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ton Life Story - Nov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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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릴 재 료를 사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형편. 아이들이 그리다 망 쳐 버린 캔버스가 그녀의 캔버스 가 됐다. 어두운 현실은 그녀의 감성에 각인됐고 그녀의 그림들 은 주로 소외된 삶을 주제로 삼 게 됐다.

고상을 수차례 부수고 심지어 동 생의 손가락을 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례는 말없이 저항하며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련은 늘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 다. 아버지는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고, 머지 않아 세상을 떠 났다. 이어 미술대학 진학을 코 앞에 두고 큰 오빠도 세상을 떴 다. 당시 예고에서 실력을 인정 화가의길, 하지만 멈추지 않는 시 받았던 그녀는 명문 미대 진학을 련 염두에 뒀으나 포기하고 직장을 ​ 잡아야 했다. 학교에서 인정받은 그녀는 화가 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고에 진학 “어려서부터 내 마음에는 근원 했다. 그리고 가계를 도와야 했 을 알 수 없는 슬픔이 있었어. 주 기에 집 한켠 조그만 공간을 화 체할 수 없을 때는 붓 대신 나이 실로 만들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 프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지. 내 쳤다. 안의 슬픔을 도려내 캔버스를 채 우듯 나이프로 질감있는 작품들 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예체능 을 그려댔어”. 분야를 전공하는 것이 환영 받 지 못하던 때. 시대적 편견은 큰 그렇게 4~5년간 직장을 다니며 오빠를 비켜가지 않았다. 동생이 화실 운영을 병행하던 그녀는 꿈 그림쟁이가 되는 것을 어떻게든 에 그리던 미대 진학을 시도했다. 말리고 싶었던 오빠는 데생용 석

못이룬 꿈을 이루기 위한 이유도 있었고, 아무리 실력있고 인기있 는 화가라도 대학 졸업장이 수반 되지 않으면 화단에 발을 붙이기 가 쉽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하지만 자신만만했던 화가에게 날아온 것은 불합격이었다. 그때 만해도 혈기가 넘쳤던 그녀는 지 원했던 대학의 사무총장을 찾아 가 이유를 물었단다. 이유인즉, 입시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내신 성적이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 “내가 다닌 데가 예고였잖아, 거 기서 내 실력을 인정했으니, 수 업을 뒷전으로 하고 그림을 그리 러 나가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 어. 성적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하지만 후회는 없어, 거길 갔으 면 교수가 됐거나 학자가 됐을테 니… 난 그림쟁이가 좋아”. 이후부터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 고 작품생활에 매진하며 미대 입 시생들을 지도했다.

유수례화가의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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