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萬隆筆記韓文翻譯반둥제3세계 기행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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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리포트

반둥/제3세계 기행 노트 아시아・아프리아・라틴아메리카 지식계획의 선행자 샘 모요 교수를 기리며

천광싱

하나의 계기로서 반둥회의 60주년 2015년 반둥회의 60년을 기해서‘아제서원(亞際書院, Inter-Asia School)’ 의 동인들은 아시아 각지에서 활동을 진행하면서 과거 60년 동 안‘제3세계’ 의 변화가 갖는 현재적 의의와 부활의 가능성을 사고하기로 결정했다. 1955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걸친 30여 개 국 가의 지도자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구미 식민 제국이 참여하지 않은 가 운데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갖는 대회를 개 최하였고,‘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의 형식으로 단결하여 미 소 패권 밖에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여 구 식민지 지역이 단결하는 길 을 열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반둥회의는 아마도 국제관계에 있어서 약소국 간에 진행한 활동에 불과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그것이 만들어낸 심원한 영향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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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의는 세계의 여러 다른 구석에서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힘을 생산 했고, 단순한 국가주의적 사유를 크게 넘어섰다. 때문에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그것이 만들어낸 작용은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 대륙의 경우, 반둥회의는 미소 양대 세력 밖에서 세계 약소국가와 연합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는데, 이는 당시 사회주의 세 계혁명의 중요한 고리였고, 그후 그것이 가졌던 영향을 단순히‘국가이 익’ 으로 개괄할 수는 없다.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지역의 경우, 반둥의 효과는 내부적으로 인종적 차이를 넘어서는 단결에 있었고, 중국인의 정체성이 현지 민족국가에 대한 충심으로 전환하는 데 도 있었다. 홍콩, 마카오, 타이완 지역 및 남한의 경우, 냉전 초기에 자 본주의 진영으로 편입되어 반둥 효과의 부재 상태가 극도로 심각한 영향 을 초래한 바 있었다. 즉, 제3세계 의식이 성장하지 못하자, 세계적 범위 에서 전(前)식민지 사이의 상호 인정 및 상호 지원하는 세계관을 창조하 는 계기를 잃게 되었으며, 특히 학술 사상 차원에서 지금까지 연속적으 로 형성된 홍콩 및 타이완 지역에 내재하는 구미 중심주의는 극복과 조 정이 곤란한 거대한 장애가 되었다. 아시아 각지에서 어떻게 다시 제3세 계적 시야를 재건하고, 과거에 그 토양이 되었던 지역 대륙

예를 들어 중국

에서 유실되고 있는 제3세계 의식을 환기시켜, 반둥회의가 열어

젖히고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미완의 지식계획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카리브해 지역으로 시선을 돌려 각 지역의 (민간) 사상계와 교 류 및 상호작용을 진행하는 것

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는 우리가 반둥

정신을 재조명하는 기본 동력이다. 2015년 2월 7일부터 8일까지 우리는 인도의 코치 무지리스 비엔날레 Kochi-Muziris Biennale(이하‘코치 비엔날레’ 로 약칭)와 협력하여 인터 아시아 비엔날레의 사상 포럼을 이어서 진행했다.1) 원탁토론 방식으로 ‘반둥/제3세계 60년’ 이라는 연속 활동을 열기도 했다. 4월 18일부터 20

1) http://interasiaschool.org/archives/project/2014아시아비엔날레포럼(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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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까지 중앙미술원[中央美術學院, China Central Academy of Arts] 샹산 (象山) 캠퍼스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항저우(杭州) 포럼을 열고,2)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지역의 중요 사상가를 초청해 이틀 동안 밀도 있는 토론을 진행했다. 회의에 참석한 동인들은 큰 충격을 받 았으며, 이후 제3세계 사상계로 통하는 루트를 열어가는 것에 대해 점차 기대를 갖게 되었다.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홍콩 링난대학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비판간행물 회의에서는 원탁토론 세션을 배치했고, 백낙청 선 생과 함께‘새로운 정세하의 제3세계 연대’ 에 관해 토론했다.3) 7월 31일 도쿄 메이지대학 스루가다이 캠퍼스에서는 선배 운동가인 무토 이치요우 (武藤一羊) 선생이‘반둥에서 더반Durban까지’ 라는 제목으로 아시아와 제3세계에 대한 그의 경험을 강연했다.4) 8월 9일 인도네시아에서는 2015 인터아시아문화연구학회를 열어,‘반둥/제3세계 60년’수라바야Surabaya 원탁 포럼을 하나의 세션으로 조직하였고,5) 회의가 끝난 10일부터 15일 까지는 반둥 및 가룻Garut 지역에서 농민점령운동과 더욱 광범위한 인민 운동연맹에 대해 고찰했다. 10월 24일과 25일에는 타이베이(臺北)에서 두 차례 포럼이 진행되었고,6) 젊은 세대들에게 반둥회의의 역사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전후 타이완 내부에 이미 존재했던 제3세 계 사상자원과의 접속을 희망하기도 했다.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는 오 키나와 나하(那 )에 모여 전후 예술사와 연결된 미술관 탐방 및 미군기 지 반대운동에 관해 3일 동안 원탁토론 형식으로 대회를 열었다.7) 한편 2016년 5월에는 서울의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를 중심으로 민중

2) 포럼 관련 논문 출판은 Inter-Asia Cultural Studies, 2016, vol. 17, no. 1 특별호 참조. 행사일 정은 http://apcs.nctu.edu.tw/page1.aspx?no=280775&step=1&newsno=39451 참조. 3) http://www.thinkinghk.org/#!activities/c1d94 참조. 4) http://apcs.nctu.edu.tw/page1.aspx?no=280775&step=1&newsno=39657 5) 관련 일정은 다음을 http://apcs.nctu.edu.tw/page1.aspx?no=280775&step=1&newsno=39678 참조. 6) http://apcs.nctu.edu.tw/page1.aspx?no=280775&step=1&newsno=39868 7) http://matn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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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매개로 아시아 각지에서 오랜 기간 운동해온 가수들이 모여 이들 과 함께, 토론을 곁들여 교류할 예정이다. 동인들이 적극 추진한 이러한 활동 외에, 레바논 베이루트를 방문했던 4월 10일에는 운 좋게도 성립된 지 겨우 3년밖에 안 된 독립적 민간 단 체‘아랍 사회과학위원회’ (Arab Council for the Social Sciences, ACSS) 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8) 이어서 6월 8일에서 12일까지는 서아프리카 세 네갈 다카르에 초청을 받아 1973년 설립되어 지금까지 지속되어온‘아프 리카 사회과학발전위원회’ (Council for the Development of Social Science Research in Africa,CODESRIA, 이하‘코데스리아’ 로 약칭) 제 14차 3년주기 대회에 참가했고,9) 미래에 아프리카 사상계와 상호 작용하 는 공간을 열 수 있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아래의 내용은 각 지역을 다니면서 앞서 언급한 활동에 참여하는 가운 데 단편적으로 느끼고 사고했던 것의 기록이다. 이 글을 통해 지난 1년 동안 우리가‘반둥/제3세계 60년’연속 활동을 하나의 계기로 삼았던 것 이 단지 과거 세계적 변동에 영향을 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맥락에서 서로 다른 회합을 통해 예상을 넘는 가능성을 격발하고자 시도했음을 보고하고자 한다.

인도 코치 무지리스 비엔날레와 민중생활 아제서원은 2015년 2월 인도 남부에 와서 코치 비엔날레와 협력하여 사회사상포럼을 개최하였고, 마지막 세션에서 반둥회의를 토론 주제로 삼았다.‘반둥/제3세계 60년’시리즈의 출발역이었던 셈이다. 포럼에 참 여한 주요 강연자는 힐마 파리드Hilmar Farid(인도네시아), 루싱화(쐗興 華, 중국), 라비 순다람Ravi Sundaram(인도) 등이었다. 일반적으로 1955년 반둥회의를 국가지도자 간의 결맹으로 보는데, 지금 상황에서 보 8) http://www.theacss.org 9) http://www.codesria.org/spip.php?article2047&la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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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이 이는 당시의 맥락에서 일찍부터 이탈한 것이며, 오히려 이와 같은 계기를 통해 이주노동자와 같이 국가체제 밖에서 소외되고 있는 새로운 의제를 전개해서, 반둥이 남긴 후유증

민족국가 상상의 고착화

돌파하는 계기로 삼는 일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았다. 물론 우리 가 마땅히‘제3세계’ 가 남겨놓은 빈곤과 낙후라는 낙인의 짐을 던져버려 야 사유의 지평을 자유롭게 넓힐 수 있다는 생각을 표출한 참석자도 있 었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코치라는 이 해변 도시에 머물면서 그곳에 축적된 여러 층위의 역사적 흔적을 느낄 수 있었던 점 이다. 코치는 14세기부터 향료를 중심으로 하는 무역 중심지로 16세기 초에 포르투갈에 점령되어 인도에서 유럽의 첫 번째 식민지가 되었다. 이어서 네덜란드와 영국에 점령되었고, 여러 형식의 과거가 여전히 현재 까지 병치되어 특수한 도시 풍모를 형성하게 되었다. 물질자원과 조건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지만, 이곳에서 열린 예술 비엔날레는 오히려 또다른 특성을 표현해냈다. 사방이 트인 지극히 소박한 천막을 포럼 공간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전람회장과 생활 공간을 최대한 결합시켜 전시장 곳곳에 도시의 구석구석을 진열해놓아, 별다른 꾸밈 없이 기존의 풍경에 융합할 수 있었고, 옛 건축물은 오랜 기간 축적된 상전벽해를 보존하고 있었다. 수많은 회화가 낙서와 같이 길가의 고풍스런 벽에 새겨졌고, 저 명한 장치예술가는 현장의 생태환경과 결합되었으며, 생활 광장의 큰 나 무는 작품이 걸리는 전시장이 되어 있었다. 해변의 모래사장도 전시의 자연 공간 및 배경이 되어주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른바 예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민중 생활에 녹아들어 비엔날레의 도전과 임무가 되었는가? 자연스럽게 초등학생의 미술과 결합하여 아동의 작품을 전시하고, 일반 적으로 벽이 높아 다가갈 수 없다고 여겨지는 예술 세계에 청소년의 참 여를 이끌어 생활 예술의 의의를 더욱 새롭게 하였다. 이처럼 민중 생활과 결합하는 동력을 반둥이 남긴 흔적이라고 할 수 있 지 않을까? 1950년대 수많은 국가 지도자들은 모두 광대한 반제 인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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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일부분이었다. 지난 60년간의 핵심적인 변화는 바로 민중과 국가의 거리가 갈수록 멀어졌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술관은 국가 체제의 현 대화 공정의 일환이 되어 점차 예술 전문화의 공간이 되었고, 코치와 같 은 비엔날레 형식은 예술적 고급화가 진행된 동북아의 세계관이 갖는 상 상 범위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예술이라는 것은 이미 일상생활과 괴리되어 소수만이 점유할 수 있는 중산 계급의 소비공간이다. 그리고 인도와 같이 다원이질적인 복합 국가에서 예술은 오히려 어디든 존재하 는 듯하다. 종교생활을 잠재적 자원으로 하는 이미 널리 폐기된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방대한 장인 체제를 밑받침해주고 있다. 2011년 콜카타에 서 제사 의식과 관련한 여러 형식의 신화 조소 용품을 제공하는 작은 구 역을 직접 체험했는데, 마치 살아 있는 화랑이자 미술관 같았다. 풍부한 역사적 깊이를 가진 인도 민중의 생활은 얼마간 현대적 유혹과 호명에 저항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생활 속의 미학과 정감이‘제3세계’ 에서 아직 소외되지 않은 예술 창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오늘날에는 어 찌하여‘예술’ 이란 이름을 가지고 더더욱 생명력을 갖는 사물을 가두어 죽이려고만 하는가? 코치에서의 여정은 우리들로 하여금‘반둥 60주년’ 이 단지 역사적 회 고가 아니라, 여정 속에서 사색하고 그동안 고착화된 사상을 새롭게 열 어젖히는 계기임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베이루트 여정 4월 초, 레바논 베이루트에 초청되어 탈식민 문제에 관한 토론회에 참 가했다. 마침내 아시아의‘아랍세계’ 에 당도하니 매우 흥분되었다.10) 1990년에 레바논 내전이 종식되어 베이루트의 전쟁 분위기는 이미 사라 10)‘마침내’ 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과거 20년간‘인터아시아’네트워크는 줄곧 아랍세계와 상 호 소통하는 연계를 만들고자 했는데, 이스탄불과의 일정한 연계 외에 기타 지역은 유기적인 연계를 만들어내지 못했었다. 그래서 심정적으로‘마침내’도달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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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지만, 전쟁의 흔적은 도시의 지리적 형세에 각인되어 있었다. 게다가 걸프 지역의 석유경제・금융자본이 대거 유입되면서, 도시 중심에 위치 한 특급 호화 주택들은 국제 투자자들의 소유가 되었다. 군용 제복 같은 옷을 입은 안전 경비/민병들은 자동소총을 휴대한 채 값이 천정부지인 부동산을 무리지어 지키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걸프 연안의 하늘 및 바다의 경치와 어우러져 극히 모순되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느낌 을 형성했다. 회의를 주최한 아나히드 알 하르단Anaheed Al-Hardan은 젊은 학자였 다. 그녀의 팔레스타인 신분과 관련 연구는 자연스럽게 토론 문제의 방 향이 권역 내의 모순을 향하도록 했고, 회의를 주최하는 그녀의 동력 가 운데 하나는 비교 시각을 통해 탈/식민 의제를 아랍세계의 토론 공간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범아랍주의는 세계적 반식민주의와 동보적(同步的) 이었고, 반식민 및 반서방제국주의를 주축으로 하여 강렬한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1960년대에 최고점을 찍었으나, 결 국 내부 정치 집단 사이의 모순과 외부적 국제세력의 교호 작용으로 인 해 20여 개 민족국가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아랍어문은 기본적으로 줄곧 관방과 민간의 통용 언어였고, 1945년 형성된 아랍국가연맹은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아시아 아프 리카 대륙을 횡단하여 본부를 이집트 카이로에 두고 있다. 아랍어문은 역사가 유구한 문명 표식으로서 심지어는 전/식민지역 가운데 가장‘국 제적’ 인 언어 중 하나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주도적인 학술언어임 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보급은 권역사 이에서 영국・프랑스・미국이 가진 장기적인 힘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층위에서 아랍세계의 상황은 아프리카와 중첩된다. 사하라 사막 이 북에 위치한 아랍세계와 달리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의 기본적 학술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다. 상대적으로 동북아의 상황은 현저하게 다르다.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는 기본적으로 20세기 이후 형성된 민족국가적 절단면과 일치한다.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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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여러 방식으로 동아시아에 들어온 지 이미 60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권역 내에서 영어(또는 미국어)가 개입한 역 사는 상대적으로 박약하고, 학술 언어가 되지도 않았다. 관방이 근래에 대대적으로 추진함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성공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언어의 통합과 지식의 통합이 필연적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베이루트에 체류한 기간 동안 나는‘아랍사회과학위원회’ 를 방문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식 연대의 어려움, 장기간 이어진 지식계의 상호 신뢰의 부재를 깨닫게 되었고, 함께 작업하는 동인들 또 한 탐색하며 전진하고, 각지에 형성되는 지식 네트워크를 연결하여, 점 차 아랍세계 공동의 플랫폼을 세우고자 시도하고 있었다.11) 감탄스러웠던 것은 이와 같은 민간의 자주적인 초국적 조직이 동북아, 나아가 아시아 대륙 전체에서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유서 깊은 문명을 가진 다원이질적인 이슬람 세계가 다른 지역과 달리 식민 제국주의로 인해 영혼의 커다란 상처를 입은 지대라는 점을 체감할 수 있었다.12)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입한 이후 1967년 이스라엘 이 개시한 6일 전쟁에 이르기까지, 줄곧 구미의 확장적 폭력의 충격에 지독히 시달렸을 뿐 아니라, 1990년대 냉전적 적대가 완화된 이후에도 다시 미국의 패권에 의해 새로운 가상의 적으로 세워졌으며, 반테러‘성 전’ 의 핵심 지대가 되었다. 장기적인 동란 속에서 이미 생존 자체가 매우 힘들었으며, 강력하고 권역적인 정치공동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내부의 서로 다른 입장과 이익을 조정하고, 강권의 개입과 분화를 막아내는 것 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페르시아만의 처지에서 동북아를 조망할 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까? 알 하르단은 내가 베이루트를 떠 11) ACSS의 조사보고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Mohammed Bamyeh(2015),“Forms of Presence of the Social Sciences in the Arab Region:Summary of the First Report” , Beirut:The Arab Council for the Social Sciences. 12) Mishra의 작품을 읽을 때 이와 같은 느낌이 특별히 두드러진다. Pankaj Mishra(2012), From the Ruins of the Empire : The Revolt Against the West and The Remaking of Asia, London:Penguin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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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 전에 점심 식사에 초청해주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녀에게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와 같은 지역은 이미 현대화된 제1 세계이며, 중국도 이미 급속하게 일어나 전지구적 정치경제에 영향을 미 치고 있는데, 만약 아랍세계에 장기적인 내전과 분쟁이 없었다면 아마도 비슷한 성취를 이루었을 거라고 말했다. 이런 대화는 사실 참으로 묵중 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은 지역에 살면서 마땅히 더욱 큰 책임 을 져야 하지만, 동북아의 충돌, 모순, 그리고 단절은 역시나 권역 외부 의 강권 세력과 결탁되어 있지 않은가? 오키나와 기지, 양안삼지(兩岸三 地, 중국 대륙, 홍콩/마카오, 타이완을 통칭), 그리고 남한의 상황, 나아 가 최근 일본의 안보 문제의 분화는 모두 제국주의가 그 한가운데에 있 음을 의미하고, 그저 이른바 민주 진영의 우산 아래 은폐되어 있을 뿐 아 닌가?

항저우 포럼 이와 같은 인식과 심정을 품고 베이루트를 떠나 4월에 모두가 힘써 준 비한‘반둥/제3세계 60년’항저우 포럼장에 도착했다. 아랍세계가 아시 아 전체를 구성하는 주요한 부분이지만, 오랫동안 동북아에 생활하면서 도 이 지역과는 거의 단절되었다고 할 때,13) 아시아 각지의 지식상황에 대해 일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함께 10여 년을 일해온 아제서원 구성원들 에게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의 낯선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다는 신체 감각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제3세계’ 가 텅 빈 이름이 아니라는 이 경험은 더욱 큰 도전을 가져오기도 했다. 핵심 조직자로서 나는 이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약간의 숙제를 했다. ‘아제서원’ 과 같이 느슨한 지식 집단과 비교할 때, 앞서 언급한 20여 개

13) 베이루트에 머문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동북아에서 온 여행객을 거의 마주친 적이 없 었다. 주말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여성 이주노동자를 마주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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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로 구성된‘아랍사회과학위원회’ (2012~)와 25개 국가로 구성된‘라 틴아메리카사회과학위원회’ (Latin American Council of Social Sciences, CLACSO, 1967~)의 존재를 발견했고, 더욱 흥미로운 조직은 바로‘아프 리카사회과학발전위원회’ (CODESRIA,1973~)였다. 다시 말해서, 아프 리카와 라틴아메리카는 1960~70년대부터 40~50여 년 동안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범권역적인 지식생산의 기제가 존재했으며, 권역 전체의 자기 정립적인 플랫폼을 만들어냈다.‘외부’ 에 대해서는 관계적인 위치에서 세 계의 서로 다른 권역을 대면했고‘내부’ 에 대해서는 하위 권역을 정합하 면서 굽어보았으며, 초국적인 시야로 절박한 문제에 대해 변론을 진행했 을 것인데

예상컨대 이와 같은 내부적이고 외부적인 기제로 인해 고도

의 감성적 특성을 갖는 국가를 개방했을 것이다

, 종족 및 인종적 폭

력, 그리고 민족주의 등과 같은 현재의 내부 논쟁 등에 대해 분석과 토론 을 진행하고 이를 축적하여, 후/식민 상태에서 해결되지 못한 여러 문제 를 대했던 것이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및 아프리카 지역과 상호교류하면 서 관심 갖고 이해하게 된 접속 지점이었다.14) 1973년에 창립되어 사미르 아민이 제1기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코데스 리아CODESRIA는 아프리카의 비판적 지식 생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 고, 과거 40여 년 동안 수많은 중요한 지식인을 양성해냈으며, 매우 뚜 렷한 학술・사상적 성과를 축적해냈다. 이뿐만 아니라 코데스리아는 일 찍이‘남 남(南 南’south-south) 간의 제3세계 연계 연구작업을 발전시 켰고, 삼대주 간의 연계가 작업의 부분적 중점이었으며, 이미 구체적인 연구에 반영되어 있었다.15) 아프리카 및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미 출현한 민족국가를 넘어서서 인근 권역까지 연계하는 지식체계가 출현한 것에 비해, 아시아 지역은 극단적으로 사분오열된 상황이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추후 지속적인 사고가 필 14) Kuan-Hsing Chen and Ikegami Yoshihiko(2016)“CODESRIA as a Pan-African Intellectual Community:An Interview with Prof. Sam Moyo” ,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17, no.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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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주(洲)’ 를 단위로 상상하는 지식 플랫폼과 그 축적이‘아시아에서 사고하며’ ,‘아시아를 방법으로, 세계를 목적으 로’ 라는 절박감을 더욱 가속화한다는 점이다. 특히 동북아 지식 상황의 심각한 제한을 간파하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 또한 정치로 인해 폭넓은 분석 시야가 성장할 토양을 가지지 못하고, 보편적 본토주의로 각자 분 리되어 정치를 담당하는 함정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세계의 대대적 변 동 국면에서 유효한 분석을 내놓을 능력을 갖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 기 때문이다. 앞서 진술한 것은 까닭 없는 탄식이 아니며,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다. 항저우 포럼 중에 아프리카의 핵심 사상가인 마흐무드 맘다니Mahmood Mamdani는 첫날 토론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중국은 흥기 하고 있다. 중국인은 미래 세계에 대해 어떤 분석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는가? 세계를 어떻게 바꾸고자 하는가?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가?’(기대할 수 있는) 이러한 큰 질문에 대해 물론 답 변을 할 수 없었다. 중국 대륙에서 이는 국가 지도자가 발언해서 처리해 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최 측인 아제서원에게 이 문제는 단지‘중국 인’ 이 반드시 방법을 모색해서 담당해야만 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동시 에 아제서원의 모든 동인이 사상 단체로서 함께 대면해야 하는 문제의식 이어야 한다. 그러나 난점은 다음과 같다. 이 일련의 문제에 효과적으로 답할 수 있 으려면 중국 내부에 대한 정확한 분석, 주변 지역에 대한 심도 있는 인 식, 더욱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내재적인 이해와‘땅 기운에 접속하는’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움 15) 항저우 포럼에 참여한 샘 모요 교수는 독립연구기구인‘아프리카 3농(三農)연구소’ 의 주임이 자 코데스리아의 전임주석이며, 아프리카 토지연구의 권위자다. 회의 이전에 참석자들에게 배 포한 배경자료를 통해, 최근 그의 연구가 일률적으로 브라질학자 한 명 및 인도학자 한 명과 공동으로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을 보라. Sam Moyo, Paris Yeros and Praveen Jha(2012)“Imperialism and Primitive Accumulation:Notes on the New Scramble for Afirca” , Agrarian South: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1)2, pp. 1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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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이는 전망을 제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본래의 국제적 강권의 변 화에 대해 정확한 분석을 해야 함은 더할 나위가 없다. 역으로 사상계가 세계에 대해 유효한 시각을 제시하지 못하면, 아주 쉽게 정치적 힘에 휩 쓸리게 된다. 실제로 표출된 변화는 반둥 시대‘세계혁명’ 을 위해 제3세 계가 단결하고, 강권에 저항하는 국제주의 세계관에서 1970~80년대 이 후 개별 민족국가의 이익 문제라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사회주의를 수단으로 식민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의 역사적 운명을 반영하는 것 같다. 또한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반봉건이 주축이 된 민족주의가 탈식민 의 역사적 과정에서‘독립 건국’ 의 층위로 환원되고 시각이 축소된 것과 같다. 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가 대항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인 데,“ ‘민족국가’ 를 포함하여 모두 식민주의에 내재적인 산물이라는 함정” 을 유효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퇴조를 보이 자,‘혁명 유산’ 은 진지하게 정리되지 못했고, 잠시 번득였던 지식, 사 상, 정신 차원의 식민주의에 대한 정리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혁명 유 산은 민족국가 질서 속으로 축소되어 미끄러지고, 식민주의 체계가 세워 낸 세계 구도를 지속했던 것이다. 일국 사회주의는 불가능한데, 이는 일 국 민족주의가 의미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족주의는 줄곧 세계자본주 의의 확장, 공고, 강화 그리고 자기정체화의 근거였다. 어쩌면 문제를 너무 크게 말해서 돌파구를 닫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반둥 60년이 우리에게 준 것은 단순히 역사적 종축(縱軸)을 열어 역사적 상황의 변화를 되돌아보는 계기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상 단체이자 지식인으로서 반둥이 열어젖힌 지식연대와 상호교류의 차 원에서‘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를 상상하는 일이 수십 년 간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놓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개별적인 내부의 정서적 감상에 침잠해 있고, 자신을 대면하는 데 있어 극도로 중요한 외부 참조 체계를 상실했다. 아프리카, 라틴아메 리카, 카리브해가 이미 자신을 해부하는 고도로 축적된 지식과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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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음을 통해 우리의 병목지점을 돌아보게 된다. 아마도 인터아시 아가 연계했던 준비 작업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문제의 기초일 것 이며,‘제3세계’ 는 본래 아시아의 연장선 위에 존재했고, 아시아로부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제3세계로 연결되는 것은 세계사로 통하는 (회피할 수 없는) 필수 경로다. 이는 요즈음 사상 운동이 단단히 부여잡아야 하는 장기적 노선 가운데 하나다.

홍콩‘회귀’ 의 탈식민 문제 5월 말 홍콩에서 주최한16)‘식민 동아시아’ 를 주제로 한 동아시아 비판 간행물 회의는 우산운동의 여파 속에서 진행되었다. 회의 중‘반둥/제3 세계 60년’원탁 토론은 우리가 눈앞의‘회귀’18년 후 점차 부상한 홍 콩과 중국 대륙 사이의 충돌과 모순을 직시하도록 했고, 반드시‘탈식민’ 문제로 되돌아와 이해해야 했다. 천칭챠오(陳淸僑)가 4월 항저우 포럼에 서 아프리카 대학 체제와 관련한 맘다니의 탈식민 의제에 대해 토론했던 것처럼, 홍콩의 1997년은 식민주의의 종료를 의미하지만, 식민 체제는 장기적으로 존속하고, 탈식민 작업은 아직 전개되지 않았으며, 통치자가 영국인에서 현지 홍콩인으로 바뀐 것 외에는 대학체제뿐만 아니라 법 률・정치・경제 등의 각 영역에서조차도 여전히 식민시대에 만들어진 기 제가 작동하고 있다. 맞은편에서 보면‘회귀’ 의 모체인 중국 대륙(관방 체제로부터 민간까 지) 또한 돌을 더듬으며 강을 건너고 있고, 과거 150년 동안 홍콩이 식 민지 과정에서 세워졌던 (생활)기제를 적절한 방법과 단계설정을 토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으며, 홍콩인에게 이미 형성된 주객관적 생활 방식을 충분히 체감 및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대 16) 2015년 홍콩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운동주체는 차기 행정장관 선거를‘진정한 보통선거’ 로 치르자는 요구를 핵심적으로 제기했으며, 경찰의 최루액 진압에 대해‘우산’ 을 들고 저항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옮긴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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륙에 이미 형성된 땅과 다시 접궤(接 軌)할 것인가? 탈식민의 시각에서 보 면, 타이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1945년 이후 타이완이‘광복’ 과 중국으로의‘회귀’ 를 통해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과정 은 명료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고, 탈식민의 역사적 과정에서 출현한 다방면의 작업과 곤란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정리를 해내지 못했다. 1980 년대와 1990년대 홍콩이‘회귀’ 하는 과정에서 타이완의 경험은 홍콩이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어 참조가 될 수 없었는데, 오늘날 되돌아 보면 타이완의 지식계는 이에 대해 아주 큰 책임이 있다. 물론 우리가 오 류 속에서 교훈을 얻으려 한다면, 홍콩과 중국 대륙이 다시 접궤된 18년 동안 발생한 문제들이 양안 간의 장기적 교류 속에서 핵심적 참조로 전 화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양안삼지의 사상계는 반드시 상호 연동되는 사상 및 지식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함께 문제를 대면해야 한다. 상술한 문제는 단지 양안삼지의‘중국인’ 만의 문제는 아니다. 동아시아 근대사의 맥락과 구도 속에 놓고 보면, 오키나와는 지금까지‘복귀’ 라는 난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남북한의 분단 초극(超克)의 곤경은 식 민・냉전・제국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19 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미 형성된 동일한 권역 구조가 남겨놓은 문제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1879년의 ‘류큐(쐑球) 처분’ , 1895년 타이완의 식민지 전락, 1910년 일본의 한반 도 병합은 오늘날 직면한 곤경이 역사의 부재이며, 함께 섞이고 싶어하 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분리 상태가 사실은 우리가 공동으로 직면하고 있는 역사 구조이며, 모두‘우리’ 의 문제임을 표지하고 있다.

아프리카 사상계로서의 코데스리아 아제서원의 동인은 항저우에서의 회합이 인연이 되어 6월 초 아프리카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초청받아 코데스리아의 3년 주기 대회에 참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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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었다. 이 여정은 아프리카 비판 지식의 전당에 향을 피우고 참배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 아프리카에 왔으니 흥분과 긴장 그리고 이상 주의적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4백여 명이 참가한 대회는 6월 8일부터 5일 동안 연이어 열렸고, 아침 9시부터 저녁 대여섯 시까지 모두가 매우 진지하고 엄숙하게 논쟁하는 것은 전에 없었던 경험이었다. 서로 다른 세대, 종족, 성별, 입장들이 격돌하면서 생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충만했 고,‘학술언어’ 의 복잡성 들었다

17)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 프랑스어 동시통역을

까지 더해졌지만, 기본적인 상호신뢰와 존중을 유지하는 능력

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비판 지식 집단의 문화는 분명 과거 40여 년 간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40년의 지식이 축적될 수 있고, 인재 를 양성하는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논쟁을 통해서 부단히 전진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코데스리아는 세계적으로 매우 특수하고 성과를 갖는 학술 사상 단체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참여해온 핵심 조직자를 방문해 젊은 세대 신입 회원 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코데스리아가 고도의 확산력을 가지고 있고, 여러 층위에서 광범하게 지식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수십 년 간 아프리카의 주요 논쟁에 참여한 주요 논자들 대부분 이 단체의 구성원으로, 이들이 핵심 의제를 제기하고, 초국적 비교 연구 를 생산해내며, 하위 권역적 조직의 연대를 형성하고, 새로운 독립적 연 구 기구를 출범시켜 지구적 연계(예를 들어 장기적으로 존재해온 남 남 계획)를 실행하며 그 핵심 성원들이 세계적 범위에서 개입을 하고 있었 다. 거의 모든 피면접자들이 코데스리아가 없었다면 그/그녀들 스스로 이와 같은 성과와 성취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며, 아프리카 비판 학술 사 상의 주체성을 세워낼 수 없었을 것이라는 고도의 자각을 가지고 있었 다.18)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초보적인 느낌은 코데스리아가 세계적으 로 유일무이한 사상 집단이라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진화하

17) 물론 포르투갈어로 발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잠비크에서 온 학자의 원성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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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전승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가치 있는 점은 그것의 장기적 축 적이 이미 의심할 나위 없이 아프리카의 현대적 지식 전통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프리카의 역사적 종별성으로 인해‘범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의식이 형성한 지적 시좌가 민족이 식민주의가 강제한 형식 이라는 점을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세계관을 형성했을지도 모 른다.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드는 하나의 착각이 있다. 1963년 잠정적으 로 출범한 아프리카 단결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에서 2001년 재편되어 출범한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에 이르기까지 약소한 중앙 정부가 점진적으로 형성되고 있고, 54개 참여국이 지방정부가 되며, 상 호간에도 초국적 생활이 형성한 하위 권역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다 o 는 점이다.19) 케냐의 저명한 작가인 응구기 와 시옹오Ngugi wa Thiong’ 는 우리가 마땅히“ ‘범아프리카주의’ 를 민중에 대한 민중의 관계로 삼아 야지, 국가 지도자 사이의 관계여서는 안 된다” 고 여겼다.20) 이른바 범아 프리카주의의‘민족주의’ 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이해와는 아주 큰 차이 를 갖는다. 왜냐하면 기존 아프리카의 민족국가는 식민제국주의에 의해 분할된 결과이고, 임의성이 매우 강하며(같은 언어 및 종족인 사람들이 18) 이케가미 요시히코(池上善 )와 나는 각자 1970년대 조직 출범 시기 사무총장을 맡았던 사미 르 아민(세네갈)과 1980~90년대 사무총장이던 탄디카 머칸다위레Thandika Mkandawire(말 라위), 1998~2002년의 주석인 마하무드 맘다니(우간다), 2005~2008년의 주석인 테레사 쿠 르즈 에 실바Teresa Cruz e Silva(모잠비크), 2008~2011년 주석인 샘 모요(짐바브웨), 현임 사무총장 에브리마 샬Ebrima Sall(감비아), 2011~2015년 주석 파티마 하라크Fatima Harrak(모로코) 및 오랜 기간 참여해온 장년 그룹에 속하는 샤히다 엘 비즈Shahida El Baz(이집트), 청년회원인 Jahlani Niaah(자메이카), 슈렌 필라이Suren P llay(남아공), 린 오 소메Lyn Ossome(케냐) 등을 인터뷰했다. 부분적인 인터뷰 기록이 차츰 정리되어 출판될 것 으로 기대한다. 19) 아시아를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로 구분하는 반면, 아프 리카대륙은 대체로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아프리카, 남아프리카로 나뉜다. 20) Ngugi wa Tiong’ o(2005),“Europhone or African memory:the challenge of the panAfricanist intellectual in the era of globalization” , in Thand ka Mkandawire (ed.), African Intellectuals:Rethinking Politics, Language, Gender and Development, Dakar:CODESRIA Books, and London:Zed, p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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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서로 다른 국가로 분할되어 편입되었다), 국가 층위의‘민족 정감’ 에 대한 사람들의 몰입도가 상대적으로 박약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민족 주의는 전체 아프리카의 범위에서 작용하고,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통합 에 대한 기대를 강조한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첨예하고 곤란한 것은 언 어 문제이다. 정치적으로 독립한 후,‘학교의 언어’ 는 기본적으로 식민시 기의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를 계승했고, 생활 언어와는 단절되었 다. 중요한 사상가이자 경제학자인 탄디카 머칸다위레Thandika Mkandawire는 현지 언어로 학습하는 것은 전체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문제로 범아프리카적 차원에서 언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6~7종의 언어를 수집 및 선택해서 총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보았다.21) 예를 들어 스와힐리어Swahili는 동아프리카와 중아프리카 10여 개 국가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학술 및 학습 언어로 발전될 수 있다. 물론 1970년대에 이르러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미 정치적 독 립을 이루었지만, 탈식민 문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40년 동안 사 상계가 관심을 가진 핵심 문제였다. 특히 코데스리아와 같이 좌익적 바 탕색을 가진 단체에게 식민주의는 단순히 문제 해석의 틀일 뿐만이 아니 라, 더욱이 정치경제적 현실에서 회피할 수 없는 구조적인 힘이었다. 맘 다니의 경전적 저작인『시민과 주체Citizen and Subject』 에 의하면, 후식 민 시기는 비록 탈인종주의화의 과정이었고, 백인 통치자가 데려온 전입 주민( ‘settler’ )이 현지의 (흑인)원주민( ‘native’ )을 대체했지만, 식민 시 기에 장기적 정치 과정을 통해 구축한 다부족 및 부락tribe으로 구성된 다원적이고 이질적이면서 동질적인 원주민은 독립 이후 이른바‘원주민 권력체계native authority system’ 가 되었고,22) 탈식민화의 정치 과정은 없었으며, 오히려 오늘날 충돌과 모순의 원인이 되었다. 즉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부락을 기초로 하는) 종족ethnic 정치를 형성한 것이다. 남아 21) 2015년 6월 10일 탄디카 머칸다위레Thandika Mkandawire와의 인터뷰에 근거함. 22) Mahmood Mamdani(2012), Citizen and Subject:Contemporary Africa and the Legacy of Late Colonialism, New Jersey: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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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카의 인종 격리 정책, 르완다의 인종 절멸, 나아가 최근 세계적으로 크게 주목 받는 수단 다르푸르Darfur의 종족 충돌은 모두 체제・법률・ 정치・경제 및 사회 각 층위의 식민 제도의 유제를 보여주는 것이다.23) 우리는 대화를 통해 아프리카를 기본적인 참조점 또는 동북아를 조망하 는 거울로 삼아, 양자 간에 전후 민족국가의 형성・분열 및 제국주의 세 력 간의 절단할 수 없는 관계라는 공유된 특성이 있음을 발견했지만, 후 자가 식민 세계사에서 갖는 종별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자 면, 동북아가 식민 상태를 벗어나는 과정은 전 식민 시기의 정치 체제와 상황을‘복원’또는‘회복’ 한다는 상상과 관련되는데, 이는 단순히 통치 계층의 교체만이 아니며, 정치 권력의 전환은‘탈식민’ 의 핵심적 표현 형 식이라는 점이다. 이는 홍콩, 마카오, 타이완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며, 한반도의 상황에서도 그러하다. 어떻게‘모체’ 로‘회귀’ 할 것인가는 회피 할 수 없는 사상 및 정치 문제이다. 이것이 아프리카 여정에서의 감회다. 회의 중에‘아프리카에서의 중국’ 이라는 문제가 줄곧 제기되었는데, 이 는 코데스리아 구성원이 오랜 기간 관심을 가져온 문제이기도 했다. 그 들이 주목한 문제는 아프리카 외부의 이른바 관찰자들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었고, 긍정과 부정의 기복이 심했으며, 여전히 변동하고 있으므로 함부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었다.24) 아프리카 지식 단체의 맥락 속 에서 아프리카에서의 중국이란 것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는 점을 명확하게 체감하였고, 함께 온 도쿄의 이케가미 요시히코(池上善 ) 도 마찬가지로 대면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현장에는 중국을 포함한 23) Mahmood Mamdani(2012), Define and Rule : Native as Political Identit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Citizen and Subject:Contemporary Africa and the Legacy of Late Colonialism, Princeton:Princeton University Press. 24) Sam Moyo(2016),“Perspectives on South-South Relations:China’ s Presence in Africa” ,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17, no. 1. Phineas Bbaala(2015),“Emerging Questions on the Shifting Sino-African Relations:‘Win-Win’or‘Win-Lose’ ?”African Development, vol. XL, no. 3:pp. 97~119;Tukumbi Lumumba-Kasongo(2015),“Brazil, Russia, India, China and South Africa (BRICS) and Africa:New Projected Developmental Paradigms” , African Development, vol. XL, no. 3: pp.7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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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지식계와 아프리카의 사상계 사이에 교류도 없었고, 이해는 더욱 없었으며, 근본적으로 이런 난감한 문제를 함께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을 서로 어색한 상황 속에서 절감했다. 담론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정치경제 적 과정에 개입할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떻게 아프리카 사상계 와 아시아 사이의 연대 구축을 시작할 것인가? 특히 얼마나 할 수 있을 지, 어떻게 할지, 조건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데 중국 사상계와의 교 류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이는 확신은 없으나 마땅히 제기할 임무를 우리가 가졌다고 하겠다.

무토 이치요우(武藤一羊)의 강좌:반둥에서 더반까지 7월 말에 도쿄로 와서 아제서원 연례 강좌[이타가키 유조(板垣雄三) 교 수의 주 강연]와 청년 학자 포럼에 함께하게 되었다. 도쿄 사무소의 동인 은 아시아 사상계와 운동권의 선배인 무토 이치요우 선생을 초청해서, 반둥 60년에 대해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가 참여한 인민운동에 대해 듣기로 했다.25) 잠시 선생이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80세를 넘긴 그의 건 강 상태는 예전과는 이미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혈기 왕성하게 집필하고, 활동을 조직하며, 눈앞의 의제에 개입하고 있었다. 사실 동아시아 각지에서 온 청년 학자들에게 일본과 아시아 곳곳에서 60 여 년 간 분투해왔고, 한순간도 인민운동의 자기 자리를 떠난 적이 없는 존경 받는 선배를 만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매우 감격스 러운 것일테다. 선생의 강연은 하나의 역사적 축을 열어젖혔는데, 1955년 반둥회의로 부터 2012년 더반의 인종차별반대 회의에 걸쳐 있었다. 나 개인이 크게 느낀 바는 이렇다. 본래‘인민운동’ 을 견지한다는 것이 무토 선생과 같은 25) 무토 이치요우 선생은 2015년 7월 31일 아제서원 도쿄사무소 초청으로 메이지대학에서‘반 둥에서 더반으로:1950~1980년대 개인적으로 참여한 초국적 인민운동 경험’ 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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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가들의 일관된 입장으로 여겼고, 특히 일본의 근대사 맥락에서 전전 과 전후 국가에 대한 불신임이 이와 같은 기본적 신념의 천연적 토대가 되었다고 보았지만, 그의 강연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그 세대들은 사실 상 1950년대 반둥회의에 깊이 감명받았고, 이와 같은 방대한 민중 영향 력을 갖는 국가 지도자들이 식민주의에 함께 도전하는 좌익 반제 운동에 설 수 있기를 매우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둥회의가 수많은 효과 를 낳는 가운데, 자본주의 진영의 반격이 세계 전체의 변화를 초래했고, 1965년부터 1966년까지 인도네시아의 공산당 대토벌은 역전의 핵심이었 다. 이로부터 동남아 지역은 오른쪽으로 전환되었으며, 이는 사회주의 진영이 아시아에서 가지와 줄기를 잃고 점차 약화되는 전환점이었다. 동 시에 반둥회의에 참여한 본래 좌경적인 국가 지도자들의 경우, 일부는 독재자가 되었고, 일부는 권력을 포기하지 않고 장기 집권하면서 수많은 운동세력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로부터 인민운동으로 전환되는데, 무토 선생이 대표하는 입장은 아마도 이렇게 해서 확립되었 을 것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민운동 형성의 기조는 역사적 산물이 지, 간단한 이론적인 연역이 아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세대가 처음에 ‘인민 민주’ 라는 민중운동 노선을 수용할 때, 사실 역사적 전신이 있었던 것이며, 그저 지식이 짧고 얕아 과거와 맞닿지 못했을 뿐이다. 무토 선생이 제출한 과거 50년의 변동 덕분으로 우리는 인민운동의 기 본 조건에 이미 상당한 변화가 있음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1980년대 말까지도 아시아 각지에서 활동을 전개하면서 수많은 곳에서 입국이 가 능한지 예측할 수 없었다. 포럼 현장에 도착해서도 늘 관방의 정보계통 에 의해 감시를 받았으며, 회의는 수시로 중단되었고, 운동가들이 체포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1990년대 이래 분위기로 보면, 아시아 지역은 전 체적으로 운동이 강력하게 탄압받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경계를 넘는‘정치활동’ 은 여전히 민감하지만, 인민운동의 공간은 확실히 넓어졌다. 그러나 국가기구 사이의 결맹이 형성하는 아세안이나 중일한 3국의 체제 간 협력 기제와 비교해볼 때, 민중운동의 권역적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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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는 여전히 상당히 박약하다. 각지의 상황 속에 상대적으로 연계의 축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가・자본・시민사회(중산계급과 상층 엘리트) 를 벗어난 협상 관계로까지 강화되어 상대적 자주를 완전하게 실현하지 는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 있는 민간 소 단체의 장기적 축적, 한국 민중운동과 시민조직의 상대적 방대함, 나아가 아래에서 보게 될 인도네시아에서 굴기하고 있는 인민운동은 모두 자기 챙기기 바쁜 상태 에 처해 있다.‘어떻게 민족국가의 통제하에서 경계를 넘는 결맹의 새로 운 조건을 창출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여전히 극복하기 쉽지 않은 도전 이다.

반둥 및 가룻 탐방 1998년 출범한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2년 주기 컨퍼런스는 올해로서 이 미 제9회를 맞이했다. 이 단체의 조직 상황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인 데, 대체로 현지의 친구들이 만든 기구나 프로그램을 지지하기 위해서 여러 곳을 찾아가게 되고, 주최를 맡은 단위는 아주 큰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어서 현지에서 이미 형성된‘문화’형식으로 회의를 조직할 수 있 다. 2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일정하게 축적을 이룬 것 같다. 인적 네트 워크는 부단히 생성되고 있지만, 여전히 오랜 친구들 몇몇은 때가 되면 자연스레 모이는 상황이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늘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얻는다. 8월 초에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 위치한 아이르랑가 Airlangga 대학에 도착했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소는 낯설었지만 인심은 익숙한 것이었다. 다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세상 을 뜬 친구에 대해 추모 형식으로 논의하는 세션이 회의에 마련되었다. 2014년 세상을 뜬 스튜어트 홀Stuart Hall과 호주의 여성주의 인류학자인 지니 마틴Jeannie Martin은 우리 그룹에 속한 많은 친구들의 오랜 친구 였는데, 몇 차례의 포럼에서 그녀/그들의 인격, 풍모 및 저작을 둘러싼 토론을 진행했다. 올해 인도네시아에 와서‘반둥/제3세계 60년’ 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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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한 것 또한 앞뒤가 맞는 것이었다.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그룹 내에 서, 특히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온 젊은 친구들에게 제3세계 연대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원탁 포럼은 곳곳에서 반둥 의제에 관심있는 참 여자들을 불러모았고, 특히 청년 학자들은 가볍게 또는 무겁게 이 의제 의 심지를 계속 불태웠다. 수라바야의 일정이 끝나고 우리 일행 10명은 인도네시아 친구의 도움 으로 반둥 지역에 도착했다. 아시아・아프리카 박물관을 참관한 것 외에 도 가룻 지역의 농촌을 방문하는 인연을 가졌다. 그곳에서 농민연맹 (Serikat Petani Pasundan, SPP)의 점령 운동을 보았고, 인도네시아 인민 운동(인민련)과 교류할 기회를 가진 것은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26) 탐방 중에 여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가장 뚜렷한 것은 농지 점령 운 동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토지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한 바가 없었는데, 과거에 목격한 것이 농지의 대량 유실 현상이었다면, 이번의 경우 전지 구적 자본이 여러 형식으로 토지를 약탈하는 현상이었다. 아프리카 대륙 에서는 토지에 대한 초국적 자본의 쟁탈scramble이 진행되었고,27) 동시 에 정치경제적 구조 조정 요인이든 국가 현대화 이데올로기의 작용이든, ‘도시화’ 는 농촌이 도시로 변하는 것을 주도적인 사상과 계획 및 실천으 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제3세계 각지에서 농민의 저항 역량 또한 대규모로 출현하고 있고,28) 인도네시아 자와바라트주의 토지 점령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26) 상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陳光興(2015),「2015萬쐠地區參訪筆記」 ,『人間思想』第 11期 및 http://apcs.nctu.edu.tw/page1.aspx?no=280775&step=1&newsno=39693 27) Sam Moyo, Paris Yeros and Praveen Jha(2012), “Imperialism and Primitive Accumulation : Notes on the New Scramble for Africa” , Agrarian South :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1(2):pp. 181~203. 28) Sam Moyo and Paris Yeros (eds.), (2005), Reclaiming the Land:The Resurgence of Rural Movements in Africa, Asia and Latin America, London:Zed Books. 아프리카가 직면한 삼 농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소개는 다음을 보라. Sam Moyo(2008), African Land Questions, Agrarian Transitions and the State:Contradictions of Neo-liberal Land Reforms, Dakar: CODES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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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탐방한 가룻 지역의 농촌 동향은 기존의 인상을 뒤집어 서 대안적 사고의 가능성을 제공했다. 농촌 운동은 단지 유효하게 자본 과 국가에 대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농촌・지방정부・중앙정부・법 원・종교 기구 등의 차원에서 움직였고, 동시에 서로 호응하는 보조 체 계(노동조합조직, 농민학교, 협동조합, 생산물판매기제, 연구개발 및 출 판 그리고 정당과 의회 진입 등)를 세워서, 농민의 생계를 바꾸고 농촌이 부유해지며, 농민이 농촌에서 생활하고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했다. 이와 같이 거의 모든 관련 영역에서 진지를 만드는 것은 매우 힘들게 얻 은 값진 성취였다. 물론 운동의 위기는 토지를 장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 는 안정성과 관련되는데, 운동의 힘이 쇠락하면 국가와 자본은 기회를 틈타 반격할 것이고, 이미 얻은 성과를 소멸시킬 것이다. 이 때문에 특정 시공간 속에서 국가의 (계급 또는 기타 사회) 속성이 운동에 유리할 때, 운동의 강인한 힘이 계기를 부여잡아 더욱 제도화된 성과로 전화되어, 국가를 통해 농민이 생존을 위해 유효하게 (공유 또는 미사용) 토지를 사 용할 수 있는 권리를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데 관건이 있다. 이와 같은 요구가 국가, 권역 및 지구적 범위에서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지는 지속적인 사고가 필요한 문제다. 그러나 어찌됐든 객관적 조건을 창출할 수만 있다면 농민, 농촌 그리고 농업에 전망이 있으며, 도시화와 공업화가 유일한 출구가 아니고, 특히 농민을 주체로 하는 지역이 더욱 전도유망한 사유를 가질 것임을 농민연맹의 실천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조건의 창출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기존 사회 생활의 바탕으로부터 진행되어야 한다. 이번 탐방을 통해 우리는 이슬람 이 생산해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볼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은 종교적 힘을 지나치게 중요한 해석 틀로 삼아서도 안 되지만, 절대 가볍 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촌민의 일과 휴식은 하루하루 종교의식 및 그와 관련된 생활의 세부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고, 운동 조직은 반드시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또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우 리는 탐방 중에 이슬람 율법학자인 울라마ulema가 마을에서 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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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하며 참여하고, 단체의 모임이 공통의 간단한 의식으로 시작되는 것 등등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조직자와 지도자는 무슬림 후손을 주체로 하 고 있었고, 몸의 단련이 오랜 기간 동안 이미 운동의 전제가 되어 있었 다. 사회 신체에서 이슬람이 갖는 운동 에너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식별 하고, 종교 기구의 인정과 지지를 얻어내는 것은 성공의 관건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며, 9・11 이 후에 당연히 강권 세력의 압력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종교와 정치가 어떠한 특수 관계이며, 특히 이슬람 세계 전체에서 인도네시아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 다. 제3세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맥락에서 사고할 때, 무 슬림 인구는 가장 방대하다. 단지 동남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아 시아의 경우에도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방대한 무슬림 인구가 있고,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아랍세계도 물론 핵심 지대이며, 남부 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대륙 또한 무슬 림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동북아시아에 무슬림 인구가 적은 것은 아시아 대륙에서 유일하게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슬람 종교가 이슬람의 일상생활 속에서 갖는 작용에 대 한 체험이 장기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는데, 이번 인도네시아행은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게 세계를 인식하고자 할 때 반드시 과거까지 닫아두었던 눈을 되찾아 더욱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진지하게 종교, 특히 이슬람이 당대 세계에서 갖는 중요한 위치를 학습해야 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어지는 방문에서 우리는 농민연맹의 운동이 더욱 큰 범위의 인민운 동의 한 고리임을 발견하였고, 인도네시아 전체 인민운동이 지금 흥기하 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인민련의 조직은 노동자, 농민, 여성, 원주민, 어민, 환경 등의 운동을 포괄하고 있었고, 1990년대 말부터 함 께하기 시작해서 오늘날 70만 명에 달하는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물 론 우리가 본 것은 현 단계의 결과물이었고, 그것들이 함께할 수 있는 동 력과 궤적을 깊이 탐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결맹이 형성된 역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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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축을 파악해야만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있기 때문이 다. 조코위 신정권이 출범하면서 운동의 확장과 발전에 자양분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과거 아시아 지역의 정권 교체 경험을 볼 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새 정부는 운동의 힘을 대대적으로 흡수하고 체제 내로 편입시켜 이후 운동의 힘을 붕괴시키지 않을까? 인민련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정치적 관계에 있어서 다른 정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사고할 것 인가? 인민련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치 형식을 창 출할 수 있을 것인가? 인민련의 국제관과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 반둥의 제3세계 정신은 운동 조직에 여전히 적극적 의미를 갖는가? 인민련의 핵 심 성원과 지도부는 중생대(中生代) 사람들로 40대 초반이고, 자생적인 기층 간부는 대부분 스무살 전후이며, 농민학교의 남성 및 여성 아이들 은 말할 나위도 없다. 계속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걸어야 할 길 또 한 아주 멀다. 우리와 같은 외부인이 농민연맹 및 인민련과 급속도로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이 과거에 각지에서 활동한 궤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즉각 인민련이 가진 농후한 좌익 바탕을 느꼈을 것이라고 믿는다. 1965 년 공산당 대토벌 이후, 좌익은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정치적 금기가 되 었고, 지금까지도 공산당을 조직하는 것은 위헌이다. 과거 50년 동안 인 민련 구성원의 선배들은 살아 있더라도 장기간 침잠해 있어야 했으며, 상황이 좋아봐야 문화적 영역에서 불꽃을 전승하면서 태울 수 있었을 뿐 이다. 우리가 만난 중생대 사람들은 대체로 낮게 엎드린 상태로 포복전 진하고 있었다. 인민련이 1990년대 말에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 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점진적인 축적이 있었고, 동시에 얼마간 1965년 이전의 인류 해방의 상상을 계승했기 때문일 것이다. 뒤집어서 질문을 한다면, 1965년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세력이 막강했고, 중 공 이외 가장 강력한 좌익 정당이었는데, 만약 대토벌이 없었다면 오늘 의 인도네시아,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시아 권역은 어떤 구도가 되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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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앞에서 언급한 선배 운동가 무토 이치요우 선생은 올해 8월 도쿄에 서 반둥회의를 토론하면서 1965년이 중대한 분수령이었다고 제기한 바 있는데, 아마도 이와 같은 뜻이었을 것이다. 1965년 학살 사건은 인도네 시아와 전체 권역 정치(나아가 세계적인 큰 국면)의 앞으로의 방향을 제 약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1965년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형성하는 관건적 부분이 된 것이다. 세계의 현재 모습을 이해하려면 1965년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인민운동이 오늘 과 같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과 관련해 동시에 크게 성찰할 지점 도 있다. 마찬가지로 남한, 타이완, 말레이시아 등과 같은 아시아 각지에서 좌익 토벌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상대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좌익 토벌이 가장 큰 규모였고, 가장 참혹했다. 어찌 이 사실로 50년 후 오늘의 부활을 설 명할 수 있겠는가? 젊은 세대는 좌익이라는 포부를 일찍이 버렸는데, 뼛 속으로부터 과거를 계승하고자 해도 개방적으로 현실을 마주할 수 있겠 는가? 그리고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타이완 좌익의 역량은 가장 부족한 데, 이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하간 이 지역에서 아직 개방되지 않은 좌익 역사라는 금기는 고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상호 연결된 것이 다. 모두 전 지구적이고 권역적인 냉전의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민족국가라는 틀을 넘어서서 인민운동이 경계를 넘는 연계를 이루려면, 반드시 봉인된 공통의 역사를 다시 열어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에 이르 는 역사적 전환점을 충분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인도네시아 내부의 역사적 궤적에서 보면 1955년 반둥회의와 1965년 대학살은 내재 적 연속성을 갖는다. 60년 후에 반둥으로 되돌아가려면 두 가지 역사적 중대 사건의 불가분성을 반드시 정리하고 마주하면서, 권역사와 세계사 에서 그것들이 갖는 의의를 다시 확정해야 한다. 반둥이 남긴 자산 혹은 이른바 반둥정신은 좌익 사상이 독점한 1955년 반둥이 표시하는‘제3세계 민족주의’ 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반식민, 반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주의 정신이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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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에서 형성된 민족주의는 강렬한 국제주의 색채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양자의 운동이 만들어낸 긴장 속에 더욱 넓은 제3세계 전/식민지 사이 단결의 상상이 존재했고, 이는 좌우 의 격절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60년 후의 오늘날 볼 수 있는 것 은 민족주의가 민족국가 내부로 위축된 모습이고, 국제주의적 단결과 연 대의 요소는 퇴장한 상황이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세계를 향 해 발언하고 있다. 오늘 반둥을 재조명하면서 우리가 반드시 참조해야 할 것은 아프리카에서 오늘까지 의연하게 인민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범아프리카 민족주의Pan-African nationalism다. 이 민족주의가 지 칭하는 것은 아프리카의 개별 피식민자가 분리되어 형성된 민족국가가 아니라, 민족국가가 식민자의 발명품이고, 아프리카가 단결하지 못한다 면 각 민족국가의 독립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족주의는 범아프리카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되 지 않으며, 그래서 아프리카를 하나의 전체로 제기하면서 독립과 자주의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다.29) 바로 이 때문에 범아프리카주의는 간단한 권 역주의가 아니라 동시에 국제주의이다. 만약 민족주의가 역사적 산물이 고, 그것이 인민운동 속에서 거대한 작용을 한다면, 민족주의이면서 국 제주의인 측면을 어떻게 열어내어‘제3세계 민족주의’ 를 다시 구성하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연대를 상상하는‘제3세계주의’ 를다 시 제출할 것인가? 이는 반둥 60년이 우리를 향해 호소하는 바이며, 이 를 계기로 민족국가를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비로소 각지 에서 내부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곤경을 타파하여 더욱 넓은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계속 전진할 것인가가 급선무인데, 아제서원의 동인

29) 범아프리카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토론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Thandika Mkandawire (ed.) (2005), African Intellectuals : Rethinking Politics, Language, Gender and Development, Dakar:CODESRIA Books, and London:Zed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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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아시아’ 의 연장선 상에서 계속해서 제3세계적 시각을 세워내야 할 뿐만 아니라, 지식체계 사이의 참조와 관련해서 코데스리아, 라틴아메리 카사회과학위원회, 아랍사회과학위원회를 참고 및 학습의 대상으로 삼아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아시아의 하위 권역 사이의 지식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만 점차 형성되는 플랫폼 기제와 지식 연대 네트워크를 통 해 불필요한 여러 가지‘내부’ 적 정서 제약을 극복하고, 내부에서 은폐되 었거나 토론할 수 없었던 문제를 서로 열어내어 개방적이고, 해석력을 가지며, 해방적인 지식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이베이(臺北)의 하늘… 타이완에 살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막막함을 갖는다. 역사적 교착으로 인해 타이완은 제3세계 의식을 가질 기회를 놓쳤고, 1949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진영 쪽으로 편입되어 중국 대륙과‘한적불양립(漢賊 30) 의 극단적 상호 대립 관계가 되었고, 중공/대륙이 존재하는 한 웚싓쒩)’

국민당 통치하의 타이완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1955년 반둥회의에는 미국의 파괴 공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대표로 했던 중국이 제3세계의 지지를 통해 세계 무대로 복귀하기 위해 내딘 큰 걸음도 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전(前) 식민지가 함께 건설하고자 했던 연대 네트워크를 마주하면서 타이완은 그 안에 참여할 계기를 상실 했을 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자기 정체성까지 폐기해버렸다. 마치 냉전 적 대치 속에서 왼쪽 눈을 뽑힌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세계적 범 위에서 전식민지의 연대와 정체성 획득이라는 차원의 시야를 결여하고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강권에 종속적인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다. 물 30)‘한적불양립(漢賊웚싓쒩)’ 은 제갈량의『후출사표(後出師表)』 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서‘한 (漢)’ 은 촉한정권이 한조(漢朝) 정통을 계승했음을 말하고,‘적(賊)’ 은 조위(曹魏)정권을 말한 다. 1949년 중국국민당이 집권하는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이전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중화인 민공화국이 유엔의‘중국’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나온 구호 가운데 하나다. [옮긴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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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1970년대 중반부터 산발적인 노력이 부단히 출현했지만, 40년 동안 타이베이의 비판 그룹은 이와 같은 결석 상황이 사상계에 초래한 맹목성 을 직시하지도 진지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타이베이의 하늘이 이토록 친 미적이고, 친일적이며, 반중국적인 것은 그것의 구체적 표현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우리는 타이베이 포럼을 계기로 젊은 세대들이 역 사적 반둥을 이해하여 차츰 제3세계적 눈을 생성할 수 있도록 땅에 물을 대는 시도를 했다. 그래서 이번 포럼은 기획상 앞서 언급한 활동과 달리 주 발표자를 작업 소조의 젊은 구성원들로 했고, 그녀들의 학습이 중심 이 되어 보고를 진행했다. 닐라 아유 우타미Nila Ayu Utami는 1955년 반둥회의가 출현한 동력과 궤적에 중점을 두어, 인도네시아 자신의 역사 적 조건을 기점으로 삼았다. 궈자(郭佳)는 이어서 전후의 국제 환경을 펼 쳐보였고, 인도네시아 안팎에서 회의가 만들어낸 유형 및 무형의 효과를 제시했다. 그후 우리는 1980년대 중반『인간잡지』 에 참여하였고, 훗날 오랜 시간 민중 연극에 투신한 중챠오(鍾喬)를 초청해서 타이완 전후에 이미 출현한 바 있는 제3세계 사상 자원을 회고했고, 그가 직접 참여하 고 관계한 구체적인 일과 인물을 통해 현재와 다시 접속하고자 했다. 농 민운동에 참여한 소조 구성원인 천잉언(陳瑩恩)은 이번 가룻 지역 탐방 후 인도네시아 농민연맹 조직에 대한 인식을 보고했고, 나 자신은 이번 연속 활동 속에서 학습한 내용과 체험에 대해 회고했다. 포럼 이튿날 오 후에 오랜 기간 성과를 축적한 음악인 왕망후이(王明輝)가 참가자들을 1970년대 이후 태국의 정치운동이 배태한 구체적이고 방대한 영향력을 갖는 민중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와 같은 포럼이 타이완에서 계속되 어, 제3세계적 시야를 열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저 씨앗 을 뿌리는 마음으로 계속 노력할 뿐이다.

오키나와 기지 투쟁의 일상생활화 11월에 나하(那 )에 도착했을 때,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키나와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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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상태’ 에 처해 있었다. 아베정권은 현지 민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지 건설 작업을 밀어부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운동은 투쟁 동 원 상태로 진입했고, 새로운 기지 건설 예정지인 헤노코(邊野古)는 다시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13일 밤 니시마치(西町)의 어느 피난소에서 운 동 조직가인 오카모토 유키코(岡本由希子)와 다시 만났다.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에 외부 세력이 상당합니다. 미국과 일본이 함께 동아시아 권역 내에서 패권을 행사하는데, 만약 이번 투쟁에서 패배하면 장기적으로 어 떤 결과가 있을까요?” 그녀가 답했다. “우리는 이기고 지는 문제는 한번도 없었어요. 투쟁은 일찍부터 일상생 활화 되어 있죠.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계속 투쟁할 거예요! 이게 오키나 와의 실제 상황이죠. 승리와 패배를 계산하지 않는 오키나와 정신입니 다.” 이번 오키나와 포럼이 전개되는 방식은 미술 실천을 매개로 오키나와 미술관 겸 박물관에서 오키나와의 전후 미술사와 조우하는 것이었다. 아 제서원의 나하 사무실 책임자인 와카바야시 치요(若쐹千代)는 이번 기회 에 동아시아 각지에서 미술 연구를 하는 친구들을 초청해서, 타이완의 우야오중(吳耀忠), 오키나와의 타이라 고시치(平싗孝七), 그리고 중국 대 륙의 농민 연화(年畵) 및 공산당 혁명시기의 촬영팀 등등, 구체적으로 일 군의 예술가 작품을 놓고 토론하고 비교했다. 이와 같이 각지의 사상적 배경이 갖는 서로 다른 풍모를 퍼즐 맞추듯이 대조해서, 앞으로 미술을 매개로 권역적 비교를 진행할 계기를 열기도 했다. 마지막 세션은 반둥에 관한 원탁토론이었는데, 오랜 친구 백원담이‘아 시아의 아시아’ 와‘아시아 속의 제3세계’ 라는 의제를 제출했던 점이 특 기할 만하다. 이는 사상적 층위에서 초기 국가 지도자(네루, 수카르노, 마오쩌둥 등) 사이의 연대와 그것이 추동한 민중운동의 연합, 그리고 권 역 내 자본운동이 현재 일상생활에서 형성하는 음악세계의 연동을 새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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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발굴하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측면과 조각들을 새롭게 연결시킬 때, 반둥의 현실적 의의가 새롭게 부상하는 법이다. 발걸음이 여기에 다다르면서 가장 강렬한 느낌은 이런 것이었다. 반둥 회의는 지금은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영향을 당시에 확실히 만들어냈 고, 그 전파력은 수많은 구석진 곳에 있던 그 시대 사람들 마음속에 퍼졌 으며, 서로 다른 형식을 갖는 크고 작은 동력으로 전화되었다. 그 시대 사람의 쇠락에 따라 반둥 효과는 점차 흩어져버리는 것 같지만, 유령과 같이 불시에 서로 다른 면모를 가지고 부상하는 듯하다. 기이한 것은 그 것이 어떤 향수(鄕愁)를 만드는 것은 아닌데, 또한 확실히 의탁의 대상이 되며, 영원히 도달할 수 없고, 완성할 수도 없지만, 또 내던져버릴 수 없 는 진행형으로 일찍이 그것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적 어도 지식인에게 이는 완성되지 않은 지식계획이며 사상방안이다. 그래 서 이를 놓아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세계사로 통하는 해석력 있는 지식 경로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노력할 뿐이다.

선행자 샘 모요 교수를 기리며 지난 1년의 여정에서 많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앞으로 함께 일하 고 여러 계획을 추진할 준비도 했다. 그 가운데 짐바브웨의 샘 모요Sam Moyo와 우간다의 마흐무드 맘다니도 포함된다. 이들은 친밀한 전우이 자, 코데스리아의 전임 및 후임 주석이기도 하다. 11월 22일 마흐무드에게서 샘이 당일 인도 델리에서 교통사고로 세상 을 떠났다는 뜻밖의 짧은 편지를 받았다. 지난 연락 기록을 살펴보니 마 지막으로 샘과 편지를 주고 받은 기록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앞으 로 아제서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상계 사이의 소 통 통로가 되어야 하는지와 관련한 자문을 구했다. 편지를 보낸 후, 곧 샘에게서 회신이 왔다. 그는 실행 가능한 일련의 작업 목록을 열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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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여름학교 및 대학원생 교환 등 당시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심화 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와 관계된 몇 권의 책의 중문 번역 등과 같은 구체 적인 사업도 제안했다. 마흐무드도 회신에서 번역 작업은 쌍방향이어야 하고, 아마도 우리가 작은 범위에서 일정한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 야 하는데, 그가 담당하고 있는 마케레레Markerere 사회연구소가 장소를 제공할 의향이 있다고 했었다. 샘은 홀연히 떠났다. 우리는 일련의 계획을 천천히 추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지원이 없어졌으니, 정말이지 그의 생각을 얼마나 추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세간의 일들은 종종 이렇다. 추진력을 가진 사람이 없어지면 마땅히 진행되어야 할 일도 멈춰버린다. 그러나 그를 애도하는 가운데 가능한 만큼이라도 그가 오랜 기간 보여준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의지를 이어받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조직해낼 수 있을 것이 다. 샘은 새로운 친구다. 아제서원에 참여하는 친구들은 2015년 4월 항저 우 회의에서 그와 처음 만났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그는 의기투합하여 급속도로 신뢰 관계를 형성하여 함께 일하는 좋은 동지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이고 쾌활하며 성실했다. 특히 현장에 대한 반응력이 강했는데, 이미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온화하고 점잖았으며, 절 대 남의 기를 죽이지 않았다. 게다가 맥주와 담배를 사랑했던 그는 회의 장 안팎에서 아주 빨리 사람들의 존경과 우정을 얻었다. 아마도 그는 세 계 각지의 학술활동에 참가하면서도 이번 항저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주 단출하게 기내에 가지고 탈 짐만 가지고 다니면서 몸이 땅에 닿자마자 상당한 시차를 극복하고 즉시 작업을 개시하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 었을 것이다. 이번에 항저우 포럼에 그를 초청했을 때도 시간이 촉박했 다. 그는 바쁜 와중에 서슴없이 도움을 줬다. 코데스리아를 대표해서 출 석하여 회의에서 매우 힘든 주 강연과 논평 역할을 맡아줬다. 그는 아주 굳은 의리를 가지고 협조해줬고,‘아프리카에서 중국’ 에 대한 사유를 담 은 글을 남겨 대학자로서의 품격과 기세를 보여줬다. 회의 중의 식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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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서, 그리고 시후(西湖)의 차밭과 상샨(象山) 일대를 탐방하던 자리에 서 우리는 그가 가진 깊고 넓은 지식과 민중 생활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인상 깊은 그의 유머감각까지 알 수 있었다. 항저우를 떠나 짐바브웨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먼저 나서서 우리 아제 서원의 구성원이 (앞에서 언급한) 6월 초에 열릴 코데스리아 3년 주기 대 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초청했다. 한달 반 후 이케가미 요시히코와 나는 세네갈의 다카에 도착했다. 이때의 샘이 주인이 되어 아프리카에서 처음 방문한 아시아인을 환영해줬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인 6월 7일 초저녁 그의 여관에서 우리는 심도 깊은 인터뷰를 진행했다.31) 샘은 매우 성찰적 으로 1970년대 이래 코데스리아의 형성을 분석했고, 흔쾌히 우리에게 조 직의 중요 인물을 소개해주어서 남은 회의 기간 동안 여러 방면에서 인 터뷰를 진행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5일 동안 지 속된 밀도 있는 회의를 통해 외부자로서 우리는‘아프리카 사상계’ 의방 대한 성취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이 단체는 1973년부터 지금까지 운영되어오면서 샘 모요와 같은 재능 있고 중량감 있는 학자를 양성했고, 동시에 샘은 그와 다른 세대에 속하 는 동지들과 사심없이 전심전력으로 참여하여 상호 신뢰를 갖는 지식 그 룹을 형성했다. 이는 아프리카의 다음 세대 지식인에게 더욱 풍부한 토 양으로 남을 것이었다. 과거 40여 년 간 코데스리아가 초국적의 민간 학 술사상 단체로서 견지해온 범아프리카주의는 점차 아프리카의 현대적 지 식 전통을 형성하고 있고, 민간과 국가의 경계와 장애를 넘어 아프리카 각지의 첨예하고 곤란한 문제에 대해 분석할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지 식 그룹과도 대화와 개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샘의 적극적인 초청은 우 리가 이와 같은 관통적인 지식 방식과 사상 플랫폼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줬다. 이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존재하지 않

31) Kuan-Hsing Chen and Ikegami Yoshihiko(2016)“CODESRIA as a Pan-African Intellectual Community:An Interview with Prof. Sam Moyo” ,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17, no. 1.

황해리포트│반둥/제3세계 기행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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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비록 코데스리아 또한 자신이 형성된 역사적 조건과 과정이 있음 을 이해해야 하지만, 이와 같은 계발이 바로 우리가 아프리카 지식계에 게 배울 부분인 것이다. 샘 모요 교수가 남겨준 우의는 아시아에서 생활하면서도 다행히 그와 작업 동료가 된 우리 동인들에게 평생 소중히 간직할 정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남겨놓은 유산, 즉 제3세계 3대주를 넘어 서는 집단 작업방식은 그가 대표하는 사상적 특징이자 지식 노선이다. 이는 우리가 이어받아 견지해나가야 할 방향이다. 만약 우리가 아직 완 성하지 못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사상 계획을 계속할 수 있다면, 샘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리라고 믿는 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축적된 여정의 기록을 샘 모요에게 헌정한다. 앞 으로 우리가 계속 채찍질하며 전진하는 길 위에서 그가 안식하기를 바란 다. 2015년 12월 22일 신주 바오산(新竹寶山)에서 *원고 정리를 도와준 궈자(郭佳), 린자쉬안(쐹家瑄), 쑤수펀(蘇淑芬)의 도움에 감사한다.

陳光興. 대만 교통대 교수. 번역:延光錫.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 1977년생.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세신(世新) 대학 사회발전연구소 사회학 석사, 대만국립교통대학 사회문화연구소 박사 수료. 주요 역서『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다르게 쓴 역사)』상/하(한울, 2012). gsye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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