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빛 vol 24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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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더라도 예수님께서 그의 육체의 희생으로 친히 하나

에 주시는 메시지다.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신 것처럼(히

함께 주님의 권고만 있고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가 없다.

10:20), 즉 모든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행위를 친히 보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초라한

여주신 것처럼 다른 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 즉 가난

교회였다. 세상적으로 보면 아무런 소망과 앞날의 밝은

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

미래도 보이지 않는 연약한 교회였다. 2:10 후반부에 나

여 사람을 살리는 일을 포기하지 말고 더욱 선행에 힘

오는 ‘충성하라’는 말은 ‘신실하라’고 번역하는 것이 문맥

써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생각으로

상 더 온전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충성하라는 말은

자기의 이해득실만을 따지지 말고 예수님처럼 희생과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일’을 연상시켜 주고 있으나, 이 문

선행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던 초기 교회의 아름다운 모

맥에서는 어떤 ‘일’보다는 장차 임할 고난 앞에서 서머

습이다. 이러한 의미를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적용하면

나 교회 성도들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

불필요하고 의미도 없는 각종 모임을 대폭 줄이고 고통

여주고 있다. 즉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므

받는 성도들과 이웃들을 향해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로 이 구절을 교회에서 맡은 일(직분)에 충성하라는 의

일에 관심 갖고 마음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

미 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을 잃지 말라는 의미이다. 죽음의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순간에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킬 때 생명의 면류관을 얻 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생명의 면류관’은 면류관의 종 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의미한다. 생명의 면

이 구절은 교회 공동체에서 직임을 맡은 자에게 주는

류관은 ‘면류관은 생명과 같다’로 이해할 수 있다. 면류

각종 임직패, 임명장이나 교사수첩에 단골로 등장하는

관과 같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면류관은 은유

말씀이다. 과연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나 알고 사용하

법으로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상을 연상시킨다.

는 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충성을 독려하기 위하여 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신실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면류

말씀과 고전 4:2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가

관)이 바로 죽음과 대조되는 ‘영원한 생명’이다. 죽기까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충성’이란 단어도 본

지 복음에 신실할 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

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왜곡되어 사용되고 있다. 충성을

원한 생명으로 대체된다.

일과 관련지어 ‘열심’내지 ‘혼신을 다하는 것’으로 이해 하여 사용하는 듯하다. 과연 본문에 나오는 충성이 열 정을 다바쳐 일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문맥을 살펴보면 2-3장의 소아시아의 7 교회를 향한 메시지 중에서 계 2:8부터는 서머나 교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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