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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그대에게 다가올 때 1 1820 년 런던. “제기랄, 제기랄. 이런 빌어먹을 일이!” 바람에 실려오는 욕설 소리에, 선상 파티의 모든 손님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템즈 강 한가운데 닻을 내린 요트 위에서 벌어지는 조지 왕을 위한 파티. 지금까지 파티는 지루하지만 위엄 있는 분위기 속에서, 모든 파티 참석자가 왕의 아름다운 요트를 위무적으로 칭찬해대고 있었다. 무늬를 넣은 가구와 고급 마호가니, 수정 방울들이 매들린 샹들리에, 금을 입힌 스핑크스 조각, 구석구석에 배치된 반짝이는 사자 상. 이 요트는 물위에 떠다니는 기쁨의 궁전이다. 내빈들은 지루한 현실에서 벗어나 생활의 행복을 느끼기 위하여 얼큰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국왕의 건강이 좋았다면 분위기는 더 흥겨웠으리라. 하지만 최근 국왕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자신도 관절염으로 몸이 고통받고 있어서 국왕은 평소와는 달리 우울해 있었다. 국왕은 쓸쓸함을 달래줄 만한 웃음과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이 선상 파티에 릴리 로슨을 특별히 초대한 것이라 말이 떠돌았다. 로슨 양이 분위기를 사로잡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녀는 여전히 생기발랄했다. “누가 저것 좀 잡아 줘요! 파도 때문에 계속 떠밀려 간다구요!” 경쾌한 웃음 소리 사이로 릴리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핑곗거리가 생기자, 신사들은 소란의 현장인 뱃머리로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릴리는 난간 위로 몸을 내민 채 물 위로 떠내려가는 물건을 안타깝게 쳐다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자가 바람에 날려갔어요!” 그녀는 섬세한 손가락으로 그 물체를 가리켜 보이고, 자신에게 몰려든 찬미자들을 향해 돌아섰다. 남자들 모두 점잖은 위로의 말을 떠벌렸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모자를 찾는 것이었다. 그녀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남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누구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제 모자를 찾아 주실 분이 안 계신가요?” 리리는 일부러 모자를 날려보낸 것이다. 몇 명의 남자는 그런 의심을 했지만, 그래도 저마다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나에게 시켜주시오” 한 남자가 모자와 코트를 벗어 던지는 시늉을 했다. “아니, 나에게 그 특권을 허락해 주십시오!” 서로들 나서대며, 릴리의 호의를 얻으려고 안달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물살은 꽤나 요동이 심했고, 일단 찬 강물에 들어갔다 하면 치명적인 감가에 거리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완벽하게 재단된 값비싼 옷들이 망가지게 될 것이었다. 릴리는 자신이 일으킨 소란을 지켜보며 재미있는 듯 미소지었다. 행동보다는 말을 더 좋아하고, 말만 앞세우는 남자들이 제각기 용감한 척 떠들어댔다. 진짜로 모자를 찾아올 생각이 있었다면, 누구든지 벌써 강물로 뛰어들었지, 저렇게 입으로 나불거리지 않으니까. “볼 만하군”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누군가 앞으로 나서서, 이런 웃기지도 않는 모자 소동을 집어치우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를 존경할 것이다. 하지만 감히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데릭 크레이븐이 여기 있었다면 그녀를 비웃거나 아니면 우스꽝스러운 몸짓 한 번으로 그녀를 웃겼을 텐데, 데릭과 그녀는 둘다 게으르고 형식만 차리는 사교계 인간들을 경멸하였다. 릴리는 한굼을 쉬며 다시 강물로 관심을 돌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짙은 회색으로 찰싹대는 물살, 봄철의 템즈 강은 지독히 차가우리라. 그녀는 얼굴을 치켜들고 마치 애무받는 고양이처럼 바람을


맞았다. 그녀는 머리가 바람 때문에 일시적으로 펴졌다가 다시 보통의 무질서한 곱슬거림으로 변했다. 그녀는 이마에 묶은, 보석이 박힌 리본을 풀면서 요트 옆에 와 부딪히는 파도를 흘긋 쳐다보았다. ‘엄마’ 작은 속삭임이 들린 것 같다. 릴리의 몸은 흠칫 움츠러들었지만,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문득 그녀의 목을 감는 보송보송한 팔과 무릎에 내려앉는 아기의 몸이 느껴지는 듯했다. 목덜미에는 이탈리아의 태양이 뜨겁게 닿았고, 연못 위를 헤엄치는 요란스런 오리들의 꽥꽥거림이 들려왔다. 릴리가 아기에게 속삭였다. ‘아가야, 저기 오리들 좀 봐. 우릴 초대하는 것 같구나!’ 작은 소녀가 몸을 꿈틀거리며 통통한 손가락 하나로 뽐내며 걷는 오리들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두 개밖에 나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는다. ‘와’하는 감탄사에 릴리도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아가야, 우리들이 아주 예쁘구나. 저 녀석들에게 줄 빵을 어디에 놨더라? 어머나 이런, 내가 깔고 앉았네’ 다시 한 번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그 즐거운 영상을 몰아냈다. 촉촉한 눈물이 느껴지면서 가슴속이 온통 고통으로 뒤틀렸다. “오, 나의 아기 니콜” 이런 고통을 없애려고 술이나 도박, 잡담이나 사냥 등을 해도 그서은 일시적인 도피일 뿐이었다. 아이를 보고 싶었다. ‘내 아기, 어디 있는 거니? 널 찾아낼 거야. 엄마가 갈 테니 울지 마라, 아가야, 울지마“ 그 절망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이 가슴을 후벼파는 칼날이엇다. 당장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지경이엇다. 그녀는 고음으로 깔깔 웃고는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 모자의 분홍 깃털은 물 속으로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내 불쌍한 모자가 가라앉으려고 해”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난간 위로 다리를 걸쳤다. “기사도 정신 좋아하네, 내가 직접 건져내야겠어!” 누군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는 요트 위에서 뛰어내렸다. 강물 속으로 풍덩 들어가자 파도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여자 하나가 비명을 질렀고, 남자들은 일렁이는 물위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맙소사”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나머지는 너무나 놀라 입도 열지 못했다. 시중에서 그 돌발 사태를 들은 국왕까지 달려나와, 난간 위에 육중한 몸을 걸친 채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최근 그의 애인이 된 레이디 코닝엄도 그의 옆에서 놀라운 감탄사를 토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죠. 저 여자는 미쳤다고! 하나님 맙소사!” 릴리는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물 속에 머물렀다.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사지를 마비시키며 혈관 속 피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묵직하게 물을 먹은 치미가 그녀를 차가운 어둠 속으로 끌어내렸다. 별로 어렵지 않군, 그녀는 멍하니 생각하였다. 그냥 이대로 밑으로 빠져버리면 한없는 어둠이 있겠지. 하지만 불현듯 두려움이 생겼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날개짓을 하며 물 위의 한 줄기 빛을 향해 헤엄쳐 올라갔다. 그 사이 손목에 스치는 흔뻑 젓은 벨벳 덩어리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물 위로 떠올라, 눈을 깜박이며 입술을 핥았다. 차가운 가시 바늘 같은 냉기가 온몸을 콕콕 찔렀다.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히며 그녀는 요트 위에 놀란 얼굴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씨익 웃어줬다/ “해냈어요!” 그녀가 모자를 흔들어 보였다. 잠시 후, 릴리는 여러 명의 손에 이끌려 요트 위로 끌어 올려졌다. 젖은 드레스가 몸에 착 들러붙어 날씬한 몸매가 유감없이 드러났다. 사람들 사이로 감탄사가 번졌고 여자들조차 부러움과 질시가 뒤섞인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런던의 어떤 여자도 남자들에게서 이 정도의 찬사를 받지 못했다. 다른 여자가 이런 천박한 행동을 했다면 동정과 경멸만을 받았을 텐데. “저 여자는 어떤 지독한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어. 그런데 왜 남자들은 저 여자한테 찬사를 보내는 거지?” 레이디 코닝엄이 큰 소리로 불만을 터트렸다. “저 여자는 벌꿀에 파리떼가 몰려드는 것처럼 스캔들을 몰고 다녀. 다른 여자였다면 수십 번도 더 나쁜 평판으로 망가졌을 텐데, 내 사랑하는 조지조차도 저 여자를 비난하지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레이디 윌튼도 똑같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남자들처럼 행동해서 그런 거겠죠. 도박을 하고 사냥을 다니고, 욕설도 퍼붓고, 게다가 정치 이야기까지 끼어 들잖아요. 남자들은 귀족 여자가 그렇게 남자처럼 행동하는게 특이한 거예요” “모양새는 완벽한 여자인데” 레이디 코닝엄은 젖은 드레스로 언뜻 보이는 우아한 몸매를 흘긋 쳐다보았다. 남자들이 릴리의 주위에 몰려들어 그녀의 과감한 도전에 박수와 찬사를 보냈다. 눈 위로 흘러내린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릴리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치마를 들어 꾸벅 절을 해보였다. “이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모자거든요” 이제는 망가진 천조각에 불과한 그 모자를 쳐다보며 그녀가 대꾸하였다. “이런, 이런. 당슨은 정말 검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오. 그렇지 않소?” 남자 한명이 감탄하며 소리쳤다. “그렇고말고요” 남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목과 어깨로 물이 흘러내리자, 그녀는 두 손으로 쓰윽 딱아내고는 머릴 열심히 흔들어 털었다. “누구 친애하는 신사분께서 저에게 순선을 갖다 주시지 않으래요? 마신 것도 한 잔 있다면 더 좋을 테구요”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꼼짝도 않는 한 사람의 모습을 알아채는 순간 그녀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녀의 주위로 수건과 뜨거운 음료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찾아보려고 남자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약간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남자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릴리가 천천히 몸을 세우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그의 대담한 시선을 맞받아쳤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왜 그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들의 갘탄스런 시선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차갑고 감정 하나 없는 경멸스런 표정은 익숙지 않았다. 릴리의 가냘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렇게 호색한 같은 외모에 완벽한 빛깔의 금발 머리는 본 적이 없다. 한줄기 바람이 그의 머리를 불어 넘기자 V 자연 이마선이 드러났다. 매처럼 귀족적인 얼굴은 대단히 엄격하며 완고해 보였다. 눈부시리만큰 연한 색의 눈동자 속에, 아주 오랫동안 고통받아 온 황량함이 깃들어 있었다. 쓰디쓴 절망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그런 눈빛. 그 이방인의 시선에 마음이 산란해지자, 릴리는 방향을 돌려 수선과 망토, 뜨거운 음료수를 들고 오는 찬미자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마음에서 낯선 남자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 저런 뿌루퉁한 남자의 찌푸림 따위가 무슨 상관이람? “로슨 양, 감기에 거릴까봐 걱정이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당신을 안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베닝턴 경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온통 이가 딱딱거려 음료수를 마실 수도 없는 릴리는 감사의 인가를 중얼거리며 새파랗게 질린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는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서둘러 주세요, 부디. 제, 제가 좀 너, 너무 충동적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이런 말을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마세요”


엄격한 자기 통제와 무슨 일에든 초연한 것으로 유명한 남자, 알렉스 레이포드는 화가 났다. 바보 같은 여자, 관심을 끌기 위해 자기 건강과 심지어 생명까지 내팽개치는 짓을 저지르다니. 그녀는 상류 사회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고급 매춘부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평판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알렉스는 불끈 쥐었던 주먹을 풀고 손바달을 코트에 문질렀다. 가슴이 탁탁 막혀왔다. 그녀의 카랑카랑한 웃음 소리, 생기 넘치는 시선, 검은 빛 머리. 맙소사, 그녀는 캐롤라인을 연상시켰다. “저 여자 만나 본 적이 없지, 아마?”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아버지와 친숙했던 노신사, 애블린 던셔 경이 그의 옆에 와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볼 때면 어느 남자든 그런 표정을 짓지. 그녀를 보고 있으면 한창 때의 솔즈베리 후작 부인이 생각나. 정말 대단히 정열적인 여자였지” 알렉스는 그 불꽃 같은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던셔 경을 쳐다봤다. “별로 감탄스럽지 않은 걸요” 그가 차갑게 대꾸하자, 던셔 경은 누런 이를 살짝 드러내며 키득거렸다. “내가 젊은 남자였으면, 틀림없이 그녀를 유혹했을 거야, 정말 그랬을 거야. 그런 여자는 이제 하나도 남지 않았거든” “그런 여자라니요?” “우리 시대에는 그런 여자들이 많았지. 그들을 길들이려면 기술과 열리함이 겸비되어야만 해. 아, 게다가 끝없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지, 유쾌한 문제들 말이야” 알렉스는 그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뽀얀 피부에 불같이 타오르는 검을 정도로 진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섬세한 얼굴. “저 여자 누구죠?” 몽롱한 꿈을 꾸듯이 그가 물었다. 아무 대꾸도 들리자 않아 시선을 돌렸을 때, 던셔 경은 이미 어디론가 사리지고 난 후였다. 릴리는 마차에 내려 그로스브너 광장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걸어 갔다. 정말 지독한 기분이다. “제대로 좀 처신해라.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한거니?” 그녀가 계단을 오르며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런던의 오갖 쓰레기가 버려지는 템즈 강은 수영하기에 전혀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물 속에서 나온 이후 고약한 냄새가 옷가지와 피부에 들러붙었고, 젖은 신발은 걸을 떼마다 삑삑소리가 났다. 그녀의 볼썽 사나운 몰골과 이상한 소리에 집사인 버튼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평소 그녀의 괴상한 행동에도 아무 표정도 보이지 않던 그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지난 2 년 간 집안 일을 맡아온 버튼은 하인에게나 손님에게나 언제나 똑같은 예의로 대우하였다. 방문객을 맞이하는 버튼의 흠잡을 데 없는 태도는 그 주인인 릴리가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어리석은 짓이나 모험 따위와는 상관없이 릴리를 완전히 레이디로서 대접해 주었다. 그녀의 행동은 거의 그렇지 않았음에도. 버튼의 위엄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면, 릴리는 자신의 하인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 했으리라. 크고 단단한 몸집에, 단정한 은빛 턱수염이 버튼의 엄격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영국의 어떤 집사도 그처럼 오만하면서도 공손해 보이는 이중성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선상 파티가 즐거우셨던 모양이군요, 아가씨?” “끝내줬어요” 생기발랄하게 말하려 애쓰며, 릴리는 축 늘어진 분홍 킷털의 흠뻑 젖은 벨벳 조각을 그에게 건넸다. 그가 멍하니 그 물건을 쳐다보았다. “내 모자예요” 그리고는 삑삑 소리를 내며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로슨 양, 응접실에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스탬퍼드 경입니다” “재커리가?” 재커리 스탬퍼드, 지적이며 감수성이 예민한 이 젊은이와는 오랜 세월 동나 좋은 친구로 지내왔다. 후작의 셋째 아들인 그는, 릴리의 여동생인 페넬로페를 사랑하지만 로슨 가의 야망을 만족시킬 만한 부나 명예를 갖추지 못한 게 불행이었다. 릴리는 결혼할 마음이 통 없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지위를 상승하려는 부모님의 꿈은 페넬로페에게 온통 집중되었다. 서로 사랑하지도 않는 레이포드 경과 약혼하게 된 여동생이 가엾였다. 그 일로 인해 재커리는 고통받고 있었다. “얼마나 리다렸어요?” 릴리가 물었다. “세 시간쯤 됐습니다, 아가씨. 급한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릴리의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녀는 양쪽 계단 사이에 위치한 응접실의 닫힌 문을 흘깃 쳐다보았다. “급하다구요, 흐음? 당장 만나야겠군요. 야, 그를 위층의 내 개인 응접실로 모셔주세요. 난 이 젖은 옷들을 벗어야 하니까요” 버튼 집사는 무표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의 침실에 붙어 잇는 그 응접실은 가장 친한 친구들만을 만나는 곳이었다. 그 응접실로 초대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곳에 초대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알겠습니다, 로슨 양” 재커리는 기다리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마음이 흥분된 상태이긴 했지만, 이곳은 남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구속이 있다. 색채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요즘 유행하는 파스텔 톤으로 잔잔한 푸른 빛이나, 밝은 분혼, 또는 노란색으로 벽을 칠해 놓았다. 매끄러운 쿠션을 댄 금박 입한 의자들과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보이는 얇고 세련된 다리가 붙은 소파들은 보기만 해도 불편했다. 하지만 이곳은 견고한 가구와 따뜻한 색채로 장식이 되어 있다. 벽에는 사냥하는 그림과 조각물 그리고 점잖은 초상화 몇 점이 걸려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는 작가나 괴짜들, 세련된 멋쟁이들이나 정치가들이 자주 모임을 가졌고 그때마다 릴리가 제공하는 술의 양은 항상 들쭉날쭉했다. 때로는 풍족하게 내놓았고 때로는 터무니없이 적게 내놓았다. 이번 달에는 창고에 잘 비축해 놓았는지, 하녀가 좋은 브랜디와 잔 하나를 갖다 주었다. 빳빳하게 다린 타임스 한 부와 달콤한 비스킷도 함께 내놓았다. 재커리는 차를 부탁한 다음 편안한 기분으로 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비스킷을 다 먹었을 무렵, 버튼이 문을 열었다. “그녀가 도착했나요?” 재커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슨 양이 위 층에서 만나시겠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재커리는 집사를 따라 구불구불한 계단을 올라갔다. 작은 응접실안에는, 대리석 벽난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잔잔하게 초록과 청동색이 섞인 푸른 실크 벽지를 비추었다. 잠시 후에, 릴리가 침실과 연결된 문가에 나타났다. “재커리!” 그녀가 달려와 그의 두 손을 부여잡자, 재커리는 미소지으며 그녀의 볼에 예의바르게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가운 하나만 달랑 입은 그녀의 모습에, 게다가 긴 옷자락 밑으로 맨발이 힐끔 보이자 그의 미소는 굳어졌다. 목에 장식까지 달린 두꺼운 가운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속옷과 다름없는 옷차림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템즈 강에 빠진 그녀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마저 맡은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여전히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숱 많은 속눈썹 밑에 자리한 눈동자는 깊은 갈색이었다. 그녀의 뽀얀 피부는 반질반질하게 운기가 났고, 어깨로 흘러내린 목선은 섬세하고 순결해보였다. 지금처럼 살며시 미소지을 때면, 그녀의 입술은 천사처럼


달콤하게 휘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순진한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재커리는 그녀가 세련된 멋쟁이들을 고상하게 모욕하는 것부터, 도둑질을 하려던 소매치기에게 상스럽게 고함치는 모습까지 다 보았다. “릴리?” 다시 한 번 콧속으로 들어오는 역겨운 냄새에 그는 코를 찡그렸다. 그의 표정에 그녀가 웃으며 두 손을 휘저었다. “목욕부터 하려다가, 당신이 급한 일이라고 해서 먼저 나왔어요. 지독한 냄새를 풍겨 미안해요. 오늘은 템즈 강에 유난히도 고기가 많더라구요” 그가 그녀의 옷차림, 아니 옷차림이라고 부르기도 미망한 가운 차림을 불편한 듯 가리켰다. “먼저 옷을 갈아입는 게 낫지 않을까요?” 릴리가 다정한 미소를 보냈다. 재커리에게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절대 별하지 않을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와 감수성 풍부한 얼굴, 단정하게 빗질한 머리, 그 모든 것이 교회를 가기위해 차려입은 말 잘 듣는 사내아이를 연상시켰다. “오, 그러지 말아요. 난 완벽하게 다 가렸어요. 그런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요, 재커리. 예정에 나에게 결혼 신청을 한 적도 있잖아요” “아, 그래요. 음” 재커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청혼은 말이 나온 즉시 거절당해서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당신과 파혼을 하기 전까지 해리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지요. 그가 당신을 비열하게 버렸을 때,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신사로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릴리에게서 코웃음이 새어나왔다. “자리를 메꾼다구요? 재커리, 그건 약혼이지 무슨 결투가 아니에요” “당신은 내 청혼을 거절했어요” “이봐요, 청혼을 승낙했다면 난 해리를 비참하게 한 것처럼 똑같이 당신도 비참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나 때문에 그이가 날 떠난 거라구요” “그게 그렇게 불명예로운 행동을 할 핑계는 안 됩니다” 재커리가 뻣뻣하게 대꾸하였다. “하지만 난 그가 그렇게 행동해서 기쁘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괴짜 숙모와 세계를 여행하지도 못했을 테고, 속모가 나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난......” 릴리가 말을 멈추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난 인생의 무덤인 결혼을 했을 거예요” 그녀가 미소지으며 불 앞에 자리를 잡은 다음 그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하였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건 상처난 내 마음뿐이었죠. 하지만 당신의 청혼은 친절한 호의로 기억하고 있어요. 날 위해 그렇게 숭고하게 행동했던 남자는 없었으니까요. 솔직히 그때가 유일했죠.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 나와 결혼하려 했어요. 내 구겨진 자존심을 구해 주기 위해서” “그래서 지난 몇 년 간 날 친구로 생각한 거가요?” 재커리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난 항상 우아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당신이, 왜 날 친구로 생각해 주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오, 그래요. 난봉꾼, 부랑아, 도둑, 내 친구들은 정말 다양해요. 정치인이나 왕족도 물론 끼어 있구요. 하지만 내가 아는 남자 중에서 당신이 우일하게 점잖은 사람이에요” “난 점잖은 것하고 거리가 멀어요” 그가 우울하게 내뱉었다. 릴리는 영원한 이상주위자인 재커리를 이토록 수심에 잠기게 한게 무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스스로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 “재커리, 당산에게 훌륭한 자질이 많이 있어요. 당신은 매력적이고......”


“하지만 잘생기지는 않았아요” “지적인데다......” “하지만 영리하지는 않아요. 재치도 없구요” “영리함이란 흔히 사악함과 동반되는 거예요, 당신이 영리하지 않다는 게 난 기쁜 걸요. 이런 얘기 그만하고, 당신이 왜 왔는지나 말해봐요. 내 동생 페넬로페 때문이죠, 그렇죠?” 재커리는 그녀의 불꽃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동생과 부모님은 지금 레이포드 파크에서 레이포드 경과 같이 있어요, 결혼식을 준비하겠죠” “결혼식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릴리를 탁탁 타오르는 불길 앞으로 발을 바싹 내밀었다. “난 동생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내가 무슨 말썽이라도 일으킬까봐 공포에 젖어 있구요” 그녀의 웃음 소리에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릴리는 탄식했다. “당신의 과거는 사실 가족들에게 그다지 신뢰를 주게끔......” “그래요, 물론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녀가 가족과 대화를 나눠본 건 정말 오래 전 일이다. 견의 경홀한 행동으로 이미 몇 년 전에 가족과의 관계는 단절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반항적인 행동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이제는 주요한 게 아니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고, 부모님은 다시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겠노라고 경고하였다. 그 당시에는 웃어넘겼지만, 요즘엔 후회가 생겼다. 그녀는 슬프게 미소지었다. “난 사랑스러운 동생, 페니를 당혹스럽게 만들지 않을 거예요. 우리 가문에 부유한 백작이 생기는 일에 방해할 생각도 물론 없구요. 그건 어머니의 가장 소중한 꿈인데” “릴리, 페넬로페의 약혼자를 마나본 적 있어요?” “음, 만났다고 할 수는 없지요. 언젠가 한 번 슈럽셔에서 언뜻 보았을 뿐이에요. 키가 크고 과묵해 보이는 인상이었어요” “만약에 페넬로페가 그와 결혼한다면, 그는 그녀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 거예요” 재커리는 드라마틱하고 충격적인 말이 릴리를 자극할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그녀는 별로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재커리를 초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재커리, 우선 거기에 만약이란 없어요. 페니는 반드시 레이포드와 결혼할 거예요. 그 대는 부모님의 희망을 저버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죠” “그녀도 날 사랑해요!” “음 그래서 당신은 지금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황을 과장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절대 관장이 아니에요! 알렉스 레이포드는 그녀에게 잔인하게 굴 거예요.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난 그녀를 위해서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어요” 그는 멜로드라마에 빠진 젊은이였다. 하지만 그는 심각했다. “오, 재커리” “릴리는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어떤 사람이든 일생에 한번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은 그 특별한 감정을 일생에 한번 겪은 것만으로 충분히 배운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래 전에, 내가 페니를 달래서 같이 도망치라고 충고한 적 있을거예요. 그 방법이 아니면 그녀를 범해서 부모님이 결혼시킬 수밖에 없도록 만들라고도 조언했지요.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어요. 우리 부모님들은 당신보다 훨씬 더 얻을 게 많은 오동통한 비둘기를 찾아냈다구요” “알렉스 레이포드는 비둘기가 아니에요. 오히려 사자에 가깝죠. 당신의 동생을 평생토록 비참하게


만들 차갑고 야만적인 동물이에요. 그는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없어요. 페넬로페도 그를 무서워해요. 당신 친구들 누구에게든 물어 보라구요. 모두 다 나와 같은 얘기 할 거예요. 그는 마음이란 게 없는 인간이에요” 흠,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 그녀도 그런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릴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재커리, 별로 해줄 만한 말이 없어요. 난 내 동생을 사랑해요, 그 애가 당신과 행복해진다면 기쁠 거예요. 하지만 당신 두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답니다”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있잖아요. 당신은 내 입장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재커리, 내가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거 잊었어요? 내 말은 그들에게 먹히지도 않는다구요. 몇 년 동안 난 우리 가족에게 골칫덩어리 존재였어요” “제발......당신이 내 마지막 희망입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릴리는 재커리의 비통한 얼굴을 쳐다보며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작은 희망조차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녀는 벌떡 일어나 방을 걸어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재커리는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릴리, 당신의 동생이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 보세요. 힘도 자유도 없는 한 여자가 어떨지 생각해 보라구요.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하고......휴, 그게 당신 같은 강인한 여자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느낌이겠지만요” 갑자기 릴리에게서 냉소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릴리는 걸음을 멈추고 무겁게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에 서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서, 조롱하는 눈빛으로 그를 봤다. “내가 그런 느낌을 알 수 없을 거라구요?” “페넬로페와 나는 둘다 희망을 잃었어요. 누군가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우리가 걷는 이 험난한 애정의 좁은 길에게 바로 인도해 줄 사람이......” “이런, 대단히 시적이군요” “릴리, 당신은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나요? 사랑이란 걸 믿지 않나요?” 릴리는 고래를 돌리며 짧은 머리카락 몇 올을 잡아뜯고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요, 난 사랑 같은 건 몰라요” 그의 질문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젠 그만 그가 떠나주었으면, 절망적인 시선도 그와 함께 사라져줬으면......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모성애는 믿죠. 형제, 자매 간의 사랑과 우정도 믿어요.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연인의 로맨틱한 사랑은 본 적이 없어요. 그런 것들은 모두 질투와 분노, 끝내는 무관심으로 끝날 운명이지요” 그녀는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부디 다른 남자들처럼 행동하세요. 이익이 되는 결혼을 하고, 그 다음에 당신에게 사랑을 쏟는 애인을 만들라구요” 재커리는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이 몸을 움찔하였다. 마치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보며 그가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하는 악평에 신뢰가 생기는구요. 여기 온 거 미안합니다. 난 당신이 도와주리라 생각했어요. 최소한 위안이라도” “빌어먹을!” 릴리의 성질이 와락 폭발했다. 하지만 재커리는 움찔하면서도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릴리는 그의 소망이 너무나도 간절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말았으면 했다. 그녀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이마에 키스하였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요, 날 용서하세요. 난 이기적인 인간이랍니다” “아뇨, 아뇨, 당신은......”


“난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이에요. 하지만 당신을 도울 게요, 재커리. 난 항상 빚은 꼭 갚는 성격이에요. 당신에게 진 빚을 오랫동안 갚지 못했잖아요” 그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해로운 힘으로 방안을 돌아다녔다. 걸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광적으로 만지는 고양이처럼 손가락 마디를 부산하게 쓸어댔다. “이젠 생각을 좀 합시다, 생각을” 그녀의 갑작스럽 변화에, 재커리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레이포드 경을 만나겠어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상황을 판단할 거예요” “그가 어떤 인간인지 내가 벌써 말했잖아요”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해요. 만약 알렉스가 당신 말처럼 잔인하거나 지독하지 않다면, 난 당신 일을 돕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손가락을 엮어 위아래로 움직여댔다. 말고삐를 잡고 사냥터로 달려가기 직전에 숨을 가다듬는 것처럼. “당신은 돌아가요, 재커리. 결정이 되면 내가 알려줄게요” “그가 내가 말한 대로 냉혹한 사람이라면 어떡하죠? 그럼 어떻게 할 건가요?” 그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였다. “그럼 페니를 당신과 결혼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예요”

2. 하녀가 이브닝 드레스 한 벌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니야, 애니. 분홍 드레스는 안돼, 오늘밤은 좀더 화려하고 강렬한 걸로 입고 싶어” 릴리는 화장대 앞에서 계란형 거울을 들여다보며 흑단처럼 곱슬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목선이 깊이 패인 그 파란 드레스요?” 애니의 동그란 얼굴에 미소로 주름이 졌다.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런던의 세련된 패션 스타일을 황홀해 하였다. “좋았어! 그걸 입었을 때는 이긴 적이 더 많았어. 남자들이 카드에 신경을 쏟지 않고 내 가슴만 쳐다보거든” 내미가 킥킥거리며 그 드레스를 찾으러 나갔고, 릴리는 이마에 은과 사파이어가 박힌 가는 끈을 묶었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그 리본 위로 내려뜨렸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미소를 보냈지만, 그건 미소라기보다 일그러짐에 더 가까웠다. 요즘 그녀에게는 도전적인 미소가 사라졌다. 너무 오랫동안 짊어지고 살았던 긴장 탓인지도 모른다. 릴리는 우울해져 눈살을 찌푸렸다. 데릭 크레이븐과의 친분관계가 없었다면, 아마 훨씬 더 신경질적이고 완고한 여자가 되었으리라. 지금껏 만난 사람 중 가장 냉소적인 남자가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 주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교계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녀가 데릭과 연인 사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 추축이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다. 데릭은 여자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는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은 없었고, 앞으로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키스조차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일일이 말하고 믿게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은 함께 사냥을 다니고, 오페라 극장의 특별석에서부터 냄새나는 커벤트 가든의 술집까지 섭렵하고 다녔으니. 데릭은 릴리의 집에 가자고 요구한 적이 없었고, 그녀도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넘어서지 못할 어떤 선이 있었다. 릴리는 그런 관계가 편했다. 그는 그녀에게 괜히 접근하려는 다른 남자들을 막아 주기 때문이다. 냉정한 남자, 데릭 크레이븐의 비위를 감히 건드리려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 2 년 간 그녀가 데릭에게 감탄할 점은 강인하고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결점도 있다. 그년 감성이란 게 전혀 없었다. 돈만을 사랑했다. 그에게 동전의 짤랑거림은 어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소리보다 더 달콤하게 들리는 음악이다. 그림이나 조각 따위에도 흥미가 없었고, 그가 감탄하는 것은 주사위의 완벽한 형태뿐이었다. 그는 문화적인 고상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뼛속 깊은 곳까지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그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닐까? 그는 절대로 자기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조금 덜 이기적이고 감성적이며 친절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의 어린 시절이 임 그를 철저하게 망가뜨렸을 것이다. 언젠가 데릭에게 어린 시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하수관에서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려진 후 포주와 창녀들, 범죄자들이 그를 길러 주었고, 자라면서 그는 인생의 가장 어두운 면만을 보고 살았다고 했다. 조금 커서는 무덤을 도굴하여 돈을 마련했지만, 그런 일이 자신의 양심이 견디지 못하자 부두의 막노동꾼이 되었다. 구덩이를 파고 생선을 분류하는 등 돈이 될 만한 짓이면 무엇이든 했다. 아직 소년 티를 벗어나지 못했을 때, 어떤 귀족 여자가 마차 안으로 빈 술상자를 나르는 그가 유심히 지켜보았다. 너저분하고 때투성이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떤 점이 마음을 끌었는지 그녀가 그를 마차 안으로 불러 들였다고 했다. “거짓말”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이야기 중간에 불쏙 끼어 들었다. “사실이라구” 그는 자신의 아파트 벽난로 앞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앉아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까만 머리와 구릿빛 얼굴, 조각한 듯한 윤곽은 아니지만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다. 약간 튀어나온 하얀 이가 미소 지을 때면 사자와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어느 여자도 저항할 수 없을 만한 미소, 하지만 그 미소는 딱딱한 초록 눈동자에의 섬광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녀는 날 마차에 태워서 런던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남편은?” “지방에 가 있었어” “도대체 그 여자는 거리에서 주운 더러운 남자아이로 무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데릭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릴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믿을 수 없어, 데릭! 그건 말도 안 돼!” “우선은 날 목욕시켰지. 휴, 그 뜨거운 물과 단단한 비누, 너무나 달콤한 향기가 났어. 바닥에 양탄자를 깔아놓았는데 참 부드러웠지. 난 먼저 팔을 문질렀어. 내 피부가 그렇게 하얘질 수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어” 그가 피식 웃으면 브랜디를 홀짝였다. “난 방금 태어난 강아지 새끼처럼 몸을 떨었지” “그러고 나서 그 여자가 당신을 침대로 끌어들였고, 당신은 그녀를 경험해 본 중에서 가장 멋진 연인이 된 거로군” 릴리가 비아냥거렸다. “아니, 아주 지독했다는 것이 더 맞아. 여자를 기쁘게 만드는 법을 나이도 어렸던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저 나만 즐기는 법을 알뿐이지” “하지만 하여튼 그 여자가 좋아했겠지?” 릴리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언제나 어리둥절하기만 하였다. 무엇이 남자와 여자를 끌어당기는지, 그들이 왜 한 침대에 들고 싶어하고, 그렇게 고통과 당혹스러움, 즐거움이 하나도 없는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들이 여자보다 훨씬 더 그걸 즐긴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여자는 왜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같이 자려 드는 것일까? 그녀는 뺨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고, 데릭의 이어지는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자신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지 가르쳐 줬어. 나도 배우고 싶었고”


“왜?” “왜라, 음......대답하기 어려운걸” 데릭은 술잔을 기울이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였다. “어떤 남자든 그 짓거리는 할 수 있어. 하지만 여자를 즐겁게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 자신의 밑에서 부드럽게 편안하게 몸부림치는 여자를 보면 남자에게는 없던 힘도 생기는 거야, 알겠어?” 그가 릴리의 당혹스런 얼굴을 흘깃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당슨은 모르는 것 같군, 불쌍한 집시” “난 불쌍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그 힘이라 게 무슨 뜻이야?” 그의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여자의 꼬리를 제대로만 간지럽게 하면, 여자는 남자를 위해 뭐라도 하려 들지. 무슨 짓이든지” 릴리는 도대체 알 수 없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무슨 짓이라고? 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 데릭. 내 말은, 난 말이야, 음, 내가 경험한 건 전혀 그렇지 않았어. 주세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연인으로 알려져 있었다구. 모두들 그렇게 말했어” 데릭의 밝은 초록색 눈동자에는 조롱기가 가득하였다. “그 자식이 제대로 하긴 한 거야?” “내가 그 일로 아이를 임신했으니까, 틀림없이 제대로 한 거겠지” “한 남자가 천 명의 사생아를 가질 수 는 있지, 하지만 제대로 한 것과는 달라. 당신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거만한 자식, 릴리가 그런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사람들이 그 짓을 어떻게 하든 관심 없었다. 그게 즐거울 리는 전혀 없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피부에 닿던 주세페의 젖은 입술과, 숨막힐 듯이 내리누르던 그의 몸뚱이를 기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비참함과 고통으로 경직될 때까지 관통하던 그 고통과. “당신 이 정도밖에 안돼?” 주세페는 이탈리아어로 지껄이며 그녀의 온몸을 더음었다. 그 외설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한 손길에 그녀는 움찔하였다. “이런, 당신도 다른 영국인들과 똑같군. 생선처럼 차가워!” 남자를 믿지 말아야한 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배웠다. 하지만 주세페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남자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남자에게라도 다시 그런 일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치가 떨렸다. 릴리의 생각을 읽었는지, 데릭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의자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어깨 위로 두 손을 올리고 번쩍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릴리는 갇혀버린 듯한 느낌에 불편하게 움찔거렸다. “당신이 날 유혹하는군. 당신에게 그 즐거움을 가르쳐 주는 남자가 되고 싶어” 협박당하는 느낌이 마음에 안 들었다. 릴리는 그를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날 건드리지마, 이 건달아” “내가 원한다면 할 수도 있지, 당신이 그걸 좋아하게끔 만들 수 있어. 당신은 어떤 여자보다도 더 한바탕 뒹굴 필요가 있어. 하지만 당신을 가르치는 건 내가 아닐 거야” “어째서?” 릴리는 시큰둥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면 당신을 잃게 될 테니까. 언제나 그렇게 되는 법이지. 난 당신을 잃을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당신은 좋은 스승이 될 다른 남자를 찾아야 해. 만약에라도 내게 돌아오고 싶으면 난 항상 당신 옆 자리에 있다는 걸 알아둬, 언제든지” 릴리는 그의 얼굴을 의아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데릭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비슷한 감정의 표현이리라. 그는 사랑을 약한 감정으로 여긴다. 그리고 약한 것을 경멸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이상한 우정을 지속시키고 싶어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도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걸 지금 내게 애정 표현이라고 하는 거야?” 긴장된 분위기는 사라졌다, 데릭은 씨익 웃으며 그녀의 짧은 머리 가락을 헐클어뜨렸다. “좋을 대로 생각하라구, 아가씨” 재커리와 만난 날 저녁, 릴리는 데릭을 찾으러 도박의 궁전 크레이븐스로 향했다. 데릭은 알렉스의 대해 무언가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다. 데릭은 영국에 있는 모든 남자들의 자정 상태까지 꿰뚫고 있었다. 과거의 재정 상태와 스캔들, 앞으로 상속받을 재산, 현재의 채무 관계까지. 그들의 밝혀지지 않은 유언장의 내용뿐만 아니라, 애인을 두고 있는지 또 그 애인에게 얼마나 돈을 주는지, 명문 학교 이튼이나 해로우, 웨스트필드에서 그 아들들이 어떤 점수를 받았는지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연한 푸른 드레스를 갖춰 입고 있었다. 깊이 패인 가슴선에 장식된 레이스로 작은 젖가슴이 도드라져 보였다. 릴리는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지 않고 혼자서 크레이븐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녀의 존재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이젠 모두들 괴상하지만 익숙한 풍경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데릭이 크레이븐스에 출입을 허락하는 유일한 여자가 바로 그녀였다. 대신 그는 그녀에게 정직할 것을 요구하였기에, 데릭만이 그녀의 비밀을 훤히 알고 있었다. 방에서 방으로 돌아다니며, 릴리는 도박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이른 저녁의 풍경을 살펴 보았다. 식당엔 맛좋은 음식과 음료를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하였다. ‘비둘기들이군’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씨익 미소지었다. 그 말은 데릭이 자기의 손님들을 일컬어 부르는 명칭이었다. 물론 그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없지만. ‘비둘기들’은 무엇보다 먼저 런던의 가장 맛좋은 요리를 즐겼다. 데릭은 일년에 2 천 파운드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급료를 주고 고급 요리사를 고용했다. 식사 도중 제공되는 프랑스 산 와인과 라인 백포도주는 데릭이 감사의 표시로 손님들에게 공짜로 내놓은 서비스였지만, 그 술을 마시고 좀더 많은 시간 동안 도박을 즐기라는 듯이 담겨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손님들은 게임 룸으로 나갔다. 루이 14 세라도 집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 만한 고급스런 분위기, 스테인드 글라스, 거대한 샹들리에, 풍성한 푸른 벨벳과 현란하고 귀중한 예술 작품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값비싼 보석처럼 자리를 잡은 것이 바로 주사위 방이다. 그곳은 설레임이 담긴 조용한 일렁임이 항상 가득하였다. 팔각형의 방을 지나는 동안 아이보리색 주사위가 딸랑거리는 소리, 착착 펼쳐지는 카드 소리,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릴리를 잡아끌었다. 타원형의 주사위 테이블 바로 위에 램프 하나가 걸려 있어, 초록의 천과 노란 표지들에 환한 빛을 집중시켰다. 오늘밤은 독일 대사관 직원 몇 명과 프랑스의 망명자, 영국의 신사들이 주사위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열중한 모습에 릴리는 불쌍한 듯 혀를 찼다. 저마다 돈을 걸고 그 뒤에 규칙적으로 던지는 주사위 소리에 최면이라도 걸린듯했다. 한 번도 도박장에 와 보지 않은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엄숙한 종교적인 의식을 행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승산을 계산하며 초연하게 게임하는 것이 이기는 비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기기 위해 게임하지 않았다. 운명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는 스릴을 즐겼다. 릴리는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게임을 하기 때문에, 적당할 정도로 항상 판돈을 거두어 갔다. 데릭은 그녀를 ‘야바위꾼’이라고 불렀고, 그 말은 그에게 있어 대단한 찬사였다. 주사위 테이블을 관리하는 두 명의 하인이 릴리를 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주방 식구들도 포함한 데릭의 하인들과 잘 어울렸다. 요리사인 라바주 씨는 언제나 자신의 창조적인 요리를 내밀고 칭찬해 주길 기대하였다. 빵가루와 크림을 덮은 가재 요리, 감자 수플레, 개암과 버섯으로 채운 메추라기 요리, 과일 젤리를 듬뿍 넣은 오믈렛, 페이스트리, 으깬 마카롱을 켜켜이 쌓은 군침 도는 커스터드. 릴리는 데릭의 날렵한 모습을 찾아 주사위 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아치형 문을


나아가려 할 때, 문득 그녀의 장갑낀 팔꿈치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데릭이라 생각하고 미소를 머금고 몸을 돌려는데, 뒤에 선 남자는 데릭이 아니었다. 대사의 보좌관임을 표시하는 황금빛 표식을 단 스페인 남자였다. 그가 의례적으로 절을 한 다음에 대뜸 그녀의 소매를 붙잡았다. “당신이 알바레스 스페인 대사님의 관심을 끌었소. 갑시다, 그분은 당신이 오길 기다리고 계시오” 그의 손을 홱 뿌리치고 나서, 릴리가 그 대사라는 사람을 찾아보았다. 가느다란 콧수염을 한 통통한 남자가 그녀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다가 자가에게 오라는 듯 손짓하였다. 릴리는 다시 보좌관을 돌아보았다. “잘못 아셨군요. 알바레스 씨에게 관심을 가져주어서 감사하지만, 난 오늘 저녁 다른 볼일이 있다고 말씀드리세요” 몸을 돌리려는데 보좌관이 그녀의 손목을 와락 잡아챘다. “갑시다, 그 분이 사례비는 충분히 얹어 주실 거요” 분명 그녀를 크레이븐스의 창녀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길 가다가 하나 주운 창녀에게 하듯이 이런 대접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난 창녀가 아니에요. 파는 물건이 아니라구요, 알아듣겠어요? 이젠 이 손 놓으세요” 남자의 얼굴이 경직되며 무언가 스페인말로 떠들어댔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알바레스가 있는 테이블 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몇몇 손님들이 그 소동을 보려고 게임을 중단하자, 그녀는 짜증과 당혹감으로 워디를 잡아죽을 듯이 노려보았다. 데릭의 잔일을 도맡아보는 워디가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나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워디가 도착하기도 전에, 데릭이 갑자기 그들 옆에 나타났다. “흐음, 바레다 씨, 로슨 양을 만나신 모양이군요. 그녀는 참 아름답죠?” 데릭은 스페인 남자의 손아귀에서 교묘하게 릴리를 풀어내었다. “하지만 이분은 특별한 손님이오, 나의 특별한 소님. 대사님을 편하게 해드릴 다른 여자들이 많이 있소, 훨씬 더 달콤한 여성들이지. 그 쪽에 비하면 이쪽은 시디신 사과라고나 할까” “당신한테나 그렇지” 릴리가 데릭을 노려보았다. “대사님은 이 여자를 원하오” 남자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이 여자는 가질 수 없소” 데릭의 목소리는 태평스러웠다. 이 도박의 궁전은 데릭 자신의 왕국이었고, 그의 말은 곧 법이었으니. 스페인 남자의 얼굴이 불안해 보였다. 자신을 무시하려 드는 사람에게 데릭은 대단히 위압적으로 보인다. 데릭은 언제나처럼 고급스런 옷차림이었다. 파란 코트, 진주빛 바지, 얼룩 하나 없이 새하얀 셔츠에 넥타이. 하지만 그렇게 고급스런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데릭에게는 일평생 거리에서 고생한 사람만이 갖는 거친 면모가 공존했다. 데릭이 아름다운 두 명의 창녀들에게 손짓하자, 여자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대사에게 재빨리 다가가 풍만한 가슴의 계곡을 드러내보였다. “내 장담하건대, 대사는 저 여자들을 좋아할 거요. 벌써 치즈를 문 생쥐처럼 행복해 하는걸” 릴리와 바레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진짜 그의 말대로 여자들의 능숙한 몸짓에 알바레스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릴리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인상을 찌푸리고 나서, 그 사내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무례한 자식 같으니” 릴리가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내가 당신의 특별한 손님이라구? 난 보호자가 필요한 여자로 보이는 건 질색이야.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 그러니 이상한 의미의 말 따위는 하지 않으면 고맙겠어” “진정해, 성질 죽이라구. 그 자식이 당신을 끌고 가게 내버려 둘걸 그랬나?” “그게 아니라, 좀더 날 존중해 줄 수 있었잖아. 그리고 당신 대체 어디 가 있었던 거야? 당신과 얘길


하고 싶어서 온 건데” “난 당신을 존중해, 다른 여자보다 훨씬 더. 자, 이제 나와 산책이나 할까. 내 귀가 실컷 물어뜯길 일만 남았군” 릴리는 그 말에 어찌할 수 없이 웃어버리고는 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그는 그녀를 대단히 귀한 상품이나 되는 듯이, 도박장 안에 데리고 다니는 걸 좋아하였다. 입구의 홀을 지나 거대한 황금 계단으로 다가가면서, 데릭은 새로 도착한 클럽 회원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하였다. 밀라이트 남작과 네빌 백작이었다. 릴리도 밝은 미소로 환대하였다. “에드워드, 나중에 나와 같이 카드 게임 하셔야 해요. 지난주에는 내가 졌으니,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셔야지요” 네빌 경이 미소로 화답하였다. “받아들이지요, 로슨 양.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식당을 향하는 네빌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자치고 그녀는 꽤나 영리해” “저 남자 가죽까지 벗기지는 마” 데릭이 경고하였다. “어제 나한테 돈을 빌리려 했다구. 그 자 주머니는 당신 같은 야바위꾼을 만족시킬 정도가 못돼” “누구 주머니는 안 그런가?” “젊은 벤팅크 경을 한 번 시도해봐. 그 아버지가 빚을 다 처리해 주거든” 그들은 함께 웅장한 계단으로 올라갔다. “데릭, 당신에게 어떤 남자에 대해 물으로 왔어” “누구?” “알렉스 레이포드 백작” “당신 여동생과 약혼한 녀석이로군” “그래, 그 사람 성격에 대해서 안 좋은 얘기를 들었거든. 당신 의견을 듣고 싶어” “왜?” “페넬로페에게 못된 남편이 될까봐 걱정이 돼. 만약 그렇다면 내가 말릴 만한 시간적 여유도 있고. 결혼식은 아직 한 달이 남았으니까” “동생에 대해서 별 관심 없었잖아” 릴리가 책망하는 시선을 던졌다. “당신은 나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어! 전혀 닮은 점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난 페니를 좋아해. 그 애는 온화하고 수줍음이 많고 순종적이야. 내가 다른 여자에게 대단히 감탄하는 자질들이지” “당신 도움은 필요 없을걸” “아니, 필요해. 페니는 양처럼 순하고 무기력하다구” “그에 비해 당신은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을 갖고 태어났고” 릴리가 코를 치켜올렸다. “내 동생의 미래를 위협하는 게 있다면, 그걸 막는 게 내 책임이야.” “빌어먹을 성인군자로군, 당신은” “이제 레이포드에 대해 알고 잇는 걸 말해봐. 당신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건 죄다 알고 있잖아. 그런 식으로 비비 꼬는 건 그만 두고. 난 다른 사람의 연래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 “뻥까지 마” “데릭, 오늘 헤이스팅스 씨 만나지 않았지? 당신은 수업에 빠지면 금방 표가 나, 난 금방 알 수가 있다구” 데릭이 경고의 시선을 던졌다. 데릭이 좀더 신사다운 말투를 배우기 위해 일 주일에 두 번씩 특별 수업을 받는다는 건 릴리만이 아는


비밀이다. 그런데 그것이 별로 진전이 없어 보였다. 몇 년 간이나 훈련받았는데도, 데릭의 말투는 수산시장의 생선 장수나 아니면 마차를 모는 마부 혹은 템플바(반역자나 죄인의 목을 매달던 곳)의 상인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약간 좋아진 점이 있긴 하지만 눈에 뛸 정도는 아니다. 언젠가 그 선생이 릴리에게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도 노력만 하면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언제나 잊어버린다구요. 아마 죽는 날까지 그대로일 것 같습니다” 릴리는 웃으면서 동정을 담아 대꾸하였다. “헤이스팅스 씨,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언젠가 놀랄 일이 생기겠지요. 설마 영원히 그 상태로 있겠어요?”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그 말에 릴리는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데릭은 졸대 신사가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말투가 오히려 재미있게 들렸다. 데릭은 그녀를 중앙의 홀로 내려다보이는 발코니로 안내하였다. 이곳은 그가 가장 대화하기 좋아하는 장소였다. 테이블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파딩이나 크리비지 카운터, 손가락 사이로 옮겨가는 카드 한 장까지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알렉스 레이포드라? 그래, 그 자가 한두 번 들른 적이 있었지, 비둘기는 아니었지만” “그래? 비둘기가 아니라구? 당신이 고개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대단한 칭찬이잖아” “레이포드는 현명하게 게임을 해. 참여는 하지만 절대 깊이 빠지지 않아.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그에게 바가지를 씌울 수는 없을 거야” 릴리는 그런 놀림을 무시했다. “소문대로 돈은 많은 거야?” “소문보다 더 많아” “가족 스캔들은? 비밀 같은 거 있어? 과거의 연애 사건이나 그의 성격에 문제가 될 만한 못된 짓을 했다던가? 그 사람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 같아?” 데릭은 두 손을 난간 위로 걸치고 자신의 작은 왕국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조용해. 개인적이고, 특히나 사랑하던 여자가 일이 년쯤 전에 꼴까닥한 후로는 더 그렇지” “꼴까닥? 꼭 그렇게 천박하게 말해야겠어?” 데릭은 릴리의 지적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케롤라인 휘트모어, 휘트필드인가? 하여튼 그런 이름인데 사냥하다가 목이 부러졌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군. 나라면 빌어먹을 멍청이라고 하겠지만” “사냥이라” 릴리는 데릭의 의미심장한 시선에 짜증이 났다. 그녀도 말 타는 것을 좋아했고, 데릭조차도 여자가 그런 위험스런 행동을 한다는 데 별로 찬성하지 않았다. “난 다른 여자들과 달라, 남자만큼 말을 잘 탄다구, 대부분의 남자들보다 내가 더 나을 거야” “이번엔 당신 목이겠군” “”그런 말 집어치우고, 알렉스에 대해서 좀더 말해 봐. 그게 전부일리는 없잖아, 난 당신을 안다구.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틀림없이 남아 있어“ “아니” 데릭의 엄격한 시선은 초록빛의 차가운 웅덩이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유머도 깃들어 있었지만 경고성 또한 다분하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일깨워주었다. 그들이 친구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데릭은 그녀가 어려움에 처하면 결코 도와줄 인간이 아니란 것을. “내 말 들어, 집시. 그냥 놔 둬. 그 결혼이든 다른 일이든. 레이포드는 잔인한 인간도 아니고, 얼간이도 아니야. 그 자한테 떨어져 있어. 당신은 그게 아니라도 해결할 문제들이 널려 있잖아”


릴리는 그의 충고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데릭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힘을 아껴서 니콜을 되찾는 일에만 정신을 쏟아야 한다. 하지만 왠지 알렉스의 성격에 대한 의문이 자꾸만 마음에 거슬렸다. 그를 만나지 않으면 평화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이 불편하게 걸리적거렸다. 너무나도 온순한 페니, 그 애가 부모님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거스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페니는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재커리의 애원하던 얼굴도 떠올랐다. 그에게 이전에 받은 마음의 빚이 있으니......릴리는 한숨을 풀 내쉬었다. “내가 알렉스를 직접 만나봐야겠어” “그렇다면 아번 주 미들턴 사냥에나 나가보시지. 거의 백 퍼센트 그 자가 거기 나타날 거야” 하인들이 각기 주인의 말들을 끌고 오는 동안, 알렉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마구간 안은 흥분된 분위기였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흥분된 날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차갑고 맑은 날씨, 코스도 도전해 볼 만한 난코스였고, 미들턴의 사냥개 무리 또한 3 천 기니 이상의 가치가 있는 새로운 녀석들로 바뀌어 있었다. 알렉스는 청명한 하늘을 흘깃 보고 나서 짜증스럽게 입술을 비틀었다. 사냥은 여섯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는데,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아직 말에 오르지 않은 자들이 반도 넘었다. 대부분은 낯익은 얼굴이다. 그들과 대화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그는 지금 그렇게 사교적인 기분이 아니었다. 말에 올라 사냥감을 쫓아 달리며 자신을 잊고 싶었다. 피곤할 때까지 생각 없이 미친 듯이 달리고만 싶었다. 노란 잔디와 짙은 초록의 나무 주위로 차가운 안개가 덮여 있었다. 그의 옆으로는 노란 꽃이 핀 가시금작화가 무성했다. 그 순간 기억 하나가 그를 엄습하였다. “캐롤라인, 사냥터에 나가지 마” 약혼녀 캐롤라인 휘트모어는 웃음을 터트리며 짐짓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복숭아빛 살결과 밝은 개암빛 눈동자, 클로버꿀의 짙은 호박색 머리칼을 가진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달링, 나에게 그런 재미를 앗아가지는 않겠죠, 네? 위험할 건 전혀 없어요. 난 탁월한 기수랍니다. 당신네 영국인들 말로 정말 멋들어진 기수죠” “사람들 사이에서 말 타는 게 어떤지 당신은 몰라. 부딪힐 수도 있고, 말이 거부할 수도 있고, 아니면 떨어져서 짓밟힐 수도 있어” “최대한 조심할게요. 설마 내가 장애물을 목숨 걸고 뛰어 넘겠어요? 나의 큰 장점은 상식이 있다는 거랍니다. 게다가 일단 마음먹으면 내 고집을 아무도 꺾을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캐롤라인이 드라마틱하게 한숨을 쉬었다. “잘 알면서 당신은 왜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하나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럼 날 사랑하지 마세요, 적어도 내일 아침에는요” 알렉스는 괴로운 기억을 떨쳐버리려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그녀가 죽은 지 2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라는 장막이 알렉스를 집어삼겼다. 거기서 빠져 나오려 노력도 해보았지만, 몇 번 시도해 본 결과 자신은 절대 캐롤라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와 비슷한 사람들은 물론 있었다. 용감하고 정열적이며 아름다운 여자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런 여자를 원하지 않았다. 캐롤라인처럼 그를 사랑해 줄 여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의 따뜻한 손길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알렉스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일년 만에 아버지가 그 뒤를 이었다, 두 아들과 산더미 같은 책임감을 뒤로 한 채, 열여덟 살 때부터 알렉스는 사업의 소작인들 문제와 집안일 등으로 온통 정신이 없었다. 헤리퍼드셔의 비옥한 밀밭과 옥수수밭, 연어로 가득 찬 강을 끼고 그의 토지가 펼쳐져 있었고,


칠턴 초크 언덕이 있는 아름다움 버킹엄셔의 소유지도 그의 땅이었다. 그는 남동생인 헨리를 보살피고 교육시키는 일에 전력을 쏟았고, 자신의 욕구 해결이나 배우자 문제 등은 한쪽으로 밀쳐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여자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 안에 갇혀 있던 그 감정의 분출에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캐롤라인의 죽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자신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는 그런 고통스런 감정에 빠져들지 않으리라. 그가 페넬로페 로슨에게 청혼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런던의 무도회장에서 찾아낸 단정한 금발의 소녀, 전형적인 영국인인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가 그를 끌어당겼다. 그에게는 바로 이런 여자가 필요했다. 그도 이제 결혼해서 상속자를 얻을 때가 되었다. 캐롤라인과는 전혀 딴판인 페넬로페, 그녀는 그의 침대를 같이 쓰고 그의 아이를 낳고, 그의 옆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늙어갈 것이지만, 절대 그의 일부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는 페넬로페의 조용한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예쁜 갈색 눈동자는 불꽃이나 활기가 보이지 않고, 그녀의 말 속에는 날카로운 재치도 없었으며, 어떤 면에서든 그의 감정을 건드릴 만큼 위협적인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의 말에 반박하거나 그와 논쟁을 벌이는 일은 상상도 못할 것이고, 그가 주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갑자기 알렉스의 생각이 눈길을 끄는 풍경에 의해 중단되었다. 극도로 긴장한 하얀 말등에 올라탄 젊은 여자가 사람들을 지나 날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만큼 홀연히 나타난 여자, 젖가슴이 봉긋한 것만 빼면 날렵한 사내아이처럼 보였다. 짧게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를 이마에서부터 리본으로 묶었다. 남자처럼 말을 탄 모습 자체도 놀라운데다, 승마용 드레스 안에 바지까지 갖춰 입고 있는 것에 더욱 놀랐다. 맙소사, 딸기색 바지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모습에 놀라워하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의 존재에 익숙한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어대었다. 젊은 야보로 경으로부터 변덕스러운 늙은이 해링턴 경까지 모두 다 친근하게 그녀를 대했다. 알렉스는 딸기색 바지를 입은 여자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본듯한 느낌이 들었다. 알렉스가 눈도 깜작이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채자, 릴리는 만족스런 미소를 애써 억눌렀다. 스년 수년 간 자신의 찬미자였던 노신사 채스터 해링턴에게 말을 붙였다. “아까부터 절 무례하게 쳐다보는 저 남자는 누구인가요?” “아하, 레이포드 백작이로군. 당신과 이미 아는 사이일 줄 알았는데. 이제 곧 당신의 어여쁜 여동생과 결혼할 사람이잖소” 릴 리가 미소지으며 머리를 저었다. “못 봤어요, 전 집안 식구들과 전혀 다른 곳에서 생활하는 걸요. 말씀해 보세요, 저 사람 보이는 것처럼 촌스러운가요?” 해링턴이 껄걸 웃어대었다. “당신이 직접 판단할 수 있도록 소개해 줄까?” “감사하지만, 저 혼자 가보겠어요” 대꾸가 나오기도 전에, 릴리는 알렉스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에게 다가가서 얼굴을 흘깃 본 순간, 전에 본 적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가 그의 옆에 말을 세웠다. “맙소사, 당신이로군요” 그의 시선이 그녀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선상 파티, 당신은 물 속으로 뛰어들었던 그 여자로군” “당신은 날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그 사람이구요” 릴 리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날은 내가 약간 정신이 나갔어요. 당신은 핑계라고 생각하겠지만요” “원하는 게 뭐지?”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등줄기 솜털까지 모조리 치솟게 했다. 으르렁대는 낮은 음성.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었더라? 정말 직선적이군요, 당신은. 하지만 난 그런 남자를 좋아하지요” “무언가 원하는 게 없다면 나에게 접근했을 리가 없지” “그 말이 맞아요, 당신, 내가 누군지 아시나요?” “아니” “릴리 로슨이에요, 당신 약혼녀의 언니” 알렉스는 놀라움을 교묘히 숨긴 채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여자가 페넬로페와 가족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한 명은 금발 머리에 천사 같은 얼굴이고, 다른 여자는 검은 머리에 불타는 듯한 모습이니. 그런데 닮은 점이 있었다. 둘다 갈색 눈동자였고, 고상한 얼굴 형태와 달콤하게 그려진 입술의 선이 똑같았다. 그는 로슨 부부와 큰딸에 대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들은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릴리, 그녀의 어머니는 윌헬미나라고 불렀다. 그녀가 스무살 때인가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후로 약간 정신이 이상해졌다고만 들은 것 같았다. 그 후로는 외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방종한 숙모와 함께 생활해서 더 거칠어졌다고 했는데 그 당시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좀더 자세히 들어둘 걸 그랬다는 후회가 되었다. “우리 가족이 나에 대해 얘기하지 않던가요?” 그녀가 물었다. “괴팍하다고 하더군” “그들이 나를 아직 기억한다는 것조차 놀라운 걸요” 그녀가 몸을 숙여 은밀하게 속삭였다 “난 나쁜 평판을 갖고 있답니다. 그걸 얻는 데 몇 년이 걸렸죠. 부모님은 날 자랑스러워하지 않으세요. 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그분은 체념하셨죠, 가족의 가지에서 날 자라버리기에는 너무 늦었거든요” 그의 딱딱한 얼굴을 쳐다보며 그녀는 수다를 멈췄다. 그 은빛의 회색 눈동자 뒤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그녀와의 잡담을 즐기거나 사교적인 미소를 짓지 않는다는 거다. 그를 어떻게 하면 잘 두룰까? 그녀가 씩씩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알렉스, 당신과 내 여동생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그는 얼음 같은 회색 눈동자로 말없이 쳐다만 보았다. “페니에게 훌륭한 짝을 맺어주려는 부모님의 야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요. 그 애는 사랑스럽고 교양 있어요, 그렇죠? 아마도 눈부신 결혼이 되겠지요, 페넬로페 로슨양과 레이포드 백작. 우리 가족 중에는 백작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 업거든요. 하지만 난 궁금해요, 당신의 아내가 되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최선의 선택일지 말예요. 당신, 내 동생을 좋아하나요, 레이포드 경?” 그의 얼굴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필요한 만큼” “그 대담은 별로 내 맘을 만족시키지 않는군요” “무얼 걱정하는 거요, 로슨 양? 내가 당신 동생을 학대할까봐? 아니면 그녀가 강제로 결혼하게 될까봐? 장담하건대, 페넬로페는 현재 상태에 꽤나 만족하고 있고”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특유의 연극적인 몸짓으로 모두를 즐겁게 하려 든다면, 로슨 양, 경고하겠고. 난 남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걸 싫어하오” 릴리는 그 냉정한 오조에 흠칫 뒷걸음질쳤다. 오, 이런. 이 남자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혈관 속에 얼음이 떠다니는 커다란 체력의 거만한 귀족쯤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왠지 그의 성질이 차가울 뿐 아니라 잔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페니가 지금 만족해 한다는 당신 주장은 믿을 수가 없군요. 난 동생을 잘 알아요. 부모님이 한 걸음 한글음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그 애를 몰고 갔을 거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당신은 페니를


두렵게 할 거예요, 그녀의 행복은 당신에게 중요치 않은 건가요? 그 애는 진실로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어요. 하지만 내 본능은 당신이 원하는 여자는 순종하면서, 당신 이름을 이러받을 금발의 상속자를 낳아줄 애 잘 낳는 여자일 뿐이라고 하는군요. 만약 그게 목적이라면 그런 여자는 주위에 널렸으니까 수백 명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만하시오” 알렉스가 거칠게 말을 잘랐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끼어 들지 마시오, 로슨 양. 그렇지 않으면 나와 지옥에서 만나게 될 거요. 아니, 내가 당신을 지옥으로 보내버릴거요” 그에게 던지는 릴리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좋아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다 알아낸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되세요, 백작님. 당신이 절 아주 잘 깨우쳐 주셨답니다” “잠깐” 자신이 하는 짓을 알기도 전에, 알렉스의 손이 그녀의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놓으세요!” 리리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의 행동은 분노를 일으킬 만했다. 다른 사람의 말고삐를 허락도 없이 잡는다는 건, 즉 말의 통제력을 빼앗는다는 건 대단히 품위 없는 행동이다. “사냥하지 마시오” 그가 말했다. “당신 말이나 듣겠다고 내가 여기 나온 줄 아세요? 이봐요, 난 사냥하러 갈 거예요. 걱정할 거 없어요, 다른 사람보다 너무 앞서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여자들은 사냥에 끼지 말아야 해” “자기들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예요” “당신은 여자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사냥을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어요. 난 실력 있는 기수라구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허락 따위는 필요없어요. 난 높은 울타리도 뛰어넘을 수 있어요. 나더러 다른 여자들과 같이 집안에서 레이스를 뜨면서 잡담이나 하라는 건가요?” “그 안에 있으면 최소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위험스럽지는 않겠지. 하지만 밖에 있으면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소” “그건 당신 혼자만의 생각이랍니다, 레이포드 경. 당신 외의 어느 누구도 내가 여기 있는 걸 불편하게 여기지 않아요” “상식이 있는 남자라면 절대 당신을 여기 놔두지 않을 거요” “그럼 전 이쯤에서 얌전하게 눈을 내리깔고 물러나야 하나요? 제가 어떻게 감히 사냥 같은 남자들의 일에 끼어 들겠어요, 하면서? 하지만 전당신의 그 독선적인 견해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이젠 고삐를 놓아주세요!” “말 타지 마시오”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터져 나와 그를 비이성적으로 몰아갔다. ‘캐롤라인, 안 돼. 오, 하나님’ “웃기는 소리 말아요!” 하얀 말이 불안하게 옆걸음질치자 릴리가 고삐를 홱 잡아당겼다. 하지만 알렉스는 여전히 손을 풀지 않았다. 릴리의 분노하는 시선이 거울처럼 투명한 회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당신 미쳤군요” 그들은 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쪽은 릴리였다. 갑자기 그녀가 난폭하게 채찍을 휘갈겼다. 금세 알렉스의 턱 밑에 빨간 상처가 생겼다. 그 순간 릴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여 그의 손을 풀어버렸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둘의 대결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알렉스는 턱으로 흐르는 피를 쓰윽 닦으면서도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잠시 그는 과거와 현실을 분리시키지 못하였다. 캐롤라인의 밝은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왔다. ‘사랑하는 알렉스, 그럼 날 사랑하지 말아요’ 그녀가 말에서 떨어지던 그날이 되살아나며 그의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하였다. “사고야” 그의 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말에서 떨어졌어. 그녀는 떨어지면서......” “의사를 데려와” 알렉스가 거칠게 다그쳤다. “알렉스, 소용없네” “망할 자식, 의사를 데려와. 그렇지 않으면......” “떨어지면서 그녀는 목이 부러졌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알렉스, 그녀는 죽었어” 그의 하인이 불현듯 그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주인님?” 알렉스는 눈을 깜박이며 빛나는 갈색 말에 초점을 맞추었다. 힘과 유연성을 겸비한 자신의 말, 그는 고삐를 움켜쥐고 말에 올라 공토를 둘러보았다. 릴리 로슨이 다른 남자들과 얘기하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봐서는, 어느 누구도 방금 전 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우리라. 사냥개 무리가 풀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판을 달려나갔다. 냄새를 찾아낸 모양이다. “여우가 풀린다!” 한 사람의 외침과 함께 여우 한 마리의 눈가리래가 벗겨졌다.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와 출발하는 말발굽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울려 퍼졌다. 사냥꾼들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다. 말과 개들의 맹공격에 들판이 뒤흔들렸다. 땅을 찢을 듯한 말발굽 소리, 하늘로는 흥분한 외침 소리가 가득하였다. “나가자!” “쉭! 쉭!” “이랴!” 사람들이 각자의 말에 박차를 가하자, 사냥은 예정된 편대를 형성하였다. 맨 앞의 사냥개를 사냥개 담당자가 바짝 따라붙고, 그 뒤 개들을 따라가는 지휘자들. 그리고 나머지는 무리와 같이 보조를 맞추었다. 릴리 로슨은 미친 여자처럼 제일 높은 장애물로 달려가 날개라도 단 듯이 훌쩍 뛰어넘었다. 자신의 안전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했다. 보통 때 같으면 알렉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앞으로 달려나갔을 테지만, 오늘은 뒤로 물러났다. 릴리의 무모한 행동을 지켜보며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주위가 온통 환희와 소음으로 가득한 동안, 알렉스는 눈을 뜬 채로 예전의 악몽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껑충 뛰어올랐다가 땅 속 깊이 발굽을 막았다. 캐롤라인, 그 기억을 이미 오래 전 마음속 저편에 묻어 두었다고 행각했는데, 정신없이 밀려드는 회상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캐롤라인의 입술 감촉, 손 안에 잡히던 그녀의 비단 같은 머릿결, 그녀를 안고 있을 때면 느껴지던 달콤한 고통. 그녀가 그의 생의 활기를 가져가 버렸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그의 활기를. 멍청한 자식, 그가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사냥하러 나와서 끔찍한 과거만 생각하고 있다니, 잃어버린 꿈을 잊지 못하는 바보.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릴리를 뒤따르고 있었다. 벌어진 간격과


가로막힌 장벽 너머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녀도 그가 뒤에 있다는 것을 느꼈으리라. 그들은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까지 가로지르며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말을 달렸다. 단호하게 말에 박차를 가하는 릴리의 신경은 흥분으로 불꽃이 튈지경이었다. 사냥의 끝, 짐승을 죽이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말을 타는 기분은 세상의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릴리는 이중으로 높이 둘러쳐진 울타리로 접근했다. 순간적으로 울타리를 넘으려는 시도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악마적인 충동이 그녀를 앞으로 내몰았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말이 도약을 거부하며 앞발을 들어올려 그녀를 안장에서 떨어뜨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하더니 그녀는 어느 순간 허공에 붕 떠 있었다. 그런 다음 땅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그녀의 몸이 땅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몸을 비틀어 공기를 들이마시려 애썼다.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잎사귀와 진흙을 움켜쥐었다. 누군가 그녀를 돌려 안아 올렸다. 그녀는 입을 벌려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눈 앞에 빨갛고 까만 점들이 춤을 추었다. 천천히 그 안개가 사라지며 위에 있는 얼굴이 보였다. 알렉스, 그에게 안긴 걸 깨닫자 그녀는 빠져 나가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인형처럼 무기력할 뿐이었다. 다시 숨을 들이쉬는 그녀의 젖가슴이 빠르게 들먹거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을 꽉 잡고 있었다. 너무 꽉 잡아서 아플 정도였다. “사냥하지 말라고 했잖소. 자살할 셈이었나?” 알렉스가 으르렁거렸다. 릴리는 몽롱한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칼라에 피가 묻어있다, 아까 그녀의 채찍에 맞은 상처에서 묻어난 피. 목에 닿은 그의 손이 억셌다. 마음만 먹는다면, 잔가지를 부러뜨리듯이 그녀의 뼈를 두 동강이낼 수도 있으리라. 릴리는 그의 몸 속에 부글거리는 어떤 힘을 의식하였다. 그의 달아오른 얼굴에 원초적이 표정이 서려 있었다, 증오와 함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어떤 표정. 윙윙거리는 귓속으로 이름이 들렸다. 캐롤라인. “당신 미쳤군요. 맙소사, 정신병원에 들어가야 해. 무얼 하는 거예요? 당신, 내가 누군지 보여요? 그 손 치워요, 내 말 들리냐구요?” 그녀의 말이 그의 의식을 일깨운 모양이었다. 그의 눈에서 살기 어린 번득임이 사라졌고, 입가의 일그러짐도 부드러워졌다.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긴장이 빠져 나감과 동시에, 그는 불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와락 밀쳐버렸다. 나뭇잎과 먼지 속에 내던져진 릴 리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벌떡 일어서서 뒤로 물러났다.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녀가 별로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자, 그는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릴리는 무릎이 휘청거려서 나무에 잠시 기대서야 했다. 말에 오를만한 힘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알렉스의 표정 없는 얼굴을 응시하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페니는 당신한테 너무 과분해. 전에는 당신이 그 애를 비참하게 만들까봐 걱정했었죠. 하지만 이젠 그 애한테 신체적인 가해라도 하지 않았는지 의심스럽군요!” “왜 새삼스레 관심 있는 척하지? 당신은 몇 년 간이나 가족을 만나지 않았소. 그들도 당신과 관계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던데”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그녀는 화가 나서 소리질렀다. 이 괴물이 페넬로페의 인생에서 모든 행복을 앗아갈 거라 생각하니 분노가 솟구쳤다. 재커리처럼 부드럽고 성실한 사람이 사랑해 주고 있는데, 왜 알렉스 같은 야만인이 페넬로페와 결혼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은 페니를 가질 수 없어. 내가 그냥 두지 않을 거야!” 알렉스는 경멸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자신을 지금보다 더 멍청한 인간으로 만들지 마시오, 로슨 양” 알고 있는 가장 상스러운 욕석을 중얼거리며, 릴리는 멀어지는 알렉스를 지켜보았다. “당신은 그녀를 갖지 못해. 내 생명을 걸로 맹세해, 당신은 페니를 갖지 못할 거야!”


3. 레이포드 파크에 돌아온 알렉스는 페넬로페와 그녀의 부모님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들렀다. 보통 기준으로 보면, 로슨 부부는 그다지 어울린다고 볼 수 없는 한 쌍이다. 조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책들을 연구하며 보냈고, 식사조차 방에서 먹을 정도로 며일이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기가 일쑤였다. 그는 바깥 세상에 대해서 흥미가 없었다. 그렇게 세상 일에 무관심한데 상속받은 재산과 토지인들 제대로 관리했을 리 만무하다. 그 반면에 그의 아내 토티는 동그란 눈에 탄력 있는 금발 머리를 가진 활발한 여성이다. 사교적인 대화와 파티를 좋아하고, 딸아이를 성대하게 결혼시키는 것이 인생 최대의 소망이었다. 그들에게서 어떻게 페넬로페 같은 딸이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으며 예쁘장한 소녀, 페넬로페는 그들의 좋은 점만을 닮았다. 그 반면에 릴리는 로슨 가족과 연결시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들이 릴리를 자신들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평화를 찾지 못했으리라. 릴리는 쉼 없이 문제를 일으키면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미쳐버릴때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알렉스는 미들턴에서 떠나온 후에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족들과 친하지 않다는 점이 진정 다행스러웠다. 다시 그녀를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녀의 존재를 위식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레이디 토티가 그를 기쁘게 맞이하며, 결혼식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따 오후에 목사님이 방문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잘됐군요. 그분이 도착하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알렉스의 대담에 이어, 토티가 그녀와 페넬로페 사이의 소파를 가리켜 보였다. “레이포드 경, 우리와 같이 차 한잔하시지 않을래요?” 그 순간 문득 페넬로페가 늑대 앞에 선 작은 토끼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펙스는 결혼식의 요란한 겉치레와 꽃단장 등에 대한 토티의 수다를 참아낼 자신이 없었기에 정중히 초대를 거절했다. “고맙습니다만, 전 할 일이 있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에 뵙지요” “네, 백작님” 두 여자가 동시에 대답하였다. 한 명은 실망감으로 다른 한 명은 안도감을 애써 숨기며. 도서실에 들어앉아, 알렉스는 회계 장부와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토지 관리인에게 위임할 수 있었지만, 캐롤라인이 죽은 이후로 그는 필요 이상으로 일을 많이 했다. 일은 외로움과 지난 추억에서 도망갈 수 있는 탈출구였다. 그는 이 집의 어떤 곳에서보다 도서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곳의 질서정연함과 평화가 마음에 들었다. 책들은 분야별로 깔끔하게 정돈되었고, 가구 또한 신중하게 배치되었다. 이탈리아식 코너장 위의 술병들조차 정확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어느 곳이건 티끌 한점 없었다, 물론 레이포드 파크의 전체 장원이 그러했지만. 50 명의 집안 하인들이 그런 일들을 맡아하였다. 바깥의 대지와 정원과 마구간 등을 돌보는 하인이 30 명 더 있었다. 방문객들마다 장원의 돔 형식 대리석 형관과 절묘한 석고작품으로 조각된 거대한 홀에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저택 안에는 여름 응접실과 겨울 응접실, 예술품으로 가득한 긴 화랑, 아침 식당, 커피룸, 두 개의 만찬용 식당, 셀 수도 없이 많은 침실과 탈의실, 거대한 부엌, 도서실, 이따금씩 연결되어 웅장한 무도회장으로 탈바꿈하는 두 개의 응접실이 꾸며져 있었다. 큰 살림이지만, 페넬로페라면 충분히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녀는 바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받으며 자라났다. 그녀가 아무 어려움 없이 장원의 여주인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온순했으며 영리했다. 아직 자신의 동생 헨리를 만나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품행 단정한 헨리와 그녀는 사이좋게 지낼 것이다. 도서실의 고요가 문에서 나는 작은 노크 소리로 인해 깨어졌다. “무슨 일이지?” 문이 살짝 열리며, 페넬로페의 금발 머리가 나타났다. 엘렉스는 그녀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제기랄, 그를 방문하는 것이 위험스런 임무라도 되는 듯 조심스러웠다. 진짜로 자신이 그렇게 두려운 존재일까? 스스로도 퉁명스럽다는 건 알고 잇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들어오시오” “백작님, 사냥이 성공적이었는지 알고 싶어서요.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는지......” 그녀가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어머니 토티가 보낸 것이리라, 페넬로페는 한 번도 자발적으로 그에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사냥은 즐거웠소” 책상 위의 서류를 한쪽으로 밀쳐내고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페넬로페는 그의 시선이 불편한 듯 불안하게 몸을 움찔거렸다. “꽤 흥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편이 맞을 거요” 그녀의 얼굴에 흐릿한 관심이 스쳐갔다. “오, 그래요? 사고가 있었나요? 충돌이라도 일어났어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잇겠지. 당신 언니를 만났으니까” “릴리가 거기 왔어요? 오, 저런” 할 말을 잃은 듯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 언니는 꽤나 특이하더군” 알렉스의 말투는 찬사와 전혀 거리가 멀었다. 페넬로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삼겼다. “릴리에게는 중간이 없어요. 한쪽은 그녀를 대단히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무력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 난 후자 쪽에 더 마음이 갔소” “아, 물론 그러실 거예요. 백작님과 언니, 둘다 자기 주장이 강하니까요” “대단히 재치 있는 대답이오” 알렉스는 그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페넬로페의 사랑스럽고 온화한 얼굴에서 릴리의 영상을 보는 것이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우린 당신에 대해서 얘길 했소” 그녀의 눈이 걱정스레 휘둥그래졌다. “백작님, 언니가 우리 가족 모두를 대표하지는 않는답니다” “그건 알고 있소” “무슨 얘기를 나누셨나요?” “당신 언니는 내가 당신을 두렵게 만든다고 했소. 정말 그렇소?” 그의 침착한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약간요” 알렉스는 그녀의 그런 수줍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여자가 그의 의견에 반박할 능력이 있는 건지, 그의 행동에 불쾌함을 느꼈을 때 책망을 표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걸어갈 때, 그녀의 몸이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아 안자, 페넬로페가 고개를 숙이면서도 훔칫 숨을 들이켰다. 문득 혼란스런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땅에 쓰러진 릴리를 안아 들었을 때 그 나긋나긋한 육체의 느낌, 페넬로페가 언니보다 키도 크고 풍만한 몸매였음에도, 이상하게 더 부드럽고 작은 인상이 들었다. “날 보시오” 알렉스의 조용한 명령에, 페넬로페는 순종하였다. 그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릴리의 눈과 똑같다. 하지만 그곳엔는 놀란 순수함만이 가득할 뿐 정열의 불길은 없었다. “불안해 할 이유는 없소. 당신을 해치지 않을 거요” “네, 백작님”


“알렉스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소?” 전에도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오, 전 못하겠어요” 그는 짜증을 최대한 눌러 참았다. “한 번 불러보시오” “알렉스” “좋아” 그가 고래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페넬로페는 움직이지 않고 그의 어깨에 손만 살짝 대고 있었다. 알렉스는 입술의 압력을 증가해가며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순종 이상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 순간 페넬로페가 그의 포옹을 견뎌내야 하는 의무 정도로 생각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의 순박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한 숟가락의 약을 입에 받아 넣고 그 쓴맛을 견디는 아이와 같이 모습이었다. 지금껏 그와 키스하는 것을 싫어하는 여자는 만난 적이 없었다! 알렉스의 황갈색 눈썹이 찌푸려졌다. “제기랄, 날 억지로 견딜 필요 없소!” 그의 퉁명스런 말에 페넬로페의 몸이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네?” 신사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부드러운 존경으로 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그녀의 반응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에게 키스해 보시오” 그가 주문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바짝 들이댔다. 그러자 놀란 비명과 함께 페넬로페의 손이 그의 얼굴에 찰싹 와 닿았다. 정확하게 따귀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힘이 가득 실리 따귀였다면 반가웠으리라. 하지만 이건 책망하듯 뺨을 건드린 정도이다. 페넬로페가 문 쪽 으로 물러나며 눈물 젖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백작님, 왜 절 이런 식으로 놀리시는 건가요?” 알렉스는 한참 동안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줄 수 없는 것, 혹은 주고 싶지 않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왜 이렇게 폭발해 버릴 듯한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용서를 비오” 페넬로페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냥으로 인해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으신 것 같군요. 남자들은 그런 원초적인 분위기에 대단히 영향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그가 냉소적으로 미소지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소” “이젠 나가도 될까요?” 그가 말없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페넬로페가 문을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백작님, 릴리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언니는 보기 드문 여자랍니다, 매우 용감하고 강인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 날 두렵게 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서 언니는 항상 날 보호해 주었어요” 알렉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페넬로페가 두 마디 이상 하는 건 거의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부모님 중 어느 분과 닮은 거요?” “부모님이 아니라 샐리 숙모를 닮았어요. 숙모님은 언니처럼 그렇게 괴팍하셨죠. 언제나 모험을 찾아다니고 틀에 매이지 않는 행동들을 했어요. 몇 년 전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언니에게 모든 재산을


남기셨답니다” 그렇게 해서 릴리가 살아갈 재산을 얻은 거로군. 지금 들은 정보는 그녀에 대한 알렉스의 편견을 굳힐 뿐이었다. 그녀는 아마 일부러 그 늙은 여자의 마음에 들게끔 행동했을 테고, 상속받은 재산을 생각하며 그녀의 죽음 앞에서 춤을 추고도 남을 여자일 것이다. “왜 결혼하지 않은 거요?” “릴리는 언제나 결혼은 여자가 아닌 남자들에게만 이득이 되는 끔찍한 제도라고 말해 왔어요” “사실, 언니는 남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과 함께 사냥을 가고 사격과 게일을 하는 그런 일들은 즐거워하지만요” “그런 일들이라? 어떤 특별한 친구라도 있소?” 그 질문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페넬로페는 그의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유순하게 대답했다. “특별한? 글쎄요, 음. 언니는 가끔 데릭 크레이븐이라는 남자와 같이 다닌다고 해요. 나에게 쓴 편지에 그 사람 얘길 한 적이 있어요” “크레이븐?” 이제 모든 그림이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알렉스는 역겨운 듯 입을 비틀었다. 그 자신도 크레이븐스 클럽의 회원이었고, 두 번 정도 그 클럽의 주인을 만난 적이 잇었다. 릴리 로슨이 귀족 사회에서 ‘사이비 신사’로 불리는 그런 남자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그녀는 매춘부의 도덕관념을 갖고 있는 것이리라. 크레이븐과의 우정은 그 이의 어떤 의미도 있을 수 없었다. 점잖은 가문에서 태어나, 물질적인 풍요와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그런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었을까? 릴리는 그 길을 선택하여, 기꺼이 자진해서 한 걸음씩 나아갔을 것이다. “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항하며 살았어요” 그의 생각을 짐작한 듯 페넬로페가 말을 이었다. “몇 년 전 그런 식으로 버림받지 않았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배신과 수치, 그것이 언니를 무모한 행동으로 이끌었던 거예요. 적어도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녀가 왜?” 문득 알렉스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자갈길을 달리는 마차의 바퀴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오늘 어머님에게 손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소?” 페넬로페가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백작님. 양장실에서 제 옷을 가봉하러 왔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건 내일로 약속이 잡혀 있는데”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알렉스는 이상한 느낌,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신경 조직이 경고의 불꽃을 튀겨댔다. “누군지 알아봐야겠소” 그가 도서실 문을 활짝 열고, 회색과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된 현관홀을 가로질러 집사인 실번보다 먼저 앞문으로 나아갔다. 문장이 찍히지 않은 까만 색과 황금빛의 거대한 마차가 문 앞에 멈춰 섰다. 페넬로페가 알렉스의 옆에 와 섰다. 바람이 불자 얇은 옷만 입은 그녀가 몸을 떨었다. 안개 낀 봄날, 오늘은 머리 위로 하얀 구름이 뭉실대는 차갑고 상쾌한 날씨였다. “누구 마차인지 모르겠네요” 파랗고 까만 제복을 입은 하인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땅위에 작은 사락형의 계단을 내려놓았다. 다음 순간 그녀가 나타났다. 알렉스는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릴리!”


페넬로페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언니에게로 달려들었고, 릴리도 즐겁게 웃어대며 페넬로페를 껴안았다. “페니!” 그녀가 동생을 살짝 떼어내 살펴보았다. “세상에 , 우아한 아가씨가 되었구나! 이게 몇 년 만이니? 어렸을 때 이후로는 보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구나” “오, 아니야. 언니가 더 아름다운걸” 릴리가 웃으며 다시 한번 동생을 껴안았다. “가엾은 노처녀 언니를 칭찬해 주다니 정말 상냥하구나” “언니는 전혀 노처녀처럼 보이지 않아” 내심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 알렉스도 그 점에는 동감했다. 릴리는 짙푸른 드레스 위에 하얀 모피가 달린 벨벳 망토를 아름답게 차려 입고 있었다. 리본으로 묶지 않은 머리가 관자놀이에서 예쁘게 곱슬거렸고, 귀여운 귀 앞부분에 몇 가닥이 나려왔다. 딸기색 바지를 입고 남자처럼 말에 올라탔던 그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발그레한 볼에 미소짓는 모습은 부유한 집안의 젊은 부인처럼 보였다, 아니 귀족의 고급 매춘부이거나. 릴리가 페넬로페의 어깨 너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부끄럽다거나 불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동생의 몸을 떼어내고 그가 손 곳까지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고는 그에게 작은 손을 내밀며 뻔뻔스럽게 미소지었다. “적진으로 돌진하라”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며 그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 만족감이 번득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드러내지 않았다. 레이포드를 격분의 상태로 몰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벌써 화가 나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는 그녀가 이 집 문 앞으로 달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남자를 자극하는 일이 지금처럼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 때문에 그의 세계는 완전히 뒤엎어지리라. 자신의 계획에 망설임은 없었다. 알렉스와 페니의 결혼은 말도 안된다. 두 사람은 잠시 보기만 해도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다. 페니는 하얀 꽃을 피운 아네모네처럼 연약하였고, 아이처럼 부드러운 금발머리는 빛을 발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대상에게 대항할 방법이 전혀 없다. 격렬한 폭풍우를 만난 갈대처럼, 몸을 굽히는 것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반면에 알렉스는 릴리가 기억하던 것보다 열 배는 더 지독해 보였다. 완벽하게 초연한 모습과 완고하게 나온 턱, 얼굴에는 동정이나 온화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점잖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야수처럼 긴장하고 있다. 그에게는 그의 가시에도 끄덕하지 않을 냉소적인 여자가 딱 어울렸다. 알렉스는 릴리가 내민 손을 무시한 채 차갑게 쳐다보았다. “당장 떠나시오” 등으로 소름이 쫙 돋았지만, 릴리는 새침하게 미소지었다. “백작님, 제 가족을 만나고 싶어요. 만나본 지가 정말 오래 되었답니다” 알렉스가 대꾸하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토티와 조지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윌휄미나!” “릴리. 오, 하나님” 그들 모두 얼어붙은 그림처럼 미동도 없이 조용하였다. 가족의 시선은 릴리의 모습에 집중되었다. 갑자기 릴리의 얼굴에서 거만함과 자신만만함이 사라지며, 그녀는 불안해 하는 어린 소녀가 되었다. 그녀가 하얀 이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엄마? 엄마, 절 용서해주시겠어요?” 토티가 울음을 터트리며 통통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윌휄미나, 이제야 왔구나! 다시는 널 보지 못할까봐 두려웠단다”


릴리가 어머니의 품안으로 달려들었다. 두 여자는 서로를 껴안은 채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엄마,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페니도 너무나 멋지게 키워 놓으셨구요. 아마 이번 시즌의 꽃이 될 거예요” “얘야, 너의 떠들싹한......그런 끔찍한 이야기들을 들었단다. 난 언제나 걱정이......오, 이런, 맙소사, 머리는 어떻게 된 거니?” 릴리는 짧은 머리를 수줍게 만져보며 씨익 웃었다. “너무 심한가요, 엄마?” “너에게 어울리는구나. 솔직히 말하면 잘 어울린다” 릴리가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아빠!” 조지는 어색하게 딸의 등을 두들겨주고 나서 점잖게 밀어냈다. “자,자. 점잖게 있거라, 구경거리 만들지 말고. 레이포드 경 앞에서 이 무슨 소동이냐. 너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냐? 이곳에는 어쩐 일이니? 왜 하필 이런 때에?” “아무 문제 없어요” 릴리가 아버지에게 미소지었다. 그들은 둘다 비슷하게 체구가 작아서 거의 눈과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더 일찍 오려고 했지만, 환영받을 자신이 없었어요. 저도 페니가 결혼하는 이 기쁜 일을 같이 나누고 싶어요. 물론 백작님이 절 싫어하신다면, 당장 떠날 거예요. 누구에게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냥 일 주일 정도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그녀가 알렉스를 흘깃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최대한 얌전하게 행동할게요, 성인군자처럼요” 알렉스의 시선이 얼음송곳처럼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이 여자를 저 마차 안으로 처넣고 곧장 런던으로 가버리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끔찍한 곳 어디로든지. 그에게서 아무 대꾸가 나오지 않자, 릴리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머물 만한 방이 없는 건가요?” 그녀가 목을 쭉 빼어 수도 없이 늘어선 창문과 발코니들을 들러보았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 여자를 목 졸라버리고 싶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만했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거절한다면, 그녀의 가족은 그를 아량도 없는 속 좁은 남자로 생각할 것이다. 페넬로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스” 페넬로페가 그의 팔에 한 손을 놓으며 간청하였다. 그녀가 자진해서 그에게 손을 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알렉스, 방은 충분히 있잖아요, 그렇죠? 언니가 얌전하게 행동하겠다고 말했으니, 틀림없이 그렇게 행동할 거예요” 릴리는 다소곳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니. 백작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 다음에 만날 기회를 만들어 보자구나” “안 돼, 난 언니가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제발, 백작님, 언니를 여기 머물게 허락해 주세요!” “에원할 필요 없소” 알렉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페넬로페의 가족과 집사 앞에서, 모든 하인들이 듣고 있을 텐데, 이렇게 애원하는 약혼녀의 뜻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는 릴리의 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잔다르크처럼 참을성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빌어먹을 여자!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합시다. 단, 그녀가 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오” “오, 고마워요!” 페넬로페가 빙그르르 몸을 돌려 릴리와 엄마를 차례로 껴안았다. “정말 멋지죠,엄마?”


릴리는 침착하게 알렉스 쪽으로 다가갔다. “레이포드, 우리가 시작을 잘못한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그건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어요. 그 사냥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녀는 너무나 진지하고 솔직하고 호소력이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녀의 어떤 말도 믿지 않았다. “로슨 양, 만약 당신이 내 이익을 손상시킬 만한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릴리는 도발적으로 미소지었다. 그녀를 해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오래 전에 가장 최악의 일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녀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남은 평생 그 일을 후회하게 만들 거요”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이 릴리의 미소는 사그라들었다. 문득 데릭의 경고가 떠올랐다. ‘내 말 들어, 집시. 그냥 놔 둬, 그에게서 떨어져 있어’ 릴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씩이며 그 말들을 떨쳐내었다. 알렉스 레이포드는 그저 한 명의 남자일 뿐이었고, 그녀는 그를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 지금만 해도 다음 몇 주 간, 그의 지붕 밑에 머물 수 있는 초대장을 받아내지 않았는가? 그녀는 어머니와 동생을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내가 레이포드 경에게 물어봤어, 널 사랑하냐고” 릴리는 자매끼리 그간의 회포를 풀자며 페넬로페와 둘만 따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동생에게 약혼자가 어떤 남자인지 알려주기 위해 즉시 미들턴 사냥에서 생긴 일을 얘기했다. “오, 언니, 그런 말을!” 페넬로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하였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키득거렸다. “백작님이 어떤 대답을 했을지 짐작할 수도 없어” “뭐가 그렇게 재미있니? 난 너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길 하려는 거야, 페니” “내 미래는 잘 진행중이야!” 페넬로페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릴리는 자신이 알렉스를 만났다는 것에 대해 동생이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그저 재미있어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 솔직한 질문에 대해, 그는 무례하고 불분명한 대답으로 날 모욕했어. 그는 신사가 아니야, 너에게 어울리는 좋은 남자가 아닌 것 같아” 페넬로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런던 사람 모두가 그를 멋진 배우자로 생각하는 걸” “난 달라” 릴리는 연신 가죽 장갑을 손바닥에 때리며 침대 앞을 서성거렸다. “무슨 근거로 그 사람을 좋은 배우자라는 거니? 외모? 글쎄, 그가 잘생긴 남자로 보인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건 그가 차분하고 침착할 때만이야” “외모는 취향의 문제일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 사람 재산 때문이라면, 널 보살피고 고상하게 유지해 줄 수 있는 남자는 그 외에도 많이 있어, 백작이라는 지위? 너라면 그 보다 더 명문가의 남자와도 충분히 만날 수 있어. 게다가 네가 특별히 알렉스를 대단히 좋아한다고도 말할 수 없잖아, 페니!” “결혼은 결정되었어, 아빠와 레이포드 경 사이에 얘기가 다 끝났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애초부터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 운이 따른다면, 나중에 사랑의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기 마련이잖아. 난 언니와 달라, 언제나 전통적이고 안전한 사고방식을 따랐잖아” 리리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불만스러운 눈으로 동생을 쳐다보았다. 동생의 그런 무미건조한 태도를 보며,


그녀가 반항적인 청소년기에 가졌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알지 못하는 세상을 다른 사람은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들의 비밀을 무엇일까? 왜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 없는 결혼이 당연한데 내겐 이해가 안 되는 걸까?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지나친 자유를 즐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페넬로페가 앉아 있는 침대 옆에 앉았다. “난 네가 왜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릴리는 씩씩하게 말하려 노력했지만,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포기한 거야, 이런 말하는 거 미안해. 하지만 내 눈에는 언니가 지독한 낭만주의자처럼 보여” 릴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그렇지 않아! 난 완고하고 현실적인 성격이야. 이 세상을 현실적으로 이해할 만큼 충분한 경험도 했다구” “사랑하는 언니” 페넬로페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언니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용감하고 많은 장점을 가졌다고 생각해. 하지만 현실주의자는 아냐, 언니는 절대 현실적이지 않아” 릴리는 손을 빼내고 놀란 눈으로 동생을 쳐다보았다. 페넬로페는 그녀의 예상과 다른 반응이다. 흠, 그렇다 해도 계획은 진행해야 한다. 페니가 애정 없는 결혼에서 구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동생의 행복을 위해서. “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난 너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 런던의 모든 남자들 중에서, 알렉스보다 널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들어올렸다. “예를 들어 재커리 스탬퍼드 같은 사람, 어때?” 페넬로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친절한 재커리”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 일은 다 결정이 났어, 언니. 내가 이제껏 무엇 하나 언니에게 부탁한 적 이 없다는 거 알 거야. 하지만 진심으로 지금 부탁할게. 제발, 날 돕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줘. 난 엄마와 아빠의 결정에 따라 레이포드 경과 결혼할 거야. 그게 내 인생의 의무야” 그녀가 손가락을 탁 퉁겼다. “그래, 언니에게 맞는 남편을 찾아보면 어떨까?” “맙소사” 릴리는 코를 찡그렸다. “난 남자가 필요 없어, 물론 사냥터에서나 게임룸에서는 아주 재미있지. 하지만 다른 Ep 남자들은 정말 지독히 불편한 존재야. 탐욕스럽고 요구가 많은 동물이라구. 난 다른 사람의 의지대로 살아야 한다는 걸 참을 수가 없어. 자기 의견이 있는 여자가 아니라 여자가 주제넘게 끼어 든다는 말도 참을 수 없구” “가족을 만들려면 남자도 쓸모가 있어” 결혼을 앞둔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페넬로페도 아이를 낳는게 여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알고 있다. 그 말에 릴리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래, 아이를 낳는 일에는 남자가 필요하지” “죽을때까지 혼자 살려는 건 아니겠지, 언니?” “남자의 소유물이 되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좋아!” 자신이 너무 커다랗게 소리쳤다는 걸 페넬로페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알아차렸다. 릴리는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의자 위에 걸쳐진 숄을 집었다.


“이거 잠시 빌려도 되겠니? 산책을 좀 해야겠어, 이 안은 숨이 막혀” “하지만 언니......” “우리 나중에 얘기하자, 저녁식사 시간에 보자” 릴리는 서둘러 홀을 가로질러 정교한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로 갈것인지 생각도 없다. 호사스런 주위 환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바닥만을 내려다보았다. “맙소사, 좀더 신중했어야 했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요즘 그녀의 자제력은 금세 한계까지 도달해 버려 말을 조심하지 못했다. 커다란 홀을 돌아다니다가 회랑에 들어왔다. 잇달아 늘어선 유리문들 사이로 부드러운 잔디밭과 오솔길의 정원이 내대보였다. 힘차게 걷는 것, 그것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숄을 어깨에 감고서 릴리는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오히려 상쾌했다. 정원은 거대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다. 세심하게 단장된 울타리로 여러 구역이 나뉘어졌으며 예배당 정원에는 작은 물줄기와 하얀 백합으로 가득한 작은 연목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랗고 보기 드문 에어셔 장미나무로 가득한 장미 정원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릴리는 덩굴과 장미나무로 덮인 정원의 벽을 따라 걸어 세월에 퇴색한 계단을 올라 인공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로 들어섰다. 그 옆의 분수 주위로 열두 마리의 공작들이 뽐내며 걸어다녔다. 정원은 매우 평화롭다. 마치 나쁜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마법의 동산 탔았다. 그녀의 시선이 동쪽으로 뻗어난 과실수들로 향했다. 그 풍경은 그녀가 2 년 간 살았던 이탈리아 빌라의 레몬 정원을 상기시켰다. 그녀와 니콜은 오두막 뒤쪽의 레몬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고, 때로는 그 옆을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 생각은 하지 마” 그녀가 격렬하게 중얼거렸다. “하지 마” 하지만 그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분수 가에 앉아 숄을 더욱 꼭 끌어당기며, 그녀의 시선은 멍하니 호수 너머 멀리 숲 쪽을 향했다. “도미나! 시장에서 아주 멋진 걸 사왔어. 빵하고 부드러운 치즈, 맛좋은 와인이야. 정원에서 와인이야. 정원에서 과일을 좀 따서 점심으로......” 그 순간 그녀는 집안의 침묵을 알아차렸다. 밝았던 미소가 사라지면서, 그녀는 문 옆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작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시골 아낙네처럼 면 치마와 소매가 길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손수건을 동여맨 모습이었다. 검은 머리와 정확한 액센트로 인해, 이탈리아인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도미나?” 그제서야 가정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가늘게 땋은 머릿다발 사이에서 회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삐져나와 있었다. “마님” 그녀의 입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횡설수설 터져 나왔다. 릴리는 늙은 여자의 등근 어깨를 쓸어안으며 달랬다. “도미나, 무슨 일인지 말해 봐. 니콜은? 그 애는 어디 갔어?” 가정부가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말하기조차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까? 아이가 병이 난 갈까? 아니면 어디 다 친 걸까? 릴리는 도미나를 밀쳐내고 육아실로 연결된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니콜? 니콜, 엄마 왔다” “마님, 아가씨는 가버렸어요!” 첫계단 위에서 릴리의 발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난간을 움켜쥐고 부르르 몸을 떨며 도미나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그게 모슨 말이야? 그 애는 어디 있어?” “남자 두 명이었어요. 막으려고 해봤지만 막을 수 없었어요. 그들이 아가씨를 데려가 버렸어요. 아가씨는 없어요” 릴리는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그들이 무슨 말을 했지?” 도미나가 다시 울기 시작하자, 릴리는 욕을 퍼부으며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빌어먹을, 울지 말란 말이야.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하라구!” 도미나는 릴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뒷걸음질쳤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 애를 어디로 데려갔어?” “몰라요” “메모라도 남긴 거 없어?” “없어요, 마님” 릴리는 늙은 여자의 우는 얼굴을 노려보았다. “오,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이런 일이” 그녀가 미친 듯이 육아실로 달려갔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졌는데도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 작은 방은 여느 때와 똑같아 보였다.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는 장난감들, 흔들의자에 걸쳐진 옷가지, 그런데 아기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릴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나 겁이 나서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후 자신의 절규하는 비명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안 돼! 니콜, 안 돼” 화들짝 릴리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 이후로 2 년이 지났다. 2 년. 니콜은 아직 엄마를 기억할까? 아직 살아 있다면, 그 생각이 스치자 목이 탁 막혀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그녀의 죄에 대한 처벌일지도 모른다. 아기를 그녀에게서 영원히 빼앗는 것, 하지만 주님은 자비를 베푸셔야 한다. 니콜은 너무나 순수한 아이이고 그 애는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평생이 걸리는 한이 있어요, 니콜을 꼭 찾아내고야 말리라. 알렉스는 이렇게 맹렬하게 먹어대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지치지 않는 에너지는 많은 양의 음식에서 나오나보다. 릴리는 햄과 마데이라 소스, 감자 몇 스푼과 익힌 야채, 페이스트리와 과일을 점시 가득 채웠다. 먹는 동안 그녀는 내내 웃고 떠들었다. 따뜻한 불빛이 그녀의 생동감 넘치는 얼굴을 비췄다. 알렉스는 몇 번이나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이끌리는 자신, 그녀가 있음으로 인해 당혹해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릴리는 능수능란했다. 사냥이나 말, 그 외에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도 저돌적인 매력과 언사로 참여 했다. 하지만 토티와 사교적인 대화를 나눌 때면, 그녀는 상류 사회에 걸맞는 세련된 여자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알렉스가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그녀가 여동생을 압도할 정도로 꾸밈없는 매력을 발산할 때였다. “페니는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예여!” 릴리의 말에 페니가 소리 죽여 웃었다. 릴리는 다시 엄마를 슬쩍 쳐다보았다. “마침내 그렇게 소망하셨던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된단 다행이에요, 엄마. 나 때문에 몇 년 간을 고생하신 후라 더욱 기쁘네요” “너 때문에 항상 고생만 한 건 아니었단다, 얘야. 그리고 난 아직도 언젠가 네 결혼식을 보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어” 릴리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내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에


악마가 날 잡아갈 걸요’ “내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찾기 힘들 거예요” 페넬로페가 호기심 가득한 시너으로 쳐다보았다. “어떤 남자여야 하는데, 언니?” “그런 남자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졸장부?” 대뜸 던지는 알렉스의 무례한 말에 릴 리가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결혼이란 사업은 남자들에게 훨씬 더 이득이남아요. 언제나 남편이 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배권을 가져요. 그런 반면에 불쌍한 아내는 남자의 아이들을 낳고, 남편에게 편안함을 제공하면서 인생의 전성기를 다 보내고, 그 다음에는 얼마 남지 않은 야초처럼 꺼져가는 자신을 한탄하게 될 뿐이라구요” “윌헬미나, 그렇지 않아. 모든 여자는 남자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만 하는 거야” 토티가 어이없는 듯 소리쳤다. “난 아니에요!” “그러시겠지” 알렉스의 시선이 그녀를 따갑게 쳐다봤다. 릴리도 그의 시선을 되 받아치며 불편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가 데릭 크레이븐과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게 분명했다. 흥,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가 전혀 아니다. “네, 그래요. 하지만 내가 결혼하게 된다면 백작님, 야수 같은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지 않는 그런 사람일 거예요. 아내를 화려한 노예가 아니라 친구로 생각해 주는 사람” “릴리, 그만해라!” 아버지가 말을 잘랐다. “난 무엇보다도 평화롭고 싶다. 넌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 이젠 조용히 하거라” 알렉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전 계속 듣고 싶군요. 말해 보시오, 로슨 양. 그 외에 남자에게 무얼 더 바라는지?” 릴리는 뺨에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가슴에 이상한 감각이 생겨났다. 긴장되고 따뜻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전 계속하고 싶지 않네요. 아버지 말씀을 따라야죠” 그녀는 닭고기 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살코기가 모래알같이 씹혀 삼키기조차 힘들어졌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 모두 어색한 침묵을 지켰고, 페넬로페의 불안한 시선이 약혼자와 언니 사이를 오갔다. 잠시 후 릴리가 어머니의 발갛게 상기한 얼굴로 시선을 들었다. “사실 저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경을 쓰고 있어요. 어머니. 절 기꺼이 받아들일 사람을 찾을 수도 있잖아. 내 거친 성경을 받아 줄 만큼 인내심이 강한 사람으로요” 그녀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이미 그런 남자를 찾았는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소리니, 얘야?” “며칠 내로 손님을 맞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대단히 매력적인 청년이죠. 당신의 이웃이기도 하구요, 레이포드 경” 토티의 얼굴이 즉시 기쁨으로 밝아졌다. “장난하는 거 아니지, 윌헬미나? 내가 아는 사람이니? 왜 진작 얘길 하지 않았니?” “말할 게 많지는 않아요. 그리고 엄마도 알고 잇는 사람이에요, 재커리요” “스탬퍼드 자작?” 가족의 놀라는 표정에 릴리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렇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해리와의 파혼 후 재커리는 내 친구가 되었어요. 몇 년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지요. 우린 서로 잘 지내요, 최근에는 우리 사이의 감정이 완전히 무르익은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답니다” 완벽해, 그녀는 자신을 칭찬했다. 아주 적당한 말투로, 편안하고 기뻐하면서도 약간의 수즙음을 섞어서, 완벽한 연기력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이 상황에 대해 당신의 애인 데릭 크레이븐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이 혀끝에 맴돌았지만, 알렉스는 꾹 참았다. 두 사람이 어떤 한쌍이 될지 생각해 보았다. 재커리는 날카로운 발톱 하나 없는 착한 강아지였다. 아마 릴리는 손가락 하나로 그를 마음껏 조종할 것이다. 릴 리가 페넬로페에게 미안한 미소를 보냈다. “페니, 재커리가 한동안 너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어. 하지만 최근에는 재커리가 날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단다. 우리 관계에 대해서 네가 기분 상하지 않기를 바래” 페넬로페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놀라움과 질투가 뒤섞인, 페니가 이런 식으로 언니를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릴리는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꾸미고 있었다. “언니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을 마났다니 나도 기뻐” “재커리는 나에게 아주 좋은 남편이 되 거야, 사격 연습은 좀더 해야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는 스포츠에 능숙하지 않잖니” 페넬로페가 기운 없이 응수하였다. “하지만 스탬퍼드 자작은 친절하고 사려 깊은 분이야” “그래, 맞아” 릴리는 중얼거리면서도 페니의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 불쌍한 페니, 그녀의 얼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자기에게 열렬히 구애했던 남자가 이제 자신의 언니와 결혼말이 오간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모든 일이 착착 맞아떨어지고 있다. 릴리는 만족스럽게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제 소님을 모셔도 괜찮을까요, 백작님?” “당신의 결혼 문제를 방해할 생각은 꿈에도 없소, 로슨 양. 당신에게 그런 기회가 일생에 언제 다시 올지 누가 알겠소?” “매우 친절하시군요” 그녀가 불쾌하게 대꾸하고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댔더니 하인이 다가와 그녀의 빈 접시를 치워갔다. “아가씨? 아가씨, 차 한 잔 갖다드릴까요?” 커튼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릴리는 신음하면서 깊은 잠에서 깼다. 밝은 햇갈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려는 데 목 근육이 뻣뻣하다. 잠을 잠 것 같지도 않았다. 이상한 꿈을 꾸었고 그 중에 몇 개는 니콜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딸을 붙잡으려고 열심히 뒤쫓아갔다. 알지도 못하는 곳에 끝도 없이 이어진 골목을 비틀거리며 뛰어다녔다. 하녀가 계속해서 귀찮게 말을 시켰다. 그의 얄미운 주인이 깨우라고 보냈는지도 모른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괜한 심술이 발동안 모양이다. 속으로 알렉스에게 욕을 퍼부으며 릴리는 눈을 비비고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아니, 차는 필요 없어. 그냥 침대에 좀더 누워 있고 싶어” 순간 주면을 둘러보던 릴리의 입에서 놀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지금 그녀는 침대에 있는 게 아니었다. 오, 맙소사. 아래층의 도서실 의자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빨간 머리에 하얀 캡을 눌러쓴 젊은 하녀는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릴리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얇은 하얀 잠옷만 입은 채로 가운이 슬리퍼조차 없었다. 어젯밤 분명히 자신의 침대에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누워 잇는 것일까. 침대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온 과정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릴리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술이라도 마셨다면 이해가 될 텐데. 술에 취해 몇 번 바보


같은 저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젯밤엔는 저녁식사 후에 마신 술 몇 모금과 강한 커피 한 잔이 전부였다. 이런 일이 전에도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런던 집에 침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부엌에서 깨어났다. 그 후에도 집사인 버튼이 응접실에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버튼은 그녀가 독한 술을 마셨거나 다른 약에 취해 그러는 것쯤으로 짐작하였기 때문에, 그런 그에게 사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맙소사, 잠든 채 집안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그건 미친 여자의 행동이 아닌가? 하녀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난 어젯밤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술 한잔 마시려고 내려왔어” 릴리가 주먹 속으로 잠옷을 비비 꼬아 넣었다. “의자에서 그냥 잠들어 버리다니 정말 우습네” 하녀가 방안을 둘러보며 잔이 없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릴리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생각 좀 하려고 여기 앉았는데 그냥 잠들어 버렸어” “그렇군요, 아가씨” 릴리는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갑자기 두통이 일어났다. “이젠 내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커피 좀 올려다 줘” “네, 아가씨” 잠옷을 꼭 여미고서, 릴리는 커다란 의자에서 일어나 도서실을 나섰다.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현관의 홀을 지났다. 부엌에서 접시 부딪히는 소리와 하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싿.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녀는 잠옷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서, 계단을 날 듯이 올라갔다. 계단 맨 위에 도착했다 싶을 무렵, 검고 당당한 모습이 눈에 잡혔다. 심장이 철렁 했다. 아침 승마를 하러 나가는 레이포드 경이었다. 그는 승마복과 반짝이는 까만 부츠 차림이었다. 릴리는 가능한 한 자신을 가려보려고 얼른 잠옷 앞자락을 끌어 모았다. 그의 한심하다는 시선이 얇은 잠옷을 찢고 그녀의 몸 속에 와 닿는 듯하였다. “그런 차림으로 집안을 쏘다니다니, 무슨 짓이오?” 릴리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문득 영감 하나가 떠오르자, 그녀는 코를 치켜 세우고 가능한 한 오만한 자세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어젯밤에 당신 하인과 놀아난 모양이죠. 나 같은 여자한테 딱 어울리는 행동이 아닌가요?” 침묵이 흘렀다. 그의 미묘한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그의 눈동자에 얼음장 같은 번득임이 아니라, 강렬한 열기가 가득 찬 것이 보였다. 그들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으나, 주위의 세상이 그들을 감싸고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움에 그녀는 약간 비틀거리며 난간을 붙잡았다. 알렉스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거칠었다. “내 집안에 머물고 싶다면 로슨 양, 하인들이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당신의 그 헤픈 몸을 보이지 말아야 할거요. 알아듣겠소? 그의 경멸은 따귀를 맞은 것보다 더 지독하였다. 헤프다고? 릴리는 이렇게 증오스러운 인간을 만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주세페를 제외하고, 그와 맞먹는 지독한 말을 말려주고 싶었지만, 갑자기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알렉스는 그녀의 모습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녀가 계단을 오르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마구간으로 향하는 대신, 아무도 없는 도서실로 들어가 잇는 힘껏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몇 번이나 거친 숨을 토했다. 그 투명한 잠옷 차림의 그녀를 본 순간부터, 그는 그녀를 갖고 싶었다. 그의 몸이 아직도 흥분으로 떨리고 있다. 그 자리에서 당장 그녀를 카펫으로 밀어뜨려


차지하고 싶었다. 그 빌어먹을 짧은 머리가 그의 손에 손짓하는 듯 유혹하였다. 섬세하고 하얗던 목덜미, 매혹적으로 솟아 있는 작은 젖가슴. 알렉스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거칠게 턱을 문질러댔다. 캐롤라인에게 대한 욕망은 부드러운과 사랑이었다. 하지만 이런 욕망은 사랑과 전혀 강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흥분 상태는 캐롤라인에 대한 사랑을 배신하는 것이다. 릴리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스러운 존재였다. 어떤 상황이든 자신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데, 유독 그녀가 옆에 있을 때만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죽을 만큼의 인내가 필요하다 해도...... 4. “재커리! 오, 재커리. 이렇게 찾아와 주다니 정말 친절하세요!” 릴리는 앞으로 달려나가 그의 두 손을 꼭 잡고는 자신이 장원의 여주인인 듯 환영하며 손님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그가 그녀의 뺨에 정중하게 키스하였다. 까만 실크 넥타이와 우아한 승마복 차림의 재커리는 흠 잡을 데 없이 잘생긴 신사였다. 집사가 신중하게 재커리의 코트와 장갑, 모자를 받아들고 나서 물러났다. 릴리가 슬쩍 재커리를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지금 모두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어요. 어머니, 페니, 알렉스요. 날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 잊지 말아요. 그리고 만약 내 동생을 자꾸 쳐다보면, 꼬집어줄 테니까 주의하세요! 이제 들어가요” “잠깐만요, 페넬로페는 어때요?” 재커리가 그녀를 붙잡으며 걱정스레 속삭였다. “그렇게 걱정스런 표정 짓지 말아요. 당신에겐 아직 기회가 있답니다, 친구” “그녀가 아직 날 사랑하나요? 그렇게 말하던가요?” “아뇨, 그 애는 인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알렉스를 사랑하지 않는 건 확실해요” “릴리, 난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죽을 것만 같아요. 우리 계획이 꼭 성공하길 바래요” “성공할 거예요” 그녀가 단호하게 대꾸하면서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자, 이젠 싸우러 나갑시다!” 함께 현관 홀을 걸으며 재커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말했다. “내가 너무 늦게 왔나요?” 릴리도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같이 차 마시기에 딱 좋은 시간인 걸요”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그를 응접실로 안내하였다. 연노란 실크 벽지와 마호가니 가구, 커다란 창문들이 있는 아름답고 상쾌한 방이었다. “우리 왔어요. 다들 잘 아시죠? 소개할 필요가 없으니 정말 편하네요” 그녀가 다정하게 재커리의 팔을 부여잡았다. “레이포드 파크의 차는 정말 훌륭하답니다. 재커리, 내가 런던에서 내놓았던 우리 집 차와 거의 맞먹을 만큼 맛이 좋다니까요” 재커리가 점잖게 사람들을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릴리는 내가 마셔본 중에서 가장 맛좋은 차를 내놓지요. 다른 사람은 모르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터득한 거예요” 릴리는 다리가 가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슬쩍 동생을 쳐다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페니와 재커리 사이에 강렬한 시선이 오간 것을 알았다. 한순간이지만, 페니의 눈에 어찌할 수 없는 열망과 슬픔이 가득하였다. ‘불쌍한 페니, 널 위해 내가 모든 걸 바로 잡아 줄게. 너와 재커리가 진실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나에게 증명해 주렴’


재커리는 예의바르게 페넬로페와 토티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페넬로페의 붉어진 얼굴을 눈치채고 그는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렸다. “레이디 로슨, 당신과 사랑스러운 따님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다네” 토티도 다소 불편한 표정이었다. 페넬로페에 대해 재커리의 청혼을 거절하긴 하였지만,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아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페넬로페에 대한 재커리의 사랑이 진실하고 명예로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력이 딸리는 가문은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 레이포드 경이 딸아이를 위해 훨씬 더 경제적으로 풍족한 배우자였다. 알렉스는 상황을 관찰하며, 벽난로 옆에 기대 시가를 꺼내 물었다. 릴 리가 그를 노려보았다. 어쩜 저렇게 무례할 수 있을까? 신사들은 보통 남자들끼리 모여 대화를 나눌 때에만 담배를 피운다. 파이프로 연기를 뿜어대는 까탈스런 노신사가 아닌 한, 알렉스는 따로 나가 담배를 피워야 했다. 숙녀들 앞에서가 아니라. 재커리가 알렉스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레이포드 경”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가를 입으로 가져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연기를 내뿜었다. 야만인 같으니라구, 릴리는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과 전혀 다른 남자의 존재 때문에 위협을 느끼나 보다. 누구나 좋아하는 매력적이고 신사다운 재커리에 비해, 알렉스는 백 년이 지난다 해도 호감 가는 인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한 번 더 노려보고 나서 재커리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리 와서 앉아요, 재커리. 요즘 런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당신이 없으니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지요” 재커리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대답하였다. “하지만 큰 디너 파티에 참석했을 때 아나벨을 만났는데, 디어허스트 경과 결혼한 후로 아주 좋아 보이더군요” “다행이에요, 찰스 경과의 결혼을 십 년이나 견뎌냈으니 그녀도 행복을 찾아야 마땅해요. 찰스는 까다로운 늙은 염소 같았어요” 토티가 놀란 숨을 삼켰다. “윌헬미나! 찰스 경을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 있니, 그런 끔찍한 말로” “어때서요? 아나벨이 그와 억지로 결혼했을 때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어요. 찰스는 남편이 아니라 할아버지에 더 가까운 늙은이였다구요! 그리고 그 사람이 아나벨에게 냉정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녀가 적당한 나이의 남편을 만날 수 있도록 제때 죽어준 게 그나마 고마운 일이죠” 토티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윌헬미나, 너무 냉정하게 말하는구나” 재커리는 릴리의 손을 토닥이며 편을 들어주었다. “당신은 너무 솔직해, 사랑스러운 릴리. 하지만 일단 사귀고 나면 당신이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졌는지 누구든지 알게 되오” 릴 리가 환하게 웃으며, 놀라서 말도 못하는 여동생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페넬로페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릴리를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부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동생이 불쌍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였다. 페니에게 이 모든 것이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을 조심하도록 노력할게요, 오늘 이 시간을 위해서라면요. 계속 얘기해 줘요, 재커리. 나의 충격적인 발언을 되도록 삼가고 있을 테니까요. 아참, 차 한 잔 드리는 걸 잊었군요. 설탕 없이 프림만, 맞죠?” 재커리가 런던 소식을 얘기해 주는 동안, 알렉스는 시가를 피우며 릴리를 지켜보았다. 두 사람이 충분히 결혼을 고려하는 사이라는 건 인정했다. 그들간에 오랜 우정으로 싹튼 당정함 친밀감이 존재하였고,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며 편안해 보였다.


그 결혼이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셋째 아들인 재커리는 자기의 상속분보다 훨씬 많은 릴리의 재산에 감사해 할 것이다. 그리고 릴리는 매력적인 여자다. 바다색 초록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피부는 연한 장밋빛으로 빛났고, 그녀의 검은 머리와 눈동자도 놀라우리만치 이국적이다.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는 걸 마다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릴리가 좋은 가문과 좋은 성격의 남자를 맞이하는 운 좋은 여자로 보이리라. 너무나 오랫동안 화류계 끄트머리에서 돌아다닌 여자치고는 축복받은 상대이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잘못된 짝이다. 서른살이 되었음에도, 재커리에게는 여전히 순진한 소년의 모습이 남아있다. 릴리처럼 기가 센 아내를 맞이해서는 절대 권위 있는 가장 노릇을 못할 것이다. 재커리는 그녀와 싸우는 것보다 그녀의 뜻에 순종하는 걸 더 편하게 여길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결국 릴리도 애송이 남편에게 경멸을 느끼게 되고 결혼 생활이 파국으로 끝날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이미 예정된 비극이다. “백작님?” 릴리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 대화를 놓치고 말았다. “백작님, 제가 정원에 구덩이를 파는 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었어요” “구덩이?” 릴리는 대단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네, 당신의 새 연못을 만들 구덩이 말이에요” 알렉스가 당혹스런 침묵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대꾸하였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요?” “당신 정원사인 첨리 씨와 어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어요. 제가 그에게 정원을 개선할 만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했답니다” 알렉스는 시가를 끄고 벽난로 안에 던졌다. “내 정원은 개선할 필요가 없소, 이십 년 동안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소” 그녀가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당신의 정원은 아름답지만 구식이 되었어요. 요즘 세련된 정원들은 연못을 여러 개씩 만들어요. 제가 첨리 씨에게 정확히 어디를 파면 좋을지 위치까지 알려드렸어요” 알렉스의 목에서부터 관자놀이로 붉은 기운이 확 치솟아 올랐다. 그녀를 목 졸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첨리는 내 허락을 받지 않고는 흙 한 줌도 뒤엎지 않을 거요” 릴리는 순진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 생각에 대단히 동조하던데요. 그는 이미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을지도 몰라요, 당신도 정원의 변화가 맘에 드실 거예요” 그녀가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 작은 연못 주위를 걸을 때마다, 언제나 절 생각하게 되겠지요” 알렉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으르렁 비슷한 소리를 내지르며 응접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토티와 페넬로페, 재커리가 모두 릴리를 쳐다보았다. “내 아이디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릴리의 실망스런 대꾸에, 토티가 혀를 찼다. “윌헬미나, 너는 좋은 뜻으로 한 행동이지만, 레이포드 경의 소유지를 네 맘대로 바꾸지 말아라” 갑자기 하얀 앞치마와 구겨진 모자를 쓴 하녀 한 명이 문가에 나타났다. “레이디 로슨, 주방장님이 결혼식 연회에 대해서 의논하시고 싶답니다. 시간 나시는 대로 들러주세요. 수프에서부터 사소한 것까지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답니다” 릴리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어머니, 내가 제안한 메뉴 변경에 대해 의논하고 싶은 모양이에요” “오, 이런. 윌헬미나,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토티가 일어나서 서둘러 방을 나섰다. 릴리는 페넬로페와 재커리에게 미소를 보내싸. “흐음, 난 내가 일으킨 소동을 좀 진정시켜야겠군요. 그동안에 둘이서 시간을 보내세요” 페넬로페의 항의를 무시하고, 그녀는 응접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두 손을 비벼대며 씨익 웃었다. “잘됐어”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녀는 뒤쪽의 회랑을 지나 정원으로 나섰다. 잘 정돈된 나무들과 울타리 주위를 걸으며 릴리는 청명한 날씨와 머리에 와 닿는 바람의 느낌을 한껏 즐겼다. 문득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알렉스의 노한 음성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숨긴 채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주인님” 첨리의 말소리가 들렸다. 턱수염이 난 동그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벗겨진 이마가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이 목소리만 듣고도 떠올랐다. “주인님, 그런 제안을 듣긴 했지만 제가 설마 그렇게 중요한 일을 주인님과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하겠습니까요” “그 여자가 무슨 제안을 했든 하지 마. 그게 중요하든 사소한 것이든 상관없어, 절대로 하지 마” 알렉스가 명령하였다. “그 여자 말을 듣고 풀 한 포기, 나뭇가지 하나도 잘라내지 말라구! 돌멩이 하나 움직이지 마!” “확실히 그렇게 하겠습니다요, 주인님” “이 정원에는 빌어먹을 연못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어” “그럼요, 필요 없고말고요, 주인님” “그 여자가 다시 자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면 나에게 알려, 첨리. 일상 생활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말라고 다른 하인들에게도 명심시키고, 그 여자가 다음에는 이 집 전체를 분황색과 자주색으로 칠해 놓을까봐 걱정된다구” “알겠습니다요, 주인님” 그것으로 그의 설교는 끝난 모양이었다. 대화가 중단되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릴리는 울타리 뒤로 더욱 몸을 감췄다. 발각되면 큰일이다! 하지만 알렉스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분명 득키지 않았다고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갑자기 그의 험상궂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로슨 양!” 릴리의 손이 화들짝 눈으로 올라갔다. “네, 백작님?” “충분히 다 들으셨나, 아니면 내가 다시 말해 주어야 하나?” “일 킬로미터 반경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 소리를 다 들었을 걸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전 이 저택을 자주색으로 칠할 생각이 전혀 없답니다” “여기는 왜 혼자 나왔지?” 릴리의 머리가 재빨리 돌아갔다. “음, 재커리와 약간의 말다툼이 있었어요. 바람이라도 좀 쐬어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나왔어요” “당신 어머니가 재커리와 페넬로페와 같이 계신 거요?” “아마 그럴 거예요” 그녀의 태연한 표정을 그가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마음속 생각을 모조리 읽는 듯한 눈초리. “무슨 일을 벌이는 거지?”


그가 몸을 홱 돌려 집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 안 돼, 재커리와 페넬로페의 화해 장면이 들통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최대한 그를 막아야 한다. “잠깐만요, 잠깐!” 그녀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갑자기 발에 무언가가 걸리더니 그녀가 비명 소리와 함께 땅에 나뒹굴었다. 발치를 돌아다보니, 나무뿌리가 땅바닥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일어나려는 순간, 발목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오, 이런 빌어먹을” 알렉스의 목소리가 그녀의 욕설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오?” “발목을 삐었어요” 알렉스는 알 만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그냥 돌아섰다. “망할 자식, 정말 삐었다니까? 이리 와서 날 일으켜 세워 줘요. 신사라면 그 정도는 해야죠. 당신은 상식도 없나요?” 알렉스는 그녀에게 다가왔지만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어느 쪽 다리요?” “그걸 꼭 알아야 하는 건가요?” 알렉스가 털썩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어느 쪽이오? 이쪽?” “아니에요, 아야! 뭘 하려는 거예요. 아야! 끔찍하게 아프단 말이에요! 그 망할 놈의 손 치워요, 이 덩치 크고 홀쭉한 새디스트야” “흠, 엄살이나 작전은 아닌 모양이군” 알렉스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물론 아니죠! 왜 이런 뿌리를 자르지 않은 거예요? 너무 위험하잖아요!” “내 전원에 대해 또다른 변화를 제안할 게 아직도 있나?” 무시무시한 얼굴로 간신히 울화를 참는 듯한 어투, 릴리는 고개를 적으며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좋아” 그가 집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릴리는 어색하게 그의 옆으로 절룩거리며 따라갔다. “부축해 주지 않을 건가요?” 그가 쳐다보지도 않고 팔을 쑥 내밀자,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 힘껏 몸을 의지하였다. 그를 최대한 지연시켜야 한다. 재커리와 페넬로페가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단둘이 보내야 하니까. 릴리가 슬쩍 옆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응접실에 있을 때와는 달리, 단정하던 머리 매무새가 많이 헝클어져 있다. 습기 찬 공기로 인해 목덜미의 머리카락이 곱슬거렸고, 한두 가닥은 이마로 흘러내렸다. 솔직히, 아름다운 머릿결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있으니, 그에게서 상쾌한 향기가 풍겼다. 담배와 풀 먹인 옷의 냄새, 그리고 무엇인지 규명할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가 존재하였다. 따끔거리는 발목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걷는 것이 즐거울 정도였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싸울 거리를 억지로 만들어냈다. “꼭 그렇게 빨리 걸어야겠어요? 경주에라도 참가하신 모양이군요. 제기랄! 내 상처가 더 심해진다면, 당신이 책임져야 할 거예요” 알렉스는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지만 속도를 다소 늦추었다. “당신은 고약한 입을 가졌소, 로슨 양” “남자들은 보통 그렇게들 말하잖아요. 나라고 하면 안 된다는 법이있나요? 그리고 사실 내 남자


친구들은 나의 다채로운 언어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답니다” “데릭 크레이븐을 포함해서?” 그가 데릭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니 반가웠다. 그녀에게 힘있는 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 “크레이븐 씨가 나에게 쓸모 있는 말들을 가르쳐 주긴 했지요” “당연하겠지” “왜 이렇게 빨리 걷는 거예요? 난 무모한 속도로 끌고 가야 하는 고집 센 노새가 아니라구요. 좀더 천천히 갈 수 없겠어요? 게다가 당신 담배 냄새도 고약해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신 혼자 가면 되잖소” 그들은 집은으로 들어가는 중에도 계속 말싸움을 벌였다. 릴리의 커다란 목소리가 대리석 홀과 회랑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재커리와 페넬로페에게 그들이 돌아왔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가 응접실 문을 열었을 때, 그 불행한 연인들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잇었다. 그들만의 시간에 과연 무슨 말이 오고 갔을지 알 수 없었다. 재커리는 평상시의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페넬로페는 발그레한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알렉스가 두 사람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로슨 양과 무슨 말다툼을 했다고 하던데?”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은 재커리가 릴리에게 당혹스런 시선을 단졌다. “나의 급한 성질은 유명하잖아요, 그냥 뛰쳐나갔던 거 미안해요. 용서해 주겠어요, 재커리?” 릴 리가 재빨리 끼어 들었다. “용서할 일은 일어나지 않은걸” 재커리가 용감하게 그녀에게 다가와 손에 입을 맞추었다. 릴리는 알렉스의 팔을 풀고 재커리의 손으로 이동해 갔다. “재커리, 날 의자에 앉혀 주셔야겠어요. 정원을 산책하다가 발을 삐었답니다. 뿌리 하나가 땅에서 불쑥 솟아 있지 뭐예요, 남자 다리통만큼 두꺼운 뿌리가요!” “그건 과장이오” 알렉스가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하여튼 꽤 컸다구요” 그녀는 재커리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페넬로페가 놀란 소리를 냈다. “찜질을 해야겠어, 가엾어라.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언니!” 그녀가 방에서 달려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얼마나 심한거요? 발목만 아픈 거요?” “괜찮을 거예요” 그녀가 과장되게 몸을 움찔하였다. “하지만 당신이 내일 와주셔야 해요. 내 상태를 보러 들러 주시겠지요?” “당신이 나을 때까지 매일매일 오겠소” 릴리는 재커리의 머리 위로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방금 들린 우드득 소리는 그의 이 가는 소리였을까? 다음날, 릴리의 발목은 조금 불편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거의 말짱하였다. 날씨는 보기 드믈게 따뜻하였고 햇살도 아름다웠다. 재커리가 마차를 갖고 와 바람을 쐬자고 하였고, 릴리는 동생과 같이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페넬로페가 알렉스에게도 같이 가자고 초대하였지만, 그는 일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모두 알렉스의 거절이 반가웠다. 그와 같이 외출한다면, 일이 훨씬 더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세 사람은 탁 트인 마차에 올라 길을 떠났다. 재커리가 능숙하게 고삐를 잡고, 릴리와 페넬로페는 챙


넓은 모자로 햇살을 가리며 마차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재커리는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두 여자의 말에 미소를 보내 주었다. 갈림길에 도착하자 재커리는 사람이 덜 다니는 한가한 길로 가자고 제안하였고, 마침내 대단히 아름다운 장소에 도착하였다. 드넓게 펼쳐진 넓은 초록의 잔디에 제비꽃과 클로버, 제라늄이 가득하였다. “너무나 아름다워요!” 페넬로페는 눈 위로 흩어진 금발 머리를 쓸어넘기며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우리 산책하자, 언니. 어머니에게 제비꽃을 따다 드리고 싶어” 릴리가 유감스럼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세, 난 아직 발목이 아픈 걸” 물론 거짓말이다. “오늘은 걷는 게 안 좋겠어. 대신 재커리가 따라가 줄 거야”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아, 언니” 페넬로페가 재커리의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며 당혹감에 얼굴을 붉혔다. “같이 가시지요. 저의 큰 기쁨이 될 겁니다” “하지만, 보호자도 없이......” “갔다 와, 재커리는 신사잖아. 그리고 나도 계석 두사람을 쳐다보면서 보호자 노릇을 해줄게. 물론 네가 산책하고 싶지 않다면, 나와 같이 여기 앉아서 풍경이나 감상하든지, 페니” 사랑하는 남자와 방해자 없이 산책을 하느냐, 아니면 언니와 같이 마차에 앉아 있느냐. 페넬로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어느 쪽을 선택할지 생각하였다. 유혹이 승리하였다. 재커리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페넬로페가 말했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요” “당신이 돌아오고 싶을 때 바로 돌아오도록 하겠소” 재커리가 대꾸하며 마차에서 펄쩍 뛰어내린 후 페니를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두 사람은 초원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릴리는 흥미롭게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완벽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다. 재커리는 명예를 아는 청년이다. 페니를 보호할 정도의 힘이 있으면서도 위협이 되지 않는 소년 같은 면도 있었다. 그리고 페니는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랑스럽고 순수한 아가씨였다. 마차 좌설 위에 발 하나를 올리고서, 릴리는 과일과 비스킷이 든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딸기를 하나 베어 물고 남은 꼭지를 옆에 버렸다. 그녀는 모자의 끈을 풀어, 얼굴 위로 햇살을 가득 받으면서 다시 딸기 하나를 집어들었다. 오래 전 이탈리아에 있을 때, 그녀는 주세페와 같이 소풍을 나간적이 있었다. 지금과 아주 흡사한 초원이었다. 연인이 되기 바로 며칠 전, 그 당시 릴리는 자신이 꽤나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풋내기였는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골 공기가 아주 좋네요” 담요 위에 팔꿈치를 기댄 채 잘 익은 배를 깨물으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선 모든 게 맛이 더 좋아져요!” “도시의 즐거움이 싫증이 난 거요, 아모레 미오?” 주세페의 아름다운 눈이 따뜻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과 촉촉한 검은 눈동자였다. “사교계는 영국과 똑같이 권태로워요. 모두가 재미난 일이 없나 찾아다니고, 아무도 쓸모 있는 얘기를 하지 않고 또 듣지도 않죠” “난 들어요, 카라. 당신 말이면 무엇이든 들을 거요” 릴리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미소지었다. “그런가요? 왜죠, 주세페?”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그의 정열적인 대답에 그녀는 웃어버렸다.


“당신은 모든 여자를 사랑하잖아요” “그게 잘못이오? 영국에서는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렇지 않소. 난 모든 여자에게 줄 특별한 사랑을 갖고 있다오, 당신을 위한 특별한 사랑” 그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포도 한 알을 따서 그녀의 입에 갖다대었다. 릴리는 우쭐한 심정으로 입을 벌렸다.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그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포도를 받아 먹었다. 그녀에게 이렇게 열렬히 구애한 남자는 없었다. 그의 눈 속에는 불가능한 약속들이 담겨 있었다. 부드러움과 기쁨과 욕망에의 약속, 머리로는 그런 약속을 믿지 않으면서도 마음은 필사적으로 믿고 싶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지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육체와 욕망의 불가사의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릴리, 아름다운 나의 영구 소녀, 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수 있소, 아주 행복하게, 벨라” 주세페가 중얼거렸다. :그런 말 하면 안돼요, 그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달아오른 뺨을 숨기려 애쓰며 시선을 피했다. “없다구? 날 한 번 시험해 보구려, 카라. 아름다운 릴리, 언제나 슬픈 미소만 짓다니. 내가 모든 걸 더 기분 좋게 만들어 줄게” 그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에게 내려왔다. 그의 키스는 따듯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릴리는 바로 그 순간 그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몸을 내어주리라. 어차피 그녀가 처녀라는 걸 믿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자신의 순결 따위는 중요치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자신이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매혹적인 불가사의로 생각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세페와의 실수 때문에 천 배나 더 심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죄값을 치르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재커리와 동생을 쳐다보았다.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의 친밀감은 눈으로도 느껴졌다. ‘그는 널 절대 배신하지 않을 남자야, 페니. 그리고 말이야, 장담하는데 그런 남자는 아주 드물단다’ 재커리가 떠난 후, 페넬로페는 들뜬 분위기였다. 하지만 몇 시간 후에는 인상까지 변해 있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동생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창백했다. 릴리는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늦은 저녁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때에야 간신히 얘기할 기회를 잡았다. “페니, 무슨 일인? 오후 내내 너무 조용하더구나, 저녁식사는 건드리지도 않고” 동생의 뒤에서 드레스 고리를 풀어주며 그녀가 물었다. 페넬로페는 화장대로 걸어가 머리에서 필들을 뽑아냈다. 머리가 금박의 폭포수처럼 허리까지 출렁였다. 릴리는 쳐다보는 그녀의 안색은 비참하게 그늘져 있었다. “언니가 무얼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더 이상 재커리와 날 만나게 해서는 안 돼, 언니. 그건 아무 소용도 없어, 그리고 잘못된 일이야!” “아까 그와 같이 산책한 것 때문에 그러니? 내가 널 어색하게 만들어나 보구나, 미안해” “아니, 그와 보낸 시간은 아주 멋졌어” 크게 소리치고 나서 페넬로페는 수치감에 사로잡힌 표정이 되었다. “난 이런 말을 하면 안 돼, 내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모든 일이 다 혼란스럽기만 해” “네가 언제나 부모님의 뜻에만 따라왔기 때문이야. 넌 그분들이 기대하는 대로만 행동해 왔어. 페니, 넌 한 번도 네 뜻대로 행동한 적이 없어. 재커리를 사랑하면서도 의무감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어” 페넬로페는 침대에 앉아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누굴 사랑하느냐는 주용하지 않아” “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거야! 왜 그렇게 흔들리는 거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까 낮에 레이포드 경이 날 불렀어. 우리가 마차 여행에서 돌아 온 후에” 릴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뭐라구? 그가 뭐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몇 가지 물어봤어. 재커리가 언니한테 구혼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어. 재커리가 나에게 접근하려고 언니한테 관심 있는 척한다는 거야”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릴리가 즉시 분노를 쏟아내었다. “그게 사실이잖아. 언니도 알고 있을 테고” 페넬로페의 목소리는 비참하였다. “물론 그래, 애초에 그 계획을 생각해 낸 사람이 나니까!” “그런 줄 알았어”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비난으로 우릴 모욕하냔 말이야!” “레이포드 경은 재커리가 나 같은 여자와 결혼할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면, 언니 같은 사람과는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 릴리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나 같은 사람이라니?” “그는 ‘경험 많은’이라는 말을 썼어” 리리는 성난 암사자처럼 방언을 걸어다니기 시작하였다. “경험이 많다고? 그는 날 남편이 필요 없는 바람둥이 여자로 생각하는 모양이군. 흥, 다른 남자들은 날 꽤나 매력적으로 생각해, 혈관속에 얼음덩이가 떠다니지 않는 정상적인 남자들은. 오,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점을 가진 남자가 날 비난했다 이거군! 내가 이 집을 나갈 때쯤이면 모든 게 고쳐져 있을 거야” “언니, 제발, 이런 일은 날 너무나 슬프게 만들어.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겠어?” “몰른 되지. 존경하는 백작님에게 중요한 일을 깨우쳐준 다음에!” “안 돼!” 페넬로페는 이 상황에 두통이 나는 듯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 “레이포드 경을 화나게 하면 안 돼! 난 우리 모두의 평화가 깨질까봐 겁이 난다구!” “그 사람이 널 위협했니?” 페넬로페가 릴리의 눈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 눈 속에는 그녀를 겁먹게 할 만한 독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배신하면 절대 참을 스타일이 아니야. 그는 자기 일을 방해받을 남자가 아니라구!” “페니, 만약에 재커리가 너에게 청혼......” “아니, 아니, 더 이상 그런 얘기는 하면 안 돼. 언니, 난 듣지 않을거야, 들을 수 없어” 페넬로페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알았어, 오늘밤은 이만 하자. 울지 마, 모든 게 잘될 거야. 두고 보라구” 알렉스는 빠른 걸음으로 거대한 계단을 내려갔다. 고급 울코트에 황갈색 조끼와 면바지를 입은 여행복 차림이었다. 어제 도착한 편지 때문에 런던에 가야 한다. 그의 동생 헨리가 명문 학교 웨스트필드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레이포드 가족 중에 학교에서 추방된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었다. 알렉스는 분노와 걱정을 동시에 느끼며, 무슨 사건으로 퇴학 얘기까지 나오게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헨리는 언제나 혈기왕성하였다. 교장의 짧은 메모에는 별 설명도 없이, 그 아이를 더 이상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동생을 똑바로 교육시키지 못한 것 같아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꾸지람이 필요할 때마다, 헨리의 잘못을 처벌해야 할 때마다 할렉스는 냉정하게 굴지 못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헨리는 너무나 어렸고, 그 아이에게 있어 알렉스는 형이라기보다 아버지에 가까웠다. 동생을 제대로 키운 것인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진작에 결혼을 해서 헨리에게 친적하고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그를 알아챈 그녀가 몇 계단 밑에서 멈춰 섰다. 그의 엄격한 얼굴을 쳐다보며, 신음과 함께 한 손을 머리로 올렸다. “우리 이 일은 못 본 척해요, 네?” “안 되겠소, 로슨 양. 당신이 어디에 갔다오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설명을 듣고 싶소” “아무 설명도 못 하겠는데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알렉스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인 하나와 만난다 어쩌구 했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런 모양새였다. 맨발에 잠옷 차림, 핼쑥한 얼굴, 방탕한 밤으로 인한 피로를 나타내주는 듯한 검은 눈자위. 왜 그 생각이 이렇게 화를 나게 하는지 알 숭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자신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도 없었는데. 입안에 쓴맛만이 감돌았다.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직접 당신 가방을 쌀 거요. 런던에서는 도덕성이 결여된 방탕한 생활이 감탄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용납할 수 없소” 그의 차가운 말에, 릴리는 도전적으로 쳐다보고 나서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뭐라고 했소?” 그가 으르렁거리자, 그녀는 설탕같이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완벽하게 멋진 하루가 되시길 빈다고 했어요, 백작님” 릴리는 방으로 돌아와 목욕 준비를 부탁하였다. 하녀들이 욕조를 준비하며, 작은 화로에 불을 지피고, 그 옆의 따뜻한 선반에 수건들을 늘어놓았다. 하녀들을 내보내고 나서, 욕조에 편안한 몸에 담그며 그녀는 멍하니 가슴 위로 물을 뿌렸다. 손으로 그린 꽃과 새 모양의 중국식 벽지, 화로의 선반에는 용과 탑 모양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구식이군. 적어도 20 년 전에 칠해진 벽이라는 데 내기라도 걸 수 있었다. ‘어차피 여기 있을 거라면,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까지 푹 물 속으로 집어넣었다. 물 속에서 다시 고개를 내민 후에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생각할 용기가 났다. 몽유병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있다. 어제도 도서실에서, 오늘 아침에는 응접실의 의자 뒤에서 깨어났다.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되었을까? 어떻게 발을 헛디디지도 않고 계단을 내려갈 수 있었을까? 만약 구르기라도 했으면 목이 부러질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일이 계속 놔둘 수는 없다. 밤마다 몸을 침대에다 묶어 놓아야 할까?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흥, 알렉스는 별로 놀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여자로 생각하니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술을 마시면 어떨까? 아니, 안 돼. 술에 의존하면 안 된다, 그건 파멸의 지름길이다. 독한 술로 스스로를 망치는 사람들을 런던에서 수도 없이 보지 않았던가. 의사와 상담해서 수면제를 달라고 해볼까? 그러다 의사가 미쳤다고 진단하면 어떻게 한담? 그럼 그 후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릴리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눈을 감았다. “어쩌면 내가 정말 미쳤는지도 몰라” 그녀가 머리카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어떤 여자인들 자기 아이를 빼앗겼는데 미치지 않고 살겠는가. 그녀는 머리와 몸을 열심히 닦고 나서, 욕조에서 나와 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하얀 레이스 장식의 속옷을 입고, 수를 놓은 면 스타킹을 신고, 작은 분홍 꽃그림이 박힌 면 드레스를 입었다. 그렇게 입으니 거의 페넬로페 나이라 해도 믿을 만큼 어려 보였다. 불 앞에 앉아 젖은 머리를 올리며, 오늘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맞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녀가 손가락을 탁 퉁겼다. “우선은, 재커리가 나에게 구혼하고 있다는 걸 알렉스에게 확인시켜야 해. 그래야 의심을 하지 않을


테니까” “아가씨?” 하녀가 문가에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 “아니,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냥 혼자 얘기한 거야” “시트를 바꾸려고 왔습니다” “내 잠옷도 가져가서 빨아 줘. 아, 그리고 레이포드 경이 어디 계신지 알아? 그분과 얘길 하고 싶은데” “런던에? 왜? 얼마나 오래?” “집사에게 오늘밤 돌아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흐음, 짧은 여행이로군. 그렇게 짧은 기가에 무얼 하려는 거지?” “무슨 일로 가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녀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지만 알렉스의 하인들은 입이 무겁고 주인에게 충성스럽다. 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웨스트필드는 런던 북서쪽의 언덕 위에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면 12 개의 도시들을 거의 다 내려다볼 수 있었다. 공립 학교 중 가장 명망 있는 웨스트필드는 위대한 정치인과 예술가, 시인과 군인들을 배출한 명문 학교이다. 알렉스도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선생님과 선배들의 엄격한 규율에도 불구하고 친한 친구들을 사귀며 장난기로 가득 찼던 즐거운 시절이었다. 헨리도 자신처럼 잘 지내길 기대하였는데,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뚱한 얼굴의 소년이 알렉스를 교장실로 안내하였다. 톤웨이트 교장은 미소도 없이 커다란 책상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였다. 그는 하얀 머리카락에 좁다라 얼굴, 숱이 많은 검은 눈썹의 마른 사내였다. 그의 말투도 표정과 마찬가지로 무뚝뚝했다. “레이포드 경, 우리 학교의 범죄자를 데리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그 학생은 위험한 성질의 소유자로 우리 웨이스트필드에 부적절한 학생입니다” 알렉스의 뒤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벽 쪽의 나무 벤치에 앉아 있던 헨리가 달려오다가 얼른 기쁨을 자제하였다. 알렉스는 미소를 감추며 그의 목덜미를 잡아 홱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동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교장 선생님이 왜 널 위험한 학생이라고 부르는 거냐?” “장난 좀 쳤어요” 알렉스는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헨리가 아슬아슬한 유머감각을 갖고 있긴 하지만,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괜찮은 아이였다. 열두 살의 소년치고 작은 키였지만, 억세고 강인하였다. 스포츠와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시에 대한 은근한 사랑도 품고 있었다. 강렬한 푸른 눈동자에는 밝은 미소가 춤을 추었고, 하얀빛 도는 금발 머리는 아무렇게나 뻗치려 해서 자주 빗어주어야 한다. 과감하고 추진력이 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잘못된 행동을 한 경우라면 재빨리 사과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그런 헨리가 어떤 일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교과서 몇 장을 풀로 붙엿거나, 살짝 열린 문 위에 물 양동이를 올려놓았을지 모른다. 흠, 톤웨이트의 분노를 달래서 이 애가 학교를 떠나지 않을 수 있도록 설득해 봐야 하리라. “어떤 장난이었니?” 알렉스의 질문에 대답한 쪽은 톤웨이트였다. “내 집 문에 폭탄을 터트렸소” 알렉스가 동생을 쳐다보았다. “네가 그런 짓을 했냐?”


헨리는 죄스러운 듯 시선을 회피하였다. “화약이었어요” “그 폭탄은 나나 내 집 가정부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힐 수 있었어” “왜 그런 짓을? 헨리, 그건 전혀 너답지가 않구나” 톤웨이트가 다시 대꾸하였다. “그 반대요, 대단히 그 녀석 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헨리는 반항적인 아이요. 권위에 도전하고, 어떤 처벌도 받아들이지 않는......” “말도 안 돼! 난 처벌을 죄다 받았다구요, 그보다 더한 것도!” 헨리가 교장을 노려보고 반발하자, 톤웨이트는 이것 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알렉스가 부드럽게 동생의 어깨를 잡았다. “날 봐라. 왜 교장 선생님 집 문 앞에 폭탄을 터트렸니?” 헨리는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았고, 톤웨이트가 다시 대꾸하였다.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요” “당신 의견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알렉스의 차가운 시선을 받자 교장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는 다시 부드러운 시선으로 헨리를 쳐다보며 달랬다. “헨리, 나에게 설명해 보렴” “별 일 아니에요”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말해 봐, 당장” 헨리가 머뭇거리며 형을 쳐다보았다. “채찍질 때문이었어요” “채찍을 맞았냐? 무슨 이유로?” 헨리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올라왔다. “형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유들이죠! 회초리나 막대기로 선생들은 언제나 매질을 했어요!” 그가 교장을 반항적으로 노려보았다. “한 번은 아침식사 시간에 늦었기 때문이었고, 한 번은 영어 선생님 앞에서 책을 떨어뜨렸다고, 한번은 목을 깨끗하게 닦지 않았다고요. 몇 달 동안 난 일 주일에 거의 세 번씩 매질을 당했어요. 아주 넌더리가 난다구요!” 우린 다른 아리들에게도 똑같은 처벌을 내립니다“ 교장이 끼어 들었다. 알렉스는 무표정하게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분노가 치솟았다. “맞은 곳을 보여봐” 헨리의 얼굴이 더욱 빨개지며 머리를 흔들었다. “형” “보여봐” 형과 교장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헨리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뭐 어떻겠어요? 교장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봐 왔는데” 그가 뒤로 돌아 재킷을 벗고 웃옷을 허리춤을 끌어올리고, 바지를 약간 내렸다. 동생이 당한 것을 보는 순간 알렉스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헨리의 등과 엉덩이는 매자국과 딱지, 멍투성이였다. 그런 처벌을 흔히 있는 일이라거나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가장 엄격한 훈육주의자라 해도 그렇게 심한 체벌은 못 할 것이다. 그 채찍질은 교육의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변태자가 한 짓이었다. 사랑하는 동생이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알렉스는 떨리는 손으로 턱을 거칠게 비벼대었다. 톤웨이틑 쳐다보지는 않았다.


만약 보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지도 몰랐으니까. 헨리가 바지를 오리고 형에게 돌아섰다. 형의 차가운 눈동자와 거칠게 꿈틀거리는 뺨을 보고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전적으로 합당한 처벌이었습니다. 채찍질은 웨스트필드의 전통적인......” 알렉스가 대뜸 교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헨리, 이 자들이 채찍질 말고 다른 짓을 한 건 없는 거냐? 다른 방법으로 처벌당한 적이 있었니?” “아뇨,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다” 알렉스가 턱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밖에 나가 있거라. 나도 금방 나갈 거니” 헨리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알렉스는 톤웨이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교장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졌다. “레이포드 경, 채찍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인정된 방법입니다” “난 인정하지 못하겠소!” 알렉스가 그를 벽으로 콰당 밀어붙였다. “사람을 부르겠소, 이런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당신을 죽여버리는 게?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 그러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니” 그는 멱살을 잡ㅇ 톤웨이트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끌어 올렸다. 교장의 비쩍 마른 목에서 숨막힌 켁켁거림이 새어나왔다. 톤웨이트의 흐릿한 눈 앞에 알렉스의 강철 같은 눈동자와 으르렁대는 하얀 이만이 가득하였다. “당신은 변태야, 아이들에게 자신의 욕구불만을 푸는 거야. 불쌍한 아이들의 등르 피가 날 때까지 채찍질하는 게 만족스러웠겠지. 당신은 인간으로 불릴 자격도 없어. 내 동생과 다른 순진한 아이들을 당신 손에서 내가 기필코 구해내고 말 거야!” “교......교육” 톤웨이트가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만약 당신의 잘난 교육이라는 것 때문에 영원히 회복하지 못할 상처가 생긴다면, 혹시라도 헨리가 다른 방법으로 학대당한 것이 밝혀지는 날에는, 넌 내 손에 끝장날 줄 알아” 알렉스는 톤웨이트의 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남자의 몸이 뒤틀리며 공포스런 소리가 새어나왔다. 교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때까지 알렉스는 계속 붙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네 머리통을 박제해서 헨리의 방 벽에 걸어둘 생각이야, 웨스트필드에서 지낸 날의 기념으로. 헨리도 좋아할 것 같군” 그가 갑자기 손을 놓아버리자, 교장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톤웨이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씨근거렸다. 코트에 두 손을 탁탁 털고 나서, 알렉스는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와 명패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문을 힘껏 닫았다. 그리고는 복도에 있는 헨리의 팔을 붙잡고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왜 진작 나에게 말하지 않았냐?” “모르겠어요” 문득 릴 리가 했던 비난의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접근할 수도 없고 냉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고 그녀가 비난했었지. 그녀의 말이 진실일까?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네 일을 이해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내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이런 일이 있었다면 진작에 내게 말했어야 했어” “제기랄! 난 이곳이 점점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구요. 아니면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다고요” “폭탄을 터트려서?” 소년이 잠잠해졌다. “헨리, 난 네가 혼자서 모든 일들을 처리하길 바라지 않아.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야. 넌 내 책임


하에 있는 거다” “그건 알아요. 하지만 형은 다른 일들 때문에 바쁘니까, 결혼식 같은 일들요” “결혼식 따위 집어치워! 그걸 핑계삼지는 말아라”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동생의 격한 항의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며 애써 침착을 유지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먼저 나에게 말해야 한다는 걸 이해시키고 싶은 거다. 나에게 널 돕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 헨리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어쩌죠?” “우린 레이포드 파크로 돌아갈 거다” “정말이에요?” 그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서렸다. “내 짐이 아직 기숙사에 있는데” “중요한 게 있냐?” “그렇지는 않지만......” “좋아, 우린 여기 모든 걸 남겨 두고 갈 거다” “그럼 전 다시 와야 하는 건가요?” 헨리의 표정에 공포가 떠올랐다. “아니, 안 와도 돼. 집에서 선생님을 구할 거야, 넌 그 지방 아이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어” 기쁜의 탄성을 올리며 헬 리가 학교 모자를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그들이 학교를 빠져 나가는 동안, 그 모자는 그들 뒤의 마룻바닥에 남아 있었다. “쉬이, 그가 오는 것 같아요” 알렉스의 마차 소리에 신경을 쓰고 있던 릴리가 재빨리 재커리를 음악실로 끌고 나왔다. 재커리와 토티, 페넬로페 세 사람은 피아노를 치며 즐겁게 노래하던 중이었다. “릴리, 대체 무슨 계획을 세운 겁니까?” “내 짐작에 알렉스는 여독을 풀기 위해 술 한잔하러 도서실에 들를거예요. 그에게 우리가 다정하게 함께 있는 모습을 모이는 거예요” 릴리는 재커리를 육중한 가구 의자로 끌어 앉히고는, 그의 무릎에 걸터앉아 항의하려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해요, 재커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잖아요” 그녀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겁고 정확한 발걸음, 알렉스가 틀림없다. 그녀는 재커리의 입에서 손을 떼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나에게 키스해요, 진짜처럼 보이게 하라구요” “하지만 릴리, 우리가 꼭 이래야 하는 겁니까? 페니에 대한 내 사랑안......” “이 키스는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하지만 꼭 이럴......” “하라니까요, 제기랄!” 재커리가 유순하게 순종하였다. 그 키스는 릴리가 전에 경함한 것과 비슷하였다. 특별하다고 말할 만한 것은 없었다. 시인들은 어째서 이렇게 기분 좋지도 않은 것을 환희로 묘사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인 스위프트의 말에 더 공감이 갔다. ‘어떤 어리석은 자기 키스를 만들어냈는고’ 하지만 사랑에 빠진 남녀들은 이 행동을 좋아했고, 이것으로 재커리와 그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걸 알렉스에게 확신시킬 수 있으리라. 도서실 문이 열렸다. 침묵이 흘렀다. 릴리는 열정적인 키스에 빠진 것처럼 보이려고 재커리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방해꾼을 알아챈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행으로 인해 헝클어진 매무새와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예상대로 거기에 있었다. 릴리는 새침하게 씨익 웃어 보였다. “평소의 유쾌한 레이포드 경이 아니군요, 백작님. 보시는 바와 같이 당신이 우리의 은밀한 순간을 방해하셨답니다” 그으 옆에 선 소년을 알아채는 순간 그녀의 말이 중단되었다. 호기심 많은 누누동자를 가진 금발 머리의 소년이 미소를 지을까 말까 고심하고 있었다. 흐음, 재커리와의 포옹을 알렉스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킨다는 건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릴리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로슨 양, 이쪽은 내 동생 헨리요” 알렉스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벼락을 내릴 듯했다. “안녕, 헨리” 그녀는 힘없는 미소로 맞았고, 소년은 예의바른 인사말 따위 아예 생략해버렸다. “알렉스와 결혼할 거면서 왜 스펨퍼드 자작과 키스하고 있었나요?” “오, 난 그 로슨 양이 아니란다. 네가 말하는 건 내 불쌍한, 아니 내 여동생이야” 아직 재커리의 무릎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하마터면 바닥에 굴러 떨어질 뻔하였다. “페니와 어머니는 음악실에 계세요. 노래를 부르고 있죠” 알렉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자, 헬리. 페넬로페를 소개해 줄게” 그 말에 아랑곳없이, 헨리가 드레스를 가다듬는 릴리에게로 다가왔다. “머리를 왜 그렇게 남자처럼 잘랐나요?” 자신의 세련된 스타일에 대한 표현이 재미있어, 릴 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냥하고 사격을 할 때 눈에 흘러내려서 귀찮았단다” “사냥을 하시나요? 여자한테는 위험할 텐데요” 릴리는 알렉스를 슬쩍 쳐다보면서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이런, 헨리. 너의 형도 처음 만났을 때 똑같은 말을 했었단다” 알렉스와 릴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갑자기 알렉스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듯하였다. 미소를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릴리가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다. “백작님, 제가 헨리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어린 남자보다 나이 든 남자에게 더 위험하거든요” “그렇겠지요, 로슨 양” 그가 헨리를 이끌고 방을 나갔다. 렐레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이상하게 쿵쾅거리며 혼란스러웠다. 지치고 헝클어진 모슨, 작은 동생의 어깨를 보호하듯이 잡은 그의 손,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남자에게 안달하며 설치는 타입의 여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머리를 매만져주고, 그에게 저녁식사를 차려주며, 왜 그렇게 힘든 얼굴을 하고 이쓴지 사연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릴리, 그가 우리 키스를 진짜로 믿었을까요?” 재커리의 질문에 릴리는 기계적으로 대꾸하였다. “그랄 거예요. 왜 안 그렇겠어요?” “그는 아주 직감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모두가 그를 과대평가하는 건 정말 지긋지긋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이 너무 날카롭게 반응했음을 깨달았다. 순간 스쳐간 생각에 놀란 때문이다. 알렉스에게 안겨 그의 단단한 입술을 느끼며, 그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배 부분이 이상하게 단단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화끈거리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에게 안긴 건 단 한 번뿐이다. 미들턴 사냥터에서 낙마했을 때, 그는 그녀를 안아서 거의


목을 조르려 했었다. 그 억센 손과 난폭한 표정이 그녀를 겁먹게 했었다. 그런 모습을 캐롤라인 휘트모어에게도 보인 적이 있을까? 릴리는 그 불가사의한 캐롤라인에 대해서도 대단히 궁금해졌다. 그녀도 그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그의 재산 때문에 결혼하기로 동의한걸까? 아니면 귀족이라는 명예 때문에? 미국인들은 귀족 가문에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는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알렉스는 캐롤라인에게 어떤 남자였을까? 따뜻하게 미소지어 주었을까? 캐롤라인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해답도 없는 질문들이 계속해서 밀려오자, 릴리는 자신에게 실컷 욕을 퍼부었다. 그의 죽은 연인이 어땠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페넬로페를 그에게서 구출하는 일뿐이다. 알렉스는 방금 면접한 선생을 내보낸 다음 한숨을 쉬었다. 하츠킨스라는 남자가 벌써 네 번째 면접자였다. 지금까지는 어떤 사람도 만족스럽지 않다. 엄격함과 이해심을 적절히 갖춘 선생을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지난 며칠 동안 성난 소작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참으로 바쁜 나날이었다. 소작인들은 산토끼의 약탈로 귀중한 곡식이 피해를 입는다고 화를 냈고, 사냥터지기는 밀렵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해왔다. “토끼를 잡는 건 나쁘다고 할 수 없겠지만요, 그들이 밤에 함정을 놓고 밀렵하는 바람에 꿩의 번식까지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올해는 사냥할 꿩조차 없게 될 겁니다!” 알렉스는 불법적인 밀렵을 중지한다면 피해난 곡식만큼 코상을 해주겠다고 소작인들에게 제안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자기들의 짓이 아니라고 발뺌하던 소작인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동의를 하였다. 그녀는 동안 버킹엄셔 소유지를 관리하는 하인들이 찾아와 소작료 거두는 문제와 여타 관리 문제들을 논의하였다. “전적으로 당신 일을 담당하는 비서를 고용해야 해요. 당신 같은 위치의 남자들은 다들 그렇게 한다구요” 전에 그들의 대화 내용을 엿들은 릴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난 내 일을 어떻게 관리할지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소” 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릴리는 애교 있는 미소로 응수하였다. “물론 그러시겠죠, 당신은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는 걸 좋아하시지요. 아마 직접 낙서 소작료를 거워 오고 싶을지도 몰라요, 혹시라도 시간이 난다면 말이에요. 직접 저택의 마루를 쓸고 닦고, 부엌에서 밀가루 반죽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놀랍군요. 당신이 하면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왜 하인들에게 시키시나요?” 끝내 알렉스는 그녀에게 당신 일이나 잘 하라고 대꾸했고, 그녀도 그를 중세의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하인을 써도 잘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여가시간이 더 많아진다 해도 자신이 무엇을 하겠는가? 페넬로페와 시간을 보낼까? 그들은 서로에게 예의바르게 대하지만 같이 있는 시간이 별로 기대되는 건 아니다. 도박과 사냥, 파티와 정치 따위에 끼어 드는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모두 대단히 지루하다. 오랜 친구들을 다시 만나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2 년 간 그는 친한 친구들과의 만남을 피했었다, 특별히 캐롤라인에 대해서 알고 그녀의 죽음에 동정을 표하는 자들을. 그들의 눈 속에 담긴 연민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찌뿌둥한 기분으로 알렉스는 어머니의 엎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는 페넬로페를 만나러 갔다. 미지근한 차를 마시며 그들과 대화를 해보려 노력하였다. 페넬로페는 자수틀 위에 수를 놓으며, 섬세한 고리 하나를 이용해 천의 색색의 실크 무늬를 만들며 그를 수줍게 쳐다보았다.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몇 분을 견딘 후, 그는 할 일이 있다는 필계를 중얼거리며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문득 회랑 쪽에서 웃음소리와 카드 들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소리나는 쪽으로 다가가며, 헨리의 친구가 찾아온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카드 놀이하는 작은 체구의


두사람, 그 중 하나는 각진 어깨를 보아 헨리가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은......그녀를 알아보는 순간 알렉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릴리는 딸기색 바지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헨리의 셔츠와 조끼까지 빌려 입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 부적절한 옷차림에 대해 호되게 한 마디 하리라 생각하며 성큼성큼 회랑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서 릴리의 모습을 훑는 순간 그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앉아 있는 자세로 인해, 그녀의 바지가 허벅지 위로 탱탱하게 잡아당겨졌고, 무릎과 종아리의 날씬한 형태까지 드라났다. 맙소사, 그녀는 그가 만난 중에서 가장 정신을 혼란시키는 여자였다. 한창 때는 그도 유혹적인 여자들을 많이 만났었다. 그들의 옷 입은 모습이나 벗은 모습, 관능적인 이브닝 드레스 차림이나 투명한 가운 하나만을 걸친 모습, 욕조 속에 벌거벗고 있는 모습, 가느다란 끈으로 묶인 프랑스산 실크 속옷을 입은 모습까지 죄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지를 입은 릴리 로슨처럼 애간장을 태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며, 흥분으로 인해 몸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필사적으로 페넬로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 노력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더욱 깊은 곳에서 캐롤라인의 기억을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캐롤라인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다. 제기랄,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릴리의 무릎과,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 카드를 펼치는 손가락의 움직임만이 가득하다. 숨결을 가다듬기 위해 자신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캐롤라인의 목소리나 얼굴조차 또오르지 않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부드러운 아지랑이 속으로 빠져버린 채 그 의 감각은 릴리에게만 집중되었다. 그녀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회랑의 모든 빛을 압도했다. 릴리도 알렉스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녀는 혹독한 말이 떨어지리라. 긴장하며 기다리고 있다가,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자 다시 카드놀이를 계속하였다. 그녀가 능숙하게 카드를 섞었다. “자, 봐. 헨리, 이 카드들을 다른 카드들 사이로 섞는 거야. 그럼 전과 똑같이 돼, 봤지? 에이스는 여전히 맨 밑바닥에 있어” 헨리가 웃음을 터트리며 직접 해보려고 카드를 집어들었다. “헨리, 사기꾼들이 속임수를 쓰면 들키는 것도 알고 있는 거냐?” 소년이 대답하기 전에 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그렇죠, 실력이 좋은 사람들은 절대 들키지 않아요” 그녀가 우아한 응접실의 의자를 권하는 숙녀처럼 그들 옆의 마굿바닥을 가리켜 보였다. “우리와 같이 하실래요? 난 당신 동생에게 가장 훌륭한 트릭을 가르쳐 줌으로써 내 비밀을 전수하고 있는 중이었답니다.” 알렉스가 그녀의 옆에 내려앉았다. “내가 감사하도 해야 하는 건가? 내 동생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거에 대해서” 릴리는 더없이 맑게 웃었다. “전혀요, 난 단지 이 가엾은 소년이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방법을 일러주고 싶을 뿐이에요” 헨리는 손가락이 미끄러져 카드가 흩어져버리자 안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괜찮아. 연습을 하면 돼, 헨리. 금방 잘 하게 될 거야” 릴리가 카드를 긁어모으려고 몸을 내밀었다. 알렉스는 열심히 카드를 긁어모으는 동안 흔들리는 그녀의 둥근 엉덩이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반응이 솟구쳐 올라, 그의 피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코트 자락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는 떠나지 못하고 햇살 가득한 회랑에서 지금껏 만난 여자 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여자의 옆을 지키고 앉아 있다. 헨리도 같이 카드를 모았다. “내 선생님은 어떻게 됐어요, 형?” 알렉스가 간신히 릴리에게서 시선을 떼어냈었다. “아직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잘됐군요, 마지막 그 사람은 똥돼지처럼 생겼던데” “뭐라구?” 알렉스가 눈살을 찌푸리자, 릴리는 은근하게 헨리에게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헨리, 내가 가르쳐 준 새 단어들을 형에게 쓰지 말거라” 알렉스가 무의식적으로 릴리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로슨 양, 아무래도 내 동생 옆에 당신이 얼씬대지 못하도록 해야할 것 같소” 릴리는 차가운 찌푸림을 예상하며 흘깃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심장을 내려앉게 만드는 소년 같은 미소가 있었다. 너무나 이상했다, 그를 미소짓게 만든 것이 이렇게 기쁜 성취감을 느끼게 하다니. 그녀는 알렉스에게 웃어 보이고, 헨리에게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의 형이 왜 아직 선생님을 구하지 못한 줄 아니? 그는 갈릴레오, 셰익스피어, 플라톤을 모두 합쳐 놓은 사람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을거야. 네가 정말 가엾어” 헨리가 끔찍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형,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줘!” “나에게 어떤 기준이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자질 있는 선생을 구하는 것이 생각보다 도 오래 걸리는구나” “헨리에게 맡기는 게 어때요? 헨리가 면접을 보는 동안 당신은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잖아요. 헨리가 선택한 후에 당신이 만나보면 되구요” 릴리의 제안에, 알렉스가 코웃음을 쳤다. “헨리가 직접 선생을 고를 수 있다고 생각하오?” “자신의 결정에 책임감 있게 행동할 거라 믿어요. 게다가 어차피 그의 선생님이 될 거잖아요. 그에게도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헨리는 그 말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내가 멋진 선생님을 고를게요, 형. 틀렸다고 생각되면 형이 거절해도 좋아요” 그 생각은 전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헨리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도해 보는 걸로 손해날 일은 없겠지. “생각해 보겠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내가 하는 거야” 릴리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흠, 당신도 가끔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네요” 그녀가 소년에게서 카드를 받아 능숙한 솜씨로 섞은 다음 바닥에 내려놓았다. “패를 떼시겠어요, 백작님?” 알렉스는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크레이븐스의 클럽에서도 이런 모습일지 궁금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장난 스런 초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 얌전하고 적절한 아내가 되지는 못하리라. 도박꾼의 날카로움과 악녀의 자질을 겸비하고, 매춘부의 간계를 지닌 매력적인 게임상대가 되리라. 그녀는 수많은 다른 면들을 갖고 있었고, 그 중 어떤 것도 그에게 필요한 모습은 없었다. “무슨 게임이지?” “헨리에게 트웬티 원의 점수를 가르쳐주는 중이에요. 자신이 게임을 잘 한다고 생각하나요, 알렉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도전적인 미소를 보며, 그가 천천히 카드의 패를 떼어냈다. “해보지” 5. 릴리는 알렉스가 카드의 명수라는 걸 깨닫고 놀랐다. 고수급 수준이다. 그를 이기기 위해서 속임수까지 썼다. 맨 위 카드를 슬쩍 보기위해 헨리에게 더 가르쳐 준다는 핑계를 대기도 하고, 가끔은 다시 한번 카드를 나눠주는 기술을 쓰기도 했다. 한두 번은 거울 앞에서 몇 시간을 연습한, 데릭에게 배운 적이 잇는 특별한 카드 섞는 기술도 사용했다. 게임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알렉스는 침묵을 유지하였다.


“자, 이번에는 어느 쪽이든 가능해. 에이스에 일의 가치가 있을 수도 십일의 가치가 있을 수도 있어. 최선의 전략은 높은 점수를 시도하는 거지. 만약에 안 된다면, 일의 가치만 사용하는 거고” 릴리가 헨리에게 마지막 패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헨리가 카드 하나를 뒤집어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십, 아무도 이걸 이길 수는 없어요” “로슨 양이 똑같은 패를 갖고 있지만 않다면” 알렉스의 한 마디에, 릴리는 조심르레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그녀의 속임수를 알아차린 것일까? 그랬음이 분명하다. 그의 포기한 듯한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마지막 카드가 나오면 게임은 끝이 났다. “이번에는 헨리가 이겼어. 다음 번에는 돈을 걸고 하자, 헨리” 그녀가 유쾌하게 떠들어대었다. “그럴 기회는 절대 없을 걸” 알렉스의 말에 릴 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거품 물지 말아요, 알렉스. 난 일이 실링 정도 걸 생각이었다구요. 가엾은 아이의 상속 재산을 떼먹고 달아나지는 않아요” 헨리가 일어서다가 신음하며 몸을 쭉 뻗었다. “그다음에는 테이블에서 해요, 의자에 앉아서요. 바닥은 지독히도 딱딱해요!” 알렉스가 즉시 걱정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괜찮냐?” 형의 걱정을 알아채고 헨리가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형. 정말이에요”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지만, 릴리는 그의 눈 속에 어젯밤처럼 걱정스런 표정이 담겨 있는 걸 알아챘다. 헨리가 뻣뻣한 걸음걸이로 떠나간 후에도 그 표정은 남아 있었다. “왜 그래요? 왜 그런 질문을?” 알렉스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수년 간의 연습 덕분이죠” 전혀 창피해 하지 않는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알렉스가 씨익 웃었다. 그의 구릿빛 얼굴에서 하얀 이가 반짝였다. 그가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슬쩍 날씬한 몸매를 훑어보았다. “열두 살짜리 소년에게 꼭 이길 필요가 있었소?” “그건 내 목적이 아니었어요. 내가 이기고 싶었던 건 당신이었어요” “왜?” 릴리의 마음을 정곡으로 찌르는 질문이다. 그와 게임을 하여 이기든 지든 아무 상관이 없어야 당연했다. 릴리는 불편하게 그를 쳐다보며, 이 남자에게 무관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심으로 소망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나중에 정직한 실력으로 게임을 해보면 재미있겠군. 당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오” “당장 정직하게 게임해 보자구요, 백작님.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의 질문에 답해 주기로 해요” 그녀가 능숙하게 두 개의 카드를 바닥에 던졌다. 하나는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7. 그녀의 앞에 떨어진 카드는 퀸이었다. 알렉스는 카드를 살피느라 고개 숙인 릴리의 머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가까이 서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그 검은 머릿속으로 입술과 코를 박고 그녀의 향기, 그녀의 체취를 들이키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무릎을 꿇고 그녀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그녀의 따듯함 속에 자신이 파묻히는......팽팽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자신을 느끼자, 그는 그 금지된 영상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려 애썼다. 자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의 부끄러운 생각들이 발각되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하나 더?” 리리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과장된 순중함으로 맨 위의 카드를 집어 바닥으로 던졌다. 10. “그만” 릴리가 다음으로 자기의 카드를 던지고는 9 인 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내가 이겼어요, 알렉스. 이젠 헨리를 보며 왜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이었는지 이유를 말해 보세요. 아니, 왜 그를 학교에서 데리고 나왔는지 말해 봐요. 성적 때문인가요?” “벌써 세 가지 질문이오. 대답하기 전에, 당신이 왜 헨리에게 관심을 갖는지 알고 싶소” “난 그 애가 좋아요.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묻는 거예요” 그녀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그녀와 헨리는 서로 호흡이 잘 맞아 보이니 그녀의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성적 때문이 아니오. 헨리에게 약간의 문제가 있었소. 학교 생활을 좋아하지도 않고, 장난도 심하고, 그런 것들이지. 교장이 그 애를 처벌하였소” 알렉스의 턱이 굳어졌다. “채찍으로 때렸나요?” 릴리는 그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그 각도에서 보니 그의 열굴이 특별히 더 거칠어 보였다. “그래서 가끔 그렇게 뻣뻣하게 걷는 거군요. 못된 교장 같으니라구, 그렇죠?” “그렇소, 톤웨이트를 죽이고 싶었지,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소” “그 사람이 교장인가 보군요” 아이에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한 사람이 혐오스럽긴 했지만, 알렉스에게 호되게 당했을 걸 행각하니 불쌍한 느낌마저 들었다. “헨리는 톤웨이트의 집 문 밑에 화약을 터트려서 보복하였소” 릴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헨리다운 짓이에요!” 알렉스의 준엄한 얼굴을 보니 그녀의 웃음이 즉시 사라졌다. “하지만 당신은 다른 일로 심란해 하는 것 같아요. 그건 헨리가 당신에게 그런 일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그의 침묵에서 대답을 읽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 모든 것들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책임 의식이 투철한 알렉스는 모든 비난과 잘못을 자신에게 씌우고 있다. 그는 동생을 사랑했다. 지금이야말로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꽃아 더욱 비참하게 만들어 버릴 절호의 찬스이리라.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그의 죄책감을 달래 주려고 노력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헨리 나이의 소년들은 거의가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다구요. 당신도 헨리 나이 때는 그랬을걸요. 헨리는 자기 혼자서 일들을 처리하려고 노력했을 거예요. 아이처럼 당신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을 거라구요.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남자아이들 생각이 보통 그렇더라구요” “당신이 뭘 안다는 거요?” “그건 당신 잘못이 안에요, 레이포드. 당신 혼자 죄를 짊어질 정도는 아니라구요. 당신은 양심이 너무 강해요. 당신 자의식만큼이나” “나이게 필요한 것이 당신에게 양심에 대한 강의를 듣는 거였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평소의 적대감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연한 회색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로슨 양” 그가 그녀의 손에 있는 카드를 손짓했다. “정직하게 다시 한 판 하는 게 어떻소?” “왜요? 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백작님?”


릴리가 미소지으며 바닥으로 다시 카드 두 장을 던졌다. 그의 계속되는 시선을 받으며, 릴리는 그의 손길이 닿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그녀에게 자극적인 감각이 전달되었다. 그래, 주세페에게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위협적이고, 지배당하는 듯한. 알렉스는 카드나 게임은 일절 무시한 채 그녀만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왜 남자를 증오하는 거요?” 알렉스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녀에게 들은 말이나 자신과 그녀의 아버지, 하물며 재커리에게조차도 그녀는 조심스런 간격을 유지했다. 하지만 헨리와 있을 때는 달랐다. 헨리는 릴 리가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너무 어리기 때문일까? 그의 본능이 릴리의 과거에 무언가 감춰진 사연이 있음을 말해주었다. ‘남자란 여자를 이용만 하고 조정하는 적이다“라고 생가가할 정도니 여러 번 상처받았을 것이다. “왜 내가......” 릴리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몇 마디 말만으로 그녀를 이렇게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지금껏 데릭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그녀의 감정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으면서. 그 질문이 자신에게 상처가 될 것을 감지했기 때문에 묻는 것이 틀림없다. 나쁜 자식. 그리고 그의 말은 옳았다. 비록 어떤 것으로도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남자들을 증오하였다. 아버지는 그녀를 무시했고, 약혼자는 그녀를 차버렸고, 주세페는 힘겹게 만들어낸 믿음을 짓밟아버렸다. 남자들이 그녀의 아이를 데려갔다. 데릭과의 우정도 공갈 협박으로 시작되었다. 남자라는 존재들은 악마에게 잡혀가야 한다. “오늘 게임은 충분히 한 것 같군요” 그녀의 손에서 떨어진 카드들이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회랑을 떠나려 했다. “로슨 양” 그가 팔을 붙잡자, 그녀는 빙글 몸을 돌리며 격렬하게 팔을 흔들어 댔다. “건드리지 말아요.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구요!” “알겠소, 진정하시오, 나에겐 물어볼 권리가 없었던 거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게 사과의 일종인가요?” 그녀의 가슴은 분노로 들먹거렸다. “그렇소” 그는 자신의 질문이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킬 줄은 예상치 못하였다. 지금도 릴리는 자제력을 되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보통 때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그녀였는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독한 고민을 간직하고 살아온 여자의 모습이다. “내가 주제넘은 질문을 했소” “그 점은 확실해요” 릴리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올렸다. 불타는 눈동자를 그의 얼굴에 고정시킨 채, 다시 한 번 비난의 말을 쏟아 붓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대답을 해주죠. 난 아직껏 믿을 만한 남자를 만난 적이 없어요. 소위 신사라는 위인들 중에서, 정직이나 연민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당신네 남자들 모두 자기 명예를 드높이고 싶어하지만, 진실은......” 그녀가 불쑥 입을 다물었다. “진실이 어떻다는 거요?” 알렉스는 이 복잡한 여자의 작은 부분이나마 알고 싶었다. 제기랄, 이 여자를 이해하려면 평생이 걸려도 모자랄 것이다. 릴리는 단호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그 동작으로 폭발하려는 감정들이 마법처럼 가라앉았다. 그녀는


오만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어치우시지요, 백작님” 그녀는 어지럽게 흩어진 카드들 틈에 그를 혼자 남겨두고 떠났다. 그날 아침의 사건을 시발점으로 릴리는 계속해서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시달렸다. 낮에는 토티와 페넬로페가 나누는 숙녀들의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시간에는 자신의 방에서 혼자 식은 쇠고기와 빵으로 식사를 때웠다. 그녀는 포도주 두 잔을 마시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아늑한 침대의 실크가 드리워져 그녀를 어둠 속에서 가려주었다. 그녀는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다가 베개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고독감이 차갑고 육중한 무게로 그녀의 가슴을 내리눌렀다. 누군가와 얘길 하고 싶다. 이 짐을 벗어버리고 싶다. 샐리 숙모가 살아계셨으면......니콜에 대해 알고 잇는 유일한 사람, 노련한 지혜와 특이한 유머 감각으로 어떤 어려움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분. 니콜이 태어날 때 산파 역할을 맡아 주었고, 어머니와 같은 부드러움으로 릴리를 보살펴 주신 분이었다. “샐리 숙모, 난 내 아기를 찾고 싶어요. 숙모님이 여기 있다면, 내가 어찌해야 할지 알려주셨을 텐데. 난 이제 돈도 없고 내 곁에는 아무도 없어요. 점점 절망 속으로 빠져들기만 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샐리 숙모, 난 어떻게 해요?” 샐리 숙모에게 가서 결혼 전에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던 그 수치스런 경험을 털어놓고, 그 부정했던 하룻밤의 사건으로 아기를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폭풍처럼 고백했던 때가 기억났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사건이라고 생각했었다. 샐리 숙모는 그녀를 침착하게 위로하셨다. ‘아기를 떠나 보내는 일은 생각해 봤니? 다른 사람이 기르도록?’ ‘아뇨,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아기는 아무 죄가 없어요. 그 애가 내 죄악 때문에 희생되어서는 안 돼요’ 릴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하였다. ‘아기를 키울 작정이라면 우리 이탈리아에서 조용히 살자구나. 우린 한 가족이 되는 거야’‘하지만 숙모님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어요’ ‘네가 부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제안하는 거야. 날 봐라, 릴리. 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돈 많은 늙은이란다. 나에겐 우리가 충분히 쓸 만큼의 돈이 있어, 세상의 위선자들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우리끼리 살아가자’ 그런 샐리 숙모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다. 그분이 무척이나 그리웠지만, 릴리는 딸아이로 인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니콜은 그녀에게 있어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 아이가 사랑과 경이로움으로 그녀의 하루하루를 가득 채워 주었다. 니콜로 인해 세상이 아름다웠다. 릴리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베개를 흠뻑 적셨다. 소리 죽여 울기 시작하자 두통뿐만 아니라 목까지 아팠다. 누구 앞에서도 무너져본 적이 없는 당당한 그녀였다, 데릭 앞에서조차. 왠지 모르게 데릭은 그녀의 약한 모습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데릭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경험하였다. 그가 여자의 눈물에 동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자신이 남 앞에서 울 용기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릴리는 울면서 생각하였다. 누가 지금 니콜과 같이 있을까. 아, 그 애가 울면 과연 누가 달래줄 것인가? 알렉스는 힘겨운 꿈에 사로잡혀 몸을 뒤척이며 신음하였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깨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안개와 그림자로 된 세상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릴리가 거기 있었다. 그녀의 조롱 섞인 웃음만이 온통 메아리쳤다. 그녀의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그녀가 그의 어깨에 입술을 대고 살짝 깨물었다. 그는 으르렁대며 그녀를 떼어내려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벌거벗은 몸이 그에게 엉켜왔다. 자신의 몸 위로 미끄러지는 그


매끄러운 팔다리로 인해 그의 마음은 정신없이 표류하였다. “당신이 무얼 원하는지 보여줘요, 알렉스” 그녀가 다 안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속삭였다. “저리 가” 그가 거칠게 내뱉었지만, 그녀는 아랑곳없이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그녀의 입술을 원하는 곳까지 잡아 내렸다. 거기에서...... 알렉스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화들짝 깨어났다. 머릿속까지 흠뻑땀으로 젖어 있었다. 온몸이 흥분으로 인해 고통스러웠다. 그가 으르렁대며 베개를 집어 힘껏 벽으로 던져 버렸다. 여자를 원했다. 이렇게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쿵쿵대는 맥박을 무시하려 애쓰며, 마지막으로 여자와 같이 잔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 보았다. 페넬로페와 약혼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몇 달 간의 금욕 생활쯤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건 멍청한 생각이었다. 멍청한 자식, 바보 같은 자식.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당장 페넬로페의 방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녀는 항의하며 눈물을 흘리겠지. 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그녀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강요할 수 있었다. 어차피 몇 주만 있으면 결혼할 사이가 아닌가. 그 생각이 합리적이었다. 적어도 욕구불만으로 죽어가는 남자에게는 그러했다. 하지만 페넬로페와 사랑을 나눈다고 생각하니, 그 장면이 떠오르자 마음이 주춤하였다. 아니, 그건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알렉스는 자신을 다그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튼을 열어 방안으로 달빛이 들어오게 하고는 삼발이위의 세숫대야로 가서 얼굴에 거칠게 찬물을 뿌려댔다. 릴리를 만난후부터, 그의 생각은 엉망진창이었다. 몸 속의 이 뜨거운 불길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맑은 정신으로 생각할 수만 있다면. 술리 필요하다, 코냑, 아니, 아버지가 아끼셨던 하이랜드 위스키가 좋겠다. 목구멍에 불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것이 필요하다. 이 괴로운 생각을 모두 불살라버릴 만한 것이. 퀼트로 된 파란 가운을 걸치고 그는 침실에서 빠져 나가 중앙 계단이 있는 동쪽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계단의 삐그덕 소리를 듣자 그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발길을 멈추고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삐그덕, 또다시 소리가 난다. 누군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그의 얼굴에 음험한 미소가 번졌다. 이젠 은밀하게 하인과 만나고 다니는 릴리를 현장에서 붙잡을 기회가 생겼다. 그걸 핑계삼아 그녀를 이 집에서 쫓아내리라. 릴리만 쫓아내면, 모든 것이 예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알렉스는 복도 한쪽에 살짝 몸을 숨긴 채 걸어갔다. 아래층 홀에서 릴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대리석 바닥을 지나는 그녀의 하얀 잠옷자락이 부드럽게 뒤로 끌렸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겠지. 그녀는 기대감에 취한 사람처럼 꿈을 꾸듯이 걷고 있었다. 알렉스의 가슴엔 독약이 스며드는 듯한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규명해 보려 했지만, 분노의 당혹스러움 사이에서 모호하기만 했다. 릴리가 다른 남자와 하려는 그 행위를 생각하면 그녀를 가혹하게 벌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알렉스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말고 흠칫 멈춰 섰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분별력 있고 점잖은 자신이 자기 집의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거어다니다니, 질투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래, 질투였다. 저 무모한 아가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내에 대해서, 한밤의 만남 때문에 질투가 난 것이다. 캐롤라인이 보면 얼마나 웃을 것인가. 캐롤라인? 다 소용 없다. 그는 릴리를 멈춰 세울 것이다. 그녀에게 절대 오늘밤의 쾌락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단호하게 계단을 내려가 현관 홀의 나무 테이블에서 램프를 더듬거려 찾았다. 불을 밝히니 부드러운 불빛이 살아났다. 그는 릴 리가 사라진 부엌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서실을 지나려는데, 약간 열려 있는 문틈으로 중얼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의 눈살을 분노로 찌푸려졌다. 릴리가 ‘닉, 닉’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스가 도서실 문을 활짝 열어 젖히며 큰 소리를 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의 시선이 방안을 훑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릴리의 작은 몸뚱이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두 팔로 껴안고 있었다. “로슨 양?” 그가 가까이 다가갔다. 램프의 불빛이 릴리의 눈동자를 반짝이게 하고, 그녀의 살결에 황금빛을 뿌리며, 잠옷 밑의 몸매를 어렴풋이 드러내었다. 그녀는 몸을 흔들며 무슨 말인가 나직이 중얼대고 있었다. 비참한 사람처럼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다. 알렉스의 입이 살짝 비꼬였다. 이 여자는 그가 미행한다는 걸 알아 차렸나 보다. “조그만 사기꾼 같으니, 이런 연극은 대단히 저질이오”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했다. 환각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이 반쯤 감겨 잇따. “그걸로 충분해” 알렉스는 램프를 옆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계속해서 그를 무시핮 짜증이 치밀었다. “필요하다면 당신을 여기서 끌어낼 수도 잇소, 로슨 양. 그러길 바라는 거요?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싶소?”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그가 그녀의 작은 어깨를 붙잡고 크게 한 번 흔들어댔다. “그만하라고 했잖소” 갑자기 릴리가 동물적인 신음을 흘리더니 두 손을 휘저으며 의자에서 튕겨 일어났다. 그녀는 테이블 쪽으로 물러나다가 램프를 뒤엎을 뻔하였다. 알렉스는 재빨리 그녀가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었다. 그때에도 그녀의 공포심은 그치지 않았다. 할퀴려 드는 광적인 손톱을 피하기 위해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했다. 작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거친 몸부림은 진정시키기 힘들 정도였다. 간신히 그녀가 휘두르는 두 팔을 자신의 팔 사이에 넣고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움찔하며 경직된 채 거칠게 헐떡여댔다. 알렉스는 그녀의 머릿속에 손가락을 넣고 그녀의 머리를 억지로 자신의 어깨에 갖다댔다. “빌어먹을. 릴리, 괜찮아. 릴리, 진정해” 그는 약간의 꿈틀거림만 가능할 정도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듯 횡설수설 지껄여댔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턱 밑으로 끼워 다시 부드럽게 흔들기 시작하였다. “나요, 알렉스요. 다 괜찮소, 진정하라구” 릴리는 꿈에서 깨어나는 듯이 천천히 정신을 되찾았다. 처음 깨달은 것은 움질일 수도 없이 누군가에게 꼭 안겨 있다는 사실이다. 가운의 열린 곳 안에 눌려진 그녀의 뺨과 턱이 털들 때문에 따끔거렸다. 기분 좋은 남자의 향내가 그녀의 기억을 일깨웠다. 그녀를 안고 있는 사람은 알렉스 레이포드였다. 그녀가 놀란 숨을 삼켰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는 주이었다. 이렇게 친근한 손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우선 본능이 그에게서 몸을 떼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그녀의 빳빳한 긴장을 풀어주고 있었다. 알렉스는 릴리가 자신을 받아들이는 걸 느꼈다. 그녀의 가볍고 나긋나긋한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꼭 끌어 안아주고 싶은 부드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쩐 일일까? 방안의 깊고 깊은 침묵이 두 사람을 감싸는 듯하였다. “알렉스?” “조용. 당신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소”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내가 오랜 금언을 잊고 있었소. 몽유병자를 깨우는 방법을 잠시 잊고 있었소” 그가 알아버렸다. 오, 맙소사. 이젠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녀의 두려움이 느껴졌는지, 그의 손은 다시 그녀의 등을 문질렀다. 흥분한 아이를 달래주듯이 토닥이는 그의 손길. “전에 보았을 때도 이런 일이었던 거요? 나에게 사실을 말했어야 했소” “그럼 당신은 날 정신병원에 집어넣었겠지요?”


그녀가 떨리는 대답과 함께 몸을 떼어내려 하였다. “가만히 있으시오, 당신은 충격을 받았소” 이렇게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전혀 그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릴리는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박였다. 한 번도 이렇게 안겨본 적이 없었다. 정열에 휩싸였던 주세페도 사랑을 나누는 동안 제대로 안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하고 무기력한 느낌이었다. 상상도 못한 상황이다. 풀먹인 옷도 넥타이도 아무것도 없이 가운만 걸친 알렉스 페이포드. 그녀의 머리가 놓여 있는 가슴은 프리깃 함선의 목재 같았고, 몸에 닿아 있는 근육질의 다리는 너무나도 단단하였다. 그의 심장 박동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려 퍼졌다. 강하다는 것은 이런 느낌일까? 그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술 한잔 마시겠소?” 알렉스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를 어서 놔줘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를 안고 뒹굴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이다. “브랜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녀는 간신히 그에게서 몸을 떼어내 알렉스가 술이 있는 코너장으로 가는 동안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가 잔 속에 코냑을 약간 따랐다. 램프 불빛 속에서, 그의 머리카락은 스페인 금화처럼 반짝거렸다. 그를 지켜보며 릴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는 오만하고 심판하려 드는 그의 모습만을 봤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가장 최악의 남자였다. 그런데 이 순간 그의 강인함으로 안전한 보호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들다니. ‘그는 적이다’ 그녀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기억해야 한다. “여기 있소” 알렉스가 그녀의 손에 잔을 쥐어주고 나서 옆에 앉았다. 릴리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 브랜디는 데릭이 제공하는 달콤한 증류주와 달리 가벼운 맛이다. 그 부드러운 액체가 그녀를 진정시켜 줬다. 릴리는 천천히 술을 마시며 꼼짝 않고 그녀를 쳐다보는 알렉스를 마조 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할 것인지 물어볼 용기가 도저히 안 생겼다. 그는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 “다른 사람은 알고 있소?” “무엇을요?” 그녀가 슬쩍 얼버무리려 하자, 그의 입이 성마르게 긴장되었다.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나오?” 그녀는 술잔을 응시하며 관심 없는 듯 휘휘 흔들었다. “나에게 사실대로 말하시오, 릴리” “로슨 양이라 부르세요” 릴리가 딱 잘라 반박하였다. “그리고 나의 야행성 습관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는 모양이지만,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랍니다” “다칠 수도 있었다는 건 생각지 못했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수도 있다는 건? 방금도 램프를 뒤집어 화재가 날 뻔했소” “그건 당신이 놀라게 했기 때문이에요!” “얼마나 오래 된 거요?” 릴리는 벌떡 일어났다. “안녕히 주무세요, 백작님” “앉으시오, 대답을 듣기 전에는 떠나지 못하오” “당신은 떠나지 말고 계속 있으세요. 난 내 방으로 올라가겠어요”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가자, 알렉스가 손을 뻗쳐 그녀를 돌려 세웠다.


“아직 내 얘기가 끝나지 않았소” “이 손 치워요!” “닉이 누구지?” 그녀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휘둥그래지는 걸 보고, 그는 자신이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음을 알았다. “닉이 요즘 만나는 남자인가? 연인인가? 당신의 사랑하는 크레이븐은 닉에 대해서 알고 잇나? 아니면 당신이......” 릴리는 무슨 말인가 중얼거리며 그의 얼굴에 그의 송곳 같은 말들이 중단되었다. “다시는 그 이름을 말하지 말아요!” 황금빛 브랜디가 알렉스의 얼굴에서 흘러내려 코와 입 사이의 패인 부분까지 미끄러졌다. “크레이븐만이 아니라, 다른 연인까지 두고 있었군. 당신이란 여자는 한 침대의 침대에서 다른 남자의 침대로 기어다니는 게 별 일 아닌 모양이지” “감히 그런 비난을 하다니! 적오도 난 살아 있는 사람과만 간통을 저질러요! 하지만 당신은 캐롤라인 휘트모어를, 몇 년 전에 죽어버린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내 동생과 결혼하려 해요. 그건 페넬로페에게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병적인 집착이에요, 당신도 잘 알 거예요. 당신이 내 동생에게 어떤 남편이 될까요? 이 완고한 야만인, 남은 평생 동안 과거 속ㅔ 파묻혀 사는 당신이 과연......”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릴리는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다. 알렉스의 얼굴은 죽음의 가면 같았다. 지금의 그를 묘사할 만한 말이 무얼까? 굶주린 호랑이나 포효하는 바다보다도 더 난폭하고 냉혹한, 그의 강렬한 시선에 덜컥 겁이 났다. 그가 죽이려 할지 모른다. 그녀의 손이 떨려서 손으로 브랜디 장이 카펫 위로 둔탁하게 떨어졌다. 그 소리가 릴리의 마비상태를 일깨웠다. 도망가려고 몸을 돌렸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알렉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뒤로 젖히자, 그녀는 무력하게 몸을 비틀 수밖에 없었다. “안 돼요” 그가 목을 부러뜨리려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힘껏 붙잡으며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릴리의 몸이 놀라움과 고통으로 뻣뻣해졌다. 이에 부딪혀뭉개진 입술에서 피가 났다. 밀어낼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알렉스가 신음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뜨겁게 빛을 발하였고, 그의 그을린 피부도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목을 감았던 그의 손가락이 하나씩 하나씩 풀렸다. 그러다가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아픈 입술을 건드렸다. “이 망할 자식” 릴리가 원한에 차서 소리질렀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다시 내려오자 몸을 꿈틀거렸다. “안 돼” 그는 그녀의 입술을 야만적인 동작으로 막아버렸다. 모든 말과 숨쉬는 공간까지 틀어막아 질식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빠져 나가려 몸부림쳤지만, 알렉스는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등으로 미끄러져 내러 그녀의 엉덩이를 자신에게로 들이밀었고 그녀 입안의 부드러움을 찾아 그의 혀가 뜨겁게 밀고 들어왔다. 그녀가 열심히 그를 밀쳐내었지만, 오히려 그의 가운이 어깨에서 벗겨지고 말앗다. 그녀의 손바닥이 그의 털로 뒤덮인 가슴에 닿았다. 그 고동치는 맥박에 손이 데일 것만 같았다. 그가 신음하며 그녀의 머리를 더욱 단단히 감싸고 자신의 혀를 깊이 밀어넣었다. 그의 숨결이 뜨겁게 뺨에 와 닿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알렉스는 그녀의 목으로 입술을 비비며 내려갔다. 그의 몸이 정열로 부들거렸다. 수년 간의 외로움이 이 한번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가 격렬하게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안 돼, 날 밀어내지 마, 캐롤라인”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나지막하여 무슨 말인지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릴리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거 놔요”


갑자기 그녀는 풀려났다. 그녀의 어리둥절한 눈이 그의 얼굴로 날았다. 알렉스도 그녀만큼이나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서로 한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릴리는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몸서리를 쳤다. 알렉스는 불안한 손으로 턱을 문질러 브랜디의 물기를 닦아냈다. 흥분과 수치심이 뒤섞인 상태로, 그는 다시 그녀에게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최대한 애를 쓰고 었었다. “릴리”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내 잘못이었어요” “릴리” “아뇨” 그가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들으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그건 재앙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난, 난......안녕히 주무세요” 그녀가 황급히 방에서 나갔다. 알렉스는 욕망의 안개를 떨쳐내려고 머리를 흔들며, 의자로 걸어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신의 손이 불끈 쥐고 있음을 발견하고, 천천히 손을 풀어 텅 빈 손바닥을 응시하였다. ‘캐롤라인, 내가 부슨 짓을 한 거지?’ ‘바보 같은 사람’ 캐롤라인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은 영원히 날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당신은 페넬로페처럼 사랑스럽고 순진한 소녀와 결혼한 다음에, 날 잊지 않으려고 했어요.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에요’ “기억만으로도 충분해” 그가 완고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왜 언제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나요? 왜 슬픔과 외로움이 아무것도 아닌 척하죠?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당신에게 사랑은 훨씬 더 필요해요’ “그만해”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지만, 캐롤라인의 조롱하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있었어요, 알렉스. 이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 때예요’ “시작할 거야, 페넬로페와 같이 새롭게 시작할 거라구.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배울 거야” 알렉스는 갑자기 말을 중단하였다. 자신이 상상 속의 유령과 대화를 하는 미치광이처럼 혼자 중얼대로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통 빈 화로 속을 들여다보았다. 제 정신을 유지하려면, 릴리를 이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 릴리는 침대로 기어들어 턱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몸의 떨림이 아직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알렉스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 볼 것인가? 지금 이 순간조차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또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베개 속에 뜨거운 얼굴을 짓뭉개면서, 입술에 닿았던 그의 입술과 그녀의 몸을 감았던 그의 팔이 떠올랐다. 그는 캐롤라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사실이 수치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릴리는 몸을 뒤척이며 신음하였다. 재커리와 페넬로페의 일을 마무리하고 가능한 한 빨리 레이포드 파크를 떠나야 한다. 다른 남자에게는 통했던 조롱과 분노, 자신의 매력들이 알렉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데릭과 똑같이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꿰뚫을 수 없는 얼굴 뒷면에 숨겨진 알렉스 레이포드의 일면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캐롤라인의 죽음을 인정 못하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모든 사랑은 캐롤라인에게 쏟아 부어졌고, 그녀는 무덤까지 그 사랑을 가져가 버렸다. 남은 평생 알렉스는 그녀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다. 캐롤라인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게 화를 낼 것이다. 페넬로페처럼 순진한 여자는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며 평생을 보내겠지만, 결국에는


비참함만을 맛볼 것이다. “오, 페니. 내가 널 그 남자에게서 구해 줄게. 그 남자는 너에 대한 사랑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널 가루로 부술 거야” 레이포드 파크에 도착한 재커리는 릴리에게 안내되지 않고, 도서실로 안내를 받았다. 알렉스 백작이 혼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포드?”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재커리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알렉스의 다리를 넓게 벌린 채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다. 반쯤 빈 술병이 무릎 위에 간신히 세워져 있었고, 그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눈자위의 검은 테두리, 얼굴에 새겨진 씁쓸하고 엄격한 표정, 방안에는 담배 연기와 함께 위스키 냄새가 고약하였다. 방안이 뿌연 연기로 가득 찬 걸 보니, 그는 줄담배를 피워댄 모양이다. 그의 손가락에 시기가 느슨하게 잡혀 있었다. 아마 이런 상태의 알렉스 페이포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무언가 끔찍한 불행이 그에게 닥친 것이 틀림없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전혀, 왜 그런 말을 묻소?” 알렉스가 퉁명스레 대꾸하였다. 재커리는 황급히 머리를 흔들며 몇 번 잔기침을 하였다. “에헴, 별 이유는 없습니다. 에헴, 당신이 약간 피곤해 보이는 것 같아서” “난, 괜찮소. 평소와 다름없이” “네, 그렇군요. 난 릴리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나가......” “앉으시오” 알렉스가 가죽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재커리는 불안하지만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그의 금발 머리를 밝게 비춰 두었다. “한잔할 테요?” “난 늦은 오후까지는 독한 술을 피하는 습관이 있어서요” “나도 평소에는 그렇소” 알렉스는 술잔으로 들어올려 꿀꺽 들이키고 나서, 앞에 앉은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신과 동년배임에도 불구하고 재커리는 동생인 헨리 정도의 나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환한 햇살이 재커리의 소년같은 얼굴에 반사되었다. 깨끗한 피부와 갈색 눈동자에는 젊은이다운 꿈과 이상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페넬로페에게 빌어먹게 잘 어울렸다. 약간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둘을 어울리는 한쌍으로 인정할 것이다. 알렉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캐롤라인은 죽었는데. 운명은 그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재커리도 페넬로페를 가질 수 없어야 공평하다. 술 취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태도가 이기적이며 쓸데없는 원한으로 가득 찼음을 알았지만 상관없다. 아무것도 상관없다. 한 가지만 빼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를 괴롭히고 있는 사소한 한가지. “로슨 양과 약혼한 남자는 누구였소?” 그의 갑작스럽고 퉁명스런 물음에 재커리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십 년 전의 일 말있가요? 릴 리가 힌돈 경과 약혼했을 때?” “힌돈 누구? 토마스 힌돈의 아들, 해리 말인가?” “그렇소, 해리” “세상의 거울이란 거울은 죄다 보고 다니는 그 제비 자식 말인가?” 알렉스에게서 비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자가 그녀의 사랑이었다고? 역시 그 여자가 지성보다는 허영으로 사람을 택했으리라는 점을


짐작하긴 했었는데. 당신은 그의 친구 였소?” “그 당시에는 그랬지요, 헤리는 매력적인 청년이었죠” “그녀는 무슨 짓을 했길래 그에게 채인 거요?” 재커리가 변호하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특별한 건 아니었소” “오, 말해 보라구. 그 여자가 그를 속였나,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나, 아니면......” “속였다고도 볼 수 있었지요, 그의는 아니었지만. 릴리는 그때 참으로 어렸죠, 열성적이고 사람을 의심할 줄 몰랐으며 순진했지요. 해리의 천박한 성격을 알지 못한 채, 그의 잘생긴 얼굴에 사랑을 느끼게 된 거요. 해리를 끌어들이려고, 릴리는 자신의 지성과 강인한 의지를 숨겼소.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있는 여자를 싫어하는 해리 앞에서 멍청한 여자처럼 행동하여 그를 매혹시킨 거요. 난 결단코 그녀가 그를 일부러 속였다고 보지 않지요. 그녀는 그가 좋아할 만한 부분에 자연스레 적응했던 것뿐이오” “하지만 결국 힌돈이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아차렸군” “그래요, 그녀에게 청혼한 후 몇 달이 지나자 알아차리기 시작했소. 해리는 비신사적으로 행동하였소.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파혼을 선언하였으니까. 그후 리리는 처참하게 무너졌소. 내가 그대신 청혼을 하였지만 거절당했고, 자신은 결혼할 운명이아니라고 말하더군. 그녀의 숙모가 몇 년 간 그녀를 데리고 해외에 나가 있었소. 그들은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살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표정이 안 보였다. 이윽고 좀더 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대륙을 열심히 휩슬고 다녔겠군” “아니, 사실 그 반대였소. 사라져버렸소. 몇 년이 자니도록 아무도 그녀의 소식을 듣지 못했소. 이탈리아에서 그녀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던 거요.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소. 내가 확신하는 건 거기서 릴리에게 대단히 슬픈 일이 있었다는 것뿐이오. 이 년 전 그녀가 영국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녀는 너무나도 변해 있었소.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떠나지 않았소. 그녀는 보통의 남자도 갖지 못한 용기를 지닌 특별한 여자요” 재커리가 뒤이어 다른 말을 더하였지만, 알렉스는 듣지 않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도서실에서 릴리와 키스하던 장면을 되새겨보았다. 그에게 그들이 연인 사이임을 믿게 하려던 뻔뻔스러운 시도였지만, 그 장면은 그들이 플라토닉한 우정 이상의 관계는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릴리가 재커리의 무릎에 앉아 키스하는 동안, 그는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었다. 두 팔을 뻣뻣하게 내려뜨린 채로. 사랑하는 여자를 껴안은 남자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만약에 재커리의 자리에 그가 있었더라면..... 알렉스는 그 생각을 얼른 떨쳐내고 재커리를 응시하였다. “릴리는 교활한 연극배우요. 하지만 썩 그럴싸하지는 않소” “그건 당신이 잘못 안 겁니다! 릴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모두가 진실하오. 당신은 그녀를 잘못 알고 있어요” “아니, 그녀를 잘못 아는 건 당신인 것 같은데. 그리고 만약 당신과 로슨 양의 유치한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았다면, 스템퍼드, 당신은 나도 잘못 안 거요” “난 무슨 말인지?” “당신은 릴리를 사랑하지 않소.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소? 오, 당신이 그녀에게 약간의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당신은 그녀를 두려워하오” “두려워한다고? 내 키의 반밖에 안 되는 여자를?” 재커리의 얼굴이 자주색으로 변했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스탬퍼드. 당신은 신사 중의 신사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마음이 없소. 하지만 릴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요, 무슨 짓이라도. 그녀에게는 원칙도 없고, 다른 사람의 원칙도 존중하지 않소. 그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멍청한 일이겠지. 당신은 한순간 그녀의 친구였다가 다음 순간에는 희생양이 되어 있을 거요. 당신을 모욕하는 걸로 생각하지 말아주시오. 난 당신에게 동정을 느끼는 거요” “동정이란, 그런 무례한 말을!” “그와 반대로 페넬로페는 모든 남자가 꿈꿀 만한 여자지. 천사 같은 외모에 단정한 행동, 당신이 한때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인정해도 난 기분 나쁘지 않을 거요” “한때는 그랬지만, 더 이상은 아니오!” “당신은 거짓말에 능숙지 못해. 스템퍼드” 알렉스가 시가를 뭉개 끄면서 잔인하게 미소지었다. “페넬로페는 잊어버리시오, 어떤 것도 우리 결혼을 막지 못할 거요. 이번 시즌의 무도회에 참석해 보시오. 거기에 가면 그녀와 비슷한 소녀들이 많을 거니. 예쁘고 순진하며, 열정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소녀들. 당신이 원하는 스타일은 바로 그런 소녀들일 거요” 재커리가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에게 애원할지, 고함을 쳐야 할지 갈등하는 것 같았다. “리리도 나에게 당신과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소. 당신 두 사람은 페넬로페에 대한 나의 감정을 젼혀 모르오. 그녀에게 용기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페넬로페는 머리가 텅 빈 인형이 아니오. 당신은 이기적인 악당이야, 레이포드!” “재커리” 릴리의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그녀가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로 문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지치고 푸석푸석했다. “그만하세요, 당신은 이제 떠나세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이건 내가 싸워야 할 전쟁이오” “지금은 아니에요, 내 말대로 해요, 재커리. 당신은 지금 떠나야 해요” 재커리가 그녀에게 다가와 두 손을 잡고 나감막이 속삭였다. “우리 계획은 이미 실패했소. 내가 그와 맞서야 하오, 릴리. 내가 이 일을 마무리지어야 해” “아니에요” 그녀가 발끝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말 믿어요. 당신이 페넬로페를 갖게 될 거예요,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할게요. 하지만 그럴려면 내 말대로 해야만 해요. 집으로 가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요? 우린 완전히 졌소, 릴리” “날 믿으세요” 그녀는 되풀이해 말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재커리가 뒤를 돌아보며, 옥좌에 앉은 타락한 왕처럼 위자에 기대어 있는 알렉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은 자신과 결혼할 여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소?” “내가 그녀의 머리에 총이라도 들이대로 결혼을 강요했다는 말이오? 페넬로페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내 청혼을 받아들였소” “거기에 자유의지란 없었소! 이 결혼에 그녀는 선택의 권한이 없었소. 모든 게 그녀 없이 결정되었단 말이오” “재커리” 릴리가 다시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재커리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그녀와 알렉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발길을 돌려 방에서 걸어나갔다. 그 이후 자갈길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이제 두 사람만이 남았다. 알렉스의 눈동자가 릴리를 훑어보았다. 자신처럼 피곤한 모습의 그녀를 보자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들었다. 피릴 깃이 달린 연한 자줏빛 드레서가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거무스름한 눈자위를 강조하였다. 입술은 어젯밤 그의 거친 행동을 증명하듯 빨갛게 부어 있었다.


“지독해 보이는군” 또다시 시가에 불을 붙이며 그가 불쑥 내뱉었다. “당신보다 심하지는 않아요. 술 취한 남자는 언제나 보기 흉하죠” 리릴가 벨벳 꽃줄로 장식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왓다. 가죽을 두른 테이블에 담뱃불로 탄 자국이 눈에 띄었다. 엉망이군. 몸을 돌렸을 때, 어디 한 번 비난해 보시지 하는 듯한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유가 뭐죠?” 그가 아무 말 없이 다 피운 시가 꽁초 하나를 들어 보였다. “테이블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이 왜 돼지처럼 술을 들이켰는지 묻고 있는 거예요. 오래 전에 잃어버린 캐롤라인이라는 성녀 때문인가요? 아니면 재커리가 당신보다 더 나은 남자라는 이유로 질투가 난건가요? 아니면......” “당신 때문이오” 알렉스가 브랜드 병을 한쪽으로 던졌다. 깨지든 말든 신경도 전혀 안쓰면서. “당신을 이 집에서 쫓아내고 싶기 때문이오. 내 인생에서, 나에게서, 쫓아내고 싶기 때문이오. 한 시간 내로 떠나시오, 런던으로 돌아가시오, 어디로든 가버리라구” 릴리는 경멸의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내가 당신 발밑에 무릎 꿇고 애원하길 바라는 모양이군요. ‘오, 제발, 백작님, 절 여기 머물게 해주세요’ 흥, 난 당신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레이포드! 난 애원하지도 떠나지도 않을 거예요.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온 후에 당신이 짜증을 내는 이유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전에는 대화할 상대가 못 되는군요” “난 브랜디 한 병을 거의 다 마실 정도로 당신에 대한 욕구를 간신이 견뎌내고 있소, 로슨 양. 내가 말짱해지는 건 아마 당신에게 반가운 일이 아닐 거요” “당신은 거만한 노새야! 내가 당신의 모든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제, 문제는 당신의 어리석고 우둔하고 멍청한 머리에서 나온 거야” “짐을 싸시오, 안 그러면 내가 직접 싸겠소” “어젯밤 일 때문인가요? 그 의미도 없는 키스 한 번 때문에? 내가 안심시켜 드리지요, 그건 나에게 티끌만큼의 의미도 없는 거예요” “난 떠나라고 했소. 당신의 카드, 한밤의 산보, 그 치졸한 계략과 커다란 갈색 눈동자, 당신의 모든 흔적을 이곳에서 없애버리고 싶소. 지금 당장” “어림 반푼 어치도 없어요!” 그가 갑자기 도서실을 걸어나갔다. “어디 가는 거예요?” 그는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큰 걸음으로 그녀의 침실을 향했다. “감히 그런 짓은 못 할걸!”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그를 뒤쫓았다. “이 무자비한 돼지, 잘난 체하는 오만하 괴물” 계단을 뛰어 알렉스와 거의 동시에 그녀가 침실에 도착했다. 침대의 시트를 갈아 끼우던 하녀들이 올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흘깃 눈길만 준 후 적보다 먼저 재빨리 방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스가 성큼 걸어 들어와 옷장을 활짝 열고서는 제일 처음 보이는 여행가방 안에 옷가지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내 물건에서 그 더러운 손 치워요!” 격분한 릴 리가 눈에 보이는, 테이블에 있던 중국산 도자기 하나를 냅다 집어던졌다. 그것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피한 알렉스르 넘어 벽으로 날아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건 내 어머니 것이었소” 그의 회색 눈동자가 분노로 가득하였다.


“그분이 지금의 당신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요? 감정이 말라버린 가슴에 자기 자신 빼고는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난폭한 야수, 어머나!” 알렉스가 창문을 열어 그녀의 가방을 내던져싿. 장갑과 스타킹, 여성용 잡동사니들이 가방에서 나와 땅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릴리는 빙글 돌아서며 알렉스에게 더 던질 만한 것이 없는지 찾았다. 그 순간 문가에 서 있는 동생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페넬로페가 공포심에 가득 차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둘다 미쳤군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알렉스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모자 상자에 드레스 하나를 쑤셔 넣다가 페넬로펠를 쳐다보았다. 술 취한 채 일그러진 얼굴, 헝클어진 머리카락, 전혀 레이포드 경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라구, 페니! 이 사람이 너와 결혼할 남자야. 볼 만한 풍경 아니니? 남자란 술 취했을 때 진짜 성격이 나타난다고 하지. 그를 보렴, 뼛속에서부터 천박함이 풍기고 있어!” 페네로페가 대꾸하기도 전에 알렉스는 거칠게 말했다. “당신의 예전 연인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요, 페넬로페. 만약 그 남자를 원한다면, 당신 언니와 같이 이곳을 떠나시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짐을 꾸려라, 페니. 우리 같이 스탬퍼드 저택으로 가자”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엄마와 아빠가 찬성하지 않으실 거야” 페넬로페가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찬성하지 않겠지. 그게 재커리의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거니?” 알렉스가 소름끼치는 시선으로 페넬로페를 응시했다. “그래? 어떻게 할 테요!” 리리의 반항적인 얼굴과 알렉스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페넬로페가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침실로 달려나갔다. “못된 자식! 여물통의 개 같으니! 당신이 지금 그 불쌍한 아이를 협박한 거잖아” “그녀는 선택을 한 거야” 알렉스가 모자 상자를 바닥에 던지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내가 당신 짐을 마저 싸줄까, 아니면 당신이 하겠소?”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좋아요, 나가요. 날 조용히 내버려 둬요. 한 시간 안에 떠날 테니까” 릴리가 경멸스런 어투로 입을 열었다. “준비되는 대로 즉시 떠나시오” 릴리는 코웃음을 쳤다. “내 부모님에게는 당신이 설명해 주시겠죠? 그분들은 당신의 말이라면 전적으로 찬성을 해줄 테니” “페넬로페에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알렉스가 경고를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릴리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머리를 흔들며 나직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만한 당나귀, 내가 그렇게 쉽게 당할 여자인 줄 아니보지?” 6. 한바탕 소란에 겁먹은 하인들이 릴리의 여행가방들을 마차로 옯겼다. 레이포드의 문장이 찍힌 빛나는 마차, 알렉스가 릴리를 런던의 집으로 데려다준 다음 곧장 돌아오라는 지시를 마부에게 내렸다. 리리리가 이 집에 머물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찾으로 저낵 안을 돌아다녔다. 2 층의 작은 응접실에서 책더미에 파묻혀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였다.


“아버지” 조지 로슨이 뒤를 돌아보며 안경을 고쳐 썼다. “레이포드 경한테 네가 떠날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강제로 쫓겨나는 거예요” “그럴 줄 짐작했다” “날 위해 아무 항변도 안 하시나요, 아버지? 내가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씀은 안 하셨나요? 아니면 내가 가버려서 속이 시원하신 건가요? 어느 쪽이든 좋은 쪽이 있으실 텐데요?” “난 읽어야 할 책이 있다” “그래요, 물론 그러시겠죠. 미안해요”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사과할 필요 없다, 얘야. 난 더 이상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소동을 일으키든 놀라지 않는단다. 오래 전에 놀라는 일은 포기했거든. 너에게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너에게 실망하는 일도 없단다” 릴리는 자신이 왜 아버지를 찾았을까 후회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아무 기대도 없기 때문에, 자신 또한 그분에게 별 기대가 없지 않았던가. 아이였을 때는, 아버지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귀찮게 굴었다. 서재에 몰래 들어가고 잡다한 질문으로 괴롭히기도 했으며, 펜을 쓰다가 책상에 잉크를 엎지른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그녀의 생각이나 행동뿐 아니라 그녀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가슴 아픈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착한 행동을 하든, 나쁜 행동을 하든 그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왜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일까? 결국 이유는 자신에게 커다란 잘못이 있는 거라고 결론을 맺었다. 집을 떠나기 전, 어머니에게 그런 죄책감을 고백하였을 때 어머니는 그녀를 달랬다. “아니다, 얘야. 그분은 언제나 그런 식이야. 네 아버지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다. 하지만 잔인한 분은 아니셔, 릴리. 못된 행동을 해서 매맞는 아이들도 있단다. 부드러운 성품의 아버지를 가진 걸 행운으로 생각해야 해” 릴리는 부모의 무관심은 때리는 것과 똑같이 자식에게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아버지의 무관심에 당황스럽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다만 체념과 슬픔만이 느껴진다. “망나니 딸이 되어서 죄송해요. 제가 아들이었다면, 아마 서로 이해 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 반항적이고 어리석었어요, 많은 실수들을 했구요. 아버지가 아신다면 지금 알고 있는 저보다 더 부끄러워하실 일도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도 저에게 낯선 이방인 이상은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전 혼자 힘으로 살았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저와 함께 있지 않았어요. 날 벌하시거나 혼내신 적도 없고, 내 존재를 의식하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으셨지요. 최소한 어머니는 울기라도 해주셨다구요” 그녀가 머리를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돌아서면 따뜻하게 맞아줄 만한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의지가 되주셔야 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책과 철학 논문들에만 파묻혀 계셨죠. 너무나도 고상한 학자일 뿐이셨어요, 아버지는” 조지가 그게 아니라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릴리는 슬프게 미소지었다. “이 말이 하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아버지를 좋아한다는 걸요. 난, 난 아버지도 나와 똑같은 감정이길 빌어요”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주먹을 불끈 쥐고 기다렸다.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죄송해요. 어머니는 페넬로페와 같이 계실 거예요. 두 사람에게 제가 사랑한다고 전해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계단을 내려왔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이제 다시는 레이포드 파크를 보지 못하겠지. 이곳의 조용한 웅장함과 고전적인 디자인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슬픈 일이야, 알렉스가 성품만 평온했다면 한 여자에게 멋진 인생을 제공할 수 있었으리라.


집사와 두 명의 서운해 하는 하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릴리는 밖으로 나와 마차에 마지막 짐이 실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길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친구와 같이 아침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헨리였다. 한 손에 든 긴 지팡이를 아무렇게나 흔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야” 그녀가 그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였다. 헨리가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릴리는 애정 어린 손길로 그의 이마에 흩어진 금발 머리를 만져주었다. “널 못 보고 떠날까봐 걱정했어” “이게 뭐예요? 무슨 일 있어요?” 헨리가 마차를 흘깃 쳐다보았다. “작별할 시간이 된 거야. 난 네 형과 싸움을 했어, 떠나야 한단다” “싸움이요? 무엇 때문에요?” 그녀는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난 런던으로 떠날 거야. 카드 기술을 다 가르쳐주지 못해서 유감이네, 친구. 언젠가 길에서라도 만나는 날이 있겠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였다. “어쩌면 크레이븐스에서 만날지도 모르고. 난 거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니까” “크레이븐스요? 전에는 그런 말 안 했잖아요” 헨리가 놀라며 물었다. “난 거기 주인과 친하단다” “데릭 크레이븐과?” “너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모양이구나” 릴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속으로 삼켰다. 그녀가 짐작한 대로 헨리는 미끼를 물었다. 신체 건강한 소년이라면 어찌 금지된 남성의 세계에 유혹되지 안을 수 있으랴. “그 사람을 모르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크레이븐은 유럽에서 가장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요.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라구요.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구요. 물론 국왕은 빼구요” 릴리가 미소지었다. “난 그렇게 말할 수 없겠는걸. 데릭이 여기 있다면, 자긴 위인들에 비하면 바다에 뿌리는 오줌 정도일 뿐이라고 말할 거야. 물론 멋진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얘길 했어요, 우리가 크레이븐스에 가서 게임을 하고 거기 여자들을 만나볼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하구요. 물론 몇 년 안에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언제가는.....” “왜 언젠가야? 지금은 왜 안 돼?”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입구도 통과하지 못할 거예요, 내 나이에는요” “물론 열두 살의 소년은 그런 곳에 들어갈 수 없지. 데릭은 그런 규칙에 엄격하거든. 하지만 내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들어줄 거야. 나와 같이 가면, 넌 안에 들어가서 게임 룸도 볼수 있고, 프랑스 요리도 맛볼 수 있고, 한두 명쯤 창녀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녀가 장난스레 씨익 웃었다. “운이 좋으면 데릭과 악수할 수도 있겠지. 그 사람은 악수를 손을 문지른다는 표현을 한단다” “날 놀리는군요” 의심스럽게 말하면서도, 헨리의 파란 눈동자는 희망으로 빛났다. “내가? 나와 같이 런던으로 가보면 알 거 아냐. 물론 네 형에게는 알리면 안 돼, 내 마차에 슬쩍 타는 거야”


그녀가 살짝 윙크를 했다. “크레이븐스로 가자, 헨리. 모험을 경험하게 해줄게” “형이 날 죽이려고 들 텐데” “오, 그는 화를 내겠지. 그런 안 보고도 알 수 있단다” “하지만 날 내던지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망할 교장이 있던 학교에서 처벌받은 걸 아니까” “그럼 무얼 두려워하니?” 헨리가 활짝 웃었다. “아무것도요!” “그럼 타실까요?” 릴리가 기분 좋게 웃고 나서 소리를 죽였다. “마부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면 안 돼, 헨리. 네가 들키게 되면 난 너한테 실망할 거야” 그녀가 떠났다. 알렉스는 도서실 창문을 통해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도감이 아니라 공허했다. 그는 우리에 갇힌 호랑이처럼 집안을 돌아다녔다. 무언가, 무언가 이 답답함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도착하기 전 수년 간 그랬던 것처럼. 이젠 더 이상의 시끄러운 논쟁도 없고, 골칫거리도 없으며,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기분이 좀도 나아지겠지. 그의 양심이 페넬로페에게 가보라고 재촉했다. 술 취한 채 분노를 내보인 것이 그녀를 겁먹게 만들었으리라. 계단을 오르면서, 알렉스는 인내심을 가질 것을 맹세하였다. 페넬로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온 힘을 쏟으리라. 그녀와 함께 하는 미래가 그의 앞에 펼쳐졌다. 품위있는 안온한 나날들. 그의 입술에 황량한 미소가 서렸다. 페넬로페와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임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녀의 방에 가까이 갔을 때, 흐느끼며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흥분에 들뜬 모소리라 잠시 릴리가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릴리보다 더 부드럽고 높은 말투였다. “난 그이를 사랑해요, 어머니. 영원히 재커리를 사랑할 거예요. 나에게 언니와 같은 용기가 있다면, 그에게 향하는 날 아무도 막지 못할 거예요” “자, 자” 토티의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말 하지 말거라. 이성을 찾아야지, 얘야. 레이포드 경의 아내가 되면, 네 미래는 물론 우리 가족들도 영원히 편안할 수 있다. 우리들 생각이 너를 위해 가장 좋은 거야” 페넬로페의 흐느낌은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날 위해 내린 가장 좋은 결정 같지는 않아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내가 옳아, 이런 짓은 네 언니의 행동이야. 나도 윌헬미나를 매우 사랑하지만, 그 애는 모든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 아이잖니. 우린 레이포드 경에게 사과를 드려야 해. 그 침착하신 분을 릴리가 그렇게까지 몰아가다니, 정말이지 난 믿을 수가 없구나! 애초에 그 애를 여기 머물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언니가 옳았어요. 언니는 재커리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걸 알고 있었어요. 오, 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면” 알렉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섰다. 그의 얼굴을 자조적인 미소가 흘렀다. 토티처럼 릴리에게 비난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다.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자신의 탓이다. 그리고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욕구가 되살아났다. 런던으로 오는 동안, 헨리는 알렉스가 자신에게 해준 친절하고 애정 깊은 일들을 설명해야 할 사명감을 가진 사람 같았다. 릴리는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하는 처지였기에, 자신도 놀랄 정도의 인내심으로 그 시간을 견뎌 냈다. 그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자기가 나무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했을 때 알렉스가 구해 주었으며, 알렉스가 호수에서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등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수도 없이


둘이서 병정놀이를 한 것은 물론이고, 알렉스가 숫자 세는 법도 가르쳐 주었으며...... “헨리” 릴리가 마침내 말을 중단시켰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미소를 보였다. “넌 나에게 무언가 설득하려 하는구나. 네 형이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냉정한 괴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네. 바로 그래요” 그녀의 빠른 눈치에 감탄하면서 헨리가 대답했다. “정확히 맞았어요! 형은 때때로 불쾌하게 굴기도 하지만, 멋진 사람이라구요. 내 말이 틀리면 이 자기에서 벼락을 맞을 거예요” 릴리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의 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알렉스를 알게 되면, 진짜로 알게 된다면, 당신도 형을 좋아할 거예요. 아주많이요” “이미 아는 것보다 더 알고 싶은 생각이 없는걸” “내가 일곱 살 때 형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강아지를 주었다는 얘기 했던가요?” “헨리, 내가 너의 형을 좋아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니?” 그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형이 페넬로페와 결혼 못 하게 하려는 거죠, 그렇죠?” 릴리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대부분의 어른들이 하는 똑같은 실수, 아이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헨리는 눈치가 빠른 아이라 당연히 자기 형과 로슨 집안 사이의 상황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니?” “둘이 싸울 때에는 아주 요란하다구요. 그리고 하인들도 수군대구요” “내가 그 결혼을 방해하는 게 기분 나쁘니?” 소년이 머리를 저었다. “페넬로페는 좋은 사람이에요, 여자로서. 하지만 알렉스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요. 캐......” 그 빌어먹을 여자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그녀는 불쾌하게 가슴이 저려왔다. 알렉스는 그 여자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을까? “그 여자 기억아니, 헨리?” “네, 그럼요. 물론 내가 그때 어리긴 했지만요” “지금은 대단히 나이 든 성인이 되신 모양이군. 지금 몇 살이더라, 열하나? 열둘?” “열두 살이요” 그녀의 농담에 그가 씨익 웃었다. “당신은 그녀와 닮았어요. 당신이 더 예쁘긴 하지만요, 나이도 더 많고” “흐음, 우쭐해야 할지 기분 나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넌 그 여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말해 보렴” “난 그녀를 좋아했어요. 캐롤라인은 생기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당신처럼 알렉스를 화나게 만든 적도 없어요. 그녀는 언제나 형을 웃게 만들었지요, 지금의 형은 거의 웃지 않지만” “안됐구나” 릴리는 멍하니 대꾸하며, 회랑에서 카드 놀이했을 때 잠깐 보았던 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데릭 크레이븐과 결혼 할 건가요?” “오, 맙소사, 아니야” “그렇다면 페넬로페를 제거한 다음, 당신이 알렉스와 결혼할 수도 있어요” 릴리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거한다고? 세상에, 넌 내가 그 애를 템즈 강에라도 던질 듯이 말하는구나! 난 말이야, 어느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단다. 그리고 네 형을 좋아하지도 않아” “이 얘기했던가요? 내가 깜깜한 걸 무서워했을 때 알렉스가 내 방에 들어와서는......” “헨리” 그녀가 경고를 담아 그를 불렀다. “이 얘기만 하게 해줘요” 릴리는 신음하며 뒤로 머리를 기대고는, 알렉스 레이포드의 미덕에 대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 데릭과 워디는 중앙의 게임 룸 책상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다가오는 가면 무도회를 준비하기 위한 수많은 메모들로 수북했다. 그들이 동의를 한 것은 이 도박의 궁전을 로마의 신전처럼 장식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데릭은 로마의 타락이 절정기에 달했을 때처럼 만들고 싶어했는데, 불행히도 그와 워디는 의견이 어긋나기만 했다. “그래, 그래” 마침내 데릭이 초록의 눈동자를 번득이며 말했다. “벽에다 거는 은장식하고 기둥은 자네 맘대로 해. 하지만 창녀들에 대해서는 내 뜻에 따라야 해” “그들을 하얀 페인트로 칠하고 조각 비슷하게 천을 씌우라는 겁니까? 그들이 저녁 내내 무억 하겠습니까?” “그냥 받침대 위에 그대로 서 있기만 하면 돼!” “그들은 십 분도 견디지 못할 겁니다” “그런 일 하라고 돈 주는 거야” 평상시 침착하던 워디의 말투에 약간 짜증이 묻어났다. “크레이븐 씨, 설사 그 아이디어로 한다 해도 말입니다. 크레이븐스의 기준과는 어울리지 않는 야하고 값싼 분위기를 내게 될 거예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말은요, 전혀 고급스럽지 않다는 뜻이지요, 교양이 부족하신 나으리” 그들 뒤쪽에서 릴리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워디를 거들었다. 데릭이 미소지으며 릴리를 돌아보았다. 은실로 수놓은 연보라색의 드레스를 입으니, 그녀는 맛좋은 사탕처럼 보였다. 릴리가 그에게로 달려들자, 그는 그녀를 안아 한 번 빙 돌려주고 나서 내려놓았다. “집시 양이 시골에서 돌아오셨군. 알렉스에게 응당한 벌을 내리고 왔나?” “아니, 하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어” 그녀는 클럽의 친근한 분위기를 돌아보며 기쁨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모든 잡일을 도맡아하는 워디에게 환한 미소를 보였다. “워디, 잘생긴 악마 양반. 나 없이 어떻게 지냈어요?” 왜소한 체격의 안경 낀 사내가 미소로 대답했다. “겨우 견딜 만했죠. 로슨 양은 언제나 반가운 분이시지요. 주방에서 뭐 좀 내올까요?” “아니, 아니요. 라바주 씨는 아마 최근에 만든 푸딩하고 파이를 한 없이 먹이려 들 거예요” “그럴 필요가 있겠어. 당신은 참새보다도 크지가 않아, 이리 와봐” 그가 그녀의 작은 어깨에 한 팔을 두르고 구석으로 걸어갔다. “지독해 보여” “그게 오늘 나를 보는 사람들의 평가인 모양이군” 데릭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열뜬 눈동자와 입가의 주름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알렉스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인물이었어. 난 가장 지독한 방법을 동원할 거야” “지독한 방법이라구” “그 시작으로 그의 동생을 유괴해 왔어”


“뭐라구?” 데릭이 릴리의 손가락을 따라 멀리 구석에 기다리고 있는 잘생긴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천천히 돌면서 휘둥그래진 눈으로 호사스런 클럽의 풍경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데릭의 반응에, 릴리는 다소 반항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난 그에게 함정을 거는 거야. 헨리는 그 미끼고” “젠장할, 이번에는 또 이런 짓을 하다니” 데릭의 어조에 릴리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날 위해서 헨리를 당신이 데리고 있어 줘, 데릭. 오늘 하룻밤만이야” 데릭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움이 희미해지고, 얼음장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클럽에 아이들은 절대 출입할 수 없어” “헨리는 천사 같은 아이야.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안 돼” “최소한 그 애를 만나보기라도 해줘” “안 돼!” “제발, 데릭, 헨리는 당신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흥분해 있다구. 당신을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국왕을 제외하고” 데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발” 그녀의 애원에 그가 마침내 대답하였다. “좋아, 인사 정도는 해주지. 그 후에는 내보낼 거야” “고마워” 릴 리가 그의 팔을 톡톡 두들겼다. 낮게 욕설을 중얼대며, 데릭은 헨리가 서 있는 곳까지 그녀에게 끌려갔다. “크레이븐씨, 레이포드 백작의 동생인 헨리 레이포드 경을 소개하겠어요” 클럽을 방문한 귀족들에게 대하듯이 데릭은 가장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크레이븐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나으리”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해요” 헨리는 데릭의 손을 움켜잡고 열심히 흔들어댔다. “멋져요! 대단해요!” 그는 손을 놓고는 호기심 많은 강아지처럼 방안을 돌아다녔다. 크리비지 카운터 그릇에 손을 넣었다가 제국 스타일의 의자 등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성역이라도 되는 듯이 경건하게 주사위 테이블에 다가갔다. “게임할 줄 아니?” 소년의 열성적인 태도에 데릭은 흥미가 일었다. “잘은 모르지만 로슨 양에게 배우는 중이에요. 내가 크레이븐스에 와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그가 경이로운 표정으로 데릭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만난 중에서 가장 놀라운 남자예요. 천재만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으니까요” “천재라, 전혀 아니걸” “아니, 내 말이 맞아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서 여기까지 이르다니......크레이븐스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이잖아요, 당신이 천재가 아니라면 난 이 자기에서 벼락을 맞을걸요! 나하고 학교 친구들은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감탄한다구요” 릴리는 헨리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데릭은 그 소년에게 아주 빠르게 다정해지고 있었다. 그가 기분 좋게 릴리를 돌아보았다.


“거만덩어리는 아니군, 이 녀석” “난 사람들 말을 전달한 것뿐이에요” 헨리는 진지하게 그지없었다. 데릭이 갑자기 그의 등을 툭 쳤다. “새 구리동전처럼 반짝거리는 멋진 녀석이야. 나와 같이 가자구, 예쁜 창녀들을 만나게 해줄게” “안 돼, 데릭. 헨리에게는 주사위, 술이나 여자, 모두 안 돼. 그 애 형이 그 사실을 안다면 날 죽이려 들거야” “이런, 여기가 무슨 빌어먹을 수녀원인 줄 아시나?” 데릭이 헨리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난 영구에서 제일 멋진 여자들을 갖고 있어. 우리 애들한테 넘어 가지 않는 사내는 없지” 릴리와 워디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교환하였다. “사장님은 저 아이가 마음에 들었나봐요” “워디, 헨리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해줘요. 잘 좀 감시해 줘요. 몇 시간씩 카드 게임에 끼어 들고 싶어할지도 몰라요. 어떤 방법으로든 그 애가 타락하거나 상처입는 일이 없어야 해요” “알겠습니다. 언제 데리고 가실 겁니까?” “내일 아침” 릴리는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워디가 예의바르게 팔을 내밀었다. “제가 마차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로슨 양” “지금쯤 헨리가 사라진 걸 알고 레이포드 경은 거의 미쳐버렸을 거예요” 릴 리가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메모를 남기셨나요?” “아니, 백작은 멍청이가 아니에요. 오래지 않아 헨리가 어디 간 건지 알 거예요. 저녁 때쯤이면 런던에 도착하겠군요. 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답니다” 워디는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든 데릭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충성을 보여주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만약에 백작이 여기 먼저 들르게 되면, 내 집으로 보내줘요. 헨리를 절대 만나게 하면 안 돼요, 그렇지 않으면 내 계획은 완전히 엉망이 될 거예요” “로슨 양, 당신은 제가 만난 여자 중에서 가장 용맹한 여성입니다” “오,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지 알고 계신 것이겠지요?” “알구말구요!” 그녀의 얼굴에 순수한 기쁜의 미소가 번졌다. “난 알렉스 레이포드 경에게 절대로 잊지 못할 교육을 시키는 중이랍니다” 헨리가 없어진 걸 알아차리고 찾기 시작했을 때, 하녀 한 명이 로슨 양이 출불하기 바로 전에 얘기하시는 모습을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런던에서 돌아온 마부는 쏟아지는 질문들로 인해 당황하였다. 헨리 도련님이 마차에 타는 것이나 내리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영리하신 분이나 들키지 않게 행동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였다. 알렉스는 동생이 릴리와 같이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 망할 놈의 여자가 그를 런던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헨리를 데려간 것이다. 당장에 달려가서 도시 전체를 뒤집어 놓으리라. 어서 빨리 그 여자를 찾아내고 싶어 기다릴 수 없을 지경이다. 그 여자를 찾아내서 자신을 조롱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가 그로스브너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알렉스는 마차가 정지하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뛰어내려 험상궂은 얼굴로 38 번 가의 계단을 올라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키가 크고


턱수염이 있는 집사가 문을 열었다. 인상적인 남자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망토처럼 위엄을 걸친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포드 경. 로슨 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동생은 어디 있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알렉스가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헨리!” 그의 목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레이포드 경, 이쪽으로” 집사가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내 동생은? 그 애는 어디 있소?” 집사의 단정한 걸음걸이와는 달리, 알렉스는 한 번에 두 계단씩 뛰어 올라갔다. “헨리? 헨리, 네 녀석 몸뚱이를 찢어버리겠다! 그리고 로슨, 그 여자는 나한테 잡히기 전에 빗자루라도 타고 도망치는 게 좋을걸!” 두 번째 계단에서 뻗은 복도에서 릴리의 침착하고 재미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 날 쫓아낸 당신이 내 집에 그렇게 당당히 밀고 들어와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목소리를 따라 알렉스가 첫 번째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어디 있는 거야?” 그녀의 웃음 소리가 홀 안에 메아리쳤다. “내 침실에요” “헨리는 어디 있어?” “그걸 내가 알아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포악하게 고함치지 말아요, 알렉스. 상처 입은 곰이라도 이보다 덜 시끄러울 거예요” 알렉스는 다음 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침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언뜻 금박 입힌 너도밤나무와 초록색 실크 커튼이 들어왔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머리가 깨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흐려지며, 까만 안개가 그를 휘감았다. 머리를 움켜잡고서, 그는 밀려드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릴리는 술병을 들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를 내려다보며 놀라움과 승리의 복잡한 감정이 전해졌다. 카펫에 황금빛 머리카락이 흩어진 그는 쓰러진 사자처럼 보였다. “버튼! 이리 와요. 버튼, 레이포드 경을 침대로 옮기도록 좀 도와줘요” 집사는 침실로 들어오다가 멈칫하면서, 릴리의 손에 든 천으로 싼 술병에서부터 알렉스의 뻗어버린 몸뚱이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릴리의 탈선과 괴상한 행동들을 수도 없이 봤지만, 그의 침착함이 흔들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간신히 무표정한 얼굴로 명령에 따랐다. “네, 아가씨” 그는 알렉스의 커다란 몸뚱이를 어깨 위로 들쳐 멨다. “조심해요, 다치지 않게. 내 말은, 내가 이미 한 것보다 더 심하게 다루어서는 안 되다는 뜻이에요” 버튼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알렉스의 늘어진 몸을 침대로 옮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일으켜 코트와 조끼와 넥타이를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마지막으로 삐죽 뻗친 회색 옆머리를 얌전하게 가라앉혔다. “다른 일이 더 있습니까, 로슨 양?” 그녀는 알렉스의 웅크린 몸 옆에 앉았다. “그래요, 밧줄” “밧줄이요?” 버튼이 무표정하게 되뇌었다. “이 사람을 묶어야겠어요. 여기서 내보낼 수 없으니까요. 아, 서둘러 줘요. 금방 깨어날지도 몰라요”


그녀는 자신의 포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 코트와 신발을 벗겨야겠군요” “로슨 양?” “왜요?” 알렉스를 골똘이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황갈색 눈동자가 올려다보자, 버튼은 힘겹게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백작께서 얼마나 여기서 머무실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오늘밤만 묵을 r 예요. 이분 마차는 뒤뜰로 옮기고 마부에게도 숙소를 마련해 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아가씨” 버튼이 밧줄을 찾으러 간 사이, 릴리는 자신의 침대에 쓰러져 있는 거구의 사내를 살펴보았다. 문득 자신이 한 짓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그는 젊고 연약해보였다. 볼 위쪽에 숱 많은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고, 언제나 보아왔던 찡그림이 없으니, 그는 너무나 순진해 보였다. “어쩔 수 없었어요, 이럴 수밖에 없었다구요” 그녀는 그의 헝클어진 금발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를 더 편안ㄴ하게 해주기 위해 목에 매인 까만 넥타이를 풀었다. 그의 체온으로 인해 실크가 여전히 따뜻하였다. 그를 말없이 쳐다보며 그녀는 조끼를 벗기고 하얀 셔츠의 단추를 두 개 풀었다. 손마디가 그의 목덜미 탄탄한 곳을 스쳤다. 이상한 떨림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구릿빛 뺨과 완고한 턱의 선, 부드럽게 굽어진 아랫입술도 만져보았다. 하루종일 자란 수염자국으로 인해 턱과 뺨이 거칠거칠했다. 타락한 천사라 해도 이보다 더 어둠과 빛의 매력적인 조화를 이룰 수는 없을리라. 기절한 상태에서조차 그의 얼굴에는 긴장이 남아 있었다. 술을 많이 들이키고 잠은 거의 자지 못한 사람처럼. 오랫동안의 슬픔이 그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우린 어떤 면에서 많이 비슷해요, 당신과 나. 자존심, 불끈하는 성질과 고집 센 기질.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산이라도 옮길 거예요. 하지만 가엾은 사람, 당신은 그 산이 어디 있는지 모른답니다.” 그녀는 문득 침실 창 밖으로 그녀의 옷가지를 던지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그 순간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댔다. 따뜻하고 아무 반응도 없다. 도서실에서의 그 관능적인 키스가 생각났다. 그녀는 그와 코가 거의 맞닿을 정도로 고개를 들어올리며 속삭였다. “깨어나세요, 잠자는 왕자님. 나에게 어떤 계획이 있는지 아실 시간이랍니다” 알렉스는 천천히 깊은 잠에서 빠져 나왔다. 옆에서 누군가가 드럼을 쳐대고 있는 듯했다. 쿵쿵, 머리 속이 쿵쾅거렸다. 그가 움찔하며 차갑고 부드러운 물체에 아픈 머리를 기대었다. “자, 자, 괜찮아질 거예요” 간신히 눈을 뜨니 여자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자신이 또다시 릴리의 대한 꿈을 꾸고 있음을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생강빵 같은 야릇한 색체를 띤 그녀의 눈동자와 매력적인 미소를 지닌 그녀의 입술이 바로 위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뺨에 부드러운 손가락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망할 놈의 여자, 영원히 날 괴롭힐 참인가?” 그녀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전적으로 당신 탓이랍니다, 백작님. 움직이지 말아요, 얼음이 떨어지겠어요. 가엾어라, 최대한 부드럽게 치려고 노력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할 필요가 없게 힘껏 때려야만 했답니다” “뭐, 뭐라고?” “내가 당신 머리를 내리쳤다구요” 알렉스는 눈을 깜박이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이건 꿈이 아니다. 자신이 그녀의 집에 들이닥쳐 방안에 들어섰는데, 머리에 충격이 가해졌다. 꿈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릴리는 옆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었고 자신은 침대에 큰 대자로 뻗어 있었다. 릴리의 차가운 걱정 속에 경고성이 다분한 살벌한 표정의 서려 있었다. “헨리는?” “걱정 마세요, 그 애는 괜찮아요. 아주 잘 있어요. 오늘밤은 내 친구와 같이 지낼 거예요” “어떤 친구? 누구야?” 그의 다그침에 그녀의 시선이 조심스러워졌다. “내가 말할 때, 너무 성급하게 묻지 말아요, 그 애의 신상이 약간이라도 걱정이 된다면, 절대” “어떤 녀석인지 말하라구!” 그는 일어나 앉으려고 몸부림쳤다. “데릭 케리이븐” “주쥐에 창녀와 도둑들만 우글거리는 천박한 깡패녀석” “헨리는 완벽하게 안전하다구요, 내가 약속해요” 알렉스가 으르렁대며 그녀에게 손을 내뻗자 릴 리가 놀란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나쁜 년!” 그의 행동은 두꺼운 침대 기둥에 묶은 손발의 밧줄 때문에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그의 머리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가 해 놓은 짓을 알았다. 한순간 충격으로 얼어붙었다가, 그는 격분한 소리를 내지르며 손발을 잡아뺐다. 육중한 침대가 삐그덕 삐그덕 흔들거렸다. 그는 난생 처음 우리에 갇힌 야수처럼 발버둥쳤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릴리는 침대가 굳건히 비티는 모습을 보며 안도하였다. 마침내 알렉스의 몸부림이 진정되고 거친 숨소리만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왜지? 왜?” 릴리가 침대 옆으로 돌아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미소는 아까보다 자신감이 약해져 있었다. 승리감이 들긴 하였지만, 무기력하게 묶여 있는 그의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밧줄이 그의 손목에 상처를 입혔다. “내가 이겼어요, 백작님, 우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거예요. 내 방법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요” 그녀는 뻣뻣한 목덜미를 비비며 하품을 했다. “우리가 말하는 동안, 재커리 스탬퍼드는 레이포드 파크에 있을 거예요. 그가 오늘밤 페넬로페를 설득해서 그레트너 그리(사랑의 도피를 한 남녀가 결혼하던 스코틀랜드의 마을)으로 데려갈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두 사람은 결혼하는 거죠. 당신을 묶어두는 임무는 내가 맡아주기로 자청했어요. 여기서 나갈 때에는 이미 늦어 있을 거예요. 당신에게 페니를 줄 수는 없어요. 그 애를 너무나 사랑하는 재커리가 있으니까요. 그가 내 동생을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 당신의 상처난 자존심은 금방 회복이 되겠지요” 그녀는 그의 충혈된 눈을 보며 미소지었다. “절대 그 애와 결혼 할 수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때, 당신은 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어야 했어요” 그의 반응을 기다리듯이 그녀의 머리가 애교스럽게 옆으로 기울어 졌다. 그도 이것이 멋진 게임이었음을 인정할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때요? 당신으 의견을 듣고 싶군요” 알렉스의 대답은 한참만에야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거칠은 으르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내 의결? 어서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절대 멈추지 말고. 나에게 잡히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나 드리라구” 커다란 침대에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중에도 이렇게 무서워 보이는 사람은 알렉스 레이포드밖에 없으리라. 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확고한 결심에 가득 차 있었다. 릴리는 그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처리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쾌활하게 받아넘겼다. “내가 당신에게 큰 호의를 베푼 거예요. 당신은 이제 마음껏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어요. 페니보다 훨씬 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요” “난 당신 동생을 원해” “그 애는 결코 당신을 즐겁게 하지 못해요. 맙소사, 정말로 당신을 두려워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요? 약간의 지각이라도 잇는 사람이라면, 그다음에는 좀더 용기 있는 사람을 고르겠지요. 하지만 아뇨, 당신은 아마 또다시 온순하고 착한 양에게 청혼할 거예요. 약한 자를 괴롭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관계에 끌리기 마련이니까” 알렉스는 두통으로 어지러웠고, 묶인 걸 풀어보려던 노력도 실패하여 엄청난 격분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가 사랑하던 사람은 모두가 그를 떠나갔다. 어머니, 아버지, 캐롤라인. 페넬로페는 잃지 않을 거라고 믿어 왔는데, 그게 가장 의지할 만한 일이었는데. 더 이상 참아야만 한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의 얼굴이 난폭하게 일그러졌다. “릴리, 밧줄을 푸시오” “내 목숨이 위태로운 걸요” “그게 앞으로 일어날 유일한 일이겠지” “아침에 풀어드릴게요, 그 다음에는 헨리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시고 마음대로 복수의 계획을 짜시라구요. 어떤 심한 보복이라도 상관없어요, 이젠 페니가 당신에게서 안전하게 벗어났으니까요” “당신은 절대 안전하지 못할 거야” “지금 이 순간은 안전한 기분인걸요” 경쾌하게 대꾸해 주다가, 그녀는 문득 그의 분노 아래 감추어진 감정을 알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있든 뒤틀린 즐거움이 약해지면서 더 부드러운 빛으로 변하였다. “헨리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애는 안전하게 잘 지낼거예요. 데릭의 부하가 아무 문제 없도록 확실히 할 거랍니다. 런던까지 오는 동안 헨리는 마차 안에서 당신에 대한 칭찬을 귀가 닳도록 늘어놓았지요. 아이에게 그렇게 헌신적인 남자라면 그리 끔찍한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얼굴을 지켜보며, 그녀는 한 손을 그의 옆구리에 대로 그 위로 약간 몸을 실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건 헨리가 아니에요, 무슨 문제죠?” 그는 자신의 숨결을 진정시키는 일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런데 내 동생과의 결혼에는 왜 그렇게 집착하며 강요하나요? 그냥 나가서 그녀와 닮은 사람을 찾으면 될 텐데요,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요. 당신이 가진 캐롤라인의 기억을 방해하지 않을 만한 사람을 찾는 거라면요” 그의 놀란 숨소리를 그녀가 포착하였다. 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어댔다. “부드러운 일이에요, 오랫동안 한 여자를 이토록 애도하는 남자는 극히 드물죠. 그게 당신의 사랑하는 능력인지, 지독한 완고함 때문인지 모르겠군요. 어느 쪽이죠?” 알렉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릴리는 그 회색의 깊은 호수를 들여다보니 이상한 연민의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은 당신만이 아니에요. 나도 그렇답니다. 나도 자기 연민에 대해 너무나 잘 이해해요. 하지만 그런 짓은 적당하지도 않고 아무 쓸모도 없다는 걸 알지요” 그녀의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가 그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감히 그 허영 가득한 자작 녀석과 깨진 걸 캐롤라인과 비교하다니” “아뇨, 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릴리는 그가 어떻게 힌돈 경과의 약혼에 대해 알고 있을까 생각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재커리에게서 알아닜음이 틀림없다. “해리에 대한 감정은 일종의 도취였어요. 내가 잃어버린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난,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도 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누구지?” “그건 개인적인 일이에요” 알렉스가 베개로 머리를 눕혔다. 릴리는 장난감을 만지듯이 그의 옷깃을 다듬어주었다. 자신의 태연한 태도가 그의 화를 부추긴다는 걸 알았다. “이 일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이 모두를 위해 최선이라는 걸 깨달을 거예요.아무리 당신이라 해도요” 그의 손에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을 보고는, 그녀가 그의 팔에 손을 갖다댔다. “그러지 말아요. 물집이 잡히고 말 거예요. 마음을 편하게 가져요. 불쌍한 알렉스, 여자에게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요” 그녀의 빛나는 짙은 갈색 눈동자가 연민 어린 웃음기로 가득하였다. “난 평생 이 기억을 소중히 간직할 거예요. 내 손 안에 들어온 알렉스 백작” 그녀가 고개를 내리자, 그녀의 미소짓는 입이 그의 바로 위에서 어른거렸다. “풀려나시면 어떻게 하실 셈인가요, 백작님?” “당신을 목 졸라 죽일 거야, 내 손으로” “그래요? 아니면 도서실에서 했던 것처럼 키스를 하시겠지요?” 그의 눈이 번득거리며 두 뺌으로 붉은 기운이 올라왔다. “그건 실수였다” 그의 경멸 섞인 어조는 릴리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은 모두-해리에게 버림받고, 주세페는 그녀에게 심한 실망을 보였고, 데릭조차도 그녀에게 성적인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그녀가 남자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었다. 이젠 알렉스도 그 남자들의 목록에 포함되었다. 왜 다른 여자들처럼 하지 못하는 걸까? 그녀의 어떤 점이 남자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갑자기 그가 얼마나 무력한 상태인가를 알렉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악마적인 충동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고개를 숙여, 그의 턱 위로 숨결을 뿜었다. “도서실에서는 당신이 날 공격했어요. 혹시 원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키스당해본 적 있나요, 알렉스? 아마 그게 어떤 느낌인지 당신도 알고 싶을 거예요” 알렉스는 이 여자가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여 그의 굳은 입술에 살짝 입을 갖다대었다. 그는 불에 닿은 사람처럼 얼른 머리를 뒤로 빼냈다. 그녀는 그를 괴롭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키스, 이 다음에는 그의 가슴털을 하나씩 뽑을지도 모른다. 릴리는 말없이 그를 살펴보았다. 무언가 그의 숨결을 거칠게 만들었다. 분노일까? 아니면 혹시라도 자신의 키스가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두 번째 생각에 더 마음이 끌렸다. “이번에도 실수인가요?” 알렉스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숨소리 하나 낼 수가 없었다. 릴리의 입술이 다시 살짝 내려왔다. 알렉스는 재빨리 숨을 들이쉬었다. 이번에는 피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호기심 어린 접촉만으로 그의 입술 위를 스쳐갔다. 알렉스는 고통스런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녀의 키스를 견뎌내었다. 밧줄을 끌어당긴 팔의 긴장으로 인해 어깨와 가슴이 돌처럼 단단해졌다. 그녀는 매끈하고 뜨거운 그의 목을 살짝 만져보았다. 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릴리는 그의 가슴 위로 몸을 더욱 붙였다. 무언가를 더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언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가 천천히 그녀의 입술 밑으로 움직여왔다. 릴리는 그의 목덜미를 감싸안고 본능적으로 더 강하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의 매끈한 혀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자, 그에 반응하고 싶은 쾌감이 일렁였다. 몸을 떨며 토해내는 릴리의 놀란 숨결이 그의 뺨에 와 닿았다. 그녀의 입술이 물러가리라 기대하며, 그는 좀더 갈증 어린 입술을 위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을 빼내지 않았다. 달콤하게 그에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알렉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관능적인 육채와 침대에 묶인 채 어찌할 수 없는 지금, 흥분이 치솟아 한곳으로 모조리 집중되었다. 그의 남성이 단단하게 치솟아 살아 움직이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그는 고통스레 신음하며 자신을 저주하였다.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어내고 그녀의 향긋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더 이상은 안 돼. 날 풀어주든가, 이런 짓을 멈추든가 하라구” “싫어요” 그녀의 말소리가 숨가쁘게 흘러나왔다. 평생 동안 이렇게 대담하고 아찔한 느낌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숱 많은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난 당신에게 한 가지 교훈을 일러 주겠어요” “나한테서 떨어져!” 그가 난폭하게 소리질렀다. 그녀를 겁주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그녀가 약간 떨어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밀착해 왔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의 몸 위로 온몸을 쭉 뻗었다. 그는 몸서리를 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발기한 남성 위에 자리잡은 그녀의 육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게 하였다. 이걸로는 충분치가 않았다, 더 이상은 필요하다. 그녀의 몸 속에 밀고 들어가 그녀의 육체와 바짝 밀착시키고 그녀의 부드러움 속에 흠뻑 빠지고 싶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조용하게 말을 내뱉었다. “충분해. 릴리, 이걸로 충분해” 그녀의 숨결은 아주 빨랐다. 사냥터에서 불가능한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처럼 무모한 모습이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스쳐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때까지. “이제 그 여자 이름을 말해 봐요. 말해 보라구요” 그의 앙다문 턱이 부르르 떨렸다. “그럴 수 없을걸요. 왜냐하면 당신이 원하는 건 캐롤라인이 아니라 나니까. 난 그걸 느낄 수 있어요. 난 살아서 숨 쉬는 여자이고 여기에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날 원해요”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캐롤라인을 찾아 헤매었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흐릿한 기억, 퇴색한 빛깔과 답답한 소리만이 존재했다. 그 어떤 것도 눈앞에 보이는 릴리처럼 현실적인 건 없었다. 그의 바로 위에 릴리의 입술이 있었다. 그 입술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즈 가까이.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의 눈속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릴리는 승리감을 노래하며 몸을 빼내어야 마땅했다. 그녀의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낮은 신음을 흐리며 다시 한 번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굴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얼굴과 목을 부드럽게 탐험하였다. 알렉스는 손으로 그녀를 만지고 허벅지 사이에 그녀를 가둬 두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밑에 몸을 쭉 뻗은 채 누워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는 죽을 지경이었고, 밧줄에 묶인 손목도 지독히 아팠다. 릴리는 그의 리듬감 있는 엉덩이의 자극에 놀랐다.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이가 아랫입술을 밭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어서” 그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입안으로 밀로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렸다. 릴리는 나지막이 쾌감의 소리를 질렀다. 충동적으로 그에게 몸을 더욱 들이밀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젖가슴을 포개며, 그의 배에 자신을 밀어붙였다. 두 몸뚱이의 마찰로 인해 드레스 자락이 무릎까지 올라갔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몸 속에서 커져만 가는 욕망 이외의 어떤 것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갑자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릴리의 몸이 경직되었다. “로슨 양?” 그녀는 베개 위로 고개를 떨구고, 알렉스의 귓가에 숨결을 토해내었다. 그는 그녀의 곱슬머리에 고개를 돌려 그 달콤한 향내를 들이켰다.


버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로슨 양?” 릴리가 고개를 들고 불안정하게 대꾸하였다. “왜 그래요, 버튼?” “방금 전갈이 왔습니다”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 일임에 틀림없다. 특별한 일이 아닌 한 버튼은 그녀의 개인 생활에 끼어 들지 않았으니. 알렉스는 그런 릴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솟구치며 눈에는 공포 비슷한 번득임이 스쳐갔다. 현기증까지 느끼는 듯하였다. 그녀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럴 리가 없어, 너무 빨라” “뭐가 너무 빠르다는 거요?”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일깨운 듯 그녀의 표정은 재빨리 평정을 되찾으며 그에게서 홱 떨어져나갔다. 그녀는 신중하게 그의 시선을 회피하였다. “이젠 작별을 고해야겠군요, 백작님.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세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못된 여자야!” 그는 그녀가 매무새를 가다듬고 방을 떠나는 모습을 분노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몇 마다 욕설을 더 외쳤다.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감옥 구경을 해야 할걸! 그리고 당신의 그 빌어먹을 집사 녀석도 반드시 손을 봐 주겠어” 문이 쾅 하고 닫히자, 그는 입을 다물고 천장을 노려보았다. 릴리는 응접실에서 버튼과 마주쳤다. 너무나 정신이 산란하여 자신의 헝클어진 모습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은쟁반 위에 메모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저분한 밀랍으로 봉인된 종이였다. 버튼이 쟁반을 내밀었다. “그 연락이 오면 어느 때든지 즉시 알리라고 해서......” “잘 했어요” 릴리가 편지를 잡아채 뜯었다. 그 안의 휘갈겨진 글씨를 훑어보았다. “오늘밤, 빌어먹을 인간! 날 지켜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언제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 같다구” “아가씨?” 머튼은 편지의 내용에 대해 알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단정치 못한 필체로 쓰여졌으며, 전달하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점만 알뿐이었다. 그 편지는 언제나 거리에서 떠도는 초라한 소년들에 의해 전달되었다. “말에 안장을 얹어 주세요” “로슨 양, 런던에 여자 혼자 말을 타고 나가는 것은 적당치가 않습니다. 특히 이런 밤 시간에는 더욱더요” “하녀에게 회색 망토를 갖고 오라고 해요. 모자 달린 걸료”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자신을 지탱하려는 듯이 난간을 힘껏 움켜쥔 채로. 커벤트 가든은 런던에서 가장 불쾌한 구역 중의 하나였다. 평범한 것부터, 생각할 수도 없는 세속적인 모든 쾌락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벽이란 벽마다 모조리 붙어 있는 색색의 포스터와 종이들, 구석구석마다 손님을 외쳐 부르는 사기꾼, 포주와 창녀들의 시끄러운 소리들, 자기 애인과 같이 극장에서 나오는 남자들이 시장에 있는 선술집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릴리는 그들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했다. 술 취한 사내는 전문적인 범죄자만큼이나 위험스럽고 비인간적이다. 그녀는 가로등 불빛과 어둠 사이를 통과해 가며, 거리를 걸어 다니는 창녀들에게 대해 연민을 느꼈다. 어린


소녀들과 쪼그라든 늙은이까지, 그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비쩍 말랐거나 술로 인해 퉁퉁 부어 있었다. 계단이나 모퉁이에서 포즈를 취하며 손님을 끌기 위해 억지 웃음을 짓고 있는 그들은 모두가 피곤한 얼굴이었다. 다른 살 길이 있었다면 그들도 이런 길로는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며 릴리는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이런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릴 것이다. 실크 이불 위에서 교태를 떨며 다이아몬드를 걸치는 고급 매춘부의 삶이라 해도. 그녀의 입술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남자에게 소유되어 억지로 그의 육체적인 욕망에 봉사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킹 스트리트의 남쪽으로 걸어가며, 그녀는 교회의 안마당을 지나갔다. 그리고는 가게와 거주지로 만들어진 듯한 작은 집들에서 나오는 야유와 휘파람 소리들을 무시하면서 조심스럽게 시작 입구에서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곳의 박공벽과 토스카나 양식의 기둥으로 치장을 한 2 층짜리 아케이드는 그런 누추한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디자인이었다. 그녀는 말고삐를 잡고 어둠 속에 멈춰 섰다. 기다린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어린 소매치기 둘을 보며 슬프게 미소짓다가 문득 니콜이 생각나자 그녀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오 맙소사, 그 애는 지금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그처럼 어린아이도 사악한 일에 이용되도록 팔렸을까? 눈에서 눈물이 따끔거리자 그녀는 거칠게 닦아내었다.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 지금은 안된다. 침착하게 자신을 통제해야만 한다. 옆의 어둠 속에서 나른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이제야 오셨군. 내가 요구한 건 가져왔겠지” 릴리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 한 손으로 고삐를 움켜쥐고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리며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비록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주세페. 내 딸을 돌려 받을 때까지는 난 한푼도 주지 않겠어” 7. 주세페 가바치 백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에서 등장하는 듯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눈이 번쩍 뜨이는 잘생긴 얼굴,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 풍성한 구릿빛 살결, 그리고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주세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여자들에 둘러싸여 햇살 가득한 피렌체 광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사교적인 모임에서 수도 없이 마주쳤고, 어느 때부터인가 주세페는 그녀를 열렬히 따라 다니기 시작하였다. 릴리는 이탈리아에서의 로맨스, 잘생긴 남자가 자신을 유혹한다는 사실에 낯선 흥분감을 느꼈다. 그녀의 유일한 남자였던 해리 힌돈은 지극히 침착하고 영국인다워, 부모님이 기뻐하실 만한 남자였다. 그는 그녀의 솔직한 면을 보자마자 떠나버렸다. 하지마 가바치 백작은 그녀의 충동적인 면을 즐겼다. 그는 그녀를 자극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는 모든 허세를 벗어 던지고 자신의 참모습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마침내 발견한 거라고 생각하였다. 지금은 자신의 어리석음이 한심할 뿐이지만 말이다. 지난 몇 년 간, 주세페의 외모는 조잡하게 변했다. 아니면 단지 그에 대한 그녀의 인식이 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관능적인 풍성함으로 이탈리아의 여자들에게 칭송되었던 그의 살짝 튀어나온 입술은 이제 역겹게만 느껴졌다. 한때는 그의 관심에 우쭐했으면서도, 지금 자신의 몸 위를 탐욕스럽게 더듬는 그의 시선은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쁜 면이 존재하였다. 날씬함을 강조하기 위해 두 손을 엉덩이에 대고 선 자세조차 불쾌할 정도니. 그와 함께 했던 그 밤을 기억하면 뱃속이 뒤틀릴 지경이다. 그는 그 일이 있은 후에 그녀에게 선물을 달라고 하여 극도의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마치 그가 시들어버린 노처녀와 같이 자준 것에 대해 마땅히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세페의 손이 뻗어와 릴리의 두건을 벗겨냈다. “부오나 세라(안녕하십니까)?” 그가 놀리듯이 정중하게 말하며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그 손을 쳐서 밀어내자, 그는 낄낄거렸다.


“여전히 발톱은 남아 있군, 새침한 고양이. 난 돈을 받으러 왔어, 카라. 당신은 니콜의 소식을 들으러 왔고. 이제 당신에게 받을 걸 받으면, 나도 줄 걸 주지” “더 이상은 아 돼, 느끼한 자식. 그 애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당신에게 돈을 주어야 하지?” “내가 장담하는데. 그 애는 안전하고 행복해” “엄마도 없이 그 애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우리 너무나도 아름다운 아이를 가졌어, 릴리. 언제나 미소짓고, 그 예쁜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지” 그가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살짝 건드렸다. “나처럼 예쁜 머리카락이야. 그 애는 날 아빠라고 불러, 가끔은 엄마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기도 하지” 그 한마디가 그녀를 무참히 부수었다. 릴리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목에 치밀어 오른 고통의 덩어리를 삼키니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내가 그 애 엄마야, 그 애한네는 내가 필요해. 그 애를 들려 줘, 주세페. 그 애가 내 아이라는 거 알잖아!” 그가 짓집 가엾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내가 시킨 대로만 했으면 이전에 니콜을 돌려보냈을 거야, 벨라. 하지만 당신은 너무나 많은 실수를 했어. 나에 대해 캐고 다니는 남자들까지 고용해서 날 조사하다니. 우리가 만난 후에 날 미행시키는 수작도 썼어. 당신은 날 화난게 만들었어, 그래서 몇 년 더 니콜을 데리고 있어야겠어”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했잖아” 물론 그건 거짓말이었다. 데릭이 사람들을 풀어 니콜을 찾아다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데릭은 도시 모든 곳에 정보원이 있었다. 짐꾼과 점원들, 딜러나 매춘부, 도살장 주인과 전당포 주인까지. 작년에는 네 번이나 릴리를 불러내 니콜의 모습과 비슷한 검은 머리의 아이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그녀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주세페를 쳐다보았다. “난 당신에게 가진 재산을 몽땅 주었어. 이젠 남은 게 없어. ‘무에서 피가 나오랴’라는 말 들은 적 있어? 그건 내가 당신에게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의미야. 왜냐하면 한푼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그럼 더 구해야지. 그렇지 난 돈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곳을 알아볼 거야. 니콜처럼 예쁜 아이를 사려는 남자들이 자위에 널렸다는 거 알아?” “뭐라고?” 릴리는 주먹으로 비명을 터지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 자식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 애를 그렇게 팔아버리면 그 애는 죽고 말 거야, 그리고 나도. 오, 맙소사, 설마 벌써 그런 짓을 해버린 건 아니겠지?”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곧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카라” 그가 손바닥을 벌렸다. “이젠 돈을 주시지” “대체 얼마나 오래 이런 짓을 계속할 거야? 언제쯤 돼야 충분해지는 거냐구?” 그는 그 질문을 무시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도 이젠 돈이 없어” “삼 일 간의 여유를 주지, 릴리. 오천 파운드 가져와. 그렇지 않으면 니콜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거야”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커벤트 가든의 거친 소음과 부드럽게 히힝대는 말의 울음 소리. 그녀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돈, 그녀의 재정상태가 이렇게 나빴던 적은


없었다. 지난달에는 크레이븐스에서 평소처럼 이득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운이 변할지도 모르지, 그것도 아주 빠르게. 게임에 깊이 참여해야만 하리라. 3 일 내에 5 천 파운드를 따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데릭에게 빌려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안 돼, 18 개월 전에 그런 실수를 한번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엄청난 재산을 생각해 볼 때, 그녀에게 1,2 천 파운드쯤 빌려주는 것이 큰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였다. 특히나 이자를 쳐서 돌려주겠다고 양속까지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데릭은 너무나 차갑고 냉정하게 돌변하여, 다시는 그에게 돈을 부탁하지 않으리라 그녀가 맹세했을 정도였다. 그의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몇 주일이나 걸렸다. 릴리는 그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인색한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에게 선물을 주고, 거대한 소유지들을 사용하게 해주고, 부엌이나 술 창고의 물건들을 기꺼이 내주었으며, 니콜을 찾는 일까지 도와주었다. 그는 이렇게 많은 면에서 관대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돈은 절대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젠 그런 부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부유한 남자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와 같이 도박을 하며 친하게 지내왔던 남자들. 해링턴 경의 불룩 튀어나온 배와 쾌활한 빨간 얼굴, 파우더 뿌린 가발을 쓴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면 존경받는 변호사인 아더 롱맨이 괜찮을지도 모른다. 코다란 코에 턱은 없고 축 늘어진 뺌을 한 그의 얼굴이 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은 상냥했으면 그는 명예를 존중하는 남자였다.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게 관심이 있음을 신사답게 표시했었다. 그 중에 한 명의 후원자로 받아들인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유숭한 대접을 받으며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인생을 영원히 변화시킬 것이다. 지금껏 그녀에게 열려 있던 자유의 문들이 영원히 닫히고 그녀는 값비싼 창녀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운이 좋을 경우 말이지만, 주세페와의 경험으로 판단하건대, 침대에서의 그녀는 너무나 불만족스러워 어느 누구나 그녀를 수유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릴리는 말에게 다가가 그 따뜻한 목덜미에 이마를 갖다댔다. “나 너무 힘들어” 피곤하고 냉소적인 기분이 들었다. 니콜을 되찾을 희망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인생은 돈을 벌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페니와 재커리와 알렉스 레이포드의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로 인해 니콜이 희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을 쏟을 만한 일이 없었다면 아마 이미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약한 빗줄기가 떨어졌다. 릴리는 눈을 감고 얼굴을 들어, 차가운 빗방울이 뺨 위로 흐르게 했다. 문득 니콜을 목욕시키던 때가 기억났다. 그 조가만 아기의 주먹으로 허공을 휘젓다가 욕조로 내려오며 물을 튀겼을 때. ‘이런! 우리 아기가 엄마에게 물을 뿌렸구나, 사랑스러운 아기. 물이란 건 목욕하기 위한 거지, 바닥에 흘리는 가 아니란다’ 릴리는 결연하게 얼굴의 빗방울과 눈물을 닦아내고, 어깨를 쭉 폈다. “그깟 돈, 전에도 벌었잖아. 어떻게 해서든 다시 만들면 돼” 시계 종이 아홉 번 울렸다. 알렉스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그걸 노려 보고 있는 중이다. 로맨틱하게 만들어진 청동 시계, 사기로 된 장미꽃다발을 건네는 귀족을 어깨 너머로 살포시 쳐다보는 수줍은 양치기 소녀가 장식된 것이다. 릴리의 침실은 그야말로 여성스러웠다. 섬세한 하얀 석고로 장식한 연한 바다색이 나는 벽지, 장밋빛 실크가 매달린 창문, 부드러운 벨벳을 덧댄 가구, 언뜻 보았던 릴리의 짓과 이 방의 분위기는 천지차이였다. 어둡고 거의 남성적이라 느껴지던 지의 첫인상과는 달리, 이 방은 마치 다른 장소에서는 하락하지 않았던 여성스러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듯했다. 마지막 종소리가 끝나자, 침실 문이 열렸다. 그 집사, 그녀는 그를 버튼이라 불렀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선생님. 편안한 밤이 되셨으리라 믿고 싶군요” 알렉스는 그를 노려보았다. 릴리가 떠난 후로, 그는 고요 속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이제껏 깨어 있는 순간엔 어떤 일에든 정신을 쏟으며 지내온 그였다.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사교적인 즐거움에 참가하고,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났다. 혼자 생각에 빠지는 시간을 파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을


고안하여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런데 릴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다. 조용한 어둠 속에서, 그는 심장을 찢는 독수리처럼 맹렬히 밀어닥치는 기억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뒤족박죽이었다. 분노와 정열, 후회와 비통감, 꼼짝없이 갇혀 있는 몇 시간 동안 그가 어떤 것들을 경험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아무도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뒤엉킨 실타래가 풀려나가며 그의 마음속이 명료해졌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는 다른 여자의 얼굴에서 캐롤라인을 보지 않을 것이며, 비통해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녀의 유령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과거의 일부이니, 그 자리에 남겨두리라. 하지만 릴리는, 그는 그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새벽 무렵 얼핏 얼핏 선잠 속에서 빠져들고 잠시 전에 다시 정신이 명확해졌다. 집사가 작은 칼을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자를까요, 선생님?” 버튼이 그의 묶인 팔을 가리키며 물어왔다. 알렉스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그를 쳐다보았다. “오, 부디 부탁드리겠소” 그가 짐짓 정중하게 대꾸하자, 집사는 능숙한 솜씨로 밧줄을 잘라냈다. 오른팔이 풀리자 알렉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슴께로 팔을 움직여 보았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있어 신음이 절로 나왔다. 침대 다른 쪽으로 돌아가는 버튼을 지켜보던 알렉스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껏 본 중에서 가장 집사다운 모습을 갖춘 사람이었다. 아름답게 다듬어진 턱수염과 지적이며 권위적인 얼굴, 이 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는 공손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밧줄을 풀어주면서도 차를 따르거나 모자를 받는 것과 똑같이 엄숙하고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알렉스의 물집 잡힌 손목을 보자, 버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백작님, 연고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당신은 할 만큼 했소” “알겟습니다, 백작님” 알렉스의 경련이 이는 팔다리를 구부려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어디 있소?” “로슨 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어디에 계신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헨리님께서 크레이븐 씨의 건물에 있다는 걸 말씀드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내 동생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다면, 로슨 양과 똑같이 당신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것이오” 버튼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알렉스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내저였다. “그녀가 부탁한다면 살인이라도 도울 작정인가?” “그분은 그런 요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백작님” “아직까지는 그렇지. 하지만 만약 그런 요구를 한다면?” “하인으로서 로슨 양은 제 충성을 요구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버튼은 정중하게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신문을 보시겠습니까, 백작님? 커피나 차를 갖다 드릴까요? 아침 식사는요?” “우선,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나는 일인 척 행동하는 걸 그만 두시오. 아니면 진짜 흔히 있는 일인가? 릴리 로슨의 침대에 밤새 손발이 묶여 있던 손님에게 아침식사를 제안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흔한 일이오?” 버튼은 릴의 사생활을 드러내기 곤란한 듯 신중하게 그 질문을 생각해 보았다. “당신이 처음이십니다, 레이포드 경”


그가 마침내 대답하였다. “이런 영광스러울 데가 잇나” 알렉스는 아픈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귀 위에 작은 혹이 생겼다. “두통약을 먹어야겠소. 그 여자에게 그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을 거요” “그렇습니다, 백작님” “내 마부에게 마차를 가져오라고 하시오. 당신과 로슨 양이 그를 마구간 난간이나 기둥 한쪽에 붙잡아 매지만 않았다면 말이오” “알겠습니다, 백작님” “버튼, 그게 당신 이름이지? 로슨 양을 위해 일한 지는 얼마나 되었소?” “그분이 런던으로 돌아오셨을 때부터입니다, 백작님” “흠, 당신 월급이 얼마나 되든지 내게로 온다면 두 배를 주겠소” “감사합니다, 레이포드 경. 하지만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째서? 릴리는 당신에게 지독한 일을 겪게 할지도 모르오. 이번일이 그녀 때문에 겪게 된 가장 최악의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습니다, 백작님” “그럼 왜 나에게 오지 않겠다는 거요?” “로슨 양은 특별한 분이십니다” “괴팍하다고 말해야겠지. 그녀에게 그런 충성을 바칠 만한 점이 있는지 말해 보시오” 버튼의 무표정한 얼굴이 한순간이나마 달라지면서 그의 눈 속에 애정 비슷한 것이 서렸다. “로슨 양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셨브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편견이 없으십니다. 그녀가 이 년 전 런던에 처음 도착하셨을 때, 전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학대를 하는 주인님을 모시고 있었지요. 면도날로 제 옆구리를 찌르기도 하셨고, 한 번은 방으로 불러들여 얼굴 앞에 권총을 흔들며 쏘아 버리겠다고 협박도 하셨습니다” “저런, 왜 다른 주인을 찾지 않았소? 당신 같은 집사라면 다른 일을 찾기가 쉬울 텐데” “전 아일랜드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백작님. 대부분의 주인님들은 영국 정교회에 속한 하인들을 원하지만, 전 그렇지가 못하지요. 종교와 아일랜드인의 혈통 때문에 전 점잖은 영국 가문에 집사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박차고 나오지 못했었지요. 제 문제를 들은 로슨 양께서 더 많은 급료로 절 고용하겠다고 제안하셨습니다. 급료를 얼마 받든 제가 로슨 양을 택할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군” 버튼은 자신의 규칙에 위배된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로슨 양께서는 절 구해 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일단 그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아무도 막을 수가 없지요. 그분은 많은 사람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자신인데도요” 그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지나치게 말이 많았군요. 용서하십시오. 커피라도 한 잔 드시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소? 릴리를 구해야 한다는 말인가? 무엇으로부터? 누구에게?” 버튼은 외국인의 말을 듣는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두통약과 같이 타임스 지를 가져다 드릴까요, 백작님?” 헨리는 동굴 같은 부엌의 긴 테이블에 걸터앉아, 라바주 씨와 앞치마를 두른 군단들이 열심히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향긋한 소스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내용물이 단지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벽에는 온통 반짝거리는 냄비, 프라이팬과 모양을 내는 금속틀이 걸려 있었다. 주방장은 군대의 지휘관처럼 방을 돌아다니며 칼과 스푼과 그 외의 손에 들린 도구들을 움직여댔다. 그


열성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솟아 오른 하얀 모자가 삐딱하니 기울어졌다. 페이스트리에 싼 생선요리에 쓸 소스가 너무 걸쭉하게 만든 부주방장, 롤빵을 너무 검게 구은 보조 제빵사에게 그의 벼락 같은 고함소리가 떨어졌다. 야채 다듬는 하녀가 당근을 너무 얇게 써는 걸 보고는 멋지게 위로 올라간 그의 콧수염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요리가 완성되자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변하여, 라바주 씨는 헨리 앞에 맛보기 요리들을 내밀었다. 헨리가 입맛을 다시며 성찬을 맛있게 먹어대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 젊은 신사 양반. 드세요, 들어요, 이것도 좀 먹어 봐요. 그리고 이것도......맛있지요?” “아주 맛있어요” 헨리는 과일과 레몬크림으로 모양으로 낸 페이스트리를 한입 가득 베어 문 채 열성적으로 대답하였다. “소스 뿌린 이 갈색 요리를 좀더 먹어도 될까요?” 주방장은 브랜디 버터와 야아, 버섯 소스로 살짝 튀겨낸 얇은 송아지 고기를 한 접시 더 내왔다. “어렸을 때 내가 처음 배운 요리법이랍니다, 백작님 저녁상을 차리는 아버지를 도와 드리면서지요” “레이포드 파크에서 먹었던 고기보다 훨씬 더 맛있어요” 라바주 씨는 영국 음식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해 하였고, 개에게도 먹이지 않을 맛없는 쓰레기라고 표현하였다. 프랑스 요리를 영국 음식과 비교하는 것은 케이크와 상한 빵을 비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도 말하였다. 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먹어댔다. 배가 터질 것 같아 도저히 더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 워디가 부엌문을 통과하여 들어왔다. “헨리 도련님, 형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분은 대단히 걱정을 하신 모양입니다. 지금 곧 모습을 보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지요” “오” 헨리의 파란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트림이 나려는 입을 막을 채 부엌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기 다시 오려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리겠지요, 몇 년쯤” 라바주 씨의 얇은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레이포드 경은 대단한 성질을 가진 분이라지요? 우리가 맛있는 요리인 뿔라르드 아 라 뻬리궤나 쏘몽 몽뻴리에(뻬리궤 지방의 살찌운 암평아리나 몽뻴리에 지방의 연어)를 갖다 드리는 게 어떨까요?” 주방장은 말을 멈추고 자기가 내놓을 수 있는 맛좋은 요리를 궁리했다. 그는 자신의 최고 요리가 어떤 야만적인 기분의 사람이라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아뇨” 헨리가 유감스럽게 대꾸하였다. 라바주의 향을 낸 닭고기 요리나 허부 소스를 뿌린 연어 요리조차도 알렉스를 달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방장님. 전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거예요. 커피 크림을 얹은 스펀지 케이크나, 그린 수플레를 위해서라면 교도소에서 한 달 간 있으라고 해도 기꺼이 참아낼 거예요" 감동을 받은 듯 라바주가 헨리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양쪽 볼에 키스하며 알아들을 숭 jqt 는 프랑스말을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껠 죈느 옴므 마니피끄(대단히 훌륭한 소년이로군요)!” 워디와 헨리는 부엌을 나서 식당을 통과해 걸어갔다. 워디가 현관홀로 돌아가는 모퉁이에서 조언을 했다. “헨리, 신사들은 언제나 신중하게 생동한다는 얘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특별히 여자들과의 행동에 관해서는요” 헨리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워디를 올려보았다. “그럼 어젯밤 크레이븐 씨가 소개해 준 여자들은 형에게 말하면 안된다는 뜻인가요?” “음, 그분께 알려야 할 특별한 이우가 있지 않다면요”


헨리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이유가 없네요” 워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헨리의 예상과 달리, 알렉스는 벼락이 떨어질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혈관 홀에 서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침착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의 옷은 구겨지고 얼굴은 수염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이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알렉스는 평소보다 훨씬 더 편안해 보였다. 다만 눈 속에 어떤 불안한 기운, 은빛의 불길한 번득임이 있었고, 악마라도 신경이 쓰일 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헨리는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어젯밤에 오지 않고 왜 오늘 아침에 나타난 것인지도. “형, 모두 내 잘못이에요. 형한테 말하지도 않고 따라오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알렉스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괜찮은 거냐?” “네, 어젯밤에는 대단히 멋진 저녁식사를 했어요. 크레이븐 씨한테 크리비지 게임을 배웠구요. 그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동생의 이상 없는 모습에 일단 안심한 그의 시선이 매섭게 변했다. “우리 얘기 좀 해야겠구나, 헨리. 책임감에 대해서” 헨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아주 길어질 것임을 각오하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 크레이븐 씨와 우리 직원들은 대단히 훌륭한 매너를 지니신 동생분께 감탄하였답니다. 우리의 성질 급한 주방장은 물론이고 크레이븐 씨까지 누군가에게 이토록 감탄하신 적은 드물지요” 워디가 끼어 들었다. “하늘이 주신 재능이지, 헨리는 남을 칭찬하는 데 탁월하거든” 알렉스는 수줍게 미소짓는 동생을 흘깃 보고 나서 다시 워디를 쳐다보았다. “로슨 양께서는 여기 계신가?” “아니오, 백작님” 알렉스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지금 릴리는 크레이븐의 침대에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질투가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 “그럼 어디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다음 며칠 간은 이곳에 오실 걸로 생각됩니다. 카드 룸이나 주사위 테이블 중 하나에 계시겠지요. 토요일에 있을 우리 가면 무도회에도 참석하실 겁니다. 메시지를 남겨 드릴까요, 백작님?” “그래, 다음 대결을 기대하라고 전해 주게” 그 불길한 말을 끝으로, 알렉스는 그의 뒤로 종종걸음치는 헨리와 같이 크레이븐스르 나섰다. 레이포드 파크에 도착하여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알렉스는 즉시 공기 중에 배어든 고요함을 눈치채었다. 헨리 또한 그 음울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이 조용한 집안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죽은 것 같은 분위기예요” 레이디 토티의 낮은 훌쩍거림이 들려왔다. 계단 위에 쓰러져 잇는 그녀의 오동통한 얼굴이 슬픔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알렉스의 주먹이 날아들 거라는 듯한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다보았다. 그녀가 부들거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백작님, 그 애가 가버렸어요! 나의 사랑하는 페니가 가버렸어요! 그 순진한 아이를 욕하지 말아주세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모든 비난은 저에게 퍼부어져야 합니다. 오, 이런 세상에” “레이디 토트” 알렉스의 얼굴에 놀라움과 슬픔이 묘한 표정이 흘렀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찾으며 동생을 흘깃 쳐다보자, 헨리는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제가 물이라도 갖고 올까요?”


“차로 갖다 주세요” 토티가 흐느끼며 말했다. “우유를 탄 강한 홍차로요. 설탕 한 스푼을 넣구요. 딱 한 스푼만이라는 걸 기억하세요” 헨리가 서둘러 걸어가자, 토티는 훌쩍거리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오, 어쩌면 좋아? 그 애가 정신이 어떻게 돼버린 건 아닐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설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알렉스가 손수건을 건네주며, 어색하게 그녀의 토실토실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상황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페넬로페와 재커리가 도망갔다는 사실요. 누군가를 비난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지요 레이디 토티, 자책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 메모를 발견하고 조지를 깨웠을 때는 이미 그 애들은 멀리 떠나버린 후였답니다” 토티가 우아하게 코를 풀었다. “남편이 아직 그 애들을 찾고 있어요. 어쩌면 아직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뇨, 페넬로페는 저에게 너무 과분한 여자였습니다. 스탬퍼드 자작이 훨씬 더 좋은 남편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요, 레이포드 경, 당신이 어젯밤에 여기 계시기만 했더라도. 당신이 안 계신 걸 알고 그 애들이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를 용기를 낸 거예요” 그녀의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가 윌헬미나의 짓이에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그 애가 여기 와서 그 애들 머릿속에 그런 망상을 심어주지 않았더라면......” 문득 알렉스의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그들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 감정을 접어둔다면 레이디 토티, 페넬로페와 스탬퍼드 자작이 대단히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는 걸 누구나 알지요” “하지만 재커리는 당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요! 그리고 이젠, 이제 더 이상 당신은 우리 사위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요” “오, 이런. 나에게 당신께 드릴 셋째 딸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알렉스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토티는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계단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흔들거리며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차침 그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웃고 있다니, 그녀의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백작님?” 알렉스는 너무 웃어서 허리를 거의 반으로 접고 있었다. “맙소사, 세 번째라니. 안 돼, 두 명으로 충분하지요. 주께 감사를, 릴리만으로도 열 명분은 충분히 해낼 겁니다!” 토티는 이번 사건에 그가 충격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듯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레이포드 경, 당신이 약간 이상해진다 해도 욕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전 응접실에서 차를 마셔야겠군요. 당신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좀 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녀는 양팔을 열심히 흔들며 달려나갔다. “고맙습니다” 알렉스는 웃음을 자제하며 간신히 대답하였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니 웃음이 멎긴 하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자신이 제 정신인 걸까. 오, 그래, 가슴속에 가벼운 느낌이 있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의기양양한 용솟음이 치밀었다. 마치 휴일을 맞은 학생처럼 무모하고


들뜬 기분이었다. 그는 페네로페를 떼어버렸다. 그건 안도감을 넘어선 해방감이었다. 그 약혼이 얼마나 큰 짐이었는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무겁게 내려앉는 짐이었다는 걸 왜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 이젠 그 짐이 사라졌다. 그는 자유였다. 그리고 페넬로페는 아마 이 순간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릴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시작할지 전혀 모르고 있으리라. 알렉스의 마음에 기대감이 가득 찼다. 릴리와 아직 끝내지 않은 일이 있다. 오, 그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형? 주방에서 금방 차를 내올 거예요” 헨리가 그의 앞에 서서 이상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디 토티는 응접실에 계서” “형, 왜 계단에 앉아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어제 여기 없었다면, 형은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내 기억으로, 넌 오늘 오후에 두 명의 선생님을 면접 보기로 되어 있다. 목욕을 하고, 옷도 갈아입어라” 그의 눈이 경고성으로 가늘어졌다. “그리고 난 행복하지 않아, 로슨 양을 어떻게 할지 생각중이다” “나이 든 쪽이요?” “당연히 나이 든 쪽이지” “어쩔 셈인데요?” “넌 그런 걸 알 나이가 아니야” “그 점은 장담할 수 없을걸요” 헨리는 귀엽게 윙크하고 나서 형의 대꾸가 있기 전에 얼른 계단을 올라갔다. 알렉스는 그대로 앉은 채 머리를 흔들며 씨익 미소지었다. “릴리 로슨,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신은 나 때문에 너무 바빠서 크레이븐의 침대에 들어갈 시간이 없을 거라는 점이지” 오늘밤도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지독하였다. 릴리는 주위의 남자들이 그녀가 위급한 상황임을 알지 못하도록 자신감 있는 분위기를 풍길려고 노력하였다. 그녀는 오늘 갖고 있는 드레스 중 가장 예쁜 옷을 입었다. 살색 실크 위로 까만 그물 수가 놓인 옷이 마치 투명한 까만 레이스만을 걸친 듯 보이게 만들었다. 태드워스 경, 반스티드 경, 잘생긴 러시아 외교관 포카 베린코브를 포함한 몇 병 의 남자들과 같이 주사위 테이블에 서서, 릴리는 침착하고 쾌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 가면으로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풀과 종이를 너무 많이 발라 뻣뻣하고 생명력이 없는 가면. 니콜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몸 속이 공허했다. 칼로 찔러본들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는 두려웠다. 도박이 이런 식으로 안 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을 보는 데릭의 시선도 느낄 수 있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는 못마땅해 하고 있다. 만약 지금 자기와 같은 입장에 있는 다른 사람을 보았더라면, 릴리는 다른 날 다시 시도해 보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오늘과 내일 이틀뿐, 5 천 파운드에 대해 생각이 날카로운 작은 송곳처럼 그녀를 계속해서 찔러대었다. 자신이 너무 깊게, 너무 빠르게 위험 속으로 빠져든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다잡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도박꾼들의 진로를 밟고 있었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그녀는 무모하게 다시 테이블 위로 세 개의 주사위를 뿌려내었다. “이번에 트리플을 한 번 만들어보자!” 주사위가 구르고 굴러 숫자를 드러내었다. 1,2,6.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의 돈이 거의 바닥나버렸다. 반스티드의 위로 섞인 미소를 보며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오늘밤은 아무래도 신용장을 빌려야겠는데요”


갑자기 데릭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우선 산책이나 좀 하지” “난 게임하는 중이에요” “돈 없이는 안 돼” 그의 손이 그녀의 장갑 낀 손목을 움켜잡았다. 릴리는 사람들에게 미소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전하며 주사위 테이블에서 빠져 나왔다. 데릭은 그녀를 비어 있는 워디의 책상으로 데리고 갔다. “왜 방해하고 그래” 이를 앙다물고 말하면서도 릴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게 미소를 지었다. “게임에서 끌고 나오다니 이게 무슨 뜻이지? 설마 신용장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건 아니겠지. 난 여기서 수백 번도 넘게 신용자을 빌렸어. 그리고 언제나 이겼다구! “오늘밤은 운이 따르지 않아. 당신의 행운이 사라졌어” 그녀는 그에게 따귀라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 그건 행운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구. 숫자 싸움이야, 숫자와 승산을 알고 있으면 돼”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도 좋아. 어쨌든 당신의 행운은 사라졌어” “아니야, 테이블로 돌아가서 그 말이 틀렸다는 걸 내가 증명해 보이겠어” “또 다시 잃기만 할걸” “그럼 잃게 내버려 둬. 이게 다 무슨 짓이야? 설마 날 보호하려는 거야? 당신에게 무슨 권리라도 있어? 집어치우라구! 난 오천 파운드를 따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니콜을 잃고 말 거야!” “만약 오늘밤 더 잃게 된다면?” 데릭이 차갑게 응수했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유일한 선택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높은 값을 쳐주는 남자에게 몸을 파는 것. “당신은 당신 돈이나 벌어, 당신이 제일 갖고 싶어하는 걸 가지라구. 나에겐 내 딸만이 가장 중요해, 다른 건 아무 상관없어. 알아듣겠어?” 그 순간 데릭의 어투가 대단히 정중해졌다. “그 애한테 창녀 어머니는 필요 없을 거라 생각되는군요” “운명에 맡기라, 그게 당신 철학 아니었던가요?” 데릭은 돌처럼 고요해지며, 눈동자도 비취 조각처럼 차갑게 번했다. 그는 정중히 절을 오리고는 그녀를 풀어주었다. 갑자기 릴리는 길을 잃고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2 년 전 이 클럽 안으로 받아들여지기 전날 밤처럼. 그는 바다의 파도처럼 변화무쌍하고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 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극한 상황이 되면 그가 손을 뻗어 도와줄 거라는 희망이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런 데릭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그녀의 인생은 그녀 자신만의 것이니까. 그녀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그에게 등을 돌려 재빨리 걸어나왔다. 주사위 테이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미소를 지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여러분, 게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어디서 시작......” 문득 새로운 참가자가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말이 중지되었다. 알렉스가 테이블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까만 바지에 수놓은 실크 조끼와 황갈색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황금 단추의 초록빛 코트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나른하고 태평스런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가장 기분 좋을 때조차도 언제나 경직되고 자신을 억제하는 듯한 부분이 존재하였는데, 오늘의 그는 그런 경직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몸속에서 황금의 빛을 뿜어내는 듯하였다. 릴리는 전 재산을 한 번의 행운에 걸어버리는 무모한 도박꾼의 얼굴에서 그와 같은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 의기소침해졌다. 결국에는 그와 마주쳐야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인가? 처음에는 돈을 잃고, 그 다음에는 데릭에게 버림받고, 이젠 이 사람이라니. 평생에 가장 최악의 밤이 되어가고 잇다. 그녀는 힘없이 그의 도전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레이포드 경, 뜻밖이군요. 여긴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가 아닌 줄 아는데요?” “당신이 있는 곳이며 어디든 좋아질 것 같소” “멍청한 자는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는 법이지요” “당신은 우리 게임이 끝나기도 전에 떠나 버렸소” “더 중요한 일이 있었거든요” 알렉스는 방금 반스티드가 주사위를 던진 테이블을 흘깃 보았다. “여기서 당신의 행운을 시험해 보고 있는 중이오?” 그는 오늘밤 그녀의 운이 나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테드워스가 말했음이 틀림없다. 아니면 포카일까, 경박한 주둥이 같으니라구. 하지만 릴리는 무심한 척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난 행운을 믿지 않아요” “난 믿소” “오늘밤 그 행운이 당신 편일까요? 그렇다면 당신의 게임을 막지 말아야겠군요, 백작님” 포카와 반스티드가 그를 위해 자기를 내주었다. 그럼에도 알렉스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만 파운드 걸지, 당신과의 하룻밤에” 릴리의 눈이 휘둥그래지며 목에서는 쉰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테이블 주위의 모든 행동들이 멈췄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했지? 뭐라고?” 태드워스가 열심히 다그치는 사이, 그 소식은 테이블 주위의 사람들에게 번져나가 다른 방 사람들의 관심까지 끌었다. 즉시 백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들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아주 흥미롭군요” 릴리의 입에서 간신히 대꾸가 새어나왔다. 알렉스가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 종이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스치는 두려운 생각들을 이해하는 듯이 살짝 미소지었다. 맙소사, 그는 진심이었다. 꿈을 꾸는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릴리는 자기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내기는 거절해야만 한다.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높은 판돈이다. 그녀가 만약 이긴다면, 그 돈으로 딸아이를 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는 날에는...... 그 후의 일을 상상ㅇ해 보려 했지만, 밀려드는 공포심으로 그녀는 살짝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알아채자 알렉스의 즐거운 듯한 눈빛이 다소 어두워졌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어조는 이상할 정도로 온화하였다. “오천을 더 건다면 어떻겠소?” 주위에서 휘파람 소리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젠 만오천 파운드다!” 태드워스가 소리쳤다. 식당과 흡연실에 있던 남자들까지 밀려들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은 이 소식을 전하려고 이리저리 부산하게 다녔다. 평소 같으면 관심의 대상을 되는 걸 즐겼을 릴리였다. 그녀의 자유 분방한 평판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신나게 웃고 떠들며 춤을 추었고, 그녀의 짓궂은 장난들은 런던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그것은 알면서도 그녀는 이 내기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돈이 꼭 필요했다. 그녀는 도움이 필요했지만, 그댈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허세와 연약한 방어막을 꿇어보는 두 개의 회색 눈동자를 쳐다보며 그녀는 애원하고 싶어졌다. ‘나에게 이런 짓 하지 말아요’ “당신의 선택이 남았소, 로슨 양” 그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선택?’ 그녀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무슨 빌어먹을 선택이냐구?’ 운명을 한번 믿어보아야 할까? 어쩌면 이런 괴상한 제안은 신의 뜻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겨야만 했다. 아니 이길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써서 니콜을 되찾을 것이다.


“주사위로는 안 돼요”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평소 하던 게임으로?”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간신히 말을 꺼냈다. “카드 룸으로 가요. 승부는 세 판으로?” 알렉스의 눈이 만족스럽게 번득이며,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내기를 받아들였다!”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크레이븐스에 이런 큰 소동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릴리의 귀에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들은 꾸역꾸역 밀려들었고, 릴리는 어느새 테이블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옴짝달짝도 못할 지경이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뒤에서 미는 압력을 막아보려 노력했지만, 모두들 좀더 좋은 곳에서 보기 위해 싸움을 계속하였다. 반쯤 몸의 방향을 틀자, 릴리의 옆구리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찔렸다. “밀지 말아요, 숨쉴 수가 없다구요” 알렉스가 재빨리 움직여 자신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의 두 팔이 튼튼한 요새처럼 그녀를 보호해 주었다. 릴리의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구요, 기가 막혀” 그는 시끄러운 소음을 뚫고 나지막이 대꾸하였다. “괜찮소” 그녀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충격과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흥분 때문이니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 보기도 전에, 데릭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요” 데릭이 큰 소리로 외치며 군중들 사이를 뚫고 다가오고 있었다. “비켜요, 모두들 물러나시오. 집시 양에게 숨을 쉴 수 있도록 해주라구. 물러나세요, 그래야 게임을 시작할 수 있지 않겠소” 사람들의 압력이 느슨해지며 약간 몸을 움직일 여유가 생기자, 알렉스는 릴리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다가오는 데릭을 애원하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데릭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아무 표정도 없다. 그의 시선이 릴리의 작고 긴장한 얼굴에 고정되었다. “작은 내기가 걸렸다던데” 릴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트웬티 워 세 판. 우린 카드 룸이 필요해요” “아니, 여기서 해. 모두 카드 룸으로 몰려갈 수 없으니, 그게 더 편리하겠지” 릴리의 간절한 소망은 배신당했다. 걱정 어린 말이나 조심하라는 한 마디도 없었다. 데릭은 그냥 이 일이 일어나도록 방관하고 있다. 오히려 이걸 구경거리로 삼고 있었다! 그녀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구해 주기는커녕 술이라도 한 잔 권할 사람이었다. 데릭에게 향한 분노가 그녀에게 정신 차릴 힘을 주었다. “언제나처럼 당신은 위로나 아부의 말 한 마디 없군요” “내가 괜히 데릭 크레이븐이 된 게 아니지, 집시” 그의 시선이 주위를 둘려보았다. “워디, 새 카드 가져와. 악마의 장난이 어떻게 되는 지 두고 보자구” 도박장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주사위 테이블의 도박이 중단되었다. 웨이터들은 새 음료수를 나르느라 바빴고, 돈과 차용증들이 교환되는 바스락거림이 방안에 가득하였다. 여기저기에서 판돈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히 알고 잇는 목소리들도 들렸다. 그녀와 같이 도박했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자신이 지길 원한다는 걸 알고 릴리는 씁쓸했다. 그들은 그녀가 내기에서 지기를 바란다. 감히 남자들의 성역을 침범한 그녀가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겨운 야만인들이야,


너희 모두 다 똑같아. “내가 돌리까?” 데릭이 물었다. “아니, 난 워디만 믿어” 릴리가 날카롭게 말했다. 경례를 하듯 살짝 이마를 만지며, 데릭이 워디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워디가 침착하게 안경을 손수건으로 닦고 얼굴에 걸쳤다. 그리고 새 카드상자를 뜯었다. 구경꾼들이 긴장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워디는 만족스러울 때까지 능숙하게 카드를 섞고 나서, 테이블에 내려놓고 릴리를 쳐다보았다. “패를 떼시지요”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나누었다. 워디는 그녀가 나눈 위쪽의 반을 다른 카드 밑으로 넣은 다음, 정확하면서도 모두가 볼 수 있을 만큼 느린 손놀림으로 맨 위의 카드를 옆으로 내렸다. 그의 침착함에 릴리의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그가 공정한 게임을 유도하고 잇음을 확신하고 그의 모든 동작을 지켜보았다. “세 판입니다. 에이스는 게임 참여자의 결정에 따라, 일이나 십일의 가치가 있습니다” 워디가 그들에게 두 장의 카드를 나누어주었다. 하나는 그림이 보이게, 하나는 아래쪽으로 향하여, 릴리의 보이는 카드는 9, 알렉스는 10 이었다. 워디가 조용히 물었다. “로슨 양?” 딜러의 왼쪽에 있는 그녀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릴리는 카드를 뒤집어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드는 2 였다. 워디를 쳐다보며 하나 더 돌리라는 시늉을 했다. 그가 원래 카드 옆에 카드 하나를 더 내주었다. 8. 릴리 뒤에서 그녀의 카드를 봤던 사람들 사이에서 휘파람과 감탄사가 터지면서, 더 많은 돈들이 내기에 오고 갔다. 릴리는 땀이 밴 이마에 살짝 손을 누르며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점수는 19. 승산은 그녀에게 있다. 알렉스는 살짝 카드를 뒤집어 숫자를 확인했다. 7, 그의 점수는 17 이었다. 그가 워디에게 다른 카드를 달라고 손짓하였고, 워디는 잭을 넘겼다. 잭의 숫자는 10. 첫판은 그녀가 이겼다. 등과 어깨에 축하의 토닥임이 와 닿자 그녀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성급하기는, 아직 이긴 건 아니라구요” 몇몇 사람이 낄낄대며, 방안 가득한 긴장감을 다소 완화시켰다. 워디가 옆에 놓인 카드를 끌어와 새로 게임을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즉시 조용해졌다. 이번에 릴리의 점수는 18, 카드를 더 청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만” 알렉스의 카드를 보며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킹이었다. 킹도 역시 10. 그가 덮어 있는 카드를 넘자, 릴리는 가슴이 덜컹하였다. 9. 알렉스의 합계 19, 이제 두 사람은 각자 한 판씩 이겼다. 그녀는 자신을 지켜보는 알렉스를 마주보았다. 오만이나 걱정의 흔적 하나 없이 조용한 확신만이 담긴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일생이 이 카드 한 판에 달려 있는데, 그는 어쩜 저렇게 태평할 수 있단 말인가? 워디가 마지막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다시 카드를 나누어주자, 방안은 신기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릴리의 카드는 퀸, 퀸도 역시 10 의 가치가 있다. 두 번째 카드는 3. 그녀가 세 번째 카드를 달라고 신호하였다. 워디가 내어준 카드는 7 이었다. 그녀의 전체 점수는 20!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말없이 알렉스를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가 이길 것이다. 그녀는 만오촌 파운드를 생각하였다. 그 정도 돈이면 주세페에게서 니콜을 완전히 데려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신간은 벌 수 있으리라. 그리고 돈이 없어 해고해야 했던 탐정을 다시 고용할 수도 잇다. 그녀는 승리감에 취한 채 알렉스를 지켜보았다. 그의 보이는 카드는 10. 그가 부드럽게 뒤집어져 있던 카드를


넘겼다. 하트 에이스. 에이스는 11, 그는 21 점을 완벽하게 맞춘 것이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릴리의 놀란 얼굴을 응시했다. “21!” 트웬티 원의 최고 점수, 21. 방안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데릭이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군” 그 순간 원초적인 정글에서나 들을 법한 외침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게임이 끝났습니다, 레이포드 경이 이기셨습니다” 워디의 말소리는 군중들의 포효 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군중들은 교양 있는 영국의 신사가 아니라 원초적인 야만인 부족처럼 행동하였다. 뿌려진 술과 똘똘 말린 종이들이 양탄자를 온통 뒤덮었고 알렉스는 등과 팔을 두들겨 맞으며 악수 세계를 받았다. 포카가 그의 머리에 보드카를 뿌리려 하자 그는 얼른 고개를 숙여 피한 다음 릴리를 찾았다. 정신없이 무슨 말인가 중얼거리며 육중한 문을 향해 빠져 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릴리!” 그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너무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빌어먹을” 릴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심하게 숨을 몰아쉬며 달려나갔다. 자신의 앞길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딱딱한 물체에 콰당 부딪히자, 그녀는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하였다.자신의 몸으로 그녀의 도망을 가로막은 데릭이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얼음장 같은 초록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거 놔” “여자들은 자좀심이 없어, 그냥 도망가려는 건가? 속 좁은 겁쟁이” 릴리는 그의 완강한 팔을 애원하듯 부여잡았다. “데릭, 난 할 수 없어, 난 할 수가 없다구” “아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이 직접 침실로 들어간다면, 당신의 내기는 명예롭게 지켜질 거야, 집시. 당신이 도망친다 해도 내가 다시 잡아올 거야. 이젠 내 아파트로 가서 그를 기다려” “왜 여기서? 난 내 집으로 가는 게 좋겠어” “여기서 해, 그래야 당신이 약속을 지켰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안 돼, 안 돼” 그녀가 멍청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했다. 갑자기 데릭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집 센 아이에게 하듯이 조용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안 된다고?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집시. 큰 처벌이긴 하지만, 당신은 받아들여야 해. 당신이 내기를 지키지 않는다면, 런던의 어느 곳에서도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크레이븐스도, 도둑들로 들끓는 가장 저속한 도박 소굴도” “왜 날 막아주지 않았어?” 릴리는 이를 덜덜 덜며 눈물을 터트렸다. “당신이 나를 조금이라도 아낀다면, 이런 일이 있게 안 했을 거야! 이런 일에 말려들지 않도록 당신이 막아주었어야 했다구. 그 사람은 날 해칠 거야. 데릭, 당신은 잘 몰라” “그는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 그가 바라는 건 당신을 약간 혼내주고 싶은 거야, 그것뿐이라구” 놀랍게도 그가 그녀의 이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가 봐. 뱃속에 술 한 잔 집어넣고, 녀석을 기다리라구” 그가 소매를 붙잡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더 힘껏 움켜잡았다.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그녀가 커다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데릭의 까만 눈썹이 가운데로 모이면서, 그의 친절함은 오만한 미소로 변했다. “침대로 들어가 납작하게 누워 있으라구, 간단해. 이젠 가, 어느 쪽으로 누워야 하는지까지 일일이 말해 줘야 하냐?” 그의 조소 어린 웃음 소리르 들으며 릴리는 붙잡았던 소맷자락을 놓았다.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데릭은 자기 아파트로 향하는 계단 쪽을 가리킬 뿐이었다. 그녀는 갈가리 찢긴 위엄을 끌어 모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깨를 쭉 펴고 걸어갔다.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 데릭의 미소는 사라졌다. 그리고 발걸음을 둘려 주사위 방으로 들어갔다. 눈으로 워디를 찾아, ‘그는 어디 있나’ 하고 입 모양을 물어보았다. 워디가 축하하는 사람들 사이에 갇힌 알렉스 레이포드를 가리켰다. 자신에게 던져지는 축하의 소리들을 모두 무시한 채, 알렉스는 복도로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간신히 빠져 나와, 커피 룸과 도서실 방향을 쳐다보며 릴리가 어느 쪽으로 갔을지 생각했다. “레이포드 경?” 게임룸으 사람들 틈에서 워디가 빠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데릭 크레이븐도 나타났다. 그의 표정을 거칠고 완고했다. 그 모습은 어느 때보다도 지금은 성공했지만 지난 과거에서 피할 수 없는 도둑의 모습을 한 사이비 신사, 그것이었다. 초록빛 눈동자가 도전적으로 회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들 사이에 경쟁 의식은 없었지만, 난폭한 부조화의 남성적인 힘의 불안함이 가득하였다. “나으리, 방금 집시 양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말해 놓았고. 워디는 정직하게 카드를 돌렸고, 아무도 이 승부에 항의하지 않을 거요” “그녀는 어디 있소?” “우선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무슨 말이오?” 데릭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쳐갔다. 할 말이 많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만한 말을 찾는 듯하였다. “그 여자한테 거칠지 않게 올라타시오, 상냥하고 친절하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음험하였다. 그리고 말없이 옆에 서 있는 워디를 가리켰다. “워디가 방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나으리, 릴리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소” “편리하군, 당신 여자를 나눠 가지려는 사람에게 침대까지 제공해주다니” 데릭이 피식 미소지었다. “난 내 것은 절대 남과 나눠 갖지 않소. 알아듣겠소? 물론 이해하겠지, 내가 보기엔 당신도 그런 사람일 테니까” 알렉스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당신과 그녀의 아무런?” “당 한 번도” “하지만 분명히......” “난 창녀들을 침대로 데려갈 뿐이오. 릴리는 좋은 물건이지, 이 손으로 그녀에게 손대지 않을 거요.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여자거든” 알렉스는 혼란스러웠다. 그 소문이 모두 거짓이며 거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가당치도 않은 말을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왜 거짓말을 하겠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빌어먹을, 릴리 로슨은 도대체 누구이고 어떤 여자란 말인가? 그걸 알아낼 날이 과연 올 것인가?


크레이븐이 워디에게 손가락을 한 번 퉁기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알렉스는 서둘러 사라지는 크레이븐을 묘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이지?” 워디는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크레이븐 씨가 말씀하신 그대로 아무 일도 없습니다. 크레이븐 씨는 로슨 양과 클라토닉한 우정을 유지하는 일에 언제나 신중을 기하셨습니다” 그말을 끝으로 그는 알렉스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왜지? 그녀에게 무슨 잘못된 점이 있었나? 아니면 그에게?” 알렉스가 워디의 옷깃을 잡아 돌려 세웠다. “말해, 그렇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 버릴 테다!” 워디는 점잫게 알렉스의 주먹에서 모직 코트를 풀어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사장님은 로슨 양을 사랑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알렉스의 주먹이 밑으로 떨어졌다. “오, 제기랄” “이젠 가보실까요, 백작님?” 알렉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디는 지하 저장실로 연결된 듯 보이는 소박한 문으로 다가갔다. 그 문을 여니 나선형으로 뻗어 올라간 좁은 계단이 드러났다. 그 계단을 올라 워디가 다른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까 데릭의 표정처럼, 뭔가 말을 하고 싶으면서도 애써 억눌러 참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실 겁니다, 백작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벨을 울려 주십시오. 신중하게 능숙한 하인들을 골라 놓았습니다” 그가 알렉스를 지나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렸다. 알렉스는 인상을 찡그린 채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졌다는 걸 알았을 때의 릴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낙심해 있을 것이다. 그에게 최악의 대접을 받으리라 예상할 것이리라. 특히나 그에게 지독한 짓을 저지르고 난 직후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그녀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이 전혀 복수와 관련되지 않은 일임으로 이해시키고 싶었다. 그가 단호하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워디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작은 방 한 칸에서 데릭을 찾아냈다. 의자들과 책상 하나, 긴 소파 하나뿐으로, 대단히 긴말한 사업상의 회담이나 밀회의 장소로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어진 곳이다. 데릭은 거의 커튼에 몸을 가린 채 창가에 서 있었다. 워디가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말없이 주홍색 커튼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크레이븐 씨?” 워디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데릭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듯하였다. “빌어먹을, 그녀는 분필처럼 창백했어. 내장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어. 그건 절대 레이포드가 기대한 모습이 아니었을걸” 그가 거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불쌍한 자식, 하나도 부럽지 않아” “그렇습니까?” 워디의 조용한 물음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데릭은 얼굴을 돌린 채 가만히 있다가, 잠시 후 거칠게 입을 열었다. “난 그녀에게 적당한 놈이 아니야. 하지만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지. 자기와 같은 종류, 인생을 시궁창에서 보내지 않은 그런 녀석이 필요해. 그녀가 날 좋아하는 것 같긴 해. 하지만 난


그녀의 마음에 응답해서는 안 돼. 난 그녀가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났으면 좋겠으니까” 한 손을 눈 위로 올리며 그가 씁쓸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가 신사 계급으로 태어났더라면, 점잖은 신분으로 태어났더라면, 그럼 지금 릴리는 그 빌어먹을 알렉스 대신 나와 같이 있었을 텐데” 자신을 자제하려 애쓰며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술 한잔해야겠어” “어떤 걸로 드릴까요?” “아무 거나, 빨리 되는 걸로 갖고 와” 워디가 방을 나설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는 커튼에 얼굴을 묻고 뺨을 비볐다. 8. 알렉스는 문지방을 넘어섰다. 요란한 바로크 식의 금박으로 장식한 사치스런 방 한가운데에 릴리가 서 있었다. 어떤 음탕한 소굴이라 해도 이보다는 더 세련된 장식일 것이다. 릴리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지만, 알렉스의 시선은 자꾸만 그녀의 살색 드레스와 까만 레이스 위로 흘러갔다. 그녀가 옷을 벗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자신이 그녀의 옷을 벗길 생각을 하니, 온몸에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우선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에 서린 불안을 달래주고 싶었다. 그 순간 릴리가 신경질적인 웃음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데릭의 아파트, 매력적이지 않나요?” 그녀는 주위를 가리켜 보이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알렉스가 방안을 흘깃 들러보았다. 고급스럽게 치장된 거울들과 신화의 장면을 재현해 놓은 플로리드 그림들. “그에게 어울리는 방이군”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접근했다. “다른 곳에 가고 싶소?” “아뇨” 그녀는 그들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며 뒤로 물러섰다. “릴리” “아니, 잠깐 기다려요. 우선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청금석으로 덮인 작은 테이블로 걸어가 종이 한 장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받아들자마자 다시 뒤로 물러났다. “내가 방금 쓴 거예요. 만오천 파운드에 대한 계약서예요. 그걸 갚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모두 돌려드리겠다고 맹세하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이자까지 쳐서, 물론 이성적인 한도 내에서지만요” “이자는 원하지 않소” “고맙군요, 아주 친절하군요” “난 당신과의 하룻밤을 원하오.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러고 싶었소”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다시 교묘하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겠소” 릴리는 제자리를 지키며 서 있었지만,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당신과 이런 짓을 할 수는 없어요. 어떤 남자라도 안 돼요!” 그녀가 두 손을 올려 그를 막았고, 알렉스는 날카롭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녀에게 그렇게도 혐오스러운 것일까? 자신에게만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남자들에게? 문득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 혹시 여자를 더 좋아하오?” “뭐라구요?” 릴리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다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오, 맙소사!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대체 뭐요?” 릴리는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냥 내 계약을 받아들이세요. 꼭 갚겠다고 약속할게요, 단지 시간이......” 그의 손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날 보시오, 릴리. 이유를 말해 보시오” 그녀는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나? 그런 거요?” “당신 때문에 아프다구요” “그래도 놓아주지 않겠소. 무슨 이유인지 말해 보시오” 아무래도 팔을 빼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표기한 채 가만히 서 있는데도 그는 막무가내로 놓아주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날 어떤 여자로 생각하는지 알아요. 내가 많은 남자들과 잤으리라 생각하겠죠. 하지만 한 사람뿐이었어요, 몇 년 전에. 호기심에다 외롭기도 했었죠. 그리고 내가 많은 실수들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난 그 순간이 증오스러워요. 그 경험은 두 사람 모두에게 비참하고 끔찍했어요. 그는 사교계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그의 잘못일 리는 없지요. 나한테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난 좋은 느낌을 주지 못하는 여자예요. 정상적인 남자라면 가장 침대로 데려가고 싶지 않을 여자가 바로 나라구요”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날 원하나요?” 알렉스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연민으로 가득하였고, 달빛도 없는 밤하늘처럼 깊고 깊었다. “그렇소” 릴리가 그의 팔을 힘껏 뿌리쳐 버렸다. “빌어먹을, 날 동정하지 말란 말이야” “이게 동정하는 것 같소?” 그가 재빨리 그녀의 엉덩를 잡아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그렇소?” 자신의 단단하게 발기된 부분을 밀며 그녀의 눈으 f 들여다 보았다. “왜 싫어하지?”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며 머리를 흔들었다. “처음에는 언제나 아픈 법이오. 그걸 알지 못했소?” “난 어떤 경우에도 좋아지지 않을 거예요”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남자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거로군, 하룻밤만으로” “알아야만 하는 것들은 모두 알았어요” 알렉스는 그녀의 등을 손으로 누르며, 부드럽게 책망하였다. “내가 당신이란 여자 한 사람만 보고 모든 여자를 판단한다면 어떻겠소?” “결혼이란 건 절대 하고 싶지 않겠죠” “흠, 당신은 나의 특별한 문제를 해결해 주었소”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와 닿았다. 그녀는 가슴 앞으로 두 팔을 뻗으며 뒤로 물러났다. “만오천 파운드는 큰 돈이오. 나와 같이 몇 시간만 보내면 갚을 수 있소”


“이젠 날 놀리기까지 하는 군요” “아니, 몇 년 간 지난 기억으로 곪아 문드러진 게 바로 당신이면서, 나에게 고집쟁이라고 했었군. 아마 당신의 그 기억은 사실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변해버렸을 거요” “오, 이젠 내 감정까지 평가를 내리는군요” 그의 성질이 확 불타올랐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그리고 그 일을 말하느니 난 죽어버릴 거예요” “좋아” 그가 입술을 그녀의 머리에 묻었다. “난 당신을 원하오, 더 이상 말하지 마. 이 빌어먹을 곳에서 우린 오늘밤 일을 치르게 될 거요” 그의 팔에 힘이 가해지며 그가 그녀의 머릿속에 더욱 깊이 코를 부벼대었다. “당신은 그냥 자연스럽게 따르면 돼, 그냥 자연스럽게” 릴리는 눈을 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갖다댔다. 그의 팔이 강철같이 느껴졌다. 그의 부풀어오른 남성이 그들 사이의 옷을 뚫고 활활 타오르는 듯하였다. 자신의 다급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입술을 움직이며, 손을 그녀의 등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릴리, 두려워하지 마. 난 당신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괜찮을 거야, 날 믿으라구. 당신은 날 믿어야만 하오” 이상하게도 순순히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요동치는 바다 속에서 빠지지 않기 위해 모든 힘을 들이며 버텨오지 안았던가. 더 이상은 힘이 없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손해날 것은 없다. 자신의 의자보다 더 큰 의자에 굴복하는 수밖에, 그냥 떠다니는 것밖에 손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내벌려 둬, 그 말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망설이며 침실로 향한 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쪽이에요”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려 램프와 묵직한 황금틀의 거울, 돌고래와 트럼펫을 조각한 거대한 침대가 있는 방에 도착하였다. 그녀를 내려놓고 알렉스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입술을 만져보았다. 그녀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불빛에 싸인 그의 완벽한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속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댔다. 입술에 그의 혀끝이 와 닿는 순간 그녀는 전기에 감전된 것만 같았다. 그의 혀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촉촉한 흔적을 남긴 다음 다시 입술을 강하게 눌러왔다. 그의 따뜻한 입술이 이상하게도 기분 좋았다. 키스를 받으려 발끝을 올리다 몸이 흔들거리자, 그녀는 그의 목을 팔로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벌렸다. 그의 허가 안으로 밀로 들어왔다. 그를 믿으면 안 된다. 지금의 부드러움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점점 커져가는 그의 긴장, 그녀의 장갑을 벗겨내는 떨리는 손, 그녀는 그에게 감춰진 거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위험스러우리만치 팽팽한 긴장감, 하지만 다른 쪽 장갑을 벗겨지는 그의 손놀림은 여전히 섬세하였다. 그의 손가락이 낮게 패인 속옷으로 다가가 그 깃털 같은 레이스를 만지작거렸다. 릴리는 자신의 속인 머리 위에 닿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그의 거친 숨소리도 들었다. 그가 어째서 머뭇거리는 것일까. 어쩌면 마음이 바뀌어 놓아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희망을 품으면서도 실망감에 가슴이 내려앉는 건 왜일까? 그 순간 그가 그녀를 뒤로 돌려세우고, 드레스 등의 작은 단추들을 풀기 시작했다. 실크와 레이스 드레스가 위태롭게 어깨에 매달렸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속옷의 리본을 풀어 밑으로 내리자, 그녀의 몸에는 하얀 슈미즈와 수놓은 스타킹만이 남았다. 그의 입술이 어깨에 와 닿았다. 그의 숨결이 뜨거운 안개처럼 피부를 옮겨다녔다. 가슴 위로 그의 팔이 부드럽게 지나치자, 발 밑의 바닥이 흔들리는 듯하였다. 그의 손가락이 작은 젖가슴 밑으로 곡선을 그리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슈미즈 위로 스쳐 젖꼭지를 찾아내었다. 그녀의 신음소리와 함께 그의 손안에서 젖가슴이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쾌감은 이내 수줍은 자의식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가슴은 작았다, 풍만해 보이도록 디자인된 드레스를 입었으니 그는 큰 가슴을 예상했을 텐데.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미 그의 손은 슈미즈 안으로


들어와 젖가슴을 뒤덮었다. 그의 손가락이 유연한 곡선을 쓰다듬으며 그 정상을 찾아 움직였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 그녀의 귓가에 그의 목쉰 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워, 완벽한 작은 인형처럼” 그가 그녀를 돌려세우고, 젖가슴이 드러나도록 슈미즈를 끌어내렸다. 그의 부풀어오른 남성이 그녀의 배와 허벅지 사이 은밀한 곳에 찔러댔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는 그 친밀한 접촉을 즐기는 듯 부드럽게 신음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릴리, 릴리” 그녀의 입술 안으로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그 매끈한 침입에 굴복하며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그가 거친 소리를 내며 그녀를 떼어놓더니, 코트의 소매를 조급하게 잡아당겼다. 잘 벗겨지지 않자 욕설을 중얼거리며 더 힘껏 소매를 끌어당겼다. 릴리의 손이 그의 옷깃으로 올라가 코트를 벗겨주었다.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그녀는 조끼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가 다 풀리자, 알렉스가 조끼를 벗고 풀먹인 하얀 넥타이마저 풀었다. 문득 릴리의 기억 속에 주세페와의 그날 밤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까만 털로 뒤덮였던 가무잡잡한 피부, 그녀의 몸을 더듬던 그의 탐욕스런 손놀림, 그녀는 침대 끈에 가만히 앉아 그 기억을 지우려 애썼다. “릴리?” 셔츠를 벗은 알렉스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엉덩이에 두 손을 갖다댔다. 그의 강렬한 회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그 불쾌한 기억은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눈앞에 알렉스가 황금빛 털로 뒤덮인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안장 있었다. 그녀는 살짝 그의 어깨로 손을 뻗어, 탄력 있는 털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 위로 움직여갔다. 그가 능숙한 솜씨로 스타킹을 내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그를 정지시켰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 단단한 것에 닿았다. 수년 간 말을 탄 탓에 여성스런 부드러운이 사라진 곳이다. 그녀가 수줍게 슈미즈 끝을 내려 몸을 가렸다. “그러지 마” 그가 그녀의 손을 밀쳐내고 그녀의 무릎에 더욱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그 안쪽 허벅지에 그의 입술이 닿는 걸 느끼지 그녀는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그 뺨의 촉감, 뜨거운 숨결에 그녀는 전류에 맞은 것 같았다. 더듬더듬 무어라 중얼거리며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무릎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알렉스는 슈미즈 밑의 그늘진 곳을 쳐다보았다. 벗어나려 하는 그녀의 다리를 힘껏 움켜쥐며, 그는 자신의 앞에 드러난 그 불가사의한 부드러움과 향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다. 그녀의 항의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조용, 조용” 그의 입술이 그 어두운 곳을 찾아 들어갔다. 걸리적거리는 슈미즈 자락을 손으로 밀쳐내면서, 그 여성의 근원 속으로 뜨거운 입심을 불어넣으며, 그는 미칠 듯이 달콤한 살내음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마침내 촉촉하게 떨리는 그곳을 발견하였다. 천천히 그 촉촉함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의 손에 붙잡힌 그녀의 허벅지가 부르르 떨렸다. 긴장으로 뭉쳐진 그 부드러운 곳에 입을 벌려 살짝 빨아보았다. 그녀의 다리에서 저항이 없어지며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와 그를 더욱 가까이 잡아당겼다. 그가 혀를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릴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는 수줍음에 빛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슈미즈를 풀어내려 했다. 제대로 되지 않자 그대로 허리까지 밀어 올렸다. 두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감싼 채, 그의 혀가 하얀 젖가슴과 짙은 색의 정상이 만나는 곳을 더듬어갔다. 그 부드러운 정상에서 입을 열어, 그것이 오뚝하게 설 때까지 애무했다. 릴리는 그의 넓은 등에 두 손을 두르고는 힘껏 끌어당겼다. 그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입술을 찾아 얼굴을 들었다. 그녀가 엉덩이를 위로 비틀어 올리며 그의 바지 속에 팽팽하게 갇혀 있는 남성을 찾아 헤매자, 그의 키스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녀의 목과 얼굴 위로 무슨 말인가 중얼거리며, 그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사랑스러워,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게. 그러지 않을 거야”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고 단호하게 그녀의 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는 몸을 빼내려다가 쾌감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빌렸다. 끈기 있게 자신을 통제하려던 알렉스의 계획은 모두 사라졌다. 그녀의 날씬하고 작은 몸이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허락한다는 듯 그 의 밑에 누워 있었고, 그는 갈망과 욕망 속에 완전히 휩싸였다. 더듬 더듬 바지를 풀어버리고, 그가 그녀의 위로 올라가 그녀의 허벅지를 넓게 벌렸다.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그녀가 그의 진입에 저항하며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는 이미 그녀의 뜨거운 몸 속으로 깊이 들어간 후였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술에 무수히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속눈썹이 올라가며, 눈물 어린 놀라움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아프게 했소?” 그녀의 눈에서 물기를 닦아내며 그가 속삭였다. “아뇨” 그녀의 낮고 떨리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사랑스러운 사람” 그가 몸을 빼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돌진하였다. 격렬한 쾌감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릴리는 두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손으로 그의 등을 열심히 문질렀다. 이맘에 와 닿는 그의 입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내리누르는 그의 근육질 육체, 그리고 그녀의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을 이끌어내는 그의 느릿한 움직임. “아” 감각이 점점 더 강렬해지자 그녀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고, 그는 더욱 깊이 밀어붙였다. 격한 흐느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의 단단한 것이 미끄러져 들어올 때마다 더욱 고조되는 긴장감으로 그의 몸을 움켜잡을 뿐이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젖가슴으로 내려와, 젖꼭지를 깨물었다. 그가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모든 정신을 그녀의 몸 속 근육에 집중시키자, 견딜 수 없는 쾌감으로 인해 그녀의 몸은 경련을 일으켰다. 몇 번 더 힘차게 몸을 밀어붙이며 그도 자신의 해방을 찾았다. 날카롭고 아찔아찔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였다. 릴리는 그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그의 밑에 누워 있었다. 온몸이 쿵쾅거리고, 기분 좋은 통증도 전해졌다. 평생 동안 이렇게 편안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한 번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나서 몸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싫은 양 콧소리를 내자, 그는 옆으로 몸을 굴려 그녀의 허리에 나른하게 팔을 감았다. 릴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에게로 더 가까이 몸을 밀착시켰다. 그의 가슴털에 얼굴을 대면서 남성적인 향기를 듬뿍 들이마셨다. 그가 무슨 말이든 하려 들었다면,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어색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숨결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고, 그의 손도 머리로 올라와 머리카락을 감았다 풀었다 장난질을 했다. 허리에 매달린 슈미즈를 제외하면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낯선 남자의 향기에 둘러싸여 누워있다는 것이 이상한 느낌이었다. 땀이 식으면서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그리고 너무나 졸렸다. 강한 포도주에 취한 듯한 느낌.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에게 닿아 있는 부분은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곧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고 자신을 수습해야 하리라, 조금만 더 있다가. 그녀는 졸린 상태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이불에 대한 말이었나 보다. 그가 그녀의 슈미즈를 완전히 벗겨주었고, 그녀는 부드러운 리넨 시트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그가 옆에 다시 누웠을 때, 그의 옷가지는 모두 벗겨진 상태였다. 릴리는 잠시 자신의 몸에 땋는 그의 맨살에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긴장 풀어” 그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여주자, 하품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 나갔다. 몇 시간이나 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깊고 편안한 잠에서 빠져 나왔을 때, 알렉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몸 위에 편안히 팔을 늘어뜨리고, 다른 팔은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었다. 그들 함께 했던 그 장면을 생각하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사교계 여자들 사이의 대화를 들으며, 그


애인들의 행동들을 들으며, 자신이 남녀 사이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오늘밤 알렉스가 한 것 같은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그가 알고 지냈던 여자들, 그의 경험들, 상상만으로도 질투가 났다. 그녀가 조심조심 그에게서 몸을 풀어냈다. 은밀한 곳이 아른아른했다. 고통이 아니라 좀전에 일어났던 감각들을 일깨워주는 것, 이게 이런 것일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주세페와의 경험과는 전혀 달랐다. 도저히 똑같은 섹스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가 침대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시트가 바스락대더니 알렉스의 하품 소리가 들렸다. “뭐하는 거요?” 그의 졸린 물음에 그녀가 어색하게 대꾸하였다. “알렉스, 난 이제 떠나야 할 것 같아요” “날이 밝았소?” “아뇨, 하지만......” “침대로 돌아오시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나른한 오만함이 그녀를 유쾌하게 했다. “소작농에게 명령하는 봉건 시대의 영주 같군요. 중세 암흑시대는 아마 당신에게 딱 맞는 시대일걸요” “어서” 그녀의 새초롬한 말투는 묵살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어둠 속의 목소리를 향해 걸어가 따뜻한 이불과 거친 털투성이 남자에게로 되돌아갔다. 그의 옆에 누웠지만, 살을 대지는 않아싿. 그리고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더 가까이 와”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수줍지만 기꺼이 그에게로 몸을 돌려 그의 몸을 감싸안고, 그의 가슴에 젖가슴을 갖다대었다. 그의 팔이 감아오지는 않았지만, 숨소리가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가까이” 그녀가 그에게로 바싹 달라붙었다. 배 위에 그의 풍성하고 뜨거운 것이 닿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가는 곳마다 불길을 남기며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가볍게 탐험하였다. “왜 떠나려고 했소?” “우리 일이 끝난 줄 알았으니까요” “잘못 짚었군” “나도 가끔은 틀릴 때가 있는 법이죠” 그가 씨익 웃으며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올리고는 젖가슴을 자신의 입으로 갖다대었다. 젖꼭지에 그의 혀가 찰싹이는 걸 느끼자 그녀의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쳤다. 그의 입술이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가 그 사이로 미끄러졌다. “원하는 게 뭐지? 뭐야?”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다급하게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를 애무하며 입술은 그녀의 입술과 턱을 살짝 살짝 깨물며 놀렸다. 그녀도 그 장난에 합류하여 그의 방황하는 입술을 찾아다니는 동안, 그녀의 숨결이 점점 가빠졌다. 그의 입술을 잡자, 그의 보답은 혀를 깊이 들이미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앞으로 밀어대며 그의 몸을 갈구하였다. 그의 어깨를 붙잡고 이름을 부르자, 그는 옆으로 몸을 돌려 그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날 원하나?” “그래요, 그래” “그럼 당신이 해봐” 그녀의 등으로 손을 미끄러뜨리며 그가 그녀의 용기를 북돋았다. “어서”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암전하게 놓였다.


“못 하겠어요” 알렉스는 그녀의 입을 벌려 혀로 원을 그려가며, 그녀의 흥분을 더 높은 곳으로 몰아갔다. “날 원한다면, 당신이 해야 할 거야” 그는 기다렸다. 그녀의 손이 어깨를 떠나자 그의 맥박이 두근거렸다. 천천히 그녀의 손이 밑으로 내려갔고, 그녀의 손이 닿은 순간 그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불에 데인 사람처럼 얼른 손을 잡아 뺐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그것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가 신음하며 몸을 움직였고, 단 한 번만의 동작으로 그녀에게 밀고 들어갔다. “이게 당신이 원하던 건가? 이런 거?” 그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오, 그래요”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누르며 신음하였다. 그는 애가 탈 정도로 신중하게 자신을 통제하였다. “그렇게 빨리는 안 돼. 우리에겐 시간이 있거든, 몇 시간이나” 그녀가 그를 다시 받아들이려고 몸을 휘어대자, 그는 웃으며 그녀를 똑바로 눕혔다. “진정해” “안 돼요” “인내심을 가지라구, 다그치지 말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엮어 머리 위로 높이 끌어올렸다. 그녀의 몸이 그의 밑에서 쭉 펼쳐질 때까지, 그녀는 계속되는 그의 움직임 밑에서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밤새도록, 이걸 생각하고 있었어” 그녀에게서 쾌락의 신음이 흘러나올 때까지 그가 자신을 억제하며 속삭였다. “당신에게 가장 믿을 수 없는 욕구불만을 느끼게 하는 거야. 당신이 그걸 원해서 비명을 지를 때까지” 그녀는 귓가에 들리는 부드러운 으르렁거림을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었다. 몸을 떨며 그의 절묘한 움직임만을 느꼈다. 그의 엉덩이가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어둠 속의 움직임과 그녀의 중요한 곳에 번져가는 뜨거운 열기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거칠게 부르며 몸을 비틀어대기 시작하였다. “그래, 이걸 기억해. 당신은 더욱더 원하게 될 거야. 난 다시, 또 다시 할 거고” 폭발을 바라는 수많은 감각들이 이젠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가 몸서리를 치며 비명을 질러대었다. 그의 말들이 긴 신음으로 녹아들며 이윽고 그도 그녀의 안으로 자신을 깊이 파묻었다. 그녀의 몸이 그를 꽉 조이는 순간 두 사람 모두 격렬한 클라이맥스로 폭발하였다. 피로와 함께 뼛속까지 느껴지는 깊은 만족감이 몸 속에 가득하다 릴리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지친 아이처럼 금세 곯아떨어졌다. 알렉스는 그녀를 안은 채 계속해서 그녀의 목과 등을 어루만졌다. 자신의 마음속에 넘쳐나는 행복감에 겁이 나기조차 했다. 하지만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중무장한 갑옷에서 틈을 발견하여 밀고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는 예정된 운명 따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였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릴리는 운명의 선물이다. 그 전까지는 캐롤라인으로 인한 슬픔이 모든 것을 가렸다. 슬픔을 잡고 있던 것도 그의 완고함 탓이었다. 그는 쓰디쓴 고립감 속에 남아 페넬로페를 그 고독의 방패막이로 삼았다. 그런데 교묘하고 위험천만한 매력을 가진 릴리가 자신의 완고함을 이겨냈다. 릴리는 잠결에 무언가 중얼거리며 가슴에 댄 손가락을 꿈틀거리자, 알렉스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오늘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 스캔들에 대한 런던의 반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본드 가에 있는 모니크 라이프리어의 가게에서였다.


파리의 매력적인 스타일을 들여와 런던 취향에 맞게끔 고치는 디자이너, 모니크는 언제나 최근의 소문을 가장 빨리 접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쾌활한 어조와 명랑한 푸른 눈동자가 세탁하는 여자에서부터 공작부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비밀을 털어놓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녀는 중년에 들어선 매력적인 검은 머리의 여성이었다. 친절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누구든 그녀에게 10 분 이상 적대감을 갖지 않았다. 이해심 많은 대화와 호기심이 왕성한 성격으로 그녀는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그녀가 비밀을 잘 지켜줄 것이며 그들에게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주리라는 것을 믿었다. 모니크는 절대 교활함이나 질투심에 눈이 멀지 않는 극히 드문 여자였으니. “누구에게 잘생긴 애인이 있고, 누가 대단히 아름다운 걸 가졌다고 해서 내가 꼭 신경을 써야 하나요?” 그녀는 언젠가 릴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에겐 친절한 남편이 있고, 내 가게와 많은 친구들, 그리고 내 귀를 가들 채울 수 있는 소문들이 있는데 말이에요. 즐거운 인생이라구요, 난 다른 사람 것을 탐낼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아요” 릴리가 평소처럼 씩씩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모니크의 보조인 코라가 팔을 한가득 실크와 모슬린을 안고 가다가 몸춰 서서는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슨 양, 잠깐만 기다리세요. 라프리어 부인께 오셨다고 말씀드릴게요. 당장에 달려나오실 거예요” “고마워요” 코라의 지나친 반색을 이상히 여기며 릴리는 대답하였다. 벌써 알렉스와의 내기에 대해 들었을 리는 없었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설마! 하지만 모니크가 뒤쪽 작업실에서 커튼을 헤치며 달려나오는 순간, 릴리는 모니크가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릴리, 셰리!” 디자이너가 탄성을 지르며 열성적으로 그녀를 껴안았다. “그 일에 대해서 듣는 순간, 당신이 즉시 이리 올 줄 알고 있었다니까요.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새로운 위치가 되셨으니, 새로운 드레스가 많이 필요할 거예요, 그렇죠?”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알았어요?” 릴 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레이디 윌튼이 방금 다녀갔는데, 그 일에 대해 죄다 말해 주었답니다. 그녀의 남편이 어젯밤 크레이븐스에 있었대요. 세상에, 당신에겐 너무나 잘된 일이에요! 얼마나 영리한 행동이었는지, 대단히 성공이에요! 사람들 말로는 레이포드 경이 당신에게 홀딱 반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런던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그 다음 타자가 되려고 난리들일 거예요. 아마 몇 년 간은 당신을 쫓아다니는 남자들로 북적거릴걸요. 이제 당신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당신은 값만 부르면 돼요, 어떤 사람이든지 기쁘게 당신의 후원자가 되려 할 거예요. 어떤 여자도 그렇게 완벽한 선택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구요! 오, 보석과 마차와 집, 그 풍요로움이 당신 것이 된다고 생각해 봐요! 머리만 잘쓰면, 당신은 런던에서 가장 돈 많은 여자가 될 수고 있답니다!” 그는 릴리를 푹신한 의자에 앉히고 최신 패션 그림을 수록한 라 벨르 어셈블리 잡지와 스케치 더미들을 한아름 안겨주었다. “얘기하는 동안 이걸 살펴보는 게 어떨까요, 난 당신에게 정말 자세하게 듣고 싶답니다. 노력하면 죄다 기억이 날 거예요. 코라? 코라, 그 샘플들 내려놓고 로슨 양께 커피 갖다드려요” “말할 만한 게 별로 없어요” 릴리는 의자에 깊숙이 내려앉아 맨 위의 스케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모니크가 그런 그녀를 상냥하게 쳐다보았다. “겸손할 필요 없어요, 이건 대단히 성공이랍니다. 당신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어요. 한동안 크레이븐 씨의 보호를 받아들인 것도 잘 한일이에요. 그는 무얼 해도 좋을 만큼 부자니까요. 하지만 당신도 변화를 가질 때가 되었지요. 그리고 레이포드 경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에요. 혈통도 좋고, 잘생긴데다,


영향력도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죠.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의 후손으로, 손쉽게 명예를 따내거나 벼락부자가 된 부류들과는 다르죠. 벌써 그와 계약을 했나요? 당신만 괜찮다면, 내가 아주 유능한 변호사를 추천해 줄 수도 있는데, 그는 비올라 미러와 퐁트미어의 합의를 이끌어 낼 정도로 능력이 있답니다” 모니크가 수다를 떨며 새로 나온 스타일을 보여주는 동안, 릴리는 말없이 그날 아침의 일을 생각했다. 그녀는 알렉스가 잠들어 있는 사이 슬쩍 옷을 입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의 몸이 하얀 시트 사이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때 이후로 그녀의 감정은 불안함과 이 상한 유쾌함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이다. 이런 행복한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 거짓말 같았다. 그녀는 런던의 모든 사교계 응접실과 커피숍에서 소문의 대상이 될 터인데 말이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후회는 들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경이감으로 지난밤을 생각하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그 차가운 눈동자와 초연함을 지닌 알렉스 레이포드가 그렇게 에로틱하고 부드러운 연인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지금도 꿈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니.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알렉스 백작에 대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그를 피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알렉스가 페넬로페를 잃은 보상을 받은 것에 만족하고 그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이젠 내일밤 기필코 만들어야 하는 5 천 파운드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오늘밤 크레이븐스에서는 높은 판돈의 도박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돈을 따지 못한다면 갖고 있는 보석과 어쩌면 드레스까지 전당물로 맡겨야 할지 모른다. “그에 대해서 말해 줄래요?” 모니크가 살살 구슬렸다. “절대 사생활에 간섭하려는 건 아니구요. 셰리, 알렉스와 당신 동생의 약혼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 일은 전처럼 진행되는 건가요?” 릴리는 그 모든 질문을 무시하고 피식 미소지었다. “모니크, 그런 얘긴 그만해요. 나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오늘밤 크레이븐스에서 가면무도회가 열려요. 난 아주 특별한 걸 입어야 한답니다. 시간이 없다는 건 알아요. 당신에게 다른 작업이 있으리라는 건 알지만, 당신이 도와줘요” “네, 네, 잘 알았어요. 대단히 긴급한 일이군요. 그 스캔들 이후로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는 거니까, 당연히 오늘밤 모든 시선이 당신에게 쏠릴 거예요. 아주 특별한 옷을 입어야겠지요” “현금이 아니라 신용으로 사야 할 것 같아요” 릴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불편하게 말했다. 대답은 즉시 흔쾌하게 흘러나왔다. “당신 원하는 대로 하세요. 레이포드 경의 재산이 당신 것이니, 도시의 반이라도 살 수 있을걸요” 릴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힘없이 미소지었다. 알렉스 레이포드나 다른 누구의 여자도 될 생각이 없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돈이 많지 않다는 얘기도. “오늘밤 가면무도회에서 가장 대담한 의상을 입고 싶어요. 뻔뻔스럽게 밀로 나가야 한다면, 옷도 그렇게 입을 거예요” 그녀의 유일한 선택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해지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오늘밤 그녀와 도박하는 남자들 모두가 카드에 집중할 수 없을 만한 의상을 입고 싶었다. “정말 영리한 분이라니까. 좋아요, 당신에게 온 도시가 관심을 가질 옷을 만들어 드리죠” 모니크가 그녀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어쩌면 우리가......그래, 그게 아주 좋겠어요” “뭐가요?” 모니크가 즐겁게 씨익 웃어 보였다. “당신을 이 세상 최초의 요부처럼 만드는 거예요, 셰리” “데릴라? 아니면 살로메 말인가요?


“아니, 최초의 여자, 이브 말이에요!” “이브?” “그렇다니까요, 그 정도며 몇 십 년 간에 얘깃거리가 될걸요” “흐음, 시간이 많이 걸리면 안 된답니다” 알렉스는 윌리엄 고조부님 이래로 레이포드 가문의 영지인 백조의 궁정으로 향했다. 그 장원은 좌우 대칭적인 양 날개와, 그리스 식 기둥, 대리석과 하얀 석고로 된 넓은 홀로 구성된 고전적인 양식이었다. 커다란 마구란 뜰과 열다섯 대의 마차를 넣을 수 있을 만한 마차고도 있었다. 좀처럼 그곳에 머물지는 않지만, 알렉스는 그곳을 관리하며 가끔 손님을 받을 수 있도록 하인을 고용해 놓았다 나이든 가정부인 호지스 부인이 문을 열었다. 하얀 잔머리로 둘러 싸인 그녀의 얼굴이 그를 보자마자 놀라움으로 변하며 서둘러 그를 안으로 맞이하였다. “주인님, 오신다는 전갈을 받지 못했어요. 미리 연락을 하셨더라면 준비를 했을 텐데요” “괜찮소, 미리 연락할 수가 없었소. 하지만 주말을 여기서 보낼 생각이오. 어쩌면 더 길어질지도 모르고, 아직 확실치 않소” “알겠습니다, 주인님, 요리사에게 알리겠습니다. 아마 당장에 식품 저장실을 채울 거예요. 아침은 드셨나요? 안 드셨으면 당장 시장에 갔다오라고 할까요?” “아침은 필요 없소, 난 집안을 좀 둘러보겠소, 호지스 부인” “알겠습니다, 주인님” 알렉스는 한참 동안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의심스러웠다. 크레이븐의 아파트를 떠나기 전에, 하녀가 가져온 쟁반에는 계란과 빵, 푸딩, 햄과 소시지와 과일이 잔뜩 있었다. 크레이븐의 개인 시종이라는 자는 그의 옷을 털고 다림질하였고 평생에 가장 시원한 면도를 해주었다. 목욕을 할 때는 하인들이 두터운 수건과 비누, 고급 화장수를 들고 옆에 서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전날 밤, 크레이븐이 어디서 보냈는지에 대한 알렉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 남자의 본심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릴리를 좋아하면서도 왜 자신이 그녀를 차지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왜 그녀를 다른 사내의 품안으로 밀어버리고, 자신의 아파트까지 쓰게 하였을까? 크레이븐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교활하며 조잡하고 탐욕스러워 보이는 반면, 깊은 마음도 있는 것 같고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릴리와 그 사내의 관계가 대단히 궁금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이상한 우정을 쌓게 된 것인지 그녀에게 설명을 들어야 하리라. 알렉스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장원을 돌아다녔다. 예정에 없던 방문 탓에, 가구들 위에 씌워진 하얀 린넨 커버는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방들은 연한 파스텔톤이었고, 바닥들은 밀랍으로 반짝반짝 닦여있거나 어울리는 카펫으로 덮여 있었다. 대리석 화로가 놓인 침실마다 꽃무늬 벽지에 침대 커튼이 드리워졌고 그 옆에는 커다란 탈의실이 붙어 있었다. 알렉스의 방은 천장을 푸른 하늘과 구름처럼 색칠한 대단히 큰 방이었다. 저택의 중앙부는 길쭉한 대리석 기둥과 정교한 샹들리에, 호화로운 가문의 초상화로 장식된 무도회장이다. 캐롤라인과 약혼했던 몇 달 동안, 알렉스는 이곳에서 지냈다. 캐롤라인과 같이 무도회와 저녁 파티를 열었는데, 함께 춤을 출 때면 그녀의 황갈색 머리가 샹들리에 불빛 속으로 반짝반짝 빛을 뿌렸다. 그녀가 죽은 후, 그는 이곳을 피했었다. 퇴색한 향수처럼 방안에 떠다니는 그 기억들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집을 돌아다니는 지금, 그 기억들에서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았고 즐겁기까지 하였다. 이리로 릴리를 데려오고 싶었다. 하얀 실크 드레스로 검은 머리를 돋보이게 한 그녀가 화사한 미소와 생기 있는 말솜씨로 손님들 사이를 누비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녀의 예측 할 수 없는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오고 갈까> 오늘 아침 그녀의 기분은 어땠을까? 그녀가 없이 깨어난 아침은 지독히 짜증스러웠다. 밝은 햇살 속에서 그녀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다시 한 번 사랑을 나누고 싶었는데, 그녀의 입술이 말하는 그의 이름을 듣고 싶었고, 그의 머리를 움켜쥐는 그녀의 손가락을 느끼고 싶었는데.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호지스 부인의 전갈을 듣자, 그의 맥박은 기대감으로 빨라졌다. 알렉스는 로코코 양식으로 된 난간을 잡고 중앙 계단을 내려가, 현관 홀로 빠르게 걸어나갔다. 방문객을 보는 순간 그의 걸음은 순간적으로 멈추어졌다. “빌어먹을” 릴리가 아니라, 그의 사촌인 로스 리온 경이다. 잘생긴 젊은이인 로스는 알렉스의 어머니 쪽 사촌이었다. 키가 큰 금발 머리에 부와 매력까지 겸비한 그는 무관심한 남편을 둔 귀족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의 무수한 연애 사건과 세계를 돌아다니며 쌓은 다양한 경험은 그를 냉소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오죽하면 친척들은 로스가 다섯 살 때부터 인생에 싫증을 냈다고 말할 정도였다. “자넨 무언가 원하는 게 없으면 찾아오지 않지, 무슨 일이야?” 알렉스의 퉁명스런 반응에 로스는 태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군, 사촌,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나?” 로스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화술을 좋아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뻔한 거지. 사촌은 두 군데 중 한 곳에 있을 수밖에 없지. 여기가 아니면 어떤 사랑스러운 여자의 품안에, 작지만 흥미를 자극하는 여자 품 말일세. 난 먼저 이곳을 찾아보리라 결정한 것뿐이지” “어젯밤 일에 대해 들은 모양이군” 알렉스의 험상궂은 태도에 로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쯤 런던에서 그 얘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나의 깊은 감탄을 받아 주시게. 자네에게 그런 면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걸” “고맙군, 이제 가보라구” “오, 아니. 아직은 아니지. 난 얘길 하러 왔어, 사촌. 좀 잘 대해 달라구. 어차피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볼 기회도 없는데” 알렉스가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로스와 그는 친구처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제기랄, 같이 산책이나 하지” 그들은 응접실 밖으로 연결된 문을 열고 부드러운 초록의 잔디로 걸어나갔다 “나의 도덕 교과서 같은 사촌 알렉스와 무법자 릴리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난 믿을 수가 없었지. 여자를 놓고 도박을 하다니, 우리의 보수적인 알렉스 백작은 아닐 거야. 다른 사람 일 거야, 그러면서도......” 그의 연한 파란 눈동자가 빛을 발하며 알렉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표정이 달라졌어. 캐롤라인 휘트모어가 죽은 후로는 이런 활기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알렉스는 불편한 듯 어깨를 으쓱이고 정원을 거닐었다. 산딸기나무와 꽃이 핀 울타리로 경계를 만든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퇴락한 해시계가 있는 정원의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자네는 이 년 동안 거의 은둔하다시피 했었지” “그래도 간간이 모임에 얼굴은 비쳤어” “그래, 하지만 모임에 참석했을 때조차도 자네에겐 공허한 부분이 있었어. 솔직히 말하면 빌어먹게 차가웠지. 어떤 위로나 연민도 거부하고,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거리를 두었어. 페넬로페와의 약혼 사실에 대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미지금한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지 않던가? 그들은 자네가 그 불쌍한 소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두 사람 모두를 가엾게 여겼지” “이젠 그녀를 불쌍히 여길 필요 없어, 그 불쌍한 소녀는 스탬퍼드 자작과 행복하게 결혼했으니까. 그들은 그레트너 그린으로 도망가 버렸네” 로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 착하고 마음 약한 재커리가, 혼자서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틀림없이 다른 삶의 도움을 받았을 거야”


“그랬지” 로스가 그 가능성을 생각해 보다가 이윽고 웃음기 어린 시선을 알렉스에게 돌렸다. “설마 릴리가? 그게 바로 어젯밤 크레이븐스의 일과 관련이 있는 거로군. “사람들에게 떠들 만한 일은 아니야” 알렉스가 조용히 경고하였다. “맙소사, 자넨 가문의 자랑거리야! 예전의 알렉스가 영원히 사라졌구나 싶었는데 다시 살아났어, 그렇지? 하기야 릴리 로슨의 매력이라면 죽은 자라도 깨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까” 알렉스는 한 발을 꼰 채 해시계에 비스듬히 기댔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그의 이마에서 머리카락을 넘겼다. 품안에 안겨들던 릴리, 어깨에 닿았던 그녀의 입술이 생각났다. 또다시 행복감과 완벽한 느낌이 밀려왔다. 땅을 쳐다보면서도 미소로 입술 한쪽이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놀라운 여자야” “아하” 로스의 푸른 눈동자도 평소의 권태로움을 벗어 던지고 흥미로움으로 생생해졌다. “내가 자네 다음으로 그녀를 갖고 싶어. 개시 가격이 얼만가?” 알렉스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위협적으로 사촌을 노려보았다. “경매 따위는 없을 거야” “오, 정말? 지난 이 년 간 팔순 아래의 남자들이라면 모두 무법자 릴리를 갖고 싶어했지. 하지만 그녀는 데릭 크레이븐의 여자였어. 그러나 어젯밤 후로는 달라졌어, 그녀가 거래 시장에 나셨다는 게 확실해졌거든”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대꾸하였다. “그녀는 내 여자야” “그녀를 차지하고 있으려면 돈 꽤나 들어야 할걸. 이젠 어젯밤 얘기가 런던에 죄다 퍼져서, 그녀를 사로잡으려는 남자들의 보석과 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될 거라구. 내가 아라비아 산 말을 선물한다면 목적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이아몬드 머리띠 한두 깨쯤 던져줄 수도 있고. 알렉스, 그녀에게 내 얘기 좀 해주게나. 한동안 자네가 차지하고 싶다면, 좋을 대로 해. 하지만 내가 그녀의 다음 후원자가 될 거야. 그런 여자는 세상에 하나뿐일걸, 아름다움과 불을 간직한 여자. 그 전설의 빨란 바지를 입고 사냥터를 누비는 모습이라니, 그걸 본 남자들 중에 자기 위로 올라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을 거야” “분홍색이야” 알렉스가 몸을 세우고 짜증스레 해시계 주위를 걸어다녔다. “분홍색 바지라구, 그리고 난 자네나 어느 누구에게도 그녀의 발냄새조차 맡게 할 생각이 없어” “그런 일을 막을 수는 없을걸” 알렉스의 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얼굴도 불길하고 음험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저런, 자네 정말로 화가 났군, 으스스해, 폭군처럼 열이 났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을 억제하느라 힘들겠군” “꺼져!” 로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자네에게 이런 감장이 있는 줄 미처 몰랐는걸. 도대체 어떻게 된건가?” “그녀에게 감히 접근하는 남자가 있으면 내가 모조리 목 졸라 죽여 버릴 거야” “그렇다면 런던 남자의 반과 싸워야만 할 걸세” 그제서야 알렉스는 사촌의 눈 속에 깃든 즐거움을 알아차렸다. 로스가 일부러 그에게 미끼를 던진 것이다. “빌어먹을 녀석!”


로스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낮아졌다. “자네 때문에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군, 그녀에게 진지한 감정을 가졌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게. 릴리는 한 남자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길들일 수 없는 여자라구. 이성을 찾게, 내 말 소홀히 듣지 말라구” 알렉스가 자제력을 되찾았다. “나한테 맞아죽기 전에 갈 길이나 가시지” “릴리는 성숙하고 경험 많은 여자야, 자네를 즐겁게 해주겠지. 알렉스, 자네가 캐롤라인을 잃었을 때 어땠는지 알기 때문에 이런 경고를 하는 거야. 자넨 지옥으로 떨어져 버렸어.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지는 않을 거라 믿네, 자넨 릴리 로슨이 어떤 여자인지 모르고 있어” “자넨 안다는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데릭 크레이븐에게 물어보지 그러나?” 로스는 자신의 화살이 정곡을 찔렀는지 보려고 유심히 그를 살폈다. 하지만 알렉스가 나른하게 씨익 웃고 말자 놀랐다. “크레이븐은 이 일에 아무 관련도 없어, 로스. 적어도 더 이상은 없어. 자네가 릴리에게 손을 뻗는다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거라는 점만 알면 돼. 이젠 집으로 돌아가지, 자네도 이제 가봐야 할 테고” 로스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를 얼마 동안 차지할 셈인지 나에게 말해 주게” 알렉스는 성큼성큼 걸으며 계속 미소를 지었다. “다른 여자나 찾아보라구, 로스. 릴리를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일거야” 세인트 제임스 가는 크레이븐스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의 마차로 북적거렸다. 보름달이 길가에 밝은 빛을 뿌리며 손님들이 입고 있는 의상을 번쩍이게 만들었고, 그들이 쓴 가면은 길 위에 이국적인 그림자를 만들었다. 기운 찬 폴로네이즈부터 우아한 왈츠까지, 이어지는 음악이 열린 창문을 통해 밖으로 울려 퍼졌다. 어느 무도회보다 가면무도회는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가면을 쓰고 가장을 한 사람들은 평소의 옷차림으로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을 하였고, 크레이븐스는 그런 생동을 위해 딱 어울리는 장소였다. 수많은 어두운 모퉁이들과 작고 은밀한 방들, 창녀나 사교계 여인이나 난봉꾼이나 불한당이나 신사들이 모두 한데 뒤엉키고 안전하거나 예측 가능한 것이라고는 어느 것 하나 찾을 수 없는 곳. 릴리는 마차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크레이븐스의 입구로 걸어갔다. 바닥에 닿는 맨발이 따끔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의상을 가리기 위해 목에서부터 발목가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오늘밤 5 천 파운드를 따는 건 어렸지 않을 것이다. 술과 흥겨운 환락이 있고, 더구나 그녀의 대담한 노출이 있는 한. 그녀는 비둘기 같은 남자들의 넋을 모조리 빼앗을 것이다. 입장을 기다리고 선손님들을 지나 집사에게 아는 체를 하자, 초록 벨벳 가면과 엉덩이까지 늘어뜨린 긴 검은 가발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알아챘는지 집사는 아무 저지도 없이 안으로 들여보냈다. 릴리가 현관 홀로 들어서자, 뒤에서 데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까딱없어 보이는 군” 데릭은 술과 방탕의 신인 바커스로 차려입었다. 고대 로마 시민이 입던 헐거운 겉옷인 하얀 토가와 샌들을 신고, 머리에는 포도송이와 잎사귀로 만든 화환을 썼다. 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릴리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괜찮지, 그렇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실례해야겠어, 난 게임을 할 거야. 오천 파운드가 날 기다리고 있어” “잠깐 나와 같이 좀 걷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정하게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예전 친구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난 어젯밤 내 몸을 걸고 필사적인 카드 게임을 했어. 당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부추겨서 클럽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날 이용하기까지 했어. 그건 뚜쟁이나 할 만한 행동이었어” 그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누군가와 장난치고 싶다 해도 난 상관없어. 나도 언제든 여자들을 침대로 데리고 가. 우리 사이에 번한 건 아무것도 없지” “어젯밤 일은 달라, 난 당신에게 막아달라고 부탁했어. 당신이 그래주길 바랐어. 그런데 당신은 신경도 쓰지 않았어. 날 버렸다구, 데릭” 그의 침착한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그의 눈빛이 난폭해지며, 뺨의 근육이 씰룩거렸다. “그런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어. 침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 관계와 아무 상관 없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당신한테는 별거 아니라는 거군. 그런 말이야?” “맞았어, 그래야만 하고” “오, 데릭” 릴리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쳐다보았다. 2 년 동안 혼란스럽기만 했던 것들이 이해가 됐다. 데릭은 그녀가 돈을 만들기 위해 절망적으로 싸워온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 자기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그것이 돈에 대한 탐욕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탐욕이 아니라 무관심이었다. 그는 진실한 우정이 아니라 우정 흉내만 내고 있었다. 지난 시절의 지독한 박탈감과 황폐함이 그의 가슴을 불구로 만들었으리라. “당신은 어느 사람 일이든 그대로 내버려 둘 거야, 그렇지? 당신이 원하는 건 의자에 앉아서 관전하는 것뿐이야, 끝없이 강아지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그게 관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지, 위험을 무릅쓰고 책임지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해. 당신은 너무나 ‘비기사도적’인 사람이야” 그녀는 일부러 그가 모를 만한 어려운 말을 사용하였다. 그는 그런 것을 대단히 싫어하였다. “다시는 당신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거야. 더 이상 그럴 필요도 없어. 어젯밤 후로 난 당신에게 품었던 내 모든 의혹을 떨쳐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그녀가 우아하게 망토를 벗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현관 홀에 도착했던 손님들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와서 꽂혔다. 릴리의 의상은 얼핏 보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차림의 느낌이었다. 모니크는 그녀의 몸에 느슨하게 감기는 투명한 드레스를 선사했다. 가릴 만한 곳에는 초록 벨벳의 잎사귀를 예술적으로 덧붙였다. 그 초록 잎사귀와 긴 검은 가발로 가리고 있긴 하지만, 투명한 천을 통해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과 섬세한 몸의 곡선이 또렷이 드러났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한쪽 발목에서부터 어깨까지 구불구불 몸을 감은 뱀의 그림이었다. 그것은 모니크의 친구인 여자 화가가 세 시간에 걸쳐 완성한 것이었다. 릴리는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빨간 사과를 데릭의 코에 갖다댔다. “한 입 맛보실래요?” 9. 순간 놀라워하던 데릭의 표정이 재빨리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릴리는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그렇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그녀의 행동을 막고 싶어하는 기색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저지도 하지 않았다. “즐거운 사냥이 되길” 데릭은 그녀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나서, 등을 돌려 걸어가 버렸다.


“사냥이라고?” 릴리는 도망치듯이 걸어가는 그를 지켜보며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에게 무언가 못할 짓을 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화려하고 단호한 미소를 띄우며 하인에게 망토를 건넨 다음 중앙 게임 룸으로 걸어갔다. 게임 룸은 교묘하면서도 예술적으로 무너진 신전처럼 바뀌어져 있었다. 벽에는 하늘색 긴 푸른 천을 드리웠고, 높이 솟은 석고 기둥들은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온 돌처럼 색칠되었다. 구석진 곳과 방 옆쪽으로 조각상과 제단들이 위치하였고, 주사위 테이블의 춤출 공간을 위해 치워지고 없었다. 위쪽 발코니에 자리잡은 음악가들은 달콤한 선율을 연주했다. 은색과 황금색 천을 걸친 창녀들은 로마의 무희처럼 베일이나 화려한 수금, 가짜 악기들을 들고 손님들 사이를 다녔다. 릴리가 나타나는 순간 숨넘어가는 소리가 방안을 휩쓸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릿광대, 군주, 해적, 그 외의 소설 속 주인공들로 각기 변장한 사내들이 릴리의 관심을 얻으려 애쓰는 동안 여자들은 멀리에서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남자들은 저마다 다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이군요!” “내가 먼저요, 내가 얘길 좀 해야겠소” “레이디 이브, 당신에게 와인 한 잔 대접하고 싶소” “당신을 위한 카드 룸의 자리를 얻었소” 소란이 점점 커지는 동안, 데릭은 워디를 찾아다녔다. 워디는 한 손에 긴 삼지창을 들고 바다의 신처럼 차려입었다. “워디, 집시 양에게 딱 달라붙어 있어, 그 여자 옆을 떠나지 말라구. 저 빌어먹을 여자가 오늘밤 여섯 번 이상 강간당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기적일걸. 서로 자기 내장이라도 내어주겠다는 미친 인간들 사이에서 말야” “알겠습니다, 사장님” 데릭의 격분한 장광설을 워디가 침착하게 들은 다음 삼지창을 이요해서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데릭의 딱딱한 시선이 주위를 훑어보았다. “알렉스, 이런 개자식.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알렉스는 춤과 환락이 점점 고조될 무렵, 자정이 되기 직전에 무도회에 도착하였다. 오늘은 여자들이 크레이븐스에서 도박할 수 있는 유일한 날, 여자들은 방에서 방으로 옮겨다니며 기쁨의 탄성과 감탄의 비명을 지러대었다. 특이한 가장과 가면을 착용한 유부녀들은 마음 놓고 사내들과 히히덕거렸고, 변장한 남자들도 화류계 여자들에게 손을 뻗쳤다. 그런 분위기를 서툰 손장난과 외설스런 농담, 무모한 행동까지 손쉽게 이끌어냈다. 와인을 물처럼 퍼마시며,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자유분방해졌다. 알렉스의 도착이 알려지자, 그를 위한 몇 번의 건배가 오고갔다. 그는 미소로 답하면서도 열심히 릴리를 찾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몸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잠시 멈춰 춤추는 사람들을 둘러보는 사이, 애교 있는 미소와 기대 어린 눈빛을 반짝이는 여러 명의 여자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한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말을 걸었다. 레이디 제인 웨이브리지가 틀림없었다. 늙은 귀족을 남편으로 둔 그 젊은 부인은 아마존의 여왕처럼 차려입었다. 분홍빛 보디스 위로 풍만한 가슴이 거의 다 드러났다. “당신 알렉스죠? 넓은 어깨와 그 빛나는 금발 머리를 보면 알 수가 있다니까요” 또다른 여자가 그에게 몸을 기대며 허스키한 웃음을 던졌다. “왜 그 차림이 당신에게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까요?” 알렉스는 루시퍼 차림이었다. 코트와 바지와 조끼, 신발까지 모두가 반짝이는 진홍빛이었다. 얼굴에는 두개의 뿔이 달린 악마의 가면을 쓰고, 어깨 위로는 진홍빛 망토를 걸쳤다. “몇 년 동안이나 그 악마 같은 충동을 어떻게 감추고 있었을까. 난 언제나 당신에게 보이는 것 이상의 정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답니다!” 알렉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매달린 여자를 슬쩍 밀어냈다. 전에도 여러 여자들의 꼬리치는 시선과


아양떠는 몸짓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유혹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어제 있었던 릴리와의 게임이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빌어먹을, 그들은 그의 불한당 같은 행동에 혐오감을 느껴야 마땅했다. 이런 흥분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코트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손을 끄집어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서” 레이디 웨이브리지가 브랜디 냄새를 풍기며 그에게 매달렸다. “당신은 너무나 위험한 남자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그녀가 그의 귓불을 지긋이 깨물었다. 알렉스는 당황한 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머리를 뒤로 빼냈다. “저에게 전혀 위험한 면이 없답니다. 이제 그만 가봐야......” “아니, 아니야. 어젯밤 당신 얘기를 다 들었다구요. 당신이 그렇게 심술궂고 복수심이 강한 야수인 줄 아무도 몰랐답니다. 내가 릴리 로슨보다 백 배 더 즐겁게 해줄 수 있어요. 나와 같이 가요, 증명해 보일 테니까” 알렉스는 간신히 그녀의 집요한 손아귀에서 빠져 나왔다. “고맙습니다만, 전 다른 볼일이 있습니다. 즐거운 저녁 보내십시오” 서둘러 몸을 돌리다가 날씬한 여자와 부딪힐 뻔하였다. 그가 얼른 그녀를 붙잡아 주자 그녀는 모을 떨며 장미꽃 가면을 통해 정열적이고 겨외감 넘치는 시선을 던졌다. “주인님, 당신은 절 모르시겠지만 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알렉스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대꾸하기도 전에, 클레오파트라로 변장한 요부-둥그란 얼굴과 높은 목소리가 크로이돈 백작 부인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가 그의 품속에 몸을 던졌다. “날 위해 도박을 해줘요. 당신의 손에 내 운명이 달렸답니다. 당신의 정열을 운명의 수레바퀴에 던지세요!” 알렉스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매달리는 여자들 틈을 뚫고 방을 빠져 나갔다. 문에 도착했을 때 어디에선가 데릭 크레이븐이 나타났다. 환락의 신처럼 차려입은 남자치고, 그는 대단히 불쾌해 보였다. 포도송이와 잎사귀 화한 아래의 얼굴은 음울하고 무뚝뚝했다. 알렉스에게 험상궂은 시선을 던지고 나서 데릭이 뒤따라오는 여자들을 막았다. 그가 흥분으로 안달하는 여자들에게 비꼬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죄송하지만, 어둠의 왕자와 난 할 얘기가 좀 있어놔서, 이제 볼일들 보십시오” 여자들이 뿔뿔이 흩어져가자, 알렉스가 놀라는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고맙소, 그들은 어젯밤 일로 날 불한당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요” 데릭의 입술이 냉소적으로 비꼬였다. “불한당이 아니라 당신은 런던의 가장 자랑스러운 황소가 된 거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여자들이란. 그 마음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누가 알 수 있겠소” 그는 여자들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릴리뿐이었다. “릴리가 와 있소?” “그렇다고 말해야겠지요, 나으리. 그녀는 침을 질질 흐리는 사내놈들과 같이 발가벗은 채 앉아 있고, 그놈들에게 오천 파운드를 긁어내기 위해 노력주이오” 알렉스의 얼굴이 멍해졌다. “뭐라고?” “잘 들으셨을 텐데” “그런데도 막지 않았단 말이오?” “그녀의 안전을 바란다면, 당신이 직접 그 여자를 보살펴야만 하오. 난 머리가 빠개질 것 같소. 그 여자를 곤경에서 구해내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어느 방이오?”


알렉스가 가면을 벗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왼쪽 두 번째 방” 데릭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팔짱을 낀 채 알렉스의 뒤를 바라보았다. “두 개 버리고” 릴리가 침착하게 말하고 다른 카드들을 집어들었다. 그녀의 행운은 어젯밤보다 열 배 이상은 좋아진 듯하였다. 지난 한 시간 동안 그럭저럭 돈을 쌓아놓았고 이젠 서서히 늘려가는 참이다. 게임에 참여한 다섯 명의 남자들은 카드가 아니라 그녀의 투명한 옷 위로 호색적인 시선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난 하나 버리지” 코브엄 경이 말했다. 릴리는 브랜디를 홀짝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젖가슴을 가린 초록 잎사귀에 다시 한 번 향하는 것을 눈치채자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 작은 방은 남자들로 우글거렸다. 그들은 모두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릴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수치심이나 점잔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목적은 돈,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주세페에게 줄 돈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니콜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움츠러드는 것은 나중 일이다. 지금은 오로지 게임에 이겨야 한다. “하나 버리죠” 그녀가 카드를 하나 내던지고 다른 카드를 집어드는데 문득 등 쪽에 따끔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서서히 고개를 돌리니 알렉스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로슨 양, 당신과 얘길 좀 하고 싶은데?” 그의 시선에 릴리의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의자에 못박힌 듯한 느낌 중에도 안전한 것으로 달아나고픈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무관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중에 해요. 당신 차례예요, 코브엄 경” 그녀가 다시 카드로 관심을 돌렸다. “지금 당장” 알렉스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욱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유리잔이라도 깰 듯한 날카로움이 배어 있었다. 관객들이 흥미로운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릴리는 그를 쳐다보았다. 사람들 앞에서 감히 그녀가 자신의 소요라도 되는 듯이 말하다니! 흥, 워디가 이 방안에 있었다. 게임을 매끄럽게 유지하고 간섭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알렉스가 무슨 짓을 하려 든다면 워디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 클럽의 정식 회원이지 않은가. “난 게임중이에요” “이젠 떠날 시간이오” 그가 그녀의 손에 들린 카드를 낚아채 테이블 위에 던져 버렸다. 순간 그녀도 테이블에서 사과를 집어 던졌으나 그는 쉽게 피했다. 그리고는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빨간 망토 속에 갇혀 버렸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팔과 다리를 꼭 감싼 채 알렉스가 그녀를 어개 위로 들쳐 멨다. 그녀가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의 머리에서 긴 가발이 떨어져 바닥에 산처럼 쌓였다. “로슨 양은 이만 실례해야겠소” 알렉스가 테이블의 남자들에게 고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기로 결심했다오, 다음에 봅시다” 그들의 놀라는 시선 앞에서, 그는 릴리를 들쳐 메고 걸어나갔다. 그녀가 몸을 비틀며 격분한 고함을 외쳐대었다. “날 내려놔, 이 오만한 자식! 유괴는 법에 위배되는 짓이야! 이 고압적인 야만인, 당신을 고발해 버릴


테야. 워디, 손 좀 써봐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데릭 크레이븐, 고약한 겁쟁이, 어서 와서 날 도우란 말이야. 빌어먹을 인간들” “레이포드 경? 저, 레이포드 경” 워디가 조심스레 알렉스에게 다가와 반대의 뜻을 보였지만 소용없었다. “누가 권총 좀 갖다 줘요” 복도로 옮겨가는 릴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테이블의 멍하니 앉아 있던, 코브엄 경이 벌어진 입을 다물고 나서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이젠 게임을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대단한 여자이긴 하지만, 제대로 생각하는 데는 도움을 안 준단 말이야” “맞습니다, 그녀는 논리적인 사고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나의 성적 욕구는 끝까지 몰아갔지요” 옆에 앉은 노팅엄 백작이 흰머리를 긁으며 한마디하자,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리고 카드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무도회작의 생기 넘치는 음악 소리를 뚫고 찢어질 듯한 여자의 욕설 소리가 들리자, 연주자들이 머뭇거리며 호기심에 무도회장을 내려다보았다. 데릭의 단호한 신호에 연주를 계속하면서도 그들의 목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쭈욱 내밀어졌다. 데릭은 헤르메스 조각상 옆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의 놀라는 감탄사를 들었다. 춤추던 사람들이나 도박하던 사람들이나 저마다 중앙의 홀로 몰려들었다. 릴리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알렉스가 그녀를 현관 쪽으로 데리고 간 모양이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처음으로 릴리는 구출되어졌다, 그녀 자신은 별로 감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안도와 고통이 뒤섞인 감정으로, 데릭은 릴리의 욕설 따위 저리 가라할 정도의 욕설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루이 14 세 옷을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중앙 홀로 돌아와 웃어댔다. “알렉스가 레이디 이브를 어깨에 들쳐 멨어요. 진자 야만인처럼 그녀를 들쳐업고 나갔다구요!” 홀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많은 군중들이 그 광경을 보려고 밖으로 몰려나갔고, 나머지는 워디의 책상에 모여들어 내기 금액을 받아적으라고 난리를 피웠다. 워디가 커다란 책에 열심히 글씨를 쓰며 외쳤다. “레이포드 경이 최소한 여성 달 동안 그녀를 차지할 가능성은 오시 퍼센트, 일 년 은 오 퍼센트” “난 그들이 결혼하는 데 천 파운드 걸겠네. 그럼 승산은 얼마나 되겠나?” 파밍턴 경이 열성적으로 끼어 들었다. 워디는 그 질문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았다. “이 퍼센트입니다, 나으리” 흥분한 군중들이 테이블 주위로 더욱 모여들었다. 한편 알렉스의 어깨에서 무력하게 몸을 뒤틀어대던 릴리는 그들을 따라오는 몇몇 사람을 쳐다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이건 납치라구, 술 취한 망나니들아! 이 자를 정지시키지 않으면, 이 자를 고소하면서 당신들 이름까지 죄다, 아야!” 엉덩이에 호된 손바닥이 내려오자 그녀는 놀란 숨을 삼켰다. “조용히 해. 스스로 구경거리를 만들잖아” “내가 구경거리를 만든다고? 아야, 망할 놈의 인간!” 다시 한 번 엉덩이가 얼얼할 정돌 얻어맞자 그녀는 멍해졌다. 알렉스가 마차로 다가가자, 당황한 마부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알렉스는 릴리를 아무렇게나 콰당 내려놓고 나서 마차에 올라탔다. 계단에 줄을 지은 사람들에게서 유쾌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릴리의 성질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녀가 창 밖으로 소리를 질렀다. “눈앞에서 한 여자가 야만적인 대접을 받는데 박수를 치다니 대단들 하군요!” 마차가 갑작스런 출발에 릴리는 위자 옆으로 굴렀다. 그녀는 몸을 감싼 망토를 풀어 버리려고 애쓰다가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하였다. 알렉스는 도울 생각도 하지 않고 맞은편 좌석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베이스웨터에 있는 백조의 궁전으로, 소리 좀 그만 지르시오” “가문의 영지로군요, 그렇죠? 굳이 날 그리 데려갈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난 그 빌어먹을 것에 한 발 W 가도 들여놓지 않을 거니까요” “조용” “길이 얼마나 되든 난 내 집까지 걸어갈 거야” “입 다물지 않으면, 당신 볼기를 늘씬하게 때려줄 거요” 릴리가 몸부림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가지 난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어, 아버지도 감히 손대지 않았는데” “그분은 신경 쓰지 않은 거지. 진작에 무슨 수를 쓰셨어야 했어. 누군가 당신 볼기짝을 때려주었어야 했소” “난......” 열띠게 대꾸하다가, 그녀는 그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고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입을 다물고 망토를 푸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했지만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고, 약간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녀가 잠자코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어젯밤 이후로 그를 두려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를 막을 사람은 세상에 없어 보일 정도로 권위가 있다. 그는 그녀에게 남아 있던, 돈을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박탈했다. 그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탓이기도 하였다. 그의 인생에 참견 하지만 않았더라면! 재커리의 부탁을 분별력 있게 거절하고 자기 일에만 신경 썼더라면, 알렉스는 지금쯤 페넬로페와 부모님과 같이 시골에 머물러 있을 것이었다. 자신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도 못한채...... 그를 침대에 묶어놓았던 것이 생각나자 두려움이 생겼다. 알렉스는 그런 모욕적인 처사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백 배로 갚으려고 그녀를 괴롭히는 일에 온 힘을 쏟을 것이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연한 은빛 눈동자가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으며 그의 검붉은 의상이 아찔할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소름끼치는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자 악마와 같이 마차에 갇혔더라도 이보다 지독한 기분이 아닐 것이다. 마차가 정지하자 하인 한 명이 문을 열었다. 알렉스는 릴리를 안고 마차에서 내려 백조의 궁전 계단을 올라갔다. 하인이 재빨리 달려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호지스 부인, 호지스 부인” “일찍 돌아오셨군요, 주인님” 문을 열고 나온 가정부가 알렉스의 팔에 안긴 여자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맙소사, 레이포드 경. 그분이 다치셨나요?” “아직은 아니오” 알렉스가 험악하게 대꾸하고 나서 릴리를 안으로 옮겼다. “릴리는 열심히 몸을 비틀어댔다. “난 여기 잇지 않을 거야. 당신이 내려놓은 즉시 떠날 거라구!” “몇 가지 일을 확실히 하기 전에는 안 되오” 릴리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안쪽 홀을 통과하여 부드럽게 휘어진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우아하며 소란스럽지 않은 스타일로 장식된 깔끔한 집이었다. 커다란 창과 고급스런 석고 조각이 어울어진 현대적인 분위기, 집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는 알렉스의 시선을 느꼈다. “내 인생을 망치려는 게 목적이라면, 당신은 계획 이상으로 성공하셨군요.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할 거예요” “게임에서 데리고 나온 것이? 뭇 사내들 앞에서 그 몸뚱이를 자랑할 기회를 망쳐버렸다고?” “내가 진심으로 그걸 즐긴 줄 알아요? 나한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만약에 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방금 하려 했던 말은 정말 위험했다.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의


비밀마저 거의 쏟아낼 뻔하였다. 알렉스는 즉시 그녀의 말을 재촉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지? 크레이븐이 말한 그 오천 파운드와 관련이 있는 건가? 그 돈이 왜 필요한 거요?” 릴리는 유령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데릭이 당신에게 오천 파운드에 대해 말했다는 거예요?”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 맙소사, 세상에 믿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니까. “그 인간을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배신자” “도박 빚이지? 당신 숙모에게 물려받았던 돈은 어떻게 하고서? 전 재산을 도박에 털어 놓은 거요? 도박에 인생을 맡긴채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온 모양이군, 그런 무책임한” 그가 말을 중지하고는 이를 악물자, 릴리는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돌렸다. 자신은 그런 방탕한 여자가 아니라고, 도박에 돈을 탕진하는 멍청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주세페의 협박과 딸아이를 찾기 위한 탐정 비용으로 갖고 있던 돈을 모두 쓰지 않았다면, 그녀도 편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주사위 테이블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노려보며, 알렉스는 그녀를 벌하고도 싶고 키스하고도 싶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갈등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다. 무언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는 그녀를 안고 커다란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녀의 망토를 풀어준 다음 망토를 의자에 던지고 돌아서는 순가, 그녀가 따귀를 갈겼다. 그리고 재빨리 방을 떠나려는 그녀의 옷자락을 그가 힘껏 움켜잡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그에게서 몸을 빼내려고 몸부림치던 순간에 그녀의 투명한 드레스가 찢어졌다. 그녀가 옷을 움켜쥔 채 머뭇머뭇 벽으로 물러났다. 알렉스가 서서히 다가와 벽에 두 손을 버티고는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덩치는 그녀의 세 배는 되어 보였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녀의 가냘픈 몸에 그려진 뱀의 형상을 훑어보았다. 페인트칠한 곳이 그녀의 하얀 피부에 까맣고 파란 얼룩을 만들었다. “나한테 손대지 마. 그렇지 않으면, 다시 당신을 때릴 거야” 그가 냉소적으로 대꾸하였다. “당신한테 손댈 생각 없소.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 그 역겨운 것이 나 좀 씻고 나오시오. 욕실은 저쪽이오” 그녀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감정으로 몸을 떨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지요, 나으리. 난 몸을 씻지 않을 거랍니다. 오늘밤 당신과 침대에 들지도 않을 거고, 당신과 얘기도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하려는 말은 죄다 알고 있어요. 내 대답은 거절이에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소?” “나한테 매력을 느끼고, 날 원하게 되었으니, 당신이 싫증을 느낄때까지 애인으로 삼겠다는 거겠죠. 그 다음에는 관대한 이별의 선물을 받을 거고, 난 기다리고 있는 후원자들 중 하나에게로 가야겠지요. 내 얼굴에 주름이 잡힐 때까지......그런 계약을 원하는 거잖아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의 몸에 있는 그 얼룩을 지우는 것이오” 그의 조용한 말에 릴리는 신경질적으로 짧게 웃었다. “날 놓아줘요. 내가 당신의 모든 걸 망쳐버렸고, 이젠 당신이 내 모든 걸 망쳤어요. 우리는 비겼다구요, 그러니 날 그냥......” 그녀의 말은 알렉스의 키스로 중지되었다. 그녀가 다시 따귀를 올리려 하자, 이번에는 그녀의 손목이 그에게 붙잡혀 버렸다. 그들은 둘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릴리는 찢어진 옷이 몸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페인트 얼룩만을 제외하면 벌거벗은 상태. 무언가 가릴 만한 것을 찾으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팔을 놓아주지 않은 채 그녀의 팔을 높이 올리고 그녀의 몸을 쓰윽 훑어보았다. 그의 숨결이 점점 더 가빠졌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그녀는 차가운 벽으로 더 움츠러들며


애원이나 거부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의 부드러운 손이 그녀의 어깨와 옆구리와 갈비뼈를 스쳤다. 그의 손바닥이 젖가슴으로 올라와 부드럽게 감싸자, 그녀의 젖꼭지가 단단해지며 몸서리가 쳐졌다. 자신이 애무하고 있는 날씬한 몸매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정열로 경직되었다. 릴리는 반응하지 않으려고 그의 손길이 주는 쾌감을 최대한 무시했다. 하지만 그녀의 감각은 어젯밤 느꼈던 그 엄청난 기쁨을 기억하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하였다. 자신을 내리누르던 그의 단단한 몸을 떠올리자, 억제할 수 없는 욕망으로 몸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죠?” 그의 손이 그녀의 살 위로 미끄러지며 젖가슴으로 올라가자, 그의 손에 묻은 페인트가 그녀의 배를 푸른빛으로 칠했다. 릴리는 그를 밀쳐내려고 그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관능적인 그림에 심취한 화가처럼 그녀의 몸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그려진 뱀의 머리가 그이 손에 잡혀, 옆구리까지 에메랄드 빛으로 문질러져 내려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단단한 압력이 더 가까이 다가오며 그의 뜨겁고 굶주린 입술이 그녀를 찾았다. 그의 손이 다급하게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자신에게로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찾으며 그가 신음하였다. 그의 욕망은 이성을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무력한 흥분으로 몸을 떨며, 릴리가 그의 넓은 어깨로 팔을 올려 그의 코트를 만지작거렸다. 벗은 몸뚱이에 그의 리넨과 벨벳이 닿는 느낌은 새롭고도 아찔했다. 그가 그녀의 어깨 위에 아플 정도로 입술을 눌렀다. 그녀는 그의 금발 머리에 얼굴을 돌려 그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그의 혀가 살갗 위로 미끄러지더니, 그녀의 목덜미 맥박치는 곳에 머물러 찰싹였다. 알렉스가 머리를 뒤로 빼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만지며, 자신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열기가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가 열성적인 신음을 내며 그 애타는 압력을 몸 속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벽으로 들어올렸다. 릴리는 그의 어깨를 움켜잡고 신음할 뿐이었다. “두려워하지 마. 다리를 나에게 감아. 그래, 잘 했어” 그녀는 묵직한 것이 침입하여 들어오자 자신의 몸이 한껏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날카로운 숨을 들이쉬며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고 열심히 매달렸다. 알렉스는 그녀의 안에서 움직여대며 그녀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가 쾌락의 소리를 내고 있다. 입술에 닿는 그 떨림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나긋한 몸뚱이가 뒤로 휘어지면서 그의 목덜미를 힘껏 움켜잡았다. 그가 더욱 깊이깊이 밀고 들어가면서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움직여 그 부드러운 털들을 열심히 쓰다듬었다. 그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한순간 그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몸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부를 떨었다. 알렉스도 즉시 자신을 풀어주엇다. 잠시 숨을 멈춘 채 그의 몸이 해방의 경련을 일으켰다. 그들은 서로에게 기댄채 숨을 헐떡이며 뭉쳐진 근육의 긴장을 풀어갔다. 알렉스는 조심스럽게 릴리의 발을 땅으로 내려놓고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부축해주며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은 쾌락의 여파를 음미하는 듯 뜨겁고 달콤하였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나서 바지를 고쳐 입었다. 릴리는 벽에 기댄채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두 팔로 자신을 감았다. 그녀는 특이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 같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알렉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릴리” 그녀에게로 내미는 그의 손을 보며 그녀가 움찔 피했다. 알렉스의 손은 페인트로 얼룩져 있었다. “그걸 씻을 거요? 아니면 내가 또 다른 이유를 대야 하는 거요?” 릴리는 자신을 몸을 덮고 있는 무지개색을 내려다보았다. “모르겠어요” 이렇게 뒤죽박죽인 상태로는 무엇 하나 또렷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신경을 갈가리 찢어놓은 마약에 취한 것처럼 요동쳤다. 미칠 듯이 불안하고 울고 싶었다. “집에 가겠어요. 내가 입을 만한 셔츠나 망토가......”


“안 돼” 그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한테 부탁하는 게 아니라 내 의지를 말하는 거라구요, 집에 가겠어요” “그런 모습으로는 안 되오. 아니, 그 페인트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표정 말이오. 끔찍한 짓을 저지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잖소” “난 언제나 끔찍한 짓을 저질러요. 내 인생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어려움의 연속이지요, 나으리. 하지만 난 당신 간섭 없이도 잘 살아남았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예요” 알렉스는 그녀의 항의를 무시하고 그녀의 몸에 다시 손을 올려 소중한 조각상을 만지는 듯이 그녀의 배꼽과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릴리의 침착함은 금세 사라졌다. 그녀가 어색하게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곧이어 그의 차분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돈이 문제인 거요?” “당신에게 도움받고 싶지 않아요” 허벅지 위의 곱슬거리는 털에 그의 손가락이 스치자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오천 파운드면 충분한 거요, 아니면 더 필요한가?” “그에 따르는 의무를 정확히 말해 주는 게 어때요? 설마하니 아무 조건도 없는 선물은 아닐 테지요?” 그는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건은 있소” 릴리는 불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적어도 정직하긴 하군요” “당신보다 더 정직하지” “난 거짓말하지 않아요” “그래, 진실을 그냥 놔둘 뿐이겠지” 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일으킨 흥분을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 혼내주기 못하는 게 애석하네요”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벽에서 떼어냈다. 그의 손에 이끌려가면서 릴리가 분노의 소리를 내질렀다. “난 당신 말에 아무것도 동의한 적 없어요!” “알고 있소, 욕실에서 얘기를 계속합시다” “내가 당신에게 목욕하는 모습을 보일 걸로 생각한다면......” 그가 갑자기 멈춰 돌아서더니, 그녀에게 강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가 놀라움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씨익 웃으며 욕실까지 그녀를 이끌고 갔다. 그녀를 놓아준 다음 욕조로 가서 금빛 수도꼭지를 틀자, 뜨겁고 찬 물줄기가 수증기를 피우며 쏟아졌다. 두 팔로 자신을 가린 채, 릴리는 놀라운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히 퇴폐적이라 할 만했다. 대리석 화로와 화려한 색색의 페인트로 빛을 낸 하얀 타일들, 전에 플로렌스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200 년 이상 지난 대단히 귀한 이탈리아 식 타일이었다. 욕조 또한 그녀가 본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두 사람이 들어가도 남을 크기였다. 그녀의 정숙한 자세에 알렉스가 피식 웃으며, 젖가슴을 감싼 그녀의 팔을 떼어냈다. “크레이븐스에서 천조각 두 개밖에 걸치지 않은 채 행진을 벌였으면서”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내 가발이 많이 가려 주었다구요” “충분치는 않았지” 그가 억지로 그녀를 욕조 안으로 넣었다. 릴리는 성난 고양이처럼 부글거리는 물 속에 앉았고, 알렉스는 자신의 더러워진 옷가지를 벗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은 안 돼” 처음에 릴리는 그의 퉁명스런 자신의 태도를 말하는 줄 알았지만, 이내 크레이븐스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자신에게 명령을 하리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다. 그녀는 어느 누구의 명령도, 부모님의 명령조차도 받은 적이 없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플리트 가라도 벌거벗은 채 걸어 다닐 수 있어요” 그는 엄한 시선을 던졌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릴리는 유리그릇에 담긴 비누를 집어 팔과 가슴을 열심히 문지르고는 물을 뿌렸다. 욕실 안에 가득한 수증기와 뜨거운 온기가 긴장을 풀어 줬다.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때 알렉스가 욕조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벗은 몸을 보고 그녀가 재빨리 물에서 나가려 했다. “안 돼요, 당신과 같이 목욕하고 싶지 않아요. 난 오늘밤 당신의 거친 행동을 이미 참을 만큰 참았다구요” “앉으시오, 십 분 전만 해도 내 거친 행동에 꽤나 반한 것 같던데” 그녀의 어깨를 잡아 누르고는 그가 그녀의 뒤쪽으로 들어와 한쪽다리는 굽히고 다른 다리는 그녀의 옆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앞으로 손을 뻗어 비누를 빼앗았다. 릴리는 그의 발을 놀려보면서 옆구리에 닿는 그의 무릎을 느꼈다. 거품을 낸 그의 손이 그녀의 온몸으로 움직이고 다녔다. 그녀는 말없이 앉아 젖가슴의 페인트가 거품으로 없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알렉스는 그녀의 어깨 위로 물을 뿌려주고 살결이 뽀얗게 빛날 때까지 닦아주었다.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그녀를 더 바짝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비누 거품을 내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움직였다. 욕실 안은 조용하였다. 부드러운 물소리와 타일에 반사되는 그들의 숨소리뿐이었다. 릴리는 욕실의 따뜻한 온기에 저항심이 사라졌다.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반쯤 눈을 감은 채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로 있는 동안에도,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매끈하게 만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젖은 목덜미와 턱부분에 살짝 닿았다. 그녀는 그에게 더욱 깊이 몸을 내맡기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손이 어느덧 그의 허벅지로 기어올라가 그 단단한 근육을 움켜쥐었다. 물 속에 잠긴 그의 거친 턱이 부드러운 벨벳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손길에 알렉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등에 닿은 그의 가슴만이 들먹거렸다. 릴리는 그가 자신을 밀어내며 이것으로 오늘의 유희를 끝났다고 말할 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거품을 낸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 주위와 작고 단단하게 뭉친 그 정상으로 춤추는 나비처럼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높이 들어올리며 쾌락의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젖가슴 위에 따뜻한 물을 부어주었다. 또다시 비누를 앞뒤로 문지른 다음, 그의 미끌미끌한 손바닥이 그녀의 배 위로 움직이다가 손가락 하나가 오목한 배꼽 안으로 살짝 파고들었다. 순간, 릴리는 불구덩이 속에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몸이 열망으로 인하여 굳어졌다. 그가 그녀의 발목에 다리를 걸어 넓게 벌렸고 r 의 손이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의 긴장된 배와 더 아래쪽으로, 그의 손가락이 흠뻑 젖은 털들을 통과해갔다. 릴리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내 생각에는” 그녀가 숨가쁘게 말하며 입술을 축였다. “당신이 생각을 그만하는 게 어떻겠소?”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가운데 손가락을 그녀의 안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그의 달콤한 손길이 몸속으로 퍼지자 그녀의 몸은 재빨리 다급한 고통으로 꿈틀거렸다. 그의 애무가 깊어질수록, 그녀의 몸은 점점 더 그 감질나는 압력을 한껏 받아들이기 위해 팽팽해졌다. 욕조 안의 물이 리듬감 있게 철썩이자,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아차렸다.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모든 걸 잊고 이 순간에만 전념하라고 그녀에게 중얼거렸다. 물과 그의 몸에 휩싸인 상태에서, 그의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고 그녀에게서 극도의 쾌감을 이끌어냈다. 그는 끈기 있게 절묘한 무한대의 클라이맥스로 그녀를 몰아갔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녀의 육체는 활처럼 휘어졌다. 그는 그녀의 고개를 뒤로 젖혀 강렬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요, 윌헬미나 로슨. 그리고 오늘밤 나와 같이 머물게 될 거요”


그는 젖은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그녀의 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옷을 입었거나, 무기가 있거나, 하다못해 한점 기력이라도 남았더라면 떠날 방법을 찾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릴리는 그가 두터운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그녀를 침실로 옮겨가는 걸 그대로 허락하였다. 알렉스는 램프를 끄고 그녀를 침대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들은 둘 다 그녀가 그에게 5 천 파운드를 받을 것이며 내일 그 계약에 대해 논의할 것임을 알았다. 그 무언의 동의가 릴리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몸을 허락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는 평화로움도 있었다. 그녀는 주세페에게 돈을 줄 것이고 딸을 찾을 수 있는 탐정을 다시 고용할 것이다. 어쩌면 지난 2 년 간의 악몽이 이제 곧 끝나지 않을까? 그의 팔이 그녀를 꼭 끌어당겼다. 그의 숨결이 곤한 잠으로 빠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친 상태에서도 릴리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일을 피하려고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그녀의 인생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로. 릴리는 자신의 옆에서 잠든 남자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를 잔인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었는데, 그녀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사실은 극히 드문 깊이 있는 감정의 소유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자제력 강하고 점잖은 성품의 사람으로 생각하겠지만, 릴리만이 그의 성질을 자극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사실이 기분 좋았다. 자신이 그에게 그렇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이브 의상을 입은 그녀를 많은 남자들이 보았다는 사실에 격분하였다. 그녀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남자의 소유욕에 즐거워하다니, 자신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졸린 상태에서도 그녀에게 팔을 두르며 더 가까이 다가들었다. 그녀는 그에게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로, 그의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긴장을 풀었다. 릴리의 뒤틀림과 발을 차대는 움직임으로 알렉스는 잠에서 깼다. 그가 눈을 비비며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슨 일이요?” 하품하며 중얼거리다가, 낮으면서도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듣자 그의 고개가 홱 옆으로 돌아갔다. “릴리? 제기랄, 무슨?” 그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릴리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서 몸을 비틀고 있었다. 온몸이 요동을 치며, 손으로는 침대보를 한 움큼 움켜쥐고 있었다. 흥분한 헐떡임 사이사이에 무언지 모를 말들이 흘러나왔다. “릴리”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에서 머리를 넘겨주었다. “쉬이, 꿈을 꾸는 거요, 그냥 악몽일 뿐이야” “안 돼!” “눈을 떠봐요, 아가씨” 그 순간 레이포드 파크에서 몽유병으로 걸어다니며 중얼거리던 그 이름이 귀에 들려왔다. 그때는 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더 확실히 들렸다. 그녀는 한 여자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댔다. “니콜, 안 돼, 안 돼!” 그녀가 흐느끼며 두 손을 휘저었다. 공포와 비참함을 느끼는 듯 그녀의 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알렉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연민과 함께 강한 호기심이 생겼다. 니콜이라, 로슨 가족에게서 그 이름을 들은 적은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릴리의 비밀스런 과거와 연결된 부분인 듯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릴리, 일어나시오. 진정하고, 당신은 괜찮아” 그녀가 땅에 내동댕이쳐진 사람처럼 숨을 멈추며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가 그녀를 품안에 꼭 안아주자,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릴리가 이런 울음을 울 줄은 몰랐다.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깊은


슬픔이 담긴 이런 흐느낌. “릴리” 그가 그녀의 떨리는 몸을 어루만지며 달래려 노력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흐느낌은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상처 깊은 울음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라면 해와 달이라도 구해 줄 수 있다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릴리, 제발. 그렇게 울지 마” 한참이 지나서야 젖은 얼굴을 그의 가슴에 비비며 그녀의 울음이 잠잠해졌다. 알렉스는 이제 설명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지친 한숨을 쉬며 너무나 갑작스럽게 잠에 빠졌다. 마치 눈물이 모든 기운을 앗아간 것처럼. 그는 멍하니 자신의 팔 안에서 잠이 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니콜이 누구지? 그 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가 들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묵직하게 기울어지자, 그의 긴장도 다소 약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좀더 혼란스러운 무언가로 바뀌었다. 자신의 이강한 보호본능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그녀를 보살펴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원치도 않고 필요치도 않다는 이 용감무쌍한 여자를. 그녀는 아마 믿지 않겠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다. 그녀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 간단한 진실이 놀라우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머릿속에 입술을 누르면서 기쁨으로 마음이 충만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어떤 말과 약속으로라도 그녀를 자신에게 붙잡아두고 싶었다. 때가 되면 그녀도 그를 좋아할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모험이다. 우선 그녀의 비밀스런 과거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현명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져 버렸으니.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원했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그는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였다. 이번 한 번만은 논리를 접어두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리라. 릴리는 편안하게 몸을 쭉 뻗었다. 눈을 깜박이며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푸르고 하얀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녀에게 향해 있는 알렉스의 투명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어깨가 들리며 드러난 젖가슴에 이불을 끌어올리려는 그녀의 손을 저지하였다.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잘 잤냐고 물어왔다. “잘 잤어요” 릴리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어젯밤에는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자신이 그의 잠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아무 질문도, 의심스런 시선도 보내지 않는 걸까. “내가 깨기도 전에 당신이 빠져 나갈까봐 걱정했소” 그녀는 어제 아침 일이 떠오르자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입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에게 옷이 없다는 건 나에게 대단히 이로운 점이지” 그의 장난스런 분위기에 불편해진 릴리가 시트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내 집에 사람을 보내서 드레스와 그의 것들을 가져오라고 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내 하녀인 애니가 무얼 가져와야 할지 알 거예요” 그가 시트를 빼앗고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자 그녀의 위엄 있는 태도가 무너졌다. “알렉스” 그의 손이 그녀의 몸 위로 가볍게 움직였다. “당신 입에서 내 이름을 듣는 게 기분이 좋아” “거짓말하지 말아요, 게다가 난 지금 옷도 필요하다구요” “어째서?” “남 보기에도 좋지 않을 테고, 그런 건......”


“골치 아픈 생각은 하지 마” 그가 그녀의 젖가슴을 감아쥐었다. “당신 정말!” 그녀는 당황해서 외치다가 그가 놀리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알렉스!” 그의 따듯한 입술이 젖가슴으로 내려왔다. 허벅지에 그의 남성이 불끈 서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감각도 반응을 보였고, 그가 그녀의 팔다리를 넓게 벌려 위로 올라타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면서 그녀의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그녀가 머뭇머뭇 그의 등을 감싸않았다. 다리를 더 높이 들어올려 무릎으로 그의 엉덩이를 감싸자,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환희의 숨결을 쏟아 부으며 빠르게 클라이맥스로 돌진하였다. 그의 몸이 굳어지며 몸서리를 치더니, 한숨과 함께 긴장이 풀렸다. 그 나른한 침묵을 먼저 깬 쪽은 릴리였다. 그녀는 시트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일어나 앉았다. “우린 당장 할 얘기가 있어요. 너무 퉁명스럽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그녀가 애써 씩씩하게 말하려 애쓰며 목을 가다듬자, 그는 눈을 빛내며 씨익 미소지었다. 그녀가 언제 그에게 퉁명스럽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돈과 의무에 대한 거예요” 그는 자신의 무릎 위로 이불을 끌어 당겨주는 그녀의 시도를 무시한 채 일어나 앉았다. “오, 그래. 내 돈과 당신의 의무에 관한 거겠지” 그녀가 불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상하게도 쾌활했다. 알렉스의 미소를 보니 그녀의 심리적 균형이 자꾸만 무너지려 했다. “어젯밤 당신은 오천 파운드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그랬지” 릴리가 짜증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그 돈을 나에게 줄 생각이 있나요?” “그럴 생각이니까 말했겠지” “그 보상으로 무얼 원하죠?” 그 순간 알렉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로맨틱한 순간이라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긴장으로 입술을 깨문 채 초조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혈관 속에 흐르는 모든 정열과 감탄이 그녀에게 감동을 못 준 게 분명했다. 그도 사무적인 어조로 되받았다. “우선, 당신과 침대를 같이 쓰고 싶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예상한 바예요. 나한테 그 정도 금액의 가치가 있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죠” 그 비꼬는 말투가 그를 재미있게 한 듯했다. “당신이 몇 가지 기본적인 기술을 습득한다면 훨씬 더 가치 있어질거요” 릴 리가 재빨리 시선을 떨어뜨렸지만, 이미 놀란 표정을 드러낸 후였다. 그들이 이미 한 행위보다 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으리라. 그는 천천히 미소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 맨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물론 오래 걸리면 안 되겠지” “집이 한 채 있어야 할 거예요, 즐길 수 있을 만큼 크면서도 적당한 위치에 있는 그런 집이요” “여긴 마음에 드나?” 애인을 두는 장소로 가문의 영지를 제안하다니 그가 분명 놀리는 것이리라. 릴리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레이포드 파크는 어때요?” “그곳이 당신 마음에 든다면 그렇게 하지” “이런 일이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모르겠어요? 당신은 대단히 재미있는 모양이지만, 난 제대로


해결하고 싶다구요! 진지하게 행동하세요” “난 진지하오” 그가 그녀를 가슴에 끌어당겨 키스하였다. 다시 고개를 들고, 그녀의 등을 껴안고 당혹스러워하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내 은행 계좌에 당신 이름을 포함시킬 거요. 당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마차를 만들어주겠소. 당신이 원하는 어떤 가게든 구좌를 얼어주겠소. 탐탁지 않긴 하지만, 크레이븐스에서 도박하는 것도 허락할 생각이요. 당신이 그곳을 좋아한다는 걸아니까. 하지만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옷만을 입어야 하오. 그리고 당신이 나 아닌 다른 어떤 남자의 관심을 받아들인다면, 그 사랑스런 목을 비틀어줄 거요. 당신은 매일 밤 내 침대에서 잠을 잘 거고, 내가 다른 곳으로 떠날 때마다 같이 가게 될 거요. 당신의 사냥이나 다른 즐기는 행동들은 계속해도 좋다고 허락하겠소, 내가 같이 참가하는 한에서. 더 이상 혼자 말을 타는 일은 없을 거요. 당신 행동 중에서 무모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내가 즉시 중지시킬 거요” 릴리는 몸이 경직되었다. 그런 조건은 한 번도 자유를 구속당하지 않던 여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반대도 없었다. “난 비이성적으로 굴지 않을 거요. 그런 경우가 있다면 당신이 일일이 말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그제서야 그녀의 입에서 간신히 말이 새어나왔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난, 난 아이를 갖지 않을 거예요. 난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요, 절대 아이를 갖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억제된 긴장감을 알아챈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좋소” “마음속에 다른 생각이 있으면서 찬성하지 말아요” “진심이 아니라면 좋다고 말하지도 않았을 거요” 그는 그녀의 고집 속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감지하였다. 시간을 갖고 기다린다면, 그녀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시작한 것인지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에게서 상속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헨리가 가문의 핏줄을 이어줄 것이니까. 릴리는 낮고 억제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리고 만약 나에게 싫증이 났을 때는,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것들은 모두 내가 갖게 해주세요” 그녀가 들은 바로는, 그것이 후원자와 정부 사이에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어차피 이런 짓을 해야 한다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게 있군”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린 알렉스가 마침내 다시 말했다. “그게 뭐죠? 돈에 대해서인가요? 집? 데릭과의 관계 때문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릴리, 조용히 하고 내 말 좀 들으시오” 그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난 당신을 정부로 두고 싶지 않소” “그게 무슨? 그녀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분노로 이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럼 지금껏 날 놀린 건가? 이것도 그녀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려는 악독한 계획의 일부였던가? “그럼 우리가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었던 거죠?” 그는 괜히 시트의 구석구석을 펴는데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소”


10. “당신의 아내?” 릴리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수치심으로 인해 금세 차가워졌다. 그래 지금까지 이 남자는 농담을 한 것이다. 그녀의 침대에 묶여서 밤을 지내는 동안 이렇게 잔인하고 교묘한 계획을 짠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어쩌면 여전히 그녀를 애인으로 두고 싶은데, 그녀의 위치를 명확히 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지배권을 갖고, 그녀는 그의 장난감이 될 것임을.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자신이 너무나 경멸스러웠다. 그녀의 상처는 너무나 깊어 화를 낼 수 조차 없었다. “당신의 그 사악하고 뒤틀린 유머 감각이 날 역겹게 하는 군요” 그의 손이 즉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아니야. 농담이 아니오.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 거요” 그녀가 그의 순을 깨물고는 노려보았다. “나에게 결혼 신청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이미 당신 정부가 되겠다고 동의했잖아요”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에 난 그녀의 이빨 자국을 쳐다보았다. “내가 당신을 지나치게 존중해 준 모양이로군, 이 신경질적인 여자 같으니!” “당신의 존중 따윈 원하지 않아요. 내가 원한는 건 오천 파운드뿐이라구요” "다른 여자였다면 내 결혼 신청에 우쭐했을 거요. 감사라도 했을지 모르지. 난 당신에게 스캔들 이상의 관계를 제안하는 거요“ “당신의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견해로 치자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난 우쭐하지도 않고 물론 감사하지도 않아요. 난 당신 정부가 되든지, 그게 아니면 아내는 결코 되지 않을 거라구요” “당신은 내 아내가 될 거요” “날 소유하고 싶은 거로군요!” 그녀가 그에게 벗어나려 애쓰며 비난하였다. “그렇소” 그가 그녀를 침대에 납작하게 눕히고는 그 위로 몸을 실었다. “그래, 난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내 거라는 걸 알리고 싶소. 당신에게 내 이름과 돈을 주고 싶소. 당신이 나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소. 당신 몸속에 들어가고 싶고 당신의 몸뿐 아니라 생각의 일부도 되고 싶지. 당신의 모든 걸 갖고 싶소. 당신의 신뢰를 얻어내고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필요한 거라면 어떤 빌어먹을 것이라도 다 주고 싶다구. 그게 당신을 두렵게 하는 거요? 그래, 나도 이런 느낌이 지독히도 겁이 나니까. 내가 없앨 수만 있다면 이런 느낌 따위는 집어치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당신이......” 그가 목이 메어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워요. 맙소사,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로군요!” “난 해리 힌돈이나 다른 어느 자식의 실수 때문에 당신을 놓치는 바보는 안 돌 거요, 릴리. 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아. 당신이 이 세상 모든 인간을 다 증오해도 괜찮소, 나만을 빼면” “내 거절이 사랑에 실패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나요? 기 막혀, 한 동안은 당신의 그 지긋지긋한 조건이나 규칙, 변덕을 참으며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마 몇 년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가 평생을 그렇게 얽매여 살거라 생각하나요? 무엇 때문에? 당신에게 받는 재산과 법적 권리 때문에? 당신에게 매일 밤 봉사하는 특권 때문에? 그것이 꽤나 유쾌하긴 하지만, 내 모든 걸 희생할 정도의 가치는 없답니다” “유쾌하다고” 그녀가 반항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너무 무거워요, 난 숨도 못 쉬겠어요”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말해 보시오, 릴리. 매일 밤 도박으로 시간을 보내야 하면서도 자유를 질기시나? 외로움을 느끼는 밤이 없다고 말할 셈인가? 위로와 친구가 필요할 때는?” “난 필요한 걸 모두 갖고 있어요” 그녀는 그의 찌를 듯한 시선을 되받아치려 했지만, 그 강렬함에 버틸 수가 없었다. “난 그렇지 않소” 릴리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럼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이 많잖아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하는 여자들, 당신을 사랑해 줄 여자요” “당신 같은 사람은 없소” “그래요? 내가 언제부터 당신에게 그렇게 끝없는 기쁨의 근원이 되었을까요?” 그녀는 그의 얼굴에 번지는 나른한 미소를 보았다. “우린 처음부터 서로에게 끌렸소. 우린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우리는 만나게 되었을 거요. 당신도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것처럼, 나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소” “바이런의 시를 너무 많이 읽으신 모양이네요. 당신이 그렇게 로맨틱한 헛소리를 하다니” “당신은 날 선택했소” “그런 적 없어요!” “당신이 크레이븐스에서나 주말의 사냥터 혹은 파트에서 만난 수백 명의 남자들, 젊은이나 늙은이나 신사나 지성인들이나, 귀족이나 은행가들이나, 벼락부자들이나, 그 모두에서 당신이 자신의 인생과 연결시킨 남자는 나뿐이었소. 이런저런 논쟁으로 날 자극하고, 내 집으로 와서 내 인생에 끼어들고, 결혼하려는 계획을 막았고, 런던까지 날 끌여들여서 당신 침대에 묶어놓았고, 나와 같이 도박을 하고 내 돈에 당신의 몸을 걸었소. 당신이 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내가 더 설명해 줘야 하나? 지금껏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활에 끼어 든 적이 있었나? 내 생각엔 없는 것 같은데” “모두 내 동생 페니 때문이었어요”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았소. 당신은 날 원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한 거요” “자만심 가득한 노새!”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나에게 자만심만이 가득한 거요? 그렇다면 나더러 당신 인생에서 꺼져버리라고 말하시오” “내 인생에서 꺼져주세요” 그녀가 쉽게 대꾸했다. “지난 이틀 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말해 보시오” “그건 아무 의미도 없었어요!” “다시는 날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시오” “다시는......” 릴리는 자신의 위에 보이는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음었다. “말해 봐, 그럼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겠소” 릴리가 다시 시도하였다. “다시는 당신을” 그가 이미 한 것보다 더, 그녀의 인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그를 잃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가 다른 말로 구슬린다면,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든 설득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해준다면. 하지만 그는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유순하고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딸아이를 찾을 수 있는


그녀의 작은 기회마저 망쳐버릴지도 모른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아 말을 내뱉는 것이 힘들었다. “당신, 정말로 내가 부탁하면 사라져줄 건가요? 그렇게 쉽게?” 알렉스는 아랫입술을 핥는 그녀의 혀끝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당지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을 뿐이오” “오, 맙소사. 자신이 없어요” 그녀가 지친 웃음을 토해내었다. 어째서?“ 릴리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패배와 어려움에 반항적인 요기로 대항해 왔다. 주세페조차도 그녀의 용기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알렉스만이 그녀의 자신만만함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녀가 그에게 얼굴을 묻으며 신음하였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사랑스런 사람” 그가 그녀의 작은 목과 어깨에 무수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팔이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난 그냥 당신 애인이 되는 게 더 좋아요” 그녀가 비참하게 중얼거렸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되오. 그게 우리의 방식이지” 그가 그녀의 이마에서 머리를 쓸어넘기며 피식 미소지었다. “게다가 당신과 결혼하는 것이 버튼을 내 집사로 고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거든” 그의 입술이 내려왔다. “좋다고 대답해요. 그렇게 말하라구, 달링” 릴리는 오로지 돈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고 자신을 납득시켰다. 청혼을 받아들인 것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겁났다. 알렉스의 아내가 되면, 그녀를 대단히 부자가 될 것이다. 니콜을 되찾을 수 있는 돈이 생기고, 주세페를 추적할 실력 잇는 탐정도 고용할 수 있다. 전에 고용했던 녹스 씨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이젠 비용 걱정 없이 열 명까지도 부릴 수 있었다. 딸아이를 찾을 때까지 도시를 이 잡듯이 뒤질 것이다.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무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알렉스는 당장 계약취소나 이혼을 하려 들겠지. 그럼 그녀는 니콜과 함께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이사할 것이다. 물론 알렉스가 그녀의 속임수에 분노하긴 하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리라. 그는 상속자를 낳아줄 다른 예쁘고 젊은 여자를 찾아낼 것이다. 그 동안에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구름과 하늘 그림이 있는 천장을 보며 그와 많은 밤들을 보낼 것이다. 얘길 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를 자극할 수도 있겠지. 한 남자와 그런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가장 가까웠던 관계는 데릭이었다. 데릭과는 정열도 없는 이상한 우정이었지만 알렉스는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했다. 잘못을 보호해 주고, 그녀의 문제에 기꺼이 끼어들려고 했다. 누군가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즐거운 면도 있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한 남자를 남편으로 부르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알렉스는 그날 오후에 당장 결혼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다. 그녀가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그의 생각이 맞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은 10 분마다 변하고 있었느니, 알렉스는 그녀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애니에게 필요한 옷가지와 기타 도구들을 갖고 백조의 궁전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소매가 약간 부풀은 노란 드레스를 입으면서도 릴리는 초조하고 불안하였다. 얌전하게 올라온 목선에는 레이스가 수놓아져 있다. “이 드레스를 입으니까 시골 처녀처럼 보여” 애니가 등의 고리를 여며주는 동안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열다섯 살처럼 보인다구. 왜 좀더 세련된 옷을 가져오지 않았어?” “옷 때문에 어려 보이는 게 아니에요, 아가씨. 아가씨의 얼굴 때문이지요” 애니가 미소지으며 대꾸하였다. 릴리는 직사각형의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짜증스럽지만 애니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았다. 분홍빛 입술은 평소보다 더 짙은 색을 띠었고, 지난밤 알렉스의 격정적인 키스로 인해 약간 부풀어 있었다. 얼굴 또한 부드럼게 화사하며 연약해 보였다. 언제나 창백해 보이던 피부는 파우더를 발라도 발그레한 홍조가 남아 있었다. 크레이븐스에서 비둘기들과 장난을 걸던 대담한 여자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었다. 냉소적이고 조롱기 어린 그녀의 시선은 그 힘을 잃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페넬로페처럼 순수하고 솔직하였다.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해리 힌돈에게 넑을 잃었던 젊은 시절의 정열적인 소녀가 생각났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동요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이 릴리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내 머리띠 갖고 왔어? 머리카락이 눈까지 흘러 내려와” 애니가 내민 머리띠 중에서 릴리는 토파즈가 박힌 황금빛 리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마에 둘러보고는 그것이 소녀 같은 드레스와 이상하게 대조되어 보이자 눈살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가서 가위 가져와, 이 머리들을 잘라버려야겠어” 머리띠를 풀어 내던지며, 그녀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어올렸다. “하지만 아가씨, 아주 예쁘고 부드러워 보이시는데요” “그럼 그냥 놔두든지” 그녀가 두 손을 얼굴을 묻으며 신음하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애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가짜 결혼, 아니, 넌 알 필요 없어. 그냥 날 여기서 나가게 해줘, 그리고 레이포드 경에게 전해” 그 대화 속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레이포드 경에게 무얼 전하라는 거요?” 시내에 나갔던 알렉스가 돌아왔다. 그의 만족스런 표정으로 보아, 그들의 결혼식을 담당해 줄 목사님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분에게 과연 무어라 말했을까. 애니가 놀라워하며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릴리 아가씨의 방에 침입한 남자는 지금껏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구석으로 물러나 실크 솔을 만지작거리며, 릴리 아가씨의 뒤에 가서 서는 레이포드 경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알렉스가 릴리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그녀의 귀에 얼굴을 내렸다. “겁쟁이, 나에게 도망가지 마시오” “그럴 생각은 없어요” 그녀가 위엄 있게 거짓말을 했다. “그 드레스를 입으니 아름답군. 그 옷을 어서 빨리 벗겨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오” “당신 머리에는 그런 생각밖에 없나요?” 애니의 쫑긋한 귀를 신경 쓰며 릴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미소지으면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거의 끝난 거요?” “아뇨” 그녀가 성마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우린 곧 출발해야 하오” 릴리는 그에게서 빠져 나와 방안을 걸어다녔다. “백작님, 생각해 봤는데 너무 서둘러 결정한 것 같아요. 전 아무래도 이번 일이 무모했다는


결론을......” 그의 긴 팔이 뻗어와 그녀를 잡았다. 미친 듯이 달아나려는 쥐를 잡는 고양이와 같다고 할까? 그녀에게 입술을 맞추며, 알렉스가 은근 슬쩍 애니에게 나가라고 손짓하였다. 하녀는 절을 오리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알렉스는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 무릎이 떨리 때까지 오랫동안 키스하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그녀의 촉촉한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나와 결혼하는 건 당신이 한 행동 중에 가장 무모하지 않는 것이오” 그녀는 초조하게 그의 코트 깃을 매만졌다. “난, 그냥 어떤 확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거면 어떻소?” 그가 정열적인 키스로 그녀의 입술을 열고 혀를 찾아 들어왔다. 릴리의 손이 그의 목으로 감기며, 숨결이 거칠어지고, 그녀의 몸은 들뜨고도 뜨거워졌다. 그가 입술을 떼어냈을 때, 그녀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에게 매달려야 했다. “알렉스” “응?” 그의 입술이 관능적으로 그녀의 입술에서 장난을 쳤다. “난 평범한 아내처럼 굴지 못할 거예요. 내가 되고 싶어해도 불가능해요” “알고 있소” 그녀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슬쩍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당신이 날 바꾸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 어떻게 장담하죠?” 그가 피식 웃었다. “당신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소? “얌전한 숙녀가 되길 바라겠지요. 여자답게 말을 타라고 할 거고, 카우힐(소의 족발을 양파 따위로 양념하여 끓인 요리)과 구두 닦는 법을 배우게 할 거고 게다가 응접실에 앉아서 수를 놓으라고” “그만” 그가 웃으면서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당신이 오랫동안 결혼하려 들지 않은 것도 이상할 게 없군. 당신이 원한다면, 집안에 있는 수틀을 모두 불살라도 좋소. 카우힐 요리는 호지스 부인에게 하라고 하지. 아니,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제발, 난 당신을 바꾸고 싶지 않아, 사랑스런 사람. 안전을 위해 약간의 고삐를 조일 뿐이지” 그가 의도한 대로, 그 말은 그녀의 불안을 불러 일으켰다. “어서 빨리 주도권을 잡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그녀의 새초롬한 대꾸에 그가 웃음으로 화답했다. 장갑 낄 시간만을 허락하고서, 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쌍두마차로 그녀를 이끌고 갔다. 그녀를 올려주고 하인에게 고삐를 건네 받은 알렉스가, 강이 있는 남쪽으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릴리는 의외로 기분이 좋아졌다. 높은 마차 위에 앉아 멋지게 말을 조종하는 알렉스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깨끗하게 다듬어진 말들은 힘이 넘쳐흘렀다. 마침내 말들이 정상 속도로 달리게 되자, 그들은 대화할 여유가 생겼다. “이 말들은 왜 꼬리를 자르지 않았나요?” 짐승의 꼬리를 자르는 것은, 요즈음의 유행이었고 실용적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고삐가 엉키잖아요” 그가 고개를 흔들며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그녀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구요? 뭐라고 했어요?” “말에게 고통스러울 거라고 했소” “그래요, 하지만 그 고통은 잠깐인 걸요, 꼬리를 자르는 것이 그들을 위해 더 안전하다구요” “꼬리가 있어야 파리를 쫓을 수 있잖소”


그녀의 마음이 따듯해졌다. “차갑다는 평판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하는군요, 나으리. 자, 이젠 저에게 고삐를 넘겨주세요” 그녀가 고삐로 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외국어라도 들은 양 멍하니 쳐다보는 그를 보고, 릴 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아주 잘 한답니다, 백작님” “장갑이 상하게 될 거요” “장갑 한 벌쯤 뭐가 어때요?” “여자에게 고삐를 넘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두려우신가요? 이 결혼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네요” 알렉스가 마지못해 고삐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에 안심이 된 듯 그가 약간 뒤로 몸을 젖혔다. “긴장을 푸세요. 금방이라도 고삐를 낚아챌 사람 같군요. 마차를 뒤 집어엎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답니다, 백작님” “모든 일에는 처음이란 게 있는 법이지” 그가 어서 빨리 되찾고 싶은 듯 고삐를 노려보았다. “그런 것 같군요” 그녀가 새침하게 말하고 나서 말의 속력을 높였다. 일 킬로미터쯤 나아가자, 알렉스는 릴리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자신만만하게 고삐를 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그렇다고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전적으로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에게 지배권을 내어주는 것은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자기 능력에 대한 릴리의 자부심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그에게나, 다른 누구에게 쉽사리 겁먹지 않을 것이다. 릴리는 그에게 딱 어울리는 아내가 될 것이다. 그의 정열과 힘, 완고함에 완벽하게 어우러질 수 있는 여자. 마차가 브롬프턴과 첼시 가에 다다르자, 알렉스가 고삐를 다시 넘겨받아 아치형의 나무문이 딸린 작은 교회의 옆길에 마차를 세웠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년이 교회 입구에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말을 붙잡아 주겠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그 아이는 알렉스가 던져준 동전을 받아 쥐며 명령하게 미소지었다. “알겟습니다, 나으리” 알렉스는 자신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 릴리에게 손을 올렸다. 그녀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얼어붙었다. 교회를 보니 지금 일어나려는 일을 냉정하게 깨달은 것이다. 알렉스가 태평스런 어조로 말을 건넸다. “손을 내밀어요, 릴리”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죠?”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태도는 태연자약했지만, 그의 눈 속에는 날카로운 번득임이 있었다. 목소리에도 긴장된 울림이 달겨 있었다. “당신을 내려 주리다” 이젠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전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해리한테 채인 후로, 난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었는데” 알렉스는 약혼자에게 버림받은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알아차렸다. 오죽하면 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수치스러운 기억이 살아 있지 않은가. 그는 그녀에게 한 팔을 두르고 머리 위에 키스해 주었다. “그 녀석은 당신을 가질 자격이 없었소. 약하고 어리석은 겁쟁이에 지나지 않았지”


“자기 자신을 위험에서 구할 정도로 영리했던 거죠. 사람들은 이런 짓을 하는 당신을 바보라고 말할 거예요” “나에게도 결점은 있소,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당신은 그 결점들에 익숙해 져야 할 거요. 하지만 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요, 윌헬미나, 절대로. 내 말 알아듣겠소?” “알겠어요, 하지만 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 당신은 나에 대해 최악의 면까지 모두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가 않답니다” 그녀는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그의 마음이 바뀔것인지 기다렸다. “필요한 건 모두 알고 있소. 나머지는 나중을 위해 남겨둘 거요” 그가 조용히 말하며 그녀를 교회로 이끌어갔다. 작은 건물 안의 소박함이 감동적이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교회 안에 가득하였고, 촛불의 불길이 참나무 의자들을 반짝거리며 보여주었다. 나이 드신 목사 한 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냥하게 주름진 얼굴. 릴리보다 크지 않은 체격임에도, 강하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레이포드 경” 그가 고요하게 미소지은 다음, 맑은 눈동자로 릴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분이 로슨 양이신 모양이군요. 전 꽤 오랫동안 알렉스를 알고 지내 왔답니다. 거의 태어나던 날부터라고 할까요?” 릴리는 평소의 신랄한 미소 비슷한 것으로 답했다. “그러세요? 그럼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백작은 좋은 남자입니다. 비록 가끔 자존심이 너무 강할 때도 있지만요” “그리고 오만하지요” 릴리의 농담에 목사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는 책임감 강하고 애정이 깊은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가문의 전통에 따르면, 보기 드물게 헌신적인 남편이 될 것입이다. 레이포드 가의 핏줄이 그렇거든요. 백작께서 강인한 기개의 여인을 선택하셔서 다행입니다. 알렉스는 지난 수년 간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살아왔습니다. 바다로 항해를 나가보신 적 있습니까, 로슨 양? 결혼이란 항해와도 같은 것이지요. 두 개의 밧줄을 잘 조화시키면 하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낼 수 있는 법이지요. 당신들의 결합에도 이런 일이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의 조용한 분위기와 사제의 상냥한 얼굴, 알렉스의 목으로 올라오는 붉은 기운이 감동적이었다. 알렉스는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도 그녀만큼이나 이 순간에 감동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도 그러길 바래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목사는 그들에게 손짓하고 교회 앞의 제단으로 걸어갔다. 릴리는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머뭇거리닥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알렉스는 그녀의 장갑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그녀의 손을 잡아 손가락을 엮었다. 릴리는 떨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미소는 없었다. 오직 진지한 표정과 열띤 눈동자뿐이다. 그들은 두 손을 맞잡고 목사 앞에 섰다. 릴리의 귓가에 목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다가 멀어지곤 하였다. 마치 꿈 같았다, 깨고 나서도 기억이 아련한 흐릿하고 당혹스러운 꿈만 같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많은 굴곡과 변화가 있었지만, 이것은 가장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를 평생 동안 알아왔던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의 손과 맞닿은 그의 손이 이상하게도 친밀하였다. 그의 고른 숨소리, 서약을 말하는 조용한 목소리의 떨림,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메아리쳐 너무나 오랫동안 휴식을 찾지 못했던 끝없는 두려움을 달래주었다. 그녀도 간신히 목소리를 안정시키며 조심스레 서약을 되풀이하여 말했다.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들어 묵직하게 조각된 금반지를 끼워주었다. 너무나 헐거운 반지, 그 한가운데 불길이 갇혀 있는 듯한 커다란 루비가 빛을 발했다. 목사는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신의 축복으로 결혼을 마무리 지었다. 그들은 교회 등록부에 사인을 하고 결혼 증명서와 특별 허가증에 두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마지막 글씨를 쓰며, 릴리는 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늙은 부부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자 목사는 실례의 말을 고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알렉스와 릴리는 묵직한 등록부에 적힌 자신들의 이름과 날짜를 내려다보았다. 릴리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흘깃 보고는 빙글빙글 돌렸다. 커다란 루비와 그 둘레에 박힌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그녀의 작은 손에 너무 크다 싶었다. “그건 내 어머니의 것이었소” 릴리가 그에게로 시선을 들었다. “아름다워요, 이걸 캐롤라인에게......” “아니오, 그녀는 이걸 본 적도 없소”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다른 여자의 기억이 실린 걸 당신에게 주었을 리 없잖소” “고마워요” 릴리가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그가 손이 아플 정도로 그녀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난 캐롤라인을 좋아했소.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그녀와 결혼했을 거고 우린 만족하며 살았을 거요” “물론 그렜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달라” 알렉스가 어색하게 잔기침을 했다. 릴리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아찍한 벼랑에 선 듯한 기분이 이었다 “무슨 뜻이에요, 다르다니요? 어떤 식으로 다르다는 건가요?” 하지만 바로 그때 목사가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왔다. “레이포드 경, 레이디 레이포드. 제가 가봐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네, 물론이지요. 결혼식을 주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렉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릴리는 레이디 레이포드로 불린 충격 때문에 질문을 잊고 말았다. 그녀는 목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알렉스와 같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내가 백작부인이라니” 교회를 나서자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알렉스의 얼굴을 오려다보았다. “내 어머니가 기뻐하실 거라 생각하세요?” “그분은 기절하실 거요. 그리고 강한 차 한잔 갖다 달라고 하실 거요” 그가 그녀를 마차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고삐를 잡으려 하자 씨익 웃었다. “그건 건드리지 마시오, 레이디 레이포드. 집으로 가는 길에는 내가 잡을 거요” 릴리의 요청으로 알렉스는 그녀를 포비스-버트럼 은행으로 데려가 5 천 파운드를 내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도박 빚 때문이라고 짐작한 듯했다. 데릭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거면 충분하오?” 은행원이 옆방의 금고로 향하자, 그녀를 구석으로 끌어내 이렇게 물은 것이 고작이었다. 릴리는 죄의식으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오늘 오후에 몇 가지 일을 처리해야겠어요. 나 혼자 하고 싶어요” 알렉스는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았다. “크레이븐을 만나러 갈 건가?”


릴리는 거짓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에게 제일 먼저 결혼 소식을 알리고 싶어요. 그는 제일 먼저 알 자격이 있어요. 그는 도덕관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어요. 그에게 이 결혼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의 마음이 상할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너무 많이 설명하지는 마시오. 그것 또한 상처가 될 거요” 그녀의 당황한 표정에 그는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짜 그 자의 감정을 모르는 거요?”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은 데릭과 내가 어떤 관계였는지 모르는......” “오, 잘 알고 있소. 그러니까 오늘 오후에는 당신 혼자 갈 필요가 있는 거겠지” 벌써부터 누군가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그녀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부디 그에게 거짓말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어쩌면 저녁 시간까지 이어질지도 몰라요” “마부와 수행원이 딸린 마차를 타고 나가기 바라오” “그렇게 할게요” 그녀가 동의하는 미소를 지었다. 수행원이 딸린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커벤트 가든에서 주세페를 만날 때에는 혼자서 가야 하리라. 데릭의 말을 빌려 몰래 빠져 나갈 것이다. 그녀의 흔쾌한 대답에 알렉스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이 솟았다. “당신이 외출한 동안, 난 리온 경 부부를 만나러 갈 거요” “당신의 삼촌과 숙모 말인가요?” “그렇소. 숙모님은 사교성을 요구하는 문제에 경험이 많으시거든” “그분이 우리 스캔들을 무마시켜주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크레이븐스의 가크 게임과 어젯밤의 그 구경거리, 페니의 갑작스런 가출과 우리의 성급한 결혼을 모두?” 그녀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문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백작님?” “숙모님은 우리가 사교계에 정상적으로 복귀하는 문제를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실 거요” “재난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걸요” 문득 사교계의 우아한 부인이 그들의 망측스러운 행동들을 무마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떠오르자 너무나 우스워졌다. 그녀의 깔깔거림에 점잖은 얼굴의 점원과 손님들이 비난 섞인 시선을 그들에게 돌렸다. “조용히 하시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알렉스의 얼굴도 웃고 있었다. “얌전하게 굴어요. 당신은 사람들 속에 끼어 있을 때마다 우릴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소” “난 몇 년 동안이나 그랬는걸요. 하지만 당신은 평판이 걱정되시겠군요, 나더러 구경거리 만들지 말라고 부탁을 하셔야......” 그 순간 알렉스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뜸 입술을 맞췄다. 조용한 은행 안에 혀 차는 소리와 놀라는 감탄사가 울려퍼졌다. 릴리는 남편의 가슴을 밀어내며 빠져 나가려 했지만, 그는 그녀가 만사를 잊어버리고 쾌감으로 몸을 떨 때까지 키스하였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릴리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감탄 섞인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상에” 릴리는 도박장의 작은 방 한곳에서 데릭을 찾아냈다. 그의 앞에 붙여진 두 개의 테이블 회계장부와 약속어음, 현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언젠가 릴리는 그의 돈 세는 속도를 놀란 적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폐사이를 움직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손놀림이 서툴러 보였다. 테이블에 다가갔을 때, 릴리는 달콤 씁쓸한 진

위에는 보면서 오늘은 냄새를


맡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과 멋진 나무를 망쳐버린 술의 얼룩들을 보았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데릭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과하게 술을 마시는 건 그답지 않았다. 특히나 가난한 사람이나 마시는 진을 마시다니, 그는 진을 아주 싫어하였다. 그의 과거를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데릭” 그의 고개를 들리고, 초록색 눈동자가 그녀의 노란 드레스와 두 뺨에 올라온 홍조를 훑어보았다. 그는 타락한 술탄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그의 가가진 얼굴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의 광대뼈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낯설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넥타이는 풀어헤치고, 까만 머리카락은 이마로 어지럽게 흘러내렸다. “워디가 당신을 보살펴 주지 않았군, 잠깐 기다려, 내가 부엌에 가서 뭐라도......” “배고프지 않아. 난 바빠” “하지만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얘기할 시간이 없어” “데릭” “시간 없다니까” “나 그 사람하고 결혼했어” 이렇게 급작스럽게 뱉어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나 오늘 아침에 레이포드 경과 결혼했어” 데릭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는 아주 조용히 남아 있던 술을 들이켰고 필요 이상으로 힘껏 술잔을 쥐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니콜에 대해서 말했나?” 릴리의 미소가 사라졌다. “아니” “사생아가 있다는 걸 그가 알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이혼이나 결혼 취소를 하려 들겠지. 자신을 속였다고 날 증오할 거고. 하지만 그를 비난하지는 않을 거야. 데릭, 화내지 말아 줘. 어리석은 짓처럼 생각될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난 화나지 않았어” “알렉스의 돈이 있으면 주세페와 협상을 할 수도 있잖아” 갑자기 데릭이 벌떡 일어나더니 동전을 한 움큼 움켜쥐고 그녀의 발치에 뿌렸다. 동전 사이에 멍하니 선 채,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잖아, 돈때문이 아니야. 나에게 진실을 말하라구, 집시. 우린 언제나 그래 왔잖아” “진실은 내가 딸을 찾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그 남자와 결혼한 거라구”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에게 거짓말하려면, 당장 이 클럽을 나가” “좋아, 인정할게. 나 그 사람 좋아해.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데릭은 다소 진정이 된 듯하였다. “그래” “그 사람은 나에게 너무 과분해. 그런 남자가 세상에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 악의나 비열한 점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는 남자야. 그는 날 변화시키고 싶지 않다고 했어. 그와 같이 있을 때면, 행복이란게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해. 전에는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잠깐만이라도 그걸 갖고 싶은 게 잘못된 거야?” “아니” “당신과 난 여전히 친구인 거지, 그렇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릴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미소지었다. “당신은, 당신에게는 알렉스 같은 남자가 필요해. 그리고 그를 찬다면 지독한 바보인 거야. 당신은 힘들게 살았어, 그래서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고. 하지만 그는 당신을 존중해 줄 거고 보살펴줄 거야. 사생아에 대한 얘기는 그에게 하지 마. 말할 필요 없을 거야” “내가 니콜을 찾아내면,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그 애를 찾지 못할 수도 있어” 그녀의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아니, 난 찾아낼 거야. 내가 당신한테 불쾌한 짓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 속 좁게 굴지 말라구, 데릭” “이 년이나 지났어. 나도, 당신이 돈을 주고 산 그 녀석도 그 애를 찾지 못했어. 숙집과 색시집을 모조리 훑고 다녔다구. 플리트 마켓하고 커벤트 가든의 장물아비한테도 죄다 물어봤고”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가 단호하게 계속하였다. “감옥이나 여인숙, 작업장이나 부두도 죄다 들여다봤어. 그 애는 죽었거나 런던에서 팔려나간 거야, 집시, 아주 오래 전에. 그 애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그들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시키는지 난 알아, 집시. 왜냐하면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까. 니콜은 오히려 죽는 게 더 나아” 그의 차가운 초록 눈동자가 어린 시절의 고통으로 번득이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신은 알렉스와 잘 살아야 돼, 그럴 자격이 있다구. 과거는 뒤에 남겨 둬, 그렇지 않으면 당신 미래까지 무너질 거야” “아니야, 니콜은 아직 살아 있어. 이 도시 어딘가에 있어. 그 애가 죽었다면 내가 모를 것 같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말해 주었을 거라구, 느낌이 왔을 거라구. 당신 생각이 틀렸어!” “집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한마디도 하지 마, 데릭. 안 그러면 우리 우정은 영원히 끝이야. 난 내 딸을 찾아내서 당신의 그 말을 취소하게 만들 거야. 나 말 한 필 빌려줘, 한두 시간만 쓰면 돼” “오천 파운드를 그 이탈리아 새끼한테 주려는 거군. 당신을 따라가서 그놈을 죽여버리겠어” “안 돼. 그러면 니콜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마저 없어지는 거야, 잘 알잖아”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워디한테 말을 달라구 해. 그리고 오늘 이후로는 알렉스가 밤마다 당신을 집안에 붙잡아 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구” 릴리는 어스름할 무렵 약속 장소에 도착하였다. 가벼운 빗줄기가 떨어지자 시작하여, 커벤트 가든에 언제나 배어 있는 쓰레기 냄새와 썩은 음식 냄새가 잠깐이나마 씻겨 내렸다. 놀랍게도 주세페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평소의 거만 떠는 태도가 사라지고 어딘가 날카로워 보였다. 그가 입고 있는 검은 옷도 초라해 보였다. 왜 그녀에게 받은 돈으로 새 옷을 사 입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보자, 그의 가무잡잡한 얼굴이 대뜸 달라졌다. “아 일 데나로(돈 가져왔어)?” 씨, 이오 오(그래요, 있어요)“ 돈 가져왔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릴리는 그가 내민 손을 뿌리치며 돈가방을 자기 가슴에 안았다. 내리는 빗줄기가 차가운 안개로 흩어져 갔다. 그는 젖은 바닥을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한마디했다. “지긋지긋한 비, 지긋지긋한 잿빛 하늘, 이놈의 영구 지겨워!” “그럼 떠나면 되잖아?” 릴리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주세페가 언짢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그들이 있으라고 해서 그래”


“그들이 누구지, 주세페? 그들이 니콜과 이 일에 관련 있는 거야?”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말했다는 듯이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돈이나 내봐” “더 이상은 주지 않을 거야. 이렇게는 안 돼, 주세페. 난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뭐든지 다 했어. 당신이 요구해서 런던에도 왔고, 내가 가진 걸 모두 주었어. 니콜이 살아 잇다는 증거 하나 보지 못한 채로. 당신이 나에게 보여준 거라고는 그 애가 떠나던 날 입고 있던 옷뿐이었어” “나한테 진짜 니콜이 잇다는 걸 의심하는 건가?” “그래, 의심스러워. 그 애는 죽었을지도 모르잖아” “죽지 않은 건 확실해” “흥, 내가 당신 말을 믿지 못한다고 해도 기분 나빠하지 말라구” “나에게 그따위로 말하면 안 되지, 카라” 주세페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잘난 척하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오늘밤에는 니콜이 안전하다는 증거를 갖고 오고 싶더라니. 당신이 날 의심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내 말을 믿을 만한 걸 보여줄 수 있지” 그가 꼬불꼬불 골목을 돌아보았다. 릴리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가 이탈리아 사투리로 무어라 외치자,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유령처럼 검은 형태가 점점 드러나 보였다. 릴리는 입을 벌린 채 그 이상한 환영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젠 뭐라고 말하실 건가, 카라?” 그 멀리 보이는 물체가 인형같이 작은 형태를 들어올린 남자라는 걸 알아채자, 릴리의 몸이 흔들거렸다. 아이의 겨드라이에 손을 넣은채, 그가 작은 아기를 더 높이 들어올렸다. 작은 소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오, 안 돼” 릴리의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아이가 주세페를 쳐다보며 작은 목소로 불렀다. “빠빠? 씨에떼 보이, 빠빠(아빠? 어디 있어요, 아빠?)?” 그녀의 딸, 니콜이었다. 릴리는 가방을 떨어뜨리고 앞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주세페가 한 손으로 그녀의 고통스런 비명을 틀어막으며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붙잡았다. 미친 듯이 몸부림치면서도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눈물을 흘리면 더 이상 아가를 볼 수가 없다. 주세페의 목소리가 귓가에 거칠게 닿았다. “어때, 저 애가 니콜이야, 우리 아기. 정말 예쁘지?” 주세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남자는 아이를 안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세페는 그녀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시간을 두었다가 이윽고 릴리를 플어주었다. 릴리는 배를 두 팔로 감싸안고 늙은 여자처럼 어깨를 웅크린 채 울어댔다. “나한테 있다고 했잖아” 주세페는 돈가방을 들어 내용물을 살핀 다음, 만족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애는 이탈리아어로 말했어” 릴리는 딸아이가 있었던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앗다. “영어도 말할 줄 알아” “당신이 있는 곳에 다른 이탈리아인들도 있는 거야? 그래서 그 애가 아직까지 이탈리아어를 말하는 거야?” 그의 검은 눈이 번들거렸다. “만약 다시 그 애를 찾으려 들면 난 화가 날 거야” “주세페, 우리 계약을 하자구, 당신이 만족할 만한”


목소리가 위험스럽게 흔들리자, 릴리는 진정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영원히 계속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당신도 니콜을 아끼잖아. 마음속으로는 그 애가 나와 같이 있는게 더 낫다는 걸 알 거야. 그 애를 안고 있던 남자, 그가 당신 동업자인 거야? 그런 사람이 더 있어? 이탈리아에서 당신 혼자 여기 오지는 않았겠지, 도와주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었을 거야. 난 당신이 어떤 지하 조직이나 음모에 빠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 내가 당신에게 준 그 돈도 그들이 빼앗아간 거지, 그렇지? 그런 조직에 대해 내가 아는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위험한 상황이야, 주세페. 그리고 당신도 니콜을 그런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을 거야” “내가 안전하게 데리고 있는 걸 직접 봤잖아” “그래, 하지만 얼마나 오래 갈까? 당신은 얼마나 안전할까? 주세페, 그 애뿐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와 계약을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녀가 애원한 듯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에 대한 증오 때문에 목이 막힐 것 같았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눈에 관심이 어리는 걸 보면서,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만족할 만한 액수로 정할 수 있어. 우리 셋 다 더 잘 살게 될 거야. 당신과 나,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의 딸이. 제발, 주세페, 제발” 입안에 쓴맛이 돌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부드러움을 유지하였다. 그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처음으로 나한테 여자처럼 부탁을 하는군, 아주 부드럽고 달콤하게. 레이포드 경의 침대에서 배운 모양이지, 응?” 릴리의 몸이 얼어붙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일을 어떻게?” “레이포드의 장녀가 되었다면서? 나와 같이 있을 때와는 달라진 거야? 어쩌면 이젠 남자에게 기쁨을 줄 만한 것이 생겼는지도 모르지” “어떻게 알았지?” “당신의 행동에 대해서 난 뭐든 알고 있어, 카라. 당신이 어딜 가는 지도” 그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특으로 뜨거운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그녀는 혐오감으로 미칠 것 같았지만, 얌전히 그의 애무를 받아들였다. “내가 한 말 생각해 볼거지?” “어쩌면” “그럼 당신 요구액을 말해 봐” 그가 낄낄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나중에” “언제? 우린 언제 다시 만나지?” “내가 연락을 보내지” “안 돼” 떠나려는 그를 그녀가 얼른 붙잡았다. “당장 알아야겠어, 지금 합의를 보자구” “인내심을 가지라구, 릴리” 그가 씨익 웃으며 그녀의 손을 피하고는 손을 흔든 후 떠났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이대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앗다, 미칠 듯한 슬픔으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조각상처럼 서 있었다. 황량한 절망감 뒤로, 한 가닥 환희가 스치고 지나갔다. 딸아이를 보았다! 그 애가 니콜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굶주린 사람처럼 그 아름다운 작은 얼굴을 되새겨 보았다. “하나님, 그 애를 안전하게 보호하소서, 그 애를 안전하게 보호하소서” 마음이 무수한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데릭에게 빌려온 작은 아라비아 막을 올라타고 나서


치마와 망토를 정리했다. 충동적으로 주세페가 사라진 길을 따라, 경찰도 감히 들어서지 않는 버려진 땅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빈민굴의 어두운 거리들은 도박이나 매춘, 그리고 소매치기에서부터 살인자까지 모든 범죄자로 득실거렸다. 무수히 많은 은신처와 골목들, 어두운 모퉁이들은 타락을 위한 가장 완벽한 장소였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그녀의 아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니. 멋진 말과 고급스런 망토를 입은 모습에, 부랑자들이 릴리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서기 시작하였다. 누군가 승마 부츠를 움켜잡자, 그녀는 깜짝 놀라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다니, 무기나 수행원 없이 이런 곳에 혼자 들어오다니. 그녀는 옆길에서 말을 돌려, 케벤트 가든을 벗어날 수 있는 길 쪽으로 말을 달렸다. 어디에선가 과격한 외침 소리가 들렸다. 다 쓰러져가는 나무 건물사이에 누더기를 걸친 사내나 고급 옷을 사내 할 것 없이 남자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무언가를 보는 듯하였다. 개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짐승들의 물어뜯는 소리. 포악한 개들과 짐승들은 한 우리 안에 넣어 놓고, 서로 물어뜯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지금 개들과 같이 던져진 것은 너구리들이었다. 질긴 가죽의 너구리들이 물어뜯기면서도 죽을 때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잔읺나 구경꾼들에게 즐거운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녀는 그 광경을 쳐다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두개의 건물 사이로 말을 몰았다. 이런 구경을 하는 남자라면 거친 부류니까, 그들에게 발각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자들의 거친 함성소리가 나무 벽들을 통해 울려 퍼졌다. 그 옆의 어둠 속에, 뒤죽박죽 모여 있는 수레와 마차들 사이에 작은 소년 하나가 무릎에 머리를 숙인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울고 있는 것처럼 어깨가 들썩거렸다. “얘야” 고개를 든 그 애의 얼굴은 지저분하고 눈물 범벅이었다. 헨리와 같은 또래처럼 보였다. 열한 살이나 열두 살, 하지만 잘 먹지 못했는지 아니면 병을 앓았는지 꽤 왜소한 체구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그녀의 말을 보자, 아이가 울음을 그치며 입을 떡 벌렸다. “왜 울고 있는 거니?” 릴리가 부드럽게 물었다. “울지 않았어요” 아이는 헤진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누가 때렸니?” “아뇨” “누구 frl 다리는 거니?” “네, 그들이 금방 저 애를 데리러 올 거예요” 소년이 알록달록한 짐마차 뒤쪽을 가리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짐마차에는 서커스 공연단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혀 건강해 보이지 않는 비쩍 마른 얼룩말 한 마리가 마차 앞에 매여져 있었다. “애라니?” 릴리가 말에서 내려서자, 소년은 일어나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마차 옆쪽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그곳 창살 너머 털이 복슬복슬한 곰 한 마리가 묶여 있는 걸 보고는 릴리가 소리를 내질렀다. “세상에!” 그 곰은 앞발에 커다란 머리를 기댄 채,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랑을 해치지 않아요, 이 애는 내 오랜 친구예요” 아이가 안으로 손을 뻗어 짐승의 머리를 문질러주었다. “정말 오래되긴 했구나” 그 곰의 털은 거칠고 지저분했다. 목 부분과 몸통에 몇 군데 커다랗게 벗겨진 부분도 눈에 띄었다. “만져도 괜찮아요” 소년의 말에, 릴리는 금방이라도 빼낼 준비를 하며 조심스럽게 창살 사이로 손을 뻗었다. 곰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유순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곰의 넓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껏 곰을 만져본 적은 없단다. 특히나 살아 있는 녀석은” 소년이 그녀의 옆에서 코를 훌쩍거렸다. “오래지 않아 죽을걸요, 뭐” “넌 서커스 단에서 온 거니?” “네, 아버지가 동물 조련사예요. 포키는 더 이상 재주를 부리지 못해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 녀석을 십 파운드 받고 팔라고 했어요” “저 안에서 물어뜯기라고?” “네, 처음에는 개들한테 기운을 내라고, 쥐와 너구리로 시작해요. 나중에는 포키 차례가 될 거예요” 릴리는 분노가 치솟았다. 저 안에 들어가면 분명 개들한테 갈기갈기 찢기고 말 텐데. “저런 건 스포츠라고 할 수도 없어, 이 곰은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을 만큼 너무 늙었단 말이야!” 그녀는 그 곰의 군데군데 벗겨진 부분이 개들이 공격하여 물어뜯을 수 있는 연약한 부분임을 알았다. 그 곰은 이제 곧 도살되어질 것이다. “난 십 파운드가 없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아버지가 때릴 거예요” 릴리는 아이의 비참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통이 길지 않도록 개들이 빨리 끝내주기를 바랄 수밖에. “정말 지독한 밤이구나” 그녀가 중얼거렸다. 세상은 잔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에 대항하여 싸운다 해도 소용없었다.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짐승의 모습에 가슴이 메이는 듯했다. “미안하구나” 그녀가 자신의 말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저기 그 아저씨가 와요” 소년의 중얼거림에, 릴리는 그들에게 다가오는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황소의 목과 나무 둥치 크기의 팔뚝을 가진 사내였다. 얼굴은 까만 털로 뒤덮였고, 시가를 문 두꺼운 입술 사이로 부러진 이가 드러나 보였다. “그거 어딨냐, 꼬맹아?” 그렇게 소리치고는, 그의 눈이 멋진 아라비아 말을 보며 가늘어졌다. “이건 뭐야?" 그가 릴리를 노려보며 말에게 다가왔다. 그가 그녀의 우아한 망토와 단정하게 접힌 노란 치마와 이미 위로 떨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쭉 훑어보았다. “맛있게 생겼는걸. 당신이 주인인갑쇼, 마님?” “집어치워” 릴리의 거친 대꾸를 듣고는 그가 우렁차게 웃어젖혔다. 그리고는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깃덩어리 갖고 왔냐? 어디 보자” 짐마차 안에 웅크린 유순한 곰을 보더니 그의 두꺼운 입술이 경멸스레 뒤틀렸다. “덩어리만 크지, 벌써 한 번 물어뜯기고 온 것 같다. 그런데도 네 아버지는 이걸 십 파운드나 받겠다는 거냐?” 소년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네, 아저씨” 릴리는 더 이상 그 사내의 못된 짓거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는 잔인하고 쓸모 없는 고통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 자에게 절대 늙은 곰을 내어주지 않겠어. “내가 십 파운드 내겠어요. 당신에게는 그 불쌍한 짐승이 필요 없어 보이는군요” 그녀가 차갑게 말하며 작은 돈주머니를 찾아냈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가건물 안의 함성 소리르 뚫고 울려 퍼졌다. “저 안에 이백 명도 넘게 들어가 있다구. 그들은 피 맛을 보려고 돈까지 다 냈어. 동냥은 그만


두시지요, 마님. 이 곰은 내가 데려가야 하니까” 릴리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겹겹이 쌓인 상자들 위에 얹어진 묵직한 쇠사슬이 눈에 띄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돈주머니가 살짝 미끄러지더니 짤랑짤랑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 이런. 내 황금과 보석들!”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그 사내는 탐욕스럽게 돈주머니를 노려보았다. “황금이라고?” 그가 입맛을 다시며 투실투실한 손을 밑으로 뻗었다. 그 순간 짤막한 금속성과 함께 묵직한 쿵 소리가 울렸다. 사내의 맘모스 같은 몸집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릴리는 자신이 휘갈긴 쇠사슬을 던져버리고 만족스럽게 두 손을 탁탁 털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소년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턱은 떡 벌어졌다. 릴리는 재빨리 주머니를 주워들어 소년에게 건넸다. “이걸 갖고 가거라, 저 말과 마차값까지 계산해도 남을 거야” “하지마 포카는......” “내가 데려갈 거야. 못된 짓을 당하지 않게 하마” 소년은 미소를 보이던, 손을 뻗어 그녀의 모직 망토를 살짝 잡았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이가 어둠 속으로 허둥지둥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릴리는 서둘러 짐마차에 자신의 말을 묶었다. 창살 밖의 소란에 불안해진 곰의 울음 소리에 말이 불안하게 허둥거렸다. “조용히해, 포키. 널 구하려는 거니까. 제발 망치지 말거라” 그 순간 무언가 그녀의 발목을 감아오더니, 쓰러져 있던 사내의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얼구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살찐 손이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홱 끌어내렸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딱딱한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내 곰을 훔쳐가려구, 응?” 그가 그녀의 위로 일어서며 침을 푸푸거렸다. “비싼 말을 타고 여기까지 와서 문제를 만든다 이거지, 그래. 내가 재미있게 해드리죠, 마님!” 그가 그녀의 위로 몸을 던져, 거칠게 보디스를 풀고 치마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릴리는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사내의 육중한 몸집이 사정없이 릴리를 내리눌렀다. 그의 몸무게 때문에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귓속에서 위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안 돼” “돔만 많으면 다냐, 이 건방진 계집년. 감히 내 머리를 내리쳤겠다!” 그 순간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게 그녀의 나쁜 습관이지. 난 그걸 고쳐주려고 노력하는 중이고” “누구야? 당신이 이 년 포주야?” 사내가 새로 도착한 남자에게 으르렁거렸다. “일단 나하고 볼일 다 끝나면 데려가라구” 소리난 쪽으로 고개를 놀린 릴리는 흐릿하게 남편의 모습이 보이자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일 리가 없다, 환상이겠지. “알렉스” 그녀의 귀에 울리는 윙윙거림을 꿇고 그의 낮고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내 아내에게서 떨어져” 11. 사내는 자기의 위협이 얼마나 먹힐지 가늠하는 듯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우리 안에 있는 곰이


낑낑거리며 불안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짐승의 소음은 그녀의 위에 올라탄 사내를 위협하는 남편의 으르렁거림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갑자기 내리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릴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아픈 갈비뼈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황을 살폈다. 두 남자가 서로 엉켜 사우고 있다. 너무나 움직임이 빨라서 금발머리로 간신히 알렉스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가 덩치 큰 사내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르고 황소 같은 목덜미를 움켜잡고 숨통을 죄었다. 사내의 뺨이 분노로 실룩거리며, 알렉스의 멱살을 잡고 두 다리를 걷어 올려 머리 쪽을 거칠게 찼다. 남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걸 보고, 릴리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날아오는 주먹을 고개 숙여 피한 다음, 알렉스는 그 사내를 잡아 상자 더미 쪽으로 던져버렸다. 나무 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릴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알렉스를 지켜보는 그녀의 눈은 그야말로 놀란 토끼눈이었다. “맙소사”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세련된 주먹다짐과 입씨름, 권총을 휘두르는 정도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그가 핏발 선 야수가 되어 맨 주먹으로 상대를 때려죽이려 하고 있다니. 그에게 이런 과격한 면이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덩치 큰 사내가 비틀비틀 일어나 다시 알렉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옆으로 살짝 피하며 돌아 남자의 갈비뼈 밑으로 주먹을 꽂았다. 또 한 번의 주먹이 날아가자, 사내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피투성이 침을 뱉고 일어서려 해보았지만, 그대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알렉스가 천천히 주먹을 풀고는 릴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야만적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에 겁이 난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그의 험악한 얼굴이 부드러워졌고, 그제서야 그녀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그의 목을 껴안으며, 큰소리로 불렀다. “알렉스, 알렉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으면 진정시키려 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한 번” “당신이 제때 와주었어요” “내가 보살펴 주겠다고 했잖소. 당신이 얼마나 힘든 일이 벌이든지간에”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그가 그녀의 머리에 대고 욕설인지 애정 어린 속삼임인지 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는 진흙투성이가 된 그녀의 긴장된 등을 한 손으로 주물러 주었다. 릴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흥분된 상태였다. 그녀의 폐부에서부터 거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정하시오, 진정해” “당신,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날 찾아냈어요?” “레이디 리온이 없길래, 크레이븐스에 갔었소. 마차와 마부는 있는데 당신이 사라졌다는 걸 발견했지. 당신이 혼자서 커벤트 가든으로 떠났다는 걸 알았소” 그가 골목 끝에 기다리고 있는 두 마리 말과 마부인 그리브스를 가르켰다. “그리브스와 난 당신을 찾으려고 이 거리를 이 잡듯이 뒤졌소” 그가 그녀의 머리를 떼어내고 회색 눈동자로 뚫어져라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내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소, 릴리” “그렇지 않아요. 난 크레이븐스에 수행원과 마부와 같이 갔어요. 당신이 요구한 건 그것뿐이었어요” “말장난은 하고 싶지 않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소” “하지만 알렉스” “조용” 알렉스는 가건물에서 나온 두 명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움직이지도 않고 쓰러져 있는 자신들의 동료를 흘깃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일이야?” “곰 갖고 와야지, 너구리가 거의 끝났단 말이야”


“안 돼!” 릴 리가 몸을 돌려 그들을 마주 보았다. “안 돼, 이 잔인한 인간들아! 너희 몸뚱이나 거기 내던지지 그래? 개들이 미친 듯이 기뻐 날뛸걸!” “내가 곰을 샀어요. 저건 내 거라구요! 저들이 하려는 짓을 알았을 때, 저 곰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들이 데려가지 않게 해줘요, 금세 갈기갈기 찢겨지고 말 텐데” “릴리, 진정하고 내 말 들어요. 이런 일은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오” “잔인하고 야만적인 짓이에요!” “동감이오, 하지만 우리가 이 짐승을 구해 낸다 하더라도, 저들은 다른 짐승을 찾아낼 거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저 곰의 이름은 포키예요” 자신의 행동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감정에 붇받쳐 남자에게 도와 달라고 매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의 당황스런 사건들과 딸아이를 보았다는 충격 때문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자들에게 곰을 내어주지 마세요, 알렉스. 저 곰을 결혼 선물로 저에게 주세요” “결혼 선물?” 그가 낡아빠진 짐마차를 쳐다보았다. 늙은 곰이 불안하게 창살의 냄새를 킁킁 맡고 있었다. 그 짐승은 물어뜯기든, 그렇지 않든 오래 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제발” 릴리가 그의 셔츠를 붙잡으며 애원하자, 알렉스는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릴리를 떼어놓았다. “그리브스에게 가서 말에 올라타시오. 이 일은 내가 처리하겠소” “하지만” “어서” 그의 단호한 음성에, 릴리는 얌전히 순종하였다. 그녀가 모퉁이로 천천히 걸어가는 사이, 알렉스가 두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 짐승은 우리 것이오” 사내 한 명이 어깨를 펴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우린 개한테 던져줄 게 필요합니다” “다른 곰을 찾아야 할 거야. 내 아내가 이 곰을 원하니까, 거기에 대해 할 말 있나?” 그의 눈동자가 차갑고 위험스럽게 빛났다. 남자들은 알렉스의 위협적인 시선과 자기 동료의 쓰러진 몸뚱이를 쳐다보았다. 자기 동료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 싶지는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개들한테 뭘 던져 주란 말입니까?” “내가 몇 가지 제안을 할 수는 있지만, 당신들 마음에는 들지 않을걸” 알렉스가 흔들림 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오싹한 눈길에 사내들이 불안하게 뒷걸음질쳤다. “쥐새끼나 너구리로 하는 수밖에 없겠어” 한 녀석이 중얼거리자, 다른 녀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곰을 내온다고 약속했는데......” 그들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알렉스가 그리브스에게 손짓하였고, 마부는 재빨리 다가왔다. “네, 나으리?” “저 짐마차를 집으로 끌고 가게. 레이디 레이포드와 난 말을 타고 돌아갈 거야” 그리브스는 백조의 궁전으로 그 곰을 옮긴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중하게 입을 다물었다. “네, 나으리”


그가 조심스레 짐마차로 다가가 나무 좌석 위에 손수건을 깔고, 자신의 멋진 옷에 먼지가 묻지 않도록 최대한 신중하게 앉았다. 곰은 그 과정을 유순하게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알렉스는 릴리가 기다리고 있는 모퉁이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얼굴이 걱정으로 찌푸려져 있었다. “알렉스, 레이포드 파크에 저 곰의 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숲에 풀어주어야 할까요?” “녀석은 너무 길들여져 있어서 혼자 살지 못할 거요. 자기 영지에 이색적인 짐승들을 데려다놓는 친구가 내게 한 명 있소” 알렉스는 이색적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그 곰을 흘깃 쳐다보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운이 좋다면 그 친구에게 핑키를 맡아달라고 설득할 수도 있겠지” “포키예요” 그가 자기 말에 훌쩍 올라탔다. “내일 밤에도 또 다른 계획이 있소? 혹시 집에서 조용한 저녁을 가질 수 있겠소?” 릴리는 ‘평범한 아내가 되지 못할 거라는 점을 경고하지 않았나요?’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그의 행동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표현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혀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갑시다”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 “알렉스, 나와 결혼한 게 유감스러우시죠?” “당신이 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위험한 짓을 한 게 유감스럽소” 다른 때 같으면 아내로서 복종해야 한다는 말에 격렬히 항의를 했을 터이지만, 자신을 구해 준 것을 생각하며 그녀는 온순하게 대답하였다. “내 문제는 혼자 힘으로 해결했어야 했는데” “당신은 크레이븐에게 빚을 진 게 아니더군. 다른 사람에게 오천 파운드를 갖다 주었소. 무슨 일에 연관된 거요, 릴리?” “당신이 묻지 않기를 바랐어요. 당신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녀가 비참하게 중얼거렸다. “나에게 털어놓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고삐를 말아쥔 채 고개를 돌려보렸다. 알렉스는 브랜디 술잔을 한 손에 든 채 도서실의 어둠을 쳐다보고 있었다. 릴리는 위층에서 잠자리를 준비하는 중이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함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그를 믿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볼 때마다, 점점 더 깊은 고통에 호우적대는 그녀를 읽을 수 있었다. 알렉스가 자신의 부를 공유할 수 있다고 확실히 말해 주었음에도, 그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빚을 청상해 주고 나면,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공포가 마술처럼 사라질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 공포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오늘밤 그녀의 행동을 그녀를 짓누르는 버거운 짐에 대한 거친 반항이었다. 비통함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처절한 몸짓, 그는 그런 것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2 년 동안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그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고 내려놓은 다음, 눈을 문질렀다. 문득 그의 행동이 멈췄다. 그녀가 와 있었다. 그걸 감지하는 즉시 그의 감각은 불타올랐다.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얀 삼베로 만든 잠옷 차림에, 헝클어진 흑단의 머리. 그녀의 아담한 모습이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그의 앞에 있는 술병으로 향했다. “당신, 술 마시는 거예요?” “아니” 머리를 긁어올리며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 지친 한탄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오?” 그녀는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듯하였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 첫날밤이잖아요” 그 말에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다른 생각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다시 그녀를 갖고 싶다는 욕망만이 가득하였다. 그 섬세한 천 아래 숨겨진 그녀의 곡선, 자신에게 닿는 그녀의 느낌, 그를 감싸던 그녀의 부드러운 포옹까지도. 신경 구석구석에 흥분이 스며들었지만, 그는 애써 무관심한 척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렇군” 그녀는 초조하게 목덜미의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순진해 보이면서도 미칠 듯이 매력적이었다. “피곤하신가요?” “아니” 점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곧 주무실 건가요?” 그가 테이블을 밀치고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가 그랬으면 좋겠소?” 그녀가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결정하시는 일에 제가 무어라 하겠어요?” “나와 같이 침대로 가고 싶소?” 그의 손이 그녀의 겨드랑이로 미끄러졌다. “네” 릴리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 순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눌렀다. 그녀는 그의 허리에 두 팔을 감으며 그에게 부드럽게 몸을 기댔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그의 몸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으스러지도록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를 위층으로 안고 올라가 조심스레 옷을 벗겼다. 그의 옷을 벗기려다 릴리의 손등이 그 부분을 스치자, 그가 격한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를 침대로 눕히고, 그는 뜨거운 키스로 그녀의 부드러운 젖가슴과 허리, 배를 애무하였다. 릴리는 그들이 함께 했던 다른 날들보다 더 과감히 자신을 내주었다. 그에게로 자유롭게 손을 놀리며 팔다리로 그를 휘감고, 손가락으로는 그의 목덜미 머리카락을 애무하였다. 그녀의 나긋하고 날씬한 몸이 열정적으로 휘어지자,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 입술을 맞췄다. 그의 손이 밑으로 내려가 부드러운 털과 그 촉촉한 열기를 감싸쥐자, 그녀가 몸서리를 치며 무릎을 벌리고 그 감미로운 압력을 받아들이려 요동하였다. 그의 손가락이 느릿느릿 마사지를 하다가 어느 순간 그녀의 몸 안으로 쓰윽 미끄러져 들어갔다. 릴리는 신음하며 그에게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그는 그녀의 목과 어깨에 키스하며 허벅지를 넓게 벌려 여인의 가장 은밀한 곳에 무게를 실었다. “눈 뜨고 날 보시오” 그녀의 눈이 그의 강렬한 시선과 뒤엉켰다. 그가 교묘하게 몸을 앞으로 밀어내는 순간 그의 묵직한 압력이 그녀에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잡고 그는 더욱더 깊이 자신을 들이밀었다. 그의 등을 감싸고 있던 릴리의 손이 쾌감이 커져갈수록 더욱더 등 깊이 파고들었다. 어렴풋이 그의 중얼거림 소리가 들렸다, 자신도 억제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열심히 중얼거렸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 당신을 갖고 싶어, 당신을 사랑해. 사랑한다고? 그녀는 멍한 혼란 속에서, 몸속에서 폭발하는 열기와 함께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느낌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팽팽해진 몸이 떨리며, 그도 곧 클라이맥스의 순간에 도달하였다. 그들의 위로 침목이 내려앉았다. 눈을 감은 릴리의 마음속에 무수한 질문들이 휘몰아쳤다. ‘당신을 사랑해’ 그가 그런 말을 진자로 했을 리 없다. 만약 했다 하더라도, 진심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샐리 숙모님도 정열에 불타는 남자의 말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충고하지 않았던가. 그 당시에는 그 충고의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지만.


잠시 후 알렉스가 떨어져나갈 듯이 몸을 움직이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잠에 취한 척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팔다리를 감았다. 그가 그녀를 풀어내려 하자, 졸리운 듯 중얼거리며 더욱 바싹 달라붙었다. 그가 다시 몸을 눕혔고, 그녀의 머리 밑에 닿은 그의 가슴이 빠르게 들먹거렸다. 그의 혼란스런 숨소리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까 자신이 한 말을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다. 분명 그 말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진실이길 바랐다. 그런 자신의 마음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그녀보다 훨씬 나은 여자를 만날 자격이 충분하다. 순수하고 순결하며 오염되지 않은 여자. 혹시라도 그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생아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는 그녀를 떠날 것이다.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남는 것은 수천 갈래로 찢어진 그녀의 가슴뿐일 것이다. “굳이 그 저속한 일들에 대해 설명할 필요 없다” 레이디 리온은 천한 소작인과 키스하다 들킨 가정교사를 보듯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호되게 나무랐다. 빛나는 은발 머리와 솔직한 푸른 눈의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얼굴 곡선이 가히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짐작케 하였다. 알렉스는 무안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숙모님, 사실은 그게 아니라” “나에게 사실에 대해 말하려 들지는 말아라, 성급한 아이야! 내가 들은 소문만으로 충분하다” “네, 밀드레드 숙모님” 알렉스는 벌써 열 번째 이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룩가에 있는 햄톤 리온 경의 저택 응접실에 앉아 있었고, 릴리는 웅크린 자세로 자신의 모아쥔 손만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얌전한 릴리의 모습에 그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이 드신 숙모님은 그의 예상대로, 15 분 동안 위풍당당하게 훈계를 내리시는 중이었다. “도박에다, 벌거벗은 채 나다니지를 않나, 또 그 난잡한 행동들도 그 외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는 주님만이 알고 계실 거다. 그 모든 얘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어, 되돌리기엔 너무 심각한 상태란 말이다. 네 아내뿐 아니라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 알렉스. 너의 행동도 충분히 비난받아야 해, 솔직히 그 이상이지. 어떻게 너의 훌륭한 평판과 가족의 명예를 그런 식으로 더럽힐 수 있단 말이냐? 네가 한 일 중에서 현명한 일이라고는 나에게 의논하러 왔다는 것 하나뿐이다. 비록 사람들의 가시 돋친 입방아에서 너희 둘을 끌어내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너희들에게 사교계의 입장권을 되찾아 주는 일은,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도적이 될 거야” “우린 숙모님이 꼭 해내시리라 믿습니다. 누군가 그 일을 해낼 사람이 있다면, 바로 숙모님뿐이지요” “그건 맞는 말이야” 레이디 리온이 뚱하게 대답하였다. 릴리는 입으로 한 손을 올리며 웃음을 삼키려 노력했다. 남편이 말썽꾸러기 학생처럼 혼나는 모습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호된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숙모님이 알렉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였다. 레이디 리온이 그녀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내 조카가 왜 너와 결혼했는지 알지를 못하겠구나. 너의 품행 단정한 동생과 결혼을 하고, 넌 애인으로 들였어야 했다” “저도 지극히 동감이에요” 릴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전 기꺼이 그의 애인이 되려고 했어요. 그게 훨씬 더 분별력 있는 계약이었을 겁니다” 그녀는 알렉스의 엄한 시선을 무시한 채로 그에게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장난기 있는 눈망울을 굴리며 말했다. “그는 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잘못된 환상으로 저와 결혼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요” 레이디 리온의 눈빛이 새삼스레 흥미를 나타내었다. “흠, 그 매력이 뭔지 알 것도 같구나. 넌 용감해 애야. 눈치도 빠르고, 하지만......”


“고맙습니다” 다시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얼른 릴리가 말을 중단시켰다. “레이디 리온, 당신이 우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 주시겠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존경스러운 사람들 속으로 다시 받아들여진다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그 말은 맞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데, 건방진 아가씨. 그 일은 충분히 가능하고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네가 더 이상 스캔들이 될 만한 구경거리를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요, 제 아내는 그렇게 할 겁니다. 저도 그렇구요, 밀드레드 숙모님” “좋아, 그렇다면 내가 힘을 써 보겠다” 그녀는 워터루 전쟁에 나가는 웰링톤 장군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그리고 물론, 너희들은 내 지시를 따라야 한다” 알렉스가 숙모에게 걸어가 입을 맞추었다. “전 분명 숙모님께 의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흥, 허풍하고는” 그녀가 릴리에게 손짓하였다. “너도 나에게 키스해 주렴, 아가야” 릴리가 얌전하게 나이 든 여자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널 보고 나니, 그 모든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겠구나. 방탕한 생활은 언제나 얼굴에 드러나는 법인데, 넌 내가 예상한 것보다 순진해 보인다. 옷만 제대로 입으면, 착한 성품의 여자처럼 보일 수 있을 거야” 릴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온순하였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리온이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그 눈에 문제가 있어, 검은 빛을 띤 갈색이 이교도적인데다 장난기로 가득 차 있으니. 그런 표정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알렉스가 릴리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항의하였다. “그녀의 눈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마세요, 숙모님. 그녀에게 아주 아름다운 부분인걸요. 제 마음에 들기도 하구요” 릴리는 말없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말이 전해준 감동에 온몸으로 온기가 퍼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그의 팔이 없다면 쓰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레이디 리온의 흥미 어린 시선을 느꼈지만, 그녀는 그의 처분만을 바라는 여자처럼 기다릴 뿐이었다. 그가 허리를 한 번 힘주어 잡았다가 풀어주었다. 레이디 리온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날카로움이 덜해졌다. “잠시 우리만 있게 해주렴, 알렉스” 알렉스가 대뜸 걱정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숙모님, 더 얘기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요” “걱정 말아라, 이 늙은 드레곤이 너의 예쁜 신부를 깨물어 먹지는 않을 테니까. 몇 가지 충고를 하고 싶을 뿐이다. 이리 와라, 아가야” 그녀가 두드린 옆자리에 릴리가 다가가 앉았다. 숙모의 경고하는 시선을 받은 후에야 마지못해 떠나는 알렉스의 모습이, 레이디 리온은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저 애는 너에 대한 어떤 비난도 달가워하지 않는구나” “자신이 집적 하는 것만 빼구요” 그 말에 레이디 리온이 웃음을 터트렸다. “저 애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조카란다. 우리 가문의 가장 모범적인 남자지. 나의 버릇없고 한량 기질만 있는 아들 녀석 로스보다 훨씬 칭찬할 만한 아이야. 네가 알렉스의 눈에 든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거다. 네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냈는지 나로서는 불가사의하다고 밖에 할 수 없지만” “저도 그래요” “상관없다. 넌 그 애를 아주 많이 변화시켰어. 어렸을 적, 그 애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 이후로 지금처럼 쾌활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단다” 릴리는 그 말이 준 무한한 기쁨을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캐롤라인 휘트모어와 약혼을 때......” “그 미국 여자에 대해 내가 한마디 해주지, 그 애는 글래머에다 아름답고 낙천적인 타입이었다. 물론 알렉스에게 적당한 아내가 되었을 거야. 하지만 알렉스의 깊은 곳까지 이해하지 못했어, 관심도 없었고. 그 애는 알렉스가 주는 큰 사랑에 대해 감사할 줄 몰랐어. 레이포드가의 남자들은 그런 면에서 아주 특별하거든. 그들은 자기 여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쏟아, 집착한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알렉스의 아버지인 내 동생 찰스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로 자신도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아내가 없는 삶은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그 얘기에 대해 알고 있니?” “아뇨” “알렉스도 다르지 않단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는다는 건 죽음이든, 배신이든 그 애에게 똑같은 영향을 끼치게 될 거야” “레이디 리온, 아무래도 상황을 너무 과장하시는 것 같아요. 그가 날 생각하는 건 그 정도는 아니랍니다. 단지 그는......” “넌 내가 생각한 만큼 명석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너에 대한 그 아이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말이다” 놀라움과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힌 채, 릴리는 레이디 리온을 쳐다보았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내가 젊었을 적보다 훨씬 더 머리가 둔한 모양이다. 입 다물어라, 얘야. 파리 들어갈라” 그 신랄한 말투는 흡사 샐리 숙모님을 연상시켰다. 샐리 숙모님이 이 우아한 부인보다 훨씬 더 괴상하긴 했지만. “숙모님, 저에게 충고하실 게 있다고 하셨던가요?” “오, 그래” 레이디 리온은 의미 싶은 눈으로 릴리를 응시했다. “너와 너의 괴팍한 행동들에 대해 모두 다 들었다. 솔직히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하더구나. 난 아름다운 용모에 호기심이 많은 소녀였지, 결혼하기 전에는 수많은 남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단다. 내 어머니가 대단히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난 한 남자를 남편이자 주인으로 맞아야 한다는 게 별로 달갑지 않았다. 런던 모두를 내 발 아래 두고 싶어했으니까 말이야. 꽃다발과 시, 도둑 키스들. 그건 아주 유쾌했다. 난 당연히 결혼으로 그 모든 걸 희생하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여겼지. 하지만 리온 경과 결혼했을 때 깨달은 게 있단다. 훌륭한 남자와의 사랑은 몇 가지를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샐리 숙모가 돌아가신 후 릴리는 이렇게 솔직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짐을 약간 풀어놓으며 진심을 내보였다. “레이디 리온, 전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어요. 너무나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살아왔지요. 알렉스와 난 금세 서로 잡아먹으려 할 거예요. 우린 둘다 성격이 너무 강해요. 어울리지 않는다구요” 레이디 리온은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한 것 같았다. “이걸 생각해 봐라. 알렉스는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을 기꺼이 감수할 정도로 널 원해. 자존심을 무척이나 중히 여기는 남자에게, 그건 큰 용기란다. 너를 위해 자신을 바보로 만들 수 있는 남자와 결혼한 건 대단히 행운이야” “그 사람이 바보처럼 보일 일은 없어요. 제가 그런 당황할 만한 일을 만들지 않을 거니까요”


그 순간 커벤트 가든에서의 늙은 곰 사건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결혼식이 끝나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벌써 수치스러운 행동을 해버리지 않았던가. “빌어먹을” 자기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레이디 리온은 씨익 미소로 답했다. “너에게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앞으로 많은 싸움이 있어야 하겠지, 물론 가치 있는 싸움을. 재미있는 볼거리가 되리라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레이디 리온은 작은 저녁 모임에 연달아 그들을 참석시킴으로써, 조용하면서도 점잖게 그들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런던 전체에 그들의 시시콜콜한 얘기가 전부 펴졌기 때문에 스캔들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하지만 레이디 리온이 그 불명예를 약화시켜 주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라, 릴리는 모임에 점잖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고 노부인과 명망 있는 기혼녀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크레이븐스에서 릴리와 같이 도박을 하며 술을 마시고 농담을 주고받았던 남자들이 이런 모임에서는 깍듯한 예절로 대접하는 것이 놀라웠다. 가끔 가다 나이 든 신사 몇 명은 즐거운 공범인 듯 그녀에게 살짝 윙크를 하기도 하였다. 부인들은 겉으로는 상냥한 척하였고, 그 누구도 속마음을 드러내면서 그녀에게 감히 노골적인 푸대접을 하지 못했다. 레이디 리온과 그녀의 존경받는 친구들이 언제나 그녀의 옆에 있었게 때문이다. 릴리가 소유한 명예와 그 뒤를 받쳐주는 알렉스의 든든한 재산도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사교 모임은 성공적으로 치를 때마다 그녀의 기반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수년 간 형식적으로만 대하던 귀족들이 이젠 그녀에게 찬사를 늘어놓으며 애정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마치 그녀를 언제나 좋아하고 있었다는 듯이. 위층 응접실에서 초대장을 들여다보면서, 릴리가 불평을 털어놓았다. “무슨 흠이 없을까 하며 쳐다보는 사람들 앞에 나가는 건, 꼬리에 리본을 단 당나귀가 된 기분이라구요. ‘이봐요, 여러분. 이 여자는 우리가 걱정하는 것처럼 천박하지는 않답니다’ 이런 노력이 그만한 가치가 있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에요, 백작님!” “그게 진짜 그렇게 골치 아픈 일이오?”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가엾다는 듯이 물었다. “아뇨, 나도 성공하고 싶기는 했어요. 그러지 못하면, 밀드레드 숙모님하테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걸요” “그분은 당신을 좋아하오” “오, 정말이에요? 그래서 언제나 내 행동과 내 눈, 옷에 대해서 비판을 하시는 거로군요. 언젠가는 가슴을 너무 드러냈다고 혼을 내셨어요. 맙소사, 난 정말 할 말이 없었다구요!” 그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아졌다. “당신은 아름다운 가슴을 가졌소” 그녀가 자신의 작은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더 커져야 한다면서 내 가슴에 찬물을 뿌리셨어요. 하지만 절대 뜻대로 되지는 않았죠. 페넬로페의 가슴이 훨씬 더 예뻐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는걸” 그가 초대장들을 바닥으로 슬어내며 손을 뻗어오자,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재빨리 피했다. “알렉스! 팍슨 경이 서류를 갖고 금방 도착할 거예요” “그럼 기다리라고 하지” 그녀의 허리를 잡아 그가 자신의 밑으로 끌어당겼다. 릴리는 웃으며 열심히 몸을 빼냈다. “버튼이 위층에 올라왔다가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하려고요?” “버튼은 너무 훈련이 잘 돼 있어서 그럴 일 없소” “백작님, 그에 대한 당신의 자부심을 정말 절 놀라게 한답니다. 자기 집사에게 그렇게 애착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영국 최고의 집사인걸” 그는 그녀의 정력적인 반항을 즐기며 그녀를 내리눌렀다. 작은 체구의 여자치고, 그녀는 놀라울 만큼 힘이 셌다. 그녀가 그를 막으려 애쓰며 낄낄거렸다. 그에게서 거의 벗어나려는 찰나, 그가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쭉 들어올렸다. 그의 다른 손은 대담하게 그녀의 몸을 훑어갔다. “알렉스, 이거 놔요” 그가 그녀의 소매를 끌어내리고 보디스까지 잡아당겼다.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주겠어” “알았어요. 난 아름다워요. 눈이 번쩍 뜨일 정도죠.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그 순간 섬세한 천이 찌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알렉스는 계속해서 그녀의 젖가슴이 드러날 때까지 드레스를 끌어내렸다. 그녀의 맨살을 쓰다듬으며, 그의 손가락 끝이 섬세한 가슴의 꼭대기를 어루만졌다. 그의 시선은 뜨거워졌고 그녀의 장난기도 사라졌다. “지금은 안 돼요” 무수한 감각들이 불꽃을 튀기자 그녀는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팍스를 만나야 한단 말이에요” “당신보다 중요한 건 없어” “제발 이성을 “난 누구보다 이성적이오” 그의 입이 젖꼭지 위에서 벌어지며 그 탱탱한 봉오리를 힘껏 빨았다. 그의 나른하고 관능적인 키스에 릴리는 몸을 떨며 그의 손아귀에 손목을 잡힌 채 이리저리 머리를 돌릴 뿐이었다. 알렉스가 그녀의 마를 올려 실크 스타킹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당신처럼 원해 본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장난을 치다가 귓속을 혀로 핥았다. “당신을 삼키라면 삼킬 수도 있어. 당신의 가슴과 입과 당신의 모든 걸 사랑해. 내 말을 믿소?” 그녀가 대꾸하지 않자, 그는 그녀에게 입술을 대며 다시 물었다. “날 믿소?” 그 순간 응접실의 닫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움에 흠뻑 빠져버린 그녀의 마음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알레그가 고개를 들고 숨결을 진정시켰다. “무슨 일이지?” 그의 목소리는 놀라운 정도로 태연스러웠다. 닫힌 문을 뚫고 버튼의 정중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주인님, 방금 여러 명의 손님들이 한꺼번에 도착하셨습니다" “여러 명이라니? 누구지?” “로슨 경 부부와 스탬퍼드 부부, 헨리 도련님과 그의 선생이라는 신사 한 분입니다” “가족들이?” 릴리는 놀란 소리를 내질렀고, 알렉스는 한숨을 쉬었다. “헨리는 내일 도착하기로 했는데, 그 애가 왔다고?” 알렉스는 버튼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지시하였다. “모두 아래층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시오, 버튼. 우리가 금방 내려간다고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주인님” 릴리가 알렉스의 어깨를 움켜잡고 충족되지 못한 욕망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싫은데” “나중에 계속합시다” 그녀의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욕구불만에 빠진 그녀는 그의 손을 끌어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그가 웃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손님들은 저녁식사를 하고 가실 거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다 가라고 해요. 당신과 단둘이 있고 싶어요” 알렉스가 씨익 웃으며 그녀의 등을 만져주었다. “우리에겐 수천 번의 밤들이 있다오. 내가 약속하겠소” 릴리는 과연 그럴까라고 생각하였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비밀을 그는 모르고 있다. 그들을 영원히 갈라놓게 될 비밀을.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그의 약속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알렉스는 그녀의 찢어진 천을 살펴보고는 다시 한 번 젖가슴 사이의 얕은 계곡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소. 나로선 이 모습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만, 당신 어머니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실 거요” 릴리는 검붉은 실크에 투명한 그물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망사 같은 소매 사이로 그녀의 유연한 팔이 내비쳤고, 살짝 퍼진 치마는 걸을 때마다 부드럽게 다리에 휘감겼다. 밀드레드 숙모님이 좋아하지 않을 유혹적인 드레스였지만, 그 옷이 자신을 돋보이게 해준다는 걸 알았기에 입기로 결심하였다. 알렉스가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대단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릴리!” 레이디 토티가 반갑게 소리쳤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딸아, 당장에 널 보로 오고 싶었단다. 넌 이 엄마를 너무나 행복하고 즐겁게 해주었어. 널 생각할 때맏 기쁨의 눈물이 흐를 정도로 자랑스럽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릴리는 어머니를 얼른 껴안으며, 페넬로페와 재커리에게 슬쩍 눈으로 웃어주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재커리의 옆에 선 페넬로페의 얼굴이 사랑으로 빛나고 있었다. 재커리도 행복에 겨운 얼굴이었지만, 릴리에게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이 소식을 우린 믿을 수가 없었답니다. 당신이 괜찮은지 보러 올 수밖에 없었지요” 릴리를 껴안으며 그가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난 괜찮아요” 오랜 친구의 시선을 받으며 릴리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너무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레이포드 경의 청혼 스타일은 정말 당혹스러울 지경이었어요” 재커리는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살피며 천천히 대꾸하였다. “당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이는군요” 알렉스가 앞으로 나서 장인의 손을 부여잡았다. “로슨 경, 제가 당신의 딸을 보살피고 모든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겠습니다. 미리 허락을 구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우리의 성급함을 용서하시고,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그들은 둘 다 알렉스가 아버지의 허락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슨 경은 보기 드물게 따뜻한 태도로 대답했다. “두 사람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라네, 그리고 두 사람 모두에게 만족스런 인생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레이포드 경”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아빠” 릴리는 놀라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그녀의 손을 잡아준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껏 아버지가 보여준 얼마 안 되는 애정 표현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진심으로 네가 잘 살기를 바란단다, 딸아”


그녀가 미소지으며 아버지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녀의 눈이 촉촉해졌다. “고마워요, 아빠” “이젠 내 차례예요” 헨리가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이제 당신은 내 형수님이에요! 형이 당신과 결혼할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 직감이 들었다구요! 이제 당신은 나와 같이 살 거고, 다시 날 크레이븐스에 데려가 줄 거고, 말을 타고 사격도 하러 갈 거고, 카드의 속임수도 가르쳐 줄 거고......” 릴리가 그의 입을 막으며 장난스레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더 이상 말하면 안 돼. 헨리, 네 형이 당장 이혼수속을 밟을지 모른다구” 알렉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으며 뺨에 키스하자,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절대 그런 일은 없소” 그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릴리는 이 순간만이라도 그 말을 사실로 믿기로 했다. “버튼이 하얀 커드를 내밀며 정중하게 끼어 들었다. “레이포드 경, 팍슨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리 모시고 오세요. 그분도 저녁식사를 하고 가실 것 같네요” 그들은 모두 느긋하게 즐거운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팍슨 경이 제안한 의견에서부터 헨리의 선생인 라드번 씨가 역사와 언어에 능통한 상냥한 남자라는 얘기까지 대화는 쉼 없이 이어졌다. 릴리는 대화가 늘어질 때면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어, 모든 손님을 편안하게 해주는 완벽한 여주인이었다. 알렉스는 테이블 끝에 앉은 그녀를 자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적어도 오늘밤, 그녀의 긴장감은 약해졌고 태양처럼 눈부시고 사랑스러우며 매력적인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며 멈칫했다. 신사들이 완인을 마시러 나가자, 페넬로페가 릴리를 구석으로 잡아 끌었다. “언니, 언니가 레이포드 경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린 너무나 충격을 받았어. 우리 모두 다! 특히나 엄마는 기절하실 뻔했어. 우리 모두 언니가 그를 증오하는 줄 알았거든!” “나도 그런 줄 알았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릴리는 수줍게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설명하기 좀 힘들어” “레이포드 경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해. 언니를 흠모하는 눈길로 쳐다본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결혼한 거야? 난 아무것도 이해가 안 돼!” “이해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그래. 페니, 내 결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말자. 난 네 얘기를 듣고 싶어. 재커리와 행복한 거지?” 페넬로페가 정열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상상 이상이야! 난 매일 아침 이 모든 행복이 꿈으로 끝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잠을 깬다니까. 우습게 들리지?” “그렇지 않아, 아주 멋지게 들려” 릴리가 갑자기 동생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가출한 얘기 좀 해봐. 재커리가 돈 주앙처럼 능숙하게 굴었니, 아니면 수줍은 신랑처럼 행동했니? 어서,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하게 얘기해 보라구” “언니도 참” 페넬로페는 얼굴을 붉히며 망설이다가, 늦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자리에 드신 후, 하인의 도움으로 재커리가 집안으로 살짝 들어왔어. 그 사람이 내 방으로 들어와서 날 안고는 자기 아내가 되어달라고 말했어. 가족을 위해 내 행복을 희생하는 건 자기가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잘 해냈구나” 릴리가 환성을 질렀다. “난 손가방에 몇 가지 짐만 챙겨서 그이와 같이 밖에서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탔어. 오, 붙잡힐까봐 얼마나 겁이 났는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알아차리시지 않을까, 레이포드 경이 당장이라도 돌아오지나 않을까 해서” “레이포드 경은 내가 확실히 붙잡아 뒀었어” 페넬로페의 눈이 호기심으로 휘둥그래졌다. “언니, 도대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묻지 말아라, 동생아. 한 가지만 더 말해 봐. 재커리는 그레트너그린에 도착할 때까지 신사답게 기다렸니, 아니면 그날 밤 덤벼들었니?” “그런 망측스러운 질문을 하다니. 재커리는 절대 여자의 약한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야, 언니도 잘 알면서. 당연히 재커리는 화로 옆 의자에서 잤어” 릴리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해, 너희 둘 다 정말 못말리게 명예롭다니까” “레이포드 경도 마찬가지야. 그는 재커리보다 더 성실하고 보수적인걸. 언니네 부부가 우리 같은 상황이었다면, 레이포드 경이 모든 예의를 갖춰 행동했으리라는 점은 확실해” 릴리는 생각해 보고 나서 씨익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그는 절대 의자에서 자지는 않았을 거야, 페니” 모든 손님들이 떠나고, 헨리와 그의 선생님은 각자의 방으로 갔다. 릴리는 하인들과 모든 게 정리되었는지 확인하고 나서, 알렉스와 같이 침실로 올라갔다. 그녀가 동생의 행복에 대해 수다를 떠는 동안, 알렉스는 하녀를 나가게 하고 릴리의 옷을 벗겨주었다. “페니는 아주 화사했어요. 그렇게 행복한 모습은 본 적이 없어요” 알렉스가 드레스를 풀어주었다. “좋아 보이더군” “좋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 애는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이 나던 걸요” 릴리는 드레스를 벗고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았고, 알렉스가 그녀의 스타킹을 내렸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전에 당신의 험악한 얼굴과 퉁명스런 태도가 그 애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깨닫게 해주었어요” 그녀가 그의 셔츠 단추를 풀며 도발적으로 미소지었다. “그녀를 당신에게서 떼어놓은 것이 내가 한 것 중 가장 훌륭한 일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날 거의 죽일 뻔했지” 알렉스가 벗겨낸 실크 스타킹을 들어올려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오, 과장하지 말아요. 머리를 약간 때린 것뿐이었어요. 당신을 아프게 하는 건 싫었지만, 막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당신은 세상에 둘도 없는 고집 센 남자잖아요” 그녀가 미안한 듯 그의 금발 머리를 어루만졌다. 알렉스는 셔츠를 벗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날 밤 날 잡아두기 위해 덜 고통스러운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요” “당신을 유혹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별로 내키지 않았답니다” 알렉스는 자신의 나머지 옷가지를 벗어 던졌다. “난 아직 그날 밤 당신의 친절에 대해 보답을 하지 못했소” “친절에 대해 보답?”


그가 얌전하게 슈미즈를 벗고 나서 시트 밑으로 들어갔다. “내 머리를 병으로 치고 싶다는 뜻인가요?” “그런 건 아니야” 그가 침대 안으로 들어와 짐짓 거칠게 그녀를 베개로 밀어붙였다. 그가 강압적으로 그녀를 내리누르며 도둑 키스를 퍼붓자, 그녀는 웃으며 몸부림을 쳤다. 그렇게 서로 뒹굴다가, 문득 그녀는 자신의 팔이 스타킹으로 침대 기둥에 묶여 있는 걸 발견하였다. “알렉스”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나머지 팔도 침대 기둥에 묶었다. 그녀는 웃음을 그치고 손목을 잡아당겼다. “뭐하는 거예요? 그만 둬요. 이거 풀어요, 당장” “아직은 안 돼” 그가 그녀의 위로 몸을 굽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에 에로틱하면서도 두려운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알렉스, 이러지 말아요” “아프게 하지 않을게, 눈을 감아” 그녀는 망설이며 그의 단호한 황금빛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인한 그의 몸이 그녀의 바로 위에 위치하였고, 그의 손가락은 목덜미에 가볍게 닿아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굴복하였다. 그의 손과 입이 그녀의 위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녀의 몸이 해방을 갈구하며 굳어질 때까지 부드러운 키스로 고문을 했다. 천천히 진입해 들어오는 그에게 그녀가 몸을 들어올렸다. 그의 몸이 그녀 안으로 깊숙이 밀려들며, 그의 입술은 달콤한 키스로 그녀를 휩쓸었다. 그녀는 두 다리와 자신의 팔로 그를 껴안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무력하게 몸만 떨었다. 한순간 그녀의 눈앞에 엄청난 환희와 하얀 열기가 폭발하였다. 그리고 그 또한 그녀의 안에서 해방을 경험했다. 나른하게 그 환희를 음미하며 그녀는 숨을 진정시켰다. 손목이 풀리자,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예요?”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당신도 이 느낌을 알고 싶어할 것 같았소”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똑같은 말을 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며, 목이 메이는 느낌이었다. “알렉스, 난 더 이상 당신과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뭘 원하지?” 릴리는 그의 머리를 움켜잡고 자신의 입으로 입술을 끌어내렸다.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어요” 날이 갈수록, 릴리는 남편의 손길과 미소, 그가 옆에 있기를 갈망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와 함께 하는 삶이 지루하고 답답하리라 예상했었는데, 오히려 그 전에는 알지 못했던 흥분의 나날이었다. 그녀를 자극했다가 당황스럽게 만드는 알렉스는 다음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때로는 같이 술을 마시며 카드 놀이하는 친구를 대하듯이 씩씩하고 거리낌 없이 그녀를 대하였고, 그녀가 말을 타고 총을 쏘는 일에 아무 반대도 하지 않았다. 또 권투 경기에 데려가, 그녀가 격렬한 싸움에. 움츠렸다가 벌떡 일어나 환호할 때 마다 웃음을 터트렸다. 알렉스는 사림을 경제적이고 솜씨 있게 처리하는 그녀에게 놀라워했고, 그녀의 지성을 자랑스러워했다. 사실 그녀는 지난 2 년간의 불규칙한 수입 때문에 절약하며 사는 일에 이미 전문가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칭찬을 듣는 것이 즐거웠고, 의견을 존중해 주는 그가 고맙기도 하였다. 때때로 그녀를 자극하여 숙녀답지 못한 행동으로 몰고 나서는 놀려대는 그의 행동도 유쾌하였다. 하지만 그녀를 희귀하고 약한 꽃을 다루듯이 대하는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욕실로 들어와 그녀의 머리를 감겨주고 부드러운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피부에서 윤이 날 때까지 향기로운 오일을 발라주었다.


릴리는 이토록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극한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었다.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해 왔던 그녀로서, 모든 일에 자기편이 있다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녀가 무언가 갖고 싶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마구간의 말이건, 극장 관람권이건 아니면 그에게 안겨 있는 편안함이건. 악몽을 꾸는 밤이면 그는 키스로 그녀를 깨워 잠들 때까지 품안에 꼭 안아주었다. 그녀가 그를 즐겁게 해주고자 할 때는, 두 사람 모두를 흥분시키는 에로틱한 강습으로 근기 있게 그녀를 이끌어주었다. 그의 사랑 행위는 대단히 다양하였다, 야만적인 독진에서부터 몇 시간이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유혹까지. 어떤 쪽이든 간에, 그녀는 언제나 완벽하게 만족스러웠다. 날이 갈수록 그는 그녀의 방어 막을 제거하고, 그녀를 부드럽고 솔직하며 연약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알렉스는 오만과 부드러움을 조화시켜, 그녀의 개인적인 일들을 고백하도록 했다. 그는 그녀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고, 그녀의외면 아래 숨겨진 수줍음을 이해하였다. 수도 없이 니콜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은 유혹이 생겼지만, 그녀는 여전히 두려웠다.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고, 아직은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주세페의 전갈이 오면 그녀에게 은밀히 알리라는 지시를 버튼에게 전했지만, 연락은 오지 않고 시간만 지나갔다. 녹스 씨를 다시 고용할까도 생각했지만, 딸아이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혹시라도 틀어질까봐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때로는 그 긴장감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 알렉스에게 조차 짜증을 냈다. 한번은 그 짜증에 그가 날카로운 반응을 보여 말다툼을 벌였다. 다음날 아침 자신이 비이성적으로 생동했다는 걸 잘 알기에 그의 눈을 마주보지도 못 하였지만, 알렉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부드럽고 따듯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그녀가 이 세상에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그런 남편이었다. 관대하고, 쉽게 용서하며, 자기보다 그녀의 요구에 더 관심을 갖는. 하지만 그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보호적이고 질투가 심했다. 자기 아내를 너무 유심히 바라본다든가 오랫동안 손을 붙잡고 있는 듯한 남자에게는 금세 인상이 험악해졌다. 런던의 모든 남자가 그녀를 갖고 싶어한다고 믿는 듯한 그의 태도는 우스울 지경이었다. 만날 때마다 매력적으로 다가서는 그의 사촌 로스는 특별히 더 그녀와 떼어놓으려고 애를 썼다. 큰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 로스는 그녀의 손에 무수한 키스를 퍼부으며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디 레이포드, 당신의 아름다움은 달빛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군요. 절 비천하게 만드십니다” “내가 널 비천하게 만들어 줄 테다” 그에게서 아내의 손을 빼며 알렉스가 험악하게 끼어 들었다. 로스는 릴리에게 즐거운 미소를 보였다. “당신 남편은 날 믿지 않는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는, 다시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제가 원하는 건 당신과 같이 왈츠를 추는 것뿐이랍니다, 마담. 천사와 춤춰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이번 곡은 나와 약속이 되어 있어” 알렉스가 아내를 끌어당겼다. “그럼 다음 곡은?” 알렉스가 뒤를 돌아보고 대꾸하였다. “그녀는 모든 곡을 나와 같이 춤출 거야” “알렉스,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어머니는 나에게 우아하게 춤추는 법을 가르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셨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내가 춤추는 건 늘 야생마가 날뛰는 것과 같다고 하였서요” “그렇게 심하기야 할까?” “장담하지만, 정말 지독해요!” 처음에는 농담이라 생각했지만, 즉시 그도 그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아내의 왕성한 움직임을


저지하게 위해 모든 힘을 기울여야 했다. 리드하려고 하는 아내를 조종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날 따라오시오” 그의 손이 강하게 이끄는데도 불구하고, 릴리는 계속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당신이 날 따라오는 데 더 쉽겠어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제안하였다. 그가 고개를 숙여 지난번 사랑을 나누었던 때를 생각해 보라고 속삭였다. 그 괴상한 충고에 그녀가 낄낄대며 웃었지만, 그녀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갑자기 그에게 통솔력을 주는 것이 쉬워졌다. 다가오는 다른 쌍을 슬쩍 피할 정도의 여유까지 생겼다. “와, 우리가 잘 해내고 있어요!” 그녀의 놀라는 표정에 씨익 웃으며, 알렉스는 그녀와 같이 몇 곡의 왈츠를 더 추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노골적으로 애정을 표시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알렉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세련된 사교계 여자들은 흔들리는 부채 뒤로 얼굴을 숨기며 부러움을 속삭였다. 그들의 남편은 아내에게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밤을 애인의 침대에서 보내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페넬로페조차도 재커리에게 그런 애정을 받아보지 못했노라고 말할 정도였다. “형부와 보통 무슨 얘길 해?” 드루리 레인의 연극을 보러 갔다가 쉬는 시간에 페넬로페가 릴리에게 물었다. “무슨 얘길 하길래 언니에게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거야?” 릴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1 층 홀의 구석에서 얘기하고 있는 두 사람 곁으로 기네스 다슨 부인과 레이디 엘리자베스 버로리가 합류하였다. 두 사람 다 릴리와 친해지기 시작한 젊은 부인들이었다. 릴리는 활기찬 유머 감각을 지난 엘리자베스가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 “나도 이 대답을 들어야겠어요. 우리 모두 어떻게 하면 남편을 위 옆에 달라붙게 만들 수 있을까요? 대체 무슨 얘길 하길래, 그가 그렇게 홀딱 반한 거예요, 릴리?” 릴리는 맞은편에서 남자들과 같이 얘기중인 알렉스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그도 뒤돌아보며 살짝 미소를 보냈다. 그녀가 여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린 거의 모든 얘기를 다 해요. 당구와 화장품, 벤담. 난 그가 싫어하는 것에도 내 의견을 저주 없이 말해요” “하지만 우리는 벤담 같은 정치인에 대해 남자들과 얘길 해서는 안돼요. 그런 얘기는 남자들끼리 하는 거예요” 기네스 부인은 당혹스러워 하며 말했다. “내가 또 잘못된 짓을 한 모양이군요. 정치인에 대해서는 토론하지 말아야 하는군요” 릴리는 웃으며 그 얘기를 마음에 새기는 척하였다. “릴리, 얘기 돌리지 말아요. 레이포드 경은 그런 대화를 좋아하나 봐요. 나도 남편에게 화장품과 벤담에 대한 의견을 물어봐야겠어요!” 엘리자베스가 눈을 빛내며 한마디 했다. 릴리는 미소지으며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까만 머리카락, 낯익은 얼굴이 눈에 스치자 그녀의 화들짝 경직되며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눈을 깜박이고 나서 다시 그 모습을 찾았지만, 그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의 팔에 부드러운 손이 닿았다. “언니? 왜 그래?” 페넬로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12. 멍하니 사람들 사이를 훑어보던 릴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미소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세페일 리는 없다. 수년 동안 그가 이렇게 사람들 틈에 섞인 적은 없었다. 그가 이곳에 왔을 리가 없다. 조속한 무리들과나 어울리겠지.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는 얼굴을 본 것 같아서” 불길한 느낌을 떨쳐내고 연극을 즐기려 해보았지만, 막상 연극이 끝났을 때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은 알렉스는 몇몇 친구들의 초대를 거절하고 백조의 궁전으로 곧장 돌아왔다. 릴리는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알렉스의 장갑과 모자를 받아드는 버튼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특별한 연락이 있었나고 물을 때마다 보여주던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멀없는 질문에, 버튼은 살짝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걸 보자 그녀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자신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얼마나 많은 밤들을 기다리며 가슴앓이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애써 연극에 대해 가벼운 수다를 늘어놓았지만, 알렉스는 그녀의 기분을 감지하였다. 브랜디를 마시려 하는 그녀에게 그는 뜨거운 우유 한 잔만을 허락하였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별 말 없이 우유를 마시고 나서 옷을 벗고 침대로 올라갔다. 알렉스가 몸을 밀착시켰지만, 처음으로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는 알렉스에 그녀는 다만 머리를 흔들었다. “피곤해요, 그냥 날 안아주세요” 알렉스의 품속에서,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니콜이 어두운 안개 속에서 그녀의 앞에서 춤을 추었다. 릴리는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지만, 언제나 몇 걸음 앞에 있을 뿐 잡히지는 않았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주위에 메아리치고, 그녀의 귀에 악마의 조롱 섞인 속삭임이 들렸다. ‘넌 절대, 절대, 딸을 찾을 수 없다. 절대’ “니콜” 그녀가 절망적으로 소리질렀다. 더 빨리 달려나가며 두 팔을 쭉 뻗었다. 다리에 감겨드는 덩굴 때문에 넘어질 뻔하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격하게 흐느끼며 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니콜의 겁먹은 울부짖음이 들렸다. “엄마” “릴리” 뿌연 안개 속으로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뚫고 들어왔다. 알렉스가 그녀를 단단히 안아주고 있었다. 그녀는 긴장을 풀고 숨결을 진정시켰다. 악몽이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서 강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눈을 깜박여 완전히 깨어났을 때, 그녀는 지금 침대 속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긴 계단의 맨 위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몽유병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알렉스의 얼굴과 목소리는 초연하였다. “잠에서 깨어보니 당신이 없었소, 당신을 이 계단 위에서 찾아냈지. 거의 떨어질 뻔했소,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거요?” 지금 그녀는 질문에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녀가 애써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악몽의 느낌을 떨쳐버렸다. “무언가 잡으려고 하던 중이었어요” “무얼?” “몰라요” “당신이 내게 진실하지 않으면 도와줄 수가 없잖소. 그 그림자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수도 없고, 그 꿈에서 안전하게 지켜줄 수도 없소” “얘기했잖아요, 잘 모르겠다구요” 그들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내가 말한 적 있던가, 얼마나 속는 걸 싫어하는지?” 그녀는 카펫과 벽과 문, 어디든 쳐다보며 그의 얼굴을 회피하였다. “미안해요” 악몽을 꾸고 났을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그에게 안겨 위로받고 싶었다. 잠시만이라도 그의 몸을 느끼며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알렉스, 날 침대로 데려가 줘요” 그는 너무나도 정중하게 그녀를 떼어놓으며 침실 쪽으로 밀었다. “가시오, 난 잠시 혼자 있겠소” 그의 거절에 놀란 그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무얼 하시려구요?” “책을 읽을지 술을 마실지, 아직은 모르겠소”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릴리는 죄책감과 근심이 뒤섞인 가운데 침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서 자신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속는 걸 싫어하신다구요? 하지만 내가 혼자 침대에 드는 걸 싫어하는 만큼은 아닐걸요” 그들 간의 싸늘한 냉기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릴리는 혼자서 하이드 파크로 아침 승마를 나갔고, 나중에는 평소에 그렇게도 지겨워하던 답장을 쓰며 자신을 바쁘게 몰아댔다. 참석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파티가 열릴 때 참석하고 싶다는 초대의 글들이 수도 없이 쌓여 있었다. 무도회, 디너파티, 음악회 모임. 가을에 슈럽셔의 클리브랜드에서 거위 사냥을 하지 않겠냐는 초대도 있었다. 그런 요청에 어떻게 답신해야만 할까?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초대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언제나 알렉스와 같이 있는 미래를 계획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는 걸 음울하게 떠올릴 뿐이었다. 그녀는 초대장들을 옆으로 밀쳐놓고, 알렉스의 책상에 놓인 종이더미를 뒤져 보았다. 점심 모임을 떠나기 전에 그날 아침 적어놓은 메모들이 있었다. 강하고 대담한 필체였다. 영지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을 읽어보았다. 소작인들에게 비싼 소작료를 받지 말고 장기간의 임대를 허락하라는 것과, 자신의 비용으로 새로운 구덩이와 울타리를 만들라는 지시사항이 적혀 있었다. 릴리는 편지를 내려놓으며 그 끝을 만지작거렸다. 대부분의 부유한 지주들이 이기적으로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는 걸 보아온 그녀에게, 알렉스의 공정함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또 다른 편지가 눈에 띄었다. ‘새 소작인에게, 포키가 살아 있는 동안 들어가는 비용은 전적으로 내 책임질 거라고 전하시오. 특별한 먹이가 필요하다면, 충분히 공급해 주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오. 그 동물이 잘 다루어지고 있는지 이따금씩 내가 직접 방문하여 확인할 것이오’ 릴리는 문득, 포키를 새로운 곳으로 보내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헨리가 오전 내내 정원의 우리 앞에 풀이 죽어 있었다. “꼭 보내야 하나요? 포키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데......” 곁에 다가오는 릴리에게 그가 물었다. “새 집에 가면 더 행복할 거야, 쇠사슬도 없고. 킹스리 경이 포키를 위해 장소를 마련해 놓았대니까. 약간의 빛이 스며드는 시원하고 어두운 곳이래” “이 녀석이 우리보다는 그쪽을 더 좋아하겠군요” 갑자기 알렉스의 조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헨리, 그 우리에서 물러나, 천천히. 다시 그런 짓을 하면, 학교에서 당한 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늘씬하게 패줄 테다” 헨리는 미소를 참으며 당장 순종하였다. 지금까지 무시무시하게 패주겠다는 위협은 많이 있었지만, 형이 자신한테 손가락 하난 건드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착한 곰이라구요, 형” “그 착한 곰이 네 팔뚝을 물어뜯을 수도 있다”


“이 녀석은 순하게 길들여져 있어요, 그러기에 너무 늙기도 했구요” “그래도 짐승이야, 인간에게 학대당한 적이 있는 짐승. 그리고 늙었다는 건 중요치 않다. 너도 결국은 알게 되겠지만, 나이가 든다고 해서 성질이 죽는 건 아니야. 밀드레드 숙모님을 생각해 봐라” “하지만 릴리도 곰을 만져 준다구요. 오늘 아침에도 그랬는 걸요” 릴리는 그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배신자. 이 일은 꼭 기억해 둘 거야, 헨리!” 그녀가 알렉스에게 사과의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미 늦었다. “당신이 이 망할 놈의 짐승을 만졌다고? 가까이 가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일렀는데?” “하지만 알렉스, 포키가 너무나 가엾어요” “이제 곧 당신 자신이 가엾어질 거요” 릴리가 도망가려고 몸을 홱 틀었지만, 그는 그녀를 쉽게 붙잡아 자신에게로 꼭 끌어당겼다. 반항적인 아내를 지켜보는 그의 회색 눈동자가 즐거움으로 번쩍거렸다. “내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소” 그가 으르렁거리더니, 헨리가 보는 앞에서 키스를 했다. 그 일을 떠올리는 지금, 릴리는 그날 자신에게 전해졌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다. 그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껏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감정. “오, 어쩌면 좋아. 당신을 사랑해요, 알렉스 레이포드” 릴리는 레이디 리온의 65 세 생일 축하 무도회를 위해 신중하게 차려 입었다. 600 여 명의 손님들이 올 거고, 시골의 여름 별장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자신에게로 시선들이 쏠릴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릴리는 정숙하면서도 절묘한 새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모니크의 숙달된 보조 두 명이 며칠 밤낮으로 공을 들인 끝에, 투명한 분홍빛의 옷감에 금빛으로 화려한 수를 놓은 옷이 완성되었다. 층층이 겹쳐진 치맛자락이 걸을 때마다 뒤를 길게 끌렸다. 그녀가 들어서자, 도서실에서 신문을 보며 기다리고 있던 알렉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한바퀴 빙글 돌렸다.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황금핀이 그녀의 검은 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작은 발에는 발목에 리본을 묶는 노란 구두를 신었다. 알렉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날씬한 몸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도자기로 갓 구워낸 듯이 절묘하고 완벽하였다. 릴리가 유혹적으로 그에게 몸을 붙였다. “가실까요?” “가지” 리온 경의 런던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는 릴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성대하였다. 중세에 기초를 세우고 수세기를 걸쳐 개조된 그 집은 환한 불빛과 신선한 꽃송이에 값비싼 크리스털, 실크, 황금으로 장식되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풍부한 멜로디가 저택 밖까지 울려 퍼졌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레이디 리온은 릴리를 자신의 옆에 달고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를 시켰다. 장관들이나 오페라 가수, 외교관 부부와 저명한 귀족들에게. 릴리는 대화를 나누며 펀치를 마셨고, 알렉스는 로스와 다른 남자들에게 이끌려갔다. 알렉스한테 내기의 중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남자들이란. 그 내기라는 게 어느 빗방울이 창문에서 빨리 굴러 떨어지는가, 아니면 누가 브랜디를 몇 잔이나 마실 수 있는가 그런 것임이 틀림없어요!” 릴리의 말에, 레이디 리온이 놀리듯이 쳐다보았다. “그래, 어떤 사람들은 그 내기에 별 걸 다 걸더구나” 그것이 크레이븐스의 사건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채고는 릴리가 애써 웃음을 참았다. “그건 전적으로 숙모님 조카의 제안이었답니다. 그 에피소드가 잊혀질 때까지 제가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마 내 나이쯤 되어 네 손자들에게 그 얘기를 전부 다 말해 주게 될 거야. 그 애들은 너의 그 엄청난 과거에 대한 감탄할 거고. ‘젊을 때 알았더라면, 늙은 나이에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옛말이 점점 갈수록 실감이 난단다” “손주들” 릴리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낮아졌다. 그녀가 슬퍼하는 이유를 잘못 이해한 레이디 리온이 안심을 시켰다. “시간은 충분해, 앞으로 몇 년 간은. 나도 로스를 서른 다섯에 낳았고, 막내인 빅토리아를 마흔에 낳았으니까. 넌 아직 비옥한 땅을 갖고 있단다, 얘야. 알렉스가 그곳을 아주 잘 일굴 거라 생각한다” “밀드레드 숙모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너무나 충격적이에요!” 바로 그때 하인 한 명이 조심스레 릴리에게로 다가왔다. “마님, 죄송합니다만 초대장을 갖지 않으신 신사분이 입구에 와 계십니다. 마님의 청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직접 나오셔서 신분을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난 아무도 초대하지......” 그 순간 한 가지 끔찍한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의 입이 그래도 다물어졌다. “아니야” 그녀의 중얼거림에 하인이 당황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마님, 그분에게 떠나시라고 할까요?” 릴리는 숨을 삼키고는, 레이디 리온의 날카로운 시선을 의식하며 애써 미소를 보였다. “아니, 내가 직접 가서 그 수수께기를 풀겠어요” 그녀가 레이디 리온을 쳐다보면서 쾌활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엿다. “호기심은 언제나 저의 큰 병이랍니다” “별로 좋은 증상은 아니지” 레이디 리온이 생각에 잠겨 대꾸하였다. 릴리는 하인을 따라 멋진 저택을 가로질러갔다. 현관에 도착한 손님들은 공손한 하인들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검은 머리의 사내가 대뜸 눈에 띄었다. 릴리는 걸음을 멈추고 겁먹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미소짓고는 과장되게 한 손을 휘저으며 절을 해보였다. “이 손님을 아시겠습니까?” 하인이 바로 뒤에서 물어왔다. “네, 그는 오랜 친구예요, 이탈리아 귀족이지요, 주세페 가바치 백작” 하인은 의심스러운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귀족적인 차림-실크 바지와 풍부하게 수를 놓은 코트,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넥타이-에도 불구하고, 주세페에게는 조잡한 성격을 드러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와 비교하면, 데릭 크레이븐이 차라리 왕자와 같은 태도와 정중함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잘난 척하는 표정에는 자신이 예전 같이 귀족의 처지인 양 생각하는 것이 역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매력적인 미소는 느끼해졌고, 대단히 잘생겼던 용모는 평범하고 딱딱해졌다. 한때 너무나 부드러웠던 까만 눈동자에도 지금은 불쾌한 탐욕스러움만이 가득하였다. 멋진 옷을 입고 있음에도 그는 백조들 사이에 낀 까마귀 같았다. “알겠습니다” 하인이 중얼거리고 나서,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갔다. 릴리는 미동도 않고 서서 주세페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이탈리아에서의 당신이 생각나는 군” “어떻게 이런 짓을? 당장 여기서 나가” “하지만 이런 귀족 사회가 내가 본래 속한 곳인걸, 카라. 내 자리를 찾으러 왔어. 난 돈이 있고, 명문가의 혈통이야. 플로렌스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레이포드 경과 결혼한 걸 나에게 말하지 않다니 당신 때문에 아주 슬펐다구, 벨라. 우린 얘기할 게 아주 많아”


“여기서는 안 돼. 지금은 안 돼” 그녀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저 안으로 날 데려가서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줘. 당신은 나를 도와야 해” “후견인 노릇을 하라고? 맙소사” 그녀는 흘깃흘깃 쳐다보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침착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내 딸을 어디 있어, 이 미치광이야?” 그가 조롱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당신이 날 위해 해줄 일이 많잖아. 나중에, 너에게 니콜을 데려다주지” “난 이 년 동안 그 말을 들었어. 이제 충분해, 충분하다구”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가 ‘쉿’ 하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저 사람이 레이포드 경인가?” 그가 지적인 금발 머리의 남자는 로스였다. 호기심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위가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의 사촌” 그녀가 로스를 돌아보며 간신히 온화한 억지웃음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그리 빠르고 영리한 대처는 아니었다. “레이디 레이포드, 어머니께서 당신의 수수께끼 같은 손님을 알아보라고 날 보내셨습니다”로스가 그녀와 주세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탈리아에서 알고 지냈던 친구예요. 리온 경, 이쪽은 주세페 가바치 백작이에요, 최근에 런던에 도착하셨어요” 그를 소개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스의 과장된 부드러움은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주세페는 우쭐하며 미소지었다“ “우리의 친분이 서로에게 이득이 되길 희망합니다, 리온 경” “그럼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레이디 레이포드?” “네, 물론이지요” 로스의 미소에 불쾌감이 서렸다. “배우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셨나요, 레이디 레이포드? 지금 당신의 무대를 기다리는 관객의 환호를 놓치고 계신 것 같군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는 천천히 걸어갔다. “내 남편에게 가는 걸 거야. 떠나라구, 주세페. 이런 웃기지도 않는 짓은 그만 둬! 그런 옷을 입었다고 당신을 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야” 그 말이 그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의 눈에 사악한 불길이 번득였다. “난 여기 남을 거야. 카라” 더 많은 손님들이 도착하면서 릴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녀는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고 손을 흔들어주며, 조용히 주세페에게 말했다. “여긴 사람들의 눈이 많아. 다른 곳에 가서 얘기해. 빨리 와, 내 남편 누에 뜨이기 전에” 남자들끼리 모여 있는 방에서, 로스는 두 손으로 브랜디 잔을 굴리며 알렉스의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사 전략에 대한 주제에 흠뻑 빠져 있었다. “연대가 여기에 포진한다면” 한 남자가 담뱃갑과 안경, 작은 조각상을 테이블 구석으로 멀어 넣었다. 알렉스가 씨익 웃으며 시가를 문 채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아니오, 그들이 여기 와 여기서 분리하여 움직인다면 더 쉬울 거요”


그는 답뱃갑과 조각상을 작은 꽃병 옆에 놓아 적을 포위하는 위치를 잡았다. “이렇게 하면 꽃병은 절대 견디지 못하지요” “하지마 당신은 가위와 램프갓을 잊고 있소. 그들은 뒤에서 공격하기에 좋은 위치란 말이오” “아니, 아니오” 다시 대답하려는 알렉스를 로스가 테이블에서끌고 나갔다. “사촌은 흥미로운 전략을 갖고 있어, 하지만 거기에 결점이 하나 있지. 언제나 발을 뺄 수 있는 길은 남겨 놓아야 한는 거라구” 알렉스가 테이블을 흘깃 쳐다보았다. “저 담뱃갑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거야?” “난 담뱃갑 나부랭이나 엉터리 전쟁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야, 사촌?” 로스가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 “당신의 약삭빠른 조그만 아내를 말하는 거지” 알렉스의 얼굴이 변하며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그가 입에서 시가를 빼내고서 옆에 있는 은쟁반에 문질러 껐다. “계속해 봐. 그리고 단어를 신중히 고르라구, 로스” “무법자 릴리는 영원히 한 남자의 여자로 남을 타입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녀와 결혼한 건 실수였어, 알렉스. 그녀는 자네를 바보로 만들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자네를 바보로 만들고 있어” 알렉스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릴리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녀석은 정신 못 차릴 때까지 두들려 패야만 한다. 하지만 먼저 무슨 일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녀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어디 있나?” “글쎄올시다. 지금쯤 은밀한 모퉁이를 찾아, 백작으로 가장한 그 이탈리아 놈이랑 정열의 포옹을 나누고 있겠지. 이름이 가바치라고 했지, 아마. 아는 이름인가? 난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알렉스가 두고 보자는 듯 악마 같은 얼굴로 쳐다보고는, 조용히 재빠르게 발길을 옮겼다. 로스는 오만하고 벽에 기대어 서서 한쪽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의 것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기다릴 인내심만 있다면 말이다. “내 예상대로, 그녀를 두 번째로 갖는 사람은 내가 될 거야” “당신은 영원히 이런 짓을 계속할 거야, 그렇지?” 릴리는 위층의 작은 응접실에서 분노를 터트렸다. “영원히 말이야, 넌 절대 내 딸을 돌려주지 않을 거야!” 주세페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달래는 소리를 했다. “아니, 아니야. 벨라, 금방 끝날 거야, 아주 금방. 당신에게 니콜을 데려다 줄게. 하지만 우선 날 이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만들어 줘, 나에게 친구들을 만들어 달라구. 이게 바로, 수년 동안 내가 갖고 싶었던 거야. 런던의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거라구” “당신은 이탈리아 사교계에서 품행이 좋지 않았어, 당신은 거기서 지명수배자가 되었지. 그러면서 뻔뻔하게 이제는 여기서 자리 잡고 싶다는 거야? 네 머리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만해. 돈 많은 과부나 어떤 멍청한 상속녀와 결혼해서 남은 평생 장원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거겠지. 그게 당신 계획이지? 나에게 당신 후견인 이 되어 소개를 시켜달라고? 이 사람들이 내 추천을 믿고 당신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씁쓸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리고 나서, 자신을 자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주세페, 난 존경받는 인물이 절대 아니야. 나에게 그런 영향력은 한푼어치도 없다구!” “당신은 알렉스 백작부인이야” “이 사람들이 날 받아주는 건 남편에 대한 존경 때문일 뿐이야” “난 내가 원하는 걸 말했어. 당신은 그걸 하면 되는 거야. 그런 다음에 니콜을 돌려줄 거야”


릴 리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주세페, 이건 말도 안 돼. 제발, 그냥 내 딸을 돌려 줘. 내가 하고 싶어도, 난 당신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어. 당신은 사람을 이요하고, 모든 사람을 경멸해. 그들이 당신의 그런 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그들이 모를 것 같아?” 갑자기 주세페가 그녀에게 다가와 철사처럼 얇은 팔을 둘었다. 꽃향기 밴 화장수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그는 뜨겁고 축축한 손으로 그녀의 턱에서부터 목까지 쓰다듬었다. “넌 언제나 나에게 물었지. 언제 아기를 돌려줄 거냐, 언제 이 일을 끝낼 거냐고. 이젠 내가 말해 주지, 이 일은 곧 끝나. 하지만 네가 날 이 부자들 세계의 일부로 만들어 준 다음이야” “안 돼” 그녀는 들먹이는 젖가슴으로 그의 손이 미끄러지는 걸 느끼며 역겨운 흐느낌을 토해내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거 기억해?” 그는 자기의 매력에 자신만만해 하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친 거 기억해? 침대에서 남녀가 함께 움직이는 걸 내가 가르쳐 줬지, 내가 너에게 기쁨을 주었어. 우린 그 일로 아름다운 아기를 만들었고” “제발, 이거 놔. 남편이 금방 날 찾으러 올 거야. 그는 질투가 많아, 절대로......” 갑자기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떨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문가에 선 알렉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레이포드 경” 그가 릴리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당신이 약간의 오해를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난 이제 떠날 테니, 당신 아내에게 설명을 들으시오” 그는 슬쩍 윙크를 하고 웃으면서 방을 나섰다. 릴리는 모든 걸 매끄럽게 둘러대리라 확신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릴리는 많은 것을 잃게 될 테니까. 알렉스의 시선을 아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둘 다 말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무도회의 웃음 소리와 음악 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우주 저편에서라도 들리는 듯 멀게 들리는 듯 멀게 느껴졌다. 릴리는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끔찍한 표정을 지우기 위해 무슨 행동이든 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 자리에서서 몸을 떠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가 왜 당신을 그런 식으로 안고 있었던 거요?” 릴리는 그의 오해였다고 확신시킬 만한 거짓말을, 영리한 거짓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전 같았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변했다. 그저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우가 사냥꾼에게 쫓겨 막다른 곳에 도달했을 때의 느낌이 이러할까,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느낌.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알렉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 자와 연애를 하고 싶었어” 그녀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두려워하며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침묵으로 충분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알렉스가 고통스런 소리를 흘리며 몸을 돌렸다. 잠시 후 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창녀 같으니” 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쳐다보며, 릴리의 눈에 눈물이 그득 차 올랐다. 그를 잃었다. 레이디 리온의 말이 맞았다. 죽음이나 배신만이 그를 망가뜨릴 수 있다고 했는데. 이제 그녀의 비밀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애절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스” 그가 닫힌 문에 손을 올려놓은 채 걸음을 멈췄다. 견디기 힘든 격렬한 감정을 추스리느라 그의 어깨가 빠르게 들먹거렸다. “제발 가지 말아요, 제발.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게요” 그의 미동도 없는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을 감싼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통스런 숨을 토했다. “그의 이름은 주세페 가바치예요. 이탈리아에서 그를 만났어요. 우린 연인사이였어요. 지금이 아니라 오 년 전에. 내가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에요. 그와 나 사이를 알면서 그 경멸스런 남자를 보는 건 당신을 역겹게 하겠죠, 나 자신도 역겨워요. 그 경험은 너무나 지독했어요. 그는 나와 같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나도 그랬구요. 난 영원히 그를 떼어버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아요. 그날 밤 이후로 내 인생은 모든 게 변해버렸어요. 왜냐하면 난, 난......” 그는 겁쟁이처럼 더듬거리는 자신으 견딜 수 없어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용기를 끌어모았다. “임신했거든요” 알렉스에게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기가 너무나 두렵고 수치스러웠다. “난 아이를 낳았어요, 딸아이” “니콜이군” 그의 목소리가 둔탁하고 이상하게 들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이 자면서 그 이름을 불렀소” “그랬겠지요, 난 자면서 꽤나 솔직한 모양이군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하시오” 릴리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이 년 동안 난 샐리 숙모님과 니콜과 같이 이탈리아에서 살았어요. 주세페만 빼고 모든 사람에게 비밀로 했죠. 그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알 권리가 있고,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우릴 보러 오지도 않았고 숙모님이 돌아가신 후 나에게 남은 건 니콜뿐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 아이가 사라졌어요. 주세페가 그 애를 데려간거죠. 나중에 그 애가 그날 입었던 옷을 보내왔을 때 그걸 알았죠. 그는 내 아기를 숨겨놓고 돌려주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돈을 달라고 했어요. 만족이란 걸 모르는 인간, 그는 그 애를 나에게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계속 돈을 더 달라고 요구했어요. 경창도 그 애를 찾을 수 없었죠. 그러던 중 주세페는 불법적인 일에 가담해서 이탈리아를 떠나야만 했어요. 그는 나에게 내 딸을 런던으로 데리고 가니까, 나도 따라오라고 했어요. 난 니콜을 찾으려고 탐정까지 고용했죠. 하지만 그가 알아낸 건 주세페가 많은 나라에 뿌리내리고 있는 지하조직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뿐이었어요” “데릭 크레이븐도 알고 있겠군” “그래요. 그는 날 도와주려 했지만, 불가능했어요. 주세페가 모든 카드를 쥐고 있었으니까요. 난 뭐든지 다 했어요. 그가 요구한 돈을 주었지만, 그 일은 계속 반복되기만 했어요. 난 밤마다 니콜이 아프면 어쩌나, 그 애가 울면 어쩌나 걱정했지요. 그 애가 날 필요로 하는데 내가 지켜주지 못하는 거면 어쩌나, 그 애가 날 잊어버렸으면 어쩌나 하고요. 그런데 그가 단 한 번 니콜을 나에게 보여주었어요. 그 애가 틀림없었어요. 하지만 그는 그 애를 만져보고 말을 걸어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죠, 그 애는 날 엄마로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아요. 그녀는 누군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혼자 있어야 한다. 이렇게 무방비상태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망각상태를 떨쳐내고 발길을 옮기려는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팔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갑자기 그녀는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고통스런 흐느낌을 토해내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가 재빨리 그녀를 돌려세우고 넓은 가슴에 안아주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다. 수년 간 참아내야 했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졌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가슴에 적셨다. 릴리는 그의 품속에, 세상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에 파고들었다. 그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서서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가 그녀를 꼭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여보. 괜찮아, 이제 더 이상 당신은 혼자가 아니오”


그녀는 목에서 찌어져 나오는 듯한 고통의 소리를 참으려 노력했지만, 흐느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정해요” 그녀가 커다란 슬픔에 자신을 내맡기는 동안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떨리는 몸을 쓸어주었 다. “이젠 이해하오, 이젠 다 이해하오” 그는 그녀의 이 고통을 같이 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내어주고 싶었다. 그녀의 머리와 젖은 얼굴, 어깨에 닿아 있는 작은 손에 그가 입술을 비볐다. 자신의 몸 속으로 그녀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 그는 있는 힘껏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마침내 그녀의 눈물이 서서히 진정되면서 그녀가 지친 듯이 머리를 기댔다. “니콜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내가 알아낼 거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당신에게 그 애를 되찾아 올 거요. 내가 약속하겠소” “당신은 날 증오해야 마땅해요. 날 떠나보내야 마땅하다구요” “쉬이, 나에 대해서 그렇게도 모르오? 정말 못된 여자로군.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왜 내가 당신을 돕지 않으리라 생각했소? 그 사실을 알면 당신을 버릴 줄 알았던 거요?” “네” “정말 못된 여자요, 당신은” 분노와 사랑으로 인해 그는 목이 메었다. 그녀의 눈 속에 깃든 절망이 그의 심장을 아프게 했다. 알렉스는 하인을 불러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지 않고 조용히 떠날 수 있는 길을 묻고, 레이디 리온에게 릴리의 두통 때문에 급작스럽게 무도회장을 떠나야겠다는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는 잠시 릴리를 혼자 남겨두고, 저택 안을 뒤져보았지만 주세페는 이미 떠난 후였다. 릴리는 너무나 기력이 빠져서 알렉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마차까지 데리고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그의 손을 막으며 이젠 괜찮다고 말했다. 빠른 속도로 마차가 달리는 동안, 알렉스는 혼란스러운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릴리가 겪은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일들을 혼자서 감당했고, 그 비밀에 방어 막을 세워 놓았으며, 자진해서 고독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이었음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위해 너무나도 비통하였다. 그는 그 세월을 돌이켜 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니콜을 찾아주겠다고 확실히 약속할 수조차 없었다. 그럴 수 있다면 하늘과 땅이라도 움직일 결심이었지만. 뼛속 깊숙이에서 불타는 분노가 몰아쳤다. 그녀에게 화가 났고, 데릭에게 화가 났으며, 그 쓸모도 없는 탐정에게, 그녀에게 그런 비참함을 겪게 한 이탈리아 새끼한테 화가 났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는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릴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딸에 대한 희망에 의지한 채 살아왔다. 만약 그 희망이 사라진다면, 니콜이 그녀에게 돌아올 수 없다면, 그녀는 지금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생기 넘치는 웃음소리와 정열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는 잘 알고 잇다. 자신의 아버지도 인생에 대한 매력을 철저히 상실한 채 죽음을 열망하는 껍데기만 남지 않았던가. 릴리에게 강해지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 이상의 힘은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지쳐 있었고, 눈은 쑥 꺼져 있었다. 백조의 궁에 도착하자, 버튼이 그들을 맞이하며 즉시 걱정스런 시선으로 릴리를 쳐다보았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주인님”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아내를 앞으로 밀었다. “아내에게 브랜디 한 잔 가져다주게. 필요하다면 가제로 먹여도 좋아.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하고, 호지스 부인에게 목욕 준비를 하라고 이르게.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아내 옆에 꼭 사람이 붙어 있어야 해. 잠시도 혼자 두면 안 되네, 알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인님” 알렉스는 그의 침착함에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의 조용한 태도에서, 지난 2 년 간 그녀가 악몽을 겪을


때마다 버튼이 릴리를 보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맙소사, 그럴 필요 없어요” 릴리가 집안으로 걸음으로 옮기며 평소처럼 활발한 척 꾸며댔다. “브랜디 더블로 갖다 줘요, 버튼” 그녀가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어딜 가는 거예요?” 그녀가 보여준 한 가닥의 기력이 알렉스의 기분을 다소 밝게 해주었다. “돌아와서 얘기해 주리다. 금방 돌아올 거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데릭이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는 걸요” 동정과 헌신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알렉스는 차갑고 신랄한 시선을 보냈다. “당신이 모르는 모양인데, 난 크레이븐이 갖지 못한 곳에 영향력을 갖고 있지. 가서 브랜디나 들이키시오, 여보” 그런 생색내는 태도에 그녀가 대꾸를 하려는데, 알렉스는 이미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 계단에 멈춰 서서 그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돌려보았다. “당신이 고용했던 탐정 이름을 말해 주시오” “녹스, 알톤 녹스. 그는 일급 탐정이에요.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이죠” 조수아 나산은 몇 년 전 알렉스의 영향력으로 새 공익 특수국을 만드는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행정장관으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정치 싸움은 사악하고 살벌하였다. 돈과 여자와 술까지 선물로 받아 챙기던 부패한 무역청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논쟁을 벌이고, 연설을 하고, 개별적인 승인을 얻어내는 데 몇 달의 시간이 거렸다. 알렉스는 그 법안이 가치 있다는 믿음도 갖고 있었지만, 성실하고 용감한 나산이 학창시절의 친한 친구라는 이유로도 그 일을 추진하게 위해 노력하였다. 나산의 이름은 언제나 웨스트민스터의 젊은 행정장관인 도널드 리어맨과 같이 언급되었다. 그 두 사람은 경찰들에게 개혁과 개선이 필요하다는 신념에 공감하였고, 그들의 특수요원을 군대식으로 철저히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나이 든 야경꾼을 보호할 뿐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다른 지역에서도 서서히 그들의 방식을 따르기 시작하였다. 나산과 리어맨의 순찰 요원들은 은행이나 부유한 사람들에게 사적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겸손한 외모에 마른 체격의 나산이 침착하고 친절한 미소로 그를 맞이하였다. “안녕하신가, 알렉스. 옛친구를 보니 반갑네” 알렉스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하네” “난 늦은 시간에는 아주 익숙하지, 내 직업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아? 내 아내의 말에 따르면, 날 볼 수 있는 시간은 한낮뿐이라고 하지” 그들은 나산의 도서실로 들어가 검은 가죽 의자에 앉았다. “자, 잡담의 그만하지. 자네가 문제를 빨리 말해 주어야 일에 착수 할 시간도 빨라지는 거니까” 알렉스는 가능한 한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하였다. 나산은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간혹 가다 질문을 곁들였다. 가바치의 이름을 아는 것 같진 않았지만, 알톤 녹스의 이름은 중요하게 들었다. 알렉스가 얘기를 끝내자,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양쪽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삼각형을 만든 채 생각에 잠겼다. “어린이 유괴는 지금 런던에서 대단히 번창하는 사업이지. 매력적인 소년과 소녀들은 이득이 남는 상품이니까, 가게나 공원, 때로는 신생아실에 있는 아이까지 닥치는 대로 빼내지. 가끔은 외국 시장에 팔아 넘기기도 해. 그러면 쉽게 흔적을 지울 수 있고 일이 잠잠해지면 금방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편리하거든” “가바치가 그런 일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 그가 빈민굴 갱단의 일원인 것은 확실해. 자네 설명으로 판단할 때, 직접 그 사업을 운영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뒤로 끝도 없이 침묵이 이어지자, 알렉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나산은 친구의 급한 성질에 미소짓고 나서, 다시 진지해졌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네. 당신의 아내가 고용했다던 녹스, 그 자는 웨스트민스터 요원의 자랑거리지. 레이디 레이포드가 전적으로 그를 믿은 건 아무 잘못도 없어” “그 자가?” 알렉스가 간단하게 물었다. “확실치는 않아. 알렉스, 일의 성격상 우리 요원들은 지하조직과 사악한 일들에 쉽게 접하게 되지. 때로는 그 지식을 나쁜 방법으로 사용하자는 유혹을 받기도 해, 순진한 생명을 돈과 바꿔치기 하는. 그래서 그들이 처음에 서약했던 경찰의 원칙을 배반하게 되는 거네. 자네 아내와 그 딸이 이런 악마의 거래에 희생양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녹스는 올해 엄청난 떼돈을 벌었어, 유괴된 아이를 되찾아주는 보상금으로 말이지. 그런 보기 드문 그의 성공이 유괴와 관련된 범죄에 그가 연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거야. 악당들에게 정보를 흘려주고, 체포되는 걸 피하도록 도와주고, 은신처를 바꾸라고 연락을 해주고 말이야. 녹스가 그 가바치와 동업자일 수도 있네” 알렉스의 턱이 굳어졌다.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자네가 허락해 준다면, 함정을 설치하고 싶네, 레이디 레이포드를 내세워서” “그녀가 위험에 노출되면 안 돼” “절대 위험하지 않아” 나산이 안심을 시켰다. “그 딸은? 그 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알렉스의 질문에 나산이 잠시 머뭇거렸다. “운이 좋다면, 가능하겠지” 알렉스는 눈을 감고 이마를 문질러댔다. “빌어먹을, 아내를 안심시킬 게 별로 없군”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나산의 조용한 대답이었다. 13. “녹스 씨가 주세페를 돕고 있었다구요? 내 돈을 받아먹으면서?” 릴리가 격분하여 소리질렀다.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나산은 주세페가 빈민굴 갱단의 일원이고, 녹스는 주세페와 거래를 할 거라 짐작하더군. 최근에 녹스는 월급 말고도 엄청난 떼돈을 벌었다고 했소” “떼돈이라뇨?” “유괴된 아이를 찾아준 것에 대한 시민들의 보상금이지. 녹스는 올해 그런 사건을 몇 건 해결해서 엄청난 보상금을 챙겼소” “그럼 갱단이 아이들을 유괴하고, 녹스 씨가 그들을 찾아와 그 보상금을 그들이 나눠 갖는 거예요? 그럼 왜 내 아이는 되돌려주지 않은 거죠? 왜 니콜만 빠진 거예요?” “주세페가 니콜을 데리고 있으면서 당신이 가진 걸 모두 긁어내자고 녹스를 설득했을지도 모르지”


릴리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 말이 맞아요. 난 그에게 많은 돈을 주었어요. 그가 원하는 건 뭐든지 주었다구요” 그녀의 시선이 손으로 떨어졌다. “오, 맙소사. 난 너무나 멍청하고 우둔한 장님이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쉽게 속은 거예요”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세페를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그녀를 안아주려는 그에게 몸을 움츠려왔지만, 지금은 그의 달래는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을 탓하지 마시오. 당신은 혼자였고 두려웠소. 그들은 그걸 이용했고, 아이를 걱정하고 당신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건 불가능했소” 릴리의 마음은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다 아는 지금 그는 그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동정할까 아니면 비난하고 싶을까? 그녀가 그의 거절을 견딜 정도의 강함을 가질 때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뿐일까? 그 대답을 알 때까지는 그에게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억지로 그를 묶어놓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지만 머리에 부드러운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구로 그를 애절하게 쳐다보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동정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을 뿐이었다. “사랑스런 사람” 알렉스가 무릎에 그녀를 끌어 올려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그는 천 번이나 읽은 책의 내용처럼 그녀의 생각을 쉽게 잃어내는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고서 그가 말했다. “당신을 사랑해” “그런 말......” “조용, 내 말 들어, 윌헬미나. 당신의 실수, 당신의 과거와 모든 두려움, 그 어떤 것도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오”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하려 애쓰며 힘겹게 침을 삼켰다. “나 그 이름 좋아하지 않아요” “알아, 그 이름이 당신의 소녀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겠지. 윌헬미나는 사랑받기를 원하는 겁 많고 열정적인 소녀요. 그러나 릴리는 강하고 용감하고,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 따윈 지옥으로 꺼지라고 말할 여자지” “당신은 어느 쪽이 더 좋은가요?” 그가 그녀의 턱을 올려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의 모든 것, 당신의 모든 부분” 릴리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확신에 기쁨으로 몸을 떨면서도, 그의 입술이 내려오자 움찔하였다. 관능적인 키스나 포옹에 대해서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상처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치료할 시간이 필요하였다. “아직은 안 돼요” 자신의 거절에 그가 화를 낼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었고, 그녀는 힘없는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침 10 시. 웨스트 엔드의 가게들은 8 시에 문을 열었고, 거리는 북적대는 상인들과, 마차, 어부들과 젖 짜는 하녀들의 소음으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릴리가 있는 이곳은 웨스트 엔드의 사람들은 훨씬 더 태평스러웠다. 하이드 파크의 모퉁이에 일찌감치 도착한 릴리는 마차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젖 짜는 여자, 검댕 묻은 가방을 든 굴뚝 청소부, 기자, 빵집 아이들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하녀들의 인사를 받았다. 아이들은 유모와 같이 아침 산책을 나왔고, 그들의 부모는 오후가 될 때까지도 침대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멀리 막사에서 하이드 파크를 향해 행진하는 호위병들의 드럼 소리와 음악 소리가 들렸다.


모퉁이의 나무 기둥 옆에 선 길다란 모습을 보자 릴리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전통적인 리어리 유니폼을 입은 알톤 녹스였다. 까만 바지와 부츠, 반짝이는 구리 단추가 달린 회색 코트, 머리에는 납작한 모자를 썼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 릴리는 마차 창문 밖으로 손수건을 흔들며 조그만 소리로 외쳤다. “녹스 씨, 이쪽이에요. 마차로 와주세요” 녹스는 마부와 짤막한 인사를 나눈 후 마차 안으로 올라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정돈하고 인사말을 중얼거렸다. 중간 키 정도의 단단한 체격을 가진 사내, 그는 40 대의 나이치고 절멍 보인다는 점을 빼면 특징 없는 얼굴이었다. 릴리가 맞은편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였다. “녹스 씨, 제 집 대신 여기서 만나는 걸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잘 아시겠지만, 당신과 만나는 걸 남편에게 알릴 수는 없었어요. 그는 설명을 들으려 할 테고......” 그녀가 말꼬리를 흐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이해합니다, 로슨 양. 아, 이런 이젠 레이디 레이포드시지요” “그 결혼은 정말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었어요. 여러 가지 면에서 내 삶을 변화시켰죠, 한 가지만 빼고. 내 딸 니콜을 찾고 싶은 마음에는 절대 변함이 없답니다” 그녀가 돈주머니를 들어올려 살짝 흔들었다. “다행히도 이젠 조사를 계속할 돈이 생겼지요. 전처럼 당신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녹스의 시선이 돈주머니에 쏠리더니 릴리를 안심시키는 거짓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에게 다시 맡겨 주십시오, 레이디 레이포드” 그가 손을 뻗어 그 작지만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이제 가바치 문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가바치 백작과는 연락이 끊기지 않았어요, 녹스 씨. 아니, 오히려 어젯밤에는 완전히 새로운 요구를 갖고 더 대담하게 접근했답니다” “어젯밤에요? 새로운 요구라구요?” 릴리가 심란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전에는 돈만 원했지요. 난 아이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한 기꺼이 내줄 의향이 있어요. 하지만 어젯밤에는......” “어떤 요구였습니까? 저의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혹시 그가 당신의 개인적인 호의를 요구하던가요, 레이디?” “그의 요구는 전보다 훨씬 더 심각 거였어요. 가바치 백작은 내가 가진 모든 것, 내 가정과 내 결혼과 사회적인 지위를 위협했어요. 사교계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자기 야망 때문에 말이에요!” 녹스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질리는 것을 보며 릴리는 내심 만족스러웠다. “믿을 수가 없군요” “사실이에요”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는 척 눈가에 손수건을 올렸다. “그는 어젯밤 레이디 리온의 생일 축하연에서 나에게 접근했어요. 깃털 빠진 공작 같은 차림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 앞에서요! 나더러 자기를 소개시키고 사교계에 낄 수 있도록 자기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요구했어요. 오, 녹스 씨, 당신이 그 끔찍한 광경을 보았어야 했어요” “저런 멍청이!” 자신의 분노가 이 상황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조심하지 못한 채, 그가 성난 소리를 질렀다. “몇몇 사람들이 그를 보았어요, 리온 경과 내 남편을 포함해서요. 내가 그를 간신히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갔을 때, 그가 그 말도 안 되는 야망을 드러내더군요. 곧 내 딸을 돌려주겠지만, 우선 자신을 사교계의 중요 인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 건 정말 절대 지워해 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는 이탈리아에서 불한당이자 범죄자였다구요! 런던에서 자기가 받아들여질 거라고 어떻게 감히 생각할 수 있는 건지” “그 자는 외국의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이제 보니 쓸모없는 인간일 뿐만 아니라 제 정신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맞았어요, 녹스 씨.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은 무심코라도 본성과 자기 계획들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맞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자기 탐욕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지요” 그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졌다. 그가 소름이 끼칠 정도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흡사 파충류의 표정처럼 사악하고 징그러웠다. 그는 주세페의 위험스러운 밀약에 끝을 낼 결심을 한 것이리라. 녹스가 정말 주세페와 빈민굴 갱단과 연결이 되었다면, 그의 돈이 그들과 한배를 탄 운명이라면, 주세페의 헤픈 혀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니. 릴리는 앞으로 몸을 내밀어 그의 팔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니콜을 찾아주세요. 녹스 씨, 그 일이 성공한다면 ‘큰’ 보상금을 약속드리겠어요” 그녀는 ‘큰’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였고, 그도 그 단어를 음미하였다. “이번에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당장 조사를 재개하겠습니다, 레이디 레이포드” “부디 진행 상황을 알려주실 때 신중을 기해 주세요. 내 남편에게는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물론이지요” 녹스는 확고하게 대답하고 나서, 모자를 다시 쓰고는 작별인사와 함께 마차를 떠났다. 그리고 단호한 결심이 선사람 같은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사라져갔다.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릴리의 호소하는 듯한 표정은 차갑게 변했다.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지옥으로나 가시지, 나쁜 자식. 그리고 가는 김에 주세페도 같이 데려가라구” 알렉스와 나산 께에게 자세한 보고를 하고, 그의 말에 대해 가능한 모든 상황을 점검한 후에, 릴리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헨리는 그리스의 골동품을 공부하기 위해 선생님과 같이 대영 박물관으로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하인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택 안 구석구석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릴리는 힘차게 말이라도 달리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을 때 혹시라도 사건이 터질까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무언가 해야만 진정이 될 수 같아 바느질을 시도해 보았지만, 손가락을 많이 찔려 수놓던 손수건마저 피로 엉망을 만들어 버렸다. 여느 때처럼 도서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는 알렉스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쉴새없이 차를 마시며,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책도 잃어보고, 키드를 들추어 보았다. 저녁식사를 조금이나마다 했던 유일한 이유는 굶는 다고 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알렉스의 신랄한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에 혼자 있는 걸 견딜 수가 없자 그녀는 응접실의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알렉스가 시집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가장 지루한 시를 선택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와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 저녁식사 때 마신 와인이 눈꺼풀을 무겁게 했다. 그녀는 소파의 쿠션에 깊숙이 기대어 잠이라는 회색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 분 아니,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알렉스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부드럽지만 다급하게 어깨를 흔들어댔다. “릴리, 여보, 눈을 뜨시오” “응? 알렉스, 무슨?” 그녀가 눈을 비비며 잠에 취해 중얼거렸다. “나산에게 연락이 왔소” 그가 바닥에 있던 그녀의 구두를 집어 발에 신겨 주었다. “나산이 심어놓았던 부하가 세인트 자일스 빈민굴까지 녹스를 따라 갔다고 하오. 나산과 열두 명의 요원들이 네더스켄에서 그를 포위했소. 우린 즉시 그리로 갈 거요”


“세인트 자일스” 그녀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그곳은 런던에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도둑들의 근거지가 득시글거리는 ‘성지’라는 별명이 붙은 곳이었다. 경찰조차도 그레이트 러셀과 세인트 자일스의 경계선을 함부로 지나려 하지 않았다. 그곳은 도둑과 살인자들이 웨스트 엔드의 귀한 것들을 빼내서 금세 어두운 미로 속으로 도망칠 수 있는 범죄의 거점이었다. “니콜에 대한 얘기는 있었나요? 아이들에 대해서는?” “없소” 알렉스는 그녀에게 망토를 둘러주고, 더 질문할 새도 없이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데리고 나갔다. 무장한 여섯 명의 수행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알렉스가 안전에 위해 만전을 기한 준비하였다. 마차가 거친 덜그럭 소리와 함께 거리를 달렸다. 두 명의 수행원들은 보행자나 느리게 움직이는 마차들을 정리하기 위해 마차 앞으로 말을 몰아 나아갔다. 두 손을 맞잡고서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릴리의 맥박은 공포심으로 인해 방망이질 쳤다. 그들이 지나치는 거리와 집들은 점점 더 낡고 지지분해졌다. 건물들도 너무 다가다가 달라붙어 공기와 빛조차 통하지 않을 듯했다. 그 더러운 지역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쇠약하고 유령처럼 창백하였다, 아이들조차도. 수천 개의 뚜껑 없는 하수구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마차 안으로 스며들어 저절로 코끝이 찡그려졌다. 세인트 자일스의 유명한 나선형 탑이 눈에 들어왔다. 중세 시대에는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으로 쓰인 교회였다. 마차가 날고 무너져 가는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알렉스가 마차 밖으로 나가 수행원과 마부에게 아내를 잘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위험한 징조가 보이는 즉시 마차를 출발시키라는 말도 덧붙여서. “안 돼요!” 릴 리가 마차를 나서려 하자, 알렉스는 한 팔로 문을 막아 내리지 못하게 했다. “나도 당신과 같이 가겠어요! 내가 밖에서 멍하니 있을 수는 없어요!” 그가 완고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릴리, 금방 데리러 오겠소. 하지만 우선 저곳이 안전한지 확인해야겠소. 당신은 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오, 당신을 절대 위험하게 하지 않을 거요” “저 안에는 경찰들이 우글거려요. 이 순간만큼은 런던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구요! 게다가, 우리가 찾고 있는 건 바로 내딸이에요!” “그건 알아. 제기랄, 릴리. 저 안에서 무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단 말이오. 당신을 가슴 아프게 할 만한 것은 보여주고 싶지 않소”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며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우리가 함께 찾아봐요. 날 무턱대고 보호만 하지 말아요, 알렉스. 그냥 당신 옆에 세워 주세요” 알렉스는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마차에서 내려주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고 네더스켄의 현관으로 걸어갔다. 낡아빠진 문을 현판으로 떼어내 옆으로 옮겨져 있었다. 두 명의 요원들이 정중하게 알렉스를 맞이하였다. 릴리를 흘깃 쳐다보며, 그 중 한 명이 건물에 침입하는 과정에서 몇몇의 사상자가 았으니 여자분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내 아내는 괜찮을 거요” 알렉스가 짤막하게 대꾸하고 나서 릴리를 네더스켄 안으로 이끌었다. 건물 안은 악취와 함께 숨이 막힐 듯 답답하였다. 몇 개의 부서진 계단을 올라 좁고 쓰레기로 가득한 복도를 걸어갔다. 벽으로 벌레들이 바쁘게 기어다녔다. 불에 탄 청어의 역겨운 냄새가 어느 방 한곳에서 강하게 풍겨 나왔다. 누군가 시꺼먼 활로에다 생선을 굽는 모양이었다. 짚이불과 몇 개의 테이블 말고는 가구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안쪽의 목소리가 나는 곳을 향하여 더 깊이 들어가면서, 릴리는 자신도 모르게 알렉스의 손을 힘껏 움켜잡았다. 그들은 요원들이 가득한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요원들은 성난 용의자들을 진정시키며 나산에게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울부짖는 아이들이 건물 구석구석에서 끌려나왔다. 나산은 방 한 가운데 서서


침착하게 상황을 관찰하며 민첩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들 앞에 쌓인 세구의 시신을 보고 알렉스가 걸음을 멈췄다. 습격 도중에 죽은 듯한 빈민굴의 초라한 사내들이었다. 릴리의 낮은 비명소리를 듣고, 그는 죽은 자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한 시체를 부츠로 건드려 뒤집어 보았다. 조세페의 흐리멍텅한 눈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릴리가 몸을 움츠렸고, 알렉스는 아무 감정 없이 피범벅의 시체를 살폈다. “칼에 찔렸군” 그들은 본 나산이 거기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알렉스, 계획이 너무나 잘 진행되었어. 녹스는 해가 지자마자 이리로 달려왔지. 빈민굴 전문 경찰인 크립혼이 있었기에, 간신히 이 구역에서 그를 놓치지 않았어. 우리 부대가 도착했을 때는, 모든 계획이 누설될까 두려워한 녹스가 이미 가바치를 죽인 후였지. 그는 레이디 레이포드에게 아이를 도려주고 약속한 보상금을 받을 생각이었다고 다 진술했네” 나산이 벽에 등을 기대고 묶인 채 바닥에 앉아 있는 녹스를 가리켰다. 다른 네 명의 갱단 조직원들과 같이 묶인 녹스가 중오스럽게 릴리를 노려보았지만, 릴리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방안에 모인 여섯 명의 아이들을 미친 듯이 살펴보았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거야?” 알렉스가 나산에게 물었다. “모든 부유한 가정의 아이라고 하던데, 녹스의 말에 따르면, 우린 그들을 부모에게 돌려줄 거야. 이 범죄가 우리 요원의 도움으로 저질러졌으니 조상금은 받지 않고. 저 자는 우리 경찰의 수치야” 나산이 차가운 경멸을 담아 녹스를 흘깃 보았다. 릴리는 모인 아이들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대부분이 금발 머리와 흰 피부였는데, 그들을 위로해 보려는 요원들에게 막무가내로 매달리며 훌쩍이고 있었다. 가슴이 메이는 광경이었다. “그 애는 여기 없어” 릴리의 얼굴이 공포로 창백해지며, 남자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했다. “이 아이들이 전부인가요?” “그렇습니다. 다시 살펴보십시오, 레이디 레이포드. 당신의 딸이 없다는 게 확실합니까?” 나산의 조용한 대꾸에 릴리는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니콜은 검은 머리예요, 그리고 이 애들보다 어려요. 더 있을 거예요, 그 애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다른 방에 있을지도 몰라요. 두려워서 어디 숨었을지도 모르고요. 그 애는 아주 작아요. 알렉스, 다른 방에서 그 애를 찾아보게 해줘요” “릴리” 알렉스가 그녀의 광적인 흥분을 잠재우며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가 부들거리며 그의 시선이 향한 쪽을 따라갔다. 덩치 큰 사내가 그들 앞을 지나가 시선이 잠시 가로막혔다가, 그녀는 구석의 어둠에 반쯤 가려진 작은 모습을 알아보았다. 릴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폐부에서 공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는 엄마의 얼굴을 똑 닮은 작은 인형과도 같았다. 맑고 잔잔한 눈동자, 그녀의 작은 팔에는 인형 비슷해 보이는 누더기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는 어둠 속에 서서 앞에 모여 있는 어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은밀한 곳에서 엿보는 생쥐처럼, 그 조용함 때문에 아무도 그 애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니콜, 오, 세상에” 그녀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며 뒤로 물러났다. 릴리는 어색하게 얼굴의 눈물을 닦아 냈다. “넌 내딸이란다, 너 나의 니콜이야” 그녀가 아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쏘노 뀌(나 여기 있서)” “널 찾기 위해 난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단다. 날 기억하겠니? 엄마야. 이오 쏘노 뚜아 맘마,


자삐쉬(난 네 엄마야, 알아보겠지)?” 아이는 이탈리아어에 반응을 보였다. “엄마?” “그래, 그래”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며, 릴리는 그 애를 안아 올려 소중하게 가슴에 끌어안았다. “오, 니콜, 내 아기!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그녀의 손이 작은 머리와 부서질 듯이 연약한 아이의 등을 열심히 어루만졌다. 니콜은 그녀의 품에 얀전히 안겨 있었다. “이젠 다 끝났어, 드디어 다 끝난 거야” 그녀는 머리를 뒤로 빼어 자신과 똑같은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니콜의 작은 손이 릴리의 뺨으로 올라와 이마와 관자놀이에 매달린 검은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릴리는 울음을 참으며 딸아이의 때묻은 얼굴에 눈물 젖은 키스를 했다. 모든 악몽은 사라졌다.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도 부드럽게 녹았다. 너무나도 평화스러웠다. 슬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그녀가 원하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딸아이의 따뜻한 체온, 엄마와 자식간에만 있을 수 있는 순수하고 완벽한 사랑.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목이 메었다. 저러고 부드럽게 자애로운 릴리의 얼굴은 본 족이 없었다. 그가 한 번도 모지 못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릴리의 다른 면이었다. 릴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깊은 연민으로 변하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보다 훨씬 더 기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나산이 그 광경에 만족해하며,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알렉스, 지금이 신종 범죄 개선법안에 대해 언급할 좋은 시점인 것 같군, 내게 필요한 부서를 새로 신설하는 데 관해서” “자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라도 해주겠네” 알렉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법안은 지금 의회의 맹렬한 반대에 직면해 있어” 알렉스는 젖은 눈을 소매로 슬쩍 닦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도와주겠네. 의원들의 팔을 비틀어야 한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자네에게 필요한 부서를 만들어 주겠어” 14. 알렉스는 크레이븐 씨가 도착했다는 전갈에 놀라며 신문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지금껏 유쾌한 아침나절을 보내는 중이었다, 알렉스는 타임스를 읽으며 이따금씩 응접실 바닥에서 위태롭게 나무 블록을 쌓는 릴리와 니콜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오, 모시고 들어와요” 릴리가 버튼에게 말하고는 알렉스에게 미안한 모소를 보였다. “데릭이 올 거라는 얘길 잊었네요. 그는 니콜을 보러 오기 전에 며칠 동안 우리만의 시간을 주고 싶다고 이제야 온 거예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알렉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니콜은 골난 고양이 톰을 쫓아 방안을 돌아다녔다. 그 가엾은 짐승이 햇살 속에 자리를 잡을 때마다, 니콜은 그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릴리는 바닥에 흩어진 장난감을 저리하면서, 알렉스가 너무 많은 장난감을 샀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아이라도 당혹할 만큼의 엄청난 양이었다. 니콜이 그 인형 비슷한 누더기 조각을 안고 있던 모습에 가슴이 아팠던지, 그는 버링턴 아케이드에서 구할 수 있는 인형이란 종류는 모두 다 사들였다. 사람들은 얼굴과 도자기 이를 가진 인형, 작은 바지와 속옷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밀랍 인형. 위층의 육아실의 장난감 극장, 흔들 목마, 거대한 인형의 집, 공과 음악상자와 집 전체를 울리게 만드는 드럼까지 온갖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니콜의 숨바꼭질하는 습관을 알아채는 건 오랜 시간이 안 거렸다. 그 애는 순간적으로 사라져서 소파나 테이블 밑에서 어른들의 걱정스런 얼굴을 보며 웃는 모습을 들키곤 하였다. 그렇게 소리 없이 움직이는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알렉스도 도서실 책상에서 한 시간 정도 일하다 보면, 어느 틈에 의자 밑에 조용히 기어 들어와 있는 아이를 발견하곤 했다. 니콜이 주세페에게 학대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릴리의 두려움은 점차 사라졌다. 조심스러운 아이이긴 해도,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햇살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말수도 많아지고 매력적인 웃음소리와 끊임없는 질문을 하며 집안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 애는 특히 헨리를 마음에 들어하였다. 헨리의 옆에 꼭 자기가 앉아야 한다고 고집하고는, 그의 금발 머리를 잡아당기고 나서 찌푸린 얼굴을 보며 낄낄거렸다. 데릭이 응접실로 들어오자, 릴리는 기분 좋은 웃음으로 그에게 달려가 재빨리 포옹하였다. “이런, 이런. 당신 남편이 보고 잇는 곳에서는 안 되지, 집시” “대단히 예의가 바르게 변하셨군요, 당신” 그녀가 씨익 웃었다. 데릭이 앞으로 걸어와 알렉스와 악수를 나눴다. “안녕하시오? 오늘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군요. 이렇게 품위 있는 집안의 응접실에 들어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당신은 언제라도 환영하겠소. 관대하게도 당신의 아파트까지 빌려주지 않았소” 데릭이 씨익 웃었다. “알렉스” 릴리는 얼굴을 붏히며 데릭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크레이븐 씨, 당신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답니다” 데릭의 시선이 소파 옆에 선 작은 소녀에게 고정되었다. 니콜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데릭이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미소를 보냈다. “니콜 양, 이리 와서 데릭 아저씨에게 인사해 줘야지” 니콜은 머뭇머뭇 그에게 다가서려다가, 마음을 바꿔 알렉스에게 달려가 그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데릭에게 수줍게 웃어 보였다. “이 애는 수줍음을 많이 타. 그리고 금발 머리 남자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는다니까” “나로서는 운이 없는 일이군” 데릭이 유감스러운 듯 자신의 검은 머리를 만졌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묘한 표정으로 릴리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아름다워, 자기 엄마처럼” 알렉스는 질투의 감정을 가라앉히려 많은 애를 썼다. 그는 니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 위에 묶여 있는 커다란 분홍 리본을 빼냈다. 크레이븐을 질투할 이유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크레이븐이 릴리를 사랑한다 해도, 그녀의 결혼에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 거라고는 점은 이미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아내에 대한 다른 남자의 그런 시선을 말없이 보고만 있는 것은 그에게 쉽지 않았다. 그들의 성생활이 다시 시작된다면 아마 참기가 한결 쉬우리라. 릴리는 주세페와 같이 있는 모습을 알렉스에게 들킨 후로 한 번도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로 릴리는 아이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들의 침대 옆으로 작은 침대가 옮겨졌고, 릴리는 하룻밤에도 몇 번씩이나 니콜을 확인하기 위해 깨어나곤 했다. 어둠 속에서 평화롭게 잠든 아이에게 다가가, 그 애가 다시 사라질까봐 걱정하면서 지켜보아다가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다. 릴리는 좀처럼 아이를 눈앞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알렉스는 시간이 지나면 릴리의 두려움이 점차 가라앉을 것임을 알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감정의 혼란을 겪은 아내에게, 자기를 받아들여 달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그는 살아오면서 이렇게 누군가를 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가까이 두고 싶었고, 그녀의 부드러움과 행복을 보고 싶었으며, 아름다운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따뜻한 입술을 느끼고 싶었다. 그 자극적인 상상에 몸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자고 자신을 다그쳤다. 릴리가 도대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이대로에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하는지, 그를 사랑하는지 간절히 알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를 다그치지 않고 침묵만을 지켰다. 침묵과 고통, 이러한 금욕 생활이 백 년 동안 지속된다 하더라도 참아 낼 수 있다. 하지만 혼자서 침대에 드는 밤마다 그녀에게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다. 잠이 들면, 밤새도록 그녀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손님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이젠 가봐야겠소” 데릭이 말하고 있었다. “안 돼, 저녁식사는 하고 가야지” 릴리의 간청을 무시한 채, 데릭은 알렉스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안녕히 계시오, 나으리. 이 두 사람과 함께 있는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라오. 당신은 이미 많은 행운을 가졌지만” “고맙소” “내가 배웅할게” 릴리가 현관으로 데릭을 따라 나섰다. 현관 앞에서 데릭은 그녀의 이마에 오빠처럼 입술을 맞췄다. “크레이븐스에 언제 올 거야? 당신이 없으니까 예전 같지 않아” 릴리가 시선을 내렸다. “알렉스와 같이 들를게” 그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며, 두 사람은 각자 말하지 못한 채 남겨진 수많은 말들을 생각하였다. “데릭, 당신이 없었다면 지난 이 년 간 난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그녀는 그들의 우정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다시는 화로 앞에서 대화할 기회도 없을 테고, 비밀과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묶어 놓았던 묘한 관계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데릭은 그녀의 입술에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움찔하였다. “안녕, 집시” 그가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니콜은 또다시 승리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손을 뻗어 고양이의 꼬리를 움켜잡은 순간, 갑자기 톰이 짜증스런 소리를 내지르며 발톱을 휘둘렀다. 아이의 손등에 분홍빛 상처가 나고 말았다. 니콜이 놀란 눈으로 고양이를 쳐다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알렉스가 재빨리 다가가 안아올렸다. “무슨 일이니, 사랑스런 아가야? 왜 그래?” 니콜이 울면서 손을 보여주었다. “톰이 할퀸 거냐?” “네, 나빠. 나빠” “어디 보자” 알렉스는 그녀의 손등에 난 상처를 살펴보고는, 쯧쯧 소리를 내며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톰은 꼬리를 잡아당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내가 그 녀석 달래는 법을 가르쳐 주마, 그럼 다시는 할퀴지 않을 거란다. 자, 이젠 날 껴안아 주렴, 나의 용감한 아가야” 그의 부드럽고 가벼운 속삭임에, 니콜은 상처도 잊어버리고 활짝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릴리는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가슴이 벅차 터질 것 같았다. 알렉스는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고, 아이와 얘길 계속하며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인형을 찾기 위해 소파 밑을 뒤졌다. 릴리는 이


순간까지 그가 진심으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자신은 그런 걸 기대할 권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 두 사람에게 주고도 남을 충분한 사랑을 가진 남자다. 그는 그녀의 잘못을 이유로 순진한 아이를 냉대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과 믿음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었다.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기쁨을 그에게 줄 수만 있다면. 그녀가 지나가는 하녀 한 명을 살짝 불렀다. “샐리, 잠시 니콜을 보살펴 줘. 낮잠 잘 시간이니까, 인형 한두 개 갖고 육아실로 데리고 가요” “알겠습니다, 마닙” 하녀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착한 아가씨예요” “레이포드 경이 저렇게 다 받아주다가는 몇 년 안 가서 버릇이 없어질 거야” 조용히 웃으며 샐 리가 응접실로 들어가 몇 가지 장난감을 집어들고는 니콜을 데리고 나갔다. “백작님” 마음속은 현기증과 기대감으로 떨리면서도, 릴 리가 새초롬하게 입을 열었다. “조용히 얘기할 수 있을까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우아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알렉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천천히 따라 올라왔다. 침실에 도착하자, 릴리는 그들 뒤로 문을 닫고 열쇠를 돌렸다. 갑자기 침묵이 내려앉았다. 알렉스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자신의 몸이 달아오르며 예민해지고, 숨결이 거칠어지려는 걸 애써 억눌렀다. 그녀가 그에게로 다가와 조끼에 손을 올렸다. 단추를 푸는 그녀의 손놀림이 가볍고 능숙했다. 조끼가 풀어지자, 그녀는 그의 넥타이를 풍어 잡아당겼다. 알렉스가 눈을 감았다. “제가 그동안 당신에게 너무 무심했지요?” 그의 셔츠로 손길을 옮기며 그녀가 속삭였다. 그는 온몸이 흥분으로 뻣뻣해졌다. 셔츠를 통해 가슴으로 스며드는 그녀의 숨결에 거의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괜찮소” “저는, 전혀 괜찮지 않았답니다” 셔츠를 바지에서 빼내고, 그녀가 그의 허리에 두 팔을 감고 가슴털에 얼굴을 비볐다. “제가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는지 보여줄 방법이 별로 없군요” 그의 손이 갑자기 올라와 그녀의 손목을 감아쥐었다. “뭐라고 했소?”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북받치는 감정으로 인해 빛났다. “당신을 사랑해요, 알렉스. 당신을 사랑해요. 지금가지는 이 말을 하기가 겁났어요. 니콜에 대해 알게 되면 내게서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 더 심하게는 명예를 위해 우릴 데리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우리를 없애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들을 없앤다고? 아니야, 릴리” 그는 그녀의 손을 풀어주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당신을 잃으면 나도 죽고 말 거요. 니콜의 아버지가 되고 싶고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소. 지난 며칠간 난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이었지, 당신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걸 어떻게 확신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소” “저에게 확신시킬 필요 없답니다” 그녀가 행복의 눈물을 반짝이며 웃었다. “당신이 그리웠소, 릴리, 내 사랑” 그가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자, 그녀의 웃음이 신음으로 바뀌었다. 그의 몸이 뜨겁게 그녀를 요구하였고, 그녀의 애무하는 손길 아래서 그의 근육이 팽팽해졌다. 그가 성급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옷마저 벗었다. 침대로 들어와 그녀의 부드러운 나신을 끌어당기며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감싸쥐었다.


“다시 말해 봐”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 알렉스” 그녀에게 길고 긴 키스를 쏟아 부으며 그의 손이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왔다. 혀와 혀가 엉키며 그들은 열기와 불길한 휩싸여 들어갔다. “다시”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그의 손가락의 침입에 몸을 꿈틀대었다. 몸을 휘어 올리는 그녀의 젖꼭지가 그녀의 가슴 털 속에 묻혔다. 그가 머리를 숙여 그 분홍빛 정상을 절묘하게 혀로 찰싹이며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의 어깨로 입술을 돌려 그의 체취와 맛을 흠뻑 빨아들였다. 그녀의 혀가 그의 젖꼭지를 찾아내자 그가 즐거운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복슬복슬한 털을 쓸고 지나 탱탱한 근육질의 배로, 더 무성한 털이 위치한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단단한 남성을 가볍게 움켜쥐고 한 번, 두 번 애무하였다. 그가 몸을 빼내더니 그녀를 넓게 벌리고 깊은 신음과 함께 그녀의 몸속으로 쑤욱 진입하였다. 그 감각에 정신을 잃은 채 그녀가 두 팔과 다리로 그를 감싸고 자신에게로 더 깊이 들어오도록 재촉하였다. 그도 강렬한 황홀경에 빠져 더욱 자신을 몰아댔다. 그가 뒤로 움직이려 하자, 그녀는 두 다리로 그를 눌러 한 번 더 몸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그의 숨 없는 움직임만을 느끼며 미친 듯이 떨었다. 그녀의 손에 닿은 그의 등이 한 순간 딱딱하게 변하더니 다급한 엉덩이의 움직임과 함께, 온몸이 날아갈 듯, 세상이 산산이 부서질 정도의 쾌락으로 폭발하였다. 잠시 후, 그녀는 사랑스러운 그의 얼굴선과 면도한 뺨의 감촉, 속눈썹 등을 나른하게 어루만졌다. 충만함에 휩싸인 알렉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격정적인 입술을 눌렀다. “난 너무나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두려워하며 지냈어요. 그런데 이젠, 이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릴리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알렉스가 팔꿈치로 몸을 들어올려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어떤 느낌이지?” “이상해요, 너무나 행복하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져요” “익숙해질 거요. 금방 당연한 걸로 생각될 거요”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릴리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는 그녀의 목을 사랑스럽게 껴안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에필로그.. 살짝 열린 창을 통해 차가운 가을바람이 들이닥치자, 릴리는 남편의 따뜻한 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들은 윌트셔에서 파밍턴 부부가 주최한 사냥 주말을 즐기는 중이었다. 바깥의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며, 릴리가 유감스러운 듯 한숨을 쉬었다. 이제 곧 이른 아침에 모이는 사냥 파티를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피곤해?” 알렉스가 물어왔다. “어젯밤 잠을 많이 못 잤잖아요” ‘다들 그랬을걸“ 그들은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이어지는 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었다.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가는 발소리, 조용히 열렸다 닫히는 문소리, 밤의 침대 파트너를 찾는 질문과 환영의 속삭임들. 릴리는 자신들처럼 항상 똑같은 침대를 나누고자 하는 부부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해서 알렉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녀와 같이 있는 걸 얼마나 감사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그는 거의 밤새도록 사랑의 행위로 그녀를 깨워놓았다.


조용히 두드리는 시종의 문소리. 이제 옷을 입어야 할 시간이다. 투덜거리며 몸을 뻗은 후에, 알렉스가 침대를 빠져 나가 옷을 입었다. 보통 생기 넘치는 기대감으로 사냥을 준비하던 릴리가 오늘은 이상하게도 움직임이 느렸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앉아 그를 지켜보았다. 알렉스가 묻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링, 난 오늘 사냥에 나서지 않을까 봐요” “뭐라고? 어째서?” 바지를 걸쳐 입고, 그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릴리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선택하였다. “릴리, 사실 난 당신이 사냥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당신이 혹시라도 다치게 된다면 견딜 수가 없거든, 하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고 싶지는 않소. 당신이 사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조심만 해준다면, 어려운 점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준다면, 난 전혀 반대하지 않소” “고마워요, 달링. 하지만 그래도 사냥하는 게 현명한 생각 같지 않네요” 그의 눈이 걱정스레 어두워졌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거요?” 릴리는 그의 살피는 시선을 받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아랫입술을 어루만졌다. “나 같은 상태의 여자들은 격렬한 행동을 피해야 하는 거예요” “당신 같은 상태......” 갑자기 그의 얼굴이 멍해지더니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래요” 그가 와락 그녀를 끌어안고는 기쁨에 넘쳐 중얼거렸다. “릴리, 기분은 어떤 거요?” 그녀를 떼내고서 그의 시선이 그녀를 훑어 내렸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몸 위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괜찮은 거요, 당신?” “모든 게 완벽해요” 그녀는 확실히 대답해 주고 나서, 얼굴을 들어 뺨으로 퍼부어지는 그의 키스를 맞이했다. “당신이야말로 완벽해. 정말 확실한 거요?” 그가 믿어지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난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잖아요. 그리요, 확실해요. 사내아이 쪽으로 내기할까요? 당신은 무얼 걸을래요?” 알렉스가 그녀의 귀에 대로 무어라 중얼거리자, 릴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다예요? 당신이 그보다 더 쓸 줄 알았는데” 그녀는 미소지으며 그의 넓은 등을 끌어안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더 가까이 오세요, 백작님. 판돈을 좀도 올릴 수 있을지 협상해 보자구요” THE END........ 진짜 죽는 줄 알았네...무턱대구 시작했다가 죽는줄 알았어여... 철자가 많이 틀리더라두 그냥..대충 읽어주세여..ㅋㅋ 이젠 잠 좀 많이 자야겠어요.... 이거 때문에 살이 더 빠진거 같아야.. 여기 책방에서 빌린거라..빠랑 칠라구 디따 노력했거든여...^0^ 암튼.. 재미 있게 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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