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시간–전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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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시간

전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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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숙 선생님은 1958년 6월 16일 생으로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며 현재 인천 근대건축전시관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 찾아 갔을 때 말씀해주신 인천 개항장의 역사가 흥미로워 구도심에 관한 이야기들을 여쭙게 되었고 이후 프로젝트에 매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다.

고경표(이하 표) : 선생님 여기가 고향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평범한 이야기들 근데 선생님이 이 주변이 바뀌는 걸 좀 더 유심히 보고 공부를 하는 분이니까······ 그런 거에 대해서 얘기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전경숙(이하 전) : 이 동네 이야기 그냥 이렇게, 옛날에는 여기에 뭐가 있었고 이렇게 하면 되나?여기서부터 시작을 하면 여기 배다리, 철교 있잖아, 거기서부터 여기 경동 이쪽까지가 여기 경동, 그 다음에 저쪽 신포동 청실홍실, 그쪽까지가 서울의 명동 거리랑 맞먹는 곳 이었어. 그래서 우리 이십대 때 전, 후로 해서 여기가 아주 가구거리. 여기 전~부 가구거리였어. 아직도 몇 개 남아 있잖아. 옛날에 그 라자가구, 리바트 우아미 막 고급 가구들 쏟아져 나올 때, 그러니까 자개1 가구에서 원목가구로 바뀌는 그 시점에. 표 : 저번에 어떤 분이 얘기 하시는 데 여기에 목공소가 그렇게 많고 호황이었다고 그래서 이 주변 일대 비싼 술집에 오는 사람들이 다 그 사장들이었다고 그러더라구요. 전 : 요정 두 많았구, 이쪽은 전부 가구거리였어. 그 대성 목재 선창 산업이 월미도 쪽에, 만석동 쪽에 있으면서 원목이 무지무지 많이 들어왔어 그 바닷길로 통해서. 들어오면서 여기가 그냥 가구······ 아주 거의 가구점이었어. 그래서 20대 초반에 얼마나 눈이 휘둥그레지지 “어머 세상에 저런 가구도 있어” 이러면서 여기만 다녀도 구경거리가 어마어마했지. 표 : 선생님 대학생 때 일이에요? 전 : 아니,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그 때였어. 그러고 고 철길 넘어 거기는 인제 그 헌책방 거리. 어마 어마했어 거의 다였어 거기 두, 그 일대가 전부 다 였어.

1. 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조각으로 빛깔이 아름답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게 썰어 가구를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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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송림동 넘어가기 전 까지. 그 세무서 자리 있어 저 꼭대기 창녕학교 영화초등학교 지나서 왼쪽 꼭대기로 거기가 세무서······ 지금도 있을 거야 아마. 거기까지 거의 다. 그쪽이구 저~쪽에 인제 동구청. 그쪽 거리까지 전부 다 헌책방 거리 였어. 표 : 그렇게 넓었어요? 전 : 말도 못했어 아주, 발 디딜 틈이 없었어. 학생들도 많았구 모든 참고서 살려면 다 거기루 가는 거지. 헌책도 팔았구, 새 책도 팔았구. 입구에는 거의 이제 크게 지금도 몇 집이 남아 있잖아?그런데는 인제 새 거를 팔았고 그 뒤 쪽으로는 인제 헌책도 많았고. 거기 가면 인제 없는 책이 없었지 뭐. 표 : 근데 어쩌다 지금은 이렇게 됐을까요? 전 : 그러니까 이제 중구청이, 지금 중구청 자리에 시청이 있었거든. 시청. 시청이 나가면서 이렇게 낙후되기 시작한 거지. 시청이 나가면 모든 사무서가 다 나가지, 쫓아 나가잖아. 그러구 지금 중구청 앞에는 그 뭐 2층 이구 몇 층 건물이구 전부 다 대소서 같은 거 있잖아. 표 : 네 대신 써주는 거. 전 : 서류 대신 써주고 막 이러는 것들, 지금이야 사람들이 다 똑똑하고 그러니까 자기가 작성하고 하잖아. 그런데 옛날에는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그렇게 뭐 관공서 들어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다 위축되는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뭐 서류를 만든다거나 무슨 뭐 한다거나 하다못해 출생신고서도 우리 어릴 때는 그랬던 거 같은데. 표 : 양식이 따로 없었어요? 전 : 양식은 있었겠지. 있었는데, 그 당시는 공무원들이 전부 다 대소서 가서 써오라고 그러구서, 대소서잖아 대소서. 그래갔고 그 중구청 앞에 전부 그런 것들이었단 말이지. 그러다가 시청이······ 몇 년도에 절루 나갔나?2 나가면서 다 나간거지. 다 나가구 인제 이 구도심을 내버려두고 신도시를 하나 만들어서 나간거야. 2. 1985년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신축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중구청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본래 인천 부청사로 1883년 10월 양식 2층 목조건물로 시작하여 1902년 청사를 신축했다. 1906년에는 인천 이사청, 1910년에는 인천부청으로 사용되었으며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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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 그게 송도에요? 전 : 아니 송도하고는 또 달라. 송도는 그 이후고. 시청이 몇 년도에 나갔는지 모르겠네. 하여튼 구월동, 구월동으로 시청이 나가면서 다 따라 나간거야. 그러면서 그 공무원들이 드나들고 시청에 드나들던 그 많은 사람들. 얼마나 옛날에는 업자들이 많이 들어왔겠어. 표 : 그럼요(웃음). 전 : 업자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왔겠어?그러구 시청이 나간대는 소문이 나면서 그쪽 구월동 지역에 건설업자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여기 와서 돈을 썼겠냐구. 그러니까 이 술집, 이 동네 술집이 말도 못했어. 하다못해 저~ 공원 꼭대기 거기에두 요정이 있었으니까. 홍예문 꼭대기에 그 요정이 있었어. 표 : 요정이요?아······. 전 : 거기 두 요정이 있었고 중구청 뒤에 성심빌라 있잖아, 거기 그 계단, 제일교 올라가는 계단 이쪽에 성심빌라, 거기도 요정 이었어. 표 :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그 요정이요? 전 : 그거하곤 쪼끔 또 달라졌지만 하여튼 요정이었어, 기생까지는 아니어도. 하여튼 뭐 되게 그랬었고 그러면서 쪼끔 인제 젊은 사람들은 뭐라고 그래야 되나······ 요정이라기보다 하여튼 술집이 되게 많았어. 그래갔고 그 예쁜 아가씨들은 다 이 동네 술집에서 일했고 그랬었어. 그러면서 이 구도심이 낙후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이제 IMF 때 완전히 그냥 쓰러지구, 완전히 쓰러졌구. 지금 그 어디야······ 그 처음 여기가 20년 전에 롯데리아니 맥도날드니 이런 게 이제 처음 들어왔거던. 지금 대박집 화로구이?거기가 옛날에 맥도날드 자리였 어. 거기서 요렇게 돌아가지구 지금 그 자동차 모형 전시해 놓은 까페가 있을꺼야 아마, 1층에는 구두 팔고. 표 : 있어요! 전 : 거기가 롯데리아 자리구. 표 : 신포시장 뒤 쪽으로. 전 : 응, 구루마 몇 개 있고. 거기가 롯데리아 이쪽에는 맥도날드. 엄청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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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롯데리아 그 전에는 뭐가 있었냐면 대성빵집 이라고 있었어. 빵집, 말 그대로 빵집이 있었어. 표 : 비슷하게 가네요(웃음). 전 : 그 집이 어마어마하게 막 굉장했었어. 거기는, 그 당시의 신포시장은 뭐 사람이 다닐 수 가 없었고 그러구 지금 그 구루마 몇 개있는 그 거리가 저쪽에 청실홍실 그쪽 윗길, 신한은행 거기까지 구루마가 쫘악!다 있었어, 말도 못했어. 그 구루마 하나 놓는 자리도 막 몇 백만 원씩 막 자릿세 내고 들어가고 그랬다고 그러더라고. 그러구 그 대박집 있는 그 거리에서 지금 말했던 지금 말한 롯데리아 고쪽, 그 앞쪽으로 전부 다 부띠끄 3 . 표 : 지금도 몇 개 있어요! 전 : 몇 개 있잖아!밤비랑 몇 집 있잖아. 거기는 전부 다 또 부띠끄 였어. 그 당시에는 그 부띠끄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부띠끄, 부띠끄 그러면서. 이제 그 양장점이 조금 고급화 됐던 거지. 표 : 저는 그래서 처음에 그 건물 자체가 옛날 르네상스 양식 같이 지어놓고 아직까지 정장 입혀놓은 마네킹이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도대체 처음에 무슨 용도로 지었길래 저렇게 멋을 부려같고 지었나 했거든요. 근데 거기가 부띠끄 거리였네요. 전 : 말도 못했지, 근데 지금 밤비하고, 김 테일러는 나중에 시작한 사람이구 밤비같은 경우는 굉장히 오래 됐구. 거긴 전부 다 그랬었어. 그러구서는 양장점은 우리 중학교 때 교복을 양장점에서 맞췄거던. 지금은 다 공장에서 기성복으로 딱딱딱 나오잖아. 근데 우린 뭐 재갔나······ 생각은 안 나네, 아~ 가서 쟀구나, 교복을 각자 가서 맞춘 거야. 표 : 엄청 비쌌겠어요. 전 : 가격은 이제 내가 계산 안 해서 모르는데. (웃음) 그 당시 교복은 또 어딜 가서 맞췄냐면 중앙시장, 중앙시장 지금 큰 길 있는데 말구 그 뒤쪽 골목이 또 있어.

3. Boutique,‘작은 점포, 소매점’ 등을 의미하지만 복식 분야에서는 규모는 작더라도 멋있고 개성적인 의류를 취급하는 점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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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 아!교복 집 몇 집 있어요, 있어요. 전 : (웃음)거기는 또 교복만 맞추는 그 양장점 거리였어. 거기 다~ 밀집해있었어. 그러면 새 학기 시작하면 거기 뭐 말도 못하지. 표 : 드글드글 했겠어요(웃음). 전 : 말도 못했어 그럼 거기 가서 직접 재는 거야. 재구선 거기서 인제 “언제 와라” 그럼 가서 찾아 가구 그랬었어. 우리는 로즈 양장점에서 했어. 표 : 이름이 로즈에요?이쁘다. 전 : 응, (웃음) 로즈였고, 우리 언니들은 거기 미원 양장점이라고 있었어, 지금은 뭐,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는데, 미원 양장점에서 또 옷 맞춰 입고. 그랬었어 이 동네에서. 그러구 그 청실홍실 거기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상가가 좀 있잖아?확실한 내 기억으론 왼쪽 거리에 놀부 부대찌개 있는 거기에 또 목공예점이 많았어. 목재소는 아니구 목공예였던 거 같애. 쪼꼬만 거 만들고 이렇게 조각하고 이렇게 해서. 그래서 놀부 거기하고 이렇게 돌아가는 그 코너에 스포츠 매장 있잖아 이쑤신 고기집 있고 그쪽으로 다 그런 것들이 또 많았었어. 목공예점이 많다가 그게 또 우리 십대 중, 후반 고 때 많았었던 거 같애. 그러다가 우리가 이십대, 고등학교 졸업하는 고 시점에 도원동 거리로 넘어갔던 거 같애. 그래서 도원동 쪽이 지금. 표 : 있어요, 있어요 지금도 문짝 만들고 가리개 만들고 그런데 몇 개 있더라구요. 전 : 응응, 간판 만들고 그렇게 또 넘어 갔어 거기가. 그래갔고 배다리 거기도 굉장히 막 번성했던 곳이야. 배다리 그 웨딩 하나 있잖아. 거기가 무슨 아케이드처럼 그렇게 들어섰었어, 백화점은 아니고 아케이드 같은 그런 수준의 상가건물인데 그것도 완전히 그냥 문 닫고 있다가 그게 인제 웨딩이 들어가구 하면서 좀 나아 진거고. 표 : 근데 되게 뭔가 서글프다고 해야 될까요. 전 : 어, 그러니까 나는 그, 나 어릴 때 여기 그 흥하던 모습과 내가 이십대가 되면서 쇠락하던 그 모습이 그걸 다 본거야. 보구 인제 삼십대 후반 사십대가 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었어, 그러다가 인제 중구청에서 인제 역사문화거리로 만들고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면서 이제 살아나기 시작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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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기 이제 오래도록 비워있던 상가가 지금 많이 들어와 있잖아. 작년 재작년 요 근래에 굉장히 많이 밝아진 거거든. 그게 인제 저기 동인천 뒤에 양키시장, 거기가 또 다 헐렸잖아 그 앞에가. 표 : 다 헐렸어요?결국? 전 : 어, 다 헐리구 거기가 광장이 들어섰잖아 그러니까 거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뭐 신도시로 갈 수도 없고 구월동 이런 데는 워낙 비싸고 그러니까 좀 상가가 싼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 거야. 그래서 빈 집이 거의 없고 다 이제 사람들이 장사하고 문을 열게 된 거고. 저쪽어디야 청실홍실에서 저쪽으로 오면 키 클럽 있잖아, 거긴 또 외국인들만 들어가는 지금도 하고 있어. 근데 옛날엔 거기는 정말 한국 사람은 못 들어갔어. 또 술값도 비쌌고. 그래갔고 거기는 또 고렇게······. 거기도 또 막 손님이 굉장히 많았었고 그 당시에 그 가수했던 사람이 있어. 제 2의 김세환이다 막 그랬던 사람이 있거든?그 사람이 이름이 이경식?이경석? 그 사람이 하든 까페도 있었구. 나, 아는 애가 또 거기 가서 그런 거 해본데 (웃음) 서빙해 본데 그래같고 걔가 가가지고 대학교 다닐 땐 데, 그래같고 걔 땜에 또 손님이 (웃음) 아주 걔가 요렇게 가늘고 하늘하늘 이렇게 생겼어 우리가 미쳤다구 우리들은 굉장히 보수적이고 막 그런데, 근데 걔도 그런 애가 아니거던?근데 자기 술집에서 한번 해보고 싶다는 거야. 표 : 궁금했나봐요. 전 : 어, 그래 가지구 걔가 거기 가서 서빙하구 하면서 손님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졌는데, (웃음) 그게 아직도 있는 거 같애, 그러니까 공영 주차장 있잖아 등대 경양식집 있지?등대 경양식집 하고 붙은 건물이거든?붙은 건물에 그 모퉁이는 이제 그 클럽이구 고 옆으로 보면 이제 2층에 뭐가 있는 거 같애 자세히는 안 봤는데. 그래같고 거기는 뭐 우리들이 지나다닐 수도 없는 곳이고. 표 : 좀 무서웠을 꺼 같아요. 전 : 그렇지, 그때는 미군들이 주로 많았던 거 같어. 미군 상당히 오랫동안 있었지 월미도 쪽에. 월미도에 있다가 해방이 되고서는 월미도를 미군이 차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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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지, 그러다가 6·25때 연합군이 들어와 있다가 미군이 언제 철수했는지는 잘 모르겠네? 그러다가 인제 평택 2함대, 평택으로 가잖아 그 천안함 사건 4 일어났던 평택 2함대가 월미도에 있다가 이게 인제 인천 시민한테 돌려주고서 평택으로 간 거지, 2함대가. 표 : 미군이 아무래도 도시에 있으면은 그 분위기가······. 전 : 그렇지, 근데 이제 월미도에 있던 미군들이 많이 왔을꺼고, 부평에도 또 미군기지가 있었잖아 얼마 전 까지도. 그래가지고 미군 또 클럽이 어디였냐면 지금 아트플랫폼 건너편에 호텔에서 그 호텔은 경찰서 자리고, 인천 경찰서 자리고 고 뒤쪽으로 뭐 하나 건물이 있는데 거기에 클럽이 있었어, 미군 클럽이. 표 : 거기서 일 하는 사람들은 당시 다 한국 여자고 사람이고 했을 거 아니에요? 전 : 그렇지, 지금은 인제 고기에 키클럽 그 쪽에 다 필리핀, 러시아 쪽 여자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다 우리나라 한국 여자들이었지. 지금 파라다이스 호텔이 옛날에는 올림포스 호텔이였어, 그 자리가 영국 영사관 자리잖아. 그 영국 영사관이 들어서기 전에는 봉수대, 봉화대가 있던 포대가 있던 자리거던. 언덕이 있고 높고 하니까 효종 때 월미도 이쪽을 해안 방어기지로 구축을 하면서 포대도 있고 그러다가 이제 개항을 하면서 영국 영사관을 짓고 그게 없어지고 올림포스 호텔이 들어 선거지. 그러다가 호텔이 처음 생기면서 외국 사람들이 많았고 거기 카지노가 또 굉장히 유명했거던, 카지노도 있었고 ‘다빈치’라는 클럽도 있었고. 그러니깐 우리 땐 고고장 이었지, 고고장인데 그때 고고장이 말도 못했어(웃음). 표 : 진짜요(웃음). 숙 : (웃음)이 동네에는 수인 역 쪽에 ‘뉴-반’도 있었고 ‘팽고팽고’라고 있어, 그 고고장 자리가 어디냐면 국민은행 뒤에 술, 주류 대리점 있잖아 창고. 그 자리가

4.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PCC-772 천안이 피격되어 침몰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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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고팽고 자리였어. 그래갔고 거기 열려있을 때 이렇게 들여다 봐, 나는 거기를 한 두 세 번 갔는데 그러니까 미술학원에, 우리 중학교 때 친구가 미술 선생님이였고 나는 보육을 하면서 인제 같이 있었어. 근데 걔는 매일 고고장을 가는 애야(웃음) 걔는 부자 집 딸이고, 근데 되게 내성적이거든?굉장히 내성적인데 그렇게 매일 고고장을 갔어. 매일 고고장을 혼자, 혼자 그렇게 갔어 그러다가 맨날 혼자가기가 그랬나봐 나보고 한번 가자고 그러더라고 “그래” 그러고 인제 갔어, 갔는데, 가서 걔는 나가서 춤을 추고 나는 거기 앉아있었는데 자리 지키고 앉아있는데 어떤 남자애가 오더라구, 오더니 나는 인제 딱 방어 자세를 취했지. “누나는 여기 왜 왔어요?”그래 그래서 가만있었지 그랬더니 “저 누나가 꼬셔서 왔죠?” 그러더라고 (웃음) 그러니까 그 남자애도 매일 오는 애야. 표 : 아, 그러니까 알았구나. 전 : 그러니깐 내 친구를 아는 거지, 그러면서 가래 집에, 그러니까 나는 깜짝 놀래갔고 누나는 저 누나 따라다니지 말고 저 누나 꼬신다고 오지 말고 집에 가라 그러더라구 자기가 커피 사줄 테니까 마시고 가래~ 그래서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그랬어 그러니까 우리 친구가 이제 들어온 거야 들어와갔고, 왜 그러냐고 그래서 “날 보고 집에 가래” 그랬어. 그랬더니 그러다 결국 쫓겨 나왔어 그 남자애한테. 표 : 특이하네요? 전 : 그러니까 우리 때는, 지금은 뭐 사람 나름이겠지만 깡패라는 게 깡패가 그 당시에는 의리가 있었단 말이야,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었단 말이지. 그게 그러니까 사람에 대한 어떤 애정이고 깡패지만?깡패노릇을 할망정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고······ 그런, 근데 걔는 깡패는 아니야, 그 남자애는 깡패는 아닌데. 어떤······ 자기가 그렇게 놀기는 해도 그런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애정들은 다 있었던 말이지, 인간미가. 표 : 선생님을 처음 보는 데 많이 불편하고 어색해 보였나봐요. 전 : 그러니까 남에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섰다기 보다, 이렇게 어떤 것은 지켜주고 싶은 그 마음, 인간에 대한 그런 마음이었다는 그 생각이 들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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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이렇게 마음이 훈훈해. 내 친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훈훈한 마음이 생겨. 그래서 내가 우리 아들한테도 그 얘기 하면 그런 게 어딨녜(웃음),이해를 못해(웃음), 결국은 그 남자애 한테 끌려 나왔어(웃음). 근데 그 당시에 그 팽고팽고에 누가 왔냐면 옛날에 그 사랑과 평화, 사랑과 평화 막 뜰 때, 그 사람들이 거기 와서 그거를 했드만. 표 : 사랑과 평화가 고향이 인천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 중에 한 명이. 전 : 아~ 그래서 거기서 시작했구나. 그러니깐 올림포스 호텔에 그 다빈치라는 클럽 거기도 대단했고 호텔이 클럽이니까는 지금에 뭐 강남에 비하는 거지 뭐. 부잣집 애들은 가는 거고 돈 없어도 진짜 날고 기는 애들은 가서 노는 거구. 그리고 올림포스 거기에 주차장 자리에 수영장이 있었어요. 표 : 야외수영장이요? 전 : 어, 야외수영장이. 표 : 아주 그냥 있을게 다 있었네요. 전 : 야외수영장 있었고, 야외수영장을 인제 갔어 갔는데 진짜 뭐 그냥, 여느 집 부잣집 그냥 풀장 만 한 고런 데야. 근데 어느 날인가 그게 없어졌더라고 수영장이 야외 수영장 자체가. 그래서 “아이 주차장 만들려고 없앴나보다” 그 생각을 했었어.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인제 아는 교수님하고 답사 다니고 그러다가 이제 자기가 아는 옛날 얘기를 하는 거지. “어 교수님 여기 옛날에 올림포스 수영장 있었어요” 근데 젊은 교수는 서울 사람이야, 그래서 “어유 여기 수영장 있었어요?” 그래서 여기 수영장 있었구 인제 막 얘길 했어. 근데 나이 드신 교수님이 이제 계시다가 “그거 왜 없어졌는지 그거는 내가 알어” 그러시면서 얘길 해 주시 더라구 “어머 교수님이 그거 아세요?” 응, 그 수영장이 왜 없어졌냐면 자기 친구가 거기서 익사를 했데요, 그래서 소름이 끼치더라고. 표 : 아이고 그걸 어쩐데요. 전 : 거기서 수영하다 익사를 했데, 표 : 그래서 없애버렸구나, 아예. 전 : 근데 사실 수영장이 요만밖에 안 하거 던?그냥 여느 집 부잣집 풀장만한······. 그렇지 지금 파라다이스 가면 그 주차장, 들어가면서 저쪽 정면 왼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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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거든요. 그러니까 크지도 않아. 그래서 그 뒤로 없어졌다고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또 그렇게 해서 수영장이 없어진 그걸 알게 됐다니깐(웃음). 이 바닥은 좁아같고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 “어 그건 내가 알어” 이러구(웃음) 누가 또 “어 그건 내가 알어”하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그렇게 되더라구(웃음). 이 거리가 정말······ 지금 생각하니까 어릴 때는 몰랐었는데 얘길 하면서 이렇게 회상을 해 보니까 정말 대단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표 : 저번에 어떤 할머니 뵙고 얘길 들었어요. 근데 그 할머니께서도 그 때 신포동 쪽 요기 앞에 하나 동인천역 쪽에서 하나 이렇게 하셨는데, 그때는 사람들이 정말 미어터져가지고 그냥 외식도 경양식 집에서 하고 술도 경양식 집에서 먹고 그래서 돈을 정말 어마어마하게 버셨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전 : 어어, 그것도 나 이십대 초반이지, 지금 여기 문화의 거리, 신포동 문화의 거리 2층은 전부 경양식 집이었어. 그래갔고 그 시장 들어가면서 초입에 보석상 있고 고기 2층에 씨사이드가 거기에도 있고 저쪽에도 있었어 신한은행 뒤쪽, 아니구나 청실홍실 옆에 편의점 있잖아?편의점 고 뒤에 2층에 씨사이드가 두 군데가 있었어. 거기도 그렇고 유지 경양식 5 이니 뭐니 그때 다 생긴 거야. 그래 가지 구 이집트라고 또 저쪽 용동고개, 용동 그 우물 건너편 쪽으로 또 이집트라고 굉장히 큰 경양식 집이 있었고. 그러니까 그 때 처음 생긴 거야, 외식이 그때 짜장면 집에서, 짜장면 분식집에서 경양식 집으로 이렇게 격상이 됐다 그러나? 외식문화가?(웃음) 표 : 돈까스, 스테이크 먹는거 네요(웃음). 전 : 그러면서 뭐 젊은 애들이 전부 뭐 만나면 경양식 가서 만났지. 그래갔구 말도 못했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니까?지금 뭐 아웃백 수준이라고 보면 되는 거지 뭐. 그러구 고기 그······ 요기 그······ 지금 안경점 있잖아 요 모퉁이에, 안경점 모퉁이에 저기가 있었어. 지하에 다방이 있었어 경동다방이라고, 경동다방이라고 그러니까 그 때는 몰랐는데 예전에 인제 그 거기하고 그 저쪽에 게스 있는 그쪽 동네가 다방거리였어.

5. 앞서 구술자로 참여한 이춘연 할머니가 경영했던 경양식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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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은성다방이니 뭐 하여튼 다방이 또 엄청 많았어. 그래갔고 이 동네에서 인제 뭐 예술하네 뭐 하시는 뭐 언론인이라든가 정말 난다 긴다 하시는 분들은 인제 그 다방에서들 또 모이셨고. 우리는 이십대 때 그 경동다방 지하에서 맨날 만났어 매일 만났어(웃음). 표 : 다방에서는 지금 자판기 커피 같은 그런 커피 주는 거에요? 전 : 어, 타서 주는 거지. 그러다가 조금 시간이 지난 다음에 “아 니들 먹고 싶은대로 먹어라” 이제 설탕 따로 프림 따로 이렇게 주구 그랬었어, 나중에 고건 좀 나중이고, 우리가 처음 다방에 갔을 때에는 다 타서 나왔지. 다방에 다니기 시작하던 고 때는, 그러다가 한 뭐 얼마 안돼서 좀 세련돼 졌다고 그러나?각자 니들이 마시고 싶은 대로 마셔라 그러면서 이렇게 따로따로 나왔던 거 같애 요기 인제 그 태능갈비, 고 뒤쪽은 전부 돼지갈비 집 이었어. 그때 또 돼지갈비라는 것이 이제 처음, 우리는 어릴 때 뭐 돼지갈비다 소갈비다 그런 게 없었던 거 같애? 그런 게 없고 그냥 소불고기, 돼지고기, 돼지고기 볶음 그 정도였던 거 같애. 돼지고기는 잘 안 먹었던 거 같애. 표 : 저희 때는 한번 외식한다고 하면 양념갈비 집, 그때는 무슨 가든 무슨 가든 이렇게 이름붙이잖아요(웃음) 꼭 거기 가서 양념 갈비를 먹었어요 지금처럼 항정살, 무슨 살 이런 게 아니라. 전 : 거기 전부 고기하고 고 건너편 안경점 뒤쪽으로 신포 청송이라고 전부 돼지갈비 집이었어. 그래갔구 이렇게 함석으로 만든 둥근 테이블 있잖아 가운데 연탄불 피워 놓고. 그러면 경동다방에서 만나서 기껏 가는 게 거기야(웃음). 거기 가서 돼지갈비 인제 몇 대 먹고, 남자애들은 소주 먹고 거기다 이제 밥 볶아 먹······ 밥을 볶아 먹었나?밥을 볶아 준 거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튼 밥 먹고, 그러구서는 먹고 나와 가지고서는 자유 공원 밤에 한 바퀴 돌면서 이제 남자애들은 <축배의 노래> 6 부르고 이제 수다 떨고 그러 면서 다녔던 거 같애. 표 : 축배의 노래가 뭐에요, 선생님?

6.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1853)의 제1막 제2장에 나오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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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그 <황태자의 첫사랑> 7 에서 그 남자들이 술집에서 막 건배하면서 부르는 노래 있어 드링~드링~ 따라라 (노래 흥얼거림) 하여튼 그런 노래 있었어. 그때 남자애들이 성당 다니구 그러면서 성당에서 인제 성가를 하고 그랬는지 축배의 노래 불르고 그랬었던 거 같애. 표 : 신포시장은 지금 정비를 해서 나아진 거 에요? 전 : 조금 나아졌지. 나 어릴 때 신포시장은 또 어땠냐면 거기에 오면 없는 게 없었던 거야. 거기 미제상인들도, 미제 파는 데도 많았었고. 뭐 중앙시장에서 양키시장에서 미제를 팔았지만 그 쪽은 이제 주로 군복 이라든가 이런 거. 뭐 먹는 것도 조금 있긴 했었어. 근데 신포시장은 주로 인제 생필품. 먹는 거 위주로 해서 미제가 많았고, 많았는데. 그 신포시장 상가······ 신포시장 상인들이 굉장히 거만하게 장사를 했어.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서울 사람들도 여기 와서 사갔으니까. 생선이라든가 이렇게 좋은 거는 왜 그 지역에······ 뭐라 그래야 되나?돈을 벌어서 서울로 이사를 간 사람들이 자기 살던 그 고향에 대한 향수라던가······ 물론 서울에도 있지 그게. 근데 왜 여기서 먹으면 더 맛있을 거 같고 여기서 사면 옛날 그거 같은 그 느낌 때문에 와서 들 사고 그랬거든. 표 : 네 뭔지 알거 같아요. 전 : 그래가지고 여기 오면 정말 없는 게 없고 그랬으니까 돈을 막 긁어모으니까 여기 상인들이 너무 거만하게 장사를 했단 말이지. 그러구 굉장히 비쌌어. 표 : 비쌌어요?시장인데요? 전 : 말도 못하게 비쌌고, 물건은 좋았지. 물건은 좋았어 근데 우리 친구 언니가 강남으로 이사 가시구나서도 여기 오셔갔구 여기서 갈치를 사 가신다니까? 요즘은 안 그러시는데 워낙 이제 연세가 드셨으니까. (웃음) “아니 언니 강남에 백화점에 갈치 없어요?”(웃음) 그 전철타고 인천역에서 내리셔서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 드시고 걸어서 이렇게 오셔갔구 그렇게 했었어 몇 년 전까지도 그렇게 했었어. 표 : 세상에요, 그 먼데.

7. The Student Prince, 1954, 1923년에 독일에서 제작된 무성 흑백의 단편 오페라 영화의 헐리웃 리메이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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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그 정도였어, 근데 물론 IMF 탓이라던가 뭐 이런 것도 있지만, 여기 상인들이 정말 거만하게 장사를 했어. 뭐 물어보지도 못하게 했어 안 살 거면 저리 가야 그런 식으로 했어. 표 : 그러면 끝이 안 좋을 수밖에 없는데. 전 : 그렇지, 그러면서 용현시장, 저기 송림시장, 현대시장 이런 큰 시장이 막 생기기 시작했단 말이지. 그러면서 가보니깐 거기는 여기보다도 크고, 물건도 많고 뭐 아주 고급은 아니어도 먹을 만하고 싸단 말이지. 그러니깐 사람들이 그런 시장으로 나가기 시작 한 거지. 그러면서 여긴 이제 IMF오고, 이마트 생기고, 이 주변에 이제 그런 큰 시장들이 생기면서 여기가 서서히 죽은 거지, 완전히 죽은 거지. 표 : 근데 시장 사람들이 좀 실수를 했네요. 전 : 그렇지, 그러니까 다 자업자득인거야. 그래서 나는 어린나이지만 무슨 장사를 저렇게 하냐 그러고 막 그랬었어. 표 : 기분 나쁘죠 물건 사러 간 건데, 좋은 게 좋은 건데. 전 : 그러니깐 정~말 이 동네에서 부자 집 마나님 아니구서는 이 신포 시장에서 대접을 받을 수가, 대접이라기보다 취급도 못 당했다니까. 그 정도로 장사를 했던 사람들이야 여기가. 표 : 저는 또 놀랬던 게 이 동네 뒤에 그렇게 고관대작들의 저택이 많았다고. 전 : 응, 전부다. 표 : 처음 이 동네에 왔는데 그냥 외제차도 아니고 슈퍼카가 막 다녀서 신포동에 이게 뭔가······ 그랬었어요. 전 : 근데 거의 다 나갔어, 전부 다 나갔다고 보면 되고.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 홍예문 그 위쪽 길, 거기 전부 큰 집 들이잖아. 큰 집 들이거든?거기 다 그런 사람들이 살았고. 중구청 뒤쪽에, 지금 중구청 직장 어린이집인가?직장 유치원 생긴데. 그 집도 굉장히, 굉장한, 굉장히 큰 집이거든. 고 주변으로다 다 이제 그런 집들이 있었는데 다 나갔어. 나가서 인제 그렇게 어린이 집 생겼고. 제일교회 바로 마주보고 있는 집 계단하고 마주 보고 있는 집 거기두 배인복 씨라고, 굉장히 인천에서 그 뭐라 그래야 되나······ 유지이기도 하고 명문가라고 해야 되나?그런 집이였어. 그런데 그것두 인제 제일교회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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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고 제일교회 교육관이 올라갔고. 고쪽 라인들 전부 그랬었어, 근데 거의 없다구 봐 나는. 그러구 인제 한 분 인제 유일하게 계시는 분이 신용석 씨라고, 신용석 박사님이라고 계셔. 그러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 함장이었던 신순성씨의 손자 분. 그 다음에 그 아버님이 신 박사님 그래같고 개항장 이야기에도 나오시는 분인데······ 최초의, 인천에서 외과를 개업하신 분이시고 그 신용석 박사님은 지금 아시안 게임 거기 조직위원장이시기도 하고 개항박물관 명예관장님으로 계시고. 이제 그 분이 한 분 계시고 거의 명문가라던가 유지라던가 하는 분들은 다 나갔지. 표 : 그런 분들은 다 팔고 나가시는 거에요? 전 : 그렇지, 다 팔구 나가고 그런 집에 뭐 인제 빌라가 들어서기도 하고 그렇게 됐더라고. 표 : 아까워요 공을 많이 들인 집들이 많던데. 전 : 많이 들인 집 이구, 홍예문 올라가면서 왼쪽으로 아미가 라고 까페 있죠?모퉁이 하나 빌라있고, 아주 빌라 있고, 고 앞에 아미가 라고 까페 있는데 고 옆 공터로 남아있는 집이 있어. 표 : 네, 있어요. 어딘지 알아요. 전 : 나는 그 집엘 들어가 봤거든 30년 전에, 30년 보다 훨씬 더 됐지 근데 30년 전에 이십 대 초반에 염색을 배운다고, 그 집 딸이 미대를 다닌데. 그래같고 또 그걸 배우러 그 집엘 간 거야. 그때 집 구경을 한번 했는데 세상에 어마어마하게 넓어. 지금 그게 공터로 딱 헐려있어서 그렇지 집이 굉장히 방도 많고 미로처럼 됐더라고, 그러니까 일식 집이었던 거야, 일본식 집. 그렇게 해서 이제 염색을 배 우고 잊어버렸지. 잊어버리구서 또 한 십 몇 년이 지난 후에 내가 이제 여기에 성당에서 한글학교 봉사를 하면서 이제 지금 구십이 넘으신 수녀님이 그때 한글학교 교장 수녀님이셨어. 근데 그 수녀님이 그렇게 산책을 좋아하셨어. 그래서 그 당시에는 중부교회 교육관, 그 자리가 김은호 화백 8 이 살던 집이거든 8. 친일화가.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으나 중심 영역은 인물에 있었다. 단순한 전통 화법의 계승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화를 통해 사생주의(寫生主義)를 흡수하고, 서양화법에서도 명암과 원근 등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독특한 필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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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토크 그 건너편에. 지금 그렇게 교육관으로 썰렁하게 남아 있잖아 고 자리가 이당 김은호 화백이 살던 집이에요. 그때 수녀님 하고 산책 다닐 때 국수집이 있었어 처음 생겨서 그거 먹고 그랬거든 그거 먹구서 인제 산책을 이렇게 가는 데, 그 집이 계속 비어있었거던?내가 염색 배우러 갔던 그 집이, 그런데 어느 날 거기에 굉장히 반듯하고 곧게 생기신 할아버지가 거기서 요렇게 뭘 하고 계시더라구 앞에서. 근데 거기 고렇게 써 있어 ‘영자 신문을 같이 읽고 영어 공부를 함께 하실 분’ 요렇게 그냥 손 글씨로 써서 붙이셨더라구. 그걸 보고 이제 수녀님도 연세가 있으시고 그 분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얘기를 시작 하시더라구. 근데 그 분도 인제 이북 분이신거야, 우리 수녀님도 이북 분이시구 그래 같구 얘기가 통해서 이렇게 보니까 “어머 저 선생님 여기 옛날 30년 전에 여기 와서 염색 배웠는데 그 집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랬더니 우리 딸이 미술 했다 그러시더라구. 표 : 맞네요, 그 분이 다시 오신 거 네요. 전 : 아우, 소름끼치더라구, 근데 왜 여기 안 사셔요?그랬어, 그랬더니 며느리랑 당신 마나님이 너무 추워서 못 살겠다는 거지. 인제 애들은 다 커서 나갔고 집은 넓고 그래같고 부평 아파트로 가셨데. 근데 이 당신이 그 집을 못 버리시는, 못 떠나시는 거야. 그래같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셔서 영어신문 같이 읽는 사람들 하고 이렇게 계시면서 당신이 계신가 봐. 근데 수녀님하고 얘기를 주고받으시는데 난 또 들어봤더니 6·25때, 6·25 전엔가 그 분이 아마 이북에서 이렇게 오셨나봐, 6·25땐지······ 6·25전에 오신 거 같애. 오셔서 홍예문 저쪽 어디학교 선생님 이셨대 그분이, 영어 선생님 이셨대. 표 : 그럼 완전 인텔리 인거 아니에요? 전 : 응, 그렇지 우리 수녀님도 일제 시대 때 일본까지 가서 공부하고 오신 분이거든 초대, 초창기 수녀님이신거야. 이북에서 영세 받고 이북에서 수녀 품 받고 오신 거거든. 그러니까 이북 분들이니까 연세도 비슷하신 거야 두 분이. 뭐 옛날 친구 만난 것처럼, 옛날 남자 친구 만난 것처럼 막 그렇게 얘길 하시더라구. 그런데 그 할아버지께서 선생님 이셨는데 그 집 앞을 이렇게 왔다 갔다 했데요. 근데 그 집이 굉장히 좋았다······ 그 당시니까 6·25, 굉장히 좋은집이였다는 거지.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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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디 교회를, 내리교횐(내리교회) 가부다······. 지금 생각하니까 이렇게 넘어가셨으면 내리교회, 교회를,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는데 아이가 그 집에 살았데요. 표 :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요? 전 : 응 주일학교, 아이가 그래서 “너는 좋은 집에 살아서 좋겠다” 이제 당신 스스로도 애한테 그렇게 얘길 하셨다 그러더라구. 그러다가 어떻게 그 집에 세를 들어서 살게 됐데. 세를 들어서 살게 됐는데 어느 날 밤에 막 옆집을 막 두들기는 소리가 나더라는 거 에요. 옆집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는데 그 옆집에 누가 살았냐면 법원장이 살았데. 법원이 어디냐면 지금 감리서 그 한진아파트, 한진아파트 그 자리가 감리서 자리 거던. 법원자리 거던. 감리서라는 것은 이제 개항장에만 있는 관아, 관공서였어. 개항을 했는데 여기에 인제 막 외국 사람들 오고, 외국 물건들 들어오는데 관공서가 없는 거야, 어촌이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문학에 있는 감리서를 통째로 옮겨 온 거죠. 옛날에는 그 관아 옆에 감옥도 있고 재판도 했고 다 했잖아. 그래가지고 감리서를 통째로 옮겨오고 거기서 김구 선생님이 두 번 옥살이를 하신 거고. 그러다가 고게 나중에 해방이 되고 나서 거기가 법원이 되는 거래요. 법원이 됐다가 우리 한참 돌아다닐 고 때는 준설공사 자리였어. 그 회사 이름은 모르는데 하여튼 준설 공사라고 그랬던 거 같애. 그래갔구 그 주변에 집들도 없고 그랬었어요. 그러니까 저녁때 거길 지나 갈려면 캄캄한 거지. 지금도 좀 약간 음침하잖아,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가로등도 뭐 없고 그러니까는 거길 지나갈려면, 지금은 뭐 금강구두니 뭐 커피숍 쫙 생겼지만 고기 들어가는 입구서부터 시커 먼 거야, 저녁 때 되면. 그러니까 막 무서워서 그 쪽엔 가지도 못했는데 준설 공사라구 그때 이 바다에서 모래 퍼 올리는, 그런 회사였던 거 같애. 그래 인제 막 고기 인제 법원 자리, 6·25 때니까 막 문을 두들기더래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잠이 깨서 들어보니까 그 재판장님이라 그래야 되나 법원장님이라 그래야 되나?“빨리 피신하셔야 되겠어요, 이북에서 쳐들어 왔어요” 그러더라는 거야 새벽에. 표 : 아, 새벽에 6·25 딱 고 시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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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쳐들어오고 그거를 뭐 정부기관이니까 법원이니까 받았겠지 연락을. 그렇게 해 갔고 와서 연락을 해 준거야. 그러니까 공무원 들이 먼저 피신을 한 거지. 표 : 그렇네요. 전 : 막 그 소리를 들었다는 거야. 그런데 이 분은 이북에서 오셨고 “쳐들어 왔다?” 그러니까 생각을 미처 못 하신 거지. 그래갔구 뭐 아주 몸만 도망갔대 그 집이 법원장인지, 몸만 도망가고 그 집 주인도 도망갔고. 그러니까는 평범한 사람들은 무슨 큰일이랴······. 표 : 네, 좀 그런 게 팽배했데요. 여순사건도 그때 워낙 사람 죽이고 죽고 난리를 치다가 이어서 6·25가 터졌기 때문에 김동춘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가서 그걸 조사했을 때 일반 시민들은 그냥 난리가 이어진 거 그냥 난리 난거, 전쟁이라는 인식 보다 옛날 분들이니까 “아이고 그 난리”라고 인식하신다고 하시더라구요. 전 : 그러니까 해방이 되고 5년, 그러니까 해방 되고 얼마나 난리, 여기도 뭐 일본군들이 해방이 되구 나서도 계속 주둔을 했었으니까. 미군의 앞잡이 노릇을 했으니까. 표 : 그래요? 전 : 미군들이 여기 사정을 모르잖아, 그 얘긴 조금 나중에 이따 하고. 어쨌거나 이 분도 이북에서 오신 분들이니까 그냥 뭐 무슨 별거겠는가 했는 거지. 그러구서는 그 집 주인도 돈이 많고 그러니까 도망을 갔다는, 피난을 갔다는 거야. 근데 이분은 그냥 거기서 사셨대. 사셨는데 6·25가 나니까 막 이제 사람들이 집 두 저쪽에서 넘어오고 그러면서 그냥 빈 집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거야. 근데 그 집 방이 무지 많았거던. 그러니까 한 집 당 한 방씩 차지하고 사는 거야 다. 그렇게 살았데, 살았는데 이제 어느 정도 전쟁이 끝나가고 그러는대도 이 사람들이 안 오더라는 거지. 죽었는지 집주인도 안 오구 이제 그렇게 됐데. 그러니까 인제 그 오래된 집, 주인 없는 집들, 6·25 때 버리고 간 그런 집들, 또 해방 때는 적산가옥이라고 일본사람이 버리고 간 집들. 그런 거를 인제 6·25가 끝나고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제 일반인들에게 파는 거지. 근데 그 집을, 전기요금도 막 오랫동안 밀려있고 그러니까 전기요금을 내야 되는 거야. 안 그러면 전기를 끊겠다는 거지 그러니까는 이 할아버지가, 지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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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전이겠지. 와 가지구 “전기요금을 내라 안 그러면 이걸 끊겠다” 그러니까 다들 나머지 사람들은 뭐 외지에서 오구 잠깐 살고 갈 꺼니까. “그럼 여기 제일 오래 된, 오래 살은 사람이 누구냐?” “나요” “당신이 전기요금을 내시오” 아 내가 왜 내느냐 이렇게 막 실랑이를 하다가 살을라니까(살려고) 냈다는 거지 당신이. 냈고, 그러구 또 얼마 있으니까 이 집을 사라 그렇게 얘길 하더라는 거야. 표 : 정부에서 먼저요? 전 : 응, 왜냐하면 그 집을 나라에서 전부 관리를 할 순 없으니까. 그렇다고 다 내쫓을 수도 없는 거고. 그러니까 제일 오래 살은 사람이 누구요 해서, 나요 하니까 전기요금도 냈고 하니까 그러면 사라 그래갔고 그야말로 그 당시에 뭐 경제적으로 다 어려운 상태니까, 지금 생각하면 헐값이지만 거저 받은 거지. 표 : (웃음) 진짜 거저 받은 거죠. 전 : 지금은 또 명당자리 아니야, 그 자유공원. 표 : 될 놈은 된 다더니요(웃음). 전 : 근데 정말 올곧고 반듯하신 분이 더라구, 얼굴에 그게 나타나더라구. 그래갔구 그 분이 그 집을 사셨다는 거야. 그래 정말 자기가 너는 좋겠다, 너는 좋겠다 하고 부러워하던 그 집에 당신이 그 집을 사고, 사시게 됐다는 거야. 그래가지고 정말 다 잘 살았다 그러시더라구. 표 : 계속 큰 걱정 없이 사셨나봐요. 전 : 응, 참 잘 살았다 그러시더라구, 그러면서 정말 반듯 하시더라구. 그러니 그 집을 어떻게 놓고 부평 아파트 아무리 뜨끈뜨끈해도 이사 가겠어 못가시지. 그러니까 그 집에 대한 애착을 못 버리시고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 전철타고 인천역에 내리셔서 이렇게 오셔서 옛날 생각 하시구 그러신거야. 그러다가 어느 날 보니까 또 그 집이 헐렸더라구. 그래서 공터로 남아있는 그 집이 그 집 인거야. 그러니까 “그때 그 할아버지 연락처라도 적어놓을걸······” 그 생각도 들고 그렇더라구. 그때가 15년 전이야. 표 : 그게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전 : 근데 그 집이 공터로 남은지도 참 오래됐어, 그런 진짜 그런 집들도 많고······ 그리구 전시관을 정식 개관하기 전에 일본에 ‘제국데이터뱅크’라는 리서치 회사가 있어. 그 회사에서 취재를 온 거야. 취재를 왔는데 이 사람들이 그냥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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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야 전시관 개관했다는 거 모르고, 정식 개관을 하지 않았으니까 모르고 왔는데 전시관이 이렇게 있으니까 자기네 취재를 하고 싶다고 한국 사람이 통역을 하더라고. 그래서 이게 무슨 회사냐 그랬더니 이 제국데이터뱅크 회사가 백 년 전에 제물포 지역을 조사를 했데. 근데 백년이 됐다는 거지 제물포에 와서 조사를 해 간 게, 백년 후에 이 제물포가 어떻게 변화 했는가 그걸 다시 취재하러 온 거야. 나는 그 얘기를 듣는데 무서웠어. 표 : 그럼요, 징글징글하네요. 전 : 어우, 너무너무 무섭더라구. 백년이 지난 후에 자기네들 그 백 년 전에 자기네들이 회사에서 조사했던 그 지역을 다시 온 거야. 그래서 “야······ 얘네가 이렇구나······” 그 생각을 했거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와서 거리 다 찍어가고 그러면서 이제 알려지기 시작 한 거지. 그러구 일본 우선주식회사, 일본 우선주식회사 지금 아트 플랫폼에서 쓰잖아?문화재단에서. 거기두 그렇게 할 때 일본에 무슨······ 어느 도신지 거기 신문에 실렸었어. 그래 같구 일본분이 그 신문기사를 오려갖고 오셨었어. 여기가 어디냐고, 그러니까 걔네들은 그걸 계속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는 거야. 한국에서, 인천에서 자기들이 지은 건물에 이렇게 활용을 한다. 그렇게 하더라고. 근데 일본 사람들은 이렇게 와서 관람할 때 보면 어떤 사람들은 되게 조심스러워. 표 : 미안한 걸 아나 봐요. 전 : 어, 조심스러워 해. 근데 또 어떤 사람은 그게 보이잖아 태도에서. 자기들의 그 영욕의 역사이긴 하지만, 그거를 하여튼 우리들 앞에서 보이기도 하고······. 표 : 정말 저번에 말씀 해 주신 것 중에서 그 군복입고 온 할아버지······. 전 : 아아, 3.1절 즈음에, 사진 찍어 가구, 대일본제국 이라고 싸인 하고 가구. 그런 사람들도 있고. 근데 주로 오시는 분들은 자기가 여기서 태어나고 열 몇 살까지 살다 가고 아니면 뭐 좀 커서 왔는지 고등학교 까지 인천여고, 전신 인천여고 다니던 분들도 오시기도 하고 그래. 주로 또 인제 쪼끔 젊은 오십 대, 육십 대는 자기 아버지가 제물포에서 어떤 사업을 하셨다거나 군수공장 이런데서 무기 만들고 잠수함 만들고, 이런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 그 어릴 때 들은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내구선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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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도 있고 그렇더 라구 그게. 그 일본 사람들은 인제 와서 어떻게 보면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자기 어릴 때 고향 이라구 생각하고 순수하게 찾아오는 분들이 주로 많았고. 그러니까 그 분들이 신흥 학교, 초등학교는 신흥학교 다닌 분들이 많아. 그래갔구 그 모임이 아직도 있데. 표 : 있어요? 전 : 일본 사람들,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다는 거야 일본에. 표 : 아, 일본에 신흥초등학교 동참 모임이. 전 : 응, 1년에 한 번 씩 오셔. 오셔 가지구 여기 신흥학교 방문도 하시구 그래. 주로 올림포스 호텔에 많이 묵으시고, 아마 신흥학교에 가면 그 기록도 있을지 몰라. 근데 신흥학교가 그 당시에 옛날에 지을 때 그게 아직 두 남아있는지 모르겠는데 스팀 시설 되게끔 지었데요. 표 : 바닥에요? 전 : 아니 바닥 말고 스팀, 그렇게 지었데. 표 : 일본 애들이 많이 다녔나봐요. 전 : 그게 일본 학교 였어, 전신. 일본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지은 학교가 나중에 신흥학교가 된 거야. 그러구 지금 그 답동, 로얄 아파트 그 자리가 일본 절 이었던 거 같애, 일본 절이었다고 그러더라구. 절이었다가 나중에 거기가 교회, 교회자리였다가 그 교회가 나가구 나서 거기 인제 아파트가 들어 선 거지. 표 : 뭐만 나가면 그냥 그 자리는 아파트가 채우네요. 전 : 응, 그게 정말 개발일까 발전일까 그 생각을 많이 해. 표 : 후퇴죠 뭐······. 전 : 그리구 일본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는 개관하던 그 해에 오셨어. 표 : 직접 오신 거 에요? 전 : 응, 이 할아버지도 맨날 자기가 살던 데니까 일 년에 두 번을 오셔. 표 : 아직도 오세요? 전 : 지금, 요번 한국 친구 할아버지한테 여쭤보니까 부인이 치매인지 뭔지 그래서 못 오신다고 그러시더라구. 작년, 올해 못 오셨어. 이 분이신데 (사진을 보여주심) 우리가 9월에 개관했는데 한 10월쯤에 오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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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셔 가지구 여길 들어 오신거야 전시관을. 근데 당신은 이제 이 전시관이 생긴 줄 모르고 들어오신거야, 그러더니 청실홍실을 보시더니 막 우셔. 우리 전시관 뒤에, 그 정면에 보이는 사진이 화장실 있는데 거기 그 거리 있잖아요 거리사진에 가운데 건물이 청실홍실이야. 그걸 보더니 막 우시는 거야. 그러더니 영어 막 섞어서 “I was born~” 뭐 그러면서 막 얘길 하시더라구. 그러니까 청실홍실 근방, 옆에서 태어나신 거야. 표 : 아, 또 그 근처에도 거주지가 있었나봐요. 전 : 응, 또 막 말은 안 통하는데 막 청실홍실 근처 사진 복사해서 드리고 책 드리고 막 그런 거지 그러니까 굉장히 고마워 하시지. 당신이 어디 가서 말도 안통하고 뭐 어디 가서 자기 고향 사진을 구할 데도 없고. 그랬던 거지 그래서 사진첩도 드리고 막 그랬었거든 근데 그 이듬해에 또 오셨어. 4월, 5월 쯤에 오셔. 4월 말에서 요때 오시는데, 그때는 또 일본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와 여기. 왜냐하면 월미도 벚꽃 구경하러. 자기네들이 그 월미도를 풍치지구 9 로 일본사람이 관광지로 만든 거잖아. 그러면서 벚꽃을 많이 심었잖아. 거기는, 월미도는 자유공원보다 조금 늦게 펴요. 벚꽃이 자유공원하고 월미도하고 필 즈음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오셔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표 : 그러면 여기에 그런 게 있다고 아는 사람들 인거죠? 전 : 그렇지, 여기서 살은 사람도 있는 거지, 여기서 살았으니까 알지. 그때 벚꽃이 핀다는 걸, 그리고 그때 벚꽃을 많이 심었다는 걸. 그러구 자기 고향이니까 이제 모여서들 오셔. 그러면서 이 할아버지랑 이제 인연이 된 거야. 그래 가지구 이제 가시 면은 자료······ 내가 새로운 사진 찾으면 보내드리구. 계속 그렇게 해서 이제 당신이 여행 다니면서 찍은 사진, 엽서 이런 걸 보내주시는 거야. 그리고 한번은 또 일본 라면을 종류별로 갖고 오셨어(웃음). 표 : 아이고!귀여우시다 정말(웃음).

9. 風致地區, 도시의 발전에 따라 파괴되기 쉬운 자연풍치를 유지보전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정구역을 획정 구분하여 지정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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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응, 귀여우셔(웃음). 정말 말이 통하면 식사대접도 하고 이러구 싶더라구. 그러다가 인제 한 몇 년 그렇게 오시다가 이제 한국 친구 분을 모시고 오시더라구, 어릴 때 친구지. 근데 그 분을 모시고 왔는데 그분이 통역을 하는 데, 일본 사람들은 조심스러운 게 있잖아?안 다구, 조금 친해졌다구 금방 저기하지는 않잖아. 한 3~4년 이렇게 지난 후에, 4년 지난 후에 그 한국 친구 분이 오셔서 “이번에는 이 친구가 왜 왔냐고 하면” 하고 얘길 하시더라구. 당신 아버님이 그러니까 여기 인천에 계실 때 집을 지으시는데 기와를 일본에서 갖고 오셨데요. 그 당시에는 개항 이후에 일본 사람들이 그 전시관도 그렇구 개항 박물관도 그렇구 답동성당 1937년에 저 건물 지을 때도 나무를 우리나라 나무를 안 썼어요. 전~부 오사카. 일본에서 다 가지고 와서 나무를 그러구 벽돌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흔치 않았고. 벽돌공장도 요기 어디에 길 건너에 있었다고 그러더라구. 그래 인제 일본 기와를 갖고 와서 집을 지으신 거야. 지으셨는데 그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유언을 하셨는데 이제 그 기와를 당신 무덤에 하나 묻어달라고 그러셨대는 거야. 근데 이 분이 칠십이 넘으시도록 그걸 어디 가서 얘기를 하겠어. 느닷없이 자기 살던 집 가서 “나 기왓장 하나 달라” 할 수도 없는 거고 조심스러우니까 그렇게 칠십 평생을 계셨던 거야. 몇 십 년 을 계시다가 그 친구를 통해서 인제 나한테 도움을 청하신 거지. 전 : 그래서 내가, 기와는 구하셨냐고 했더니 구하셨다고 그러시더라구. 표 : 어떻게 구하셨대요?할아버지 사시던 집이 남아있는 거 에요? 전 : 그 한국 친구 분을 모시고 간 거야. 표 : 살던 집에요? 전 : 응, 근데 다행히 또 그때 기와가 있더래요, 지금은 모르겠어 벌써 몇 년 됐으니까. 표 : 위치는 아세요? 전 : 확실한 위치는 모르고 지금 어디냐면 신포 동사무소 있죠?신포 동사무소에서 이쪽 신포 시장 쪽으로 오는 길에 거기 몽블랑이라고 미용실이 있었어요. 큰 밥집 건너편에, 몽블랑이라고 있었는데 고 모퉁이 어디라고 그러시더라구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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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분한테 나중에 한번 그 집이 어딘지 가르켜 주세요 했는데 못 오신 거야. 그래서 인제 문화재청에 전화를 했어요. 문화재청에서 공항에 감정평가단이 또 있데요 누굴 연결 시켜 주더라구. 이분 들 한텐 출발 하시라고 하고. 그래서 인제 공항에 계시는 분한테 전화를 했더니 이게 인제 우리나라 꺼 라도 몇 년도 이후는 문화재가 아니고 외국에서 들어왔어도 이게 오래됐거나 그러면 문화재로 들어가고 반출이 어렵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이러이러한 사정이고 얘길 했더니 알겠다고 그래서 인제 그 분한테 갔어요. 도착했다 그러시고서는 한참 있다 전화를 하셨더라구, 한국 친구 분이 전화 하셨는데 지금 다 잘 됐데요 다 잘 돼서 이제 그 분 말씀은 선생님이 얘길 잘 하셔서 잘 돼가지고 이게 공항에서 또 어느······ 그 어디선가는 또 풀러본데요 근데 그 박사님이 아주 다 패키지랑 서류까지 해서 다 만들어 줬데 이거는 풀르지 말고 그냥 통과시키라고. 그래같고 풀르지도 않고. 표 : 너무 다행이네요, 정말. 전 : 정말 그분 한테는 고맙게 일이 잘 된 거죠. 그래서 무사히 잘 갖고 가서 묻어드렸다고, 그 일본 할아버지가 너무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울면서 그러셨어. 표 : 평생에 마음에 담고 있었던 거잖아요 이제야 그랬는데, 사실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 부터 계속 그 생각을 갖고 계셨을 텐데. 전 : 그치, 근데 조심스러우시니까 말을 못 한 거지. 그러셨던 거야. 그래서 나랑 이런 거(엽서) 주고받고, 책 보내드리고, 엽서 보내드리고, 당신은 또 이런 거 보내시고. 나중에는 너무 좋으니까 막 친구 분들도 모시고 오는 거야 근데 거기에서 서예 하는 여류 작가라고 그러시더라구. 여자 친구 분들도 오시고 남자 친구 분들도 오셨더라구 근데 그 여자 친구 분이 맨날 한국에 내 얘기를 한다는 거야 (웃음) 인천에 내 얘길 한데 (웃음) 모이면 인천에 애인이 있다고 분명히 있다고 (웃음) 친구들이 막 놀린다는 거야. 표 : 그 애인이 선생님이잖아요(웃음). 전 : 그 여자 선생님이, 서예하시는 그 선생님이 막 놀리시더라구 그래서 인제 우리 붓펜 있잖아요, 그걸 선물로 드렸어 그랬더니 막 옆에 있는 일본 친구 분들이 자기도 달라고 막 해서 나중에 제가 보내드리겠다고 그래가지고 보내드리고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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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어. 그런데 사실 그게 우편료 그거 얼마 안 되는데 이게 사실 신경을 써야 되는 일이잖아. 근데 인제 막 어떤 교수들은 막 그래 어 월급이 얼마나 많다고 그런 걸 다 부치고 그러느녜, “나는 월급보다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 좋아서 하는 거고 이분 들은 자기 고향 찾아오고 고향에 대한 추억을 그리고 또 해방이 되고 일제 강점기 때는 안 좋게 갔지만 지금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자기 고향에서 또 이런 사람을 만났고 노후에 좋은 추억이 되겠느냐. 표 : 그럼요. 전 : 그 생각을 했어요 그러구 이분은 우리말을 참 잘하시더라구. 표 : 아 이분은 다른 분이세요? 전 : 다른 분이야, 우리말을 참 잘하셔, 이분은 내가 어떻게 알게 됐느냐면 그 구청에 구청 직원하고 연결이 돼서 오셨어요. 오셔가지고 이 분은 고등학교 까지, 고등학교를 여기서 다니셨나봐. 그러니까 인제 청소년기 때 자기 추억을 다시 회상 할려고 친구분 두 분하고 오셨어. 그리고 한 분은 할머니야. 할머니가 오셨는데 유물을 보더니 막 우셔. 또 한 할아버지도 홍예문 붙잡고 또 막 우시더라구. 근데 그 할머니는 손주하고 증손주 하고 오셨더라구. 근데 그 손자가 우리말을 배웠다고 그러더라구. 그 할머니 얘기 하시는데 아버지가 그 인천여고의 전신, 거기 이제 선생님 이셨데요, 그래가지고 친구랑 맨날 홍예문에서 만나서 학교를 갔데. 표 : 조선친구요? 전 : 아니 일본 친구, 그래갔고 이제 홍예문에서 만났고 이제 무슨 만나면 꼭 홍예문 거기에서 만났다고 그러시더라고 근데 사또 요네지로 라는 판화작가가 있어요. 일제 시대 때 작가 사또 요네지로 라는 작가가 있는데, 그 인천 발전 연구원에 김창수 박사님이라고 있어요. 그 분이 저기 관교동 종합예술회관 거기에서 <만국 공원에 기억>이라는 그 사진전을 했었어요. 근데 그때 보니까 사또 요네지로의 인천각, 존스턴 별장을 그 판화로 해서한 엽서가 있었어. 그래서 그거를 칼라복사를 해서 갖고 있었어 전시관에. 근데 내가 그때 할머니한테 그걸 드렸어 그러면서 사또 요네지로 작품이라고 그랬더니 이 할머니가 그 사람하고 굉장히 친했데요, 그 판화 작가랑 굉장히 친했다고 그러시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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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 아 또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거네요 알게 모르게. 전 : 그러니까 여기는 참 이야기가······ 나는 참 행복하고 복이 많았던 거 같애. 처음 시작을 하면서 그런 분들도 많이 만났고······. 그래서 그 할머니 또 그 판화 그림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시고 가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택시 잡아 드리구 하면서 건강 하시구 내년에 또 오시라고 그랬더니 그냥 기약은 못한다 그러면서 쓸쓸하게 웃으셨던 모습도 생각나고 그래요. 표 : 건강하셔야 되는데 말이에요. 전 : 그치, 그리고 전시장 그 옆에 주차장 있잖아, 요식업소 있고 고 앞에 똑같은 집이 있잖아 그게 우체국 관사였데요. 고 똑같은 집. 표 : 아, 할머니들 맨날 나와서 얘기하시고 거기. 전 : 응, 맞어, 맞어 관사였는데 고 앞에 삼화다방 있잖아 삼화다방자리. 지금은 문 닫았어, 식당 같은 고기 집 하나 있고, 코카콜라 대리점 있고 고 옆에 삼화다방 자리가 있어요. 그 다방이 굉장히 오래 된 다방이거든?몇 십 년 된 다방인데, 몇 년 전에, 작년?재작년?한 2년 됐나?그······ 하여튼 좀 복잡해. 그 집주인이 서울사람이래요. 근데 그렇게 방치해 두고 있는 거야. 근데 그 주인이랑 아는 사람이 고 옆집 식당이라는 거야. 그래갔고 “내놔라!”해서(웃음) 근데 이건 뭐 사실인지는 몰라 할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이니까(웃음). 표 : 풍문이네요, 풍문(웃음). 전 : 그 앞집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내놔라”해서 그 다방을 결국 몇 십 년을 하시던 다방을 내 놓으신 거야. 근데 전성기 때는 그야말로 거기가 시청이고 그럴 때는 막 다방 레지라고 그러잖아?근데 왜 레지가 그러지 레이디가 그냥 레지가 된 건가? 표 : 글쎄요(웃음). 전 : 그래갔구 게스 그쪽 동네가 은성다방, 무슨 다방 뭐 언론인들이 그렇게 많이 다니셨어 거긴. 많이 집합 장소였고. 근데 고 삼화 다방 그 자리가, 그 밑에 보면 물이에요 전부. 거기 바닥에 이렇게 쇠로 된 뚜껑이 있어. 그 뚜껑을 열면 물이 철렁철렁 해. 표 : 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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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 모르겠어, 다른 집은 지하실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그 다방 자리는 이렇게 다방 입구에 이만~한 쇠가 있다, 한번 열려있을 때 봐바. 쇠가 있는데, 그 쇠로 덮혀 있는 뚜껑을 열면 바로 물이야. 물인데 그때 인제 다방에 갔을 때 그 아주머니가 보여주신다고 그러시더라구. 근데 아우 열지 마시라구, 열지 마시라구 그랬었어. 근데 앞집 할머니가 얘기 하시는 데 6·25 때, 6·25 때 그 거리에 또 미군들이 넘쳤데요.인천 시청 자리가 거기거던. 미군들이 넘쳐가지고 하여튼 젊은 여자고 나이 든 여자고 보기만 하면 납치 해다가 강간했데 고 거리에서. 그 거리에서 그래갔고 아주 해만 떨어지면 낮에도 혼자는 못 다니고 그랬다 그러시더라구. 그리구 인민군이 이제, 6·25 때 “왔다!나왔다!뭐 인민군이 돌아다닌다!” 그러면 그 동네에 아저씨들은 그 물속에 들어가서 숨어있었데요. 표 : 어머. 전 : 그 집 지하, 그 집 지하에 그 물 속에 목만 내 놓고 있었다고 그러더라구. 숨어 있다가 인민군들 가면 또 밤에 나오고 그랬데 거기가 그런 장소 더라구, 그러니까 역사적인 장소인거야.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고. 표 : 나중에 한번 꼭 가봐야 겠어요, 또 그게 고인물인지 왔다갔다 물인지. 전 : 그게 바닷물이 들어와서 그냥, 저 쪽에 인제 매립을 하면서 막힌 게 아닌 가 그 생각도 들고. 그러면서 인제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 오고 빠지질 못하지 않는가······ 또 비가 와서 어디서 스며들어 온 걸 수도 있고. 그 생각도 들더라구. 표 : 정말 특이하네요. 전 : 그러구 6·25때 인천시장 했던 분이 김정렬씨인가 그렇데요, 이거는 한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그 분의 사촌 동생이 한번 오셨어, 전시관에 오셨는데 그 분도 연세가 많으시지, 많으신데 거기가 일제 시대 때는 일본인들의 거점지 였지만 6·25때는 인민군들의 거점지 였잖아. 그래 가지구 고기······ 인제 중구청!옛날 시청 자리, 구락부 뭐 이런 자리는 인민군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러구 나서 다시 연합군이 들어오고 국군이 들어왔잖아요. 들어오면서 아······ 인민군들을 잡아가지고 그 자리에서 막 죽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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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 즉결 심판 그런 거였나 봐요. 전 : 응, 그 자리에서 그냥 막 죽여가지고 중구청 앞에 그냥 막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그러더라고······ 시체가 널려있었고, 나중에는 인민군을 잡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배에 태워가지고 바다에 가서 그냥 갑판 뒤에 세워놓고 그냥 쏴서 수장을 시켰다고 그러더라구. 근데 그 얘기는 내가 백령도에 계시는 할아버지가 증언 하신 게 있어요. 그래서 인하대 교수가 그 분 인제, 그 분 말씀을 녹취해갖고 와가지고 CD를 구워서 풀어준 적이 있어요. 6·25 때 그 말씀 하신 걸. 근데 그 분도 그때 그 얘길 하시더라구. 백령도에도 막 공산당들이 말도 못했데, 거긴 완전 공산당 치하였다고 그러시더라구. 근데 그 지역에 청년 몇 명이서 공작대를 만들어갔고 활동을 했는가봐. 그러다 이제 그게 발각이 되고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도 있었고 그랬는데 국군이 들어왔을 때 인민군들 처형을 그렇게 했다 그러더라구. 표 : 수장시켰다고. 전 : 그 할아버지 증언하고 그 사촌동생이 와서 한 얘기하고 일치하니까. 여기가 바닷가니까 그 시체를 어따 묻겠어, 묻을 데도 없고, 어딘가로 싣고 가야되잖아. 그러니까 바닷가로 끌고 가서 그냥 수장시켰다고 그 말씀을 또 하시더라고······. 표 : 바다에 수장시킨 얘기 저도 들었어요, 여자 강간한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제가 뵙던 어른들께서 꼭 미군이 여자 강간한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그런 게 너무 만연하고 당연했던 상황 이었나 봐요. 전 : 그래서 그 할머니도 그러시는 거야. 미군들이 우릴 해방시켜주러 왔지만 그냥 여자만 보면 잡아다 강간을 했다는 거지, 대낮에도 그랬다는데. 그러구 일본이 패망하고 갈 때, 걔네두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걸 알았지. 알았기 때문에 돈도 무지무지 많이 찍어갔다가 여기 뿌렸잖아. 아주 여기를 그냥, 뭐라 그래야 되나 경제적으로 그냥 회복할 수 없게 끔 그렇게 돈을 찍어내고 그렇게 갔고. 표 : 작정을 한 거네요. 전 : 어, 아주 그냥 야밤에 가서 찍어가지고 다음날 왕창 뭐 그런 식으로 했고 걔네들이 가면서 미군하고 우리나라하고 얼마나 이간질을 했는데. 그러니까 미군은 조선에, 우리나라에 대해서 전무상태잖아 거의 전무상태였고 태평양전쟁 일어나면서 인제 오게 된 거고. 그러니까 하여튼 그 전세가 기울면서 이간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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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못하게 한 거야. 그러니까 해방이 되고 나서도 미군이 다 친일파들을 앞에 세워서 우리를 관리 한 거 아니야. 표 : 그래서 뒤틀려버렸죠. 전 : 응, 그러면서 또 일본이 한동안 또 있었고. 패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기간 동안 여기 있었잖아. 표 :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전 : 그러니까 친일파들이 그 이후에 계속 득세를 했던 거고 결국은 박정희 때도 친일파 들이 다 국회로 들어 간 거고. 그러니까 일본이 그냥 가진 않은 거지 그냥 망한 애들이 아닌 거지. 표 : 지독한 거죠. 전 : 우리를 아주 짓 밟아놓고 간 거야 그러니까는 영국이 인도를 아주 그냥 그야말로 회복 할 수 없게끔 밟아놓고 갔듯이······ 그래도 우리는 이 만큼 성장하고 올라 온 거지. 표 : 그게 또 사람들의 힘 인거죠, 일반 시민들의 힘이지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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