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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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그런사람

2016.10/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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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누군가 너는 어떤 사람입니까 물었을 때 나는 그런사람 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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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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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구글러의 편지> 책으로 유명한 구글 코리아의 김태원 상무가 얼마 전 회사에 강연을 하러 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저와 네 학번 차이인데 약간 학 교의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분입니다. 학부생 때 각종 공모전에 서 상을 휩쓸고, 곧바로 모두가 선망하는 구글에 입사하고 그 후로도 자신 의 경험을 책으로 강연으로 널리 알리는 모습이 참으로 멋졌던 것이지요. 2009년 졸업을 앞둔 저도 김태원이라는 이름에 매료되었고 그 이름을 제 삶 의 길라잡이로 삼았던 기억이 납니다. 나도 저 사람이 도달한 그 경지까지 는 꼭 가보고 싶다는 질투 어린 열정으로 졸업을 앞둔 학부 마지막 해에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혼신의 힘으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제가 직장에 들어가고 또 시간이 수 년 지나 사원과 대리를 지나 어 느덧 과장을 바라보는 나이에 있게 되니 어느새인가 과거의 나의 우상들이 조금씩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나에게 열정과 꿈과 도전이 라는 단어를 늘 새겨주었던 그 우상들은 사회라는 필드에서 서 보니 각자의 위치가 조금 달랐을 뿐, 높낮이가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던 셈입니다. 비단 이것은 김태원 상무만의 일은 아닙니다. TBWA 박웅현 님도 조금씩 제 사고와 행동에서 멀어지는 분 중 하나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서른 초반을 지나고 있는 제 화두는 단연 그것입니다. 왜 과거의 나의 우상들이 더 이상 나의 우상이 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단 지 몇 가지의 언어로 사회인을 갈망하던 학부생 저를 현혹시켰다고 생각하 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나이를 불문한 열정으로 자신의 삶을 쟁투하며 전진하는 분들일 겁니다. 다만 ...... 변해갔던 것은 제 자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자신에게 겨눌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진화의 시발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1월을 앞두고 일곱 번째 <월간 그런사람> 입니다. 발행인 황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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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ell my stories with 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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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 and Good On the Cover / Meyoungc.JNGB 글 없는 그림책의 세계 안개향의 그림책산책 / 안개향 그녀는 금요일에도 주말에도 바빴다 유학생 부부의 좌충우돌 성장기 / 레몬트리 움직임으로 알아차리는 나 나의 무용담舞踊談 / 박유미 새로움의 의미 All the world’s a stage / 김유란 윤리와 비윤리의 경계선 Connecting the dots / avec 사진놀이 오래된 일기 / 황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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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youngc.JNGB, <Right and Good>, 2016, Mixed media on Paper, 27cm x 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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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ht and Good On the Cover Meyoungc.JNGB_ 결과가 아닌 노력을 꿈꾸는 중년아줌마

십여년 전 미술치료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림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때

그 때 치료사선생님께서 잡지를 던져주고 와닿는 글이나 그림을 아무렇게 배치해보라 하셨다 내 고민과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해주던 잡지 조각들

도서관에서 잔뜩 얻어온 잡지를 폈다 그렇게 찢고 붙인다. 사진들과 둘러둘러 한참동안 눈을 맞춘다

끊임없이 생기는 관계들 불필요한 말보다 침묵이 옳다, 선하다 믿어 왔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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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없는 그림책의 세계 안개향의 그림책산책 안개향_ 두 아이의 엄마이자 번역기획가. 읽고 일하고 일궈갑니다

5세, 2세인 두 딸은 아직 한글을 모른다. 그래도 이야기의 재미는 잘 아 는지 매일 한 권이라도 그림책을 골라온다. 그런데 가끔 조용해서 보면 아이 가 혼자 책을 보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에 비추어 “글도 못 읽는데 뭘 보 는 거지?”라고 생각하다 이내 답을 찾는다. 아이는 그림을 읽고 있다. 내용을 다 아는 책이면 그림을 통해 글줄을 상기하며 읽고 있을 것이고, 내용을 전혀 모르는 책이면 그림만 보며 상상하고 발견한다. 아이는 그렇게 글 없이도 그 림책을 읽는 방법을 알고 있다. 본래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어우러져 이야기를 전달하는 책’이다. 평론 가 데이비드 러셀은 그림책을 ‘이야기 예술과 그림 예술의 결합’이라고 정의 했고, 그림 작가 바바라 쿠니는 ‘진주 목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글 없이 만들어진 그림책도 있다. 아이가 글을 못 읽어 그림만 읽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책 말이다. 이 때 독 자는 비어 있는 글줄을 스스로 상상하고 채워가며 그림책을 읽어가는 흥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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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흥미롭지만 상당히 당혹스러운 경험이다. 글줄에 익숙한 어른들로서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지, 이게 정답이 맞는지 자꾸 되물으며 난감해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림책을 읽는 데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림을 읽는 것이 어 렵다’는 두려움에서 한 발만 벗어나 보면, 그림책으로 접할 수 있는 세계는 보 다 확장된다. 세계가 확장되는 기쁨에 조금 더 다가가보기 위해, 글 없는 그림 책의 세계를 슬쩍 들여다보고자 한다.

# 글 없는 그림책의 경우 그림만으로 서사와 정서를 전달하다 보니 일상보 다는 환상에 근접한 내용이 담긴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다른 시공간으로 벗어 나는 ‘여행’이라는 주제가 다양하게 변주되며 펼쳐진다. 에린 베커의 첫 그림책『머나먼 여행』에서는 외로운 소녀가 마법 색연필 덕에 새로운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는 대로 현실이 되는 마법 색 연필이라는 소재는 그림책에서 크게 사랑 받는 소재다. 소녀가 빨간 색연필로 문을 그리면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그 곳은 동양과 서양이 교묘 하게 조화된 세계다. 소녀는 배, 열기구,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을 그리며 물 과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짓지 않고 넘나든다. ‘머나먼 여행’이라는 제목에 걸맞 게 실로 화려하면서도 아슬아슬한 여행이 펼쳐진다. 새장에 갇힌 보랏빛 새를 구해주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자, 보랏빛 새의 주인이자 보라색 색연필을 가 진 소년과 마주한다. 둘은 이제 함께 떠나는 새로운 여행을 기획하게 될까? 이 환상적인 여행 그림책은 2014년 칼데콧 명예상의 영예를 누렸으며 속편 『비 밀의 문』까지 낳았다. 1995년 칼데콧 명예상을 받은 에릭 로만의 『이상한 자연사 박물관』의 경 우 완전히 다른 시간으로 여행을 떠난다. 비를 피해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간 작은 참새가 공룡 화석 주위를 날아다니게 된다. 한 순간 공룡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작은 참새는 공룡 시대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공룡이 참새를 잡 아먹기도 하지만, 참새는 유유히 공룡 화석을 빠져나오면서 다시 현실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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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다. 작가는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현실은 액자 형식으로 구성하고, 참새 가 완전히 공룡 시대로 빠져들어간 환상은 여백 없이 화면을 꽉 채우는 방식 으로 구성했다. 즉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세계가 여백의 유무로 구분되고 있 는 것이다. 시간을 넘나드는 특별한 여행이, 여백의 활용과 대담한 구도의 그 림만으로도 생생하게 전달된다. ‘책 속 여행’을 떠날 때 글 없는 그림책이 활용되기도 한다. 니콜라우스 하 이델바흐의 『브루노를 위한 책』은 글 없는 그림책이 중간에 액자 형식으로 들 어간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주인공 울라와 브루노가 만나는 현실세계는 글과 그림이 함께 한다. 울라가 책을 읽어주면서 둘이 책이라는 환상세계로 떠나게 되는데, 빨간 책갈피를 잡고 책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글이 사라진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글줄이 나타난다. 책 속 여행을 하고 돌아온 브루노는 “우리 어디 갔다 온 거지?”라며 어리둥절해한다. 독자도 마찬가지 다. 책 속에 몰입했을 때 말이 필요 없어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글 없 는 그림책이라는 형식이 이 감정을 얼마나 극대화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여행이라는 주제가 많이 변주되었다 뿐이지, 글 없는 그림책이 다 루는 주제가 여행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글 없는 그림책이 하나의 카테고 리를 형성하하고 시장에서 입지를 구축해 가면서,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 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글 없는 그림책에 특별한 관심을 쏟은 작가를 살펴보면 서, 관련 세계를 좀 더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판형 활용하기, 이수지] 2016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 최종 후보 에까지 올랐던 이수지 작가는 글 없는 그림책 작업을 다수 했다. 책의 접지선 을 경계로 활용해 만든 글 없는 그림책 3부작이 대표적이다. 가로로 긴 판형 의 『파도야 놀자』에서 접지선은 땅과 바다의 경계가 되어, 소녀와 파도가 그 사이를 넘나들며 노는 장면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좁고 세로로 긴 판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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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으로』에서 접지선은 현실과 전신 거울의 경계가 된다. 또한 위아래로 펼쳐지는 가로 판형의 『그림자 놀이』는 접지선이 현실과 그림자의 경계 역할 을 한다. 이수지 작가의 한 인터뷰를 보면, 앞의 두 작품은 계획한 것이 아니 지만 『그림자 놀이』의 경우 아예 종이부터 상하로 접어놓고 이야기를 구상했 다고 한다. 즉 작가는 책의 물리적 속성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오직 그림만으로도 충만하고 재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글줄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의 시각적 속성이 오히려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이다. 작가가 아직 시도하지 않은 판 형이 하나 남아 있는데(위아래로 펼쳐지는 세로 판형), 과연 4부작이 완성될 수 있을까? 그네? 엘리베이터? 아니면 폭포?

[말이 없는 그림 소설, 이기훈] 그림책에 최초로 만화 기법을 도입해 분할 면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작가는 『눈사람 아저씨』로 유명한 레이먼드 브릭스 다. 이후 데이비드 위즈너의 『시간상자』, 『구름 공항』, 『이상한 화요일』, 숀 탠 의 『도착』 등 만화 기법을 도입한 글 없는 그림책들이 다수 출간되며 반향을 일으켰다. 2010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었던 작가 이기훈은 이 제껏 출간한 3개 그림책 모두를 만화 양식의 글 없는 그림책으로 작업했다. 『 양철곰』은 파괴된 도시에서 몇 알의 도토리가 푸른 싹을 틔우기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양철곰 이야기를, 『빅피쉬』는 물을 뿜는 신비한 물고기와 노아의 방 주 이야기를, 『알』 은 알을 깨고 나온 온갖 동물과 호수 여행을 하다 사라지는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사의 스케일이 상당히 커서, 마치 말이 없는 그 림 소설을 읽는 것 같다. 세 작품 모두 드로잉은 섬세한 반면 구도는 역동적이 다. 또한 작가는 면 분할을 교묘하게 활용해 독자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데 탁 월한 재능을 보인다. 서사를 전개할 때는 촘촘하게 면을 분할하고, 충만한 정 서를 전달할 때는 두 쪽에 걸쳐 웅장한 장면을 연출해낸다. 현실과 환상/전설 의 경계를 글 없이도 생생하게 넘나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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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지, 『그림자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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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보기, 이슈트반 바녀이] 헝가리 출신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이슈 트반 바녀이의 작품은 볼수록 놀라움을 더한다.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도록 철학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책이다. 바녀이 역시 『 줌, 그림 속의 그림』, 『이게 다일까?』 『상상 이상』의 3부작으로 유명하다. 연작의 첫 작품인 『줌, 그림 속의 그림』의 경우, 아주 크게 확대된 닭의 볏 으로 시작해 시점이 점점 멀어진다. 삐죽삐죽 빨간 형체는 알고 보니 닭볏이 고, 멀리서 보면 닭볏을 보고 있는 아이들이, 또 그 아이들이 있는 집이 보이 는 형식이다. 이렇게 그림 속 그림이 확장되면서 결국 우주 공간의 작은 지구 로 끝나게 된다. 이 책은 글 없는 그림책의 또 다른 대가 데이비드 위즈너의 『 시간 상자』에 강한 영감을 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게 다일까? 』도 유사한 형식을 취한다. 누군가 화살을 겨누고 있는데, 이는 손목시계 속 그림이고, 시 계 주인은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파리 콩코드 광장은 영화 세트의 그림일 뿐이고……. 『상상 이상』은 앞의 두 작품과는 약간 다르지만, ‘ 본다’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본질은 유사하다. 앞쪽과 뒤쪽의 그림은 한 가지 사건을 담고 있지만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르다. 강렬하고 간결한 그림만으로도 ‘다른 시선’에 대한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숨은 그림 찾기, 안노 미쓰마사] 안노 미쓰마사는 일본 작가로는 처음으 로 1984년 그림책 작가 최고 영예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했 다. 과학과 예술이 일체가 된 세계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글 없는 그림 책도 다수 그렸다. 대표작 『이상한 그림책』은 현실에서 성립할 수 없는 이상한 도형의 세계 를 그리고 있다. 예를 들면 위아래를 알 수 없는 집, 안팎을 구분할 수 없는 성 벽,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흘러 돌아가는 물 그림 등이 담겨 있다. 눈속임 그림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판화가 에셔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3차원의 입체 를 2차원의 평면에 옮기는 과정에서 그림이 교묘히 비틀린 까닭에, 유심히 들 여다보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숲 이야기』는 여러 숲의 모습과 그 속에 숨어 있는 동물들을 그린 세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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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트반 바녀이, 『줌, 그림 속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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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안노 미쓰마사, 『이상한 그림책』 (아래) 에셔, <오르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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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그림책이다. 글 없이 양 쪽이 온전히 숲의 그림을 담고 있어, 마치 숲 속으 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기린, 호랑이, 앵무새 등 숲 속에 숨어 있는 여러 동물들을 찾아보려면 자세히 들여다볼 수 밖에 없다. 『여행 그림책』 시리즈 역시 두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하는 책이다. 그냥 보면 유럽의 작은 마 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책 같지만, 옛이야기, 명화, 소설 등의 한 장면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런 책은 단숨에 훅 읽기 보다, 하루 한 두 장을 탐독하며 읽어야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렇듯 그림 그 자체에 빠져들어 숨은 그림 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그림책의 경우, 별다른 글은 필요하지 않다.

[단어에서 이야기로, 블렉스볼렉스]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 블렉스볼렉 스는 만화, 판화 등 다양한 작업을 펼치다가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실크스 크린 작업을 했다. 소개할 책 세 권은 완전히 글이 없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한 쪽에 그림 한 장과 오직 한 개의 단어로 이뤄져 있어, 글이 ‘거의 없는’ 책이 라고 할 수 있다. 『Season』은 단 세 가지 색상만을 겹쳐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만든 책으 로, 2010년 뉴욕타임스 최고의 일러스트레이션 책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 책 은 사계절에 일어나는 다양한 풍경을 보여준다. 몇 번의 계절이 흘러가며 일 어나는 사건, 풍경, 인물, 동물, 식물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양 쪽의 단어들은 역시 서로 유사하기도, 배치되기도, 라임이 꼭 들어맞기도, 공유하는 정서가 유사하기도 하다. 그래서 굳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어느 한 장만 펼쳐놓고 작은 이야기를 만들거나 그림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People』도 같은 구성을 취한다. 세상의 온갖 사람들(직업, 성별, 연령 등)을 보여주고 있으며, 양 쪽의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반대말, 다른 직업, 사랑, 적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한 단어책 같아 보이지만, 양 쪽에서 주고받는 이 야기가 만들어지면서 예상 외의 울림을 준다. 『Ballad』 역시 단어로 이뤄진 실 크스크린 기법의 책이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똑 같은 풍경에 인물 들이 하나 둘 끼어들며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짧은 단어 밖에 없는데도 이렇듯 다양한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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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말했지만, 우리 같은 어른에게 글 없는 그림책은 낯설다. 처음 이런 책을 접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아이가 이런 책 을 뽑아와 읽어달라고 하면,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읽어줘야 하나 난감해진다. 필자는 전문가 강연에서 ‘글 없는 그림책을 읽는 법’에 대해 물은 적도 있다. 북극곰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그림책 작가인 이루리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사실 그림 그리고 읽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태어났습니 다. 하지만 교육 과정 속에서 이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문자 교육만 받 으면서 그림은 어렵다는 공포를 주입 받는 것이죠. 그러나 글의 양과 작 품의 깊이는 별개입니다. 글줄이 긴 그림책의 경우 짧고 재미있게 읽어 주면 됩니다. 글 없는 그림책은 아이와 나눠 읽으면 됩니다. 설명해줄 필 요가 없습니다. 같은 그림을 봐도 아이와 엄마가 찾는 게 다릅니다. 한 작품에 한 주제가 있다는 부담감을 버리세요. 글 없는 그림책의 경우 일 관된 스토리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마틴 솔즈베리도 이루리 작가와 유사한 말을 한다. 어린이들은 본능적으 로 그림을 그리고, 본 것과 상상한 것들을 합치는 데 능하다. 따라서 드로잉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우고 강화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사실 수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그림을 의미를 발견하고 해석하 는 시각적 문해력은 상당히 중요하다. 풍경 속에서 패턴을 찾아보기, 관점을 바꾸고 손을 움직여 사물을 직접 그려보기, 나만의 프레임으로 대상을 찍어보 기 등의 행위는 우리 어른들이 시각적 문해력을 키우는 데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사실 글 없는 그림책을 어렵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글줄로 전환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맞나? 내가 지금 이렇게 읽는 게 맞 나?’라고 묻게 된다. 우리는 내용을 파악하고 줄거리를 요약해 전달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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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길들여져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글 없는 그림책이 어려운 것은 우리 가 너무 정답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 없는 그림책의 장점은 정답과 주인공의 부담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이 있는 그림책의 경우 주된 서사를 따라가야 하고, 숨은 그림을 찾는 잔재미가 부가적으로 제공된다. 반면 글 없는 그림책의 경우 주 된 서사와 주인공을 고집할 필요 없이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 예를 들면 『 노란 풍선의 세계 여행』을 보면,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노란 풍선의 시선 에는 파란 자동차, 마법 양탄자를 탄 아저씨, 줄무늬 옷 남자의 이야기가 담긴 다. 어느 누구를 따라가도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하루 동안 공원에서 일 어난 일을 스냅샷처럼 담은 『공원에서 일어난 일』 역시 마찬가지다. 책 맨 뒤 에 각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일부 담겨 있기는 하지만, 누가 딱히 주인공이라 고 말하기 어렵다. 각자의 사연이 모두 의미가 있으며, 그것은 발견하는 독자 에게 달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 없는 그림책은 생각보다 천천히,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그냥 후루룩 넘겨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 재미, 서사를 채 이해할 수가 없다. 여유를 갖고 그림 속에 온전히 들어갈 때 글 없 는 그림책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너무 많은 말 속에서 살아가는 현 대인에게 평온한 휴식처가 될 수 있다. 글 없는 그림책은 ‘정답에서 벗어나 좀 더 색다르게 보기’의 기회를 제공 한다. 문자 교육에 익숙한 나로서는 여전히 한 가지 서사를 꿰어 파악하고 싶 다는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글 없는 그림책’을 통해 그 림에 집중하고 그림을 자세히 읽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다. 앞에서 다 룬 작가 네 명의 경우에도, 이기훈 작가의 작품을 제외한다면 서사에 기댄 그 림책이라고 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림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서사를 발견하기 위해 끙끙거릴 필요가 없다. 정답이 아니면 어떠랴. 주인공이 누구인들 어떠 랴. 그 그림에 흠뻑 빠져 나만의 상상여행을 잠시 잠깐 떠날 수 있다면 그것으 로 충분할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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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여행』, 에린 베커, 웅진주니어(‘14) 『이상한 자연사 박물관』, 에릭 로만, 미래아이(‘01) 『브루노를 위한 책』,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풀빛(‘03) 『파도야 놀자』, 이수지, 비룡소(’09) 『거울 속으로』, 이수지, 비룡소(‘00) 『그림자 놀이』, 이수지, 비룡소(‘10) 『양철곰』, 이기훈, 리젬(‘12) 『빅피쉬』, 이기훈, 비룡소(‘14) 『알』, 이기훈, 비룡소(‘16) 『줌, 그림 속의 그림』, 이슈트반 바녀이, 보물창고(‘13) 『이게 다일까?』, 이슈트반 바녀이, 문학동네어린이(‘06) 『상상 이상』, 이슈트반 바녀이, 내인생의책(‘06) 『이상한 그림책』, 안노 미쓰마사, 비룡소(‘06) 『숲 이야기』, 안노 미쓰마사, 한림출판사(‘01) 『여행 그림책』, 안노 미쓰마사, 한림출판사(‘99) 『Seoson』, Blexbolex, Enchanted Lion Books(’10) 『People』, Blexbolex, Gecko Press(‘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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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감상했던 재즈 음악회 @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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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금요일에도 주말에도 바빴다 유학생 부부의 좌충우돌 성장기 레몬트리_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는 유학생, 남편, 딸 바보 아빠

그녀는 금요일에도 주말에도 바빴다.

책상 위 노트북 스크린에 눈을 꾸욱하고 두고선 떼지를 못하는 그녀였 다. 자연스레 육아는 나의 몫이 되어 버렸다. 점심에 지수에게 밥을 먹였다. 밥알을 조금 우물 우물 씹고선 먹기 싫다고 고개를 돌리는 우리 딸. 결국 주 걱을 손에 쥐고 갖은 협박과 회유를 하면서 밥을 겨우 먹였다. 밥 먹는데만 길게는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아이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하지만 이제는 밥 먹는 훈련을 시간을 들여 시켜야 한다. 어느덧 15개월이 되는 지수는 얼 마나 활발한 지 모른다. 체력으로 치면 어른인 우리 부부 두 사람보다 더 좋 지 않을까 싶다. 아빠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아이를 잠시 두고 조금만 일 을 하려 하면 옆에 쪼르르 따라와선 같이 놀자고 노크를 한다. 반응이 없으 면 칭얼대고 보채기 시작한다. 점심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함께 놀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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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나도 모르게 지쳐간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간다. 여전히 손 끝 하나 움직이지 않게 노트북만 들여다보며 타자를 치고 있는 아내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은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엘에이 아트 뮤지엄에 가보면 어떻겠냐 고 아침에 넌지시 물어보았다. 빨리 리포트를 작성해서 교수에게 보내야 한 다며, 아내는 일을 다 끝내고 잠시 바람을 쐬자고 답한다. 다시 아이와 씨름 을 하며 저녁 밥을 먹이는데 속에서 불 같은 것이 지펴 오르는 것이 느껴진 다. "아내를 서포트 해줘야 해. 지난 2년 동안 내가 박사 수업 듣는다고 바 쁠 때는 아내가 지수도 보고 저녁 밥도 하고, 도시락도 챙겨주고 공부만 할 수 있게 모든 걸 도와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좀 도와줘야 하잖아."

머리론 알겠는데, 마음은 자주 따로 논다. "뮤지엄 8시까지야." 분명 점심 때 아내에게 말했었다. 오후 5시 40분이 되니, 아내가 "딸깍" 마우스 클릭 버튼을 누르며, 만세를 부른다. "아, 드디어 제출했다. 제출 완 료!" 나를 쳐다보더니, "우리 잠깐 나갈까?" 한다.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바람 좀 쐬고 싶었다. 지수를 돌보며 마시고 내 뿜은 집안 공기는 텁텁할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지수 짐을 챙겨서 잠시라도 나가 바람을 쐬면 되는데, 내 마음 속에서 그 놈의 문지기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 문지기가 속삭인다. "나도 바쁘단 말이야! 나는 할 게 없는 줄 알아? 박사 3학년차가, 2학년보다 할 일이 훨씬 더 많고 바쁘다고. 2학년까지는 수업만 들으면 되지, 3학년부턴 다 혼자 해야 하니깐 얼마나 막막하고 뭘 해 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그래도 지금이라도 아내와 함께 지수를 데리고 잠시 나가고 싶은데, 의 외로 입에서 튀어 나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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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긴 뭘 나가? 됐어."이다. 화장실에서 가서 새로 산 왁스로 머리도 만지고, 옷도 외출복을 입고, 지수 간식 거리도 챙기고 있는데, 말은 그렇지 않다. 안 나간다고 했다. 그 랬더니, 눈치 없는 곰 같은 아내가 내가 화장실에서 머리 만지는 것도 모르 고, 빨래하러 빨래 방에 지수 데리고 나갔다 온단다. 박물관은 8시까지다. 지금이라도 가면 늦지 않다. 하지만 이 쓸모 없는 문지기 놈 때문에 오늘도 가지 못할 듯 하다. 그러면서 나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주부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일에 치이는 남편, 바쁜 남편 을 기다리는 아내. 하루 종일 육아를 하랴, 반찬을 만들랴, 청소를 하랴 지 쳤던 아내. 남편이 오면 외출도 좀 하고 싶은데, 자기 일, 자기 취미 말고는 무심한 남편. 그런 아내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물론 우리 부부는 약간은 특이한 케이스이다. 둘 다 박사공부를 하고 있으니, 우리는 뭐든지 동등하게 분담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도 거의 대부분 아내가 더 많은 가사 일을 감당하지만 말이다. 아내와 지수가 떠나고,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 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 때 시각 오후 6시 30분. 우리의 발걸음은 함께 박물 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한인마켓에서 김밥과 양념치킨도 사서 말이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7시였는데, 야외에서 재즈 공연이 시작되고 있 었다. 여기 저기 담요를 깔고 미국 사람들이 휴식을 즐기며 음악을 감상하 고 있었다. 우리도 돗자리를 깔았다. 아내와 함께 누워 밤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았다. 나쁜 친구 문지기에 대해서 고백했다. 눈치가 느린 아내는 하루 종일 지수를 본다고 공부를 못 했으니, 나에게 조용히 공부할 시간을 준다고 밖에 나간 것이었다고 한다. 오후 6시 30분도 절대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부부 사이라도 당연한 것은 없다. 쓸데 없는 자존심을 내려 놓는 훈련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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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광고 선전 알림 선언

월간 그런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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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theyo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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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으로 알아차리는 나 나의 무용담舞踊談 박유미_ 무용을 사랑하는 심리학자

지금의 내가 궁금할 때 마음도 일상도 엉킨 실타래 같은 때가 있다. 마음을 아무리 들여다본들, 물건을 정리하는 것처럼 차곡차곡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쉽지는 않다. 마 음을 정하기 어려운 고민거리가 있을 때, 그 어느 편도 가보지 않은 길이니 어떤 길이 더 좋을지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내 마음도 알기 어려운데 다른 사람의 마음은 더더욱 알기 어렵고 혼란스럽다. 진실이 무엇일까, 진심이 무 엇일까, 진정한 나는 누구일까? 그럴 때 나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오센틱 무브먼트(진정한 움직임, Authentic Movement. 미국 서부 무용/동작치료 선구자 Mary Whitehouse의 기법)로 들어간다. 물론, 안전하게 지켜보고 나의 움직임을 목격해주는 위트니스 witness가 있을 때에만. 눈을 감고 내 안의 움직임 충동을 기다렸다가 이를 따라가준다. ‘이렇 게 움직여야지.’ 어떠한 의도도 없다. ‘이런 움직임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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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아무런 판단도 없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움직여지는 그 순간을 기다렸 다 쫓아간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에 홀려서 숲 길을 헤매듯, 움직임 충동 의 순간이 깨질 새라 조심조심 저절로 일어나는 움직임을 따라간다. 전혀 움직이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 또한 괜찮다. 그러면 움직 이고 싶지 않은 나의 충동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준다. 바다로 가라앉는 돌덩 이처럼 머리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을 때도 있다. 그러면 그대로 움직인다. 머리가 점점 더 무겁게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한참을 있다 보면 점점 편안해진다. 혹은 조금 지루해지기도 한다. 그 러다 꿈틀꿈틀 갓난 아기처럼 움직여지기도 하고, 어느 날은 연인을 유혹하 는 여인처럼 움직여지기도 한다. 어떤 움직임도 괜찮다. 그것이 그 순간 진 정한 나의 움직임이다. 움직임은 점점 더 격렬해질 때도 있고, 한결같이 잠잠할 때도 있다. 옳 고 그른 것은 없다. 너무 오래 바닥에만 머무른다고 스스로 자책하거나 억 지로 힘을 내어 일어설 필요도 없다. 그저 오늘의 나,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의 나는 이러하구나, 받아들여주면 된다. 알아차려주고 보듬어주 면 된다. ‘아, 오늘 내 몸은, 내 움직임은 머무르고 싶어하는구나. 쉬고 싶구 나. 바닥의 힘이 필요하구나.’ 그러다 조금 다른 빛이 있는 곳으로 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도 한다. 빛이 들어오는 창을 찾아 꿈틀꿈틀 기어간다. 창을 만나니 바람이 느껴진다. 잠시 누워 바람의 온도를 느낀다. 이제, 바닥이 아닌 벽을 느껴보고도 싶다. 아까와는 다른 공간, 수평면(horizontal plane)이 아닌 수직면(vertical plane)이 느껴진다. 낯설고 새롭다. 아직은 약간 불안하기도 하지만, 바닥 과는 또 다른 단단한 힘이 있다. 벽을 손으로 짚어가며 걸어보기도 하고, 조 금 용기가 나면 벽에서 잠시 떨어져보기도 한다. 점점 벽과 분리되어 혼자 움직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러다 문득 불안하면 다시 벽으로 돌아와 기대 어 서서 머무른다. 벽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안정을 찾고 희미하게 웃으며 다시 벽에서 살짝 멀어져 보기도 하고, 좀 더 먼 곳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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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뻗어 나온 길 눈을 감고 있지만, 눈 앞에 있는 수많은 갈래의 길이 손에 잡히는 듯하 다. 마치 삶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게 되는 소소한 결정거리부터 중 대한 인생의 문제까지. 두 갈래, 세 갈래, 수많은 갈래의 길들. 그 길은 내 몸 바깥 공간에 만들어진 길 같지만, 내 안에서 뻗어 나온 길이기도 하다. 과거 의 어느 날 무심코 저지른 일, 고심해서 결정한 일, 알면서도 외면한 일, 그 저 스쳐 지나간 인연, 오래도록 서성이는 인연, 고심 끝에 끝낸 인연, 애써서 곁에 두는 인연. 하나하나가 길이 되어있기도 하고, 서로 얽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길들이 눈을 감으니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쫓아가본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따라 걸어가본다. 그 길은 불안한가, 편안한가? 또 다른 길을 나서본다.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이 사람은 따뜻한 가, 차가운가? 더듬더듬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이 길은 그럼에도 불 구하고 나의 길인가, 빨리 빠져나가야 하는 잘못 든 길인가? 느껴보려고 애 쓰며 움직인다.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막막할 때도 있고, 마음 속 깊이 깨 달음이 올 때도 있다. 머리로는 맞다고 생각했던 길이 아니었구나, 싶을 때 도 있고, 불분명하던 감정이 명확하게 정리될 때도 있다. 그저 그걸로 됐다. 어차피 누구나 처음 사는 인생, 정답이란 있을 수 없으니.

홀로, 혹은 함께 공간을 탐색하다 보면 다른 움직이는 사람(mover)을 만나게 된다. 피 하고 싶을 때는 피한다. 혼자 어둠 속을 더듬더듬 헤매다 누군가를 만나 반 가울 때는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어색한 움직임이지만 따뜻하기도 하고, 내게는 없는 리듬(rhythm)이라 재미있기도 하다. 한참 움직이다가 힘들면 가만히 기대어 쉬기도 한다. 따뜻하고 편안하다. 상대방이 나를 토닥거려 준 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면 그대로 눈물도 흘려버리고, 고맙고 흐뭇해진 마음으로 더 오래 기대어 있는다. 어느 날은 나도 놀랄 정도로 과감해질 때도 있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팔을 내밀거나 발을 뻗어 접촉을 유도한다. 내가 먼저 리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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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내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으로 이끌기도 한다. 있는 힘껏 밀기도 하 면서 상대방과 힘겨루기도 한다. 이런 움직임을 일상과 연결시켜보면 관계 속에서 과감한 에너지가 필요할 때, 혹은 정반대로 그러한 에너지를 상대방 에게 원할 때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났던 것 같다. 오센틱 무브먼트의 힘은 표현과 통찰에 있다고 본다. 말로 못다한 것들 을 움직임으로 자유롭게 표현해낼 때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또, 내 안 의 움직임 충동을 통해 삶을 돌아보게 되는 통찰의 힘이 있다. 그래서, 처음 에는 10분도 길게만 느껴지던 것이 나중에는 30분도 부족하다. 오센틱 무 브먼트에는 중독성마저 있어서 바쁘게 일상을 살다보면 ‘아, 지금쯤 찐-한 오센틱 한 판 필요한데…’ 하며 갈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고보니, 지금이 마침 그러하다. 날 위해서라도, 오랜만에 오센틱 그룹 한번 꾸려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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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dy-is-voi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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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비윤리의 경계선 Connecting the dots / avec avec_ 공대언니의 세상읽기

진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진이 나를 보자마자 목소리를 높여 불평을 토했다. “선생님! 반장이요 맨날 애들한테 뛰지 말아라 장난치지 말아라 엄청 뭐라 고 하거든요? 근데 반장이 맨날 제일 많이 떠들고 제일 많이 뛰어다녀요! 반장이 모범이 되어야지 앞장서서 말썽 피워요! 반장이 그래도 돼요??” 흔한 일상이었다. 나는 진에게 대답해 주었다. “진아, 너도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어. 반장이라고 항상 모든걸 완벽하게 할 수는 없고 실수 할 때도 있을 수 있지. 이미 너희가 투표로 뽑은 반장이니까, 투 표를 잘 해서 올바른 반장을 뽑는 게 중요하겠지? 너희의 결과로 뽑은 반장이니 까 지금은 맘에 들지 않더라도 조금 이해해 줘야 해. 다음 투표 때는 더 잘 고민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 반장을 뽑을 수 있을까 생각해봐. 아니면, 네가 생각하는 반장이라면 이렇게 해야해! 하는 모습을 네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 2학기때는 친구들이 너를 반장으로 뽑아주지 않을까? 너도 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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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고 싶어? 그러면 지금 반장은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네가 먼저 모범을 보여 서 반 친구들의 인정을 받아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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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기사들이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구조조정 과 회계부정에 관한 기사들이다. 5년의 사회생활 경험을 토대로 한다면, 과 연 내가 저 위치에 있었을 때 어떻게 행동했을 지 자신 없다. 사회와 조직은 끊임없이 나에게 정의로움보다는 사익을 최대한 챙기고 눈앞의 손익에 따 라 행동하는 것이 영리한 선택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나는 내가 속해있는 조직과 사람들의 분위기에 쉽게 물들고 그 색을 쉽게 내 색으로 만든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런 나를 잘 알고 있기 에, 내가 속해 있는 곳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는 매우 중요한 요소 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참 어렵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욱 선택을 내리기 어 려워진다. 마음속엔 현재의 편안함과 달콤한 유혹과 올바른 것, 장기적인 삶에 대한 저울질이 항상 존재한다. 인생은 선택들의 연속이지만, 매 순간 올바른, 후회 없는 선택을 내리고 있는가에 대해선 확신에 찬 대답을 하기 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퇴사 전까지 이년 이상 몸 담았던 프로젝트는 30억불 달러, 한화 3조원 가량의 프로젝트였다. 첫 계약 시점으로부터 2년 후에는 추가 프로 젝트가 계약되면서 40억불 가량의 프로젝트를 새로 수주했다. 총 70억불 달러, 한화 7조 이상의 대형 프로젝트였다. 회사 입장에선 역대 최고의 계 약 금액이었고, 새로 진출하는 시장이었기에 모두 흥분했었다. 회사 내부인 들만 흥분한 것이 아니라, 관련 업종의 업체들도 흥분해 있었다. 새로운 시 장에 우리 회사와 함께 진출해보고 싶은 계산이다. 영업 사원들을 만날 때 마다 언제 출장가냐며, 본인도 꼭 데려 가 달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했 었다. 상징적인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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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다른 팀의 부장님에게서 시작되었다. 유난히 그 업체와의 일은 힘들었다. 우리 부서 구매 건은 아니었지만, 협업이 필요했고 설계 인력의 검토가 필요했기에 우리도 종종 미팅에 참여하고 설계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건 왠걸 계약 금액과 프로젝트 수준에 맞지 않게 업체의 실력은 형편 없 었다. 정말 기본도 안 되어 있었다. 수많은 기본도 안되어있는 업체를 만나 왔지만, 이 업체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 수준이어서 갑인 우리가 을인 그 들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관리해주곤 했다. 업체가 사용하여 완성품 을 제출하여야 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하여, 우리들이 그들의 프로그램 사용법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재직 기간 중 만난 최악의 업체였 다. 나중에야 왜 그런 형편없는 업체가 선정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해당 계 약 담당 부장과 그 업체간의 모종의 계약이 있었던 것이었다. 소문으로는 10억을 리베이트 받았다고 했다. 당최 구매 업체와의 계약 금액이 얼마였 기에 10억을 리베이트 받았는지 알기는 힘들지만, 전사에 소문이 퍼졌고 해당 부장은 검찰 조사를 받고 회사에선 물러났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모두의 처음 반응은 업체에게 리베이트 받 은 10억을 토해내고 별도의 벌금도 부여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당 연한 수순이었다. 누구라도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결과는 의외였 다. 벌금으로 1억에 미치지 않는 선고를 받고, 별도의 처벌 없이 회사를 사 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했다. (소문으로 들은 내용이기에 정확한 처벌 결과는 다를 수 있다.) 난 고작 대리였고, 내가 다루는 계약의 규모는 고작해야 수십억 대였다. 물론 수십억원 규모의 계약도 적은 규모는 아니지 만, 항상 공정하고 윤리적인 선택을 내리려고 매우 노력했다. 나는 내 미래 아들 딸들에게 부끄러운 부모가 되고 싶지 않다. 매 순간 업체에게 접대를 핑계로 식사 대접을 받을 때도, 업체와 함께 견학을 빙자하여 바람 쐬러 놀 러 갔다 올 때도, 항상 내 이 행동이 윤리적으로 옳은지 아닌지 판단하고 적 절한 선에서 거절하려고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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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게, 내 마음이 옳다고 외치는 방향으로 살려고 순간 순간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5년을 지낸 회사였고, 우리 회사는 정의롭다고 느끼고 있었 다. 하지만, 이렇게 산 내가 바보 같았다. 고작 십 퍼센트도 안 되는 벌금을 부여 받고, 현 직장에서 물러나기만 하는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부정을 저질 러도 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씁쓸했다. 내가 왜 열심히 살아왔는지, 왜 회사 생활 하는 내내 정의롭고 공정하게 임하려고 힘들게 노력해 왔는지 허 탈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어온 신념이 있었다. 부모님에게 받은 가르침일 수 도 있고, 내 스스로 쌓아온 덕목이었을 수도 있다. 회사 입사 전에는 나 스 스로 열심히 쌓아온 가치가 있었다. 회사에서 느끼는 가치는 이와 많이 달 랐다. 회사가 보여주는 가치는 내가 쌓아온 가치와 방향이 많이 달랐다. 더 오랜 시간을 이 조직에서 몸담다 보면, 이러한 메시지를 내가 받는 수준을 넘어서 후배들에게 비슷한 메시지를 주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았다. 두 려웠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회사에서 이러한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었 다.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더 이상 대한민국만을 무대로 하지 않았다. 세계 시장을 무대로 했고, 세계 어느 곳이든 진출했다.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앞으로 수명의 연장으로 기존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일을 할 텐데, 20대 후 반이라는 어린 나이에서부터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 괴로웠다. 앞으로 변할 수 있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은 수도 없이 많을 것 같았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앞으로 내 인생에서 대한민국 대기업 은 없을 거라고 결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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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놀이 오래된 일기 황정운_ 1985년생. 7년차 직장인. 월간 그런사람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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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진, 사진기를 처음 알았을 때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동아리 소개를 하러 온 선배 인상이 좋아서 우연하게 들어간 천문반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미놀타 수동 카메라를 만지게 되었고, 그 뒤로 3년 동안 별자리 사 진 찍는 법을 글로, 귀로, 눈으로 익히게 되었다. 천문 사진 찍는 건 생각보 다 꽤 어려웠다. 사진은 빛을 담아내는 과정이었다. 빛이 많은 곳에서는 의도하지 않아 도 하얀 얼굴이 나왔고, 빛이 없는 곳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흔들거리는 내 얼굴이 웃고 있었다. 당시만해도 생소했던 용어를 외워가며 사진을 이해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내가 알아둔 이론만큼 사진을 찍으 러 다니지 않았다. 내가 그 때 조금 더 많은 사진을 찍었더라면, 지금즈음 난 사진을 정말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결과, 원하는 구도가 나오지 않을 때는 늘 사진기 탓을 했다. 이 것보다 조금 더 비싼 카메라가 있다면 내가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그러나 내가 찍은 사진을 현상해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났을 때, 그 속에 담긴 색은 내 마음이었고 잡히지 않은 앵글은 내 가 오늘동안 쫓고있던 꿈이었네, 라며 홀로 중얼거린다. 내가 원하는 것을 사진 한 장에 담아낼 수는 없었구나. 그런 것들을 모 두 한 컷에 담아버리면 그 속에 뭐가 있는지 다 묻혀버리는 걸. 단단하게 뿌 리박힌 나무를 거슬러 파아란 하늘로 유유히 올라가는 물고기들처럼 나도 유유하게, 때론 고고하게 오늘 내가 찾고 있는 꿈을 찾아 떠나야했다. 비록, 그런 내 모습이 사진에 담겨지지 못해도 말이다.

그 과정이 잃어버린 꿈을 찾는 것처럼 슬프진 않다. 웃음을 만나게 될 11월아 어서 오렴.

- 2006.10.31일의 일기 (만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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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그런사람 2016년 10/11월호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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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및 발행 황정운

발행일 2016. 10. 31.

기고 문의 : 전자우편 aboutexpression@gmail.com 페이스북 /aboutexpression 블로그 marill00.blog.me

월간 그런사람은 : 월간 그런사람은 "i tell my stories with my ……” 를 슬로건으로 ‘나’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고민하고 표현하려는 그런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2016년 4월 창간한 월간 문화잡지입니다. 개인 기고자들의 글을 중심으로 매월 만들어집니다. 저희는 글 속에 투영되어 있는 사람의 흔적에 좀 더 다가가려 합니다. 나에 대한 성실하며 지속가능한 고민과 표현, 저희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뿐입니다.

* 본지는 한국도서잡지윤리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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