이고 계속 에 집트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 후에 우리가 우리 약속에 대하여 크게 걱정 하지 않았지만 7년을 다 마치고 나서는 우리가 우리 언약을 기꺼이 실행 했다. 그런데 우리가 빠른 걸음으로 우리 수도원을 다시 찾아 갈 그때에 우리는 이미 광야에 돌아갈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우리 선배들에게 마땅한 공경을 드렸다. 우리가 그들에게 자주 죄 송한 편지를 보냈지만 그들이 우리를 너무 따뜻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 들은 안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본래의 사랑스러운 관 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우리도 이제 우리 서약 때문에 느꼈던 가책의 가 시를 깨끗이 뽑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분들도 우리를 기쁘게 배웅하는 가운데 우리가 다시 스케테 광야로 돌아왔다. 거룩한 형제 여러분9), 우리는 부족한 능력으로 고명한 교부들의 지식 과 가르침을 여러분을 위하여 저술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서투른 표현으 로 그들의 가르침을 밝히기보다 오히려 어둡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우 리 촌스러움을 꾸짖어도 그 위대한 분들에 대한 찬양을 아까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심판자이신 하느님 앞에는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 아무리 조 야한 말투라도 그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독자들이 그 숭고한 뜻을 바라보면 우리의 설익은 표현방법 이 방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칭찬보다는 남의 선익만 염려했

9) 담화집 제2권의 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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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약을 지킴에 대하여

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고를 손에 들게 되는 모든 분들이 주의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좋게 보이는 모든 것은 교부들의 것이고 좋지 않게 보이는 것이 저희의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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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누피우스 아빠스의 담화 요한 가시아노 제20담화: 참회의 목표와 보속의 증표 요한 가시아노 진 토마스 옮김

I 비할 데 없이 훌륭한 피누피우스(Pinufius) 아빠스가 보속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을 전할 때 우선 그분의 겸손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 다. “포기하는 이들에 대하여”라는 제도서 제4권1)에서 그 겸손을 간단 하게 언급했지만 만일 내가 독자의 싫증을 걱정해서 여기서 이 점에 대 하여 침묵을 지킨다면 이 주제의 중요한 부분을 빼는 것과 다름없다. 사 실 그 책을 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본 글을 보게 될 수 있는데 말하는 분의 공로를 언급하지 않으면 그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피누피우스는 아빠스이면서 사제로서 파네피시스(Panephysis)라는 이 집트의 도시에서 멀지 않은 커다란 수도원을 다스리었다. 그의 덕행과 영 광이 그 온 지방에 크게 퍼졌기 때문에 아빠스는 인간들의 칭찬을 통해 이미 자기 노고의 보수를 받은 것 같아서 자기가 특별히 싫어하는 헛된 인기가 영원한 상급의 열매를 빼앗아 갈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몰래 자기 수도원을 떠나서 타벤니시(Tabenisi) 수도승들이 사는 가장 1) 참조. ‘포기하는 이들에 대하여’, 코이노니아 제13호(1988, 여름), 왜관: 한국 베네딕도 수도 자 모임, 150-166; 코이노니아 선집 제6권(교부), 왜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2004, 593-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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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목표와 보속의 증표

외딴 곳을 찾았다. 거기서 그가 추구한 것은 광야의 고독이나 혼자 사는 삶의 안정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어떤 때에 수도원에서 해야 하는 순종 의 노고를 참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주제넘게도 추구하는 일을 볼 수 있는데 피누피우스는 도리어 유명한 수도원에서 멍에 메기를 원했다. 거기서 그는 복장으로 알려지지 않기 위해 세속의 옷을 입고 그쪽 전례 대로 여러 날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문 밖에서 노숙하며 모든 이들의 무 릎 앞에 엎드렸다. 그 사람들은 그이 의도를 오랫동안 시험했다. 그들은 그가 그 거룩한 생활을 진지하게 원해서가 아니라 다 늙어서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탓으로 수도원에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끝에 가 서 그는 입회의 허락을 받았다. 피누피우스는 정원 일을 맡은 젊은 수사를 돕게 되었다. 그는 책임자가 명령하는 모든 것과 그 일 자체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사람들이 감탄하 는 거룩한 겸손으로 완수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지겨 워서 피하는 어떤 필요한 일을 그는 몰래 수고하여 밤사이에 해냈다. 날 이 새면 온 공동체가 경탄하면서도 그 유익한 일을 누가 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삼년간 그가 열망했던 굴욕적인 복종의 노고 를 즐기고 있다가 그를 알던 어떤 수사가 그가 떠났던 에집트의 지역에 서 우연히 그곳에 오게 되었다. 그는 피누피우스 아빠스를 즉시 알아보 았지만 우선 그가 입고 있던 옷과 그가 맡은 소임을 보고 오랫동안 망설 였다. 그러나 자세히 바라보고 난 다음 그 수사는 피누피우스의 앞에 엎 드렸다. 그것을 본 형제들은 처음에 깜짝 놀랐고 그 다음 그 수사가 피누 피우스의 이름을 밝혔더니 그들은 죄송함을 금치 못했다. 자기들 가운데 서도 성덕으로 유명했던 사람을 몰라보았고 그렇게 공로 많고 사제직을 지닌 사람에게 그만큼 비천한 일을 맡겼던 것에 대해 마음 아파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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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피누피우스는 눈물을 쏟으면서 이렇게 폭로를 당한 것을 마귀의 시 기로 돌렸다. 그렇지만 형제들은 그를 둘러싸면서 자기 수도원으로 호송 했다. 그는 잠시 거기에 머물다가 명성과 높은 위치 때문에 받는 후대에 다시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배를 타고 멀리 시리아에 속한 팔레스티 나 지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우리가 살던 수도원에서 초심자와 수 련자로 받아들여지고 우리가 사는 방에 같이 머물 허락을 받았다. 그러 나 거기서도 그분의 덕행과 공덕이 오래 숨어있을 수 없었다. 전에 당했 던 폭로와 비슷한 일로 그의 신원이 다시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큰 영광과 찬양 가운데 그를 다시 자기 수도원으로 모셔가고 마침내 그가 가졌던 위치를 가지도록 강요했다.

II 얼마 후에 우리도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에집트로 가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지극한 사랑과 열망으로 찾아보았다. 그분은 우리 를 대단히 친절하게 받아들이고 옛 수도원의 규칙을 지키기로 한 어떤 수사에게 그 자리에 모인 모든 형제들 앞에서 어렵고 숭고한 규정들을 전해주었다. 그 내용을 본인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도서 제4권에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요약한 바 있다. 그런데 참된 포기의 절정은 우리 에게 너무 이해하기 어렵고 기묘하게 보여서 우리 비천한 이들이 거기까 지 절대로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에 빠져 얼굴 로도 우리 안에서 깊이 느끼는 쓰라림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가 상당히 불안한 마음으로 빨리 복된 원로에게 돌아갔더니 그는 즉시 이런 큰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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픔의 원인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래서 제르마노 아빠스는 깊이 탄식하면 서 이렇게 대답했다.

III 지금까지 몰랐던 가르침의 내용은 우리에게 드높은 포기의 가파른 길 을 밝혀 주었으며 우리 눈을 덮었던 어두움을 제거하여 하늘에 마련된 포기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탁월하고 숭고할수 록 우리는 더 크게 절망에 억눌립니다. 우리가 그 위대한 이상을 우리 미 천한 힘과 비교할 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형편없는 상태를 보 여주신 덕행의 무한한 높이에 견주어 우리는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현재의 수준에서마저 떨어질 수도 있다고 느낍니다. 절망의 무게가 우리를 눌러 낮은 상태에서 더욱 깊은 구렁에 빠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상처를 낫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약밖에 없 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목적과 무엇보다 보속이 다 되었다는 증표에 대 하여 배우고 싶습니다. 지나간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만 가지면 말 씀하신 완덕의 봉우리들로 올라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IV 피누피우스: 그대를이 가진 겸손의 풍부한 열매에 대하여 큰 즐거움을 느낀다네. 옛날 그대들의 방에 함께 살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미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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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으로 보았고 높이 평가했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가장 낮 은 이 사람이 말만 좀 대담하게 하여 내세우는 규범을 그대들이 그렇게 감탄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쁘네. 내가 틀리면 몰라도 그것을 수행하려는 그대들의 열성은 그것을 말한 나의 정성보다 못하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대로는 내 말이 좀 엄격하게 들려도 그것은 그대들 의 실행에 거의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그대들은 날마다 스스로 행하는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의 공덕을 감추고 있네. 그래 도 그대들이 초보자처럼 성인들의 그 지침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 가 크게 칭찬 받아야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이 부지런히 요청하 는 내용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다루겠다. 사실 나의 능력이 모자라 지만 옛 친분을 생각할 때 나는 그대들의 명령에 순종하게 되어 있네. 회개의 공덕과 효과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말했을 뿐 아니라 책을 써 서 여러 가지를 발표해서 회개가 얼마나 유익하고 얼마나 많은 힘과 은 총을 가지고 오는지를 밝히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하느 님이 과거의 잘못을 언짢아하여 지극한 범죄에 이미 가장 정의로운 벌 을 내리려고 할 때, 회개가 그분을 방해하고, 마치 보복하기 싫은 그분의 발을 멈추게 한다. 그런데 틀림없이 그대들은 타고난 지혜와 지치지 않는 성경 공부에 의하여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고, 이 지식은 수도생활의 시작부터 그대들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대들이 알려고 하는 것은 회개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회개의 목적과 그리고 보속 이 넉넉히 되었는지에 대한 증표의 문제다. 남들이 생략한 점들에 대하 여 그대들이 지극히 영리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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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그래서 그대들의 요망을 가장 간결하게 채우기 위하여 회개의 충분하 고 완전한 정의를 밝히겠는데 그것은 우리가 뉘우치거나 양심의 가책이 되는 죄를 앞으로 절대로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속죄와 사죄 의 증표는 우리가 거기에 대한 애착도 우리 마음에서 쫓아버렸다는 것이 다. 그래서 누구든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속죄와 탄식에 몰두해도 과 거에 범한 죄나 그와 비슷한 짓들의 모양이 눈앞에 나타나고 거기에 대 한 쾌감을 느끼지 않더라도 그 기억이 깊은 심중을 괴롭힌다면 아직도 옛 죄악의 완전한 해방을 못했다는 것이다. 속죄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사람은, 과거의 죄에 대한 매력이나 공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때에야 지나간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양심 안에 보속과 용서의 증표를 제공하는 지극히 진실한 심판관이 앉 아있다. 양심은 모든 것이 밝혀지는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도 아직 육신 안에 머무는 우리에게 우리 죄과에 대한 해방을 알리고 속죄의 끝과 용 서의 은총을 밝혀준다. 같은 것을 더욱 뚜렷하게 표현한다면 우리 마음 에서 현세의 쾌락에 대한 욕망과 충동이 모두 쫓겨 나갔을 때에야 지나 간 악의 영향을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VI 제르마노: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서 거룩하고 구원에 이르는 통회를 어떻게 발하겠습니까? 성경에서는 회개하는 이의 말씀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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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께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아니 감추며 주 님께 내 죄악을 아뢰나이다 하였나이다”(시편 31,5). 그렇게 해야 그 뒤의 말씀도 실제대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즉 “당신은 내 마음의 죄악을 용 서해 주셨나이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 밤마다 잠자리를 적시나이다. 눈 물에 이부자리 젖어드나이다”(시편 6,7)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엎드려 기 도하면서 잘못들의 용서를 얻어 낼 수 있는 눈물을 흘려야 되지 않습니 까?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한 기억을 우리 마음에서 몰아내면 그것이 어 떻게 가능합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너는 기억하라”(이사 43,25-26: 70인역)고 하시니 그것은 오히려 죄의 기 억을 굳이 지키라는 명령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일할 때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에도 일부러 정신을 차려 제 죄를 기억하도록 노력합니다. 그래 야 참된 겸손과 마음의 통회를 더 효과적으로 가져서 예언자와 함께 “저 의 비천과 고생을 보시고 저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소서”(시편 24,18: 라 틴역)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VII 피누피우스: 조금 전에 이미 말했지만 그대들이 물어본 것은 회개의 본질이 아니라 회개의 목표와 충분한 보속의 증표에 관한 것이다. 내 생 각에 그 문제에 대하여 나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대답을 제공했다. 그런 데 그대들은 죄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과연 아주 유익하고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참회를 하는 이에게 해당한 것이 다. 그들은 계속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나는 내 죄를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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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시편 50,5)와 “내 죄에 대하여 생각합니다”(시편 39,19: 라틴역). 우리가 회개를 하며 아직도 죄과의 기 억이 우리를 괴롭히는 동안에는 죄의 고백에서 우러나는 눈물의 단비가 우리 양심에서 타는 불을 꺼야 한다. 그러나 누가 그런 겸손한 마음과 통 회하는 정신을 간직하고 수고와 탄식에 계속 몰두한다면 죄에 대한 기억 이 점차 잠들게 된다. 그러면 자비로운 하느님의 은총으로 양심의 가시 가 영혼의 골수로부터 뽑혀진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이 속죄의 목표에 도 달했고 완전한 용서를 받았으며 범한 죄의 때를 씻었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죄의 기억을 벗어나려면 과거의 악습과 욕정을 일체 지우고 마음의 완전한 순결을 지키는 길 밖에 없다. 틀림없이, 너무 나태 하거나 소홀히 해서 자기 악습을 씻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그 순결을 얻 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꾸준히 신음하고 슬피 탄식함으로 과거의 더 러움을 흔적까지 없애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과 행실로 다음과 같 이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 “내가 당신께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아니 감추었습니다”(시편 31,5)와 “자나 깨나 빵이런 듯 눈물이오이다”(시편 41,4).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응답을 들을 수 있다: “주님께서 이 렇게 말씀하신다: 네 울음소리를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라. 네 노고가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또 비슷하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악행을 구름처럼, 너의 죄악들을 안개처럼 쓸어버렸다”(이 사 44,22). 그리고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 43,25). 그래서 각자가 “묶이는 죄악들의 사슬에서” 풀려나 크게 감사하면서 주님께 “주께서 내 사슬을 끊어 주셨나이다. 찬미의 제사를 올리나이다”(시편 115,7-8)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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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할 것이다.

VIII 세례성사의 보편적인 은총과 피를 흘려 받게 되는 고귀한 순교의 은사 외에도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있는 여러 가지 참회의 열매가 있다. 우선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따르는 단순한 회개가 있다. 이에 대하여 복된 베 드로 사도는 “회개하고 돌아서서 죄가 지워지도록 하시오”(사도 3,19)라 고 했으며 세례자 요한과 주님 친히 “회개하시오 하늘 나라가 다가왔습 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참회의 여러 가지 열매가 있다.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죄의 큰 덩어리를 파묻을 수 있다. “사랑은 허다 한 죄를 덮어준다”(1베드 4,8)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선의 열매도 우리 상처들의 약이 된다.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처럼 자선은 죄를 없앤 다”(집회 3,30)는 것이다. 눈물을 흘림으로도 죄과를 씻을 수 있다: “흐르 는 눈물 밤마다 잠자리를 적시나이다. 눈물에 이부자리 젖어드나이다” (시편 6,7)라는 말씀대로다. 그리고 저자는 그 눈물을 공연히 흘리지 않 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어서 “악을 짓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주 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어주셨다”(시편 6,9)고 한다. 마찬가지로 죄는 고 백함으로 용서의 선물을 얻게 된다. 그것은 “나를 거슬러 주님께 내 불의 를 고백하니 당신께서는 내 마음의 잘못을 용서하셨나이다”(시편 31,5: 라틴역)와 “네가 옳다는 것이 밝혀지도록 먼저 네 죄악을 말해보라”(이 사 43,26: 70인역)는 말씀과 같다. 또한 마음과 몸의 고행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악에 대한 용서를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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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왜냐하면 시편에서는 “불쌍하고 애달픔을 굽어보시고 나의 모든 죄 악을 용서하소서”(시편 24,18)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히 품행의 교 정을 통하여 우리 죄가 사해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자 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 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주님께서 말씀하 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 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6-18). 그리고 우리가 가끔 성인들의 전달로 잘못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다음의 성경 말씀으로 알 수 있다: “누구든지 형제가 죄짓는 것을 보거든 그 죄가 죽 을 죄가 아니라면 하느님께 청하시오. 죽을 죄를 짓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1요한 5,16). 또 “여러분 가운데 누가 앓 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시오. 그들은 주님의 이 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병자를 구할 것이며 주님이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어떤 때는 자비와 신앙으로 죄의 더러움이 제거된다. 그것은 “자비와 믿음으로 죄가 씻어진다”(잠언 15,27: 70인역)는 말씀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훈계하고 설교해서 회개하 여 구원을 받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 죄가 자주 없어진다. 그 근거는 “죄 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 여 허다한 죄를 덮게 된다”(야고 5,20)는 말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 리가 남을 용서함으로써 우리 죄의 용서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 서 “여러분이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 께서도 여러분을 용서하실 것입니다”(마태 6,14)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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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대들은 인자하신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자비의 문 을 열어주셨는지 보았다. 그래서 구원을 원하는 사람이면 생명을 회복하 기 위한 그렇게 많은 치료제가 제공되는 것을 보고 아무도 절망에 빠지 지 말아야 한다. 네가 몸이 약해서 단식하는 수고를 통해 죄과를 없앨 수 없다고 걱정하느냐? 따라서 “단식으로 두 무릎은 후들거리고 살덩이 는 기름기 없이 말라버렸나이다”(시편 108,24). “내 먹은 빵은 재와 같사 옵고 마시는 것 눈물에 섞여 있나이다”(시편 101,10)라는 말씀을 할 수 없느냐? 그러면 너그럽게 애긍을 줌으로써 속죄하여라. 만일 없는 이에 게 줄 것이 없다면 주님께서 저 과부의 두 닢이 부자들의 커다란 기부보 다 낫다고 하셨고(참조. 루카 21,1-2) 냉수 한 잔에 대한 보상을 돌리겠다 고 하셨으니(참조. 마태 10,42) 가난해서 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너는 적어도 품행의 교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만일 모든 악습을 소멸하여 덕행의 완성에 다다르 지 못한다 해도 남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협력하라. 만일 이런 봉사에 자격이 없다고 걱정한다면 사랑의 실천으로 죄를 덮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마음이 너무 약해서 못한다면 아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서 적어도 성인들의 전달하는 기도를 통하여 네 상처에 대한 치료를 간절히 청하라. 끝으로 “내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아니 감추었나이다”(시편 31,5)라고 탄원할 수 없는 사람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자백하면 “당신은 내 마음의 죄악을 용서해 주셨나이다”(시편 35,5: 라틴역)라고 덧붙일 수 있겠다. 만일 네가 부끄러워서 사람들 앞에서 죄를 밝히지 못한다 해도 모든 죄를 이미 알고 계시는 그분께 그것을 고백하고 꾸준히 애원하면서 끊임없이 이렇게 말해라: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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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얻었삽고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시편 50,5-6). 하느님께서는 폭로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지 않고 치유해 주시고 치욕을 전혀 주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다. 그렇지만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만큼 잘 준비되고 안전한 이 방법보다 더욱 쉬운 다른 방법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 치료제 의 사용을 우리 재량에 맡겨주셨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에게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라”(마태 6,12) 고 하면 우리 죄의 용서가 우리 자신의 심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죄의 용서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면 위에서 말한 도구 를 사용해 보아야 한다. 아무도 마음이 완고해서 구원을 위한 이 치료법 을 무시하고 위대한 사랑의 원천을 멀리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그 모든 일을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탓허물을 치우지 않 는다면 그것은 속죄를 이르는데 모자라다. 그런데 우리가 경건하게 시도 해 보던 것을 간절한 기도와 함께 주님께 바치면 그분께서 그것을 살펴 보시고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시도에 무한한 사랑으로 응답해 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 어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 43,25). 그러니 위에 서 말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매일의 단식과 마음과 몸의 극기로 속죄의 은총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말씀대로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이루어지지 않기”(히브 9,22)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 “살과 피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지는 못하기 때문이다”(1코린 15,50). 그래서 누가 “하느님의 말씀인”(에페 6,17) 영의 칼을 막아 이러한 피흘림을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다음과 가은 예레미야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즉 “피 흘리는 일에서 칼을 거두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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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0)는 것이다. 이 칼은 죄악에 힘주는 해로운 피를 잘도 흘려 우리 영 혼의 지체 안에서 만나는 육과 세속의 응결물을 모조리 삭제하고 제거 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악습에 대하여 죽고 하느님을 위하여 살면서 영 적인 덕행의 힘으로 왕성해진다. 그렇게 되면 수도승은 이제 지나간 잘못 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앞으로 올 기쁨에 대한 희망으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과거의 악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미래에 올 선을 내다보고 그 는 죄에 대한 슬픔에서가 아니라 저 영원한 기쁨에 대한 즐거움에서 눈 물을 흘릴 것이다. 그는 “뒤에 있는 것” 즉 육의 악습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필리 3,13) 즉 영적 선물과 덕행을 향해 (몸을) 내뻗치게 된다.

IX 그런데 그대가 조금 전에 말한 것 즉 지나간 죄를 일부러 기억한다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 오히려 그런 기억이 갑작스럽게 침입해오면 즉시 물리쳐야 한다. 그런 것은 특히 고독 속에서 사는 사람 의 정신이 순결을 관상하는데 큰 방해가 된다. 과거의 죄를 회상하면 정 신은 세상의 더러움에 얽혀 악습의 고약한 냄새를 맡아 질식하게 된다. 만일 그대가 이 세상의 우두머리를 따라 무지나 방종으로 저지른 일을 기억하면 그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전혀 쾌감을 느끼지 않더라도 옛 부 패의 단순한 접촉마저 반드시 해로울 것이다. 그 고약한 악취는 정신을 괴롭히고 덕행의 영적인 향기, 다시 말하면 그 감미로운 냄새를 맡지 못 하게 한다. 그래서 옛날 악행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그것으로부터 달 아나야 한다. 그것은 점잖고 단정한 사람이 거리에서 어떤 음탕하고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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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스러운 여자를 만나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 여자가 말과 포옹으로 그 에게 다가가면 그는 반드시 달아날 것이다. 그 여자를 즉시 피해가지 않 고 잠시만이라도 창피스러운 대화를 나눈다면 부끄러운 쾌락을 승낙하 지 않았다 해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나쁜 판단과 비난을 피할 수 없 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기억 가운데 저런 위험한 생각들이 일어나 면 즉시 그것을 쫓아내고 솔로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는 “빨리 나 가라. 그가 있는 곳에 머물지 말고 그에게 눈을 돌리지 말라”(잠언 9,18: 70인역)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천사들은 우리가 부끄럽고 추잡한 생각 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지나가는 길에 우리에게 “주님의 강복이 너희 에게 있기를” 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의 눈이 우선 추 잡하고 세속적인 일을 주시하면 우리 정신은 좋은 생각에 몰두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솔로몬의 명제와 같다: “네 눈이 남의 여자를 본다면 네 입은 괴상한 소리를 말한다. 너는 바다 한 가운데에 누운 자와 같고 큰 폭풍 가운데 있는 키잡이와 같을 것이다. 그때 너는 ‘사람들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않았고 나를 비웃어도 나는 몰랐다’ 고 할 것이다”(잠언 23,33-35: 70인역). 추한 생각만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생각을 떠나 우리 마음의 관심을 항상 천상 일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 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요한 12,26)라는 우리 구세주의 말씀과 같다. 사 실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가련한 마음으로 과거에 스스로 범했던 것이 나 남이 범했던 것을 회상하면 극히 예리한 쾌감의 화상을 맞는 일이 자 주 생길 수 있다. 그와 같이 경건하게 시작한 일이 더럽고 해로운 결과로 끝난다. 그것은 “사람에게 바른 길로 보여도 그 끝은 지옥의 깊은 곳까지 빠진다”(잠언 16,25: 70인역)는 말씀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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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그래서 우리는 악행에 대한 해로운 기억보다 덕행에 대한 욕망과 하늘 나라에 대한 갈망으로 훌륭한 통회를 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 다. 하수도 위에 서 있으면서 그 오물을 저어 보는 사람은 그 고약한 악 취에 질식할 수밖에 없다.

XI 이미 몇 번 말을 했지만 참회할 죄를 범하게 했던 충동들과 감정들이 우리 마음에서 절단되었을 때에야 우리는 과거의 죄를 완전히 속죄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자기를 저 악행에 빠지게 했던 원인과 계기를 영의 열성을 다하여 잘라 내지 않는다면 저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들과 위험하게 사귀어서 음행 이나 간음에 빠졌다면 그들을 쳐다보는 것도 지독하게 피해야 한다. 또 술을 지나치게 마시거나 음식을 너무 먹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면 자기를 유인하는 음식에 대한 과식과음을 엄격하게 억제해야 한다. 또한 돈에 대한 욕심과 사랑 때문에 거짓 맹세나 도둑 혹은 살인이나 모독을 범했 다면 자기를 탐욕으로 현혹한 대상을 잘라 버려야 한다. 자만심이 자기 를 분노의 죄로 몰았다면 깊은 겸덕으로 오만의 싹까지 뽑아야 한다. 이 와 같이 모든 죄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먼저 그것을 짓게 된 원인과 기회 를 삭제해야 한다. 이런 요법으로 우리는 틀림없이 과거에 지은 죄의 망 각에까지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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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그런데 방금 내가 망각에 대하여 가르친 것은 모세의 율법에서도 금하 는 대죄에만 해당된다. 착한 생활로써 죄에 대한 느낌까지 사라지면 거기 에 대한 참회가 목표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말씀대로 “의인도 매일 일곱 번 떨어지고 일어나는”(잠언 24,16) 소죄에 대하여는 참회가 언제나 필요하다. 무지나 망각으로, 생각이나 말로, 뜻밖의 일이나 피할 수 없는 일로, 또 육체의 연약함과 잠자다가 일어나는 일로 우리는 어떤 때 마지못하게 또는 어떤 때 원해서 매일같이 자주 실족한다. 이런 것들 에 대하여 다윗도 주님께 기도하면서 정화와 용서를 청하여 “뜻 아니한 허물이야 누가 다 아오리까? 내 모르는 잘못에서 나를 깨끗이 해 주소 서”(시편 18,13)라고 한다. 그리고 (바울로)사도는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 악을 저지른다”(로마 7,19)고 하다가 이에 대해 탄식 하며 “나는 비참한 인간이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내겠습 니까?”(로마 7,24)라고 부르짖었다. 어떤 자연의 법칙처럼 우리는 이런 과 실에 너무 쉽게 떨어진다. 그것을 멀리하려고 아무리 자신을 살피고 지켜 도 그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제 자는 단적으로 이렇게 규정했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속 이는 것이며…… 그분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1요한 1,8.10). 따라서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회개의 목표에 이 르렀다는 것만이 크게 유익하지 않다. 금지된 것을 피하는 것으로 부족 하다.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가면서 속죄의 증표가 되는 덕행들을 행하도 록 언제나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 역겨워하시는 악취를 풍기고 더러운 중죄만 피했다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 마음의 순결과 사도들이 가르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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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사랑으로써 주께서 기뻐하는 덕행의 좋은 향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 피누피우스 아빠스가 속죄의 증표와 회개의 목표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기 수도원에 머무르라고 정성과 사랑으로 청했다. 그러나 우리가 스케테 광야의 명성에 너무 끌려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붙들 수 없었고 결국 우리를 놓아주었다.


제37집 발 행 일

2012년 여름

발 행 인

한국 베네딕도 수도자 모임

편 집 인

진 토마스

화순

편집위원

이장규 아타나시오

왜관

박정희 루나

대구

양숙희 이사악

서울

최미숙 살루스

부산

인 쇄

분도출판사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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