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벚꽃이 피는 4월, 어느덧 3학년이 되어 계속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학창 시절의 끝 이 다가오고 있었다서늘했던 날도 이제는 완연한 봄이 되어 가벼운 가디건 한 장만으로 도 춥지가 않다학교 화단에는 작은 벚꽃 나무들이 심겨 있었는데, 운이 좋게 걸린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면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잎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새로운 학 기가 시작된 설렘, 성큼 앞으로 다가온 졸업으로 인한 두려움이 뒤섞여 어수선한 교실의 소음을 한 귀로 흘리며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3학년이 되 었으니 무얼 해야겠다는 자각도 없이 새삼스러운 감상도 딱히 들지 않았다아, 이런 인 생으로 괜찮은 걸까. 별다른 목적의식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멍하니 바라보던 바 깥으로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띈다. 삐죽삐죽하게 묶은 갈색 머리, 건들건들한 걸음 걸이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아이 중 하나였지만, 어쩐지 그 애가 이쪽을 바라보 던 순간, 아, 눈이 마주쳤다라고이유도 알 수 없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토 하루키는 성실하게 관계를 쌓는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노력은 하고 있어,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자신도 변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딱 히 먼저 말을 거는 일 없이 온종일 창밖이나 보고 있더라도 말을 걸어오는 아이는 꾸준 하게 있었다그 차분한 분위기가 오히려 사람을 홀린다던가단정하고 곱상한 외모 덕에 오히려 신비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매년, 매 학기먼저 말을 걸어왔다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벽에 아무도 말을 걸지 않게 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너는 사람을 좀 폭넓게 사귀어야 할 필요성이 있어 나도 노력은 하고 있다니까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그래. 음…그래도 루이가 있으니까 괜찮잖아 상대가 한숨을 쉬어도 그저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하루키 본인도 그것이 그렇게 좋지
밴드부를 만들게 된 건 작년 말, 한 학년 아래인 시나노 에이지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밴드부, 만들지 않을래요? 처음에야 물론 들은 체도 하지 않았으나 조름에 못 이겨 결국 두손 두발을 들고 말았던 게 의외로 흥미가 붙어버렸다. 시나노가 좋아하는 시 끄러운 음악은 잘 모르겠다, 역시그렇지만 가끔 기분 전환 삼아 듣기에는 나쁘지 않았 다 비록 부원 수가 시나노와 하루키, 둘 뿐이라서 정식 동아리로 인정받지도 못했지만
아무래도 서양 록 같은 건 유행이 아니니까요아이돌이나 힙합 같은 걸 요즘 애들은 좋 아해요. 제 기타를 매만지며 시나노가 푸념처럼 늘어놓은 말이었다. 너도 요즘 애들이잖
밴드부를 하고 있어, 라고 말하면 의외네, 라는 반응이 돌아왔었다 대체로 말할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단지 옆에 있다가 질문이 날아올 때도 있었고아무튼, 도무지 밴드하 고는 어울리지 않는 차분하고 묘하게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게 아토 하루키라는 아이 였다. 밴드라고 하면 좀 더 열정적인 분위기잖아.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러게, 하고 웃을 뿐 이었다. 저도 제가 어울리지 않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방과후가 되면 구교사의 음악실에서 동아리 활동을 했다신축 건물을 지으며 구교사는 이제 쓰지 않게 되었지만, 단지 낡았다는 것뿐이고 큰 문제는 없으므로 밴드부 활동을 허 락받기도 어렵지는 않았다. 사실 하루키는 새로 지은 건물보다도 구교사를 더 좋아했다. 낡은 나무 창틀이 뒤틀려 잘 열리지 않고, 겨울에는 바람이 새어 난방을 틀어도 춥긴 했 으나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아 타박타박 소리가 울리는 복도라던가, 뒤편에 야트막한 언 덕이 있어 푸릇한 나무들이 보이는 게 좋았다도시에서 그런 녹색을 보기는 생각보다 쉽 지 않기도 하고.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당장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타인이라는 미지의 영역은 항상 어렵게만 다가왔다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혹 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저 애가 싫어하지는 않을까? 사람은 쉽게 호의를 가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했다그러니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고.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토 하 루키는 관계에 있어서 다소 겁쟁이 같은 면모를 보이고는 했으니.
“그런 거야?”
언젠가의 점심시간에 나누었던 대화였다
학교 곳곳의 게시판들에는 시나노가 직접 만든 홍보지가 붙어있었다. 알록달록한 펜으 로 열심히 그린 다소 조잡한 홍보지는 작년부터 꾸준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사실 학교 게시판 같은 걸 주의 깊게 보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기에 그다지 효과를 보지는 못 했었다밴드부 자체에 흥미를 느껴 견학 오는 아이들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하지만 대 개는 두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돌아가거나, 좀 더 다른 . 이를테면 재즈 같 은 걸 기대하고 오는 바람에 음악적 방향성이 다르다며 돌아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두 사람 다 실력이 능숙하기라도 하면 몰라시나노야 이전부터 쭉 쳐왔던 기타를 능숙하게 연주했지만, 음악을 시작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하루키는 아직도 뚱땅거리는 수준에 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손가락은 자꾸만 미끄러지고, 엉뚱한 줄을 울려 탁한 불협화음을 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전부터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는데, 고작 손가 락을 움직여 연주하는 일에도 해당하는 걸까. 이런 걸 정말 밴드부라고 불러도 되나? 이
“응, 선배는 은근 무르니까요.”
“왜 루이한테는 나한테 한 것처럼 조르지 않아?”
*
“그런가 .”
“그야 선배는 조르면 넘어와 줄 것 같은데, 오토와 선배는 아니잖아요.”
아. 그건 그렇지만요. 루이도 함께할래? 오랜 친구에게도 제안했었지만, 학생회로도 충분 히 바쁘다며 단칼에 잘렸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조금쯤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흘끔, 돌아가는 눈을 보았다 곧 정신을 차린 시나노는 거의 천장에 닿을 듯이 펄쩍 뛰며 소년을 맞이했다. “맞아요! 밴드부! 헐, 어떻게 왔어요? 진짜 밴드부 찾아온 거 맞아요?”
똑똑열려있던 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에 시선이 돌아갔다집중이 풀리자 바로 틱, 하고 기타 줄을 튕기던 손이 빗나갔다. 문에 서 있는 건 갈색 꽁지머리를 한 소년 하나. 날카로운 눈매와 꾹 다문 입매가 선뜻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러나 잘 살펴 보면 삐딱한 자세에 비교해 교복은 흐트러진 곳 없이 단정해서 고작해야 목덜미 부근의 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것뿐이었다 직전까지도 그렇게나 바라던 신입 부원의 기회일지도 모르는데예기치 못한 방문객에 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잠시간 얼어붙어 버렸다
“여기가 밴드부인가요.”
“대박! 가입하러 온 거예요? 그런 거예요? 제발 그렇다고 해주세요!” 사람을 보고 신난 강아지처럼 왈왈왈 떠들어대는 시나노의 머리를 하루키가 뒤에서 꾹, 눌렀다.
“...잘못 왔나요?”
“예? 예 밴드부.”
걸 . 동아리라고 할 수 있나? 자꾸만 드는 의심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새 학기니까, 신입생이 들어올지도 몰라요 시나노가 희망차게 외쳤던 말이었다 옆에서 복잡한 악보와 씨름하며 골머리를 앓던 하루키는 그 말을 듣고서는 글쎄, 하고 조금쯤 회 의적인 감상을 가졌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특별할 것 없던 그 대화에서 하루키가 할 말을 잃었던 건, 그에게 얽혀있는 과거 때문 이었다. 무심결에 내려간 시선 끝에 있던 명찰에 선명하게 쓰여있던 이소이 레이지, 라는 그 이름을 그저 태연하게 받아넘길 수는 없었다. 저를 빤하게 바라보는 그 얼굴에서 제가 아는 그 어떤 익숙한 모습도 찾아낼 수 없었지만잠시 멈칫한 뒤에 아무렇지도 않은 태 연한 얼굴로 미소 지었기에 상대가 그 찰나를 눈치채지는 못했을 터였다아마도아무튼, 아토 하루키는 제 마음을 숨기는 건 자신이 있었다특유의 그린듯한 미소로, 꾸며낸 다 정한 목소리로.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아, 그래이소이 이소이?”
“이소이 레이지임다.”
웃기지도 않는 만담 같은 대화였다 마주 보고서니 소년은 제 키보다도 한참 낮아서, 아, 작네하고실례일지도 모르는 감상을 품었다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져간 건 시나노 였지만, 오랜만에 본 새로운 부원 (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보고 너무 흥분해서 달려들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3학년이기도 했고 머리를 좀 식힐 수 있게 시나노를 잘 앉혀두고 그때까지 묵묵하게 서 있던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좀 진정해, 시나노민폐잖아.”
“어른스럽게 말해야지.”
“예.”
“그러니까 .”
“힝입니다.”
“힝.”
“좋아요. 밴드부, 마음에 들어요.”
환호성을 내지르는 시나노를 보며 웃었지만, 마음속은 복잡했다환영한다는 말은 완전 히 빈말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우러난 말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그러한 태도가 가식적이라는 비난도 두어 번 들었던 것 같지만 일단 지금에서야 누구도 딴지 걸지는 않을 터였다몇 학년이야? 할 수 있는 악기가 있어? 같은 대화는 물 흐르 듯 자연스럽게 흘렀으며 그 애는 밴드부에 입부하겠노라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거절해 주기를 바랐다부원이라고는 네가 보는 둘이 다야게다가 둘 다 기타라서, 네가 베이스 를 한다고 하더라도 밴드의 구색도 못 갖출 거야. 같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건 무의식중의 껄끄러움이었다. 그렇군요, 라며.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듣고 있던 이소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루키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리고 묻는 것이, “아토 선배도 밴드 부인 거죠?” 였다 고개를 끄덕인 긍정이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맴돌았다
할 일이 없을 때 해외 밴드의 공연을 찾아보는 건 밴드부를 하게 된 이후 생겨난 습관 이었다처음에는 직접 찾아보기는커녕 시나노가 보내주는 링크나 들어가 보고는 했는데, 점점 아는 곡이 늘어나고 아는 밴드가 늘어나니 저도 모르게 아, 그 밴드 좋았지 하고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 검색하기 시작했었다. 명색은 보컬 겸 세컨드 기타니 나름대로 참고삼아 실력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도 겸사겸사 생겨났고.
그 아이를 만나고 난 날의 저녁하루키는 불도 켜지 않은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멍하 니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었다. 습관처럼 들어간 사이트에서 추천으로 뜬 영상 하나를 클 릭한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강렬한 비트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발끝을 까닥였다. 고요한 집 안에서 소란스러운 것은 오로지 그뿐이다 시선은 영상에 고정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이소이 레이지임다, 라고그렇게 말하던 모습이 자꾸 맴돌고 있었다 아토 하루키, 아토 하루키. 오늘부터 너는 아토 하루키가 되는 거야. 상냥하게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시끄러운 연
주 소리마저 잊히고, 차오르는 생각 속에 함몰되어 그 어릴 적의 기억에 얽매이고 있었 다이미 전부 잊었다고 생각한 과거였다이제는 다시 떠올려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그 러나 어떤가? 아직도 이렇게, 하루키는 다시금 그때의 어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내도록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이하여, 전날의 우울은 다음날의 아침까지 도 영향을 미쳤다 말간 봄날의 햇살은 상쾌한 아침을 비추고 있는데, 거울에 비추어진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어 홀로 겨울을 맞이한 것만 같았다 아, 루이가 본다면 걱정할 텐데어차피 먹는다고 한들 속에서 받지 않아 게워낼 것이 뻔하여 아침은 걸렀다사실 먹는 날보다 먹지 않는 날이 더 많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이른 기상에 시간은 남아 아침 의 고요 속에서 가만 생각에 잠겼다. 두어 시간의 얕은 잠이라도 일단 도움이 되기는 한 것처럼, 어제저녁의 복잡함은 그래도 많이 가신 터였다 레이지, 레이지 이소이 레이지 네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게 과연 우연일까구태여 물을 용기는 나지 않으면서도 신 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오늘 오후에 다시 만나게 되면 평범하게 인사할 수 있으 려나.
“아, 시간이.” 허둥지둥 가방을 챙기고, 신발 끈을 맨 후에 대문을 나서면 그 앞에 서 있는 오토와 루 이가 보였다딱히 그러기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어있던 일이었 다 이전에는 방과후에도 같이 하교했는데, 너는 너대로 학생회로 바빠지고 나는 나대로 밴드부에 들게 되어 함께 집에 가는 날보다 따로 가는 날이 더 많아졌다. 뭐, 네가 학생 회로 바쁘니 나도 달리 할 일을 만들까 싶어 밴드부에 들어가게 된 것도 있지만. * 깨끗한 새 교과서를 펼쳐놓고 수업을 들으면서도 영 마음은 다른 곳을 가 있었다. 매일
스트라토캐스터냐, 레스폴이냐 하면 의견이 많이 갈리긴 하지만요. 사실 그냥 취향에 따 라 고르면 된다고 생각해요. 아, 전 개인적으로 레스폴이 더 좋아요. 그 묵직함이 멋있잖 아요? 연한 베이지색의 기타를 조율하며 시나노는 그렇게 말했지만, 하루키는 스트라토 니 레스폴이니 전혀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모양이야 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종례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교실에서 미적거리다 음악실로 향했다. 그 애가 어떤 아이 인지도 모르면서 미리부터 불편해하고, 그런 건 좋지 않지그래, 어른스럽지 못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어차피 앞으로 보고 지내야 하는데 마음을 좋게 먹어보자종이로 커다 랗게 밴드부, 하고 써 붙여둔 문을 열면 도란도란 떠들고 있는 이소이와 시나노가 보였 다.
같이 동아리 활동을 했으니 오늘도 그 애가 올 텐데. 이름 탓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새로 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피곤해지는 일이었다 내가 동아리 활동 같은 걸 하지 않았던 애초의 이유가 뭐였는지 다시금 떠오르며 교과서 한 귀퉁이에 삐죽빼죽한 낙서를 그렸다 열린 창문으로 봄날의 바람이 불어와 살랑거리는 꽃잎 한 장이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바 람결에는 아주 옅은 풀 내음이 함께 묻어와서, 저도 모르게 사르르 풀리는 마음에 뭐, 괜 찮겠지. 싶어진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벚나무 아래에 서 있던 아이가 그 애였던가. 이쪽 을 바라보았을 뿐일 텐데,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해버렸던 그때 구교사 음악실에 놓인 앰프라던가, 보면대 같은 갖가지 물품들은 대부분 시나노가 가져 온 것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키가 연습하는 검은색의 기타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고 작 부활동 때문에 악기를 사는 것도 부담되실 것 같아서요그렇게 말하며 매끈한 바디를 매만지던 손길에는 그야말로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그야 첫 악기니까 시나노는 처음 기타를 쥐었던 그때의 기쁨을 기억하고 있었다누르는 손가락이 아픈 줄도 모르고 매일 매일 연주했고, 좋아하는 노래마다 카피하며 홀로 즐거워했었다. 그렇지만 역시 함께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혼자 좋아하는 것보다는 함께 연주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해서 밴드부를 만들고 싶었다게다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도 생겼으니까
아주 다행히도 시나노가 종알종알 발랄하게 떠들어준 덕분에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다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니 기타를 조율하고 딩, 딩…이제는 좀 익숙 해진 음계를 짚던 중, 예상치 못하게 대화의 주제가 이쪽으로 넘어왔다
“예. 별로 그런 이미지로는 안 보이니까요.” “으음, 아무래도 그렇지…그냥 시나노한테 어울려주던 것뿐이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계속하고 있어.” 이미 여러 번 나눠본 문답이라 익숙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시나노가 아토 하루키를 밴 드부에 영입했던 건, 딱히 큰 이유가 없었다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전부 권유했었
“응? 나?”
“딱히 멋지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일단 감삼다.”
“미안, 종례가 늦어져서….”
“그나저나 아토 선배는 어쩌다가 밴드부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며 저도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이소이는 이쪽을 한번 흘끗 보더니, 다시 제가 들고 있던 베이스로 시선을 돌렸다. 무덤덤한 표정으로는 어떤 생각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 선배~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오, 진짜? 그거 멋진데.”
“있잖아요, 이소이군은 이탈리아에서 왔대요! 굉장하지 않아요? 멋지지 않아요? 이탈 리아어도 할 줄 안대요.”
아무래도 좋을 대화를 두런두런 나누다 보면 창밖에는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각자 짐을 챙겨 들고나와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햇볕이 사라지니 역시 좀 쌀쌀하다 생각하며 가디건을 여몄다. 운동부는 아직도 연습을 하나 보네. 그러게요, 같은 짤막한 대화. 다음 에 시간이 나면 주말에도 만나자는 둥 떠드는 말들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재게 걸음을 놀리던 때였다툭, 하고제 어깨 위에 얹어지는 겉옷을 보며 하루키는 머리 위로 물음표 를 띄웠다
아닌 게 아니라 기타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언밸런스하게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사람 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면모가 있었다하루키를 열심히 보컬로 밀어붙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사람은 역시 잘생기고 볼 일인가 봐요언제였더라따분한 음계 연습 중, 마 음대로 되지 않는 기타를 들고 씨름하던 하루키를 멍하니 구경하다 툭, 튀어나왔던 말이 었다. 잘생겼다느니 하는 말들을 들으면 하루키는 괜히 멋쩍어지고는 했다. 그야 본인이 못생겼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잘난 척을 하는 유형은 더더 욱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역시 밴드부에 비주얼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으며 개중에 지금까지 꾸준히 어울려줬던 게 하루키뿐이었을 뿐이었다.
“...추워 보이시길래.”
“어……고마워?” “앗, 선배 추워요? 제 것도 드릴까요?” “아냐, 괜찮아마음은 고마워.” 얼떨결에 옷자락을 쥐긴 했지만, 솔직히 좀 어리둥절했다 그야 쌀쌀하다 싶긴 했지만 그렇게 티를 내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묵묵하게 앞을 보며 걸어가는 옆모습을 슬쩍 보았 지만,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저를 둘러싼 가정환경도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못했다다정다감했던 아버지 는 어느 날부터인가 이유도 없이 차가워진 태도로 그를 대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미움받 았더라면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하루아침에 돌변한 태 도에 영문을 몰라 눈치만 보았었다새로 태어난 동생 때문일까그 애가 더 귀엽고 예뻐 이제 귀엽지 않은 나는 싫어진 걸까어쩌면,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게 아닐까아마 그런가 봐어린 마음에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알 수 없으면서 잘 못했어요, 라며 옷자락을 잡았으나 말없이 내려보는 눈빛에 슬그머니 손을 풀었었다. 홀로
2. 어린 시절, 하루키는 꽤 병약한 편에 속했다. 지금도 그렇게 건강하다고 하긴 어려웠지 만, 그때는 정말로 조금만 무리를 해도 픽 쓰러지기가 일쑤였다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 작하는 계절이면 그 계절 내내 침대 위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했다몸이 약하니 어린이집 이나 유치원에 가기도 어려웠고, 초등학교에 입학 이후로도 밥 먹듯 빠지며 반 아이들과 는 서먹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꾀병 부리는 거 아니야? 라는 속닥임을 들을 때마다 어린 마음에 속상한 적도 가끔 있었다. 강아지 한 마리라도 길렀으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그마저도 체질에 맞지 않아 결국 친구라고는 한쪽에 놓인 식물들밖에 없었다
똑딱, 똑딱시계 소리만이 흐르는 방안에 누워있으면 가끔 창밖으로 아이들이 웃고 떠 드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럴 때면 유리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지나는 아이들을 가만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다 들키면 찬바람이 몸에 좋지 않다는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문을 닫았지만, 제 마음에 뚫린 허한 구멍으로 드나드는 찬바람은 막을 수가 없었 다
남은 복도에서 그저 바닥만 내려보았었다. 아마 무슨 사정이 있었으려니 생각은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기 시작했던 것도 그즈음이었으니그러나 그것을, 단지 어렸을 뿐인 하루키가 이해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부엌에서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는 어린 동생을 살살 달래며 괜찮아괜찮아, 라며 웃어 보였었다. 그때의 하루키도 열 살 언저리의 어린아이였는데. 괜찮다는 말은 아 마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나를 안아주며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홀로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된 건 열두 살이 되던 무렵이었다몸이 약하니 좀 더 시골에 서 요양하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는 그전에도 종종 들었었다. 공기 좋고 차분한 곳에서 지내면 좀 나아지지 않겠냐는 이야기. 하지만 그가 가게 될 곳은 생뚱맞게도 도쿄라서, 아, 이번에야말로 내게 질려 다른 곳에 멀리 보내버리려나 보다하고 혼자 이불 속에 웅 크려 생각했었다 슬프다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부모님이 싸우는 게 아마 내 탓인 것 같으니 내가 없어 이 가족이 행복해진다면 그걸로도 괜찮았다 부모님이랑, 동생이랑. 그렇게 셋이서. 그만 없다면 완벽했을 그림이었다. 이제야 막 가을로 접어들던 계절의 밤이었다. 이불 속에 파묻혀있는데도 왠지 조금 추워서, 자꾸만 자꾸만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쿄에 전학을 가긴 했으나, 본래 지내던 곳에서도 내내 겉돌던 아이가 갑자기 다른 사 람들과 잘 지내게 되는 것도 무리였다. 더군다나 그때의 하루키는 음침한 성격으로 쉬이 호감을 살 인간형도 아니라서, 결국 내도록 따돌림과 괴롭힘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디서부 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악의적 소문, 책상 위의 낙서사물함을 열면 가득한 쓰레기와 아 무 이유 없는 시비들그 모든 것들이 그를 지치게 했다중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도 괴롭 힘은 끊이질 않아서 하루하루 메말라가고만 있었다 그대로 말라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2학년 무렵 만난 오토와 루이의 덕분이었다. 저를 맡아 돌봐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하루키는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
다 그의 앞으로 남겨주신 유산이 꽤 되는 편이라 당장의 생활은 문제가 없었으나 어찌 흘러가게 될지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었다. 혹여나 큰돈이 드는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
“...예에이곳에서 일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다시 침묵. 하필이면 다른 손님도 없어서 매장에 단 둘뿐이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발 랄한 사랑 노래만이 눈치 없이 재잘거리고, 하루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예의 친근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아.”
“뭐 마실래? 이것도 인연인데, 내가 사줄게.”
“...어.”
으며 후에 대학을 진학한다면 그를 위한 등록금이 필요했다. 여기저기 면접을 보고, 겨우 일하게 된 곳은 집 근처의 작은 개인 카페손님도 그렇게 많지 않고 점장님도 푸근하고 좋으신 분이라 잘 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그곳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건 당연히 시나노나 루이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딱히 숨길만 한 일도 아니었거니와 어차피 그 애 들이라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낼 것 같은 기묘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가끔 같 은 학교 학생도 몇 번 들릴 때가 있어서, 익숙한 면면이 보여도 그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었다아마 오늘도 비슷하게 지루하고 그럭저럭 피곤한 날이 되겠구나, 싶었다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이소이 레이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서먹한 침묵이 감돌았다. 미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어색한 눈 맞춤. 예상 치 못했던 습격과도 같은 만남에 하루키는 잠시 아득함을 느꼈다가, 곧 정신을 차리며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런 곳에서 다 보네, 이소이군.”
“아뇨, 그럴 필요는 .”
“정 부담되면 저번에 빌려줬던 겉옷의 답례라고 생각해사실 친해지고 싶어서 뇌물 주 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좋고말고 오늘따라 시나노가 그립고 간절했던 적이 드물었다. 그의 거 침없는 성격이 피곤할 때도 있었으나 지금만큼은 그가 있어 줬으면 했다언젠가는 이소
“진짜? 에스프레소를? 굉장하네….”
씁쓸한 커피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이런 걸 정말 좋아한다고?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 에서 왔다고 하던가이탈리아는 커피의 본고장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다아메리 카노 같은 건 용납할 수 없다든가, 그런 이야기. 뭐, 하루키는 굳이 따지자면 커피보다는 홍차를 더 좋아하는 편이라 아무래도 좋았지만. 갓 내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바 테이블 에 앉은 이소이 앞에 놓아주며 쿠키 두어 개를 같이 내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 게 아니라 딱히 단 거 안 좋아하고원래 자주 마시던 거라서요.”
“… …. 예, 그럼 에스프레소로….” 눈을 굴리던 이소이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하루키는 에, 하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에스프레소? 그거 완전 작고 쓸 텐데. 비싼 거 마셔도 괜찮아.”
“이 정도로 뭘시나노도 불러도 좋겠네저번에 다 같이 바깥에서 한번 보자고도 했었 고난 일해야 해서 같이 어울려주진 못하겠지만.”
“나랑?”
“어서오세요.”
3시가 되어갈 무렵이면 다음 타임의 직원이 온다.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면 여전히 하 늘은 밝아서, 집에 돌아가면 할 일을 고민하게 된다. 빨래를 걷어 개고, 청소를 하고 .
이와도 친해져서 둘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편안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게 오늘 은 아니었다
“으음, 그보단 사실, 아토 선배랑 단둘이서 얘기해보고 싶었거든요.”
커피잔 위로 내리깔았던 시선이 올라와 하루키를 보았다. 어쩐지 그 시선에 조금 긴장 이 되어 손을 꼭, 쥐었다단순히 친해지고 싶어서, 같은 의미는 아닌 것 같아서너무 과 도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이소이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짤랑,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하루키가 손님을 보며 인사하자, 이소이는 다시 입을 꾹, 다물며 커피잔만 감싸 쥐었다. 네, 스트로베리 요거트 프라페펄 추가하시고요포장이세요? 주문을 받고 음료를 만든 다이제는 눈 감고도 외울 수 있을만큼 익숙해진 과정을 지나 다시 등을 돌리면 그 애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커피잔은 비워진 채였고, 같이 내어주었던 쿠키도 보이지 않았 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러 달지 않은 걸 내어줬는데. 그 애 입맛에 맞으려 나. 안녕히 가세요, 웃는 얼굴로 인사하면서도 직전까지도 그 자리에 앉아있던 그 애를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에 마음이라는 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하루키로서는 이게 최선 이었다. 그러한 껄끄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가끔 은 너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소이 레이지는 좋은 아이였고, 그런 사람에게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게 온당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무뚝뚝한 어조 속 자상한 배려를 눈치채는 일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니하지만 어 김없이 마음은 또 뒤집히고 뒤틀려서, 또다시 홀로된 시간에 끝도 없이 가라앉을 뿐이었 다. 모르겠다. 귓속에 물이 찬 것처럼 먹먹한 이명이 들어차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세
기타 연습도 좀 더 해야 하는데. 짧은 손톱을 매만지며 생각을 이어나간다. 돈이 얼마나 모였더라시나노의 기타를 계속 빌려 쓰기도 미안한데어차피 안 쓰는 거니까 괜찮아요, 라고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비싼 걸 살 여유 같은 건 없으니 가능하면 3~4만엔 선에서 해결하고 싶다숨만 쉬고 살아도 사람은 돈이 들었다 무언가를 하려고 들지 않아도, 단지 살아있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노력은 필요했다. 느릿한 눈짓으로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서는, 아까 왔었던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 했을지 하루 키는 잠시 궁금해했다아마 그렇게 중요한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겠지카페의 문을 열 고 나올 적에, 어쩌면 기다리고 있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유도 없이 들었다그럴 리가 없는 일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텅 빈 현관에 대고 다녀왔습니다, 하고 의미도 없는 인사말을 흘려본다 두 사람분의 신발이 한 사람의 것밖에 남지 않게 된 건 그렇게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이었다그러나 대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새삼 외로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야트막한 발소리가 적막한 집안으로 퍼진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하루키는 문득,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문득 무척이나 피로하다고 느꼈다. 살아있음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때때로 찾아오 는 무력감은 온몸을 나른하고 무겁게 만들어 한 발자국도 떼기 어렵게 만들고는 했다살 아가는 의미, 살아있음의 의미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이렇게나 눅눅하게 늘어 지는 건 결국에는 이소이 레이지, 그 아이 때문이었다그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 너를 단 지 우연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걸까. 사실 네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사실을 하루키도 알고는 있었다.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게 그 아이의 잘못도 아니며 단지 그 자리에 있었 을 뿐임을
* “그러면, 이제 드럼만 있으면 되겠네요!” 옥상에서 올려보면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철망에 기대어 탁 트인 정경을 바라보면 막혀있던 가슴도 조금쯤 개운해졌다딱히 막혀있지 않은 만큼 생
고요한 집안에 홀로 누워있을 때면 예기치 못한 고독이 자신을 덮칠 때가 있었다하늘 이 밝아 조명도 켜지 않던 낮이 무심결에 지나고, 어느새 어두워진 거실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할 때라던가특히나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에는 묘하게 속이 메스껍고 두통이 일어 서 괜히 서러워지고는 했었다. 세상에 온건하게 나 혼자 남았다는 느낌. 누군가에게 전화 를 걸고 싶어 휴대폰을 열었는데, 걸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저 멍하니 액정만 바라볼 때의 그 기분외로웠지만, 그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그저 홀로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던 날들은 시시때때로 내게 찾아들고는 했다아마 루이에게 전화한 다면 받아주겠지어쩌면 시나노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줄지도 몰랐다그러나 그러고 싶 지 않다면.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당연하게 있어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던 때를 하루키는 문득 그리워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외로움은 끝도 없이 속삭였다. 두 사람이 살던 곳 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도 넓어서, 하루키는 조금 울었다열아홉은 아직,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는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각보다도 아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자주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하루키는 루이가 챙겨준 도시락을 꾸역 입에 밀어 넣으며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바라보았다. 옆에서는 다른 아이
상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제대로 걸을 수 없어 비틀거렸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네가 어쩔 수 없이 미웠다결코 좋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밀린 청소와 빨래, 매일매일의 공부 그러나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들지 않아 하루키는 그저, 소파 위로 깊숙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고기를 드세요제 빵도 드릴까요?”
“하루키, 남기지 말고 먹어라.”
“더 먹고 싶지 않은데…. 충분히 배부르니까 괜찮아.”
“딱히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배가 부른 건데….” 글렀다전부 한 편이다내 편은 전혀 없다하루키가 못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남은 도시락을 깨작거리는 사이, 시나노는 딸기 우유를 입에 문 채로 다시 루이에게 시선을 돌 렸다
“오토와 선배는 여전히 밴드부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는 거죠? 드럼만 있으면 딱인 데….”
들이 조잘조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밴드부는 물론, 루이까지. 본래도 잘 어울리던 멤 버였으니 새삼 특별할 건 없었지만, 이소이가 입부한 이후로는 한 명이 더 늘었다이소 이는 도시락을 가져오는 대신 매점에서 산 빵을 야무지게 입에 넣고 있었는데, 손에 들린 것 외에도 서너 개는 앞에 쌓아두고 있었다 시나노도 이미 매점에 들렀다가 온 참인지 도시락을 먹고도 과자나 사탕 같은 주전부리를 끊임없이 입에 넣고 있었다. 자신이라면 하나만 먹어도 벅찰텐데. 하루키는 혀를 내두르며 생각했다. 지금 먹고 있는 도시락도 슬 슬 물려가던 참이라 슬쩍, 뚜껑을 덮으려 하던 때였다
“앗, 맞아요! 선배는 좀 많이 먹어둘 필요가 있어요너무 마른 거 아녜요?”
“무리다.”
“널 위해서 좋아하는 반찬으로만 준비한 거니까 먹어 성의를 무시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야.”
“챙겨줄 필요 없다고 해도 말이야.”
“아아.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지.”
힝, 하고 시나노는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었다하루키는 그 옆에서 빵 두 개째를 해치 우곤 세 개째를 뜯고 있는 이소이의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대체 저게 다 어디로 들 어가고 있는 걸까, 골똘히 고민했다.
“학생회로도 충분히 바빠게다가 하루키를 챙기는 일도 손이 많이 가니까 말이야.”
“오토와 선배랑 하루키 선배는 꽤 친해 보이네요.”
“중학교 때라… 처음 봤을 땐 교복 입은 초등학생인 줄 알았다 흠, 그때의 하루키 는 . 지금보다 많이 까칠했지.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보였어. 그래도 지금은 많이 유해
진 편이라고 할 수 있겠군.” “저기, 당사자 앞에서 그렇게 말하지 말아 줄래?” 도시락은 아무도 보지 않는 사이 뚜껑 덮어 제쳐두곤, 하루키가 끼어들었다. 한 손에는 결국 이소이가 반강제로 들려준 빵을 든 채로 어쨌거나 사춘기였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딱 잘라서 거절하실 것까진 .
“오, 그러면 중학교 때 아토 선배는 어땠어요?”
”
하여간 자기가 아빠나 할아버지쯤 되는 줄 안다고, 하루키는 투덜거렸다 루이는 그저 잔잔하게 웃을 뿐이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얌전하게 야키소바 빵을 먹던 이소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
“뭐, 그런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요~! 그보다, 다들 아는 드러머 같은 거 없 어요? 숨겨놓은 사람 같은 거 있으면 꺼내 봐요, 빨리빨리.” 손에 든 딸기 우유를 붕붕 휘두르며 재촉하는 말에 하루키는 그런 게 있을 리가…라 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대로도 적당히 괜찮지 않나, 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타만 둘 이었는데 이제는 베이스가 들어와 기타와 베이스의 합주가 가능해졌다. 물론 록! 이라고 하려면 분명 강렬한 드럼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없는 걸 뭐 어떡하겠나 싶기도 하고의 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밴드부(와 외부인 한 명)의 반응에 시나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벌렁 누워버렸다
“드럼 없이 어떻게 밴드라고 할 수 있어요! 꼭 필요하다구요, 드럼은.”
“나갈 수는 있지.”
그때의 나에게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노라고, 아무도 첨언하지 않았는데 되레 찔린 하 루키가 줄줄 늘어놓았다
밴드부를 만든 게 작년 말이었고, 올해 신학기가 시작되고도 한 달이 지난 무렵이었다 이제까지 안 들어왔다는 건 앞으로도 가망이 없다는 뜻이 아니려나 지긋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못 이겨 손에 들린 빵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하루키는 생각했다
“바닥 더러워일어나.”
“드럼이 없으면 축제 공연에도 못 나가잖아요….”
“다들 너무해~. 나만 진심이지, 나만.”
“없는 걸 어떻게 해?”
“히잉.”
* 드럼을 배워볼까. 동아리 활동까지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시나노는 무언가 득도 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기타가 둘이나 되니 한 명은 드럼을 해도 괜찮지 않나 싶 어서생각해볼수록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드럼도 솔직히 박력이 있어서 멋있고… “그러면 네가 아니라 내가 드럼을 해야지.”
“그럼 제가 드럼을 할까요.”
하루키는 못 미덥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시나노의 이마에 꽁, 하고 딱밤을 놓았다아프지도 않으면서 아야야 엄살을 피우며 시나노는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선배는 체력도 약하잖아요. 게다가 밴드의 비주얼인데, 드럼을 해버리면 의미없구 .”
“에, 그치만 아토 선배가 드럼을 하기엔 좀….”
“아니, 베이스도 밴드의 필수 요소란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마안…오토와 선배, 밴드부….”
“내가 뭐 어때서?”
“안 한다.”
*
아토 선배가 오토와 선배를 어떻게든 설득해주시면 안 되나요하고 애처롭게 바라보는 눈길을 쳐내며 하루키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그 애가 드럼을 칠 줄 아는가는 차치하 더라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으니까.
푸르스름한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아침학교도 가지 않는 공휴일이지만 몸에 남은 습 관으로 깨어버린 시간이었다좀 더 잘까, 싶어도 내키지 않아 멍하니 창가에 기대어 바 깥을 보고 있노라면 달력의 붉은 칠에도 불구하고 바쁘게 걸어가는 현대인들을 볼 수 있 었다. 내년이면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아니지, 대학생이니까 여전히 공휴일에는 이렇듯 바깥이나 내다볼 수 있게 될까. 이제는 4월도 다 가고 5월이 되어 올해의 반이 성큼 지 나가고 있었는데, 나는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었다 루이는 탐정 사무소를 하는 가업을 이을 거라고 하던데 함께 하자는 제의는 기뻤지만 역시 그렇게까지 배려를 받는 건 좀 그렇지, 싶은 면이 있어서식물을 좋아하니 꽃가게를 해볼까매일같이 파릇한 풀잎들에 둘러싸여서 그들을 돌봐주는 삶이란 행복할 것 같은데. 반쯤은 졸음에 겨운 머리로 멍하 니 생산성 없는 생각을 이어가던 차, 핸드폰의 알림이 울렸다.
“아카네?”
뭐, 어차피 정말로 드럼을 배울 생각도 없었지만요. 하고 푸념 어린 한숨을 내쉬며 시 나노는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올해 축제까지 남은 기간은 5개월그 안에 어떻게든 드럼 을 구하지 않으면 기타와 베이스만 있는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야 했다 “내년에는 선배가 졸업해버리니까요. 그래서 가능하면 올해 안에 해결하고 싶어요. 게다 가 아카네도 이번 축제에 보러 온다고 했는데 .”
“...어 . 있어요. 그런 게.”
[좋은 의견이네요.]
어떻게 할까휴일이 되면 하는 대청소라던가, 밀려있던 집안일들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사실 꼭 하지 않아도 좋았지만, 쉬는 날인데 오늘만큼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기도 했고. 게다가 곧 있으면 중간고사가 아닌가. 어차피 학교에 가면 다 볼 얼굴들인데, 굳이 짬을 내서 만나야 하나? 게다가 아무래도 껄끄러운 아이를 휴일에도 보고 싶지는 않아 서그러나 바로 거절할 마음이 들지도 않아서 톡, 톡손으로 창틀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 겼다고작 몇 분의 고민이었을 텐데, 재촉하는 시나노의 메시지가 화면에 올라온다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리 고민하게 되는 건 오히려 그 아 이 때문이었다. 너무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내가 피한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사 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결국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은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애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까어쩌면 이 기회에 불편한 감정을 없애려고 노력해 보자한참의 고민 끝에 보낸 답장은 간결했으나, 그 아래에 깔린 상념들은 길고 복잡하 기만 했다.
[그것보다 돈독해지자는 뜻이죠!]
[다들 오늘 뭐 하세요?? 바쁘신가요??]
발신자는 시나노 에이지. 밴드부의 단체 라인 방이었다. 그렇네, 더 이상 1:1이 아니구 나이소이가 들어와 3명이 되었으니까벌써 2주가 훨씬 넘었음에도 새삼스러운 감상을 품으며 답장을 보냈다한가하다는 말 이후로 이어진 말들을 요약하자면, 오늘 바쁘지 않 다면 다 같이 모이자는 말이다밴드부의 친목 도모를 위해서라나 뭐라나 [친목 도모는 평소에도 하고 있잖아.]
“그러게요.”
“날이 생각보다 덥네.”
5월, 여름과 봄의 사이오늘 도쿄의 기온은 23도청명한 하늘 아래 사람들은 바삐 오 간다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지만, 약속 장소에 있는 건 어쩐지 두 명뿐늦는구나, 시 나노 하루키는 멍하니 발밑의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다시 침묵번잡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들로도 이 사이의 정적을 채우기란 역부족이 라, 괜스레 핸드폰만 붙들었다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는 잘도 이어지던 말이 왜 저 아이 와 함께 있을 때면 나오지 않을까? 친근한 말 한마디는 이렇게나 어려울까. 또다시 속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감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본인에게 느끼는 한심함,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스스로 끌려 나온 선택에 대한 후회잘도 웃고 떠드는 사람 들이 신기했다제대로 나아가질 못한 채 멈추어 선 건 여기 서 있는 나 뿐인가 싶었다 이젠 나를 괴롭히지도 못할 과거에 사로잡혀서는 죄도 없는 어린 후배를 미워하기나 하는 나를 비웃는 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아, 레이지. 너는 왜 그 이름을 가지고 있어? 네 가 레이지만 아니었으면 나는 너를 이렇게 거북하게 느낄 필요가 없었을텐데한없이 가 라앉는 정신을 깨운 건 선배, 하고 부르는 이소이의 목소리였다 “괜찮으신가요.” 안색이 좋지 않아서요하고 덧붙이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곧게 이쪽을 바라보는 눈길 은 염려를 담고 있었다. 복잡한 속내를 억지로 삼키며 괜찮아, 라고 답하며 웃었지만, 이
소이는 그렇게 수긍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몇 번 더 하루키를 살핀 그는 더 말을 붙이지
는 않은 채 휴대폰을 들어 하루키에게 내보였다. 시나노가 보낸 라인 메시지가 떠있었다.
[죄송해요! 길을 잃었어요!]
이전부터 종종 있던 일이라 새삼 놀랍진 않은 일이었다이래서 같이 만나서 오자고 했 던 건데, 자신 있는 투로 괜찮다고 하길래 수긍한 게 잘못이었다시나노가 보내온 사진 의 장소를 확인해보니 이곳에서 가자면 30분은 족히 걸릴 장소였다 더 길을 잃지 않게 그곳에서 기다리라며, 데리러 간다는 답장을 보내고서는 걸음을 옮겼다. 함께 걷는 동안 할 이야기가 딱히 생각나지 않아 결국에는 공통적인 대화 소재인 시나노 이야기만 자꾸자 꾸 늘어놓게 되었다처음 그 애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 기타를 배우게 된 경위그 애 덕 분에 노래도 잘하지 못하는데 보컬을 맡게 되어 곤란하다는 말들생각나는 대로 아무렇 게나 늘어놓는 시답잖은 대화지만 그런 말이 아니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불편한 마음은 지나치게 많은 말들로 이어졌다. 예, 그렇네요. 짤막한 대답만 늘어놓으면 서도 시선은 이쪽을 바라보며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온다차도와 인접한 길에 들어서 면 레이지는 자연스럽게 하루키의 바깥쪽에서 걸었다 그런 자연스러운 배려를 깨달으며 또다시 울렁거린다나는 이렇게나 좋은 아이를사람이 많은 복잡한 길목, 인파에 휩쓸려 갈 뻔한 하루키의 손목을 황급하게 잡아채는 따끈한 손의 온도가 느껴졌다. 그 따뜻한 체 온이 순간적으로 너무나 불에 덴 것처럼 뜨겁게 느껴져서, 하루키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뿌리쳐버렸다당혹스러운 침묵, 물끄러미 내팽개쳐진 손을 바라보는 시선등줄기를 타고 죄책감이 흘러내렸다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미안해변 명처럼 중얼거렸지만, 사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하루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 었다. 한층 어색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휴대전화의 내비게이션을 따라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업히십쇼.”
얼핏 잘못 들었나? 싶던 목소리는 다시 한번 확실하게 들려왔다이소이도 고개를 두 리번거리는 것이 일단 환청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간 곳에 있는 건 왠 사람이다. 아 니, 뭐. 사람 목소리를 따라왔으니 사람이 없는 게 더 무섭겠지만. 아무튼, 그 애는 다가 온 우리를 보더니 반가운 얼굴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보아하니 다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 하고 있던 것 같았다
“오, 다행이군. 혹 바쁘지 않다면 도움을 주면 고맙겠어.” 특이한 말투를 가진 그 아이는 자기를 아이바 이부키라고 했다늘어놓은 사정을 들어 보니 높은 곳에 새끼 고양이가 올라가 내려오지 못하는 것 같아 도와주려 했는데, 밟고 올라갔던 담벼락이 그만 무너지며 발목을 다쳐버렸다고 했다 휴대전화를 챙겨오지 않아 어딘가 연락을 하기에도 곤란했고정작 구하려 했던 고양이는 알아서 잘 내려와 어디론 가 가버렸는데 말이지살펴보니 돌에 깔리기도 했던 듯 심하게 까지고 부어올라 있어서, 보는 쪽이 더 아프다며 하루키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좀 도와주시게!
“일단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 근방에 병원이 있던가. 검색해보니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곳 하나를 찾 아낼 수 있었다
“죄송해요! 그치만 저도 혹시 늦을까봐 30분 정도 여유있게 나왔는데, 길이 너무 어려 웠어요전철 타는 방향도 헷갈리는 바람에 전혀 모르는 곳에서 내려버려서 무서웠단 말 이예요이대로 미아가 되어서 영영 집에 못 돌아가면 어떡하지, 하고 울 뻔했다니까요?”
그를 업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바가 이소이보다 한참 키가 커 한껏 구겨진 모양새 가 되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루키는 조심스럽게 제가 업는 게 낫지 않냐 제안했으나 이소이는 특유의 담담한 투로, “콩나물에겐 무리예요.”라며 거절해버려서 하루키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저 기, 콩나물이라니 내 얘기야? 그럼 누구 얘기겠어요 왜 콩나물? 그냥 그런 느낌이라 아이바는 도움받는 처지에 그저 고마울 뿐이라며 웃었다.
* “아무튼, 그런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이소이는 좀 늦을 것 같아.” 이소이는 아이바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하루키는 먼저 시나노를 찾으러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딘가 카페라도 들어가 있으면 될 텐데. 시나노는 벤치도 아니고 커다란 가로수 아래 울상이 되어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러다 하루키를 발견하고선 아토 선배- 하며 뛰어 오길래, 익숙하게 옆으로 비켜서 피했다따지고 보면 모이자고 했던 시나노가 오지 않았 던 게 원흉이 아니었던가 숨 막히던 어색함을 견디기 힘들었던 하루키는 할 말 없어? 라며, 못마땅하게 팔짱을 꼈다
*
불쌍하게 올려보는 눈에 하루키는 한숨을 내쉬며 그 이마에 딱밤이나 한 대 놓고 말았 다어찌 됐든, 이미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이소이를 기다리기 위해 들어 간 카페에서, 시나노가 시킨 5단 파르페를 보며 하루키는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다고 생 각했다
“아뇨, 그건 아니었지만 .”
“그 사람 말인데요. 드럼에 흥미가 있대요.” 아, 하고다음날의 밴드부 활동 중에 이소이는 말을 꺼냈다드럼을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시나노만의) 길고 긴 토론 중 나온 말이었다그 사람, 이라고만 하니 당연히 아무 도 알아듣지 못했으며 시나노는 눈을 빛내며 이소이에게 와락 달려들다 하루키에게 덜미 가 잡혔다
“그 애, 우리 학교였어?”
“아이바… 혹시 어제 그?”
“누구요? 누구요??”
예, 하며 이소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루키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그, 이름이 뭐더라 . 아이바라고 했던가.”
“...그럼 의미 없는 거 아냐?”
“괜히 기대했잖아요 .” 다시금 축 늘어지며 시나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밴드라니, 재미있을 것 같다고는 하던데요앰프는 연결하지 않은 채로 착실하게 음계를 연습하며 이소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베이스 기타를 배운 적은 있지만 사실 연주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기초적인 음계도 조금 헷갈린다며 매일같이 기초 연습에 충실하고 있었다
3.
5월이 된다는 건, 곧 중간고사가 다가온다는 뜻이었다벌써 코앞으로 닥친 시험에 쉬 는 시간에도 교실은 조용했다물론 시험에 큰 뜻을 두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런 아이들은 공부하는 아이들의 눈초리에 떠밀려 복도로 나가거나 제자리에 엎어져 잠이나 자고는 했다. 하루키는 일단은, 성적은 챙기는 쪽이었다. 앞으로 뭘 할지 모르겠다면 공부 를 우선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학생의 본분인 학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건 좋지만 그 때문에 성적에 영향이 가는 건 좋지 못한 일이었다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연필을 굴렸다사각사각, 하는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타도 들고 나오지 않은 하루키가 그렇게 말하자, 시나노는 에엥, 하며 내키지 않는다 는 듯한 반응을 내보였다. 이소이는 언제나 그랬듯 무덤덤하게 그런가요, 하고 고개를 끄 덕여 보였을 뿐이고.
내년이면 너도 3학년인데 성적은 잘 챙겨야지. 진로는 정했어? 밴드부도 즐겁지만 역 시 학생의 본분을 지키며 줄줄줄 이어지는 잔소리를 피하다 못해 가만있던 이소이의 뒤로 쏙, 숨으며 시나노는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그럼 잘하고 있네 이소이는 어때? 진도 따라가는 게 버겁지는 않아?”
“그럼 다 같이 공부할까? 모르는 게 있으면 가르쳐줄 수도 있을테고.”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굳이 그런 제안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함께 있으면 불편한 건 사실이었으나 결국 같은 동아리 활동을 이어나갈 사이였다. 고작 세 명뿐인 부원인데,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면 문제가 있었다. 그때 이소이의 손을 뿌리친 이후, 그도 하루키 가 자신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품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그럼에도 그 는 여전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하루키도 별다른 내색 없이 그 전처럼 그를 대했다그 속 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신경은 종일 곤두서있었지만제안에 시나노는 흔 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고, 이소이는 말없이 하루키를 가만 보다가 고개를 끄덕여보 였다.
“나름대로…할 만하긴 한데이해가 안 가는 것도 있긴 함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주에는 활동을 쉬는 게 어떨까 싶어.”
“에엥이 아니야, 에엥이.”
“나름대로 성적은 잘 유지하고 있다구요! 치이.”
“아, 선배 저도 이것 좀 알려주세요~! 전혀 모르겠어요
그래그래,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보였다혹 시선을 눈치챘을까 다 시금 몰래 눈짓해봐도 변화 없는 표정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하루키는 본
평소에는 기타 소리가 울리던 동아리방을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와 간간이 책 넘기는 소 리가 채웠다집중하지 못할 것 같던 시나노는 의외로 문제를 푸는 일에만 열중하여 입을 열지 않았고, 이소이도 묵묵하게 제 앞에 놓인 참고서를 읽어내렸다오히려 가장 집중하 지 못하는 건 공부를 제안한 하루키, 본인이었다하얀 종이 위에 써 내려가는 글씨가 꼭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고, 외우려 했던 단어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제멋대 로 춤을 추었다. 그저 장소가 낯설어 그런가 보다. 한 번씩 공부가 되지 않는 날이 있는 데 오늘이 그날인 건지도 몰랐다평소에는 익숙하기만 하던 긴머리도 오늘따라 왜 이렇 게 거슬리는지,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서서…제 앞에서 공부하는 이소이의 작은 손 짓 하나하나마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저도 모르게 그저 펜을 움직이는 손길에 정신이 팔려있던 때였다.
“이 문제, 이해가 좀 안 되는데요.” .”
“...왜 그래?”
“하루키 선배.”
“아.” 이소이가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쳤다하루키는 어쩐지 하면 안 될 일을 들킨 것만 같 아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얼빠진 소리를 내어버렸다 비록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 만, 왠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인이 저 애를 너무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손길 하나, 말 한마디에도 줄에 당겨진 사람처럼 휩쓸려 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저 애는 아무렇지 않은데, 혼자 이렇게나 전전긍긍해서는 “어떤 게 이해가 안 가?”
친절한 목소리, 다정한 태도가식적인 웃음나는 이렇게나 불편한데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소이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한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어린아이처럼 구는 건 나뿐인 것 같아 서차라리 네가 보이는 대로 불량하고 거친 아이였으면 나았을지도 몰랐다아주아주 못 된 아이라서, 내가 너를 불편해하는 게 잘못된 일이 아니었으면 했다그러나 넌 왜 이렇 게 좋은 아이라서 나는 널 마음 놓고 좋아할 수도 없는데,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질 모르겠다. 5월의 찬란한 햇빛이 음악실 안으로 바스러진다. 하늘은 한없이 푸르렀 으며 초록으로 물든 나뭇잎들은 싱그럽기만 하다무채색으로 시들어가는 건 나뿐이다그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단지 나의 탓으로 나직하게 설명하는 목소리는 남의 것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시나노는 설명을 들으면 서도 골머리를 앓는 눈치더니, 별안간 걸려 온 전화벨 소리에 후다닥 휴대전화를 들고 잠 시 통화 좀 하고 오겠다며 음악실을 나선다. 문을 닫으면 복도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차단 되어 결국 이 공간에는 둘만이 남았다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한 채 로 손안에서는 볼펜을 굴렸다연필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참고서를 살피는 것 같던 이소이는 문득 이쪽을 보지도 않고서 하는 말이, “굳이 친절하게 대해 주시지 않아도 돼요.” 라서. 완전하게 읽혀버린 속내에 확 밀려드 는 건 수치심이다 갈무리하지 못한 어린 감정들은 그렇게나 티가 났던 것이었다 모른 척하기 힘들 정도로 나름대로 배려한답시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에 하루키는 이대로 뛰쳐나가 혀라도 깨물어버리고 싶었다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홧홧했다하얗 게 질릴 정도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겨우 쥐어 짜낸 말이라고는 그런 게 아니야, 라는 우습지도 않은 거짓말이었다.
“그런가요그럼 다행이네요.”
저 애가 유독 내게만 신경 쓴다는 사실을 하루키는 눈치채고 있었다 제 신경이 온통 저 아이에게 쏠린 것처럼 이소이의 시선도 끈질기게 하루키를 좇고 있었다몇 번이고 마 주치던 시선을 모르지 않았고, 아주 사소한 곳에서도 이소이는 하루키를 우선했다. 하루키 가 견디기 어려웠던 건 아마 그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첫 만남부터, 그가 본인을 불 편해한다는 걸 눈치채고 난 이후까지도 변하지 않은 그런 태도 때문에내뱉어진 질문에 이소이는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듯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느릿하게 답변이 흘러나왔다
흘긋 이쪽을 보는 시선,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어투. 다시금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하루 키는 참지 못하고 결국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넌 왜 나한테 잘해줘?”
“잘 보이고 싶으니까?” “...왜?” “...그냥요.” 저, 사실 밴드부도 선배 때문에 들어온 거예요밴드 같은 거 관심도 없었고여상한 어 투로 흘러나오는 말들은 하루키를 전혀 이해시켜주지 않아서, 엉켜버린 머릿속은 오히려 더 어지럽기만 했다. 그 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나? 1학년과 3학년이었으니 오며 가
“아닐걸요.” 모순이었다 만난 적도 없는 나를 어떻게 알고 밴드부까지? 의문은 가득했으나, 그걸 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통화를 마친 시나노가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까. 시나노는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특유의 발랄한 톤으로 조잘거리며 제자 리에 앉았고, 하루키는 가득한 질문들을 갈무리하여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3.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그날의 저녁은 저물고 다음 날의 아침은 떠올랐다 문 바깥에서 당연한 듯 서서 기다리고 있는 루이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안도가 되는 것 같 기도 하고, 마구 화를 내며 그 아이의 험담을 하고 싶기도 했다. 꼭 보호자라도 된 것마 냥 행세를 해. 하루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정작 루이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루이가 있으므로 안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소홀해지고 있는지 도 몰랐다저 애만 있으면 되니까, 나는새롭게 부딪혀가며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건 굉 장히 피곤한 일이었고, 토모코씨도 돌아가신 지금 하루키의 유일한 정신적 지지대가 되어 주는 건 루이뿐일지도 몰랐다. 분주하게
함께 등교하는 시간은 꽤 이른 편이라 곁을 지나는 학생들은 드문드문했다
며 마주칠 일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으로는 그랬다. 하루키는 혼 란스러운 얼굴로 차근차근 생각을 진행 시키려 애썼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 있어?”
하루키가 그 아이를 껄끄러워 한다는 것쯤 오토와 루이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리저리 말을 돌리고 회피하려다 결국 제 감정을 모두 토로해버린 게 한참 전의 일이었으 니그렇게 불편하다면 밴드부를 그만둬그렇게도 넌지시 말을 했었다그렇다면 마주칠 일도 없을 테고, 더 이상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도 없을 테니하지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 았으니 하루키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고, 그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그 애가 미 우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얼굴을 보는 게 괴로우면서도 그만두지는 않았으면 좋겠 다. 꼭 밴드를 하고 싶다면 시나노의 핑계를 대자니,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다저 자신도 파악하지 못한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말로 풀어놓을 수 없으니, 그 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이후로는 처음 꺼내는 이야기였다. 그 애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렇 게 행동하는 걸까. 사실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는데도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의미를 파악 하려 애쓰고 있는 걸까좀 우습지제대로 된 마침표도 없이 주저리 늘어놓는 말들을 묵 묵하게 듣던 루이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난 네가 우습게 행동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 도 없어.” 여느 때와 다름없는 진중한 표정이었다아무튼, 이라며 루이는 나직한 어조로 차근차근 하루키의 말을 되짚어보았다. 주어진 단서는 고작 하루키의 말뿐이었다. 루이가 이소이 레이지와 마주치는 건 점심시간, 다 같이 모여 식사할 때뿐이었으며 그때도 그렇 게 활발하게 대화를 주고받지는 않는 편이었다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 애는 하루키를 바라보고 있었다얕은 기침이라도 하면 물을 챙겨주고, 햇볕이 따가울 때는 하 루키가 그늘진 자리에 앉도록 했다그런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일들까지 알고 있는 건 습관적인 타인을 관찰하는 습성 덕분이기도 했지만, 루이도 하루키를 챙기기 위해 상시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다정함은 천성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듯 들어 본다면,
“...첫눈에 반했다거나?”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담백한 어조로 내뱉는 말에 하루키는 순간 균형을 잃을 뻔했다.
오픈 준비를 하는 가게들,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들. 하품하는 하루키의 모습을 보며 루이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나 봐, 라며 말을 건네왔다 “이소이 레이지라고 했지.”
남은 진지한데, 그런 말 하지마. 삐죽거리며 핀잔을 건네자 루이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가능성은 있지 않나?” “전혀.”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텐데.”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인 가, 하고 하루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루이를 바라보았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은 장난기를 띠고 있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그런가? 하고 설득될 것만 같았다잠깐 그 추측을 머릿 속에서 굴려보던 하루키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살래살래 내저었다. 다른 건 없어? “다른 가설이라면, 사실 그 애가 정말 네 동생일 수도 있지.” 이건 하루키도 떠올려본 생각이었다제 기억 속의 조그마한 동생의 모습과 그 애의 모 습은 영 딴판이었지만, 자라면서 너무나도 변해버렸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하지만 그 렇다면 어째서 타인인 척하는 걸까. 제가 본인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여겨서 그런 건 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으니 그저 갑갑할 따름이었다. 자박이는 발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걷던 하루키는 이내 기나긴 한숨처럼 말을 흘렸다 “정말, 그냥 그만둘까봐밴드부 같은 거, 원래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다면 힘들지도 않을테다. 시나노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어차피 본인은 반드시 필요한 포지션도 아니고어쩌면 본인보다 나은 새 멤버가 들어올 수도 있었다장황하게 늘어지는 말은 맥아리없이 힘없이 흩어졌다루이는 딴지를 걸거나 맞장구도 없이 묵묵하 게 들으며 나란히 옆을 걸었다대화는 가끔 산으로 흘러 실없는 농담이 되기도 하고, 곧 다가올 루이의 생일에 대한 말도 나왔다. 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지. 담담하게 하는 말 에 아저씨 복대같은 건 어떠냐며 장난스럽게 물으며 웃기도 했다. 어느새 저만치 학교가 눈에 들어오며 잔잔해졌던 감정의 흐름이 복잡해질 때였다루이는 문득, 하루키, 하고 부 르며 고개를 돌렸다
가 하고 싶은대로 해최고의 문무양도 탐정이 될 사람이 지지하는데 못할 게 뭐가 있겠 나.” 밴드부를 관두면 학생회에 들어오는 것도 고려해보는 게 어떠냐며, 씩, 웃으며 하는 말에 하루키는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라 하던 말을 제대로 맺지도 못한 채 발끝만을
“난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할 사람이고,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으면 해.”
“뭐야, 갑자기.”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나도 그렇고, 시나노도 언제고 너를 지지하겠지그러니 넌 네
한결 풀어진 기분으로 교실에 들어선 하루키는 한번, 기지개를 쭈욱 폈다꾸깃꾸깃 아 무렇게나 구긴 종이 뭉치 같던 정신까지 쫙 펴진 기분이었다완전하게 개운해지지는 않 았으나 그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아직도 이소이 레이지의 목적은 모르겠 다그 애가 왜 그 이름을 가졌는지도 모르겠고, 왜 나에게 접근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 다그러나 그런 게 그렇게나 중요한가? 애초에, 나는 그 애가 왜 그렇게 불편하고 껄끄 러웠는지 되새겨보자면 결국 그 애를 보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 때문이었다잘 묻어두었 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다시금 떠올라 나를 삼켜버린 탓이다. 이제는 그때의 무력했던 어 린아이가 아닌데도. 물론 그 몇 마디의 대화로 그 감정들을 당장 완전히 떨쳐내는 건 무 리가 있었다여전히 외로움은 오랜 친구처럼 어둠을 틈타 나를 찾아올 테고, 그 애를 보 면 반사적으로 피하고 싶을 터였다그러나 날 떠나지 않을 친우를 믿으니 외로움은 영원 하지 않음을 알며 조금쯤은 맞설 용기를 낼 수 있었다하루키는 노력하기로 했다당장 좋아할 수는 없더라도, 그 아이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있게.
* 볕이 따가워질 때쯤의 계절이라 이제는 옥상에서 점심을 먹지 않았다. 그늘진 벤치는 항상 인기가 많아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행동이 빠른 이소이나 시나노 중 하나가 먼저 잽싸게 선점을 해놓으면 다른 하나는 붐비는 매점으로 달려가 빵이나 샌드위치 따위 를 쓸어오고는 했다일전에는 매점에 빨리 가기 위해 창문을 넘던 이소이가 선생님께 걸 려 혼이 났던 적도 있었다시나노도 겪어본 적 있는 일이라 창을 넘는 요령이나 타이밍 따위를 전수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빨리 가지 않으면 인기 없는 맛없는 것만 남는다던가. 이를테면 오이오이 샌드위치라던가(정말 마요네즈와 오이만 들어갔다), 불닭 주먹밥 같은 거(이소이는 나쁘지 않다고 했지만). 그거라도 남으면 다행이지, 가끔은 정말 아무것도 안 남을 때가 있어요라며 시나노가 투덜거렸었다 하루키와 루이가 오자마자 원군으로 뛰쳐나갔던 시나노는 이윽고 이소이와 함께 돌아왔 는데, 품에는 이번에 쟁취한 전리품들을 한가득 안고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테이블 위로
바라보다 조그맣게 고마워, 라는 한마디를 내뱉는 게 고작이었다. 정말이지, 루이는 하루 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아니 뭐, 축제 공연 때만~ 이라면 괜찮지 않나? 하고.” 안되나요, 라며 시나노는 슬 쩍 루이의 눈치를 보았다흐음, 하며 잠시 생각하던 루이는 공연에는 외부 초청 공연도 하니까 괜찮을지도,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본래는 안되는 게 맞아하지만 눈감아줄 순 있지공연 때만 잠깐이라면.”
이소이는 삐딱하게 웃으며 제 몫의 빵 봉지를 뜯었다반대편에서는 시나노가 오늘 이 전리품들을 얻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고충을 늘어놓고 있었으며, 루이는 적당히 맞장구 를 쳐주는 중이었다하루키는 조금쯤 못마땅해진 기분으로 도시락을 깨작이며 이소이와 는 애초부터 상성이 별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 이렇게 노력하는 것도 모르고 저번에 했던 말도 역시 그냥 적당히 한 말 아니야? 괜히 꿍얼거리며 밥이나 팍팍 입에 넣었다.
가득 쌓이는 빵이며 과자 따위를 하루키는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당연하게 반대편에 앉으려는 이소이를 보고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선, “레이지,” 하고 부르며 손짓했 다부러 루이와는 마주 앉으며 옆자리를 비워둔 참이었다의아한 눈빛을 하면서도 그는 순순하게 손짓을 따라 빈자리에 와서 착석했다
“저, 별로 안 좋아하시지 않으셨던가.”
“근데, 그 아이바라는 사람 아직 드럼에 관심 있대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시나노 가 이소이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셔서.” 반대편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소이가 나직하게 속 닥였다
“안 물어봐서 모르겠는데요정말 밴드에 넣을 생각임까?”
“아싸! 그렇대요! 아직 관심 있는지 한번 물어봐 줄 수 있어요?”
“뭐, 그렇긴 한데요.”
“너야말로 나한테 잘 보이고 싶다면서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물어보는 건 어렵지 않지만 . 아, 그러고 보니까.” 말없이 얌전하게 도시락이나 파고 있던 하루키에게로 이소이가 시선을 돌렸다
“이소이군.”
“뭠까.”
“미워하기까지? 그건 몰랐는데.” 표정에는 한 줌 변화도 없으면서, 짐짓 놀랍다는 투로 이소이가 말했다. 아무튼, 이라며 민망한 듯이 헛기침을 하며 잠시 망설이던 하루키는 곧 말을 이었다.
“아이바군이 감사 인사를 표시하고 싶다던데요라인 아이디 알려줘도 되나요.” “응? 별로 상관은 없는데…. 난 그닥 감사받을 일 같은 건 안 한 것 같은데.” 실질적 으로 병원까지 옮겨줬던 것도 이소이였고, 본인은 그저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배웅이나 한 게 전부가 아니었던가아무래도 좋다며 일단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고작 연 락처 정도니까 곁에 앉은 이소이를 흘끔 보았다가 다시금 도시락 위로 시선을 옮겼다 긴장했던 만큼 저 아이를 보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가볍게 농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순간 아래 일렁이던 음울함은 희미한 그림자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마 루이가 함께 해준 덕분이겠지. 내가 이대로 붕 떠 날아갈 것 같을 때마다 이 땅에 붙잡아주는 지지대 가 되어주는 사람은 역시 루이뿐이었다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녹색을 띤 까만 머리카락 이 시선 끝에서 흔들렸다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점심을 맞이하고 있었다 방과 후, 집에 가는 길 먼저 갈림길에서 헤어지는 시나노에게 손을 흔들며 하루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느릿하게 옮기는 걸음 너머로 나란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멋쩍어 괜히 길어지려는 말
을 스스로 자각하여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가, 흘끔 이소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쪽을 바
“그렇지만 일단, 너랑 잘 지내고 싶긴 해무슨 목적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지만일단 나도 밴드부…가 즐겁기도 하고.”
“내가 널 미워했던 건 사실이긴 해.”
“예, 저도요. 저야 뭐, 어차피 좋아할 수밖에 없고.”
“응?”
아, 나 진짜 꼴사납네어른스럽지 못하게귀까지 빨갛게 익어버린 하루키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나 누군가의 관계에 있어 고민해본 적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간만이었다.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여전히 널 볼 때면 싱숭생숭하겠 지만, 지내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예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생각하나 싶던 이소이는, 이내 씩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서는 다시 잽싸게 정면을 보긴 했지만. “그러니까, 미안? 노력할 테니까…새삼스럽지만…잘 부탁할게.”
“그런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