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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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그런사람

2016.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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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누군가 너는 어떤 사람입니까 물었을 때 나는 그런사람 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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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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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을 앞두고 다섯 번째 <월간 그런사람> 입니다.

한 때 책을 일 년에 백 권씩 읽다가 아이가 태어나며 잠시 책을 멀리하게 되 었습니다. 아이가 조금 자라고 나서 밤에 여유 시간이 생기니 다시금 책을 꺼내 들 시간과 정신적인 여유가 생기네요. 안방에서 아이는 자고 있고 저 는 거실은 불은 꺼둔 채 서재에 앉아 책을 조용히 넘기는 밤 11시, 12시의 적막함은 참으로 황홀합니다.

이번에 제가 읽었던 책은 1999년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고등학교 총기 난사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어머니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라 는 책입니다. (2016, 반비출판사 펴냄) 보통 범죄심리학이나 사회과학적으 로 범죄의 배경과 심리적인 요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데, 이 책은 가해자 의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저지른 범죄와 그럼에도 자식이라는 사랑 사이의 여러가지 솔직한 감정을 아주 진실되게 밀도있게 쓴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어로의 번역이 아주 잘 된 책이었습니다. 예전에 책 을 읽을 때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한국 작가가 쓴 책을 골랐던 이유 는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번역을 거치며 의미가 절반 이하로 훼손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해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을 만나기 어렵듯, 좋은 번역가에 의 해 번역된 책을 만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입니다. 최근 한강 작가가 맨부커 상을 수상한 것 이면에는 그것을 다른 언어로 아름답게 옮겨 적은 데보라 스 미스가 있었음을 저는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로 나의 생각을 실체 있는 무언가로 가공하고 조형해 냅니다. 책 을 쓰는 사람도, 그 책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사람도,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 도 모두 언어와 글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이들입니다. 그런 언어의 아름다 움을 계속 기억하고 싶은, 다섯 번째 <월간 그런사람> 입니다. 발행인 황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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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ell my stories with m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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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 I Need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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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Cover / Meyoungc.JNGB 올랭피아(Olympia) : 파리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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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 황정운 놓치고 있는 것들, 놓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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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향의 그림책산책 / 안개향 너에게만 알려주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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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작은 뜨락 / 이창희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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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necting the dots / avec 아빠가 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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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부부의 좌충우돌 성장기 / 레몬트리 즉흥, 삶을 담은 나의 무용담舞踊談 / 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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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youngc.JNGB, <Lord I need you>, 2016, Mixed media on Paper, 26.5cm x 1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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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 I Need You On the Cover Meyoungc.JNGB_ 결과가 아닌 노력을 꿈꾸는 중년아줌마

사람에게 주어진 마음바닥의 끝은 어디이며 채워짐의 끝은 어디이고 또 성장의 끝은 어디인가

순간순간 최선이기에 비워내고 쳤던 바닥을 또 치고 좌절하는 듯하나 다시 일어서고

그러더니 늘 치던 바닥에 균열이 생긴다 그 틈 사이로 밀려드는 기쁨 순간 맑고 벅찬 감사의 찬양이 나온다

곧 내가 규정해왔던 바닥이 허물어지며 무의미해진다 미미하더라고 다음 성장을 소망하고 기대하는 기쁨의 순간

그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 모두가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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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Olympia) : 파리에서 1 나의 서양미술 순례 황정운_ 1985년생. 7년차 직장인. 월간 그런사람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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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여섯 시 반이 되자 나와 아내는 잠에서 깰 수 밖에 없었다. 전 날 숙소에 도착해 잠이 들 때도 창 밖 하늘이 아직 환해 시간이 밤이 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걷고, 숙소로 돌아와 씻 고 저녁을 먹은 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와인을 마시는 느낌 자체는 밤의 그것이었지만 좀처럼 창 밖의 풍경은 하루가 저물어간다는 것과 어울리지 않았다. 마침 파리에 도착한 날은 2014 브라질 월드컵이 개막하던 날이었 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에 열리던 예선 경기는 다섯 시간의 시차를 건너 파 리의 저녁에 방송되었다. 밖은 여전히 밝았다. 파리는 서울보다 십 도 가량 위도가 높았고 여름이 시작되는 6월에는 밤 열 시에도 좀처럼 해가 지지 않 았다. 우리는 잠을 청하기 위해 두꺼워 보이는 커튼으로 창을 가리고 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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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미세한 커튼 틈 사이로 덥고 강렬한 아침 햇살이 침대로 쏟아졌다. 그렇게 나와 아내는 파리에서의 또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4평 정도 되는 좁은 숙소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서 씻고 난 뒤 하 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다 보면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시각은 아침 여덟 시 였다. 문을 열자 숙소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이 크로와상과 커피 등이 담긴 큰 트레이를 들고 들어와 침대에 놓고 나간다. 민첩하고 기계적인 동작이 몇 초 걸리지 않아 미리 연습해둔 불어로 아침 인사를 건넬 틈이 없었다. 우리 가 묶었던 숙소는 따로 식당이 없이 아침식사를 각자 방 안으로 제공해 주 었는데 선택권이 다양한 것은 아니었다. 크로와상이냐 바게트냐 하는 빵의 종류와 커피의 당도 등 기본적인 몇 가지를 전 날 데스크에 이야기해두면 정해진 시간에 트레이에 담아 갖다 주는 셈이었다. 나와 아내는 트레이를 둘러싸고 침대에 앉아 TV로 프랑스 뉴스를 보 며 아침식사를 한다. 불어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영어와는 다른 제2외국어 의 묘한 매력이 있다. 불어를 배경 삼아 저녁도 아침도 같은 장소에서 비슷 한 느낌으로 한다. 커피는 철로 된 비커와도 같은 특이한 잔에 담겨 있는데 갓 데워진 것이라 후후 불며 마신다. “음, 역시 크로와상이 맛있네요” “아무것도 아닌 식사인데 왜 파리에서 먹는 것은 이렇게 맛있지.” 나와 아내는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으며 유명하지 않은 별 세 개짜리 숙 소에서 제공하는 흔한 식사마저 맛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감탄하며 아침식사 를 마친다. 나는 속으로 과연 이곳은 파리구나, 라고 생각하고 만다. 여기가 정말 고급 유럽문화의 정수인 파리구나. 4평도 안 되는 작은 숙소에서 말이 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내와 나는 같은 숙소에 열흘 동안 있었고 매일 아침마다 방에서 식사를 했다. 열흘 정도 매일 아침마다 흑인 여성을 만난 셈이다. 우리에게 아침을 갖다 주는 여성들이 매일 아침마다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두 세 명이 번갈아 가며 적어도 어제와는 다른 사람을 만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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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모두는 흑인 여성이었다. 조명이 없는 문 밖 어두운 복도에서 그녀들 은 무표정한 낯빛을 한 채 환한 방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을 맞이 하는 나의 모습은 어정쩡했다. 말을 건넬 만큼 여유 있는 광경도 아니었지 만 무엇보다 그녀들에게 무슨 행동을 해야 할 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그럴듯한 파리 시내 고급 식당에서 돈을 내고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좋은 식당을 찾는 것이라면 마치 서양문화에 원래부터 익숙한 사 람처럼 그럴싸하게 흉내거나 나를 포장할 수 있었다. 몇 백 년의 역사를 지 닌 카페에서 에끌레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유럽의 지성인처럼 담론을 즐 기는 것,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꺼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었다. 에꼴드빠리(Ecole de paris)의 예술인들, 벨에포크(belle epoque)의 안락한 문화, <Midnight in Paris>의 문화와 예술의 향연으로 접근된 파리 는 내가 기꺼이 포섭되고 그의 일부가 되려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 앞에 서 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정신의 수용, 그것이 나의 솔직한 속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식사를 갖다 주러 온 흑인 여성을 마주하는 것은 그런 포장 과는 다른 행위였다. 내가 기꺼이 그의 일부가 되려는 파리의 그 무엇이 아 니었다. 그녀들은 언제나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자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곳은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공간이다. 그녀에게 나는 무엇으로 포장되어야 하는가? 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이 들었다. 포장할 것이 없었다. 나는 흑인여성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올 때 나는 어정쩡하게 문 옆에 서 있게만 되었다. 그래서 이방인에 불과했다는 감정이 파리의 아침마다 되풀이되었고, 이방 인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한 낮 내내 되풀이되었다. 2014년 6월 16일. 파리에 도착한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파리에는 열흘 간 머무는 일정이었다. 반 년 전 겨울에 회사 일로 미리 한 번 다녀간 아내의 소개에 따라 파리에서의 일정은 순조롭고 질서정연했다. 파리라는 도시에서 가볼 곳과 경험할 곳이 많았다. 이곳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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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심 같은 것은 없었지만 적어도 어디에 가야 할 지 모르는 일은 없었다. 우 리의 일정은 파리 시내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 지베르니, 베르사유와 같은 몇 몇 근교 지역으로 채워져 있었다. 파리 시내에서는 크게 여섯 군데의 미술관을 가 볼 예정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셰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은 센 강을 따라 서로 인접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고, 그에 더해 파리시립현대미술관(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 그리고 몽마르뜨 언덕 인근의 낭만주의 박물관(Musee de la Vie romantique)을 마지막 날에 가볼 생각이었다. 역시 가장 기대가 되는 쪽은 오르셰 미술관이었다. 물론 파리 예술의 상징은 단연 루브르 박물관이다.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다양한 예 술 조각, 장식들로 가득한 루브르도 좋았지만 그 보다는 19세기 이후의 인 상주의 그림으로 가득한 오르셰 미술관에 좀 더 마음이 닿았다. 오르셰 미술관에서도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은 마네(Edouard Manet)가 1863년 그린 <올랭피아(Olympia)> ……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역사나 신화 속 장면을 추구하던 신고전주의나 아카데미학파의 시대를 종식하고 인상주의의 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예술사의 분수령이라거나 기념 비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은 후대의 기준으로 재단한 것이겠지만, 적어도 모 든 현재 예술사에서 인상주의의 시작은 마네의 낙선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 마네의 지위다. 부유한 집안에서 법관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란 마네 자신은 스스로를 예술계의 사조를 바꾼 혁명의 기수라거나, 새로운 예술주의의 창시자라는 생각에는 보수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립 미술원에서 개최하는 전 람회에서 낙선한 뒤 낙선된 그림만을 모아 전시하는 낙선전(落選展) 이후로 그는 인상주의 작가들의 상징이자 구심점이 된다. 낙선전은 단 1회만 개최 되고 끝나고 말았다. 낙선전의 처음과 끝을 만든 마네의 그림이 <풀밭위의 점심식사>였다. 그 뒤 마네는 서양미술에서 인상주의의 문을 연 작가로 영원히 기억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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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인물들의 강렬한 시선과 의도적 으로 입체성을 제거한 듯한 그림의 평면성은 다른 인상주의 작가와는 다른 그만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실제 눈으로 관찰하고 캔버스에 그림으로 옮기는 대상은 비록 현 실 속의 입체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옮겨 담는 캔버스는 어디까지나 평면이 다. 입체가 아닌 것이다. 평면에 대상을 구현하는데 비록 그 대상이 입체적 이라는 이유로 양감과 같은 명암과 색채를 덧붙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캔버스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언제까지나 진실을 그려야 하며, 그 진실이란 그림이 그려지는 캔버스란 결국 평면이라는 점이다. 이미지가 말하는 진실 은, 그림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림은 그림이다…… 확실히 그의 생각은 기존의 아카데미와는 다른 인식의 급격한 이동이었다. 고흐가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한다면 마네는 인상주의 자체를 시작한 사내였다. 언젠가 부끄럽게 고백했지만 서양미술은 인상주의와 같은 말이 었다. 인상주의는 나 자신을 예술의 세계로 밀어 넣는 비밀의 단어와도 같 았다. 이것이 인상주의를 바라보는 비서양인의 좁은 인식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시작을 연 마네를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그 마네의 <올랭피아(Olympia)> ……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 스>,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에서 구도와 대상의 나체 군상의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 이 작품은 강렬한 시선 그 자체였다. 한 여성이 목에 검은 끈 하나를 매단 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 다. 한 눈에 보아도 객을 기다리는 매춘부의 모습이다. 복도에서 마주한 것 과 같은 흑인 하녀가 그 옆에 서 있고, 침대 위에는 털을 바짝 세운 검은 고 양이가 한 마리 올려져 있다. 어쩌면 인상주의의 시작을 알린 <풀밭위의 점 심식사>보다 더 강렬한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이 작품은 특유의 평면 적인 군상들, 성(性)을 상징하는 다양한 장치들, 그리고 무엇보다 중앙에 관 객을 향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는 여성의 강렬한 시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올랭피아는 인상주의 효시라는 마네의 상징성을 압축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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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uard Manet The Luncheon On The Grass Oil, Canvas 208 x 265.5 cm 1863 Musee d'Orsay, 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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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의 이름이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이름은 곧 올랭피아라는 작품에서 씻겨져 나가고 말았다. 이 작품은 마네 자신이었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파리에 도착하고 오르셰 미술관에 가기 전 며칠 동안 견딜 수가 없었다. 보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은 걷잡을 수 없는 환상이 되었고 그것이 망상으로 넘어가기 전에 나는 센 강을 건넜 다.

#2

숙소에서 오르셰 미술관까지는 걸어서 30분 거리였다. 오페라의 유령 무대로 유명한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을 지나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에 도착하면 바로 센 강 건너편이 오르셰 미술관이다. 아침 무렵 의 튈르리 정원은 한적했다. 평일 출근 시간이라 거리에서는 직장으로 향하 는 파리 시민의 모습을 종종 보았지만, 이곳에서는 나와 아내의 발걸음 소 리만이 들렸다. 센 강 방면 출구로 빠져나오니 건너편 오르셰 미술관이 보 였다. M과 O라는 글자가 새겨진 플랜카드가 미술관 곳곳에 걸려있다. 미술관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9시 …… 정식 개관은 30분 후였기 때문 에 나와 아내는 아직은 줄이 길지 않은 엔트리 라인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 다. 입구 근처에서는 오렌지 색 옷을 입은 청소부가 미술관 외벽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흑인 남성이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유리창에 스프레이 세제를 여기 저기 묻히더니 여유로운 동작으로 플라스틱 막대를 꺼내 유리창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움직임이었 다. 유리창을 바라본 채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이 어땠는지 는 알 수 없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 세 장 정도 닦고 나자 입장이 시작 되었다. 오르셰 미술관은 20세기 초까지 기차역이었다. 그래서 과거 기차역 플 랫폼이 세로 중심의 미술관 구조로 아직도 남아있었다. 한 가운데에는 통로 가 길게 놓여져 있었다. 통로를 따라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양 옆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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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부터 20세기의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와 아내는 그림 을 관람하는 속도가 서로 달랐다. 나는 그림을 빠르게 여러 번 보는 편이었 고, 아내는 한 그림을 진지하게 오래 감상하는 쪽에 속했다. 중요한 것은 미 술관의 영적인 아름다움을 각자의 속도대로 각자의 정신에 채워 넣는 것이 었다. 우리는 한 시간씩 각자 한 층을 관람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내와 헤어지니 마네의 <올랭피아>가 여기 전시되어 있을까 하는 걱 정이 앞섰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5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오르셰 미술관展>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오르셰 미 술관에 소장 중인 인상주의 회화 작품들이 대거 서울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유명한 미술관들은 소장 작품이 많아 전 세계 각지의 미술관에 작품을 대여 하거나 창고에 보관하며 순환 전시하기 때문에 모든 작품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작품을 어떤 때에 만날 수 있는 건 운에 가까울지 도 모른다. 그래서 원작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파리로 건너왔지만, 정작 그 원작은 파리에서 서울로 가 있을지도 모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 씩 어긋남에 대해 걱정이 들었다. 미술관 1층의 어느 전시관(Salle) 모퉁이를 돌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마네의 <올랭피아>가 무사히 걸려 있었다. 세로 130cm, 가로 190cm 작지 않은 그림이다. 그때의 감각을 텍스트로 옮겨 적는 것은 쉽지 않지만 실제로 직접 마네의 그림을 눈 앞에서 보는 것은 황홀했다. 그림은 책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평면적으로 다가왔고, “그림은 현실이 아닌 그림”이라 는 마네의 표현이 이해되었다. 사람의 몸, 침대의 질감, 배경의 어두움 모든 것을 평면으로 환원시키는 것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림 한 가운데 누워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체 여인의 시선…… 아니 여인은 오 히려 턱을 들고 있어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오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 발적으로 굴복하고 싶을 정도로 그 시선은 내게 정면으로 부딪혀 왔다. 다 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도통 짐작할 수 없었다. 시선은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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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었지만 내면은 텅 빈 느낌이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 …… 마네와 우연 히 법원 복도에서 마주친 뒤 약 10여년 동안 마네의 뮤즈가 되었던 여성이 다. <풀밭위의 점심식사>에서 나체의 모습으로 도발적인 웃음을 지으며 관 객을 응시하고 있는 그 여성이었다. 마네가 <풀밭위의 점심식사>나 <올랭 피아>를 통해 관객의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을 때 그 중심에는 그녀의 나 체가 있었다. 마네의 나체가 문제였다. 사실 그리스 시대부터 르네상스를 거치며 여성의 나체는 성(性)이 제거된 성(聖)의 전형으로 그려지며 낯선 것 은 아니었다. 나체 자체가 금기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마네의 나체는 오히려 성(聖)을 제거하고 성(性)을 전면으로 드러내고 있었던 셈이다. 부끄 러움이 없는 빅토린 뫼랑의 눈빛 …… 나뿐만 아니라 수 많은 관객을 홀린 도발적인 눈빛 때문에 그녀는 실제 하찮은 신분의 길거리 매춘부일 것이라 는 오해를 받았다. 그렇지만 빅토린 뫼랑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나 스스로 예술인이 되 기를 희망한 여성이었다. 16살부터 모델로 활동하고 여성들을 위한 아카데 미에서 조금씩 그림을 연습해보기도 한다. 기타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 연주 에도 소질이 있던 그녀는 카페에서 종종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19 살이 되던 해 우연히 거리에서 마네와 만나게 되고, <Street Singer(1862)> 작품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그의 뮤즈가 된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마네 의 걸작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모델로만 만족할 수 없었다. 빅토린 뫼랑이 마네를 처음 만난 것이 1862년 …… 1870년이 지나자 그녀는 예전부터 그리던 회화 공 부를 조금씩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빅토린 뫼랑이 그렸던 그림은 정 작 그녀를 뮤즈로 대했던 마네가 가장 경멸했던 아카데미의 사실적인 회화 였다. 재능이 있던 그녀는 결국1976년 살롱에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한다. 문제는 마네도 똑같이 그림을 출품했지만 그는 낙선했다는 점이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의 모델로만 생각했던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그것도 마네가 경 멸하는 살롱에서 입선하고 만다. 그 일을 계기로 빅토린 뫼랑과 마네는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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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객체에서 주체로 변해가는 과정에서의 위협이었다. 나의 예술 적인 감각을 발현하기 위한 소재이자 객체였던 대상이 스스로의 존재를 예 술인으로 각인시키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 주체라는 걸 깨닫자 마네는 더 이 상 빅토린 뫼랑이 캔버스에 갇힌 모델로만 머무르지는 않으리라 느꼈을 것 이다. 박제된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주체임을 깨달은 대상은 더 이상 객체 로 회귀할 수 없다. 당신은 모델이라는 객체였던 순간부터 주체의 눈빛을 가졌던 건가 요…… 나는 <올랭피아> 그림 앞에 서서 빅토린 뫼랑의 시선을 조용히 마주 보 았다. 그녀가 실제 매춘부라는 오해, 마네의 수 많은 여성 편력 중 하나라는 오해, 이름조차 남길 것이 없는 흔한 모델이라는 오해 속에서 그녀의 시선 은 흔들림 없이 나를 굴복시켰다. 마네가 그녀를 뮤즈라는 객체로 바라보았 지만 이미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예술인이라는 주체임을 알고 있다는 눈빛 이었다. <올랭피아>에서 조금씩 마네라는 이름 대신 그녀의 존재가 더 먼저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마네가 그리기 시작했지만 빅토린 뫼랑이 완성시킨 것이기도 했다. 약속했던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1층의 그림은 거의 다 돌아본 셈 이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아내와 만나 오르셰 미술관의 나머지 그림들도 흥미롭게 보았다. 역시 그림책에서나 보았던 세잔(Paul Cezanne),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모네(Claude Monet)의 회 화를 직접 볼 수 있던 것이 좋았다. 한국에서 유독 모네의 작품이 인기가 많 아서인지 그의 대표 작품은 앞서의 전시 때문에 서울로 가 버리는 바람에 볼 수 없었다. 다만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 두 작품만 으로 오르셰 미술관에 온 보람은 충분했다. 나는 빅토린 뫼랑의 눈빛을 계속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 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크게 두각을 드러낸 것은 없지만 평생 예술인으로 스스로를 생각하였고, 살롱에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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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ouard Manet Olympia Oil, Canvas 130.5 x 190 cm 1863 Musee d'Orsay, 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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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출품했다는 점, 그리고 1927년 사망했다는 사실 정도만 전해 올 뿐 이다. 마네의 뮤즈가 아닌 빅토뢴 뫼랑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는 눈 빛에서 무엇을 더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 나는 그것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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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린 뫼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파리를 떠나는 마지막 날이 었다. 2014년 6월 21일 오전이었다. 저녁 늦은 밤 비행기라 하루 종일 시 간이 있었는데, 나와 아내는 전 날 찾았던 파리 교외 지베르니(Giverny)에 서의 인상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덧 파리에서의 열흘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숙소에서 나와 짐을 잠시 맡기고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숙소에서는 루이라는 커다란 개를 키웠는데 가끔 루이는 우리가 하루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 1층 어딘가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혀 를 날름거리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가 떠날 때 루이는 보이지 않았다. 몽마르뜨 언덕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 그 중간에 생 라자르 역을 지나치며 빅토린 뫼랑을 한 번 더 떠올렸다. 마네의 1873년작 <생 라자르 역(Gare St. Lazare)>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기차를 한 아이가 물 끄러미 바라보고, 중년의 여성이 그 아이 옆에 앉아 캔버스 너머를 응시하 고 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함께 마네의 뮤즈가 된 지 어느덧 10년, 빅토린 뫼랑은 젊지 않은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었다. 모녀(母女)가 함께 있 는 배경이 생 라자르역에 당도하는, 혹은 출발하는 기차 연기였다. 지금의 생 라자르 역은 그림에서의 창살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는 사람으 로 가득한 광장을 지나 낭만주의 박물관(Musee de la Vie romantique)으 로 향했다. 낭만주의 박물관은 19세기 초 여류 조각가로 활동한 아리 쉐퍼(Ary Scheffer)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하다가 1980년대에 들어와 같은 시기 낭만주의 화가들과 문인들의 삶을 다룬 시립 박물관으로 규모를 넓힌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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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한 주택가 골목 안에 있어 이곳이 박물관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 나와 아내는 1년 전 로마를 찾았을 때 여행책자나 지도에 잘 소개되지 않은 작은 성당에서의 정취를 만끽하며 즐거워했는데, 파리에서도 그런 곳을 찾아보 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낭만주의 박물관에 정확히 무엇이 전시되고 있는 지, 무슨 공간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정표를 따라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니 작 은 정원이 나오고 정원을 둘러싼 주택이 보인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 쇼팽의 에뛰드가 흐르고 있었다. 정확한 op넘버는 몰랐지만 특유의 청량감 넘치는 피아노 소리는 쇼팽의 음악이었다. 은은한 조명으로 가득한 박물관 1층의 주인공은 19세기 초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 문인 조르주 상드 (George Sand)였다. 여러 소설을 발표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으 로 발돋움한 조르주 상드의 본명은 오로르 뒤팽(Aurore Dupin). 그녀는 빅 토르 위고, 톨스토이, 보들레르, 니체, 뒤마와 같은 동시대의 유명한 예술 가, 문인들과 폭 넓은 교류를 나누었는데 그들 중 몇 몇과 사랑에 빠진 낭만 적인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여섯 살 연하의 시인 뮈세나, 10년 넘게 관계를 유지한 피아니스트 쇼팽과도 사랑과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내가 주목했던 건 낭만적인 사랑 이면의 것들이었다. 조르주 상 드는 사교 모임에서는 파이프를 물고 담배를 피거나 연미복에 중절모자를 쓰는 등 남장을 즐겼는데 여성이라는 존재의 한계가 아직은 명확했던 19세 기 초반의 시대를 통과하기 위한 그녀만의 혹은 그만의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남장이라는 선택을 통해, 혹은 남장을 하면 서까지 남성이라는 주류 세계에 주체로서 편입되려 했고 그 결과 그녀는 오 늘 날 19세기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이라는 주체성을 획득했다. 빅토린 뫼 랑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시대에 남긴 셈이다.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이 박물관 전체를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알려진 이름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남장을 하면서까지 주류 세계에 주 체로 편입되어야 했던 객체의 삶 …… 아니 객체를 객체로 분류하는 것은 주체의 시선이다. 타자의 기준이다. 객체의 시선에서는 객체 그 자신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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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박물관 1층 조르주 상드의 방에서

체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가 무언가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그 마음가짐에 대한 것이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며 너를 위 한 모델로 살아가는 것, 그건 객체이자 동시에 이방인의 삶이었다. 내가 통과하는 시대를 적극적으로 포섭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내가 시 대에 포섭될 것인가를 견주어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오늘 날 더 유 명한지 여부는 오히려 중요하지 않았다. <올랭피아> 속 빅토린 뫼랑의 눈빛이 불편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그녀 의 눈빛은 스스로가 자신이라는 세계관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 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너는 무조건적으로 파리라는 이 도시의 정취와 서양미술이라는 이상 적인 세계관에 무조건적으로 흡수되고 싶은 것이냐, 너는 네가 흡수되려고 하는 서양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융해되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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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예술을 지향하는지 스스로 자각한 채 파리 라는 공간에 뛰어들려고 하는 것이냐…… 빅토린 뫼랑은 나에게 너는 주체이냐 혹은 주체인 척 하는 이방인이냐 는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책을 통해 배웠던 서양미술에 대한 환상과 갈망 은 파리라는 벨에포크로 가득한 도시에 오며 완벽하게 충족이 되었다. 나는 모든 것에서 파리의 정취에 감탄했고 모든 사물에 예술적인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러한 정신에 나 자신을 버리고 융화되려고 했다. 그렇게 섞이고 나면 나 자신에게도 파리가 가진 미술과 문화의 정신이 조금은 물들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들고 나면 서양미술이라는 무언가로 나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무조건적인 마음 앞에 그녀들이 묻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형체가 무너진 융화는 융화가 아니며 결국 너는 이방인에 불과할 것이라고. 이방인은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이방인은 자신이 성립될 수 없는 객체였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아직은 질문이 없는 이방인의 여행이었던 셈이 다. 나는 주체인척 하는 나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끝 내 무서웠다…… 인상주의의 효시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네는 빅토린 뫼랑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려낸 것에 불과할 지도 몰랐 다. 나는 아직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 아니라고 믿었던 건 나 자신만의 착 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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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고 있는 것들, 놓아야 할 것들 안개향의 그림책산책 안개향_ 두 아이의 엄마이자 번역기획가. 읽고 일하고 일궈갑니다

상자, 야자 열매 등에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구멍을 낸다. 입 구가 좁은 유리병도 좋다. 그 안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과일이나 견과류 등 을 넣어두면, 원숭이가 구멍 안으로 손을 넣어 음식을 움켜쥔다. 구멍이 너무 작기 때문에 주먹 쥔 채로는 손을 빼낼 수 없다. 그렇지만 손 안의 음 식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원숭이는 어떻게든 과일을 쥔 채 손을 빼내 려고 안간힘을 써본다. 될 리가 없다. 결국은 인간에게 붙들려 잡히고 만 다. 이것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누구보다 재빠른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다. 최근 나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전환점이라고 할 만한 결정을 내 렸다. 현대인에게 있어 직업을 바꾼다는 것은 꽤 큰 결심이자 모험이다. 사람들마다 결정을 내리는 방법은 다 다르다. 어떤 이슈의 장단점을 꼼꼼 히 분석해 수치화하고, 더 높은 점수를 얻은 쪽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있다. 반면 재고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직관을 믿고 결정 내리는 사람도 있 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따지고 들면 그 직관이라는 것 속에도,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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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적이고 순차적인 프로세스를 따르지 않을 뿐 분명 이해득실을 따지는 고유의 체계가 있다. 이 결정을 통해 내가 얻을 것과 잃을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더 중하고 귀한지에 대해 따져보게 된다. 잃을 것은 자명했고 얻을 것은 불투명했다. 회사가 제공하는 안락한 울타리, 동료들과의 대화, 금전적 여유는 포기해야 했다. 아이들과의 유대 감과 제 2의 직업을 얻으려 했으나 정말 엄마가 집에 있어야만 아이들과 의 정서적 교류가 가능한 것인지, 제 2의 직업은 과연 얻을 수 있을지 내게 맞는 옷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내 손에 무엇을 쥐고 싶은지 고심하고 판단하여 결정을 내렸다. 지금껏 두 손에 잡고 있던 회 사, 돈, 직위를 내려놓고 또 다른 소중한 가치를 잡기 위해 선택을 한 것이 다. 우리 손은 두 개뿐이다. 옳은 것을 쥐고 가야 한다. 시인 정호승은 ‘내 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한다.’고 했다. 무엇을 놓고 무엇을 다시 쥐어야 할지 항상 선택하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삶이 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놓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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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 알아주는 성공’에 대한 집착

『슈퍼 거북』은 널리 알려진 우화 ‘토끼와 거북이’의 결말 이후를 담고 있는 책이다. 잠든 토끼를 앞질러 우승을 차지한 후, 거북이 꾸물이는 다 른 동물들이 실망할까 봐 고군분투한다. 어디 물어볼 데도 없이 도서관에 서 책을 파고들고, 하루도 빠짐 없이 훈련을 하며 1등 자리를 지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진짜 빨라지면서 슈퍼 거북이 되어 가지만, 꾸물이는 너무 지쳐 천 년은 늙어버린 것만 같다. 빨라지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돌아볼 수 없는 지금 대신, 자신의 속도대로 인생을 즐길 수 있었던 예전을 그리워하곤 한다. 어느 날 토끼가 다시 찾아와 도전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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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밀자 꾸물이는 마지못해 경주에 참가한다. 슈퍼 거북이 된 꾸물이가 토 끼를 한참 앞질러 갔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깐 졸다가 결국 토끼가 이 기고 만다. 모두들 토끼의 우승을 축하하고 꾸물이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 아온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단잠에 빠져든다. 그 후 꾸물이는 본래 속 도의 삶을 되찾는다. 꽃을 가꾸고 수영을 하고 책을 보고 맛을 음미하며 느긋한 시간 속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 에서는 과도한 성과주의로 인해 극단으 로 자신을 내모는 현대 사회를 폭력적인 사회로 진단하고 있다.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명제가 개별 자아를 지배하는 나머지, 과한 긍 정성이 오히려 탈진으로 인한 ‘우울증’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탈진은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개개인을 극단적인 고독으로 몰아간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 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 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은 경색으로 귀결된 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 다. (중략)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 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 한병철, 『피로사회』 66-67쪽 발췌

『피로사회』 에서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착취자이자 피 착취자라고 규정하지만, 그 자기 자신은 오롯한 진짜 나라고 말하기 어려 워 보인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시선에 갇혀 있는 나’, ‘남이 알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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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나’에 가깝다. 자신의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모른 채, 할 수 있다는 주변과 사회에 둘러싸여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슈퍼 거북』의 꾸물이 역시 시선에 사로잡힌 채 ‘진짜 나’를 놓치 고 ‘사람들이 원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 온갖 훈련을 견뎌낸다. 그래서 빨 라진 꾸물이가 행복하면 다행이련만, 꾸물이 곁에는 참다운 행복도 진정 한 친구도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1등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은 후에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일구어가는 행복을 누리는 것 이다. 나의 본질과 상관 없이 오직 1등만을 위해 질주하는 우리네의 모습 은 꾸물이와 무척 닮아 있다. 지치고, 늙고, 그러나 멈출 줄 모르는 피로의 한가운데.

#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

『찾고 있어!』에는 다른 것만 찾아 헤매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사람들을 놓치고 있는 주인공 하양이가 등장한다. 친구들이 모두 반갑게 인사하며 뭘 하고 있냐고 묻지만, 하양이는 오직 땅만 보고 걸으며 한결같이 대답한 다. “뭘 좀 찾고 있어.” 그 누가 말을 걸어도 하양이는 고개를 들 줄 모른 다. 머리에 새똥을 맞은 후에야 비로소 하양이는 고개를 든다. 그리고 친 구들의 얼굴을, 마을의 거리를, 하늘의 풍경을, 밤낮의 변화를 보고 느낀 다. 하양이는 더 이상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 않고, 대신 친구들과 함께 충 만한 시간을 보낸다. 지금 이곳, 내 주위, 내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아 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지금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놓치는 경 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정체되어 있다는 불안 감이나 고립으로 인한 외로움 때문에, 아이와 보내는 시간에 온전히 집중 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길에 눈을 돌려본다. 지금 이 일은 자신의 꿈이 아 니라며 새로운 것에 기웃거리기만 할 뿐 실제 뛰어들 용기는 없는 직장인 들도 많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대학 생활을 즐기지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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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이는 동물들이 실망할까 봐 걱정이 됐어. 그래서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 진짜 슈퍼 거북이 되기로 말이야. ‘빠르게 살자!’

- 『슈퍼 거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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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어디 한 군데 몰입하지도 못하는 청춘들도 마찬가지다. 만족스럽지 못한 현재에 대한 비판, 그리고 미래를 위한 준비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나의 현재에 감사하고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면, 자신이 원하던 미래가 내 앞에 펼쳐지더라도 또다시 먼 미래만을 꿈꾸 며 한탄하게 될 것이다. 다른 곳만 보려는 마음,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가득한 이상 지금이 주는 오롯한 행복은 놓칠 수 밖에 없다.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은 돈과 관련될 때 더욱 부각된다. 『행복한 돼 지』에서는 돈이 주는 편의와 계급적 우월성에 현혹되어, 진짜 행복을 잃어 버리는 돼지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먹을 것이 가득하고 따뜻한 집이 있 고 마음껏 뒹굴 들판이 있고 무엇보다 부부와 친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 고, 돼지 부부 베르타와 브릭스는 만족할 수 없었다. 부자가 되어야만 멋 진 일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정말로 행복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연 히 보물 상자를 찾은 돼지 부부는 도시로 나가 화려한 옷, 최신 자동차, 근 사한 집을 사고 행복해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는 자주 고장 나고 꼴은 엉망이고 일은 쌓여만 갔다. 참다 못한 돼지 부부는 거추장스러 운 옷을 벗어 던지고 전에 살던 과수원으로 돌아가 ‘마음 놓고, 자유롭게, 실컷’ 뒹굴며, 다시 찾은 자유를 만끽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돈이 행복의 밑바탕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다. 하지만 행복이 돈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부자가 되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돼지 부부의 생각은 요즘 우리의 모습과 꼭 같지 않은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나의 취향, 나의 자유, 나의 행복을 돈 때문에 저당 잡혀 사는 꼴이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성공을 위한 열정 과 끈기를 강조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난 6월 "회사 업무에 모 든 시간을 투입하고 있다. 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이런 사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라도 마음대로 가서 평온하게 하루를 보냈으면 하 는 바람이 있다. 사업 얘기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해 화제가 되었다. 혹자는 다 가져본 사람의 배부른 소리라고 비난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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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성공 뒤 내보일 수 없었던 피로감과 갑갑 함이 진하게 엿보인다. 돈은 행복으로 가는 여러 개의 문 중 단 한 개 문의 열쇠일 뿐이다. 돈과 관련한 열쇠를 열 개 스무 개 들고 있다고 해서, 다른 문을 열 수는 없다.

# 문제의 무게

『엄마 말 안 들으면… 흰긴수염고래 데려온다!』는 엄마 말에 코웃음 쳤다가 진짜로 흰긴수염고래를 키우게 된 빌리의 이야기이다. 황당한 상 황을 능청스럽게 이끌어가는 작가의 역량이 일품인 책이다. 세상에서 가 장 큰 동물, 30미터짜리 흰긴수염고래를 집에서 키우게 되다니! 빌리는 학 교에 고래를 데려가고 씻기고 놀아주고 먹이느라 하루 종일 진을 뺀다. 그 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고래 입 속에 있으면 아무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겠군. 그래서 빌리는 고래 뱃속으로 들어간다. ‘흰긴수염고 래 때문에 생긴 문제에서 벗어나려면 흰긴수염고래 안에 들어가는 게 최 고다.’라고 말하며, 빌리는 완전히 색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긴 머리 공주』의 표지에 등장하는 길고 검고 구불구불한 머리채는 마치 붓글씨와 같아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는 아버지의 명령과 왕국의 번 영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하는 공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9명의 시녀가 수영장을 빌려 머리를 감겨주고 엉킨 머리를 다 빗는 데 세 시간이 나 걸리는 등, 공주의 행동에는 제약이 많다. 나중에는 가방 두 개에 머리 채를 넣어 다니고 가방이 무거워지자 이것을 들고 다녀줄 서커스단 출신 남자까지 고용하게 된다. 무거운 머리채에 매여 살던 공주는 어느 날 궁전 을 빠져 나와 자유의 몸이 된다. 서커스단을 찾아간 공주는 머리를 자르고 가방 없이 서커스의 긴 머리 공주가 되어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게 된다. 살면서 우리는 온갖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성적, 친구, 가족, 입시, 직업, 상사, 건강, 가난, 실직 문제 등. 그 중에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 제도 있고 그러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에 닥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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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매몰되고 만다. 문제를 피하려고 하거나, 이고지고 다니면서 괴로 워하거나, 단기적이고 피상적인 해결방법을 찾는 데만 골몰한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제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짜 원인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문제의 무게에 짓눌리 지 말고 문제의 원인을 손에서 놓아야 한다. 빌리가 고래 입 속으로 들어 가 편안히 눕듯, 긴 머리 공주가 머리를 잘라버리고 훨훨 날아가듯. 그것 이 진짜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다.

# 아직, 아직은 이라는 망설임

정유미 작가의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2015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우울과 희망이 동시에 엿보이는 그림이 인상적이다. 한 소녀가 직접 만든 작은 인형 상자 안을 여행하면서 다른 인물(사실은 자신의 자아가 투영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두 발로 새로 운 세상에 나가보고 싶은 소녀와 달리, 각 인물들은 방에 갇혀 나올 생각 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직 예쁘지 않아 보여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 고, 누군가는 가진 게 부족해 풍족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누군가는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소녀는 각 인물들에게 위로를 건 네며, 결국 자신의 좁은 공간을 벗어나 인형의 집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 게 된다. 틀에서 벗어나 틈을 찾아낸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좋은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완벽을 기하는 자세가 중요할 때도 있다. 섣불리 발부터 내밀기보다는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찬찬히 일을 시작하는 것은 신중한 태도이다. 하지만 결국 일을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첫 발걸음이다. 아직,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마음은 시작을 유예하며 스스로를 끝없는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나 를 옥죄는 것이다. 스스로 판단했을 때 준비가 99점 되어 있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완벽주의자 기질과 불안 지수가 높은 사람들이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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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난 지금 못가. 매일매일 거울을 보며 준비하지만, 뭔가 부족해 보여. 그걸 찾고 완벽해지면, 그때 나갈 거야.”

‘지금 내가 움직이면 모든 게 무너질지도 몰라.”

- 『나의 작은 인형 상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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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다. 그러나 요즘 같이 빠른 시대에는, 오히려 완벽한 상품을 내는 것보다 어느 정도 구체화된 상품을 내고 소비자의 반응을 보며 수정하고 보완하고 발전해나가는 것이 좋은 전략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판단했을 때 80점 정도 준비가 되었다면, 일단 손가락을 꿈쩍이든 코 끝을 찡긋거리 든 한번 움직여 보는 것이 어떨까. 그 몸짓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춤이 완성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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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둘을 데리고 집에 오는 길은 쉽지 않다. 팔랑거리는 아이들 손도 잡아줘야 하고 아이들 짐에 내 짐에, 비까지 오면 설상가상이다. 하지만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놓을 수 없는 것은 두 아이의 곱고 보드라운 손이다. 인생에서 끝까지 놓을 수 없는 몇 가지가 무엇인지 고민해본다면,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좀더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은 욕심에, 알면서도 놓지 못하고 계 속 움켜쥐고만 있는 것들이 우리 삶에 넘쳐난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진 정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전전긍긍하게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시선, 성과에 대한 과한 집착, 현재가 아닌 미래, 돈, 이런 것들보다도 진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찾아 가만히 두 손에 쥐 어보는 것이다. 그런 행복은 나와 나의 사람들, 지금 바로 이곳에서 벌어 지는 일들 속에 있다. 『슈퍼거북』의 거북이가 꽃을 가꾸고 샤워를 하며 웃 듯이, 『행복한 돼지』의 돼지 부부가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들판에서 편안 한 잠을 자며 웃듯이. 나는 당신의 지금, 이 순간의 소소한 행복을 응원한 다. /

『슈퍼 거북』, 유설화 글/그림, 책읽는곰(‘14) 『찾고 싶어!』, 올가 데 디오스 그림, 키즈엠 (‘16) 『행복한 돼지』, 헬렌 옥슨버리 글/그림, 웅진주니어(‘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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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말 안 들으면… 흰긴수염고래 데려온다!』, 맥 바넷 글/애덤 렉스 그림, 다산기획(‘10) 『긴 머리 공주』, 안너마리 반 해링언 글/그림, 마루벌(‘01) 『나의 작은 인형 상자』, 정유미 글/그림, 컬처플랫폼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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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만 알려주는 비밀 내 삶의 작은 뜨락 이창희_ 도토리같은 사내아이의 엄마입니다. 글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건 비밀인데 너에게만 살짝 알려주는 거야. 라고 피아노선생님이 아이에게 말씀하셨대요.

아이는 주 5회 피아노수업을 받지만 수요일과 금요일은 피아노에 가 지 않거든요. 수요일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방과 후 바둑수업을 받고 집에 와요. 그럼 이미 학교공부도 했고 바둑수업까지 받았으니 피곤할텐데 싶어 서 아이에게 피아노수업을 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매주 수요일에 피아노학원에 가지 않습니다. 금요일은 학교를 2시 40분에 마치는데 그 날도 일주일이 끝나는 날 이어서 거의 피아노에 가지 않아요. 뭔가 지친 목소리로 전화한 아이가 피아노를 쉬어도 되냐고 물어오 면 쉬라고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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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도 피아노를 거의 빠지게 됩니다. 수요일은 확실히 피아노를 가지 않고 금요일은 거의 피아노를 가지 않는 거지요. 월요일에 피아노를 치는데 선생님이 그러셨대요.

도윤아. 이건 비밀인데. 너에게 특별히 알려줄게. 수요일(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에 피아노수업이 마치면 모두 콜팝을 먹을거야. 모두 콜팝 한 통씩 먹게 되어있어. 그런데 네가 수요일에 안 올까봐 알려주는 거야. 수요일에 꼭 오라고.

아이는 이 엄청난 비밀을 나에게 알려주며 몰랐으면 어쩔 뻔 했냐고. 그래서 이번주는 수요일에 꼭 피아노를 가야한다고 했어요. 그 선생님이 누구시냐고. 엄마도 이불 속에서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 다. 좋은 선생님.

이건 비밀인데. 이건 비밀인데 너에게만 알려주는데. 이번 주 수요일엔 피아노를 마치고 콜팝을 먹어. 모두 다 콜팝을 먹어. 네가 안 올까봐 비밀인데 알려주는 거야.

따뜻한 말. 따뜻한 마음을 통해 나오는 따뜻한 말. 이번 수요일엔 잊지말고 꼭 피아노에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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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 Connecting the dots avec_ 공대언니의 세상읽기

“준아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과학자요” “왜 과학자가 되고 싶어?” “범준이랑 우혁이랑 같이 과학자가 되기로 했어요. 우리 타임머신 만 들거에요” “우와 멋있다~ 나중에 타임 머신 만들면 선생님도 태워줘야해~!” “그건 선생님이 얼마나 잘 해주는지 봐서 생각해 볼게요” 준은 초등학교 4학년이다. 몇 년 전 미스터 피바디라는 영화를 보여 줬었다. 천재 강아지가 인간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할리우드식 애니메이 션이다. 천재 강아지 미스터 피바디는 타임머신을 만들었고, 인간 아들은 실수로 타임머신을 작동 시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이다. 11살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삶 속에서, 내가 이 아이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아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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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퇴사했어요?” 라는 질문을 퇴사한지 7개월차인 지금까지 수백 번 은 들은 것 같다. 매번 내 답은 똑같다. “원래 오래 다닐 생각이 없었어요. 계획대로라면 적어도 1년 전에는 퇴사했어야 해요. 하던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느라고 퇴사 계획이 조금 늦 어졌을 뿐이에요.” 내 이런 대답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내 인생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EARLY TWENTIES> “팀플 같이 하실래요?” “네, 좋아요” “전공이 뭐에요?” “전전전이요!” “진짜요? 전 경영대생인줄 알았어요!”

팀플을 할 때마다 서로 소속과 학번을 밝히며 시작하곤 한다. 나는 항상 공과대학 전전전(전기전자전파공학과)이라고 했고, 백이면 백 깜짝 놀라며 심리학, 경영학, 어문학 등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전공인 줄 알았다 고 했다. 나는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2학년때는 경영학과 이 중전공을 시작하였다. 졸업할 시점에는 경영학과 학점 수가 본 전공인 공 학 보다 많았다. 나의 독특한 이력은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항상 나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 때 기자를 꿈 꾸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책을 좋아하고 사회에 대 한 고민이 깊었던 나였지만, 과외 선생님의 추천을 따라 이과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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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대학을 가기가 더 쉽고, 향후 진로에도 도움이 많을 것이라 하셨다. 대한민국의 문과 이과 제도로의 구분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한 다발 이지만, 일단 이는 논외로 하고 내 이야기에만 집중해 보기로 하자. 기자의 꿈을 접은 이후에는, 항상 경영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한 기업을 경영하고 내가 있는 곳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고 싶었다. 하지 만, 생각해 보니 내가 삼성전자의 사장이라면 내가 만들어 파는 제품에 대 한 이해가 없이 어떻게 물건을 제작하고 효과적으로 팔 수 있을까? 싶었 다. 그래서 공학을 전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학부는 공학을 전공하고, MBA 를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내 나이 18세, 고2때의 다짐이다. 나는 하고 싶은 전공이 있었지만, 가고 싶은 학교가 딱 한 군데 있었 다. 학교가 가지는 야성적이고 정의로운 이미지가 좋았다. 하지만, 고3 시 절 내 성적은 조금 부족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능 시험에는 너무 긴장을 한 탓에 언어영역에서 역대 최악의 점수가 나왔다. 절망적이었다. 나는 꼭 그 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시 2학기 원서 모집에 는 경쟁률이 가장 낮은 전파통신공학과를 지원했고 합격했다. 무슨 전공 인지 전혀 몰랐지만 경쟁률이 낮아서 지원했다. (나중에는 이 전공이 전기 전자공학부와 통합되어 결국 졸업 시에는 공과대학 전기전자전파공학부 를 전공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공대의 벽은 높았다. 내 점수에 맞춰 지원해서 적성과 상관 없 는 전공으로 입학한 이후로 전공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였다. 원래의 계획 을 조금 당겨 MBA 로 예정해 두었던 경영학 공부를 학부의 이중전공으로 대체했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10대 후반 20대 초반 시절에 많이 읽던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주로 힐러리 클린턴, 콘돌리자 라이스 등 여성 혹은 소수이지만 사회적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자서전이 많았다. 먼지 쌓여 책 장 구석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책이었지만,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어린 시절 내가 미래를 꿈꾸며 설레고 두근두근 하던 감정이 기억났다. 20대 초 반의 나는 그랬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고, 어린 나이에 이해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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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불합리함들이 많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MID TWENTIES> 지금 되돌아 보면, 20대 중반까지의 내 삶은 내가 하고 싶은 분야와 정 반대로 선택해 왔던 것 같다. 책을 좋아하고 경영학을 전공하고 싶었지 만, 공학을 전공했고, 경영학 전공을 활용하여 취직을 준비했지만 엔지니 어로 첫 직장을 시작했다. 졸업할 시기가 다가와 취직 준비를 할 때였다. 환경 컨설턴트로 인턴 을 마쳤고, 본격적인 공채 시즌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입사가 확정되었다. 인턴 시절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을 한 후, 설득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재밌게 일했고 평가도 좋았다. 컨설턴트라는 분야는 좋았지만 회 사에 대한 확신은 조금 부족해서 몇 개 회사에 더 지원했다. 10개 미만의 기업에 지원하였고 모두 경영/관리/컨설팅/구매 등으로 지원하였다. 단 한 개 회사만 엔지니어로 지원했다. 그 기업의 문화와 사람이 좋았다. 사 람들의 문화가 좋았고, 임직원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난 점도 맘에 들었다. 임직원이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문화가 좋았다. 그 렇게 다른 경영 전공을 살려 지원한 모든 곳을 마다하고, 난 엔지니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나에게 흥미롭지 않지만 필요할 것 같은 분야는 전공이나 직업으로 꼭 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 넣었던 선택들이 뒤늦게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는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관심을 주고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NEWBIES> 글의 서두에 언급했듯이, 나는 엔지니어로의 삶을 오래 살 계획이 아 니었다. 그 다짐은 신입사원 한 달 만에 정해졌다. 당시 나는 부서의 5년만에 처음 들어온 여자 신입사원이었다. 워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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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험한 업종이라 여자를 잘 뽑지도 않았고 여자가 지원을 잘 하지도 않는 분야였다. 오래간만에 들어온 여자 신입사원이라 많은 관심을 받았 다. 당시 내 별명은 제2의 김잘난 부장이었다. 김잘난 부장은, 부서 내 유 일한 여자 부장으로 다른 부장들에 비해 진급이 빨랐고, 내가 퇴사할 즈음 에는 회사 내의 유일한 여자 임원이었다. 당시 김잘난 부장은 임원 승진을 위한 전형적인 코스를 밟기 위해 다른 부서로 이동해 있을 시절이어서 얘 기만 많이 들었지 어떤 사람인지 본 적은 없었다. 김잘난 부장은 쿠웨이트에서 추방당하고 200년 출입금지를 받은 일 화로 유명했다. 출장으로 쿠웨이트를 방문하던 중, 현장에서 일하는 부하 직원들을 위로하겠다고 팩소주를 캐리어에 꽉 채워 입국하다가 세관에 잡 힌 것이다. 쿠웨이트는 독실한 이슬람 국가로 알코올이 금지되어 있는 국 가다. 약 일주일간 쿠웨이트 감옥에 갇혀있다가 200년 출입금지라는 형을 받고 풀려난 김잘난 부장의 일화는 회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같은 일 화였다. 부서 전체 회식에서 처음으로 김잘난 부장을 만났다. 흔치 않은 여자 부장이고, 워낙 일 잘한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나를 그 부장의 후임으 로 많이들 언급했기에 어떤 분일지 궁금했다. 회식자리에서 부장님을 보 는 순간, 난 이곳에 오래 몸담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굳혔다. 부장 님은 남자였다. 남자보다 더한 상남자였다. 단발머리에 화장기 전혀 없는 수수한 얼굴에 행동은 매우 거칠었다. 말투도 보통의 남자들보다 거칠었 으며, 말술이었다. 얼핏 보기엔 체구가 왜소한 남자였다. 난 절대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난 커리어를 가진 엄마이자 아내인 사람이 되고 싶었 지, 남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김잘난 부장을 보는 순간, 내 모습을 철저히 변화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모습은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회사에는 닮고 싶은 롤모델이 없었다. 남자 동료들은 나를 시기했고, 상사들은 여성 성이 필요한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업무적으로는 차별했다. 여 자인 나에겐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은 쉽게 얻는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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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심히 싸우고 노력해서 쟁취해야 했다. 아파도 ‘역시 여자라…’라는 말을 들을까 노심초사하며 꾹꾹 참아가며 일했다. 한편으론 다른 동료들은 쉽게 얻을 수 없는 기회를 나는 여자라는 이 유로 쉽게 얻었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내내 임원, 부장들의 술자리에 참 석했다. 고객 고위층과 만날 때 종종 동석해서 회의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동료들은 쉽게 하지 못하는 업무 고충을 나는 상사들에게 보다 쉽게 얘기 할 수 있었다. 나는 한 명의 직원으로 성장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여직원이라는 사실이, 내가 어느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이 내 존재감을 증명하는 타이 틀이 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난 그냥 평범한 직원으로, 평등한 기회를 부여 받고 실력으로 증명하 고 싶었다.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하고, 예쁜 미소로 내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지 않았다. 난 엔지니어였고, 철저히 실력으로 인정받는 업종 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젊고 남들에겐 없는 여성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환영 받았다. 활짝 핀 꽃송이였다. 거꾸로 말하면, 10년 후 아이를 가지고 엄마 가 되어 젊음과 그들이 바라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시든 꽃이 되는 시기가 오면 내 존재가치가 사라짊을 의미했다. 조직이 나에게 기대하는 건 엔지 니어가 아니었고, 적당히 분위기 맞추며 웃는 여직원이었다. 이곳에서는 롤모델도 없었고, 미래도 없었다. 많이 울었고 아팠다. 몸도 아팠고 마음도 아팠다. 신입사원 1년간 응 급실을 제 집 드나들듯이 방문했다. 의사들은 항상 쉬어야 한다고 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내가 내린 결정이 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뒤돌아 다른 길을 택한다면 내가 선택한 결정을 포기하는 것 같았다. 내 가치를 증명해보고 싶었고, 내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 렇게 나는 다른 동료들과 동등하게 첫 번째 승진을 목표로 하였고 버텼다. 문자 그대로 버텼다. 하루 하루 이를 악물고 버텼고, 괴로운 시간들을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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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문화의 주축인 대기 업의 생활을 이해해야 대한민국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문적인 기 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없었고,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만 있었다. 대 한민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젊은 시절의 사회 깊숙이 들 어가 경험하며 느끼는 것들이 나에게 좋은 거름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 했다. 퇴사를 결심할 즈음에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싫어하던 분 야의 일도 최고는 아니지만 꽤 좋은 성과를 냈다. 무슨 일을 해도 중간 이 상은 할 자신이 생겼다. 대한민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이해 와 공감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생겨났다. 직장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만 5년의 대기업 생활을 정리하고, 내 인생의 대기업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대리 3년차를 맞이하는 겨울에 당당히 사표를 제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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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되는 순간 유학생 부부의 좌충우돌 성장기 레몬트리_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는 유학생, 남편, 딸 바보 아빠

2015년 7월 8일 저녁 9시 49분, 아내와 나 사이 첫째 딸 지수가 태어 났다. 우리가 짐을 싸고 병원에 입원한지 22시간만이었다. 길고도 긴 날이 었다. 12시간이면 아기가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나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래도 감사한 점은 아내가 그토록 걱정하던 수술을 하지 않고 자연분만 으로 지수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지수의 출생과정을 지켜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본격적 인 분만 돌입에 앞서 이미 많은 출혈을 겪은 아내를 바라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가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나"라는 사람이 그냥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삶의 모든 것이 다 이 힘든 고통의 과정을 겪어 얻어졌다고 생각하 니 나도 모르게 "삶"의 의미가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둘째, 출산과정 중 가장 안쓰러웠던 점은 아내가 아무것도 먹을 수 없 었다는 것이다. 입원 당일 저녁 6시에 스시로 배를 채운 것과 병원으로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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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 직전 몽쉘통통 하나를 먹은 게 앞으로의 30시간 동안 전부였다. 무통 주사를 맞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져 출산 중 토할 수가 있어 병원 측에선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하게 했다. 유일하게 허락한 음식은 처음엔 얼음 물 과 나중엔 작은 얼음들. 아내는 무통주사를 일찍 맞은 편이기에 큰 고통을 장시간 느끼진 못했다. 그래서 30시간 내내 내가 들었던 말은 "배가 너무 아파"라는 말 보다 "아몰랑 배고팡..."이라는 말이었다. 30시간의 대기 중 그녀가 이야기한다. 자기 앞에서 스낵을 꺼내서 3 개만 먹어달라고. 과자를 3조각 입 속에서 뿌드득 뿌드득 부셔서 먹으니 그녀도 입을 "얌얌" 모양을 내며 함께 먹는 시늉을 낸다. 이걸 그녀 앞에서 먹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최근에는 매일 새벽 6시면 칼 같이 기상해서 배 고프다며 콘 푸레이 크를 먹었던 그녀였다. 30시간 동안 그걸 지켜보는 나도 괴로웠다. 30시간 동안 관찰했던 아내의 해산기, 우리 딸 지수의 출생기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2015년 7월 8월 00:00 AM

지수를 낳을 병원에 도착했다. 밤 12시, 즉 아침 00시이다. 이때만 해 도 12시간 후 내일 낮이면 지수를 볼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병원에 들어서니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미국에선 한국과 달리 산부인과 개 인병원의 의사들이 임신기간 동안 진찰을 해 주고 출산은 대형병원에서 진행한다. 병원의 간호사들이 출산 직전까지 돌보다가 시간이 임박하면 그간 진찰을 해 주었던 담당 산부인과 의사를 부르는 것이다.

병원 측에선 우리 부부에서 대기실 방 하나를 내주었는데, 방이 상당 히 깨끗하면서도 넓직하고 좋았다. 아내의 침상 옆으론 내가 누울 공간이 충분한 소파가 하나 있었고, 방 안에 개인 화장실과 샤워실이 별도로 있었 다. 수화를 시킨다고 아내가 링겔을 맞았고, 새벽 1시 30분즈음 되어 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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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할 수 있었다. 우리의 밤 간호를 맡은 엘리사는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30분 간격으로 와서 상태를 확인한다고 했다.

2015년 7월 8월 10:30 AM

새벽에 몇 번을 깼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계속 피곤했다. 잠자리도 집 이 아닌 이상에야 편할 수가 없었다. 눈을 떠지면 다시 감고 잠을 청하기 를 반복할 뿐이었다. 아침 10시30분 즈음되니 우리의 산부인과 담당의인 선생님이 와 계셨다. 간단히 체크업을 하고 돌아가셨고, 간호사가 엘리사 에서 칼라로 바뀌었다. 칼라는 체구가 큰 미국 간호사였는데, 왠지 마음이 편하다며 아내가 좋아했다. 아이가 나오려면 자궁문이 10센티까지 열려야 한다. 그 때서야 산모가 힘을 주는 푸쉬를 해서 의사가 꺼낼 수 있다는 것 이다. 엊그제 산부인과에 갔을 때만 해도 조금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들었다. 유도분만으로 가기는 하지만 결국 제왕절개 수술로 끝날 가능성 이 크다는 것이다 . 감사하게도 간호사가 자궁문이 2센티 열렸다고 한다. 이날 오전부터 (10센티까지 문을 열어주는) 촉진제를 맞기 시작했다.

2015년 7월 8일 12:10 PM

짧은 시간에 아내가 간호사 칼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까 운 사이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쭉 자라왔다는 그녀 에게 왜 간호사의 직업을 택했는지, 미국 사람들은 집을 언제쯤 사는지, 집을 사는데 어떤 환경과 동네를 선호하는지, 미국에서 의사의 직종은 얼 마나 괜찮은지,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선 임신과 출산 관련 일체의 비용을 주정부에서 담당하는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등을 재잘재잘 잘도 물어본다. 덕분에 나도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공부 를 했다. 칼라가 아내에게 무통주사를 언제쯤 맞을 것이냐고 물어온다. 무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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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놓아주는 의사가 정해져 있는데, 먼저 신청한 순서대로 놓아주기 때 문에 앞의 사람들이 시간을 많이 끌면 2시간도 걸릴 수 있다고. 오후 12시 30분과 오후 2시 옵션을 주는데, 아내가 고민할 새도 없이 빨리 맞겠다고 답한다. 무통주사를 맞으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 하반신을 마취하기 때문 에 고통이 없어진다. 주변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분들은 무 통주사 없이 아이를 낳으려다가 너무 아파서 결국 고통은 고통대로 다 겪 고 마지막에 가서 무통주사를 맞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내는 영리하게 도(?) 빨리 맞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서서히 그녀의 등과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주로 산모 들에게는 배에 진통이 더 심하게 오지만, 어떤 산모들에게는 등과 허리 쪽 으로 진통이 오기도 한다고 한다. 무통주사를 놓아주는 의사가 와서 준비 를 하는 그 사이에 아내의 진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5분에서 10분 이었는데, 진통이 너무 아프다며 어쩔 줄 몰라 할 정도였다. 그녀의 등으 로 여러 가지 주사기와 호스를 꽂힌 채 마취제가 주입되는데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20분 가까이를 마취제를 주입했다. 나중에 아내 말로는 잠시 겪었던 배와 등의 진통이 너무도 아파서 오 히려 등 뒤에 주입하는 마취제는 별로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 주사를 맞자 마자 진통을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 2015년 7월 8일 15:00 PM

지수가 나올 문이 3-4센티로 열렸다. 10센티까지 가려면 아직 갈 길 이 멀다. 우리가 머물렀던 호실은 8층이었다. 큰 창문 너머로 LA시내의 한 단면이 보였다. 꼭 세상이 멈추어있고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었다. 왜냐하면 방 안에서 그저 대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의 와이파이가 잡히길래 나름 책상을 만들어 여름에 하 고 있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 상황에서 오래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보고 문이 더 열리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지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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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잠시 홀로 병원 지하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가서 집에서 싸온 점심거리-컵라면, 인스탄트 전복죽, 통조림 고추참치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2015년 7월 8일 19:00 PM

산부인과 담당 선생님께서 퇴근 후에 들리셨다. 문이 6-7센티 정도 열렸는데, 진행되는 경과가 진척은 있지만 너무 느리다고 하셨다. 그래 도 경과가 있으니까 앞으로 2~3시간 (저녁 9~10시)까지만 기다려보고 그 때까지도 준비가 안 되면 제왕절개 수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셨다. 많 은 환자들이 수술을 안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데, 해야 되는 상황이 와 서 선생님께서 하자고 하면, 억지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 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 드렸다. 떠나시면서 느리지만 진척이 있으니까 "positive"하다며, 될 것 같으니 지켜보자고 하셨다. 이 때부터는 정말 기도가 되었다. 앞으로 2-3시간에 결판이 난다니 말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아내에게도, 지수에게도 좋지 않을 터였다. 이 산부인과 선생님은 카리스마가 강하신 분인데, 알고 보면 인정도 많으 신 분이셨다. 그래서 나와 아내 모두 선생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수술 없이 문이 열리길 기도했다. 그 때 아내가 내게 실내에만 있는 게 너무 답답하지 않느냐며 30분만 밖에서 산책하다 돌아 오라고 한다. 나가서 보니 병원이 LA 다운타운 바로 근처에 있었다. 다운 타운의 어느 다리 위에서 12차선의 도로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바람을 맞 았다. 그것이 어떤 삶인지 잘 상상은 안 가지만, 아내와 나와 지수 우리의 앞 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2015년 7월 8일 20:45 PM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기도를 부탁 드렸다. 감사하게도 이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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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음하여 문이 10센티로 열렸다. 저녁 간호를 맡은 에밀리 간호사가 "completed"라는 단어를 썼다. 다른 간호사가 와서 이중으로 체크를 했 다. 준비가 됐다고 한다. 산부인과 선생님께 전화를 걸더니 오라고 사인을 보낸다. 아내와 함께 너무 감사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겪어본 적이 없어서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2015년 7월 8일 21:10 PM

세 명의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분주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우리의 담당 간호사, 한 명은 baby sitter, 또 한 명은 보조 간호사였다. 그 간 아내가 맞았던 무통 주사액 주입을 중단했다. 이제부터는 배와 하반신 에 힘을 주기 위해 서서히 고통을 되찾아야 한다 했다. 곧 산부인과 선생 님이 도착하셨다. 우리는 분만을 위해 우리가 묶었던 방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어보니, 이 방 이 상태 그대로 분만을 한다 고 한다. 낯선, 별도의 수술실로 이동하지 않는다고 하니 아내가 마음을 편안하게 먹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때부턴 푸쉬 연습이 시작되었다. 숨을 깊게 들여 마셨다가, 배에 주 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이 오면 10초간 숨을 쉬지 않고 있는 힘을 다 해 복부와 하반신에 힘을 주는 동작이었다. 10초 뒤엔 다시 바로 숨을 들이 마셔 다음 10초간 힘을 준다. 이렇게 3번 연속을 한 세트로 해야 했다. 몇 번 연습을 하지 않아서 바로 실전에 돌입했다. 이제 방 안에는 아내와 나, 산부인과 선생님, 간호사 에밀리, 그리고 baby sitter를 맡은 엘리스 이렇 게 5명이었다. 남편으로서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내가 푸쉬를 하면서 10초간 숨을 멈출 때,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나 역시 나도 모르게 10초간 숨을 멈추었다. 아내의 손을 잡아주는 것 외에는 해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2015년 7월 8일 21:3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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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선생님께서 아내의 푸쉬가 약하다고, 이렇게 해서는 수술 로 가야 한다고 겁을 주기 시작했다. 나의 위치에서 보이진 않았지만 선생 님은 지수가 나오는 걸 힘들어한다고 걱정하셨다. 보통의 분만보다 시간 이 너무 오래 지체되고 있다고 하셨다. 아내는 분명 최선을 다 하고 있었 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힘을 주며 푸쉬를 이어갔다. 막판에 는 선생님이 배큠 간이도구 (배큠이라고 해서 청소기 같은 것이라 생각했 는데, 실제로는 주먹만한 납작한 판에 가는 줄이 하나 달려 있는 아주 작 은 도구였다) 를 꺼내서 산도 압박에 힘을 가하셨다.

2015년 7월 8일 21:48 PM

지수의 머리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온 얼굴과 몸이 핏속에 젖어 있었 다. 얼굴이 나오니 몸통과 다리가 나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응애 응애" 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아내는 푸쉬하기 에 정신이 바빠 아기가 나오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여기 봐 요 여기 봐"할 때에야 갓 태어난 지수를 보고 활짝 웃었다. 하지만 출산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 있었다. 아내의 상반신이 지수를 낳은 1시간 뒤까지도 심하게 떨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몸과 팔이 떨리는 지 홀로 숟가락을 집어 과일을 먹겠다는 그녀의 손이 과일을 연이어 떨어 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몸은 한 시간이 넘도록 부 르르 떨렸다. 처음 지수를 보고 너무 놀랐던 점이 있다. 우선, 아기가 내가 생각했 던 것보다 훨씬 컸고, 머리가 너무도 길쭉해 보였다. 배큠을 써서 그런가, 안 그래도 길쭉해 보이는 머리 위가 조금은 찌그러져 보였다. 그 모습에 너무 놀라 당황이 되었다. 내 애가 맞나 싶었다. 하지만 지수의 이마와 손 가락과 발가락을 보니 나의 딸이 확실히 맞았다. 이마가 나처럼 넓은 점과 손가락과 발가락 마디 주름이 짜글짜글한 게, 나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 기의 건강체크를 맡은 의사들은 아기가 힘들어하면서 나왔기 때문에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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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통보다 빠르다며 당분간 인큐베이터에 데려가 몇 가지 검사를 해야 된다고 했다. 아내에게 속삭여 산부인과 선생님께 아기의 두상이 괜찮은 거냐고 물 어보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아기들이 출생 적에는 머리가 원 래보다 길다고 한다. 출생 시 가해지는 압박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머리 모양은 곧 제 자리를 잡아간다고. 인큐베이터에 있는 지수를 보고 왔는데, 출생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벌써 머리 모양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음 을 보았다. 해산 직후 아내가 말했다. "애는 내가 낳았으니까 이제부터는 오빠가 키워줘". 아내는 곧바로 먹을 것을 찾았다.

2015년 7월 8일 23:40 PM

마무리를 하고 분만했던 방에서 퇴실하여 아래 층의 회복실로 이동했 다. 다른 산모와 함께 지내지 않고 우리 둘만 지낼 수 있는 개인 공간이어 서 좋았다. 캘리포니아 주정부에서 임신에 관련하여 진찰 및 출산 비용을 전부 담당해준다. 지수가 잠시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것도, 아내가 회복실 에서 병원에서 제공하는 식사의 미역국을 먹는 것도 (미국 병원이지만 워 낙 한국 환자들이 많아 미역국도 제공해준다) 말이다.

2015년 7월 9일 06:30 AM

분명 나보다 더 아내가 힘들 텐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지수를 보 러 가자고 보챈다. 산모는 분만이 끝나고 날이 지나면서 고통이 더 심해진 다고 한다. 그래서 100일까지는 회복이 중요하다고. 아직도 출혈이 있어 침대에 흔적이 있는데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아내가 얼른 가 보자고 한다. 역시 엄마의 힘은 대단하다. 요한복음 16장 21절의 말씀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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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있었던 우리 딸 지수. 건강하게 자라 얼마 전 돌을 맞이하고 지금은 벌써 아장아장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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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아이 난 기쁨으로 인해 출산의 고통을 다 잊어버린다”는. 부끄럽 지만 나는 너무 잠이 온다며 30분 더 잤다가 아침 7시가 되어서야 지수를 보러 합류했다. 지수는 여러 가지 감염결과 확인 이후, 빠르면 2~3일 내에 인큐베이터에서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지수를 안아보았다. 작은 생명체인 지수가 내 품에 고개를 파고 들어오는데, 그 기분을 어떻게 형용해야 하는 지, 너무 이상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이 스쳤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해 오며 이기적으로 살아왔 다. 아내를 만나 부부생활에 맞추어가며 나도 많이 변화하긴 했지만, 여전 히 종종 아내에게서 "오빠는 너무 이기적이야"라는 소리를 듣는다. 지수 를 안으며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이제 나도 사람이 되어가겠구나 하는... 이 제는 Cheif Household Officer (아내는 Household Director, 지수는 Household Member)로서 지금껏 살아왔던 이기적인 "내"가 아닌 한 가 정의 책임자인 "아빠"로서의 삶을 배워나가게 될 것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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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C Dance Project (Dancer: Charlotte Landr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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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 삶을 담은 나의 무용담舞踊談 박유미_ 무용을 사랑하는 심리학자

즉흥, now or never

무용이라면 어떤 장르이건 그 각각의 다양한 색깔이 다 마음에 들 어서 대체로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춤은 즉흥(卽興, improvisation)이다. 정해진 안무 순서를 외우며 오랜 연습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에도 즐거움과 성취감이 있지만, 텅 빈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 운 움직임으로 채워가는 과정이 나에게는 더 짜릿하다. 내 몸에 잠재된 어 떤 움직임이 튀어나올지, 어떤 감정을 마주하게 될 지 나도 모르는 상태에 서 끝없이 나와 상대방의 움직임을 탐색해가는 순간에는 온 몸이 예민하게 살아있다. 한 명 한 명의 즉흥적인 움직임들이 만나 예상하지 못했던 아름 다운 장면을 만들어낼 때에는 더없이 뭉클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똑같은 움직임과 감정이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에 더 애틋하고 또 소중하 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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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움직임

무용동작치료(dance/movement therapy)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여 러 기법 중에서도 어센틱 무브먼트(authentic movement, 진정한 움직 임, 무의식적 움직임)가 내게는 가장 치유적인 경험이었다. 즉흥적인 움직 임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 있는 기법이다. 서로에게 지지적이고 안전한 집 단이 꾸려지는 것이 가장 우선이다. 몸과 마음을 깨우는 워밍업 작업들을 거친 후, 무버(mover, 움직이는 자)와 위트니스(witness, 목격하는 자)가 원으로 둘러앉는다. 무버(mover)는 눈을 감은 채 내 안의 움직임 충동을 따라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간다. 가만히 쉬어도 좋다. 때론 격렬하게 춤을 추기도 하고 웃기도 울기도 한다. 위트니스(witness)는 무버(mover)의 모 든 움직임을 온 몸으로 지켜보고 공감하며 무버(mover)에게 소중한 그 순 간들을 그야말로 ‘목격’해준다. 존재 자체로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버 팀목이 되어준다. 그저, 그것으로 족하다. 어떠한 해석도 평가도 하지 않는 다. 어센틱 무브먼트(authentic movement)로 몸이 가는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과정 자체에 해방감이 있다. ‘아, 속 시원~하다!’하는 카타르시스 가 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몸으로, 움직임으로 풀어내고 나 면 훨씬 홀가분해진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나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다. ‘내가 왜 자꾸 이런 동작을 반복할까? OO와의 관계에 어떤 관련 이 있을까?’ ‘요즘 제일 고민인 이 일에 대해 내 머리가 내린 결정은 A지만 내 몸과 무의식은 B라는건가?’ 한번 더 귀 기울여 들어주고 나를 돌아본다. 가끔은 몸이 감정을 실어서 격하게 말하기도 한다. ‘내가 지금 이런 상태라 고! 날 좀 알아봐달라고!’ 머리로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몸이 지쳐있을 때도 있고, 더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있을 때도 있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더 자유 롭고 더 과감할 때도 있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아, 지금 이게 나구나.’ 어센틱 무브먼트(authentic movement)의 또 다른 치유력은 위트니 스(witness)에 있다. 나라는 존재를 말없이 지켜보며 있는 그대로 온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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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 눈을 감은 채 움직이고 있지만 내가 다치지 않고 위험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지지 감. 그리고, 위트니스가 목격한 나의 움직임을 아무런 비판이나 판단 없이 이야기해줄 때 얻게 되는 새로운 통찰. 이 모두가 어우러져서 깊은 치유가 일어나게 되고, 어센틱 그룹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 지금 쯤 어센틱 필요한데..!’ 하는 갈증과 중독성이 생긴다.

그리고, 삶.

즉흥적이고 순간적이며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들이야말로 인생과 가 장 닮은 움직임이 아닐까?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점. 예상하고 계획하 더라도 그것만이 답이 아닐 수 있으며, 예측하지 못한 것에서 더 감동적인 장면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점. 단 한 번 뿐이라는 점. 즉흥 혹은 인생 속 에서 접촉하게 되는 타인들과 어떻게 만나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갈지 자신 들도 모른다는 점. 몰입하여 춤추거나 혹은 살아내는 과정에 즐거움과 행 복과 실망과 슬픔과 황홀함이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어떠한 움직임이든 어떠한 삶이든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아름답다는 점. 그래서, 그냥 묵묵히 살아내고 나만의 춤을 춘다. 어두운 순간들에 지 나치게 좌절하지 않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순간에 과하게 들뜨지 않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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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그런사람 2016년 8월호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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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및 발행 황정운

발행일 2016. 7. 31.

기고 문의 : 전자우편 aboutexpression@gmail.com 페이스북 /aboutexpression 블로그 marill00.blog.me

월간 그런사람은 : 월간 그런사람은 "i tell my stories with my ……” 를 슬로건으로 ‘나’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고민하고 표현하려는 그런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2016년 4월 창간한 월간 문화잡지입니다. 개인 기고자들의 글을 중심으로 매월 만들어집니다. 저희는 글 속에 투영되어 있는 사람의 흔적에 좀 더 다가가려 합니다. 나에 대한 성실하며 지속가능한 고민과 표현, 저희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뿐입니다.

* 본지는 한국도서잡지윤리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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