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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s

‣ 어린 시절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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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om seoul to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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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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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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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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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말이다 민상용

어린 시절에는 말이다. 나는 나이를 먹는

며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어린 시절의 추억

것이 너무나도 싫었고, 어른이 되는 것이 너

을 곱씹고 곱씹으며 앨범이 닳고 닳도록 보

무나도 싫었다 이 말이다. 그래서 남들 다

는 습관도 다 지나간 날을 ‘지나간 날’로 불

빨리 컸으면 좋겠네, 얼른 어른이 되었으면

러야 하는 쓸쓸함 때문이리라.

좋겠네 이러던 때에 나는 오히려 지금이 좋

생각해보면 마냥 즐겁던 시절만은 아니었

아서 지금처럼만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다. 단 한 번도 잘 살았었다는 말을 하기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는 한 살 한 살 자

무색했던 시절이었고, 한 달을 먹을 반찬이

꾸 먹어가고, 올해도 어느새 시월, 나는 곧

마땅치 않아 쌈장 한 통으로 끼니를 때운 적

이십대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

도 많았으며 도시락 반찬통에 채울 반찬이

직 만으로는 이십대라고 외치던 서른 살의

없어 염치없이 밥만 학교에 들고 가면 친한

누나를 보며 속으로 나는 나의 삼십대를 의

친구들이 다 자기 반찬을 기꺼이 나눠주던

연하게 받아들여야지 했었지만, 그것도 어린

시절도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교복

시절의 치기였을 뿐, 벌써부터 서른 살이 두

을 미리 맞추지 못해서 부리나케 문방구에서

렵고 겁이 난다.

파는 교복을 입학식 전날 사기도 했고, 하복

점점 더 멀어져간다고 했다. 머물러 있는

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아 동복의 긴팔 남방을

청춘인 줄 알았다고도 했다. 그렇다. 이제

반팔처럼 접어 입고 다니다가 복장 불량으로

청춘이라 불릴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고 있

혼이 나기도 했다. 아버지의 술버릇 때문에

는 것이다. 중학교 3학년 16살인 애들에게

놀이터에 숨어 지내던 날은 차라리 혼자 살

청춘예찬을 가르치며 나도 너희와 같이 청춘

수 있는 어른어린이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

의 특권을 누린다고 했었지만, 이제는 어느

도 했었다. 살이 닿는 가까움보다는 그저 가

새 청춘은 다 가버리고 홀로 기타를 치며 매

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저절로 스며드는 가

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노래를 부르게 생

까움이었기에 지금껏 엄마 손 한번 잡아드리

겼단 말이다.

는 용기나 누나들과 포옹 한번 하기가 머쓱

책을 읽고 공감하는 감수성만큼은 다른

해서 씨익 열적은 웃음만 짓게 하는 무뚝뚝

남성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바는 아

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직도 『자거라 네 슬픔아』의 책장을 한 장

용기를 내어 좋아한다고 말했던 첫 고백은

도 쉬이 넘길 수 없다거나, 『모랫말 아이

결과도 알 수 없이 허공에 던져진 숨결처럼

들』을 읽으면서 홀로 즐겁고도 아득해져서

사라졌으며, 미친 듯 공부하여 미래를 구상

그만 입가에 울 듯한 미소가 절로 어린다거

했던 나의 고3은 수능 날의 눈물로 탈바꿈해

나 하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서로가’를 들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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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서른 살이 두렵고 겁이 난다.”

그래도 말이다. 나는 그 시절이 끔찍이도 그립다. 비록 남이 볼 때 전혀 즐겁지도 행 복하지도 않은 기억일 지라 하더라도 나는 그때의 그 눈물과 쓰린 가슴과 두려움과, 배 고픔이 너무나도 그립고 또 그립다. 게다가

그래서 내가 이 글을 쓴다. 나의 어린 시

그 동안의 세월이 모두 쓰리고 아프고 고달

절과, 잊히지 않을 이야기들과, 잊고 싶지

팠을까. 당연히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남들

않은 이야기들, 꼭 기억하고 싶은 일들을 이

보다 일찍, 남들보다 많이 겪었을 뿐, 나는

제는 내 머리 속에서 꺼내어놓고, 왜곡되고,

그 시절의 또래 아이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

변질되고, 착색되지 않은 채로(이미 지금 이

이 천진하고, 순진하고, 순수했다. 어쩌면 그

순간도 늦은 것을 알지만) 온전히 남아있을

런 인생의 굴곡이 있었기에 더 지난날이 그

수 있게 말이다.

립고 그리운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 기억이 맨 처음일 수는 없고, 또

그런데 참 불행히도 그렇게 지난날을 그

처음부터 쓴다고 할지라도 어느 날의 기억이

리워하면서도 그것을 기록하려고 들지 못했

어느 해의 기억과 뒤섞여 명확하지 않을 수

다. 방학숙제로 꼬박꼬박 썼던 일기는 모두

있겠지만 그 또한 어떠랴. 어느 과거이건 나

가 폐품처리 되어버렸고, 사진도 몇 번의 이

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기에, 또한 나의 일대

사를 거치고 앨범을 바꾸고 하면서 없어져버

기를 쓰고자 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저 끄적

린 것도 많아졌다. 스무 살 이후로는 특히

거릴 뿐이다. 그리워할 뿐이다. 웃을 뿐이다.

사진을 인화하지 않아 그 시절에 대한 나의

아직 시작은 안했다. 오프닝도 시작하지

흔적이 너무도 미비하여 오히려 네 살, 다섯

않았고, 어울릴 만한 BGM도 선곡되지 않았

살에 비해 기억이 가물가물 해질 정도이니

다. 그러나 그리고 그래서 기대가 된다.

말 다한 게 아닐까. 여기, 모두가 지켜보지 않아도 될 이야기 가 있다. 누구나 꼭 읽어야 할 수필도, 소설 도, 시도, 희곡도 아닌 글이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 공감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 다면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들과도 좋은 친 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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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입니다. 아시겠읍니까?” 김승옥, <서울·1964년 겨울>(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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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구대희

이 잡지를 (굳이) 발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적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실 이러한 내용들은 개인 블로그나 홈피에 쓸 수 있음에도, 더욱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한-인쇄, 제작, 배포 등 - 유형의 종이 잡지로 발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해서 기대하 는 바는 무엇인가요?

A1

한누리

예? 저는 그저 하고 싶어서 할 뿐인데 왜 굳이 하는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음 전 그냥 하고 싶어서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전 정말 그냥 해보고 싶어 시작했습니다. 이 잡지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물으셨지요? 그냥 답만 말한다면 기대하는 바는 없습니다. 음, 독자를 의식하고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절대’ 아닙니다. 이 를테면 자기만족이랄까요.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전 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했고 그것에 만 족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으로 만든 것이지만 그만두지 않고 8호까지 할 수 있었던 힘은 구 독자가 점점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족이외의 또 다른 기쁨을 알았다고나 할까요? 그러 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잡지를 만들어 스스로 좋고, 그렇게 만든 잡지를 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고, 그래서 합니다. 아, 개인 블로그나 홈피에 글을 올리는 것이 더 쉽고 편합니다. 정해진 기일(마감)도 없고, 공동 작업을 할 필요도 없고, 따로 인쇄나 배포를 할 필요도 없지요. 그에 비해 종이 잡지는 어려움도 많고 매번 힘들지만, 하나하나 작업해서 만들어진 완성물을 보면 힘든 감정들이 다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굳이) 종이잡지의 형태를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종이 잡 지로 발간하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할 만한 것 같아요. 뭐, 개인적으로 블로그보다 종이로 인쇄된 글을 더 좋아하긴 해요. 음, 이메일과 편지(우편)의 차이라고 할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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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

정아람

비슷한 형태의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종이로 된 인쇄물을 만드는 게 어렵지 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뭔가를 만들고, 그것이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상상을 하니 무척 설렜습니다. 처음 심정은 그런 재미뿐이었습니다. 마냥 '뿅가는' 그런 기분뿐이었으 므로 뒷감당보다는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게 중요했습니다. 첫 호에 실었던 글은 그 첫 호에 싣기 위해 쓴 글이었습니다. 잡지를 만들기 전에는 홈페이 지가 유일한 표현의 출구였습니다. 그때 써서 올렸던 글을

발췌해 이 지면에 실었던 적은 있

었지만 이제는 그런 게 단지 복사해서 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이 페이지에 실리 는 글은 동시에 최초로 공개되는 글입니다. 이 페이지에서만 볼 수 있는 글입니다. 그렇게 하 는 이유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는 글과는 다른 자세로 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종이책에 서 받는 느낌이나 편리함 등이 있습니다. 종이로 읽으면 독서 시간을 늦출 수 있어서 좋고, 손 수 표시해가며 메모하는 것도 좋고, 읽다가 중단하면 그 부분에서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 는 것도 좋고. 글을 지어갈 때도 차분해지는 게 있습니다. 뭐랄까요, 글에 정중해지려고 노력 하게 됩니다. 이 잡지 작업을 하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하나는 인쇄, 제작, 배포 는 글쓰기와 동등하게 중요한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글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고민입니다. 글이 자체로 빛난다면 그 빛을 따라올 누군가들에 대해 글쓴이가 관여할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3

민상용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인터넷에 올리는 글, 그 글들에 무게감을 주고 싶었기 때 문이다. 나는 지금 블로그도 운영하지 않고, 미니홈피도 거의 폐쇄 수준이지만 한 때는 사진을 찍고 사진에 대한 감상을 시로 적어 쓰던 사람이었다. 사진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창작물도 가 지고 있고, 자기가 쓴 글에 자기만족을 하는 자족적인 인간이다. 개인적으로는 모니터로 글을 읽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번은 문학작품을 컴퓨터 모니터상으로 읽은 적이 있는데, 내가 책으로 읽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싫은 느낌이었다. 다소 가벼우면 서도, 기계적이랄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자족적인 인간이다. 잡지라는 것은 원래 만든 사람이 보라고 만드는 것은 아닐 텐데 나는 그렇다. 내가 보자고 만드는 것이 잡지다. 지금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우리 멤버들의 글도 잡지가 나오기 전까진 안 본다. 인쇄되고 나면 그때서야 한 부 가져가서 틈나는 대로 읽는다. 그럴 때 드는 기분은, 글이 주는 따뜻한 느낌, 이 사람이 정말 이 글을 쓰기 위해 들인 애를 나도 같이 느끼는 기분, 글의 무게감도 절실하게 느껴지고, 사람다운. 그렇게 나를 만족시키며 잡지를 만들고 있다. 알겠지만 지구상에는 60억의 인구가 존재한다. 사실 60억까진 가지 않아도 된다. 10명만 모여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도 보자. 나와 같은 의도일지는 몰라도 이렇게 함께 잡지를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히, 나 말고도 이 잡지를 읽으며 나 와 같은 감상을 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 잡지를 만들고, 글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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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슬로우 08-31

왜 의미 없이 사는 게 불가능한가요. 살아가기 전 단계인 존재 자체부터 목적과 의미가 없 는데. 우리가 뭘 위해서,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 Re : `목적과 의미가 없는데`라는 생각의 출발은? 삶, 태어남에 대한 의미를 찾기 위 해(_) 스스로 의문을 가졌다는 말. 아닌가요? 그 자체가 이미 의미가 되었네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만이 궁금해 하는 질문이지요. 답은 없지만(너무 많거나) 의미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가지죠.

시로ㄴ티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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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한누리 08-31

1호의 글을 보시고 하시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음, 1호에서 나눈 대화는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서였습니다. ‘태어남에 대한 의미’를 말해주셨네요. 애초 사람들이 태어나는 것에는 의미 가 없으니, 살아가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존재 차제가 의미 없음이라고요. 우선, 저는 생명의 탄생에 대해 그 어떤 의미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모릅니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나는 것에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정말 의미 가 없는지 의미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죠. 저는 모릅니다. 우리가 뭘 위해서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서 태어난 게 아닌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태어나지는 않 았습니다. 부모의 불꽃같은 사랑에 의해서 어느 순간 생기게 되었네요. 하아. 왜 하필 저였는 지, 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 람도 저와 같을지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서 태어난 게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태어날 때 의미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음, 태어나는 것 과 사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났기에 산다고 하지만 태어났기에 죽을 수도 있 지요. 태어나면 당연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태어나 사는 인생이지만 그 인생의 지속 의 의무는 사실상 없지 않습니까? 태어남의 목적이 없으니.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태어나기에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가기에 살아가는 것이지요. 삶의 지속. 지속은 선택이지 요. 태어나 이곳에 놓인 그 이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 태어난 자체에 주어진 의미가 아 닌, 놓인 후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살아서 의미가 있 는 것이지, 의미가 있어 살아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꼭 애초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의미가 아닙니다. 행위와 현상이 지닌 뜻이 의미입니다. 뜻이란 무엇을 하겠다고 속으로 먹은 마음이 나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내는 속내입니다. 바로 이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상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뜻을 알건 모르건 뜻이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현상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닐까요? 그럼에도 내가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겐 삶이란 ‘무의미해!’ 라고 이야기하면 되지요. 의미란 부여하는 사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주관적이죠.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는 삶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요. 뭐 과거에는 의미가 있었던 것들이 현재에는 의미가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나의 존재가 그 자체만으로 다 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요? 어떤 타인에게 나의 존재가 의미가 있을 수도. 그래요. 남에게 나의 존재가 의미가 있다 한들 나 스스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가 없으면 그만이지 요. '애초부터 의미가 있는 삶', '애초부터 의미가 없는 삶'이란 없을 것 같습니다. 삶이란 누군 가를 위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 기에 살아가는 데 의미를 붙일 수 있는 것은 본인 스스로뿐이겠지요. 의미 있는 삶을 사는지, 무의미한 삶을 사는지도 본인만 알 수 있겠지요. 전 이왕이면 사람들이 무의미한 삶보다는 의 미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뜻하는 것도 없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스 스로 무엇을 위해 하는지도 모르며 살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허나, 정말 무의미한 삶이라면 죽은 것과 같은 삶이라면. 그렇다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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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작점, 태어남에 대한 이야기. 전혜린은 “우리는 정말 무엇 때문에 태어난 것일까?”라는 본인 스스로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식물이 자라듯 맹목적인 우연” 이외에 그 어떤 이유가 있겠느냐고. 그래, 우리의 태어남의 이유가 정말 맹목적인 우연이라면. 슬프다. 어젠가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왜 사느냐?”고 학생들은 모두 “태어났 기에 어쩔 수 없이 산다.”고 했다. 이제 난 문득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산다하는 사람들에 게 이런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아이를 낳으실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예!’ 라면, 그렇다면 말입니다. 아이는 이곳에 태어나고 싶어 할까요? 왜 어쩔 수 없이 태어나 산다 고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나게 만드는 것일까. 태어남, 그 자체의 고통을 계속 만들어 내 는 것.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렇게 태어나게 하고 태어나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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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금 해 한누리 사람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다. 골치 아픈 의문을 끔임 없이 만들어내는 것이 말이다. 특히 답이 없는, 풀 수 없는 문제에 답을 구하려고 하니. 명백할수록 질문해보아야 한다. 그럼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이 무엇이 지. 맞는 것은 무엇이며 답은 무엇인가. 답이라는 것은 누가 정해두었으며 그것이 진정한 답이 라고 어떻게 생각하는가. 난 항상 의문을 품고 살아간다. 또 과거에 있어서 주저함보다는 벗어나려하는 듯하다. 이 탈. 난 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내가 이상한 걸까? 그들이 이상한 걸까? 내가 적응을 못한 걸까? 그들이 적응을 잘한 걸까? 난 어떤 상황 이나 조건의 앞에서 잘 어울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상황이나 조건이 타당하지 않거 나 말도 안 될 때의 이야기이다. 침묵해야 하는가? 문제가 있는데 침묵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침묵하는 것이 상황을 이대로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침묵이란 무엇일까? 우리에게 기쁨일까? 혹은 슬픔일까? 기쁨이라면 난 나의 이 덩어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담아 두어야 할까? 하지만 그 덩어리들은 점점 더 커져 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다 다르면 결국 침묵을 깨뜨린다. 무참히도. 나와 그들 사이의 오류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 것인 가? 난 지금 너무 무겁다. 무거워 한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을 자고만 싶다. 나의 이런 무 거운 잠은 언제까지 계속 돼야 하는 것일까? 난 이 모든 무의미한 것들처럼 결국 그런 무의미 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도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정은 한다. 어쩌겠는가. 내가 어찌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의 삶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난 하나의 희망을 품어본다. 그들에게 나 역시 이해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보여 달라고. 그대들은 모두를 가진 것이며 모두가 소유하고 있는 삶을 함께 소 유하고 있으니. 나에게 조금의 선심을 베풀어 준다면, 조금은 행복해 질 것이다. 아프고 안타 까운 마음은 어찌 할 수 없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네들 나 좀 안타까워 해주시오. 무엇이 다 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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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른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모른다고 생각되 는 것들은 알아도 소용없고, 알아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또한 그 것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 르고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알려고만 한 다면 그 무엇이든 알 수 있으니까. 자신이 알려고 하는 그 무엇을 스스로의 생각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답은 항상 자신이 가 지고 있기에. 어느 날 우연히 자신과 같은 답을 가지고 있다는 사 람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이거나 또다시 자신에게 공허함을 가져다 드리리라 확신한다. 자신 스스로 던진 물음에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는 안 된다. 나를 통해, 본인의 입 을 통해 이야기해 마주해야 한다. 그것만이 해답이며,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알지 못함에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모르고 있는 일이다.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은 세상의 부 끄러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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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습성 인간과 비슷” VS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정신분석비평에 관한 수업을 듣다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라캉의 "무의식 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뭐지? 무슨 소리란 말인가, 무의식 그 자체는 구조화되어 있 다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무의식을-의식 할 수 없는 것-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무의식의 구조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의식(無意識)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해석하자면 ‘의식이 없다.’이다. 국립국어원에서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살펴보면 ‘자신의 언동이나 상태 따위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일체의 작 용’, ‘자각이 없는 의식의 상태’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이라는 게 있을까? 무의식이라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어떻게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무의식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의식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무의 식을 무의식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더 이상 무의식이란 없다. 언어로 규정되면 그것은 더 이 상 無가 아니다. 정말 무의식이라면 우리가 그것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없어야한다. 생각할 수 없는 것. 의식이 없다는 것인데, 어떻게 의식하지 않고 '의식이 없음' 을 아는 것일까. 무의식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無', '없음', '의식 속에 그 어떤 현상이나 증상 이 잡히지도 않는', '말할 수조차 없는' 뭐 뭐 뭐 그런 것 아니던 가? 의식적이지 않는 것도 또한 의식적이지 않은가? 억압은 의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억압이란 어떤 목적성을 가지 고 있다. 즉, 의도적이다. 의식. 무의식적 억압이란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의식적 이다. 의식하고 싶은 것만을 의식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싶은 데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지워버릴 수도 있다. 내가 기억을 못하는 이유는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하지 않은 부분들이다. 비의식적인 것이다. 파도가 흔들리는 이유는 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물이 없으면 나 타는 것은 없다. 바람이 부는 데로 파도가 친다는 사실! 파도가 그저 바람 없이 일렁일 수 없 다는 사실. 결국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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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광

정아람

"제자리걸음을 단지 '새로운 기분'으로 되풀이함" - 소녀들은 이것을 '미래'라고 부른다. 목이 마른 낭쏭

최후의 고백은 할 수 없지만 최선의 상상

지 알 수가 없네, 알 수가 없어. 말을 잘근

은 가능할 것이다. '것이다'. 난봉꾼 남편과

잘근 씹는 A는 자기 생각을 막힘없이 쏟아

한 평생 살아온 할머니가 망가진 자신을 추

낼 수 있을까? 침은 튀기지만 저 발열은 아

스를 때 참으로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이

름답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잃은 줄 모른 채

가, 그자가, 저이가 이만큼 타이르고 이만큼

시뻘겋게 고함치는 천진한 노력이다. 인간이

발악하고 이만큼 눈물 짜고 찢어진 내 가슴

자신의 언어를 찾기 위해 탐험하는 첫 관문

알았으면 철 좀 들겠지. 그러나 난봉꾼은 여

을 옹알이라고 하자. 그러나 그것의 출처란

전하다. 여전히 그자는 난봉꾼이다. 그러니

이를 테면 좋아하는 필자들의 단어들이고,

할머니는 '그러나'와 '여전히'의 존재를 염두

필자들의 단어들은 번역된 철학서에서, 원작

에 둘 필요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

자를 이해하지 못한 번역자에게서, 외국어와

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가만히 찾아

모국어의 간극에서, 문맥에 따른 뉘앙스와

보면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편집할 수 있는

쓰는 자마다 다른 개념에서, …다행인지 불

예시문은 자신에게 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행인지 A는 닥칠 생각은 않고 있다.

있는 자가 '이것은 나의 이야기입니다' 라고

비유하자면 추상은 어둠일 것이다. 새하

고백한다. '어떤 속사정이 그런 식으로 글을

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의미란 끝없이 산출

쓰게 했습니까. 하필이면 왜 그 단어를 이

될 것이다. 넘치고, 넘치는 만큼 버려질 것

자리에 집어넣었다는 겁니까.' 하필이면. 그

이다. 넘칠수록 가장 필요한 의미는 중심에

러나 모든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글이 있었던

서 멀어질 것이다. A는 윤곽이 흐릿한 대량

것은 아니었다. 모든 시선을 충족시키기 위

의 추상들이 귀신처럼 배회하는 페이지를 만

해 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글은

든다. 프린팅 방식으로 반복 생산된 색색의

그런 역할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져야할 영

마릴린 먼로처럼 A의 언어에는 표정이 없다.

역으로 기꺼이 한 몸 던지기도 하지만, 비유

뭔가를 많이 획득해왔지만 동시에 분실하고

하자면 그것은 그런 필드와 그 필드의 소유

있는….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들을 차

자와 그 필드의 규칙을 지켜야하는 사원들의

용하는 학습법으로, 마이 제너레이션은 미지

사정이다. 남의 사내규칙과 남의 사내규정을

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왜 나의 페이지에 초청해야 하는 건지 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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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 리노베이션 따위

눈이 감기고 꿈이 시작된다. 드넓은 들판엔 파도가 치고 드높은 돌무덤이 햇볕을 쬔다. 구 름은 넘실거리며 버드나무가 팔랑인다. 우리가 가진 건 귀뿐이라서 색채는 저마다 음들로 지 각된다(그 느낌은 우리 둘만 알자). 끊임이 없다. 구름이 천천히 이동하고 버드나무가 유유히 흔들리는 하얗고 파랗고 연둣빛(거봐, 고작 쓰면 이래. 온전한 느낌은 우리 둘만 알자). 소리 들은 평행하고 부딪치고 뒤섞인다. 한 번에 덩어리로 뭉쳐선 가리가리 찢어지는 순식간. 가냘 프게 스친다, 서로가, 단지 스치기 위해 절교를 미뤄온 톰 소여와 친구들. 지렁이도 하는 꿈틀 거림 같은 것이 우리에게선 빠져나갔다. "우리는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요? 우리는 만나서 무엇이 되려고 이 지랄인 걸까요?" 부실한 의식을 적어 내려가고자 한다면 용기에 담아야 할 단 하나는 용기뿐이다. 부실한 의 식이라고 부서질 의식은 아니지. 이봐, 용기를 내봐.

나는 나에게 가장 충실한 채집자. 나라는 근거에서 나오는 내 말. 남자 친구와도 여자 친구와도 혼성의 친구와도 가본 적 없는 종로의 어느 골목을 안다. 술집 과 여관이 마주 선 사이에 헌책방이 있다. 들판을 배회할 때의 기분처럼 흐린 하늘이 걸린 어 느 날, 정처 없이 걷다 발걸음을 멈췄다. 점박이 고양이 때문이었다. 순전히 고양이 때문이었 다. 미니 카펫이 깔린 문 앞에서 사라진 얌체. 허전해진 시선을 하늘로 올렸다. 단란주점식의 핑크색 간판엔 하얗고 둥근 알파벳이 모르는 철자다. <Er geht aus dem Haus>. "그는 집에 서 나온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에선 하얀 화분을 든 사람이 서 있다. 노인의 얼굴엔 꽃씨를 채집하는 도시소년의 진지한 순진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다. 비루한 방은 벗어던지고 책으로 나오라는 작명이오. 술집과 여관 사이, 종로와 독일어, 헌책과 무너질 책방, 하오체와 화분을 든 노인. 완전히 넋이 나갔다. 손을 뻗은 책장엔 외국 작가들의 사진집이 차곡차곡 꽂혀 있었 다. 이 안주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 시간이 쌓인 모든 책들은 손님맞이에 정중하다. 그것 이 방문자를 안심하게 만든다. 그날 밤부터 '장미 여관'에 머물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면 방에 서 나와 책방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책의 품은 너르고 컸으며 종종 그 안으로 온몸을 구기 지 않고도 기어 들어갈 수 있었다. 간혹 오줌을 참지 못하거나 고양이를 놀리고 싶을 때엔 밖 으로 나오기도 했다. 식사 시간이면 할아버지를 모시고 차 한 잔을 나눴다. 그의 얇은 허벅다 리 위에서 솜털 같은 고양이가 곤히 잠들곤 했다. 쿠키를 곁들인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책 속 의 목소리들에게서 영롱한 동지의식을 느꼈었다. 하루는 눈을 비비다 움찔했다. 내 가여운 눈 알을 긁을 수 있는 건 내 손밖에 없구나. 재미없는 엄살을 받아주는 것도 내 맘밖에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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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

잡지 「술래」는 참여자 각자의 페이지를 모은 작업물이다. 각자의 생각을 담아 각자가 쓴다. 그 생각은 철저히 개별적으로 시작된다. 풀어가는 과정에서는 공 유되기도 한다. 범주는 지정된 바 없다. 작게는 스스로의 의문을 찾아내기 위 한 페이지이며, 크게는 애초에 없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한 페이지가 된다. 그 것들을 찾아내는 과정을 또는 찾아낸 것을 각자의 방법으로 이곳에 풀어놓으 려 한다. 이 즐겁고도 슬픈 놀이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다. 그러나 더 좋은 건 이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술래이다. 잡아봐라.

[술래 배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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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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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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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호 2010년 10월 11일 발행


술래9  

술래9 정아람 한누리 민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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