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ollae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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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번째 이야기

술래

Soollae #14


잡지 『술래』는 참여자 각자의 페이지를 모은 작업물이다.

‘ 각자의 생각을 담아 각자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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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각은 철저히 개별적으로 시작된다. 풀어가는 과정에서는 공유되기도 한다. 범주는 지정 된 바 없다. 작게는 스스로의 의문을 찾아내기 위한 페이지이며, 크게는 애초에 없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한 페이지가 된다. 그것들을 찾아내는 과정을 또는 찾아낸 것을 각자의 방법으로 이곳에 풀어놓으려 한다. 제도적인 관문을 통해 길러진 전문가 집단만이 영화와 문학과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 니다. 예술은 특정인들만이 넘을 수 있는 문턱이 아니라, 자신을 실현하려는 인간이라면 모두 가 드나들 수 있는 격조 놓은 양식이라 생각한다. 삶과 예술에 대한 애증을 갖고 있는 모두가 예술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이 아닌 놀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행한다. 그렇기에 『술래』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고 통스러운, 필진들의 배움을 자랑하기 위한 장이 아니다. 글은 필진 스스로 일을 달성하거나 목 표를 위한 수단이 아닌 것이다. 술래는 독자와 함께 숨을 것들을 찾아내는 놀이다. 술래의 작 가들은 자신이 술래가 되어 찾은 것들을 지면에 풀어놓고, 독자는 술래가 되어 그 지면 속에서 그들의 의미를 찾는다. 당신은 이 즐겁고도 슬픈 놀이를 지켜보기만 해도 좋다. 그러나 더 좋 은 건 이 놀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술래이다. 잡아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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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llae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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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줌에 침을 뱉어라 . 정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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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와 아빠 . 민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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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편적인 질문 . 한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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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TTER

파랑새에게 . 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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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줌에 침을 뱉어라. 정아람

mcb-gir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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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과 똥이 몸에서 밀려 나오려 한다. 그것들이 돌격할 때 나는 내 의지로 그들을 막아내지 못한다. 얼마큼은 유보할 수 있지만, 원천적인 봉인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오줌과 똥의 막강함이다. 쉬이 누어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격정소나타>는 콩쿠르 무대에서 오줌을 꺼내 든다. 주인공 권여선은 지난 대회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오줌을 쌌다. 그래서 공개적인 망신을 당했고 다니던 피아노 학원도 끊었다. 그러나 피아노를 끊은 것은 아니었다. 동네 학원으로 옮겨 계속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다시 콩쿠르 현장으로 왔다.

시험장에서는 상하로는 심사위원과 부대끼고 좌우로는 동급의 학생들과 실 력을 겨루어야 하니 가시 방석이 따로 없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으나 긴 장감과 초조함-누구처럼 망하면 어쩌나, 누구만큼도 못하면 어쩌나 등등! 괴로운 걱정들-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다. 그 극도의 압박을 방어하기 위해 누군가는 손을 안마하는 것처럼, 권여선은 오줌이 마렵다.

그녀의 오줌은 이 경직된 시험장에서 정신적 압박을 견디려는 방편이다. 그 러므로 설령 그녀가 무대에서 오줌을 쌌던 과거가 또 다시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 는 질문을 달리 해볼 수 있다. 오줌을 싸면 안 되는 곳에서 싸게 될 때, 왜 그래야만 했을까 하는 질문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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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알고 있던 <격정소나타>(최고은, 12분, 2006)를 부음을 듣고 난 후 보게 되었 다. 운이 좋게도 믿을 수 있는 영화들을 발견하면 그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세상의 현상을 진단하고 윤리가 부재한 자리를 살펴보며 영화라는 현실로 윤리를 회복한다. 이 영화가 관객들을 더 많이 만나 지상에 혼자 남는 일이 없기를 빈다. 온라인 단편영 화 상영관 「유에포」(http://www.youefo.com)가 만남을 주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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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소나타>에서 권여선의 과거를 아는 소녀들의 진심은 이보다는 조금 모난 곳에 가 있다. '그 미친년(권여선)이 또 오줌을 싼다.'에 내기를 거는 소녀여, 겉으론 예의 차 림으로 걱정을 한다지만 속으론 이번에도 어디 오줌을 쌀랑가 보려는 소녀여. 우리는 이 소 녀들에게서 배운다. 권여선이 오줌을 쌀 수밖에 없었을 이유,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 을 헤아리고 공감하기보다 그 쓰러짐을 조롱하고 욕보는 것에 대하여. 그 비좁고 허름한 마 음 골방에 대하여.

경쟁이 삶의 조건이긴 하나, 경쟁이라는 형식적인 구도에 그치지 않고 더 멀리 와 버렸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경쟁은 실존하는 태도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 단 하나의 무대를 향해 시험 대기자들은 좌석이 빌 틈 없이 계속 공급된다. 문은 좁아터졌고 응시자 수는 미어터지는 상황에서 내 몫 건사하기도 바쁜 세상, 느는 건 처세술이요, 처지가 같은 타인에 대해 생각할 여지는 왜소해진다.

경기 레이스는 단연코 '나의 우월한 독점'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작게는 내가 선 두를 차지하는 것만이 최선처럼 여겨진다. 크게는 그들-같은 대열에 나란히 선 이들-을 그 냥 제치고 이겨야 할 사물로 취급한다. 종종 여론을 보며 느낀다. 안전시설이 부재한 경기장 을 두고 사회적인 성찰과 고민이 아니라 선수 개인의 부주의를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비난 하는 식의 모습이 그렇다.

권여선의 약점인 오줌을 돈내기에 부치고 조롱하는 소녀 또한 자기가 한 것처럼 당 하게 될 날이 언젠가 올지도 모른다. 권여선들이 처한 동시대는 남루한 몰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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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경쟁의 무대가 초래하는 극도의 정 신적 압박에 대한 방어책인 오줌이 능욕당하는 세상이라면, 굳이 오줌을 숨길 당위가 있겠는 가. 숨길 이유가 없다. 그래서 권여선은 기저귀를 철회한다! 내깃돈마저 스스로 내준다!

유쾌한 펀치는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저 운명의 무대에서도 이어진다. 덜 덜 떨리는 무대 위에서 우리는 심사위원의 시선에 버티느라 자신을 쉽게 잊기도 한다. <격정 소나타> 또한, 권여선이 자신의 내면을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 려는 듯, 멀리서 무대 한가운데를 담아내곤 한다. 그리고 빛나는 대목이 있다.

권여선이 연주하고 있는 피아노 건반을 내려다보는 시선 다음 카메라는 오줌을 암 시하듯 권여선의 다리 쪽으로 내려가다가 그 움직임을 중단하고 다시 권여선의 얼굴로 돌아 온다. 그녀의 미소가 우리에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곧 조그맣게 졸졸졸 소리가 들리기 시작 하고 정말로 그녀는 오줌을 싸지만 그걸 다 알고 있는 권여선의 미소엔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토록 포기할 수 없는 피아노를 드디어 다시 연주하는 권여선의 그러한 시선이 이 각박한 과열의 장에 대한 응수로 보였던 건 왜일까. 피할 수 없는 과열 경쟁의 장 안에서 온갖 부딪치는 시선들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는 윤리적인 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 다. 기어이 터져 나오는 오줌에 누가 침을 뱉는가. 해방 소녀 권여선은 지금 막 아름답고 강 렬한 땀방울을 내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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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와 아빠 -1화

민상용

miniloo01179@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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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하고도 다섯 시간 전

"학교 다녀왔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을 열고 가방을 집어 던지려는 찰나, 집안 공기가 싸늘하다. 대개 이럴 때의 싸늘한 공기가 피부를 지나 뇌로 전달되는 정보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우리 남매가 무엇을 잘못했거나, 아빠와 엄마가 크게 한판 했거나.아직 6학년인 작은 누나와 고1인 큰 누나는 오지 않을 시간, 잘못이 있다면 내게 있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정황을 살피러 안방으로 갔다. 엄마는 조용히 안방 큰 창 밑에 앉아 계셨다. 창으로 눈부신 빛이 들어오고 있는 가운데 엄마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져서 표정 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엄마의 표정은 무릎 옆에 놓여있는 회초리로 대신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분명 화가 난 얼굴이었다.

"들어와 앉아봐." 차분하고도 싸늘한 이 목소리는 엄마가 극도로 화가 났을 때만 나오는 소리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서 최대한 발걸음을 천천히 했다. 이럴 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동으로 무릎을 꿇고 앉게 된다. 엄마가 이 정도로 화를 낼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잘못이 들켰기에 이렇게 화를 내시는 것일까 하고 머리를 굴렸다.

안방의 그 무섭고도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무릎이 덜덜 떨리면서도 머릿 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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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시간 전

조서연 내 너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 너만 아니었다면 나는 어젯밤 엄마에게 그렇게 혼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밤새 공포의 나날로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독을 품고 교실에 앉아 이 계집애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일찍 왔나. 가만 보니 교실에 나 밖에 없다.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해보았다. 대체 이 계집애가 어떻게 우리 엄마에게 그 정보를 흘리게 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 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서연과 우리 엄마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일까 말이다. 그나저나 너무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오긴 왔나보다. 복도에 나가보니 이 건물에 학생이라곤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교실에 돌아와 책상에 엎드려 다시 생각해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새 교실엔 아이들로 북적북적 했다. 엄마와 조서연이 어떻게 만났을 지 생각해본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어 버렸나보다.

"야, 너 어제 별 일 없었냐?" "응, 별 일 없었는데? 가 아니고!!! 야!!!!!!!! 조서연!!!!!!!!!!" 이름을 외치자마자 벌써 저만큼 도망가고 있는 조서연. 도망간다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저것이 기필코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엄마에게 그 사실을 흘렸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넌 잡히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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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하고도 여덟 시간 전

3층짜리 건물에서 3층은 우리 집이고, 2층은 미술 학원, 1층은 사진관과 문방구, 그 사이에 분식집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도 엄마는 낮잠에서 깨어나 대충 머리를 가다듬고 1층으로 내려간다. 건물 겉에 둘러져 있는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 사진관에 들러 가볍게 인사를 한다. 분식집에서 떡꼬치 두 개를 사들고 문방구로 들어간다. 엄마는 무료한 낮 시간을 문방구 주인아주머니와 수다 떠는 것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 날도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날들이었다.

"어머, 서연아. 문방구에 뭐 사러 왔니?" "아,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응. 그래. 호호호. 목사님은 안녕하시지?" "네. 잘 지내세요." 대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아주머니, 이 문제집 얼마에요?" "응, 4000원이야." "어머, 서연이는 산수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 공부도 잘 하겠다 얘." "아니에요, 이번에 산수경시대회에서 얼마나 못 봤는데요. 그래서 공부하려고 문제집 사는 거예요." "산수 경시대회? 아, 참. 내 정신 좀 봐. 그래 그게 있었지. 그거 결과가 나왔겠구나. 점수 나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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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이 때 조서연이 나와의 약속을 지켰더라면. 목사님의 딸로서는 죄를 짓는 것이겠지 만, 그런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나였기에. 또, 교회에선 사람은 어차피 태어난 것 자체가 죄요,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게 당연하고, 다만 하나님의 품으로 회개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나였기에. 어쨌든,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더라면. 그랬 더라면. 나는 엄마 앞에서 조금 덜 무서웠고, 아빠 앞에서 떨지 않을 수 있었을까.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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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장 보편적인 질 문 한누리

onetheworl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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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질문을 하나 하겠다. 인간이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은 타당한가? 아마, 내가 무엇을 묻고 싶은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질문을 추가해보 도록 하겠다. 인간을 네 가지로 구분되는 것은 타당한가? 다시 말하면 인간을 네 가 지의 혈액형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한가? 사람의 혈액형은 기본적으로 A형, B형, AB형, O형으로 나뉜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심리테스트나 성격이나 궁합을 본 다. 이러한 행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네 가지의 유형으로 구분해, 설명하고 판단 하고 이해하려는 행위가 타당한가? 또는 인간을 암수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한가? 이 것이 나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이 ‘아니오.’라면 당신은 현재 나와 같은 대 답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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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와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의 질문을 추가해보도록 하겠다. 그렇다 면 제3자가 당신의 삶과 의미, 목적, 형태를 정의하고 확정짓는 행위는 옳은가? 당신 이 집합으로 설명될 필요가 있나? 무엇을 위해?

Soollae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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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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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shic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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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TTER

파랑새에게 우리에게남는것은‘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왜’보다는‘얼마나-나에게’이기때문에. 하지만그것은타인을위한것은아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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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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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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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한누리 onetheworld@gmail.com 민상용 miniloo01179@paran.com 정아람 mcb-girl@hanmail.net

김진희

디자인 shic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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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2011년 3월 15일 copyright.2011 soollae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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